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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미디 외길” 김희갑씨 타계

    ◎「팔도강산」 시리즈 등 7백편 출연… 폐렴악화/임화수와 불화­박정희 총애 등 숱한 일화 특유의 익살로 서민을 웃기고 울린 희극배우 김희갑씨가 18일 하오 서울대 병원에서 숨졌다.향년 71세.평소 심장병을 앓아온 김씨는 지난 14일 독감증세로 입원,치료를 받아오다 상태가 악화돼 폐렴으로 이날 유명을 달리했다. 외길을 살아온 그의 일생은 우리나라 희극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22년 개마고원 산골에서 태어난 그가 광대의 길로 들어선 것은 46년 2월.친구였던 기자의 소개로 처음에는 「반도가극단」의 무대뒤에서 배우에게 대사를 읽어주는 프롬터 역할이었다.그러다가 그해 11월 대구폭동사건으로 배우들이 잠적하는 바람에 대역으로 출연하면서 무대에 서기 시작했다. 배를 곯기가 일쑤였던 10여년간의 유랑극단 생활끝에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58년 「청춘쌍곡선」,59년 「오부자」에 출연하면서부터였다. 59년 11월 정치깡패 임화수와 맞붙었던 사건은 지금까도 제1공화국 정치야사로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당시영화계를 주름잡던 임화수는 「코미디 코리아」라는 단체를 만들어 양훈 양석천 구봉서 곽규석 김희갑씨를 그 전속팀으로 결성하려 했다.그러나 전속이 되면 다른 영화에는 출연하지 못하고 부산과 서울등 실연무대에 동원돼야만 했다.임화수의 그같은 강제적 가입권유를 거절했던 그는 결국 갈비뼈가 3대나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그의 대표작은 66년부터 제작된 영화 「팔도강산」과 TV드라마 「꽃피는 팔도강산」이다.김씨와 황정순씨,한혜숙 박근형 태현실씨등당대의 톱스타들이 총출연한 「팔도강산」은 영화만 5편이 만들어진데 이어 TV드라마로까지 만들어져 10년동안 큰 인기를 모으는등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으며 이 작품으로 박정희대통령의 총애를 받기도 했다. 주·조연과 단역까지 포함해 지금까지 출연한 총작품수는 7백여편. 유가족으로는 미망인 김영정씨(66)와 1남5녀.발인은 20일 상오10시,장지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연락처 383­0015
  • 여류명창 김명하씨(이세기의 인물탐구:28)

    ◎청류의 음색·유창한 성조… “타고난 소리꾼”/12가사·시조 등 정가 두루 통달… 명인 경지에/장려한 성색·거침없는 음역엔 감탄사 절로/“한의 세월 노래로 용해”… 사재로 문화재단 설립,후학 길러 /모란은 화중왕이요 향일화는 충신이로다.연화는 군자요 행화소인이라,국화는 은일화요 매화한사로다­/ 두 손을 무릎위에 가지런히 얹고 단정하게 노래부르는 월하의 편수대엽은 세파에 시달린 흔적없이 계류처럼 맑고 청아하게 흘러내린다. 특히나 그의 세청은 비단실을 뽑아내는듯한 명가의 격조와 경제특유의 화려하고 힘있는 성색을 지닌것이 특징이다. 처음을 높이 질러부르는 언롱은 쉽사리 달아오르거나 쉽사리 자지러들지 않는다.넘어가고 이어지고 휘어지고 늘어지는 가락마다에 인생의 희로애락을 굽이굽이 드리우면서도 풍류를 생략하거나 정가특유의 기품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명주 명주 명주 비유 원로국악인 성경린씨는 일찍이 월하의 노래를 일컬어 「무늬없이 짠 치렁치렁한 비단」이란 의미의 명주,또 현란한 구슬을 끝없이 꿴듯한 명주,그 깊고 유창한 성조에 취하지 않고는 배길수 없는 명주에 비유했고 「월하의 정가를 들을수 있는것은 우리로서는 얼마나 경행스러운 일인가」를 찬탄해 마지않았다. 관현악반주에 맞춘 가곡12가사를 비롯,시조·한시·칠언절구에 뛰어나고 양금·거문고 연주솜씨도 수준급이다. 평시조 엇시조·사설시조·지름시조,가곡의 우락·계락등 어느 대목에 이르러도 구구절절 막힘이 없고 중간에서 곡조를 잠깐 변조시켜 질러부르는 계면조(중거)는 시의 참맛을 살려 시절가다운 흥취를 능란하게 펼쳐나간다. 아련한 피리소리 전주에 실린 피리소리 못지않은 그의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재능은 과연 타고나는 것이라는 감탄이 절로 나올수밖에 없다.만약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면 어떻게 저런 청추의 음조를 끝없이 울릴수 있을 것인가. 집안대대로 소리를 하거나 춤을 추거나 어릴때부터 유랑극단을 쫓아 일찍이 자신의 기량을 갈고닦아온 다른 국악인들과는 달리 월하의 국악계 입신은 참으로 극적이고 의외의 예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가 지금까지의 본명 김덕순대신 여창 김월하로 다시 태어나기까지는 마치 백락천의 비파타는 여인을 연상케하는 참담하고 기구한 사연이 오뇌의 흐느낌처럼 얼룩져있다. 그는 본래 경기도 고양군 한진면 보광리,지금의 이태원부근에서 평범한 가정의 2남3녀중 막내로 태어 났다.그러나 나이 세살때 전국에 창궐하던 호열자에 걸려 어머니와 두 오빠가 죽고 부친 김희문씨가 실성하다시피 집을 뛰쳐나가자 세자매는 뿔뿔이 흩어져 남의 집 양녀로 키워지게 되었다. 그가 양녀로 간집은 종로구 사간동 모녀이대가 사는 전통있는 가문으로 그는 조모와 양모밑에서 절도있는 여성이 갖춰야할 모든 덕목과 예절을 배우며 자라났다. 재동보통학교에 다녔으나 15살때부터 혼인말이 나오더니 16살되던해 경기도 양주출신으로 서울에서 회사에 다니던 김용복씨와 결혼,부군은 부인을 끔찍히 사랑하여 묘동학원 속성고등과에 보내주는등 자녀는 없었지만 부부의 금실은 유난히 좋았던 추억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6·25때 부군이 납북되자 그는 손재봉틀 하나를 들고 부산 피란길에 나섰고 그때부터 이루 말할수 없는 가난과 고초를 겪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낮에는 낙동강 하구 하단에서 푸성귀를 받아다가 동대신동 시장에 나가 팔고 밤에는 삯바느질,착실하게 돈을 모아 집한채를 마련했으나 먹고 자는것 잊어 버린채 건밤샘으로 일거리에 쫓기다보니 영양실조에 걸려 덜컥 몸져 눕게 되었다. ○시조 동호모임 가입 그때 동네노인의 권유로 지금은 없어진 구덕수원지쪽에 산책을 나가기 시작했고 새벽마다 그곳에서 시조연습을 하던 시조동호인들을 만난 것이 그의 운명을 바꾼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멀찌감치 비켜앉아 그들의 연습을 구경이나 하는 입장이었으나 입속에서 조금씩 따라부른것이 차츰 시조에 빠져들어 그 모임에 자연스럽게 끼어들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모르고 있었고 어디서 노래부른적도 없어 그저 남이 하는 대로 따라부를수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느리고 길게 뽑는 호흡도 그렇지만 노래의 맛을 깊이 알아 우조를 부르고 계면우를 부르는 툭 터진 소리는 「마치 통나무를 끌고 산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화미하면서도 시원하다」하여 당장에 시조하는 사람들의 눈에 띄고 말았다. 마침 동호인의 한사람이던 두봉 이병성이 두세번씩 그의 노래를 따로 청해 듣고는 「성색의 단아함과 장려함」에 무릎을 치며 기뻐해 마지 않았다.두봉은 이왕직 아악부에서 하규일의 지도를 받은 성악의 큰 봉우리로 그는 모처럼 만난 이 재능있는 여성에게 시조와 12가사 완창지도를 자청하고 나섰다.그때 얻은 아호가 달을 지고 있다는 뜻의 월하였다. 그는 장사를 때려치우고 낮에는 두봉 밑에서 배우고 또는 동네유지들을 모아 가르치거나 여기저기 불려나가 가곡을 부르게 되었다. ○소남 이주환에 사사 또 절색의 미모탓에 그를 바라보는 뭇시선이 많았으나 깔끔하고 쌀쌀한 성품은 한눈파는법 없이 오로지 시조에만 매달렸고 밤에는 여전히 삯바느질을 해냈다. 『어릴때 친부모 형제를 잃고 양녀로 키워지던 소년시절과 남편과 행복했던 결혼생활,피란지에서의 가난과 슬픔』을 마감하고 시조수업 3년만 59년 서울 중앙방송국이 주최한 이승만대통령 탄신기념명창대회에서시조부문 1등 수상,당대최고 율객으로 손꼽히던 소남 이주환역시 「정려하나 격발이 없는,이처럼 가곡을 위해 태어난 청류의 음색」은 결코 흔치않음을 심사평에서 지적했다. 그는 이를 계기로 피란길 10년만에 다시 서울로 올라와 국립국악원에서 본격적인 소남의 가곡수업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그때 나이가 43세. 일장월취로 시존의 모든 갈래를 꿰뚫었고 한시도 세갈래로 섭렵하여 그의 이름은 널리 회자되기 시작했고 정부행사나 모든 축하모임에서 당당히 가곡독창자로 출연하는 화려한 월하시대를 개막했다. ○검약실천,저축상받아 국악원과 국악예술고를 비롯,서울대 한양대 추계예술대 정신문화원 강사로 하루 5∼6시간 강의가 있을때도 그는 바느질만은 손에서 놓지 않는다.마포와 낙원동에 각 5층짜리 빌딩 주인에다 저축상을 받기도 한 재산가지만 단칸방에서 손수 밥을 지어먹고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다닌다.아무리 배가 고파도 국수한그릇 사먹기위해 혼자서 식당에 들어가본일도 없다.화투짝 한번 만져 본적도 없고 술잔한 담배 한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그는 찬밥에 물을 말아 내손으로 담근 김치로 식사를 때우고 새벽에 일어나면 그가 사는 낙원동 골목길을 일일이 청소한다. 수없이 길러낸 자녀들의 미국유학도 하고 박사나 교수가 되기도 했지만 공부를 시키고 나면 독립시킬뿐 은혜에 보답받기 위해 그들을 공부시킨 것은 아니다. 지난 90년 50억 재산을 몽땅 털어 월하문화재단을 설립,마포에 있는 연구소에 나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지금도 집에는 대학 국악과에 보내고 있는 서너명의 양녀를 데리고 있다. 『나는 그저 평범한 아녀자에 불과할뿐,다행히 시조를 좋아하여 이 세계에 빠질수 있었고 나의 모든 시름과 외로움을 덮어준것을 늘 감사하고 있다』그래서 특별한 사명감이나 포부때문은 아니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속요와는 달리 김천택의 청구영언 박효관·안치영의 가곡원류 김수장의 해동가요등 바둑판처럼 또렷한 정간보에 의해 비교적 체계있게 전수된 우리의 가곡을 후대까지 잇게하기 위해 국악에 뜻을 둔 젊은이들을 한명이라도 더 가르치고 싶다는 일념이다. 시조강의할때가가장 행복한 그는 그의 소리를 원하는 곳은 부산이든 대전이든 마다않고 달려간다.그리고 어떤 무대에서도 「어전에서 부르던 정갈하고 깔끔한 노래답게 소리에 한도 싣지않고 흥도 치우치지 않게」몸가짐·마음가짐을 흐트리지 않는다.두성과 비음을 다 쓰면서도 잡소리가 섞이지않은 그의 노래가 곧잘 범패에 비유되는 것은 불교신자로서의 그만의 독특한 득도의 경지때문일 것이다./바람은 지동치듯 불고 궂은비는 붓듯이 온다.눈 정에 거른 님은 오늘밤 서로 만나자고 판접쳐서 맹서 받았더니 이 풍우중에 제 어이오리,진실로 오기 곳 오량이면 연분인가 하노라­. 이 짧은 우락이 10여분.그는 부군을 잃은대신 「가곡」으로 꽃피운 그의 세월속에서 도무지 오지않을 님을 한시도 기다리지 않은적이 없는듯,그 높고 긴 가락속에 임그리운 여운을 절절히 끌고있다. 웅려 정대한 스케일과 함께 옥쟁반에 쏟아붓는 은구슬 금구슬의 그 현란한 사연은 아마도 「나이나 세월은 사랑을 멈추게 하지않는다」는 단 한마디,그래서 그 끝없는 마음속의 계류는 어쩌면 눈물일지도 모른다. □연보 ▲1917년(양력 19 18년2월8일)경기도 고양군 한진면 보광리 출생(본명 김덕순) ▲1932년 서울재동보통학교졸업 ▲1936년 서울묘동교회 부설 묘동학원 야간부고등과 졸업 ▲6·25 부산피란시절 부산 시조동호인 국립국악원 부산지원 두봉 이병성선생(이왕직아악부출신)사사 ▲1958년 서울중앙방송국주최 이승만대통령 탄신기념 명창대회 시조부문 1등 수상,소남 이주환선생(초대국립국악원장)사사를 비롯,전라도 임석윤·이창배·정운산 선생 사사 ▲1959년 「월하시조」(오아시스레코드 출반) ▲1961년 서울귀환(종로구 낙원동 정착) ▲1968년부터 국악고교 졸업식장서 장학생선발(장학생육성시작) ▲1969년 국악협 시조분과위원장 ▲1970년 전국시우단체 총연합회 발족 초대 회장취임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여창가곡 예능보유자지정 ▲1974∼92년 국립국악원·국악예술고강사 ▲1975∼92년 서울대·한양대·추계예술대강사 ▲1981년부터 해마다 조선일보사주최 국락대공연 참가 ▲1983년 「김월하시조(1집·2집)」(아시아레코드출반) ▲1984년9월 문예진흥원주최 가곡발표회(문예회관대극장) 10월 가곡보존협회주최 가곡발표회(세종문화회관대강당) ▲1986년 「김월하가곡집」(LP3장,문화재보호협서출반) ▲1987년 국립국악원주최 중요무형문화재 발표 해마다 참가 ▲1990년 월하예술단및 월하어린이 예술단창단(KBS­TV출연및 해마다 지방공연) ▲1991년 뮤지컬 「콩쥐팥쥐」(월하 어린이 예술단공연) ▲1991년 재단법인 월하문화재단 발족(월하국악상 제정및 국악경연대회 국악연구발표및 관련단체지원,장학생 선발 등의 사업) ▲1992년 월하문화재단설립1주년기념 전통음악발표회(예술의전당)주한외국인초청 공연(워커힐서)월하예술단공연(세종문화회관대강당)수십차례의 국내공연및 해외공연등 ▲1976년∼현재 법원연수원·서울교육원·정신문화연구원·한국표준공업학회 국립국악원 출강(현재)월하문화재단이사장,월하예술단및 월하어린이예술단대표,국악협회고문 84’국악대상·세종문화대상·88’저축의날 국민목련장
  • 친일척결(외언내언)

    「조국광복을 지향하여 거족적으로 발양된 위대한 3·1정신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주는 3·1문화상 수상자 가운데는 엉뚱하게도 친일인사들이 포함돼 있다.일제의 대동아전쟁을 찬양하는 글 「동방의 여인들」과 학도병 출전을 격려하는 시「내 어머니 한말씀에」등을 쓴 여류시인 ㅁ씨를 비롯,문학평론가 ㅈ씨 ㅂ씨,소설가 ㅊ씨등 문인들과 동양화가 ㄱ씨,서양화가 ㄱ씨등이 그들이다.이 가운데 ㅂ씨와 ㅁ씨는 이 상의 심사위원까지 역임했고 다른 심사위원들 중에서도 사학자 ㅇ씨,야당 총재를 지낸 ㅇ씨,국립대학총장을 역임한 ㅇ씨,명문사학 총장을 지낸 ㅂ씨등이 친일인사로 분류된다. 우리사회의 친일 청산이 얼마나 이루어지지 않았는가를 보여주는 기막힌 자료는 또 있다.48년 제헌국회에도 친일인사가 10명(4.8%)이나 있었고 50년 2대 국회엔 20명(9.2%),58년 4대 국회엔 26명(10.5%)으로 더욱 늘어났다.그런가 하면 자유당때 장관을 역임한 사람 96명 가운데 34%인 33명이 친일인사였고 허정 과도내각때는 그 비율이 무려 60%에 달했다.경제계는 더욱높아 55∼65%에 이른다.평생을 친일문제 연구에 바친 고 임종국씨가 밝혀낸 자료다. 이러하니 정부가 포상한 독립유공자 명단에 친일인사가 포함되고 독립기념관에 그들에 관련된 자료가 전시돼도 새삼 놀랄 일이 못되는 것이다.보훈처는 이들에 대한 재심사를 실시하여 친일행위가 확인될 경우 서훈을 취소하기로 했으며 독립기념관도 관련전시물의 철거를 검토하고 있다한다.늦었지만 잘한 결정이다. 기회주의 출세주의등 왜곡되고 뒤틀린 우리사회의 부정적 가치관은 친일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크게 기인한다.정통성을 지닌 정부만이 친일청산에 나설수 있다.문민정부의 개혁과제로 친일 청산문제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기를 기대한다.
  • 소설가 이제하씨(이세기의 인물탐구:27)

    ◎“글을 그림처럼”… 절제된 언어의 마술사/「환상 리얼리즘」기법 구축,무의식세계 조파/사회 선입감·통념 거부… 쓰고싶은 글만 고집/「나그네는…」 이상문학상 수상… 시인·화가로서도 경지에 꾸부정하게 걷는 비뚤어진 걸음걸이,구겨진 청회색 점퍼에 벙거지를 눌러쓴 이제하의 모습은 카뮈의 뫼르소나 사르트르의 로캉뎅 일수도 있다.그가 담배를 피우거나 커피를 마실 때도 마찬가지다.무심한듯 생각에 잠긴 묵연은 그대로가 시적 회화적 분위기를 연출시킨다. 만사에 서툴고 세련된 티를 보이지 않는것도 이 예술가의 독특한 특징일 것이다.그러나 말 하기가 싫어 억지로 하는처럼 어눌하게 굴다가도 자신의 의지와 소신을 펼때는 드물게 치열함을 드러낸다.메마른듯한 그의 가슴에 정열과 온기가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이때 뿐일것 같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그는 단순한 소설가만은 아니다.시인이자 화가이며 화가이자 소설가다.그리고 타고난 다방면의 재능을 한 수준으로 고루 이끌어 자연스러운 자신의 경지를 이루고 있다. ○1회 학원문학상수상 그가 문단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세때인 57년 여름,정식 데뷔보다도 훨씬 이전의 일이다.52년 마산동중시절 이미 「학원」지에 투고하여 그의 달콤하고 아름다운 서정시는 전국의 문학소년소녀들에게 널리 애송되고 있었다. /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서울 친구의 편지를 읽는다/보라빛 노을을 가슴에/안았다고 해도 좋다/…아아 밀물처럼 온몸에 스며 흐르는/노곤한 그리움이여/로 전개되는 「청솔 그늘에 앉아」는 박목월 조지훈씨의 심사로 제1회 학원문학상 수상과 함께 60년대까지 중3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그의 지난 시절의 이야기에서 또하나 빼놓을수 없는 것은 국민학교에 입학해서 『처음으로 선생님께 내 이름을 불렸을때의 그 가슴의 고동을 잊지 못한다』는 감격과 홍대 조각과에 진학하여 『대학 2학년이 될때까지 학점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는 것을 들수 있다. 너무나 순진한 나머지 그는 대학이란 강의시간이나 학점에 관계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해보는 장소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런 그의 단순함은 문학쪽에서도 언뜻언뜻 엿보인다. 「현대문학」지의 시추천 완료후 그는 다시 신문의 신춘문예와 월간지를 통해 소설데뷔 관문을 거쳤고 당시 발표한 「유원지의 거울」「흰제비의 여름」또 속물과 진정한 예술가의 대립을 그린 「유자략전」등으로 「표현수법에 있어 속도감을 느끼게 하는 뛰어난 압축미」「소설로 쓰여진 한편의 예술사회학」이란 호평속에서 문단의 시선을 한몸에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독자들의 무한한 무의식을 자극하기 위한 그의 「초현실」이나 「잠재의식」등의 기법상의 탐구는 「쉬르계열의 그림을 느끼게하는 난해성」으로 지적되자 그는 자신의 작품을 「환상리얼리즘」으로 표현,이를 설명하기도 전에 한 평자가 작품과는 상관없는 지연(지연),학연을 거론하면서 「환상과 현실이라는 두 대칭이 어떻게 한 이름으로 공존할수 있는가」란 의문을 제기하여 그는 한순간 환멸감과 모멸에 빠지는듯 했다. 그는 후에 「신뢰할수 없는 이런 사람들이 필요없는 리더의식과 옹졸한 콤플렉스로 지연·학연·인정주의 따위로 섹트를 조성하고 60년대식,70년대식으로 작가를 구분하려 든다」고 통탄해 마지 않았다.「환상리얼리즘」이란 한낱 조어가 아닌 기왕에 있어온 미술상의 한 경향을 지칭하는 용어를 잠시 소설에 차용한 것이지만 그는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의 소설은 외형적 사회의식보다 개인의 무의식세계,그들의 꿈과 악몽을 다루기 위해선 초현실주의 기법을 취할수 밖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는 자기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은 아니지만 옳지않은 것,속된것,뻔뻔스러움과 적당주의는 그와는 맞지 않음을 명료하게 구분짓는다. 74년 채식주의를 테마로한 「초식」발표와 함께 현대문학상이 주어졌을 때도 그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여 문단에 파문과 충격을 던졌다.모든 문학상이 일반적으로 너무 무난히 주어지며 과열된 문협선거에 얽힌 문단정치에 혐오감을 느꼈다는게 수상거부의 이유였다. 작가의 시대적 책임이니 사명이니 하는 명제란 무엇인가. 그는 「작가가 가장 경계해야 할것은 당대가 직접 간접으로 요구하는 유형무형의 온갖 윤리감각」이라고 말한다.예의 「모든 사람들이 물을 원할때는 불을 이야기함으로써 물에 대한 감각을 없애주는 것이○수상 거부로 큰 파문 작가의 사명이며 책임일 뿐」모든 사람들이 필요로 한다고해서 작가마저 부화뢰동하고 나서면 작가 본래의 본성이 와해되고 작품은 몰개성화로 타락한다는 것이다. 과연 『쓰고싶은 것을 써서 생존이 가능한 작가는 몇사람이나 되겠는가?』를 자문하고 『작가는 자신의 고독을 이야기로 팔아 연명하는 하릴없는 날품팔이』라는것과 이에따른 자책지심을 문단에 촉구하기도 했다. 그의 이런 자세는 문단초기인 신촌시절에서 동숭동 팔판동 지금의 평창동에 이르기까지 시종여일 변함없는 소신을 지키는듯 하다. 신촌시절에는 그의 부인(고행자씨)이 삐에로 의상실을 경영,화곡동에 집을 산적도 있으나 부인의 사업실패로 난생처음 가져본 집을 빚잔치로 없앴고 이 때의 고생을 바탕삼아 장편 「광화사」와 중편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를 탄생시킨 계기가 되었다. 이 작품이 이상문학상을 수상했을때도 여전히 『물리적인 힘에 물리적인 힘으로맞서는 것은 문학이라고 생각지 않으며 문학은 대결로서 당장 결판을 보는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을 견디고 스며들고 녹이는 작업』임을 상기시킨 저 유명한 수상연설을 남기고 있다. 『문학에서의 가장 큰 고함소리는 침묵입니다.좋은 작품을 읽고 났을때의 그 멍청히 강요당하는 침묵­』 그리고 그의 소설은 회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림에서의 구성 색채 주제의 형상화 과정이 그 형식만 다르게 나타날 뿐 글쓰기와 많이 닮아있음을 강조했다.이는 일찍이 시인 김춘수씨가 그의 소설 「황색강아지」를 보고 「영화적 기법을 사용한 소설」이라는 지적과도 상통한다. 군제대후 조각과를 4학년 1학기에서 그만두고 서양화과 3학년에 편입,그는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화가인 델보를 비롯,뭉크와 스텡 프란시스 베이컨에 빠져있었고 영화에 대해서는 한때 소형영화클럽을 만들만큼 영화광,요즘도 시간이 날때마다 청계천에 들러 레이저디스크를 복사해온다.비디오테이프만 8백여개.좋아하는 작품은 소련의 영화감독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탤지어」를 꼽고 있다.그는 한때 까마귀를 비둘기처럼 뱃심좋게 훈련시켜 돈심부름을 시켜봤으면 바란적도 있고 팔판동에 살때는 밤 10시가 넘어 총리공관이 있는 행길까지 내려가 장난감 비행기를 날리며 딸아이와 뛰어놀기도 했다. 한번은 딸아이(슬·고2)가 좋아하는 빵을 사기위해 호텔 지하에 위치한 제과점에 가려다가 호텔 직원에게 제지당한 적이 있었다.꺼부정한,초라한 행색이 사뭇 못마땅한듯 한참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그의 가방을 가리키며 「그 안에 뭐가 들었느냐?」고 묻자 그는 아주 천연덕스럽게 그 사람의 두눈을 똑바로 마주한채 「총」이라고 대답하여 혼비백산시킨적도 있다.이 사회의 선입감,오래묵은 관념에 대한 특유의 냉소가 또하나 이제하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는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시나리오 작업이후 일간신문을 비롯,월간지등에 「이제하 영화칼럼」을 쓰고 있다.좋아하는 영화를 마음껏 보고 마음껏 평을 쓴다.물론 본격적인 평이라기 보다 객석에서의 느낌을 좀더 심층있고 사려깊게 쓰는 식이다. ○노래엔 기품 가득 그리고 때때로 젊은 시인 가수들과 어울려 그가 작사·작곡한 노래를 함께 부르기도 한다.평소 대화때는 꺼들꺼들 쇠된 목소리를 내지만 노래할 때의 음성은 청량한 기품이 일품이다. 그는 이제 우리문단의 중진의 위치다.그의 말대로 그가 책임질 수 있는 예술을 성취해 가고 싶어한다.그래서인지 그에게선 느슨한 기는 찾아볼 수 없다.긴장을 푼듯 방심하고 무심한 속에서 오히려 감수성의 현을 전보다 더한층 팽팽하게 당기는 자세다. 그런중에도 친구들과 다양하게 교분을 트고 있고 그래서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간혹 그가 괴벽이나 기인기질을 지닌 것이나 아닌가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는 누구보다 반듯하다.선배나 후배들에게도 따뜻하고 정중하다.어느날 갑자기 그의 달라진 환경과 연륜과 함께 갑자기 표현하는듯한 속된 구석은 근원적으로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그럼에도 그가 지닌 예술성과 인간미는 이 시대에선 몇사람 되지않는 「비범임에는 틀림없다.그래서 그의 예술추구는 정련되지 않은 생금에도 비유된다. 그 옛날 그가 시추천을 받을 무렵 미당이그의 시를 향해 「신시쩍 나무」라고 한것처럼 도무지 「가뭄」을 타지않을 뿐만 아니라 「정신도 「정」,「우리의 공명선에 잘 직통하는 그의 특수어법」은 바로 그림으로 그려진 소설,소설로 그리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연보 ▲1937년 5월20일(음)경남 밀양출생.이해동씨와 김일선여사의 3남매중 독자 ▲1946년 마산으로 이주 ▲1953년 마산 고1 시「청솔그늘에 앉아」로 제1회 학원문학상 ▲1956년 마산고졸「새벗」잡지에 동화「수정구슬」당선 홍대조각과 입학 ▲1957년 「현대문학」에 시「노을」「설야」「바다」서정주추천 신태양사 「황색강아지」당선 ▲1958년 「소설계」중편 「나팔산조」 준당선 ▲1961년 군제대후 홍대조각과 4년에서 서양화가 3년으로 편입,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손(수)」입선 ▲1964년 육십년대 사화집동인(성찬경·박재삼·박회진등) ▲1966년 연작동화 「노래하는 돌」(신아일보연재) ▲1969년 동화 「느림보의 다섯가지 수수께끼」(대한일보연재) ▲〃 문제작 「유자략전」발표로 화제 ▲1973년 첫 창작집「초식」(민음사간) ▲1974년 「초식」으로 현대문학상 수상했으나 수상거부 ▲1977년 꽁트 스케치집「새」(수문서관간)「소설문예」 창간 편집위원 ▲1978년 창작집 「기차,기선,바다,하늘」(홍성사간)월간「수상」(월간 에세이 전신)주간 ▲1979년 화랑협회 계간지「미술춘추」주간 ▲1982년 첫 개인전,개전기념시집「저어둠속 등빛들이 느끼듯이」(청하간) ▲1983년 일러스트집「사라의 눈물」(우석사간) ▲1984년 서양화 10인 소품전·문학선집 「밤의 수첩」(나남간) ▲1985년 중편「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발표(이장호감독으로 영화화) ▲1986년 동화집「노래하는 돌」(샘터간)장편「광화사」(한국일보연재) ▲1987년 장편「광화사」1·2부(문학사상간)「소녀유자」(문학사상 연재) ▲1988년 장편「소녀유자」(고려원간)장편「시습의 아내」(경남매일연재)수필집「길떠나는 사람에게」(동아간)이상문학상수상전집「임금님의 귀」(문학사상간) ▲1990년 장편「진눈깨비의 결혼」(청맥간)문학선집「포말위의 식사」(강천간) ▲91­현재 창작집 「기차 기선 바다 하늘」외 창작들 재간.영화칼럼집「시네마천국」(우리문학사간) 이상문학상·한국일보문학상 수상.
  • 노동절 평화적 가두행진

    58년 이후 35년만에 처음으로 정부에 의해 허용된 노동절 기념행사가 1일 서울·전주·대구등 3개도시에서 열렸다.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전국업종노조회의,현대그룹노조총연합,대우그룹노조협의회등 4개 노동단체회원 3만여명은 이날 하오3시 서울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제1백4주년 세계노동절 기념대회」를 갖고 30대재벌 총수의 재산공개·금융실명제실시·해고노동자 및 해직교사들의 원상복직·전교조인정·복수노조 금지조항철폐 등을 요구했다.이들은 이어 신촌로터리·마포대교를 거쳐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까지 6㎞구간을 평화행진 했다.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53)

    ◎길림시절:12/가공조직 「공산청년동맹」/56년 연안파 숙청뒤 중공게경력 은폐/“조선공산당 산하서 청년활동” 꾸며내/중국공산당원생활 7∼8년 과거 지우기 공청날조 제2기가 되는 19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중반까지 김일성은 「공청가입」에 관한 표현을 아래와 같이 하고 있다. 58년…「김일성원수는 1926년에 벌써 공산청년동맹에 가맹하였다」이나영의 「조선민족해방투쟁사」337면 61년…「김일성동지는 길림육문중학교에 입학한 후 1926년 8월에 공산청년동맹에 가맹하였다」「조선근대혁명운동사」287면 이밖에 64년에 나온 박상혁의 「조선민족의 위대한 영도자」도 비슷한 표현을 쓰고 있다. 해방후 중국공산주의청년단이란 조직이름을 이리저리 변형해 가면서 자신이 마치 26년에 중공계통이었던 것 같이 비치고 있었던 김일성은 5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이러한 허위를 새로운 허위로 전환하였다.그는 우선 52년에 사용한 「공산주의청년회」란 조직명칭에서 「회」를 「동맹」으로 다시 돌리고 중공계통이란 냄새를 없앴다.그 다음 「공산주의」에서 「주의」를 빼고 「공산청년동맹」이란 새로운 가공조직을 만들었던 것이다. ○허위사실 또 변조 그런데 이러한 변조작업의 정치적 배경에는 1956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8월 전원회의 이후의 연안파,소련파 숙청이 있었다.중국공산당 계통이었던 연안파를 몰살하면서 김일성은 「주체」적인 방법으로 자기 경력에서 중공계통이란 냄새를 지워버린 것이다.원래 북한에서 사용하는 「주체」란 말에는 김일성만은 무슨 일이든지 제멋대로 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런데 「공산주의 청년동맹」을 「공산청년동맹」으로 명칭변경한 김일성의 행동에는 중공계통이었던 자기를 조선공산당 계통으로 왜곡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1925년에 서울에서 창건된 조선공산당은 그 산하 청년단체를 고려공산청년회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이외에도 「공산청년회」라고 생략할 수 있는 조직명칭으로 조선공산청년회가 있는데 이 문제는 다음에 말하겠다. 한국에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공산주의자를 자처하고 있는 김일성이 통치하고 있는 북한에서는 25년에 창건된 조선공산당에 대한 평가는 문자 그대로 최악이다.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처음으로 나온 역사서적 「조선민족해방투쟁사」에서 저자 이나영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이 창건되었다.그러나 이는 파벌투쟁을 극복,청산한 토대위에서가 아니라 주로 화요·서울 양파간의 격렬한 대립투쟁의 와중에서 화요파가 중심이 되고 이에 북풍회파·상해파의 일부가 참가하여 결성되었다.같은 시기에 공청도 화요파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이나영의 이러한 기술은 한마디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는 「종파분자」들의 소굴이고 종파의 연합이면서 그 종파들이 대립하고 투쟁하는 집합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혹평이다. ○“종파투쟁 집합체” 이것이 과연 조선공산당 창건에 관한 정당한 평가인가 어떤가는 별문제이다.다만 여기서 우리가 상기해야 할 것은 이나영이 퍼붓는 욕설은 그것이 단순한 욕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이 나올 때까지 북한에서 진행된 국내파,남노당파,연안파,소련파가 숙청되는 가장 중요한 구실이었다.그리고 이러한 딱지를 제공한 자는 김일성 자신이었다.그는 화요파였던 박헌영,서울파 출신인 최창익 등을 과거의 행적까지 「종파」로 규정하여 숙청한 인물이다. 김일성은 그들을 일망타진한 후 조선노동당의 역사적 정통성을 조선공산당에 두지 않고 「과감하게」중공 항일빨치산파로 옮겨버렸다.그는 1958년 2월8일 조선인민군 열병식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하게 되는 것이다. 「항일빨치산투쟁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했지 나쁜 것은 없습니다.반당 종파분자들은 무엇때문에 이것을 반대합니까? 그들의 목적은 지난날 우리나라 역사에는 아무런 투쟁업적도 없었다고 하며 또 만일 있다고 하면 고루 한몫씩 나눠먹자는 것입니다.그들의 비방은 아무런 근거도 없습니다」 「우리가 계승해야 할 유일한 전통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깃발 밑에 근로인민의 이익을 옹호하여 투쟁한 항일유격대의 혁명전통입니다」「우리가 전통을 계승한다고 해서 오가잡탕을 다 계승할 수는 없습니다」 ○동만주서 유격대 김일성은 해방전인 1930년대,동만에서 성장한 중공유격대에 몸을 담아 7∼8년간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따라서 이 기간의 대부분 그는 중국공산당 당원이었다.그는 그후 45년 8월까지도 명명백백한 중공당원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중반까지 약 10년의 세월을 소비하여 한 것은 중공에 조속한 자기의 과거를 지워버리는 작업이었다. 그 전형적인 작업이 30년대의 어떤 시기에 중공공청에 소속하고 있었던 경력을 26년으로 앞당겨,마치 자기가 조선공산당 산하의 청년조직에 있었던 것처럼 공청 경력을 바꾸는 일이었다. 그는 이런 작업을 20년대에 조선공산당의 정수분자였던 인물들을 모조리 없애버리는 피비린내 나는 숙청을 거의 완성한 후에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①「조선민족해방투쟁사」58년 간 2백78면 ②「김일성 저작선집2」72면
  • 중국계 피아니스트 하림/뉴욕서 화려한 데뷔공연

    ◎호로위츠,“전설적연주가 될 운명” 극찬 지난 17∼18일 이틀간 뉴욕에서 데뷔공연을 가진 한 피아니스트가 뉴욕악단의 화제가 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자바에서 태어난 중국계의 이 피아니스트가 특별히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은 그의 혈통때문이 아니라 개성이 넘치는 독특한 연주솜씨 때문이다.에드워드 하림이란 이 피아니스트는 금년 31세로 신인으로서는 늦깎이인 셈이다. 제럴드 슈와츠가 지휘하는 뉴욕 챔버심포니와 협연한 하림은 데뷔곡으로 쇼팽의 협주곡 F단조를 택했는데 뉴욕 타임스는 그의 연주를 평한 기사에 「한 불가사의한 인물의 선두 진입」이란 표제를 달았다. 그를 지도해온 저명한 연주가 블라디머 호로위츠는 하림을 한마디로 『전설적인 연주가가 될 운명을 갖고 태어난 인물』이라고 평하고 있다.그의 연주가 평단에서나 학계에서 특별히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그의 자유로운 연주기법 때문이다.어떤 평자는 그를 두고 1958년 등단한 번 클라이번 이래 가장 카리스마적인 피아니스트라고 평하기도 한다. 『당신은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거나 아니면 너무 시적인 연주가가 아니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하림 자신은 『나는 음악에 심취한다.그러나 심연에 빠져드는 형은 아니다』고 대답한다. 자바의 아주 부유한 중국계가정의 6남매중 네번째로 태어난 하림은 10대 후반부터 뉴욕의 줄리어드에서 피아노공부를 해왔다.그런면에서 보면 31세의 데뷔는 상당히 늦은 편에 속한다.그는 또 자라면서 그 흔한 음악경연대회같은데서 입상 한번 해본 일도 없다. 심할 때는 두번째 연주에서 떨어질 때도 있었다.이유는 그의 연주가 때로는 괴벽하고 또 너무 개성적이며 감성적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림은 줄리어드에 와 처음 사샤 고로드니츠키,고로드니츠키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루돌프 퍼커스니같은 쟁쟁한 교수들의 지도를 받았다.그러나 아무도 그의 연주방법에 수정을 가하지 않았다.교수들은 오로지 연습만을 요구했는데 퍼커스니같은 사람은 1년 내내 계속해서 연습을 시키기도 했다고 하림은 회고한다. 퍼커스니 교수는 『그는 이미 뛰어난연주기술을 터득하고 있는데다 대단히 감각적이며 기본적으로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할 일은 개성을 살리도록 도와주는 것뿐이라고 믿었다』고 말한다. 하림이 호로위츠를 만난 것은 1988년.그러나 호로위츠가 하림에게 요구한 것도 연습,연습뿐이었다.그도 연습만이 연주가를 보다 더 자유롭게 할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이 하림에게 가르친 것은 음색의 변화,음향의 반향같은 것에 대한 연구였다고 하림은 전한다.하림이 이들 스승 외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은 이그나즈 프리드만이 연주하는 쇼팽의 피아노곡들이었다고.그는 프리드만의 연주에서 피아노가 낼수 있는 최상의 소리를 들었다고 말한다.또 프리드만을 결코 모방하려고 하지는 않았으나 프리드만은 자신이 상상하고 있는 것보다 자유롭게 연주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술회하고 있다.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46)

    ◎길림시절:5/육문중 입학경위 날조/“27년 2학년 편입… 29년 중퇴” 새 주장/사실이라면 28년 6월 졸업했어야/27년 1월 아닌 8월 오동진집에 이번 회고록에서는 김일성이 길림에가서 육문중학교로 들어간 경위를 전에없이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다.그 내용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김일성은 1927년 정월 중순에 무송을 떠나 길림으로 왔다.그는 먼저 성내 차루가와 상부가 사이에 있는 오동진의 집으로 찾아 갔다.오동진은 길림으로 온 이상은 여기서 너의 우물을 파라고 격려한 후 그에게 기숙사에 들어가지 말고 자기 집에 있으라고 하였다.거기에서 그는 최형우(최일천)와 만나 그와 「동지」가 되었다. ○다른 전기 없는 내용 그날 하오 오동진은 그를 삼풍잔에 데리고 가서 이 여관에 머물고 있었던 독립운동가에게 인사시켰다.거기에는 김시우가 소개신을 써 준 김사헌도,정의부 경호대장인 장철호도 있었다. 김사헌은 소개신을 보고 그를 길림육문중학교의 한인 교사 김강에게 소개하고 김강은 이 학교 교장 이광한에게 그를 만나게 하였다.이광한 교장은 김일성이 나라를 찾는데 한몸 바치겠다고 하자 1학년을 거치지 않고 2학년에서 공부하게 해달라는 그의 요구를 들어 주었다. 그는 길림에 가서 처음에는 오동진의 집에서 학교에 다녔고 그가 체포된 다음에는 장철호의 집에 한 1년,현묵관네 집에서 몇달,그리고 오동진의 후임으로 정의부 사령을 하던 이웅의 집에도 얼마간 가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과거의 그 어떠한 전기에서도 전혀 볼 수 없었던 새 이야기들이다.그러면서 이 이야기들은 당돌하게 나온 것 치고는 또 너무 자세하다.이것이 사실이 아니라 소설이란 것이 금방 탄로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첫째로 김일성은 조선노동당의 전통을 날조하는데 이용한 「해외조선혁명운동사」의 저자 최형우를 27년 1월에 길림에서 만난 것같이 왜곡하였다.그러나 최형우는 30년에 오가자에서 그를 본 기사를 쓰고 있을 뿐이다. 또 김일성은 한국전쟁 때 인민군으로 하여금 살해하게 한 최형우를 파렴치하게도 「동지」였다고 주장하고 있다.그가 김일성의 동지였더라면 해방직후 어째서 그는 월북하지않고 한국전쟁 때까지 이남에 남아 있었겠는가. 둘째로 그는 58년에 중국에서 귀국한 김시우를 평북 전천에 귀양보내다시피 쫓아내 평양에 한번도 부르지도 않고 그곳에서 죽게 하였다. 그런데 화성의숙 시대의 자기를 우상화할 필요가 생기게 되자 그는 이 김시우를 전기에 등장시키고 그의 서재에서 자기가 마르크스 문헌을 읽었다는 산화를 만드는데 이용하였다.이번에는 그를 다시 이용하여 중학교에 들어가는데 그가 마치 중간다리를 놓아준 인물인 것처럼 만들어 놓고 있다. ○김시우소개로 꾸며 셋째로 그는 이왕 거짓말을 꾸밀 바에야 「통이 크게」(김일성,김정일의 평소 입버릇)해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그는 당시 정의부에서 활약한 인물 중에서도 최고지도자였던 오동진,현정경(현묵관),이웅 등의 집을 전부 자기의 하숙집으로 만들어버렸다. 이 대목에서 어느 정도 신빙성을 감촉할 수 있는 것은 68년 전기 이후 자주 그 이름이 나오는 장철호와의 관계 뿐이다.그러나 그 집에 1년이나 있었다는 것은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넷째로 이 인물들중 중국인 이광한은 육문중학교 교장이었던 것이 문헌에 보인다.따라서 어떤 한일의 중개로 이광한이 김일성과 만난 가능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또 그 사람이 김강이란 선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27년 1월17일은 아니다.앞에 인용한 문장에는 이광한이 1학년이 아니라 2학년에 넣어달라는 김일성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서 그를 2학년에 넣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회고록의 다른 부분에서는 「육문중학교는 정의와 법도를 매우 중시하는 학교」라고 하고 있다. 또 육문중학교가 아니라도 1학년에 넣을 학생을 교장이 독단으로 2학년에 집어 넣을 학교는 없을 것이다. 당시의 중학교 학년학기 일정표를 보면 1월에 2학년에 편입되면 28년6월에는 중학교를 졸업해야 한다.29년 5월에 중퇴한 실지 경력보다 김일성은 1년이나 더 빨리 「졸업」해 버리는 것이다.그가 1월에 1학년생이 됐다고 할 수도 없다.그의 현재 주장은 2학년 전학이기 때문이다. 이상을 보면 이번 회고록의 길림 입성 부분은 어느 모로보나 소설가의 창작,그것도 앞뒤가 너무 맞지 않는 졸작 같은 것으로 되어 있다. ○교장결정 납득안가 김일성은 실지로 길림에 입성한 27년 8월보다 반년 이상 이전인 1월의 길림을 자신의 「활무대」로 삼았다.실지로 자기가 있지도 않았던 이 길림을 무대 삼아 그는 김시우를 자기의 심부름꾼으로 만들고 최형우와 「동지」가 되며 오동진을 하숙집 주인으로 격하시키고 이광한에게 1학년이 아닌 2학년에 전학시키라고 강박하여 「성공」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없었던 일을 아무리 있었다고 주장해 보더라도 없었던 것은 없을 수 밖에 없다.김일성은 27년 1월에는 길림에는 없었던 것이다. ①「세기와 더불어Ⅱ」199∼204면 ②같은책 202면
  • 서예가 김기승씨(이세기의 인물탐구:21)

    ◎“힘차고 남성적인 운필” 원곡체 창안/한자명체 두루 통달… 독창적 변형경지 도달/고 최현배박사도 “한글 본연성품 표출” 칭송/성경구절 작품화 유명… 도산선생 묘비문 등 명필남겨 글씨를 이루기전 작업대앞에 선 원곡 김기승씨의 모습은 신을 향한 기도처럼 절실하고 경건하다. 눈부신 백지위에 붓길이 닿는순간 율동처럼 이어지는 묵향,어느때는 일필휘지,어느 때는 점 하나에도 혼신을 다해 멈출듯 흐느끼는 ▦황은 그 자체가 이미 통신의 경지다. 마치 자신의 손이 아니라 신에 의해 움직이는것처럼 힘차게 그어내린 획마다에선 맑고도 밝은 상서로운 향기를 뿜어낸다.그리고 그 몇순간의 긴장은 폭풍전야의 정적인듯 은은히 주위를 압도한다. 원곡의 문향실은 그가 38년간 머물렀던 종로구 적선동에서 이곳 워커힐 아파트로 옮긴지 올해로 만 10년이된다. 요즘도 여전히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독교 방송을 들으면서 하루일과를 시작하고 근처 아차산에 올랐다가 내려와서 바로 작업에 임한다. 그리고 하루 2시간에서 3시간,전날 독서로 구상해두었던명언·명구를 마음속에 새겨 우러나오는 진한감동을 작품속에 담아낸다. 그는 글씨를 이루는데 있어 아름다움은 언제나 「선」이어야함을 전제하고 있다.이른바 선하지 않은 것은 미가 될 수 없다는 논리다.기술이 피부라면 인격은 근골이다.티없이 청정한 피와 살과 뼈대가 합일될때만 비로소 미의 영혼이 글씨와 글속에 첩식된다는 것이다.순수한 서체에서의 체삽이나 시속기는 천착스러움의 극치다.글이 뜻하는 바를 거르거나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타내기 위해선 심혼의 혈서로 성자에 임해야 한다고 말한다. ○글씨 내재의미 중시 「초학자시 불가진형세 선상자성의 재필전」­글씨는 처음 대할때 그 형세를 알수없으니 먼저 글씨가 이루어짐을 생각하면 뜻은 쓰기전에 있게 된다,즉 원곡은 서의 진수는 글씨의 모양에 두기보다 그 내부에 내재된 뜻을 소중하게 여기는 투철한 작가정신으로 일관되어 있다. 해서·행서·초서·전서·예서등 한자체에 두루 통달하여 일가를 이룬동안에도 그는 한때 중국말로 된 성경을 국전에 출품한 적이 있었다.막상 이를 내놓았으나 알아보는 사람이 별로 없어 그때부터 그만의 독특한 원곡체를 창안,한문각체의 독창적 변형을 한글에 적용시킨 이 서체는 한자와의 대련 작품을 쓸때도 조화와 균형을 깨지않는것이 특징이다. 옛날 궁중에서 궁녀들이 소설을 베낄때 사용한 궁체가 부드러운 반흘림의 반행초의 실용글씨라면 원곡체는 한문보다 힘차고 남성적인 운필,구슬을 꿴듯한 우아미보다 먹물이 뚝뚝 듣는 힘의 분출이 돋보이는 서체다. 한글학자 고 최현배박사는 원곡의 한글체를 보고 『산같이 망막하고 강같이 줄기차다.우리의 한글이 제본연의 성품으로 온전히 나타났다』고 칭송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그의 독창성이 지나쳐 그 자신이 스스로 「전위예술」이라 일컬었던 「묵영기법」은 서예계에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큰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묵영기법이란 청묵의 번짐을 사용하거나 먹물의 농담으로 거듭써서 시각효과를 앞세운 일종의 회화적 서예 회화인 셈이었다. 서예계는 『전위예술,즉 묵영은 서예에서는 있을수 없다』고 발칵 뒤집혔고 심지어는 『전통을모르고 전통을 소화할 수 없기 때문에 나타난 예술』로 혹평되기도 했다. ○「묵영기법」 논쟁불러 이때도 젊은감각과 시대에 부응하는 예술을 지향해온 원곡으로서는 전통예술을 지키기 위해선 고루하게 전통만을 고집하기 보다 오히려 여러각도의 실험과 시도를 언해 새로운 조형언어를 발굴,전통의 소중함은 물론 각자의 개성과 특성을 살려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평생동안 그가 써온 작품은 개인전때마다 40점에서 60점씩 32회.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는 평소에 아끼는 성경구절들은 그때마다 아름다운 작품으로 담아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육당 최남선의 「삼·일독립선언문」을 비롯,제갈량의 「전후출사표」는 3천자이상,아가서8장 4천여자,무위자연의 노자 「도덕경」5천여언,특히 굴원의 「이소경」의 경우는 사적고증,한자구성·암기 등으로 6개월준비,집묵만도 10일이상 걸린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랜 연륜과 우수사려가 없는 마음가짐으로 인해 그의 글씨에는 향기는 물론 불가사의한 힘이 담겨 있다. 올해나이 84세.그러나 그 음성과 행동에서 연노의 기색은 찾아볼수 없다. 또 서예계 최고 원로의 권위의식 같은것도 없다.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격의없이 친절하고 편안하게 대한다. 1909년 충남 부여군 홍산면 조현리에서 김정현씨와 김취옥여사의 2남중 차남으로 출생.5세때부터 조부인 동효공이 설립한 한문서당 삼언재에서 글씨와 천자문을 배웠고 홍산소년백일장에 나가 한시짓기 장원,11세때 보통학교 2학년에 들어가면서 신교육을 받게됐으나 공주고보 2학년때 일인체조교사를 배척하는 맹휴의 주동자로 지목되는 바람에 서울 휘문고보로 전학,그후 만주로 건너가 봉천 문회고급중학과 상해중국공학대학 경제과에 다녔다. 상해유학시절 흥사단 원동위원부에 입단하여 도산 안창호선생을 모신 독립운동에 가담,국내신문의 주요기사를 발췌정리하여 국내정세를 보고하거나 흥사단 행사때마다 글씨를 잘 쓴다고 해서 식순을 쓰는 일 등을 맡아보기도 했다. ○흥사단서 독립운동 그때부터 대학에서 공부한 경제학보다 글씨 쓰는 일에 심취하여 졸업후 고향에 돌아오자 고장의 명필인 산정 신익선선생에게 본격적으로 글씨를 배웠다. 하루종일 쓴 글씨가 집안마당에 흰눈처럼 수북히 쌓였던 기억은 지금도 그에게 불길같은 작업의지를 당겨준다고 한다. 그후 다시 서울로 올라와 소전 손재형선생에게 사사.『재주는 있으나 헛 공부했다』는 혹독한 질책을 받으면서 그는 구양순 안진경 왕희지의 법첩으로 겨울밤이 지새도록 수련을 쌓아갔다. 봉천 문회고급중학교때 남경서 신학대학을 나온 백영엽목사의 영향을 받아 크리스천이 된 그는 조국에 돌아가면 목사가 되려했으나 글자 한자한자의 그 묘한 성자에 빠져 글씨쓰는 일을 평생의 직업으로 삼게 되었다.그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글씨로 전한다는 의도에서 성경구절을 작품에 담게 되었고 성경구절을 쓴 작품만도 6백여점에 이른다. 새문안교회에 다닌지 45년,출중한 건강을 타고난 그는 담배나 커피·술은 입게 대지 않는다. 산부인과 의사인 부인 차인실씨(82)와는 1939년에 결혼,외아들인 명호씨(53·미앨라배마에서 병원)와 4녀가 있다. 원곡은 주변을 조금씩 정리해 본다는 뜻에서 지난83년 그가 아끼던 자작품 2백87점을 골라 국립현대미술관에 보내던날,아들 딸을 결혼시켜 내보낼때보다 더 가슴저미는 허망함과 섭섭함에 그날밤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고 말한적이 있다. 지난 90년에는 그가 한평생동안 소장해왔던 추사 김정희의 「고시행서」위창 오세창·김구선생의 글씨,청전 이상범과 절친했던 운보 김기창,청계 정종여의 금물로 그린 「독수리」등 30억 상당의 골동서화를 아들의 모교인 연대박물관에 기증. 1958년 제1회 개인전을 필두로 신세계미술관이 주관하는 개인전이 끝나면 부인과 자녀들이 권유하는대로 이대와 고려대 중앙대등 각 대학에 작품을 나누어 보낸다. ○33회째 개인전 준비 그가 제정한 원곡서예상은 올해 16회째,오는 10월25일부터 제33회 원곡서예개인전을 역시 신세계미술관에서 갖게된다. 도산 안창호선생의 묘비문을 비롯,수백여개의 비문과 동상문 현판글씨 시비등 전국 방방곡곡에 그의 글씨가 산재해 있으나 단 한글자도 그는 허트로 내놓는 일은 없다. 그의 마음가짐은 「논어」에 나오는­ 「불지명이면 무이위군자야요 불지례면 무이립야요 불지언이면 무이지인야라(천명을 알지못하면 군자가 될수 없고 예를 모르면 세상에 나서 행세할수 없고 말의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지 못한다)」를 실천하며 앞만보고 살아왔다.분한이 있으면 향기로운 글,빛을 발하는 글에 이를수 없기 때문이다.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대덕약곡」(큰덕은 골짜기 같아야 한다)」에서 따온 그의 아호인 원곡처럼 그래서 나를 낮추고 남을 섬기고 마음을 텅비운 맑고 깊은 골짜기,세상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을 포용하면서 묵묵하게 자신의 일에 정진하는 예인의 자세를 지킬 뿐이다. □연보 ▲1909년 충남 부여 홍산출생 ▲1927년 만주 봉천 문회고급중학졸업 ▲28년 흥사단 원동위원부입단 안창호 김구 이동령선생이 이끄는 한국독립당입당 ▲1932년 중국 상해 중국 공학대학부 경제과 졸업 ▲1936년 소전 손재형선생사사 ▲1939년 조선서도 진흥회 주최 전국서도전 입선 ▲1942년 중국 상해서 전중국서화전 입선 ▲1946년 전국 서화전 이등상 ▲1949년 제1회국전 서예부 특선(문교부장관상) ▲53∼55년 국전 제2·3·4회 특선 ▲〃 대성 서예학원 설립 ▲〃 서울대·숙대·상명여대 출강(15년간) ▲56∼58년 국전 제5·6·7회 추천작가(출품) ▲58년 제1회 원곡 서예전 ▲59·60년 〃 제8·9회 초대작가(출품) ▲61∼82년 국전 제10∼30회 국전심사위원·운영위원 ▲59∼89년 원곡서예전 제2회∼29회 개최 ▲1976년 미국·유럽 미술여행 ▲78년 제1회 원곡서예상 제정 ▲79년 동아일보 주최 원곡서예 회고전 ▲79년 북유럽및 캐나다 미술여행 ▲〃 제1회 원곡 미술상 제정 시상 ▲79∼92년 제2∼15회 원곡서예상 시상 ▲83년 국립현대미술관에 자작 대표작(2백87점 기증) ▲84년 주일 한국 대사관 한국문화원 초대 서예전 ▲87년 봄베이·카이로등 유럽지역 여행 ▲기독교 미술인 협최 회장역임 고왕경·김강경·경천애인·시편23편·이소경·삼일독립선언문·애경·전후출사표·1오일삼성오신·불원천불우인·묵시록등 1천여점 은관문화훈장 한국서예사 원곡서문집
  • “부패척결·기강확립에 전력”/김두희 법무장관의 정책향방

    ◎공석중인 검찰내부인사 곧 단행/법무행정 개선에도 최선 다할터 『새정부 출범으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기를 맞아 부정부패척결과 국가기강확립이란 국가당면과제에 공무원들과 함께 힘을 다할것입니다』 신임 김두희법무부장관은 『장관임명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뜻밖의 일』이라면서 『법무행정에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12월6일 2년임기의 임기제 제3대 검찰총장에 취임했던 김장관은 취임후 3개월 이틀만에 그만둔데 대해 『개인적으로 임기를 마치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면서 『그러나 어제(7일)박관용대통령비서실장이 전화로 내정사실을 알렸을때 그점까지를 충분히 고려해 맡긴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김장관은 이어 『앞으로는 검찰총장의 임기제가 잘 지켜질 것으로 본다』고 말하고 『새정부의 당면과제가 국가기강확립·경제활력·부정부패척결등 3가지이고 그중 두가지가 소관사항인 만큼 국민의 전폭적 지지속에 성공적으로 마치겠다』고 다짐했다. 김장관은 이어 『후임 검찰총장은 곧바로 임명해야 하는만큼빠른 시일내에 대통령께 임명을 제청할 것』이라고 밝히고 『검찰내부에도 공석중인 자리가 많아 이도 곧 단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제24대 검찰총장으로 역대 총장중 가장 짧은 기간을 재직했던 김장관은 이날 전격적으로 마련된 총장 이임식장에서도 『27년 동안의 검사생활을 마감하게 돼 아쉬운 마음』이라고 밝혔다. 김장관은 경남 산청출신으로 58년 고2때 대입검정고시에 합격,1년을 월반한 수재형으로 정통 수사검사 출신이다. 온화하고 침착하며 과묵한 성격이 돋보이는 그는 고시14회로 66년 서울지검 검사로 출발,줄곧 선두주자로 달리면서 일찌감치 「재목」으로 지목돼 왔었다. 법무부 검찰국장시절 상사의 무리한 지시에는 어금니를 물고 버티는 뚝심을 보여 별명이 「어금니」. 대검 중수부장 시절에는 영동개발사건·명성사건등 대형 금융사건을 매끄럽게 처리했으며 서울검사장 때엔 민생치안에도 큰 힘을 쏟았다. 취미는 바둑이며 부인 조정진씨(51)와의 사이에 2남1녀를 뒀다. ▲경남 산청출신·52세 ▲서울대 법대 ▲고시 14회 ▲대검 중앙수사부장 ▲법무부 검찰국장 ▲서울지검 검사장 ▲법무차관 ▲대검차장 ▲검찰총장
  • 국악인 양승희씨(이세기의 인물탐구:18)

    ◎죽파의 가야금산조 득음 “외길 인생”/혹독한 수련 견디며 「명인」 향한 일념 불태워/뉴욕 독주회땐 “동양의 신의 경지” 격찬받아/세계 명대학에 한국학과설치 위한 모금연주 등 활동 활발 가볍게 튕기고 힘차게 엮는 줄은 가락마다 깊은 시름,희비가 엇갈려 가슴속에 묻어둔 사연을 한없이 풀어낸다.길어도 길어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 옥수 어느 때는 성긴 빗방울에 오동잎 스치듯,일렁이는 파도에 하늘이 소스라치듯 성난 폭우에 수면이 갈라지고 뇌성이 번뜩인다.활짝 핀 꽃송이가 삽시에 저버리는 아픔을 안으로 삭이는 절제미,청정과 청쾌가 선명한 양승희의 가야금 산조를 듣고있노라면 문득 연전에 돌아간 죽파의 운율이 되살아난다. 명인의 길에 오르기엔 젊고 눈부신 나이,화사하고 여린 용모,그러나 무대에서의 능란하고 당당한 연주솜씨는 당대 명인을 계승한 후계자다운 풍모다. 경건함 중에도 정한의 기개가 감돌고 줄을 타는 손끝에서 처절과 애련이 여울져 스승을 잃고 홀로서기까지의 고통과 시련이 얼마나 큰것인가를 절감케 한다. 양승희는 스승인 죽파 가야금산조 하나에 그의 전인생을 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산조 일인자를 꿈꾸며 오로지 이 한길을 위해 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많은 고초를 스스로 감내해왔다.자신이 걸어온 가시밭길을 새삼 돌이켜볼 여유는 없다.다만 그것이 지금보다 더 험난하고 가파르다해도 미동도 지체도 할 수 없는 위치다.두 아들의 어머니로서 아내와 며느리로서의 길 이전에 「죽파 가야금 산조의 가문」을 이어갈 공인이며 예인의 사명감이 있을 뿐이다. 죽파 김란초는 가야금 산조 창시자의 한사람인 김창조(1865∼1920)의 친손녀로 그는 조부의 산조에다 단몰이(세산조시)를 창작해넣어 독자적인 죽파류 가야금 산조를 성립,국내외에 1백여명이 넘는 제자를 두고있었으나 양승희를 후계자로 삼아 바로 이 산조를 계승시키고 있었다. 양승희는 스승으로서의 죽파의 삶을 전적으로 맡아 극진히 모셨을 뿐만 아니라 죽파의 모든것,예술혼과 예술성,인간의 도리와 예의범절에 이르기까지 스승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분신과도 같은 인연이다. ○곡해석·연주력 출중또 「뛰어난 곡해석과 연주력,끈질긴 노력과 집념,죽파가야금산조를 잇는데 최선을 다하는 지속적인 마음가짐은 누구에게도 비견될 수 없는 비범등이 후계자로 지목된 이유의 하나라는 것이 국립국악원 이승렬원장의 지적이다. 스승댁에 머물면서도 새벽에 눈뜨자 연습,장고에 맞춰 다시 한번,그리고 스승과 맞춰보고 학교에 다녀와서 한바탕 연습,단 한번도 스승을 거스르거나 거역하지 않았다. 「교수」보다는 「연주가」이기를 원하는 스승의 뜻을 받들어 국악의 세계무대 진출이라는 목표를 세워놓고 황병기 나인용 백병동등 국내작곡가들의 창작곡을 받아 초연으로 기량을 확대시켜 나가기도 했다.국악인으로서는 드물게 시립국악관현악단·시향·KBS교향악단과의 대연주회 협연,1년에 수십차례의 해외연주 활동등은 죽파로 하여금 어느 자리에서나 제자를 마음껏 자랑삼을 수 있게 해주었다.특히 85년 뉴욕 카네기 리사이틀 홀에서 가진 독주회 평과 사진이 실린 워싱턴 포스트지를 보고는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그때 미국의 저명 음악평론가인 마리온 자콥슨은 양승희의 가야금연주를 「볼쇼이 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의 솔로를 보는 듯한 황홀감」에 비유,「55분동안의 연주는 꼼짝없이 청중을 사로잡아 마치 동양의 선의 경지를 경험케 했다」고 쓰고 있다. 89년 79세의 나이로 스승이 몸져 눕게되자 양승희는 고려병원에 모시고는 꼬박 3개월을 그의 곁을 지키면서 스승의 어깨를 주물러 드리려면 「몸이부어 손가락자국이 깊이 남는다」고 안타까워 했고 이를 지켜본 국악계의 김소희씨며 박귀희씨는 『형님은 훌륭한 제자를 두셔서 돌아가셔도 여한이 없겠다』고 부러워 했었다. 같은해 9월17일 임종하기 직전에 죽파는 양승희부부를 불러 유산정리와 함께 자신의 장례를 부탁했다.스승의 유언이 아니더라도 양승희는 당연히 상주가 되어 장례기간의 상례지휘는 물론 삼우제와 사십구제,소상제와 대상제,91년에는 고인을 위한 추모음악회를 여는등 스승과 가까웠던 국악계의 원로들을 참여시킨 무대를 마련하여 「난죽같은 사제의 정」을 변함없이 확인시켜 주었다. 양승희는 본래는 서울에서 태어났다.그러나 국민학교 3학년때 정치를 하는 부친을 따라 집안이 모두 강원도 원주로 이사.피아노와 무용을 배우다가 한 미국선교사의 권유로 원주여고 2학년 되던해 가야금을 시작했다. 서울을 오가며 서울대 김정자교수에게 가야금을 사사,처음부터 가야금의 가락이 마음속에 파고들어 타고난듯 악기에 밀착되는 감이었다. 대학교 2학년인 70년 4월 역시 김정자교수의 소개로 사직동에 있는 죽파문하에 입문,그때부터 만19년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스승의 엄격한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고2때 가야금 시작 유난히 청각이 예민한 스승은 한올의 음정차이도 족집게로 집어내듯 가혹하게 교육시켰다.하루 6시간에서 7시간,어느때는 10시간을 해내야만 비로소 만족하는 듯 했다.마음에 들지않으면 노안에 광채를 번뜩이며 가차없이 바로잡아 주었다. 그러는 사이 오랫동안 교제해온 부군 노만균씨와는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3년후인 76년에야 뒤늦게 결혼해야 했다. 「결혼하면 가야금을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스승은 이를 못마땅히 여겼으나 「결혼후에도 가야금 계속은 물론 예술가의 길을 걷는데 적극 협조하겠다」는 시댁측의 다짐을 받고나서야 안심하는 빛이었다.혈육이 없던 그는 친딸같은 양승희에게 대대로 내려온 집안의 옥가락지를 물려주면서 「부디 가야금 가문의 대를 이어줄 것」을 두번 세번 당부해마지 않았다. 그러나 7년간의 혹독한 피나는 훈련과 수련에도 득음하지 못한 제자를 몹시 나무라는 눈빛에 양승희는 결혼 1년만에,낳은지 백일도 안된 아들을 시어머니(송재임여사)에게 맡기고 다시 스승의 문하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여자로서의 행복을 추구했다면 그는 그때 가야금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어린 자식을 떼어놔야 하는 마음은 문자 그대로 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아픔이었다. 부군은 고대와 프랑스유학후 국립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근무,시댁은 훌륭한 가문과 가풍으로 양승희는 얼마든지 풍족한 환경에서 아마도 안락을 누릴 수도 있었다.그러나 남편과 시어머니가 죽파와의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오히려 「예인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박사과정까지 서둘러주었다. ○지난의 수련과정 겪어가야금은 악기를 다루거나 기교를 가르치는 교육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말과 마음으로 전하는 구전심수만이 참다운 예도였다.그해 6개월 다음해 다시 6개월,80년에는 9개월간이나 스승곁에서 성음을 얻기위한 피나는 훈련을 쌓아야 했다. 「학이 살포시 나무가지에 내려앉듯 햇빛 찬란한 해변에 잔물결 반짝이듯 용이 승천하는 힘찬 기운과 동시에 사방이 잠잠하여 침묵하듯 연주하라」는 것이 스승의 연주 지침이었다.차차 국악계의 원로들로부터 「죽파 전성기때의 소리가 난다」는 칭찬과 「매운 손끝에 만만찮은 도전적인 개척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그럴수록 그는 혼신의 힘으로 가야금에 매달렸다.이는 판소리에서의 폭포수같은 성음을 위한 폭포독공백일수련에 못지않은 지란의 과정이었다. 죽파의 총애와 편애로 동료들의 질시와 따돌림이 따랐으나 스승은 그때마다 「높이 나는 새는 눈에 띄는 법,어중간히 날면 백발백중 돌에 맞기 쉽지만 힘찬 비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게 된다」고 감싸주었다.그리고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물려주기 위해 그의 나이가 다했음을 애석하게 여겼다.커다란 회오리가 지나간듯 어쨌든 지난 세월속의 시련은 그에게 인간적인 성숙을 주었다. 그는 세계 각 유명대학에 한국학과 설치를 위한 기금모금 연주등 91년에 10여차례,지난해 20여차례,올해도 연초와 2월까지 유럽지역 순회와 터키연주등 연말까지 해외연주일정이 빡빡하게 짜여있다.물론 그에게 남겨진 가장 큰 과제는 죽파기념관을 세우는 일,전수생들을 위한 연주무대 마련,이에 앞서 스승의 이야기를 창극으로만들기 위해 극본과 음악을 작가와 작곡가에게 의뢰해놓고 있다.그리고 이 모든 진행은 시댁과 남편의 따뜻한 보살핌이 뒷받침이 되어주고 있다. 진양조에서 중몰이 중중몰이에서 자진몰이 휘몰이 단몰이 장단배열을 갖는 죽파산조를 한바탕 타고나면 인생살이 희로애락이 한낱 물거품이라던 스승의 말이 불현듯 새삼스럽다.원형리정,이제 사계의 순리처럼 자연스러운 산조가락의 하나하나가 그의 몸속에서 피가 되고 살이 되고 그 자신이 바로 가야금이 되어 그날이 언제일지는 모르나 마음으로 음조를 울리고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산조미의 극치에 이르고 싶은 것이 오직 절실한 그의 기원이다. □연보 ▲1948년 6월 서울출생,양주창씨(92년작고)와 박정옥여사의 2남4녀중 장녀 ▲58년 집안이 원주로 이사 ▲73년 서울대 음대 국락과졸업 ▲75년 서울대 대학원 졸업 ▲86년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예술철학박사학위) ▲75년∼93년2월 서울대 국악과강사 ▲76∼80년 동덕여대·목원대·성심여사대강사,이대·중앙대출강,한국가야금연주단단장,중요무형문화재23호 김죽파류 가야금산조이수자,준인간문화재 죽파 김란초를 비롯,이창규 황병기 이재숙 김정자 사사 ▲71년 서울대 음대 정기연주회 「죽파류 가야금 산조」독주 데뷔 ▲75년 서울국립국악원주최 신인음악회협연(이성천지휘) ▲77년 가야금 독주회(국립극장소극장) ▲79년 가야금 독주회(세종문화회관)·제1회 유네스코주최 2인음악회(가야금 양승희,거문고 김선한) ▲80년 가야금 독주회(공간사랑)죽파류 55분 가야금 산조 ▲82년 KBS교향악단 정기연주회(지휘 발터 길레센) ▲83년 무형문화재 예술단 창단 1주년기념 특별연주 ▲85년 대한민국음악제 KBS교향악단 협연(지휘 홍연택) ▲85년 미뉴욕 카네기 리사이틀홀 독주,자유중국·일본 독주회 ▲86년 자유중국 NewAspect 초청 국제예술제 국제 고쟁 명가대회참가 ▲88년 가야금 독주회(국립국악원 국악당) ▲89년 서울시향 범세대연주회(세종문화회관) ▲89년 KBS국악대상 축하공연외 해외연주8회 ▲90년 백두산 제천대회,가야금독주회(예음홀)해외연주 7회 ▲91년 KBS 국악관현악단 정기연주 해외연주 10여회 ▲91년 고 죽파 김난초선생 추모음악회주관(국립영화제작소 영화제작)등 해외연주 20여회 ▲92년 미 조지워싱턴대 초청연주 ▲92년 대한민국음악제 연변 김진교수와 남북한 가야금 비교연주등 해외연주 20여회 ▲93년 우즈베크스탄 공화국대 한국학과 설립기금모금외 유럽지역 연주 황병기 작곡 「비단길」「영목」 「밤의소리」「남도소리」 관현악곡 「7현을 위한 새봄」편곡 「Amaging Grace」나인용작곡「가야금 협주곡 도약」「용」「영상」이강덕작곡 「가야금 협주곡Ⅴ」정윤주작곡 「황병기주제에 의한 가야금 콘체르토」백병동작곡 「환명」 제1회 KBS 국락대상,중요무형문화재 예술상 공로상,KBS FM 명인 CD 출반
  • 김덕 안기부장/일처리 치밀… 북한·중국문제에 정통

    건장한 체격에 온화하고 포용력이 있으나 일처리는 치밀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북한및 중국문제에 조예가 깊은 대표적 국제정치학자로 정연한 이론과 분석력을 갖추고 있다.특히 빼어난 필력과 논리적 언변으로 매스컴의 각광을 받아왔다. 지난 58년 서울대 법대와 62년 미인디애나대 대학원을 졸업한후 외국어대에서만 32년째 교수로 봉직했다.외교정책론·사회주의체제론·유럽정부론 등은 명강의로 꼽힌다.「현대사회사상사」등의 저서가 있다. 국제정치학회장도 역임했고 외무부 자문위원등 현실 외교정책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림에 전문가적 조예를 갖고 있으며 취미는 그림수집과 등산. 부인 박은혜여사(52)와 2남.
  • 「금융계 첫 여성이사 탄생」 꿈 무산/여성계운동 좌절

    ◎조흥은 주총서 주부대학장 장도송씨 승진 탈락 「금융계 여성이사 1호를 배출시키자」는 여성계의 운동이 결실을 맺지 못했다. 여성계는 연초부터 조흥은행 주부대학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장도송씨(57)를 금융계 여성이사 1호로 승진시키기 위한 운동을 벌여왔으나 23일 열린 조흥은행주주총회에서 장씨는 이사승진에서 탈락됐다. 한국여성민우회·한국여성정치연구소·전문직 여성클럽 한국연맹회 등 10개 여성단체는 장씨를 금융계 여성이사 1호로 배출시키기 위한 운동의 일환으로 지난 2월초부터 회원단체를 중심으로 「조흥은행 통장갖기운동」을 전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여왔다. 장도송씨는 58년 부산대 상대를 졸업한 후 조흥은행에 입사,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지점장」 등의 기록을 세우며 현재 1급으로 정년퇴직을 1년 앞두고 있는데 「금융계 여성 이사 1호 탄생」여부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쏠려왔다.
  • 컴퓨터 게임/건전한 SW개발·국내시장 육성 모색

    ◎정보문화센터,오늘 용산 전자상가서 세미나 개최/유통물 99%가 외제… 유해품 범람/불법복제 막고 개발자 지원 절실/문서편집·그래픽 등 학생교육 다양화 필요 최근 일본 닌텐도사 게임기의 광과민성발작논쟁·게임소프트웨어의 폭력·외설물 만연 등 컴퓨터게임 유해론 시비가 일고 있는 속에 건전한 게임문화를 정착시키고 국내 게임소프트웨어 시장 육성방안을 논의하는 세미나가 한국정보문화센터 주최로 24일 서울 용산전자상가 한국통신 소프트웨어플라자에서 열린다. 이 세미나에서는 한국교육컨설팅연구소 연구부장 김영회박사가「컴퓨터게임문화가 청소년교육에 미치는 영향」,동서게임채널 윤원석사장이「국내 게임소프트웨어의 활성화와 시장육성방안」을 각각 발표한다. 지난 58년 미국에서 처음 개발된 컴퓨터게임은 62년 미국 MIT대학의 스티브 러셀이 우주전쟁게임을 개발하면서 본격화돼 일본 닌텐도사의 패미컴 등의 전자게임기로 발전됐다.국내에는70년대 이후 벽돌깨기게임이 처음 전자오락실에 등장했으며 80년대 들어 쏟아지는 포탄을 피하며 목표를 맞히는 갤러그게임,도형을 짜맞추는 테트리스등이 보급됐다. 컴퓨터게임은 특성상 긍정과 부정적인 양면을 띠고 있다. 컴퓨터와 쉽게 친해질수 있다는 점이 긍정적인면.시뮬레이션및 역할게임을 했을때 문제해결절차를 익힐수 있고 승부근성을 키워준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도 많다. 게임 내용이 대부분 적을 죽이거나 먹어치우며 파괴하는 폭력성을 띠고 있어 게임에 몰두하게 되면 친구나 가족들과의 교류 시간이 줄어든다.게임소프트웨어의 99%가 미국·일본등 외국제품이어서 외국의 문화·사고및 생활방식 등이 여과없이 전달될수 있고 장시간 게임을 할 경우 눈등 건강에 해를 끼칠수 있다는 점 등이다. 이와 관련,세미나에서 한국교육컨설팅연구소 김영회박사는 『청소년들이 컴퓨터를 선용하게 하려면 단순한 베이직(BASIC)프로그래밍하는 방식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전제,문서편집소프트웨어를 이용,일기·편지쓰기·글짓기를 하게 하거나 그래픽프로그램으로 상상력을 동원해 그림을 그리고 색칠하게 한다.또 수학적인 도형개념을 익히고다양한 형태의 그림을 그리면서도 프로그래밍하는 기술을 배울수 있는 로고및 로고라이터를 가르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안했다. 한편 동서게임채널 윤원석사장은 『게임용소프트웨어 시장은 5백억원대 규모로 일본의 6조원에 비하면 걸음마 단계로 국산의 시장점유율은 1%도 채 안된다』며 불법복제의 만연,게임소프트웨어의 저작권법및 컴퓨터프로그램보호법 시행의 제도적 문제 인식의 미흡,게임경시풍조 등이 정체화를 초래했다고 진단했다. 따라서 활성화하려면 정부는 과감하게 개발자들을 지원하는 한편 불법복제행위를 처벌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기업은 영세한 프로그래머들의 개발의욕을 높여주고 신속한 상품화로 소비자들의 욕구에 부응할 것을 강조했다.또한 개발자들은 참신한 게임소재를 발굴,국제적으로 활용되는 컴퓨터하드웨어 기종에 호환이 되도록 개발하며 소비자들은 정품 소프트웨어구입을 원칙으로 하고 무형의 소프트웨어도 상품으로 취급하는 지적소유권개념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홍세표 신임 한미은행장(인터뷰)

    ◎“증자 연내 마무리 짓겠다”/규모 작지만 경영합리화 매진 홍세표 한미은행 신임행장(58)은 22일 『몸집이 작은 후발은행의 장점을 살려 경영합리화에 전력투구하겠다』고 밝혔다. ­오랜 임원생활 끝에 행장자리에 오른 소감은. ▲재무구조가 견실한 한미은행을 맡게 돼 기쁨과 함께 책임감을 느낀다.지난 10년동안 임원으로 지내며 한번쯤 은행경영을 맡을 마음의 준비를 해왔었다. ­앞으로의 경영방침은. ▲자율화에 따른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무엇보다 경영합리회가 최선의 지름길이다.신속한 의사결정과 권한의 하부이양을 통해 고객에 대한 서비스에 역점을 두겠다.이를 위해 과장·대리등 중간관리자가 참여하는 「소중역회의」에서 행내의견을 적극 수렴해 나가겠다. 심사기능의 강화로 부실채권을 줄이고외환거래업무를 활성화해 나가겠다. ­그동안 밖에서 본 한미은행은. ▲대주주인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의 영향으로 철저한 여신심사와 함께 신속한 의사결정이 장점인것으로 알고 있다.특히 직원들의 자질이 우수해 향후 직원 감축없이도 무인점포의 확대설치등으로 생산성을 높이는데 어려움이 없을 정망이다. ­앞으로의 최우선 과제는. ▲부족한 자본금의 증자를 통해 국제결제은행(BIS)이 정한 자기자본비율 8%를 달성하는 일이다.연내 BOA·대우·삼성등 대주주와 협의,증자를 매듭짓겠다. 지난 58년 고려대 경제학과를 나와 한은에 입행한뒤 67년 외환은행 창립과 함께 자리를 옮겨 15년동안 미국·독일에 근무한 외환통이다.고 육영수여사의 조카이며 장덕진·한승수전장관,윤석민 전대한선주회장등과 매제사이이며 이상근전행장과는 춘천고 동기동창의 인연을 갖고 있다.김영자여사와의 사이에는 2남1녀를 두고 있다.
  • 영 전통춤 모리스댄스 복원

    ◎15세기 풍요기원 의식… 소멸 백년만에 재현 유럽의 섬나라 영국에서는 요즘 약 1세기 전에 거의 자취를 감춘뒤 관광포스터에서나 찾아볼수 있었던 모리스 댄스라는 전통춤의 복원운동이 활발히 일고있다. 꽃과 리본으로 장식된 화려한 중절모,깨끗한 와이셔츠에 십자반도를 두르고 다리에는 스타킹 위에 방울을 주렁주렁 매단 일단의 신사들이 야외풍경을 배경으로 펼치는 경쾌한 율동.아코디언,바이올린,콘서티나(아코디언과 비슷한 악기의 일종)가 어우러져 내는 포크음악에 맞춰 서로 빠르게 교차하면서 발뒤꿈치를 두드리기도 하고 나무막대기를 맞닥뜨리기도 하며 이따금씩 손수건을 꺼내 머리위로 흔들기도 한다.마치 어떤 의식을 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리스 댄스 춤꾼들의 모습이 클레이게이트,헤딩튼,애더베리,셔본 등의 작은 마을들에서 자주 목격되고 있다. 모리스 댄스는 그 기록이 1458년까지 거슬러올라가는 깊은 뿌리를 갖고있지만 시대상황이 변하고 춤의 유래에 관한 해석이 달라짐에 따라 혹독한 수난을 당하다가 끝내 종적을 감췄던 이 나라비운의 전통춤이다. 이 춤의 유래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었지만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초기에는 영국에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 풍요를 기원하던 전통의식에서 파생된 고유의 춤으로 이해됐다.그 결과 이 춤의 장려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헨리7세 등 국왕들이었다.이들은 댄서들에게 재정보조를 해주고 왕궁에서 공연을 갖도록 배려했으며 상류층들의 후원을 적극 독려했다.이에 힘입어 모리스 댄스는 쉽게 대중화되어갔다. 그러나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댄서들은 시련을 맞기 시작했다.성직자들은 왕궁을 누비는 호화스런 차림의 이 춤에 대해 탐탁지 않게 여겼다.그리고 이에 맞물려 춤의 유래에 관한 해석도 명칭(Morris)에서 나타나듯 아프리카 북서부의 무어인들(Moorish)의 전통에서 파생된 외래춤이라는 쪽으로 바뀌었다.당시 댄서들은 얼굴을 검게 분장했는데 이는 모리스 댄스가 무어인의 춤이라는 해석의 유력한 근거가 되었다. 17세기 청교도혁명을 계기로 모리스 댄스는 마침내 불법화되고 댄서들은 음주,신성모독,춤의 난잡성 등을 이유로 재판까지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그 이후로는 음성적으로 명맥만 유지되다 그나마 세기말에 들면서 거의 사라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같은 모리스 댄스가 부활의 기회를 갖게된 것은 작고한 음악사가인 세실 샤프의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그는 1899년 이 춤을 목격하고는 복원을 결심,어린시절 이 춤을 추었거나 본적이 있는 80∼90대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증언과 자료를 수집했으며 이를 토대로 나중 포크댄스협회를 창설했다.요즘 이곳저곳에서 재현되고 있는 모리스 댄스는 이 협회의 고증과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들이다. 모리스 댄스는 아직은 다양한 직업과 연령층으로 구성된 소규모 마을사람들이 아마추어수준에서 재현해내는 동호인활동차원에 머물고 있다.그러나 일반적으로 남성춤으로 인식돼온 이 춤이 여성들에게도 급속히 확산되고있고 최근에는 국내뿐 아니라 홍콩,캐나다에서도 모리스 댄스 클럽이 결성되는 등 사라질뻔한 한때의 위기를 딛고 귀중한 전통 문화유산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 소신 굽히지 않는 “대쪽판사”/이회창 감사원장 내정자의 면모

    ◎재판 10여건서 소수의견 낸 “강직파”/선관위장때 불법선거에 사임 결단 『비공식적으로 감사원장직 요청은 받았지만 앞으로 국회동의 임명절차가 남아 있으므로 현재로서는 소감이나 감사원운영계획등에 대해 밝히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김영삼차기대통령에 의해 새정부의 감사원장으로 내정된 이회창대법관이 22일 대법원 청사 3층 사무실로 찾은 기자들에게 밝힌 첫마디이다. 그는 그러나 『김영삼차기대통령과는 면식이 없던 사이』라면서 『최근 새정부에 동참해 달라는 의사타진을 받고 고심끝에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상당수의 공무원들은 다 청렴한 것 아닌가요』라며 자신의 성품에 대한 세간의 평가에 겸손해하며 『감사원장직에 내정된 이유는 잘 알지 못하며 그에 대해 얘기하는 것도 도리가 아닐 것 같다』며 소감피력조차 극구 사양했다. 투철한 사명감과 대쪽같은 성품으로 법조계에 정평이 나있는 그의 첫마디 역시 「그 다운」일성이었다. 81년 법관출신으로는 최연소 대법관으로 임명돼 86년까지 대법원 판사를 지내면서 대법원전원합의체 판결 46건 가운데 16건의 주심을 맡아온 그는 이중 10여건에서 「소수의견」을 통해 판결과 관련된 소신을 피력,법이론에 관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현 김덕주대법원장과 함께 진작부터 대법원장감으로 지목돼 주로 소장 법관들의 지지도가 높은 이감사원장 내정자는 대법관시절 이같은 대쪽소신이 「걸림돌」이 돼 대법관 재임명에서 탈락되기도 했다. 그는 이어 88년에 중앙선거관리위원장직을 맡았으나 재임1년3개월때인 89년10월 동해시및 서울 영등포을구 국회의원 재선거과정에서 불법선거운동을 규제하지 못한 책임을 통감한다며 사임했다. 53년 경기고를 졸업,서울법대에 진학한뒤 4학년때인 56년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그는 58년 공군 법무감실 법무관을 거쳐 60년 인천지법 판사로 발령돼 법조인의 길을 걸었다. 그뒤 73년까지 주로 서울에서 민·형사·고법판사등을 지냈고 73년 서울민사지법 부장판사,77년 서울고법판사를 거쳐 서울남부지원장,서울민사지법 수석부장판사를 역임했다. 이어법원행정처 기조실장을 거쳐 대법관이 된 그는 80년 5월 비상계엄령하에서 김대중씨집에서 불법집회를 가진 혐의로 구속기소된 박세경변호사에 대한 고등군법회의에서 『81년 계엄령이 해제된 시기에서 박변호사에 대한 군법회의는 헌법에 위배된다』는 소수의견을 냈었다. 당시 이일령·이정우·오성환대법관과 함께 낸 이 소수의견은 당시 시국상황에서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88년 다시 대법관에 임명된 그는 92년 3월 국가보안법 제7조 고무찬양혐의로 구속기소된 김상명씨 사건선고에서 이재성·배만운대법관과 함께 『고무찬양죄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이적행위가 나타나야 하는 것』이라며 반대소수의견을 내기도 했다. 판결이외에 그가 고법판사로 있을 당시 모재벌이 연루된 사건에서 사건을 재벌쪽의 패소로 판결을 내린 그에게 재벌측이 보내온 양복티켓을 변호사를 통해 반납토록 한 일화도 법조계에서 잔잔한 파문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 차기대통령으로서는 차기 정부에서 명실상부한 감사원의 기능을 위해 그의 이같은 성품과 해박한 법이론이크게 평가됐으리란 분석이다. 이감사원장 내정자의 부친은 대검검사를 지낸 이홍규변호사(87)이며 부인 한인옥씨의 부친 한성수씨 역시 대법관을 지냈고 사위 최명석씨(31)도 현재 서산지청검사여서 전형적인 법조인가족이기도 하다. 가끔 갖는 법조인들과의 술자리에서 한번 「발동」이 걸리면 두주불사한다는 것이 주위의 말. 부인 한씨와의 사이에 2남1녀를 두고 있다.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38)

    ◎소년시절:16/화성시절 목격자의 최후/민족주의자 활동 비밀 아는 김시우/58년 입북하자 “우상화 걸림돌” 배척/벽지 귀양살이… 죽을때 “인연” 발설 종전의 김일성 전기에서는 김일성이 화성의숙을 중퇴한 일을 둘러싸고 아무말도 없었다.그런데 이번 회고록은 종전과는 달리 그의 퇴학을 가지고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다.그 내용이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생애 첫 대용단” 선전 ㈀독립군의 3중대장은 운영난에 빠지고 있었던 화성의숙을 위하여 모금한 돈을 몽땅 자기의 결혼식 비용에 써버렸다.김일성은 이러한 독립군에 경종을 울리기 위하여 「ㅌ·ㄷ」성원들과 협의한 끝에 각 중대에 성토문을 돌렸다.정의부를 비난하는 자에 대해서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오동진까지도 이 성토문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그러나 한장의 성토문 정도로 독립군의 정치도덕적 타락을 막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화성의숙의 학생들은 모연공작에 나가면 경쟁적으로 재물과 양식을 거둬들였다.그들은 식사때 조밥에 시래기국만 준다고 밥타발까지 하였다.이런 학생들이 2년 후에 군관이 되어 독립군의 중대와 소대들을 거느리게 된다는데 김일성은 실망하였다. 이런 말을 하면서 회고록은 화성의숙은 김일성의 기대에 만족을 주지 못하였고 또 그는 화성의숙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고 하고 있다.그리하여 그는 사망한 김형직의 약방을 지키고 있는 삼촌 김형권대신 약방을 할것인가.아니면 번양이나 하얼빈이나 길림같은 도시에 가서 상급학교에 진학할 것인가라고 고민했다는 것이다.그는 화성의숙을 중퇴하고 길림에 가서 중학교에 다니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는데 그 결심은 그의 생애에서 처음으로 되는 대용단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회고록의 말 속에서 어용작가들이 「심양」을 들먹이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김일성은 심양의 평단중학교에 한동안 있었기 때문이다.이 평단중학교 시절이 없으면 그의 길림중학교 전학은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그가 이 학교에 있었다는 것 자체는 사실이다. ○전천협동농장 배치 그가 심양에 있었던 시기는 그가 화전이나무송에는 없었던 시기로 된다.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화전이나 무송에 발은 디딜 수는 있었다.그러나 그는 이런 지방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다. 따라서 화전에서 있었던 이상의 일들은 김일성이 모친이 있는 무송현성과 심양을 오가는 사이에 이곳을 지나가다가 김시우 집에 들러서 들은 이야기들 이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그가 김시우 집에 들른 일도 회고록에는 나오고 있다. 김일성은 화전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김시우를 자기와 아주 가깝고 친한 사이로 묘사한다.그러나 이 일을 김시우쪽으로부터 보면 문제는 사뭇 다르다. 그는 해방후 오랫동안 중국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가 1958년에 가서야 비로소 북한에 돌아왔다.그런데 그는 김일성이 있는 평양에 가서 살지는 않고 북한에서도 아주 벽지인 평북 강계군 전천지방에서 숨어살다 싶이 했다.김일성이 전천을 현지지도해도 그와 만나지도 않았다.그는 죽을 때 자기 자식들에게 처음으로 자기와 김일성과의 인연을 말했다고 한다. 어용작가들은 이러한 김시우를 마치 김일성에게 충실한 것 같이 묘사하고 있다.그러나 회고록에서 뽑은 이상의 골자만으로도 북한에 돌아온 김시우의 절망은 엿볼 수가 있다.그는 귀국하지 말 것을 귀국하였다. 화전에서 문제아였던 김일성과 몇번이나 만나서 그의 성향을 익히 알고 있었던 김시우는 모택동치하의 중국에 버티고 있으면서도 김일성 곁에는 가지 않았다.그러나 58년 무렵의 중국에서는 「조국」이 융성발전하고 있다는 김일성의 허위선전이 그냥 먹혀 들고 있었다.아마도 귀국하고 싶어하는 자식들의 요구 때문에 그는 그들과 같이 북한으로 돌아간 모양이다. 「조국」이라고 돌아온 그들은 그러나 김시우가 북한에서 가장 문제로 삼는 출신성분에 걸렸기 때문에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그는 정의부,국민부계통의 민족주의자였다.남로당파,연안파,소련파 등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에게 「종파」란 딱지를 붙여서 한창 숙청하고 있는 58년에 이러한 김시우가 중국에서 넘어온 것이다.그들은 입국하자마자 첩첩산골인 전천의 협동농장으로 배치되어 거기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과거 민족주의 계통이었다는 사실은 철저한 비밀로 되어있다.그것은 지금 현재도 마찬가지이다.그는 철두철미 「공산주의자」였던 것으로 되어있고 또 그렇게 행세하고 있다. ○「종파」딱지 붙여 숙청 1920년대 김일성과 안면이 있었던 민족주의자들이 70년대 이후 북한에 가서 그와 만나는 일이 생겼다.그리고 때로는 사망한 인물도 노동신문에서 소개하고 있다.그런데 이러한 일은 김일성 우상화에 무슨 득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그리고 김일성과 만나거나 노동신문에 게재되는 민족주의자들은 예외없이 그들의 언행이 우상화에 복무되도록 철저히 왜곡된다. 그런데 김시우는 이러한 우상화작업에 참여할 때를 놓친 인물이다.그러나 그는 적어도 자기 입으로는 김일성에 아첨하지 않았다는 공적을 쌓고 죽었다. ①「세기와 더불어1」177면 ②같은책 181∼182
  • 한국무용가 최현씨(이세기의 인물탐구:14)

    ◎절제된 몸짓… “여백의 미” 표현 일품/고고한 기품 넘치는 타고난 재능의 예인/김해랑문하서 승무·태평무 등 두루 이수/완벽주의적 성격… 대선배와의 불화 “천추의 한”으로 갓쓰고 도포입고 부채들고 최현이 무대에 나타나면 이도령이 광한루에 나선듯 화사하고 눈부시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헌칠하고 단정한 매무새,운신의 폭이 조용하면서도 민첩하다.삭풍이 이는 한겨울에도 그의 분위기에는 오월 단오같은 싱그러운 신록이 묻어있다. 부채끝으로 오작교(오작교)를 가리키고 부채를 펴서 얼굴을 가리면 그때마다 한양의 풍류와 선비의 기품이 동시에 엇갈린다. 무용계에서 「푸르름을 몰고다니는 예인」으로 불리는 것처럼 그는 20대 미장부의 멋과 미를 변치않는다.나이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젊고 기개에 넘쳐있다.언제 어디서나 누구앞에서나 당당하다. 우선 그의 춤솜씨부터가 그렇다.타고난 재능과 기량으로 그는 빠르고 느린 어떤 곡조에도 절묘한 춤의 경지를 보여준다. 정중동이 절제된 그의 「승무」나 「살풀이」등 그의 춤의 매력은 그 움직임마다에 여백의 미를 살리는데 있다.뿌리치고 내뻗는 손짓하나에도 선과 배경을 치밀하게 계산하여 마치 한폭의 수채화를 그리고 있는듯 하다.힘이 들어가지 않은,몸속으로부터의 흥취가 절로 살아나 어느땐 멈추고 어느땐 다시 흐른다.그리고 조각처럼 푸르고 흰 얼굴에는 한과 슬픔을 자제한 인고가 담겨있다. 그는 춤뿐아니라 춤과 관련된 영화와 연극,창극과 뮤지컬을 두루 섭력한 예술가다. ○춤관련 영화·연극 출연 완벽주의자인만큼 한가지를 알아도 끝까지 파고들어 전문가 못지않은 실력을 쌓고있다.대강대강 그럭저럭은 그에게는 통하지 않는다.사람을 사귀어도 한번 사귄 사람은 절대로 놓지않는다. 이렇게 흑백이 분명하기때문에 무용계에서의 그의 위치는 자칫 외롭기 십상일수가 있다.그러나 서로서로 인맥·학맥,제자 스승으로 얽히고 설킨 속에서 그가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할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타고난 재능,탁월한 춤솜씨 하나뿐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춤추는 사람이 춤잘추는데야 누가 뭐라하겠는가.위로는 막강한 선배들이 기라성처럼 좌정하고 이리저리 끈이 닿는 무용풍토에서 최현자신은 그런 자부심과 오기 하나만으로 고고하게 버티어왔다 할수 있다. 그가 춤으로 무용계에 어필하기 시작한 것은 65년 그가 안무·출연한 무용극 「초라니」에서다.조택원이후 송범 김진걸 이매방으로 이어지는 남자무용수중 수려한 춤과 미모마저 갖춘 그의 출현은 무대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51년이후 한때 영화에 심취하여 조미령 김승호 허장강 등 당대 스타들과 영화 「춘향전」「시집가는날」등에서 주연,이후 그가 안무·출연한 무용극 「춘향전」「마의태자」「황진이」등은 노련미 넘치는 춤기교와 함께 영화에서 닦은 연기솜씨로 관객을 사로잡았던 작품들이다. 특히 그의 대표작인 「비상」은 그 자신이 끊임없이 추어왔고 지금도 무용인들에게 사랑받는 작품의 하나다. 소매가 긴 백삼에 상투관 차림,부채 하나만으로 무대를 누비는 이 「비상」은 희로애락의 일상사를 살고있으나 저 하늘을 향한 끝없는 의지,꿈을 잃지않으려는 인간의 끈질긴 열망이 춤속에 담겨져 「마음을 비운 춤」「생의 환희와 승리를 득도의 경지로 이끈 춤」「아무도 비상을 최현만큼 출수 없다는 경계선을 확실하게 그을수 있다」고 시인이며 무용평론가인 김영태가 쓴적이 있다. 영화·연극 못지않게 그의 음악취미또한 광적이다. 76년 호암 이병철회장의 도움으로 독립문쪽에 무용연구소를 개설하고 최현무용단을 창단했을때 그의 연구소는 무용연구소라기보다는 마치 음악연구소처럼 사방벽이 온통 오리지널 디스크로 둘러싸여 있었다.그의 오디오 취미는 「마니아」급으로 오디오전문지들은 걸핏하면 드보르자크에서 수재천에 이르는 그의 음악취미·오디오기기들을 탐방취재하고 있다.이 방면에서는 특히 김영태와 의기투합하여 두사람은 충무로에서 용산전자상가를 곧잘 기웃거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음악취미도 “광적” 최현은 마산에서 성장했지만 본래 부산사람이다.본명은 최윤찬,후에 영화계에 데뷔하면서 최현이란 예명을 가졌다. 16세때 전국가요경연대회에서 특상한 것을 계기로 「천재소년가수」가 되어 지평선 가극단을 쫓아 마산에 정착,마산의부호이자 한량으로 소문난 김해낭문하에 입문하여 그곳에서 궁중무에서 승무·살풀이·태평무·탈춤·기방무를 고루 이수했다. 그러나 스승이 초기엔 장작이나 패게하고 집안청소를 하게 할뿐 도무지 춤을 가르쳐주지 않아 그때도 당돌했던 그는 『왜 춤을 가르쳐주지 않느냐』고 스승에게 항의하곤 했다. 『예술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네가 보고 느끼고 깨달아라』그는 머리속에 꽉 찼던 안개가 걷힌 듯 스승의 이 말을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그때부터 춤이 몸속에서 피돌기처럼 돌고 흥이 기운처럼 솟구치기를 기다렸다.스승은 그제서야 그에게 춤 한자락씩을 지도해나갔다. 예술의 겸손을 엄숙하게 익히고도 인격수양이 덜 됐거나 춤을 잘 춘다는 주변의 칭찬에 우쭐한 나머지 지금까지도 가슴에 남아 잊히지 않을 큰 「잘못」을 하나 저지른 적이 있다. 58년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스승 김해랑 안무로 「독무」를 출때였다. 당시 명고수인 지영희씨가 장단,그의 부인인 성금련씨가 가야금을 연주,진양조에서 중머리 중중머리로 넘어가는 대목에서 지영희씨가 그만 잦은몰이 장단을 잘못친 것이다. 박자와 호흡,시간조절에 의해 손의 움직임을 감을 수도 펼수도 있는 그로서는 리듬이 맞지않아 크게 당황했고 무대는 막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물불 가리지 않고 다짜고짜 지영희씨에게 덤벼들었다. 『무대는 생명입니다.단 한번의 실수도 있어선 안돼요.관객에게 손가락질 받으면 나는 이것으로 끝납니다』 지영희씨는 『최선생 내가 정말 잘못했네.큰 실수였다』고 백배사죄했으나 그로서는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망발.당대의 명인이자 대선배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자신의 방만함을 후회했다고 탄식한다. 이제 그는 참다운 예술가가 되고 싶다.밖에서 안을 들여다 보고 진지하게 나를 점검하여 「몸짓」하나 「소리」하나에도 자연의 질서가 깃든 지혜와 노의 경지에 이르고 싶다.그리고 내 춤속에 관객을 끌어들여 나의 한과 정취와 풍류의 빛,내가 살아온 춤의 굽이굽이를 함께 향유하고 싶다고 말한다. 최현의 많은 이야기중에서 그가 54세때 27세 연하의 신부를 맞아들인 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는 화제중 하나다. ○54세때 27세 신부 맞아 84년 12월,일밖에 모르던 까다로운 성품의 최현이 갑자기 결혼을 발표,더구나 신부는 서울예고를 졸업,그가 지도위원으로 있던 국립무용단 단원이라고 해서 주변의 놀라움은 한층 컸다. 신부인 원필녀씨는 나이보다 깊고 의젓한 성품으로 춤추는 스승을 멀리서 지켜보면서 혼자서 그를 사모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두사람의 결혼은 올해로 만 9년.제자로서 스승으로서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결혼초기때의 사랑과 정성과 존경을 변함없이 나누고 있다. 최현씨는 그동안 부인을 한성대와 이대대학원에 다니게 했고 지금은 한성대에 출강.『내가 아프면 밤새 내 머리맡에 앉아 나를 지켜준다』고 자랑한다. 지난해 6월엔 제1회 원필녀개인무용발표회를 주선해 주었다.그리고 그가 사랑해마지않던 그의 춤 「비상」을 부인에게 추게 했다. 그는 88올림픽 폐막식때는 10만군중과 수천명의 출연자들에게 청사초롱 「안녕!」을 추게 하여 방대한 스케일로 각계의 시선을 모았었다.지난해엔 청소년예술제에 「파란풍선」에 이은 「비단안개」를 안무,서울예고 무용단을 이끌고 일본 도쿄 무장야시민문화회관에서 「시집가는날」을 공연,올해는 문예진흥원 창작지원기금을 받아 그의 개인발표회를 준비중이다.작품은 정철의 「사미인곡」. 차범석극본·최종원음악의 이 작품은 그의 춤 60평생을 정리한 집대성의 일환으로 그의 특기인 「춤에서의 여백의 미」를 유장하게 전승시킨다는 집념을 담고 있다. 그는 아무리 춤을 잘추어도 훈련된 춤,숙련된 춤은 단호하게 부정한다.긴 세월 스스로 깨달아 마음속에서 몸속에서 자연스러운 율동으로 우러나오는 극미(극미)에 이르러야 한다고 주장한다.그리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기를 축적시키면서 이를 어느 한순간 우주의 무한한 공간속에 힘차게 내뿜는다.장삼자락을 낙화로 흩날리며 탄식의 숨결을 하공에 흩뜨려놓듯,그래서 그의 춤의 한끝은 결국 끝없는 비상임을 그는 알고 있다. □연보 ▲1929년12월 부산 영도 출생.최재용씨와 이말념씨의 2남5녀중 장남 ▲1946년 마산으로 이사 ▲1953년 마산상고졸업 ▲1959년 서울대 사대 체육과 졸업 ▲1988∼1990년 중앙대 사회개발대학원 예술학과 수학 ▲1946∼1953년 마산 김해랑 무용연구소 입문 전통무용 유형과 기법사사 ▲1953년∼ 오광대일인자 장재봉,민속춤의 김숙자씨등에게 승무·살풀이·태평무·탈춤·기방무 등 이수 ▲1955년 최윤찬무용연구소 개설 ▲1961∼1962년 서울대 음대 무용강사 ▲1965∼1985년 서울예고 강사 ▲1967∼1974년 서울대 사대 체육과강사 ▲1976년 최현 무용단 창단 ▲1980∼1981년 중앙대 예대 무용과 강사 ▲1981∼1985년 서울예전 무용과 주임교수 ▲1982년 최현 무용연구실 개설,한국무용협회이사,한국문화예술단체 총연합회(예총)이사,문공부 문화재 전문위원,국립무용단지도위원,한국무용협 부이사장,대한민국 무용제 심사위원 문예진흥원 지원기금 심사위원역임 (영화)「삼천리의 꽃다발」 「시집가는날」 「춘향전」 「불멸의 성좌」 (무용·안무출연)무용극 「초라니」 「춘향전」 「시집가는날」 「마의태자」 「황진이」국립창극 「심청가」 「강릉매화전」 「광대가」 「변강쇠타령」 「시집가는날」 「대춘향전」 「허생전」 「심청」 「서동가」 「이춘풍전」 「놀부전」 「소태산」 「아리랑」 ▲1970년 일본 EXPO70 한국의날 안무·출연 ▲1971년 국립무용단 유럽지역 10개국 순회공연 안무·출연 ▲1975년 국립무용단 일본 10개도시 순회공연 안무·출연 ▲19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예술제 「녹」 「비상」안무·출연 ▲1980년 국립무용단 동남아 9개국 순회공연 안무·출연 ▲1982년 시립무용단 「한국 명무전」에 「비상」출연 ▲1985년 호암아트홀 개관 초청공연 「헌화가」안무·출연 ▲1987년 88서울예술단 창단공연 「새불」구성·안무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안무총괄 「안녕」 ▲1990년 국제문화협 주최 일본 지역 공연 창극 「심청전」안무 ▲〃 동아일보창간70주년기념 모스크바지역등 5개국 순회공연 창극 「아리랑」안무·출연 ▲1991년 국립극장주최 청소년예술제 「파란풍선」안무 ▲1992년 국립극장주최 「비단 안개」안무 ▲〃 서울시립무용단 무용극 「춘향전」객원안무 ▲현재 문화부 문화재 보호협회 「한국의집」예술총감독,서울예고 무용과장 서울올림픽 안무총괄 공로 대통령 표창
  • “노동당의 들러리” 북한의 「야당」(오늘의 북한)

    ◎그 위장단체의 실체를 파헤친다/통일전선전략 도구로 당지시에만 맹종/사회민주당/서구·남미 외교발판 마련 첨병역할/천도교청우당/「종교」가면 쓰고 반한·반미선전 앞장 북한관영 중앙통신은 김일성이 지난달 23일 병사한 사회민주당 중앙위원장 이계백(87)의 빈소를 직접 찾아가 조문하고 유가족을 위로했다고 보도했다.이같은 김주석의 조문은 다소 이례적인 것으로 북한전문가들은 북한이 사회민주당의 역할에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잘 알려진대로 북한은 노동당이 지배하는 사회로 모든 권력은 노동당에 집중돼 있으며 중요한 결정 역시 노동당에 의해 내려지고 있다.이처럼 노동당 유일당체제이면서도 북한은 대내외적으로 노동당 이외에 다른 정당들도 기능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다. 북한이 노동당 이외의 복수정당이라고 주장하는 정당은 사회민주당과 천도교청우당이다.그러나 이들 정당은 이름이 정당이지 실제에 있어선 직맹이나 문예총과 마찬가지로 「당의 충실한 방조자」역할을 할뿐 정당으로서의 기능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따라서 이들 두 정당은 「야당」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노동당의 정책과 노선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집권 노동당의 외곽단체이자 통일전선전략의 기구로서만 존재가치를 인정받고 있을 뿐이다.이들 두 정당의 실체를 벗겨본다. ▷사회민주당◁ 해방직후 공산당과 적위대 그리고 구소련군대의 행패가 빚어낸 민심의 이반을 막기 위해 복수정당제가 실현된다는 것을 세계에 선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난 45년11월3일 「조선민주당」이란 이름으로 창당됐다.당시 당수는 고당 조만식.이후 48년3월 제3차 전당대회에서 최용건이 위원장에 올랐으나 최는 56년 4월 노동당 제4차대회에서 노동당 부위원장을 겸직,「우당」이라는 말조차 유명무실한 것으로 만들었다.김일성은 58년 조선민주당과 청우당의 지방조직을 전면적으로 해체,「당중앙」이라는 윗 조직만 남겨 놓았다. 이후 조선민주당은 하부조직도 없이 노동당의 대내외정책을 지지 또는 추종하는 어용정당으로 전락했다.이때부터 60년대까지 조선민주당은 대남문제와 관련한 성명발표와 집회참석등 대한·대미비난활동에 역점을 둔 적극적인 활동을 보였다.그러나 70년대에는 남북대화 진행과정에서 부위원장 김성율을 남북적십자회담 자문위원으로 참여시켰는가 하면 79년1월 「조국전선」 4개항목의 구국방안에 따라 민족통일준비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한 남북접촉에 대표를 파견하는등 위장활동을 전개했다. 조선민주당은 81년1월28일 제6차 당대회를 열고 당의 명칭을 현재의 조선사회민주당으로 개칭하는 한편 민주사회주의를 당의 지도이념으로 내세우고 10개항의 당강령을 새로 채택했다.이는 북한이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응하는 한편 이 정당을 통해 서구및 남미 등지에 외교적 발판을 구축하려는 외교전략에 의한 것이었다. 북한은 80년대 이후 세계각국에서 혁신정당들의 역할이 증대됨에 따라 사회민주당의 역할을 부각시킴으로써 국제사회에서 반한여론을 조성하는 한편 서방의 사회주의 정당들과 연계를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 오고 있다. 북한은 지난 89년4월 부주석 강양욱이 병사한 이후 6년 넘게 공석으로 남아 있던 사회민주당 위원장직에 조총련부의장을 지낸 이계백을 선출했었다. ▷천도교청우당◁ 천도교도들의 정당으로 46년2월8일 김일성의 독재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책략의 일환으로 창당됐다.초대당수에는 김달현(18 84·함북)이 선출됐으나 김은 19 58년말 「조선전선 간첩사건」에 연루돼 숙청됐다. 천도교청우당은 사회민주당과 함께 하부조직이 없는 명목상의 정당으로서 노동당의 정책을 적극 지지해왔으며 특히 종교적 이념을 표방하면서 북한의 통일정책을 한국사회에 선전하는데 앞장서 왔다. 북한은 지난 89년3월 천도교청우당 제6기 14차전원회의에서 지난 77년 이후 천도교청우당을 대표해온 정신혁을 제1부위원장으로 강등시키고 그 자리에 최덕신을 앉혔었다.최는 한국에서 외무부장관과 서독주재대사 천도교교령 등을 지낸 경력으로 인해 주목을 끌기도 했다.이 회의에서는 북한이 제시한 통일정책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한국의 모든 천도교도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할 것을 촉구하는 「남조선 천도교인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채택한바 있다. 이와함께 북한은 천도교청우당을 ▲고려연방제 통일방안 지지 ▲팀스피리트훈련 중지및 주한미군 철수 ▲한국의 북방정책 모략·비방 등 북측 통일방안 지지 및 반한·반미선전에 적극 활용해오고 있다. 현재 천도교청우당은 최덕신의 사망(89년11월)으로 다시 정신혁이 대표를 맡고 있으며 최희준·이득렬·김철민·한일섭·한영수·임선태 등이 부위원장직에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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