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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기완 선생이 병상에서 문재인 정부에 남긴 말

    백기완 선생이 병상에서 문재인 정부에 남긴 말

    “민중의 자존심을 갖고 소신대로 해보시오.” 평생 민중·민족·민주 운동의 불쌈꾼(혁명가)이자 큰 어른으로 살아온 백기완(88) 통일문제연구소장. 외세의 압제와 분단, 군부독재 등 현대사를 90년 가까운 삶에 아로새긴 그의 시선은 늘 못 배우고, 못 가진 사람들을 향했다. 병상에서 백기완 선생은 “나 같은 사람의 이야기가 귀에 들리진 않겠지만 그저 병실에서 한마디 남깁니다”라며 문재인 정부를 향해 당부의 말을 남겼다. 백기완 선생은 “문재인 정부가 한반도 문제에 관해서 다가서는 그 태도, 방법. 다 환영하고 싶습니다. 생각대로 잘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한마디 보태주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라며 말문을 열었다. 세월호 리본을 단 백기완 선생은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노력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역사에 주체적인 줄기였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바로 이 땅의 민중들이 주도했던 한반도 평화운동의 그 맥락위에 서있다는 깨우침을 가지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백기완 선생은 “지난 촛불혁명은 우리 한반도의 참된 평화요, 민주요, 자주통일. 민중이 주도하는 해방통일이었습니다. 그 맥락위에 서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문재인 정부 민중적인 자부심과 민중적인 배짱을 갖고 소신대로 한번 해보시오!”라고 힘을 실어주었다.고문으로 몸이 반쪽이 될지라도 백기완 선생은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투사, 사회운동가인 동시에 새내기, 동아리, 달동네 등 수많은 한글어를 만들어낸 우리말 운동가, 소설 <버선발 이야기>, 자서전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등을 펴낸 문필가였다. 그는 1932년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아버지 백홍렬과 어머니 홍억재 사이에 4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인 백태주는 천석꾼의 부자로 장련면의 유지로 있으면서 3.1 운동 당시 수천장의 태극기를 제작하여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는 등 민족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아버지 백홍렬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재직했고, 청년운동에도 나섰다. 두 부자는 각각 1923년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에 수해와 지진피해가 있었을 때와 1934년 삼남지방 수재 당시에 의연금을 기부하고 구휼에 힘쓰는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지만 조부 백태주가 독립군에 군자금을 대어주다가 발각돼 고문 끝에 옥사당한 이후 가계가 급격히 몰락했다.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고 남북이 분단되며 가족도 나뉘어 살게 됐다. 백 선생은 이때 부산제5육군병원에서 군 복무를 했다. 전쟁 통에 징용된 작은 형이 죽기도 했다. 이같은 가족사는 이후 백 선생이 통일운동에 매진하는 계기가 됐다. 1964년 함석헌·계훈제 등과 함께 한일협정 반대운동을 벌이며 민주화 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투옥과 고문은 일상이 됐다. 장준하 등과 ‘유신헌법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 운동’을 벌였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됐다. 1979년엔 ‘YMCA 위장결혼 사건’을 주도했다가 용산구 보안사령부로 끌려가 몽둥이로 두드려 맞고 무릎을 앞으로 꺾이고 손톱을 뽑히는 등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건장하던 몸은 반쪽이 됐다. 두 번째 옥고도 치렀다. 당시 옥중에서 썼던 시 ‘묏비나리’는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원작이 됐다.마지막 원고엔 “김진숙 힘내라” 그는 인생의 막바지까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삶을 살았다. 2014년 세월호 진상규명 집회,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 등의 현장에서 맨 앞자리를 지켰다. 가장 최근 행보는 지난해 12월 ‘연내 중대재해법 제정과 김진숙 복직을 촉구하는 사회원로 기자회견’에 이름을 올린 것이었다. 당일 백 소장은 몸이 불편한 탓에 하루 온종일을 들여 쓴 육필 원고를 보내왔다. 그의 원고에는 “김진숙 힘내라”는 여섯 글자가 담겨있었다. 백원담 교수는 “아버지가 마지막 남긴 글귀는 ‘노나메기’였다. 너도나도 일하되 모두가 올바로 잘사는 세상이라는 뜻”이라고 밝혔다.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 장례위원회’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빈소를 차리고 장례는 오일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전국 16개 지역에 분향소 및 온라인 추모관(baekgiwan.net)도 운영한다. 발인일인 19일 오후 종로구 대학로에서 노제가 진행된다. 여야는 모두 고인을 애도했다. 더불어민주당 신영대 대변인은 “영원한 민중의 벗, 백기완 선생님의 정신은 우리 곁에 남아 영원할 것”이라고 했다. 국민의힘 김은혜 대변인은 “우리가 누리는 평등한 세상은 고인의 덕분”이라 했다. 정의당 정호진 대변인은 “사회적 약자들을 역사상 처음으로 정치의 주인으로 호명했다”고 추도했다. 장례위원회는 “선생님의 뜻에 따라 조화를 받지 않는다. 선생님은 (생전) 조화를 보낼 값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이어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으로부터도 (문재인 대통령 명의의) 조화를 보내겠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거절했다”고 덧붙였다. “내 이야기를 듣고 발을 구르던 젊은이들은 지금 다 뭘 하는지. 그러나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가슴에 심어 주는 것 자체가 성공의 역사라고 믿는 것, 그게 진보사상이고 이야기예요.”(2013년 4월 22일자 서울신문 인터뷰)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못다 한 ‘임을 위한 행진’… 저 하늘에서 계속되리라

    못다 한 ‘임을 위한 행진’… 저 하늘에서 계속되리라

    한일협정 반대로 민주화 운동 전면 나서YMCA 위장결혼 사건 등 수차례 옥고백원담 “父 마지막 글귀는 ‘노나메기’”“김미숙·김진숙 힘내라” 병상 메시지도 “그 돈 이웃 도와야” 유지… 靑조화 거부전국 16곳 분향소… 19일 대학로 노제“내 이야기를 듣고 발을 구르던 젊은이들은 지금 다 뭘 하는지. 그러나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가슴에 심어 주는 것 자체가 성공의 역사라고 믿는 것, 그게 진보사상이고 이야기예요.”(2013년 4월 22일자 서울신문 인터뷰) 백기완(88)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5일 새벽 폐렴 투병 끝에 별세했다. 평생 민중·민족·민주 운동의 불쌈꾼(혁명가)이자 큰 어른으로 살아온 그는 민중의 장쾌한 수호자 ‘장산곶매’가 돼 하늘로 떠났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정숙씨와 딸 원담(성공회대 교수)·미담(화가)·현담(출판사), 아들 일(울산과학대 교수)씨가 있다. 90년 가까운 그의 삶엔 외세의 압제와 분단, 군부독재 등 질곡의 현대사가 아로새겨져 있다. 그는 못 배우고 못 가진, 그리하여 배우고 가진 자들에게 압제받는 이들을 위해 기꺼이 ‘앞서서 나가는’ 삶을 선택했다.백 소장은 1933년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태어났다. 정규교육이라고는 국민학교 4학년까지 다닌 게 전부인 데다 분단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비극을 겪었지만 독학으로 통일 문제와 사회 모순에 대한 인식을 키워 나갔다. 6·25전쟁 중 해외 유학을 권유받았으나 ‘조국을 두고 나 혼자만 유학을 갈 수 없다’며 거절했다. 1964년 함석헌·계훈제 등과 함께 한일협정 반대운동을 벌이며 민주화 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투옥과 고문은 일상이 됐다. 장준하 등과 ‘유신헌법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 운동’을 벌였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됐다. 1979년엔 ‘YMCA 위장결혼 사건’을 주도했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계엄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당시 옥중에서 썼던 시 ‘묏비나리’는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원작이 됐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치러진 13대 대선에서는 김영삼·김대중 후보 단일화를 압박하기 위해 독자 민중후보로 출마했다가 직전에 사퇴했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는 노동자 민중후보로 추대됐지만 현실 정치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는 인생의 막바지까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삶을 살았다. 2014년 세월호 진상규명 집회,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 등의 현장에서 맨 앞자리를 지켰다. 송경동 시인은 “백 선생이 병상에서 쓰신 마지막 글귀는 ‘김미숙 어머니 힘내라’, ‘김진숙 힘내라’였다”고 전했다. 백원담 교수는 “아버지가 마지막 남긴 글귀는 ‘노나메기’였다. 너도나도 일하되 모두가 올바로 잘사는 세상이라는 뜻”이라고 밝혔다.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선다’는 평소 지론답게 여러 권의 수필집과 시집을 냈다. 우리말 사랑도 남달랐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장산곶매 이야기’, ‘젊은 날’, ‘버선발 이야기’ 등을 출간했다.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 장례위원회’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빈소를 차리고 장례는 오일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전국 16개 지역에 분향소 및 온라인 추모관(baekgiwan.net)도 운영한다. 발인일인 19일 오후 종로구 대학로에서 노제가 진행된다. 장례위원회는 “선생님의 뜻에 따라 조화를 받지 않는다. 선생님은 (생전) 조화를 보낼 값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이어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으로부터도 (문재인 대통령 명의의) 조화를 보내겠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거절했다”고 덧붙였다. 여야는 모두 고인을 애도했다. 더불어민주당 신영대 대변인은 “영원한 민중의 벗, 백기완 선생님의 정신은 우리 곁에 남아 영원할 것”이라고 했다. 국민의힘 김은혜 대변인은 “우리가 누리는 평등한 세상은 고인의 덕분”이라 했다. 정의당 정호진 대변인은 “사회적 약자들을 역사상 처음으로 정치의 주인으로 호명했다”고 추도했다. 이두걸 기자 douzirl@seoul.co.kr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 “영천·대구 같은 생활권… 도시철도 1호선 연장은 상생 1호 사업”

    “영천·대구 같은 생활권… 도시철도 1호선 연장은 상생 1호 사업”

    “영천시 승격 40주년을 맞은 뜻깊은 올해를 대구도시철도 1호선의 영천 연장 원년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최기문 경북 영천시장은 15일 서울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영천 발전과 백년대계를 위해 오는 6월 확정될 제4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에 대구철도 1호선 영천 연장 사업이 반드시 반영되도록 노력하겠다”며 이같이 밝혔다. 최 시장은 이어 “영천은 대도시인 대구와 불과 26㎞ 거리에 있어 사실상 대구생활권이지만 광역철도망 구축에서 소외돼 양 도시 시민들이 불편을 겪고 지역발전을 막고 있다”면서 “특히 영천 경마공원 및 대구경북경제자유구역 영천지식창조형지구 조성 등 새로운 교통수요가 창출될 대규모 사업이 활발히 추진 중인 점을 감안할 때 대구철도 1호선 연장 사업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또 최 시장은 “대구철도 1호선 영천 연장으로 대구 도심권과 영천시가 실질적인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이면서 지역 균형발전과 경제권 확대 등을 통한 양 도시 상생발전을 촉진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다음은 최 시장과의 일문일답.-대구철도 1호선 영천 연장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국토교통부가 수립 중인 제4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에 반영시키기 위해 총력을 쏟고 있다. 정치권과 중앙정부에 대구철도 1호선 영천 연장이 지역 발전에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며 강력하게 건의하고 있다. 6월 확정을 앞둔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반영되게 하려고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다. 이 사업은 2023년 준공 예정인 경산시 하양읍 하양역에서 영천시 금호읍까지 5㎞ 철로를 연장하는 광역철도 프로젝트다. 총사업비 2052억원 정도가 예상된다. 현재 국토부가 제4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 반영에 대한 연구용역과 타당성 검토를 진행하고 있다.” -대구철도가 영천까지 연장되면 어떤 효과가 기대되나. “지역 숙원인 영천~대구의 원활한 교통 소통에 일대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뿐만 아니라 대도시권 기업 유치, 일반산업단지 공영 개발(29만 7000㎡), 금호읍 신월리 신도시(1만명 거주 규모) 등 현재 추진하는 대규모 사업과 연계돼 시너지 효과를 낼 것으로 보인다. 통학과 출퇴근을 위해 대구~영천 대구대 시내버스를 갈아타야 하는 등 어려움을 겪는 대구대 교직원과 학생 3만여명도 혜택을 입게 된다.” -지지부진하던 영천경마공원(렛츠런파크 영천) 조성 사업이 올해부터 본격 추진된다. “영천은 2009년 12월 과천·제주·부산에 이어 한국마사회의 제4경마공원 후보지로 지정된 이후 사업 추진이 계속 담보 상태였다. 마침내 지난해 말 경북도로부터 지역개발사업구역 지정 및 실시계획 최종 승인 고시를 받으면서 장기간 끌어오던 숙원사업이 해결됐다. 입지후보지 확정 이후 11년 만이다. 올해부터 건축 허가 및 시공사 선정 등을 시작으로 공사에 들어가 2025년 완공할 예정이다.” -사업 규모는. “영천 금호읍 성천·대미리 일대 부지 145만 2813㎡에 3657억원을 투입해 조성한다. 과천경마공원(114만㎡)보다 넓은 국내 최대 규모다. 특히 영천 경마공원에는 국내 최초로 국제 규격의 잔디 주로가 설치된다. 영국 더비, 호주 멜버른 등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경마 경주는 대부분 잔디 주로에서 박진감 넘치게 펼쳐지고 있다. 경북도와 영천시가 부지 매입비로 600억원을, 마사회가 건설비로 3057억원을 투입한다.” -예상되는 연간 이용객은. “마사회의 영천 경마공원 기본계획을 보면 개장 초기 경마 관람 입장객은 하루 최대 2847명에서 7년차에는 9016명까지 크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경마 관람객과 별도로 경마공원 내 가족단위 입장객은 5월 하루 최대 5476명에 이를 것으로 예측됐다. 연간 공원 입장객은 35만명에 이를 전망이다.” -지방 소멸위기 극복 및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인구 늘리기에 힘을 쏟고 있다. “2018년 7월 취임 이후 인구 늘리기에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 영천도 다른 지역처럼 저출산·고령화와 전출 등으로 인구 감소가 심각한 상황이다. 영천 인구는 1966년 19만 8471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계속 감소해 지난해 말 10만 2015명을 기록했다. 10만명 붕괴 위기에 처했다. 올해도 인구 증가를 위해 임신 및 출산지원금 지급, 화남·화북·자양지역 국공립어린이집 설치, 귀농·귀촌 지원사업, 육군 3사관학교 등 군부대와 학교, 기관, 단체를 대상으로 주소 이전 운동을 폭넓게 펼쳐 나가겠다. ‘기업 하기 좋은 도시’를 조성해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일도 중요하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어려움을 겪는 시민들을 위한 지원책은 어떤 게 있나. “소상공인과 영세상인 등을 지원하기 위해 8개 분야, 76건의 민생안전 종합대책을 수립해 촘촘히 추진하고 있다. 특히 지난 설 명절 전에 모든 주민에게 1인당 10만원씩의 제2차 영천형 재난지원금을 지원했다. 지난해 5월에는 대구·경북 최초로 전 시민 재난긴급생활비를 지원하는 등 시민 생계안정과 지역 경기 활성화를 위해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시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영천은 포은 정몽주, 최무선 장군, 노계 박인로 등 충신들이 태어난 호국충절의 자랑스러운 고장이다. 또 임진왜란 때 영천성 수복전투, 6·25 전쟁 때 영천전투 등으로 위기의 조국을 지킨 최후의 보루이자 역사적인 고장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 영천 시민들은 솔선수범해 코로나19 방역의 모범이 되고 있다. 지난해 2월 18일 우리 지역에서 신천지 대구교회 교인으로 인해 경북 최초로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했고 이후 인접 대구, 경산, 청도, 포항 등지에서 확진자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음에도 성공적인 방역으로 차단했다. 시민들께서 코로나 극복을 위해 고통과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자율 방역에 적극적으로 동참해 준 덕분이다.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그렇다고 아직은 방심할 때가 아니다. 개인 마스크 착용, 손 씻기 등 개인 방역수칙을 철저히 하고 불필요한 타 지역 방문을 자제해 달라.” 영천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최기문 경북 영천 시장은 보수 텃밭서 무소속 당선… 경찰 총수 출신 첫 단체장 최기문 경북 영천시장은 경찰총수 출신의 전국 제1호 기초자치단체장이다. 행정고시(제18회) 출신으로 1981년 경찰에 투신해 2005년 퇴임 때까지 20여년간 재임하는 동안 꼼꼼한 성격에 일 처리가 깔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서울경찰청 정보관리부장. 경찰청 기획정보심의관 등을 거친 전형적인 정보통이다. 대통령비서실 행정관, 치안비서관, 경찰청 차장, 경찰대학장 등 경찰 핵심 자리를 두루 경험했으며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는 우리나라 경찰 사상 최초의 임기제 경찰청장을 지냈다. 인생유전이라고 했던가. 퇴임 후 약 10년을 낙천·낙선하며 무관으로 지냈다. ‘고향 발전’ 의지로 19대, 20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연속 출마했으나 낙선한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일념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고 다시 한번 2018년 6·13 지방선거에 영천시장 무소속 후보로 나서 시민들의 부름을 받았다. 주민들 사이에 보수의 텃밭인 영천에서 무소속으로 도전, 당선 드라마를 써내려 간 의지의 정치인으로 각인됐다. 경북대사대부고와 영남대를 졸업했고 서울대와 동국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 “中 반대하면 가만 안 둬”… 물어뜯을수록 잘나가는 환구시보

    “中 반대하면 가만 안 둬”… 물어뜯을수록 잘나가는 환구시보

    “BTS, 중국 무시” “호주, 중국 신발 밑의 껌” 자극적 내용으로 갈등관계 국가들 맹비난해외는 물론 자국에서도 “부끄럽다” 외면 최고지도부 가려운 곳 긁어주고 ‘악역’ 자처 시진핑 등 선호… 하루 200만부 발행 매체로중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감이 확산되면서 ‘애국기사 제조기’로 불리는 환구시보·글로벌타임스를 둘러싼 논란도 커지고 있다. 하루 200만부 가까이 발행되는 환구시보는 대륙의 주요 매체로 성장했지만 미국과 영국, 일본, 호주 등 중국과 갈등을 빚는 모든 나라를 적나라하게 비난해 식자층의 혐오도 상당하다. 중국에 반대하는 모든 대상을 ‘물어뜯어’ 지지자와 반대파를 동시에 양산하는 ‘환구시보의 정치학’을 살펴봤다. ●인민일보 잉여인력 해결하고자 만들어진 서브 브랜드 1948년 공산당 기관지로 출발한 인민일보는 이제 하루 300만부가량을 찍어 내며 본토를 대표하는 일간지로 자리매김했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본격화한 1980년대부터 해외로 특파원을 보냈고 국제부 기사도 자연스레 늘었다. 그런데 인민일보는 지금도 평일 20면, 주말 8면에 불과할 만큼 지면이 적은 편이다. 전 세계로 나간 특파원 상당수가 기사를 쓰지 못하고 허송세월했다. 이에 회사는 “거액을 들여 각국으로 파견한 이들에게 일할 기회를 주고 회사 수익도 창출하자”며 1993년 1월 환구시보를 창간했다. 외신 기사에 특화된 인민일보의 ‘서브 브랜드’라고 할 수 있다. 환구시보는 작정하고 돈을 벌고자 만든 신문이다. 중국 공산당의 기본 철학을 따르지만 인민일보·신화통신 등 정론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운영된다. 신문 1면은 한 건의 기사로 채워진다. 민족주의 정서가 가득한 제목을 달아 독자의 감정을 자극한다. 과거 한국의 지하철에서 쉽게 볼 수 있던 무료 일간지와 구성이 비슷하다. 환구시보는 하루 발행 부수가 150만부를 넘어 상업적으로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09년 4월부터 영문판인 ‘글로벌타임스’도 발행한다. 두 매체는 홈페이지 주소도 다르고 기사 내용 역시 미세하게나마 차이가 있다. 환구시보가 국내 독자에게 초점을 맞췄다면, 글로벌타임스는 외국인을 위한 홍보에 중점을 뒀기 때문으로 보인다. 인민일보가 자사 국제 뉴스에 중국 정부의 의중을 담고자 두 종류의 ‘부캐’(부캐릭터·평소 모습이 아닌 새로운 성격)를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 한국에는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둘러싸고 한중 갈등이 불거지면서 이름이 알려졌다. 당시 환구시보는 “한국 보수주의자들은 김치만 먹어서 멍청해진 것이냐”, “앞으로 한국인은 수많은 사찰과 교회에서 평안을 위해 기도나 하라”, “사드가 한반도에 배치되면 한국은 국가 지위에 악영향을 받을 것” 등 막말을 서슴지 않았다. 일부 전문가는 “환구시보는 인민일보가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황색언론 매체다. 중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볼 수 없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한 외교 소식통은 “지분 구조에 관계없이 관영 매체로 보는 것이 맞다”면서 “주요국 정부들은 환구시보에 오보가 실리면 (신문사가 아닌) 중국 정부에 문제를 제기한다. 매체의 논조를 당국이 결정한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후시진 편집인, 재산·여자 논란에도 승승장구환구시보가 지금의 유명세를 얻게 된 것은 후시진(61) 편집인(편집국장)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1960년 베이징에서 태어나 인민해방군 난징국제관계학원(학부)을 마치고 베이징외국어대에서 러시아학(석사)을 전공했다. 지금은 중국에서 극좌(우리나라의 우파) 언론인으로 분류되지만 1989년 6월 톈안먼 사태 때는 목숨을 걸고 민주화 시위에 참여했을 정도로 개혁 성향이 강했다. 같은 해 11월 인민일보에 입사해 1991년 구소련 붕괴 당시 현장을 누볐고 1993년 유고슬라비아 특파원으로 발령받아 보스니아 내전도 목격했다. 해외 취재 경험을 통해 ‘아무리 대국이라도 통제력을 잃으면 한순간에 나라가 무너진다’는 사실을 체감했다고 한다. 1997년 환구시보 부편집인을 거쳐 2005년부터 편집인을 맡고 있다. 그는 본토에서 사용이 금지된 트위터와 유튜브 등을 자유롭게 쓸 수 있어 ‘중국 외교부의 비공식 대변인’으로도 불린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그에게 전권을 부여했다’는 소문도 돈다. 중국 정부보다 앞서 해당 사실을 파악하고 단독 기사를 내보내는 등 정보력도 상당하다. 하지만 그는 사실관계를 왜곡한 보도와 논조로 많은 나라와 불화를 겪고 있다. 지난해 10월 방탄소년단(BTS)이 밴플리트상 수상 소감에서 “6·25전쟁은 한미 양국이 겪은 고난의 역사”라는 취지로 말한 것을 두고 “중국을 무시했다”고 호도했다가 전 세계에서 비난 받았다. 시 주석 등 중국 최고지도부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려고 ‘악역’을 자처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최근 그는 불륜 및 혼외자 논란에 휩싸였다. 지난해 말 부편집인 돤징타오(45)가 “후 편집인이 오랫동안 전현직 직원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 2명의 혼외자를 두고 있다”며 공산당 감찰기구에 고발하면서부터다. 언론인으로서 모으기 힘든 거액의 자산을 축적했다는 폭로도 이어졌다. 이에 대해 베이징 소식통은 “후 편집인의 개인적 명성에 타격이 있을 수 있지만 자리에서 물러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현 중국 지도부는 능력·도덕성보다 당에 대한 충성도를 우선시한다. 의혹이 사실로 밝혀져도 그가 보여 준 성과를 감안해 덮고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공산당 매파 심중 엿보는 창구” vs “언론 품격 저하” 지난해 코로나19 확산을 계기로 반중 정서가 강하게 퍼지자 환구시보와 후 편집인의 공격성도 비례해 커졌다. 인민일보와 신화통신 등이 외부 세계의 시선을 의식해 품위를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환구시보는 감염병 피해 국가들의 당연한 불만까지도 대놓고 비난하는 기사와 사설을 실었다. 상대 국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왔다.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가 코로나19 ‘중국 책임론’을 거론하며 국제조사를 요구하자 후 편집인이 “호주는 중국의 신발 밑에 붙어 있는 껌”이라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언론학계에서는 환구시보가 ‘돌격대장’ 역할을 맡아 중국 공산당 매파의 의중을 국제사회에 ‘질러 본’ 뒤 돌아오는 여론을 가늠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본다. 일종의 ‘간 보기’다. 그래서 중국 언론이 세계 각국에 ‘막말을 했다’고 하면 출처는 십중팔구 환구시보다. 과거 우리나라 종편 논객들이 한쪽으로 치우쳐 반대 입장을 가진 이들에게 조롱과 분노를 쏟아 내는 것과 비슷하다. 중국에서도 환구시보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 상당수 오피니언 리더는 “이런 기사와 사설이 나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라며 이 신문을 읽지 말라고 권한다. 문제는 시 주석 등 지도부가 환구시보의 홍보 방식을 선호한다는 점이다. 중국 정부의 ‘전랑외교’(중국과 갈등을 빚는 국가를 강하게 맞받아치는 외교 기조)를 충실히 뒷받침하고 있어서다. 2019년 홍콩 명보는 소식통의 말을 빌려 “시 주석이 후시진을 칭찬하고 인정했다. 당국도 각 기관에 ‘환구시보 선전 방식을 본받으라’고 전했다”고 보도했다. 환구시보 기사는 중국 내 매파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한 면도 있다. 하지만 지나친 민족주의 성향으로 중국 언론 전체의 품격을 떨어뜨린다는 비판도 크다. ‘중국은 늘 옳고 서방은 무조건 나쁘다’는 식의 이분법적 논리가 중국의 건전한 발전에 악영향을 준다는 우려도 나온다. 마더융 런민대 국제관계학원 교수는 “전랑외교는 자신의 관점을 상대방에게 억지로 주입하려고 한다. 상대방이 이를 받아들일지 여부는 신경쓰지 않는다”면서 “이제라도 중국 외교 당국은 ‘다른 나라가 우리의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생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베이징 류지영 특파원 superryu@seoul.co.kr
  • “中 반대하면 가만 안 둬”… 물어뜯을수록 잘나가는 환구시보

    “中 반대하면 가만 안 둬”… 물어뜯을수록 잘나가는 환구시보

    “BTS, 중국 무시” “호주, 중국 신발 밑의 껌” 자극적 내용으로 갈등관계 국가들 맹비난해외는 물론 자국에서도 “부끄럽다” 외면 최고지도부 가려운 곳 긁어주고 ‘악역’ 자처 시진핑 등 선호… 하루 200만부 발행 매체로중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감이 확산되면서 ‘애국기사 제조기’로 불리는 환구시보·글로벌타임스를 둘러싼 논란도 커지고 있다. 하루 200만부 가까이 발행되는 환구시보는 대륙의 주요 매체로 성장했지만 미국과 영국, 일본, 호주 등 중국과 갈등을 빚는 모든 나라를 적나라하게 비난해 식자층의 혐오도 상당하다. 중국에 반대하는 모든 대상을 ‘물어뜯어’ 지지자와 반대파를 동시에 양산하는 ‘환구시보의 정치학’을 살펴봤다. ●인민일보 잉여인력 해결하고자 만들어진 서브 브랜드 1948년 공산당 기관지로 출발한 인민일보는 이제 하루 300만부가량을 찍어 내며 본토를 대표하는 일간지로 자리매김했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본격화한 1980년대부터 해외로 특파원을 보냈고 국제부 기사도 자연스레 늘었다. 그런데 인민일보는 지금도 평일 20면, 주말 8면에 불과할 만큼 지면이 적은 편이다. 전 세계로 나간 특파원 상당수가 기사를 쓰지 못하고 허송세월했다. 이에 회사는 “거액을 들여 각국으로 파견한 이들에게 일할 기회를 주고 회사 수익도 창출하자”며 1993년 1월 환구시보를 창간했다. 외신 기사에 특화된 인민일보의 ‘서브 브랜드’라고 할 수 있다. 환구시보는 작정하고 돈을 벌고자 만든 신문이다. 중국 공산당의 기본 철학을 따르지만 인민일보·신화통신 등 정론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운영된다. 신문 1면은 한 건의 기사로 채워진다. 민족주의 정서가 가득한 제목을 달아 독자의 감정을 자극한다. 과거 한국의 지하철에서 쉽게 볼 수 있던 무료 일간지와 구성이 비슷하다. 환구시보는 하루 발행 부수가 150만부를 넘어 상업적으로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09년 4월부터 영문판인 ‘글로벌타임스’도 발행한다. 두 매체는 홈페이지 주소도 다르고 기사 내용 역시 미세하게나마 차이가 있다. 환구시보가 국내 독자에게 초점을 맞췄다면, 글로벌타임스는 외국인을 위한 홍보에 중점을 뒀기 때문으로 보인다. 인민일보가 자사 국제 뉴스에 중국 정부의 의중을 담고자 두 종류의 ‘부캐’(부캐릭터·평소 모습이 아닌 새로운 성격)를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 한국에는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둘러싸고 한중 갈등이 불거지면서 이름이 알려졌다. 당시 환구시보는 “한국 보수주의자들은 김치만 먹어서 멍청해진 것이냐”, “앞으로 한국인은 수많은 사찰과 교회에서 평안을 위해 기도나 하라”, “사드가 한반도에 배치되면 한국은 국가 지위에 악영향을 받을 것” 등 막말을 서슴지 않았다. 일부 전문가는 “환구시보는 인민일보가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황색언론 매체다. 중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볼 수 없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한 외교 소식통은 “지분 구조에 관계없이 관영 매체로 보는 것이 맞다”면서 “주요국 정부들은 환구시보에 오보가 실리면 (신문사가 아닌) 중국 정부에 문제를 제기한다. 매체의 논조를 당국이 결정한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후시진 편집인, 재산·여자 논란에도 승승장구환구시보가 지금의 유명세를 얻게 된 것은 후시진(61) 편집인(편집국장)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1960년 베이징에서 태어나 인민해방군 난징국제관계학원(학부)을 마치고 베이징외국어대에서 러시아학(석사)을 전공했다. 지금은 중국에서 극좌(우리나라의 우파) 언론인으로 분류되지만 1989년 6월 톈안먼 사태 때는 목숨을 걸고 민주화 시위에 참여했을 정도로 개혁 성향이 강했다. 같은 해 11월 인민일보에 입사해 1991년 구소련 붕괴 당시 현장을 누볐고 1993년 유고슬라비아 특파원으로 발령받아 보스니아 내전도 목격했다. 해외 취재 경험을 통해 ‘아무리 대국이라도 통제력을 잃으면 한순간에 나라가 무너진다’는 사실을 체감했다고 한다. 1997년 환구시보 부편집인을 거쳐 2005년부터 편집인을 맡고 있다. 그는 본토에서 사용이 금지된 트위터와 유튜브 등을 자유롭게 쓸 수 있어 ‘중국 외교부의 비공식 대변인’으로도 불린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그에게 전권을 부여했다’는 소문도 돈다. 중국 정부보다 앞서 해당 사실을 파악하고 단독 기사를 내보내는 등 정보력도 상당하다. 하지만 그는 사실관계를 왜곡한 보도와 논조로 많은 나라와 불화를 겪고 있다. 지난해 10월 방탄소년단(BTS)이 밴플리트상 수상 소감에서 “6·25전쟁은 한미 양국이 겪은 고난의 역사”라는 취지로 말한 것을 두고 “중국을 무시했다”고 호도했다가 전 세계에서 비난 받았다. 시 주석 등 중국 최고지도부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려고 ‘악역’을 자처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최근 그는 불륜 및 혼외자 논란에 휩싸였다. 지난해 말 부편집인 돤징타오(45)가 “후 편집인이 오랫동안 전현직 직원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 2명의 혼외자를 두고 있다”며 공산당 감찰기구에 고발하면서부터다. 언론인으로서 모으기 힘든 거액의 자산을 축적했다는 폭로도 이어졌다. 이에 대해 베이징 소식통은 “후 편집인의 개인적 명성에 타격이 있을 수 있지만 자리에서 물러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현 중국 지도부는 능력·도덕성보다 당에 대한 충성도를 우선시한다. 의혹이 사실로 밝혀져도 그가 보여 준 성과를 감안해 덮고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공산당 매파 심중 엿보는 창구” vs “언론 품격 저하” 지난해 코로나19 확산을 계기로 반중 정서가 강하게 퍼지자 환구시보와 후 편집인의 공격성도 비례해 커졌다. 인민일보와 신화통신 등이 외부 세계의 시선을 의식해 품위를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환구시보는 감염병 피해 국가들의 당연한 불만까지도 대놓고 비난하는 기사와 사설을 실었다. 상대 국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왔다.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가 코로나19 ‘중국 책임론’을 거론하며 국제조사를 요구하자 후 편집인이 “호주는 중국의 신발 밑에 붙어 있는 껌”이라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언론학계에서는 환구시보가 ‘돌격대장’ 역할을 맡아 중국 공산당 매파의 의중을 국제사회에 ‘질러 본’ 뒤 돌아오는 여론을 가늠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본다. 일종의 ‘간 보기’다. 그래서 중국 언론이 세계 각국에 ‘막말을 했다’고 하면 출처는 십중팔구 환구시보다. 과거 우리나라 종편 논객들이 한쪽으로 치우쳐 반대 입장을 가진 이들에게 조롱과 분노를 쏟아 내는 것과 비슷하다. 중국에서도 환구시보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 상당수 오피니언 리더는 “이런 기사와 사설이 나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라며 이 신문을 읽지 말라고 권한다. 문제는 시 주석 등 지도부가 환구시보의 홍보 방식을 선호한다는 점이다. 중국 정부의 ‘전랑외교’(중국과 갈등을 빚는 국가를 강하게 맞받아치는 외교 기조)를 충실히 뒷받침하고 있어서다. 2019년 홍콩 명보는 소식통의 말을 빌려 “시 주석이 후시진을 칭찬하고 인정했다. 당국도 각 기관에 ‘환구시보 선전 방식을 본받으라’고 전했다”고 보도했다. 환구시보 기사는 중국 내 매파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한 면도 있다. 하지만 지나친 민족주의 성향으로 중국 언론 전체의 품격을 떨어뜨린다는 비판도 크다. ‘중국은 늘 옳고 서방은 무조건 나쁘다’는 식의 이분법적 논리가 중국의 건전한 발전에 악영향을 준다는 우려도 나온다. 마더융 런민대 국제관계학원 교수는 “전랑외교는 자신의 관점을 상대방에게 억지로 주입하려고 한다. 상대방이 이를 받아들일지 여부는 신경쓰지 않는다”면서 “이제라도 중국 외교 당국은 ‘다른 나라가 우리의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생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베이징 류지영 특파원 superryu@seoul.co.kr
  • “영천·대구 같은 생활권… 도시철도 1호선 연장은 상생 1호 사업”

    “영천·대구 같은 생활권… 도시철도 1호선 연장은 상생 1호 사업”

    “영천시 승격 40주년을 맞은 뜻깊은 올해를 대구도시철도 1호선의 영천 연장 원년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최기문 경북 영천시장은 15일 서울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영천 발전과 백년대계를 위해 오는 6월 확정될 제4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에 대구철도 1호선 영천 연장 사업이 반드시 반영되도록 노력하겠다”며 이같이 밝혔다. 최 시장은 이어 “영천은 대도시인 대구와 불과 26㎞ 거리에 있어 사실상 대구생활권이지만 광역철도망 구축에서 소외돼 양 도시 시민들이 불편을 겪고 지역발전을 막고 있다”면서 “특히 영천 경마공원 및 대구경북경제자유구역 영천지식창조형지구 조성 등 새로운 교통수요가 창출될 대규모 사업이 활발히 추진 중인 점을 감안할 때 대구철도 1호선 연장 사업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또 최 시장은 “대구철도 1호선 영천 연장으로 대구 도심권과 영천시가 실질적인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이면서 지역 균형발전과 경제권 확대 등을 통한 양 도시 상생발전을 촉진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다음은 최 시장과의 일문일답.-대구철도 1호선 영천 연장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국토교통부가 수립 중인 제4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에 반영시키기 위해 총력을 쏟고 있다. 정치권과 중앙정부에 대구철도 1호선 영천 연장이 지역 발전에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며 강력하게 건의하고 있다. 6월 확정을 앞둔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반영되게 하려고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다. 이 사업은 2023년 준공 예정인 경산시 하양읍 하양역에서 영천시 금호읍까지 5㎞ 철로를 연장하는 광역철도 프로젝트다. 총사업비 2052억원 정도가 예상된다. 현재 국토부가 제4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 반영에 대한 연구용역과 타당성 검토를 진행하고 있다.” -대구철도가 영천까지 연장되면 어떤 효과가 기대되나. “지역 숙원인 영천~대구의 원활한 교통 소통에 일대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뿐만 아니라 대도시권 기업 유치, 일반산업단지 공영 개발(29만 7000㎡), 금호읍 신월리 신도시(1만명 거주 규모) 등 현재 추진하는 대규모 사업과 연계돼 시너지 효과를 낼 것으로 보인다. 통학과 출퇴근을 위해 대구~영천 대구대 시내버스를 갈아타야 하는 등 어려움을 겪는 대구대 교직원과 학생 3만여명도 혜택을 입게 된다.” -지지부진하던 영천경마공원(렛츠런파크 영천) 조성 사업이 올해부터 본격 추진된다. “영천은 2009년 12월 과천·제주·부산에 이어 한국마사회의 제4경마공원 후보지로 지정된 이후 사업 추진이 계속 담보 상태였다. 마침내 지난해 말 경북도로부터 지역개발사업구역 지정 및 실시계획 최종 승인 고시를 받으면서 장기간 끌어오던 숙원사업이 해결됐다. 입지후보지 확정 이후 11년 만이다. 올해부터 건축 허가 및 시공사 선정 등을 시작으로 공사에 들어가 2025년 완공할 예정이다.” -사업 규모는. “영천 금호읍 성천·대미리 일대 부지 145만 2813㎡에 3657억원을 투입해 조성한다. 과천경마공원(114만㎡)보다 넓은 국내 최대 규모다. 특히 영천 경마공원에는 국내 최초로 국제 규격의 잔디 주로가 설치된다. 영국 더비, 호주 멜버른 등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경마 경주는 대부분 잔디 주로에서 박진감 넘치게 펼쳐지고 있다. 경북도와 영천시가 부지 매입비로 600억원을, 마사회가 건설비로 3057억원을 투입한다.” -예상되는 연간 이용객은. “마사회의 영천 경마공원 기본계획을 보면 개장 초기 경마 관람 입장객은 하루 최대 2847명에서 7년차에는 9016명까지 크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경마 관람객과 별도로 경마공원 내 가족단위 입장객은 5월 하루 최대 5476명에 이를 것으로 예측됐다. 연간 공원 입장객은 35만명에 이를 전망이다.” -지방 소멸위기 극복 및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인구 늘리기에 힘을 쏟고 있다. “2018년 7월 취임 이후 인구 늘리기에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 영천도 다른 지역처럼 저출산·고령화와 전출 등으로 인구 감소가 심각한 상황이다. 영천 인구는 1966년 19만 8471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계속 감소해 지난해 말 10만 2015명을 기록했다. 10만명 붕괴 위기에 처했다. 올해도 인구 증가를 위해 임신 및 출산지원금 지급, 화남·화북·자양지역 국공립어린이집 설치, 귀농·귀촌 지원사업, 육군 3사관학교 등 군부대와 학교, 기관, 단체를 대상으로 주소 이전 운동을 폭넓게 펼쳐 나가겠다. ‘기업 하기 좋은 도시’를 조성해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일도 중요하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어려움을 겪는 시민들을 위한 지원책은 어떤 게 있나. “소상공인과 영세상인 등을 지원하기 위해 8개 분야, 76건의 민생안전 종합대책을 수립해 촘촘히 추진하고 있다. 특히 지난 설 명절 전에 모든 주민에게 1인당 10만원씩의 제2차 영천형 재난지원금을 지원했다. 지난해 5월에는 대구·경북 최초로 전 시민 재난긴급생활비를 지원하는 등 시민 생계안정과 지역 경기 활성화를 위해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시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영천은 포은 정몽주, 최무선 장군, 노계 박인로 등 충신들이 태어난 호국충절의 자랑스러운 고장이다. 또 임진왜란 때 영천성 수복전투, 6·25 전쟁 때 영천전투 등으로 위기의 조국을 지킨 최후의 보루이자 역사적인 고장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 영천 시민들은 솔선수범해 코로나19 방역의 모범이 되고 있다. 지난해 2월 18일 우리 지역에서 신천지 대구교회 교인으로 인해 경북 최초로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했고 이후 인접 대구, 경산, 청도, 포항 등지에서 확진자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음에도 성공적인 방역으로 차단했다. 시민들께서 코로나 극복을 위해 고통과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자율 방역에 적극적으로 동참해 준 덕분이다.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그렇다고 아직은 방심할 때가 아니다. 개인 마스크 착용, 손 씻기 등 개인 방역수칙을 철저히 하고 불필요한 타 지역 방문을 자제해 달라.” 영천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최기문 경북 영천 시장은 보수 텃밭서 무소속 당선… 경찰 총수 출신 첫 단체장 최기문 경북 영천시장은 경찰총수 출신의 전국 제1호 기초자치단체장이다. 행정고시(제18회) 출신으로 1981년 경찰에 투신해 2005년 퇴임 때까지 20여년간 재임하는 동안 꼼꼼한 성격에 일 처리가 깔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서울경찰청 정보관리부장. 경찰청 기획정보심의관 등을 거친 전형적인 정보통이다. 대통령비서실 행정관, 치안비서관, 경찰청 차장, 경찰대학장 등 경찰 핵심 자리를 두루 경험했으며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는 우리나라 경찰 사상 최초의 임기제 경찰청장을 지냈다. 인생유전이라고 했던가. 퇴임 후 약 10년을 낙천·낙선하며 무관으로 지냈다. ‘고향 발전’ 의지로 19대, 20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연속 출마했으나 낙선한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일념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고 다시 한번 2018년 6·13 지방선거에 영천시장 무소속 후보로 나서 시민들의 부름을 받았다. 주민들 사이에 보수의 텃밭인 영천에서 무소속으로 도전, 당선 드라마를 써내려 간 의지의 정치인으로 각인됐다. 경북대사대부고와 영남대를 졸업했고 서울대와 동국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 못다 한 ‘임을 위한 행진’… 저 하늘에서 계속되리라

    못다 한 ‘임을 위한 행진’… 저 하늘에서 계속되리라

    한일협정 반대로 민주화 운동 전면 나서YMCA 위장결혼 사건 등 수차례 옥고백원담 “父 마지막 글귀는 ‘노나메기’”“김미숙·김진숙 힘내라” 병상 메시지도 “그 돈 이웃 도와야” 유지… 靑조화 거부전국 16곳 분향소… 19일 대학로 노제“내 이야기를 듣고 발을 구르던 젊은이들은 지금 다 뭘 하는지. 그러나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가슴에 심어 주는 것 자체가 성공의 역사라고 믿는 것, 그게 진보사상이고 이야기예요.”(2013년 4월 22일자 서울신문 인터뷰) 백기완(88)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5일 새벽 폐렴 투병 끝에 별세했다. 평생 민중·민족·민주 운동의 불쌈꾼(혁명가)이자 큰 어른으로 살아온 그는 민중의 장쾌한 수호자 ‘장산곶매’가 돼 하늘로 떠났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정숙씨와 딸 원담(성공회대 교수)·미담(화가)·현담(출판사), 아들 일(울산과학대 교수)씨가 있다. 90년 가까운 그의 삶엔 외세의 압제와 분단, 군부독재 등 질곡의 현대사가 아로새겨져 있다. 그는 못 배우고 못 가진, 그리하여 배우고 가진 자들에게 압제받는 이들을 위해 기꺼이 ‘앞서서 나가는’ 삶을 선택했다.백 소장은 1933년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태어났다. 정규교육이라고는 국민학교 4학년까지 다닌 게 전부인 데다 분단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비극을 겪었지만 독학으로 통일 문제와 사회 모순에 대한 인식을 키워 나갔다. 6·25전쟁 중 해외 유학을 권유받았으나 ‘조국을 두고 나 혼자만 유학을 갈 수 없다’며 거절했다. 1964년 함석헌·계훈제 등과 함께 한일협정 반대운동을 벌이며 민주화 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투옥과 고문은 일상이 됐다. 장준하 등과 ‘유신헌법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 운동’을 벌였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됐다. 1979년엔 ‘YMCA 위장결혼 사건’을 주도했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계엄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당시 옥중에서 썼던 시 ‘묏비나리’는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원작이 됐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치러진 13대 대선에서는 김영삼·김대중 후보 단일화를 압박하기 위해 독자 민중후보로 출마했다가 직전에 사퇴했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는 노동자 민중후보로 추대됐지만 현실 정치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는 인생의 막바지까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삶을 살았다. 2014년 세월호 진상규명 집회,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 등의 현장에서 맨 앞자리를 지켰다. 송경동 시인은 “백 선생이 병상에서 쓰신 마지막 글귀는 ‘김미숙 어머니 힘내라’, ‘김진숙 힘내라’였다”고 전했다. 백원담 교수는 “아버지가 마지막 남긴 글귀는 ‘노나메기’였다. 너도나도 일하되 모두가 올바로 잘사는 세상이라는 뜻”이라고 밝혔다.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선다’는 평소 지론답게 여러 권의 수필집과 시집을 냈다. 우리말 사랑도 남달랐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장산곶매 이야기’, ‘젊은 날’, ‘버선발 이야기’ 등을 출간했다.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 장례위원회’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빈소를 차리고 장례는 오일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전국 16개 지역에 분향소 및 온라인 추모관(baekgiwan.net)도 운영한다. 발인일인 19일 오후 종로구 대학로에서 노제가 진행된다. 장례위원회는 “선생님의 뜻에 따라 조화를 받지 않는다. 선생님은 (생전) 조화를 보낼 값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이어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으로부터도 (문재인 대통령 명의의) 조화를 보내겠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거절했다”고 덧붙였다. 여야는 모두 고인을 애도했다. 더불어민주당 신영대 대변인은 “영원한 민중의 벗, 백기완 선생님의 정신은 우리 곁에 남아 영원할 것”이라고 했다. 국민의힘 김은혜 대변인은 “우리가 누리는 평등한 세상은 고인의 덕분”이라 했다. 정의당 정호진 대변인은 “사회적 약자들을 역사상 처음으로 정치의 주인으로 호명했다”고 추도했다. 이두걸 기자 douzirl@seoul.co.kr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 [근대광고 엿보기] 근대 대표 출판사 겸 서점 ‘박문서관’

    [근대광고 엿보기] 근대 대표 출판사 겸 서점 ‘박문서관’

    “신구 서적 만종(萬種)과 문방구를 완비하고 특별 대염가로 도매 소매하오니 다소(多少) 불구하고 주문하시오. 일어 영어 사전 자전 각종도 구비함.” 한국의 근대 출판을 대표하는 출판사 겸 서점인 박문서관의 광고 내용이다. 박문서관의 창업주 노익형(1885~1941)은 몹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14살 때부터 육의전의 하나인 저포전(苧布廛) 점원, 객주집 거간 일을 하고 잡화상을 차렸지만 오래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랬던 그가 지인의 권유로 경성 남대문통 3정목(현 남대문로 3가) 상동교회 앞에서 자본금 200원으로 작은 서점 박문서관을 연 것은 22세 때인 1907년이었다. 한일병합으로 총독부에 역사 서적을 몰수당하는 고초를 겪었지만, 봉래동을 거쳐 1925년 종로로 서점을 옮기고 출판사도 겸하면서 사업은 확장일로로 들어섰다. 박문서관은 안국선의 금수회의록을 약 4만부 팔았고, 춘향전·심청전·조웅전·유충렬전 등 구소설을 1년에 약 3만~4만부 판매하는 등 규모를 키워 갔다. 1920년대에는 ‘짠발쟌 이야기’ 등의 번역·번안물과 이광수의 ‘무정’, ‘첫사랑’ 등도 히트작이었다. 염상섭의 ‘견우화’, 현진건의 ‘지새는 안개’ 등도 출간했다. 큰돈을 번 노익형은 대동인쇄소까지 인수해 경영하며 출판, 서적, 인쇄 3대 부문의 패자(覇者)가 됐다. 인쇄소는 종로 YMCA 바로 뒤에 있었다. 서점 판매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 준 것은 오늘날의 온라인 판매와도 같은 통신판매였다. 1935년 무렵에 그는 신구 소설 등 1000여종의 책 판권을 갖고 있었고 매출의 70%를 통신판매로 달성했다고 한다(매일신보 1936년 5월 14일자). 박문서관은 문학도서 외에 문세영의 ‘조선어사전’ 등 사전류도 펴냈고, 무엇보다 박문문고라는 휴대하기 좋은 문고본을 발행해 독서의 저변을 넓혔다. 1938년에는 월간 문예지 ‘박문’을 발행해 쟁쟁한 문인들의 수필을 실었다. 그러나 노익형은 일제에 협력하고 창씨개명을 해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다. 광복 후 박문서관은 박문출판사와 박문서점, 박문인쇄소로 분리됐다. 노익형 사후 유일한 혈육인 노성석씨를 거쳐 성석씨의 고교 선배인 이응규씨가 총괄 사장을 맡아 운영했다. 문을 닫은 것은 1957년이었다. 출판사와 서점 경영이 어려워진 것은 6·25 전쟁 때 인쇄시설이 폭격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60평쯤 되던 박문서점이 있던 곳은 종로2가의 옛 고려당 바로 옆 건물이었는데 2002년에 없어진 종로서적의 지척이었다. 폐업 당시 박문서점은 영창서관, 덕흥서림과 함께 서울의 3대 서점으로 꼽혔다. 1972년에 설립된 고시·수험 서적 전문 출판사 박문각과 박문서관의 연관성은 찾을 수 없다. 박문서관의 목판 691장은 2013년 근대문화재로 지정됐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밀리터리 인사이드] 경항모 건조하면 정말 나라가 흔들릴까

    [밀리터리 인사이드] 경항모 건조하면 정말 나라가 흔들릴까

    “경항모 건조에 2조원, 함재기 등에 3조원”7만개 일자리 생성…경제효과 35조원 예측美전문가 “소규모 분쟁, 원거리 모두 적합”“경항공모함을 건조하면 10년, 20년 뒤에는 국방비 전액을 여기에 투입해야 한다.” “경항모 전단 유지비만 30조~40조원이 든다.” 일각에서 제기된 정말 무서운 예측입니다. 경항모 1척을 도입하는데 이렇게 많은 유지비가 들어간다면 우리 국력은 금방 소진될 겁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초강대국인 미국, 러시아, 중국을 제외하고도 인도, 브라질,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태국 등 세계 많은 나라가 항모를 운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가까운 일본도 경항모 도입을 추진하고 있죠. 지난해 말 국제통화기금(IMF)이 내놓은 ‘세계 경제전망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기준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1조 5868억달러로 세계 10위권에 오를 것으로 예측됐습니다. 세계 10위권 국가의 국력이 경항모 단 1척으로 소진된다면 세계에 항모를 운영할 나라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경항모 유지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경항모 건조하면 국방비 전액 투입?지난 4일 해군은 충남대와 ‘국가안보의 핵심전략자산, 경항공모함의 필요성’을 주제로 ‘경항공모함 세미나’를 가졌습니다. 해군이 직접 전문가들을 초청해 경항모 도입 필요성을 설명하는 자리를 만든 겁니다. 찬반 양론이 팽팽한 가운데 전문가 세미나는 많은 국민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물론 비난과 조소도 많았습니다. 언론 보도도 행사의 개괄적인 내용을 전하는데 그쳤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행사에서 처음으로 나온 몇 가지 숫자에 주목했습니다. 행사를 주최한 충남대의 길병옥 국가안보융합부 교수는 경항모 건조에 2조원, 함재기 20대 및 해상작전헬기 8대 도입에 3조원이 소요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길 교수는 “경항모 운용유지비는 통상 건조 비용의 10%임을 고려할 때 연 2000억원 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습니다. 지난해 국방예산은 50조 2000억원이었습니다. 전력유지비는 13조 8000억원입니다. 경항모 유지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1.4%입니다. 그리고 경항모 전력화에 아직 10년의 기간이 남아있습니다. 길 교수는 건조비와 유지비를 분할해 충분히 준비할 수 있는 기간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2030년쯤엔 유지비가 1% 미만이 될 것”이라며 “우리 경제력으로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강조했습니다.물론 한 해 2000억원이라는 예산은 막대한 금액입니다. 항모 건조예산 2조원도 적지 않은 금액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보한 세계적인 조선 기술도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의 항모 건조기술은 선진국 대비 80%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누가 전수해준 것도 아닌데, 해군은 이미 경항모 건조에 필요한 180여개 핵심기술 중 비행갑판 설계, 전투체계 등 160여개 기술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길 교수는 이런 기술력을 바탕으로 관련 산업을 육성할 경우 오히려 경제적 파급효과가 35조 8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7만 1500여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고 방산중소기업 육성 효과와 수출효과 각 3조원, 항공산업 육성 효과 2조 7000억원 등의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 합니다. 근거없이 경항모를 무작정 ‘돈 먹는 하마’라고 비판하는 건 옳지 않다는 겁니다. 길 교수는 “구축함, 잠수함, 다목적·대잠 헬기, 조기경보 헬기, 근접 방어 시스템, 항대공 유도탄 방어시스템 필수 요소는 이미 국방 중기계획에 포함돼 추가 예산소요는 많지 않다”고도 했습니다. ●“항모 건조시 경제적 파급효과 35조원” 다만, ‘장밋빛 환상’은 경계해야 합니다. 적절한 예산 균형은 필요합니다. 중형항모(4만~6만t급)의 공격력이 더 높은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훨씬 더 큰 건조비와 유지비가 소요됩니다. 도입 계획에는 목소리를 높이지만, 선뜻 거액의 비용을 감당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계획을 수정해 중형항모 예산을 감당하자고 주장하는 건 ‘아예 항모 사업을 엎자’고 말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세미나에선 ‘이탈리아의 교훈’도 제시됐습니다. 왜 이탈리아는 2차 세계대전 후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항모를 도입하게 됐을까. 해군 소장인 정승균 해군본부 기획관리참모부장은 “과거 이탈리아도 ‘우리는 지중해 중앙에 위치한 불침항모여서 항모가 필요없다. 지상 발진 전투기로 영국 함대를 격침할 수 있다’고 오판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정 소장은 잠수함사령관을 지낸 대표적인 해군 전술 전문가입니다.항모가 해전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건 1940년 11월입니다. 당시 영국 항모 일러스트리어스호에서 발진한 함재기 21대가 이탈리아 남부 타란토항을 기습공격해 전함 3척을 격침하고 순양함 2척을 대파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불침항모’ 이탈리아의 어이없는 패전 다음해인 1941년 3월에는 영국 항모 포미더블이 참전한 ‘마타판 해전’이 벌어졌습니다. 이탈리아 해군은 함포로 영국 함정들을 수장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순양함 4척이 가볍게 파손되고 뇌격기 1대를 잃은 영국과 달리 ‘벌떼’ 공격을 받은 이탈리아는 전함 1척과 순양함 3척, 구축함 2척을 잃고 지중해 통제권을 상실하게 됩니다. 비슷한 사례는 우리가 경험한 6·25 전쟁 때도 있었습니다. 정 소장에 따르면 일본에서 발진한 전투기는 불과 15분만 공습할 수 있었는데, 조종사들은 “링 위에서 눈을 가리고 경기하는 권투선수처럼 급하게 폭탄을 던지고 날아왔다”고 했습니다. 반면 항모에서 발진한 함재기들은 5~10분만에 현장에 도달했습니다. 북한군 포로들은 “파란 비행기(함재기)가 가장 무서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미국 국방정보국(DIA) 분석관을 지낸 브루스 벡톨 앤젤로주립대 교수는 “새로운 경항모는 F35B에 최적화된 플랫폼을 보유하고 있으며, F35B 확보 시 공습역량은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 “소규모 분쟁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공중작전 수행을 위한 원거리 플랫폼으로도 적합하다”며 “한국 해군의 작전능력은 경항모 전투단 보유를 통해 괄목할만한 성장을 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경항모 도입으로 과연 나라가 흔들릴까요. 아니면 국방력이 높아질까요. 이런 의견을 참조해 앞으로 사업 추이를 잘 살펴봐야겠습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더 나은 삶 위해 민중과 연대… 사람답게 사는 길 찾는 문학 대들보

    더 나은 삶 위해 민중과 연대… 사람답게 사는 길 찾는 문학 대들보

    “사람답게 살아가라.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불의와 타협한다거나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이 갈 길이 아니다.” 이것은 요산 김정한 선생의 문학비에 있는 문장이자 선생의 삶과 소설 그 자체다. 어떤 문장은 때로 한 생애를 고스란히 그리는데, 이것의 발원이자 끝은 오롯이 그 사람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선생이 말한 ‘사람’은 어떤 존재들일까. 땅에 두 발을 딛고, 머리는 하늘을 향해 있다는 것은 모두 같다. 하지만 형상은 같을지언정 사는 형태와 마음은 다 달라서 ‘사람답게’가 붙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세상이 아닌가. 게다가 빼앗긴 땅을 딛고 선 사람들이라면 ‘사람답게’란 이른바 생존의 다른 말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늘 땅에 서 있을 수밖에 없던, 그리하여 삶에 흙먼지가 자욱하게 묻은 농민들의 이야기를 가장 자세히 삶의 끝까지 유심히 듣고 쓰던 작가. 빼앗긴 땅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곡절을 누구보다도 아파했으며 끝내 그들과의 유대와 사람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고자 했던 요산 김정한의 소설과 삶 속으로 들어가 본다.선생은 1908년 음력 9월 26일에 경남 동래군 북면 남산리에서 태어났다. 금정산 자락에 위치한 동네였던 터라 낙동강과 범어사가 지척이었다. 강가의 물을 끌어다 농사를 짓던 사람들과 절의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매료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여섯 살이 되던 해부터 동네 서당에서 한학을 시작했고, 어머니에게서는 한글을 배웠다. 명정 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에 참여했다. 중앙고보를 거쳐 동래고보를 졸업했다. 1928년에 양산 대현공립보통학교의 교사가 됐다. 교사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학교 안에 있는 일본 선생들과의 불합리한 제도에 항거해 동맹휴업을 결의했다가 경찰서에 연행된다. 이 일로 인해 학교를 그만둔 선생은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와세다대학 제1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문우회에 가입해 시를 쓰기 시작한다. 이때 ‘조선시단’에 ‘구제사업’이라는 작품을 기고했다가 제목만 실리고 내용의 전문이 삭제되는 일을 겪는다. 귀국한 다음해에 남해공립보통학교의 교사로 부임했고, 그 시기에 소설 ‘사하촌’을 써서 193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사하촌’은 일제강점기 당시에 사찰 소유의 논밭을 경작하는 빈농들의 궁핍한 삶과 친일 스님들의 행적을 비롯해 절 아래 마을의 논들을 관리하는 마름들의 횡포를 사실적으로 그려 낸 작품이다. 고통받는 민중들과 가진 자들이 토지를 수탈하는 모습들이 일제강점기였던 시대상을 반영했고, 작품에 나오는 절의 실제 배경이 범어사라는 것이 알려져 그곳 스님들의 원성을 샀다고 한다. 소설 발표 후에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테러를 당해 두 달 동안이나 거동을 하지 못할 정도로 몸을 다치기도 했다.1939년에 남명학교로 전근을 갔을 적에 일본의 문화 말살 정책으로 한글을 쓰지 못하는 형편이 되자 학교를 그만두고 동아일보 신문지국을 운영했다. 그러나 일제의 신문 검열과 그간의 행적들로 인해 일본 순사들의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고아원으로까지 피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절필하고 경남도청 상공과 산하 면포조합 서기로 취직해 해방될 때까지 근무를 했다. 해방 후에도 미군정의 정책에 반대해 경찰에 잡혀 가는 생활이 계속됐다. 6·25 때는 ‘국민보도연맹’에 연루돼 죽을 고비를 맞이하지만 남해공립보통학교 시절의 제자와 처남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모래톱이야기’를 쓰며 다시 문단에 복귀한다. 이후에 낙동강 주변의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농촌소설들을 집필하기 시작하는데, 핍박받고 가난에 찌들어 있는 농촌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평을 받는다. 선생은 ‘문학도 인간이 살아가는 데 더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며 민중에 대한 연민과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한 작품들을 썼다. 이것이 그의 작품이 리얼리즘 문학의 선봉에 서게 된 이유다.1950년 부산대 교수였던 선생은 4·19혁명 후에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5·16 쿠데타 직후에 해직됐다가 1965년이 돼서야 복직하게 됐다. 이때부터 매우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시작해 ‘수라도’, ‘뒷기미 나무’, ‘산거족’, ‘삼별초’ 외에 수 많은 소설들을 썼다. 독립운동과 광복 후의 반독재, 반민주에 저항하는 운동으로 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고 절필을 선언하기에 이르렀지만 30년 후에 다시 펜을 잡고 ‘사람’이 ‘사람답게’ 지낼 수 있는 세계, 흙먼지 이는 폭폭한 삶일지라도 누군가는 그들의 어깨를 부여잡고 함께 걷고 있다는 연대의식들을 나타내는 작품들을 써 내려갔다. 대부분 정의와 인간됨,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억울하게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주어진 삶에 순응하고 불의에 타협하며 어려운 이들의 삶을 모른 척했더라면 결코 나올 수 없는 작품들이 선생의 삶과 고투의 시간들을 대변하고 있는 셈이다. 선생은 끝내 힘없는 약자들의 편에 서서 정의와 사람다운 삶을 노래했다. 그를 계속 주목하게 하는 배경엔 이런 강직하고도 치열했던 글쓰기 행보가 있다. 2006년에 개관해 지금까지 부산의 가장 큰 문학 성체로 자리한 요산문학관은 선생의 생가를 비롯해 세미나실, 전시실, 도서관, 집필실, 강당으로 이루어진 다목적 건물이다. 후배 작가들을 비롯해 부산 시민들이 언제든지 가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여러 가지 문학적인 시간을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다. 선생의 생애와 작품을 비롯한 다양한 발자취들도 확인해 볼 수 있다.요산문학관에서는 매년 ‘요산문학축전’을 열고 있다. 문학관과 부산작가회의 소속 작가들이 주축이 돼 치르는 큰 문학 잔치다.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는 ‘고유제’를 시작으로 요산문학상, 창작지원금 시상, 소설 세미나, 백일장과 전시 등으로 요산 정신을 기리고 후배 작가들을 독려한다. 부산에 거주하며 부산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소설가가 된 임회숙 작가는 올해도 요산문학축전의 한 축을 담당해 여러 행사를 지켜본 소감을 전해 주었다. 부산에 있는 후배 작가들은 리얼리즘 문학의 대들보이자 민중들과 끊임없이 연대하고 불의에 저항했던 요산 선생의 정신을 기리고 싶어 하며, 선생은 부산 문학의 정신이자 대들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임 작가는 선생과의 직접적인 인연은 없었지만 제1회 요산문학제 수필 부문 장원 출신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문학의 시작이 요산 선생의 작품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또 작가가 돼 해마다 요산문학축전에 참여할 수 있는 시간이 굉장히 복되다고도 말해 주었다. 요산 선생은 후배들이 본받고 싶어 하는 리얼리즘 소설의 바이블 같아서 소설을 쓰다 길이 막힐 때마다 펼쳐 드는 책이 바로 요산 선생의 수많은 소설 중의 하나라고도 했다. 선생이 불의에 항거하고, 지주와 소작농들의 혈투 그리고 땅을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의 싸움으로부터 지금의 우리는 얼마나 다른 세계에 살고 있을까. 어떤 면에서는 그때와 지금의 현실이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아, 그래서 선생의 소설이 리얼리즘이라는 것인가. 끝없이 새롭게 읽히는. 그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사람답게 사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화두를 언제나 고민하게 되는 게 아닐까.낙동강가와 절 아래 마을에서 시작된 사람들의 문장이 지금도 살갗이 흙먼지에 쓸려 오듯이 다가오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함께 어깨동무하며 두 발로 땅을 디딜 수 있는 곳, 그리해 우리가 같이 나란히 앉아 책장을 펼칠 수도 있는 곳, 그곳이 김정한 선생의 요산문학관이다. 소설가 이은선
  • 北 납치·구금 추정 2만여건 DB 사이트 구축

    북한에 납치되거나 강제 구금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례 2만여건을 데이터베이스(DB)로 구축한 인터넷 사이트 ‘풋 프린트’(https://nkfootprints.info)가 28일 개설됐다. ‘풋 프린트’는 2017년 미 국무부 후원으로 비영리 인권단체 전환기정의워킹그룹과 북한인권시민연합이 시작한 프로젝트로, 스위스 비정부기구 휴리독스 등 9개 인권단체가 참여했다. 사이트에는 6·25 한국전쟁 국군포로나 1969년 납북된 대한항공(KAL) 여객기 탑승자 등 1950년대부터 2016년까지 납북된 것으로 보고되거나 추정되는 2만여명의 자료가 연도별, 지역별 등으로 정리돼 있다. 유엔 ‘자의적 구금에 관한 실무그룹’(WGAD)과 ‘강제적·비자발적 실종에 관한 실무그룹’(WGEID), 국제적십자위원회, 국제민간항공기구 등에 제출된 진정서와 북한 당국의 답변 기록 등도 수록됐다. 또 정보 공개 청구를 통해 확보된 국내 정보기관과 경찰의 수사 기록, 정부 기관의 문서, 법원 결정문, 피해자 및 목격자 증언도 담겼다. 자료는 한국어와 영어, 일본어 등 3개 언어로 제공되고 향후 중국어, 스페인어 등이 추가될 예정이다.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 ‘불침항모론’ 넘어선 ‘한국형 항모’…어떻게 부활했나

    ‘불침항모론’ 넘어선 ‘한국형 항모’…어떻게 부활했나

    1997년 나왔던 불침항모론에 부딪혀올해 항모 예산 101억→1억으로 삭감 해군 “최소한의 억지력은 보유해야비행장 전투기는 지원에 시간 걸려”6·25 전쟁의 경험 등 들어 합참 설득타당성 분석 후 내년 설계 진행될 듯1997년 3월. 해군이 일본과 대등한 군사력을 갖추기 위해 야심 차게 준비했던 ‘한국형 항공모함’ 도입 계획은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의 반대에 직면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당시 한국의 해군 전력이 일본의 10%에 불과하다는 점을 들어 2만t급 경항모와 6척의 구축함으로 이뤄진 항모전단을 꾸리도록 지시했습니다. 합참 등이 항모 건조를 반대한 표면적인 이유는 “주변국의 군비증강을 야기해 지역 안보를 위험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군 수뇌부의 다른 속내도 있었습니다. 육군 중심의 합참은 “당장 북한에 대응하는 쪽에 군사력 건설을 집중해야 한다”며 항모 건조를 강력 반대했습니다. 그때 나온 것이 ‘한반도 불침항모론’입니다. ●23년 전 등장한 ‘불침항모론’ 또 발목 반면 중국과 일본은 주변국의 반대에도 차근차근 항모 건조 계획을 진행시켰습니다. 특히 중국은 랴오닝함과 산둥함 등 2척의 항공모함을 만들었고 3번함 건조를 준비 중입니다. 이는 과거 미국에 쏠렸던 태평양의 힘의 균형추가 움직이도록 했습니다. 중국은 미국과 대등한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해 4개 항모전단을 건설할 방침입니다.지난달 11일 국회 국방위원회 예산심사 소위. 야당은 한국형 항모 설계비 101억원 대신 공고 착수금 10억원만 확보해 달라는 해군과 방위사업청의 요청을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유지비는 비싼데 북한 위협에 소용이 없다”, “한반도는 불침항모”라는 논리가 나왔습니다. 23년이 지났지만 논쟁은 제자리였습니다. 심지어 “해군 장교들이 태평양전쟁의 일본이나 미국처럼 항모 위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낙조를 바라보는 로맨틱한 기분은 느낄지 몰라도 우리 안보 현실에는 별로 필요 없다”는 극한 표현까지 나왔습니다. 해군 내부는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여당 내부에서도 일부 반대 여론이 나와 결국 올해 항모 예산은 1억원으로 쪼그라들었습니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습니다. 합참은 지난달 30일 합동참모회의를 갖고 한국형 항모 건조 사업에 대해 소요(연구개발 또는 구매) 결정을 내렸습니다. 군 수뇌부는 경항모로 추진하는 한국형 항모에 대해 ‘안보 위협에 대응한 미래 합동전력’으로 평가하고 사업 추진을 결정했습니다. 이에 따라 2021~2025년 국방중기계획에 한국형 항모 건조사업이 포함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올해 방위사업청은 사업 타당성 분석을, 해군은 항모 건조와 함재기인 F35B 도입에 대한 세부 계획을 준비하게 됩니다. 사업이 정상적으로 추진되면 내년에 기본설계가 진행됩니다.●‘공중 재무장 불가능’ 한계 넘을 미래 전력 해군은 23년 전과 달리 어떻게 합참을 설득했을까. 해군은 예산 전액 삭감이라는 충격에도 차분하게 ‘율곡 이이’와 ‘서애 류성룡’을 거론했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율곡 이이는 1592년 임진왜란 전 ‘10만 양병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이렇게 평화로운데 무슨 전쟁이냐”는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왜군을 물리치는 데 큰 역할을 한 류성룡은 ‘징비록’을 통해 “미리 전쟁을 막지 못한 것을 반성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중국과 일본의 해군력은 이미 우리를 한참 앞선 상황입니다. 해군 수뇌부는 “주변 강대국 수준까지는 도달하기 어렵지만, 최소한의 억지력은 보유해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20년 넘게 항모 건조 반대논리로 사용된 ‘한반도 불침항모론’도 적극 반박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6·25전쟁에서의 경험이 주요 반박 근거였습니다. 전쟁 초기 남한에서의 비행장 운용은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일본에서 미 공군 전투기들이 출격했습니다. 하지만 대한해협을 넘어 1시간 넘게 날아온 전투기들의 작전시간은 15분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미 해군 항모에서 출격한 전투기들은 불과 5~10분 만에 지상군 지원이 가능했습니다.F15K의 작전시간은 독도 상공기준 30분, 이어도 20분입니다. KF16은 각각 10분과 5분에 불과합니다. 공중급유기 도입으로 F15K의 독도 상공 작전시간이 90분 정도로 늘어났고 최신 전투기 F35A 도입도 이뤄졌지만 여전히 ‘공중 재무장’은 불가능하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것을 대체할 수 있는 미래 전력이 항공모함이라고 해군은 주장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일본도 이미 1980년대에 ‘불침항모론’ 논쟁을 벌였다는 점입니다. 그러다 경항모 도입을 선언하며 방향을 선회했습니다. 일본은 지난해 방위백서에 “끊임없는 제공권 우세를 확보하기 위해 유연성이 필요하다”며 “국토가 협소해 활용할 수 있는 활주로에 한계가 있는 일본의 특성을 고려하면 단거리 이착륙 및 수직이착륙이 가능한 전투기 운용은 그 유연성을 높인다”고 썼습니다.●“태국도 이미 경항모 보유… 건조비 분산” 정치권 등에선 차라리 ‘핵추진 잠수함’을 도입하라는 목소리도 높습니다. 그러나 핵잠은 한미 원자력협정이 선결 조건이고 경항모와는 작전 성격이 다르다고 해군은 설명합니다. 전차와 자주포의 성격이 다르듯 핵잠과 항모는 목표가 전혀 다른데 섞어서 설명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특히 항모는 존재 자체로 전쟁 억지력과 외교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 해군의 설명입니다. 해군은 합참에 7만t급 이상 중형 항모 건조에 대해선 부정적인 입장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른바 ‘가성비’가 맞지 않다는 겁니다. 이런 점 때문에 대형 항모를 갖춘 미국조차 향후 6척의 경항모를 추가로 건조할 계획이라는 점을 사례로 들었다고 합니다. 반대로 우리 국력에 경항모를 갖추는 것은 낭비가 아니냐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보다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낮다고 여겨지는 이탈리아, 브라질, 태국 등이 이미 경항모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해군은 합참에 “항모 건조에는 10년이 넘게 소요되기 때문에 건조비를 분산시키면 국방재원 내에서 충분히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적극 설명했다고 합니다. 과거 이지스 구축함조차 비용 문제를 거론하며 추가 건조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떤가요. 한국형 항모 사업이 이번 합참의 결정으로 큰 탄력을 받을 수 있을지 주목됩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국가보훈대상자 마지막 길 예우하는 구로

    국가보훈대상자 마지막 길 예우하는 구로

    서울 구로구가 국가를 위해 헌신한 국가보훈대상자들에 대한 예우를 표하기 위해 장례 지원사업을 한다고 27일 밝혔다. 각종 장례 편의용품과 장례 서비스를 지원하는 사업이다. 국가보훈처의 국가유공자 장례서비스와 별도로 운영돼 두 서비스를 동시에 이용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국가보훈대상자의 유족들에게 세면도구, 수건, 양말, 부의금 가방 등 모두 27종의 장례 편의용품과 구로구 근조기를 지원한다. 상조 전문업체 소속 장례지도사의 컨설팅 서비스도 제공한다. 장례지도사가 장례식장을 방문해 유족들에게 복잡한 장례 절차를 알려주고 근조기 설치 등을 돕는다. 구에 주민등록을 두고 거주하다가 사망했으며, 장례식장이 수도권에 있는 독립유공자, 국가유공자, 참전유공자, 특수임무유공자, 5·18 민주유공자, 고엽제 후유(의)증 환자(등급판정자) 등 국가보훈대상자와 유족증을 소유한 선순위 유족 1명이 지원 대상이다.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는 구청 복지정책과로, 그 외의 시간에는 종합상황실로 전화로 신청하면 된다. 이 밖에도 구는 구로5동 거리공원에 2018년 10월 6·25와 월남전 참전유공자 중 구로구에 주소를 둔 4321명의 이름을 새긴 높이 2.7m, 너비 6.5m 크기의 ‘참전유공자 기념비’를 건립한 데 이어 2019년 6월에는 높이 2m, 너비 40~80㎝ 크기의 ‘호국영웅 참전유공자 기념 조형물’을 설치하는 등 순국선열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힘쓰고 있다. 이성 구로구청장은 “국가보훈대상자들의 마지막 가시는 길이 외롭지 않도록 복지와 예우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서울광장] 국립중앙박물관, 석조 문화재 고향에 보내자/서동철 논설위원

    [서울광장] 국립중앙박물관, 석조 문화재 고향에 보내자/서동철 논설위원

    원주 법천사터 지광국사현묘탑이 5년의 보존 처리 작업을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는 소식이 며칠 전 들렸다. 20년 전쯤 법천사터를 찾았을 때 주변은 모두 논밭이어서 도무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절터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절터 초입의 당간지주도 동네 한복판에 숨어 있듯 자리잡고 있어 찾기가 쉽지 않았다. 얼마 전 찾은 법천사터는 완전히 달라졌다. 체계적인 발굴조사로 옛 절터의 전모가 드러났고, 당간지주도 당당한 모습을 되찾았다. 다만 산기슭에 축대를 쌓아 조성한 부도권역만은 달라지지 않았다. 세련된 조각을 자랑하는 지광국사현묘탑비와 나란한 현묘탑 터의 빈자리는 을씨년스러웠다. 마침내 그 공백이 메워지는 것이다. 지광국사 해린(984∼1070)의 무덤이라 할 수 있는 현묘탑은 비운의 문화재다. 1912년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15년 돌아온 뒤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앞에 세워 놓았는데, 6·25전쟁 중 포탄에 맞아 지붕돌 위쪽이 산산조각 났다. 부서진 탑을 1957년 보수하면서 지금의 국립고궁박물관 옆으로 옮겼고 보수 작업 끝에 11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남한강변에는 고려시대 대찰(大刹)의 옛터가 즐비하다. 경기 여주 고달사터와 강원 원주 법천사·거돈사·흥법사터, 충북 충주 청룡사터가 그렇다. 한결같이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대부분 불교국가 고려의 왕사(王師)나 국사(國師)가 은퇴하고 머무른 하산소(下山所)였다. 일대는 개경에서 제법 떨어져 있음에도 유사시에는 물길로 빠르게 오갈 수 있었다. 은퇴 이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싶은 ‘거물 스님’의 거처로 각광받았던 이유일 것이다. 편리한 남한강 수운은 역설적으로 이 일대 사찰의 석조 문화재가 일제강점기 집중적으로 수탈당하는 원인이 되었다. 법천사를 비롯해 앞서 거론한 사찰 가운데 청룡사를 제외한 다른 사찰은 하나같이 일제강점기 부도며 탑비를 빼앗겼다. 고달사터 쌍사자석등과 흥법사터 진공대사탑 및 석관, 거돈사터 원공국사승묘탑 등이 그것이다. 지광국사현묘탑의 귀향은 이 탑의 관리 주체인 문화재청의 결단 덕분이다. 문화재는 제자리에 있어야 가장 높은 진정성을 발휘한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실제로 원주시는 법천사터를 정비한 데 이어 지광국사현묘탑을 돌려받아 ‘완전체’가 되면 새로운 역사문화 관광지로 크게 각광받을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반면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관을 채우고 있는 남한강변의 다른 석조 문화재들은 언제 돌아갈지 기약이 없다. 법천사터에서 남쪽으로 멀지 않은 거돈사터는 2만 5000㎡ 남짓한 사역의 정비가 일찌감치 이루어졌다. 거돈사터에도 해동공자 최충이 비문을 지었다는 원공국사승묘탑비만 남아 있을 뿐 정작 승묘탑이 없는 것은 법천사와 닮은꼴이다. 원공국사승묘탑이 있던 자리에는 모조탑을 세워 놓았는데 기계자국 선명한 새하얀 탑이 폐사지 분위기와 어울릴 수는 없다. 흥법사터는 남한강 지류인 섬강변에 있다. 섬강은 법천사가 있는 흥원창 주변에서 남한강에 합류한다. 흥원창은 강원 서부에서 세금으로 걷은 곡식을 도성으로 실어 나르는 조창이다. 진공대사 충담이 머무른 흥법사터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비문을 지었다는 진공대사 탑비가 역시 진공대사탑을 잃은 채 남아 있다. 이 밖에 남한강 하류인 양평 보리사터의 대경대사탑비와 상류인 제천 월광사터 원랑선사 탑비도 중앙박물관에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중앙박물관은 이들 석조 문화재를 제자리에 보내면 훼손이 염려된다고 한다. 하지만 원주시만 해도 지광국사현묘탑을 제자리에 보호각을 세워 보존하는 방안과 전시관을 새로 지어 내부에 탑과 탑비를 옮기는 방법을 놓고 고심하고 있을 만큼 지방자치단체의 의식 수준은 높아졌다. 무엇보다 ‘너무도 귀중한 문화유산인 만큼 훼손되어선 안 되니 돌려줄 수 없다’는 논리는 서구 박물관이 약탈 문화재의 반환 요구를 거절할 때 쓰는 어거지일 뿐이다. 중앙박물관은 남북 관계의 진전에 따라서는 조만간 로비를 장식하고 있는 개성 경천사터 십층석탑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문제를 놓고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을 맞이할 수도 있다. 중앙박물관은 개성 남계원터 칠층석탑도 갖고 있으니 고민은 크다. ‘훼손 염려’ 논리로 붙잡고 있는 게 가능하겠는가. 석조 문화재를 과감하게 제자리에 보내는 능동적이고 선제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당장 어렵다면 처리 원칙이라도 마련해야 할 때다. sol@seoul.co.kr
  • [밀리터리 인사이드] 훈장 거부한 전쟁영웅 ‘김영옥’을 아십니까

    [밀리터리 인사이드] 훈장 거부한 전쟁영웅 ‘김영옥’을 아십니까

    한국·유럽·미국서 훈장받은 유일한 군인과감한 결단력으로 독일군 포로 생포장군이 부관 계급장 떼어내 달아주기도6·25전쟁 휴전선 60㎞ 북상시킨 주역 한국 고아 돌보고 美한인 권익 위해 애써세상엔 수많은 영웅이 있습니다. 특히 치열한 전투 속에선 영웅이 더 많이 탄생하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영웅은 많지 않습니다. 부풀려진 전공에 도취해 높은 자리에 앉고, 권력을 휘둘렀던 인물들이 더 흔합니다. 그런데 이 군인은 좀 달랐습니다. 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에 참전했고 한국과 미국, 유럽에서 모두 훈장을 받은 유일한 인물. 전투에선 누구보다 용맹했지만, 권력을 쥐기보다 사회봉사에 앞장섰던 휴머니스트. 고(故) 김영옥(1919~2005) 대령입니다. ●피사의 사탑에 처음 오른 연합군 24일 김영옥 평화센터와 일대기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저자 한우성 전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에 따르면 김영옥은 독립운동가 김순권씨의 아들로, 1919년 1월 2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병사로 입대했다가 장교가 됐지만, 그가 배치된 곳은 일본계 미국인으로 구성된 100보병대대였습니다.진주만 공습을 당한 미군은 이들을 ‘일본놈’이라고 공공연하게 멸시하고 조롱했지만 김영옥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심지어 일본계 부대원들도 그를 탐탁치 않게 여겼지만, “우리는 같은 미국인으로, 같은 목표를 위해 싸운다”고 감쌌습니다. 1943년 100대대는 유럽을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상륙했습니다. 독일군은 이탈리아 중남부 지역에 방어선인 ‘구스타프 라인’을 치고 있었습니다. 연합군은 적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포로가 절실했습니다. 대대 작전참모인 김영옥 중위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계가 느슨한 아침에 적진을 돌파해 포로를 잡아오겠다”고 나섰습니다. 실제로 부대원 1명만 데리고 갈대밭을 기어가 적 2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탈리아 주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중장은 그의 초인적인 성과와 낮은 계급에 놀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특별무공훈장 수여식에서 부관의 대위 계급장을 떼어내 김영옥에게 전달하고 직접 진급을 지시했습니다. 그는 피사와 로마 해방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피사의 사탑에 처음 오른 연합군으로 기록되기도 했습니다.이어 프랑스로 건너가 브뤼에르, 비퐁텐느 지역을 해방시켰습니다. 비퐁텐느 마을 성당 동판에는 지금도 ‘김 대위’를 칭송하는 문구가 있습니다. 동판에는 “100대대 영웅들중 1명인 김영옥 대위, 이 성당 문 앞 왼쪽에서 부상했으나 치넨(의무병 이름)과 함께 성공적으로 탈출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는 기관총탄 3발을 맞고 사경을 헤매다 항생제 처치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프랑스·한국에서도…수많은 공적 쌓아 박갑룡 송원대 교수가 쓴 ‘휴머니스트 전쟁영웅 김영옥 대령의 리더십 연구’ 논문에 따르면 100대대 부대원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리더십을 잊지 못해 그를 따랐습니다. 직접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쏘며 달리는 등 늘 선봉에 섰기 때문입니다. 나베 다카시게는 “그는 항상 전선에 있었고, 선봉에 있었다”며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이환준 김영옥 평화센터 사무국장은 “일본계 미국인들이 훗날 그의 휠체어를 끌며 존중하고 따랐다. 그의 인생은 말 그대로 겸손·헌신·용기였다”고 설명했습니다. 그의 활약은 전쟁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 리처드 윈터스 예비역 소령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는 이런 공로로 이탈리아에서 ‘동성무공훈장’과 최고훈장인 ‘십자무공훈장’을, 프랑스에서 십자무공훈장과 최고훈장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습니다. 한국군은 물론 미군 중에서도 이렇게 많은 훈장을 받은 이는 없습니다. 그는 강력한 포병 화력을 바탕으로 한 전술을 자주 써 미군 전술 교본 변화에도 공헌했습니다.더 놀라운 사실은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모님의 나라를 구하겠다’며 예비역 대위로 자원입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정보 수집 업무를 맡으며 ‘한국인 유격대’를 조직했습니다. 1951년 5월 중공군 2차 춘계공세 때는 구만산·탑골 전투와 금병산 전투에서 참전해 사기가 떨어진 부대원을 독려해 승리로 이끌었고, 북상한 유엔군 부대 중 가장 빠른 진격으로 ‘캔자스선’(38도선 인근의 전술선)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그가 이끈 부대는 휴전선을 60㎞ 위로 밀어올리는데도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부하에게 주라” 훈장 거부한 군인 진격이 너무 빠른 나머지 미군의 오폭을 받고 부상했지만 일본 오키나와에서 치료받고 다시 전선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런 공로로 미국에서 동성무공훈장, 은성무공훈장 등을 받았고, 한국·유럽에서 받은 훈장까지 합하면 주요 무공훈장만 19개나 됐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공적을 뽐내지 않았습니다. 6·25 전쟁 당시 특별무공훈장을 주려는 연대장에게 “훈장은 받을만큼 받았다. 부하들에게 주라”며 거부했습니다. 일대기를 쓴 한 전 이사장이 취재차 무공훈장을 몇 개나 받았는지 물어보자 “잊어버리고 세어보지도 못했다”며 차고 구석 종이상자에 넣어둔 은성무공훈장을 꺼내 보여줄 정도였습니다.그는 수많은 고아들을 도운 ‘휴머니스트’이기도 했습니다. 처음 도착한 부산역에서 1000명이나 되는 남루한 차림의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이에 그는 미군 장교들에게 “나는 한국인 2세다. 여기 굶주린 아이들이 우리만 보고 있다. 우리는 미 육군 장교다. 한두끼쯤 안 먹어도 굶어죽지 않는다”며 전투식량을 나눠주도록 했습니다. 전투 중에도 장병 1인당 50센트씩을 모아 ‘경천애인사’라는 고아원에 전달했습니다. 유엔군 중 특정 고아원에 지원금을 준 부대는 김영옥의 부대가 유일했다고 합니다. ●美 한인 동포 돕는데 여생을 바치다 1972년 대령으로 전역한 그는 정치권의 ‘러브콜’을 뿌리치고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을 돕는데 여생을 바쳤습니다. 미국 최대 소수인종 비영리 보건기관인 ‘한인건강정보센터’와 ‘한미연합회’를 설립했습니다. 일본계 미국인을 설득해 미 캘리포니아주 의회 위안부 결의를 돕고,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 조사위원회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늘 “나는 100% 한국인이자 미국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그렇게 원했던 ‘참군인’이었습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재미 6·25참전용사 숙원 풀어… 권익위, 영문 병적증명서 발급

    6·25전쟁에 참전했지만 참전 사실을 문서로 인정받지 못했던 미국 거주 참전용사 41명의 숙원이 해결됐다. 국민권익위원회는 미국 조지아주에 거주하는 6·25전쟁 참전동포들에게 참전 사실이 기록된 영문번역본 병적증명서를 발급했다고 21일 밝혔다. 조지아주는 미국이 참전한 전쟁 동맹군 중 미국 시민권자이자 조지아주에 사는 주민이 운전면허증에 참전군인 표식을 새길 수 있도록 지난해 주법을 개정했다. 이에 참전동포들은 우리 정부로부터 참전 기록을 발급받고자 수차례 시도했다. 하지만 대부분 국적이 소멸되고 국내에 도움을 줄 친지가 없어 어려움을 겪었다. 이미 70여년의 세월이 흘러 관련 기록을 찾기도 쉽지 않았고, 외교부 등 여러 소관부처에 일일이 도움을 요청하기도 어려웠다. 권익위는 이들의 민원을 접수하고 병무청, 국방부, 국가보훈처의 도움을 받아 70여년 전 기록을 뒤진 끝에 6·25전쟁 참전 재미동포 41명에게 병적증명서를 발송했다. 신청인들은 권익위에 보낸 편지에서 “영문으로 번역된 병적증명서로 그 누구나 어느 기관에도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참전사실을 증명할 수 있게 됐다”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떠나는 해리스 美대사에 안동소주 선물한 文

    떠나는 해리스 美대사에 안동소주 선물한 文

    문재인 대통령은 19일 이임을 앞둔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를 만나 “그동안 함께 한잔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며 해리스 대사가 좋아하는 안동소주를 작별선물로 건넸다. 2018년 7월 해리스 대사가 부임했을 때 문 대통령이 “안동소주를 좋아한다 들었는데 언제 같이 한잔하자”고 말하자, 해리스 대사가 “한미 사이에 많은 현안을 이야기하려면 안동소주가 모자라겠다”고 화답했던 점을 떠올린 것이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후 청와대에서 해리스 대사를 30분간 접견하면서 그가 재임한 지난 2년 반을 “역동적이었다”고 회고한 뒤 “벌써 시간이 흘러 작별 인사를 나누게 됐다”고 말했다고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이 밝혔다. 문 대통령은 “대사께서 흥남철수작전 70주년을 맞아 거제도를 방문하고, 흥남철수작전 기념비에 헌화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면서 “한미 동맹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함경남도 흥남 출신인 문 대통령의 부모는 1950년 12월 24일 흥남 철수 당시 미국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탈출했다. 문 대통령은 “새로운 미국 (바이든) 행정부와도 한미 동맹 강화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진전을 위해 긴밀히 협력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해리스 대사는 “한국에 대한 좋은 기억과 한국민과 맺은 우정을 간직하고 떠난다”며 북미 관계에 역할을 한 것과 6·25전쟁 70주년 기념행사를 재임 기간의 ‘하이라이트’로 꼽았다. 지난해 6·25전쟁 70주년 행사 당시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참전 용사들을 대우하고 기리는 걸 보고 군인 출신인 해리스 대사는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해리스 대사는 “전 세계가 코로나 팬데믹(대유행)을 겪을 때 한국이 어떻게 대응하고 선거를 치러내고 국민을 보살피는지 직접 볼 수 있어 기뻤다”면서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文대통령, 해리스에 “함께 한잔할 기회 갖지 못했다”

    文대통령, 해리스에 “함께 한잔할 기회 갖지 못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19일 이임을 앞둔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를 만나 “그동안 함께 한잔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며 해리스 대사가 좋아하는 안동소주를 선물했다. 지난 2018년 7월 신임장을 주면서 문 대통령이 “안동소주를 좋아한다 들었는데 언제 같이 한잔하자”고 말하자, 해리스 대사가 “한미 사이에 많은 현안을 이야기하려면 안동소주가 모자라겠다”고 답한 것을 떠올린 것이다. 문 대통령은 해리슨 대사 부임 이후 지난 2년 반 동안 한미 양국이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정착을 위해 긴밀히 공조해온 점을 평가하며 이임 후에도 한미 동맹에 대한 지속적 관심과 성원을 당부했다고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이 브리핑에서 밝혔다. 문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대사께서 (지난해 10월) 흥남철수작전 70주년을 맞아 거제도를 방문하고, 흥남철수작전 기념비에 헌화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면서 “한미동맹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어 “새로운 미국 (바이든) 행정부와도 한미동맹 강화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진전을 위해 긴밀히 협력해나갈 것이며 코로나 극복과 기후위기 대응 등 글로벌 현안 대응을 위해 적극 공조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해리스 대사는 “한국에 대한 좋은 기억과 한국민과 맺은 우정을 간직하고 떠난다”면서 북미관계에 역할을 한 것과 6·25전쟁 70주년 기념행사를 재임 기간의 ‘하이라이트’로 꼽았다. 지난해 6·25전쟁 70주년 행사 당시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의 참전 용사들을 한국이 대우하고 기리는 걸 보고 군인 출신인 해리스 대사는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해리스 대사는 또 “전 세계가 코로나 팬데믹(대유행)을 겪을 때 한국 같은 혁신국가가 어떻게 대응하고 선거를 치러내고 국민들을 보살피는지 직접 볼 수 있어 기뻤다”면서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한미동맹은 군사동맹뿐만 아니라 문화, 과학기술 등 공통의 관심사로 계속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강 대변인은 전날 신년 기자회견 질문 과정에서 한 기자가 의도적으로 ‘손가락 욕’을 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데 대해 “큰 오해가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강 대변인은 “저도 현장에 있었는데 이런 논란 자체가 의아할 정도로 모독이라고 전혀 느끼지 못했다”면서 “오해가 풀렸으면 한다. 대통령도 전혀 불쾌감을 느끼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앞서 ‘나는 꼼수다’ 멤버였던 김용민 씨는 페이스북에 해당 기자가 질문하는 사진과 함께 올린 글에 “이거 대통령에 대한 메시지 아닌가”라며 “해명 좀 하시죠”라고 글을 올렸다. 그러자 일부 친문(친문재인) 지지자들은 온라인 상에서 해당 기자를 맹비난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138년 만에 새 역사, 주민 손으로 용산공원 세워야”

    “138년 만에 새 역사, 주민 손으로 용산공원 세워야”

    6년에 걸쳐 용산기지 역사 3부작 완성“복원계획 수립부터 지방정부 참여해야정부 공공주택 공급 협의없이 발표 서운”“우리 지역 역사를 연구하고 정리하는 게 구청장의 책임이고 의무입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용산기지를 138년 만에 (외세로부터) 돌려받았는데 그걸 넘어 우리에게 갖는 의미를 재조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장현 서울 용산구청장은 새해를 맞아 지난 13일 서울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최근 완성한 용산기지 역사를 책으로 엮은 ‘용산기지 역사 3부작’ 작업에 대해 “구청장 재임 기간 최대의 성과로 꼽아도 과언이 아닐 만큼 중요한 일”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며 이같이 밝혔다. 국가사업인 용산공원을 조성할 때 이 기록물이 방향을 제시하는 초석이 되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용산구는 2014년 ‘용산의 역사를 찾아서: AD 97~1953’에 이어 2017년 ‘용산기지 내 사라진 둔지미 옛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 지난해 12월 ‘용산기지의 역사를 찾아서: 6·25전쟁과 용산기지’까지 6년에 걸쳐 용산기지 역사 3부작을 완성했다. 성 구청장은 “용산기지에 대한 방대한 역사를 차근차근 살펴 가며 이 책을 낸 것처럼 용산기지에 들어서는 첫 국가공원인 용산공원을 조성할 땐 속도보다 방향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면서 “나무만 심고 벤치만 놓는다고 공원이 되는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성 구청장은 “과거 용산 미군기지에서 기름이 유출된 사례가 있기 때문에 환경오염 조사를 철저히 해야 한다”며 “처음부터 재점검해야 하는 것은 물론 환경오염 조사를 비롯한 향후 복원계획을 수립할 때 용산구가 참여해야 한다”고도 했다. 지난해는 성 구청장에게 아쉬움이 많이 남는 한 해였다. 무엇보다 지역의 굵직한 사업을 추진할 때 구청장이 지닌 권한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정부가 지난해 8월 미군기지 캠프킴 부지에 공공주택 3100가구를 공급하겠다고 구와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발표한 것은 지방정부의 정신을 훼손한 것”이라면서 “향후 경부선 지하화, 용산공원 조성 등 용산의 지도를 바꿀 대규모 사업을 추진할 때는 해당 지방정부인 용산구의 목소리가 반드시 반영돼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용산구는 지난해 코로나19 여파로 어려운 시기를 겪는 가운데서도 민선 7기 공약이행평가에서 최고 등급을 받는 등 대외적으로 좋은 성적을 거뒀다. 성 구청장은 앞으로도 주민들이 보람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요건을 갖출 수 있도록 다양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힘을 쏟겠다고 했다. 그는 “용산역 전면에 광화문광장을 뛰어넘는 대규모 공원인 용산파크웨이를 조성하고 공원의 지하공간을 상업시설로 개발하는 계획을 활발히 추진 중”이라며 “전 세계 관광객들이 문화와 쇼핑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지역의 문화명소로 만들어 품격 있는 국제도시로 거듭나겠다”고 말했다. 민선 7기 반환점을 돈 성 구청장은 남은 임기 동안 신규 사업보다는 현재 추진 중인 사업을 마무리하는 데 총력을 기울일 계획이다. 성 구청장은 “코로나19 이후 용산의 지속 가능한 성장동력이 역사문화관광에 있다고 본다”면서 “우선 올해 말 준공을 목표로 하는 용산박물관(가칭)과 관내 주요 박물관 인프라를 연계한 역사문화박물관특구(가칭) 지정을 추진해 역사문화도시로 발돋움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아이들 몸은 만신창이인데 가해자 하나 없다니”...가습기 피해자들의 호소

    “아이들 몸은 만신창이인데 가해자 하나 없다니”...가습기 피해자들의 호소

    “우리 아이들 몸은 벌써 만신창이가 됐는데 어떻게 그런 판결을 내릴 수가 있습니까.”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당한 쌍둥이 박나원·다원 자매의 어머니 김미향(39)씨는 14일 억울함을 호소하며 눈물을 보였다. 그는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가자 없는 ‘유령 사건’이 아니고 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나원·다원 자매는 생후 3개월이던 2012년 초 SK케미칼이 제조하고 애경산업이 판매한 애경 가습기메이트에 처음으로 노출됐다. 동생은 생후 6개월 무렵, 언니는 돌이 지났을 때 호흡 곤란이 시작됐고 2015년에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1등급 판정을 받았다. 또래보다 성장이 느린 아이들을 볼 때마다 김씨는 눈물을 보일 수밖에 없다. 목에 구멍을 뚫어 목소리조차 잘 내지 못하는 아이가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가습기 살균제’라고 놀림을 받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진다고 한다. 김씨는 “내 아이 몸만 봐도 알겠는데, 눈으로 보면 아는데 어떻게 그런 판결이 내려졌는지 납득이 안 된다”며 “죽은 아이들과 겨우 생명을 유지하는 분들께 진짜 죄송하지 않느냐”고 항변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유족들은 14일 서울 종로구 환경보건시민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 12일 가습기 살균제 관계자들에 대한 법원의 무죄 판결의 부당함을 호소했다. 지난 12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부장 유영근)는 업무상 과실치사 등 혐의를 받은 애경산업·SK케미칼·이마트 등 관계자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동물실험·역학조사 결과 이들이 제조·판매한 가습기살균제 속 클로로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CMIT)·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MIT) 성분이 폐질환을 유발한다고 보기 어려웠다는 것이 이유다. 피해자들은 판결 이후 전혀 납득할 수 없다며 반발했다. 2012년 애경 가습기메이트를 사용해 남편과 두 아들까지 모두 천식과 폐쇄성 폐질환을 앓게 된 김선미(36)씨는 “판결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심한 장난을 치나 보다’는 정도로만 생각했다”며 “아무리 이해하고 납득이 안 되지만 아무것도 할수있는 게 없어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난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어 “아이들에게 ‘엄마가 미안해’라고 하고 있지만 정작 책임질 사람이 없다”며 “재판부때문에 나는 무책임한 엄마가 됐다”고 울먹였다. 이플러스 가습기살균제(이마트 PB상품)를 2007년부터 사용해 지난해 8월 부인 박양숙씨를 먼저 떠나보낸 김태종(66)씨는 “6·25전쟁 이후 단일 사건으로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게 가습기 살균제 참사”라며 “판사와 제조사 경영진, 검찰, 국회의원에게 ‘너희도 우리와 똑같이 6개월만 써보라, 죽나 안 죽나 써보고 얘기하라’고 하고 싶다”고 말했다. 센터는 오는 19일 가습기 살균제 재판에 전문가 증인으로 참여한 환경보건·독성 분야 연구자들과 함께 CMIT/MIT의 인체 영향을 설명하는 간담회를 진행할 계획이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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