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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드 갈등에도 중국군 유해 인도식

    사드 갈등에도 중국군 유해 인도식

    6·25 전쟁에서 전사한 중국군 유해 28구의 인도식이 22일 인천국제공항 계류장에서 한·중 공동으로 열린 가운데 추궈훙 주한 중국대사가 유해함에 오성홍기를 덮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美전략폭격기 B-1B 7일만에 또 한반도에…北 폭격훈련

    美전략폭격기 B-1B 7일만에 또 한반도에…北 폭격훈련

    미국이 22일 광범위한 파괴력을 가진 전략무기인 장거리전략폭격기 B-1B ‘랜서’를 전격적으로 한반도에 전개했다. B-1B는 우리 공군 전투기들과 편대를 이뤄 폭격 훈련을 하며 북한에 강력한 경고메시지를 보냈다. 국방부는 “우리 공군은 오늘 한반도 상공에서 미 공군 B-1B 전략폭격기와 한미 공군 연합훈련을 실시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한반도에 전개된 B-1B는 1대로, 괌 앤더슨 공군기지에서 이륙해 일본 방공식별구역(JADIZ)에서 항공자위대 전투기 F-15J와 연합훈련을 한 다음, 한국 방공식별구역(KADIZ)으로 들어왔다. 이어 대구와 서산 공군기지에서 이륙한 우리 공군의 F-15K 2대, KF-16 2대와 유사시 B-1B의 한반도 전개 절차, 연합 편대 비행, 모의 사격훈련 등을 했다. 시뮬레이션을 활용한 모의 사격훈련은 서해 직도 상공에서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직도는 전북 군산 앞바다에 있는 무인도로, 공대지 사격장으로 쓰인다. 국방부는 “이번 훈련을 통해 한미 공군은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한미동맹의 강력한 억제력을 과시하는 한편, 한미 전력의 상호운용성 및 연합 전술능력을 향상시키고 유사시 신속대응전력의 전개 능력을 숙달했다”고 평가했다. 당초 미국은 B-1B 2대를 한반도에 전개할 예정이었지만 1대만 보냈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한반도 긴장 수위를 조절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모양이 백조를 연상시켜 ‘죽음의 백조’라는 별명을 가진 B-1B는 B-52, B-2 ‘스피릿’과 함께 미국의 3대 전략폭격기로, 적지를 융단폭격할 수 있는 가공할 파괴력을 갖췄다. 가공할 위력으로 ‘죽음의 백조’로도 불린다. 최대 탑재량이 B-52와 B-2보다 많아 기체 내부는 34t, 날개를 포함한 외부는 27t에 달한다. 한 번 출격으로 대량의 폭탄을 투하할 수 있다는 얘기다. 2천파운드급 MK-84 폭탄 24발, 500파운드급 MK-82 폭탄 84발, 2천파운드급 GBU-31 유도폭탄 24발 등을 탑재할 수 있다. B-52, B-2와는 달리 핵폭탄을 장착하지는 않는다. 최대속도가 마하 1.2로, B-52(시속 957㎞), B-2(마하 0.9)보다 빨라 유사시 괌 기지에서 이륙해 2시간이면 한반도에서 작전할 수 있다. 고속으로 적 전투기를 따돌리고 적지를 폭격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은 지난 15일에도 B-1B 2대를 한반도에 전개했다. 7일 만에 B-1B를 거듭 한반도 상공에 보냄으로써 북한에 고강도 무력시위를 한 것으로 해석된다. 6·25 전쟁 당시 미 공중전력의 폭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본 북한은 미 장거리전략폭격기가 한반도 상공에 뜰 때마다 예민하게 반응해왔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B-1B 편대의 한반도 전개 다음날인 16일 “우리에 대한 핵 선제타격을 기어코 실행해보려는 적들의 무모한 군사적 망동이 극히 위험한 단계에 들어섰다”며 반발한 바 있다. 미국은 최근 B-1B 외에도 핵추진 항공모함 칼빈슨호(CVN 70)와 핵추진 잠수함 콜럼버스함(SSN 762)을 잇달아 한반도에 보내 북한 핵심 시설 타격 연습을 했다. 미국은 앞으로도 다양한 전략무기를 순차적으로 한반도에 전개해 대북 군사적 압박 수위를 높일 예정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4월의 눈’ 흩날리면 군항 고도 진해선 ‘벚꽃 엔딩’

    ‘4월의 눈’ 흩날리면 군항 고도 진해선 ‘벚꽃 엔딩’

    경남 창원시 진해구(옛 진해시)는 군항과 벚꽃의 도시다. 일제가 군사적 목적에서 1910년부터 군항시설과 도로 등을 건설하는 등 군항도시를 계획해 조성했다. 해방이 된 뒤에는 해군사관학교를 비롯해 해군 관련 부대와 시설이 잇따라 들어서 대한민국 해군 기지가 됐다. 도시 곳곳에 일제강점기 때와 1950~60년대 지은 오래된 건축물이 보존돼 있다.일제가 진해군항도시를 조성하면서 도시미관을 좋게 하려고 벚나무를 심은 게 진해 벚나무의 유래로 전해진다. 해방 뒤 벚나무가 일제 잔재라는 인식이 퍼져 대부분 베어 냈다. 그 뒤 왕벚나무는 한국에서 자생하는 우리나라 고유 수종이라는 사실이 확인돼 1960년대부터 진해지역에 다시 왕벚나무를 심기 시작해 36만여 그루에 이르는 벚나무가 도심과 주변 산등성이까지 우거진 지금의 진해 벚꽃 도시가 조성된 것이다. 해마다 3월 말~4월 초, 하얀 벚꽃으로 뒤덮힌 도시와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가 어우러진 해안도시 풍경은 황홀하다.창원시와 진해군항제축제위원회는 벚꽃이 절정인 다음달 1~10일 열흘 동안 진해구 전역에서 세계 최대 벚꽃 축제인 진해군항제를 개최한다. 20일 창원시에 따르면 해마다 군항제 기간에 벚꽃축제와 군항시설 등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300여만명이 진해를 방문한다. 만개한 벚꽃길을 걸으며 축제를 즐기고 도시 곳곳에 널려 있는 근대건축물과 군부대를 탐방하는 봄 나들이 재미가 쏠쏠하다. 진해 군항제는 1953년 4월 13일 우리나라 최초로 이순신 장군 동상을 북원로터리에 세우고 이승만 대통령 등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제를 올린 게 시초다. 북원로터리 이순신 장군 동상에서 해마다 추모제를 지내다 1963년부터 진해 군항제를 시작해 올해 55회째다. 기상예보 기관은 올해 진해지역 벚꽃은 오는 26일쯤 꽃잎 2~3개가 피면서 개화가 시작돼 전야제가 열리는 31일 전후로 만개할 것으로 예보하고 있다. 벚꽃은 개화 5~6일쯤 뒤 활짝 피므로 올해는 군항제 개막일을 전후해 눈부신 벚꽃 절경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군항제는 오는 31일 오후 6시 중원로터리 특설무대에서 식전 공연과 축하 공연, 불꽃쇼 등 개막행사로 시작돼 다음달 10일까지 추모행사, 이 충무공 호국퍼레이드, 공연예술행사, 여좌천 별빛축제, 속천항 멀티미디어 해상 불꽃쇼, 군부대 개방행사, 군악의장페스티벌 등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진다. 김종문 창원시 문화예술과 축제담당은 “올해 군항제에는 개막식 때 불꽃쇼를 비롯해 새로운 행사를 많이 추가했다”고 말했다. 다음달 7~9일 진해공설운동장 등에서 육해공군과 해병대, 미8군 등의 군악대와 의장대 등이 펼치는 진해군악의장페스티벌은 군항제의 으뜸 볼거리 행사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해군사관학교와 해군 진해기지사령부, 해군교육사령부, 미해군 진해함대지원부대가 축제 기간에 일반인 출입을 허용하고, 부대 안에서 다양한 체험·전시 행사를 한다. 해군 부대 안에도 수십~100여년 된 벚나무가 우거져 있어 축제 때면 눈부신 벚꽃 하늘이 펼쳐져 많은 관광객들이 몰린다. 부대 안 박물관·함정 등도 개방한다. 다음달 1일에는 오후 8시 속천항 해상에서 ‘멀티미디어 불꽃쇼’가 펼쳐져 바닷가 밤하늘에서 오색찬란한 불꽃이 쏟아진다. 진해루 앞 방파제 구간에 6·25 참전 16개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 국기를 내걸어 ‘세계의 거리’를 조성한다. 군항마을 빛거리 조성, 여좌천 주차장 주변에 세계음식거리 조성, 진해 시가지 중간에 있는 야트막한 제황산 공원에 경관조명을 설치해 별빛거리를 조성하는 등의 행사는 올해 처음으로 하는 행사다. 특히 제황산 정상에 있는 진해탑(28m) 8층 전망대에서 보면 사방으로 시가지와 바다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경화역 주변 벚꽃이 우거진 철길을 비롯해 장복산 공원 벚꽃터널, 안민고개 십리 벚꽃길, 여좌천 로망스다리 주변 벚꽃길, 제황산 공원, 진해 내수면 환경생태공원 벚꽃 등은 군항제 기간에 꼭 둘러볼 벚꽃 명소다. 창원시는 축제 기간에 시내 교통 체증을 줄이고 대중교통을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올해 처음으로 중심도로 버스전용차로제를 시행한다. 해군교육사령부 영내를 비롯해 도심과 외곽 곳곳에 모두 1만 6200대를 주차할 수 있는 임시주차장을 확보하고 임시주차장과 주요 행사장 사이를 오가는 무료 셔틀버스 82대를 운행한다. 셔틀버스는 오전 9시부터 밤 10시까지 5~10분 간격으로 다닌다.권중호 시 안전건설교통국장은 “군항제 기간에 올해 처음으로 버스전용차로제를 시행함에 따라 교통혼잡이 예상되는 주말에는 승용차는 외곽 주차장에 세워 두고 셔틀버스를 이용하면 편하게 오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진해구 지역은 일제강점기 때 조성된 시가지 형태와 100년이 넘은 건축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세월이 흘러가면서 근대문화유산 박물관 도시로 조명받고 있다. 진해지역 구도시 시가지 구조는 중원로터리와 북원로터리, 남원로터리 등 3개의 로터리가 이어져 있다. 중원로터리를 중심으로 방사선 형태로 8개의 도로가 뻗어 있다. 이 같은 시가지 구조는 일제강점기 시절 계획해 만든 것으로 당시 형태가 지금껏 유지되고 있다. 해군 기지로 군사보호구역에 묶여 개발이 제한되다 보니 도시 조성 당시 시가지 구조와 건축물 등이 보존될 수 있었다.진해우체국, 시민문화공간 흑백, 새수양회관, 일제 해군통제부 병원장 사택, 백범 김구 선생 친필 시비, 1930년대 건축된 중평동 일본식 장옥, 진해탑, 진해역, 우리나라 최초의 이순신 장군 동상, 중앙동 군항마을 역사관, 적산가옥 등 다양한 근대문화유산 건축물이 있다. 군항마을 역사관은 1920년대 지은 적산가옥을 리모델링해 역사자료 전시관으로 꾸몄다. 1·2층 전시관에 진해의 역사와 근대문화유산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 등이 전시돼 있어 진해 탐방에 앞서 군항마을 역사관을 먼저 둘러보면 현장을 편하게 찾아다닐 수 있다. 진해우체국은 러시아풍으로 1912년 건립된 건물로 2000년까지 우체국으로 사용됐다. 사적 291호로 지정돼 있다. 문화공간 흑백도 1912년 지은 건물로 2008년까지 ‘흑백다방’으로 운영되다 지금은 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현재 음식점으로 쓰고 있는 새수양회관은 1938년 건립된 3층 목조 건물로 지붕이 육각형 정자 모양을 하고 있다. 건물이 뾰족해 뾰족집이라고도 부른다. ‘선학곰탕’ 음식점 건물은 일제강점기 해군통제부 병원장 사택으로 1938년 건축된 건물(근대문화유산 193호 등록 문화재)이다. 진해역은 1926년 11월 건립돼 2014년까지 운영되다 진해선 폐선으로 문을 닫았다. 근대문화유산 192호 등록 문화재다. 8층으로 이뤄진 진해탑은 일제가 세운 러·일전쟁 전승 기념탑을 부수고 그 자리에 해군 군함을 상징하는 형상으로 1967년 건립했다. 2층에 창원시립 진해박물관이 있다. 북원로터리 중앙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은 1952년 우리나라 최초로 세운 이순신 동상이다. 벚꽃길로 유명한 여좌천 둑은 일제가 군항도시 조성을 하면서 하천물이 넘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나라 주민을 동원해 쌓은 건축물이다. 해군기지사령부 부대 안에 있는 진해요항부 사령부(등록 문화재 194호)와 진해방비대 사령부 본관·별관(등록 문화재 195·196호), 진해요항부 병원(등록 문화재 197호) 등도 지은 지 100년이 넘은 건물들이다. 해군기지사령부 안에는 일제 해군 통신대가 썼던 건물을 개조해 이승만 대통령 별장으로 이용했던 건물도 남아 있다. 창원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軍, 사드 갈등에도 중국군 유해 송환

    軍, 사드 갈등에도 중국군 유해 송환

    중국과의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갈등에도 불구하고 국방부는 6·25전쟁 당시 한국에서 숨진 중국군 유해 28구의 중국 송환을 위한 입관식을 20일 진행했다. 이날 입관된 유해는 22일 중국 측에 인도된다.이날 오후 인천에 있는 중국군 유해 임시 안치소에서 거행된 입관식에는 우리 군 관계자와 주한 중국대사관 무관을 비롯한 중국군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주한미군의 한반도 사드 배치에 중국이 강력 반발하고, 중국 내에서 한국 기업 등에 대한 각종 보복 조치가 잇따르면서 양국 관계가 악화됐지만 우리 군은 제네바 협약에 명시된 인도주의적 정신에 따라 올해도 중국군 유해 송환을 결정했다. 중국 측 역시 같은 맥락에서 우리 측 제안을 거부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국방부가 6·25 참전 중국군 유해를 송환하는 것은 올해가 네 번째다. 2014년부터 해마다 중국 청명절(올해 4월 4일)을 앞두고 중국군 유해를 송환해 왔다. 중국군 유해 송환은 2013년 6월 중국을 방문한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제안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받아들이면서 시작됐다. 2014년 437구가 송환됐고 2015년과 지난해에도 각각 68구, 36구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시 주석은 2014년 3월 한·중 정상회담에서 중국군 유해 송환에 대해 감사의 뜻을 밝혔다. 박홍환 전문기자 stinger@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판잣집과 달동네 <상>

    [그때의 사회면] 판잣집과 달동네 <상>

    가수 남인수가 휴전 이듬해인 1954년 발표한 ‘이별의 부산정거장’ 속의 판잣집은 피란민의 애환과 고난을 말해준다. 고향을 잃고 집을 잃은 사람들은 그곳을 터전으로 해서 다시 삶을 이어 갈 수 있었다. 40여년 전만 해도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는 온통 판잣집으로 뒤덮이다시피 했다. 6·25 전쟁 후 집을 잃은 사람들과 북한 피란민들에게는 판잣집이나 움막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일제 강점기에도 무허가 불량주택이 있었다. 땅에 흙담을 만든 뒤 그 위에 가마니나 거적을 덮은 것으로 토막으로 불렸으며 그 속에 사는 사람은 토막민이라고 했다. 유치진의 희곡 ‘토막’은 바로 일제하 토막민들의 비참한 생활을 소재로 한 희곡이다. 판잣집은 판자와 나무로 만든 집이었다. 판자촌의 생활은 비참했다. 말이 집이지 겨우 비바람만 피할 수 있을 정도로 허술했다. 불법 가옥이어서 전기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다. 우물은 물론이고 화장실까지 공동으로 썼다. 전쟁이 터지면서 200만명에 가까운 이북 동포들이 월남하고 농어촌 주민들이 상경하면서 서울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전쟁 이후의 혼란 속에 판자촌은 걷잡을 수 없이 생겨났다. 서울의 청계천 주변과 용산 해방촌, 금호동 등에 집중적으로 생겼다. 해방촌은 최초의 판자촌이다. 해방촌은 해방(광복)을 전후해서 생겨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서울 용산구 용산동 2가 일대다. 광복 후 해외에서 돌아온 동포들이 먼저 이곳에 자리를 잡고 전쟁 이후 월남한 동포들이 합류하면서 수만 명이 거주하는 거대한 판자촌이 형성됐다. 38도선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38 따라지’라고 했다. 따라지는 화투에서 한 끗을 의미하는데 하찮은 인생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낮춰 불렀다. 청계천 양쪽에도 판자촌이 형성됐다. 수표교까지는 판잣집이 없었지만 종로 3가 근처부터 하류 쪽으로 판자촌이 길게 띠를 이루고 있었다. 대폿집과 철물점, 보신탕집도 판잣집이었다. 도시 미관을 해치고 화재가 자주 발생함에 따라 불법 판잣집을 마냥 묵인해 줄 수도 없었다. 정부는 우선 간선도로 주변의 판잣집을 자진 철거하도록 유도했다. 미관보다 더 큰 문제는 화재였다. 판잣집의 재료가 기름칠한 종이와 나무였으므로 화재에는 무방비였다.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은 한 집에서 불이 날라치면 수십, 수백 가구가 동시에 불탔다. 그러나 자진 철거는커녕 도리어 더 불어나고 매매행위까지 공공연하게 발생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판잣집을 전부 철거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1955년 무렵이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그해 6월 무렵 자진 철거한 판잣집은 9322가구이며 철거 대상 판잣집은 6만 가구에 이르고 있다. 사진은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 판자촌 화재(1972년 1월 5일). 손성진 논설실장 sonsj@seoul.co.kr
  • [사설] 분열 아닌 통합의 길 가는 역량 보여 주자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사건의 심리를 마무리 짓고 오늘 오전 선고한다. 지난해 12월 9일 국회로부터 탄핵소추 의결서를 접수한 지 91일 만에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헌재의 선고 결과는 당장 정치 일정에 커다란 변화를 몰고 올 수밖에 없다. 헌재가 탄핵을 인용해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을 파면하면 60일 안에 대통령 선거를 치러야 한다. 대통령 임기가 1년 남짓 짧아지면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은 물론 ‘국민의 삶’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탄핵이 기각돼 박 대통령이 직무에 복귀한다 하더라도 탄핵 정국 후유증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말할 것도 없이 ‘촛불’과 ‘태극기’로 쪼개진 민심이다. 헌재가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우리 사회의 최우선 과제는 상처 난 국민의 마음을 보듬어 다시 통합의 길로 이끄는 것이어야 한다. 오늘 우리가 향유하는 민주주의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일본제국주의의 강점과 6·25 전쟁에 이은 남북 분단으로 만신창이가 된 나라를 다시 세우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민주주의 선진국들이 놀라워하고 민주주의로 발전하는 과정에 있는 나라들이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국민이 흘린 피의 대가다. 지금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도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과정에서는 한목소리를 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게 뜻을 합쳤던 결과가 오늘날의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오늘 헌재 선고에 승복하느냐, 불복하느냐에 따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한 단계 도약할 수도, 수십 년 전으로 뒷걸음질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딴판으로 돌아간다. 서울 재동의 헌재 청사 앞에서 벌어지는 탄핵 찬반 진영의 시위는 선고가 다가올수록 과격해지는 양상이다. 어제도 헌재 정문 앞에서는 “탄핵 각하”를 외치는 시민들이, 그 맞은편에서는 “탄핵 인용”을 주장하는 시민들이 돌아가며 1인 시위를 벌였다. 양측은 치열한 설전을 넘어 언제라도 폭력 사태가 벌어질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찬반 진영은 오늘 이곳에서 각각 대규모 집회를 예고하고 있다. 선고 이후 어떤 모습이 펼쳐질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지금은 힘을 합쳐도 나라를 정상화시키기가 쉽지 않다. 구성원 하나하나의 뼈를 깎는 노력이 더해지더라도 탄핵 소추 이전의 나라로 돌아갈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하다. 게다가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과 중국의 ‘사드 보복’ 등 안보 및 경제 환경은 최악이다. 그럼에도 헌법 가치를 부정하며 헌재 결정에 불복하는 사태까지 빚어진다면 대한민국호(號)는 결국 항해 불능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
  • ‘전쟁고아 아버지’ 헤스 美대령 기념비 건립

    ‘전쟁고아 아버지’ 헤스 美대령 기념비 건립

    1950년 12월 20일, 서울은 또다시 풍전등화의 위기에 휩싸였다. 압록강까지 치고 올라갔던 국군과 유엔군은 그해 10월 참전한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인해 서울 부근까지 밀려 내려왔다. 부모를 잃은 수많은 전쟁고아는 적의 포탄 세례에 그대로 노출될 위기에 직면했다.그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고(故) 딘 헤스 미 공군 중령(대령 예편)은 군목 러셀 블레이즈델과 함께 서울의 전쟁고아 1000명을 C54 수송기 15대에 나눠 태워 제주도로 피신시켰다.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제주도에 전쟁고아들의 보금자리인 보육원도 지었다. 휴전 후에도 수시로 한국을 찾아 고아들을 지원했고, 20년 넘게 전쟁고아를 위한 모금 활동을 했다. 헤스 예비역 대령에게 ‘전쟁고아의 아버지’라는 호칭이 붙은 이유다. 제주도 제주항공우주박물관에 9일 그의 공적기념비가 세워졌다. 이로써 자서전 ‘전송가’에 적었던 그의 소망도 현실이 됐다. 자서전에서 그는 전쟁고아들의 고통과 희생을 기억하기 위한 기념비를 세우고 ‘우리가 구조할 수 없었던 생명들을 추모하며’라는 글귀를 새겨 주길 소망했다. 헤스 예비역 대령은 한국 공군의 토대를 만들어 준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는 6·25전쟁 당시 미 공군이 한국 공군 조종사 양성 등을 위해 창설한 ‘바우트1’ 부대를 맡아 공군 전투력 강화에 힘을 쏟았다. 1년간 무려 250여회 출격하며 적 지상군 격퇴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자신의 F51 전투기에 ‘신념(信念)의 조인(鳥人)!’이라는 우리말 글귀를 큼지막하게 적어 놓았고, 이는 한·미 공군 간 우의의 상징이 됐다. 이날 기념비 제막식에는 정경두 공군참모총장, 김방훈 제주 정무부지사, 마크 내퍼 주한 미국대사 대리, 더불어민주당 위성곤 의원 등이 참석했다. 그의 아들 래리 헤스(75)는 “어떤 이가 아버지에게 ‘무엇으로 기억되고 싶은가’라고 물었을 때 아버지는 ‘사랑’이라는 단어로 기억되고 싶다고 하셨다”고 감격스럽게 말했다. 박홍환 전문기자 stinger@seoul.co.kr
  • [손성진 칼럼] 운명의 날, 분노 게이지를 낮추자

    [손성진 칼럼] 운명의 날, 분노 게이지를 낮추자

    운명과 명운은 엄연히 다른 말이다. 명운은 내가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바뀌지 않는다. 운명은 바꾸고 조종할 수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운명의 날, 우리의 국운을 바꿀 내일을 향한 시곗바늘이 재깍재깍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다. 운명은 ‘촛불’이나 ‘태극기’,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다 같다. 더 큰 운명은 물론 대한민국의 운명이다. 이제 내일이면 그 운명이 결정된다. 마주 달려온 두 기관차가 충돌할 직전의 상황까지 와 있다. 과연 이 나라의 앞에는 어떤 운명이 펼쳐질 것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 손에 달린 게 운명이다. 증오에 찬 섬뜩한 악다구니부터 먼저 던져 버려야 한다. 엄동설한 곱은 손에 촛불과 태극기를 손에 손에 든 것은 누구라도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애국심의 발로임을 의심치 않는다. 민주 국가에서 다양성의 충돌은 인정된다. 그것은 나라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토양으로 승화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다양성이 상대방을 깔아뭉개고 내 생각만을 절대적 가치로 끌어올리고자 할 때 민주주의는 붕괴되고 만다. 독재주의로의 회귀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아름다운 별빛처럼 보였던 촛불도 때로는 화를 못 이긴 민초들의 횃불로 시커먼 연기를 내며 더 거대하게 타올랐다. 그럴수록 태극기는 범람했고 맑은 광화문의 하늘을 뒤덮어 버렸다. 앞으로 몇 달이 우리에겐 반만년을 이어 온 역사에서 큰 변곡점이 될 게 분명하다. 이제 곧 운명의 방향은 결정될 것이다. 우리가 조종하는 대로 대한민국의 운명은 움직일 것이다. 증오심을 삭이지 못하고 두 기관차가 끝내 정면충돌한다면 우리의 운명은 뒷걸음질칠 게 뻔하다. 식민지배와 전쟁, 독재를 극복하고 키워 온 민주주의와 경제적 발전은 한순간에 잃게 될지도 알 수 없다. 사실 알고 보면 ‘촛불’과 ‘태극기’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다. ‘촛불’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삼촌, 숙모가 바로 ‘태극기’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태극기’의 아들, 손자가 ‘촛불’이다. 태어난 시기와 환경이 달라서 서로 생각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할아버지는 6·25를 겪었고 아버지는 겪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는 가족이고 그래서 하나다. 다만, 두 진영 모두 이념에 매몰돼서는 곤란하다. 이념에 앞서는 것이 정의다. 불의의 얼굴에 이념의 화장품을 바른다고 불의가 정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보수든 진보든 마찬가지다. ‘촛불’에 저항하는 세력의 위세가 커진 것은 일부일지라도 이념을 끌어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태극기’를 걱정하는 것은 그들의 과격성 때문이 아니라 불의를 이념으로 포장해 옹호하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이유에서다.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의 헌법기관인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정의롭다고 봐야 한다. 정의가 이념보다 앞선다고 인정한다면 헌재의 결정에 승복하는 게 민주 시민의 도리다. 다수결의 원리로 지탱되는 민주 국가에서 그 원리를 부정한다면 왕정국가로 이주하는 수밖에 없다. 두 진영의 심리에는 사회에 대한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 분노 게이지는 양쪽 모두 최고조다. 북한의 위협이 트라우마인 태극기 진영은 노인 빈곤, 실종된 경로사상에도 격노한다. 촛불 진영은 빈부 격차, 신분 상승의 기회 상실, 불공정 사회, 재벌 독점에 대한 분노가 어느 때보다 크다. 둘의 갈등을 기득권을 옹호하고 파괴하려는 것으로 보는 관점은 별도다. 위에 나열된 분노 촉발 원인들은 종언을 고해야 한다. 명운이 다하지 않았다면 다하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운명이며 그것을 스스로 개척하는 일이다. 격변하는 세계는 종전 이후 우리에게 가장 큰 시련을 강요하고 있다. 마치 곧 전쟁이 터지고 외환위기가 재현될 것 같은 위기감이 뒤덮고 있다. 그러나 걱정은 걱정, 위기감은 위기감에 그쳐야 한다. 6·25 직전 좌우 격돌의 재판(再版) 같다는 불길한 생각도 생각으로 끝내 주기 바란다. 그러자면 어느 쪽이든 얼마 후 탄핵 결정을 보고 승리한 상대방을 전복시키고 말겠다는 분노 게이지부터 낮추자.
  • 쌍둥이 두 쌍·육해공 3부자·독립유공자 후손… 신임 장교 합동임관식 “충성”

    쌍둥이 두 쌍·육해공 3부자·독립유공자 후손… 신임 장교 합동임관식 “충성”

    8일 충남 계룡대 대연병장에서 열린 ‘장교 합동임관식’을 통해 소위 계급장을 어깨에 단 육해공군 신임 장교 5291명 가운데는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 형제도 두 쌍이나 포함돼 있다. 육군 3사관학교 52기 박만호(24)·면호(24) 소위와 육군 학군단(ROTC) 55기 양수영(24)·수민(24) 소위가 그들이다.박 소위 형제는 특히 아버지와 형에 이어 장교로 임관해 4부자 육군 장교 가족의 탄생을 알렸다. 아버지 박재기 예비역 중령은 육군 ROTC 22기, 형 박성호 육군 대위는 육사 69기 출신이다. 쌍둥이 형제는 “아버지와 형에 이어 육군의 명예를 드높이는 조국 수호의 간성이 되겠다”고 말했다. 육사 73기 강솔(25) 소위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3대에 걸쳐 육사 출신 장교의 길에 들어섰다. 할아버지 강경식 예비역 중령은 15기, 아버지 강철환 대령은 46기다. 해사 71기 김용현(25) 소위가 임관하면서 육해공군 3부자 가족도 탄생했다. 아버지 김경서 대령은 공사 38기 출신이고, 동생 김용인 생도는 육사 76기로 입교해 2학년에 재학하고 있다. 2년 뒤 김 생도가 임관하면 창군 이래 처음으로 3부자가 동시에 육해공군 장교로 현역 복무하는 사례가 된다. 육군 ROTC 55기인 신윤철(25) 소위는 육군 ROTC 27기인 아버지 신희현 육군 준장의 뒤를 잇는다. 이화여대에 재학 중인 동생 신보혜씨는 57기로 ‘3부녀 학군 장교’ 탄생을 앞두고 있다. 해사 71기 박희재(24) 소위와 3사 52기 이철홍(24) 소위는 각각 의병활동과 3·1운동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대를 이어 조국을 지키는 영광을 안게 됐다. 육군 ROTC 55기 김하늘(24) 소위는 6·25 참전 영웅의 외손녀다. 6·25전쟁 당시 통신병으로 복무했던 김 소위의 외조부는 북한군에 잡혀 포로수용소에 3년 동안 수용됐다가 탈출해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신임 장교들은 각 군과 병과별 초등군사반 교육과정을 거쳐 육해공군과 해병대 일선 부대에 배치된다. 박홍환 전문기자 stinger@seoul.co.kr
  • [그 시절 공직 한 컷] 우리 강산 푸르게… 1970년 공공의 적 ‘송충이와의 전쟁’

    [그 시절 공직 한 컷] 우리 강산 푸르게… 1970년 공공의 적 ‘송충이와의 전쟁’

    1970년 철도청 공무원들이 송충이를 일일이 손으로 잡고 있다. 철도청은 1963년 중앙행정기관으로 발족했으나 2005년 1월 1일 공기업인 현재의 코레일로 개편되면서 사라졌다. 송충이 잡기는 ‘한 마리의 송충이라도 더 잡아서 우리의 강산을 보호하자’란 구호 아래 공무원을 비롯해 전 국민이 참여한 거국적인 운동이었다. 1950~60년대는 송충이가 사회 문제가 될 정도로 심각했다. 6·25 이후 전쟁과 땔감으로 황폐화된 산에 소나무 묘목을 심어 산림녹화에 힘을 썼지만 송충이가 어린 묘목에 피해를 주고 얼마 남지 않은 소나무숲도 송충이가 차지하다 보니 당시 송충이는 ‘공공의 적’이었다. 일선 공무원들은 소나무 말고 다른 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주장도 했지만 우리나라 산림을 소나무가 아닌 나무로 대체하기는 어려웠다. 학생들과 공무원이 팀을 이뤄 지역을 정해 놓고 학생들은 어린 소나무에 있는 송충리를, 공무원들은 높은 나무의 송충이를 잡아 주머니에 모은 다음 들판으로 내려와 휘발유를 부어 태워 죽였다. 송충이는 생태계에서도 천적이 거의 없어 자연적인 퇴치가 쉽지 않았다. 70년대 들어 헬기로 약제를 살포하면서 현재 송충이 문제는 거의 해결됐지만 솔잎혹파리, 소나무재선충 등 더 지독한 해충들이 소나무를 위협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 훈장 받은 6·25 용사 유족, 장학금 기탁

    6·25 참전용사 유가족이 화랑무공훈장을 전달받으면서 감사의 뜻으로 장학금 100만원을 기탁했다. 경남 하동군 금성면은 28일 정부가 금성면 출신 고 김상풍 하사에게 최근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해 김씨의 딸 김춘선(69)씨에게 훈장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국방부에 따르면 6·25 전쟁 직전에 군에 입대한 고인은 군 복무 중에 질병을 얻어 1955년 8월 의가사 제대한 뒤 1961년 12월 31세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유가족과 국방부는 오랫동안 노력한 끝에 제주도에서 무공을 세운 자료를 찾아내 뒤늦게 고 김 하사에게 훈장이 추서됐다. 딸 김씨는 “나라를 위해 헌신한 아버지 뜻을 이어받아 고장 발전과 장학사업에 기여하고 싶다”며 하동군 장학재단에 100만원의 장학기금을 내놨다. 정부는 고 김 하사와 함께 역시 하동군 금성면 출신의 6·25 참전용사로 무공을 세운 고 박이수(2006년 사망) 일등병에게도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하고 유가족에게 훈장을 전달됐다. 하동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군번 3개째’ 힘들어도 나라 위해 충성!

    ‘군번 3개째’ 힘들어도 나라 위해 충성!

    김정권·정연·박환기씨 병·부사관 거쳐 여생도 첫 수료… 참전자 후손도새달 8일 계룡대서 합동 임관식육군 3사관학교의 김정권(27)·김정연(27)·박환기(26) 생도는 곧 세 번째 군번을 부여받는다. 김정권 생도는 육군30사단에서 병사로 복무한 뒤 같은 부대에서 전문하사를, 김정연 생도는 육군학생군사학교에서 병사와 부사관을, 박 생도는 육군종합행정학교에서 병사와 경비분대장으로 복무했다. 세 생도는 장교가 되기 위해 2015년 3사에 다시 입교했다. 28일 함께 경북 영천의 3사 졸업식장에 선 이들은 다음달 8일 장교 합동임관식에서 생애 세 번째 군번을 부여받고 장교의 길에 들어선다. 3사는 이날 오후 제52기 생도 졸업식을 열고 모두 484명에게 졸업장을 수여했다. 1968년 개교 이래 처음으로 48대1의 높은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여생도 18명도 정예장교로서의 힘찬 출발을 알렸다. 독립운동가 후손인 윤지인(28) 생도는 6·25전쟁 참전군인인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참군인의 꿈을 키웠고, 조현정(27)·이지혜(26)·김명은(26) 생도는 아버지, 남송미(24) 생도는 오빠와 동문이 됐다. 3사 관계자는 “첫 여생도 졸업은 육군이 장교 양성 과정의 마지막 문호를 여성에게 개방한 이후 우수 여성인력을 확보하고 여군 역량 발휘의 디딤돌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의 결실”이라고 말했다. 일란성 쌍둥이인 박진수(24)·박동수(24) 생도는 함께 대구 경원고등학교를 졸업한 데 이어 3사 졸업식장에도 나란히 섰다. 형제는 “장교가 되는 길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함께할 수 있었기에 극복할 수 있었다”며 “태어날 때부터 함께해 온 우리가 함께 공병장교의 길을 걷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이날 졸업식에서는 김석환(25) 생도가 대통령상을, 이종현(24) 생도가 국무총리상을, 박면호(24) 생도가 국방부 장관상을 각각 받는 영예를 안았다. 이날 졸업한 484명의 3사 생도들은 다음달 8일 충남 계룡대에서 열리는 장교 합동임관식을 통해 소위로 정식 임관되며 각 병과학교에서 16주간의 군사교육을 이수한 후 6월 전후방 각급 부대에 배치될 예정이다. 박홍환 전문기자 stinger@seoul.co.kr
  • 끝까지 감추려는 그들…진실을 말하려는 우리

    끝까지 감추려는 그들…진실을 말하려는 우리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교과서 왜곡 등 한·일 양국 간 얽힌 역사 문제가 스크린을 달구고 있다. 개봉도 하기 전에 일본 측이 국내 영화의 왜곡 주장을 펴는 등 양국 간 역사 인식을 둘러싼 갈등이 고조될 전망이다.# ‘눈길’ 위안부 피해자의 참혹했던 현실 조명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아픈 역사를 조명한 ‘눈길’(감독 이나정)이 1일 물꼬를 튼다. 2015년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KBS 3·1절 2부작 특집극으로 방송된 작품이다. 당시 특집극으로는 높은 5% 안팎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극장 상영을 목표로 제작된 만큼 영상미가 돋보인다. 크고 작은 국제영화제들에 공식 초청됐다. 극장판은 방송분에 견줘 오프닝과 엔딩을 새롭게 편집했고, 러닝타임을 늘렸다. 1944년 일제강점기 말을 배경으로 한 마을에 사는 가난한 집 딸 종분과 부잣집 막내 영애가 일본군에 끌려가 겪게 되는 참혹한 현실을 그렸다. 아역 배우 출신의 김향기, 김새론의 연기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노년의 종분은 김영옥이 연기해 무게감을 더했다. 이야기는 지난해 관객 358만명을 동원한 ‘귀향’과 닮았다. ‘귀향’이 소녀들이 겪었던 폭력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반면, ‘눈길’은 소녀들의 얼굴에 나타나는 공포와 절망감을 밀도 있게 그려냈다.# ‘어폴로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사연들 한국, 중국, 필리핀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오늘을 만날 수 있는 다큐멘터리 ‘어폴로지’(감독 티파니 슝)가 오는 16일 바통을 잇는다. 캐나다국립영화위원회가 제작한 이 작품에서 중국계 캐나다 여성 감독은 6년간 세계 곳곳을 돌며 할머니들을 만났다. 피해자에서 인권 운동가로 변신한 한국의 길원옥 할머니, 위안소에서 일본군 아이를 낳았지만 버려야 했던 중국의 차오 할머니, 해방 뒤 고향에 돌아와 백년가약을 맺은 남편에게 끝내 과거를 털어놓지 못했던 필리핀 아델라 할머니의 사연이 고통스럽다. 슝 감독은 “오래전 일이라고 침묵하면 다음 세대에서 그다음 세대로 답습하게 된다”면서 “이것은 단순히 아시아 문제도, 역사 속 문제도 아닌 범지구적 문제”라고 강조했다. 극장 수익 중 10%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한 정의기억재단에 기부된다. 또 개봉 및 마케팅 비용 마련을 위한 ‘스토리펀딩’도 진행 중이다.# ‘대장 김창수’ 백범 김구선생의 청년기 다뤄 이르면 상반기 개봉을 목표로 후반 작업 중인 ‘대장 김창수’(감독 이원태)는 청년 백범 김구를 다룬 작품이다. 김창수는 김구가 젊은 시절 쓴 이름. 일제에 의해 목숨을 잃은 명성황후를 위한 복수라며 일본인을 살해했다가 사형 선고를 받은 김창수가 옥중에서 진정한 독립투사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다. ‘암살’에서 독립군으로 열연했던 조진웅이 타이틀롤을 맡았다. 송승헌이 형무소장 역으로 첫 악역에 도전한다. 정진영과 정만식 등 연기파들도 함께했다.# ‘군함도’ 日 탄광에 끌려간 강제노역 조선인의 탈출기 주목받는 여름 대작이 ‘군함도’(감독 류승완)다. 7월 개봉 예정인 이 작품은 일본 하시마섬 탄광에 끌려간 강제 노역 조선인들의 탈출기를 그렸다. 황정민, 소지섭, 송중기, 이정현 등 초호화 캐스팅에다가 순제작비만 220억원을 쏟아부었다. 지난해 하반기 촬영한 ‘군함도’ 예고편이 공개되자 일본 우익 매체인 산케이가 날조된 이야기라며 맹공하고 나섰다. 제작사 외유내강은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 강제 징용 피해자들은 물론, 수많은 증언과 자료가 있는 역사적 사실로 왜곡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일축했다. # ‘박열’ 일왕 폭살 모의한 독립운동가의 삶 담아 올 영화계 대미는 일제 강점기에 천착하고 있는 이준익 감독의 ‘박열’이 장식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으로 건너가 무정부주의 단체 흑도회를 조직하고 일본 왕세자를 폭살하려 했던 독립운동가의 삶을 담은 작품이다. 일본 여인과 연인 사이였고, 해방 때까지 22년간 옥살이를 했으며, 6·25 전쟁 당시 납북된 박열의 삶은 파란만장 그 자체다. 최근 촬영을 마무리한 이 작품은 이제훈이 타이틀롤을 맡았다. 지난해 큰 울림을 준 이 감독의 전작 ‘동주’와는 달리 컬러 작품이다. 연내 개봉 목표.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한·일 역사 문제는 한국 영화가 꾸준히 짚어줘야 할 이슈이자 소재”라면서 “일제 등 역사를 직시하고 정면 승부하는 작품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유쾌한 꼰대씨 송복이 말하는 나, 우리, 대한민국] 새 한국 사회 탄생시킨 3·1 운동… 그 불멸의 위대함

    [유쾌한 꼰대씨 송복이 말하는 나, 우리, 대한민국] 새 한국 사회 탄생시킨 3·1 운동… 그 불멸의 위대함

    1919년의 3·1운동은 우리 현대사의 시작이다. 그것은 역사학자가 말하는 우리의 현대사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말하는 우리의 현대사다. 한국 사회가 보는 한국의 현대사는 근대사 없는 현대사다. 근대사는 중세사회의 종말로부터 시작된다. 중세사회의 특징은 자아(自我) 개념이 없는 것이다. 요사이 식으로 말하면 셀프(self) 개념이 없는 사회다. 물론 민족 개념도 없고, 내 나라 의식인 자국(自國) 개념도 없다. 자국 개념이 없는 것만큼 자기 문화에 대한 정체성 개념도 없다.일제의 침탈과 합방 이전의 조선 사회는 바로 그 중세사회였다. 조선 왕조는 그 숨이 끝날 때까지 근대사회의 여명(黎明)이 없었다. 여명은 날이 밝아 오는 무렵의 희미한 빛이다. 희미한 빛조차 보이지 않은 채 조선 왕조는 끝났다.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조선과 달리 실제의 조선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계속 거꾸로 돌리고 있었다. 그 전형적 예가 위정척사(衛正斥邪)다. 위정척사는 소(小)중화(中華)를 지향하는 사상이며 주창이다. 위정의 정(正)은 유교이며 중국의 문화다. 척사의 사(邪)는 서구의 문물이며 사상이다. 유교며 중국의 문화는 옳고 바른 것으로 굳게 지켜야 하고, 서구의 문물이며 사상은 사악한 것, 간사하고 악한 것으로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정척사야말로 중세 사상 그 자체다. 물론 그 이전 갑오경장도 하고 개화파도 있었지만 사회 변화, 국가 개혁의 주경향이 되지는 못했다. 아니, 될 수가 없었다. 이유는 소중화 사상이 위아래로 너무 뿌리 깊게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유교 사상에 침잠(沈潛)해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사서삼경이 아니면 책이 아니고 삼강오륜이 아니면 도덕이 아니라는 그런 정도도 훨씬 넘어서 있었다. 그 소중화 사상은 당시 오직 한 나라 중국만이 나라이고, 중국만이 우리가 의지하고 귀의할 나라이며, 그 나머지 다른 나라들은 모두 문화가 없거나 아득히 낮은 오랑캐 나라들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중국 말고는 어느 나라와도 상종할 수 없다는, 만일 상종을 하려 할 때에는 천자(天子)의 나라 중국로부터 반드시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엄청난 배타적 쇄국주의 사고였다. # 20세기 초까지 조선 선비들은 중세인에 머물러 거기에다 우리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 중국이라는 나라에 가까이 다가가 있는 작은 ‘중국적 모형’이라는 소중화 나라로 자부하고 있었다. 그 자부심으로 위정척사적 사고는 더욱 굳어서 근대사회로의 길은 계속 차단됐다. 1840년대 초 아편전쟁으로 천자의 나라 중국이 서구 세력의 무력 앞에 산산 박살이 나는 것을 번연히 보면서도 이 소중화의 자부심은 변화가 없었고, 아편전쟁 이후 20년이 지나는 고종 연간은 물론 그 이후에도 계속되는 쇄국주의가 이를 잘 말해 준다. 우리가 근대사회로 가는 길이 얼마나 멀었던가를 당시 위정척사파의 대표적 투사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에게서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그는 외세 배격을 끝까지 주장하면서 일본에 반대하다 1906년 대마도에 유배돼 순절한, 그 의기와 지조에서 높이 추앙받는 대표적 조선 유학자다. 그는 도끼를 메고 대궐 앞에 엎드려 일본과의 수교를 결사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고, 의병을 일으켜 일본에 항쟁도 했다. 그러다 대마도 유배 전 흑산도로 먼저 유배됐다. 흑산도 유배 중 흑산도 여티미마을(천촌·淺村) 바위에 새긴 그의 글귀가 아직도 선명히 전해지고 있다. 기봉강산(箕封江山) 홍무일월(洪武日月)이 그 글귀다. 조선은 어떤 나라인가. 중국 사람인 기자(箕子)가 세운 나라다. 조선의 해와 달은 누구의 것인가.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것이다. 그의 해와 달이 밝게 비치고 있는 나라가 조선이다. 왜 서양을 배격하고 일본을 배격해야 하는가, 우리는 기자와 주원장이 만들고 비춰 주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위정척사파의 주장이고 최익현의 사상이다. 숭명사대(崇明事大) 소중화의 전형이다. 오늘날 사드 반대하러 중국 가는 정치인과도 별 차이가 없었다. 사드를 반대하면 자국에서 할 것이지 우리 안보에 그 어떤 책임 의식도 갖지 않는 그들 중국인에게 어떻게 기대려 하는가. 조선조 사대(事大)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면암 최익현에서 보듯 20세기 초까지 조선 선비들의 대다수는 중세인(中世人)들이었다. 선비는 물론 일반 사람들의 사고도 모두 중세인의 그것을 벗어나지 못했다. 내 나라라는 자국 개념이 없었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아 개념은 더더욱 있을 수 없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내 민족이라는 집단의식, 우리 고유 문화라는 정체성 또한 갖지 못했다. 완전히 중세인들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근대가 없이 일본에 먹혔고, 식민지가 됐다. # ‘근대’ 없이 ‘중세’에서 현대사회로 뛰어올라 그렇다면 그 무엇이 우리의 기나긴 중세시대를 마감하게 했는가. 심지어는 식민지 시대에 들어와서까지도 여전히 중세시대에 살았다면 그 무엇이 우리를 중세사회로부터 벗어나게 했는가. 그것이 1919년의 3·1운동이었다. 3·1운동으로 해서, 3·1운동을 기점으로 우리는 근대가 없이 중세에서 단번에 현대로 뛰어들었다. 우리의 현대사는 3·1운동이 시작이다. 새로운 한국 사회, 현대의 한국 사회 출발은 곧 3·1운동이었다. 3·1운동으로 해서 한국 사회는 새로이 태어났다. 바로 거기에 3·1운동의 위대성이 있다. 우리가 영원히 1919년의 3·1운동을 기려야 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3·1운동을 역사의 한 사건으로만 생각한다. 기껏해야 일제의 수탈과 압제에 못 견뎌 온 국민들이 들고일어난 대궐기 대저항운동 정도로 여긴다. 대다수 역사학자들도 일제의 식민정책이 달라지는 시대의 한 이벤트 정도로 기술한다. 그러나 그것은 3·1운동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3·1운동의 역사성을 잘못 읽고 있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3·1운동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무엇을 만들어 냈는지, 역사의 물줄기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전혀 생각지 않은 것이다. 조선조 실록을 읽는 그 안목, 그 습관으로 한 임금이 가고 다음 임금이 들어서고, 그리고 이 사화(士禍) 저 정변(政變)을 거치면서 많은 신하가 죽고 대폭 바뀌고 쫓겨나는 그 이벤트성(性) 역사에 길들여진 안목으로 보는 3·1운동은 그저 그런 이벤트일 뿐이다. 무엇보다 3·1 정신은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정신이다. 3·1정신은 바로 불역유행(不易流行)의 정신이다. 아무리 세상이 달라도 그리고 아무리 세월이 가도 달라지지 않는 정신, 그 불역유행의 정신을 근 100년 전 우리 선인들이 가슴에 담았고 그리고 널리 널리 고양했다. 그럼으로써 일제가 아무리 탄압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얼 속에 깊이 간직됐고, 그 모진 세월 속에서도 절대로 죽지 않았다. 아니 죽을 수가 없는 정신이다. 해방이 되고 좌우로 갈려 밤낮없이 우리끼리 싸우는 가운데서도 그 정신은 그대로 살아 있었다. 6·25의 극한 상황에서도 그 정신은 꺼지지 않고 있었다. 1950년대 60년대 한없이 배가 고팠던 그 굶주림의 시대, 그리고 6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는 그 치열한 산업화 시대에도 그 정신은 불타고 있었다. 그것은 끊어질 수 없는 그리고 멈출 수 없는, 그 맥이 끝없이 이어지는 한국인 정신이었다. 만일 이런 3·1운동, 3·1정신이 없었다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일제 36년이 끝나고 해방이 됐어도 중세사회 조선시대의 연장으로 그대로 살았을 것이다. 물론 3·1운동이 일어났다 해서 사회 구조가 하루아침에 달라진 것은 아니다. 구조는 분수령을 넘듯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생산 방식이 완전히 바뀌지 않는 한 구조는 한동안 그대로 지속된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은 다르고, 사고는 다르다 구조보다 훨씬 앞서 혹은 구조와 동떨어져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던 내 나라 의식, 민족의식, 자아의식이 3·1운동으로 해서 3·1운동이 일어나기 이전과 이후가 확연히 구분되고 차별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역사에서 3·1운동을 다시 생각하고 새로이 읽어야 할 이유가 확연해지는 것이다. 연세대 명예교수
  • [수요 에세이] 터키에서 날아온 낭보/문재도 서울대 공대 객원교수·전 산업통상자원부 차관

    [수요 에세이] 터키에서 날아온 낭보/문재도 서울대 공대 객원교수·전 산업통상자원부 차관

    ‘우리 기업들이 일본 업체를 누르고 세계 최장 규모의 현수교 수주전에서 사업권을 따냈다.’해외 대형 프로젝트 시장에서의 수주 급감을 절감하는 우울한 상황에 지난 설날 터키에서 날아온 모처럼만의 낭보다. 우리 기업들의 기술력과 무역보험공사 및 수출입은행의 수출금융 지원이 함께 힘을 모은 쾌거라고 한다. 힘차게 박수를 보낸다. 터키는 유럽, 중동, 아프리카, 중앙아시아를 잇는 교두보다. 그 자체로 8000만명의 인구를 가진 주요20개국(G20) 회원국이기도 한 경제 강국이다. 우리에게는 6·25전쟁에 참전한 전통적인 우방국이자 현대차, 포스코, 효성 등 간판 기업들이 현지 공장을 가동하고 있는 요충지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2012년 터키와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었고 방산 등 전략 분야에서도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새삼 터키에서 원전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민관 수주단을 이끌고 터키를 찾았던 2010년 10월의 일이 떠오른다. 당시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자원개발원전정책관이었던 필자는 한 달 내내 터키 수도 앙카라에서 살다시피 했다. 우리나라는 흑해 연안에 위치한 시노프 지역의 원자력발전소 건설 유치 경쟁에 뛰어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터키는 중동과 러시아 등 산유국 가까이 위치하면서도 석유나 가스 같은 에너지자원의 부존은 희박해 수입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다. 때마침 우리나라는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사업권을 따냈고 여세를 몰아 추가 수주를 함으로써 원전 강국으로 도약하려 했다. 원전 같은 고도 기술이 필요한 대규모의 전략적인 프로젝트는 양국 간 신뢰가 선행돼야 한다. 역사적 인연이 있는 우리와 터키는 이러한 점에서 최적의 파트너로 평가됐다. 국제적인 대형 프로젝트는 대략 두 가지 형태로 발주가 된다. 하나는 설계, 제작, 시공과 같은 건설만 해외업체에 맡기고 운영은 자기가 하는 방식이다. 또 다른 하나는 건설 이후 운영까지 모두 해외업체가 맡아서 하는 투자 연계형 방식이다. 올해 우리 기업들이 수주에 성공한 터키 현수교나 예전에 도전했던 시노프 원전은 후자에 해당한다. 기술 역량과 함께 프로젝트 금융 조건이 중요하다. 6년도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시노프 원전 수주전을 떠올리면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는 UAE 수주전 때 맹활약한 한국전력 전문가를 중심으로 민관 합동 팀을 짰다. 휴일도 없이 터키 에너지부와 마라톤협상을 이어 갔다. 끝이 보인다 싶을 무렵, 최대 난관에 봉착했다. 원전에서 생산된 전기를 얼마에 팔 것인지와 터키 정부의 지급보증 여부를 놓고 좀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터키는 전기를 최대한 싼값에 팔고 싶어 했고, 우리는 손해 보고 가동할 수는 없다며 적정 단가를 요구했다. 만약의 사태로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할 것에 대비해 터키 정부의 지급보증도 주문했다. 솔직히 진정한 의미의 프로젝트 금융은 상대국 정부의 지급보증이 걸림돌이 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원전은 건설에만 10년, 운영에 60년 이상 장기간이 소요된다. 이렇듯 불확실성이 큰 데 반해 제공 가능한 상업금융은 아무리 길어야 20년을 넘지 않는다. 따라서 발주국 정부의 지급보증과 같은 추가적인 담보 조치가 필요했다. 터키가 순순히 응할 리 없었다. 터키 측은 과거 정부 보증으로 인해 재정 부실에 빠졌던 ‘아픈 역사’를 한사코 앞세웠다. 게다가 당시 터키는 유럽연합(EU) 가입을 염두에 두고 있어 정부 빚이 늘어나는 데 매우 주저했다. 그렇게 한 달간의 실무 협상은 접점을 찾지 못하고 파국을 맞았다. 우리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양국 장관회의와 정상회담 의제로까지 올렸지만 끝내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이후로도 2년여 동안 우리는 터키 실무진을 여러 차례 만나 의기를 투합했다. 하지만 최종 승자는 일본이었다. 2013년 초 터키 정부는 일본을 최종 파트너로 선택했다. ‘국가 간 협상이 성공하려면 서로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완전히 맞아야 한다’는 선배 관료들의 충고를 절감한 순간이었다. 그래도 필자는 지금도 당시 협상단이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후배 관료들에게 꼭 해 주고 싶은 조언. 이번에 성공하지 못했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놔야 한다. 그래야 이 프로젝트에서 실패했어도 다른 프로젝트에서 기회가 다시 찾아온다.
  • [자치단체장 25시] 4·19 효시, 근현대사 품은 강북… “경전철 타고 오세요”

    [자치단체장 25시] 4·19 효시, 근현대사 품은 강북… “경전철 타고 오세요”

    “2017년에는 강북구가 명실공히 서울 동북권의 중심지로 거듭날 겁니다.” 박겸수 강북구청장은 21일 구청장실에서 서울신문과 만나 ‘북한산 역사문화관광벨트 조성’, ‘경전철 개통’ 등 주요 사업이 마무리되는 올해를 강북구의 ‘터닝포인트’로 삼겠다고 다짐했다. “지역 내 가장 큰 기업은 음식점”이라고 박 구청장이 자조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취약했던 강북구가 양 날개를 장착하고 힘찬 날갯짓에 들어간 것이다. 두 사업은 2010년 박 구청장이 민선 5기 취임 직후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구민들에게 약속했던 것들이다. 그만큼 박 구청장 개인에게도 의미가 크다.‘역사문화관광벨트’는 북한산둘레길 2코스인 ‘순례길’을 따라 자연환경(북한산 국립공원, 북서울 꿈의숲 등)과 문화유산(순국선열 및 애국지사 16위 묘역, 국립 4·19 민주묘지, 3·1운동의 발상지인 봉황각과 분청사기 가마터)을 아울러 강북구만의 역사문화자원으로 특화시킨 것이다. 부지가 수유동과 우이동 일대 48만㎡에 이른다. 문화적 유산이 풍부한 강북구였기에 가능한 프로젝트다. 박 구청장은 “광화문, 경복궁, 창경궁 등 한국을 대표하는 관광자원들은 어디까지나 왕조나 지배층 양반의 문화”라며 “이와 달리 강북구는 오늘날 민주주의 발전 및 경제 번영을 이뤄 낸 근현대사의 백성문화가 오롯이 녹아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특히 박 구청장은 지난해 근현대사기념관 개관을 ‘일대 사건’이라고 표현했다. 어린 학생들이 우리 역사를 보고 배울 수 있는 최적지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기념관은 동학농민운동부터 항일의병전쟁, 3·1운동을 거쳐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6·25전쟁, 4·19혁명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지난해 10월 박 구청장은 직접 문화해설사를 자청하며 지역 내 학교 교감 37명을 상대로 직접 ‘기념관 세일즈’를 하기도 했다. 박 구청장은 “오는 4월부터 지역 내 13개 중학교에 다니는 3학년생들은 필수 체험코스로 근현대사기념관을 방문하도록 교육청과 협의를 끝냈다”면서 “근현대사를 외우지 말고 이해하면 재밌는 과목이 될 것”이라며 밝게 웃었다. 강북구가 전국 초·중·고등학생이 근현대사를 배우는 수학여행지, 대학생을 비롯한 세계 청년들이 민주주의를 체득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할 날이 머지않은 셈이다.올해 강북구는 ‘도시농원 체험장’과 ‘예술인촌’의 조성에 나서 역사문화관광도시를 향한 세부 일정에도 더욱 박차를 가한다. 2019년 완공이 목표인 진달래도시 농업체험장도 기본 설계 및 도시관리계획 결정용역을 앞두고 있다. 서울시가 직접 추진키로 한 우이동 가족캠핑장은 기반시설 등 전체 사업의 70% 정도가 진척됐다. ‘역사문화관광도시’ 강북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는 4·19혁명이다. 지난해 5월에는 사단법인 ‘4·19혁명 유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등재 및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프랑스 파리의 유네스코 본부에 신청서를 제출했다. 결과는 세계기록유산국제자문위원회(IAC)의 심사를 거쳐 7~8월쯤 발표될 예정이다. 이번에 신청한 4·19 기록물은 총 1450건에 이른다. 1960년 학생과 시민들의 항거활동과 그 이후 이뤄진 부정선거, 피해자 보상, 책임자 처벌 등과 관련된 문건들이다. 우리나라는 지난해까지 훈민정음과 조선왕조실록, 5·18민주화운동 기록물 등 모두 13건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박 구청장은 “4·19는 독재정권을 비폭력저항으로 붕괴시킨 학생혁명의 효시로서 전 세계에 알릴 필요가 있다고 봤다”면서 “올해로 5회째를 맞는 4·19혁명 국민문화제도 양적 성장보다 내실에 치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강북구 우이동과 동대문구 신설동을 연결하는 경전철 우이~신설선(11.4㎞)의 개통도 올해 7월 말쯤 이뤄진다. 2009년 9월 착공한 이후 약 8년 만이다. 그동안 우이~신설선은 서울시와 민간사업자가 갈등을 빚으며 중단과 재개를 반복했다. 현재는 공정률이 90%를 넘어서 전 구간 무인 시운전 중에 있다. 소요시간이 기존 50분에서 20분으로 30분가량 단축될 것으로 기대된다. 박 구청장은 “지하철 4호선을 제외하면 주로 버스에 의존했던 대중교통체계가 경전철 개통으로 확대된다. ‘교통혁명’이라고 명명하고 싶다”며 “경전철이 북한산 역사문화관광벨트를 지나기 때문에 역사문화관광벨트와 북한산의 접근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무엇보다 경전철 개통은 강북구의 전체적인 역세권 개발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박 구청장은 “지금까지 동북선의 중심인 지하철 4호선 수유역, 미아사거리역 개발만 생각했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4호선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경전철이 (개통)되면 강북 지역 8개 역사 주변도 권역 개발을 위한 지구단위 계획을 수립해 삼양로 일대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강북구는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경전철역 주변의 상권 활성화를 위한 연구용역을 진행하고 있다. 역세권별로 특색 있는 개발을 하려는 강북구의 노력이다. 강북구는 관광객 유치를 위해 오는 9월쯤 북한산에서 ‘산악인 축제’도 개최할 예정이다. 산악인 축제는 구의 소중한 자산이라 할 수 있는 북한산과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 16좌를 등정한 엄홍길 대장이 있어 가능한 축제다. 박 구청장과 엄 대장은 매년 중학생들과 ‘청소년 희망원정대’를 꾸려 태백산을 오르고 있다. 두 사람은 여기서 나아가 산악인들의 대표 축제를 강북구에서 열어 보자는 데 뜻을 모았다. 박 구청장은 지난해 한 사업 중에 ‘청소년 유해업소 근절운동’을 최고로 꼽았다. 일반음식점 영업신고를 한 뒤 퇴폐주점처럼 영업을 하는 이른바 ‘빨간집’ 없애기에 주력해 2015년 5월부터 지난해 말까지 170곳 중 100곳이 업종을 바꾸거나 문을 닫았다. 특히 이들 업소가 세가 저렴한 학교 주변 일반 주택가 골목까지 침투한 게 문제였다. ‘학교보건법’에 따르면 학교로부터 반경 200m는 상대정화구역으로 교육상 위생, 유해업종은 들어설 수 없다. 당연히 학부모의 우려도 뒤따랐다. 박 구청장은 “구와 성북강북교육지원청, 강북경찰서 등 3개 유관기관이 공동 협력해 해결해 나가기로 하고 1주일에 한두 차례씩 강력한 합동단속을 벌였다”면서 “내후년인 2019년에는 강북구에서 유해업소가 완전히 없어질 것으로 본다”고 내다봤다. 박 구청장은 3선 도전에 대한 입장도 밝혔다. 그는 “주변에서 (3선에 도전하라는) 권유가 많다. 주요 사업을 마무리 지으라는 얘기를 많이 하신다. 청취하고 있다”면서 “어떠한 정책이 자리잡으려면 두 번으로는 조금 부족하고 세 번 정도 (구청장을 역임) 해야 하지 않나. 그래야 역사문화 관광이라는 어젠다가 강북구민들한테 정착될 것으로 본다”며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박 구청장은 1980년대 군사정권에 맞서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상도동계와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동교동계를 주축으로 결성돼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민주화추진협의회에서 활동했다. 이후 서울시의원을 두 번 지냈고 2010년 59.31%라는 높은 득표율로 민선 5기 구청장에 당선됐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명인·명물을 찾아서] 공동변소·연탄가게·솜틀집… 고단한 시절 멈춘 곳

    [명인·명물을 찾아서] 공동변소·연탄가게·솜틀집… 고단한 시절 멈춘 곳

    온 나라가 잘살아 보겠다며 땀 흘렸던 1960~1970년대. 굶주린 배를 부여잡기 일쑤였던 그 시절,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삶은 혹독했다. 지금은 힘든 시간을 이겨냈다며 한잔 술에 호기롭게 말하지만 당시는 춥고 황량하기만 했다. 한편으론 가슴이 먹먹해지는 그리움과 추억으로 회자된다. ‘달동네’는 도시 빈민들의 상징적인 주거 공간이었다. 가파른 언덕을 따라 다닥다닥 붙어 있는 판잣집들은 값싼 주거지인 동시에 생존의 공동체였다.달동네란 이름은 마을이 높은 산자락에 위치해 달이 잘 보인다 해서 붙여졌다. 혹은 고단한 삶 때문에 달을 바라보며 출퇴근했기에 그리 불렸다는 말도 나온다. 지금은 대개 재개발로 흔적을 찾아보기 쉽지 않지만, 인천에 지난 시절 달동네의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해 놓은 곳이 있어 찾아갔다. 인천 동구 송현동에 위치한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은 1960~1970년대 달동네 사람들의 생활상을 테마로 한 체험 중심 박물관이다. 수도국산(水道局山)은 동구 동인천역 뒤에 있는 산이다. 개항기 이후 일본인들이 인천 중구 지역을 차지하자 그곳에 살던 조선인들이 수도국산으로 쫓겨나면서 산자락 주거지가 탄생했다. 그 후 6·25전쟁 피란민과 산업화 시기 실업자들이 몰려들어 18만 1500㎡ 규모인 동네에 3000여 가구가 모둠살이를 시작했다. 수도국산 박물관은 과거의 흔적과 기억을 모아 실제 달동네 터 꼭대기에 2005년 10월 건립됐다. 박물관을 향해 언덕을 오르다 보면 숨이 턱턱 막히지만 정상에선 인천시내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여 과거와 현재를 데자뷔하는 듯하다. 박물관은 제1전시실과 제2전시실이 층으로 나뉘어 있다. 관람 순서가 정해져 있지는 않다. 제1전시실은 990㎡ 규모로 영화 세트장처럼 과거 달동네 모습을 실감 나게 재현한 공간이다. 어두컴컴한 실내 공간 안에는 좁은 골목길을 따라 연탄가게, 구멍가게, 이발소, 솜틀집 등이 자리한다. 구멍가게에는 예전에 인기를 끌던 과자와 음료수가 진열돼 있고 솜틀집에서는 마네킹이 솜을 틀고 있다. 여럿이 사용했던 공동구역의 공동수도와 공동변소는 금방이라도 악취가 올라올 것처럼 현실감 있게 묘사해 놓았다. 달동네는 여러 가구가 수도나 화장실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이 당연했다. 줄을 서서 물을 길었고, 아침저녁으론 화장실 앞에서 문을 두드리며 재촉하는 게 흔한 모습이었다. 그래서인지 달동네는 이웃관계가 지속되는 공동체였다. 옆집 담벼락이 우리 집 담벼락이기도 했고 TV가 있는 집으로 동네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 이곳 전시실에는 그런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 낸 가정집의 모습도 보인다. 좁은 쪽방 안에는 진짜 사람처럼 마네킹들이 TV 앞에 모여 김일의 레슬링을 관람하고 앉아 있다. 흑백 TV에서는 김일의 실제 레슬링 경기 영상이 재생돼 현실감을 더해 준다. “이야 김일이다, 김일!” 지난 15일 전시장을 관람하던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발길을 멈추고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마치 생중계를 보는 것처럼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하다가 경기가 끝나자 웃음을 머금으며 발길을 돌렸다. 아마 예전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함께 온 손자는 이런 광경이 어리둥절한 눈치다. 요즘 아이들은 달동네 생활상에 공감하기 힘들겠지만 다양한 체험을 통해 그 시절을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전시실 내 곳곳에는 물지게 체험, 연탄불 갈아보기, 주사위 놀이 등 체험코너가 마련돼 있다. 또한 골목에 놓여 있는 터치스크린 컴퓨터를 누르면 전문 작가들이 촬영한 달동네 모습부터 실제 달동네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다. 기성세대에게는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아이들에게는 잠시나마 부모의 삶을 느끼게 해 세대 간을 이어 주는 장소다. 2층 제2전시실로 올라가면 추억 어린 상점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 상점들은 실제로 인천을 대표했던 가게를 본떠서 재현해 놓았다. 가장 먼저 1971년부터 영업했던 ‘우리사진관’이 있다. 사진관 안에는 1970~1980년대에 촬영한 사진들이 비치돼 있고 옛 교복과 교련복을 직접 입어볼 수 있다. 그 옆은 ‘미담다방’이다. 미담다방은 동인천역 축현파출소 옆에 있었던 다방으로 1960년대부터 인천의 명소였다. 공간이 크지는 않지만, 옛 다방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푹신한 다방 소파에 앉아 담소를 나눌 수 있고 한쪽에는 LP 판이 빼곡한 뮤직박스가 있어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다방 앞에는 인천 토박이라면 대개 들어본 바 있는 ‘송림양장점’과 ‘창영문구’가 자리잡고 있다. 기획전시실에서는 달동네박물관의 11번째 기획 특별전인 ‘추억 속 우리집에 가다’를 오는 5월 28일까지 개최한다. 특별전은 지역 주민들이 기증한 유물들을 한자리에 모았기에 의미를 더한다. 실제 살림살이로 쓰던 드레스 재봉틀부터 타자기, 라디오, 선풍기 등이 오랜 세월을 간직한 채 전시돼 있다. 이 가운데는 1950년대부터 동구 금곡동 배다리에 위치했던 ‘20세기 약방’에 관한 자료를 기증받아 마련된 공간도 있다. 박물관 관람의 종착점은 ‘추억의 구멍가게’다.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운 옛 과자와 기념품, 만화책 등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한다. 관람료는 어른 1000원, 청소년 700원, 어린이(5~12세) 500원이다. 관람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며 월요일은 휴관한다. 김학준 기자 kimhj@seoul.co.kr
  • [김석동의 한끼 식사 행복] 매일 600만 그릇 팔리는 ‘짜장면’

    [김석동의 한끼 식사 행복] 매일 600만 그릇 팔리는 ‘짜장면’

    한국인이 가장 많이 먹는 외식 메뉴는 아마도 짜장면이 아닐까 한다. 예전에는 입학이나 졸업식 때나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지만, 이제는 언제든지 쉽게 즐길 수 있는 국민 메뉴가 되었다. 짜장면은 원래 중국 산둥 지역의 작장면(炸醬麵)에서 유래하며, 우리나라에는 1900년대 초 들어왔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의 짜장면은 6·25 전쟁 이후에 많은 양을 값싸게 제공할 수 있게 변형된 것이다. 우리식 짜장면은 춘장에 식은 면을 말아 먹는 중국식과는 달리 양파, 고기, 감자, 채소를 고루 넣고 볶은 뒤 전분을 풀어 묽게 끓여 뜨거운 면에 얹어 먹는다. 짜장 소스 위에 오이채나 완두콩을 얹고 입맛에 따라 식초, 고춧가루를 더하고 단무지, 양파를 곁들인다. 맛과 레시피가 우리 환경과 입맛에 맞게 놀라운 변신을 한 것이다. 짜장면에 얽힌 에피소드는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필자 또한 예외가 아니다. 1997년 11월 IMF 경제위기로 치닫던 당시 재정경제원 외화자금과장의 직책에 있었다. 매일매일을 사투를 벌이다시피 하던 시절인데, KBS 9시 뉴스에서 우리가 일하는 현장을 국민에게 소개하겠다고 강권해서 할 수 없이 응했던 적이 있다. 녹화가 막 끝난 저녁 즈음, 여느 날과 다름없이 자동으로 미리 시켜 둔 짜장면이 배달되었다. 우리는 무심코 취재팀에게도 권하고 식사를 했다. 그런데 이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고 그대로 방송된 것이다. 참 계면쩍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TV를 보다가 갑자기 짜장면 생각이 나서 다음날 오랜만에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는 인사를 도처에서 받았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짜장면은 과거 정부 시절 물가관리 대표품목이 될 정도로 국민 메뉴여서 수준급 식당도 곳곳에 많다. 그래도 기억에 남는 곳을 몇 군데 소개하려 한다. 서울 서대문구 신촌 이화여대 후문 쪽에 ‘효동각’이 있다. 메뉴는 짜장면뿐이다. 일·월요일은 휴무인 데다 평일에도 점심만 하고 그것도 3시까지만이다. 주인, 부인, 아들 세 사람이 하는 집이다. 주문 후 요리를 시작하므로 꽤 기다려야 한다. 면발이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하고 짜장 소스에 버섯이 들어가 식감이 좋다. 조미료를 전혀 쓰지 않은 순한 맛인데도 이 집만의 특유의 풍미가 가득하다.마포구 공덕동 효창운동장 뒷담 쪽에는 1981년에 문을 연 ‘신성각’이 있다. 테이블이 몇 개 안 되는 작은 집으로, 주방은 보조도 없이 주인 혼자서 하고 부인은 홀 담당이다. 메뉴는 짜장면 등 총 여섯 가지. 기다리는 동안 볼 수 있는 수타 모습은 감동마저 준다. 주인은 짜장면을 예술로 믿는다. 순수 그 자체의 맛이라는 것이다. 점심때 줄이 길다. 중구 명동 중앙우체국 옆에는 ‘개화’란 식당이 60년 넘게 자리잡고 있다. 화교가 하는 중국집인데, 다소 가는 면발에 걸쭉한 짜장 소스를 비벼 먹는다. 소고기를 다진 유니짜장을 많이 시킨다. 단맛이나 고소한 맛은 적으나 중독성 있는 특별한 맛이다. 마포 불교방송 건물 지하에는 1953년에 개업한 ‘현래장’이 있다. 인근 작은 건물에 있다가 재개발로 옆 건물로 이사했다. 이사 전에는 길에서 유리 너머로 수타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수타의 원조 격이어서 맛볼 만하다. 용산 삼각지 전쟁기념관 옆에는 ‘명화원’이 있다. 테이블이 몇 개 안 되는 작은 점포로, 얼마 전 가게를 새로 단장했다. 입소문이 나면서 줄이 길어졌다. 메뉴는 짜장면, 탕수육 등 다섯 가지뿐이다. 탕수육과 군만두도 유명하다. 졸업과 입학 시즌이다. 이 시절이면 가족들과 함께 즐기던 옛날의 그 짜장면 생각이 절로 난다. 얼른 가서 한 그릇 사 먹어야겠다.
  • 사드 갈등에도… 새달 중국군 유해 20여구 송환

    한국과 중국은 주한미군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갈등과 상관없이 다음달 22일 6·25전쟁 당시 숨진 중국군 유해 20여구와 유품을 중국에 송환하기로 했다. 한·중 양국은 15일 서울 국방부 청사에서 중국군 유해 송환 실무회의를 열어 이같이 합의했다. 국방부는 “양측이 3월 20일 공동으로 유해 입관식을 진행키로 하고 22일 20여구의 유해를 인도하는 내용의 합의서를 채택했다”고 밝혔다. 이번 회의에서 양국은 향후 발굴되는 중국군 유해와 유품도 인도적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송환키로 했다. 국방부 관계자는 “중국 측은 우리의 유해 발굴 노력에 감사를 표명했으며, 양측 모두 적극적인 협의를 통해 올해 제4차 중국군 유해 송환을 추진하자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고 설명했다. 우리 측에서 장학명 국방부 군비통제차장이, 중국 측에서 리구이광(李桂廣) 민정부(국가보훈처 격) 부국장이 각각 대표로 참석했다. 양국은 사드 배치 갈등과 인도주의적 차원의 유해 송환은 별개라는 원칙 속에서 유해 송환에 합의했다. 중국군 유해 송환은 매년 1월 말∼2월 초 실무회의를 거쳐 청명절(올해 4월 4일) 전에 인도가 이뤄지는 일정으로 3년간 진행됐다. 첫해인 2014년 437구, 2015년 68구, 지난해 36구 등 지금까지 총 541구의 유해와 유품을 송환했다. 박홍환 전문기자 stinger@seoul.co.kr
  • 사드 갈등에도… 새달 중국군 유해 20여구 송환

    한국과 중국은 주한미군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갈등과 상관없이 다음달 22일 6·25전쟁 당시 숨진 중국군 유해 20여구와 유품을 중국에 송환하기로 했다. 한·중 양국은 15일 서울 국방부 청사에서 중국군 유해 송환 실무회의를 열어 이같이 합의했다. 국방부는 “양측이 3월 20일 공동으로 유해 입관식을 진행키로 하고 22일 20여구의 유해를 인도하는 내용의 합의서를 채택했다”고 밝혔다. 이번 회의에서 양국은 향후 발굴되는 중국군 유해와 유품도 인도적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송환키로 했다. 국방부 관계자는 “중국 측은 우리의 유해 발굴 노력에 감사를 표명했으며, 양측 모두 적극적인 협의를 통해 올해 제4차 중국군 유해 송환을 추진하자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고 설명했다. 우리 측에서 장학명 국방부 군비통제차장이, 중국 측에서 리구이광(李桂廣) 민정부(국가보훈처 격) 부국장이 각각 대표로 참석했다. 양국은 사드 배치 갈등과 인도주의적 차원의 유해 송환은 별개라는 원칙 속에서 유해 송환에 합의했다. 중국군 유해 송환은 매년 1월 말∼2월 초 실무회의를 거쳐 청명절(올해 4월 4일) 전에 인도가 이뤄지는 일정으로 3년간 진행됐다. 2013년 6월 중국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의 제안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화답하면서 시작됐다. 첫해인 2014년 437구, 2015년 68구, 지난해 36구 등 지금까지 총 541구의 유해와 유품을 송환했다. 박홍환 전문기자 stinger@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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