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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전상처 아무는 현장 르포(캄보디아 통신)

    ◎킬링필드에 움트는 「화평의 새싹」/“「루주」집권 암흑기 극복” 프놈펜에 활기/유엔 깃발아래 「앙코르」 영화재현 꿈꿔 「킬링 필드」캄보디아에 평화의 새싹이 움트고 있다.유엔의 주도하에 진행되고 있는 민주국가건설작업으로 13년간의 내전에 찢긴 생채기가 하나 둘씩 아물어 가고 있는 것이다.서울신문은 유엔선거감시단 일원으로 선발돼 지난 19일 현지에 파견된 김주환씨(27)를 통신원으로 위촉,새삶을 일궈가고 있는 캄보디아인들의 생생한 모습을 독자들에게 전하기로 했다. 세계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앙코르와트사원이 있는 나라.그보다는 영화 「킬링필드」로 더 알려진 캄보디아에 진정한 평화는 올 것인가. 환락과 풍요의 도시 방콕에서 프놈펜까지의 비행시간은 한시간 남짓.19일 하오 1시 방콕항공을 떠난 낡은 소형비행기가 태국국경을 넘자 내려다 보이는 캄보디아 풍경은 짙은 녹음이 우거진 평화로운 농촌풍경 그대로였다.그땅이 지난 70년대말 불과 4년동안 8백만 인구중 2백만이 죽는 엄청난 동족살륙극을 치른 전쟁터이며그후에도 혼돈과 소요가 계속되고 있는 피의 땅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시골정거장처럼 썰렁한 프놈펜공항은 민간여객기는 눈에 띄지 않았고 하얀 유엔마크를 단 군용기들이 줄지어 있었다.그 너머 격납고에는 소련제 미그기들이 꼬리만 밖으로 내밀고 있었다. 트랩을 내려오자 공항검사대라고는 책상 하나만이 덩그렇게 놓여 있을뿐이었다.그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주위에서 서성거리던 중년부인 하나가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와 깡마른 소녀의 사진 한장을 내밀었다.「매춘」을 알선하는 뚜쟁이였다. 공항 보세구역에까지 잡상인(?)들이 드나들 정도로 부패와 무질서의 도가 극에 달한듯했다. 나이지리아 출신 UNTAC(유엔캄보디아과도행정기구)소속 사복경찰의 안내를 받아 프놈펜정부가 자랑하는 포첸통 하이웨이를 따라 시내로 향했다.얼마쯤 가다 안내인이 길 왼편으로 프놈펜대학 옆 3층정도의 건물이 여러채 모여있는 폐허를 가리켰다. 그 건물들은 과거 크메르루주 집권당시 이른바 「국민개조」라는 미명하에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됐던 곳이라는 설명이었다.대부분의 건물들이 부서져 있고 간판등 많은 자취들이 잡초더미속에 가려져 있었지만 얼핏보기에도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캄보디아인들은 도대체 왜 동족간에 엄청난 살륙전을 치러야 했을까.우리나라의 6·25전쟁으로 인한 동족살상을 외국인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듯이 폴포트 정권의 대량학살 이유 역시 외국인에게는 미스터리가 아닐수 없었다. 프놈펜에서 당시의 체험자를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폴포트정권 당시 4년동안 수용소생활을 했던 킴 헹 찬씨(36·호텔지배인)는 악몽같던 그때를 생생하게 회상했다. 1975년4월17일 크메르 루주는 프놈펜을 점령하자 국가를 재건한다는 미명하에 기존관습과 질서의 파괴에 나서 3백만명의 프놈펜시민을 대부분 지방수용소로 강제이주시켰다.처음에는 미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했으나 곧 식량증산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당시 20세이던 킴씨역시 태국국경 근처의 한 수용소에서 하루15시간씩 일주일 내내 휴일도 없이 강제노동에 동원됐다.멀건 옥수수죽 두그릇으로 하루를연명해야 했으며 의료품은 전혀없어 병이 들면 그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했다.또 그들이 내세운 어설픈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반발하는 사람은 가차없이 처형됐다.킴씨는 침묵과 복종으로 일관,살아나긴 했으나 가족 13명중 9명이 목숨을 잃는 비극을 겪었다. 이같은 엄청난 암흑기를 겪은 이들은 아직 모든 것이 부족하고 불안정한 생활이지만 유엔의 존재에서 커다란 희망을 느끼고 있다.유엔평화유지군(PKF)의 존재에 대해 킴씨는 『이나라 최초의 민주주의 실험인 만큼 공정한 선거를 통해 평화를 확립시키는 계기가 돼야 할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앙코르제국의 영화가 언젠가 다시 올것을 믿는다』며 과거 찬란한 민족유산에의 강한 집착도 나타냈다. 지난 20년 가까이 국제적으로 폐쇄되다시피했던 프놈펜은 이제 국제도시화하고 있다.아직 외국인중 상당수가 일본인이긴 하지만 유엔깃발아래 세계각국에서 온 사람들로 가히 인종박람회를 방불케 하고 있다.오랜 내전에 고통당한 대부분의 캄보디아인들이 이번에는 진정한 평화가 오려나하는 기대를 이들 외국인들에게 걸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캄보디아인들의 실정을 무시한 외국인들의 호사스런 생활이 이같은 기대를 반감을 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최근 이곳 번화가인 아차르 민 가로에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나는 양식 레스토랑의 한끼식사값은 대개 3달러에서 20달러.이곳 공무원들의 한달 봉급에 해당하는 20달러짜리 「스끼야끼」를 거침없이 먹어치우는 외국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캄보디아인들의 시선이 곱지않기 때문이다.
  • 정 총리,오늘 중대 대북제의/이인모씨 송환 입북자와 연계 포함

    ◎「7·7선언」 4주년맞아 연 총리에 정부는 북한이 강력하게 송환을 요구하고 있는 미전향 장기수출신 이인모씨(75)문제와 관련,북측이 오는 8월25일 서울에 올 「이산가족 노부모 북측방문단」에 이씨의 재북가족을 포함시킬 경우 인도적 차원에서 이들의 상봉을 허용할 방침인 것으로 6일 알려졌다. 정부는 그러나 이씨 개인의 송환문제는 남북상호주의 원칙에 입각,처리되어야 한다는 방침에 따라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힐 것으로 전해졌다.한편 정부는 북측이 이씨의 송환을 고집할 경우 60년대에 강제로 납북된 KAL기 승무원을 비롯,북한에 억류돼 있는 납북어부 등 6·25전쟁 이산가족을 제외한 납북인사들과 남북한에 있는 미전향 장기수들과의 일괄 교환을 목표로 한 별도의 남북회담 개최를 제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7일「7·7선언」4주년을 맞아 연형묵 북한정무원총리에게 보낼 정원식국무총리 명의의 대북서한에서 이같은 뜻을 북측에 전달할 계획이다. 정부는 이밖에 이 서한에서 「8·25 이산가족 노부모방문단및 예술단」교환을 비롯한 이산가족문제,남북경제교류협력문제 등 남북관계 전반에 대한 정부의 전향적인 입장을 밝힐 것으로 보인다.
  • 6·25 42돌맞아 평화통일대회/재향군인회

    재향군인회(회장 소준렬)는 6·25전쟁 42주년을 맞아 25일 전국 시·도·군별로 「6·25자유수호전쟁 42주년 민족평화통일을 위한 대회」를 가졌다. 서울에서는 이날 행사에 앞서 상오10시 향군회원 및 우방국 참전용사등 5천여명이 동작동 국립묘지를 참배,현충탑에 헌화하고 조국을 지키다 산화한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렸다.
  • 분단문학/90년대 새 방향모색 활발

    ◎이청준·김원일·구효서씨,새방법론 제시/피해의식 버리고 화해의길 모색/북한주민 삶의 실상 작품화 시도/평론가들 “침체 벗어나기위한 바람직한 현상” 반겨 분단문학의 퇴조 기미가 역력한 가운데 분단문학의 새로운 전망을 모색하는 글들이 현역작가들에 의해 잇따라 발표되고 있다. 소설가 이청준씨는 「문예중앙」여름호의 권두에세이 「통일을 향한 문학」,소설가 김원일씨는 최근 출간된 분단소설선 「달맞이꽃」(중원사간)머리글 「분단시대를 마감하며」에서 각기 자신들의 분단문학관을 펼치며 90년대 분단문학의 갈길과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어 관심을 끈다.이에 앞서 지난봄 소설가 구효서씨는 젊은 세대로서 자신의 분단문학관을 장편소설 「전장의 겨울」로 형상화해 주목을 끌었었다.이같은 시도들은 현재 침체를 겪고 있는 분단문학 창작에 돌파구를 틔워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해방공간에서 좌우익 갈등의 묘사로부터 출발한 분단문학은 6·25를 거치면서 휴머니즘문학·반전문학으로 변모하였으며 60년대 최인훈씨의 「광장」이라는 뛰어난 성과를 낳고 70년대 성장기를 거쳐 80년대에는 탈이데올로기적인 장편소설로 만개했다.그러나 90년대에 들어와선 통일지향문학으로 나아가고 있을 뿐 뚜렷한 성과를 보이지 않고 있는 상태다.순수하게 분단문제를 다룬 것으로 올해 발표된 소설로는 현길언씨의 「여자의 강」,구효서씨의 「전장의 겨울」,이청준씨의 「가해자의 얼굴」,홍상화씨의 「유언」정도이다.이같은 부진은 작가들의 관심이 대부분 분단문제를 떠나있으며 소재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이 기존의 시각에 식상해 있기 때문으로 새로운 시각의 확보 등 분단문학이 한단계 진전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이를 위해 소설가 이청준씨는 권두에세이 「통일을 향한 문학」에서 피해자의 입장을 대변해왔던 이제까지의 분단소설의 경향과는 달리 가해자의 처지에 서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수난자의식은 자기 수난에 대한 보상과 보복의 대상을 겨누고 드는 대립적 힘의 악순환을 부르기 쉬운 반면 자책과 속죄의 괴로움으로 수난자의 용서와 화해를 구하는 가해의식의 각성은 효과적으로 민족의 화해와 통일의 길을 열어나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 그는 또 앞으로의 분단문학은 보다 더 활발한 평등성의 고양으로 자유지향성과의 균형있는 조화를 이뤄나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북녘 인민들」의 삶의 실상에 대한 작품화가 분단문학의 새 과제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김원일씨는 「분단시대를 마감하며」라는 분단문학에 대한 회고와 반성의 글에서 지금까지 분단문학에서 큰 비중으로 다뤄져왔던 남로당의 자리에 현재 북한을 통치하고 있는 정치세력이 들어서야 한다고 주장했다.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북조선을 세워 6·25전쟁을 수행한 실세로서 오늘의 북한사회를 건설하며 인민을 이끌어 온 주체이기 때문이라는 것.그는 『앞으로의 분단문학이 북한의 현정치세력을 정면으로 끌어들여 객관화시키지 않고서는 영원히 반쪽문학으로 남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국전쟁의 기원을 천착한 소설 「전장의 겨울에서 한국전쟁의 발발이 김일성과 이승만 두 사람의 집권욕에서 비롯됐다는 결론을 내린바 있는 구효서씨는 분단문제를 다룸에 있어 사회과학적 시각 뿐만 아닌 인문과학적 시각의 필요성을 새롭게 강조했다.현대정보산업사회에 있어 그 사회의 성격에 맞게 복잡한 시각들을 포괄해야만 분단문제에 대한 올바른 파악이 비로소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이같은 주장들에 대해 문학평론가 김윤식씨는 『분단문학이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로 나아가는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지적하고 앞으로 작가들의 활발한 창작성과를 기대했다.
  •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42년이 지난 「그날」아침에/이형근

    6·25전쟁 3년1개월은 평생을 군인으로 일관한 나에게는 한마디로 치욕적인 전쟁이었다. 군인이 싸우면 이기든지 지든지 둘중에 승부를 내야 하는데 4백만명의 동족이 숨지고 1천만명의 이산가족을 만든 전쟁이 휴전으로 끝이 나고 아직도 통일을 이루지 못한것은 수치스러운일이 아닐 수 없다. 휴전협정이 조인된지 39년이 지난 지금에도 휴전선일대에는 남·북한 1백여만명의 장병들이 대치하고 있다. 1백55마일 휴전선에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긴 휴전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으며 단위면적당 가장 많은 장병과 무기가 집결되어 있다. 소련이 와해되고 동유럽권이 붕괴되는 등 세계사적인 변혁이 일어나고 있으나 한반도 안보상황만은 변화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전쟁은 아직도 계속중이며 진행중이다. 통일을 하는데는 반드시 상대방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북한의 김일성이 진정으로 조국의 평화적인 통일을 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북은 경제적인 형편이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핵개발과 무력증강을 계속하고 있다.북한은 외교적인 압력에도 불구하고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려 하지 않고 있다. 남북기본합의서가 발효됐는데도 지난 5월22일에는 북한의 무장침투조가 군사분계선을 넘어 침투해 왔으며 북한은 유엔군측의 군사정전위원회 개최제의도 묵살하고 있다. 휴전협정에 명시되어 있는 군사정전위원회 기능이 1년이상이나 정지되어 있다. 세계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는데도 북한 위정자들의 대남적화통일전략은 변하지 않고 있다. 최근 젊은 세대들의 성급한 통일논의와 함께 과격한 시위에서 인공기가 등장하는 사실을 보고 전쟁을 지휘한 군인의 입장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6·25 전쟁기간동안에 학생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군번도 없이 종군,7만여명이 죽어갔다. 42년전 낙동강 전선에서 이름없이 숨져간 수많은 학도병들의 애국심이나 현재의 대학생들의 애국심이나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체제수호를 위해 숨져간 학생들과 적화통일도 좋다는식의 감상주의적인 통일론을 펴는 학생들과의 의식의 차이는 대단한 것이다.통일은 반드시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의 통일이 되어야 한다. 적화통일도 좋다는 식의 성급한 생각은 필경 우리 모두를 공산주의의 노예로 만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소련과 동유럽국가들도 버린 사회주의·공산주의 체제는 북한에서도 멀지않아 붕괴될 운명에 처해 있다. 6·25당시 우리 국군의 병력은 9만5천명밖에 안되는데다 소총과 수류탄도 별로 없었다. 북한은 만주와 소련에서 전투경험을 한 직업군인들을 중심으로한 병력 20만명과 전차 2백42대,포 7백28문,전투기 2백11대로 국군과는 비교도 되지않는 우세였다. 당시 북한이 보유한 소련제 T34탱크는 공산권이 가진 가장 우수한 탱크였다. 장갑능력도 뛰어나고 기동력도 우수하며 소형이어서 좁은 길이나 험준한 산악지역에서도 훌륭히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는데 우리가 가진 중기라고는 고작 M8장갑차 27대뿐이었다. 6·25 발발당시 대전의 2사단장이었던 나는 이날 상오 육군본부의 김백일참모차장으로부터 북한이 38선을 돌파,남침했으니 부대를 의정부로 옮기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2사단은 사단본부만 대전에 있고 청주·천안·온양에 1개연대씩 주둔하고 있는 향토사단이었다. 사단본부 병력을 인솔하고 노량진을 거쳐 용산에 도착해보니 국군은 이미 패주중이고 북한군은 탱크를 앞세우고 파죽지세로 남진하는 상황이었다. 부대를 잃은 패잔병과 지휘소를 잃은 부대장,고향을 잃은 실향민,부모와 자식을 잃은 고아와 가장들의 비참한 행렬이 이어졌다. 전선이 무너진 상황에서 후방의 병력을 전선에 투입한다면 계속해서 먹힐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육본에서는 무기도 장비도 없이 후방의 병력동원에만 열중했다. 전선에 병력이 투입되면 궤멸되어 없어지고 다시 병력을 모으고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사이 대전·대구까지 밀리게 됐다. 50년 9월은 내 생애에서 가장 비참한 달이었다. 사랑하는 아내가 전쟁중 영양실조로 숨지고 막내동생인 이상근준장이 청송전투에서 전사해 집안이 풍비박산이 됐다. 50년 10월에 초대 3군단장에 취임해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에 이어 38선을 돌파,북진대열에 참가하게 됐다. 3년전쟁의 결과는 국토의 초토화와 폐허뿐이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국방력과 경제력 두 가지 힘을 길러야한다.
  • 6·25는 우리에게 무엇인가/참전·전후세대 좌담

    ◎“통일의지 가다듬는 「역사의 거울」삼아야”/「상잔의 비극」 잊으면 제2불행 초래/“젊은층 북한 몰라… 통일 접근 신중히”/깨어있는 젊은이 많아야 한반도 앞날 밝아 6·25동란 42돌을 맞았다.전쟁이 일어난뒤 강산이 네번이나 바뀌고 당시 태어난 사람들은 이제 장년이 되어 사회각분야에서 중견으로 활약하고 있다.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아직도 동족상잔의 비극이 생생한데 젊은 세대에게는 6·25가 한낱 역사속의 「사건」으로만 여겨져 가고 있다.인공기가 내걸리고 북한의 상투적인 구호가 그대로 외쳐지는 현실에서 우리는 6·25를 어떻게 해석해야하며 또 무엇을 배울것인가.전쟁을 겪은 세대와 전후세대가 한자리에 모여 6·25의 참뜻을 되새겨본다. ▷참석자◁ ▲배명오씨(63·전 국방대학원 교수) ▲김용승씨(53·월간 「한사랑」 주필) ▲박현정양(21·동덕여대 의상학과 3년) ▲배명오교수=전쟁의 비참한 날들이 아직 생생하고 6·25의 상처가 다 아물었다 할 수 없는데 벌써 42년이 흘러갔습니다.저는 서울대 3학년 재학중 6·25가나 바로 육군종합학교에 입학했다가 참전했습니다.숱한 격전을 치르며 살아남은게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그러나 해마다 6월만 되면 가슴이 답답합니다.6·25가 역사 속으로 묻혀가며 잊혀지는게 섭섭하고 우리 국민의 80%나 되는 전후세대들이 북한을 너무 모르는게 안타깝고 국민들의 성급한 통일욕구가 불만스럽기 때문입니다. ▲김용승주필=저는 국민학교 6학년때 전쟁을 맞았습니다.지긋지긋했던 피란살이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전후세대가 들으면 「또 고리타분한 이야기하는구나」하며 외면할지 모르지만 저는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갖자』는 것을 강조합니다.누가 누구를 위해 피를 흘린 것인가를 생각해야 된다고 믿습니다. 개인이 잘 되려면 웃어른을 잘 모셔야 되듯 나라도 공세운 유공자들을 위해야 잘되는 것입니다.이 말은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로부터 대접받자는 뜻이 아닙니다. 요즈음은 축구만 잘해도 국가가 예우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참전세대는 어림잡아 1백59여만명 되는데 이 가운데 47만명이 생존해 있습니다.특히 전쟁부상자 1백10명은 보훈병원에서 40여년을 보내고 있습니다.이들의 영예를 선양해 줄 때 국민적 구심점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박현정양=저는 솔직히 이런 자리가 어색해요.부끄러운 말씀이지만 6·25에 대한 인식도 매우 적었습니다. 과연 6·25를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지 저는 당혹스럽습니다.대학생활을 하면서도 이데올로기의 홍수에 혼돈을 느끼고 있습니다.난롯불에 직접 손을 덴 사람과 그저 막연히 「아,뜨겁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과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국민학교때에는 학교에서 「상기하자,6·25」라며 표어를 만들고 포스터를 그리기만 했을 뿐입니다.그리고 대학에 들어와선 그런 막연한 개념들을 자연히 잊어버렸습니다. ▲배교수=지정학적으로 우리나라는 대륙과 해양세력의 중간에 위치,항상 그 영향을 받게 돼있습니다.우리가 한반도에서 생존하는 한 현재는 물론 2000년 이후에도 전쟁이 되풀이될 가능성이 항상 있습니다.이 때문에 우리는 6·25전쟁을 망각해선 안됩니다. 서울을 보십시오.「세계적 대도시」라고들 합니다만 그게 자랑거리가 안됩니다.많은 안보전문가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서울은 너무 밀집되어 있습니다.그리고 자본주의의 좋은 점보다도 취약한 요소들이 도처에 많습니다. 안보·국방은 더욱 투철히 해두어야 하는데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김주필=통계에서 보면 우리민족이 9백여차례나 외국으로부터 침략을 받았다고 합니다.여기에서 우리는 더이상 전쟁이 되풀이 되어선 안된다는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자신의 과거를 설명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또 과거를 되풀이할 수 밖에 없다』는 인도속담은 우리에게 던지는 경구입니다.우리민족의 역사의식은 유감스럽게도 매우 약합니다.전쟁이 끝난지 불과 39년입니다.그런데 현재 우리국민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원자폭탄이 떨어진 일본 히로시마 평화의 집앞에는 이런 비문이 있습니다. 「그들을 용서할 수는 있어도 잊을 수는 없다」무서운 경구입니다.평화를 지키는 힘도 중요하지만 역사를 망각하지 않는 국민의식이 더욱 중요합니다. ▲박양=두분께서 저희 젊은 세대에 대한 지적을 많이 해주셔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자본주의의 영향탓인지 물질만능에 젖어 정신적인 것을 많이 잃어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다수 젊은이들은 깨어 있는 정신을 갖고 있다고 자부해요.각자 개인들이 작은 일부터 질서를 지키고 건전한 시민의식을 갖고 생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배교수=좋은 말입니다.민족혼을 갖고 있는 젊은 세대들도 많다고 봅니다.박수갈채를 보낼만한 훌륭한 젊은이들도 많아 한편으로는 마음든든합니다. 그들의 의식이 깨어 있는 한 우리민족의 통일에 대한 미래는 꽤 긍정적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통일에 대한 지나친 환상을 갖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국민들을 공연히 들뜨게 해서는 안되겠지요. 그러나 최근 우리의 통일정책은 너무 양보하는게 아닌가 하는 느낌과 너무 성급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주필=통일 문제를 논의할 때 우리 국민의 교육열이 높다는 사실도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높은 교육열을 잘만 활용하면 통일문제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접근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또 최근 우리 것을 찾자는 움직임이 각계에서 번지고 있는 데 이것도 제대로 방향을 잡아주면 민족통일문제와 접목을 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양=역사는 항상 되풀이된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6·25는 우리에게 역사적인 거울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젊은 세대들이 불행했던 과거를 배우고 익혀서 다시는 민족의 비극이 되풀이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것 찾기,우리 물건쓰기운동도 한창인데 이럴때 애국에 대한 가치관을 정립시키면서 국민의 정신력을 한데 모으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6·25가 우리에게 건전한 의식을 갖게 해주는 역사적 거울로 우리에게 다가설 수 있다고 봐요. ▲배교수=통일문제와 관련해 최근 우리 체제만을 고집하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어 유감스럽습니다.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론을 제기하고픈 생각이에요.우리의 현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한반도에서의 통일은 대한민국 주도하에 이뤄져야 하며 체제와 이념은 자유민주주의에 바탕을 둬야 할 것입니다.▲김주필=우리에게 있어서 내부의 갈등이 더 큰 문제일 수 있습니다. 이 점 겸손하게 받아들이면서 내부의 갈등을 해소하고 순화시키는 노력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통일을 앞당길 수 있는 한 방법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배교수=젊은이들은 남북고위급 회담차 서울에 온 북한 대표단들의 미소와 유연한 자세를 보았을 것입니다.그러나 그 온화한 미소뒤에는 지난 5월22일 군사분계선을 넘어 비무장지대에 침투한 북한 무장침투조의 양면성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박양=동족상잔의 전쟁은 다시는 없어야 합니다.그러기 위해서는 국가적인 힘의 축적이 필요하다고 보며 경제성장과 함께 정신적 가치관의 확립이야 말로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 미·영·불등 참전국,대규모 기념행사/6·25발발 42주년 맞아

    ◎“평화수호 기리자” 박물관 견학·참전비 기공/유엔·비·가·그리스등서도 잇따라 추모집회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이 일어난지 올해로 42주년이 된다.미국 캐나다등 당시 참전국들은 이달들어 당시 자유와 평화를 위해 목숨바친 참전용사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각종행사를 열고 있다. 올해 행사들은 특히 최근들어 중국과 구소련등에서 북한의 남침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들이 속속 공개되고 있는 가운데 열리고 있어 한국전 참전용사들뿐만 아니라 전후세대들에게도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각국별로 치러지고 있는 기념행사를 간추려 본다. 유엔은 동부지역 한국전 참전 용사회주관으로 25일 기념식을 베터리 공원에서 가진다. 미국에서는 지난 13일 참전용사 초청 리셉션과 한국전쟁영화 상영회가 있었다.14일에는 한국전 참전기념비 기공식을 부시 미대통령,체니 국방장관,콜린 파월 합참의장,현홍주 주미 한국대사등 한미 고위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가졌다. 이 기공식에서 노태우대통령은 현대사가 대신한 인사말을 통해 『미병사들이 보여준 숭고한 희생은 한미양국이 추구하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크게 공헌했다』고 격려했다. 월남전 참전용사 기념비 맞은편에 세워질 이 기념비는 한국정전 41주년이 되는 오는 94년 7월 27일 준공될 예정이다.그리고 25일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재향군인회 서부지부(회장 조인하)주최로 기념식과 참전교포 위문활동도 가진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뉴질랜드 필리핀에서도 25일 참전용사들과 교민등이 기념비 참배및 헌화등을 한다. 특히 네덜란드에서는 오는 10월 참전용사와 그가족,그리고 유럽각국의 참전용사회가 모이는 최대규모의 추모및 재회행사가 열릴 예정이다.이밖에 26일 주한 필리핀 대사관에서는 6·25기념 티 셔츠를 나눠준다. 벨기에는 26일 한국전 참전전통 인수부대인 제3공수대대에서 한국의 날 기념행사를 가지고 한국박물관등을 견학한다.28일에는 캐나다 호주 터키에서 기념행사와 참전용사 재상봉및 전사자 추도회를 가진다.그리스에서는 30일 주한 그리스 대사관주관으로 참전용사 위로 리셉션및 무명용사비 헌화식을 거행했다.
  • 남침에서 「합의서」 채택까지… 그 교훈과 통일 전망 대담

    ◎현실 무시한 감상적 통일론 경계할때/평양,체제유지 하려 대화채널 이용/상호사찰수용등 「합의서」 이행 급선무/남북신뢰 구축의 지름길은 북의 적화야욕 포기/마찰작은 문화­경제교류 힘써 북의 변화 유도해야 「과거는 지나간 현재이며 미래는 다가올 현재」라는 말이 있다.역사는 항상 연속선상에서 진행된다는 말인 것같다.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이 발발한지 어언 42년이 흘렀다.최근의 남북관계진전은 우리 민족 모두에게 통일에의 꿈을 부풀게 하고 있다.하지만 핵사찰문제에서 알수 있듯이 남북관계는 현실을 무시한채 성급한 결론을 유도하기 힘든 난제가 아닐 수 없다.국군사의 산 증인 채명신 전주월한국군사령관과 북한문제전문가 유석렬외교안보연구원교수의 대담을 통해 「6·25에서 남북합의서 채택」까지의 역사적 교훈과 통일의 전망등을 들어 본다. ▷채명신◁ ▲육본 작전참모부장 ▲주월한국군 총사령관 ▲주 스웨덴·그리스·브라질 대사 ▷유석열◁ ▲미 미주리주립대 정치학박사 ▲미 북 아이오와대 조교수▲현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유석렬외교안보연구원교수=올해로 6·25전쟁 42주년을 맞았습니다. 이 시점에서 6·25전쟁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을 최근의 남북관계와 연결시켜 조망해보는 것이 올바른 남북관계를 펼쳐나가고 이해할 수 있는 기틀이 된다고 봅니다. 6·25는 북한이 남한을 침략한 것이지만 어찌보면 남한이 너무 무방비상태였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군사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적으로 혼란한 상황이어서 우리에게도 책임은 있다고 볼수 있는 것입니다. ▲채명신 전주월한국군사령관=저는 6·25가 발발하기 전에 북한에 거주하다 47년에 월남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해방직후 북한사정은 잘 알고 있지요.좌경화된 일부 세력은 6·25가 남침이 아니라 북침이라고 주장하는데 터무니없는 얘기입니다.6·25는 소련군부가 북한 공산군을 육성,치밀한 계획아래 준비한 끝에 일으킨 것입니다.시초단계에서는 소련군이 주도했고 김일성은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진후 남침계획에 참여했다고 보여집니다.46년 2월 본인이 진남포근처 보통학교에서교편을 잡고 있을때 공산당간부훈련기관인 평양학원설립식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그 설립식에서 축사를 한 소련군 사령관과 북한주재대사가 「내년에는 여기에 탱크·공군기가 참여할 것」이라고 수차례 강조했지요.이것은 6·25를 스탈린이 주도했고 김일성이 그 꼭두각시 노릇을 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사실입니다. ▲유교수=말씀 중에 북침얘기가 나왔는데 요즘은 많이 들어갔지만 한때 일부 좌경운동권 학생들에 의해 많이 주장됐었죠. 분명한 것은 3일만에 서울이 함락당한 것이나 전쟁 발발당시 전군의 3분의 1만이 근무중이었던 점만을 봐도 북침은 전혀 근거없는 주장으로 생각되는데 채선생님께서 좀더 설득력있게 설명해주시죠. ○수차례 예비도발 ▲채전사령관=소련과 김일성은 6·25 남침을 치밀하게 준비했습니다.저는 장교임관 후 48년 송악산전투 등 인민군과 치열한 정기전을 여러차례 치렀는데 우리쪽 전투능력을 테스트하기 위한 예비도발이었어요.또 2천5백명에서 3천명에 달하는 게릴라부대를 태백산 등지에 남파시켜 후방을 괴롭혔는데 이것도 우리의 군전투능력을 분산시키려는 의도였습니다.게다가 50년 6월25일은 일요일이었으며 3분의 1 이상의 병력이 외출을 나간 상태였지요.농촌출신 군인들은 농번기휴가를 내보냈었습니다.그것도 새벽 4시의 기습남침이었으니 첫날부터 우리의 군전력이 궤멸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요.이때 두가지 미스터리가 아직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첫째는 군비상경계가 6·25전쟁발발 하루전에 해제된 이유와 둘째는 그해 6월10일 전후 대대적 군인사가 단행돼 6·25당시에는 자기 부대순시도 채 못한 전방 연대장·사단장이 많았었다는 점이지요. ○두가지 미스터리 ▲유교수=이제 최근의 남북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90년대 들어 남북한 관계가 어쨌든 호전된 양상을 보여 7차에 걸친 고위급회담이 열렸습니다. 3차회담까지는 기본관계합의서를 먼저 체결하자는 남측과 불가침선언을 먼저 해야한다는 북측의 입장차이를 좁히지 못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4차회담에 이르러서 남북 쌍방은 단일안건을 채택하기로 의견을 모았고 5차회담에서 화해불가침교류협력이라는 단일안건을 채택,처음으로 합의를 도출했습니다. 7차회담에서는 북측이 놀랄 정도로 적극적으로 나와 평양에서 모종의 특명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북한이 이처럼 남북대화에 적극성을 띠게 된 것은 대충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는 것으로 분석됩니다. 먼저 체제의 위협을 느낀 것 같습니다. 남한에 의한 흡수통일을 막기 위해 제도적 장치로 합의서를 만들자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죠. 또 미국 일본과의 관계개선 및 수교문제가 있습니다. 북한이 당면하고 있는 경제침체와 국제적인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미·일과의 관계개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셋째,김정일에게 권력을 승계하기 위한 사전조정작업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북한은 남북합의서 채택을 「역사적 사변」으로 선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김일성도 공개적으로 크게 만족을 표시했습니다. 이와 함께 합의서채택이 김정일의 주도로 이루어진 업적임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죠. 또다른 측면에서 김일성의 80회 생일을 축제분위기 속에서 맞자는 뜻도 포함돼 있습니다. 축제분위기를 만드는데는 남북합의서가 최상의 선물이고 이를 이용,김일성의 생일을 민족 최대의 명절로 부각시키자는 것이죠. 이밖에 남한 주민들의 대북 경계심을 이완시켜 친북세력을 조성하려는 숨은 뜻도 보입니다. 북한은 남한사회를 불안하고 불투명한 사회로 규정하고 대남혁명의 기대를 결코 버리지 않은 상태입니다. 올해 대통령선거와 총선등 2차례의 큰 선거를 치르고 경제가 침체되는 틈을 비집고 들어가 국민과 정부간의 불신을 조장하고 혼란을 일으켜 보자는 거죠. ▲채전사령관=이북 공산주의의 실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북한측 주장이 그럴듯하게 들릴수도 있습니다.하지만 그들이 통일을 외치고 있는 것은 미·일의 경제적 지원을 바라는 절박한 필요성에서 나오는 것이지 진심으로 평화구축을 바라기 때문이 아닙니다.7·4공동성명에 서명하면서 땅굴을 팠다든지 얼마전 3인조 무장간첩침투사건등 그들이 진정으로 평화를 바라지않는 예는 많습니다.KAL기 폭파범인 김현희씨가 엄연히 서울에 살고 있는데도 아직 우리측 조작이라고 우기고 있지 않습니까.그들은 거짓말도 공산혁명을 달성하기 위한 유효한 수단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유교수=현재 남북관계에서는 핵문제의 해결이 선결과제로 등장했습니다. 6·25전쟁으로 얻은 교훈 하나가 북한을 실뢰할 수 없다는 것인데 북한의 핵개발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임시사찰 결과를 검토해보면 영변에 위치한 의문의 건물은 핵재처리시설일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이는 핵재처리시설과 우라늄농축시설을 보유하지 않는다는 남북간의 비핵화공동선언을 정면으로 위배한 것입니다. 북한은 IAEA의 사찰만으로 핵의혹을 해소하려 하지만 우리로서는 상호사찰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핵문제가 빨리 해결되지 않으면 정치군사·교류협력분과위원회가 제대로 활동할 수 없게됩니다. 북한이 진실로 남북간에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원한다면 상호사찰에 응해 핵의혹을 깨끗이 풀어야 합니다. ▲채 전사령관=유교수님 말씀이 전적으로 옳습니다.상호주의 원칙에 의해 의심스러운 곳은 어디든지 개방되어야 합니다.우리가 이제까지 얼마나 북한에 속았습니까.국제적 압력을 총동원,핵문제 만큼은 털끝만한 의심도 남겨서는 안됩니다.작은 땅덩어리,높은 인구밀도의 상황에서 핵무기를 쓰려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봅니다.북한은 또 핵운반수단을 완벽하게 개발해놓았습니다.핵폭탄만 만들면 일본 일부까지 목표물이 됩니다.따라서 사찰대상에는 핵운반수단과 핵폭탄 못지않은 피해를 줄수 있는 화학무기까지 넣어야 된다는게 저의 생각입니다. ▲유교수=이러한 상황인식 아래 앞으로의 통일정책 방향과 추진과정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남북이 불신을 어떻게 해소하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의 통일정책은 쉬운 것부터,상호마찰이 적은 것부터 해결해나가자는 것입니다. 정치·군사문제부터 우선적으로 해결하자는 북한의 주장은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렵지 않습니까. 남북이 먹고 먹히는 통일이 아니고 한민족이 함께 사는 통일을 이뤄야 합니다. 점진적인 노력을 통해 남북의 합의 사항을 성실히 수행해 나간다면 통일은 반드시 이끌어낼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채전사령관=현실을 무시한 이상론추구에는 위험이 많습니다.북한이 도저히 들어줄수 없는 주장을 할때는 받아들이지 않는 원칙론적 자세가 필요합니다.실천가능한 교류문제는 덮어둔채 정치·군사문제부터 해결하자는 것은 억지입니다.특히 남북한이 당장 몇십만명을 감군하자는 주장같은 것은 합의가 무척 어려운 난제인데 이런 주장을 전제로 내세운 대화는 무의미합니다.그것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하거나 비관할 필요는 없습니다.과거 감정을 들추어내어 앞으로의 대화분위기를 깨서도 안되지요.말장난으로 시간을 끌때는 단호조치를 취해야겠지만 대화의 문은 항상 열어놓아야 합니다.이번 여름 남북이산가족 상호방문도 인원이 너무 적어 답답하긴 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더 남북왕래를 해서 서로를 알겠다는 끈기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공존노력 중요해 ▲유교수=그러한 바탕에서 앞으로의 남북관계를 전망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남북간에는 핵통제공동위를 포함 모두 4개의분과위원회가 설치됐는데 남북합의서에 따른 부속합의서의 채택이 당면과제가 될 것입니다. 정치·군사분과위원회는 국가보안법 폐지 미군철수등을 주장하는 북한의 태도에 변화가 없을 것으로 전망됩니다. 다만 교류분과위는 북한이 경제교류를 원하고 있어 낙관되지만 결국 핵문제의 해결이 선행돼야만 본격적인 교류가 성사되겠죠. 통일의 시기를 말하기는 매우 조심스럽지만 김일성은 최근 한 연설에서 『95년을 통일의 해로 하자』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물론 완벽한 통일이 아니고 연방제 등 공존적인 의미죠. 우리도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69%의 국민이 10년 안에 통일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2천년까지 통일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결정적인 기회가 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이에 대한 철저한 준비를 해야겠죠. ▲채 전사령관=통일의 기본개념에 있어 우리와 북한이 다릅니다.북한은 공존·공영에 바탕한 평화통일이라기보다는 아직도 적화통일이 우선입니다.국제적 압력이 너무 거세니까 할 수 없이 시늉만 내는 것이지 속마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습니다.그러니까 큰 줄거리는 합의해놓고 세부실천과정에서 계속 트집을 잡아 남북관계진전을 가로막고 있는 것 아닙니까.저들이 95년 통일을 얘기하고 있는 것도 그때가서는 적화 통일준비가 완성될 수 있다는 생각아래 나온 발언일 가능성도 있지요.핵무기개발뿐 아니라 김일성나이도 생각할때 그때쯤을 적화통일의 호기로 여길 수 있습니다.특히 북한은 남쪽의 혼란을 기대하는 눈치입니다.최근 주체사상·인공기 등이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현상을 보고 쾌재를 부르고 있을 겁니다.자기들은 무력강화를 늦추지 않으면서 남쪽의 변화를 주목하고 있는 것이지요.김일성이 사망하고 김정일이 실각하는 북한내부변란이 없는한 통일에 대한 북한의 자세는 크게 달라지지 않으리라 봅니다.일본도 통일한국등장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경제지원에 나설 수도 있어 통일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독일의 경우도 엄청난 통일비용을 치르지 않았습니까.우리도 공산당의 실체를 직시하면서 초연한 자세로 통일의 기회가 성숙될때까지 실력을 쌓아야겠습니다. ○국민합의에 최선 ▲유교수=42년이 지난 뒤에도 6·25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북한의 행태로 볼 때 적대감과 불신이 없을 수 없지만 우선 점진적인 신뢰회복이 가장 중요합니다. 독일이나 예멘에서와 같이 금방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감상적인 생각은 한반도의 상황여건을 도외시한 것입니다. 대내적으로는 정치의 안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북은 우리사회가 어지러울 때마다 갖가지 제안을 내 혼란을 일으키려 합니다. 국민의 합의와 노력을 통해 정치·경제·사회 모든 분야에서 북한이 동경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그것이 최선의 방책입니다.
  • 통일전망대/금강산절경 손에 잡힐듯

    ◎강원도고성 소재… 6·25 격전지/옥녀봉·해금강선 “어서오라” 손짓/실향민·이방인등 하루 1만여명 줄이어 철책선 너머 금강산이 보고파 목을 늘이고 말없이 서있는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명호리 역사의 현장 통일전망대­.6·25를 앞두고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줄을 잇고 있다. 원호의 달을 맞아 먼발치로나마 고향을 보기위해 찾아온 실향민이 있는가 하면 대치현장의 긴박감을 확인하려는 이방인 관광객들도 적지않다.안내자의 설명으로는 요즘 통일전망대를 찾아오는 내방객은 1만여명에 이르고 있다.현충일인 지난 6일에는 1만6천여명이나 되었다. 통일전망대가 세워진 명호리는 6·25전쟁때 3천여명의 고귀한 목숨을 대가로 되찾은 격전의 현장이기도 하다.속초시에서는 50㎞쯤 떨어져 있고 고성에서도 28㎞나 올라가 있다. 민통선 검문소를 거쳐 통일전망대에 올라보면 우선 절경과 함께 저들의 허구성을 실감하게 된다.아름다운 자연에 요란한 선전구호를 내걸어 놓았기 때문이다.그러나 실망도 잠시,눈앞에 다가오는 비경이 잡친 기분을 깔끔하게 씻어준다.북쪽으로는 금강산 일만이천봉의 마지막 봉우리라는 구선봉(높이 1백85m·일명 낙타봉)이 손에 잡힐 듯이 다가와 보이고 그 오른켠에는 현종암·복선암·부처바위·사공바위·외측도의 해금강이 표주박처럼 두둥실 떠있다. 또 서쪽에는 금강산의 둘째봉인 옥녀봉(1천6백10m)을 비롯 세존봉 육선봉 집선봉 등이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며 「어서 오라」는듯 손짓하고 있다.『구선봉은 전망대에서 2.9㎞의 거리(직선)에 있고 신선대도 16㎞만 더 가면 닿을수 있으며 통일전망대에서 원산은 1백18㎞로 강릉보다(1백30㎞)더 가깝다』는 안내인의 설명을 들으면 가슴이 더욱 뭉클해 진다. 더욱이 금강산 전망대가 지난5월 완공되어 금년말이나 내년초쯤이면 금강산을 더욱 가까이서 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금강산전망대는 통일전망대보다 2㎞쯤 올라간 곳에 세워져 있다.일반공개를 앞두고 현재 도로정비등 기반작업이 한창이다. 통일전망대 관광에서 또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민통선안 마을인 고성군 현내면 명파리 명파마을의 토속음식을 즐기는 일이다.1백50여가구가 모여사는 이 마을에는 토속음식점이 즐비하다.그중에서도 통일식당(전화 682­0723)의 막국수와 감자부침,토속주는 그야말로 일미다. 통일전망대 관광은 연중무휴이며 아침9시부터 하오4시40분까지 입장이 가능하다.관광객은 민통선 검문소에서 내려 사전교육을 이수해야 들어갈 수 있다.서울에서는 속초→전망대를 거쳐 고성→진부령과 속초→한계령,속초→강릉→영동고속도로등 3가지 귀로를 택 할수 있다.
  • 국가유공자에 존경을/김원홍 사회2부 차장(오늘의 눈)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국가유공자들은 국민적인 존경을 받으며 명예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역사가 깊고 전통이 있는 나라일수록 국가유공자들에 대한 예우도 높다. 영국 사람들은 현충일에 전국민이 빨간 양귀비꽃을 달고 런던 수상관저앞에서 여왕이 참석한 가운데 장중한 추념식을 갖는다.프랑스에서도 현충일엔 파리 개선문앞 무명용사비에 하루종일 헌화가 계속되며 샹젤리제거리에는 낡은 훈장을 단 참전용사들의 행진이 이어진다. 우리나라 국가유공자들은 광복이전 독립운동가와 6·25전쟁 수훈자등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해방전에 독립운동을 하기란 그야말로 태풍속에서 촛불을 켜는것 만큼이나 어려워 수십만이 희생됐으며 광복이후 6·25전쟁 때에는 수백만명의 동족이 체제를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수많은 미망인과 전쟁고아,상이용사들이 전쟁의 비극을 증언하고 있다. 현재 국가보훈처에서 연금을 받고 있는 상이군경은 4만7천64명,유족은 7만3천9백29명,독립유공자및 후손은 6만3천7백66명 등 17만5천3백35명으로 가족까지포함하면 보훈인구가 1백만명 가까이 된다. 이들에게 지급되는 기본연금은 월 27만4천원에 불과하다. 정부는 유공자들에게 사업자금 학자금 영농자금 주택자금 자립자금 등을 지원하고 그외 취업알선,의료지원 등을 하고 있으나 유공자 대부분은 노령과 불편한 몸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 6·25전상자들의 대부분은 나이가 65세가 넘은 고령이어서 상처부위의 재발로 고통스러운 특별생활을 하고 있다. 보훈의 달인 이달들어 국가유공자들이 입원중인 병원과 상이용사촌엔 각계각층의 위문이 줄을 잇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위문이 일년에 한번씩하는 의례적인 행사같이 느껴져 안쓰럽다. 평소 유공자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갖는 것은 물론 그들이 긍지와 명예를 지키고 살 수 있도록 보다 따뜻한 관심과 배려가 있어야 하겠다.
  • 「보훈의 달」의미 되새기는 「호국 할머니」오금손여사(이사람)

    ◎「반공강연」 22년간 4천61차례/독립군 유복녀… 「군번없는 간호장교」로 6·25 참전/“「무조건 통일」 주장하는 젊은이들 안타까워요” 『북한공산집단의 남침으로 동족상잔의 처절한 전쟁을 치러야했던 우리들입니다.더욱이 북한의 집요한 남침위협속에 처해 있는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국민들은 당시의 비참함과 참혹상을 잊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중국에서 독립군 유복녀로 태어나 광복군생활을 거쳐 6·25전쟁에 참전해 꽃다운 젊음을 바쳤던 오금손여사(62·대전시 중구 산성동 우성아파트 107동 910호)가 바라보는 우리의 현실은 안타깝기만 하다. 『대학가에서 인공기가 거리낌 없이 나부끼고 있습니다.젊은 학생들이 무조건 「통일」「통일」하는데 저들을 잘 모르고 하는 짓들입니다.하기야 국민의 70%가 6·25전쟁을 경험하지 못했으니 북한공산당의 잔학상이나 기만성을 알 리가 없겠죠』 그래서 그런지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1일 아침 일찍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대전 국립묘지를 찾아 집을 나서는 오여사의 발걸음은 왠지 무겁게만 보인다.오여사가 젊은 가슴을 향해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증언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70년3월 대한상이군경회로부터 호국의식계도 강사로 임명되면서부터였다.오여사는 호국강연을 그때부터 22년동안 모두 4천61회나 했다. 『저는 1930년 2월20일 독립군 유복녀로 중국 북경에서 태어났습니다.아버지(오흥삼)는 제가 태어나던 해 왜놈들에게 체포돼 행방불명 되셨고 어머니(이봉녀)는 저를 낳은지 1주일만에 왜경들에게 끌려간뒤 소식이 끊겼습니다』 『갑자기 고아가 된 저는 14살때까지 중국군 장군의 수양딸로 자라다 15살때인 1944년3월 아버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오세덕씨를 따라 독립군본부에 들어가 광복군 일원으로 활동하다 해방을 맞았습니다』 오여사가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품에 안긴 것은 해방 이듬해였다.그러나 서울엔 일가친척이 하나도 없었다. 『하느님이 도우셨던가 봅니다.당시 청진동에서 순천병원을 개업한 양근섭씨가 오갈데 없는 저를 양녀로 삼아 1년후에 개성간호전문학교에까지 보내주셨습니다』 스무살이 되던 1949년3월 간호전문학교를 나온 오여사는 개성도립병원에 취직해 보람과 긍지를 갖고 나이팅게일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그러나 얼마안가서 하늘과 땅이 통곡한 6·25가 터졌다. 『그때 저를 비롯해 개성도립병원에 근무하던 간호원 24명이 모두 간호장교(소위)로 자원입대했습니다.군번은 없었습니다.그래서 저희들은 지금도 남아 있지만 팔뚝에 배치부대이름인 「백골부대」란 문신을 새겼습니다』 야전병원엔 연일 부상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의약품이라곤 다이아진과 압박대 뿐이었다. 휴전무렵 금화지구전투에서 오여사와 친구 한명은 인민군의 포로가 됐다.인민군부대에는 1백50여명의 양민들이 불잡혀 있었다.인민군들은 한 여학교 교사를 국방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면도칼로 가죽을 벗겨 살해했다.오여사의 친구는 국방군의 위치를 대지 않는다고 젖무덤을 도려내 살해했다.붙잡힌 양민 대부분이 그렇게 죽어갔다.오여사도 손톱과 발톱 이빨을 모두 뽑혔다. 오여사는 54년봄에 서울로 왔다.냉차장사·화장품장사등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돈이 조금 모이길래 윤락여성과 탈선청소년들의 선도일에도 간여했다. 오여사는 건강이 좋지않아 지난 82년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로 내려갔다.그곳에 「독립군 정양원」을 건립,상이군경과 독립유공자들이 마음놓고 쉴 수 있게 했다. 지난 90년 11월 호국영령들이 묻힌 곳에 가까이 있기 위해 대전으로 내려온 오여사는 지난해 7월엔 중국을 방문,그곳에 살고 있는 동포들에게 3개월간 호국강연을 하기도 했다. 『이달에는 거의 매일 강연을 해야될 것 같습니다.영령들이어 고이 잠드소서』 호국강연을 하기위해 발길을 돌리는 오여사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 미군유해 15구/북한,내일 인도

    북한은 26일 6·25전쟁중 전사 또는 실종된 유엔군 유해 15구를 28일 상오10시 판문점에서 송환하겠다고 유엔군사령부에 통보했다.
  • 평생모은 1백50억“사회환원”/박로사할머니 쾌척… 작고(일요화제)

    ◎유언따라 복지재단 설립 “이웃돕기”/6·25때 월남… 조산원하며 사랑 실천 80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간 할머니가 평생 모은 1백50억여원의 재산을 불우이웃을 위해 써달라며 사회복지기금으로 쾌척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지난해 10월27일 부산시 남구 망미동 천주교회에서 생활하다 부산대학병원에서 78세를 일기로 숨진 박로사씨(속명 범숙·사진)는 임종직전 천주교 마산교구청(주교 박정일신부)앞으로 평생동안 모은 현금 41억원이 예금된 통장과 토지·임야등 1백10억원상당의 부동산을 불우이웃을 위해 사용해달라는 내용의 유언장을 넘겨주었다. 박씨의 재산을 기탁받은 천주교 마산교구청은 고인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그해 11월 「범숙복지재단」을 설립했으며 이를 주축으로 노인복지회관,청소년수련의집 건립을 추진하는등 각종장학사업및 복지사업을 펴고있다. 지난 1914년 평남 평원군 순안면 남산리 부농의 집안에서 태어난 박씨는 6·25전쟁이 터지자 단신 월남,경성제대 의학부 부설간호학과를 수료한뒤 이화여대 의예과에 입학,2년간 다니다 수녀가 되기위해 명동성당 수녀원에 입회했으나 건강문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주위의 주선으로 미인디애나주 노르메딩대학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박씨는 조산원자격증을 얻어 부산에서 개업하면서 본격적인 사회봉사활동을 폈다. 그녀는 또 1·4후퇴이후 부산 서구 서대신동 시장통에 텐트를 치고 전쟁고아 20여명을 수용,「고아들의 대모」로서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실천해 나갔다. 박씨는 이때부터 지난 40여년 동안 한푼도 낭비하지 않고 저축을 하면서 목돈이 생기면 땅과 임야를 사들여 부산 남구 망미동 천주교회 뒷산 1만여평과 김해군 생림면일대 3만여평의 논,창녕군 성산면등지의 임야 수십만평을 마련했었다.
  • 북한의 주택사정과 건설현황을 보면(오늘의 북한)

    ◎주택 7만가구 김일성생일 맞춰 준공/평양에 30층아파트 5만가구 지어/자재난심각… 도마다 지원물자 할당/주택보급률 65%… 개인소유없이 모두 임대 북한은 지난 15일 김일성의 80회생일에 맞춰 평양 통일거리(낙랑구역)와 광복거리(만경대구역)의 5만세대 「살림집」(아파트)을 비롯,전국에서 총 7만2천가구의 주택을 준공한 것으로 알려졌다.김일성의 80회 생일잔치에 포함돼 요란한 준공식을 가진 대규모 살림집건설사업의 하일라이트는 통일·광복거리의 아파트 완공이다.총 2만세대분의 아파트가 세워진 통일거리는 개성·평양을 잇는 고속도로를 사이에 두고 좌우로 조성된 신시가지.북한은 「혁명의 수도」평양의 면모를 일신한다는 계획 아래 대동강에 인접한 이 일대에 30층 짜리 고층 아파트를 집단적으로 건설했는데 길이 5㎞,폭 1백20m의 중앙도로를 축으로 총 8개단지가 들어섰다고 전한다.북한은 또 만경대구역 팔골사거리(광복역)에서 김일성 생가가 자리한 만경대 진입로에 이르는 광복거리 5.4㎞ 구간에도 2차로 3만가구의 아파트를 건설한 것으로알려졌다.북한언론은 이밖에 신의주 신시가지의 4천가구를 포함,순천 안주 송림등 공업지대와 문덕 신천 강령등 농업지대등 여러 도시와 농촌에도 약 2만 2천가구의 주택이 새로 들어섰다고 전하고 있다. 지난 89년 12월 김정일의 지시로 착공된 통일거리와 광복거리는 「공화국의 자존심」 평양 건설사업계획에 의거,이곳에 대단위 주택단지가 조성되면서 북한의 선전책자에 단골로 실려왔던 곳.그 가운데서도 특히 광복거리는 지난 89년 제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계기로 개발된 평양의 대표적 거리로 꼽힌다. 이곳의 주택단지는 아파트밀집으로 인한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묶음식·꺾음식·탑식·계단식 등의 형태로 외형상의 변화를 꾀했으며 학교 유치원 탁아소 등 9만㎡에 달하는 근린편의시설도 건설돼 있다고 한다. 전반적으로 열악한 경제사정에도 불구,북한이 이처럼 주택건설에 힘을 쏟고있는 것은 「식의주」해결을 인민의 행복의 척도로 삼고 있는 그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주택부족문제로 애를 먹고 있기 때문이다. 정확한 통계는 나와있지 않지만 북한의 주택보급률은 65%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지방기관소속 간부급 이상의 고위직들만 1백% 주택배정을 받는 것을 감안하면 일반주민들의 주택보급률은 그보다 낮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난달 10일 폐막된 최고인민회의 제9기3차회의에서 『지난해 살림집건설 투자를 그전 해에 비해 1백6% 늘리고 도시와 농촌에 현대적인 살림집을 건설하기 위해 큰힘을 넣었다』고 한 재정부장 윤기정의 91년도 결산보고는 주택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당국이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 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89년 평양축전 전 완공을 목표로했던 1백5층짜리 유경호텔공사가 골조만 올려진채 중단돼 있는 사실에서도 알 수있 듯,기술과 자재·자본부족등 북한이 처한 현실적 어려움은 북한당국의 의욕적인 주택공급정책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원래 91년 해를 넘기기 전에 완공,김정일의 생일(2·16)축하행사에 앞서 준공식을 가질 예정이었던 평양및 주요도시의 주택건설사업은 자재부족으로 공기가 1백일이나 늦춰졌다는 것이다. 또 지난달 12일 「통일거리및 5만가구주택건설」준공식에서 그에 못지 않게 큰 사업인 광복거리 공사가 구체적인 언급없이 슬쩍 넘어간 것도 아직 공사가 마무리되지 못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현재 당면하고 있는 심각한 자재부족은 그들이 각 도에 일정량의 평양시 「건설지원물자」를 할당한데서도 드러나고 있다. 그동안 북한은 6·25전쟁중 60만호의 주택이 완전히 파괴됐다고 주장해왔다.그래서 북한당국은 휴전 직후부터 평양을 비롯,도시중심의 주택건설에 나섰으며 60년대 들어서부터는 농촌주택건설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고 언론들은 설명하고 있다. 북한의 주택공급은 주민들의 생활환경을 집단화하고 밀집화하기 위해「설계의 표준화와 규격화」의 방침에 따라 도시에서는 고층아파트가,농촌지역에서는 연립주택이 주로 보급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주택건설은 매년 9만가구씩 늘어나는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현재 그 부족량이 1백50만호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특히 일반노동자의 경우 결혼후 3년 이내에는 살림집배정 차례가 오지 않아 별거생활을 해야한다는게 귀순자들의 말이다. 이에따라 북한은 80년대들어 10층이상 30층까지의 고층 아파트단지를 조성하는 동시에 농촌지역에서는 2∼3층에서 5∼7층에 이르는 연립주택건설에 주력하고 있다. 이들 연립주택들의 규모는 방2∼4개에 창고 세면장 목욕탕 화장실 등의 부대시설을 갖춘 정도다. 북한에선 각급 주택을 계층과 지위에 따라 임대형식으로 배정,주택소유에 대한 「자본주의적 요소」를 배제하고 있다. 임대료는 비교적 헐한 편이어서 4호 아파트의 경우 여름엔 10원(우리돈 2천3백원),난방이 필요한 겨울철에는 16원을 낸다. 계층별 주택공급기준은 크게 5단계로 구분된다. 단독 고급주택인 특호는 당및 정무원의 부부장급이상,인민군소장이상이 거주할 수 있으며 그 아래 당및 정무원국장급·인민배우·대학교수·기업소책임자등이 입주할수 있는 신형 고층아파트인 4호주택이 있다. 다음 3호주택(중급단독주택및 신형 아파트로 중앙기관지도원·도급기관 부부장 이상의 중견간부),2호주택(일반아파트로 시군과장급·학교교원·천리마작업반장급)순으로 돼 있는데 1호주택은 일반근로자와 협동농장원이 입주할 수 있는 집단공영주택과 농촌 문화주택 구옥등이 해당된다. 주택의 관리및 입주배정은 시·군인민위원회에서 담당하며 주택관리상태를 점검하기 위한 「위생」 「20호」등의 검열이 정기적으로 실시되고 있다.
  • 김정일,인민군 완전 장악할까(오늘의 북한)

    ◎25일 창군기념일 계기로 점검 해본다/원수계급 받으면 사실상 군지배/「권력승계」관련 보수파 숙청 예상/당군사위장·국방위장 맡을지는 불투명 북한의 「붉은 군대」「조선인민군」이 오는 25일로 창설 60주년을 맞는다.김정일의 50회생일(2·16),최고인민회의 제9기3차회의(4·8∼10),김일성의 80회생일(4·15)등 굵직한 행사에 이어 치러지게 될 이번 인민군 창군60주년기념행사는 김정일의 명실상부한 군권력장악과 관련,또다시 내외의 관심을 끌고 있다.현역병 1백만명의 규모를 자랑하는 「조선인민군」은 『조선노동당의 혁명적 무장력』이란 북한의 명문규정대로 로동당의 절대적 지배하에 있는 「당의 군대」「혁명의 군대」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동시에 이러한 당적·혁명적 성격은 김일성의 유일체제와 연관되어 이제까지 조선인민군을 철저한 「김일성의 군대」로 각인시켜 왔다. ○매년 기념행사 요란 지난 1977년까지 2월8일을 인민군창건일로 기념해 오던 북한은 1978년부터 김일성이 항일유격대를 창설(1932)했다는 4월25일로 일자를 변경,해마다 요란한 기념행사를 벌여오고 있는데 이같은 결정 역시 인민군의 김일성 사병화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북한은 김일성의 생일 이틀전인 지난 13일 「중대방송」을 통해 당중앙위원회,당군사위원회,중앙인민위원회,국방위원회 공동명의로 「김일성주석에게 대원솔칭호를 수여한 데 대한」「결정」을 발표,지난해말 인민군최고사령관에 취임한 이후 예측돼왔던 김정일에의 원솔계급수여가 오는 25일 현실화될 것임을 강하게 시사했다. 북한군의 장성서열은 소장·중장·상장·대장·차솔·원솔로 올라가는데 원솔의 자리는 6·25전쟁이 끝날 무렵인 지난 53년2월부터 김일성주석이 지켜오고 있으며 차솔는 오진우인민무력부장이 올라있다. 북한군은 최고사령관아래 「모든 군사정책을 마련하고 군산업발전에 관한 사업을 조직·지도하며 전인민군을 지휘하는 최고 군사기관」(당규약 27조)인 당군사위원회와 이를 심의·집행하는 국가기구차원에서의 국방위원회를 최상위에 두고 있다. 실제적인 군정은 최고 당·정협의체기구인 중앙인민위원회직속의 인민무력부가 위 두기구의 통제 아래 인민군총참모부(총참모장 최광)를 통해 시행하도록 되어있는데 김일성주석은 당군사위원장과 국방위원장을 모두 맡고 있어 정책결정의 정점에 서 있다. 한편 김정일은 그의 권력승계작업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지난 80년 당중앙위 6기 제1차 전원회의에서 「정치국상무위원」「정치국원」「비서」로 선출됨과 동시에 오진우에 이어 두번째 위치로 당중앙위 군사위원에 올랐다. 이어 81년 후계자호칭이 공식적으로 나오면서 군사업의 70%이상을 직접 지시하기 시작했고 90년5월 최고인민회의 제9기 1차회의에서 중앙인민위원회와 동격의 위치로 확대개편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에 선출됐으며 지난해 12월 당6기 19차 전원회의에서 인민군최고사령관에 추대되기에 이르렀다. ○현재 계급은 소좌 따라서 실질적으로 군을 장악하고 있으나 공식계급은 73년 당조직선전부 근무당시의 소좌계급에 머물고 있는 김정일이 차솔인 오진우위의 원수계급에 올라간다는 사실은 군내 위계질서를 명확하게 확립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볼 수 있다. 북한전문가들은 이와 함께 실제 군을 통제하는 국방위원회위원장과 당군사위원회 위원장을 이번 25일 군창설기념식에서 김일성으로부터 물려받을 것인가의 여부가 김정일의 명실상부한 군권장악을 측정하는 관건이 될것이며 이는 또한 「총비서」 「주석」직이라는 공식권력승계를 점칠수 있는 자대가 될 것으로 분석한다. ○대폭 인사개편 될듯 이와관련,서재진민족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북한군은 심각한 인사적체에 직면,50세의 「김정일원수」가 들어섬으로써 이을설등 연로하고 무기력한 혁명빨치산1세를 솎아내 군의 신진대사를 꾀함과 동시에 권력승계와 관련한 군의 지지강화를 꾀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기대하는 것 같다』고 분석하고 『따라서 25일 행사이후 대대적인 군인사개편과 김정일의 양위원장 취임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내다봤다. ○헌법 일부개정 검토 북한헌법 93조는 그러나 주석이 전반적 무력의 최고사령관과 국방위원회위원장이 된다고 규정해놓고 있기 때문에 김정일의 당군사위와 국방위 위원장직승계를 위해서는 헌법개정이 불가피하다. 바로 이 대목이 지난 10일 폐막된 최고인민회의 제9기 3차회의에서 제기된 「헌법수정」안의 내용에 관심을 갖게하는 부분이다. 그 구체적 내용이 전혀 알려지지 않고있는 이 헌법수정안에 대해 서실장은 『북한이 공개한 내용이 「김일성동지와 로동당이 새롭게 제시한 사상과 이론,그 밑에 인민이 이룩한 성과를 반영해」라고 돼있어 애매하긴 하지만 「포괄적」이라는 측면에서 헌법 93조의 수정등도 점쳐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북한연구소의 김창순이사장은 『지난해 이뤄진 김정일의 인민군최고사령관 추대가 위헌사항이므로 이를 바로 잡기위해 주석=전반적 무력의 최고사령관이라는 고리를 끊었을 수도 있다』고 밝히고 『이번에 김일성에 수여된 대원솔계급을 새로 만드는 안도 포함될수 있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그러나 김이사장은 최근 일부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서 논의되고 있는 「제1부주석제 신설」가능성에 대해서는 『원래 제1부주석제가 북한에 존재하고 있었으며 과거 김동규와 김일(76·4)이 그 자리에있었다』고 지적,『김정일은 왕위계승자로서의 동궁의 개념에 드는 이상,영의정·우의정과 같은 개념의 제1부주석등 행정의 수위자리를 꼭 거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유석렬교수(외교안보연구원)는 『원수가 국방위원회와 당군사위원장을 맡는 것이 상식이긴 하지만 신설된 대원솔의 성격에 따라 달라질것』이라며 김일성의 대원솔계급이 단순한 상징적 계급이 아닌 스탈린식의 실질적 권한을 갖는 것이라면 군을 통제하는 양 위원장자리는 당분간 김정일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으로 전망 했다. 김일성이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엔 결코 최고권력의 지위를 김정일에 넘겨주지 않을 것으로 보고있는 전문가들 역시 인민군의 현계급제도에 없는 「대원솔」계급 신설은 향후 김정일에게 「총비서」 「주석」 등의 자리를 물려주더라도 김일성이 더 「상위」의 지위를 만들어 눌러 앉을 것이라는 추론을 가능케 하는 대목이라고 말하고 있다.
  • 「수복지구 땅 사취」 수사/주인없는 토지 서류위조,등록신청

    ◎강원경찰청,10명 적발 【춘천=조한종기자】 강원경찰청은 10일 최모씨(42·양양군 양양읍)등 10명에 대해 도내 수복지구내 주인이 확인되지 않은 땅을 자기땅인 것처럼 거짓으로 서류를 꾸며 소유자 복구등록신청을 한 혐의를 잡고 수사에 나섰다. 경찰에 따르면 최씨등 10명은 정부가 6·25전쟁으로 토지공부가 없어진 3·8선이북 수복지구내 토지를 실제주인에게 등기해 주기위해 지난 63년부터 91년까지의 시한법인 「수복지구내 소유자 미복구 토지의 복구등록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미복구토지복구등록 신청을 하도록 한 것을 악용,20필지 6만여평에 이르는 주인이 확인되지 않은 땅을 자신들 앞으로 소유자 복구등록신청을 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관계서류를 위조하거나 법에 규정된 4∼5명의 증인을 허위로 내세워 땅을 가로채려 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신청마감을 앞둔 지난해 12월 신청자중에 이같은 허위신청자가 많을 것으로 보고 해당 7개 시·군에서 신청한 3억9만6천7백12평 가운데 의심이 가는 3천4백67필지 8백5만평에 대해 수사를확대하고 있다.
  • 여자의 강·전장의 겨울/분단과 6·25의미 새롭게 조명(문학)

    ◎여자… 살기위해 몸바친 기구한 삶 그려/전장… 탈이념시각서 전쟁의 원인 규명 이제까지와는 다른 시각으로 분단을 바라보는 두편의 소설이 잇따라 출간돼 눈길을 끈다. 최근 출간된 현길언씨의 장편소설 「여자의 강」(한길사간)과 구효서씨의 장편소설 「전장의 겨울」(모음사간)은 6·25가 통과하는 한 시기를 배경으로 분단과 6·25의 의미를 새롭게 캐묻는 작품이다. 최인훈의 「광장」에서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이르는 분단문학의 흐름을 이어받은 이 두 소설은 이제까지 분단문학에서 소홀히 취급돼 왔던 측면을 비중있게 다루고 있어 이채롭다. 「여자의 강」은 여자의 성을 객체화,타락시키는 요소로서의 분단의 역사,「전장의 겨울」은 6·25전쟁의 원인규명에 각각 치중하고 있는데 특히 「전장의 겨울」은 6·25 미체험 세대로서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비롯한 사회과학서들을 읽으며 자란 젊은 작가들의 분단시각을 대변하는 도전적인 작품으로 주목된다. 「태백산맥」이 계급투쟁 또는 반제국주의라는 이분법적 이념의 잣대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 있다면 「전장의 겨울」은 아무런 편견없이 그 모든 분단적 상황에 내재한 근본적 동인들을 추적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까지 이념전쟁으로서의 6·25의 성격을 희석시키면서 보다 자유로운 사고의 틀 안에서 6·25의 의미를 새삼 묻고 있는 것이다. 『이유도 모르고 싸우다 겨울능선에서 죽어간 영령들을 위해』라는 작가의 말에서 드러나듯 이 작품은 전쟁에 투입된 병사들의 대부분이 전쟁의 발발원인이나 전쟁목적을 잘 모르고 있었다는 추정에 근거하고 있는데 그들의 처지는 월남전에 파병된 한국군의 처지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전투에 투입된 주인공 주기호 일병은 숙명론자 김병도 하사,이상주의자 서석,인민군으로 전향한 아버지 주도현 등을 만나면서 전쟁의 원인을 차츰 깨달아가며 자신의 운명론적 전쟁관을 극복해간다. 아울러 미군과의 포로수용소생활을 통해 주일병은 브루스 커밍스류의 한국전쟁을 내전으로 보는 시각 냉전으로 인한 제국주의와 사회주의간의 대리전쟁으로 보는 시각 등 다양한 6·25의 발발원인에 접하게 된다. 그러나 작가는 전쟁의 발발원인을 감히 단정짓게 하지는 않는다. 작가는 다양한 전쟁의 원인을 열거하는 과정에서 이제까지 이념의 맹목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온 정권의 부당성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 모든 역사적 질곡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조국을 사랑할 것을 다짐하고 통일에의 앞날을 기약하는 주인공상을 보여주는 「전장의 겨울」은 현대 젊은이들의 열린 시각을 잘 반영하고 있는 분단소설이다. 한편 「여자의 강」은 가부장적 시각에서 여성을 묘사하여 비난을 샀던 「태백산맥」이 간과했던 부분들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제주 4·3사건으로부터 6·25,그 이후까지의 분단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여자의 강」은 박명자라는 빨치산출신의 여주인공이 어려운 시절에 자신의 성을 도구화하여 목숨을 보전시키고 결국 물질적 성공과 연이은 정신과 파탄에 이르는 과정을 그려보이고 있다. 전쟁이나 내란같은 혼란한 시기에 여성의 성은 단순한 욕망충족의 수단이나 남성 힘의 발산대상으로 전락됐음을 이 소설은 상기시킨다. 특히 분단의 시대에 있어여성의 성은 이념적인 도구,정치적 흥정의 대상,또는 어떤 보상의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는데 박명자는 이를 극복하는 차원에서 자신의 성을 적극적으로 사용해 오히려 물질적 성공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작가는 이러한 허황된 성공에 여주인공의 정신적 파탄이라는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다. 즉 작가는 박명자를 진실로 사랑하며 어려움속에서도 순수를 지켰던 몇몇 사람들의 의미를 여주인공에게 깨닫게 함으로써 이른바 「성의 정치학」에 맞서는 「사랑의 정치학」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공군 C54수송기,26년만에 명예퇴역(단신패트롤)

    ◇지난 66년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뒤 월남전에 참전했던 공군의 C54수송기(사진)가 31일 하오 공군7654부대에서 명예퇴역식을 가졌다. 이날 퇴역식에는 공군장병 및 역대C54조종·정비사들이 참석,한국상공에서 사라지게된 노후 항공기와의 석별을 아쉬워했다. C130 허큘리스와 C123수송기에 창공을 넘겨준 C54수송기는 42년 미 더글러스항공사에 의해 제작돼 2차대전때는 맥아더장군의 전용기로 사용되고 6·25전쟁때는 유엔군 지상부대의 공수임무를 맡는등 세계각국의 중·장거리 수송기로 활약해왔다. 우리나라에서는 박정희대통령의 전용기로 사용됐으며 86년 아시안게임때는 성화봉송 임무를 맡기도 했다. 이날 퇴역한 C54수송기는 26년간 6만여시간의 비행시간을 기록하며 연인원 11만명의 장병과 8천여t의 물자를 수송했다. C54수송기는 앞으로 지상전시장에 전시된다.
  •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없길 기도”(인터뷰)

    ◎어제 해체된 주한 미공병대대장/파울로우스키 중령/6·25때부터 군비행장 건설 참여/“한국인 근로자의 동료애에 감사”/1941년 본토서 창설… 대대급 부대로는 첫 철수 지난 50년 7월4일 한국에 온뒤 42년동안 주둔했던 미802공병대대가 13일 평택시 캠프 험프리즈에서 부대 해체식을 가졌다. 주한미군1단계 감축계획의 하나로 이날 해체돼 귀국하는 공병대대장 도널드 파울로스키중령(42)은 『그동안 한국인들이 보여준 따뜻한 우정과 근면성·협동심에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하고 『미국의 우방인 한국인들에게 다시는 전쟁의 비극이 없기를 기원합니다』라고 귀국소감을 밝혔다. 6백여명의 대대규모 미군이 철수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802공병대대는 2차대전이 한창인 지난41년 6월 미본토에서 창설돼 알래스카와 일본등지에서 활동했다. 45년 4월 오키나와 전투에 참가한뒤 6·25전쟁이 일어나자 10일만에 부산에 도착,유엔군의 일원으로 한국전쟁에 투입됐다. 3년 1개월의 6·25전쟁기간동안 각종 전투의 선봉에 섰던 이 부대는 휴전이 된 이후에는 전후 군사시설복구에 전력해왔다. 포항·수원·오산·군산·대구·원주·김포등의 군용비행장 활주로와 격납고 통신시설 대부분이 이 부대가 건설한 것이다. 『우리부대는 창설된 이후 지금까지 대부분을 한국에 주둔하면서 비행장을 건설하고 이를 보수 관리해왔습니다.부대원 모두가 애국심과 사명감을 갖고 각종 어려운 공사에 헌신해주어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부대원들은 모두가 공항·도로·교량건설의 전문 엔지니어들이며 부대장비 또한 최신·최고가품들이어서 우리 공병부대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파울로스키중령은 이날 해체식에서 「우리가 노력해야 비행기가 날수 있다」는 부대훈이 쓰여진 부대기를 미2사단 공병여단장 피터 소아대령에게 반납하면서 『우리는 임무를 마쳤습니다』라고 부대해체신고를 했다. 802공병대대 부대기는 미주리주 미공병학교 박물관에 영구보존 된다. 파울로스키중령은 샌프란시스코의 미군간부학교에 입교,교육을 받은뒤 새로운 보직을 받을 예정. 그는 6·25가 일어나기 전인 50년 6월16일 미사우스 다코타주에서 태어나 주립광산기술대학을 졸업한뒤 72년 ROTC로 임관,올해로 임관 20주년이 된다. 그는 미본토와 독일·일본·괌 등 해외 근무를 하다 90년 6월 대대장으로 한국에 부임해 왔다. 『한국에 근무하는 동안 카튜사및 한국인 노무단원들과 지극히 우호적인 분위기속에서 일해올 수 있어 다행스럽게 생각됩니다.남북관계가 잘 진전되고 있다는 것도 한국인 동료들로부터 잘 듣고 있습니다.우리부대의 철수가 한반도 평화정착에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부대에서 일하던 1백38명의 한국인 근로자들은 본인이 퇴직을 희망하는 3명을 제외하고 전원이 다른 미군부대로 전출되어 감원이 된 사람은 없다. 이날 부대해체식에는 대대장을 비롯한 장교 10여명과 하사관·병사 등 70여명이 도열,부대기 하강식을 지켜보며 섭섭해 했다. 캠프 험프리즈기지내 헬리콥터 격납고에서 거행된 해체식에서 부대기는 애국가와 미국국가가 교대로 연주되는 가운데 평화의 상징인 녹색천으로 감싸졌다. 지난 90년부터 시작된 1단계 주한미군감축에는 지금까지 5천여명이 철수했고 올해말까지 2천여명이 추가 철수할 계획이다.
  • 외언내언

    딘 러스크 전미국무장관은 록펠러재단 이사시절 한때 상원의원 출마를 종용받은 일이 있었다.그는 자신의 개인생활·인격·과거사 등을 몽땅 벗기게 되는 그런 일은 당하고 싶지 않다며 거절했다.점잖은 러스크는 그런 가시밭 길을 걷고 싶지 않았다.이처럼 국민의 지도자를 자처하며 국가경영에 참여하려면 과거의 경력,현재의 삶,미래를 투시하는 식견과 역사감각 등이 요구되고 또 유권자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지난 미대통령 민주당 선두주자였던 게리 하트는 여자스캔들로 도중하차 했고 이번에 나선 빌 클린턴후보 역시 지난 한때의 여인때문에 곤경에 처해있는 터에 병역기피 여부로 새로운 장애가 또 하나 생겼다.현 댄 퀘일부통령도 베트남전때 현역 아닌 보충역으로 근무한 것이 합법적이긴 하나 정당했던 것이냐는 자격 시비가 적지 않았다.◆보통시민으로 살때는 용인되나 국회의원이나 대통령후보등 국가경영에 참여하는 공인이 되려면 그 기준은 법률위반을 넘어 높은 도덕성이 요구된다.총선,대선을 앞두고 유권자들은 요즘 나서고있는 후보들의 말 재주에 현혹되지 말고 6·25전쟁 때는 어디서 무엇을 했고,군복무는 제대로 했는지,탈세나 기타 전과사실은 없는지,사회생활은 어떻고 그가 높은 선거직에 오를 만한 자질은 있으며 주변 사람들로부터 평소 존경을 받아온 인물인지 등을 곰곰 따져봐야 한다.◆선거로 우리는 술친구를 뽑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지도자를 선택하는 것이다.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는 말 잘하고 영악한 처세술을 가진 잔재주꾼이나 돈많이 가진 사람은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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