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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기철의 플레이볼] 메츠 홈구장 셰이스타디움

    야구장의 이름은 볼티모어나 애리조나처럼 야드나 파크로 불리는 특수한 경우를 빼면 거의 스타디움과 필드로 나뉜다. 필드란 트인 구조를 말한다. 스타디움에 대해 이런 건축물을 처음 지은 로마인이 가진 생각은 애초부터 원이 아니라 반원 두 개가 합쳐진 것이다. 반원이 하나면 연극 무대가 되고, 반원이 두 개 모이면 하나의 원을 이루는 폐쇄형 경기장이 된다. 필드는 클래식한 느낌을 주고 스타디움은 모던한 느낌을 준다. 요즘은 복고풍이 대세. 새로 짓는 구장은 대개 필드다. 뉴욕 메츠의 홈구장 셰이스타디움은 스타디움이긴 하지만 비교적 필드에 가까운 구조다. 또 스타디움이 경기장의 형태에서 나온 말이라면 셰이는 사람 이름이다. 우리에겐 서재응의 과거 소속 팀이며 이제는 박찬호가 뛸 구단이라 친근하기도 하지만, 한인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퀸즈의 플러싱에 있어 한국 사람들과도 가까웠다. 메츠가 1964년 플러싱의 셰이스타디움에 자리잡기까지의 과정은 복잡하다. 미국 제일의 도시답게 뉴욕은 양키스와 다저스, 자이언츠의 세 팀이 복작거리던 곳이었다.이런 도시에서 1958년 다저스와 자이언츠가 서부로 떠나간 데 대한 뉴욕 팬들의 충격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야구를 보고 싶으면 양키스 경기를 보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하겠지만 다저스나 자이언츠의 골수팬들에게는 양키스가 원수일 뿐이지, 자신들이 응원할 대상은 전혀 아니었다. 뉴욕의 지도층들은 메이저리그에 구단 증설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그러자 이들은 아예 제3의 리그인 콘티넨털리그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제3의 리그에 참여하는 인물들을 보고 메이저리그는 4개 구단 증설을 허용했고, 조안 페이슨에게 구단 설립권을 줬다. 페이슨은 1950년 뉴욕 자이언츠의 주식 1주를 매입한 것을 시작으로 자이언츠가 서부로 가기 전까지 구단 주식의 10%를 매입했던 최초의 여성 구단주였다. 자이언츠가 떠나자 페이슨은 주식을 모두 팔아버리고 뉴욕에 새로운 내셔널리그 팀을 유치하는 데 앞장섰다.1962년 뉴욕에 팀이 신설되었지만 새 구장은 공사 중이라 양키스구장을 빌려 쓰려고도 했지만 거부당했다. 결국 낡은 폴로 구장을 써야 했고 셰이스타디움은 1964년부터 사용했다. 그럼 셰이는 누굴까? 뉴욕의 변호사로서 신설 구단 유치위원장 역할을 한 사람이고 구장 이름에 붙였다. 이제 2년만 더 쓰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바로 옆에 초현대식 복고풍 구장 시티필드가 지어지기 때문이다. 구장 이름도 요즘 유행처럼 기업에 팔았다.페이슨이나 셰이는 지하에서 시티필드를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스포츠투아이’ 전무이사 cobb76@gmail.com
  • [병자호란 다시 읽기] (6) 임진왜란,누르하치,그리고 조선 Ⅲ

    [병자호란 다시 읽기] (6) 임진왜란,누르하치,그리고 조선 Ⅲ

    1405년 퉁밍거티무르가 입조(入朝)해 건주위도지휘사에 임명된 이래 명의 여진족에 대한 포섭작업은 가속이 붙었다. 영락제(永樂帝)는 1409년 흑룡강, 우수리강 유역의 광활한 지역을 총괄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노아간도사(奴兒干都司)라는 기관을 설치했다. 퉁밍거티무르를 비롯한 여진족 추장들은 노아간도사 아래 편제된 수많은 위소(衛所)들의 장(長)으로 임명돼 명의 신하가 되었다. 명은 위소 우두머리의 임명과 위소 상호간의 분쟁에는 개입했지만 위소의 통치는 여진족의 자율에 맡기는 체제를 만들었다. 만주에 대한 명의 지배는 점차 확고해져갔다. 이제 조선이 ‘고구려의 고토’ 만주를 수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명 견제하의 조선-여진관계 영락제가 만주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고히 했던 뒤에도 조선과 여진의 관계가 단절된 것은 물론 아니었다. 조선은 여전히 오도리, 오랑캐, 우디캐 등 여진 종족들과 밀접한 관계를 지속했다. 여진인들은 조선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한양에 와서 조공했다. 조선은 입조했던 추장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회사(回賜)라는 명목으로 각종 물자를 제공했다. 태조부터 성종(成宗) 때까지 여진족들의 조공 횟수는 거의 1100차례에 이를 정도로 많았다. 여진족 가운데는 아예 조선에 귀화를 원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조선은 귀화한 여진인들을 향화인(向化人)이라 부르며, 그들을 내지로 이주시켜 집과 땅 등의 생활기반을 제공했다. 조선은 1406년 경원(慶源)에 무역소(貿易所)를 설치해 여진족들과의 교역을 허용했다. 여진족들은 말, 모피, 진주 등 자신들의 특산물을 가져와서 면포, 소금, 솥, 농기구, 소(耕牛) 등을 바꿔갔다. 주로 수렵이나 유목에 종사하다가 점차 농경의 필요성에 눈떠 가고 있던 여진족들에게 조선에서 구입한 소나 농기구는 매우 소중했다. 조선과 여진 사이의 이같은 교류가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일찍부터 조선과 여진의 교섭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명은 1458년(세조 4), 건주좌위 도독 동창(童倉)이 조선에서 벼슬을 받았던 사실을 알게 되자 양자의 접촉을 엄금했다. 하지만 여진족들은 경제적으로 이득이 컸던 조선과의 관계를 쉽사리 포기할 수 없었다. 조선 또한 여진족들을 일종의 ‘울타리’로 생각했고, 그들을 초무(招撫)하여 몽골 침략 이래 보전하지 못했던 북방영토를 회복하고자 했다. 세종 연간 사군(四郡)과 육진(六鎭)을 설치해 압록강, 두만강 이남의 강역을 확보했던 것은 그같은 노력의 결실이었다. 조선은 또한 여진을 회유하여 스스로를 ‘상국’으로 자부하며 문화적 우월의식을 나타냈다.‘조선의 문물(文物)과 교화(敎化)를 사모하여 귀화한 여진인’을 뜻하는 ‘향화인’이란 말 속에 그같은 의식이 담겨 있었다. ●왜란시 절감한 누르하치의 위협 16세기 이후 여진족에 대한 조선의 관심은 15세기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우선 명이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고 조선의 여진 접근을 견제했던 영향이 컸다. 또 여진세력 자체가 조선 안보에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했던 이유도 있었다. 이성량(李成梁)이 활약하던 16세기 후반까지는 여진족 내부에서 조선을 위협할 만한 유력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기껏 두만강 부근의 여진족들이 간헐적으로 침략하여 변경을 소란하게 하는 정도였다. 16세기 후반 선조대에 이르러 조선의 권력은 사림파(士林派)에게 돌아갔다.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지향하던 그들은 ‘고구려 고토의 회복’과 같은 대외적 팽창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명에 대해 공손히 사대(事大)만 잘하면 대외적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들에게 여진이나 일본은 그저 교화시켜야 할, 조선보다 한 단계 낮은 ‘야만족’일 뿐이었다. 그런 그들이 당시 한창 세력을 떨치고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누르하치에 대해 정확한 정보나 인식을 가질 리 없었다. 정확하지 못한 대외인식의 귀결은 먼저 임진왜란으로 나타났다. 1592년 9월, 누르하치의 원병 파견 제의를 받은 조선이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야기한 바 있다. 충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조선에 들어왔던 명군 지휘관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누르하치 군대의 ‘위력’을 이야기했다. ‘그들 기마군단의 위력은 가공할 만하다. 일본군에게 밀리면 도주하면 되지만, 누르하치 군에게는 그것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선조와 조정은 바짝 긴장했다. 그 와중에 1595년(선조 28), 산삼을 캐기 위해 평안도 위원(渭原)으로 잠입했던 건주 여진인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들이 조선 영내에서 소를 훔쳐가자 위원 군수 김대축(金大畜)이 여진인을 사로잡아 죽인 것이었다. 조선 조정은 이 사건 때문에 누르하치가 침략해 오지나 않을까 우려했다. 실제로 누르하치가 격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같은 해 10월, 선조는 신료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뾰족한 대책이 나올 수 없었다. 모든 역량을 동원해 일본군과 맞서고 있는 현실에서 서북변 방어는 거의 방치돼 있었다. 그렇다고 남방의 병력을 빼서 서북쪽으로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신충일(申忠一) 허투알라로 보내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조선은 고육지책을 생각해냈다. 명의 권위를 빌려 누르하치의 침략을 견제한다는 복안이었다. 그 계책은 병조판서 이덕형(李德馨)이 주도했다. 이덕형은 명나라 장수 호대수(胡大受)를 움직였다. 호대수의 참모 여희원(余希元)을 건주여진 지역으로 들여보내 누르하치를 선유(宣諭)하도록 했다. 조선 관원에게도 중국인 옷을 입혀 동행시켰다. 1595년 11월, 여희원은 누르하치의 부장(副將)을 만나 여진인들이 조선 영내로 잠입한 것을 힐책하고, 조선에 보복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조선은 여희원을 통해 응급조치를 취한 후 다양한 대책을 마련했다. 선조는 누르하치를 회유하기 위해 비단을 제공하고, 이후 산삼을 캐기 위해 넘어오는 여진인을 죽이지 말라고 지시했다. 또 그들의 침략에 대비해 들판을 완전히 비우고 성에 들어가 방어하는 청야책(淸野策)을 연구할 것을 강조했다. 조선은 나아가 남부주부(南部主簿) 신충일(申忠一)이란 인물을 허투알라로 들여보냈다. 조선인의 눈으로 누르하치 진영의 상황을 직접 정탐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조처였다. 신충일은 1596년 1월, 허투알라를 다녀온 뒤 선조에게 상세한 보고서를 올렸다. 유명한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가 그것이다. 이는 오늘날 청 초기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료로서 평가받고 있다. 신충일의 보고서를 본 뒤 선조는 “천지의 기세가 바뀌고 있다.”며 탄식했다. 이어 신료들에게 누르하치와의 충돌을 피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라고 거듭 촉구했다. 북쪽의 ‘오랑캐’, 남쪽의 ‘왜구’ 이른바 북로남왜(北虜南倭)에 의해 포위된 조선의 현실을 새삼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정세변화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해 임진왜란을 불렀던 것은 과오였지만, 선조 정권의 누르하치에 대한 대책은 평가할 만한 것이었다. 누르하치를 견제할 만한 자체 역량이 없는 현실에서 명의 권위를 이용하고, 그들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높이 살 만하다. 임진왜란이라는 커다란 위기를 겪으면서 역설적이지만 조선은 외교적 감각을 키웠던 것이다. 6자회담이 어렵사리 타결됐지만 동북아 평화를 위해 아직 갈길이 먼 오늘날, 선조대의 누르하치 정책은 소중하게 돌아보아야 할 역사의 거울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美대선출마 선언… 힐러리와 양강구도 될듯

    |워싱턴 이도운특파원|2008년 대통령 선거를 향한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과 배럭 오바마 상원의원간의 양보할 수 없는 한판 싸움이 10일(현지시간) 공식적인 막을 올렸다. 두 사람의 승부에 따라 민주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는 사상 처음으로 여성이거나 흑인으로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민주당 내에 존 에드워즈 전 상원의원을 비롯한 다른 후보들도 있지만 두 후보를 모두 따라잡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링컨 이미지를 차용한 오바마 오바마 의원은 이날 차기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오바마 의원은 고향인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 광장에 모인 수천명의 유권자 앞에서 “이제 우리 세대가 시대의 소명에 대답할 때”라면서 ‘세대교체론’을 제시했다. 오바마 의원은 올해 45세이다. 민주당의 클린턴 상원의원, 공화당의 존 매케인 상원의원,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 등 다른 유력한 대선 후보들은 대부분 60세가 넘었다. 오바마 의원은 이라크 전쟁을 ‘비극적인 실수’로 규정하고 이라크에서의 철군을 주장했다. 이는 공화당 후보들뿐 아니라 이라크 전을 찬성했던 클린턴 의원까지 겨냥한 것이다. 이날 오바마 의원이 연설 장소로 택한 스프링필드의 옛 주 정부 청사는 같은 일리노이 주 출신인 에이브러햄 링컨 전 대통령이 1858년 “내부가 갈라진 집은 서 있지 못한다.”는 명연설로 흑인노예 해방을 위한 정치투쟁을 시작했던 곳이다. 미 언론들은 흑인인 오바마 의원이 자신의 출마를 노예 해방과 연상시키며 자연스럽게 링컨의 이미지를 차용했다고 분석했다. 클린턴 의원도 뉴욕주에서 연거푸 당선됐지만 고향은 오바마, 링컨과 마찬가지로 일리노이주이다.●힐러리 “이라크전 실수는 부시에 있어” 클린턴 의원은 이날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투표가 처음 시작되는 뉴햄프셔 주를 방문했다. 당내 경선은 미국의 50개주를 돌아가며 계속하지만 가장 먼저 투표가 실시되는 아이오와와 뉴햄프셔 두 주에서의 승부가 초반 판세를 결정한다. 클린턴 의원은 베를린 시청과 콩코드 고등학교에서 뉴햄프셔 주민 수천명을 만났다. 베를린 시청에서 클린턴 의원이 정치 현안에 대해 연설한 뒤 유권자들은 클린턴 의원이 2002년 이라크전 개전 때 찬성표를 던진 이유를 집중적으로 캐물어 곤혹스럽게 했다. 클린턴 의원은 9·11이후 미국의 강한 보수화 바람을 의식, 부시의 정책에 동조했었다. 클린턴 의원은 “만약 지금과 같은 정도의 군사 정보를 갖고 있었다면 당시 결코 찬성표를 던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변명하고 “내가 찬성표를 던진 것은 책임을 지겠지만 실수는 부시 대통령이 저지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재까지의 여론조사에서는 클린턴 의원이 오바마 의원에 앞서 있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뉴햄프셔 주에서도 클린턴 의원이 27%의 지지를 얻어 21%를 기록한 오바마 의원을 앞섰다. 그러나 오바마 의원에 대한 지지는 상승세에 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dawn@seoul.co.kr
  • [신연숙 대기자의 금요초대석] 이석행 민주노총 5대위원장

    [신연숙 대기자의 금요초대석] 이석행 민주노총 5대위원장

    이석행(48) 신임 민주노총 위원장은 온건파인가, 강경파인가. 이 위원장을 온건파로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29일 그의 첫 기자회견 뉴스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온건파라더니 아니네.” 이 위원장은 회견에서 “파업투쟁을 통해서 노동자의 조직역량이 강해져야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와의 대화 조건으로 장기투쟁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와 180명의 구속자 문제 해결을 내걸었다. 마오쩌둥을 연상시키는 ‘현장대장정’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그동안 잦은 파업, 강경시위는 시민들만 짜증나게 했을 뿐 아무런 위력이나 실익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지도부 비리사건, 내부 폭력사태 등과 겹쳐져 민주노총의 위기론까지 자초했던 터다. 이 상황에서 이른바 ‘온건파’의 당선은 변화를 기대케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 위원장은 ‘꽤 센´ 발언으로 이런 예상에 물음표를 찍게 했다. 약간의 긴장감을 갖고 서울 영등포 민주노총 위원장실에서 만난 이 위원장은 뜻밖에 사람좋은 ‘배추장수´ 인상이었다. 충청도 억양, 내려간 눈꼬리에 시종 미소가 입가를 떠나지 않아 외모로만 본다면 분명 그는 ‘온건’했다. ▶해고노동자 출신인데 어떻게 해고됐습니까. “대동중공업이 두원그룹으로 매각된 다음 해인 1991년 해고됐습니다. 당시 윤석양 이병이 양심선언을 하고 보안사의 정치사찰 문서를 공개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제가 267번째로 나왔습니다. 조합원 20명의 임금을 옷장에서 훔쳐 해고됐다는 내용이었는데, 이게 ‘말’지는 물론 주간 노동자신문에 박스기사로 실린 거예요. 너무 분하고 황당하여 보안사 앞에 가서 ‘보안사 해체하라’고 유인물을 돌리며 항의했죠.” 회사는 항의하는 그를 오히려 ‘회사 무단이탈’‘회사 명예훼손’을 이유로 해고했다. 더욱 황당해져 법에 호소했지만 대법원까지 가서 졌다. 그때는 젊은 정열이 넘쳤고,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고 믿던 때였다. 사법부에 대한 절망과 불신감이 들었다고 했다. ▶처음 노조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요. “전북기계공고를 나왔습니다. 정밀가공사 자격증만 따 나가면 잘 살 수 있다고 해 그런 줄 알았습니다. 졸업하고 상공부장관 추천을 받아 진주 대동중공업에 취직했는데 이게 딴판이에요. 일당이 770원이었는데 월급으로 10만원을 받았습니다. 일요일도 없었고, 연장근무를 얼마나 했으면 이만 한 돈을 받았겠습니까. 누가 와서 노조 만들면 일요일과 ‘4대절’ 빨간날은 모두 놀 수 있다고 말해 따라가서 교육부장 맡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 같은 ‘강성’이 됐나요. “1984년도에 한국노총 1주일 코스 ‘새마을 교육’을 받고 깜짝 놀랐어요. 이름만 ‘새마을 교육’이지 노동 교육이었어요. 김금수(전 노사정위원장), 천영세(민주노동당 의원)씨가 강사로 나왔고, 함께 교육을 받았던 여성노동자들이 서울에 한번 놀러 오라고 해요. 청춘이라 1주일 후 서울로 올라갔죠.” 그때 여성들이 서울대 다니다 현장에 들어온 ‘학출’운동가였다. 노조운동은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며 혼을 냈고 이때부터 월2회,1박2일씩 상경 학습이 시작됐다. 다음 해에는 문성현(민주노동당 대표)씨 등을 만났고 이불 속에서 ‘불온서적’을 탐독하기에 이르렀다. 본격적으로 파업을 주도하거나 연대투쟁에 가담하는 운동가가 되었다. ▶해고노동자인데 어떻게 민주노총 조합원 자격이 있었지요. “제가 전과 7범이라 정식 취직은 못합니다. 대신 비정규직으로 작은 공장에서 선반공으로 일하며 서울 동부 금속지역노조에 가입했죠. 비정규직으로 위원장이 된 것은 제가 처음입니다.” 이 위원장은 선반공으로서 촉망받는 기술자였다. 해고된 뒤는 물론,2005년 민주노총 사무총장을 그만두고 나서도 금형공장으로 돌아가 선삭 일을 하였다.‘엄마냄새 ’다음으로 ‘기름냄새’가 좋다는 그는 죽을 때까지 현장 노동자로 살아갈 것이라고 했다. ▶‘현장’을 강조하고 계신데 ‘현장’의 힘을 몰아 더욱 세게 나가는 것 아닌가 걱정됩니다. “맞습니다. 힘이 되는 만큼 교섭을 요구할 겁니다. 지금 걱정이 ‘제조업 공동화’입니다. 남아 있는 굴뚝산업 자동차, 조선, 반도체 정도입니다. 이거라도 제대로 지키는 민주노총이 돼야 합니다. 제조업들이 외국가는데 정부는 서비스산업, 관광산업 외치다 실업률이 이렇게 됐습니다. 힘을 갖고, 정부 정책 초기단계서부터 개입해 들어갈 겁니다. 이렇게 되자면 민주노총이 파업을 해도 콧방귀 뀌는 상황으론 안 됩니다.” 그러나 파업은 수단이지 목적은 될 수 없다고 못박는다. 이 일로 내부에선 욕먹지만 이론이 아니라 체험으로 굳어진 신념이기에 현장에 힘을 기울이기로 했다. 현장대장정은 앞으로 6개월간 텐트를 들고 떠나려 한다. 우선 2월 한달간 서울 사무직을 순회한 후에는 20만 조합원이 파업 안되면 촛불집회라도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낼 작정이다. ▶이수호 전 위원장 때 추진했던 사회적 교섭 재개를 기대해도 될까요. “우리 의견을 반영하는 시스템이 되면 전체 조합원의 찬반투표를 거쳐 그 힘을 받아 들어가겠습니다. 정부가 틀 만들어놓고, 받을래 안 받을래 하는 식으론 안 됩니다. 현장에는 교섭하자는 소리가 높습니다.2004년 당시, 정부와 민노총 간에는 노사정·노정의 중층적 교섭틀이 합의돼 가고 있었습니다. 실무자들이 대화를 거부해 깨졌지요. 이의 유효성을 확인하는 데서부터 작업을 시작하겠습니다.” ▶폭력적인 거리 시위에 시민들이 지쳐 있는데요. “비정규 법안, 자유무역협정(FTA) 거리 시위는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한 가족에 한 명 꼴이나 되고 FTA는 민족 정체성과도 관련된 일입니다. 또 임금인상 요구만으로는 민주노총 존재의미가 없습니다. 제도개선, 정치운동을 통해 소외 계층의 공감을 얻어야지요. 다만 폭력시위는 다분히 유도된 측면도 있지만, 오는 8일 공식 취임식 때 비폭력투쟁을 선언하겠습니다. 경찰이 밟고, 잡아가도 저항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경영계는 산별 교섭을 거부하고 있는데 이들을 테이블로 끌어낼 복안은 있습니까. “산별노조가 정착되면 기업의 부담이 줄어든다는 것을 설득하겠습니다. 주택, 교육, 의료비 등 기업의 후생복지비 지출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부분을 정부와 함께 교섭하면 기업이나 노동자나 걱정없이 일할 수 있게 되지 않겠습니다. 이를 위해 우선 노동장관을 만나겠고, 산자부, 행자부, 교육부 등 누구라도 찾아가겠습니다.” 이 위원장은 누구와도 대화를 피하지 않겠다며, 자신은 ‘더디게 발전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열려 있음을 뜻하는 이 말은 온건파로 분류되는 이유인 듯도 싶었다. yshin@seoul.co.kr ■ 이석행 위원장은 1958년 충남 청양 출생. 광산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 이후 기성회비를 한번도 못내고 초등학교를 졸업했다.14세 때 광산에 들어가 아침 여섯시부터 노동자로 일하고 밤 1시까지 재건학교에서 공부한 뒤 귀가하는 생활 끝에 학비를 모아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학비를 보태주던 누나가 결핵에 걸리는 바람에 서울로 올라가 구두닦이를 했다. 또다시 2년간 돈을 벌어 고향에 내려와 중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는 박정희 대통령 때 방위산업 육성을 위해 정책적으로 세운 전북기계공고(익산)를 다녔다. 돈이 안 들고 취직 걱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977년 대동공업에 병역특례자로 입사해 이때부터 금속노동자가 됐다.1980년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위원장을 2회 지냈다. 해고된 뒤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사무차장, 전국자동차산업연맹 부위원장을 지냈고 1988년 전국금속산업연맹 부위원장을 거쳐 2004년 민주노총 4기 이수호 위원장의 러닝메이트로 사무총장이 됐다.2005년 민주노총 내 금품비리 혐의로 지도부가 총사퇴할 때 물러났다. 민주노총 내 온건파인 국민파로 5기위원장 당선. 월수 150만원 정도의 선반공 임금과 강의료, 아내가 액세서리에 구슬을 붙여주고 받는 돈 60만원으로 살아가는 노동자다.
  • 백남준 1주기 추모행사 다양

    세계적인 미술거장 백남준이 타계한 지 29일로 1년이 됐다. 존 케이지 탄생 100주년 추모굿을 벌이기 위해 2012년까지는 살아있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그였다. 백남준은 그의 예술생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미국의 현대음악 작곡가 존 케이지를 1958년 처음 만났다. 이듬해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그의 첫 퍼포먼스 ‘존 케이지에게 바치는 경의’를 펼치면서 피아노를 전복시켰다. 그의 1주기 추모를 위해 여러 행사가 열린다. 백남준의 대표작 ‘다다익선’이 설치돼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오전 11시 추모식이 거행된다. 1977년 백남준과 결혼한 평생의 예술동반자 구보타 시게코 여사가 1시간10분짜리로 직접 편집한 ‘마이 라이프 위드 남준 백’이 상영된다. 이 영상에는 그의 대표적 해프닝과 34년만에 찾은 86년의 한국 여행,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병원에서 부인 및 간호사와 함께 성적 자극을 통한 마사지 치료과정 등이 담겨 있다. 오는 3월23일∼5월6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백남준 1주기 추모전’을 통해 그의 비디오 아트 발전과정을 돌아볼 수 있다. 29일 오후 2시 서울 인사동 쌈지길에서는 인간문화재 무속인 김금화씨가 백남준 추모굿을 벌인다. 백남준은 요셉 보이스 추모굿을 갤러리 현대 뒷마당에서, 샤롯 무어맨 추모굿은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열었다. 또 갤러리 쌈지에서는 3월18일까지 ‘백남준과 플럭서스 친구들’이란 전시회를 통해 백남준이 초기멤버로 활동했던 1960년대 전위예술 운동 플럭서스(Fluxus)를 조명한다.(02)736-0088. 그의 대표작 가운데 3대 위성중계 작품인 ‘굿모닝 미스터 오웰’ ‘바이바이 키플링’ ‘랩 어라운드 더 월드’ 등 주요 비디오 작품이 상영된다. 어린이 50여명이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를 주제로 그린 그림과, 한복예술인 이지영 작가의 설치작품 ‘백남준 꽃상여 타고 다시 떠나다’도 전시된다. 서초구 잠원동 필립강갤러리에서는 2월28일까지 사진작가 이은주(60)씨가 찍은 백남준 사진을 전시하는 ‘아, 백남준’전이 열린다. 이씨는 예술가의 삶을 렌즈에 담아 온 작가로, 뉴욕 소호작업실에서의 백남준 모습도 처음 선보인다.(02)517-9092.윤창수기자 geo@seoul.co.kr▶관련기사 25면
  • “이순신표 거북선 곧 복원·공개”

    “이순신표 거북선 곧 복원·공개”

    415년 전에 제작된 거북선(귀선·龜船)에서의 화룡점정은 무엇일까. 십중팔구는 용머리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거북머리가 아닌 용머리를 달았을까. 임진왜란 중 이순신 장군이 임금에게 올린 장계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 1592년 6월14일)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있다.“신이 일찍이 섬 오랑캐의 변란을 염려하여 전선과는 다른 거북배를 만들었습니다. 이물에는 용의 머리를 달고, 그 아구리로는 대포를 쏘았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거북이가 천년을 살면 용, 즉 ‘신귀’가 된다는 이야기(龜變化神龜)가 있다. 아울러 조자용씨가 소장한 ‘귀선도’에 보면 “신귀는 사신(四神)과 사령(四靈)에서 한자리를 차지해 벽사와 길상의 상징이 되어 용왕의 사자로서도 큰 임무를 맡았다.”라고 돼 있다. 따라서 거북선에 용머리를 단 것은 신귀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전통 한선(韓船)기능 전승자로 국내 유일한 고대선박 연구가 이원식(73) 원인고대선박연구소 소장. 백제 사신선, 통일신라 교관선, 고려 완도선 등 지난 42년동안 36건의 고대선박을 연구·복원제작해 이 방면에 거의 독보적인 존재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거북선박사 1호’라는 공식명함을 하나 더 추가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새로운 영역을 쌓았다. 지난 달 실시된 한국해양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심사에서 그가 제출한 논문 ‘1592년 귀선의 주요 치수 추정에 관한 연구’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된 것. 학위수여식은 오는 2월21일. 여기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그가 발표한 연구논문의 내용이다.2006년말 현재 역사 서적이나 교과서 등에 게재돼 있는 귀선도(龜船圖)나 정부 기관에 전시된 모형선은 ‘1795년식 거북선’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해 1592년 이순신 수군절도사가 창제한 거북선이 아니라 203년이 지난 1795년(정조19년) 규장각에서 편찬한 ‘이충무공 전서’의 ‘귀선지제’에 근거해 만들어졌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따라서 1592년에 일본군의 침략전쟁때 해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1592년식 거북선’에 대한 실체는 밝혀지지 않아 연구과제로 남아 있었다. 이 소장이 연구한 대목이 바로 이 ‘1592년식 거북선’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젊은이 못지않은 왕성한 연구의욕으로 400여년 전의 베일을 어느정도 벗겨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지난 17일 오후 경기도 용인시 백암면에 위치한 그의 자택을 찾았다. 강아지 세마리가 먼저 나와 꼬리치며 낯선 방문자를 맞이한다. 현관 입구에는 ‘한선 기능 전승자’‘원인고대선박연구소’라는 문패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때마침 그는 1592년식 거북선의 복원작업을 위한 설계도, 즉 선체 선도(線圖)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우선 1592년식 거북선이 1795년식 거북선과 다른 점을 비교해달라고 요청했다. 첫번째는 크기나 규모면에서 1795년식에 비해 전체적으로 30%정도 작은 것이 특징. 따라서 선체 전장의 길이가 1795년식(34.05m)보다 7m가량 작은 26.27m이고, 선체 선폭은 1795년식(9.15m)보다 1.9m 좁은 7.06m라는 것. 배 밑창에서 갑판까지의 깊이 또한 1795년식의 2.34m보다 다소 낮은 1.92m라고 설명했다. 두번째로는 대포의 포혈.1592년식의 경우 좌우측 각각 6개씩의 포혈이 있는 반면 1795식은 이보다 더 많은 10개씩이다. 또한 1592년식에는 없는 소구경포혈이 1795년식 거북잔등 부분에 설치돼 있다. 특히 용머리의 경우 1592년식은 대포를 발사했으나 1795년식은 유황염초를 피웠다고 했다. 아울러 1795년의 용머리 배치가 90도로 꺾인 반면 1592년식은 이보다 완만한 30∼40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 이밖에 1592년식에는 거북잔등에 창을 꽂아 적이 오르지 못하도록 했으나 1795년식은 거북그림을 그려넣었다는 것이 큰 차이점이라고 이 소장은 밝혔다. 이같은 연구결과의 근거에 대해서는 “1592년 당시 이순신 수군절도사의 일기와 장계,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등 관련 전적(典籍)에 기록된 거북선의 주요수치와 기타 선박 관련자료 등을 참고했다.”고 부연했다. 여기에 그동안 대한조선학회지 등에 발표한 거북선 관련 선행 연구논문을 활용했다. 특히 전통한선의 제1번 기본치수가 되는 ‘1592년식 거북선의 저판치수자료’ 7건을 발굴했으며 이것이 1592년 거북선 주요치수 연구의 계기가 됐다. 그렇다면 1592년식 거북선은 언제 복원될까. 이 소장은 현재 현대중공업 조선해양연구소에서 ‘한국 전통선박 복원 조사연구’ 프로젝트(책임연구원 민계식 부회장)의 사외연구원으로 몸담고 있다. 이 연구소는 자체적으로 전통 고대선박 복원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으며 지난해에만 1795년식 거북선과 조선통신사선 등 정밀모형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 소장이 현재 1592년식 거북선의 선도 및 공작설계도 작업을 마무리 중이서 이르면 올 봄 실험용 모형정도는 언론에 공개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거북선연구에 대한 논의는 1958년 숭실대 최영희 교수의 ‘귀선고(龜船考)에서 처음 대두되었으며 1964년을 전후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 소장 역시 이 무렵 한강유역과 서해안 및 남해안의 전통 한선의 조선기법을 채록하면서 고대선박 연구에 뛰어들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공고 4학년때 6·25가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입대했다가 공군사관학교 조종간부후보1기로 군복무를 마쳤다. 제대후 제약회사인 ‘한국화이자’에 기계담당 공무직으로 1963년 입사했지만 고대선박 연구에 꾸준히 관심을 가졌다.1965년에 ‘국방사학회’에 가입한 뒤 그해 첫 논문인 ‘귀선의 과학적 연구’를 발표했다. 내친 김에 ‘원인(元仁)고대선박연구소’라는 민간연구소를 설립했다. 1969년에는 은사로 모시는 김재근 서울대 조선공학과 교수(작고)와 함께 아산 현충사에서 최초의 거북선 복원작업에 들어갔다.1971년에는 인천대림조선소에서 처음으로 원형의 2분의1 1795년식 거북선을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이 거북선은 극영화 ‘이순신’(김진규 감독)에 등장했다. 이후 거북선 복원에만 10여차례, 신라시대 전선(戰船), 장보고 무역선, 백제 사신선, 완도 고려선, 조선통신사선 등 30여 척의 고대선박을 복원, 박물관 등에 전시했다. 아울러 ‘한국의 배’‘고대선박 발달사’ 등 4권의 저서를 냈고 논문은 수십편을 발표했다. 그는 뒤늦게나마 정식 학위를 취득하려고 검정고시와 독학사 과정을 거친 뒤 2002년 해양대 대학원에 진학하는 집념을 보였다.2004년 석사 학위 논문이 통과되자 곧바로 박사과정을 밟았고 일주일에 2∼3일씩 부산과 용인을 오가며 노력한 끝에 이번에 그 결실을 보았다. “앞으로는 기존의 1795년식 거북선은 1592년식으로 대체되어야 하며 하고 이에 따른 후속 작업은 매우도 중요합니다. 아울러 잘못 알려진 우리의 전통 한선에 대한 수정작업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해요.” 주말마다 찾아오는 손자손녀들을 만날 때마다 늘 강조하는 말이 있다.學而時習之 不亦說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34년 서울 출생 ▲50년 경기공고 4년 재학때 학도병 입대 ▲65년 원인고대선박연구소 설립 ▲69년 문화공보부 현충사 귀선 고증위원 ▲85년 한국과학사학회 정회원 ▲92∼96년 해군사관학교 해저유물발굴단 자문연구위원 ▲98년 대한조선학회 정회원 ▲2001년 독학사 검정고시 합격, 한국해양대학 장보고연구소 연구원 ▲04년 해양대 공학석사 ▲06년 공학박사 # 주요 상훈 전통한선기능 전승자(노동부장관 지정), 대통령 표창(01년, 한선기능전승 유공) 등 # 주요 작품실적 현충사 거북선(69년), 중앙정보부·해군사관학교 거북선(71년), 미국EXPO 거북선(84년) 등 수십여 작품. 그외 장보고 전선, 조선통신사선, 완도 고려선, 신라 교역선, 백제사신선, 통나무쪽배 등 30여 작품제작
  • [씨줄날줄] 닥터지바고 ‘공작’ /최태환 수석논설위원

    파스테르나크는 시인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 모른다.‘닥터 지바고’는 그의 유일한 장편소설이다. 문장 한 줄 한 줄이 시다.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이 시로 쓴 소설이라면, 닥터 지바고는 소설로 쓴 시다.‘소나기’로 익숙한 황순원도 시에서 출발했다. 그의 소설이 시의 연속과 같은 감동을 주는 이유다.‘하얀전쟁’의 작가 안정효가 어느 자리에서 닥터 지바고를 번역해 보고 싶다고 했다. 원작의 깊이를 좀 더 진하게 전하고 싶어서다. 닥터 지바고는 탄생부터 비극이었다. 볼셰비키 혁명의 그림자와 허무주의 이상이 부각됐다 해서 출간되지 못했다.1958년 작가의 조국 옛 소련이 아닌 서방에서 먼저 나온 이유다. 의사이자 시인인 주인공 지바고와 애인 라라는 일상의 삶조차 개조를 요구하는 격동의 한가운데서,‘혁명’ ‘역사’라는 명분 대신 심리적 망명자의 길을 선택한다. 작가의 감성과 이상이 녹아있다. 작가는 후일 “혁명의 격동기를 살았던 동시대인에 대한 빚갚음으로 작품을 구상했다.”고 했다. 영화로도 닥터 지바고는 친숙하다.1965년 제작됐다. 데이비드 린 감독 특유의 영상미가 너무 깊게 영화팬들에게 남아있다. 제작자는 며칠전 타계한 카를로 폰티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여배우 소피아 로렌의 남편이었던 사실이 자랑스럽다고 했던 그다. 설원과 금지된 사랑, 러시아 전통악기 발랄라카의 애잔한 음색이 지금도 선연하다. 닥터 지바고의 첫 출간이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공작으로 이뤄졌다고, 최근 외신이 전했다. 영국의 선데이 타임스다. 유럽 친구에게 보내는 원고를,CIA가 몰래 촬영해 출간했다는 것이다. 원고를 빼돌리기 위해 몰타에 항공기를 2시간 강제 착륙시켰다고 설명했다. 예술을 탄압하는 나라라는 사실을 알려, 소련정부를 곤경에 빠트리기 위해서였단다.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의 첩보·공작전의 단면이다. 파스테르나크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하지만 거절했다. 소련정부의 압력 때문이었다. 보도가 진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다. 아울러 정치적 의도에서 빛을 봤건 아니건 의미가 없다. 닥터 지바고가 지금 우리 곁에 살아있다는 사실이 중요하고, 행복하다. 최태환 수석논설위원 yunjae@seoul.co.kr
  • 인스턴트 라면 개발 안도 닛신식품 회장 별세

    |도쿄 이춘규특파원|‘즉석(인스턴트) 라면’을 세계 처음으로 만든 안도 모모후쿠 일본 닛신식품 회장이 5일 오사카부 이케다시의 한 병원에서 심장마비로 별세했다.96세. 즉석 라면은 현재 전세계에서 한 해 857억개나 팔리는 대중소비식품. 1910년 타이완에서 태어난 안도 회장은 1933년 일본으로 건너왔다. 대학시절 타이베이와 오사카에 의류회사를 운영하기도 했다.2차대전 종전 직후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던 일본 국민을 위해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라면을 개발하기로 마음먹고 1948년 닛신식품의 모태를 설립했다. 전후 자신이 이사장을 하던 신용조합이 도산, 한때 무일푼의 나락에 빠지기도 했으나 추운 밤 라면을 먹기 위해 사람들이 길게 줄을 늘어선 것을 보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라면을 개발하기로 작심했다. 이런 배경에서 자택 실험실에서 1년간 하루도 쉬지 않고 하루 3∼4시간씩 실험을 계속한 끝에 48세이던 1958년 즉석라면인 ‘치킨라면’ 만들기에 성공했다. 59년에는 ‘라면에서 미사일까지’ 판매한다는 미쓰비시상사와 판매제휴에 성공, 당시 부상하던 슈퍼를 통해 즉석라면을 판매하며 불티나게 팔려나가 ‘식품대량소비시대’를 열었다. 무일푼에서 성공한 경험을 토대로 ‘기상천외의 발상’이란 책을 내 새롭게 사업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미국 출장 중 자신의 즉석라면을 미국인이 종이컵에 넣은 뒤 물을 부어 먹는 것을 보고 착안,1971년에는 뜨거운 물만 부으면 되는 ‘컵라면’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안도 회장은 닛신식품을 매출 27억달러(약 2조 5000억원)의 회사로 성장시켰으며 2005년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2005년에는 주위에 “올해 골프 라운딩을 100회 하겠다.”고 다짐,101회나 소화했을 정도로 건강체질이었다고 주치의가 밝혔다. 타계 전날인 4일에도 회사 신년회에서 30분간 신년사를 하기도 했다.taein@seoul.co.kr
  • 창립 60돌 LG그룹 어제와 오늘

    창립 60돌 LG그룹 어제와 오늘

    한국경제를 떠받치는 대표적인 그룹인 LG그룹이 5일 창립 60돌을 맞는다.LG는 보다 젊어진 경영진과 첨단기술을 앞세운 진취적인 경영방침을 발판삼아 100년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전략과 그 실행을 위해 고심하고 있다. ●락희(樂喜)를 아십니까 2006년 기준 7조 5650억원의 자본금과 매출 80조원대,14만명의 대가족을 거느린 LG의 역사는 1947년 1월5일 부산 서대신동에서 시작된다. 당시 41세였던 구인회 창업회장은 사돈사이였던 고(故) 허준구 GS건설 명예회장과 함께 화장품을 생산하는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를 세워 LG의 초석을 놓았다. 3년 뒤의 한국전쟁으로 국민의 의식주가 황폐화된 가운데 LG는 빗, 비눗갑, 칫솔, 식기류 등의 플라스틱 제품을 시작으로 생활필수품 시장에 뛰어들었다. 67년 국내 최초의 민간정유회사인 호남정유를 설립하는 등 성장을 거듭했고 84년 1월부터 럭키금성그룹으로 새로 태어났다. 그후 95년 구본무 회장이 취임하면서 세계화와 21세기 경영을 위한 포석으로 그룹명칭을 LG로 통합했다. ●럭키크림에서 초콜릿·샤인폰까지 세상에 락희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알린 제품은 ‘럭키크림’이다. 갈색 용기에 당시 미국 유명 여배우의 얼굴을 담은 이 제품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54년 최초의 국산치약인 ‘럭키치약’을 개발, 당시 국내치약시장을 독점하던 미국의 콜게이트 치약을 제치고 국내 시장을 이끌게 된다. 특히 66년에는 가루형 합성세제 ‘하이타이’를 내놓으며 주부들의 사랑을 받았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사업영역을 확장하던 LG는 58년 금성사(현 LG전자)를 설립했다. 이듬해 국내최초로 라디오를 생산, 전자산업의 신기원을 개척했다.60년대 접어들면서 LG는 국산 가전제품시대를 열었다.60년에는 선풍기,61년에는 자동 전화기에 이어 65년에는 국내 최초의 국산 냉장고를 선보였다.70년대에는 에어컨, 세탁기, 컬러TV 등을 내놓으면서 가전제품의 대명사로 불리게 된다. 82년 국내 최초 마이크로 컴퓨터 ‘마이티’를 개발하면서 LG는 첨단제품 시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95년에는 코드분할다중접속(CDMA)방식 상용화에 성공했다.2003년에는 국내 제약사중 처음으로 미국 FDA의 정식승인을 받은 국산 신약 팩티브를 선보였다.2004년에는 세계 최초의 지상파DMB폰,2005년에는 생방송을 멈출 수 있는 타임머신TV를 개발했다. 지난해에는 1000만대 판매를 앞두고 있는 ‘초콜릿폰’과 후속작 ‘샤인폰’을 내놓았다. 또 100인치 LCD패널이 세계 최대 LCD로 기네스북에 오르는 등 기술을 인정받았다. ●100년 기업을 향한 LG 지난 2일 시무식에서 구본무 회장은 혁신과 공격적인 경영을 주문했다.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면 무한경쟁시대에 도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 잡음없이 LS그룹,GS그룹이 분가한 뒤 ‘일등LG’를 천명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지난해 LG전자 등 주력사업분야의 부진을 놓고 LG그룹의 미래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전자·정보통신 등 주력분야의 성패에 LG그룹의 미래,LG그룹의 100년이 달려 있다. 박경호기자 kh4right@seoul.co.kr
  • [그의 삶 그의 꿈] 책에 미친 책 사랑… 한국 출판계의 죽비

    [그의 삶 그의 꿈] 책에 미친 책 사랑… 한국 출판계의 죽비

    글 최준 시인, 사진 한찬호 사진작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그를 만나기 전에 책을 한 권 읽었다. 굳이 말하자면 한 사람의 자전 에세이라 할 수 있을까. 회고록 엇비슷한데, 주인공도 젊고, 무엇보다 재미가 있어서 단숨에 읽어치웠다. 글쓴이는 전문 글쟁이가 아닌데도 이야기 사이사이에다 맛깔스런 양념을 칠 줄 알았고, 좀 그렇다 싶은 부분에 이르러선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의뭉스럽게, 미련 없이 커튼을 내릴 줄도 알았다. 책의 주인공은 58년 개띠. 젊다. 그러나 육체적 젊음 이상으로 활달하고 부지런한 사람. 의지가 강해서 한 번 마음먹은 일이면 끝을 보는 성격. 반면 냉정한 면도 없지 않아서 상황 판단이나 사태 파악에 큰 실수가 거의 없다. 책 더미에 묻혀서 청춘을 다 보냈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사람. 이렇게 일방적으로 머릿속에다 대략 정리하고, 책의 주인공을 만나러 홍대 입구로 간다. 사무실을 찾아들어 건네주는 명함을 받았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그렇다. 다소 생소하지만 그는 지금 출판과 출판 마케팅에 관한 연구를 하는 사람이다. 이에 관한 강의도 하고, 이런 저런 관련 매체에 글도 많이 쓴다. 그의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는 출판인이나 출판인을 꿈꾸는 이들을 위한 연구소인 셈인데, 이에 관한 잡지도 만들고 단행본도 많이 냈다. 연구소에서 그는 책에 관련된 책만 펴냈다. 열정의 근원 그는 출판이 주먹구구식의 한탕주의가 아닌 과학이며 경영이라 한다. 복권당첨 같은 베스트셀러의 환상에만 빠져 있는 우리나라의 출판 현실과는 정반대의 지론을 펴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출판사들이 갖고 있는 근시안적 안목이 무엇보다 큰 문제인 듯하다. 소신도 의지도 없이 현실에만 안주하려는 출판인들의 안일한 태도는 그의 제1의 비판 대상이다. 그는 출판 전반이 어렵게 된 현실도 눈여겨보고 있다.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이런 출판 현실을 낳았지만 가장 실제적인 요인으로 서적의 인터넷 할인판매제도를 꼽는다. 모든 상거래 행위에는 일종의 룰이 있다. 서적 인터넷 할인판매는 이 룰을 깨뜨리는 행위인 것이다. 책값을 할인해 주고, 끼워 팔기도 하는 이런 변칙적인 상행위에 일부 출판사들이 동참하면서 오랫동안 오프라인의 한 축을 형성했던 동네 서점들이 사라졌다. 그는 이 현상을 출판계의 ‘자기발등찍기’라 말한다. 사무실에서 마주앉아 있는 동안 그는 책 얘기만 했다. 어느 특정한 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 출판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관한 자신의 소신과 견해를 말했다. 종이책의 소멸이니 출판계의 위기이니 말들이 많지만 그는 한국 출판의 미래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도박판에 들어앉은 듯 재수 경영에 목숨 건 일부 출판인들처럼 주먹구구식이거나 감각에만 의존하는 견해가 아니다. 전문가다. 전문가답게 자신만의 대안과 구체적인 제안을 가지고 있다. 우리 출판계에서 보기 드문 사람이다. 책을 정말 사랑해서 출판계에 뛰어들었고 그 애정에 비례하는 열정을 가지고 출판과 마케팅을 연구하고 있는 사람. 책에 미친 사람 그가 자신의 저서에 쓴 프롤로그에 인상적인 부분이 있다. 어느 날 그의 연구소로 만화전문 출판사 사장이 찾아왔다. 영업자를 구해야 하는데 어떤 사람이 좋을지 난감하다는 것이었다. 만화에 미친 사람을 뽑으세요. 그가 말했다. 그래도 경험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출판사 사장이 반문했다. 결국은 다 열정입니다. 만화책에 미친 사람이 만화를 팝니다. 그가 대답했다. 속는 셈치고 사장은 만화에 미친 사람을 직원으로 채용했다. 어땠을까? 그 결과는 예측 가능하다. 제안이 실패로 돌아갔다면 안 썼을 테니까. 그는 열정을 최우선으로 꼽는다. 열정은 사랑의 현실적인 발현이다. 출판 입문에서 현재까지 그는 오직 책 사랑으로, 책에 대한 열정으로 살아왔다. 그의 출판사 입문은 1982년이었다. 출판 편집자 생활 1년에 출판 영업자 15년,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를 세우고 출판 비평가로 9년, 그러니까 25년 동안을 책과 살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니 그의 인생은 책으로 깔린 길로 책을 지고 가는 셈이다. 독자들은 그를 잘 모를지 모른다. 알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출판에 관련하고 있는 사람들은 다 안다. 그는 한국 출판계의 죽비다. 입바른 소리 잘 하고, 불의를 못 참고, 누구보다도 출판계의 앞날을 걱정하고 그 대안에 골몰하고 있는 사람이다. 인문학이 부활해야 격동과 혼란의 시기였던 1980, 90년대에 그는 《창작과 비평사》의 영업담당자였다. 출판사 영업담당자의 업무는 서점을 상대로 책을 파는 일. 그러니 출장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전국을 돌아다녔다. 이때 그는 모든 출판인의 꿈인 밀리언셀러도 여러 권 경험했다. 이러한 경험들이 1998년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를 문 열게 했다. 이때부터 그는 출판비평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북페뎀》, 《기획회의》와 같은 출판 발전을 모색하는 잡지도 발간한다. 자신이 출판사 영업담당자로 있던 1980년대를 회상하며 그는 인문학의 소멸을 많이 걱정했다. 인문학은 모든 분야의 근간이 되는 학문이다. 80년대는 누가 뭐래도 인문학의 시대였다. 대학 정문 부근에는 적어도 한두 개의 인문학 전문 서점들이 있었고 젊은이들은 그곳에서 역사와 현실에 대한 눈을 뜨고 시대의 모순과 불행을 바로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웬만한 출판사에서는 인문학 ‘총서’나 ‘신서’ 시리즈 하나쯤은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기적 승부의 단맛에 취한 출판사들이 인문학 서적 출판을 멀리하면서 인문학이 설 땅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는 인문학의 위기가 학자와 출판인 모두의 책임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데모’보다 ‘자기반성’을 먼저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출판에 관한 활발한 토론의 장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자신의 발언에 대한 반론도 있기를 바란다. 논쟁 가운데서 대안을 발견하고 길을 찾자는 것이다. 외부 상황에 일희일비하는 소용돌이 속을 벗어나지 못하는 출판 현실을 바라보는 그의 안타까운 마음이 느껴져 마음이 짠해진다. 한기호. 그는 책 더미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책 더미 속에다 몸을 묻는 사람이다. 책에 깔려 죽을지도 모른다. 혹시 그게 자신에게 바라는 그의 마지막 희망은 아닐까.     월간 <삶과꿈> 2006.12 구독문의:02-319-3791
  • 이미경 CJ 부회장이 ‘라디오 스타’ 재개봉한 까닭

    이미경 CJ 부회장이 ‘라디오 스타’ 재개봉한 까닭

    ‘영화계의 큰 손’으로 불리는 이미경 CJ엔터테인먼트 부회장이 이준익 감독의 영화 ‘라디오 스타’에 각별한 애정을 표시해 눈길을 끌고 있다. 18일 CJ에 따르면 CJ계열 멀티플렉스인 CJ CGV는 현재 서울 압구정, 인천, 동수원, 부산 동래 등 전국 4개관에서 이미 종영됐던 ‘라디오 스타’를 재상영하고 있다. 지난달 16일부터 재상영되기 시작한 ‘라디오 스타’는 30∼50대 관객으로부터 꾸준한 호응을 받고 있으며 20일까지 CGV 4개관에서 상영될 예정이라고 CGV측은 밝혔다. 이미 종영된 영화를 재개봉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로 ‘라디오 스타’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던 이 부회장이 직접 지시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친누나인 이 부회장은 평소 CJ 엔터테인먼트 관계자들에게 “영화시장의 잠재수요 고객인 40∼50대 관객의 발길을 영화관으로 유인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 개발해야 한다.”고 역설해 왔으며 ‘라디오 스타’의 CGV 재개봉도 이 같은 경영철학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졌다고 CJ측은 설명했다. ‘라디오 스타’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은 이 부회장이 “‘라디오 스타’ 같은 영화가 대표적인 40∼50대 관객의 감성에 맞는 좋은 영화라고 할 수 있으며 40∼50대는 10∼20대에 비해 반응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관람시기를 놓친 관객을 위한 재상영을 적극 검토해 보라.”고 관계자들에게 지시했다는 것.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40∼50대 관객의 수요 개발에 특히 관심이 많은 것 같다.”면서 “주요 계열사에서도 40∼50대 관객의 수요를 유발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1958년생인 이 부회장은 재작년부터 CJ그룹의 차세대 핵심사업으로 손꼽히는 엔터테인먼트 부문의 경영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2006 도하 아시안게임] 서장훈 중국전·카타르전 벤치신세 왜?

    |도하(카타르) 임일영특파원| 2006년 12월13일은 한국 농구사에 악몽으로 남게 됐다. 한국은 바스켓볼 인도어홀에서 열린 도하아시안게임 남자 농구 8강전에서 중국에 52-68로 패배,1958년 도쿄 대회 이후 48년 만에 노메달이라는 치욕을 당했다. 한국농구가 고개 숙인 날 공교롭게 10여년 동안 대표팀의 간판 센터로 활약한 서장훈(32·207㎝·삼성)은 코트에서 볼 수 없었다. 예선 4경기 중 2경기 선발 출장을 비롯, 평균 16분여 동안 9점에 3.3리바운드를 책임졌지만 정작 중요한 카타르와 중국전에선 줄곧 벤치를 지킨 것. 최근 눈에 띄게 성장한 하승진(21·223㎝)은 이날 16점 16리바운드의 맹활약을 펼쳐 한국농구의 희망임을 증명했다. 다만 포스트에서 분전하던 김주성(27·205㎝·동부)이 일찌감치 파울트러블에 걸리면서 경험이 일천한 하승진을 도와줄 빅맨이 아쉬웠고 자연스레 시선은 벤치의 서장훈에게 쏠렸다. 공식적인 결장 이유는 허리 부상 및 목 통증. 하지만 소속팀 삼성에서 외곽플레이가 뼛속 깊이 밴 서장훈에게 단 3∼4주의 훈련을 통해 포스트플레이를 기대하기는 무리였다. 현 대표팀의 센터 요원은 서장훈과 하승진뿐. 김주성과 김민수(24·200㎝·경희대)는 파워포워드에 가깝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서장훈 대신 다른 센터를 뽑아야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대표 예비명단 18명 가운데 서장훈을 대체할 빅맨이 아예 없다는 것이 한국농구의 서글픈 현주소다.최부영 감독은 “태릉에서 훈련시켜보니 장훈이는 이미 센터의 본능을 잊은 상태였다. 골밑을 비비고 들어가고 리바운드를 위해 박스아웃을 하기보다는 3점라인에서 패스를 요구하기 일쑤였다.”고 설명했다. 정상급 기량을 지녔지만 ‘장신슈터’로 변한 서장훈이 설 자리가 없었던 셈. 최 감독은 또한 “장훈이도 내 주문을 이해하고 알겠다고 했지만, 막상 예선 4경기를 뛰게 해보니 또다시 삼성에서의 플레이가 나왔다. 어차피 승진이를 업그레이드시키지 않고는 미래가 없는 상황에서 장훈이를 기용할 이유가 없었다.”고 털어놓았다.일부에서 제기되는 불화설에 대해서는 “감정의 골이 생길 이유가 없다. 태릉에 있을 때부터 누누이 세대교체의 필요성을 설명했다.”고 강조했다.반면 ‘중국의 서장훈’ 격인 왕즈즈(29·214㎝)의 활약은 대조적이었다. 야오밍보다 한 발 앞선 00∼01시즌 미프로농구(NBA)에 데뷔한 뒤 4시즌을 뛰고 유턴한 왕즈즈도 자국 내에서의 인기는 별로다. 서장훈처럼 골밑 몸싸움을 기피하고 외곽에서 3점슛을 즐겨 던지는 탓. 그러나 왕즈즈는 49-42까지 쫓긴 4쿼터에서 홀로 11점을 몰아쳐 추격에 찬물을 끼얹었다. 물론 하승진이 이젠리엔(19·216㎝)에 묶여 미스매치를 이용한 손쉬운 득점이 대부분이었지만 단 13분을 뛰면서 16점을 올린 왕즈즈의 모습에 벤치에 앉은 서장훈이 계속 오버랩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argus@seoul.co.kr
  • 국립의료원 간호대, 성신여대에 합병

    50년 전통의 국립의료원 간호대학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내년부터 성신여대 간호학과로 탈바꿈한다. 보건복지부와 교육인적자원부는 현행 3년제인 국립의료원 간호대학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성신여대로 넘겨 4년제 간호대학으로 운영한다고 12일 밝혔다. 성신여대는 다음주부터 2007학년도 신입생 지원서를 접수한다. 기존 재학생은 3년 과정만 마친 뒤 바로 졸업하거나 성신여대에서 추가로 1년을 더 다니고 졸업할 수 있다. 현재의 서울 을지로6가 캠퍼스는 국립의료원 시설로 활용된다. 전후 국가재건기 의료인력 확충을 위해 1958년 스칸디나비아 3국(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의 도움을 받아 ‘국립의료원 간호학교’로 개교했으며 ‘국립의료원 간호전문학교’(77년),‘국립의료원 간호전문대학’(79년)을 거쳐 99년 3월 현재 이름으로 개명했다. 지금까지 간호사 1925명이 배출됐다.김태균기자 windsea@seoul.co.kr
  • [씨줄날줄] 3000억달러 수출탑/육철수 논설위원

    우리나라가 지난 5일 오후 6시에 수출 3000억 달러를 달성했다. 세계에서 11번째라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몇달 전인 1948년 2월, 무역선 ‘앵도호’가 홍콩과 마카오에 건어물과 한천을 내다 판 이후 58년 만이다. 첫 해에 1900만 달러이던 수출액이 무려 1만 6000배로 불어났으니 실로 격세지감이다. 수출전선에서 땀과 열정을 쏟은 무역인들의 노고에 그저 머리숙여 감사할 뿐이다. 수출한국의 오늘이 있기까지 빼놓을 수 없는 이는 아무래도 박정희 전 대통령일 것이다. 그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전통적 가치관을 스스로 ‘상공농사’로 바꾸고 “수출만이 살 길”이라며 무서운 집념을 보였다. 덕분에 우리의 무역사는 1964년 11월30일 수출 1억 달러를 돌파하면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게 된다. 박 전 대통령은 ‘수출총사령관’을 자칭하며 팔 수 있는 것은 모조리 파는 ‘수출 제일주의’를 밀어붙였다.1억 달러를 달성한 날은 ‘제1회 수출의 날’로 지정됐고, 지금까지 ‘무역의 날’로 기념되고 있다. 자신감을 얻은 우리나라는 1971년 10억 달러,1977년 100억 달러,1995년 1000억 달러 고지를 차례로 넘었다.10억 달러 달성에는 한 해 1억 달러 이상 수출된 가발이 효자노릇을 톡톡히 했다.100억 달러 돌파에는 종합상사들이 중심에 섰다. 이어 수출 주종목이 중화학 제품으로 바뀌면서 수출액은 해마다 목표 이상을 거두게 된다. 당시 대통령의 닦달이 어찌나 심했던지, 상공부 직원들은 연말이면 목표액을 채우려고 수출품을 실은 배를 일단 항구에서 통관시켜 공해상까지 나갔다가 돌아오게 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지곤 했다. ‘잘 살아 보자.’는 국민의 호응도 대단했다.60∼70년대 ‘공돌이·공순이’로 불리던 구로공단 근로자들은 수출의 첨병이었다. 인권유린과 노동착취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그들의 땀이 오늘의 성취에 밑거름이 됐음은 물론이다.1964년에 수출 1억 달러를 돌파한 나라는 한국과 과테말라 등 12개국이었다. 그런데 한국을 제외하고는 모두 중진국 진입에 실패했다는 점은 국가지도자와 기업, 그리고 국민의 호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일깨워 준다.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OUR STORY] 눈내리는 플롯폼에 서보셨나요

    [OUR STORY] 눈내리는 플롯폼에 서보셨나요

    7년 동안 330여 차례나 기차여행을 한 사람이 있다.1주일에 최소한 한번 이상은 기차를 타야만 가능한 숫자다. 거리로는 22만 2000여㎞. 지구를 다섯바퀴 돌고도 남는 거리를 국내선 기차로만 여행한 셈이다.1999년 이후 모아온 기차표가 1200여장에 달하고, 기차역 주변 음식점 명함만 600여장이다. 가슴에 KTX 1호 승객이란 ‘훈장’도 달고 있다. 이만하면 우리나라에서 기차여행 좀 ‘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겠다. 다소 부족한 느낌이 든다면 이런 건 어떨까. 의자 하나만 달랑 놓인 간이역을 비롯해, 경전선과 영동선 일부를 제외한 국내의 모든 역에서 기차를 타고 내려 보기도 했다. 폐선이 된 기차역을 찾아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축구를 워낙 좋아해 전북 현대의 경기가 열리는 곳이라면 불원천리, 기차를 타고 찾아 간다. 홈구장인 전주까지는 461호 첫 열차부터 마지막 열차인 489호까지 시간대별로 모두 타보았다. 직업상(그의 현재 직업은 기차여행 가이드다) 다녀온 것을 제외하더라도, 강원도 정동진역에 내린 것만 무려 80여회에 달한다. 32세의 청년 박준규. 우리나라 기차여행의 대표선수다. 그와 함께 강원도 북부의 고원도시 태백시를 다녀왔다. 글 사진 태백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박준규씨와 떠난 기차여행 아침 8시. 배낭하나 멘 단출한 차림의 박준규씨와 함께 청량리에서 강원도 강릉까지 가는 무궁화 열차에 올랐다. 갑자기 추워진 바깥 날씨와는 달리 열차 안은 포근하고 안락했다. “기차를 처음 탄 것은 유치원 때였어요. 지금은 레일 바이크로 유명한 경북 문경시 가은읍의 외가에 가기 위해서였죠. 초등학교 시절에는 혼자서 문경까지 다녀오곤 했어요.” 당시 기차는 그에게 교통수단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가 오롯이 기차여행을 한 것은 중학교 2학년때. 진주행 통일호 열차를 타고 구례구역에서 내려 5박6일 동안 지리산 종주를 한 것이 그의 첫번째 기차여행이었다. 이후 기차는 그에게 따로 뗄 수 없는 삶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는다. 왜 그렇게 기차여행이 좋은지 궁금했다.“내 집은 기차라고 할 만큼 기차여행이 편하고 즐겁기 때문이죠. 기차여행은 세상사의 축소판인 것 같아요. 다양한 사람과 일들을 만나고 경험하게 되죠. 어떤 사람과 함께 여행을 하게 될지 막연한 기대감 같은 것도 있고요. 의자를 돌려 모르는 사람들과 마주보며 이야기도 나누고, 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보이는 산과 들, 강 등 경치를 감상하는 것이 참 좋아요.” 양평역에서 단체관광에 나선 촌로 10여명을 태운 기차는 다시 강원도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모처럼 나들이에 나선 노인들이 열차에 오르면서 조용하던 객실 분위기가 한순간 왁자지껄해졌다.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들뜬 모습이다. 승객이 별로 없어, 맞은편 의자에 다리를 뻗은 채 이야기를 이어갔다. “대학교 1학년 때인 1994년부터 본격적으로 기차여행을 하기 시작했죠. 하지만 취미가 직업이 될 만큼 빠지게 될 줄은 몰랐어요. 대학 3학년때는 기차로만 4박5일 동안 여행한 적도 있어요. 거리로는 5000㎞ 정도 됐고요. 군대를 제대한 다음 그야말로 기차여행에 굶주렸던 때였죠.‘한붓 그리기’처럼 청량리에서 출발해 강릉, 부산, 목포를 돌아 대전, 천안까지 간 다음 다시 장항, 군산을 거쳐 서울로 오는 코스였어요. 중앙선과 태백선, 경전선, 동해남부선, 호남선, 장항선 등 거의 전 노선을 한번에 돌았던 거죠.” 원주를 지난 기차는 어느덧 태백준령을 향하고 있다. 금교 신호장과 치악역 중간에 있는 ‘금대 2터널´은 루프식 터널. 일명 ‘또아리 굴´로 불린다. 경사가 급해 직선으로는 오르지 못하고, 용수철처럼 빙글빙글 돌아서 가야 한다.‘유령굴’로도 불리는 치악터널을 지날 때는 괴기스러운 분위기 때문에 왠지모를 한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코스는 태백-영동선. 청량리역까지 오는 1640호 열차의 경우, 강릉역 등 이 구간에 있는 모든 역에서 출발해 보기도 했다.“우리나라의 원초적인 지형을 지나는 코스예요. 평균속도가 60㎞ 이하여서 느긋하게 경치를 감상할 수 있죠. 이 코스의 백미는 흥전에서 나한정 구간이에요. 경사가 급하고 고도차가 400m에 달해 열차가 스위치 백으로 운행해야 하죠. 내년 하반기에는 루프식 터널로 바뀐다고 하니, 아쉽네요. 영동선은 정동진역 다음부터가 정말 좋아요. 열차가 바다와 나란히 달리죠. 안인역의 해돋이도 좋고요.” 두번째로 좋아하는 코스는 정선선.“‘느림의 미학’을 한껏 맛볼 수 있는 구간이죠. 구불구불한 조양강을 따라 증산에서 아우라지까지 1시간 정도 가는데, 역마다 펼쳐지는 시골풍경이 아름답기 그지없어요. 자그마한 간이역과 북한강의 경치가 이어지는 중앙선도 둘째가라면 서럽죠. 특히 경북 의성역에서는 반드시 자장면을 먹어봐야 해요. 맛이 정말 일품이에요. 기차에서 어떻게 자장면을 시켜 먹냐고요? 제 홈페이지(www.traintrip.wo.to)에 오시면 알려 드릴게요.” 기차가 가뿐 숨을 내쉬며 강원도 영월땅으로 접어 들었다. 옛날 큰 물난리 때 삼척에서 떠내려 왔다는 전설을 간직한 삼척산과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 등 수려한 풍광이 차창 밖으로 잇달아 펼쳐졌다. 서강에서는 큰고니 4∼5마리가 물위에 뜬 채 한가로이 유영하고 있다. “기차를 타고 가다 처음으로 여자친구를 만나기도 했어요. 지금은 없지만요. 여자친구보다 기차가 훨씬 좋아요. 수학공식으로 표현하자면 ‘여친 기차’죠. 축구와 비교하자면 ‘여친 축구’쯤 될까요.”이렇게 얘기했던 그도 기차가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촬영지였던 함백을 지나자 아련한 눈망울로 ‘새비재’오르는 길을 바라보았다. 새비재는 ‘그녀’와 견우가 타임캡슐을 묻은 소나무가 있는 곳. 그는 정말로 여자친구보다 기차가 좋은 걸까. ● 기차여행 고수되기 첫째:사전준비를 철저히 하라. 열차나 버스 등의 출발정보가 담긴 ‘월간 시각표’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제공하는 팸플릿 등을 반드시 챙길 것. 둘째:각종 할인혜택을 꼼꼼히 챙겨라. 철도회원에 가입해 일정 포인트를 적립하면 무료여행도 가능하다.KTX의 경우 비즈니스 카드 할인(주중 30%, 주말 15%), 역방향 할인(5%), 자동발매기 할인(1%) 등을 합치면 최대 36%까지 싸게 여행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사전예매 할인, 철도회원 카드 할인, 얼리 버드(early bird)할인 등 다양한 할인혜택이 있다. 셋째:장시간 여행에 필요한 것들은 반드시 챙겨라. 물 등 간단한 먹거리와 디지털 카메라, 각종 충전기 등을 가져갈 것. 밤열차는 춥기 때문에 작은 담요 등도 가져가면 좋다. 충분한 수면을 위해선 안대가 필수다. ■ ‘문화재급’ 추억의 간이역 10곳 간이역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굵직한 사건들로 점철된 20세기의 역사이자, 그 시기를 살아간 세대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다. 번듯하지는 않지만, 허술한 겉모습에서 외려 푸근함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간이역의 사전적 의미는 역무원이 없고 정차만 하는 역. 철도법에서는 역원배치 간이역과 무배치 간이역 이하 등급의 철도역사라고 규정하고 있다. 전국 650여개의 기차역 중 400여곳이 간이역이다. 다음은 박준규씨가 추천한 가볼 만한 간이역들이다. 유형문화재로 지정되는 등 언론보도를 통해 익히 알려진 곳은 제외하고, 아직 소개가 덜 된 ‘문화재급’ 간이역으로만 선정했다. 1. 구 전라선 서도역 한 문학가의 작품이 역사(驛舍)를 살려낸 특이한 경우에 해당된다. 고 최명희의 소설 ‘혼불’의 주요 배경지. 혼불문학관이 인근에 위치하면서 관광지로 거듭나고 있다.1930년대 지어진 목조역사를 최근 대대적으로 보수해 예전모습 그대로 복원해 놓았다. 주변 풍경이 수려하고, 현 서도역에서 도보로 5분이면 도착하는 곳이어서 접근하기도 수월하다. ▲가는 길 용산이나 영등포역→여수행 열차→남원역→75번 버스→서도역. 무궁화가 하루 10회, 새마을호는 3회 운행하고 있다. 현재 서도역에는 열차가 정차하지 않는다. 2. 구 전라선 오수역 붉은 벽돌로 지어진 1950년대 중반의 전형적인 간이역. 지금은 기차가 새로 지은 오수역으로 다니고 있다. 주인을 구한 개 이야기로 유명한 이곳은 지역이름 또한 오수(獒樹·개나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개의 무덤에 꽂아 놓은 지팡이에서 싹이나 커다란 나무가 되자, 이 나무를 오수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 영화 ‘광복절특사’에서 주인공들이 탈출하기 위해 이용했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가는 길 용산, 영등포역→여수행 열차→오수역. 무궁화호가 하루 9회 운행. 오수역에서 구오수역까지는 도보로 이동해도 될 만큼 가깝다. 3. 중앙선 문수역 1941년 7월1일 현재의 역사가 만들어졌다. 작은 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과 철길이 어우러진 풍경이 좋다.65년 된 역사도 아름답지만, 역사 옆에 있는 보선반 건물도 비슷한 세월의 깊이를 간직한 옛 건물이다.30년 전 폐역된 승문역까지 철길을 따라 이어지는 1차선 포장도로는 트레킹하기에도 좋다. 경북 영주시에서 가까워, 부석사 등 관광후 들러볼 만하다. ▲가는 길 청량리역→안동행 열차→문수역. 무궁화호가 하루 1회 운행. 4. 영동선 하고사리역 강원도 삼척시 골짜기에 위치한 곳으로, 하루 단 한번 열차가 선다. 상상속으로만 그리던 그림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두평 남짓한 맞이방(대합실)과 무인 간이역, 그리고 역사앞에 가지를 내린 채 서있는 수양버들이 하고사리역의 전부지만, 철도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성지처럼 여겨지는 곳이다. 어쩌면 철거될지도 모르는 곳이어서 더욱 더 아쉬운 곳이다. ▲가는 길 청량리역→안동행 열차→영주역→강릉행 열차로 환승→하고사리역. 무궁화열차가 하루 1회 운행. 영주발 강릉행 열차는 아침 6시5분에 출발하기 때문에 영주에서 1박을 해야 한다. 영주에서 버스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5. 구 수인선 송도역 10년 전 운행을 중단한 협궤철도 수인선의 종착역. 어천역과 소래역 등과 함께 아직까지 남아 있는 수인선의 3대 역사 중 한 곳이다. 현재는 일반기업체의 사무실로 활용되고 있다. 인천 도심에 있어 경관이나 운치는 다른 간이역에 비해 덜하지만, 과거 수원과 인천을 오가던 협궤 꼬마열차의 추억이 어려있는 곳이다. ▲가는 길 지하철 1호선→동인천역→6-1번,46번 버스→송도역 삼거리. 6. 정선선 나전역 꼬마열차로 유명한 정선선의 4대 간이역 중 한 곳. 과거 석탄을 나르던 정선선이 이제는 관광객을 나르는 철길로 바뀌었고, 그 중심에 나전역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보기드문 목조역사인데다, 성신여대 미대 학생들이 그린 도깨비그림이 인상적이어서 철도마니아뿐 아니라, 아이들도 무척 좋아하는 곳이다. ▲가는 길 청량리역→강릉행 열차→증산역 →아우라지행 통근열차로 환승→나전역. 증산과 아우라지를 오가는 통근열차는 하루 2회 운행. 청량리역에서 오전 10시에 출발하는 열차를 타면 증산역에서 오후 2시에 출발하는 통근열차와 연결된다. 7. 경원선 서빙고역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서울시내에 남은 역사 중 가장 오래된 곳 중 하나다.1958년에 지어졌다. 전철 서빙고역과 맞붙어 있다. ▲가는 길 지하철 1호선 서빙고역 하차. 8. 동해남부선 거제역 1940년대에 지어진 일제시대 간이역. 철도역사가 플랫폼 위에 서있는 몇 안되는 역사 중 한 곳이다. 부산광역시 거제동에 섬처럼 자리잡고 있다. 동해남부선 이설 및 광역 복선전철화 작업과 함께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동해남부선 철길과 맞닿은 벽화도 볼거리다. 철도에 관한 시와 귀여운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가는 길 서울역, 영등포역→포항, 울산행 열차 →경주역 하차→거제역. 무궁화 열차가 하루 3회 운행. 9. 중앙선 우보역 중앙선에는 유난히 1940년대 초반에 지어진 역사가 많이 남아 있다. 그중 경북 군위군에 위치한 우보역과 화본역이 추천할 만하다. 두 곳 모두 시골 한적한 마을을 감싸안은 모양으로, 하루 4∼5회 열차가 선다. 기차가 아니면 접근이 쉽지 않은 깊은 산 속 간이역이다. 아담한 간이역사 외에도 오래 된 화물홈의 모습과 역장의 친절함이 인상적인 곳. ▲가는 길 청량리역→안동행 열차→안동역 하차→부전행 열차→우보역. 무궁화 열차가 하루 1회 운행. 10. 구 문경선 진남역 석탄산업이 한창이던 1960년대 문경선과 가은선의 분기점이자 신호장역으로 개업한 곳이다.60년대 지어진 곳으로는 보기 드물게 목조역사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현재는 레일바이크 매표소로 쓰이고 있다. 문경 레일바이크를 타기 위해서는 가은선 가은역 앞 가은농공단지, 또는 문경선 진남역을 이용하면 된다. 진남교반과 그 아래를 흐르는 영강의 경치가 일품인 곳. 여행과 레저를 겸할 수 있는 멋진 간이역이다. ▲가는 길 서울역→김천역 하차→영주행 열차(하루 3회 운행)→점촌역→가은, 문경행 시내버스→진남휴게소.
  • ‘신도쿄 타워’ 디자인 공개

    |도쿄 이춘규특파원| 오는 2011년 완공되면 610m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방송탑이 될 ‘신도쿄 타워’의 디자인이 25일 공개됐다. 도쿄 시 외곽 스미다 구에 세워지는 이 탑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높은 캐나다 토론토 소재 CN 타워(553m)의 기존 기록을 경신하게 된다. 일본 6대 방송사들이 500억엔(약 4400억원)을 들여 2008년 착공하는 이 타워는 지난 1958년 건설된 333m 높이의 현 도쿄 타워를 대체한다. 해마다 250만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도쿄의 상징물 도쿄 타워는 그대로 존속, 관광용 등으로 사용된다. 새 방송탑은 지상디지털 방송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도쿄 등 수도권 TV와 라디오 방송 등을 커버하게 된다. 새 탑에는 지상 350m와 450m에 각각 대형 전망대가 설치돼 원통형 공중 회랑을 통해 사방을 조망해 볼 수 있게 된다.taein@seoul.co.kr
  • 원로가수 신카나리아 별세

    원로가수 신카나리아(본명 신경녀)가 24일 새벽 5시쯤 경기도 안산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94세. 1912년 함남 원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32년 조선예술단을 거쳐 시에론·빅타·콜롬비아 레코드사의 전속가수로 활동했다.40년대에는 신태양, 라미라,KPK 등 악극단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나는 열일곱살이에요’를 비롯해 ‘강남제비’ ‘에헤라 좋구나’ ‘아리랑선풍’ ‘노들강변’ 같은 숱한 히트곡을 남겼다.1958년 한국무대예술원 중앙위원을 시작으로 가수협회 부회장과 원로연예인상록회 최고위원 등을 역임했고, 문화포장(1998년)과 각종 공로상도 받았다. 장례는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장으로 치러지고 유해는 전북 국립임실호국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유족으로는 딸 이혜정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발인은 26일 오전 10시30분.(02)2072-2011.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장 펀드, 이번엔 ‘화성산업 개조’

    일명 ‘장하성 펀드’로 불리는 한국기업지배구조펀드(KCGF)가 화성산업 지분 5%를 확보, 경영참여를 선언하고 나섰다. 펀드 운영회사인 라자드 에셋 매니지먼트 LLC는 22일 화성산업의 주식 63만 4570주(5.09%)를 장내 매수해 경영 참여 목적으로 보유 중이라고 밝혔다. 장하성 펀드는 지난 4월과 5월,11월에 걸쳐서 수차례 화성산업의 지분을 장내 매집한 것으로 나타났다. 펀드의 고문을 맡고 있는 장하성 고려대 경영대학장은 “화성산업은 영업가치와 자산가치가 훌륭하며 IMF구제금융 이후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거쳐 기업 내용도 좋고 미래 전망도 밝지만 대구에 기반을 둔 중견기업이라는 한계로 제대로 된 가치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면서 “화성산업의 경영진과 기업지배구조 개선에 협력키로 합의했으며 회사 측의 동의를 얻어 사외이사 후보를 추천하고 회사가 사외이사를 선임하는 데 협력키로 했다.”고 말했다. 1958년에 설립된 화성산업은 대구 소재 중견기업으로 화성개발, 화성기술투자, 동아애드 등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1972년 대구에서 동아백화점을 신축개점해 유통업에도 진출했으며 1988년에 증권거래소에 상장됐다.화성산업은 작년 매출과 순이익이 각각 5017억원,175억원이었으며 올 들어 3·4분기까지 누적 매출액과 순이익이 각각 3887억원,73억원을 기록했다. 회사 측은 올해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을 올릴 것으로 전망했다. 이인중 대표는 창업주인 이윤석 명예회장의 아들로 대구상공회의소 회장직도 맡고 있다. 한편 이날 화성산업은 가격제한폭까지 올라 1만 6800원에 마감했다.이종락기자 jrlee@seoul.co.kr
  • ‘왕실 보물 엿보기’에 빠진 日열도

    |나라 김미경특파원| 58년째 해마다 같은 주제로 열리는 박물관 특별전이 있다. 별로 새로울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전국 곳곳에서 수십만명이 몰려와 전시회를 관람하며 감탄한다. 우리나라 경주에 비견되는 일본의 고도(古都) 나라에 있는 나라국립박물관이 매년 10∼11월에 개최하는 ‘쇼쇼인(正倉院) 특별전’이 그것이다. 쇼쇼인은 일본 왕가의 고대 보물창고로, 나라국립박물관 인근 도다이지(東大寺) 중심지인 대불전(大佛殿)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소장품이 9000여점에 이르지만 한번도 전면 공개된 적이 없다. 그러다가 58년 전부터 해마다 한차례씩 20일 정도만 일반에 70∼90점씩 공개되고 있다. 이른바 ‘신비주의’ 전시효과 못잖게 특수를 누리고 있다. 나라박물관에 파견근무 중인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최선주 학예연구관은 “쇼쇼인 소장품은 일왕가 등 특수층만 관람하다가 일반에 공개된 뒤 누구나 한번쯤은 봐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특별전을 통해 이른바 ‘일왕가 엿보기’에 일본인들이 푹 빠져 있는 것이다. 올해에는 천평승보(天平勝寶) 8년(756) 쇼무일왕(聖武天皇)이 사망하고, 그의 49재일에 왕비인 고묘(光明)가 생전 남편 쇼무가 아끼던 물품 650여점을 도다이지 대불(大佛)에 헌납했다는 국가진보장(國家珍寶帳) 목록을 필두로 1250년 전 쇼쇼인의 출발선을 되돌아보는 전시로 기획됐다. 국가진보장에는 백제 병풍 등 당시 우리나라가 일본에 보냈던 보물들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또 전체 전시품 90점 가운데 올해 처음 공개된 13점 중에는 신라시대 제작된 불경으로 추정되는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권 제72~80이 모습을 선보였다. 대방광불화엄경은 필체나 보존상태 등으로 볼 때 나란히 전시된 일본 불경보다 훨씬 높은 수준을 자랑했다. 이와 함께 왕실에서 사용된 화려한 의상과 악기·그릇·칼·향로·사찰 등이 완벽한 보존상태를 뽐냈다. 또한 도다이지 창건에 사용된 물품과 각종 불교 공양구 등도 왕실가를 엿보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chaplin7@seoul.co.kr
  • ‘철권 독재자에서 오욕의 사형수로’

    ‘철권 독재자에서 오욕의 사형수로’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은 양 극단의 평가를 받는다. 반대자에 가차없는 권력의 화신, 한때나마 아랍 민족주의의 영웅이라는 두 얼굴이 혼재한다.난폭한 스타일은 유년기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생후 몇 개월 뒤 부친을 잃고 계부에게 폭언과 구타를 당했다는 대목이 자서전에 나온다. 후세인은 중학생 때 바그다드로 상경, 바트당에 들어가 1958년 쿠데타에 참가한다. 당시 아랍민족주의를 탄압하던 친영(親英) 정권의 압둘 카림 카셈 장군을 암살하려다 실패,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68년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이번엔 2인자로 등극한다.32세 때의 일이다. 혁명지휘위원회 부의장으로 사회간접시설을 깔고 문맹퇴치에 앞장서면서 당시 이슬람 근본주의로 ‘회귀’한 이란과는 달리 근대주의자로 비쳤다. 하지만 권력을 잡자 곧바로 이란과 전쟁을 벌이는 등 독재자의 길을 걸었다. 당시 그를 만난 한 정치인은 “침실 옆에 12켤레의 구두와 스탈린 책이 가득했다.”고 말했다. 그후 8년간 전쟁에서 50만명을 희생시켰고 쿠르드족엔 화학무기를 퍼부었다. 미국의 지원을 받기도 했던 그가 좋아한 영화는 ‘대부’. 쿠웨이트 침공 실패와 걸프전 패배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유지하는 끈질김도 보였다. 그러나 대량살상무기(WMD)를 숨기고 알 카에다를 도왔다는 이유로, 조지 부시 대통령과는 9·11 이후 한 지구촌에서 살 수 없는 ‘운명’이 된다. 2003년 고향 티크리트 인근에서 마을주민의 밀고로 지하벙커에서 생포된 그는 쑥대머리의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이후 재판정에서 보여준 호통은 한편의 소극. 신분을 밝히라는 재판부에 첫 마디가 “나는 이라크 대통령이다. 당신은 이라크인인데 나를 모른단 말이냐. 당신이야말로 누구냐.”였다. 그후 꺼진 마이크를 붙잡고 “내 말 좀 들어보라.”고 호소하기도 여러 차례. 이제 시선은 또 다른 ‘악의 축’ 지도자에 쏠린다. 미국의 전략대로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등이 ‘뜨끔’할는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박정경기자 oliv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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