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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프면 찾는 된장국… 뿌리 다 벗어버릴 순 없죠”

    “아프면 찾는 된장국… 뿌리 다 벗어버릴 순 없죠”

    “철광석에서 철판을 뽑아내는 것이니 돌과 철판은 형제나 부자지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돌은 자연을 상징하고 철판은 산업사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물체 간의 대화와 소통, 짝지어 주기가 이번 전시회의 주제이지요.” 경남 함안 출신으로 1958년 서울대 미대에서 일본 도쿄의 일본대학 철학과에 편입한 뒤 일본에서 거주하며 아시아를 대표하는 현대미술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이우환(73)씨. 27일 서울 사간동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만난 이 작가는 6년 만에 여는 국내 개인전을 이렇게 설명했다. ●“작품 감상은 철저하게 혼자서 하세요” 이 작가의 작품들은 그것이 회화든, 조각이든 ‘창조’나 ‘생산’과 같은 작가적 행위보다 자연스러운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들은 무의식적으로 명상적인 상태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혼자서 감상해야 좋다. 자연석과 대형 철판, 대형 철사들로 이뤄진 조각들도 마찬가지다. 단단하고 힘있게 생긴 둥근 돌 앞에 놓인 철판은 돌의 물리적 힘이 작용한 듯 맞은편 끝이 살짝 튀어나왔다. 두 개의 철판을 잇대 놓고 양 옆에 자연석을 놓은 작품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연석의 힘이 철판에 물리적인 힘을 가한 듯 틈새가 살짝 타원형으로 벌어져 있다. 그는 이런 작업에 대해 “일종의 작가적 트릭인데, 관객들에게 알 듯 말 듯한 시각적 느낌을 전달해 작가의 의식이나 인식을 전달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현대미술에서 실체성이 부정되는 현상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만든다는 것, 창조한다는 것은 진짜 무엇이냐는 물음을 던졌다.”고 말했다. ●“나는 이우환이라는 작가일 뿐” 2007년 베네치아비엔날레에서 일본국가관 작가로 나섰던 이 작가에 대해서는 늘 ‘일본 작가냐, 한국 작가이냐’는 논란도 따라다닌다. 이날 간담회에서도 똑같은 질문이 나오자 그는 “나는 이우환이라는 작가다.”라고 말했다. 일본이나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아니라 작가 이우환이란 정체성을 표현한다는 의미다. 이에 덧붙여 그는 “20년 한국에서 살았고, 또 20년은 일본, 30년간은 유럽에서 살았다. ”면서 “일본에서 살면서 일본식의 철저한 양식성을 받아들였지만, 경상도 억양을 쓰고 몸이 아프거나 피곤하면 찾는 된장국 등을 통해 자신의 뿌리를 결국에는 다 벗어버릴 수 없는 것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일본 현대미술의 한 계열인 ‘모노하’의 이론가이기도 한 이 작가는 제7회 파리비엔날레에 일본 작가들과 참여해 ‘모노하’를 유럽에 소개했고, 1994년 뉴욕 구겐하임 소호에서 열린 ‘전후 일본 전위미술’전을 통해 미국에 작품세계를 알리기도 했다. 1990년에는 한국문화훈장을 받았다. 이번 국내 전시는 국제갤러리에서 10월9일까지 열린다. (02)733-8449. 글 사진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유도세계선수권] 최민호·왕기춘 金 메친다

    [유도세계선수권] 최민호·왕기춘 金 메친다

    한국유도의 쌍두마차 최민호(왼쪽·29·한국마사회)와 왕기춘(오른쪽·21·용인대)이 같은 꿈을 꾸고 있다. 26일부터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두 번째 금메달을 목에 걸겠다는 것. 1958년 일본 도쿄대회에 첫 발을 내디딘 뒤 지금까지 세계선수권에서 두 번 이상 우승한 한국 선수는 전기영(1993·95·97년)과 조인철(97·01년), 조민선(93·95년)뿐이다. 대회 첫날(26일) 스타트를 끊는 최민호는 60㎏급에서 2003년 오사카 대회 이후 6년 만에 제패를 노린다. 베이징올림픽에서 모조리 한판승으로 금메달을 일군 최민호는 이후 극심한 후유증을 겪었다. 다 이룬 터라 목표를 잃어버린 탓. 적지 않은 나이에 감량의 부담까지 고려해 66㎏급으로 외도도 했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가노컵에서 8강 탈락하는 등 결과는 좋지 못했다. 결국 유도회의 ‘교통정리’로 60㎏급에 복귀했다. 5월 러시아 그랜드슬램대회 1회전 탈락의 수모를 겪는 등 슬럼프는 길었다. 하지만 여름 내내 태릉선수촌에서 혹독한 훈련으로 전성기 실력을 되찾았다. 2007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대회에서 깜짝 우승, 스타가 됐던 왕기춘은 27일 2연패를 노린다. 베이징올림픽에서 갈비뼈 부상 탓에 은메달에 머물렀던 아쉬움을 달랠 각오다. 물론 상황은 다르다. 경쟁자들이 그의 미세한 습관까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샅샅이 분석을 끝냈을 터. 하지만 왕기춘도 올림픽이란 큰 무대를 겪으면서 한 단계 성숙해졌다. 올림픽 이후 TV 출연과 각종 행사에 불려다니는 등 유명세를 치르면서 ‘바람이 들었다.’는 말도 나돌았지만, 초심을 되찾았다. 유도회에서는 내심 28일 81㎏급에 출전하는 김재범(24·한국마사회)에게도 희망을 품고 있다. 파워와 지구력은 톱클래스였다. 다만 ‘문전처리 미숙’이란 꼬리표가 따라다녔지만 기술적 완성도도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평가다. 1993년 캐나다 해밀턴대회 금메달리스트 출신인 정훈 남자팀 감독은 “지난해 올림픽이 끝난 뒤 1년 동안 모든 준비를 완벽히 끝냈다. 금 2개 이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자팀은 14년 만의 금메달에 도전한다. 1995년 일본 지바대회에서 정성숙과 조민선이 동반 우승을 차지한 뒤 여자유도의 금맥은 끊겼다. 베이징올림픽 78㎏급 동메달리스트 정경미(하이원)가 가장 정상권에 근접해 있다. 서정복 여자팀 감독은 “남자보다는 전력이 약하지만 국제 경험이 많은 정경미와 정정연(용인대·48㎏급) 등이 기대할 만하다.”고 말했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부고] 원로 영화배우 최성씨

    원로 영화배우 최성(본명 최영준)씨가 24일 오전 5시 췌장암으로 별세했다. 81세. 1928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난 고인은 허장강, 이해룡, 이대엽, 박노식 등과 함께 1950~70년대 영화계를 풍미한 배우다. 영화에서는 주로 조연으로 출연했다. 1958년 영화 ‘낙화유수’로 데뷔한 이래 ‘오발탄’(1961년),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년), ‘인천상륙작전’(1965년) 등 130여편의 영화에서 연기했다. 또한 ‘연애소설’(2002년), ‘하늘정원’(2003년) 등 2000년대에도 활발한 활동을 벌여 제37회 대종상영화제에서 특별연기상을 받았다. 유족은 부인 홍영희씨와 아들 정원(성남아트센터 총무과), 대원(영화배우)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발인 26일 오전 8시. (02)2227-7597. 홍지민기자 coral@seoul.co.kr
  • [김대중 前대통령 서거] 사선 다섯번 넘어… 민주주의 유토피아 꿈꿨다

    [김대중 前대통령 서거] 사선 다섯번 넘어… 민주주의 유토피아 꿈꿨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인동초’, ‘행동하는 양심’으로 불리며 반세기 한국 정치사를 풍미했다. 한국 정치사에서 ‘3김(金)시대’의 한 축이었던 고인(故人)은 1997년 겨울, 반세기만에 ‘선거혁명’을 통한 정권교체를 이뤘다. 3전4기로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는 외환위기를 극복했고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켜 한반도 정세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5차례의 죽을 고비와 5년여의 감옥생활, 6년여의 가택연금, 3년의 망명생활 등 고인의 삶은 견디기 어려운 시련으로 점철됐다. 가톨릭 세례명인 ‘토마스 모어’처럼 고행하는 구도자의 삶을 이어온 셈이다. “정이 많은 분이다.” 영원한 비서실장인 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을 이같이 묘사했다. 말년에도 거의 매일 서울 동교동 자택을 드나든 박 의원은 “지난 1월 민주당 정세균 대표가 방문해 용산참사에 대해 말을 꺼내자 이내 김 전 대통령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면서 “평소에도 드라마 속 (비참한) 사람들을 보며 눈시울을 붉힐 만큼 평소 인정도 많으셨다.”고 전했다. 말년에는 미국의 버락 오바마 행정부 등장과 맞물려 케네디 전 대통령과 관련된 책을 탐독하고 여론주도층을 만나 서민과 비정규직을 위한 사회 안전망, 생산적 복지를 강조했다고 한다. 전남 목포에서 뱃길로 150리. 김 전 대통령은 1924년 매서운 바닷바람을 등진 하의도라는 작은 섬에서 3남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는 지금도 생가터가 남아 있다. ‘후광’(後廣)이라는 호(號)도 여기서 따왔다. 중농의 아들이었던 그는 목포상고(현 전남제일고)에 수석 입학한 수재였지만 반일운동으로 학적부에 ‘시찰계요’라고 적힐 만큼 반골기질을 드러냈다. 1945년 약관의 나이에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 신민당에 입당했지만 8개월 만에 탈당한다. 이어 3단계 통일방안(1972년)과 광주 민주화운동(1980년) 등을 거치면서 색깔론에 휘말렸다. 고인은 1946년 첫 부인 차용애 여사와 가정을 꾸리고 해운회사를 경영, 큰돈을 모은다. 뛰어난 상술로 목포일보를 인수한 뒤 주필을 겸하기도 했다. 자금을 끌어대고 경쟁상대를 꺾으며 사람의 마음을 낚는 장사와 정치는 닮은꼴이다. 1950년 한국전쟁 때는 우익단체 참여를 빌미로 인민군에게 처형될 위기에 몰렸지만 이송 중 극적으로 탈출, 첫 죽음의 고비를 넘긴다.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서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며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다. 3대를 포함, 4차례 낙선의 쓴잔을 연거푸 마셨다. 1958년 강원도 인제군 민의원 선거 때는 후보등록이 취소됐고, 1959년 보궐선거에선 색깔론에 휘말렸다. 4·19혁명이 일어난 1960년 선거에서도 낙선했다. 1961년 인제군 보궐선거에서 당선의 첫 기쁨을 누린 김 전 대통령. 하지만 사흘 만에 5·16을 맞아 반혁명사건에 연루돼 교도소로 직행한다. 토머스 모어의 교훈은 오히려 고난 극복의 힘이 됐다. “늦어도 100년 뒤면 (토머스 모어처럼) 역사에서 재평가받을 것”이라며 고통을 이겨냈다. 1962년 이희호 여사와 재혼한 고인은 이듬해 목포에서 민주당 후보로 공화당 후보를 제치고 당선됐다. 1964년 5시간20분간 행한 ‘필리버스터’ 발언과 6개월간 13차례 본회의 발언 등은 지금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1971년 7대 대선은 기회이자 시련의 계기였다. 1970년 45세의 나이에 ‘40대 기수론’의 라이벌 김영삼(YS) 전 대통령을 물리치고 신민당 후보로 나섰지만 이듬해 선거에선 94만표 차로 패배했다. 이후 20년간 혹독한 시련이 밀려왔다. 일본 망명 중인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을 시작으로 전두환 군사정권까지 55차례의 연금생활, 5년반 동안의 감옥생활, 2차례의 망명생활을 겪었다. 1976년 명동 3·1구국선언으로 구속(긴급조치 9호 위반)됐고, 1981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훗날 고인은 “솔직히 죽는 것이 두려웠지만 영원히 사는 길을 택했다.”고 회고했다. 가톨릭계의 구명운동 덕에 목숨을 건진 고인은 1982년 도미, 두 번째 망명길에 오른다. 한국인권문제연구소와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이끌며 민주화 운동의 외로운 무게중심이 됐고, ‘인동초’란 별칭도 얻게 된다. 1985년 12대 총선을 앞두고 전격 귀국한 고인은 김포공항에서 연행돼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하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만든 신한민주당이 2·12총선에서 109석을 확보, 1987년 6월 항쟁의 기틀을 마련한다. 사면복권 뒤 1987년 13대 대선에 출사표를 던졌지만 3위에 머무르며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후보 단일화 실패에 따른 비난에 휩싸였다. 1988년 총선의 평민당 ‘황색 돌풍’으로 일선에 복귀했지만 1992년 12월 대선에서 패배한 뒤 정계은퇴를 선언한다. 고인은 “40여 년의 파란 많았던 정치생활에 사실상 종막을 고한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다.”며 대선 낙선의 소회를 곱씹었다. 막을 내릴 것 같던 정치인생은 영국으로 건너간 지 6개월만에 다시 불꽃을 살렸다. 1993년 귀국해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했고, 빗발치는 비판 여론을 무릅쓰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이듬해 총선에서 제1야당으로 올라서자 대선 4번째 출마를 선언한다. ‘대통령병 환자’라는 비난이 일었지만 단 1.6%포인트의 표차이로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색깔론과 지역감정의 벽을 넘었다. 보수세력인 자민련과의 DJP연합이 힘이 됐지만, 역설적으로 색깔과 지역의 부조화스러운 조합이기도 했다. 고인의 대표 브랜드는 ‘햇볕정책’이다. 반세기 동안 닫혔던 북쪽의 문을 열게 하는 열쇠로, 서독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과 궤를 같이한다. 이를 바탕으로 이뤄진 역사적 남북정상회담은 한반도가 ‘레드 콤플렉스’를 벗어던지고 탈냉전체제로 진입하는 촉매제가 됐다. 고인을 한반도 유일의 노벨상 수상자로 만든 일대 사건이었고, 퇴임 뒤에도 논쟁이 있는 사안에 대해 비중있게 언급할 수 있는 유일한 지위를 부여했다. 고인은 대통령 임기말 측근들의 비리가 뒤늦게 터진 데다 아들들이 구속되는 등 마음고생도 적지 않았다. 6·15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북한과 밀거래한 사실은 안타까운 기록으로 남게 됐다. 또 완벽주의와 제왕학적 리더십은 권위주의적 통치라는 오명도 남겼다. 오상도 허백윤기자 sdoh@seoul.co.kr
  • 中·타이완 대표 100명 화해의 해협 횡단

    │베이징 박홍환특파원│“샤진(厦金)해협에 새 역사를 썼다.” 50여년 전 중국과 타이완 간에 치열한 포격전이 펼쳐졌던 현장에서 지난 15일 양안의 화해를 상징하는 해협 횡단 이벤트가 펼쳐졌다. 중국과 타이완 사이에 놓인 바다를 수영으로 건너는 행사가 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중국 푸젠(福建)성 샤먼(厦門)시와 타이완 진먼다오(金門島) 사이 샤진해협 6㎞를 헤엄쳐 건너는 이번 행사에는 중국과 타이완에서 각각 50명씩 모두 100명이 참여했다. 반관영 통신인 중국신문사는 “양안에서 100명이 해협을 수영으로 횡단함으로써 새로운 역사가 쓰여졌다.”고 보도했다. 참가자들은 이날 오전 샤먼시 예펑자이(椰風寨) 해변을 출발, 3시간여 동안 헤엄쳐 진먼다오의 솽커우(雙口) 해변에 모두 무사히 도착했다. 타이완의 최전방 군사기지가 있는 진먼다오는 중국과 타이완 간 분단의 상징적 장소이다. 1958년 중국 인민해방군은 이 섬을 점령하기 위해 무려 47만여발의 포탄을 퍼붓기도 했다. 2002년부터 기획돼 7년만에 성사된 이번 행사를 위해 타이완 측은 진먼다오 내 일부 군사 시설들을 다른 지역으로 옮길 정도로 성의를 보였다. 지난해 타이완의 마잉주(馬英九) 총통 당선 이후 중국과 타이완 간에는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분야 등에서 교류와 협력이 크게 강화되고 있다. stinger@seoul.co.kr
  • 안중근 조카며느리 생존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시 난강구 안산가에 사는 안로길(97) 할머니. 안씨는 안중근 의사의 5촌 조카며느리다. 안씨는 1944년 일제에 의해 남편이 사망하면서 일제에 대한 적개심이 극에 달했다. 안 의사 가문의 며느리라는 데 자긍심을 갖고 있던 안씨는 이때부터 원래 차(車)씨였던 성을 안(安)씨로 바꿨다. 이적 행위 단속이 거세던 1958년 안씨는 하얼빈역 광장 등에서 태극기와 안 의사 초상화를 앞세우고 안 의사 공적 인정과 종교의 자유 등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결국 안씨는 1958년 1월 긴급 체포돼 반혁명죄로 무기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게 됐다. 86살 되던 1998년 반평생을 옥중에서 보낸 뒤 자유의 몸이 됐다. 하얼빈으로 돌아오긴 했으나 안씨를 반겨줄 곳도, 안씨를 뒷바라지해 줄 일가친척도 찾을 수 없었다. 우연히 안씨의 사연을 알게 된 최선옥(72·전 성모자애병원 원장) 수녀의 도움으로 아파트 방 한 칸을 얻어 함께 생활하고서야 안 할머니는 비로소 안식처를 찾을 수 있었다. 안씨의 조카인 정덕재(71·랴오닝성 선양 거주)씨는 “평생을 바쳐 갈구했던 조국이 나서는 모습만 보여줘도 반평생 얽힌 응어리를 풀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선양 연합뉴스
  • [씨줄날줄] 죽산 조봉암/김종면 논설위원

    1950년대 극심한 사회 혼란 속에 자유당 이승만은 반공의 기치를 높이 들고 북진통일론을 외쳤다. 이에 맞서 진보당 당수 죽산(竹山) 조봉암은 평화통일을 부르짖었다. 항일독립운동가로 제헌의원과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낸 그는 1952년 직접선거로 이뤄진 제2대 대통령에 출마하지만 차점으로 떨어진다. 모두가 명철보신하며 제 살 길을 찾고 있을 때 감연히 이승만 독재에 도전한 것이다. 1956년 제3대 대통령에 출마하지만 다시 낙선한다. 박헌영의 공산당과 결별, 진보당을 만들어 위원장으로 정당활동을 하던 죽산은 1958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돼 다음해 처형된다. 혹자는 죽산을 미국 건국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에 견주기도 한다. 대한민국 헌법제정에 참여하는 등 건국의 주춧돌을 놓은 인물이고 보면 그럴 만도 하다. 죽산의 행적에서 무엇보다 주목할 대목은 1950년대 극우반동시대 평화통일·사회민주주의 강령을 내세운 진보당을 창당, 진보정치운동의 씨앗을 뿌렸다는 점이다. 6·25전쟁 이후 부패 특권경제 아래 신음하던 서민들에게 진보당의 사회민주주의적 정책은 큰 호응을 얻었다. 전후 농지개혁과 관련된 죽산의 역할과 사상은 농업의 국내총생산(GDP) 비중이 절대적이던 ‘농업국가’ 한국의 기초를 세운 것으로 평가받는다. 오늘날 죽산은 몽양 여운형과 함께 진보정치세력이 따라 배워야 할 벤치마킹의 대상으로 꼽히기도 한다. 죽산의 진보당이 뿌리내렸더라면 우리나라도 유럽처럼 사회민주주의가 국정의 한 축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죽산은 지난 50년간 북한의 공작금을 받았다는 죄목으로 사형돼 ‘간첩’ 대접을 받아 왔다. 정치보복에 따른 ‘사법살인’의 희생자라는 사실은 애써 외면돼 온 것이다. 해방정국의 대표적인 진보정치인. 그는 과연 우리에게 잊혀진, 아니 잊혀져도 좋은 인물인가. 엊그제 여야의원과 사회원로들이 죽산 50주기를 맞아 선생의 명예회복을 청원하는 성명을 냈다. 이들도 지적했듯 진실과 정의, 인권의 문제는 이념을 떠나 우리 모두가 지향해야 할 보편적 가치다. 법원의 신속한 재심이 있어야겠다. 역사의 진실 규명에 진보와 보수가 따로 있을 수 없다. 김종면 논설위원 jmkim@seoul.co.kr
  • [테마 스토리 서울] (6) 화랑대역

    [테마 스토리 서울] (6) 화랑대역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중략)/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간이역을 배경으로 민중들의 고달픈 삶을 노래한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 누구나 한번쯤 간이역에서 경험했을 추억의 편린들을 담고 있다. 서울의 마지막 간이역인 경춘선 화랑대역 역시 크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롯이 남아 있는 작은 추억의 장소 가운데 하나다. 1939년 경춘선(성동~춘천) 개통에 맞춰 근대 양식의 목조 건물로 건립된 이 역은 ‘태릉역’이라는 이름으로 승객을 맞다가 1958년 육군사관학교가 역사 바로 옆에 자리잡으면서 ‘화랑대역’으로 이름을 바꿨다. ●1958년 육사 생기면서 이름 바뀌어 공릉동 29의51에 자리한 이 역사는 일자형 평면 위에 ‘十자형’ 박공지붕으로 이루어진 여느 간이역과 달리 비대칭의 삼각형 박공지붕이 특징이다. 다른 간이역사에 비해 건립 당시의 원형도 잘 보존돼 있는 편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도심과는 어울리지 않는 남루한 모습의 작은 역사지만 주변의 고즈넉함과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운치를 더해주는 곳이다. 누가 보더라도 한눈에 간이역임을 알 수 있는 아담하고 소박한 간이역이 서울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지금은 비록 직원 6명에, 하루 승객 20명 안팎의 초미니 기차역이지만 지난 70년간 청량리와 춘천을 잇고, 통일호와 비둘기호 열차가 분주히 오갔다. 화랑대역은 육군사관생도를 비롯한 군 병력을 이동시키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동해안 작전지역으로 하계군사훈련을 떠나는 육사 생도들은 새벽 4시 열차에 몸을 실으며 ‘군인의 길’을 다짐했으리라. ●내년 말 운행 중단… 테마공원으로 그러나 경춘선 복선화 전철이 개통되는 내년 말이면 화랑대역에선 더 이상 기차를 볼 수 없게 되지만 2006년 12월4일 등록문화재 제300호로 지정되면서 앞으로 역사의 원형은 고스란히 보존된다. 다행히 서울시가 경춘선 폐선 구간으로 테마 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어서 화랑대역은 기차역이 아닌 새로운 의미의 문화공간으로 시민들을 맞을 것이다. 전광삼기자 hisam@seoul.co.kr
  • [글로벌 시대] 마이클 잭슨 有感 /정희섭 마크로젠 이사

    [글로벌 시대] 마이클 잭슨 有感 /정희섭 마크로젠 이사

    동남아 출장 중에 마이클 잭슨의 장례식을 TV를 통해 봤다. 그런데 그의 장례식은 장례식이 아니라 기라성 같은 인기 연예인들이 모여 벌이는 세계 최대의 버라이어티 쇼와 같았다. 애도사를 하러 나온 사람들도 그의 죽음 자체에 대해서는 슬퍼했지만 그렇다고 엄숙한 이야기만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고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못내 아쉬워하고 비통해했지만 우리나라 식의 장송곡이 퍼지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마치 그가 인류 음악사에 남긴 업적의 편린들을 정리하는 세션을 갖는 것 같았다. CNN에 의하면 전 세계 10억명의 인구가 마이클 잭슨의 장례식을 시청했다고 하니 그의 인기와 영향력을 느낄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한 사람의 죽음마저 상업적인 볼거리로 승화시켜 웃고 떠드는 미국 문화가 우리의 정서와는 사뭇 다른 것이어서 생소하기까지 했다. 1958년에 태어나서 2009년 6월25일에 세상을 떠난 마이클 잭슨. 51세의 젊은 나이에 고인이 된 그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 공방과 조사가 아직도 뜨겁다. 이제 무르익은 중년의 나이에 우리를 떠나간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 한때는 극성팬이었던 나는 ‘타계’라는 말을 붙이고 싶어졌다. 타계란 인간계를 떠나 다른 세계로 간 귀한 사람의 죽음을 일컫는 말이 아니었던가. 미국의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는 지난 7월6일자 특집 기사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그는 음악의 전설이었으며 또한 전설로 남을 만한 괴짜였다.” “이제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상황에서, 마침내 우리는 마이클 잭슨이 누구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허심탄회한 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마이클 잭슨의 시대가 도래하기 전에는 프랭크 시내트라,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스가 한 시대를 구가했다면, 잭슨의 시대가 시작된 이후로는 그에 필적한 만한 슈퍼스타를 꼽기 힘들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남녀노소 및 인종을 초월한 진정한 우리 시대의 영웅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흑인으로서 현재 미국 사회에서 큰 성공을 이룩한 오프라 윈프리, 마이클 조던, 타이거 우즈 등을 논하기 이전에, 미국에서 이미 흑인 대통령이 탄생한 현재의 상황에서, ‘그가 흑인이었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 자체가 큰 의미를 전달해 주지 않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거의 30년 전에 그가 백인이 아닌 흑인 가수로서 전 세계를 오랜 기간에 걸쳐서가 아닌 순식간에 열광시켰다는 사실은 실로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수많은 백인 아티스트 사이에서 가뭄에 콩 나듯이 이름을 올렸던 레이 찰스나 루이 암스트롱, 제임스 브라운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이들을 팝의 황제라고 칭하지는 않는 것을 보면 마이클 잭슨은 세계 연예계의 판도를 바꾸고 지각을 변동시킨 흑인 혁신자임에 틀림이 없다. 음악사에 끼친 그의 영향력과 더불어, 그가 미국 내뿐 아니라 인도, 남아공, 체코, 루마니아, 이탈리아, 아일랜드 등 수많은 나라를 돌며 어린이들을 위해 기부한 금액도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마이클 잭슨은 단순히 우리를 시청각적으로 즐겁게 만드는 엔터테이너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광고 촬영에서 입은 화상으로 고통 속의 나날을 보냈다는 사실과, 백인이 되고 싶어 안달이 난 인물이라는 오해 속에 감추어진 ‘백반증’이라는 병마와의 사투 등이 공개되면서 그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서서히 일어날 것이라고 본다. 공교롭게도 나의 생일이 6월25일이다. 내가 열광했던 스타가 내 생일과 동일한 날에 세상을 떴다는 사실에 기분이 묘해졌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인종을 초월하여 전 세계를 열광시킬 대 스타의 탄생을 고대하는 날로 기억된 2009년의 아쉬운 생일이었다. 정희섭 마크로젠 이사
  • [17일 TV 하이라이트]

    ●TV는 사랑을 싣고(KBS1 오후 7시30분) 개그맨으로 데뷔해 드라마부터 뮤지컬까지 장르를 불문하며 다양한 배역을 소화해 내고, 이젠 예능프로그램까지 진출해 ‘40대 비, 몸짱 탤런트’라는 별칭을 얻고 있는 탤런트 이정용. 그가 진정한 겸손과 도전이 무엇인지 일깨워준 잊지 못할 초등학교 시절 스승 이경화 선생님을 찾는다. ●VJ특공대(KBS2 오후 9시55분) 이 맛이 왕이다! 한여름, 임금님 수라상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진미는 무엇이었을까. 제철에 나는 신선한 식재료여야 함은 물론, 진귀하면서도 조리 방법에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우리 곁에 성큼 가까워진 수라간 단골 진미들의 특별한 변신을 만나 본다. ●희망특강 파랑새(MBC 오후 6시50분) 1958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촉망받는 권투선수였던 안효주씨. 비교적 늦은 나이에 요리사가 되었지만 14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최고 주방장에 올랐고, 현재 초밥 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다. 요리는 해도 해도 끝이 없다는 요리사 안효주씨의 장인정신에서 발견한 희망의 메시지를 들어 본다. ●대결! 스타셰프(SBS 오후 8시50분) 이번 시간에는 그동안의 식재료보다 더욱 어려운 주제로 ‘고창의 복분자’를 이용한 요리 대결이 펼쳐진다. 산지와 스튜디오를 오가며 팽팽한 긴장감 속에 벌어지는 스타셰프들의 요리대결이 펼쳐진다. 그리고 예능 프로그램에 최초로 출연한 금난새의 까다로운 맛 평가가 이루어진다. ●60분 부모(EBS 오전 10시) 정신과전문의 채정호 교수와 함께 스트레스를 이해하고, 긍정적인 삶을 통해 행복을 만들어 나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 본다. 그저 낙관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긍정주의자’로 사는 비결도 배워 보고 ‘스트레스 많은 세상, 행복하게 사는 법!’ 이라는 주제로 특강도 펼친다. ●YTN초대석(YTN 낮 12시35분) 긴급한 세계의 구호현장에서 구호천사로 발 벗고 뛰었던 한비야씨가 국제 NGO인 월드 비전 긴급구호팀장이라는 굴레에서 일단 벗어났다. 현장경험을 정책이론에 접목시키기 위해 더 큰 뜻을 품고 유학의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바람의 딸로 잘 알려진 한비야씨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본다.
  • [서울광장] 실패한 역사에서 길을 찾는다/오일만 논설위원

    [서울광장] 실패한 역사에서 길을 찾는다/오일만 논설위원

    현실과 이상 사이에는 늘 괴리가 있기 마련이다. 국가정책의 집행에서도 정책의 취지와 현실이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정책에 내재된 현실적 이해 관계가 얽혀 있어 상황은 복잡해진다. 이념적 색채까지 보태지면 정책의 본질과 국익보다는 당파 이기주의가 부각된다. 역사를 돌아 보면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국론이 분열되고 나라를 어렵게 하는 정책이 적지 않았다. 비정규직 파동을 지켜 보면서 떠오른 것이 11세기 후반 북송조(北宋朝)의 신법·구법 논쟁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격렬했던 논쟁 가운데 하나다. 고갈된 재정난 타개를 위해 농민과 소상인들을 보호하고 육성하려던 왕안석(王安石·1021∼1086)의 신법은 지주·관료·종친 등 구법파들의 이익과 정면 충돌한다. 피비린내 나는 신·구파의 권력투쟁으로 이어지면서 1127년 북송 멸망의 원인을 제공했다. 후세 역사가들은 “신법의 이상은 높으나 현실의 벽을 넘기가 어려웠다.”고 평했다. 신·구법 싸움에서 간과할수 없는 교훈은 정책집행의 일관성 문제다. 조선조의 사색 당파처럼 재상(국무총리격)이 속한 정파에 따라 신법이 폐기됐다 부활하는 일이 반복됐다. 정책을 집행하는 관료들은 다음 정권의 향배를 살피면서 적당히 처신하는 풍토가 만연했다. 법 집행에 활기가 떨어졌고 신법은 실패로 돌아갔다. 우리의 노동정책도 이런 전철을 밟고 있지나 않은지 우려된다. 노동부는 참여정부가 제정한 비정규직 법안 시행과 후속 조치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는 비난에 직면해 있다. 이영희 노동부 장관은 취임 직후부터 노동시장 유연성을 강조해 왔다. 이 장관의 이런 철학이 노동부의 소극대응으로 이어지고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 측면이 있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사회의 이분법적 정치 문화를 고려할 때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가정책이 오락가락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반면 성공한 정책은 분명 이유가 있다. 시대정신을 관통하는 민심의 지지와 실천 가능한 현실성, 그리고 효율적인 정책집행이 삼위일체가 돼야 한다.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을 보자. 극좌 노선인 문화 대혁명의 광기가 휩쓴 직후라 실용노선에 대한 인민들의 광범위한 지지가 있었다. 덩샤오핑(鄧小平)이라는 지도자의 전략·전술도 탁월했다. 무엇보다 일관성있게 정책을 집행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반면 1958년에 시작된 대약진 운동은 철저한 실패작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조급증이 문제였다. 15년 안에 영국의 강철 생산량을 따라잡는다는 목표는 애초부터 무리였다. 현실성이 결여됐고 의욕이 앞섰다. 2004년 3월에 제정된 ‘성매매 방지법’ 역시 이상이 현실을 앞지른 사례가 될 것이다. 성 충동이 인간의 본능인 이상 매매춘을 법으로 근절하기는 어렵다. 시행 5년을 맞아 성매매 시장은 더욱 음습해졌고 사회적 비용은 폭증했다. 20세기 초 미국의 금주법 역시 종교적 이상을 법률로 강제했지만 ‘알코올의 욕구’를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비정규직 문제 역시 이상과 현실의 해법이 혼재됐고 한국적 모순과 갈등이 얽히고 설킨 사안이다. 여당은 당장의 해고사태 방지와 노동시장 유연성이라는 현실에 초점을 맞췄고 야당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는 근원적 해법을 중시하고 있다. 비정규직법이 당파적 이익이 아닌 성공한 정책이 되기 위해선 여야 모두 역사가 남긴 실패의 교훈을 곱씹을 필요가 있다. 오일만 논설위원 oilman@seoul.co.kr
  • 마이클 잭슨과 ‘행운의 숫자 7’의 관계는?

    마이클 잭슨과 ‘행운의 숫자 7’의 관계는?

    마이클 잭슨의 장례식이 7일(현지시간) 전 세계적 추모열기 속에서 엄수된 가운데 고인의 생애와 행운의 숫자 ‘7’ 사이에 모종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추모성’ 풀이가 소개돼 관심을 끌고 있다. 마이클 잭슨의 사망 소식을 최초 보도한 미국의 TMZ닷컴은 고인의 유언장이 2002년 7월 7일 작성됐다고 전하고 유언장 작성일과 장례식 날짜인 2009년 7월 7일 사이에 정확하게 7년이란 시간이 존재한다고 밝혔다. 이어 마이클 잭슨의 히트곡 ‘Black & White’와 ‘Billie Jean’이 나란히 7주간 차트 1위를 기록했으며 앨범 ‘Thriller’와 ‘Bad’, ‘Dangerous’가 각각 탑 40 히트곡 7개를 배출했다고 설명했다. 또 마이클 잭슨은 9남매 중 7째이며 그의 성 마이클(Michael)과 이름 잭슨(Jackson)의 영문 철자가 모두 7개의 알파벳으로 이루어졌다고 짚었다. 마이클 잭슨이 태어난 해인 1958년을 살피면 ‘19+58=77’이란 수식이 나오며 그의사망일인 25일에도 ‘2+5=7’이라는 풀이가 숨어있다고 TMZ닷컴은 전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해외음악통신원 고달근@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미술과 산책] 미술을 가까이 하는 삶은 행복하다11

    [미술과 산책] 미술을 가까이 하는 삶은 행복하다11

    많은 미술가들은 타계 후 작품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본인이 미술관을 설립하여 영구히 관리하는 경우는 극소수이고 어느 미술관에 기증한다고 해도 쉽게 받아주지 않는다. 미술시장에서 잘 팔리는 작가라면 걱정이 없겠지만 말이다. 유족의 입장에서는 작품을 짊어지고 고심한다. 몇몇 유족들이 미술관을 준비하다가 설립도 어렵지만 개관 후에도 지속적인 경상비가 들어가는 그 재원이 어려워 포기하는 것을 보았다. 조각가 문신은 타계 후 미망인 최성숙 씨가 숙명여대 안에 1999년 ‘문신미술연구소’로 출발하여 2004년 ‘문신미술관’을 개관하였다. 문신의 작품 보존, 자료정리, 출판, 전시, 아트상품 개발 등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가고 있다. 작년에는 ‘문신저술상’까지 제정하여 문신의 삶과 예술을 심도 깊게 연구하고 저술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또한 ‘마산시립문신미술관’도 운영되며 ‘문신미술상’을 제정하여 양쪽에서 문신을 기리고 있다. 최성숙 씨 또한 화가로 작년 서울 인사동 공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진 바 있다. 한국화가 고암 이응노를 위해 미망인 박인경 씨가 2000년 서울 평창동에 ‘이응노미술관’을 개관하여 운영하다가 폐관하였다. 2007년에는 ‘대전시립이응노미술관’을 개관하여 운영해오며 프랑스에 남겨졌던 이응노 유작들이 연차적으로 대전시에 기증이 이루어지고 있다. 작년에 경기도 양주에 서양화가 나희균 씨에 의해 한국화 추상화 입체작품을 개척했던 안상철을 기리는 ‘안상철미술관’이 개관되었다. 사람은 타계 후에는 묻혀지고 잊혀 가는데 이들은 지속적인 화제 인물로 거론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부부화가는 임용련·백남순 씨가 있는데 이들은 파리에서 유학했고 1930년 결혼에 11월에는 부부 유화전을 열었다. 타계한 운보 김기창과 우향 박래현은 유명작가로 우리 현대미술사에 이름을 남겼다. 청각장애자인 운보는 우향을 만나지 않았다면 작가로 대성하기 어려웠다고 회고한 바 있다. 1992년 1월 원로 서양화가 김흥수 화백(당시 73세)과 여류 서양화가 장수현(31세) 씨의 결혼이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이들은 스승(덕성여대)과 제자로 만나 손녀 뻘이 될 수 있는 42살의 나이 차를 극복했다. 많은 부부 미술인 중 양쪽 모두 뚜렷한 활동을 보인 커플로 남편이 먼저 작고한 경우는 미인도로 유명한 동덕여대 교수였던 한국화가 장운상과 덕성여대 교수를 역임한 예술원 회원인 섬유공예가 이신자, 추상화로 족적을 남긴 한성대 교수를 역임한 작고 서양화가 하인두와 한국화가 유민자, 건국대 교수를 역임한 서양화가 이용환과 심죽자,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요절한 서양화가 박길웅과 박경란, 작고한 조각가 전국광과 양화선, 작고한 조각가 유영교와 미술사가 목원대 이은기 교수 등이 있다. 현역 조각가로 성신여대 교수를 역임한 정관모와 김혜원, 서양화가 서울대 교수를 역임한 윤명노와 한승재, 서양화가로 상명대 교수를 역임한 구자승과 안양대 장지원 교수, 서양화가 강원대 유병훈 교수와 한국화가 김아영, 서양화가로 경희대 교수를 역임한 박재호와 허계, 서양화가로 공주대 교수를 역임한 강길원과 서양순, 한국화가로 영남대 교수를 역임한 정치환과 섬유공예가인 효성가톨릭대 최영자 교수, 한국화가 경원대 강경구 교수와 심현희, 한국화가 홍익대 문봉선 교수와 강미선-이들은 둘다 중앙미술대전 대상 수상 작가이다. 서양화가 추계예대 최진욱 교수와 박강원, 서양화가이며 설치미술 활동도 벌이는 신영성과 하민수, 조각가 광주교대 박정환 교수와 신옥주, 조각가 서울대 문주 교수와 홍수자, 도예가 이정도와 전진희, 조각가 한진섭과 미술사가 한양여대 고종희 교수, 조각가 김성회와 미술사가 김이순 등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이 많다. 이들은 학교의 동창 또는 사제지간으로 만나 결혼하고, 작품 활동에 서로의 도움을 주며 미술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같은 장르 또는 전혀 다른 장르에서 다른 성향의 작품 활동을 하며 때로는 함께 부부전도 개최한다. 사후에는 미망인이 부군을 위해 미술관을 설립하고 유작전을 꾸미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글 김달진 김달진미술자료관 관장 www.daljin.com <미술인의 운문과 산문> 4. 22~8.31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옛 문인화가들이 그림뿐 아니라 글에도 능했던 점에 착안해 글과 그림의 연관성을 살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코자 기획한 자료전으로 18세기 강세황에서 21세기 손상기까지 나온다. 미술 작가와 이론가들이 쓴 시집과 수필집 80여 권으로 꾸며졌으며 천경자의 수필집, 미술평론가 오광수와 윤범모 시집 외에도 다양한 미술인들의 시, 수필 등을 만날 수 있다. 희귀본인 월북화가 김용준의 《근원수필》 1948년 초판본, 고유섭의 《전별의 병》 1958년, 이중섭의 편지를 모은 책 《그대에게 가는 길》, 신위의 《경수당전고》 국역본 등이 전시된다. 관람객들이 책 표지뿐 아니라 글의 내용도 감상할 수 있게 중요한 부분을 복사해 읽어볼 수 있도록 전시했다. (T. 02-730-6216) <일본현대미술전 Remembering - Next of Japan> 5.14~6.25 두산갤러리, 대안공간루프 과거 저팬애니팝으로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던 일본 현대미술의 그늘에서 벗어나 90년대 이후 일본 현대미술의 단면을 볼 수 있는 전시이다. 과거나 현재 중심 혹은 경제적 가치에 중점을 둔 전시가 아니라 미학적 가치에서 미래의 일본 현대미술을 엿볼 수 있다. 이번 전시 참여작가들은 일본 버블 경제세대인 30대들로 매우 주체적이고 작위적인 자아의 영역 안에서 사적인 유희를 즐기고 사회와 관계성조차 내면의 주관적 시선 안에서 바라보는 작품의 성향을 보인다. 이들 20여 명의 작가들은 설치, 영상, 회화, 사진 등 모든 장르에서 세계 현대미술계에서 매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매우 독창적이고 감성적인 이미지들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작품들이 전시된다. (T. 02-708-5050 www.doosanartcenter.com) <대학로 100번지> 5.21~7.5 아르코미술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아르코미술관이 동숭동에 자리한 지 30년이 되는 해를 맞이하여,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위치한 미술관의 진행 경로를 가늠해 보고자 기획된 전시이다. 그동안 시각예술의 동시대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다양한 층위의 관객들을 흡수하는 전시와 프로그램들을 진행해 왔다. 이번 전시는 미술관과 미술관이 위치한 장소의 기억들을 수집하고 재해석하여 조립을 하는 방식의 전시이다. 지난 30여 년의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변화해 온 미술관의 행보는 김구림, 민정기, 홍경택 등 다양한 연배의 작가들 30여 명이 함께 다채로운 방법으로 보여준다. 그동안 아르코미술관과 함께 했던 미술작가들은 물론이고, 대학로를 중심으로 청년문화를 만들었던 문인들의 자유방담, 각종 퍼포먼스 프로그램 등이 진행 될 예정이다. (T.02-760-4724)
  • [마이클 잭슨 전설속으로] 44년간 지구촌 우상으로…팝의 ‘History’ 되다

    [마이클 잭슨 전설속으로] 44년간 지구촌 우상으로…팝의 ‘History’ 되다

    영국 런던에서의 컴백 콘서트를 불과 2주일가량 앞두고 세상을 떠난 마이클 잭슨은 ‘팝의 황제’라는 수식어가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던 뮤지션이다. 13개의 넘버원 싱글, 7억 5000만장에 달하는 전체 앨범 판매고,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 보유, 그래미상 13차례 수상 등 그를 따라다니는 기록들은 헤아릴 수가 없다. 춤, 노래, 연주, 작사·작곡에 이르기까지 천재적인 면모를 과시했던 그는 세계 팝 음악의 흐름을 바꿔놨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혁신적이고 현란한 춤사위는 1980년대 MTV의 등장과 함께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열었다. 그가 끼친 영향은 음악적인 테두리 안에만 머무른 게 아니다.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씨는 “백인이 지배하던 미국 사회에서 흑인의 긍지와 자신감을 높여줬다는 점에서 단순한 대중음악가를 뛰어넘어 사회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로 봐야 한다.”면서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도 빚을 지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1958년 8월 잭슨가(家)의 아홉 형제 가운데 일곱째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이미 스타였다. 6살 때인 1964년 형제들로 구성된 그룹 ‘잭슨 파이브’의 리드보컬이 됐으며, 5년 뒤 잭슨 파이브 소속으로 자신의 첫 번째이자 역사상 최연소 빌보드 1위 히트곡인 ‘아이 원트 유 백’을 발표하며 혜성과 같이 등장했다. 1979년에는 전설적인 음반 프로듀서 퀸시 존스와 손잡고 솔로 앨범 ‘오프 더 월’을 내며 독립했다. 이때부터 흑인 소울 음악에 백인 음악의 록적인 요소까지 크로스오버시키며 아우라를 만들어냈다. 1000만장 이상 팔렸던 ‘오프 더 월’은 그러나, 황제 등극을 위한 서곡이었을 뿐이다. 1982년 발표한 앨범 ‘스릴러’는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괴물로 변신하는 파격적인 영상을 보여줬던 ‘스릴러’를 비롯해 트레이드 마크가 된 안무 ‘문워크’를 선보인 ‘빌리 진’, 뮤직비디오 사상 처음으로 집단 군무를 등장시킨 ‘비트 잇’, 폴 매카트니와의 듀엣곡인 ‘걸 이즈 마인’ 등이 담긴 이 앨범은 현재까지 1억 400만장 이상 팔리며 그를 살아 있는 전설로 만들었다. 엄청난 비용을 들여 상상 이상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마이클 잭슨식’ 투어를 시작한 3집 ‘배드’(1987)와 퀸시 존스와 결별한 뒤 자신의 작곡과 제작 능력을 뽐낸 4집 ‘데인저러스’(1991)에 이르기까지 고공 행진을 거듭했다. 잭슨은 199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며 음악 외적인 일로 구설수에 오르며 내리막길을 걸었다. 1993년 아동 성추행 혐의로 고소당해 그동안 쌓아올린 명예에 먹칠을 했다. 이 사건은 2330만달러의 합의금으로 무마됐지만, 그는 2003년 또다시 비슷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돼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1994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리사 마리와 결혼해 화제를 뿌렸으나 2년도 안돼 파경을 맞았고, 이후 간호사 데비 로우와 재혼했으나, 역시 갈라섰다. 1995년 ‘히스토리’ 이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2001년에 마지막 정규앨범 ‘인빈서블’을 발표했으나 명성을 되찾는 데는 실패했다. 잦은 성형수술도 도마에 올랐다. 흑인의 우상이었음에도 얼굴을 하얗게 만들어 백인이 되려한다는 조롱이 끊이지 않았다. 성형수술 부작용으로 인한 건강 이상설로도 이어졌다. 잇단 소송과 건강 문제로 돈을 잃었고, 빚도 불어나 자신의 저택을 파는 등 파산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엄마와 읽는 동화] 180 센티미터/노경실

    [엄마와 읽는 동화] 180 센티미터/노경실

    “엄마!” “왜 그러니 영석아?”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엄마는 날개 달린 천사처럼 금방 달려 왔다. 엄마는 언제나 그렇다. 엄마의 몸은 부엌에 있어도, 시장에 있어도, 이모 집에 가 있어도 마음은 늘 내 옆에서 빙빙 돌고 있는 것 같다. 외국 동화책에서 읽었는데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지켜 주는 천사가 있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 엄마가 나를 지켜주는 천사일까. 하지만 난 엄마 천사가 너무너무 싫다. “영석아, 왜?” 달려온 엄마는 나를 이리저리 살피며 물었다. 나는 엄마의 눈길을 슬쩍 피했다. 아니, 아예 무시했다. “학교 가게 돈 줘요!” 나는 엄마대신 책상을 바라보며 소리를 꽥 질렀다. 그러나 엄마는 놀라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천사 같은, 아니 바보 같은 우리 엄마. 나는 엄마의 아들이지, 엄마의 왕자가 아니란 것쯤은 나도 알고 있는데, 엄마는 왜 나한테 절절 매는지 모르겠다. 또, 엄마가 나에게 화를 내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엄마에게 짜증도 내고, 욕도 하고, 심술도 부렸지만 모두 허탕이었다. “돈? 얼마? 뭐 하려고?” “에이, 신경질 나. 엄마가 무슨 형사예요? 별 걸 다 묻네! 자연학습 준비물 사야 된단 말이에요! 2000원 줘요! 다른 집 애들은 돈 달라고 말하기 전에 아예 한달 용돈을 한번에 왕창 준대요!” 나는 조금 전에 먹은 밥 한 그릇이 한꺼번에 소화될 만큼 크게 말했다. 내가 엄마를 괴롭히는 마지막 방법은 이렇게 다른 집 부모들이랑 비교하는 거다. 그러면 엄마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 하지 않는다. ‘바보, 우리 엄마는 바보!’ 나는 엄마가 주는 돈을 받아들며, 속으로 바보라는 말을 2000원 어치, 아니, 2만원 어치나 중얼거렸다. 1000원짜리 두 장을 바지 주머니에 구겨 넣고 집에서 나온 나는 축 처진 어깨로 학교로 향했다. ‘창피해! 우리 반 애들 엄마들은 모델이나 탤런트처럼 이쁘고, 키도 크고, 옷도 멋있게 입는데 우리 엄마는 왜 저래? 키도 작은 데다가 못 생겼어! 옷도 정말 지저분하고 촌스러워! 난 정말 복 없는 아이야! 다음달에 엄마가 학교에 오면 난 도망칠 거야!’ 다음달 마지막 토요일은 학부모초청 공개수업 행사가 있는 날이다. 우리 학교는 일 년에 한 번씩 엄마 아빠들을 초청하여 우리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래서인지 그 날은 엄마와 아빠들은 파티에 가는 사람들처럼 눈부시게 꾸미고 오는데, 우리 엄마는 언제나 청소하다 달려 온 사람 같은 차림이다. 그러니 내가 얼마나 창피하고, 속상하겠는가! 그때 등 뒤에서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반 일 번, 이영석!” 우리 반의 반장, 김장철이다. 키도 크고, 공부도 잘 하는 장철이는 내 앞을 가로막고 뚝 하니 버텨 섰다. “영석아, 키 작다고 기죽어서 다니지 말라고 충고하는 거야. 아침부터 고개를 푹 숙이고 다니면 사나이가 아니지!” 장철이는 책받침으로 내리치듯 손바닥으로 내 등을 두 번 세게 때리고는 교실로 뛰어갔다. “에이 씨! 자기는 얼마나 크다구….” 나는 손을 뻗어 아픈 등을 꽉 누르며 중얼댔다. 나는 키가 작다. 5학년인데 150센티미터를 넘지 못한다. 이게 다 엄마 탓이다. 엄마는 키가 작다. 키가 178센티미터인 아버지는 키 작은 엄마가 너무 귀여워서 결혼했다고 말하지만 그건 옛날 일 아닌가! ‘나는 아버지를 닮아야 하는데 엄마 닮아서 키가 작아요. 왜 엄마는 키가 안 컸어요?’ 라고 내가 물었을 때에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영석아, 엄마가 어렸을 때 너무 가난해서 너의 외할머니한테 젖을 잘 받아먹지 못하고, 나중에는 밥도 자주 굶어서 이렇게 된 거야. 하지만 너는 엄마가 어떻게 하든 좋은 것만 먹이니까 고등학생 정도 되면 180센티미터는 될 거야.’ 그래서 나는 바락 대들었다. “그럼 나보고 고등학생 될 때까지 얘들한테 놀림받고 살란 말이에요? 왜 날 이렇게 작게 낳았어요? 엄마 자식이 키 때문에 놀림받고 사는 게 좋아요? 에이! 내가 아버질 닮았으면 얼마나 좋아. 아버지는 키도 크고, 잘 생기고, 멋쟁이인데…. 나는 엄마 닮아서 글렀어! 그것도 꼭 나쁜 점만 닮았다니까! 내가 공부 못하는 것도 엄마 닮아서 그런 걸 알기나 해요?’ 그래도 엄마는 빙긋 웃기만 했다. 바보 같은 엄마! 나는 아침부터 시장에서 생닭을 열심히 손질하고 있을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장사를 하고 있는 시장에서 누구도 나를 흉보거나, 나무라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칭찬을 한다. ‘영석이, 너는 효자라며? 엄마한테 그렇게 잘 한다며?’ ‘영석아, 네 엄마가 복이 많구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데도 어쩜 그렇게 효자니? 니네 엄마는 사람들 볼 때마다 하는 얘기가 네 칭찬이야. 너 나중에 어른 되서도 엄마한테 지금처럼 잘 해야 한다.’ 시장 사람들이 내 정체를 알면 얼마나 실망할까…. 오늘은 학교를 가지 않는 토요일이지만 나는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깨끗이 샤워를 하고, 엄마가 사준 새 점퍼를 입었다. 진한 파란색 점퍼는 내가 너무너무 입고 싶어했던 옷이다. 이 점퍼의 상표를 좋아해서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아이들은 대부분 신발도, 청바지도, 가방도 그리고 점퍼도 이 회사 상표가 붙은 거라면 자랑스럽게 입고, 신고 다닌다. 더구나 이 회사의 광고모델은 지금 인기 최고의 5인조 그룹 가수다. 단 몇 십 초 동안이지만 예쁘고, 늘씬한 누나들과 근육이 멋있는 키 크고 잘 생긴 형들이 노래하고 춤을 추며 상표 선전을 하는 걸 보면 정신이 쏙 빠진다. 이 상표의 옷을 입고, 신발을 신고, 모자를 쓰고, 청바지를 입고, 어깨에는 가방을 메고 거리에 나선다면 내가 180센티미터의 키에 멋진 남자가 되어, 이 세상에서 최고로 예쁜 여자가 내 친구가 될 것 같다. 나는 괜히 어깨를 으쓱하며, 헛기침을 했다. 그때,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영석아, 빨리 가자.” 새 점퍼를 입은 오늘은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날이다. 아버지는 부산에서 일을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한 달에 한번씩 부산으로 내려간다. 이번에 아버지를 만나면 다음달에 있을 학부모초청행사에 꼭 와 달라고 말할 거다. 나는 거울에서 물러나 마루로 나왔다. “으엑! 그, 그게 뭐예요?” 나는 엄마를 골려 주려고 일부러 입을 쩍 벌리고 놀란 척했다. “왜? 왜 그러니? 엄마 얼굴에 뭐 묻었니?” 엄마는 들고 있던 가방을 얼른 내려놓으며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었다. “에이, 촌스러워! 그게 뭐예요? 요즘에 누가 엄마처럼 그런 파마를 해요? 에이, 창피해!” 내 말에 엄마는 허둥거리는 손짓으로 머리를 매만졌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훑으며 죄 지은 사람처럼 작게 말했다. “어제 밤에 시장 일 끝나고 미장원에 갔는데, 내가 너무 늦은 시간에 간 바람에 원장님이 급히 말아주어서…. 그래도 이 파마가 다섯 달 이상은 간대. 난 별로 이상하지 않은데. 한 달 정도 지나면 길들여져서 괜찮아질거야. 어서 가자.” 참 이상한 일이다. 내가 엄마라면, ‘너 그딴 식으로 말하면 안 데리고 간다! 엄마를 무시하는 녀석은 안 데리고 가! 에이, 한 대 맞을래!’ 하면서 고속버스 표를 짝짝 찢을 거다. 그래서 아이의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다시는 함부로 말하지 않겠다고 싹싹 빌게 만들거다. 그런데 엄마는 빙긋 웃기만 했다. 집 밖을 나오면서부터 엄마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눈치가 여우보다 빠르고, 호랑이보다 매섭다. 나는 엄마를 흘낏흘낏 살폈다. 엄마는 거리에 있는 가게들의 유리창이 나타날 때마다 얼굴을 비쳐 보며, 손으로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매만졌다. 나는 엄마의 이런 모습을 보며 속으로 픽 하고 비웃었다. ‘흥! 얼굴이 예쁜 것보다 마음이 예뻐야 한다는 건 순전히 거짓말이야. 우리 반 애들도 그렇잖아. 영미는 착하고, 혜순이는 공부가 일등이고, 미옥이는 글도 잘 쓰지만 얼굴이 밉다고 남자애들한테 인기가 별로잖아. 그 대신 공부 못하는 진미랑, 깍쟁이에다가 공주병 환자인 성은이랑, 애들 무시하는 걸로 소문난 미미는 키 크고 예쁘다고 남자애들이 잘 해주잖아. 그래서 화이트데이 때에 그 애들이 사탕을 제일 많이 받았잖아. 요즘 텔레비전에 나오는 가수도 키 크고 얼굴이 예뻐야지 인기가 있잖아. 남자도 키 크고 잘 생겨야 출세하는 세상인데.’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엄마의 뒤를 천천히 따라 갔다. 그때, 엄마가 갑자기 내게 물었다. “영석아, 너, 키가 180 센티미터 되는 게 소원이라고 했지? 그런데 그렇게 키 크면 뭐 할 건데? 우리나라 통일을 위해서? 세계평화를 위해서? 엄마랑 아버지한테 효도하려고? 그것도 아니면 훌륭한 사람되려고?” 순간, 나는 아무 말도 못한 채 엄마를 바라보며 나 자신에게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순전히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니?´ ●작가의 말 요즘은 유치원 어린이들조차 몸짱, 얼짱이란 사람들에 열광하며 심지어는 흠모하며 모방하려 한다. 생각해본다. 정작 우리들의 마음, 양심, 생각을 멋있고, 아름다우며 건강하게 가꾸고 키우려고 한 적은 있는지? 한 권의 좋은 책을 읽은 얼굴, 생각을 깊이 하는 얼굴은 당장 이름다워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잘 난 얼굴보다도 아름답게 변화되어간다. 이것이 책과 사색의 힘이며 특권인 것이다. ●약력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중앙일보 신춘문예(동화), 한국일보 신춘문예(소설) 당선으로 등단했으며 현재, 한국작가회의 아동분과위원장, 한국방정환재단 운영위원으로 있다. 상계동아이들, 복실이네가족사진, 동화책을 먹은 바둑이, 짝끙바꿔주세요, 엄마친구아들 등 여러 책을 냈으며 그림자매 시리즈, 애니의 노래, 선생님 도와주세요 등 많은 어린이 책을 번역하고 있다.
  • 김재현 강서구청장 명예 철학박사 학위

    김재현 강서구청장 명예 철학박사 학위

    김재현 강서구청장이 19일 강서구 그리스도대학교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김 구청장은 낙후된 지역발전과 소외 계층에 대한 복지행정을 펼치고 관·학 연계 주민학습 프로그램 개발 등 탁월한 주민자치 철학을 인정받아 ‘그리스도신학대학 제1호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는다고 18일 강서구가 밝혔다. 2007년 12월20일 제5대 강서구청장에 당선된 김 구청장은 그동안 지역공동체 만들기에 힘써, 더불어 함께 사는 지역사회 조성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강서구는 그리스도대를 비롯, 중앙대와 강서구간 ‘평생학습교육협약’을 체결했다. 이를 통해 주민생활에 유익한 건강, 복지, 교양, 생활법률 등의 강좌를 개설, 주민들의 평생교육 기회를 열었다. 지역 초·중·고교의 교육환경 개선을 위해 약 50여억원의 교육경비를 지원했으며 어려운 학생 84명에게 10억여원의 장학금도 지급했다. 또 노인들의 건강과 여가활동 지원, 활기찬 노년을 위한 ‘어르신행복대학’을 전 자치회관에서 연중운영하고 있다. 더불어 범죄예방을 위한 ‘실버 순라군’을 만드는 등 노인 일자리 마련에 힘썼다. 노인들의 부족한 여가 공간 마련을 위해 경로당과 노인종합복지관 3곳을 건립하고 있는 등 노인복지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번 학위식은 그리스도대학이 1958년 개교된 이후 최초의 명예 철학박사 수여식이다.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나로’ 발사 의미와 전망

    ‘나로’의 발사는 우리나라 우주개발의 전환점이 될 전망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1996년부터 2007년까지 정부가 추진한 ‘우주개발중장기기본계획’에 따라 총 1조 9700억원의 예산을 투입, 6기의 위성(다목적실용위성 아리랑 1호, 2호, 우리별 1호, 2호, 3호, 과학기술위성 1호)을 성공적으로 발사 운용했다. 하지만 발사장이 러시아, 프랑스, 미국, 일본이었고, 발사체도 마찬가지였다. 이명균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는 “나로 발사의 성공은 우리나라가 우주 산업 10대 강국에 진입할 수 있는 교두보이자, 향후 우주개발의 이정표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나로의 발사성공 여부도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발사에 성공하면 우리나라는 세계 열 번째로 ‘우주클럽(Space Club)’에 가입하게 된다. 우주클럽은 자국 우주기지에서 자체 기술로 개발한 로켓을 발사 성공한 9개 나라로 구성돼 있다. 1957년 10월 4일 구 소련(현 러시아)을 시작으로, 미국(1958년), 프랑스(1965년), 일본(1970년), 중국(1970년), 영국(1971년), 인도(1980년), 이스라엘(1988년), 이란(2009년)이 발사에 성공했다. 하지만 로켓 1차 발사 성공률은 30% 수준이다. 미국, 일본도 1차 발사에서 모두 실패했다. 발사에 성공한 9개국 중 최초 발사에 성공한 나라는 구 소련, 프랑스, 이스라엘 세 나라에 불과하다. 우리나라도 1차 발사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 만약 이번에 발사가 실패하더라도 나로는 9개월 간격으로 내년 4월과 2011년 1월에 두번 더 발사 할 수 있다. 로켓 추진체인 1단을 제공하는 러시아와 최대 3회 발사, 2회 성공 조건으로 계약했기 때문이다. 이번 1차 발사와 내년 2차 발사에 연속 성공한다면 2011년 3차 발사는 하지 않는다. 현재 정부는 2007년 6월 ‘우주개발진흥기본계획(Space Vision 2016)’을 수립, 추진 중이다. 올 11월 말쯤엔 첫 정지궤도위성인 ‘통신해양기상위성(COMS)’이 발사된다. COMS는 통신·해양·기상탑재체로 관측한 정보를 국내·외로 송수신하며 수명은 7년. 특히 기상위성으로서 8분 단위 초단기 예측이 가능해져 돌발성 폭우·폭설도 예보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발사에 성공하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7번째 정지궤도 기상위성 보유국이 된다. 내년에는 과학기술위성 3호가 발사된다. 3호는 다음달 나로에 실려 쏘아 올려지는 과학기술위성 2호와 마찬가지로 적외선 카메라를 사용하는 관측위성이다. 3호는 우주만 관측할 수 있는 2호와는 달리 지구관측 능력도 갖추며, 중량도 100㎏급에서 150㎏급으로 늘어난다. 다목적실용위성(아리랑) 5호와 3호도 내년과 후년 각각 발사된다. 나로호의 뒤를 이을 후속 발사체인 한국형 발사체(KSLV-II)도 국내 독자기술로 2018년까지 개발된다.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위성발사의 경험을 축적하고 핵심기술을 습득해 2018년에 발사될 나로 2호(KSLV-II)는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는 1단 추진체도 우리기술로 만드는 것이 목표다.”라고 말했다. 이영준기자 apple@seoul.co.kr
  • [기고]우주 향해 첫걸음 떼는 나로우주센터/민경주 한국항공우주연구원 나로우주센터장

    [기고]우주 향해 첫걸음 떼는 나로우주센터/민경주 한국항공우주연구원 나로우주센터장

    “시간과 돈이 많으면 누구든지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수 있다. 그러나 시간과 돈이 부족한 상태에서 이 일을 달성해야만 우리는 유능한 연구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일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고 이러한 임무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기회로 생각하고 오히려 고마워하자!” 국내에서는 첫 시도였던 우주센터 구축을 위해 전라남도 고흥 외나로도에 모인 연구원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기 위해 자주 했던 말이다. 한국 최초 우주발사체 ‘나로(KSLV-I)’의 발사 임무를 수행할 나로우주센터가 공식적 준공을 알리고 우주를 향한 첫 출항을 준비하고 있다. 마치산 허리를 잘라 내 만든 발사대에 올라 시원하게 펼쳐진 남해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우주센터 구축을 위해 지금껏 이곳에서 피땀 흘린 자랑스러운 연구원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떠오른다. 사랑하는 아내가 신장이식 수술을 받고 누워 있던 서울의 병원을 뒤로하고 파견지로 떠나야 했던 연구원, 신혼 초기부터 이 프로젝트에 참여해 이제 아버지가 된 연구원, 이번 나로의 발사가 성공하면 그동안 가족에게 못해 주었던 것을 다 보상해 주고 싶다던 연구원, 한 달에 한 번 있는 체육 행사를 경험해 보고 싶다는 연구원 등. 그들의 노력과 희생이 없었다면 나로우주센터의 준공 역시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로우주센터는 우리나라 최초 우주발사장으로서 우리의 위성을 우리 땅에서 발사할 수 있는 기반이 될 뿐만 아니라 우주개발의 전초기지이면서 독자적으로 우주개발을 수행하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일반적으로 우주선진국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인공위성 및 발사체 자력개발 능력, 그리고 자국 내 발사장 구축 등 3박자가 갖추어져야 한다. 현재 우리의 우주개발 프로그램의 궁극적 지향점이 바로 이러한 3박자를 모두 갖춘 우주개발의 자주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지난 50여년 동안 수천 개의 위성을 우주공간으로 발사해 온 우주기술 선진국들의 우주개발 역사를 살펴보면 가장 먼저 대두되는 것이 바로 발사장, 즉 우주센터다. 세계적으로 발사장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으로 1949년 설립된 플로리다의 케이프커내버럴 발사장을 비롯해 현재 10개의 발사장을 운영하고 있다. 신흥 우주강국 중국은 1958년 유인우주선 선저우호 발사로 유명한 주취안발사장 설립을 시작으로 총 3곳을 운영하고 있으며, 현재 또 다른 발사장 한 곳을 건설 중에 있다. 일본 역시 1963년 건설된 가고시마 발사장을 비롯해 현재 세 번째 발사장을 구축하고 있다. 이처럼 각국이 우주개발을 수행하기 위한 선결조건으로 가장 먼저 발사장 설립에 착수하는 이유는 바로 우주센터가 우주개발을 수행하기 위한 전초기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미국, 러시아, 유럽연합, 일본, 중국, 인도 등에 비해 우주개발 역사가 매우 짧다. 하지만 우주센터를 보유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우리의 우주기반기술 확보는 비약적 성과를 이뤘다. 이제 이번 나로우주센터 준공과 첫 우주발사체 발사를 통해 앞으로 우리나라의 우주기술 개발이 더욱 탄력을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제 막 출항 준비를 알린 나로우주센터에서는 나로(KSLV-I)의 첫 발사 준비가 한창이다. 우주를 향한 대한민국의 꿈이 우리 위성에 실려 우리 땅에서 우리의 손에 의해 날아 오를 역사적 순간이 이제 멀지 않았다. 남해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우리의 땅에서 우리의 기술력이 생산해 낸, 태극마크 선명한 우주발사체 나로(KSLV-I)가 붉은 빛을 내뿜으며 힘차게 도약하는 장관의 순간을 그려 본다. 민경주 한국항공우주연구원 나로우주센터장
  • 中·日 군비확장 ‘소리없는 전쟁’

    中·日 군비확장 ‘소리없는 전쟁’

    │도쿄 박홍기특파원│“중국과 일본은 이미 소리없는 군비확장 경쟁에 들어가 있다.” 영국의 싱크탱크인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는 8일 발간한 ‘일본의 재무장’이라는 연구보고서를 통해 중·일 사이에 펼쳐지는 군비 증강의 현실을 지적했다. 보고서는 크리스토퍼 휴즈 영국 워위크대(국제정치·일본 문제)교수가 썼다. IISS는 지난 1958년 설립된 영국의 민간전략연구기관이다. 휴즈 교수는 “일본은 지속적으로 군비를 늘리는 중국과 대등하게 되기 위해 군사력의 증강을 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일본은 해상자위대를 인도양과 소말리아 해역에 파견, 세계의 해양안전보장에서 보다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고 평가했다. 해상자위대는 2001년 11월부터 인도양에 나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개되는 ‘테러와의 전쟁’에 참가한 다국적군의 함대에 연료를 지원하고 있다. 보고서는 “일본 자위대의 적극적인 활동은 국제 테러나 해적 대책, 해상수송로 방위뿐만 아니라 아프간이나 아프리카 등지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중국에 맞서려는 의도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중국 역시 세계 안보 분야에서 자국의 위치를 넓히려는 일본에 강한 경계감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일본의 재무장에 따라 “중·일간의 경쟁은 한층 심화될 우려가 있다.”고 내다봤다. 즉 군비를 증강하는 중국을 겨냥한 일본의 재무장은 다시 중국을 자극하는 악순환 구조를 낳고 있다는 논리다. 휴즈 교수는 보고서에서 “일본은 자국의 재무장이 미국과의 동맹 강화와 함께 세계 안보에서의 역할 제고라는 효과를 거둘 수 있겠지만 이웃 나라들과의 관계에 미칠 영향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불안정한 긴장의 요인이 되지 않도록 신중하게 다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보고서는 이밖에 일본의 방위비, 군수산업, 평화헌법 개정 움직임, 미·일 동맹 및 핵무기 문제 등의 내용도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중국의 지난해 군사비 지출은 스웨덴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의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2007년에 비해 10% 늘어난 849억달러(약 106조원) 규모이다. 미국의 6070억 달러에 이어 세계 2위 군사비 지출국으로 부상했다. 일본의 군사비는 463억달러로 7위를 기록했다. SIPRI 측은 “세계 군수산업은 이라크와 아프간 전쟁, 개발도상국의 국방예산 증가에 힘입어 경제위기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면서 “중국의 군사비 지출은 경제성장과 함께 군사대국이 되려는 열의와 맞물려 있다.”고 설명했다. hkpark@seoul.co.kr
  • [신경림 누항 나들이] 죽산 조봉암사건을 다시 떠올리는 이유

    [신경림 누항 나들이] 죽산 조봉암사건을 다시 떠올리는 이유

    올해는 죽산 조봉암이 사형을 당한 지 꼭 반 백 년이 되는 해다. 1958년 1월에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체포되어 다음해 7월 간첩죄로 처형되었으니 실로 일사천리의 고속 재판이었다. 그가 저지른 죄라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뻔했으니 그 전전해 치러진 대선에서 너무 많은 표를 얻음으로써 보수정치인들에게 큰 위협으로 떠올랐다는 점이 그 하나요, 그때까지도 금기시되었던 남북의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는 것이 그 둘이었다. 그 재판이 가진 정치적 성격을 알고 있는 1심 재판부는 간첩죄에는 무죄를 내리고 국가보안법 일부에 비교적 가벼운 5년 형을 선고했으며, 진보당 간부들은 모두 무죄로 석방을 했다. 그러나 항소심은 검찰이 구형한 대로 간첩죄를 적용, 그에게 사용언도를 내렸으며, 이듬해의 상고심에서도 그대로 사형언도가 되풀이되었다. 그리고 5개월 뒤의 재심청구가 대법원에서 기각된 바로 다음날(7월31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때의 비통하고 절망적이던 느낌을 나는 ‘그날’이라는 시에서 비유적으로 형상화한 바도 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잠이 잘 오지 않는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 명명백백한 사법살인의 희생자인 죽산이 아직도 명예회복이 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 민주주의는 크게 퇴행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상당한 수준의 민주화를 성취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가 아직도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렇게 장황하게 죽산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고 있는 것은 그 재판과정에서 한 재판관이 보여준 용기있는 결단이 최근 새삼스럽게 생각나서다. 1심의 재판장이던 그는 세간의 예상을 뒤엎고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죽산의 평화통일론에 손을 들어주었다. 북진통일 이외의 어떠한 방식의 통일도 논해서는 안 되는 서슬 퍼런 시대에 말이다. 매일처럼 경찰의 노골적인 비호 아래 용공판사를 규탄하는 데모가 벌어졌고, 당국은 공공연히 그에게 사퇴 압력을 가했다. 그 뒤 압력을 이겨 내지 못하고 그가 사퇴한 것으로 알지만, 그가 남긴 기록 한 대목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 책(아마도 ‘어느 재판관의 고뇌’라는 책이 아니었나싶다)에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육이오 때 그는 부역자들을 재판하는 고역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급조된 계엄법은 재판관의 재량을 한껏 제한, 유죄인 경우 사형, 무기, 15년의 세 가지 형을 선고하는 자유밖에 주지 않았다. 그는 명확한 증거가 없는 한 거의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했으며, 범법의 심증이 있을 경우에도 그것이 가벼운 것이면 무죄로 판결했다. 강제 동원되어 노래 몇 마디 부르고 박수 몇 차례 쳤다가 15년의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는 불행한 삶이 있게 하는 것이 법의 취지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법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 위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통한 죽음과 죽산의 사법 살인은 서로 닮은 곳이 없다. 그런데도 문득 죽산 사건이 생각난 것은 그 재판관이 피의자에 대해서 가졌던 태도와 노 전 대통령을 다룬 검찰의 태도가 너무나 판이해서였다. 그 재판관은 피의자는 유죄가 확정되기까지는 일단 무죄라는 생각으로 피의자를 대했으며, 피의자도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피의자를 조롱하고 망신주고 모욕하는 일을 법관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터부로 여긴다는 뜻의 진술도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이런 합리적이고 온유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검찰에 몇 사람만 있었어도, 전직 대통령의 자결이라는 불행한 광경을 우리는 역사에서 보지 않았어도 좋았을는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새삼스럽게 그를 생각나게 하며 죽산사건을 떠오르게 한다. 법도 역시 사람을 위해서 기능하는 것이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그 법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인간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인간적인 사람들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의 진술도 잊히지 않는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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