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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용군에 시민권 발급”…‘가짜사나이’ 이근, 우크라 시민될까

    “의용군에 시민권 발급”…‘가짜사나이’ 이근, 우크라 시민될까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침략군에 맞서 참전하는 외국인에게 군용 여권으로 거주 허가와 더불어 시민권을 발급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같은 방침에 따라 의용군이 되겠다며 무단으로 출국해 논란이 된 이근 전 대위의 우크라이나 시민권 신청 여부도 주목받게 됐다. 8일(현지시간) 우크라 우크린포름·영국 가디언을 종합하면 예벤 예닌 우크라이나 내무부 제1차관은 러시아 침공에 맞서기 위해 우크라이나로 입국하는 외국인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국제 군단’(international legion)이라고 칭하는 외국인 자원봉사자들이 우크라이나 시민권을 받게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예벤 예닌 차관은 “우크라이나 정부가 발급한 군용 여권을 통해 거주 허가를 받을 수 있다. 앞으로 참전 외국인 중 우크라이나 시민이 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우크라이나 법안 심사를 거쳐 시민권을 발급할 것”이라며 외국인 의용군 참여를 독려했다.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은 현재 외국인 의용군이 약 2만명이며 세계 52개국에서 참전 의사를 밝히고 있다고 전했다.이근, 곧 여권반납명령 통지 우크라이나 전역은 지난달 13일부터 ‘여행금지’ 지역으로 지정돼, 한국 국민이 예외적 여권사용 허가 없이 입국하면 행정제재 및 형사처벌 대상이 된다. 정부는 이근에 대해 현재 소지 중인 여권에 대한 반납 명령, 미반납시 여권 무효화, 새 여권 발급 거부 및 제한 등의 행정제재를 가할 수 있다. 외교부는 이근에 대해 여권법에 따른 행정제재를 진행 중이며 형사고발도 추진하겠고 밝혔다. 유튜브 ‘가짜사나이’로 이름을 알린 이근은 출국 전 외교부에 예외적 여권사용 허가에 대해 문의도 하지 않고, 무단으로 폴란드를 통해 우크라이나에 입국했다. 이근과 함께 출국한 2명 역시 조만간 신원이 특정될 것으로 보인다. 6·25전쟁 때 도와줘서 감사하다는 이근 이근은 매일 인스타그램을 통해 생활 모습을 올리고 있다. 이근은 우크라이나에 도착한 뒤 “6·25전쟁 당시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도와드리겠다”라고 썼다. 한국전쟁 당시 우크라이나는 소련에 속해 있었다. 당시 소련은 북한을 돕기 위해 참전했다. 이근은 자신의 우크라이나행을 두고 네티즌들의 설전이 이어지자 “안 가면 안 간다고 지×, 가면 간다고 지×. 역시 우리나라 사회의 수준”이라며 날 선 반응을 보였다.
  • ‘우크라이나 참전’ 이근 전 대위, 과거 예비군 불참 전력

    ‘우크라이나 참전’ 이근 전 대위, 과거 예비군 불참 전력

    러시아의 침공 전후 여행금지 지역으로 지정된 우크라이나에 의용군으로 참여하겠다며 출국한 이근 전 대위를 둘러싼 논란이 커지면서 과거 ‘예비군 훈련 불참’ 전력이 재조명되고 있다. 이근 전 대위는 지난 6일 유튜브 채널과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전 세계에 도움을 요청했을 때 ROKSEAL은 즉시 의용군 임무를 준비했다”면서 우크라이나를 향해 출국한 사실을 공개했다. 특히 그는 여행금지 지역이 된 우크라이나에 허가를 받지 않고 들어갈 경우 여권법에 따라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의 벌금 등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하며 “한국 정부의 강한 반대를 느껴 마찰이 생겼다”, “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협박을 받았다”는 식으로 정부를 비난했다. 이후 외교부가 여권 무효화 등 행정 제재를 하겠다는 방침을 밝히자 이근 전 대위는 “시간 낭비하면서 여권 무효화하는 것보다 어떻게 지원할 수 있는지나 고민해보라”며 맞받아치기도 했다. 이근 전 대위 일행이 현행법과 정부의 방침을 어겨가며 우크라이나에 입국한 것을 놓고 “용기가 대단하다”며 박수를 보내는 반응도 있었지만 “스스로 위험을 초래하는 무모한 선택”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특히 그를 비판하는 의견 중엔 과거 그의 예비군 훈련 불참 전력을 거론하는 반응도 있었다. 그는 과거 페이스북 댓글로 예비군 훈련에 불참했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다. 당시 지인이 “켄(이근)도 못 피해가는 예비군”이라는 댓글을 달자 “한번 안 갔다가 체포되고 경찰서에서 조사받았다”는 답글을 남긴 것이었다. 예비군 훈련을 이유 없이 거부할 경우 예비군법에 따라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 등에 처해진다. 우크라이나에 도착한 뒤 인스타그램에 “6·25전쟁 당시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쓴 글도 논란이 됐다. 한국전쟁 당시 우크라이나는 소련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처럼 이근 전 대위의 우크라이나행을 두고 네티즌들의 설전이 이어지자 그는 댓글을 통해 “안 가면 안 간다고 지×, 가면 간다고 지×. 역시 우리나라 사회의 수준”이라며 날 선 반응을 보였다. 한편 외교부는 이근 전 대위가 정부의 사전 허가 없이 우크라이나에 입국한 사실을 확인했다면서 그의 여권에 대한 행정제재를 진행 중이며 향후 여권법 위반 관련 형사 고발도 추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 우크라 도착한 이근 “안 가면 안 간다고 지×, 가면 간다고 지×…우리나라 수준”

    우크라 도착한 이근 “안 가면 안 간다고 지×, 가면 간다고 지×…우리나라 수준”

    우크라이나 국제의용군에 참여하겠다며 우크라이나로 출국한 해군특수전전단(UDT/SEAL) 출신 이근 전 대위가 자신의 행보를 비판한 네티즌을 향해 날선 반응을 보였다. 이씨는 지난 7일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채널 ‘ROKSEAL’을 통해 “저의 팀은 우크라이나에 무사히 도착했다”며 “6·25전쟁 당시 도와주셔서 감사하다. 이제는 우리가 도와드리겠다”고 밝혔다. 이어 “외교부는 시간 낭비하면서 우리 여권을 무효화하는 것보다 어떻게 지원할 수 있는지나 고민해 보라”며 “우리는 최전방에서 전투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야간투시경도 계속 요청했으나 수출 허가를 못 받았다”며 “따라서 미국 정부에서 야간투시경을 지원받으려고 노력 중”이라고 전했다. 앞서 전날 이씨는 “최초 대한민국 의용군”이라며 우크라이나 의용군 지원 사실을 밝혔다. 그는 “처음에는 공식 절차를 밟아 출국하려고 했으나 한국 정부의 강한 반대를 느껴 마찰이 생겼다”며 “처벌을 받는다고 우리가 보유한 기술, 지식, 전문성을 통해서 우크라이나를 도와주지 않고 이 상황에서 그냥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기도해달라”고 주장했다. 온라인에서는 “외교부 방침에 반하는 무모한 선택”이라는 비판과 “용기 있는 결단”이라는 응원이 엇갈렸다. 네티즌들의 설전을 두고 이씨는 댓글을 통해 “안 가면 안 간다고 지X, 가면 간다고 지X. 역시 우리나라 사회의 수준”이라며 날 선 반응을 보였다.한편 우리 외교부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가능성이 커지던 지난달 13일부로 우크라이나 전역에 ‘여행금지’를 뜻하는 여행경보 4단계(흑색경보)를 발령했다. 1~3단계 여행경보와 달리 4단계는 법적 구속력을 갖는다. 우리 국민이 4단계 발령 국가에 외교 당국의 ‘예외적 여권 사용 허가’를 받지 않은 채 입국하거나 체류할 경우 여권법 제26조에 따라 1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거나 여권법 19·13·12조에 따라 현재 소지 중인 여권에 대한 반납 명령, 여권 무효화, 새 여권 발급 거부 및 제한 등의 행정제재를 가할 수 있다 외교부는 “국민은 현재 우크라이나가 전시임을 엄중히 인식하고 여행금지국인 우크라이나에 허가 없이 입국하지 말 것을 재차 당부한다”고 전했다. 한편 이씨는 2018년 대통령경호처 경호안전교육원 교관단 감사장을 받았으며, 2020년 유튜브 콘텐츠 ‘가짜사나이’에서 훈련 교관으로 활약하면서 인기를 끌었다.
  • 너른 엄마 품 같은 한 자 한 자… 무자비한 세상에 헤진 마음 기대다 [작가의 땅]

    너른 엄마 품 같은 한 자 한 자… 무자비한 세상에 헤진 마음 기대다 [작가의 땅]

    마흔 살에 등단해 맹렬한 글쓰기연이어 가족 잃은 슬픔에도 집필암 투병 중에도 후배 작가 챙기고부의금 받지 말라던 시대의 어른 사후 문학관·문학마을 건립 반대도서관에 세워진 자료실이 유일소설·수필·동화 등 치열한 흔적둘러보기만 해도 마음 놓이는 곳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스산했던 마음이 놓이는 사람이 있다. 선생께서 동의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작가와 선생님이라는 호칭에 앞서 ‘엄마’가 놓이는 것은 그의 너른 품과 손맛 그리고 그가 쓴 문장의 힘에 모두들 기대어 산 덕분이 아닐까. 선생에게 천둥벌거숭이 같은 이들과 무자비한 세상을 향해서 날카로운 문장으로 단도리를 해 주던 큰엄마 같은 느낌을 갖는 것은 비단 나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소설을 누군가의 슬하에 놓아두어야 한다면 최소한 한국 문학의 자리에서 그 주인은 ‘박완서’다. 나는 입때껏 그리 믿고 읽고 써 왔다. 이 또한 나만의 일일까.소설가 박완서는 1931년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박적골에서 1남 1녀 중 둘째로 출생했다. 세 살 무렵에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조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선생은 훗날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의 추억을 회상했다. 할아버지가 손녀와 집안 사람들의 창씨개명을 허락하지 않았던 까닭에 ‘박완서’라는 이름을 지킬 수 있었다고 한다. 딸을 사대문 안의 좋은 학교에 보내고자 했던 어머니의 교육열 덕분에 개성에서 경성으로 이사를 했다. 숙명고등여학교에 입학했지만 일본의 소개령으로 인하여 개성으로 이사한 후에 호수돈고등여학교로 전학을 갔다. 개성에서 해방을 맞았고, 서울로 돌아와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1950년 6월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지만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6·25전쟁이 발발한다. 스무 살의 박완서는 전쟁 중에 숙부와 오빠, 올케를 잃는다. 어린 조카와 어머니를 책임져야 했기에 학업에 복귀하는 대신 미8군의 PX 초상화 부에서 일을 시작한다. 그곳에서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려 주던 박수근 화백을 만나게 되고 이는 훗날 등단작 ‘나목’의 주요 모티프가 된다. 선생은 그곳에서 일하는 것을 그다지 자랑스러워하지는 않았지만 졸지에 가장이 된 처지였던 터라 생계를 위해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후에 서울의 동화백화점으로 자리를 옮겨 일하다가 그곳에서 만난 측량기사와 결혼을 한다. 1남 4녀의 자식을 둔 채로 ‘엄마’와 ‘아내’의 역할에 충실하던 중에 1968년에 열린 박수근 유작전을 보고 그와 함께 일을 했던 때의 이야기를 쓴 수필을 소설로 개작해 ‘신동아’ 장편소설에 응모를 한다. 첫 소설 집필작으로 당선이 된 선생은 그때의 소감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중략) 자꾸 쓰다가 빗나가면서 내가 상상한 걸 보탤 적이 있어요. 그럴 때는 즐겁게 써져요. 원고지에다가 쓸 때니까 하루 대여섯 장만 써야지 했는데, 20장도 써지는 날이 있어. 보면 내가 막 보태는 거야. 그 다음날 계속해서 쓰려고 어제 거 읽어 보면, 이건 아닌 거예요. 진짜만 추리고 나면 뼈대만 남고. 말보다는 거짓말을 보태니까 잘 써진다 싶어요. 거짓말을 시키는 게 내 소질이라는 걸 느꼈어요. 그때는 생각도 못했지만, 쪼끔 어려운 말로 하면 상상력이죠. 사실에다 상상력을 보태야지 사실의 뼈대만 갖고 쓰는 건 난 도저히 재미가 없구나.”(박완서,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중에서) 나이 마흔의 늦깎이 등단이었다. 그 이후의 엄청난 창작열은 데뷔하던 해 작가의 나이 따위는 중요치 않다는 것을 몸소 보여 준 셈이다. 선생은 끝까지 현역 작가로 살다 가겠다는 뜻을 품었고, 마침내 이루어 내었다. 그의 작품에 대해 문학평론가 서영채는 이렇게 말했다. “늦깎이들에겐 몇 가지 공통점이 보여요. 일단 냉정하고 현실적이에요. 문인이기 때문에 삐딱함이나 낭만이 없을 수 없지만, 세상과 삶을 보는 방식에는 낭만기가 없어요. 냉정하죠. 냉소적이기도 하고요. 젊지 않은 나이의 힘이라고 해야 할까. 양상은 다르지만, 늦깎이가 지니는 맹렬함 같은 것도 보여요.”(서영채, ‘왜 읽는가’에서) 그야말로 맹렬하게 써 내려갔다. 왕성하다는 말로도 부족함이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어쩌면 서영채의 말대로 ‘냉정하고 현실적’이었기 때문에 작가로서의 시간을 엄마의 시간에서 떼어 내 살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미루어 짐작해 본다.등단 이후에도 작가와 엄마의 역할을 매우 충실하게 해 나갔던 터라 집안은 평화로웠고 작가로서의 치열함은 매해 출간되는 작품집으로도 충분히 설명이 가능했다. 그러나 1988년 5월에 암투병을 하던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마취과 레지던트로 근무하던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는 일이 벌어진다. 연이어 가족을 잃은 선생은 심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부산의 분도 수녀원에 요양을 하러 내려가기도 했다. 도저히 회복될 것 같지 않던 아픔 속에서도 선생은 다시 글을 써 내려갔다. 그 당시의 심정을 수필집 ‘한 말씀만 하소서’에 토로했다. “걔는 또 앞으로 할 일이 많은 젊은 의사였습니다. 그 아이를 데려가시다니요. 하느님 당신도 실수를 하는군요. 그럼 하느님도 아니지요. (중략) 행복했을 때는 아침이 좋았는데 요샌 정반대다. 내 앞에 펼쳐진 긴긴 하루를 살아낼 생각이 지겹도록 아득하게 느껴진다. 시시때때로 탈진하도록 실컷 울면 그동안이라도 시간을 주름잡을 수가 있는데 그것도 용납 안 되는 하루 동안이란 얼마나 가혹한 형벌인가.”(‘한 말씀만 하소서’에서)부산 수녀원을 나와서 미국에 살던 딸네 집으로 갔던 선생은 머지않아 서울로 돌아와서 중단했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한다. 전과 다름없이 꾸준히 작품을 생산해 내었고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2011년 별세 후에는 보관문화훈장에 추서됐다. 우스갯소리로 ‘박완서 선생이 타지 못한 문학상은 젊은작가상밖에 없다’는 말을 할 수도 있을 만큼 현존하는 문학상을 거의 다 수상했다. 수상하지 못한 젊은작가상은 ‘심사’를 하다가 돌아가셨으니 어느 정도 연관은 있게 된 셈은 아닌가. 선생은 암 투병은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젊은 후배들의 작품을 읽었다. 새로운 영화를 보는 것도 즐겼고 간간이 후배들을 만나 와인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것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시간이었다고. 등 뒤에 서 있는 이들에 대한 촉을 놓지 않으려는 어른의 배려를 받은 작가들은 그 시간을 더할 나위 없이 그립다고들 한다. 해마다 쏟아낸 작품의 종수와 그의 빼어남은 육신의 나이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선생께서 세상을 뜨셨을 적에 오죽하면 ‘우리는 원로 작가 한 분을 떠나보낸 게 아니라 당대의 가장 젊은 작가 하나를 잃었다’(문학평론가 신형철)고 했을까. 게다가 소설을 읽고 쓰는 사람치고 박완서 선생의 글을 곁에 두지 않았던 이가 있을까. 다작이면서도 빼어난 작품들을 스스럼없이 써내는 선생을 귀감으로 삼는 후배 작가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한 사람으로서도, 소설가로서도 모든 것을 알고 읽고 있는 듯하던 선생은 자신의 삶에 대해 이렇게 돌아보았다.“돌이켜보면 내가 살아낸 세상은 연륜으로도, 머리로도, 사랑으로도, 상식으로도 이해 못 할 것 천지였다.”(‘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중에서) 다른 이도 아닌 ‘박완서’의 말이었기에 더 수긍이 가고 또 그의 수백 편의 소설들 덕분에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들이기도 하다. 병석에서 후배들의 병문안을 극구 사양하고, 별세하기 전에는 가난한 후배 문인들에게 절대로 부의금을 받지 말라는 말을 남겼던 시대의 어른. 미처 다 읽지 못한 ‘젊은작가상 심사 원고’가 선생의 곁에 놓여 있었다는 병실의 풍경은 너무도 많이 되뇐 탓인지 보지 않았는데도 마치 본 것 같다. “한국 문단에 박완서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수많은 여성 작가들에게 얼마나 든든한 희망이었는지 선생님은 아실까요. (중략) 선생님만큼 오랫동안 쓰고 싶다는 바람을 가슴에 품은 후배 작가들이 저 말고도 참 많습니다.”(소설가 정이현의 편지 중에서) 너른 품으로 감싸 안아 줬던 후배들이 많았다고 한다. 어른 아니 엄마의 자리에 있던 선생의 부음을 들었을 문단과 독자들의 상실감은 아직도 너무 크다. 선생이 기거하던 경기 구리시 아치울 마을의 노란 집에는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다. 자신의 사후에 집이 문학관이나 문학마을이 되는 것을 반대했다고 전해진다. 박완서의 이름이나 유물의 전시가 아닌 오로지 작품으로만 후대에게 기억되고 싶다는 작가의 유지였지만 작가 박완서를 기리는 후대의 갈망은 더 컸던 모양이다. 구리시에서 문학관 건립을 승인했고 착수 절차에 돌입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무산됐다. 그리하여 2009년 인창도서관에서 문을 연 박완서 자료실이 현존하는 유일한 박완서의 기념관인 셈이다. 박완서 자료실에 들어가자마자 눈에 띈 것은 서울대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는 선생의 모습이었다. 전쟁통에 그만둔 학교에서 훗날 문학박사 학위 수여식을 열기까지 선생의 삶의 면면들이 한눈에 펼쳐진 공간이기도 했다. 소설, 수필, 동화에 이르기까지 선생이 엄혹할 정도로 치열하게 썼던 흔적이 모여 있는 곳이다. 자료실 곳곳에 놓인 선생의 사진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그저 마음이 놓이는 장소였다. 다시 한번 선생의 소설을 펼쳐 보고 싶어지는 공간이었달까. 한 작가의 자료를 모아 둔 곳이 꼭 그가 살던 터는 아니어도 될 것이다. 그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마음 한자리에 작가의 이름과 작품을 새겨 놓은 공간을 마련해 둔 것이니. 게다가 그 작가가 박완서라면 살아가는 내내 마음이 무너지고 다리가 꺾일 때마다 자신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는 든든한 의자 하나 마련한 것과도 같을 터이다.우리에게는 박완서가 있었다. 손맛 좋아 밥을 두 공기씩 먹게 만들고 이야기를 잘 들려주어 밤마다 채근하듯이 그의 곁으로 모이게끔 하는.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는 박완서의 소설이 남았다. 종종 선생께서 돌아가셨다고 느껴지지 않는 것도 어쩌면 그가 쓴 소설의 힘이 아닌가. 소설이라는 집의 가장 첫 번째 주인 같은 박완서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그가 만든 소설 속에서 상처받고 헤진 마음을 놓아두어도 되는 가장 큰 이유다. 엄마의 품에서는 그래도 된다. 소설가 이은선
  • 6·25 비정규 특수부대 ‘켈로부대’ 유족들 공로금 받는다

    한국전쟁(6·25) 당시 활약한 ‘켈로부대’ 등 비정규 특수부대의 부대원과 유족 160명에 대해 처음으로 공로금이 지급된다. 국방부는 지난 23일 비정규군 공로자 보상심의위원회를 열고 켈로부대원과 유족 등 비정규군 공로자 160명(본인 143명, 유족 17명)에게 총 15억 7000만원의 공로금 지급을 의결했다고 24일 밝혔다. 지난해부터 시행된 비정규군의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에 따른 첫 보상 조치로, 공로금은 전쟁 당시 공적이 유사한 백골병단 보상법의 사례를 참고해 1인당 1000만원 내외로 결정됐다. 비정규군은 1948년 8월 1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적 지역으로 침투해 유격과 첩보 수집 등 비정규전을 수행한 조직 또는 부대에 소속된 사람을 뜻한다. 켈로부대를 비롯해 미 8240부대, 미 중앙정보국(CIA) 첩보부대(영도유격대), 미 극동공군사령부 첩보부대(6004부대) 등과 비정규군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비정규전을 수행한 것으로 인정한 조직이 해당된다. 켈로부대는 미 극동군사령부가 1949년 6월 1일 북한 지역 출신자를 중심으로 조직한 북파공작 첩보부대로, 미 8240부대와 연계해 6·25전쟁 중 수많은 비밀작전을 수행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07년 켈로부대원도 한국 정부로부터 보상받을 수 있도록 특수임무수행자 보상법을 개정하거나 별도의 법률을 제정하라고 국방부 장관에게 권고했고, 정부는 지난해 4월 ‘6·25 비정규군 보상법’을 제정했다. 켈로부대와 미 8240부대 등 법 적용 대상 부대원은 1만 8000명에 이르며 이 중 생존자는 3200여명이다. 사망자는 유족이 대신 보상을 받게 된다.
  • 4·3 재심사건 속도 낸다…재심만 전담하는 재판부 신설

    4·3 재심사건 속도 낸다…재심만 전담하는 재판부 신설

    제주 4·3 당시 억울한 옥살이를 한 사람들의 한(恨)을 풀 수 있을까. 제주지법은 21일 제주4·3사건 재심만 담당하는 전담재판부를 신설했다고 밝혔다. 전담 재판부는 모두 2개부(형사합의제4-1부, 4-2부)로 구성되며, 장찬수 부장판사가 재판장을 맡는다. 배석판사는 총 4명이다. 재판장을 맡은 장 부장판사는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제주4·3 재심 사건을 담당한 바 있으며 제주 4·3 재심사건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정확하고 신속하게 처리해 줄 적임자로 판단했다. 제주지법에 따르면 지난 10일 제주4·3 직권 재심 권고 합동수행단이 4·3 수형인 희생자 20명에 대한 직권 재심을 처음 청구한 데 이어 올해만 2530명에 대한 직권 재심 청구가 이뤄질 예정이다. 그동안 4·3사건 생존 수형인 및 유족들의 재심청구는 있었으나 4·3사건 군법회의 수형인에 대해 검사가 직권으로 재심을 청구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들은 1948년부터 49년까지 2차례 진행된 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 위반과 내란죄 등의 죄목으로 최대 15년형을 선고받고 다른 지역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6·25전쟁 이후로 행방불명된 희생자들이다. 특히 피해자가 제기할 특별재심 청구까지 포함하면 연내 최소 3000명 이상이 재심을 청구할 것으로 예상된다. 제주지법은 이에 따라 예상되는 사건 수와 신속하게 처리돼야 할 사건의 특수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제주 4·3 재심 사건만 전담하는 형사합의부를 신설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함께 제주4·3사건 관련 형사보상은 형사2부와 3부가 분담해 처리한다. 제주지법은 “신설되는 전담재판부 운영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제주4·3 재심 사건을 적법하고 신속하게 결정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 72년 만에 전달된 6·25 무공훈장

    72년 만에 전달된 6·25 무공훈장

    6·25 전쟁에 참전해서 낙동강 전투 등에서 전공을 세우고 전사한 군인에게 수여된 무공훈장이 주인을 찾지 못하다 72년 만에 유족에게 전달됐다. 경기 안산시는 6·25 참전유공자인 고 홍순철(1928∼1950) 하사의 유족에게 금성화랑 무공훈장을 72년 만에 대리 수여했다고 15일 밝혔다. 홍 하사는 1947년 입대한 뒤 육군 제8사단 소속(현재 오뚜기부대)으로 6·25 전쟁에 참전해 공비 토벌과 낙동강 전선 침공 저지에 공을 세우고 아군의 북진 공격 시도 등 반격에 기여했으나 1950년 7월 15일 전사했다. 전사 이후 공적을 인정받아 1950년 12월 30일자로 무성화랑·금성화랑 2개의 무공수훈 훈장 대상자로 선정되며 상병에서 하사로 2계급 특진했다. 전시에 훈장이 유가족에게 전달되지 못했다가 국방부의 ‘6·25전쟁 무공훈장 주인공 찾기 사업’에 따라 72년 만인 지난 14일 조카인 홍일호씨에게 전달됐다. 홍씨는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삼촌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애써 주신 국가와 안산시에 감사드린다”고 소감을 밝혔다. 윤화섭 안산시장은 “국가를 위해 헌신한 유공자와 유족들의 숭고한 뜻을 절대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 72년 만에 전달된 6·25 참전 무공훈장… 고 홍순철 하사 유족에 수여

    72년 만에 전달된 6·25 참전 무공훈장… 고 홍순철 하사 유족에 수여

    6·25 전쟁에 참전해서 낙동강 전투 등에서 혁혁한 전공 세우고 전사한 군인에게 수여된 무공훈장이 전시라서 전달되지 못하다가 72년만에 뒤늦게 유족들에게 전달됐다. 경기 안산시는 6·25 참전유공자인 고(故) 홍순철(1928∼1950) 하사의 유족에게 금성화랑 무공훈장을 72년 만에 대리 수여했다고 15일 밝혔다. 홍 하사는 1947년 입대한 뒤 육군 제8사단 소속(현재 오뚜기부대)으로 6·25 전쟁에 참전해 북한군 공비 토벌 및 낙동강 전선 침공 저지에 공을 세우고 아군의 북진 공격 시도 등 반격에 기여했으나, 안타깝게도 1950년 7월 15일 전사했다. 전사 이후 공적을 인정받아 1950년 12월 30일 자로 무성화랑·금성화랑 2개의 무공수훈 훈장 대상자로 선정되며 상병에서 하사로 2계급 특진했다. 이후 70년 넘게 서훈되지 못한 훈장은 국방부가 유공자·유공자 유족에게 훈장을 전달하는 ‘6·25전쟁 무공훈장 주인공 찾기 사업’에 따라 72년 만인 지난 14일 조카인 홍일호(반월신문 회장) 씨에게 전달됐다. 무공훈장은 전시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에서 전투에 참전하거나 접적지역에서 적의 공격에 대응하는 등 전투에 준하는 직무수행으로 뚜렷한 무공을 세운 사람에게 수여하며, 5등급으로 나뉜다. 훈장을 대신 받은 조카 홍일호 씨는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삼촌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애써주신 국가와 안산시에 감사드린다”고 소감을 밝혔다. 윤화섭 시장은 “국가를 위해 헌신한 유공자와 유족들의 숭고한 뜻을 절대 잊지 않겠다”라며 “보훈가족의 예우와 복지향상을 위해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 한류·생태·레저 다 품은 오산… 수도권 남부 대표 관광지 꿈꾼다

    한류·생태·레저 다 품은 오산… 수도권 남부 대표 관광지 꿈꾼다

    경기 오산시가 ‘교육의 도시’에 이어 수도권 최고의 ‘관광도시’로 떠오르고 있다. 지금까지 ‘오산시’ 하면 ‘교육도시’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혁신교육을 지원하고 생애주기별 맞춤형 평생교육을 추진해 유네스코 학습도시상, 대한민국 평생학습대상(2회) 등을 받는 성과를 냈기 때문이다. 오산시는 3선 곽상욱 시장의 추진력에 힘입어 교육도시가 됐다. 곽 시장은 오산시를 지속가능한 도시로 만들기 위해 교육과 함께 ‘굴뚝 없는 공장’으로 불리는 관광산업 육성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14일 밝혔다. 오산에는 그동안 특출한 관광자원이 없었다. 그러나 서울대병원 오산병원을 유치하려던 내삼미동에 국내 유일의 미니어처빌리지를 비롯한 관광형 테마파크를 유치하고 하수종말처리장 상부에 수도권 최대 반려동물 테마파크를 만드는 등 ‘다른 도시에는 없는 관광상품’을 만들어 수도권 남부 관광 거점이 된 것이다. ●국내 유일의 실내형 미니어처빌리지 내삼미동 테마파크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오산미니어처빌리지’다. 독일 함부르크의 ‘미니어처 원더랜드’와 미국 뉴욕의 ‘걸리버스 게이트’ 등 세계 주요 미니어처 테마파크를 벤치마킹한 국내 유일의 실내형 미니어처 전시관이다. 부지면적 1만 1783㎡(약 3564평), 건물 전체면적 3521㎡ 규모로 실제 크기를 87분의1로 축소, 연출한 미니어처 세상을 통해 세계 각국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하고 누구나 함께 보고 즐기고 상상할 수 있는 체험 기반의 콘텐츠로 꾸몄다. 기존 미니어처 시설들과는 차별화된 각각의 스토리와 연결되는 미니어처의 움직임을 통해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건물 1400여개, 자동차 1450여대를 이용해 공간마다 상징이 되는 랜드마크와 에피소드를 연출했다. 상설전시장은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를 미니어처로 표현한 시간여행(한국관)과 유라시아 횡단 열차를 타고 평화를 찾아 떠나는 여정을 표현한 세계여행(세계관)을 테마로 이뤄져 있다. 전시 관람 이후에는 오산시 캐릭터와 미니어처 세계관을 결합한 3D 애니메이션 ‘가디언즈’를 체험할 수 있다.●한류관광자원이 된 드라마 세트장 한류 관광자원을 겨냥한 드라마세트장은 코로나19 대유행이 지나간 이후 대표 관광상품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2018년에 조성된 ‘아스달 연대기’ 세트장은 상고 시대를 배경으로 한 국내 유일의 창작 세트장이다. 거대한 성문을 통과하면 아스달 사람들에게 공지 사항을 전달하는 ‘제화단’을 지나 아스달 연대기 세트장 랜드마크인 ‘연맹궁’까지 당도할 수 있는데, 아파트 7층 높이의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한다.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색감을 자랑하는 ‘불의 성채’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관람객들의 필수 촬영 장소다. 2020년 만들어진 ‘더 킹’ 세트장은 대한제국의 황궁 정원을 배경으로 했다. 노란 은행나무가 특히 인상적이다. 화면 속 정원을 가득 채웠던 연못은 물을 비워 휴게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방문객 시설 ‘어서오산 휴(休)센터’는 지난해 3월 정식 개관한 후 내삼미동 방문객을 위한 관광 편의시설과 관광 안내센터 역할을 하고 있다.●수도권 최대 반려동물 테마파크 청와대에서 분양받은 남북 협력의 상징 풍산개 ‘강산’이와 ‘겨울’이가 사는 반려동물 테마파크도 오산시의 자랑이다. 120억원을 들여 하수종말처리장 상부 1만 973㎡를 개조한 테마파크는 동물 놀이터를 비롯해 애견 미용실, 펫호텔, 애견 수영장, 애견동반 카페 등 반려견과 반려인들을 위한 맞춤 공간으로 꾸몄다. 시는 펫미용 창업 프로그램 등도 운영해 일자리 창출 효과를 노리고 있다. 동물 놀이터의 경우 코로나19 악재 속에서도 연간 4만명 이상이 이용하고 있다. 지난해 5월 오산시청사에 개장한 자연생태체험관은 도심 속에서 자연을 호흡하는 공간이다. 민간 투자 방식으로 추진한 새로운 공공청사 개방 정책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청사 공간을 활용해 자연관·생명관·과학관·오산관 4개의 테마관과 20개의 세부 콘텐츠 공간으로 꾸몄다. 자연생태체험관과 함께 시청광장 물놀이장, 아이 놀이터인 자이언트트리를 시민 공간으로 재구성하고 인근 도로를 차 없는 거리로 만들어 시민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다양한 광장문화를 조성할 계획이다. 이 밖에 죽미령 평화공원 내 유엔군 초전기념관은 2013년 4월 개관한 공립박물관이자 국가 지정 현충시설이다. 상설전시실에선 6·25전쟁 자료와 죽미령전투에 참전했던 스미스 특수임무부대 관련 유물을 전시한다. 경기도립 물향기수목원은 ‘물과 나무와 인간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2006년 개원했다. 물방울 온실, 산림전시관, 난대·양치식물원, 방문자센터 등이 있다. 가시연꽃·미선나무 등 모두 1930여종의 식물이 있다.●오산시 전체가 생활정원 오산시는 도심 전체를 생활정원화하는 야심 찬 계획을 추진한다. 오산천에는 시민참여형 작은정원을, 도심주택 밀집 지역에는 생활정원을 조성하고 있다. 오산천 제1호 정원을 시작으로 2020년 ‘킁킁정원’까지 총 94개의 작은정원을 만들었다. 유아에서 성인까지 생활안전을 체험할 수 있는 경기도 국민안전체험관도 307억원을 투입해 내삼미동 1만 6500㎡에 지하 1층, 지상 1층, 연면적 7000㎡ 규모로 건립 중이다. 교통안전, 소방관 직업 체험, 가정 내 안전사고 교육 등을 담당하는 ‘어린이 안전 동화마을’, 자연 재난이나 산업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줄 ‘복합안전체험관’, 응급 처치 교육과 4D 영상을 활용한 가상 안전 체험 등 11개 체험존을 만들어 안전교육과 재미를 모두 충족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 제주 4·3군법회의 수형인 첫 직권재심 청구

    # A(여·농업)씨는 4·3사건 이후 피난생활을 하다가 18세 때 군인에게 연행돼 1949년 7월 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위반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아 전주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6·25 이후 행방불명됐다. A씨는 4·3희생자 B씨와 1975년 5월 사후 결혼했다. # C(농업)씨도 21세 때 경찰에 연행돼 1949년 7월 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위반죄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6·25 이후 행방불명됐다. 제주 4·3사건 직권재심 권고 합동수행단은 10일 이같이 관련 자료가 있는 4·3 수형인 희생자 20명에 대해 1차로 직권재심을 법원에 청구했다고 밝혔다. 4·3 당시 불법 군사재판인 군법회의의 수형인명부에 기재된 희생자는 2530명이다. 그동안 4·3사건 생존 수형인 및 유족들의 재심청구는 있었으나 4·3사건 군법회의 수형인에 대해 검사가 직권으로 재심을 청구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들은 1948년부터 49년까지 2차례 진행된 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 위반과 내란죄 등의 죄목으로 최대 15년형을 선고받고 다른 지역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6·25전쟁 이후로 행방불명된 희생자들이다. 한편 도는 이날 제주4·3평화공원 평화교육센터에서 74년 만에 신원이 확인된 4·3 희생자 5명에 대한 보고회를 열고 유가족에게 인계했다.
  • 코로나 팬데믹 예언자의 일침 “안전·위험, 구원·파멸은 다르지 않다”

    코로나 팬데믹 예언자의 일침 “안전·위험, 구원·파멸은 다르지 않다”

    치명적 바이러스·집단감염·마스크3년 전 소설 속 묘사, 현실과 닮아“현실은 내 소설보다 더 기이했다”새로운 유형의 변종 바이러스가 세상을 덮친다. 종교 단체에서 집단 감염이 발생하고, 확진자는 급증한다. 학교는 휴교하고 여객기 운항은 취소된다.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돌아다닐 수 없다. 지난 2년여간의 코로나19 팬데믹을 연상케 하는 이 내용은 놀랍게도 중국에서 첫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발견되기 10개월 전인 2019년 1월 출간된 미국 스릴러 소설 ‘라인 비트윈: 경계 위에 선 자’에서 묘사한 풍경이다. 책은 3년 만에 국내 번역 출간됐지만 팬데믹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다. 저자인 한국계 미국인 토스카 리(한국명 이지연·53)는 8일 서울신문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집필 당시엔 설마 이런 현실이 실제로 일어날까 예상하지 못했고, 책이 나온 이후 소설보다 더 기이한 현실이 펼쳐졌다”고 돌아봤다. 미국에서 화장지 사재기가 일어나고 마스크 착용이나 백신 접종이 정치 문제가 될 줄 몰랐다는 그는 “책을 통해 반대 개념인 인류의 구원과 파멸, 온전한 정신과 광기, 안전과 위험의 간극이 그리 크지 않다는 점을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2020년 미국 ‘인터내셔널 북 어워드’를 수상한 소설 속 상황은 암울하다. 알래스카 영구 동토층이 녹으면서 풀려난 치명적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정신 착란과 치매를 일으키고, 지옥 같은 상황이 종교집단 ‘신천국’(New Earth) 교주 매그너스와 관련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신천국 밖으로 추방당한 여성 윈터 로스가 매그너스와 맞서는 이야기는 박진감 넘친다. 속편도 국내 출간을 앞두고 있다. 토스카는 “2016년 시베리아 동토층이 녹으면서 순록의 사체에 있던 탄저균이 풀렸다는 뉴스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며 “사이비 종교 집단에서 쫓겨난 젊은 여성이 외부 세상에서 다시 새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떨지 궁금했다”고 설명했다. 소설 속 상황을 허구로 단정한 그였지만 “현실은 소설보다 더 기이한데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알겠는가”라고 되물었다. 작가의 의붓딸 중 한 명의 이름을 딴 소설 속 주인공 윈터 로스는 강인하고 재치 있는 캐릭터다. 작가는 “슈퍼 영웅보다는 한 용기 있는 여성이 역경을 극복해 나가며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려는 이야기가 더 감동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세계 경영학계의 석학인 이상문 네브래스카대학 석좌교수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폐쇄적인 북한이 팬데믹으로 가장 이득을 본다는 한 미국인의 대화를 소설에 넣어 한반도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기도 했다. 인생 대부분을 네브래스카주에서 보낸 작가는 “6·25전쟁 당시 열한 살이던 아버지가 북한군에 죽을 뻔했다”며 “많은 미국인이 북한 지도자의 핵 야망과 위협을 우려하는 등 한반도 정세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한국을 18차례 정도 방문했다는 그는 또 “한국은 아버지의 고향이자 나의 일부로 한국 음식, 문화, 케이팝을 사랑한다”고 전했다. 대학에서 영문학, 국제관계학을 전공하고 리더십 컨설턴트로도 활동하고 있는 작가는 원래 발레리나가 되려 했지만 청소년기에 부상을 당해 꿈을 접어야 했다. 대학 1학년 때 아버지와 좋아하는 소설에 대해 대화하다가 문득 독자들에게 롤러코스터 같은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데몬’, ‘하와’, ‘유다’ 등 히트작을 낸 그는 “다음 작품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필리핀에서 싸웠던 미군 포로들의 우정과 희망에 관한 소설을 집필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 팬데믹 예견한 ‘라인 비트윈’ 작가 토스카 리 “현실이 내 소설보다 더 기이했다”

    팬데믹 예견한 ‘라인 비트윈’ 작가 토스카 리 “현실이 내 소설보다 더 기이했다”

    새로운 유형의 변종 바이러스가 세상을 덮친다. 종교 단체에서 집단 감염이 발생하고, 확진자는 급증한다. 학교는 휴교하고 여객기 운항은 취소된다.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돌아다닐 수 없다. 지난 2년여간의 코로나19 팬데믹을 연상케 하는 이 내용은 놀랍게도 중국에서 첫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발견되기 10개월 전인 2019년 1월 출간된 미국 스릴러 소설 ‘라인 비트윈: 경계 위에 선 자’에서 묘사한 풍경이다. 책은 3년 만에 국내 번역 출간됐지만 팬데믹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다. 저자인 한국계 미국인 토스카 리(한국명 이지연·53)는 8일 서울신문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집필 당시엔 설마 이런 현실이 실제로 일어날까 예상하지 못했고, 책이 나온 이후 소설보다 더 기이한 현실이 펼쳐졌다”고 돌아봤다. 미국에서 화장지 사재기가 일어나고 마스크 착용이나 백신 접종이 정치 문제가 될 줄 몰랐다는 그는 “책을 통해 반대 개념인 인류의 구원과 파멸, 온전한 정신과 광기, 안전과 위험의 간극이 그리 크지 않다는 점을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2020년 미국 ‘인터내셔널 북 어워드’를 수상한 소설 속 상황은 암울하다. 알래스카 영구 동토층이 녹으면서 풀려난 치명적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정신 착란과 치매를 일으키고, 지옥 같은 상황이 종교집단 ‘신천국’(New Earth) 교주 매그너스와 관련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신천국 밖으로 추방당한 여성 윈터 로스가 매그너스와 맞서는 이야기는 박진감 넘친다. 속편도 국내 출간을 앞두고 있다. 토스카는 “2016년 시베리아 동토층이 녹으면서 순록의 사체에 있던 탄저균이 풀렸다는 뉴스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며 “사이비 종교 집단에서 쫓겨난 젊은 여성이 외부 세상에서 다시 새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떨지 궁금했다”고 설명했다. 소설 속 상황을 허구로 단정한 그였지만 “현실은 소설보다 더 기이한데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알겠는가”라고 되물었다. 작가의 의붓딸 중 한 명의 이름을 딴 소설 속 주인공 윈터 로스는 강인하고 재치 있는 캐릭터다. 작가는 “슈퍼 영웅보다는 한 용기 있는 여성이 역경을 극복해 나가며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려는 이야기가 더 감동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세계 경영학계의 석학인 이상문 네브래스카대학 석좌교수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폐쇄적인 북한이 팬데믹으로 가장 이득을 본다는 한 미국인의 대화를 소설에 넣어 한반도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기도 했다. 인생 대부분을 네브래스카주에서 보낸 작가는 “6·25전쟁 당시 열한 살이던 아버지가 북한군에 죽을 뻔했다”며 “많은 미국인이 북한 지도자의 핵 야망과 위협을 우려하는 등 한반도 정세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한국을 18차례 정도 방문했다는 그는 또 “한국은 아버지의 고향이자 나의 일부로 한국 음식, 문화, 케이팝을 사랑한다”고 전했다. 대학에서 영문학, 국제관계학을 전공하고 리더십 컨설턴트로도 활동하고 있는 작가는 원래 발레리나가 되려 했지만 청소년기에 부상을 당해 꿈을 접어야 했다. 대학 1학년 때 아버지와 좋아하는 소설에 대해 대화하다가 문득 독자들에게 롤러코스터 같은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데몬’, ‘하와’, ‘유다’ 등 히트작을 낸 그는 “다음 작품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필리핀에서 싸웠던 미군 포로들의 우정과 희망에 관한 소설을 집필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 [박홍환 칼럼] 한복 논란과 도돌이표 한중 관계/평화연구소장

    [박홍환 칼럼] 한복 논란과 도돌이표 한중 관계/평화연구소장

    그날 일은 앞으로도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대학 1학년 때인 1983년 5월 5일. 어린이날이자 일요일이었다. 때마침 학교 축제 기간이라 수업이 없어 고향 집에 내려가 있는데 전국 무전여행에 나선 대학 친구 2명이 찾아왔다. 함께 점심을 먹고 한가롭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허공을 가른 음성은 다급하다 못해 심하게 떨렸다. “국민 여러분 여기는 민방위본부입니다. 실제 공습경보를 발령합니다. 이 방송은 실제 상황입니다.” TV는 긴급 뉴스를 전했다. 랴오닝성 선양을 출발해 상하이로 가던 중국민항 296편이 다롄 상공에서 무장괴한에게 납치돼 한반도 남쪽으로 향하면서 발령된 공습경보 상황은 불과 몇 분 만에 종료됐다. 기체는 춘천의 미군 헬기 비행장에 불시착했고, 이 사건은 6·25전쟁 당시 총부리를 겨누며 격전을 벌였던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중공) 간 외교 관계 수립의 결정적 단초가 됐다. 당시 중국 측과 교섭했던 공로명 외교부 제1차관보(전 외교장관)의 회고다. “기체 수리 등을 명목으로 우리 측은 시간을 끌면서 중국 측 교섭대표단 및 피랍 승객·승무원들과의 스킨십을 확대했다. 삼성전자를 견학시키고, 선물도 듬뿍 안겼다.” 중공과의 첫 접촉인 만큼 관계 수립의 계기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 이 사건 해결 과정에서 양국은 9개항의 외교 각서를 주고받았는데 이 문서에는 양국의 정식 국호인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처음으로 적혔다. 이후 양국은 86서울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등을 계기로 접촉면을 더욱 넓혀 1992년 8월 24일 공식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이렇게 문을 연 한중 관계가 올해로 수교 30주년을 맞는다. 경제적으로는 이미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교역 상대국이자 최대 수출시장이고, 한국은 중국의 3대 교역 상대국이다. 1992년 63억 달러에 불과했던 양국 교역액은 2019년 2434억 달러로 39배 증가했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은 2만 8000곳에 육박한다. 양국 국민 간 교류는 80배나 늘어 연간 1000만명 이상이 오가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해소되면 교류 규모와 교역액이 더 큰 폭으로 늘어날 것임은 불 보듯 뻔하다. 외교관계도 한층 돈독해졌다. 수교 첫해인 1992년 ‘우호협력 관계’로 시작해 1998년 ‘21세기를 향한 협력동반자 관계’로 격상됐고, 2003년 ‘전면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거쳐 2008년에는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로 발전했다. 중국 측은 수교 30주년인 올해 또다시 외교관계의 격상을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존 외교관계에 ‘전면적’이라는 수식어를 추가하길 희망하지만 ‘걸림돌’은 도처에 널려 있다. 무엇보다 양국민 사이의 반감이 위험할 정도로 커진 상황이다. 지난해 말 김치에 이어 이번 베이징동계올림픽 개막식 한복까지 원조 논란에 휩싸이면서 온라인상에선 양국 국민 간 댓글전쟁이 치열하다. 동북공정 같은 역사 왜곡 이슈,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같은 중국 견제 이슈가 두드러졌을 때도 마찬가지다. 한중 관계는 냉탕과 온탕을 도돌이표처럼 오락가락하고 있다. 덩치가 커진 중국의 역사 확대 욕구, 중국에 대한 한국민들의 뿌리 깊은 피해 의식이 그 중심에 있다. 양국 간 교류 확대가 오히려 반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중국인들이 즐겨 쓰는 표현 중에 구동존이(求同存異)라는 말이 있다. 공통 관심사를 찾고, 이견은 뒤로 물려 협력의 돌파구를 마련하자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비슷한 의미인 상호존중이라는 표현이 있다. 한중 수교 30년, 건설적인 향후 30년간의 한중 관계 발전을 위해 구동존이와 상호존중의 의미를 깊이 새겨야 할 때다. 도돌이표 악순환은 끊어 내야만 하지 않는가.
  • 닉슨·마오쩌둥 악수 뒤엔 패권다툼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

    닉슨·마오쩌둥 악수 뒤엔 패권다툼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

    엄혹한 근현대사에서 미국과 중국은 적과 동지의 관계를 넘나드는 묘한 사이다. 1844년 마카오 인근에서 왕샤(望廈) 조약을 통해 첫 공식 관계를 맺은 이후 올해로 178년간 애증의 관계를 이어 왔다. 복잡한 국제질서 속에서 양국 모두 이이제이(以夷制夷)와 원교근공(遠交近攻) 전략을 멋지게 구사했다. 멀리 떨어진 나라와 협력하고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하는 대전략을 통해 국익 극대화를 관철시킨 나라들이다. 미중의 대립과 갈등이 커져만 가는 국제 정세 속에서 한국의 외교 전략을 모색해 본다. 1840년 1차 아편전쟁에서 패한 중국은 굴욕적인 난징조약(1842년) 체결 뒤 최강국 영국 견제를 위해 미국을 끌어들였다. 중국은 영국을 격퇴하고 독립을 쟁취한 미국을 서구 열강의 방패막이로 활용했고 미국 역시 시장 확대를 위해 왕샤조약을 체결했다. 6·25 전쟁 당시엔 전쟁까지 벌여 숙적이 되기도 했던 양국은 20세기 냉전 당시 손을 잡고 소련을 무너뜨렸다. 물고 물리는 양국이 21세기 패권전쟁에 돌입한 것은 냉엄한 국제질서의 단면을 보는 듯하다. 한국전쟁 이후 20년간 죽의 장막에 갇힌 중국을 극적으로 국제무대로 이끈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제국주의자 미국’이었다.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과 갈등을 빚어 온 중국은 1969년 소련과 무력 충돌 이후 새로운 국가안보 전략을 수립한다. 1971년 7월 9일 낮 12시 15분, 베이징 난위안(南苑) 비행장에 두꺼운 뿔테 안경의 미국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날 파키스탄의 칸 대통령과 만찬 도중 복통을 이유로 사라졌던 인물이 돌연 베이징 공항에 나타난 것이다. 바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외교안보 보좌관, 헨리 키신저였다. 마오쩌둥·저우언라이 등 중국 수뇌부와의 극비 회동을 위한 것이다. 1950년 6·25전쟁 이후 철천지원수로 지냈던 미중 양국이 화해의 첫발을 뗀 순간이었다.미소 냉전이 한창이던 1960년대 말부터 닉슨 대통령은 공산진영의 넘버2, 중국을 끌어들이는 구상에 착수했다. 중소 국경 분쟁에 휩싸인 중국과 손을 잡고 당시 주적인 소련 견제에 나서야 한다는 키신저의 ‘세력균형론’을 수용한 것이다. 미국은 700년 전 중국 땅을 밟았던 마르코 폴로의 이름을 딴 ‘폴로 프로젝트’라는 극비 계획을 가동했다. ‘키신저·저우언라이 극비 회동’을 통해 미중 수교의 큰 그림을 그렸고 이듬해인 1972년 2월 21일, 골수 반공론자 닉슨 대통령과 미 제국주의 타도를 외쳤던 마오쩌둥 주석이 역사적인 회담을 가진다. 미국은 중소 분쟁의 틈을 노려 중국과 손을 잡고 일거에 힘의 균형을 역전시켰고 `1979년 국교를 수립한다. 소련 붕괴와 냉전체제의 종식은 세력균형을 통해 패권국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키신저 외교’의 결정판이었다.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팍스 아메리카나(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라는 기본 틀을 유지했다. 미국은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도우면서 ‘아름다운 동반자’로 불렸다. 미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자본주의 분업체제의 틀 속에서 중국은 경제개발에 나섰고, 중국은 그 대가로 이 지역에서 미국의 지배적·군사적 우위를 인정한 것이다. 1979년 미중 수교를 주도했던 덩샤오핑의 도광양회(韜光養晦·힘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린다) 전략이 나온 배경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국민당 장제스 정권과 연합해 대일 태평양전쟁(1941년)을 치른 전우의 사이였다. 큰 틀에서 미국과 중국이 국교를 단절하고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것은 한국전쟁(6·25전쟁) 이후 20년에 불과하다.양국은 2018년 7월 출구조차 보이지 않는 갈등기로 접어들었다. 관세·무역 전쟁의 외피를 둘렀지만 갈등의 본질은 세계 경제 주도권을 둘러싼 기술 전쟁이란 시각도 강하다. 트럼프·바이든 정권이 3년 넘게 공세를 취했지만 중국은 여전히 결사항전 의지를 다지면서 갈등이 전방위로 확산 중이다. 미국으로서는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급부상한 중국이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것을 더는 용납할 수 없다는 경고다. 미국이 중국을 ‘잠재적 적국’으로 간주해 본격적으로 움직인 시기는 2010년부터다. 중국은 그해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일본을 처음으로 추월, 주요 2개국(G2)으로 발돋움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소홀히 했던 미국의 버락 오바마 정권은 2011년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 전략’을 공식선언했다. 대중 포위전략이 본격화되면서 퇴로 없는 패권전쟁에 돌입한 것이다. 중국 역시 세계 강대국으로 우뚝 서려는 대국굴기의 욕망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다. 2012년 11월 당 총서기에 오른 시진핑 국가주석이 세계 최강국의 꿈, 즉 중국몽(中國夢)을 전면에 내걸었다. 미중 모두 ‘투키디데스 함정’(패권국과 신흥 강대국 간의 대결)에 빠져드는 형국이다.
  • 흑백사진 시절의 체육대회를 당신은 아시나요

    흑백사진 시절의 체육대회를 당신은 아시나요

    그 때 그 시절을 아시나요. 제주도청 별관 지방자치사료관에 들어서면 빛바랜 흑백 사진들이 옛 향수를 불러 일으키며 방문객을 반긴다. 그중에 신성여중 응원단의 모노톤의 흑백사진은 당장이라도 응원단이 사진 밖으로 튀어 나올듯이 기세가 등등하다. 제주특별자치도가 제주도 지방자치사료관을 새롭게 단장하고 ‘1920년 이후 제주체육행사에 관한 기록’ 104점을 올해 12월말까지 전시한다고 24일 밝혔다. 지난해 공모를 통해 도민들이 자발적으로 무상 기증한 기록물에 대해 민간기록물 관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보존을 최종 확정했다. 이번에 전시하는 기록물은 사진 등 시청각 기록물, 행사 기념품, 문서류 등으로 ▲1952년 제1회 전도학생체육대회 사진첩 ▲1993년 전도학생체육대회 마스게임 사진 및 마스게임 계획서 ▲2002년 한·일월드컵 자원봉사 관련 기념품 ▲1998년 전국체육대회 기념품 및 1983년 전도학생체육대회 마스게임 사진이 대표적이다. 특히 1952년 제1회 전도학생체육대회 사진첩은 입수경로는 불분명하나 기증자가 부친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발견한 자료다. 이는 제주도청 신청사 낙성기념(현 제주시청 청사 완공 기념)으로 열린 제주도 최초의 제1회 전도학생체육대회 행사와 관련된 사진첩으로, 6·25전쟁 중인 1952년 11월 15~16일 이틀에 걸쳐 현재 제주시청 앞인 광양벌에서 중학교 16개, 고등학교 9개 선수단 800여명의 선수가 출전한 당시로서는 최대 규모의 체육 행사 관련 기록물이다. 당시 종목별 경기 모습뿐만 아니라 개발 전 옛 광양벌과 당시 도청으로 사용된 관덕정 모습 등도 엿볼 수 있어 의미가 있다. 강재섭 제주도 총무과장은 “이번 전시가 민간기록물의 보존 가치를 되새기고 기록문화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면서 “도민의 자발적인 무상기증 기록물로 이뤄진 전시인 만큼 이를 통해 도민 공감대를 형성하고 소통하는 뜻깊은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부경대, ‘워커 하우스’ 이전 추진 논란... 학내 갈등

    부경대, ‘워커 하우스’ 이전 추진 논란... 학내 갈등

    부경대가 한국전쟁 때 유엔 사령부 건물로 사용된 워커 하우스를 현재 장소에서 교내 다른 곳으로 옮기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17일 부경대와 유엔문화 콘텐츠 연구소 등에 따르면 학교당국은 ‘노르웨이 숲 공간(워커 하우스 일대 )환경개선 사업’을 위해 최근 회의를 개최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동원 장보고 관 뒤편 농구장 옆으로 이전▲ 워커 하우스 건물 지붕철거 후 벽체만 남긴 채 향파관 이전 ▲ 지붕철거 후 벽체만 남기는 방안 등 3가지 안을 마련, 구성원들의 의견을 수렴한 뒤 확정하기로 했다. 환경개선 사업에는 25억 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그러나 일부 교수 등 학내 구성원은 근· 현대사적 가치가 높은 워커하우스 일부 철거 및 이전 등에 반발하고 있다. A 교수는 “워커 하우스는 전쟁사적으로 지리적 의미가 중요한데, 다른 곳으로 이전한다면 사료적 가치가 크게 훼손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역사적 구조물은 위치의 중요성이 함축되기 때문에 위치의 이전은 일차적이고 본질적인 훼손이고 돌과 콘크리트 구조물의 특성상 이전 때 원형 훼손이 불가피하다”며 이전 반대 뜻을 밝혔다. 워커 하우스는 부산시의 유네스코문화유산 등재사업에도 선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이 건물은 비어 있는 상태다. 문제의 건물은 6·25 전쟁 당시 전 국토의 80%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자 유엔사령부가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옛 수산대(현 부경대)에 옮긴 시설이다. 워커 장군은 6·25전쟁 때 파병된 미8군 사령부의 초대 사령관으로 낙동강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지키지 못하면 죽음’(Stand or die)이라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에도 간접적으로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워커 장군은 1950년 12월 23일 함께 참전한 아들의 무공훈장 수상을 축하하러 가다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하봉규 유엔문화 콘텐츠 연구소장은 “애초 워커 하우스 중심으로 주변 환경개선사업을 추진했는데 어떤 연유인지 추진 과정에서 변질했다”며 “ 이로 인해 학내 갈등으로 비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대학 당국은 “ 노르웨이숲 공간 환경개선 사업지역에 기념관이 포함돼 있다. 기념관 존치 및 이전 여부 등에 대해 검토하고 있다”며 “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않았다”고 말했다.
  • ‘섬광탄’만 쏴도 얼어죽은 중공군…공군의 힘 [밀리터리 인사이드]

    ‘섬광탄’만 쏴도 얼어죽은 중공군…공군의 힘 [밀리터리 인사이드]

    6·25 전쟁 전세 뒤집은 유엔군 공군공중우세로 北 공세 저지…속도 절반으로연이은 공습에 전투력 50~60%로 줄어산길로 다니다 체력 소모…탈영 속출하기도우리는 왜 공군력을 강화해야 할까. 왜 거액을 들여 첨단 스텔스기를 사고, 공격력을 극대화한 전투기를 만들어야 할까. 왜 늘 ‘공중우세’를 점해야 할까. 이 질문에 답이 될 만한 보고서가 나왔습니다. 우리는 하루 만에 6·25 전쟁의 판도를 바꾼 ‘인천상륙작전’은 기억하지만,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북한군과 중공군을 공격해 전세를 역전시킨 ‘항공차단작전’은 잘 모릅니다. ‘항공차단작전’은 지상군에 대한 근접지원과 별개로, 공군이 직접 나서 적을 공격하고 이동을 지연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적 기지나 철도, 이동하는 병력에 대한 폭격이 해당됩니다. 북한군과 중공군 입장에선 참담한 일이었겠지만, 공습작전이 이들의 공세를 저지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북한군 파상공세 저지한 유엔군 공습 9일 이형재 공군작전사령부 전투계획과장이 작성한 ‘6·25전쟁 초기 유엔공군 항공차단작전의 효과’ 보고서에 따르면 본격적인 폭격은 북한의 남침 사흘 만인 1950년 6월 28일부터 시작됐습니다.유엔군은 이날 북한군 물자 수송 열차가 집결하는 ‘문산조차장’을 B26 폭격기로 공격했습니다. 29일부터는 한강 교량과 이북에 있는 북한군을 공격하라는 더글라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시로 출격이 늘었습니다. 29일 ‘평양 비행장’을 폭격해 항공기 25대와 무기고를 폭파시켰고, 7월 20일부터는 계속 공중우세가 유지됐습니다. 어찌나 폭격이 매서웠는지 개전 후 3일 동안 하루 25㎞씩 이동하던 북한군은 이후 11㎞ 밖에 전진하지 못했습니다. 그 해 11월까지 북한 전차 452대, 차량 8367대, 기관차 228량, 항공기 104대, 교량 118곳, 포대 243곳이 폭격으로 파괴됐습니다. 특히 개전 초기인 7월 7일부터 10일까지 4일간 서울에서 평택으로 이동하던 북한군 수송트럭 300대 이상이 파괴됐습니다. 다리가 끊기고 대낮에 트럭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당장 식량 배급량이 하루 800g에서 400g으로 줄었습니다.북한군은 공습을 피하기 위해 야간행군을 시작했고,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렸습니다. 산악지역으로 이동해야 해 시간이 지체됐고 체력 소모가 심했습니다. 교량을 피해야 해 병사들의 발은 늘 물에 젖었고 동상에 걸리는 인원이 늘었습니다. 심지어 낮에 은신할 때도 유엔군의 감시를 피해 도로에서 1.5~4.0㎞ 떨어진 지역에서 숙영해야 했습니다. ●공포감에 탈영 속출…김일성 “대전 점령 왜 못 하나” 이 때문에 북한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를 뒤집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북한군 825명을 심문한 미 공군 문서에 따르면 사기 저하 이유로 식량부족(21.4%), 무기 부족(9.8%), 휴식 부족(8.2%)이 무려 39.4%를 차지했습니다. 직접적인 공격인 공군기 공습(17.9%), 포병 공격(4.7%)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심지어 유엔군 공습으로 사망한 인원보다 탈영한 인원이 훨씬 많은 사례도 있었습니다. 김일성은 개전 초인 7월 19일 북한 소련대사 테렌티 포미치 슈티코프에게 편지를 보내 “도저히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김책, 강건에게 2번이나 대전 점령을 지시했는데 움직이지 않았다. 미 공군 때문”이라고 토로합니다. 8월 낙동강 전선에 다다른 북한군의 전투력은 전쟁 직후와 비교해 50~60%로 낮아졌습니다. 이후 5개월 동안 전체 전쟁기간 북한군 포로의 90%인 13만 6000명이 항복하게 됩니다.10월 참전한 중공군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중공군 포로들은 “34㎏이나 되는 무거운 짐을 지고 하루 36㎞씩 걸어야 해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야간에 행군한 산길은 가팔랐고 많은 이들이 얼어죽었다”, “참호를 팔 시간이 없어 온종일 떨고 있었다”, “적기가 무서워 불을 피우지도 못했고 굶주림에 떨었다”고 진술했습니다. 한 공습으로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이 사망하기도 했습니다. 남한 후방에서 게릴라 작전을 펼치기 위해 11월 투입된 북한군 10사단은 초기 8000명으로 출발했으나 12월 38선에 도달했을 때는 추위와 동상으로 무려 3000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1000명을 보충한 뒤 38선을 넘어 2월엔 경북 안동에 도착했지만 2000명이 또 고열과 동상으로 사망했습니다. 결국 사단장은 후퇴를 명령했고, 강릉에서 국군의 포위망에 걸려 부대가 전멸되다 시피했습니다. 이때 붙잡힌 포로들의 진술은 처참했습니다. 보급을 받지 못해 비상식량을 소진한 뒤에는 무작정 굶었다고 합니다. 군화를 보급받지 못해 짚신이나 고무신을 신고, 심지어 맨발로 산길을 걸어간 인원도 있었습니다. 공습을 피하기 위해 불을 피울 수 없었고, 적진이어서 마을로 갈 수도 없었습니다.●‘섬광탄’ 공포…미군 “폭격보다 더 효과적” 눈 위에서 잠자고 추위에 떨었습니다. 하루에 단 한번만 밥을 지을수 있었기 때문에 ‘얼음밥’을 먹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매일밤 7~8명이 죽었습니다. 일부는 “고열에 시달리는 병사가 많아 정신이 온전치 못했고, 사소한 일에도 시비가 붙었다”고 진술했습니다. 유엔군에 붙잡힌 북한군 10사단 병사와 중공군 병사들은 의외로 ‘섬광탄’의 공포를 많이 언급했습니다. 심문 중 섬광탄이 공포스럽다고 밝힌 비율이 평균 71%나 됐습니다. 야간 행군 중 우연히 섬광탄을 발견하면 유엔군 공습이 이어질까 두려워 숨었고, 한동안 눈밭에서 추위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러다 상당수가 얼어죽었습니다. 미 공군 작전분석실은 섬광탄을 ‘저렴한 비용으로 적을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기술’로 판단했습니다. 심지어 적의 행군을 늦추는데는 교량을 타격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일수 있다는 분석도 나왔습니다. 그래서 섬광을 내다 다 타면 폭음을 내는 ‘기만용 섬광탄’ 개발을 검토하기도 했습니다. 왜 우리가 공군력을 강화해야 하는지, 공중우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사례들입니다.
  • “목숨 다할 때까지 싸운 조선군”…선교사가 본 정발은 용맹했다

    “목숨 다할 때까지 싸운 조선군”…선교사가 본 정발은 용맹했다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난을 극복하는 데 있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존재는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결정적이다. 하지만 이 엄청난 국가적 변란에서 벗어나기까지는 전국 곳곳에서 목숨을 바쳐 싸운 수많은 사람들의 역할이 있었다. 갈수록 잊혀져 가는 임진왜란의 또 다른 주인공들을 기억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이순신과 권율, 그리고 언제나 논란의 복판에 있는 원균은 다루지 않는다. 순절했으되 이름을 남기지 못한 민초에 대한 추모의 마음 또한 담고자 한다. 임진왜란이 시작된 부산에서 영웅들의 흔적을 찾아나서는 여행은 지하철을 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부산역에서 오늘의 주인공 정발(1553~1592) 장군을 만나려면 지하철 1호선을 이용해 노포 방향으로 한 정거장만 가면 된다. 걸어가도 10분이면 초량시장을 막 지난 초량교차로 광장에서 장군의 동상과 마주하게 된다. ‘나를 따르라’는 듯 오른팔을 치켜올린 동상의 정발 장군은 왜군에게 맞서 부산진 수성(守城)에 나선 군사를 독려하는 모습이다.왜란의 첫 번째 교전인 부산진 전투에 대한 오해는 ‘조선왕조실록’이 부추긴 것이나 다름없다. 선조실록 1592년 4월 13일자는 ‘적선이 바다를 덮어 오니 부산 첨사 정발은 마침 절영도에서 사냥을 하다가, 조공하러 오는 왜라 여겨 대비하지 않았는데 미처 진(鎭)에 돌아오기도 전에 적이 이미 성에 올랐다. 정발은 난병(亂兵) 중에 전사했다’고 적었다. 절영도는 오늘날의 영도다. 위기가 닥쳐왔는데도 한가하게 놀러 나갔다가 어이없이 죽었다는 투다. 당시 일본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예수회의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1532~1597)가 ‘일본사’에 서술한 부산진 전투의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아우구스티노(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가톨릭 세례명)는 성 안에 있는 장수에게 목숨을 살려줄 테니 항복하라는 전갈을 보냈다. 하지만 성 안의 병사들은 비웃으면서, 먼저 조선 국왕에게 사람을 보내 그렇게 해도 되는지 물어볼 테니 기다리라고 거짓으로 답했다.’ 조선군은 시간을 벌면서 전투준비를 하고 있었다. 프로이스의 기록은 이어진다. ‘조선군은 매우 용감하고 과감하게 저항했으며 전투는 3시간 가까이 지속됐다. 해자에는 모두 마름쇠가 부설됐거나 사람의 키 정도로 물이 차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은 수없이 많은 마름쇠에 발이 찔리지 않도록 해자 위에 널판을 놓아 건넜다.…중략… 훌륭한 장수와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히 높은 조선군 거의 모두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웠고, 오직 소수만이 살아남아 포로가 되었다. 조선군 중 가장 먼저 전사한 이는 그들의 총대장이었다.’ 선조수정실록에서는 분위기가 조금 바뀐다. 선조실록 내용에 대한 성찰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선조실록은 광해군 시대, 선조수정실록은 인조 반정 이후 편찬된 것이다. ‘정발은 절영도에 사냥하러 갔다가 급히 돌아와 성에 들어갔는데 전선은 구멍을 뚫어 가라앉히고 군사와 백성들을 모두 거느리고 성가퀴를 지켰다. 이튿날 새벽 적이 성을 백 겹으로 에워싸고 서쪽 성 밖 높은 곳에 올라 포를 비 오듯 쏘아댔다. 정발이 서문을 지키면서 한참 동안 대항하여 싸웠는데 적의 무리 중 화살에 맞아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정발이 화살이 다 떨어져 적의 탄환에 전사하자 성이 마침내 함락되었다.’정발은 무능하고 게으른 장수일 수 없다. 위원군수이던 정발은 1589년(선조 22) 비변사가 무인을 불차채용(不次採用)할 때 추천을 받았다. 서열과 관계없이 능력 있는 장수를 발탁하는 인사 제도다. 함께 추천된 정읍현감 이순신은 1591년 전라좌수사에 올랐고 정발도 못지않게 고속승진해 부산진수군첨절제사에 임명된 것이 왜란이 발발한 바로 그해 초다. 정발이 왜군 침입의 위기의식을 못 느끼고 있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선조실록에는 ‘임진년 3월 부산 첨사 정발이 급하게 보고했는데 대마도주 평의지의 배가 포구에 와 정박하고 첨사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에 길을 빌린다는 따위의 말이 있었다. 그 글을 물리치고 이들이 변경에서 머물러 기다리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더니, 평의지는 절영도에 배를 대었다가 며칠 만에 앙심을 품고 떠났다’는 대목이 있다. 임진왜란 일어나기 불과 한 달 전에 일어난 일이다. 부산진과 동래부를 지키려 목숨을 걸었던 조선군의 분투는 명나라가 ‘조선이 왜국과 담합해 우리를 치려는 것 아니냐’고 의심했을 때 오해를 풀어주는 수단이 됐다. 정발은 1594년 병조판서에 추증됐지만, 의로운 죽음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다 1597년 통신사행이 상당한 변화를 만든다. 명나라 사신 양방형·심유경과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황신(1560~1617)의 전언 때문이다. 부산진성 전투에 참가했던 왜군 장수 야나가와 시게노부는 “우리는 부산에서 크게 기세가 꺾일 수밖에 없었다”고 조선군의 필사적인 저항을 높이 평가했고, 정발의 첩 애향이 순절한 것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정발은 1686년(숙종 12)이 되어서야 충장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정발 동상이 있는 초량역에서 다시 지하철을 타고 부산진역 다음 좌천역에서 내리면 정공단이 있다. 정공단은 부산을 대표하는 가구거리인 좌천동의 좁은 골목으로 언덕길을 조금만 오르면 나타난다. 정발 장군이 수성군을 지휘하다 숨을 거둔 부산진성 서문 터라고 한다. 정공단은 1766년(영조 42) 부산진첨사 이광국이 세운 것이다. 정공단은 정발 장군을 비롯해 그의 막료 이정헌, 첩 애향, 노비 용월과 이름 없는 수군 순절자들을 배향하고 있다. 앞서 1761년(영조 37)에는 경상좌수사 박재하가 ‘충장공정발전망비’(忠壯公鄭撥戰亡碑)를 영가대에 세웠다. 충장공 정발의 순국을 추념하는 비석이라고 할 수 있다. 전망비는 지금 정공단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총병력은 최소 16만명 이상이었다. 부산진성을 공격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선봉대는 1만 8700명이었다. 반면 부산진성의 조선군은 500~600명이었으니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정발에게는 ‘어떻게 죽느냐’가 중요했을 것이다. 우리는 왜란의 비극을 겪은 원인을 ‘방비 없이 당한 조선의 총체적 무능’에서 찾는다. 개인적으로는 ‘위기의식도 적지 않았고 대비도 했지만 국력은 미치지 못했고, 대비가 충실했어도 100년의 전국시대를 거친 왜군의 전투력은 감당하기 어려웠다’는 것이 실상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조선군도 이후 전투 경험을 쌓으며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 왜군에 대한 정보가 없었던 것은 치명타였다. 조정은 일본이 섬나라인 만큼 수군이 강하고 육전에 약할 것이라고 거꾸로 생각했다. 수군에게 해전을 포기하고 육지에 올라와 전투에 임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도 이 때문이다. 경상좌수영 소속인 정발 휘하 부산진수군이 위기상황에 해전(海戰)이 아니라 절영도에서 사냥을 겸한 육전(陸戰) 훈련을 하고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오히려 ‘수륙(水陸)의 전투와 수비 중 어느 하나도 없애서는 안 된다’며 수군을 지킨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매우 예외적이었다. 당시 부산진성 앞에는 군선의 정박지가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부터 야금야금 간척이 이루어져 지금은 바다가 꽤 멀다. 부산진성은 왜란 직전 성벽을 높여 쌓고 해자도 깊게 팠지만 왜군의 공격능력에는 결과적으로 미치지 못했다. 왜군이 애써 점령한 부산진성을 버려 두고 뒷산에 증산성, 해안에 보조성(자성·子城)을 새로 쌓은 것도 이 정도의 성곽으로는 방어가 가능하지 않다고 봤기 때문이다. 조선은 그만큼 전쟁 경험이 없었다. 조선은 왜란 이후 자성 일부를 활용해 새로운 부산진 첨절제사영을 구축했다. 새 부산진성은 좌천역에서 걸어가도 되지만 지하철 1호선 범일역에서 내리면 좀더 가깝다. 이곳에서는 일본식 성 특유의 경사진 성벽을 만날 수 있다. 가파른 성벽 위에는 부산진성의 진남루가 세워졌다. 수군기지로 썼지만 이곳에도 포구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전선의 정박지를 조성하느라 준설한 흙을 쌓아올리고 지었던 누각 영가대도 사라졌다. 지금 조선통신사역사관 옆에 보이는 영가대는 최근 재현한 것이다. 지금 부산에서는 임진왜란의 상처인 자성대라는 이름 대신 부산진성으로 부르자는 시민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정발 장군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무덤은 고향인 경기 연천군 미산면 백산리에 있다. 옷가지로 의관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우암 송시열의 묘갈명을 새긴 비석을 비롯한 석물은 6·25전쟁 와중에 모두 사라졌다. 지금 보이는 석물들은 1982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 [박홍환 칼럼] ‘고지전’과 종전선언/평화연구소장

    [박홍환 칼럼] ‘고지전’과 종전선언/평화연구소장

    영화 ‘고지전’(2011)은 6·25전쟁 막바지 정전협정 체결을 앞두고 벌어진 고지전투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마도 강원 철원의 395고지(백마고지) 전투, 또는 역시 철원의 425고지 전투를 모티브로 삼았을 것이다. 정전협정 협상 국면에서 한 발짝이라도 더 나아가 점령 지역을 넓히려 육박전을 불사해 가며 치열하게 싸웠던 고지 쟁탈전을 생생하게 재연한 국내 전쟁영화의 수작 중 하나다. 특히 그저 그런 ‘국뽕’ 전쟁영화가 아니라 생사를 가르는 처절한 전투에 임하는 장병들의 복잡한 심경, 피아 간의 보이지 않는 심리전 등을 세밀하게 묘사해 더욱 인상적이다. “이제 이 전쟁의 마지막 전투다. 이렇게 전선이 교착된 2년 6개월 동안 50만명이 죽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남았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북한의 김일성, 중국의 펑더화이, 미국의 마크 클라크가 서명한 정전협정문은 같은 날 오후 10시부터 효력을 발휘하는데 영화의 압권은 그 12시간 동안의 마지막 고지 쟁탈전이다. 살아남은 자는 없다. 백마고지와 425고지 전투는 6·25전쟁 최대의 격전으로 꼽힌다. 백마고지에서는 1952년 10월 6일부터 열흘간 중공군 38군과 국군 제9사단이 무려 12차례나 치열하게 고지 쟁탈전을 벌였다. 당시 양측 합쳐 1만 6000명 넘는 병력이 죽거나 다쳤다. 정전협정 체결 직전인 1953년 7월 20일부터 일주일간 계속된 425고지 전투에서는 중공군과 북한 인민군 950명, 국군 160명이 전사했다. 전쟁과 대결의 광기가 격해질수록 역설적으로 평화에 대한 갈망은 점점 거세지기 마련이다. 최후의 전투에 임했던 68년 전의 양측 장병들도 “조금만 버티면 전쟁은 끝난다”며 다가올 평화에 대한 기대감을 가득 안고 고지에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어정쩡한 휴전 상태에 머물고 있는 한반도 현실은 피아 간에 목숨을 걸고 고지전을 펼쳤던 68년 전 그때로부터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3년 전 남북 정상이 판문점에서 “올해 종전을 선언하자”(판문점선언 제3조 제3항)고 합의했지만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은커녕 ‘종전선언’조차 난관에 봉착해 있다. 종전선언 당사국인 남북미중 가운데 우리만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분주하게 나머지 당사국들을 설득하고 있는데 여간해서 진척되지 않고 있다. 대선 국면이 본격화하면서 오히려 우리 내부적으로도 찬반 대립이 커지는 등 장애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네 당사국마다 종전선언의 내용과 성격에 대해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4국이몽(異夢), 4국4몽이니 제대로 진전될 까닭이 없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어제 “베이징동계올림픽을 남북 관계 개선의 한 계기로 삼기로 희망했지만, 현재로서는 그런 기대가 사실상 어려워지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는데 종전선언 또한 쉽지 않다는 얘기로 들린다. 이스라엘의 국제법학자 요람 딘스타인의 정의에 따르면 정전협정의 효력이 지배하는 한반도는 실질적 무력 사용 여부와 관계없이 여전히 ‘기술적’ 차원의 전쟁 상태이다. 이런 상태를 종료시키려면 궁극적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하지만 법적 구속력은 없어도 당사국 간 다짐 성격을 갖는 종전선언 또한 기술적 전쟁 상태를 끝낼 수 있는 절차이자 수단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우리 정부는 종전선언을 통해 교착상태인 남북 및 북미 관계 개선과 비핵화협상 재개를 꾀하고 있는데 북한도 일단 긍정적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북한은 종전선언 그 자체보다는 제재 완화 등의 대응 조치를 내심 바라고 있으며, 미국은 종전선언 이후 북한과 중국이 유엔군사령부 해체 등 정전협정 체제를 뒤흔드는 외교적, 정치적 요구를 해 올 가능성을 경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종전선언에 ‘평화협정 체결 시까지 정전협정은 유효하다’는 내용 등을 포함시킬 것을 요구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중국은 한반도에서의 영향력 유지나 미국 견제에 종전선언을 이용할 공산이 크다. 하지만 종전선언 방정식이 아무리 이처럼 고차원적이라도 반드시 풀어내야만 한다. 논란이 크고 협의가 지난한 평화협정 체결을 전제로 한 종전선언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정치적 합의에 불과한 단 한 줄짜리 종전선언이라도 말이다. 68년 전 격전의 고지에서 산화한 무수한 장병들이 갈망했던 것은 휴전도 정전도 아닌 종전과 평화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 [책꽂이]

    [책꽂이]

    숭배 애도 적대(천정환 지음, 서해문집 펴냄) 문화비평 전문가의 시각으로 자살 사건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개괄한 에세이.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분신한 무수한 열사나 노무현·노회찬 등 정치인, 최진실과 같은 연예인의 극단적 선택 이면을 분석한다. 극단적 대결의 정치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의 ‘관종 문화’ 등도 비판적으로 조명한다. 400쪽. 1만 7000원.남극대륙(데이비드 데이 지음, 김용수 옮김, 미다스북스 펴냄) 미지의 얼음대륙 남극을 둘러싼 200여년의 탐험과 쟁탈전의 역사를 담았다. 1959년 남극조약에 따라 주권과 영토관할권 문제는 동결됐지만, 중국 등 새 국가가 합류하고 석유 발견 가능성이 여전하기 때문에 표면 아래서 각국의 경쟁이 지속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736쪽. 4만 5000원.폭격기의 달이 뜨면(에릭 라슨 지음, 이경남 옮김, 생각의힘 펴냄) 논픽션 작가인 저자가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인 1940~41년 독일의 공습을 받은 영국 안팎의 정세를 생동감 있게 풀어냈다. 희미한 달빛에도 폭탄의 표적이 될까 봐 염려하던 영국인들의 이야기와 지도자의 관점에 따라 전세가 바뀌는 과정을 그렸다. 752쪽. 3만원.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100세 노인(에디 제이쿠 지음, 홍현숙 옮김, 동양북스 펴냄)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의 회고록. 지난 10월 101세로 별세한 그는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한 하루하루를 생생히 묘사하며 사랑과 우정, 친절과 희망,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 우리 삶의 연료라는 점을 일깨워 준다. 272쪽. 1만 6800원.당신을 위한 클래식(전영범 지음, 비엠케이 펴냄)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누비며 숨겨진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냈다.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등 거장들의 삶과 작품이 우리에게 어떤 힘과 위안을 주는지 짚어 본다. 음악의 목적은 감동이니 클래식은 고급스럽고 엄숙한 예술이란 편견을 버리고 마음으로 느껴 보기를 권유한다. 275쪽. 1만 5800원.이제는 잊어도 좋겠다(나태주 지음, 앤드 펴냄) ‘풀꽃’으로 유명한 나태주 시인이 첫눈 같은 유년 시절의 생생한 삶과 풍경을 재현한 자전적 기록. 1945년에 태어나 여섯 살 때 6·25전쟁을 겪은 저자는 외할머니와 곁방살이를 하던 기억을 비롯해 적막하지만 찬란하기도 했던 가족사를 회고한다. 인생을 사막에 비유한 나태주 시 세계의 근원을 짐작할 수 있다. 336쪽.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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