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58년
    2026-03-22
    검색기록 지우기
  • 2026-03-22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4,241
  • 30년 낚시 끝에 진줏빛 희귀 상어 낚은 어부

    30년 낚시 끝에 진줏빛 희귀 상어 낚은 어부

    영국해협 와이트섬 인근에서 하얀 진줏빛으로 빛나는 희귀 상어가 발견됐다. 영국 뉴스통신 SWNS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백상어’는 심해 조업을 하던 제이슨 길레스피의 그물에 걸렸다. 길레이프의 사진 속 희귀 상어는 작은 까치상어과 토우프상어(tope shark)종으로 몸 길이는 90cm 정도이다. 길레스피는 “나는 30년간 어부 생활을 했지만 이러한 희귀종을 본 적이 없다”며 “이것은 일생일대의 특별한 경험”이라고 말했다. 그는 “토우프상어는 보호종이기에 포획하지 않고 사진만 찍고는 바로 놓아주었다”고 전했다. 사진을 본 전문가들은 온몸이 진줏빛이 나는 하얀색인 해당 상어는 루시즘(백변증)으로 색소가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토우프상어는 1758년 처음 발견됐으며 사람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종이다. 동대서양과 서대서양, 칼르포르니아만 인근 등 넓게 서식하며 최대 55살까지 생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강경민 콘텐츠 에디터 maryann425@seoul.co.kr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파리 패션계에 동양을 심은 겐조 코로나에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파리 패션계에 동양을 심은 겐조 코로나에

    파리 패션계에 동양을 이식한 브랜드 ‘켄조’ 창립자인 다카다 겐조가 4일 파리 근교 뇌이쉬르센에 있는 아메리칸 병원에서 코로나19 감염 합병증으로 눈을 감았다. 향년 81. 일본 효고현 출신의 고인은 파리 패션계에서 성공한 1세대 동양인 디자이너다. 고베대에 진학했으나 곧 그만 두고 분카패션대학에서 본인이 정말로 하고 싶던 공부를 시작했다. 1958년 남학생 입학을 허용한 이 학교의 첫 남자 입학생이었다. 졸업하자마자 프랑스 마르세유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어 1964년 파리에 도착했다. 겐조는 프랑스 브랜드 레노마의 보조 스타일리스트로 취직했고, 1970년 서른 나이에 자신의 첫 번째 매장 ‘정글 잽’을 열었는데 앙리 루소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듯한 화려한 색채감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일본식 문화와 서양식 문화를 접목한 작품들이 호평을 얻었고, 1976년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세상에 내놓았다. 여성 컬렉션으로 디자이너 생활을 시작한 겐조는 1983년 남성 컬렉션을 선보였고 1988년 향수를 출시했다.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모은 켄조 향수병에 그려진 꽃은 그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1994년 여름에 파리를 대표하는 관광묘소 퐁뇌프 다리를 꽃과 담쟁이덩굴로 수놓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패션쇼가 끝나고 무대인사를 할 때면 늘 소년과 같은 미소를 지었던 겐조는 1993년 루이뷔통 모에 헤네시(LVMH)에 자신의 브랜드를 매각하고 6년 뒤 패션계에서 떠나겠다고 발표했지만 2003년 독립 디자이너로 복귀, 이듬해 아테네올림픽 유니폼을 디자인했다. 프랑스 예술 문화 훈장 등을 받았다. 안느 이달고 파리 시장은 트위터에 추모의 글을 올려 “엄청난 재능을 갖춘 디자이너로서 고인은 파리 패션계에 색깔과 빛을 선사했다. 파리는 이제 아들 중 한 명이 스러진 것을 추모한다”고 적었다. LVMH의 시드니 톨레다노 최고경영자(CEO)는 패션뉴스 매체 WWD 닷컴에 “나도 그가 경력을 시작했던 1970년대 그의 브랜드 팬이었다. 내 생각에 그는 위대한 디자이너였다”고 안타까움을 털어놓았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한국 여성운동 선구자’ 이이효재 교수 별세

    ‘한국 여성운동 선구자’ 이이효재 교수 별세

    여성학자이자 사회학자로서 한국 1세대 여성운동의 기틀을 닦은 이이효재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4일 별세했다. 96세. 1924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1958년 모교 이화여대에 사회학과를 창설했다. 1980년에는 전두환 군사정권의 광주 학살을 규탄하는 시국선언으로 교수직에서 해임됐다가 복직하기도 했다. 그는 여성운동가로서도 깊은 발자취를 남겼다. 1977년 국내 최초의 여성학과 설치를 주도했고, 호주제 폐지에 앞장서는 한편 한국여성민우회 초대 회장과 한국여성단체연합 회장 등을 지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결성에 참여하고 1991년 공동대표를 역임하는 등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국제사회에 공론화하는 노력도 했다. 이날 문재인 대통령도 이 교수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추모 글을 올렸다. 문 대통령은 “이효재 선생님은 한국 여성운동의 선구자이며, 민주화운동과 사회운동에도 지대한 역할을 하셨다”면서 “어두웠기에 더욱 별이 빛나던 시절, 큰 별 중 한 분”이라고 밝혔다. 이어 “2012년 대선에서 실패했을 때 크게 상심해 낙향하셨던 모습이 생생하다”면서 “2017년 청와대 녹지원에 한 번 모신 것이 마지막이 됐다. 선생님의 삶에 큰 존경을 바치며 삼가 명복을 빈다”고 밝혔다. 유족으로는 딸 이희경씨, 동생 은화(전 이화여대 교수)·효숙·성숙씨, 올케 이부자씨가 있다. 여성단체들은 여성장으로 고인을 배웅하기로 했다. 빈소는 창원경상대병원 장례식장 VIP 1호실에 마련됐다. (055)214-1910.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
  • 연희동 주택가에서의 처절한 전투…아름다운 서울의 평화를 선사하다

    연희동 주택가에서의 처절한 전투…아름다운 서울의 평화를 선사하다

    2005년에 출간한 장편소설 ‘신들의 황혼’을 쓸 때 나는 ‘연희고지 전투’ 장면에서 가장 가슴이 아팠다. 주인공은 겨우 스무 살이었다. 6·25 전쟁이 시작되고 사흘 만에 빼앗긴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연합군이 감행한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한국 해병대원. 불과 한 달 전에 입대한 학도병이었지만 그는 어느덧 죽음에 무감각해져 있었다. 오로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만이 남아 있었다. 포성과 화염에 휩싸인 인천항에서 상륙주정의 문이 열리자 무조건 앞을 향해 뛸 때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많은 인민군이 남쪽으로 내려간 상태에서 항공 폭격과 함포 사격을 퍼부은 뒤였으므로 인천에 상륙한 병사들에게 다가온 것은 전투가 아니라 시체 썩는 냄새였다. 적들이 버리고 간 각종 중화기 사이에서 뒹구는 인민군의 시체들, 불타버린 시체들…. 후퇴하는 적군과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면서 도달한 행주 나루에는 허옇게 불어터진 시체들이 물에 떠다니고 있었다. 그들이 오기 직전에 서울 진격의 교두보 확보를 위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증거였다. 수륙양용 장갑차를 타고 건너면서 내려다본 한강에는 인민군과 미군과 국군의 시체가 뒤엉켜 있었다.그러나 서울 서쪽 안산의 줄기인 연희고지 근처에 이르자 상황이 달라졌다. 눈앞의 104고지에는 인민군이 기관총과 박격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고지 앞을 흐르는 하천과 구릉은 적에게만 유리한 지형지물이었다. 게다가 나머지 땅은 엄폐물 하나 없이 트여 있는 개활지였다. 그의 소총 부대는 그 모든 것을 헤치며 나아가야 했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의 훈련장이기도 했던 연희 104고지는 천연 요새이자 적의 최후 방어선이었으므로 서울 탈환을 위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교전의 회오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스무 살 청년은 정신없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동료들의 몸에서 피가 솟구쳐 오르고 곳곳에서 비명이 들려와도 무조건 나아가야 했다. 한국 해병 제1대대는 26명만이 생존했으나 104고지를 탈환함으로써 서울 수복 전투의 승기를 잡았다.바로 그곳, 연희 104고지 전적지를 찾았다. 지난 26일 서울신문과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이 함께하는 ‘2020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의 18번째 여정 ‘104고지와 안산’에서였다. 서울 수복 70주년 기념일을 이틀 앞둔 주말, 하늘은 높고 햇살은 투명했다. 6·25 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 수복을 이룬 것에 대해 우리는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1950년 9월 15일과 28일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서대문구 연희동, 이 평화로운 주택가가 바로 그 시기의 격전지였다. ‘연희104고지앞(구 성산회관)’이라는 이름의 버스 정류장에 내리면 눈앞에 보이는 대형 건물(구 성산회관, 현 지오영) 뒤의 낮은 산이 104고지다. 그곳으로 안내하는 표지판이 없어서 지도를 살펴 가며 주택가의 오르막길을 올라가니 작은 공원이 나타났다. 1982년에 세워진 ‘해병대104고지전적비’가 그곳의 주인공으로 높게 서 있다. 그러나 1958년에 처음 설치했다는 자연석 비석을 찾을 길 없어 둘러보니 전적비 맞은편 아래로 뒷모습의 윗부분만 조금 보였다. 그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있으나 표지판이 없었다. 지금은 ‘궁동 공원’으로 바뀐 104고지 정상이 아닌 산자락에 전적비가 설치된 까닭은 바로 이 비석 때문이었을 터인데, 전쟁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1950년대에 비문을 새겼던 역사적인 바윗돌로 이끄는 표지판이 없는 게 아쉬웠다. 연희 104고지 전적지는 서울미래유산이자 현충시설이다. 70년 전에 이곳에서 스러져간 수많은 젊음을 기리며 우리는 전적비 앞에서 묵념했다. 인민군은 최후까지 진지를 사수하기 위해 어린 병사들의 발목과 기관총을 쇠사슬로 묶어놓고 끝까지 저항하게 했다. 하지만 서울을 탈환하려는 아군의 의지는 그보다 강했다. 아군 전사자 178명, 인민군 사살자 1750명의 치열한 전투였다. 한미 해병이 안산 일대의 주요한 봉우리들을 모두 점령한 것은 9월 25일에 이르러서였다. 그리고 마침내 9월 27일, 한국 해병대 청년들이 중앙청에 걸려 있던 인공기를 내리고 태극기를 게양했다. 전적비 옆에 있는 ‘해병대 수도 서울 탈환 작전’ 안내판에는 그 사진이 중앙에 가장 크게 게시돼 있다. 사진과 지도가 어우러진 설명문을 읽으며 6·25 전쟁을 이야기하다가 우리는 잠시 서울 시내를 내려다봤다. 안내판에는 ‘104고지 탈환 후 서울 시내를 바라보는 해병대’ 사진이 있는데 그 사진 속의 서울은 포연에 휩싸인 폐허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서울은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104고지의 총성이 시작된 지 1주일 뒤 수도탈환기념식에 개선부대로 참석한 해병대 청년들처럼.우리는 연희동 주택가를 지나고 연세대 캠퍼스를 거쳐 안산 자락을 넘어 서대문 쪽으로 코스를 잡았다. 연세대는 당시 6일 동안 엄청난 포격전이 벌어진 격전지였다. 6·25 발발 직후에 인민군 사령부가 들어섰고 서울 수복 후에는 미군이, 1·4 후퇴 때는 중공군이 각각 진지를 구축해 전란 내내 군인들이 주둔했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학생들의 자유와 교정의 평화가 가득하다. 1922년에 세워진 핀슨관 앞에서 우리는 잠시 숨을 고르며 멈춰 섰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남학생 기숙사였고 지금은 윤동주 기념관으로 쓰는 국가지정 문화재 건물이다. 윤동주 시인은 1938년과 1940년에 각각 이곳에 머물렀는데, 하숙집터로 알려진 종로구 누상동에서 등교할 때는 안산 자락을 넘어다니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우리는 캠퍼스 북쪽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온실을 지나자 안산으로 올라갈 수 있는 쪽문이 나타났다.안산은 자락길이 잘 갖춰져 있지만, 그 길로 진입하기까지는 등산로의 숲길을 헤치며 가야 한다. 서울 수복을 위해 한미 해병대가 진격했던 길, 일제강점기의 윤동주 시인이 하숙집을 오갔던 길, 그 길을 가늠해 보면서 흙길을 밟아 오르다가 숨이 차오를 무렵 안산 자락길을 만났다. 휠체어와 유모차도 다닐 수 있게 조성한 순환형 무장애 숲길답게 주말을 맞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양한 종류의 숲과 여러 방향의 조망을 즐기며 걸을 수 있는 안산 자락길은 총 7㎞로 이어져 있다. 평탄한 데크 길을 걷다가 우리가 걸어온 연희동 쪽을 내려다보면서 앞선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자유와 평화라는 유산을 되새겨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미래의 세대에게 어떤 유산을 물려줄 수 있을지 생각해 봤다. 자락길에 만발한 꽃무릇의 진홍색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올 무렵, 우리는 서대문형무소 쪽으로 이어지는 등산로의 하산길로 접어들었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들과 독재정권 시절의 민주화 운동가들이 갇혀서 고통당했던 서대문형무소의 담벼락을 따라 걷는 동안, 우리의 현재는 앞선 세대가 물려준 선물 같은 유산이라는 생각이 거듭 들었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된 김광섭의 시 ‘독방 62호실의 겨울’과 심훈의 ‘그날이 오면’을 떠올리면서, 우리가 받은 이 선물을 미래에 어떻게 물려줄 수 있을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동안 독립공원을 지나 독립문 사거리에 이르렀다.독립문 건너편에 자리잡은 영천시장도 서울미래유산이다. 1960년대에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재래시장으로 전쟁의 폐허를 딛고 자유 민주주의 사회를 발전시켜 나간 서민들의 생활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현장이다. 서울의 대표적인 골목형 전통시장인 영천시장을 통과하면 나타나는 석교교회도 서울미래유산이다. 조금 빠듯했던 일정을 따라 마지막 목적지인 석교교회에 이르자 1916년에 건립된 고딕 양식의 적벽돌 건물이 그 자체만으로도 대견하고 의미 있게 여겨졌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쟁의 폭격에도 무너지지 않고 모든 것을 지켜본 교회. 저 안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사연들로 기도했을까. 이것은 유형의 유산이지만 무형의 유산이기도 하다. 오늘 둘러본 모든 것들이 그랬다. 외형상 문화적 인공물에 해당하는 유산이라도 거기에는 문화적 행위와 이야기가 담겨 있고 물리적 배경이 존재한다.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유산은 어쩌면 유형과 무형으로 나눌 수 없는 우리의 삶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하루하루를 성실히 의미 있게 살아가다 보면 유·무형의 유산은 저절로 쌓여갈 것이다. 미래 세대에게 전할 100년 후의 보물을 둘러보는 서울미래유산 투어. 치열했던 전쟁의 결과로 얻은 자유와 평화의 길을 걸었던 여정의 마지막에서 맑디 맑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연희고지 전투를 끝낸 뒤 피아의 구분 없는 시체더미 속에서 허탈한 마음으로 밤을 맞이했을 때, 동쪽 하늘로 한가위의 둥근 달이 떠올랐다고 했던가. 올해도 그 달은 어김없이 떠올라 우리를 비춰 줄 것이다. 100년 후의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글·해설 고은주 소설가사진 김학영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연구위원 ■다음 일정 제19회 4·19민주묘지 ●출발 일시 10월 3일(토) 오전 10시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연희동 주택가에서의 처절한 전투…아름다운 서울의 평화를 선사하다

    연희동 주택가에서의 처절한 전투…아름다운 서울의 평화를 선사하다

    2005년에 출간한 장편소설 ‘신들의 황혼’을 쓸 때 나는 ‘연희고지 전투’ 장면에서 가장 가슴이 아팠다. 주인공은 겨우 스무 살이었다. 6·25 전쟁이 시작되고 사흘 만에 빼앗긴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연합군이 감행한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한국 해병대원. 불과 한 달 전에 입대한 학도병이었지만 그는 어느덧 죽음에 무감각해져 있었다. 오로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만이 남아 있었다. 포성과 화염에 휩싸인 인천항에서 상륙주정의 문이 열리자 무조건 앞을 향해 뛸 때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많은 인민군이 남쪽으로 내려간 상태에서 항공 폭격과 함포 사격을 퍼부은 뒤였으므로 인천에 상륙한 병사들에게 다가온 것은 전투가 아니라 시체 썩는 냄새였다. 적들이 버리고 간 각종 중화기 사이에서 뒹구는 인민군의 시체들, 불타버린 시체들…. 후퇴하는 적군과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면서 도달한 행주 나루에는 허옇게 불어터진 시체들이 물에 떠다니고 있었다. 그들이 오기 직전에 서울 진격의 교두보 확보를 위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증거였다. 수륙양용 장갑차를 타고 건너면서 내려다본 한강에는 인민군과 미군과 국군의 시체가 뒤엉켜 있었다.그러나 서울 서쪽 안산의 줄기인 연희고지 근처에 이르자 상황이 달라졌다. 눈앞의 104고지에는 인민군이 기관총과 박격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고지 앞을 흐르는 하천과 구릉은 적에게만 유리한 지형지물이었다. 게다가 나머지 땅은 엄폐물 하나 없이 트여 있는 개활지였다. 그의 소총 부대는 그 모든 것을 헤치며 나아가야 했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의 훈련장이기도 했던 연희 104고지는 천연 요새이자 적의 최후 방어선이었으므로 서울 탈환을 위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교전의 회오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스무 살 청년은 정신없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동료들의 몸에서 피가 솟구쳐 오르고 곳곳에서 비명이 들려와도 무조건 나아가야 했다. 한국 해병 제1대대는 26명만이 생존했으나 104고지를 탈환함으로써 서울 수복 전투의 승기를 잡았다. 바로 그곳, 연희 104고지 전적지를 찾았다. 지난 26일 서울신문과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이 함께하는 ‘2020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의 18번째 여정 ‘104고지와 안산’에서였다. 서울 수복 70주년 기념일을 이틀 앞둔 주말, 하늘은 높고 햇살은 투명했다. 6·25 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 수복을 이룬 것에 대해 우리는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1950년 9월 15일과 28일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서대문구 연희동, 이 평화로운 주택가가 바로 그 시기의 격전지였다. ‘연희104고지앞(구 성산회관)’이라는 이름의 버스 정류장에 내리면 눈앞에 보이는 대형 건물(구 성산회관, 현 지오영) 뒤의 낮은 산이 104고지다. 그곳으로 안내하는 표지판이 없어서 지도를 살펴 가며 주택가의 오르막길을 올라가니 작은 공원이 나타났다. 1982년에 세워진 ‘해병대104고지전적비’가 그곳의 주인공으로 높게 서 있다. 그러나 1958년에 처음 설치했다는 자연석 비석을 찾을 길 없어 둘러보니 전적비 맞은편 아래로 뒷모습의 윗부분만 조금 보였다. 그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있으나 표지판이 없었다. 지금은 ‘궁동 공원’으로 바뀐 104고지 정상이 아닌 산자락에 전적비가 설치된 까닭은 바로 이 비석 때문이었을 터인데, 전쟁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1950년대에 비문을 새겼던 역사적인 바윗돌로 이끄는 표지판이 없는 게 아쉬웠다. 연희 104고지 전적지는 서울미래유산이자 현충시설이다. 70년 전에 이곳에서 스러져간 수많은 젊음을 기리며 우리는 전적비 앞에서 묵념했다. 인민군은 최후까지 진지를 사수하기 위해 어린 병사들의 발목과 기관총을 쇠사슬로 묶어놓고 끝까지 저항하게 했다. 하지만 서울을 탈환하려는 아군의 의지는 그보다 강했다. 아군 전사자 178명, 인민군 사살자 1750명의 치열한 전투였다. 한미 해병이 안산 일대의 주요한 봉우리들을 모두 점령한 것은 9월 25일에 이르러서였다. 그리고 마침내 9월 27일, 한국 해병대 청년들이 중앙청에 걸려 있던 인공기를 내리고 태극기를 게양했다. 전적비 옆에 있는 ‘해병대 수도 서울 탈환 작전’ 안내판에는 그 사진이 중앙에 가장 크게 게시돼 있다. 사진과 지도가 어우러진 설명문을 읽으며 6·25 전쟁을 이야기하다가 우리는 잠시 서울 시내를 내려다봤다. 안내판에는 ‘104고지 탈환 후 서울 시내를 바라보는 해병대’ 사진이 있는데 그 사진 속의 서울은 포연에 휩싸인 폐허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서울은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104고지의 총성이 시작된 지 1주일 뒤 수도탈환기념식에 개선부대로 참석한 해병대 청년들처럼.우리는 연희동 주택가를 지나고 연세대 캠퍼스를 거쳐 안산 자락을 넘어 서대문 쪽으로 코스를 잡았다. 연세대는 당시 6일 동안 엄청난 포격전이 벌어진 격전지였다. 6·25 발발 직후에 인민군 사령부가 들어섰고 서울 수복 후에는 미군이, 1·4 후퇴 때는 중공군이 각각 진지를 구축해 전란 내내 군인들이 주둔했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학생들의 자유와 교정의 평화가 가득하다. 1922년에 세워진 핀슨관 앞에서 우리는 잠시 숨을 고르며 멈춰 섰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남학생 기숙사였고 지금은 윤동주 기념관으로 쓰는 국가지정 문화재 건물이다. 윤동주 시인은 1938년과 1940년에 각각 이곳에 머물렀는데, 하숙집터로 알려진 종로구 누상동에서 등교할 때는 안산 자락을 넘어다니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우리는 캠퍼스 북쪽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온실을 지나자 안산으로 올라갈 수 있는 쪽문이 나타났다.안산은 자락길이 잘 갖춰져 있지만, 그 길로 진입하기까지는 등산로의 숲길을 헤치며 가야 한다. 서울 수복을 위해 한미 해병대가 진격했던 길, 일제강점기의 윤동주 시인이 하숙집을 오갔던 길, 그 길을 가늠해 보면서 흙길을 밟아 오르다가 숨이 차오를 무렵 안산 자락길을 만났다. 휠체어와 유모차도 다닐 수 있게 조성한 순환형 무장애 숲길답게 주말을 맞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양한 종류의 숲과 여러 방향의 조망을 즐기며 걸을 수 있는 안산 자락길은 총 7㎞로 이어져 있다. 평탄한 데크 길을 걷다가 우리가 걸어온 연희동 쪽을 내려다보면서 앞선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자유와 평화라는 유산을 되새겨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미래의 세대에게 어떤 유산을 물려줄 수 있을지 생각해 봤다. 자락길에 만발한 꽃무릇의 진홍색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올 무렵, 우리는 서대문형무소 쪽으로 이어지는 등산로의 하산길로 접어들었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들과 독재정권 시절의 민주화 운동가들이 갇혀서 고통당했던 서대문형무소의 담벼락을 따라 걷는 동안, 우리의 현재는 앞선 세대가 물려준 선물 같은 유산이라는 생각이 거듭 들었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된 김광섭의 시 ‘독방 62호실의 겨울’과 심훈의 ‘그날이 오면’을 떠올리면서, 우리가 받은 이 선물을 미래에 어떻게 물려줄 수 있을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동안 독립공원을 지나 독립문 사거리에 이르렀다.독립문 건너편에 자리잡은 영천시장도 서울미래유산이다. 1960년대에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재래시장으로 전쟁의 폐허를 딛고 자유 민주주의 사회를 발전시켜 나간 서민들의 생활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현장이다. 서울의 대표적인 골목형 전통시장인 영천시장을 통과하면 나타나는 석교교회도 서울미래유산이다. 조금 빠듯했던 일정을 따라 마지막 목적지인 석교교회에 이르자 1916년에 건립된 고딕 양식의 적벽돌 건물이 그 자체만으로도 대견하고 의미 있게 여겨졌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쟁의 폭격에도 무너지지 않고 모든 것을 지켜본 교회. 저 안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사연들로 기도했을까. 이것은 유형의 유산이지만 무형의 유산이기도 하다. 오늘 둘러본 모든 것들이 그랬다. 외형상 문화적 인공물에 해당하는 유산이라도 거기에는 문화적 행위와 이야기가 담겨 있고 물리적 배경이 존재한다.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유산은 어쩌면 유형과 무형으로 나눌 수 없는 우리의 삶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하루하루를 성실히 의미 있게 살아가다 보면 유·무형의 유산은 저절로 쌓여갈 것이다. 미래 세대에게 전할 100년 후의 보물을 둘러보는 서울미래유산 투어. 치열했던 전쟁의 결과로 얻은 자유와 평화의 길을 걸었던 여정의 마지막에서 맑디 맑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연희고지 전투를 끝낸 뒤 피아의 구분 없는 시체더미 속에서 허탈한 마음으로 밤을 맞이했을 때, 동쪽 하늘로 한가위의 둥근 달이 떠올랐다고 했던가. 올해도 그 달은 어김없이 떠올라 우리를 비춰 줄 것이다. 100년 후의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글·해설 고은주 소설가사진 김학영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연구위원 ■다음 일정 제19회 4·19민주묘지 ●출발 일시 10월 3일(토) 오전 10시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피고 지는 자연과 생명, 3D 애니메이션으로 창조하다

    피고 지는 자연과 생명, 3D 애니메이션으로 창조하다

    메마른 나뭇가지에서 초록 잎이 돋아나 풍성한 그늘을 드리우는가 싶더니, 어느새 붉게 물들었던 잎사귀들을 우수수 털어내고 다시 빈 몸이 된다. 형형색색의 과일과 꽃들이 허공을 떠다니는가 하면 작은 생물과 식물들이 바닷속을 유영한다. 미국 영상미디어 설치작가 제니퍼 스타인캠프가 3D 애니메이션으로 창조한 디지털 풍경들이다. 스타인캠프의 개인전 ‘소울스’(Souls)가 서울 자하문로 리안갤러리와 율곡로 리판머핀에서 동시에 열리고 있다. 1958년 덴버에서 태어나 패서디나 아트센터디자인대학과 캘리포니아 예술대학에서 공부한 스타인캠프는 1989년부터 3D 애니메이션과 뉴미디어로 작업해 온 이 분야 개척자다.리안갤러리에선 ‘레티널(Retinal) 1, 2’, ‘스틸 라이프(Still-Life) 4’, ‘주디 크룩(Judy Crook) 12, 14’를 만날 수 있다. ‘레티널’ 시리즈는 화려한 비눗방울 같은 덩어리와 탯줄처럼 보이는 가닥들의 역동적인 운동감을 통해 눈 속 망막 정맥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스틸 라이프 4’는 17세기 플랑드르화파의 바니타스 정물화를 재해석했다. 인생무상, 삶의 허무를 드러낸 바니타스 정물화와 달리 컴퓨터그래픽으로 구현한 과일과 꽃, 식물의 우아한 움직임은 생의 환희를 느끼게 한다. ‘주디 크룩’ 시리즈는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나무의 이미지를 사실적으로 담았다. 리만머핀에선 ‘블라인드 아이(Blind Eye) 4’, ‘프라이모드리얼(primordial) 1’, ‘데이지 체인 트위스트, 톨’(Daisy Chain Twist, tall)등 세 작품이 전시 중이다. 10월 31일까지.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고어 텍스를 인류에 선물한 고어 83세로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고어 텍스를 인류에 선물한 고어 83세로

    비가 쏟아지는 날씨에도 산행 등 야외 활동을 즐길 수 있도록 고어 텍스를 발명한 로버트 고어가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실 1976년에 그가 고안한 이 신기술 덕에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 달림이들, 야외 활동을 즐기는 이들이 덕을 봤다. 의류뿐만 아니라 인공심장 패치(심장근육을 단련시키는 장치), 기타 줄, 우주복, 진공 처리된 가방 등 수많은 제품에도 이 기술이 응용돼 많은 이들의 실생활에 도움을 줬는데 그가 지난 17일(이하 현지시간) 오랜 질환 끝에 세상을 등졌다고 1958년 고인의 아버지가 창업하고 고인이 고어 텍스를 개발한 회사 WL 고어 앤드 어소시에이츠가 뒤늦게 알렸다고 영국 BBC가 20일 전했다. 미국 유타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델라웨어 대학에서 화학 학사학위를, 미네소타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딴 뒤 아버지와 빌, 비에브 두 삼촌이 함께 창업한 회사에 취업했다. 1969년 그는 이 회사 연구실에서 길다란 사슬을 반복해 만들어내는 커다란 분자로 이뤄진 새로운 형태의 폴리머(polymer·고분자) 소재를 개발했다. 그의 아버지는 또 하수관들을 잇는 테이프를 새로 개발하라고 시켰는데 마침 그는 듀폰에 재직할 때부터 미세한 구멍들을 많이 만드는(microporous) 구조로 10배 이상 늘어나는 폴리테트라플루오로에틸렌(PTFE)란 신소재를 연구하고 있었다. 수십억 개의 미세한 구멍들은 물방울 입자 크기보다 작아 방수 기능을 하면서도 공기가 잘 통하는 통기성도 좋아 이를 의류에 적용하는 것이 그가 연구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노스페이스와 파타고니아 등 고급 등산 의류 브랜드와 계약을 맺었고, 나이키와 계약을 맺어 트레킹화, 등산화 등에 기술을 응용하기 시작했다. 라인홀트 메스너가 1978년 에베레스트 북벽 무산소 등정 때 밀레의 고어 텍스 아우터를 입었다. 1981년 미국 항공우주국(NASA)가 우주복 소재로 채택했다. 1990년대 힙합 래퍼들이 허세 부리듯 앞다투며 신어 입소문을 내줬다.이 회사의 수석 기술자인 그렉 해논은 고어 텍스가 “우리 회사 역사에 정녕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고 지난해 일간 델라웨어 온라인와의 인터뷰를 통해 털어놓았다. 고인이 회장을 맡은 1996년 수십억 달러의 가치를 지닌 회사로 성장했다. 그는 당시 “우리의 의료 용품 덕에 인공심장을 이식 받아 더 오래 살게 된 어린이 등 미래 세대와 우리 사회에 유산을 남겨줄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2000년 자리에서 물러났는데 현역으로 일하는 내내 국제플라스틱엔지니어협회가 주는 상을 비롯해 수많은 상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자녀들, 손주들, 증손주들이 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고어텍스’ 개발한 로버트 고어 별세…의료기기·우주복에도 쓰여

    ‘고어텍스’ 개발한 로버트 고어 별세…의료기기·우주복에도 쓰여

    전 세계적으로 널리 쓰이는 방수 원단의 대명사 ‘고어텍스(GORE-TEX)’의 개발자 로버트 고어가 지난 17일(현지시간) 세상을 떠난 것으로 전해졌다. 83세. 고어텍스를 제조하는 미국 고어사는 화학공학자이자 최고경영자(CEO)였던 고어가 오랜 지병으로 사망했다고 밝혔다고 BBC 방송이 20일 보도했다. 고어는 미국 유타주에서 태어나 델라웨어대학교와 미네소타대학교에서 각각 학사와 석사 과정을 거친 뒤 아버지와 삼촌이 1958년 설립한 고어사에 합류했다. 1969년 새로운 형태의 폴리머를 개발한 고어는 이를 10배 길이까지 잡아당겼을 때 물방울 입자보다도 작은 미세구멍이 수십억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물방울 입자가 통과하지 못하는 미세구멍이 촘촘히 생성된 원단의 방수 기능을 알아본 고어는 이 원단에 ‘고어텍스’라는 명칭을 붙여 1976년 선보였다. 땀 등 몸에서 배출한 습기는 밖으로 내보내고 눈·비 등 외부의 수분 침투를 막는 고어텍스는 등산복과 신발 등 수많은 아웃도어용품에 적용되면서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또 심장 패치와 같은 의료기기나 우주복, 기타 줄 등을 제조하는 데에도 널리 쓰이고 있다. 1996년 고어는 “우리 제품의 도움으로 심장 수술을 받은 아동들을 포함해 미래 세대와 사회에 값진 유산을 남기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고어사의 CEO 자리에 올라 수십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회사를 이끄는 4년 동안 고어는 세계 플라스틱기술자협회(SPE) 등으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여러 차례 상을 받기도 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사모님 따라 강남 간 화랑… 가로수길에 예술이 피어났다

    사모님 따라 강남 간 화랑… 가로수길에 예술이 피어났다

    서울미래유산 투어로 가는 길. 지하철 속에서 사람들은 똑같은 모습으로 핸드폰 화면에 고개를 박고 있지만 보고 있는 것은 제각각이다. 지하철 한 칸이라는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과 마음은 핸드폰 화면을 통해 가까이는 집에서부터 학교, 일터, 부산, 먼 이국으로 가 있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을 만나는 투어를 앞두고 있어서일까? 공간에 가득 이어진 가상의 선들이 보이는 듯했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20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6회 ‘백남준 만나기’는 비 내리는 한남대교를 바라보며 시작됐다. 예술로 소통을 시도했던 백남준의 투어를 소통의 관문인 한남대교에서 시작한 전혜경 해설사의 선택이 탁월했다.●서울미래유산 지정된 ‘제3한강교’ 한남대교가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이유는 서울 강남 시대를 여는 출발점인 교량이고, 경부고속도로와 연결돼 서울과 전국이 소통하는 관문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다리는 용산구 한남동과 강남구 신사동 사이를 잇는 한강에서는 네 번째로 건설된 교량이다. 개통 당시 광진교를 제외한 인도교 중에서 세 번째로 지어졌기 때문에 제3한강교로 불려서 1979년 가수 혜은이가 부른 ‘제3한강교’라는 노래가 공전의 히트를 했다. 1985년 한강종합개발사업을 하면서 한남대교로 이름이 변경됐다. 한남대교는 한양과 삼남(충청·전라·경상) 지방을 연결하는 선상에 위치한 교통 요충지로 한양의 ‘한’, 삼남의 ‘남’에서 한 글자씩을 따와 붙여진 명칭이다. 경부고속도로의 종점은 양재IC이지만 한남대교 남단이 경부간선도로의 종점이다 보니 일반적으로 경부고속도로 입구라고 부른다. 투어단 일행은 발걸음을 옮겨 길 입구에 노란 은행잎 문양의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 가로수길로 들어섰다. 1980년대 중반 자발적으로 길가에 심은 은행나무 때문에 가로수길이란 명칭을 얻게 됐다. 신사동 가로수길의 중요한 특색은 갤러리와 패션 관련 업종의 입점을 들 수 있다. 갤러리는 신사동 가로수길 형성 과정에서 문화적 이미지 활성화의 촉매 역할을 했다. 미술품을 향유하던 부유층이 강남 지역으로 대거 이동하자 인사동 지역의 화랑들도 강남으로 이전했다. 1997년 17곳이던 갤러리는 신사동 가로수길이 문화 브랜드로 발전할 수 있는 밑거름 역할을 했다. 그러다 1997년 외환위기와 함께 미술품 수요가 사라지면서 강남의 미술품 수요가 위축됐고 화랑들은 다시 강북으로 회귀하게 된다.●파리 패션전문기관 에스모드 분교 개교 패션 관련 업종으로 프랑스 파리의 패션 전문교육기관인 에스모드(ESMOD)가 1989년 신사동에 서울분교를 개교했고, 1991년에는 서울모드 패션전문학교가 문을 열었다. 이로 인해 신사동 가로수길 일대는 패션 디자이너 지망생과 해외 유학을 다녀온 디자이너들이 자리잡게 되는 계기가 되면서 ‘패션 거리’, ‘디자이너 거리’로 불리게 됐다. 2011년에는 패션 관련 업종이 45.7%를 차지할 만큼 가로수길의 상업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로수길처럼 자생적인 변화를 겪어 온 장소들은 대부분 일정한 변화의 패턴을 거친다. 먼저 특정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조건을 찾아 모여든다. 두 번째 단계는 이들이 선호하는 예술적 분위기를 가진 카페, 다양한 외국 음식점 등이 생겨난다. 이용자들의 특색에 맞춰 형성된 독특한 분위기에 매혹된 다수의 일반인들이 유입된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방문자의 증가가 지역 상권 확대로 이어지며 지대와 임대료를 끌어올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임대료를 부담할 수 없는 업소는 결국 떠나게 된다. 사람들이 가로수길로 모이는 이유는 분위기 때문인데, 현재 가로수길에는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대형 프랜차이즈 상점들이 들어서며 예전의 독특한 매력과 정체성을 지닌 분위기는 사라졌다. 압구정로에서 가로수길로 들어서 잠시 걷다 보면 오른편에 거대한 캔버스를 연상시키는 예화랑이 보인다. 예화랑은 1978년 개관해 백남준 관련 작품전을 기획했고, 강남의 첫 화랑으로서 신사미술제를 개최하는 등 강남 지역의 미술문화를 선도한 화랑으로 지난해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됐다. 예화랑 건물은 장운규 건축가가 설계했다. 이 건축물은 2006년 한국건축가협회상, 2006년 한국건축문화대상, 제24회 서울시건축상 등을 받았다. 외벽을 하나의 공간으로 설계한 입체적인 건축물은 벽이면서 동시에 무한한 가능성을 표현하는 입체 조각물이다. 정면보다 골목을 돌아 측면에서 봐야 외벽 사이 공간으로 새로운 시야를 경험할 수 있다. 건물 자체가 예술이다.●화랑 ‘강남 시대’ 연 이숙영 관장 우리나라 화랑의 강남 시대를 연 어머니 이숙영 관장의 뒤를 이어 예화랑을 이끄는 2세대 김방은 관장은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예술을 지향한다. 갤러리 공간 안에서의 전시기획뿐 아니라 도시의 문화 환경을 조성하는 공공미술 프로젝트와 외부 전시 기획, 기업과의 문화 마케팅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미술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2층에는 니콜라스 보데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계단 사이로 비추는 빛과 조도를 달리한 조명등에 보이는 작품들은 공간과 소통하는 듯 생생한 감동을 전달해 준다. 이날 참석자들은 2016년 백남준 타계 10주년을 기념해 예화랑에서 개최했던 특별전 ‘백남준 쇼’ 관련 영상을 3층 영상실에서 보면서 김 관장의 특별해설을 들었다. 코로나19로 인한 언택트 상황에서 중요한 사회적 화두로 언급되는 것 중 하나가 ‘소통’인데, 백남준은 50여년 전부터 ‘참여와 소통’을 주제로 작품 활동을 했다. 그는 한국의 무속이 신과 인간을 연결해 주는 소통이요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말하며, 자신을 ‘굿쟁이’로 규정하며 예술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무당에 비유했다. 백남준의 여권 번호는 7번이었다. 그만큼 해외로 나가기 어려웠던 시절에 일찍부터 일본과 독일에서 음악 공부를 한다. 1958년에는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를 만나 인생과 예술세계에 일대 전환을 맞는다. 이후 1963년 독일에서 열린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TV’로 비디오아트의 선구적 활동을 전개하고, 1964년 뉴욕에서 음악, 퍼포먼스, 비디오를 결합한 작품들을 선보이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비디오아트에 관심이 많았던 백남준은 TV 기술 연구에 몰두해 영상제작 기계인 비디오 신시사이저를 개발한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기술과 예술을 합친 비빔밥이라고 칭한다.이러한 백남준의 경력은 그를 세계적 예술가로 평가하게 하는 데 손색이 없지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의견이 많다. 하지만 백남준은 자신의 인생을 결정지은 사상이나 예술의 바탕은 한국을 떠나기 전에 모두 흡수했고 자신의 뿌리는 한국에 있다고 말한다. 그의 어린 시절 추억은 예술 창조에서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특히 여러 사람이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추도록 부추기는 굿하는 장면은 그가 작품을 만들 때 가장 큰 영향을 준다고 고백한다. 한 예로 샴페인을 구두에 따라 마시기 같은 해프닝은 어린 시절 새참과 함께 나온 막걸리를 고무신에 받아 마시는 것을 봤던 기억에서 비롯된 의식이라고 한다. 백남준의 작품 ‘다다익선’은 ‘많음’의 대상이 물건이 아니라 ‘수신(受信)의 절대 수’, 즉 커뮤니케이션을 뜻한다. 차별 없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장을 열어 많은 사람들이 서로 말하고 들으면서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결국 현대의 소통 부재인 조직의 혁신까지도 가능하게 하자는 메시지를 담았다. 이처럼 백남준은 일생 ‘참여와 소통’이라는 분야를 개척하고 예술로 승화시켰다. 백남준은 첨단 테크놀로지를 과감하게 예술에 도입해 새로운 장르들을 열며 시간을 앞서간 개척자다. 이는 그가 예술뿐 아니라 기술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다양한 예술과 기술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각 영역을 넘나들면서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추구한 점에서 그는 ‘현대예술의 르네상스 맨’으로 평가받고 있다.이날 투어의 마지막 코스는 도산공원이었다. 도산공원에는 도산기념관과 도산 안창호 선생 내외 묘소, 동상이 있다. 도산 안창호 기념관은 코로나19로 관람할 수 없었는데 입구에 도산 안창호 선생이 앉아 있는 포토존 벤치가 마련돼 있다. 16세에 조국과 민족을 위해 평생을 바치기로 했다는 안창호 선생의 애국심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백남준과 안창호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간 이들이다. 업적의 경중을 따지기보다 각자의 위치에서 보여 준 열정에서 다시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글 이소영 동화작가 사진 김학영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연구위원 ■다음 일정 제17회 풍납동 전설 ●일시 : 9월 19일(토) 오전 10시 ●신청: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아베 집권 8년, 근거 없는 환상의 시대… 한일 관계마저 악용”

    “아베 집권 8년, 근거 없는 환상의 시대… 한일 관계마저 악용”

    2012년 재집권 이후 약 8년간 역대 최장기 집권 기록을 써 온 아베 신조 일본 총리(자민당 총재)가 14일 무대 저편으로 물러난다. ‘수정주의 역사관과 우경화’, ‘총리관저 중심의 1강 독재’, ‘아베노믹스와 장기 불황 탈출’, ‘역대 최악의 한일 관계’ 등 지난 시대의 명암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일본 내에서 진행되고 있다. 대표적 진보 진영 학자인 야마구치 지로(62) 호세이대 법학부 교수를 지난 11일 도쿄도 내 호텔에서 만나 아베 시대에 대한 평가와 전망을 들어 봤다. 그는 “지난 8년의 아베 집권기는 일본 사회가 근거 없는 자기만족의 환상에 빠져 엄혹한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했던 시간이었다”고 규정했다. 한일 관계의 악화는 이 과정에서 아베 정권에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됐다고 했다. -아베 총리의 장기 집권이 가능했던 주된 요인이 무엇인가. “정치, 경제, 사회, 외교안보 등 환경이 두루 아베 총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재임 동안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가속화되면서 젊은 세대의 취업 여건이 이전보다 크게 좋아진 게 대표적이다.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과 중국의 세력 확장 등 주변국 정세의 긴장이 고조된 것도 매파인 아베 총리에게 ‘외교안보에 강하다’는 이미지를 형성해 줬다. 야당 분열도 아베 정권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도록 만들었다.” -‘아베노믹스’의 성과는 어떻게 평가하나. “금융완화는 ‘엔저’(엔화가치 하락)를 유발해 수출 기업에 큰 도움이 됐고 주가 상승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경기 회복의 온기가 부유층과 대기업에만 편중됐고 일반 국민에게는 제대로 가지 않았다. 실질임금은 오히려 하락해 불공평과 격차가 한층 확대됐다.” -아베 총리가 사임하게 된 진짜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나. “그가 밝힌 궤양성 대장염은 단지 구실에 불과할지 모른다. 객관적으로 분명한 사실은 아베 총리가 완전히 막다른 길에 몰려 있었다는 것이다. 지난해 10월 소비세 증세로 경기 악화를 부추겼고, 올해 코로나19 사태에서도 한·중·일·대만 등 동아시아 4개국 중 대응을 가장 잘못했다. 지난 4월 이후 30% 정도의 역대 최저 지지율이 고착화됐던 것은 국민들의 정권에 대한 총체적 불신의 반영이다.” -총리관저의 관료 인사권 장악이 많은 부작용을 낳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고위 관료 인사에 정치 권력자가 관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집권이 장기화하는 과정에서 정권에 대한 충성도가 인사의 척도가 된 게 문제였다. 정권에 비판적이거나 정책 방향에 의문을 제기하는 관료들이 좌천되거나 찬밥 대우를 받는 상황이 이어졌다. 행정과 관련된 과도한 정치적 통제는 모리토모 학원에 대한 국유지 헐값 매각, 가케 학원에 대한 수의학과 특혜 인가 등으로 이어졌다. 공적인 권력의 사물화였다. 잘못된 정책 방향이나 결정에 대한 관료들의 비판이나 내부 고발이 일어나지 않게 됐다. 행정의 공평함과 공정함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모리토모 특혜와 같은 권력형 비리 의혹에 일본 국민들이 너무 소극적으로 대응한 것 아닌가. “이 부분이 한국과 일본의 매우 큰 차이다. 한국에서는 박근혜 대통령 때 권력의 사물화가 나타나자 국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정권을 퇴진시켰다. 그러나 일본에는 국민의 무기력이랄까 무관심이 팽배해 있다. 아베 정권의 문제가 드러나도 일시적으로는 지지율이 내려가지만 곧 회복되곤 하는 일이 반복됐다. 이제 일본은 아시아 민주주의의 선두주자라고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하나의 거대한 ‘환상’이 일본 사회에 확산된 결과라고 본다. 일본 내각부가 매년 실시하는 사회의식 조사 결과를 보면 2010년대 들어 큰 변화가 나타난다. 사회현상에 대한 만족도가 2010년대 전반기부터 급격히 상승한다. 자연환경, 양질의 치안 등 긍정적인 부분에 대한 인식이 크게 높아지고 재정 악화, 격차 확대 등 부정적인 요소에 대한 인식은 약해진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이에 따른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가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본다. 거대한 재앙을 경험하면서 ‘살아 있는 것만으로 다행이다’,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족하다’는 현상 만족감이 강해진 것이다.” -일본의 상황이 계속 나빠지는 데도 원인이 있다고 보이는데. “그렇다. 성장이 정체되고 인구도 줄면서 국가의 쇠약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그런 현실 인식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근거 없는 만족감, 자존감, 자기 긍정으로 이어졌다. 이런 상황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정신적 도핑(약물 투여)이라고 할까. 그러나 이는 악화되는 현실에 대한 불감증을 낳는다. 코로나19 대책도 그러다가 결국 한국, 중국에 뒤처지게 된 것 아닌가. ‘여기가 문제다’, ‘이 부분에서 실패했다’는 비판적 논의를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은 큰 문제다. 문제점을 직시해 대책을 세우고, 이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켜 나아가겠다는 의지가 약화된 게 오늘날 일본 사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이 아베 장기 집권에 큰 도움이 됐을 것 같다. “아베 정권은 때마침 국민들의 의식 변화가 본격화하는 시점에 출범했다. 정권 안정에 엄청난 도움이 됐음은 물론이다. 이 과정에서 아베 정권은 ‘일본은 여전히 아시아의 강대국’이라는 근거 없는 자존감을 국민들에게 심으며 내셔널리즘을 자극하는 수법을 썼다. 한일 관계 악화는 그로 인한 결과다.” -수정주의 역사관의 확산도 그런 맥락에서 볼 수 있을 듯하다. “사회당의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전후 50주년인 1995년 침략과 식민 지배에 대해 반성과 사과의 뜻을 밝히는 담화를 낸 것은 연립여당이었던 자민당의 동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당시는 모두 전쟁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었다. 보수이건 진보이건 ‘과거 일본이 일으킨 전쟁은 잘못된 것이었다’, ‘아시아 사람들에게 심대한 피해를 입힌 책임이 있다’와 같은 인식들이 있었다. 하지만 전후 75년이 지난 현재 자민당 정치가들의 지적 수준은 크게 낮아졌다.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 최근 우익 작가들의 저열한 역사수정주의 책들이 잘 팔리고 있는 것도 일본 사회의 이런 분위기를 대변한다. 조작된 얘기를 역사인 듯 말하는 풍조가 확산되면서 일본 문화의 열화가 초래되고 있다. 이를 촉진한 대표적 인물이 아베 총리였다.” -한일 간 첨예한 과거사 이슈인 ‘징용 피해자’와 ‘위안부’ 등 2개의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한다고 보나. “둘 다 직접 피해를 본 당사자들이 노령화돼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현실적인 해결책은 정치적 타협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기금을 만들어 보상한다는지 하는 것이다. 일본 정부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적극적인 보상에 나서는 것이 최상이겠지만 그것은 이상적인 바람이다. 현재 일본 국내 상황을 볼 때 불가능하다. 정치적인 해결의 유연성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총리직을 이어받게 되면서 아베 정권에 대한 반성은 불가능해 보인다. “스가 장관은 관료들을 조종하고 언론을 통제하며 아베 정권의 기둥 역할을 해 왔다. 지난 정권에 대한 반성은 불가능하고 폐해도 바로잡히지 않을 것이다. 다만 스가 정권은 코로나19와 경제 위기 지속 등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일 것이다.” -역사수정주의는 계속될 것으로 보나. “아베 정권만큼 내셔널리즘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을 것이다. 스가 장관은 최소한 야스쿠니신사(A급 전범 합사)에 갈 성향은 아니다. 그러나 일반 국민 사이에서 수정주의 역사관에 기초한 내셔널리즘은 계속 확산될 것이다. 이미 종전 75주년이 지난 가운데 전쟁의 기억은 앞으로 점점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글 사진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야마구치 교수는 1958년 오카야마현 출생. 도쿄대 법학부 졸업. 영국 옥스퍼드대 연구원, 홋카이도대 교수 등을 거쳐 호세이대 법학부 교수(정치학)로 재직 중이다. 아베 신조 정권의 우경화·독재화에 맞서 이론적 비판은 물론 다양한 현장 활동도 펼쳐 왔다. 일본 정부의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 조치 때 ‘한국은 적(敵)인가’라는 제목의 지식인 공동성명을 주도하기도 했다.
  • [씨줄날줄] BTS와 빌보드/임병선 논설위원

    [씨줄날줄] BTS와 빌보드/임병선 논설위원

    1964년 영국 록그룹 비틀스가 ‘아이 워너 홀드 유어 핸드’로 빌보드 싱글 1위를 차지해 7주 연속 지키자 미국 신문들은 ‘영국의 침공’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비틀스 멤버들이 뉴욕 공항에 발을 디뎠을 때 대단한 인파가 몰려나왔고,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하자 팝 문화에선 앞선다는 미국의 자존심은 무너져 내렸다. 1980년대 미국의 팝을 동경하던 젊은이들은 매주 토요일 아침 주한미군 라디오(AFKN)에서 흘러나오던 ‘아메리칸 톱 40’ 프로그램을 이어폰을 꽂은 채 듣곤 했다. 이 프로그램은 전 세계 음악 차트 가운데 으뜸으로 인정받는 빌보드의 ‘핫 100’ 가운데 상위 40곡을 소개했다. 음원을 찾아 헤매던 이들에겐 오아시스 같던 프로그램이었다. 빌보드는 1894년 11월 1일 업계 소식을 전하는 전단지로 출발해 1936년 1월 4일 팝 음반 순위표를 출간하고 1940년 7월 20일 차트를 발표했다. 1958년 8월 4일 장르에 상관없이 싱글의 순위를 가리는 ‘핫 100’을 처음 발표했다. 장르가 세분돼 35개 차트로 늘었는데 한국의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BTS)이 핫 100에 싱글 ‘다이너마이트’를 올리자마자 바로 1위를 차지했다. 다이너마이트는 진입하자마자 1위를 차지한 곡이란 영예도 누렸다. 62년 역사에 지금까지 42번밖에 없었다. 아시아 가수가 1위를 차지한 것은 일본 출신 사카모토 규의 ‘스키야키’ 이후 무려 57년 만이며 한국 뮤지션으로는 처음이다. BTS는 이미 핫 200 앨범 차트에 여러 곡을 올려놓아 사카모토처럼 단발에 그치지 않고 비틀스급의 문화적 충격을 안길 것으로 기대된다. 힘든 시절을 견뎌낸 BTS 멤버 각자의 노력도 있겠고, 프로덕션과 음악산업 종사자들의 공로도 있겠지만 주목해야 할 대목은 BTS가 독특한 팬덤 문화인 ‘아미’와 함께 성장해 왔다는 점이다. BTS 아미들이 각자 좋아하는 멤버들의 개인적 성취를 알리는 이메일은 언론사의 대중문화 담당자들에게 매일 수십 통씩 쏟아지고 있다. 열성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전성기의 비틀스도 꿈꾸지 못한 일이다. BTS와 아미들은 단순히 스타와 팬의 관계를 넘어 정치사회적 이슈에도 한목소리로 변화를 요구한다. 지난 6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오클라호마주 털사 유세에서 ‘노쇼 운동’ 을 했고, 인종차별을 선동하는 듯한 트럼프 대통령의 트윗 글을 BTS 지지 글로 도배함으로써 위력을 과시했다. 국가 브랜드 강화를 꿈꾸는 문화체육관광부 등은 BTS를 비롯한 케이팝그룹들의 팬덤 현상을 산업과 기업으로 연결해 부가가치를 내고 싶을 것이다. 케이팝의 새 역사가 ‘소프트파워’로 연결될 방안을 지혜롭게 짜냈으면 한다. bsnim@seoul.co.kr
  • [시론] 스포츠, 모든 사람의 기본권/이대택 국민대 스포츠건강재활학과 교수

    [시론] 스포츠, 모든 사람의 기본권/이대택 국민대 스포츠건강재활학과 교수

    지난 8월 국회에서 통과된 ‘최숙현법’(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에서 ‘국위선양’ 문구가 삭제됐다.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체육을 국가 통치 운영의 도구로 삼았던 이 법의 틀이 변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이 법은 체육인과 체육단체를 중심으로 승리지상주의를 제일의 목표로 삼는 구시대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 국민 체육 진흥의 당위성을 통해 국가의 수직적인 지배력을 공고히 한다. 국민체육진흥법의 목적이 대한체육회의 설립 목적, 시도체육회나 종목단체들의 설립 목적과도 일치한다는 것이 단적인 예다. 58년 전 제정된 이 법에서 스포츠권을 누려야 할 개인은 국가의 집체주의적 목적을 실현하는 수동적인 주체로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의 체육 법과 제도의 지향점은 여전히 개인이 아닌 국가를 중심에 놓고, 체육을 국위 선양의 도구로 생각하던 1970년대 권위주의 시대에 머물고 있다. 그런데 이 법이 규정하는 스포츠의 가치가 우리 사회에 필요한 전부인가. 이 법은 우리 사회가 스포츠에 바라는 요구를 온전히 반영하고 있는가.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스포츠가 우리 모두를 위해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정확히 규정한 법이 없다. 스포츠가 우리 모두의 기본권임을 실제로 일상에서 경험해 본 적이 없고 배운 적도 없기 때문이다. 이제 스포츠를 아우르는 법의 지향점은 국가에서 개인으로, 국민에서 사람으로 옮아가야 한다. 오늘날 스포츠의 권리 주체는 ‘모든 사람’으로 확장됐다. 모든 사람은 마음껏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권리가 있고, 누구나 이 권리를 성별, 장애, 인종, 종교, 나이 등 어떤 이유로도 차별당하지 않고 누려야 한다. 사람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가치가 있다. 사람의 움직임은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도구이자 동기가 된다. 사람의 움직임을 매개로 하는 스포츠는 사람의 수만큼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다. 사람들의 신체 움직임은 한 개인의 행복과 인간관계에 영향을 주고 이는 사회 성장과 발전에 기여한다. 스포츠가 그 자체로 하나의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다. 오래전부터 스포츠는 모든 사람의 기본권이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헌장 제4조는 모든 인간은 인종, 종교, 정치, 성별로 차별받지 않고 스포츠 활동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유네스코(UNESCO)는 스포츠 참여와 실천이 모든 사람의 기본적 권리이고 이를 통해 개인, 공동체, 사회가 광범위한 이득을 얻는다고 명시한다. 유럽평의회도 모든 사람이 스포츠에 참여할 권리를 가지며 스포츠가 인간 발전의 중요한 요소로 장려돼야 한다고 천명한다. 대한민국 헌법은 스포츠권을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지만 헌법상 행복추구권, 신체의 자유,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에서 본원적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한 해 전 스포츠혁신위원회는 대한민국 스포츠 정책 패러다임의 미래상을 ‘모두를 위한 스포츠’로 전환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스포츠기본법 제정을 정부와 국회에 권고했다. 스포츠기본법은 스포츠가 모든 사람의 기본적인 권리임을 천명하는 법이다. 또 국가가 스포츠권을 보호하고 증진해야 할 의무를 규정한다. 스포츠가 개인의 일상 문화로 자리잡도록 돕기 위해서 여성, 장애인, 아동·청소년, 노인, 이주민 등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인구 집단이 차별 없이 스포츠권을 누리도록 돕는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또 스포츠기본법이 스포츠 정책을 마련하는 근거이자 정책 평가의 기준으로 작동하도록 했다. 스포츠기본법을 ‘체육 헌법’으로 삼아 58년간 46차례나 개정되면서 누더기가 된 국민체육진흥법을 비롯해 15개로 흩어져 있는 체육 관계 법령을 정리하도록 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구체적인 스포츠 진흥 계획을 세우고 이에 대한 책임을 명확히 하도록 했다. 교육부·보건복지부·문화체육관광부로 흩어진 체육 관계 대책이 스포츠기본법 아래로 모이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언제 어디서나 마음껏 스포츠에 참여하고 그 과정과 결과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승리지상주의를 국가 통치 수단으로 삼는 데 국한된 법은 지양돼야 하며 보편 타당하고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법을 지향해야 한다. 스포츠기본법 제정은 필수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 다시 필요하고 언젠가는 제정되고 말아야 할 법이다. 이미 늦었지만 더 늦지 않아야 한다. 우리도 스포츠가 모든 사람의 기본적 권리임을 이제 명확하게 소리 내어 천명하자.
  • [씨줄날줄] 진격의 라면/전경하 논설위원

    [씨줄날줄] 진격의 라면/전경하 논설위원

    인스턴트 라면은 1958년 고(故) 안도 모모후쿠 닛신식품 회장이 개발했다. 튀김요리에 착안해 닭고기맛이 밴 밀가루를 빠르게 기름에 튀긴 후 건조시킨 ‘치킨라멘’이다. 안도 회장이 라면을 개발했을 때 나이는 49세. 그는 1971년 컵라면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그런 까닭에 일본 오사카에 인스턴트라면기념관, 요코하마에 컵라면박물관과 라면 테마파크인 신요코하마라면박물관 등 라면 박물관이 3개 있다. 박물관에는 안도 회장이 라면을 개발한 실험실을 재현한 공간이 있다. 그는 사업에 망해 무일푼 신세에서 집 마당에 실험실을 마련해 라면을 개발했다. 라면을 한국에 들여온 사람은 고(故) 전중윤 삼양식품 명예회장이다. 닛신식품이 아닌, 당시 일본 라면업계 2위였던 묘조식품의 도움을 받아 1963년 출시했다. 전 회장은 동방생명 부사장으로 일본에서 경영 연수를 받았을 때 먹어 본 라면을 국내에 도입하기 위해 외화 차관도 받았다. 라면의 초기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라면의 ‘면’이 옷감이나 실로 오해됐고, 밀가루 음식은 간식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라면시장은 1965년 정부의 혼·분식 장려와 롯데공업(현 농심)의 참여, 1970년 소고기맛 라면 등장 등으로 규모를 키우다가 1980년대에 급성장했다.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돼 라면의 다양화와 고급화가 진행됐기 때문이다. 라면시장은 팔도가 1983년에, 오뚜기가 1987년에 참여해 4강 구도(농심·오뚜기·삼양식품·팔도)인데 풀무원이 2011년에 뛰어들었다. 라면의 장점은 보관과 요리의 간편함이다. 간편함은 국내의 치열한 경쟁과 더해져 한국 라면이 세계 음식으로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라면 수출은 2015년 2억 2000만 달러(약 2600억원)에서 지난해 4억 7000만 달러(약 5500억원)로 늘어났는데 올해는 더 큰 규모로 성장할 전망이다. 코로나19로 인한 강제적 ‘집콕’이 전 세계로 퍼지면서 농심은 올 상반기에 지난해 수출의 65%, 오뚜기는 72.7%를 이미 수출한 상태다. 국내 시장도 커졌다. 지금까지 라면시장의 최대 규모는 2016년 기록한 2조 1612억원이다. 다양한 먹거리가 등장하면서 라면 매출은 2조원을 넘나들었는데 올 상반기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2% 늘어난 1조 1300억원이다. 반기 실적 기준으로 사상 최대다. 특이한 점은 봉지라면의 성장이다. 그동안 뜨거운 물만 넣으면 되는 컵라면 비중이 1인 가구와 편의점 증가 등의 영향으로 2016년 33.2%에서 지난해 37.5%까지 높아졌다. 올 상반기에는 이 비중이 34.3%로 떨어졌다. 집콕이 ‘집쿡’(집에서 요리하기)으로 이어지는데 라면 요리가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lark3@seoul.co.kr
  • 美 인사, 차이잉원과 대만군 추모식 첫 참석

    美 인사, 차이잉원과 대만군 추모식 첫 참석

    미 재대만협회장, 대만 총통과 대만군 추모국무부 직원이 관리하는 사실상 공사관 수장 지난 6일 보건장관 대만 방문에 연이은 행보민주주의 공통점으로 中공산당 맞설 우군 확보대만 주재 미국 특사가 차이잉원 대만 총통과 중국 인민해방군에게 사망한 대만 군인 추모식에 처음으로 참석했다. 지난 6일에는 1979년 미중 수교 이후 처음으로 장관급 인사가 대만을 방문했다는 점에서 미국이 중국 견제를 위해 친대만 행보를 강화하는 모양새다. ABC방송 등 미 언론들은 23일(현지시간) “진먼도에서 열린 제2차 대만해협 위기 발발 62주기 추모식에 처음으로 참석했다”고 보도했다. 1958년 8월 23일 당시 마오쩌둥 국가주석이 이끌던 중국군은 본토에서 불과 4㎞ 떨어진 대만 진먼도에 폭격을 가했고 미국은 항공모함을 급파해 방어했지만 이 과정에서 많은 대만군이 희생됐다. AIT는 대만에 있는 민간기구지만 미국 공관 역할을 하고, 미 국무부 직원들이 관리한다. 따라서 AIT 회장은 사실상 미국 정부의 대만 특사로 여겨진다. 크리스텐센 회장의 첫 추모식 참석은 ‘하나의 중국’을 강조하는 중국에 민감할 수 있는 행보다. 이런 사정을 감안한 듯 일부 대만 방송은 이날 추모식을 생중계로 보도했다. 다만, 이날 차이잉원 총통이나 크리스텐슨 회장 모두 연설 없이 분향과 추모만 했으며, 현장 기자들과 별도의 인터뷰도 하지 않았다고 AP통신이 전했다. 미국의 친대만 행보는 지난 6일 앨릭스 에이자 보건복지부 장관이 미중 수교 이후 최고위급 중 처음으로 대만을 방문하면서 본격화됐다. 2018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대만여행법(미 관리의 대만 여행 허가)에 서명한 뒤 실제 고위 관리가 대만을 방문한 첫 사례였다. 미국의 친대만 기조에는 민주주의 체제를 공통점으로 중국 공산당에 맞서는 우군을 확보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경제 대결로는 중국과 무역관계가 밀접한 국가들의 전폭적 지원을 받기 힘들다는 판단이 깔린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 이경주 특파원 kdlrudwn@seoul.co.kr
  • ‘물 들어올 때 노젓자’...대만, 美 등에 업고 ‘탈중국’ 속도

    ‘물 들어올 때 노젓자’...대만, 美 등에 업고 ‘탈중국’ 속도

    대만이 미국의 ‘중국 때리기’에 편승해 ‘탈중국’ 행보를 본격화하고 있다. 차이잉원 대만 총통은 23일 제2차 대만 해협 위기 발발 62주년을 맞아 진먼도를 방문해 전사장병들을 추모했다. 진먼 포격전으로 불리는 제2차 대만 해협 위기는 1958년 8월 23일~10월 5일 중국 인민해방군이 진먼에 주둔하던 대만군에 포격을 가한 전투다. 인민해방군은 47만발에 달하는 포탄을 퍼부었지만 대만군은 미국의 해상수송 지원을 받아 이곳을 기적적으로 지켰다. 이날 행사에는 미국 주재 대만 대사 역할을 하는 윌리엄 브렌트 크리스텐센 미국재대만협회 회장이 참석했다. 대만 대사가 참석한 것은 처음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대만 언론들은 크리스텐센 회장의 참석을 두고 “대만에 대해 미국이 지지를 표시한 것”이라며 반기고 있다. 앞서 대만 정부는 지난 19일 ‘중국판 넷플릭스’인 아이치이와 텅쉰스핀(WeTV)의 서비스를 전면 금지한다고 밝혔다. 양안(중국과 대만) 교류에 관한 법규를 보완해 중국 본토 기업의 진출 금지 목록에 동영상 플랫폼 분야를 추가했다. 대만 정부는 중국 본토의 동영상 서비스가 중국 공산당의 문화적 선전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고 보고 이를 금지해왔다. 그러나 아이치이와 텅쉰스핀은 대만 현지 업체들과 협력하는 우회로를 찾아내 자유롭게 영업을 해왔다. 중국 1위 동영상 서비스인 아이치이에 가입한 대만 회원만 해도 600만명에 달한다. 그간 대만 정부가 묵인하던 중국 본토의 문화 컨텐츠 사업을 이번에 확실히 제거한 것이다. 지난 12일에는 차이 총통이 미 정부에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제안하기도 해 논란이 됐다. 차이 총통은 12일(현지시간) 미 싱크탱크인 허드슨연구소가 주최한 화상회의에서 ‘대만이 직면한 외교, 안보, 경제적 과제’를 주제로 연설했다. 그는 “나의 최우선 과제 중 하나는 공동의 이해관계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건설적 안보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고 “두 번째 중점 분야는 FTA 협상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은 중국과의 관계를 감안해 대만과의 FTA 체결에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트럼프 미 행정부가 중국 견제를 목적으로 대만과 FTA를 체결할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인권위 “민법서 친권자 징계권 삭제하고 모든 체벌 금지해야”

    인권위 “민법서 친권자 징계권 삭제하고 모든 체벌 금지해야”

    최근 충남 천안에서 보호자의 학대로 아동이 여행용 가방에 갇혀 끝내 사망하는 등 심각한 아동학대 사건이 발생하면서 친권자의 징계권 조항을 삭제하는 여러 민법 개정안들이 발의된 가운데, 국가인권위원회가 “민법에서 친권자의 징계권 조항을 삭제하고 모든 형태의 체벌 금지 조항을 민법에 반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국회와 정부에 표명하기로 했다. 인권위는 21일 상임위원회를 열고 △현행 민법에서 친권자의 징계권을 명시한 제915조를 삭제하고 △아동에 대한 체벌 금지를 보다 명확히하고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기 위한 목적으로 ‘모든 형태의 체벌을 금지한다’는 내용을 민법에 반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국회의장과 법무부 장관에게 표명하기로 의결했다. 상임위원회에 출석한 인권위원 3명과 최영애 인권위원장은 이런 내용의 의견표명 안건을 원안대로 의결했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18년 아동학대 주요통계’에 따르면, 2018년 아동학대 사건 2만 4604건 중 학대행위자가 부모인 경우가 76.9%(1만 8919건)으로 가장 높았고, 가정 안에서 아동학대 사건이 발생한 비율은 80.3%(1만 9748건)에 달했다. 현행 민법 제915조는 친권자가 자녀를 보호 또는 교양하기 위하여 필요한 징계를 할 수 있고 법원의 허가를 얻어 감화 또는 교정기관에 위탁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조항은 아동에 대한 부모의 체벌을 정당화하고, 아동을 학대한 부모가 법정에서 위법성 조각 사유로 제시하는 수단으로 이용돼 왔다. 민법이 1958년 제정된 이래 친권자의 징계권 조항은 지금까지 전혀 개정이 이뤄지지 않았다. 의견표명 안건을 검토한 인권위 사무처는 “친권자의 징계권을 삭제하면 향후 아동학대 방지를 위한 방향으로 법령과 제도를 개선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밝혔다. 사무처는 지난달 31일 기준으로 제915조를 삭제하는 내용의 민법 개정안 5개를 검토했다. 그런데 개정안 중에는 ‘친권자가 필요한 훈육을 할 수 있다’는 단서를 신설한 법안도 포함돼 있다. 단 필요한 훈육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체벌과 같이 신체적·정신적·정서적·성적 폭력 및 경제적 착취, 또는 가혹행위를 하거나 유기 또는 방임을 해서는 안 된다고 제한을 둔 법안들이다. 그러나 사무처는 “만일 ‘필요한 훈육을 할 수 있다’는 규정을 둔다면 가해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아동학대 행위가 필요한 훈육이라고 주장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법에서 친권자의 징계권을 삭제한 효과가 낮아질 우려가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이에 인권위는 친권자 징계권 삭제, 모든 체벌 금지 외에도 ‘필요한 훈육’이라는 문구를 민법에 사용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표명하기로 했다. 다만 사무처는 여러 개정안에서 ‘친권자는 자녀에게 체벌을 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조항을 새로 만든 일에 대해 “아직도 ‘부모가 훈육 차원에서 아이에게 체벌을 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시각이 상당한 상황에서 민법에 체벌 금지 조항을 명시하는 것은 아동학대 가해자에게 체벌은 금지돼 있다는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면에서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지난달 30일 기준으로 체벌을 금지한 국가는 60여개국이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열린세상] 기후변화 대책, 국가 차원에서 서둘러야/박광국 가톨릭대 행정학과 교수

    [열린세상] 기후변화 대책, 국가 차원에서 서둘러야/박광국 가톨릭대 행정학과 교수

    2019년 12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개최된 제25차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 25)는 회기 연장 끝에 온난화 대책 강화에 대해서는 합의했지만 전 세계 초미의 관심사였던 파리협정을 시행하기 위한 규칙 합의에는 실패했다.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재원 조달을 두고 선진국과 개도국 간에 극심한 이견이 노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을 비롯한 개도국들은 선진국의 역사적 책임과 더불어 더 많은 역할 분담을 요구하고 있는 데 비해 선진국들은 개도국 역시 온실가스 배출 감축에 대한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COP 25 개최에 앞서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연방법률에 근거해 최근 13개 정부기관이 발표한 ‘제4차 국가 기후 평가’ 보고서에 대해 “난 믿을 수 없어”라는 말로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다. 이에 따라 트럼프 행정부는 공식적인 파리협정 탈퇴서를 작년 11월 유엔기후변화 사무국에 제출했다. 파리협정의 출범과 발효에 결정적 역할을 한 초강대국 미국의 입장 변화를 보고 우리나라 정부가 향후 기후변화에 대한 정책 방향을 잘못 설정한다면 국가 재앙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인류가 배출하는 온실가스가 기후변화를 가속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1980년대 들어 정부간패널(IPCC)을 통한 과학적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증명되고 있다. 한 예로 세계기상기구(WMO)가 2019년 11월 발표한 대기중 온실가스 농도는 1800년대에 280※ 수준이었으나 꾸준히 증가했다. 1958년에는 315※, 2018년에는 408※으로 증가해 2018년 기준으로 이산화탄소 농도는 산업화 이전(1750년 기준)보다 1.47배 증가했고, 이로 인해 지구 평균기온은 1850~1900년대에 비해 약 1℃ 증가했다. 환경 부문에서 미국의 오판은 1980년에 대통령으로 취임한 레이건 행정부에서 처음 이루어졌다. 그 당시 레이건 대통령은 개발과 환경오염 사이의 인과성은 아직 완전히 입증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개발론자들을 대거 행정부 고위관료에 포진시켰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의회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고 이들 중 대부분은 탄핵을 받고 사임했다. 그 이후로도 미국의 환경정책은 환경보호청(EPA)을 중심으로 매우 엄격하게 시행돼 왔기 때문에 트럼프 행정부의 일탈된 기후변화 대응 정책도 해프닝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왜냐하면 기후변화를 보는 전 세계적 시각이 매우 단호해졌기 때문이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최근 2050년 탄소 중립 목표 달성을 위한 정책 이니셔티브인 ‘유러피안 그린 딜’(European Green Deal)을 발표했는데 주요 내용에는 2020년 3월 탄소 중립 목표 달성을 위한 기후법 발의, 배출권거래제 적용 범위를 선박 부문에서 향후 수송, 건설 부문까지 확대하는 안들이 포함돼 있다. 특히 중국을 포함한 개도국들은 파리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합의한 감축안보다 더 강도 높은 감축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선진국들의 온실가스 감축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징후를 볼 때 앞으로 기후변화에 대비해 강도 높은 온실가스 감축 노력이 경주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런데도 우리나라는 올해도 저먼워치, 뉴클라이밋연구소, 기후행동네트워크가 발표한 기후변화대응지수(CCPI)에서 전체 61개 국가 가운데 58위로 기후악당 국가에 이름을 올리는 불명예를 안았다. 지금부터라도 우리나라는 기후변화 대응과 관련해 이러한 오명을 벗고 오히려 기후변화 대응을 주도해 가는 국가로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온실가스를 유발하는 요인들을 산업, 발전, 수송, 가정 부문별로 철저히 진단하고 이를 줄일 수 있는 에너지 혁신 효율 전략 로드맵을 과감하게 추진해 나가야 한다. 특히 정부 차원에서 정책 수단으로 명령통제(command & control) 방식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보다는 시장유인(market incentive) 방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이에 실패할 경우 우리나라 기업들이 구입해야 하는 탄소배출권 규모는 매년 10조원 안팎인 것으로 추정된다. 기후변화에 슬기롭게 대처해 나가는 것은 미래 우리나라의 국가경쟁력을 제고해 나가는 데도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 [씨줄날줄] 베이루트/임병선 논설위원

    [씨줄날줄] 베이루트/임병선 논설위원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는 ‘지중해의 파리’로 통할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성경에 하나님이 성전을 지으려면 레바논산의 백향목을 쓰라고 했다고 나올 만큼 풍요로움을 상징하기도 했다. 아랍의 재화가 몰려드는 금융 중심지였으며 1970년대까지만 해도 중동과 아랍권에서 가장 이름난 교역항이었다. 정치와 문화, 지식의 중심지였다. 레바논 사람은 여러 인종의 피가 섞인 이가 많았다. 종파도 정말 다양했다. 기독교만 해도 마론파,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가톨릭, 가톨릭, 개신교로 나뉘고 이슬람교는 수니파, 시아파, 드루즈파 등으로 분열돼 18개 종파가 뒤섞여 있다. ‘모자이크 국가’란 말이 나올 정도다. 독립을 3년 앞두고 종파별로 돌아가며 권력을 잡는 배분안에 합의했다. 구두 합의였지만 그런대로 잘 지켜졌다. 하지만 1948년부터 팔레스타인 난민이 이스라엘에 쫓겨 들어오면서 복잡해졌다. 기독교도가 인구에 비해 너무 많은 권한을 쥐고 있다며 이슬람교도가 1958년 반란을 일으켰다가 미국의 개입으로 진압됐다. 1974~76년에는 무슬림과 팔레스타인 난민이 손을 잡고 기독교에 대항해 내전을 일으키자 기업들이 베이루트를 떠나기 시작했다. 내전이 끝난 뒤에는 기독교 민병대의 주도로 내전을 딛고 일어선 동베이루트와 이슬람교도가 절대 다수인 서베이루트로 분단되다시피 했다. 1982년 이스라엘이 레바논 영토를 침범해 폭격을 가하고 3년 뒤 철수했다. 1980년대 말에는 파괴 행위가 격렬해져 수천 명이 이 도시를 탈출하기도 했다. 1990년대 잠깐 평온을 되찾았으나 이슬람 시아파 중심의 무장조직 헤즈볼라가 이스라엘과 로켓포 공격을 주고받는 준전시 상황이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15년 동안 폭탄 공격만 열세 차례 일어났다. 여기에다 시리아 난민까지 밀려 내려와 레바논 경제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나랏빚은 연간 국내총생산(GDP)의 170%이다. 이런 형국에 4일(현지시간) 베이루트 항구 근처에 6년 넘게 방치된 질산암모늄 저장소가 두 차례 대형 폭발을 일으켜 100명 이상이 숨지고 4000명 이상이 다치는 엄청난 참극이 빚어졌다. 베이루트시장은 “어떻게 이 도시를 재건할지 엄두가 안 난다”고 절규했다. 레바논이 생채기를 이겨 내려면 국제사회의 도움이 간절하다. 한국 정부도 거들겠다는 의사를 빨리 표명했으면 한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 겸 시인 칼릴 지브란이 베이루트에서 차로 두 시간여 걸리는 브샤레 마을 출신이다. 그의 시 ‘예언자’ 한 구절이 절절하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bsnim@seoul.co.kr
  • 산업디자인 선구자 민철홍 별세

    산업디자인 선구자 민철홍 별세

    산업디자인 분야를 한국에 도입한 민철홍 서울대 명예교수가 4일 오후 별세했다. 87세. 민 명예교수는 1958년 서울대 응용미술과를 졸업하고 미국 일리노이공과대에서 수학하고서 귀국해 한국인더스트리얼디자인협회(KSID) 결성을 주도했다. 서울올림픽 ‘영광의 벽’(1989) 등 옥외 시설, 대우중공업 산업용 로봇(1983)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작품을 냈다. 빈소는 분당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0호실, 발인은 7일 오전 7시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데스크 시각] 굿바이 전세/김동현 사회2부 차장

    [데스크 시각] 굿바이 전세/김동현 사회2부 차장

    이번에는 정말 전세와 이별을 해야 할 것 같다. 사실 이별의 위기는 5~6년 전에도 있었다. 지금과 달리 당시 경제부총리는 ‘빚을 내서 집을 사라’는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그러나 확신이 없었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집을 사지 않고 전세로 눌러앉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주택건설사업이 부진하면서 신규 주택 공급은 넉넉하지 않았다. 전세 시장의 수요·공급이 맞지 않자 전셋값이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씩 뛰는 일이 서울에서 벌어졌다. 일부 집주인들은 전세보증금 상승분을 월세로 환산해 재계약을 했다. ‘반전세’의 탄생이다. 전세 계약 대신 반전세, 월세 계약이 늘어나자 부동산 전문가들은 ‘전세의 종말’이 올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하지만 이후 신규 주택 공급 물량 증가와 가격 상승이 맞물리면서 당시 ‘전세의 종말’ 예언은 빗나갔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말이다. 한데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 초저금리 상황이 계속되면서 시중은행의 예금금리는 1%대를 기록하고 있다. 또 보유세 부담이 커진 상황에서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 하는 집주인들은 전세보증금을 높여 받는 것보다 ‘따박따박’ 월세 받기를 원하고 있다. 여기에 정부가 임대차 3법을 통과시키자 전세를 월세로 바꾸겠다는 집주인들의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시중금리가 빠르게 오르지 않는다면 앞으로 2년 안에 임대 방식을 전세에서 월세로 바꾸는 집주인들이 늘어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정부는 이번 임대차 3법이 세입자 보호와 주거 안정성 강화를 위해 꼭 필요한 제도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임대 기간을 늘리고, 임대료 상승폭을 5%로 제한하는 것은 분명 상대적으로 경제적 약자인 세입자의 권리를 강화하기 위한 법이다. 정부가 약자를 위해 ‘선의’(善意)를 가지고 정책을 펴겠다는데 ‘토’를 달 이유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경제’라는 것이, ‘정책’이라는 것이 참 묘하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추진하는 경제 정책과 제도라도 결과물이 반드시 좋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1958년 중국의 마오쩌둥은 배고픈 인민의 식량을 훔쳐 먹는다는 이유로 참새의 씨를 말렸다. ‘타마작운동’(打麻雀運動)으로 중국에선 2억 마리의 참새가 죽었다. 그런데 참새를 없애자 해충이 창궐해 양곡 생산량은 더 줄었다. 특히 메뚜기떼가 극성을 부린 1960년에는 쌀 수확량이 절반으로 줄면서 수천만의 인민이 굶어 죽었다. 선의로 만들어진 정책이 곧 좋은 결과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임대차 3법 통과 이후 집주인들의 반발이 거세다. 세입자를 구하는 과정에서 반려동물이나 아이를 키우는 가정에 집을 빌려주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물론 신규 전세 계약 때 전세자금대출을 받는 사람은 들이지 않겠다는 이들도 나타나고 있다. 특히 새로 임대 계약을 체결하게 되면 전세가 아닌 월세로 세를 놓겠다는 이들이 급격하게 늘고 있다. 일부 여당 정치인은 전세에서 월세로 임대시장이 바뀌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임대주택시장이 전세에서 월세로 전환하게 되면 무주택 서민의 주거비 부담이 늘어난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사실이다. 언젠가는 전세와 이별을 해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이별할 줄은 몰랐다. 서민들의 내 집 마련에 디딤돌이었던 전세를 이렇게 급하게 떠나보내려니 섭섭함이 크다. 특히 다가올 월세 시대에 늘어난 주거비 부담으로 내 집 마련을 위한 자산 축적이 더 어려워지는 후배 세대들에게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야 할 것인지 모르겠다. moses@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