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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한미군 해외훈련 일상화될 것”

    “주한미군 해외훈련 일상화될 것”

    “(국방개혁을 통한) 변화는 한·미동맹을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존 D 존슨 미 8군사령관(중장)이 20일 서울 용산 미군기지 내 하텔하우스에서 가진 국방부 출입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우리 군의 국방개혁과 관련, “한국군이 지휘구조 시스템을 변화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서 “이 안건에 관해서는 현재 토의가 진행 중이며 결정된 사항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한·미관계를 더욱 강하게 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존슨 사령관은 이어 “미군은 오는 2015년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이후 한국군이 미 공군과 해군을 지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지원할 것”이라면서 “(군의 변화는) 6·25전쟁 이후 (한·미가)함께 겪어 왔던 변화로 서로를 보완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주한미군의 전투능력 강화를 위해 해외 훈련이 일상화될 것”이라고 밝혔다. 미8군은 지난해와 올해 필리핀과 태국에서 다국적군이 모여 실시한 훈련에 참가한 바 있다. 최근 북한의 동향을 묻는 질문에 존슨 사령관은 “지금 한국과 미국 군의 정보공유가 잘 되고 있고 역사적으로 어느 때보다 강력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면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정보 수집 능력을 어떻게 향상시킬지 계속 고민하고 있으며, 현재 특별히 이상한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전작권 전환 이후 미군 전력에 대해서는 “한국에 전개하도록 계획된 증원부대 규모에는 변함이 없다.”면서 “(한국군 중심으로)지휘구조만 바뀌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8군사령부가 군수·행정 기능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유사시 미 국방부에 전력 증원을 요청했지만 지금은 그 기능이 태평양군사령부로 이관돼 사령부에 직접 요청하면 된다.”면서 “유사시 지원 병력과 장비의 전개가 더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게 됐다.”고 전했다. 존슨 사령관은 또 주한미군 병력 유지와 관련해 “그간 특기가 있는 장병을 이라크로 파병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면서 “하지만 이들이 전개됐을 때 같은 능력을 갖춘 인력이 한국에 들어와 인력 공백은 없었다. 한·미 간 합의된 주한미군 2만 8500명을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주한미군이 해외 훈련에 참가할 때 한반도 위기 발생 시 즉시 복귀할 수 있는 이동수단을 확보해 놓는다.”면서 “미 8군 병력은 한국에서의 임무를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간담회에 배석한 미 8군사령부 참모장인 도널드 잭슨 대령은 “(미8군은)미 태평양군사령부와 태평양육군사령부가 주관하는 훈련에 참가하게 될 것이고 이를 통해 한국 내 작전지원 능력을 향상시킬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김일성 생일날 대북전단 30만장 살포… 진보단체와 충돌 없어

    탈북자단체와 보수단체가 각각 김일성 전 주석의 생일(태양절)인 15일 경기 파주시 임진각에서 대북 전단을 북한으로 날려 보냈다. 전단 살포를 반대하며 대립했던 주민단체와의 충돌은 없었다. 자유북한운동연합 등 20여개 탈북자단체 회원 10여명은 오전 6시쯤 대북 전단 20만장을 대형 풍선 10개에 매달아 북으로 날려 보냈다. 전단에는 3대 세습 등의 북한 체제를 비난하고 리비아 사태 등 중동의 민주화 열풍을 알리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탈북자단체는 전단과 함께 1달러짜리 지폐 1000장을 풍선에 넣어 띄웠다. 대북전단보내기국민연합 회원 4~5명도 이날 전단 9만장을 대형 풍선 9개에 매달아 날려 보냈다. ‘북 동포에게 보내는 1달러 담은 자유편지’라는 제목의 전단은 6·25 전쟁의 피해상과 함께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의 실상을 주민들에게 알리면서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양말 300켤레를 풍선에 함께 넣어 보냈다. 이 단체의 최우원 대표는 “풍향이 좋지 않아 보내지 못한 전단 1만장은 특정 일에 임진각에서 가까운 제3의 장소에서 날려 보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장충식기자 jjang@seoul.co.kr
  • [독자의 소리] 청소년들에 안보 교육 절실하다/은평경찰서 보안계 경위 안관종

    얼마 전 관내 학생 50여명과 함께 천안함 폭침 현장 견학을 다녀왔다. 한 대학생은 인터넷을 통해 천안함 사건이 자작극인 줄 알았는데, 직접 현장을 둘러보니 사실과 달랐다는 반응을 보였다. 순간, 학생들에 대한 안보 현장 교육이 절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소년들의 경우 안보 불감증이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최근 한 여론 조사를 보면 초·중·고교 학생들에게 6·25전쟁을 누가 일으켰냐고 물었더니 26.1%가 북한의 남침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특히 학교 교과목에서 역사과목을 선택과목으로 소홀히 취급하고 있어 안타깝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에 대한 국가안보 교육은 분단된 한반도의 미래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 정부 차원의 안보교육 프로그램과 견학장소 개발, 관련 홍보 영상물 제작 등 노력이 필요하다. 학교에서도 일정시간 이상 안보교육이 이뤄질 수 있도록 법령과 제도가 뒷받침돼야 한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국가관 확립을 위해 공교육을 통한 안보교육이 보다 강화되길 바란다. 은평경찰서 보안계 경위 안관종
  • 전사 60년 만에 국립묘지서 만난 형제

    6·25전쟁 당시 열아홉살의 나이로 형을 따라 국군에 입대한 뒤 전사한 동생이 60년 만에 형의 곁에서 영면하게 됐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지난해 10월 말 강원 양구군 방산면 백석산에서 발굴된 고(故) 이천우 이등중사(병장)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기로 했다고 5일 밝혔다. 6·25전쟁 당시 자신보다 4개월 전에 전사한 형 이만우 하사의 묘 바로 옆에 안장될 예정이다. 그동안 발굴된 전사자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해 왔지만 국방부는 관례를 깨고 함께 참전한 형제의 영면을 위해 서울현충원에 안장키로 했다. 경북 청도 농부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이 이등중사는 낙동강전투의 막바지인 1950년 9월 초 형이 입대한 지 한달 만에 홀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원 입대했다. 그는 입대에서 전사하기까지 1년여 동안 서울 수복에 이은 북진의 대열에 서서 평양탈환작전 등에 투입됐다. 하지만 1951년 9월 25일 백석산 탈환을 눈앞에 두고 인근 ‘무명901고지’ 부근 능선에서 전사했다. 형인 이만우 하사는 1950년 8월 1사단에 입대해 낙동강전투와 평양탈환전투에 참여했고 1951년 5월 봉일천전투에서 전사해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국방부는 이날 육군 53사단장과 박신한 유해발굴감식단장을 유가족 자택으로 보내 신원 확인 통지서와 위로패, 유품 등을 전달했다. 유가족들은 먼저 전사한 형 이 하사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사실도 모르고 지내오다 이 이등중사의 발굴로 두 형제에 대한 소식을 모두 확인하게 돼 감격은 더 커졌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서울올림픽 ‘굴렁쇠 소년’ 윤태웅 
7일 뮤지컬 ‘오! 당신이 잠든 사이’에 도전

    [김문이 만난사람] 서울올림픽 ‘굴렁쇠 소년’ 윤태웅 7일 뮤지컬 ‘오! 당신이 잠든 사이’에 도전

    #상황1 감격의 장면을 떠올린다. 1981년 9월30일 독일 바덴바덴.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사마란치 위원장이 전 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울 코레아(Seoul, Korea)!’라는 역사적 단어를 내뱉었다. TV로 실황중계를 지켜보던 대한민국 국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부둥켜안으며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바로 이 시간. 서울 강남에서는 한 남자 아이가 탄생했다. 아이는 이 같은 국가적 경사를 알기라도 하듯 그 누구보다도 ‘응애 응애’ 하는 울음소리가 힘차고 씩씩했다. #상황2 1988년 9월 17일 서울 잠실의 올림픽 메인스타디움. 태권도 격파 시범이 끝나고 잠시 술렁일 때 8살 된 한 어린이가 들어섰다. 까만 반바지에 하얀 반팔 티셔츠, 빨간 챙이 달린 하얀 모자를 쓴 어린이는 굴렁쇠를 굴리며 운동장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굴렁쇠가 쓰러지면 어떻게 하나. 현장의 10만 관중은 물론이고 TV를 지켜보던 전 세계인의 숨조차 멈추게 했다. 잠시 후 어린이는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손을 흔들며 활짝 웃었다. 그제서야 가슴 쓸어내리던 손으로 모두 기립 박수를 쳤다. 어린이는 다시 굴렁쇠를 굴리며 앙증맞게 사라졌다. #상황3 2011년 3월 29일. 서울 대학로 예술마당. 한 청년의 눈빛이 가슴 시리도록 촉촉하게 젖어 든다. 이어 애절하게 노래를 부른다. ‘만남이 달콤함만은 아니듯/이별이 아픔만은 아니듯/사랑에 머물 수는 있어도 절대로 갇히면 안 돼요/열려진 문으로 나가요 무지개를 좇으려 하지 말고/괜찮아 울어도 좋아요/그대를 아껴요 그대가 먼저야.’ 생김새로 보아 여인의 미성일 것 같았지만 남성 특유의 바리톤 음성으로 강한 흡인력을 내뿜는다. 윤태웅(30)씨. ‘영원한 굴렁쇠 소년’으로 통한다. 서울 올림픽 개막식 당시 굴렁쇠 굴리기를 통해 ‘인류의 화합과 번영, 평화’를 전 세계에 전하는 ‘찐한 장면’을 연출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서울은 세계로, 세계는 서울로’라는 영원히 잊지 못할 감동의 도가니를 만들어 냈다. 그가 굴렁쇠를 굴리게 된 인연은 ‘상황1’에서 보듯 1981년 9월 30일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된 바로 그날 태어난 2400명 중 한 명의 호돌이로 뽑혔던 것. ●오디션 거쳐 주인공 ‘닥터 리’ 발탁 올림픽 이후 그는 평범하게 지냈다. 그러다 2002년 6월 서해교전 당시 연평도에서 해병으로 군복무 중인 사실이 알려졌다. 이어 2006년 1월 ‘19 그리고 80’에서 중견배우 박정자씨와 호흡을 맞추며 연극 배우로 데뷔해 화제가 됐다. 그가 이제는 뮤지컬 무대에 도전한다. 오는 7일부터 10월 초까지 대학로 예술마당에서 ‘오! 당신의 잠든 사이’의 주인공 ‘닥터 리’라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게 된다. 윤씨가 뮤지컬 데뷔 무대로 선택한 ‘오! 당신이 잠든 사이’는 공연계의 ‘미다스 손’이라고 불리는 장유정 연출의 작품이다. 2005년 초연 이후 1800회가 넘게 무대에 올렸을 정도로 대학로의 장수 뮤지컬로 손꼽힌다. 지난 29일 대학로에서 한창 연습 중인 윤씨를 만났다. 뮤지컬 배우로 데뷔하는 소감이 어떨까. 비교적 차분하면서도 조용한 말투로 대답한다. “연기를 시작하면서 뮤지컬 배우에 대한 꿈을 갖고 있었고 언젠가는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때마침 오디션을 한다기에 용기를 내고 도전했지요. 처음이라 그런지 잘해야겠다는 욕심과 부담도 동시에 있고 또 한편으로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오! 당신~’에서 그는 다양한 캐릭터를 맡게 된다. 우선 ‘닥터 리’ 역은 가톨릭 무료 병원의 유일한 훈남 의사로 외로운 환자들의 몸과 마음을 함께 치료해 주는 인물이다. 병원장 ‘베드로 신부’와 시종일관 부딪치지만 누구보다 마음이 따뜻한 캐릭터로 감동을 준다. 또한 환자들의 사연이 하나둘씩 펼쳐질 때마다 카사노바, 6·25 전쟁 속 우체부 소년, 동네 양아치 등 다섯 가지의 캐릭터를 소화하게 돼 그의 활약상이 기대된다. “이 작품은 병원에서 어느 날 반신불수 환자가 사라지면서 시작되는 내용이지만 미스터리와 드라마, 로맨스 등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코믹과 감동을 선사합니다. 그동안 이 작품을 보신 분도 많겠지만 새로운 캐스팅으로 다른 감동을 맛볼 수 있을 겁니다.” 뮤지컬이란 연기와 노래, 춤이 함께 뒷받침돼야 관객들에게 감동을 선사할 수 있는 장르다. 그는 지난 2006년 연극 데뷔 때에도 오디션을 통해 무대에 올랐고 연극계 대선배인 박정자씨와 연기를 하면서 나름대로의 실력을 선보였다. 또 현재 출연 중인 tvN ‘롤러코스터’에서도 열연하고 있다. 그렇다면 노래와 춤은? “단기간 노래(성악) 레슨을 받으며 준비를 했지만 역시 어렵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부족한 점도 발견되고 있고, 또 그럴 때마다 깨닫고 배우면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춤이야, 운동신경도 남보다 뛰어나고 어느 정도의 끼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의 연출자는 윤씨에 대해 “놓치기 쉬운 감정선까지도 잡아내면서 캐릭터의 특성을 풍부하게 표현할 줄 아는 배우”라면서 노래와 춤도 잘 소화해내고 있다고 기대감을 전한다. 윤씨는 이번 뮤지컬 무대를 통해 또 한번 연기영역을 넓히는 만큼 기회가 되면 영화 쪽에도 진출해 연기자로서 완성도를 높일 생각이라고 했다. “원래 영화 쪽에도 관심이 있습니다. 준비를 하다가 못한 경우도 있고 해서 언젠가는 완성품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지요.” ●바리톤 음색… 강한 흡인력 내뿜어 화제를 돌렸다. 앞에 언급했듯이 2차 서해교전 때 그는 연평도에서 근무했다. 당시의 상황을 잠시 떠올린 그는 사뭇 진지한 자세로 돌아온다. “그때 해안포 중대에서 근무했습니다. 2002 월드컵 때 한국과 터키의 경기가 있던 날이어서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요. 당시 바로 코앞에서 벌어진 실제 상황이라 처음에는 두려움과 공포로 다가왔지만 전쟁을 가상해서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총을 들고 달려가고 싶은 마음도 들더군요. 우리 해군 병사들이 희생되는 것을 보고 전쟁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비참함도 경험했습니다.” 해병대에 자원한 것은 어릴 적부터 익혀 온 태권도(현재 공인4단)가 계기가 됐다. 해병대 출신인 사범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에서였다. “제가 복무할 때에는 연평도에서 인천을 오고 가는 쾌속정이 없어서 외박은 아예 없었고 휴가를 나갈 때에도 날씨로 인해 일정이 다소 달라지곤 했지요. 중국집에서 자장면 먹고 한 곳밖에 없던 노래방에서 노래도 부르고, 또한 인정 많던 아저씨와 아줌마들과 만났던 기억 등 지금도 마을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런데 지난해 연평도 포격 사건때 피해를 입는 광경을 보고 정말 가슴이 아프더군요. 또 날아오는 포탄에도 불구하고 바로 맞대응하는 후배 해병들을 보고 대견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연평도의 비극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군의 모습에 대해 일부 질타를 받는 것도 있지만 애정 있게 포용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근 불거진 해병대의 구타 문제와 관련해서는 약간 웃으면서 언급을 피한 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로 대신했다. 그는 2009년 10월 치열하게 군생활을 했던 연평도를 다시 찾았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여행지로 연평도를 선택했던 것. 여기에서 그는 우연히 KBS 예능프로그램 ‘1박2일팀’을 만나 깜짝 출연을 한다. 이를 놓고 ‘조작 의혹설’에 잠시 휘말리기도 했다. 그래서 당시 상황을 물었다. ●연출자 “감정선 안 놓쳐… 노래·춤도 잘 소화” “삶이 힘들었을 때 카메라 하나 달랑 들고 무작정 연평도를 찾았지요. 여기저기 사진 찍으며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1박2일팀’을 만났습니다. 녹화 장면을 보면서 사진도 찍고 주변을 얼쩡 거렸지요. 이때 현장에서 프로그램 작가를 만났어요. 작가는 그런 저에게 누구냐고 물었고 ‘88올림픽 호돌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즉석에서 인터뷰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는 살아오면서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아 ‘굴렁쇠 소년’이라는 얘기를 수도 없이 했단다. 이와 관련된 비화 한 토막을 들려준다. “88올림픽 당시 이어령 선생님이 총연출을 하셨지요. 원래 선생님은 동양화의 한 폭처럼 쓱 지나가는 걸로 했습니다. 그라운드에 나와 굴렁쇠를 굴리며 중간에 멈추지 않고 그냥 사라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분야를 맡은 이덕분 세종대 교수가 중간에 박수라도 받게 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우겨서 결국 그라운드 한복판에서 굴렁쇠를 어깨에 메고 손을 흔들며 박수를 받게 됐습니다.” 당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이 ‘혹시 굴렁쇠가 쓰러지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하자 그는 “그런 얘기가 있었는데 이어령 선생님께서 어린이가 굴리는데 아무려면 어떠냐. 쓰러지면 자연스럽게 다시 세워서 계속 굴리라고 했다.”고 회고했다. 그와 인터뷰 시간은 30여분. 연습 스케줄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꿈이 무엇인지 물었다. “비록 짧지만 인생이라는 것이 계획대로 되는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일이 닥칠 때마다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언젠가는 스스로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연극과 뮤지컬 등 닥친 일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영화출연도 제게 좋은 인연으로 다가오겠지요. 지금은 ‘오! 당신이 잠든 사이’에만 몰입할 겁니다.(웃음)” 편집위원 km@seoul.co.kr ●배우 윤태웅은 1981년 9월 30일 88올림픽이 확정되던 날 서울 잠원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희대와 조흥은행 소속 축구선수로 활약했다. 윤씨는 태어난 날짜가 인연이 돼 88올림픽 당시 ‘올림픽 호돌이’에 뽑혔으며 ‘굴렁쇠 소년’이란 별명을 얻었다. 1994년 잠원초등학교를 거쳐 신반포중학(1997년)과 서울고(2000년)를 나왔다. 어릴 때부터 태권도를 배운 그는 해병대 출신 태권도 사범의 영향으로 2001년 12월 해병대에 자원 입대해 연평도에서 군복무를 했다. 2004년 2월 제대한 뒤 곧바로 경기대 체육학과에 복학했고 2006년에 졸업했다. 그해 1월 공개 오디션을 거쳐 ‘19 그리고 80’으로 연극무대에 데뷔했다. 이후 ‘올 인더 타이밍’ ‘난 새에게 커피를 줄 수 없다’ 등에 출연했다. 현재는 tvN의 ‘롤러코스터’에서 열연 중이며 결혼정보 회사 ‘듀오’의 모델로도 활약하고 있다. 오는 7일부터 10월 초까지 뮤지컬 ‘오! 당신 잠든 사이에’에서 다양한 캐릭터로 관객들과 만날 예정이다. 결혼은 내년쯤에 할 생각이란다.
  • [열린세상] 중국 한반도 정책의 미국 요인/황병무 국방대 명예교수

    [열린세상] 중국 한반도 정책의 미국 요인/황병무 국방대 명예교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리비아의 내전이 격화되자 서둘러 비행금지구역 설정과 이를 이행하기 위한 공군력·해군력 사용을 핵심으로 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지상군 투입은 미국의 주저와 중국의 반발로 배제되었다. 그러나 ‘민간인 보호를 위한 모든 필요한 조치’에 따라 카다피 군에 대한 폭격이 실시됐다. 미국은 카다피 축출을 개입의 목적으로 밝혔다. 중국과 러시아는 공습의 확대에 반대하고 있다. 리비아 사태는 강대국 정치에 민감한 한반도의 안정, 평화와 통일문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구소련·북한·중국이 6·25전쟁 공모 시 미국이 군사개입한다면 중국은 군대를 보내 김일성을 도울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중국의 참전은 한국군이 아닌 미군 주도의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할 때 결정되었다. 휴전회담 초기에 중국은 한반도에서 모든 외국군의 철수를 주장했지만 미국의 강한 반발로 철회했다. 1972년 중국은 미국과의 수뇌회담을 통해 하나의 중국을 인정받고 타이완으로부터 모든 미군과 전술핵무기의 철수를 얻어내는 데 성공하지만 주한 미군의 존재를 묵인한다. 그후 중국은 주한 미군을 중국 안보의 위협보다는 한반도 통일의 방해요인으로 선전했다. 1980년대 이후부터 중국의 주한미군에 대한 태도는 이중적이다. 중국은 주한미군의 공식적 철수 주장은 미국 패권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는 이유로 자제하면서 주한미군 증원이나 새로운 첨단 무기 도입 및 한·미 연합훈련의 강화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반대하는 태도를 견지해 오고 있다. 중국 정부와 전문가들은 북한 급변사태의 발생 가능성을 부인한다.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일어난다면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이 조성, 유도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중국은 북한 난민문제에 대해서는 미국과 협의할 의사가 있으나 북한 급변사태 시 정치적 문제에 대한 논의를 꺼린다. 전문가들은 북한 급변사태 시 미국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해야 하며 외세의 개입이 없다면 중국도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또 개입한다면 유엔의 결의를 거쳐야 함을 강조한다. 중국 전문가들은 북한 급변사태를 통일의 기회로 삼고자 하는 한국 일부 언론의 보도를 의식한 듯 중국 정부가 지지하는 통일 원칙, ‘당사자 간에 자주·평화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상기시킨다. 통일한국은 비핵화, 외교적 중립을 지켜야 하며 주한미군의 향방에 대해서도 논의를 원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한반도에서의 단일 국가 등장은 역사적으로 중국과 안정된 관계를 유지했음을 상기시키면서, 강대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동북아 정세의 안정과 지역 경제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말한다. 중국은 북한의 핵문제로 미국과 관계가 나빠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렇지만 미국의 주장에 따라 북한을 압박하기보다 6자회담의 재개를 위한 여건 조성을 위해 관련국들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원한다. 전문가들은 천안함과 연평도 사태로 한반도에 긴장이 높아지는 것에 우려를 표명하면서도 북한이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아 경제가 궁핍해지고 내정이 불안정해지는 사태를 더욱 우려한다. 중국은 이러한 사태의 예방을 위해서도 중국이 북한을 포기해서는 안 되며 북한의 리더십 안정과 경제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중국 정부는 북한의 안정과 비핵화 중 안정에 정책의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북한의 핵 무장은 중국에 위협이 되지 않고 미국·일본·한국 간의 안보협력을 강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북한 체제의 붕괴는 동북아 세력균형을 중국에 불리하게 만들어 미국의 패권질서를 강화시킨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북한 급변사태의 대비는 일차적으로 정치적이어야 한다. 한·미의 군사 대비가 언론에 과도하게 노출되다 보니 북한 붕괴를 겨냥한 통일이 목표인 양 오해 받기 쉽다. 중국은 북한 급변사태의 원인이 핵과 선군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북한의 노선에 있음을 직시하고 정책전환을 지원해야 한다. 또 유사시 북한이 중국의 내정불간섭 원칙의 예외지역이 되어서는 안 된다. 북한의 내부 폭발이 국제전으로 비화되지 않도록 외교적 대비가 필요하다. 주변국이 납득할 수 있는 통일한국의 외교 방향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 [부고] ‘최승희 조카’ 北 여류시인 최로사 사망

    월북 무용가 고 최승희의 조카이자 ‘김일성상’을 받은 북한의 정상급 여류시인인 최로사가 사망했다고 북 조선중앙통신이 12일 전했다. 통신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날 최로사의 빈소에 조화를 보냈다는 소식을 전했지만 사망 일시, 원인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최로사는 최승희의 오빠인 최승일의 장녀로, 1948년 아버지를 따라 월북해 김일성종합대학 재학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간호장교로 복무했다. 그는 군 복무 중 발표한 시 ‘샘물터에서’로 등단했고, 이 작품은 6·25전쟁 때 가요로 만들어져 아직도 북한 최고의 전시가요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이 작품으로 심봉원·석광희와 함께 ‘김일성상’을 받았고, 이후 시인으로 활동하면서 ‘축배를 들자’, ‘그네뛰는 처녀’, ‘새별’, ‘조선의 행운’, ‘만수축원의 노래’ 등을 발표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부고] ‘재일동포 정신적 지주’ 박병헌 민단 상임고문

    [부고] ‘재일동포 정신적 지주’ 박병헌 민단 상임고문

    재일본대한민국민단 고문인 박병헌 대성엘텍 명예회장이 7일 새벽 경기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84세. 고(故) 박 명예회장은 재일민단 총무국장, 사무차장, 감찰위원, 부단장을 거쳐 1985년과 1988년 제38, 39대 단장을 역임하고 최근까지도 상임고문을 맡아 민단계 재일동포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 왔다. 고인은 초등학교 때 일본으로 건너가 주경야독으로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했으며, 6·25 전쟁이 발발하자 혈서를 써 가며 참전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642명의 재일학도의용군 일원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그는 민단 활동과 병행해 1973년 대성전기(현 대성엘텍)를 창업했으며, 재일한국투자협회 설립을 주도하고 신한은행 출범에도 참여했다. 보국훈장 삼일장, 대통령방위무공훈장, 체육훈장 청룡장, 국민훈장 모란장과 무궁화장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황영임(64)씨와 장남 성규(일본소니 부장), 차남 상규(대성엘텍 상무)씨가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발인은 10일 오전 7시. (02)3410-6915.
  • [부고] 동아출판사 창업주 김상문 前회장

    동아출판사 창업주인 김상문 전 동아출판사 회장이 6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6세. 1915년 대구에서 태어난 고인은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만년필 수리를 하면서 돈을 모아 1945년 대구에서 동아출판사를 창립했다. 해방 후 전국 최초로 ‘신생국어독본’을 발행했다. 6·25 전쟁 후 빈털터리가 되었다가 서울로 올라와 다시 출판사 문을 연 후 동아전과, 완전정복, 동아학습대백과, 각종 사전 등을 펴내며 국내 학습도서 시장을 석권했다. 참고서와 사전은 20억권이 넘게 팔려 나갔으며 시장 점유율은 70%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그러나 백과사전 제작과 판매에 무리하게 매달린 결과 출판사가 두산그룹에 인수되는 아픔을 겪었다. 1983년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상문각 회장, 동서문화사 명예회장을 지냈고 만년에는 건강 전도사가 되어 장수 비결을 담은 ‘100살 자신 있다’를 출간하기도 했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간다’ ‘오뚝이 인생 절망은 없다’ 등의 저서도 펴냈다. 유족으로는 윤진, 병진, 광진, 은주 씨 등 3남 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발인은 8일 오전 7시, 장지는 대구 선영. 연락처 010-3220-4134.
  • “아파트가 좋다고? 고향땅 밟으니 아픈 몸도 금세 다 나았어”

    “아파트가 좋다고? 고향땅 밟으니 아픈 몸도 금세 다 나았어”

    포격으로 폐허가 됐던 연평도 곳곳이 눈에 띄게 깨끗해졌다. 깨져 널려 있던 유리 파편이 사라지고, 거리마다 나뒹굴던 쓰레기들도 말끔히 치워졌다. 피폭으로 집을 잃은 주민들에게는 잠시나마 묵을 수 있는 보금자리도 생겼다. 연평초등학교 운동장에 지어진 임시가옥이 그곳이다. ●“내 마을 내가 돌보니 정말 좋아” 4일 오전 10시. 연평도 남동쪽에 위치한 해경파출소 옆에서는 ‘취로사업’에 참여한 남부리 주민 99명이 부서진 건물 잔해 등 주변 쓰레기를 치우고 있었다. 취로사업은 지난달 24일부터 시작됐다. 사업은 5월까지 이어진다. 인천시가 행정안전부로부터 20억원의 예산을 배정받아 연평도 주민들을 대상으로 벌이는 사업이다. 한 사람당 기본 5만원에 식대를 더해 5만 3000원을 일당으로 지급한다. “아파트든 뒤파트든 그게 무슨 소용이야. 고향 돌아오니까 이렇게 좋은데. 아프던 몸도 금세 다 나았어.” 취로사업에 참여한 조연화(81) 할머니가 밝게 웃으며 동료 할머니들에게 농담을 건넸다. 옆에서 일하던 윤선비(74) 할머니가 “내 고향 내가 치우고, 돈도 벌고, 얼마나 좋아.”라고 말을 받았다. 인천의 찜질방을 전전하다 없던 병을 얻고, 두고 온 집 걱정에 한시도 편하게 잠을 청한 적이 없었던 할머니들이 고향에 돌아오자 기운이 솟는 모양이었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조 할머니는 6·25 때 연평도로 피란 와 연평도에서 지금은 돌아가신 남편을 만난 뒤 자식들을 낳아 길러 뭍으로 내보냈다. 60년 넘게 연평도에서만 살았다. 조 할머니는 “처음엔 아파트라고 해서 좋은 줄만 알았지. 그런데 가서 보니 남의 집에 산다는 게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야.”라고 말했다. ●“임시가옥이지만 친구들 있어서 행복해” “임시가옥에서 살아도 연평도에 오니 좋아요.” 지난 3일 오전 11시, 연평초등학교 4학년이 된 고성현(10)군이 인천연안부두에서 연평도행 코리아나익스프레스 여객선에 혼자서 탔다. 사흘 전부터 연평도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계속되는 기상악화로 인천에 더 머물러야 했다. 연평도 포격으로 피란길에 오른 후 처음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어려서 부모가 따로 사는 탓에 할아버지·할머니 품에서 자랐지만 구김살이 없었다. 되레 맑고 검은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친구들 보러 빨리 가고 싶어요.” 성현이는 새 교과서, 새 담임 선생님과 새 교실에서 공부할 생각에 한껏 기대가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돌아갈 집이 없다. 포격으로 몽땅 파괴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현이는 가족들과 당분간 연평초등학교 운동장에 설치된 임시주택에서 살아야 한다. 할아버지·할머니·큰아버지·성현이 그리고 강아지 ‘가을이’까지 다섯 식구를 하나로 묶어 주는 소중한 거처다. 전국재해구호협회가 국민 성금으로 지은 임시주택 39채에 포격으로 집을 잃은 32가구 69명이 입주했다. 머리를 감으려면 화장실 문을 열고 엉덩이를 쭉 빼야 할 만큼 좁고, 둘만 누워도 몸을 뒤집지 못할 정도로 협소하지만 성현이 가족은 오히려 감사했다. 할아버지 고영선(72)씨는 “우리를 위해 국민들이 성금을 모아 마련해 준 집인데 어떻게 불평할 수 있겠느냐. 감사하다.”고 말했다. 오후 3시. 성현이가 연평도에 도착한 지 2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다. 성현이는 연평마트 앞 인조잔디 축구장으로 나가 반 친구들과 축구를 하며 뒤엉켜 놀았다. 구김 없이 큰소리로 떠들고 까불었다. ‘남의 동네’인 인천에서는 할 수 없었던 ‘놀이’였다. 올해 성현이의 가장 큰 소망은 빨리 새집이 생기는 것이다. 새집이 마련되면 아빠가 새 책상과 침대를 사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아빠도 다시 볼 수 있다. 성현이는 “빨리 새집이 생겼으면 좋겠다.”면서 눈을 반짝였다. ●“가슴의 상처 빨리 치유됐으면…” “이웃들이 돌아오니 내 마음이 부자가 된 거 같아요.” 4일 오전 8시 30분 남부리 연평교회 맞은편. 이기옥(51·여)<서울신문 2010년 12월 22일자 1면>씨가 집을 나섰다. 요즘 매일 아침 9시면 두꺼운 점퍼를 세 겹이나 껴입고 집을 나선다. 오전 9시부터 시작되는 취로사업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이씨는 “내 마을을 내 손으로 다시 세운다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면서 “사람들 모두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는 큰데 상처는 여전히 깊게 남아 있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북한의 포격 후 100일 동안 그에게 일어난 일 가운데 가장 기쁜 일은 해병대 연평부대에서 복무하던 아들 성기림(24)씨가 돌아온 일이다. 성씨는 포격으로 숨진 고(故) 서정우 하사의 해병대 입대 동기로, 지난달 10일 만기제대했다. 그간 이씨는 아들을 지척에 두고도 연평도 사태 이후 계속되는 비상근무로 얼굴을 보지 못해 속을 끓였다. 이씨는 “아들이 가족 품으로 돌아온 게 지난 100일 동안 내게 일어난 가장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라면서 다시 빗자루를 들며 웃었다. ●주민들에 매달 5만원씩 지원 연평도 복구작업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날도 한국전기안전공사가 직원 11명을 파견해 연평도 곳곳의 전기선로 교체작업을 벌였다. 연평면사무소에 따르면 창문·창틀 교체작업은 99%, 대문·방문 교체작업도 98% 끝났다. 상수도도 수리를 신청한 228가구 중 199가구, 보일러는 171가구 중 160가구가 공사를 마쳤다. 난방용 기름도 차질 없이 공급돼 추위를 덜 수 있게 됐다. 또 올 1월 시행된 ‘서해 5도 지원 특별법’으로 인해 이달부터 6개월 이상 거주한 주민은 매달 5만원씩 정주지원금을 받는다. 여기에다 올 7월 ‘서해 5도 종합발전계획’이 확정되면 노후주택 개량지원, 생필품 구매대금 지원 등 추가 지원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연평도 김양진기자 ky0295@seoul.co.kr
  • “밝은 성격과 돌나물이 장수비결”

    “밝은 성격과 돌나물이 장수비결”

    국내 최고령자로 세계 기네스 도전에 나선 114세의 김엄곡(경기 구리시 수택동) 할머니에게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주민등록상 1897년 11월 7일생인 김 할머니는 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에서 가난한 농사꾼의 딸로 태어났다. 18세의 나이로 결혼, 슬하에 4남매(2남 2녀)를 두고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일제 식민지와 6·25 한국전쟁 등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김 할머니가 밝힌 장수비결은 ‘밝은 성격과 돌나물’이다. 김 할머니는 “(일제 식민지) 당시 2~3년 동안 돌나물만 캐 먹었다.”며 “좋은 나물을 많이 먹어서 건강한 것”이라고 말했다. 늘 밝은 얼굴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도 김 할머니의 건강 비결. 100세가 훌쩍 넘었지만 주위 사람에겐 항상 자상하고 밝은 표정을 한다. 어려운 일이 많을수록 마음이 건강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김 할머니는 첫 아들을 20세에, 이어 남편까지 일찍 잃었다. 남은 3남매를 키우기 위해 남자보다 더한 일을 하면서도 밝은 마음은 잃지 않았다. 김 할머니가 장수하면서 깬 기록도 많다. 지난 10년간 김 할머니의 장례를 위해 가입한 상조회사만 5개다. 그 사이에 없어진 부실 상조회사가 부지기수로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월은 피할 수 없었다. 김 할머니는 3년 전부터 노환으로 동두천의 한 노인병원에 입원해 있다. 현재 경기도와 구리시로부터 최고령자로 인정받은 상태다. 국내 최장수 부문 도전은 처음. 한국기록원은 심사를 거쳐 세계 기네스협회에 신청하게 된다. 현재 세계 최고령 기네스 보유자는 115세인 미국의 유니스 샌본 할머니이지만 지난 1월 31일 사망하면서 김 할머니가 국내 최고령자로 인정될 경우 세계 기록 도전도 가능할 전망이다. 장충식기자 jjang@seoul.co.kr
  • [나와 통일] (1) 김명섭 연세대 통일연구소장

    [나와 통일] (1) 김명섭 연세대 통일연구소장

    한반도의 통일을 가져오는 힘은 정부의 정책이 아니라 국민의 가슴속에서 나온다. 1945년 해방과 1950년 6·25전쟁 발발 이후 남북한의 정권은 통일보다 분단상황 관리에 치중해 왔다. 유엔 등 국제사회와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 국도 한반도의 통일이 아니라 현상유지에 주력했다. 그런 상황에서 남북 분단은 고착화돼 왔고, 통일에 대한 열망과 기대감은 낮아져 갔다. 국민은 진정으로 통일을 원하는가, 원하지 않는가. 서울신문은 그에 대한 답변을 찾기 위해 ‘나와 통일’이라는 시리즈를 시작한다. 국가나 정부가 아니라 국민 각자의 주관적 시각에서 통일을 얘기해 보는 소통의 마당이 되길 기대한다. 나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듣고 부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대학에서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는 ‘우리의 소원은 민주’라는 개사곡과 함께 친숙한 노래였다. 2011년의 시점에서 아직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힘차게 부를 수 있을까? 더 이상 ‘우리’라는 막연한 이타심에 호소하는 통일이 아니라 서로의 이기심을 인정한 통일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의 소원으로서의 통일과 너의 소원으로서의 통일을 보다 명확히 하고 서로의 교집합을 찾아나가는 것이 더 확실한 통일의 길일지도 모른다. 약 30년간 정치외교학을 공부하면서 통일은 나의 중요한 학문적 관심사였다. 통일에 대한 관심이 정치외교학의 길로 나를 인도했다고도 볼 수 있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1907년 남강 이승훈 선생이 평안도 정주에 세운 학교였다. 서울로 이주한 학교의 운동장에 서서 씨알 함석헌 동창회장의 강연을 들었다. 고당 조만식 선생의 정신을 배우고, 나중에 북한 인민무력부장이 된 고당의 제자 최용건이 김일성의 편에 섰던 일화도 들으면서 통일의 꿈을 키웠다. 대학에서 통일에 대한 설익은 열정을 학문적으로 승화시키면서 분단구조화 과정과 6·25전쟁의 상관관계에 관한 석사학위 논문을 썼고, 국가들 간의 통일을 이루어 가고 있던 유럽의 현장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코리아의 문명적·문화적 정체성에 관한 관심을 키웠으며, 냉전사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문명론적 관점에서 코리아의 분단과 통일을 다룬 논문들을 발표했다. 나에게 통일은 무엇보다 내가 속한 언어공동체에 대한 지정학적 관심이다. 물론 하나의 언어공동체가 반드시 하나의 정치공동체가 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독일어권인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통일을 말하면 나치잔당 취급을 받기 쉽고, 영어를 쓰는 영국과 미국이 통일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북한에서 사용되는 ‘민주’나 ‘평화’와 같은 단어들이 한국에서 사용되는 ‘민주’나 ‘평화’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를 지닌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공동체는 소중하다. 나는 말과 글을 통해 존재한다. 내가 말하고, 글을 쓰기도 하지만,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말하고 있는 로고스적 존재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만주’라는 단어의 사용 빈도가 낮아지고 ‘중국 동북지방’ 또는 ‘둥베이지방’이라는 단어의 사용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한글공동체에 대한 시공간적 인식이 희미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느낀다. 그것은 나를 구성하고 있는 기억의 일부, 어쩌면 나 자신의 일부가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코리아의 평화 통일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헌법적 의무인 동시에 나의 존재론적 관심이다. 세계화 시대를 맞으면서 “마누라만 빼고 모두 바꿔야 산다.”는 경영자의 말이 회자된 적이 있다. 그렇지만 인간에게는 손절매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코리아가 지정학적 종심이 얕은 이유로 자기 표준만을 고집하면 망하고, 부단히 세계적 문명 표준을 따라잡아야 하겠지만, 스스로의 정체성마저 상실한다면 경제적 성공과 행복의 주체도 모호해질 수 있다. 나의 소원으로서의 통일은 세 개의 북한(북한주민, 북한정권, 북한국가)을 분리해 접근하는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통일이다. 코리아의 최저치인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참상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이산가족들에 대한 관심, 탈북민들에 대한 관심, 그리고 남북한의 군사적 대치 상황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북한 주민들의 손에 확실하게 전달될 수 있는 원조를 제공하고 그들의 마음속에 코리아의 독립, 광복, 분단, 6·25전쟁, 산업화, 민주화에 관한 진실의 씨앗들을 심어야 한다. 동시에 북한의 김정일 정권이 붕괴한 이후에도 당분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은 국가로서의 북한과는 점진적이고 평화적인 통이(統二 혹은 統異)를 위한 국제적 접근이 필요하다.
  • 見敵必殺… 날마다 ‘전쟁’ 치른다

    見敵必殺… 날마다 ‘전쟁’ 치른다

    ‘견적필살(見敵必殺·적은 보는 대로 죽여라).’ 지난달 23일 서부전선 최전방 일반전초(GOP) 대대 정훈장교 책상 직책표에 붙어 있던 말이다. 지난해 11월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 전투형 부대로 거듭나고 있는 전방 장병들의 다짐이 그대로 묻어나는 표현이다. 휴전선 155마일의 장병들은 김정일·정은 부자의 북한 정권과 소리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서해와 맞닿아 있는 경기 파주 임진강 하구는 강 중간에 군사분계선(MDL)이 위치해 중립수역에 해당한다. 6·25전쟁 이후 정전협정에서 남과 북은 MDL을 중심으로 각각 2㎞ 떨어진 지점에 경계철책을 만들고 중간지점은 비무장지대로 남겨 두기로 했다. 하지만 북한은 비무장지대의 전방초소(GP)를 증가시켰다. 이 지역의 GP는 육안으로도 관측될 정도다. 도라대대 성석민 중위는 “정전협정에 따라 남과 북의 GP는 1대1 비율로 비무장 지대 안에 둘 수 있도록 돼 있는데 현재 북측이 우리 초소의 수보다 3배가량 많은 초소를 배치해 놓은 상태”라고 말했다. 특히 동부전선 최전방 남북한 GP 간 거리는 600여m에 불과한 곳도 있다. GOP 대대의 한 중대장은 “지난해 말과 올해까지 근무태만한 북한군들의 모습이 자주 관측되고 있다.”면서 “낮에는 졸고 있거나 군복을 풀어헤친 모습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 이들의 모습이 위장된 것일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첨단 감시 장비를 동원해 북한군에 대한 관측과 정보분석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고 전했다.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 전방부대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장사정포 사격에 대한 방호벽 설치다. 그동안 산속에 위치한 전방부대는 전면전보다는 적의 침투에 대한 경계에 집중해 왔다. 하지만 전면전에서나 사용할 것으로 생각하던 장사정포를 북한이 국지도발에 이용함에 따라 우리 장병의 생존성과 부대 보호가 중요하다는 판단에 이르게 됐다. 이에 따라 휴전선 전 전선의 최전방 막사들은 북한의 장사정포 공격에 대비해 방호벽을 설치하고 진지를 새롭게 구축하는 등 새로운 도발에 대비하고 있다. 또 장병들은 오전과 오후 점호 시간 직전 녹취된 포사격 소리를 듣는 훈련을 매일 반복하고 있다. 포성을 듣고 북한군 포사격인지를 구분하고, 실제 어느 정도 거리에서 포사격이 이뤄지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소리에 익숙해지면 그만큼 우리 군의 대응 속도도 빨라진다는 판단에서다. 무적태풍부대 박성훈 소령은 “연평도 포격 도발이 우리 군에 안겨준 뼈아픈 교훈으로 전방부대에서도 그에 맞춘 대응방향을 계속해서 연구 중”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전면전에 대비한 훈련도 실전처럼 이뤄지고 있었다. 동부전선 최전방 정형균 대대장은 “실전 같은 훈련이 장병들의 생존성을 극대화한다는 점을 지난해 연말 과학화훈련(KCTC)에서 확인했다.”고 전했다. 북한의 무력도발이 연평도 사건으로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면서 긴장의 끈을 바짝 조이고 있다. 이런 부분은 전방 사단의 신병 훈련에도 영향을 줬다. 중부전선 제2신교대대 최문호 중령은 “가혹하지 않되 강한 훈련을 하도록 하고 있다.”면서 “전선 투입 즉시 전투가 가능한 강한 군인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전했다. 서부전선 GOP 대대의 경우 “초탄 명중으로 임진강을 적의 피로 물들이자.”, “북괴군의 가슴팍에 우리의 총칼을 꽂자.”는 등 북한군에 대한 적개심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정훈장교들의 정신교육 횟수도 증가했다. 북한군을 실제 근접 촬영한 자료를 이용해 북한의 위협을 장병들에게 알리고 정신전력을 극대화한다는 취지에서다. 글 사진 서부·중부·동부전선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현빈·비 9월 낙동강전투 재현 행사 참여

    현빈·비 9월 낙동강전투 재현 행사 참여

    올해 군에 입대하는 탤런트 현빈(왼쪽·본명 김태평)과 가수 비(오른쪽·본명 정지훈)가 참여하는 ‘낙동강전투’ 재현 행사가 오는 9월 열린다. 국방부는 25일 6·25전쟁 60주년 2차 연도 사업으로 낙동강지구전투 전승행사 등 12개 사업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국방부는 안보관 확립, 전투행사, 참전국 우호증진, 호국문화 선양 등 4개 사업주제를 선정했으며 주제별로 2~4개 사업을 다음 달부터 본격 시행할 계획이다. 특히 오는 9월 예정인 낙동강지구전투 전승행사는 연예인 출신 병사와 참여를 희망하는 학생·주민들이 전투를 재현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국방부 관계자는 “현빈은 3월 입대 예정이고 비도 상반기, 늦어도 9월 안에는 입대할 것으로 안다.”며 두 사람을 전승행사에 참여토록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홍영식 선생 가문 유물 234점 기증

    홍영식 선생 가문 유물 234점 기증

    1884년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갑신정변의 주역 홍영식(1855~84) 선생 가문의 유물들이 경기 수원시에 모였다. 홍영식 선생 증손자인 홍석호(67·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전 우정박물관장은 24일 수원시청 상황실에서 염태영 수원시장을 통해 가문의 유물 234점을 수원화성박물관에 기증했다. 조선말기와 대한제국시대의 문집과 교지, 간찰 등으로 당시 정치상황과 격동기의 가족사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유물들이다. 홍영식 선생의 부친으로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홍순목(1816~18 84)의 문집인 ‘기당고’와 홍영식이 강화도조약 이후부터 갑신정변 이전까지 만난 일본 사신과의 대화기록을 정리해 둔 왜사공간록이 대표적이다. 이 유물들은 조선말기와 대한제국기 정치상황을 알 수 있는 기록으로, 기당고 등 일부는 지금까지 한번도 공개되지 않았던 소중한 유물로 평가된다. 1910년 6월 순종이 홍영식에게 ‘충민’이란 시호를 내린 교지 ‘홍영식 시호 칙명’을 비롯한 대한제국기 황제의 명을 내린 칙명도 눈길을 끈다. 기증된 유물은 홍석호씨가 1965년 체신부 공무원으로 입부한 이후 체신기념관장과 우정박물관장 등으로 근무하면서 흩어져 있던 것들을 40여년에 걸쳐 수집한 것이다. 1884년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난 뒤 당시 영의정이던 부친 홍순목은 며느리와 어린 손자를 안고 자결했고 형 홍만식마저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비통하게 여겨 자결하면서 집안은 풍비박산났기 때문이다. 홍씨 역시 6·25 때 아버지가 실종된 뒤 충남 당진의 외할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고교 3년 때 처음으로 가문의 이력을 알았다고 한다. 홍씨는 “1965년 서울에 올라오니 고모의 시아버님이 이게 너희 집 가보라며 상자 2개를 주셨는데 열어 보니 1910년 순종황제가 할아버지들(홍순목, 홍만식, 홍영식 삼부자)에게 내린 시호교지였다.”고 말했다.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연평도 초·중·고 北 포격 3개월만에 합동 졸업식

    연평도 초·중·고 北 포격 3개월만에 합동 졸업식

    “밝고 티 없이 자라야 할 아이들이 폭탄 소리에 놀라고, 눈총을 받아가며 외지 학교를 떠도는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1일 오전 10시 인천 옹진군 연평초등학교에서 열린 연평도 초·중·고교 합동 졸업식. 학부모 대표인 최재숙(44·여)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최씨는 육지로 피란 간 연평 학생을 당시 다른 학교들이 수용하지 않으려 하자 “이곳마저 거부하면 우리 아이들은 갈 곳이 없다.”며 영종도 운남초등학교에 눈물로 호소해 임시학교를 개설하게 만든 주인공이다. 졸업식에는 면장, 우체국장, 농협장 등이 단골 멤버인 여느 시골 학교 졸업식과 달리 교육부장관, 해양경찰서장, 부교육감까지 참석해 무게감을 더했다. 하지만 흥겨운 ‘지역 잔치’로만 치러질 수 없었다. 지난해 11월 발생한 북한군 포격 사건이 잊을 수 없는 충격과 고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축사를 위해 연단에 오른 인사들은 잇따라 지난 일을 거론하며 어려움 속에서도 무사히 학업을 마친 학생들을 격려했다. 피란 생활을 마치고 3개월 만에 본교를 찾은 재학생과 졸업생이 뒤엉켜 그동안 못다 한 얘기를 나누면서 숙연했던 졸업식장 분위기는 활기를 띠었다. 이 학교 박안수 연구부장은 “학생들이 태어나 살아 온 섬에서 졸업식을 치르게 돼 다행”이라며 “오늘 졸업식이 연평도가 주민들의 터전으로 다시 자리 잡기 위한 첫 단추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재학생 대표로 연단에 선 5학년 이인영(12)군은 “지난겨울은 너무나 아프고 슬펐지만 지금 마을 어귀에는 파란 싹이 돋고 있다. 우리 마을도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1시간 30분 동안 비교적 차분하게 진행된 졸업식이 끝나자 학생들은 졸업식 때 흔한 ‘자장면 외식’조차 없이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섬에 식당들이 아직 영업을 재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지로 배움터를 옮겨 가면서도 학업을 계속한 학생들이기에 이날 무엇보다 값진 졸업장을 받았다. 졸업생은 초등학교 12명, 중학교 10명, 고등학교 7명 등 모두 29명. 초·중학교 졸업생은 연평도에 있는 중·고교에 진학하며, 고교 졸업생은 전원 육지에 있는 대학교 입학이 결정됐다. 최영호(49) 교사는 “대학 입시를 앞둔 민감한 시기에 6·25전쟁 당시 천막 교실을 연상케 하는 고초를 겪으면서도 대학에 합격한 우리 아이들이 자랑스럽다.”고 강조했다. 김민지양은 편부인 아버지가 지난해 대장암으로 타계하는 슬픔과 이어진 피란 생활 속에서도 숙명여대 한국어문학부에 당당히 합격했다. 유한대 기계과에 진학하는 이정석군은 북한군 포격 이후에도 계속 섬에 남아 시각장애 1급인 아버지를 돌봐 이날 효행상을 받았다. 이군은 “앞으로 육지로 나가면 아버지는 여동생이 모시겠지만 조금은 걱정된다.”고 말했다. 서울호서전문대 애견동물관리과에 합격한 염현아양은 “한때 너무 힘들었지만 졸업해서 행복하다. 뛰어난 애견미용사가 되겠다.”며 밝게 웃었다.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특파원 칼럼] 중국의 김정일 생일선물/박홍환 베이징특파원

    [특파원 칼럼] 중국의 김정일 생일선물/박홍환 베이징특파원

    역시 중국과 북한은 ‘그날’을 거르지 않았다. 이집트의 독재자 무바라크가 시민의 힘에 굴복해 퇴진한 지 채 48시간도 지나지 않은 13일 중국은 부총리급인 멍젠주(孟建柱) 국무위원 겸 공안부장을 북한에 보내 3대 세습을 진행 중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69번째 생일을 축하했다. 화면에 비친 생일선물은 영화 등이 담긴 DVD 4장과 만경봉을 닮은 수석, 서우타오(壽桃·장수를 비는 복숭아) 도자기 등 세 가지였지만 김 위원장은 헤아릴 수 없는 큰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한 듯하다. 김 위원장은 자신의 생일 하루 뒤인 17일 정월 대보름 밤 류훙차이(劉洪才) 중국대사 등 평양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을 위한 연회를 베풀어 아들인 김정은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등 당·정·군 최고지도자들과 함께 직접 관람했다. 정월 대보름은 중국에서도 위안샤오제(元宵節)로 가장 중요한 명절 가운데 하나다. 중국은 2009년과 2010년 김 위원장의 생일을 한달여 남겨둔 시점에 왕자루이(王家瑞)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을 북한에 보내 현안 논의와 함께 생일을 미리 축하해 왔다. 이번에는 생일 직전이었다는 점, 직급도 한 단계 상향됐다는 점 등이 다르다. 그만큼 중·북 우호관계를 강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멍 부장은 김 위원장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화려한 수사(修辭)까지 동원했다. 14일 김 위원장 부자와 만난 그는 “조선노동당 대표자회에서 김정일 동지께서 조선노동당 총비서로 추대되고 김정은 동지께서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추대돼 조선 혁명의 계승문제가 빛나게 해결된 데 대해 열렬히 축하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세습 문제가 완성됐다는 점을 축하한다는 뜻이다. 김정은을 파트너로 삼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 멍 부장이 마흔살 가까이 어린 김정은과 파안대소하는 사진은 이제 중국이 김정은과의 ‘정상외교’에 나설 준비를 마쳤다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중국과 북한은 한반도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지난해 더할 수 없는 밀월을 구가했다. 김 위원장이 이례적으로 두 차례나 중국을 방문했고, 양국 간 교역액은 30% 넘게 증가했다. 무엇보다도 중국은 잇단 도발로 국제사회의 비난에 직면한 북한의 최대 후원자 역할을 맡아 두둔하기에 바빴다. 후진타오(胡錦濤) 주석과 시진핑 부주석 등 중국의 최고지도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선배 혁명가들이 만들어 놓은 중·북 전통 우호관계를 세대를 이어 계승·발전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시 부주석은 특히 “위대한 항미원조전쟁(한국전쟁의 중국 명칭)은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이었다.”며 6·25에 대한 세계사적 평가를 뒤집기까지 했다. 베이징 외교가에서는 북·중의 이런 밀월관계를 감안하면 머지않은 시기에 김정은이 중국을 방문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28살에 불과한 김정은이 아버지와 나이가 같은 후진타오 주석을 만나 악수하는 ‘어색한 장면’이 연출될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일반적인 외교관계로 해석하기 힘든 북·중관계에서는 전혀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게 베이징 외교가의 분석이다. 중국이 김 위원장에게 희귀한 생일선물을 보내고, 권력 세습의 완성을 축하하는 한편 김정은을 대화 파트너로 삼는 건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6·25에 참전해 10만명 넘는 전사자를 낸 입장에서 북한과의 혈맹을 언급하지 않는다면 마오쩌둥의 통치행위에 대한 부정일뿐더러 전사자 후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 듯도 싶다. 하지만 중국이 모르는 사실이 있다. 국민의 선거로 뽑히지 않은 권력, 그것도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권력 세습을 공식적으로 축하한다는 건 중국에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중국 공산당은 비록 아전인수 격이기는 하지만 지난해 기관지를 통해 ‘민주화’가 세계적·시대적 조류라고 정의 내린 바 있다. 명실상부하게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국으로 성장한 중국은 북한의 세습정권이 무너졌을 때 과연 오늘 김 위원장에게 건넨 ‘생일선물’의 의미를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stinger@seoul.co.kr
  • [열린세상] ‘필승’이 억제의 요체이다 /황병무 국방대 명예교수

    [열린세상] ‘필승’이 억제의 요체이다 /황병무 국방대 명예교수

    국제사회는 무력을 금지할 수 있는 권위적 기구가 없다. 국가는 새로운 양식의 공격 방법을 개발하고 정치적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폭력에 의존한다. 국가는 생존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준비된 무력에 의한 전쟁의 승리가 해답이다. 칼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전쟁의 승리가 방어의 요체임을 강조했지 전쟁의 억제를 논하지 않았다. 핵무기 출현으로 클라우제비츠의 전쟁관은 한동안 도전을 받았다. 인류 공멸의 핵전쟁은 국가정책의 유효한 수단이 될 수 없다. 핵전쟁은 방어가 아닌 억제의 대상이다. 실증 파괴할 수 있는 핵 보복력에 의한 억제전략이 등장했다. 1950년대 미국은 ‘선택한 장소에서 선택한 수단으로 즉각 보복할 능력’을 보유해 공산주의 침략을 억제한다는 대량보복 전략을 채택했다. 그러나 이 전략은 국지 내지 애매모호한 군사 도발을 억제하지 못했다. 베트남전을 계기로 미국의 전략은 다양한 군사 분쟁에 대응하기 위한 신축 대응전략으로 바뀐다. 핵전략도 억제 외에 방어를 위한 미사일방어체계를 포함한다. 현실은 다시 신 클라우제비츠의 전쟁관이 지배한다. 즉, 핵무기는 전쟁의 유용성을 감소시키기보다는 전쟁의 형태에 영향을 미칠 뿐이다. 국방선진화추진위원회는 북한 군사 도발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 도발행위 자체보다 도발 의지를 분쇄해 도발할 생각을 가지지 못하도록 ‘능동적 억제’로 우리의 군사전략을 바꾸고, 북한의 공격 징후가 보이면 공격 거점을 선제 타격할 의지와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건의했다. 억제는 상대가 보복 위협을 인식해야 성공한다. 6·25전쟁 이후 잇따른 국지 도발에 보복의 면죄부를 받아 온, 그리고 핵 보유를 자처하는 북한이 우리의 선제타격 의지와 능력이 무서워 국지 도발을 자제할지 의문이다. 군은 호랑이를 잡을 수 있는 스텔스 전투기와 장거리 순항미사일 및 전략기동부대들이 승냥이들의 국지 도발을 저지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 고민을 안고 있다. 보복 전력의 강화 때문에 북한이 노리는 허점을 보완하는 기반 전력의 개선은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 유사시 선제타격 결심은 확전의 우려와 경제적 영향 때문에 전쟁지도부에 매우 큰 정치적 부담을 준다. 또 작전권에 대한 미국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칠 때 상대의 의도와 능력을 과대평가하기 쉽다. 지난해 북한의 두 번에 걸친 도발은 전술적 충격에 의한 전략적 이익을 노린 것이다. 연평도 포격은 현지에 배치된 지상화력의 우위를 이용했다. 대비도 전술적 차원이어야 한다. 도서 내 기반 전력의 우세균형을 유지하면서 필요 시 신속대응전력으로 지원해야 한다. 민간대피시설의 강화는 필요하나 도서를 공세기지로 바꾸거나 요새화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가칭 서북도서방어사령부는 독립작전을 위한 지휘통일에도 불구하고 해상작전의 기능 분화로 합동작전에 비효율적인 옥상옥이 돼서는 안 된다. 우리 해군은 지난 10년, 세 번의 서해교전에서 승리했다. 1월 말 청해부대의 최영함은 ‘아덴만 여명’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삼호주얼리호를 납치한 해적을 소탕하고 선원 21명을 구출했다. 청와대가 이 작전을 승인한 이유는 ‘해적과는 타협하지 않는다.’는 선례를 만들어 미래 한국 선박의 납치를 억제코자 한 것이다. 아덴만 여명작전은 기만과 기습에 의해 성공했고 천안함, 연평도 피격에서는 똑같은 전술에 피해를 입었다. 실패와 성공, 모든 작전은 동일한 지휘구조와 체제에서 이뤄졌다. 문제는 군 지휘구조가 아닌 리더십과 방어태세에 있다. 통합군 사령부 지향의 군 상부 지휘구조 개혁의 논쟁으로 시간과 노력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이 개혁은 3군의 역할 재정립과 병력의 감축 등 방위태세를 대폭적으로 조정해야 하는 통일 이후로 미뤄야 한다. 전시작전권 전환에 따른 전구작전지휘부서는 합참의장 산하에 두어도 된다. 군은 북한의 어떠한 도발도 초전박살로 종결해야 한다. 이는 북한의 도발 의지를 분쇄해 추가 도발을 억제하는 길이며, 북한을 핵문제와 평화체제 논의의 장소로 불러내 당당하게 우리의 입장을 요구할 수 있는 기반이다. 필승을 위한 전투형 리더십 확립과 완벽한 전비태세의 유지는 군의 몫이다.
  • [시론] 통일 편익은 얼마나 될까/윤덕룡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시론] 통일 편익은 얼마나 될까/윤덕룡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언젠가부터 통일비용에 대한 우려가 통일을 꺼리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그러나 통일비용은 다른 비용과 마찬가지로 통일 편익과 대비를 해야 정당한 판단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통일 편익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통일의 경제적인 편익은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통일로 인해 발생하는 적극적인 이득이며 다른 이득은 분단비용의 절약이다. 적극적 편익 중 첫째로 들 수 있는 대표적인 이득은 북한의 지하자원이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북한에는 300여종의 광물자원이 분포돼 있다. 그중 단시일 내에 상업화가 가능한 유용광물만 140여종에 이른다. 그뿐만 아니라 정보기술(IT) 부문 생산에 필수적이지만 세계적으로 부존량이 적은 희토류도 북한 내에 다량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마그네사이트는 세계최대의 매장량을 자랑하고 있고 텅스텐, 티타늄 등의 자원도 높은 부존량을 자랑한다. 통계청은 2008년 기준으로 북한의 지하자원 잠재가치가 7000조원가량 될 것으로 추정했다. 지하자원의 가치만으로도 가장 높게 추산된 통일비용을 넘어선다. 둘째로 북한의 토지이다. 통일은 북한의 토지만큼 한국땅이 넓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당장은 북한 토지의 금전적 가치가 높지 않지만 통일 후 투자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면 그 가치는 남한지역보다 커질 가능성이 크다. 거대시장인 중국과 러시아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2009년 남한 전체의 토지가치는 5000조원 정도로 알려졌다. 통일 후 북한지역 토지의 평균가치가 남한과 같아진다고 가정하면 북한지역의 토지가치는 6000조원이 된다. 그뿐만 아니다. 남북한 간 영토의 통합은 남한지역 토지의 순가치도 높여줄 것이다. 육로로 아시아 대륙과 유럽까지 연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편익은 인구의 증가이다. 북한인구는 약 2400만명이다. 남한 인구의 50%에 달한다. 통일 초기 북한주민의 일자리 확보가 숙제이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인구의 증가는 통일한국의 경제를 더욱 강화시키는 요인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통일로 한국은 인구 감소와 노령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기를 맞게 될 것이다. 통일이 가져올 또 다른 편익은 분단비용의 절약이다. 그 대표적인 비용은 과도한 군사비다. 한국의 군사비는 2010년 295억 달러로 세계 11위이다. 한국 GDP의 3%를 넘는 금액이다. 북한은 극심한 빈곤 중에서도 지난해 59억 달러의 군사비를 지출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한은 69만명, 북한은 117만명에 달하는 엄청난 정규군을 유지하고 있어서 그에 상응하는 규모의 국방비 지출이 불가피하다. 통일 후 군사비는 지금의 절반 이하로 감소할 수 있다. 지정학적 리스크로 인한 비용도 무시 못한다. 한국은 지금까지 국제금융시장에서 A1 이상의 신용등급을 달성한 적이 없다. 이러한 제약은 한국이 다른 나라들에 비하여 더 높은 이자를 국제금융시장에서 지급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비용을 가져오고 있다. 그 외에도 통일 후 사라지게 될 분단비용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러시아로부터 수입하는 천연가스는 북한 때문에 저렴한 파이프라인을 사용하지 못하고 선박으로 실어와야 한다. 중국과의 교역은 급속도로 확대되고 있지만, 육로를 이용하지 못하여 높은 수송비를 내고 있다. 이러한 분단비용들은 실제 숫자로 계산할 수 있으며, 분단이 극복되기 전까지는 지속적으로 지급해야 하는 비용이다. 통일로 절약할 수 있는 가장 큰 분단비용은 평화의 위협이다. 6·25전쟁 이후 지금까지 숱한 간첩사건과 무장공비가 국민의 생명을 앗아갔다. 최근에는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으로 우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이 손실을 보았다. 직접 피해를 당하지 않은 국민도 불안과 분노로 말미암은 정신적인 비용을 치렀다. 통일은 이러한 분단비용을 다시는 지불하지 않게 할 것이다. 평화 확보의 편익은 값을 매길 수 없다. 통일을 포기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다.
  • [데스크 시각] 럼즈펠드의 ‘역사적 기억상실증’ /박찬구 국제부 차장

    [데스크 시각] 럼즈펠드의 ‘역사적 기억상실증’ /박찬구 국제부 차장

    이라크전을 이끈 도널드 럼즈펠드 전 미국 국방장관이 최근 회고록에서 한국인의 ‘역사적 기억상실증’(historical amnesia)을 거론했다. 2003년 방한 때 한국에서 일던 이라크 파병 논란을 되돌아 보면서다. 그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왜 지구 반대편 이라크로 가서 죽고 다쳐야 하느냐.”라는 한국 기자의 질문에 “50여년 전 미국이 젊은이들을 지구 반대편 한국으로 보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라고 답했다고 한다. “미군의 참전으로 자유와 경제적 성공을 일군 한국의 역사적 기억상실증을 느꼈다.”는 얘기다. 일방적 외교와 패권주의에 젖은 미국 내 대표적인 강경 우익 인사라는 점에서 럼즈펠드의 역사 인식이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이라크전과 아프가니스탄전에서 미군이 보인 비윤리적이며 독선적인 행태가 서방의 다른 6·25전쟁 참전국들로부터 외면당한 사실도 재론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하지만 한국인의 자유로운 여론 형성과 다양한 가치의 표현을 ‘맏형’의 은혜도 망각하는 몰염치한 태도쯤으로 폄하하는 그의 시각에서는 섬뜩함을 넘어 시대착오적인 제국주의의 오만을 떠올리게 된다. 굳이 럼즈펠드가 ‘역사’를 거론했으니, 한반도의 시계를 과거로 돌려보자. 몇 가지 역사적 사실만 짚어 봐도 그의 인식이 얼마나 편의적이고 일방적인지 알 수 있다.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이 가열되던 1866년 대동강에 출몰한 이양선(異樣船)이 조선 관리의 퇴거 요구를 무시한 채 총과 대포를 쏘며 평양 주민들을 살육하고, 조선 상선을 약탈했다. 미국의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 사건이다. 역사는 조선 영토에서 일어난 서양과의 첫 무력 충돌로 기록하고 있다. 5년 뒤에 미국은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콜로라도호를 비롯해 군함 5척과 함재 대포 85문, 군사 1200여명을 앞세워 강화도를 공격했다. 당시 광성진 전투에서는 어재연(魚在淵) 형제를 포함한 조선 관군 53명이 필사적으로 저항하다 몰살당했다. 미국과 한반도의 역사는 이렇게 침략과 희생으로 시작됐다. 가까운 해방 정국을 돌이켜 보면, 한반도를 대립과 긴장으로 몰아가며 자국의 이념과 국익을 확장시킨 냉전 구도의 한 축에는 분명 제국주의 미국이 있었다. 1945년 12월 전후(戰後) 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모스크바 3상회의 직후 국내에서는 좌익과 우익이 각각 찬탁(贊託)과 반탁(反託)으로 갈라져 격렬히 대립했다. 3상회의 결과의 핵심은 남북에 걸친 통일 임시정부의 수립과 최장 5년의 신탁통치안이었다. 당초 한반도 신탁통치안은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과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가 먼저 제시했다. 소련 총리 스탈린은 임시정부 수립 후 4개국 원조방안을 구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국내 한 신문에서 미국이 의도적으로 퍼뜨린 ‘소련은 찬탁, 미국은 반탁’이라는 구도를 대서특필함에 따라 국내에는 사실과 정반대로 알려지게 됐고, 이후 좌우의 극심한 대립으로 통일 임시정부의 수립이라는 과제는 희석되고 말았다. 이어 미국과 특수 관계를 맺고 있던 이승만은 사실상의 남북 분단을 의미하는 남한만의 단정(단독 정부)·단선(단독 총선거)을 처음으로 공개 주장했다. 1946년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한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직후 이른바 ‘정읍(井邑) 발언’을 통해서였다. 민족 자주독립 국가의 좌절과 남북 분단, 그로 인한 6·25전쟁의 연원에서 미국이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이처럼 역사는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물론 역사가 과거에만 머물 수는 없다. 과거에서 진보하고, 현재를 디딤돌 삼아 더 나은 미래를 추구하는 것이 역사다. 하지만 불편한 과거는 외면하고 무시해 버리는 역사 편식 증후군은 상호 신뢰와 이해를 바탕으로 한 미래지향의 역사 발전에 장애물이 될 수밖에 없다. 럼즈펠드의 역사적 ‘팩트’ 상실증을 우려하는 이유다. ckpar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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