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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장상의 골프인생 등 특집방송

    케이블·위성TV 골프전문 채널 J골프가 7일 개국 3주년 특집 방송을 내보낸다. 먼저 프로골퍼 한장상 선수의 골프인생을 다룬 휴먼 다큐멘터리 ‘J골프 스페셜-군자리에서 오거스타까지’가 7일 오후 8시30분에 방영된다.1958년에 프로에 입문한 한장상은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반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골퍼다. 이어 오후 9시30분에는 ‘J골프 매거진 개국 특집(2부작)’을 방송한다.1부는 전 세계 투어 소식과 최근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박세리 선수와의 인터뷰를 전한다.2부는 각계 명사들이 전하는 축하 오프닝 쇼와 함께 그동안 큰 인기를 누렸던 베스트 프로그램들을 소개한다.
  • 완벽 복원된 ‘명나라 황제 의복’ 中서 공개

    최근 중국에서 완벽하게 복원된 명나라시대 황제복이 공개돼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23일 베이징에서 공개된 두 벌의 황제복은 1958년 9월 ‘명십삼릉’(명나라 역대 13 제왕의 능)에서 출토된 것으로 이는 13대 황제인 ‘만력제’(萬曆帝)의 옷이다. 출토 당시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으나 난징(南京)의 비단연구소(云锦研究所)가 16년간의 복원을 통해 화려한 제 모습을 찾았다. 이날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황제가 입던 ‘예복’. 비단연구소 장홍바오 주임은 “황제의 예복은 붉은 색을 위주로 하되 황색과 백색 등 여러 색깔이 혼합되어 있으며 도안이 매우 화려하다.”며 “예복 한 벌에 ‘卍’(만)자 도안이 279개, ‘壽’(수)자가 256개, 둥근 용의 무늬가 12개나 그려져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료에 근거해 옷의 문양이나 소재를 연구하는데 13년, 제작하는데 3년의 시간이 걸렸다.”며 “그간 복원에 참여한 사람은 무려 1920명에 달한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이 황제복은 다른 어떤 유물보다 완벽하게 복원되었다.”며 “디자인 연구 뿐 아니라 역사적 고증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결혼생활 13년동안 가출 27번 한 아내

    결혼생활 13년동안 가출 27번 한 아내

    한해 두차례씩 26번 집을 나간 가출「챔피언」의 아내를 13년동안 남의 힘도 빌지않고 매번 찾아낸 남편이 있다. 여기 또다시 가출광 아내는 27번째 가출을 단행(?), 남편을 애태우고 있는데 결혼 13년에 숨바꼭질 27번으로 세월을 보낸 어느 중년부부의 얘기. 뛰어난 미모 명석한 두뇌…한해 두번씩 정기적 증발(蒸發) 화제의 주인공은 충남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G여관 주인 장혜곤(張惠坤)씨(49)와 그의 아내 박유하(朴榴夏)여인(36). 이들 부부가 결혼한 것은 지금부터 13년전. 13년동안 한해에 꼭 두차례씩 그러니까 26번이나 집을 나간 가출광 아내를 책하기보다 주위의 주소까지 받아가며 가출광아내를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집념으로 남의 힘도 빌지 않고 전국 방방 곡곡을 뒤져가며 26번을 모두 찾아낸 탐색「챔피언」남편 장혜곤씨. 이 탐색「챔피언」인 장씨도 지난 3월 15일 27번째로 집을 나간 아내의 가출에는 몸과 마음이 지쳐 그냥 쓰러져 눕고 말았다. 『아무래도 병적인 것만 같습니다. 지금이라도 좋아요. 마음만 잡고 돌아와 준다면 기꺼이 맞아들일 생각입니다』 아내를 찾기에 지쳐서 그런지 나이에 비해 이마의 주름살이 많은 남편 장씨의 하소연이다. 매사에 집념이 아주 강한 장씨는 고향이 평북 의주(義州). 해방과 더불어 홀로 남하, 자수성가 해야겠다는 굳은 신념아래 맨 주먹으로 일을 했다. 평소 익혀온 토목측량기술과 양조기술로 여러업체를 전전, 꽤 많은 돈을 모았다. 모은 돈으로는 관광객이 들끊는 백제의 고도 부여에 제일 규모가 큰 숙박시설을 갖추었다. 남부럽지 않은 가정생활을 누려오던 장씨가 박여인과 결혼한 것은 지금부터 13년전인 58년 이른봄이다. 이때 장씨의 나이 36세, 박여인은 23세였다. 이 결혼은 장씨에겐 세번째 결혼. 첫부인은 43년 이북에서 사별했고 6·25동란 이듬해 김(金)모여인과 재혼했다. 김여인의 몸에선 3남매를 얻었다. 세번째 아내인 박여인은 경북 영덕에서 태어나 부산H여고를 졸업, 23세 때 부여S다방「레지」로 직업전선에 나섰던 여인. 예쁜 얼굴과 명석한 두뇌, 수완이 좋아 다방을 찾는 손님들은 모두가 박여인을 보고 호감을 가졌다. 다방에서 일하기엔 너무나 아까운 여성이라고 손님들의 칭찬을 받았다. 장씨도 이런 손님중의 한사람. 「저런 아가씨를 여관종업원으로 있게 하면 수완이 좋아 영업이 잘 될 것 아니냐?」고 마음먹은 장씨는 박여인을 설득, 여관종업원으로 데려왔다. 여기서부터 단란했던 장씨의 가정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주위의 비웃음도 “나몰라” 나가면 데려오기 26차례 부인 김여인과의 불화가 잦고 급기야는 종업원인 박여인과의 관계에 까지 색안경을 쓰고 불만을 품은 김여인은 자진해서 이혼해 버렸다. 김여인과의 이혼으로 안방주인이 된 박여인은 결혼해서 5개월이 채 못된 53년전 7월 여관에서 모은 돈을 가지고 첫번째로 자취를 감췄다. 남편 장씨는 경찰에 가출신고를 내고 신문광고,「라디오」등을 통해 박여인을 찾아나섰다. 장씨는 손수 집을 나서 박여인의 친척 혹은 각처의 직업소개소를 찾아 수소문도 했다. 이때 논산 S소개소에서 박여인이 전주(全州)시내 모 다방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 말을 들은 남편 장씨는 전주시내 다방이란 곳을 전부 뒤져서 H다방에서 비로소 박여인을 찾았다. 꾸중에 앞서『과거를 묻지 않겠다』고 다짐한 남편 장씨는 그 길로 박여인을 집에 데려왔다.남편을 따라 집에 돌아온 박여인은 다시는 집을 나가지 않겠다고 남편에게 맹세까지했다. 이렇게해서 이들 부부는 즐거운 나날을 보내 넉달이 지났다. 59년 3월 이른 봄. 또다시 박여인은 첫번째 집을 나갈 때처럼 돈을 한뭉치 안고 자취를 감춰버렸다. 장씨는 주위사람들로부터 비웃음도 많이 샀다. 『세상에 여자가 그 여자 하나냐? 집을 나간 여편네를 무엇때문에 찾으려 하느냐?』등등 귀가 시끄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남편의 속마음을 모르는듯 박여인은 한해 두번씩 꼬박꼬박 집을 나갔고 남편 장씨 역시 꼬박꼬박 같은 방법으로 다방가에서 찾아내곤 했다. 아기를 낳으면 마음을 잡을까 하고 10번째로 찾았을 땐 유달리 박여인의 거동을 살펴 64년봄 딸(지금 8살)을 낳았다. 딸아이가 돌이 가까와오자 박여인은 또 자취를 감춰버렸다. 숨바꼭질「술레비용(費用)」자그마치 2천(千)만원 남편 장씨는 이때가 박여인과의 결혼생활중 가장 오래 있은 때였다고 말한다. 꼭 20개월을 같이 살았기 때문이다. 결혼생활이 어린아이들의 술레잡기처럼 변해 이들 부부는 몸을 감추고 다시찾고 또 감추고 또 다시 찾았다. 『지금까지 경찰에 가출신고를 낸 것은 아마 국내에서 최고기록일 겁니다. 그사람 때문에 없어진 돈을 따지면 2천만원이 넘습니다. 보통사람같으면 벌써 알거지가 되었지요. 남들은 그사람이 성적인 매력이 있어 찾는다고들 합니다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버려진 사람을 새로운 여성으로 만들기 위해 열성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울 정신병원에도 보내 요양도 시켜봤읍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허사였읍니다』 26번째 집을 나간 작년 2월에는 서울에서 김모씨(40)와 간통한 사실까지 드러나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까지 되었었다. 물론 남편 장씨의 마지막 수단인 고발로 형무소신세까지 지게 된 것. 박여인의 수감생활을 보다 못한 장씨는 그길로 상경, 고소를 취하, 박여인을 출감시켰다. 작년2월 박여인이 출감하던날 남편 장씨는 맛있는 음식을 사주고 용돈까지 주어『부디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하게 살아다오』석별의 행복을 나누고 아주 헤어졌다. 그뒤 몇 달이 지난 작년 여름. 난데없이 박여인으로부터 엽서가 날아왔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참회하기위해 대구 C교에 입교 강습을 받고 있으니 면회를 와달라』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받고 자주 면회를 갔읍니다. 이제 정말 그 사람은 새 사람이 된 것으로 알았읍니다. 딸 아이도 같이 엄마인 박여인을 자주 만났읍니다. 6개월의 강습소 생활을 끝내고 주위의 이목도 있고 해서 우선 가까운 인근 논산 H동에 전셋방을 얻어 지금까지 생활을 같이 했읍니다』 오늘이나 내일 박여인을 논산집에 데려가려고 마음먹었던 장씨의 뜻은 지난 3월 15일 27번재 가출로 산산조각이 났다. 남편 장씨에게 아무런 불만이 없다고한 박여인은 과연 가출증 환자일까? [선데이서울 71년 3월 28일호 제4권 12호 통권 제 129호]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청국장 박사 김한복 호서대 교수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청국장 박사 김한복 호서대 교수

    다음은 얼마전 인터넷사이트 ‘청국장닷컴’에 등장한 내용 중 일부다. 한 50대 아주머니는 “두 달 정도 생청국장을 먹었더니 혈당과 혈압이 떨어져 이젠 약 없이도 살 것 같다.”고 글을 올렸다. 그러자 한 20대 여성은 “청국장을 먹고 체중이 3㎏ 정도 빠졌다.”고 거들었다.30대 후반의 여성 주모씨는 “변비가 심해 20여년간 3∼4일에 한 번꼴로 변을 봤는데, 생청국장을 먹은 뒤 매일 변을 본다.”며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볍다.”고 했다. 이에 모 대학의 소화기내과 교수는 “변비가 심한 22세 여성을 대상으로 변비검사(방사선 비투과성 표지자 검사)를 시행한 결과 음식이 장을 통과하는 시간이 29시간으로 나타났으나 1주일간 생청국장을 먹게 한 뒤 재차 검사했을 때는 9시간으로 줄었다.”고 했다. 한 사업가는 “성기능 감퇴가 생청국장을 먹은 뒤 몰라보게 좋아졌다.”고 했다. 이 사이트에 드나드는 회원은 현재 1만 5000여명에 이르며 조회건수만 82만 3000여건에 달한다. ●웰빙시대 청국장은 ‘콩으로 만든 보약´ 썩은 듯한 특유의 냄새로 한때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던 청국장이 이제는 최고의 건강식으로 각광받고 있다. 전국적으로 청국장 열풍이 거세게 일고 있는 것. 최근 특허청에 따르면 청국장 관련 특허출원이 급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2000년부터 2006년까지 7년간 총 288건이 출원됐다.2004년 79건,2005년 67건 그리고 2006년 84건이 출원되어 최근 3년간 출원 건수가 근래 7년간 출원 건수의 80%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다. 특허출원의 기술 유형을 보더라도 초콜릿, 과자, 빵, 아이스크림, 요구르트, 두유 등의 간식류 등을 비롯해 스파게티, 피자, 자장면, 김치, 미용용품 등 생활 각 분야로 다양하게 번지고 있다. 청국장은 알다시피 자연식품이자 발효식품으로 우리의 대표적인 전통식품 중의 하나. 각종 영양성분이 풍부하게 들어 있고 발효에 의하여 흡수율이 높은 것으로 입증됐다. 특히 청국장에 포함된 미생물, 효소 또는 생리활성물질이 인체의 신진대사를 촉진시켜 고혈압, 당뇨, 고지혈, 복부비만 등 우리나라 4대 성인병 예방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래저래 청국장은 ‘콩으로 만든 보약’이라는 칭송과 함께 웰빙 식단의 주인공으로 자리를 굳혔다. 이쯤 해서 ‘청국장 박사’로 알려진 호서대 김한복(50) 교수를 안 만날 수 없다. 왜냐 하면 그가 바로 청국장 열풍을 일으킨 주인공이기 때문. 그는 서울대 미생물학과를 졸업한 뒤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1992년부터 본격적인 청국장의 효능을 연구했다.2003년에는 ‘청국장 다이어트 건강법’이라는 책을 내 화제가 됐고 특히 2006년 4월 고혈압 환자에 특효가 있는 ‘혈압 강하 청국장’(특허명:기호도가 향상된 혈압 강하 기능성 분말 청국장 조성물)을 처음 개발해내 신문과 방송에서 집중 조명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요즘 언론에 통 등장하지 않는다. 무슨 이유인지 궁금증이 생겼다. 하여, 그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요즘 공부에 푹 빠져 있으니 인터뷰를 사양하겠다.”고 거절했다. 뭔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거듭 설득해 허락을 받고 호서대 아산 캠퍼스로 달려갔다. 연구실에서 만났다. 근황을 물었더니 “고등학교 수학공부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면서 웃는다. 그의 책상에는 ‘이산수학’과 ‘선형대수학’ 등의 책자가 여러 권 놓여 있었다. 또 통계학과 컴퓨터프로그램과 관련된 공부도 병행하고 있단다. 까닭이 있을 터. 청국장의 효소가 인간의 유전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제대로 밝히기 위해서’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예를 들어 인간의 유전자가 3만개라고 할 때 청국장에서 나오는 미생물 효소는 수십만개에 이르기 때문에 이들이 인체세포와 어떻게 화합, 적응하느냐는 것. “다시 말해 인체 유전자 발현과의 연관성, 즉 면역학적 관계를 밝히고 신약개발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연구를 하고 있지요. 복잡한 생물정보계통을 정리하려면 수학과 통계학을 필수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청국장안 신진대사 균형물질 규명 그러면서 청국장 연구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암시했다. 지난 15년 동안 청국장이 우리 몸에 좋다는 것을 알리고 전도했다면 앞으로는 토종 청국장에서 세계 최초로 신약개발을 해낸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이에 매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그는 일본 도쿄대학과 규슈대학에서 청국장과 관련된 세미나에 참석, 이 같은 사실을 귀띔해주자 여러 교수들이 높은 관심을 갖더라고 말했다. 아울러 일본 학계지인들로부터 청국장을 먹고 살이 많이 빠졌다는 얘기도 전해들었다. 그렇다면 그의 연구는 어느 정도? “청국장이 갖고 있는 효소와 생리활성물질 등은 우리 몸에서 신진대사의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즉 청국장 효소가 몸에 들어갔을 때 인체의 과잉상태 부분을 정상으로 내리고, 또 부족한 상태는 다시 정상으로 끌어올리는 조절역할을 한다는 것. 수십만개의 효소가 3만개의 인체 유전자들과 얽히고 설키고 만나 인해전술식으로 원활하게 신진대사를 돕는다는 설명이다. 이어 그는 “우리 몸에서 생기는 각종 알레르기나 관절염 등은 면역이 지나친 반응에서 생겨난다.”면서 결국 과잉억제조절을 해주는 기능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 같은 사실을 토대로 현재 새로운 논문을 준비하고 있으며 늦어도 2,3년 안에 학술지에 발표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 이후 단계는 이를 제품화하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혈압과 당뇨 등 성인병 조절 기능을 갖춘 신약을 의미했다. “당뇨만 하더라도 신진대사의 신호체계가 어긋났을 때 발생하는 것이지요. 멀지 않은 날에 바로 그 기능을 정상화시켜주는 것을 청국장에서 추출해낼 것입니다. 이제는 과학연구를 미국식으로만 하지 말고 우리의 전통에다 새로운 첨단을 접목시키는 방법을 찾아야 할 때가 왔지요.50나이에 학생들도 싫어하는 수학공부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집에서도 청국장 만들기 쉬워요” 다음은 청국장 박사가 권하는, 일반 가정에서 쉽게 청국장으로 발효시키는 요령.(1)슈퍼마켓에서 대두 500g 한봉지를 산다.(2)콩을 물에 하룻밤동안 불리면 통통해진다. 콩이 물을 잡아먹기 때문이다.(3)불린 콩을 삶는다. 가스레인지에 얹어 두시간 정도 삶은 후 물을 뺀다.(4)보온을 해준다. 여러 방법이 있지만 스치로폴과 모기향을 피울 때 사용하는 전자매트를 이용하면 쉽다.(5)2,3일 뒤 콩색깔이 바뀌고 뜬 냄새가 나면 일단 성공이다. 하얀 콧물같이 생긴 생리활성 물질이 안생겼다고 해서 실패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6)이를 일주일동안 매일, 또는 3회정도 한두 숟가락씩 먹으면 좋다. 청국장을 복용하는 동안 식사때 현미밥과 마늘을 먹어주면 효과는 더욱 높아진다. 김 교수는 7년 전 이같은 방법으로 6개월여 만에 체중 15㎏을 감량했으며 지금도 175㎝의 키에 60㎏의 체중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집안식구들도 청국장을 좋아해 틈틈이 청국장 요리를 직접 해준다는 그는 “청국장은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우리 인체와 매우 친하려는 습성이 있으므로 꾸준히 즐기면서 먹으면 좋은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아울러 약은 당장에 효과를 볼 수 있지만 내성과 부작용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되도록 청국장과 같은 자연식을 권한다. 그의 언급대로, 늦어도 10년 안에 성인병과 난치병을 치료할 수 있는 획기적인 ‘청국장 신약’이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58년 대전 출생 ▲82년 서울대 미생물학과 졸업 ▲84년 동대학 미생물학 석사 ▲92년 한국과학기술원 분자생물학 박사 ▲97∼98년 미 스태퍼드대 미생물 및 면역학과 연구원 ▲94∼현재 호서대 생명공학과 교수 ▲2000년∼현재 청국장 먹기 운동 전개 ▲01년 캡슐형 청국장 개발 ▲03년 ‘청국장 다이어트 건강법’ 발간 ▲05∼06년 미 매사추세츠대 의과대학 객원교수 # 주요 연구내용 청국장 발효균주 개발, 청국장의 기능성(항산화, 혈압강하, 면역조절 등) 연구, 청국장 관련 논문 40여편 발표 및 특허등록 3건, 청국장이 인간세포에 미치는 영향을 마이크로어레이(DNA칩)·생물정보학 등을 이용한 신약개발 연구 준비 중.
  • 다섯번째 한글본 ‘연행록’ 발견

    다섯번째 한글본 ‘연행록’ 발견

    조선시대에 중국으로 파견된 공식 사절단의 행적을 한글로 기록한 기행문집 ‘연행록(燕行錄)’이 발견돼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의왕시는 21일 의왕문화원에서 개최하는 의왕시사 발간기념회를 통해 연행록을 공개했다. 의왕시사편찬을 위한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입수한 이 한글 연행록은 철종 때 품산(品山) 김직연(1811∼1884)이 작성한 문집으로, 국내에서 5번째로 발굴된 것이면서 현존하는 마지막 사행(使行)기록이다. 의왕시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이 연행록은 철종 9년인 1858년 10월26일부터 이듬해 3월20일까지 동지사(冬至使·조선시대에 명과 청에 정기적으로 파견한 사신)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동행한 김직연이 기록한 기행문집이다. 모두 3권으로 된 연행록은 정사(正使)인 이근우(1801∼1872)를 비롯해 310명으로 구성된 사신단이 대궐을 떠나 중국 베이징에 이르는 과정, 베이징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사행 목적을 완수하고 떠나기 전날까지의 상황, 베이징을 떠나 귀국해 복명하기까지의 과정으로 각 권을 구분했다. 강남대 경기문화연구소 김근태 박사는 “조선시대에 모두 870차례에 걸쳐 중국 명과 청에 공식 외교사절을 보냈고 이를 기록한 연행록은 100여편이 전하지만 이 중 한글본은 드물어 학술적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확인된 한글 연행록은 허목의 ‘죽천행록’(1624년 10월∼1625년 10월), 홍대용의 ‘을병연행록’(1765년 11월∼1766년 4월), 이계호의 ‘연행록’(1793년 8∼10월), 서유문의 ‘무오연행록’(1798년 10월) 등이 있다. 이번에 발굴된 연행록은 한글본과 함께 한문필사본 ‘연사록(燕 錄)´도 발견돼 이를 비교 분석하면 한글과 한문으로 구분해 기록을 남긴 의도 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의왕시는 이날 연행록 한글본 외에 일제 초기에 세금을 거둘 목적으로 만든 지적도인 ‘과세지견취도(課稅地見取圖)’도 공개했다. 수원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부고] 국쾌남 前 의원 별세

    제4대 민의원을 지낸 국쾌남 전 의원이 15일 숙환으로 별세했다.85세.1958년 제4대 민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국 전 의원은 세기상사와 세기항공 대표, 대한체조협회장, 주한 페루 명예영사 등을 지냈다. 유족은 국정본 세기상사 대표 등 4남2녀. 발인은 17일 오전 8시30분.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02)3410-6917.
  • [한국의 대표기업] (4) LG전자

    [한국의 대표기업] (4) LG전자

    한국전쟁이 끝나고 4년 뒤인 1957년 초, 구인회 락희화학 사장을 비롯해 임직원들이 사무실에 모여 있었다. 당시 기획실장이던 윤욱현씨가 “요즘 LP레코드판을 듣다가 잠을 설치고 있다.”며 이야기를 꺼냈다. 구 사장은 “우리가 그거 만들면 안 되는 거요.”라고 물었다.“기술 수준이 낮다”는 대답에 구 사장은 “기술이 없으면 외국가서 기술 배워오고, 안 되면 외국 기술자 초빙하면 될 것 아니오. 전자공업 해봅시다.”하고 밀어붙였다. 이렇게 해서 이듬해인 1958년 10월 만들어진 회사가 지금의 LG전자다. ●첫 국산 라디오·흑백TV·에어컨 만들어 LG전자의 역사는 한국 전자산업의 산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1959년 국산 라디오 생산을 시작으로 냉장고(65년), 흑백TV(66년), 에어컨(68년), 세탁기(69년) 등을 선보였다. 이들 제품 모두 ‘국내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은 물론이다. 1995년에는 금성사에서 LG전자로 회사이름을 바꿨다. 현재 LG전자는 ▲휴대전화의 모바일 커뮤니케이션(MC) ▲냉장고·에어컨 등 가전인 디지털 어플라이언스(DA) ▲모니터·TV·플라스마 디스플레이 패널(PDP) 등 디지털 디스플레이(DD) ▲오디오·VCR·노트북 PC 등 디지털 미디어(DM) 4개 부문에서 연간 20조원 이상의 매출을 내고 있다. LG전자의 매출액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에는 9조 8500억원이었으나 지난해에는 23조 1700억원으로 늘었다. 또 58년 창업 당시 300명이던 직원 수도 해외 현지법인을 포함해 8만 2000여명으로 급증했다. LG전자는 2010년까지 전자ㆍ정보통신 업계에서 글로벌 ‘톱3’로 진입한다는 중장기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매출뿐 아니라 시장점유율, 수익성, 성장률, 주주가치 등을 모두 포함해 글로벌 톱3가 되겠다는 것이다. 올 초 혁신경영 전도사로 불리는 남용 부회장이 사령탑을 맡으면서 가시적 성과도 보이고 있다. 휴대전화에선 초콜릿폰·샤인폰 등 잇따라 히트작을 내놓고 있다. 브랜드 이미지도 크게 높아졌다. 양문형 냉장고, 스팀 드럼세탁기 등도 호평을 받고 있다. ●에너지 R&D에 3년간 2200억 투자 LG전자는 중점 육성사업인 휴대전화, 디지털 TV, 디스플레이, 시스템 에어컨 등과 함께 새로운 성장엔진을 발굴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일단 에너지와 내비게이션으로 방향을 잡았다. 지열 등을 이용한 ‘에너지 솔루션 사업’과 내비게이션 등 텔레매틱스에 엔터테인먼트 기능을 합친 ‘카인포테인먼트(car infotainment)’를 신성장동력으로 육성 중이다. 에너지 솔루션 사업은 에어컨사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최근 지열, 천연가스, 바이오에너지 등을 이용한 ‘하이브리드 에너지 시스템’과 냉난방 등 에너지시스템의 제품개발·제안·설계·시공·관리까지 책임지는 ‘에너지 솔루션’ 사업전략을 발표하기도 했다. 시장전망도 밝다. 업계는 지열·풍력·태양력 등 국내 재생에너지 시장규모가 올해 2300억원에서 2010년 4200억원으로 커질 것으로 전망한다. 올해 2800명인 에너지 사업 관련 연구인력도 2010년까지 4000명으로 늘릴 계획이다. 앞으로 3년간 기술개발을 위해 2200억원을 투자할 예정이다.LG전자 DA사업본부장 이영하 사장은 “에어컨 기술력과 에너지 솔루션을 연계한 신사업으로 에너지문제와 친환경 이슈에 대응하는 것은 물론 새 수익원을 창출하는 신성장 동력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다른 성장동력인 카인포테인먼트사업을 위해 현대자동차와 자동차 오디오는 물론 내비게이션 등 텔레매틱스 제품의 기획·설계·개발까지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단순히 길만 찾아주는 수준이 아니라 차에서도 집에서처럼 홈엔터테인먼트를 즐길 수 있는 제품을 내놓는다는 전략이다. LG전자는 2002년부터 그랜저 등 현대·기아자동차 주요 차량에 텔레매틱스 단말기를 공급하고 있다. 또 지난해 DMB복합 내비게이션 제품을 출시하는 등 휴대용 내비게이션 단말기 시장도 적극 공략하고 있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LG전자 세계 톱3 되려면 요즘 LG전자 임직원들의 표정이 무척 밝다. 한때 주당 5만원선까지 떨어졌던 주가가 ‘마의 벽’으로 불리던 10만원을 넘었기 때문이다. 가전·디스플레이·휴대전화 등 모든 사업부문의 실적이 골고루 호전되면서 주가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LG전자가 이같은 기세를 이어나가려면 보완할 점이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PDP패널 등 디스플레이 부문은 여전히 LG전자의 발목을 잡고 있다. 물론 올해 성적은 나쁘지 않다. 앞으로 적자폭이 점차 줄어들 것이라는 긍정적 전망도 나온다. 문제는 내년이다. 권성률 하나대투증권 연구원은 “계절적 비수기인 내년 상반기에 어떤 실적을 보일 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이승혁 우리투자증권 연구원은 “마케팅 특히 퀴담처럼 제품에 별도의 이름을 붙이는 서브 브랜드 마케팅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실적 상승의 중심축인 휴대전화부문도 물량이 부족하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김익상 CJ투자증권 연구원은 “LG전자가 연속적으로 휴대전화에서 히트제품을 내놓는 것은 긍정적이지만 분기당 생산량인 2100만대로는 부족하다.”면서 “적어도 분기당 3000만대가 넘어야 저가 제품에서도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말했다. 권 연구원은 “LG전자가 내년에 9300만대의 휴대전화를 생산할 것으로 예상한다.”면서 “생산물량 1억대의 고비를 어떻게 넘느냐가 관건”이라고 지적했다. 생산량이 1억대가 넘으면 규모의 경제로 수익성이 좋아질 수 있다. 하지만 무리해서 생산량을 늘리면 수익성이 희생될 수밖에 없다. 영업이익을 유지하면서 생산량을 끌어올리는 것이 LG전자의 당면과제인 셈이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남용號 출범 11개월 평가 몸값만 7조원이 늘었다. 지난해 8조원이던 LG전자의 시가총액은 지난 7일 사상 최대인 15조원을 돌파했다. 주가도 처음으로 10만원대를 넘어섰다. 올 1월2일 LG전자의 주가는 5만 7500원이었다.1년도 안돼 89%가 올랐다. 같은 기간 코스피 지수 상승률(44%)의 두 배다. 이같은 변화의 중심에는 전략의 귀재, 경영혁신전도사, 적자기업 회생의 마술사 등 다양한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남용 LG전자 부회장이 있다. 업계에서는 주가상승의 이유를 “남 부회장 체제가 들어서면서 수익성 개선과 원가절감 노력 등이 실적 개선으로 이어진 덕분”이라고 분석했다. 남 부회장은 LG전자의 체질을 튼튼하게 변화시키고 있다. 무엇보다 회사의 성장 엔진인 휴대전화 부문의 실적이 크게 좋아졌다. 지난 1분기 휴대전화 부문은 6.6%의 영업이익률(본사 기준)을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는 적자였다.LG전자 관계자는 “남 부회장은 단순히 손익계산서상의 비용을 줄이는 1차적인 접근이 아니라 건물, 재고, 부채 등 모든 자산으로 최대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종합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 부회장의 경영의 핵심에는 ‘고객’이 있다. 그는 ‘펀앤드펀(Fun & Fun)’이론을 강조한다.“임직원이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는 것뿐 아니라 고객에게 즐거움을 주자.”는 게 펀앤드펀 이론이다. 남 부회장은 올해 첫 임원회의에서 “각 지역의 고객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반영해 그 지역에 맞는 마케팅 전략을 고안하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고객의 즐거움을 위해 공급자 위주의 제품별 마케팅 조직을 수요자 위주 지역별 마케팅 조직으로 재편했다.LG전자는 경영회의에 앞서 15분간 고객과 상담원의 통화내용을 듣고 시작한다. 고객의 불만에 대한 개선사항을 남 부회장이 직접 점검하는 것은 물론이다. 제품에 문제가 있다면 해당 제품의 최고 수장인 사업본부장이 직접 보고해야 한다. 해외 출장을 갈 때마다 현지 일반 가정을 방문해 LG제품의 평가를 직접 듣기도 한다. 제품 설명서나 안내 책자에 나오는 외국어와 어려운 용어를 쉬운 표현으로 바꾼 것도 그의 ‘고객 중심’ 경영실천의 일환이다. 남 부회장은 외부에서 30ㆍ40대 젊은 임원을 대거 영입했다. 올해 임원인사에서는 3명의 외국인 임원을 발탁하기도 했다. 남 부회장은 마케팅·구매전문가 등 외국계 인재를 계속 영입하겠다고 밝혔다.“한 명의 글로벌 인재가 1300명의 마케팅 인력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는 남용식 ‘메기론’의 산물이다. 메기를 넣어둔 논의 미꾸라지가 더 튼튼하게 자라는 것처럼 외부 인재 영입으로 조직에 긴장감을 불어넣고 선진 마케팅 기법 등을 받아들이는 계기로 삼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 부회장의 이같은 과감한 체질개선은 조직 내 ‘개혁 피로감’을 불러오기도 했다. 외부인재 영입은 경쟁력 확보와 선진 마케팅 기법 전파라는 긍정적 효과뿐만 아니라 ‘인화의 LG’에 균열음을 만들어냈다. 내년부터 전면 시행될 영어 공용화나 현재 시행 중인 낭비제거 운동 등에 대한 ‘스트레스’도 적지 않다.“하긴 해야 하는데 생각보다 힘들다.”는 목소리가 심심찮게 들린다. 한 임원은 “개혁에는 언제나 진통이 따르게 마련”이라며 “성장해가는 과정으로 봐달라.”고 주문했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석유 지정학이 파혜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

    미국의 엑손, 모빌, 셰브런, 텍사코, 걸프와 영국계 브리티시석유, 로열더치셸은 이른바 ‘세븐 시스터스’로 불리는 7대 석유 메이저 기업이다. 이들은 1928년 스코틀랜드의 아크너리에서 제3세계 석유자원을 나누어 갖는 이른바 ‘현상유지 협정’을 맺는다. 이후 7개 석유 메이저는 전 세계 석유의 채굴과 정유, 판매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행사한다. 두 나라의 석유 재벌이 세계 석유 시장을 마음대로 주무른 것인데, 배후에 두 나라 정부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 은밀한 카르텔은 지배력을 깨뜨리려는 위협에는 가차없이 응징을 가하는데 이르렀다. ●석유자주화 앞선 伊 마테이 의문의 죽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는 석유 메이저들로부터 석유를 수입하느라 달러 보유고가 고갈되어 가는 것이 고민이었다.1945년 국영 석유회사의 책임자로 임명된 엔리코 마테이는 자생적 에너지 자원을 만드는데 착수했다. 마테이는 적극적으로 탐사에 나서 석유 매장지와 가스전을 잇따라 찾아냈다. 천연가스를 산업도시인 밀라노와 토리노의 산업도시로 운반하고자 4000㎞에 이르는 가스관을 건설하는 한편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어 낮은 가격에 석유를 공급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석유 메이저들에 마테이가 본격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은 1957년이다. 마테이가 석유 메이저들이 아직 ‘배분’하지 않은 이란 지역의 2만 3000㎢를 시추하고 개발할 수 있는 25년 동안의 독점권을 갖는 내용의 협정을 체결한 것이다. 미국과 영국 정부도 석유 메이저들과 같은 생각이었는데, 그냥 놔둔다면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 석유 질서’를 완전히 뒤엎을 판이었기 때문이다. 마테이는 1958년에는 소련과 원유를 구매하는 협정을 맺는다. 대금은 현금이 아니라 송유관을 인도하는 형식의 현물로 지불하기로 했다. 소련은 볼가-우랄산맥에서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헝가리로 이어지는 거대한 송유관망을 건설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막대한 물량의 소련 석유가 동유럽을 거쳐 서유럽으로 공급되는 것을 의미한다. 1962년 9월 마테이가 건설한 제철소가 소련의 송유관 공사에 투입할 대구경 파이프를 생산해 내기 시작했다. 불과 한달이 지난 10월27일, 마테이의 전용비행기는 시칠리아를 이륙하여 밀라노로 가던 도중 공중에서 폭발하고 만다. 한창 정력적으로 일하던 56세의 마테이를 포함한 세 사람의 탑승자가 모두 사망한 것이다. 당시 로마에 주재하던 미 중앙정보국(CIA) 책임자 토머스 카라메신스는 그 직후 조용히 로마를 떠났다. 미국 정부는 ‘마테이 암살’과 관련한 카라메신스의 보고서를 아직 공개하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국가 안보에 관한 사안’이라고만 밝히고 있다. ●20세기 전쟁들 석유에서 비롯됐다 ‘석유 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윌리엄 엥달 지음, 서미석 옮김, 길 펴냄)은 20세기 역사를 ‘석유의 눈’으로 본다.‘영국과 미국의 세계 지배체제와 그 메커니즘’이라는 부제가 일러 주듯 미국과 영국이 지난 100년 동안 ‘석유 패권’를 통하여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지 설명한다. 지은이는 30년 동안 석유 지정학을 집요하게 연구한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비주류 경제학자. 그는 20세기에 빚어진 숱한 전쟁들, 예를 들어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최근의 이라크전쟁은 물론 코소보 사태, 아프리카 내전,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전쟁이 모두 석유에서 비롯되었다고 단언한다. 지은이는 석유 메이저들이 장악한 유전들이 바닥을 드러낼 조짐을 보이자, 워싱턴과 석유 메이저들은 자신들의 요구에 따른다고는 해도 산유국 정권들에 한가롭게 의존만 할 수는 없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들의 계획은 세계 석유 자산을 직접 통제하는 것이고, 그들은 그것을 ‘중동지역 민주주의의 촉진’이라고 부르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은이가 바라 보는 이라크 전쟁의 실체이다.1만 8000원.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빛의 화가’ 방혜자 재불 여류작가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빛의 화가’ 방혜자 재불 여류작가

    ‘마음을 비우고, 우주를 향해 걸어갑니다. 텅빈 가운데, 어무도 없는 어두운 길’ 빛을 좇는 여정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것도 태초의 빛이다. 어쩌면 인간은 우주의 깊디깊은 어둠에서 한 줄기의 빛에 의해 태어났을 게다. 문득 이런 상상을 해본다. 동 터오르는 어느 새벽녘, 누렁이 소의 등에 편안하게 올라타고 그 빛을 향해 뒤뚱뒤뚱 걸어가는 모습을…. ●고암 이응로 선생과의 인연 1958년 어느 날이었다. 고암(顧庵) 이응로 선생이 유럽으로 떠나기 전 미술공부를 하는 여대생에게 ‘소를 끌고 가는 사람’이라는 그림을 그려줬다. 한 손으로는 고삐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채찍을 든, 아주 힘이 넘치는 그림이었다. 고암이 장래가 촉망되는 미술학도에게 소처럼 꾸준하면서도 묵묵히 그림에 정진하라는 뜻을 담았다. 얼마 후 그 여대생은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고 ‘국비장학생 1호’라는 명함과 함께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이곳에서 다시 고암을 만났음은 물론이다. 그로부터 1989년 고암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늘 한 가족처럼 지내며 예술적 스승으로 따랐다. 특별한 인연은 또 있다.‘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유명한 수화(樹話) 김환기(1974년 작고) 선생과도 자주 만나 미술적 영감을 얻곤 했다. 요즘들어 그의 작품세계가 수화의 후기작과 다소 연결시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빛의 화가’로 잘 알려진 방혜자(71) 재불화가.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지칠 줄 모르는 정열로, 앞만 보고 무던히 걸어가는 소처럼 생명의 빛을 좇는다. 올해만 해도 파리와 브뤼셀 등에서 4개월 동안 개인전을 가진 데 이어 최근에는 서울 환기미술관(종로구 부암동)에서 ‘방혜자-빛의 숨결’이라는 제목으로 고국의 팬들을 위해 한 달반 동안 개인전을 가졌다. 한국에서의 전시는 2년만이다. 이번 전시에는 앞·뒷면을 같이 쓸 수 있는 무직천 위에 석채, 흙 등 천연 안료로 그린 ‘빛의 회화’를 선보여 관람객들을 감동시켰다. 평론가들도 “무직천의 앞과 뒷면에 천연 안료를 스며들도록 하는 기법으로 빛의 효과를 함축적이면서 극대화했다.”고 표현했다. 방 화백은 1961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한 뒤, 파리 국립미술학교와 파리 국립응용미술학교 등에서 벽화와 색유리화 수업을 받았다. 지금까지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무려 110여 차례에 걸쳐 개인전과 단체전을 가졌다. ●후불탱화 그려 ‘빛의 구도자´로 불려 특히 그는 내면의 세계를 ‘빛’으로 표현해내는 특유의 기법으로 프랑스, 독일, 스위스 등지에서 주목되는 현대미술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비평가 질베르 라스코는 “우주를 경탄하는 그 시선은 우리가 무궁무진한 아름다움을 감상하도록 도모한다. 그녀는 또 우주의 아름다움, 조화, 다양함을 증언하기 위해 깨어 있다.”라고 평가했다. 시인 샤를 줄리에 등 프랑스 여러 현대 시인들과 시화집을 내며 대중적 인기까지 높였다. 그는 10년 전 빛 그림으로 파리교외의 길상사, 그리고 서울 보각사와 개화사의 후불탱화를 조성하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빛의 구도자’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시차 내한한 그에게 전화를 걸어 인터뷰 요청을 했다. 약간 바쁜 모양이다. 그래서 전시가 끝난 직후인 지난달 29일 경기도 광주시 영은미술관에서 만났다.10만평 부지에 지난 2000년 개관한 영은미술관은 대유문화재단에서 운영하며 다른 미술관과는 달리 작가들을 위한 창작스튜디오 공간까지 마련했다. 방 화백이 한국체류시에는 주로 여기에 머문다. 일흔 넘은 나이로는 정말 믿기지 않을 만큼 까만 머리카락이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키는 작고 왜소했으며, 목소리는 물방울이 천천히 떨어지듯 또렷하고 청아하게 들려왔다. 이런 체격으로 우주의 빛을 빚어내는 힘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방 화백은 하루 일과를 명상에서 시작한다. 정신을 집중해 내면의 빛을 찾아내는 일이고 또 작업의 원동력이라고 했다. 또한 자라면서 일제 강점기와 6·25 등 시대적 고통을 견뎌냈던 상흔 또한 ‘여정의 힘’에 큰 보탬을 주고 있을 터이다. 그의 뒤를 따라 작업실로 자리를 옮겼다. 가을 햇살이 창 너머로 스며들면서 작업의 흔적, 즉 ‘빛의 숨결’로 가득했다. 자리에 앉자 도쿄에서 전시가 있다는 말을 먼저 꺼냈다. 그동안 유럽 전시는 많았지만 일본 전시는 처음이라고 했다. 여러번 전시 요청도 많이 왔지만 그때마다 거절했단다. 일제 때 외삼촌과 할아버지가 심한 고문을 받았던 일, 초등학교 시절 우리 말을 썼다가 혼났던 일, 태평양 전쟁을 핑계로 온갖 훈련에 동원됐던 일 등등 당시의 악몽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제가 일생동안 가장 고심해온 것은 어떻게 하면 예술을 통해 평화에 이르는 길을 제시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죠. 세상에 환한 빛을 고루 비추는 것이지요.” ●15일부터 日서 첫 전시회 이러한 예술가적 사명이 그동안 닫혔던 문을 열게 했다. 예술의 경지에서 일본행을 결심했다는 것. 전시는 오는 15일부터 12월1일까지 도쿄시내 긴자(銀座)미술관에서 열리며 40여점이 전시된다. 그는 이어 “인간은 빛으로부터 왔고, 빛에서 살고, 빛으로 돌아가는 존재가 아니냐.”고 반문한 뒤, 빛은 생명의 원초적인 에너지 그 자체라고 강조했다. 또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내면에 빛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 이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라나게 도와야 한다. 이 또한 예술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거듭 역설했다. 빛과의 인연을 묻자 “어릴 적 시냇물 속 조약돌에 비친 햇빛을 어떻게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를 늘 고민했다. 이후 빛에 감탄하고 빛의 존재를 느끼면서 살았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특히 6·25 때 얻은 병으로 죽기 직전까지 갔을 무렵, 수덕사 노스님에게서 전해들은 자연과 생명에 대한 깊은 얘기도 자연스레 ‘빛의 숨결’의 바탕이 됐음은 물론이다. 방 화백은 시인인 외사촌 오빠(김돈식·대표시집 석화촌)의 영향을 받아 어렸을 적엔 그림보다 시를 무척 좋아했다. 학창시절에는 랭보와 보들레르 같은 프랑스 시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러던 경기여고 시절 김창억 미술선생의 권유로 미술반에서 활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파리에서는 고암과 수화를 만나면서 작품세계의 깊이를 한층 더했다. “김환기 선생과는 대학시절 처음 만났고 뉴욕에서도 여러번 만났지요. 고암은 동양미술학교를 세우는 등 정말 한 세기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하는 훌륭한 분이지요. 파리에 있을 때는 저를 친딸처럼 아껴주셨지요.” 방 화백의 화실은 파리14구역에 위치해 있다. 인근 자택에서 매일 아침 걸어서 오고간다. 남편은 프랑스 한국학연구소 교수로 있던 알렉상드로 기예모즈. 피레네 인근에 등산을 갔다가 인연이 됐다. 남편은 한국의 무속까지 연구할 만큼 방 화백보다 더 한국을 좋아한다. 슬하에 건축가인 아들과 딸(승마학교 조교)을 두었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태양계 생성의 비밀“혜성에게 물어봐”

    태양계 생성의 비밀“혜성에게 물어봐”

    이것에 대한 첫 번째 기록은 BC 467년 중국 주나라 문서에서 발견됐고, 사람들은 재앙의 전조로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지구의 파편’이라고 주장했고, 르네상스 시대까지 정설로 여겨졌다. 중세 이후 과학자들은 이것이 타원 또는 포물선 궤도를 가지고 돈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지금은 먼지와 얼음으로 구성된 당당한 태양계의 구성원으로 인정받고 있다. 현재까지 1600여개가 발견된 이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영국의 과학자 ‘핼리’가 1705년에 1758년의 출현을 예측해 그의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지구 충돌 가능성 배제 못해 순수 우리말로 ‘살별’이라 불리는 혜성(彗星)은 영화 속에서 지구와 충돌해 인류를 멸망시키는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실제로 혜성은 공룡 멸종의 유력한 원인으로 꼽히고 있으며, 과학자들도 궤도가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혜성이 언젠가 지구와 충돌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94년에는 슈메이커-레비9 혜성이 목성에 충돌해 상상속의 일이 아님을 증명하기도 했다. 혜성의 핵은 얼음과 먼지로 구성돼 있으며 크기는 수㎞에서 수십㎞정도다. 대부분 태양계 외곽의 오르트 구름대에서 발생하며 평소에는 다른 행성들처럼 태양을 공전하지만, 어떤 이유로 긴 타원의 궤도를 갖게되고 태양 근처로 다가오면 표면의 얼음과 먼지가 증발하면서 꼬리가 생기게 된다. 대부분의 혜성은 한 번 태양에 접근했다가 멀리 사라지는 수천년 이상의 공전주기를 가진다. 그러나 대형 행성인 목성이나 토성 등의 인력에 잡히면 핼리 혜성(76년 주기)이나 엥케 혜성(3.3년 주기)처럼 비교적 짧은 주기를 갖기도 한다. 지구에 가깝게 접근하거나, 매우 밝은 혜성이 통과할 때는 지구상에서 육안으로 관찰할 수도 있다. 쌀쌀해진 한국의 가을 밤하늘에도 맨눈으로 보이는 혜성이 나타났다. 한국천문연구원은 최근 ‘p17홈스(Homles)’ 혜성이 맨눈으로 관측이 가능한 2등급까지 밝아졌다며 사진을 공개했다.1892년 영국의 에드윈 홈스가 처음 발견한 홈스 혜성은 7.1년 주기로 태양을 돌며 현재 북동쪽 하늘에서 카시오페이아자리 왼쪽에서 관측되고 있다. 내년 3월까지인 이번 방문을 놓치면, 다시 보기 위해 7년을 기다려야 한다. ●영화 속 딥 임팩트 실제로 재현 혜성은 최초 발견자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관례다. 동시 발견자의 경우 3명까지 붙일 수 있다. 지난 95년 4000년만에 지구를 찾은 헤일-밥 혜성의 이름이 발견자인 미국의 앨런 헤일과 토머스 밥에서 비롯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다른 천체들보다 지구에 가깝게 접근하지만, 한번 기회를 놓치면 대부분 평생 다시 볼 수 없기 때문에 혜성은 과학자들의 실험 대상으로 인기가 높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혜성실험으로는 2005년 미 항공우주국(NASA)이 시도한 ‘딥 임팩트’ 프로젝트를 들 수 있다. 영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이 프로젝트에서 NASA는 딥 임팩트 탐사선으로부터 세탁기 크기의 금속탄환을 발사해 혜성 템펠 1호에 충돌시켰다. 시속 3만 7100㎞의 속도로 돌진하던 360㎏ 무게의 구리 통은 충돌과 동시에 파편과 가스가 섞인 수천㎞의 불기둥을 만들어냈다. 당시의 파괴력은 TNT 폭탄 4.5t을 한꺼번에 터뜨린 것과 맞먹는 위력으로 축구장 넓이,14층 빌딩 높이의 구멍을 만들 수 있는 수준이었다. 딥 임펙트 프로젝트에는 250여명의 과학자와 3억 3300만달러의 비용이 소요됐다. 그러나 NASA가 이 실험을 시행한 이유는 흔히 생각하듯 ‘지구 멸망 대비’가 아니었다.NASA의 목적은 이 실험을 통해 지구로 접근하는 혜성에 대한 정확한 물리적인 계산 및 그 충격으로 인해 발생되는 물리적인 반응과 충돌 이후 분출되는 성분을 알아냄으로써 태양계 생성의 실마리를 찾고자 하는 것이었다. 딥 임팩트 탐사선은 무려 6개월 동안 4억 3100㎞를 날아가서 시속 3만㎞로 움직이는 혜성을 정확히 맞히는 장관을 만들어냈다. 과학의 발전이 홍수, 기근, 전염병의 원인으로 지목되던 혜성을 우주쇼의 주인공으로 만들어낸 셈이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광화문 복원 진두지휘 신응수 대목장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광화문 복원 진두지휘 신응수 대목장

    ‘어라, 광화문이 사라졌네!’‘그럼, 언제 다시 나타나지?’ 서울 도심의 한복판, 세종로에 왔다가 광화문이 없어진 것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출퇴근하는 사람들도 이곳을 지날 때면 저절로 고개를 돌려 깜쪽같이 사라진 광화문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한번쯤 해봤을 터이다. 지난 9월28일자 서울신문에는 훈훈한 기사가 단독보도돼 눈길을 끌었다. 광화문 복원을 총지휘할 도편수 자리를 놓고 벌이던 전통 건축분야의 양대 산맥의 한판 승부에 대한 내용이다. 형님뻘인 전흥수(70) 대목장이 신응수(66) 대목장에게 도편수 자리를 아름답게 양보했다는 것이다. 전 대목장은 추석 연휴 직전에 신 대목장과 만나 “우리끼리 자리를 놓고 다투는 것은 누워서 침뱉기가 아니냐.”면서 물러서겠다는 뜻을 알렸다. 신 대목장은 전 대목장의 어려운 결정에 고마움을 표시했음은 물론이다. 특히 전 대목장은 “그 사람(신 대목장)이라면 광화문 복원을 제대로 해낼 것”이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로써 광화문 복원공사의 도편수(목수 우두머리) 자리는 신 대목장이 맡게 됐다. ●18년간 경복궁 복원사업 이끌어 신 대목장은 1991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보유자로 지정됐으며 지금까지 18년동안 경복궁 복원사업을 대부분 진두지휘해 왔다. 또한 앞으로 2년동안 광화문 복원까지 맡게 됐으니 천년궁궐 재현의 대역사는 사실상 그의 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서울 경복궁 함화당 복원공사 현장에서 신 대목장을 만났다. 명함을 내밀었더니 돌아온 명함이 특이하다. 근정전 사진 위에 ‘성재(誠齋) 申鷹秀’라고 적혀 있었다. 하늘을 나는 매응(鷹)? 의아해 하자 “향나무 숲에서 매가 날아오르는 어머님 태몽 때문에 매응자로 했고 성재는 경복궁 복원사업 초창기때 한 서예가 선생이 집을 정성스레 잘 지으라며 지어준 호”라고 설명했다. 먼저 전 대목장과 만남에 대한 얘기를 슬쩍 꺼냈더니 “그 분과는 친하게 지내고 있다.(전 대목장은)기능인들이 화합이 잘 안되는데 그러면 되겠느냐고 하셨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어 “광화문 복원공사는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면서 산림청과 문화재청의 도움을 받아 국유림과 사유림 등에서 적합한 목재를 고르고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아마 동해안쪽에 자라고 있는 소나무(적송)가 선택될 것 같으며 천년궁궐을 짓기 위해서는 좋은 나무가 필수조건”이라고 강조했다. 대들보인 경우 소나무 수령이 300∼400년정도 돼야 한다는 그는 “일제때 좋은 나무들이 마구 남벌돼 나무 구하기가 여간 쉽지 않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높이 18m, 직경 70㎝이상의 적송을 찾기가 녹록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또 “올 겨울부터 목수일이 시작되기 때문에 그 이전에 나무를 구입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궁궐 복원 공사에는 뭐니뭐니해도 철저한 고증이 가장 중요하다면서 광화문 복원공사에는 우리나라 최고의 목수 30여명이 투입된다고 밝혔다. 현재 경복궁 복원공사 사업은 모두 5단계 중 4단계를 마친 상태. 이 가운데 광화문 복원사업이 최종단계로 경복궁 재현의 화룡점정인 셈이다. 그가 맡은 경복궁 복원사업으로는 현재 진행 중인 함화당을 비롯해 ‘침전지역’‘동궁지역’‘태원전 권역’‘건청궁’‘근정전’ 등이다. 광화문의 경우 본문 외에 군사방, 수문장청, 영군직소 등이 포함된다.2009년까지 목재만 450만재, 기와 150만장, 비용 1789억원이 투입되며 전각 등 총 93동이 복원되는 대단위 공사다. 신 대목장 개인적으로는 꼬박 20년을 경복궁에서 출퇴근하게 되는데 그 대미를 광화문으로 장식하게 된다. 그는 “문무백관의 조회와 국가의식을 거행했던 근정전은 우리 고건축의 백미”라고 극찬하면서 해체·복원하는 과정에서 140년전의 건축기법을 완전히 이해하게 됐고 또한 광화문도 이와 비슷한 건축기법이라고 귀띔했다. 근정전 복원은 2000년부터 3년 10개월 걸렸다. “광화문 복원공사는 예정된 2009년 말 이전에 끝낼 수 있습니다. 목조는 잘 관리만 하면 천년수명이기 때문에 광화문 또한 이제 새로운 천년을 시작한다고 볼 수 있지요.” 그는 중졸학력으로 당대 최고의 목수자리까지 올랐다. 올해로 꼭 50년째 목수인생을 맞고 있는 그는 1942년 충북 청원군 오창면에서 9남매 중 여덟째로 태어났다. 병천중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서울로 올라와 신강수 한테 망치질을 배우며 일찍 밥벌이 전선에 뛰어들었다. 말 그대로 먹고 살 수 있는 기술 한가지만 배우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던 것. 그러다보니 목수들의 양말 세탁 등 온갖 심부름과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대들보용은 소나무 수령 300~400년 돼야 그러던 1960년 명인 이광규의 문하생으로 들어간다. 이때 봉원사 요사 및 종각 공사에 참여했다. 이듬해에는 스승의 스승 조원재를 만나 남대문 중수 공사에 동참했다. 1965년 군복무를 마친 후에는 오대산 월정사 대웅전, 진주성 촉성문, 서울 숭인동 청룡사 대웅전, 용인 호암장 신축 공사 등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대목장의 길로 접어들었다. 1975년 수원성 장안문 복원공사 때에는 도편수로 독립하면서 1983년까지 밀양군 무안면 홍제사 법당, 서울 삼청동 총리공간, 서울 필동 한국의 집, 경주 안압지 1∼3건물, 단양 구인사 사천왕문, 부여 삼충사 영당 및 내외삼문, 울산 동축사 대웅전 및 산신각, 유성 현충원 현충문, 부여 무량사 극락전 보수 공사 등을 맡으면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다. ●중졸 학력으로 50년째 목수… 당대 최고 도편수 자리에 1982년 청와대 영빈관인 상춘재를 신축할 때 도편수를 맡았다. 한겨울에 30여명의 목수들과 함께 새벽 여섯시에 청와대로 출근,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부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웠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상춘재는 4개월 만에 완공됐다. 이와 관련 “아마 가장 빨리 지은 한옥이 아니겠느냐.”고 술회했다. 이 같은 인연이 있어서인지 1989년 청와대 대통령관저의 신축공사까지 맡게 된다. 그는 평소 “좋은 적송을 구하는 사람이 좋은 건축을 하는 것”이라고 늘 주장해왔다.1980년대 초반 강원도의 적송 많은 산 50만 평이 매물로 나오자 주저 없이 사들여 좋은 재료를 현장에 공급하면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바탕이 된다. 대한민국 최고의 명품인 경복궁 보수공사의 도편수가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경복궁 복원공사가 다 마무리되면 평소의 꿈인 우리나라 전통건축 박물관을 지을 예정이다. 슬하에 2남3녀를 두었으며 큰아들이 목재소를 운영하면서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다. 신 대목장은 우리나라 고건축의 대가인 조원재, 이광규로 이어지는 대목장 계보를 잇고 있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그가 걸어온 길 ▲1942년 충북 청원 출생 ▲58년 충남 병천중학교 졸업 ▲58∼60년 신강수, 박광석 문하에서 한옥 주택 신축 공사 ▲75∼78년 수원성곽 장안물, 창용문 복원 공사(도편수 신응수) ▲79년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 신축 공사 ▲82∼83년 청와대 상춘재 신축 공사 ▲88년 경복궁 만춘전 복원 공사 ▲89∼90년 청와대 대통령관저 신축 공사 ▲91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 74호 대목장 보유자 ▲91∼95년 경복궁 침전지역 복원 공사(강녕전, 교태전, 경성전, 연생전, 웅지당, 연길당, 함원전, 흠경각, 동서행각, 건순각, 양의문, 함흥각 등) ▲96∼98년 경복궁 동궁지역 자선당, 비현각, 회랑 복원 공사 ▲97∼99년 경복궁 자경전, 창덕궁 돈화문 보수 공사, 경복궁 경회루 보수 공사 ▲97∼2001년 경복궁 흥례문 권역 복원 공사(흥례문, 유화문 및 화랑) ▲2000∼04년 창덕궁 규장각 옥당, 약방, 영의사, 검서청, 양지당, 봉모당 복원 공사, 경복궁 근정전 보수공사 ▲04∼현재 경복궁 건청궁(장안당, 곤녕합, 복수당 外 13동) 복원공사 # 수상 만해예술상 수상(99년), 옥관문화훈장(2002년) 등 # 주요 저서 ‘천년 궁궐을 짓는다’‘목수’‘경복궁 근정전’ 등
  • [MLB] 美프로야구 포스트시즌 개막…이번에 저주 풀릴까

    ‘이번에 저주 풀리나.’ 미국과 일본 프로야구의 ‘가을 잔치’가 각 4일과 8일 시작된다. 저주를 받아 오랜 기간 정상을 밟지 못해 목마른 팀들이 올시즌엔 챔피언 반지를 끼며 이를 풀지 관심이 쏠린다. ●시카고 컵스 ‘염소의 저주´ 한 맺힌 저주 가운데 가장 묵은 것은 시카고 컵스를 울리는 ‘염소의 저주’. 컵스는 1907∼1908년 2년 연속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지만 이후 98년 동안 무관으로 지냈다.1945년 술 취한 팬이 염소를 몰고 구장에 들어가려다 거부당하자 “다시는 우승하지 못할 것”이라고 저주를 퍼부은 이후 아예 월드시리즈에 오르지 못했다. 컵스는 4일 올시즌 2승4패로 열세인 애리조나와 디비전시리즈를 벌인다. 1948년 이후 58년 동안 월드시리즈 우승컵을 품지 못한 클리블랜드는 ‘로키 콜라비토의 저주’에 시달린다. 클리블랜드는 1960년 전년도 홈런왕 로키 콜라비토를 디트로이트의 타격왕 하비 쿤과 황당한 트레이드를 한 이후 호사가들은 이를 ‘로키 콜라비토의 저주’라고 불렀다. 클리블랜드는 디비전시리즈에서 시즌 6전 전패의 수모를 안긴 뉴욕 양키스와 5일부터 격돌하나, 올시즌도 저주를 풀기 힘들 전망이다. 앞서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1919년 돈을 받고 일부러 지는 바람에 내린 ‘블랙삭스 스캔들의 저주’를 2005년 1918년 우승 이후 88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풀었다. 보스턴도 2004년 양키스에 3연패 뒤 기적의 4연승으로 ‘밤비노의 저주’를 86년 만에 날렸다. ●日 한신 ‘켄터키 프라이드의 저주’ 일본프로야구에선 센트럴리그의 한신이 ‘켄터키 프라이드의 저주’에 눈물을 뿌렸다.1985년 일본시리즈 우승 때 광팬들이 패스트푸드 체인점 켄터키 프라이드 가게 앞의 샌더스 대령의 모형을 훔쳐 강에 던진 이후 저주가 시작됐다. 이후 한신은 2003년 다이에와 맞붙어 3-4로 무릎을 꿇은 게 유일할 정도로 일본시리즈에 얼굴을 내밀지 못했다. 한신은 올시즌 플레이오프제가 도입된 덕에 리그 3위에 불구하고 22년 만에 일본시리즈 우승컵을 안을 기회를 잡고 있다. 김영중기자 jeunesse@seoul.co.kr
  • 佛좌파지식인 앙드레 고르

    |파리 이종수특파원|“우리가 함께 한 지 58년이나 됐지만 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당신을 사랑하오.” 프랑스의 대표적인 좌파지식인 앙드레 고르(84)가 지난해 병상의 아내 도린(83)을 돌보면서 쓴 책 ‘아내에게 쓰는 사랑의 편지’의 한 대목이다. 프랑스 일간지 르 몽드에 따르면 고르는 지난 달 25일(현지시간) 파리 근교 트로와의 자택에서 투병중이던 아내 도린과 함께 목숨을 끊었다. 아내와 동반자살한 소식이 전해지자 아내에 대한 애절한 사랑을 담은 그의 저서 ‘아내에게…’는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고르는 1964년 주간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를 창간, 미셸 보스케라는 필명으로 활동했다. 그는 사르트르의 비서로 일하던 때 영국 출신의 아내 도린을 처음 만났다. 이후 도린이 중병에 걸리자 1983년 모든 활동을 접고 트로와로 옮겨가 아내와 조용히 살아왔다.vielee@seoul.co.kr
  • [씨줄날줄] 죽산 조봉암/이목희 논설위원

    죽산 조봉암에게는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1958년 진보당 사건으로 투옥된 그는 재소자 사이에 큰 인기를 누렸다. 이름 모를 새가 날아오면 조봉암은 자신의 콩밥을 나줘주곤 했다. 이듬해 그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뒤에도 오랫동안 재소자들은 ‘조봉암 새’에게 밥을 던져주며 죽산을 기렸다고 한다. 진보당 간사장을 지냈던 윤길중은 주변에 이렇게 말했다.“나는 ‘털이 난 보수’인데 죽산 선생을 좋아해 따랐을 뿐이오.” ‘사법살인’으로 정적(政敵) 조봉암을 제거한 이승만도 한때 죽산을 높이 평가했다. 제헌국회를 주재하다가 조봉암이 어찌나 똑부러지게 발언을 하던지 사회석에서 뛰어 내려왔다. 이승만은 조봉암의 등을 두드리며 “베리 굿”을 외쳤다. 공산주의 경력의 조봉암을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발탁한 것도 이승만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죽산은 유흥 문화에서도 세련된 편이었다. 일류 기생집에서 북치고, 장구치고, 육자배기를 뽑으며 파티를 벌이곤 했다. 한편에서 귀족적이라는 비판이 있었지만, 혁신 정객이라고 풍류를 즐기지 말란 법은 없다. 조봉암의 진보당이 내걸었던 공약 역시 시대를 앞서갔다.1956년 대통령선거. 죽산의 평화통일론과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이 맞붙었다. 미국·소련과 균형있는 외교관계, 생산·분배의 합리적 통제로 민족자본 육성, 교육체계 혁신…. 지금 보면 죽산의 주장이 훨씬 설득력 있다. 당시 열악한 환경에서도 죽산은 200만표 이상 득표, 영구집권을 노리던 이승만에게 위협을 가했다. 인간적인 매력, 사회주의자이면서 공산독재를 배격한 선견지명. 여러 장점에도 불구, 죽산의 실책은 있었다. 동암 서상일로 대표되는 보수 출신의 혁신파와 결별한 일이다.“죽산이 동암의 갓을 썼더라면 이승만이 진보당 사건의 꼬투리를 잡지 못했을 텐데….”라고 한탄하는 이가 꽤 있다. 헌정사상 ‘사법살인’ 첫 희생자로 꼽히는 조봉암이 48년만에 간첩혐의를 벗었다. 진실화해위는 국가가 죽산의 명예회복 조치를 취하고 유가족에게 사과하도록 권고했다. 재심 판결, 독립유공자 인정 등 개인적 명예회복을 넘어 역사의 교훈으로 길이 새겨야 할 사건이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조봉암 사건은 정치 탄압”

    “조봉암 사건은 정치 탄압”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7일 ‘진보당 조봉암 사건’에 대해 “이승만 정권이 저질렀던 비인도적, 반인권적 인권유린이자 정치탄압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국가에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권고했다. 진실화해위는 지난 18일 제54차 전원위원회 회의에서 “이승만 정권은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한 조봉암을 제거하고 그가 이끄는 진보당이 1958년 총선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하려 했다.”고 사건의 배경을 규정했다. 조봉암은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평화통일과 사회민주주의적 공약으로 200여만표 이상을 득표했던 정치인으로 같은 해 진보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1958년 정부는 진보당의 정당 등록을 취소해 버렸고 조봉암은 국가변란과 간첩 혐의 등으로 구속돼 1959년 사형당했다. 진실화해위는 초동수사를 맡았던 특무대에 대해서는 “민간인에 대해 수사권이 없는 기관이었기 때문에 절차적 불법성이 존재한다.”면서 “검찰도 아무런 증거도 없이 공소 사실도 특정하지 못한 채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에 대해 국가변란 혐의로 기소했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진실규명 결정에 따라 진실화해위는 “국가는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총체적으로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이어 “조봉암은 일제 시기 독립운동을 하다 복역했음에도 사형판결로 인해 독립유공자 인정을 못받았다.”면서 “국가는 조봉암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권고를 덧붙였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사막중국/ 폴리테이아 펴냄

    봄철만 되면 황사가 기승을 부리면서, 그 원인을 퇴치하겠다며 적지 않은 한국 기업과 단체가 황사발원지로 지목되는 중국이나 몽골의 사막으로 달려가 나무를 심는다. 지리학자인 이강원 전북대 교수는 그러나 사막화는 사막을 녹지로 바꾸고 초지를 경지로 바꾸는 과정에서 발생한 현상인 만큼 그 과정을 반복할 이유가 없다고 비판한다. 지하수위가 낮거나 강수량이 확보되지 않는 곳에 나무를 심으면 관정을 파거나 하천수를 끌어들여야 하는 만큼 지하수위를 더욱 하강시켜 오히려 사막화를 촉진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사막중국’(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중국연구총서 9, 폴리테이아 펴냄)에서 “사막화 현상은 순수한 자연적 과정의 결과가 아니라 토지이용의 변화와 맞물려 있으며, 토지이용의 변화는 다시 사회변동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고 설명한다. 중국의 사막화 현상 또한 사회변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에 따르면 중국의 북방 건조지역 개발은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시도되었다. 그 가운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의 시도가 가장 규모가 컸고 지속적이었다. 쑨원(孫文)이 1965년 ‘건국방략(建國方略)’에서 표방했을 만큼 북방 건조지역에 대한 이주와 개간 정책이 당시 중국에서는 일종의 숙원사업이자 시대정신이었다는 것이다. 1958년 시작된 대약진운동은 ‘자연개조’의 차원에서 북방으로 인구이동과 대규모 개간을 촉진시켰다.1966년 문화대혁명은 또다시 건조지역에 외지인구를 유입시켰고 초원과 사막의 개간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1978년 개혁개방 정책이 시행되면서 북방 건조지역 농민들이 개인적으로 토지확대와 가축의 수 불리기에 몰두하면서 사막화는 더욱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사막화 현상의 원인이 바로 사막을 옥토로 바꾸겠다는 시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교수는 “근본적인 대책은 사막화 지역의 주민을 이주시키고 경지와 지하수 관정을 폐쇄하는 등 지극히 인간적인 정성을 다하는 것뿐”이라면서 “이후 사막을 없애거나 황사를 소멸시키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장구한 자연적 치유과정의 몫”이라고 말했다.1만 5000원.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2) 국제선원 무상사 주지 무심 스님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2) 국제선원 무상사 주지 무심 스님

    “모든 것을 내려놓게나.” 몸과 마음을 비우라는 전 화계사 조실 숭산(2004년 입적) 스님의 ‘방하착(放下着)’ 한마디에 미련없이 세상의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한국불교에 귀의한 무상사 주지 무심(無心·49·본명 조슈아 헨리 레아)스님. 미국 보스턴대 화학과를 졸업한 이 미국의 과학도를 한국 땅의 ‘눈 푸른 납자(衲子)’로 변신시킨 건 무엇일까. 이 푸른 눈의 과학도에게 많은 길 중에서도 하필이면 한국불교를 택해 한국 승가에 몸담게 한 것은 불법(佛法)인가, 아니면 거역 못할 인연인가. 언제 어디서건 “나는 전생에 한국사람이었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무심 스님.1984년 처음 한국 땅을 밟아 한국생활을 한 지 23년째를 맞은 그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다. 무상사(無上寺·충남 계룡시 두마면 향한리 산 51의9)는 서울 화계사 국제선원과 함께 한국의 선(禪)불교를 만방에 전파하는 양대 수행도량. 계룡산 국사봉 아래 국제선원과 대웅전, 요사채의 한옥식 건물 세 채를 갖춰 망집을 버리고 ‘참 나’(眞我)를 찾기 위해 물 건너 산 넘어 찾아드는 외국인 스님들을 맞아주는 이색지대이다. 지금은 미국, 말레이시아, 폴란드, 체코, 리투아니아, 홍콩의 스님과 행자 10명이 편하게 살고 있지만 안거 때면 참선 정진하는 20여명의 외국인 납자들로 선풍이 시퍼렇다. 이 무상사에서 4년째 외국인 수행자들을 이끄는 주지 겸 지도법사 무심 스님은 ‘아주 무서운 선생님’이다. 평소엔 웃음 많은 넉넉한 친구이지만 흐트러진 수행승들에겐 어김없이 불호령를 내리는 ‘계룡산 호랑이’인 것이다. ●보스턴대 출신 미국의 과학도 ‘불교 입문´ 무상사(無上寺).‘부처님 앞에선 위도 없고 아래도 없이 모든 게 평등하다.’는 대웅전의 ‘무상사’편액을 바라보는 스님의 각오는 날마다 새롭다. 대학시절 명상과 요가에 빠져 있던 그에게 숭산 스님과의 만남은 세상의 미명을 밝히는 큰 길로 불쑥 다가왔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힌두교 수행자를 따라 간 토굴에 불상이며 십자가며 힌두신이며 여러 종교 상징들이 있었는데 유독 불상에 눈길이 가더란다.“불교를 알고 싶다.”는 말에 돌아온 “불교를 배우려 들지 말고 살아 있는 부처님을 찾아보라.”는 힌두교 수행자의 말에 호기심만 더 쌓일 뿐이었다. 케임브리지 선원을 찾아 숭산 스님의 법문을 듣고도 의심이 풀리지 않아 귀찮을 만큼 끈질기게 수행법을 묻던중 “모든 것을 내려놓아라. 모든 것을 버리는 게 수행이다.”는 말에 눈앞이 밝아졌다. 스님 말마따나 “수행기술이나 방편을 알려줄줄 알았는데 의외의 내려놓으라는 ‘방하착’ 한마디에 눈 귀가 열린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식품회사에 1년반을 다니면서도 ‘방하착’이 내내 머리에 휘돌아 결국 숭산 스님으로부터 허락을 받아 행자가 됐다. ●수덕사 등 한국의 유명 선원에서 안거 34차례 화계사에 온 게 1984년 4월 말이다. 수덕사, 정혜사, 신원사를 비롯해 전국의 이름난 선원에서 안거에 든 것만 해도 34차례. 숭산 스님의 법문에 감화돼 머리를 깎고 한국으로 출가한 50여명의 외국인 스님 가운데 가장 먼저 조계종 비구계를 받은 인물이다.‘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의 원을 받아들인 범어사 스님들이 머리를 깎아주었다.‘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로 유명한 현각 스님의 사형이기도 하다. 부산 흥법사 주지 심산 스님과 대구 관음사 회주 우학 스님은 당시 부산 범어사에서 함께 비구계를 받은 한국인 도반들이다. “나를 버리려 했던 내가 무거운 짐을 진 껍데기가 돼있음을 알곤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남이 해주는 밥을 먹고 남의 생각과 손에만 이끌려 살고 있는 나였지요.” 2001년 화계사 국제선원장 시절이었다. 후배들 눈치도 보이고 해서 “내 손으로 뭔가 하겠다.”는 뜻을 숭산 스님에게 간곡히 알린 뒤 부산으로 내려가 무작정 시작한게 남산국제선원이다. 한국의 외국인 스님 가운데 가장 먼저 일선포교에 나선 것이다. 한국인 신도들을 직접 대한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범어사 밑의 포교당으로 쓰이던 상가 건물의 방 하나를 빌려 ‘남산국제선원’ 간판을 붙이고 나니 신도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엿하게 선원의 모양새를 갖춰갈 무렵 무상사의 주지 스님이 사정이 생겨 고국인 폴란드로 돌아가는 바람에 무상사로 옮겨와야 했다. “당시 신도들의 열성과 신심은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어요. 무상사에 와서도 신도들의 요청으로 매주 두번씩 부산에 내려가 법문이며 수행지도를 해야 했지요.” 이후 비구니 스님이 선원을 맡아 어렵게 꾸려갔지만 결국 문을 닫아야 했던 사연은 잊을 수 없는 아픔이다. 무상사에 와선 대웅전도 번듯하게 세워놓았고 지금은 건물들에 단청을 입히느라 바쁘다. 기자가 찾아간 날도 단청 불사에 매달려 손님 맞으랴 건물 손질하랴, 한참 만에야 스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한국의 절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처님의 상호를 떠올리게 하는 둥근 얼굴이다. 유난히 푸른 눈만 아니라면 걷는 폼새나 말하는 투며 영락없는 한국사람이다. “이런저런 불사들을 모두 도맡아 하자니 돈도 있어야 하고 사람도 있어야 하고 여간 어려운게 아니에요. 종단 지원 없이 모든 것을 다하려니 더 힘들어요.” 종각도 세워야 하고 숭산 스님 부도탑도 모셔야 하고…. 이런저런 욕심(?)을 주섬주섬 늘어놓는다. “이젠 사판승이 다 되었다.”며 겸연쩍어하는 스님의 말끝을 잡았다.“한국불교에서 무엇을 얻었느냐.”는 물음에 한참의 침묵 끝에 날 선(?) 말을 돌려준다.“한국불교에서 무엇을 구하려는 게 아니라 무엇을 갚고 살아야할지를 고민 중입니다.” 한국의 불교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의 수행전통을 오롯이 갖춘 채 염불과 불경 공부를 겸하는 통(通)불교의 성격을 갖지만 한국의 스님들은 이 ‘귀중한 보물’을 잘 모르고 사는 게 안타깝단다. 한 절집에서 이렇게 큰 일들이 어그러지지 않고 순탄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게 신기하다고 한다. 다그쳐 물었다. 발심(發心) 출가의 화두, 즉 ‘얼마나 내려놓았느냐.’는 미련한 질문에 서슴없는 답이 나왔다.“말에 집착함은 곧 허상에 쫓기는 것일 뿐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내려놓으라는 숭산 스님의 방하착도 길을 제대로 찾으라는 방편에 다름 아니지요. 끊임없이 묻고 의심하고 노력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무상사에선 남녀구별 없이 한방에서 함께 참선 ‘분별없는 말은 오해를 낳고 큰 화로 이어진다.’는 평범한 경계가 무상사에선 혹독한 묵언수행의 전통으로 서 있다.“묵언수행은 참회의 방편이 아니라 나를 찾는 수행의 큰 길”이라는 무심 스님의 지론을 따르는 무상사의 외국인 스님들은 보름, 수개월, 심지어는 수년간 묵언수행을 계속한다. 수행을 깨는 납자들은 가차없이 쫓겨난다. 구별과 차별 없는 ‘무상(無上)’의 큰 뜻은 수행공간에서 독특하게 살아 있다. 다른 한국의 선방들이라면 비구, 비구니, 남자신도, 여신도들이 각각 다른 방에서 참선에 들지만 이곳 무상사에선 한 방에서 모두가 함께 한다. 역시 무심 스님의 수행방식이다. 포교는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이해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무심 스님. 얼마전 아프간 피랍사건을 의식한 듯 불쑥 말을 꺼낸다.“한국인이 예루살렘에 가서 유대교나 기독교 포교를 하는 것과 내가 한국에 와서 불교 포교를 하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인도에서 중국으로 간 달마대사도 처음엔 그곳 불교계에서 박대당했다는 비유와 함께 “나도 한국인들에게 무시와 질시를 숱하게 받았지만 지금 이렇게 한국인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느냐.”며 웃는다. “한국에 언제까지 살겠느냐.”고 물었다. 답은 생각대로였다.“불법을 위해 사는 사람이 어디에 살고 어디에서 죽는 게 무슨 상관이냐.”면서 한국과 인연이 끝나면 본국으로 돌아가 살 수도 있지만 아직 이곳에서 할 일이 많다고 넘긴다. 유대인의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나 “한국불가에 귀의하지 않았으면 나도 역사 교사가 되었을 것”이라는 무심 스님.“깨끗한 물이나 오염된 물이나 모두 허물없이 받아들이는 바다처럼 어머니의 가슴과도 같은 넓은 도량의 한국불교를 택하는 눈 푸른 사람들에게 맑은 정신을 갖도록 하는 게 내 소임”이라며 기자를 배웅했다. ‘내려놓으라.’는 방편과 함께 받은, 스님의 ‘이 뭐꼬.’ 화두풀이는 계속되고 있었다. 계룡산 무상사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무심(無心) 스님은 ●195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 출생 ●1979년 보스턴대 화학과 재학중 숭산 스님 만나 발심 ●1980년 보스턴대 졸업 ●1984년 한국 입국, 화계사에서 법명 ‘무심´ 받음 ●1986년 범어사에서 비구계 수지 ●1985∼1989년 수덕사, 신원사 등에서 안거 ●1997년 화계사 국제선원에서 지도법사 자격 받고 공안지도 ●1999년 화계사 국제선원 수석지도법사 ●2002년 부산 남산국제선원 개원 ●2003년∼ 계룡산 국제선원 무상사 주지 및 지도법사
  • 제3의 성/유정애 옮김

    1997년 프랑스에서 출판돼 화제를 모은 ‘제3의 성’이 국내에 번역 소개됐다. 프랑스 그르노블대 철학과 교수인 질 리포베츠키가 쓴 ‘제3의 성(유정애 옮김, 아고라 펴냄). 프랑스의 여성작가 보부아르가 쓴 ‘제2의 성’이 페미니즘의 경전으로 떠오른지 58년만이다. 저자가 정의하는 ‘제3의 성’의 핵심은 ‘독립성’이다.‘뱃속에 심어진 씨앗을 키우는 유모’로 여겨졌던 제1의 여성은 악마화되고 경멸받았다. 또한 제2의 여성은 사랑받고 찬미의 권좌에 오르긴 했으나,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였을 뿐이다. 이에 비해 제3의 여성은 자기 자신의 지배를 받는 창조적인 존재다. 공부, 직업, 결혼, 이혼, 자녀 문제 등 삶의 거의 모든 부문에서 여성은 선택의 주체가 됐다. 하지만 굴레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가사노동은 아직도 영원한 불평등지대다. 시간제 근무자의 80%는 여성이며, 자녀를 세 명 둔 가정에서 어머니가 직장생활을 하는 경우는 50%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조직생활에서 여성이 수장이 되는 것을 가로막는 ‘유리 천장’ 역시 저자는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조직에서의 경쟁은 처음부터 남자들에게 유리한 싸움이라는 것이다. 소년은 소년답게, 소녀는 소녀답게 가르치고 키우는 사회화 모델은 남성에게 권력 투쟁에 더 적합한 정신상태와 태도를 심어준다. 여성은 또한 권력쟁탈, 출세주의, 남성들의 기회주의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두 성의 평화로운 공존은 불가능한 것인가. 저자는 현재 남성들이 과장되고 그릇된 남성우월주의를 버리고, 새롭게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제3의 성이란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이다. 굴종과 대립의 여성상을 뛰어넘고,‘남성화’의 다른 이름인 ‘남녀평등의 신화’를 무너뜨린 곳에 여성과 남성 양성의 미래가 존재한다는 게 저자의 결론이다.1만 2000원.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여든 넘어서도 무대 서는 ‘한국의 파바로티’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한국의 파바로티’는 여전히 힘찬 목소리로 무대를 지키고 있다. ‘한국 테너의 뿌리’ 안형일(81)씨가 13일 오후 8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제자들과 함께 ‘골든 보이스’란 제목으로 음악회를 연다.●오페라 데뷔 반세기안씨는 올해로 데뷔 반세기를 맞았다.1958년 국립국장에서 오페라 ‘리골레토’의 만토바 공작으로 데뷔한 이래 70여개 오페라에서 주역을 맡았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역은 10번 이상 공연한 ‘라보엠’의 루돌프. 모두 힘들어 하지만 꼭 한번 하고 싶어하는 역할로 파바로티의 데뷔작이기도 하다.안씨는 “파바로티는 가장 존경하는 성악가로 하느님이 준 소리가 다시 천상으로 가게 돼 정말 서럽다.”고 최근 타계한 ‘천상의 목소리’를 애도했다. ●매일 체력 다지며 1~2시간씩 연습안씨가 성악가로서는 유례없이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무대에 설 수 있는 것은 꾸준한 건강관리와 연습 때문. 거의 매일 헬스클럽에서 30가지의 운동기구를 모두 사용하며 체력을 다진다. 하루에 1∼2시간씩 발성 연습도 빼놓지 않는다.“성악가는 운동선수와 마찬가지로 쉬지 않고 연습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일주일만 연습을 하지 않아도 좋은 소리가 나지 않지요.” 한국 성악계에서 그보다 선배는 오현명(83) 교수가 유일하다. 두 사람은 지난 7월에도 한무대에 서 매력적인 목소리를 뽐냈다.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안씨는 경성음악학교(현 서울대 음대)에 가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월남했다.3년간 아르바이트를 해 겨우 음악학교에 입학했고, 이탈리아 산타체칠리아음악원 유학도 40대가 되어서야 떠날 수 있었다. 음악 때문에 헤어진 가족들은 아직 한번도 만나지 못했고, 이산가족 상봉 신청도 했지만 소식이 없다고 노 성악가는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음악회 수익은 `안형일 장학금´으로이번 음악회는 그로부터 음악적 영향을 받은 200여명의 제자들이 마련한 것. 박상현 지휘자가 이끄는 모스틀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맡고, 추희명 김동현 이명국 이혜선 등 한국 성악계를 이끄는 그의 제자들이 총출연한다. 안씨는 마지막에 오페라 ‘라 조콘다’ 가운데 ‘하늘과 바다로’를 불러 대미를 장식한다. 서울신문사가 주최하고 KTF, 산업은행, 금호아시아나가 협찬하는 ‘골든 보이스’ 음악회 수익은 안형일 장학금으로 사용돼 젊은 성악도들에게 돌아갈 예정이다.(02)1588-7890.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日 세지마 류조 前 이토추상사 회장 별세

    日 세지마 류조 前 이토추상사 회장 별세

    |도쿄 박홍기특파원|일본의 이토추 종합상사를 성장시킨 세지마 류조 전 회장이 4일 노환으로 별세했다.95세. 과거 박정희 전 대통령의 관동군 직속상관이었던 것을 비롯,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군부출신 인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교도통신 등에 따르면 류조 회장은 이날 오전 0시55분 도쿄 자택에서 숨졌다.1938년 육군대학 졸업 후 일본군 대본영 참모로서 활동했다. 종전 뒤에는 옛 소련군의 포로로 잡혀 11년동안 시베리아에서 억류생활을 했다. 1956년 귀국,1958년 이토추에 입사해 주로 항공기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전무, 부사장을 거쳐 부회장, 회장을 지내다 2006년 퇴임했다. 치열한 항공기 판매전을 그린 소설 ‘불모지대’의 주인공 모델로 화제를 낳기도 했다. 고 이병철 삼성 초대 회장, 박태준 전 회장과도 오랜 친분을 쌓았고 포항제철(현 포스코) 설립에 깊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인 83년에는 안보협력 차관 40억달러(약3조 7500억원) 제공을 내세우며 당시 나카소네 총리의 첫 공식 방한을 성사시켰다. 81년 3월 나카소네 내각의 임시행정조사위 위원에 취임해 일본 내에서 반발이 많았던 국철, 전매공사 민영화 작업에 나서 노동계, 정계의 반발을 무마시켰다. 오부치 게이조, 다케시다 노보루, 미야자와 기이치, 하시모토 류타로 전 총리 등 정계 요인들과 교분이 두터웠다. 전성기 때 정·재계 직함만 100여개에 달할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 전쟁에 깊숙이 관여한 인물로 전후 정치 막후에서 활동한 것에 대한 비판도 따랐다. 생전 자서전에서 ‘대동아전쟁’을 자위전쟁이라고 규정하며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에도 이름을 올리는 등 극우파란 평가를 받아왔다. hkpar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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