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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영화 르네상스 이끈 거장의 작품들

    1960년대 한국영화 전성기를 이끌었던 김수용(83) 감독의 예술 세계를 감상해 볼 수 있는 전시회가 서울 도심에서 열린다. 중구와 중구문화원은 9월 4~10일 문화원 예문갤러리에서 ‘영화의 향기, 김수용의 예술세계’를 개최한다고 30일 밝혔다. 2012 청계천예술제의 첫 번째 기획전시로 열리는 이번 행사는 김 감독이 연출한 작품을 모아 전시와 영상전, 축제마당으로 마련된다.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기도 한 김 감독은 1958년 데뷔작 ‘공처가’로 충무로에 입성한 뒤 1999년 ‘침향’까지 40년이 넘는 영화 인생 동안 ‘저 하늘에도 슬픔이’, ‘갯마을’, ‘안개’, ‘도시로 간 처녀’ 등 109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개막식인 4일에는 성우 배한성씨의 사회로 극작가 신봉승씨가 김 감독의 50년 영화인생을 소개한다. 김 감독이 만든 영화의 하이라이트만 모은 영상전도 연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세계서 가장 똑똑한 10인은 누구?

    세계서 가장 똑똑한 10인은 누구?

    사람이 얼마나 똑똑한 지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주관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들의 지능지수(IQ)나 성취도 만으로 판단하기에는 다소 문제가 될 수도 있지만 여기 ‘슈퍼스칼러(SuperScholar)’라는 비영리단체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10인을 선정했다고 미국 허핑턴포스트가 전했다. 슈퍼스칼러에 따르면 50%에 달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IQ가 90~110 사이며 하위 2.5%는 IQ 70 이하고, 상위 2.5%는 IQ 130 이상, 0.5%는 IQ 140 이상에 속한다. 다음은 슈퍼스칼러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10인(순위는 없음.) ▲스티븐 호킹(70) 영국의 이론물리학자. 그는 루게릭병에도 불구하고 블랙홀 등의 우주 연구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겨 14개의 표창을 받은 바 있다. IQ 160인 그는 7권의 베스트셀러를 가진 작가이기도 하다. ▲김웅용(50) 진정한 신동으로 꼽힘. IQ 210인 그는 한때 기네스북에서 10년간 세계에서 가장 높은 IQ를 가진 인물로 기록됐으며 현재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IQ를 가진 인물로 알려졌다. 네 살때 4개국어를 통달했으며 1974년 12세때 미국항공우주국(NASA)에서 선임연구원으로 발탁돼기도 했다. 현재는 충북개발공사에 재직하고 있다. ▲폴 앨런(59) 마이크로소프트(MS)의 공동창업자. 천재 중에서 가장 성공한 인물로 꼽히는 그는 142억달러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현재 세계 재벌 순위 48위에 기록되고 있다. IQ는 170이며 SAT 중 두 과목에서 1600점 만점을 기록한 것으로 전해졌다. ▲릭 로스너(52) 미국 공중파 방송의 제작자 겸 작가. ‘경찰특공대’란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그는 IQ가 192가 넘지만 스트리퍼, 롤러스케이팅 웨이터, 나이트클럽 기도, 누드모델 등의 다양한 이력을 보유하고 있다. ▲게리 카스파로프(49) 1985년 22세의 나이로 최연소 체스 그랜드마스터가 됐다. 21년간 세계 최정상의 자리를 지켰으며 1996년 슈퍼 컴퓨터 ‘딥 블루’에 패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IQ 190인 그는 대통령 선거 후보로 출마한 바 있으며 현재는 작가이자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앤드류 와일즈(59) 영국의 천재 수학자. 1995년 그는 358년간 그 어떤 수학자도 증명하지 못했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를 증명했다. IQ 170인 그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수학 및 과학에 관한 15개의 수상을 한 바 있다. ▲주디트 폴가(36) 15세의 나이에 체스의 대가 바비 피셔를 꺾고 체스 최연소 그랜드챔피언에 올랐다. 부친은 그녀와 언니 소피아를 대상으로 교육에 대한 획기적인 실험을 성공시켰다. 그녀의 IQ는 170이다. ▲크리스토퍼 히라타(30) IQ 225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다. 그는 14세때 캘리포니아공과대학(칼텍)에 입학했으며 16세때 NASA의 화성 관련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22세에 프린스턴 대학에서 천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알려졌으며 13세때 물리학올림피아드에서 금메달을 딴 바 있다. ▲테렌스 타오(37) 세계에서 가장 지능이 높은 인물. IQ가 230으로 기록돼 있다. 그는 유아때 어린이 프로그램인 ‘새서미 스트리트’를 보고 홀로 셈을 터득했다. 2살때는 기본적인 수학 능력을 갖췄고 9세 때는 대학과정의 수학 문제를 풀었다. 그는 24세에 UCLA 최연소 교수가 됐다. 13세때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금메달을 땄다. ▲제임스 우즈(65) 가장 똑똑한 영화배우. IQ 180인 그는 SAT 언어에서 만점을 수학에서 779점을 받았으며, 메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그는 에미상을 세 차례 수상했으며 아카데미상에 두 차례 노미네이트됐다. 사진=슈퍼스칼러닷오알지 윤태희기자 th20022@seoul.co.kr
  • 美엔 자존심·인류엔 신기원 찾아준 영웅 ‘고요의 바다’로

    美엔 자존심·인류엔 신기원 찾아준 영웅 ‘고요의 바다’로

    “한 인간에게는 작은 걸음일지 모르지만 인류 전체에는 위대한 도약이다.” 1969년 7월 20일. 당시 전세계 인구의 5분의1에 해당하는 6억명은 인류 최초로 우주 왕복선인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 표면을 밟은 한 남자의 소감을 들은 뒤 환호했다. 세계 역사상 오래 기억될 이 결정적 순간의 주인공이자 미국인들의 ‘우주 영웅’인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이 25일(현지시간) 세상을 떠났다. 82세. 암스트롱은 관상동맥 협착 증세로 이달 초 심장 수술을 받았으나 수술 뒤 발생한 합병증 때문에 사망했다고 그의 가족들이 성명을 통해 발표했다. 가족들은 “그를 잃은 것은 애석하지만 그의 삶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세계 젊은이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1930년 오하이오주의 와파코네타에서 출생한 암스트롱은 어린 시절부터 하늘을 나는 것에 관심이 많아 16살에 운전면허증을 따기도 전에 비행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항공 우주의 매력에 빠진 암스트롱은 1947년 퍼듀대학에 입학해 항공공학을 전공했다. 1949년 대학 재학 중 해군에 입대해 한국 전쟁에 참전했고 78차례의 전투 비행 임무를 완수한 뒤 1952년 제대했다. 한국 전쟁 당시 서울 수복에 큰 공을 세워 3개의 훈장을 받기도 했다. ●16살때 차보다 비행자격증 먼저 따 전쟁에서 돌아온 그는 다시 대학에 돌아가 1955년 졸업한 뒤 1958년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 시험 비행조종사로 일을 시작했다. 1962년 9월 NASA의 제2기 우주비행사로 선발돼 1966년 ‘제미니 8호’의 지휘 조종사로서 아제나 위성과 최초의 도킹에 성공했다. 3년 뒤 1969년 7월 16일 에드윈 버즈 올드린, 마이클 콜린스와 함께 아폴로 11호에 탑승해 달을 향해 출발한 암스트롱은 7월 20일 오후 10시 56분(한국시간 7월 21일 오전 11시 56분)에 ‘고요의 바다’라고 불리는 달 표면에 무사히 착륙했다. 그의 달 착륙 성공은 1957년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면서 우주 개척 분야에서 선두 자리를 지키고 있던 옛 소련으로부터 미국이 자존심을 되찾아오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주 탐험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평소 ‘영웅으로 불리기를 꺼리는 영웅’으로 칭송받을 정도로 겸손했던 암스트롱은 달 착륙 임무를 완수하고 난 4개월 뒤 두 동료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으며, 1971년 NASA에서 은퇴해 1979년까지 신시내티대학에서 우주 공학을 가르쳤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날 성명을 내고 “암스트롱은 그가 살았던 시대뿐 아니라 전 세대에 걸쳐 미국의 위대한 영웅”이라며 “그가 처음 달에 발을 내디뎠을 때 인류에게 절대 잊혀지지 않을 성취의 한 순간을 전했다.”고 고인의 업적을 기렸다. 밋 롬니 공화당 대선 후보 역시 성명을 통해 “달은 첫 번째로 자신을 방문한 지구의 아들을 그리워할 것”이라고 애도의 뜻을 전했다. ●동료 올드린 “달 볼때마다 떠올릴 것” 암스트롱과 함께 아폴로 11호에 탑승했던 버즈 올드린은 “달을 볼 때마다 40여년 전 달을 밟았던 그 순간을 떠올리게 될 것”이라며 “2019년 달 착륙 50주년을 기념해 세 명이 함께 만나기로 했는데 그러지 못하게 됐다.”며 안타까워했다. 조희선기자 hsncho@seoul.co.kr
  • [커버스토리] 국산車 생산 50년…5대 강국으로

    [커버스토리] 국산車 생산 50년…5대 강국으로

    “기아가 100% 자체 개발로 승용차를 만든다고 하자 일본 기술자들이 ‘기아가 만든 차가 굴러갈 수 있을까요?’라며 비웃었습니다. 우리는 그 말을 책상 앞에 붙여 놓고 씨름한 지 1년 만에 100% 우리 손으로 세피아를 만들어 냈습니다.” 기아차에 입사, 봉고 신화 등을 낳아 ‘한국의 아이어코카’, ‘자동차 경영의 귀재’ 등으로 불린 김선홍(80) 전 기아차 회장의 회고다.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뒤 1958년 기아산업 공채 1기로 입사한 그는 1968년 36세에 이사가 되는 등 기아산업과 고속성장을 같이한다. 1981년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 이후 현재 기아자동차의 골격을 잡았다. 포드·마쓰다와 3각협력체제를 구축, 프라이드 신화를 일군 것도 그였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 직전 기아차의 좌초로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은둔해 왔다. 인터뷰를 사양하던 그를 지난 23일 서울 강북구 미아동 그의 자택 앞 찻집에서 만났다. 칩거 이후 15년 만이다. 김 전 회장은 “바퀴도 핸들도 못 만들던 우리가 세계 5위의 자동차 강국이 된 것을 보니 인생을 걸고, 자동차 국산화만을 보고 달렸던 나의 인생이 헛되지만은 않은 것 같다.”며 미소를 지었다. 김 전 회장이 자동차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55년. 유엔재건단의 차량 등에 쓰이는 부품을 조달하거나 만드는 병기기술연구소에서 근무했다. 그는 “자동차 한 대도 못 만드는 나라지만 그곳에선 가내 수공업으로 거의 모든 부품을 만들고 있었다.”면서 “이런 저력이 우리 자동차산업의 바탕에 깔려 있다.”고 설명했다. 이 경험으로 그는 1962년 기아산업이 상공부와 함께 추진하던 삼륜차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김 전 회장은 “3륜차가 나온다고 하자 지금의 서울시청 광장에 우마차들이 가득 모여 ‘삼륜차 때문에 먹고살기 어려워진다’며 데모를 했다.”면서 “그때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김 전 회장은 1970년대 말 제2차 석유파동으로 기아차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회장으로 추대돼 ‘봉고신화’에 이어 프라이드, 세피아, 엘란, 중형차 크레도스 등을 내놓는다. 그는 “봉고는 기아차를 살렸고, 프라이드는 기아차에 날개를 달아 주었던 차”라고 소개했다. 화제를 바꿔 은둔의 배경을 묻자 “다시 세상에 나타나고 싶지 않았다.”면서 “그냥 ‘김선홍 기아 회장’이란 이름이 잊혀지기를 바랄 뿐이었다.”고 털어놓았다. 기아차의 좌초 음모설에 대해선 “내가 무슨 이야길 할 수 있겠나. 나는 패장이다. 이제 모든 걸 다 놓았다. 배가 침몰하면 부하들의 크고 작은 실수를 선장이 지는 것이 옳다.”고 손사래를 쳤다. 한국의 자동차 산업과 관련, 김 전 회장은 “세계적인 석학 피터 드러커가 미국 GM이 한창 잘나갔던 1970년대에 ‘쉐보레 브랜드를 스핀업(분사)시켜야 한다’고 했다.”면서 “당시 드러커의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GM이 이렇게 위기를 맞지 않았을 것”이라고 답을 대신했다. 글 사진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15)경북 영양 지훈길·두들마을길

    [길을 품은 우리 동네] (15)경북 영양 지훈길·두들마을길

    면적은 서울의 1.3배이지만, 인구는 1만 8000명. 경북 영양은 중부고속도로 입구에서 차로 1시간 30분을 더 가야 닿을 수 있는 두메산골이다. 흔한 4차선 도로나 신호등조차 이곳에선 사치다. 하지만 영양은 오일도·조지훈·이문열 등 내로라하는 대가들을 연거푸 배출한 넉넉한 ‘문향’(文鄕)이다. 옛 이름 고은(古隱)처럼 수백 년 된 고택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밤이면 마구잡이로 쏟아져 내리는 별 무리에 없던 감수성도 살포시 샘솟는 곳. 권오승 영양군 부군수는 “영양의 이런 특이점이 다른 지역보다 더 많은 문인을 배출하게 한 원인일지 모른다.”고 말했다. 조지훈의 주실마을과 이문열의 두들마을을 찾았다. 지난 9일 정오 영양 북단 일월면에 있는 주실마을. 노()신사가 발길을 멈추고 울컥, “선생님….” 외마디만 던지고 눈물을 훔쳤다. “고려대에서 문학을 가르친 조동탁(호 지훈) 선생의 흔적을 찾아 1960년대 학번 제자들이 자주 이곳을 찾는다.”고 양희 조지훈문학관 해설사가 말했다. 어디 제자들뿐이랴. 조지훈을 기억하고 그와 같은 시인이 되기를 꿈꿨던 이들에게 이 마을을 다녀간다는 건, 곧 성지순례다. 문학을 좋아하건 그렇지 않건,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승무)’ 한 구절쯤은 읊는다. 시인의 생전 모습과 그가 남긴 작품에 흠뻑 취해 걷는 길. 1017m 지훈길엔 시인이 나고 자란 고택(호은종택·壺隱宗宅)과 문학 공원의 20여개의 시비가 길 따라 놓여 있다. 호은종택은 겹겹이 쌓아올린 담에 口자 모양이다. 폐쇄적인 가옥 형태다. 이에 대해 김민자 문화해설사는 “당시 경상도 양반가는 자신을 꽁꽁 감춰 남을 배려하고 체통을 지켰다.”면서 “삼불차(三不借·빌리지 않는 세 가지)는 조선중기 환란을 피해 주실마을에 온 한양 조씨의 가훈”이라고 말했다. 재(財)불차·문(文)불차·인(人)불차로 재물·문장·양자를 빌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수백 년을 이어져 온 이 원칙 때문에 주실마을 조씨를 ‘칼 같은 남인(南人)’이라 하여 검남(劍南)이라 불렀다. 퇴계학풍을 계승한 남인은 지금으로 치면 수백 년간 정권을 잡은 적이 없는 ‘만년야당’이라고 할 수 있다. 호은종택 뒤로는 시인이 17세까지 지냈던 ‘방우산장’(放牛山莊)이 있다. 시인은 이곳과 서울 성북동 자택은 물론 자신이 기거했던 곳은 모두 방우산장이라고 불렀다. 위치가 산도 아닐뿐더러 소를 키우지도 않아 이런 이름을 지은 까닭이 궁금하다. 그는 1953년 신천지에 기고한 ‘방우산장기’에 “설핏한 저녁 햇살 아래 내가 올라타고 풀피리를 희롱할 한 마리 소만 있으면 그 소가 지금 어디에 가 있든지 내가 아랑곳할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일월산 전설이 조지훈의 ‘석문’ 소재 그 옆 지훈 문학관. 시인의 손때 묻은 자필 원고와 담배파이프·안경·모자 등 소품들이 눈에 띈다.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닥아서다(낙화의 한 부분)”. 생전에 여동생과 함께 육성으로 녹음한 시낭송도 들을 수 있다. 이 시는 창작 의도와 상관없이 한 정치인에 의해 더 널리 알려졌다.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가 2003년 구속될 때 자신의 심경을 이 시를 인용해 표현했다. 문인에게 고향이란 창작 소재이기도 하다. 일월산을 배경으로 전승되고 있는 황씨부인당 전설은 첫날밤도 치르지 않고 떠나버린 남편을 기다리다 죽은 한 규수의 안타까운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바로 조지훈의 ‘석문’(石門)의 모티브다. 이문열의 대표 소설인 ‘젊은 날의 초상’에도 영양에서 영덕으로 넘어가는 창수령이 등장한다. 영양군 남단 석보면 두들마을은 이문열이 나고 자란 곳이다. 이 마을을 관통하는 1787m 두들마을길은 석천서당·석계고택·유우당 등 ‘문화재투성이’다. 작가가 집필하고 후학양성을 위해 지은 한옥집 광산문우(匡山文宇) 담 아래에는 백일홍이 심어져 있다. 그의 문중인 재령이씨 사람들이 대대로 좋아하는 꽃이다. “내가 이만큼 글을 쓰는 것도 고향을 잘 만났기 때문”이라는 작가의 고향사랑이 묻어난다. 이르면 올해 말 이문열이 이곳으로 영구이주할 것이라고 군의 한 관계자가 귀띔했다. 지금도 잘 보존되고 있는 재령이씨의 두들마을 전통 중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음식디미방이다. 조선조 대학자 석계 이시명의 정부인 장계향이 380여년 전 지은 동아시아 최초의 조리서다. 종부 조귀분(63)씨가 이 조리서에 담긴 146가지 음식을 재현했다. 꿩·해삼·전복은 물론 곰바닥까지 이용해 화려하다. 특이한 점은 조리법의 51가지가 술 빚는 법이라는 점이다. 이 중 감향주(甘香酒)는 걸쭉해서 숟가락으로 떠먹는 술이다. 찹쌀·멥쌀·누룩·물 등 4가지 재료로만 만드는데, 도수는 13~14도 정도로 적포도주와 비슷하다. 박승길 군 전통음식육성담당은 “당시 재령이씨 문중을 찾아온 손님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그들에게 정성껏 술상을 차려 대접하는 것이 아녀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어쩌면 ‘문향’에 술이 발달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지훈도 소문난 애주가였다. 1958년 ‘신태양’에 기고한 ‘삼도주’(三道酒)라는 글에서 그는 “술의 진미를 완미(玩味·음식을 잘 씹어서 맛봄)하는 심경이면 탁주·소주·약주 할 것 없이 가위 도주라 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재령이씨 음식디미방 술 빚는 법이 30% 장계향은 이문열의 소설 ‘선택’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가부장사회인 조선시대, 시문에 뛰어났던 그가 아녀자로서 자식 양육과 집안일에 충실했던 것이 ‘강요’가 아닌 ‘선택’이었다는 것을 일생을 짚어가며 설명한다. 이 때문에 1997년 연재 당시 ‘반페미니즘 소설’로 낙인 찍혀 공격을 받았다. 작가 자신도 인정하듯 “페미니즘에 저항할 논리는 이 세상에 없다.” 하지만 작가는 “선입견 없이 읽어 보면 거기서 비판되고 있는 것은 저속하게 이해되고 천박하게 추구되는 페미니즘임을 알게 될 것”이라고 논쟁에서 단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런 고집스러움은 1960년 4월 혁명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큰일을 위해 죽음을 공부하라.”고 한 조지훈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대학교수였던 시인은 학생들에게 “내가 죽음을 공부하라는 것은 군중 속에 휩싸여서 군중과 함께 여러 사람에 싸여서 죽는 공부가 아니라 혼자서라도 죽을 공부를 하라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오탁번 고려대 명예교수는 “(4월 혁명이) 무질서화되고 소인배들의 명리로 전락할 기미가 보이자 강경한 어조로 그들을 깨우쳤던 것”이라면서 “선생의 위치에서 떳떳이 설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지훈의 이와 같은 꾸짖음은 더욱 빛났다.”고 평가했다. 겹겹이 쌓아올린 경상도 양반가 담벼락 안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대가의 속마음을 정확히 알 순 없다. 하지만 껍질이 두꺼워 고춧가루가 많이 나오는 영양고추처럼 이곳 출신 작가들의 작품이 유난히 실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글 사진 영양 김양진기자 ky0295@seoul.co.kr ●16회는 대전시 대덕구 동춘당로를 소개합니다.
  • 코스타리카 대통령 ‘서울명예시민’

    코스타리카 대통령 ‘서울명예시민’

    중남미 국가인 코스타리카의 라우라 친치야 미란다(54) 대통령이 외국국가 원수로는 12번째로 서울시 명예시민이 된다. 서울시는 이명박 대통령의 초청으로 지난 19일부터 22일까지 3박 4일 동안 방한한 친치야 대통령이 21일 오후 시청에 들러 박원순 시장으로부터 서울특별시명예시민증을 받는다고 20일 밝혔다. 명예시민은 1958년 시작했으며, 그동안 우즈베키스탄 대통령 등 11명의 국가원수와 거스 히딩크 감독, 미국 풋볼선수 하인스 워드 등 92개국 666명이 명예시민증을 받았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99세 노작가,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채색하다

    99세 노작가,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채색하다

    “거, 왜 나이 얘기를 꺼내 가지고…. 전 나이 생각 안 합니다. 여기 모두가 죽을 사람들이고, 산다는 건 곧 죽음 속에서 산다는 얘기지요. 모두가 만나는 게 죽음인데 때 되면 간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말투는 어눌하고 발음은 샌다. 그런데 느릿느릿 말을 이어가는 와중에 흘리는 싱긋 웃음은 해맑다. 9월 16일까지 서울 신사동 갤러리현대강남에서 한국 추상의 1세대, 기하추상의 대부로 꼽히는 한묵(작은 사진) 작가의 회고전이 열린다. ●시대별 작품 40점·미공개작 4점 전시 작가는 1914년생이니 올해 우리 나이로 아흔아홉으로 최고령 생존 작가다. 그런데 1961년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리겠다며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아직 거기서 산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 자주 이름이 들먹여지는 작가는 아니다. 멀리 떨어져 지내는 데다 스스로도 작품에 진전이 없다 싶으면 애써 전시를 하지도 않았으니 더 그랬다. 그래서 젊은 시절부터 꾸준히 작업해 왔는데 이번 전시를 계기로 낸 도록이 첫 도록이란다. 한국 개인전도 2003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연 ‘오늘의 작가전’ 이후 처음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만주로 이주한 작가는 그 곳에서 미술을 배우고 일본 가와바타미술학교에서 공부를 이어 나갔다. 광복과 함께 금강산에 머물다 분단으로 북한에 남았다가 1·4 후퇴 때 월남해 중고등학교 미술교사를 거쳐 홍익대 교수로 부임했다. 그야말로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받아 낸 것이다. 이제 홍익대 교수로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기반이 꾸려졌을 때 작가는 홀연히 그림을 제대로 그리겠노라며 프랑스행을 택했다. 프랑스 공부를 통해 이전 한국에서 하던 구상 같은 추상을 버리고 완전한 기하추상의 작업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는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시대별 작품 40여점과 미공개작 4점을 전시해 뒀는데 작가의 변화상이 읽힌다. 초기에 한국전쟁으로 인한 비참한 상황을 그려냈다면, 프랑스로 건너간 뒤엔 3차원적 공간을 2차원 캔버스에서 구현하기 위해 노력한 작품들, 3차원에다 시간까지 끌어들여 만들어낸 작품들로 차츰차츰 변화해 왔다. ●한국전쟁 후 모습·광주민주화운동 참사 그려 아무리 추상이라 해도 한국 현대사를 겪은 상흔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1958년 잡지 ‘신태양’ 표지 그림으로 그린 ‘흰 그림’은 발표 당시 한국전쟁 이후 한국인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해서 크게 화제가 된 작품이다. 1987년작 ‘동방의 별들’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을 담은 작품이다. 부인 이충석(81)씨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르몽드 신문에 그 참상이 전해졌는데 그 뒤로 한 1년 정도는 붓을 못 잡을 정도로 괴로워했다.”면서 “그들의 눈동자를 위로하는 작품”이라고 전했다. 작가와 이중섭(1916~1956)의 인연도 빼놓을 수 없다. 일본 유학 시절, 금강산 시절, 서울 시절을 모두 함께했을 뿐 아니라 이중섭의 마지막을 수습한 이가 바로 작가다. 그런데 이중섭 얘기만 나오면 작가는 입을 잘 열지 않는다. 생전에 한 번도 인정받지 못하고 거의 굶어 죽다시피 한 그가 안타까워 그러는 것이다. 부인에 따르면 지난해 이중섭 장례식 때 쓰였던 방명록을 우연히 찾았다고 한다. 그래서 건네줬더니 너무 속상해하며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고 했다. 그 비통했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기 싫다는 것이다. 부인조차 “이중섭에 대한 얘기는 아픔이 너무 커서인지 절대 안 하려고 해서 나도 별로 들은 바가 없다.”고 전할 정도다. 기자의 질문에도 작가는 회갑 때 이중섭을 기리며 지었다는 ‘친구가 날아간 동녘하늘을 바라보며’라는 시만 보여줄 뿐이었다. (02)519-0800.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파란만장 ‘원숭이女’ 미라, 1세기 만에 고국으로

    평생을 사람들의 손가락질 속에서 살았고, 죽어서도 원치 않은 전시품이 되야 했던 한 희귀병 여성이 사망한지 92년 만에 고국의 땅을 밟게 됐다. 해외언론의 6일자 보도에 따르면 멕시코 출신의 줄리아 파스트라나는 1834년 출생 당시부터 선천성 다모증으로 얼굴을 포함한 몸 전체에 털이 수북하게 자라는 기이한 외모를 가졌다. 얼굴을 뒤덮은 검은 털 뿐 아니라 유난히 큰 코와 돌출된 입 때문에 언제나 사람들은 그녀를 ‘원숭이 인간’ 등으로 부르며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봤고, 서커스 등에 나서며 유랑하다 26살 때인 1860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공연 중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녀는 자신을 닮은 아이를 출산한지 3일밖에 지나지 않았으며,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파스트라나가 사망한 뒤에도 고단함은 계속됐다. 그녀의 시신은 곧장 미라로 만들어졌고, 숨지기 직전까지 몸담았던 서커스단은 공연 내내 그녀의 미라를 보관한 유리관을 전시했다. 1921년 노르웨이의 한 축제 기획자가 그녀의 시신을 사들였지만 58년 뒤인 1979년 시신이 감쪽같이 도난당했다. 그리고 20년 뒤, 그녀의 시신은 밀봉된 관에 든 채 노르웨이 오슬로대학의 해부학 실험실에서 발견됐다. 최근 오슬로대학 측은 서신을 통해 파스트라나의 시신을 멕시코 교육부로 보내겠다는 뜻을 밝혔으며, 정확한 장례식 일정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 문화대혁명 위기 이겨낸 내화의 명인

    문화대혁명 위기 이겨낸 내화의 명인

    섬세한 수작업으로 만들어지는 중국 특유의 미술공예 내화(內畵). 투명하거나 반투명한 용기 안쪽 면에 그린 그림을 말한다. 2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내화의 명맥을 잇는 예술가 중에서도 대가로 꼽히는 명인 왕시싼. 31일 밤 10시 40분에 방송되는 EBS ‘직업의 세계-일인자’에서는 문화대혁명의 시련을 이겨내고 중국 최고의 내화 명인이 된 왕시싼을 만나 본다. 내화는 특별히 제작된 세필을 병의 입구로 넣어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한다. 청조 때부터 시작된 내화는 애초 코담배를 담았던 병을 장식하기 위해 생겼으나 이후 독특한 공예품으로 발전했다. 100명이 안 되는 중국의 내화 예술가 중에서도 단연 최고로 꼽히는 왕시싼. 1938년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어릴 때부터 미술을 좋아하던 소년이었다. 1958년 민간예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지어진 공업예술연구소의 학생으로 합격하면서 정식으로 내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의 내화 예술 작품은 전량이 외국으로 수출될 만큼 수출가치가 높았다. 왕시싼은 특유의 섬세하고 생동감 있는 작품을 만들어 내며 내화 명인으로서의 입지를 다져 나갔다. 내화 예술가로서 승승장구하던 그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1966년에 문화대혁명을 겪으면서 반혁명자의 아들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부친의 고향인 헝수이로 쫓겨나다시피 와야 했다. 베이징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에게 헝수이는 낯선 땅이었다. 물론 돈 한 푼 없이 맨손으로 다시 시작해야 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힘들 때마다 그림을 그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오롯이 예술만 바라보며 작품 활동을 계속해 오길 40여년, 왕시싼은 현재 중국에서 ‘국가미술공예대사’로 지정될 만큼 내화에 관한 한 최고의 명인으로 꼽히고 있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최동호 새벽을 열며] 천재 시인 백석과 늙은 양치기

    [최동호 새벽을 열며] 천재 시인 백석과 늙은 양치기

    지난 7월 1일은 천재 시인 백석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백석은 1912년 평북 정주에서 출생해 1930년 소설로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일본 유학 후 1936년 1월 시집 ‘사슴’을 간행해 시단에 혜성과 같이 등단했다. 1935년의 정지용 시집에 이어 다음 해 백석 시집의 출간은 한국 현대시가 실질적으로 서구 모더니즘을 극복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김기림은 ‘백석 시집을 가슴에 안고’라는 신간 서평을 통해 백석 시집이 ‘신년 시단에 한 개의 포탄을 내던졌다.’고 표현한 바 있다. 백석은 문학적 명성만큼 행복한 시인은 아니었다. 구원의 여성 란과 사랑을 이루지 못한 이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흥 영생고보의 영어교사로 부임했지만 다시 여기서 만난 자야 여사와의 사랑 또한 불행한 결말로 끝났다. 1940년대에는 만주 일대에서 방랑하듯 생계를 위해 측량보조원, 측량서기, 소작인 등 온갖 고초를 겪는 극빈의 생활을 경험했다. 백석이 이 시기에 쓴 것으로 여겨지는 역작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과 같은 시는 그의 시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남북 분단으로 문단에서 사라진 그의 시들은 유종호 신경림 등의 선구적인 논의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봉인된 채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그의 시가 다시 사람들에게 읽히기 시작한 것은 1988년 납북·월북작가들에 대한 해금 조치 이후다. 2001년 북의 유족들에 의해 1995년 백석이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1959년 1월부터 사망시까지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의 협동농장에서 양치기 생활을 한 것도 전해졌다. 1958년 10월 이른바 당에서 내려온 ‘붉은 편지’ 사건 이후 당성이 부족한 작가들에게 현지 지도원으로 내려가 ‘붉은 작가’로 단련할 것을 요구하는 당의 명령에 따라 백석은 자원 형식으로 내려간 것이었다.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는 산간 오지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양의 출산을 기뻐하고 양을 몰고 나갔다가 양을 몰고 들어오는 단조로운 생활이었을 것이다. 분단 이후 백석에 대해 최초로 본격적인 평필을 든 유종호가 그의 시에서 한국적 페시미즘을 논한 것은 그의 문학만이 아니라 생애 전체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었다는 느낌이 든다. 어떻게 보면 백석의 문학적 인간적 불행은 한국문단의 불행이자 분단시대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말해 주는 사례일 것이다. 인생의 전반부는 천재시인으로 평가되는 문단적 명성을 누렸으나 인생의 후반부는 산골오지에서 양치기로 살아야 했다는 것은 그의 생에 드리워진 비극적 운명이라고 말하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말로도 논단하기 어려울 것이다. 북 만주에서 방랑을 시작할 무렵에 이미 그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다. 1941년에 발표한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그는 하늘이 사랑하는 사람을 낼 적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라고 노래했다. 20대 초반의 미끈하고 준수한 미남의 얼굴과 70대 중반의 늙은 양치기의 얼굴에서 백석의 반세기가 교차한다. 산간 오지의 양치기가 돼 산야를 누비면서 바라보았을 수많은 봄과 여름을 떠올려 본다. 그는 하릴없는 여름날 느리게 걸어가는 양들과 흰 구름과 들꽃을 스쳐 가는 바람을 보았을 것이며 바람결에 스치는 그 향기를 느꼈을 것이다. 복권을 위해 당에 충성하는 편지와 시를 쓰며 울분을 다스려야 했던 40대 후반의 자신을 그는 회심의 미소를 띠며 회상했을 것이다. 회한과 오욕을 넘어선 경지에서 하늘을 바라보았을 그의 미소가 잔잔하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운명의 사슬을 벗어난 그가 영원한 자유인으로 웃고 있다. 탄생 100주년을 맞아 출간된 ‘백석문학전집’을 통독하면서 한국 현대시의 정점에 서 있는 그의 시와 20세기 한국인이 헤쳐 나와야 했던 역사적 굴곡의 상징적 축도로서 그의 생이 하나가 돼 만들어진 큰 바위 얼굴과 같은 거대한 시인의 초상화를 그려 본다.
  • 노벨상 두 번 받았다, 그런데 틀린 논문 그대로다

    노벨상 두 번 받았다, 그런데 틀린 논문 그대로다

    기본적인 질문을 하나 던져 보자. “잘못된 논문은 왜 철회해야 하는가?” 당연한 얘기지만 잘못됐기 때문이다. 특히 과학에서 잘못된 논문을 바로잡는 것은 과학의 학문적 특성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과학은 본질적으로 지식을 쌓아가는 분야다. 하나의 사실이 밝혀지면 이를 기반으로 또 다른 연구가 이뤄지고, 새로운 사실이 밝혀진다. 과학저널의 역사는 수백년에 이른다. 최초의 과학저널은 영국의 ‘왕립학회 철학회보’(Philosophical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로, 1665년에 만들어졌다. 최초의 논문 철회 역시 이 저널에서 이뤄졌다. 1746년 벤저민 윌슨은 이 저널에 “1746년 발표한 ‘라이덴병’에 관한 논문은 벤저민 프랭클린의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틀린 것으로 보이는 만큼 철회한다.”고 1756년에 썼다. 언급된 프랭클린은 바로 그 미국의 정치가이자 과학자인 프랭클린이고, 등장한 연구는 피뢰침의 발명으로 이어진 연을 이용한 번개 실험이었다. 과학적으로 완벽하다고 여겨지는 이론이나 실험이 추후에 잘못된 것으로 밝혀지는 사례는 무수히 많다. 천동설과 지동설, 창조론과 진화론이 그랬고 인체에 대한 신비 등 셀 수 없이 많은 분야가 과학적 발전에 따라 새롭게 쓰여진다. 위대한 과학자들 역시 잘못된 주장으로 역사에 오명을 남긴다. ●과거의 잘못된 논문 다 철회해야 하나 최근 해외 과학계에서는 ‘과거의 잘못된 논문은 무조건 철회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서로 다른 분야에서 노벨상을 두 차례나 받은 최초의 사람. 화학자이자 반전운동가 라이너스 폴링(1901~1994)이 1953년에 미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한 ‘DNA의 3중 나선구조’ 논문에 대한 얘기다. 폴링은 일찍부터 화학에 관심을 가졌고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 대학 졸업 전에 이미 원자의 전기적 구조와 분자의 화학결합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머릿속에 갖고 있었다. 졸업 후에는 유럽에 머물며 보어(1922년 노벨 물리학상), 슈뢰딩거(1933년 노벨 물리학상) 등 세계적인 석학들 속에서 꿈을 키웠다. 폴링은 1927년부터 오리건대의 화학 교수를 지내면서 분자의 구조가 물질의 화학적, 물리적 특성은 물론 인체내의 생리적 기능도 결정한다는 사실을 알아채기 시작했다. 결국 오랜 기간의 연구 끝에 폴링은 각 원자들이 모여 적절한 방법으로 서로 결합해 분자를 이루고, 분자가 모여 물질이 될 수 있는 원자의 가장 기본적인 결합 방법을 규명했다. 이 공로로 그는 1954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폴링의 업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원자와 분자구조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기반으로 단백질, 변성된 단백질, 엉긴 단백질 등 다양한 형태의 단백질 구조를 규명했다. 아미노산, 폴리펩티드 등 현재 알려진 단백질의 구조분석 기법이 바로 폴링에서 시작된 것이다. 현대 의약학의 아버지인 셈이다. 폴링에게 노벨상을 안겨 준 또 다른 업적은 핵무기와 관련이 있다. 1940년대 원자폭탄 개발을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오펜하이머는 폴링에게 화학부문 책임자를 맡아 달라고 요청했지만 폴링은 이를 거절했다. 전쟁이 끝나자 폴링은 적극적인 반핵운동을 시작됐다. 폴링은 1955년 51명의 노벨상 수상자와 함께 전쟁종식 및 핵실험 금지 서명운동을 시작했고, 1958년 49개국 과학자 1만 1000여명의 서명을 받은 청원서가 유엔 사무총장에게 전달됐다. 이해 폴링은 ‘더 이상의 전쟁은 없어야 한다’는 책을 통해 과학이 전쟁의 도구가 되어 가는 과정을 고발했다. 이 같은 운동의 결과로 폴링은 196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폴링은 노벨상을 두 차례 수상한 네명의 인물(나머지 셋은 마리 퀴리·존 바딘·프레데릭 생어) 중 한명이자 과학과 다른 분야에서 상을 수상한 최초의 인물이며, 두 차례 모두 단독 수상한 유일한 인물이다. ●“과거의 오류도 의미 있어 철회 반대” 폴링은 두 차례 부정적인 논란의 중심에 섰다. 가장 유명한 것이 현재까지 학계의 의견이 갈리고 있는 ‘비타민C 과다섭취’ 요법이다. 비타민C 신봉자였던 폴링은 1973년 직접 연구소를 차려 비타민C를 연구했고, 많이 먹을수록 건강해진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항암효과가 뛰어나며 필요량의 수백배를 섭취하면 20년에 이르는 경이적인 수명 연장이 이뤄질 것이라고 발표했다. 폴링은 94세로 세상을 떠나 충분히 장수했지만 그의 연구소가 진행한 비타민C 관련 임상실험들은 추후에 과장되거나 조작됐다는 것이 입증됐다. 폴링이 이를 알았는지 여부는 확실치 않다. 이보다 앞선 논란은 ‘20세기 과학계 최고의 경쟁’으로 불렸던 DNA에 관한 얘기로, 앞서 언급한 논문 오류 사건이다. 단백질과 분자 구조를 입증한 폴링은 DNA 구조 규명에서도 가장 앞서 있었다. DNA 구조를 발견한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 역시 폴링을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꼽았고, 폴링의 연구기법을 이용했다. 하지만 폴링은 DNA가 3중나선이라고 믿었고, 이 같은 믿음을 토대로 1953년 2월 PNAS에 논문을 실었다. 그러나 다음해 4월 왓슨과 크릭이 ‘2중 나선 DNA’ 논문을 네이처에 발표하면서 폴링의 주장은 불과 두달 만에 틀린 것으로 판명됐다. 폴링 역시 자신의 연구가 잘못된 정보에 기반했으며, 오류를 인정했지만 왓슨과 크릭의 노벨상에 대해서는 “너무 젊다.”면서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지난 5월, 논문철회 및 조작 감시사이트인 리트렉션 워치는 아직까지 PNAS에 그대로 실려 있는 폴링의 논문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해 화두를 던졌다. PNAS는 “너무나 당연히 틀렸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논문”이라는 이유로 지금까지 폴링의 논문에 대해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전세계에서 583명의 전문가들이 참여한 투표에서 47.17%는 ‘그냥 내버려 둬야 한다’, ‘잘못된 논문이라고 명시해 남겨둔다’가 36.88%였다. 반면 ‘온라인에는 남겨둔 채 철회됐다고 기재한다’(14.58%)와 ‘아예 철회하고 삭제한다’(1.37%)는 소수에 머물렀다. 로이터헬스 대표인 이반 오랜스키는 “잘못된 논문을 무조건 철회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나름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도 중요하다는 교훈을 보여 주는 사례”라고 평가했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1세대 재즈 뮤지션 류복성을 만나다

    1세대 재즈 뮤지션 류복성을 만나다

    72세의 현역 연주가 류복성. 색소폰 연주자 정성조, 보컬 박성연, 피아니스트 신관웅 등과 함께 한국에 재즈 음악을 알린 1세대 재즈 뮤지션이자 라틴 퍼커션(타악기)의 최고 연주가로 꼽히는 이다. 드럼이 좋아 음악을 시작했던 소년이 어느덧 재즈 인생 55년을 맞았다. 10일 밤 10시 40분에 방송되는 EBS ‘직업의 세계-일인자’에서는 재즈 연주가 류복성과 만나는 시간을 갖는다. 중학교 2학년 때 라디오를 통해 우연히 재즈 음악을 처음 접한 류복성은 이후 고등학교 때 서울로 상경해 드럼 연주에 대한 꿈을 키웠다. 그러다 1958년 미 8군 쇼단에 입단한 것을 시작으로 1961년 이봉조 악단, 1966년 길옥윤 악단과 연주활동을 하는 등 한국을 대표하는 악단에서 드럼을 치다가 1967년 색소폰 연주자 정성조와 함께 ‘류복성 재즈 메신저스’를 창단하면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류복성은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라틴 퍼커션에 관심을 갖게 됐고, 이후 라틴 타악기 주자로 변신했다. 1978년엔 ‘류복성과 라틴 코리아나’를 창단하고 음반도 냈다. 나미의 ‘영원한 친구’, 송대관의 ‘해뜰날’ 등 수많은 히트 가요에 타악기 연주자로 참여했으며, 1971~1989년 방영됐던 인기 드라마 ‘수사반장’의 타이틀곡 봉고 연주를 하기도 했다. 라틴 타악기인 봉고, 콩가, 팀벌레스를 비롯해 삼바 타악기인 아고고벨, 셰이카, 스루도, 탐보림 등 수십 가지에 이르는 타악기를 자유자재로 연주하는 류복성은 드럼뿐만 아니라 타악기 연주에서도 독보적인 연주가로 손꼽힌다. 올해로 연주인생 55주년을 맞은 그에게 재즈는 여전히 지구상 최고의 음악이자, 분신 같은 존재다. 짜인 악보에 의해 움직이는 다른 음악과 달리 재즈는 공연을 하며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재즈 1세대 동료들과 매주 함께하는 공연 때는 마치 전성기 때의 연주를 보는 듯 넘치는 에너지로 무대를 장악한다. 일흔둘의 나이를 잊게 하는 열정의 요인은 무엇인지 재즈 메신저 류복성에게서 찾아본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열린세상] ‘친구의 날’과 사이버 시대의 우정/박남기 광주교육대 총장

    [열린세상] ‘친구의 날’과 사이버 시대의 우정/박남기 광주교육대 총장

    마음에만 두고 있던 친구, 미안하거나 서운했던 친구에게 연락하고 서로의 마음도 주고받을 수 있는 날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지난 5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해 친구와 발음이 비슷한 7월 9일을 친구의 날로 정하자고 제안했었다. 2011년 여름 아르헨티나에 갔다가 그 나라 사람들이 친구의 날에 서로 축하하는 모습을 보며 그 생각을 하게 됐다. 한국청소년쉼터협의회가 2007년에 7월 9일을 가출 청소년을 위한 친구의 날로 제정하고 선포했었음을 나중에 알았지만 이날이 가출 청소년뿐만 아니라 모든 청소년과 성인들도 소중한 친구를 서로 챙기는 날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다시 제안했더니 의외로 호응이 컸다. 그 결과 상당수 학교에서는 7월 9일 아이들 마음속에 우정이 피어나도록 하기 위한 다채로운 친구데이 행사를 추진하게 됐다. 미국에서는 1919년부터 8월 첫째 주 일요일을 우정의 날로 지켜 오다가 상업성에 대한 부작용 탓에 1940년대에 들어 잊혀지게 됐다. 1958년 파라과이의 알테미오 브라초 박사가 7월 30일을 우정의 날로 정하자고 제안해 남미의 많은 나라들과 일부 아시아 국가들에서 우의를 다지는 날로 삼게 됐다. 그를 주축으로 인종, 피부색, 종교를 넘어 온 인류가 우정을 돈독히 하자는 세계우정운동이 전개됐고, 드디어 2011년 유엔이 7월 30일을 ‘세계 우정의 날’로 공식 선포했다. 일부 국가에서는 과거 미국의 풍습을 받아들여 8월 첫째 주 일요일을 우정의 날로 지키고 있다. 친구는 오랫동안 가까이 사귄 벗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 대부분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를 한둘은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바쁜 삶을 핑계로 급우나 직장동료는 있지만 기쁨과 슬픔을 함께할 마음의 친구는 갖지 못한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마음을 터놓을 친구의 필요성은 느끼면서도 왜 그러한 친구를 갖고 있는 청소년이나 성인들의 비율은 갈수록 낮아지는 것일까.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상황 변화에 따른 사람들의 인내력 저하이다. 인간관계에서 상대에 대한 인내 정도는 필요 수준에 비례하고 대체 가능성의 수준에 반비례한다. 요즈음 아이들은 게임을 비롯해 다양한 놀이 대체물이 있기 때문에 같이 놀다가 갈등이 생기면 불편한 마음을 쉽게 드러내고 놀이 친구를 쉽게 떠나곤 한다. 그러다 보니 깊은 우정을 나눈 마음의 친구를 만들기 어렵다. 그런데 큰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그러한 대체물은 친구 역할을 해 줄 수가 없다. 어찌 보면 게임과 텔레비전 그리고 정보기술(IT)이 새로운 놀이 상대를 만들어 주는 대신 친구는 뺏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친구의 날을 맞이해 우정은 선물처럼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인내하고 존중하며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쌓이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고 서로 친구를 챙겨 줄 것을 제안한다. IT는 사이버 우정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현대인은 가족이나 친구가 물리적으로 떨어진 곳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제는 카톡이나 페이스북 등을 통해 마치 곁에 있는 것처럼 지속적으로 서로의 이야기와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됐다. 친구의 날을 맞아 세계 최고의 IT와 그 사용을 자랑하는 우리의 여건을 토대로 시대에 걸맞은 사이버 우정을 새롭게 정의하고 이를 키워 갈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생각해 보기를 제안한다. 단순한 사이버 에티켓 수준이 아니라 가상공간에서 친구와 소통하고 우정을 다질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 소통시 유의할 점, 적절한 어휘 선정 방법, 갈등 해결 방법 등을 발전시켜 갈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면 현대인들이 바쁜 중에도 가상공간에서 친구에게 자신의 감정과 당면 문제를 터놓고 이야기하고 서로 위로를 주고받으면서 사이버 우정을 키워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유엔이 제정한 세계 우정의 날 취지를 살려서 다문화사회 시대에 걸맞게 다른 사람들의 문화와 생각 그리고 삶을 이해하고, 나아가서는 지역, 피부색 그리고 종교를 넘어 모두가 친구가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날로 친구의 날을 발전시켜 가기를 기대해 본다.
  • 낡은 F-4 전투기, 20억짜리 미사일 달았더니…

    낡은 F-4 전투기, 20억짜리 미사일 달았더니…

    공군 17전투비행단은 F-4E 팬텀Ⅱ 전투기 60대로 구성되어 있는 부대다. F-4 팬텀은 미국이 1958년 개발해 미공군과 해군의 통합 전투기로 운용하기 시작했는데 당시에는 전 세계 모든 전투기 중에서 가장 성능이 좋은 전투기였다. 특히 6t 이상의 무장을 장착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F-4팬텀은 ‘전투기+폭격기’인 전폭기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우리 공군은 F-4D와 F-4E를 운용하였는데, F-4D는 모두 퇴역을 하였고 그 후속으로 FX사업을 통해 들여온 F-15K가 임무를 이어 받았다. 요즘 언론에서 F-4E 팬텀을 노후 전투기의 대명사처럼 부르는데 F-4도 한때는 세계 최강의 전투기였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한다. 지금도 MK-82 500파운드 폭탄을 최대 24발이나 장착할 수 있으니 지상 폭격에 있어서는 유용한 전력이다. 그러나 아무리 잘나갔던 전투기라도 세월의 흐름은 거역할 수 없는지라 요즘에 개발된 각종 정밀타격 무기의 사용이 제한된다. 하지만 우리 공군의 F-4E는 엄청난 미사일을 장착할 수 있으니 그게 바로 AGM-142 ‘팝아이’다. 팝아이는 영어로 Popeye인데 이걸 뽀빠이라고도 읽는 사람도 있는데, 이게 팝아이인지 뽀빠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뽀빠이 만큼 강력한 것은 사실이다. 사정거리가 무려 112km나 되고 정확도는 1m이며 2m 두께의 콘크리트도 관통할 수 있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장거리 공대지 미사일 중 가장 정확한 미사일이며 탄두중량도 350kg이나 돼 F-15K가 운용하는 탄두중량 230kg의 SLAM-ER보다 훨씬 강하다. 우리 공군이 운용하는 모든 공대지 미사일 중 가장 강한 위력이다. 우리 공군은 2000년대 초반 한발 당 20억원에 이르는 이 팝아이 미사일을 100여발 도입하고 F-4E팬텀 전투기를 개량하여 사용할 수 있게 했다. 17전투비행단은 북한의 도발이 있으면 즉시 그 원점을 타격하기 위해 F-4E 팬텀과 팝아이 미사일을 비상대기 시켜놓고 있다. 사이렌이 울리면 불과 30분도 안 되서 팝아이를 장착하고 이륙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어 놓았다. 그런데 17전투비행단의 F-4E들은 나이가 너무 많다. 1967년생부터 1981년생 까지 있으니 이미 불혹의 나이를 넘긴 기체들이 우리 안보를 지키기 위해 아직도 현역에서 뛰고 있는 것이다. 공군은 이를 더 사용하기 위해 개량에 개량을 거듭하였으나 결국 그 한계에 왔고, 올해부터 퇴역을 시작하여 2019년까지 모든 F-4E 팬텀 전투기가 퇴역하게 된다. 그러면 이 후속기체들은 어디에? 그것이 바로 FX3 사업을 통해 들여올 차세대 전투기들인 것이다. FX3 사업이 적시에 진행되어야만이 F-4E의 퇴역에 따른 공백을 최소화 할 수 있는 것이다. 글·사진 신인균 자주국방네트워크(www.kdnnews.co.kr) 대표
  • [기획]최고경영자=⑪ 세방(世邦)그룹 오세중(吳世重)씨

    [기획]최고경영자=⑪ 세방(世邦)그룹 오세중(吳世重)씨

     관광업체 중「랭킹」1위를「마크」하고 있는「세방(世邦)」의 73년 외화 획득 목표액은 4백56만$, 한화로 치면 18억원. 세방(世邦)여행사,「글로발」여행사, 세방관광(世邦觀光) 3개 회사를「리드」하는 세방(世邦)「그룹」회장 오세중(吳世重)씨(49)는 대학시절 영어책을 내다 팔아 끼니를 때우던 고학생, 자수성가의 대표적인「케이스」다. 『「호텔」이 모자라요. 관광객을 받아들일「호텔」방이 없어서 이 정도에 그치고 있읍(습)니다.이 문제만 해결되면 6백만~7백만$까지도 기록할 자신이 있읍(습)니다』  호리호리한 몸매, 까무잡잡한 얼굴. 사장이나 회장이란 인상을 주기보다는 그저 평범한「샐러리맨」과 같은 느낌이다.  세방(世邦)의 72년 실적은 관광객 3만8천명에 2백30만$. 외국관광객 한 사람에 평균 61$씩의 수입을 올린 셈이다.이에 비해 73년 목표는 7만8천명에 4백56만$로 관광객 1인당 58$씩의 수입을 올릴 것으로 가늠하고 있다.  72년의 전체 외국관광객이 37만명이었으니 그 중 10%의 손님을 세방(世邦)이 시중 든 셈이다.  관광업체 중에서「톱」의 실적을 올리고 있다.  한때 어머니와 팬츠 장사…영어사전 팔아 끼니 때(우)고  『우리나라를 찾는 관광객의 80%가 일본인입니다. 일본 관광객의 대중화가 아루어진 반면 질적인 면에선 해마다 떨어지고 있어요. 72년 관광객 1명에 대한 수입이 60$선이었던 것이 올해는 50$선으로 떨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어쨌든「붐」은「붐」이에요. 큰 변화가 없는 한 앞으로 3~4년간은 한국 관광「붐」이 계속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읍(습)니다. 그 후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기복이 있겠지요』  오(吳)씨가 지적하는 바론 80%를 차지하고 있는 일본 관광객은 구미 관광객과 큰 차이가 있다는 것. 구미 관광객은 일단 관광에 나서면 여러 나라를 한꺼번에 도는데 비해 일본인은 거의 한 곳에 머무르며「릴렉스」하는 관광여행이라는 것이다.  결국 3~4년 후 혹시 중공(중국)의 문이 열리면 그쪽으로 몰리지 않을까, 조심스런 예상을 하고 있다.  관광업계에 오(吳)씨가 뛰어든 것은 58년 5월. 대한여행사 해외여행부 직원으로 출발했다. 60년에 지금의 세방(世邦)을 창설, 만 13년만에「랭킹」1위의 관광업계로 세방(世邦)을 키워 왔다.  『관광업도「서비스」업이 아닙니까? 남을 속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제 소신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직」이라고 믿고 있지요.「정직」하면 사업도 번창하고 돈도 모을 수 있겠지요』  오(吳)씨는 고대(高大) 영문과 출신. 대학 졸업후 피난지 부산(釜山)에서 국제신보 외신부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년후 우연한 기회에 서북항공사로 옮겨 5년간 근무하다가 뛰어든 곳이 바로 대한여행사였다.  오(吳)씨의 학창 시절은 가난과 고생으로 점철되었던 시련기. 고향인 황해도 해주에서 맨손으로 월남한 처지였기에 눈물나는 고생을 해야 했다.  서울에 떨어져서 어머니 동생과 함께 살림을 꾸려야 했는데 하루는 쌀독이 바닥났다. 아무리 집안을 뒤져보아도 집에 값나갈만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들고 나간 것이 영어「콘사이스」. 전차 탈 차비마저 없어 마포에서 종로2가의 고서점까지 걸어야 했다.「콘사이스」를 처분하여 생긴 돈이 5백환. 메고 갔던 배낭에 살 한되를 넣고 전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서 밥을 해 먹은 추억을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다.  대학 입학 후에는 남대문시장에서「팬츠」장사로「아르바이트」. 헌 광목을 사다 염색을 하여 만든「팬츠」를 내다팔아 생활을 꾸려나갔다.  당시「팬츠」만드는 바느질 일을 맡은 것이 어머니. 광목을 사오고 , 만든「팬츠」를 내다파는 일은 오(吳)씨가 맡았다.  『동란 때니까 누구나 마찬가지였겠지만 거의 20대는 비참할 정도였어요, 극장이나 다방이라곤 근처에도 얼씬해 보지 못한채 나이 30을 넘겼으니까요』  공부하는 경영자로 사원 승진시험 치러  이 때문인지 오(吳)씨는 이름난 구두쇠. 꼬장꼬장하고 헛돈을 안쓰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다. 오(吳)씨와 함께 일하는 사원들의 이야기를 빌면 오(吳) 회장 자신이 메(미)주알고주알 너무나 다 알고 있어 일하기가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다고. 자수성가의 대표적인 예이기에 많은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과는 나무나 차이가 난다고 혀를 내두른다.  또 오(吳)씨는 한번 사람을 쓰면 절대로 내보내지 않는 경영자로도 유명.  현재 세방(世邦)에서 기둥 역할을 하고 있는 중역진의 대부분이 60년 세방(世邦)이 출범할 당시 신입 사원들이었다.그래서 현재 세방(世邦)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연조 깊은 사원이 많아 월급이 너무 많이 지출되고 있다는 것. 사원 봉급이 세방(世邦) 전 예산의 50~60%를 처지하는 데다 봉급「베이스」가 높은 사원이 많아 골치를 앓고 있다.  『이젠 옛날과 사정이 많이 달라졌어요. 저희같은 관광업체의 경우엔 특히 사원들의 자질 문제가 회사의 장래를 결정하게 되었읍(습)니다. 전문 지식이 없이는 우선 만나는 고객들과 이야기가 통하질 않게 돼요. 때문에 근무 연한이 오래 되었다고 승진하는 게 아니라 시험을 치러서 일정한 수준의 성적을 따야 승진하도록 하고 있읍(습)니다』  경영자로서 영문과 출신이란「핸디캡」을 메우기 위해 오(吳)씨는 69년 고대(高大) 경영대학원 연구과정(1년「코스」)을 수료한데 이어 그 해에 또다시 석사과정에 입학,「공부하는 경영자」가 되기 위한 자세를 가다듬었다.  대학·대학원을 모두 고대(高大)에서 수료한 탓인지 사원의 8~9할이 고대(高大) 출신. 그러나 오(吳) 회장 자신은 의도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떻게 고르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파안대소.  오(吳)씨의 취미는 바둑(7급)과「골프」(「핸디」10). 세방(世邦) 창설 후에는 사회 활동도 부지런히 해 온 편. 1960년 이후 줄곧 JCI·「로터리·클럽」회원으로 활약해 왔다.  부인 백남희(白南姬) 여사와의 사이에 2남1녀를 두고 있다. 지난 해부터는 수도여사대 관광개발과 강사로도 출강. 오(吳)씨 자신의 뼈아픈 대학 생활이 너무도 사무쳐 수도여사대에「세방장학회」를 마련, 가난한 대학생을 돕고 있기도 하다.  <신근수(申槿秀) 기자>[선데이서울 73년 3월 25일 제6권 12호 통권 제232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9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기사 내용과 광고 카피 등 당시의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한권에 얼마냐고요? 50원이었습니다. ●이 기사에 대한 저작권, 판권 등 지적재산권은 서울신문의 소유입니다. 무단 전재, 복사, 저장, 전송, 개작 등은 관련법으로 금지돼 있습니다.
  • [K-코믹스 신한류 이끈다] (11) 시사만화의 어제와 오늘

    [K-코믹스 신한류 이끈다] (11) 시사만화의 어제와 오늘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대명사로 군림해 온 시사만화가 여러 해째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랫동안 권력을 풍자하고 사회 부조리와 모순을 고발하며 서민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아픔을 대변했던 시사만화가 설 자리를 잃어 가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주 무대였던 신문 지면에서 점차 밀려나고 있다. 독자들이 신문을 펼치면 가장 먼저 찾을 만큼 높았던 열독률도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위기의 시사만화의 과거를 짚어보고 온라인시대 부활의 가능성을 모색해 본다. 우리 만화의 역사는 시사만화의 역사와 궤를 함께한다. 1909년 이도영 화백이 ‘대한민보’ 창간호 1면에 게재했던 삽화를 근대 만화의 출발로 보는데, 그게 바로 시사만화다. 시사만화는 이렇듯 언론의 발전과 함께 성장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와 친일파를 풍자하며 민초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대한민보는 일제의 사전 검열에 맞서 시사만화 게재란을 먹칠해 인쇄한 적도 있었다. 정부 수립 이후에도 시사만화의 역할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 등 독재와 억압 속에 말 한마디 제대로 하기 힘들었던 시절, 시사만화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했다. 1950년대 들어 시사만화의 스타 캐릭터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대중적인 스타는 김성환 화백의 ‘고바우 영감’(동아·조선 등)이다. 이승만 정권부터 전두환 정권까지 서민의 애환을 대변하며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고바우 영감에 이어 안의섭 화백의 ‘두꺼비’(경향·한국 등), 김기율 화백의 ‘도토리’(서울), 정운경 화백의 ‘왈순 아지매’(경향·중앙 등), 윤영옥 화백의 ‘까투리 여사’(서울), 오룡 화백의 ‘야로씨’(조선), 이홍우 화백의 ‘나대로 선생’(동아) 등이 차례차례 스타로 떠올랐다. 시사만화의 기본이 권력에 대한 풍자라 필화(筆禍)도 많았다. 대표적인 게 1958년 김성환 화백의 ‘경무대 똥통’·1972년 윤영옥 화백의 ‘새마을 운동 비판’·1986년 안의섭 화백의 ‘대통령 모욕’ 사건 등이다. 1987년 민주항쟁 이후 시사 만화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당시 일부 네 칸 만화들은 시대 흐름을 반영하지 못하고, 군사 정권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 박재동이란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한겨레 그림판을 통해 참신하고 진보적인 한 칸 만평을 선보이며 스타로 떠올랐다. 이는 신문 시사만화의 주류가 ‘네 칸 만화’에서 ‘한 칸 만평’으로 이동하는 세대 교체의 신호탄이기도 했다. 이후 김상택(경향·중앙)·백무현(서울) 화백 등이 한 칸 만평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 시사만화의 위기가 시작된다. 민주화 이후 만평에 대한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언론사들은 시사만화 지면을 점점 줄여나갔다. 2002년 동아일보는 손문상 화백이 떠나며 만평의 맥이 끊겼다. 2004년에는 문화일보와 세계일보가 각각 이재용, 조민성 화백과 갈등을 빚으며 만평을 내렸다. 2007년 매일경제 이필선 화백, 2009년 중앙일보 김상택 화백, 2011년 조선일보 신경무 화백이 지병으로 세상을 뜨며 만평이 자취를 감췄는데, 중앙일보만 박용석 화백이 맥을 잇고 있다. 시대를 풍미하던 네 칸 만화는 상황이 더욱 열악하다. 1999년 조선일보 ‘미스터 삐삐’(안중규), 2002년 중앙일보 ‘왈순 아지매’, 2004년 한겨레 ‘미주알’(김을호), 2008년 동아일보 ‘나대로 선생’이 차례차례 연재를 중단했고 이후 후속작이 나오지 않았다. 전국 단위 일간지가 한 칸 만평, 네 칸 만화를 모두 게재하던 시절은 옛말이 됐다. 네 칸 만화를 계속 연재해 온 전국 단위 일간지는 서울신문·경향신문·매일경제밖에 없다. 한 칸 만평과 네 칸 만화를 모두 다뤄 온 곳은 서울신문·경향신문뿐이다. 시사만화가 위축되고 있는 배경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시대의 변화다. 과거와 달리 권력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수단이 많아졌고 그 경쟁에서 시사만화가 조금씩 밀려났다. 오프라인 매체의 권위가 무너진 온라인 시대가 오며 사회 풍자 기능을 인터넷 콘텐츠에 상당 부분 내주게 된 것. 언론사 내부의 원인도 있다. 민주화 이후 저항 대상이 정치 권력에서 자본 권력으로 이동했고, 광고주와의 관계를 고려한 언론사 내부 편집 방침과 시사만화가들의 충돌이 빈번해졌다. 언론사들도 부담스러운 시사만화 게재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더욱이 무한경쟁 시대에 광고매출 감소로 경영난에 봉착한 중소 언론사들은 구조조정 1순위로 시사만화를 올려 놓는 분위기다. 시사만화를 부활시키려면 시사 만화계 자체는 물론이고 언론계의 노력이 절실하다는 의견이 많다. 많은 전문가들이 내부 편집 방향에 얽매이지 않고 시사 만화가의 소신과 창작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 주는 것이 기본이라고 말한다. 독자를 사로잡을 화제작이 자주 나올 수 있도록 작업 환경을 개선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매일 마감을 해야 하는 국내 시사 만화가들은 외국에 비해 정신노동의 강도가 매우 높다. 정치·경제·사회 등 전문 분야별로 전담 시사 만화가를 둬 높아진 독자 수준을 충족시킬 만한 전문성과 깊이를 갖추고 이를 통해 노동 강도를 낮춰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시사 만화계 내부의 변화도 절실하다. 독자의 관심과 욕구가 다양해진 만큼 그동안 갇혀 있던 정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시사만화의 영역을 넓히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다양한 형식 파괴를 시도하며 새로운 시대 독자들의 호응을 이끌어 낼 필요성도 제기된다. 시사만화 인력이 정체된 만큼 후진 양성 시스템을 고민해 볼 시기다. 현재 전업으로 활동하고 있는 시사 만화가는 30명 안팎. 그나마 정규직은 10명가량이다. 좁은 시장 탓에 시사 만화가 지망생도 갈수록 줄고 있다. 김을호 화백 이후 여성 시사 만화가는 맥이 끊긴 상태다. 기성 언론에 소속된 시사 만화가에 견줘 상대적으로 더 많은 창작의 자유가 주어지기 때문에 인터넷 미디어를 통한 시사만화가 늘고 있지만 전업 작가로 활동하기에는 경제적 기반이 탄탄하지 못하다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새로운 시사만화 플랫폼을 만들어 저변을 넓히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지면이 있는 작가와 지면이 없는 작가 모두를 통합할 수 있는 시사만화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어 배포하고 여기에서 수익 구조를 만들어 작가들에게 돌려주자는 것이다. 앞으로가 매우 중요하다.”(하재욱 전국시사만화협회 사무국장·시사만화가)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워크아웃 벽산건설 자금난에 법정관리

    벽산건설은 경영 정상화를 위해 서울중앙지법에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 개시를 신청했다고 26일 공시했다. 올 들어 풍림산업, 우림건설에 이어 세 번째 건설업체의 법정관리 신청이다. 회사 측은 “서울중앙지법이 신청서와 관련 자료를 서면 심사해 회생절차 개시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1958년 설립된 벽산건설은 시공능력평가 순위 26위의 중견 종합건설업체로 2010년 6월 채권은행들의 기업별 신용등급평가에서 C등급을 받고 7월부터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갔다. 채권단은 워크아웃 이후 두 차례에 걸쳐 2174억원을 지원하고 벽산건설 오너인 김희철 회장도 290억원가량의 사재를 출연하는 등 경영정상화를 도모했다. 하지만 주택경기 침체로 인한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로 지난해 자본잠식 상태에 빠졌고, 이후 자금사정이 더욱 어려워지면서 결국 법정관리행을 택했다. 벽산건설의 PF금액은 약 4000억원이다. 김성곤기자 sunggone@seoul.co.kr
  • 백석문학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다

    백석문학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다

    “정거장에서 60리/60리 벌길은 멀기도 했다.//가을 바다는 파랗기도 하다!/ 이 파란 바다에서 올라온다-/민어, 농어, 병어, 덕재, 시왜, 칼치…가// 이 길외진 개포에서/나는 늙은 사공 하나를 만났다./이제는 지나간 세월//앞바다에 기여든 원쑤를 치러/어든 밤 거친 바다로/배를 저어 갔다는 늙은 전사를.!//멀리 붉은 노을 속에/두부모춰럼 떠 있는 그 신도라는 섬으로 가고 싶었다.” 평안북도 정주 출신의 시인 백석(그림·1912~1995?)이 1957년 9월 19일 북한의 문학전문 주간지 ‘문학신문에 발표한 시 ‘등고지’다. 이번에 새로 발굴된 이 시는 ‘앞바다에 기여든 원쑤를 치러’의 이념성이 강한 대목만 빼면 백석 시의 특징인 한국적 서정성과 정취 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평가를 받는다. 백석이 북한에 머물면서 1950~60년대에 쓴 시 3편과 ‘문학신문 편집국 앞’ 등 산문 4편, ‘고요한 돈 1·2’ 등 번역소설 2편 등이 새로 발굴됐다. 이번에 발굴된 백석의 시와 산문, 번역소설은 1948년 분단 직전으로 한정됐던 백석 문학의 지평을 넓혀 주고, 북한에서의 문학 활동의 단초를 밝힌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번에 발굴된 자료는 중국 베이징국가도서관, 옌볜도서관, 북한의 조선국립중앙도서관, 레닌도서관, 통일부 산하 북한자료실, 일본 도쿄에 있는 여러 도서관 등에서 꼼꼼히 찾은 것이다. 최동호 고려대 국문과 교수는 백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펴낸 ‘백석문학전집 1·2’(서정문학 펴냄)에 발굴 자료를 모두 담았다. 최 교수는 “백석 문학의 전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으로, 작품을 하나하나 원본과 대조해 정본화하는 작업까지 거쳤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이번에 나온 백석전집이 2012년 6월 20일 현재까지 유일한 정본”이라고 선언한 뒤 “출간기록은 있지만 발굴되지 않은 ‘테스’, ‘고요한 돈 3’, 행방이 묘연한 1960년대 시집 등을 계속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문주 영남대 교수는 “이번에 발굴된 시는 ‘등고지’ 외에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조국의 바다여’ 등으로 분단 이후에도 이념적 색채가 없이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는 백석의 색깔을 유지한 부문들이 확연하다.”고 분석했다. 최 교수는 “1962년 4월 10일 발표한 ‘조국의 바다여’가 흥미로운데 당성이 강한 ‘붉은 작가’로 단련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박정희 정권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며 부정적으로 써놓았다.”고 말했다. 백석답지 않게 이런 식이다. “…바다여 잠잠하지 말라, 잠자지 말라/세기의 죄악의 마귀인 미제,/간악과 잔인의 상징인 일제/박정희 군사 파쑈 불한당들을/그 거센 물결로 천 리 밖, 만 리 밖에 차던지라” 그러나 백석의 이런 노력에도, 그는 평양으로 복귀하지 못했다. 백석은 1958년 당성이 약한 인민들을 지방 생산현장으로 보내는 ‘붉은 편지’를 받고,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로 내려가 양치기로 살면서 생애를 마쳤다. 이번에 발굴된 ‘문학신문 편집국 앞’(1959년 1월 18일)과 ‘관평의 양’(1959년 1월 14일), ‘가츠리섬을 그리워하실 형에게’(1961년 5월 21일), ‘체코슬로바키야 산문 문학 소묘’(1957년 3월 28일) 등에서는 백석이 ‘붉은 편지’를 받고 관평리로 내려가는 과정과 그곳의 삶이 드러난다. 특히 ‘문학신문 편집국 앞’에서 백석은 “이 속에서 어찌 제가 당이 기대하는 붉은 작가로 단련되지 않겠습니까. 맡겨진 일에 힘과 마음 다하여 훌륭한 조합원이 되여 앞으로 좋은 글을 쓸 것을 다시 한 번 맹세합니다. 1월 10일 삼수 관평에서”라고 쓰고 있다. 이번에 발굴된 숄로호프의 장편소설을 번역한 ‘고요한 돈 1·2’(1949~1950)도 흥밋거리다. 러시아의 혁명 전후를 다룬 이 번역소설은 한국전쟁 때 북한군의 배낭에서 발견되곤 했단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작품해설에서 “세계문학의 반열에 들어 있는 작품을 매개로 한국어의 수준을 한 단계 격상시키고 있다.”면서 “번역문학이지만 토속어·토착어의 보고이자 아름다운 시적 창조물들을 감각적으로 생동감 있게 자아냈다.”고 분석했다. 백석이 1957년 1월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를 간행해 아동문학가로 활동한 이유도 관심사다. 김 교수는 “원래 백석은 외국문학분과위에 있다가 아동문학분과위 명단에도 이름이 올라간다. 자유롭지 못한 북한 상황 탓에 아동문학을 했을 것으로 추정해 보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고 말했다. 1956년 북한 공산당은 소설가 등 작가들에게 ‘장르를 불문하고 아동문학에 투신하라.’고 지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이번 발굴로 백석 문학의 총체성에 한걸음 다가갔다.”면서 “본래 백석문학이 어느 지점에서 균열했는지를 연구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한편 최 교수 등이 속한 한국비평문학회는 오는 30일 서울여대에서 백석 탄생 100주년 기념 세미나도 연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커버스토리] “숙련공 베이비부머 일터에 남겨라”

    [커버스토리] “숙련공 베이비부머 일터에 남겨라”

    “출산율을 높이고 베이비부머(1955~1963년생)를 최대한 생산 현장에 머무르게 하는 등 새로운 수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우기종 통계청장은 22일 인구 5000만명 돌파를 맞아 서울 강남구 경인지방통계청에서 서울신문과 인터뷰를 갖고 이같이 밝혔다. 우 청장은 합계출산율(한 여성이 15~49세의 가임 기간 동안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자녀 수)이 2.1명 아래로 떨어지던 1983년(2.06명) 출산 대책을 전환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합계출산율 2.1명은 인구가 줄어들지 않는 대체출산율(인구를 현상 유지하는 데 필요한 출산율)이기도 하다. 그는 “출산율 효과는 단기적으로 나타나기보다 아이들이 커서 다시 아이를 낳게 되는 30여년 후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그 효과는 시간이 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고 설명했다. 합계출산율이 대체출산율 아래로 떨어진 지 30여년이 지났다. 지금 우리나라의 합계출산율은 1.24명이지만 2060년에는 1.4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우 청장은 “출산율을 1.8명까지 올리면 인구가 5000만명 이하로 줄어드는 시점이 2045년에서 2058년으로 13년 늦춰지고 65세 이상 고령자 비중도 2060년 40.1%가 아닌 35.8%(2046년 예상치)가 돼 고령화 속도도 늦출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고령층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실질 은퇴 연령과 취업률은 높지만 자원봉사 참가율은 낮은 ‘고단한’ 노년이다. 우 청장은 “고령자 대부분이 제조업 등의 생산 현장이 아닌 자영업 등 서비스 분야에 있다.”며 “베이비부머는 산업 현장에서 떠나면 급격하게 몰락하거나 해외 여행 등을 떠나는 이중 구조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베이비부머가 산업 현장을 떠나면 ‘숙련 단절’이 된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정년 연장은 출산율 제고와 함께 반드시 추진해야 할 대책”이라고 강조했다. 자원봉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도 주문했다. 그는 “자원봉사를 나눔의 개념이 아닌 생산과 소비를 통해 사회에 참여한다는 의미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 청장은 “북한 인구 등도 더하면 대한민국 인구는 8000만명”이라고 설명했다. 통계청이 추계한 북한 인구는 2012년 기준 2443만명으로 남한 인구의 절반 수준이다. 재외동포는 727만명이다. 북한도 2037년 인구가 2654만명으로 정점에 이른 뒤 감소할 전망이다. 우리나라는 이보다 빠른 2030년 5216만명을 기록한 뒤 감소한다. 전경하기자 lark3@seoul.co.kr
  • 고전 vs 낭만…새달 발레 명품 대표작 진검승부

    고전 vs 낭만…새달 발레 명품 대표작 진검승부

    우아한 발레를 두고 ‘격돌’이라는 말은 다소 어울리지 않지만 그래도 쓸 수밖에 없다. 7월 공연 달력을 보면 퍼뜩 떠오르는 가장 적절한 말이다. 국내 정상급 발레단인 유니버설발레단(UBC)이 7~14일 고전발레의 대표작 ‘로미오와 줄리엣’을 올리는 데 이어 18~22일 미국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가 낭만발레의 걸작 ‘지젤’을 공연한다. 많은 사람들이 잘 아는 작품인 데다, 장소도 두 공연이 같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이라 그야말로 ‘진검승부’다. ■30년 만에 온 맥밀런 버전…UBC의 ‘로미오와 줄리엣’ 또 ‘로미오와 줄리엣’인가, 라고 할 수 있겠다. 셰익스피어 3대 비극 중 하나이자, 영원한 사랑의 성서인지라 많은 장르에서 공연한다. 발레도 마찬가지여서 작곡가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을 바탕으로, 레오니트 라브롭스키(1940년·마린스키 발레단), 존 크랑코(1958년·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케네스 맥밀런(1965년·로열발레단), 장-크리스토프 마이요(2006년·몬테카를로 발레단) 등 안무가별 버전도 많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이 공연하는 것이 크랑코와 맥밀런 버전이다. 맥밀런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등장인물과 내면 묘사가 셰익스피어의 원전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평가 받으며, 안무가를 ‘드라마 발레의 거장’에 올려놓았다. 맥밀런 버전은 1983년에 영국 로열발레단이 한·영수교를 기념해 국내에서 공연한 뒤 한번도 무대에 오른 적이 없다. 이번 공연은 거의 30년 만에, 최초로 한국발레단이 올리는 맥밀런 버전이라는 데 의미가 크다. UBC는 이 공연에 폴 앤드루스가 새롭게 만든 영국 버밍엄로열발레의 무대장치와 의상을 옮겨왔다. 맥밀런 재단의 데보라 맥밀런이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디자인이기도 하다. 로열발레단 스태프 10여명이 내한해 원전에 가까운 발레를 선사한다. 수석무용수 안지은과 세계 유명 발레단에서 객원무용수로 활약한 로버트 튜슬리, 김나은과 콘스탄틴 노보셀로프가 주역으로 나선다. 황혜민은 이승현과 연기한 뒤 ‘단짝’ 엄재용과 대미를 장식한다. (02)580-1300. ■줄리켄트 등 초호화 무용수…ABT의‘지젤’ 발레단의 위상으로 본다면 영국의 로열발레, 프랑스의 파리오페라발레와 함께 ‘세계 톱3’이다. 작품은 ‘백조의 호수’, ‘로미오와 줄리엣’과 함께 역시 대표작으로 손꼽히니, 둘의 만남이 기대될 수밖에 없다. 4년 만에 한국을 찾은 ABT는 드라마틱한 내용에 윌리(처녀 혼령)들의 군무가 환상적인 낭만발레의 전형, ‘지젤’을 들고 왔다. 섬세한 내면 연기로 관객을 사로잡을 ABT의 지젤은 모두 5명이다. 줄리 켄트와 팔로마 헤레라, 시오마라 레예즈 등 세계적인 무용수가 총출동한다. 지난해 미국 링컨센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서 ‘지젤’로 데뷔한 한국인 무용수 서희와 솔로이스트 가지야 유리코도 무대에 선다. 알브레히트와 힐라리온이 각각 4명, 윌리들의 여왕 미르타가 5명이라 골라보는 재미가 있는 한편, 어떤 공연을 볼까 갈등깨나 하겠다. 공연을 기획한 더에이치엔터테인먼트 측은 “ABT 무용수와 스태프 130여명에 국내 스태프 80명, 60인조 오케스트라가 참여하는 초대형 규모이자 화려한 무대를 준비하고 있다.”면서 “물론 관전포인트는 정확한 동작과 섬세한 연기를 펼치는 세계적인 무용수들의 기량이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02)598-3119.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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