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6·25
    2026-06-25
    검색기록 지우기
  • 2026-06-25
    검색기록 지우기
  • SEO
    2026-06-25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9,334
  • “조상의 소중한 발자취 전하고 싶어”

    “40여년 동안 정성껏 수집한 고려·조선시대 유물을 많은 학생들이 볼 수 있도록 모두 기증했습니다.” 부산 해운대구 우동에 사는 조만규(76)옹은 최근 동네에 있는 부흥고등학교에 고려 및 조선시대 유물 70여점을 기증했다. 이 학교는 기증받은 유물로 교내박물관을 만들어 최근 문을 열었다. 유물은 고려시대 흑유주병, 청자광주구병, 고려청자 잔과 접시, 조선시대 청와백자 주병, 상평통보, 마패 등이다. 골동품 시가로는 수백여만원에 이른다. 평양 출신의 조옹은 6·25전쟁 때 혈혈단신으로 부산으로 피란와 북부위생㈜의 대표이사를 지내다 2005년 퇴임했다. 그는 1960년대부터 전국을 돌아다니며 취미삼아 도자기 등 골동품을 하나둘씩 사모았다. 소중한 우리 문화재가 일본 등 외국으로 무분별하게 유출되는 것이 안타까워 악착같이 유물을 수집했다. 이렇게 반평생에 걸쳐 모은 유물은 모두 2500여점. 금액으로 환산하면 수억원어치에 이른다. 그는 나이가 들자 귀중한 유물을 여러 사람이 보고 느낄 수 있도록 지난해 진주박물관과 동아대 박물관 등 10여곳에 2000여점을 기증했다. 이어 50여년간 살고 있는 지역의 학교에도 교육용으로 도자기류 등을 내놓은 것이다. 수집을 하면서 골동품에 대한 안목도 키워 출장감정까지 한다는 조옹은 남은 소장유물 500여점을 곧 국립박물관 등에 기증하기로 했다. 조옹은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조상의 소중한 발자취를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김은국 소설 ‘순교자’ 연극으로

    김은국 소설 ‘순교자’ 연극으로

    ‘무거운 연극의 부재.’ 공연계의 현재를 걱정하는 목소리에 섞여 나오는 오래된 주제 가운데 하나다. 한국 신극 100주년 및 세종문화회관 30주년 기념작인 서울시극단의 ‘순교자’(6월1일까지세종M시어터)는 바로 그 틈새를 의식적으로 파고든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역설적이게도 ‘형식에 대한 고민 없는 주제의 진중함’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스스로 묻게 만든다. 촛대가 드리워진 평양 중앙교회.6·25 전후의 쇠락함과 비참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이 공간엔 헐벗은 노숙자만 군데군데 앉아 있다. 여기에 육군본부 정보국장 장 대령과 육군특무대로 평양에 파견된 이 대위가 등장한다. 대령은 대위에게 한국전쟁 당시 공산당에 감금된 14명의 목사를 조사하라고 지시한다.12명은 처형당했고 2명은 살아남았다. 죽은 자는 어떻게 죽어 갔으며 산 자는 어떻게 살아났는지 밝히라는 것. 당시 이들을 처형한 공산당의 정 소좌는 목사들이 “개처럼 죽어 갔다.”고 진술한다. 죽음 앞에서 신앙을 부정한 변절자였다고. 살아남은 신 목사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순교자였다고 거짓 고백한다. ‘순교자’는 1969년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른 김은국의 동명소설을 무대로 옮긴 것. 극은 이 대위의 ‘1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전개된다. 대사로 이미 다 표현한 상황을 주인공의 독백으로 다시 설명하는 식이다. 장면당 10분 이상 끌고 가는, 영화로 말하면 ‘롱테이크’가 많아 집중도가 떨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뮤지컬과 개그쇼에 익숙한 관객들은 적응이 어려울 수도 있다.‘목사들의 죽음의 진상’ 장면이 그리 큰 파문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도 아쉽다. 무거운 연극이 자립하는 길은 표현 방식에 대한 고민 없이는 불가능하다. 지난 4월 선보인 미국 연출가 리 바우어의 ‘인형의 집’이나 16∼18일 개막하는 아이슬란드 연출가 기슬리 외른 가다슨의 ‘변신’은 각각 고전에 뿌리를 댔다. 이 작품들은 진지한 주제에 혁신적인 실험을 가미해 관객의 공감을 얻어낸 사례로 꼽힌다. 그런 의미에서 ‘순교자´는 소설이라는 텍스트를 왜 입체적인 무대로 옮기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봐야 할 듯하다.(02)399-1114∼6.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초중고 교과서 전면 수정 ‘보·혁 마찰’ 부르나

    초중고 교과서 전면 수정 ‘보·혁 마찰’ 부르나

    10년간의 진보정권이 끝나고 보수정권이 들어서면서 예상됐던 일이지만 정부가 초·중·고교 사회교과서의 내용 전반에 대한 수정·보완 작업에 들어갔다. 교과서 개편과정에서 수구 보수세력과 경제단체 등의 의견을 상당 부분 반영할 것으로 예상돼 진보진영과의 마찰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강조돼 왔던 좌파성향의 서술을 걷어 내겠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민감한 한국근현대사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정권교체에 따라 교육의 근간이 될 교과서 내용을 섣불리 바꾸려는 시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15일 “경제단체를 중심으로 역사·경제 교과서 내용에 대한 수정요구가 많아 사회 교과 전반을 대상으로 검토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도연 장관은 지난 14일 “현행 역사교과서가 지나치게 좌편향적인데 대책을 마련하라.”는 질문이 나오자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근현대사가 폄하되지 않도록 (수정)검토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상의 “시장경제 등 337건 왜곡·오류” 대한상공회의소는 지난 3월 초·중·고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경제, 사회, 국사, 근현대사 등 4개 과목의 교과서 60종을 분석한 결과 왜곡·오류 등 337건의 문제점을 찾아 냈다며 교과부에 개선의견을 냈다. 특히 시장경제, 기업활동, 세계화에 대한 편향적인 서술이 많다며 문제를 삼았다. 예를 들어,‘경제 안정면에서 계획경제가 시장경제보다 우위’(고교 경제),‘시장경제하에서 정부의 간섭이 없다면 경기변동 문제가 해결되기 어렵다.’(고교 경제),‘대기업 위주의 수출증대 정책은 중소기업의 발전을 막는 요인이 되었다.’(고교 사회)는 내용 등이다. 또 ‘38도선 곳곳에는 국군과 북한군간에 크고 작은 충돌이 쉴새없이 일어났다.’(고교 근현대사)는 6·25 전쟁이 양쪽 모두에 책임이 있음을 암시하며 북한의 침략을 희석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진보학자 “정권차원의 해석은 잘못” 반발 이같은 비판에 대해 진보진영의 학자들은 “있었던 사실조차 없애려는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는 “지금의 교과서가 좌편향했다는 것은 1987년 이후 한국사회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라면서 “뉴라이트 단체들이 그렇게 나오는 것은 대한민국의 기득권 세력이었던 친일파와 독재자들이 비판을 받는 것을 막아 보려는 시도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임지현 한양대 역사학과 교수는 “친시장적 집단에서는 당연히 예전 노동자 계급에서 국가 발전이나 경제발전을 이뤘다는 말을 빼고 싶을 것”이라면서 “하지만 이들 생각에 맞춰 교과서를 성향에 맞게 바꾸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새달 의견 수렴… 내년 1학기 반영 교과부는 지난달 말 ‘교육과정·교과서 발전협의회’를 열어 이해단체의 의견을 수렴했다. 정부 각 부처, 관련단체 등이 6월 중순까지 수정이 필요한 부분에 대한 구체적 의견을 다시 모아 8월말까지 수정·보완을 한다. 이어 9·10월 두달간 집필자의 수정작업을 거쳐 11월 인쇄에 들어가 12월부터 책이 나와 내년 1학기 교과서부터 반영된다. 김성수 이경원기자 sskim@seoul.co.kr
  • “교회가 권력과 결탁하면 썩게 되죠”

    “교회가 권력과 결탁하면 썩게 되죠”

    신자 5만명, 전체 사제 수 230명의 작은 교회 대한성공회. 많은 일반인들에겐 그저 ‘영국 국교’쯤으로 알려진 소수종교이지만 이 땅에서 1890년부터 선교를 시작해 옹골찬 신앙을 이어 개신교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유연한 교단 운영과는 달리 구성원들의 ‘줏대있는 소신’으로 인해 작지만 강한 교회로 인상지어지는 대한성공회. 내년 1월 박경조 주교의 뒤를 이어 대한성공회 제5대 서울교구장으로 착좌하는 김근상(56) 신부는 어찌보면 성공회에서 가장 ‘성공회적인 사제’중 한 명이랄 수 있다. 어느 자리에서나 분방하게 속말을 뱉으면서도 남의 말을 잘 듣는, 아주 유연하고 강한 신부이다. “성경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처럼 진짜 신앙의 의미는 뻔히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을 이기는 데 있습니다.” 서울교구장 착좌에 앞서 22일 주교 서품을 받는 김 신부는 13일 기자들과 만나 “공부도 못했고, 품성이 썩 고운 것도 아닌데 교구장으로 뽑힌 것은 사제들과 신자들이 함께 잘 어울릴 사람이 누구인가를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겸손한 소감을 밝혔다. ●운동권·베이시스트·연극배우…‘괴짜´ 신부 “교회가 세상의 권력과 결탁할 때 빠르게 부패한다.”는 김 신부는 그러나 “못생긴 나무가 숲을 지키듯 잘나지 못한 이 사람에게 성공회를 지키는 큰 소임이 주어졌다.”면서 뼈있는 말을 이어갔다. “성공회가 500여년간 변함없이 가져온 큰 미덕은 서둘지 않고 민주적 절차를 거쳐 합의점을 끌어내는 것입니다. 제가 맡은 교구장은 바로 이 미덕을 지켜 교회 안팎의 갈등과 대립을 풀고 일치시키는 소임이겠지요.” 법으로 강제하는 공동체가 아닌, 자발적 신앙으로 어우러지는 공동체의 전형이라고 성공회를 설명하는 김 신부. 그는 극우니 극좌니 하는 양단의 분별이 아니라 여러 색깔이 어울려 아름다움을 빚는 무지개처럼 느슨한 일체감으로 어우러지는 성공회의 신앙 전통을 흐트러뜨리지 않겠다고 거듭 강조한다. 서강대 화학과를 3학년 1학기에 중퇴하고 가톨릭대 신학부를 나와 성공회 성미가엘신학원 과정을 마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 재학시절 이른바 운동권에도 몸담았고 밴드에 가입해 베이스 기타를 치는가 하면 연극배우와 연출가로도 뛰어다녔다. 그래서인지 툭툭 쏟아내는 말이며 짓는 몸짓이 어디 한군데에 맺히지 않은 채 자유롭다. 별명 그대로 ‘괴짜’스럽다. ●아버지는 성공회 서울성당 주임사제 외할아버지가 성공회 서울성당 주임사제를 지낸 뒤 6·25전쟁 중 평양에서 교회를 홀로 지키다 순교한 이원창 신부. 아버지는 성공회 서울성당 주임사제를 지낸 김태순 신부. 신학대에 진학할 뜻을 비치자 어머니가 “아버지와 남편을 이어 어떤 여자를 또 데려다 더 고생시키려드느냐.”며 다림질하던 다리미를 집어던졌다고 한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통일위원장과 ‘온겨레 손잡기 운동본부’ 상임대표를 맡아 통일운동과 북한돕기에도 앞장선 활동가. 그 누구에 못지않게 북한동포를 향한 연민이 크지만 “아프리카의 불쌍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손잡고 도와야 할 인간들이기 때문에 돕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민족끼리’라는 말은 아주 싫어한단다. ●“후배 사제들 고통의 땅으로 보낼 것” “불교며 기독교 사람들이 지탄받는 데 대해 종교인의 하나인 성공회 사제로서 공동 책임을 느낀다.”는 김 신부. 종교인, 신앙인으로 손가락질받지 않기 위해 동료 사제와 교우들이 절실하게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100명 중 89명이 끼니마다 먹을 것이 없어 고통받는 오지의 사람들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습니까. 성직자들이야말로 인간의 고통을 본능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훈련을 받고 뛰어야 합니다. 후배 사제들을 라오스며 캄보디아 미얀마 등 고통의 땅에 보내 도전의식을 키울 것입니다.” 글 사진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종교플러스] 원불교 18일 6·25사망자 위령제

    원불교는 18일 오후 7시30분 금강산 온정리 문화회관에서 6·25전쟁으로 사망한 100만 여위의 남북한 및 UN, 중공군 장병들의 영혼들에 대한 ‘민족화해 생명평화 위령제’를 지낸다.150여명의 원불교 원로교무와 교도들이 18∼20일 내금강 일대에서 갖는 순례행사의 하나로 진행한다.(02)813-2203.
  • [Seoul In] 52개교 순회 ‘6·25전쟁 사진전’

    강남구(구청장 맹정주) 6·25 제58주년을 맞아 지역 53개 초·중학교를 순회하며 전시하는 ‘6·25전쟁 사진전’을 연다. 전시회는 13일 일원초등학교를 시작으로 다음달 30일까지 사진 52점이 전시된다. 주민 전시회는 지난 8∼9일 구청 1층에서 가졌다. 전시회에서는 국군방송이 제작한 ‘6·25전쟁의 참상’이라는 동영상도 함께 상영된다. 자치행정과 2104-1231.
  • 동대문 축구장도 역사속으로

    서울 동대문운동장이 14일부터 본격 철거된다. 지난달 철거된 동대문운동장 야구장에 이어 다음달 30일까지 축구장 철거를 마무리함에 따라 동대문운동장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동대문운동장은 일본 히로히토(裕仁) 왕이 왕세자 시절에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일제가 서울성곽을 허물고 1926년 3월 동대문 성터에 세운 것이다. 당시 이름은 경성운동장.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체육시설인 이곳에 일제는 축구장만 건립했지만, 이후 테니스장(34년), 수영장(36년) 등이 잇따라 들어선다. 이후 6·25전쟁 이후인 1959년 야구장을 지으면서 한국 체육의 메카로 떠오른다. 실제 동대문운동장은 1988년 올림픽 이후 잠실종합운동장에 그 역할을 내주기 전까지 각종 국가 대항전과 축구·야구 대회가 열리는 등 한국 근대 체육의 산실이었다. 특히 70년대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리는 고교 야구대회는 장안의 화제였다. 그러나 시설노후화 및 기능상실로 인해 동대문축구장은 2003년 3월 폐쇄돼 임시 주차장과 풍물시장으로 이용돼 왔다. 축구장 내부에 있던 풍물시장은 현재 신설동 구 숭인여중 부지로 이전했다. 서울시는 철거에 앞서 동대문축구장 구조물 철거를 위해 관람석 의자 1만 9000여개를 제거하고 경기장 외부에 먼지를 억제하기 위한 가림막 및 안전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한편 서울시는 동대문운동장을 기억할 수 있는 기념물을 남기자는 문화·체육계 등의 요구를 반영해 축구장 북측 조명탑 2기는 현재 위치에 그대로 보존하고 성화대도 앞으로 조성되는 공원 안으로 이전하기로 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동대문 축구장도 역사속으로

    서울 동대문운동장이 14일부터 본격 철거된다. 지난달 철거된 동대문운동장 야구장에 이어 다음달 30일까지 축구장 철거를 마무리함에 따라 동대문운동장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동대문운동장은 일제가 히로히토(裕仁) 당시 왕세자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서울성곽을 허물고 1926년 3월 동대문 성터에 세운 것이다. 당시 이름은 경성운동장.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체육시설인 이곳에 최초 축구장이 건립됐지만, 이후 테니스장(34년), 수영장(36년) 등이 잇따라 들어선다. 이후 6·25전쟁 이후인 1959년 야구장을 지으면서 한국 체육의 메카로 떠오른다. 실제 동대문운동장은 1988년 올림픽 이후 잠실종합운동장에 그 역할을 내주기 전까지 각종 국가 대항전과 축구·야구 대회가 열리는 등 한국 근대 체육의 산실이었다. 특히 70년대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리는 고교 야구대회는 장안의 화제였다. 그러나 시설노후화 및 기능상실로 인해 동대문축구장은 2003년 3월 폐쇄돼 임시 주차장과 풍물시장으로 이용돼 왔다. 축구장 내부에 있던 풍물시장은 현재 신설동 구 숭인여중 부지로 이전했다.서울시는 철거에 앞서 동대문축구장 구조물 철거를 위해 관람석 의자 1만 9000여개를 제거하고 경기장 외부에 먼지를 억제하기 위한 가림막 및 안전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한편 서울시는 동대문운동장을 기억할 수 있는 기념물을 남기자는 문화·체육계 등의 요구를 반영해 축구장 북측 조명탑 2기는 현재 위치에 그대로 보존하고 성화대도 앞으로 조성되는 공원 안으로 이전하기로 했다.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영원한 YMCA맨’ 전택부 선생이 말하는 스승 스코필드 박사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영원한 YMCA맨’ 전택부 선생이 말하는 스승 스코필드 박사

    ‘아, 스코필드 박사님/호랑이 할아버지 사모합니다./병상에 누워계실 때 찾아가 문안 드리면 ‘난 호랑이가 아니요, 고양이요’/임종이 가까워져서 찾아가 문안드리면/‘난 고양이가 아니요, 참새요.’하며 눈시울을 적시던 호랑이 할아버지, 지금도 할아버지를 사모합니다.’ 올해 아흔이 넘은 할아버지가 38년 전에 떠난 스승을 그리워하며 쓴 추모시 중 일부이다. 스코필드 박사는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Schofield)로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에서 의료, 선교, 독립운동 보도 등의 활동을 한 영국 출생의 캐나다인이다. 한국의 3·1운동을 적극 지지해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렸고,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지난달 10일, 주한 캐나다대사관 1층 로비에서 스코필드 박사를 기리는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스코필드 박사가 1970년 4월12일 81세로 세상을 떠날 때 그의 임종을 끝까지 지켜봤던 오리 전택부(93) 선생은 이날 행사장에서 ‘호랑이 할아버지, 영원히 사랑합니다’라고 다시 한번 읊어 참석자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이날은 또 ‘호랑이 스코필드 동우회’(회장 정운찬 전 서울대총장) 발족식도 함께 열려 캐나다 대사관 신축건물 1층을 ‘스코필드 홀’로 명명했다. 행사에는 데이비드 피터슨 캐나다 토론토대 총장, 김국주 광복회 회장, 김한중 연세대 총장 등의 인사가 참석했다.‘호랑이 스코필드’는 한국명 ‘석호필(石虎弼)’의 ‘호(虎)’와 그의 강직한 성품을 기리는 뜻에서 이름 지었다. ‘영원한 YMCA맨’으로 불리는 오리 전택부 선생. 그는 해마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두 사람이 있다. 스승 스코필드 박사와의 각별한 사제지간의 정이 그 첫번째. 그리고 ‘스승의 은혜’의 노랫말을 지은 아동문학가 강소천이다. 소천과는 한 고향에서 태어나 학교를 같이 다녔다. 함흥 영생고보 시절, 소천은 일본인 교사의 조선학생 차별대우에 항의해 동맹휴학을 주동했다가 퇴학당한 친구 오리 전택부를 통해 항일사상을 길렀다. 둘은 6·25전쟁으로 헤어졌다가 휴전 직후 서울에서 다시 만났는데, 오리는 기독교계에서 운영하는 어린이 잡지 ‘새벗’의 주간으로 있었다.1955년 오리가 ‘사상계’로 옮길 때 소천을 새벗의 주간으로 추천할 정도로 절친했다. 스승의 날을 앞두고,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에서 노년을 보내는 오리를 만났다. 그의 아호는 ‘전택부’의 오리 ‘부(鳧)’에서 따왔다. 어린 시절 오리의 부모가 귀엽다는 이유로 “오리야, 오리야!”라고도 불렀다. 한자로는 ‘나의 동리’라는 뜻에서 ‘오리(吾里)’로 적는다. 그의 집에 들어서자, 맨 먼저 벽에 걸린 김동리 선생의 친필 ‘낙도안덕(樂道安德)’이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궁금해 하자 오리는 “1975년 YMCA총무를 퇴임하면서 ‘무슨 재미로 사나’라는 에세이집을 출간했을 때 동리가 축사한 뒤 직접 써 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스코필드 박사는 우리보다 더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아꼈다며 스승을 회상했다. “2001년 4월20일, 주한 캐나다 대사관 주최로 스코필드 박사의 유품 전시회가 있었지요. 이때 보관해왔던 유서원문과 유품을 기증했습니다. 나더러 조사(弔詞)를 하라고 하기에 (앞에 언급된)‘호랑이 할아버지 사모합니다.’라고 읊었더니 그걸 전시장에 액자를 만들어 내걸더군요.” 스코필드 박사와의 인연은 오리가 서울YMCA총무를 맡았을 때였다. 당시 전택보 YMCA 이사장이 빈털터리나 다름없는데다 소아마비로 다리까지 불편해 절뚝거리는 스코필드 박사에게 승용차를 선뜻 선물했다. 이때 스코필드 박사는 서울대 수의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면서 YMCA를 왕래했고 오리는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3·1운동 때 스코필드 박사는 어떤 역할을 했나요. “그 분이 1916년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가 3·1만세 때 죽거나 다친 많은 시민들을 위해 구호활동에 앞장섰습니다. 당시에는 세브란스병원 의과대학 교수였지요. 특히 경기도 화성군 제암리 사건 때 일본의 만행을 세상에 폭로했지요. 오늘 새로 밝힐 것도 있습니다. 그해 4월15일 3·1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 병사들이 제암리 외에 화성군 수촌마을까지 급습했습니다. 교회당과 집집마다 사람을 가둬놓고 불을 질렀지요. 무차별 총질로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나와 불도 못 끄고 마을의 42가구 중 40가구의 식구들이 대부분 불에 타 죽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스코필드 박사는 자전거로 수촌마을을 오고가며 부상자들을 치료했지요. 이로 인해 스코필드 박사는 국외로 추방됐는데 ‘끌 수 없는 불꽃’이란 책을 써서 한민족의 의거를 세계만방에 알렸지요. 광복 이후 우리 정부의 초청으로 한국에 와서 훈장을 받았습니다.” 오리는 이같은 스코필드 박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1976년 4월19일 수촌마을에 3·1운동 기념비를 세웠다. 이때 직접 비문을 지었다.‘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인생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하더니, 여기 마을 사람들은 호랑이와 의좋게 오래 살며, 길이 길이 낙원을 이루리라.’ ▶스코필드 박사는 동물도 무척 아꼈다고 하던데요. “맞아요. 하루는 침통한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기에 까닭을 물었더니 ‘내 동생이 죽었어.’라고 대답하더군요. 그래서 ‘캐나다에서 동생소식이 왔나요?’라고 다시 물었더니 ‘아니야, 내 동생이 창경원에 있잖아. 창경원에 문제 많아요, 그래서 내 동생이 죽었어.’라고 해요. 그날 아침 신문에 호랑이 한 마리가 죽었다는 신문을 보고 슬퍼했던 것입니다.” ▶유서에는 무엇이 담겨 있었나요. “모 고아원에 돈 얼마 주고,YMCA에는 얼마 주고, 누구누구에게는 얼마를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갑을 열어봤더니 미화로 2500달러밖에 없었는데 주라는 돈은 4000달러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돈을 더 보태 유서대로 했지요. 평생 가난하게 살면서도 그 분은 많은 학생들과 고아들에게 돈을 주면서 ‘돈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야.’라고 하셨지요.” 스코필드 박사는 월남 이상재 선생을 무척 존경했다고 한다. 그리고 캐나다 출신 선교사 게일(G.S.Gale·연동교회 창설자)과 에비슨(O.R.Avison·세브란스의전 창설자) 등이 토론토대학의 선배이자 한국 YMCA창설자였기 때문에 오리에게 YMCA회관 재건에 쓰라며 30달러,50달러씩 돈을 자주 주었다고 한다. “돌아가실 때까지 그분은 서울대 관사에서 혼자 사셨지요. 자식 얘기가 나오면 ‘한국에 아들과 딸들이 많이 있잖아요.’라고 했습니다. 연금과 지지자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으로 여생을 보냈지만 1년 내내 옷 한 벌 사 입지 않고 그 돈을 모았다가 불우 이웃을 위해 썼습니다.” 오리는 스코필드 박사의 유지를 제대로 받들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고 몇번 되뇌었다. 오리는 서울에서 살다가 두 달 전에 도곡리로 이사를 왔다. 서울여대 교수로 있는 아들이 새로 집을 지어 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는 것. 오리는 “아들이 어릴 적 우리 고향집처럼 지었어.”라면서 “나는 일제때 공산주의자였지…, 문익환, 장준하 등도 다 내 친구이고 후배였는데 먼저 갔어.”라고 덧없는 세월을 잠시 떠올린다. 그는 최근 ‘에세이문학’ 봄호에 자신의 마지막 글 ‘상사화의 비밀’이라는 수필을 썼다고 했다.100세까지 건강하게 사시라고 하자 “(인심)쓰는 김에 넉넉하게 200살로 하면 안 되겠나.”며 웃는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마당까지 배웅나온 오리는 “참, 스승의 날이라고 했지, 독립운동가였던 여천 이용설(1895∼1993) 선생 있잖아. 그분도 스코필드 박사를 스승으로 무척 존경했다고 꼭 좀 써줘.3·1운동으로 일본 경찰에 쫓길 때 스코필드 박사가 많이 도와주셨거든.”이라고 했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사설] 북, ‘통미봉남’ 미련 떨쳐야

    북한은 엊그제 영변 핵원자로의 가동일지를 포함해 1만 8000쪽에 이르는 핵문건을 방북한 성 김 미국 국무부 과장에게 넘겼다. 반면 제2의 6·25발발 운운하며 남측에 대해선 적대감을 계속 표출하고 있다. 남북관계가 북·미 관계의 진전에 발맞추지 못하고 삐걱거리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이런 파행이 남북 어느 쪽에도 이롭지 않다고 본다. 북한이 조만간 핵신고서를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 측에 공식 제출하면 북·미 관계에 급진전이 예상된다. 신고 내용을 검증해 큰 하자가 없으면 미국도 대북 테러지원국 해제절차를 밟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북측이 미국과의 직거래로 원하는 반대급부를 모두 얻을 수 있다고 여긴다면 큰 착각이다. 지난 1990년대에도 북·미가 제네바 협상을 타결했지만, 경수로 건설 등 대북 지원의 중심적 역할은 결국 남측이 떠맡지 않았던가. 북측이 남측의 어깨 너머로 도모하려는 ‘통미봉남(通美封南)’은 실제론 가능하지 않다는 얘기다. 6자회담에 앞서 미국이 50만t 대북 식량지원도 검토하고 있다. 인도적 차원에서 좋은 일이지만, 문제는 북한의 올해 식량 부족분을 메우기에는 턱없이 모자란다는 사실이다. 대북 민간지원단체에 따르면 북한주민들은 올봄 지난 90년대 고난의 행군 이래 다시 대거 아사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그런데도 북측이 이명박 정부에 대해 입에 담지 못할 비방으로 남측의 지원 여론에 찬물을 끼얹고 있는 꼴이다. 그렇다고 해서 동족인 우리가 방관자로 남아있을 순 없다. 북한이 어깃장을 놓는다고 해서 대북 지원에 손 놓고 있어선 안 된다는 얘기다. 세계식량계획(WFP) 등 국제기구를 통한 우회적 지원도 북한지도부의 자존심을 감안한다면 검토 가능한 대안일 게다. 그러나 물밑접촉을 통해서라도 직접 지원 방안을 협의하면서 남북관계의 물꼬를 트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고 본다.
  • [열린세상] 북핵문제와 한반도 평화체제의 미래/정영태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열린세상] 북핵문제와 한반도 평화체제의 미래/정영태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한국은 6·25 전쟁의 비극을 겪고 난 이후 ‘불안정’한 평화상태(정전상태)를 유지해 오면서, 전쟁과 폭력의 부재(不在)라는 소극적 평화를 추구함과 동시에 남북한 갈등의 민주적 조정과 남북한 간 교류협력을 제도화하고 활성화하는 적극적 평화를 발전시키는 데 초점을 맞춰왔다. 특히 한국은 새로운 협정, 즉 남북한의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정전협정을 대체하기 이전까지는 정전협정이 잘 준수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반면 북한은 ‘평화=탈(脫)미제국주의’ 공식을 변함없이 추구하였다. 북한은 “평화는 제국주의자들을 쓸어버리지 않고서는 진정한 평화에 대하여 생각할 수 없다.”(김일성 저작집)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북한은 휴전협정 이후 현재까지 끊임없이 한반도에서의 미군철수를 요구하였다. 북한의 평화 관련 주장들은 ‘미제국주의’에 대한 철저한 타도와 승리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이를 거부하는 어떠한 평화노력(‘부르주아 평화주의’)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신념을 깔고 있다. 그동안 북한이 남북 평화협정 제의에서 출발하여 점차적으로 북·미 평화협정 요구로 변화시켜 오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근본적인 ‘평화전략’의 수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남북평화협정이든 북·미평화협정이든 북한 당국이 주한미군 철수를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다. 북한은 미국과의 직접적인 평화협상 시작→주한미군의 기능과 역할 변화→북·미평화협정 체결→주한미군 철수 목표 달성을 그들 고유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대한 남북한의 입장은 첨예하게 대비된다. 남한은 현상유지(정전체제)를 기본으로 하면서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평화프로세스를 선호하면서 북한의 현상타파(정전협정체제를 북·미평화협정체제로) 노력을 억제하는 데 최대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반면 북한의 핵문제가 국제적(혹은 북·미간) 문제로 등장하면서 그들은 이를 북·미 직접협상 지렛대로 최대한 활용하는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하였다. 향후 북한의 핵문제는 다자간 협상(6자회담) 틀 내에서 해결과정을 걷게 될 것이고 여기에는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도 자연히 포함될 것이다. 한반도 평화와 관련된 6자 다자틀의 핵심은 역시 미국과 북한의 직접회담이 될 것이라는 사실에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 미국은 그동안 한·미동맹관계 차원에서 한반도 평화문제를 판단해 왔으며 평화협정 체결 문제와 관련한 미국의 입장은 한국의 입장과 궤를 같이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북한의 핵문제 해결이 미국의 중요한 외교적 사안으로 등장함으로써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대한 미국의 입장이 변화될 수 있는 우려가 상존한다. 따라서 향후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과정은 북핵 문제 해결 과정이 어떻게 진전되느냐에 따라 결정될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지난 4월8일 북·미 양국의 싱가포르 회동에서 핵 신고에 대한 잠정 합의안이 도출된 이후 북핵 협상이 급물살을 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금까지 전해진 바에 따르면 이 합의안은 미국의 유연한 접근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북핵문제 관련 핵심 사안은 플루토늄, 고농축 우라늄(HEU), 대 시리아 핵협력 의혹 등이다. 미국은 풀루토늄 관련 신고와 검증이 자세하고도 철저하게 이루어지도록 요구하면서도 HEU와 시리아 핵 협력과 같은 핵확산 문제는 재발방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조만간 6자회담이 재개될 것이며 여기에서 핵합의 이행차원의 북·미간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가 앞당겨질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해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한 철저한 대비가 요구된다. 정영태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소설가 박경리 타계] 1955년 등단…본지 기자 지내

    [소설가 박경리 타계] 1955년 등단…본지 기자 지내

    1926년 10월28일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박경리는 아버지의 방랑벽으로 사실상 홀어머니 밑에서 생활하며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는 이런 신산한 삶을 잊기 위해 독서와 시작(詩作)에 매달렸다. 훗날 그가 사석에서 “혹시나 어머니의 눈에 띌까 전전긍긍하며 매일매일 시 쓰기에 매달렸다.”고 고백했을 정도로 그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삶의 크나큰 위안이었다. 삶의 고통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박경리는 1945년 진주여고를 졸업한 뒤 이듬해 결혼했다. 그러나 6·25전쟁이 터지고 그해 말 남편을 사별한 데 이어 전쟁 직후에는 아들마저 여의는 참척(慘慽)의 아픔을 겪었다. 이런 절망적 삶은 그를 처연한 문학의 외줄타기로 더욱 거세게 내몰았다.1955년 김동리의 추천을 받은 단편 ‘계산’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이후 그는 오롯이 글쓰기에만 한평생 매달렸다. 1969년 박경리는 자신의 문학적 삶에 큰 걸음을 내디딘다.‘토지’ 1부를 ‘현대문학’에 연재하기 시작한 것.1994년 5부를 끝으로 20여년에 걸친 ‘토지’의 대장정은 막을 내린다.‘토지’를 완간한 그는 1998년 연세대 국문과 교수로 임용돼 후배 양성에 매진하는 한편 99년 토지문화관을 건립, 후배 작가들에게 창작의 공간을 제공해 왔다. 박경리는 뛰어난 작가이기 이전에 유능한 기자이기도 했다.1959년부터 3년여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를 지냈다. 당시 ‘다치기레’(해설 박스기사)를 혼자 쓰다시피하며 필명을 날린 일화들이 전해온다. 그러나 그 자신 언론에 몸담았으면서도 작품활동을 하는 동안 언론과의 접촉은 극도로 꺼렸다. 작가는 오로지 글로만 말한다는 신념에서였다.“작품에 모든 것이 들어있는 만큼 독자들이 읽어주는 것으로 만족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작가가 나서서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것은 그만큼 작품이 미흡하다는 뜻이라는, 스스로를 향한 삼엄한 경계였던 셈이다. 생명운동가답게 그는 일상생활도 아주 소박했다. 새벽 2시쯤 일어나 책을 보거나 글을 쓴 뒤 동이 터오면 텃밭에 나가 손수 심은 고추 등 채소를 정성스레 돌봤다. 토지문화관 옆의 텃밭에도 철마다 푸성귀를 가꿔 오가는 지인들에게 나눠준 그였다. 작가에게 글쓰기 이외의 유일한 위안은 담배였을까. 그는 하루 1갑 넘게 담배를 피운 지독한 애연가였다.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사설] ‘토지’로 돌아간 박경리 선생

    이 찬란한 신록의 계절에 우리는 한국문학의 최정상에 우뚝 서 있던 위대한 문학가 한 분을 다른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슬픔을 겪었다.‘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이 82세를 일기로 어제 영면한 것이다. 지난달 지병이 악화해 입원한 선생은 한달간 산소호흡기에 의존하다 끝내 생의 끈을 놓았다. 박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 공간과 6·25의 혼란기에 청년기를 보냈고, 그 후로도 오랜 세월 엄혹한 군부정권 아래서 민족사의 동통(疼痛)을 남달리 아파한, 한 시대의 지성이었다. 그래서 그가 남긴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시대의 격랑에 휩쓸려 이리저리 부딪치면서 켜켜이 한(恨)을 쌓아간다. 하지만 그 바탕에서 작가가 찾은 것은 ‘불행’이 아니었다. 시대상황으로도 꺾지 못하는 올곧은 저항정신이요, 생명에 대한 외경이요, 인간의 근원적인 사랑과 욕망이었다.6·25를 배경으로 한 초기의 화제작 ‘시장과 전장’,19세기 말에서 광복까지를 다룬 대표작 ‘토지’가 모두 그러했다. 특히 ‘토지’가 한국문학사에 남긴 업적은 어떠한 찬사로도 부족하다 하겠다. 구미 문학이론을 따르지 않은 특유한 전개, 등장인물 700여명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살아나는 묘사, 한국·만주·일본을 넘나드는 스케일 등에서 ‘토지’는 이후 발달한 한국 대하소설의 뿌리이면서 또한 금자탑이었다. 이제 선생의 육필 원고를 더이상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선생의 치열한 창작혼과 생명사랑은 이 땅에 계속 이어지리라고 우리는 믿는다. 그가 남긴 토지문학관이 앞으로도 후배들을 위한 창작교실이자, 환경·생태를 사랑하는 이들의 모임터 구실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련다. 박경리 선생은 그의 작품 이름처럼 ‘토지’로 돌아가 더욱 굳건히 뿌리내렸다.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올해 교단 떠나는 ‘섬진강 시인’ 김용택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올해 교단 떠나는 ‘섬진강 시인’ 김용택

    초·중학교 국어시간 ‘시읽기’에 등장한다. 평범한 농촌의 일상이지만 갖출 것은 다 갖춘, 앙증스러운 ‘동요시’가 아닐까 싶다. 섬진강 시인으로 유명한 김용택(60)씨. 현재 섬진강 상류지역, 전북 임실군 덕치면 덕치초등학교 교사로 몸담고 있다.1970년부터 교사생활을 시작했으니 올해로 38년째. 그 세월 중 20여년이나 2학년 ‘꼬맹이’들의 담임을 맡아 함께 뒹굴었다.‘영원한 2학년’인 까닭이다. 그는 지난 3월21일부터 어린이날인 오늘(5일)까지 아주 특별한 시간을 마련했다. 덕치초 2학년 아이들이 평소 그렸던 그림 150여점을 모아 광주 무등현대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었던 것. 재학생은 물론 2학년을 거쳐간 제자 졸업생들도 많이 참석, 코흘리개 시절을 떠올렸다. 김 시인은 2학년 어린이들과 각별하다. 평소 2학년을 “깨끗한 영혼, 이슬을 단 풀잎”이라며 무척 아꼈다. 이런 그가 올해로 교단을 떠날 것이라는 소문이 들렸다. 에구 섭섭도 하여라. 어린이날을 맞아 그를 만나러 떠났다. 서울에서 전주, 다시 전주에서 버스를 갈아 타고 임실을 거쳐 5시간 만에 강진 터미널에 내렸다. 주름이 잔뜩 파인 할머니 몇분이 좌판을 깔고 산나물을 파는 모습이 눈에 띈다. 택시를 타고 덕치초 정문에 도착한 것은 10분 후. 어릴 적 도화지에 크레파스로 그렸던 한 폭의 그림이 눈앞에 쫙 펼쳐진다. 아담한 2층건물이 회문산을 바로 등지고 섬진강 상류의 물흐름을 묵묵히 감상하고 있는 자태였다. 주위는 온통 푸르름으로 학교를 둘러쌌다. 푸른 잔디밭의 운동장에는 어린이들 몇몇이 즐겁게 뛰어 놀고 있었다. 학교건물 유리창에는 1학년부터 6학년 교실을 알리는 색종이 간판이 붙어 있었다. 김 시인은 운동장 한쪽에 별도의 작은 가건물 공간을 마련, 시도 쓰고 아이들과 상담도 하며 지낸다. 여기에는 각종 문학서적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멀리서 왔다며 반갑게 맞이한다. 머리를 짧게 깎아서 그런지 김 시인은 환갑의 나이지만 40대 후반이라고 우겨도 얼마든지 통할 것 같은 동안(童顔)이었다. 어린이들과 함께 지내면 나이를 안 먹느냐고 인사를 건네자 “그런 것 같다.”며 웃는다. ▶아직도 2학년 담임인가요? “아닙니다. 올해는 국어교과 전담입니다.1∼2학년은 글짓기를 가르치고 3∼6학년은 국어만 가르치고 있지요.2학년만 20년 넘게 맡고 있다가 이번 학기 처음으로 교과전담을 하게 됐습니다.2학년은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대신 진실이 통합니다. 또 한 순간이라도 가만히 있지 못해요. 이는 흡수능력이 가장 왕성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TV나 자동차 등 인간이 만들어낸 도구들이 전혀 없어도 뛰어놀 땅만 있으면 그들은 행복합니다.” ▶20년 동안 2학년 꼬맹이들과 지낸 소감이 있다면? “그들은 진지합니다. 이는 곧 진정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나무가 잎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과정과 같지요. 또 표현을 잘 합니다. 그들이 그린 그림을 볼 때마다 항상 느끼지요. 그래서 몇년 동안 2학년 아이들의 그림을 모아 두었다가 이번에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추억을 만들어주고 또 어른들에게는 우리 어린이들의 진지함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덕치초 재학생은 모두 46명이다.2학년 7명,3학년 11명,4학년 11명 등이다. 하지만 갈수록 학생수가 줄어든다고 했다. 더러는 농촌학교체험을 하러 도시에서 몇명씩 오기도 한다. 김 시인이 어릴 적 이 학교에 다닐 때는 반 학생이 모두 18명. 워낙 가난한 마을이어서인지 중학교에 진학한 학생은 그가 유일했다. 농민이 꿈이었던 그는 농고를 졸업한 뒤 은행대출을 받아 돼지와 오리사육 사업을 하다 그만 망하고 말았다. 서울로 도망가서 빈둥빈둥 지내다 다시 고향에 내려 왔다. 친구들이 ‘선생’을 권유했다.1960년대말 당시만 하더라도 교사수가 절대 부족해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교사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떠밀리다시피 친구들과 함께 사진 찍어 지원서를 제출했더니 혼자만 합격통지서를 받았다.4개월 동안 교육을 받은 뒤 1970년 덕치초 바로 인근의 청웅초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덕치초로 온 것은 1년 뒤였다. 그가 시를 쓰게 된 것은 책을 파는 아주머니를 만나면서였다. 산골에서 무료하게 지내던 차에 ‘도스토옙스키전집’을 구입한 그날로 독서삼매경에 푹 빠졌다. 이후 철학을 생각하게 됐으며 그 생각을 정리하려고 틈틈이 글을 써두게 됐다. 여기에 격동기의 1970∼80년대 사회상을 담다보니 어느날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주위에 감수 받을 시인도 없고 해서 1982년 ‘창작과비평사’에 글을 보내면서 독자들과 만나게 됐다. 결국 1985년 시집 ‘섬진강’을 펴내면서 오늘날 국민적 시인 반열에 올랐다. ▶교단을 떠난다는 소문이 사실인가요, 아직 정년도 남았는데? “6·25 혼란 중에 실제나이보다 세살 적게 호적에 올려져 51년생으로 돼 있습니다. 정년까지 4,5년은 더 남은 셈이지만 솔직히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특별한 이유나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평소 나이 예순이 되면 그만두려고 했지요.” 이어 가장 마음이 아팠던 일을 털어 놓는다. 어쩌면 교직을 떠나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들어 결손가정의 아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제가 가르친 제자들이 서울 가서 결혼해 살다가 가정파탄이 생겨 아이들만 이곳 할머니한테 보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우리 학교에 오게 됩니다. 그 제자 놈들이 저보고 또 (자기네 자식들을)가르치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가슴이 정말 미어지더군요. 그 아이들도 울고 저도 많이 울었습니다.” 이처럼 시들어가는 나뭇잎 같은 아이들을 살려 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애정을 많이 쏟았다. 처음보다 아이들의 상태가 많이 나아졌다고는 했지만 그는 “가난의 대물림과 양극화 현상으로 벼랑끝으로 몰리는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겠느냐.”고 장탄식을 한다. 그는 지난해 모 텔레비전 방송사의 요청으로 덕치초 2학년 아이들과 인간드라마를 한편 찍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이들과의 이별’을 예감했다고 고백했다. 행복과 보람, 말할 수 없는 어떤 안타까움이 동시에 교차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교육 현실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 아이들이 놀 줄을 모른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같이 놀아 줄 상대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독선적이고 이기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합니다. 이는 정서가 고갈되고 교육이 점수위주로 이뤄지는 탓입니다. 교육정책 자체가 21세기의 개념도 모르고 방향도 잃고 있지요. 대안은 환경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이루는 생태 순환적으로 가야 합니다.” 그는 이달에 책 2권을 낸다. 지금의 섬진강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것과 초등학교 이전에 경험했던 고향마을(덕치면 진메마을) 이야기를 모았다. 교단을 떠나면 글쓰는 일에만 전념할 것이냐는 질문에 “이달부터 고향마을에서 노모를 모시고 사는 것이 지금의 계획”이라며 웃어 넘긴다. 슬하에 아들 둘을 두었으며 모두 대학생이다. 전주에서 출퇴근해온 그는 곧 진메마을로 집을 옮겨 노모를 모시며 살 예정이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48년 임실 출생. ▲68년 순창농림고 졸업. ▲70년 청웅초등학교 교사. ▲71년 덕치초등학교 교사. ▲82년 창작과 비평사 ‘21인 신작시집’에 작품발표로 문단 데뷔. ▲97∼2002년 운암초등학교 마암분교 교사. ▲02∼현재 덕치초등학교 교사. ▲03∼현재 제4대 전북작가회 회장, 전북환경운동 공동의장. ●주요 수상내역 2002 제11회 소충사선문화상,1997 제12회 소월시문학상,1986 제6회 김수영문학상 등. ●주요 도서작품 콩 너는 죽었다(동시집), 풍경일기(산문집). 시집 섬진강, 맑은날, 꽃산가는 길, 누이야 날이 저문다, 그리운 꽃편지, 그 여자네집, 강같은 세월 외 다수.
  • [책꽂이]

    ●신의 그릇(전2권, 신한균 지음, 아우라 펴냄)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사기장의 이야기. 지은이는 전통 조선사발의 선구자 고 신정희 선생의 장남으로 사기장의 가업을 잇고 있다. 도예 전문가가 쓴 예술가소설답게 철저한 고증과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각권 1만원.●빛을 기억하라고?(손필영 지음, 빛방울화석 펴냄) 199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의 첫번째 시집. 표제시 등 65편의 시가 실려 있다. 자연의 아름다움 등 원초적 세계의 순수성을 진솔하게 담아 냈다.6000원.●서재필 광야에 서다(고유 지음, 문이당 펴냄)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과 의기투합해 거사를 도모한 스무 살 열혈청년 서재필. 그는 정변이 실패하자 역적으로 몰려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의대를 졸업, 한국인 최초의 서양의가 되기도 한다. 서재필의 일생을 소설의 형식을 빌려 재구성했다.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서재필의 고뇌어린 내면세계가 잘 드러나 있다.9800원.●소년병의 일기(박명근 지음, 문학동네 펴냄) 불과 열여섯살의 나이로 6·25전쟁 당시 자원입대해 겪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그린 자전적 참전 일기. 지은이는 “내일을 사는 한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잊어서는 안될 우리의 과거와 미래의 꿈과 용기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말한다.1만원.●파란나비 효과 하루(김주희 지음, 민음사 펴냄) 2004년 ‘피터팬 죽이기’로 제28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작가의 첫 소설집. 표제작 등 7편이 실렸다. 파란나비 원숭이의 이미지로 대표되는 ‘비주류’ 청춘들의 삶과 고뇌를 생동감 있게 담아냈다.1만원.●황제의 밀사(전2권,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열림원 펴냄) 프랑스 출신 작가가 내놓은 장편소설. 타타르족의 반란을 저지하기 위해 러시아 황제의 밀사로 파견된 주인공이 숱한 장애를 극복하고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모험을 실감나게 그렸다.9000원.●꽃들의 질투(이자벨 라캉 지음, 김윤진 옮김, 예담 펴냄) 대한제국의 밀사와 프랑스 여인이 파리를 무대로 펼치는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 지은이는 한국계 프랑스 작가. 한국과 프랑스를 하나로 묶는 작가 자신의 운명적 혈통을 모티프로 삼아 구한말 시대상을 다뤘다.9800원.
  • “전쟁과 분단에 짓밟힌 개인의 삶 그렸죠”

    “전쟁과 분단에 짓밟힌 개인의 삶 그렸죠”

    “아직도 이산의 아픔과 상처가 아물지 않아 마음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것은 제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이들의 상처가 하루 빨리 치유되기를 바랍니다.” 등단 43년째를 맞은 소설가 김원일(66)이 일곱번째 소설집 ‘오마니 별’(강 펴냄)을 내놓았다. 표제작 등 6편이 실린 이번 소설집은 6·25전쟁과 분단 고통 속에서 짓밟힌 작가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분단문학의 대표 작가답게 반세기를 넘긴 분단의 아픔과 개인의 실존을 실감나게 그려 낸다. “전쟁은 이제 멀리 사라져 버린 이야기라고들 여기지만, 분단의 족쇄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죠. 요즘 작가들이 개인사나 연애문제를 많이 쓰고 있지만, 나만큼은 전쟁과 분단 이야기를 다룰 일종의 책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가 느낀다는 ‘책무’는 전쟁체험 세대라는 이유도 있지만 전쟁 중 아버지가 월북한 아픈 기억의 개인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작가가 가장 애착을 느낀다는 ‘오마니 별’은 피란길에 어머니와 손윗누이를 잃고 전쟁 고아로 살아온 한 노인이 죽은 줄 알았던 누이와 반세기 만에 만나는 것을 기둥 줄거리로 삼는다. 전쟁의 충격에 기억을 잃은 채 ‘조평안’으로 살던 노인과 모국어를 잃고 ‘안나 리’로 살아온 누이는 ‘오마니 별’을 매개로 기억과 언어를 되살리며 감격적인 상봉을 한다. 오마니 별은 남매가 피란길에서 헤어졌다가 만날 때 서로 확인하기 위해 동쪽 하늘의 저것을 보고 알아 보자고 정해 놓은 일종의 ‘부신(符信)’과도 같은 별. 일흔을 넘긴 한 노인이 용초도 민박집 민이네에게 들려 주는 이야기 형식으로 전개되는 ‘용초도 동백꽃’도 전쟁이 가져온 이별이라는 점에서 ‘오마니별’과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전쟁고아 출신으로 북파공작원이 된 두 친구 이야기를 그린 ‘임진강’은 북파공작원을 둘러싼 역사적 사실의 증언이 아니라, 생사의 갈림길에서 북파공작원이 느끼는 우정을 다룬다.“그러고 보니 여태 나뭇등걸에 함께 매달려 있던 영규가 보이지 않았다. 부상당한 몸이라 더이상 버텨낼 수 없었던 건가. 노도와 같은 흙탕물 속에서 살아야겠다고 사투를 벌이던 그를 잃자 울컥 눈물이 솟았다.” 분단의 역사가 숨겨온 외면하고픈 진실과 만나지만, 작가는 북파공작원의 참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끌어 안는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에서는 어머니가 빨치산 소탕작전에서 죽은 배다른 둘째아들의 시체를 보고 “예수를 믿지 않았어도 진실로 빈자의 등불이 되려 했던 장한 아들”이라고 말하는 데서도 이념을 넘어선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엿보인다. “이제 나이가 많아 앞으로는 글 쓰는 작업도 쉽지 않을 것 같고…. 그래서 이번 작품집에 더욱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요즘은 젊은 시절에 쓴 작품을 퇴고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는 그는 “옹달샘에서 시작된 물이 강으로 스며들어 있는 듯 없는 듯 희석된 끝에 비로소 바다에 당도한, 적적한 마음”이라며 허허롭게 웃었다.1만 1000원. 글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부시 불신임 69%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률이 갤럽 여론조사 70년 역사상 최악으로 나타났다.21일(현지시간) USA투데이와 갤럽의 공동조사 결과에 따르면 “부시 대통령을 불신임한다.”는 응답자는 69%를 기록했다.1938년 갤럽이 대통령 지지도 조사를 시작한 이후 최고치다. 이전까지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해리 트루먼 당시 대통령이 세웠던 67%가 최고치였다. “부시를 지지한다.”는 응답자는 28%였다.52년 트루먼의 23%에 이어 밑에서 두번째다.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은 2001년 9·11사태 이후 90%까지 치솟았었다. 그러나 임기말 고유가와 서브프라임 모기지론(비우량주택 담보대출) 사태 등이 겹치며 바닥을 모른 채 헤매고 있다.박창규기자 nada@seoul.co.kr
  • 살인범(殺人犯) 박원식(朴元植)은 한방에서 두 여자(女子)와…

    살인범(殺人犯) 박원식(朴元植)은 한방에서 두 여자(女子)와…

    살인강도범 박원식(朴元植·38)이 거쳐간 6인의 여자. 포악하고 비정한 박(朴)이지만 여자다루기에는 명수. 천성이 방랑아였던 그의 발자취가 닿는 곳마다 연인이 생겼고, 그는 또 연인의 돈으로 방랑을 계속, 새 여자를 만들곤 했다. 그의 엽색 행각을 더듬어 보면-. 애인의 돈우려 새 애인 만드는 자금 삼아 박은 1933년3월29일 경남 김해(金海)군 이북(二北)면 병(屛)리 법동곡(法洞谷)부락 695 박모(75·사망)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적에 의하면 박의 형은 1930년에 태어났다가 3살때 죽었으며, 박의 아래로는 3남(34), 누이 둘(29·21)과 4남(24)이 입적돼있다. 이중 4남은 47년에 출생, 53년에 죽은것으로 돼있으나 3남은 주민등록 신고도 없이 행방불명으로 돼 있는데, 부산 영도구 신선동에 살고있는 박의 어머니 김(金)노파(68)에 의하면 3남은 오래전에 죽었다고 한다. 박은 70년 8월 10일자로 김모 여인(30)과 혼인신고가 돼있으며, 70년 3월30일 출생한 딸이 같은 날짜로 입적돼있다. 박이 주민등록증을 발부받은 곳은 시내 서구 남부민동 220번지 4통2반으로 돼있는데 이곳은 박의 시집간 큰누이가 사는곳으로 박이 누이 집에 더부살이 하면서 주민등록을 한것으로 보인다. 박은 찢어지도록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교육도 제대로 받지못했고 고향인 김해에서 국민학교 3년을 중퇴, 집에서 놀고있다가 14살때 김해를 떠나 부산(釜山) 대구(大邱)등지로 떠돌아 다니다 6·25가 나던 해인 18살때 군에 입대, 20살때 제대한것으로 알려졌다. 군에서 제대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박은 남의집 품팔이등으로 가난한 생활을 하다 집안은 부유하나 천성의 벙어리로 시집을 못가고있던 동네 처녀에게 데릴사위 형식으로 장가를 들었다. 장가를 든 박은 처가집에서 놀고먹으면서 벙어리부인을 툭하면 때리는 등 행패를 부리다 1년만에 아무말없이 사라져 버렸다는게 고향사람들이 박을 기억하고 있는 전부다. 이후의 박의 행적중 뚜렷한 것은 22살때 대구지법 영덕지원에서 절도죄로 징역10월을 선고받고 복역했으며, 2년뒤 다시 절도죄로 김천(金泉)지원에서 징역2년, 교도소내에서도 담배를 피우고 소란을 떠는등 문제수(囚)로 지목받았었다. 59년 9월 부산지법에서 모종사건으로 징역7년형을 받고 복역중 64년도 9월 1차감형때 풀려나와 오늘까지 별로 하는일없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베일」에 가린 생활을 해왔다. 성격이 난폭하고 여자낚기와 사격의 명수인 박은 이름도 김창식(金昌植), 박태동등 나오는대로 주워 섬기면서 때와 장소에 따라 「카메레온」처럼 변신해왔다. 박으로부터 제일 처음 피해를 입은 한독약국 김근상씨(34)에 의하면 김씨가 박을 본 것은 7년전이었는데 이때 박은 자기가 모처에서 일을 한다면서 거드름을 떨며 알수없는 몇마디 말을 하고 헤어진후 강도를 당한 지난 6월29일밤 처음 봤다는 것이다. 이처럼 박의 행적은 뚜렷하지않은데, 호적에 입적돼 있는 본처와 어머니가 70년2월이후 살고있는 영도구 신선동 본집에도 한달에 한두번 바람처럼 나타났다가 생활비조로 1,2만원을 던져주고 휙 나가버려 처와 어머니도 박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있다. 박이 현재 본처로 돼있는 김모여인을 만나기는 68년도에 박이 탕아로 부산의 사창가인 완월동 등지를 드나들면서 만나 서로 정이 들자 동거생활로 들어갔다한다. 이때(68년12월) 박은 웬일인지 대구로 김여인과 함께 옮겨가 지난 11일 제2의 범행을 저지른 대구시 비산(飛山)동 296의30 진(陳)기춘씨집 근처에 집을 얻어 생활을 하면서 사형인 진씨에게 『생활이 곤란하면 함께 일본으로 뛰자. 준비는 다 돼있다』는 등의 말로 자주 접근해 왔다. 이를 수상히 여긴 진씨가 모기관에 박을 고발했는데, 고발당한지 5일만에 다시 박이 나타나 『재미없다, 죽을줄 알아라』는 등의 협박을 하고는 부산으로 간다면서 대구에서 바람같이 사라져 버렸다. 여자다루는 마력(魔力) 지녔나? 질투없이 몸대고, 돈대고 70년 3월 부산에 나타난 박은 친척들이나 자기를 오래알고 있던 곳에는 전연 얼굴을 내밀지 않고 남부민동 220 자기 누이집으로 『자신이 다른지방으로 전근간다』면서 가족을 보내고는 행방을 감추었다. 이리저리 혼자 떠돌던 박은 이해 6월 송도 모주점에서 두번째 내연의 처인 문(文)모여인(28)을 만났다. 해녀생활을 하다 주점에 나온지 얼마 안된 문여인은 박의 능수능란한 여자다루는 솜씨에 그만 녹아떨어져 자기집에서 박과 함께 동거생활을 시작했다. 문여인은 이때 얼마나 박을 좋아했는지 박없이는 세상을 살아가는 맛이 없다는 식으로 제나름의 시를 지어「노트」에 적어놓는등 박을 붙잡기에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박은 두달후에 온다간다 말한마디없이 문여인의 곁에서 증발했는데, 이때 박은 문여인덕으로 먹고살면서 부산의 번화가를 드나들다가 중앙동 K다방의 고용「마담」으로 있던 김모여인(28·동래구 부곡동)을 구슬러 김여인의 언니가 살고있는 부곡동으로 김여인과 함께 옮겨가 버렸다. 박은 새로 사귄 김여인과 어울려 김해를 비롯, 경남(慶南)의 명소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연인과의 정을 두텁게 했다. 하는일없이 놀고먹는 박은 무슨 해상장사를 하겠다는등 알쏭달쏭한 소리를 해가며 김여인과 김여인의 언니돈 89만여원을 갖다 흥청대면서 지난 5월 박이 김여인과 함께 일본으로 밀항하기위해 함남동 문여인집으로 올때까지 죽 이곳에 눌러있었다. 5월말 문여인집으로 김여인과 함께 옮겨온 박은 한집에서 한달가까이 김여인을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여인들을 잘돌봤는지 이들은 한번도 싸우거나 불평을 늘어놓은적이 없다고한다. 타고난 「플레이·보이」인 박은 공식적으로 드러난 김·문등 여인말고도 서울 모다방에 있다는 손(孫)모, 대구에 있다는 김(金)모등 이루 헤아릴수없을 정도로 많은 여인들을 주변에 두었는데 이들에게서 들은 박의 여인낚기의 특징은 뛰어난 화술에 있다는 것이다. 중졸정도의 교육을 받은 여인들은 박과 앉아 5분정도만 이야기해도 금방 좋아질 정도로 그는 이 방면에 비상한 재간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부산(釜山)=김홍석(金弘錫) 기자> [선데이서울 71년 7월 25일호 제4권 29호 통권 제 146호]
  • [글로벌 시대] 함께 살아가는 글로벌 시대/ 전혜경 유니세프 일본사무소 조정관

    [글로벌 시대] 함께 살아가는 글로벌 시대/ 전혜경 유니세프 일본사무소 조정관

    2001년 2월 유엔난민기구(UNHCR)에서 JPO (Junior Professional Officer, 자세한 내용은 http:///www.unrecruit.go.kr/참조)로 근무하기 시작한 나는 그해 11월 처음으로 난민 캠프를 가게 됐다. 개인적으로 중학교 시절부터 난민, 특히 난민 어린이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으며 그들을 위해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에 잠비아로 향하는 나는 매우 들떠 있었다. 처음 밟은 아프리카 대륙은 매우 아름다웠고 잠비아 사람들은 따뜻하고 친절했다. 수도 루사카의 UNHCR사무소에서 잠비아에 있는 난민들에 대한 브리핑을 받은 후 앙골라와 국경이 있는 웨스턴 프로빈스로 출발했다. 이후 몽구라는 도시를 거쳐 낭웨시 난민 캠프에 도착했다. 잠비아의 이웃인 앙골라는 당시 내전 중이었고 내가 도착하기 며칠 전부터 하루에 수백에서 수천명의 앙골라인들이 국경을 넘어 잠비아로 피란하는 상황이었다. 수십일을 걸어온 난민들의 모습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대부분 노약자들이었다. 그나마 보이는 젊은 남자들의 대부분은 지뢰에 다리를 다친 사람들이었다. 마침 그때가 우기였는데 갑자기 수많은 난민들이 국경을 넘어오는 바람에 창고에 보유하고 있던 텐트, 주방기구 등의 긴급 지원 물품이 동이 난 상태였다. 그래서 난민들은 장대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여기저기 모닥불을 피워 놓고 구호 물품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생긴 지 얼마 안 됐던 낭웨시 캠프에는 2만명 정도의 앙골라 난민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캠프가 이미 만원이어서 대부분 난민들은 캠프 밖에서 생활터가 지정되기를 기다려야 했다. 어려서 부모님과 집안 어른들로부터 6·25전쟁과 피란 생활에 얽힌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50년이 지났지만 그런 비극은 아직도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바로 내 눈앞에 고향과 가족 그리고 소유한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잃고 타지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보건소를 가 보니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여기저기 심하게 다친 사람들뿐만 아니라 수십일을 걸어오느라 극심한 영양실조와 탈진으로 쓰러진 어린이들로 병실이 가득 차 있었다. 몇몇 아이들은 뼈만 앙상하여 만지면 으스러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 주머니에는 그때 5개월 된 딸아이의 사진이 있었는데 살이 올라 뺨이 터질 것 같은 사진 속의 딸아이 모습과 너무 대조적이었다. 시대와 장소를 잘못 만나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 난민 아이들 때문에 잠비아를 떠날 때까지 딸아이 사진을 다시 볼 수가 없었다. 오늘도 수많은 어린이들이 전쟁뿐만 아니라 가난과 질병으로 사망하고 있다. 작년 9월 유엔아동기구(UNICEF) 발표에 따르면 5세 미만 어린이 사망자수가 처음으로 연 1000만명 미만으로 감소했다.970만이란 숫자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국제 사회의 꾸준한 노력으로 인해 얻은 성과이자 새천년 목표 달성을 위한 희망적인 수치다. 이는 또한 서울시 인구에 비견할 수 있는 규모의 5세 미만 어린이들이 도움을 받지 못해 죽어 가고 있다는 안타까운 사실이기도 하다. 글로벌 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제 이웃이라는 개념을 다시금 생각해 볼 때가 됐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으며 그들을 모른 척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국제기구에서 봉사하는 한국인으로서, 지구촌에 사는 한국인으로서, 훗날 그들의 기억에 한국이 ‘우리가 어려웠을 때 도와준 고마운 나라’로 기억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우리나라가 어려웠을 때 UNICEF를 비롯한 여러 기구와 나라들의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한국도 이제 다른 나라에 있는 어려운 어린이들을 이웃으로 생각하고 더욱더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면 한다. 전혜경 유니세프 일본사무소 조정관
  • [부고] 애국지사 박종길 선생 별세

    [부고] 애국지사 박종길 선생 별세

    일제 강점기 중국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광복군으로 활동했던 애국지사 박종길 선생이 9일 새벽 서울보훈병원에서 별세했다.84세. 1924년 경북 영양에서 태어난 선생은 44년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인 토교대(土橋隊)에서 활동했다. 광복을 맞아 귀국, 육사 5기생으로 입대한 뒤 6·25전쟁에 참가해 용문산 전투, 하천 전투 등에서 공을 세웠다.54년 중령으로 예편한 뒤 3·4·5대 민의원을 역임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63년 대통령표창을,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수여했다. 유족으로는 미망인 정기원(82) 여사와 아들 재민·장락·승민씨, 딸 연화·경란씨 등 3남2녀가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11일 오전 8시,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3묘역이다.(02)3410-6901.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