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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덜란드 참전용사 대한민국의 품에 ‘영면’

    네덜란드 참전용사 대한민국의 품에 ‘영면’

    한국전쟁 때 참전한 네덜란드 참전용사가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영면한다.국가보훈처는 6·25전쟁 때 유엔군으로 참전한 네덜란드 참전용사 고(故) 요한 테오도르 알데베렐트(Johan Theodoor Aldewereld)의 부산 유엔기념공원 안장식을 27일 오전 11시 거행한다고 26일 밝혔다. 알데베렐트의 유해는 지난 25일 오후 4시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들어와 서울현충원 봉안당에 임시 안치됐다. 고인은 1951년 8월 네덜란드 반호이츠부대 보병(일등병)으로 참전해 단장의 능선 전투, 평강 별고지 전투, 철의 삼각지 전투에 투입됐다. 1952년 7월 12일 전역한 뒤 네덜란드로 돌아가 사업가로 활동했다. 고인은 2016년 5월 네덜란드 횡성전투 65주년을 계기로 국가보훈처의 재방한 사업 초청으로 한국을 다녀갔다. 당시 동료 전우인 니콜라스 프란스 웨셀의 유해 봉환식과 유엔기념공원 안장식에도 참석했다. 고인은 네덜란드 참전협회에 동료들이 잠들어 있는 대한민국 땅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지난 2월 4일 88세로 세상을 떠났다. 부산유엔기념공원의 유엔 참전용사 사후 개별안장은 2015년 5월에 처음 실시됐으며 이번에 여섯 번째로 안장식이 열리게 된다. 이날 안장식 행사에는 네덜란드 방한단과 국가보훈처 및 주한 네덜란드대사관 관계자, 군사정전위원회 대표, 유엔사령부 대표 등 30여명이 참석한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국가보훈처는 6·25 전쟁때 유엔군으로 참전한 네덜란드 참전용사 고(故) 요한 테오도르 알데베렐트(Johan Theodoor Aldewereld) 씨의 부산 유엔기념공원 안장식을 27일오전 11시 거행한다? <국가보훈처 제공>
  • [자치단체장 25시] 현대사 스며든 강북…우이~신설 도시철도 타고 ‘힐링투어’

    [자치단체장 25시] 현대사 스며든 강북…우이~신설 도시철도 타고 ‘힐링투어’

    박겸수 강북구청장은 평소에 ‘우직하다’는 평을 듣는다. 198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을 따라 평화민주당(현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한 뒤 당적을 한 차례도 바꾸지 않았고, 1995년 서울 강북구 서울시의원으로 지방자치를 시작해 20여년 동안 꾸준히 구정을 챙겨왔다. 주민들은 어리석을 정도로 한길로 나아가는 박 구청장의 모습에 신뢰를 보냈다.박 구청장은 지난 22일 구청장실에서 서울신문과 만나 “이해관계에 따라 여야를 왔다 갔다 하는 건 옳지 않다. 그런 모습이 구민들에게 신뢰를 준 것 같다”면서 “지난 7년간 주민들 성원에 보답하는 길은 공약의 성실한 이행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강북구는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의 선거공약 이행실적 평가에서 2015년부터 올해까지 3년 연속 최우수 등급인 ‘SA’ 등급에 선정됐다.현재 강북구의 새로운 브랜드로 자리잡은 ‘역사문화관광벨트 조성’도 2010년 출마 당시 박 구청장이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던 것 중 하나다. 역사문화관광벨트는 북한산둘레길 2코스인 ‘순례길’을 따라 자연환경(북한산 국립공원, 북서울 꿈의숲 등)과 문화유산(순국선열 및 애국지사 16위 묘역, 국립4·19민주묘지, 3·1운동의 발상지인 봉황각과 분청사기 가마터)을 아울러 강북구만의 역사문화자원으로 특화시킨 것이다. 부지가 수유동과 우이동 일대 48만㎡에 이른다. 문화적 유산이 풍부한 강북구였기에 가능한 프로젝트다.박 구청장은 역사문화관광 벨트 조성 사업의 시작을 이렇게 회상했다. “구청장으로서 ‘강북구의 미래 비전이 뭘까’ 생각해 보니 미래가 보이지 않더라고요. 지역의 60%가 숲이고, 나머지는 일반주거단지로 묶여 있어 개발이 힘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손병희, 이시영, 신익희 선생 등이 잠들어 있는 순국선열 16위 묘와 3·1운동의 발상지 봉황각, 광복군 합동묘소, 4·19민주묘지 등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당시만 해도 표지판조차 없던 곳을 벨트로 잇고 생명력을 불어넣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땅속에 묻혀 있던 우리 선조들의 역사를 강북구에 스며들게 하고 싶었습니다.” 특히 지난해 근현대사기념관 개관은 박 구청장에게 ‘일대 사건’이다. 기념관은 동학농민운동부터 항일의병전쟁, 3·1운동을 거쳐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6·25전쟁, 4·19혁명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어린 학생들이 우리 역사를 보고 배울 수 있는 최적지인 셈이다. 박 구청장은 “역사문화관광벨트의 핵심은 기념관이라고 봤다. 2011년 박원순 서울시장이 당선되자마자 찾아가 기념관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설득했다”고 말했다. 지난달부터는 ‘너랑나랑우리랑 스탬프 힐링투어’라는 이름으로 근현대사기념관과 국립4·19민주묘지, 순국선열묘역 일대를 묶어 만든 역사·문화·관광 스탬프 투어를 시작했다. 4곳에서 스탬프를 받아 제휴 업소에 제시하면 음식값 등을 5~15% 정도 할인받을 수 있다.강북구 우이동과 동대문구 신설동을 연결하는 우이~신설선(13개 역, 11.4㎞)의 도시철도 개통은 강북구의 ‘역사문화관광벨트 조성’에 가속도를 더하고 있다. 우이~신설선은 2009년 9월 착공한 이후 서울시와 민간사업자가 갈등을 빚으며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다가 약 8년 만인 지난 9월 2일 개통했다. 우이동에서 신설동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출퇴근시간대 기준으로 종전 50분대에서 20분대로 30분가량 줄어들 것으로 구는 보고 있다. 박 구청장은 “도시철도가 북한산 역사문화관광벨트를 지나기 때문에 역사문화관광벨트와 북한산의 접근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될 것이다. 벌써 우이동 상인들은 ‘사람들이 늘었다’며 반색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는 우이~신설선의 수익성 문제에 대해 “(수익이) 안정화되려면 2년 정도 걸린다. 이용객이 많다 적다 논의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밝혔다. 이야기가 무르익자 박 구청장은 도시철도와 관련된 일화도 꺼내놨다. “제가 서울시의회 교통위원회 소속으로 강북구를 위해 일할 때 강북구 발전 저해 요인 중 하나가 교통이었습니다. 사실상 대중교통체계가 지하철 4호선 하나였거든요. 삼양로 구간도 차가 너무 막히고, 교통정체 해소 방안이 절실했습니다. 당시 민선 1기 시절 조순 서울시장을 찾아가 면담을 통해 도시철도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설득했던 게 기억납니다. 서울시의원 시절 기여했던 도시철도 사업을 구청장으로서 마무리 지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박겸수호(號)가 전폭적으로 지원해 온 4·19혁명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사업도 결실을 보고 있다. 문화재청은 지난 6월 세계기록유산의 등재신청대상으로 4·19혁명기록물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이는 박 구청장의 민선 6기 공약사항으로 2015년부터 시비를 포함해 약 2억 5000만원을 투입했다. 내년 3월 문화재청이 등재신청서류를 유네스코에 제출하면 최종결과는 세계기록유산국제자문위원회(IAC)의 심사를 거쳐 2019년 하반기쯤 발표된다. 박 구청장은 “실제 4·19혁명기록물이 유네스코에 등재되면 세계 민주주의 역사를 다시 쓸 수 있게 된다. 4·19혁명의 위상을 영국의 권리장전, 미국의 독립혁명, 프랑스 대혁명에 이은 세계 4대 혁명으로 격상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박 구청장은 ‘청소년 유해업소 근절운동’에도 애착이 크다. 일반음식점 영업신고를 한 뒤 퇴폐주점처럼 영업하는 이른바 ‘빨간집’ 없애기에 주력해 2015년 5월부터 지난해 말까지 170곳 중 118곳(69.4%)이 업종을 바꾸거나 문을 닫았다. 이들 업소는 세가 저렴한 학교 주변 일반 주택가 골목까지 침투해 구는 골머리를 앓아왔다. ‘학교보건법’에 따르면 학교로부터 반경 200m는 상대정화구역으로 교육상 위생, 유해업종은 들어설 수 없다. 당연히 학부모의 우려도 뒤따랐다. 박 구청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지역의 34개 초·중·고 학교 교장과 학부모들이 한데 모여 간담회를 하는데 ‘학교 앞에 유해업소를 없애달라’, ‘교육적으로 애들한테 좋지 않다’는 의견이 많더라고요. 바로 경찰서, 교육청과 힘을 합쳐 문제 해결에 나섰습니다.” 인터뷰를 끝마칠 때쯤 박 구청장의 사무실에 걸려 있는 큼지막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사인여천’(事人如天·사람 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라). 박 구청장은 “제가 2011년 처음 직원들과 만나는 신년인사회에서 ‘사인여천을 실천하고 구민과 소통을 통해 구민이 주인 되는 행정을 펼치겠다’고 말했다. 모든 공직자가 가야 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민선 5기 때 매일 오후 2~4시 구청장실 문을 열어놓고 주민들을 만난 이유”라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박 구청장은 내년 3선 도전에 대해 “내년 지방선거 출마 준비를 위해 열심히 주민들을 찾아가고 이야기를 듣는 중이다. 출마하라는 의견을 많이 주신다. 강북구 발전을 위해서, 제가 공약하고 기획한 역사 문화 관광도시를 확실하게 마무리 짓기 위해서 출마는 필요하다”고 명확한 입장을 밝혔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박겸수 강북구청장은 누구 1980년대 군사정권에 맞서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상도동계와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동교동계를 주축으로 결성돼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민주화추진협의회에서 활동했다. 이후 서울시의원을 두 번 지냈고 2010년 59.31%라는 높은 득표율로 민선 5기 구청장에 당선됐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도 52.34%를 기록했다.
  • 6·25 참전 네덜란드 노병 “한국에 묻어달라”

    6·25 참전 네덜란드 노병 “한국에 묻어달라”

    6·25전쟁에 참전했던 네덜란드 노병이 유언에 따라 한국 땅에서 영면한다.네덜란드인 요한 테오도르 알데베렐트는 22살 때인 1951년 8월 네덜란드 ‘반호이츠 부대’ 일병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던 강원도 ‘단장의 능선’ 전투 등에 참가한 그는 이듬해 7월 네덜란드로 돌아가 전역했다. 고국에서 사업가로 성공한 그는 지난해 5월 국가보훈처 초청을 받아 6·25전쟁 이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이때 그는 네덜란드 전우 니콜라스 프란스 웨셀의 유해봉환식에도 참석했다. 자신이 피 흘려 싸웠던 대한민국의 놀라운 발전상과 참전용사에 대한 예우에 큰 감동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한국 정부에 대한 감사의 편지를 로디 엠브레흐츠 주한 네덜란드대사에게 보내기도 했다. 지난 2월 4일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알데베렐트는 ‘전우들이 잠들어 있는 대한민국 땅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보훈처는 유족과 협의해 오는 25일 그의 유해를 봉환키로 했다. 당일 인천공항에서는 피우진 보훈처장 주관으로 유해봉환식이 거행된다. 이어 그의 유해는 서울현충원 봉안당에 임시 안치됐다가 오는 27일 유엔군 묘지가 있는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6·25전쟁 참전 후 고국에서 숨을 거두고 한국 땅에 유해가 묻힌 유엔군 참전용사는 2015년 5월 안장된 프랑스인 레몽 베르나르를 시작으로 알데베렐트까지 5명이다. 박홍환 전문기자 stinger@seoul.co.kr
  • 빨치산 토벌작전 영웅, 66년 만의 귀환

    6·25전쟁 당시 강원도 인제에서 북한 빨치산을 토벌하다가 전사한 한진홍(당시 21세) 일병의 유해가 전사 66년여 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19일 경남 합천군 초계면 내동 마을회관에서 이 마을에 사는 한 일병의 아들 한윤식(68)씨에게 아버지의 유해 등을 전달하는 ‘호국영웅 귀환행사’를 실시했다. 유해와 함께 가족에게 전달된 물품들은 전사자 신원확인 통지서와 국방부장관 위로패, 유해 수습 시 관을 덮었던 태극기, 발굴 유품 등이다. 한 일병은 결혼 후 아들을 낳고 살다가 1951년 1월 육군 직할부대인 결사유격대에 입대했다. 한 달여 만에 북한군 후방지역 침투 작전에 참가한 한 일병은 대원들과 함께 강원도 어은산을 향해 침투하던 중 2월 15일 인제군 설악산 저항령 일대에서 빨치산을 공격하다 적의 총탄에 전사했다. 유해는 지난해 11월 8일 인제군 북면 용대리 저항령에서 수습됐다. 한 등산객이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저항령 등반 중 유해 목격담이 단서가 됐다. 이 글이 유해발굴단 소속 서일권(38) 탐사관의 눈에 띄었고 곧바로 현장탐사와 발굴이 이어졌다. 한 일병의 신원은 아들 한씨가 이미 2014년 11월 유전자 시료를 채취해 둬 가능했다. 한 일병은 지난 2000년 국군 유해발굴이 시작된 이후 122번째로 신원이 확인된 전사자로 기록됐다. 한씨는 “너무나 감격스럽고 국방부 관계자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 일병의 유해는 유가족들과 협의를 거쳐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아직 발굴되지 않은 국군 전사자는 12만 3000여명에 이른다. 박홍환 전문기자 stinger@seoul.co.kr
  • [우리 이웃 접경지역 : 6개 시·군 특성과 애로사항·숙원사업] 남북 평화 ‘물꼬’ 금강산 관광 조속 재개를

    [우리 이웃 접경지역 : 6개 시·군 특성과 애로사항·숙원사업] 남북 평화 ‘물꼬’ 금강산 관광 조속 재개를

    금강산 관광이 중단된 지 벌써 8년이 지났다. 1998년 11월에 시작된 금강산관광은 남북분단 역사에 새로운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유람선을 이용한 해로 관광을 시작으로 2003년 9월부터는 육로관광이 시작됐고, 그로 인해 우리 고성군에도 관련 사업의 투자와 업체의 증가, 그에 따른 고용의 증가 등 지역경제의 한 축으로 자리잡게 됐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2008년 7월 관광객 피격사건으로 인해 금강산 관광은 중단되고 머지않은 장래에 관광이 재개되리라는 군민의 희망은 이제 절망으로 변한 지 오래다. 금강산 관광 중단으로 인한 우리 군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빚을 내어 투자했던 식당, 건어물 가게, 기념품점 등은 졸지에 빚더미에 앉았고, 관광업체에 종사하던 직원들은 직장을 잃게 됐다. 그로 인해 지역경제는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가정경제의 파탄으로 이혼가정, 조손가정 증가 등 지역의 존립마저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고성군은 1945년 해방과 동시에 3·8선 이북에 위치하며 북한 치하에 있다가 6·25전쟁으로 인해 수복된 지역이다. 분단의 한반도처럼 남북 고성이 비슷한 면적으로 절반으로 나뉘어 있고 우리가 그토록 재개되기를 원하는 금강산 관광의 금강산도 북고성 땅이다. 따라서 남북평화와 화합의 전초기지로서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손색이 없는 곳이다. 이러한 여건을 바탕으로 우리 군은 통일 및 북방경제시대에 대비해 통일 자치군 지정 건의 등 통일고성 기반구축을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핵실험, 미사일 발사 등 끊임없는 북한의 도발로 인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금강산 관광은 단순히 관광 차원을 넘어 화해와 협력 교류, 평화의 지름길이다. 그 물꼬가 우리 고성의 땅 금강산에서 시작될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금강산 관광이 남북평화의 상징으로 조속히 재개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금강산 관광 재개에 고성군의 희망을 담아 본다.
  • 28일 평택해군기지서 국군의 날 기념식

    문재인 정부의 첫 번째 국군의 날 행사가 오는 28일 경기 평택 해군 제2함대사령부에서 열린다. 해군기지에서 국군의 날 행사가 열리는 것은 창군 이래 처음이다. 국군의 날은 6·25전쟁 당시 국군이 38선을 돌파한 10월 1일을 기념해 제정됐다. 기념식도 매년 10월 1일 열렸지만 올해는 추석 연휴와 겹쳐 기념행사를 앞당겼다. 국방부 관계자는 14일 “건군 제69주년 국군의 날 행사가 9월 28일 오전 해군 제2함대사령부에서 개최된다”면서 “북한의 도발 위협에 따른 위중한 안보 상황임을 고려해 최초로 육·해·공 3군 합동 전력이 해군기지에서 행사를 진행함으로써 강력한 대북 억제 의지를 과시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과 직접 대적하면서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수호하는 제2함대사령부에서 기념식을 열어 북한의 도발에 대한 결연한 대응 의지를 과시한다는 게 국방부의 설명이다. 이번 기념식에서 군은 해군의 각종 함정과 육·해·공군의 각종 항공기, 탄도미사일인 ‘현무2’, 순항미사일인 ‘현무3’를 비롯한 각종 전략무기들을 대거 공개할 예정이다. 특히 한국형 3축체계의 위력을 국민들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취지에서 사거리 300㎞ 이상의 현무2A, 500㎞ 이상의 현무2B, 800㎞ 이상의 현무2C와 사거리 1000㎞가 넘는 현무3, 지대지미사일 에이태킴스(ATACMS), 요격미사일 패트리엇(PAC2), 중거리 지대공미사일(MSAM), 공대지미사일 타우루스·슬램ER 등을 실물 공개한다. 굳건한 한·미 동맹과 한국에 대한 미국의 확장 억제 공약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핵항공모함을 비롯한 미국 전략자산들도 영상을 통해 소개한다. 이와 관련, 빈센트 브룩스 주한미군사령관 겸 한미연합사령관은 보국훈장 통일장을 받는다. 한미연합사령관이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훈장을 받는 것은 처음이다. 국군의 날 기념식에 이어 다음달 8∼12일 제15회 지상군 페스티벌, 17∼22일 서울 국제 항공우주 및 방위산업전시회(ADEX), 24∼27일 대한민국 해양방위산업전(MADEX) 등 육·해·공군의 다양한 안보 관련 행사가 진행된다. 박홍환 전문기자 stinger@seoul.co.kr
  • [인물 플러스] 사업도 봉사도 ‘나이스 샷’…“희망·사랑의 골프장 건설할 것”

    [인물 플러스] 사업도 봉사도 ‘나이스 샷’…“희망·사랑의 골프장 건설할 것”

    골프는 많은 스포츠 중에서 육체적·정신적 건강을 동시에 도모하는 매너 스포츠다. 또 품위 있는 인간관계를 유지시켜 줄 뿐만 아니라 어린이부터 노년층까지 고르게 참여하며 즐길 수 있는 종목이다. 과거에는 돈 많은 사람들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대중화되지 못했지만 최근 스크린골프가 대중화되면서 이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운동’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으며 많은 사람이 골프를 즐기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본지는 국내에서 골프사업을 한 데 이어 태국 골프업계를 손금 보듯 하는 이윤식 위너골프 대표를 만나 이 대표가 그리는 골프의 세계화에 대한 비전을 인터뷰했다. 편집자 주태국은 한국 골퍼들이 가장 선호하는 골프여행지 중 하나다. 특히 추운 겨울에 무제한의 라운딩, 그리고 비교적 저렴한 물가가 그 이유일 것이다. 이윤식 대표는 “태국은 연중 온화한 날씨와 천혜의 자연경관, 다양한 볼거리와 풍부한 먹을거리 등 다양한 매력을 간직하고 있다”고 말한다. 게다가 “국내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저렴한 물가가 골퍼들을 즐겁게 한다며 운동 후 피로를 풀 수 있는 스파, 마사지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마련돼 있어 골퍼들의 천국이라 불린다”고 말하며 태국 자랑이다. 파주에서 골프사업을 크게 하면서 실패의 경험도 있기도 한 이 대표는 태국에 7년전 건너가 골프사업을 시작, 성공의 길을 걷고 있다. 태국은 한국인이 가장 즐겨 찾는 해외 여행지 상위에 들어가기도 한다. 지난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가 처음 시행됐을 때 많은 한국인이 첫 해외 여행지로 선택한 나라가 태국이었다. 한국인 해외 여행객 숫자가 2000만명을 돌파한 2016년 한 해 동안에도 태국을 방문한 여행객 숫자는 150만명이 넘었다.국가별로 보면 일본, 미국, 중국의 뒤를 잇는다. 미국, 일본, 중국은 근대 이후 한국인의 운명을 좌우했던 나라들. 이런 나라들에 관한 정보는 지금도 미디어나 서적을 통해 시시각각으로 우리에게 전해진다. 또 직간접적으로 이 3개국과 어떻게든 연관을 맺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태국은 그 많은 여행객 숫자에 비하면 그리 가깝게 느껴지지는 않는 듯하다. 여행자유화 시절부터 20년간 태국 골프업계를 잘 아는 이윤식 대표는 “한국인의 여행 행태나 여행 장소 등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거의 없다”고 말했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패키지도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변함이 없다는 얘기다. 큰 호텔을 좋아하고, 악어농장이나 트랜스젠더 쇼를 보고, 쇼핑센터에 들르는 것도 거의 그대로라는 것. 나아가 최근 겨울철에 많은 골프 관광객들은 공항에서 골프텔로 직행하거나 골프장들만 전전하다가 귀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 사람들의 관심 사항은 크게 변한 게 없다는 것이 이 대표의 분석이다. 사실 태국은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한국과 매우 가까운 나라다. 6·25전쟁 때 태국군이 1만 2000명이나 참전했다. 터키 수준이다. 현재는 한국이 태국보다 잘살기 때문에 태국인들이 한국을 부러워하지만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사정은 많이 달랐다. 지금은 한국에서 중동 지역을 왕래할 때 두바이를 통해서 거의 직항이 운항되지만 1970년대에는 대부분 방콕에서 비행기를 갈아탔다. 중동 지역으로 일하러 나가거나 일을 마치고 귀국하는 한국인 근로자들이 반드시 들르는 곳이 방콕이었다. 당시에는 한국인 건설근로자들이 방콕에서 내려 태국의 부유함과 자유로움을 부러워하기도 하였다. 지금은 태국 사람들에게 한국산 공산품, 게임, K팝, 한국 화장품 등이 큰 인기다. 한국 아이돌 연예인들의 얼굴 모습을 넣은 봉지에 담긴 과자들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태국은 또 한국을 찾는 탈북민들이 자주 경유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태국 정부는 이런저런 사안에 대해 한국을 적극 지원한다. 최근에는 한국대사관의 노력으로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해외 골프 여행의 메카는 태국이다. 골퍼들에게는 태국에서의 골프 라운드를 가장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특히 수도 방콕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면 세계적인 휴양지 빳따야(파타야)와 여행객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청정 지역 짠타부리가 있다. 그리고 카오야, 빳따야에 가면 명문 골프장 라운드와 함께 태국의 문화를 만끽할 수 있고, 짠타부리에 가면 진정한 휴식과 흥미로운 골프코스가 기다리는 숨은 진주를 만날 수 있다. 많은 이들은 우리나라의 가장 더운 시기인 7~8월이 태국에서도 가장 더운 시기라고 오해하곤 한다. 하지만 그 시기 태국은 우기를 거치고 있어 평년보다 기온이 낮고, 우천 빈도도 야외 활동에 큰 지장이 없을 정도로 뜸하다. 지난 7월 말 찾은 태국은 한낮에는 꽤 더웠지만 열대야가 없어 해가 진 이후에는 우리나라보다 더 선선했다. 쑤완나품 국제공항에서 스쿰빗 로드를 이용하는 것으로 태국에서의 일정이 시작됐다. 방콕에서 동쪽으로 뻗은 스쿰빗 로드를 이용하면 태국 동부로 이동할 수 있다. 이윤식 대표는 태국 골프 코스가 전체적으로 조경이 아름답고 전통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이 대표는 태국의 고급스럽고 깔끔한 인테리어의 클럽하우스를 지나 코스에 나가다 보면 울창한 나무숲과 나무꽃, 중간중간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큰 바위가 멋진 조화를 이뤄 라운드 전부터 골퍼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고 한다. 토너먼트 코스답게 난이도도 꽤 높아 상급자들도 흥미로운 라운드를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반적인 동남아 골프장과 달리 워터해저드가 많지 않고 페어웨이의 적절한 언듈레이션과 고저의 차가 있어 마치 한국 골프장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한다. 코스 컨디션도 우리네 회원제 골프장 못지않게 매우 준수하다. 페어웨이 지대보다 그린이 높이 솟아 있는 포대 그린이 꽤 많고 그린 주변과 페어웨이 곳곳에 넓은 벙커가 있는 것도 람차방 컨트리클럽의 특징이다. 좋은 스코어를 위해서는 샷 거리보다 정확성을 갖춘 샷이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대표는 누구나 배우고 즐길 수 있는 ‘골프스쿨’도 만들고 싶다고 한다. 골프 초보에서 싱글되는 법, 선택과 집중으로 실력을 키운다는 것이다. 이윤식 대표는 “골퍼분들의 아픈 곳을 치유해 줄 수 있는 그런 프로가 되고 싶습니다”라며 “남녀노소 누구나 골프를 즐길 수 있게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라고 전했다. 이 대표는 골프를 좀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도록 골프연습장만의 문화를 만들어 가고 싶다고 한다. 체계적인 골프 프로그램 통해 화상의 서비스도 제공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윤식 대표는 서울 판교 일대에서 도시가스 사업을 하고 파주에서 큰 규모의 골프사업을 하다가 큰 손해를 보았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지금으로부터 7년전에 태국에 건너가 강한 추진력을 발휘, 골프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방콕 부근 골프장과 카오야 지역에 5~6개의 골프장을 운영하며 골프 인구 저변 확대에 힘을 쓰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해외 진출을 위한 학원 운영을 하고 있다. ‘홈스테이 교육’을 통해 외국으로 진출시키는 그는 현재 골프투어 사업도 왕성하게 경영하고 있다. 이 대표는 한 번의 실패를 거울삼아 현재 태국에서 골프사업에 성공했다는 소리를 주변으로부터 듣는다. 이러한 가운데 태국지역 불우이웃돕기 운동에도 활발하게 움직이며 사업을 키워가고 있다. 이 대표는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태국에서 봉사활동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또 자신이 운영하는 골프장을 주변 사람들에게 개방, 골프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한다. 그래서 현지 태국 당국으로부터 신임을 얻는 등 일취월장하고 있다. 성공의 길을 걷고 있는 이윤식 대표는 “향후 희망과 사랑이 넘치는 골프장을 건설할 것”이라고 말한다. 골프 사랑은 지금 태국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홍의석 객원기자 hong5960@seoul.co.kr
  • [퍼블릭IN 블로그] “세금으로 해준 게 뭐냐”→“세금으로 나라 바꾸자” 되는 그날까지

    [퍼블릭IN 블로그] “세금으로 해준 게 뭐냐”→“세금으로 나라 바꾸자” 되는 그날까지

    세금 징수가 본업인 세무공무원조차 자신이 내는 세금을 “뜯긴다”고 표현하는 게 현실이다. ‘피’와 ‘폭탄’은 우리말에서 세금을 달리 부르는 단어다. 세금 내기 좋아하는 국민은 어디에도 없다지만 우리 국민들의 조세 거부감은 유별나다. 게다가 갈등 수위도 갈수록 높아진다. 노무현 정부는 ‘세금 폭탄’에 휘청댔다. 이명박 정부는 ‘부자 감세’에 요동쳤다. 박근혜 정부는 ‘서민 증세’에 홍역을 치렀다.# 고혈·폭탄… 의무보단 착취의 상징 된 세금 생각해 보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조선 말기 ‘삼정(전정·군정·환곡)의 문란’에서 시작해 일제 식민지, 6·25전쟁, 권위주의 정권,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세월호 참사 등으로 이어진 200여년 동안 우리는 세금을 권리이자 의무로 인식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온 국민이 각자도생(各自圖生)을 생존 원리로 체득한 나라에서 세금이란 그저 수탈과 착취를 고상하게 부르는 이름이었을 뿐이다. 세금을 이르는 흔한 표현인 ‘혈세’(血稅)가 그 증거다. 혈세란 원래 메이지유신 당시 일본에서 ‘전쟁에서 피를 흘리는’ 병역 의무를 가리키는 용어였다. 하지만 이 땅에선 이미 1920년대부터 ‘민중의 고혈을 빠는 세금’이라는 용례로 나타난다. 종합부동산세 도입에 반발하면서 나온 ‘세금 폭탄’ 역시 조세에 대한 적대감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용어다. ‘불공평한 세금’은 가뜩이나 불만에 찬 민초들의 심장에 불을 질렀다. 금융자산과 부동산은 막대한 세제 특혜를 받는 반면 체감할 수 있는 복지 지출은 턱없이 부족했다. 부당한 세금에 저항하는 것은 독립운동이요 민주화운동이었다.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 발표한 결의문에서 두 번째 요구사항이 바로 “서민의 세금을 대폭 감면하고 국민경제의 밑받침인 근로대중의 최저생활을 보장하라”였다. 서슬 퍼런 유신정권조차 부가가치세 시행에 반발해 세무서 직원들이 피습·살해당하고 세무서가 불탔다는 보고에 긴장하기도 했다. # 모두를 위한 ‘보편 증세’, 국가 신뢰에 달렸다 천만다행으로 세상은 바뀌었다. 이 나라는 더이상 세월호 참사로 국민 노릇 하는데 자괴감을 주던 최모씨의 나라가 아니다.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 빛나는 ‘촛불 혁명’의 온기가 지속되려면 우리도 이제 발상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국가가 내게 해준 게 뭐냐’에서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우리 나라를 나라답게 가꾸자’로. 국민들은 문재인 정부가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어주길 기대한다. 사실 새로운 것도 아니다. 헌법은 인권 증진(제10조), 고용 증진과 적정임금 보장(제32조 제1항), 사회복지와 재해예방·재난안전(제34조), 환경 보전과 쾌적한 주거 보장(제35조), 소득 분배와 경제 민주화(제119조 제2항) 등 국가의 의무로 가득하다. 다만 역대 정부가 ‘국민들이 세금 내기를 싫어한다’거나 ‘증세에는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논리 뒤에 숨었을 뿐이다. 국가가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하고 제 구실을 하려면 결국 지금보다도 훨씬 더 적극적인 조세·재정 정책이 필요하다. 문재인 대통령과 기획재정부가 좀더 담대한 조세정책으로 국민들에게 ‘보편 증세’를 설득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세종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월요 정책마당] 이산가족이 재회하는 추석을 고대하며/천해성 통일부 차관

    [월요 정책마당] 이산가족이 재회하는 추석을 고대하며/천해성 통일부 차관

    가족·친지들이 모여 송편을 빚고 따뜻한 정을 나누는 민족 대명절이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명절이 되면 북녘 고향에 있는 가족들의 생사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이산가족들은 더욱 그리움이 커질 것이다. 만날 수 없는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 태어난 고향 땅을 밟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이산가족 규모는 대략 60만~70만명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에 등록된 이산가족찾기 신청자는 8월 말 현재 총 13만 1221명으로 연령대로 보면 80대 이상 고령자가 60% 이상을 차지한다. 그동안 정부는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다. 1971년 8월 대한적십자사가 북한적십자사에 제의한 이산가족 찾기 제안을 시작으로 1972년 8월 29일 제1차 남북적십자본회담이 개최됐다.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은 이산가족 문제 해결의 전환점이 됐다. 이후 20차례 상봉과 7차례 화상상봉이 실현됐고 남북의 4677가족 2만 3519명이 상봉했다. 우리측은 이와 함께 전면적 생사확인, 상봉 정례화, 서신 교환, 고향 방문 등을 북측에 지속적으로 제안해 왔다. 북한이 국군 포로나 납북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상황에서도 이산가족의 틀 내에서 생사확인과 상봉이 추진되기도 했다. 전체 이산가족 규모에 비하면 미약하지만 꾸준히 교류가 이어짐에 따라 이산가족 문제가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일방적인 대화 중단과 도발로 인해 2015년 제20차 행사 이후 이산가족 상봉도 남북 간 협의도 중단되고 있어 안타까운 심정이다. 이산가족 문제는 이산 1세대의 고령화로 인해 다른 어떤 사안보다도 시급히 해결해야 할 책무다. 정부는 이산가족 등 인도적 문제를 최우선 과제 중 하나로 인식하고 있으며 문제 해결에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베를린 구상’을 통해 이산가족 상봉, 고향 방문, 성묘를 북한에 제의했다. 대한적십자사는 후속 조치로 남북적십자회담을 판문점에서 개최할 것을 7월 17일 북한에 제의했다. 대통령은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이를 재촉구했다. 이에 대해 북한은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응답하지 않은 채 도발을 계속하고 있으나 정부는 인도적 문제와 관련한 남북 간 협력은 여전히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북한은 우리 정부의 제의에 조속히 호응해 나와야 한다. 남북 이산가족의 한을 풀기 위해 이산가족 교류의 문을 열어야 한다. 상봉, 고향 방문, 성묘를 우선 추진하고 전면적 생사확인, 상봉 정례화 및 규모 확대, 서신 교환 등 다각적 교류를 확대해야 한다. 거동이 불편한 분들을 위해 화상상봉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민간 교류 지원을 확대하고 교류 기반을 구축하는 사업도 병행하고 있다. 남북 이산가족 교류촉진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지난 2월에는 이산가족 교류경비 지원에 관한 지침을 개정해 민간 교류 지원을 확대했다. 앞으로 이산가족 교류에 대비해 ‘유전자 검사’와 ‘영상편지’를 준비하고 있다. 이 밖에도 이산가족 역사가 보존될 수 있도록 ‘이산가족 기록물 수집, 전시 및 디지털 박물관 구축 사업’도 추진 중이다. 납북자와 국군 포로 문제도 당사자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지금 북한에 억류된 우리 국민도 하루빨리 돌아올 수 있도록 남북 관계 차원의 모든 노력과 함께 국제사회와도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다. 올해 말 전시 납북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임진각에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을 개관한다. 비슷한 시기에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이산가족 기록물 기획전시회’가 개최되고 ‘디지털 박물관’도 개관한다. 많은 분들이 참여하셔서 이산가족, 납북자 등의 인도적 문제 해결에 공감해 주시기를 바란다. 실질적인 해결을 위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조속히 상봉과 교류가 재개되고 이산가족의 아픔, 나아가 분단으로 인한 한반도의 아픔이 해소되기를 기대한다.
  • “남북 다툼 가슴 아파 조국 안 떠나… 그게 이중섭의 양심”

    “남북 다툼 가슴 아파 조국 안 떠나… 그게 이중섭의 양심”

    올해 101세인 김병기 화백. 지난 7월 대한민국예술원 역대 최고령 신입회원이 되어 화제가 됐던 그는 우리 근현대 화단의 형성을 직접 몸으로 겪은 거의 유일한 생존 화가다. 여름을 아쉬워하듯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던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있는 김 화백의 화실에 예사롭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순박한 인상의 야마모토 아야코(42). 한국미술사의 찬란한 빛과 같은, 그러나 ‘불운의 천재 화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이중섭(1916~1956)의 큰아들 태현(1947년생·지난해 작고)씨의 장녀, 그러니까 이중섭의 손녀다.●김화백, 이중섭과 보통학교서 첫 인연 김 화백은 아야코를 보자마자 반갑게 두 손을 부여잡고 “네가 바로 중섭의 손녀로구나”라며 감격스러워했다. 다마미술대학에서 영상을 전공하고, 지금은 교토 근처 나라에서 인쇄회사에 다니고 있다는 아야코는 “할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인 김 화백님을 만나 할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어 일부러 찾아왔다”고 했다. 1916년 평양에서 태어난 김 화백과 이중섭은 평양의 종로보통학교에서 6년간 같은 반을 지낸 동창이다. 두 사람은 일제강점기에 도쿄의 분카가쿠엔(文化學院)에서도 함께 유학했다. 이중섭은 1935년 도쿄 제국미술학교서양화과에 입학했다가 1년 만에 그만두고 전위적인 분위기가 강했던 분카가쿠엔 미술부로 옮겼다. “평양의 종로보통학교에서 중섭과 나는 6년을 같은 반에서 공부했지. 한 학년에 3개 조가 있었고, 우리는 3조였어. 같은 학년에서 미술을 하는 사람은 우리 둘뿐이었기 때문에 더욱 가깝게 지냈지. 중섭의 집에 가서 형님에게 붓글씨를 배우기도 했고, 중섭이 우리 집에 와서 홍차도 마시고, 아버지(김 화백의 아버지는 1세대 서양화가인 김찬영이다)가 두고 간 영국 잡지를 보곤 했어.”김 화백은 평양 지도를 그려 보이며 이중섭과의 학창 시절 얘기를 쏟아 놓았고 아야코는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눈을 반짝이며 귀를 기울였다. “나는 평양고보로 진학하고, 중섭은 평북 정주의 오산 고보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민족주의자가 된 거지. 일본 유학 시절에도 중섭은 석고 데생 시간에 소를 그리고, 학생 파티에선 일본 학생들이 알아 듣거나 말거나 ‘낙화암, 낙화암, 왜 말이 없는가’ 하는 조국의 노래를 거리낌 없이 불렀어. 어떻게든 해야 하는 일을 하는 패기 넘치는 청년이었지.” ●외로움 견디며 ‘부부’ 등 걸작 쏟아내 이중섭은 분카가쿠엔에서 2년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도 만났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44년 학교를 졸업하고 연인 마사코를 일본에 둔 채 원산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마사코가 한국으로 와 혼례를 올리고 부부가 됐고 첫째 태현과 둘째 태성을 얻었다. 가족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란을 내려갔다가 제주 서귀포에서 1년을 살았다. 1951년 겨울 부산으로 건너오지만 생활고 때문에 마사코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냈다. 이중섭은 1953년 도쿄에서 단 5일의 해후를 끝으로 가족과 영영 이별하게 된다. 김 화백은 그때를 또렷이 기억했다. “나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본에 가서 살 방도를 찾았겠지만 중섭은 달랐어. 두 형제(남과 북)가 서로 싸우는데 내가 어떻게 일본에 마음 편히 남겠는가라고 했지. 그게 바로 중섭의 양심이었어.” 이중섭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며 ‘소’, ‘부부’, ‘가족’ 등 한국 미술의 대표적인 걸작들을 쏟아냈다. 그러나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겪다 1956년 9월 6일 서울적십자병원에서 외롭게 숨을 거뒀다. 그의 주검을 처음 본 것도 김 화백이었다. ●간염·영양실조 고통 겪다 숨져“적십자병원에 중섭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갔는데 침대에는 안 보이고 시체실에 있었던 거야. 그 길로 문예단체총연합에 연락하고, 친구들에게도 연락해서 20여명이 모여 예술인장을 치렀어. 홍제동에서 화장을 하고 뼈의 일부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다른 일부는 일본으로 보냈어.” 마지막 순간의 이야기를 듣던 아야코는 기어코 눈물을 쏟았다. 아야코는 “할아버지가 마지막 순간에 누구와 있었는지가 궁금했다. 너무 외롭게 가셨을 것 같아 항상 마음에 걸렸다”면서 “마지막 길을 잘 열어준 김병기 화백님께 찾아가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라고 할아버지가 나를 떠미는 것 같아 한국에 왔다”고 털어놨다. 김 화백은 아야코의 손을 꼭 잡고 “처음 만났지만 순수한 점이 중섭을 빼닮았다”면서 “나를 친할아버지처럼 생각하라”고 했다. 아야코는 “할아버지를 만난 것처럼 반갑고, 오래전부터 아는 분처럼 따뜻했다. 감사의 마음을 직접 전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하다”며 활짝 웃었다.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걷는 두 사람은 이미 한 가족이었다. 글 사진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단독] 역사의식 없는 정부… 천안함 기림비도 “가치 없다” 졸속 반출

    [단독] 역사의식 없는 정부… 천안함 기림비도 “가치 없다” 졸속 반출

    문화재청이 지난해 말 평택기지로 반출을 승인한 용산 미군기지 내 기념물 55점은 대부분 주한미군과 관련된 것들이다. 따라서 얼핏 가볍게 생각하면 ‘미군 기념물을 미군이 가져가겠다는데 뭐가 잘못이냐’고 볼 수도 있다. 문화재청도 이런 판단을 토대로 반출을 승인했을 수 있다.하지만 이는 역사의식이 결여된 편의주의적 사고로, 특히 공무원들이 이같이 사고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역사나 문화재, 기념물을 통시적(通時的) 관점에서 보지 않고, 단일 물품(item)처럼 사고하는 단편적 시각이 정부의 판단을 지배할 경우 우리 역사를 보존하고 계승하는 것은 위기에 빠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주한미군의 기념물이라고 모두 반출을 허용해 버리면 지난 60여년간 축적된 ‘용산의 현대사’가 통째로 공동화(空洞化)되는 현상이 빚어지는 것이다.서울신문이 10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장인 국민의당 유성엽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용산 미군기지 내 기념물·기념비 이전 평가 결과 목록’을 살펴보면 문화재청은 지난해 12월 13일 단 하루 만에 미군 측이 요구한 용산기지 내 기념물 68점 중 55점에 대해 반출을 승인했다.문화재청은 이날 1차 서면평가만으로 미군 측이 요구한 용산기지 내 기념물 68점 중 51점에 대해 ‘주한미군 역사와 관련됐다’는 이유로 모두 이전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사망한 미7사단 소속 코이너 소위의 이름을 딴 캠프 코이너 안내 동판, 첫 미국고문사절단장 윌리엄 로버츠 장군을 기리는 로버츠 광장 안내 동판,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 제8군 사령관으로서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한 낙동강전투 등을 지휘한 워커 장군을 기리는 동상과 안내판 등이 포함됐다.또 이순신 장군 동상과 천안함 관련 기림비, 석탑, 석등 등에 대해서는 “최근에 조성된 것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 반출을 승인했다. 문화재청은 같은 날 2차 현지실사를 통해 기념물 4건을 추가로 반출 승인했다. 졸속 심사라는 비판이 나오는 대목이다.반면 문화재청이 용산에 보존하기로 결정한 것은 포탄병기념비, 조선시대 남단 유적터, 조선시대 문인석상, 일제시대 초소 등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조사팀 명단 공개 요청엔 “불가” 문화재청이 이처럼 반출을 승인한 55점 가운데 지난 6월까지 윌턴 H 워커 장군 동상 등 12점이 평택기지로 이전 완료됐다. 나머지 43점은 연말까지 순차적으로 용산 미군기지 이전과 함께 모두 이전될 예정이다. 문화재청은 반출을 승인한 조사팀의 명단을 공개해 달라는 서울신문의 문의에 대해 “한·미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문화재보호분과회의의 ‘주한미군기지 내 문화재 조사를 위한 절차서’ 규정상 공개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신주백 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는 “정부의 판단 기준은 단순히 ‘용산기지 조성 후 미군과 관련이 됐느냐, 안 됐느냐’”라면서 “기념물 하나하나로 판단할 것이냐 역사적, 공간적 차원에서 판단할 것이냐의 문제인데 한국 정부는 기념물 하나하나에 대한 판정에 머물렀다”고 지적했다. 김천수 용산문화원 역사문화연구실장도 “결국 기나긴 용산 군사기지 역사에서 미군이 주둔했던 역사는 소거해 버린 것”이라면서 “일제강점기까지의 역사만 용산의 역사인가”라고 반문했다. 이어 “역사라는 것은 단편적으로 볼 게 아니라 유적이나 돌 하나도 전체 맥락 속에서 역사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정부가 반출을 허가한 캠프코이너 안내 동판의 코이너 소위는 단순히 주한미군 역사와 관련된 인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한국전쟁에 참전해 사망한 군인으로 우리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전 승인된 나이트 필드 기념비도 3사단 7보병연대 F중대 소속의 노아 나이트 일병의 이름에서 따왔다. 나이트 일병은 1951년 11월 23~24일 고왕산 부근 고지에서 일어난 전투에서 급조폭발물을 휴대한 채 아군 진지로 돌입하는 중공군을 저지하다 폭발로 중상을 입었다. 미국은 나이트 일병의 탁월한 용기를 인정, 명예훈장을 수여했다. 김 실장은 “나이트 필드는 한미연합군사령부와 주한미군사령부의 주요 의식이 치러졌던 곳”이라면서 “군 수뇌부와 역대 대통령들이 이곳에서 행사를 치렀는데 이를 가져가는 것도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특히 1차 서면조사에서 반출을 승인한 한국전쟁 미군 기념비(만주사변 전사자 충혼비)는 미군 역사와만 관련이 됐다고 볼 수 없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본래 충혼비는 일본군이 1931년 만주사변에서 사망한 일본군 병사들을 추모하고자 1935년 용산기지 자리에 세웠다. 주한미군이 1953년 용산기지 주둔을 시작하면서 충혼비의 비석을 교체해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전사자 기념비로 재건립했다. 이는 일본군 병참 기지에서 미군기지로 외국군의 주둔지가 됐던 용산의 역사를 반영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화재청은 이에 대해 “주한미군 역사와 관련성이 높고, 원형이 심하게 손상됐다”는 이유를 들어 반출 승인했다. 신 교수는 “충혼비는 한국을 식민 지배한 일본의 역사이기도 하고, 한국을 구해준 미군의 역사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면서 “미군이 여기에 얹혀서 기념비를 만들었으니 미군이 가져가도 된다고 하는 것은 한·미 기억이 공존하는데 우리는 이를 소거시켜 버리고 미국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라고 지적했다.●‘용산기지 역사화’ 공론화 필요 전문가들은 한국 정부가 이처럼 역사에 대한 주체 의식 없이 기념물 반출을 허가함에 따라 용산기지 이전 후 조성되는 국가공원도 ‘미군 주둔의 역사’는 빠진 허울뿐인 국가공원이 될 공산이 커졌다고 우려한다. 신 교수는 “1953년부터 현재까지 미군이 주둔했던 64년간의 세월을 어떻게 역사화할 것인가에 대한 아무런 고민이나 시야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김 실장은 “미군 존재의 흔적을 모두 소거하면 미군 주둔의 역사가 어떻게 설명되겠느냐”면서 “기념물을 되돌려받지 못한다면 이를 기록할 표지석이라도 남겨야 한다”고 말했다. 성장현 용산구청장은 “용산기지를 어떻게 역사화할 것인지 공론화가 필요하다”면서 “현재 용산국가공원 사업은 국토교통부에서만 맡고 있는데, 다양한 주체가 공원 조성 과정에 참여해 의견을 반영할 수 있도록 국무총리실 산하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수연 기자 songsy@seoul.co.kr
  • [단독] 용산 ‘60년史’ 미군에 통째로 내줬다

    [단독] 용산 ‘60년史’ 미군에 통째로 내줬다

    미군기지 기념물 68점 중 55점 문화재청, 심사 하루 만에 승인 박정희 前대통령 휘호 비석 포함 “주한미군 연관 높다 판단” 해명 “문화재 반출 역사 되풀이 안돼” 한국 정부가 미군 측이 요구한 용산기지 내 기념물 55점에 대해 주한미군 역사와 관련됐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평택기지로 반출하는 것을 지난해 12월 허가한 것으로 10일 확인됐다.지난 60여년간 용산에 축적된 영욕의 현대사를 증명할 기념물임에도 한국 정부가 진지한 역사의식 없이 졸속으로 미군 측에 내줬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서울신문이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장인 국민의당 유성엽 의원을 통해 입수한 ‘용산 미군기지 내 기념물·기념비 이전 평가 결과 목록’에 따르면 문화재청은 미군이 요구한 용산기지 내 기념물 68점 가운데 55점에 대해 평택기지로 반출하는 것을 승인했다. 문화재청은 미군의 요청을 받은 국방부 주한미군기지이전사업단의 요구에 따라 지난해 12월 13일 단 하루 만에 1차 서면평가와 2차 현지실사를 마치고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 정부가 반출 승인한 용산기지 기념물의 전체 목록이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68점 중 이전을 불허한 13점은 조선시대 문인석상 등 미군 주둔 이전부터 용산에 있었던 문화재가 대부분이다. 반면 이전을 허가한 55점은 6·25전쟁에서 전사한 미7사단 소속 코이너 소위의 이름을 딴 캠프코이너 안내 동판과 1978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한미연합군사령부 창설에 하사한 휘호를 기념하는 비석(Fortress of Peace), 천안함 기림비 등 1953년 미군 주둔 이후 만들어진 기념물이 대부분이다. 문화재청은 이에 대해 “최근에 조성돼 문화재적 가치가 미미한 경우나 원형이 심하게 손상된 경우, 주한미군과의 역사적 연관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경우 등은 이전 가능하다고 평가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신주백 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는 “반출을 허가한 목록을 보면 일제강점기까지만 우리의 역사라고 판단하고 미군 주둔 이후 64년간의 기념물은 모두 가져가게 했다”면서 “용산이 우리의 땅이고, 용산기지를 우리의 역사라고 생각하면 미군이 만든 기념비일지라도 우리 것으로 생각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과연 어느 나라의 공무원인가 묻고 싶다”고 비판했다. 성장현 용산구청장도 “문화재 하나하나로만 따질 게 아니라 기념비가 갖는 역사성을 따져야 한다”면서 “문화재청이 혼자 결정할 게 아니라 국민과 공유하고 답을 찾았어야 하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유 의원은 “해방 이후 무분별한 문화재 반출의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며 “용산 부지 활용방안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문화재 보존 대책도 마련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송수연 기자 songsy@seoul.co.kr
  • 살찌우고 시력 교정해 입대 ‘진짜 사나이 3代’ 82년 복무

    살찌우고 시력 교정해 입대 ‘진짜 사나이 3代’ 82년 복무

    할아버지 세대부터 아버지, 아들까지 3대에 걸쳐 총 15명이 모두 현역으로 병역을 이행한 이기옥씨 가문이 올해 ‘병역명문가’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병무청은 6일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공군회관에서 제14회 병역명문가 시상식을 개최했다.이씨 가문은 3대가 총 991개월(82년 7개월) 동안 현역 군인으로 근무했다. 고(故) 이억조씨는 1942년 강제징용으로 일본 이바라키현의 공군비행장에서 2년 6개월 동안 강제노동을 하다 돌아왔다. 이후 6·25전쟁이 발발하자 부인과 두 어린 자식을 남겨 둔 채 참전했고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에서는 모든 소대원이 전사하고 단 2명만 생환하는 등 죽음의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이어 2대 이기옥씨 등 5명, 3대 이진현씨 등 9명도 모두 당당히 군 복무를 마쳤다. 특히 이진현씨는 저체중으로 군 복무가 곤란했지만 체중을 늘려 입대를 했고, 3대 이주용씨 역시 시력교정술까지 받은 뒤 학사장교로 복무했다. 국무총리 표창은 조욱래씨 가문과 류덕재씨 가문이 받았다. 조씨 가문은 3대에 걸쳐 12명이 총 384개월을, 류씨 가문은 11명이 총 314개월간 군 복무를 했다. 아울러 병무청은 올해 처음으로 부자가 함께 월남전에 참전한 하승무씨 가문 등을 감동과 이야기는 있는 ‘스토리 가문’으로 선정했다.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 [김성호 선임기자의 종교만화경] 올해 창설 100주년… 전세계 가난한 이들을 위한 지역사회 지원

    [김성호 선임기자의 종교만화경] 올해 창설 100주년… 전세계 가난한 이들을 위한 지역사회 지원

    성골롬반외방선교회는 아일랜드 출신 콜롬바누스 성인을 주보로 에드워드 갤빈 주교와 존 블로윅 신부에 의해 1916년 설립된 로마 가톨릭 선교단체다.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했으나 1950년 중국 정부가 선교사 입국을 거절함에 따라 당시 교황 요한23세의 요청으로 라틴아메리카로 진출했다. 선교사들이 페루·칠레 등지에서 가난한 도시 정착민들을 찾아 선교에 나섰고 파키스탄, 대만, 브라질, 자메이카, 벨리즈 등지로 선교 지역을 넓혀 왔다. 아일랜드에 본부를 둔 채 세계 17개국에서 900여명의 사제가 활동 중이다.성골롬반외방선교회는 설립자들이 채택한 좌우명인 ‘그리스도를 위한 순례’(Perigrinari pro Christo)라는 표어 그대로 그리스도와의 일치와 ‘자신을 비우는 사랑’을 우선 지향한다. 그 영성과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선교 사제들로 종신회원을 양성하면서 자원 사제들과 평신도 선교사, 후원 회원들을 지원한다. 특히 다른 종교의 전통과 그리스도교 신앙 사이의 대화 증진을 비롯해 지역교회들 간 교류, 선교사를 파견한 지역과 파견된 지역 사이의 교류를 돕는 일을 중시한다.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인 대상으로 삼아 지역사회에 필요한 활동을 지원하는 게 특징이다. 한국에서는 1933년 맥폴린 신부 등이 전라도와 제주도 서쪽지역 선교를 담당하면서부터 활동을 시작했고 이후 일제 탄압과 6·25전쟁 등 갖은 시련 속에 250여명의 회원이 활동한 것으로 집계된다. 현재 한국지부에 소속된 선교 사제는 한국인 8명을 포함, 모두 33명으로 이 중 13명이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선교센터에서 사목 중이다. 성골롬반외방선교회는 창설 100주년을 맞아 오는 11월 23일부터 100주년을 기념하는 기도와 세미나 등의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한국지부도 ‘종교 간 대화’ 프로그램을 비롯해 ‘열린 미사’의 확대 등을 고려 중이다. 특히 한국지부의 첫 터전이었던 옛 광주신학대 자리(현 천주교 광주교구청)에서 개회 미사를 갖는 것을 시작으로 1년간의 일정으로 세미나와 기도회를 진행하는 한편 세계 각지의 젊은 선교사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대규모 선교체험 행사도 열 예정이다. 글 사진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이철성 경찰청장 “인권침해 진상조사 대상에 성역 없다…경찰도 포함”

    이철성 경찰청장 “인권침해 진상조사 대상에 성역 없다…경찰도 포함”

    ‘고(故) 백남기 농민 사망사건’ 등 도를 넘은 경찰의 공권력 행사로 초래된 주요 인권침해 사건의 진상을 밝힐 별도의 조사위원회가 지난 25일 출범했다. 그런데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는 경찰 추천위원 중 박진우 경찰청 차장이 포함돼 논란이 되고 있다. 박 차장은 2015년 11월 민중 총궐기 대회에서 고 백남기 농민이 경찰 물대포를 맞고 사망했을 당시 경찰청 수사기획관이었다.이에 이철성 경찰청장이 “조사 대상에 성역이 없고, 필요한 경우 진상조사위 위원을 포함한 경찰 지휘부도 조사 대상이 될 수 있다”고 28일 밝혔다. 이 청장은 이날 “원활한 조사 협조 등을 위해 경찰개혁위원회 논의에 따라 (진상조사위의) 당연직 위원으로 위촉된 것”이라면서 “위원 개인이 사건과 연관되어 공정성을 해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훈령상 제척·기피·회피 규정을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청장은 또 “경찰은 진상조사위의 모든 조사에 성실한 자세로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행정 분야에서도 조그마한 어려움이 없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할 것이며 관계자 조사, 관련 시설 방문·이용, 자료제출 요구 등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일부 진상조사위원과 조사관에게 2급 비밀취급 인가를 부여하고 정당한 사유 없이 진상조사위에 자료를 제공하지 않으면 징계를 요구할 수 있게 하는 등 실질적 조사가 이뤄질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다고 이 청장은 설명했다. 앞서 경찰청은 경찰의 인권침해 사건을 조사할 별도의 기구를 구성하자는 지난달 경찰개혁위원회의 권고를 수용해 지난 25일 민·경 합동으로 ‘인권침해 사건 진상조사위원회’를 발족했다. 진상조사위는 업무의 중립성과 독립성, 공정성을 보장하고자 전체 위원 9명 가운데 3분의2인 6명을 민간위원으로 구성했다. 민간위원은 유남영 전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진상조사위원장), 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 김전승 흥사단 사무총장, 노성현 서울지방변호사회 노동인권소위원장, 위은진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 부위원장, 정문자 한국여성단체연합 이사다. 나머지 3명은 경찰 추천위원으로 박 차장과 박노섭 한림대 국제학부 교수, 민갑룡 경찰청 기획조정관이 맡았다. 진상조사위는 20명 규모로 민간·경찰 합동조사팀을 꾸려 조사를 진행하고, 조사하기로 결정한 사건의 진상과 인권침해 내용, 원인, 재발방지책을 포함한 조사 결과를 공표할 예정이다. 활동 기간은 1년이며, 최장 1년까지 연장할 수 있다. 진상조사위는 ‘고 백남기 농민 사망사건’ 등 6건의 사건을 조사 대상으로 우선 선정했다. 2013년 경남 밀양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주민들을 경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과도한 물리력을 행사한 사건과 2011년 제주 서귀포시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주민들을 경찰이 강제진압 한 사건도 포함됐다. 또 2009년 평택 쌍용자동차 파업 강제진압 사건, 철거민 5명과 경찰관 1명이 사망한 ‘용산참사 사건’도 조사 대상이다. 이 청장은 “진상조사위 활동을 통해 과거 경찰력 행사로 인한 인권침해 사건의 객관적 진실을 규명하고 구조적 원인과 문제점을 밝혀서 경찰력 행사 과정과 제도, 관행을 인권 친화적으로 개선하는 전환점으로 삼겠다”고 말했다. 앞서 경찰은 지난 2004년에도 ‘과거사 진상규명 위원회’를 설치·운영해 경찰이 연루된 불법 선거개입·민간인 불법 사찰·용공 조작 의혹 사건들의 진상을 규명한 적이 있다. 당시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1991년)을 비롯해 서울대 깃발 사건(1985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사건(1985년), 청주대 ‘자주대오’ 사건(1991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1979년), 보도연맹원 학살 의혹 사건(6·25전쟁 당시), 1946년 대구 10·1사건(1946년), 나주부대 민간인 피해 의혹 사건(1950년)에 대한 조사가 이뤄졌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오자복 전 국방부 장관 별세

    오자복 전 국방부 장관 별세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 합참의장,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 국방부 장관을 지낸 오자복 예비역 육군대장이 25일 별세했다. 88세.고인은 6·25전쟁 기간 중인 1951년 10월 육군 소위(갑종 3기)로 임관해 6사단장과 5군단장, 제2야전군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군수지원사령부 인사 참모로 베트남전쟁에도 참전했다. 합참의장 재임 중에는 야전군 전력 보강과 수도권 방위 전력 발전에 힘을 썼다. 예편 후에는 예비역 장성 모임인 성우회 회장(2003)을 맡기도 했다. 보국훈장삼일장, 보국훈장천수장, 보국훈장국선장, 보국훈장통일장, 수교훈장광화장 등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아들 오보환(안산대 교수), 딸 오혜영씨가 있다. 영결식은 27일 오전 9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합참 주관으로 열린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이다. 박홍환 전문기자 stinger@seoul.co.kr
  • 민·경 합동 ‘진상조사위’ 출범…경찰 인권침해 사건 조사

    민·경 합동 ‘진상조사위’ 출범…경찰 인권침해 사건 조사

    ‘고(故) 백남기 농민 사망사건’ 등 도를 넘은 경찰의 공권력 행사로 빚어진 주요 인권침해 사건의 진실을 밝힐 기구가 출범했다.경찰청은 25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청사에서 민·경 합동으로 ‘인권침해 사건 진상조사위원회’(이하 진상조사위)를 발족하고 첫 회의를 열어 조사 대상과 향후 일정과 관련한 논의를 진행했다. 진상조사위는 지난달 경찰의 인권침해 사건을 조사할 별도의 기구를 구성하자는 경찰개혁위원회의 권고를 경찰청이 수용해 꾸려졌다. 경비·수사·정보수집 등 경찰이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인권침해가 발생했거나 인권침해 논란이 불거진 사안, 인권침해 진정이 접수된 사건,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사건 등이 진상조사 대상이다. 진상조사위는 업무의 중립성과 독립성, 공정성을 보장하고자 전체 위원 9명 가운데 3분의2인 6명을 민간위원으로 구성했다. 민간위원은 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 김전승 흥사단 사무총장, 노성현 서울지방변호사회 노동인권소위원장, 위은진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 부위원장, 유남영 전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정문자 한국여성단체연합 이사다. 나머지 3명은 경찰 추천위원으로 박노섭 한림대 국제학부 교수, 박진우 경찰청 차장, 민갑룡 경찰청 기획조정관이 맡았다. 진상조사위는 20명 규모로 민간·경찰 합동조사팀을 꾸려 조사를 진행하고, 조사하기로 결정한 사건의 진상과 인권침해 내용, 원인, 재발방지책을 포함한 조사 결과를 공표할 예정이다. 활동 기간은 1년이며, 최장 1년까지 연장할 수 있다. 조사 대상으로는 지난 2004년 이후 경찰의 인권침해 논란이 불거진 사건들이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2015년 11월 민중 총궐기 집회에서 고 백남기 농민이 경찰 물대포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고, 2009년 용산참사와 쌍용자동차 파업농성 진압 사건도 조사 대상에 오를 전망이다. 진상조사위 사무실은 서울 용산구 남영동 경찰청 인권센터(옛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설치된다. 경찰청은 진상조사에 필요한 인력과 장비, 시설 등을 지원하고 진상조사위가 요구하는 자료도 가능한 한 제공할 방침이다. 조사 결과는 향후 인권정책 수립에 반영하기로 했다. 앞서 경찰은 지난 2004년에도 ‘과거사 진상규명 위원회’를 설치·운영해 경찰이 연루된 불법 선거개입·민간인 불법 사찰·용공 조작 의혹 사건들의 진상을 규명한 적이 있다. 당시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1991년)을 비롯해 서울대 깃발 사건(1985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사건(1985년), 청주대 ‘자주대오’ 사건(1991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1979년), 보도연맹원 학살 의혹 사건(6·25전쟁 당시), 1946년 대구 10·1사건(1946년), 나주부대 민간인 피해 의혹 사건(1950년)에 대한 조사가 이뤄졌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선생님은 운명을 피하지 않고 목숨 바쳐 조국을 지켰다”

    “선생님은 운명을 피하지 않고 목숨 바쳐 조국을 지켰다”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4)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탈영병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인천 소재 치과 원장) 씨의 도움으로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8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해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는 부산까지 걸어가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0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 소위·24세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제자 이동호의 증언 내가 인천상업중학교를 다닐 때 쾌활한 성격이신 심선택 선생님께서는 영어 선생님이셨다. 그 후 해병대 장교가 되시어 9·15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셨다. 그때 인천에 상륙하신 선생님께서는 송현국민학교에서 6년제 중학교 학생들을 만난 자리에서 나라가 위난에 처했을 때 학생들의 가야 할 길을 일러 주신 일이 있었다. 당시 훈시 내용 (부탁의 말)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학생들은 앞으로 통일되는 조국의 장래를 책임져야 할 역군으로 성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절대로 보호되어야 할 세대이다. 둘째, 금번 통일전쟁은 우리 기성세대에 맡기고 너희 학생들은 전후에 학교로 돌아가 공부할 준비를 하여야 한다.셋째, 학생들은 정부가 수복되고 학교가 정상화 될 때까지 학생들 스스로 자치 단체를 구성하여 상호 보호하는 구심체가 되어야 한다. 넷째, 학생자치 단체의 구성원들은 경찰이 복귀하여 치안이 안정될 때까지 군(軍)의 지시를 받아 치안 유지에 협조하여야 한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우리 학생들의 나갈 길을 일러주신 심선택 선생님과 만남의 시간은 불과 1~2시간에 불과했지만 선생님이 남기고 가신 말씀은 우리 제자들 가슴에 영원히 남아 있다. 심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인천학생들은 인천학도의용대를 재건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내 친구를 포함한 몇몇 인천상업중학교 5·6학년 제자들이 심 선생님이 계신 해병부대에 현지 입대하여 참전하였다. 심 선생님은 이들 현지 입대한 제자들과 같이 서울 탈환작전에 참전하고서 북진하던 중 함경도 지역에서 선생님의 해병부대가 갑자기 적에게 포위되어 선생님은 포위망을 피해 안전지대로 이동하려 하였으나 고향에서 데려온 한 제자가 아직도 포위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제자 해병대원을 구하기 위해 밤중에 지프를 몰고 가다가 어느 골짜기에서 산속에 매복해 있던 인민군이 쏜 총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전사하셨다는 말을 들었다.●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제자 민병태의 증언 심선택 선생님은 내가 인천상업중학교 1학년과 2학년 재학 중일 때 영어 과목을 가르쳐주신 선생님이셨으며, 또 내가 학교에서 야구선수 생활을 할 때 야구를 책임지셨던 야구부장이셨다. 그 후 언제부턴가 안 보이시더니 해병대 사관학교에 지원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후 6·25사변이 일어나고 9·15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다음 날 9월 16일 오전에 상륙군인 우리 해병대를 환영하기 위해 집에서 가까운 동인천 역전 광장에 나가 만세를 부르고 있을 때인데 저만치서 한 해병대 장교가 나에게 손짓을 하며 아는 체를 하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까 심선택 선생님이셨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 야, 너 민병태 아니냐”고 말씀하시며 내게 다가오시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를 빨리 알아보신 것은 야구부장으로 계실 때 나를 유난히 좋아해 주셨기 때문이었다. 그때 한국해병 상륙부대는 화수동 쪽에서 철다리 밑으로 해서 동인천역 광장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그때 나는 선생님과 공산 치하 때의 상황을 몇 마디 나누고는 선생님과 헤어졌다. 그 후 소식을 들으니까 선생님께서는 함경도까지 진격하시다 인천상업중학교 제자 해병대원을 구하려다가 전사하셨다는 것이었다.●조카 주인숙의 증언 6·25 전쟁 때 전사한 심선택 소위는 우리 어머니 막냇동생이며 내게는 외삼촌이다. 5년제 인천상업중학교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인 인천상업중학교에 와서 교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심선택 외삼촌이 서울대학교를 졸업할 때쯤 나는 송현국민학교 6학년이었는데 이때 외삼촌이 교생 선생님으로 와서 우리 반 담임도 맡아 하셨었다. 우리 외삼촌이 인천상업중학교에서 영어 선생님으로 재직하다가 해병대에 지원하여 해병 소위가 된 후 9·15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여 잠깐 도원동 공설운동장에 주둔하고 있을 때 면회를 갔던 일이 있었다. 이때 외삼촌이 “인숙아 내가 곧 출동하는데 출동했다가 돌아올 때 네 신랑감을 구해 올게” 말하고 서울수복 작전에 참전하였었는데 그때가 우리 외삼촌을 만나본 마지막 순간이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우리 엄마가 외삼촌 전사통지서를 받고 크게 통곡하시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우리 외삼촌은 13살 때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어 우리 어머니 그늘에서 학교에 다녔다. 심선택 외삼촌은 이모였던 우리 어머니를 친어머니처럼 의지하며 자랐고 우리 어머니는 막냇동생을 친아들처럼 애지중지 키웠기 때문에 우리 어머니 설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시흥 보병학교 동기생 강복구 대령의 증언 심선택 동기를 처음 만난 곳은 시흥 육군보병학교에서였다. 심선택 동기는 학사 출신 간부 후보생으로 1구대에 배치되었을 때 나도 같이 1구대에 있었다. 그때 심선택 동기생은 인천 출신으로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모교 6년제 공립 인천상업중학교에서 영어 선생님으로 있다가 해병대 간부후보생으로 지원한 것을 알게 되었으며 교육받는 동안의 심선택은 아주 침착하고 공부도 잘 했으며 특히 영어 실력이 대단하였다. 보병학교가 6·25전쟁으로 인하여 제주도로 건너가서 거기서 계속 교육을 받았다. 심선택 동기는 6·25 전쟁 초기에 그만 전사 하였으며 그렇게 전쟁터에서 꽃다운 나이에 사라진 심선택 동기를 생각하면 지금까지 살아온 내가 과연 전사한 동기들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하는 생각이 가끔 나곤 한다. 처음 우리 해병 사관 2기생들의 총인원은 23명으로 그중 3명은 해병대 하사관에서 합격한 김동준, 신양수, 나(강복구)이고 나머지 20명은 당시 대학교를 졸업한 학사 출신 20명이었다. 이렇게 23명은 하나 낙오 없이 전원 소위로 임관한 후 나는 해병연대 2대대 5중대 2소대장으로 배치되었고 심선택 소위는 3대대 부관으로 배치되었다. 당시 1대대장은 고길훈 중령, 2대대장은 김종기 중령, 3대대장은 김윤근 중령이었다. 그 후 인천상륙작전에 같이 참전하고 서울탈환과 함경도로 진격했을 때 나는 소속이 다른 심선택 소위가 전사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함흥에서 후방으로 후퇴한 후 부대를 재정비하고 도솔산으로 공격하는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가서야 심선택 소위의 전사를 알게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3대대에 배치된 심선택은 매사에 빈틈이 없고 또한 영어 실력이 뛰어나 당시 김윤근 대대장은 그를 인사부관으로 임명하고 함경도 전투에 참전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소대 지휘관도 아닌 그가 어째서 전사했는지를 알아보니까 중공군의 참전으로 아군이 포위되었을 때 3대대도 후퇴하게 되어 내일 아침 8시면 후퇴하기 위해 준비를 마치고 난 후 밤이 깊었는데 갑자기 심선택 소위가 대대장한테 “먼저 후퇴 지점으로 간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때 대대장은 “심 부관 내일 아침이면 대대 전체가 이동하는데 그때 같이 가지 왜 먼저 가려고 그러는가?”라고 물으니까 심 소위는 무엇에 쫓기는 듯 “먼저 가겠습니다” 하면서 지프를 타고 먼저 떠났다는 것이었다. 그런 후 이튿날 후퇴 지점에 와서 보니까 심선택 소위가 보이지 않아 알아보니까 낙오된 해병대원을 구하려고 갔는데 함경남도 마한령의 계곡에서 인민군이 쏜 총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그만 전사했다는 것이었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참전기 3회를 마치며 해방된 지는 6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3년 후 국가 위난의 시기에,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를 졸업하고 모교 인천상업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젊은 선생님이 계셨다. 뜻한 바가 있어 시흥보병학교에 입교하였고 해병 소위로 9·15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였다. 1950년 11월 12일 날 함경남도 마한령에서 제자 해병대원을 구하려다가 인민군의 흉탄을 맞고 24살의 나이로 전사한 인천의 아들이다. 해병 소위 심선택 선생님을 추모하는 충혼탑(忠魂塔)은 인천 그 어디에도 없다. 먼 훗날에도 해병 소위 심선택 선생님의 나라사랑 마음을 기억해주기 바라면서 이 참전기를 기록한다. 이규원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 선택 소위는 24세에 전사했기 때문에 모교 6년제 공립 인천상업중학교 제자들, 조카 그리고 육군보병학교 동기생의 증언으로 참전기를 대신한다. ■ 심선택 소위의 인천상업중학교 제자였던 이경종 6·25 편찬위원이 남기는 말 나는 6년제 공립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 재학 중일 때 6·25 한국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1950년 12월 18일 인천을 출발하여 부산까지 20일간 걸어가서 육군 제2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서 자원입대하여 중학교 3학년과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4년간 공부할 시기를 전쟁터에서 보냈다.이후 46년의 세월이 흐른 뒤, 1996년 7월 15일부터 큰아들(이규원)과 같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려는 과정에서 충격적인 참전 역사와 전사(戰死) 사실이 밝혀질 때는 마음을 어떻게 가눠야 할지 모를 때가 한 두 번이 아녔고 눈물이 앞을 가린 적도 많았다. 그중에서도 내가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다닐 때 영어 선생님이셨던 심선택 선생님의 육군보병학교 입교, 해병 소위 임관과 함경도의 마한령에서 24세에 전사한 사실을 밝혔을 때 나는 큰 충격을 받았었다. 이제 6년제 공립 인천상업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셨던 심선택 선생님의 발자취와 전사를 관계된 분들의 증언으로, 그리고 동작동 국립묘지 서쪽 14블록의 한 귀퉁이에 누워 계신 선생님의 묘소를 큰아들 이규원과 함께 1997년 8월 13일 참배한 것을 기록으로 남긴다.
  • 최문순 화천군수 “66년 전 참전용사의 희생으로 얻은 자유… 후손 자립 도우며 갚아나갈 것”

    최문순 화천군수 “66년 전 참전용사의 희생으로 얻은 자유… 후손 자립 도우며 갚아나갈 것”

    “어려운 시절 도움 받아 이만큼 잘살게 됐으니 이제는 우리가 어려운 참전용사 후손들을 보살펴야 할 때입니다.”최문순(63) 강원도 화천군수는 9년째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후손들을 위한 보은의 장학사업을 펼쳐 감동을 주고 있다. 에티오피아 후손 장학사업은 최 군수가 주민생활지원실장이던 2009년부터 시작했다. 올해는 참석을 못했지만 해마다 현지를 직접 찾아 참전용사 후손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한국으로 데려올 유학생도 선정했다. 최 군수는 21일 “2009년 6·25 참전 60주년을 앞두고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의 희생에 대한 보은으로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 에티오피아 아이들의 밝은 표정을 보고 미래에 도움을 주고자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면서 “6·25전쟁 때 화천 지역은 에티오피아 참전국 용사들이 가장 치열하게 전투를 치른 곳”이라고 말했다. 에티오피아 학생들을 대상으로 주로 장학사업을 펼치지만 한국으로 유학시킨 대학생도 5명에 이른다. 모두 석사 과정이다. 이들 가운데 4명은 졸업했고 1명은 재학 중이다. 내년 새 학기에 새로 1명을 더 선발한다. 기금은 화천군을 중심으로 일반인과 군부대 등에서 일부 기부받고 일부는 평화의 댐 인근에 들어선 세계평화의 종공원 타종료를 받아 쓰고 있다. 최 군수는 “화천군이 평화와 자유를 얻은 게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면서 “장학사업은 돈만 주는 게 아니라 후손들 삶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도록 하는 게 목적인 만큼 자립능력이 없거나 공부를 할 수 없는 후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속적인 사업으로 이끌고 가겠다”고 말했다. 화천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분단, 어둠, 죽음에 내리는 애도의 꽃비

    분단, 어둠, 죽음에 내리는 애도의 꽃비

    “꽃은 화려하고 아름다워 축하의 의미도 있지만 어둠과 죽음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밝은 면이 있지만 그늘도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죠.”분단의 풍경을 그려 온 작가 송창(65)은 몇해 전부터 꽃에 꽂혔다. 2010년 경기 연천군 미산면의 유엔군 화장장을 방문했을 때 6·25전쟁 당시 타국에서 스러져간 유엔군 참전용사들의 넋이 마치 붉은 꽃으로 다시 피어난 듯한 강한 인상을 받으면서부터였다. 1952년 금굴산에서 중공군과 맞서 싸우다 희생된 벨기에군과 영국군을 화장했던 곳이다. ‘영국군 화장터’라고도 불리는 곳을 찾았을 때엔 죽음을 상징하는 망초꽃이 키높이로 자라 방치돼 있었고, 특히 화장터에 누군가 놓고 간 조화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바래고 삭은 상태로 놓여 있는 것에 가슴 한구석이 아렸다.“분단의 구조가 결국 죽음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라지고 잊혀진 사람들에게 애도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작가는 이후 경기 파주, 연천, 포천과 강원 철원 등 분단 지대의 스산한 풍경에 꽃을 ‘심는’ 작업을 계속해 왔다. 2010년 이후 작품들에서 그는 분단이라는 주제에 꽃이라는 또 다른 미학적 선을 덧댄다. 공동묘지에 버려진 조화들을 틈나는 대로 주워다 접착제로 캔버스에 부착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학고재 갤러리에서 ‘꽃그늘’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출품된 39점의 작품 중 절반 가까이가 꽃 작업이다. 농밀하고 묵직한 느낌이 드는 회화에 붉은 꽃들이 피어난 느낌은 매우 강렬하다.본관 안쪽 벽에 걸린 대작 ‘꿈’은 마치 꿈속에서 본 듯한 전쟁의 폐허를 재현한다. 한국전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연천군 군남면 남계리의 풍경은 매우 비현실적이면서도 강하게 다가온다.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용암이 식으면서 만들어진 주상절리와 끊어진 다리 아래의 강바닥에 흘날리는 꽃들이 묘한 감동을 안겨 준다. 작가는 “푸른 하늘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였다”며 “꽃은 전쟁으로부터 걸어온 기나긴 여정에 바치는 헌화였다”고 말했다.세 개의 화면으로 분할된 회화작품 ‘그곳의 봄’에서 작가는 화장장 시설이 그려진 중앙 캔버스 위에 수많은 조화를 놓았다. 왼쪽에는 작가가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 보았던 망초를, 오른쪽에는 영국을 상징하는 견종인 레브라도 리트리버 반려견이 돌아오지 않는 주인을 그리워하는 듯한 모습으로 서 있다. 전시의 제목으로 쓰인 설치작품 ‘꽃그늘’은 나무 실탄박스, 연습용 포탄 및 실탄에 조화를 흩뿌린 것이다. 탱크, 끊어진 철길 등 분단과 전쟁을 상징하는 대상을 그린 작품에도 ‘잊혀진 이들에 대한 애도’를 상징하는 꽃비가 내린다. 작품마다 빗물이 흘러내린 듯한 흔적도 눈길을 끈다. 작가는 “철책선이라든지 탱크라든지 굳건히 서 있는 대상들이 녹슬고 헐어서 없어지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설명했다.1952년 전남 장성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작가는 일상 속에 스며든 가난과 전쟁의 고통을 겪으며 어린 시절을 지냈고 1980년대 광주에서 대학 시절을 보내며 또 다른 비극을 접했다. 사회문제에 대해 예술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고찰해 온 작가는 현실참여적 작가들과 교류하며 1980년대 초반부터 ‘임술년’ 동인으로 활동했다. 전쟁의 아픔과 민족상잔의 비극, 그로부터 비롯된 여러가지 사회문제들을 적극적으로 표현해 온 작가의 초기 작품도 이번 전시에 소개되고 있다. 작가는 대학 졸업 이후 서울 근교에 미술교사로 부임해 출퇴근하면서 목격한 도시 변두리 풍경을 담았다. 신관 지하 2층에서는 개발의 불도저가 기층민들의 삶을 밀어붙이는 독산동 근처 시흥의 산동네, 난민 천막촌이 자리잡은 강남, 난지도 매립지 등을 그린 ‘매립지’ 시리즈를 볼 수 있다. 신관 지하 1층에서는 한국 근현대사 장면을 주제로 한 실크스크린 작업을 볼 수 있다. “역동적이지만 혼란스럽기도 한 근현대사에 대한 성찰의 필요성을 느껴 많은 공부를 했다”는 작가가 우리 현대사의 그늘을 포착한 작품들이다. 전시는 9월 24일까지. 글 사진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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