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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한국전쟁 50년

    6·25동족상잔이 일어난지 반세기.155마일 철책선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이대립과 긴장속에 살아온 50년의 세월이었다.잠시 갔다 다시 돌아오겠다며 북녘땅을 떠나 온 이산가족들이 부모형제를 그리워하며 살아온 단장(斷腸)의 세월이기도 했다. 이처럼 6.25한국전쟁은 우리민족에게 너무 깊은 상처와 손실을 안겨 주었다.민족자존에 치욕만 남긴 전쟁이었다.장구한 배달민족의 정통성이 무너지고 남북간의 이질성이 심화돼 통일을 막는 마음의 장벽이 남북사이에 가로놓이게 됐다.이 모든 전쟁의 상흔들은 반세기가 흘렀지만 아직도가셔지지 않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한국전쟁 50주년을 맞으면서 남북이 함께 되새겨야할 교훈은 앞으로 어떤상황에서도 두번 다시 동족간의 무력다툼은 결코 있어선 안된다는 것이다.만약 앞으로 한반도에서 또다시 6·25와 같은 전쟁이 일어난다면 민족자체의파멸을 초래하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것이 자명하다.통일은 다소 지연되더라도 평화를 유지하며 단계적으로 통일이 이뤄져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있다. 따라서 남북이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는 6·25전쟁의 상처를 하루빨리 치유하고 민족이 더불어 살아가는 평화체제를 확고하게 구축하는 일이다.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고 남북의 화해와 협력이 제도적으로 보장될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6·25전쟁이 종식됐다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때문에 올해 6·25는 그 어느때보다 각별한 뜻을 지닌다.분단이후 최초의 역사적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민족화해와 한반도 평화보장을 위한 획기적 성과를 이뤘기 때문이다. 정상회담 이후 한반도에 평화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는 점 또한 매우 긍정적인 변화다.휴전이래 하루도 빠짐없이 자행됐던 북의 휴전선 대남 비방방송이중단된 것도 긴장완화에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북한이 해마다 정치목적으로 치러왔던 7·27전승기념일(휴전협정일)행사를 올해 취소한 것은 남북대결구도 종식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우리측이 증오와 타도의 결의를 담은‘6·25의 노래’대신‘우리의 소원’을부르기로 결정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더욱이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이 22일 판문점전화통지문을 통해 간접적으로 메시지를 교환한 것은 두 정상의 신뢰확인과회담성과 이행에 기대를 갖게하는 대목이다. 또한 우발적 군사충돌 방지를 위한 남북 군사직통전화도 개설될 것으로 보여 남북군사분야 신뢰구축이 급류를 탈 전망이다.남북한은 반세기만에 찾아온 화해와 협력분위기를 살려 아직도 끝나지 않은 6·25전쟁을 완전히 종식시키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 전두환 전대통령 전적지 방문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은 ‘6·25’ 50주년을 맞아 24일 서부전선 전적지와 전방고지를 방문한다.전 전 대통령은 문산 통일공원내 육탄십용사탑과 충현탑을 참배한 뒤 인근 대전차진지를 방문해 장병들을 격려할 예정이다. 전방 방문에는 전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李順子)여사와 황영시(黃永時)전 감사원장,이상희(李相熙) 전 내무장관,안현태(安賢泰) 전 경호실장,김진영(金振永) 김동신(金東信) 전 육군참모총장 등 40여명이 부부동반으로 참가한다. 오풍연기자 poongynn@
  • [문화예술 분단장벽 허무나](4)미술

    지금 우리 사회의 1차적인 관심사는 분단의 극복이다.미술활동 또한 이 명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그런 관점에서 볼 때 한국 미술은 과연 분단현실나아가 통일의 문제를 제대로 반영해왔으며 또 반영하고 있는가. 많은 이들은 우리에게 전쟁은 있었지만 전쟁미술은 없다고 말한다.이것은 우리 미술이그만큼 역사의식이 결여돼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미술은 50년대를 제외하곤 거의 전쟁을 다루지 않았다.60∼70년대 ‘민족기록화’의 하나로 간혹 다뤘지만 관변적인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한국미술이 민족분단의 아픔과 모순을 인식하고 이를 본격적으로 형상화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에 들어서다.분단극복 혹은 통일을 지향하는 그림들이 ‘6·25’‘분단전’‘통일전’등 주제전의 형식을 통해 선보였다. 6·25를 다룬 미술작품은 현재 별로 남아 있지 않다.전쟁체험을 형상화하는데 비교적 성공한 작가로는 박고석,이수억,이철이,양달석 등이 꼽힌다. 특히박고석의 ‘범일동 풍경’(1952)은 6·25 당시 피난민 거주지였던 부산 범일동 풍경을표현주의 기법으로 잘 표현했다는 평.그러나 50년대 전쟁을 주제로 작품활동을 한 작가들은 명백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전쟁화가’로서의 집단적 조형이념을 보여주지도,양식적 영역을 확보하지도 못했다.그들의 그림의 모티브는 한정됐다.전쟁으로 인한 비극상을 단순 소박하게 재현했을 뿐, 그 역사성을 깊이 있게 살핀 작품은 드물다.한국전쟁 조형물로 또 다른 관심을 끌 만한 것이 미국 수도 워싱턴 국민광장에 세워진 한국전 참전기념동상이다.19명 군인들의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표정을 담은 이 상징물은 국내 작가의 작품은 아니지만 ‘잊혀질 수 없는 전쟁’으로서의 6·25의 의미를 새삼 일깨워 준다. 우리 미술은 문학 등 다른 장르에 비해 분단상황에 뒤늦게 주목했다. 문학분야에서는 4·19이후 분단모순과 통일에 대한 논의가 제기됐고 이어 참여문학이 등장했다.참여문학은 70년대 들어 민족문학으로 발전해갔다.모더니즘을극복하고 민족문학 혹은 민중문학이란 이름 아래 통일지향적인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다.반면 미술 쪽에서는 모더니즘이 제도권에 진입,주류를 이루며 20년 가까이 화단을 지배했다.이는 미술의 장르적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분단상황에 대한 미술가들의 깊은 성찰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우리 미술이분단상황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 데는 70년대 이후 문학 등 인접예술분야와 사회과학의 발전에 힘입은 바 크다. 80년대 들어 분단극복과 통일 염원을 담은 작품들이 집중적으로 선보였다. 오윤 ‘통일대원도’,손장섭 ‘역사의 창-통일염원’,최병수 ‘분단인’,김봉준 ‘온 겨레도’ 등이 그것이다.그러나 그 내용은 지나치게 관념적이고상징적인 것이어서 구체적인 통일의 비전을 제시하지는 못했다.미술에서 분단모순이나 통일문제는 이제 더이상 민족·민중미술 작가들만의 몫이 아니다.보다 많은 미술가들 사이에 통일지향적인 미술이념이 확산될 때 한층 심화된 그림이 나올 수 있다. 한편 6·15선언 이후 분단극복을 위한 남북 미술교류를 위한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어 주목된다.한국미술협회는 광복절 ‘33인 판문점 합동전’을 추진하고 있으며,한국고미술협회는 10월중도자기 등 고미술품을 중심으로 한‘남북교류민족전’을 연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또 월북화가 이쾌대의작품전이 최근 그의 고향인 경북 칠곡에서 열렸으며,지난 5월에는 북한이 자랑하는 천재화가 오은별의 개인전이 서울에서 열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진정한 의미의 남북 미술교류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여전히 ‘제도미술’의 틀에갇혀 있는 북한미술에 대한 연구가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 김종면기자 jm
  • 뉴욕서 6·25 50주년 사진전

    [뉴욕 연합] 6·25 발발 50주년을 맞아 뉴욕시 맨해튼에서 25일(현지시간)부터 내달 15일까지 3주간 기념 사진전이 열린다. 이번 사진전은 뉴욕 총영사관,코리아 소사이어티,뉴욕시 등이 공동 주관하며 해방 이후 6·25를 포함 남북정상회담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사진 107점이 전시된다. 전시실은 시청 인근 고문서자료실의 중앙홀로 뉴욕시청이 무료로 대여했으며 루돌프 줄리아니 뉴욕 시장이 직접 참석해 개막연설을 할 예정이다.
  • 자유총연맹 전국 웅변대회

    한국자유총연맹(총재 楊淳稙)는 23일 서울 장충동 자유센터에서 남북화해와 협력을 다지기 위한 전국 웅변대회를 마련했다.6·25발발 50주년을 계기로남북사이에 새롭게 열리고 있는 화해시대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자리로 전국에서 예선을 거친 20명이 참가해 실력을 겨뤘다. 수상자는 다음과 같다. ◆대통령상 김종래(자영업 38 울산) ◆국무총리상 오동춘(육군 15사단 일병)◆통일부장관상 박은지(강원 강일여고 1년)◆국방부장관상 김기태(충북 충주대원고 1년)◆행정자치부장관상 신현주(주부 28 충남 천안)◆교육부장관상김희현(서울 명원초등 6년)◆대회장상 천지형(인천경찰청 기동1중대 상경)?장려상 조영희(주부 40 제주시)
  • [문화예술 분단장벽 허무나](3)영화

    현실을 이미지로 반영하는 작업이 영화라면,지난 반세기동안 우리 영화사에서 남북분단은 ‘본의아니게’ 주요소재가 돼왔다. 한반도 분단과 영화를 주제로 최근 논문을 쓴 영화평론가 김의수씨 같은 이는 “70년대 이전의 한국영화치고 분단영화 아닌 게 없더라”고 말할 정도다. 분단을 소재로 잡은 영화는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시점에서부터 끊임없이 만들어져왔다. 초기 반공영화의 대표작으로 첫손에 꼽히는 영화는 ‘피아골’(감독 이강천·1955년).지리산 빨치산의 만행과 여대원을 둘러싼 그들의 갈등,자유의식을 그린 이 영화의 흥행 이후 분단영화는 영화가의 최고 아이템으로 부각되다시피 했다.‘지옥화’ ‘철조망’ ‘오발탄’ 등의 6·25 소재 영화가 붐을일으킨 것이 그 즈음이다. 5·16과 유신 등의 질곡을 거치는 동안 분단이라는 특수상황은 정치논리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60년대에는 상업성이 고려되지 않은,다분히 통치차원의 반공영화들이 줄을이었다.‘증언’ ‘돌아오지 않는 해병’ ‘카인의 후예’ ‘전우가 남긴 한마디’ 등이 그런 작품들이다. 그렇다면 이 대목쯤에서 고개드는 의문.이들 영화가 분단현실 극복의 한 대안으로 기능해온 적이 있었을까.분단을 보는 영화적 시각이 반공이데올로기를 벗어나기 시작한 시점은 80년대 들어서였다. 영화평론가 김시무씨는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정지영 감독의 ‘남부군’,이장호 감독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등이 비로소 전쟁의후유증과 인간의 고뇌를 담아내기 시작했다”고 평가한다. 분단을 바라보는 영화적 시각은 시대흐름속에서 꾸준히 달라져왔다.대자본이 들어가고 상업논리가 최고 우위를 점하는 최근의 영화제작 현장에서는 더말할 나위도 없다.분단인식을 ‘범국민적’으로 환기시켜준 영화는 단연 ‘쉬리’였다. 남북간 이념대립 자체가 맥락을 이룬 이 영화는 분단과 영화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데 확실한 공을 세웠다.정치적·이념적 메시지를 가진 영화는성공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보기좋게 깨부순 것. 영화평론가 전찬일씨는 “분단이 엄연한 현실인 이상,영상이미지 시대에 그것은 앞으로도 변함없이 주요한 영화적 테마가 될 것”이라고 전제하고 “분단현실을 함께 고민하는 장치로서 영화는 얼마든 큰 역할을 자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언제부턴가 베트남전을 ‘지옥의 묵시록’이나 ‘7월4일생’ ‘플래툰’으로 떠올리는 상황에 주목해보라는 주문이다. 물론 여기서 짚고넘어가야 할 문제점도 있다.분단현실이 상품화·오락화 일변도로 치닫는 최근 영화제작 경향에 대한 비판이다. 남북이념의 대립을 부각시키는 영화는 분단 극복에 기여하기보다는 오히려고착을 조장하는 위험부담이 크다는 점에서다.‘쉬리’를 정면겨냥해 “우리쪽을 자극하는 영화는 만들지 않도록 남쪽 언론에 말해달라”고 했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멘트는 흘려들을 일만도 아닌 셈이다. 판문점의 긴장을 소재로 한창 마무리 단계에 들어간 미스터리 휴먼드라마 ‘공동경비구역 JSA’(감독 박찬욱)에 쏠리는 관심이 어느때보다 큰 것도 그래서다. 분단현실을 극복하는 데 영화가 주효 장치로 활용될 가능성은 얼마든포착된다는 게 영화가의 중론이다. ‘공동경비구역’을 제작한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는 “분단에 대한 균형감각있는 철학이 전제된다면,한반도 분단상황에 대한 지구촌의 성의있는 관심을유도하는 데 영화가 결정적 역할을 할 수도 있지 않겠냐”고 반문한다. 올 칸느영화제에서 분단을 겪은 독일 등 유럽권에서 이 영화에 대한 관심이많았던 점에 주목,명필름측은 영화를 내년 베를린영화제에 출품할 계획을 잡고 있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은 많다.당장 ‘공동경비구역’의 경우 통일대교 촬영을 군당국에 협조요청했다가 보기좋게 거절당했다.올리버 스톤이 ‘플래툰’이나 ‘7월4일생’을 혼자 힘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 상기되는 대목이다. 황수정기자 sjh@
  • 제프 훈 英국방 오늘 내한

    [런던 AFP 연합'제프 훈 영국 국방장관이 23일부터 29일까지 한국과 중국을차례로 공식 방문한다고 영국 국방부가 21일 발표했다. 훈 장관은 6·25 발발 50주년 기념식 참가를 위해 서울을 먼저 방문하고 이어 중국을 방문,츠하오톈(遲浩田) 국방부장 등 중국 고위관리들을 만난다고국방부는 전했다. 훈 장관은 또 베이징에서 세계평화와 관련,탕자쉬안(唐家璇) 중국 외교부장과 합동 세미나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영국 국방부는 덧붙였다.
  • 남북 화해시대/ 朴在圭장관 編協 간담회 내용

    박재규(朴在圭)통일부장관은 22일 다음주 남북 고위급 당국간 회담기구가발족할 예정이라고 밝히는 등 정상회담 후속 조치 등에 대해 밝혔다.다음은박 장관이 이날 한국신문방송 편집인협회 주최 조찬간담회에서 밝힌 정부의후속 조치 및 입장과 주요 쟁점에 대한 설명을 정리한 것이다. ●김정일 쇼크/ 빨리 가라앉도록 하는 게 필요하다.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에 대한 분석과 정보가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발생했다.김 위원장이 천사인지 천사의 베일에 쌓여 있는 상태인지를 묻는 질문이 있는데 답변은 시기 상조다. ●통일교육/ 냉전체제가 종식되고 화해 협력시대가 왔는데 교재는 이에 못미친다.성급하게 앞서 교재를 바꾸는 것도 문제다.오두산전망대의 테이프와 자료는 5∼10년 전 것이다. ●회담 성사 배경/ 북한은 전력과 사회간접자본 등이 매우 부족하다.북한은경제를 발전시키려면 국제사회의 도움에 앞서 남쪽의 협력을 받아야 할 판단한 것으로 본다.지난 4∼5년간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외교적 시도가 있었다.러시아,중국도 “남쪽과협력하는 게 실익과 살 길을 찾는 방법”이라고 충고한 것이 도움이 된 것 같다. ●적십자회담 전망/ 계속 진행되도록 하겠다.나이 많은 국군 포로들도 내려올 수 있도록 조용히 추진하겠다.언론이 협조해 주었으면 한다.많이 데려올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한국전쟁 언급/ 두 정상이 6·25를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과거에 있었던전쟁이 다시 발발하면 공멸(共滅)이란 점에는 의견을 같이했다. ●통일방안 합의 의미/ 북측의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은 완전한 통일을 의미했다.두 체제와 두 정부가 있고 중앙정부가 외교권과 군사권을 가지는 것이다. 이번 공동선언에선 연방이 연합제로 바뀌었다.즉 남북한이 현체제를 유지한다는 것을 뜻한다.한해는 북 지도자가 2년간 대표를 하고 남은 2년 동안 남측 지도자가 대표를 하는 것이다. 정리 이석우·김상연기자
  • SBS‘기아체험 24시간’지구촌 굶주림 하루 체험기

    SBS의 ‘새천년 기아체험 24시간’이 24∼25일 4부로 나뉘어 방송된다.지구촌의 굶주림 실태를 청소년에게 일깨워 주기 위해 마련된 이 프로그램은 97년에 시작돼 올해가 4번째다. 올해는 특히 6·25 50주년을 맞아 굶주림의 고통을 직접 겪었던 아버지 세대와 어렵고 힘들었던 순간을 모르고 자라온 청소년들이 24시간을 함께 굶으면서 전쟁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누는 ‘장’으로 기획됐다.SBS의 유일한6·25 특집 프로그램이다. 1부는 24일 오후 4시,2부는 같은 날 밤 12시,3부는 25일 오전 8시30분,4부는 이날 오후 4시30분에 각각 방송된다.진행은 탤런트 박상원 이영애 김혜자와 신세대 스타인 이정현 이지훈 김민희가 릴레이식으로 맡는다. 이 프로는 서울 잠실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1만5,000여명의 청소년들이 24시간 동안 기아를 체험하는 현장과 제주도 비자림 야영장을 동시 이원 생방송으로 중계한다.올해는 화상채팅을 이용해 연락이 어려운 독도,최전방 군부대 등을 비롯해 남극의 세종기지,남미,중국,아프리카 등 세계 각국에서 기아체험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연결한다.박세리 박찬호 남나리 등 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스포츠 스타들의 격려 메시지도 생방송으로 전달할 계획이다. 기아체험 행사에 직접 참여하는 김건모 클론 김현정 샤크라 백지영 베이비복스 등 인기 가수들의 축하공연도 벌어진다.또 가수 김현성과 이수영은 현지 취재한 케냐 우간다 코소보의 기아실태를 자료화면과 함께 보여준다. 기아체험이 진행되는 동안 인터넷(www.famine24.net)이나 ARS(700-1234)를통한 모금행사가 펼쳐진다.SBS는 이 성금으로 북한의 국수공장과 수경재배농장에 대한 지원을 더욱 강화하고 동티모르,코소보 등의 결식아동 지원을 확대할 예정이다.지난 3년간은 매년 20억원 안팎의 성금이 모였다.방송사측은이 돈을 국내 결식아동 돕기,북한의 국수공장 6곳 건립,세계 각지 난민촌의기아어린이 지원 등에 썼다. 전경하기자 lark3@
  • [문화예술 분단장벽 허무나](2)공연예술

    분단의 상처를 창작의 원천으로 삼아 예술적으로 승화하려는 움직임은 연극,무용,음악 등 공연예술계에서도 꾸준히 이어져왔다. ◆연극/ 분단초기인 1950년대에는 전쟁의 충격으로 반공의식을 담은 작품들이주로 창작됐으나 60년대들어 전쟁과 분단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학계에서는 60년 신춘문예작인 박현숙의 ‘사랑을 찾아서’를 ‘분단희곡’의 출발로 꼽는다.한 여인이 사랑을 찾아 이데올로기에 상관없이 남북을 오가는 과정을 그린 이 작품은 남자주인공인 공산당원을 인간적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다. 차범석의 ‘산불’은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이데올로기 갈등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보다 객관적으로 묘사했다는 평을 받은 작품.‘관광지대’‘모가지가긴 두사람의 대화’(박조열)‘바꼬지’(이재현)등도 60년대 분단과 통일문제를 다룬 희곡들이다.이재현은 ‘포로들’(72)‘멀고 긴 터널’(77)‘적과 백’(83)등 6·25전쟁포로를 다룬 기록극형식의 삼부작을 내기도 했다. 80년대에 이르러 분단희곡은 새로운 전기를맞는다.동서간의 해빙무드에 힘입어 보다 적극적으로 분단의 모순상황을 지적하고 이데올로기의 무의미성을고발하는 작품들이 대거 쏟아졌다. 노경식의 ‘하늘만큼 먼나라’(85)황석영의 ‘한씨연대기’(84)이강백의 ‘호모세라파투스’(83)‘칠산리’(89)이반의 ‘아버지 바다’(89)등이 대표적이다. 분단과 통일문제를 정치사회적인 시각으로 묵직하게 다룬 80년대에 비해 90년대는 풍자적이고 우화적인 분단희곡들이 눈에 띈다.장소현의 ‘김치국씨환장하다’(98)나 오태영의 ‘통일익스프레스’(99)는 패러디와 유머감각,아이러니를 표현기법으로 도입함으로써 관객들의 변화된 정서에 부합하는 한편날카로운 사회비판도 놓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수작으로 꼽히는 작품들이다. 연극평론가 유민영씨(단국대 교수)는 “분단을 다룬 수작 희곡들이 상당수이나 양적인 면에서나 스케일,그리고 심도에 있어서 소설에 비해 미약한 것이사실”이라고 지적하고 “6·25를 이념이나 상황이 아닌 철학적 성찰로 접근할때 비로소 뛰어난 작품이 나올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무용/ 지난 95년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산하 민족춤위원회는 해방5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춤제전을 벌였다.‘해방50년,겨레의 몸짓으로’를 주제로한 이 행사는 그간 개별적으로 이뤄져온 무용계의 분단 형상화작업을 전체적으로 묶어내는 역할을 했다.당시 선보인 한상근의 ‘무초Ⅲ’은 현대춤과 전통춤을 조화시켜 통일을 위해 몸바친 이들을 그려냈으며,정혜진 무용단은 ‘새들의 암장’이란 작품에서 북한에 고향을 둔채 이국땅에서 삶을 마감한 박남수시인의 삶을 형상화했다. 개인적으로 분단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보여온 무용가로는 분단이후 한국상황을 무용극 ‘내사랑 한반도’(88)로 풀어낸 조기숙을 비롯해 살풀이 시리즈의 이정희 중앙대교수,강혜숙 청주대 교수등이 대표적이다. 민족춤위원회 김채현위원장은 “분단문제를 현대적인 관점으로 접근해 외국인도 공감할 수 있는 국제적인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무용계의 과제”라고 지적했다. ◆음악/ 작곡가 안익태가 30년대 작곡했던 ‘코리아환타지’를 60년대에 전쟁을 승화시키는 쪽으로개작한 것을 비롯해 변훈의 ‘떠나가는 배’이호섭의‘울음’등 많은 작곡가들이 분단의 비극을 음악으로 형상화하는데 힘을 기울였다.그러나 작품 못지않게 삶자체에 통일의지가 가득했던 작곡가 윤이상이 갖는 상징성은 그 무엇보다 큰 자리를 차지한다. 95년 독일 베를린의 한 병원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윤이상은 조국의 분단을 걱정했다.67년 동베를린간첩단사건에 연루돼 71년 독일에 귀화한 뒤 한번도 고향땅을 밟지 못했던 그는 음악으로 남북 화해의 다리를 놓기위해 수시로 북한을 오갔다.‘오보에와 하프를 위한 이중 협주곡’칸타타‘나의 땅,나의 조국’등 통일을 염원하는 작품창작뿐 아니라 88년에는 남북축전을 제안하고,90년 평양에서 범민족통일음악회를 직접 주도하기도 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민경찬 교수는 “남북한이 서로 민족음악을 내세우지만 결국 둘다 반쪽의 민족음악일 수 밖에 없었다”면서 “남북의 음악계가 서로합심해 새로운 통일음악을 모색할 시기”라고 강조했다. 이순녀기자 coral@
  • [50돌에 되돌아 본 6.25](2)최대격전 안강·다부동 전투

    “이땅에서 전쟁은 영원히 사라져야 합니다.” 6·25전쟁 50돌을 나흘 앞둔 21일 조선시대 사상가 이언적(李彦滴)선생의사당이 있는 경북 경주시 안강읍 양동리에서 만난 학도병 출신 참전용사 김영재(金泳在·69·경주시 용강동·상이2급)씨의 피맺힌 절규다. 전사(戰史)에 ‘최후결전 안강전투’로 기록돼 있는 이 지역은 본래 경주북쪽에 위치한 평야지대였다.동쪽으로는 포항,서쪽으로는 영천이 이웃한 요충지로 포항∼영천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의 중심지였다.당시 송요찬(宋堯讚)대령이 지휘한 국군수도사단과 이종찬(李鍾贊)대령의 3사단이 북한군 2군단,12사단의 8∼9월 두 차례에 걸친 공세를 저지하며 반격의 기틀을 다졌던 6·25전쟁 최대 격전지중 한곳이다. 20여일 동안의 안강전투가 끝나갈 무렵인 50년 9월20일 오른쪽 가슴에 관통상을 입고 아직도 투병중이라는 김씨는 “160명이던 중대원이 하루밤 사이에20여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악몽 같은 그날을 회고했다. 김씨는 경주공업중 5학년이던 50년 8월15일 입대,열흘 동안 기초군사훈련만받고 전투에 투입됐다. 당시 안강은 낮에는 미군 전투기의 지원을 받은 국군이,밤이면 게릴라전에능한 인민군이 점령하는 등 밤낮으로 주인이 바뀌는 숨막히는 전투가 이어졌다.전사에는 남북한 군인 2,500여명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전쟁이 휩쓸고간 상처는 5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꽃다운 젊음이 무수히 사라진 전장터는 신록만 무성할 뿐이었다. 온통 핏빛으로 물들었던 안강 양동 골짜기는 지난 68년 저수지로 바뀌었다. 동족상잔의 한맺힌 땅이 포항시민들의 식수원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희생자들의 넋을 떠올리며 낙산 1·2교와 동해남부선 철도가 가로지르는 100m 폭의 형산강 옆 야산에 자리잡은 전적기념관쪽으로 발길을 돌렸지만 기념관은 건설회사의 부도로 짓다만 채 흉물처럼 버려져 있었다. ‘잊혀져 가는 전쟁의 아픔’을 되새기며 안강에서 자동차로 2시간여를 달려 낙동강 물결이 굽이치는 경북 칠곡군 왜관에 도착했다. 다부동지역은 50년 8월1일부터 9월24일까지 50여일간 북한군 4개 사단,아군2개 사단이 투입돼 아군 2만5,900명과 북한군 3,500명이 목숨을 잃은 혈전의현장이다. 이곳에서는 경북도와 칠곡군 주최로 23일부터 사흘간 열리는 ‘낙동강 세계평화의 제전’ 준비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24일에는 희생자 위령제가,25일에는 ‘낙동강 평화 선언식’이 이어진다. “가신 님의 짧은 인생은 겨레와 함께 영원히 살아가리”.최대의 격전이 치러졌던 가산면 다부리 유학산 왼쪽 봉우리 중턱에는 애절한 글귀가 새겨진호국용사 충혼비가 세워져 있다.기념관 방명록에는 미국 등 참전군인들의 서명이 줄을 이었다. 최근 육군본부가 실시한 6·25전사자 유해발굴 결과 이곳에서 모두 117구의유해와 유류품 1,038건이 발굴됐다.이곳에서 나온 북한군 유골 2구는 경기도파주시 적성면의 적군묘지로 옮겨져 안장됐다. 다부1리에 사는 최사순(崔四順·80)씨는 “피란에서 돌아오니 군인들의 시신이 널부러져 있어 구덩이를 파고 30∼40구씩 끌어묻는 데만 꼬박 닷새가걸렸다”면서 “이렇게 묻은 시신만 해도 족히 300구는 될 것”이라며 어느덧 눈시울을 붉혔다.이곳도 최근 개설된 등산로를 따라 산새 울음소리와 패랭이꽃만 만발할 뿐전쟁의 흔적은 간데 없었다. 낙동강전선 최대 격전지였던 안강과 다부동은 남북 화해의 시대를 맞으면서평화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주는 것 같았다. 안강·왜관 송한수기자 onekor@
  • [황석영의 맛따라 추억따라](4)잃어버린 먹거리

    6·25전쟁 전에도 쌀이 늘 모자라서 수제비나 국수를 많이 먹었지만 밥을 지어 먹을 때에도 반찬은 한 두어 가지가 고작이었다.동그란 밥상 가운데에 찌개 냄비 올려놓고 김치 한 보시기에 밥 한 그릇씩이 고작이었다. 그러니 밥에다 뭔가 넣어서 해먹으면 양식도 절약이 되고 반찬도 따로 장만할 필요가 없게 된다.나는 요즈음 경양식 집에서 김치와 베이컨과 햄이며 당근 등속을 넣고 버터에 볶은 김치볶음밥은 어딘가 맛이 분명치 않아서 딱 질색이다. 김치가 시어지면 속을 좀 털어내고 송송 썰어서 김치밥을 해먹었고 햇감자가나오면 감자밥을, 고구마가 나오면 고구마밥을,그리고 가을에 김장하고나서남은 무를 넣고 무밥도 해먹었는데,콩나물은 값싸고 가장 흔한 채소라 어느철에도 가끔씩 해먹었다. 영등포의 그 작은 집 뒷뜰에는 화단도 있었고 수돗간과 광도 있었고 광 위에장독대가 있었다. 여름이면 화단에다 일년초의 씨를 뿌렸는데 봉숭아 채송화분꽃 그리고 나팔꽃이 누나들이 매어준 실을 타고 판자 울타리 끝에까지 기어 올랐다.익으면 발간 주황색이되는 유자도 열렸고 수세미 넝쿨도 광의 지붕으로 뻗어 올라갔다.초겨울이 되면 아버지가 광의 뒷편 그늘진 곳에다 땅을 파고 김장독을 묻곤 했다. 어머니가 뚜껑과 짚으로 둥글게 짠 덮개를 열고 웅크리고 한 손을 집어넣어통배추 김치나 절인 무를 꺼내는 모습이 지금도 눈 앞에 삼삼하다. 김치밥은 돼지고기를 써야 더욱 맛이 좋다.돼지 살코기를 다져서 갖은 양념하여 살짝 볶아 놓고 쌀을 앉힐 때 김치와 돼지고기와 쌀을 켜켜로 두어 물을 잡는다.보통 때보다 물을 약간 덜 잡아서 밥을 하면 되지만 약간 질척한듯 짓는 것이 더욱 맛있는 것같다.양념장을 준비했다가 조금씩 밥 위에 두고비벼서 먹는다. 멸치로 다시를 낸 맑은 미역국과 함께 먹으면 다른 찬이 필요가 없다. 콩나물 밥도 짓는 법은 비슷하여 양념이 된 고기를 볶아서 콩나물과 같이 쌀에 앉히는데,더욱 구수한 맛을 내려면 다시마 우린 물이나 멸치 맛국물로 밥물을 잡는다.역시 양념장을 넣고 비벼서 먹는다.국은 재첩이나 조개로 된장국을 끓여서 낸다. 무밥이나 감자밥 고구마밥도 모두 양식이 모자라던 시절의 밥짓기지만,얼마전에 여행길에서 산간에 들어갔다가 감자밥과 막장으로 끓인 호박찌개를 먹고 투박하고 구수한 옛맛이 살아나서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웠던 적이 있었다.도무지 이런 맛이란 시중의 음식점 어디를 가보아도 없다.요즈음 대중식당의 차림표와 음식은 서울에서 저 남도 끝이며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어슷비슷한 맛이다. 의 평준화가 이루어진 셈이랄까.대충 벽에 붙은 차림표대로 주문을 하고나면어디선가 먹은 그 음식이 같은 모양새로 나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밥은 또 어떤가.밤중에 공부를 하다가 아니면 책을 읽다가 귀찮기는 하지만 속이 출출해서 슬슬 부엌에 나가서 뭔가 먹을 것을 찾는다.형제들이 많은 집이면 서로 가위 바위 보를 하기도 하고 제일 굴풋하고 시장한사람이 부엌으로 나가게 된다. 밥이 솥 안에 조금 남아있고 찬장에는 먹던 김치가 있고 고추장 뿐이다.허름한 양은 냄비에다 참기름을 두르고 밥과 고추장과 김치를 넣어 비비면서 볶는다.그대로 숫가락 여러 개를 꽂아서 냄비채로 들고 방으로 돌아오면형제들이 저마다 달려들어 퍼먹는데 밤참의 그 맛이란 세 끼 중에 가장 특별한맛이다. 뭔가 나물이나 김치나 하여튼 먹고 남은 찬을 넣고 비벼 먹는 음식은 어느지방에나 있는데 사람들 추측에 의하면 대개 명절이 지난 뒤라든가 제사를지낸 며칠 후에 ‘먹어 치우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전주 지방의 비빔밥이 유명하지만 안동에서는 원래의 의미대로 헛제사밥이라고 부른다. 어렸을 적에 평양이 고향이던 어머니는 ‘온반’을 제대로 한 적은 없었다. 부모님들은 아마도 수십년 동안을 남쪽에 정착해 살면서도 이곳은 임시 거처려니 여기고 살아온 게 분명할 것이다.더구나 어머니는 농촌 가정 출신이 아니라 개화된 지식인 집안이었고 커서 배운 요리도 거의가 일본식의 개화 음식이었다.아니,그렇다고는 해도 무엇보다도 어머니는 뿌리를 뽑힌 ‘피난살이’의 살림을 의식적으로 벗어날 수가 없었을 게다.내가 중학교에 들어가서몇 대를 서울에서 살아온 토박이 아이들의 도시락 반찬을 보고 깊은 인상을받았던 기억이 난다. 특히 그들이 찬통에 싸온 여러 종류의 장아찌는 기가막힌 맛이었다. 머니는 나중에 아버지와 사별하고부터는 혼자서 벅찬 생업을 감당하노라고더욱 부엌일과 멀어졌고 우리집 식단은 그야말로 가게에서 그날 그날 사다가후딱 조리해서 먹어치우는 식이 되었다. 어머니는 노티를 외우던 것처럼 고향의 온반이 먹고 싶다고 여러번 말했고 비슷하게 만들어 먹기도 했다.그저콩나물 시금치 무나물 등속에다 두어 국물을 부어 만든 것이었는데 우리가보기에는 국밥도 아니고 비빔밥도 아닌 이상야릇한 음식인 듯했다.이렇듯 야릇한 음식으로는 중국집의 울면이 있다.우동이나 짬뽕처럼 시원한 국물도 아니고 짜장면처럼 비비는 것도 아닌 걸죽한 소오스가 아닌가.마치 비벼 먹다가 마음이 변해서 국을 들이부운 것만 같다. 내가 몇 차레 김일성 주석과 나눈 점심에 온반을 먹게 되었다.어느 기록에도보니까 해방후 초기 집권 시절에 부인이 집에서 직접 콩나물 기르는 얘기가나오고 장군(김 주석)이 콩나물 국밥을 즐겨했다고 한다. 이거이 주로 먼길 떠나는 사람들이 먹었디.손님이 많고 일손은 바쁘고 할적에 온반 한 그릇씩 주면 얼마나 편리했겠소.속두 풀리구 든든하디. 온반 역시 설이나 제사 뒤의 비빔밥의 유래와 같은 계통의 음식이었을 것이다. 다만 추운 지방에서는 남은 음식을 차게 먹을 수 없으니 더운 국물을 부어서먹었을 게 분명하다. 이것을 끓인 것으로 온반죽이 있으니 더욱 그럴 듯 하다. 표고버섯과 고기를 볶고 찢어 놓은 고사리며 갖은 양념하여 무친 숙주나물을두고 달걀 지단을 썰어 밥 위에 얹고 녹두전을 부쳐서 밥 위에 얹고나서, 그위에 푹 곤 양지머리 국물이나 닭 가슴 살을 곤 맑은 육수를 부어서 먹는다. 대개는 국물을 자박자박하게 잡지만 나는 뜨거운 국물을 밥과 건더기가 푹잠기도록 부어야 직성이 풀린다.벌겋고 시원하게 담근 깍두기나 고추를 갈아젓과 버무린 배추 겉절이 김치를 곁들여 먹으면 이마에서 땀이 나고 속이후련해진다.과음한 이튿날 속풀이로도 그만이고 별로 입맛이 없는 요즈음의여름 날 점심 때에 땀을 흘리며 먹고나면 이열치열도 될 것이다. 초대소에서도 점심으로 몇번 더 먹은 기억이 난다.요새는 북에서 무슨 국을끓여도 대개는 닭을 고아서 쓰는 모양이었다.내가 된장국의 맛을 내려고 멸치를 찾았더니 주방장은 멸치를 어떻게 국물로 쓰느냐고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내가 자꾸만 된장국이나 야채국에는 멸치를 넣어야 제맛이 난다고 했더니 답답했던지 그가 멸치를 가지고 나와서 내게 보여 주었다.아뿔싸,이북에서는 동해안 멸치가 있긴 있는데 크기가 거의 작은 꽁치만이나 했다.이건비려서 못쓰겠지.이것 보다 작은 게 있어야 한다고 했더니 그건 멸치가 아니라 까나리라고 하는 것이었다. 역시 지방마다 맛과 조리법이 다른 이유는 기후와 풍토,그리고 자연조건에따른 것이다.그러한즉 땅은 작지만 팔도마다 서로 조금씩 다른 말과 음식은얼마나 아기자기한가.
  • 병·의원 ‘폐업 저지’ 시민이 나섰다

    시민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이 병·의원의 집단폐업 철회를 위해 행동에 나섰다. 참여연대와 건강연대,경실련,서울YMCA 등 20여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의약분업 정착을 위한 시민운동본부’ 회원 100여명은 지난 20일 김재정(金在正) 의사협회장과 신상진(申相珍) 의권쟁취투쟁위원장을 의료법 위반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발한 데 이어 2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염리동 병원협회를 항의 방문했다. 이들은 병원협회 관계자들에게 “의료계의 무책임한 행위가 국민의 생명을앗아가고 있다”면서 “시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한 만큼 강력한 집단폐업 저지운동을 전개하겠다”고 통보했다. 시민운동본부는 선언문을 발표,“환자들의 치료받을 권리,건강할 권리를 되찾기 위한 시민행동을 벌여나갈 것을 선언한다”면서 “의사들이 불법 집단폐업을 멈추고 국민 앞에 사죄하는 순간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강조했다. 6·25세대 50명이 주축이 된 평화봉사단체인 ‘코리안 타이거스’(대표 洪貞植·관세사)도 이날 “진료마비 고통을 더이상 방관할 수 없다”며‘시민행동대’를 결성했다. 이들은 23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안국동 참여연대 사무실에서 시민행동대발족식을 가진 뒤 진료를 거부하는 의사에 대한 시민 체포조를 편성, 행동에나서기로 했다. 한편 회원들간의 의견 조율이 어려워 집단폐업 사태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던 ‘인도주의 실천의사협의회’는 이날 성명을 내고 “의약분업을 찬성하며 의사협회의 집단폐업을 반대한다”고 밝혔다. 김경운기자 kkwoon@
  • [사설] 남북문제 말을 가려야

    남북문제에 관한 언행에는 아직 주의를 기울여야 할 대목이 너무 많다.남북정상회담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화해와 협력관계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자칫 한 군데라도 어긋나면 모든 게 허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게한다.모두가 조심스러워 할 수밖에 없다.이런 관점에서 남북문제와 관련한최근의 시비와 논란은 유감이다.한 언론사는 ‘북,노동당규약 개정 약속’이라는 제목으로 정부가 비보도를 요청한 내용의 기사를 내보내 파문을 일으켰다.여기에다 지난 20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에서 박재규(朴在圭)통일부 장관은 “국제법상 국군 포로는 없다”고 발언,비난을 샀다.북한의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이 평양 순안공항에 영접을 나온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느냐는문제를 놓고 박 장관과 양영식(梁榮植)차관의 답변이 엇갈려 민망한 모습을연출하기도 했다.이같은 일들은 모두가 말(言)이 씨앗이 됐다.그렇지만 단순한 시비로 끝나지 않고 자칫 남북문제를 혼란의 국면으로 빠트릴 수도 있다는 점에서 우려된다. 문제의 노동당규약 개정문제는 남북정상이 비공개를 전제로 의견을 교환했던 내용 가운데 하나이지만 김 위원장이 명확하게 약속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 당국의 설명이다.그러나 이같은 사실이 보도됨으로써 남북한 신뢰관계에심각한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이 때문에문제의 언론사도 처음에는 기사화 여부를 고심했다고 한다.하지만 북한의 인식 변화를 알리는 것이 6·15 공동선언에 대한 국민적 합의 분위기를 뒷받침한다고 판단해 보도했다는 해명이지만 설득력은 떨어진다.현 단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북의 상호 신뢰를 좀더 공고히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북한을 자극하는 기사 한 줄이 남북관계의 기본 틀을 깰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했어야 옳다고 본다.박 장관의 ‘국군 포로’ 관련 발언은 시기적으로도적절치 못했다.6·25 50주년을 불과 며칠 남겨두지 않았기 때문이다.국방부가 반박 해명서에서 강조한 것처럼 국군 포로 및 실종자문제는 국가의 본분과 도리에 관한 문제라는 사실도 분명히 짚었어야 했다.김정일 위원장의 영접과 관련한 통일부 장·차관의 엇갈린 답변은 지휘체계에 문제가 있는 것이아니냐는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적절한 해명과 조치가 뒤따라야 할 것으로본다. 남북 정상회담의 바람은 상당 기간 계속될 전망이다.들뜬 분위기 속에 유사한 성격의 논란과 시비가 되풀이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그렇다고 당장남북관계에 획기적인 일이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앞으로 다가올 변화의 물결에 대비해야 한다.최근의 파문에 비춰보면 ‘나는 알고 있다’는 식의 과시적 언행은 금물이다.대국적 견지에서 말은 가리고 행동은 신중해야 한다.
  • 공공부문 개혁/ 국제포럼 주제발표 요약

    *한국의 공공부문개혁. 현 정부는 98년 2월 출범과 동시에 공공부문개혁을 최우선 과제로 인식하고추진했다. 해방 이후 처음으로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뤄져 국민들의 폭넓은지지를 얻은데다 6·25 이후 최대의 국난인 국제통화기금(IMF)체제에 들어간 외환위기가 강력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기회를 준 면도 있다.하지만외환위기를 너무 빨리 극복해 개혁의지가 느슨해진 점은 개혁의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현 정부의 개혁은 당초의 야심적인 계획에는 다소 미달되지만 과거정부의개혁과는 그 강도나 범위에서 뚜렷이 구별된다.국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것이상으로 많은 일을 했다.국민의 정부 출범후 2차례의 정부부문 구조조정으로 30억달러의 예산을 절감했다.중앙정부의 인력은 2001년까지 16%,지방정부의 인력은 19%가 감축된다. 또 23개 중앙정부기능을 지방으로 넘겼다.88개기능은 외부위탁(아웃소싱)했다.또 올해부터 정부의 고위직 20%를 개방형 직위로 선정해 민간인에게도 문을 열어놓았다.75개 기금을 55개로 통폐합했다. 하지만 이러한 지금까지의 성과는 시작에 불과하다.그동안의 하드웨어적인구조조정에서 한단계 발전한 새로운 조직문화가 시급히 정착돼야 하나 쉬운일은 아니다.또 영국과 뉴질랜드의 개혁성과가 가시화되는데에도 10년 이상이 걸렸다.현 정부 출범후 불과 2년의 개혁으로 항구적인 성과를 기대하는게 어렵다는 의미다. 정부부문에 대한 보다 강력한 개혁이 필요하다.지난 2년간의 개혁은 주로정부부문보다는 공기업과 정부산하기관에 치중됐다.대통령 직속의 민간협의회 설치 등을 통해 정부부문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경제가 급속히 회복되면서 개혁의지의 이완현상이 나타나는 점도 개혁에는걸림돌이다.국민들의 저항을 극복하고 공공부문 각 주체들의 자발적 혁신노력을 유도해야 한다.앞으로 개혁은 새로운 시스템에 맞는 조직문화 형성,지속적인 개혁의 추진과 공공기관들의 자발적인 개혁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김인수 행정개혁위원장. *스웨덴의 경험. 스웨덴의 공공부문의 특징으로 작은 중앙정부(4,300명),독립형 정부기관(250여개)을 들수 있다.이는 지방정부에 대한중앙정부의 간섭이 줄어들고 각정부기관 책임자의 재량권이 늘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60년대 초까지 스웨덴의 공공부문은 세부적이고 불필요한 규제가 많았고 예산에 있어 불용(不用)예산은 이월이 불가능했고 많은 항목으로 이뤄지는 등무계획적인 예산 편성이었다. 그뒤 90년대 초 부동산 거품 붕괴와 금융위기,경기침체를 겪자 94년 집권한 정부가 공무원 인력을 축소(지방정부 14%,중앙정부 12%)시켰고 예산편성 과정을 하향식으로 하고 각 정부기관의 항목별 예산은 총액예산제로 전환해 재정 안정화를 단행했다. 현재 철도,전력,우편,통신 등의 규제를 완화하거나 민영화를 추구하고 있는 상태다.성과관리 체제에 대한 검토,감사체계,정보화도 점검되고 있다. 공공부문의 개혁은 각 나라의 문화와 여건에 따라서 접근돼야 한다.하지만 ▲법집행과 서비스 제공외의 정부의 직접적 통제 근절 ▲공공부문의 전문성 제고 ▲공직내 인센티브 활성화 ▲정책결정의 투명성 ▲권한과 책임의 명확화 등은 다른 나라에서도 고려해야 한다. 크눗 렉스트 행정발전처사무국장. *호주에서 얻는 교훈“20년간 두정권에 걸쳐 이뤄져”. 지난 20년간 호주는 노동당 정부와 보수연립정부,두 단계의 급격한 공공부문 개혁이 이뤄졌다. 지난 83∼96년 노동당 집권 시절 사업적 성격이 강한 정부서비스의 기업화및 민영화와 예산의 투입보다는 사업 목표와 성과에 촛점을 맞춘 사업예산제도 도입,중기예산제도 도입과 운영비제도의 개선,자문인력에 대한 중앙통제의 철폐 등의 개혁을 이뤄냈다. 또 96년 보수연립정부는 공공서비스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과 고객 위주의행정에 초점을 두고 개혁을 추진했다. 공공서비스법을 제정하고 모든 정부기관을 대상으로 고객서비스 헌장제도를 실시하고 각 행정기관의 장(長)에게는직원의 인사 등에 대한 자율적인 재량권을 줬다. 연립정부의 개혁은 과거 노동당 정부의 개혁으로 기반이 조성됐기에 가능하다. 이처럼 공공부문 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개혁전략이 예산당국에 의해뒷받침돼야 한다. 각 부처 장관들도 확고한 개혁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개혁노력이 장기간 지속돼야한다. 렌 얼리전 재무차관보.
  • [50돌에 되돌아본 6.25](1)비운의 다리들

    우리에게 6·25전쟁은 무엇이었고 어떤 모습으로 남을 것인가.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50년 세월동안 상쟁(相爭)과 배덕으로 얼룩졌던 한반도에 화해와평화의 여명이 드리워졌다.남북 상생(相生)의 물줄기가 용솟음치고 통일의빛이 어둠을 뚫고 내리비치고 있다.6·25전쟁 50주년을 맞아 ‘전쟁을 넘어평화로,분단을 넘어 통일로’ 가야 한다는 뜻에서 6·25특집을 시리즈로 마련했다. 1950년 6월28일 새벽 2시30분.칠흑같이 어두운 한강에서 큰 폭발음이 들렸고 화광은 일순간 주위를 대낮처럼 밝혔다.한강인도교와 한강철교,광진교가동강난 것이다.다리를 건너던 피란민 1,000여명도 수장됐다. 전쟁과 다리…. 다리는 땅과 땅을 이어준다.교류와 화해의 통로다.6·25 전쟁사에 등장하는다리는 예외없이 끊기고 찢어졌다. 한국 전쟁사에서 다리는 뺏고 뺏기는 격전의 장소가 아니었다.전진과 후퇴의 기로에서 시간을 벌기 위해 ‘작전상’ 끊은 것이 특징이다. 한강의 3개 다리와 함께 임진교,왜관교,금강교,대동강철교,압록강철교,평양승호리철교가 남진과 북진,후퇴 등 전세(戰勢)에 따라 엇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전쟁이 발발하면 도로와 철로는 곧 병참선(兵站線)이 된다.전쟁 초기 전차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내려오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다리를 폭파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전쟁통의 다리는 피란민들의 피눈물이 어린 곳으로 인식되고 있다. 온 몸에 보따리를 이고 메고 들고 한강다리 난간에 매달린 피란민들의 행렬,미처 강을 건너지 못한 피란민이 망연자실해 강 건너쪽을 바라보는 모습들은 우리의 의식 깊숙이 각인돼 있다. 그러나 한강다리 조기 폭파는 국군의 퇴로를 차단,북한군의 포위작전을 도와주는 결과를 낳았다.6·25 전쟁사는 대표적으로 ‘실패한 작전’이었다고기록하고 있다.당시 한강다리 폭파임무를 맡았던 최창식(崔昌植·대령) 공병감은 전쟁중이던 9월21일 육군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부산교외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낙동강변의 왜관교 폭파는 인민군의 워커라인(당시 미8군 사령관이었던 워커 장군의 이름을 딴 낙동강방어전선) 돌파를 저지하기 위해 이뤄졌다.미군제1기갑사단 호버트 개이 사령관의 “저 놈의 다리를 날려버려”란 한마디명령에 다리를 건너던 수백명의 피란민 대열은 아랑곳하지 않고 폭파됐다. 6·25 전쟁사에는 폭파된 다리만 기록돼 있진 않다.특히 영도다리와 돌아오지 않는 다리,자유의 다리는 ‘다시는 되풀이돼선 안되는 전쟁의 교훈’을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1934년 부산항과 영도를 연결하는 국내최초의 연륙교로 세워진 부산의 명물 영도다리는 전란을 피해 부산으로 몰려든 피란민들에게는 만남의 장소였다. “길을 잃고 헤매는 영도다리”란 가사로 전쟁의 아픔을 노래했던 ‘굳세어라 금순아’는 피란민들의 애창곡이었다. 영도다리 곳곳에는 사람을 찾는 벽보로 가득찼고 가족들을 기다리다 못해순간적으로 바다에 몸을 던지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잠깐만’이라는 푯말이 자살방지용으로 나붙어 있었다.다리 아래에는 교하촌(橋下村)이라고 불린 1,000여가구의 판자촌이 진을 쳤다. 경기도 파주시 판문점 우리측 평화의 집 뒤쪽 사천을 가로지르고 있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와 경의선상행선 철교의 잔해로 남아 있는 자유의 다리 또한 지울 수 없는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휴전협정 조인 이후 남쪽과 북쪽으로 송환된 포로들이 건너기만 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었던 다리였다.임진각에서 북쪽으로보이는 자유의 다리는 전쟁 와중에 상하행선이 모두 파괴됐으나 포로교환을위해 목조로 급조해 만들었다.1만2,773명의 포로들이 이 다리를 건너면서 “자유 만세”를 외친 곳이다. 전쟁으로 파괴된 다리들은 지난 50년 동안 다시 이어졌지만 당시 함께 찢긴상처와 안타까움은 아직 치유되지 못했다.분단 이후 첫 남북정상의 만남이전쟁통에 끊어진 남과 북을 연결시켜주는 ‘통일의 다리’가 되길 바라는 까닭이다. 노주석기자 joo@
  • ‘정상회담 대화록’비공개 합의

    박재규(朴在圭) 통일부장관은 20일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간에 이뤄진 남북 정상회담의 대화록과 회의록이 있으나 남북양측이 비공개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박 장관은 또 “국군포로 문제는 이미 6·25 직후 남북한의 포로 교환으로끝난 문제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국군포로는 없다”고 말했다. 박 장관은 이날 국회 통일외교통상위 전체회의에 출석,“당시 북한에 남아있던 국군포로는 4만5,000여명이었으나 대부분 전쟁 당시 총각이어서 지금은포로가 아니고 넓은 의미에서 이산가족으로 보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박 장관은 “지난 2월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국방부장관도 ‘법적으로국군포로가 없다’는 의견을 개진했다”고 설명했다. 박 장관은 “이번 8·15때 (1차) 이산가족 상봉에서는 우리가 추천한 100명을 상봉시키지만,국군포로로 이산가족이 된 사람들은 2차 상봉때 포함된다”고 밝혀 이산가족 상봉이 1회에 그치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재경위에서 이헌재(李憲宰) 재정경제부장관은 남북경협과 관련,“정부는 앞으로 남북간 민간 경협을 뒷받침할 수 있는 투자보장,이중과세방지,청산결제방안등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데 주력하겠다”고 말했다. 이 장관은 “남북 양측 모두에 이익이 되고 우리 경제의 부담능력 범위 내에서 실천가능한 사업부터 합의해 단계적, 점진적으로 경협을 시행토록 하겠다”고 밝혔다. 금융구조조정의 공적자금 투입과 관련,“공적자금 소요액은 약 30조원 규모이나 이 가운데 올해 소요분은 20조원 가량”이라면서 “현 시점에서 예측하지 못한 소요액이 추가로 발생,기존 공적자금의 회수와 재활용이 불가능할경우에는 국회 동의를 얻어 조성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국회는 이날 통일외교통상·보건복지·재정경제·정무·국방 등 11개 상임위를 열어 간사를 선임한 뒤 소관부처 장관들을 출석시킨 가운데 업무보고를듣고 현안에 대한 정부 대책을 추궁했다. 강동형기자 yunbin@
  • 남북 화해시대/ 국회 통일외교위 2가지 쟁점

    20일 열린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에서는 남북정상회담과 관련,여야간에 두 가지 쟁점이 불거져 나왔다.박재규(朴在圭)통일부장관의 “국제법상 국군포로는 없다”는 요지의 발언이 파문을 일으켰다.지난 13일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김대중(金大中)대통령 평양 순안공항 영접 계획을 우리 정부가 사전에 알고 있었는지 여부도 여야간 논란이 되었다. ◆ 북한내 국군포로 유무. 이날 통일외교통상위에서는 국군포로의 존재 유무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상임위가 끝난 뒤에는 국방부까지 논란에 끼어들었다. 무소속 정몽준(鄭夢準)의원은 최근 박 통일장관이 한 언론과의 회견에서 “국제법상으로 볼 때 국군포로는 현재 없다”고 밝힌 것과 관련한 진의를 추궁했다. 박 장관은 이 회견에서 “6·25직후 유엔군과 북한이 양측 포로를 교환하면서 포로 문제는 일단락됐다.당시 돌아오지 않은 국군은 4만5,000여명으로,대부분 북한에서 결혼해 살고 있다.넓은 의미에서 이들은 국군포로가 아니라이산가족”이라고 말했었다. 정 의원은 “지난해 국방부가 ‘국군포로대우법’을 제정한 사실을 알기나하느냐.박 장관이 국군포로의 존재를 부인하면 정부 입장에 상반되는 것”이라며 공격했다.이에 박 장관은 “국군포로 문제는 국제법상 6·25 직후에 매듭지어졌다”며 “지난 2월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도 국방부장관과 만나 이같이 정부측 입장을 정리했다”고 말했다.그러나 국방부는 이날 ‘국방부 입장문’을 통해 박 장관의 발언을 전면 반박했다.윤일영(尹日寧)대변인은“국방부는 국군포로 및 실종자 문제는 국가의 본분과 도리에 관한 문제로국가에서 책임지고 해결해야 한다는 기본인식을 갖고 있다”며 “박 장관 발언은 의미가 잘못 전달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또 “국군포로 문제는 국제법 차원보다는 남북화해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해결하려 노력해 왔다”고 설명했다.국방부는 현재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를 268명으로 잡고 있다. 진경호기자. ◆ 공항영접 사전인지. 통일외교통상위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은 김정일 위원장의 공항영접과 관련,당시 평양에서 김 대통령을 수행하던 박준영(朴晙瑩) 청와대대변인과 서울의양영식(梁榮植) 통일부차관의 상반된 발언을 집요하게 파고 들었다. 김 위원장의 공항영접을 정부가 미리 알았는지에 대해 박 대변인의 “몰랐다”는 말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양 차관이 한 “알고 있었다”는 답변 가운데 무엇이 맞느냐는 것이었다.박 장관은 이에 “정부는 몰랐다”고 대답했다.그러자 일부 의원들은 양 차관에게 직접 당시의 발언경위를 물었고,이에양 차관이 “평양상황실로부터 지침을 받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고답변하면서 논란이 빚어졌다. 한나라당의원들은 일제히 “장·차관 가운데 누구 말이 맞느냐”며 집중포화를 퍼부었다.김 의원은 “깜짝쇼를 하려 했던 것이냐,아니면 차관이 자기역할을 과시하려 했던 것이냐”고 추궁했다.유 의원은 “평양에서 온 지침서를 가져오라”며 정부를 다그쳤다.이들은 정부측의 명쾌한 해명 없이는 답변을 계속 들을 수 없다고 몰아붙였다. 양 차관은 “평양방문 하루전인 12일 평양의 우리측 상황실로부터 ‘김 위원장이 공항에 나올 수도 있다’는 연락을 받았으나 확실히는 몰랐다”며 수습을 시도했으나 야당의원들은 아랑곳 않고 파상공세를 이어갔다. 결국 회의는 3시간여 동안 정회하는 진통 끝에 22일 정부가 당시 평양상황실에서 서울로 통보한 지침서를 위원회에 제출하고 경위를 해명하는 쪽으로결론을 내리고 저녁 8시15분 산회했다. 진경호기자 jade@
  • 분단이후 남북문단 등단한 유일 작가 정창근씨

    “남북한 정상들이 손을 맞잡은 모습을 TV로 지켜보며 흐르는 눈물을 참을수 없었습니다.죽는 날까지 조국 통일에 도움이 되는 글을 쓰고 싶어요” 재독(在獨)동포였다가 지난 97년 국적을 회복해 현재 전북 정읍시 산외면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는 정창근(鄭昌根·70)씨는 분단 이후 남북한 양쪽 문단에 모두 등단한 국내 유일의 작가다. 그는 독일 국적을 갖고 있던 89년 겨울 현지 문인들의 초청으로 2주일간 북한을 방문,조선문인협회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문학’에 200자 원고지 160장 분량의 소설 ‘들쥐’를 발표했다.이 작품은 6·25이후 남한에서 사회개혁을 외치던 많은 지식인들이 변절해 제도권에 흡수되는 상황에서 개혁의 뜻을 굽히지 않은 한 젊은이의 좌절을 그리고 있다. 그가 남한에서 발표한 최신작은 95년 독일에서 발표한 ‘포스탐 인터체인지’란 작품을 수정 보완,지난 1월 ‘통일마당’에서 출간한 ‘브란덴부르크비가(悲歌)’다.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소설은 파독(派獨)광부인 주인공이‘남북’두개의 조국에 대해 느끼는 애증과 고뇌,동독 여인과의 사랑을 그리고 통일독일의 문제점을 예리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전북 전주출신인 그는 5·16이후 군정연장 반대추진위원으로 활동하는 등민주화운동을 벌이다 74년 간호사로 취업한 부인과 함께 독일로 건너갔다.그곳에서도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깊이 관여했으며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솟아난 노래’등의 중편과 대하소설 ‘남산위의 저 소나무’등을 발표하기도 했다. 정읍 조승진기자 redtrain@
  • [문화예술 분단장벽 허무나](1)문학

    올해는 6.25전쟁이 발발한지 50년이 되는 해.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 성사로어느 때보다 강한 화해 분위기가 감돌아 6.25를 맞는 감회가 유다르다. 분단극복을 포함한 민족문제의 해결은 이 시대를 사는 한국인의 최대 책무이며문화예술 부문은 믿음직한 선봉이 되고자 한다.남북화해의 세기에 맞는 첫 6.25를 기해 동족상잔의 치유와 회복,통일을 향한 장르별 문화예술의 성과와과제를 시리즈로 짚어본다. 상처는 대개 시간과 함께 아문다.그러나 세월이 상처의 본질까지 치유시켜주지는 않는다.상처를 근본적으로 낫게 하자면 세월의 망각에 마비되는 대신시간이 주는 거리감으로 기억을 보다 투명하게 닦아야 한다. 6·25이후 50년을 되돌아 볼 때 6·25를 다루거나 관련된 문학작품은 시간이 갈수록 드물어졌다.이같은 관심의 양적 축소는 작가들이 해야 할 일을 회피한 결과일 수도 있으나 주제가 본질·정예화한 데서 온 당연한 현상으로수긍될 수 있다.소설을 중심으로 한 6·25문학은 직접적 아픔에 압도된 50년대식 전중·전후 문학을 극복하면서 ‘이념’과 ‘분단’을 최대의 이슈로삼게 된다. 전중·전후문학은 “6·25로 인한 개인의 파탄과 가치관의 붕괴,풍속적 변모 혹은 전쟁의 극한 상황성,삶의 부조리 등을 묘사·절규한다”고 평론가김병익은 지적했다.김동리 박영준 황순원 염상섭 등 전쟁이전 활동 소설가들과 함께 전쟁을 체험하며 등단한 손창섭 오영수 김성한 서기원 이범선 박경리 선우휘 등의 전후세대 소설가들의 50년대 작품들은 6·25란 대폭발로 귀가 멀도록 멍멍해진 가운데 씌어진 것이다.목전의 미증유의 상황에 사로잡혀있어 역사적인 안목으로 차분히 응시하는 겨를 같은 것은 도저히 기대하기어려웠다.황순원의 ‘나무들 비탈에 서다’ 김동리의 ‘실존무’ 염상섭의‘취우’ 손창섭의 ‘비오는 날’ 박경리의 ‘불신시대’ 서기원의 ‘암사지도’ 등은 높은 문학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6·25를 객관적·전면적으로 보는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6·25전쟁의 직접성이 닳아지면서 이 동족상잔의 거대한 뿌리로서의 이념과 끝나지 않는 전쟁의 현재로서의 분단 문제가 서서히 전면에 나선다.이때 50년대 문학은 “6·25에 대한 적극적인 의미가 결여되며 따라서 분단에 대한현실적,미래지향적 의지를 정서적 비애로만 환치시킨다”(김병익)는 비판 앞에 놓인다.즉 역사의식의 미흡을 지적받고 있는데 장용학의 ‘요한시집’(1955) 등 몇몇 작품들은 비교적 역사의식을 지닌 작중인물을 통해 분단에 대한객관적인 시각을 확보하고자 한 것으로 평가받았다.그리고 상상력의 문을 넓혀준 4·19혁명과 함께 최인훈의 ‘광장’(1960)이 나왔다.‘6·25를 하나의의식화된 이념의 형태로 포착한’(김윤식) 이 소설은 6·25의 이념적 동인이되었던 양대 이데올로기의 본질과 그 현실적 양상을 ‘한꺼번에’비판하는 넓은 시야를 보여주었다. 문학이 힘을 쏟아야할 당대의 이슈들이 많아지고 반공 이념 일변도의 정치상황과 맞물려 6·25문학의 후신으로서 분단 현실을 투철하게 인식하려는 ‘분단 문학’은 활기를 잃었다.이 와중에서 이호철의 ‘판문점’(1961) 하근찬의 ‘야호’(1972) 윤흥길의 ‘장마’(1973) 김원일의 ‘노을’(1977) 등은 편협하게,분단고착적으로 굳어진 6·25,남북대치에 관한 일반 독자의 인식에 일침을 가했다.또 홍성원은 역사성은 뒤떨어지지만 6·25를 총체적으로조망하는 대하장편 ‘남과 북’을 내놓았고 불명료한 역사관점 속에서도 빨치산을 주인공으로 한 이병주의 실록장편 ‘지리산’이 각각 70년대 후반 완성됐다. 시간은 망각의 잡초를 무성하게 퍼뜨리지만 뜻있는 사람에겐 드디어 기억의꽃망울을 터트리도록 한다. 6·25 체험세대인 조정래는 ‘태백산맥’을 83년9월부터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89년9월 10권으로 완간된 이 소설은 빨치산화한 민중,백성들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조명하고 있다.40년 가까이 왜곡과 망각의 음지에 차폐된 역사에 기억과 평가의 햇빛을 쏘인 것이다.이 햇빛으로쑥쑥 자라난 것은 빨치산의 신화가 아니라 보다 객관적으로 조망된 6·25당시의 역사와 보다 미래지향적으로 투영된 분단의 현실이었다.이제 문학에서분단은 절대적으로 고착된 전제가 아니라 극복의 몸짓으로 다가갈 수 있는가변물인 것이다. 이후 미전향 장기수 문제를 다룬 김하기의 ‘완전한 만남’(1991)과 분단현실과 관련이 깊은 제주 4·3사태를 이야기하는 현기영의 ‘마지막 테우리’(1994) 등이 있지만 탈역사적 기류의 90년대에는 이렇다할 6·25,분단문학작품이 없었다. 전쟁체험 세대가 점진적으로 이룩한 분단극복의 방향성에다 남북 양쪽을 과거 어느 때보다 편견없이 바라볼 수 있는 시대상황을 잘 활용할 때 6·25 미체험의 신세대들도 분단문학의 순도를 한 눈금 더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김재영기자 kjykj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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