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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악이 흐르는 공항/김경운 사회부 기자(현장)

    ◎뜻밖 볼거리에 외국관광객 “원더풀” 슈베르트 ‘세레나데’의 그윽한 선율과 브람스 ‘헝가리안 댄스’의 경쾌한 가락이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2일 하오 김포국제공항 국제선 2청사 3층 대형홀.공항관리공단이 ‘기억에 남는 문화공항’이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마련한 음악회가 열리고 있었다.58년 국제공항으로 문을 연뒤 처음 열리는 행사다. 코리아 오케스트라와 서울 필하모니 오페라 합창단이 출연했다. 출국장으로 나서던 여행객들도 잠시 발길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고 막 입국한 외국인 관광객들은 눈이 휘둥그래지며 “원더풀”을 연발했다. 뜻밖의 볼거리에 청중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고 한곡 한곡 연주가 끝날 때마다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88년 완공된 국제선 2청사 대형홀은 여느 연주회장 못지 않게 고급스러운 실내장식에다 실내 인공림으로 꾸며져 있다.때문에 ‘숲속의 연주회’로 여겨질 만큼 감탄을 자아냈다. 음악회에는 ‘이사도라 던컨’‘대부’‘금지된 장난’등 귀에 익은 영화주제곡과 ‘그리운 금강산’‘경복궁타령’ 등 우리 가곡과 민요도 곁들여졌다. 김포공항은 이미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공항으로 자리잡았다.지난해 이용객수는 3천4백70만여명으로 세계 국제공항 가운데 9위를 차지했고 매년 이용객 증가율도 평균 12.3%나 돼 일본의 나리타공항을 제치고 아태지역에서 단연 1위다. 공항은 그 나라의 얼굴이다.공항의 첫 인상은 어떠한 관광자원보다 소중할 수 밖에 없다. 음악회를 지켜본 공항 이용객들은 “품격있는 국제공항의 주인이라는 자긍심을 일깨워준 훌륭한 행사’라며 흐믓해 했다.
  • 수호전 저자 시내암의 흥화(중국문학의 고향을 찾아:11)

    ◎시씨 집성촌 시가교장에 유채화 만발/뒤집은 팽이모양의 시내암 모역 성지단장 한창/생명걸고 저술한 수호전은 발분저서의 사표로 나처럼 평생 주먹 한번 써보지 못한 샌님에게는 차라리 무송같은 주먹이 부러울 때가 있다.그래선지 「수호전」그 파란만장의 송강취의를 좋아했고,시내암(1296∼1370)이 살고 그의 유택이 된 강소성 흥화현 신타향 시가교장은 관심을 끌던 곳이다.그럼에도 거기 가는 길은 몹시 불편해서 엄두를 내지 못했다.상해에선 어림 잡아 400㎞쯤이지만 꼬불 꼬불 지방 도로를 몇번인가 갈아타면서 거푸 물어야 겨우 찾을수 있었다.북으로 양자강을 건너 남통과 동대를 거쳐 대풍현 백구진에 이르면 시가교장의 문턱에 닿은 셈이다. 「수호전」의 저자와 저자의 고향과 무덤,그리고 저작 연대에 대한 쟁론은 분분했다.그것은 「수호전」이 비록 북송 말년에서 원말명초에 이르기까지 250여년동안,평화나 희곡의 형식으로 민간에 전래됐던 양산박일대의 관핍민반의 설화를 소설화함으로써 결코 온전한 창작은 아니지만 그를 두고 농민폭동설을비롯 송강투항설·시정 서민의 반란설·충간설·영웅설·악한설등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의 고향을 두고도 소주·항주·흥화·양주·회안·백구 등의 이설이 있지만 그 어느 것도 틀리다고 할 수는 없다.그의 고향이 소주나 항주·흥화라는 설이 구구하지만 소주는 그의 고향이요 출생지라면 항주는 벼슬하던 곳이다.흥화와 백구는 그가 성장하면서 「수호지」를 완성했던 곳이면서 그가 묻힌 곳이다.다만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흥화현 신타향 시가교장으로 불린다.흥화는 옛날 양주에 속했던 군현의 하나요,회안은 시내암이 죽은 곳,그러니까 그 어느쪽에도 인연이 있고 족적이 닿았다. 「수호전」의 저자를 두고도 말이 없지 않았다.「삼국지」의 저자인 나관중과의 공저설이나 나관중의 편집설,심지어 나관중의 저작설이 있지만 시내암의 단독 저작설은 신중국 건국이래 1958년과 1978년,시씨들의 집성촌인 시가교장 근교에서 출토되거나 발견된 시내암의 잔비를 비롯 시씨 종가의 지권기록·시씨 종친들의 묘갈명·시씨 족보·시씨 선영에서 출토된 부장품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 결과,시가교장의 시씨 선영에 시내암의 무덤이 있고,그 저자 또한 시내암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필자가 근 10시간을 털털이 버스에 시달리다가 백구진 작은 읍내에 내렸을때 몹시 낯 설었다.심지어 으스스한 느낌이었다.글쎄 양산박의 건달로 뵈는 시커먼 청년 서너사람이 일시에 몰려 와서 나를 에워쌌다.내가 그물에 걸린 물고기로 보였던 것이다.그들은 저마다 오토바이를 몰고 와서 호객을 하는 것이다.여기서는 오토바이가 택시나 삼륜차를 대신하는 모양이다.시가교장까지 왕복하기로 차삯을 인민폐 35원으로 흥정했다. 백구진에서 시내암 무덤까지 약 10㎞는 밀밭을 뚫고 가는 흙길이다.마침 유채화가 한창이다.길옆으로 누런 유채꽃,유채꽃 너머 짓푸르게 키가 훌쭉한 전나무,그 전나무가 휘휘 흔들리는 그림자밖으로 끝없이 아득한 밀밭이 너울거리고 있다.그 세가지 원색은 일망무진의 평행선을 긋고,나는 그 시커먼 녀석이 호마처럼 쿨렁거리는 꽁무니에 붙어 요동을 치고 있다.그 녀석 궁둥이에 깔린 비닐 끈을 꾹참고 눈을 질끈 감았는데 이따금 짝눈으로 뵈는 풍경은 취할만 했었다.그렇게 꼬박 반시간을 달렸다.대영이란 마을에서 우회전,한참 달리다보니 시가교장이라 했다.풍요로운 농가 40,50채가 넘었다.물어보니 지금도 죄다 시가 들만 산다고 했다. 연당이 있고 둥그렇게 시내가 맴을 그리면서 훤칠한 형국을 만들었는데 그중앙에는 시내암의 무덤,그 왼편에는 사당,사당앞에 정각,다시 오른편에는 자료실,자료실뒤로는 칙칙하게 나무들을 심었다.시내암 봉분은 엊그제 묻은듯 밋밋한 흙더미,팽이를 거꾸로 세운듯 했다.그 봉분앞에 우뚝 세운 묘표,「대문학가시내암선생지묘」. 이는 일찍이 1942년과 1957년,흥화현 현청에서 문화유적지로 지정되었던 것을 최근의 발굴과 고증을 거쳐 드디어 그 성역화를 결정,묘역의 확대와 미화에 피치를 올리고 있는데 올 7월에 준공 예정이라고 한다. 좌우를 둘러 보아도 물론 청룡백호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오직 기름진 평야일 뿐이다.거기다 사통팔달의 물줄기들,농토의 관개용이다.그런데 여기서시내암은 630여년전,흉중의 분개를 안고 문을 걸어 잠근채 「수호전」을 완성했던 것이다.물론 그 분개는 그의 짧은 관로와 원군의 무도한 압박때문이었다.벼슬은 내동댕이 치고 원군을 피해 여기 궁벽한 흥화까지 피란했던 것이다.더구나 주원장의 간곡한 청마저 물리친채 오직 「수호전」 완성에 성명을 건 것은 「발분저서」의 사표가 아닐수 없다.여기서 영웅의 무기는 붓이요 또 그것이 불후하다는 것을 재확인하게 된다. 필자는 다시 밀밭길을 달려서 백구진으로 건너가는 나루터에서 오토바이를 내렸다.나루터를 건너면 행정구역으로 대풍현 백구진.하지만 백구진은 옛날 흥화현에 예속되었다. 나루터를 건너 다시 다리를 건너면,두둥실 두채의 건물,그 왼쪽 이층은 「백구문화원」,그 오른쪽에 「시내암기념관」.시내암의 하얀 입상이 서있는,시내암 연구를 위한 자료전시실이다.주로 신중국 건국이래 이 지역에서 발굴된 자료와 연구실적을 통해 흥화의 시가교장이 시내암의 유택이요 「수호전」의 산실임을 입증하고 있다. 이러한 전시물을 참관하는 동안왠지 씁쓸한 생각이 스쳤다.역사적인 인물의 이름이나 뼈다귀를 서로 팔아먹고 있다는 생각이다.흥화현청이 시내암의 묘로 관광수입을 올린다면 백구진은 시내암의 기념관으로 한몫을 보고 있다.이런 일은 「개혁개방」중인 중국 어디서고 보이는 일이다.
  • 장정연 주한중국대사(서울신문 특별 인터뷰)

    ◎7월 홍콩환수는 중국통일 첫걸음”/일국영제 등 3원칙 견지… 경제자유 보장/한반도통일 지지… 4자회담 시간 더 필요/한국인 성격급해도 위기극복 능력 탁월 □대담=안병준 국제부장 장정연 주한중국대사는 『잘 풀렸다』고 말했다.국제신사 답게,온화한 미소를 지었다.은퇴를 앞둔 63세 답쟎은 홍안이,약간 어두운 집무실을 시종 밝게 해주었다.서울 명동 주한 중국대사관에서의 인터뷰는,황장엽 비서 망명사건을 화두로 2시간 동안 진행됐다.서울신문의인터뷰 요청은 「홍콩에 대한 중국의 주권회복」을 주제로 함에 따라 이뤄졌다.그러나 가끔 다른 얘기도 있었다.그는 황비서 문제에 대해 『조용한 것이 좋다』고 조용히 말했다. 대사는 「임기 만료에 따른 귀국」보도에도 아랑곳 않는듯 했다.『한민족은 참으로 부지런하고,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극복하고 이루어 내는 독특한 민족』이라고 곧 떠날 사람처럼 말했다.굳이 「우정어린 충고」를 요청하니 예의 미소와 함께 『좀 급하죠?』라고 말했다.그리고 덧붙였다.『4자 회담도,통일 문제도 때가 있는것이니 기다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대사는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의자 뒤의 액자를 가리켰다.「신재리향심회조국 입족본직방안세계」ㅡ 몸은 타국에 있으나 마음 속에는 조국을 담고 있다,자기 업무를 충실히 수행하며 전세계를 내다 보자.유창한 한국어로 풀어주며,대사는 『95년 강택민주석께서 방한 하셨을때 써주신 것』이라고 자랑스러워 했다.얘기를 하는 동안,대사는 자료없이도 많은 통계를 정확히 제시했다. ­오는 7월1일은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고 중국의 주권을 회복하는 역사적인 날입니다.홍콩에 대한 중국의 주권회복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습니까. ○중 경제교류 통로 기대 ▲홍콩은 영국이 아편전쟁 승리후 지난 1842년의 남경조약,1860년 북경조약 등의 불평등조약을 청나라에 강요함으로써 할양됐습니다.따라서 주권회복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습니다.우선 156년동안의 민족적 치욕을 씻고 중국의 국가주권을 회복한다는 것입니다.「하나의 중국」으로 통일하는데 역사적인 한걸음을 내디뎠다는 뜻도 있지요.홍콩 문제가 잘 해결되면 오는 99년 마카오에 대한 중국 주권회복이나 대만과의 통일 문제 해결에도 좋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 중국의 경제발전에도 유리한 작용을 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중국은 홍콩을 외국과의 경제교류의 다리로,다른 나라들은 중국과의 경제교류의 통로로 보기 때문이지요.특히 국제적으로 다른 나라의 영토분쟁에도 모범적 사례가 될수 있다고 봅니다.영국과 아르헨티나간의 포클랜드 분쟁 등이 두나라간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수 있는게 바로 그 예가 될수 있지요.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이 홍콩의 현재 생활방식을 지지한다면서 중국 주권회복식에 참석한다고 밝혔습니다.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참석이 영국의 영향력이 없어지는 홍콩에 대해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하하려는 의도로 보는 일부 서방전문가들의 시각도 있습니다. ○경제이외 간섭은 불용 ▲홍콩에 대해 미국은 물론 모든 나라의 경제적 이익이 보호돼야 한다는게 중국의 기본원칙입니다.그러나 오는 7월1일 이후는 홍콩이 중국에 속하게 됩니다.따라서 경제적 이익을 제외한 부문에 대한 영향력의 행사는 내정간섭에 속하므로 묵과할 수 없다는 것이 중국의 기본 입장입니다. ­서방언론들은 홍콩에 대해 중국이 주권을 회복한 이후의 홍콩 민주주의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데. ▲중국은 홍콩에 대해 일국양제(한나라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공존)·항인치항(홍콩인이 홍콩을 다스림)·고도자치(행정권,입법권,사법권에 고도의 자치권 부여) 등 3가지 기본원칙을 견지(견지)하고 있습니다.지금 홍콩의 정치·경제·생활방식 등이나 법률이 기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죠.물론 홍콩의 현행법이 중국 주권이 회복된 뒤의 홍콩특별행정구(SAR) 기본법에 저촉되면 약간의 변화가 올 가능성은 있습니다. ­동건화 초대 홍콩특구 행정장관은 중국에 「노(NO)」라고 할수 없는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어 중국의 「입김」을 우려하고 있습니다.동 행정장관이 친중국계 인사인데다 행정장관의 선출과정에서도 친중국 발언을 한 탓도 있습니다. ○홍콩번영은 한인의 땀 ▲그것은 오해입니다.동 행정장관의 당선은 정말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이뤄졌습니다.특히 공개·공정·공평 세가지의 민주주의 원칙에 의한 선거를 거쳐 당선돼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홍콩의 번영은 영국인들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은데,대체적으로 동의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홍콩의 번영은 순전히 중국인들의 노력에 의해 일궈낸 것이지요.지난 40∼50년대에 중국 상해·절강성 등의 중국인들이 홍콩에 많은 투자를 했습니다.지난 60년대부터는 중국의 광동성 등에서 생수·야채·생선·육류 등의 대부분을 열차로 싣고 홍콩으로 들어가고 있는게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싱가포르·말레이시아 등이 조세감면·금융자유화 등 특혜조치의 단행을 통해 홍콩에 투자된 외국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홍콩은 지금도 자유무역·자유거래·자유경쟁의 원칙 아래 공정거래가 이뤄지고 있습니다.앞으로도 이같은 원칙은 계속 지켜질 것입니다.따라서 홍콩의 안정적인 발전이 지속되고 투자환경이 유지되면 투자유인을 위한 새로운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보다,지금의 완전한 자유를 보장해주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중국 주권을 회복한 뒤 홍콩의 언론 자유에 우려하는 말이 많습니다.홍콩의 권위지 명보의 경우 지난달에 대표적인 공산당 비판 논객 3명이 떠났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언론의 자유에 대해 크게 우려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물론 약간 달라질 수는 있을 것입니다.홍콩이 중국 주권을 회복한 뒤에는 내정간섭에 해당하는 비판은 하지 못할 것으로 봅니다.언론의 자유는 충분히 보장하되 영국 통치시기와는 달리 어느 정도 「자제」될 것이라는 얘기이지요.주권회복 후에는 하나의 중국에 속하게 되기 때문에 중국식으로 약간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언론자유 침해없을것 ­치안문제로 전전긍긍하는 대만·마카오와 달리 홍콩 치안상태는 매우 안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그러나 홍콩이 중국주권을 회복하면 중국의 불법이민이 늘어나는등 치안상태가 혼란스러워질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중국인들의 불법이민이늘어난다는 말은 기우입니다.주권을 회복하더라도 대륙의 중국인들이 홍콩에 가려면 중국 정부의 신청 및 허가를 받아야 하는 탓에 마음대로 갈수 없어 치안문제에 대해 우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향후 한국과 홍콩과의 관계는 어떻게 봅니까. ▲더 잘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홍콩의 한국 총영사관을 그대로 두고 노(NO)비자 여행도 그대로 시행할 것을 두나라의 외무부 사이에 이미 합의됐습니다.홍콩에 있는 한국기업·교민들의 이익도 보장됩니다.한·중 관계가 좋은 만큼 여러가지의 경제활동·무역 등도 앞으로 더욱 활성화될 것으로 보고 있지요.특히 홍콩의 안정은 한반도및 아시아의 안정과 평화 유지에도 일조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국총여사관 유지 ­이제 화제를 바꾸겠습니다.장 대사께서는 평양 주재 중국대사관에서 10여년 이상을 근무했으며 서울 주재 중국대사로 6년째 봉직하고 있어 남·북한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정통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남·북한을 오가며 느낀 한국인들에게서 본받을 점이나 충고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남한이건 북한이건 한민족은 일을 열심히 한다는 점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어떤 어려움도 결심을 하면 꼭 하고야 마는 좋은 품성도 가졌지요.40여년간 한·중 외교관계가 없어 처음 한국에 왔을때 상당히 걱정을 했습니다만,한국인들이 친절하고 진실되며 솔직해 별 어려움없이 업무를 수행하게 됐음을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인 친절하고 진실 그러나 한민족은 전체적으로 성격이 급합니다.모든 일을 빨리 빨리 처리하려고 하는게 조금 문제가 될수 있다는 뜻이지요.또 조용하게 처리할 사안은 조용하게 처리하고,크게 할 문제는 크게 하는 처리방식의 강약조절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한 4자회담에 대한 전망은. ▲조금은 비관적입니다.하루 이틀에 결론이 날 것 같지 않습니다. ­한반도 통일에 대해 어떤 고견을 갖고 있습니까. ▲중국은 한반도의 통일이 하루 빨리 이뤄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그렇게 노력도 하고 있습니다.한반도의 통일에 중국과 미국,일본이 옆에서 도와줄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남·북한 쌍방이 해결할 문제라고 봅니다.남·북한이 머리를 맞대고 공통된 노력에 의해 풀어야할 숙제인 셈이지요. ­그러면 남·북한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요. ▲지금 대화는 안되고 있는 상태이지만 여건이 성숙될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려야 합니다.서두르지 말고 천천히,여유있게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한국은 강하고 실력이 있으며 고급두뇌도 많습니다.한국이 북한에 대해 너그럽고 여유있게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정리=김규환 기자〉 □장정연 대사 약력 △36년 북경 출생 △58년 북경대 조선어학과 졸 △58년 외교부 근무 △63∼69년 주북 중국대사관 근무 △70∼76년 외교부 아주국 근무 △76∼81년 주북 중국대사관 2등서기관 △81∼86년 외교부 부처장·처장·참사관 △86∼89년 주북 중국대사관 수석참사관 △89∼92년 외교부 아주국 부국장·국장 △92년∼ 초대 주한중국대사
  • 청소년 우울증 심각하다(사설)

    청소년의 3분의 1이상이 경증이상의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보고가 나왔다.보건사회연구원이 95년 전국 5천4백샘플을 놓고 실시했던 우울증실태 조사의 분석결과다.전국민 우울증 유병률은 25.4%,이중 청소년 유병률이 34.5%라는 것은 매우 심각한 과제이다.즉시 치료가 필요한 중증도 14%나 된다.15∼19세 집단에서 자살충동을 겪은 청소년은 무려 45.8%다.뿐만 아니라 7%는 실제 자살을 기도했다고 한다. 원인은 더욱 답답하다.대부분이 입시에 따른 성적위주교육의 스트레스라고 응답했다.물론 뜻밖의 결과는 아니다.오히려 잘 알고 있는 현상의 확인일 뿐이다.하지만 우울증이 실제로 상당히 심각한 병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유병률에 대한 대책이 전혀 없다는 중요한 허점을 발견하게 된다.자살기도경우의 45%는 두번이상 자살을 시도했다고 하는데,의학적으로는 이들이 곧 치료를 받지 않으면 자살로 생을 마감할 것이라고 판정하고 있다. 가정기능의 약화,학교교육의 파행성,요보호청소년의 증가,비행청소년의 난폭화 등 청소년 삶의 환경에 열악한 항목이 한둘이 아니므로 자연 긴급상황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우울증 증세를 미루어둔채 지낼수 있을는지 모른다.그러나 청소년이 살아야할 내일의 세계는 지금 개개인이 특별한 창의력을 가지고서만 살수 있다고 전망된다.무관심속에 우울증으로 성장하는 청소년들이 21세기를 살아갈 창조적 능력을 어떻게 획득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대안은 무엇인가.첫 단계로 최소한 중·고교에 전문상담요원을 배치해야 한다.실은 1958년부터 상담교사교육을 시도했고 70년대에 교도주임을 두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던 바 있다.그뒤 이 담당교사들이 진로상담주임으로 바뀐 것이 잘못된 것이다.그러니까 현재로는 정신적 심리적 서비스가 전혀 없는 교육이다.문제의 심각성을 다시 절감하여 본격 대책을 세워야 한다.
  • 양자강 하류지역(중국문학의 고향을 찾아:5)

    ◎7천년의 역사·문화가 살아 숨쉰다/송·원·명·청대 거치며 걸출한 문인·묵객 대거 배출/당도·양주·항주·소주·소흥 등서 중국문학 꽃피워 지난달 12일부터 서울신문에 연재하는 「중국문학의 고향을 찾아」가 5회째를 맞는다. 그동안 중국의 국민시인 이태백이 만년을 보낸 양자강 하류의 당도시와 꽃과 술과 물의 마을 양주,한말의 망명시인 김택영이 묻힌 남통,송나라 시인 진관이 공부한 고우시 등을 찾았다.이처럼 중국문학 대가들의 숨결이 살아있는 양자강은 세계에서 세번째로 긴 6천300㎞의 강이다. 양자강의 지리조건과 역사는 황하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장강으로 불리는 양자강,그 길다란 용틀임은 황하의 스무줄기에 상당한 수량을 유출하면서 그 겨드랑이에 중국의 쌀 수요량 10분의4를 산출하는 세칭 어미지향을 거느리고 있다. 그럼에도 인문사회의 역사는 황하보다 천년이 넘게 뒤져 있다.장강유역에 주대의 유물이 간혹 보이지만 역사의 기록은 기원전 6,7세기의 춘추시대 오 월에서 비롯된다.그마저 정치의 중심이나 번영의 시장으로 각광을 받기는 송원 양대부터임을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마저 생생하게 기록했다.항주는 세상에서 제일 화려하다고. 물론 남송의 문화가 하루아침에 건너온 것은 아니었다.벌써 춘추전국때 오월문화를 비롯해서 육조때의 남조문화가 바탕을 닦은 것이다.그 빛과 힘은 양자강의 하류에 응집되었다.여기서 말하는 양자강 하류란 강서성 호구로 부터 안휘성 동남단과 양자강삼각주,곧 양자강 남북연안에 위치한 절강성과 강소성 상해 등 3개 시·성을 통칭하고 있다. 양자강 하류지역은 남송·원·명·청을 거쳐 민국과 신중국에 이르기까지 줄곧 상승의 기세다.비단과 도자기를 비롯 쌀·차 등 농산품의 생산과 수출로 경제의 번영을 누리면서 희곡과 미술 등의 예술로 강남문화를 일구었는가 하면 성리학과 실학의 연구로 근대화·민주화의 앞장에 섰다.거기다 근대문학의 가장 뜨거운 산지가 됨으로써 문인을 배출하는 못자리가 되었다. 필자가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했던 「중국고대문학사」와 「중국근대문학사」에 등장하는 문인들을 그 출생지와 활동지별로분류한 나머지 그 전체의 4할쯤이 이곳서 태어나고 이곳에 작품을 썼다는 일차적인 통계를 얻을 수 있다. 그들은 물론 송대 이후 특히 명·청 양대에 집중되어 있다.따라서 시와 산문·평론등 귀족문학은 물론 시민문학으로서 그 광장을 넓혀 소설과 희곡등 다양한 꽃을 피웠다. 그러니까 황하는 열악한 지리환경을 극복한 채 정치문화의 번영을 누렸고 양자강은 풍요로운 지리환경임에도 중화문화의 종속적인 지위를 벗어나지 못하다가 남송때에야 그 지기와 인걸을 발휘했던 것이다. 1949년,새로운 중국이 건설되고 한중관계가 단절된 뒤 중국의 고고학계에는 지각변동에 상당하는 새로운 발굴과 함께 새로운 발견,새로운 학설이 잇따라 발표되었다.그것은 1953년 섬서의 서안교외인 반파에서 기원전 5000년에서 3300년까지 존재했을 신석기 문화유적을 발견하여 북방의 문화사를 2000년이나 소급한 일이 있었다.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제까지 적막한 옥토로만 여겼던 장강 하류지역에서 연거푸 놀라운 문화가 햇빛을 보기 시작하 것이다. 1958년 상해 근교 청포현 숭택에서 기원전 3400년에서 4000년의 정제 석기를,1959년 절강 가흥근교인 마가빈에서 기원전 5000년에서 4000년의 신석기와 홍도를,다시 1973년과 1977년 두차례에 걸쳐 절강 여요현 나강향 하무도에서 기원전 5000년의 쌀과 목조건축·방직·축목등의 유적을 각각 발굴 연구하면서 7000년이나 숨겼던 비밀이 어렴풋 풀리게 된 것이다. 문학은 자연지리적 환경보다는 인문사회적 환경의 산물이요,중국은 황하와 장강을 중심한 남북문화지만 선후적 관계보다는 개성적 차이로 발전되었다는 1차적 결론을 얻을수 있었다.그것은 장강삼각주의 지형이 말해 준다.그 서북에 낮은 산악과 구릉이 남북으로 누워있을뿐,절대의 면적이 수로가 사통팔달하는 대평원이어서 배산임수해야 인물을 낸다는 통속적인 풍수설을 뒤엎고 있다.또한 장강 삼각주에서 출토된 신석기 유물들은 북방의 동시대 유적인 반파의 그것보다 오히려 정교한 데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과 목적으로 필자는 안휘성의 동남단인 당도에서 출발,장강삼각주의 문학 유적을 전전하면서 그 현장을 확인키로 했다. 「홍루몽」의 저자 조설근을 길러준 남경을 거쳐 「서유기」의 저자 오승은의 고향 회남과 「경화연」의 저자 이여진의 고향 연운항,송나라 문호 소동파가 최후를 마친 상주,「삼국지」를 재현시킨 북고산의 진강,원말의 영웅소설 「수호전」의 배경이요 그 저자 시내암과 청나라의 이름난 시인이자 화가인 정판교의 고향인 흥화.명말의 시인 전겸익의 고향인 상숙,역시 명말 시인 진자룡의 고향인 송강,명나라 후칠자의 수령인 왕세정의 고향 태창,역시 명말의 시인 고염무의 고향으로 지방극 곤극의 고장인 곤산,명말의 문인이자 여행가인 서하객의 고향 강음,당나라때 대시인 백거이 위응물 유우석 등이 벼슬살이했던 소주.청말의 문학평론가 왕국유의 고향인 가흥,만당의 시인 두목이 벼슬했던 호주,송나라의 거물 사객인 주방언과 청나라때 문학이론가 원매 등의 고향이요,당 송의 대시인이었던 백낙천과 소동파가 치적을 남겼던 항주.명나라때 시인이요 대사상가였던 왕양명과 역시 시인이었던 황종희의 고향 여요,한나라때의사상가였던 왕충의 고향 상우,송나라 대시인 이었던 육유와 현대문학의 비조인 노신의 고향 소흥,청나라때 희곡가 이어와 중국 현대시단의 거성인 애청의 고향인 금화 등이 앞으로 연재의 대상이 된다. 그 많은 곳을 되돌아보면 청록색의 망망대야,그 풍요로운 평원과 수향에서 중국문학사의 절반이 이룩된 것을 볼수 있었다.
  • 세계적 권위 「로로로 인물평전」 첫선

    ◎도서출판 한길사,102권중 1차 10권 내/철학·종교·문학·음악·미술 등 인문학 총괄/아도르노·붓다·T.S.엘리엇·히치콕 등 다뤄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인물 평전시리즈인 독일 로볼트 출판사의 「로로로 평전시리즈」가 「한길 로로로」란 이름으로 국내에 선보였다.도서출판 한길사는 지난해 로볼트사와 저작권 계약을 맺고 「로로로 평전시리즈」 102권에 대한 번역작업을 시작,이번에 1차분 10권을 펴냈다. 지난 58년 독일 작가 쿠르트 쿠젠베르크에 의해 처음 발간된 이래 지금까지 600여권이 나온 이 시리즈는 독일어권에서만 2천만부가 팔렸으며,세계 10여개국 언어로 번역·출간된 전기물의 고전.철학·종교·문학·음악·미술·영화 등 인문학 전분야에 걸친 다양한 인물들의 지적 스펙트럼을 통해 인류의 정신적 유산을 정리한다.텍스트에만 주로 의존해온 기존의 평면적인 전기류와는 달리 풍부한 시각자료를 실어 입체적으로 꾸민 것이 특징.이번에 선보인 것은 「아도르노」(하르트무트 샤이블레 지음),「붓다」(폴커 초츠 지음),「니체」(이보 프렌첼 지음),「로자 룩셈부르크」(헬무트 히르슈 지음),「하이데거」(발터 비멜 지음),「도스토예프스키」(얀코 라브린 지음),「T.S.엘리엇」(요하네스 클라인슈튀크 지음),「앨프레드 히치콕」(베른하르트 옌드리케 지음),「뭉크」(마티아스 아르놀트 지음),「하이젠베르크」(아르민 헤르만 지음) 등으로 각 분야 전공학자들이 번역을 맡았다. 이 시리즈는 우리가 희미하게 알고 있는 단편적인 지식의 연결고리를 분명히 해줄뿐 아니라 원전 텍스트에의 접근을 한층 쉽게 해준다는 점에서 기대를 모은다.하나의 예로 우리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을 경우 하이데거의 사상형성 과정과 지적 배경,학문적 영향을 주고받은 주변인물들에 대한 정보부족으로 그 사상의 진수를 이해하기 어려웠다.발터 비멜의 「하이데거」는 바로 이같은 지적 갈증을 풀어줄만한 실질을 갖춘 하이데거 안내서로 평가할 만하다.이 책은 하이데거 사상의 흐름을 그의 사유의 이중적 동기인 「존재물음」과 「진리물음」의 상호연관성속에서 파악한다. 「한길 로로로」는 사상·철학분야뿐 아니라 대중문화의 스타들을 조명하는데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그 첫 테이프는 「앨프레드 히치콕」이 끊었다.「새」「사이코」등 작품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영국출신 영화감독 앨프레드 히치콕(1899∼1980).『나는 나를 둘러싼 주위의 것들이 구름 한점 없이 투명하고 고요한 것을 좋아한다.잘 정돈된 책상은 마음의 평정을 가져다 준다』고 고백했을 만큼 히치콕의 개인적 삶은 평범하고 조용했다.그러나 그가 예술가로서 성장하는 과정은 매우 독특했다.그것은 그가 네 분야씩이나 섭렵했기 때문이다.히치콕은 무성영화로부터 출발해 29년 첫 유성영화 「공갈(Blackmail)」을 만들었고,39년 미국으로 건너가 스릴러영화 장르를 확립했으며,1948년 이후에는 컬러영화를 만드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했던 것.이 책에는 빅토리아 시대풍의 교육을 받은 영국 상인가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신장 기능마비로 죽을 때까지의 히치콕의 개인사가 낱낱이 담겨져 있다. 시리즈의 각권 끝에는 관련인물들의 생생한 증언록이 실려 있어 동시대의 지적 지형도를 그려보는데 일정한 도움을 준다.한편 한길사는 「루소」(게오르크 홀름스텐 지음),「페스탈로치」(막스 리트케 지음),「톨스토이」(얀코 라브린 지음) 등 2차분 10권을 7월중 펴낼 계획이다.
  • 조용기 목사 실화소설 나왔다

    ◎소설가 유양우씨 「솟아올라라,생명의 샘물」/폐결핵 앓던 20대 전도사의 입지전 육체적으로는 폐결핵에 걸리고 정신적으로는 좌절과 실의에 빠져있던 20대의 한 전도사가 한국최대 교회의 당회장으로 성공하기 까지의 과정이 소설로 출간됐다. 세계 3천5백만 신도들의 교단인 「세계하나님의 성회」총재,조용기 목사의 실화소설 「솟아 올라라,생명의 샘물」이 중견소설가 유양우씨 집필로 도서출판 유정에서 나왔다. 1958년 5월 서울 서대문구 대조동 천막교회에서 출발,서대문 순복음중앙교회를 거쳐 현재의 여의도 순복음교회가 설립되기 까지의 과정이 사실을 바탕으로 자세하게 전개된다.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온 조목사의 기도와 교회 성장과정이 순복음교회 초기의 집사 장로 교인들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제1부 샘물과 같은 보혈은 제2부 그물로 오는 영혼 제3부 솟아 올라라 생명의 샘물 등 3부로 구성된 이 소설에는 실존인물과 가상인물을 적절히 배합,교회사를 기록했을 뿐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좌절과 갈등을 신앙으로 극복해가는 내용이 진솔하게 담겨있다. 저자 유양우씨는 「소설 삼국유사」를 쓴 중견작가로 한국문화예술인선교회 창립멤버이며 교회의 집사이다.
  • 의약품 제조 화란 「오르하논」사(G7으로 가는 길:62)

    ◎성공률 5%에 과감한 투자/신제품개발에 평균10년… 연구·노하우 축적/제조약품 60%이상 여성용으로 품목특화 『5%의 성공을 위해 전력을 투구한다.』 네덜란드의 세계적 의약·화학제조기업인 악조노벨그룹의 주력 계열사 오르하논의 세계 의약업계 패권전략이다. 대개의 제조업은 연구개발(R&D)에 투자한 것 만큼 효과를 본다.그러나 의약분야는 좀 다르다.하나의 신제품을 개발하기까지는 보통 10년 정도가 걸리고 그것도 성공 확률이 5%에 불과하다. 여성용 의약분야에서 세계 정상을 자랑하는 오르하논사는 5% 미만의 성공 확률에도 불구하고 약효와 시장성을 정밀분석,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면 과감한 R&D 투자로 승부를 건다.신제품을 개발하려면 시간단축이 가장 중요하다.어떤 의약품이라도 먼저 만드는 회사가 최고다.나중에 만들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피임약의 최고효능 자랑 오르하논사의 이같은 R&D 투자전략과 여성용 의약분야를 특화,지속적으로 추진한 것이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유지하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다.(남성들은 잘모르겠지만) 세계 여성들에게 잘 알려진 「린디올」이란 피임약은 바로 오르하논사가 지난 58년 미국 회사와 합작으로 개발에 성공,40년 가까이 피임약의 최고 권위와 효능을 자랑하고 있다. 우리나라 약국에서 「가스필로드」「안티오바이오필러스」「메르실론」 등의 이름으로 팔리고 있는 피임약도 이 회사의 제품이다.50세 이상 여성의 호르몬기능을 충족시켜 주는 「리비알」도 오르하논이 만들었다. 오르하논사 연구개발팀의 기념비적 개가로 꼽히는 「리비알」은 갱년기 여성이 뼈에 칼슘분이 모자라 다치기 쉬운 것을 적절한 호르몬 공급을 통해 막아주는 약.다른 시중 약은 복용시 생리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 약은 전혀 그런 부작용이 없다고 한다.아주 사소한 기술력의 차이겠지만 오르하논은 이같은 완벽한 기술로 최고의 효능과 안전성을 확보,세계 여성용 의약계를 주름잡고 있다. 이밖에도 시험관 아기의 생체(바이오)리듬에 맞춰 만든 「휴메혼」,「퓌레혼」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제품들이 수두룩하게 있다. 오르하논이 만드는의약품 가운데는 여성용이 전체의 62%를 차지한다.그 가운데 피임약이 40%,갱년기 여성을 위한 약이 10%,불임여성용 약이 12%의 분포를 보이고 있다. 오르하논은 이같은 비중에 걸맞게 여성용 의약품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연구경험과 노하우를 갖고 있다.또 이런 기술력이 복합적으로 상승작용을 함으로써 여성용 의약 신제품의 개발이 빠르고 성공확률도 매우 높다. 최근에는 지금까지의 피임약 개발기술을 총집결,직경 5㎝ 정도의 둥근 튜브로 만든 새로운 피임약을 개발하고 있다.이 피임약은 매우 보드랍고 유연한 투명 튜브안에 호르몬을 주입한 것으로 자궁안에 삽입할 경우 21일간 임신이 안된다고 한다.이 피임약의 개발에 완전히 성공할 경우 매일 피임약을 먹어야 하는 여성들에겐 더없이 편리한 획기적인 신제품인 셈이다. 완제품 단계인 이 피임약은 현재 튜브안의 불임 호르몬이 일정량으로 흘러나오도록 하는 2개 연결 부위의 완벽성을 기하는 작업만 남아 있다. 아직 이름조차 붙여지지 않았지만 2000년대까지는 상용화,또 다시 여성용 의약분야에서 오르하논의 권위를 입증시켜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외국사와 끊임없는 제휴 오르하논사의 연간 R&D 투자는 전체 매출의 16%,금액으로는 3억5천길더(약 1천7백50억원)이다. R&D 분야의 현지화·세계화도 서두르고 있다.연구분야는 암스테르담 본사 연구소와 스코틀랜드에 두고 있으며 개발분야는 암스테르담·프랑스·미국·일본 등지에 갖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연구인력은 연구분야에 400명,개발분야에 1천명 등 1천명이 종사하고 있다.R&D 관련 연구원들은 대부분 현지인들이다.하나의 연구프로젝트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들 현지 연구원들을 선발,개발팀을 구성한다. 훌륭한 연구성과를 위해 다른 나라 연구팀과 제휴도 많이 한다.미국의 합작사나 스코틀랜드 연구팀은 공동연구 파트너로서 오르하논사의 명성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오르하논은 R&D 뿐만 아니라 시장조사에도 철저하다.전 세계 56개국에 지사나 합작사를 두고 이를 최대한 활용,판매망을 구축하고 있다.최근에는 체코·러시아·헝가리 등 구 동구권에 대한 시장 공략에적극 나서고 있다.우리나라에도 지난 82년부터 합작투자(한화 오르헨 코레아)를 시작,수출·판매·납품·생산 등의 업무를 맡도록 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매출 2배로 오르하논은 지난 20년대 초에 창립,올해로 75주년을 맞고 있다.R&D 분야의 과감한 투자로 지난 86년에는 연간 매출이 10억길더(약 5천억원)였으나 매년 5∼12%씩 급성장,10년만인 지난 95년에는 20억길더로 두배로 늘었다.모기업인 악조노벨그룹은 쉘(정유사),필립스 등과 함께 네덜란드가 자랑하는 3대 세계적 기업군이다. ◎연구개발팀장 페르하우언/“연구·개발 소홀하면 기업파산”/철저한 시장조사 결과따라 신제품 개발 『모든 제약회사는 미래에 경쟁력 있는 제품을 개발하는 것이 꿈입니다.R&D를 게을리하는 제약회사는 결국 경쟁력을 잃고 쓰러집니다.』 오르하논사의 페르하우언 연구개발팀장은 다른 제조사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제약회사는 연구개발이 회사의 장래를 좌우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자동차 등 다른 제품제조사들은 연구개발에실패를 해도 그것을 토대로 다시 개발이 가능하다』며 『그러나 제약회사의 경우 연구개발 성공률이 5%에 불과,엄청난 투자비를 그냥 날릴 수도 있지만 이 때문에 투자를 게을리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오르하논사는 매출 기준으로 세계에서 어느 수준인가. ▲매출은 세계 30위,연구개발은 25위 수준이다.그러나 여성용 의약에 관한 한 세계 최고임을 자부한다.의약제조사도 분야별로 특화하고 그것을 전략사업으로 추진해야 경쟁에서 이길수 있다. ­언제부터 R&D의 중요성을 느끼고 본격적으로 연구팀을 가동했나. ▲회사 창립부터다.창립 당시에 회사앞에 돼지 도살장이 있었다.그들이 버리는 내장을 소독하고 화학처리하는 과정에서 연구개발팀이 구성됐고 내장을 소재로 연구도 시작,의약품을 만들었다.첫 개발제품은 「인슐린」이다.회사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오르하논이란 네델란드어로 「내장」이란 뜻이다. ­신제품 개발시 어디에 중점을 두나. ▲전체 여성 또는 갱년기 여성 등 중요한 분야마다 시장조사 결과에 따라 맞는 제품을 개발한다.특히 의약품의 효과분석과 영향력,안전도 등의 문제를 깊이 고려한다. ­제약회사들은 R&D 투자시 위험성이 크다고 했는데. ▲하나의 신제품을 개발하는데 4억달러 정도를 투자해야 한다.처음 연구개발에 들어갈 때는 전혀 성공 보장이 없다.실패하면 그것으로 끝이고 돈도 그냥 날라간다.우리는 5%의 성공을 기대하면서 R&D에 역점을 두고 있다. ­연구개발에 성공한 연구원에 대한 보상이나 대우는. ▲성공한 연구원에게 로열티를 주지는 않는다.대신 보너스 혜택이 많다.전 세계에 흩어진 연구원들이 각종 프로젝트에 따라 전문분야별로 연구팀을 구성하기 때문에 한 연구원이 동시에 여러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도 있다. ­여성용 의약분야로 특화하게 된 계기는. ▲특별한 계기는 없다.연구개발분야의 노하우를 쌓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성용 의약 쪽으로 치중했고 이것이 가속화되면서 세계 최고의 연구·기술력을 보유하게 됐다.우리가 만드는 다른 제품도 경쟁에서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 LG그룹 창립 50주년

    ◎3대 거치며 49개 계열사의 재계3위로 성장/구본무 회장 공격경영 선언 「제2혁신」 구슬땀 LG그룹이 27일 창립 50주년을 맞는다.연암 고 구인회 회장이 지난 47년 화장품 제조회사인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를 창립한 지 반세기만에 LG그룹은 49개 계열사와 15만명의 임직원을 거느린 재계 3위로 급성장했다. 구인회 창업회장은 화학과 전자를 그룹경영의 양축으로 했다.58년에는 LG전자의 전신인 금성사를 세워 전자공업분야에 뛰어들었다.단순 소비재 산업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됐다. 2대 구자경회장은 방위산업·반도체 건설·정보통신·증권·종금·석유화학·유통업 등 사업다각화로 현재의 LG그룹 기틀을 마련했다.95년 그룹 이름도 럭키금성에서 LG로 바꾸고 기업이미지통합(CI)작업을 마쳤다. 취임 1년만인 96년 3월 구본무 회장은 그룹의 장기비전인 「도약 2005」를 선포,「제 2혁신」을 추진하고 있다.새 사업에 진출하기보다 기존 사업을 키워나가는데 우선순위를 뒀던 그동안의 보수적인 경영과는 달리 개인휴대통신(PCS)과 굵직굵직한 민자사업권을 따내는 등 「공격경영」에 나섰다. 21세기의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생존할 수 있는 기업구조를 갖추기 위해 구조조정에 돌입했다.정보통신·멀티미디어,생명공학에 승부수를 던진 구본무 장은 성공적인 구조조정과 이를 뒷받침해줄 기업문화 개혁을 과제로 안고 있다.
  • 종정의 사표(외언내언)

    조계종 신도 1천여만명,스님 1만3천600여명,사찰 1천700여개를 거느리고 있는 한국불교의 으뜸종단.해방후 새로지은 사찰과 암자를 제외하면 전국에 산재해있는 고찰 거의 전부가 이종단 소속이다.법맥계승의 정통성이나 교세에서 한국불교=조계종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이 종단이 배출한 불교계의 거봉도 수없이 많다.조선조 말엽 선종의 중흥조로 추앙받았던 경허대선사를 비롯,만공 용성 효봉 청담 탄허 성철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이 조계종의 법맥을 이어왔다. 이 종단의 법통을 대표하는 어른은 종정 스님.종단행정이 총무원장중심제로 되어 있어 실권은 없지만 그 상징성과 영향력은 막강하다.현 종정은 통도사 방장인 월하스님.지난 94년 5월14일 제9대 종정으로 추대 됐다.18살때 출가한 그는 58년동안 통도사에서만 수행해온 원로스님.엄격하기로 유명했던 성철스님에 비해 소탈하고 부드러워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풍모를 지니고 있다. 문중의 최고 어른이면서도 신도들과 함께 어울리기를 좋아 하고 시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청소와 빨래를 직접 한다.돈 많은 신도가 승용차를 사드리겠다고 여러번 간청했지만 끝내 거절하기도 했다. 이처럼 소박한 월하종정이 최근 열린 원로회의에서 돌연 사표를 제출,종단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월하종정은 『취임당시 1년만 하겠다고 했는데 이미 2년이 지났으므로 더 이상 이자리에 앉아 있을수 없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는 것이 총무원의 해명.그러나 종단주변에서는 월주 총무원장의 종단운영에 불만을 품고 사의를 표명 한 것으로 보고 있다.종정 스님의 사표제출은 종단으로서는 큰 사건이다.종단의 어른이 임기(5년)도 끝나기전에 물러나겠다고 선언한 자체도 그렇지만 그동안 종정자리를 놓고 종단내의 문중끼리 치열한 다툼을 벌여 왔기 때문.이번에는 어떻게 결말이 날지 알수없지만 이것이 종단내분으로 번지지 않고 원만하게 수습되기를 기원한다.
  • 이태백의 당도시(중국문학의 고향을 찾아:1)

    ◎취라산 강변공원 곳곳에 시선기린 유적이…/달 잡으러 몸던진 채석강물에 태백의 환상 어리고/청산아래 외로운 무덤 묘포엔 「시인」아닌 「명현」으로 새 기획연재물 허세욱 교수(고려대 중국문학)의 「중국문학의 고향을 찾아」가 오늘부터 매주 수요일 서울신문을 통해 독자들을 만난다.이 시리즈는 당나라의 시인 이태백이 만년을 보내고 「홍루몽」의 저자 조설근,송나라 문호 소동파,「수호전」의 저자 시내암,송나라 시인 백낙천,중국현대문학의 비조 노신 등이 태어나고 작품활동을 벌인 위대한 중국문학의 산실인 양자강 하류의 어제와 오늘을 필자의 깊이있는 시각으로 새롭게 조명해나게 된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의 동요처럼 당나라 시선 이태백은 살아서 달에 놀았지만 죽어서 땅에 묻혔다.그 묻힌 땅을 찾아서 가는 길이다. 그는 천재시인으로 세상에 이름을 남겼다.심지어 한국의 어린이조차 남의 나라 시인으로 여기지 않을 만큼 친숙했던 시인이건만 낳아서 묻힐 때까지 기구한 구름나그네였다. 이태백은 기원 701년,무역상이던 아버지를 따라 서역의 쇄엽,그러니까 지금의 키르기스공화국 토크마크부근에서 출생,다섯살때 고향인 사천성 강유현 청련향으로 귀국했다.고향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뒤 출향관,중국의 강남·강북 많은 땅을 떠돌다가 예순한살되던 761년 섣달,당도의 현령으로 있던 족숙 이양빙 집에 기식하다가 이듬해 11월,끝내 늑막염으로 병사했다.당도의 동북교외에 위치한 용산 동록에 매장됐다 다시 58년 뒤인 기원 820년,역시 용산 건너편 청산의 서쪽 산자락에 이장,오늘에 이른 것이다. 혈통에 대한 이설도 분분했다.부조의 오랜 외유때문에 혼혈일 가능성 외에도,심지어 이족으로 보는 호인설도 있지만 그의 자작시나 행장·묘비의 기록에 따라 한족,그것도 장상의 후예로 보인다. 이백과 당도의 인연은 깊었다.중·만년에 방랑점으로 삼은 선성·금릉(지금의 남경)·광릉(지금의 양주)등지를 연결하는 중간점인 데다 그가 숭모하던 남조의 시인 사조(464∼499)가 태수를 지낸 곳,그래서 한동안 선성서 살면서도 일곱번이나 당도를 출입했다.지금 태백이 영구지지로 묻힌 곳도 사조의 고택이 있던 청산 그 산자락이었다. 당도시에서 북쪽으로 10㎞도 안되는 마안산시,서남쪽에 양자강 강줄기를 치마처럼 휘감고 우뚝 선 해발 130m의 취라산은 전체가 이태백기념관이랄 만큼 그를 기리는 유적으로 널려 있다. 평생 벼슬을 마다하고 시주화월에 미쳐서 강호를 떠돌던 이태백은 인생이 몽땅 저물어버린 기원 756년,나이 56세에 당나라 현종의 열여섯째 아들인 영왕이 형인 숙종과 벌인 친위쿠데타에 연루,심양에서의 옥고과와 야랑으로의 유배를 겪다가 나이 59세에 석방된다.그러니까 그의 만년 6년은 반란에 옥고,가난에 병고,끝없는 시련에 꺾이고 만 것이다.그가 친위쿠데타에 끼어든 것은 당시 장안을 협공한 안록산의 반군,그 무도한 발굽에 무력해진 정부군을 돕겠다는 비분강개 때문이었다. 과연 그의 절필로 알려진 「임종의 노래(임종가)」엔 뜻을 이루지 못한 한이 서려 있다. 「대붕이 난다,사방을 떨치며, 중천서 날개를 꺾이자 건널 힘이 없어라. 바람에 사무치고,저 해솟는 나무에 노닐었지만 옷소매가 걸렸어라. 뒷날 누가 알랴! 공자가 가버린 뒤라 슬퍼할 이 없거늘」 대붕비혜진팔예 중천추혜력부제 여풍격혜만세 유결상혜괘좌결 중니망혜수위출체 필자는 이 절필이 씌어진 현장에서 이를 암송하면서 이태백 최후의 땅을 밟았다.그의 문학을 사랑한 지 40여년,그가 객사한지 1천2백34년만에. 남경에서 서남쪽으로 한시간남짓,마안산 시계에 접어들자 하늘을 뚫는 굴뚝에 까만 연기.마안산 속스러운 거리를 뚫고 계속 남하했다.이윽고 오른편에 신록의 작은 산이 보였다.그 모양이 파란 고동 같다 하여 「취라산」.하지만 우리에겐 「채석산」이 다정하여라.작은 돌다리를 지나 「채석진」이란 방문을 지나자 채석산 강변공원의 경내에 들어섰다.신록이 옹알대는 오솔길을 걷자 뜻밖에 누런 기와의 대웅전이 육중하게 버티고 섰다. 바로 「태백루」다.그 지붕,그 기둥,그 처마.과연 건물의 웅장함에 표일한 이태백의 기상이 넘쳐 흘렀다.당나라 원화연간에 창건했지만 여러번 병화에 소진,지금 이 3층누각은 청나라 광서연간에 세운 것이다. 문간 양쪽에 웅크리고 있는 돌사자로부터 정루앞의 굽이굽이 병풍,정루 2∼3층마다 바람인 듯 표표하게 유랑하는 이태백의 유람도에 쇠탈한 조각상,거기다 그를 기리는 비명들.과연 「태백루」는 저 동정호의 「악양루」,무창의 「황학루」와 함께 중국 3대누각으로 칠 만했다. 하지만 필자는 어서 이 엄숙한 전당을 벗어나고 싶었다.저 산꼭지에는 비록 전설이지만 이태백의 최후를 증언하는 현장이 지금도 채석강 맞바람에 천리장강을 굽어보고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거기서 엉망진창으로 취한채 저 채석강의 달을 잡으려 풍덩 투신해버리는 그 미치광이의 환상을 잡고 싶어서였다. 채석산 정상은 과연 가슴이 후련했다.장강이 아찔하게 굽어뵈는 벼랑위로 넓은 반석위에 「연벽대」란 큼직한 글씨.그러니까 옥을 꿰어놓은 관망대라는 뜻이지만 어디 천년전부터 전설로 불리던 「착월대」만큼 친숙하랴! 착월대서 조망하는 장강의 도도함이나 착월대서 굽어보는 천인단애의 「채석기」는 분명 절경이었다.그래서 이태백은 여기서 「우저에 배를 매고 (야박우저회고)」란 명시를 썼고,송나라 시인 매요신은 이태백의 투강설화를 시에 옮겼다.그뿐만 아니었다.현대의 요절시인 주상(1904∼1933)은 이태백이 투신했다는 채석기 밑에서 1933년12월5일 새벽,상해서 남경으로 가는 연락선에서 투신자살했다.지금은 착월대옆에 붕조처럼 두팔을 활짝 벌리고 훨훨 비상하는 이태백조상을 세웠고,그 위로는 이태백의 투강자살을 기념하는 의관총이 있다. 채석산을 내려와 당도시 동남쪽 청산 아래 당도현 하동향 태백촌에 있는 이태백의 무덤으로 발을 옮겼다.말하자면 전설의 현장에서 사실의 현장으로. 청산은 해발 200m에 가까운 낮은 산.하지만 평지에 있는 이태백의 묘는 초행자가 인가로 알고 지나치기 일쑤다. 건너편 용산에서 이장한 이 묘는 그의 고향 사천 강유로부턴 만리타관이었다.이태백 생전의 친구이던 범작의 아들 범전정이 이 지방 관찰사로 있을때 이태백의 두 손녀 청에 따라 이장을 결정한 것이다. 묘역은 상당히 넓었다.공원을 방불케 다양한 관상수,초입엔 장중한 「태백사」,당나라 헌종때 세웠다지만 여러 차례 중건한 듯새로웠고,열몇개의 비,그중에 「임종의 노래」가 새겨져 가슴을 뭉클케 했다. 무덤은 묘각안에 있었다.다섯겹의 두레석에 둘러싸인 무덤,2m높이의 운석 묘표엔 「당명현이태백지묘」가 이국나그네를 어리둥절케 했다.그의 호방한 일생에 비추어 한낱 시인으로 묘비를 달지 않고,하필이면 그가 혐오하던 도덕군자인 명현으로 받들었을까. 이태백 스스로는 어이없게 찡그리고 있을지 몰랐다.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이 「시인 이태백」을 찾고 있는데 말이다.당나라의 명시인 가도는 여기 이백묘를 참배타가 객사하지 않았던가?
  • mila schon(패션가 산책)

    「밀라 쇤」은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브랜드다.최상의 질을 추구하는 고급 브랜드로 유명하다.단순함과 우아함(엘레강스)을 기조로 하고 있다. 밀라 쇤 여사는 이탈리아 정통파 패션의 제1인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다.패션의 여왕이라는 수식어도 붙는다.유고슬라비아의 귀족명문가 출신으로 어릴적에 밀라노로 이주했다.전설의 디자이너로 남아있는 발렌시아 가문의 고객이 되면서 패션과 인연을 맺었다.귀족적이며 클래식한 분위기의 발렌시아풍 영향을 받았다. 58년 고급의상실을 차리면서 패션계에 뛰어들었다.최고의 소재를 사용한다는 게 방침.실용적인 감각이 돋보인다.색채감각이 더해지면서 고급스런 이미지도 살아난다. 『여성을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일시적인 유행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멋,자기만의 스타일을 창조하는게 중요하다.자신을 알고 멋을 내는게 정말로 엘레강스와 통하는 것이다』 그가 터득한 패션학이다. 밀라 쇤의 디자인은 시공을 초월한 느낌을 준다.원초적이면서 현대의 감각을 살려내 몸의 선(바디라인)을 정교하게 해 준다.감촉이 우수한 고품질의 재료를 사용하는데다 착용감이 좋고 우아함이 넘치는 실루엣….전통의 바탕위에 이뤄진 깨끗하고 단순한 현대적인 감각과 선은 밀라 쇤을 세계적 브랜드로 자리잡게 했다. 퍼스트라인과 세컨드라인으로 구분된다.세컨드라인은 퍼스트라인보다 20%쯤 싸다.주 고객층도 다르다.퍼스트라인은 30대 후반∼50대,세컨드라인은 30대∼40대를 주고객층으로 한다.93년 일본의 이토츠상사가 밀라 쇤의 경영권을 인수했다. 금비(금비)가 94년부터 수입해 국내에도 팔고 있다.갤러리아 명품관과 리츠칼튼호텔,라마다 르네상스호텔,부산의 파라다이스 비치호텔,부산 광복점(051-246-9292)에 매장이 있다.여성재킷은 90만∼1백50만원,스커트는 40만∼60만원,블라우스는 50만∼70만원,니트제품은 10만∼40만원이다.남성 정장은 1백80만∼2백만원,셔츠는 10만∼20만원,넥타이는 10만∼20만원선이다.
  • 김송죽 소설 「번개치는 아침」(송화강 5천리:17)

    ◎북만일대 조선족 삶과 투쟁 생생히/비적의 약탈에 맞서 결성한 무장지위대/후일 공산군부대 편입… 국민당군 토벌나서/항일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반동으로 찍혀/중국 문혁시기 혹독한 핍박·고초겪어 흑룡강성 화천면 성화향 성화촌에 사는 김송죽 선생(59)은 퇴직교원이다.자식들은 모두 대학을 나와 하얼빈에서 직장생활을 하느라 나가있다.그래서 두 내외가 넓은 한족식 집을 지켰다.그는 80년대 초에 처녀작 장편소설 「번개치는 아침」을 발표한데 이어 90년대 초에는 장편실화 「혈전」을 내놓았다.이미 문명을 얻은 그는 요즘 「관동의 밤」이라는 장편소설을 탈고했다. 처녀작 「번개치는 아침」은 그의 부친을 모델로 한 소설이다.광복직후 조선족부대가 비적과 싸운 투쟁의 역사를 그렸다.국민당군 별동대 성격의 비적은 광복직후 북만일대에서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다.공산당을 적으로 싸워야했던 당시 국민당에 북경에서 먼 북만은 사실상 통치지역 밖이었는지 모른다.그런 탓에 국민당을 돕는답시고 나선 별동대속에는 만주국시절 헌병이나 경찰관도끼여있었다는 것이다. ○피땀어린 농토 등지고 유랑 그리고 실제 국민당 비호를 받았다.국민당 제15집단군 총사령 상장 사문동과 제1집단군 총사령 상장 이화당,국민당 동북 정진군 총지휘 중장 장우신이 별동대를 조종했다.당시 그들의 횡포를 고발한 노래말에 「사(사문동),이(이화당),장(장신우)은 불지르고 살인하니」라는 내용이 들어갈 정도였다.북만일대의 주민들은 이들에게 등을 돌렸다.공산당이 일찍 뿌리를 내린 이유도 이들 때문이었다. 이들이 한번 휩쓸고 지나가면 마을이 불타버리고 주검이 들판을 덮었다.더구나 조선족은 늘 사냥의 대상이 되어 무참한 죽음을 맞았다.그런 일로 해서 조선족들은 피땀으로 일군 땅을 버리고 다시금 유랑을 떠나는 이들이 많았다.이 무렵 조선족 선각자들이 일어났다.무장자위대를 만들어 마을을 지켰던 것이다.그러고 나서 얼마있다가 공산당 군부대에 속속 편입되었다. 그러한 무장자위대 가운데 맨 먼저 공산당 군부대에 편입한 조선독립대대는 1945년 11월25일 연안에서 주덕해와 손을 잡았다.조선의용군 제3지대로 개편한 조선독립대대는 다음해 4월28일 하얼빈에서 국민당군과 싸웠다.하얼빈이 국민당군 손에서 떨어져나오자 당기관과 발전소,송화강철교,비행장 경비를 담당했다가 국민당군 토벌에 나섰다.1946년 9월2일 하얼빈시 향방구 사리툰전투에서는 제3지대 소속 조선족 21명이 전사했다. 김송죽 선생의 부친이자 소설 「번개치는 아침」의 모델 김병념은 광복직후 동북민주연군에 참가했다.제1연대 조선족대대인 제2대대 5중대 1소대에 배속되었다.소대에서 3반장 직책을 맡은 그는 1946년 가을 대대를 따라 흑룡강성 화남현 발전소로 이동했다.그해 11월6일 주변정찰을 나갔다가 국민당군 병력과 교전이 붙었다.그 전투에서 김병념은 대대참모 김해정 등과 함께 전사했다.그리고 얼마뒤인 11월20일 국민당 제15집단군 총사령 사문동이 붙잡혔다.사문동은 12월23일 벌리현에서 총살되었다. 김송죽 선생은 소년시절을 부대에서 보냈다.부친 김병념이 전사한 이후에도 모친이 부대 재봉대에서 군복을 짓는 일을 하고 있어서 그냥 영내에서 살았다.그러다 부대가 북한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모친과 함께 벌리현에 남았다.할아버지 김석길이 아직 생존해있던 때로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애국계몽운동가이자 교육자요,독립운동가였던 할아버지 밑에서 비교적 엄하게 자랐다. ○소년시절 군부대서 생활 할아버지 김석길은 1884년 평남 수난 태생이었는데,1912년부터 계몽운동에 참여했다.3·1운동에 적극 가담한 연고로 지명수배를 받자 제자 9명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넜다.집안과 휘남을 거쳐 왕청에 와서 대종교에 입교하고 북로군정서의 일원이 되었다.그리고 1925년 신민부에 들어갔다.1928년에는 김좌진 장군이 파견한 의란현에서 이도강 등에 4개의 학교를 세웠다. 김송죽 선생이 스무살 나던 해인 1958년에 할아버지 김석길은 흑룡강성 화남현에서 세상을 떴다.그러나 독립운동에 참가한 민족의사들은 대접을 못받고 있다.항일운동을 했으면서도 공산당이 이끈 투쟁대열에 서지 않은 사람은 모두가 배제되었다.오늘날 흑룡강성 항일열사 가운데 민족독립운동가는 한 사람도 없다.물론 김석길 같은 분들도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 후손들은 오히려 모진 핍박을 받았다.더구나 문화대혁명시기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겪어야했던 고초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김송죽 선생은 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였다는 이유로 반동민족주의자가 되었다.그의 죄목은 반동민족주의자 말고도 역사반혁명분자의 아들,반혁명집단의 두목,반당분자,반사회주의분자 등 10가지에 이르렀다.부친 김병념이 국민당군과 투쟁한 사실도 깡그리 무시해버렸다.부친이 광복전 강제로 끌려가 철도경호대에 있었다는 사실만 들추어 혁명열사가 계급의 적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김송죽 선생 자신이 써놓았던 소설 「번개치는 아침」의 원고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비적토벌을 내용으로 한 것까지는 그런대로 넘어갔으나,김동철·김해정이 조직한 조선족부대를 문제로 삼았다.김동철과 김해정은 본래 항일연군 8군에서 일제와 싸웠다.그러다 1939년 군장 사문동이 일제에 투항하자 숨어있다가 광복과 더불어 조선족부대를 창설했던 것이다.그 뒤에 동북민주연군 제1연대 제2대대에 편입되었던 조선족부대가 1949년북한으로 건너갔다는 사실을 반동으로 몰았다.문화혁명 당시 중국에서는 북한을 수정주의로 보았던 터라 조선족부대는 반동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었다. ○농사일 틈틈이 습작 그는 옹골진 4년을 감옥에서 보냈다.모진 매를 맞고 이른바 돌림투쟁을 숱하게 당했다.그래도 푸른 대나무처럼 곧게 살라는 뜻에서 지어준 자신의 이름(송죽)에 먹칠을 하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감옥생활 4년을 버티었다.감옥에서 나온 뒤에도 소설 「번개치는 아침」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1965년 탈고하고 하얼빈 조선족문화관에 원고를 보내놓은 상태에서 날벼락을 맞았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출판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내 문학수업은 어떤 의무감에서 이루어졌디요.청소년기를 할아버지와 함께 하면서리 독립운동 이야기를 숱하게 들어서 그걸 언젠가 정리한다는 생각을 했습네다.할아버지 유언도 일제에 대항한 독립운동과 비적의 횡포를 역사로 기록하라는 것이었디요.할아버지한테 듣고,어렴풋하나마 어려서 실제 보아왔던 일들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의미에서 소설을썼던 것이외다.1957년 벌리중학을 나와 농사일 틈틈이 그런 꿈을 키우면서 실제 습작을 해왔디요.할아버지 유언과 내 꿈은 실로 오랜만에 이루어졌습네다』 김송죽의 「번개치는 아침」은 1983년에 출판되었다.원고를 탈고한지 꼭 18년만에 햇빛을 본 것이다.그에게는 물론 가족사를 문학적으로 정리했다는 뿌듯한 성취감을 안겨주었다.또 다른 한편으로는 기억속에서 차츰 멀어지고 있는 조선족들의 삶과 투쟁을 복원한 대서사시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요즘 탈고한 장편소설 「관동의 밤」도 북만의 독립운동사를 형상화한 것이다.자그마치 75만자나 되는 작품을 출판할 길이 없어 애를 태우고 있다.
  • 빈 스트라우스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19일 내한

    ◎고전∼스트라우스시대의 정통음악 오스트리아 국립방송교향악단(ORF)의 연주자들로 구성된 빈 스트라우스 페스티벌 오케스트라가 19일 하오 5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내한 연주회를 갖는다. 지휘는 ORF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이자 빈 스트라우스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인 빌리 부에츠레르.58년 창단된 이 오케스트라는 고전시대부터 스트라우스 시대의 곡에 정통하다는 평가를 받는 앙상블이다. 연주곡목은 모차르트의 변주곡 KV138 F장조,바흐의 첼로 협주곡c단조(협연 홍웅선),요한 스트라우스의 「봄의 왈츠」 등.232­4798.
  • KENZO(패션가 산책)

    KENZO(겐조).신선한 색채,화려한 꽃무늬옷으로 현대 파리모드를 리드해가고 있다.올봄과 여름 패션은 한폭의 수채화 이미지를 나타내는데 역점을 뒀다.부드러운 터치와 편안함,신비로움을 가미한 세련된 도시적인 에너지…. 겐조의 패션세계는 즐겁고 밝고 건강하고 자유스런 모습이다.『인생은 결국 건강해야 한다』는 그의 얘기와도 맥을 같이한다. 겐조는 지난 39년 일본의 효고에서 태어났다.그러나 파리가 활동근거다.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패션스쿨에 가려했으나 부모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고베의 가이보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패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한학기를 다닌 뒤 도쿄로 왔다.58년 여성패션학교인 가쿠엔 스쿨 입학허가를 받았으며 65년 꿈에 그리던 파리로 진출했다. 피에르 가르텡,크리스티앙 디오르,샤넬과 같은 명 브랜드의 패션쇼에 간신히 들어가기는 했지만 오히려 사기는 떨어졌다.그들의 작품은 너무 완벽해 흉내낼 수 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70년 4월 첫 패션쇼를 연 이후 재능을 인정받아 파리에 알려지기시작했다. 다양한 계층을 고객으로 삼기 위해 가격대도 다양하다.겐조로고가 새겨진 싼 T셔츠로부터 1천만원이나 하는 오트쿠튀르 이브닝드레스까지 있다.18세에서 60대까지도 입을 수 있을 정도로 제품도 다양하다.동양과 서양의 즐거움·아름다움·미소가 표출되는 겐조의 패션세계는 액세서리까지 이어진다.스카프·넥타이·시계·보석·안경·우산·손수건·남녀 화장품도 있다. 갤러리아 백화점,롯데백화점 본점,부산 현대백화점,대구백화점 등 서울과 부산 대구의 주요 백화점,워커힐 면세점에 매장이 있다.재킷은 주로 30만∼80만원,드레스는 20만∼40만원,스커트는 10만∼60만원,팬츠는 20만∼30만원,스카프는 20만∼30만원,넥타이는 7만원,손수건은 1만원선이다.
  • 마지막 연합고사… 고입시험 변천사

    ◎74년 고교평준화 제도와 함께 도입/내년부터 학군별로 석차매겨 배정 고입 선발 시험인 연합고사가 10일 치러지는 시험을 마지막으로 23년만에 폐지된다.대신 중학교 종합생활기록부의 교과 성적 및 봉사활동 등을 기준으로 학군별 전체 석차를 매겨 추첨을 통해 고등학교를 배정한다. 탈락자는 실업계 고교 등으로 진로를 바꿔야 한다.우수학생들이 몰려 있는 중학교에서도 탈락자가 나올 수밖에 없다.일부 특정 지역 중학교에서 전학사태가 일어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서울을 비롯,대부분의 시·도 교육청이 98년부터 이처럼 새로운 방식으로 고교 입학생을 선발한다. 연합고사제는 지난 74년 「중 3병」과 엄청난 사교육비,고교간 학력 격차 등 병폐를 제거하기 위해 고교 평준화 제도와 함께 도입된 획기적인 조치다.고입 예정자들은 공동 출제된 문제로 시험을 치른 뒤 인문계는 학군내 학교에 추첨 배정됐고,실업계는 추천을 통해 입학생을 받았다. 서울과 부산 등에서 처음 도입한 이래 80년에는 전국 고교생의 60%가 연합고사를 통해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실제 고교간 격차 해소와 교육 정상화에 기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받았다. 그러나 81년 고교 평준화 정책에 대한 문제점이 지적되면서 「고등학교 입학 선발고사」로 명칭이 바뀌고 연합고사를 채택하는 시·도가 줄기 시작했다.94년에는 대부분의 시·도 교육청이 아예 시험을 따로따로 출제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서울에서는 연합고사 탈락자가 2천여명선에 그쳐 「선발」의 의미가 퇴색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한편 연합고사 이전에도 국가고시제 등 다양한 고교 선발시험이 시행됐었다.45년부터 50년까지 학교장의 책임 아래 시험을 치르는 「학교관리제」,51∼53년에는 시·도 주관 아래 「국가연합고사제」가 실시됐다.54∼57년에는 출신 중학교장의 추천에 의한 무시험 전형과 필기 고사가 병행됐다.58년부터 61년까지는 고등학교들이 합동으로 문제를 출제한 「연합고사제」,62·63년에는 국가가 출제한 「국가고시제」가 시행됐다. 이어 64·65년에는 시·도별 공동출제,66년부터 연합고사 실시전인 73년까지 학교장의 책임 아래 단독 출제또는 시·도 단위의 공동출제중 하나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고교 신입생을 선발했다.
  • 공익정론 외길 초일류 고급지로(서울신문 51년)

    □45년∼84년 ·항일지 「대한매일신보」 뿌리로 ·54년 소설 「자유부인」장안 선풍 ·56년 언론사상 첫 한글판 제작 □85년∼현재 ·CTS 첫 도입 등 언론사에 큰 획 ·서울신문,스포츠서울 뉴스넷 개통 ·96년 10월 전면가로쓰기 단행 서울신문은 해방공간의 어지러운 상황이 한창 전개되던 1945년 11월22일 태어났다. 서울신문 탄생은 당시 언론계는 물론 정치·사회·문화계로부터 비상한 관심을 모은 하나의 사건이었다.일제 총독부 기관지 역할을 한 매일신보의 인쇄시설과 건물 등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신문발행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갖춘데다 이제야 비로소 민족의 기대와 염원을 담아낼만한 권위있고 책임있는 언론기관이 등장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서울신문은 이와 함께 창간호를 1호가 아닌 제13738호로 시작했다.이는 새 시대를 맞은 해방조선의 대변기관을 자임하는 동시에 1904년에서 한일합방까지 지령 1461호를 기록한 대한매일신보와 이후 1945년 11월10일자(13737호)를 끝으로 미군정청으로부터 정간처분을 받은 매일신보의 전통을잇는다는 정통성의 표현이었다. 창간 이래 3년 가까운 기간 중립지 노선을 고수해온 서울신문은 그러나 국토가 분단되고 공산화 위협이 거세지자 반공지로 변신한다.직접적인 계기는 1949년 5월3일 공보처가 내린 발행정지 처분이었다.이유는 반정부기사를 많이 싣는다는 것이었다.그러나 이후에도 각종 현안이나 이승만정부에 대한 건설적 비판논조는 계속 이어갔으며 미군철수안·여순반란사건·국가보안법 문제 등에서 비교적 온건하고 균형있는 입장을 견지했다. 한국전 발발은 서울신문에도 큰 시련이었다.기자 1명을 포함한 사원 8명이 목숨을 잃었고 시설 일부가 두차례나 파괴·해체당했으며,고단한 부산 피난시절을 감당해야 했다.그러나 서울신문은 멈추지 않았다.51년 4월6일에는 서울수복후 첫 진중신문을 발행,「우리는 돌아왔다」는 사설을 게재함으로써 서울시민들을 감격에 젖게 했다. 6·25전란은 한편으로 서울신문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강화시키는 계기가 됐다.이는 자유당 발족을 전후해 통치기반의 공고화를 꾀했던 이승만정부의 구상에 의한 것이었다.하지만 이같은 상황에서도 서울신문은 정치부문에선 친정부적 성격을 분명히 하면서도 기타 문제에 있어서는 시시비비를 엄정하게 가리는 절묘한 균형을 취했다. 한편 50년대초 반공포로 석방·휴전협정 조인·한일회담 결렬 등 역사적 사건들이 쉼없이 전개되는 속에서도 서울신문은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사상초유의 인기와 시비를 몰고 왔던 소설 「자유부인」의 연재가 그것이다.54년 1월1일부터 그해 8월6일까지 모두 215회에 걸쳐 연재된 「자유부인」은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6·25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때 전후의 퇴폐적 분위기에 휩쓸려 허영과 향락으로 치닫는 여성을 묘사한 이 소설은 장안에 숱한 화제를 낳으며 소설의 윤리성과 창작의 자유에 관한 논쟁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1960년 4·19혁명은 서울신문에게 시련과 희망을 동시에 안겨주었다.4·19 그날 시위군중에 의해 사옥이 불타는 수난을 당한 반면,곧이어 출범한 제2공화국 하에서 서울신문은 「불편부당과 엄정중립」을 다시 표방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된다.그러나 새출발의 기쁨도 잠깐,극심한 경영난으로 서울신문은 61년 5월9일부터 무기한 휴간에 들어갔다. 5·16 쿠데타는 서울신문에게 재기의 길을 열어주었다.7개월째 발행되지 못하던 서울신문이 집권층의 후원과 재벌들의 호의적 반응으로 그해 12월21일 속간된 것이다.이때부터 서울신문은 비약적인 사세신장을 이루었으나 한편으로는 5·16 군사정부와 뒤이은 제3·제4공화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길을 걷게 된다.특히 72년 10월 유신으로 빚어진 전환기에서 서울신문은 친정부적 성격을 굳히게 된다.서울신문의 성격상 당시로선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서울신문은 창간 30주년인 75년을 기점으로 사세중흥기를 맞게 된다.고속 오프셋 윤전기의 가동으로 신문발행의 전환기를 마련했고 ▲지령 1만호 기념 만호장학금 신설 ▲의료보험제 도입 ▲급여인상 등 사원복지를 크게 향상시켰다. 5공 출범한 81년은 서울신문으로선 새롭게 내실을 다지는 원년이 됐다.대중문화에 대한 욕구를 해소할 길이 없던 청소년층을 위해 「TV가이드」를 창간,대중문화를 선도했는가 하면 「예술과 비평」을 선보여 고급문화를 추구하는 독자들을 만족시켰다.바야흐로 종합언론사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신문은 이와 함께 국내 최고 종합일간지다운 면모를 다지고자 새 사옥 마련에 나섰다.82년 1월1일 태평로를 떠나 을지로 임시사옥으로 이사한 뒤 3년여에 걸친 대역사끝에 새 사옥을 마련한 것. 85년 1월1일 준공된 서울신문·프레스센터 사옥은 한국언론 제2세기의 개막을 알리는 전조였다.이때부터 서울신문은 쾌적한 환경에 최첨단 시설을 갖춘 「한국언론의 메카」로 자리잡았다.특히 이 시기에 도입된 CTS 제작시설은 신문발행사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됐다.국내 신문사로는 최초로 CTS를 도입한 서울신문은 다른 신문사들의 부러움을 한껏 즐기며 신문제작 역사에 뚜렷한 이정표를 남겼다. 서울신문의 비약적 발전을 위한 사건은 또 있었다.그해 6월23일 「스포츠서울」의 탄생이 그것이다.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보다많은 스포츠 정보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자 창간한 「스포츠서울」은 30분만에 창간호 가판이 완전매진되는 등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면서 지금까지 정상의 스포츠·연예·오락 전문지로 군림하고 있다. 스포츠·연예·오락전문지 「스포츠서울」,시사주간지 「뉴스피플」,대중문화 전문주간지 「TV가이드」,여성월간지 「퀸」등을 자매지로 둔 서울신문은 이제 또한번의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증자를 통한 5세대 CTS와 최첨단 윤전기의 도입을 마무리한데 이어 「서울신문·스포츠서울 뉴스넷」이 1일 접속횟수 1백만을 돌파함으로써 전자신문계의 신기원을 이룩한 것이다.21세기에 진정한 정론지로서 독자들을 찾아갈 서울신문의 밝은 미래는 이미 시작됐다. □약사 1945년 △11.22 서울신문 창간 1946년 △3.1 제1회 「3·1기념 서울·인천간 왕복마라톤 경기대회」개최(77년 32회까지 존속) 1948년 △10.18 시사지 「주간 서울」 창간 1951년 △3.8 전란으로 휴간 △6.9 피란지 부산에서 서울 복귀 1953년 △8.16 첫 견습기자 공채 실시 △9.1 어린이신문 「주간소년서울」 창간 1954년 △1.1∼8.6 소설 「자유부인」연재 1956년 △10.18 언론사상 첫 한글판 제작 1958년 △10.1 신문사상 처음으로 조석간 발행 1960년 △4.19 시위군중에 의해 사옥 전소 △4.26 휴간 △6.27 속간 1961년 △5.9 경영난으로 휴간 △12.21 속간 1962년 △8.13 석간으로 전환 1966년 △2.9 한국 최초로 1백만원 고료 장편소설 당선작 시상 1968년 △9.22 대중 주간지 「선데이 서울」 창간 △11.22 전 지면에 걸쳐 한글전용 단행 1975년 △3.30 「주간 스포츠」 창간 △11·2 「주간 소년서울」 폐간 1978년 △10.5 보관자료 마이크로필름화 1981년 △7.18 청소년 주간지 「TV가이드」창간 1982년 △1.1 을지로 임시사옥으로 이전 1985년 △1.1 언론사상 처음으로 CTS 도입,태평로 신사옥 입주 △6.23 스포츠 전문지 일간 「스포츠 서울」 창간호 발행 1989년 △9.23∼10.18 파업 1990년 △6.23 여성월간지 「퀸」창간 1991년 △7.31 구로공장 준공 △12.31 「선데이 서울」폐간 1992년 △1.5 자매지 주간 「피플」창간 △7.3 대구인쇄본부 준공 △12.25 「피플」,「뉴스피플」로 제호 변경 1994년 △2.18 「깨끗한 산하지키기 운동본부」발족 1995년 △11.22 서울신문·스포츠서울 뉴스넷 개통 1996년 △1.29 서울신문·스포츠서울 뉴스넷 국내 첫 동화상 속보체제 시작 △10.1 전면 가로쓰기 단행
  • 도 무오이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

    ◎19세부터 독립운동… 상무장관 등 역임/작년 4월 방한… 「과거」정리·협력틀 다져 도 무오이 공산당서기장은 베트남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로 꼽힌다.무오이 서기장은 79세의 고령이지만 여전히 건강을 유지하며,레 둑 안 국가주석,보 반 키에트 총리와 함께 베트남의 정치·경제를 안정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다.무오이 서기장의 학력등 어린 시절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19세이던 36년부터 항불혁명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인도차이나 공산당에 입당한 것으로 전해진다.41년 프랑스당국에 체포돼 4년동안 옥중생활을 했으나 탈옥후 하동성 및 남딘성 당서기에 선출되는등 본격적인 활동을 펼쳐나갔다.무오이 서기장은 58년 상무장관을 지낸 이후 국가물가위원회위원장,부총리 겸 국가기간산업건설위원장,기간산업건설 및 공업·교통·운수담당 부총리를 역임했다.무오이 서기장은 지난 82년 당 정치국원에 선출된 뒤 87년 당서기,88년 총리를 거쳐 91년부터 서기장을 맡고 있다. 무오이 서기장은 지난해 4월 우리나라를 방문,한·베트남간의 한때 불행했던 과거를 정리하고 미래의 협력관계를 다지는 기틀을 마련했다.무오이 서기장은 지난 7월 베트남을 방문한 공노명외무부장관이 예방했을 당시,20분전부터 면담장소에 나와 기다리며 기자들의 사진촬영과 질문에도 응하는 등 「열린 지도자」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 전남 선암사 산신도(한국인의 얼굴:84)

    ◎호랑이가 분장한 「하얀 산신령」/펑퍼짐한 어깨 부드러운 인상 불교탱화에는 불교신앙과 곧바로 연결될 수 없는 그림이 있다.우리 고유의 산신신앙을 불교가 받아들인 산신탱화가 그 것이다.이 그림은 바깥에서 들어온 외래종교 불교가 우리민족 마음 밑바닥에 깔린 기층심성을 파고든데서 비롯되었다.불교 토착화현상의 하나인 것이다. 전남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 선암사가 소장한 산신도는 명품의 탱화다.조선시대 후기 작품인 이 탱화에는 신선과 세 동자,호랑이가 배치되었다.그림속에 나오는 신선은 호랑이가 모습을 달리 한 변화신이다.신선은 큼직하게 그렸다.신선의 등받이가 되어뒤쪽에 길게 앉은 호랑이가 신선 무릎 위로 머리를 내밀었다.맨 앞쪽 어린 두 동자는 얌전한 자세인데 뒤쪽에 선 동자 하나는 딴전을 부리고 있다. 그림 전체가 부드럽다.펑퍼짐하게 앉은 신선 어깨와 신선을 뒷전에서 감싼 호랑이 몸둥이가 함께 둥글게 돌아간 탓이리라.그리고 호랑이 꼬리도 유연한 곡선으로 S자를 그렸다.호랑이 꼬리 끝이 뭉게뭉게 피어오른 구름에 닿았고,왼쪽 노송 한 그루는 가지를 한껏 옆으로 펼쳤다.그러나 솔 가지는 호랑이 꼬리에 닿을듯 말듯 멈추었다.과연 신선이 머물러도 좋을 선경이다.산신은 풍골이 준수했다.백발이 성성하여 노인은 분명하나 혈색은 아직 홍안인지라 얼굴이 불그레했다.신선은 왼쪽 다리를 무릎 고여 세우고 그 위에 손을 걸쳤다.그리고 호랑이 몸에 편히 기대었으니 잘 생긴 얼굴이 평온할 수밖에 없다.신선이라고해서 위엄스러운 구석도 없고 그저 자비롭다.어딘가 먼 허공을 응시한 눈매에 자비가 어렸는데 백발이 수염에 가린 입술이 짐짓 웃음을 지을 모양이다. 눈썹도 희게 시었다.남색 두건 밑으로 흘러내린 머리칼도 희고,구레나룻이며 윗 입술과 턱을 뒤덮은 긴 수염도 희다.그 소담한 백발의 수염을 심산유곡에 부는 미풍이 가닥가닥 흔들어놓았다.「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이야기속의 산신이 바로 선암사 산신도 안에 들어앉았다.할머니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옛 이야기 민담에 등장하는 「하얀 산신령」인 것이다. 탱화는 재주 많은 스님들이 주로 그렸다.그림 그리는 화승을 가리켜 금어라 했다.선암사 산신도에는 당시 금어 도순이 함풍팔년에 그렸다는 사실을 밝힌 화기가 들어있다.1858년에 그린 것이다.본래는 송광사 청진암것인데 후대에 선암사로 옮겨왔다.
  • 「옷 돌려내어라」 자판(컴퓨터 걸음마:18)

    1900년대 초에 이원익님이 영문타자기를 개조해서,자모 구성이 5벌식인 84글쇠(12글쇠 7열)세로쓰기 한글타자기를 최초로 만들어냈습니다.1934년경에는 송기주님이 자음 3벌, 모음 1벌인 4벌식 42글쇠 2단 시프트식 한글타자기를 제작하였습니다.가로쓰기로 된 최초의 한글타자기는 1949년 공병우님이 개발하셨지요.타자 속도를 빠르게 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두고 개발한 3벌식 한글타자기로서,본격적인 실용타자기로 볼 수 있습니다.이후,타자 속도보다는 글자 모양에 신경을 쓴 김동훈님의 5벌식 한글타자기가 1958년에 개발되었고,1960년대에 들어서는 공병우식 3벌식 타자기가 60%,김동훈식 5벌식 타자기가 30% 정도의 비율로 사용되고 있을 정도로 2종류의 한글타자기가 주종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던중,1968년 10월에 상공부에서 4벌식 표준자판 시안을 발표했습니다.다음해인 1969년 7월에는 과기처에서 초성 1벌,중성 2벌,종성 1벌로 구성된 4벌식 타자기를 한글타자기의 국가 표준으로 정하고,인쇄전신기(텔레타이프라이터)용으로는 풀어쓰기 2벌식을표준으로 확정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그뒤 계속 자판 논쟁이 일어나고 있던 중에 1982년 과학기술처가 2벌식 한글 자판을 컴퓨터의 표준 자판으로 확정하고,1985년에는 컴퓨터와 타자기의 자판 배열을 통일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한글타자기마저 2벌식으로 표준을 정하였습니다. 2벌식에서 아라비아 숫자가 배열된 맨윗줄에 3벌식에서는 받침의 「ㅎㅆㅂ」과 모음 「ㅛㅠㅑㅖㅢㅜ」와 초성「ㅋ」과 「­=」 글쇠가 있습니다.2벌식에는 「바지들고서」가 있는 2번째줄에 3벌식 자판은 받침의 「ㅅㄹ」과 모음 「ㅕㅐㅓㄹㄷㅁㅊㅍ」과 「〔 〕」이 있습니다.2벌식의 「바지들고서」 자리에 3벌식은 「ㅅㄹㅕㅐㅓ ㄹ』가 있어서 3벌식 자판을 「옷돌려내어라」 자판 또는 「돌려내어라」 자판이라고 부릅니다. 첫째줄을 외우려고 억지로 문장을 만들어보니까 「낳았습 용규냐 예의수컷」이 됩니다.「ㅎㅆㅂ ㅛㅠㅑ ㅖㅢㅜㅋ」인 맨 윗줄에 나온 받침(종성),모음(중성),초성을 넣어서 글자(음절)를 만들어 본것입니다.둘째줄은 「옷돌려내어라 두목춘풍」 입니다.이건 그럴듯하네요.셋째줄은 「용산이하는 노인과자봉투」,넷째줄은 「암각에 소주시험」이 됩니다.「암각에 소주시험」이란 말은 없지만 엉터리라도 만들어본 것이랍니다.「ㅁㄱㅔ ㅗㅜㅅㅎ」로 「음각에 오후사후」라고 만드는 것보다는 「암각에 소주시험」이 조금 나아 보이지요? 미국에서는 100년 이상 사용하던 퀘르트(QWERT) 자판이 있지만,1982년에 드보락(Dvorak)이 개발한 자판이 더좋다고 미국 표준에 추가하였습니다.우리도 「바지들고서 자판」인 2벌식 자판에 「돌려내어라 자판」인 3벌식 자판을 표준 한글 자판으로 추가하여야 할 것입니다.3벌식 자판을 보급시키려고 안간힘을 쓰면서,뚱보강사가 자판 외우는 법을 이야기합니다.그러나 사실은, 이렇게 글쇠(키)를 외워서 치려고 하지말고 「타자 연습」하는 프로그램을 구해서 게임을 하면서 글쇠를 익히는 것이 더 좋은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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