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6·25 참전
    2026-06-20
    검색기록 지우기
  • 1월 매출
    2026-06-20
    검색기록 지우기
  • 집중력
    2026-06-20
    검색기록 지우기
  • 현장성
    2026-06-20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438
  • 정부“인권보호”확고한 의지/미전향 장기수 2.25특면 배경

    22일 새정부 출범 1주년을 맞아 단행한 특별사면 및 복권의 핵심내용은 미전향 장기수 17명에 대한 조건없는 석방과 향후 특단의 조치 검토를 꼽을 수 있다. 미전향 장기수의 조건없는 석방은 새정부의 인권 보호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함께 대북 관계에서의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39년째 복역중인 남파간첩 禹용각씨(71)를 비롯,형집행정지로 풀려나게 될미전향 장기수 17명은 지금까지 국제 인권단체 등에서 대표적인 인권침해 사례로 거론해 왔다. 법무부는 이날 “고령으로 더이상 대한민국의 체제를 위협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이 때문에 북한에 있는 가족의 안위를 위해 禹씨 등에게 공안사범에게 요구하는 준법서약서를 강요하지 않았다.준법서약서는 북의 가족에 대한 위협인 만큼 비인도적·반인간적행위라는 고려에 근거한 것이다. 물론 일부 장기수는 검사들과의 개별면담을 통해 공개적인 준법서약은 곤란하지만 국법질서를 준수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연고가 없는 장기수들을 위해 서울 ‘만남의 집’,대전 ‘사랑의 집’ 등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생계대책까지 마련했다. 朴相千 법무부장관은 이날 특별사면 및 복권 기자회견에서 이들 미전향 장기수에 대한 특단의 조치와 관련,“지금 그 내용을 밝힐 수 없다”고 했으나 ‘북송’ 등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관계당국에서는 이미 각종 대화채널을 통해 북한당국과 이들의 처리문제를 놓고 어느 정도 논의가 이뤄졌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李인모 노인 북한송환 때처럼 아무런 대가없는 일방적인 ‘시혜’조치로 끝나지 않겠다는 게 정부의 의지인 것 같다. 따라서 앞으로 남·북간 협상에 따라 지난 87년 오스트리아 빈으로 여행중납북된 유학생 李在煥씨(37)나 같은해 납북된 동진27호 선장 崔宗錫씨(51)와의 맞교환이나,6·25참전 국군포로와의 맞교환 등도 실현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다. 朴弘基 hkpark@
  • 金三雄 칼럼-장면박사 출생100년

    “자기의 명성이 자기의 진실보다 더 빛나지 않는 자는 축복이다”―인도시인 타고르의 말을 올해 출생 100주년을 맞는 제2공화국 張勉총리에게 드리는 헌사로 삼으면 어떨까. 격동의 현대사에서 장면박사처럼 잘못 평가된 정치지도자도 흔치 않다. 그가 이끈 야당과 시민 학생에 의해 타도된 독재자나 합법정부를 쿠데타로 전복한 군사독재자가 ‘존경받는 인물’의 상위를 차지하는 반면 인격적이고도덕적인 품성과 자질로써 ‘단군 이래의 자유’와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동시적으로 추진하다 좌절한 민주지도자는 망각되고 있다. 이것은 5·16이래 거듭된 군사쿠데타와 그 아류 정권에 의한 ‘승자의 기록’의 결과이지만, 진실을 탐구하고 가르치는 학자·교사·언론인들에게는 수치스러운 일이다. 한국역사상 최초로 성공한 4월 시민혁명으로 출범한 장면정권은, 프랑스대혁명이 입헌군주주의자와 시민계급, 온건파와 과격파싸움으로 나폴레옹쿠데타를 불러오고, 독일 바이마르 공화정이 ‘지구상에서 가장 자유로운’사회를 구현한다면서 극좌·극우싸움의 혼돈끝에 히틀러 나치스를 맞았듯이, 집권8개월만에 박정희쿠데타로 붕괴되었다. [인간 장면의 인품] 역사상 대부분의 시민혁명이나 개혁이 쿠데타나 반동세력에 의해 좌절된 것처럼 장면정권 역시 5·16쿠데타를 겪게 되고, 이런 과정에서 그는 무능과부패의 상징으로 낙인찍혔으며, 독재자들이 역사인물로 격상되는 가치전도현상이 나타났다. 우리 현대사나 국민정신면에서 대단히 부끄러운 모습이다. 장면박사는 인격적으로 매우 훌륭한 분으로 평가된다. 한없이 온후하고 어진 분으로서 인자하면서도 강직하며 사려깊은 분이었다. 외유내강의 독실한신앙인이고 지식인이었다. 그는 ‘각하’의 호칭보다 ‘장박사’로 불리기를 원했으며 집권 8개월 동안‘단군 이래의 자유’로 불릴만큼 민주주의를 허용했다. 물론 무질서와 정치사회적 혼란이 따르기도 했지만 오랜 억압구조에서 시달리던 국민에게 과도기적 현상이었다. 반민주행위자와 부정축재자의 처단등 4·19혁명과업을 수행하는 데 너무 미온적이었다는 비판도 따른다. 그러나 독재정권에 대한 안티테제로 등장한 정권으로서의 시대적 한계와, 민주정치 제도에서 가장 운영이 어렵고 높은 민도와 양식있는 국회의원들을 전제로 하는 의원내각제에 발이 묶여서 과단성있는 정책을 추진하지 못한 제도적 한계도 따랐다. 여기에 야당의 사사건건 발목잡기와 이상주의적 조급성에 기운 혁신계와 일부 지식인·학생들의 급진적 통일론도 장면정권 좌절의 요인으로 지적된다. [재평가와 교훈찾아야] 장면은 비록 군인들에게 탈권당한 비운의 정치인이지만 그가 한국현대사에남긴 족적은 너무 크다. 무엇보다 제3차 유엔총회 한국수석대표로서 대한민국정부가 한반도 합법정부로 유엔의 승인을 받는데 기여한 일이다. 또 6·25전란 당시 주미대사로서 유엔군 참전을 위해 발휘한 역량도 큰 업적이다. 특히 민주당을 결성하여 이승만정권으로부터 암살 저격까지 받으면서 끝까지 반독재투쟁을 벌인 것이나, 집권기 혼란속에서도 일관되게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고 경제개발계획을 착실히 마련한 것등은 큰 업적이다. 그러나 교과서적 민주주의나 미온적인 시국 대처는 프랑스혁명기와 독일 바이마르공화정 시기처럼 반동세력에게 기회를 주게 되고 결국 역사를 후퇴시킨 행위로서오늘의 김대중정부에도 교훈으로 남는다. 곧 시작될 대한매일의 ‘제2공화국과 장면’연재는 장면박사의 재평가를 통해 왜곡된 현대사를 바로잡고 제2공화국 좌절의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자는데 있다.
  • 한국전 사망 60여 무명용사 하천변 가매장 48년 방치

    6·25전쟁 당시 국민방위군으로 참전했다 숨진 60여명의 무명용사들이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하천변 묘지에 가매장된 채 50년 가까이 방치되고 있어 적절한 조치가 시급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21일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동 주민들에 따르면 이 집단 무덤은 대천동 강정초등학교 부근 하천변인 ‘난쟁이도’ 일대에 비문도 연고자도 없이 방치되고 있다.이곳에 묻힌 무명용사들은 17∼40세의 나이로 50년 12월 국민방위군으로 입대해 북한 인민군과 싸우다 1·4후퇴 당시 제주도까지 내려온 후 강정초등학교에 수용됐다가 기아와 질병 등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라고 주민들은 말했다. 서귀포시는 이들의 구체적인 신원을 모른다는 이유로 충혼 묘지로 이장 등조치를 취하지 못한 채 매년 한차례 벌초나 주변환경 정비에 그치고 있다.제주 l 金榮洲 chejukyj@
  • 빨치산 루트 관광코스 만든다/하동군,내년부터 2억원 들여 개발

    절경(絶景) 못지 않게 ‘피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지리산의 빨치산 활동장소들이 관광코스로 개발된다. 경남 하동군은 6·25 전쟁 당시 지리산 빨치산들의 루트와 아지트를 복원해 문화관광코스로 개발하겠다고 9일 밝혔다. 하동군은 이를 위해 내년부터 2년간 2억원을 들여 군내 지리산 지역인 화개와 청암지구의 빨치산 근거지를 복원할 계획이다. 군은 빨치산이 활동했던 지난 48년부터 55년까지 8년 동안 큰 전투나 사상자가 많은 지역에 대해 대·소형 안내판을 설치하고,이들 지역을 연결하는 등산로를 재정비하는 한편 관련자료와 참전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토굴 등 빨치산 근거지를 복원할 방침이다. 군은 부군수를 위원장으로,당시 빨치산 토벌에 참여했거나 납치된 토벌 중대장 등 14명으로 ‘빨치산루트 개발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들은 본격적인 사업에 착수하기 전에 사료를 토대로 아지트,활동루트,주요 격전지 등을 현지 답사할 예정이다.
  • 건군 50돌… ‘국민의 군대’ 되기까지

    ◎세계속의 ‘자주强軍’ 급성장/48년 경비대로 출발… 정치개입 오점/평시작전권 환수­장비첨단화에 박차/PKO활동 등 국제평화 수호 큰 기여 1일로 건군 50주년을 맞은 우리 군의 발자취에는 반세기의 나이테 만큼이나 두터운 영욕의 역사가 담겨 있다. 군은 한국전쟁과 월남파병 등을 거치면서 급속도로 성장,병력 수로만 따지면 중국 러시아 미국 인도 북한에 이어 세계 6위인 69만명의 거대조직을 자랑하고 있다. 군은 그러나 5·16군사혁명과 12·12,5·18사태를 통해 30여년간 이 나라를 통치해온 ‘독재군부’의 온상이라는 오점도 남겼다. ▷국군 50년 역사◁ 우리 군은 48년 9월5일 조선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가 각각 육군과 해군으로 개칭되고 49년 10월1일 공군이 창설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육·해·공군 3군체제를 갖추며 출발했다. 창군 당시 육군은 국방경비대 660명,해군은 100t급 증기선 1척,공군은 수류탄과 폭탄을 손으로 투하했던 경비행기 20대 등 초라한 규모였다. 1945∼1950년까지 건군기를 거친 군은 창군 2년만인 50년 6·25전쟁에서북한의 기습남침에 맞서 백척간두에서 국가의 존망을 걸고 사투를 벌여야 하는 시련기를 맞았다. 유엔군의 6·25 참전으로 작전지휘권을 넘기는 수모도 감내해야 했다. 국군은 53년 휴전과 함께 52년 발효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군사력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4·19와 5·16의 정치적 격변기를 겪으면서 꾸준히 체계를 정비해 65년 이후 월남전에 참전하는 등 용맹성을 내외에 떨쳤다. 70년대들어 朴正熙 전 대통령은 ‘자주국방’정책을 주창하면서 미국 의존도의 군사력에서 탈피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북 억제력 및 자위전력 증강계획에 따라 율곡사업이 착수된 것도 이 무렵부터다. 93년 소말리아에 공병대를 파병한 이후 앙골라와 서부사하라,인도·파키스탄,그루지야 등에서 유엔평화유지 활동에 참여했고 94년에는 한미연합사로부터 평시작전권을 환수받아 ‘세계속의 국군’으로 성장하게 됐다. ▷향후 위상 및 과제◁ 건군 50주년을 맞는 군은 북한의 지속적인 군사적 위협과 통일 한국군의 위상을 재정립해야 하는 당면과제를 안고 있다. 그동안육군은 기존 재래전력 외에 북한의 미사일공격에 대비한 ‘미사일 요격용 미사일’ 개발에 착수하는가 하면 전술 지대지미사일(ATACMS)과 227㎜ 대구경다연장 무기체계(MLRS)를 도입중에 있다. 해군은 KDX­Ⅰ(구축함사업)에 이어 KDX­Ⅱ사업과 잠수함 건조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으며,공군은 KF­16전투기를 비롯해 공대공·공대지 미사일을 다량 보유하고 있다.
  • 재일 학도의용군/崔弘運 논설위원(外言內言)

    30일 상오 인천시 남구에 있는 수봉공원에서는 조촐하지만 뜻깊은 행사가 있었다. 재일학도의용군 참전기념비 앞에서 金義在 보훈처장과 辛容祥 재일대한민국 민단본부장,생존한 회원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있은 ‘재일학도의용군 6·25참전 48주년 기념식’이었다. 산책로와 각종 체육시설,어린이 놀이터도 있어 평소에는 많은 시민들이 찾는 공원이지만 이날은 때마침 내린 비로 이들 참석 인사 외에는 관심을 갖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날의 뜻을 기리는 행사장 분위기는 반세기 전,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던 조국을 구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한 채 현해탄을 건너온 재일 학도의용군들의 뜨거운 열기를 그대로 전하고 있었다. 이들은 병역의무가 없었으나 죽음을 각오하고 자진 참전한 교포 청년·학생들이었다. 중동전에 참전했던 이스라엘 유학생들보다 17년이나 앞선 근세 최초의 자진참전이다. 이스라엘이 그들 유학생들의 참전정신을 민족이념으로 정해 생활의 좌표로 삼고 있듯이 이들보다 훨씬 빨리 달려와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재일 학도의용군의 정신은 훨씬 값진 것으로 재평가돼 계승되어야 마땅하다. 이들의 참전정신은 바로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조국을 구하기 위한 애국정신이요 멸사봉공(滅私奉公)정신이며 민족을 구하기 위해 생명을 바친 살신성인(殺身成仁)정신이다. ‘6·25전쟁 이후 최대 위기’로 표현되는 지금,‘제2의 건국’을 선언한 우리로서는 이들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아 나라를 일으켜 세우고 지탱할 수 있는 기둥 정신으로 삼아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들이 해외에서 전화(戰火)에 휩싸인 조국으로 달려오는 순간,유학 등 갖은 명목으로 조국을 떠났던 사람들이 있었듯이 오늘도 병역기피,뇌물수수,사치스런 생활로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무리들이 많기는 마찬가지다. 특히 청소년들은 나약할대로 나약해져 전쟁이 일어나면 해외로 달아나겠다고 하고,걸핏하면 가출이요 자살이다. 이들에게 재일 학도의용군들의 호국·애족정신은 분명 귀감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한미우호협회가 주는 ‘제 3회 한미 우호상’을 수상하기 위해 내한한 레이먼드 데이비스 미국 예비역 해병대장은 6·25전쟁에 참전해 큰 공을 세운 역전의 용사다. 그는 “한국전과 2차 세계대전,월남전 등 모든 전쟁은 준비하지 않아 당했으나 철저히 준비한 걸프전에서는 큰 피해가 없었다”면서 유비무환(有備無患)을 강조했다. 대비하지 않아 처참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맞았던 우리로선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그리고 재일 학도의용군의 정신을 되새기며 위기의 오늘,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야겠다.
  • 국군포로 또 생환/장무환씨 45년만에 脫北

    국가안전기획부는 30일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혀 북한에 억류됐던 장무환씨(72)가 최근 북한을 탈출,제3국을 거쳐 인천항을 통해 귀환해옴에 따라 관계기관과 합동으로 조사중이라고 밝혔다. 안기부에 따르면 장씨는 휴전을 앞둔 지난 53년 4월 국군에 입대한 뒤 7월 보병 22연대 하사로 강원도 김화지구 전투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됐다. 그후 북한으로 옮겨져 국군 포로들이 집단 수용된 함북 아오지수용소와 탄광 등지에서 생활하다 지난 8월 북한을 탈출,45년만에 조국의 품에 안겼다. 북한 억류 국군포로의 귀환은 94년 10월 趙昌浩씨,97년 12월 梁珣容씨에 이어 세번째다. 張씨의 가족으로는 고향인 경북 울진군 매화리에 부인 朴順南씨(68)와 포항에 사는 아들 영욱씨(45·포철 크레인기사)가 있다. 張씨는 지난달 탈북 후 중국에서 부인 및 아들과 감격의 재회를 했다.
  • 깐수를 위한 변명/서해성 소설가(굄돌)

    무하마드 깐수를 아시나요.이름으로 보아 누구나 알 수 있다시피 서울역이나 흥남 부두에서 잃어버린 형을 찾는 광고가 아니다.무하마드 깐수를 아시나요.그렇다고 6·25동란때 참전한 옛 전우를 찾는 건 더구나 아니다. 이름이 좀 닮기는 했어도 권투 선수 또한 물론 아니다.하지만 그가 우리겨례붙이인 것만은 틀림없다.이름이 어째 그런데 아랍사람 같냐구요.이것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비극을 단적으로 증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버젓이 정수일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중국 지린성에서 태어나 아랍이름을 빌려쓰고 한국에서 공부하여 교수로 활동하다 간첩죄로 옥에 갇혀있는 사람이다.여기서 그가 지은 죄를 새삼 따져묻거나 다른 말로 둘러부쳐 죄목을 흐리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무릎제자이기는커녕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말을 삼고 나선 건,실크로드나 신라에 관심 있는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듯 내내 옥에 가둬두기에는 그가 너무 뛰어난 학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처용이 무슬림이라는 논지를 처음 전개한 것(현 고교교과과정에반영되었다)이나 파미르를 정벌한 전설적인 명장 고선지 연구, 그리피스나 로스가 말한 ‘닫힌 은둔의 나라’한국의 존재를 일거에 뛰어넘어 천여년 전 신라와 서역간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확대해낸 성과( 신라·서역교류사’)는 하나하나가 빛나는 연구업적이 아닐 수 없다. 짐작컨대 이번 8·15를 맞아 감형된 것도 그러한 사유가 참작되었을 터이다.한 걸음 더 나아가 죄목만큼이나 학문의 성과 또한 엄하게 따져 이내 그에게 온전한 집필의 자유를 줄 수 있는 우리사회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게 지나친 것일까.사마천에게 목숨을 빼앗는 대신 궁형을 내린 것도 ‘사기’를 써낼 재능을 아낄 수 있는 사회역량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그리하여 한번 더 묻고자 한다.무하마드 깐수를 아시나요.
  • 국군포로 송환 촉구/어제 ‘6·25’48주년/전국서 행사 잇따라

    6·25 48돌인 25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5,000여명의 유가족들과 참배객들의 찾아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숭고한 넋을 기렸다. 대한재향군인회(회장 張泰玩) 소속 참전용사 2,000여명은 현충원 현충탑에 참배하고 호국종을 48번 울렸다.재향군인회는 이어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金鍾泌 총리서리 등 6,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군포로 송환촉구 범국민대회’도 열었다. 300여명의 원불교 신도들도 현충원 무명용사탑에서 합동위령제를 가졌다. 전국연합(상임의장 李昌馥)은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 기원제’를 개최하고 명동성당까지 촛불을 들고 행진했다.
  • “사선 넘은 전우 명예 찾아주오”

    ◎6·25때 민간인 유격대 ‘백골병단’ 용사들/647명 적후방 침투 3개월 활동 “전과 혁혁”/360여명 전사… “종전후 돌아온건 무관심뿐” “물질적인 혜택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조국을 지키려고 사선을 넘나들었던 우리가 그에 걸맞는 명예를 찾자는 것뿐입니다” 지난 51년 북한군 점령지역에 침투돼 수백명의 전사자와 실종자를 낳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유격대 ‘백골병단’ 용사들.이들은 지금도 이름없이 산화한 전우들을 생각하면 처절한 가슴을 달랠 길 없다. 백골병단은 1·4후퇴를 즈음해 적 후방교란을 위해 급조한 유격대였다. 육군본부는 민간인 647명을 차출,대구 육군보충대에서 불과 3주간의 특수훈련만 시키고 51년 2월 강원도 북한군 점령지역으로 인민군 복장을 시켜 투입했다. 비록 3개월 동안의 유격활동이었지만 혁혁한 전과를 올혔다. 양양군 인구리에 주둔했던 인민군 69여단의 궤멸은 이들의 공이었다.백골병단 대원들은 69여단의 작전계획,병력 등이 기록된 전투상보를 갖고 상급부대로 가던 인민군 장교 4명을 생포,전투상보를국군 수도사단에 전달해 대승을 거둘 수 있게 했다. 대남 빨치산 사령관 임무를 띠고 남한으로 내려오던 인민군 중장 길원팔(吉元八)을 인제군 가리산리 필례마을에서 생포한 것도 이들이었다.그러나 길원팔과 함께 붙잡힌 인민군 여장교가 탈출,이 때부터 인민군 부대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시작됐다. 인제군 용대리에서 1만여명 규모의 인민군 부대에 맞서 싸우다 60명이 목숨을 읽었다. 단목령은 이들에게 비극의 자리였다.일주일 동안 굶은 채 격전을 치른 대원들은 이곳에서 120여명이 굶어 죽거나 얼어죽었다.끝내 살아남은 사람은 647명중 283명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정부의 무관심.생존자들중 일부는 대한유격참전동지회를 만들어 국방부에 여러차례 훈장도 요청했지만 국방부는 훈장수여는 전쟁직후 이미 끝났다는 냉담한 반응이었다. 동지회 全仁植 회장(69·당시 작전참모·대위)은 “우리가 훈장을 받겠다는 것은 개인의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니라 흐려져가는 호국정신을 다시 살리자는 데 더 큰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 순국영령 추모 진혼예술제/내일 현충원 참전용사묘역

    순국영령을 추모하는 진혼예술제 ‘우리들의 슬픈 얘기’가 25일 하오 6시30분 서울 동작동 현충원 참전용사묘역에서 펼쳐진다. 6·25의 비극을 예술로 승화시키고 갈수록 퇴색되고 있는 호국정신에 대한 자성을 새롭게 하기위해 ‘비목마을 사람들’ 주최로 열리는 이번 예술제에는 문화계 인사와 보훈가족,실향민이 참가한다. ‘비목마을 사람들’은 시인 신경림,가곡 ‘비목’의 작사자이자 국립국악원장 한명희,방송인 황인용씨를 공동대표로 지난 96년부터 일명 ‘비목의 계곡’으로 불리는 강원도 화천군 평화의 댐에서 문화제를 갖고 순국영령 추모제를 개최해온 단체. 이번 예술제에는 6·25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참가인원을 625명으로 제한했으며 이들이 하얀 광목으로 띠를 이뤄 장관을 연출할 예정이다. 이 가운데 이애주씨의 진혼춤이 공연되고 안숙선 명창의 판소리와 추모가,소프라노 박미혜씨의 ‘비목’ ‘기다리는 마음’이 이어진다.또 남유소화백은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그림을 그리며 김대환(타악기),최선배(트럼펫) 강은일씨(해금)의즉흥 연주도 곁들여진다.580­3000.
  • 6·25 용사에‘작은 보훈’/3년째 안경 무료제공 해온 邊永玉씨

    ◎잊혀져 가는 6·25 현실 안타까워…/해마다 국립묘지 찾아 호국영령 기리기도 “각박한 세태속에서 잊혀져 가는 6·25 참전용사들에게 작은 위안이 됐으면 합니다” 서울 명동 세일콘택트 안경원 邊永玉 사장(43).邊사장은 이제는 노인이 된 6·25 참전용사들에게 3년째 노안용 돋보기를 무료로 기증해 오고 있다. 올해도 보훈의 달 첫날인 지난 1일부터 참전용사들에게 돋보기를 선사하고 있다.7월말까지 2,000명에게 줄 계획이다.재향군인회에 보낸 교환 쿠폰을 갖고 안경점을 찾는 사람은 하루 20∼30명.현충일을 하루 앞둔 5일 안경원은 할아버지 참전용사들로 유난히 북적댔다. 邊사장은 군복무중 사고로 숨진 조카의 무덤을 돌보기 위해 해마다 국립묘지를 찾으면서 나라를 위해 싸운 분들을 위해 뜻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노안용 돋보기를 무료로 기증하기 시작하게 됐다고 밝혔다. 邊사장은 “참전용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들이 정작 안타까워하는 것은 물질적 도움이 아니라 6·25의 의미가 잊혀져 가는 현실임을 알게 됐다”면서 “작은정성이지만 우리 사회가 일흔살 안팎의 고령이 된 ‘백발의 용사’들에 대해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음을 알아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 ‘보훈의 달’ 6월 곳곳 추념 행사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을 맞아 1일 상오 7시30분 서울 63빌딩에서 열리는 국가유공자 조찬기도회를 시작으로 순국선열을 추모하고 국가유공자 등을 위무·격려하는 행사가 한달동안 다양하게 개최된다. 제43회 현충일인 6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현충문 앞 광장에서는 3부 요인 및 각계 대표,전물 군경유족,학생 등이 참가한 가운데 추념식이 거행된다. 25일에는 서울 올림픽 제2체육관에서 유엔참전용사 205명 등 1만여명이 참가하는 6·25기념행사가 열린다. 또 정부 포상 등 국가유공자 포상,국군 모범용사 초청·위로(22일·서울신문사 주최),8천여명의 신규 국가유공자에 대한 증서 수여,6·25 및 월남 참전용사에 대한 ‘참전용사 증서’ 수여,6·25참전비 순례,범국민 호국안보 강연회,백일장 및 사진 전시회 등의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 6·25 훈장 찾아줍니다/假수여증 받은 6만여명

    ◎본인·유가족 陸本 확인을 ‘6·25 무공훈장을 찾아줍니다’ 국방부는 28일 6·25전쟁때 ‘무공훈장 가수여증’을 받았으나 아직까지 정식 훈장을 받지 못한 국가유공자 6만3,629명을 대상으로 무공훈장 찾아주기 운동을 펼친다고 밝혔다. ‘가수여증’을 보관하고 있는 당사자는 물론 유가족 누구라도 육군본부 부관감실 인사처리과(02­505­1622,042­550­1622∼6)로 연락하면 훈장 수여대상자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군 관계자는 “전쟁 중 자신들에게 훈장이 수여된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온 참전 노병들이 적지 않다”면서 6·25 당시 군에 복무했으면 누구나 육군본부에 확인해 볼 것을 당부했다. 6·25전쟁 중 모두 17만9,391명에게 을지·충무·화랑무공훈장 등이 수여됐으나 92년말 현재 11만5,762명만이 정식 훈장을 교부받았다.
  • 유엔사·北 군사대화 7년만에 재개될듯/판문점서 장성급으로

    유엔사령부와 북한군간의 장성급대화가 7년만에 재개될 전망이다. 유엔사와 북한군은 군사정전위원회 장성급 대화를 복원하기 위해 최근 판문점에서 잇따라 비서장급회의를 열어 장성급 접촉이 필요하다는데 원칙적으로 합의,세부절차를 논의중인 것으로 27일 알려졌다. 대화가 성사되면 유엔사­북한군간 고위 군사채널이 지난 91년 이후 7년만에 재개되는 것이다. 유엔사측은 지난 2월11일 판문점 비서장회의를 통해 ▲장성급 대화 참석자는 한국군 준장,미군소장,영국군 준장 및 6·25참전 군정위 위원 가운데 1개국 대표(대령) 등 4명으로 한다 ▲유엔사측의 4개국 대표는 동등한 발언권을 갖는다 ▲의제는 정전협정과 관련된 사항으로 국한한다 ▲첫 장군급 대화는 6월내에 판문점 군정위 본회의실에서 연다는 내용의 4개항을 북한군측에 정식으로 제의했다.이에 대해 북한측은 3월말 유엔사측의 수석대표 문제 등 전제조건을 달았지만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회신을 보내왔다.
  • 6·25 실종자 이번주부터 신고접수

    국방부는 이번 주부터 1만9천여명에 이르는 6·25 실종자에 대한 확인 및 신고 절차를 거쳐 보훈 혜택을 주기로 했다고 3일 밝혔다. 유가족들은 전국 주요 향토사단 내 ‘실종자 신고 센터’에 비치된 참전실종자 1만9천409명의 명단을 확인한 뒤 실종자와 신고자의 관계를 확인할수 있는 호적등본 2통과 6·25 당시 상황을 목격한 사람 2명의 인우(隣友)보증서 각 2통을 제출하면 된다. 실종자 명단 확인 및 신고장소는 다음과 같다. △서울·경기=국방부 민원실(02)748­5018 △강원=36사단(0371)741­6697,68사단(0397)73­4115△충청=계룡대(042)550­0404 △영남=50사단(053)320­6681,53사단(051)741­4245 △호남=35사단(0652)259­6683,31사단(062)260­6672 △제주=제주방어사령부(064)40­4009
  • 국군포로 80명 北 생존 확인/국방부

    ◎명단공개후 송환요구 적극 검토 정부가 신원을 파악한 북한 생존 국군포로는 80여명으로,정부는 이들의 생존확인과 송환을 북한에 적극 요구할 방침인 것으로 27일 알려졌다. 정부 관계자는 “국군포로로 94년 귀환한 趙昌浩씨와 이번에 귀환한 梁珣容씨 등의 진술을 토대로 정리된 북한 생존 국군포로는 80여명으로 파악되고 있다”고 밝히고 “그러나 趙·梁씨 등의 진술을 육군 병적 원본 등과 비교·검토해 봐야 최종적인 숫자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관계자는 이어 “그동안 북한에 억류돼 있는 생존 포로의 안전을 위해 생존 가능자의 명단을 공개하지 않았다”고 설명하고 “하지만 정전협정의 틀이 아닌 남북화해교류 및 불가침에 관한 남북기본합의서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이들의 명단을 공개해 이들의 생존여부 확인과 송환을 북한에 요구하는 문제를 검토키로 했다”고 말했다. 국방부는 오는 30일 열리는 국가안보회의(NSC)의 실무조정회의와 상임위등을 거쳐 국군포로의 명단공개여부가 최종 결정되면 국내 가족들과 접촉하거나유엔 등 국제기구와 제3국 등의 협조를 얻어 생존 여부를 확인해 나가기로 했다. 한편 국방부는 6·25참전 실종자 4만1천971명 가운데 전사처리된 사람은 2만2천562명이고 여전히 실종자로 분류된 사람은 1만9천409명이라고 밝혔다.
  • 주한미군:上(대한민국 50년:16)

    ◎45년 日 항복후 4만5천명 첫 진주/6·25땐 최대 32만명 파병 ‘韓國수호’/국력 신장 따라 우리방위비 분담 늘어 이땅의 주한미군 역사는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지 25일만인 1945년 9월 8일부터 시작됐다.이날 하지중장 휘하의 제7사단이 1진으로 인천에 상륙했다.인천 내항에는 해방군으로서 입성하는 미군을 환영하는 인파로 발디딜 틈이 없었으며 부두는 온통 태극기와 성조기의 물결을 이루었다.이어 29일과 10월 8일 40사단과 16사단이 부산과 목포에 도착,38선 이남지역을 지배하는 점령군으로 주둔하기 시작했다.당시 주둔병력은 4만5천명. 이후 주한미군의 존재는 대한민국 50년사의 전개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면서 이땅의 정치·사회·문화 등 모든 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특히 주한미군의 철군을 둘러싼 한미간 논쟁과 갈등은 두나라 관계의 본질을 대변해줄 만큼 양국의 정치적 상황과 국민적 정서를 그대로 반영하며 전개됐다. ○닉슨 ‘괌독트린’ 2만명 철수 주한미군에 의한 군정통치는 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끝났다.그리고 한반도를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하는 애치슨라인이 설정됨에 따라 49년 5월부터 6월 사이에 군사고문단 500명만 잔류시킨뒤 철수했다.주한미군의 첫번째 철군이다.이 과정에서 당시 李承晩 대통령은 미국측에 충분한 보상과 확실한 안전보장 등을 요구했지만 결국은 점령군의 철수완료 시기만을 통보받았다. 그러나 미군은 이로부터 1년만에 한국전쟁이 발발함으로써 유엔 참전국의 일원으로 재진주해야 했고 이때 치른 대가는 컸다.전쟁기간중 가장 많을 때는 32만7천의 병력을 파견했으며 전사 3만3천여명,부상 10만3천여명 등 인명피해만도 엄청났다.하지만 종전 이후인 8월8일 한국정부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합의하고 10월1일 조인함으로써 한반도에 합법적으로 주둔할수 있게 됐다. 70년대 들면서 한미간에는 또 한차례 주한미군의 철수를 둘러싸고 신경전과 갈등이 전개됐다.70년 닉슨이 아시아에서의 미국역할의 축소를 밝히는 이른바 괌독트린을 선언함에 따라 그해 후반기부터 71년 3월에 걸쳐 7사단 병력 2만명이 철수했다.한국측은 미국의 일방적인 주한미군 감축계획은 66년한국군이 월남에 증파될때 맺은 ‘브라운 각서’의 주한미군 감축시 사전협의 약정을 위반한 것이라며 강력 반발했다. 결국 이후 열린 협의에서 미국은 한국군 현대화 5개년 계획을 지원하기 위해 약 15억달러의 군사원조및 차관을 제공하는 한편 양국간 연례안보협의회를 개최하기로 합의를 보았다.우리의 방위산업 육성과 국군현대화 등의 추진이 본격화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 세번째 철군은 이로부터 5년이 지난 76년 7월 인도주의를 표방한 민주당대통령후보 카터가 대선공약으로 내걸면서 쟁점화됐다.당시 한국은 유신의 철권통치하에 있던 시기로 한국의 인권문제가 미국내에서 여론의 쟁점으로 부각돼있었다.미의회 프레이저소위원회 청문회가 “한반도가 적화되더라도 미국과 일본의 안전에 영향이 없는 만큼 인권탄압적인 한국으로부터 미군을 철수해야 한다”고 못박을 정도로 미국내의 반한여론은 드높았다.한국정부는 이를 내정간섭의 논리와 핵개발 위협으로 맞받아침으로써 양국관계에는 살얼음판 같은 핵긴장이고조됐다.朴正熙는 75년 6월 12일자 워싱턴포스트와의 회견에서 “한국은 핵무기를 개발할 능력을 갖고 있으나 지금은 개발하고 있지 않다.만일 미국이 핵우산을 걷어가면 한국은 핵무기를 개발하게 될 것이다”고 공개선언,미국정부를 압박했다.그런 한편으로는 ‘선보완 후철군’론을 주장하며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균형 유지책과 한국의 자체 방위력 증강조치를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카터의 철군결정은 미의회 및 군부로부터 많은 비판과 반발을 샀고 이에 카터는 싱글러브 장군을 주한 미8군 참모장에서 해임,철군 반대론에 쐐기를 박기도 했다. ○韓·美軍 역할­위상 큰 변화 아무튼 3차 철군을 둘러싼 한미간의 밀고 당기기에서 한국은 20억달러 상당의 무기 및 군사시설을 제공받고 미공군의 강화,한미 합동군사훈련 실시,한미연합사령부 설치 등의 부수적 성과를 거뒀다.또한 3천4백명의 철수가 이뤄진뒤 미국은 대북한 군사력 재평가결과에 따라 81년까지의 주한미군철수 동결조치를 발표함으로써 3차 철군계획은 사실상 백지화로 일단락됐다. 이상에서 보듯 80년 이전에 거론되거나 실행된 주한미군 철수는 철저하게 미국의 입장에서 결정된 것이며 한국의 입장이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80년대 초 한국이 정치적 격변을 거치면서 주한미군 철수문제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됐다.광주의 참극에서 행해진 주한미군의 역할문제다.주한미군은 전에 한국의 정치적 격변기 때마다 민주화를 지지하는 태도를 취하기는 했으나 결정적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61년 5·16 쿠데타때는 매그루더 사령관이 이의 저지를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79년 12·12 쿠데타태도 위컴사령관이 신군부에 항의를 했다고는 하나 항의로 그쳤다.그러나 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는 신군부측의 병력이동과 관련,주한미군 작전지휘권 아래 있는 부대의 이동이라는 측면에서 주한미군이 직·간접적으로 신군부를 지원 내지는 묵인했다는 비난을 샀다.그리고 이때부터 한국민들로부터‘반전반핵’‘양키 고홈’의 야유를 받으며 시위의 대상으로 몰리기에 이르렀다. 어쨌든 철군을 둘러싼 양국간 대립과 해소의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군과 주한미군의 역할 및 위상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즉 한국전쟁 이후 70년대 말까지는 한반도의 안보를 미군이 주도하고 한국군이 보조하는 관계에서 80년대초 동반자관계로 격상했고 90년대 들어서는 94년 미군의 평시작전통제권 이양이 상징하듯 한국군이 주도하고 미군이 보조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점점 미묘한 문제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의 문제다.한국의 경제력 신장을 반영하기도 하는 방위비 분담은 78년 한미연합사 창설이후 어김없이 제기되면서 특히 대한군사판매차관(FMS)를 졸업한 86년 이후로는 연례안보협의회의 최대 관심사로 등장했다.
  • 국군의 발자취(대한민국 50년:15)

    ◎軍 정치적 중립 5·16구데타로 무너져/65년 월남 파병 계기로 환골탈태/軍장비 현대화­전투력 강화 한몫/6·25 직전 10만서 69만 大軍으로 한국전쟁 발발 직전 대한민국 국군의 총병력은 10만5천여명이었다.이 가운데 지상군이 9만6천여명,해군 7천여명,공군 2천명가량이다.참고로 북한 인민군은 총 19만8천명 규모였다. 국군은 6·25를 거치면서 미국의 원조와 지원 아래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엄청나게 성장했다.전쟁중에는 최고 80만에 이르기도 했지만 종전 무렵에는 60만 대군으로 자리잡았다.게다가 사회 각 부문의 성장이 더딘 상태에서 군은 미국식 교육·관리제도를 도입,운영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앞서가는 조직이 되었다. ○李承晩의 정치이용 거부 그러나 덩치가 커지긴 했어도 군은 정치적인 영향력을 벗어나지는 못했다.제1공화국 시절 李承晩 대통령은 자신의 취약한 정치적 기반을 보완하고 집권을 연장하는 도구로 군을 이용하려 했다.이에 따라 정치권이 인사에 개입하고 부정선거를 강요했으며,정치자금 조달을 요구하기도 했다. 갓 독립한신생국가에서,4억달러쯤에 이르는 미국의 군사원조와 국가예산의 40%가량을 이용하는 군만큼 재정능력이 풍부한 집단은 없었다.따라서 정치권으로서는 군이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의 대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자유당 정부 때의 군이 일방적으로 정치에 끌려다닌 것만은 아니다.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발생한 ‘부산 정치파동’ 당시 이종찬 장군은 육군훈령을 내려 군의 정치개입을 공식적으로 금지했다.60년 4·19가 일어났을때도 군은 질서유지에만 나섰을뿐 정치적으로는 철저하게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나름대로 정치권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던 군의 자세는 5·16군사쿠데타가 터지면서 일시에 무너진다.인사문제를 비롯한 군 내부의 부정부패가 누적되고 정치불안이 야기한 사회혼란이 이어지자 이를 빌미삼아 朴正熙 소장과 일부 영관급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5·16은 朴正熙 집권 18년에 이어 全斗煥·盧泰愚로 연장되는 군사정권 시대의 출발점이 됐다.이 기간 군출신 정치세력은 특유의 기획력과 추진력으로 일정부분 경제성장을 이룬 것이 사실이다.그러나 ‘경제발전’이라는 미명아래 민주주의 발전은 억압됐고 인권탄압이 공공연히 자행됐다.국민의 군대여야 할 군은 국민에게 사랑받기 보다는 경원의 대상이 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특히 1980년 5월 ‘광주의 비극’은 군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됐다. 한편 대한민국 국군은 월남파병을 거치면서 다시 한번 환골탈태한다.1965년 1월8일 朴正熙 정부는 국무회의를 열어 월남에 국군 2천명을 파견하기로 결의했다.다음달 24일 비둘기부대장병 583명이 첫 전투부대로 파병됐다.이에앞서 64년 9월11일에는 의료진과 태권도 사범 164명이 부산항을 떠나 열하룻만에 월남 사이공(현 호지명시)에 도착했다. 한국군의 월남 파병은 1961년 11월 朴正熙 당시 최고회의 의장과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 사이에서 처음 논의됐다.파병의 명분은 ▲한미 양국은 자유우방으로서 아시아의 집단안보에 공동책임이 있고 ▲월남의 안전은 한국의 안보와 직결되며 ▲한국으로서는 6·25때 우방 16개국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이제 빚을 되갚아야 한다는것 등이었다. ○8년간 31만2천명 파병 하지만 파병이 쉽게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우리 정부로서는 파병에 따른 제반조건을 보다 유리하게 얻어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한미간의 줄다리기는 월남전 내내 계속됐고,이같은 상황은 65년 5월17일 미국에서 열린 朴正熙 대통령과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전후의 사정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여하튼 65년 6월14일 월남공화국 수상이 우리 정부에 1개 전투사단 지원을 공식요청한 것을 계기로 국군의 월남 참전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그해 10월16일 첫 전투사단인 맹호부대가 부산항을 떠났고 이어 백마부대·백구부대·청룡부대가 속속 파병대열에 합류했다. 1973년 3월23일 마지막 부대가 귀국하기까지 8년동안 대한민국 국군은 모두 31만2천여명을 월남에 파견했다.그땅에서 국군은 대대급 이상 작전만 1천100회를 실행했고,민간지원 사업으로는 3천500여채의 건물을 지어주고 1천700㎞의 길을 닦아주는 노력을 기울였다. 월남파병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종적으로 내리긴 아직 이르지만 국군장비 현대화와 전투력 강화라는 측면에서만 따질 때 크게 기여했음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아울러 국군이 국제사회에서 위상을 드높이는 데도 한몫을 했다. 최근 국군은 UN평화유지활동(PKO)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93년 7월 소말리아에 공병대대를 파견한 것을 시발로 그동안 앙골라,서부사하라,인도·파키스탄,그루지아 등지의 분쟁지역에서 평화유지군 활동을 벌였으며 이에 따른 국제사회는 그 증거라 할 만하다. 6공화국에서는 헌법에 군의 정치적 중립을 명시했다.이어 문민정부는 하나회 조직을 정비하는 등 군의 정치개입을 용납하지 않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했다.군도 국방백서를 발간,군의 실상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군내 민주화를 이루고자 군인복무규율을 개정하는 등 국민의 군으로 거듭 태어나려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 국군은 지상군 56만,해군 6만7천,공군 6만3천 등 총 69만병력에 이른다.이에 견줘 북한군 규모는 1백14만7천명이다. ◎朴正熙­존슨 대통령 65년 월남 파병 담판/“전투병력 추가 파병 안하면 주한美軍월남으로 빼겠다”/“對韓 경제원조 확대 한국 군장비 현대화 해달라” 65년 5월 미국에서 만난 朴正熙 대통령과 존슨 미국 대통령은 한미 양국의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확인한 뒤 동아시아 안보에 관해 깊이있는 논의를 나누었다.그러나 실질적인 초점은 단연 한국군의 월남 증파 건에 맞춰졌다. 존슨은 공산주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한국군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이어 한반도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데 한미상호방위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가를 역설했다.이때는 한국이 전투부대로 비둘기부대 2천명을 파견한 정도였기 때문에 존슨의 치하처럼 월남에서 큰몫을 담당하지 못한 상태였다.존슨의 언사는 결국 한미상호방위에 더욱 관심을 가질테니 한국도 월남에 병력을 더 많이 보내라는 정치적 요구에 다름아니었다.이 자리에서 존슨은,한국이 병력 파견을 늘리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월남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는 암시도 함께 했다. 두 정상은 이 만남에서 미국의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와 한국군 현대화를 추진하는 군사원조를 늘이기로 합의했다.또 주월한국군 유지비용의 인상과 주한미군 유지 약속 등에도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다음해 3월7일 브라운 주한 미대사는 국군의 월남 추가파병에 따른 미국측 보상조치를 약속한 14항목의 문서를 한국정부에 전달했다.주요 내용은 ▲추가파병 비용은 미국이 부담 ▲한국 육군 17개 사단과 해병대 1개 사단의 장비 현대화 ▲월남 재건 및 구호사업에 한국업체 참가 ▲미국의 차관·군사원조 계속 및 신규차관 제공 등이다. 이 각서이후 곧바로 국군은 2만여명을 월남으로 보냈고,월남전이 끝날 때까지의 병력 31만여명은 월남전 참전국 가운데 미군에 이은 두번째 규모 였다.또 민간업체의 월남에 대한 수출액 할당도 연 6천만달러로 늘어났으며 건설사업 등에의 참여도 활발해져 우리 사회는 ‘월남특수’를 노렸다.그러나 월남에서 숱한 한국청년들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하였다든지,참전용사와 그 자녀들이 고엽제 후유증으로 시달리는 일따위는 월남파병에 따른 손실이기도 하다.
  • ‘돌아온 영웅’ 싱글러브 前 주한미군 참모장

    ◎“DJ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대북정책 북 오판 방지에 역점둬야 마땅/주한미군 한반도서 전쟁억지 역할 수행 【崔哲昊 기자】 카터 대통령시절 주한미군 참모장이었던 존 K.싱글러브 예비역 소장(77)이 9일 베트남 참전 한국군과 미군용사들에 대한 기념사업차 오랜만에 한국을 다시 찾았다.한국전쟁은 물론 월남전에서도 한국인들과 함께 공산주의와 싸운 미국의 전쟁영웅 싱글러브씨는 지난 50년동안 한국을 지켜본 사람으로써 다시 찾은 한국에 대해 “한국을 한마디로 말할 때 내게 떠오르는 단어는 ‘자랑스러움’과 ‘애정’이라고 밝혔다.그는 지난 1977년 카터 대통령의 인권정책이 주한미군의 철수로까지 이어지자 이 정책이 실책이라고 공개비판했다가 예편됐었다. ○92년 김 대통령 처음 만나 ­金大中 대통령 정부가 새로 출범한지 얼마 안되는 시점에 다시 방한한 소감은.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金대통령이 선거전 시기에 친북성향의 인물로 비쳐지는 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는 것이다.내가 본 金大中씨는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나는 지난 92년 金대통령을 처음 직접 만났다.한 세미나자리에서 처음 보고 며칠 뒤 조찬을 함께 하면서 깊이있는 대화를 나눴다.나는 그자리에서 그가 당시 盧泰愚정부가 주한미군과 미국에 친밀함을 보이지 않은 것에 비판하면서 친미성향적 말을 한 것에 대해 상당히 놀랐다.또 盧泰愚 대통령이 북한과 대면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그의 우유부단함을 지적했었다.金大中씨의 당시 이 비판은,과거 정권이 그를 용공으로 몬 것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미국의 친구들에게 김대통령이 철저한 반공주의자라는 것을 얘기하자 그들도 김대통령이 잘못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카터는 매우 연약한 인물 ­새 정부가 취해야할 대북정책은. ▲상식적으로 행동하지않는 金正日이 그가 저지르는 과격행동으로 인해 북한이 어떤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오판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한미군철수 반대 건으로 퇴역했는데 미군주둔의 의미와 철군시기는. ▲미군의 철수문제는 전적으로 한국민의 판단에 달렸다고 본다.다만 미군은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직접적으로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철군을 주장한 카터가 지금은 대북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는데. ▲카터는 매우 연약한 사람이고 좌익주의자들로부터 조종 당하는 인물이다.그가 북한에 가서 金日成을 만난 것은 최악의 실수이다.그가 행했던 많은 외교정책은 실수의 연속이었다. ­얼마전 회고록에서 한국전은 충분히 예견된 전쟁으로 막을 수 있었다는 내용을 강조했다던데. ▲나는 군에서 제대한 이후 회고록을 썼다.거기서 나는 6·25전쟁이 미국정보기관의 판단착오가 가져온 중대한 결과라는 분석을 실었다.즉 CIA에 의해 북한내부 깊숙히 침투됐던 공작원들이 金日成군대가 전쟁준비를 마쳤고 언제든지 남침할 것을 경고했는데 CIA정보분석자들은 이를 소홀히 취급했다. ○전역후 회고록 등 집필 ­전역이후 최근까지의 근황은. ▲전역직후 많은 시간을 책을 쓰고 강연을 하는가 하면 지난 80년대 레이건 대통령시절 공산주의에 핍박받는 전세계 나라를 위해 물심양면 도움을 주고자 노력해오고 있다. ­한국은 IMF구조조정 시대에 살고 있다.한국민에게 조언을 한다면. ▲미국에서도 대공황시절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내 어머니의 가족도 뿔뿔이 흩어져 살았고 나는 시간당 25센트를 받으며 일도 해봤다.우리도 그 고난을 이겨냈다.한국도 그런 정도의 고난은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고 본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