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6·25
    2026-06-23
    검색기록 지우기
  • 민심
    2026-06-23
    검색기록 지우기
  • 2026-06-23
    검색기록 지우기
  • MLB 데뷔
    2026-06-23
    검색기록 지우기
  • 2026-06-23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9,318
  • “日 젊은이에 위안부 진실 알려야”

    “日 젊은이에 위안부 진실 알려야”

    교사 출신의 한 일본인이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연을 담은 우리 동화를 일본에서 번역, 출간해 화제다. 일본에서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고서가 출간된 적은 있지만 동화가 일본어로 번역되기는 처음이다. 일본 도쿄도립고등학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다 퇴임한 야스다 지세(66·여)는 지난 7일 일본 도쿄의 한 구립복지회관에서 자신이 직접 일본어로 번역해 출간한 장편 창작동화 ‘꽃에게 물을 주겠니’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이 동화는 작가 이규희씨가 쓴 ‘모래시계가 된 위안부 할머니’를 번역한 것으로, 위안부 피해자인 황금주(93) 할머니의 일생을 다루고 있다. 황해도에서 태어난 황 할머니는 19세 때 위안부로 끌려가 만주 등지에서 생활하다 광복 후 귀국했다. 황 할머니는 이후 6·25 때 전쟁고아 5명을 보살펴 결혼까지시키는 등 사회활동에 헌신했다. 야스다는 1992년 일본에서 열린 위안부 관련 집회에 참석한 뒤부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매년 3~4차례나 한국을 찾아 수요집회에 참석하는가 하면 일본에서 열리는 위안부 증언대회 등의 안내를 맡으며 황 할머니와도 개인적인 친분을 다져왔다. 그녀는 “황 할머니를 모시고 출판기념회를 하고 싶었지만 고령으로 건강이 나빠져 함께하지 못한 것이 무척 아쉽다.”면서 “더 기다리고 싶었지만 한·일 관계가 악화되는 상황이어서 더는 늦출 수 없겠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야스다는 일본에서 위안부를 부정하는 망언이 잇따르는 것에 대해서도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그녀는 “위안부가 사실이 아니라는 우익들의 주장이 대두되고 있는 것이 일본의 현실”이라면서 “이럴 때일수록 해야 할 일을 통해 진실을 알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공공도서관에 ‘꽃들에게 물을’이 많이 보급돼 젊은이들이 쉽게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배경헌기자 baenim@seoul.co.kr
  • ‘열등감 괴물’이 거장 우뚝… 인간승리로 한국영화 새 역사

    9일(한국시간)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막을 내린 제69회 베니스영화제의 스포트라이트는 오롯이 빛바랜 개량한복에 밑창 터진 신발, 꽁지머리를 한 아시아 감독에게 쏟아졌다. 2000년 ‘섬’으로 처음 베니스영화제(경쟁부문)를 두드릴 때만 해도 철저한 무명이었다. 하층민의 삶에 대한 펄떡거리는 묘사, 인간의 악마성에 대한 탐닉에 일부 유럽평론가들은 매혹됐다. 반면 여성 비하로 페미니스트 진영의 공격을 자초했고, 신체 훼손으로 특징지어지는 폭력성 탓에 혹평도 뒤따랐다. 하지만 스스로 “열등감을 먹고 자란 괴물”이라고 평한 김기덕(52) 감독은 한국 영화감독 중 가장 먼저 황금사자상 트로피를 품었다. 그만큼 굴곡진 인생의 소유자도 드물다. 1960년 경북 봉화에서 절대군주와도 같던 6·25 상이용사 아버지와 외유내강형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다. 가정형편 탓에 공식 고교학력이 인정되지 않은 농업학교에 진학해 그의 최종학력은 ‘중졸’이다. 졸업 후 구로공단과 청계천 공장에서 일하다 해병대에 입대해 5년 만에 하사관으로 제대했다. 시각장애인교회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1년쯤 신학을 공부했다. 종교적 배경은 작품에도 투영됐다. 이탈리아 평론가 안드레아 벨라비타는 “기독교와 소통은 그의 지식과 정신적 성장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기독교로부터 어떤 종교적 확신도 얻지 못하지만, 죄와 속죄의 변증법만큼은 흡수한 것처럼 보인다.”고 평했다. 서른 살이 되던 1990년,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유럽 이곳저곳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3년간 생계를 유지했다. 그 무렵 난생처음 본 영화 ‘양들의 침묵’, ‘퐁네프의 연인들’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1993년 한국에 돌아온 그는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공모전에 도전했다. 기계나 그림에는 능했지만, 글은 익숙한 표현수단이 아니었다. 떨어졌다. 오기가 생겨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교육원에 등록했다. 그러고는 1996년 3억 5000만원짜리 저예산 영화 ‘악어’로 데뷔했다. 영화를 처음 접한 지 불과 4년 만이다. 1998년 ‘파란 대문’이 베를린영화제 파노라마 부문 개막작으로 상영되면서 유럽에 이름을 알렸다. 2004년에는 ‘사마리아’로 베를린영화제 감독상을, ‘빈집’으로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을 각각 받았다. 세계 3대 영화제의 감독상 트로피 2개를 한 해에 받는 이례적인 성취를 거뒀다. 또 장동건과 이나영, 하정우, 오다기리 죠 등 스타들이 출연을 자청할 만큼 위상도 치솟았다. 하지만 ‘콤플렉스를 품은 비주류 감독’, ‘저예산 예술영화 감독’의 이미지도 여전했다. 평단과 관객 모두 ‘지지’ 혹은 ‘안티’로 극명하게 엇갈렸다. 70만명을 동원한 ‘나쁜 남자’를 제외하면 대부분 1만명을 넘기지 못한 것도 같은 이유다. 2008년은 끔찍한 해였다. ‘비몽’ 촬영 중 여배우 이나영이 사고로 죽을 뻔한 데 큰 충격을 받았다. 애제자 장훈 감독이 김기덕필름을 떠나 대기업 계열 투자배급사와 손잡았다. 속세와 인연을 끊은 그는 3년 동안 산속에서 칩거하며 영화감독으로, 인간으로 고민과 번뇌를 담은 다큐멘터리 ‘아리랑’을 찍었다. 영화 속 장 감독과 충무로에 대한 독설이 알려지면서 파문이 일었지만, 지난해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상을 받았다. 영화 인생의 바닥까지 떨어졌던 그는 창작에 대한 열정을 회복했다. ‘피에타’는 “그의 최고작은 아니지만 성숙함이 돋보이는 수작”부터 “김기덕 작품 중에서도 평균 이하”란 평까지 여전히 호불호가 엇갈린다. 하지만 황금사자상을 거머쥔 김기덕이 ‘특별한 그의 영화경력에서도 새로운 출발’(AFP통신)을 한 것만은 틀림없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시인 도종환 ‘오장환 시 깊이 읽기’

    시인 도종환이 ‘오장환 시 깊이 읽기’(실천문학사 펴냄)를 내놓았다. 오장환(1918~1951)은 백석·이용환 등과 함께 1930년대 후반 활동하던 시인으로, 휘문고 시절에 정지용에게 시를 배웠다. 단 한편의 친일시도 쓰지 않으면서 어렵고 궁핍한 시기를 잘 견뎌낸 시인은 신장병으로 6·25전쟁 때 세상을 떴다. 오장환의 시는 리얼리즘·모더니즘 계보에 속한다.
  • 연극 ‘일곱집매’로 본 기지촌 여성의 삶

    연극 ‘일곱집매’로 본 기지촌 여성의 삶

    “왜 굳이 이런 아픈 기억을 꺼내 들은 거죠?”(관객) “잊고 싶은 기억을 자꾸 끄집어내는 것이 불편할 수 있습니다. 연극에서 나온 ‘닿을 수 없는 거리’라는 표현처럼, 슬픔이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어 우리는 이해할 수 없어요. 그렇다고 우리가 이 문제를 한국에 있었던 어떤 사건쯤으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겁니다.”(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정말 가슴 아픈 이야기이지만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인식에 따라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관객) “할머니들의 이야기이면서 현대사의 부침에 시달린 우리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제야 꺼내놓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인식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요.”(이 교수) 지난 2일 서울 혜화동 연우소극장에서는 한바탕 토론회가 열렸다. 주제는 과연 1950~70년대 기지촌 여성들은 보호받아야 할 대상인가, 한국 현대사의 부침 속의 희생양에 불과한가이다. 주제를 던진 것은 이날 무대에 오른 연극 ‘일곱집매’였다. 일곱집매는 주한 미군 캠프인 험프리가 있는 경기 평택시 안정리의 옛 이름이다. 일곱 집이 다정한 자매처럼 살았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군 군사비행장을 만들기 위해 밀어버렸고, 6·25전쟁 때 미 공군 비행장으로 바뀌어 캠프 험프리가 들어섰다. 이 안정리 기지촌을 무대로, 연극은 이제는 노인이 돼 쓸쓸히 살아가는 기지촌 여성들의 삶을 담고 있다. 무대는 할머니들이 사는 작고 허름한 방 7개에 둘러싸인 앞마당이다. 기지촌 아이들의 입양 문제를 주제로 박사논문을 준비하는 한국계 미국인 하나가 이곳을 찾았다. 냉정한 순영 할머니와 발랄한 화자 할머니, 기지촌에서 낳고 자란 청년 춘권, 미군 철수 활동가 상철, 기지촌의 젊은 여성 필리핀인 써니를 만나 그들의 삶을 기록한다. 아들 마이클을 미국으로 입양 보낸 순영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려던 하나는 되레 질문을 받는다. “기자, 작가, 어린 여대생들까지 내 이야기를 듣고 갔지. 하지만 달라진 게 없어. 선생은 뭐에 쓰려고 하지? 박사학위를 따는 거 말고는, 뭐가 달라지는데?” 하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다른 기지촌과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쉼터 등을 거쳐 그가 찾아온 대답은 ‘기록’이다. “인간이 단 한 명이라도 살아 있는 한 영원히 망각될 수 없도록. (할머니) 죽기 전에 슬픔을 새겨두고 떠나요. 사람들이 몰랐다고 말할 수 없도록.” 두 할머니가 털어놓는 이야기는 충격적이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기지촌에 들어온 어린 순영이 미군에게 하룻밤 대가로 받은 돈은 40달러. 살림에 보태고 동생들을 공부시키는데 유용했다. 아버지는 몸을 팔았다면서 때리기 일쑤였지만 돈이 부족하면 또 순영을 찾았다. 당시 정부는 ‘외화벌이 산업역군’이라면서 미군을 ‘손님’으로 받을 수 있도록 성병관리까지 했다. 행여 도망이라도 갈까봐 ‘애국자’라고 부추기고 “나중에 아파트 한 채 받을 수 있다.”는 사탕발림으로 유출을 막았다. 한국 현대사의 부침 속에 시달리던 여성들은 이제는 ‘자발적으로 몸을 판 양공주’라는 오명과 정부의 외면 속에서 힘겹게 생활하고 있다. 연극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처절하게만 그리지 않는다. ‘눈물을 담아둔 둑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애써 욕지거리를 해대면서 유쾌하게 포장하는 화자 할머니가 끊임없이 웃음을 유발한다. 덕분에 2시간 30분에 달하는 연극은 지루할 새가 없다. 대본을 쓴 이양구(극단 해인 대표)씨는 “(화자 할머니는)긴 연극을 끌어가기 위해 설정한 인물이 아니라 실제 할머니들에게서 본 모습의 일부”라면서 “너무나 아픔이 깊어서 선뜻 꺼내 들지 못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포장하면서도 늘 죄책감에 사로잡혀 계시는 분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1950~70년대 우리나라의 기지촌 문제는 강제냐 자발이냐 이런 차원이 아니라, 국가가 개인에게 준 상처와 제도적·구조적 폭력 문제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정리에서 10년째 기지촌 할머니들을 돌보면서 이 공연을 기획한 햇살사회복지회 우순덕 대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 대한 관심이 연극 ‘나비’(2005)를 통해서 확산됐듯이 이 연극으로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9일까지. 1만~1만 5000원. 070-8236-0445.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60년 모은 전 재산 100억 연세대 기탁

    60년 모은 전 재산 100억 연세대 기탁

    60여년 전 전쟁통에 남으로 내려온 이북 출신 할머니가 평생 고생하며 모은 100억원대 재산을 연세대에 기탁했다. “빈손으로 내려와 굶기를 밥 먹듯 하며 모은 것”이라면서 “돈이 없어 공부 못 하는 아이들을 위해 써 달라.”고 했다. 지난달 14일 김순전(89) 할머니가 모시 저고리를 곱게 차려입고 정갑영 연세대 총장실을 찾았다. 할머니는 자신이 소유한 전 재산을 연세대에 내놓겠다고 했다. 서울 중곡동 자택, 숭인동·능동·공릉동 소재 주택 및 상가 4채의 소유 지분과 예금 등 100억원에 이르는 큰 재산이었다. 연세대는 할머니가 홀로 살고 있는 중곡동 집을 제외한 모든 건물의 소유권 이전 절차를 지난달 말 마쳤다. 황해도 장연군에서 부잣집 딸로 태어난 김 할머니는 6·25 전쟁 중 피란민에 섞여 남편, 오빠와 함께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왔다. 할머니가 들고 내려온 재산이라고는 이불 한 채가 전부였다. 낯선 서울에서 남편과 아들을 건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김 할머니는 “버스비를 아끼려고 후암동에서 동대문까지 버스로 4~5 정거장 되는 거리를 매일 걸어다녔다.”며 60여년 동안 소박하고 검소한 삶을 살았다고 했다. 할머니는 하루하루 생활을 위해 노점상을 비롯해 손에 잡히는 일들을 닥치는 대로 해야 했다. 어렵게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부동산 등에 투자했고, 탁월한 안목 덕에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서 재산 규모가 어느덧 100억원까지 늘었다. 10여년 전 남편과 사별한 할머니는 구순(九旬)을 앞두고 어린시절 공부 못 한 아쉬움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오빠들은 상급 학교에 진학하며 공부를 이어갔지만 할머니는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했다. 할머니가 대학교에 모든 재산을 내놓기로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연세대 방우영 이사장이 같은 이북 출신이라는 사실을 전해듣고 흔쾌히 연세대 기탁을 결정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식구들 먹고살 걱정은 없다.”면서 “저는 생각하지 마시고 그저 어려운 학생들 뽑아 훌륭한 일꾼으로 만들어 달라.”고 당부했다. 교내에 자신의 뜻을 기리는 작은 비석 하나 만들어 달라는 뜻도 전했다. 정 총장은 지난달 24일 할머니의 중곡동 집을 찾아 감사패를 전달했다. 정 총장은 이 자리에서 “얼마나 크고 소중한 돈인지 알고 있다.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고 어르신의 뜻대로 잘 쓰겠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연세대 관계자는 “할머니를 세브란스병원으로 따로 초청해 건강상태를 점검하고 보청기를 선물했다.”면서 “할머니의 사후 장례를 주관하고 이름을 딴 ‘김순전 장학기금’을 운영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산불 공중진화 능력 세계최고 수준… ‘숲의 파수꾼’

    산불 공중진화 능력 세계최고 수준… ‘숲의 파수꾼’

    산림청 소속 기관인 산림항공본부가 불혹의 나이를 넘겼다. 시작은 보잘 것 없었지만 지금은 산림 현장의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 가냘픈 묘목이 낙락장송으로 성장한 격이다. 일제의 산림 수탈과 6·25 전쟁으로 전국의 산림이 파괴되고 그나마 남아 있던 산림이 솔나방 등 병해충으로 피해를 입자 ‘방제’를 목적으로 1971년 창설된 산림청 항공대가 뿌리다. 헬기 3대와 조종사·정비사 각각 3명으로 출발해 설립 41주년을 맞은 지금은 47대의 헬기와 317명의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 군을 제외하면 명실상부한 국내 최대 항공 운영 기관이다. 산불 진화와 항공방제, 산악구조 등의 임무를 수행하며 ‘숲의 파수꾼’이자 ‘하늘의 일꾼’으로 전천후 활약상을 자랑한다. 초기 산림 헬기의 역할은 항공방제에 집중됐다. 당시 보유 헬기도 방제에 적합한 기종이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산불 계도 비행이 추가되고, 1981년 서울 양재동 산불 진화에 처음 투입되기도 했으나 전체적인 역할 변화는 없었다. 그러다 전국적인 산림녹화로 숲이 울창해지고, 낙엽 등 가연성 물질이 많아지면서 산불 피해가 확산되던 1980년대 후반 중요 업무가 산불 공중진화로 전환됐다. ●대형산불 경험 후 초동 진화체계 구축 산불 역사에서 러시아제 대형 헬기 카므프(KA32T)와 강원 고성 산불, 동해안 산불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993년 러시아에서 들여온 카므프는 산불 공중진화 역량을 높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남산(339㏊)의 11.3배에 달하는 3834㏊의 산림 피해가 발생한 1996년 고성 산불은 화재 현장에 신속히 접근하는 항공관리소의 필요성 인식과 함께 실질적인 현장 진화를 전담할 공중진화대 신설(97년)로 이어졌다. 산불 피해 집계가 이뤄진 이래 최악인 2만 3794㏊의 피해가 발생한 2000년 동해안 산불은 그해 4월 7일 강원 고성에서 발화해 15일 경북 울진까지 산림을 초토화시켰다. 쓰레기 소각에서 돌변한 화마를 잡기 위해 194대의 헬기가 투입되는 기록도 남겼다. 이를 계기로 산불 진화 체계가 초기진화로 재구축되는 한편 국민들에게 산불의 위험성을 알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항공사고 62% 방제 중 발생 산림 헬기의 역할은 11월에서 이듬해 5월까지는 산불, 6~8월은 항공방제, 9~10월은 인명 구조와 산림현장 화물운송 등으로 크게 구분된다. 이 중 2~8월의 역할은 특히 중요하다. 산불조심 기간인 봄에는 산불에 맞서 숲을 지키는 ‘파수꾼’으로, 여름철에는 숲을 치유하는 ‘에어힐링’(방제)으로 탁월한 존재감을 과시한다. 산림항공본부는 현재 본부와 8개 지역관리소 체계로 헬기 47대와 조종사 75명, 정비사 70명, 공중진화대 46명을 분산 배치하고 있다. 30분 내 산불 현장 도착 체제를 갖추기 위해서다. 연간 비행 시간 가운데 산불진화 작업이 전체의 35%를 차지하며 이어 방제(25%), 구난·구조·화물운송(15%) 순이고 나머지는 계도 및 비행훈련 등이다. 태안 기름 유출 피해 현장에는 초대형 헬기(S64E)가 투입돼 물대포로 바위에 붙은 기름때를 제거하는 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산림 헬기의 연간 비행 시간은 2009년 8094시간으로 최고치를 기록한 뒤 지난해 말 기준 6402시간으로 줄었다.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효율성이 검증된 헬기를 임대해 산불조심 기간이나 병해충 방제 기간에 자체 투입하면서 감소하는 추세다. 그러나 조종사 1인당 연간 평균 비행 시간은 150~200시간으로 군을 포함해 여전히 국내에서 가장 길다. 지난 40년간 발생한 항공사고는 34건. 이 중 62%(21건)가 항공방제 과정에서 발생했다. 항공방제는 폭염 속에서 최대의 방제 효과를 내기 위해 70~100㎞로 저공 비행(나무 초두부에서 10m)하므로 위험할 수밖에 없다. 특히 오전 5시에 시작해 오전 11시 이전에 마쳐야 하는데 이 시간대에는 안개와 구름, 돌풍 등 기상악화 변수가 잦다. 베테랑 조종사들도 긴장감을 놓지 못하는 시간대다. 방제에 파견되면 평균 7~10일 꼼짝없이 근무해야 하는 부담도 크다. 박영빈 진천 산림항공관리소 운항실장은 “화물 공수는 비행 시간이 많지는 않지만, 산림헬기 조종 8년차 이상 경력자만 투입되는 등 난이도가 가장 높다.”고 말했다. ●비행술·기술력은 세계 최고 우리나라의 산불 공중진화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인도네시아와 중국의 경우는 우리의 항공진화 체제를 벤치마킹해 현재 국내 민간 항공사에서 헬기를 임대해 사용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군 작전용 헬기로 개발한 ‘카므프’를 국내 지형에 맞춰 산림용으로 개조해 120% 활용하는 능력도 발휘했다. 조종사들의 비행 역량도 뛰어나다. 군에서 2000시간 이상 비행한 베테랑이더라도 산림 헬기 조종에 바로 투입되기는 어렵다. 입사 후 기종전환(10시간)과 지상교육(40시간) 등 평균 2개월 교육을 마치고 실전에 투입된다. 미국이나 러시아에서는 산악 착륙이 위험한 업무여서 별도 훈련까지 받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일반 업무에 속한다. 초대형 헬기 시범 조종을 위해 산불 현장을 찾았던 미국의 조종사가 강풍이 부는 현장에서 대형 헬기를 조종해 이륙하는 산림 조종사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근무 체계는 불안정하다. 조종사가 시트당 1명에 불과해 대형 산불이나 비상 상황이 발생하면 업무 과부하를 피할 수 없는 실정이다. 8시간 비행 후에는 24시간 휴식이 필요하지만 다음 날 정상 근무를 해야 한다. 정비사도 분산 배치되면서 헬기 1대를 1명이 맡는다. 300시간 후 이뤄지는 중정비는 본부에서 시행한다. 신원주 산림항공본부 안전감독관은 “현장에서 조종사와 정비사는 비상시 절대 아프지 말라는 불문율이 있다.”면서 “아픈 사람이 생기면 대체가 불가능한 구조”라고 말했다. 공중진화대도 인원 부족으로 산불 시즌에는 2개조(1개조 23명)의 특수진화대로 임시 편성해 산불 위험 지역에 배치하는 실정이다. 정부대전청사 박승기기자 skpark@seoul.co.kr 후원 : 산림항공본부
  • 軍창작뮤지컬 배우·스태프 모집

    국방부는 6·25전쟁 당시 참전용사와 해외 참전국의 활약을 다룬 창작뮤지컬 ‘약속’의 배우와 스태프를 모집한다고 28일 밝혔다. 이 뮤지컬은 군 주도하에 현역장병들과 국내 전문제작진이 참여하며 정전협정과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60주년이 되는 내년 1월 한 달간 공연할 예정이다. 국방부는 뮤지컬 제작을 위해 8월부터 9월말까지 현역 및 일반인을 대상으로 배우와 스태프를 선발할 예정이다. 선발 예정인 배우 및 스태프는 모두 80명(현역 장병 50명, 일반인 30명)으로 다음 달 13일까지 군 내부 인트라넷과 인터넷 홈페이지(www.musical625.co.kr) 또는 우편을 통해 지원할 수 있다. 최종 합격자는 10월 5일 국방부와 육군 인트라넷, 인터넷 홈페이지, 국방일보를 통해 공지된다.
  • [기고] 해외파병은 국가안보의 초석이다/윤영미 평택대 교수

    [기고] 해외파병은 국가안보의 초석이다/윤영미 평택대 교수

    탈냉전기 전 세계는 내전·테러·국가 간 분쟁·난민 발생·인권유린·자연재해 등 다양한 위협에 직면해 있다. 이런 국제사회의 분쟁해결과 인도적 지원을 위해 유엔은 유엔평화유지군(PKO) 활동을 대폭 확대하고 있다. 내년은 한국이 1991년 유엔에 가입한 이후 PKO 활동을 시작한 지 20년이 되는 해다. 한국군은 1993년 소말리아 상록수부대 파병을 시작으로 전 세계의 분쟁지역에서 평화와 재건, 군과 민간인과 협력해 수행하는 민사(民事)작전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또 한국군의 우수성, 기강, 현지 활동 등 운용 측면에서 최고수준의 역량을 보여주고 있어 유엔과 국제사회로부터 큰 찬사를 받고 있다. 특히 62년 전 6·25전쟁 당시 한국에 5만 달러의 물자지원을 제공했던 레바논에서 동명부대가 활동하고 있다. 2007년 7월 파병됨에 따라 한국군 최장기 파병기록을 세우고 있다. 동명부대는 한국에서 8000㎞ 떨어진 이역만리 땅에서 현지인들로부터 ‘신이 주신 선물’이라는 칭송을 받으면서, 지역 재건과 민사작전 수행 등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최근 정부합동평가단원으로 아프가니스탄,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바레인 등을 파병부대의 현지 활동과 정세파악을 위해 방문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장병들이 한국군 특유의 성실성과 친화력으로 현지 문화를 존중하면서 활발한 민사활동을 전개, 국가 위상과 한국 붐을 일으키는 주역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희망의 전도사’로 불리는 350여명의 오쉬노부대가 지난 2년 동안 지방재건지원팀(PRT)의 보건진료와 학교 건립 활동 등을 경호하고 지역 안정화에 힘쓰고 있었다. UAE의 아크부대는 UAE 특전부대의 교육훈련을 지원하고, 연합연습 등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지난 2년 동안 UAE군의 정예화 및 작전수행능력 향상을 이끌었다. 더불어 사막 및 고온의 환경에서 한국군의 전투수행 능력도 높아졌다. UAE 총참모부는 한국군을 미국·영국·프랑스·호주보다 더 신뢰, ‘한 팀’(One Team)으로 간주했다. 심지어 ‘아크 열풍’은 한국어 배움과 K팝 등으로도 잘 표출되고 있었다. ‘아덴만의 영웅’인 청해부대는 소말리아 해역과 주변에서 선박의 안전한 항해를 위해 연합해군과 지속적인 활동을 전개, 그 명성 역시 자자했다. 비록 짧은 방문 기간이었지만 현지인들이 한국군의 활약에 대한 찬사와 높은 평가에 긍지와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혹독한 사막의 날씨와 테러위험 속에서도 강인한 군인정신으로 국익과 한국군의 국제적 명성을 드높이는 장병들의 헌신과 열정에 감사와 찬사를 다시 한 번 보낸다. 한국은 6·25전쟁 당시 유엔으로부터 16개국의 전투병 파병과 5개국의 의료지원, 42개국의 물자지원을 받았다. 현재 전쟁의 폐허 속에서 세계 경제 10위권으로 성장했으며, 세계 각국에 도움을 주는 나라로 변모했다. PKO 활동의 참여는 군사외교이자 보은외교의 일환이며, 유사시 국제사회의 지원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앞으로 정부와 군은 더 활발하게 국가적 및 군사적 역량을 발휘해야 하며, 한국군의 선진화와 국제화에 국민의 적극적인 지지와 참여가 필요하다.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이 너그러운 그늘이 소산댁 할머니에겐 또 하나의 친정입니다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이 너그러운 그늘이 소산댁 할머니에겐 또 하나의 친정입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명실상부한 정자나무로 사람의 마음에 자리 잡으려면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그리는 어린 시절 풍경에 오롯이 떠오르는 나무여야 한다. 나무는 먼 길을 휘휘 달려서 다다른 고향 마을의 면사무소 앞 조붓한 주차장에 자동차를 세우고 천천히 걸어가는 길 곁에 있으면 좋다. 면사무소 울타리를 따라 소방소 파출소를 지나고, 빨간색 표지판이 반기는 우체국에 들러 도시에 남겨둔 벗들에게 고향 소식을 담은 손편지를 쓸 수 있는 곳이라면 금상첨화다. 우체통에 편지를 접어 넣은 뒤, 가만가만 마을 안으로 돌아들면, 우뚝 서서 반기는 큰 나무, 그 아래 평상에서 늙은 어머니가 집 떠난 자식들을 기다리며 앉아 있다면, 고향 정자나무의 풍경은 비로소 완성된다. ●열여섯 각시 설움부터 여든 노인 푸념까지 품어 전남 담양 무정면 봉안리 술지마을의 정자나무 풍경이 꼭 그랬다. 나무를 찾아 무정면사무소 앞에 자동차를 세우고 천천히 골목길을 돌아드는데, 반갑게 나선 건 아담한 우체국이었다. 편지 한 장 쓰지 않고서는 지나치기 어려울 듯한 시골 우체국이다. 우체국을 지나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오른 한 그루의 은행나무가 길을 막아선다. 그 우람한 나무 그늘 아래 놓인 반듯한 평상 위에는 어느 시골 마을에서나 흔히 만날 수 있는 우리네 어머니 한 분이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우리 마을에서는 이 나무 그늘이 제일 시원해. 우리 집은 저 위에 있는데, 더워 견딜 수가 없으면 여기로 나오지. 바람 한 점 없는 날에도 여기는 시원하거든.” 열여섯에 이 마을로 시집 와서 산다는 소산댁(80) 할머니는 긴 무더위에 대한 푸념을 그렇게 털어놓았다. 나무는 천연기념물 제482호인 ‘담양 봉안리 은행나무’다. 천연기념물이라고는 하지만, 봉안리 은행나무는 여느 천연기념물처럼 가까이 하기 어려운 위엄을 갖추었다거나 독불장군처럼 홀로 우쭐대지 않는다. 그저 여느 시골 마을이라면 있음직한, 그렇고 그런 큰 나무다. 누구라도 품어 안을 수 있는 너그러움을 갖춘 외할머니 품처럼 편안한 느낌이다. 그렇다고 나무가 작아서 하찮아 보인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무는 한눈에도 늠름한 위용을 갖추었다. 키는 15m나 되고, 줄기 둘레는 8m를 넘는다. 새로 돋은 맹아지 하나가 줄기 곁에 바짝 붙어서 자라났다. 맹아지는 얼핏 봐서 또 하나의 다른 가지로 보이지 않고, 그저 하나의 줄기에 난 굴곡으로 볼 수 있을 만큼 바짝 붙어있다. 그 덕에 나무의 줄기는 실제보다 더 굵고 우람하게 다가온다. ●지금도 정월대보름 마을사람들 모여 당산제 “은행이 무지하게 많이 맺혀. 좀 지나 가을 되면 하도 많이 떨어져서 냄새도 심하지만, 이 옆을 지날 때에는 조심해야 해. 은행 열매의 독이 오를 수도 있거든. 옛날에는 열매를 주워서 동네 자금을 만들어 썼는데, 요즘은 그냥 두더라고. 아무나 와서 주워가도 되지만, 독 오르니까 조심해야 해.” 자식들을 모두 대처로 내보내고 홀로 시골 집을 지키고 있는 소산댁 할머니는 마을 일에 무관심한 듯, 마치 남의 일처럼 이야기한다. 자신의 몸 간수만으로도 살기 힘든데, 마을에서 은행을 줍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투다. “안 아픈 데가 없어. 이 나이 되면 다 그렇겠지만, 온몸이 다 쑤시고 아파. 나무야 나보다 많이 살았지만, 저리 튼튼해 보이잖아. 하긴 나무가 아픈지 아닌지 내가 어찌 알겠어?” 건강 체질로 보이는 노인이지만, 할머니는 그 나이쯤의 노인들에게 자연스레 찾아오는 잔병 치레로 고생이 많은 모양이다. 허리도 꼿꼿하고, 음성도 강렬하고, 귀나 눈도 전혀 어둡지 않다. 그리고 가만히 나무를 쳐다보며 마치 ‘나무는 아프지 않아 좋겠다.’고 말을 건네는 듯하다. 봉안리 은행나무는 500살을 넘긴 늙은 나무다. 나무라고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어디 아픔이 없었을까만, 겉으로는 소산댁 할머니처럼 건강해 보인다. 나무는 때때로 통곡의 울음 소리를 낸다고 한다. 그가 아파했던 것은 대개의 큰 나무들이 그런 것처럼 임진왜란이나 6·25전쟁처럼 나라에 큰 일이 벌어지던 때였다. 나무 그늘에서 자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땅에 일어나는 불길한 일을 나무도 아파했다는 이야기다. 나무는 오랫동안 마을의 당산나무로 살아왔다. 지금도 정월대보름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정성껏 당산제를 지낸다. 모두 합하면 150가구 정도 되는 비교적 큰 마을이어서, 당산제를 올릴 때면 나무 앞의 작은 길과 나무 옆의 공터가 사람들로 가득 메워진다고 한다. ●500년 사람살이 흔적을 담다 나무가 그저 크기만 하다고 해서 푸근하게 느껴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큰 나무는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을 제압해 주눅이 들게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정작 나무가 푸근하게 느껴지는 건 어떻게 우리와 더불어 살아왔는지에 대한 흔적에 달려있지 싶다. 봉안리 은행나무는 지난 500년 동안 마을 어귀에서 마을에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의 평안한 쉼터로 살아왔다. 봄이면 어김없이 연초록의 잎을 내고 꽃을 피웠으며, 여름 되면 푸른 잎으로 수굿이 빛과 바람을 모아 열매를 무성히 맺어 마을 살림살이를 보탰다. 마을 사람들이나 그들의 오두막집이 바뀌어도 나무는 언제나 고향 마을 지킴이로 그 자리를 똑같이 지켰다. 팔십 평생을 살아온 늙은 우리네 어머니들의 이마에 흐른 땀을 가만가만 식혀주며 나무는 사람살이의 안녕을 기원했고, 이 땅에 평화가 깨질 때마다 큰 울음을 울었다. 고향을 생각할 때마다 맨 앞에 떠오르는 나무가 아닐 수 없다. 글 사진 담양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전남 담양군 무정면 봉안리 1043-3 술지마을. 88올림픽고속도로의 담양나들목으로 나가면 담양공고 교차로가 나온다. 1㎞ 쯤 직진하면 담양경찰서 앞 백동사거리에 이른다. 여기에서 우회전하여 옥과 방면으로 5.2㎞ 남짓 가면 왼쪽으로 무정면사무소가 나오고 면사무소 뒤편으로 농공단지와 마을이 이어진다. 비교적 큰 마을이다. 봉안리 은행나무를 찾아가려면 면사무소 앞에 마련한 조붓한 주차 공간에 자동차를 세우고, 예쁜 우체국이 있는 마을 길을 따라 100m 쯤 걸어가야 한다.
  • 아름답죠? 소중한 우리 독도

    아름답죠? 소중한 우리 독도

    강남구는 22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구청 1층 로비에서 ‘아름다운 섬 독도사진전’을 개최한다. 구는 최근 일본 정부가 우리땅 독도를 국제 분쟁 지역화하기 위한 공세에 나서고 있는 데 자극받아 우리 국토의 소중함을 주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독도사진전을 마련했다고 20일 밝혔다. 특히 이번 전시는 독도교육 시범학교인 경남 창원의 소답초등학교에서 독도전경, 독도 빛내림 등 독도의 아름다운 모습을 담은 사진 34점을 지원했다. 구는 독도사진전에 앞서 21일에는 구청 1층에서 안보의식 고취를 위해 ‘6·25 참전 전사자 유해품 전시 및 사진전’을 개최한다. 국방부의 유해발굴 감식단에서 제공한 전사자 유품 150점과 관련 사진 51점 등을 전시해 주민들이 6·25 전쟁의 역사적 교훈을 되새길 수 있도록 했다. 신연희 구청장은 “사진전은 2012년 을지연습에 주민의 관심과 참여를 높이기 위해 마련한 것”이라면서 “사진전을 통해 주민들이 독도사랑과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일깨우는 좋은 기회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한·중 수교 20주년…상생의 미래를 열자] 잊혀진 타이완

    타이완(臺灣)은 한국과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한국과 타이완의 외교관계는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시작됐다. 한국은 정부수립 두 달 뒤인 같은 해 10월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난징(南京)에 대사관 개설 준비사무소를 마련했고, 이것이 한국 최초의 외교공관이었다. 미국을 정점으로 ‘반공’ 이념을 표방하는 자유진영의 울타리에 속했던 한국과 타이완은 6·25전쟁을 계기로 당시 중공(중화인민공화국)으로 불리던 중국을 공동의 적국으로 규정하며 두터운 동맹을 과시하는 등 유대 의식도 남달랐다. 그러나 중국의 굴기에 따라 타이완의 위상이 쇠퇴하면서 한·타이완 관계도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중국은 1978년 개혁·개방 이후 고도 성장을 지속하면서 국제사회에서 목소리를 높여 왔고, 결국 타이완에 있어서 아시아의 마지막 맹방이었던 한국 역시 1992년 8월 24일 중국과 수교하면서 타이완과의 외교 관계를 청산했다. 물론 타이완이 외교적으로 완전히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것은 아니다. 미국은 단교 뒤에도 ‘타이완 관계법’을 국내법으로 제정해 맹방 역할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은 지난해 중화민국 100주년 건국 기념 행사 때 축하사절단 70명을 보낼 만큼 타이완에 공을 들여왔고, 지금도 타이완인은 일본을 가장 좋아하는 나라로 꼽는다. 한국도 단교 이듬해인 1993년부터 민간 창구 형식으로 수도 타이베이(臺北)에 대표부를 설치, 운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북·중 관계만큼 한·타이완관계가 매끄럽지는 않다. 중국은 한국과의 수교 이후에도 북한과 ‘혈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 타이완에 대한 관심은 미미하다. 타이완이 5대 수출국이고, 타이완 관광객이 일본·중국·미국에 이어 4위이며, 중화권 한류(韓流) 진출의 교량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색할 지경이다. 공무원은 물론 정치인이나 대기업, 언론, 학계 리더들마저 관심은 중국 쪽에 쏠려 있다. 타이완 내 반한 감정이 잦아들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타이완은 방치하기에는 여전히 한국에 매우 중요한 존재인 것도 사실이다. 타이완은 최근 경제를 고리로 중국과의 양안(兩岸) 관계를 발전시키면서 다시 관심을 끌고 있다. 주타이베이 한국 대표부 관계자는 “타이완은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고마운 친구이자 오랜 우정을 간직한 나라임이 분명하다.”면서 “공공외교 강화 차원에서라도 과도하게 중국의 눈치를 보며 타이완을 홀대하는 행동은 삼가야 한다.”고 말했다. 베이징 주현진특파원 jhj@seoul.co.kr
  • 6·25 격전지 경남 하동군 동산리 호국 충혼탑 2014년 말까지 건립

    6·25 때 최초의 장군 전사자였던 채병덕(1916~1950) 육군참모총장이 전사하는 등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경남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에 호국충혼탑이 건립된다. 경남 하동군은 14일 하동읍 읍내리 하동공원 안에 있는 기존 충혼탑을 대신해 6·25 당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역사의 현장인 적량면 동산리 산 25-1 일대에 새로운 호국충혼탑을 2014년 12월까지 건립한다고 밝혔다. 모두 31억원을 들여 8465㎡의 부지에 충혼탑과 애국지사·국군·경찰·한청기동대원 등 호국영령들의 위패 757위가 봉안된 봉안각, 경찰전적비, 한청기동대 전공충혼탑 등을 함께 건립한다. 채병덕 소장은 육군참모총장을 두 차례나 지냈으며 1950년 7월 27일 지형 정찰을 하다 북한군 기습을 받아 전사했다. 군은 1971년 건립한 충혼탑과 주변 부지가 비좁아 이전 건립을 추진하게 됐다고 밝혔다. 창원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해방뉴스 1호엔… 기독교역사박물관 전시회

    해방 이후 6·25전쟁이 발발하기까지 격동의 혼란기 한국 교회와 개신교 인사들의 모습이 녹아 있는 희귀 자료들을 볼 수 있는 전시회가 열린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경기 이천시 초지리·관장 한동인 장로)이 박물관 설립 11주년을 맞아 15일부터 올 연말까지 마련하는 ‘해방의 기쁨과 분단의 아픔-교회의 재건과 건국활동’전. 해방과 분단 상황에서 한국 교회와 개신교 인사들의 활동을 통해 우리 현대사를 되돌아볼 수 있는 자료 68점이 전시된다. 전시 자료들은 대부분 기독교인들의 활동이 담긴 신문, 잡지, 단행본, 설교집들.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김구 선생이 간략하게 논술한 내용을 정리한 ‘김구 선생 혈투사’며 ‘대한독립운동과 임시정부투쟁사’, ‘임마누엘 제9호’, ‘맑스주의와 기독교’, ‘어린이신문’ 등 모두 이 박물관을 건립한 한영제 장로가 생전 30여년간 청계천을 돌며 수집한 것들이다. 이 가운데 1945년 9월 15일 발행된 ‘해방뉴스 1호’와 이승만·김일성·조만식 등 좌우 진영의 주요 인사들이 포함된 ‘조선인민공화국 인민위원씨명’, 재미교포 김용중이 설립한 한국문제연구소에서 만든 ‘Voice of Korea’는 일반에 처음 공개되는 희귀 자료다. 1945년 9월 15일 발행된 ‘해방뉴스 1호’는 해방 이후 국내 상황과 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을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인민공화국 인민위원씨명’은 1945년 9월 6일 경기여고 강당에서 개최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선출된 조선인민공화국 인민위원 명단이다. 그런가 하면 ‘Voice of Korea’는 1943년부터 1961년까지 발행한 주간지를 엮은 것으로 6·25전쟁 당시의 ‘고창 학살 사건’등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이 밖에 독도 전경 사진과 독도 관련 최초의 본격적인 학술 논문 ‘독도 소속에 대하여’(심석호)를 실은 ‘사해 창간호’(1948년 12월 12일 조선사연구회 발행)와 유관순의 사촌 올케로 국내 최초의 여성경찰서장(경북경찰국 소속 대구 여성경찰서장)을 지낸 노마리아의 활동을 담은 사진첩도 흥미롭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때론 소비현장, 때론 생계현장… 女, 격동의 공간을 지배하다

    식민지 시절 일본인이 점령했던 지배의 공간, 전쟁의 포화가 휩쓸고 간 참담한 폐허, 민주화 열기로 뒤덮인 목마름의 해방 공간, 첨단의 유행과 패션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소비와 향락의 최일선…. 세대와 연령에 따라 서울 한복판 명동은 각양각색의 얼굴로 각인된다. 명동은 그렇게 다양한 성격의 땅이지만 늘 남성과 생산보다는 여성과 소비의 인상이 짙었다. 지금도 그 인상은 여전하다. 전국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곳, 전국 최고의 상권, 외국인 여행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공간, 보행객의 최고 밀집 지역 명동. 그곳에서 여성은 언제나 소비에 치우친 존재일까. 여성 학자가 쓴 ‘명동 아가씨’(김미선 지음, 마음산책 펴냄)는 그 ‘소비적이고 여성들의 발걸음이 몰리는’ 명동을 뒤집어본 흥미로운 책이다. 6·25전쟁이 끝난 뒤 허무와 비감이 무성했지만 상권이 형성되고 번창했던 1950∼60년대의 명동을 저자는 새롭게 되살려 놓았다. 당시의 여성 잡지와 일간지 기사며 사진, 행정지도, 당사자 인터뷰를 통해 재구성한 명동이 마치 현미경을 통해 들여다본 손금처럼 생생하다. 저자는 전후의 명동이 소비·문화·생존의 공간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지금의 명동을 일군 주인공이 바로 여성이었음을 강조한다. 저자가 훑어내 보여 주는 명동의 궤적을 보자. 총성이 그친 후 도시 재건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명동은 국가 행정과 경제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사회복지부, 상공부, 증권거래소 등이 들어섰고 전쟁 중 폐업했던 백화점 개점과 함께 양장점이며 미용실이 들불처럼 빠르게 거리를 점령했다. 그렇게 요동치는 명동에서 여성은 소비와 노동의 주체였다. “시일에 맞춰 (옷을) 완성하기까지 밤이 이슥하도록 일을 해야 하고 정열을 소모시켜야 한다.” “손님들이 바쁘다고 성화를 부릴 때는 손끝이 말을 듣지 않아서 울고 싶어진다.” 당시 디자이너와 미용사로 일했던 여성들의 회상은 그 증거나 다름없다. 일부 여성이 누리고 치장했던 사치와 소비의 한켠에선 전쟁으로 가장을 잃어 생계를 위해 몸부림쳐야 했던 여성들이 즐비했다.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서 함께했다 할지라도 누구의 경험을 중심으로 해석하고 쓰이느냐에 따라 그 공간의 역사는 달라진다.” 저자는 지금도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변화무쌍한 공간 명동을 빌려 결국 이렇게 말한다. “전쟁으로 인한 ‘폐허’와 ‘허무’가 난무하는 가운데서도 여성들은 부딪쳐 싸웠고 도전했다.” 1만 3000원.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이종원 선임기자 카메라 산책] 농촌진흥청, 케냐·에티오피아 농업기술 전수현장을 가다

    [이종원 선임기자 카메라 산책] 농촌진흥청, 케냐·에티오피아 농업기술 전수현장을 가다

    2009년 이탈리아 라퀼라. G8 확대정상회의에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한국이 빈곤했던 시절의 식량위기를 극복한 점을 강조해 눈길을 끈다. 그는 “내 아버지가 케냐에서 미국으로 유학 왔을 당시에 케냐는 한국보다 잘살았지만, 이후 케냐를 비롯한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기아와 빈곤에 허덕이는 사이 한국은 부국(富國)이 됐다.”고 소개했다. 그의 말처럼 ‘보릿고개’ 시절을 겪은 한국의 ‘녹색혁명’은 아프리카인들에게 가장 탐나는 발전 모델이 되고 있다. 이에 농촌진흥청이 검은 대륙에서 펼치는 농업기술 전수사업의 현장을 찾았다. 최근 케냐 직항편이 취항하면서 13시간 비행으로 한층 가까워진 아프리카. 케냐는 해발 1700m의 고산지대로 7~8월에도 아침 저녁은 물론 낮에도 쌀쌀하다. 케냐는 전통적인 농업국가이면서도 생산성은 야생에서 자연적으로 자란 것을 거둬들이는 수준이다. 수도 나이로비에서 북서쪽으로 25㎞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농촌진흥청 해외농업기술개발(KOPIA) 센터. 한국에서 파견된 연구원들과 현지인들이 시험 재배한 무의 수확이 한창이다. 현지인 작업반장인 찬둘라(37)씨는 어른 머리통만 한 큰 무를 손에 들고 활짝 웃으며 “기회가 된다면 한국에 가서 선진 농법을 빠짐없이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KOPIA는 농촌진흥청이 아프리카를 비롯한 아시아·남미의 15개 개발도상국에서 농업기술을 지원하기 위해 벌이고 있는 사업이다. 농촌진흥청 김현순 국외농업기술과장은 “한국의 씨감자와 고품질 쌀 생산기술은 물론 그린 빌리지 조성 등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희진 연구원은 “전기·통신 등 기반시설도 부족하고, 열대성 질병과 문화적인 이질감이 있지만 우리가 선진 농업기술로 케냐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에 가슴이 벅차다.”고 말했다. 농촌진흥청은 우리의 ‘소 번식기술’을 아프리카에 전파해 축산발전과 농가소득증대에도 기여하고 있다. 국제축산연구소(ILRI) 파견연구원인 농촌진흥청 국립축산과학원의 조창연 박사는 “과학적으로 체계화된 수정란이식기술을 케냐 현지에 적용,우유와 고기 생산량을 늘림으로써 빈곤 퇴치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농촌진흥청은 긴 가뭄으로 메마른 아프리카에 최소한의 물로 농작물을 키울 수 있는 기술도 전수하고 있다. 지난해 시작한 한국·아프리카 농식품기술 협력협의체(KAFACI)의 국가별 맞춤형 시범사업의 하나로 올해부터 에티오피아에 농경지 물 관리기술 지원사업을 본격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에 농업연수를 다녀왔던 솔로몬 아세파 에티오피아농업연구청장은 “전 국민의 85%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에티오피아가 잘살 수 있도록 보다 많은 한국의 선진 농업기술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에티오피아 코피아센터 조현묵 소장은 “시설하우스를 이용한 고품질 채소 재배와 축산기술 개발이 중점사업”이라고 말했다. 아프리카 유일의 6·25 참전국, 1인당 국민소득 300달러, 말라리아·에이즈·영양결핍 등으로 인한 영아사망률 세계 1위…. 아프리카 53개국 중 최빈국인 에티오피아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는 ‘새로운 꽃’을 의미한다. 코피아센터 이신영 연구원은 “한국의 농업기술로 에티오피아에 ‘새로운 꽃’을 활짝 피우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우리나라의 아프리카에 대한 농업원조는 자강불식(自强不息)의 지원이다. 스스로 자국의 농업성장에 필요한 기술을 습득해 재현하도록 하는 새로운 사업방식이다. 박현출 농촌진흥청장은 “단순한 자원 획득이나 서구와 같은 물질 중심 원조가 아닌, 식민지와 가난이라는 공감대 속에서 현지인들의 정신과 삶을 바꾸는 것이 핵심”이라며 “개도국 농민들의 소득을 증가시키고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사업”이라고 덧붙였다. 아프리카는 현재 한국의 앞선 농업기술과 경험에 목말라 하며 뜨거운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절대빈곤’이라는 우리의 역사와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이 된 발전 경험이 여러 아프리카 국가에 동질감과 함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미지의 검은 대륙에서 ‘농업 한류’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는 것이다. 글 사진 케냐 나이로비·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jongwon@seoul.co.kr
  • “깨끗해진 독도 물밑… 이젠 불발탄 보이지 않아”

    “깨끗해진 독도 물밑… 이젠 불발탄 보이지 않아”

    “2009년 첫 수중 정화 활동 때보다 물밑이 훨씬 깨끗해졌습니다. 6·25전쟁 때 투하된 불발탄이나 녹슨 쇳조각 등이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어선 등에서 떨어진 폐어구가 대부분입니다.” 지난 8일 오후 4시 독도 동도 부두 근처 바닷물에서 막 나온 다이버들의 말이다. ●육해군 첩보부대 예비역 모임… 2009년 창설 육해군 첩보부대 출신 예비역들의 모임인 ㈔해룡 회장을 맡은 백동일(63) 예비역 대령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1996년 한·미 간 민감한 외교 사안으로 비화됐던 ‘로버트 김’ 사건의 당사자이며 독도 지킴이 활동을 위해 2009년 해룡을 창설했다. 백 회장과 회원 39명은 7일부터 9일까지 울릉도를 거쳐 독도에 다녀왔다. 2009년 이후 네 번째 방문이다. 이들은 독도에 상륙한 후 일본의 독도 야욕을 규탄하고 독도 2개 섬 가운데 동도 부두 좌우 600m 구간 수중에서 그물 밧줄 등의 각종 폐기물을 건져내는 수중 정화 활동을 벌였다. 한여름이지만 물속은 차갑고 물살도 거셌다. 15명의 다이버들은 20㎏에 이르는 스쿠버 장비를 메고 바닷속 밑바닥을 샅샅이 훑었다. 백 회장과 나머지 회원들은 다이버들이 거친 조류에 떠밀려 조난당하지 않도록 보트를 타고 살폈다. 조류가 빨라 몸을 가누기도 쉽지 않았지만 독도에서의 수중 정화 활동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회원들은 최선을 다했다. ●“독도지킴이는 물론 국토방위에 최선” 수거된 폐기물량은 전보다 줄었다. 3시간 동안 1.5t을 건졌다. 3년 전 첫해 때의 2t보다 0.5t 적었다. 폐기물은 울릉군에 인계했다. 독도 관리사무소 측은 해룡의 활동 덕분이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특히 물살이 거센 독도에서의 수중 정화 활동은 특수임무수행자부대(UDU)와 육군첩보부대(HID), 해군첩보부대(NIU), 해군특수전부대(UDT) 출신인 해룡 회원들만이 해낼 수 있는 위험한 작업이다. 하지만 해룡 은 자발적으로 매년 이 작업을 한다. 해룡은 당초 울릉도에서 독도를 릴레이 수영 방식으로 횡단하는 광복절 기념 행사를 계획했으나 가수 김장훈씨가 비슷한 시기에 같은 행사를 준비하자 안전망 등의 장비를 대여하고 수중 정화 활동 등을 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백 회장은 “회원들은 비록 전역했지만 나라와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은 현역 때와 마찬가지”라면서 “앞으로도 독도 지킴이 활동은 물론 국가 안보와 국토 방위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상봉기자 hsb@seoul.co.kr
  • 사격대표팀 첫 금의환향

    런던올림픽에서 금메달 3개, 은메달 2개 등 역대 최고 성적과 함께 첫 종합우승의 쾌거를 이룬 사격 대표팀이 7일(현지시간) 귀국길에 올랐다. 고의 패배 혐의로 실격, 지난 4일 불명예 귀국한 여자 배드민턴 대표 4명을 제외하면 런던올림픽에 참가한 한국 선수단 가운데 메달리스트가 포함된 첫 귀국이다. 또 애초 폐막 이후인 13일 일제히 함께 귀국하기로 했던 메달리스트들은 10일 자율적으로 귀국길에 오를 예정이다. ●총기 반출기간 때문에 먼저 귀국 사격 대표팀이 맨 먼저 귀국길에 오른 이유는 총기 반출 기간 때문이다. 대한사격연맹 관계자는 “선수들 총기를 일괄 관리하고 있는 대회 조직위원회가 우리 선수단의 총을 이미 한국에 보냈다.”며 “총기 관리 규정상 선수들이 반드시 한국에서 총기를 수령해야 하고 해외 반출 기간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예정대로 귀국하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한편 대한체육회의 방침 변경에 따라 7일 귀국할 예정이었던 수영 국가대표 박태환(23·SK텔레콤)은 일정을 늦춰 10일 오후 런던을 떠난다. 박태환은 메달리스트는 모두 함께 귀국하도록 하자는 체육회의 당초 방침에도 “여기에서는 도저히 못 견디겠다. 도망이라도 쳐서 무조건 한국으로 가겠다.”며 반발했지만, 여론의 뭇매를 맞은 체육회가 경기단체 방침과 선수 개인의 의사에 따라 10일부터 귀국길에 오를 수 있도록 한발 물러났고 박태환도 체육회의 남은 일정을 따르기로 한 것. ●박태환, 내일 세인트 폴 성당 참배 이에 따라 박태환을 비롯한 메달리스트들은 선수촌 등에 머무르며 경기에 나서는 한국 선수들을 응원하고, 9일에는 6·25 참전 용사비가 있는 런던의 세인트 폴 성당을 찾아 참배할 계획이다. 앞서 대한체육회는 귀국 환영 행사 참가 등을 이유로 메달리스트들의 귀국 일정을 제한했고,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는 박용성 회장과 체육회를 비난하는 글이 쏟아졌다. 체육회는 4년 전 베이징올림픽 때도 같은 이유로 메달리스트의 귀국을 막아 여론의 뭇매를 맞은 바 있다. 박성국기자 psk@seoul.co.kr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13) 광주 육판서길 & 대구 북성로

    [길을 품은 우리 동네] (13) 광주 육판서길 & 대구 북성로

    단편소설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 소년 어니스트는 마을 바위 골짜기에 새겨진 큰 바위 얼굴을 닮은 훌륭한 인물에 대한 얘기를 어머니로부터 듣고 자란다. 마을 사람들 역시 평생에 걸쳐 훌륭한 인물의 출현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실망하기를 반복한다. 19세기 중반 미국의 얘기다. 고단하고 남루한 삶을 사는 이들에게 부와 명예, 권력 등 출세에 대한 욕망은 이렇듯 지역과 시대를 가리지 않았다. 대구 중구 북성로와 광주 동구 육판서길 역시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부와 출세에 대한 갈망의 얘기를 담고 있다. 타관으로 떠나 출세한 이는 마을의 자랑이다. 하지만 구불구불한 고향 길을 따라 대처로 떠난 이 대부분은 으리번쩍하게 출세하기보다 여전히 퍽퍽한 삶 속에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다. ■광주 육판서길 깜빡이는 30촉 전구를 올려다보며 박수를 치고 처음으로 전화를 들여놓은 집에 모여 감격스러워했던 것이 20년 남짓 전의 일이다. 지하수가 아닌 수도꼭지에서 졸졸거리는 수돗물에 감격했던 것은 불과 7, 8년 전이다. 광주 도심에서 20분 안쪽 거리에 있는 마을이건만 발전은 더뎠다. 온 나라가 난리던 6·25전쟁 때도 아무런 피해가 없었을 정도였다. ‘전라도판 동막골’ 같은 곳이다. 광주에서 화순 쪽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접어드는 길 입구에 커다란 바윗덩어리 표석이 보인다. ‘六判里’(육판리)라고 쓰여 있다. 여기서부터 육판서길이다. 시멘트로 닦인 길이긴 하지만 쉬 사람 사는 마을이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구불구불한 산길, 논길, 밭길이다. 다른 곁길도 없다. 육판서길 중간쯤 왼쪽으로 들어가면 작은 절(법림사)이 하나 있어 육판서길 143번길이 하나 따로 나와 있는 정도다. ●평산 신씨·광산 김씨 집성촌 시작점에서 2004m를 가니 거짓말처럼 마을이 하나 나왔다. 500년 정도의 나이를 자랑하는 느티나무가 마을 어귀에서 한껏 팔을 벌리고 있다. 행정구역명은 광주 동구 내남동 내지마을이다. 하지만 내지마을이 아닌 육판마을로 흔히 쓰인다. 풍수지리학적으로 3정승 6판서가 나올 지세라고 해 붙은 이름이다. 정승에 판서라니…. 정승은 요즘으로 치면 총리급이고 판서면 장관급인데 진짜 판서를 여섯 명이나 배출했던 것일까. 아니면 대처를 꿈꿔 온 궁벽한 마을의 바람이 담겼던 걸까. 이 마을은 평산 신씨와 광산 김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육판서길을 도로명 주소로 쓰는 집은 모두 82곳이 있지만 외지로 많이 떠나 빈집이 20곳 가까이 된다. 마을에서 가장 젊어 이장을 맡고 있다는 김성중(64)씨는 “아주 옛날부터 지관들이 마을을 보고 나면 한결같이 풍수지리학적으로 지세가 아주 좋아 3정승 6판서가 나올 곳이라고 했다.”면서 대처로 나간 육판마을 출신 인사들의 이름을 줄줄이 읊는다. 어디 병무청장, 어느 지역의 지법원장에 4성 장군, 큰 리조트를 운영하는 사업가…. 광주에서 언론인 생활을 하다 은퇴하고 귀향한 신현덕(70)씨도 “풍수지리학에서는 길지의 조건 중 ‘산진수회 필유음택’이 있는데 우리 마을이 딱 들어맞는다. 외지인들도 묘를 쓰기 위해 여기로 들어온다.”고 거들었다. 산진수회 필유음택(山盡水回 必有陰宅)은 산으로 막히고 물이 감아 도는 곳에 묘를 쓴다는 뜻이란다. ●내지천 마을 감싸고 분적산 병풍처럼 실제로 마을을 찬찬히 둘러보니 무등산 자락에서 뻗어 내린 분적산이 병풍처럼 든든히 버티고 있고 내지천이 마을을 감싸며 흐르고 있다. 총리, 장관까지는 아니라도 궁벽한 마을에서 출세한 사람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 곁들여졌다. 마을회관 앞에서 삶은 감자를 먹으며 마을 내력을 살펴보니 꼭 풍수지리학적 지세만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비밀은 육판마을의 놀라운 교육열이었다. 단순히 자식들의 교육열이 아니라 어른, 아이 가릴 것 없는 배움의 열기 그 자체였다. 그저 먹고사는 것에만 매달려야 했던 1955년부터 육판마을에서는 한문서당을 운영했고 1961년에는 문맹 퇴치를 위해 야학을 열었다. 공식 학력은 보잘것없는 촌로들이 문자속이 기특할 수밖에 없는 것도, 마을회관 벽마다 마을의 크고 작은 역사를 빼곡히 기록해 놓은 것도 그에 따른 당연한 이치였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자식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는 것도 순리에 가까웠겠다 싶다. 소설 ‘큰 바위 얼굴’에서 큰 바위 얼굴을 닮은 훌륭한 인물의 출현을 기다렸던 어니스트와 마을 사람들이 말년에 이르러서야 새삼 깨달았듯이 육판마을 역시 마찬가지 가르침을 준다. ‘출세’는 돈이나 권력 그 자체가 아니라 성찰할 줄 아는 겸손한 성품과 순결한 노력에 따른 부수적 산물이다. 글 사진 광주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대구 북성로 일제강점기 때 대구 읍성이 헐리고 일본인들이 몰려들었다. 허물어진 읍성 자리에 신작로를 냈다. 북쪽에 낸 신작로가 북성로다. 대구역 사거리 대우빌딩에서 달성공원 입구까지 1.42㎞ 구간이다. 지역 최초로 포장된 도로였을 뿐만 아니라 북쪽에 경부선 철로가 나면서 제일 먼저 일본 사람들이 토지를 매입하기 시작한 도로이기도 하다. ●대구 읍성 헐고 낸 신작로 1.42㎞ 구간 자연스럽게 북성로 일대는 일본인들의 상점으로 채워졌다. 조경회사인 스기하라합자회사, 목재회사인 구로가와 재목점, 대구 최초의 목욕탕인 조일탕, 대구 곡물회사, 마쓰노 석유회사, 철물점 등이 생소한 일본어 간판을 내걸고 늘어섰다. 식당, 요릿집, 영화관, 여관 등이 있던 무라카미초(향촌동)와 연결돼 대구 최고의 번화가를 이뤘다. 특히 이곳에 자리 잡은 미나카이 백화점(현재 대우 주차장 자리)은 대구 본점을 시작으로 한반도 전역과 만주, 일본 도쿄에 이르기까지 18개 지점을 거느린 백화점 그룹으로 성장했다. 1940년 당시 종업원 4000여명에 연 매출이 1억여엔인 공룡 기업이었다. 미나카이 백화점은 5층으로 지어질 당시 대구 최고층 건물이었다. 기둥 사이에 붉은 벽돌을 쌓고 타일을 붙였으며 안에는 유일하게 엘리베이터까지 설치했다. 꼭대기 층에는 카페가 있어 지방의 재력가들이 드나들었다. 최근 이 백화점을 내용으로 한 ‘북성로의 밤’이라는 소설이 출간됐다. 일본이 식민지 수탈을 목적으로 부설한 철도도 북성로를 당시 최고의 번화가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철도가 멈추는 대구역 주변에는 물류가 모이고 빠져나가는 대형 창고들이 줄줄이 들어섰다. 거래량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주식인 쌀의 거래는 일제의 수탈 강화와 함께 투기성을 띠는 지경에 이르렀다. 해방 이후 북성로는 사교와 문화의 거리로 변모한다. 백조다방은 당시로는 파격적인 그랜드 피아노가 있어 향토 음악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향토 음악인의 연습 공간으로 애용되기도 했다. 6·25전쟁 시절에는 북성로 일대에 이름난 다방이 많이 있었다. 모나미, 청포도, 백조, 백록, 호수, 꽃자리 등이다. 모나미다방은 문인들이 즐겨 찾았으며 꽃자리다방에선 구상 시인의 시집 ‘초토의 시’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상권이 변하면서 1970년대 들어 북성로에는 공구 골목이 들어섰다. 북성로 거리 양쪽에 500여개 점포가 빼곡히 들어서 있다. 공구, 호스, 농기구, 베어링 등의 산업용품을 판매한다. 이곳에서 대구 경북 산업이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3산업공단, 이현공단 등 도심 산업단지가 들어선 1970년대 후반 전성기를 맞았다. ●30년 넘은 여인숙·쪽방 다닥다닥 이후 공구 골목은 부침을 거듭했다. IMF 외환 위기와 금융 위기를 거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1998년에는 검단동 유통단지로 상당수 업체가 빠져나가면서, 최근에는 인터넷 쇼핑몰이 생겨나면서 큰 위기를 맞았다. 이렇게 반복되는 위기에도 굵직한 회사들이 여전히 북성로를 지켜 공구 골목은 건재하다. 하지만 공구 골목 주변은 개발에서 소외돼 도심의 빈촌으로 전락했다. 북성로에는 아직도 30년이 지난 낡은 여인숙과 쪽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30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그래도 북성로에서 변화한 곳이 있다. 1904년 건설된 대구역사다. 당시 오두막 형태의 임시 역사였지만 1913년에 다시 지어졌다. 목조 2층으로 일본, 서양 절충형의 르네상스 양식 건물이었다. 역 앞 광장은 민중 집회와 축제, 선거 유세 때 가장 먼저 꼽히는 장소였다. 대구를 드나드는 사람들과 만나고 이별하는 추억을 시민들에게 남겼다. 그 광장은 2002년 대구역이 롯데백화점 민자역사로 바뀌면서 시민들의 품을 떠나고 말았다.북성로에서 50년째 살고 있다는 김정규(75)씨는 “북성로는 대구의 모든 돈과 쌀이 모였던 곳이었다. 이제는 대구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 전락해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글 사진 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14회는 제주 서귀포시 ‘이어도로’를 소개합니다.
  • [조은지 기자의 런던eye] 폐회식까지 기다리라고? 그만 집에서 쉬게 해줘요

    메달리스트들의 발이 묶였다. 한국에 가고 싶은데 갈 수가 없다. 대한체육회가 13일 런던올림픽 폐회식까지 있다가 함께 돌아가자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예정은 이렇지 않았다. 종목별로 일정에 맞춰 출입국 계획을 세우도록 했다. 그러나 올림픽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바뀌었다. “메달리스트는 폐회식까지 보고 함께 귀국하자.”고. 메달을 딴 선수들은 억지로 올림픽선수촌에 남아 다른 종목 응원을 다닌다. 6일 경기장에서 마주친 선수들은 한결같이 “한국 가고 싶어 죽겠어요.”라고 했다. 다소 뜻밖의 반응일지도 모르겠다. 런던에 며칠 더 머무르면서 관광도 하고, 다른 경기도 보면 얼마나 좋을까 싶을지도. 그러나 선수들은 전부 고개를 젓는다. “가족들한테 축하받고 싶다.”, “선수촌의 긴장감이 부담스럽다.”, “질려서 빵을 못 먹겠다.”는 등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얼른 귀국하고 싶은 마음은 똑같다. 심지어 당장 수술대에 올라야 하는 유도 김재범·송대남·조준호도 런던에 남았다. 대한체육회는 6일 “한국선수단 임원과 메달리스트들이 오는 9일 6·25 참전용사비가 있는 세인트폴 성당을 참배한다. 목숨을 바쳐 조국을 지켜준 우방 영국에 감사를 표시한다. 그 이후 본인 자유 의사에 따라 귀국할 예정”이라고 했다. 여론 등쌀에 밀려 ‘급조’한 프로그램이다. 물론 ‘좋은 게 좋은 식’으로 생각하면 며칠 더 있는 것도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분통 터지는 건 런던에 머물러야 하는 뚜렷한 이유가 없다는 것. 그저 인천공항 들어갈 때 목에 메달 걸고 ‘폼 잡는 일’을 위해 남아 있을 뿐이다. 선수단 귀국 행사라면 한국에 있다가 몇 시간 전에 합류해도 될 일인데 말이다. 너무 촌스럽다. 대한체육회는 4년 전에도 귀국 금지 문제로 입방아에 올랐다. 베이징올림픽에 나섰던 350여명의 대한건아(!)들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개선장군처럼 귀국했다. 버스를 나눠 타고 도심으로 이동해 세종문화회관에서 서울광장까지 도보 행진을 했다. 공중파로 생중계됐다. 이튿날엔 청와대에서 밥도 먹었다. 정연주 KBS 사장 해임, 재벌들의 광복절 특별사면, 여권발 부패 등 뜨거운 이슈들이 ‘올림픽 특수’에 휩쓸려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지난 4년 동안 올림픽만 보고 땀을 흘린 선수들이다. 이들이 바라는 건 의미 없는 런던 관광이 아니다. 따뜻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입에 맞는 음식을 즐기며 늘어지게 자고 싶은 것뿐이다. 선수들 덕분에 열대야를 견뎌냈으면 그걸로 됐다. 공항 나갈 때 ‘모양’ 갖추는 게 대수는 아니잖나. 지친 선수들을 이제 제발 좀 놓아주자. zone4@seoul.co.kr
  • 北 해군사령관 정명도 퇴진

    북한 해군의 총괄 책임자인 해군사령관이 정명도에서 박원식으로 교체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지난달 리영호 총참모장 해임 이후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의 군 수뇌부 교체 가속화 움직임과 맞물려 주목된다. 한 대북 소식통은 5일 “북한의 해군사령관 정명도 대장이 동해함대사령관인 박원식으로 교체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는 지난달 27일 북한 조선중앙TV가 전승절(6·25전쟁 정전협정 체결일) 59주년을 맞아 열린 중앙보고대회를 녹화중계한 화면에서 해군사령관 자리에 정명도가 아닌 다른 인물이 앉아 있던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정명도와 관련된 북한 매체의 보도는 지난 3월 26일 제4차 노동자대표자회 선거를 위한 당 인민군대회 참석이 마지막이다. 신임 해군사령관으로 추정되는 박원식은 2004년 4월 중장(우리 군의 소장에 해당)으로 진급했고, 지난 2월 김정일 생일을 앞두고 김정일 훈장을 받았다. 사령관 교체 시기는 아직 불명확하나 김 제1위원장이 최근 군부 장악력을 높이기 위해 수뇌부를 물갈이하려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통일부 관계자는 “정명도 해군사령관이 2010년 김정은을 후계자로 옹립할 때 리영호와 함께 부상한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군 수뇌부 재편과 관련됐을 개연성이 있다.”고 밝혔다. 하종훈기자 artg@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