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6·25
    2026-06-23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9,316
  • “진도 보도연맹 희생자 유족에 배상하라”

    “진도 보도연맹 희생자 유족에 배상하라”

    ‘6·25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전국유족회’ 주최로 9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열린 사법부 규탄 집회에서 한 유족이 눈물을 훔치고 있다. 최근 대법원은 ‘진도 국민보도연맹 사건’ 희생자 유족 7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유족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광주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국군포로·납북자 현황

    국군 포로와 납북자 가족들은 지난 60년 동안 저마다 가슴속에 커다란 ‘멍에’를 안고 평생을 견뎌 왔다. 사랑하는 가족을 지척에 두고도 만나지 못하는 현실은 정전 체제의 한반도가 풀어야 할 커다란 숙제 가운데 하나다. 정부는 1990년대 이후 귀환한 국군 포로와 탈북자들의 증언에 근거해 현재 북한에 있는 국군 포로를 500여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앞서 국가정보원은 2006년 6월 공개한 자료에서 탈북자 신문 등을 통해 국군 포로 총 1734명의 신원이 확인됐으며 이 중 생존자는 548명, 사망자는 885명, 행방불명자는 301명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 가운데 북한을 탈출해 한국으로 돌아온 국군 포로는 1994년 조창호 소위를 비롯해 80명에 불과하다. 북한은 정전협정에 따른 포로 교환으로 국군 포로 문제가 일단락됐으며 강제 억류 중인 국군 포로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명칭도 ‘국군 포로 출신’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하지만 포로 교환 당시인 1953년 유엔군사령부가 집계한 국군 실종자 8만 2318명 가운데 공산군이 최종 송환한 국군 포로는 8343명뿐이다. 북한이 2000년 이후 이산가족 상봉자 명단 교환 과정에서 공식적으로 생사를 확인해 준 국군 포로는 19명이며 이 중 17명이 남측 가족과 상봉했다. 국군 포로와 납북자 송환 운동을 벌여 온 사단법인 ‘물망초’(이사장 박선영)는 지난 4월 북·중 국경 인근의 북한 탄광 지역에 국군 포로 113명이 생존해 있다며 이들의 명단을 공개하기도 했다. 정부가 추정하는 ‘전후 미귀환 납북자’ 숫자도 517명에 달한다. 대부분 선원들이다. 귀환한 전후 납북자 3318명 중 3310명은 납북 후 1년 이내에 송환됐지만 8명은 30년 이상 북한에 억류돼 있다 2000년 이후 탈북에 성공해 귀환한 것으로 전해졌다. 6·25전쟁 당시 납북된 ‘전시 납북자’는 공식 집계된 인원만 1991명이다. 북한은 송환은 커녕 납북 사실을 시인도 하지 않고 있다.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일본인 납북자 및 그 가족까지 돌려보내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기고] 국정조사와 국정원 개혁 방향/문순보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기고] 국정조사와 국정원 개혁 방향/문순보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최고 정보기관인 국가정보원이 수난의 시대를 맞고 있다. 지난 대선 때의 정치 개입 의혹부터 최근의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에 이르기까지 전대미문의 사건들로 시끄럽다. 최근 여야 정치권에서 국정원 댓글사건과 관련해 45일간의 국정조사를 실시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국정원의 미래는 수술대 위에 오르게 됐다. 그러나 최근 남북관계를 고려할 때 국가안보와 방첩활동을 담당하는 정보기관의 위상을 깎아내리고 심지어 조직의 폐지까지 주장하는 것은 과도한 처사라 생각된다. 국정원에 집중되는 비난의 시선과 온갖 의혹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정보기관은 필수적인 존재다. 북한이 다양한 도발 위협을 가하고 남남갈등을 조장하려는 현실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가령 야권 일각에서 제기되는 주장처럼 국정원 조직을 해체할 경우 6·25 사이버공격 같은 북한의 은밀한 도발을 어떻게 감지하고 대응할 것인가. 실제로 국정원은 최근의 혼란상과 비난에 대한 대응책에 고심하다 지난 6·25 사이버 공격을 사전에 감지하지도 못하는 등 본연의 업무에 소홀한 모습을 보인 것 같다. 야권에서는 최근 국정원장의 탄핵과 조직 해체까지 거론하며 정보기관의 부도덕성을 연일 질타하고 있다. 심지어 야권에서는 장외투쟁까지 벌이며 국정원 개혁을 위한 여론몰이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구국전선’이 대선 무효 및 정권 퇴진을 부추기는 촛불시위를 선동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 야권의 국정원 단죄 의지가 북한의 남남갈등 조성 전략에 이용당하여 퇴색되거나 자칫 변질될 우려가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향후 전개될 국정조사에서는 국정원의 정치 개입 의혹과 관련하여 사실관계를 토대로 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재발방지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국정원 개혁의 방향은 정보기관의 전문성을 최대한 살리되 조직의 정치 개입이나 정치 사찰은 엄격히 규제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안들을 도출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국정원의 전문성이란 대북정보 수집 외에도 종북세력 및 간첩 활동을 차단하고 국가안보를 위한 파수꾼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을 말한다. 이 같은 전문성을 넘어 국정원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남용하며 민주주의에 역행할 소지는 확실히 규제돼야 한다. 그러나 국정조사 정국이 정보기관에 대한 민주적 통제라는 이름하에 국정원을 무력화시키려는 시도로 변질돼서는 안 된다. 북한까지 ‘국정원 죽이기’에 나선 마당에 정치권에서마저 조직의 폐지 등 극단적 처방을 논의한다면 조직 구성원들의 사기 저하와 업무 위축 등 국익을 저해하는 또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자유와 민주, 인권이라는 지상가치도 따지고 보면 국가안보가 충만히 보장될 때 추구될 수 있는 가치들이다. 국가의 안위가 흔들린다면 그런 가치들도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번 국정조사를 통해 조직 운영상에 문제점이 드러났다면 정치권은 그것을 시정하는 노력을 통해 국정원을 한 차원 성숙된 정보조직으로 거듭나게 해야 한다. 국정원이 국민의 신뢰를 받는 진정한 정보조직의 위상을 갖추도록 관련 법안을 정비하고 정보기관으로서의 특수성과 기능을 제도적으로 정비할 때, 국정원은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 [정전협정 60년] 현재진행형 비극 (상)민간인 학살 경산코발트광산 르포

    [정전협정 60년] 현재진행형 비극 (상)민간인 학살 경산코발트광산 르포

    장맛비가 퍼붓던 지난 4일, 경북 경산시 평산동의 폐(廢)코발트광산. 일제가 군사용 코발트를 확보하려고 1930년대 채광을 시작해 1942년 폐광된 동굴 입구는 냉동 창고 문이라도 열어 놓은 듯 한기를 쏟아냈다. 안전모를 쓴 채 몸을 잔뜩 웅크리고 들어선 갱도 바닥에는 광산 내부에서 흘러나온 물이 고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물이 첨벙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고 침침한 전구 불빛에 언뜻언뜻 드러나는 붉은색의 갱도 옆 벽면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꼭 온도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100여m를 더 들어가자 수직으로 뚫린 또 하나의 굴과 연결됐다. 동행한 경산코발트광산유족회 박의원 대표가 말문을 열었다. “수직 동굴 저 위쪽에서 6·25전쟁 당시 군인과 경찰들이 사람들을 줄줄이 묶은 채 총으로 쏴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수직 동굴 높이가 50m 정도인데 시체로 가득 차 더는 못 떨어뜨리게 되니까 나중에는 골짜기 이곳저곳에 시체들을 묻었다고 해요. 동굴에서 기관총 탄피나 수류탄 흔적도 발견됐어요. 산 채로 떨어진 사람들을 확실하게 처리했던 모양이에요.” 1950년 7~8월, 이곳에서 민간인 3500명이 군경에 의해 집단 사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희생자들은 경산, 청도 등지의 국민보도연맹원 1000여명, 대구형무소 수감자 2500여명 등이다. 앞서 1949년 이승만 정부는 좌익에 전향 기회를 주겠다는 명분으로 보도연맹을 만들었다. 1년 만에 보도연맹원 숫자는 30만명을 웃돌았다. 지역 할당제가 떨어지자 빨치산의 짐을 날라 주고 밥을 해 주고 심부름을 해 줬던 이들까지 보도연맹원으로 엮어 넣은 탓이다. 하지만 전쟁이 터지자 이승만 정부는 보도연맹원이 인민군과 동조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해 동시다발적으로 집단 학살에 나섰다. 1950년 여름, 남한 전역 수십여 곳에서 벌어진 학살 중 대전 산내 골령골과 더불어 가장 희생자가 많은 곳이 바로 경산이다. 1990년대부터 경산코발트광산 사건 규명에 천착해 온 최승호 경산신문 대표는 “정말 논매고 밭매다 붙들려 간 억울한 분들도 있겠지만 희생자 대부분이 보도연맹원인 것은 맞다”면서도 “하지만 살아남으려고 어쩔 수 없이 단순 부역을 했던 분들이다. 전쟁 중이라고 해도 법적 근거 없이 죽임을 당할 죄는 결코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1960년 4·19혁명 이후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국회는 진상 규명에 착수했다. 하지만 이듬해 5·16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없던 일’이 됐다. 유족들은 군사정권의 서슬에 ‘빨갱이’로 몰릴까 봐 숨을 죽였다. 2000년대 들어 유족회와 시민단체 등이 유해 발굴에 나섰지만 정부와 경산시는 뒷짐만 졌다. 2005년 비로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이 제정되면서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발굴에 나서 420여구를 수습했다. 이전까지 유족회가 발굴한 유골이 80여구다. 그동안 이곳에는 골프장과 노인요양병원이 들어섰다. 하지만 수십~수백m 떨어진 폐광과 골짜기에는 여전히 3000여구의 유골이 방치된 상황이다. 2010년 특별법 종료와 함께 발굴은 중단됐고, 그나마 유족들이 발굴한 80여구마저 임시 컨테이너에서 조금씩 부식되고 있다. 2010년 진실화해위 보고서는 ‘5·16 이후 유족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정신적, 경제적 고통을 받으며 현재까지 사회적 약자로 살아오고 있으며, 특히 연좌제로 인한 사회적 차별로 정상적인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밝혔다. 유가족 300여명은 지난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해 1심에서 121억여원의 배상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국가의 항소로 2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남편을 잃은 10여명의 부인들을 비롯한 유족들은 정전 60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진행형’의 비극을 겪고 있다. 나정태 유족회 부회장은 “3000여구의 유골도 수습해야겠지만 시급한 건 컨테이너에 보관된 탓에 빠르게 훼손되고 있는 80여구를 처리하는 문제”라면서 “충북대에 보관 중인 420여구도 내년까진 옮겨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국군 유해 발굴 사업처럼 하기를 기대하지는 않지만 우리도 똑같은 국민”이라면서 “유골을 모아 합동 화장을 하고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장소와 작은 기념관 정도는 세울 수 있도록 정부가 나서 주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경산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10년간 1000여구 시신 수습한 남자

    10년간 1000여구 시신 수습한 남자

    매일 전쟁터에서 실려오는 시신을 염(殮)하는 남자가 있다. 60여년 전 6·25 전쟁 때의 일화가 아니다.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는 얘기다. 워싱턴포스트는 4일(현지시간) 지난 10년간 1000여명의 아프간 군인 시신을 염습한 남자의 스토리를 보도했다. 아프간전 최대 격전지인 칸다하르 지역 군병원에서 민간인 신분으로 일하는 아프간 남성 누룰라 누리(33)의 업무는 탈레반 반군의 공격에 전사한 아프간 군인들을 염하는 것이다. 전쟁터에서 병원으로 실려온 전사자의 몸에 묻은 피와 때를 깨끗이 닦아낸 뒤 이슬람 식으로 향수를 뿌리고 하얀 천으로 덮는 일이다. 이처럼 곱게 ‘단장’된 시신은 유족에게 보내진 뒤 매장된다. 누리의 ‘집무실’은 병원 한 켠의 컨테이너 안이다. 거기에는 침대와 선풍기, 시신을 씻겨낼 고무 호스가 비치돼 있다. 팔다리가 잘려나가거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시신을 보고 만지는 일은 누리에게 고통 그 자체다. 다소 멀쩡해 보이는 시신을 침대에 눕힌 순간 하얀 시트가 순식간에 붉게 물드는 것을 보고 놀란 적도 있다. 그래서 그는 신경안정제 없이는 잠을 청하지 못할 정도다. 누리는 “전사자의 시신을 염하는 일은 정신적·육체적으로 사람을 지치게 한다”면서 “시신 3~4구를 씻기고 나면 탈진해 드러눕고 만다”고 털어놨다. 그는 가족에게도 자신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 아직 밝히지 못했다. 그는 탈레반 정권 집권기 때 19세의 나이로 병원에서 청소일을 시작했다. 그러다 전쟁이 터져 탈레반 정권이 쫓겨난 뒤 전사자가 밀려들어오면서 현재의 일을 맡게 됐다. 최근 미군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군의 철군이 진행되면서 그 공백을 메우고 있는 아프간 군의 전사자가 급증하고 있다. 매달 400명의 아프간 군인과 경찰이 사망하고 있다. 그만큼 누리의 일도 많아지고 있다. 한밤 중에 자다가 불려나가는 일도 다반사다. 누리는 “나보다 시신을 많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라면서 “군대가 싸우면 사람은 반드시 죽게 돼 있다”며 직업에서 체득한 ‘인생철학’을 밝혔다.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 “고물·참전수당 모아 900만원…더 힘든 이웃들에게”

    “고물·참전수당 모아 900만원…더 힘든 이웃들에게”

    “밥만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으면 가진 것을 모두 사회에 베풀고 떠나려고 해. 일제시대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제대로 배우지 못한 한이 남지만 그래도 이북에 비하면 훨씬 행복한 삶이었지.” 폐지와 고철을 수집하며 생계를 이어오던 6·25 참전 유공자가 그동안 모은 전 재산 900여만원을 사후(死後)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주인공은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허름한 옥탑방에서 홀로 사는 최귀옥(81)옹. 최옹은 5일 옥탑방에서 인간성회복운동추진협의회 관계자와 만나 이를 상의했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당시 인천에서 일용직 건설노무자로 일하던 최옹은 군대에서 밥이라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이듬해 입대했다. 2군단 소속으로 화천 전투에서 북한군과 싸웠다는 최옹은 당시 군대 야학에서 글을 깨우쳤고, 제대 후에는 여러 회사를 전전하며 버스 운전기사로 일했다. 하지만 개인사는 순탄치 못했다. 가정불화로 부인, 자식들과 헤어지고 살던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온 최옹은 이후 가족과 연락이 끊긴 채 16년간 폐지와 고철을 수집하며 생활하고 있다. 최옹이 폐지를 모아 얻는 수익은 한 달에 2만원 정도. 그나마 요즘엔 몸이 불편해 한 달 이상 일을 못 하고 있다. 6·25 참전 수당 15만원과 구청에서 나오는 보조금을 합해도 월 30만원이 채 안 되는 빠듯한 살림이다. 최옹은 이 가운데 매월 2만원을 6·25 참전유공자회에 회비로 납부하고, 폐지를 통해 얻은 수입은 쓰지 않고 따로 모아 뒀다. 최옹은 “나 자신도 어릴 때 아버지 없이 자라서인지 수십년 전부터 보육원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면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이들을 위해 쓰고 싶다”고 밝혔다. 최옹의 나눔은 6·25 참전용사들 사이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최옹은 정월이 되면 구청에서 지급한 쌀의 절반을 6·25 참전유공자회를 통해 얼굴도 모르는 다른 참전용사에게 보낸다. 3년째 자신의 몫을 나눠 온 최옹은 “난 밥은 먹고 살지만 형편이 더 안 좋은 참전 용사도 많다”면서 “6·25 참전 수당 15만원은 생계를 잇기에 턱없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北에 나라 뺏기지 않으려 죽기 살기로 싸웠단다”

    “北에 나라 뺏기지 않으려 죽기 살기로 싸웠단다”

    “안개 속에서 포탄이 떨어지는데 피란민들은 보따리를 메고 갈팡질팡하고 어린 아이들은 울부짖고 난리도 아니었지. 우리는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열악한 총을 들고 지리산에 숨어 있는 북한군과 싸우느라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어.” 6·25 참전용사인 이덕회(82)옹은 3일 서울 강북구 번동 자택에서 손자·손녀뻘 되는 인근 화계중학교 2학년 5반 학생 12명에게 전쟁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진지한 표정으로 이를 경청하던 학생들은 때때로 “아~” 하고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화계중학생 754명에게 이날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사단법인 인간성회복운동추진협의회가 주관한 ‘6·25 참전 영웅과 함께하는 세대 공감 친구데이’ 행사를 통해 평소 보기 힘들었던 고령의 6·25 참전용사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10여명씩 한 조를 이뤄 각각 서울 소재 참전용사 69명의 자택으로 찾아가 선물을 전달하고 청소와 설거지, 안마 등의 봉사 활동을 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지급받는 참전수당 월 19만원으로 겨우 살아간다는 이옹은 “대학생들도 6·25의 의미를 잘 모르는 요즘 중학생들이 이렇게 찾아와줘 고맙다”면서 “그때 나라를 빼앗겼다면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을지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김다솔(14)군은 “집 청소를 깨끗이 해드리려고 했는데 저희가 온다고 할아버지께서 청소를 다 해 놓으셔서 죄송스럽다”면서 “어르신들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자주 찾아뵙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같은 반 황건희(14)군은 “평소 집에서 어른들께 듣지 못했던 6·25 전쟁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으니 신기하다”면서 “저희도 커서 군대에 가겠지만 할아버지의 말씀을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고진광 인추협 대표는 “나라의 소중함과 어르신에 대한 고마움을 새로 깨닫게 돼 청소년들에게 의미 있는 인성교육이 될 것”이라고 행사의 취지를 설명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포천 저물녘 민낯의 산정호수… 은밀한 속삭임 구라이협곡

    포천 저물녘 민낯의 산정호수… 은밀한 속삭임 구라이협곡

    경기도 포천이라면 응당 현무암들이 이룬 풍경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겁니다. 북한땅에서 분출된 용암이 흘러내리며 조탁한 풍경들은 강원도 철원을 휘휘 돌아 경기도 연천과 포천 등에까지 이어집니다. 용암이 만든 풍경들만 모아 포천에선 따로 ‘한탄 8경’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 제7경이 구라이골입니다. 1㎞ 남짓한 현무암 협곡인데, 접근이 어려워 여태 베일에 가려져 있었지요. 어렵사리 구라이골을 돌아봤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협곡이지만 이채로운 볼거리들이 가득했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곳이라 한결 신비감이 더했지요. 이에 견줘 산정호수는 듣고도 안 본 곳에 속할 겁니다. 고백하자면 ‘쌍팔년도’에 명자깨나 날렸던 낡은 여행지로 여겨 엿볼 생각조차 안 했던 게 사실입니다. 한데 직접 호수를 보고 나니 이런 선입견이 싹 사라졌습니다. 명성산 등의 우람한 암릉들에 둘러싸인 호수의 자태는 실로 눈부셨습니다. 포천의 자랑 ‘영평 8경’이나 ‘한탄 8경’ 중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신세지만, 이만한 자태라면 국내 어느 호수에도 뒤지지 않겠습니다. 글 사진 포천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angler@seoul.co.kr 포천시에서 자랑스레 내세우는 게 있다. 포천 관내를 흐르는 한탄강이 단일 지역 단일 하천으로는 국내 최다의 국가문화재 보유지역이라는 것이다. 국내 유일의 현무암 협곡 하천인 한탄강은 전체 길이가 136㎞에 이른다. 그 가운데 포천 지역을 흐르는 강줄기는 40㎞ 정도다. 그 안에 천연기념물 3곳, 명승 2곳 등 국가문화재가 다섯 곳이나 포함돼 있다. 포천시는 여기에 교동 가마소와 샘소, 구라이골 등의 명소를 더해 ‘한탄 8경’으로 지정했다. 그런데 한탄 8경에 포함돼 있으면서도 ‘문화재 축’에 끼지 못한 명소들에 대한 대접이 영 말이 아니다. 특히 제7경인 구라이골이 그렇다. 편의시설은커녕 이정표 하나 없다. 동네 주민들조차 찾아가기 힘들다며 손사래를 칠 정도다. 지난달 27일에도 관광객 몇 명이 구라이골을 찾았다가 진입로가 없어 주변만 빙빙 돌다 되돌아갔다. 사실 포천의 대표적 관광 아이콘인 비둘기낭<서울신문 2010년 4월 8일자 16면>에 대한 대접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지난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면서 ‘삐까뻔쩍’하게 바뀌긴 했으나, 비둘기낭 취재 당시만 해도 폭포까지 오르내리는 계단이 부실해 꽤 애를 먹었다. 사람들이 많이 찾을 때 부랴부랴 편의시설을 갖춰 놓기보다, 먼저 갖춰 놓고 사람을 오라 하는 게 순서 아닐까. 구라이골은 매우 독특한 세계다. 창수면을 흐르는 운산천이 한탄강과 몸을 섞는 끝자락에 형성된 현무암 협곡이다. 찾아가는 과정부터 ‘이색적’이다. 어른 키보다 웃자란 개망초를 무수히 헤치며 가야 한다. 그러다 개골창 같은 냇가 쪽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면 협곡 초입이 있다. 도무지 협곡이 있을 거라고 생각되지 않는 곳에 기이한 세계가 펼쳐져 있다는 점에서 비둘기낭과 빼닮았다. 구라이골은 둥근 공동(空洞)의 형태다. 평지 아래로 용암이 흐르며 파놓은 흔적이다. 협곡의 위는 나무들이 울울창창하다. 그러니 평지에서 보면 아래쪽에 협곡이 있다는 걸 눈치채기 어렵다. 인근 주민들은 햇볕 한 줌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과장이 보태지긴 했지만, 푹 파여 볕 보기 힘든 건 사실이다. 실제 6·25전쟁 때는 주민들이 협곡 곳곳에 생성된 굴에서 피란 생활을 하기도 했단다. 협곡에 발을 딛고 서면 탄성부터 터져 나온다. 작은 냇가에서 느닷없이 협곡으로 ‘환골탈태’하니 말이다. 협곡 안엔 딱 두 가지 색만 있다. 현무암 절리들이 내뿜는 섬뜩한 검은빛과 숲의 나무들이 선사하는 싱싱한 푸른빛이다. 둘은 어느 한쪽 치우침 없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공상과학영화를 많이 봐선가. 검은 굴에서 시조새가 뛰쳐 나오고, 1m 넘는 지네가 암벽을 타고 걸어다닐 것만 같다. 이런 풍경이 1㎞ 남짓 이어진다. 주민들은 협곡을 구라이냇가라 부른다. 물길을 따라 자박자박 걷다 보면 수직폭포나 새털 형태의 주상절리, 바위굴 등과 만난다. 협곡 안엔 큰 가마소와 작은 가마소 등 두 개의 폭포가 형성돼 있다. 주상절리를 날개처럼 두른 형태가 영락없는 비둘기낭의 축소판이다. 협곡의 끝자락, 그러니까 한탄강과 인접한 작은 가마소는 다른 루트로 진입해야 볼 수 있다. 역시 진입로가 수풀 속에 감춰져 있어 주민들의 도움 없이는 찾기 힘들다. 물을 담고 있다는 이름에서 보듯 포천(抱川)은 물이 많은 곳이다. 현무암 협곡들을 제외하고도 도시 안팎에 빼어난 호수와 계곡들이 늘어서 있다. 그중 첫손 꼽히는 곳이 산정호수다. 1980년대 아베크족들의 성지였던 곳. 그 탓에 낡은 여행지로 평가절하되기 일쑤지만, 직접 호수를 보고 나면 열에 아홉은 생각이 바뀔 게 틀림없다. 호수는 명성산(923m)과 금학산(947m) 사이에 안겨 있다. 명성산의 책바위 암릉, 망봉산의 기암절벽 등과 어우러진 풍경이 장쾌하다. 이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 망봉산 뒤편의 무명고지(380m)다. 호수 바로 앞의 망봉산에서 굽어보는 전망보다 외려 낫다는 이들이 많다. 등산로가 조성돼 있지 않지만, 찾아가기는 어렵지 않다. 산정호수 주차장 초입의 ‘평강식물원’ 이정표 선 곳에서 산 쪽으로 난 길을 따라 400여m 곧장 가면 된다. 산정호수 쪽으로 돌출된 암반지대여서 단박에 알아볼 수 있다. 호수는 낮보다 이른 아침이나 저물녘에 돌아보는 게 낫다. 새벽녘엔 하얀 물안개가 호수를 감싸고, 저녁 무렵엔 교교한 달빛이 수면 위로 쏟아져 내린다. 호수 주변에 목재 데크가 조성돼 있어 자박자박 걷기 좋다. 명성산 비선폭포와 등룡폭포 등의 경관도 볼 만하다. 등룡폭포까지 1시간 30분 정도면 다녀올 수 있다. ■잘 곳 : ‘한화리조트 산정호수 안시’가 최근 리모델링을 끝내고 재개관했다. 프랑스의 휴양도시 ‘안시’에서 이름을 따왔다. 리조트는 총 213개의 객실을 갖췄다. 외형상 가장 도드라진 변화는 워크숍과 MT 등 단체 행사에 적합한 공간을 대폭 늘렸다는 것. 기존의 수영장을 없애고 그 자리를 다양한 부대시설로 채웠다. 특히 다목적홀의 경우 농구와 각종 운동회 등을 개최할 수 있을 정도로 너른 실내 공간을 확보했다. 온천수를 이용한 사우나는 반드시 들르는 게 좋겠다. 시설은 소박하지만 수질은 ‘럭셔리’하다. www.ehanwharesort.co.kr, 534-5500(이하 지역번호 031). ■맛집 : 관인면 냉정리 샘물매운탕은 메기매운탕만 판다. 재료가 떨어지면 문을 닫기 때문에 저녁에는 맛보기 힘들다. 533-6880. 한화리조트 야외바비큐장에서 포천의 명물 이동갈비를 직접 구워 판다. 주말엔 사람이 많아 예약하는 게 좋다. 명성산 산행을 위해 간단한 음식을 준비한다면 산정호수 주차장 끝자락의 뉴욕핫도그(589-3328)를 권한다. ‘요리’ 수준의 맛도 일품이고, 명성산 등 산행 정보를 가게 주인장이 꿰고 있어 귀동냥하기 좋다.
  • 잇단 군기문란에… ‘연예병사’ 없어지나

    국회 국방위원회 운영개선소위는 2일 최근 이른바 ‘연예병사’들의 잇따른 군기문란 행위에 대해 국방부로부터 현안 보고를 받고 제도 폐지를 포함한 개선책을 마련키로 했다. 소위 위원장인 김진표 민주당 의원은 회의 후 브리핑에서 “연예병사에 대한 인솔 간부의 지휘통제 및 부대 내 숙박 원칙 등 규정이 무시되고 탈법·불법 행위가 이뤄졌다”면서 “제도를 폐지하는 것을 포함해 원점에서 보완책을 검토키로 했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이어 “연예병사 개인뿐 아니라 지휘·감독 책임이 있는 관계자들의 직무유기도 철저히 조사해 일벌백계하도록 촉구했다”면서 “앞으로 국방부 특별감사 결과가 나오면 대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방부는 지난달 21일 6명의 연예병사가 춘천에서 6·25전쟁 63주년을 기념하는 군 행사를 마친 뒤 술을 마시고 개인 휴대전화를 사용했다는 SBS 시사프로그램 ‘현장21’의 보도와 관련, 조사를 진행 중이다. 이 가운데 가수 ‘세븐’(최동욱 이병)과 ‘상추’(이상철 일병) 등은 유흥업소 밀집지역의 안마시술소를 출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방부는 5일까지 특별감사를 벌여 관련자를 처벌하고 군 홍보지원 제도 개선 방안을 마련키로 했다. 한편 SBS의 ‘현장21’은 2일 방송된 ‘화려한 외출… 불편한 진실’ 편에서 지난달 18일 대구와 5월 광명시에서 열린 ‘위문열차’ 공연 전후에도 연예병사 대부분이 휴대전화를 자유롭게 사용하고, 사복 차림으로 새벽까지 음주를 하는 등 규정위반 사례가 있었다고 밝혔다. 방송은 또한 전 국방홍보원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연예병사들이 미용실과 병원치료 등을 목적으로 자유롭게 외출을 했다고 보도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씨줄날줄] 한국의 부자 세계의 부자/손성진 수석논설위원

    경주 최부잣집은 조선시대 영남에서 대표적인 부자 가문이었다. 12대 300여년간 만석꾼으로 살았다. 독립운동 자금을 대기도 한 최부잣집은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가문으로도 유명하다. 집 안에는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시집 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등의 ‘육훈’(六訓)이 적혀 있다. 6·25 이후 기업가들은 거부의 반열에 올랐다. 당시에는 종합소득 신고액으로 부자 순위를 알 수 있었다. 1970년에는 한진 조중훈씨가 1위, 경남기업 정원성씨가 2위, 현대건설 정주영씨가 3위였다. 조중훈씨는 베트남 특수를 타고 1968년부터 내리 4년 1위를 차지했다. 1972년에는 서울통상 대표 최준규씨와 같은 회사 조성곤씨가 일약 1위와 2위로 뛰어올랐는데, 서울통상은 가발제조업체였다. 1973년에는 부산 동명목재 소유주 강석진씨가 1위에 등극했다. 현재 세계 최고의 부자는 누구일까.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 조사에 따르면 1위는 멕시코의 통신 회사 텔맥스 텔레콤 회장인 카를로스 슬림으로, 재산은 690억 달러에 이른다. 2위는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 창립자 빌 게이츠(560억 달러), 3위는 미국의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 워런 버핏(500억 달러)이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106위, 현대차그룹 정몽구 회장은 161위다. 그렇다면, 역사상 최고의 부자는? 미국 ‘셀러브리티 넷워스’라는 곳에서 ‘인류 역사상 세계 최고부자 25’를 발표했다. 1위에는 14세기 아프리카 말리 왕국의 ‘황금왕’인 ‘만사 무사’가 올랐다. 그의 재산은 현재 가치로 약 4000억 달러나 된다. 20년간 통치하며 800여명의 아내를 거느렸다고 한다. 2위는 로스차일드(3500억 달러), 3위는 록펠러(3400억 달러), 4위는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3100억 달러)로 매겨졌다. 로스차일드는 독일계 유대 금융자본가다. 로스차일드의 재산은 드러나지 않은 게 많다고 한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와 체이스맨해튼은행이 이 가문에서 만든 은행이다. 미국의 석유재벌 록펠러(1839~1937)는 생시에 미국에서 생산되는 석유의 95%를 손에 쥔 독점으로 엄청난 돈을 모았다. 얼마 전 재벌닷컴이 매긴 올해 국내 개인재산 순위는 1위 이건희 회장을 필두로 정몽구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이 뒤를 이었다. 부자들의 순위와 재산변동을 보면 두 가지가 느껴진다. 경제는 불황 속에서 헤매는데 억만장자는 매년 늘어나고 그들의 재산도 증가한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2세, 3세들의 급부상이다. 양극화와 부의 대물림이 읽히는 것이다. 손성진 수석논설위원 sonsj@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北초소까지 1.2㎞… “우리도 北도 항상 상대 주시”

    [정전협정 60년] 北초소까지 1.2㎞… “우리도 北도 항상 상대 주시”

    임진강 하구부터 강원도 고성까지 240여㎞를 가로지르는 비무장지대(DMZ)는 정전 협정의 산물이다. 협정은 무력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군사분계선(MDL)으로부터 양측 모두 2㎞씩 뒤로 물러나 너비 4㎞의 완충 지대를 설치하도록 했다. 하지만 정전 체제 60년이 이어지면서 DMZ는 ‘화약고’로 변했다. 북한군은 1960년대부터 DMZ 내부로 슬금슬금 초소를 옮겼다. 뒤질세라 우리 군도 일부 초소를 MDL 쪽으로 북상시켰다. 강원 철원군 ‘철의 삼각지대’에 자리 잡은 천왕봉 OP(관측소)도 그중 하나다. 6사단 청성부대가 주둔하는 이곳은 당초 남방한계선 이남에 있었지만 1975년 제2땅굴이 발견되면서 군사정전위원회의 승인을 얻어 1.4㎞ 북쪽으로 초소를 옮겼다. 천왕봉 OP에서 MDL까지는 불과 600m. 가장 가까운 북한군 GP(감시초소)는 1.2㎞다. 말 그대로 최전방이다. 천왕봉 OP 중대장 김방한(30·학군 44기) 대위는 “6·25전쟁이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는 걸 잠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입을 뗐다. 그는 “MDL에서 불과 300m 떨어진 지점까지도 수색, 매복을 들어가는데 그곳에선 육안으로도 적의 활동을 볼 수 있다. 물론 저들도 늘 우릴 지켜보고 있다”면서 “우리만큼 저쪽도 똑같이 준비하기 때문에 긴장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 대위는 북한의 무력시위가 고조되던 지난 3월 부임했다. 그는 “민간에서는 북한의 특이 동향이 발생할 때 위협을 느끼겠지만 이곳은 늘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상태이기 때문에 달라질 건 없다”고 말했다. 지난달 초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인근 오성산 초소에 출몰했을 때 북한군의 움직임이 분주해지면서 긴장이 고조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는 어떤 도발에도 대응할 수 있도록 최상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가끔 군기 사고에 대해 민간인들이 ‘군이 썩었다’는 식으로 매도하면 장병들은 사기가 꺾일 수밖에 없다”면서 “북한이 언제든 다시 위협해 올 수 있는 만큼 후방에서 진심 어린 응원을 해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철원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朴대통령 訪中] 해결 가능한 역사 걸림돌부터 제거… 류옌둥 “한·중 한단계 더 발전”

    [朴대통령 訪中] 해결 가능한 역사 걸림돌부터 제거… 류옌둥 “한·중 한단계 더 발전”

    박근혜 대통령은 중국 국빈 방문 중에 중국과의 역사 공조에도 역점을 뒀다. 6·25전쟁 당시 사망한 중국군 유해 송환 및 중국 내 항일 유적지 보존 문제 해결에 나선 것이다. 그동안 한·중 간에 체제가 다르다는 이유로 난항을 겪었던 역사 문제 중 해결 가능한 것부터 걸림돌을 제거하며 양국 간 신뢰를 쌓아 가자는 의미다. 박 대통령은 경기 파주시 공동묘지에 안장돼 있는 중국군 유해 360구를 유족들에게 송환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며 역사 공조의 손을 내밀었다. 지난 29일 베이징의 칭화대(淸華大) 연설 직전 칭화대 출신 류옌둥(劉延東) 부총리와 환담하는 자리에서다. 박 대통령은 “이번 방중의 슬로건을 ‘심신지려’(心信之旅)라고 정했는데 그만큼 취지에 맞게 신뢰를 갖고 두 나라 간에 우의를 다진 것에 대해 굉장히 감명받았다. 그런데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께 말씀드리려 했는데 빠진 게 좀 있다”며 중국군 유해 송환 입장을 전격적으로 전했다. 이에 류 부총리는 “대통령께 너무 감사하다”면서 “한국 정부의 특별한 배려와 대통령의 우의의 감정이 그대로 전달됐다”고 감사를 표했다. 류 부총리는 이어 “중국에는 ‘비가 떨어지는 것처럼 멀리 가더라도 반드시 조국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속담이 있다”며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시 주석께 보고드리겠다. 한·중 관계가 한 단계 더 발전하는 뜻깊은 의미를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현재 파주의 공동묘지 내 적군 묘에는 6·25전쟁 당시 사망한 중국군과 북한군 묘가 있다. 우리 정부는 망자들에 대한 예우로 묘를 관리해 왔으며, 중국 측은 그동안 일부 중국군의 유해를 북한을 거쳐 가져갔다. 1997년 이후 북한이 인수를 거부해 송환이 중단되면서 현재 360구가 남아 있다. 청와대 김행 대변인은 “중국인이나 한국인이나 모두 동양인이고 유교 문화의 영향을 받아 가족과 조상을 중시하는데 이들의 유해가 계속 이국 땅에 묻혀 있도록 방치하는 건 유족이나 후손에게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유해 송환 배경을 설명했다. 박 대통령은 또 같은 날 산시(陝西)성 성도 시안(西安)에서 자오정융(趙正永) 산시성 당서기와 면담 및 만찬을 가진 자리에서 194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이 시안의 창안(長安)구 두취(杜曲)진에 주둔한 바 있고, 우리 정부가 2009년부터 그곳에 광복군 유적지 표지석 설치 사업을 추진한다고 소개하면서 사업 허가를 요청해 긍정적 반응을 이끌어냈다. 이에 앞서 박 대통령은 지난 28일 시 주석과의 특별 오찬 자리에서는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역의 안중근 의사 의거 현장에 기념 표지석을 설치하는 것과 과거사 관련, 중국 정부의 정부기록보존소 기록 열람 협조를 요청했고, 시 주석은 유관기관에 이를 잘 검토하도록 지시하겠다고 화답했다. 베이징·시안 오일만 기자 oilman@seoul.co.kr
  • 김한길 “초당적으로 협력해 NLL 지켜나갈 것”

    김한길 민주당 대표는 29일 “조국과 영토를 수호하다 산화한 용사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초당적으로 협력해 NLL(북방한계선)을 지켜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이날 경기 평택 해군2함대에서 열린 제2연평해전 11주년 추모식에 참석해 제2연평해전 전사자 유가족들을 만나 이같이 밝혔다고 김관영 대변인이 전했다. 그는 “국민의 정부 시절 발생한 제1연평해전은 6·25 이후 발생한 최초의 정규전에서 압도적인 승전을 거둔 기념비적 전투가 됐고, 참여정부까지 굳건한 안보의 바탕 위에 선 평화 속에서 남북화해협력을 이뤄왔다”면서 “민주당 역시 안보 중시 정책으로 평화를 수호해왔다”고 강조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한반도 지형변화(하)

    지난 60년간 전쟁 억제 역할을 해온 정전협정은 북한의 무효화 선언이 아니더라도 이미 한계점에 도달한 상태다. 북한이 정전협정을 지키지 않는 상황이 오히려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정도로 ‘적대 행위의 사실상 정지’라는 본래 의미를 잃고 사문화된 지 오래됐다. 정전협정이라는 안전장치가 전면전을 막고 있는 게 아니라 달라진 국제 역학관계 등 외교 환경과 ‘최악의 무장 충돌만은 피하자’는 남북의 암묵적 합의에 의해 안전이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다. 정전은 휴전보다 좁은 의미로 ‘서로의 합의에 의해 전쟁 당사국들이 일시적으로 전투를 중단한다’는 뜻이다. 휴전은 전쟁 중 얼마 동안 전투를 멈춘다는 의미로 정전보다는 더 나아간 준 평화상태로 볼 수 있다. 정전협정 한글판에는 ‘한반도 정전협정’으로, 영문판에는 ‘휴전협정’(Armistice Agreement)이란 표현을 혼용해 사용하고 있다. 어떤 것이든 전투를 일시 중단할 뿐 전쟁의 종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전협정상 비무장지대는 1000명 이내의 비무장 인원이 들어가 관리하도록 돼 있지만, 한반도 대치 상황이 이어지면서 실제로는 양측의 무장병력과 지뢰, 방벽 등 군사 시설물로 중무장됐다. 군사 인원 및 장비의 반입을 감시하는 중립국감독위 산하 중립국 시찰 소조의 활동은 북한의 소련 무기 반입 논란 끝에 1956년 5월 활동이 중지됐고, 시찰 소조의 활동을 규정한 정전협정 조항도 폐기됐다. 정전 감시의무를 수행하는 군사정전위와 중립국감독위의 기능도 1990년대 들어 공산 측 대표단이 철수하면서 완전히 마비된 상태다. 북한은 1993년 체코, 1995년 폴란드 대표단을 강제 철수시켰는데, 폴란드의 경우 철수를 거부하자 겨울철 막사의 전기와 수도까지 단절했다. 1994년 12월에는 군사정전위 중국 대표단을 철수시켰고, 1996년에는 군사정전위를 대신한다는 명분으로 인민군 판문점대표부를 일방적으로 설치했다. 북한이 군사정전위원회를 거부한 표면상의 이유는 한국군 장성을 군사정전위 수석대표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국군은 휴전협정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수석대표가 될 수 없다는 논리다. 서명 당사자에 한국대표가 빠진 정전협정의 태생적 한계가 결국 협정문을 형식상의 문서로 만들어 버린 셈이다. 정전협정은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대장 등 3명만이 서명했다. 중국군만 제어할 수 있다면 북진통일을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정전협상에 반대하며 한국군 대표를 휴전회담에서 철수시켰다. 전문가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정전협정의 불안정성이 시작됐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국군은 6·25전쟁 당시 교전 당사자일 뿐만 아니라 정전협정의 구속을 받는 집행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유엔군 사령관에게 권한을 맡기고 있다. 이를 빌미로 북한은 정전체제의 평화체제 전환 협상에서 한국을 제외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등 정치·외교적 공세를 펴왔다. 정전협정을 적용하면 한국은 북한이 도발을 해 와도 직접 책임을 따지지 못하고 유엔군 사령관에게 책임 추궁을 의뢰해야 한다. 군사정전위가 나선다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군사정전위가 조사 활동을 마치고 유엔군 사령관에게 조사보고서를 제출하면 유엔군 사령관은 이를 유엔 안보리에 보고하는 절차를 밟는데, 이후의 대응 조치에 대해서는 특별한 규정이 없어 북측의 책임을 추궁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 당시에도 유엔사 특별조사팀이 조사에 들어갔지만 북한은 자신들의 어뢰공격으로 천안함이 침몰했다는 조사 결과를 부인했다. 꼭 평화체제로의 전환이 아니더라도 정전협정은 60년간 달라진 남북 간 상황에 맞는 새로운 체제로의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이와 관련해 북한도 1996년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정전협정을 대신하는 ‘잠정협정’을 제안한 바 있다. 평화협정 체결 시까지 정전 상태를 평화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잠정협정을 체결하자는 것이었지만, 주체를 북·미로 한정한 게 문제다. 정전협정이 그렇듯, 한국이 배제된 협정은 실효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평화체제로의 전환 과정에 제도상이 아닌, 실질적인 안전관리 방안 마련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기고] 천안함 박정훈 병장과 그의 할아버지/강성만 서울북부보훈지청장

    [기고] 천안함 박정훈 병장과 그의 할아버지/강성만 서울북부보훈지청장

    누가 소설을 일컬어 ‘현실을 보다 극적으로 각색한 것’이라 했는가. 박대석의 사연은 소설보다 처절하다. 그의 작은아버지 박동석은 1951년 7월 강원도 고성지구 전투에서 20세의 나이로 전사하여 유해가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아버지 박동방은 6·25전쟁에서 미7사단 31연대 기갑대대 소속으로 경기지구 전투에 참전하여 두 귀의 청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1950년 10월에 명예제대한 후 평생 전상의 후유증을 안고 살다 2005년 돌아가셨다. 그의 어머니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대신해 생때같은 자식들을 위해 평생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갖은 고생을 다 하였다. 혹자는 전쟁 때 고생 안 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한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이것이 끝이 아니다. 3년 전 온 국민을 슬픔에 잠기게 했던 천안함 46용사 중 막내뻘인 고(故) 박정훈 병장의 아버지가 바로 그, 박대석이다. 아들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곤 했던 바다, 그가 해군에 복무할 당시 출동했던 그 백령도 바다에 아들과 함께 천안함이 가라앉았다. 해군에 입대하라고 적극 권유했던 아버지는 아들을 바다에 묻고 내 탓이라며 지금도 자책의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하근찬의 소설 ‘수난이대’에서 만도는 아들 진수를 만났다. 아버지는 한쪽 팔이 없고, 아들은 한쪽 다리가 없지만 그 둘은 함께 살아가며 힘이 되어 줄 것이다. 하지만 박대석에게는 다시 돌아와 ‘아부지!’ 하고 불러줄 아들 정훈이가 이 세상에 없다. 그는 전쟁으로 야기된 혈육의 희생을 감내해야 한다. 천안함 폭침 3주기가 지나고 조국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잔인한 6월’이다. 천안함 46용사의 가족들을 비롯해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의 가족들이 그들의 장한 아들을 만나러 갈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 아들을 잊지 말아 달라고,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해 달라고. 유족들의 슬픔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에서 기인하는 것이 가장 크겠지만, 사랑하는 이들의 희생이 점차 국민들 기억속에서 사라져 버린다는 안타까움도 그 못지않게 유족들을 슬프게 한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호국보훈의 달에는 박대석에게 반가운 소식이 있다. 박정훈 병장의 모교인 대광고등학교에서 ‘천안함 순국 추모비’를 건립해 추모비 제막식을 갖기로 했다. 조국을 수호하다 순국한 박정훈 병장과 천안함 46용사의 희생을 기리고 그들을 기억하고자 함이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희생을 잊지 않고 이들을 추모하는 우리의 보훈의식이 유족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기를 바란다. 영국의 처칠 총리는 “피를 흘려야 할 때 피를 흘리지 않으면 남의 노예가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일제 강점하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피를 흘렸고, 이 땅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6·25전쟁에서 우리의 젊은이들뿐 아니라 유엔 참전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피를 흘렸다. 이들의 피흘림과 숭고한 희생 위에 지금의 번영된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국가유공자의 희생에 감사하고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들의 희생을! 남겨진 자들의 슬픔을!
  • [정전협정 60년] 군사분계선에서 2㎞씩 후퇴 DMZ 설치

    [정전협정 60년] 군사분계선에서 2㎞씩 후퇴 DMZ 설치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유엔군 대표와 북한·중국군 대표가 사인한 정전협정은 6·25 전쟁 중지를 문서로 약속한 것이다. 협정 체결까지 본회담 159회, 분과위원회 회담 179회, 참모장교 회담 188회, 연락장교 회담 238회 등 2년간 총 765회의 회담을 거쳐 역사상 가장 긴 정전 협상으로 꼽힌다. 협정문은 전문 5조 63항, 부록 11조 26항으로 군사분계선 획정과 그로부터 2㎞씩 후퇴해 만든 비무장지대(DMZ) 설치,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독위원회 임무, 전쟁포로 교환 등 군사 부문과 정치회담 소집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정전협정 체결의 후속 조치로 평화체제 논의가 이뤄졌던 1954년 4월 스위스 제네바 정치회담은 87일 만에 성과 없이 끝났다. 한반도는 전쟁도, 평화도 아닌 무력 충돌의 위험이 상존하는 지대가 됐다. 북한은 지난 3월 ‘정전협정 백지화’ 선언 이후 미국과의 대화를 주장하고 있다. 북한은 한국이 정전협정 서명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북·미 직접 대화만을 통한 정전체제 협상을 고수해 왔다. 1991년 한국군 장성이 군사정전위원회 유엔군 측 수석대표가 되자 북한과 중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1994년 4월과 12월 군사정전위에서 철수하는 등 정전협정을 무력화시켰다. 북한의 주장은 국제관례에도 맞지 않다. 정전협정의 서명자와 당사자를 의도적으로 혼동시키는 대남 전술일 뿐이다. 정전협정은 군사 조약으로, 교전 쌍방의 군 수장이 교전자들을 대표해 체결하는 게 관례다. 협정 서명을 유엔군 대표가 했더라도 협정 당사자는 한국과 서명 당시 참전한 16개국이 모두 포함된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김종민 이 생각 저 생각] 비핵화, 남북일제 그리고 고성

    [김종민 이 생각 저 생각] 비핵화, 남북일제 그리고 고성

    평화는 생명이자 돈이다. 엊그제로 6·25전쟁이 난 지 63년, 한달 뒤면 정전이 된 지 60년이 된다. 이 전쟁에서 150만명이 죽고, 360만명이 다쳤으며, 1000만 이산가족이 생겼다. 전비는 2차세계대전 다음으로 큰 6910억 달러 상당이었다고 한다. 정전 60년의 고통과 피해는 전비를 훨씬 능가한다.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망과 금강산 관광 중단, 2010년 3월 천안함 피격과 11월 연평도 피격 사망, 2013년 5월 개성공단 폐쇄 등만 꼽아도 피해는 충격적이다. 남북 대치와 지속되는 분단상황에 따른 기회비용은 셈조차 어렵다. 분단비용은 전비를 훌쩍 뛰어넘는 천문학적 금액이다. 통일은 대박이다. 분단비용을 상쇄하고 큰 편익을 남긴다. 중앙대 신창민 명예교수는 계산했다. 2030년 통일이 된다면 10년간 통일비용은 약 1조 6034억 달러가 들고, 같은 기간 매년 남한 국내총생산(GDP)의 7%에 이르는 투자가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7%는 군비 감축에서 2%, 국제금융기구 차관에서 1%, 국채 발행에서 3%, 세금에서 1%를 각각 충당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GDP 7% 규모의 실물투자 중 약 80%를 남한이 공급하면 남한 GDP는 5.6% 증가한다. 총소득의 1%를 세금으로 내면 실질소득이 11% 증대된다. 3만 달러에서 시작한 1인당 국민소득은 통일 10년 후 불변가격으로 7만 7000달러가 된다고 봤다. 평화나 통일은 거저 오지 않는다. 평화를 바라지만 대부분 무임승차하려 한다. 때가 되면 통일은 오며, 일부에서는 돈 드는 통일은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젊은 세대의 염원은 통일이 아니라 정규직이라고까지 어느 드라마는 그리고 있다. 논리적으로는 생명이자 돈이고 대박이지만 평화와 통일에서의 시장 실패는 심각하다. 큰 편익을 가져오는 평화와 통일이 정상적 모드로 작동되게 하려면 상응하는 비용과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사회적 합의는 필수이다. 평화와 통일을 위해 항상 새로운 모색이 필요하다. 남과 북은 서로 경제력과 군사력을 앞세워 끝없는 대치를 하고 있고, 북의 핵은 평화와 통일로 가는 최대의 걸림돌이다. 최근 본격화되는 국제적 공조는 북의 비핵화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한다. 차제에 핵 없는 북한을 전제로 분단과 통일비용을 최소화하는 도전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크다.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특정지역에 국제도시국가를 설치하고 남북이 공동운영에 나서면 소모적 대치는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남과 북이 함께 쓰는 하나의 제도를 만들어 가는 남북일제(南北一制)의 실험은 항구적 평화와 점진적 통일의 지름길이 된다. 남북일제는 말처럼 쉽지 않고 북한의 참여가 선결요건이다. 핵실험과 개성공단 폐쇄의 무리수를 두면서도 북한은 원산을 세계적 휴양지로 만드는 국가급 개발에 착수했다. 원산공항과 항구의 개방, 마식령 스키장 건설, 원산~금강산 관광증기열차, 외래객 수용태세의 혁신 등을 천명했다. ‘세계가 조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이 세계 속에 있다’고 외치면서 전쟁은 절대 없으니 안심하고 관광객을 보내달라고 중국에 요청하고 있다. 북한이 진정으로 동해안 개방과 국제관광을 원한다면 이웃한 강원도에 손을 내미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평화와 통일로 가는 새로운 전기가 될 수 있다. 비핵화와 함께 금강산을 공유한 세계 유일의 분단 군(郡) 남북 고성이 홍콩 같은 국제자유지대가 되면 좋겠디. 교류가 많았고 신뢰가 깊은 강원도가 중앙의 지원 아래 북 고성을 남북일제에 참여시키는 노력이 관건이며, 이는 평화의 시장 실패를 만회하는 시금석이기도 하다. 북극이 녹으면서 러시아의 남진, 중국의 동진, 일본의 서진, 한국의 북진이 동해에서 전개되고 있다. 세계적 명승인 원산~고성, 금강산~속초, 설악산~강릉의 동해안은 북방경제의 교두보이자 최고의 관광자원이 된다. 통합 고성에서 남북의 협치는 통일대박의 첫걸음이다. 고성 남북일제는 평화와 통일의 새로운 아고라이자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될 수 있다.
  • [정전협정 60년] 6·25전쟁 적국이던 중국이 우방으로…한·미·중·일 ‘다자협력’ 틀로 北核 대응

    1953년 7월 27일 밤 10시. 정전협정이 서명된 지 꼭 12시간 만인 그때 한반도의 전 지역에서 총성이 멈췄다. 그로부터 60년이 흘렀지만 동북아시아 안보 지형은 불확실하고 복잡하다. 북한이 군사적 비대칭성을 타개하기 위해 핵과 탄도미사일 무장을 가속화하고 있고, 역내 민족주의와 영토 마찰로 인한 갈등은 지속되고 있다. 냉전 체제는 붕괴됐지만 한·미·일 동맹 구도가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중국이 신형 대국으로 부상하면서 북핵은 동북아 안보를 교란하는 최대 변수가 됐다. 한반도 안보 지형의 주축은 정전체제와 함께 진화되어 온 한·미 동맹이다. 1953년 10월 1일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모태로 한 양국 동맹은 상호 보완적인 동반자 단계를 지나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자리 잡았다.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는 한·중 관계다. 1992년 수교 이후 지속적으로 발전하던 양국 관계는 2008년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로 격상되면서 6·25전쟁 적국에서 우방국으로 진전됐다. 무엇보다 중국은 동북아 안정의 핵심 지렛대로 기능하고 있다. 중국은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이 동북아 안정을 뒤흔들며 자국에도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보기 시작했다. 북·중 관계가 혈맹에서 정상적인 일반 국가관계로 변하고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한·미 양국과 중국의 한반도 이해관계가 충돌할 여지도 여전히 큰 게 현실이다. 중국은 북한을 미국과의 대립·경쟁 속에서 전략적 완충지대로 보는 시각이 주류이고, 한반도 통일에 있어서도 여전히 ‘방어적’이라는 인식이 적지 않다. 결국 당사자인 우리가 미·중 관계를 협력과 선의의 경쟁으로 유도하며, 동북아 안보를 꿰뚫어 보는 외교적 역량을 갖춰야 할 시점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동북아 평화·협력구상’ 등 역내 다자 안보협력 구상이 한반도 평화 체제의 한 동력이자, 새로운 평화 모델로 부상하고 있는 것도 한국 주도의 안보 지형을 만들어 가기 위한 일환이다. 신성호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정전 60년의 큰 흐름을 보면 남한이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북한에 대한 우위를 점유하게 됐고, 1990년대 이후 남북 간 체제 경쟁은 사실상 끝났다”며 “남한이 한반도 문제를 주도하는 적극적 자세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신 교수는 “북한이 정전체제의 평화체제 전환을 주장하면서 남한에서는 그런 담론이 종북 오해를 받고 있지만 이제는 우리가 주도적으로 평화체제를 논의할 때가 됐다”며 “독일 통일 과정을 봐도 서독이 동방정책을 통해 공산권과의 화해 협력을 추진한 게 역설적으로 동독 체제가 무너지는 출발점이 됐다”고 말했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사설] 전방위 해킹사태… 선제적 대응책 긴요하다

    청와대 홈페이지가 어제 또다시 해킹을 당했다. 국무조정실 등 일부 부처와 언론사, 새누리당 8개 시도당의 홈피에서도 해킹 또는 접속 지연 등 해킹 의심사례가 발생했다. 다행히 피해가 크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최근 들어 청와대만 해도 2011년 3월에 이어 두번째 해킹을 당했다. 아직 공격의 주체가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잇단 사이버 공격으로 인해 국민들은 불안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북한을 비롯한 특정 세력의 사이버 공격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09년 디도스(DDoS·분산 서비스 거부) 공격에 이어 2011~2012년, 지난 3월 농협·언론사의 전산망 마비사태는 엄청난 사회적 혼란과 피해를 낳았다. 이처럼 최근의 사이버 공격 대상은 정부기관은 물론 금융기관 등으로 전방위적이며 지속화 하는 양상으로 바뀌고 있다. 오죽하면 미국·중국 등 국가들도 사이버 공격 대응이 곧 국가 안보를 지키는 것이란 인식 아래 예산을 집중 투입하겠는가. 북한과 대치 중인 우리로서는 하시라도 사이버 경계 태세를 늦춰서는 안 되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하지만 이번 청와대 홈피 해킹 사태를 보면, 불과 두 달 전 정부가 발표한 사이버 공격 종합 대책이 무색할 지경이다. 정부는 청와대 홈피가 해킹을 당한 뒤 피해 확산을 막는다며 보안 강화를 당부했지만, 사전 홍보 등 기본적인 매뉴얼이 가동됐는지 의심스럽기조차 하다. 이번 해킹은 국제해커집단인 어나니머스가 6·25에 맞춰 북한 사이트에 대한 디도스 공격을 하겠다고 밝힌 터여서 관련 기관은 만반의 대비책을 세웠어야만 했다. 또한 어나니머스가 청와대 홈피 공격은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밝혔지만, 해킹의 주체가 이들이든 북한이든 허술한 대비가 문제이긴 매한가지다. 정부기관을 대상으로 한 사이버 공격은 주요 정보가 유출될 우려가 크기에 사전 대비가 철저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대규모 해킹 사태가 발생할 때마다 철저한 선제 대응만이 차후의 공격을 막고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주문했다. 사이버 공격을 원천적으로 막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하지만 정부가 공언한 사이버 민방위훈련은 이번에 가동되지 않았다. 사이버 공격 관련 법률안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란 것은 변명일 뿐이다.
  • [씨줄날줄] 켈로 부대와 카투사/손성진 수석논설위원

    6·25의 전황을 반전시킨 인천상륙작전과 중공군의 남하를 지연시킨 장진호 전투. 유엔군이 주도한 두 작전에는 숨은 한국군 영웅들이 있었다. 바로 켈로 부대원들과 카투사다. 켈로 부대로 불리는 KLO 부대는 미군이 1949년 6월 조직한 비정규 첩보부대였다. 1950년 9월 14일 저녁 7시. 켈로 부대원들은 팔미도 등대의 불을 밝히라는 맥아더 장군의 명령을 받았다. 최규봉 대장과 미군들은 어둠을 뚫고 팔미도에 침투해 치열한 전투 끝에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던 팔미도를 손에 넣었다. 9월 15일 0시 12분, 이들이 등댓불을 밝힘으로써 261척의 유엔군 함정이 상륙작전을 개시할 수 있었다. 첩보부대의 성격상 그들은 존재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원자력학회장을 지낸 원자력 학계의 원로 이창건 박사는 서울대 전기공학과 1학년에 다니다 이 부대의 기획참모로 참전했다. 이 박사는 몇년 전 ‘KLO의 한국전 비사’라는 책을 써 활약상을 알렸다. 8000여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지만 켈로 부대원들은 군번이나 계급, 군적이 없다. 최근 정부가 부대원들이 점호를 받는 모습, 침투하기 직전 모습, 작전지도 등을 확보해 보상을 받을 길이 열렸다. 6·25 전투 중 가장 처절한 전투로 남은 장진호 전투.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을 건넌 중공군은 동부전선 장진호 주변 산악에 매복하고 있었다. 미군은 계곡을 따라 북진하다 11월 27일 밤부터 중공군 7개 사단의 포위 공격을 받았다. 병사들은 철수 명령을 받고 후퇴하면서 12월 1일까지 혹한 속에서 적의 공격을 막아냈다. 살아 돌아온 미군은 385명뿐이었다. 장진호 전투는 병력 손실이 컸지만, 중공군의 진출을 2주나 지연시키는 전과를 남겼다. 이 전투에서 한국인 카투사 875명도 숨졌다. 카투사들은 아리랑을 부르며 싸우고 얼어붙은 발걸음을 재촉했다고 한다. 카투사(KATUSA)는 주한미군에 배속된 한국군이다. 첫 카투사병은 대구와 부산 등지에서 징집됐다. 이들은 1950년 8월 16일부터 일본 후지산 근처에서 훈련을 받았다. 한달도 안 되는 훈련을 마친 카투사들은 곧바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했다. 한국 지형을 잘 아는 카투사들은 말이 잘 안 통했지만 미군들에게는 중요한 존재였다고 한다. 카투사는 혜산진 점령, 펀치볼 전투 등에서도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참전 당시 갓 스물의 나이였던 켈로 부대와 카투사 용사들은 정전 60년이 지난 지금 팔순을 넘겨 이미 상당수가 고인이 되었다. 더불어 그들의 전공(戰功)도 점점 잊히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손성진 수석논설위원 sonsj@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