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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공산당 90주년] 공산당을 이끈 10명의 주역

    ●천두수(陳獨秀·1879~1942) 공산당 초기 지도자. 청년 시절 반청(反淸) 활동에 몸담고, 5·4운동 후에는 마르크스 사상에 심취. 베이징대 교수 시절 ‘매주평론’ 등 사상지 발간. 상하이 지역 공산당 조직 결성. 제1차 당대회에 불참했지만 초대 중앙국 서기에 선임되는 등 5차 때까지 중앙국 서기, 중앙국 집행위원장, 총서기 등 역임.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 두 말할 필요 없는 중국 공산당 역대 최고지도자이자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주역. 자신이 결성한 후난성 공산당 조직을 대표해 제1차 당대회 참석.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며 무장봉기 주도. 대장정 도중인 1935년 1월 ‘준이(尊義)회의’에서 당권 장악. 신중국 건국 후 당과 국가의 전권을 장악.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등의 대오류에도 불구하고, 건국의 아버지로 신격화.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 혁명운동 때부터 사망할 때까지 마오쩌둥과 평생을 함께한 동지이자 영원한 2인자. 건국 후 초대 총리(외교부장 겸임)를 맡아 사망할 때까지 27년간 역임. 탁월한 정치적, 외교적 수완과 함께 고도의 청렴성으로 사망 후에도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역대 총리로 추앙받음. ●주더(朱德·1886~1976) 중국 10대 원수 가운데 한 명. 독일 유학 중 저우언라이의 추천으로 중국 공산당 가입. 소련에서 군사학을 전공한 뒤 귀국해 국민당군에 합류. 1928년 병력 1만명과 함께 마오쩌둥의 징강산 해방구에 가담. 제2차 국공합작 때는 8로군 총사령관으로 항일전쟁을 지휘. 건국 후 인민해방군 총사령관, 국가부주석, 중앙군사위 부주석 등을 역임. 문화대혁명 때 물러났다가 1971년 복권. ●펑더화이(彭德懷·1898~1974) 6·25전쟁에 인민지원군 총사령관으로 참전한 중국 10대 원수 가운데 한 명. 1928년 입당해 항일전쟁 때 부총사령관으로 주더 총사령관을 보필. 건국 후 국방위원회 부주석, 국무원 부총리, 국방부장 등을 역임하며 군 현대화 추진. 1959년 루산회의에서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 실패 등을 지적하다 실권.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 중화인민공화국 제2세대 지도자.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두 차례 실권됐다가 복권된 ‘오뚜기’. 항일전쟁 및 내전 시기에는 정치공작, 건국 후에는 국정에 참여. 실용주의 노선을 주창해 마오쩌둥 추종자들과 대립. 마오쩌둥 사후 화궈펑(華國鋒)과의 권력투쟁 끝에 실권 장악. 개혁·개방 선도하며 중국의 발전 견인. “자본주의에도 계획이 있고, 사회주의에도 시장이 있다.”며 ‘사회주의 시장경제’ 도입. ●후야오방(胡耀邦·1915~1989) 개혁파 지도자. 1989년 4월 사망하자 청년학생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톈안먼(天安門) 광장에 모여들면서 ‘톈안먼 사태’ 촉발. 1928년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에 가입한 뒤 홍군의 일원으로 대장정 참여. 건국 후 공청단 제1서기 등으로 공청단 업무 주관. 1980년 2월 당 총서기로 선출된 뒤 개혁 및 실용주의 정책을 펼쳤으나 1987년 대학생 시위에 미온적으로 대처했다는 이유 등으로 실각. ●장쩌민(江澤民·1926~ ) 제3세대 지도자. 상하이교통대 재학 시절인 1946년 입당. 건국 후 공장 관리자 및 공업연구소 책임자 등으로 일하다 문화대혁명 때 공직에서 축출. 복권된 뒤에는 상하이시 당서기 등으로 승승장구하면서 핵심인물로 부상. 1989년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가 실각하자 총서기로 선출됨. 1990년 4월 덩샤오핑의 마지막 공직이었던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선출되면서 당·정·군 전권 장악. 재임 중 한·중 수교,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등 성사. ●후진타오(胡錦濤·1942~ ) 제4세대 지도자. ‘퇀파이’(團派·공산주의청년단 출신)의 대부. 칭화대 수리공정학과 졸업 후 학교에 남아 정치보도원으로 후배들의 정치교육 담당. 문화대혁명 때 간쑤성 수력발전소 노동자로 하방됐지만 승진을 거듭해 덩샤오핑에 의해 4세대 지도자로 낙점돼 1992년 최연소로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됨. 이후 2002년 당 총서기, 2003년 국가주석, 2004년 중앙군사위 주석에 선출되면서 당·정·군 장악. ‘과학발전관’을 주창. ●시진핑(習近平·1953~ ) 후진타오의 뒤를 이을 5세대 핵심지도자. 아버지는 국무원 부총리 등을 역임한 시중쉰(習仲勳)으로 ‘태자당’(당·정·군 혁명원로들의 자제그룹) 계열. 문화대혁명 때 아버지의 실각 등으로 중학교 재학 중 산시성 오지로 하방. 10번이나 입당이 거부될 정도로 시련을 겪었으나 경력을 쌓고, 저장성 당서기 등을 거쳐 2007년 상하이시 당서기에 오른 뒤 같은 해 제17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됨. 이듬해 국가부주석, 지난해 중앙군사위 부주석에 선출돼 후계 입지 공고화.
  • [부고]

    ●박래관(전 장흥군수)씨 부인상 용석(통일부 사무관)형욱(전남대 의대 교수)은경(송원여교 교사)씨 모친상 조상희(전남대 의대 교수)씨 시모상 임우진(전 광주광역시 행정부시장)씨 장모상 28일 광주 천지장례식장, 발인 30일 오전 9시 (062)527-1000 ●신용균(전 송산학원 이사장)씨 별세 현종(전 서울디자인고 교장)씨 부친상 28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발인 30일 오전 7시 30분 (02)2227-7547 ●신무균(6·25 참전 철도기관사)씨 별세 광현(미리넷솔라 부사장)대현(캐나다 거주)씨 부친상 유태상(전 대림요업 고문)심규헌(사상당한의원 원장)씨 장인상 27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30일 오전 5시 (02)3010-2231 ●최윤경(사업)준경(〃)씨 모친상 윤대현(사업)강윤승(성남고 교사)김철(두산인프라코어 전무)씨 장모상 28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발인 30일 오전 9시 30분 (02)2227-7556 ●안해일(서경대 교수)해익(쏠텐페퍼 대표)씨 부친상 박두용(연세대 생활협동조합 상근이사)씨 장인상 이근자(한국금융연수원 전산정보실장)씨 시부상 28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발인 30일 오전 (02)2227-7563 ●신규성(전 부산동아대 경제학과 교수)씨 별세 최승욱(대가파우더시스템 전무)씨 장인상 27일 부산 해운대 성가정성당, 발인 29일 오전 8시 (051)704-7726 ●방삼현(웅진코웨이 상무)우현(충주새마을협의회장)진현(LG전자 차장)씨 부친상 28일 충주 영광장례식장, 발인 30일 오전 (043)845-7632 ●윤영삼(공군 중령·재경지원단 서울공보실장)씨 부인상 28일 중앙대병원, 발인 30일 오전 (02)860-3500 ●이승환(아이디에스 대표이사 회장)씨 모친상 28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30일 오전 8시 30분 (02)3010-2232
  • 국내 복권 변천사

    국내 복권은 연금식 복권 ‘연금복권 520’이 등장하기 까지 60여년 동안 숱한 변천을 겪어 왔다. 근대 이전에 발달한 민간협동체인 ‘계’에서 우리나라 복권의 기원을 찾는 이도 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막바지인 1945년 7월 일본 정부가 군수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승찰’이라는 근대식 복권을 발행한 적이 있다. 액면가 10원에 1등 당첨금 10만원이었다. 해방 이후 나타난 복권은 1947년 12월 선보인 ‘올림픽 후원권’이라는 게 정설이다. 1948년 제12회 런던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한 경비를 마련할 목적에서 발행됐다. 액면 금액은 100원, 1등 당첨금은 100만원으로 모두 140만장이 발행됐다. 이후 이재민 구호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1949~50년 사이 ‘후생복표’가 세 차례에 걸쳐 판매됐다. 6·25전쟁이 끝난 뒤인 1956년 2월부터는 산업부흥자금 및 사회복지자금 조성을 위해 ‘애국복권’이 10회에 걸쳐 판매됐다. 1962년과 1968년에는 박람회 개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각각 산업박람회 복표와 무역박람회 복표가 등장했다. 국내 복권사에서 진정한 의미의 복권 시장이 형성된 것은 국내 최초의 정기 복권인 주택복권이 등장한 1969년부터다. 액면가 100원, 1등 당첨금 300만원, 월 1회 50만장 발행으로 출발했던 주택복권은 1973년부터 주 1회 발행으로 바뀌었다. 1등 당첨금도 1978년 1000만원, 1981년 3000만원, 1983년 1억원으로 뛰었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겨냥해 1983년 4월부터는 ‘올림픽복권’으로 이름을 고쳤다가 1989년 다시 본래 이름을 찾았다. “준비하시고, 쏘세요!”로 기억되는 국내 복권의 대명사 주택복권은 그러나, 즉석식복권과 온라인복권에 밀려 2006년 4월 37년 역사를 마감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는 복권이 공익 자금을 조달한다는 정당성이 컸지만 1990년 대 이후 분위기가 달라졌다. 1990년 9월 즉석에서 당첨 여부를 가릴 수 있는 즉석식복권이 등장해 사행심 조장 논란이 일었다. 또 복권발행기관이 다양화되고 각 기관이 재원조달 확보 차원에서 경쟁적으로 복권을 쏟아내 정부가 사행성을 조장한다는 비판도 나왔다. 그래서 2004년 ‘복권 및 복권기금법’이 제정돼 복권발행기관이 복권위원회로 일원화됐다. 2002년에는 국내 복권 산업의 최강자로 우뚝 선 온라인복권 ‘로또복권’이 선보였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경기도 세계 최대 그림 그리기 참여

    경기도 세계 최대 그림 그리기 참여

    경기도내 학생과 학부모, 교사 등 160여명이 27일 오후 수원체육관에서 6·25 휴전 58주년을 맞아 평화통일을 염원하고 한국의 발전상을 세계에 보여 주기 위한 20m×35m짜리 대형 그림을 완성했다. 완성된 대형 그림은 지난 18일부터 25개 교육지원별로 140개 학교에서 학생 1000여명, 학부모 500여명, 교사 100여명이 참여해 그린 1m×5m 크기의 그림 140장을 합쳐 만든 것이다. 그림은 28일까지 이곳에서 전시된 뒤 일본 도쿄에 본부를 둔 비영리기구에 보내진다. 이 비영리기구는 세계 64개국에서 이 같은 방식으로 그린 그림을 원폭지점인 히로시마 평화공원에서 다시 합쳐 세계에서 가장 큰 그림을 완성한 뒤 전시할 계획이다. 또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도 전시할 예정이다. 도내 학생과 학부모, 교사가 지구살리기 프로젝트로 세계에서 가장 큰 그림 그리기에 참여한 것은 주최 측인 해당 비영리기구가 경기도교육청에 한국 대표로 참가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반총장 부인 유순택 여사 “수험생처럼 일하는 남편… 가장으로선 70점”

    반총장 부인 유순택 여사 “수험생처럼 일하는 남편… 가장으로선 70점”

    “어디 가서 누가 ‘세계의 퍼스트 레이디’ 그러면 몸이 막 오그라들어요. 그런 말 들을 자격이 안 되는데….” 지난 21일 재선에 성공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부인 유순택 여사는 24일 오후(현지시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연임 과정에서 보여준 한국 국민들의 성원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며 이같이 밝혔다. 고등학교 시절 만나 결혼한 지 올해로 40년. →반 총장 연임이 확정됐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한 달에도 몇 번씩 외국 출장 때문에 가방을 싸고 푸는 게 일이다. 앞으로는 더 많이 싸야 할 것 같다. 외국 여행 다니면서 보면 남편은 한국 사람이라는 걸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경제적, 정치적으로 성공한 한국을 예로 들어 어려운 나라에 용기와 희망을 준다. →집에 들어오면 어떻게 지내나. -꼭 수험생같이 생활한다. 밤 12시쯤 잠자리에 들고 새벽 5시 정도에 일어난다. 여러 자료들을 모두 검토하고 소화해 내지 않으면 안 되니까. 토·일요일에는 주로 외국 정상들과 통화하느라 거의 시간을 보낸다. (가장으로서 점수를 준다면) 50점은 박하고, 70점 정도?(웃음) →지난 4년 반 동안 가장 속상했던 적은. -총장에 대해 잘 모르면서 폄하하는 기사를 보면 억울하고 속상했다. →반 총장이 가장 자랑스러웠던 때는. -2009년 1월 가자 전쟁 때 셔틀 외교를 하면서 사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직접 가자에 들어가서 폭탄 맞은 건물 앞에서 마이크도 없이 연설을 하는 모습을 방송으로 보면서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집에 돌아왔는데 목이 완전히 잠겨서 말을 하기도 힘들어하더라. 연기를 많이 마시고 큰 소리로 연설해서…. →사무총장의 배우자로서 외국 출장에 자주 동행하나. -재난·재해 지역이나 분쟁 지역 같은 곳은 비행기 편도 그렇고 해서 같이 못 가지만 대부분은 함께 간다. 아프리카 지역 같은 곳은 거의 따라갔다. 에티오피아는 매년 가고, 카메룬, 브룬디, 말라위, 케냐 등 수없이 많은 나라들을 다녔다. 그런 곳에 가면 마치 6·25전쟁 끝난 직후의 상황을 보는 것 같다. →여사의 내조 스타일은. -특별한 것은 없다. 남편의 커리어에 해가 되지 않게 조심하면서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여성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유엔은 물론이고 전 세계 각지에서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유엔 고위직 가운데 여성 비율이 40%라고 들었다. 한국 여성들은 우수한 잠재능력을 갖고 있다. 이를 더 개발하고 발휘해서 사회 각 분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사회 발전에 이바지했으면 한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마이클 페티드는 누구

    마이클 페티드(52) 빙엄턴 뉴욕주립대 교수는 1983년 미국의 한 무역회사 직원으로 한국 지사에 파견 나오면서 처음 우리나라와 인연을 맺었다. 이전까지 접했던 한국에 대한 지식이라고는 6·25를 배경으로 한 1970년대 TV 드라마 ‘매시’(MASH)를 시청하며 얻은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실제 한국에서 접한 문화와 사람은 너무 매력적이었고 이 때문에 1985년 당시 미국 내에서 한국학 프로그램이 가장 잘 갖춰진 하와이대에 입학했다. 석사 과정을 밟던 1992년 서울대에 교환학생으로 왔다가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이후 박사과정을 마친 뒤 1998년부터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객원교수를 지내며 이화여대 등에 출강했다. 당시 학생과 동료로부터 ‘마 교수님’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한국사 서적에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우리 옛 여성의 삶을 추적해 보려고 고전문학을 전공했다. 또 우리맛에도 푹 빠져 ‘한식 : 그림과 함께 하는 역사’라는 서적을 펴내기도 했다. 2009년 6월 북미지역 외국인 교수 240명이 한국의 정치 현실을 비판하며 발표한 시국선언에 참여할 만큼 국내 정치 상황에도 관심이 깊다. 여름에는 삼계탕과 보신탕을 즐기며 겨울에는 도토리묵에 막걸리 한잔 걸치는 것이 낙이라는 그는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 교수를 거쳐 2003년부터 빙엄턴 뉴욕주립대에서 한국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열린세상] 6·25전쟁, 한국전쟁, 남북전쟁/전현수 경북대 사학과 교수

    [열린세상] 6·25전쟁, 한국전쟁, 남북전쟁/전현수 경북대 사학과 교수

    ‘6·25전쟁’ 발발 61주년을 맞고 있다. 해마다 이 기념일이 반복되듯이 올해도 예외 없이 이 전쟁에 어떠한 이름을 붙여 줄 것인가 하는 논쟁이 언론지상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6·25전쟁’인가 ‘한국전쟁’인가를 다투는 이 논쟁은 최근에는 학계로까지 확산되는 양상이다. 전쟁 발발 직후에는 ‘6·25사변’, ‘6·25동란’이라는 용어가 많이 사용되다가 ‘6·25전쟁’이라는 용어로 통일되어 갔다. 1980년대에 들어와 ‘한국전쟁’(Korean War)이라는 명칭이 사용되면서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군사편찬연구소 등 정부출연 연구기관에서조차 ‘6·25전쟁’과 ‘한국전쟁’이라는 명칭을 번갈아 사용했다. 이러한 혼란을 막기 위해 교과부와 국사편찬위원회가 ‘6·25전쟁’을 공식적인 편수용어로 확정했지만, 교과서 밖에서는 ‘한국전쟁’이라는 용어가 여전히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왔다. ‘6·25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전쟁 발발 시점에서 따온 ‘6·25전쟁’이라는 명칭이 전쟁을 겪은 민중의 경험을 온축하고 있어 가장 객관적인 명칭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국전쟁’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는 학자들은 ‘한국전쟁’이라는 무가치한 이름이야말로 이 전쟁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편견을 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전쟁에 어떠한 이름을 붙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전쟁의 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김춘수가 노래했던 것처럼, 우리가 어떤 전쟁에 특정한 이름을 붙여 주는 것은 그것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6·25전쟁’이라는 명칭은 전쟁 발발 시점을 부각시켜 북한의 전쟁 책임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개입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이 용어는 전쟁의 전체 과정을 시야에 넣지 못하고 있다. 김일성과 스탈린의 ‘남침’ 전쟁만이 포착되어 있고, 이승만과 맥아더의 ‘북진’ 전쟁이나 중공군 참전 이후의 ‘미·중’ 전쟁을 포괄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한국전쟁’이라는 명칭도 문제가 많다. 외국 사람들 입장에서는 ‘한국에서 일어난 전쟁’(War in Korea), ‘한국전쟁’(Korea War 혹은 Korean War)이라는 표현이 가능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을 ‘한국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어느 나라도 자기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을 이런 식으로 부르지 않는다. ‘한국전쟁’이라는 명칭은 ‘한국이 일으킨 전쟁’이나 ‘한국 사람들끼리의 전쟁’으로 잘못 이해할 가능성도 있다. 결국 우리는 61년째 이 전쟁을 기념하고 있지만 이 전쟁에 누구나가 공감할 만한 마땅한 이름을 붙여 주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전쟁의 명칭이 전쟁의 성격과 긴밀히 연관된 것이라면 전쟁의 성격을 명확히 함으로써 전쟁에 명칭을 부여하는 방향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전쟁 당시 남북의 지도자들은 모두 전쟁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라도 분단 상태를 극복해야 한다고 보았다. 김일성은 공공연히 국토완정을 주장하며 스탈린과 마오쩌둥을 설득하여 전쟁에 나섰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인민군의 남침으로 빛이 바랬지만,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은 유엔군과 함께 38선의 회복에 만족하지 않고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남북은 형태는 다르지만 전쟁을 통해 통일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전쟁은 통일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분단을 한층 고착화했다. 이 때문에 이 전쟁을 ‘통일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안이한 역사인식이다. 결국 ‘6·25전쟁’은 남과 북의 ‘통일’ 전쟁이라는 성격과 남한을 앞세운 자유진영과 북한을 앞세운 공산진영 사이의 전쟁이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갖는다. 처음부터 내전의 성격과 국제전의 성격이 결합된 전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이 전쟁을 남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세력과 북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세력 사이의 전쟁, 즉 ‘남북전쟁’으로 불러 볼 수 있지 않을까.
  • “참전용사 살아생전에 ‘한반도 통일’ 보여주고 싶습니다”

    “참전용사 살아생전에 ‘한반도 통일’ 보여주고 싶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24일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남은 한반도가 통일되는 모습을 참전 용사 여러분들 살아생전에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6·25 전쟁 61주년을 하루 앞두고 서울 용산동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참전유공자 위로연’에 참석, “참전용사 여러분을 우리는 결코 잊지 않고 존경할 것”이라면서 이같이 밝혔다. 이 대통령은 “정부는 북한 땅에서, 또 어느 곳에 묻혀 있을, 아직 되찾지 못한 13만명의 우리 용사들 마지막 한 사람까지도 끝까지 발굴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 치의 땅도 거저 얻어질 수 없고 자유도 거저 얻어질 수 없다.”면서 “희생 없이는 한 치의 땅도 지킬수 없고, 희생 없이는 자유를 지킬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은 전후 반세기 만에 산업화를 이뤘고, 불가능하다는 경제 번영과 민주주의를 이뤄냈다.”면서 “그렇게 되기까지 6·25 참전 국군용사들과 16개국 유엔군 참전 용사들의 희생이 있었으며 세계 15위 경제번영 국가, 세계 20위 민주국가를 이룬 것으로 참전한 여러분에게 보답을 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이어 “6·25의 참혹한 역사와 그 진실의 역사를 6·25 세대뿐 아니라 다음 세대, 그 다음 다음 세대에도 정확히 가르쳐야 한다.”면서 “지나간 6·25를 상기하고 우리 국민이 단합함으로써 이 땅에 6·25와 같은 비극을 막을 수가 있다.”고 강조했다. 행사에는 6·25 전쟁 당시 중공군 포로로 북한에 억류됐다 2000년 7월 70세의 나이에 북한을 탈출한 유영복씨를 비롯해 미국과 터키를 포함한 국내외 참전용사, 참전국 주한 외교사절, 국군 귀환용사 등 900여명이 참석했다. 김성수기자 sskim@seoul.co.kr
  • [주말 하이라이트]

    ●6·25특집다큐(OBS 토요일 밤 9시 20분) 고(故) 임인식 대위는 그동안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 최초의 종군기자이다. 그의 6·25 전쟁 당시 기록물들을 통해 전쟁이란 무엇이며,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남겼는지를 되돌아본다. 특히 그동안 공개된 적이 없는 6·25 전쟁의 사진자료와 당시 사진대대장으로 참전했던 고 임인식 대위의 일기와 기록을 최초로 공개한다. ●광개토태왕(KBS1 토요일 밤 9시 40분) 모용보는 전후배상을 하겠다는 거짓 약속을 하며 고구려 왕 이련을 기만한다. 한편 모용보는 화해하는 척하며 담망 왕자를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 담덕은 모용보의 속셈이 의심스러워 이 자리에 동행해 음식에 독을 넣은 것은 아닌지 면밀히 주시한다. 하지만 풍발은 음식이 아닌 선물로 준비한 피리에 독을 발라 놓았는데…. ●내 마음이 들리니(MBC 토요일 밤 9시 50분) 준하는 민수에게 애인이 되어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민수가 동주를 좋아하는게 싫다며, 민수에게 그 점을 생각해보라는 말을 남긴다. 한편 동주는 진철에게 자신이 봐서는 안 될 장면을 봐서 떨어졌다고 말한다. 동주는 현숙에게 용서를 빌고 그 자리에서 내려오라고 얘기한다. ●토요특집 출발! 모닝와이드 3부(SBS 토요일 오전 7시 40분) 전국 방방곡곡에 숨어 있는 최고 전설. ‘나는 전설이다’의 이번주 주인공은 서울 영등포역 앞에서 40여 년간 교통정리를 해 온 97세 임진국 할아버지다. 평생을 총각으로 살아왔던 그가 아흔이 넘어서 드디어 장가를 갔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알콩달콩 달콤한 신혼생활을 즐기고 있다는데…. ●화평공주 체중감량사(KBS2 일요일 밤 11시 15분) 화평공주는 선왕의 늦둥이 막내딸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왕이 된 오라버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큰 화평공주. 그녀는 지혜롭고 따뜻한 성품을 지녔지만 지나치게 몸집이 크다. 하지만 그녀는 궁 안의 모든 이가 그녀에게 친절하기 때문에 자신의 큰 몸태가 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늘 푸른 인생(MBC 일요일 오전 6시 10분) 낙동강 변의 기름진 토양에서 질 좋은 농산물이 생산되는 곳이 있다. 그곳은 바로 대구시 달성군 논공읍 노이1리 갈실마을이다. 겉으로는 티격태격해도 마음 깊숙이 서로 존경하며, 따뜻한 부부의 정을 나누고 살아가는 갈실마을 어르신들의 인생 이야기를 함께한다. ●김연아의 키스&크라이(SBS 일요일 오후 6시 40분) 개그맨 김병만의 스케이팅 실력이 날로 향상되어 놀라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지난주 방송된 첫 페어컴피티션에서 파트너와 좋은 호흡으로 높은 점수를 받았던 김병만. 최근 더욱 열심히 연습하고 있다고 한다. 또 촬영장에서 김병만이 망설임 없는 리프트와 스핀으로 이 코치를 놀라게 한 현장도 만나 본다.
  • [6·25 전쟁 61주년] “남편 납북 61년… 전화벨 울리면 그이 왔을까 가슴 떨려”

    [6·25 전쟁 61주년] “남편 납북 61년… 전화벨 울리면 그이 왔을까 가슴 떨려”

    “그날 몸을 던져서라도 나도 함께 데려가라고 매달렸어야 하는 건데…. 내무서 앞에 끌려나온 남편 모습을 보니 정신이 핑 돌면서 가슴이 울렁거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어.” 24일 서울 청량리동에서 만난 김항태(83) 할머니는 말문을 열자마자 흐느꼈다. 주름이 조글조글한 손으로 가슴팍을 연신 내리쳤다.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가 풀리지 않은 듯 보였다. “그때 내가 임신 1개월째라는 걸 나중에 알았지. 남편은 우리 딸이 있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갔으니…. 딸은 남편과 나를 이어주는 유일한 생명줄이야.” 결혼 1년 5개월 만에 스물두 살의 새댁은 남편을 북으로 떠나보냈다. 할머니의 남편 김재봉(91) 할아버지는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말 강화군 교동도의 신혼집에서 인민군과 마을 좌익 청년들에게 잡혀 북한 황해도로 끌려갔다. 그렇게 남편을 보내고 전쟁통에 홀로 낳은 딸이 올해로 환갑이 됐다. 4년 전부터 할머니를 괴롭히는 고관절 디스크의 고통은 가슴을 까맣게 태운 그리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직도 그냥 끊어지는 전화가 오면 남편이 나를 찾아 전화한 게 아닐까 싶어. 그런 전화가 올 때면 가슴이 떨려.” 북녘 어딘가에 살아 있다면 올해로 아흔 살이 넘었을 남편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할머니는 아직 체념하지 않았다. ●서울 수복 직후 남편과 생이별 할머니는 남편과 헤어진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당시 충격으로 날짜 감각을 잊은 채 멍하니 보냈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신 할머니는 국군이 서울을 되찾은 지 며칠 뒤라고 기억했다(1950년 9월 28일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수복했다).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고 서울도 되찾아 조만간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북으로 간 남편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쾅, 쾅쾅’ 그날 새벽녘 귓전을 울리는 굉음에 놀라 잠에서 깼다. ‘북한군이 다시 내려온 건 아닐까….’ 정신을 차려 보니 포탄 떨어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누군가 집 대문을 거세게 두드리고 있었다. 미처 몸을 숨길 새도 없이 거센 발길질에 대문이 부서졌다. 십수명의 정체 모를 청년들이 들이닥치자 무서움에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들은 내무서에서 나온 사람들이라고 했다. ‘반동 세력이니 내무서로 함께 가야겠다.’면서 다짜고짜 남편의 팔을 붙들었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남편의 가슴팍에 내무서원은 기다란 총부리를 들이댔다. 남편은 그렇게 내무서로 끌려갔다. 한바탕 소란을 치르고 정신을 차려 보니 희뿌옇게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이튿날 정신을 차리고 내무서 앞으로 달려갔다. 남편은 포승줄에 두 손이 꽁꽁 묶인 채 다른 마을 청년들과 함께 매여 있었다. (손가락으로 방안 끝에서 끝을 가리키며) “그때 남편이랑 같이 붙들려 간 사람들이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는 될 거야. 두 줄로 섰으니 한 스무명 정도…. 맘에 안 드는 사람들은 죄 끌고 간 거지.” 내무서원들은 남편과 청년들을 교동도 항구로 데려갔다. 할머니는 울먹이며 남편의 뒤를 따라갔지만 함께 배에 오를 수는 없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지만 그 순간이 진짜로 마지막이 되리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남편이 탄 배는 건너편 황해도 연백군이 바라다보이는 교동도 항구를 떠났다. 배를 타고 30분도 채 안 걸리는 가까운 거리를 건너가는 남편의 뒷모습,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김 할머니가 남편으로부터 받은 마지막 소식은 남편이 끌려간 지 이틀 만에 보낸 작은 쪽지 한 장이었다. 함께 끌려간 사람들 가운데 면 서기와 이웃 청년 2명이 풀려 나오면서 전해준 것이었다. 손바닥 반만 한 작은 종이엔 ‘내 걱정하지 마세요. 배 타고 건너와 잘 있습니다. 당신의 남편 김재봉’이라고 쓰여 있었다. 단정하게 또박또박 적힌 이 세 문장이 60년이 넘도록 김 할머니 가슴에 박혀 있다. 조심스레 쪽지를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작은 종이 쪼가리, 귀퉁이가 다 닳도록 만지고 보면서 35년을 간직했는데, 80년대 중반에 이사하다 모두 태워버렸어. 그때는 ‘어차피 돌아올 수도 없는 남편인데 갖고 있은들 뭐하나’ 이런 심정이었지.” ●쪽지 35년 간직하다가 불 태워 할머니가 여전히 잊지 못하는 남편 김 할아버지는 서울농고를 졸업하고 교동도 금융조합(현재의 농협) 서기로 입사한, 똑똑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그는 친구들과 사랑방에 둘러앉아 시국 토론도 하는 열혈 청년이었다. 전쟁 전에는 뜻 맞는 마을 청년들과 청년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이념 대립이 팽팽하던 전쟁 직전, 남편은 좌익 세력의 표적이 됐다. 공산당이 득세한 교동도에서 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당원 가입도 거부했다. 할머니는 “전쟁이 터지자마자 동네 빨갱이들이 명부를 들고 다니면서 이름을 쓰고 지장을 찍으라고 했는데 그게 공산당 가입 명부였다.”면서 “교동도에는 빨갱이들이 많았는데, 그게 다 먹고살기 어려운 사람들이 공산당에 넘어갔던 탓”이라고 말했다. 할아버지의 자상함은 한도 없었다. “이 양반은 이렇게 내 가슴을 아프게 하려고 그랬는지 그렇게도 별났다. ‘김치도 맛있다, 빨래도 잘 넌다’ 하면서 항상 칭찬해줬다. 무거운 것도 하나 못 들게 했다. (주먹 쥔 손으로 다른 쪽 손바닥을 탕탕 내리치면서) 그런 말을 바로 엊그제 한 것 같고, 아직도 생생한데….” 할머니는 또다시 한참을 울었다. 남편이 북으로 간 뒤에도 김 할머니는 교동도를 떠나지 못했다. 언젠가 돌아올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농사일로는 커 가는 딸과 생활하기가 벅찼다. 아버지 얼굴을 모르는 딸에게 공부를 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 딸이 10살이 되던 1961년 서울로 왔다. 외삼촌이 살고 있던 답십리에 방을 구했다. 다른 환경에서도 남편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다. 딸을 학교에 보내고 집안이 조용해지면 방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남편과 함께 자식 기르는 재미로 살 줄 알았는데 하루아침에 벼락을 맞았으니…. 죽어야 잊지 그전엔 못 잊어.” 80년대 중반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시작되자 남편 소식을 들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러나 납북자는 대상이 아니었다. 북한에서 납북자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북에서 저렇게 뻗대니 어떻게 햐. 절대 용서가 안 돼.” 할머니는 남편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는 현실에 가슴을 저몄다. 인고의 세월은 끝이 없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이산가족 방문 상봉이 합의되자 김 할머니는 다시 가슴이 뛰었다. 불편한 다리로 이북5도청에 마련된 이산가족 민원 창구를 찾았다. “교동도 지도를 가져가 여기서부터 저기로 내 남편이 끌려갔다고 그렇게 설명을 했는데…. 내 절절한 심정을 이해나 해줄는지. 못 만나게 할 거면 살아 있는지 말이라도 해줘야 할 거 아냐.” ●北서 납북자 인정 안 해줘 분통 “몇 년 전에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남편을 꼭 찾아주겠다며 걱정 말라는 서신도 보내왔는데 결국 허사였어. 내 남편은 납치돼 간 건데 정부에서 책임지고 찾아줘야 해.” 할머니의 목소리에서 결기가 느껴졌다. “60년 동안 남편이 딱 한 번 내 꿈에 나온 적이 있어. 교동도 안방 아랫목에 앉아 내 이름을 부르기에 화들짝 놀라 깼는데 꿈이지 뭐야. 꿈인 걸 안 순간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할머니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뒤로 꿈에도 한 번 안 나오니 야속한 사람이지. 내 마음에는 그 사람의 사랑이 불에 넣어도 안 탈 거 같고 물에 넣어도 안 떠내려갈 거 같고 그래.”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새삼 가슴을 후비는 탓이리라. 김 할머니 눈가에 다시 이슬이 맺혔다. 윤샘이나기자 sam@seoul.co.kr
  • 국가보훈대상자 20명 포상

    김황식 국무총리는 24일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국가유공자 복지증진과 지역사회 발전 등에 이바지한 공로로 유양배(72·전상군경 1급)씨에게 국민훈장을 주는 등 모범국가보훈대상자 20명을 포상했다. 1965년 월남전에서 척추관통상을 입은 유씨는 중상이 상이군경이 모여 사는 십자성용사촌 대표로, 경기도 안산 반월공단에서 위생재료를 생산하는 복지공장을 운영하면서 수익금을 용사촌 회원들의 생활안정에 지원,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또 2007년부터 3년간 한국전에 전투병을 파병한 유엔 16개국 전상자 75명을 초청, 한반도 안보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등 국제교류에도 이바지했다.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은 김성욱(62)씨는 1968년 월남전에 참전한 중상이 전상 국가유공자로, 월남전고엽제후유의증전우회 사무총장으로 일하면서 전우회 발전을 위해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는 고엽제 후유증 환자들이 수당지급, 취업, 교육지원 등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매월 지급되는 국가보훈보상금의 10%를 사회복지단체에 기증해 취약계층을 돕고 있다. 대통령표창을 받은 대한민국상이군경회는 1951년 6·25 전쟁 중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 발족, 국가를 위해 희생한 상이군경 회원의 복지 증진에 기여해 왔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어머님 오래 사신 罪?

    어머님 오래 사신 罪?

    “똑같은 6·25 전쟁 전몰군경 자녀인데…미망인 어머니가 오래 사신 죄로 보상금을 못 받는 게 말이 됩니까. ” 경기 포천시에 사는 박모(61·여)씨는 두 살 때이던 6·25전쟁 당시 국군이었던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를 잃었다. 한 살 어린 여동생과 박씨 그리고 홀로 된 어머니와 할머니, 네 식구만 살아 남았다. 박씨의 어머니는 품팔이를 하며 생계를 꾸렸다. 스무 살에 결혼한 박씨는 중풍을 앓던 어머니의 병구완을 하며 살았다. 박씨의 어머니는 2004년 유명을 달리했다. 이후 정기적으로 나오던 보훈 수당이 끊겼다. 식당일을 하며 어렵게 생계를 꾸려 왔지만 2008년 허리 수술을 받고 난 뒤에는 그마저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처지다. 박씨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아버지에 대한 보상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인지, 정말 억울하다.”며 눈물지었다. 박씨 어머니가 받은 수당은 ‘6·25전몰군경자녀수당’이다.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하 예우법) 제16조 3항에는 ‘1998년 1월 1일 이후 유족 중 1명이 보상금을 받은 사실이 있는 전몰군경이나 순직군경의 자녀에게는 지급하지 아니한다.’고 명기돼 있다. 이 규정 때문에 2004년 박씨의 어머니가 사망한 이후 76만 7000원의 수당을 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6·25전몰군경미수당유자녀회’에 따르면 이같이 수당이 끊긴 미수당 유자녀가 전국적으로 7000명에 이른다. 문제는 ‘1998년 1월 1일 이후’ 라는 조건이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1998년 생활이 어려운 6·25 전몰군경 유족에게 생활조정 수당으로 월 25만원씩 지급했다. 하지만 유족들은 희생자들에 대한 대우가 지나치게 적다고 항의했고, 결국 보훈처는 예우법을 개정해 제16조 3항을 신설, 2001년 7월부터 시행했다. 이후 미수당 자녀들은 10년 넘게 항의 중이지만 법은 아직 바뀌지 않고 있다. 보훈처 관계자는 “독립유공자의 경우 일제강점기 기간도 길었고 독립운동 때문에 자녀들의 생계가 어려워지지 않았나. 반면 6·25는 기간이 짧았고 미망인이 충분히 지원받았는데 손자 세대 이후까지 지원받겠다는 것은 지나치다.”며 법개정에 난색을 표했다. 반면, 전문가들은 잘못된 법 조항을 고쳐 정부가 제대로 된 보상을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최광수 총신대 평생교육원 책임교수는 “법 조항이 비합리적이다. ‘1998년 조건’을 삭제하고 모든 유자녀들이 수당을 받되 향후 몇 대까지 받을 수 있는지 명확히 하는 게 맞다.”고 밝혔다. 미망인이 1997년 12월 31일에 죽으면 유자녀가 수당을 받고 1998년 1월 1일에 죽으면 수당이 끊기는 구조는 형평성 차원에서 모순이라는 설명이다. 일부 국회의원들은 입법 발의에 나섰다. 신상진·강승규(한나라당) 의원 등은 ‘1998년 1월 1일 이후’ 조건이 부당하다며 개정안을 마련 중이다. 문제의 조건을 삭제, 모든 전몰군경 유자녀에게도 수당을 주도록 하는 게 골자다. 강 의원 측은 “‘1998년’이란 조건이 현실적으로 문제가 있어 이 조항을 삭제하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김진아기자 jin@seoul.co.kr
  • [6·25 전쟁 61주년] 우리의 주적은 45% “일본” 6·25전쟁 발발연도는 58% “몰라”

    [6·25 전쟁 61주년] 우리의 주적은 45% “일본” 6·25전쟁 발발연도는 58% “몰라”

    “6·25전쟁? 들어 봤는데, 언제 일어났죠?”(대전 Y초등학교 6학년생) “6·25전쟁이 남침이라고요? 북침 아닌가요? 북한이 먼저 침략했으니까.”(서울 D중학교 2학년생) “우리의 주적은 일본이죠.”(대구 B중학교 1학년생) “우리 때야 반공 교육 받고 자랐지만, 지금 학생들에게는 공부할 시간까지 빼앗아 가면서 6·25전쟁을 가르칠 필요가 있을까.”(서울 N초등학교 5학년 교사) 25일 6·25전쟁 발발 61주년을 맞이한 가운데 6·25전쟁에 대한 초·중·고생의 안보의식이 갈수록 약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안보교육이 국·영·수 중심의 교육에 밀려 등한시된 탓이 크다는 지적이 교육계에서 나온다. 24일 행정안전부가 지난 4일부터 11일까지 전국 중·고생과 19세 이상 성인 2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국민 안보의식 설문조사 결과 청소년의 57.6%가 6·25전쟁이 몇 년에 일어났는지를 대답하지 못했다. 2008년 조사 당시 56.8%보다 0.8% 포인트 늘어났다. 6·25전쟁이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됐다는 사실을 모르는 청소년도 51.3%나 됐다. 19~29세의 성인도 절반이 넘는 55.1%가 6·25전쟁이 발발한 연도를 몰랐다. 한국청소년미래리더연합이 최근 전국 400여개 중·고생 2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안보관 설문조사에서 “우리의 주적은 누구?”라는 질문에 학생들은 일본(44.5%)을 첫째로 꼽았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등으로 인한 영향 때문이라는 게 교육계 관계자의 분석이다. 다음으로 북한(22.1%), 미국(19.9%), 중국(12.8%)이 그 뒤를 이었다. 경남 남해 미조초교 이상제(57) 교장은 “지역 교육청이 안보교육 관련 공문과 교육자료를 일선 학교에 보내고 있지만, 젊은 교사들의 안보의식이 상당히 약화돼 있는 데다 학력 신장 위주의 교육에 혈안이 돼 있어 안보교육이 뒷전이 된 게 문제”라면서 “학생들의 안보의식 함양을 위해 6·25전쟁 경과 등을 역사 교육의 일환으로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재연·이영준기자 apple@seoul.co.kr
  • [6·25 전쟁 61주년] “北 국군포로 560명 생존 즉각 송환을”

    6·25 전쟁 때 북한에 붙잡혔던 국군 포로 가운데 560명이 현재 살아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또 6·25 참전용사단체는 북한이 이들의 인권을 탄압했다며 최근 국제형사재판소(ICC)와 유엔인권위원회(UNHRC)에 각각 고소장과 진정서를 냈다고 24일 밝혔다. 재미 국군포로와 참전용사 등으로 구성된 단체인 국군 포로 송환위원회는 ICC와 UNHRC에 제출한 고소장과 진정서에서 “북한은 (휴전협정 당시 북한에 억류 중이었던) 8만여명의 국군포로 중 송환을 희망하는 사람을 의도적으로 명단에서 뺐다.”면서 “이후 억류된 국군포로들을 탄광 등에 보내 강제노동을 시키는 등 인권을 탄압했다.”고 밝혔다. 통일부에 따르면 1953년 정전협정이 맺어질 때 유엔군사령부가 추정한 북한 억류 국군포로는 8만 2000여명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남한으로 송환된 포로는 8343명 뿐이었고 나머지 7만 3000여명은 자신의 뜻과 관계없이 북한에 남았다는 것이다. 송환위 측은 이 가운데 560여명이 아직 생존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들의 송환을 촉구했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6·25 전쟁 61주년] “난리통에 여자가 무슨 군입대냐며 가족들 반대도 많았죠”

    [6·25 전쟁 61주년] “난리통에 여자가 무슨 군입대냐며 가족들 반대도 많았죠”

    “그러니까 열여섯 살 때였지요. 전쟁 중이었지만 여자도 뭔가 해야 한다는 결의가 아주 높았습니다.” 원로 성우 고은정(75)씨는 해마다 이맘때면 6·25전쟁 당시를 잠시 추억한다. 지난 20일 서울 서초동 자택 인근에서 고씨를 만났다. 1950년 11월 서울 수도여중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고씨는 학생들 사이에 ‘국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고, 금방 통일된다.’는 소문을 들었다. 고씨는 “서울고와 용산고 학생들도 학도의용군에 뽑혀 북진 대열에 합류한다.”고 말하면서 여학생이라고 가만히 있으면 되겠느냐고 했더니 동의하는 친구들이 여럿 있었다. 결국 며칠 뒤 고씨는 단짝 친구 3명과 함께 여자의용군에 자원입대했다. 서울 충무로의 일신초등학교에 훈련막사가 설치됐다. 한성여고 밴드부와 동덕여고 무용반 학생들도 와 있었다. 여기에서 ‘여자의용군 예술대’가 결성된 것. 고씨의 군번은 0995862. 훈련은 주로 아침 일찍 남산을 한 바퀴 돌아오는 것이었다. 20일쯤 지나자 잠시 외출을 나가게 됐다. 집에 갔더니 가족들이 “난리 통에 여자가 무슨 군입대냐.”며 귀대하지 말라고 붙잡았다. 고씨는 “어떻게 외출 나왔다가 안 들어가느냐.”며 부대로 돌아갔다. 그런데 동료 3분의1이 귀대하지 않았다. 남은 예술대원은 20여명. 이튿날 예술대원들은 부산으로 떠나기 위해 겨울용 잠바와 담요 한 장씩을 들고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수백 명의 남자군인 틈에 끼여 무개화차에 막 오르려는 순간 신성모 국방장관이 나타나 “왜 여자들을 지붕 없는 차에 태우느냐.”고 호통을 쳤다. 할 수 없이 다음 날 트럭을 이용해 인천항을 거쳐 상륙함정(LST)을 타고 3일 만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이후 예술대원들은 영도초등학교의 임시막사에서 지냈다. 그러던 중 고씨는 발을 다쳐 의무실 신세를 지게 됐다. 이때 한 목사의 도움으로 책 몇 권을 얻었다. 예술단원으로 병원 위문을 가기 위해서는 책이 필요했다. 1951년 2월 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르면서 휴가를 떠나게 됐다. 하지만 딱히 갈 곳이 없어 도움을 받았던 목사와 함께 제주도에 있는 피란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제주도로 향했다. 고씨가 제주 오현중학교에 설치된 피란민 학교에서 중학교 졸업장을 받게 된 것도 이런 까닭이다. 여기에서 그는 육군 제대자로 처리됐다. 고씨는 “당시 동료들과 가끔 만나 추억담을 나누기도 했지만 지금은 세월이 지나서인지 그러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백선엽 장군 등 6·25 참전 군인들에 따르면 여자의용군은 당시 김현숙 소령이 최초 여군단장을 맡아 500여명으로 조직됐다. 처음 여자의용군을 모집할 때 3000명 이상 몰렸을 정도로 지원율이 높았다. 지원 자격은 18~25세의 미혼 여성으로 중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으로 엄격한 필기시험과 신체검사를 거쳤다. 여군은 후방지역에서 주로 행정·경리·통신 분야에서 복무했지만 일부는 전방 전투사단에 배치돼 정보수집, 수색활동, 선무활동에 참가했다. 특수교육을 받은 일부 여군들은 적진에 투입돼 첩보수집 임무를 수행했다. 특히 인천상륙작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암호명 ‘래빗’(토끼)으로 미군 첩보부대의 훈련을 받은 미모의 첩보요원들도 비밀리에 임무를 펼쳤다. 간호장교들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사방이 포위됐을 때에도 끝까지 부상병을 돌보다가 많은 희생을 당했다. 제주에서는 최초의 여자 해병대 126명이 모집돼 40여일 동안 훈련을 받고 일선에 배치됐다. 여기에는 미혼인 학교 선생도 여럿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전선이 교착되는 상황과 함께 전투가 소강상태에 이르면서 여군은 새로운 체제로 재정비된다. 1951년 11월 여군의 인사관리 등을 담당할 지휘기관으로 여군과가 육군본부 고급 부관실 내에 설치돼 각 군 감실 및 부대에 배속된 여군의 인사 행정 업무를 담당했다. 김문 편집위원 km@seoul.co.kr
  • “반값 등록금에 보태주세요”

    신분을 밝히기를 거부한 70대 원로 교육자가 학생들의 ‘반값 등록금’에 보태라며 모교에 5억원을 선뜻 내놓았다. 건국대 발전기금본부(SKARF)는 23일 건국대를 졸업하고 특수학교를 운영하는 등 40년 넘게 교육자의 길을 걸어온 70대 교육자가 평생 모은 5억원을 학교 발전기금으로 기부했다고 밝혔다. 지난 21일 그가 건국대를 찾았다. 그는 “학교에 기부를 하고 싶다.”며 5억원이 예금된 통장과 도장을 꺼냈다. 그는 기부 사실을 끝까지 익명으로 해 줄 것을 신신당부 했다. 그는 “최근 반값 등록금을 외치며 학생들이 길거리로 나선 모습이 안타까워 전 재산을 기부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내가 누릴 수 있었던 기회와 축복을 교육에 되돌려 주는 게 기쁘다.”며 “뭐니뭐니 해도 교육이 힘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이 마음 놓고 학업을 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지원하고 더 좋은 교육 시설을 만드는 데 보태 달라.”고 당부했다. 건국대 관계자에 따르면, 6·25 전쟁과 피란 시절의 어려움 속에서도 배움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던 그는, 1960년대 건국대를 졸업하고 특수학교를 운영하는 등 줄곧 교육자의 길을 걸어왔다. 그 역시 재학시절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그만둘 뻔한 고비가 많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대학 측은 기부의 뜻을 기리기 위해 장학회를 설립하고 학생들에 장학금을 지급하는 한편, 기부자 예우를 위해 이번에 새롭게 도입한 ‘기부클럽’에서 최고 수준의 멤버십을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영준기자 apple@seoul.co.kr
  • “61년전 우정 감사합니다”

    “61년전 우정 감사합니다”

    6·25 전쟁 발발 61주년을 앞두고 미국에서 참전용사들에 대한 감사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워싱턴한인연합회(회장 최정범)와 경기 용인의 새에덴교회(담임목사 소강석)는 22일(현지시간) 워싱턴DC 미 연방하원 레이번 빌딩에서 ‘한국전 참전용사 감사보은 행사’를 공동 개최했다. 행사에는 한덕수 주미대사를 비롯해 찰스 랭글, 에드 로이스, 에니 팔레오마베가 등 지한파로 알려진 연방 하원의원들이 참석했다. 상원 외교위원회의 공화당 간사인 리처드 루거 의원 등도 기념 메시지를 보냈다. 초청된 6·25 전쟁 참전용사와 가족 등 200여명은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 희생자를 위한 묵념과 기념식에 이어 감사 메시지 영상을 지켜본 뒤 한국 전통음악과 고전무용을 감상하고 주최 측에서 준비한 기념선물도 받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윤순구 워싱턴총영사가 대독한 기념사에서 “대한민국은 결코 여러분들의 희생을 잊지 않을 것”이라면서 “이번 행사가 한·미 간 아름다운 우정의 역사를 기념하고 밝은 미래를 여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6·25 전쟁에 참전한 랭글 의원은 “감사합니다.”라고 한국말로 인사한 뒤 “안보를 위해 헌신한 분들이 대접을 받아야 한다. 생존자뿐 아니라 전사자들도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매년 50~100명의 참전 미국인을 한국에 초청해 온 소 목사는 “한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참전용사들에 대한 은혜도 갚고 미래 한·미동맹 강화에도 기여한다는 취지에서 이번 행사를 준비했다.”면서 “행사 후 인근 보훈병원을 찾아 참전용사들을 위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별도로 버지니아주 한인회(회장 홍일송)와 한·미교류협회도 24일부터 이틀간 일정으로 참전용사 700여명을 초청해 워싱턴DC 한국전 기념공원 등에서 감사 행사와 기념식을 갖는다. 또 워싱턴문화원과 문화체육관광부, 국기원은 오는 25일 버지니아에서 6·25 전쟁 61주년을 되새기는 태권도 시범 공연을 열 예정이다. 주미대사관도 24일 한국 기념공원에서 한 대사와 유엔 13개 참전국 소속 국방무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행사를 갖는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23일 TV 하이라이트]

    ●전사자 유가족을 찾습니다(KBS1 오후 5시 20분)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은 수많은 장병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조국을 위해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하지만 그 가족들은 전사통지서 한 장 받아보지 못한 채 60여 년의 세월을 눈물로 보내야 했다. ‘전사자 유가족을 찾습니다’에서는 6·25전쟁 참전 유공자들과 학도병이 출연해 전사자 유가족 찾기의 중요성을 함께 알아본다. ●최강합체 믹스마스터(KBS2 밤 8시 50분) 겜브리지 바다 한가운데 석유 개발 중인 시추 기지가 있다. 드릴이 뚫고 들어간 바다 밑 깊숙한 곳에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었던 정체불명의 거대 악이 눈을 뜬다. 아트레이아의 장로단은 세상이 멸망할 위기에 처함을 감지한다. 그렇게 세상을 구할 믹스마스터를 구하기 위해 마스터헨치를 선발해 겜브리지로 파견한다. ●불굴의 며느리(MBC 밤 8시 15분) 세령은 진우와 혜령이 함께 있는 사진을 보고 의아해한다. 급기야 흥신소 직원에게 혜령에 대해 자세히 조사해보라고 이른다. 신우는 영심이 마음에 걸려 만월당까지 찾아가지만 영심의 오해를 사게 된다. 한편 지은은 휴가를 끝내고 회사에 복귀하는데, 우연히 신우와 영심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놀라고 만다.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SBS 밤 8시 50분) 경기도 시흥에 기상천외한 입맛을 가진 사람이 있다. 보고도 믿기지 않을 별난 식성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은 바로 송경운씨다. 겉으로 보기에는 보통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운동을 하던 주인공이 봉지에서 꺼낸 것은 애벌레. 그가 망설임 없이 애벌레를 입 속으로 넣는 모습은 보는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든다. ●선생님 선생님 우리 선생님(EBS 밤 12시 5분) 충북 진천군에 위치한 문백초등학교에 학생들을 가슴으로 품은 이정원 선생님이 있다. 교직 생활 14년 동안 전교생을 자녀처럼 생각해 세세한 것 하나까지 챙겨주고 있는 엄마 같은 선생님이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족 같은 학교에서 아이들과 그녀가 만들어가는 따뜻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본다. ●특선다큐 불로장생의 역습 1부(OBS 밤 11시) 인구 감소 문제로 지구촌에서 사라지게 될 최초의 국가로 한국이 꼽혔다. 이를 ‘코리아 신드롬’이라 공식 명명하기도 했다. 노인들을 새로운 국가 성장 동력원으로 보고, 노년의 인간이 가지는 ‘나이 듦’의 지혜, 즉 ‘에이징 파워’에 주목한다. ‘불로장생의 역습 1부’에서는 초고령화 사회로의 진행 과정을 과학과 의료기술 개발 현장을 통해 알아본다.
  • 국가기록원 한국전쟁 희귀영상·사진 공개

    국가기록원 한국전쟁 희귀영상·사진 공개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모습과 이승만 전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구호활동 등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6·25 전쟁 관련 희귀 영상물과 사진 등이 공개됐다. 국가기록원은 22일 6·25 전쟁 61주년을 맞아 2007년부터 4년여간 유엔 기록보존소에서 수집한 한국전쟁 관련 기록물 중 5분 분량의 영상과 12장의 사진을 언론에 소개했다. 이 중에는 1951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의 수용복에 전쟁포로(PW)를 의미하는 도장을 찍는 모습, 프란체스카 여사의 구호활동 모습 등이 담겨 있다. 또 53년 휴전회담 장소로 제의됐었던 ‘덴마크 병원선’ 내부가 촬영된 영상도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됐다. 국가기록원 관계자는 “포로수용소나 프란체스카 여사 관련 영상은 공개된 적이 있지만, PW 도장을 찍는 모습과 프란체스카 여사가 직접 구호활동을 벌이는 영상은 처음으로 확인됐다.”면서 “우리나라의 첫 지방의회 선거 과정이 상세히 기록된 것도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경옥 기록원장은 “1080분 분량의 영상과 2885장의 사진기록물이 분류되는 대로 기록원 홈페이지(www.archives.go.kr)를 통해 일반에 공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박성국기자 psk@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6·25전쟁 당시 1사단장 백선엽 장군

    [김문이 만난사람] 6·25전쟁 당시 1사단장 백선엽 장군

    톨스토이가 쓴 명작 ‘전쟁과 평화’를 잠시 기억해본다. 마지막 부분이다. 주인공 안드레이 청년이 죽어가면서 ‘시베리아의 하늘도 파랗구나’라고 읊었다. 평화로운 파란 하늘을 진작 봤으면 전쟁을 할 일도 없을 텐데 죽어갈 때 누워서 하늘을 보니 ‘왜 피 흘리면서 전쟁을 했을까’라는 물음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6·25전쟁은 왜 했을까. 평화를 위해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했고, 세월이 지난 지금도 눈물겹도록 아프게 하는 역사를 왜 만들어야 했을까. 참으로 비통하고 영원히 기억을 할 수밖에 없는 우리 민족의 큰 상처이기에 해마다 6월이면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1950년 6월 25일 아침 7시였다. 젊은 장교의 일성은 이랬다. “사단장 각하, 전방에서 적이 전면적으로 침공해 왔습니다. 개성이 대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개성은 벌써 점령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서울과 개성 등 전방을 지키는 보병 제1사단 작전참모 김덕준 소령의 숨가쁜 목소리를 들은 것은 당시 백선엽 1사단장이다. 우리 역사에서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을 알리는 제1보였다. 백선엽 장군은 시흥에 있던 육군보병학교에서 10일 전부터 3개월 과정의 고급간부교육을 받고 있던 중 급거 귀대하여 1사단을 지휘했다. 이후 낙동강까지 후퇴한 1사단은 한국군 부대 중에서 유일하게 미1군단에 배속돼 지원 나온 미군 2개 연대와 함께 경북 칠곡의 다부동 전투를 치렀다. 전투 중 한국군 병력의 후퇴와 무단이탈이 심해지자 함께 다부동을 지키던 미군 27연대장 마이켈리스(Michaelis) 대령이 “전선 좌측의 한국군 부대가 무단 이탈하고 있다.”며 다급하게 전황을 알려왔다. 백선엽 장군은 후퇴하는 국군을 막으며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 저 사람들(미군)이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이럴 순 없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며 싸울 것을 호소했다. 이후 1사단은 평양 입성을 가장 먼저 했다. 백선엽 장군은 최근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라는 제목으로 6·25 전쟁 당시 1128일의 기억을 책으로 펴냈다. 6·25전쟁 얘기만 나오면 누구보다 또렷이 기억하는 살아 있는 역사로 여긴다. 6·25전쟁 61주년을 앞두고 지난 20일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에서 백선엽 장군을 만났다. 6월이어서 그런지 강의를 해 달라는 손님들이 분주히 드나들었다. 약속 시간보다 20분 뒤에야 자리에 마주 앉았다. 1920년생이면 우리 나이로 92살. 그런데도 전쟁의 기억은 분명했다.. 차 한 잔을 마시더니 백 장군이 “고향이 어디요.”라고 물었다. 제주도라고 답을 드렸다. 그러자마자 나오는 얘기는 이러했다. “제주도 무척 많이 갔지. 6·25때 모슬포에 보충대가 있었어. 16주 동안 교육을 시키고 전쟁터에 보냈거든, 그래 육군 제1 훈련소야. 20살 전후의 청년들 10만명 정도가 훈련을 받았어, 내 동생(백인엽 장군)이 훈련소장도 했고. 태풍도 많이 왔어. 미군부대에서 지원 받은 천막을 치고 훈련했지. 하루에 상륙함정(LST) 두 척이 오고 가면서 훈련병들을 실어 날랐어. 그 병사들이 전쟁터에 많이 죽었어.” 백 장군의 눈이 잠시 감긴다.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전쟁상황에서 지금의 5~6주 교육보다 더 긴 16주 교육을 했던 이유에 대해 물었다 . “미군의 2차대전 방식을 그대로 따랐거든. 미군은 100개 사단이 있었는데 대부분 16주 동안 훈련을 받고 전쟁터에 보내졌어. 2차대전때…. 제주도 훈련소는 일제때 썼던 비행장이야, 그러니까 일본군들이 중국의 난징(南京) 폭격을 위한 중간 기지였지. 훈련소에는 미군 고문관들이 많았어.” 백 장군은 왜 제주에 자주 갔을까. “내가 육군참모총장을 했었거든. 훈련소에 물이 부족했어. 그걸 해결하기 위해 LST나 미군 비행기를 이용해서 여러 번 갔어. 아마 수십 차례 될걸. 또 동생이 1년동안 훈련소장으로 있었거든. 장도영 장군도 훈련소장을 했었지.” 백 장군은 잠시 4·3사건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1948년 4월 3일이야. 내가 부산 3여단 참모장을 했어. 제주 관할이니까 부대 시찰차 갔었지. 그때는 제주읍이야. 4월3일 아침에 비행기를 타려고 하는데 김익열 연대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가 왔어. 김달삼(金達三)이 이끄는 폭도들이 제주지역 11군데 지서를 습격했다고 말야.” 잠시 관련 자료을 들여다본다. 김달삼은 사회주의 혁명가로 제주 4·3 사건을 주도한 남조선로동당원이다. 그의 본명은 이승진이며, 고향은 대구. 일본에서 중학교와 대학을 나왔다. 1945년 1월 일본에서 강문석의 딸 강영애와 결혼했으며 김달삼이란 이름은 원래 강문석이 쓰던 가명이다. 1946년 말 제주도 대정중학교 사회과 교사로 재직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쳤다. 그는 교사로 재직 중에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을 맡았으며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책이자 군사부 책임자가 됐다. 화제를 다시 돌려 6·25 전쟁때 제1보를 보고한 김덕준 소령에 대해 물었다. “그날 아침 7시였어. 지금도 그 목소리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 전화를 받는 순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북한이 탱크와 전투기를 갖고 있는거 알았거든.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도 수차례 얘기했고…” 백 장군은 이 대목에서 “이승만 대통령도 미군에게 북한의 남침 예상을 얘기했고 나도 미군 고문단과 만날 때마다 전투기와 탱크, 대포를 달라고 수차례 말했다.”고 술회했다. “우리야 그때 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지. 미군에게 그렇게 여러번 얘기해도 귀담아 듣지 않았어. 희생을 줄일 수도 있었는데 말야. 북한군은, 나중에 노획문서를 보니 깨소금까지 준비할 정도로 매우 치밀하게 전쟁을 계획했어.” 백 장군이 얘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북한군이 왜 6월 25일을 택했는지 알 수 있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북한군은 남한에서 먹을 것이 많은 계절인 6월부터 9월까지를 정했지. 3개월이면 부산까지 싹 쓸어버릴 작정이었어. 이 시기는 들판에 가면 먹을 것들이 많거든. 전쟁에서 먹거리는 매우 중요해. 북한은 추수때까지 전쟁을 끝낼 계획을 짰어.” 그렇다면 우리 군사들은 무엇을 먹고 싸웠을까. “낙동강까지 후퇴하면서 농협창고에서 쌀을 얻었고 밭에 가면 파와 배추가 있었지. 그걸 먹었어. 또 우리 선량한 아주머니들, 국민들이 갖다주는 음식도 먹었어. 아주 훌륭한 분들이야. 다부동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우리 주민들이 갖다주는 음식이 있었기 때문이지.”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할 때는 어땠을까. “김일성 군대는 낙동강에서 완전히 녹았어. 북진을 하면서는 시장에서 먹을 것을 사 왔고 군에서 나오는 건빵을 먹었지. 고지 전투에서는 배가 고파 이탈하는 군인들도 더러 있었어. 북진할 때는 하복을 입었는데 나중에 동복으로 갈아 입었고…. 북한 주민들이 우리를 보더니 많이 환영했어. 먹을 것도 주고….” 백 장군은 평북 운산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과 맞닥뜨린다. “중공군은 장개석 군대 출신들의 최정예 부대야. 일본군과 10년을 싸운 군사들이었지. 전쟁경험이 아주 많아. 그런 군사 100만명이 압록강을 넘어와 매복을 하고 있었으니 우리 군이 당할 수밖에 없지. 그래도 우리 1사단을 덜 당했어. 운산 일대에 중공군 30만명이 매복하고 있다는 것을 하루 전에 알 수 있었지. 하루 밤새 싸우다가 도저히 안 되더라구. 결국 후퇴하고 말았지만….” 그러면서 백 장군은 북한군의 변화상에 대해 여러 번 강조했다. “남북한은 여전히 휴전 상태이며 두 세대가 지나는 동안 북한은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120만명의 지상군과 20만명의 특공대를 갖고 있다.”면서 “지난 61년 동안 북한은 청와대도 습격하고 천안함을 폭침하고 연평도를 포격하는 등 별 장난을 다했다.”고 말했다. “우리 젊은이들이 경계를 잘해야 돼. 대부분 고등학교 이상 출신들이 군대를 가잖아. 자원이 아주 훌륭해요” 백 장군은 군사영어학교 출신이다. 전체 110명이었는데 지금 만나는 동기들은 겨우 15명 내외에 불과하다. 건강이 어떠냐고 했다. “아픈 데 없어. 병원도 안 가. 동기들과 만나 옛날 얘기하는 재미로 살고 있어.” 맥아더 장군이 얘기했다.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 백 장군은 “너무 오래 살았어.”하면서 껄껄 웃는다. 편집위원 km@seoul.co.kr >> 백선엽 그는 누구인가 1920년 평안북도 강서군 덕흥리에서 태어났다. 1940년 3월 평양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교사로 재직하다가 만주 봉천(奉天) 군관학교에 진학하면서 군인의 길을 걸었다. 1942년 12월 제9기로 졸업하고 견습군관을 거쳐 1943년 4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다. 해방 직후에는 잠시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1945년 2월 월남했다. 이후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학했고, 1946년 2월에 임관했다. 그해 1월 창설된 국방경비대에서 제5연대장을 맡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방경비대가 정식으로 국군으로 재편되면서 제5연대장과 육본 정보국장을 거쳐 1950년 4월에 개성을 관할하는 국군 1 보병사단 사단장(당시 계급 대령)으로 부임했다. 1951년 겨울에는 지리산의 빨치산 소탕을 위한 ‘백(白) 야전사령부’를 구성했으며 이 사령부를 모태로 이듬해 4월에는 한국군 최초로 근대화된 2군단을 창설했다. 1952년 7월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된 후 군 훈련체계의 개혁, 보급체계 개편, 상이군인들에 대한 복지 향상 등에 힘썼다. 이때 10개 상비사단 창설(11~20사단), 10개 예비사단 창설 등을 추진했다. 퇴역 후에는 외교관 생활을 한 뒤 교통부 장관을 지냈다. 대한민국 최초의 원수계급에 해당하는 예우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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