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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북향민

    [씨줄날줄] 북향민

    ‘분단 문학의 대명사’로 불린 소설가 이호철의 데뷔작 ‘탈향’(1955)은 6·25전쟁 당시 피난지 부산이 배경이다. 작가는 1950년 12월 흥남 철수 직전 원산 철수 당시 미군 수송선을 타고 고향을 떠났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탈향’은 함께 피난선을 탄 네 친구 이야기다. 처음엔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그리며 서로를 의지하지만 혹독해지는 환경에 결국 뿔뿔이 흩어진다. 작품 속 “부산은 눈도 안 온다”는 독백은 객지에 내던져진 상황을 상징한다. 시간이 흐르고 고향에 돌아갈 수 없음이 분명해지자 타향에서 뿌리내릴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작가는 탈향(脫鄕)이라고 썼지만 독자는 고향을 떠날 것을 강요당한 탈향(奪鄕)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실향민’이라는 표현은 1953년 전쟁이 중단되고 이북5도 출신에 대한 행정체계가 마련되면서 쓰이기 시작했다. ‘탈향’의 작가도 ‘실향’이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이런 제목을 붙이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그럼에도 실향민은 이후 신문·방송은 물론 일상생활에서 보편적으로 쓰이게 됐다. 1990년대 이후 북한 주민의 국경 이탈이 늘어나고 그 상당수가 남한에 들어오면서 ‘북한 이탈 주민’ 또는 ‘탈북민’이라는 표현이 가세한다. 분단으로 돌아가지 못한 실향민과는 다른 북한 출신 이주자를 지칭할 용어가 필요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서면서 북한 이탈 주민이나 탈북민은 물론 실향민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본격적으로 제기된다. 북한 이탈 주민은 법적 용어다. 통일부가 탈북민 호칭을 바꾸는 방안을 다시 추진하고 있다. ‘하나민’, ‘통일민’, ‘북향민’이 주요 후보라고 한다. 적지 않은 북한 이탈 주민이 ‘이탈’이나 ‘탈북’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명칭 교체는 의미가 훨씬 명료한 대안이 있어도 신중해야 한다. 새로운 대안은 2004년 호응을 얻지 못한 ‘새터민’만큼이나 인위적 조어(造語) 느낌에 입에도 잘 붙지 않는다. 서동철 논설위원
  • 부산 찾은 장동혁...가덕 신공항 사업 적극 지원

    부산 찾은 장동혁...가덕 신공항 사업 적극 지원

    국민의힘 지도부는 14일 부산 가덕신공항 예정 부지와 유엔기념공원을 찾았다. 장동혁 대표 취임 후 첫 지도부 지방 현장 일정이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부산·경남(PK) 민심을 끌어안기 위한 행보로 해석된다. 김도읍 정책위의장, 정희용 사무총장을 비롯해 곽규택·김대식·주진우 등 부산 지역구 의원들과 박형준 부산시장이 장 대표와 가덕도 전망대를 방문했다. 장 대표는 “가덕신공항은 하나의 공항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남부권 전체의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마련하고, 국토 균형 발전의 한축을 만드는 것”이라며 “당초 예정대로 원활하게 사업이 진행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장대표는 “바닷길뿐 아니라 공항 건설로 새로운 하늘길이 열려 부산이 명실상부한 글로벌 물류 도시로 거듭나야 한다”며 “국민의힘이 최선을 다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나가겠다”고 했다. 장 대표는 부산 주민들이 ‘가덕도 신공항 편입주민 생계지원 특별법’ 개정안 국회 통과를 촉구하자 “이 문제뿐 아니라 민원 해결을 위해 국민의힘이 적극 지원하겠다”고 답했다. 그는 기자들과 만나 부산 방문에 대해 “부산은 국민의힘을 든든하게 지켜줬던 곳”이라며 “해양수산부 이전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말씀드릴 필요가 있고, 공항 건설 사업에 여러 걸림돌이 있는 것 같아서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장 대표는 6·25전쟁 유엔군 전몰장병 묘지인 유엔기념공원을 찾아 참배했다. 장 대표는 방명록에 ‘Stand or Die(지키거나 죽거나), 인간의 존엄, 종교의 자유, 법치주의, 사법부의 독립’이라고 적었다. 경찰의 손현보 세계로교회 담임목사 구속과 더불어민주당의 내란특별재판부 설치 추진 등을 염두에 둔 비판으로 해석된다. 장 대표는 15일에는 부산에서 현장 최고위원회의를 열고 , 해수부 임시청사 공사 현장을 둘러볼 예정이다.
  • 6·25 때 北 도왔던 중국군 유해 본국 송환…별도 행사는 없어

    6·25 때 北 도왔던 중국군 유해 본국 송환…별도 행사는 없어

    국방부는 12일 오전 9시 30분 인천국제공항에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과 중국 퇴역군인사무부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제12차 중국군 유해 송환을 시행했다고 밝혔다. 이날 중국 측에 인도된 중국군 유해 30구와 유품 267점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6·25전쟁 당시 전사한 우리 국군의 유해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함께 발굴됐다. 국방부는 국제법 존중과 인도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2014년부터 올해까지 12차례에 걸쳐 총 1011구의 중국군 유해를 송환했다. 정부는 2014년부터 매년 중국군 유해를 송환하면서 인도식 등 공식행사를 열어왔으나 지난해에 이어 올해는 행사를 생략했다. 다만 지난해는 송환 자체를 알리지 않은 것과 달리 올해는 중국군 송환 소식을 보도자료를 통해 미리 전한 바 있다. 국방부는 “이번 중국군 유해 송환이 한중 간 우호협력 관계 강화에 기여하기를 기대하며, 앞으로도 관련 협력을 지속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중국군은 6·25 전쟁 당시인 1950년 10월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에 들어와 북한을 도와 연합군과 싸웠다. 참전한 병력 규모는 240만명 이상으로 이 가운데 전사자는 20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 아버지는 6·25참전, 아들은 주한미군…‘한미동맹명문가상’ 수여

    아버지는 6·25참전, 아들은 주한미군…‘한미동맹명문가상’ 수여

    아버지와 아들이 대를 이어 한국을 지킨 미군 가족이 ‘한미동맹명문가상’을 받는다고 국가보훈부가 12일 밝혔다. 총 다섯 가문이 한미동맹명문가상의 최초 수여자에 선정됐다. 국가보훈부는 6·25전쟁에 참전한 미국 참전용사를 비롯한 주한미군 복무장병과 가족 등 총 87명이 14~21일 한국을 찾는다고 이날 전했다. 3인의 참전용사와 주한미군 복무장병 46명, 가족 38명이 대상이다. 이반 방한 대상 중에는 대를 이어 한국을 위해 헌신한 다섯 가문도 포함됐다. 국가보훈부는 오는 19일 부산에서 개최하는 감사 만찬에서 장관 명의로 한미동맹명문가상을 수여한다. 버른 위트머 참전 용사는 1951~1952년 미 육군 상병으로 6·25 전쟁에 참전해 낙동강 유역 등에서 공수 강하 작전에 참여했다. 그의 아들 브라이언 T.스미스(65)는 주한미군으로 1980~1981년 복무했다. 레이몬드 버질 데일리 참전용사는 1951~1953년 미 공군 제623 항공통제 및 경보 비행대대 병장으로 참전했다. 그의 아들 제임스 E.데일리(60)는 1985~1986년 주한미군으로 복무했다.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춘천에서 복무한 호워드 아고스타의 아들 리차드 H. 아고스타(72)는 세 차례에 걸쳐 한국에서 군 생활을 했다. 1978년, 1989년, 1994년에 걸쳐 총 5년간 용산에서 미 육군 의무중대와 의무대대에서 의무후송 헬기 조종과 지휘관으로 복무한 이력이 있다. 이번 방한 행사를 계기로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으로 처음 한국 땅을 밟은 루디 B. 미킨스 시니어(94) 참전용사가 75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는다. 미 해병대 소속으로 참전한 그는 장진호 전투에서 두 다리와 팔 등 총 열세 곳에 부상을 입고도 투혼을 발휘해 네 개의 퍼플하트 훈장을 받았다. 그는 6·25전쟁 당시 한국인 소년에게 받은 피에 젖은 태극기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고 밝혔다. 1953년 1월 인천항에 정박한 미 해군 병원선 ‘헤이븐’에서 해군 간호사로 복무하며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정전 협정 이후에는 전쟁포로를 미국으로 이송하는 업무를 담당했던 로이스 R. 귄(98) 참전용사와 1953년 미 육군 하사로 참전했던 로버트 M. 마르티네즈(94) 참전용사도 72년 만에 한국을 찾는다. 이들은 14일 인천공항에 입국해 15일 인천상륙작전 기념식 참석을 시작으로 캠프 험프리스 방문, 한미동맹컨퍼런스 참석 등의 일정을 소화할 예정이다. 권오을 보훈부 장관은 “우리 정부는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희생·헌신한 유엔참전용사와 주한미군 복무장병을 기억하는 것은 물론 재방한 초청과 현지 감사·위로 행사 등 다양한 국제보훈사업을 통해 한·미동맹의 결속력을 다지면서 참전국과의 연대 역시 더욱 강화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 희양산 정상 벼랑 끝에서… 불꽃같은 그의 삶을 되짚다

    희양산 정상 벼랑 끝에서… 불꽃같은 그의 삶을 되짚다

    일제 멸망 꾀한 아나키스트 가네코양녀로 고초 겪다 3·1운동 뒤 급변평생 같았던 4년 독립투쟁 끝 옥사박열의 흔적 따라 문경 자락에 영면찾는 이 적은 백두대간 내륙의 명산 불교의 성지이자 희양산문의 장소오르기 힘든 만큼 빼어난 풍경 자랑이름값에 견줘 찾는 이들이 많지 않은 산이 있다. ‘백두대간의 화강암 돔’ 희양산이다. 충북 괴산과 경북 문경이 경계를 이룬 산. 명불허전이라 할 희양산의 풍경도 빼어났지만 그보다 마음을 빼앗은 건 자신을 사랑하고, 또 그만큼이나 조선의 남자를 사랑했던 일제강점기의 일본 여인 가네코 후미코 이야기였다. 힘들게 희양산에 오를 때에도 그의 이야기는 머리를 떠나지 않을 정도로 강렬했다. 문경의 박열 의사 생가 옆에 홀로 잠든 그의 묘를 보고, 그의 일생을 정리한 글을 읽는다면 누구라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희양산에 앞서 가네코의 이야기를 전하려는 건 이 때문이다. ‘불량스러운 조선의 아나키스트’ 독립지사 박열(1902~1974)은 지난 2017년 개봉한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을 통해 널리 이름을 알렸다. 한데 그의 첫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1904~1926·대부분의 검색 사이트가 1903년 출생이라 적고 있지만 여기선 한국의 공훈전자사료관과 일본 국회도서관 기록에 따른다)는 당최 생경했다. 영화에선 꽤 비중 있게 등장하는 편이다. 하지만 박열(이제훈)의 사상적 동지, 혹은 죽음도 가르지 못한 연인 정도로 그려져 그의 진면목을 알기엔 역부족이다. 영화에서 말하지 않은 가네코(최희서)의 어린 시절, 교도소에서의 극단적 선택(타살 의혹도 여전하다) 이후 처리 과정, 사형 선고 이후 박열의 행보 등까지 살펴야 비로소 그들의 삶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다. 그 마지막 퍼즐이 있는 곳이 문경의 박열의사기념관이다. 기념관에 들면 왼쪽으로 묘지가 나온다. 묘비에 “이곳은 일본인으로서 일제의 멸망과 일왕 폭살의 필요성을 주장한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이명 朴文子)의 묘”라고 적혀 있다. ‘박문자’는 남편의 성을 따르는 일본의 관습에 따른 이름이다. 묘역은 봉분 크기에 견줘 전체 면적이 어색할 정도로 넓다. 물론 북한에 잠들어 있는 박열의 유해가 봉환되는 상황을 상정해 넓게 조성한 것이다. 먼저 알아야 할 건 가네코는 조선 독립운동가의 일본인 아내이기 이전에 이미 군주제와 군국주의, 남성 우월주의 등 폭력적 이데올로기들에 맞선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혁명가였다는 것이다. 영화로 잠시 돌아가자. 교도소 간수가 가네코에게 말한다. “조선에서의 7년이 너를 이렇게 만들었구나.” 가네코는 이렇게 응수한다. “그래서 깨어 있는 거다.” 조선에서의 경험이 그의 삶에서 무척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걸 이 대화를 통해 감지할 수 있다. 가네코는 옥중 자서전을 통해서도 “3·1 독립운동을 목격했을 때 나에게도 권력에 대한 반역 정신이 일기 시작했으며 남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감격이 가슴에 용솟음쳤다”고 했다. “그(박열)와 동지로서 투쟁했던 4년만이 진정한 나의 삶이었다”고도 했다. ●무적자에서 독립투사로 다시 태어나 가네코가 영화에서 독백처럼 읊은 자신의 과거를 정리하면 이렇다. 그의 친할머니는 그를 “무적자”(無籍者)라고 불렀다. 태어났지만 태어나지 않은 자, 호적에 오르지 못한 자를 뜻하는 말이다. 가네코가 태어난 곳은 가나가와현 요코하마다. 하지만 처제와 살림을 차릴 정도로 난봉꾼이었던 아버지와, 재혼을 거듭하던 부창부수의 어머니는 그의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다. ‘무적자’인 탓에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가네코는 친척 집에 얹혀살다 1912년 충북 청주 부강면(현 세종시)에 살던 고모의 양녀가 돼 조선으로 건너간다. 기대와 달리 곧장 식모로 전락한 가네코는 극단적 선택까지 결심할 정도로 할머니와 고모에게 가혹한 학대를 받는다. 그는 부강역 앞 철길로 뛰어들려다 멈추는 일을 거의 매일 반복한다. 그가 이를 멈춘 건 “나는 나 자신이어야만 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다. 1919년 3·1 만세운동을 목격한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가네코는 도쿄에서 박열을 만나면서 급진적인 아나키즘에 심취하게 된다. ●박열에 대한 연모 갖게 된 시의 첫 문장 “나는 개××로소이다.” 박열이란 이름을 세상에 깊이 각인시킨 문장이다. 가네코에게서 박열에 대한 연모의 감정이 싹트게 된 것도 ‘나는 개××로소이다’라는 시의 이 첫 문장이었다. 둘은 1922년 동지로서의 동거 서약을 맺고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일왕 암살을 계획했다는 대역죄로 체포돼 1926년 사형선고를 받고, 이 과정에서 변호사 후세 다쓰지의 도움으로 옥중 결혼식을 올리고, 당시 일본 내각 총사퇴를 불러온 ‘괴사진’을 촬영하는 등의 내용은 널리 알려진 바다. 대법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이후 둘의 행보는 갈린다. 무기징역으로 감형한다는 일왕의 ‘은사장’을 발기발기 찢은 가네코는 도치기현의 우쓰노미야 여자교도소로 이감된 뒤 그해 옥사했다. 그의 죽음이 본인 의지였는지, 타살이었는지에 관해선 갑론을박이 여전하다. 박열은 감옥에서 22년을 복역한 뒤 재일본조선거류민단 단장을 맡아 활동하다 6·25전쟁 때 납북돼 평양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죽어서 다시 돌아왔지만 빈자리 남아 교도소 인근 공동묘지에 묻힌 가네코의 유골은 우여곡절 끝에 그해 조선으로 돌아왔고, 11월 5일 박열 집안의 선산인 문경읍 팔령리에 묻혔다. 그의 소원대로 “박열의 고향마을”에 묻힌 건 2003년 박열의사기념관 조성 당시다. 다만 “박열과 나란히 묻어 달라”는 바람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가네코는 꽃보다 상록수를 좋아했다. 그는 작성 연월일 불명의 옥중편지에서 자신의 묘를 찾는 이들에게 “새싹을 피워 올리고 있는 상록수 한 가지를” 올려 달라고 했다. 피었다가 시드는 꽃보다 “언제나 푸르게 하늘을 향해 활짝 피어나는 상록수의 새싹을 나는 끝없이 사랑”해서다. 죽음의 원인은 불명이지만 그가 죽음을 예감하고 있던 건 분명해 보인다. 사족 하나 덧붙이자. 일본인으로 한국 독립유공자에 헌정된 인물이 둘이다. 한 명은 가네코, 또 한 명은 박열 부부를 변호한 후세다. 가네코는 2018년 애국장, 후세는 2004년 애족장을 각각 받았다. 그중 가네코에 관한 일본 내 재평가 움직임은 1972년 그의 일대기를 그린 ‘여백의 봄’ 출간 이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11일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에서 개막한 제30회 아이치국제여성영화제의 개막작도 그의 옥중 자서전과 이름이 같은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다. 박열과 교도소를 달리한 이후부터 죽음에 이르는 과정만 그린 영화로 올 초에 개봉했다. 영화를 통해 100년 전 국가권력에 항거한 여성 아나키스트의 마지막 길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영화 ‘박열’은 국내 대표적인 온라인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볼 수 있다. 이제 희양산으로 간다. 희양산은 중부 내륙의 명산이면서도 찾는 이들이 적다. 산객들이 방문하기에 무척 불편해서다. 들머리는 괴산과 문경 두 곳이다. 한데 문경 쪽은 사실상 막혔다. 산 아래 봉암사가 조계종에서 지정한 특별수도원이라 연중 산문을 걸어 잠근다. 일 년에 딱 하루, 부처님오신날에만 절집 문과 등산로를 연다. 조계종이 워낙 강력하게 보호하는 곳이라 그날 외엔 누구도 출입할 수 없다. 괴산 쪽에선 연풍면 은티마을이 들머리다. 일반인이 희양산에 오를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곳이다. 한데 여기도 그리 녹록하지는 않다. 마을 아래 주차장에서 산행 들머리까지 거리가 1㎞를 훌쩍 넘긴다. 그늘 한 점 없는 뙤약볕 아래 30분 가까이 오르막길을 걷다 보면 등산을 시작하기도 전에 진이 빠진다. 이를 알고 있는 등산객들은 어떻게든 산행 입구까지 차를 가져가려고 하지만, 이를 막는 주민과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다. 한쪽은 봉쇄, 한쪽은 눈칫밥이니 아예 희양산을 패스하는 이도 없지 않다. 명산이면서도 찾는 이가 드문 이유다. 희양산은 백두대간이 남녘을 향해 치닫다가 중부 내륙에서 우지끈 솟아오른 돌산이다. 괴산 연풍면과 문경 가은읍이 이 산에서 경계를 이룬다. 높이는 999.4m. 북쪽을 제외한 삼면이 화강암 암벽이다. 맑은 날 암벽이 볕을 받으면 환하게 빛을 낸다. 한자 이름을 ‘햇볕 희’(曦) 자에 ‘볕 양’(陽) 자로 쓴 이유다. 불교계에선 희양산을 성지처럼 여긴다. 통일신라시대의 선종을 대표하는 아홉 곳의 불교 성지, 이른바 구산선문 가운데 희양산문이 문을 연 곳이라서다. 은티마을 초입에 금줄로 동여맨 돌탑이 있다. 남근을 상징하는 돌무더기다. 여기엔 사연이 있다. 풍수지리상 은티마을은 여근곡 형상이라고 한다. 신라 선덕여왕이 마을에 은거한 백제군을 신통력으로 꿰뚫어 보고 병력을 투입해 전멸시킨 뒤 ‘남근입어여근즉필사의’(男根入於女根則必死矣)라는 표현으로 마을 지세를 설명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담긴 내용이다.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대놓고 남녀상열지사에 비유한 것인데, 마을 입구의 남근석은 그러니까 풍수지리상 비보(도와서 보충함)의 목적으로 세운 것이다. 은티마을에서 희양산 정상까지는 편도 4.5㎞다. 마을 주차장에서 걷는 구간을 포함하면 거리는 좀더 늘어난다. 각종 온라인 게시물은 소요 시간을 편도 3시간~3시간 30분 정도라 적고 있다. 이는 전문 산꾼 기준이다. 일반 등산객이라면 최소 편도 4시간 이상 잡아야 한다. 하산길에서 소요 시간이 준다고 해도 최소 왕복 6시간, 휴식 시간까지 포함하면 7시간 이상 걸린다. 물론 ‘등린이’(등산 초보)를 기준으로 삼으면 소요 시간은 더 늘어난다. ●식수는커녕 화장실도 없는 오지 등산 희양산 정상까지는 지름티재를 거쳐 직벽 구간으로 오르는 코스와 희양산 성터를 거쳐 ‘상대적’ 완경사 구간으로 오르는 코스로 나뉜다. 전자가 거리는 짧되 매우 거칠고 힘들다면, 후자는 다소 길어도 덜 거칠다. 등산로에 계곡물은 거의 없다. 산짐승들이 마실 물 정도만 드문드문 고여 있을 뿐이다. 당연히 식수는 단단히 챙겨 가야 한다. 화장실 등 편의시설도 없다. 그저 정상부 일대에 최소한의 생명줄인 로프가 매어져 있는 게 전부다. 지름티재까지 3㎞ 구간은 된비알이 별로 없다. 이후 1.5㎞의 직벽 구간이 문제다. 특히 정상의 암반부에선 두 팔과 두 다리를 모두 써야 간신히 오를 수 있다. 내려올 땐 더 위험하다. ‘등린이’라면 가급적 성터 코스로 오르길 권한다. ●봉암사 너머 굽이굽이 산세도 일품 정상에서 맞는 풍경은 더할 나위 없이 감동적이다. 특히 문경 쪽이 빼어나다. 봉암사와 그 너머 경북 일대의 산들, 조령천과 합류해 남녘으로 굽이쳐 흐르는 영강 등이 절경을 펼쳐내고 있다. 희양산이 깃든 괴산 연풍과 문경 가은 쪽에 가볼 만한 여행지가 많다. 괴산 연풍면 천주교 연풍성지는 조선 후기 순교자들의 유적지다. 너른 잔디밭과 아름드리나무들이 어우러져 쉬어 가기 딱 좋다. 문경을 대표하는 역사 인물은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다. 그가 태어나자 금빛 안개가 피어올랐다는 금하굴 등의 견훤유적지, 그의 아버지 아자개를 모티브로 삼은 아자개 장터 벽화 거리 등 볼거리가 있다. 등록문화재인 가은역, 석탄박물관과 가은오픈세트장 등으로 구성된 문경 에코월드도 가은읍 내에 있다. 산행의 피로는 온천으로 푼다. 문경새재 아래 온천단지가 조성돼 있다. ‘왕의 온천’이라 불리는 충북 충주 수안보도 희양산에서 멀지 않다.
  • 물방울 화백 김창열… 20대 경찰관 시절, 제주의 예술여정 더듬다

    물방울 화백 김창열… 20대 경찰관 시절, 제주의 예술여정 더듬다

    물방울 화가 김창열이 경찰관으로 제주에서 머물던 시기의 예술 창작여정을 집중 조명하는 전시가 열린다.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은 오는 9일부터 2026년 3월 2일까지 제2·3전시실에서 특별기획전 ‘우연에서 영원으로: 김창열과 제주’를 개최한다고 5일 밝혔다. 이번 전시는 김창열 화백이 6·25전쟁을 계기로 머물게 된 제주에서의 문학·미술 활동과 전쟁의 참혹한 경험을 예술로 승화시킨 창작 여정을 집중 조명한다. 특히 1950년대 제주 시기를 기점으로 전쟁의 상처와 물의 기억을 토대로 문학과 미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형성된 독창적 미학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작가의 평생 화업을 이해할 수 있는 연구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1929년 평북 신의주 명필가의 집안에서 자라난 그는 검정고시로 194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했지만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학업을 중단했다. 1951년 9월 3일 경찰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첫 근무지로 제주에 부임했으며, 1953년 서울로 전보될 때까지 제주 문인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이 인연은 2016년 제주도에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이 개관하는 계기가 됐다. 특히 20대 초반 제주에 경찰로 파견된 김창열은 그림에 몰두하며 ‘사이비 경찰관’이라는 별칭을 얻었고, 문인 계용묵, 화가 장리석·홍종명 등 피난 온 예술가들과 활발히 교류했다. 1953년에는 계용묵이 엮은 문학지 ‘흑산호’에 시 3편(종언, 설계도, 동백꽃)과 표지화를 발표했는데, 이는 현재까지 알려진 김창열의 가장 이른 시기의 미술작품으로 예술 여정의 출발점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는 김창열이 제주를 기억하며 제작한 ‘물방울(제주도, 2003)’을 출발점으로 파리·뉴욕·서울·제주로 이어지는 여정을 따라간다. 작가의 창작 토대가 된 ‘물의 기억’이 추상미술과 초현실주의로 수렴되는 과정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또한 어린 시절 맹산 강변과 제주 바다에서의 수영 경험이 훗날 물방울 회화로 이어진 예술적 원천임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선 인공지능(AI) 영상을 통해 김창열의 제주 시기를 체험할 수 있다. 김은자 여사가 2024년에 기증한 뉴욕 시기 작품 3점도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된다. 이종후 제주도립미술관장은 “이번 전시는 김창열 화백의 젊은 날 제주 시기를 깊이 들여다봄으로써 그의 예술적 뿌리를 이해하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라며 “문학과 미술을 넘나든 그의 실험과 사유를 직접 경험해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오는 19일에는 김동윤 제주대학교 교수를 초청해 ‘김창열 작가의 제주 시기와 예술활동’을 주제로 특별강연도 개최한다.
  • 젤렌스키 “한국, 美 군사 지원 덕에 경제 발전… 우크라도 가능”

    젤렌스키 “한국, 美 군사 지원 덕에 경제 발전… 우크라도 가능”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3일(현지시간) 6·25전쟁 뒤 한국이 이룩한 경제 발전을 거론하면서 전후 ‘한국 모델’을 주목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한국의 성장 배경에 동맹국 미국의 강력한 안보 지원이 있다고 강조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프랑스 매체 르 푸앵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사례에 대해 “그 시나리오가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한국식 시나리오는 가치가 승리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며 “한국의 발전은 경제·문명적 쇠퇴가 뚜렷한 북한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도 추켜세웠다. 그러면서 “한국은 휴머니즘을 중시했기 때문에 문명·기술·경제에서 도약을 이뤘다”며 “국가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한국이 경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미국의 군사적 지원을 강조했다. 그는 “한국에는 북한의 장악을 막는 강력한 동맹국 미국이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한국인들은 여전히 위험에 직면해 있다”며 “한국의 경제가 번영하고 있고 동맹으로부터 보호받고 있지만, 북한이 지금과 같은 상태로 존재하고 지도부의 성격이 변하지 않는 한 한국은 완전히 보호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강력한 방공시스템을 통한 안보보장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그는 유럽 자금을 통해 매달 10억 달러(약 1조 3900억원) 규모모의 미국 무기를 조달할 계획인데, 핵심이 탄도미사일 요격용 패트리엇 미사일 시스템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한국은 안보를 보장해 주는 수많은 방공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며 “우크라이나도 한국이 보유한 패트리엇 시스템과 같은 신뢰할 수 있는 안보보장을 할 결심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양자회담 제안을 받은 사실을 전하고 “나는 ‘가능하다. 젤렌스키가 모스크바로 오면 된다’고 답했다“고 말했다. 반면 우크라이나 정부는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제3국 회담만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 ‘한국 모더니즘 선구자’ 김기림의 흩어진 유산을 오롯이 복원하다

    ‘한국 모더니즘 선구자’ 김기림의 흩어진 유산을 오롯이 복원하다

    전쟁·분단으로 흩어진 작품 망라 詩 외에 비평가적인 면모도 주목 “여기는 발달된 활자의 최후의 층계올시다./단어의 시체를 짊어지고/일본 종이의/표백한 얼굴 위에/거꾸러져/헐떡이는 활자”(김기림, ‘시론’ 부분) 한국 모더니즘의 선구자였던 김기림(1908~?)의 문학적 유산이 정본(正本)이라는 이름으로 총망라됐다. 권영민 서울대 국문과 명예교수가 엮은 김기림 전집(총 3권·민음사)이 최근 출간됐다. 김기림은 일반 독자에게는 교과서에 실린 ‘바다와 나비’로도 잘 알려진 시인. 이번 전집은 그간 분단과 전쟁으로 여러 군데 흩어져 있던 작품을 한 곳에 오롯이 복원하고 재조명한다는 데 의의가 있다. “나의 생활은 나의 장미./어디서 시작한 줄도/언제 끝날 줄도 모르는 나는/꺼질 줄이 없이 불타는 태양/대지의 뿌리에서 지열을 마시고/떨치고 일어날 나는 불사조./예지의 날개를 등에 붙인 나의 날음은/태양처럼 우주를 덮을 게다.”(‘쇠바퀴의 노래’ 부분) 김기림은 1908년 함경북도 학성군에서 출생했다. 18세인 1926년 니혼대학 전문부 문학예술과에 입학한 뒤 1930년에 졸업하고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활동했다. 그가 남긴 시, 평론, 산문은 모두 기자 생활을 하면서 발표한 것들이다. 6·25전쟁 당시 피란하지 못하고 북한 인민군에 의해 납북됐다. 이후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전집에는 ‘기상도’(1936), ‘태양의 풍속’(1939), ‘바다와 나비’(1946) 등 시집에 수록된 작품 외에도 발표는 됐으나 시집에는 묶이지 못한 작품도 엮었다. 그는 예리한 비평가이기도 했다. 특히 낭만주의 사조가 유행하던 당대 한국 문단에 서구의 이론이던 모더니즘을 도입했다. ‘모더니즘의 역사적 위치’(1939), ‘과학으로서의 시학’(1940), ‘시의 이해’(1950) 등은 그 결과물이다. 특히 ‘시의 이해’는 당대 영문학자로 이름을 날렸던 I A 리처즈(1893~1979)를 독해하고 나름대로 쌓아 올린 시론(詩論)이다. T S 엘리엇(1888~1965) 등 걸출한 영미 시인들의 이름이 김기림의 평론에 인용된다. 권 교수는 “김기림은 시를 ‘시인이 자기의 목적으로 향하여 새로운 의미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고 규정한다”면서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제작으로서의 시’인데 이것은 19세기 말 프랑스 보들레르 이후 서구의 모더니스트들이 강조해 온 새로운 관점”이라고 해설했다. 평론 가운데 ‘감상에의 반역’이라는 글의 도입부는 꽤 큰 울림을 준다. “강면(江面)에 뜨는 평정만을 보고 그 강은 죽었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많다. 물밑을 흐르는 진정할 줄 모르는 물굽이에 대하여 사람들은 생각한 일이 없다. 비극이 비극적인 것은 그중의 인물이 우는 때가 아니다. 차라리 그 속에 나타나는 인생의 동떨어진 위치가 관객을 울리는 것이다. 시가 스스로 울음으로써 독자를 울리려고 하는 시가 있다. 그런 경우에 우리는 차라리 그러한 치기를 웃을 밖에 없다.”
  • 한미동맹대상에 김장환 극동방송 이사장

    한미동맹대상에 김장환 극동방송 이사장

    올해의 ‘한미동맹대상’ 수상자로 김장환 극동방송 이사장을 선정했다고 한미동맹재단과 주한미군전우회가 1일 밝혔다. 한미동맹대상 선정위원회는 김 이사장에 대해 “1950년대부터 한국과 미국, 양국 군의 가교 역할을 수행하며 한미동맹의 발전 및 공고화에 크게 기여했다”면서 “한미 간 신뢰 구축과 교류 협력 증진에 헌신해 한미동맹을 굳건히 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김 이사장은 종교 지도자의 영역을 넘어 6·25전쟁 참전 용사와 주한미군 장병, 그 가족들을 기리는 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미국 워싱턴DC에 건립된 한국전 참전 용사 기념비 ‘추모의 벽’ 사업에 적극 참여했고 여러 차례에 걸쳐 참전 용사와 주한미군 장병 유가족들을 한국에 초청하기도 했다. 특히 미국의 지미 카터,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 및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등과 다양하게 교류하며 민간외교 현장에서도 활약했다. 한미동맹대상은 한미동맹 강화에 기여한 개인이나 기관을 선정해 수여하는 상으로 한미동맹재단과 주한미군전우회 심의를 거쳐 선정된다. 지난해 1회 수상자는 한화그룹이었다. 시상식은 오는 17일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개최되는 ‘2025 한미동맹 콘퍼런스’에서 진행된다.
  • “女농구 日에 지면 화나, 채찍질 필요”

    “女농구 日에 지면 화나, 채찍질 필요”

    한국 여자농구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박신자(84) 여사가 국제 대회에서 부진한 후배들을 향해 “일본에 지는 모습을 보면 화가 난다. 슛 연습을 더 해야 한다. 채찍질이 필요하다”며 분발을 촉구했다. 박 여사는 지난 30일 부산사직체육관에서 열린 2025 박신자컵 개막 기자회견에서 “지는 걸 몹시 싫어하는데 한국이 2024 파리올림픽에 오르지 못해 실망스럽다. 제가 선수로 뛸 때는 당당히 세계 대회에 출전했다. 잘한다고만 하지 말고 야단도 쳐 달라”며 쓴소리를 했다. 미국에 거주하는 박 여사는 자신의 이름을 딴 대회가 10주년을 맞은 것을 기념해 부산을 찾았다. 그는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고 아홉 살에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왔다. 트럭을 얻어 타고 화물기차로 갈아타면서 모진 고생 끝에 부산진에 도착한 다음 어느 집의 외양간 근처에 작은 방을 얻어 지냈다. 제게 부산은 호의를 베풀어 줬던 고마운 곳”이라고 돌이켰다. 박 여사는 1967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을 준우승으로 이끌며 대회 최우수선수(MVP)로 뽑힌 ‘전설’이다. 2020년 아시아 국적으로는 사상 처음 2020년 국제농구연맹(FIBA)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다. 그는 지난 7월 FIBA 아시아컵을 4위로 마친 한국 여자농구에 대해 “우리 선수들이 1등을 목표로 노력해 주길 바란다. 아시아에서 쩔쩔매는 모습이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박 여사는 대회 첫날 조별리그 A조 개막전에서 한국 챔피언 부산 BNK가 일본 최강 후지쓰 레드웨이브에 52-62로 패배하자 선수들을 불러 모아 아쉬운 점을 짚기도 했다. 특히 빅맨 박성진에게 “더 많이 연습하라”며 애정 어린 조언을 남겼다. 박 여사의 조카인 박정은 BNK 감독은 “우리 선수들이 속도와 체력에서는 발전했는데 수싸움이 너무 단면적이라며 이를 선수들에게 전수하라고 조언해 주셨다”고 귀띔했다. 박신자컵은 오는 9월 7일까지 열린다.
  • 너무 가득 차서 텅 빈… 그 상흔이 맺혀 있었다

    너무 가득 차서 텅 빈… 그 상흔이 맺혀 있었다

    “6·25 때 동창 120명 중 60명 죽어그 상흔을 생각하며 물방울 그려”‘상흔·현상·물방울·회귀’ 4장 구성미공개작 31점 포함 120여점 전시 “물방울은 자신의 상(像)이 증오스러워 안간힘을 쓴다. 그걸 빨아들이고, 그런 다음 물어뜯고, 그런 다음 말살하려고… (중략) … 그것은 간데없고, 물방울은 떨어지며 마른다.” 프랑스의 저명한 평론가이자 시인인 알랭 보스케는 ‘무슈 구뜨’(물방울 씨)로 통했던 김창열(1929~2021)의 물방울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다.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선보이는 전시 ‘김창열’은 투명하고 영롱한 물방울 이면에 담긴 의미를 찾는 여정과 같다. 작가의 작고 이후 국내 미술관에서 열리는 첫 회고전이다. 연대기적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그가 1950년대 앵포르멜 운동(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에서 발생한 현대 추상미술 운동)에 심취했을 때의 작품부터 1965년 미국 뉴욕 시기, 1969년 프랑스 파리 정착 이후 작품까지 미공개 31점을 포함한 120여점을 선보인다. 미공개 작품에는 최초의 물방울 작품으로 알려진 1972년 작 ‘밤에 일어난 일’보다 앞서 제작된 1971년 물방울 회화 2점이 포함됐다. 이번 전시는 ‘상흔’, ‘현상’, ‘물방울’, ‘회귀’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됐다. 첫 번째 장인 ‘상흔’에서는 해방과 분단, 전쟁이라는 격동의 시기를 거치면서 예술세계의 주요 토대가 된 ‘삶과 죽음’을 내면화한 초기작을 만날 수 있다. 이 시기의 경험은 이후 물방울 작품들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작가는 과거 한 인터뷰에서 “6·25전쟁 중에 중학교 동창 120명 중 60명이 죽었고, 그 상흔을 총알 맞은 살갗의 구멍이라고 생각하며 물방울을 그렸다. 근원은 거기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두 번째 장 ‘현상’에서는 그동안 보기 어려웠던 뉴욕 시기 작품과 파리 전환기 작업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기존 추상회화에서 물방울로 바뀌게 되는 조형적 징후들을 발견하게 된다. 뉴욕에서 파리로 이주하면서 제작한 ‘현상’ 연작은 기존의 차가운 기하학적 형태가 녹아내리는 듯 유기적 형상으로 바뀐다. 또 응집된 덩어리는 마치 인체의 장기처럼 점액질로 표현된다. 작가의 나이가 마흔을 넘어선 197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야 평생을 천착한 물방울이 등장한다. 파리 근교 마구간을 작업실로 쓰던 당시 아무렇게나 놓아둔 화폭 뒷면에 세수한 물을 뿌렸다가 맺힌 물방울을 발견하게 된다. 그 순간의 감동을 작가는 후에 이렇게 회고했다. “그때 화폭 뒷면에 물방울이 맺혀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걸 보았는데, 그게 무척 놀랍고 감동적이었어요. 텅 빈, 투명하고 무색무취인 그 작은 것들, 곧 사라질 테지만 옅은 빛 아래 아름답고 맑은 자태를 보이는 그것들을 두고 동양 철학에서는 ‘충만한 공(空)’이라고 했을 법합니다.” (프랑스 비평가 미셸 앙리시와의 인터뷰) 김창열의 물방울은 단순한 물질적 형상을 넘어 동아시아 철학 전통과 깊은 접점을 이루며 정신적 사유의 매개체가 된다. 물방울은 또 화면을 가득 채운 천자문과도 조우한다. 작가의 ‘회귀’ 연작은 삶의 상흔을 붓질로써 덮어 주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설원지 학예연구사는 “김창열의 물방울은 단순한 시각적 재현이 아니라 애도의 수행”이라며 “반복되는 형상 속에 전쟁과 상흔을 꿰매려는 수행이 담겼다”고 설명했다. 세계적 아트페어 ‘프리즈 서울’ 개최 시기(9월 3~6일)에 김창열 카드를 내세운 것에 대해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국현이 어떤 모습을 보여 줘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며 “한국 미술이 ‘단색화’로 시작해 1960~1970년대 아방가르드까지 소개된 상황에서 다음 타자를 고른다면 김창열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김창열이라는 예술가를 새롭게 발견하고 재정립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오는 12월 21일까지.
  • 임정 경무국장 김구 선생 등 ‘경찰 영웅 5인’ AI로 되살렸다

    임정 경무국장 김구 선생 등 ‘경찰 영웅 5인’ AI로 되살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초대 경무국장을 지낸 김구 선생 등 ‘경찰 영웅’ 5인이 인공지능(AI) 기술로 되살아났다. 21일 경찰청과 유튜브 채널 ‘그려DREAM’은 창경 80주년을 맞이해 김구 선생과 문형순 경감, 차일혁 경무관, 안병하 치안감, 이준규 경무관 등을 AI로 복원하고 이들의 공적을 소개(출생순)하는 영상을 제작했다. AI 기술로 이들의 옛 사진을 복원하고 이를 토대로 실제 살아 있는 모습처럼 재탄생시킨 것이다. 영상 속에서 임시정부 청사를 배경으로 연한 미소를 띠고 있는 김구 선생은 1919년 8월 12일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에 임명돼 치안을 유지하는 업무를 맡았다. 경무국은 상하이 일대에서 독립운동가를 사칭한 이들을 색출하거나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일제 밀정을 찾아 처단했다. 문형순 경감은 1949년 제주4·3사건 당시 처형 지시 이행을 끝까지 거부하면서 278명의 생명을 구해 ‘제주판 쉰들러’로 불린다. 6·25전쟁 때 빨치산 토벌대장이던 차일혁 경무관은 정읍 칠보발전소를 포위한 2000여명의 빨치산을 격퇴한 ‘전쟁 영웅’이자 빨치산 은신처로 활용된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상부의 명령을 거부해 천년 고찰의 명맥을 지켜 낸 인물이다. 안병하 치안감과 이준규 경무관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부당한 지시에 저항하며 시민을 지켰다. 이후 신군부의 고문에 시달린 두 사람은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사망했다.
  • “北 간다” 인공기 펼친 비전향장기수… 통일대교서 군에 막혔다

    “北 간다” 인공기 펼친 비전향장기수… 통일대교서 군에 막혔다

    비전향장기수 안학섭(95)씨가 20일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가겠다며 경기 파주시 통일대교 진입을 시도했으나 군 당국에 의해 제지됐다. 안씨는 이날 11시 40분쯤 통일대교 남단 검문소에 도착해 지팡이를 짚고 걸어서 통일대교 진입을 시도했으나 사전 허가가 없어 곧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민간인출입통제선(민통선)인 통일대교는 군 당국의 허가가 있어야 통과할 수 있으며 무단 진입 시 군사시설보호법 위반 등으로 처벌될 수 있다. 약 10분 만에 돌아선 안씨는 인공기를 들고 북한 송환을 요구했으며 이후 건강 악화로 119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이송됐다. 안씨는 이날 공개된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마지막 소원은 북한에서 남은 생을 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폐 질환을 앓고 있는 안씨는 “오늘 죽을 수도 있고, 내일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다”면서 “북한에서 사는 것을 바라지 않고 그저 그곳에 묻히고 싶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또 “전향서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온갖 수모와 고문, 폭력으로 치욕과 고통의 나날을 견뎌야 했다”고 주장했다. 현재 김포 민통선 근처에서 살고 있는 안씨는 출소 후 약 10년 동안 미군 철수 운동을 했다. 그는 “최근 들어 자주 의식을 잃고 응급실에 간다”면서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미국에 수모와 고통을 당하다가 죽어서까지 이곳에 묻히는 것은 너무 억울하다”고 했다. 인천 강화도 출신인 안씨는 6·25전쟁 때 북한군에 입대한 뒤 1953년 4월 체포돼 종신형을 선고받고 42년간 복역한 후 1995년 출소했다. ‘빨갱이’라며 한국 가족들에게 외면받았던 안씨는 반미 시위를 주도하며 통일을 외쳤고, 그의 집에는 여전히 못에 박힌 성조기 등 반미 예술 작품이 걸려 있다. 끝내 전향서에 서명하지 않은 것을 자랑스레 여기는 안씨는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며 “총알은 멈췄을지 몰라도 이념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덧붙였다.
  • 평소엔 학자, 올림픽 땐 메달리스트… 생활 체육으로 대전환을[87년 체제 ‘대한민국’만 빼고 다 뜯어고치자]

    평소엔 학자, 올림픽 땐 메달리스트… 생활 체육으로 대전환을[87년 체제 ‘대한민국’만 빼고 다 뜯어고치자]

    환골탈태 절실한 엘리트 체육스포츠 인권 정책 수년째 제자리만‘이기흥 사태’ 후 생활 체육 더 축소예산 62% 줄고 부서도 2개로 감축엘리트·생활 체육 통합 정책 절실“체육인에 교육·복지도 함께 해야” 대한민국 체육은 애초 6·25전쟁 뒤 체제 선전을 위한 도구로 집중 육성됐다. 체육 정책의 뿌리인 ‘국민체육진흥법’은 1962년 9월 제정 당시 그 목적이 ‘체육을 통한 국위 선양’에 있음을 명확히 했다. 지난해 사상 첫 1000만 관중 시대를 열며 ‘국민 스포츠’ 지위를 다진 프로야구 역시 1982년 5공화국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출범했다. 1979년 12월 12일 군사 반란을 일으켜 집권한 신군부는 혼란스러운 민심을 빠르게 잠재우기 위해 국민의 시선을 정치가 아닌 다른 곳으로 돌려야 했고 대중의 사랑이 뜨거웠던 고교야구에 주목했다. 이런 배경에서 대중화된 각 체육 종목은 국민의 여가와 건전한 취미 활동을 위한 장이라기보다는 성과를 내야만 하는 전쟁터와 같았고 결과를 내기 위한 과정은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선수 개인의 인권은 물론 국제 대회에 나갈 대표 선발 과정, 종목별 협회 행정 등에서 ‘공정’과 같은 개념은 엘리트 체육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민주화 이후 점차 시대가 변화하면서 엘리트 체육을 향한 사회 인식도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과거 올림픽에서 은메달이나 동메달을 따고도 죄인이 된 양 시상대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국민에게 사과했던 선배들과는 달리 승자를 축하해 주고, 주어진 결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선수들이 속속 등장했다. 체육계 외부적으로는 엘리트 유망주의 학습권 강화 움직임이 일었다. 2010년 국가인권위원회는 성과지상주의적 엘리트 체육의 폐단을 지적하며 ‘스포츠 인권 가이드라인’을 제정했고 한국 체육 정책의 근본적인 대전환을 촉구했다. 인권위는 가이드라인을 ▲헌장 ▲폭력 예방 ▲성폭력 예방 ▲학습권 보호 등 모두 4개 부문으로 구성하면서 ‘국가 차원에서 체계적인 스포츠 인권 정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치권은 2021년 스포츠기본법을 제정하며 국가주의적 엘리트 중심 정책에서 국민 모두의 ‘생활 체육 시대’로 대전환을 선언했지만 여전히 구호에 그치고 있다는 지적이다.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2023년 12월 출범한 국가스포츠정책위원회는 출범 당시 1차 회의 이후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 정부는 엘리트 체육과 생활 체육 정책의 통합 컨트롤타워로 국가스포츠정책위를 발족했지만 정부와 갈등을 빚던 당시 이기흥 회장 체제 대한체육회는 불참을 선언하며 반쪽짜리로 만들었다. 체육계 대표 단체가 없는 정책위는 1년 뒤인 지난해 12월 2차 회의를 개최할 계획이었지만 윤석열 당시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로 무산됐고 이후 사실상 식물 위원회로 전락했다. 생활 체육 실무를 집행하는 대한체육회의 관련 예산과 조직도 축소됐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이 회장 체제 체육회의 방만·불투명한 예산 집행을 지적하며 올해 체육회 예산으로 지난해 대비 1388억원 삭감한 2951억원을 배정했다. 생활 체육 진흥 예산은 지난해 1357억원에서 올해 514억원으로 62% 쪼그라들었다. 생활체육부·청소년체육부·스포츠클럽부 3개 부서로 구성됐던 체육회 생활체육본부 조직은 예산 축소에 따라 학교생활체육부와 스포츠클럽부 2개 부서로 축소됐다. 전문가들은 정책 설계 단계에서 기존 엘리트 체육과 생활 체육을 대립적 요소로 보는 이분법적 시각부터 깨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현우 서울대 체육교육과 교수는 “지금까지 우리 체육 정책은 생활 체육을 지원하면 엘리트 체육은 지원이 줄어들고 성과를 해칠 수 있다는 시각이 팽배해 10년 넘게 정책이 공회전하고 있다”면서 “엘리트와 생활 체육 통합 정책을 위해서는 체육인 중심의 현 정책위에 교육과 보건, 복지 전문가까지 참여폭을 확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년기부터 다양한 스포츠를 손쉽게 접할 수 있는 미국과 유럽, 일본 등에서는 드물긴 하지만 생활 체육에 바탕을 둔 선수가 올림픽을 비롯해 국제 대회에서 메달을 목에 거는 사례도 있다. 2020 도쿄올림픽에 이어 2024 파리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딴 미국 여자 펜싱(플뢰레) 선수 리 키퍼는 켄터키대 의과 대학에 재학 중이다. 신경외과 전문의인 아버지를 따라 6살 때 펜싱을 취미로 시작했다. 도쿄올림픽 여자 사이클 도로 경주에서 금메달을 거머쥔 아나 키젠호퍼의 ‘본업’은 수학자다. 오스트리아 빈 공과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고, 스페인 카탈루냐 공대에서 박사 학위를 딴 뒤 스위스 로잔연방공대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며 올림픽을 준비했다. 2018년 4월 세계 최고 권위 마라톤 대회인 미국 보스턴마라톤에서는 일본 사이타마현에서 고교 사무직으로 근무하던 가와우치 유키가 2시간 15분 58초 기록으로 남자부 우승을 차지했다. 아시아인이 이 대회에서 우승한 건 2001년 이봉주 이후 처음이었다. 가와우치는 고교 시절까지 육상을 전문으로 했지만 부상으로 일찍 꿈을 접었고 마라톤 동호회에서 달리기를 이어 갔다.
  • 1970년 히트곡 ‘봄비’ 부른 한국 최초의 솔 가수

    1970년 히트곡 ‘봄비’ 부른 한국 최초의 솔 가수

    ‘봄비’를 부른 ‘한국 최초의 솔 가수’ 박인수(본명 백병종)가 폐렴으로 별세했다. 78세. 18일 유족에 따르면 고인은 오랜 기간 알츠하이머 등으로 투병해 왔으며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던 도중 건강이 악화해 이날 세상을 떠났다. 1947년 함경북도 길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6·25전쟁 도중 어머니와 둘이 피란길에 올랐다가 열차에서 어머니의 손을 놓쳐 고아가 됐다. 이후 고아원을 전전하다 미군 선교사의 도움으로 열두 살 때 입양돼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외로움과 향수병에 시달리며 뉴욕 할렘가를 떠돌았다. 고인은 귀국 후 미국에서 접한 솔 창법을 앞세워 미8군 클럽에서 활동했고 1960년대 말 그룹 ‘퀘션스’에 객원보컬로 참여하면서 신중현 사단에 합류했다. 그는 1970년 신중현이 작사·작곡한 ‘봄비’를 불러 이름을 알렸다. ‘봄비’는 1967년 신중현이 발굴한 이정화가 먼저 불렀다. 고인은 이후 ‘나팔바지’, ‘펑크 브로드웨이’, ‘의심받는 사랑’, ‘꽃과 나비’ 등으로 인기를 얻었고 1992년 ‘해뜨는 집’과 2013년 ‘준비된 만남’까지 총 20여장의 음반을 발표하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대표곡 가운데 6·25전쟁 당시 헤어진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노래인 ‘당신은 별을 보고 울어 보셨나요’가 큰 인기를 끌면서 1983년 모친과 극적으로 재회했다. 고인은 1970년대 중반 대마초 파동에 휘말렸고, 1990년대 중반부터는 저혈당 증세와 파킨슨병 등으로 건강이 악화되면서 노래를 접고 무대를 떠나기도 했다.
  • 극동방송 ‘나라사랑축제’ 성황…인천 수놓은 광복·복음의 기쁨

    극동방송 ‘나라사랑축제’ 성황…인천 수놓은 광복·복음의 기쁨

    해마다 광복절을 전후해 전국 주요 도시를 돌며 광복의 의미와 평화의 가치를 되새기는 극동방송 나라사랑축제가 올해는 인천에서 성황리에 개최됐다. 2025 나라사랑축제가 열린 지난 15일 인천삼산월드체육관에는 극동방송 전국 어린이합창단 700명을 비롯해 그 가족, 교회 관계자 등 6000여명이 운집했다. 나라사랑축제는 2011년부터 코로나19 팬데믹 시기를 제외하고 극동방송이 꾸준히 이어 온 행사다. 올해는 광복 80주년에 더해 한국 선교 140주년, 인천상륙작전 75주년을 기념해 열렸다. 인천은 독립운동의 중심지이자 근대화와 한국 선교의 발상지, 6·25전쟁의 전황을 뒤집은 연합군 상륙작전이 이뤄진 곳이다. 내년 개국 70주년을 앞둔 극동방송의 첫 전파가 송출된 곳 또한 인천이라 그 의미를 더했다. 축제는 선교 140주년 기념 감사 예배로 문을 열었다. 17사단 군악대의 특별 연주와 함께 유정복 인천시장의 개회 선언이 이어졌고 어린이합창단의 ‘애국가’와 ‘아! 대한민국’을 시작으로 주요 행사인 음악회가 2시간에 걸쳐 펼쳐졌다. 역사의 장면을 5개 주제로 연결하는 연합 공연으로 꾸려진 음악회는 사물놀이, 부채춤, 장구춤 등 전통 유희부터 난타와 힙합 등 현대적 퍼포먼스까지 곁들여져 흥을 돋웠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손에 손잡고·오! 대한민국!’ 등 통일을 염원하며 절정에 달한 음악회는 합창단과 관객 모두가 ‘할렐루야’를 제창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는 “우리 다음 세대의 아름다운 합창과 퍼포먼스를 통해 대한민국의 복음화와 광복의 기쁨을 되새기고 이 땅의 평화를 기억하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를 바라며 축제를 개최했다”고 설명했다. 전국 곳곳에서 모인 합창단원들은 “축제를 준비하면서 우리가 누리는 평화에 감사하고 하루속히 평화 통일이 이뤄지길 기도하는 계기가 됐다”고 입을 모았다.
  • 꿈엔들 잊힐리야… 캔버스 위 그리움의 고향을 거닐다

    꿈엔들 잊힐리야… 캔버스 위 그리움의 고향을 거닐다

    유영국·오지호·윤중식 등 75명 작품애향·실향·망향 등 4개 주제 구성 근원에 대한 고민… 11월 9일까지 “내 고향은 전남 기좌도. 고향 우리 집 문간에서 나서면 바다 건너 동쪽으로 목포 유달산이 보인다. 목포항에서 백마력 뚝딱선을 타고 호수 같은 바다를 건너서 두 시간이면 닿는 섬이다. 그저 꿈 같은 섬이요, 꿈속 같은 내 고향이다.” 대한민국 1세대 서양화가 김환기(1913~1974)가 쓴 ‘고향의 봄’이란 글이다. 전남 신안 안좌도(기좌도와 안창도를 갯벌 간척으로 연결한 섬)에는 김환기의 생가가 남아 있다. 평생 북방식 ㄱ자형 기와집과 그 주변을 둘러싼 구릉과 산, 바다를 그리워하던 마음은 캔버스에 고스란히 남았다. 그는 ‘운월’에 고향 바다를 연상시키는 푸른빛 바탕에 파도를 닮은 구름을 물결선으로 묘사하고 두 개의 달을 그려 넣었다. 김환기가 바다와 섬을 그리며 향수를 달랬다면, 그와 함께 해방 후 ‘신사실파’ 동인으로 활동했던 유영국(1916~2002)은 끊임없이 산을 그리며 고향인 경북 울진을 그리워했다. ‘산봉우리의 삼각형, 능선의 고선, 원근의 면, 다채로운 색’ 등 모든 것을 지닌 울진의 산은 1960년대 이후 그의 작품에서 주된 모티브가 됐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분단과 전쟁 그리고 산업화와 도시화를 지나온 한국인이 느끼는 향수는 남다르다. 광복 80년의 역사를 ‘고향’이라는 키워드로 짚어 한국 근현대 풍경화를 그러모은 전시가 찾아왔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은 ‘향수, 고향을 그리다’를 통해 미술가 75명의 작품 210여점을 선보인다. 전시는 크게 ‘향토’, ‘애향’, ‘실향’, ‘망향’ 등 네 개의 주제로 구성돼 ‘잃어버린 조국’이자 ‘그리움의 땅’, ‘잊힌 풍경’인 고향의 풍경을 펼쳐 놓는다. 일제강점기 오지호(1905~1982)는 ‘동복산촌’이란 작품을 통해 동복천이 흐르던 고향 전남 화순의 마을 풍경을 따스한 시선으로 그려 냈다. 리움미술관이 소장한 이 작품이 국내 전시에 소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근대 수묵화의 혁신을 끌어낸 이응노(1904~1989)는 해방 전후 고향 충남 홍성과 인근 지역의 풍광을 수묵의 다양한 조형 실험과 함께 풀어냈다. 6·25전쟁이라는 민족사의 비극 속에서 작가들은 상실의 땅과 전후 폐허가 된 땅을 기록했다. 이수억(1918~1990)은 ‘6·25동란’이란 작품을 통해 삶의 터전을 잃고 떠나는 피란민의 행렬을 대형 화면에 장중하게 담아냈다. 인물의 표정은 모두 생략됐지만, 바닥을 향해 숙이거나 커다란 짐에 눌려 있는 머리에서 인물들이 느끼는 고통과 고단함이 느껴진다. 평양 출신으로 피란 과정에서 이산의 아픔을 겪은 윤중식(1913~2012)은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석양, 섬, 강, 돛단배, 비둘기, 들녘 등을 반복해 그리며 향수를 달랬다. 이번에 전시된 ‘봄’에는 새처럼 자유로이 날아서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을 담아냈다.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바다, 물고기, 게, 아이들 등 향토적인 소재를 통해 환상적으로 그려 낸 이중섭(1916~1956)도 만날 수 있다. 이북 출신인 그는 가족을 일본으로 떠나보낸 뒤 한국과 일본을 가르는 바다를 사이에 둔 절절한 그리움을 ‘가족’, ‘길 떠나는 가족’, ‘현해탄’ 등에 담아냈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가’를 묻고 다시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전시는 오는 11월 9일까지 계속된다.
  • 광화문광장 채우는 광복의 함성…국가보훈부 빛축제 개최

    광화문광장 채우는 광복의 함성…국가보훈부 빛축제 개최

    국가보훈부가 광복 80년을 맞아 16~23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대규모 빛축제 ‘80개의 빛, 하나된 우리’를 개최한다고 15일 밝혔다. 광화문과 외벽 80m를 거대한 미디어 캔버스로 활용해 1945년 광복부터 현재까지의 80년 역사를 빛으로 표현하는 행사다. 행사 기간 매일 밤 8시~10시까지 30분 간격으로 총 4회 영상이 상영된다. 1부 ‘80개의 빛, 하나된 우리’, 2부 ‘빛으로 새겨진 영웅들 : 광복을 향한 불굴의 의지’, 3부 ‘독립운동가에게 전하는 감사의 마음 한 줄’, 4부 ‘80개의 빛, 하나의 강’으로 구성됐다. 영상을 통해 광복, 6·25전쟁, 민주화운동을 거쳐 문화강국이 된 대한민국의 역사를 감동적으로 그려낼 예정이다. 16~21일까지 5일간 광화문광장 육조마당 일대에서는 빛을 활용한 다채로운 놀이·체험 행사들도 진행된다. 육조 마당 중앙에는 약 12m 높이의 거대한 물탑과 다양한 크기의 물 조형물로 구성된 ‘광복의 탑’이 조성된다. 여기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인 데니 태극기 등 과거의 태극기와 현재의 태극기를 815개의 빛 조형물이 감싸는 ‘광복의 꽃 : 광화’ 공간도 조성한다. 권오을 국가보훈부 장관은 “이번 빛 축제를 통해 선열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일군 광복의 위대한 역사, 그리고 온갖 역경을 딛고 이어 온 광복 80년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빛으로 구현함으로써 국민과 함께 광복의 환희를 만끽하는 축제의 장이 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하겠다”고 밝혔다. 국가보훈부는 전날 국회의사당에서 ‘대한이 살았다’ 행사도 진행했다. 국가보훈부는 ‘보훈봉’을 만들어 나눠줬고 행사에서는 독립영웅을 추모하는 불빛과 1945대의 대규모 드론쇼를 선보였고 가수 싸이, 다이나믹듀오, 거미 등이 출연해 자리를 빛냈다. 행사에는 우원식 국회의장과 권 장관, 이종찬 광복회장 등도 참석했다. 권 장관은 “광복 80년을 맞이하게 된 것을 매우 뜻깊게 생각하며 전야제에 참가한 국민들이 자긍심을 갖길 기대한다”라며 “보훈부는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고 계승하는 광복 80주년 사업을 지속 추진하겠다”라고 말했다.
  • 문성호 서울시의원 ‘국군포로 기억의 날’ 및 ‘북한인권증진의 날’ 촉구 건의안 발의

    문성호 서울시의원 ‘국군포로 기억의 날’ 및 ‘북한인권증진의 날’ 촉구 건의안 발의

    문성호 서울시의원(국민의힘, 서대문2)이 다가오는 광복절을 맞이해, 아직도 해소되지 못한 북한 억류 국군포로와 그의 후손들과 아직도 북한 괴뢰정부에서 자유를 빼앗겨 신음하는 북한 주민의 인권 회복과 향상을 위해 기념일을 지정하고자 해당 법률에 법적 근거를 포함하도록 개정할 것을 담은 건의안을 발의했음을 전했다. 동시에 일전에 뉴욕항에 입항했던 북한이탈주민의 날 기념비가 미국 뉴저지 크로스톨에 성공적으로 세워졌음을 알렸다. 문 의원은 “6·25전쟁이 발발한지 75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1953년 정전협정 체결 후 6만 명의 국군포로가 송환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되며, 1994년 10월 23일 조창호 소위가 귀환에 성공해 동년 11월 26일 보국훈장 통일장을 받고 중위로 전역한 것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80명의 국군포로가 귀환하였지만 대부분 돌아가시고 8명만 살아계신 상황이다”라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어 문 의원은 “2014년 2월 17일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에서 공개한 조사보고서는 북한의 체계적이고 광범위하며 심각한 인권침해의 중대성, 규모, 성격은 “현 세상에서 유례가 없는 국가(a state that does not have any parallel in the contemporary world)”를 보여준다고 평가하면서 북한의 국군포로 억류가 ‘포로의 대우에 관한 1949년 8월 12일자 제네바협약(제3협약)’ 위반임을 확인하고 이를 포함한 북한의 여러 인권침해가 반인도범죄(crimes aginst humanity)에 해당된다고 판단하면서 북한 사태의 국제형사재판소(ICC) 회부를 권고했다”라며 설명을 이어갔다. 덧붙여 문 의원은 “2024년 12월 20일 개정된 ‘6·25전쟁 납북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 제11조의2(6·25전쟁 납북자 기억의 날)는 납북자를 기억하고 납북피해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높이기 위해 매년 6월 28일을 6·25전쟁 납북자 기억의 날로 하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6·25전쟁 납북자 기억의 날에 적합한 행사, 교육 및 홍보 등을 실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같은 날 개정된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 제4조의4(북한이탈주민의 날)는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높이고 북한이탈주민의 권익을 향상하기 위해 매년 7월 14일을 북한이탈주민의 날로 하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북한이탈주민의 날의 취지에 맞는 행사, 교육 및 홍보 등을 실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국군포로를 기억하고 북한인권을 증진하기 위한 날은 지정된 바 없다”라며 법적 근거를 통해 지정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또한 문 의원은 “국군포로를 기억하고 국군포로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높이며 국군포로의 생사 확인과 송환을 촉구하기 위해 1994년 조창호 중위가 전역식을 가진 11월 26일을 ‘국군포로 기억의 날’로, 북한인권증진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제고하고 국민적 관심을 높이기 위해 2014년 유엔 COI 보고서가 공개되었고, 작년 한국, 미국, 일본이 그 10주년을 맞아 북한에 대해 국제법상 의무를 준수하고 납북자, 억류자, 미송환 국군포로 문제의 즉각적 해결을 포함한 모든 인권 침해와 유린 종결을 위한 즉각적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낸 2월 17일을 ‘북한인권증진의 날’ 로 지정하고자 한다”라며 건의안 발의의 취지를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문 의원은 “따라서 매년 11월 26일의 ‘국군포로 기억의 날’, 매년 2월 17일의 ‘북한인권증진의 날’ 지정 등의 법적 근거를 포함하도록 ‘국군포로의 송환 및 대우 등에 관한 법률’에 제15조의6(국군포로 기억의 날), ‘북한인권법’에 제9조의2(북한인권증진의 날)를 신설하는 내용의 개정을 할 것을 담아 선배 동료 의원들과 함께 건의안을 발의했다”라며 말을 마쳤다. 한편, 지난 6월 5일 문 의원이 직접 전한 ‘북한이탈주민의 날 기념비’는 뉴욕항에 입항한 후, 지난 7월 17일, 미국 뉴저지 클로스터(크로스톨)에 성공적으로 세워졌으며, 이날 기념식은 국제북한인권연맹이 주최하여 마영애 회장을 비롯해 주뉴욕총영사관 이동규 동포영사, 재향군인회 미북동부지회 배광수 회장, 뉴욕베트남참전유공자전우회 제임스 정 회장, 김중렬 뉴욕해병대전우회 이사장,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수석 부회장 박진하 목사, 박정희대통령뉴욕기념사업회 이청일 회장, 홍종학 뉴욕한미연합회 회장, Robert Auth 뉴저지주 클로스터 하원의원, John Gidden 클로스터 시장, Victoria Rofi Amitai 클로스터 시의원 등 각계 인사가 참석, 대한민국의 통일과 북한에 억류된 주민들의 인권 회복 및 향상에 대한 구호를 외쳤다.
  • 광복 80돌에 이름 되찾은 한국 1호 프로골퍼

    광복 80돌에 이름 되찾은 한국 1호 프로골퍼

    일제강점기인 1941년 일본식 이름으로 출전한 일본오픈골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연덕춘(1919~2004)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고문이 광복절을 앞두고 이름을 되찾았다. KPGA는 1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대한민국 1호 프로골프 선수 고 연덕춘- 역사와 전설을 복원하다’ 행사를 열고 연 고문의 일본오픈 기록 정정 및 우승 트로피 복원 기념식을 진행했다. 1916년 서울에서 태어난 연 고문은 1934년 일본으로 골프 유학길에 올라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1941년 일본 골프 최고 권위 대회인 일본오픈 정상을 밟으며 한국 골퍼 최초로 국제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일본골프협회(JGA)는 연덕춘이라는 한국 이름 대신 노부하라 도쿠하루라는 일본식 이름과 일본 국적을 공식 기록으로 남겼다. KPGA와 대한골프협회(KGA)는 지난해 JGA에 공식 기록에서 연 고문의 국적과 이름을 수정해 달라고 요청했고 광복 80주년과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이한 올해 4월 마침내 염원을 이루게 됐다. KPGA는 이날 6·25전쟁 당시 유실된 연 고문의 일본오픈 우승 트로피를 복원해 공개하기도 했다. 이 트로피는 독립기념관에 전시될 예정이다. 야마나카 히로시 JGA 최고 운영 책임자(COO)는 “올해는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인 뜻깊은 해”라며 “JGA는 지난해 KPGA 등의 요청을 받은 뒤 내부 논의를 거쳐 만장일치로 기록을 정정하기로 결정했다”고 전했다. 2004년 세상을 뜬 연 고문은 앞서 1958년 한국 최초의 프로골프 대회인 한국프로골프선수권대회(현 KPGA 선수권대회)에서 초대 챔피언에 올랐고, 1968년엔 후배들과 함께 KPGA를 결성해 회원 번호 1번으로 등록하는 등 한국 프로골프의 초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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