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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0년만에 열린 소이산길 안전 걱정말고 걸으세요

    울산 울주의 하늘억새길. 해발 1000m가 넘는 간월산·신불산·영축산·천황산·재약산·가지산 등 7개 능선이 이어진 길이다. 드넓은 억새 군락지로 유명하다. 경기 양평 남한강·북한강 물가에 펼쳐진 흙길인 물래길도 많은 사람이 찾는다. 연꽃·갈대·철새·여울이 수려해 영화·드라마촬영 장소로 이름난 곳이다. ●행안부 ‘녹색길 베스트10’ 선정 24일 행정안전부는 이 두 곳을 포함, 여름휴가를 즐길 수 있는 ‘우리 마을 녹색길 베스트10’을 뽑아 발표했다. 광주 동구 ‘무등산 자락 다님길’은 도심 무등산 줄기에 노선이 완만해 누구나 다닐 수 있는 길이다. 강원 철원의 소이산 생태 숲 녹색길은 원래 군 작전도로였다. 6·25전쟁 이후 60년간 민간에 개방된 적이 없는 곳이다. 철원평야가 한눈에 들어오는 광경이 일품이다. 서산 아라메길을 걷다보면 마애삼존불·혜미읍성 등 백제와 조선시대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여수 금오도 비렁길에서는 동백나무 숲터널을 지나 해안을 따라 기암괴석 절경을 즐길 수 있다. ●안전요원 1411명 배치해 순찰 이 밖에 충북 충주 비내길, 전북 정읍 백제가요 정읍사 오솔길, 경북 예천 삼강 회룡포 강변길, 경남 함양 지리산 자락길 등도 베스트 10에 올랐다. 행안부는 관광객의 안전을 고려, 안전요원 1411명을 배치했다. 김장주 행안부 지역녹색정책관은 “동호회 참여 걷기대회 개최, 홍보책자 소개 등으로 걷기 붐을 조성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김양진기자 ky0295@seoul.co.kr
  • [시론] 장병 정신교육은 시비대상 아니다/여영무 전 언론인·남북전략연구소장

    [시론] 장병 정신교육은 시비대상 아니다/여영무 전 언론인·남북전략연구소장

    최근 국내 정치경제 상황은 매우 긴박하고 혼란스럽다. 12월 대선을 앞둔 여야의 힘겨루기와 대통령 친인척들의 잇따른 부정·비리 연루, 종북 인사들의 국회 입성 등으로 말미암은 국가 정체성 훼손, 통진당 내 선거부정 등으로 국가 기강이 심히 흔들리고 있다. 이런 국정 혼란은 정도의 차이일 뿐 어느 나라에서나 항상 있는 문제들이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분단 67년간 북한으로부터 6·25 남침 전쟁을 비롯해 부단하게 침공을 받아 항상 전쟁 위험을 조마조마하게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심각성이 다르다. 북한은 ‘대선의 해’마다 친북과 종북 세력을 키우려고 각종 선전선동과 유언비어를 확산하면서 더욱 맹렬히 나서고 있다. 그들은 올해도 그런 대남 정치공작을 이미 시작했다. 북한의 허위 기만 선전선동에 취약한 세대가 6·25를 겪지 않은 청장년들이다. 수십 년간 일부 세력의 편향 왜곡된 친북·반미 세뇌교육 탓도 크다. 햇볕정책 시기 한 고위 안보관계자는 북한에 대한 대북 적개심보다 조국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강조함으로써 대적(對敵)관을 교묘하게 왜곡하기도 했다. 1980년대 출생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미국과 북한 간 ‘전쟁이 난다면 어느 편에 서야 하느냐’는 물음에 ‘북한 편에 서야 한다’고 답한 신세대가 66%에 달했다. ‘미국 편에 서야 한다’는 응답은 불과 28.1%였다. 퍼주기식 대북 포용 햇볕정책이 젊은 세대들의 대적관을 이처럼 엉망으로 흩트려 놓았다. 국가, 특히 군대의 대적관이 명확하지 않으면 전투력을 최대한 향상시킬 명분이 약하고 유사시 대적 섬멸 의지도 주춤할 수밖에 없다. 같은 민족이지만 북한이 우리의 ‘주적’이라는 것을 젊은 세대와 국군 장병에게 교육하고 확인시켜야 한다. 북한의 호전 세력이 대한민국의 존립과 안전보장을 위협하는 세력이며 주적이 틀림없다. 지난 60여년간 북한의 행태를 보면 그들은 오늘 웃으면서 대화하다가도 내일 당장 전단(戰端)을 여는 핵을 가진 호전 세력이자 1인 독재국가다. 북한을 단순한 동족으로 여기는 것보다 주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6·25와 천안함, 연평도 포격 같은 기습공격에 더욱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으며 물샐틈없는 방어 태세를 갖출 수 있다. 군사훈련과 장병을 위한 정신교육은 필요불가결하다. 군대 정신교육의 목표는 장병들에게 누가 주적인가, 대적관을 확실히 하고 직접·간접·국내외적 위해 요소들을 미리 알려 일도 필살의 정신무장을 시키는 것이다. 정신교육은 장병의 국토방위 임무가 조국의 간성으로서 얼마나 숭고하고 성스러운 일인지를 고취하는 목적도 있다. 요즘 대형 출판사들이 안보·전략 관계 서적들을 출판하지 않는 것은 이런 부류의 서적들이 전혀 팔리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젊은 세대들의 안보관을 무감각하고 취약하게 하는 또 하나의 충격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젊은 세대들은 실은 안보가 국민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줄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미래 행불행까지도 좌지우지한다는 사실을 똑똑히 깨달아야 한다. 병자호란과 임진왜란, 그리고 김일성의 6·25 남침 전쟁이 남북분단의 고통을 결정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각에서 최근 군대 내 장병 정신교육을 위한 안보 강연을 시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본다. 안보, 국방, 외교(대북정책)는 미국 등 선진국처럼 초당적이라야 적들이 감히 넘보지 못할 것이다. 튼튼한 안보야말로 적과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최상의 병법이자 손자병법의 으뜸 전략이다. 더구나 지난해 12월 김정일 사망으로 김정은이 3대 세습정권을 승계한 후 최근 강경파 리영호 총참모장이 갑자기 해임되는 등 권력투쟁이 치열하다. 김정은의 후계 권력 기반이 아직 공고하지 못하다는 증거다. 마침 대선까지 겹친 올해 북한이 이런 내부 불안을 바깥으로 돌리고자 또 어떤 무력도발을 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다. 장병 정신교육의 필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이유다.
  • [기획]최고경영자=⑫ 현대(現代)칼라 장남수(張南秀)씨

    [기획]최고경영자=⑫ 현대(現代)칼라 장남수(張南秀)씨

     「카메라」가 좋아「카메라」1개만 덜렁 둘러메고 미군부대에 취직했다. 그로부터 25년. 이젠 한해 매상 3억원을 올리는「메머드」종합현상소의 사장이 됐다. 한때는 사진기자로 6·25 동란에도 종군했고 미군 PX사진부에서도 일하기도 했다. 휴전 직후 서울역 뒤 서계동(西界洞)에 세운 현대(現代)「칼라」가「컬러」시대를 맞으면서부터 사업도, 인생도「컬러풀」해진 장남수(張南秀)씨의 맨주먹 입지전(立志傳).  고향은 경기도 시흥(始興). 그러나 부모를 따라 일본에 건너가「도꾜」의 성고고등학교 예과 학생일 때 해방을 맞아 귀국했다.  20살 때부터 만지기 시작한「카메라」에 그만 정이 들어 23살때 인천(仁川)서 흥신양행이란 사진재료상을 차린 장남수(張南秀)씨다. 뜻하지 않은 6·25 동란으로 첫 사업은 실패하고 부산(釜山)에 피난 가 국제(國際)「타임스」사의 사진기자로 입사, 전선에 종군하기도 했다.  수복 직후인 51년 9월 미군 PX사진부에 들어간 것이 오늘의 현대(現代)「칼라」를 있게 한 계기. PX에 근무하다 사귀게 된 미군 장성의 권유로 문산(汶山)에 주둔하고 있던 미(美)해병사단을 상대로 DP점을 차렸다.  『미군(美軍) 상대의 장사란 땅짚고 헤엄치기죠. 수금 날짜가 정확하니까 모든 게 계획대로 움직여 나갈 수 있거든요』  여기서 장(張)씨는 돈을 모을 수가 있었고 사업을 크게 벌여나갈 경험을 얻었다고. 당시는 흑백사진뿐이었지만 미군들의 초상화도 그려 주고「슬라이드」도 만들어 주었다고.  53년 가을, 서울 서계(西界)동에 현대(現代)현상소를 차렸다. 창설 당시의 직원은 모두 20명.  『그때만 해도 전기·수도사정이 나빴어요. 지금 이 자리는 일제때 양조장 하던 자리라 아무리 가물어도 샘물이 끊이지 않는 좋은 자리였어요. 또 바로 앞집엔 고관(高官)이 한분 살아 전기 특선(特線)이 들어왔어요. 수도·전기 사정 때문에 이곳에 자리 잡았지요』  6·25땐 사진기자로 종군···미군 상대로 DP점 차려  당초 현대(現代)「칼라」가 설립되었을 땐 장(張)씨 말고도 6명의 동업자가 있었으나 일해 오는 동안 모두 독립해 나가고 지금은 장(張)씨만 남아 독자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현대(現代)「칼라」는 7~8년 전부터「컬러」사진이 대중화되면서「메머드」기업으로 자라났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80%가 흑백사진이던 것이 지금은 95%가「컬러」사진으로 뒤바뀌었다.  이 중 25%는 미군 상대의 군납으로 초상화「앨범」「컬러·슬라이드」등을 함께 제작하고 있다.  새한「칼라」와 더불어 국내 현상업계의 2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현대(現代)「칼라」는 현재 2백여곳, 지방에 1백여곳의 특약점을 갖고 있으며 손익분기점은 한달 매상 3천만원선.  『「컬러」가 대중화되면서 현대(現代)가 큰 것은 사실이지만 1백여곳이나 생겨났지요.「컬러」사진의 질이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으면 분간할 수 없읍(습)니다. 당장 보기엔 똑같은 저질의 상품을 군소업자들이「덤핑」하고 있으니 우리처럼 규모 큰 곳은 고전을 면치 못하지요』  장(張) 사장의 경영 철학은 한 업종에만 매달리지 않는다는 것.  『「메인·비즈니스」(주업종·主業種)가 잘 될때 장래성 있는「사이드·비즈니스」(부업종·副業種)를 벌여 놓아야죠.「메인」이 한계점에 이를 땐「사이드」쪽에 지원해 줄 수 있도록』  바로 이「사이드·비즈니스」로 생겨난 것이 현대(現代)교역주식회사다. 66년 5월에 설립된 현대(現代)교역은「아사히·펜탁스」사의「카메라」,「러키」사의 확대기,「캐논」사의 전자계산기, 「미놀타」사의 전자복사기, 그리고 일본의「사꾸라·필름」등을 수입해 국내에 팔았다.  다음 손댄 것이 인쇄업. 우리 나라 최초로 4색도(色度) 인쇄기를 수입해다 국내 출판업계에 팔았으며 직접 인쇄업에 손대기도 했으나 여기선 별 재미를 못 보았다.  한(韓)·일(日)무역에「브레이크」가 걸리자 이번에 미국에 손을 대「듀퐁」사의「필름」대리점으로 의료용·공업용「X레이」, 제판용「필름」들을 들여다 팔기도 했으며 우리나라 최초로「와이드·컬러」를 개발해 각 유흥업소 등에 팔아 재미를 보기도 했다.  포부는 국산 카메라 제작···해외정보망 넓혀 수출도  『이제는 수입보다 수출이 더 재미를 보는 세상이 됐읍(습)니다.「엔」화 ,「마르크」화의 평가절상으로 수출의 길이 넓어졌거든요』  현대(現代)교역도 얼마 전 신문광고를 내어 수출 가능한 상품엔 외국「바이어」들을 소개 알선해 주겠다고 했다.  『우리가 갖고 있는 해외 정보망이 있어 일하기 쉽거든요. 현대(現代)「칼라」는 그대로 두고 앞으로는 현대(現代)교역을 종합수출상사로 발전시켜 볼 계획입니다』  그 첫 계획으로 주안(朱安)공업단지에 있는「모자이크·타일」공장과 제휴, 올 4월부터 매달 3만여$어치씩 수출하기로 했다고.「모자이크·타일」은 월남 종전과 함께 동남아에 불어온 건축「붐」에 꼭 필요한 자재. 없어서 못 판다는 장(張) 사장의 말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도자기 공장에서 쓰는 돌광산을 이미 인수해 놓을 정도로 속이 깊다.  또 하나의 계획은 일본의「아사히·펜탁스」와 제휴, 국내에서「카메라」를 만들어 보는 것. 당장 완제품은 어려워 우선 부품 생산부터 시작해 마지막엔 국산「카메라」를 만들어 내겠다는 포부다.  『우리 회사 자랑요? 글쎄 15년 이상 근속자가 많고 1백30여명 사원 중 50% 이상이 10년 이상 근속자라는 점일까요?』  한번 쓴 사람은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는 게 장(張) 사장의 인사(人事)관리「알파」이자 「오메가」.  어렸을 때는 동네 골목대장으로『땅딸보』란 별명을 들었다는 데 지금도 야무진 사업수단은 어렸을 때 그대로란 주위의 평. 기계체조로 몸을 단련했고 지금도 새벽 5시30분에 꼭 일어나 새벽 등산을 하는 열성파.「골프」는「핸디」8로「프로」못지 않은 솜씨.  『자수성가 비결요? 머리 잘 쓰고 부지런하면 되죠, 업체를 이끌어나가는 덴 인화·단결이 최고의 자본이고요. 재산요? 글쎄···한 5억쯤 된다고 해두죠, 뭐』 <창(昌)> [선데이서울 73년 4월 8일 제6권 14호 통권 제234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9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기사 내용과 광고 카피 등 당시의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한권에 얼마냐고요? 50원이었습니다. ●이 기사에 대한 저작권, 판권 등 지적재산권은 서울신문의 소유입니다. 무단 전재, 복사, 저장, 전송, 개작 등은 관련법으로 금지돼 있습니다.
  • 23일 ‘6·25와 정전체제’ 학술회의

    국가보훈처는 오는 23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20층)에서 사단법인 한국국방안보포럼 주관으로 6·25전쟁 60주년 국내학술회의를 개최한다고 19일 밝혔다. 보훈처와 6·25전쟁 60주년 사업위원회가 공동으로 후원하는 이번 학술회의의 주제는 ‘6·25전쟁과 정전체제-교훈과 나아갈 길’이다. 세부적으로는 3개의 발표 주제로 구성돼 있으며 ‘정전의 과정과 배경’ ‘정전 60년의 유산과 교훈’ ‘정전체제를 넘어서의 과제’ 등에 대해 논의한다. 참석인원은 300여명이다. 보훈처 관계자는 “이번 학술회의는 청년들에게 6·25전쟁과 정전협정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할 방향과 비전을 제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하종훈기자 artg@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한국 현대음악 개척 강석희 前서울대 교수

    [김문이 만난사람] 한국 현대음악 개척 강석희 前서울대 교수

    오는 27일 런던올림픽이 열린다. 올림픽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성화가 아닐까. 시곗바늘을 잠시 1988년 서울올림픽 현장으로 돌린다. 9월 17일 저녁 잠실 올림픽 주 경기장. 숱한 곳을 돌고 돌아온 성화가 드디어 경기장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가 싶더니 여태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제우스 신, 천둥, 번개, 투창대회, 춤 등의 이미지가 컴퓨터와 트럼펫, 여성 보컬 등에 의해 역동적이고 아름다운 선율로 형상화됐다. 그 음악을 타고 성화대에 점화가 되는 순간 이 광경을 지켜보던 전 세계 음악인들이 놀라움과 찬사를 아낌없이 보냈다. 역사상 처음으로 컴퓨터 음악을 성화에 접목시켰기 때문이다. ‘프로메테우스 오다’라는 제목에 걸맞게 문명의 다양성을 잘 조화시켜 세계 음악사적으로 잊을 수 없는 감동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10월 2일 저녁 성화가 꺼질 때에도 이 같은 광경이 다시 연출됐다. 당시 이 음악을 직접 작곡하고 감독까지 맡았던 주인공이 바로 강석희(77) 전 서울대 교수다. 지금도 그날의 광경을 잊지 못한다. 그의 이름 석 자를 세계 음악인들에게 각인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음은 물론이다. 그는 1966년 국내 최초의 전자음악 ‘원색의 향연’을 작곡했다. 이를 시작으로 30인의 타악기 주자를 위한 ‘예불’, 관현악을 위한 ‘생성69’, 피아노를 위한 ‘정점’ 등의 작품을 연이어 쏟아냈다. 196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는 음악의 암흑기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전자음악을 비롯한 음악극, 칸타타, 독주곡, 관현악곡, 협주곡, 실내악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을 만들어내 음악계를 놀라게 했다. 아울러 1969년 그가 처음 주도한 ‘판 뮤직 페스티벌’은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오면서 세계 음악과 흐름을 같이하고 있다. 특히 1970년 일본 오사카 국제박람회 때 그의 창작곡이 연주되면서 일본과 유럽의 음악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1984년 국제현대음악협회(ISCM) 주최 세계 음악제에서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부회장에 선출돼 세계 무대에서 확실히 인정받기에 이른다. ●11월 도쿄·내년 4월 루브르박물관서 연주 올해로 그의 음악 인생은 55년째다. 지금까지 세상에 내놓은 작품은 모두 80여 곡에 달한다. ‘가야금을 위한 다섯 개의 정경’, 국악 관현악을 위한 ‘취타향’ 등 전통과 접목시킨 것도 있고 김수용 감독의 ‘화려한 외출’ 등 영화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국내에서보다 유럽과 미국, 남미 등 해외에서 초연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는 작품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솔로, 오케스트라, 오페라, 실내악 등 전통적 형식의 작품들을 형식에 따라 각기 적합한 어법으로 소화해 낸다.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젊은 청년처럼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 16일 오후 경기 성남시 분당에 있는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악보와 여러 음악 관련 책들이 이리저리 널려 있었다. 그런데 피아노가 보이지 않았다. 자리에 앉으면서 그 까닭을 먼저 물었다. “저는 원래 피아노가 없습니다. 작곡할 때 미리 다 소리를 알고 하기 때문에 피아노를 전혀 쓰지 않습니다. 물론 피아노 앞에 앉아 소리를 들어보며 작곡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건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방법이지요. 제 경우는 창작할 때 고도의 집중력을 가져야 하거든요.” 그렇다면 곡을 다 쓰고 나서 어떻게 듣느냐고 했더니 “연주하는 무대 객석에서 처음 듣습니다. 연주는 연주가의 몫이니까.”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괜히 물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서 요즘에는 어떤 일로 바쁜지 물었다. “작년에 일본으로부터 위촉받은 ‘8중주’가 있는데 8월 말까지 끝내야 합니다. 오는 11월 도쿄에서 첫 연주회가 예정돼 있거든요. ‘8중주’가 끝나면 곧바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판타지’를 써야 합니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측에서 오래전에 위촉을 받아 놓은 상태거든요. 이 곡은 내년 4월에 루브르박물관에서 연주될 예정입니다.” 이렇듯 그의 곡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많이 찾는다. 최근 브라질 상파울루와 미국 뉴욕에서 그의 오케스트라곡이 연주됐다. 11월에는 일본, 그리고 12월에는 토론토 연주회가 있으니 하반기에만 4차례 해외에서 연주되는 셈이다. “오사카엑스포 당시 오케스트라곡인 ‘생성69’와 실내악 2곡이 연주됐을 때 일본의 신문이나 음악잡지에 크게 게재됐습니다. 얼마 뒤 독일에 갔을 때였지요. 저를 알아보는 음악가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기분이 좋더라고요. 하루아침에 유명해졌다는 말이 있잖아요(웃음).”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에게 대중들이 현대음악을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음악이 어려우냐 쉬우냐가 문제가 아니라 좋은지 아닌지가 중요합니다.”라면서 “좋은 음악은 분명 감동을 던져 줍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대개 현대음악에는 기립 박수가 없다고들 하지만 1997년 ‘피아노 콘체르토’ 파리 연주 때와 서울 연주 때 등 그동안 기립 박수를 많이 받았습니다. 작품의 성공적인 연주는 형언할 수 없는 행복함과 자신감으로 이어집니다.”고 말했다. 대중들도 음악을 자주 접하다 보면 그런 행복과 감동을 맛볼 수 있다고 부연했다. ●1년에 2곡 정도 작업… 지금까지 80여곡 탄생 그는 한 해에 2곡 정도 쓴다. 곡을 쓸 때마다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하고 고통을 이겨내며 난해한 수학문제를 풀 듯이 논리적으로 연결해 나가는 작업을 한단다. 마치 건축가가 설계해 놓은 전체의 디자인에 따라 그려 나가듯이. “작곡가가 작곡한다는 것은 순수한 음과의 대결을 의미합니다. 소리는 차갑고 냉정한 것이지요. 그런 소리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작곡가가 할 일입니다. 음악은 보이지 않는 예술이기 때문에 그 구조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흐르는 건축물이라는 표현을 쓰지요.” 어떻게 해서 작곡과 인연을 맺었을까. 초등학교 때만 하더라도 탐정과 추리소설에 심취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외증조부와 손을 잡고 집을 나섰는데 도착한 곳이 경성공업고등학교 교장 선생 댁이었다. 당시 할아버지는 고종 때 장원급제하고 1900년에 일본 유학을 다녀올 만큼 공부를 많이 한 분이었고 경성공고 교장은 바로 할아버지의 제자였다. 이때 할아버지는 경성공고 교장에게 손자를 부탁했다. “그런 인연으로 나중에 음악과 전혀 관계없는 경성공고에 진학했습니다. (잠시 생각하다가) 그런데 대개 좋아하는 선생님을 만나면 그 과목을 잘하게 되잖아요. 미술 선생님이 좋으면 미술을 공부했고 음악 선생님이 좋으면 음악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렇게 미술과 음악, 수학 등을 좋아했지요. 또 32권짜리 세계문학전집을 독파했는데 그게 나중에 음악에 대한 집중력과 저력을 키우는 원천이 됐습니다.” 그는 음악대학에 진학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도 말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종로6가에 살 때였다. 하루는 서울대 음대에 놀러갔다. 우연히 작곡을 전공하는 대학생들을 먼발치에서 볼 수 있었고 그 모습이 아주 멋있게 다가왔다. 문득 작곡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는 청음 실력이 남다르다는 얘기를 듣고 있던 터였다. 곧바로 책을 몇 권 읽고 서울대 음대에 응시했다. 당시 47명이 시험을 치렀는데 8명이 합격했다. 이강숙, 백병동, 송해섭, 장광열, 이영욱, 임종영, 장성덕 등이 동기들이다. “1964년 급성간염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였습니다. 대학 동기 백병동이 ‘전기와 전자’라는 책을 놓고 갔습니다. 평소 관심이 있어서 단숨에 읽었지요. 전자음악이란 이렇게 만드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처음 알게 됐습니다. 퇴원하자마자 KBS 스튜디오를 빌렸고 3개월의 작업 끝에 전자음악을 만들어 냈지요.” 이후 전자음악과 컴퓨터를 접목시키는 등 오늘날까지 한국의 현대음악을 개척하며 꾸준히 이끌어 오고 있다. “예술가란 기존에 닦아 놓은 길을 따라서 가는 것이 아니라 험한 정글에서 길을 찾아 나가는 모험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작곡가 강석희는 국내 첫 전자음악 ‘원색의 향연’ 발표 1934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1946년 경성공고 토목과에 진학했다가 6·25전쟁 때 경북 안동으로 피난 가서 안동고를 졸업했다. 이 무렵 성가대 활동을 통해 음악을 접했다. 이후 서울대 음대에서 작곡을 전공했으며 졸업 후 6년 동안 정신여고 음악 교사로 재직했다. 1960년대 초반부터 서양의 현대적 작곡 방식에 관심을 가졌으며 1966년 한국 최초의 전자음악 ‘원색의 향연’을 첫 작품으로 발표했다. 1968년 잠시 한국에 와 있던 윤이상 선생에게 작곡을 배웠다. 1969년 ‘판 음악제’의 모태가 되는 ‘서울 현대음악 비엔날레’를 개최했다. 1970~1971년 독일 하노버 음악대학에서 작곡을 배웠다. 이후 베를린 공과대학에서 음향학자 프란츠 빈켈 등을 사사했다. 1982~1999년 서울대 작곡과 교수로 재직했다. 1984~1990 국제현대음악협회(ISCM) 부회장을 맡았다. 이후 서울올림픽 폐회식 음악감독(1988), ISCM 서울 세계음악제 집행위원장 및 예술감독(1997), 계명대 특임교수(2000) 등을 지냈다. 주요 수상으로는 대한민국문화예술상(1990), 보관문화훈장(1998), 서울사랑시민상(2004) 등이 있으며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 [밥상 108년 5대 변천사] ①살기 위해 먹는 시대 ②먹기 위해 사는 시대 ③건강을 먹는 시대

    우리 사회는 지난 108년 동안 일제 강점기, 광복과 분단, 6·25전쟁, 산업화 등 굴곡의 변화를 겪었다. 시대 흐름에 따라 밥상의 형태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의 밥상은 ‘살기 위해 먹는 시대’에서 ‘먹기 위해 사는 시대’를 거쳐 ‘건강과 즐거움을 찾는 시대’를 향하고 있다. 1900년대 초반 개화기 조선의 밥상은 곤궁하기 짝이 없었다. 1800년대 후반 홍수와 가뭄 등 자연재해가 잇달아 농작물 생산이 부진했다. 그나마 수확한 쌀은 부패한 왕실과 관료들에게 빼앗기기 일쑤였다. 인구의 80%를 차지했던 농민들은 풀, 감자, 나무열매에 잡곡을 섞어 끓인 죽 등으로 입에 풀칠하기 바빴다. 하루 세 끼를 챙겨 먹기 어려웠다. 1895년 동경의학잡지에 실린 한인 상식(常食) 조사표는 조선 중류 서민층의 7일간 식사를 관찰한 결과 1일 2식을 했다고 적고 있다. 1910년 국권을 일제에 빼앗기면서 ‘밥상의 암흑기’가 시작됐다. 토지조사사업으로 농민 대부분이 논밭을 빼앗긴 채 소작인으로 전락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곡물 수탈은 한층 심해졌고, 서민들은 영양 불량에 시달렸다. 이화여전(현 이화여대) 가사과 교수였던 방신영(1890~1977)이 1952년 펴낸 ‘우리나라 음식 만드는 법’을 보면 당시의 중하위 계층을 위한 권장 식단표가 나온다. 하루 두 끼 정도만 밥을 먹고 나머지 한 끼는 국수, 수제비, 찐빵, 고구마 등으로 해결하도록 제시돼 있다. 동물성 단백질 반찬은 일주일에 한 번 먹는 생선 조림이 유일하다. 식량 부족은 미국의 원조로 어느 정도 해소됐다. 우리 정부는 1955년 미국과 협정을 맺고 1964년까지 밀, 보리, 쌀 50만~60만t을 들여왔다. 이는 당시 국내 총 곡물생산량의 40%를 차지하는 양이었다. 1960년대 이후 산업화 시기는 본격적으로 먹기 위해 사는 시대였다. 정부의 혼분식 장려운동으로 1인당 연간 밀가루 소비량이 1965년 13.8㎏에서 1969년 28.7㎏으로 2배 이상 증가했다. 1963년에는 국내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인 삼양라면이 생산되면서 라면으로 한 끼를 대신하는 가정이 늘어났다. 영양 측면에서는 여전히 미흡했다. 1962년 영양권장량이 처음 제시됐다. 25살 남자의 표준 영양권장량은 하루 에너지 2900㎉, 단백질 70g이었지만, 당시 국민 평균 하루 공급 열량은 1923㎉, 단백질 53.2g으로 기준치에 크게 못 미쳤다. 1972년 개발된 통일벼 등 다수확 품종의 보급으로 쌀밥 소비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쌀이 풍족해지자 밥상은 양보다 질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곡류 위주의 식단에서 벗어나 동물성 식품, 우유, 과일의 소비가 급증했다. 이런 경향은 1인당 연간 식품 공급량의 변화에서 드러난다. 쌀의 1인당 연간 공급량은 1975년 119.8㎏에서 1979년 136㎏으로 정점을 찍은 뒤 급격히 감소했다. 2009년에는 81.3㎏으로 최고점 대비 54.7㎏이나 줄었다. 반면 육류 소비는 1975년 9.3㎏에서 2009년 43.3㎏으로 4.7배 늘었고, 같은 기간 우유류는 4.4㎏에서 53.3㎏으로 12배 이상 증가했다. 과일도 1975년에는 1인당 14㎏ 정도 먹었지만 2009년에는 47.7㎏으로 4.3배 증가했다. 1989년 해외여행이 자유화되면서 밥상의 서구화가 본격화됐다. 2010년 3840가구를 대상으로 국민건강영양조사를 한 결과 주 5~6회 외식을 하는 사람이 26.6%였고, 하루 1회 이상 외식하는 비율도 25.3%인 것으로 나타났다. 오달란기자 dallan@seoul.co.kr
  • [밥상 108년 5대 변천사] 새우깡과 초코파이의 대결…‘달고나’와 ‘뻥이오’의 추억

    [밥상 108년 5대 변천사] 새우깡과 초코파이의 대결…‘달고나’와 ‘뻥이오’의 추억

    밥상만큼은 아니지만 우리 국민의 식생활과 추억을 함께 엿볼 수 있는 게 바로 주전부리다. 일제시대 때도 생과자(왜떡)나 서양식 제과점이 있긴 했지만 서민들에겐 ‘그림의 빵’이었다. 대신 떡이나 엿, 옥수수 등 자연 식품으로 궁금한 입을 달래야 했다. 1945년 해태제과가 생기면서 양갱, 캐러멜, 웨하스 등 과자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하지만 주전부리에 대변혁이 일어난 것은 6·25전쟁이 끝난 뒤 설탕, 밀가루, 껌 등이 본격 등장하면서다. 그런데 ‘더 센 놈’이 다가오고 있었다. ‘스낵의 혁명’으로 불리는 새우깡이 1971년 12월 농심을 통해 나온 것이다. 새우깡은 40년이 넘은 지금까지 70억 봉지 이상 팔리며 자꾸만 손이 가는 ‘부동의 국민 간식’으로 자리 잡았다. 막강한 라이벌 초코파이도 1974년에 등장했다. 동양제과(현 오리온) 직원이 1973년 미국 출장길에 맛본 ‘초콜릿 입힌 과자’를 귀국 후에도 못 잊어 1년여의 실험 끝에 내놓은 게 초코파이다. 이 대목에서 또 빼놓을 수 없는 게 ‘달고나’와 ‘뻥’이다. 불에 얹은 국자에 설탕을 녹여 소다를 푼 뒤 부풀어 오르면 납작하게 문양을 찍어 내는 과자가 달고나다. ‘띠기’ ‘뽑기’ ‘국자’ 등 지역마다 부르는 이름은 제각각이지만, 길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침을 살살 발라 가며 문양을 떼어내야 제맛인 것은 ‘전국 공통’이다. 요란한 뻥 소리와 함께 튀겨져 나오는 강냉이 역시 쌀의 변신이 주는 신기함과 무시무시한 선전포고(“뻥이오”)의 인기 덕에 동네 아이들을 졸졸 몰고 다녔다. 이후 식품산업이 발달하면서 젤리, 아이스크림 등 온갖 간식이 쏟아져 나왔다. 최근 들어서는 설탕 대신 올리고당이 들어간 제품을 찾을 정도로 주전부리에도 ‘웰빙’ 개념이 파고들었다. 안미현기자 hyun@seoul.co.kr
  • [‘소통의 장’ 광장의 10년 명암] “특정이념, 권력 독점 못해… 정상국가로 가는 과정”

    “종북세력을 척결하지 않고서는 국가 안정을 얻을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가 이 땅에 뿌리내리도록 기도하자.” 지난달 24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지키기 6·25 국민대회에서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명예회장인 조용기 목사가 “종북 척결”을 외치자 2만여명(경찰 추산)의 참석자들은 ‘종북 정당 몰아내자’는 손팻말을 흔들며 환호했다. 이날 행사는 한기총과 애국단체총협의회, 호국보훈안보단체협의회 등 보수단체들이 주관해 열렸다. 보수단체의 목소리가 광장을 채우고 있다. 서울신문이 사용료 징수가 시작된 2004년부터 2012년 6월까지 서울광장 사용 내역을 분석한 결과 ‘북한 정권 규탄’, ‘무상급식 반대’ 등을 주제로 한 보수성향의 집회가 지난해부터 급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과거 진보단체들의 전유물이었던 광장에서 보수단체들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다는 뜻이다. 2004년의 경우 보수단체는 서울광장에서 단 두 차례만 집회를 가졌다. 10월 4일 노무현 대통령 규탄과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등을 주제로 열린 ‘국민대회조직위원회’ 행사 등이 그것이다. 2005년에도 ‘북한민주화운동본부’의 행사 등 2건, 2006년 2건, 2007년 0건, 2008년 2건, 2009년 0건, 2010년 1건으로 보수단체의 집회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2011년을 기점으로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2010년 천안함 피격 사건과 2011년 무상급식 이슈의 영향을 받아 보수단체의 집회는 ‘복지포퓰리즘추방국민운동본부’의 ‘무상급식반대 주민투표서명’ 등 17건에 달했다. 이러한 모습은 올해도 그대로 이어져 6월 말까지 6건의 보수단체 관련 행사가 열렸다. 이재근 참여연대 시민감시팀장은 “2010년 서울광장 사용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꾸면서 보수단체의 움직임도 활발해졌다. 관변행사가 대부분이지만 광장이 개방돼 누구든 의사 표현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보수단체들은 “사회가 좌편향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나설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장기정 자유청년연합 대표는 “북한 인권과 ‘종북’ 문제가 이슈가 되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면서 “자유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확실히 추구하는 정당이 집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장에서 보수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은 민주화에 따라 특정 이념이 더 이상 독점적으로 정치권력을 잡지 못하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는 “과거 군사정권에서 국가가 하던 일을 보수단체가 대행하고 있다.”면서 “국가가 어느 정도 중립성을 갖추고 ‘정상국가’로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민주화로 인해 보수단체들도 의사 표현을 하지 않고서는 자신들의 요구를 얻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는 것이다. 또 정치이념보다 경제가 더 주요한 화두로 사회에 자리 잡은 것도 보수단체가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이유로 꼽힌다. 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화학부 교수는 “경제문제가 중요해질수록 이념의 영향은 줄어들게 된다.”면서 “때문에 이념을 중요하게 여기는 보수단체의 불만이 커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배경헌기자 baenim@seoul.co.kr
  • [부고] ‘곱사춤’ 공옥진 여사 별세

    ‘곱사춤’의 대가 공옥진 여사가 9일 오전 4시 52분 전남 영광의 한 병원 중환자실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81세. 고인은 1931년 전남 영광에서 판소리 명창 공대일 선생의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고인은 삶의 애환을 담은 소리와 해학적인 곱사춤, 전통무용을 접목한 ‘1인 창무극’을 만들어 수십 년간 서민과 함께했다. 대중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1인 창무극’이 무형문화재로 인정된 것은 2010년 11월이다. 1998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투병하면서도 후학을 양성했고, 2010년 국립극장에서 마지막 공연을 했다.
  • 유엔참전국 청소년 현충원 방문

    유엔참전국 청소년 현충원 방문

    2012 유엔 참전국 청소년 평화캠프 발대식이 열린 9일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캠프 참가자들이 6·25 참전용사 묘지에서 묘비를 닦고 있다. 도준석기자 pado@seoul.co.kr
  • “6·25 기억하고 인성교육·자원봉사도 하고”

    “6·25 기억하고 인성교육·자원봉사도 하고”

    ‘6·25전쟁과 참전용사도 기억하고 인성교육, 자원봉사도 하고.’ 사단법인 인간성회복운동추진협의회(인추협)가 주최하고 국가보훈처, 6·25참전유공자회, 한국대학생재능포럼 등이 주관한 ‘2012 세대공감 7·9(친구) 데이’ 행사가 9일 오후 서울 광화문 청계 광장 일대에서 열렸다. ●참전유공자 250여명, 학생들과 자매결연 6·25전쟁 참전 유공자 250여명과 초중고등학생과 대학생, 일반 시민 등 모두 1000여명이 참석한 이날 행사는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고령의 참전 유공자들과 학생들을 연결시키는 자매결연과 교육, 봉사를 위한 목적으로 마련됐다. 참가자들은 인추협이 지난 5월부터 진행한 국군포로 수기 공모자 등 신청자 가운데에서 선정됐다. 행사는 고등학생 자원봉사 공연단의 ‘난타’ 공연을 시작으로 전몰 장병에 대한 추모 묵념, 학생 대표 4명과 참전용사 대표 1명의 ‘세대공감 결의문’ 낭독, 자매결연을 위한 격려의 글 나누기, 전체 합창, ‘세대공감 길놀이’와 사물놀이 공연 등으로 진행됐다. 이날 자매결연을 맺은 유공자와 학생들은 앞으로도 정기적 만남을 통해 ‘유공자 돌봄 사업’을 진행하고 향토 기업 등의 참여를 유도해 기부와 각종 지원 사업도 추진할 예정이다. ●“범국민적 참여 사업으로 확대” 인추협 관계자는 “이번 행사를 단기가 아닌 장기적인 사회운동으로 펼쳐 감으로써 19만명에 이르는 참전 유공자들을 계속 지원하고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학생들이 올바른 국가 정체성과 역사를 배우고 봉사를 통한 참여의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 목표”라며 “전국적, 범국민적인 참여 사업으로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흥과 한 뒤틀린 몸짓에 서민 울고 웃었다

    흥과 한 뒤틀린 몸짓에 서민 울고 웃었다

    “통섭의 시대에 춤과 소리와 이야기를 아우르는 큰 별이 스러졌습니다.” 전통 공연 기획자인 진옥섭 한국문화의집 코우스 예술감독은 고(故) 공옥진 여사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한과 해학을 담아 소리를 하고 춤을 추면서 창조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1인 창무극’의 창시자이고 곱사춤과 동물춤으로 사람들을 웃겼다가 울리고 상처를 어루만지는 예인이기도 했다. ●최승희 일본집서 문틈으로 춤 배워 호적으로는 1933년생이지만 고인은 1931년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판소리 명창 공대일(1910~1990) 선생이고 아버지의 팔촌형 공창식(1887~1936)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으뜸가는 소리꾼이자 명창 임방울의 스승이기도 하다. 전라도 유명 예술인 집안에서 자라 사람이 북적거리는 환경에서 어릴 적부터 소리를 접했다. 아버지에게는 단가(판소리를 부르기 전에 하는 짧은 노래)를 배웠다. 단가를 모두 뗀 뒤에야 사설을 배울 수 있다는 가르침 때문에 사랑채 심부름을 하거나 부엌에서 흥얼거리면서 판소리 사설을 익혔다. 일곱 살쯤에 옥진은 일본으로 떠났다. 당시 일본으로 가던 ‘신무용의 대가’ 최승희 선생에게 아버지가 1000원을 받고 부엌데기로 판 것이다. 아버지는 그 돈으로 강제 징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린 옥진은 최승희의 일본집에서 집안일을 하며 틈틈이 문틈으로 춤을 배웠다. 10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 해방을 맞고, 열일곱 살에 경찰관과 결혼했다. 6·25전쟁 통에 경찰관 가족이라는 이유로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했다. ●야속한 세월 견디며 삶의 애환을 예술로 전쟁 뒤에 딸을 하나 낳아 어엿한 가족을 꾸리는가 싶었는데 남편이 동네 처자와 눈이 맞아 버렸다. 미련 없이 딸을 둘러업고 집을 나와 세상과 맞닥뜨렸다. 절에 얹혀살면서 스님들 밥을 지어 주고 때때로 절 뒤편에서 즐거운 일, 슬픈 일을 떠올리며 혼자 웃고 울었다. 1960년대에는 임방울 창극단, 김연수 우리악극단, 박녹주 국극협회 등 여러 국악 단체에 참여하면서 무대를 만들었다. 야속한 세월을 견디면서 몸에 익은 삶의 애환을 고스란히 풀어낸 것이 ‘1인 창무극’이다. 1978년 서울 공간사랑 개관 기념 공연에서 첫선을 보인 ‘1인 창무극’은 그야말로 ‘빅히트’를 쳤다. 전통 무용에 해학적인 동물춤을 접목한 ‘1인 창무극’은 수십년간 서민을 웃기고 울렸다. 그 후 동양인 최초로 미국 링컨센터에서 단독 공연을 하기도 했고 일본, 영국 등지에서 공연하면서 “가장 서민적인 한국 예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80~90년대는 ‘1인 창무극’ 전성기였다. 1995~1996년 서울 대학로 두레극장 공연에서는 500석 공연장에 1000여명이 몰려들었다. 이쯤이면 국악계 어르신으로 대접을 누릴 만도 한데 고인은 한사코 호텔 숙식을 거부했다. 최고의 스타였지만 올 때마다 김치를 담아 와 제작진을 일일이 불러 먹이는, 그저 어머니 같은 분이었다고 했다. “서울 종로3가에 있는 운당여관이라는 곳에서 늘 묵었고 함께 올라온 아주머니와 직접 밥을 해 드셨어요. 방값도 못 내던 무명의 서러움을 생각하면서 이만큼이나 됐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면서요.” 당시 공연기획을 한 진옥섭 대표의 말이다. 대중적인 인기에도 불구하고 공옥진의 ‘1인 창무극’이 무형문화재로 인정받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1998년 고인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듬해 ‘1인 창무극’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그러나 전남도 문화재위원회는 ‘전통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창작한 작품’이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10년이 지난 2009년 재신청을 할 때는 건축물이 주로 대상이 되는 ‘등록문화재’ 지정을 추진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 2010년 무형문화재로 인정 2010년 5월 마침내 ‘판소리 1인 창무극 심청가’가 전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 예고되고 그해 11월 최종 인정됐다. 2010년 6월 서울 국립극장 무대에 오른 고인은 “맺히고 맺힌 한을 풀었다. 이젠 죽어도 원이 없다.”며 온 힘을 다해 생애 마지막 춤을 췄다. “공옥진 선생 하면 ‘곱사춤’부터 떠올려요. 하지만 이건 본질이 아닙니다. 곱사춤은 심청가에 나오는 맹인잔치에서 공 선생이 표현한 많은 맹인 중 하나일 뿐입니다. 곱사춤이나 동물춤은 공 선생만이 할 수 있고 그분밖에 못 하는 ‘1인 창무극’의 일부인 거죠. 어떤 공연을 봐도 관객의 눈물과 콧물을 쏙 빼는, 그러다가도 또 언제 그랬느냐면서 웃겨주는 명공연을 보지 못한다는 게 우리 문화계에는 큰 상실일 겁니다.” 빈소는 전남 영광 농협장례식장 2호실. 발인은 11일 오전 8시로 잠정 결정됐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특파원 칼럼] 韓中수교 20년에 보는 ‘역사 갈등’/주현진 베이징 특파원

    [특파원 칼럼] 韓中수교 20년에 보는 ‘역사 갈등’/주현진 베이징 특파원

    “한국에서도 단오절을 지내죠? 주로 뭘 하나요?” 지난 단옷날(6월 24일) 즈음 홍콩 언론사에 근무하는 한 중국 본토인 기자가 건넨 질문이다. 베이징(北京)시 신문판공실이 외신 기자들(홍콩, 타이완, 마카오 포함)을 베이징의 관광 명소인 이화원으로 초청해 경주용 배인 용주(龍舟) 타보기, 나뭇잎으로 싸서 찐 찹쌀밥인 쫑즈(?子) 만들기 등 단오 풍습을 체험하는 행사를 통해 단오가 중국의 전통 명절임을 각인시키는 자리였다. 행사의 취지는 물론 중국 기자의 질문에도 한국에 단오를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불편한 심기가 여실히 묻어 있었다. 실제로 적잖은 중국인들에게 단오란 초나라 충신 굴원(屈原)을 기리는 데에서 유래한 전통 명절이라기보다 반한(反韓) 감정을 자극하는 초강력 기제에 가깝기 때문이다. 지난 2010년 8월부터 1년간 베이징에서 학교를 다닌 적이 있는데, 그때 함께 공부했던 중국 대학원생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았던 한국 문화에 대한 질문 중 하나 역시 단오에 관한 것이었다. ‘한국에서 유래한 한국 고유의 명절은 도대체 뭐가 있느냐.’는 공격적인 이슈로 이어질 만큼 강릉단오제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계기로 한국을 중국 문화의 약탈범 정도로 여기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한국의 단오는 중국의 굴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단옷날의 성격에 맞게 개발한 지역 민속 축제를 문화재로 인정받은 것이어서 중국의 명절을 한국에 빼앗겼다고 우려할 필요도, 더더욱 억울해할 필요도 없다. 일부 중국 학자들도 이같이 주장하지만 악화된 정서를 돌이키기엔 역부족이다. 당장 지난 3일 ‘고대 중국 화폐에 한글로 보이는 두 글자를 찾아냈다.’고 밝힌 한국의 한 주역 연구가의 주장이 전해지면서 반한 감정이 들끓었다. 한국에선 눈길도 끌지 못한 이 학설이 중국에선 “한국이 중국 고화폐에 한글이 있다고 또 우긴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졌다. 중국의 트위터 격인 웨이보에서 이 문제와 관련해 지난 4일 하루에만 ‘한국의 중국 문화 도적질’이란 비난성 댓글이 무려 2000만건도 넘게 올라왔다. 앞서 한자(漢字), 공자(孔子) 등 한국인이 보기에도 황당한 출처 모를 문화 기원에 관한 오해가 응어리처럼 깊게 축적된 탓이다. 중국을 봉쇄하려는 미국의 전략에 한국이 동참하는 것으로 언론에 보도된 한·일정보협정 문제는 외교문제를 넘어 반한 여론으로 비화하는 분위기다. ‘한·중 수교 이후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 중국에서 큰 돈을 벌면서도 틈만 나면 미국과 손잡고 중국의 뒤통수를 치려 한다.’는 정서가 저변에 깔려 있어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은 쉽게 조성된다. 2007년 신화통신 계열의 신문이 실시한 국가 선호도 조사에서 한국은 중국인이 싫어하는 국가 1위에 처음 꼽힌 이후 지금도 네티즌들로부터 주요 비호감 국가로 거론된다. 물론 한국인의 중국 혐오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 역사 문제로 따지자면 할 말이 더 많다. 중국이 한국의 고구려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킨 동북공정이나, 동북공정을 완성하기 위한 만리장성 늘리기 공정이 대표적이다. 다민족국가인 중국이 민족·영토 통합용으로 내놓는 주장이라지만 역사를 입맛대로 왜곡하는 행위는 몰상식하다. 분단의 아픔을 초래한 6·25전쟁을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이란 이름으로 부르며 위대한 승리로만 부각시키는 것은 한국인의 마음에 큰 상처를 준다. 역사 문제는 민족의 자존심이나 긍지와 연결돼 있어 이성을 마비시키고 민족주의를 고조시킨다. 협상의 여지가 없어 해소되지도 않고 작은 계기만 있어도 거대한 혐오의 불길로 번지기 쉽다. 올해로 한국과 중국이 수교 20주년을 맞지만 양국 관계는 성숙되기보다 역사 문제로 서로 반감만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단옷날에 대한 중국인의 질문에 뭐라 말하면 현명한 답이 될까. 인식이란 한 번 형성되면 바꾸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양국이 역사 갈등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수교 20주년을 맞아 곰곰이 생각해 본다. jhj@seoul.co.kr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8)부산 중구 40계단길

    [길을 품은 우리 동네] (8)부산 중구 40계단길

    뜨거운 태양보다 전국에서 찾아든 젊은이의 열기로 더 뜨거운 해운대, 세계에서 가장 큰 ‘노래방’인 사직 야구장, 해마다 국제 영화제와 록 페스티벌이 열리는 축제의 도시. 항구 도시 부산은 시가 내건 ‘다이내믹 부산’이라는 구호만큼이나 역동적이고 뜨거운 곳이다. 특히 본격적인 피서철에 접어드는 7월부터는 국내는 물론 중국과 일본 관광객이 대거 방문하는 관광도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부산은 그 화려한 겉모습 이면에 한국전쟁의 상처를 품고 있는, 아픔과 설움이 짙게 밴 도시다. 전쟁의 피해가 가장 적었기에 전쟁의 흔적도 오롯이 간직한 부산, 그중에서도 피란민의 눈물과 땀으로 얼룩졌던 중구 40계단길을 찾았다. “니 어디고? 아직 안 나왔나. 내는 벌써 나왔지. 계단에 있으니까 글로 온나.” 2일 점심시간 부산국제여객터미널과 인접한 중구 동광동의 작은 골목 길. 골목 길 주변 상가와 건물에서 반소매 셔츠 차림의 직장인들이 점심 식사를 위해 삼삼오오 무리지어 나오기 시작했다. 같이 밥을 먹기로 한 일행을 찾는 듯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사람들도 눈에 들어왔다. 이들이 정한 만남의 장소는 대부분 ‘계단’이었다. 부산 동광동, 더 넓게는 중구 일대에서 계단은 특정한 장소를 뜻하는, 삶의 흔적이 녹아 있는 특별한 공간인 것이다. 이 지역의 도로명 주소인 ‘40계단길’(180m) 역시 이 계단이 역사와 의미가 깊기 때문에 탄생한 새 주소다. 사실 이 40계단을 아는 사람은 부산에서도 이 지역 인근 주민이 아니고서는 그리 많지 않다. 이 계단이 큰길에 있는 것도 아니고, 높은 건물 숲 사이에서 옛 ‘달동네’를 잇는 좁은 길에 덩그러니 놓인 계단이기 때문이다. 40계단이 처음으로 ‘외지 사람’에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초 피란민의 아픔을 노래한 가요 ‘경상도 아가씨’가 나오면서부터다. 경상도 아가씨는 “40계단 층층대에 앉아 우는 나그네. 울지 말고 속시원히 말 좀 하세요. 피난살이 처량스레 동정하는 판잣집에 경상도 아가씨가 애처로워 묻는구나…(중략)… 그래도 눈물만이 흘러 젖는 이북고향 언제 가려나.”라는 가사로 ‘굳세어라 금순아’와 함께 부산 일대의 피란민들을 위로했던 대표적인 노래다. 이때의 40계단은 영도다리와 함께 피란민들의 상봉의 장소로 쓰였다고 한다. 이후 이 계단은 1999년 흥행에 성공한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주요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지금의 젊은층에게도 폭넓게 알려졌다. 40계단이 언제 처음 생긴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동광동 일대가 개발됐던 1908년을 전후로 생겨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지금의 40계단길의 기준이 되는 계단도 원래의 40계단이 1970년대 난개발로 사람 한 명 지나기도 불편할 정도로 좁아지면서 새로 만든 것이다. 옛 40계단은 지금의 40계단보다 북쪽으로 10m쯤 떨어진 지점에 있다. 40계단 문화원에서 문화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는 홍우석(77)씨는 전쟁 당시 40계단 일대 풍경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홍씨는 “전쟁 당시 함경도고 서울이고 할 것 없이 전국 각지에서 부산으로 몰려들었고, 특히 배를 타고 피란 온 사람들이 부산항을 통해 들어오면서 지금 40계단을 중심으로 인근 야산에 판잣집을 짓기 시작했다.”면서 “당시 미군 구호물자 배급을 항구 근처에서 했는데 피란민들은 먹고살 게 구호물자뿐이라 그 40계단을 맨발로 뛰어다니곤 했다.”고 말했다. 이때 피란민들이 구호물자를 서로 사고 팔기 시작하던 ‘도떼기 시장’(질서가 없고 시끌벅적한 비정상적 시장)이 현재 부산의 명소 ‘국제시장’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밖에 피란민들이 당시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미군부대에서 버리는 음식 찌꺼기를 모아다 끓여 파는 ‘꿀꿀이죽’(일명 유엔탕) 장사와 빈 깡통과 포탄 파편 등을 엮어 판잣집 지붕 등으로 쓸 수 있도록 하는 ‘깡깡이’ 장사 등이었다. 홍씨는 “당시 40계단 뒤로 동광동, 영주동, 보수동, 대청동 일대 모두가 피란민에게는 ‘무주공산’이었고, 그때의 피란촌이 아직도 부산의 서민 밀집지역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피란민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긴 40계단 일대는 2000년대 초반 들어 대대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구청이 계단을 중심으로 역사성을 살린 ‘문화관광테마거리’를 조성하면서부터다. 지금의 40계단길 주변 건물은 대부분 현대식 건물로 바뀌었지만 거리 곳곳에서는 1950~70년대의 향수가 묻어 나온다. 발가벗은 큰아이 옆으로 아기에게 젖을 물린 모습의 ‘어머니의 마음’과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잠든 아기를 업고 가는 모습의 ‘40계단 여인상’ 등의 조형물은 당시 고단한 삶 속에서도 자식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전해진다. 계단 중턱에는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위로라도 하는 듯 ‘아코디언 켜는 사람’이라는 조형물이 설치돼 있고, 이 조형물을 가로지르면 ‘경상도 아가씨’ 등의 노래가 아코디언 연주로 흘러나온다. 중구는 이 지역에 대한 1단계 사업을 마치고 2013년 완공을 목표로 총 사업비 42억원의 2단계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2단계 사업에 따라 한·일 우호의 거리와 문화예술인의 거리, 부산 정거장 거리 등 거리의 역사성을 되살릴 계획이다. 중구 관계자는 “중구에는 40계단뿐만 아니라 곳곳에 조국 독립운동과 6·25 전쟁의 유서가 깊은 지역이 많기 때문에 도시 개발 정책 수립 시 역사성 보존을 가장 중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 사진 부산 박성국기자 psk@seoul.co.kr ●9회는 정읍·부안·고창 ‘동학로’를 소개합니다.
  • “이승만 집권 때도 독립운동가 수감했다”

    “이승만 집권 때도 독립운동가 수감했다”

    서울 통일로 ‘서대문형무소’는 1905년 을사늑약 때일제가 만든 경성감옥이었고 1912년 서대문형무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이 형무소의 신세를 졌다. 해방 이후 독립운동가들이 다 떠난 서대문형무소에는 누가 수감됐을까? 왜 곧바로 일제의 악행을 고발하는 역사박물관으로 직행하지 못했을까? 김삼웅(69) 전 독립기념관장은 4일 오후 2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독립관 무궁화홀에서 열리는 ‘이승만 집권기의 서대문형무소’란 학술대회에서 ‘1948~1959년 서대문형무소’란 제1주제 논문을 통해 서대문형무소 수감자들의 변천사를 밝혔다. 김 전 관장은 “1948~1959년 12년은 이승만의 1인 통치와 자유당의 전횡기였다.”면서 “1949년 1월 반민특위의 검거활동으로 서대문형무소가 악질적 친일파인 소설가 이광수, 일제경찰관 노덕술 등 친일파로 가득했지만, 겨우 1개월 만인 그해 2월 15일 이승만이 반민특위 활동을 비난하고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등으로 서대문형무소가 다시 독립운동가들로 가득 차게 됐다.”고 탄식했다. 소설가 이광수는 수감 20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고, 노덕술은 이승만 대통령이 “경찰의 기술자이며 경험자이므로 그를 제거하고는 국가의 치안을 유지하기 어렵다.”면서 석방을 요청하던 중 그해 6월 6일 반민특위가 와해되자 풀려났다. 1949년 6월 ‘국회프락치사건’이 발생했다. 신의주 등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김약수 의원과 반민법 제정에 남다른 열정을 보인 노일환·서용길 의원 등 13명의 의원이 체포됐다. 김 전 관장은 “헌병사령부 산하에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이들을 심하게 고문해 ‘자백’을 받아 냈다.”면서 “당시 헌병대에는 친일경찰 김정채, 윤우경, 최운하, 김호익 등이 핵심이었다.”고 말했다. 노일환은 재판 과정에서 “남로당 가입 사실과 남로당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는 자백이 고문을 못 이긴 허위 자백”이었다고 진술했다. 즉 반민특위 활동이 와해된 후 서대문형무소에는 일제강점기와 비슷하게 독립운동가들이 가득해졌다는 것이다. 1947~1954년 제주 4·3사건으로 2530여명이 일반재판 및 군정재판, 군법회의 등을 통해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 중 16~30세 여자 수감자 70여명이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됐다. 제주도에는 형무소가 없어서 전국 각지 형무소에 분산·수감된 탓이다. 김 전 관장은 “일제강점기에 총독부가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수감하기 위해 특별히 여사(女舍)를 지어서 관리했기 때문”이라면서 “6·25전쟁으로 이 중 일부는 인민군에 편입되거나 여맹에 들어갔고, 또 일부는 잡혀서 총살됐다.”고 설명했다. 6·25전쟁 직후부터 3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는 북한군이 사용했다. 반공·친미 인사라고 추정되는 사람들을 투옥하고, 후퇴할 때는 대량 학살하거나, 북으로 끌고 갔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이승만 정부는 서울시민 중 북한군에게 협조한 부역자들을 색출해 서대문형무소에 가두기 시작했다. 당시 서울시민은 대략 145만명이었고, 이 중 40만명만이 피란을 떠났다. 김 전 관장은 “서울시민은 안심하라는 라디오방송을 거듭하다가 한강다리를 폭파시켜 피난도 못하게 해 놓고는 잔류한 서울시민을 부역자로 모는 것은, 임진왜란 때 한성을 떠난 선조나 병자호란 때 인질로 잡혀 갔던 처자를 ‘환향녀’라며 비난했던 인조와 다를 바가 없다.”고 비판했다. 실제 사형에 처해진 사람은 다소 줄었지만, 당시 부역자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자는 867명에 이르렀다. ‘종로의 협객’ 김두한은 1947년 4월을 시작으로 1954년 5월, 1965년, 1966년 ‘국회오물투척사건’ 등으로 4차례 수감됐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옴부즈맨 칼럼] 6·25전쟁과 인구 5000만명 시대/김성회 CEO리더십 연구소장·국민대 겸임교수

    [옴부즈맨 칼럼] 6·25전쟁과 인구 5000만명 시대/김성회 CEO리더십 연구소장·국민대 겸임교수

    한해의 절반이 지났다. 상반기를 되돌아보며 결산하고 하반기의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7월이다. 개인적 결산 외에 국가적 의미에서도 6월 말을 기점으로 되새기고 준비해야 할 연대기적 사건 보도가 잇따라 있었다. 우리나라 인구가 5000만명을 돌파해 세계 7번째 20-50클럽(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인구 5000만명)에 가입했다는 6월 23일 자 보도와 한국전쟁의 상흔을 되새겨 보는 25일 자 ‘62주년 6·25전쟁 보도’가 그것이다. 6·25는 아직도 종북파 논쟁이 핫이슈가 될 정도로 ‘이념 대치’가 끝나지 않은 현 상황에서 ‘잊혀진 전쟁’이 되어선 안 될 우리 역사의 상처다. 계속되어야 할 관심과 탐구의 대상이다.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나간다는 점에서 인구 5000만 시대 도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한다. 온고(溫故)의 대상이 6·25전쟁이라면, 지신(知新)은 인구 5000만명 시대 도래였다. 2012년 하반기를 열며 언론의 이 두 가지 보도 태도를 통해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서울신문의 보도는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25일 자 1면 사이드로 ‘포화로 한쪽 벽만 남은 가정집’ 사진을 싣고, 2면 전면을 할애한 ‘청소년 57%, 6·25 발발 연도 모른다’라는 국민 안보의식 여론조사 결과, 6·25 소년병 생존자들의 참전명예수당이 12만원으로 재일 학도 의용군의 98만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다는 논란, 이명박 대통령의 6·25 참전국 보은 순방차 콜롬비아 국빈방문 기사를 각각 실었다. 27면에는 6·25 참전용사에게 무공훈장 찾아준 홍성태 예비군 연대장 인터뷰, 한국전 참전 보답차 에티오피아에 교육후원한다는 한양대 기사, 31면에 6·25전쟁과 서울의 한옥 칼럼이 게재됐다. 다른 신문보다 지면 할애의 양적 면에선 앞섰지만, 질적 면에선 아쉬운 감이 있었다. 머리를 짜내고 발로 뛰어 준비한 자체 기획기사, 특집기사보다는 보도자료를 기반으로 한 평면성 기사가 대부분이었다. 남북분단 상황이 오늘날 가지는 의미, 천안함, 연평해전 등 남북관계로 확장해 6·25의 현재적 의미에 대해 심층탐구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칼럼이나 기획기사가 부족하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6·25는 사설이나 칼럼에서도 우선순위에 밀렸다. 그나마 CEO칼럼에서 ‘6·25전쟁과 서울의 한옥’을 다루었지만, 한옥이 사라진 것에 대한 아쉬움에 그쳤다. 도하 각 신문의 관련 보도 태도 또한 이 궤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사설에서 ‘6·25전쟁 62주년’을 주제로 다룬 신문은 2개사(중앙일보, 한국경제신문) 정도에 불과했다. 국민일보가 관련 칼럼을 다룬 것이 고작이었다. 6·25전쟁이 ‘잊혀진 전쟁’으로 청소년 세대가 그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고사하고 기억조차 못 한다는 지적이 나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갈수록 이 같은 현상이 개선되지 않는 것은 6·25를 ‘과거 역사책 속 흑백삽화’로 다루거나 무관심한 기성세대와 언론의 책임이 크다.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은 과거에 매몰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미래를 준비하는 새 패러다임으로 주목할 역사적 사건은 대한민국 인구 5000만명 돌파였다. 서울신문은 발 빠르게 ‘메이저 코리아, 고령화가 덫’이란 제목의 커버스토리를 다뤘다.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20-50클럽에 가입하는 의미와 대처방안에 대해 공격적으로 지면을 편성해 1, 2, 3면을 할애하고 심층적으로 보도했다는 점에서 돋보였다. 인구 5000만명 시대의 빛과 그림자에 대해 다양하고 깊게 조망하고 의미와 추정에 얽힌 뒷이야기를 함께 소개해 ‘재미와 의미’ 두 마리 토끼를 잡고자 하는 노력을 읽을 수 있었다. 고령화·저출산의 문제, 경북 군위군의 성공사례 등을 이론적 측면에서부터 실제 성공사례까지 다루는 전방위적 보도도 눈길을 끌었다.
  • 해병대 최초의 미녀 3총사, 실제 사진 보니…

    해병대 최초의 미녀 3총사, 실제 사진 보니…

    해병대 창설 63년 만에 처음으로 영관급 여성 장교가 탄생했다. 해병대는 김윤전(36)·한경아(34)·조윤정(35) 대위가 1일 각각 소령으로 진급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2001년 7월 사관후보생 96기생으로 해병대에 첫발을 내디딘 최초의 여군 장교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해병대사령부 군수참모처에서 근무 중인 김 소령과 정보참모처의 한 소령은 임관 이후 해병대 장교교육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하며 후배들을 양성하기도 했다. 특히 김 소령은 2006년 해병대 여군 최초로 전투부대 중대장직을 맡기도 했다. 해병대 1사단 헌병대 수사과에서 근무하던 조 소령은 이번 진급으로 여단급 부대의 헌병대장직을 맡아 해병대 최초의 여성 헌병대장이라는 또 하나의 경력이 추가된다. 김 소령은 “영관급은 위관장교와 달리 합당한 전문지식을 갖춰야 하기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면서도 “육아와 일을 병행하기 어려워 아이들에게 좀 더 신경을 못 써 미안하다.”고 밝혔다. 한 소령은 “남자 군인보다 더 잘해야 한다는 기대를 충족시켜야 하기에 부담도 느낀다.”며 “군인으로서 초심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해병대에서 여군의 시초는 1950년 8월 6·25전쟁 당시 자원 입대한 해병 여자 의용군 74명이다. 1955년 1월 이들이 모두 전역하면서 2001년 김 소령을 포함한 7명의 여군 학사장교가 임관할 때까지 해병대에는 여군이 없었다. 현재는 장교 90여명과 부사관 120여명의 여군이 해병대에서 복무하고 있다. 하종훈기자 artg@seoul.co.kr
  • 이 여인들의 눈물, 외면할 수 있습니까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을 다룬 ‘학살, 그 이후’(권헌익 지음, 유강은 옮김, 휴머니스트 아카이브 펴냄)는 제사상에 올리는 한 잔의 술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인 저자는 한국인 인류학자다. 인류학자로서 1994년부터 틈나는 대로 베트남을 드나들며 현지조사를 수행했다. 한국인으로서 베트남전 특수로 인해 “내가 살던 가난한 동네에서도 물질적 상황조건이 개선”됐다는, 나중에 깨달은 “도덕적 궁지” 때문이다. 한국인 인류학자로서 저자는 이 책을 “공물(供物)로 내놓는다.”고 해뒀다. 학문적 땀방울 못지않게 인간적 눈물방울이 읽히는 이유다. 저자가 처음 꺼내 놓은 얘기는 1968년 2월 25일 한국군 해병대가 민간인 135명을 학살한 뒤 살아남은 몇몇 주민들이 시체들을 가매장해 둔 것까지 불도저로 모조리 밀어버렸다는 ‘하미 학살’이다. 한달이 채 지나지 않은 3월 16일, 미군도 똑같은 짓을 저질렀다. 이는 ‘미라이 학살’로 널리 알려졌다. 한국군의 행위가 그에 못지않게 잔혹했고, 노엄 촘스키가 “43건의 미라이 학살들”이라는 복수형 표현을 쓸 정도로 빈번했음에도 왜 미라이 학살만 알려졌을까. “하위 행위자는 폭력적인 마을 평정 작전에서 지배적 행위자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행동하고도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일 뿐이다. 쉽게 말해 이름을 떨친 종군기자나 연구자들은 미군만 쫓아다녔지, 한국군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국가 정체성 운운하며 흥분할 필요는 없다. 저자는 베트남전 참전군인들을 대놓고 비난하지 않는다. 그들 역시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실제 저자가 만난 학살 생존자들은 시계추처럼 오간 군인들의 극단적 이중성에 곤혹스러워했다. 어제 주민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고 집 짓는 걸 도와주던 이들이 오늘은 주민들을 모아놓고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총을 난사했다는 것이다. 이 극단적 이중성이 어찌 그들 탓이랴. “전쟁이라는 냉혹한 태엽장치에서 시계추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고 “시계추에는 자체의 동학이 있지만 자신의 운동을 통제할 수 없”었을 뿐이다. 저자는 “전후의 삶을 통해 이런 잔인한 동요의 기억과 싸웠다고 믿는다.”는 수준에서 매듭짓는다. 저자가 힘을 모으는 지점은 학살된 이들을 베트남 사람들이 추모하고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과정이다. 이는 저자가 에밀 뒤르켐의 수제자 로베르 에르츠의 ‘상징적 양손잡이’ 개념을 주된 화두로 붙잡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아노미 개념에서 보듯 뒤르켐은 사회적 유대감에 관심을 가졌다. 에르츠는 그다음 단계, 그러니까 사회적 유대가 격렬하게 깨졌을 경우 어떤 양상이 벌어지고 이를 어떻게 봉합할 것인가를 연구했다. 이를 위해 제안한 것이 양손잡이 개념이다. 오른손에게 바른 손이라는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왼손도 함께 바라봐 온전한 양손잡이가 되자는 것이다. 영웅적 군인이 오른손이라면, 학살 피해자는 왼손이다. 저자는 실제 현지조사를 통해 학살 피해자들이 베트남 내부에서도 왼손 취급당했음을 드러낸다. 전쟁 이후 베트남도 대대적인 기념사업을 수행했다. 전선에서 피 흘리며 죽어간 젊은이들에게 국가는 전쟁영웅이란 칭호를 부여했고 기념비와 묘지를 바쳤다. 그러나 균열도 드러난다. 북베트남 전사들은 전쟁을 위해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전장에 투입됐다. 해서 시체를 고향으로 되돌려 보내 웅대한 기념비 옆에 묻으면 된다. 접경지대격인 베트남 중부의 학살 피해자는 다르다. “영웅적 전사자라는 도식 안에서 보면, (학살 피해자들의) 집단 무덤은 재생의 가치가 결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편의 유해와 상대편의 유해가 뒤죽박죽 엉켜 있는 모호한 대상”이다. 그래서 “혁명 열사들의 유해를 모아 마을의 중심부로 가져왔을 때 평범한 마을 사람들의 유골은 논으로 바꿀 예정인 곳에서 외곽의 모래투성이 황무지로 옮겨졌다.” 비극적 죽음에 눈물 흘릴 공간을 잃어버린 주민들은 해원을 위해 사당을 짓고 무당을 불렀다. 조선시대 성리학이 교조화되면서 의지할 곳을 잃은 부녀자들이 절과 무당집에 몰려갔듯, 베트남 주민들도 민간전통신앙에 의지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들었다. 문제는 국가적 공식 기억에 맞지 않고 과학적 사회주의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베트남 정부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점이다. 이는 딜레마를 낳는다. 전쟁 당시 베트남 인민들이 가장 분노한 것은 외국 군인들이 조상을 모신 사당을 부수고 사람을 함부로 죽였을 뿐 아니라, 장사조차 못 지내게 시체를 마구 훼손하고 뒤섞어 버린 만행이었다. “전쟁 동원 체제에 가장 뚜렷한 기여를 한 조상 사당들이 전쟁이 끝난 뒤에 정치적 불순성과 문화적 후진성의 상징으로 꼽힌 것은 아이러니다.” 이 갈등은 1990년대부터 수면 위로 치솟는다. 여러 가지 형태의 이장운동이 벌어지는 것이다. 국가가 조성한 공식 무덤에서 개인 사당으로 유골을 빼내오거나, 버려졌던 유골을 국가의 공식 무덤에 안치하는 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베트남전은 이데올로기나 박정희 평가 문제, 유력 차기 대권주자인 박근혜 의원의 반발(2001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베트남전 참전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자 “6·25전쟁에 참전한 16개국도 북한에 사과해야 하느냐.”고 공격했다.) 등이 있어서 한국에서도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빙빙 에둘러 왔지만, 사실 책의 백미는 이 부분이다. 하나만 꼽자면, 하미 전쟁열사묘지에는 ‘전쟁범죄 희생자 35인의 공동무덤’이 있다. 1986년 9월 하미에서는 하미 근처 하지 마을에서 한국군에 의해 35명이 학살당한 사건을 놓고 논쟁이 벌어진다. 주민들은 이들 역시 열사라 보고 공식묘지에 묻어 달라고 요구하지만, 정부는 이를 거부한다. “열사란 직접 적과 맞서 싸운 이들”이라서다. 주민들 압력으로 결국 무덤은 조성되지만, 정부는 이들 묘를 파내려고 한다. 그때 주민들은 “낫이나 작대기를 무기 삼아 들었다.” “오늘부터 너희가 우리 적”이라면서. 저자는 무차별적인 학살 때문에 그 수많은 뼈와 해골 가운데 어느 것이 누구의 유골인지 모를 지경이지만, 그럼에도 한 구 한 구 파내 정성스럽게 쓰다듬고 정리하고 가지런히 다시 묻는 이장의 과정 자체가 후손들에게는 정신적으로 커다란 치유가 된다는 증언들을 곳곳에서 강조한다. 저자가 끊임없이 길어올리는 것은 ‘농민인지 전사인지 구분 안 되는 악독한 빨갱이 베트콩’ 대신 ‘조상 모시면서 제 땅을 제가 파먹고 살길 원하는, 농경사회라면 흔히 발견되는, 한국에서도 흔히 찾을 수 있는 농민의 얼굴’이다. “농민 전사들이 군복을 입은 정규군 병사들과 악수를 하고, 정치 장교들이 장황하게 늘어놓는 연설을 참고 들으며, 달 없는 밤을 틈타 재빨리 집으로 달려왔을 때, 그들이 여전히 군인이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니까 “체제가 공간의 균질성과 정체성의 불변을 고집한 반면, 삶으로 직접 겪는 냉전의 현실은 모순적 공간이나 변증법적 공간이었고, 이러한 현실 속의 정체성은 변하지 않는 동일자가 아니라 쉽게 변화하는 존재였으며, 이런 변형성이야말로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을 제공했다.” 모두가 베트콩이었으되, 그 어느 누구도 베트콩이 아닌 이런 상황을 저자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부른다. 저자는 이 책으로 2007년 미국 인류학회가 수여하는 클리퍼드 기어츠상을, 후속작 ‘베트남전쟁의 혼령들’로 2009년 미국 아시아연구협회가 주는 조지 카힌상을 받았다. 해서 책 앞에는 드루 파우스트 하버드대 총장의 서문이 붙어 있다. 한 구절 따온다면 이렇다. “전쟁을 수행하는 나라들은 정치적 목적과 이데올로기를 위해 죽은 이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가족들에게서 그들을 앗아가 깊은 상처를 남기고 사자(死者)들을 역사의 행위자가 아니라 도구로 뒤바꾼다.” 한국전쟁과 그 이후 지금까지도 격렬한 이념전쟁을 치르고 있는 한국에서도 이런 연구가 수행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저자는 한국전쟁 연구 권위자인 박명림 연세대 교수와 손잡고 ‘한국전쟁을 넘어서’라는 국제연구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기다려지는 부분이다. 1만 5000원.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한국미에 대한 열정… ‘혜곡 정신’을 복원하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는 혜곡 최순우 박물관이 있다. 제4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1916~1984)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집은 도시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혜곡을 존경하던 이들은 소식을 접하고 십시일반으로 모금해 집을 구입했다. 그렇게 ‘시민문화유산 제1호’가 탄생했다. 사람들이 이 집에서 지키고자 했던 것은, 오래된 나무 기둥의 감촉을 가진 후원과 혜곡이 김홍도의 ‘단원도’를 재현한 마당의 괴석, 집안 곳곳에 놓인 옛 문갑과 탁자, 그가 개성집에서 보고 자란 아름다운 옹기들이 놓인 장독대 등 곳곳에 깃든 그의 정신과 메시지였다. 소설가이자 칼럼니스트 이충렬은 “아름다운 한옥이 아니라, 한국미를 궁구(窮究)했던 혜곡의 고뇌가 담긴 위대한 유산”이라고 말한다. 그가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김영사 펴냄)를 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설적인 박물관인이자 미술사학자로서, 개성박물관 말단 서기에서 제4대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올라 현장에서 순직하기까지, 혜곡이 보여준 한국미에 대한 애정이나 노력, 뚝심 등 삶의 자세는 시대를 초월해 본받을 만하다.”고 덧댔다. 저자는 혜곡 정신을 복원하기 위해 8년 전부터 자료를 모았다. 혜곡이 1947년 9월 서울신문에 발표한 ‘개성 출토 청자파편’부터 1984년 작고할 때까지 쓴 문화재해설 280편, 미술 에세이 205편, 논문 41편, 사료해제 86편을 읽고 또 읽었다. 혜곡의 유족은 물론 그의 집에서 하숙하던 학생들까지, 발자취를 따라갔다. 책은 1962년 1월 프랑스 파리 세르누치박물관에서 있었던 일화로 시작한다. 프랑스의 예술가이자 드골 정부의 문화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가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보고 매료된 현장이다. 저자는 “우리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린 혜곡의 삶을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가장 먼저 꺼냈다.”고 했다. 세계 예술의 지성이라 불린 말로의 감탄에 대비해, 혜곡이 우리 문화가 정작 한국에서는 인정받지 못한 서글픔에 휩싸이는 모습이 실로 그래 보인다. 책은 이어 혜곡의 출생부터 순직까지 일대기를 차근차근 풀어낸다. 송도고등보통학교를 다닐 때 조선미술사학의 개척자이자 자신의 스승이 된 고유섭 개성부립박물관장을 만난 일, 6·25전쟁이 발발한 다음 날 포연이 자욱한 틈새에서 수위부장과 밤새 박물관의 중요서류를 포장한 긴박했던 사건, 1955년 국립박물관의 덕수궁시대가 열린 배경, 1957년 처음으로 우리 국보의 미국 순회전이 열린 이야기 등이 빼곡하다. 한국 근현대문화사의 주요 사건과 현장을 담은 진귀한 사진 70여장이 더해져 책은 박물관사로도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도 책에서 살아난 혜곡에게서 한국 문화의 역사와 정체성, 고유성을 깨닫는 데 큰 의미가 있다. 1만 8000원.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철원·화천 “철길로 지역경제 살리자”

    강원 철원군(경원선)과 화천군(경춘선)이 철길 연장 운행과 철길 관광객 유치에 팔을 걷어붙였다. 철원군 경원선복원범군민추진위와 화천군은 26일 경원선 의정부 연장운행을 주장하고 경춘선 청량리역 관광안내센터를 개소하는 등 철길 따라 지역을 살리겠다고 나섰다. 추진위는 ▲대마리 유인 역사 건립 ▲의정부 연장 운행 ▲증차 운행이 해결돼야 철원 발전이 이뤄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역 최대 현안인 경원선 신탄리~대마리역 5.6㎞ 구간을 잇는 복원공사가 연말 완공되면 철원지역에서 6·25전쟁 이후 60여년 만에 기차운행이 재개되는 상징성이 있지만 지역 발전에 큰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또 지난해 7월 집중호우로 경원선의 연천 초성리 철교 유실로 하루 17회 운행되던 이 구간 열차가 운행 재개된 지난 3월부터 하루 11회로 축소 운행하는 것도 예전대로 하루 17회로 연장 운행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화천군도 27일 서울 청량리역에 화천관광안내센터를 연다. 군은 서울~춘천 간 ITX-청춘 열차 개통과 연계한 사계절 수도권 관광객을 화천까지 끌어들이기 위해서다. 군은 이와 함께 쪽배축제 및 토마토 축제가 시작되는 새달 중으로 매주 토요일 선등거리에서 열리는 주말장터와 연계해 1박이나 당일 화천을 관광할 수 있는 철도관광상품을 출시할 예정이다. 센터 개장식에서는 화천의 청정 자연에서 재배된 신품종 토마토인 ‘팅커벨’(Tinker Bell)무료시식 및 판촉 행사도 연다. 군은 경춘고속도로와 복선전철, ITX 개통에 발맞춰 수도권 관광객 유치를 위해 이미 지난 1월부터 남춘천역에 관광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정갑철 화천군수는 “ITX-청춘 열차 이용객이 100만명을 돌파하는 등 최근 철도를 이용한 수도권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다.”면서 “청량리역 관광안내센터 개소를 계기로 화천군의 관광명소 및 먹거리, 볼거리, 즐길거리 등 관광정보를 적극 홍보해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데 힘쓸 작정이다.”라고 말했다. 철원·화천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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