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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스푸트니크/이춘규 논설위원

    불은 인간 생활의 질을 크게 향상시켜 주었다. 구석기 시대에 인간이 불을 이용하게 되면서 음식을 익혀 먹거나 체온을 유지, 수명을 크게 연장할 수 있었다. 사냥이나 전쟁에도 이용됐다. 열매를 건조시켜 건과를 만들었다. 해충을 죽였다. 신석기인들은 재를 비료로 이용하는 화전농법을 개발했다. 불이 화재와 같은 불행도 초래하지만 불의 발견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발견으로 여겨지고 있다. 종이 발견 전 인간은 돌·금속·찰흙 외에 동물의 뼈·대나무 등을 이용해 기록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나일강변에서 자라는 파피루스라는 식물을 저며 서로 이어서 기록하는 재료를 만들어 썼다. 기원전 2500년께 종이와 유사하게 만들어져 기록용으로 활용됐지만 종이에 비견되지는 못했다. 서기 105년 후한의 채륜이 종이를 발명하고 나서야 인류의 기록문화는 비약적으로 진보한다. 디지털시대에도 종이는 도도한 생명력을 자랑한다. 원자폭탄처럼 과학의 진보가 인류에게 재앙을 초래하기도 했지만 과학은 고비고비마다 인류 생활에 변화를 주었다. 나침반은 항해술을, 금속활자는 인쇄문화를 꽃피웠다. 현미경·천체망원경은 정밀과학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증기기관은 인류의 이동시간을 단축했다. 전지와 전등은 인간의 활동시간을 획기적으로 늘렸다. 다이너마이트, 전화, 자동차, 비행기, 진공관의 발명도 인류생활에 커다란 충격을 던졌다. 과학은 경쟁을 통해 진화했다. 옛 소련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1957년 10월 발사된 스푸트니크 1호는 인류의 우주시대를 열어젖혔다. 당시 미국과 체제 우월성 경쟁을 벌이던 소련의 결정타였다. 미국이 과학기술에서 소련에 앞선 걸로 인식되던 때라 스푸트니크는 미국에 충격과 공포심마저 안겼다. 미국은 부랴부랴 1958년 미국항공우주국(NASA)을 설립하고 과학자를 양성, 1969년 유인우주선을 최초로 달에 착륙시키고서야 스푸트니크 충격에서 벗어났다. 스푸트니크 충격으로부터 50여년. 미국이 다시 위기감에 휩싸였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를 ‘스푸트니크 순간(moment)’으로 표현했다. 새 세계의 경쟁국인 중국, 인도 같은 아시아 신흥국들의 경제적 위협을 거론하면서다. 이들 국가의 수학·과학·교육과 신기술 개발 투자가 미국에 스푸트니크 충격과 같은 위협이라는 것. 교육개혁, 사회간접자본 재건, 정부 지출 억제 등에 힘써 미국의 경쟁력을 높이자고 했다. 스푸트니크 충격이 미국에 그만큼 컸다는 얘기다.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소설가 이순원 “한없이 다정한 어머니 꼭 다시 돌아오세요”

    선생님…, 다시 한번 또 불러봅니다. 선생님…. 지난 22일 아침 저는 전국에서 모인 길꾼들과 함께 제 고향 강원도의 바우길 위에 있었습니다. 길을 걷는 도중 김영현 선배가 전화문자로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소식을 알려주었습니다. 대체 이게 무슨 거짓말 같은 소식인가 믿어지지 않아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고 나무숲 사이의 하늘을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겨울 하늘은 저토록 차고 맑은데, 제 기억 속에 하고많은 선생님의 모습 중 3년 전 어느 봄날, 박경리 선생님을 저 세상으로 보내 드리던 영결식장에서 저희를 두고 이렇게 떠나시면 남은 사람들의 빈자리는 어떻게 하시냐고 우시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마음을 차분히 하려고 해도 차분해지지 않았습니다. 함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하자 모두 저처럼 놀란 얼굴을 하였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도 그리고 오래도록 선생님의 책을 읽어온 독자들에게도 가슴 한구석을 텅 비게 하는 소식이었습니다. 저는 23년 전 선생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내리 10년간 신춘문예에 낙방하다가 어느 문예지에 응모한 제 작품을 선생님께서 뽑아 주셔서 정식으로 한국 문단에 나왔습니다. 옛날 선비들에게는 어려서부터 글을 가르쳐 준 사사스승과 과장에서 글을 뽑아 준 발탁스승이 있는데, 두 스승에 대한 예를 언제나 같이 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새 작가로 저를 뽑아 주신 것을 지금도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언젠가 동인문학상 시상식 때 선생님께서는 제 어머니에게 다가오셔서 두 손을 꼭 잡아주셨습니다. 저에게는 그 모습이 마치 저와 저의 문학이 이 땅에 있게 해 주신 두 어머니의 모습 같았습니다. 이것은 선생님에 대한 저만의 생각이 아니라 한국의 거의 모든 후배 작가들이 우리가 현역작가로 함께 글을 쓴다는 것만으로도 선생님께 한없이 기대고 의지하며 위로받아 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한국문단에 참으로 큰 어머니의 모습으로 선생님께서 후배 작가들을 지켜봐 주셨고, 저희는 또 선생님의 넓은 품에 저마다 한식구로 위안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어디 우리 작가들에게만이겠습니까? 제가 함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했을 때 모두 똑같은 마음과 똑같은 얼굴로 놀랐던 것은 한국의 모든 독자들 역시 지금껏 선생님의 글에서 한없이 따뜻하고 넓은 어머니의 모습을 느껴 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전에 어떤 독자는 선생님의 글에 대해 세 줄만 읽으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고, 책을 다 읽고 나면 한없이 다정한 모습으로 위로받은 느낌이라고 말했습니다. 독자들도 그렇고 함께 글을 쓰는 작가들도 그렇고, 선생님은 선생님을 직접 뵌 사람들에게도 뵙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어머니의 모습으로 우리 문학을 지켜 오셨고, 마지막까지도 손에서 펜을 놓지 않은 현역 작가로 살아오셨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이 더 믿을 수 없고, 더 애통한 것인지 모릅니다. 선생님의 수많은 독자분들도, 또 글을 쓰는 저희도 아직 선생님을 놓아 드릴 준비가 전혀 안 되었는데 어느 아침 선생님께서는 홀연히 저희 곁을 떠나셨습니다. 이별의 놀라움은 언제나 이제까지 겪어 보지 못한 일처럼 낯설고 눈물은 또 언제나 이렇게 늦게 흐르는가 봅니다. 선생님…, 우리에게 너무 크시고 고우신 선생님…. 누가 이렇게 바쁜 걸음으로 선생님을 우리 곁에서 데려가는지요. 좀 더 오래, 그리고 아직도 많이 선생님을 봐야 할 우리의 빈 가슴은 어떻게 하라고 이렇게 선생님을 데려가는지요. 눈물이 앞을 가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겠습니다. 가셔도 잊지 마시고 저희와 이 땅의 독자들에게 다시 한번 돌아오세요, 선생님. 손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꼭 돌아오세요, 선생님…. ●이순원은 1958년 강릉 출생. 1988년 등단.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효석문학상, 한무숙문학상 등 수상. ‘은비령’, ‘정동진’, ‘워낭’ 등 출간
  • 법원 ‘사법살인’ 인정… 죽산 반세기만에 ‘복권’

    법원 ‘사법살인’ 인정… 죽산 반세기만에 ‘복권’

    사법부가 반세기 만에 ‘사법살인’을 인정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박시환)는 20일 간첩으로 몰려 사형당한 죽산(竹山) 조봉암(1898~1959)에 대한 재심에서 국가변란과 간첩 혐의에 대해 전원일치로 무죄를 선고했다. 이에 따라 진보당을 창당한 조봉암은 사형 집행 52년 만에 간첩 누명을 벗게 됐다. 재판부는 국가변란 혐의에 대해 “진보당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거나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결성됐다고 볼 수 없다.”며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북한의 위장평화통일론을 따르는 것이라고 볼 증거도 없다.”고 밝혔다. 간첩 혐의에 대해서는 “유일한 직접 증거인 육군특무부대 증인이 상급 법원에서 진술을 번복하는 등 신빙성이 없고, 증인의 진술은 일반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육군특무부대가 증인을 영장 없이 연행해 수사하는 등 불법으로 확보해 믿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진보당을 창당한 죽산의 사형은 당시 이승만의 정적 제거 차원이라고 해석한 셈이다. 대법원이 죽산 조봉암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것은 1959년 당시의 사형 선고와 집행이 사실상 ‘사법살인’이었음을 고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이번 판결은 이용훈 대법원장 취임 이후 ‘어두운 과거’를 바로잡겠다는 뜻이 반영된 것으로 사법부의 과거청산 결정판이라고 해석하는 견해가 많다. 한편 재판부는 조봉암의 또 다른 혐의인 불법무기 소지에 대해서는 유죄를 인정했지만, “재심에서 공소사실 대부분이 무죄로 밝혀졌으므로 뒤늦게나마 그 잘못을 바로잡고 형의 선고를 유예한다.”고 밝혔다. 재판부가 직접적으로 ‘사과’란 표현을 쓰지는 않았지만 ‘반세기 만의 무언의 사과’라는 분석이다. 독립운동가로 제헌의원과 국회부의장, 초대 농림부 장관 등을 지낸 조봉암은 진보당을 창당하고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대항마로 부상했지만, 1958년 간첩죄 등으로 기소됐다. ▲북한의 주장과 같은 평화통일을 정강정책으로 하고 대한민국을 변란할 목적으로 진보당을 결성했다는 것(국가보안법 위반) ▲육군 특무부대 공작요원 양이섭을 통해 자금 원조 등의 북한 지령을 받았다는 것(간첩죄) ▲허가 없이 권총 1정과 실탄 50발을 소지한 것(군정법령 5호 위반) 등이 그가 받은 혐의다. 1심에서는 징역 5년이 선고됐지만 2심과 3심에서 각각 사형이 선고됐다. 1959년 7월 30일 재심 청구는 기각됐고, 다음날 사형이 집행됐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7년 죽산의 사형 집행을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비인도적, 반인권적 행위이자 정치탄압”이라고 규정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황희석 변호사는 “반세기 만에 진실을 밝혔지만 만시지탄(晩時之歎)의 느낌”이라고 말했다. 임주형기자 hermes@seoul.co.kr
  • 박수칠때 떠난다…룰라 브라질 대통령 오늘 ‘아름다운 퇴장’

    박수칠때 떠난다…룰라 브라질 대통령 오늘 ‘아름다운 퇴장’

    ‘민주주의의 롤모델’ ‘엘리트를 넘어선 노동자 대통령’ 남미독립의 아버지 시몬 볼리바르도, 아르헨티나 빈민의 어머니로 불렸던 ‘에비타’ 에바 페론도 그만한 사랑을 받지는 못했다. 진심을 보여준 정치인과, 정치인의 진심을 믿고 따른 국민. 8년간 그가 이끈 브라질에는 우파와 좌파의 경계도, 노동자와 부유층의 대립도 없었다. 모두를 위한 정치, 서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그의 포부는 비웃음을 샀지만 그가 만들어낸 브라질의 오늘은 민주주의에서 당연하게 여겨졌던 ‘레임덕’이라는 용어마저 무색하게 만들었다. 31일(현지시간) 퇴임을 앞둔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에 대한 전세계의 찬사가 끊이지 않고 있다. 브라질 여론조사기관 센수스가 룰라 대통령의 퇴임을 사흘 앞둔 29일 발표한 여론 조사 결과 룰라 대통령의 개인 지지율은 87%를 기록했다. 정부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83.4%로, 2003년 정부 출범 이래 최고치를 나타냈다. 룰라 대통령은 국영 라디오의 주례 담화 ‘대통령과의 커피 한잔’의 고별방송에서 “지난 8년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지지해 준 국민에게 감사한다.”고 밝히고 눈물을 흘렸다. 2003년 그가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브라질은 300억 달러의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이라는 빚더미를 안고 있었다. “엘리트들이 해내지 못한 것을 선반공 출신이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그의 외침은 공허했고, 오히려 그의 노동자 성향이 브라질 사회의 대립을 더욱 부추길 것이라는 우려가 우세했다.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구두닦이, 금속공장 노동자를 전전하던 강성 노동운동가의 대통령 당선은 노동자 계급이 일으킨 ‘깜짝 반란’으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룰라 대통령은 브라질의 가능성을 현실로 바꿨다. 룰라 정부는 사회간접시설에 대한 과감한 투자와 물류시설 확충, 에너지 개발 확대 등을 담은 경제성장촉진(PAC) 프로그램을 실시해 8년간 연평균 7.5%의 실질성장률을 기록했다. ‘빈곤 퇴치 프로그램’은 2900만명을 ‘먹을 고민’에서 구출했고, 중산층은 3000만명 이상 늘었다. 국제사회에서는 경제와 정치 모두에서 미국 중심의 구도에 맞서 ‘할 말은 하는’ 지도자로 평가되며 G7 시대를 다자외교 시대로 바꾼 주역으로 평가된다. 룰라 대통령의 성공에는 ‘실용’ ‘포용’ ‘상생’ ‘스킨십’ ‘협상’ 등 다섯 가지 리더십이 크게 작용했다. 그의 정책엔 좌도, 우도 없었다. ‘강한 추진력’을 제외한 모든 신념을, 실질적인 결과를 위해서는 과감히 버렸다. 경제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 아래 노동운동 현장에서 40년 가까이 대립하던 대기업과 기존 정치 세력의 힘을 적극 활용했다. 10여개의 정당을 규합해 연립내각을 구성하고 기업인들도 적극 영입했다. 노동자들을 위한 정책을 펴면서 브라질 경제를 지배하는 농축산 기업들에 대해서도 지원책을 펼쳐 상생을 모색했다. 8년간 이어진 국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는 ‘심장에서 우러나는 정치’를 내세운 스킨십의 결과다. 8년간 670일가량을 수도가 아닌 지방에서 보내며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고, 현장에서는 경호원의 제지를 뿌리치고 국민 속으로 뛰어들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 모든 과정에서 노동운동가 출신 특유의 협상력이 중요한 무기로 쓰였다고 평가한다. 모든 정치 활동을 협상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에 정당 간 대립, 기업인과 노동자의 대립, 국제사회의 역학 구도에서 룰라는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온건하게 목소리를 내며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90%에 가까운 국민의 성원 속에 시민으로 돌아가는 룰라 대통령의 향후 행보도 관심거리다. 그는 대선 재출마(3선) 가능성에 대해 “신은 한 사람에게 두 번 선물을 주지 않는다.”면서 “대통령직 복귀를 바라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잘라 말했다. 로이터통신 등 일부 외신들은 그가 브라질 국내에서의 성공을 기반으로 유엔 사무총장 등 국제사회의 요직에 도전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룰라가 일궈낸 브라질은 이제 그의 정치적 양녀인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 당선자로 이어진다. 호세프 신임 대통령은 ‘PAC의 어머니’로 불릴 정도로 룰라 대통령의 정책에 깊이 관여했다. 취임 이전이지만 그의 국정운영 지지도가 70%에 육박하는 이유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룰라 약력 ▲1945년 브라질 북동부 페르남부코주에서 빈농의 아들로 출생 ▲1952년 상파울루주 산토스에서 초등학교 입학 ▲1958년 초등학교 중퇴/구두닦이 시작 ▲1960년 금속공장 취업 ▲1966년 노동조합 가입 ▲1975년 철강노조 위원장 당선 ▲1980년 노동자당 결성 ▲1986년 연방 하원의원 진출 ▲1989~1998년 세차례 대선 출마, 낙선 ▲2002년 대선 승리, 34대 대통령 취임 ▲2006년 재선 성공 ▲2009년 2016년 올림픽 유치
  • 병원 인턴제도 50년만에 사라진다

    오는 2014년부터 전문의가 되기 위한 인턴·레지던트 과정이 통합돼 단일 수련체제로 바뀐다. 기존 인턴제를 없애는 대신 레지던트 제도를 확대·강화해 전문적인 의료 지식과 기량을 익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전문 의료인력 양성기간이 현재보다 줄어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1차 진료기능이 한층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대한의학회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전문의 제도 개선 방안 연구 최종보고서’를 최근 확정한 것으로 24일 확인됐다. 이 연구용역은 보건복지부 의뢰로 수행됐으며, 최종안은 복지부에 제출됐다. 복지부는 최종보고서를 토대로 내년에 ‘의료인 및 의료관계자의 양성 관련 시행령’을 개정, 전문의 수련제도 개편에 본격적으로 나서기로 했다. 1958년 미국식 의료제도를 모방해 병원 인턴을 처음으로 선발한 이후 50년 넘게 유지돼 온 전문의 양성 제도가 처음으로 ‘수술대’에 오르게 되는 것. 서울신문이 단독 입수한 최종보고서(안)에 따르면 현재 의대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턴 제도는 2014년부터 부분 또는 완전 폐지하는 대신 기존 레지던트 제도를 확대한 ‘스트레이트 인턴제’(뉴 인턴제)가 도입된다. 또 현재 4년으로 일원화된 레지던트 수련기간 역시 진료과목별로 조정된다. 수련기간은 스트레이트 인턴제가 도입되는 2014년 이후 26개 전문 진료과학회에서 논의해 조정하도록 했다. 스트레이트 인턴제가 도입되면 의대 졸업생들은 현재보다 일찍 전공과를 선택할 수 있어 레지던트 1년차부터 수습 전공의로 의료현장에 투입될 전망이다. 현행 인턴제도는 매년 3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1년 동안 전공의 필수과목인 내과·외과·산부인과 등에서 각 4주 이상씩, 소아과에서 2주 이상 교육을 받도록 하고 있다. 인턴과정을 마치면 레지던트 4년 과정을 거쳐 전문의 자격을 얻게 된다. 하지만 이 같은 수련제도는 여러 진료과에서 다양한 현장 경험을 습득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장기간의 수련 과정을 거쳐야 해 전문인력 낭비라는 지적이 제기돼 왔으며, 잡무와 낮은 급여로 신진 의료인력을 혹사한다는 비판도 끊이지 않았다. 기존 인턴제도가 폐지되면 일반진료를 위한 ‘진료 면허제’도 새로 마련될 전망이다. 의학회는 스트레이트 인턴제를 통해 전문의가 배출되고, 이와는 별도로 일반 진료를 담당할 ‘진료 전문의’를 양성해 국민 건강의 근간을 이루는 1차 의료를 맡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안석·이영준기자 ccto@seoul.co.kr
  • [연평도사태 한 달] 수십만 포탄 견딘 진먼다오의 힘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 타이완 최전방의 섬, 진먼다오(門島)가 주목받고 있다. 우리 군 당국이 진먼다오 지하요새를 참고해 연평도 등 서북도서 요새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소식까지 들린다. 진먼다오는 서북 도서와 비슷한 입지다. 타이완 본섬에선 120여㎞나 떨어져 있지만 중국 본토와는 2㎞ 거리다. 1958년 8월 23일부터 44일동안 중국군은 47만발의 폭탄을 이 고도에 쏟아부었지만 섬을 빼앗지는 못했다. 섬을 지킬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지하 도시를 방불케하는 진먼다오의 지하요새화와 “진먼다오에 가면 돈 벌고 먹고살기 쉽다.”는 인식을 주민들에게 심어준 타이완 정부의 정책 노력이 배경이 됐다. 진먼다오 고량주가 타이완을 대표하는 술이 된 것도 보이지 않게 섬의 산업과 경제를 부추기기 위해 애써온 타이완 정부의 노력 결과였다. 주민들에 대한 복지 및 연금 특혜, 기업활동 등에 대한 세금 감면 및 보조금 지급 등 제도화된 유인책은 주민들의 호응을 얻어냈고 진먼다오 안보의 초석이 됐다. 진먼다오 쇠고기가 타이완 최상의 쇠고기로 변함없는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섬의 경제를 살려 주민들을 남게한다.”는 타이완 정부의 정책이 섬세하게 작동한 덕택이었다. 유인책이 주민들을 섬에 남게하는 소프트 파워로 힘을 발휘했다면 섬의 요새화는 하드 파워로 작동했다. 동서 20㎞, 남북 5~10㎞의 섬 전체를 땅 속으로 그물망처럼 연결했다. 지하에는 폭 1m, 높이 2m의 지하통로가 2㎞나 이어진 민간대피소들이 12곳이나 건설돼 있다. 각 대피소를 연결하면 무려 10㎞나 되는 갱도가 거미줄처럼 연결돼 있다. 베이징 박홍환특파원 stinger@seoul.co.kr
  • [런던통신] 맨유를 만든 두 명장 버스비와 퍼거슨

    [런던통신] 맨유를 만든 두 명장 버스비와 퍼거슨

    1900년대 초반 축구종가 잉글랜드의 평범했던 축구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는 이후 두 명의 스코틀랜드 출신 명장과 함께 세계 최고의 클럽으로 거듭났다. 1958년 2월 6일 비극적인 뮌헨 참사에도 불구하고 1968년 맨유를 유럽 정상에 올려놓았던 매트 버스비 경과 1999년 잉글랜드 클럽 최초의 트레블(리그, FA컵, 챔피언스리그)을 달성한 알렉스 퍼거슨 경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영국 전역에 내린 폭설로 프리미어리그(EPL) 일정 대부분이 취소된 19일(현지시간) 영국 언론들이 일제히 이 두 감독을 언급한 건 퍼거슨 감독이 새롭게 수립한 기록 때문이다. 1878년 팀 창단 이후 맨유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휘봉은 잡은 감독은 24년 1개월 13일의 故 버스비 경이다. 그러나 이날을 기점으로 그 기록은 24년 1개월 14일의 퍼거슨 경에 의해 깨지게 됐다. 20년이면 강산이 두 번 변한다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만으로 퍼거슨 감독의 기록을 모두 표현할 순 없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겠지만 EPL에서 축구 감독의 목숨은 파리 목숨보다 짧다는 얘기가 있다. 2006년 영국 워릭 경영대학원(Warwick Business School)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1992년부터 2005년까지 잉글랜드 감독들의 평균 재임기간은 약 2년이었다. 허나 퍼거슨은 무려 24년간 성공신화를 써 내려왔다. 퍼거슨 감독 자신도 이 같은 대기록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맨유 홈페이지를 통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런 순간이 올게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솔직히 버스비 감독의 재임 기간이 훨씬 더 길게 느껴진다. 그는 뮌헨 참사 이후 팀을 재정비해 유럽 정상에 올랐다. 이는 매우 엄청난 일이며 버스비 감독이 영원히 기억되는 이유이기도 하다”며 선배 감독의 업적을 더 높이 평가했다.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앞서 언급했듯이 버스비 감독은 뮌헨 참사로 인해 8명의 선수들을 잃었고(당시 맨유 선수단을 태운 비행기는 뮌헨 공항 근처에 추락했고 그로인해 43명의 탑승자 중 23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또한 중태에 빠졌다. 그러나 버스비 감독은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섰고,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위기에서 맨유를 다시금 유럽 정상급 클럽으로 일으켜 세웠다. ▲ 닮은 꼴, 버스비 감독와 퍼거슨 감독 사실 누구의 업적을 더 높이 평가할 수 없을 정도로 두 명장이 맨유에서 만든 스토리는 영화처럼 화려하다. 영국 대중지 <데일리 미러>는 “위대한 두 감독이 위대한 클럽을 만들었다(Great Men Shape Great Club)”며 두 명장을 극찬했는데, 이는 그만큼 그들의 행보가 위대했음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1912년 클럽의 초창기를 이끌었던 언스트 맨그널 감독이 떠난 이후 맨유는 2부 리그로 강등되는 등 암흑기를 보낸다. 특히 1930/1931시즌에는 개막 이후 12연패의 수렁에 빠졌고 이듬해 개막전에 올드 트래포드를 찾은 관중은 겨우 3,500여명에 불과했다. 끝없는 추락을 거듭하던 맨유를 구한 건 1946년 지휘봉을 잡은 버스비 감독이었다. 그는 부임 2년 만에 FA컵 정상에 올랐고, 1951/1952시즌에는 41년 만에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부임 이후 꾸준히 유망주 발굴에 박차를 가했던 그는 데니스 바이올렛, 마크 존슨, 던컨 에드위즈, 바비 찰튼 등 이른바 ‘버스비의 아이들’을 이끌고 리그를 맨유의 세상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뮌헨 참사로 주축 선수 대부분을 잃은 맨유는 한 때 리그 중위권까지 추락하며 다시 암흑기를 걷는 듯 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살아난 버스비 감독은 바비 찰튼을 중심으로 팀을 재정비했고 그로부터 10년 뒤인 1967/1968시즌 잉글랜드 클럽 최초로 유럽피언 챔피언십(현 챔피언스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기적을 연출했다. 클럽의 황금기를 이끌던 버스비 감독이 팀을 떠난 이후 맨유는 1970~80년대 또 다시 침체기를 겪는다. 그러던 1986년 11월 맨유는 또 한 번 스코틀랜드 출신의 명장 퍼거슨 감독과 만난다. 퍼거슨은 버스비 경과 찰튼 경 등 맨유 관계자들의 지지 아래 유망주 발굴부터 장기적인 발전 계획을 세웠고 1990년 FA컵 우승을 시작으로 맨유의 새로운 전성기를 열어 나갔다. ’버스비의 아이들’이 맨유의 첫 번째 황금기를 이끌었다면, 라이언 긱스, 폴 스콜스, 데이비드 베컴, 네빌 형제 등 ‘퍼기 아이들’은 맨유의 두 번째 황금기를 열어 젖혔다. 영국 언론은 물론 라이벌 클럽들 모두 “그런 어린애들로는 우승을 할 수 없다”며 비아냥 거렸지만, 퍼거슨 감독은 에릭 칸토나를 중심으로 ‘퍼기의 아이들’을 이끌고 거의 모든 우승 트로피를 휩쓸었다. ▲ 퍼거슨 “버스비 경은 하늘이 내려준 선물” 이처럼 두 명장이 걸어온 길은 고스란히 맨유의 찬란한 역사가 됐다. 그리고 맨유의 역대 최장수 감독이 된 퍼거슨의 성공신화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24년간 EPL 우승 11회, FA컵 우승 5회,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2회, FIFA 클럽월드컵 우승 1회 등 수 많은 영광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지만 그의 발걸음은 아직도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퍼거슨은 영국 대중지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를 통해 “버스비 경은 하늘이 내게 내려준 선물이었다. 그는 내가 장기적으로 팀을 만들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줬고 많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며 버스비 경이 있었기에 지금의 자신이 존재한다고 밝혔다. 버스비에서 시작된 맨유의 영광은 이렇게 퍼거슨에 의해 계속되고 있다. 사진=영국 일간지 ‘데일리 미러’ 서울신문 나우뉴스 유럽축구통신원 안경남 pitchaction.com
  • 눈길끄는 사립미술관 두 곳 기획전

    눈길끄는 사립미술관 두 곳 기획전

    시간의 무게와 인연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는 때, 사립미술관 두 곳의 기획전이 눈길을 끈다. 올해 개관 21주년인 금호미술관은 그간 미술관과 깊은 인연을 맺었던 작가 21명의 과거와 현재를 조망하는 ‘21 & Their times’(그들의 시간들)를 열고 있다. 최근 신관을 개관한 김종영미술관은 ‘연리지, 꽃이 피다’전을 통해 1950년대 폐허의 화단에서 우정을 나눴던 세 거장, 장욱진·김종영·김환기을 추억한다. 서울 사간동 금호미술관은 지금까지 600여회 전시에서 실험성이 강한 중견·신진 작가의 작품들을 소개해 왔다. 이 가운데 미술관의 정체성을 보다 뚜렷이 각인시켜줬던 21명의 작가를 초대했다. 근작과 더불어 작업의 모티브가 됐던 오브제나 드로잉, 그리고 초기작을 나란히 배치했다. 미술관이 작가를 키우고, 작가는 미술관을 키운 ‘동반 성장’의 시간을 함께 돌아보도록 한 구성이다. 독특한 필묵기법으로 수묵화의 전통을 새롭게 확장시켜온 김호득은 천장에서 바닥으로 길게 떨어지는 먹지에 노란색 분필로 수직의 선을 그은 설치 작품을 한쪽 벽면에 설치했다. 그 옆에는 1990년대 수평선 작업이 걸려 대조를 이룬다. 조각가 정현은 지난해 기무사터에서 열렸던 국립현대미술관의 ‘신호탄’전에 선보인, 대형 작품의 원형이 된 철수세미 작품 등과 함께 철도용 침목·아스팔트·철근 등 그가 즐겨 다루는 작업 재료들을 전시했다. 재료의 성질을 살리고, 인공적인 개입을 최소화하는 작가의 작업 방식을 엿볼 수 있다. 김태호는 10년간 지속적으로 해온 미니멀 회화 작품과 작업의 근간이 되었던 드로잉, 사진들을 출품했다. ‘맨드라미 작가’ 김지원도 맨드라미 생화를 박제시킨 오브제를 비롯해 맨드라미와 관련된 다양한 실험과 모색의 흔적을 선보인다. 내년 2월 6일까지. (02)720-5114. 서울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의 ‘연리지, 꽃이 피다’전은 한자리에 가장 모으기 어렵다는 1950~60년대 장욱진, 김환기, 김종영의 대표작 35점과 소묘 30점을 전시한다. 1910년대에 태어나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한 세 작가는 한국전쟁 후 서울대학교에 적을 두고, 신사실파 등을 통해 서로 교유하며 전통과 현대, 사실과 추상, 동양과 서양을 융합해낸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적인 인물들로 꼽힌다. 충남(장욱진), 경남(김종영),전남(김환기) 등 출신 지역과 성장 배경이 다른 이들이 전후 서울의 황량한 풍토에서 나눴던 우정을, 서로 다른 뿌리를 지닌 두 나무가 얽혀 한 몸을 이루는 연리지(連理枝)에 비유한 점이 흥미롭다. 일반에 거의 공개된 적이 없는 희귀작들이 여러 점 나왔다. 물고기의 형상을 사각과 삼각의 색면으로 분할해 구성한 장욱진의 초기작 ‘물고기’(1959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는 추상미술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엿보게 한다. 고향 앞바다를 닮은 푸른 빛 화면에 달 하나가 떠 있는 김환기의 ‘산과 달’(1950년대)은 일반인은 물론 연구자들에게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다. 개인 소장자를 설득해 어렵게 전시했다는 후문. 조각가 김종영의 ‘꿈’(1958년)은 세부적인 형태를 생략하고, 절대적인 미를 추구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이 밖에 김환기가 뉴욕 시절 신문지 위에 그린 과슈 작품, 장욱진이 매직펜과 먹으로 간결하게 그려낸 소묘, 서예에 능했던 김종영의 수묵 추상소묘 등을 만날 수 있다. 내년 2월 11일까지. (02)3217-6484.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이사람] 구자현 조달청 구매사업국장

    [이사람] 구자현 조달청 구매사업국장

    “불량자재를 사용하는 등 품질이 떨어지는 제품을 공급한 업체는 공공조달시장에 발을 못 붙이게 해 ‘조달물품은 싸구려’라는 이미지를 바꾸겠습니다.” 구자현(52) 조달청 구매사업국장은 13일 ‘조달제품 명품 프로젝트’의 핵심으로 우수한 품질을 꼽았다. 그동안 공공조달 시장은 양적 성장을 이뤘다. 중소기업의 공공조달시장 참여가 늘고, 2005년 다수공급자계약제도(MAS·Multiple Award Schedule) 도입 후에는 쇼핑몰도 활성화됐다. 하지만 진입장벽을 낮춘 결과 품질저하와 부실기업 문제가 발생했다. 구 국장은 13일 “현재 나라장터 쇼핑몰에 등록된 품목이 32만여개에, 연간 거래 규모가 11조원에 달한다.”면서 “시장 조성 및 업체에 기회를 균등하게 부여한다는 목적이 달성된 만큼 품질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는 ‘품질검사의 한계’라는 현실적인 문제점이 있다. 미국 등 선진국의 MAS는 규격과 품질을 수요기관이 책임진다. 조달청도 초기 제도 도입 당시 같은 방식을 택했으나 수요기관이 감당하지 못하면서 민원과 갈등이 생겼고 결국 계약기관인 조달청이 품질검사 업무를 책임지고 있다. 지난해 조달청의 품질점검 실적은 1%로 98만건 중 9800건, 쇼핑몰은 등록상품 32만여개 중 1377개로 0.43%에 불과했다. 운이 나쁘면 걸리고 운이 좋으면 지나가는 셈이다. 전 품목을 직접 검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조달품의 품질과 관련해 업체의 자율은 보장하되 위반 시 강력한 책임을 묻는 자율 방식을 도입했다. 부실이 드러나면 경고에 그치지 않고, 문제가 발생하면 6개월간 공공기관 입찰 참여를 불허한다. 진입은 가능하나 조달청의 이력관리에 기록이 남아 ‘신인도’ 하락으로 수주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특히 연내 나라장터에 정보이력을 공개할 계획이어서 부정당업체(공사 수주나 물품 납품 과정에서 문제가 드러난 업체)는 사실상 조달시장에서 퇴출될 수밖에 없다. 구 국장은 “불량자재를 사용해 납품했던 업체가 적발돼 18억원을 환수당하고 공공조달 입찰이 막히자 폐업을 했다.”면서 “강력한 처벌을 한다는 것 자체가 업체에는 강한 압박으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내년 4월 시행 예정인 ‘자가품질보증제’는 조달제품의 품질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것이다. 품목과 제도 운용방안에 대한 연구용역이 진행 중이다. 업체의 노력 여하에 따라 납품검사가 면제되는 등 ‘채찍과 당근’이 확실하다. 부정당업체는 처벌이 끝나더라도 일정기간(2년) 입찰 감점을 받고 입찰 및 계약보증금 부담률도 높아진다. 경쟁이 심하고 국민 보건 및 안전관련 품목은 부실업체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재무상태와 품질·기술능력 등을 평가해 쇼핑몰에 참여시키는 거래사전자격심사제(PQ)도 도입된다. 구 국장은 “공공조달시장은 수요가 적고 가격이 비싼 신기술의 초기 시장 기능도 수행한다.”면서 “우수한 품질을 발판으로 도전정신을 실현할 수 있는 블루칩 우량시장을 육성하겠다.”고 강조했다. 글 사진 정부대전청사 박승기기자 skpark@seoul.co.kr >>구자현 국장 약력<< ▲1958년 충남 부여 ▲대전고, 서울대 영문학과 ▲행시 25회 ▲조달청 행정관리담당관, 기획예산담당관, 시설국장, 기획조정관, 서울지방조달청장
  • 역대 노벨상 시상식 불참·거부 11명 면면

    100여년간 이어져온 노벨상 시상식에 수상자가 불참하거나 수상을 거부한 사례는 류샤오보를 포함해 11건에 이른다. 이 가운데 9건은 타의에 의한 것이었다. 대부분 독재정권의 압력 때문이다. 노벨상 중 평화상 수상자가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한 것은 류샤오보가 네 번째로, 대리인 수상과 상금 전달까지 모두 이뤄지지 않은 것은 처음이다. 1936년 나치 치하의 독일 언론인 카를 폰 오시에츠키는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중병을 앓고 있었고 정권이 출국을 불허해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당시 메달 수여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대리인이 상금을 받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돌프 히틀러는 집권 당시 오시에츠키뿐 아니라 모든 독일인의 노벨상 수상을 금지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때문에 1938년 화학상을 받은 리하르트 쿤을 비롯해 아돌프 부테난트(1939년 화학상), 게르하르트 도마크(1939년 생리·의학상) 등도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 중 쿤은 1945년, 도마크는 1947년에야 상장과 메달만 전달 받았고, 부테난트는 수상을 포기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소련이 노벨상 수상자 탄압을 주도했다. 195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지명됐던 ‘닥터 지바고’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정부의 지시로 수상을 거부했다. 반체제 물리학자였던 안드레이 사하로프 역시 1975년 노벨평화상 시상식 참여가 금지됐지만, 이탈리아 출국 비자를 갖고 있던 그의 부인이 대리 수상했다. 독재정권에 저항해 민주화 운동을 펼친 공로로 평화상을 수상한 폴란드의 레흐 바웬사(1983년)와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1991년)는 각각 부인과 아들이 대리인으로 시상식에 참석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 중에서도 수상 거부자가 있었다. 1973년 베트남 평화협정의 공로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과 평화상 공동수상자로 이름을 올린 레득토 북베트남 총리는 “베트남에 아직 진정한 평화가 오지 않았다.”며 수상을 거절했다. 자의로 노벨상 수상을 포기한 사람은 레득토 총리와 1964년 문학상 수상을 거부한 프랑스 작가 장 폴 사르트르 등 두 명뿐이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미인은 딸 낳는다고?”… 진화심리학이 답한다

    “미인은 딸 낳는다고?”… 진화심리학이 답한다

    ‘엄마의 외모를 보면 자녀의 성별을 알 수 있다?’ 고정관념으로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사회 현상을 기발하게 풀이해 온 한 진화심리학자가 다시 도발적 해석을 내놓았다. 외모가 아름다운 여성이 그렇지 못한 여성보다 딸을 낳을 확률이 8%가량 높다는 것. 진화심리학은 환경에 맞춰 신체가 진화하듯 심리 또한 생존을 위해 가장 유리한 쪽으로 변화한다고 보는 학문이다. 1일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 인터넷판은 ‘우리의 진화에 관한 불편한 진실?’이라는 기사를 통해 런던 정경대 사토시 가나자와 박사가 그동안 던져온 색다른 해석을 보도했다. 가나자와는 조만간 출간될 ‘생리학’지에 1958년생 여성 1만 7000명이 45세가 됐을 때 어떤 성별의 자녀를 뒀는지 분석한 결과를 실었다. 이들 여성은 유년기에 영국의 ‘아동 성장 연구’에 참여한 사람으로 7살 되던 해 교사로부터 외모를 평가받아 두 집단으로 나뉘었다. 분석 결과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은 집단은 아들과 딸을 같은 비율로 낳았으나 ‘아름답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은 쪽은 58대42의 비율로 남자아이를 더 많이 낳았다. 가나자와는 “예쁜 외모는 아들보다 딸이 물려받을 때 더 유용해서 진화심리학적으로 보면 아름다운 여성이 잠재적으로 딸을 택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아들을 둔 남성의 이혼 확률이 낮은 이유도 진화심리학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남성은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배우자로서의 능력을 평가받는 반면 여성에게는 젊음과 신체적 매력이 중요하다고 가나자와는 주장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세상살이에 유용한 지위를 물려줄 수 있으나 딸에게 신체적 아름다움을 물려주기는 어렵다. 이 때문에 아들을 둔 남성이 가정을 지키려는 본능을 더 강하게 느낀다고 해석했다. 가나자와는 ‘진보주의자가 보수주의자보다 똑똑하다.’는 사회적 통념도 진화심리학을 통해 풀이했다. 지난 3월 그가 내놓은 연구 결과에 따르면 스스로 ‘매우 진보적’이라고 답한 응답자의 평균 지능지수(IQ)는 106이었던 데 반해 ‘매우 보수적’이라고 답한 사람의 평균 IQ는 95에 그쳤다. 가나자와는 “인간은 태생적으로 보수적이지만 타고난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상황을 이해하려는 쪽으로 진화해왔다.”면서 “이 때문에 머리가 더 좋은(더 진화한) 사람일수록 진보적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가나자와는 “자살 폭탄 테러범 대부분이 무슬림인 것은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지만 결혼 문화도 한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일부다처제’를 따르는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자연히 제 짝을 찾지 못하는 남성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 진화심리학적으로 성비를 맞추려는 경향 때문에 죽는 데 두려움을 덜 느낀다는 것이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부고] ‘제국의 역습’ 어빈 커시너 감독

    영화 ‘스타워스’ 시리즈 가운데 ‘제국의 역습’ 편을 만든 감독 어빈 커시너가 폐암 투병 끝에 지난 27일 타계했다. 87세. 1923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난 커시너는 서던캘리포니아대(USC) 영화학교를 졸업했으며 1958년 데뷔작 ‘스테이크아웃 온 도프 스트리트’를 시작으로 영화감독의 길을 걸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제국의 역습’ 외에도 007 시리즈 영화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과 ‘로보캅2’ 등이 있다. 조지 루커스 감독은 커시너의 사망 소식을 듣고 낸 성명에서 “세계는 위대한 감독을 잃었다.”며 애도했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더 멋진 신세계’를 맞는 우리의 자세

    ‘더 멋진 신세계’를 맞는 우리의 자세

    2차 세계 대전 후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에 새로운 서문을 추가 한다. 이 서문은 이전의 ‘멋진 신세계’에서 자신이 놓쳤던 결점을 집어내는 형태로 쓰여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만족스럽지 않았던지, 그는 1958년 ‘다시 찾은 멋진 신세계’라는 비평집까지 발간한다. 어찌 보면 이는 작가로서 꽤 위험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작품에 대해 작가가 던지는 끊임없는 질문들은 작가에 대한 독자들의 신뢰를 여지없이 무너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멋진 신세계’가 SF형식으로 쓰여져 있다는 점, 더 정확히 말해 미래사회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의 행동은 선뜻 이해가 가질 않는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 놓고는, 그 이야기 안에 심각한 결점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한편으로 작가의 오만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생각은 SF를 공상과학소설이라고 불러오던 우리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래사회를 그리고 있는 어떤 작품도 절대 ‘공상’에 기대 있지 않다. 다른 문학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미래사회를 그리고 있는 SF 또한 결국은 ‘지금-여기’라는 현실에 기초해 쓰여 졌기 때문이다. 다만 미래사회, 특히 미래사회를 디스토피아로 그리고 있는 SF는 지금의 현실에 만족해하며 인간들이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을 경우 맞닥뜨리게 될 극한의 삶을 보여준다는 것. 그러니 따지고 보면 미래사회를 그리고 있는 작품들은 오히려 우리가 리얼리즘이라 부르는 작품들보다도 더 리얼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작품들 대부분의 결말이 디스토피아라는 것은 여간 씁쓸한 일이 아니다. 간혹 암울한 결말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SF작품들을 외면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하지만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장밋빛 미래를 살기 위해선 현재의 악몽을 직시해야 한다. 악몽을 잊기 위해 다시 단잠을 청해서는 곤란하다. 한시라도 빨리 끔찍한 악몽에서 화들짝 깨어나 현실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 [주말 데이트] ‘세시봉 디너쇼’여는 포크계의 살아있는 전설 송창식

    [주말 데이트] ‘세시봉 디너쇼’여는 포크계의 살아있는 전설 송창식

    피리를 부는 사나이다. 언제나 웃는 멋쟁이다. 고래사냥을 갈 때도 피리 하나 불고 간다. ‘한번쯤 돌아보겠지’라고 불러도 ‘바람따라 떠도는 떠돌이’라며 웃는다. 그러면서 ‘갈 길 멀어 우는 철부지야, 나의 피리 소릴 들으려무나 삘릴리 삘리리’라고 한다. 무정타. 못마땅해 칭얼대면 ‘왜 불러, 왜불러, 돌아서서 가는 사람을 왜 불러 토라질 땐 무정하더니 왜 왜 왜~’라고 답한다. 특유의 ‘히죽 웃음’과 함께. 에궁, 고래잡으러 3등 완행열차나 타는 게 훨씬 낫겠다. 살아 있는 포크계의 전설이다. 더 이상의 수식어가 필요없다. 가수 송창식(63). 지난 22일 인디 밴드 대표주자 장기하가 MBC 예능프로그램 ‘놀러와’에서 송창식의 ‘왜 불러’를 불러 인기를 끌었다. 며칠 앞서 같은 프로그램에 1970~80년대 우리나라 음악계를 대표했던 가수 네 명이 출연, 중·장년층의 향수를 자극했다. 당시 서울 소공동에 위치한 유명한 음악 감상실 ‘세시봉’에서 만나 매일 노래를 부르던 멤버, 즉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이다. 프로그램을 보면서 느꼈던 한가지. ‘역시 송창식이구나’. 왜? 항상 홀리듯 다가오는 미소가 여전했고. 떨리듯 가슴 속을 후벼파는 울림의 목소리가 그랬다. 송씨의 음악 인생은 올해로 43년째. 1967년 데뷔 당시에는 베이스 기타리스트 이익균, 윤형주 등과 함께 ‘트리오 세시봉’으로 시작했고 이듬해 이익균이 군대에 가자 윤형주와 ‘트윈 폴리오’로 바뀐다. 여기에서 잠깐 팁. 세시봉은 1958년 사업을 하던 이흥원(1975년 작고)씨에 의해 시작됐다. 이후 1960년까지 충무로1가와 소공동, 종로 YMCA 세 군데를 거친다. 1964년 무교동에도 생겨났다. 1969년 TV 보급에 밀려 문을 닫을 때까지 많은 젊은이들이 이곳 통기타에 열광하면서 젊음을 한껏 발산했으며 ‘통기타 가수의 산실’ ‘청바지 문화의 원조’라는 말도 여기에서 생겨났다. 당시 100여평의 ‘세시봉’에는 입장료 30원을 낸 청춘남녀들로 연일 성황을 이뤘다. 여기에서 조영남, 윤형주, 김세환, 송창식이 함께 무대에서 섰고 이백천, 이상벽씨 등이 사회자로 나서 인연을 맺기도 했다. 송씨는 ‘세시봉 시절’에 ‘나는 너’ ‘하얀 손수건’, ‘웨딩 케이크’, ‘축제의 노래’ 등을 히트시켰다. 1970년 솔로로 전향한 이후 그는 특유의 음악적 천재성으로 많은 팬들을 확보한다. ‘고래사냥’, ‘왜 불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담뱃가게 아가씨’, ‘맨 처음 고백’, ‘피리 부는 사나이’, ‘가나다라’, ‘푸르른 날’, ‘한 번쯤’ 등을 쏟아내면서 200여곡이 넘는 자작곡으로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올해로 솔로 전향 40주년을 맞는 데다 다음달 21~22일 서울 홍은동 스위스그랜드 호텔에서 ‘세시봉 친구들’이라는 제목으로 모처럼 디너쇼를 갖는다기에 데이트를 요청했다. 지난 23일 저녁 경기 구리시에 있는 송씨의 연습실. 늘 그랬던 것처럼 양 팔을 가볍게 벌리는 동작에다 ‘히죽 웃음’으로 맞이한다. 어째서 그런 미소가 나왔을까. 고등학교 시절이다. 교실에 남학생이 5명, 여학생이 50명이 있었다. 교실에 들어갈 때마다 약간 지각한 것이 미안해 슬쩍 웃기 시작했는데, 그게 평생 습관이 돼버렸다. 연습실은 꽤 넓어보였다. 40년된 LP판들이 수백장 정도 진열돼 있었고 벽에는 머리숱이 많을 때(50살부터 머리가 빠졌다고 한다)의 큰 사진이 걸려 있다. 그 사진 앞에 마주 앉았다. “여기에서 요즘 무슨 연습을 하나요.” “요즘뿐만 아닙니다. 365일 저녁 8시면 여기에 옵니다. 기초연습을 하지요. 아~ 하는 발성과 음정 연습입니다. 노래부를 때 음정 틀리면 곤란하거든요.(웃음)” “다음달 디너쇼 준비는 잘 돼갑니까.” “잘되고 안되고 뭐 있겠어요. 늘 연습하는 것처럼 하면 되니까.” 이때 김세환씨와 윤형주씨가 들어온다. 디너쇼 멤버들이다. 윤씨는 “레퍼토리나 정해보자고 오늘 만난다.”고 했다. 아니 불과 20여일 남기고? 하긴 선수들이니깐…. “디너쇼에는 왕년의 세시봉 시절 이상벽씨도 함께합니다.” 순간, 엄청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얘기를 더 이상 해본들 무슨 소용있으랴. 화제를 돌렸다. “나이에 비해 젊어 보입니다. 운동은 어떤 거 합니까.” “제자리 돌기합니다. 자고 일어나서 두 시간동안 제자리에서 도는 것이지요. 기마 자세로 눈을 감고 온몸의 힘을 쭉 빼고 있으면 저절로 몸이 돌아갑니다. 이렇게 팔을 가볍게 벌리고….” 여기서 잠시 그의 일과 정리. 늘 아침 6시에 자고 오후 2시에 일어난다. 40년째 낮과 밤을 거꾸로 사는 셈이다. 일어날 때 화장실에서 꼭 한 시간동안 책을 읽는 버릇이 있다. 잡지든 고전 소설이든 닥치는 대로 읽는다. “연말이 다가오는데 술 약속이 많습니까.” “40년 전에 술을 끊었습니다. 간혹 마실 때도 있는데 새로운 술이 나왔을 때 입술로 살짝 맛만 봅니다. 그렇게 맛본 것 중에 마오타이주(茅台酒)가 가장 기억에 납니다.” “퇴촌 집이 수상가옥이라고 하던데요.” “집 없이 살다가 16년 전에 하나 마련했는데 그저 개울가 옆에 있는 집일 뿐입니다. 수상가옥을 지으려면 얼마나 돈이 많이 들겠습니까. 집사람이 물을 좋아해요. 더울 때 8월에 태어났거든요(웃음). 제가 직접 설계했습니다. 부엌을 좀 크게 했지요.” 그는 어릴 때 가수가 아니라 지휘자가 되고 싶었다. 작곡을 선택하려고 했으나 가난해서 성악으로 전환했다. 그것도 독학. 처음에는 클래식을 공부했다. 그럴 때 우연히 찾아간 ‘세시봉’에서 팝송을 부르는 조영남을 보고 팝송과 대중음악에 빠지게 됐다.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있습니까.” “저는 원래 계획이 없어요.. 늘 하던 대로 이렇게….” 이때 윤형주씨가 옆에서 “내년 10월에 세종문화회관 공연 있잖아. 트윈 폴리오 공연….” 하고 거든다. 다들 소리내어 웃었다. 김문 편집위원 km@seoul.co.kr
  • [부고] 대한불교 관음종 종정 죽산 큰스님 입적

    대한불교 관음종 종정인 죽산(竹山) 대종사가 지난 23일 낮 1시 10분 입적했다고 관음종이 25일 전했다. 법랍 59세, 세수 77세. 죽산 큰스님은 1934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 1952년 양산 통도사에서 월하스님을 은사로 삼고 출가해 1954년 사미계를 받았고 1958년 범어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해 비구계를 받고 통도사, 해인사, 범어사 등의 선원에서 수행했다. 이후 오세암, 영암사, 백련암, 성암사 등의 주지를 거쳐 1967년 서울 숭인동 낙산 묘각사에서 관음종을 창종한 태허스님의 제자가 돼 관음종 원로위원, 원로회의 의장 등을 지냈고 2003년부터 관음종 종정을 맡아왔다. 영결식은 27일 오전 10시 관음종 총본산인 서울 묘각사에서 종단장으로 봉행되며, 분향소는 묘각사와 경주 동국대병원 왕생원에 마련됐다. (02)763-0054, 3345. 김문 편집위원 km@seoul.co.kr
  • SF, 56년 만에 월드시리즈 품다

    SF, 56년 만에 월드시리즈 품다

    샌프란시스코가 56년 만에 미 프로야구 정상을 밟았다. 샌프란시스코는 2일 미국 텍사스 주 알링턴의 레인저스 볼파크에서 열린 월드시리즈 5차전에서 선발 팀 린스컴의 호투와 에드가 렌테리아의 3점포를 앞세워 텍사스를 3-1로 꺾었다. 이로써 4승 1패가 된 샌프란시스코는 7전 4선승제인 월드시리즈의 우승컵을 차지했다. 1958년 새 연고지인 샌프란시스코로 옮긴 뒤 4번째 도전만에 이룬 우승이다. 뉴욕 자이언츠 시절이었던 1954년 우승 이후 56년 만이다. 1883년 뉴욕 고담스로 창단한 이래 뉴욕과 샌프란시스코를 거치면서 127년 구단 사상 통산 6번째 우승의 감격을 맛봤다. 2007년 샌프란시스코의 사령탑이 된 브루스 보치 감독은 생애 첫 월드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대회 최우수선수(MVP)에는 2, 5차전에서 결승 솔로홈런과 스리런홈런을 각각 터뜨린 렌테리아가 선정됐다. 2008년 나란히 사이영상을 받은 아메리칸리그 우승팀 텍사스의 클리프 리와 내셔널리그 챔피언인 샌프란시스코의 린스컴이 1차전에 이어 두 번째로 격돌했다. 6회까지 전광판은 ‘0’의 행진을 계속했다. 1차전과 달리 투수전이었다. 균형이 깨진 건 7회 초 샌프란시스코의 공격 때였다. 무사 2·3루 찬스를 맞은 렌테리아는 볼카운트 0-2에서 리의 컷패스트볼이 가운데로 몰리자 그대로 받아쳐 좌중간 담장을 넘겼다. 1차전에서 대거 7점을 내주며 무너졌던 리는 이번에도 실투로 결정적인 한방을 허용했다. 샌프란시스코는 30개 구단 중 팀 평균 자책점 1위(3.36)다웠다. 시리즈 5경기에서 정규 시즌보다도 낮은 2.45로 잘 막아냈다. 이날도 린스컴과 마무리 브라이언 윌슨의 활약이 돋보였다. 린스컴은 8이닝 동안 3안타(1홈런) 2볼넷 1실점의 역투로 시리즈 2승째를 올렸다. 삼진은 무려 10개나 잡아냈다. 2008~09년 동안 2년 연속 사이영상을 수상한 관록이 빛났다. 반면 텍사스는 7회 말 넬슨 크루즈가 솔로홈런을 날려 1점을 만회했지만, 더 이상 추가점을 뽑아내지 못했다. 1961년 창단 후 첫 월드시리즈 우승을 노렸던 텍사스는 팀 타율 1위(.276)다운 화력을 뿜어내지 못했다. 이번 월드시리즈에서 해결사 조시 해밀턴이 타율 .100, 블라디미르 게레로가 .071로 침묵한 게 아쉬웠다. 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 주말 영화

    ●허드서커 대리인(EBS 일요일 오후 2시 40분) 1958년 허드서커사의 회장이 44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하자, 시드니 이사는 경영권을 장악하기 위해 다른 이사들과 함께 음모를 꾸민다. 무능한 회장을 허수아비로 영입하여 주가를 떨어뜨린 후, 회사를 다시 사들이려는 속셈이다. 허드서커 회장이 자살한 바로 그날, 경영학 전공을 살릴 일자리를 찾던 노빌(팀 로빈스)은 허드서커사의 우편실에 취직한다. 입사 첫날, 노빌은 회장의 편지를 시드니 이사에게 전하러 간다. 마땅한 회장을 찾지 못해 고민하던 시드니는 어수룩해 보이는 노빌을 보자마자 회장으로 추대한다. 한편 신문사 기자인 에이미는 취재를 위해 노빌에게 접근하지만, 노빌과 가깝게 지내면서 점점 그의 열정과 순수함에 매료된다. 예상과 달리, 노빌이 훌라후프를 개발해 큰 성공을 거두자 초조해진 시드니 이사는 노빌이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도용했다는 거짓 정보를 신문사에 넘기고, 노빌을 모함하여 끝내 그를 무일푼으로 쫓아내는 데 성공한다. ●동갑내기 과외하기2(KBS1 토요일 밤 12시 45분) 짝사랑하는 남학생을 찾아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온 재일교포 준꼬. 그녀가 머물게 될 하숙집은 친절한 주인아저씨, 맛있는 밥, 풀옵션 방까지 뭐 하나 부족한 게 없다. 하지만 손님 유치에 혈안이 된 주인아저씨가 내어준 방은 그 집 아들이 쓰는 방이었다. 방을 빼려는 준꼬에게 주인아저씨는 아들방뿐만 아니라 토종 한국인 종만의 일대일 한국어 과외지도까지 제공한다며 준꼬를 붙잡는다. 억지로 떠맡은 한국어 과외가 귀찮은 종만은 아버지의 감시에 과외를 접을 수도 없는데, 반대로 한국어 과외에 높은 열성을 보이는 준꼬는 배운대로 전부 흡수하겠다는 일념으로 학구열을 불태운다. 하지만 무책임한 과외와 검증되지 않은 실전 속에 점점 외국인 욕쟁이로 거듭나는 준꼬. 꿈 많던 준꼬의 한국 생활은 험악하고 험난하게 꼬여만 가는데…. ●크림슨타이드(OBS 토요일 밤 12시 20분) 러시아에서 발생한 내전을 틈타 구 소련의 강경파 군부지도자 라첸코는 핵미사일 기지를 포함하여 군통수권 일부를 장악한 뒤 미국 본토를 위협하는 3차대전 시나리오를 구상 중이다. 미 국방성은 라첸코가 핵미사일 암호를 수중에 넣기 전에 그의 전쟁 의지를 제압해야 하는 위기에 빠진다. 마침내 램지 함장의 지휘하에 핵잠수함의 출정이 시작되고 러시아의 핵미사일 기지에 접근하던 중 러시아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게 된다. 어뢰 공격을 가까스로 피한 후 본국으로부터 핵미사일의 발사에 대한 단계적인 명령이 하달되기 시작한다. 램지 함장은 직권으로 핵미사일 발사를 명령하지만 부함장 헌터가 함장과 부함장이 동시에 동의해야만 핵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다는 규정을 들어 명령을 거부하고 램지 함장의 지휘권을 박탈해버린다.
  • [월드시리즈]샌프란시스코 WS 먼저 1승

    8년 만에 월드시리즈(7전4선승제)에 진출한 샌프란시스코가 먼저 웃었다. 샌프란시스코는 28일 AT&T파크에서 펼쳐진 미 프로야구 텍사스와의 홈 경기에서 후안 우리베의 3점포 등 장단 14안타를 몰아치며 11-7로 짜릿한 역전승을 거뒀다. 샌프란시스코가 우승하면 56년 만이다. 전신인 뉴욕 자이언츠가 1954년 통산 5번째 우승한 게 마지막이었다. 1958년 연고지를 샌프란시스코로 옮긴 이후 3차례 월드시리즈에 올랐지만 모두 우승컵을 들지 못했다. 텍사스는 1961년 창단 이후 월드시리즈 첫 출전이지만, 첫 경기에서 패해 기세가 꺾였다. 사이영상 수상자 간 선발 맞대결이라 기대를 모았다. 샌프란시스코의 팀 린스컴은 2008, 2009년 내셔널리그 사이영상을 2번 수상했다. 텍사스의 클리프 리는 2008년 아메리칸리그 사이영상을 받았다. 그러나 팽팽한 투수전이 될 거란 예상은 빗나갔다. 타선에서 승부가 갈렸다. 샌프란시스코는 2-2 동점이었던 5회 1사 뒤 토레스와 산체스의 연속 2루타로 역전한 뒤 코디 로스와 오브리 허프의 중전 적시타로 5-2로 달아났다. 이어 우리베의 스리런 홈런으로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린스컴은 5와 3분의2이닝 4실점하며 부진했지만 타선 지원 덕에 생애 첫 월드시리즈 승리를 따냈다. 포스트시즌 무패 행진(7승 무패)을 이어가던 리는 4와 3분의2이닝 7실점(6자책)으로 시리즈 첫 패를 기록했다. 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 한국전쟁 ‘클라리넷 소녀’ 찾았다

    한국전쟁 ‘클라리넷 소녀’ 찾았다

    제주국제관악제조직위원회는 1952년 7월 한국전쟁 당시 제주를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했던 ‘클라리넷 소녀’를 58년만에 찾았다고 28일 밝혔다. 조직위는 전쟁고아인 이 소녀가 전쟁의 참화 속에서 악기를 부는 모습(왼쪽)이 한국관악사 등에 의미를 지니고 있다며 지난 8월 클라리넷 소녀를 찾기 위해 전국에 수소문했다. 주인공은 서울 성북구에 살고 있는 유인자(오른쪽·69)씨. 당시 9세였던 유씨는 서울 주자동 집이 폭격으로 쑥대밭이 되자 가족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지면서 혼자 인천으로 정신없이 내려갔다. 유씨는 ‘전쟁고아’라며 군용기로 제주도까지 옮겨졌고 한국전쟁 기간에 전쟁고아들을 수용한 한국보육원에 들어갔다. 관악대가 있던 이곳에서 유씨는 클라리넷을 처음 잡았다. 그해 여름 유씨는 제주도를 방문한 이 대통령 내외 앞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했다. 유씨는 “대통령이 미국 민요인 ‘매기의 추억’을 좋아하신다고 그 곡을 연주했다.”면서 “이 대통령은 나보고 ‘귀엽다’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다시 한번 연주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유씨는 보육원의 배려로 서울에서 고교를 졸업, 서울대 국악과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이 없어 진학을 포기했다. 유씨는 24살 때 지금의 남편과 결혼해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제주국제관악제조직위 이상철 상임부위원장은 “내년 제주국제관악제에 유씨를 초대해 58년 전의 클라리넷 선율을 다시 듣고 싶다.”고 밝혔다. 제주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이사람] 이창석 환경부 생태원건립추진기획단장 “세계최초 복합생태원으로”

    [이사람] 이창석 환경부 생태원건립추진기획단장 “세계최초 복합생태원으로”

    “생물다양성 보전·연구의 산실인 국립생태원 건립에 대한 총책임을 맡게 돼 어깨가 무겁습니다. 최선을 다해 세계적으로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놓겠습니다.” 이창석 환경부 국립생태원건립추진기획단장은 17일 서울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이 같이 밝혔다. 지난달 임명된 이 단장은 “큰 프로젝트를 책임지게 된 데 대한 부담감이 적지 않다.”면서도 환경·생태학 분야 전문가답게 당찬 포부도 밝혔다. ●동북아 최대… 생태자원 한자리에 이 단장은 “우리가 후발 주자이긴 하지만 세계적으로 독특한 생태원을 만들려고 한다.”면서 “온실 안에서 동식물과 어류까지 관찰할 수 있는 생태원은 세계 최초이고, 규모면에서도 동북아에서는 가장 크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국립생태원은 기후변화에 따른 생태계 변화 연구와 생물다양성 보전을 위한 다양한 생태 모델 전시 등 생태교육 기능을 맡게 된다. 지역발전을 도모하는 국가 주도 생태연구기관으로 총 3400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될 예정이다. 2012년 말 준공을 목표로 건립 작업이 이미 시작됐다. 충남 서천의 99만 8000㎡ 부지에 생태연구동을 비롯, 멸종위기종연구동, 생태교육동과 방문자 숙소, 생태체험관, 방문자 센터가 들어선다. 국립생태원의 핵심 시설인 생태체험관은 열대·아열대·지중해·온대·극지 5개의 기후대별 온실과 기획 전시실로 지구의 다양한 생태계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야외에는 온대숲과 한반도 숲, 그리고 습지체험 시설 등도 만들어진다. 처음 서천지역은 갯벌을 매립하고 장항산업단지를 조성하는 계획이 잡혀 있었다. 하지만 갯벌의 생태적 가치가 부각되면서 보전과 지역발전을 꾀하는 새로운 대안사업 필요성이 대두됐다. 지역과 관계부처가 산업단지 건설 대신 국립생태원과 국립해양생물자원관, 내륙산업단지 등을 대안으로 제시해 2007년 6월 국립생태원 건립부지로 확정됐다. ●서천지역 생태원 건립지로 결정 이 단장은 “생물 서식지 훼손으로 생물다양성 유지 여건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면서 “생물자원이 국가 경쟁력을 평가하는 요소로 부각되는 만큼 이에 관리할 생태원이 건립돼 다행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국립생태원은 현재 부지를 가로지르는 군도 6호선과 송전 선로를 지하화하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이 작업은 올 연말 마무리된다. 그는 “전반적인 공사가 연초부터 시작됐고 생태체험관도 올해 7월 착공에 들어갔다.”며 “예정된 기간 내에 공사가 마무리될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국립생태원은 일반 건축 공사와 달리 살아 있는 동·식물을 도입해 기후대별 생태모델을 재현해야 하기 때문에 건설 과정에서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 단장은 “동·식물이 도입되고 안정화될 때까지 성패를 가늠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공사 단계별로 문제점을 점검하고 초기에 해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생태원은 생물산업 육성·지원, 생태 복원기술 개발 등 국가 생물산업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단장은 “자부심을 갖고 차질없이 사업을 진행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글 사진 유진상기자 jsr@seoul.co.kr ●이창석 단장 약력 ▲1958년 공주 ▲충북대 과학교육과 졸업, 서울대 식물학과(석·박사) ▲한국생태학회 상임이사 ▲환경정책평가위원 ▲국토해양부 중앙하천관리위원 ▲서울여대 부설 한국생태학교장·생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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