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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수복 64주년 기념 중앙청 태극기 게양 재현

    서울 수복 64주년 기념 중앙청 태극기 게양 재현

    28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제64주년 서울 수복 기념행사에서 해병대 병사들이 풍선으로 만든 대형 태극기를 배경으로 6·25전쟁 당시 중앙청 태극기 게양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 이언탁 기자 utl@seoul.co.kr
  • [서울&평양 내러티브 리포트] 北 부동산 훈풍 ‘대박과 쪽박 사이’

    [서울&평양 내러티브 리포트] 北 부동산 훈풍 ‘대박과 쪽박 사이’

    #사례 1 2000년 고향 청진을 떠나 한국에 홀로 입국한 탈북자 고모(42)씨는 악착같이 돈을 모아 최근 분당에 커피숍을 개업했다. 그는 2008년부터 함경북도에 있는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 토지와 주택을 사도록 하고 있다. 고씨는 “통일이 되면 혜산(구리)·무산(철광) 광산을 비롯해 지하자원이 많은 인근 지역에 아파트, 상업시설 등 수요가 많을 것을 내다보고 미리 땅을 사놓고 있다”며 “충분히 이득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사례 2 조부모 고향이 함경남도 단천인 캐나다 교포 김모(50)씨는 2010년에 북한 나진~선봉시에 투자형태의 닭 사료 생산 공장을 세웠다. 주민들에게 신선한 재료를 공급할 수 있다고 북한 경공업성 간부들을 설득한 결과였지만, 실제로는 근처에 물류 창고를 짓기 위해서였다. 김씨는 10~20년 내 이곳에 수만 개의 컨테이너가 들어찰 것으로 내다봤다. ●임대·매매땐 무상몰수와 강제노역 처벌 받아 한국을 오가는 사업가와 조선족, 그리고 탈북자까지 투자에 가담한 것은 법적으로는 매매가 불가능한 ‘북한 부동산 바람’의 단면이다. 아직 투기라고 부를 만한 수준은 아니더라도 미래의 투자 가치를 보고 일찌감치 부동산을 사들이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현상으로 읽힌다. 북한에서 부동산을 임대 또는 매매할 경우 무상몰수와 강제노역의 처벌을 받는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이미 자본주의 국가와 같은 사적 거래가 만연하고 있다는 것이 북한 사정을 잘 아는 이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이 같은 현상들은 국가 계획경제 아래 북한판 ‘시장경제’가 적절히 혼합된 형태의 결과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이 2012년에 탈북한 133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7%가 이미 집을 매매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그럼에도 법으로 소유권이 보장되는 않는 상황에서 토지와 주택, 더 나아가 전답 매매는 ‘투자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북한의 부동산 투자는 기회이자 모험이다. 한마디로 쪽박과 대박 사이에 있다는 의미다. ●법적보호 못받아도 통일대박 기대감에 매매 급증 박모(45)씨는 지난해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다. 최근까지 북한 평양에서 살았기 때문에 실상을 잘 안다. 그는 부동산 매매가 1994년 ‘고난의 행군’ 이후 시작됐다고 말했다. 박씨는 “고난의 행군 이후 사람들은 굶주리지 않으려고 모든 것을 들고 (시장에) 나왔다. 집이나 텃밭도 예외는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평양 대동강 옥류교 근처 공원이 바로 개인 간 집(아파트 및 단층집 포함)을 거래 하는 곳”이라며 “실거래자와 거간꾼(중개인)들 수십명이 공터에 삼삼오오 모여 가격 흥정을 한다”고 말했다. 이어 “예전엔 아파트가 인기였으나, 최근엔 땅집(단독주택)이 인기다. 집터인 대지 소유가 가능하기 때문에 거기에 무엇을 중축하든 관료들을 설득하기 나름”이라고 말했다. ‘고난의 행군’ 이후 우후죽순처럼 생긴 북한 내 중국 화교들과의 합작회사들도 ‘북한판 부동산 열풍’을 만드는 또 다른 주역으로 꼽힌다. ●中 자본 들어와… 화교들 중심 상업시설 즐비 북한은 김정은의 3대 세습 이후 핵과 경제 병진노선을 고수하면서 낙후한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합작 형태의 중국 자본에 많은 양보를 하고 있다는 게 그 배경이다. 2000년 이후 북한 만경대구역, 모란봉구역, 중구역, 보통강구역, 평천구역 등 중심가 상업시설들엔 중국 화교들이 운영하는 백화점, 게임장, 미용실, 식당, 노래방, 사우나, 당구장, 볼링장 등이 무수하게 들어찼다. 이들은 건물과 소비자는 있으나, 투자 자본이 없는 북한 내 상업기관들과 연계해 시장을 개척해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건물과 땅을 임대 형식으로 소유하고 있다. 투자금을 회수할 때까지 담보형태로 땅과 건물을 점유하고 있어, 실제 주인이나 마찬가지다. 대표적으로는 번화가로 알려진 평양 만경대구역에 2012년 개점한 ‘광복지구상업중심’이 있다. 마트의 명칭부터 중국식이기도 한 이 쇼핑몰은 북한 내 외화벌이 기관인 경흥지도총국과 중국 자본이 결합해 만든 최초의 대형마트이다. 이곳에서 판매되는 공산품의 70%는 중국산으로 알려졌다. 북한 정권도 쇠락한 경제를 일으키려고 여러 자구책을 내놓고 있는데 이런 정책들이 땅 사재기를 부채질하고 있다. 북한은 지난해 11월 도마다 13개의 지방급 경제개발구와 중앙급인 신의주 경제특구를 공식 발표했다. 이들 개발구에 기존의 공식 중앙급 경제특구인 나선경제무역지대, 황금평·위화도 경제지대, 개성공업지구, 금강산국제관광특구를 더하면 북한엔 무려 18곳이 특구·개발구의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지난 7월 평양시와 황해남도, 남포시, 평안남도, 평안북도 등 6곳에 경제개발구를 또다시 지정해 첨단기술과 물류가공 단지 조성 등에 나서며 자연스럽게 “땅이 돈이 된다”는 사실을 북한 주민들에게 각인시킨 꼴이 됐다. ●실향민 ‘땅 문서’ 거래 증가… 브로커 활개 한국에서도 북한에 땅을 가진 실향민의 ‘땅 문서’ 거래가 잦아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1950년 6·25전쟁 당시 실향민들이 쥐고 나온 ‘땅문서’들이 최근 가격상승 기대 때문에 입도선매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 들어 붐을 이루고 있는 ‘통일 대박론’에 힘입은 셈이다. 부동산 매매를 돕는 ‘브로커’들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한 대북소식통은 “북한 장마당(시장)에서 집이나 토지의 매매를 연계하는 업자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면서 “매도자와 매수자가 거래를 합의하면 부동산을 관리하는 간부에게 뇌물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상 간부들도 부동산 매매에 동참하고 있는 셈이다. ●통일 이후 북한 땅 소유권 문제 후폭풍 일 듯 하지만 남북이 통일 이후에도 북한에 소유한 토지를 사적 재산으로 인정받고 법적 보호룰 받을 수 있을까. 법조계와 학계 등의 견해는 엇갈린다. 북한 내 부동산에 대한 재산권을 인정해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독일 통일을 예로 든다. 통일 독일이 토지문제를 개인 간 문제로 취급하면서 엄청난 사회갈등 비용을 지불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남북 사회통합차원에서 토지 점유자에게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설명이다. 한편에서는 북한의 토지를 통일 정부가 재국유화하는 것이 오히려 혼란을 막을 것이란 반론도 나온다. 분명한 건 남북통일 이후 북한 땅의 소유권 문제가 상당한 골칫거리가 될 것이라는 전망에는 이견이 없다. 이 때문에 통일 이후 국유재산 관리 및 사유화 방안을 수립하기 위한 전담기구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함께 제기된다. 한국자산관리공사는 지난 3월 통일 후 북한 지역 토지의 원소유자들에 대해선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고 ‘상징적 수준의 보상’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땅을 둘러싼 일부의 부동산 투기가 ‘대박’이 될지 ‘쪽박’이 될지 귀추가 주목되는 대목이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씨줄날줄] 신발기업의 귀환/손성진 수석논설위원

    1980년대까지 번성했던 우리나라 신발산업은 이후 급격히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노동집약적 산업인 신발제조업은 임금상승에 따른 경쟁력 약화로 폐업하거나 중국, 동남아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국내에는 8대 신발 메이커가 있었는데 그중에 국제(왕자표), 태화(말표), 삼화(범표), 동양(기차표), 진양, 보생 등 6개 회사가 부산에 있었다. 경성고무가 군산에, 조일이 서울에 있었을 뿐이다. 부산이 신발산업의 메카가 된 것은 전시(戰時) 수요가 많던 6·25 전쟁 당시 임시수도였고 노동력이 풍부했으며 원료 수입이나 제품 수출이 용이한 항구도시였기 때문이다. 신발 산업의 호황으로 젊은이들이 농촌을 떠나 부산으로 몰려들었고 부산 경제도 활기가 넘쳤다. 퇴근 시간이면 공장 근처 술집은 빈자리가 없었다. 종업원들 사이에서는 보석계를 만들어 패물을 장만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부산 서면 근처에 보석 가게들이 우후죽순 들어선 것도 신발산업 덕이었다고 한다. 급성장한 부산의 신발산업은 거부와 재벌을 탄생시켰다. ‘정수장학회’의 모체인 ‘부일장학회’를 설립한 김지태의 삼화고무는 한때 종업원이 1만명을 넘었다. 김씨는 부산을 넘어 전국적인 갑부로 통했다. 양정모의 국제고무는 국제그룹이라는 재벌로 성장했다. 그러나 신발업계의 임금이 마지노선인 300달러를 돌파하면서 1987년부터 부산의 신발산업은 거의 몰락했다. 국제고무의 관계사인 진양고무는 1992년, 태화고무는 1994년 생산을 중단했다. 국제상사의 ‘프로스펙스’는 한일그룹으로 넘어갔지만 한일마저 부도나 이름만 지키고 있다. 고 현수명 회장의 동양고무는 화승그룹으로 발전해 ‘르까프’라는 상표를 만들었다. 최근 화승그룹은 모기업 ‘화승’을 다른 기업에 넘겼다고 한다. 태화고무 상표는 살아남아 ‘말표 고무신’과 ‘태화 고무장갑’은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다. 부산을 떠났던 신발업체들이 20여년 만에 돌아온다고 한다. 지난 23일 부산시는 중국 등으로 진출했던 신발기업 5개사와 ‘유턴 협약’을 체결했다. 저임금 메리트가 점점 사라지자 기업들이 국내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이른바 ‘리쇼어링’(re-shoring)이다. 부산시는 2006년부터 신발산업을 부흥시키고자 사업비를 지원하는 등 육성책을 펴왔다. ㈜에이로 등 중국에 진출한 기업들은 공장을 현지인에게 넘기고 부산에 다시 공장을 짓는다. ‘트렉스타’는 중국 톈진 공장의 생산 규모를 절반으로 줄이고 강서구 녹산공단에 새 사업장을 연다. 신발업체들이 외국으로 나가고 나서 산업공동화를 겪었던 부산으로서는 여간 반가운 소식이 아니다. 손성진 수석논설위원 sonsj@seoul.co.kr
  • 지상군페스티벌 새달 1~5일 개최

    육군은 국군의 날인 다음달 1일부터 5일까지 충남 계룡시 계룡대 비상활주로 일대에서 ‘제12회 지상군페스티벌’을 개최한다고 25일 밝혔다. 이번 행사는 ‘국민에게 신뢰받는 강한 육군’이라는 주제로 구성돼 육군을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체험과 볼거리가 제공된다. 육군의 과거, 현재, 미래를 보여주는 전시관인 ‘육군이야기마당’은 육군역사관, 군복전시관, 병영생활관, 탄약전시관, 과학화훈련관, 육군과 문화예술의 만남 등으로 구성된다. 행사장에는 소공연장도 설치돼 이철환, 고정욱, 박경석 등 작가들의 특강과 뮤지컬, 마술, 나라사랑콘서트 등의 소규모 행사가 개최된다. 야외 전시장인 ‘피로 얻은 자유’에는 6·25전쟁 참상 사진, 유해 발굴 유품 등이 전시된다. 이 밖에 육군의 멋을 느낄 수 있는 의장 시범, 특공무술, 국악 공연, 헌병 모터사이클 공연도 펼쳐지며 특전사 요원들은 헬기에서 빠르게 내려와 적을 제압하는 헬기 래펠 시범을 보인다. 육군 관계자는 “육군이야기마당 전시관에 메모지와 펜을 비치해 병영문화 혁신에 대한 국민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한·캐나다, 북극 탐사·2차전지 협력 MOU 체결

    한·캐나다, 북극 탐사·2차전지 협력 MOU 체결

    박근혜 대통령이 22일(현지시간) 캐나다 의회에서 스티븐 하퍼 캐나다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고 두 나라가 1993년 수립한 ‘특별 동반자 관계’를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이날 이뤄진 두 나라 정상 간의 회담은 ‘협력의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진행됐다. 두 나라 정상은 자유무역협정(FTA)에도 정식 서명했으며 에너지·자원 관련 기술과 북극 연구·개발, 산림 분야 등으로 협력의 범위를 확대하는 등 각종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한국은 지질자원연구원과 캐나다 지질조사소 간 MOU를 통해 캐나다 인근 북극 지역 지질, 자원 등에 대한 공동 조사와 탐사를 추진할 수 있게 됐다. 한국 전자부품연구원과 캐나다의 세계 최대 수력발전기업인 ‘하이드로퀘벡’이 2차 전지에 대한 기술 협력을 추진키로 하는 등 에너지 기술 분야에서도 각종 MOU가 맺어졌다. 두 나라는 항공편의 운항 횟수, 노선 제한을 철폐하는 내용으로 2009년 가서명된 양국 간 항공자유화 협정에 정식 서명했으며 전국경제인연합회와 캐나다 상공회의소는 민간 경제협력위원회를 재개키로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전날 첫 공식 일정으로 수도 오타와의 총독 관저에서 열린 공식 환영식에서 “한·캐나다 FTA는 관계의 발전을 위한 새로운 도약대가 될 것이며 양국 간 파트너십은 양자 협력을 넘어 아·태 지역 협력, 유엔과 주요 20개국(G20) 등의 국제 협력으로까지 확대돼 나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데이비드 존스턴 총독은 “양국은 자유, 민주, 공정성 및 법치의 가치를 공유하고 있고 양국 국민은 훌륭한 교육을 받은 교양인이며 세계 무대에서 책임감 있는 사람들로 인정받고 있다”고 화답했다. 캐나다는 이날 총독 관저 연회장에서 열린 국빈 만찬에 존스턴 총독 내외 외에도 하퍼 총리 내외, 베벌리 매클래클린 대법원장 내외 등 캐나다 정부 의전 서열 1~3위가 모두 참석하는 등 각별한 예우를 보여줬다. 청와대는 경협 확대 측면에서 에너지 기술 분야 교류 협력을 이번 방문의 대표적인 경제 성과로 꼽았다. 양국 간 ‘2차 전지’에 대한 기술 협력 MOU를 통해 캐나다의 원천 기술과 우리의 제조 기술을 결합해 전기자동차용 차세대 2차 전지(리튬폴리머)를 개발하는 동시에 현재 51% 수준인 우리의 2차 전지 국산화율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한편 박 대통령은 22일 오전 숙소인 총독 관저 정원에서 존스턴 총독 내외와 함께 기념식수를 했다. 이어 오타와 시내 중심부 캐나다 의회 맞은편에 자리 잡은 국립전쟁기념비를 찾아 헌화하고 묵념하며 6·25전쟁 당시 파병된 캐나다 참전 용사들의 고귀한 희생과 헌신에 사의를 표했다. 박 대통령은 2박 3일간의 국빈 방문 일정을 마치고 23일 미국 뉴욕으로 이동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의 면담을 시작으로 유엔 일정을 시작한다. 오타와(캐나다) 이지운 기자 jj@seoul.co.kr
  • [커버스토리] 그래~ 이 맛이야… 괜찮아, 사실이야

    [커버스토리] 그래~ 이 맛이야… 괜찮아, 사실이야

     경기 광주에 사는 30년차 주부 이익순(54)씨는 평소 음식 맛을 내려고 소고기, 해물 등 다양한 복합 양념이 첨가된 ‘다시다’를 쓴다. 글루탐산나트륨(MSG)만 들어가 있는 미원은 김장할 때만 쓴다고 했다. 이씨는 “몸에 나쁜지 알면서도 음식 맛이 안 나 찌개 등을 끓일 때 어쩔 수 없이 조금씩 쓴다”면서 “MSG가 무해 하다는 이야기를 TV에서 봤지만 계속 뜬소문이나 의혹이 제기되는 걸 보면 안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감칠맛’을 내는 대표적인 식품첨가물인 MSG는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짠맛, 단맛, 쓴맛, 신맛에 이어 제5의 맛으로 인정받으며 ‘식탁 위의 혁명’으로까지 불렸던 MSG는 도대체 어쩌다 이 같은 ‘주홍글씨’를 새기게 됐을까. ●대상 ‘미원’으로 초보 주부 사로잡아  1908년 일본에서 탄생한 MSG가 우리나라에 건너온 것은 일제 강점기 때 원조 조미료 회사 아지노모토사가 자연스럽게 들어오면서부터다. MSG는 음식 맛을 돋우는 마법의 재료로 통하며 ‘뱀가루’라고 불렸을 정도다. 해방 이후 일제 조미료 수입이 금지되자 6·25전쟁 직후 대성공업사가 ‘미소미’를 생산했지만 별 재미를 못 봤다.  본격적인 MSG 시장을 연 건 대상의 창업주인 임대홍 회장이 일본에서 조미료 생산기술을 배워오면서부터다. 임 회장은 1956년 부산에서 동아화성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며 ‘신선로표 미원’을 생산했다. 미원은 대성공을 거뒀다. 음식을 준비하는 초보 주부나 음식점에서 미원은 1등 공신으로 자리를 잡았다.  조미료 사업이 대 히트를 이어가자 현재의 CJ제일제당(삼성그룹 분리 전)도 MSG 시장에 뛰어들었다. 제일제당은 원형사를 인수해 1963년 12월 미풍산업주식회사를 차린 뒤 ‘미풍’을 내놨다. 하지만 미풍은 미원의 짝퉁이라는 인식이 강했고 1세대 MSG의 승리는 미원이 가져갔다.  삼성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이 “세상에 안 되는 것” 세 가지 중 조미료를 꼽으며 안타까워했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던 조미료 시장에 먹구름이 낀 건 1968년 미국의 한 의사가 ‘MSG가 들어간 중화요리’가 가슴 압박감이나 두통 등의 증상을 유발한다고 주장하면서부터다. 이때 제기된 ‘중화요리증후군’은 이후 MSG와 큰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 났지만 당시 불거진 MSG 유해성 논란은 1993년 말 국내 조미료 시장에 고스란히 옮겨 붙었다. ●1993년 럭키 “인체 유해” 네거티브 광고  불을 지른 건 1993년 12월 ‘맛그린’을 내놓은 럭키(현 LG생활건강)였다. 후발주자였던 럭키는 미원과 다시다를 ‘화학조미료’라고 가르키며, 인체에 유해한 MSG가 다량 햠유돼 있다는 도발적 광고를 냈다. 대상과 제일제당은 발칵 뒤집어졌다. 안전성이 확보된 MSG가 건강에 해로운 것처럼 비쳐졌기 때문이다.  당시 보사부(보건복지부)는 2주 만에 럭키 맛그린에 대해 광고시정명령을 내리고 피해를 입은 미원과 제일제당에 사과하도록 했다. 하지만 소비자들의 머릿속에 ‘MSG=화학조미료’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는 데 보름이란 시간은 충분했다. 사실 ‘맛그린’도 MSG만 뺐을 뿐 핵산이나 합성향 등 다른 첨가물을 여전히 사용해 천연조미료라고 말할 수 있는 제품은 아니었다. 결국 맛그린은 MSG에 대한 불필요한 논란과 혼란만 가중시킨 채 시장에서 사라졌다.  이 여파로 이후 조미료 시장에서 MSG라는 단어는 자취를 감췄다. 식품업체는 너도나도 ‘천연’, ‘자연’임을 강조하는 복합조미료를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제품은 2007년 출시된 CJ제일제당의 ‘산들애’와 대상의 ‘맛선생’이다. 이 제품들은 MSG 등의 첨가물을 없애고 100% 자연재료로 만들어졌음을 강조하며 소비자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FAO·WHO “안전하다” 연구 결과 발표  그러는 사이 MSG에 대한 누명은 벗겨졌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2010년과 2012년 ‘MSG는 평생 섭취해도 안전하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유엔식량기구(FAO)와 세계보건기구(WHO)가 연합한 식품첨가물전문가위원회(JECFA)도 1987년 230여 건의 연구 결과를 검토한 결과 ‘MSG는 건강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 MSG 일일 섭취 허용량을 철폐했다. ●국내선 외면… 세계 시장 매년 2% 성장  국내 소비자들은 MSG를 외면하고 있지만 전 세계 MSG 시장은 매년 2%대 성장을 구가하고 있다. 소금보다 나트륨 저감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는 등 MSG의 장점이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MSG 제조업체도 수출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대상에 따르면 국내 매출은 1990년 이후 2013년까지 400억원 증가에 그친 반면, 수출 매출은 같은 기간 2000억원 이상 늘었다. 대상의 최대 수출국은 일본으로, 2013년 MSG 5325t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매출액으로는 약 101억 4580만원에 달한다.  하지만 여전히 MSG를 바라보는 국내 소비자들의 시선은 따갑다. 한 식품업계 관계자는 “MSG가 건강에 나쁘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계속해서 나오는 이유는 효모나 글루타민산 등 조미 소재에 과학적 정보가 많지 않기 때문”이라면서 “한번 나쁜 인상이 심어지면 소비자들의 마음을 다시 열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명희진 기자 mhj46@seoul.co.kr
  • [당신의 책]

    [당신의 책]

    지식의 반감기(새뮤얼 아브스만 지음, 이창희 옮김, 책읽는수요일 펴냄) ‘메소팩트’란 시간에 따라 서서히 변화하고 진화하는 진실을 뜻하는 신조어다. 이 용어를 처음 소개한 새뮤얼 아브스만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지식이 생성, 확산, 전이, 소멸되는 과정에 주목했다. 저자는 대학의 논문 인용과 대출 통계 등을 살펴본 결과 지식의 효용은 방사성동위원소의 반감기 곡선과 유사한 형태를 보인다고 주장한다. 각 학문의 반감기를 따지자면 물리학이 13.07년으로 가장 길고 경제학(9.38년), 수학(9.17년) 등이 뒤를 이었다. 물이 고체인 얼음으로 변하는 순간 급격한 변화가 수반되듯 지식의 발달이 축적되면 어느 순간 이에 기반한 큰 변화가 일어나며 인류가 달에 아폴로11호를 쏘아 올린 사례가 대표적이다. 책은 지식 자체를 습득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변화하는 지식에 적응하는 방법을 배우라고 조언한다. 340쪽. 1만 6000원. 맑스를 읽다(로베르트 쿠르츠 엮음, 강신준·김정로 옮김, 창비 펴냄) 독일의 사상가인 저자가 마르크스의 대표 저서 20여편을 분석해 오늘날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대안을 고민한 책이다. 책은 지금의 자본주의는 이미 파산선고를 받았음에도 대체 방안이 없어 명맥만 유지될 뿐이며 마르크스의 이론은 오늘날 더욱 유효해졌으나 그에 대한 해묵은 오해 때문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20세기의 거대 변혁 과정에서 마르크스 이론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것은 선진국 노동운동가들이 ‘자본’ 등 마르크스 이론을 견강부회한 오류 탓이라는 것. 책은 ‘자본’ ‘경제학 철학 초고’ ‘잉여가치론’ 등 마르크스의 대표 저술 20여편을 분석해 주요 이론을 8개 주제로 나눠 정리했다.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특징, 노동사회의 위기 진단과 그에 대한 비판을 전반부에서 다룬다. 자본주의의 야만성, 자본주의 위기의 역사적 흐름, 세계금융위기 발생 과정도 되짚고 현재의 자본주의 폐단을 극복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한다. 536쪽. 2만 5000원. 가면권력(한성훈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6·25전쟁 시기에 민간인 학살로 얼룩졌던 국민보도연맹 사건과 거창 양민 학살 사건에 대한 진실과 진상 규명 운동 등을 집중 조명했다. 국가에 의해 ‘학살’이 이뤄진 과정과 관련 사실들을 사회인문학적 시각으로 고찰했다. 1999년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문제에 관심을 가진 후 희생자, 가족, 가해자들을 직접 만나면서 시민단체(민간인학살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를 직접 조직한 저자인 만큼 책은 온전한 역사 현장의 기록이다. 역사적 진실을 가려내기 위해 치열하게 발품을 판 저자는 이승만 정부의 최고위층, 검찰, 경찰 등 국가 기관이 어떤 역할을 하며 가해자가 됐는지, 또 희생자들은 어떻게 내부의 적으로 내몰렸는지를 되짚는다. 가해자를 처벌하지 않는 사회, 진실을 덮는 사회적 침묵과 국가의 무책임, 정치의 책임윤리 등을 함께 고민한다. 458쪽. 2만 3000원. 나에게는 중동이 있다(박상주 지음, 부키 펴냄) 20여년간 일간지 기자로 뛰었던 저자가 아프리카와 중동을 발로 뛰며 현지에서 성공한 한국인 17명을 심층 취재해 책으로 엮었다. 아프리카 이야기는 ‘나에게는 아프리카가 있다’에 담았다. 중동편의 경우 역경을 딛고 성공해 현지에 정착한 이야기 8편이 실렸다. 선원으로 일하다 모로코에서 배추와 무를 재배하고 방앗간으로 성공한 이종완씨 부부, 이슬람권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태권도 사범을 거쳐 섬유용 계면활성제 제조업 사장으로 변신한 조경행씨, 배구 선수 출신으로 바레인에서 식당 경영에 성공한 오한남씨 등의 성취담이 옆에서 지켜본 듯 생생하게 소개된다. “취업 고민을 하는 젊은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책이었으면 한다”는 게 저자의 말. 아프리카편에서는 잠비아 등지에서 가발 사업으로 연간 16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김근욱씨 이야기 등이 등장한다. 239쪽. 1만 4800원.
  • 역대 아시안게임 영상·기록 33건 공개

    역대 아시안게임 영상·기록 33건 공개

    우리나라는 1951년 6·25전쟁 중이라 제1회 인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 참가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54년 열린 제2회 마닐라 대회에서 사상 첫 국제 종합대회 금메달을 따는 등 단숨에 3위를 달성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국가기록원은 제17회 인천 아시안게임을 맞아 9월 ‘이달의 기록’ 주제를 ‘역대 아시아경기대회, 기록으로 보다’로 정하고 관련 기록물을 19일부터 홈페이지(archives.go.kr)에 공개한다고 18일 밝혔다. 공개 기록물은 1950∼1980년대 아시안게임 파견 선수단과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준비상황 및 경기 등을 담은 동영상 14건과 사진 18건, 문서 1건 등 총 33건이다. 홈페이지에서는 제2회 마닐라 대회 육상에서 첫 금메달을 딴 최윤칠 선수 등 선수단의 귀국환영회 사진, 제8회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여자배구 장면 등을 볼 수 있다. 조현석 기자 hyun68@seoul.co.kr
  • “멈춘 철마 보면 밀고, 끌고서라도 고향 가고파”

    “멈춘 철마 보면 밀고, 끌고서라도 고향 가고파”

    “명절에 고향 가겠다고 새벽같이 표 사러 나온 사람들 보면 너무 부럽지요. 임진각의 ‘철마는 달리고 싶다’ 글귀를 보면 멈춘 기차를 밀고 끌고서라도 가고 싶습니다. 우리 세대에 통일 돼 다시 고향땅을 밟을 수 있을까요.” ‘철도의 날’(18일)을 하루 앞둔 17일 서울 동대문구 코레일 수도권동부본부에서 만난 박정철(40) 과장은 체제 장벽에 막혀 갈 수 없는 고향땅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했다. 현재 노무팀에서 일하는 박 과장은 1998년 부모와 누이, 아내, 아들과 함께 탈북해 한국에 정착했다. 북한에서 철도학교를 졸업한 뒤 철도부에서 일한 경력이 인정돼 2000년 코레일(당시 철도청)에 입사했다. 수송원부터 역무원, 관제원, 열차 차장, 부역장을 거친 그는 북한에서의 근무 경력을 합하면 20년 가까이 철도 현장을 지켰다. 그가 철도를 업으로 삼게 된 것은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른다. 땅끝마을 전남 해남 출신의 아버지는 6·25전쟁 때 국군으로 참전했다가 북한군 포로가 됐다. 3년 만에 전쟁은 멈췄지만, 아버지는 북한의 송환 거부로 고향땅에 돌아올 수 없었다. 박 과장은 “출신성분이 나쁜 아버지는 함북 회령 탄광에서 평생 광부로 일해야 했다”면서 “북한은 군대를 다녀와야만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지만 국군 포로의 아들이란 이유로 입대조차 할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군대도, 대학도 갈 수 없었던 그는 철도를 자신의 진로로 정하고, 철도학교를 졸업한 뒤 회령역에서 역무원 일을 시작했다. 박 과장은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북한 억양과 사투리 때문에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을 정도였지만, 철도 용어나 시스템은 남북한 모두 공통 요소가 많아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남북한 철도 격차도 실감했다. 그는 “한국은 2000년대 이후 모든 시스템이 자동화되고 KTX가 생기는 등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북한은 1990년대 후반까지 열차의 80%가 증기기관차였고, 레일을 시설부 직원들이 직접 손으로 깔 정도로 열악했다”고 설명했다. 지난 6월, 그의 아버지는 고향땅 해남에서 눈을 감았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한을 풀어서인지 편안하게 임종을 맞았고, 국립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반면 박 과장은 한국으로 오면서 고향을 잃었다. 그는 “남북 철길이 다시 열리면 처음 시작했던 회령역을 지나 중국과 러시아로 뻗어나가는 곳에서 역장을 하고 싶다”며 활짝 웃었다.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 “8500년 역사의 터키 속살 천년고도 경주서 엿보세요”

    “8500년 역사의 터키 속살 천년고도 경주서 엿보세요”

    “‘이스탄불 in 경주 2014’가 한국과 터키 양국 정부는 물론 문화·역사 도시인 경주시와 이스탄불 간의 우호 및 교류 협력 증진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최양식 경북 경주시장은 17일 “8500년 역사와 문화적, 예술적 풍요로움을 지닌 터키 정부와 이스탄불시가 천년 고도 경주에서 ‘이스탄불 in 경주’를 통해 자신들의 속살을 유감없이 선보이는 것은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강조했다. 이스탄불시는 지난 12일부터 22일까지 11일간 ‘형제의 나라’ 대한민국 경주에서 ‘새로운 여정의 시작’이란 주제로 이 축전을 개최하고 있다. 도와 시가 지난해 터키 이스탄불에서 성공적으로 개최한 이스탄불·경주세계문화엑스포 2013 후속 행사다. 다음은 최 시장과의 일문일답. →축전이 대박을 예고하는데. -행사 닷새째인 16일까지 누적 관람객이 38만명을 넘어섰다. 예상 밖이다. 중국과 일본, 미국, 터키 등 외국인도 많이 찾는다. 터키에서 온 행사 관계자들도 무척 놀라워한다. 경주는 지금 마치 터키를 옮겨 놓은 듯하다. 행사 기간 모두 70만~80만명이 찾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스탄불과 경주 간의 귀중한 문화 교류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비결은 뭔가. -터키 정부와 이스탄불시가 해외에서 개최하는 사상 최대 규모의 문화, 예술, 프로모션 행사가 되도록 지원해 준 덕분이다. 예산 120억원이 투입되고 350명의 터키 문화예술인들이 참여한다. 이스탄불시는 지난해 이스탄불·경주세계문화엑스포 개최 이후 실크로드의 한쪽 끝인 이스탄불에서 출발해 터키 문화를 실크로드의 다른 한쪽 끝인 경주로 가져간다는 마음으로 행사를 정성껏 준비했다. →축전에서는 무엇을 보여 주나. -터키 이스탄불이 가진 가장 엄선된 공연, 문화, 예술 생활상을 선보인다. ‘터키 시네마의 역사’라는 다큐멘터리와 세계 최고의 군악대 메흐테르 공연, 이스탄불 시립연극단 창단 100주년 기념 연극 등 최고의 문화와 공연이 한자리에서 펼쳐진다. 아름다운 톱카프 궁전을 모티브로 한 메인 무대와 보스포루스 대교를 거닐며 제국의 역사를 3D 영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이스탄불 홍보관 등도 인기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실내 시장인 ‘그랜드 바자르’ 부스를 구경하고 민속춤도 함께 출 수 있다. 터키 음식을 맛보고 터키 음악도 알게 될 것이다. →축전의 의미와 기대 효과는. -이스탄불시는 이번 행사를 위해 6·25 파병 이후 가장 많은 터키인을 한국으로 보냈다. 양국이 형제의 나라임을 재확인하고 문화·예술을 통해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는 기회가 됐다. 앞으로 두 국가와 두 도시가 모든 분야에서 교류를 확대해 나갈 것으로 확신한다. 경주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데스크 시각] ‘바보야, 문제는 역사교육이었어’/이지운 정치부 차장

    [데스크 시각] ‘바보야, 문제는 역사교육이었어’/이지운 정치부 차장

    2004년 고구려사 문제가 불거졌을 때 일의 주무부서인 외교부 동북아국장은 박준우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었다. 문제가 터지자 박 국장은 슬그머니 중국 현지답사를 다녀온 적이 있는데, 이후 중국 외교관에게 “그래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구려 왕의 이름 몇 개쯤은 댈 줄 안다”면서 에둘러 면박을 줬다던 기억이 난다. ‘중국사람들은 도대체 고구려가 어느 시대, 어디에 위치했던 왕조인 줄 알기나 하느냐’는 얘기였다. 중국의 이른바 ‘동북공정’ 초기만 해도 대부분 어이가 없다는 반응들이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은 줄 안다.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중국의 노력이 어떠한지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는 정신은 중국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로부터 10년인데, 역사는 계속 문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일본이 이렇게까지 나올 수 있으리라 상상하기는 쉽지 않았다. 망언에 망언이 그치지 않고, 그것이 국제 문제로까지 비화된 게 오늘의 현실이다. ‘인륜’에 관한 일이 이럴진대 독도 문제에 일본의 염치를 기대하는 게 무리일지 모른다. 독도를 교과서에 우겨넣은 일본은 그저 기다리는 중이다. 한 세대만 지나면 독도에 대한 일본인들의 지식이 좀 더 풍부해지면서 상황은 호전될 거라 믿고 있을 게다. ‘고구려’가 뭐에 쓰는 물건인지도 몰랐던 절대 다수 중국인들에게 고구려가 익숙해진 요즘이다. 그때쯤이면 한·일 젊은이들은 독도의 역사성을 놓고 뜨겁게 싸워야 할지 모른다. 역사가 문제가 되기는 안팎이 따로 없다. 요즘 국내서 벌어지는 역사교과서 논쟁은 좀 극단적으로 하자면 ‘유관순이냐, 전태일이냐’로도 압축된다. 한쪽에서는 일본 제국주의의 대표적 희생자이자 항일의 아이콘 ‘유관순 누나’가 어떻게 교과서에서 사라질 수가 있느냐고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또 다른 쪽에서는 EBS 한국사 교재에서 여운형-조봉암-전태일에 대한 기술을 삭제하며 교육부가 ‘역사 왜곡’을 시도하고 있다고 흥분하고 있다. 논쟁은 특정인물의 첨삭으로 그치지 않는다. 유관순과 전태일을 각각 어떤 분량으로 가르쳐야 할 것인가는 숨은 논쟁거리다. 역사적 비중, 과연 우리 사회가 이 문제를 해결할 역량을 갖고나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곳곳에 지뢰다. 역사 교육의 다양성, 선택권의 문제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로의 복귀와 맞물려 있다. ‘고구려는 옛것이니 현대사 비중을 늘려달라’고 한다면 다양성에 대한 이 욕구는 얼마나 충족될 수 있을까. 나아가 학교와 사회는 이 요구를 충족시켜줘야 할 의무는 있는가. 있는 역사를 간수하기도 바쁘지만 우리에게는 되찾아야 할 ‘잃어버린 역사’도 적지 않다. 예컨대 해방~6·25 전후 건국기의 사건들은 남북 간 쟁탈의 영역으로 남은 지 오래다. 국체와 그에 따른 정체성을 좌우지하는 주요한 지점이지만 선뜻 그곳으로 나아가려들 하지 않는다. 역사가 안팎으로 주는 괴로움은, 애시당초 기다려 그쳐질 일이 아니었다. 역사 문제는 상시 갈등요소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이제로 또 10년이 지나면 고구려나 위안부, 건국기의 사건들은 더욱 뜨거운 ‘분쟁’으로 달아오를 것이다. 중국, 일본, 북한이 ‘바보야, 문제는 역사교육이었어’라고 할 때, 땅을 쳐도 늦다. jj@seoul.co.kr
  • 北 “AG 앞두고 인천상륙작전 재연은 도발” 비난

    北 “AG 앞두고 인천상륙작전 재연은 도발” 비난

    남북한이 19일 개막하는 인천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에 대해 공방을 벌였다. 북한은 이에 덧붙여 한·미 군사훈련 중단과 5·24 대북제재 조치 해제 등을 대화의 선결조건으로 내세우며 정부를 압박했다. 정부의 2차 남북고위급접촉 제안에 즉답을 피하면서 상황을 관망하며 입지를 강화하고자 하는 의도로 풀이된다. 군 당국은 15일 6·25 전쟁의 전세를 뒤집은 인천상륙작전 64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월미도 해안에서 이지스 구축함 등 함정 10여척과 상륙장갑차 20여대 등으로 당시 작전을 재연했다. 앞서 북한은 14일 대남기구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보도를 통해 “이 행사는 평화와 친선 속에 진행되는 아시아경기대회와 인류의 지향과 염원에 대해 용납 못할 도전이며 도발”이라면서 “남측 당국은 남북관계에 미칠 엄중한 후과에 대해 심사숙고해야 한다”고 비난했다. 국방부는 15일 “상륙작전 전승행사는 매년 연례적으로 해온 행사로 아시안게임과는 무관하다”고 반박했다. 국방부와 통일부는 우리 정부가 민간인들의 대북 전단 살포를 지원하고 있다는 북한 주장에 대해서도 “근거 없는 내용”이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북한 응원단 파견이 무산된 데 이어 인공기 게양 금지 논란이 부각되며 북한을 대화로 이끌 기제가 점점 사라진다는 데 대한 우려도 제기된다. 인천시는 지난달 북한 선수단이 인천에 오는 만큼 상륙작전 재연행사는 생략해 달라고 국방부에 협조를 요청했었다. 한편 조선중앙통신은 이란을 방문 중인 리수용 북한 외무상이 무함마드 자바드 자리프 외교장관과 회담했다고 이날 보도했다. 중앙통신은 “(회담에서) 여러 분야에서 확대발전시킬 데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고 전하며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6·25 납북자’ 판사 이선재씨 등 69명 추가 인정

    정부는 12일 서울청사에서 정홍원 국무총리 주재로 ‘6·25전쟁 납북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 명예회복 위원회’를 열고 69명을 납북자로 추가 인정했다고 밝혔다. 납북 당시 서울고등법원 판사였던 이선재씨를 포함한 69명이 ‘6·25전쟁 납북자’로 추가됨에 따라 2010년 위원회 출범 이후 납북자로 공식 인정받은 사람은 3375명으로 늘었다. 위원회는 또 납북자 관련 자료의 수집 및 분석기간을 진상조사보고서 집필을 위해 내년 말까지 1년 연장했다. 위원회는 국내외 특수기록 자료를 추가 수집·분석하고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될 기념관 및 추모탑 조성과 관련된 각종 전시자료도 수집할 예정이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주한미군에 공여된 토지 여의도의 33배

    우리 정부가 주한미군지위협정(SOFA)에 따라 미군에 공여한 토지 규모가 9700만㎡로 여의도 면적의 33배에 달하지만 관리 실태가 부실한 것으로 알려졌다. 훈련장 일부의 토지 지목이 논밭으로 돼 있거나 토지 경계선이 애매해 지방자치단체와 갈등을 빚어 군 당국이 뒤늦게 대책 마련에 나섰다. 10일 국방부에 따르면 주한미군에 공여된 토지는 전국적으로 67개 미군 기지와 훈련장 9700만㎡인 것으로 조사됐다. 주한미군 공여 토지와 시설은 그 사용 권리만 미군에 부여될 뿐 재산의 소유권은 우리 정부가 가지고 있다. 하지만 미군 시설과 훈련장으로 사용되는 토지 430만㎡의 지목이 사용 목적이 다른 논밭, 과수원으로 등재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공된 토지의 경계선이 모호한 미군 기지가 있는 지자체에선 이와 관련한 각종 민원으로 국방부, 주한미군 등과 갈등을 빚는 것으로 전해졌다. 국방부 관계자는 “지목이 논밭인 부지를 건물과 활주로 등의 용도로 사용하면 관련 법에 저촉되고 앞으로 부지 활용에도 많은 제약이 따른다”며 “미군 기지 내 사용 목적과 일치하지 않는 부지의 지목을 변경해 토지의 활용성이나 국방 자산 가치를 높일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6·25전쟁을 계기로 미군에 토지를 공여할 당시 측량기술과 지리정보 부족 등으로 제공된 토지의 경계선이 모호한 미군 기지도 33곳에 달했다. 국방부는 33개 기지에 대해 연도별 계획을 수립, 2017년까지 경계선을 확정할 계획이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소리 인생 35년 맞는 송서·율창 예능 보유 서울시 무형문화재 41호 유창 명창

    [김문이 만난사람] 소리 인생 35년 맞는 송서·율창 예능 보유 서울시 무형문화재 41호 유창 명창

    ‘유인(有人)이 문래복(問來卜)하되 여하시화복(如何是禍福)일고/ 아휴인시화(我虧人是禍)요 인휴아시복(人虧我是福)이라.’ 명심보감에 나오는 대목이다. ‘어떠한 것이 재앙이고 행복인가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남을 해롭게 함은 재앙이요, 남이 나를 해롭게 함은 행복이다’라는 뜻이다. 얼핏 보아 짧은 문장인데도 불구하고 외우기가 썩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옛날 선비들은 책 한 권 분량의 고전을 어떻게 다 암기하고 이해를 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소리 내어 읽는 방법이다. 길고도 긴 문장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을 반복하며 차곡차곡 외워 나갔다. 그렇게 소리 내어 읽는 것을 송서(誦書)라고 한다. 예부터 집안을 기쁘게 하는 세 가지 소리가 있다. 삼희성(三喜聲), 즉 ‘글 읽는 소리, 아기 우는 소리, 다듬이소리’ 이다. 특히 과거시험을 보는 집안에서는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아야 합격할 수 있다고 믿었다. 송서는 주로 고전을 읽는 것이고 율창(律唱)은 한시를 읊는 소리를 말한다. 무작정 읽고 읊는 것이 아니다. 송서는 글을 읽을 때 음악적인 멋을 넣어 구성진 성악으로 표현하는 예술이다. 즉 음악적 예술성을 토대로 경전이나 산문을 외워서 가창하는 것이다. 또 율창은 한시에 청(淸·목소리)을 붙여 일정한 장단 없이 오언절구, 칠언절구, 칠언율시 등을 가락에 올려 부른다. 둘 다 선비문화의 대표적 음악 유산으로 고품격의 멋스러움이 묻어나는 격조 있는 소리로 여긴다. 경기민요 명창으로 잘 알려진 유창(55·본명 유의호)씨는 이 같은 송서·율창으로 ‘600년 선비의 숨결’을 이어가고 있는 대표적 소리꾼이다. 그는 2009년 서울시무형문화재 41호 ‘송서·율창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았으며 송서의 정통계보인 이문원-묵계월 선생의 대를 이으면서 송서·유창을 발표하는 국악인은 유씨가 국내에서 유일하다. 그는 타고난 목소리와 음악성으로 이미 경기 서도의 좌창이나 입창은 물론 가곡과 시조를 오래전에 두루 섭렵했다. 송서와 율창에 매진하면서부터 특유의 남성다운 성량과 기교, 그리고 독특한 창법을 개발한 소리꾼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런 그가 올해로 소리인생 35년을 맞는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오는 11월 15일 서울 대학로 동승아트홀에서 관련 세미나를 여는 등 ‘특별한 송서·율창의 무대’를 펼친다.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4일 서울 종로구 국악로 연습실에서 유씨를 만났다. 연습실은 작은 공연무대로 꾸며져 있었다. ‘대학’ ‘중용’ ‘격몽요결’ 등의 고전과 고대 문장가들이 애독하던 진귀한 시문이 담긴 책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공연얘기부터 나왔다. “공연제목을 ‘송서 유창 소리인생 35년’으로 했습니다. 학자들이 참석하는 세미나를 먼저 진행한 다음 송서·율창의 무대로 이어지고 ‘명심보감’ ‘촉석루’ ‘영풍’ 등 고전 10여편이 등장하게 됩니다. 송서·율창은 책을 읽는다는 측면에서 아이들한테 교육적 기능으로 잘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초·중·고 학생들도 많이 참석하도록 했어요. 학생 때 외운 것은 어른이 되어도 잊히지 않고 계속 남게 되거든요. 이런 차원에서 이번 공연 때 ‘훈민정음’에 새로운 멋과 가락을 넣을 예정입니다.” 그는 2012년 세종마을 선포 1주년을 맞아 훈민정음 반포 재연행사 때 ‘훈민정음’을 송서로 불러 주목을 끌었다. 이처럼 송서는 글을 읽는 낭독의 소리이기 때문에 어떤 고전이든 여러 창법으로 부를 수 있다. 송서·율창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반인은 물론 국악 전공자들도 어렵고 딱딱하다는 이유로 이해와 관심이 그다지 높지 않은 편이었다. 묵계월 선생한테 송서를 배울 때 처음에는 여러 사람이 함께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들 배우기를 기피했고 오로지 좋은 목소리를 타고난 유씨만이 끝까지 남아 자신의 예술세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유씨는 ‘송서’라는 말 자체가 일반인들에게 다소 생소할 뿐이지 알고 보면 매우 흥미롭다고 강조한다. 지난해 8월 ‘송서·율창 꽃피우다’라는 무대를 통해 ‘삼설기’ ‘적벽부’ ‘추풍감별곡’ 등 송서와 율창 22곡을 담은 새로운 음반을 출시하면서 신개념의 독서운동을 열창한 것도 좀 더 대중과 가까이하기 위해서였다. 송서·율창은 조선 후기 사대부 독서인들의 인식과 가치관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국악과 차별화된다고 그는 말한다. 단순히 눈으로만 글 읽는 소리가 아니라 고전의 내용을 음미하고 행동으로 실천하기 위한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총체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 국악사적 의미에서 고유의 창법과 리듬, 선율 등 여러 면에서 훌륭한 전통성을 보유하고 있지만 6·25를 지나면서 급격히 쇠락했다. 또한 한글 중심의 교육체계가 도입되면서 극장무대와 라디오 등에서 점차 다른 공연종목에 밀리게 됐다. 유씨는 이런 상황을 안타깝게 여겨 꾸준히 무대에 서는 한편, 제자 양성에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 그런 노력 덕분에 요즘 들어 송서에 관심을 보이는 학생과 일반인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이수자와 전수자 등 제자들도 많아지고 있다고 유씨는 말한다. “인문학적 소양이 더욱 요구되는 현대 사회에서 송서·율창은 아주 중요합니다. 고전 교육의 부활을 통해 청소년 인성 교육에 기여하는 동시에 ‘고전의 재발견, 현대적 재창조’를 화두 삼아 ‘살아 숨 쉬는 전통음악 구축’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죠.” 송서는 조선시대 과거시험 때 배강(背講)이란 과목으로 채택됐다. 다시 말해 시험장에서 책을 앞에 놓고 뒤돌아 앉아 그 책의 내용을 줄줄 외우는 것이다. 따라서 성균관, 향교, 서원, 서당 등 당시 모든 교육과정에서 가장 중시됐다. 그 덕분에 조선은 공부의 나라요, 글 소리의 천국이었다. 위로는 임금과 세자, 아래로는 입신출세를 마음에 둔 선비들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글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고 유씨는 말한다. “송서는 독서인들의 공부방법이자 생활이었습니다. 송서는 사회적 신분 상승의 수단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독서인들의 인격 수양과 실천을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당시 사랑방과 서당을 돌며 공연했고 대상층은 사대부가에서 남성 중심의 식자층과 독서인들이었습니다.” 음악적 창법의 특징으로는 멜로디 자체가 틀에 짜여져 있지 않고 목청이 좋고 성량이 튼튼해야만 소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감정을 억제시키고 심정(心情)을 정화시키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는 것이다. 유씨는 “송서·율창은 대한민국의 대표적 전통성악”이라고 거듭 강조하면서 “전통송서의 보존과 동시에 교육적 기능이 큰 창작송서의 개발, 율창의 복원 등 국악의 대중화 및 전통문화콘텐츠의 확장에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특히 인류 무형문화유산으로서 충분히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사라질 뻔했던 송서·율창의 창법을 꺼내 맥을 잇는 것도 이 같은 까닭이다. 그는 1999년 9월 19일 서울 운현궁에서 첫 발표 무대인 ‘송서의 밤’을 가졌다. 잠시 당시를 회고한다. “공연날짜를 잡고 보니 공교롭게도 숫자 9가 많은 날이었습니다. 저는 한옥 노락당에서 글을 소리 내어 읽었고 관객들은 마당에 설치된 천막 안에서 관람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습니다. 많이 걱정이 되더군요. 하지만 300여 관객 중 한 사람도 자리를 뜨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공연이 끝났을 때 한 교수님이 ‘송서에 대한 관심이 예사롭지 않다’고 하더군요. 그때 이후 사라져가는 송서를 열심히 보급하겠다고 다짐했지요.” 어떻게 해서 소리와 인연을 맺었을까. 충남 서산 출신인 그는 어릴 때부터 시조와 시창에 능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랐다.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시조창을 따라 부르다 보니 소리가 점점 좋아졌다. 그러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979년 박태여 선생에게 경기민요와 서도소리를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이은주 선생을 거쳐 1992년 묵계월 선생을 만나면서 ‘삼설기’ 및 ‘12잡가’ 등을 전수받았다. 1998년 전주대사습 경기민요 부문에서 남자로서는 최초로 장원을 차지하는 등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 이듬해 운현궁에서 가진 첫 무대를 시작으로 매년 경기소리와 송서·율창 발표무대를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는 “송서는 책을 읽고 낭독하고 외우는 암송의 예술이다. 그런 예술과 교육의 효율적 접목을 통해 도덕적 가치구현을 실현하는 데 이바지하겠다”고 말한다. 선임기자 km@seoul.co.kr ■명창 유창은 1959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시조에 능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1979년 박태여 선생한테 경기 서도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1994년 묵계월 선생의 문하로 들어가 ‘삼설기’와 ‘12잡가’를 익혔다.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 산타령을 이수했다. 1999년 제1회 송서의 밤 발표회를 가졌다. 2000년 소리극 ‘장대장타령’의 주연을 시작으로 다수의 소리극에 출연했다. 2001년 ‘유창 경기 12잡가’ 이후 매년 발표회를 가졌다. 200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전수조교로 인정받았다. 2009년 서울시무형문화재 제41호 송서·율창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았다. 주요 수상으로는 전주대사습 민요부문 장원(1998년), 전국 경서도창대회 대통령상(2000년), KBS국악대상 민요상(2003년), 옥관문화훈장 서훈(2012년) 등이다. 음반과 저서활동으로는 송서 삼설기 취입(1999년), 12잡가,송서 음반 출시(2004년), 삼설기 연구 출간(2000년), 묵계월 경기소리 연구 발간(2003년) 등 다수가 있다.
  • 달리고 싶다, 원산 종착역까지

    달리고 싶다, 원산 종착역까지

    100년 전 서울~원산을 오가는 경원선 열차가 완전 개통됐다. 그러나 지금은 갈 수 없는 곳. 지난달 1일부터 운행을 시작한 ‘경원선 DMZ트레인’은 세계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땅, 비무장지대(DMZ)를 둘러볼 수 있는 유일한 열차다. 평화와 통일의 꿈을 싣고 서울역과 우리나라 최북단 역인 철원 백마고지역을 하루 한 차례 왕복 운행한다. ‘백마고지역이 종점이 아니라 원산으로 가는 경유지가 되는 날까지….’ 한 승객이 열차 안 게시판에 짧은 소망의 글을 남겼다. 5일 오전 9시 27분 서울역을 출발한 DMZ트레인 3량(136석)은 빈자리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탑승객들로 북적였다. 열차가 운행된 지 한 달을 갓 넘었지만 벌써 입소문을 타고 주말에는 2~3주일 전에 예약해야 할 정도로 인기를 끄는 관광열차로 자리 잡았다. 경원선은 1914년 9월 16일 전 구간이 개통된 이래 DMZ에 가로막혀 운행이 중단될 때까지 분주히 서울과 원산을 오갔다. 일제가 북부지방 물자를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만든 철도로, 용산~의정부~철원~평강~삼방관~원산까지 223㎞를 운행했다. 현재 남측 구간은 백마고지역에서 DMZ까지 16.2㎞, 북측 구간은 DMZ에서 평강까지 14.8㎞가 끊어진 상태다. 이 구간이 연결되면 기차를 타고 금강산은 물론 서울에서 최단거리로 시베리아횡단철도와 이어져 유럽까지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서울역에는 오후 6시 35분에 돌아올 예정이다. 백마고지역까지 26세 이상 성인 편도 요금은 주중 1만 2400원, 주말 1만 2800원이다. 백마고지역은 민통선(남방한계선 바깥 남쪽으로 5~20㎞에 있는 민간인출입통제구역) 인근까지 운행하는 최북단 역이다. DMZ트레인은 열차 자체가 하나의 작은 박물관이다. 1호차에는 한국철도의 역사와 관련된 사진과 전시물, 2호차에는 DMZ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담은 사진, 3호차에는 DMZ 관련 생태 사진이 각각 전시돼 있다. 2시간 남짓 달린 열차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고 쓰인 철도 중단점 팻말에 가로막혀 멈춰 섰다. 더 이상의 철로가 없다. 강원 철원군 대마리에 있는 백마고지역 역사 안에는 통일을 기원하는 소망 쪽지들이 가득했다. 원래 백마고지역은 철원에서 태어난 월북 작가 이태준의 이름을 따려 했지만 6·25전쟁의 상징인 백마고지 전투의 강렬한 이미지 때문에 결국 백마고지역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역 인근에는 전적지 기념비가 있다. 백마고지는 육군 9사단(백마부대)이 철원평야 북단의 요충지인 395고지에서 중공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인 곳이다. 점심식사를 마친 뒤 백마고지역에서 철원 안보관광 투어버스를 타고 ‘노동당사’ 건물에 도착했다. 노동당사 3층 건물은 철원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물. 원래 그 주변에 철원역과 은행, 곡물검사소, 상가 등이 즐비했지만 지금은 곳곳에 흔적만이 남아 있다. 1946년 지어진 노동당사는 공산정권에 협조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체포, 구금, 고문, 학살된 분단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노동당사 건물은 예전 ‘서태지와 아이들’의 뮤직비디오에 등장하기도 했었다. 옛 철원역은 직원이 80여명에 달하던 금강산선의 시발역이었다. 민통선으로 들어서 조금을 달리자 버스는 DMZ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3사단(백골부대) 멸공OP(군사관측소)에 도착했다. 민통선은 출입 인원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버스에 군인이 동행할 정도로 보안이 철저한 곳이다. 물론 사진촬영도 금지된다. 멸공OP에서는 부대 정훈장교의 설명과 함께 DMZ 안에 있는 한탄강과 민들레 들판을 비롯해 서방산, 오성산 등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북한의 선전마을도 볼 수 있다고 한다. 백골부대 OP에서 내려와 금강산선 흔적을 볼 수 있는 금강산 전철교량에 도착했다. 한탄강 계곡을 가로지르는 이 교량은 1926년 세워진 것으로 철원역에서 내금강까지 116.6㎞를 오가던 열차가 지나던 다리다. 철원역에서 내금강역까지 4시간 30분 정도 걸렸는데 연간 15만명 정도가 이용했다고 한다. 남방한계선 바로 앞에 있지만 민통선 내에서 유일하게 남쪽 방향으로만 사진을 촬영할 수 있다. 버스는 경원선의 아픔을 볼 수 있는 철원 평화전망대에 도착했다. 궁예가 철원을 도읍으로 정한 뒤 만든 태봉국도성(궁예 도성)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태봉국도성은 DMZ 안에 있었던 왕궁성으로, 외성 둘레가 12.5㎞에 이르는 거대한 도성이었다. 일제가 경원선 철도를 만들면서 우리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철로가 태봉국도성 안을 관통하도록 했다고 한다. 남방한계선과 맞닿은 곳에 복원돼 있는 경원선 간이역인 월정리역에 도착했다. 원래 DMZ 안에 있었는데 1988년 철원 안보관광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이곳으로 이전해 복원했다. 월정리역에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문구 아래 누워 있는 녹슨 객차의 잔해도 볼 수 있다. 이 객차는 6·25전쟁 당시 월정리역에 있다가 공중 폭격으로 파괴된 북한군 객차다. 4시간 30분 남짓한 짧은 ‘철원여행’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경원선의 흔적은 연천역에서도 볼 수 있다. 서울역으로 돌아가는 열차는 연천역에 16분간 정차를 하는데 연천역에 세워진 급수탑을 돌아봤다. 급수탑은 1914년 개통 당시부터 1967년까지 운행되던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경원선에는 중간 지점인 연천역에만 급수탑을 설치했는데 23m 높이의 원통형 급수탑과 콘크리트로 만든 상자형이 있다. 탑 외부에는 총탄 자국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급수탑 아래에서는 열차 정차시간에 맞춰 잠시 동안만 지역 농산물을 판매하는 옥계마을 ‘빤짝장터’가 열렸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 경원선이 원산을 넘어 중국과 유럽으로 넘어가는 그날이 오길 기대해 본다. 글 사진 조현석 기자 hyun68@seoul.co.kr
  • “현대사의 ‘진행형 아픔’ 알려… 관심 낮아 걱정”

    “현대사의 ‘진행형 아픔’ 알려… 관심 낮아 걱정”

    “굉장히 민감한 문제라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진행형인 현대사의 아픔을 알리려 했는데, 의외로 관심이 낮아 걱정이에요.” 개인과 공동체에 얽힌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다뤄온 설치미술 작가 임민욱(46)씨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벌어진 민간인 학살을 소재로 대형 퍼포먼스를 벌여 주목받고 있다. 작품 제목은 ‘내비게이션 아이디’. 지난 4일 66일간의 대장정에 들어간 광주비엔날레의 오프닝 행사에서 경북 경산과 경남 진주에서 60여년 전 목숨을 잃은 민간인 희생자들의 유골을 담은 컨테이너를 동원해 화제가 됐던 퍼포먼스다. 당시 놓인 컨테이너 2개는 광주 용봉동 비엔날레 전시장 앞 광장에서 계속 전시되고 있다. “희생자 가족들은 지금도 억압받는 공동체로 남아 있어요. 진실과화해위원회가 발굴하다가 활동 종료로 방치되거나 유족이 발굴한 유해들을 모았습니다.” 보도연맹 관련자와 인민군 부역자로 지목받아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의 유골이다. 작가는 “세월호 사건 못지 않게 시급히 풀어야 할 문제임을 강조하기 위해 앰뷸런스, 소방헬기를 등장시켰다”면서 “권력에 희생된 인간성을 회복하고 치유하자는 메시지가 담겼다”고 말했다. 작가는 제6회 광주비엔날레상(2006년), 제7회 에르메스미술상(2007년), 제1회 미디어아트 코리아상(2010년) 등을 수상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마오쩌둥은 외로웠고 덩샤오핑은 행복했다”

    “마오쩌둥은 외로웠고 덩샤오핑은 행복했다”

    중국 인민일보가 두 국부(國父)이자 1, 2세대 지도자인 마오쩌둥(왼쪽·毛澤東)과 덩샤오핑(오른쪽·鄧小平)의 말년을 비교하면서 “가정은 지도자의 성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라고 분석한 기사를 지난 27일 게재했다. 신문은 “각종 자료로 볼 때 마오는 말년에 고독했던 반면 덩은 그렇지 않았다. 덩이 위대한 업적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은 강한 인내심(문화대혁명 때 박해를 받으면서도 마오에게 계속 편지를 보내 숙청을 면함)뿐 아니라 화목한 가정이 그를 뒷받침했기 때문”이라며 덩의 끈끈한 가족애를 조명했다. 신문은 덩이 힘들 때 그의 ‘좋은 아내’ 줘린(卓琳)이 항상 곁에 있었고 문혁 때 많은 자녀들이 부모를 비판하고 등을 돌렸지만 그의 다섯 자녀는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당시 베이징대에 재학 중이었던 덩의 장남 덩푸팡(鄧樸方)이 주자파(走資派)로 몰린 아버지를 비판하라는 시달림을 피해 건물 4층에서 뛰어내려 평생 반신불수가 됐지만 끝까지 아버지를 지지한 일화는 지금도 회자된다. 덩의 가족은 1976년 문혁 직후 덩이 실각당한 뒤 탕산(唐山)대지진까지 겹쳐 온 가족이 텐트 속에서 피난 생활을 할 때도 함께 책을 보거나 카드 게임을 하는 등 캠프 온 듯한 기분으로 지냈을 만큼 가족애가 남달랐다고 신문은 소개했다. 임종 때도 부인과 자녀들의 품 속에서 행복하게 눈을 감았을 만큼 언제나 든든한 가족이 함께했다고 강조했다. 반면 마오는 혁명의 대장정 속에서 가족을 차례로 잃었다. 마오가 임종을 앞두고 병상에서 큰딸 리민(李敏)의 손을 잠시 잡은 것이 죽기 전 가족과 보낸 시간의 전부였다고 신문은 적었다. 마오의 첫째 부인 양카이후이(楊開慧)는 국민당 세력들에게 지독한 고문을 당한 뒤 처형됐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마오안잉(毛岸英)은 6·25전쟁 때 죽었다. 마오의 바람기를 참지 못해 집을 나간 것으로 전해지는 둘째 부인 허쯔전(賀子珍)과의 사이에서 둔 3남 3녀는 리민을 빼고 대부분 어린 시절 연락이 끊겼다. 셋째 부인 장칭(江靑)은 문혁 직후 자살했다.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 필리핀 파병 병사 3명 무단이탈해 술판 벌여

    필리핀 레이테주 타클로반 일대에 파견돼 태풍 피해 복구 임무를 수행 중인 아라우부대 병사 3명이 근무지를 몰래 빠져나가 술을 마시다가 적발됐다. 이에 따라 해외 파병 부대의 기강 해이도 도마 위에 올랐다. 합동참모본부 관계자는 28일 “아라우부대 소속 병사 3명이 지난 10일 오후 3시간 동안 부대를 무단이탈해 술을 마시다가 적발됐다”고 밝혔다. 이들은 일병 2명과 상병 1명으로 주둔지 인근 맥아더공원에서 필리핀 병사들과 맥주를 마시다 부대 간부에게 적발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관계자는 “이들은 군사 활동을 같이하는 필리핀군 병사들이 맥주를 함께 마시자고 권해 시내로 따라 나갔다고 진술했다”면서 “해당 병사들은 규정에 따라 사건 발생 다음날인 11일 귀국 조치됐으며 원소속부대에서 징계를 기다리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아라우부대는 지난해 12월 필리핀에 파병돼 초대형 태풍 ‘하이옌’으로 큰 피해를 입은 레이테주에서 재해복구 작업을 벌이고 있다. 주로 공병과 의료진으로 구성된 부대 장병 500여명은 그동안 초등학교, 병원, 6·25 참전용사 가옥 등 26개의 건물을 복구했고 1만 5000여명의 주민을 대상으로 진료 활동을 펼쳐 현지에서 호평을 받아 왔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중국 군사안보 전문가 황병무 국방대 명예교수

    [김문이 만난사람] 중국 군사안보 전문가 황병무 국방대 명예교수

    ‘너는 너대로 싸우고, 나는 나대로 싸운다.’ 중국의 싸움 방식이다. 우리는 중국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많은 것을 안다고 해도 여전히 잘 모르는 게 중국이다. 우선 면적으로 치면 세계 4위에 해당한다. 그리고 인구는 세계 1위, 국내총생산(GDP)은 세계 2위, 1인당 국민소득은 87위이다. 그렇다면 군사력은? 안보전략은? 궁금해지는 게 점점 많아진다. 지리적으로 우리의 이웃이면서도 한국전쟁 때는 서로 총부리를 맞대고 싸우기도 했다. 중국은 경제력으로나 군사력으로나 많은 성장을 하고 있다. 이제는 중국을 제대로 그리고 분명하게 알아야 할 때라고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지난해 11월 중국이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열도)를 포함한 방공식별구역(ADIZ)을 선포하자 일본은 ‘분쟁도서 탈환’을 명목으로 자위대에 공격적 기능을 강화했다. 베트남, 일본, 필리핀 등 해양 영유권 분쟁의 문제를 안고 있는 중국은 국력이 커짐에 따라 주변국들에 주권과 영토 보전은 물론 국익을 증대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영향력을 확대할 것으로 국제 문제 전문가들은 예견한다. 최근 국립타이완대 정치학과 중국대륙 및 양안관계 교육연구센터는 황병무(75) 국방대 명예교수의 ‘중국안보해석서’를 발간했다. 신중국군사론(1992년, 세종문화상 수상)의 내용과 각종 영문 논문, 신문 기고문 등을 분석하고 2회에 걸친 인터뷰를 통해 책을 펴냈다. 국내학자 가운데 이런 식으로 국제정치 서적을 발간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그만큼 중국의 안보에 대해 꾸준히 연구해 왔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오고 미국 캘리포니아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국방대 교수와 안보문제연구소장, 한국 국제정치학회 회장, 외교부 정책자문위원장, 대통령 국방발전자문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지난 22일 서울 여의도 자택에서 황 교수를 만났다. 먼저 국립타이완대에서 최근 발간한 책인 ‘중국안보해석서’의 내용을 물었다. “중국 특색의 군사학 학문체계의 정립을 위한 시도 외에 중국안보정책 결정의 몇 가지 영향 요소와 당군 관계, 내우외환의 연동적 위협관을 다룬 것이지요. 예를 들어 당에 의한 군의 통제로 정치안정을 유지하는 것과 또 정치 리더십 분열 시 당내에서 누가 군을 통제하느냐는 여전히 문제라는 내용 등입니다.” →중국 안보정책의 기본방향은 무엇인가요. -“미국이 민주와 자유를 추구하는 반면 중국은 평등과 공정을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대등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국가이익을 위해 동중국해, 남중국해, 아프리카 등 전 세계적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안보정책의 핵심은 이러한 이익을 지키는 것이지요. 이런 과정에서 미국이 개입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중국은 아시아문제는 아시아가 해결하기를 원합니다. 중국은 군사력의 기본은 경제이고 안보의 토대 또한 경제라는 인식하에 관련 정책을 펴나가고 있지요. 이 같은 바탕에서 요즘 들어 더욱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입장으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그동안 베트남과 일본, 필리핀 등과 해양분쟁을 겪어 왔습니다. 어떤 식으로 그런 분쟁을 해결하려고 하는지요. -“냉전기 중국은 미국을 비롯한 인도, 구소련, 베트남 등과 무력분쟁에 들어갈 때 외교 경로를 통해 평화적 해결을 시도한 뒤 군사행동을 취했습니다. 탈냉전기 중국은 강압외교의 목표와 수단이 유연해지고 있습니다. 2010년 9월 센카쿠 부근에서 발생한 중국 어선과 일본 순시선의 충돌로 중국 어민이 억류됐을 때 외교적 해결이 어렵게 되자 중국이 희토류 광물 수출을 중단하는 무역제재를 통해 중국 어민을 석방시키는 데 성공한 사례를 보면 알 수 있지요.” 한국전쟁 이후 중국은 주로 국지전 형식을 전개해 왔으며 영토분쟁이 생기면 경제적으로든 군사적으로 재빨리 응징은 하겠지만 정치적으로 영토 자체를 얻는 것은 자제하는 방식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맹주를 위해 계속 노력은 하되 영토 자체를 점령하게 되면 동아시아 국가들이 반중 친미 체제로 돌아서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또한 만약 그렇게 될 경우 중국 중심의 안보협의체를 만드는 데에도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남중국해 스카버러섬(중국명 황옌다오) 부근에서 필리핀 어민의 어로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중국 어업지도선이 필리핀 해경과 대치할 때 필리핀은 미국과 해상훈련을 실시했습니다. 중국은 함정과 항공기를 동원해 무력시위를 감행했고 필리핀이 제안한 국제해양법 중재안을 거부했지요. 또 중국은 주중 필리핀 대사를 불러 필리핀의 긴장 조성 행위에 대응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고 경고했으며, 동시에 중국인의 필리핀 여행을 잠정적으로 중단하고 필리핀 수입 과일류에 대한 검역을 대폭 강화하는 등 경제제재를 실시했습니다. 하지만 필리핀에 대한 군사행동은 하지 않았지요. 베트남과 해양분쟁이 생길 때도 해·공군력을 동원해 베트남을 압박할 수 있었지만 사태를 진정시키며 외교경로에 의한 해결을 모색했습니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어떤 정치철학을 갖고 있는지요. -“지난번 시 주석이 방한했을 때 수행했던 150명의 사절단 대부분이 경제 관련 인사들입니다. 그만큼 경제를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경제는 정치와 안보를 뒷받침하는 튼튼한 토대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선경후정(先經後政), 경제가 항상 먼저이고 정치는 그 다음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지요.” →중국과 일본의 군사력을 비교하면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는지요. -“중국의 해·공군은 일본에 비해 질적으로 떨어지지만 양적으로는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적의 동향을 탐지하는 정보능력이라든가 잠수함과 비행기간의 정보지휘 연동체제 등은 중국이 약합니다. 하지만 중국은 미국을 상대로 군사력을 꾸준히 증강시키고 있습니다. 중국은 한국전쟁 이후 전면전을 치른 경험이 없습니다. 빨리 선제공격하고 빠지는 국지전 전법을 구사하고 있지요. 다시 말해 ‘너는 너대로 싸우고 나는 나대로 싸운다’는 방식입니다.” →가끔 훈련 중인 중국 인민해방군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현재 중국 군부의 위상은 어떠하며 정치에 어느 정도 관여하는지요. -“인민해방군은 중국이라는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자긍심이 크지요. 그런데 요즘에는 당의 군대로 전문화됐습니다. 중국 상무위원 7명 중 해방군 출신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지요. 그래서 인민해방군은 일종의 압력단체가 됐습니다. 후생이나 복지예산이 줄어들면 다시 올려 달라고 압력을 넣기도 합니다. 요즘 젊은 장교들은 다시 국가의 군대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철저하게 당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조직으로 굳어졌지요.” →우리나라는 미국과 연합훈련을 통해 한·미 동맹을 과시합니다. 그런데 중국은 동맹관계인 북한과 훈련을 하지 않습니다. -“중국은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가끔 합동훈련을 하는데 북한과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 중국은 북한과 굳이 훈련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또 북한이 군사적으로 중국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도 않습니다. 북한 또한 핵을 가지고 있는 마당에 중국과 훈련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요.” →그렇다면 북한에 위급한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중국이 군사적으로 개입을 하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서두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태의 원인을 파악하고 사태의 정도에 따라 개입 여부를 결정하겠지요. 또한 미국과 한국이 서둘러 개입하지 않는 나름대로의 방법을 모색할 것입니다. 중국 정치인이나 중국 인민들의 핏속에는 침략적인 유전자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한 군사력을 앞세워 국익을 추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영토적으로 침략을 받을 경우 응징한다는 원칙을 세워 놓고 있지요.” 인터뷰를 마치면서 황 교수에게 군사안보 전문가가 된 까닭을 물었다. “글쎄요. 제가 6월 25일생인데 그 6·25라는 숫자가 운명적으로 저를 따라다녔다고 할까요(웃음). 또 제가 석사과정을 마치고 군대에 가려고 할 때 육사에서 교관요원을 처음으로 뽑았어요. 1966년부터 3년간 근무하면서 ‘게릴라’ 등 육사 부교재를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자연스럽게 안보전문가의 길로 가게 됐지요.” 선임기자 km@seoul.co.kr ■황병무는 1939년 6월 25일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 전주고를 나왔으며 서울대 외교학과, 동대학원 석사과정을 거쳤다. 미국 캘리포니아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육군사관학교에서 정치학 교관을 지냈다. 이후 국방대 교수, 안보문제연구소 소장, 한국 국제정치학회 회장, 외교부 정책자문위원장, 대통령 국방발전자문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국방대 명예교수와 대통령 국가안보자문단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신중국 군사론’, ‘전쟁과 평화의 이해’, ‘한국 안보의 영역, 쟁점, 정책’, ‘국방개혁과 안보외교’, ‘국방정책의 이론과 실제’(공저) 등이 있다. 세종문화상(국방·안보 분야), 보국훈장 천수장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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