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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케시타 前 日총리 생애

    19일 타계한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전 일본총리는 자민당 최대파벌의 오너로 일본 정가 막후에서 10년 넘게 ‘킹메이커’로 영향력을 행사해온 인물.일본 경제 최대호황기에 총리를 지낸 그는 ‘조정의 미학’‘화(和)의 정치’를 구현했다는 호평과 함께 파벌정치,선단(船團)정치 등 일본형 정치병리의 씨를 뿌렸다는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다. 와세다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잠시 교사로 일하던 다케시타는 58년 중의원에 당선,정식으로 정계에 입문한 뒤 내리 14선을 기록했다.일찍부터 다나카가쿠에이(田中角榮) 전총리의 유력한 후계자로 권부를 지켜오다 87년 7월 독자적으로 ‘게세카이(經世會)’(다케시타파)를 출범시켜 그해 11월 총리에취임,절정기를 구가한다. 89년 6월까지 1년반 재임하는 동안 다케시타는 소비세 도입 등에서 강력한추진력을 보여주기도 했으나 정·관·재계가 고리처럼 얽힌 유착형 정치문화를 심화시켜 일본경제의 거품붕괴를 가져왔다는 비판을 사기도 했다.리크루트사 헌금의혹 사건으로 퇴진한 뒤에도 우노 소스케(宇野宗佑),가이후 도시키(海部俊樹),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등 후임내각을 탄생시키며 건재를과시했고 92년 파벌영수를 정치문하생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전총리에게넘겨준 뒤에도 사실상의 오너로서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오부치의 총리선출에 깊숙히 관여해 왔다.모리 요시로(森喜朗) 총리 역시 병상의 다케시타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해부터 공식 행사를 멀리한채 요양해왔지만 결국 지병인 변형성 척추증을 이기지 못한 셈.그의 공백으로 모리 총리의 위상은 물론,오부치파를 비롯한 집권당 역학구조에 지각변동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와세다(早稻田)대 동문인 박태준(朴泰俊) 전총리 등과 오랜 지인인 것을 비롯,한국내에도 인맥이 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손정숙기자 jssohn@
  • 영천 37.3도…올 최고

    19일 낮 경북 영천의 수은주가 37.3도까지 급상승,올들어 가장 높은 기온을기록했다.지난 58년 6월26일 대구의 38도에 이어 두번째로 높았다. 또 밀양 35.7도,의성 35.6도,안동 35.1도,춘천 35도,홍천 34.5도,양평 34.4도,서울 33.3도 등을 기록했다. 한편 서울시는 19일 오후 2시를 기해 양천·강서·구로구 등 남서지역 7개구에 이틀째 오존주의보를 발령했다. 전영우기자
  • 학술 신간

    ■남북한 경제구조의 기원과 전개(김성보 지음). 해방이후 1950년대 후반까지 북한에서 진행된 토지개혁-국가관리 소농체제-농업협동화 등 농업체제 형성과 변화 과정을 다루었다.북한 농업에 관한 연구가 거의 없는 역사학계 현실에서 최초의 연구성과로 꼽힌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사회경제적 갈등의 중심에는 항상 토지문제가 있었고 이는 해방과 분단 공간에서도 마찬가지.남북한이 ‘유상 매수와 분배’‘무상몰수와 분배’라는 정반대 토지정책을 채택함으로써 점차 분단농업 구조가고착하는 맥락을 파악했다.지은이는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이다.역사비평사 1만8,000원. ■현대 정치경제학의 주요 이론가들(안청시·정진영 엮음). 정치학과 경제학 사이의 벽을 깨 양쪽을 통합하는 새 사회과학으로 떠오른분야가 정치경제학이다.그 핵심되는 주제는 ‘국가·시장·사회의 조화로운관계 모색’‘민주주의 이상과 가치 실현’‘지속적 경제발전과 사회개혁 전략’등이라 할 수 있다. 이 분야를 대표하는 학자 9명,하이에크 폴라니 그람시 무어 슘페터 다운즈허쉬만 노스 월러스틴의 이론을 국내 정치·행정·사회학 교수들이 정리해소개했다.대우학술총서의 하나.아카넷 2만원. ■근대 조선 경제의 진로(전석담·최윤규 지음). 지난 58년 북한 노동당이 당원용 역사해설서로 간행한 ‘19세기 말-일제통치말기의 조선사회경제사’가 원전이다.전체 4장 가운데 1장은 전석담이, 2장부터는 최윤규가 썼다.전석담은 백남운과 더불어,일제강점기하 경제사학자로서 첫손가락을 다툰 인물이다. 원본을 그대로 출간하지 못하고,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의 김인호 선임연구원이 일본 번역판을 재번역해 내놓았다.원본은 출간 직후 절판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연구원은 이 책이 ▲북한에서 ‘주체’논리가 교조화하기 전의 저작으로서▲최초로 19세기이후 한국경제사 체계를 구성했으며▲일제강점기하 남과 북을 아우른 경제사 저서로 고전의 반열에 들만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아세아문화사 1만3,000원.
  • [끊이지 않는 지구촌 분쟁](3)인도-파키스탄 카슈미르 대립

    지난 10년간 민간인 7만여명 사망,4만명 처형,17만5,000명 주거 박탈,15만명 추방…. 세계의 지붕 카슈미르는 잔혹한 학살극과 이에 맞선 보복전,피비린내 나는인권 유린의 기록으로 얼룩져 있다.카슈미르를 둘러싸고 핵보유국 인도와 파키스탄이 대치해온지 어느덧 50여년.지난 반세기 동안 인류는 잊을 만하면치솟아오르는 포연을 지켜보며 시시때때로 핵전쟁의 악몽에 빠져들어야 했다. ■발단/ 1947년 인도가 영국에서 독립할 때 파키스탄도 인도에서 분리됐다.그러나 카슈미르 귀속 문제가 해결되지 못해 분쟁의 불씨를 남겼다.결국 당시카슈미르 통치자 하리 싱이 인도로부터 각종 원조를 제공받는 댓가로 인도편입 조약에 서명하자 파키스탄이 이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47년 양국간 1차전쟁으로 비화됐다. ■속성은 종교전쟁/ 1차전쟁이 끝난 49년 유엔 중재로 그어진 군사분계선에따라 카슈미르의 3분의1이 파키스탄에 편입됐다.그럼에도 인도의 지역패권은상당부분 인정된 셈.그러나 카슈미르 인구의 80%를 점하는 이슬람교도는 소수 인도 힌두교도의 통치권행사에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카슈미르의 독립 또는 파키스탄으로의 병합을 요구하며 끊임없는 게릴라전을 도발했고 파키스탄 등 범회교권이 이들의 봉기를 측면지원했다.결국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가 카슈미르를 둘러싸고 국제적 세력다툼을 벌이고있는 셈. ■교전 전개 양상/ 핵보유국끼리의 충돌이 몰고올 파국의 가능성 때문에 국제사회는 유례없는 중재 노력을 쏟아부었다.그러나 종교간 갈등 특유의 인화력,게릴라전의 불가측성,국제사회 이해갈등 등이 겹겹이 얽히면서 어렵사리 마련된 화전(和戰)문 초안이 휴지로 돌변하기 일쑤였다. 48년,65년,71년 세차례 전면전 끝에 72년 현상 유지를 규정한 심라(simla)협정이 체결됐으나 파키스탄에 대한 외세 완전 철수와 독립투표를 주장해온파키스탄측 불만을 잠재우지 못했다.80년대 양국은 정상회담 및 부전조약 등긴장 완화를 향한 적지 않은 움직임에도 불구,아프가니스탄 사태,파키스탄의 펀잡 지원,시크 극렬분자의 인도 항공기 납치,핵경쟁 등으로 번번이 충돌했다. 90년대는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단체들의 독립 요구가 극에 달한 때.이들이폭동,테러,게릴라전,비행기 납치 등 극렬행동을 서슴지 않을 수록 인도는 배후의 파키스탄을 겨냥한 강경진압을 불사,걷잡을 수 없는 유혈충돌로 번지곤했다. 카슈미르의 대표적 이슬람 무장단체로는 친파키스탄 성향의 ‘히즈불-무자히딘’,독립을 주장하는 ‘잠무 카슈미르 해방전선’ 등을 꼽을 수 있다. 중국,미얀마,미국(이상 파키스탄 지원) 러시아,이스라엘(인도 지원) 등이국제사회의 맹주,또는 지역에서의 영향력 확대 등을 노리고 개입하는 것도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요인. ■전망/ 국제사회는 양국간 핵무기 경쟁으로 비화할 것을 가장 우려하고 있다. 핵전쟁 현실화는 카슈미르라는 불씨가 남아 있는 한 한시라도 도외시할 수없는 변수.종교분쟁의 특수성,무장테러단에 대한 통제 가능성이 극히 낮다는점 등으로 카슈미르 불씨의 완전 차단이 당분간 불가능하리라는 관측이 주를 이뤄 우울한 전망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손정숙기자 jssohn@. ■카슈미르 분쟁 일지. ■1947.8 인도,파키스탄 독립. ■47.10 인도­파키스탄 1차 전쟁. ■49.9.7 종전협정 조인.파키스탄 카슈미르 지역 40% 가까이 획득. ■65.9 카슈미르 2차 전쟁. ■71년 말 방글라데시 독립문제로 3차 전쟁. ■72.7 카슈미르 통제선 획정(심라협정). ■93.6 인도,회교도 게릴라 소탕작전 실시. ■96.1 양측 카슈미르 국경 11개 지역 동시교전. ■98.5 인도,파키스탄 나란히 핵실험. ■99.5 인도 20년만에 카슈미르 공습. *印 74년 첫 실험…파, 대응 무장. 인도-파키스탄의 핵경쟁은 서로 상대를 겨냥한데서 발단,서남아시아를 비롯한 아랍권은 물론 온 인류를 연쇄 공포속으로 몰아넣었다. 먼저 도화선을 제공한 쪽은 인도.1948년 우라늄광 탐사,58년 플루토늄 처리시설 구매 등으로 핵인프라를 구비해오다 74년 핵실험의 첫 단추를 눌렀다. 파키스탄이 바짝 긴장했을 것은 불문가지.65년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연구용 원자로 가동이 적발된 것을 필두로 핵무장 움직임이 속속 노출되기 시작했다. 핵경쟁은 98년 5월 쌍방이 한차례씩 지하핵실험을 주고받으며 점입가경에이르렀다.인도가 24년만에 5차례 핵실험을 감행한지 두주만에 파키스탄이 6차례 핵실험에 성공,그간 물밑에서만 떠돌던 양국의 핵대치 우려감을 기정사실화했다.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 및 핵확산금지조약(NPT)등 국제사회의 핵통제제도에 양국이 모두 가입을 거부하고 있다는 점.또한미국-러시아 등이 핫라인,각종 방공망 등으로 우발적 사고에 대비하는데 반해 세계 최빈국인 이들 사이에는 어떤 기술적 방어틀도 갖춰져 있지 않은 형편이다. 핵전력은 인도측이 월등한 것으로 관측된다.인도와 파키스탄의 핵탄두는 각각 30기와 10기,당장 제조가능한 원자폭탄이 74개와 10개로 추정되고 있다. 현역병 수,전차와 야포 등 화력,전투기 등 재래병력에서도 인도는 파키스탄의 두배 이상.군사전문가들은 이같은 열세를 파키스탄이 선제 핵공격으로 커버하려고 할 경우 전면 핵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을 결코 배제할수 없다고밝히고 있다. 손정숙기자
  • ‘자랑스러운 이화인’ 에 윤정옥·김갑순씨

    이화여대(총장 張裳)는 26일 제6회 ‘자랑스러운 이화인’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윤정옥(尹貞玉·75) 공동대표와 원로영문학자 김갑순(金甲順·86) 전 이대교수를 선정했다. 윤 공동대표는 49년 이대 영문과를 졸업,58년부터 91년까지 이대에서 영문학과 교수로 재임했다.90년부터는 정대협 공동대표를 맡아 종군위안부 문제해결에 앞장 서 왔다. 김 전 교수는 35년 이화여전 문과를 졸업한 뒤 영문과 교수 및 문리대학장을 역임했으며 국내에 영어 연극을 최초로 도입한 1세대 영문학자다. 시상식은 오는 31일 오전 10시 이대 대강당에서 열린다. 이창구기자 window2@
  • ‘GoldStar’ 추억속으로

    우리나라 가전제품의 대표적 브랜드로 수출에 일익을 담당해온 ‘GoldStar(골드스타)’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LG전자는 최근 캐나다 토론토에서 북미지역 브랜드를 LG 브랜드로 바꾸는대규모 행사를 열고 LG 브랜드가 붙은 첨단 백색가전제품 30여개 모델을 북미시장에 처음 선보였다. LG는 또 퀘벡,벤쿠버 등 북미지역 30여개 도시에서 브랜드 교체를 알리는로드쇼 겸 제품설명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이에 따라 지난 58년 한국 전자제품 최초의 수출품목인 라디오에 붙어 해외로 나갔던 ‘GoldStar’브랜드는 완전히 사라지게 됐다. ‘GoldStar’는 그동안 한국 전자제품 수출의 대명사로 여겨져 왔으나 지난 95년 기업이미지 개선작업에 따라 럭키금성그룹이 LG그룹으로 바뀌면서 GoldStar 브랜드도 LG브랜드로 교체돼 왔다. LG전자는 북미지역을 마지막으로 전세계 전지역을 대상으로 실시했던 ‘GoldStar’브랜드의 교체작업을 끝마치게 된다. 김태균기자 windsea@
  • 이한동 총리지명자는 누구?

    이한동(李漢東) 신임 국무총리 지명자는 대표적인 보수주의 정객으로 입법·행정·사법 3부에서 화려한 경력을 쌓은 6선의 정치인이다. 이 지명자는 경복고와 서울법대를 졸업,58년 제10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합격 발표에 앞서 이등병으로 입대했던 그는 발표 뒤 중위로 임관,군법무관을 지냈다. 63년 2월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법조계에 첫발을 디뎠다.당시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가 함께 근무한 판사 동료였다.68년 법복을 벗고 변호사 개업을 했으나 6개월 만에 법무부 법무실 검사로 채용돼 서울지검 특수1·형사1부장 등을 거쳤다.특이하게 판사·검사·변호사를 모두 지냈다. 81년 당시 신군부의 ‘차출’케이스로 검사장 승진의 꿈을 접고 민정당 간판으로 11대 총선 때 고향인 연천·포천·가평에서 출마,원내 진출에 성공한뒤 내리 6선을 기록했다. 여당 원내총무 세번,사무총장 두번,정책위의장에다 신한국당과 한나라당 때는 대표최고위원까지 고위 당직은 안해본 게 없을 정도로 승승장구했다.88년에는 내무부장관을 역임했다.이지명자는 이때부터 ‘중부권의 대표주자’를자임,당시 김윤환(金潤煥)고문과 당내 최대계파인 민정계를 양분했다. 97년 7월21일 신한국당 대통령후보 경선을 고비로 시련을 겪는다.경선에서3위로 낙선한 이지명자는 15대 대선 이후 당내 비주류의 중심축으로 활동했다.98년 8·31 전당대회에서 또 다시 이총재에 도전했으나 실패했다.지난 1월 보수대통합의 기치를 내걸고 한나라당을 탈당,자민련 총재로 변신했다. ‘일도(一刀·단칼)선생’이란 별칭 답게 두주불사(斗酒不辭)로 유명하지만최근에는 폭탄주를 자제하는 편이다. 대전여중·고와 충남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부인 조남숙(趙南淑)씨와 1남 2녀가 있으며,독서와 등산이 취미. 이도운기자 dawn@
  • 천수이볜 새총통 20일 취임

    중국-타이완간에 또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천수이볜(陳水扁) 타이완 새 총통의 취임(20일)을 앞두고 중국과 타이완은 양안간 평화를 역설하면서도 ‘하나의 중국’과 관련,강도높은 설전을 펴고 있는 것.한편 중국과 타이완은 과거의 입장과는 달리 양안관계 개선을 위한 중재를 미국에 부탁,양안관계에 변화를 가져올지 모른다는 기대를 부르기도 한다.이런 가운데 천 총통의 취임사에 양안관계 정상화를 위한 어떤 내용이 담길지 주목된다. ■중국 =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15일 ‘하나의 중국’ 원칙과 타이완이 중국의 일부라는 사실이 인정되지 않는 한 양안간에 지속적인 평화는 있을 수 없다고 위협했다. 또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은 당초 러시아,타지크스탄 등 중앙아시아5개국 정상회담 참석을 위해 18일 출국할 예정이었으나 천 새 총통의 취임식 대응방안 마련을 위해 외국순방 계획을 연기했다고 중국 관영 ‘원동(遠東)경제평론’이 보도했다. 뿐만 아니라 베이징의 외교소식통들은 장 주석이 지난 노동절 휴가 때 난징(南京),저장(折江) 등 타이완과 접경한 최일선 부대들을 순방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타이완에 대한 중국의 ‘무력 행사’ 위협이 행동에 옮겨질지 관심을 끌고있다. 한편 홍콩의 성도일보는 중국이 최근 ‘타이완 새 정부의 독립 추진 위험성이 날로 커지고 있어 타이완 문제를 무력으로라도 해결하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면서 장 주석은 중국군 장병들이 타이완과의 전쟁에 대비,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58년 진먼다오(金門島) 포격전 상황을 담은 TV특집물을 준비·방영키로 했다고 보도했다. ■타이완 = 천수이볜(陳水扁) 총통 당선자는 당선 이후 끊임없이 ‘베이징 달래기’에 나섰으나 효과를 보지 못했다.중국의 일국양제(一國兩制) 방식을 거부하고 타이완을 독립시켜야 한다는 과거 그의 주장이 타이완은 중국의 일개 성(省)에 불과하다는 중국 입장과 배치돼 중국이 천 당선자에게 불신을 품고 있기 때문.중국에 대한 투자규제 완화 등 천 당선자의 평화 제스처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것이나 천 당선자가 보낸 밀사를 중국이 문전박대한것도이 때문이다.그렇다고 타이완 독립을 강령으로 삼고 있는 민진당 당수인 천 당선자가 자신을 총통으로 뽑아준 타이완 지지자들을 뒤로 한 채 독립방침을 하루아침에 뒤집기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타이완이 최근 미국에 양안관계 개선을 위한 중재를 요청한 것은 불신으로 인해 협상테이블조차 마련되지 않는 난국을 미국의 힘을 빌어 타개해보자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천 당선자가 이번 총통 취임식에서 중국을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명분을 챙길 수 있는 카드를 내놓을지 여부.천 당선자가 취임식에서 양안관계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긴장관계가 악화돼 무력충돌로 번질 가능성도 있다. 강충식기자 chungsik@
  • 오부치, 日불황 타개 ‘성공한 총리’

    ‘인품의 오부치’도 병마 앞에는 결국 무릎을 꿇었다.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전 일본총리는 지난 4월 2일 하오 7시30분 혼수상태에 빠진지 43일만에 타계했다. 98년 7월30일 대망의 총리 자리에 올라 내각이 총사퇴한 4일까지의 총리 재임일수는 616일로 역대 총리중 ‘장수’부문 14위.부드러운 인상과 온유한인품,자리를 같이 하면 누구라도 빨아들이는 듯한 겸허한 성품 덕분에 ‘블랙홀’이란 별명을 지녔던 그는 비교적 빠른 시일 안에 침체된 경제를 회복궤도에 올려놓은 ‘성공한 총리’로 평가받았다. 1937년 군마(群馬)현에서 출생한 오부치는 아버지 오부치 고헤이(小淵光平)의원의 2남으로 2세 정치인이었다.와세다(早稻田) 대학원 재학중이던 63년 26세의 나이로 첫 출마해 당선된 옛 군마3구는 오부치의 정치색을 결정지은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후쿠다 다케오,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같은 거물 정객들의힘겨루기 씨름판이었다.이들과 함께 출마하면 오부치는 언제나 3,4위였다.그래서 어느 일본 정치인은 이런 오부치를 ‘미국과 소련 양대국 사이의 골짜기에 핀 한송이 백합’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의 정치적 스승인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전 총리와 비슷하게 ‘참을성 많고 적을 만들지 않는 인품’을 키워왔다고 할 수 있다.파벌내 분열로 군소파벌로 전락했던 옛 다케시타파를 물려받아 오부치파 회장이 되면서 그는특유의 ‘인품’으로 다른 파벌의원들을 끌어들여 최대 파벌로 키웠다. 사토(佐藤)파를 거쳐 다나카(田中)파 회원이었던 79년 그는 오히라(大平)내각때 총무장관겸 오키나와(沖繩) 개발청장관으로 첫 입각했다.87년 다케시타 내각에서 관방장관으로 기용됐다. 그는 다케시타 총리의 최측근이자 중간보스로서 다케시타와 ‘2인3각’의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91년에는 자민당 간사장에 취임하면서 ‘대망’을키웠다.‘관방장관과 간사장을 거친 사람의 절반은 총리가 된다’는 통념에따라 총리감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1년8개월의 총리 재임중 10년 불황과 낮은 지지율로 사면초가에 빠진자민당을 수렁에서 건져올렸다.뿐만 아니라 취임초기 ‘경제회생 내각’이라 이름을 붙이고 경제회복에 전력을 기울여 99회계년도의 경우 공약대로 플러스 성장으로 되돌려놓았다.연립정권을 통해 정권의 기반도 안정시키고 외교에도 적극적이었던 그에게 그러나 마냥 ‘행운’만 따라주지는 않았다.50%대가 넘던 지지율이 지난해 10월을 고비로 하락세로 돌아선데다 최근 비서관의 수뢰의혹,경찰비리,금융재생위원장의 망언 등 악재(惡材)가 겹치면서 정치적 수세에 몰렸었다.더욱이 쓰러지기 하루 전날 자유당의 연정 탈퇴는 극도로 쌓인 심신의 피로함에 결정타를 안겼다. 오부치는 일본 정계에서 널리 알려진 친한(親韓) 성향이었다.일한 의원연맹 창립 멤버이자 사망전까지 이 연맹 부회장이었다.총리취임후 98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고 이듬해 그가 한국을 방문,한국과 우호를쌓았다.양국이 서로 인정하듯 한일관계는 오부치 총리 시대에 가장 탄탄대로를 걸었다.한국으로선 듬직한 ‘우군’을 하나 잃은 셈이다. ■1937년 군마현 출생. ■58년 와세다대 문학부 입학. ■63년 최연소 중의원 의원 당선. ■70년 우정성 정무차관. ■79년 총무장관 겸 오키나와 개발청장관. ■87년 다케시타 내각 관방장관. ■91년 자민당 간사장. ■92년 다케시타(이후 오부치파) 회장. ■97년 하시모토 내각 외상. ■98년 7월 총리 취임. ■99년 1월 자민·자유당 연정수립. ■〃 10월 자민·자유·공명 연정수립. ■2000년 4월2일 뇌경색 긴급입원. ■〃 5월 14일 사망. 황성기기자 marry01@. *오부치 총리 타계 이모저모. ●자택 안치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전총리의 유해는 이날 병원에서 수습된 뒤 오후 7시쯤 병원을 나와 빈소가 마련된 도쿄 시내 자택에 안치됐다. 유해를 실은 차량은 경찰 호위를 받으며 그가 40년 가까이 지냈던 국회의사당과 쓰러지기 전까지 집무했던 총리 관저를 한바퀴 돌아 말없이 집으로 향했다. 오부치 전총리의 타계로 공석이 된 중의원 군마(群馬) 5구는 둘째딸인 유코(優子·26)씨가 물려받아 6월25일 실시될 총선에 출마할 것으로 알려졌다. ●장례 일본 정부·여당은 장례를 ‘내각·자민당 합동장’으로 치를 것을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역대 총리중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의 장례는 국장,7년여 총리를 지낸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는 국민장,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 등은 자민당장,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등은 내각·자민당 합동장으로 치렀다. ●조문 및 애도 오부치 전 총리의 타계소식이 알려진 직후 최측근인 노나카히로무(野中廣務) 자민당 간사장과 아오키 미키오(靑木幹雄) 관방장관 등이병원을 찾아 미망인 지즈코 여사 등 유족을 위로했다.오부치 전총리의 타계소식을 접한 모리 요시로(森喜朗) 총리는 “어려운 시대에 훌륭한 지도자를잃어 슬픔을 참기 어렵다”고 애도의 뜻을 표했다.오부치 전 총리의 정치적스승인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76) 전 총리는 “오부치군과는 40여년간 고락을 같이 해왔다”면서 “이제 편안히 쉬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클린턴 미국 대통령 부부와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 등 세계 각국의 정상들도 성명을 발표,오부치 전 총리의 타계를 애도하고 지도자로서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향후 정국 모리 총리가 이날 6월25일 중의원 선거 방침을 확인하면서 일본은 본격적인 총선 정국에 돌입.일본 여야는 오부치 전 총리의 타계가 총선에 미칠 영향을 계산하면서도 자민당쪽으로 ‘동정표’가 움직여 다소 여권이유리할 것으로 전망.특히 오부치 전 총리가 쓰러진 이후 다케시타 전총리 등 원로 정치인들이 대거 은퇴의사를 밝혀 이번 총선에는 세대교체가 두드러질 것으로 보인다. 황성기기자
  • 40여년전 선생님 사랑 못잊어 유고시집 출간한 두제자의 報恩

    이순(耳順)을 넘긴 두 제자가 스승의 날을 맞아 무명시인이었던 고교 담임선생님의 유고시를 모아 시집으로 출간해 훈훈한 사제간의 정을 되새기게 하고 있다.주인공은 채의진씨(64·문경양민학살희생자유족회장)와 김주태씨(63·대진 대표이사).이들은 최근 상주고교 시절 국어교사이자 담임선생님이었던 고 이대희씨(李大熙·90년 작고)의 유고시 44편을 묶은 '너랑 가고 싶어라'를 펴냈다. 이들이 고인이 된 스승에게 각별한 추모의 정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두 사람 모두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교생활이 곤란했음에도,이 선생이 마치 자식처럼 돌봐주는 참스승의 면모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고교 때 문학도였던 채씨는 “선생님의 영향으로 고1 때 이미 국내 작가들은 물론 카뮈,니체,카프카등 외국 작품을 탐독했다.가끔 시를 써 보여드리면 수업시간에 제 작품을 소개해주시는 등 그분은 은사님이기 이전에 내 청년기의 정신적 지주였다”고말했다. 김씨는 “선생님은 집안사정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마련해주기 위해동분서주하셨으며,늘 다정다감하셨다”고 회고했다. 1925년 경북 상주출신인 이대희 선생은 54년 동국대 사학과를 졸업한 뒤 상주고교에 부임,4년동안 교편을 잡다가 건강이 좋지않아 58년 교단을 떠났다. 90년 병환으로 작고하기까지 이 선생은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두 사람은 스승의 날 하루전인 14일 경북 상주 사벌면에 있는 이 선생의 묘소를 찾아 시집을 헌정하고 21일 서울 코리아나호텔 7층 스테이트룸에서 시집출간 자축모임을 겸해 이 선생의 추모행사를 갖는다. 정운현기자 jwh59@
  • [굄돌] 좋은 건축을 위한 여지

    르 코르뷔제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미스 반 델 로에와 함께 현대건축의 3대 거장으로 꼽힌다.그가 지난 1953년 프랑스 마르세이유에 설계한 아파트는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코르뷔제는 러시아를 비롯한 공산국가에서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단위로 지어지던 획일적인 디자인의 아파트를 세계 건축계가 주목하는 작품으로탈바꿈 시켰다.이 건물이 완성된 직후 아파트 옥상에서 세계건축가들이 모인국제회의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또 다른 거장 건축가 월터 그로피우스는 “이 건축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건축가는 즉시 건축 일을 포기하는게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건물 한 동에 23개의 크고 작은 단위세대가 입주하도록 한 마르세이유 아파트는 중간층에 식당과 슈퍼마켓,약국,체육관 등이 있다.또 1층에 기둥으로이루어진 개방공간(piloti)을 만들고 옥상에 수영장과 휴식공간 및 녹지를조성했다.건물을 하나의 공동체로 설계한 것이다. 지난 1958년 서울에 한국 최초의 아파트인 종암아파트가 들어 선 이후 한국의 아파트 건축 역사도 40여년을 헤아리고 이제 전국민의 절반 정도가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코르뷔제처럼 아파트를 작품으로 만들어낸 한국 건축가는없다.오히려 우리 건축가들에게 아파트 설계는 흥미 없는 프로젝트이다.그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건축가의 창의력이 끼어들 여지가 없을 정도로지나치게 시시콜콜한 건축법의 제약이 오랫동안 계속된 것도 그 하나로 꼽을수 있다. 지금은 많이 개선됐지만 한동안은 법 대로 따라하면 설계가 끝날정도였다. 얼마 전 건설교통부가 아파트 발코니 폭을 최대한 2m까지 늘릴 수 있도록 하고 1층에 필로티를 설치하면 인센티브를 주는 내용의 건축법 시행령 개정안을 마련했다는 보도가 있었다.얼핏 생각하면 그럴싸하다. 그러나 비록 규제완화 방향이라 하더라도 법이 너무 세밀하게 규정하는 것은또 다른 획일화를 가져올 것이란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발코니나 필로티나 전체적인 단지계획의 필요성에 따라 설계되어야지 법률로 정할 일은 아니다. 앞으로 모든 아파트의 발코니 폭은 2m,1층은 으레 필로티로 띄우게 될 가능성이 큰데 좋은 주거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건축가에게 폭넓고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는 여지를 주어야 한다. 이상연 건축가
  • 조소앙선생등 월·납북인사 6명 사망일자·묘소 첫 확인

    한국전쟁 중 월·납북된 임정요인 등 저명인사 중 그동안 생사가 알려지지않은 일부 인사들의 사망일자와 장소,최후의 모습 등이 새로 밝혀졌다.이같은 사실은 본지 신준영 기자가 이 달초 방북,조소앙 선생의 비서출신으로 조선생 등 남측인사들의 북행 당시 이들과 동행했던 김흥곤씨(76·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고문)와의 인터뷰 과정에서 확인됐다.그동안 월·납북인사들의최후가 더러 알려지기는 했으나 북한현지에서 당시 관계자의 증언으로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김씨에 따르면,조소앙 선생은 58년 9월 10일 평양시내 남포병원에서 학질로타계했으며, 김규식 선생은 50년 12월 10일 만포 적십자병원에서,조완구 선생은 54년 10월 27일 평양시내 자택에서 타계한 것으로 각각 확인됐다.이밖에 독립운동가 출신의 유동열·김의한·송호성 등의 최후도 확인됐다.이외에도 현상윤 전고려대 총장,백관수 전동아일보 사장을 비롯,제헌의원 강욱중씨(경남 함안)의 사망경위·장소,묘소 등도 확인됐다. 국사편찬위원회 김광운(41) 편사연구사는 “현상윤,백관수,송호성,김의한 등의 사망일자·경위가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평양 리포트/(하)월·납북 인사 행적·최후

    김흥곤 선생(76·북한평화통일촉진협의회 고문)은 남한 현대사연구자들이가장 만나고 싶어하는 재북 인물중 한 사람이다.그는 전남 광주 출신으로 약관 22세 때부터 조소앙(임정 외무부장) 선생의 비서로 활동했다.48년 4월 남북연석회의때는 조 선생을 수행해 평양에 다녀왔고,50년 9월 15일 미군의 인천상륙후 인민군의 후퇴때 조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북행길에 올랐다.그는 지난 56년 7월 조소앙을 중심으로 안재홍,엄항섭(임정 선전부장),오하영(민족대표 33인중 1인),최동오(임정 국무위원),송호성(광복군·국방경비대 총사령관),김효석(자유당시절 내무장관)등 남한측 인사들이 조직한 북한 ‘평화통일촉진협의회’(이하 통협)에 참가해 현재 이 단체의 고문으로있다.그는 재북 임정요인들의 북에서의 삶과 최후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4월 7일 오후 5시 평양 보통강호텔 면담실에서 어렵게 선생을 만났다. ●증언을 결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선생님의 증언은 우리 현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남에서 온 기자선생을평양에서 만나게 되니 반갑습니다.민족주의 애국인사들의 운명에 대해 제가 70평생 체험한 이야기를 하려 하니 정확히 보도해주기 바랍니다”●선생님께서는 어떤 인연으로 조소앙 선생의 비서가 되셨습니까. “일제하 광주사범학교 3학년때 2종 교원시험에 합격해 교원생활을 했는데학생들에게 조선어 공부를 시키다가 43년 반일교원으로 몰려 파면당했습니다.독립운동가 출신 당숙의 소개로 서울 백남운 선생댁에 피신해 있었는데 해방후 임정요인들과 함께 귀국한 조 선생이 비서를 구하면서 내 얘기를 들으시고 비서로 삼으신 겁니다”●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셨을 때 일들을 소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때 남의 좌익세력들은 비법적으로 배를 타고 해주로 들어갔지만 민족주의 세력은 합법적으로 올라갔습니다.김구,김규식(임정 국무위원),조소앙,조완구(임정 국무위원) 선생 모두 자기 차로 평양에 가서,그 차로 돌아다니다가 내려가셨습니다.연석회의에 대한 국민들의 성원은 대단했습니다.참가자들에게 양복 와이셔츠도 해주고 과일,사이다 같은 것을안겨주면서 열렬히 환송했습니다”. ●남에서는 남북연석회의가 실패했다고 보는 학자들도 많습니다.오늘의 관점에서 남북연석회의를 평가하신다면? “그것은 우리 역사상 공산주의세력과 민족주의세력이 합작 단결을 과시한최초의 대민족회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지금도 평화통일하자면 이념을 떠나민족이 대단결하는 것 밖에 다른 방도가 있습니까.앞으로도 민족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북남연석회의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남북연석회의에 대해 남한의 보수진영 학자들은 ‘남북협상은 전적으로 북측에 이용당했다’는 입장이다.반면 진보진영에서는 ‘남북협상 가운데 남북연석회의는 그런 측면이 있지만,이어 열린 남북요인회담(4김회담 포함)은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한의 민족적 노력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편집자주]●정정화 여사의 회고록 ‘녹두꽃’에는 김 선생님께서 50년 9월 인민군이후퇴할 때 안재홍,조소앙 선생을 모시고 평양까지 후퇴한 것으로 나와있는데,후퇴과정과 그때의 민족주의 인사들의 모습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남쪽에서는대부분 이 분들이 강제로 납북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면 선생들을 모시고 올라온 내가 납치범이란 말인가.당시 그 분들은‘남북협상파’ 세력이라고 불렸습니다.그분들은 ‘남북 국회가 우선 통합해서 통일헌법을 채택하고 50년 8·15를 기해 통일정부를 세우자’는 평화통일방안을 50년 6월 26일 국회에 상정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이런 상황에서 6월 25일 전쟁이 난 것입니다.전쟁이 터진 후 조소앙 선생은 ‘우리가 조금만 빨리 평화통일방안을 통과시켰다면 이런 유혈전쟁이 없었을 텐데’하고 통탄해 하셨습니다.9월 15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습니다.남북협상을 주장하시다가 김구 선생이 희생당하신 것을 알고 있는 저로서는 ‘외국군 철수와 평화통일’을 일관되게 주장해온 민족주의 애국인사들의 안위를 걱정하지않을 수 없었습니다.조 선생께서는 빨리 유혈전쟁을 그치고 평화통일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셨고 전쟁이 그리 오래 가리라고는 보지않으셨습니다.이남 언론에서는 우리가 개성에서 서흥,봉산을 거쳐 대성산으로 갔다고 보도했는데 우리는 미국대사관에서 노획한 차를 타고 임진강 수중다리를 거쳐 다른 길로 왔습니다”[이에 대해 서중석교수(성균관대·현대사전공)은 “당시 북행길에 오른 사람들은 개인마다 차이가 있다.조소앙·김규식·원세훈 등 중도우파 계열의 인사들이나 친일파로 지목된 이광수·백관수 등은 납북됐다고 볼 수 있다.반면 ‘국회프락치사건’ 관련자 등은 자진월북했다고 봐야 한다”고 말한다.당시 김씨처럼 남측인사들의 북행길에 동행했던 신경완씨(가명·80년대 망명·98년 작고)의 증언집 ‘압록강변의 겨울’에 따르면,서울을 점령한 6월 28일 노동당 군사위는 남한내 주요인사들을 포섭,재교육하여 통일전선을 강화키로 결정하고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요인들을 연행,체포했으며,9월 15일 연합군의 인천상륙후 후퇴하면서 평양에서 재교육을 받고있던 남측요인들을 데리고 자강도 만포까지 후퇴한 것으로 돼 있다-편집자주]●평양에 도착해서는 어디로 가셨습니까? “당시 평양 대동강 남쪽에 국제전화중계소가 있었습니다.그곳은 국제적으로 등록된 곳이라 폭격을 안하게 되어 있습니다.우리는 9월 20일 평양에 도착해서 국제전화중계소 인근 농촌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동네 아주머니들이 음식을 해와서 융숭하게 대접받은 후 백선을 두른 특별열차를 타고 강계까지 갔습니다”●북으로 간 민족주의 인사들은 박헌영,이승엽사건과 56년 ‘종파사건’이나면서 큰 고초를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최근 공개된 58년 10월 6일평양주재 러시아대사 푸자노프의 ‘업무일지’에 따르면 “58년 9월 30일 동료들로부터 비판을 받은 조소앙 선생이 대동강에 투신자살했다”고 기록돼있습니다.사실입니까? “전혀 사실과 다릅니다.조 선생이 별세하신 것은 58년 9월 10일입니다.별세하실 때까지 조 선생은 상급(장관급) 대우를 받으면서 상(장관)들이 사는평양 흥부동 4호주택에 사셨습니다.별세하실 무렵 선생은 학질을 심하게 앓아 많이 쇠약해 있었습니다.별세 전날인 9·9절 술을 드시고 10일 새벽 대동강으로 산보를 나가셨다가 현기증을 일으켜 물에 빠지셨는데 겨우 정신을 차려 집에까지 오셨습니다.그길로 남산병원에 입원했는데 그만 운명하시고 말았습니다.병원에서는 사망원인을 학질로 진단했습니다”●김규식 선생의 마지막 모습을 전해 주십시오. “김 선생께서는 50년 12월 10일 만포 적십자병원에서 운명하셨습니다.머리 뒤에 혹이 있고,오랜 숙환이 계셔서 전쟁중에 후퇴하시면서 많이 고생하셨습니다”. ●조완구,김의한(임정요인 김가진의 아들),엄항섭,송호성,유동열(임정 군무부장) 선생 등 다른 임정요인들의 사망시기와 최후도 궁금합니다. “면담에 나오기 전에 신 기자의 질문요지를 전해 받고,남에 있는 애국지사들의 후손들에게 제삿날이라도 정확히 알려주어야겠다는 일념에서 한분 한분 돌아가신 날짜를 정확히 적어 가지고나왔습니다(선생은 실제로 약 8쪽의 종이에 자필로 빽빽히 적은 메모를 보여주었다).조완구 선생은 홍명희 부상(차관)의 고모부가 됩니다.평소에도 홍명희 선생이 자주 나와 잘 돌봐드렸는데54년 10월 27일 평양 대성산구역 청암동 자택에서 운명하신 후 홍명희 부상이 주관해서 장례를 잘 치러드렸습니다.김의한 선생은64년 10월 9일 평양시 동대원구역 새마을동 자택에서 운명하셨고,통협 상무위원으로 부상급 대우를 받으시던 엄항섭 선생은 62년 7월 31일 평양에서 별세하셨습니다.통협 상무위원 송호성 선생은 평양 북새거리 자택에서 59년 3월 24일 운명하셨고,유동열 선생은 전쟁중 후퇴하다가 50년 10월 18일 자강도 희천 계선 쌍방골에서 폭격으로 돌아가셨습니다”●제헌의원 가운데 생존해 계신 분들은 어떤 분들이십니까. “경남 함안 국회의원이던 강욱중 선생은 69년 7월 1일 돌아가셨습니다.역시 제헌의원 출신이신 최태규 선생은 올해 80으로 얼마전 팔갑상을 받으셨습니다.통협 상무위원으로 재직하고 계십니다만 심장이 안 좋으셔서 요즘은 집에서 쉬고 계십니다”●돌아가신 민족주의 애국인사들의 묘소는 어디에 있습니까. “김규식,조소앙,조완구,오하영,엄항섭,유동렬,최동오,임규섭 선생은 신미리 애국열사릉에,그외 통협 회원들은 신미리와 삼석구역(대성산) 특설묘지에 계십니다.또 통협 결성전에 돌아가신 현상윤(고려대 총장·50년 9월 25일폭격으로 사망),백관수(동아일보 사장·제헌의원·51년 10월 25일 폭격으로사망),정인보(국학자) 선생 역시 삼막 특설묘지에 모셨습니다.정인보 선생의따님은 홍명희 선생의 며느리가 되어 지금 평양 청류동에 살고 있습니다”junyoung@
  • [천수이볜의 타이완](中)兩岸관계

    ‘폭풍 전야의 고요’.타이완(臺灣)의 독립을 표방하는 천수이볜(陳水扁)총통 당선자의 행보를 중국 당국이 예의주시하고 있는 현 상황의 양안(兩岸)관계를 나타내는 타이완 언론들의 표현이다. 천 총통 당선자의 양안정책 기본방향은 중국과 타이완은 ‘2개의 독립된 국가 대 국가’의 특수관계라는 것이다.2개의 중국은 서로 예속되지 않고,통치하지 않으며,관할권도 갖지 않아야 한다는 논리다.특히 타이완의 독립과 관련된 사항은 타이완인들의 투표를 통해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리덩후이 (李登輝)의 양국론(兩國論)에 뿌리를 둔 이같은 천 당선자의 입장은 중국이 주장하는 ‘하나의 중국’이란 원칙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어서 앞으로 양안관계가 순탄치 못할 것임을 예고해 주고 있다. 천 당선자가 독립을 표방하고 있지만,상당기간 양안관계를 긴장시키는 자극적인 발언을 자제하는 현상유지 정책을 견지할 것이라는 게 양안관계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이다.그는 정치·경제개혁 등 내정 개혁과 수습을 위해풀어야 할 여러가지 문제가 있는 데다,총통선거 및 여론조사 결과 대다수 타이완인들이 양안관계의 현상 유지나 개선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 당선자가 20일 기존의 강경 입장을 수정해 중국에 평화정상회담을 제의하면서 ‘하나의 중국’ 문제를 논의할 용의가 있다고 밝힌 것도 당장은 중국과의 긴장 조성이 아니라 데탕트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 할 수있다. 이번 선거에서 무소속의 쑹추위(宋楚瑜) 후보와 국민당의 롄잔 후보를 지지한 60%에 가까운 타이완인들은 현상 유지나 개선을 원하는 사람들로 볼 수있다.19일 타이완 남녀 923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 양안관계의 현상유지를 원하는 사람이 51%,타이완의 독립 주장을 포기하자는 사람이 31%인데 비해 타이완 독립을 선포하자는 사람은 불과 4%에 지나지 않았다고 연합보(聯合報)가 20일 보도했다. 타이완 국립 정치대 우위산(吳玉山) 교수는 “천 당선자의 경우 우선 국제사회의 지지를 끌어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며 “특히 미국의 지지를필요로 하는 천 당선자로서는 불필요한 양안관계의 긴장 조성으로 불이익을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홍콩의 정치분석가 조셉 정 교수도 “중국과 타이완은 현재 불필요한 양안관계의 긴장을 피하기 위해 어휘를 선택하는데 고민하는 상황”이라며 “그러나 중국과 타이완간에 양안관계에 대한 입장 차이가 너무 커 양측간의 대화를 기대하기도 어렵다”고 전망했다. 중국 당국도 섣불리 무력시위 등 양안관계를 긴장시킬 입장이 못된다.올해안으로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목표로 하는 중국으로서는 양안관계의 긴장 고조로 얻을 수 있는 실익이 별로 없는데다,타이완도 군사대응은 물론 경제교류마저 중단할 것이라고 밝혀 오히려 중국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중국 전문가 데이비드 즈웨이그 홍콩 과학기술대 교수는 “중국이단기적으로는 타이완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자세를 견지하겠지만,장기적으로는 양안관계에 긴장이 고조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양안관계에는 미국 변수도 있다.단순히 중국과 타이완간의 관계로만 그치는게 아니라,‘동북아의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미국의 개입을 부를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타이베이(臺北) 김규환 특파원 khkim@. * 양안관계 불안 타이완 증시 급락. 타이완의 천수이볜(陳水扁) 총통 당선자는 20일 중국과 ‘하나의 중국’을논의할 수 있다며 대(對) 중국 강경입장을 다소 누그러뜨렸다.야당 지도자에서 책임있는 총통으로의 변신을 상징하는 발언으로 받아 들여졌지만 양안관계에 대한 타이완인들의 불안은 가시지 않는 모습이었다. □천 당선자는 이날 ‘하나의 중국’을 논의할 수 있다고 밝히면서 98년 중국을 방문했던 구전푸(辜振甫) 타이완해협교류기금 회장과 만나 양안관계에관한 경험을 배우겠다고 강조. 분석가들은 천 당선자의 발언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하나의 중국’논의의 전제조건으로 내건 ‘중국과의 동등한 지위’를 중국이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 □중국은 타이완 총통선거 사흘째인 이날도 여전히 신중한 반응을 유지.중국언론들은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이 9월 국민당 총재직을 사임한다는 사실을짤막하게 보도.베이징(北京) 시민들도 선거 결과와천 당선자에 대해 자세히모르고 있으며 별다른 관심도 표명하지 않고 있다. □천 당선자는 타이완 독립에 보다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는 다수 국민들의 견해를 존중해야 할 것이라고 워싱턴 포스트가 19일 지적. □중국의 일부 학자들은 양안관계가 불안정해져 10년내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19일 경고.중국 첩보조직과 연계된 한 연구소의 얀 수에통은 천 후보당선은 양안간 긴장관계에 부정적 효과만을 더할 뿐이라면서 “단기적으로는 아무 일이 없겠지만 10년이내에는 전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타이완 정국과 양안관계의 불확실성을 반영하듯 타이완의 주가지수인 자취안(加權)지수는 개장직후 전주보다 271.19포인트(3.1%) 떨어진 8,492.08까지 급락. □천 후보의 당선에 기여했던 인맥들이 대거 새 내각의 요직을 차지할 것으로 타이완 언론들은 보도.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리엔저(李遠哲) 전중앙연구원장은 본인이 아직 승낙하지 않았지만 국무총리격인 행정원장 기용이 확실시되고 있다.천탕산(陳唐山)타이난(臺南)현장은 미국통으로 외교부장감으로 꼽힌다.이밖에 민진당 실력자인 셰창팅(謝長廷) 가오슝(高雄)시장,린이슝(林義雄) 민진당 주석,장준슝(張俊雄) 사무총장,린자청(林嘉誠) 전 타이베이부시장 등도 내각에 참여할 것으로 점쳐진다. *국민당 內訌 가속화… 정가 재편 예고. 국민당은 어디로 갈것인가. 지난 51년간 타이완을 일당통치해온 국민당이 총통선거에서 완패,최초의 야인생활에 돌입하게 됨에 따라 국민당의 향배에 세인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의 치욕적 패배가 국민당 내홍을 가속화할 것으로 내다보고있다. 이같은 국민당의 균열은 궁극적으로 타이완 정가 전체의 재편을 예고하는신호탄으로 분석되고 있다. 총통선거 결과가 드러나기 시작한 18일 오후부터 국민당 중앙총본부 앞에는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의 즉각적 주석직 사임을 요구하는 국민당 지지자들의항의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대만 독립론자로 꼽히는 리총통에 대해 그간 정견을 위해 당을 버리고 민진당 천수이볜(陳水扁) 후보를 지원하고 있다는 밀약설이 끊임없이 나돌아왔다. 시위대의 리총통 문책 요구도 이런 의혹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하지만 이는역설적으로 국민당 내부에 타이완 독립론과 분리반대론이 어느때보다 팽팽히 맞서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론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국민당의 반세기 타이완 통치가 막을 내림과 동시에 향후 정국은 명목상의양당체제에서 다당제로의 핵분열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정계재편의 바람이 거셀수록 파편은 거대한 인력풀인 국민당에 집중될 것이다.당장민진당이 대거 두뇌 사냥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야당경력 10여년만에 집권당으로 급부상,국정운영 경험이 전무한 민진당으로서는 국민당으로부터의 정책브레인 영입이 급선무로 떠오르고 있다. 리총통의 이념적 적자로 평가받는 천 총통 당선자가 리총통의 민진당 영입을 서두를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신당 창당을 선언한 쑹추위(宋楚瑜) 전 대만성장의 행보도 강력한 변수가될 전망이다.국민당 탈당 후 무소속으로 박빙의 차점을 기록한 쑹 후보는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제1야당’ 창당을 공언,그를 지지하는국민당 내부의 부분이탈이 예견되고 있다. 현재로서는 3당간의 탐색전 또는 합종연횡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이는 향후정국에서 저력의 국민당이 대내외적 도전에 어떻게 맞서나갈지가 관건이다. 손정숙기자 jssohn@. *양안관계 일지. □1949년12월 국민당,타이완에 망명정부 수립. □55년 미국-타이완,상호방위조약 체결. □58년 중국-타이완,진먼(金門)섬에서 포격전. □71년 유엔,중국의 유엔 대표권 인정. □79년 미국,타이완과 외교관계 단절하고 중국과 관계수립. □87년 타이완,계엄령 해제.양안관계,화해분위기로 반전. □91년 타이완,무력을 통한 본토 수복 정책 변경.중국과의 전쟁상태를 공식적으로 종식. □92년 타이완 해협교류기금회(SEF)-중국 해협양안관계협회(ARATS),양안간민간문제 검토 시작. □95년1월 장쩌민(江澤民) 중국국가 주석,타이완과의 평화통일 ‘8개안’ 제시.타이완도 대안 제시. □95년6월 리덩후이(李登輝) 타이완 총통,미국 방문.중국,타이완과의 접촉단절. □96년3월 중국,최초의 타이완 총통선거에서 리 총통 재선을막기 위해 타이완을 겨냥해 3차례 미사일을 발사.리 총통,재선. □99년7월 리덩후이,타이완과 중국은 “특수한 국가대 국가관계” 선언. □2000년2월21일 중국,“평화협상 아니면 전쟁 불사”라는 강경노선 표명. □2000년3월18일 천수이볜(陳水扁),제10대 총통에 당선.
  • 고대 국문과 백경순씨 ‘청바지 할머니’ 42년만에 학사모

    “뒤늦게 공부하도록 도와준 남편에게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지난 10일 환갑을 지낸 만학 주부 백경순(白慶順·60·서울 성북구 장위동)씨가 42년만에 고려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다. 지난 58년 충북 충주여고를 졸업한뒤 고려대에 입학한 백씨는 완고한 집안분위기 탓에 서울로 유학오지 못하고 매일 등하교를 반복했다.결국 견디다못해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학업을 포기했다.지난 64년 결혼해 2남 1녀를 낳았지만 백씨의 마음은 항상 “공부를 마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간절했다. 꿈을 되살린 것은 지난 96년.백씨는 수능을 치르지 않고도 재입학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1학년 2학기생으로 재입학했다. 백씨는 청바지 차림으로 배낭을 메고 등교한 뒤 맨 앞자리에 앉아 수업을들어 손주·손녀같은 후배들과 교수들 사이에 화제를 일으켰다. 그동안 최우등상과 우등상 등 4차례 상을 받았다.평균평점은 4.5 만점에 3. 72점.한달 전 자신의 졸업을 보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간 남편이 그립다는백씨는 “기회가 된다면 대학원에 진학해 좀 더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딸과 막내아들도 올해 성신여대 대학원과 포항공대 대학원을 졸업한다. 이랑기자
  • 1인 생명보험 지출 연 100만원 돌파

    국민 한사람이 생명보험료로 지출하는 돈이 연간 100만원선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됐다.생명보험 도입 초기인 55년의 0.1원과 비교하면 1,000만배 성장한 수치다. 또 생명보험회사들의 전체 자산은 93년말 50조원을 돌파한 지 6년만에 100조원대로 곱절 뛰어 생보업의 빠른 성장세를 보여주었다. 생명보험협회(회장 裴贊柄)는 16일 생보협회 창립 50주년을 맞아 ‘생명보험산업 50년 변화 추이’ 조사보고서를 냈다.이 조사에 따르면 지난 55년 0. 1원에 불과하던 국민 1인당 연간 생명보험료 지출규모가 97년에는 106만4,466원으로 100만원선을 넘어섰다가 98년에는 IMF(국제통화기금)체제의 영향으로 99만9,148원으로 감소했으나 지난해 다시 100만원대를 돌파했다. 생보사들의 자산은 55년에는 200만원에 불과했으나 58년 2억원,81년 1조4,689억원,93년 50조2,002억원 등 연평균 35.8%의 성장세를 보이면서 99년 11월 100조8,949억원을 기록했다. 안미현기자 hyun@
  • 밀레니엄 해맞이 울릉도 ‘북적’

    독도를 지척에 둔 울릉도에 각종 사회단체 관계자 등 외지인들이 몰려들고있다.우리의 땅 독도를 바라보며 새 천년을 설계하고,독도를 지키기 위한 행사에 참가하려는 사람들이다. 포항과 울릉도간을 운항하는 여객선 썬플라워호는 30일 500여명을 울릉도로실어 날랐다.31일에는 탑승권 815장이 완전 매진됐다. 30일 울릉도를 찾은 사람 중에는 PC통신 ‘독도사랑 동우회’·민족문제연구소·부산민예총·삼일동지회 등 독도 관련단체 회원 200여명이 포함됐다.29일에는 15개대 학생 80여명이 회원인 ‘새천년 맞이 독도 탐사단’도 들어왔다. 전국어민총연합회는 이날 낮 12시 53t짜리 어선에 어민 10여명을 태우고 독도를 방문하기 위해 부산을 출발했다.이들은 31일 오후 울릉도에 도착한 뒤어민의 생존권과 직결된 독도 주변을 한바퀴 돌며 독도를 지키기 위한 의지를 다진다. 박상국(朴相國·45·상업·서울 마포동)씨는 “새천년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새해를 설계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왔다”면서 “일본의 음모를 저지하려면 하루빨리 독도를 국민 관광지로 개발,국민들이 자주 찾게 해야 한다”고강조했다. 새천년 첫날 울릉도와 독도에서는 해맞이 행사를 비롯해 독도 주권선언,독도를 지키다 순직한 사람들을 위한 위령제 등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진다. 새천년 맞이 독도탐사단 인솔자 이승헌(李承憲·30·강남대 문헌정보학과4)씨는 “부산 민예총 회원들과 함께 새해 1일 독도를 지키다 순직한 독도 의용수비대와 독도 최초 거주자 최종덕씨,58년 미군의 오인 폭격으로 숨진 독도 주민 등을 위한 위령제를 지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최근 결성된 ‘독도 유인도화 국민운동본부’ 회원인 장준영(張浚暎·47)씨는 “32가구 78명이 독도로 호적을 옮겼다”면서 “새천년 둘째날 회원들과함께 ‘제2의 고향 독도 방문 행사’를 가질 계획”이라고 말했다. 울릉도 조현석기자 hyun68@
  • [외언내언] 西勢東漸의 폐막

    442년 동안 포르투갈의 영토였던 마카오가 20일 0시를 기해 중국에 반환됐다. 마카오가 이제 중국의 영토임을 세계에 선언한 역사적인 주권 이양식에는장쩌민(江澤民)국가주석을 비롯한 중국 지도부가 총출동하다시피 했다. 또한 세계도 58개국이나 공식 사절단을 보내 축하했다.몰려든 보도진만도 1,000명이 넘었다. 서구열강(西歐列强)에 의한 아시아 지배가 끝나는 엄숙한 순간이었다.2년전 홍콩이 반환됐고 이제 마카오마저 이양됨으로써 아시아 지역에 더이상 유럽국가의 식민지는 존재하지 않게 됐다. 96년간 미국이 지배해왔던 파나마 운하도 31일 파나마 정부에 넘어가지만이것으로 지구상에 식민지가 아주 사라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아직도 세계 60여곳에 식민지가 남아있다.미국프랑스 영국 등 8개국이 식민국가들이다.그중에도 프랑스는 식민지가 남미의 기아나와 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아 등 16곳이나 된다.영국은 대서양의 버뮤다,스페인 남부의 지브롤터 등 15곳,미국은괌·사모아 등 14곳이다. 그러나 남은 이들 지역은 엄밀한 의미에서 식민지라 하기는 곤란하다.120개 섬으로 구성된 폴리네시아의 원주민중 하나인 마오리족이 독립을 요구하고있으나 전체적으로는 58년 주민 투표를 통해 프랑스령으로 남기를 희망했다. 다른 곳들도 거의 전지역 주민들이 종주국내 잔류를 스스로 바라고 있어 식민국과 피식민 지역간 갈등이 없다.또 이들 지역은 국방·외교권을 제외하면 이미 전지역이 광범한 자치권을 누리고 있다. 그런 뜻에서 마카오의 반환은 서세동점(西勢東漸)시대의 종언이란 세기적의미가 있다.20세기는 아시아 지역 피지배국가들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배를벗어나려는 독립투쟁사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아시아의 마지막 식민지 마카오가 20세기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반환이 이루어진 것은 상징적이다.21세기와 더불어 국가간 먹고 먹히는 식민시대는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있다. 마카오는 ‘차이니스 마카오’로 다시 태어났지만 홍콩과 마찬가지로 중국내 특별자치구역으로 남는다.앞으로 50년 동안 자본주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게 된다.또 하나의 중국내 일국양제(一國兩制)의 실험장이다. 식민지배의 아픈 역사를 안고 있지만 홍콩과 마카오는 동서문화의 접점으로서,중국 근대화의 향도로서 앞으로는 중국역사에 오히려 긍정적으로 기여하게 될지도 모른다.역사는 때로 전화위복(轉禍爲福)의 반전도 가르쳐주고 있다. [林春雄 논설위원 limcw@kdaily com]
  • 우즈, 뷰익社와 스폰서계약 체결

    [샌디에이고 AP 연합] 타이거 우즈가 16일 미국의 자동차메이커 뷰익과 5년간 스폰서 계약을 맺었다.뷰익과 우즈 모두 구체적인 계약조건을 밝히지 않았으나 계약금은 2,000만∼2,500만 달러(약 220억∼280억원)인 것으로 전해졌다. 뷰익의 로저 애덤스 사장은 “이번 계약으로 우즈는 앞으로 5년간 캐디백에 뷰익 로고를 새기고 우리 회사가 주최하는 대회에 가급적이면 모두 출전하게 된다”고 밝혔다. 뷰익은 58년 사기업으로는 처음으로 미국프로골프(PGA)투어의 타이틀스폰서를 맡았고 현재 뷰익인비테이셔널 등 4개 대회의 타이틀스폰서를 맡고 있다.
  • 20세기 최악 악천후…1907년 中 가뭄

    [워싱턴 AP 연합] 금세기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악천후는 1907년 중국에서 발생한 가뭄이었으며 이로인한 기아로 무려 2,400만명이 숨졌다고 미국 해양대기국(NOAA)이 13일 발표한 ‘세기의 악천후’ 보고서에서 밝혔다. 중국의 가뭄은 또 1928∼30년,1936년,1941∼42년등 세차례 더 이어져 수백만명이 추가로 희생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NOAA는 말했다.다음은 NOAA가 발표한 금세기 최악의 기상이변들이다. ▲1907년 중국에서 가뭄과 기아 발생.사망자 2,400만명 추산.1928∼30년,1936년,1941∼42년 등 세차례 가뭄에서 수백만명 사망 추정.▲1921∼22년 옛소련의 우크라이나와 볼가 지역에서 가뭄 발생.사망자 25만∼500만명 추정.▲1965∼67년 인도에서 가뭄 발생.사망자 150만명 추산. ▲1931년 중국 양쯔강범람.홍수와 그에 따른 질병 및 기아로 370만명 사망.▲1972∼75년 아프리카 사헬에서 가뭄 발생.60만명 사망 추정.같은 지역에서 발생한 1984∼85년 가뭄으로 그 이상의 희생자 발생 추정.▲1970년 방글라데시 사이클론으로 30만∼50만명 사망 추정.같은지역에서 1991년 사이클론으로 13만8,000명 사망. ▲1998년 중미에서 허리케인 미치로 1만1,000여명 사망.▲1954년 이란의 대홍수로 1만여명 사망.▲1991년 필리핀에서 태풍 델마로 6,000명 사망 추정. ▲1958년 일본에서 태풍 베라로 5,000명 사망 추정.▲1952년 런던에서 대 스모그(smog)로 4,000명 사망 추정.▲1972년 이란에서 눈을 동반한 폭풍으로약 4,000명 사망.▲1965년 겨울 네덜란드와 영국등 북부 유럽 해안에서 폭풍으로 2,000명 사망 추정.▲1900년 미국 갤버스턴섬에서 허리케인으로 8,000명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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