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6·25
    2026-06-27
    검색기록 지우기
  • 5위
    2026-06-27
    검색기록 지우기
  • 360명
    2026-06-27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9,343
  • [책꽂이]

    ●계용묵 전집(계용묵 지음, 민음사 펴냄) ‘백치 아다다’의 작가 계용묵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그의 소설과 산문을 나눠 묶은 전집. 단·장편으로 일관해 문단의 조명을 받지 못했던 작가의 미발표 작품까지 수록됐다. 소설집 2만 5000원, 산문집 2만원. ●백년여관(임철우 지음, 한겨레신문사 펴냄) 한겨레신문에 연재된 소설가 임철우의 새 장편. ‘봄날’ 이후 5년 만에 쓴 작품으로 일제시대,6·25 보도연맹 사건, 광주항쟁 등 한국사 100년을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재구성했다.9000원. ●그해 여름(전4권)(이영숙 지음, 한글 펴냄) 천재작가 이준수 등 직업이 다른 세 사람의 욕망과 사랑, 인간의 이중성을 그린 장편소설. 미술출판 기자 출신인 작가는 1992년 단편 ‘환상의 나라’ 이후 ‘함박눈이 내린 새벽’‘대바람 소리’ 등 중단편을 꾸준히 발표해 왔다. 각권 8000원.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고은 등 71명 지음, 열화당 펴냄) 고은 이윤기 최인호 김지하 한수산 강석경 신경숙 등 한국의 대표 문인 71명이 문학을 향한 순수열정과 글쓰기의 아픈 여정을 고백했다. 붓을 꺾을 수 없는 작가들의 육성이 ‘문학론’으로도 손색없다.1만 2000원. ●책 읽어주는 남자(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이레 펴냄) 15세 소년과 36세 여인의 사랑을 빌려 독일 현대사의 아픈 기억을 반추한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재출간됐다. 작가의 단편집 ‘사랑의 도피’(1995년)도 나란히 선보였다.9500원. ●핑거포스트,1663(전2권)(이언 피어스 지음, 김석희 옮김, 서해문집 펴냄) 내란과 혁명으로 점철된 17세기 영국을 무대로, 과학 의학 신학 인식론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아우르는 미스터리 역사추리소설.1권 1만 3800원,2권 1만 2800원.
  • [논술이 술술] 키워드/국가보안법

    올해 가장 뜨거웠던 이슈 중의 하나가 국가보안법 개폐 문제였다. 여론도 갈라지고 정치권에서도 첨예하게 맞서 오다 일단 논의를 뒤로 미뤘다. 그러나 더 급한 민생법안들이 해결되면 국가보안법 논의는 재점화될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적어도 개정해야 한다는 데는 국민들의 다수가 동의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폐지를 놓고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여당은 폐지하는 쪽으로 당론을 확정했지만 야당은 당의 운명을 걸고서라도 저지하겠다고 맞서고 있다. 국민 여론조사는 조금씩 다른데 어떤 조사에서는 폐지 의견이 많았지만 다른 조사에서는 폐지하지 말자는 의견이 50%를 넘기도 했다. 국보법 개폐 논란은 보혁 진영의 논리 대결과 뗄 수 없는 문제다. 대체로 과거 6·25를 겪어본 장·노년 보수층은 국보법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젊은 진보층은 시대의 변화를 인식하고 과거의 낡은 잣대와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논쟁의 시발점 국가보안법은 일제시대 치안유지법을 모방해 만들어진 법률인데 간첩과 좌익분자를 처벌하기 위한 이 법이 독재권력하에서 민주인사들을 탄압하는 도구로 악용됐다는 것이 폐지론자들의 주장이다. 처벌 조항들은 매우 애매하고 예비 음모죄까지 처벌할 수 있도록 돼 있어 인권침해의 소지가 크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유엔 인권위원회 등으로부터 폐지 권고를 여러 차례 받았다는 것. 남북이 전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유엔에 동시가입했고 교역량도 증대되는 등 시대 상황이 과거와 크게 달라졌기 때문에 국보법은 시대착오적인 법률이라는 논리다. 이에 대해 유지론자들은 아직도 북한의 대남적화 전략은 변하지 않았고 실제로 서해교전 등 도발을 일삼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법률적으로 볼 때 북한은 여전히 반국가단체일 뿐이기 때문에 경제적 교류를 하더라도 국가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권안보에 악용돼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정권의 문제이지 법의 문제가 아니고 운용을 철저히 하면 된다는 것이다. ●첨예하게 대립하는 여러 문제들 국가보안법 조항 중에서도 폐지를 놓고 여야가 첨예하게 맞서고 있는 것이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보느냐, 찬양고무죄를 인정하느냐 등의 문제다. 여당은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한 정부 참칭 조항을 삭제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헌법이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형법상 적국의 개념에 포함시켜 형법의 외환·내란죄로 다스릴 수 있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북한은 헌법의 영토 규정에 따라 국가로 인정해선 안 되기 때문에 북한을 정부를 참칭하는 반국가단체로 규정해야 한다고 한다. 비수교국이나 교전국에 해당하는 준적국, 또는 적국의 개념을 준용하는 것은 법률적으로 무리가 있다고 설명한다. 제7조 ‘국가의 존립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점을 알면서 반국가단체의 활동을 찬양, 고무, 선전한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찬양·고무죄에 대해서도 정면으로 대립하고 있다. 여당은 국가보안법 중에서 가장 악용된 이 조항을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찬양 고무의 개념이 모호해 소위 ‘불온 서적’만 갖고 있어도 국보법으로 처벌해온 과거를 예로 든다. 텔레비전에서 북한의 서커스를 보고 잘 한다고 해도 처벌할 수 있는 법이 국가보안법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폐지 반대론자들은 이 조항을 없앤다면 광화문에서 김일성 추모집회를 열어도 처벌할 근거가 없으므로 단서 규정을 좀 더 엄격히 바꾸어 존치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 다음이 불고지죄다. 국가보안법의 조항을 어긴 사실을 알면서 수사기관에 신고하지 않는 사람을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이 조항에 대해 폐지론자들은 인륜도덕을 파괴하는, 전 국민을 국보법 위반자로 만들 가능성이 있는 조항이라고 한다. 아버지가 아들을 신고하지 않는다고 해서 처벌하는 것이 옳으냐는 주장이다. 한나라당은 이에 대해 배우자, 직계 존비속, 형제, 자매는 형을 면제한다는 선에서 조항을 고치되 조항 자체는 살려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대비 포인트와 예상 논제 국가보안법은 어느 쪽이 옳다고 할 수 없는 정치적 사상적 신념과 연결된 문제다. 이 문제가 논술 면접시험에 나올 것으로 예상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논리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국보법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더라도 국가보안법 자체의 문제점은 분명히 파악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예상되는 논제는 ▲국가보안법이 폐지된다면 그 대안은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설명하라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서는 안 된다면 왜 그런가 ▲국가보안법이 악용된 사례와 폐단을 예로 들고 국보법 폐지 또는 개정 문제에 대한 생각을 말하라 ▲국가보안법은 과연 악법이라고 생각하는가 ▲국보법의 찬양 고무 조항은 폐지돼야 하는가, 유지하되 개정하는 것으로 족한가? 등을 들 수 있다. 손성진기자 sonsj@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한국의 케인즈’ 조순 前경제부총리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한국의 케인즈’ 조순 前경제부총리

    조순 전 부총리는 한국의 ‘케인스(J.M.Keynes)’다. 아니다, 관악산 ‘산신령’이다. 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산행을 거른 적이 없다. 또 있다. 산에 오를 때마다 ‘진짜 산신령’과 고난도의 선문답을 질펀하게 주고받는다. 북망산에 누워 있는 이태백과 두보가 놀라 깨어날 정도다. 그가 직접 지은 산시(山詩) 하나를 감상해 보자. ‘산위의 어긋어긋 늙은 소나무/꾸불꾸불 구름으로 용처럼 들어가네/평생의 친구라곤 새와 참새뿐/밤낮으로 의지하며 여름 겨울 보내누나’(山上參差列老松/入雲屈曲似蒼龍/巢枝鳥雀平生友/日夜相依過夏冬. 제목 두타산노송(頭陀山老松).2002년 8월23일 작.‘參差’는 ‘참치’로 읽는다.) 조 전 부총리는 제자들과 산행을 자주한다. 그때마다 제자들은 ‘산신령’이라는 표현을 아무 거리낌없이 한다. 그는 오히려 즉흥시를 지어 화답까지 한다. 이래저래 지어놓은 산시(山詩)만 해도 수백편에 이른다. ‘산신령’이란 별명이 붙은 이유. 그는 6공화국 시절 경제부총리를 맡았다. 그때 자택인 서울 봉천동에서 관악산을 넘어 출근하곤 했다. 하루는 출입기자들과 함께 관악산을 올랐다. 그런데 산을 타는 모습이 마치 구름 위를 사뿐사뿐 걷는 듯했다.30대의 젊은 기자들이 60대의 부총리를 뒤따르지 못했다. 그저 하얀 눈썹을 휘날리며 바람처럼 앞서갈 뿐이었다. 이를 본 누군가 ‘야, 산신령이다.’라고 표현했다. 그의 한시(漢詩) 실력은 중국에서도 알아줄 만큼 해박하다. 중국 방문 때 즉석에서 한시를 읊으며 일필휘지로 써내려가 입을 떡 벌어지게 했다. 그는 어린 시절 선친한테 한문을 배웠다. 논어·맹자 등도 일찌감치 터득했다. 그는 요즘 민족문화추진회에서 회장직을 맡아 ‘승정원일기’와 ‘일성록’ 발간사업을 추진하고 있다.‘일성록’은 조선시대 정조임금부터 고종까지 임금이 직접 쓴 일기다.‘승정원일기’는 60년 사업이고 ‘일성록’은 30년 사업이다. 학계에서는 ‘일성록’이 발간되면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될 것으로 본다. ●스테디셀러 ‘경제학원론’ 조 전 부총리는 딱딱한 경제얘기를 하지 말자며 인터뷰에 응했다. 그러나 요즘의 화두가 ‘경제’인데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는가. 그는 우리나라 경제학계의 거두로 꼽힌다. 그가 지은 ‘경제학원론’은 전공에 관계없이 대학생이면 누구나 일독할 정도로 대학가의 ‘스테디셀러’이다. 얼마 전에는 제자인 이정우 대통령정책기획위원장에게 ‘분배론’을 더이상 거론하지 말라는 쓴소리를 던져 관심을 모았다. 서울 구기동 집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하얀 머리와 흰눈썹만 빼면 여전히 동안의 얼굴. 먼저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과의 관계를 물었다. “내가 교수 시절 그는 무척 똑똑한 대학생이었지. 그래서 ‘경제학원론’을 만들 때 다른 제자 5명과 함께 참여시켰어. 그는 인플레이션 부분을 맡았지. 숙제를 줬더니 아주 똑떨어지게 정리했더군. 청와대에 들어간 뒤에도 3,4차례 만날 정도로 여전히 아끼는 후배지. 얼마전 언론에서 쓴소리 했다고 보도했는데 사실은 치켜세우려고 한 게 그렇게 됐어.” 현 정권의 경제운영에 대한 ‘고언’을 부탁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이 있어야 해.”라고 했다. 이어 “386들은 (머리가)우수하나 경험이 적어. 그러다보니 자기들만 아는 이론이 바탕이 되고 있지. 결국 현실과 맞지 않게 되고 말아.”라고 지적했다. 그는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도 실사구시야말로 (경제정책의)가장 과학적인 방법으로 여겼다.”면서 “실사를 파악한 뒤 국가비전을 제시하는 전략이 있어야 하는데 이는 곧 국가의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 경제의)어려움의 씨는 오래 전부터 시작됐다.”며 경제난의 뿌리 깊은 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386세대 머리 우수하나 경험 적어 걱정” “70년대 관치경제에 의해 공업화를 이루다보니 대기업 중심으로 성공을 거두었어. 그러나 이면에는 불균형성이란 이중구조가 생겨났지.80년대에 이를 치유할 기회가 있었으나 그렇지 못했어. 중소기업은 잘 안되고 정치적으로 민주화 요구가 크게 일어난 시기였지. 결국 문민정부가 등장했으나 경제운영은 그 전과 다름이 없었어. 불균형은 더욱 심화되고 국제 경쟁력은 떨어지고. 그러다 외환위기를 맞았지.” 김대중 정권 때의 관치개혁도 들춰냈다. 즉 금융·노동 등 4대 공공부문을 개혁하면서 2년 만에 IMF를 극복했으나, 카드남발과 소비진작, 건설경기를 부추기는 등의 내수를 통한 성장정책의 실정을 꼬집었다. 결국 참여정부가 이를 고스란히 넘겨 받았지만 비슷한 관치개혁을 추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진정한 시장경제의 원리가 아닌 개발연대의 패러다임식 같은 경제운영, 예를 들어 동북아 중심 성장, 금융허브, 경제특구 등 과거의 방법을 답습 하다보니 실사구시는 여전히 뒷전이라는 것이다. 그는 “우리 경제는 오랜 지병처럼 일조일석에 낫지 않는다. 방법은 딱히 없으며 시일을 두고 치유해나갈 수밖에 없다.”면서 “국민과 기업의 사기를 올리고 흐트러진 사회질서를 우선적으로 회복시켜야 원동력이 생겨난다.”고 역설했다. 아울러 국민과 기업, 정부 등 모든 경제주체가 책임감을 통감하고 ‘좀더 잘해 보자.’는 사회적 운동이 뒤따라야 한다고 부연했다. ●6·25때 통역장교로 임관 화제를 돌려 수능부정 사태 등 최근의 교육문제를 꺼냈다. 그러자 “기러기 아빠가 있는 나라가 도대체 세상 어디에 있느냐.”고 반문하면서 “(수능처럼)전국적으로 똑같은 기준을 정해도 (교육제도의)효과가 없다는 것이 확인되지 않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울러 “경쟁이 없는 교육은 국가를 위해서도 결코 도움이 안 된다.”며 대학마다 자율권을 많이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익과 좌익 등 최근의 분열양상과 관련, 그는 헌팅턴 교수의 ‘문명의 충돌’을 예로 들었다. 남북분단과 좌·우익 투쟁의 역사성이 물밑에 깔려 있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늘 분열의 소지가 많다는 것. “가급적 봉합하는 정책이 많이 나와야 해. 정책 입안자들은 말 한마디라도 조용하게 하고 분배 얘기는 될수록 꺼내지 말아야 돼.” 그는 1928년 강원도 명주군 구정면에 유학자 조정재의 1남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49년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그는 1년여 동안 강릉농고에서 영어교사를 했다. 그 경력으로 그는 6·25때 통역장교로 임관했다.51년에는 육군사관학교 영어교관으로 발탁됐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육사11기생들이 그의 첫 제자였다. 1957년 대위로 제대한 그는 경제학 연구를 위해 미국 유학길을 떠났다.11년 뒤 귀국, 서울상대 교수로 몸담았다. 이때 정운찬 현 서울대 총장, 좌승희·김승진 박사 등이 그의 제자로 몰리면서 ‘조순학파’라는 한국경제학계의 한 맥을 이루게 됐다. “산이란 춘하추동 언제나 고향이지. 좌우명? ‘도(道)를 밝혀 공(功)을 계산하지 말고, 바름(正)과 의리를 밝혀 이익을 도모하지 말라.’이지.” 바둑 아마5단인 그는 최근 조훈현씨와 4점 접바둑을 두어 이겼다. 또 논어와 노자에 빠진 것도 즐거움 중 하나이다.24년째 봉천동에 살고 있는 그는 매일 아침 새벽 서울대까지 부인과 함께 산책을 한다.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28년 강원도 강릉 출생 ▲49년 서울대졸업 ▲67년 캘리포니아대 경제학박사 ▲68년 서울대상대 부교수 ▲70∼88년 서울대 경제학과교수 ▲81년 학술원회원 ▲92∼93년 한국은행총재 ▲93년 도산서원 원장 ▲95년 서울시장(초대민선) ▲97∼98년 한나라당 총재 ▲98∼2002년 15대국회의원 ▲2002년 민족문화추진회 회장, 명지대 석좌교수, 서울대 명예교수, 바른경제동인회 회장 등으로 활약 ■ 주요저서 경제학원론, 한국경제의 현실과 진로, 중장기 경제개발 전략에 관한 연구,J.M. 케인즈, 화폐금융론, 한국경제의 이해, 조순 경제논평 등
  • [내 인생의 등대] 박홍섭 마포구청장-사생취의(捨生取義)

    [내 인생의 등대] 박홍섭 마포구청장-사생취의(捨生取義)

    “중·고등학교 시절 한 분의 선생님이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줬다면 너무 뻔한 스토리 아닌가요? 흔치 않은 이야기를 제공해야 하는데 어쩌나….” 서울 마포구 성산동 성미산 자락 마포구청에서 만난 박홍섭(63) 구청장은 자신의 이야기는 ‘기사거리’가 될게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6·25가 발발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읜 박 구청장은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아버지와도 같은 평생의 스승 고(故) 서기원(徐基元) 선생을 만났다. 서 교장은 숭문 중·고등학교의 기틀을 닦은 분으로 한국 사학교육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인물. “사부(師父)로 모셨어요. 내 평생의 지침이 돼 왔던 사생취의(捨生取義)란 말도 그 분으로부터 배웠고, 크고 작은 일에 대해 항상 명확하게 시비를 가려주셨던 현명한 분이셨죠.” ‘사생취의’란 의로움을 구하기 위해 목숨도 버린다는 뜻. 박 구청장은 서슬퍼렇던 시절 험난한 노동운동의 길을 걸었던 것도 모두 ‘사생취의’란 한 마디 때문이었다고 회고한다. “법대에 진학했지만 고시공부보다는 노동법 공부에만 열을 올렸어요. 사부의 말씀과 내 삶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의로움’이란 결과가 나오더라고요. 당시에는 ‘노동’이란 말만 꺼내도 ‘빨갱이’ 취급받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쉽지 않은 결단이 필요했죠.” 박 구청장은 ‘사생취의’를 실천하기란 어려운 일이라고 덧붙였다. “목숨을 버리는 것이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그것보다 오히려 의로움이 무엇인지 아는 게 더 어렵죠. 이것이 독서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책을 많이 읽어서 진정한 정의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죠.” 박 구청장은 조만간 어떤 식으로든 구청공무원의 승진에 ‘책읽기’를 반영하겠다고 강조했다. 행정의 최일선에서 적극적인 대민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공무원들에게는 순간적인 판단력이 필요하고, 그 능력을 배양시키기 위해서는 독서가 필수적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최인훈의 ‘광장’,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라이트 밀스의 ‘들어라 양키들아’ 등이 재밌게 읽었던 책입니다. 기본적으로 역사인식이 바탕이 돼야 현재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제 신념이죠.” 김기용기자 kiyong@seoul.co.kr
  • [문학이 머문 풍경]구상시인 마음의 고향 ‘왜관’

    [문학이 머문 풍경]구상시인 마음의 고향 ‘왜관’

    강/아침 강에 안개가 자욱 끼어 있다./피안을 저어 가듯/태백의 허공석을 나룻배가 간다./기슭, 백양목 가지에/까치가 한마리/요란을 떨며 날은다.(중략) ●남북 양쪽에서 필화 경험 지난 5월 고인이 된 시인 구상(具常). 시인은 남북 두 체제에서 필화를 경험한 유일한 문인이다. 1946년 함경도 원산에서 동인지 ‘응향’에 ‘밤’ 등 시를 발표하며 데뷔했으나 반인민적인 반동시인으로 몰렸다. 그 체제를 못견뎌 월남한 시인은 65년 8월 희곡 ‘수치’를 무대에 올리려다 등장인물 중 빨치산 군관의 대사가 문제되어 공연 보류조치를 당했다. 시인의 고향을 원산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으나 진짜 고향은 서울 이화동이다.4살 때 독일계 성 베네딕트 수도원의 교육사업을 위촉받은 아버지를 따라 함남 원산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사제가 되기 위해 성 베네딕트 수도원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 종교학과에서 불교를 공부했다. 당시 문예창작과와 종교과를 두고 과 선택문제로 고민했던 시인은 결국 종교과를 선택했다. 이것이 그의 시에 나타난 초월적 종교관의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6·25전쟁 때는 국방부 기관지 ‘승리일보’를 만들었고 군작가단 부단장을 지냈다. ●왜관에서 20여년간 작품활동 전후 이승만 정권에 대해 반독재 투쟁을 벌였던 그는 1952년 승리일보가 폐간되자 부인 서정옥(93년 작고)씨가 병원을 개업한 경북 칠곡군 왜관으로 삶터를 옮겼다. 이곳에서 시인은 53년부터 74년까지 기거하며 작품활동을 했다. 칠곡군은 지난 2002년 구상문학관을 건립했다. 부인이 경영하던 순심의원 자리에 2층짜리 문학관이 들어섰다. 문학관 뒤편에 시인의 거처였던 관수재(觀水齋)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시인과 가까왔던 윤장근(73) 죽순문학회회장은 “설창수 시인이 ‘낙동강이 보인다.’며 관수재라는 이름을 붙였다.”며 “강물과 푸른 풍경이 선생의 가슴에서 시를 우려내기에 지극히 안성맞춤인 장소였다.”고 말했다. 낙동강은 구상 시의 원천이었다.‘강’이란 연작시 100편을 발표했으며, 그의 시에는 늘 퍼내도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솟아나는 강물이 흐르고 있다. 윤 회장은 “구상 선생이 유난히 ‘강’에 집착하는 것은 관수재에서 늘 낙동강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 관수재에서 보이는 것은 테니스장에서 공을 치는 아낙네들뿐. 목을 쭉 빼보았으나 강 범람을 예방하기 위해 만든 높은 제방에 가려 강 건너 모텔과 신축아파트 공사장의 기중기만이 눈에 들어왔다. 문학관 2층에 올라가서야 겨우 낙동강이 보였다. 안내하던 문학관 직원은 “당시와 변하지 않은 것은 6·25전쟁 때 폭격돼 두동강 난 낙동강 철교밖에 없다.”고 귀띔했다. 시인은 관수재에서 윤 회장 등 많은 문인들과 교분을 쌓았다. 영남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을 할 때 시인이 대구 향촌동 다방에 보이지 않으면 문인들은 관수재로 몰려가 시인과 밤새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특히 절친한 친구인 천재화가 이중섭은 관수재의 단골손님이었다. 이중섭은 일본에 있는 자신의 가족을 그리워하며 단란한 구상 시인의 가족을 이따금씩 그렸다고 한다. 한번은 병색이 짙은 구상에게 천도 복숭아를 그린 그림을 주며 쾌유를 기원했다. 시인은 생전에 “그 ‘복숭아 그림’ 때문인지 지병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연명했다.”고 회상하곤 했다. 구상 시인의 본적지는 관수재가 있는 왜관이다. 전쟁중 북에 있는 가족이 내려오더라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 시와 마음의 고향이었기 때문에 왜관을 본적지로 고집하지 않았을까. 요즘 하루 100여명의 관광객들이 구상문학관을 찾아 시인을 느끼고 있다. 시인의 빈 자리를 구상문학관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칠곡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트리플캐스팅 황솔·문슬예·이진주

    트리플캐스팅 황솔·문슬예·이진주

    “너무너무 기뻤는데요, 옆에서 우는 친구들 달래주고 표정 관리하느라고 혼났어요.” 새달 4일부터 서울 정동극장에서 공연되는 가족극 ‘몽실언니’에서 주인공 ‘몽실이’를 맡게 된 아역 배우들은 앳되지만 어른스러웠다. 황솔(신천초6·13), 문슬예(중계초4·10), 이진주(구성초4·10). 오디션을 통해 연극에 투입된 아이들은 트리플 캐스팅으로, 한 명이 몽실이를 하면 나머지 두명은 극중 다른 배역으로 무대에 선다.8월말부터 하루 7시간 이상 강도 높은 연습을 하고 있지만 “연기가 너무 재미있어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또박또박 말한다. 연기에 대한 끼를 스스로 발견하고 부모님을 졸라 연기학원에 다닌 아이들이니 오죽할까. ●새달 4일부터 정동극장 공연 솔이는 이번 연극이 데뷔 무대.TV와 영화에 얼굴을 비쳤던 슬예, 진주에게도 본격 연기는 이번이 처음이다.‘몽실언니’는 TV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던 동화작가 권정생의 작품이 원작이다. 가난과 배고픔 때문에 남편을 버린 어머니가 만난 새 아버지의 학대로 절름발이가 된 몽실이가 6·25 전쟁통에 부모를 한꺼번에 잃고 식모살이, 구걸을 하면서도 배다른 동생들과 이웃을 돌보며 꿋꿋하게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풍요로움을 누리고 살아온 아이들이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의 이야기를 온몸으로 풀어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 “땅바닥에 떨어진 밥을 주워담는 장면에서 밥을 허겁지겁 주워 담아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됐어요. 그래서 엄마가 ‘동냥이라도 나가 봐라.’한 적도 있어요.” 평소 엉뚱한 말을 잘한다는 슬예의 솔직한 말.“연기에 대해 눈을 뜨게 됐어요.”라고 제법 진지하게 말하는 슬예는 “저는요, 힘도 세졌어요.”라며 수줍게 웃는다. 동생 난남이를 업고 나뭇짐까지 하는 몽실이로 살게 되니 얼마 전 엄마도 업을 수 있었단다. 현재 TV 어린이 프로그램에 단역으로 출연 중인 진주는 자타가 공인하는 ‘눈물의 여왕’.“(연극계가)인간적이어서 너무 좋아요.”“감정도 더 풍부해졌고요.”라고 진주가 말하자 이에 질세라 “관객들과 나의 감정을 나눠주고 함께 느낀다는 점이 너무 좋아요.”라고 솔이가 언니답게 이어받는다. 아이들이 부쩍 자란 건 몽실이 덕이다. ●하루 7시간이상 강도높은 연습 사슴처럼 맑은 아이들은 작은 몸뚱이에 두둑한 배짱과 에너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90분 동안 이어지는 무대가 하나도 떨리지 않았다. 요동치는 가슴을 부여잡아야 했던 쪽은 오히려 무대 아래의 엄마들. 지난 10월 과천에서 열렸던 프리뷰 때 막이 내려가자마자 엄마들은 너나할 것 없이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목소리가 너무 고와서 자꾸 예쁜 몽실이가 된다는 솔이. 아직 힘이 부족하다는 진주. 마음으로 우는 게 힘들었다는 슬예. 어리다고 열정이 없을까. 자신들의 단점을 얘기하는 아이들은 심각했다. 겉모습뿐 아니라 속내까지 진짜 몽실이가 되고 싶은 아이들이 꾸미는 무대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공연계 대목인 연말, 화려한 볼거리로 치장한 대규모 공연들의 위세가 아무리 대단해도 말이다.31일까지.2만∼3만원.(02)751-1500.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씨줄날줄] 꽁까이/이용원 논설위원

    10여년전 뉴욕 출장길에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미스 사이공’을 볼 기회가 있었다.1991년 4월 처음 무대에 오른 이 뮤지컬은 당시 ‘공전의 히트작’이니 ‘뮤지컬 관람료를 100달러대로 올린 작품’이니 하는 찬사를 받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7명, 대부분 40대였다.1막이 끝나고 휴식시간에 로비에서 만난 우리는 눈길 마주치기를 꺼려 일부러 딴쪽을 보며 의례적으로 몇마디만 나누었다. 우느라 퉁퉁 부은 눈을 확인하기가 서로 계면쩍었기 때문이다. 작품의 줄거리는 이러했다. 베트남의 시골 소녀 킴이 술집으로 팔려와 미 해병을 만나 사랑하게 된다. 남베트남 정부가 패망하자 남자는 귀국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킴은 아이를 낳아 키운다. 몇년 후, 그사이 미국에서 결혼한 남자가 부인과 함께 킴을 찾아온다. 그가 제 아이를 데려가겠다고 하자 킴은 아이를 넘겨준 뒤 절망에 빠져 자살한다. 영어로 된 대사를 다 알아듣지 못한다 해서 작품을 이해하는 데 지장은 없었다. 킴이 전하는 사랑과 슬픔, 분노, 절망이 고스란히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그 이야기는 6·25전쟁의 와중에, 그리고 그후에 이땅의 어머니·누이들이 겪은 그것 그대로였다. 국군이 베트남전에 참전한 1960년대 중·후반과 70년대 초 우리사회에는 꽁까이(베트남 처녀)아오자이(베트남 여성의 전통의상)같은 단어가 유행했다. 남베트남이 패망한 뒤로 베트남은 한동안 우리에게 멀리 있었다. 다만 베트남전을 무대로 한 소설·드라마에서 꽁까이·아오자이가 되살아날 뿐이었다. 그러다 베트남과 수교하고 나서는 한국 남성과 베트남 여성 사이에 태어난 한인 2세 문제가 새로 제기됐다. 우리 농촌의 총각들이 짝을 찾기 어려워지자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 국가의 처녀들과 국제결혼에 나선 지 오래되었다. 그런데 들어와 사는 외국인 신부 가운데 두어 명이 에이즈 환자로 판명된 모양이다. 환자로 밝혀진 이들은 보건당국에서 철저히 지도·관리해 병이 악화하거나 주위에 전염되는 일이 없도록 하면 된다. 다만 걱정인 것은 이 일로 외국인 신부들에 대해 편견을 갖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다. 한국 처녀들이 그러하듯 그들도 모국에선 순결한 꽁까이였음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seoul.co.kr
  • [씨줄날줄] 자학사관/이기동 논설위원

    위태위태하게 대치하던 이 땅의 진보·보수진영이 엉뚱하게 ‘자학(自虐)사관’을 매개로 공개 일합을 겨루었다. 뉴라이트(New Right)운동을 내건 자유주의연대가 창립선언문에서 “노무현정권은 자학사관을 퍼뜨리며…과거와의 전쟁에 자신의 명운을 걸고…”운운하자, 한 친노(親盧)인터넷 매체가 곧바로 “자학사관 운운하는 자유주의연대는 일본 극우파와 쌍둥이…”라고 반격하고 나선 것이다. 자유주의연대가 자학사관을 언급한 취지에는 무한경쟁의 시대에 과거사에 매달리지 말고 미래를 논하자는 뜻이 담겨 있다. 하나 ‘자학사관’이란 단어를 쓴 것은 분명 잘못이다. 일본 극우파들은 과거 일제가 자행한 난징학살, 위안부 등에 대해 사죄하자는 진보진영의 목소리를 자학사관이라고 반박한다. 자유주의연대는 자신들의 진의를 왜곡한 사이버테러라고 항변하나, 한치의 허점도 용납되지 않는 전장에서 이런 용어를 쓴 것은 큰 실수다. 신지호 교수 등 운동권 출신 486지식인들이 모여 극우와 극좌를 모두 배격하고, 여야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다원주의 사회건설에 이바지하겠다며 나선 게 뉴라이트운동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지적풍토는 이들이 추구하는 중간을 용납하지 않는다.“내 눈에는 올드(old)라이트와 구분이 안 된다.”는 열린우리당 유시민의원의 반응은 일찍이 예견된 수순이었던 셈이다. 급기야 뉴라이트를 한국판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이라고 부르는 목소리까지 등장하자, 자유주의연대는 인터넷 매체를 향해 이달말까지 공개토론에 응하라고 요구했다. 한바탕 이념전이 눈앞에서 벌어지게 된 것이다. 아무래도 좌우와 진보·보수, 여기에 민족주의와 반미친북, 친노·반노까지 가세해 피아구분도 안 되는 일대 혼전이 벌어질 것 같다. 자유주의연대는 일제와 6·25를 겪은 이 땅에서 순수한 이념논쟁이 가능하다고 진정 믿는 것일까. 자유주의연대는 출범 일주일이 채 못돼, 이렇게 진보세력의 최대 공격목표가 되고 말았다.‘보수는 바꾸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치부하는 진보의 오만은 배격돼야 하지만, 이런 척박한 지적 풍토까지 포용하는 것은 뉴라이트운동의 과제다. 하지만 아직 이들의 내공이 여기에는 못 미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정치권 친위대들의 천박하고 비열한 궤변을 보고 싶은 게 아니다. 진지한 지적 토론속에서, 유연한 대안 이념의 출현에 대한 기대가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된다. 이기동 논설위원 yeekd@seoul.co.kr
  • 25일 출범한 ‘최승희 춤연구회’ 김백봉 이사장

    “최승희 선생님은 항상 조국을 생각했어요. 또 무궁화가 있기에 춤을 출 수 있는 것이라며 조국 사랑을 늘 강조하셨지요.” 원로 무용가 김백봉(77)씨. 그는 전설적인 무용가로 알려진 최승희의 수제자이면서 동서지간이다.24일 저녁 김씨는 경희대에서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최승희 춤 연구회’를 공식 출범시켰다. 연구회 이사장직을 맡은 그는 “해외에서 활동 중인 최 선생의 제자들과 만나 한국무용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데 앞장서겠다.”며 ‘최승희의 춤과 삶’을 연구할 것임을 피력했다. “최승희 선생님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무용가였으며 한국 무용계의 씨앗이 된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월북 이후 선생님의 삶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무용가로서 남긴 업적은 대단하지만 인간적인 조명은 잘 안 됐다고 생각합니다.” 스승의 춤에 대한 평가를 해달라고 하자 그는 “매우 아름답고 철저히 객석과 호흡하는 무용가였다.”면서 “오사카나 도쿄에서 공연할 때 대학생들이 환호를 지르며 기립박수를 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최 선생은 ‘평생 하루에 2시간씩만 연습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말씀을 격언처럼 하셨다.”면서 “새벽 4,5시에 일어나 작품연습에 몰두할 정도로 춤을 사랑했다.”고 회고했다. “스승님은 항상 단발머리였죠. 머리핀 두 개만 꽂으면 머리 미용은 끝났습니다. 제가 머리핀을 자주 꽂아 드렸지요. 또 선생님은 제가 몸이 아프면 꼭 안아주셨습니다. 자신보다 항상 남을 배려하는 자세로 삶을 사셨지요.” 1911년 서울에서 태어난 최승희는 국내뿐만 아니라 파리와 뉴욕 등에서도 활발히 공연했다.1946년 월북한 최승희는 국립최승희무용연구소를 개설해 활동하다가 1967년 숙청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씨는 13살 나이에 일본 도쿄에 있는 최승희를 찾아 무용에 입문,10여년 동안 제자로 활동했다. 최승희의 남편은 1920년대 유명한 문필가였던 안막(본명 안필승). 김씨는 17세때 안막의 동생인 안제승과 결혼했다. 해방후 김백봉 부부는 최승희 부부와 함께 월북했다가 6·25전쟁이 발발하자 아들을 데리고 월남했다. 김씨의 두 딸 안병헌·안병주씨와 세 손녀도 춤을 전공하고 있다. 김문기자 km@seoul.co.kr
  • 설대위 前예수병원장 별세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렸던 설대위(David John Seel) 전 예수병원장이 21일 오후 1시(한국시간) 고향인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몬트리트 자택에서 80세를 일기로 숨졌다.6·25전쟁 직후 전주에 호남 최대 규모의 ‘예수병원’을 짓고 36년간 인술을 펼쳤던 그는 지난 90년 귀향해 자녀들과 함께 살아왔었다. 미국 루이지애나에서 의대를 졸업한 그는 54년 미국 남장로교 의료선교사로 아내 설매리(Mary Batchelor Seel)와 함께 방한, 전주 다가동 언덕 위에 자그마한 진료소를 설치하고 환자 치료에 나서게 된다. 의술과 희생, 봉사정신으로 주민 치료에 온 힘을 기울였고 탁월한 사업경영 수완을 발휘한 끝에 예수병원을 60∼70년대 호남지역의 최대 병원으로 키워냈다. 특히 돈 없는 불쌍한 처지의 환자를 많이 보살피는 등 따스한 인술(仁術)로 ‘전북의 정신적 스승’이란 애칭도 얻었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금강산 신계사 대웅보전 낙성식

    금강산 신계사(神溪寺) 대웅보전 낙성식이 대한불교 조계종 및 북측 조선불교도연맹, 현대아산㈜ 공동 주최로 20일 신계사 터에서 성대히 치러졌다.1951년 6·25 전쟁중 폭격으로 소실돼 석탑 등만 남아 있던 신계사는 지난 4월 착공에 들어가 약 7개월 만에 복원불사의 첫 결실인 대웅보전 준공을 보게 됐다. 금강산관광 6돌(19일)에 맞춰 열린 행사에는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 신계사 복원추진위원장 종상 스님, 현정은 현대 회장,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 유홍준 문화재청장, 시인 고은씨 등이 참석했다. 북측에서는 최일람 문화보존지도국 설비보존차장 등 4명이 직접 행사를 지켜봤다.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美, 일본군 재무장 도왔다”

    미국이 6·25전쟁 때 일본군 자위대의 전신인 경찰 예비대에 전차와 곡사포 등을 지원하는 등 사실상 일본군의 재무장을 적극 도왔다는 주장이 일본 현역 장교에 의해 제기됐다. 21일 국방부 산하 군사편찬연구소에 따르면 일본 방위청 방위연구소 소속 구즈하라 가즈미(葛原和三) 대령은 지난 18일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한·일 군사사 워크숍’에 참석, 미국의 일본 경찰예비대 지원 사실을 미ㆍ일 군사 자료를 인용해 공개했다. 그는 ‘6·25전쟁과 경찰예비대’란 제목의 논문에서 “미국은 6·25전쟁 때 경찰 예비대를 치안부대에서 방위부대로 위상을 높이고,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서 활약한 군 경력자 충원을 허용하는 방법을 통해 중무장화를 도왔다.”고 주장했다. 논문에 따르면 미국은 북한이 일으킨 6·25전쟁에 중공군이 참전한 것을 계기로 소련군도 병력을 움직여 일본을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치안업무로 제한된 경찰 예비대를 방위부대로 개편했으며 이 과정에서 예비역 장교 1000여명을 충원했다. 경찰 예비대원들은 미군 교범을 바탕으로 철저한 미국식 교육을 받았고,1952년 8월부터는 미군측이 제공한 전차와 곡사포 등 화력장비로 훈련을 받았다.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문학이 머문 풍경]현기영 ‘지상에 숟가락 하나’

    [문학이 머문 풍경]현기영 ‘지상에 숟가락 하나’

    현기영(玄基榮)의 자전적 장편소설인 ‘지상의 숟가락 하나’는 현기영만의 문학세계를 있게 한 그의 유·소년기의 총체다. 작가의 성장과정에서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상처깊은 곳을 서사구조로 엮은 이 책은 그가 4·3작가로, 저항작가로, 민족작가로 일컬어지게 된 것이 그의 유·소년기의 시대상황이나 성장배경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의 고향 척박한 땅, 화산도 제주는 아득한 수평선으로 둘러싸인, 오래전부터 귀양섬으로, 외세 강점기에 수탈의 섬으로 천대받아온 오지 변방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질곡마다에서 민초들이 억압과 수탈에 맞서 분연히 들고 일어나 ‘이재수의 난’,‘해녀항일운동’,‘4·3항쟁’의 섬이기도 했다. 1941년 1월생인 그는 이 섬에서 해방기부터 6·25때까지의 격동기 파란을 몸소 겪으며 유·소년기를 보냈다. 특히 2만 5000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1947년 4·3당시는 일곱살 나이로 고향인 제주시 노형동 ‘함박이굴’에서 해변마을인 삼도2동 ‘무근성’ 외가댁으로 피란가야 했고 그가 직접 접한 봉화봉기, 가택수색, 토벌작전…, 그리고 ‘함박이굴’의 초토화와 살육 등이 그의 어린 눈에 여과없이 수렴되면서 후일 그의 작품세계의 근간이 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작가는 소설 ‘지상‘에서 “고향마을의 초토화 장면은 검게 타버린 폐허를 배경으로 한 완벽한 구도의 목탄화로 내 의식에 자리잡게 되었다.”고 술회하면서 “인간의 경험, 상상력을 훨씬 능가해 버린 그 엄청난 살육과 방화를 놓고 어떻게 무자비하다, 잔인무도하다 하는 따위의 빈약한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라고 부연하고 있다. ●4·3작가, 저항작가로 그의 글쓰기는 70년대,80년대,90년대로 옮겨 오면서 유사하지만 각기 다른 고랑을 일군다.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아버지’가 당선되면서 등단한 그는 얼마 동안 현대 도시인의 좌절감 등을 일반화한 모더니즘적 경향을 보이다 78년 제주 4·3사건을 소재로 한 중편 ‘순이삼촌’을 발표하면서 저항작가로의 옷을 갈아입는다. 이 소설로 제주도 민중사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문제작가로 주목받아,‘필화’의 고통까지 겪었으나 결국 이 글은 1970년대 최고의 문제작으로 평가받으면서 향후 4·3작가로 자리매김하는 단초가 됐다. 그는 계속해서 ‘도령마루의 까마귀’‘해용 이야기’‘길’‘어떤 생애’ 등 4·3을 화두로 한 작품들을 잇달아 냈고 제주4·3연구소장과 제주사회문제협의회장 등을 역임하는 등 4·3과 관련한 사회활동도 왕성히 펼쳤다. 그의 제주 민중사에 대한 탐구정신은 80년대 들어서도 계속돼 ‘이재수의 난’을 다룬 장편 ‘변방에 우짓는 새’와 인간의 꿈이 역사의 힘 앞에 무참히 좌절되는 단편 ‘마지막 테우리’를 잇달아 발표했고 서사와 서정이 조화를 이룬 글 ‘지상에‘로 1989년 만해문학상,1994년 오영수문학상에 이어 1999년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현기영은 80년대부터 민족문학작가회의에 관계해 오다 지난해 2월 지금의 제11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으로 발탁됐다. ●개운치 않은 변화들 그래도 소설 ‘지상에‘는 휴전 이듬해 한라산 금족령이 풀릴 때까지 그가 여전히 해맑은 소년의 자리에 있었음을 그리고 있다. 밀기울범벅과 고구마를 식사 대용으로 삶아 먹는 궁핍 속에서도 오줌싸개였고,‘땜통’과 ‘똥깅이’라는 별명을 가진 개구쟁이였고, 신주머니를 곧잘 잃어버리는 철부지였고, 팽나무와 먹구슬나무를 사랑했던 순돌이였다. 이제 그의 생가가 있던 ‘함박이굴’은 4·3으로 불타 없어졌지만 고향 노형동은 제주 최고의 상권지로 우뚝 커졌고 그가 친구들과 벌거숭이로 물장구치던 병문천은 지금 말끔히 복개돼 왕복 5차선도로와 상가 주차장으로 변했다. 다이빙질을 하던 용연에서는 매년 음력 4월 보름 ‘용연야범 축제’가 열리고, 내년 2월까지는 동에서 서로 현수교식 구름다리도 놓아질 참이다. 친구들과 탄피 주우러 다녔던 도두봉까지의 현무암 해안길은 어느새 야간 조명시설까지 갖춘 해안도로로 단장돼 영화나 TV에 나올 정도로 세련된 카페촌으로 둔갑했다. 그러나 작가의 속내는 이런 치장들이 도저히 편하고 개운치 않다. 작가는 이 책에서 그 이유를 “아름다운 풍광의 배후에 아직도 진혼되지 않은 수만 원혼들이 음산한 기운으로 깃들어 있고, 그 검은 현무암지대가 그 시절의 초토화 불길에 타버린 숯더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이제 나는 용두암 근처 현무암의 바닷가에서 부산스레 들락날락하는 호사한 관광객 무리를 밀어내고 거기에서 놀던 옛 아이들을 다시 등장시켜 놓아야 하겠다.”고 넋두리한다. 제주 김영주기자 chejukyj@seoul.co.kr
  • [좋은도시 만들기] (1) 햇빛 안드는 아파트 많다

    [좋은도시 만들기] (1) 햇빛 안드는 아파트 많다

    6·25전쟁 복구개발 후 50여년, 한국은 기로에 서 있다. 도시화가 급진전되지만 난개발이 적지 않다. 주택보급률이 100%를 웃도는 반면 주택의 품질에 대한 소비자의 불만은 높다. 신도시와 기존 도시 재개발, 아파트와 단독주택간 선택도 쉽지 않다. 그런데도 행정수도 이전, 지역균형발전, 기업도시 등 도시와 주택 문제는 여전히 뜨거운 이슈다. 도시와 주택문제를 집중 조명하는 ‘좋은 도시 만들기’ 특집기사를 국내외 취재를 통해 싣는다. 서울 구로구 구로3동 현대아파트 301동 주민 34가구는 인근에 지어지고 있는 70m 높이의 14층짜리 아파트형 공장건물로 인해 일조권을 침해당했다며 최근 소송을 제기했다. 문제가 된 아파트형 공장건물은 이 아파트로부터 69m 떨어진 준공업지역에 세워져 있다. 송재범씨 등 주민들은 “공장건물 때문에 일조시간이 하루 1시간을 넘지 못하고 있다.”며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1차적으로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인 상태다. 소송대리인인 고미진 변호사는 “지은지 11년된 이 아파트는 준공업지역에 위치한 경우이지만 법원으로부터 일조권을 인정받은 몇 안 되는 사례”라고 말했다. 집 앞에 ‘합법적으로’ 건물이 들어설 때도 일조권 침해를 인정해주는 추세다. 또 건설회사가 분양한 아파트 입주자에게도 일조권이 인정되고 있다. 이런 추세에서 앞으로 일조권 분쟁이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지난 99년 인천시 부평구 부개동 한국아파트 입주자 홍모씨 등 38명이 아파트 단지 내 옹벽으로 인해 일조권을 확보할 수 없다며 건축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냈다. 이 당시 재판부는 “주택으로서의 기능 유지를 위해서는 동지일을 기준으로 최소 연속 2시간의 일조시간을 확보해야 한다.”며 일조량을 확보하지 못한 건축분양자는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판결했다. ●현실과 동떨어진 건축법 일조권은 말 그대로 햇빛을 쬘 수 있는 권리이다. 하지만 서울 등 대도시에 빽빽이 들어선 주택의 입주자들은 이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해온 게 사실이다. 법규를 몰라서, 또는 알아도 소송절차 등 권리를 찾는 방법이 너무나 번거로워 대부분의 입주자들은 참고 살아온 게 사실이다. 특히 단지로 형성된 아파트의 저층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앞 건물에 가려 햇빛이 제대로 안 들어도 “건설회사들이 법규에 따라 지은 건물”이라고 믿으며 일조권을 따지지 않고 살아왔다. 여기에는 ‘앞동 건물의 높이만큼만 떨어져 뒷동 건물을 지으면 된다.’는 등의 현실성이 떨어지는 건축법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인동거리 축소로 고밀개발 현행 건축법은 일조권을 위해 공동주택의 동간 거리(인동거리:동간 간격/건물높이)를 0.8배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 규정에 따라 아파트나 다세대주택 등을 지을 경우 대부분의 뒷동(북측) 건물에서는 최소 일조시간 2시간(동짓날 기준)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선문대 이장범 교수는 지적한다. 정부는 동간 거리를 현행 0.8배에서 법 개정을 통해 내년에는 1.0배로 늘릴 예정이다. 그러나 이 역시 필요 일조량을 확보하기에 충분치 않다. 특히 문제는 인동(隣棟)거리가 용적률 상향 조정과 맞물려 고밀 개발을 가능케 했다는 점이다. 노후 주택의 재건축 사업이 부지에 햇볕이 안 들 정도의 고밀 난개발로 이어진 데는 이런 인동거리 축소 규정이 한몫한 것이다. 인동거리의 경우 1978년 1.25배에서 1982년 1.0배로, 주택 200만호 공급이 본격화된 1992년부터는 0.8배로 다시 줄었다. 1988년 건축법상 용적률이 400%로 완화됐지만 이를 이용한 초고밀 아파트는 1990년대 초까지 등장하지 못했다. 그러나 인동거리가 0.8배로 완화되면서 본격적으로 재건축 사업을 통한 고밀도 개발과 초고층 아파트가 등장한 것으로 분석됐다. 이동구기자 yidonggu@seoul.co.kr ■ 햇빛 잘드는 집 조건 ‘남향 좋아하다간 일조량이 부족한 아파트에 살기 쉽다.’‘동남이나 남서 방향으로 단지가 비스듬히 서 있는 단지는 동간 거리가 짧아도 빛이 더 든다.’ 이장범 교수가 서울 강남구를 기준으로 동짓날인 12월22일의 일조량 시뮬레이션을 돌려 분석한 결과이다. ●북측과 남측에 각 12층짜리 아파트가 서 있고 그 간격이 건물 높이만큼(1.0배)일 경우:북측 동 1층에 연속 2시간 빛이 드는 것은 총 96가구중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그림 1). ●북측 12층, 남측 6층의 아파트가 서 있고 북측 건물의 절반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거나, 남북 모두 12층짜리 건물이 2.0배 떨어져 있을 경우 북측 건물에 2시간 일조량이 확보되는 비율은 75∼80%가 된다(그림 2). ●동서남북에 12층짜리 건물이 ㅁ자로 들어서 있을 경우에는 북측 건물에 2시간 빛이 드는 것은 10% 안팎에 불과하다(그림 3). 또 표에서 보는 것처럼 건물배치가 동남향이나 남서향으로 비스듬히 서 있을 경우 2시간 일조량 확보에 필요한 인동계수가 0.94나 1.11로 다른 정남향보다 훨씬 짧다. 동남향이나 남서향은 앞뒤 건물의 간격이 정남향 때보다 좁아도 일조량 확보에는 더 유리하다는 결론이다. 한편 성균관대 임창복·박승민 교수팀은 ㅁ자형 건물 배치에서 일조시간을 측정했다.4층짜리 건물을 예로 들어 남북 대(對) 동서간의 간격이 2대 1일때 북측에 위치한 동의 1층 가구는 2시간 이상의 일조시간을 확보한다. 그러나 이 비율이 1.5대1 이하부터는 일조시간이 2시간에 못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개정 건축법안에 따른 1.0배를 ‘ㅁ자형’ 공동주택에 적용하기는 힘들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동구기자 yidonggu@seoul.co.kr ■ 일조권이란 건축에서 일조를 중요시하는 것은 자외선에 의한 위생적·보온적 효과 등, 즉 쾌적한 주거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다. 이를 보장하기 위해 건축법 등에서는 통상적으로 동짓날에 주택 거실에 연속해서 2시간, 하루중 4시간의 일조를 최소한 확보토록 하고 있다. ■ 이장범 교수의 진단 “아파트나 다세대 주택 동간의 거리는 높이의 2배 정도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건설업계나 전문가들은 막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니 그런 통념은 맞는 것이었습니다.” 선문대 이장범(건축학과) 교수는 “동간 거리가 현재 0.8배에서 내년부터 1배로 는다고 해도 필요 일조량을 확보하는 데는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는 “공무원들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법을 고친다.”고 일침을 놨다. 이어 “일부 건설회사들은 일조량에 관한 시뮬레이션 시스템을 이용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회사들은 좁은 땅에 건물을 높이, 그리고 많이 올리면서 수익 위주로 짓는 바람에 일조량이 모자란 공동주택을 짓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건설에서 5년 안팎 일하다 1980년 중반 설계사 사무실로 전직한 이 교수는 지난해 학계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다세대 주택의 입지와 주차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 2002년 말 한양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 교수는 “공동주택 동간 거리를 규제한다고 해도 용적률이 높을 경우 건설회사들은 ㄱ자나 ㄴ자 등의 건물 배치로 적정한 일조량을 확보하기에 어려운 건물을 짓는다.”며 높은 용적률에도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특별취재팀 ●북유럽팀 이상일 논설위원(특별취재팀장), 건국대 김세용 교수 ●서유럽팀 이동구 기자, 이정형 중앙대 교수 ●미 국 팀 장세훈 기자, 김도년 성균관대 교수
  • [Doctor & Disease] 김창환 경희대 한방병원장

    [Doctor & Disease] 김창환 경희대 한방병원장

    한국인에게 침(鍼)보다 더 가까운 의구(醫具)나 의술(醫術)은 아직 없다. 아직은 어느 병원, 어느 의사, 어느 약제도 침의 이런 불가사의한 위력을 뛰어넘지 못한다. 침술은 첨단기술이 지배하는 21세기에도 한국인은 물론 세계인의 온갖 병증에 두루 적용되고 있다. ●美의대 80곳서 대체의학 다뤄 이 침을 잡고 평생 의료 현장을 지킨 김창환(60) 경희대 한방병원장은 침이야말로 아직 현대의학이나 과학이 규명하지 못한 신비의 영역에 있다고 말한다. “침이란 우리 몸의 생체에너지 기(氣)의 통로인 경락(經絡)과 혈(穴)에 물리적인 자극을 주어 질병을 예방, 치료, 진단하는 전통의술인데, 문제는 아직도 경락의 실체를 과학적으로 속속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서구의 많은 의학자들이 효험을 인정하고 있으니 불가사의한 일이지요. 미국의 경우 현재 80여개 의과대학에서 동양의학인 대체의학을 교과서에 수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침의 원리는 무엇인가. -한의학의 기본은 음양오행설이고, 여기에 경락학설, 장부학설이 더해져 침술을 낳았다. 간단하게 말해 인체에 존재하는 임맥과 독맥 등 14개 주요 경락과 365개 경혈을 자극해 생체 반응을 일으키도록 하는 의술이다. 그런 침술이 구체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질환은 어떤 것들인가. -기본적으로 임상 각과의 모든 병증이 대상이다. 치료의 극치라는 마취 분야에서도 침술의 효능이 입증되고 있다. 단, 용혈성 질환이나 에이즈같은 전염질환, 염증이 있는 질환 등에는 신중해야 한다. 침이 각 병증에 어떻게 작용하나. -통증이나 마비, 대사질환 등에 적용할 수 있는 침술이 각각 다르다. 예컨대 심한 통증의 경우 침으로 경혈을 자극해 엔돌핀 생성을 촉진시키는 방법을 쓰는데, 몰핀 계열의 이 엔돌핀은 체내에서 뛰어난 진통작용을 한다. 크게 보면 양의는 각 질환에 대해 미세하게 접근하는 반면 한의는 인체를 단일한 생체조직, 즉 전일개념으로 보고 접근한다. 암을 예로 들자면, 암 발생 부위와 연결된 경락을 자극해 암세포의 활동을 억제하는 방식이다. ●뇌졸중·마비­호흡기질환에 특효 한의학의 전일개념에 대해 ‘인체의 작용과 기능, 거기에서 나타난 병증을 통합적으로 살피는 접근법’이라고 소개한 김 원장은 한의학의 마취 효과를 체험한 사례도 설명했다. “제가 인턴이던 지난 72년, 맹장염을 앓았는데, 침술마취로 수술을 받겠다고 자청을 했지요. 그렇게 해서 우리나라 최초로 침술마취 충수절제술을 시도하게 됐는데, 이후에 더 효과적인 마취방법이 개발돼 지금은 자궁근종 수술도 침술마취로 해결할 정도입니다.‘경희 한의학’의 전통이 이렇게 쌓인거지요.” 침술의 마취효과를 정말 믿었나. -당연하다. 중풍이나 척추경추 손상으로 인한 마비는 물론 최근에는 사시나 대사면역질환, 알레르기 질환에도 침술이 폭넓게 적용된다. 말기암의 경우 통증이 심해 마약류를 투여하는데, 이런 경우에도 침술로 통증을 완화시킬 수 있다. 침술은 어떻게 분류하나. -종류별로는 몸 전체에 침을 놓는 체침, 귀에 놓는 이침, 머리를 자극하는 두침, 손에 놓는 수지침, 발에 놓는 족침 등으로 나누며, 방법에 따라 벌의 독성을 이용하는 봉독약침 등 침과 약을 병용하는 약침, 전기자극을 이용하는 전침, 침과 뜸의 기능을 합한 온침, 침을 불에 달궈 사용하는 화침, 레이저를 경혈에 조사하는 레이저침 등이 임상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침술이 임상 각 과에 두루 적용된다고 했는데, 그래도 특별히 유효한 질환이 따로 있지 않나. -그렇다. 뇌졸중이나 안면마비 등 마비질환, 요통이나 관절염 등 근골격계 질환, 편도선염이나 알레르기성 비염 등 호흡기질환, 월경통이나 산통 등 부인과 질환, 두통, 우울증, 수면장애 등 신경정신과 질환, 소아 사시 등 안과질환과 금주 금연 등 약물중독, 비만치료 등을 들 수 있다. ●주먹구구식 사술 난립 부작용 커 그는 사술(詐術)의 범람 등 한의학의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일제가 정책적으로 한의학을 말살하려고 해 참 손실이 컸습니다. 여기에다 6·25전쟁 등을 겪으면서 잃은 게 적지 않지요. 또 원래 한의학, 특히 침술은 서양의학과 달리 간편하다고들 여기는 데다 비방(方)의식이 있어 제대로 배우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사술 문제를 일으켜 오고 있는 게 사실이고, 그 부작용도 무척 큽니다. 그러나 침술이 그렇게 접근할 의술은 아닙니다. 치명적인 감염이나 치료부작용 등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침술의 미래를 어떻게 보는가. -WHO(세계보건기구)가 건강의 영역에 한의학의 일부인 ‘영적 요소’를 추가했으며, 서구의 의학교육에서 대체의학을 공부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심지어 독일에서는 편두통이 느껴지면 ‘침 맞으러 가겠다.’고들 말한다. 한의학의 과학성이 규명되면 우리뿐 아니라 세계가 주목하고, 놀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더 이상 주먹구구식으로는 안된다. 과학화, 통계화가 중요하다. 지금의 세상은 한의학이 흥성했던 조선시대와 다르다. 한의학에서도 적극적으로 첨단 이화학적 기기를 개발, 활용해야 하고, 객관적이고 타당성있는 치료술을 찾아내야 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부도 인식을 바꿔 더 많은 관심을 갖고 한의학의 세계화를 지원해야 한다. ■ 김창환 원장 △경희대한의대 및 대학원(한의학 박사)△경희의료원 한방병원 침구과장, 교육부장, 진료부장△대한 침구학회장△대한한의학회 이사장 등 역임△현, 경희대 한방병원장 글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사진 이호정기자 hojeong@seoul.co.kr
  • [산산산]포천 - 철원 명성산

    [산산산]포천 - 철원 명성산

    수도권에서 억새산행으로는 명성산(922m)이 최고다. 능선에 억새군락이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경기도 포천과 강원도 철원에 걸쳐 위치하고 있고, 산자락에 산정호수를 끼고 있어 가을 호수의 정취 또한 이곳의 자랑이다. 이 산의 이름은 애달픈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고 목 놓아 울자 산도 큰 소리로 같이 울었다고 해서 ‘울음산’이라고도 불리기 시작했고, 같은 뜻의 한자 이름인 명성산(鳴聲山)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또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궁예가 술잔을 놓고 최후를 맞은 장소도 명성산이다. 거지로 전락한 궁예가 생의 마감을 했다는 전설을 안고 있는 슬픈 산이기도 하다. 명성산 주능선 동쪽 수십만 평 넓이에 펼쳐지는 억새 군락은 본래 나무가 울창했다 한다. 그런데 이곳이 억새군락으로 변한 것은 6·25 전쟁 때 남북간의 격전을 치르면서 울창했던 나무들이 사라지고서부터다. 이래저래 명성산은 아픔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산이다. 산행은 등룡폭포 입구 매점과 식당 앞을 출발해 비선, 등룡폭포와 억새밭 , 삼각봉을 거쳐 정상, 산안고개, 산정호수로 나오는 6시간 코스와 등산로가든식당에서 비선, 등룡폭포를 거쳐 억새밭 삼각봉에서 자인사로 하산하는 3시간 코스가 가장 많이 이용된다. 최근 등룡폭포 못 미쳐 비선폭포 아래에서 왼쪽 암릉으로 오르는 책바위 코스도 사람들이 즐겨 이용하는 코스다. 이번 산행은 억새밭을 거쳐 정상을 갔다가 하산하는 6시간 코스를 소개한다. 산정호수 관광단지 주차장에서 도로를 따라 걷다가 다리 직전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골짜기를 따라 비선폭포와 등룡폭포를 거쳐 포천군이 자랑하는 ‘5만평 억새꽃밭’으로 올라선다. 억새밭 위쪽 팔각정 전망대에서 땀을 식히며 단풍을 벗고있는 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일주일동안 받았던 스트레스가 감쪽같이 사라진다. 삼각봉으로 오르는 능선 동쪽 아래를 바라보면 굽이치는 은빛 물결에 숨이 턱 막힌다. 수만 평에 달하는 분지 전체가 억새물결로 장관을 이룬다. 황금물결이 일렁이는 억새군락 너머로 각흘봉, 광덕산, 상해봉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한북정맥 상의 백운산, 국망봉, 도마치봉 등이 멀리의 화악산과 함께 시원하게 펼쳐지는 파노라마 같은 풍광은 가히 일품이다. 삼각봉에서 정상까지는 약 1.5㎞, 이 구간도 능선길 동쪽에 빽빽하게 밀집되어 있는 억새군락이 아름답다. 정상에 서면 북서쪽으로 단풍의 흔적이 남은 암릉과 철원평야를 가르는 한탄강이 몸과 마음을 시원하게 만들어준다. 하산은 철의 삼각지대 등 휴전선 일대가 바라보이는 북서쪽 궁예능선을 타고 내리다가 삼거리에서 좌측길로 해서 신안고개로 내려서면 된다. 신안고개에서 남쪽 도로를 따라 1시간쯤 걸어 내려오면 자인사 앞이다. 쉬엄쉬엄 가면 6시간30분이 넘게 걸린다. 입장료 어른 1000원, 어린이 400원이며 주차비는 승용차 1500원.(031)531-6103. 산행팁: 등룡폭포 상부인 안덕재와 사각봉에서 주능선쪽은 군부대 사격장 근처라 출입을 통제할 때가 있다. 전화로 확인을 하고 코스를 미리 잡는 것이 좋다. 실전명산 순례 700코스 중에서 hss1708@korea.com
  • “받은 사랑 다시 나누니 기쁨 두배”

    “받은 사랑 다시 나누니 기쁨 두배”

    “과거 구호단체의 도움을 받던 한국이 이제 반대로 다른 나라의 어린이들을 돕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입니다.” 한국을 찾은 국제 아동후원단체 ‘플랜 인터내셔널’의 스타이너 시바스찬(59) 이사회장은 2일 오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몰에서 한국의 후원자들을 만나 감사의 뜻을 전하며 “한국이 앞으로 후원국이 될 아시아 국가들의 좋은 예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이 자리에는 후원자 6명이 참석,1시간 남짓 얘기를 나눴다. 시바스찬 회장은 “‘플랜 인터내셔널’은 장기 계획을 통해 어린이들이 자립, 사회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돕는 단체”라면서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는 어린이들을 돕는 것은 ‘의무’”라고 말했다. 시바스찬 회장은 북한 어린이 지원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북한의 상황을 좀더 알고 싶어 한국에 왔다.”면서 “한국이 북한 지원의 교두보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고 기대했다. 이 자리에는 9세 때부터 ‘플랜 인터내셔널’을 통해 도움을 받았던 유영수(44)씨가 후원자로 참석, 눈길을 끌었다.11세 베트남 소녀를 돕고 있는 유씨는 “‘플랜 인터내셔널’을 통해 소개받은 미국인이 후원해 주는 생활보조금으로 가난을 이겨냈다.”면서 “내가 받은 사랑을 되돌려줄 수 있어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어린시절 형이 이곳을 통해 도움을 받았다는 김진범(48)씨 역시 “더 많은 사람이 마음을 열고 더 어려운 처지의 어린이들을 도왔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지난 37년 영국에서 설립된 ‘플랜 인터내셔널’은 15개국에서 100만여명이 회원으로 가입, 네팔·방글라데시·베트남·에티오피아 등 45개국 110만여명의 어린이를 돕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6·25전쟁이 끝난 지난 53년부터 26년 동안 ‘양친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삶과 경영이야기] (32) ‘국궁 경영론’ 김영훈 대성그룹 회장

    [삶과 경영이야기] (32) ‘국궁 경영론’ 김영훈 대성그룹 회장

    대성그룹의 김영훈(52)회장은 21세기에 맞는 미래기업을 지향하는 2세 경영인이다. 그의 미래기업론은 회사의 주력인 핵심업종을 우선 전문화한 뒤 이와 병행해서 기동력있는 전략업종을 키우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같은 목표를 제대로 완수하려면 이론과 실제가 잘 무장된 학자풍 CEO(최고경영자)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21세기에는 유연하고 합리적인 사고, 감각이 더 빛을 낸다는게 그의 지론이다. ●대성의 모태는 칠판공장 1947년 설립된 대성은 연탄산업을 통해 한때 재계 10위권을 넘나들던 국내 대표적인 에너지기업이었다. 그러나 연탄과 석탄이 주 에너지원의 자리를 석유, 가스, 원자력 등에 내주자 도시가스 망사업으로 명맥을 유지하며 옛 영광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 대성은 2001년 2월 창업주인 김수근 명예회장이 작고하면서 3개 소그룹으로 분할됐다.3형제중 장남인 김영대(62)회장은 그룹의 모태인 대성산업 등 8개 기업을 맡았고, 차남인 김영민(59)회장은 서울도시가스 등 5개 계열사의 경영권을 쥐었다. 삼남인 김영훈 회장은 대구도시가스 등 15개 기업의 경영인이 되었다. 한때 형제간의 경영권 분쟁으로 재계의 눈총을 받기도 했으나 김 명예회장이 생전에 지켰던 서울 안국동 본사 집무실을 김영훈 회장이 넘겨받으면서 김 회장이 사실상의 총수 자리를 넘겨받았다. 김 회장은 “대성그룹의 모태는 칠판 공장이었다.”는 흥미로운 얘기를 털어놨다. 아버지 김 명예회장은 대구 출생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잠시 은행원으로 근무하다 해방후 국내 최초의 무연탄 회사를 세웠다. 변변한 사업을 펼치기도 전에 6·25전쟁이 터져 사업 기반을 날려버렸다. 이때 칠판 제작공을 만나 칠판을 만들었으나 전쟁통에 잘 팔릴 리가 없었다. 애써 만든 칠판은 창고에 쌓여만 갔다. 전쟁이 끝난 뒤에 정부가 학교를 복구하기 시작하자 칠판이 대량으로 필요했으나 시장에 남아있는 칠판이 거의 없었다. 국군이든 북한군이든 넓은 운동장이 있고, 건물이 반듯한 학교를 군 주둔지로 사용하면서 교실의 칠판을 모두 땔감으로 불태웠기 때문이다. 창고에 칠판이 가득했던 김 명예회장으로서는 대박이 터진 셈이다. ●공부벌레가 전문경영인으로 김 회장과 6형제·자매들은 엄격한 기독교 집안에서 근검절약을 몸으로 실천하며 자랐다. 그는 “제 자식들에게도 어릴적부터 존댓말을 쓰도록 하고,‘돈은 반드시 일을 해서 버는 것’이라고 가르친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뒤 8년 동안 학문과 씨름했다. 미국 미시간대에서 법학석사, 경영학석사를 마친 뒤 하버드대에서 신학과 경제학 석사를 마쳤다. 그의 본래 꿈은 신학자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공부벌레’로 불렸다. 요즘도 한 달에 10여권의 책을 읽을 정도다. 그러나 88년 미국에서 아버지 김 명예회장의 갑작스러운 부름을 받고 귀국한다. 대성산업 기획조정실장직이 그에게 맡겨졌다. 김 명예회장이 예전같지 않은 건강과 다가오는 21세기의 대성을 걱정한 탓이다.36살의 김 회장은 부실 계열사를 정리하고 재무구조를 개선하는 일에 매달렸다. 유학 기간 중 잠시 미국계 은행의 한국지사에서 매니저로 일한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그는 다른 기업들이 은행대출로 외형을 부풀릴 때 이자율이 높은 종합금융사와의 거래를 줄이고 내부의 유보자금이 일정액을 넘지 않도록 적절히 조정했다.13년뒤에 그가 대성산업의 대표이사에 올랐을 때 연매출은 2조원에 이르렀다. 특히 외환위기 당시인 98년 대기업의 평균부채율이 380%였으나 대성그룹의 부채율은 140%에 불과했다. 그는 은행에서 일할 때 조금은 무모해 보이던 ‘동아건설의 리비아 대수로 건설공사’에 적극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해 큰 성공을 거뒀다고 회고했다. 김 회장은 “일의 성사는 크고 작음을 떠나 얼마나 전문적이고 합리적으로 파고드는가 하는 것”이라면서 “역경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으나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합리적인 사고로 정확한 판단을 내린다면 성공은 뒤따를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각화와 전문화의 결합 김 회장은 “미래는 ‘Economy of Mobility(기동성 경제)’의 시대”라면서 “곧 환갑의 나이를 맞는 대성그룹은 변화의 시대에 새로운 창조와 도전을 위해 ‘CEM 경영’을 21세기 경영지표로 삼았다.”고 말했다.CEM이란 도전과 변화, 창조를 각각 의미하는 영어 단어의 이니셜 ‘C’와 경제를 뜻하는 ‘E’, 기동성을 나타내는 ‘M’에서 따왔다. 그는 또 그룹창립 50주년을 맞던 97년 그룹의 주력업종을 ‘CEM’라고 제시했다. 즉 에너지와 환경의 ‘E’, 투자의 ‘M’, 정보통신과 건설의 ‘C’다. 이에 대한 그의 설명이다.“에너지가 주력인 회사는 환경문제와 자연스럽게 직면하게 되고, 환경은 곧 건설사업과 연계된다. 건설은 인텔리전트 빌딩 등 첨단 정보통신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고 이같은 모든 사업은 자금운용이 뒷받침돼야 가능하다.”즉 사업을 복잡하게 다각화하더라도 충분한 개연성이 있는 분야를 선택해 집중하면 ‘시너지 효과’가 크다는 말이다. 그룹의 핵심업종인 에너지 사업은 더욱 전문성을 갖추면서 환경·건설·정보통신 등 주력업종의 다각화를 통해 수익모델을 만들도록 했다. 김 회장은 “도시가스 사업은 리스크가 낮지만 순이익이 높지 않다.”면서 “돈은 ‘하이 리스크-하이 마진’ 사업을 통해 번다.”고 부연했다. 최근 그가 관심이 있는 에너지 사업은 두가지다. 인도네시아 사라와크 해상의 가스전에서 중국 상하이까지 바다속으로 4875㎞의 가스관을 설치하는 ‘AGG’사업이다.2008년 베이징 올림픽 이전 완공을 목표로 아시아 6개국이 사업법인을 공동 설립하고, 대성 등이 지분 참여를 한다. 김 회장은 2002년 4월부터 법인의 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중국의 에너지 수요는 가히 폭발적”이라면서 “직송 가스관이 만들어지면 중국 전역의 에너지 공급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특히 그는 “내 꿈은 한국의 인천항까지 추가로 해저에 가스관을 설치해서 유조선이 해적들이 출몰하는 남중국해를 지날 필요가 없이, 가스관을 통해 안정적인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하나는 몽골의 고비사막에 태양광·풍력 복합발전소를 건설하는 것이다. 낮에는 태양광으로, 밤에는 풍력으로 사막의 지하수를 끌어올려 ‘고비사막의 녹화사업’도 한다는 계획이다. 주한몽골 명예영사이기도 한 그에게 몽골 정부는 든든한 후원자인 셈이다. 김 회장은 “주력인 핵심업종엔 무심한 채 전략업종의 다각화에만 몰두하면 핵심업종은 경쟁기업에 밀려 주저앉고, 전략업종마저 부실해진다.”면서 “미국의 펩시콜라가 코카콜라에 자꾸 밀리면서 콜라 외에 패스트푸드 등에 손을 댔다가 결국 콜라시장마저 거의 코카콜라에 내주고 만 것이 교훈”이라고 소개했다. ●국궁경영론과 주인 의식 김 회장은 ‘국궁 경영론’을 펼치기도 한다. 그는 “활시위를 팽팽히 당기는 것은 가장 좋은 발시의 기회를 만들기 위한 과정인데, 경영도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에는 시장동향, 경쟁업체 현황, 목표점 등 각종 정보를 수집하고 철저히 분석해야 한다. 김 회장은 수년전 어깨가 아파 한 은행장의 권유로 국궁을 시작한 뒤 지금은 마니아 수준 이상의 실력을 갖췄다. 새벽 4시에 일어나면 화살없이 활시위를 당기는 체조를 한다. 요즘은 주변 사람들에게 국궁을 권하며 전파하는 일에도 재미를 느낀다. 김 회장은 ‘주인의식’ 경영론으로 이어간다. 즉 “사원들이 각자가 경영인이라고 마음을 먹게 되면 각자의 발전은 물론 덩달아 기업도 건강하게 발전한다.”고 했다. 그는 마음씨 좋게 보이는 인상만큼 직원들을 편하게 대해주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일주일에 한번씩 순번을 정한 직원들과 함께 영화를 감상하고 토론하는 일도 중요한 경영 일과중에 하나다. 최근엔 영화사업에도 일부 투자하고 있다. ■ 김영훈 회장은 김영훈 회장은 한국의 명문학교를 나와 미국 명문대에서 유학, 법학·경영학·신학·경제학 등 4개의 석사학위를 취득한 수재형 최고경영인(CEO)이다. 그리스신화, 인문학, 음악, 영화에도 취미 이상의 지식과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런 만큼 그의 경영지론은 철저한 분석을 통한 정확한 판단으로 투자위험을 줄이는 것으로 모아진다. 하지만 자신은 중국 고전에 등장하는 지장인 한신이나 용장 항우가 아닌 덕장인 유방이 되길 원한다. 그가 57년 역사의 대성을 연탄·도시가스 기업에서 에너지·환경·정보통신 등 복합형 기업으로서 정상에 끌어올릴 수 있을지 관심을 끈다. 김 회장은 한국도시가스협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문화산업특위 위원장, 주한몽골 명예영사, 한국능률협회 부회장, 사랑의 집짓기운동연합회 한국본부 이사 등도 함께 맡고 있다. 김경운기자 kkwoon@seoul.co.kr
  • ‘11월 호국인물’ 고광수 공군대위

    전쟁기념관(관장 김석원)은 6·25전쟁 당시 중동부전선에서 빛나는 전공을 세운 고광수 공군 대위를 ‘11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했다. 1929년 10월 광주에서 태어난 그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7월 공군사관학교 1기로 졸업, 소위로 임관했으며 한국군 최초의 정찰비행부대에 이어 교육부대 등에 배속돼 정찰 및 후배 양성임무를 수행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계급 특진과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전쟁기념관은 다음달 4일 호국추모실에서 유족과 공군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고인을 추모하는 헌양행사를 거행한다.
  • [문학이 머문 풍경]요산 김정한

    [문학이 머문 풍경]요산 김정한

    하늘과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맑은 가을이 되면 부산사람들에게는 새록새록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사람답게 살아라’라고 일갈한 부산의 대표적 향토작가이자 민족문학의 큰별 요산 김정한(金廷漢)선생(1908∼1996)이 바로 그다. “사람답게 살아라.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불의에 타협한다든가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의 갈 길이 아니다.” 자신의 소설 ‘산거족’중에서 나오는 한 대목이지만 이는 요산선생의 생전 좌우명이기도 하다. 대쪽같은 성품의 소유자로 늘 힘없는 사람들의 아픔을 대변했던 요산은 지인과 수많은 제자들에게 항상 올곧게 살기를 강조했다. 그래서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8년째 접어들지만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1940년 일제의 우리말 말살정책이 노골화되자 “왜놈의 문자로 글을 쓸 수 없다.”며 교직을 그만두고 붓을 꺾은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이같은 그의 성격은 자연스레 자신의 작품에 스며들었고, 화려한 꽃보다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들풀처럼 강인함과 저항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데뷔작인 ‘사하촌’과 ‘옥심이’,‘모래톱 이야기’,‘산거족’ 등 그의 작품에 잘 녹아있다. 1978년 산문집 ‘낙동강 파수꾼’이 발표된 이후 사람들은 그를 낙동강 파수꾼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낙동강은 요산에게 영원한 작품의 무대요, 고향이기 때문이다.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향 부산에서 평생을 보낸 요산선생은 지금도 부산지역 문화계의 커다란 정신적 지주로 우뚝 솟아있다. ●요산 연보 1908년 당시 경남 동래군 북면 남산리(현 부산 금정구 남산동)에서 중농인 김기수씨의 장남으로 태어난 요산은 서울 중앙고보를 다니다 동래고보로 전학, 학업을 마쳤다. 선생은 경남 남해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193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사하촌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이후 ‘옥심이’,‘항진기’ 등 8편의 단편을 조선일보, 조광(朝光), 문장(文章)지 등에 발표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수차례 옥고를 치른 선생은 손수 우리말사전과 식물도감을 만들며 민족혼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56년 광복전에 썼던 작품을 모아 ‘낙일홍’이란 소설집을 간행했으나 다시 창작작업에 들어간 것은 절필 이후 26년만인 1966년이었다. 이때 발표한 작품이 부산 을숙도를 배경으로 한 ‘모래톱 이야기’다. 요산의 호에 대해서는 견해가 엇갈린다.93년 최원식 인하대 교수와 대담한 자료에 따르면 원래 아호가 ‘연산’이었다고 한다.6·25때 정치적인 혐의를 받고 특무대에 붙잡혀갔는데 당시 연산이란 호가 산에 있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취하는 사람인 줄 알고 취조관이 아지트를 대라고 하는 바람에 몹시 혼이 났다고 한다. 같이 붙잡혀 당시 상황을 함께 겪었던 ‘동산’이란 선배가 “무식한 취조관이 많으니까 호를 요산으로 고치라.”고 해 그때부터 요산으로 바꿔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산의 생가 관리를 맡고 있는 사촌 동생 김재한(70)씨는 “이는 사실과 다르다. 할아버지께서 어릴 때 형님의 호를 요산으로 지어주셨다는 말을 직접 들었다.”며 잘못 전해진 것이라고 정정했다. 요산선생은 한국앰네스티위원과 민족문학작가회의 초대회장을 역임했으며 한국문학상, 문화예술상, 심산상 등 많은 상을 수상했었다. ●요산 생가 부산 금정구 남산동 범어사 밑에 자리잡고 있는 요산 생가는 사후에 지역문인과 뜻있는 인사들의 후원과 부산시의 예산을 지원받아 지난 2003년 말끔하게 복원됐다. 금정산 산자락 아래 주택가 사이 골목길에 들어서면 널찍한 마당에 팔작 지붕의 4칸 한옥이 눈에 들어온다. 선생이 태어나 결혼하기전까지 살았던 생가에는 생전 소장했던 도서와 저작물, 문헌정보, 서화작품, 생전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직접 만든 사투리 사전 등이 전시돼 있다. 관리인 김씨는 요산선생에 대한 일화를 내년쯤 책으로 출판할 계획이다. 김씨는 “생가 바로 옆에 건립할 예정인 요산문학관 건립이 예산문제로 답보상태여서 마음이 아프다.”며 “하루빨리 건립돼 요산선생의 정신을 계승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제자이자 요산문학 연구가인 경성대 조갑상(55) 교수는 “데뷔작인 ‘사하촌’은 당시만 하더라도 단편으로서는 대작이었으며 요산은 주목받는 신인 중 한명이었다.”고 말했다. ●요산문학제 올해로 7회째를 맞는 ‘요산문학제’가 지난 16일부터 23일까지 열렸다. ‘요산, 민족문학을 넘어서’의 주제로 열린 이번 문학제는 부산을 뛰어넘어 울산, 경남 등 영남권을 아우르는 문학축제로 한층 더 성숙됐다. 이번 요산문학제에서는 특히 ‘시·소설 퍼포먼스’와 ‘전국 사투리 경연대회’가 처음으로 열려 주목을 끌었다. 그리고 소설무대가 됐던 낙동강 하구언∼을숙도∼구포∼원동∼삼랑진 뒷기미 나루를 둘러보는 낙동강 뱃길을 따라가는 요산문학 기행도 문학도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