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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섶에서] 지슬과 청야/박찬구 논설위원

    우리 현대사의 또 다른 불편한 사건을 다룬 영화 ‘청야’가 입소문을 타고 있다. 6·25전쟁 발발 이듬해인 1951년 경남 거창군 신원면 일대 주민 719명이 국군에게 몰살당한 거창양민학살사건을 소재로 삼았다. 당시 군의 비공식 작전명이었던 청야는 벽을 튼튼히 하고 들의 곡식을 거둬들여 적의 식량보급을 끊는다는 ‘견벽청야’를 뜻한다.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어이없는 죄명으로 젖먹이와 어린이 385명을 포함해 마을 사람들은 말 그대로 초토화를 당했다. 관람 내내 제주 4·3항쟁을 그린 ‘지슬’이 오버랩됐다. 지슬과 청야, 두 편의 독립영화는 이념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영혼을 씻김굿으로 달래며, 그 광기의 역사를 우리 공동체가 되풀이해선 안 된다는 화두를 건넨다. 역사물에서는 감독의 영화적 상상력과 팩트 사이에 간극이 생길 수 있다. 이를 감안하더라도 두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묵직하고 쓰리다. 엔딩 크레딧과 함께 청야는 툭 던진다. ‘몰랐다면 알아야 하고, 알았다면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박찬구 논설위원 ckpark@seoul.co.kr
  • “유해 없는 유공자의 배우자 현충원 안장 못해” 형평성 논란

    국가유공자가 사망했을 때 정부가 유해를 수습하지 않으면 배우자를 국립묘지에 안장할 수 없어 형평성 논란이 제기됐다. 12일 국가보훈처와 국방부에 따르면 현행 ‘국립묘지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은 유공자인 남편의 유해가 있는 배우자만 국립묘지의 남편 묘소나 납골당에 합장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하지만 유해가 없으면 묘소와 납골당에 합장할 수 없고 남편과 배우자 이름을 함께 새긴 위패로만 봉안하도록 돼 있다. 이에 따라 서울현충원에 위패가 봉안된 배우자는 696명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이에 대해 “6·25전쟁 당시 전사한 유공자의 유해를 수습하지 못한 것은 국가의 책임인데도 그 배우자의 사망 시 유가족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면서 “남편의 유해가 있으면 안장할 수 있고 유해가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규정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곳곳에서 제기됐다”고 밝혔다. 송영근 새누리당 의원실 관계자도 “미국은 군의 기록을 근거로 남편 유해가 없는 배우자에 대해서도 안장을 허용하고 있다”면서 “유해를 수습하지 못한 유공자의 배우자도 국립묘지에 안장할 수 있도록 관련 법안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유공자인 남편보다 먼저 사망한 배우자의 경우 공·사설 묘지에 안장한 다음 남편이 사망한 다음에야 국립묘지로 이장하게 하는 등 유가족에게 경제적 부담을 떠안기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충원 관계자도 “6·25전쟁 때 남편이 전사한 배우자 대부분이 평생을 수절하면서 어렵게 생계를 꾸려 온 분들”이라면서 “그분들에게 정신적, 경제적으로 이중 부담을 안기는 것은 국가의 책무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동물박사가 들려주는 동물이야기] 일제에 독살당한 맹수들… 그날밤, 동물도 사람도 울부짖었다

    [동물박사가 들려주는 동물이야기] 일제에 독살당한 맹수들… 그날밤, 동물도 사람도 울부짖었다

    1945년 7월 25일 이왕직(李王職·일제강점기 조선 황실과 관련한 사무 일체를 담당하던 기구) 회계과장이었던 일본인 사토는 느닷없이 직원들을 죄다 불러 모아 “사람을 해칠 만한 맹수류를 모두 죽여야 한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미군이 창경원을 폭격할 경우, 동물들이 우리를 뛰쳐나와 사람을 해치지 않도록 미리 대비하라는 지령을 일본 본토에서 받았다는 것이다. 극비리에 정체불명의 극약이 배부돼 먹이에 타 동물들에게 먹였다. 여느 때처럼 맛있게 저녁을 먹은 코끼리, 사자, 호랑이, 곰, 뱀, 악어, 독수리 등 21종 38마리가 조용히 영원한 침묵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녀석들이 죽던 날 밤 창경원 일대는 최후를 고하는 맹수들의 울부짖음이 처량한 곡소리같이 울려퍼졌고, 전 직원도 함께 울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온다. 그러나 결국 창경원에는 폭격이 없었기 때문에 무고하게 희생된 동물들에 대한 안타까움은 지금까지 갈수록 커지기만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이런 비극은 비단 한국에만 일어난 게 아니다. 타이완과 만주에 있는 동물원들도 예외일 순 없었다. 일제 또한 미국으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1940년대부터 여러 동물원의 동물들도 수난을 겪게 되는 잔혹사가 있었다. 미국과 힘겹게 전쟁을 치른 일본은 패전 쪽으로 기울자 본토에 있는 우에노 동물원, 고베 동물원, 오사카 동물원 등 여러 동물원 동물에 대한 조치계획인 ‘동물원 비상조치요강’을 발동했다. 여기에는 동물원이 공습을 받을 경우에 대한 조치 방법을 적어 놓았다. 먼저 위험 정도에 따라 동물종을 4등급으로 분류했다. 곰, 대형 고양잇과 동물과 코끼리·하마·들소 같은 대형 초식동물, 늑대, 하이에나, 개코원숭이, 독사, 왕뱀류는 가장 위험한 1종이다. 이런 동물들은 청산가리, 스트리키닌 등의 극약으로 살처분하거나 총살하도록 돼 있었다. 6·25전쟁 때도 참혹하긴 마찬가지였다. 애끊는 노력으로 전쟁 초기인 1950년 동물들은 다행히 목숨을 지켰지만 이듬해 중공군 개입으로 1·4후퇴를 할 땐 사육사들도 빠짐없이 짐을 싸야만 했다. 그해 3월 서울 재수복 뒤 창경원 동물원 풍경에 대해 옛 창경원 사육사는 이렇게 떠올렸다. “동물사는 모두 열려 있었지만 살아 움직이는 동물은 새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낙타, 사슴, 얼룩말은 머리통만 남아 있었다. 여우나 너구리, 오소리, 삵 등은 굴과 돌 틈에 끼여 죽어 있었다. 모두 그렇게 굶어 죽고, 얼어 죽었다.” 창경원은 일제에 의해 ‘한국 깎아내리기’ 차원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는 이곳에 동물원과 식물원, 놀이시설을 들여놓아 놀이터로 만들고 말았다. 조선시대 궁궐인 창경궁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제대로 된 동물원을 국민들에게 안긴 계기는 1977년 확정된 ‘서울대공원 건설계획’이다. 당시의 우리나라 경제상황에 비춰 대공원 건설은 엄청난 규모의 사업 구상이었다. 만약 그때 서울대공원을 건설하지 않았다면, 수도권 어느 곳이라도 지금처럼 좋은 위치에 대형 복합공원을 건설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서울대공원 건설계획에 따라 창경원에서 1980년부터 소속을 서울시로 옮긴 한국 동물원 역사의 증인이 바로 지난해 말 별세한 오창영(1928~2013) 초대 서울동물원장이다. 창경원 때부터 직위는 원래 관리직이 아니라 수의관이다. 1차적으로는 동물 진료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었지만 고인만큼 야생동물에 대한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겸비한 사람은 국내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새롭게 조성될 동물원 디자인에 대한 구상과 더불어 각 동물사의 세부설계에도 크게 기여했다. 초기 서울동물원은 400여종에 이르는 동물을 대대적으로 수입했다. 창경원 당시엔 해외종, 국내종을 통틀어 모두 130여종에 불과했다. 오 원장은 기린, 사자, 하마 등 익숙한 동물 말고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는 동물들에게 한글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국어학자, 생물학자, 식물학자, 대학교수, 동물원전문가로 자문위원회를 구성하는 열성을 보였다. 대표적인 사례로 남미에 서식하는 ‘자이언트 앤트 이터’(Giant Ant Eater·길이 50㎝를 웃도는 혀를 가진 희귀종)에겐 ‘큰개미핥개’라는 이름을 붙였다. ‘링 테일드 리머’(Ring Tailed Lemur·긴 꼬리에 선명한 테 모양의 검은 털과 여우처럼 생긴 얼굴 모양을 한,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 서식하는 원숭이)엔 ‘꼬리여우원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당시로선 아주 낯설었을 법하다. 오 전 원장에 뒤이어 곧바로 동물원을 이끈 인물이 ‘동물의 왕국’이라는 텔레비전 프로 해설을 오래 진행한 고 김정만(1934~2010)씨다. 그 또한 창경원에 수의사로 발을 들여놓았다. 본격적인 영상매체 시대에 각종 프로에 출연, 대중과 친해져 동물박사로 이름을 알리면서 동물원의 위상을 드높였다. 오 전 원장과 함께 한국동물원계의 큰별로 불린다. 동물원 수준은 그 나라의 동물복지를 가늠하는 잣대다. 이런 맥락에서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2002년 캐나다 토론토 동물원에서 6개월간 연수를 받았다. 어느 날 동물원장 윌리엄 래플리 박사와 대화하다가 오 전 원장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래플리 원장이 수의사로 일하던 젊은 시절 한국에서 손님이 왔다고 해서 며칠씩이나 동물원을 안내했단다. 두꺼운 스케치북에다 직접 손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동물사 구석구석의 시설들을 낱낱이 조사했는데 세부적인 질문이 얼마나 많았던지 애를 먹었다고 한다. 올해로 서울대공원은 개원 30주년을 맞는다. 여러 시설의 노후화 문제를 안고 있지만 노력한 점도 적잖다. 유인원관·열대조류관을 성공적으로 리모델링했으며, 올해 개관을 목표로 기존 맹수사 전시 지역을 ‘백두산 호랑이 숲’과 새로운 전시개념을 도입한 ‘소동물 트위닝(twinning) 전시관’으로 바꾸는 공사도 한창이다. 앞으로 외형적인 변화뿐 아니라 가장 안전한 동물원으로 거듭나기 위해 여러 분야의 외부 전문가 자문을 통해 관리시스템을 총체적으로 바꾸는 혁신을 계획하고 있다. 선진국 동물원들처럼 종 보전 센터로서의 역할에도 더욱 충실할 것이다. 좋은 동물원을 만들려면 시민들도 함께 관심을 보여야 한다. 잘못된 게 있으면 실망과 비난에 그치지 말고 적극적으로 요구해야 할 때다. 시민들의 요구를 달게 받겠다는 각오를 새삼 다진다. vetinseoul@seoul.go.kr
  • 그리운 임이여 다시 만나자 영도다리서

    그리운 임이여 다시 만나자 영도다리서

    그래 봐야 다리의 상판 한쪽을 들어 올리는 것뿐이라 생각했다. 그 장면 본다 한들 새삼 무슨 추억이 돋아날까도 싶었다. 한데 실제 보니 달랐다. 한국인 유전자 속에 그려진 과거에 대한 기억 때문일까. ‘1·4후퇴’에 이은 ‘피란살이’의 신산한 경험은 없었어도, 어르신들의 먹먹한 표정에서 애수의 기억 한 자락 읽어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부산 ‘영도다리’ 얘기다. 지난해 47년 만에 도개(다리를 들어올리는 것) 기능을 복원해 화제가 됐던 다리다. 다리 너머는 천리마가 뛰놀았다는 섬, 영도다. 개항(1876) 이전엔 섬 안에 말 목장도 있었다니, 말의 해에 가볼 여행지로 꼽을 만하다. 오전 11시. 영도다리와 부산대교 위에 수십명의 사람들이 서 있다. 공식 명칭은 ‘영도대교’지만 부산 사람들은 대부분 영도다리라고 부른다. 다리 아래 점집 거리는 100여명의 구경꾼들로 빼곡하다. 사람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영도다리 상판에 쏠렸다. 낮 12시. 도개를 알리는 뱃고동 소리에 이어 옛 노랫가락이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현인(1919~2002)이 부른 ‘굳세어라 금순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서 연인 ‘금순이’를 애타게 찾는 ‘국제시장 장사치’의 절절한 심정을 그린 노래다. 때맞춰 중구 쪽 영도다리 상판이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외국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이다. 영도 쪽에서 오던 시내버스와 승용차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운전자와 승객들은 차에서 내려 도개 장면을 구경하거나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현재와 다른 시간대 같았던 15분이 흘렀다. 영도다리를 세운 건 일제다. 영도에 조선소를 지으려던 일제는 물류의 원활한 조달을 위해 교량이 필요했다. 한데 해운업자들의 반대가 심했다. 다리가 서면 큰 배가 부산항에 들어갈 수 없어 우회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 절충안으로 나온 게 도개교(跳開橋)였다. 한국 최초의 도개교 역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영도다리는 1934년 11월 23일 개통됐다. 당시 부산 인구의 3분의1에 달하는 6만여명의 인파가 몰려 다리 상판이 올라가는 장면을 지켜봤다고 한다. 공식 명칭은 ‘부산대교’. 1980년 바로 옆에 새 부산대교가 생기면서 ‘영도대교’로 바뀌었지만 사람들은 줄곧 ‘영도다리’라고 불렀다. 6·25전쟁 중엔 한 맺힌 공간이었다. 1951년 1·4후퇴 때 이북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져 남으로 향했다. 부산까지 쫓겨온 이들이 알 만한 ‘랜드마크’라야 영도다리밖에 없었을 터. 피란길에 오르며 “영도다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기약은 했지만 전쟁의 혼란 속에 그리 되기가 어디 쉬운가. 가족과의 재회에 실패하고 팍팍한 피란살이를 견디지 못한 이들은 종종 영도다리 아래로 몸을 던졌다. 피란민의 애절한 사연들은 그렇게 다리 난간에 맺혔다. 다리 밑 판자촌엔 가족의 안위를 궁금해하는 피란민들을 상대로 점집도 생겨났다. 한창때는 점집이 무려 80여개에 달했다고 한다. 도개는 1966년 멈췄다. 교량 노후화, 교통량 증가 등이 이유였다. 영도로 들어가는 상수도관이 부착되면서 다리는 도개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동시에 철거 계획도 추진됐다. 그러다 예전과 같은 모양의 도개교를 새로 짓자고 의견이 모아졌고, 지난해 11월 27일 새 다리가 개통됐다. 왕복 4차선이던 폭이 6차선으로 넓어졌고, 도개 각도가 최대 80도에서 75도로 다소 줄어들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예전과 거의 똑같다. 철거된 옛 다리의 부속시설들은 기념관이 세워지면 전시될 예정이다. 도개는 하루 한 차례 낮 12시부터 약 15분간 진행된다. 영도와 자갈치시장을 오갔던 도선도 올해 부활될 예정이다. 다리를 건너면 영도다. 섬의 옛 이름은 절영도였다고 한다. 끊어질 절(絶), 그림자 영(影)을 썼는데, 나중에 ‘절’자가 떨어져 나갔다는 것. 진선혜 문화관광해설사가 전하는 사연은 이렇다. 신라 때부터 조선 중기까지 영도에 나라에서 직접 관장하는 말 방목장이 있었다. 방목되던 말 가운데 하루에 천리를 간다는 천리마도 있었다. 말이 어찌나 빨랐던지 그림자가 따르지 못하고 곧잘 끊어졌단다. 그래서 절영도다. 영도 안에 절영해안산책로가 조성됐다. 영도의 해안 절경을 꿰고 가는 길로 남항대교 인근에서 중리해변까지 3㎞쯤 된다. 해안절벽 위는 흰여울문화마을이다. 6·25전쟁 중에 피란민들이 주로 살던 동네다. 마을 전체를 재개발하려다 계획을 바꿔 일부만 개발하고 옛 정취를 그대로 살리기로 최근 결정됐다. 알록달록 벽화가 그려진 집들이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 산책로가 끝나는 중리마을에는 해녀들이 많다. 영도의 진산은 봉래산(395m)이다. 세 개의 봉우리로 이뤄졌다. 봉래산이 뭔가. 선인이 산다는 전설의 산이다. 영주산, 방장산과 더불어 삼신산이라 불린다. 봉래산 자락에 깃든 마을 이름도 범상치 않다. 봉래동, 영선동, 신선동, 청학동이 등을 맞대고 섰다. 이름만으로 선계에 든 듯하다. 정상에 서면 부산 서쪽 송도해변부터 동쪽 해운대 일대까지 죄다 눈에 들어온다. “봉래산 올라야 부산 제대로 본다”던 진선혜 해설사의 설명 그대로다. 봉래산 아래, 그러니까 영도 남쪽은 태종대다. 촌스러운 표현으로 여기 안 보면 ‘앙꼬 빠진 찐빵’ 먹은 것과 다를 게 없다. 기암들이 모여 이룬 풍경이 빼어난 곳. 그러니 영도의 랜드마크다. 1억년을 넘나드는 동안 형성된 호수 퇴적층 위로 장산에서 분출된 화산재가 쌓이면서 오늘의 모습을 갖췄다. 지난해 11월엔 내륙형(도시형) 국가지질공원 인증도 받았다. 부산 지역의 지질학적인 변화상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란 뜻에서다. 이미 국가 지정문화재 명승 제17호로 지정됐으니 2관왕을 거머쥔 셈이다. 신라 태종 무열왕이 이곳을 즐겨 찾았다고 한다. 태종대란 이름도 그가 과녁 세워 활 쐈다던 고사에서 비롯됐다. 영도등대 일대가 백미다. 과장 좀 보태 기암절벽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가늠조차 어려운 시간과 파도가 조탁한 풍경이 펼쳐져 있다. 왜구에 끌려간 남편을 기다리다 돌이 된 여인의 전설이 담긴 망부석, ‘좀 놀아본’ 신선과 선녀가 질펀하게 어울렸다던 신선바위 등이 볼 만하다. 태종대 절벽을 딛고 선 등대는 1906년 세워졌다. 100년 넘게 부산 앞바다의 밤길을 밝혔다. 예서 맞는 해돋이가 멋들어지다. 등대가 불을 밝히기 시작하는 초저녁 풍경도 고즈넉하다. 글 사진 부산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51) →가는 길 영도다리 건너 영도경찰서 뒤쪽 항만으로 빠지면 남항동 일대다. 남항방파제를 따라가면 절영해안산책로 시작점이다. 종착지인 중리해변까지는 3㎞. 쉬엄쉬엄 걸어도 2시간 안쪽에 돌아볼 수 있다. 산책로 들머리 위쪽이 흰여울문화마을이다. 태종대는 영도의 가장 남쪽에 있다. 차로 봉래산 정상 아래까지 가려면, 청학동 해련사를 찾아간다. →맛집 남항동 일대에 먹자골목이 형성돼 있다. 탐라자리물회(413-7900)는 제주산 자리돔 물회로 이름난 집. 8000원. 봉래동 부산삼진어묵(416-5466)은 이른바 ‘부산오뎅’의 시초라 전한다. 태종대 짬뽕(405-2992)은 시원한 국물의 짬뽕으로 입소문 났다. 태종대 초입에 있다.
  • 한국사는 이해가 중요…역사흐름 알면 답 찾는 데 도움

    한국사는 이해가 중요…역사흐름 알면 답 찾는 데 도움

    대입 수험생과 마찬가지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에게 한국사는 꼭 넘어야 할 벽이다. 암기해야 할 내용이 많아 어렵게 느껴지지만, 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2% 부족’의 고배를 마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 자주 출제됐던 부분을 정리하고, 지난해 7급 필기시험 한국사 과목에서 100점 만점을 맞은 합격자의 조언을 듣는다. 우선 5급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은 응시 전까지 한국사능력검정시험 2급 이상(고급) 성적을 미리 받아 놓아야 한다. 검정시험 성적표가 있어야 5급 시험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검정시험은 연중 네 차례 시행된다. 올해 첫 시험(제22회)은 오는 25일 전국 52개 지역에서 치러진다. 결과는 다음 달 11일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누리집(historyexam.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권용기 에듀윌 강사는 “한국사 기출 문제를 분석했을 때 이번 시험에서도 수험생들에게 물어볼 주제는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면서 “고급 문제의 경우 50문제 중 전·근대 시기 관련 문제는 30개, 근대 이후의 문제는 20개 정도의 비율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책·고시·취업>최신 뉴스 보러가기 권 강사는 선사시대 내용에서는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 시대 구분하기, 단군신화 및 8조법금 분석, 고조선 발달사 등이 주로 다뤄진다고 설명했다. 삼국시대는 6가야 연맹과 금관가야, 대가야 비교, 고구려·백제·신라 발전사, 임나일본부설 비판, 신라의 왕호 변천사, 수도·중심지 이동, 통일신라와 발해의 중앙행정 조직 등이 자주 등장한다. 고려시대의 경우 호족 정책, 지배세력의 변천사, 무신집권기 정치·경제·사회상, 공민왕의 개혁 정치, 대외 관계, 서경 천도 운동 등이 출제될 가능성이 높다. 삼국시대만큼이나 숙지해야 할 내용이 많은 조선시대에는 세종과 성종의 편찬사업, 고려와 조선의 지방행정 조직 비교, 성균관·서원·향교·서당 등의 구분, 붕당정치, 인조반정 이후 친명배금 정책과 광해군의 중립정치 비교, 영조와 정조의 개혁 정책, 세도정치 등이 수차례 활용됐다. 근대기에서는 흥선대원군의 개혁,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비교, 강화도 조약,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과정,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등의 출제 빈도가 높다. 일제강점기는 시기별 일제 통치·경제 정책, 3·1운동과 6·10만세운동, 항일운동 간 비교, 임시정부 활동, 중일전쟁 이후 광복군·의용군 활동 등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현대사에서는 모스크바 3상 회의, 정부 수립 과정, 6·25전쟁, 4·19혁명 및 5·16 군사정변, 유신 체제와 신군부 등장, 광주민주화운동과 더불어 6·10항쟁, 7·4 남북공동성명과 관련된 지식을 학습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아영(28·여·일반행정직)씨는 지난해 시험 한국사 과목에서 만점을 받았다. 하지만 그 전 시험에서는 15점을 받고 크게 낙심한 바 있다. 박씨는 “2010년 생애 첫 공무원 시험에서 한국사 점수가 15점이었다”면서 “비록 시험 준비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치른 것이라고 하지만 성적이 너무 나빠서 내가 우리나라 국민이 맞나 하는 생각도 했다”면서 웃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영어 다음으로 힘들었던 과목이었을 만큼 한국사가 번번이 발목을 잡았다”고 말하는 그가 만점을 받은 비결은 ‘많이 푸는 것보다 제대로 이해하는 것’에 있었다. 박씨는 처음 한국사를 공부할 때 주변에서 추천하는 학습법을 그대로 따랐다. 요약 노트를 만들 시간에 기본서를 한 번이라도 더 읽고 기출 문제를 많이 풀어 보라는 게 주위의 조언이었다. 2년 동안 같은 방법으로 공부했지만 점수는 늘 70~80점에 머물렀다. 변화가 필요했다. 그는 기본서를 바꾸는 일부터 시작했다. 박씨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으로 주제가 나뉜 가운데 역사적 사실이 시대별로 기술된 기본서를 골랐다”면서 “시간 순으로 적힌 책이 한국사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시험을 앞두고 15차례 이상 반복해 기본서를 정독했다. 또 법원직·경찰직·소방직 공무원 시험 등에 출제된 한국사 기출 문제도 풀어 보면서 나름의 정리 작업을 병행했다. “문제를 풀면서 확실히 이해한 지문과 그렇지 않은 지문, 헷갈리기 쉬운 지문과 주의해야 할 지문을 따로 표시한 뒤 엑셀 파일로 정리했다”는 박씨는 “문제를 많이 푸는 일도 좋지만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푸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수험생활 3년차에 비로소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암기가 필요한 내용을 골라 공책에 담았다. 또 암기 내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른바 ‘연표식 정리’를 활용했다. 그는 “역사적 사건들을 먼저 세기별로 크게 분류한 뒤 몇몇 주요 사건이 발생한 연도를 외우면서 공부했다”면서 “역사 흐름을 알면 어떤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 정확히 몰라도 문제를 풀 수 있지만 제한된 시간 안에 답을 빨리 찾으려면 주요 사건의 발생 연도는 암기하는 게 편하다”고 했다. 박씨는 네 차례 도전 끝에 공직에 진출했다. 그는 한국사 점수를 높이려 노력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제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방법을 찾아내는 공무원이 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20대女 시험 계속 떨어지자 택한 방법이…

    대입 수험생과 마찬가지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에게 한국사는 꼭 넘어야 할 벽이다. 암기해야 할 내용이 많아 어렵게 느껴지지만, 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2% 부족’의 고배를 마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 자주 출제됐던 부분을 정리하고, 지난해 7급 필기시험 한국사 과목에서 100점 만점을 맞은 합격자의 조언을 듣는다. 우선 5급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은 응시 전까지 한국사능력검정시험 2급 이상(고급) 성적을 미리 받아 놓아야 한다. 검정시험 성적표가 있어야 5급 시험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검정시험은 연중 네 차례 시행된다. 올해 첫 시험(제22회)은 오는 25일 전국 52개 지역에서 치러진다. 결과는 다음 달 11일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누리집(historyexam.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권용기 에듀윌 강사는 “한국사 기출 문제를 분석했을 때 이번 시험에서도 수험생들에게 물어볼 주제는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면서 “고급 문제의 경우 50문제 중 전·근대 시기 관련 문제는 30개, 근대 이후의 문제는 20개 정도의 비율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권 강사는 선사시대 내용에서는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 시대 구분하기, 단군신화 및 8조법금 분석, 고조선 발달사 등이 주로 다뤄진다고 설명했다. 삼국시대는 6가야 연맹과 금관가야, 대가야 비교, 고구려·백제·신라 발전사, 임나일본부설 비판, 신라의 왕호 변천사, 수도·중심지 이동, 통일신라와 발해의 중앙행정 조직 등이 자주 등장한다. 고려시대의 경우 호족 정책, 지배세력의 변천사, 무신집권기 정치·경제·사회상, 공민왕의 개혁 정치, 대외 관계, 서경 천도 운동 등이 출제될 가능성이 높다. 삼국시대만큼이나 숙지해야 할 내용이 많은 조선시대에는 세종과 성종의 편찬사업, 고려와 조선의 지방행정 조직 비교, 성균관·서원·향교·서당 등의 구분, 붕당정치, 인조반정 이후 친명배금 정책과 광해군의 중립정치 비교, 영조와 정조의 개혁 정책, 세도정치 등이 수차례 활용됐다. 근대기에서는 흥선대원군의 개혁,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비교, 강화도 조약,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과정,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등의 출제 빈도가 높다. 일제강점기는 시기별 일제 통치·경제 정책, 3·1운동과 6·10만세운동, 항일운동 간 비교, 임시정부 활동, 중일전쟁 이후 광복군·의용군 활동 등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현대사에서는 모스크바 3상 회의, 정부 수립 과정, 6·25전쟁, 4·19혁명 및 5·16 군사정변, 유신 체제와 신군부 등장, 광주민주화운동과 더불어 6·10항쟁, 7·4 남북공동성명과 관련된 지식을 학습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아영(28·여·일반행정직)씨는 지난해 시험 한국사 과목에서 만점을 받았다. 하지만 그 전 시험에서는 15점을 받고 크게 낙심한 바 있다. 박씨는 “2010년 생애 첫 공무원 시험에서 한국사 점수가 15점이었다”면서 “비록 시험 준비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치른 것이라고 하지만 성적이 너무 나빠서 내가 우리나라 국민이 맞나 하는 생각도 했다”면서 웃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영어 다음으로 힘들었던 과목이었을 만큼 한국사가 번번이 발목을 잡았다”고 말하는 그가 만점을 받은 비결은 ‘많는 푸는 것보다 제대로 이해하는 것’에 있었다. 박씨는 처음 한국사를 공부할 때 주변에서 추천하는 학습법을 그대로 따랐다. 요약 노트를 만들 시간에 기본서를 한 번이라도 더 읽고 기출 문제를 많이 풀어 보라는 게 주위의 조언이었다. 2년 동안 같은 방법으로 공부했지만 점수는 늘 70~80점에 머물렀다. 변화가 필요했다. 그는 기본서를 바꾸는 일부터 시작했다. 박씨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으로 주제가 나뉜 가운데 역사적 사실이 시대별로 기술된 기본서를 골랐다”면서 “시간 순으로 적힌 책이 한국사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시험을 앞두고 15차례 이상 반복해 기본서를 정독했다. 또 법원직·경찰직·소방직 공무원 시험 등에 출제된 한국사 기출 문제도 풀어 보면서 나름의 정리 작업을 병행했다. “문제를 풀면서 확실히 이해한 지문과 그렇지 않은 지문, 헷갈리기 쉬운 지문과 주의해야 할 지문을 따로 표시한 뒤 엑셀 파일로 정리했다”는 박씨는 “문제를 많이 푸는 일도 좋지만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푸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수험생활 3년차에 비로소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암기가 필요한 내용을 골라 공책에 담았다. 또 암기 내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른바 ‘연표식 정리’를 활용했다. 그는 “역사적 사건들을 먼저 세기별로 크게 분류한 뒤 몇몇 주요 사건이 발생한 연도를 외우면서 공부했다”면서 “역사 흐름을 알면 어떤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 정확히 몰라도 문제를 풀 수 있지만 제한된 시간 안에 답을 빨리 찾으려면 주요 사건의 발생 연도는 암기하는 게 편하다”고 했다. 박씨는 네 차례 도전 끝에 공직에 진출했다. 그는 한국사 점수를 높이려 노력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제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방법을 찾아내는 공무원이 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6·25 전사 경찰관 63년만에 가족 품으로

    6·25 전사 경찰관 63년만에 가족 품으로

    “돌아가신 할머니가 아버지를 위해 매일 밤 장독에 밥을 떠놓고 살아 있기를 기원하셨죠. 아버지가 입으셨던 경찰 정복 한 벌을 애타게 간직하시며 우셨던 기억이 납니다.” 27일 6·25전쟁 당시 24세의 나이로 전사한 아버지 김세한 순경의 신원확인 통지서와 경찰 단추, 경찰 버클, 발굴 당시 유해를 덮었던 태극기를 전달받은 외동딸 김준자(64·부산 사하구)씨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김씨는 “꿈인지 생시인지 믿기지 않는다”면서 “아버지는 키가 훤칠한 미남형으로 총명하고 책임감이 강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간신히 말을 이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강원 춘천시 동산면 군자리에서 유해 한 구와 더불어 경찰 단추·버클, 플라스틱 숟가락, 군장고리 등을 발굴한 것은 지난해 5월 21일. 이곳은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8일 국군 6사단이 북한군 12사단의 남하를 저지한 원창고개 전투가 벌어진 지역이다. 신원 확인에 참고할 단서가 없었지만, 감식단은 2003년부터 6·25 전사자 유가족으로부터 채취해 축적해 둔 유전자(DNA) 시료 자료와 비교작업을 벌인 끝에 2009년 5월 22일 김씨의 유전정보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경기 포천에서 5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김 순경은 1949년 10월 1일 내무부 치안국 보안과 소속 철도경찰대로 임용된 뒤 수원에서 근무하던 중 6·25전쟁을 맞았다. 발발 3일 만인 1950년 6월 28일 춘천 인근 원창고개 전투에 투입돼 북한군을 저지하던 중 전사했다. 유해는 유가족과 협의를 거쳐 내년에 경찰청 주관으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계획이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유치곤·이천길·현봉학… 영웅을 기억하라

    유치곤·이천길·현봉학… 영웅을 기억하라

    국가보훈처는 26일 내년도 ‘이달의 6·25 전쟁영웅’ 17명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내년 1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된 유치곤(왼쪽) 공군 준장은 1952년 평양 승호리 철교 폭파 작전의 주역으로 영화 ‘빨간 마후라’(1964년·신상옥 감독)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북한군 후방 보급로의 핵심 요충지인 승호리 철교를 미 공군은 36회나 폭파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만 거듭했다. 임무를 넘겨받은 우리 공군 F51 전폭기는 세 번째 출격 만에 철교를 두 동강 내는 데 성공했다. 1951년 5월 양평 용문산 전투의 주역인 이천길 육군 상사와 노승호 육군 하사가 2월의 전쟁영웅으로 뽑혔다. 6·25전쟁 당시 주한 미8군사령관을 지낸 밴 플리트 장군과 어머니에게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시고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함께 싸우는 전우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편지를 남기고 참전한 아들 밴 플리트 2세 공군 대위는 3월의 영웅으로 뽑혔다. 흥남 철수 작전 당시 에드워드 알몬드(소장) 미 10군단장을 끝까지 설득해 수송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통해 9만 8000여명을 구출하게 한 현봉학(오른쪽) 박사는 12월의 전쟁영웅으로 선정됐다. 보훈처는 내년 7월 27일 ‘유엔군 참전의 날’에 ‘이달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된 유가족을 초청해 위로할 계획이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北김정은 “전쟁은 언제 한다고 미리 광고하지 않아” 군부대 시찰

    北김정은 “전쟁은 언제 한다고 미리 광고하지 않아” 군부대 시찰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김정일 최고사령관 추대 기념일(24일)을 맞아 제526대연합부대 지휘부를 시찰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5일 보도했다. 김정은이 방문한 526대연합부대는 평안남도 남포시에 사령부를 둔 3군단인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통신은 이 대연합부대가 6·25전쟁 시기 57명의 ‘공화국영웅’과 많은 수훈자를 배출했으며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수십 차례 시찰한 ‘자랑 많은 부대’라고 소개했다. 김정은은 부대 지휘관들을 만난 자리에서 “우리나라를 세계적인 군사초대국의 지위에 올려세운 장군님(김정일)의 업적은 후손만대에 빛날 것”이라며 김정일 최고사령관 추대 기념일을 뜻깊게 기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정은은 부대의 혁명사적교양실과 연혁실, 작전지휘실, 군사연구실, 권총사격관을 돌아보며 만족을 표시하고 “전쟁은 언제 한다고 광고를 내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고 싸움준비 완성에 최대의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지시했다고 통신이 전했다. 이어 군인회관, 버섯재배온실 등 부대의 여러 곳을 둘러보고 나서 부대 군인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김정은의 3군단 시찰에는 최룡해 군 총정치국장, 리영길 군 총참모장, 장정남 인민무력부장, 서홍찬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 김수길 총정치국 조직부국장, 박정천 포병사령관, 박태성 노동당 부부장, 김동화 군 중장 등이 동행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한·중, 중국군 유해 425구 송환 합의

    경기도 파주시 ‘적군묘지’에 안장된 6·25전쟁 참전 중국군 유해 425구가 정전 6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간다. 한·중 양국이 19일 중국군 유해 송환에 최종 합의하면서 60여년 전 적으로 대치했던 적대 관계를 해소하는 상징적인 전환점이 될 것으로 평가된다. 국방부 관계자는 이날 “한·중 양국은 최근 수차례 열린 실무협의 끝에 유해 송환에 합의했다”며 “이날부터 유해 발굴 작업이 개시됐다”고 밝혔다. 중국군 유해는 발굴-건조-유해·유품·기록지 대조-정밀 감식 등의 수순을 거쳐야 해 내년 4월쯤 중국 정부에 인도될 것으로 전망된다. 안장된 중국군의 군장류와 배지, 지갑 등 개별 유품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 보관된 것으로 전해졌다. 적군묘지에 안장된 중국군 유해 인도는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6월 중국을 국빈 방문했을 당시 류옌둥(劉延東) 국무원 부총리와의 환담에서 공식 제안했다. 정부는 1981년부터 1997년까지 중국군 유해 43구를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해 중국 측에 인도했지만 그 이후 북한의 인수 거부로 중단됐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주말 인사이드] “목어에서 은어까지 굴곡진 인생… 탱탱한 알 무기로 국민생선 도전!”

    [주말 인사이드] “목어에서 은어까지 굴곡진 인생… 탱탱한 알 무기로 국민생선 도전!”

    오도독… 오도독…. 입안 가득 알을 터뜨리며 담백한 맛에 반해 겨울철이면 사람들은 나를 즐겨 찾습니다. 비록 깊은 속살을 간직하지 못했고 폼 나는 일류 횟감도 아니지만 나는 한겨울 서민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는 국민 생선입니다. 그런 나를 사람들은 주로 굽거나 조림 등으로 끓여서 먹지요. 특히 배에 가득 차 빨갛게 익어 나오는 알을 먹는 맛이 일품이라며 나를 먹을 때면 다들 엄지손가락을 치켜듭니다. 영양가도 풍부합니다. 소화 흡수가 잘되고, 불포화지방이 포함돼 성장기 어린이의 두뇌 발달과 성인병 예방에 도움을 준다니 어디 하나 버릴 것 없는 게 우리들입니다. 기름기 많은 흰 살 덕에 담백하고 구수한 맛이 일품이지만 수컷의 정소에는 세포를 재생시켜 주는 핵산이 많아 건강에도 좋다고 합니다. 이런 입소문을 타고 알이 있는 암컷만 찾던 사람들이 요즘에는 수컷도 많이 찾는다니 수컷들의 인기도 상종가 칠 날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습니다. 세월 따라 사람들 입맛도 변하는지 요즘에는 횟감으로도 제법 잘 나갑니다. 주문진 등 강원 동해안 항·포구 횟집 수족관에서는 내가 다른 고기들과 어울려 헤엄치는 모습도 가끔 보입니다. 최근 들어 횟감을 찾는 사람이 늘어서랍니다.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진풍경입니다. 제가 지체 높은 다른 물고기들과 함께 수족관에 들어가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요. 수년 전까지만 해도 밋밋한 맛 때문에 횟감으로 맛이 떨어진다고 외면받았지만 몇 년 사이 비늘이 없는 나를 뼈째 썰어 내는 일명 ‘세꼬시’로 즐기려는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생긴 새로운 풍경이랍니다. 이래저래 국민 생선으로 인기가 갈수록 높아지게 생겼습니다. 한겨울이 시작된 요즘에는 항·포구 포장마차나 구이집마다 나를 굽는 구수한 냄새가 관광객들의 발길을 잡습니다. 그런 나는 한겨울 동해안의 명물로 자리 잡은 ‘도루묵’입니다. 나의 이름에 얽혀 전해져 오는 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 당초 나의 이름은 목어(木魚)였는데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피란길에 올랐던 선조 임금이 신하들이 구해 온 목어를 먹고 ‘맛이 좋다’며 은어(銀魚)라 부르라고 했답니다. 그 뒤 도성으로 돌아온 임금이 이번에는 맛이 없다며 ‘도로 목어라 부르라’고 해 ‘도로목 - 도루묵’이 됐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정조 때 편찬한 고금석림(古今釋林)에는 고려시대 왕이 이 같은 말을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아무튼 기록에도 나오고, 수라상에서 이름이 정해진 생선은 내가 유일할 것입니다. 우리 도루묵들은 11월 초부터 12월 말까지가 제철입니다. 동해안 수심 200~400m의 모래가 섞인 개펄에서 살다가 11~12월 산란을 위해 육지가 가까운 연안으로 몰려갑니다. 연안의 수초에 알을 낳기 위해서입니다. 배들도 이때 집중적으로 그물을 이용해 우리를 잡습니다. 육지에서 20~30m 떨어진 수심 10~20m의 바다에는 배 속에 여문 알을 품은 도루묵들이 주로 살고 있습니다. 이보다 조금 먼 육지에서 1㎞ 안팎 떨어진 수심 70~100m의 바다에는 아직 알이 영글지 않은 도루묵들이 주로 서식합니다. 가까운 바다에는 1~1.5t급 작은 배들이 나가고 조금 먼 바다에는 2~3t짜리 배들이 나가 우리를 잡습니다. 어민들은 주로 낮 시간에 그물을 쳐 놓았다가 새벽 3~6시쯤 그물을 걷고 있습니다. 이후 새벽 시간에 항·포구에 도착한 배들은 그물에서 우리를 떼어 낸 뒤 곧바로 위판장에 올려 경매에 부칩니다. 그때마다 우리 도루묵들은 살아서 입을 쩍쩍 벌리고 지느러미를 펄럭거리며 살려 달라고 애원하지만 우리를 산 중간상인들은 큰 삽으로 우리들을 ‘쓱쓱’ 쓸어 담아 자신들의 가게로 향합니다. 이런 와중에 몇몇 어민은 우리를 장화 신은 발길질로 툭툭 차며 알이 나오게 한 뒤 흘러내린 알을 줍기도 합니다. 구워 먹고 삶아 먹기 위한 것이지만 날것으로 주워 먹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부 어민들은 날것으로 알을 먹으면 비릿하면서 톡톡 터지는 맛이 색다르다며 이를 즐깁니다. 6·25전쟁 때 피란민들이 바닷가에 머물며 도루묵 알을 주워 연명했다는 얘기도 전해지니 예부터 우리 도루묵 알은 이래저래 인기였던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우리를 잡기 위한 새로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민이 아닌 관광객을 포함한 일반인들이 항·포구마다 통발을 이용해 우리 도루묵을 잡으려고 북새통을 이룹니다. 우리 도루묵들이 알을 낳기 위해 육지 가까이 간다는 것을 안 사람들이 한 사람당 작게는 2∼3개에서 많게는 10여개씩의 통발을 바다에 던져 놓고 우리를 잡습니다. 우리들이 통발을 수초로 잘못 알고 안으로 들어가는 걸 이용해 잡으려는 것이지요. 참 어리석게도 우리들은 통발 1개에 보통 수십 마리씩 잡히고 있으니 사람들이 점점 재미를 붙이는 것 같습니다. 이런 풍경도 이달 말쯤이면 끝날 예정입니다. 해를 넘겨 1월이 되면 우리 도루묵 알들이 여물고 고무처럼 탱탱해져 상품으로 가치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때쯤 되면 어민들은 우리를 잡는 대신 대게나 양미리잡이로 돌아섭니다. 우리 도루묵들은 하루빨리 그날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나는 수십 년 사이 천덕꾸러기 생선도 됐다가 귀한 대접을 받는 등 부침이 심했습니다. 1970~1980년대에는 너무 많이 잡혀 어민들이 리어카에 나를 가득 담아 골목길을 누비며 삽으로 퍼서 팔 만큼 값싼 생선으로 천대받았습니다. 당시에는 ‘말짱 도루묵’이란 말이 생겨날 만큼 어민들 사이에서는 돈벌이가 되지 않는다며 환영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 생선이었습니다. 이후 2000년대 들어 동해안 바닷속 서식 환경이 나빠지면서 어획량도 급격히 줄었지요. 바닷속 물이 수온 상승과 백화현상을 겪으며 수초들도 많이 사라졌습니다. 냉수성 어종인 우리 도루묵들에게는 참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더구나 사람들이 치어까지 싹쓸이하면서 어획량은 더 줄었습니다. 1970, 1980년대에는 한 해 2만 5000t씩 잡혔지만 어려운 시절이던 2007~2009년에는 한 해 2720~3800t 생산에 그쳤습니다. 한때 동해안 어민들 사이에서는 우리 도루묵이 ‘사라지는 물고기’ 명태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7~8년 전부터 바닷속 수초에 알을 낳는 우리들의 습성을 이해한 사람들이 플라스틱 인공 어초를 심고 인공 수정된 치어를 방류하기 시작하면서 2, 3년 전부터 다시 개체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치어방류사업은 사람들이 우리 도루묵 알을 수거해 수조에서 부화시킨 뒤 바다에 방류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지난해부터 다시 많은 도루묵이 잡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이 잡혀도 문제인 것이 우리들 몸값이 떨어지고 판로에 어려움을 겪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지난해에는 ㎏당 6851원(20마리 1만~1만 5000원) 하던 우리들 몸값이 올해에는 더 떨어져 ㎏당 4618원(20마리 5000~1만원)까지 합니다. 어민들은 우리를 잡으면서 ‘출어 경비도 못 건진다’며 울상을 짓고 있습니다. 생산이 넘쳐나면서 요즘에는 사람들이 아이디어를 내 우리 도루묵을 어묵과 구이, 동그랑땡 등 가공식품으로 개발하려 하고 있습니다. 천대받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 도루묵은 국민 생선으로 꾸준히 인기를 얻어 왔고, 앞으로도 영양이 풍부하고 맛 좋은 생선으로 자리 잡아 갈 것입니다. 모쪼록 우리 도루묵이 많이 생산되고 많이 소비되면서 어민들에게 환영받는 생선으로 자리 잡길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글 사진 강릉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평양 방문·비자 신청할 때 구월산 가고 싶다고 했더니 북한이 오해해 억류한 듯”

    “평양 방문·비자 신청할 때 구월산 가고 싶다고 했더니 북한이 오해해 억류한 듯”

    북한 억류 42일 만에 풀려난 미국인 메릴 뉴먼(85)이 9일(현지시간) 자신의 억류 이유로 북한의 오해를 들었다. 뉴먼은 성명을 통해 “평양 방문과 비자 신청 당시 순진하게도 북한 가이드에게 (6·25전쟁 때) 구월산에서 싸운 이들이 살아있는지 묻고 살아있다면 만나고 싶고 구월산도 가고 싶다고 했다”며 “북에서 내 호기심을 해로운 것으로 오해한 것 같다”고 밝혔다. 뉴먼은 6·25전쟁 당시 북한 지역에서 활동한 반공 게릴라 부대인 ‘구월산유격대’의 군사고문관을 지냈다. 그는 “북한 사람들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전쟁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나는 그 점을 더 신경 썼어야 했다”고 덧붙였다. 또 지난달 말 북한 매체가 공개한 그의 사죄 영상은 협박에 의한 것이었다며 북한 측 조사관이 사죄하지 않으면 간첩 혐의로 15년형이 선고될 수 있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 北소식통 “숙청된 장성택, 이미 처형”…측근은 ‘제2의 황장엽’ 되나

    北소식통 “숙청된 장성택, 이미 처형”…측근은 ‘제2의 황장엽’ 되나

    북한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의 숙청이 공개된 가운데 장성택 부위원장이 이미 처형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자유북한방송은 9일 북한 소식통을 인용해 “중앙당 간부가 전해준 데 의하면 장성택과 그의 측근들은 이미 지난 5일에 처형되었다”며 “정치국 회의에서 결정이 돼 룡성구역에 위치한 호위국 부대 안에서 군 장성들과 인민보안부, 노동당 간부들까지 모두 7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 소식통은 “지금 평양은 물론 전국에 ‘장성택이 권력을 가지고 모은 돈은 조선 안에 또 다른 조선을 만들 수 있는 액수였다. 올해 9월 중국과 협력해 장군님을 제거하고 통일조선 임시정부를 세우려고 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면서 “유일지도체계를 세우기 위해 앞으로 수 년 동안 장성택 부위원장의 측근 숙청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소식통은 이달 초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나는 선대수령들과 달리 그가 누구든 조국과 수령을 배반한 자들에 대해서는 추호도 용서할 생각이 없다. 당사자(장성택 부위원장)는 물론 관계자들까지 모조리 공화국의 법을 적용해 처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밝혔다. 그는 “아마도 공화국 창건 이후 가장 큰 숙청이 될 것 같다”며 “12월 초부터 노동당과 군은 물론 국가체육지도위원회, 국가우주개발국, 원자력공업성, 국가경제개발위원회, 인민보안부, 국가안전보위부, 노동당산하 외화벌이 단위들까지 장성택이 조금이라도 관여했던 기관들에 대한 조사와 숙청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지도자의 가계인 장성택 부위원장의 숙청에 대해 고민해볼 줄 알았는데 단호하게 처형하자 지금 중앙당은 물론 전국이 뒤숭숭하다”며 “아마도 지난 90년대 후반에 있었던 서관희(농업담당비서)사건(심화조사건)보다 몇 배가 되는 인원이 숙청될 것 같다”고 전했다. 심화조 사건이란 1997년 8월 서관희 전 조선노동당 농업담당비서가 6·25전쟁 당시 포섭된 미국간첩으로 노동당의 농업방침을 방해 했다는 혐의를 받고 공개 처형되고, 2만5000명의 인사와 가족들을 숙청한 김정일의 권력공고화 과정에 빚어진 대규모 처형사건이다. 이 소식통은 “현재 호위총국에서 중요 직책을 맡고 있는 그(김정은)의 외삼촌(고영희의 남동생)인 고수일이 숙청을 책임지고 진행 중”이라면서 “이 기회에 재일동포 자녀인 고가(家)의 호위국 진입에 대해 불만을 터놓았던 군 원로들까지 보복당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또 “장성택의 처형으로 주민들 속에서는 ‘다음 순서는 최룡해가 될 것이다’는 말이 나돌고 있다”며 “정권장악을 위한 공포정치가 오히려 위상을 떨어뜨리고 인민들의 원성만 키우는 꼴이 되었다”고 전했다. 한편 장성택 전 부위원장의 핵심 측근은 중국에 머물며 망명을 시도하는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장성택 부위원장의 외화벌이 및 자금 담당으로 알려진 이 측근는 김정은 체제 2년은 물론 장성택 실각 사태의 원인과 과정 등에 대해 증언해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에 신병 처리 문제가 역대 최고위급 탈북자였던 지난 1997년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 망명 당시에 못지않게 중요한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다.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北, 억류 미국인 메릴 뉴먼 추방 배경은?…고령 부담·美와 관계개선(종합2보)

    北, 억류 미국인 메릴 뉴먼 추방 배경은?…고령 부담·美와 관계개선(종합2보)

    북한에서 ‘반공화국 적대행위’ 혐의로 억류됐던 6·25전쟁 참전용사인 미국인 메릴 뉴먼(85)이 42일 만에 풀려났다. 북한이 특사 파견 등 미국 정부의 노력이 없었음에도 메릴 뉴먼을 추방한 것은 고령으로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국제사회의 비난이 나올 수 있음을 감안하고 미국과 관계개선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7일 메릴 뉴먼을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추방했다며 “본인이 잘못 생각하고 저지른 행위라고 하면서 그에 대해 인정하고 사죄했으며 심심하게 뉘우친 점과 그의 나이와 건강상태를 고려했다”고 발표했다. 또 “해당 기관에서는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첩보장교로서 자기가 직접 양성, 파견한 간첩테러분자들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관광객의 외피를 쓰고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미국 공민 메릴 뉴먼을 억류하고 조사를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메릴 뉴먼은 이날 오전 중국 베이징 국제공항에 도착했으며, 오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에 탑승한 것으로 전해졌다. 메릴 뉴먼은 베이징에서 “집으로 돌아가게 돼 기쁘다”며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아내를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일본 교도통신이 보도했다. 앞서 중앙통신은 지난달 30일 메릴 뉴먼의 사죄문 전문을 공개했으며 사죄문 작성하고 직접 읽는 모습을 영상으로 내보냈다. 당시 메릴 뉴먼은 사죄문에서 6·25전쟁 때 북한에서 남한으로 내려온 사람들로 구성된 ‘구월산유격군전우회’ 회원들의 주소와 이메일을 북한의 관광안내원에게 전달했다고 밝혔다. 메릴 뉴먼은 지난 10월 26일 10일간의 북한 관광을 마치고 평양에서 베이징행 비행기가 이륙하기 직전 체포돼 억류됐다. 한국과 미국 정부는 메릴 뉴먼의 추방에 환영의 뜻을 밝히고 북한이 1년 넘게 억류 중인 또 다른 미국인 케네스 배(한국명 배준호)씨도 석방할 것을 촉구했다.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은 이날 오전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전몰 미군에 헌화한 뒤 기자들과 만나 “메릴 뉴먼의 석방은 적어도 하나의 햇살 같은 소식”이라며 “북한이 케네스 배 역시 이유없이 잡고 있는데 즉각 석방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도 조태영 외교부 대변인 명의의 논평에서 “북한에 억류되었던 미국인 메릴 뉴먼이 석방되어 가족의 품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을 환영한다”며 케네스 배 씨의 석방도 기대한다고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이어도·마라도·홍도 포함된 방공구역 확정

    정부는 6일 청와대 국가안보정책조정회의를 통해 이어도와 마라도, 홍도(거제도 남방 무인도) 상공이 포함된 우리 측 방공식별구역(KADIZ)을 확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KADIZ 남방 경계선은 우리 측 비행정보구역(FIR)을 기준점으로 확대돼 이어도 상공도 우리 공군의 방위 구역이 될 것으로 관측된다. 6·25전쟁 중이던 1951년 미국 공군에 의해 선포된 KADIZ가 62년 만에 확대 조정되는 셈이다. 정부는 지난 1일 국가안보정책조정회의에 KADIZ 재조정 방안을 상정한 바 있다. 이날 회의는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이 주재하고, 윤병세 외교부 장관, 김관진 국방부 장관, 남재준 국가정보원장 등이 참석했다. KADIZ 확대는 국가안보적 이익을 고려한 조치로 풀이된다. 지난달 23일 이어도까지 포함된 일방적인 중국의 동중국해 방공식별구역(CADIZ) 설정에 대응하는 동시에 과거부터 이어도와 우리 측 FIR 및 KADIZ 경계선을 침범해 온 일본 방공식별구역(JADIZ)에 대한 맞대응 성격도 짙다. 정부는 지난달 28일 한·중 국방전략대화에서 이미 CADIZ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통보한 바 있다. 그럼에도 정부가 FIR을 새로운 KADIZ의 기준점으로 삼은 것은 주변국과의 마찰을 최소화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국제민간항공기구(ICAO)가 설정한 FIR은 국제법상 효력을 인정받는 공역으로, 주변국과 중첩돼도 군사적 충돌을 회피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내포돼 있다. 확정된 KADIZ는 남쪽 경계선의 경우 이어도 남방 100㎞ 지점까지, 남·동쪽은 일본 쓰시마섬을 기준점으로 독도 해역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 관계자는 “KADIZ 확대는 우리의 자주적 조치에 해당된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이날 KADIZ 확대 조정안을 최종 확정하고도 공식 발표를 8일로 미룬 것은 주변국에 대한 구체적인 좌표값 등 사전 통보 절차를 밟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훙레이(洪磊)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한국의 방공식별구역 확대 조치는 국제법과 국제 관례에 부합해야 한다”면서 한국과의 협상(소통)을 강조했다. 중국이 KADIZ 확대에 대해 거친 표현보다는 대화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한국이 CADIZ를 인정할 경우 중국도 확대된 KADIZ를 인정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아울러 중·일이 모두 자국 방공식별구역에 이어도 상공을 포함하고 있는 만큼 KADIZ가 이어도까지 확대돼도 반발할 명분이 약하다는 지적도 있다. 서울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 北, 억류 미국인 메릴 뉴먼 추방 배경은?…고령 부담·美와 관계개선(종합)

    北, 억류 미국인 메릴 뉴먼 추방 배경은?…고령 부담·美와 관계개선(종합)

    북한이 7일 억류하고 있던 미국인 메릴 뉴먼(85)을 추방했다고 밝혔다. 메릴 뉴먼은 북한에서 ‘적대행위’ 혐의로 억류된 지 40여일 만에 풀려나게 됐다. 북한이 특사 파견 등 미국 정부의 노력이 없었음에도 메릴 뉴먼을 추방한 것은 고령으로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국제사회의 비난이 나올 수 있음을 감안하고 미국과 관계개선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메릴 뉴먼을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추방했다며 “본인이 잘못 생각하고 저지른 행위라고 하면서 그에 대해 인정하고 사죄했으며 심심하게 뉘우친 점과 그의 나이와 건강상태를 고려했다”고 발표했다. 또 “해당 기관에서는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첩보장교로서 자기가 직접 양성, 파견한 간첩테러분자들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관광객의 외피를 쓰고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미국 공민 메릴 메릴 뉴먼을 억류하고 조사를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조사결과에 의하면 미국 공민은 우리나라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가지고 들어와 반공화국 적대행위를 감행했다”고 덧붙였다. 중앙통신은 그러나 메릴 뉴먼을 추방한 정확한 시점과 방식을 따로 설명하지 않았다. 중앙통신은 지난달 30일 메릴 뉴먼 씨의 사죄문 전문을 공개했으며 사죄문 작성하고 직접 읽는 모습을 영상으로 내보냈다. 당시 메릴 뉴먼은 6·25전쟁 때 북한에서 남한으로 내려온 사람들로 구성된 ‘구월산유격군전우회’ 회원들의 주소와 이메일을 북한 안내원에게 전달했다고 밝혔다. 6·25전쟁 참전용사인 메릴 뉴먼은 10월 26일 10일간의 북한 관광을 마치고 평양에서 베이징행 비행기가 이륙하기 직전 체포돼 억류됐다. 앞서 미국 백악관은 지난 2일(현지시각) 북한에 억류된 케네스 배(한국명 배준호) 씨와 메릴 뉴먼 씨 등 미국 시민 2명을 즉각 석방하라고 북한 당국에 촉구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6·25전사자 666명, 현충원에 잠들다

    올해 전국 77개 지역에서 발굴된 6·25전쟁 국군전사자 가운데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666명의 유해 합동봉안식이 6일 오전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열렸다. 정홍원 국무총리 주관으로 열린 합동봉안식에는 김관진 국방부 장관,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육·해·공군 참모총장, 이영주 해병대사령관 등 400여명이 참석했으며 추진경과 보고와 종교의식, 헌화 및 분향, 영현봉송 순으로 진행됐다. 합동봉안된 유해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과 육군, 해병대 등 36개 사단급 부대가 지난 3월부터 11월까지 강원도 양구·철원, 경북 칠곡 등에서 발굴했다. 국방부는 이후 유해를 유해발굴감식단 중앙감식소(유해보관실)로 옮겨 신원확인 작업에 착수한다. 2000년부터 국군전사자 유해 7658구를 발굴한 국방부는 신원확인을 위한 DNA 검사에 필요한 유가족들의 유전자 시료 2만 6490여개를 확보했으며, 이를 통해 신원이 확인된 83구는 가족에게 인계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이중근 회장, 6·25 관련저서 기증

    이중근 회장, 6·25 관련저서 기증

    이중근(왼쪽) 부영그룹 회장 겸 우정문고 대표이사가 4일 서울 통일로 경찰청 본청에서 자신의 저서인 ‘6·25전쟁 1129일’ 1100권을 경찰에 기증하고 이성한 경찰청장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 책은 6·25전쟁 발발부터 정전협정까지 매일의 날씨, 전황, 국내외 정세 등을 일지 형식으로 기록한 편년체 역사서로, 경찰청은 전달받은 도서를 16개 지방경찰청과 산하 경찰서 등에 전달해 안보의식 정립을 위한 참고도서로 활용하기로 했다. 부영그룹 제공
  • [열린세상] 미국역사박물관에서 만난 한국의 슬픈 얼굴/박남기 광주교육대 교수

    [열린세상] 미국역사박물관에서 만난 한국의 슬픈 얼굴/박남기 광주교육대 교수

    미국 수도 워싱턴에는 박물관이 한데 모여 있는 박물관 몰이 있는데 전 세계로부터의 방문객이 연간 1000만 명에 육박한다고 한다. 미국역사박물관은 근현대사를 어떻게 꾸며놓고 있을까 하는 궁금한 생각이 들어 워싱턴에 간 김에 들렀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더라도 현재의 역사는 승자의 역사일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을 거의 몰살시키고 건국된 미국이어서 그러한지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내용은 배제돼 있었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 덕인지 미국 흑인의 역사는 아주 상세하게 묘사돼 있었다. 1950년대 부분에서는 예상대로 미국인들이 ‘잊힌 미국전쟁’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6·25전쟁 당시 피란모습 사진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않게 2000년대 부분에 여자 아이 한복이 전시되어 있어서 반가움과 놀라움으로 다가갔다. 미국 역사에 한복이 소개될 정도로 미국 사회에서 한인의 위상이 높아졌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설명문을 읽었다. 그랬더니 기대와는 달리 2003년에 미국에 입양되었던 줄리아 하영 보쉬라는 아이가 입었던 한복을 양부모가 기증한 것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다. 그 아래에 보니 미국이 1950년에 한국전쟁의 고아를 입양하기 시작한 이래 1990년대까지는 미국 입양아의 대다수는 한국아이였는데 그 이후 중국과 러시아 출신 입양아의 비중이 더 커졌다는 설명이 실려 있었다. 그 글을 보는 순간 부모의 품을 떠나야 했던 수많은 입양아들의 울음소리와 먼 땅에서 뿌리를 내려야 했던 그들의 힘들었을 삶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아무리 자기네 역사박물관이라고 하더라도 남의 아픈 부분을 꼬집어 꼭 전시해야 할까 하는 불편한 생각이 들어 자료를 조사해 보니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중국과 러시아가 자국 아동의 해외 입양을 엄격히 통제하고, 러시아는 아예 미국 입양을 금하여 한국 입양아의 비율이 다시 1위가 되었다고 한다. 미 국무부에 따르면 2010~11 회계연도 한국 입양아 수가 아프리카 출신 입양아를 합한 것뿐만 아니라 인도와 중국 입양아 수까지 더한 것보다도 더 많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제공하는 나라로 바뀌어 개발도상국 지원을 위해 연 2조 411억원(2013년)의 국고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급속한 성장 과정에서 섬세하게 살피지 못해 아직도 곳곳에 후진국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데 그중 하나가 해외 입양이다. 보건복지부의 노력으로 16만 5000명을 넘어선 해외 입양아에 대한 지원책은 조금씩 결실을 맺고 있다고 한다. 이들에 대한 체계적인 지원 강화와 더불어 기아와 전쟁에 시달리는 아프리카보다도 해외 입양이 더 많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범사회적 관심을 더 기울여야 할 것 같다. 해외 입양의 가장 큰 원인은 미혼모라고 한다. 교육계는 시대의 변화를 직시하여 중학생 이상의 학생을 대상으로 한 성교육뿐만 아니라 논란 중인 피임교육 강화를 진지하게 검토함으로써 미혼모 방지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미혼모자에 대해 선진국에 걸맞은 사회인식 개선, 제도와 지원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미혼모 양육권 포기 비율이 미국은 2%인데 우리는 67%나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미혼모에 대한 부정적 인식, 국가의 지원 부족이라고 한다. 부정적 인식은 하루아침에 고치기 어렵지만, 미혼모자에 대한 국가 차원의 지원책은 국민 행복 증진을 위한 ‘손톱 밑의 가시’의 하나로 포함시켜 당장이라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가난하던 시절 오랫동안 국가를 대신해서 미혼모 시설을 운영해 오던 사설기관 중 일부가 이제는 기관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외 입양을 권장하는 것도 해외 입양 비율이 높은 한 원인이라고 한다. 여야 대치 정국이 이어지고 있지만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뜻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 대한 범사회적 공감, 복지부, 교육부, 외교부 등 관련 부처 간의 협력, 그리고 입법부의 더 높은 관심은 미국역사박물관에 홀로 서 있는 하영이의 한복이 살아 있는 슬픈 역사가 아니라 박제된 과거의 역사가 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속보]北 “억류 미국인, 죄 인정”…사죄문 공개

    [속보]北 “억류 미국인, 죄 인정”…사죄문 공개

    북한은 30일 억류 중인 미국인 메릴 뉴먼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사죄의 뜻을 밝혔다면서 사죄문 전문을 공개했다. 6·25전쟁 참전용사인 뉴먼씨는 지난달 26일 10일간의 북한 관광을 마치고 평양에서 베이징행 비행기가 이륙하기 직전 체포돼 북한에 억류중이었다.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최근 우리 공화국의 해당 기관에서는 관광객으로 들어와 적대행위를 감행한 미국공민 메릴 에드워드 뉴먼을 단속, 억류했다”면서 “그의 대조선적대행위는 여러 증거물들에 의해 입증됐고 그는 자기의 모든 죄과에 대해 인정하고 사죄했다”고 밝혔다. 또 뉴먼이 해당기관에 제출했다는 ‘억류된 미국 공민 뉴먼의 사죄문’ 제목의 문서도 전문을 공개했다. 사죄문에서 뉴먼은 “저는 조선전쟁시기 구월부대 생존자를 만나보고 죽은자들에 대해서는 넋을 위로할 계획을 품고 있었다”며 “그 생존자들과 그의 가족, 후손을 혼자서 찾는다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어서 관광일정 진행 중에 안내원에게 이 일을 도와줄 것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이어 “생존자들을 만나게 되면 이미 전부터 연계하고 있는 ‘구월산유격군전우회’에 소속된 자들과 연계시켜 주려고 했다”며 관광안내원에게 이 전우회 회원들의 주소와 이메일 주소를 전달했다고 밝혔다.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조선 인민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용서를 빌면서 저를 처벌하지 말아주시기 바란다”며 “다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조선 인민을 반대하는 범죄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북한이 억류중인 뉴먼의 범죄사실을 공표하고 그의 사죄문을 공개함에 따라 그의 석방 수순을 밟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특히 뉴먼은 올해 85세로 고령인데다 심장질환을 지병으로 앓고 있어 북한 억류중 신병에 이상이 생길 수 있다는 점에서 북한은 북미관계 등과 상관없이 곧 석방키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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