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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리다툼 비판’ 몸 낮춘 정동영·김근태

    “누구의 아집과 욕심이나 관용 때문이 아니고 3자 관계이다 보니까 생기는 문제 아니냐.” 정동영(얼굴 왼쪽) 전 의장과 김근태(얼굴 오른쪽) 전 원내대표 입각이 이달 말에서 6월 중순 이후로 늦춰지자 열린우리당의 한 당선자는 25일 그 배경을 이같이 분석했다.‘3자’는 청와대,정 전 의장,그리고 김 전 대표를 지칭하는 것이었다.개각 지연이 고건 총리 제청권 고사 등에 따른 것이지만 사실상 권력을 둘러싼 ‘수(手)싸움’ 때문이라는 진단이었다.대권주자들의 급부상에 따른 권력누수를 방지하고 균등한 기회보장을 위해 ‘정·김’을 입각시키려는 노무현 대통령과 정 전 의장 및 김 전 대표간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생긴 필연적 문제라는 지적이었다. 통일부장관 자리를 둘러싼 갈등이 개각 파행의 한 원인이 됐다는 일각의 비판 여론을 의식한 듯 ‘정·김’은 일단 자세를 낮추었다.하지만 정 전 의장은 외부와의 연락을 끊은 반면 김 전 대표는 기자들에게 ‘희망사항’을 우회적으로 표시하는 등 낮추는 정도는 달랐다. 김 전 대표는 이날 방송기자들과 점심을 함께 한 자리에서 입각과 관련,“청와대로부터 공식적으로 제안받은 적이 없는데 어떻게 거부라고 하겠느냐.”고 보건복지부장관 내정설과 거부설 모두 일축했다.그러나 “보건복지부 장관은 전문성을 요하는 자리인데 그런 준비가 안됐다는 이유로 거부하라는 얘기를 측근들이 한다.”며 간접적으로 거부 의사를 밝혔다. 정 전 의장은 아예 잠행에 들어갔다.한 측근은 “지난 22일부터 닷새간 일정으로 가족들과 함께 설악산에 가 현재 백담사에 있다.”면서 “물러난 사람을 왜 그렇게 괴롭히느냐.”며 개각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6·25때 실종된 김 전 대표 친형들 문제로 김 전 대표가 통일부장관에 맞지 않다는 얘기를 했다는 지적에는 “어불성설”이라는 등 개각 지연에 따른 불똥이 자신들에게 튀는 것을 경계했다. 두 사람은 서로간의 갈등이 노무현 대통령에게도 부담을 줄 정도로 ‘위험수위’에 오르자 조만간 화해의 자리를 마련하는 방안을 각각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주목된다. 박현갑기자 eagleduo@˝
  • [서울탱고] 김용만의 ‘남원의 애수’

    ‘춘향’은 가장 한국적인 여인으로 그려진다. 임자년 사월 초파일생(당시 16세) 꽃다운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앞세운 탐관오리 변학도의 수청을 거절하고 꿋꿋이 정절을 지킨 미인. 춘향전의 무대 전북 남원시는 지금도 ‘정절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도령과 춘향이가 처음 만났던 오작교가 있는 광한루 일원에서는 매년 세계적인 향토축제 ‘춘향제’가 열리고 있다. 춘향전과 관련된 영화,논문,그림,사진 등 각종 문헌과 작품들이 수없이 많지만 대중가요 또한 빼놓을 수 없다. 1953년 가수 김용만씨의 데뷔작인 ‘남원의 애수’는 1950∼60년대를 주름잡은 전국민의 애창가요다. 최근까지도 노래방에서 남원의 애수를 못 부르면 ‘뽕짝’의 원조를 모르는 사람으로 분류되고 있다. 한양천리 떠나간들 너를 어이 잊을소냐/성황당 고개마루 나귀마저 울고넘네/춘향아 울지마라 달래였건만/대장부 가슴속을 울리는 님이야/아∼∼ 어느 때 어느 날짜 함께 즐겨 웃어보나. 알쌍급제 과거보는 한양이라 주막집에/희미한 등잔불이 도포자락 적시였네/급제한 이도령은 즐겨왔건만/옥중에 춘향이가 그리는 님이여/아∼∼ 어느 때 어느 날짜 그대품에 안기려나.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의 김용만씨가 부른 이 노래는 6·25전쟁 이후 어려웠던 사회분위기와도 맞아떨어져 어린아이에서 어른까지 누구나 함께 부르는 대 히트곡이었다. 김부해 작사 김화영 작곡의 ‘남원의 애수’가 남녀노소 모든 계층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것은 누구나 한번쯤은 ‘이별’에 관한 아픔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음의 오르내림이 구성져 듣기 좋고 따라부르기 쉬운 특성을 가진 것도 이 노래가 대 유행한 주요인이다. 한번 들으면 쉽게 기억할 수 있는 이 노래의 클라이맥스는 ‘춘향아 울지마라’하며 눈을 질끈 감고 가슴을 쥐어짜내는 감정을 듬뿍 실어 마음껏 소리를 지르는 대목. 라디오조차 제대로 보급되지 못했던 시기여서 ‘전파사’나 ‘라디오방’ ‘레코드가게’ 등에서 이 노래를 틀어놓으면 길가던 사람들이 한동안 멈춰서서 흥에 취하기도 했다. 유난히 고급 요정이 많았던 남원에서는 ‘남원의 애수’를 불러야만 술맛이 나던 시절이 있었다. 남원 출신 전직 언론인 이금택(61)씨는 “젊은 시절 젓가락 장단에 맞춰 수없이 불렀던 노래가 바로 남원의 애수였다.”면서 “술이 한순배 돌아 취기가 오르면 기분이 좋을 때나 슬플 때나 이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부르곤 했었다.”고 그 시절을 떠올렸다.남원의 애수는 배호씨가 우수에 잠긴 목소리로 다시 불러 70∼80년대까지 그 유행은 맥이 끊이지 않았다.근래에도 주현미씨가 신바람나는 트로트 곡으로 리메이크해 신세대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다. 이도령과 성춘향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피어오른 남원은 2000년대 들어 새로운 관광도시의 면모를 갖춰가고 있다.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떨쳤던 요정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었지만 가족과 연인들이 즐겨 찾아가는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광한루원에는 보물 281호인 광한루를 비롯해 오작교,완월정,연지,월매집,춘향관,야생화 꽃밭 등이 아기자기하게 배치돼 있다.인근에는 토산품 판매점과 맛좋기로 유명한 음식점들도 즐비하다.광한루원 앞을 흐르는 요천은 달에 오를 수 있다는 승월교,음악분수,동편제거리,체육시설 등이 조성돼 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줄을 잇고 있다. 이도령과 춘향의 사랑처럼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백년해로하고 싶어하는 연인들과 신혼부부들도 이곳을 많이 찾는다.요천변에는 4월에는 벚꽃,5월부터는 장미꽃이 가득 피어나 ‘사랑을 꽃피우는 명소’로 유명하다. 남원관광단지에는 국립민속국악원,춘향문화예술회관,춘향테마파크 등이 들어서 있다. 올해부터는 국립공원 지리산과 연계한 세계허브축제가 열려 ‘춘향의 향기’를 상품화시켰다. 고층아파트가 즐비하게 들어선 남원시는 비록 고색창연한 옛맛을 다소 잃기는 했지만 아직도 ‘남원의 애수’를 만끽할 수 있는 도시다.원형이 잘 보존된 광한루와 지리산 등 주변 관광지를 둘러보고 이도령과 춘향의 이별을 떠올리며 ‘애수’에 젖어보는 것도 기억에 남는 봄나들이가 되지 않을까. 남원 임송학기자 shlim@˝
  • [문화마당] 골방의 기록/ 백지연 문학평론가

    청춘의 고독과 방황을 섬세하게 그려낸 여러 소설들 중에서도 김승옥의 작품들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우리 소설사에서 김승옥만큼 화려하고 짧게 당대의 소설계를 빛낸 작가도 드물 것이다.그의 소설은 6·25전쟁 후 황막한 폐허 속에서 움트기 시작한 예술적 자의식을 새로운 형태로 보여주었다.한 예로 그의 ‘무진기행’의 마지막 구절은 지금 읽어도 그 청신한 감수성에 가슴이 설렌다. “한 번만,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안개를,외롭게 미쳐가는 것을,유행가를,술집 여자의 자살을,배반을,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꼭 한 번만.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라는 주인공의 고백 속에서 자신의 방황에 대한 위로와 확인을 얻은 문학 청년이 한 두 명이 아니었으리라.청춘이 증명하는 자기결벽과 우울증을 이처럼 아름답고 명징하게 그려낸 소설가도 없다. 얼마 전 출간된 김승옥의 산문집 ‘내가 만난 하나님’(작가)을 읽으면서 새삼스러운 감회에 사로잡힌 것도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작가의 투병과정 중에 출간된 이 책은 한 시대의 빛나는 기록들을 담고 있는 솔직한 자기고백서라는 점에서 특별한 느낌을 준다.물론 제목이 상징하듯이 산문집의 절반 이상을 채우고 있는 것은 작가의 절실한 신앙간증이다. 신선한 감수성으로 한국소설사를 장식했던 명민한 재능의 소유자가 어느 순간 소설쓰기를 중지하고 종교에 귀의하게 된 일은 여러 사람을 놀라게 했다.소설을 쓰다가 영화각본을 쓰고 영화감독으로 데뷔도 하였다가 잡지사에서 근무하는 등 여러 행로를 거친 김승옥은 한동안 소설을 쓰지 못했다.유신시대와 민주화운동이라는 사회적 격류 속에서 충격과 분노 때문에 글을 쓰지 못했다는 그의 기록은 가슴 저릿하게 다가온다.그의 문학적 결벽증과 섬세한 감수성을 생각한다면 그를 찾아온 ‘종교적 계시’가 갑작스러운 것만은 아닐 것이다.그 어느날 갑자기 ‘하얀 손’이 나타나 “인도에 가서 전도하라”(‘내가 만난 하나님’)는 명언을 내렸다는 그의 간증은 단순한 신앙고백만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실제로 이 책에서 흥미롭게 다가온 것은 종교 이야기보다도 유년기와 대학시절에 관한 회고담이었다.‘옛날,하나님을 만나기 전’으로 표기되어 있는 과거사들은 작가 김승옥을 이해하는 또 다른 코드를 제공한다. 특히 ‘나의 첫 창작’은 김승옥 자신이 처음 ‘꾸며낸 이야기’에 대한 흥미로운 자료로 읽힌다.어린 김승옥에게 외사촌형과 그의 친구들이 속삭이던 여자친구 이야기와 음담패설은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높은 탑에서 서로 껴안고 있는 남녀가 있는 이상한 서울’에 대한 소년의 환상은 이후의 김승옥 소설에서도 자주 되풀이되는 문학적 모티프가 된다. 도시에 대한 동경과 좌절을 젊은이의 예민한 감수성으로 포착한 김승옥의 소설은 우리에게 남아있는 빛나는 소설의 기억이다.정든 누이와 어머니가 있는 서늘한 해풍을 등지고 찾아온 서울은 젊은이에게 안식을 주지 못한다.그에게 “우뚝우뚝 솟은 빌딩들이 몸뚱이의 한편으로는 저녁 햇빛을 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짙은 푸른색의 그림자를 길게길게 눕”(‘力士’)히는 도시의 고독한 풍경은 문학의 골방으로 파고들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김승옥의 글을 읽으면서 그 연약하고 섬세한 청춘의 감수성이 가슴 한 구석에 만든 생채기를 오래도록 들여다보게 되는 것은 괴롭고도 행복한 일이다. 백지연 문학평론가˝
  • 부산고법“거창학살 국가에 책임 없다”

    6·25전쟁 당시 발생한 거창양민학살에 대해 국가는 유족에 대한 직접피해는 물론 정신적 피해에 대해서도 배상금을 지급할 의무가 없다는 판결이 나왔다. 부산고법 제5민사부(부장 윤인태)는 18일 문모(80)씨 등 거창양민 학살사건 희생자 및 유족 등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원심을 깨고 원고패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거창사건은 1951년 2월 발생했고 학살책임자에 대한 판결도 같은 해 12월 선고된 만큼 판결 선고일로부터 3년,사건 발생일로부터 5년을 경과해 손해배상 소멸시효가 지났다.”고 밝혔다.재판부는 또 국가가 거창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및 희생자 배상 등에 소홀히 하는 등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는 유족들의 주장에 대해 “국가나 공무원의 부작위에 대해서는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특히 “현행법 체계에서는 거창사건에 대한 국가배상이 불가능한 만큼 국회의 특별입법에 의해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거창사건 유족 등 324명은 2001년 창원지법 진주지원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해 1심에서 국가는 유족 등에게 40만원씩을 지급하라는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받았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
  • 쌀 재배면적 30년만에 최소

    올해 벼 재배면적이 정부 조사 이후 가장 낮을 것으로 예상된다.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은 전국의 표본 논 농가 3200곳을 상대로 올해 벼 재배 의향 면적을 조사한 결과,재배면적은 98만 7000㏊로 지난해(100만 2000㏊)보다 1.5% 감소할 것으로 추정됐다고 13일 밝혔다. 이같은 올 벼 재배면적은 현행 방식의 조사가 시작된 1974년(120만 4000㏊) 이후 최소 면적이다.또한 시·군 단위의 검증되지 않은 보고를 토대로 집계한 통계를 따져봐도,6·25전쟁 직후인 52년(81만 4000㏊) 이후 가장 규모가 작다.지금까지 최대 규모는 87년으로 126만 2000㏊에 달했다가 96년 104만 9000㏊까지 줄었다. 2000년 107만 2000㏊,2001년 108만 3000㏊로 다시 증가하다 2002년(105만 3000㏊)부터 줄기 시작했다. 김경운기자 kkwoon@˝
  • 대한재활의학회 명예회장 신정순 박사

    “성실,오직 그것 하나지.” 뜻밖의 대답이었다.‘한국재활의학의 대부’ 신정순(申廷淳·77) 박사,그에게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는 적어도 이런 답변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한평생을 바치면서 한국재활의학의 기초를 닦은 일,크고 작은 사회단체 회장·이사 등을 역임하며 봉사해온 일로 미뤄볼 때 ‘예상답안’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재차 ‘되도록 업적이나 공헌 위주로 말해달라.’고 질문했다.한참을 망설여 나오는 답이라곤 똑같다.“글쎄,난 잘 모르겠는걸.내 인생에서 내가 가장 자랑스럽고 자신있는 것은 이것 하나야.내 좌우명,‘성실’이라는 두 글자를 어떠한 경우에도 배신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걸 빼면 내 인생에 어떤 자랑거리가 또 있을까?” 기자의 ‘우문’에 명료한 ‘현답’을 들은 기분이다.만점짜리 오답이랄까. ●“성실이라는 두 글자 평생 배신 안 해” 대한재활의학회 명예회장을 맡고 있는 신 박사는 1957년 세브란스 병원에서 정형외과 수련과정을 시작한 이래 40여년을 재활의학의 기초를 닦는 일에 바쳤다.세브란스 병원장 등을 지내며 의사 본연의 활동 외에도 대한재활의학회,한국장애인재활협회,한국재활재단,뇌성마비복지회 등 재활의학 관련 단체들의 창립과 운영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왔다. 92년 연세대 재활의학과 교수를 정년퇴임한 후에도 한국뇌성마비복지회장,국제키비탄 한국본부 총재,한국재활재단 이사 등을 맡으며 적극적인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런 그이지만 거듭 “날 너무 대단한 인물처럼 쓰지는 말라.”고 부탁해 온다.“소문이 안 나서 그렇지 나보다 더 훌륭하신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난 그저 스승님들이 가르쳐주신 ‘의료는 곧 봉사’라는 말씀을 조금이나마 실천해 보려고 했을 뿐이야.” 신 박사는 51년부터 6년간의 군의관 생활을 통해 재활의학에 한평생을 바칠 것을 결심했다.“전장에 나가 수족을 잃은 군인들,민간인들,식량부족으로 제대로 먹지 못해 소아마비에 걸린 장애아동들….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어.53년 당시 주한미1군단 등이 모금해서 세브란스 병원 구내에 만들어준 ‘절단자 재활시설’이 있었는데,거기 가 보면 말도 못해.” 신 박사는 스승의 권유로 67년 홍콩으로 건너가 홍콩대학 부속병원인 퀸메리 병원,아동병원,재활센터 등을 돌며 선진 재활의학을 배웠다.“당시 우리나라에는 말로도 알려지지 않았던 첨단기술과 장비들을 마음껏 경험하고 배울 수 있었지.그때 참 자극 많이 받았어.” 68년 귀국한 신 박사는 박재주(사회사업가) 선생 등과 함께 신체장애자협회(현 장애인재활협회)를 세운다.“그때 정부나 학계,사회단체 어디 할 것 없이 장애인들에게 정말 무심했어.그런 반성에서 만들었지.지금은 그래도 훨씬 좋아진 거야.” ●6·25 참상 겪고 재활의학계 투신 신 박사는 “장애는 개인의 불행이 아닌 사회 전체의 불행이다.”라는 스승 주정빈 박사의 말씀을 항상 가슴에 품고 산다.“장애인 재활 문제는 단순한 의학만의 문제가 아니야.사회 전체가 관심을 가지고 책임져야 할 문제이지.특수교육,이동할 수 있는 권리 확보,노동권 보장….제대로 하려면 결국 사회 전 분야가 연관되지.그게 또 여러 사회단체 활동을 한 이유이기도 하고….” 신 박사는 71년 12월에는 문병기,정인회,신필수 박사 등과 함께 재활의학회를 창립했고 72년 4월에는 제2대 특수교육학회장으로 선출된다.75년부터는 국제사회봉사단체 ‘키비탄클럽’에 참가(아시아담당 총이사)해 장애아동들을 돕는다.“사실 한 것도 없는데 소리만 괜히 요란하지.” 잠시 웃던 신 박사는 “역시 가장 큰 보람은 치료했던 장애아동들이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된 것을 보았을 때 느낀다.”고 회상했다. “기억에 남는 환자는 역시 김인호라는 친구지.7살 때 연세재활원에 입원했는데 뇌성마비가 심해 팔다리도 쓰지 못하고 말도 제대로 못했어.그런데 이마와 혀로 교과서를 넘기면서 공부하고,입에 문 막대기로 전동타자기를 두드리며 필기하더니 고등학교 때부터 미국 유학 가서 성적우수 금메달도 여러번 탔지.나중에는 워싱턴 가톨릭대학교에서 우주물리학 박사 학위까지 땄어.91년인가 고맙다고 찾아왔는데 얼마나 기쁘던지….” ●“봉사는 복지사회의 소중한 자원” 그러던 신 박사는 “인호가 미국에서는 자원봉사자들이 휠체어 밀어주더라고 자랑할 때는 가슴이 아팠다.”고 말했다.“지금이야 많이 좋아졌지만 예전에는 우리나라가 그런 쪽에는 좀 열악했거든.관공서에도 경사로가 제대로 없는 사회에서 장애인들이 누군가의 도움없이 ‘평범’하게 살기란 거의 불가능했지.” “인호가 미국에 안 갔더라면 어떻게 됐을까.”라며 한국의 상황을 떠올리며 씁쓸해하던 신 박사는 “봉사는 복지사회의 윤활유”라고 강조했다.“꼭 장애인에 대한 봉사만 국한시켜서 말하는 게 아냐.선량한 시민정신에 의한 봉사는 복지사회의 소중한 자원이지.우리나라에서 상당히 부족한 희귀자원처럼 보이기도 하고.” 내리사랑일까.신 박사는 젊은 의료계 후배들에게 따끔한 한마디 당부를 잊지 않았다.“요즘 많이 힘든 것도 알고,국민들에게 오해받으면 괴로운 것도 알지….그렇지만 우리들 탓은 없을까.요즘 젊은 친구들이 흉부외과 등 ‘힘드는 과’는 기피하고 이른바 ‘손쉬운 과’를 선호한다고 들었어.이건 의술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 다같이 생각해야 할 문제라고 봐.난 선생님들로부터 ‘의료는 봉사’라고 배웠어.그리고 적당주의를 싫어하는 성격 탓에 최선을 다해 봉사했지.그게 내 평생의 자랑거리야.개인적으로는 봉사정신 없으면 제대로 된 의사 아니라고 봐.내가 너무 구닥다리인가?(웃음)” ■그가 걸어온 길 ▲1927년 서울 출생 ▲51년 세브란스의과대학(연세대 의대) 졸업 ▲57년 육군 군의관 복무 후 예편 ▲63∼66년 삼육아동재활원 의료부장 ▲67∼68년 홍콩대 의대 연구생활 ▲72년∼현재 대한재활의학회 이사 ▲72∼82년 한국특수교육학회장 ▲72∼92년 연세의료원 재활원장 ▲78년∼현재 서태평양 뇌성마비학회 이사 ▲80년∼현재 한국장애인재활협회 이사,한국뇌성마비복지회 이사,부회장 ▲82∼84년 대한재활의학회장 ▲87∼91년 세브란스병원장 ▲89∼91년 국제키비탄 한국본부 총재 ▲92년∼현재 한국재활재단 이사 ▲2001∼현재 한국뇌성마비복지회장 ▲2002∼현재 대한재활의학회 명예회장 글 채수범기자 lokavid@seoul.co.kr 사진 이종원기자 jongwon@ ˝
  • 별세 구상시인 詩세계·일생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오늘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시 ‘오늘’ 중) 11일 작고한 구상 시인의 삶은 ‘구도자적 자세’와 ‘영원한 현역 시인’으로 압축할 수 있다.산소호흡기를 쓰고 투병하던 지난해 격월간 문예지 ‘한국문인’ 10,11월호에 유언과 함께 남긴 위의 유언시는 이런 고인의 삶을 잘 보여준다. 구상 시인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두고 ‘마치 흐르는 물같은 삶을 산 사람’이라고 한다.그렇듯 그의 삶은 문학과 신앙이라는 두 축으로 지탱되는 구도(求道)의 그것이었다. 노년 들어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버린 짤막한 턱수염,얼마간 창백해 보이는 길다란 얼굴에 그럴 듯하게 구레나룻까지 이루며 자란 이 수염은 항상 그의 무명 한복과 어울려 이 땅의 수많은 독자와 문인들에게 ‘따뜻하고 순결한 시인’이라는 지워지지 않는 표상으로 각인돼 있다.문인이기 전에 그는 암울한 식민지의 신문기자였다. 스물 네살 나던 1943년에 함흥에 있는 ‘북선매일신문’ 기자로 세상과 맞닥뜨렸던 젊은 구상은 이후 두 차례의 필화사건과 6·25,감옥생활과 질병 등 온갖 신산을 겪으며 오로지 문학에의 열정과 종교(가톨릭·세례명 요한)적 신념으로 시대를 앞서 이끌었다. 그가 겪은 첫번째 필화사건은 1946년에 일어났다.원산문학가동맹의 주축멤버였던 그는 해방 1주년을 기념해 발표한 동인시집 ‘응향(凝香)’에 발표한 ‘여명도’‘길’‘밤’등의 시가 퇴폐적이고 악마적이라며 반동으로 몰리자 이듬해 2월 서울로 월남해 이산의 삶을 시작했다.이때 남한에서는 남로당 기관지였던 ‘문학’이 이 시집을 대대적으로 소개했고,민족진영에서는 김동리씨 등이 나서 이에 반박하는 등 한차례 격랑이 일기도 했으며,이 와중에 그는 별도의 입상이나 추천 절차없이 문단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이후 본격적인 민권운동에 나선 그의 길은 평탄치 않았다.전쟁 후 영남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있던 그는 칼럼 ‘고현잡화(考現雜話)’와 시사평론집 ‘민주고발’ 등으로 사사건건 당시 자유당 정권과 부딪쳐 이적죄로 15년형을 선고받는 두번째 필화를 겪었다.그런가 하면 그는 평생 갖가지 병력(病歷)을 체험하며 형극의 길을 걸어온 시인이기도 했다.폐결핵으로 두번이나 수술을 했는가 하면 두번의 큰 교통사고와 당뇨병,만성 천식과 전립선 비대증,망막염과 백내장 등 수많은 병마와 싸워야 했다. 이런 역경 속에서도 고인의 지사적 풍모는 돋보였다.4·19 이전에 대표적 민권운동가였던 엄상섭,전진한씨 등과 함께 시국강연회를 갖는 등 치열하게 민권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그의 고고함은 5·16쿠데타 직후 박정희 장군의 상임고문역 추대를 거절한 것이나,전두환 정권의 부당한 학·예술원법 개정에 맞서 홀로 입법기구 회원직을 사퇴한 사실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권력에 초연함을 유지했던 고인의 인품은 현세의 이해관계에 초월해 예술세계를 지키며 외롭게 살다간 예술가들에 대한 애정으로 나타나 소장품을 내놓고 모금운동을 벌여 서울신문이 주관하는 ‘공초(空超) 오상순 문학상’의 토대를 세우기도 했다. 시인 구상은 그의 삶이 험난할수록 더욱 강고하게 종교에 집착하는 면도 보여 주었다.이런 영향으로 그의 시에는 대부분 동양적 관조와 기독교적 영원성이 깊게 배어 있다.연작시 ‘그리스도 폴의 강’은 이런 그의 정서를 대변하는 작품이다. 한편 서울 강남 성모병원 빈소에는 김수환 추기경,서영훈 전 적십자사 총재,박삼중 스님,이한택 주교를 비롯해 문덕수,박연희,김남조,김광림,구중서,성찬경,김종길,김종해,신세훈,신달자,김이연,류자효씨 등 많은 종교인과 문인들이 찾았다.노무현 대통령은 조화를 보내 조의를 표했다. 김 추기경은 “고인은 좁은 의미의 가톨릭이 아니라 종파를 넘어서 온세계를 아우르는 의미로서의 가톨릭 시인이었다.모든 것을 향해 열려 있었고,항상 마음을 비우는 진실의 사람이었다.”고 추모했다. 구중서씨는 “고인은 전쟁 중에는 인민군의 묘지를 만들어 준 뒤 ‘적군 묘지 앞에서’라는 시를 썼고,베트남 전쟁 때 미군이 승승장구할 때는 ‘인류가 아직 깜깜하다.’며 인간의 도덕적 양심을 묻는 시 ‘베트남 기행’을 썼다.”면서 “이데올로기나 정파,권력에 가담하지 않고 인간 본성과 양심을 쉬우면서도 뜻이 깊은 시로 표현했다.”고 말했다. 이종수기자 vielee@seoul.co.kr ‘초토(焦土)의 시(詩)’ 8 - 적군 묘지 앞에서 오호,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구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 바른 두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도 사랑보다도 더욱 신비스러운 것이로다. 이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땅은 30리면 가로막히고 무주공산(無主空山)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람 속에 깃들어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으로 흘러가고 어디서 울려오는 포성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놓아 버린다. ■ 구상시인 연보 ▲1919년 서울 이화동 출생.본명 구상준(具常浚) ▲1941년 일본대학 전문부 종교과 졸업 ▲1946년 원산에서 시 ‘여명도’등으로 필화,월남 ▲1948∼1950 연합신문 근무 ▲1952∼1956 효성여대 교수 ▲1961∼1965 경향신문 논설위원겸 동경지국장 ▲1976∼1999 중앙대 대우교수 ▲주요 저서 시집 :‘구상(具常)’,‘초토(焦土)의 시’,‘까마귀’,‘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개똥밭’,‘다시 한번 기회를 주신다면’,‘오늘속의 영원,영원속의 오늘’,‘인류의 맹점에서’,‘홀로와 더불어’ 등. 수상집 :‘침언부어(沈言浮語)’‘영원속의 오늘’‘실존적 확신을 위하여’‘시와 삶의 노트’ 사회평론집 :‘민주고발(民主告發)’,수필집 ‘우주인과 하모니카’ ‘현대 시창작입문’ 등. ˝
  • 40년 ‘무등산 지킴이’ 박선홍씨

    무등산은 광주의 상징이다.도심 근처에 해발 1187m 높이로 솟아 웅대함이 돋보인다.그러면서 정상 가까이에 발달한 원기둥 모양의 절리(節理)의 절경이 어머니 품처럼 포근함을 느끼게 한다.광주 사람들에게 무등산은 이 고장의 역사이자 기념비다.백제 땐 무진악(武珍岳),고려 때 서석산(瑞石山)이라고 불렸다.북쪽은 나주평야,남쪽은 남령산지의 경계에 있다.버스 토큰 하나로 산자락에 내려 등산을 즐기고 지인들과 만나 담소하는 휴식처다.그래서 주말 휴일이면 시민들로 북적이는 살아 있는 산이다. ●민둥산을 울창한 숲으로 바꾼 광주토박이 이런 무등산도 6·25전란을 거치면서 황폐화의 위기를 거쳤다.나무를 땔감으로 쓰던 70년대 이전까지 벌거숭이 민둥산이었다.멧돼지와 고라니가 뛰놀고 산새가 지저귀는 울창한 숲으로 바뀐 지는 최근이다.153과 897종의 식물이 분포한다.이 가운데 465종은 약료작물로 알려져 있다. 오늘의 무등산이 제 모습을 찾게 된 뒤안에는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의 땀과 노력이 베어 있다.그럼에도 한 사람을 꼽으라면 많은 사람들은 주저없어 박선홍(79)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 공동의장을 추천한다.그는 ‘무등산 지킴이’‘무등산 박사’‘광주토박이’등으로 통한다.무등산과 함께 해온 광주의 산증인이기도 하다.“모든 시민의 사랑으로 무등산의 자연생태계가 복원됐습니다.지금은 야생동물이 인근 농작물에 피해를 줄 정도이니 ‘상전벽해’가 아니겠습니까.”.박의장은 모든 공을 시민에게 돌린다. 그가 무등산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청소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충장로 5가에서 태어난 그는 1940년대 초까지 천연 원시림의 모습을 보고 자랐다.그러나 일제의 세계2차 대전 도발과 전쟁물자 고갈에 따른 연료난으로 산림 남벌이 시작되면서 옛 모습을 잃어갔다.해방후 광주시청 공무원으로 잠시 재직하다가 1952년 광주상공회의소로 자리를 옮겼다.그는 같은해 보이스카우트 ‘무등소년대’ 대장으로 무등산과 본격적인 인연을 맺는다. ●산악회 창설·책발간 등 무등산 보호 앞장 이어 55년 이 지역 최초의 산악회인 ‘전남산악회’를 조직하고,69년엔 ‘전남 산악연맹’ 창설을 주도했다.“개구쟁이 시절 노닐던 산자락이 무차별 벌채로 망가져가는 것을 그대로 볼 수만 없었다.”는 그는 산악인을 중심으로 무등산 보호에 나서기로 맘 먹는다.매일 산을 누비벼 자생 동·식물을 관찰하고 사찰,문화재 등을 조사했다.관련 자료가 될 것 같으면 무엇이든 주워 모았다.유래나 전설을 담은 자연물에 대해서는 나이 지긋한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물었다.무등산에 대해 무언가 알아야 ‘보호’라는 명분을 내걸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당시만해도 ‘무등산 보호’를 시민운동으로 이끌어낼 만한 토대가 마련되지 않았다. 그는 이를 토대로 1976년 ‘무등산’이란 507쪽짜리 책을 펴냈다.무등산의 유래와 전설·경관 등을 망라했다.“풀 한 포기 돌 한조각에도 생명이 있음을 느겼다.”는 박씨는 “내 삶을 부려 놓을 때까지 살아 움직이는 무등산에 대한 기록을 멈출 수 없다.”고 말한다.현재 6번째 개정 증보판을 내 놓았다.소설가 송기숙(전남대 명예교수)씨는 “폐허가 된 절터를 찾아 하나 하나 유래와 전설을 밝히고 유려한 필치로 구수하게 이야기를 펼쳐간다.”며 “이 책은 그의 해박한 지식과 철저한 고증이 담긴 향토문화의 큰 수확”이라고 평가했다.무등산이 70년대 산업화 이후엔 벌채가 아닌 개발로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등산객이 아무데서나 밥을 짓고 쓰레기를 마구 버렸다.산중에서 고성방가와 술주정까지 벌어졌다.그는 자연보호운동을 시작할 때라고 판단했다.1989년 지역 산악단체와 YMCA,흥사단 등 12개 단체가 참여,‘무등산 보호 결의대회’와 ‘오물수거 캠페인’이 열렸다.그는 이를 계기로 같은해 봄 ‘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를 창설했다.거창한 구호 보다는 ▲쓰레기 버리지 말기 ▲취사 삼가기 ▲세제류 안쓰기 등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지금은 800여개 단체가 가맹한 대표적 시민단체로 성장했다.협의회는 최근 모 업체가 무등산 자락에 추진중인 ‘온천개발’을 백지화하도록 유도했다.시민들의 호응도 급속히 확산됐다. 그는 2001년 ‘무등산 공유화 재단’을 설립하고 영국 등 주요 선진국들이 펼치고 있는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에 뛰어들었다.무분별한 개발을 막기 위해 무등산의 사유지를 사들여 영구 보존하는 운동이다.시민과 지역 기업들의 협조로 지금까지 무등산 자락 사유지 7만 5000여평을 사들였다. ●내셔널트러스트 운동 등 공감대 확산 노력 그는 또 지방으로서는 처음으로 지난 86년 ‘민학회’를 창설했다.고향의 발자취를 더듬고 자기 정체성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다.19세기말 개화기 이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광주의 향토자료와 역사를 집대성한 ‘광주 1백년’이란 3권짜리 책도 펴냈다.“좋은 자연환경 속에서 정신이 건강한 후세들이 태어날 것이라 믿습니다.무등산 보호도 결국은 삶의 터전을 풍요롭게 가꾸자는 실천운동이지요.”단 한 번도 고향을 떠나보지 않았고,이 곳에서 숨쉬고 부대끼며 80평생을 살아온 그의 얼굴에는 고향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짙게 배어 있었다. 글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그가 걸어온길 ▲ 1952년 광주상공회의소 사무국장,보이스카우트 ‘무등소년대’대장 ▲ 55년 이 지역 최초 산악회인 ‘전남산악회’ 조직 ▲ 69년 전남산악연맹 창설 ▲ 89년 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 창설 ▲ 94년 조선대 이사장 ▲ 99년 광주전남 사회복지 공동모금회 창설,초대회장 ▲ 2000년 제1회 대한민국 산악대상 산악환경상 수상 ▲ 2001년 무등산 공유화 재단 설립 ˝
  • ‘광해군, 탁월한‘ 저자 한명기 교수

    “이라크 파병 논란은 380여년 전 명나라에 의해 촉발된 조선조 광해군 때의 파병논란과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역사적 교훈 차원에서 반추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파병 논란의 묘수가 ‘380년 전의 메시지’에서 풀어질 수 있을까.평전 ‘광해군,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의 저자 한명기(43·명지대 사학과) 교수. 그는 최근의 이라크 추가파병 논란과 관련,찬반을 떠나 이 시점에서 광해군의 ‘외교술’을 한번쯤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우선 6·25전쟁을 도운 ‘미국’과 임진왜란때 조선에 원군을 보낸 ‘명’이라는 ‘슈퍼파워’가 파병요청을 해왔다는 현실과 역사적 상황이 그렇다. 또 파병에 앞서 파병지에 대한 정보수집의 노력과 파병후 여러 돌출변수의 수습과정 등도 흥미롭게 비교될 수 있다고 한 교수는 설명한다. “명나라는 후금의 기세에 눌려 위기에 처하게 되자 조선에 임진왜란때 원군을 보낸 은혜를 갚으라며 파병요청을 끈질기게 해왔지요.그러나 광해군은 ‘사나운 후금과 노회한 명의 싸움에 끼어들면 망할 수밖에 없다.’며 명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그러면서 광해군은 명을 설득시키려 애를 쓰고 다른 한편으로는 후금을 다독거리는 양면적 외교정책을 구사했다.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정에는 ‘임진왜란때 구원해준 명의 요청을 거절해서는 안된다.’는 찬성론이 거셌다.게다가 명 역시 계속 거부할 경우 조선을 먼저 치겠다는 협박까지 했다. 한 교수는 “광해군은 마지못해 강홍립 장군에게 1만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출전토록 명령을 내리면서 압록강 국경에서 대기토록 하는 치밀함을 보였다.”면서 “그러나 나중에 작전권과 지휘권이 명에 넘겨지면서 강홍립은 후금과의 전투에서 참패당해 결국 투항하고 말았다.”고 상기시켰다. 그는 또 “광해군은 이후에도 계속된 명의 추가파병의 요구를 일축하면서 사신과 첩자를 동시에 보내 명과 후금의 동향을 살피고 정보를 수집하고자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한 교수에 따르면 당시 광해군은 ▲명의 주력군이 너무 멀리 떨어진 사천성에서 동원된다는 정보를 알고 명의 패배를 예견했으며 ▲조선군 파병요청시 후금과의 전투에서 10만명을 출전시키겠다는 당초 약속과는 달리 7만명밖에 동원시키지 않는 등 국익차원의 외교를 펼쳤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우리보다 파병 결정에 훨씬 자유로운 일본은 파병에 앞서 민·관조사단이 이라크 현지에 12차례나 파견돼 치밀한 사전조사를 실시했다.”면서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고작 두 차례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한국군이 이라크 현지에서 저항세력의 공격을 받아 사상자가 발생하고 테러 위협이 생길 경우 국내 정치상황에도 큰 파장을 몰고올 수밖에 없습니다.” 김문기자 km@seoul.co.kr˝
  • 평택미군기지 소음피해 주민 5억대 손배소 제기

    경기도 평택 미공군기지와 캠프 험프리스 미군기지 인근 주민 530명은 3일 “미군기지의 심한 소음으로 정신적·신체적 고통을 겪어왔다.”며 1인당 100만원씩 모두 5억 30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서울중앙지법에 냈다. 원고들은 소장에서 “6·25전쟁 이후 주한미군이 평택지역을 공군기지로 사용하면서 주민들은 난청과 이명 등 신체적 피해,농사방해와 주택균열 등 재산피해를 보았다.””고 주장했다. 이번 소송에는 오산기지 주변의 서탄면 황구지리·금각2리·회화리 등 주민 368명과 캠프 험프리스 인근 팽성읍 송화리 주민 162명 등이 원고로 참여했으며 앞으로 개인별 피해 정도를 측정해 청구액을 늘릴 계획이다. 정은주기자 ejung@˝
  • [박완서의 살아가는 이야기] 기분 좋은 날

    지난주 양구에 있는 박수근 미술관을 다녀왔다.준공할 무렵 처음 가보았고 연전에는 우연히 그 근처를 지나다가 아주 잘 돼 있는 표지판 때문에 잠시 들러본 적이 있다.이번이 세 번째이기 때문에 표지판이 나타나자 일행에게 내가 뭘 좀 아는 것처럼 굴고 싶었나보다.차가 진입로로 들어서기도 전에 저어기 보이는 저 건물이 바로 미술관이라고 손가락질을 해도 아무도 알아보는 것 같지 않았다.그렇게 되니까 나도 여기던가,저기던가 긴가민가해지고 말았다.그 정도로 그 미술관은 기념관이나 미술관 건물쯤 되면 규모나 외관이 어느 정도 높다랗고 번들대야 된다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고 마치 들판의 일부처럼,평범한 농가의 돌담처럼 눈에 안 띄게 다소곳이 엎드려 있다. 그러나 가만히 눈여겨보면 보통 안목으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는 걸 알 수가 있다.그 곳 자연뿐 아니라 박수근이라는 화가의 인품이나 작품세계와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속기(俗氣)도,자기 과시의 욕망도 찾아지지 않는다.들어가는 길도 마치 대문 열어놓고 사는 인심 좋은 집처럼 마음 놓고 빨려들게 된다.그러나 들어가 보면 이게 웬 떡이냐 싶게 눈이 휘둥그레진다.실상 그 전까지는 정말이지 잘 지었다싶은 건물에 비해서는 소장품의 양이 빈약했었다. 박수근의 정물화 ‘굴비’를 비롯해서 갤러리 현대의 박명자 관장이 기증한,박수근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화가들의 작품 52점은 하나같이 보석처럼 빛나는 작품인지라 그걸 여태까지 소장한 그의 안목도 안목이지만 세상에,저 좋은 걸 아까워서 어떻게 내놓았을까,한 개인의 용기 있는 결단이 던진 충격은 우리나라도 앞으로 예술을 향유하는 태도에 획기적인 변화가 올지도 모른다는 은근한 기대감까지 품게 한다.‘굴비’는 도록 같은 데서 여러 번 접한 작품인데도 실물을 보니까 어머,저건 알배기 영광굴비 아냐?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만큼 사실적이었다.전시된 작품은 다 소품이었고 태반이 살기 힘든,더군다나 그림으로 먹고 살기는 더 힘든 시대의 작품이건만 훗날 그 대가들이 그린 대작 못지않게 아름답고 밀도 높아 그 시대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마저 불러일으켰다. 미술관을 나오면 박수근의 동상이 미술관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동상을 정면으로 볼 때는 너무 젊고 너무 잘 생긴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나중에 미술관과 그의 모습을 멀리서 옆으로 잡은 사진을 보니 마치 오랜 방랑 끝에 고향에 돌아온 나그네가 언덕에 앉아 감개무량한 듯,또는 지친 듯 우두커니 고향집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그는 마침내 고향에 돌아온 것이다.이번 전시회가 열리기 며칠 전 그의 유해는 타향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미술관을 바라보는 언덕 위에 안장됐다.유족과 친지들,미술관 관계자들이 오랫동안 벼르던 걸 윤달 든 해를 기해 단행한 듯했다.이번 전시회는 마침내 묻힐 자리에 묻히게 된 그의 이장을 기념하는 뜻도 있었을 것 같다. 이렇게 모든 것이 갖춰지기 전 평일 날에도 하루 평균 2백명 가까운 관람객이 이 미술관을 찾는다고 유홍준 명예관장은 자랑스러워했다.산골 중의 산골,교통도 불편하고 볼거리도 없는 오지 중의 오지에 그만한 방문객을 끌어모을 수 있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었다. 관장은 그 공을 양구군수에게 돌렸다.군수는 건축에 관한 모든 일을 전문가에게 일임하고 예산을 집행하는 것 외엔 어떤 간섭도 안 했다는 것이다.개막 테이프를 끊을 때도 그는 말석에 있으려고만 했고 축사도 사양하고 있는 둥 없는 둥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다.그게 조금도 꾸밈없이 자연스러워서 저절로 존경심이 우러났다.지나침으로 고인을 욕되게 하지 않을 줄 아는 그의 겸손이 마침내 박수근이라는 탁월한 문화상품을 그의 고장의 것으로 만든 것이다. 그게 양구의 복이라면,6·25전엔 38선 이북이었던 양구가 휴전 후 휴전선 이남 땅이 된 것은 우리 모두의 복이자 박수근의 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사후에 복 많은 분이라는 소리를 할 수 있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듣는 고인도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 [박완서의 살아가는 이야기] 기분 좋은 날

    지난주 양구에 있는 박수근 미술관을 다녀왔다.준공할 무렵 처음 가보았고 연전에는 우연히 그 근처를 지나다가 아주 잘 돼 있는 표지판 때문에 잠시 들러본 적이 있다.이번이 세 번째이기 때문에 표지판이 나타나자 일행에게 내가 뭘 좀 아는 것처럼 굴고 싶었나보다.차가 진입로로 들어서기도 전에 저어기 보이는 저 건물이 바로 미술관이라고 손가락질을 해도 아무도 알아보는 것 같지 않았다.그렇게 되니까 나도 여기던가,저기던가 긴가민가해지고 말았다.그 정도로 그 미술관은 기념관이나 미술관 건물쯤 되면 규모나 외관이 어느 정도 높다랗고 번들대야 된다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고 마치 들판의 일부처럼,평범한 농가의 돌담처럼 눈에 안 띄게 다소곳이 엎드려 있다. 그러나 가만히 눈여겨보면 보통 안목으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는 걸 알 수가 있다.그 곳 자연뿐 아니라 박수근이라는 화가의 인품이나 작품세계와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속기(俗氣)도,자기 과시의 욕망도 찾아지지 않는다.들어가는 길도 마치 대문 열어놓고 사는 인심 좋은 집처럼 마음 놓고 빨려들게 된다.그러나 들어가 보면 이게 웬 떡이냐 싶게 눈이 휘둥그레진다.실상 그 전까지는 정말이지 잘 지었다싶은 건물에 비해서는 소장품의 양이 빈약했었다. 박수근의 정물화 ‘굴비’를 비롯해서 갤러리 현대의 박명자 관장이 기증한,박수근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화가들의 작품 52점은 하나같이 보석처럼 빛나는 작품인지라 그걸 여태까지 소장한 그의 안목도 안목이지만 세상에,저 좋은 걸 아까워서 어떻게 내놓았을까,한 개인의 용기 있는 결단이 던진 충격은 우리나라도 앞으로 예술을 향유하는 태도에 획기적인 변화가 올지도 모른다는 은근한 기대감까지 품게 한다.‘굴비’는 도록 같은 데서 여러 번 접한 작품인데도 실물을 보니까 어머,저건 알배기 영광굴비 아냐?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만큼 사실적이었다.전시된 작품은 다 소품이었고 태반이 살기 힘든,더군다나 그림으로 먹고 살기는 더 힘든 시대의 작품이건만 훗날 그 대가들이 그린 대작 못지않게 아름답고 밀도 높아 그 시대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마저 불러일으켰다. 미술관을 나오면 박수근의 동상이 미술관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동상을 정면으로 볼 때는 너무 젊고 너무 잘 생긴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나중에 미술관과 그의 모습을 멀리서 옆으로 잡은 사진을 보니 마치 오랜 방랑 끝에 고향에 돌아온 나그네가 언덕에 앉아 감개무량한 듯,또는 지친 듯 우두커니 고향집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그는 마침내 고향에 돌아온 것이다.이번 전시회가 열리기 며칠 전 그의 유해는 타향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미술관을 바라보는 언덕 위에 안장됐다.유족과 친지들,미술관 관계자들이 오랫동안 벼르던 걸 윤달 든 해를 기해 단행한 듯했다.이번 전시회는 마침내 묻힐 자리에 묻히게 된 그의 이장을 기념하는 뜻도 있었을 것 같다. 이렇게 모든 것이 갖춰지기 전 평일 날에도 하루 평균 2백명 가까운 관람객이 이 미술관을 찾는다고 유홍준 명예관장은 자랑스러워했다.산골 중의 산골,교통도 불편하고 볼거리도 없는 오지 중의 오지에 그만한 방문객을 끌어모을 수 있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었다. 관장은 그 공을 양구군수에게 돌렸다.군수는 건축에 관한 모든 일을 전문가에게 일임하고 예산을 집행하는 것 외엔 어떤 간섭도 안 했다는 것이다.개막 테이프를 끊을 때도 그는 말석에 있으려고만 했고 축사도 사양하고 있는 둥 없는 둥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다.그게 조금도 꾸밈없이 자연스러워서 저절로 존경심이 우러났다.지나침으로 고인을 욕되게 하지 않을 줄 아는 그의 겸손이 마침내 박수근이라는 탁월한 문화상품을 그의 고장의 것으로 만든 것이다. 그게 양구의 복이라면,6·25전엔 38선 이북이었던 양구가 휴전 후 휴전선 이남 땅이 된 것은 우리 모두의 복이자 박수근의 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사후에 복 많은 분이라는 소리를 할 수 있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듣는 고인도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6)통일을 기다리는 건봉사 불이문(不二門)

    불교에서 불이(不二)는 크게 세 가지 뜻을 지닌 것으로 가르쳐 온다. 첫 번째는 다르지 않은 것,같음,한 몸을 말한다.그 다음은 둘이 대립하지 않는 것,두 가지가 평등한 것을 말한다.상대와의 차별을 넘어선 절대 평등의 경지,대립을 멀리한 뛰어난 이치를 추구한다.세 번째는 앞의 두 경우가 경전의 이론적 해석을 통하여 관념 세계의 본질을 밝히려는 것과 달리,실천적인 상태를 추구한다.그리하여 불이(不二)란 상대의 마음이 되는 것을 뜻하고 거기 도달하기 위해 고행 정진한다. 무릇 웬만한 사찰에는 이같은 뜻의 불이문(不二門)이 세워져 있다.수많은 불이문 중에서 금강산 건봉사(乾鳳寺)의 불이문은 단연코 다른 불이문들과는 차별화되는 매우 특별한 내력을 지니고 있다.오늘은 금강산 건봉사의 전설적인 역사와 함께 이곳 불이문을 감상하기 위해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로 떠난다. 바야흐로 진달래꽃이 심심산천에 불을 놓아 아름다움을 향한 소리 없는 소리가 강원도 산과 들에 뿌리 없는 봄바람 나무를 휘젓는다.옛사람들이 이르기를 양간지풍(襄杆之風)이요 통고지설(通高之雪)이라 했다.즉 양양과 간성은 바람이 많고,통천 고성엔 눈이 많이 온다는 뜻을 제법 그럴싸한 문자풍으로 읊조렸는데,오늘은 고성 땅에도 봄바람이 폭풍처럼 인다.고성 땅은 서쪽의 태백 준령과 동쪽의 비취빛깔 동해 수평선을 지방의 특성으로 꼽을 만큼 서쪽은 지대가 높고 동쪽은 낮은 들판으로 장엄했다.이런 지형을 두고 조선시대 이곳 현감을 지낸 이식(李植)은 ‘높은 산에는 눈이 희끗희끗 남아 있는데,바닷가 흰모래밭에는 벌써 해당화가 지고 있구나.’하고 노래했었다. 건봉사는 대한민국에서 금강산 이름을 앞에 거느린 유일한 사찰이다.한때 우리나라 사대명찰(四大名刹) 중 하나였으며,강원도의 모든 절을 거느렸던 호국불교를 대표하는 매우 큰 도량이자 불교 미술의 박물관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유구한 역사와 화려하고 굵직 굵직한 승려들의 처소였었다. ●6·25전쟁 치열한 전투현장 되기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의승군(義僧軍)을 일으키기도 했다.허망하게 붕괴되어 패주하는 조선군대를 대신하여 조선의 운명을 구원한 의승군의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 건봉사다.경전과 목탁 대신 칼과 몽둥이를 들고 중생구원을 실천한 1000여명의 승려들이 군사훈련을 했다. 건봉사는 평소에도 700여명 승려들이 수행하던 전국 최대규모의 사찰이었고,1500년 동양불교의 민중구제에 대한 불멸의 증험 도량이었다.이곳 수행자와 불교 신도들이 이루어 낸 여러 종교적 성취와 영험들은 한국 불교의 자존심이었다. 이같은 건봉사는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 6·25의 상처가 가장 잔혹하게 남은 곳이기도 하다.3000 칸이 넘는 거대한 건봉사가 역사의 회오리 속에 빨려 든 것은 해방되던 해부터였다.건봉사는 3·8선 이북에 속했다.소련군이 들어와 인민위원회가 생기고 북한 정권이 세워지자 반종교정책이 강행되었다.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의 토지개혁으로 건봉사 소유 토지가 몰수되고 종교활동이 금지되자 승려들은 남쪽으로 피신해왔다.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다.건봉사는 1951년 4월부터 휴전이 될 때까지 2년 동안 적군과 아군이 물고 물리는 일대 접점지역의 중심무대가 되었다. 1951년 5월10일 당시 건봉사는 금강산 줄기를 따라 후퇴하는 북한군의 중간집결지였다.유엔군 공군과 미8군 소속 한국 1군단,국군수도사단 기갑연대의 합동공격이 시작되었다.유엔군 전폭기 편대가 폭격을 시작하여 건봉사 핵심 건물들이 불타고 수많은 국보들이 모조리 파괴되고 불타버렸다.1951년 6월 이후부터는 중국군의 5월 공세에 맞선 국군 3군단과 1군단의 이른바 건봉산전투가 건봉사를 사이에 놓고 16차례의 공방전을 벌였다. 국군이 쏘아댄 포탄만 10만 발이 넘었고 미7함대의 함포사격과 공군기까지 가세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1951년 6월의 건봉산 전투로 건봉사는 국군에 의하여 점령되었다.이곳 수행자들과 마을 주민들은 모두 속초 이남으로 강제 이주되고 그때까지 형체가 남아 있던 몇몇 사찰 건물은 국군부대의 막사로 이용되었다. 사찰 빈터에는 천막을 짓고 이 일대 부대를 지휘하는 지휘소나 보급 전진기지로 삼았다.주둔 부대는 겨울이 되자 사찰 건물의 목재를 뜯어내어 난방용 화목으로 썼다.기둥과 건물 곳곳의 목재들은 이렇게 자취를 감추어 갔다.전투 양상에 따라 교차 투입되면서 건봉사에 주둔했던 국군부대로는 수도사단,3사단,5사단,8사단,9사단,11사단,15사단,육본직할81야포대 등이었다.1953년 7월27일 휴전후에도 건봉사는 군부대 막사로 사용되었는데,1954년 9월 주둔중이던 국군부대의 촛불에 의한 실화로 남아 있던 건물들이 불타버렸다.이 때의 화재로 더 이상 주둔시설로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주둔 부대는 건봉사를 버리고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다.그때부터 건봉사는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는 민통선 안에서 철저한 폐허로 변해갔다. ●1988년까지 민간인 출입통제구역 1988년까지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었지만 이곳의 역사를 아는 문화재 도굴꾼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땅속에 매몰되어 있는 불교미술품과 문화재를 훔쳐내기 시작했다.임진왜란 때 양산 통도사에 보관 중이던 부처님의 치아 사리를 왜군들이 빼앗아 일본으로 가져갔던 것을 사명대사가 되찾아와서 건봉사에다 보관해 왔다.이런 사실을 아는 도굴꾼들의 집요한 접근으로 마침내 도굴당했다.그때까지 남아 있던 수많은 석조 조형물들이 밀반출되어 서울의 부잣집 정원석으로 사용되고,울창하던 아름드리 소나무들은 군부대에 의하여 도벌당했다.군부대에서는 비무장 지대의 경계에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워 엄청난 양의 소나무를 베어 민간업자들에게 팔아넘기기도 했다.특히 1967∼1968년 고성군에 의한 대대적인 벌목으로 사찰경내는 황무지가 되었다. 그렇게 베어내고도 아직 남아 있는 몇 그루의 소나무들을 보면 이곳 소나무들이 겪은 수난의 역사가 새삼 떠오른다.원래 솔숲이 울창하기로 유명했던 이곳은 일제 때 동경대학 연습림이 되면서부터 수난이 시작되었다.그때 일본의 목재업자들은 이곳 좌우 산골짝에서 수령 수백년되는 아름드리 소나무를 벌채하여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발구’라는 기계로 실어 날랐다.이곳 소나무들은 모두 일본으로 실려가서 일본 귀족들의 집을 짓는데 사용되었다.그때 동경대학 연습림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한국의 소나무들을 베어 일본으로 실어가는 이른바 민족경제 수탈을 연습하던 것이었음을 알 수 있겠다.아무튼 이같은 일제와 한국전쟁의 포화속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 하나 있다.그 엄청난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총상 하나 크게 입지 않고 살아 남은 건물이 다름 아닌 불이문이었다. ●만일염불회… 민중불교의 성지 원래 건봉사는 우리나라 불교 역사상 가장 이채로운 종교적 체험을 하던 도량이었다.만일염불회(萬日念佛會)가 그것이다.1만일 동안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는 기도를 통하여 아미타불을 직접 만나고 극락에 오르는 좀체 믿기 어려운 수행이었다.758년부터 시작된 이 특이한 수행에는 수천 명이 함께 참여했는데,무려 27년여 동안이라는 긴 시간 동안 집단으로 수행하는 이 모임은 1908년까지 이어져 내려왔고,건봉사는 한국 민중불교의 성지로 자리잡게 되었다.누구든,그 신분이나 재산,성별이나 유·무식에 걸림없이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실천적 평등관이 이곳에서 1000년이 넘게 시도되었던 것이다. 지금 기적처럼 남아 있는 불이문은 남북이 이념이나 체제를 뛰어 넘는 평등,서로의 고통과 아픔을 안아주고 치유해쥬는 실천적 공존을 통하여 통일 민족이 이루어지는 날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불이문을 찾던 날,불이문 오른편에 서 있던 산벚꽃나무 꽃잎이 기도에 대한 응답인 듯 분분히 흩날리고 있었다.통일은 상대의 마음이 되어주는 불이법문(不二法門)의 완성이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6)통일을 기다리는 건봉사 불이문(不二門)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6)통일을 기다리는 건봉사 불이문(不二門)

    불교에서 불이(不二)는 크게 세 가지 뜻을 지닌 것으로 가르쳐 온다. 첫 번째는 다르지 않은 것,같음,한 몸을 말한다.그 다음은 둘이 대립하지 않는 것,두 가지가 평등한 것을 말한다.상대와의 차별을 넘어선 절대 평등의 경지,대립을 멀리한 뛰어난 이치를 추구한다.세 번째는 앞의 두 경우가 경전의 이론적 해석을 통하여 관념 세계의 본질을 밝히려는 것과 달리,실천적인 상태를 추구한다.그리하여 불이(不二)란 상대의 마음이 되는 것을 뜻하고 거기 도달하기 위해 고행 정진한다. 무릇 웬만한 사찰에는 이같은 뜻의 불이문(不二門)이 세워져 있다.수많은 불이문 중에서 금강산 건봉사(乾鳳寺)의 불이문은 단연코 다른 불이문들과는 차별화되는 매우 특별한 내력을 지니고 있다.오늘은 금강산 건봉사의 전설적인 역사와 함께 이곳 불이문을 감상하기 위해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로 떠난다. 바야흐로 진달래꽃이 심심산천에 불을 놓아 아름다움을 향한 소리 없는 소리가 강원도 산과 들에 뿌리 없는 봄바람 나무를 휘젓는다.옛사람들이 이르기를 양간지풍(襄杆之風)이요 통고지설(通高之雪)이라 했다.즉 양양과 간성은 바람이 많고,통천 고성엔 눈이 많이 온다는 뜻을 제법 그럴싸한 문자풍으로 읊조렸는데,오늘은 고성 땅에도 봄바람이 폭풍처럼 인다.고성 땅은 서쪽의 태백 준령과 동쪽의 비취빛깔 동해 수평선을 지방의 특성으로 꼽을 만큼 서쪽은 지대가 높고 동쪽은 낮은 들판으로 장엄했다.이런 지형을 두고 조선시대 이곳 현감을 지낸 이식(李植)은 ‘높은 산에는 눈이 희끗희끗 남아 있는데,바닷가 흰모래밭에는 벌써 해당화가 지고 있구나.’하고 노래했었다. 건봉사는 대한민국에서 금강산 이름을 앞에 거느린 유일한 사찰이다.한때 우리나라 사대명찰(四大名刹) 중 하나였으며,강원도의 모든 절을 거느렸던 호국불교를 대표하는 매우 큰 도량이자 불교 미술의 박물관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유구한 역사와 화려하고 굵직 굵직한 승려들의 처소였었다. ●6·25전쟁 치열한 전투현장 되기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의승군(義僧軍)을 일으키기도 했다.허망하게 붕괴되어 패주하는 조선군대를 대신하여 조선의 운명을 구원한 의승군의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 건봉사다.경전과 목탁 대신 칼과 몽둥이를 들고 중생구원을 실천한 1000여명의 승려들이 군사훈련을 했다. 건봉사는 평소에도 700여명 승려들이 수행하던 전국 최대규모의 사찰이었고,1500년 동양불교의 민중구제에 대한 불멸의 증험 도량이었다.이곳 수행자와 불교 신도들이 이루어 낸 여러 종교적 성취와 영험들은 한국 불교의 자존심이었다. 이같은 건봉사는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 6·25의 상처가 가장 잔혹하게 남은 곳이기도 하다.3000 칸이 넘는 거대한 건봉사가 역사의 회오리 속에 빨려 든 것은 해방되던 해부터였다.건봉사는 3·8선 이북에 속했다.소련군이 들어와 인민위원회가 생기고 북한 정권이 세워지자 반종교정책이 강행되었다.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의 토지개혁으로 건봉사 소유 토지가 몰수되고 종교활동이 금지되자 승려들은 남쪽으로 피신해왔다.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다.건봉사는 1951년 4월부터 휴전이 될 때까지 2년 동안 적군과 아군이 물고 물리는 일대 접점지역의 중심무대가 되었다. 1951년 5월10일 당시 건봉사는 금강산 줄기를 따라 후퇴하는 북한군의 중간집결지였다.유엔군 공군과 미8군 소속 한국 1군단,국군수도사단 기갑연대의 합동공격이 시작되었다.유엔군 전폭기 편대가 폭격을 시작하여 건봉사 핵심 건물들이 불타고 수많은 국보들이 모조리 파괴되고 불타버렸다.1951년 6월 이후부터는 중국군의 5월 공세에 맞선 국군 3군단과 1군단의 이른바 건봉산전투가 건봉사를 사이에 놓고 16차례의 공방전을 벌였다. 국군이 쏘아댄 포탄만 10만 발이 넘었고 미7함대의 함포사격과 공군기까지 가세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1951년 6월의 건봉산 전투로 건봉사는 국군에 의하여 점령되었다.이곳 수행자들과 마을 주민들은 모두 속초 이남으로 강제 이주되고 그때까지 형체가 남아 있던 몇몇 사찰 건물은 국군부대의 막사로 이용되었다. 사찰 빈터에는 천막을 짓고 이 일대 부대를 지휘하는 지휘소나 보급 전진기지로 삼았다.주둔 부대는 겨울이 되자 사찰 건물의 목재를 뜯어내어 난방용 화목으로 썼다.기둥과 건물 곳곳의 목재들은 이렇게 자취를 감추어 갔다.전투 양상에 따라 교차 투입되면서 건봉사에 주둔했던 국군부대로는 수도사단,3사단,5사단,8사단,9사단,11사단,15사단,육본직할81야포대 등이었다.1953년 7월27일 휴전후에도 건봉사는 군부대 막사로 사용되었는데,1954년 9월 주둔중이던 국군부대의 촛불에 의한 실화로 남아 있던 건물들이 불타버렸다.이 때의 화재로 더 이상 주둔시설로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주둔 부대는 건봉사를 버리고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다.그때부터 건봉사는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는 민통선 안에서 철저한 폐허로 변해갔다. ●1988년까지 민간인 출입통제구역 1988년까지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었지만 이곳의 역사를 아는 문화재 도굴꾼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땅속에 매몰되어 있는 불교미술품과 문화재를 훔쳐내기 시작했다.임진왜란 때 양산 통도사에 보관 중이던 부처님의 치아 사리를 왜군들이 빼앗아 일본으로 가져갔던 것을 사명대사가 되찾아와서 건봉사에다 보관해 왔다.이런 사실을 아는 도굴꾼들의 집요한 접근으로 마침내 도굴당했다.그때까지 남아 있던 수많은 석조 조형물들이 밀반출되어 서울의 부잣집 정원석으로 사용되고,울창하던 아름드리 소나무들은 군부대에 의하여 도벌당했다.군부대에서는 비무장 지대의 경계에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워 엄청난 양의 소나무를 베어 민간업자들에게 팔아넘기기도 했다.특히 1967∼1968년 고성군에 의한 대대적인 벌목으로 사찰경내는 황무지가 되었다. 그렇게 베어내고도 아직 남아 있는 몇 그루의 소나무들을 보면 이곳 소나무들이 겪은 수난의 역사가 새삼 떠오른다.원래 솔숲이 울창하기로 유명했던 이곳은 일제 때 동경대학 연습림이 되면서부터 수난이 시작되었다.그때 일본의 목재업자들은 이곳 좌우 산골짝에서 수령 수백년되는 아름드리 소나무를 벌채하여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발구’라는 기계로 실어 날랐다.이곳 소나무들은 모두 일본으로 실려가서 일본 귀족들의 집을 짓는데 사용되었다.그때 동경대학 연습림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한국의 소나무들을 베어 일본으로 실어가는 이른바 민족경제 수탈을 연습하던 것이었음을 알 수 있겠다.아무튼 이같은 일제와 한국전쟁의 포화속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 하나 있다.그 엄청난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총상 하나 크게 입지 않고 살아 남은 건물이 다름 아닌 불이문이었다. ●만일염불회… 민중불교의 성지 원래 건봉사는 우리나라 불교 역사상 가장 이채로운 종교적 체험을 하던 도량이었다.만일염불회(萬日念佛會)가 그것이다.1만일 동안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는 기도를 통하여 아미타불을 직접 만나고 극락에 오르는 좀체 믿기 어려운 수행이었다.758년부터 시작된 이 특이한 수행에는 수천 명이 함께 참여했는데,무려 27년여 동안이라는 긴 시간 동안 집단으로 수행하는 이 모임은 1908년까지 이어져 내려왔고,건봉사는 한국 민중불교의 성지로 자리잡게 되었다.누구든,그 신분이나 재산,성별이나 유·무식에 걸림없이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실천적 평등관이 이곳에서 1000년이 넘게 시도되었던 것이다. 지금 기적처럼 남아 있는 불이문은 남북이 이념이나 체제를 뛰어 넘는 평등,서로의 고통과 아픔을 안아주고 치유해쥬는 실천적 공존을 통하여 통일 민족이 이루어지는 날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불이문을 찾던 날,불이문 오른편에 서 있던 산벚꽃나무 꽃잎이 기도에 대한 응답인 듯 분분히 흩날리고 있었다.통일은 상대의 마음이 되어주는 불이법문(不二法門)의 완성이다.
  • 백선엽 예비역 대장 소장 역사기록 육군 기증

    휴전회담 당시 한국측 대표를 맡았던 백선엽(84) 예비역 대장이 반세기동안 소장해 온 휴전협정 의정서와 라오스 파병계획 등 군 관련 역사 기록물 836건을 육군에 기증한다. 육군은 29일 계룡대에서 남재준 육군 참모총장 등 군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의장행사 및 역사 기록물 기증식을 갖는다. 이번에 기증되는 자료는 휴전협정 당시 중요 제안록과 라오스 파병계획,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고한 한국군 현대화계획 등 문서 193건을 비롯해 사진자료,이승만 대통령의 서신·훈시문,교범·교재·책자,연설문과 보고서,비망록 등 총 41종 836건이다. 기증자료는 백 장군이 6·25전쟁 당시 1사단장 재직 시절부터 연합참모본부 의장을 지낼 때까지 직접 다뤄온 기록들로,당시 상황을 재조명하고 분석할 수 있는 자료들이다.특히 라오스 파병계획은 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이 미측에 정정이 불안하던 라오스에 파병을 제의하면서 그 대가로 한국군 20개 사단을 35개로 늘리겠다는 제안을 한 것으로,미측의 거부로 파병은 불발에 그쳤지만 역사적 가치가 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육군 기록정보관리단은 기증된 자료들에 대해 전문보존처리작업과 역사적 가치에 대한 분석평가 작업을 거친 후 마이크로필름 사본과 데이터베이스 파일로 제작할 예정이다. 평남 강서 출신인 백 장군은 만주봉천 군사학교를 졸업한 뒤 1946년 국방경비대에 입대했고 1950년 6·25전쟁 당시 휴전회담 한국대표,한국군 최초의 육군 대장,연합참모본부 의장 등을 역임했다.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5월의 호국인물’ 여방오 중사

    전쟁기념관은 26일 6·25전쟁 당시 중동부 전선에서 공을 세우고 전사한 여방오(1928∼1953) 육군 일등중사를 5월 호국인물로 선정,발표했다. 여 중사는 전남 완도 출신으로 6·25전쟁이 한창이던 강원도 인제군 서화 북방 812고지 전투에 참가했다. 당시 북한군은 우세한 병력을 앞세워 6월 8일 파상공격을 감행해 52연대의 방어진지선을 돌파하고 812고지 동쪽 능선인 쌍용고지까지 점령했다.아군은 고지 탈환을 위해 중대병력을 투입했으나 번번이 좌절됐다. 이 때 여 중사는 아군 공군기의 지상공격을 유도하기 위해 대공포 표지판을 메고 북한군 기관총 진지로 돌진,전투기 공격으로 진지가 완전히 파괴될 수 있도록 임무를 완수하고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그의 전공을 기려 1955년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했다.전쟁기념관은 다음달 6일 호국추모실에서 고인을 추모하는 현양행사를 할 예정이다.˝
  • 창씨개명 → 일본식성명 강요 5·16 혁명 → 5·16 군사정변

    ‘창씨 개명-일본식 성명 강요,한국전쟁/6·25사변-6·25전쟁,5·16혁명-5·16군사정변.’ 교육인적자원부는 근·현대사의 역사용어가 아직도 혼란스럽게 사용되고 있다고 판단,교과서에 실린 용어 소개와 함께 채택 이유를 최근 홈페이지(www.moe.go.kr) 공개자료실에 띄웠다. 이에 따르면 1950년 남북한 간에 일어난 전쟁은 ‘한국전쟁’‘6·25동란’‘6·25사변’이 아니라 ‘6·25전쟁’이다. ‘한국전쟁’은 제3국에서 본 관점이 들어 있고,‘동란’‘사변’에는 동족끼리의 싸움 정도로 의미를 축소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또 ‘광주민주화운동’‘광주항쟁’은 민주화운동을 특정지역으로 한정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어 ‘5·18민주화운동’으로 통일했다.5·16을 ‘혁명’ 또는 ‘쿠데타’로 표기하는 데 대해서는 가치 판단이 덜한 ‘5·16군사정변’으로,8·15해방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해석해 ‘8·15광복’으로,4·19의거는 민주주의 발전에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한 점에 근거해 ‘4·19혁명’으로 정리했다. 이밖에 대구 10·1항쟁은 좌익이 조직적·계획적으로 벌인 일임을 감안해 ‘대구10·1폭동사건’으로,제주도 4·3폭동은 지역주민 전체를 폭도로 왜곡할 우려를 없애기 위해 ‘제주도 4·3사건’으로 기술했다.여수·순천 10·19반란 역시 주민 전체를 반란자로 볼 가능성이 커 ‘사건’으로 썼다. 광복 전의 역사와 관련,‘쇄국정책’은 조선을 폐쇄사회로 표현해 구미의 문호개방 압력을 합리화할 우려가 있다고 보고 ‘통상수교 거부정책’으로,창씨개명은 일제의 강요라는 의미를 강조해 ‘일본식 성명 강요’로 표기했다. 이와 관련,교육부 구난희 연구관은 “교과서에 실린 역사용어는 이미 95년 이후 학계 전문가 등의 검증을 거친 만큼 혼란없이 사용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정리했다.”고 설명했다. 박홍기기자 hkpark@˝
  • 제41회 국군모범용사 초대

    서울신문사는 국방부와 공동으로 국토방위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는 국군모범용사를 초청,그들의 노고를 격려하는 ‘국군모범용사 초대’ 행사를 개최합니다. 이 행사는 올해로 마흔 한 돌을 맞이하는 국내 최고의 국군장병 위로행사로서 지난 1964년부터 매년 6·25를 전후하여 펼쳐오고 있습니다. 전군에서 선발된 모범용사 60명과 그 배우자들은 전국 주요도시를 방문,각 기관장과 만남의 시간을 갖는 것과 더불어 각 지역의 산업현장을 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군의 위상정립과 사기진작에 크게 기여하게 될 이 행사에 국민 여러분의 큰 성원을 바랍니다. ●행사기간:2004.6.21.(월) ∼ 26.(토,5박 6일) ●방문지역:서울,대전,광양,사천,창원,부산,울산,경주 등 ●초대인원:모범용사 60명과 배우자(총 120명) 주최: 서울신문사 ·국방부 협찬:보워터 한라제지˝
  • ‘6·25때 학살’ 유골 수백점 발굴

    한국전쟁중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양민들의 유골이 경남 마산에서 무더기로 발견됐다. ‘양민학살 경남대책위원회’는 지난 24일부터 경남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 산태골에서 6·25당시 학살된 양민들의 유골발굴 작업을 벌여 사람의 두개골 등 유골 수백점을 수습했다고 25일 밝혔다.유족회는 “마을 주민의 증언으로 미뤄 이번에 발굴된 유골은 한국전쟁 당시 진주형무소에 수감됐던 보도연맹원들로 당시 학살된 인원은 200∼300명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주민들은 “6·25전쟁때 군인과 경찰로 보이는 사람들이 포승에 묶인 사람들을 트럭 4대에 싣고 와 마을 뒤 산태골과 ‘도둑골’ 폐광에서 총살한 뒤 묻은 적이 있다.”고 전했다. 이번 발굴작업은 지난 2002년 9월초 태풍 ‘루사’ 내습시 여양리 일대 임야의 토사가 유출되면서 10여구의 유골이 발견되자 유족회측이 발굴·수습 및 묘소 설치를 요구,1년 7개월 만에 이뤄졌다. 창원 이정규기자 jeong@˝
  • [무슨 영화 볼까]

    ●범죄의 재구성 장르/예매율 범죄스릴러/31.5%(18세) 감독/배우는 최동훈/박신양·백윤식·염정아 어떤 줄거리 5명의 사기꾼들,한국은행을 털다. 이래서 좋아 치밀한 이야기 구성,흠잡을 데 없는 연기. 이래서 별로화끈한 범죄스릴러가 되기엔 약한 반전. 홈피 반응은 “…” ● 라이어 장르/예매율코믹드라마/22.4%(18세) 감독/배우는김경형/주진모·공형진·송선미 어떤 줄거리두집 살림 하던 뻔뻔남,거짓말하다 혼쭐나네∼ 이래서 좋아꼬리를 무는 거짓말,몸집을 불려가는 코미디. 이래서 별로시·공간적 한계,연극적인 대사톤. 홈피 반응은“공형진씨,배아프게 웃기더군요.” ●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장르/예매율종교드라마 / 19.9%(15세) 감독/배우는멜 깁슨/제임스 카비젤·모니카 벨루치·클로디아 게리니 어떤 줄거리나사렛 예수의 마지막 12시간을 묘사한 드라마. 이래서 좋아성경을 다시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내러티브. 이래서 별로눈을 질끈 감고 싶을 만큼 참혹한 장면들. 홈피 반응은 “나를 열렬한 신자로 만들어준 고마운 영화” ● 어린 신부 장르/예매율로맨틱코미디 / 11.4%(12세) 감독/배우는김호준/김래원·문근영 어떤 줄거리여고 1년생과 바람둥이 대학생의 신혼일기. 이래서 좋아참신한 설정, 깨물어주고 싶게 귀여운 문근영. 이래서 별로그들은 왜 무조건 시키는 대로 결혼했을까. 홈피 반응은“순정만화 같은 재미,아쉬운 마무리” ● 첫키스만 50번째 장르/예매율로맨틱 코미디/5.0%(12세) 감독/배우는피터 시걸/애덤 샌들러·드루 배리모어 어떤 줄거리플레이보이, 기억상실증 걸린 여자에 빠지다. 이래서 좋아그녀의 기억을 위해서라면 온몸을 망가뜨려서라도 웃음을…. 이래서 별로운명적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 너무 희미? 홈피 반응은“…” ●태극기 휘날리며 장르/예매율전쟁액션 / 3. 9%(15세) 감독/배우는강제규/장동건·원빈·이은주·공형진 어떤 줄거리6·25전쟁을 배경으로 ‘전우’가 돼버린 형제. 이래서 좋아‘실미도’를 보며 흐느꼈다면,이번엔 펑펑 울지도…. 이래서 별로기교없이 단선적인 드라마 전개. 홈피 반응은“국제 경쟁력을 갖춘 전쟁영화” ● 더티 댄싱:하바나 나이트 장르/예매율로맨스 드라마/2.5%(15세) 감독/배우는가이 펄랜드/로몰라 게리·디에고 루나. 어떤 줄거리미국 여고 3년생이 쿠바 소년과 라틴댄스에 빠지는 이야기. 이래서 좋아정열의 라틴댄스…더 이상 무슨 말을. 이래서 별로엉성한 이야기 전개가 눈엣가시. 홈피 반응은“…” ● 테이킹 라이브즈 장르/예매율스릴러/1.9%(18세) 감독/배우는D.J.카루소/안젤리나 졸리·에단 호크 어떤 줄거리자기 정체성 잃은 연쇄 살인마와 FBI요원의 줄다리기. 이래서 좋아어둠 속 숨바꼭질…기본은 갖춘 스릴러. 이래서 별로극적 효과 떨어지는 반전,밋밋한 마무리. 홈피 반응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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