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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당 투표, 설문조사였나…국민의힘 “현대판 4사5입”

    민주당 투표, 설문조사였나…국민의힘 “현대판 4사5입”

    내년 4월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후보 공천을 하기 위한 더불어민주당 당헌 개정에 대한 전 당원 투표 결과를 놓고 야권이 투표 유효성을 문제삼고 나섰다. 투표 정족수가 모자랐다는 것이다. 투표율 26.35%…3분의 1에 못 미쳐 2일 민주당에 따르면 이번 전 당원 투표에는 권리당원 80만 3959명 중 21만 1804명(26.35%)이 투표에 참여해 86.64의 찬성률이 나왔다. 민주당의 현행 당규에 ‘전 당원 투표는 투표권자 총수의 3분의 1 이상의 투표와 유효투표 총수 과반수의 찬성으로 확정한다’고 나와 있다. 이 때문에 야권은 33.33%에 못 미치는 26.35%의 투표율로 정족수 조건을 충족 못한 투표 결과를 확정해 의사 결정에 반영했다면서 무효라고 비판했다. 국민의힘 김기현 “현대판 4사5입이냐” 국민의힘 김기현 의원은 페이스북에 “현대판 4사5입 개헌 시도인가”라며 “투표 성립요건인 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무효”라고 주장했다. 4사5입이란 ‘4 이하는 버리고 5는 올리는 어림셈’으로 일반적 의미의 반올림을 뜻한다. 1954년 11월 이승만 대통령이 초대 대통령에 한해 연임 제한을 폐지하려는 헌법 개정안을 내고 국회에서 표결에 부친 결과, 재적의원 203명 중 찬성 135명이 나와 정족수 기준인 203명의 3분의 2 이상인 135.33명을 채우지 못하자 당시 자유당과 정부가 “4사5입 원칙에 따라 203명의 3분의 2는 135명”이라고 주장했고, 이는 ‘4사5입 개헌’으로 알려지게 됐다. 정의당 정호진 수석대변인도 “알리바이용, 들러리용 당원 투표로 책임정치를 스스로 폐기처분하더니 이제는 절차적 정당성마저 폐기처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민주당 “3분의 2 유효투표 적용 대상 아니었다”이에 대해 민주당은 이번 투표가 유효투표 조항 적용 대상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민주당은 유효투표 규정에 대해 “해당 규정은 권리당원 청구로 이뤄지는 전 당원 투표에 관한 것”이라면서 이번에 당 지도부 직권으로 실시한 투표와는 별개라는 입장이다. 즉 이번 전 당원 투표는 당원들의 ‘의견’을 묻기 위한 투표였지 ‘의결’을 위한 투표가 아니었기 때문에 정족수 조건 자체를 충족할 필요가 없다는 설명이다. 지도부가 당원들의 의견을 알아보기 위해 투표를 진행했고, 당헌 개정을 결정하는 데 있어 투표 결과를 참고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번 투표는 ‘더불어민주당은 당헌 96조 2항을 개정해 2021년 4월 재보궐선거에 후보자를 추천하고 합니다. 이에 찬성하십니까?’라는 질문으로 진행됐다. 이와 함께 당헌 개정안 내용과 ‘향후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 완수와 민주당의 정권재창출을 위해 2021년 재보선 승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당원 여러분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합니다’라는 제안도 포함됐다. 민주당은 지난 3월 비례연합정당 참여 투표(투표율 30%, 찬성률 74.1%)와 5월 더불어시민당 합당 투표(투표율 22.5%, 찬성률 84.1%) 때에도 전 당원 투표율이 3분의 1에 못 미친 결과를 결정에 반영했다. 김기현 의원은 “민주당은 의결 절차가 아니라 의지를 묻는 투표이기에 괜찮다고 주장하지만, 궁색한 궤변일 뿐”이라며 “정치 도리에 어긋난 당헌 개정에 이어 절차적 규정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한다”고 비판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처음이자 최고였다… 굿바이, 제임스 본드

    처음이자 최고였다… 굿바이, 제임스 본드

    가난한 어린 시절 지나 ‘007’로 스타덤성적 매력 뽐내는 남성 역할 모델 창조 크레이그 “시대·스타일 정의한 사람”첩보 영화 시리즈 ‘007’에서 1대 제임스 본드 역할로 세계 영화팬들에게 각인된 영국 배우 숀 코너리가 31일(현지시간) 별세했다. 90세. 1930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태생인 그는 1962년 007 시리즈 첫 작품인 ‘007 살인번호’(원제 Dr. No)에서 주연을 맡으며 ‘첩보 요원이자 성적 매력도 뽐내는 남성’ 역할 모델을 할리우드 영화계에 만들어 내며 역대 007 배우 중 으뜸이라는 평가를 남겼다.그는 ‘오리엔트 특급살인’(1974년), ‘장미의 이름’(1986), ‘언터처블’(1987년), ‘인디아나 존스:최후의 성전’(1989년), ‘더록’(1996년) 등 다수 작품에 출연했고 2006년 공식 은퇴했다. 미국 아카데미상과 2개의 영국영화TV예술아카데미(BAFTA)상, 3개의 골든글러브상을 수상하는 등 상복도 많았다. 2000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아버지는 가톨릭 출신 공장 노동자, 어머니는 신교를 믿는 청소부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13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우유 배달, 벽돌공을 하다가 해군, 모델을 거쳐 1954년 단역으로 연기 생활을 시작했다. 007 시리즈 제작 당시 제작자 부인의 추천으로 배역을 따낸 그는 이 영화로 스타덤에 오른다. 스코틀랜드 태생임을 자랑스레 여겼던 그는 2003년 스코틀랜드 독립 전에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의 부고에 세계 지도자, 연예계 동료들의 애도도 잇따랐다. 니컬라 스터전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수반은 “비통하다. 우리는 오늘 가장 사랑하는 아들 중 하나를 애도한다”고 추모했다. 이스라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트위터에 “우리는 항상 그의 겸손한 카리스마와 따뜻한 웃음을 기억할 것”이라고 적었다. 그의 뒤를 이어 최근 제임스 본드 역할을 하는 영국 배우 대니얼 크레이그는 코너리가 “시대와 스타일을 정의한 사람”이라며 “그가 스크린에서 보여 준 재치와 매력은 메가와트 수준으로, 그는 현대 블록버스터를 창조하는 데 일조했다”고 애도했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원조 007 제임스 본드” 英 배우 숀 코네리 별세 (종합)

    “원조 007 제임스 본드” 英 배우 숀 코네리 별세 (종합)

    영화 ‘007’ 시리즈에서 1대 제임스 본드 역을 맡은 영국 원로 배우 숀 코네리가 31일(현지시간) 사망했다고 BBC 방송이 보도했다. 향년 90세. 1930년 8월 25일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파운틴브리지 지역에서 태어난 코네리는 1962년 제작된 007 시리즈 첫 작품인 ‘007 살인번호’(원제 Dr. No)에서 최초의 제임스 본드 역할을 맡았다. 당시 여러 배우가 물망에 올랐지만, 제작자의 부인이 코네리의 매력이 본드 역할과 어울린다고 추천했고 그는 결국 배역을 맡게 됐다. 코네리는 007 시리즈 가운데 7편의 작품에서 주연을 맡으며 ‘섹시한 남성’이라는 역할 모델을 할리우드 영화계에 만들었다. 이 외에도 그는 ‘오리엔트 특급살인’(1974년), ‘장미의 이름’(1986), ‘언터처블’(1987년), ‘인디아나 존스:최후의 성전’(1989년), ‘더록’(1996년)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했으며 2007년 공식 은퇴했다. 그는 연기 생활을 하는 동안 미국 아카데미상(오스카)과 2개의 영국영화TV예술아카데미(BAFTA)상, 3개의 골든글러브상을 수상했다. 영화 ‘언터처블’에서 연기한 아일랜드 출신 경찰 역할로 1988년 오스카 남우조연상을 받았으며, 2000년 스코틀랜드 홀리루드궁에서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기도 했다.1954년 단역으로 본격적으로 연기 생활을 시작한 그는 이후 드라마와 영화 등에서 경력을 쌓았다. 1957년 BBC의 ‘블러드 머니’에서 첫 주연을 맡았다.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김제 망해사 가을 비대면 관광지 100선 선정

    김제 망해사 가을 비대면 관광지 100선 선정

    전북 김제시 진봉면 망해사(望海寺)가 ‘2020 가을 비대면 관광지 100선’에 선정됐다. 김제시는 망해사가 한국관광공사의 비대면 관광지 100선에 뽑혀 효과적인 관광마케팅을 추진할 방침이라고 22일 밝혔다. 망해사는 만경강이 서해와 만나는 절벽에 고군산군도를 멀리 조망하는 방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름도 ‘바다를 바라보는 절’이라는 뜻이다.절터가 넓지 않고 건물이 조촐하지만 지평선과 수평선을 함께 조망할 수 있는 자연환경이 뛰어나고 힐링하기 좋은 숨겨진 명소다. 서해 낙조가 일품이다. 절 뒤 진봉산 낙조대에 오르면 사방으로 탁 트인 호남평야와, 만경 둘레길 갈대밭, 심포항 등이 발 아래 내려다 보인다.망해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이다. 642년(의자왕 2) 거사 부설이 창건했다는 설과 754년(경덕왕 13) 통일신라의 승려 통장이 창건했다는 설이 내려온다.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으로 쓰러져가던 망해사는 1624년(인조 2년) 조사 진묵이 중창하였다. 김제시 관계자는 “망해사는 대중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벼랑 위에서 망망대해를 조망하는 천혜의 경관이 아름답고 주변에 새만금 바람길, 봉화산 숲길 등 관광자원도 많아 조용하게 쉬면서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고찰”이라고 말했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독도경비, 내년부터 일반 경찰이 맡는다…의경제도 폐지 여파

    독도경비, 내년부터 일반 경찰이 맡는다…의경제도 폐지 여파

    내년 초부터 의무경찰이 아닌 일반 경찰이 독도 경비를 담당한다. 12일 경북지방경찰청에 따르면 정부의 의무경찰(의경)제도 폐지 방침에 따라 내년 1∼2월 독도경비대의 의경을 모두 일반 경찰관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현재 독도경비대는 울릉경비대원들이 3교대로 파견되고 있다. 내년 초에는 울릉경비대 자체를 모두 경찰관으로 구성, 교대로 독도 경비에 투입한다. 이달 중 울릉경비대 의경 20여명을 우선 경찰관으로 대체하고 내년 초 경찰 정기 인사 때 나머지를 전원 교체한다. 경찰기동대 신임 순경들을 순차적으로 1년 동안 근무하도록 한다. 이를 위해 3층짜리 경비대 숙소 가운데 2·3층을 리모델링하고 있다. 경찰관은 1인 1실을 이용한다. 현재 의경은 경비대 숙소에서 내무반 생활을 한다. 또 인원이 줄어드는 만큼 육안감시를 대체하는 장비 등 경비·보안 시설을 대폭 보강할 계획이다. 독도 경비에는 1954년부터 1개소대 규모 경찰이 상주하고 있다. 2011년부터 모집으로 선발한 의경을 투입해 왔다 안동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아시안게임 한국 첫 金… ‘육상 거목’ 최윤칠 별세

    아시안게임 한국 첫 金… ‘육상 거목’ 최윤칠 별세

    한국 스포츠 사상 첫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 시름하던 국민을 위로한 ‘한국 육상의 거목’ 최윤칠 대한육상연맹 고문이 8일 별세했다. 고인은 한국전쟁 직전 열린 보스턴마라톤 대회에서 3위에 입상하며 일제 치하를 벗어난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데 힘을 보태기도 했다. 92세. 1928년 7월 함경남도에서 태어난 고인은 어려서부터 ‘장거리, 마라톤 신동’으로 불리며 두각을 나타냈다. 1950년 4월 열린 보스턴마라톤 대회에서는 함기용, 송길윤에 이어 3위에 올랐으며 1954년 마닐라아시안게임 1500m에서는 금메달을 목에 걸며 고국에 아시안게임 첫 금메달을 안겼다. 당시 5000m에서는 은메달을 따내기도 했다. 국내 최정상급 장거리 선수였지만 올림픽 메달과는 아쉽게 인연을 맺지 못했다. 해방 뒤인 1948년 런던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했지만 38㎞ 지점까지 선두로 달리다 근육 경련으로 결승선을 3㎞ 앞두고 기권하는 불운을 겪었다. 한국전쟁 중 열린 1952년 헬싱키올림픽 마라톤에서는 3위에 29초 뒤진 4위로 결승선을 통과해 시상대에 오르지 못했다. 당시 중간 순위를 3위로 잘못 전달받는 바람에 순위를 유지하는 레이스를 펼치다 4위에 그쳤다는 안타까운 후일담도 전해온다. 고인은 현역 은퇴 후 대표팀 코치로 후배 육성에 나서 1958년 도쿄아시안게임 당시 이창훈의 마라톤 금메달 획득을 거들기도 했다. 또 대한육상연맹 이사를 지내는 등 국내 육상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970년 국민훈장, 1992년 대한민국 체육포장을 받았다. 빈소는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10일 오전 10시. (02)2227-7500.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역대 대통령 다녀간 ‘한일관’ 등 ‘백년가게’ 지정

    역대 대통령이 다녀간 해장국집 등 전통을 자랑하는 전북지역 음식점 11곳이 ‘백 년 가게’로 선정됐다. 전북중소벤처기업청은 8일 전주 ‘한일관’과 ‘한양불고기’, 군산의 ‘명월 갈비’와 ‘유정 초밥’, 남원의 ‘흥부골 남원 추어탕’과 ‘새집 추어탕’ 등 11곳을 백 년 가게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이로써 2018년부터 시작된 도내 백 년 가게는 총 46곳으로 늘었다. ‘한일관 본점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부터 영업을 시작해 전주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향토 전통음식점이다. 한정식과 콩나물국밥, 비빔밥이 유명하다. 한일관은 박정희·노태우·김영삼·이명박 등 전직 대통령들과 다수의 유명인들이 다녀간 음식점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한양불고기’는 최근 뜨고 있는 전주 객리단길에서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불고기 맛집이다. 신선한 국내산 재료만 고집해 40년간 한결같은 맛을 유지해오고 있다. ‘명월갈비’는 군산지역 대표 소갈비 맛집이다. 한우 갈비를 비법양념장으로 숙성한 소갈비 단품 메뉴만으로 3대째 운영해 오고 있다. ‘유정초밥’은 군산의 가장 오래된 일식집이다. ‘정직’이라는 경영철학을 기반으로 최고 선도의 원재료로 만든 신선한 초밥을 제공하고 있다. ‘일흥옥’은 군산에서 가장 오래된 콩나물국밥집이다. 뜨거운 국물을 부었다 부었다를 반복하는 토렴식 콩나물국밥으로 많은 단골손님을 보유하고 있다. 지리산 천왕봉 둘레길에 있는 ‘흥부골 남원추어탕’은 직접 키운 미꾸리와 인산 죽염을 사용해 특별한 맛의 추어탕을 제공하고 있다. ‘새집’은 남원 추어탕의 원조 격이다. 추어탕과 추어 숙회, 미꾸리 깻잎 튀김 등 다양한 메뉴로 유명하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잊혀진 어린 영웅’ 6·25 참전 인천학생 2000명의 못다한 이야기

    ‘잊혀진 어린 영웅’ 6·25 참전 인천학생 2000명의 못다한 이야기

    ●1996년 7월 ‘인천학생스승6·25참전사 편찬위원회’ 창립 70년 전 한국전쟁 때 국군에 자원입대했던 인천 지역 까까머리 중고생들의 참전 역사를 추적기록해 온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이경종(86)씨와 그의 장남인 이규원(58·이규원치과) 원장이 바로 그들이다. 이씨는 참전 중학생 중 한 명이다. 부자는 1996년 7월 ‘인천학생스승6·25참전사 편찬위원회’를 창립했다. 198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을 직접 찾아다니며 참전 과정을 육성 녹음했다. 흑백 사진과 관련 유물 등 증거가 될 만한 모든 것을 수집해 2004년 12월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을 전액 자비로 세웠다.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지역 학생 2000여명과 참전한 스승의 나라사랑을 기억하고 전사한 학생 208명과 스승 심선택(당시 24세) 소위를 추모하기 위해서다. 고위층 자녀들의 군 복무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 시대 부자는 이름 없이 잊히는 어린 전쟁영웅들의 이야기를 밝히고 알리는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이씨는 1995년에 전쟁 중 생긴 허리병 때문에 입원 중이었다. 누군가 가져다 놓은 신문에서 ‘정부가 6·25 참전 용사 증서를 준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리고 이듬해 7월 중·고등학교 졸업장 모양의 참전 증서가 정말 액자에 담겨 배달돼 왔다. 아직 어머니 가슴속이 그리운 솜털 뽀송뽀송한 청소년기 4년을 조국에 바친 보상이 50년이 지난 후 종이 증서 한 장으로 온 것이다. 참전하지 않은 중학교 동창들은 상당수 학업을 계속해 사회 지도층 인사가 됐지만, 이씨는 전역 후 생계가 어려워 곧장 취업 전선으로 뛰어들었다. 그래서 그의 학력은 ‘중졸’이다.●당시 수많은 또래들 인민의용군 끌려가 실종 “그들은 너무나 어려서 입대할 필요가 없었던 어린 중학생들이었습니다.” 참전 증서를 받아 들자 이씨는 1950년 12월 18일 인천을 출발해 20일 동안 부산까지 걸어가서 참전했던 옛일이 하나둘 주마등처럼 떠오르며 지나갔다. 이씨는 1950년 6월 전쟁이 발발했을 때 열여섯 살 중학교 3학년으로, 인천 동구 송림동 333번지에 살고 있었다. 당시 수많은 중학생 또래 청소년들이 인민의용군에 끌려가 대부분 실종되는 터라, 그는 용유도로 피란 가서 친척 집에 숨어 있었다. 9·15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인천이 수복되고 지역사회가 안정을 되찾을 무렵인 그해 10월 초 인천학도의용대가 창립됐다. 이씨를 비롯해 인천 지역 청소년 및 청년 수천명이 가입했다. 그들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하게 되자, 인천이 다시 북에 점령되면 예전처럼 인민의용군에 끌려갈 것을 우려했다. 공포가 인천 전역으로 엄습해 오자, 중학생부터 대학생까지 4000여명은 1950년 12월 18일 인천 병사구사령부(현 병무청)에서 나온 국민방위군 관계자를 따라 동인천역 앞 인천 축현초등학교(현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를 출발해 경남 통영충렬초등학교에 있던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로 향했다. 이씨의 홀어머니는 그 어려운 시기에 어떻게 마련했는지 두 살 많은 형(기종)과 이씨에게 6000원(당시 80㎏짜리 쌀 10가마 상당)씩을 눈물을 흘리며 손에 쥐여 줬다. 옆집 살던 두 살 어린 조순범(당시 중학교 1학년) 등 중학생 50여명도 인천학도의용대 남동지대장이었던 최수보(당시 고려대 2학년) 선배를 따라 길을 나섰다. 출발지는 눈물바다를 이뤘다. 부모들은 전쟁 중에 어린 자식을 군에 보내야 하는 절절함이, 학도병들은 유난히 추웠던 그해 12월 통영까지 500㎞ 거리를 매일 25㎞씩 20일을 걸어야 하는 막막함이 겹치면서 모두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인천은 이듬해 1월 초 또다시 북에 점령당했다.1950년 12월 하순의 추위는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처음 인천에서 출발할 당시 4000여명에 이르던 행렬은 안양, 수원을 지나면서 절반으로 줄었다. 추위와 배고픔,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되돌아간 것이다. 칼바람을 맞으며 추풍령 고개를 지날 때에는 굶거나 얼어 죽어 가는 국민방위군 행렬을 만났다. 길가에 나뒹구는 국민방위군 시신이 허다했지만, 땅이 꽁꽁 얼어 묻어 줄 형편이 안 됐다. 국민방위군은 1950년 12월 40세 미만 제2국민병역으로 조직됐으나 운영이 미숙해 1·4후퇴 때 부산으로 걸어서 철수하다 아사자·동사자·병자가 약10만명이나 발생한 것으로 전해진다. 처참한 모습을 본 이씨 등 일행은 국민방위군 입소를 포기하고 해병이 되고자 마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중학교 4학년(현 고1) 이하는 체력검사에서 대부분 탈락했다. 할 수 없이 마산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이동해 1951년 1월 10일 천신만고 끝에 부산진초등학교에 임시로 문을 연 육군제2훈련소에 도착했다. 그러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거부됐다. 우여곡절 끝에 실종 군인의 군번을 부여받는 편법으로 입대했다. 같은 달 31일 군사 기본훈련을 마친 이씨는 공병학교로, 조순범은 부산육군통신학교로 가면서 헤어지게 됐다. 이씨의 형은 해병이 됐으나, 얼마 안 돼 질병으로 귀가했다. 이씨는 1954년 12월 5일 만기 전역했다.●李씨, 장남 권유로 소년병 참전과정 기록 참전 증서를 받아 든 후 이씨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학생 소년병으로 참전했던 전우들이 그리웠다. 그러던 1996년 7월 어느 날 장남인 이 원장이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챘다. 아들은 “아버지 제가 도와 드릴 테니 모두 만나 보고 그분들의 참전 과정을 기록으로 남겨 보시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그러면서 20만원이 든 봉투와 카메라, 수첩, 소형 녹음기를 내밀었다. “아버지는 아무도 관심 없는 인천 소년병에 대한 얘기를 더 늦기 전에 기록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6·25 참전 인천 학생들이 진술한 녹음테이프와 인터뷰 수첩, 참전 사진과 제대증, 교육필증 등 참전 관련 각종 공문이 점점 쌓이면서 이 원장은 때로 아버지와 함께 길을 나서기도 했다. 이 원장은 부친에게서 듣기만 했던 6·25 참전 인천 지역 학생들이 수천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전사자도 200여명에 이른다는 사실을 밝혀낸 뒤에는 의무감마저 생겼다.●참전사 4권 출판… 향후 10권까지 계획 1951년 1월 31일 이후 소식이 끊긴 옆집 후배 조순범의 전사 사실을 알게 된 건 6·25 참전 학생인 변광선(인천상업중 4년) 선배가 제공한 자료에서였다. 1998년 4월 서울 국립묘지를 찾은 이씨는 조순범의 묘비를 쓸어 안고 “너는 전쟁터에서 죽고 나는 살아 돌아와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됐구나”라며 통곡했다. 이 모습을 바라본 아들 이 원장도 눈물을 쏟았다.인천학도의용대 남동지대장을 맡아 중학생 50여명을 이끌고 부산으로 내려갔던 최수보(별세)씨는 1997년 7월 7일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단 1명의 낙오도 없이 후배들을 데리고 부산통신학교로 갔다. 그는 대학생이라 훈련소 현지에서 장교 임관 제의를 받았으나 자신이 데려간 어린 후배들과 함께 사병으로 복무하며 그들을 안전하게 돌보기 위해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생전 이씨를 만난 자리에서 “당시 나의 마음은 어떻게 해서든지 어린 중학생 대원들을 잘 보호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회고했다. 50여년 세월이 흐른 뒤 참전 인천 지역 학생들의 흔적을 찾아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작은 실마리만 있어도 무조건 달려갔다. 그곳에서 작은 정보라도 얻으면 그것으로 또 다른 연결점 찾기를 반복했다. 1996년부터 지금까지 약 20년 동안 발품을 판 결과 2500여점에 달하는 6·25 참전 인천학생들과 전사학생들의 흔적이 담긴 증서·인쇄자료·훈장증·전사 통지서 등을 모을 수 있었다. 이 원장은 이 자료들을 모아 2004년 12월 자신의 병원 건물 1~2층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을 열었다.●아들 李원장 “전후세대 전쟁 참뜻 이해했으면” 참전관은 추모기억추억 등 3개의 테마공간으로 이뤄졌다. 이 원장은 “참전관이 전쟁을 모르고 자란 세대가 전쟁의 참뜻을 제대로 이해하는 역할을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다음달 중순 약 10억원을 들여 대로변 5층 건물 1·2층 연면적 660㎡ 규모로 확장 이전해 새로 문을 연다. 아버지와 아들이 모은 인천 학생 참전 역사 기록사업은 책으로도 펴낸다. 1996년 만든 편찬위원회가 2000여명의 참전 과정과 전사자 208명에 대한 모든 얘기를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2007년 첫 번째 책을 출판한 뒤 2013년 4권까지 나왔다. 앞으로 총 10권까지 제작할 계획이다. 오늘도 이씨는 이규원치과 1~2층에 마련한 인천학생 6·25 참전관에 들어선다. 먼저 출근한 아들이 반갑게 맞이한다. “아버지 오셨어요” 하면 이씨는 “감사합니다” 하며 자신의 소원을 들어준 장남에게 허리 굽혀 인사한다. 아들은 “에이, 아버지~” 하며 멋쩍어한다. 그런 부자를 바라보는 직원들과 주변 사람들의 얼굴엔 미소가 피어 오른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전통건축 문법을 근대적으로 풀어낸 자생적 모더니즘

    전통건축 문법을 근대적으로 풀어낸 자생적 모더니즘

    한강 양화대교 북쪽에 한 봉우리가 솟아 있고, 그 위에 특이하면서도 기품 있는 일군의 건축물이 앉아 있다. 이 봉우리의 이름은 절두산으로, 천주교도의 목을 잘라 처형했던 순교성지다. 절두산성당으로 통칭되는 ‘한국천주교 순교자박물관’과 ‘병인박해100주년 기념성당’은 잊혀져 가는 건축가 이희태(1925~1981)의 명작이다.●이희태, 1세대 건축가 3대 거장 근대적 의미의 건축가는 체계적인 건축교육을 받고 설계사무소를 운영하며, 자기 이름으로 작품을 설계한 한국인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런 정의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의 박길룡(1898~1943)이 최초의 근대 건축가다. 그러나 건축가의 직능을 본격적으로 알린 이는 해방 이후에 활동한 김중업(1922~1988)과 김수근(1931~1986)이다. 이들은 20세기 초 유럽에서 확립돼 세계를 주도한 모더니즘 건축을 정착, 발전시켰다. 이들과 견줄 수 있는 다른 건축가라면 단연 이희태를 꼽을 수 있다. 한국 근대건축의 대표작들이 만들어졌던 1960~1970년대는 이 세 건축가가 정립한 삼국지의 무대이기도 하다. 김중업·김수근은 모두 일본 유학을 통해 모더니즘 건축을 습득했다. 김수근은 유학 시절 일본의 세계적 건축가 단게 겐조의 영향을 짙게 받았고, 김중업은 20세기 최고의 건축가 르코르뷔지에 사무실에 취직해 직접 배우기도 했다. 이들의 학력과 이력의 아우라는 대단했고, 그들의 제자가 현재의 건축계를 주도하고 있다. 반면 이희태는 빈농 집안에서 태어나 외국 유학은커녕 고등교육조차 꿈꿀 수 없었다. 1942년 경성직업학교를 졸업한 것이 최종 학력이다. 건축 현장의 기능인을 배출하는 것이 목표인 학교였다. 졸업 후 강제징용을 피해 어찌 취직한 곳이 조선비행기공업회사였고, 여기서 엘리트 건축가인 엄덕문·김중업 등을 동료로 만났다. 그들 같은 지식인 건축가가 되는 것이 청년 이희태의 새로운 목표가 됐다. 한국전쟁 직후 일생의 기회를 잡는다. 당시 서울대 미대 학장인 장발이 엄덕문에게 강의를 부탁했는데 그가 이희태를 소개해 대신 강의를 맡게 됐다. 고졸 청년이 최고 대학의 강사가 됐으니 평생 서울미대 교수로 불리기를 영광으로 삼았다. 장발은 4·19 내각수반 장면의 동생이며, 한국 천주교에 큰 위상을 가진 집안 출신이었다. 이희태의 능력과 성실함을 높게 산 장발은 천주교 건축 일을 주선했다. 1954년 명수대성당을 시작으로 혜화동, 인천 송림동, 진해, 경주, 청파동, 아현동, 압구정동 성당을 설계하게 됐다. 아울러 명동 샤르트르 수녀회, 계성여고, 서강대 예수회 신부관, 성나자로마을까지 영역을 넓혔다. 이 가운데 명수대성당은 최초의 모더니즘적 성당으로, 혜화동성당은 그의 대표작으로 명성을 얻었다. 1960년대는 그의 전성기였다. 절두산성당과 국립극장 현상설계에서 당선돼 건축계 최대의 히어로가 됐다. 국립극장 설계를 위해 미국과 유럽의 문화시설을 견학했고, 멕시코와 홍콩 등 초청 방문도 잦았다. 1970년대 초까지 경주박물관, 공주박물관(현 충남역사문화원), 부산시립박물관 등 문화시설 설계로 분주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부터 설계 의뢰가 끊겨 사무소 문을 닫았고, 가정 문제는 복잡해졌으며, 불치의 병까지 얻어 끝내 57세 나이로 타계했다. 내성적이며 비사교적이었던 그는 제자를 키우지 못해 그를 기억하는 사람도, 남겨진 자료도 많지 않다. 어려운 처지에도 명동 한복판에 사무소를 얻었고, 늘 고급 맞춤양복을 입었으며, 매사에 엄격하고 깔끔했던 차도남(차가운 도시 남자)으로 기억될 뿐이다.●절두산성당, 20세기 한국의 고전 한국 천주교 전래사는 박해와 순교의 역사였다. 신유박해로 300여명, 기해박해로 130여명 그리고 병인박해(1866~1871)로 8000여명이 순교했다. 1866년 2월 흥선대원군의 조선 조정은 9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포함해 전국에서 신도 수천 명을 처형했다. 이는 곧 그해 가을의 병인양요를 촉발시켰다. 프랑스 극동함대 선단이 8월에 한강의 양화진과 서강까지 거슬러 정탐했고, 9월에 대대적으로 강화도를 침략했다. 천주교도들이 프랑스 군대를 끌어들였다고 병인양요 후 또다시 대대적인 처형을 자행했다. 특히 양화진에서 수백 명을 참수했다. “외적이 더럽힌 곳을 원인 제공자들의 피로 씻는다”는 야만적인 명분이었다. 원래 이 봉우리는 누에머리를 닮아 ‘잠두봉’이었으나 참수 처형 이후 ‘절두산’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한국 천주교는 1957년 잠두봉 일대의 토지를 매입해 순교 100주년에 맞춰 1967년 성당과 기념관을 완공했다. 서울의 다른 순교성지인 새남터는 1982년에 기념성당을, 서소문 밖 처형터는 2020년 역사박물관과 기념공원으로 단장했다.자연 지형을 최대한 존중하고 성당과 박물관의 기능을 조화시키라는 것이 설계 조건이었다. 이희태의 당선안은 그 장소성을 극대화시킨 작품이다. 지형의 높낮이 차이를 활용해 높은 곳에 성당을, 한 단 낮은 곳에 박물관을 배치했다. 두 건물을 대각선으로 배치하고 그 접점에 높은 종탑을 세워 서로 통합했다. 이 종탑은 멀리서도 종교적 상징이 되는 랜드마크다. 두 개의 분리된 건물은 건물 외벽에 걸쳐진 회랑으로 모두 연결된다. 전통 건축의 방법인 채 나눔을 따르되 기능적 통합을 꾀했다.불규칙한 지형을 살리기 위해 1층을 띄운 필로티 형식으로 박물관을 설계했다. 필로티 하부에는 8각 화강석 기둥을 세워 마치 전통 누각 건축의 누하주와 같아 보인다. 위로 볼록한 기념관의 콘크리트 지붕은 초가지붕을 연상시킨다. 갓 모양인 성당의 원형지붕은 넓적한 칼 모양의 종탑이 내리쳐 잘려 나간 순교자들의 머리를 상징했다고도 한다. 회랑의 난간은 마치 목조를 짜 맞춘 것 같은 세심한 디테일을 가졌다. 역사적 장소성뿐 아니라 문화적 전통성과 종교적 상징성을 동시에 얻는 데 성공했다. ●독학으로 완성시킨 토착적 고유형 건축 그는 체계적인 고등교육도, 모더니즘의 세례도 받지 못했다. 모든 것을 독학으로 습득해야 했다. 그럼에도 초기작인 혜화동성당(1955)은 그 어떤 건축보다 모던하다. 직사각형의 몸체와 사각기둥인 종탑이 전부인 건물이다. 단순하지만 아름답다. 아름다움의 비밀은 외관의 비례에 숨겨져 있다. 종탑의 높이와 건물의 폭이 같아 보이지 않는 정사각형을 이룬다. 직사각형 몸체의 가로세로비는 2대1로, 두 개의 정사각형이 숨어 있다. 그의 다른 성당들도 이처럼 정교한 비례의 틀 안에서 계획됐다. 모더니즘 건축은 건축적 개념과 내부 공간의 구성을 중시했지만, 이희태는 이를 비례 체계의 형식미로 구현했다. 독학의 한계이자 성과였다. 당시 의식 있는 건축가들은 서구 건축의 수용과 전통문화의 계승이라는 모순 속에서 건축적 자의식을 표현해야 했다. 두 가지의 가능성이 존재했다. 하나는 모더니즘 건축의 보편성 위에서 전통을 차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통적 건축의 문법을 근대적 방법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김중업이나 김수근이 전자의 태도를 취했다면, 이희태는 후자에 가깝다. 김중업의 주한프랑스대사관은 한옥의 처마선을 추상화했으나 전반적으로 르코르뷔지에의 문법에 충실했다. 김수근의 공간사옥은 한국 전통의 인간적 스케일을 추상화한 모더니즘적 집합체였다. 반면 이희태의 절두산성당은 목조건축을 연상시키는 누각형 구성, 초가형 지붕, 열주와 서까래 등의 전통적 문법을 철근콘크리트로 추상화했다. 그래서 이질감보다 편안함이 앞선다. 필로티-열주-처마지붕의 세 요소로 건물을 구성했는데, 이는 전통 건축의 기단-벽체-지붕의 3분구성으로 회귀한 것이다. 이후 국립극장이나 공주박물관에 공통적으로 적용된 그만의 고유한 문법이었다. 근대적 건축가의 길을 결심했을 때나 모더니즘의 원리를 체득할 때 그리고 현재와 전통의 화해를 꾀하고 자신만의 건축 문법을 만들 때도 그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스승이 없기에 자기 지시적이었고, 외래의 이상형이 없었기에 토착적인 고유형을 창조할 수 있었다. 어쩌면 한국 천주교의 운명과도 닮았다. 한국 천주교는 전교 사상 유례없이 내부적 갈망으로 시작해 자생적으로 성장해 왔다. 독학 가톨릭인 셈이다. 박해와 순교는 외래 종교와 전통 가치관이 충돌한 결과였다. 마치 우리의 근대건축이 서구와 전통 사이에서 갈등해 온 것과 같다. 차이가 있다면 순교자의 후예들은 박해의 역사를 충실히 기억하는 반면, 이희태의 존재와 건축적 의미는 거의 잊혀져 간다는 점이다. 건축학자·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 “다시보기 안되는데…” 나훈아 콘서트, 중국서 통째로 유통

    “다시보기 안되는데…” 나훈아 콘서트, 중국서 통째로 유통

    중국판 유튜브 ‘빌리빌리’ 사이트서KBS 콘서트 영상 버젓이 불법 유통시청률 29%…“우리 콘텐츠 보호해야” 전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황’ 나훈아의 KBS 콘서트 영상이 중국에서 버젓이 불법 유통 중인 것으로 3일 확인됐다. 국내에서는 인터넷 다시보기 서비스조차 제공되지 않는 상태인데, 저작권 침해 피해가 우려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조명희 의원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중국판 유튜브로 불리는 ‘빌리빌리’(bilibili) 사이트에는 지난달 30일 KBS 2TV에서 방영된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영상을 찾아볼 수 있다. 이 동영상 링크에 접속하면 2시간 반에 이르는 나훈아의 전체 콘서트 영상이 통째로 재생된다고 조 의원 측은 전했다. 조 의원은 “나훈아 콘서트에 대한 온라인 다시보기 서비스나 TV 재방송이 없다는 것이 KBS의 방침이었다. 우리 콘텐츠를 보호하면서 국민들에게 영상 저작물을 정상적으로 서비스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미 이전부터 한국 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중국 방송사들의 저작권 침해 사례가 빈발해왔다는 것이 조 의원의 지적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자료에 따르면 2016년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한국 예능 프로그램 18편에 대한 20차례의 포맷 표절·도용이 확인됐고, 이 중 19건이 중국에서 발생한 것으로 집계됐다. 앞서 나훈아는 지난달 30일 KBS 2TV에서 방송된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를 통해 시청자들과 만났다. 나훈아가 15년 만에 방송에 출연한다는 점을 비롯해 처음으로 진행되는 비대면 공연이라는 점, 노개런티 출연이라는 점 등으로 방송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나훈아 “가만있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아” 해당 방송분은 재방송과 다시보기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는 방송이라는 점에서 시청률이 전국 가구 기준 29.0%(닐슨코리아 집계)까지 치솟는 등 본 방송에 대한 시청자들의 관심이 뜨거웠다. 이에 KBS는 공연 비하인드를 담은 다큐 ‘나훈아 스페셜’을 이날 방영했다. 이날 방송에서 나훈아는 제작진에 “내가 가만히 있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아서”라며 콘서트 개최를 결심하게 된 이유를 밝혔다. 첫 연습 당시 나훈아는 스태프들에 “54년째 가수로 살아왔는데 연습만이 살길이고 연습만이 특별한 것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최선을 기자 csunell@seoul.co.kr
  • [강남순의 낮꿈꾸기] 긴즈버그의 유산, 한국 사회에 주는 의미

    [강남순의 낮꿈꾸기] 긴즈버그의 유산, 한국 사회에 주는 의미

    “마녀, 악인, 괴물, 좀비, 가장 비열한 인간, 대법원의 수치.” 2020년 9월 18일, 87세의 나이로 사망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을 향한 보수주의자들의 호칭이다. 이러한 부정적 표지는 “악명 높은 RBG”라는 별명으로 전환돼 오히려 그의 역할을 지지하고 확산시키는 대중적 아이콘이 됐다. 긴즈버그는 미국 역사에서 한 개인이 이룰 수 있는 최대치의 변화를 이룬 사람 중 하나이다. 그런데 긴즈버그가 한국 사회에 남긴 것은 무엇인가. 첫째, 긴즈버그는 소위 ‘동료 결혼’(peer marriage)이라는 평등 결혼의 중요성과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동료 결혼이란 경제적 책임, 양육의 책임, 가사노동의 책임, 그리고 여가 시간의 자유 등 삶의 네 분야에서의 책임과 평등을 나누는 결혼을 의미한다. 21세였던 루스와 한 살 더 많았던 마틴이 결혼한 것은 1954년, 지금부터 66년 전이다. 그 오래전에 두 사람은 동료 결혼을 했고, 평생 평등 결혼 관계를 지켜냈다. 내조 또는 외조라는 의미가 아니다. 내조·외조는 이미 ‘내(內)·외(外)’라는 위치를 설정하면서 결혼 관계에서의 젠더 역할에 대한 가부장제적 고정관념을 자연적인 것으로 구성한다. 여성의 내조는 당연시되고, 남성의 외조는 과장되고 미화된다. 긴즈버그의 동료 결혼 관계를 내조·외조라는 가부장제적 개념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보수주의자들 “마녀·괴물·좀비”로 호칭 루스는 하버드 법학대학원 학생일 때 암에 걸린 마틴을 위해 그의 학업이 이어지도록 최선을 다했다. 14개월 된 아이의 엄마로 법학대학원의 학생인 본인도 해야 할 일이 많았을 텐데, 양육과 가사는 물론 그의 학업에 차질이 없도록 밤새워 마틴 친구들의 노트를 빌려 필기를 해 학업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마틴이 먼저 졸업하고서 뉴욕에 취직했을 때, 루스는 하버드대에서 컬럼비아대로 학교를 옮겼다. 남편을 따라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병력이 있는 동반자와 함께 사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루스가 대법관으로 임명됐을 때에는, 뉴욕에서 가장 잘 알려진 세금 변호사였던 마틴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루스를 따라서 워싱턴DC로 이직한다. 외향적이고 유머 감각이 뛰어난 마틴, 다소 내향적이고 늘 진지한 루스는 각기 다른 개별성을 지닌 두 인간으로 서로 지지하고 보살피며 살았다. 친구, 연인, 동료, 지지자, 동반자, 위로자, 돌봄자로 포괄적인 파트너십을 나누며 2010년 마틴의 죽음까지 56여년 동안 동료 결혼 관계를 이어 왔다. 대법관 임명 청문회장에서 루스는 마틴을 “남편”이 아닌 “파트너”라고 지칭한다. 이러한 호칭은 2020년이라면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1993년에 그러한 호칭을 썼다는 것은, 결혼을 진정한 파트너십으로 이해한 두 사람의 의식을 드러낸다. 마틴은 요리를 거의 전담했다. 그는 딸이 결정했다며 “루스가 부엌에 들어오는 것은 더이상 허용되지 않는다”고 특유의 유머를 담아 공적 자리에서 말하곤 했다. 두 긴즈버그의 삶은 진정한 파트너십의 전형을 보여 준다. 1950년대에 만났을 때부터 이미 여성의 일이 남성의 일처럼 똑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마틴과 같은 파트너가 없었다면, 자신이 대법관으로 일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루스는 회고한다. 공적 영역에서 평등을 외치면서, 사적 영역에서는 여전히 위계적인 가족 관계를 유지한다면 한 사회의 민주적 가치가 확산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남편 암에 걸리자 학업 계속하게 최선 둘째, 긴즈버그는 권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보여 준다. 권력을 사용하는 데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권력을 자신의 개인적 이득을 확장하기 위한 도구로만 쓰는 사람, 또 다른 하나는 공공선을 확장하기 위해 쓰는 이다. 권력 자체는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무엇을 위해 그 권력을 사용하는가에 관심을 둬야 하는 이유이다. 긴즈버그는 대법관이라는 막강한 권력을 인종, 계층, 성별, 성적 지향 등에 근거해 권리가 박탈된 모든 사회적 소수자들의 권리와 평등의 확장을 위해 사용했다. 물론 우리가 모두 대법관과 같은 막강한 제도적 권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각자의 정황에서 크고 작은 권력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 권력을 자신의 개인적 이득 확장, 정치세력 또는 타자를 억누르고 지배하기 위해서 쓸 수 있다. 또는 그 권력을 구성원 모두가 함께 평등하게 살아가는 가정, 집단, 사회, 그리고 세계를 위해 사용할 수도 있다. 긴즈버그는 기존의 전통과 관습이 차별적일 때는 단호하게 저항했다. 긴즈버그의 유명한 “나는 반대한다”(I dissent)는 사적 이득이나 정치적 파당성이 아니라 공공선을 위한 권력 행사였다. 개인이 부여받은 권력은 자유와 평등 가치의 확산이라는 공공선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긴즈버그는 우리에게 보여 준다. 셋째, 긴즈버그는 페미니즘의 범주가 여성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으로 확장돼야 한다는 유산을 남겼다. 그에게는 ‘페미니스트’라는 표지가 따라다닌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성차별 문제에만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다. 한 사회에서 한 종류의 평등 문제는 다른 종류의 평등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것을 그는 보여 주었다. 젠더 평등은 페미니즘의 출발점이지만, 도착점이 아니다. 긴즈버그는 성차별, 성소수자 차별, 한 부모 양육자로 살던 남성의 권리, 아동 이주민의 권리 또는 인종적 소수자들의 투표권 보호 등 다양한 모습의 차별 문제에 개입하고 법적 평등을 제도화하고자 자신의 권력을 사용했다. 그의 페미니즘은 제도적으로 배제되고 소외된 ‘모든’ 사람의 권리를 확장하고자 하는 코즈모폴리턴 페미니즘이었다. 넷째, 87세까지 치열하게 사회개혁을 위해 일한 긴즈버그는 한국 사회에서 빈번하게 소환되는 세대론의 위험성을 알려준다. 386, 586 또는 2030 등으로 표기되는 세대론의 빈번한 소환은, 그 목적이 무엇이든 득보다 실이 많다. 세대론은 생물학적 나이를 시대적 구조와 연결하면서 특정한 나이의 사람들을 동질적 존재로 집단화한다. 특정한 시대를 산 사람들의 동질성을 전제로 하는 세대론의 치명적인 위험성은, ‘반쪽 진리’를 ‘전체 진리’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대론적 관점에서 보자면, 긴즈버그는 이제 퇴물로 물러나서 보수적 사고로 점철된 삶을 사는 구세대로 구분돼야 한다. 그러나 그는 생물학적 나이가 들수록 점점 개혁의 급진성을 법적으로 제도화하고자 치열하게 일했다. 한국 사회가 지속적으로 세대론을 소환하는 한 정치와 사회에서 성숙한 민주적 시민의식이 일상화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민주적 의식은 나이, 학연, 지연, 선후배 관계 등에 따른 집단적 동질화가 아니라 개별인의 사유와 입장의 차이를 인식하고 존중하는 윤리적 개인주의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정치 성향 다른 대법관 스칼리아와 우정 다섯째, 우리가 최후까지 지켜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인간됨이라는 것을 긴즈버그는 가르쳐 준다. 평등사회를 위해 평생 치열하게 일하면서, 그는 자신과 정치적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반대자를 적대시하지 않았다. 동료 대법관이었던 안토닌 스칼리아와의 우정은 널리 알려져 있다. 긴즈버그와 스칼리아는 매우 다른 정치적 입장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러나 돈독한 친구 관계를 이어 왔다. 여행도 함께 가고, 오페라도 함께 보고, 두 사람이 함께 오페라에 등장하기도 했다. 정반대의 관점을 가진 두 사람이 어떻게 그런 우정을 나눌 수 있었을까. 긴즈버그는 2016년에 사망한 스칼리아의 장례식 조사에서 스칼리아가 자신에게 한 말을 인용한다. “나는 아이디어를 공격한다.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 정치적 입장과 생각이 다르다고 반대자를 악마화하는 것이 일상인 한국에서, 긴즈버그의 태도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누군가를 악마화하는 순간 파괴되는 것은 그 타자의 인간됨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간됨이다. 개혁이란 점진적이며 고도의 인내심이 요청되는 지난한 과정이라고 긴즈버그는 말한다. “한 번에 한 걸음씩”(one step at a time)의 철학을 가지고, 인내심을 가지고 그는 반대자들 또는 변화의 필요성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모든 이들의 평등이라는 법 정신에 근거해 설득하고자 했다. 한국이 성별, 장애, 나이, 성적 지향, 종교, 학력 등 그 어떤 것에 근거해서도 차별받는 사람이 없는 사회가 되기 위해 갈 길은 참으로 멀다. 그러한 사회를 만들고자 할 때 우리가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긴즈버그는 그의 삶과 권력 사용 방식으로 가르쳐 준다. 글 텍사스크리스천대(TCU)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그림 김혜주 서양화가
  • “나는 한국인 안광훈입니다”…50년 빈민운동가 ‘푸른 눈 신부’ 특별귀화

    “나는 한국인 안광훈입니다”…50년 빈민운동가 ‘푸른 눈 신부’ 특별귀화

    50여년 동안 재개발지역 철거민과 저소득층의 편에서 싸워온 빈민운동가 안광훈 신부(78·브레넌 로버트 존)가 24일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법무부는 24일 오전 뉴질랜드 출신 안 신부의 특별 공로를 인정해 대한민국 국적증서를 수여했다고 밝혔다. 호주 시드니 골롬반신학대를 졸업한 안 신부는 1966년 원주교구 주임신부로 임명되면서 한국 땅을 밟았다. 안 신부는 1969~1979년 탄광촌 주민들의 권익 보호에 앞장섰고, 1995년부터는 달동네 주민들의 생계유지를 위해 힘썼다. 1999년 솔뫼협동조합, 2016년 삼양주민연대를 설립하는 등 한국 사회의 저소득층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앞장섰다. 안 신부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4년 인권·봉사 분야 아산상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날 안 신부는 국적증서 수여식에서 “20대 청년으로 한국에서 광훈의 이름을 받았고, 54년이 흘러 80세에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며 “한국은 제2의 고향이 아니라 고향 그 자체이며, ‘이방인’이 아닌 ‘온전한 한국인’으로 살게 되어 자랑스럽다”고 소감을 밝혔다. 필립 터너 주한 뉴질랜드 대사는 축사에서 “한국과 뉴질랜드 간 돈독한 협력관계와 긴밀한 인적교류를 통해 코로나19에도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고, 신부님의 한국 사회 헌신도 이의 일부”라고 밝혔다. 이어 뉴질랜드 원주민 마오리인 속담을 인용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고 덧붙였다. 진선민 기자 jsm@seoul.co.kr
  • 서울 강서구의회 ‘제주4·3특별법 개정 촉구 건의안’ 채택

    서울 강서구의회 ‘제주4·3특별법 개정 촉구 건의안’ 채택

    서울시 강서구의회(의장 이의걸)가 지난 18일 제274회 임시회 제2차 본회의에서 전국 226개 기초의회 중 처음으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개정 촉구 건의안’을 의결했다. 윤유선 의원이 대표 발의하고 나머지 21명의 의원이 동참해 강서구의회 전체 의원이 발의한 건의안은 제주 4·3사건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 국회에 계류 중인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전부개정법률안’의 신속한 처리를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서울시의회와 경기도의회, 강원도의회, 충청남도의회, 전라남도의회 등 5개 광역의회에서도 채택했다. 건의안에서 의회는 제주 4·3사건이 1947년 3월 1일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인 1954년 9월 21까지 7년여간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고, 민족 분단과 이념 갈등의 현대사에서 국가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최대 규모의 민간인 희생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이념 대립과 분단이라는 현실 속에서 진상 조사와 정명조차 이뤄지지 못한 채 반세기에 가까운 기간을 보내왔다고 밝혔다. 또 2000년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 이래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공식 사과와 제주 4·3평화공원 및 4·3 평화기념관 설립, 경찰과 국방부의 유감 표명 등 의미 있는 진전에도 불구하고 더욱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조치가 강구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유선 의원은 “강서구에는 서울제주도민회와 제주도 출신 대학생 기숙사인 탐라영재관이 자리 잡고 있어 제주도와 인연이 깊다”며 “제주 4·3사건은 제주도만의 슬픔이 아닌 대한민국 현대사의 커다란 아픔인 만큼 개정안을 조속히 통과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강서구의회가 제주4·3이라는 아픔과 한(恨)에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위로를 전함과 동시에 왜곡된 제주4ㆍ3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에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해 건의안을 준비했다”고 밝혔다. 아래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개정 촉구 건의안 전문. ‘제주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우리 현대사에서 국가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최대 규모의 민간인 희생 사건이다. 그러나 ‘제주 4·3사건’은 국민의 인권을 근본적으로 침해했던 중대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이념 대립과 분단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이유로 드러낼 수 없는 금기의 역사로서 제대로 된 진상조사와 정명조차 이뤄지지 못한 채 반세기에 가까운 기간을 보내왔다. 오랜 시간 동안 전개된 희생자 유족과 제주도민, 시민사회 등의 진상규명 운동으로 2000년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고, 본격적인 진상조사를 시작으로 ‘제주 4·3사건’의 완전한 해결을 위한 한 걸음이 전개됐다. 2003년 10월 ‘제주 4·3사건’의 진상을 담은 우리 정부의 진상조사 보고서가 확정되었고, 노무현 대통령의 공식적인 사과가 이뤄졌다. 이를 시작으로 ‘제주 4·3평화공원’과 ‘4·3평화기념관’ 등이 설립됐고, ‘4·3희생자 추념일’이 법정기념일로 지정됐으며 경찰과 국방부가 사건발생 71년 만에 유감을 표명하는 등 사건의 진상규명과 희생자 및 유족의 명예회복 등을 위한 의미 있는 진전이 있었다. 그럼에도 ‘제주 4·3사건’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서는 희생자 유족 그리고 제주도민을 포함한 모두의 상처가 치유되고, 우리 사회가 ‘제주4·3사건’을 온전한 모습으로 추모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더욱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조치가 강구돼야 한다. 특히, 어떠한 목적과 이상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일련의 폭력적·불법적 행위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 정부에 의한 배·보상, 2530명에 달하는 군법회의 피해자에 대한 구체적인 명예회복 등에 있어 실질적인 조치를 강구 하기 위한 법률의 개정이 절실하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지난 7월 27일 ‘4·3특별법’에 규정된 ‘제주 4·3사건’의 정의를 구체화하고 희생자에 대한 국가 차원의 보상을 명확히 하며, 추가적인 진상조사와 불법 군법회의에 대한 무효화 조치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전부개정법률안’이 국회에 제출됐다. 이에 서울특별시 강서구의회 의원 일동은 ‘제주 4·3사건’의 완전한 해결을 통해 희생자 및 유족의 상처가 치유되고, 우리 사회가 갈등과 반목의 역사를 넘어 통합과 평화의 새 시대를 열 수 있도록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전부개정법률안’의 조속한 입법을 촉구한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대만해협 지도 다시 그리는 중국… “대만에 ‘먼저 쏴라’ 자극 의도”

    대만해협 지도 다시 그리는 중국… “대만에 ‘먼저 쏴라’ 자극 의도”

    중국이 전투기와 폭격기 등 19대를 보내 대만해협 중간선을 침범하면서 군사 대치의 위험을 증가시키고 있다. 중국이 중간선을 침범하는 것은 대만에 접근하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 대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보내는 불만 신호라고 블룸버그통신이 2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중국 인민해방군(PLA) 군용기가 지난 18일 미사일을 장착한 채 군사훈련의 일환으로 대만과 중국 본토에 있는 중간선을 반복적으로 침해했다. 대만 국방부는 “중국 군용기들이 중간선을 넘어와 우리의 주권을 침해하고 지역 평화를 해쳤다”고 발표했다. 중간선을 넘은 중국 군용기들은 J16 전투기 16대, H6 전략폭격기 2대, 대잠 초계기 1대가 포함되었다. 현지 매체에는 미사일이 장착된 중국 군용기 사진이 실렸다. 이에 대만은 전투기를 즉시 출격하고 대공미사일을 전개하는 대응에 들어갔다. 출격한 대만 조종사가 “중간선을 비행했다. 즉시 물러가라”고 경고했지만, 중국 조종사들은 “중간선은 없다”며 앞으로도 훈련을 계속하겠다는 신호를 보냈다고 보도했다. 중간선은 과거 20년 동안 완충지대로서 존중받았으나 중국 군용기들은 트럼프가 취임한 이후인 2019년 3월 이후 5차례 넘었다. 중간선은 양측의 충돌을 방지하고자 미국이 1954년 설정했다. 이 같은 대만 매체의 보도는 “환상을 버리고 싸울 준비를 하라”는 PLA 동부전구사령부의 소셜미디어 게시글과 함께 중국 매체에 널리 보도됐다. PLA는 19일 대만을 지원하는 미국의 핵심 시설인 괌의 앤더슨공군기지와 유사한 모습의 활주로를 H6 폭격기가 타격하는 모의 훈련 동영상을 공개했다.말콤 데이비스 호주전략정책연구소의 선임 애널리스트는 “대만해협 위의 중간선 지도를 다시 그리는 것은 중국이 압력을 가중시키고 무력 사용을 정당화하려는 명백한 조치”ㄹㅏ며 “전쟁 위험이 상당히 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이런 공격적인 비행은 어쩌면 대만에 ‘먼저 쏴라’고 자극하는 의도”라며 “그러면 베이징은 필요한 모든 정당화 명분을 갖게 된다”고 설명했다. 차이잉원 총통은 20일 기자회견에서 “이런 행동은 중국의 국제 이미지에 도움이 되지 않고, 대만 국민에게 경각심을 더할 뿐”이라며 “지역의 다른 국가들에 중국이 가하는 위협과 중국 공산당 정권의 본질 알게 한다”고 말했다. 이어 “중국 공산당은 자제하고, 도발하지 마라”고 덧붙였다. 베이징은 대만을 중국 영토의 일부로 간주하며 무력으로 합병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양측은 70년 이상 별도로 통치되어 왔지만 사회적·경제적 유대는 깊다. 대만을 별도의 주권 국가로 보는 차이는 2016년 총통 취임 이래로 미국의 군사·경제적 지원을 구애하고 있다. 국제사회의 반대에도 중국이 홍콩보안법 강행 이후 불안에 휩싸인 대만에 앨릭스 에이자 미국 보건부 장관이 방문하는 등 최근 미국 관리들이 잇따라 찾아가자 중국은 이에 분노해 중간선을 침범한 것으로 블룸버그는 분석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트럼프 “처형 반대” 아흐레 뒤 이란, 유명 레슬링선수 사형 집행

    트럼프 “처형 반대” 아흐레 뒤 이란, 유명 레슬링선수 사형 집행

    국제적으로 처형 반대 움직임이 일어났던 유명 레슬링 선수 나비드 아프카리(27)가 살인 혐의로 처형됐다고 이란 국영방송이 12일(이하 현지시간) 보도했다. 그는 이란 국내 대회를 휩쓸다 시피 한 유명 선수였다. 국영방송은 피해자 유족이 확정된 사형을 집행해 달라고 사법부에 요청한 데 따라 그가 종교적 관용을 받지 못하고 이날 오전 교수형이 집행됐다고 전했다. 이란 사법부는 아프카리가 남동생 둘과 공모해 공기업 경비원을 흉기로 살해한 혐의로 사형이 확정됐다고 지난달 29일 발표했다. 남동생 바히드는 징역 54년, 하빕에게는 27년형이 선고됐다. 그의 사형 확정 소식이 전해지자 이란 누리꾼들은 그가 2018년 1월 반정부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그에게 누명을 씌워 보복성 판결을 내렸다면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구명 운동을 벌였다. SNS에는 ‘#나비드를 살려달라’는 해시태그가 빠르게 확산했고 사형을 반대하는 앰네스티 등 국제 인권단체, 외국의 유명 레슬링 선수들까지 무려 8만 5000명이 온라인 서명 운동을 펴 사형 선고가 부당하다면서 석방을 요청했다. 그의 가족은 면회하면서 몰래 녹음한 음성파일을 근거로 이란 당국이 심하게 고문해 허위 자백을 강요했다고 주장했다. 어머니는 아프카리가 고문을 당한 뒤 동생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해야만 했다고 주장했다. 아프카리는 음성파일을 통해 “내가 만약 처형되면,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려 했던 무고한 사람이 처형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줬으면 한다”고 털어놓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지난 3일 트윗을 통해 “이란의 지도자들에게. 이 젊은이(아프가리)의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목숨을 살려준다면 대단히 고맙겠소”라고 거들었다. 미국 국무부도 같은 날 성명을 발표해 “미국은 아프카리에게 사형을 선고해버린 이란 정권에 대한 세계적 분노에 동참한다. 2018년 평화 시위에 참여한 그는 고문을 받은 끝에 허위로 자백했다”라고 비난했다. 이란 사법부는 트럼프 대통령의 ‘요청’ 아흐레 만에 사형을 집행한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트윗에 대해 이란 보수 성향 매체 타스님 뉴스는 “트럼프는 가혹한 제재로 이란의 코로나바이러스 감염 환자의 목숨을 위험에 몰아놓고서 살인자의 생명을 걱정한다”고 비난했다. 변호인 하산 유네시는 트위터에 이란 법에 따라 가족이 형 집행 전에 면회도 하지 못했다며 “나비드에게 마지막 접견 기회마저 빼앗을 정도로 그렇게 집행을 서둘러야 했느냐”고 따졌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그의 사형 집행 뒤 낸 성명을 통해 “매우 충격적이다. 국제적으로 구명 운동을 벌였으나 처형을 막지 못해 깊이 실망한다”고 밝혔다. 외부의 의혹 제기에 이란 사법부도 적극 대응했다. 사법부가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그는 2018년 8월 1일 밤 이란 중부 시라즈 시내에서 동생이 모는 오토바이를 타고 한 공무원을 쫓아가 뒤에서 흉기로 여러 차례 찔러 살해했다. 같은 달 시라즈에서 반정부 시위가 소규모로 벌어졌다. 이 범행 뒤 장소를 옮겨 다른 이를 살해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는 게 사법부의 설명이다. 살해 동기는 구체적으로 공개되지 않았다. 사법부는 또 이들 형제가 2018년 1월 전국적으로 발발한 반정부 시위에 참여해 경찰에 흉기를 휘둘러 중상을 입혔고 시위 중 벌어진 약탈에 가담했다고 덧붙였다. 고문을 당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변호인의 입회 아래 조사가 진행됐고, 아프카리가 고문 여부를 밝히는 법의학적 검증을 거부했다”고 부인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김미숙 경기도의원 ‘4·3특별법 개정 촉구 건의안’ 상임위 통과

    김미숙 경기도의원 ‘4·3특별법 개정 촉구 건의안’ 상임위 통과

    경기도의회 경제노동위원회 김미숙(더불어민주당·군포3) 의원이 대표 발의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개정 촉구 건의안이 제3회 안전행정위원회에서 원안 가결됐다. 김 도의원은 4일 건의안의 상임위 통과와 관련해 “역사는 단순 과거가 아닌 미래를 위한 교육이라 생각한다”면서 “제주 4·3 사건의 완전한 해결은 근현대사에서의 상처를 치유하고 이를 통해 갈등과 반목의 역사를 넘어 통합과 평화의 시대를 열게 할 것”이라고 밝혔다.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국내 현대사에서 국가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최대 규모의 민간인 희생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김 의원실에 따르면 제주 4·3 사건의 완전한 해결을 위한 적극적·실질적인 조치를 마련하기 위해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오영환 의원안)이 지난 7월 국회에 제출된 상태다. 법률 개정으로 정부의 폭력적·불법적 행위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와 배·보상, 구체적인 명예회복 등이 이루어질 것으로 김 의원은 기대했다. 안전행정위원회에서 의결된 본 건의안은 오는 18일 경기도의회 제3차 본회의에서 심의될 예정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공장 굴뚝과 문화예술의 건강한 공존

    공장 굴뚝과 문화예술의 건강한 공존

    서울과 인천을 잇는 국도를 경인로라고 부른다. 부천 소사로 복숭아를 먹으러 간 기억이 있는 세대에게는 경인가도라는 이름이 더 익숙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국토의 대동맥이라면 자연스럽게 경부고속도로가 떠오르지만 19세기 개항 이후 오랫동안 우리 산업의 대동맥은 경인로였다. 전국 곳곳에 대형 산업단지가 줄지어 들어선 오늘날에도 수도권 서남부지역 일대로 확대된 경인공업지대는 여전히 한국 최대의 산업단지라는 지위를 잃지 않고 있다. 경인로의 서울 쪽 시발점인 영등포 일대는 경인공업지대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경인선 철도는 경인로와 나란히 놓였다. 경부선 철도는 서울역을 출발해 경인선과 같은 선로를 타고 달리다가 영등포역을 지나 구로동에 이르면 남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그저 경인선과 경부선의 분기점 노릇만 하던 곳에 1974년 서울지하철 1호선이 완공되면서 구로역이 지어졌다.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20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4회 ‘문래창작촌’은 구로역 광장에서 출발해 영등포역이 바라보이는 문래동 창작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2차산업의 발상지인 경인공업지대가 3차산업 시대에 어떻게 적응해 가고 있는지 살펴보는 기회가 됐다. 산업단지가 클수록 노동자의 희생도 비례해 컸던 만큼 모순을 극복하려 했던 노력의 일단을 확인한 것도 소득이다.구로라는 땅 이름에선 ‘산업 발전의 메카’ 같은 긍정적 이미지보다는 ‘처절한 생존의 현장’처럼 다소 어두운 이미지가 감도는 것도 사실이다. 구로공단이 구로디지털단지와 가산디지털단지로, 구로공단역이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이름을 바꾼 것도 상당 부분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구로역은 여전히 구로역이다. 역사는 환승역의 기능에 충실하다. 서울지하철 1호선은 개통 당시 청량리에서 인천과 수원과 오가는 두 갈래 노선이었다. 구로역은 우리나라 최초의 전철 환승역이라는 의미를 부여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럼에도 지하철을 타고 구로역에 내리는 순간 이곳에서는 왠지 즐거운 만남보다는 슬픈 이별이 더 많았을 것 같은 느낌이 스쳐 지나갔다. 여전한 남아 있는 선입견 탓이었다. 하지만 3번 출구로 나서 환하고 깨끗한 광장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표정에서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처절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한쪽에서는 아주머니 한 분이 텃밭에서 길렀음 직한 채소를 광주리에 조금씩 담아 팔고 있다. 고구마순이며 애호박이 구매욕을 자극하지만 참는다. 광장 앞 경인로 건너편에는 우리 목적지의 하나인 구로기계공구상가단지가 사거리 좌우로 나뉘어 펼쳐져 있다. 건널목에서 녹색 신호등이 켜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줄지은 초대형 곡물저장고에 CJ제일제당의 로고가 보인다. 이전에는 1960년대 건빵 한 품목으로 당시 7대 기업에 오른 동립산업의 밀가루 공장 라인이었다고 한다. 이 공장 터는 조만간 복합 문화 공간으로 개발될 예정이다. 그 길 건너에는 하동환자동차 공장이 있었다. 1954년 창업한 버스 제조 회사로 1966년 베트남과 보르네오에 버스를 수출한 기록을 남겼다. V자 날개 모양 가운데 H자가 새겨진 로고를 달았던 하동환 버스가 기억났다.구로기계공구단지는 일대 산업단지의 지원 공단 역할을 톡톡히 하는 듯했다. 1981년 세워진 국내 최초의 산업용품 유통단지로 5만종 남짓한 기계 관련 부품과 공구가 품목별로 블록을 달리해 배치돼 있다. 4개 블록 24동 건물에 모두 1920개 업체가 들어 있는데, 기계·전기·광산·목공·화공·용접에 소방까지 산업 관련 기자재라면 없는 것이 없다고 큰소리친다. 궂은 날씨에도 건물과 건물 사이 좁은 골목을 오가는 화물차며 오토바이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불황을 말하는 사람이 많지만 상가 입주율은 여전히 100%를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기계공구단지를 나서 동쪽 신도림역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넓게 뚫린 경인로 양쪽으로 플라타너스가 우람하다. 과거 경인로는 왕복 2차로의 길 양쪽으로 일제강점기에 심은 플라타너스가 인상적인 곳이었다. 이제 노거수로 자라난 플라타너스는 당시의 흔적이다. 신도림역에 접근해 가면서 오른쪽에 2011년 세워진 디큐브시티가 보인다. 호텔과 백화점, 뮤지컬 공연장, 영화관, 대형서점, 식당가, 일반 주거시설이 밀집한 복합 공간이다. 40~50층의 고층건물이 밀집해 들어선 이곳은 대성연탄 공장 터다. CJ제일제당의 밀가루 공장 터도 아마 이런 방식으로 탈바꿈하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연탄 공장이 뮤지컬 전용 공연장으로 탈바꿈한 것을 극적 변신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우리 삶의 양상 역시 이렇듯 극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디큐브시티를 지나며 돌아보게 된다. 밀가루 공장은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 곁에 찾아올지 기대하게도 된다. 35만㎡에 이른다는 디큐브시티 곁에는 대성그룹 계열사 간판을 달고 있는 주유소도 보인다. ‘연탄 공장이 엄청나게 넓었던 모양이군’ 하고 혼잣말을 했다. 투어단 일행이 걷고 있는 왼쪽, 곧 디큐브시티 건너의 대우푸르지오 오피스텔은 한국타이어 공장이 있던 자리다. 주변 조흥화학과 삼영화학 터에는 동아아파트·종근당·동일제강이, 기아특수강 자리에는 대림아파트·롯데아파트·태영아파트가 각각 자리잡았다. 구로구 최대 공장 밀집 지대가 이제는 구로구 최고 주거단지가 됐다. 주민들의 자부심이 높다고 한다. 도림천을 건너 도림교 사거리에서 경인로를 건넌다. 신도림역이 있는 도림천 서쪽이 대형 공장지대였다면 도림천 동쪽 블록에는 지금도 작은 철공소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경인로 남쪽 골목으로 들어섰다. 층고가 높은 작업장 2층에 반원형 혹은 박공 모양의 삼각형 다락이 딸린 건물이 줄지어 있는 전형적인 ‘영등포식 공장지대’가 시작된다. 외지에서 찾아오는 손님을 위한 카페는 보이지 않는다. 일대 철공소 종사자가 끼니를 해결하는 식당과 주점은 몇 개 보인다. ‘엄마밥상 호프’가 눈길을 끈다. 옆에서 걷던 일행에게 “된장찌개가 끓는 백반이 떠오르는 엄마밥상과 치맥이 생각나는 호프는 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네” 하고 말을 건네니 “점심에는 백반을 하고 저녁에는 치맥을 파나 보지, 뭐”라는 답이 돌아온다. 그런지 아닌지 확인해 보지는 못했다. 그럴수록 세련미와는 거리가 있는 이 동네의 레트로 감성이 조금은 매력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문래동사거리에서 도림동성당에 가려면 도림고가차도로 경부선과 경인선 철길을 건너야 한다. 1921년 영등포공소로 출발한 도림동성당은 명동 종현성당과 중림동 약현성당, 혜화동 백동본당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긴 역사를 갖고 있다고 한다.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잡은 지금의 건물은 1963년 지어진 것이라고 하는데, 아파트 단지가 둘러싸기 전에는 멀리서도 바라보였을 것 같다. 도림동성당의 역사는 우리나라의 가톨릭노동청년회가 1960년 이 성당을 중심으로 창설됐다고 적고 있다. 공장지대에 자리잡은 성당에서 가톨릭노동운동이 태동한 것은 자연스럽다. 가톨릭노동청년회는 이후 우리 노동운동사에 적지 않은 족적을 남겼다. 하지만 이제는 그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대신 회랑이 아름다운 이 성당은 최근 혼배성사의 명소로 떠올랐다고 한다. 비가 뿌리는 이날도 결혼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도림고가차도를 다시 건너 문래동으로 간다. 문래동사거리에서는 우성특수강 건물과 연결된 이웃 우진스텐 건물 옥상에 올라가 볼 일이다. 높지 않은 3층짜리 건물이지만 문래창작촌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철공소 밀집 지역답게 검붉은 색깔이 주조를 이루는 지붕 사이사이에 창작촌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예술가들의 작업이 가까이, 또 멀리 보인다. 철공소와 예술가가 공존하는 문래창작촌은 2003년부터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됐다고 한다. 초창기에는 철공소 색채와 예술가들의 원색 작업이 강렬한 콘트라스트를 이루면서 특유의 매력을 뽐냈다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원색이 바래면서 또 다른 조화를 이뤄 내고 있다. 문래창작촌은 벌써 문래카페촌이 됐다. 창작촌이 이름을 알리기 날리기 시작하자 홍대 앞과 대학로 등 서울 중심부에서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밀려난 카페와 음식점들이 아파트형 공장으로 이전한 철공소의 빈자리에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명성이 높아지는 만큼 임대료도 오르면서 이제는 또 다른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개성 있는 카페와 음식점 거리는 이웃 블록으로 확장되고 있다. 규모는 다르지만 홍대 앞 문화가 망원시장으로 연남동으로 넓어진 현상과 닮은꼴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이번 투어에서는 문래창작촌의 명성을 다시 한번 실감했지만, 경인공업지대의 시발점으로 문래동 철공소 동네의 성가도 변치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래창작촌의 의미를 퇴락해 가는 공장지대를 예술과 문화가 대체하는 것으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문래동 철공소들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고 우리 산업에서 굳건하게 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문래동 현상’은 이질적으로 보일 뿐 대표적인 2차산업과 대표적인 3차산업의 건강한 공존으로 해석하고 싶다. 2차산업의 중심이었던 구로공단은 3차산업을 추구하는 가산디지털단지로 발 빠르게 성격을 바꿨지만, ‘문래동의 공존’은 훨씬 더 오래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 서동철 문화재위원회 위원사진 김학영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연구위원 ■ 다음 일정제15회 서울풍물시장 ●일시 : 9월 5일(토) 오전 10시 ●신청: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건강이상설’ 아베, 두 달 만에 7시간 병원 검사

    ‘건강이상설’ 아베, 두 달 만에 7시간 병원 검사

    건강 이상설이 돌고 있는 아베 신조(얼굴) 일본 총리가 정기검진을 받은 지 불과 2개월 만에 다시 병원을 찾아 몸에 정말로 문제가 생긴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아베 총리는 17일 오전 10시 30분쯤 도쿄 게이오대학병원에 들어가서 오후 6시쯤 병원에서 나왔다. 병원에 머문 시간은 7시간 30분이었다. 아베 총리는 귀가하면서 기자들의 질문에 “수고했다”고만 말하고 사택으로 들어갔다. 교도통신은 병원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지난 6월 정밀검진 결과에 따른 추가 검사”라고 전했다. 아베 총리는 18일까지 휴가를 낸 상태다. 총리관저 측은 “건강관리를 확실히 하기 위해 여름휴가를 이용해 검진을 받은 것일 뿐”이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으나 2개월 만에 재검사를 받는 것이 흔한 일이 아니어서 다양한 추측을 낳고 있다. 1954년생으로 66세인 아베 총리는 그간 게이오대학병원에서 6개월에 한 차례씩 정밀검진을 받아 왔다. 코로나19 부실 대응 등에 따른 최악의 지지율 하락 속에 야당의 임시국회 개최 요구를 거부하고 기자회견도 회피하고 있는 아베 총리에 대해 최근 여러 경로로 건강 이상설이 제기돼 왔다. 주간지 플래시는 이달 초 “지난 7월 6일 관저 내 집무실에서 아베 총리가 피를 토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고 TBS방송은 지난 13일 아베 총리의 도보 이동시간을 측정해 걸음걸이가 전보다 크게 느려졌다고 전했다. 아베 총리의 지병인 궤양성 대장염이 악화됐을 가능성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이 병은 그가 1차 집권기를 1년 만에 끝내고 2007년 9월 퇴진한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억측이 난무하자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지난 4일 “나는 매일 총리를 만나고 있다. 건강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기자회견을 통해 해명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최근 들어 아베 총리의 안색과 표정이 이전보다 어둡고 초췌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지난 1월 26일부터 6월 20일까지 147일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공무를 본 데 따른 후유증일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한편 일본 내각부는 이날 “지난 4~6월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전기 대비 7.8% 감소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상황이 1년간 계속되는 것을 전제로 계산한 연율 환산치는 -27.8%로, ‘리먼 쇼크’ 글로벌 금융위기 때인 2009년 1분기 -17.8%보다도 10.0% 포인트 낮았다. 관련 통계를 역산할 수 있는 1955년 이후 최악의 마이너스 성장이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근대광고 엿보기] 한강 인도교 개통 축하 광고/손성진 논설고문

    [근대광고 엿보기] 한강 인도교 개통 축하 광고/손성진 논설고문

    요즘도 축하의 뜻을 담은 광고기법이 통용되지만 100년 전에도 건축물 완공 등의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축하 광고가 게재됐다. 1917년 10월 7일 한강 인도교가 개통돼 사람들이 걸어서 한강을 건널 수 있게 됐다. 그날자 매일신보는 4개면 가운데 1면과 2면에 인도교 개통 소식을 전하면서 관련 사진과 조선 치도(治道) 계획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 광고면은 4개면 전체에 개통 축하 광고를 실었다. 물론 철도, 도로, 다리 등 일제의 한반도 인프라 구축은 수탈이 목적이었지만 뉴라이트 학자들의 식민지 근대화론에 이용되고 있기도 하다. 한강에 가설된 최초의 교량은 한강철교로 미국인 모스가 구한말 정부로부터 경인선 철도 부설권을 얻어 1897년 착공했다. 그러나 모스가 자금난에 빠지자 일제가 부설권을 인수해 1900년에 준공했고 1944년까지 3개 선이 완공됐다. 모스는 원래 한강철교에 보행자 도로를 만들 계획을 명시했지만, 부설권을 가로챈 일제는 공사비를 절감한다는 이유로 보도를 만들지 않았다. 총연장이 딱 1㎞(1005m)인 한강 인도교는 준공 당시 현재의 조명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여름밤에 장식 전등을 화려하게 밝혀 산책객들을 불러 모았다고 한다. 그러나 처음 준공됐을 때는 지금보다 훨씬 협소한 다리였다. 1925년 대홍수로 일부가 훼손되기도 했고 자동차의 증가로 교통량이 많이 늘어나자 1935년에 현재와 같은 모습의 다리를 새로 건설했다. 한강 인도교에는 전차 궤도도 부설돼 전차가 서울역에서 용산을 거쳐 한강 남쪽으로 다리를 건너다니게 됐다. 이후 전차 경유지인 노량진과 종점인 영등포 지역이 급격히 도시화됐다. 인도교는 6·25 전쟁 때 철교와 함께 폭파됐으며 1954년에 완전히 복구했다. 1981년에는 4차선이던 인도교를 8차선으로 확장했다. 한강 인도교의 이름은 제1한강교로 바뀌었다가 1984년 한강대교로 개칭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위 광고는 ‘화평당’이 실은 한강 인도교 개통 축하 광고다. 화평당은 ‘동화약방’, ‘제생당’과 더불어 당시 제약업계를 이끌던 업체였다. 광고를 자세히 보면 한강 인도교를 처음 건너는 도초식(渡初式) 행사에서 화평당의 대표 제품인 ‘팔보단’(八寶丹) 간판을 든 사람들이 다리를 떼를 지어 건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삽화를 통해 다리의 생김새를 독자들에게 알려 주는 한편 광고 효과도 노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광고에서는 팔보단 말고도 ‘태양조경환’과 ‘자양환’도 선전하고 있다. 양화점(제화점), 자동차 대여업체, 기생조합, 포목점, 정미소 등의 광고주들도 크고 작은 명함 광고로 지면을 채웠다. sonsj@seoul.co.kr
  • [열린세상] 해방 75주년을 맞이하며/김경민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특별공훈교수

    [열린세상] 해방 75주년을 맞이하며/김경민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특별공훈교수

    일제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지 75주년을 맞이했다. 75년 동안 동북아 관련 국가들은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회고해 보자. 대한민국은 1950년 6·25 전쟁을 치르며 나라 전체가 잿더미가 됐지만, 온 국민이 합심 단결해 세계 10대 무역강국이 됐고 정치 분야는 독재정치를 청산하고 귀중한 민주주의를 이루어 냈다. 미국이 G11 후보국에 거론할 정도니 역사 이래 가장 강성한 나라가 됐다. 북한은 김일성ㆍ김정일의 통치가 끝나고 3대째 세습되는 공산국가이며, 경제적으로는 피폐하지만 핵무기를 개발하고 대륙간탄도탄을 보유할 정도로 위협적인 국가가 돼 있다. 중국은 어떤가? 1949년 마오쩌둥이 오늘날의 공산주의 국가를 설립하고 정치적으로는 안정됐으나,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헨리 키신저의 핑퐁외교로 미중 국교 정상화를 이룬 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경제정책이 성공하며 돈을 엄청나게 벌기 시작해 이제는 미국과 어깨를 겨누는 G2가 됐다.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사력 증강에 국력을 쏟아부어 일본과 한국을 압도하는 군사력을 갖게 됐고, 심지어는 미국도 경계해야 하는 나라로 변화했다. 역사는 지금도 전개되는 과정에 있다. 중국이 오늘날과 같은 경제력을 갖고 미국을 위협할 정도가 됐으니 과연 헨리 키신저의 판단이 옳았는가라는 물음은 먼 훗날의 역사가 말해 줄 것이다. 일본은 어떤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해 미국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평화헌법을 부여받고 비무장 나라가 됐으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1954년 자위대가 발족해 군사력을 또다시 보유하는 국가가 됐다. 군사력을 갖되 외국으로부터 공격을 당했을 경우에만 군사력을 사용할 수 있는 이른바 전수방위(專守防衛) 족쇄에 묶여 있으나, 1998년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이 일본 열도를 넘어 태평양에 낙하하면서 일본 열도가 발칵 뒤집혔고 자위대는 군사력을 급속히 증강할 발판을 마련했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무참히 패배하고 핵폭탄 공격까지 받으면서 수백만명이 죽는 쓰라린 경험을 했기 때문에 과거와 같이 군국주의를 앞세운 전쟁 국가가 되는 것을 국민들은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강력한 군사력 보유를 은근슬쩍 찬성하는 이유는 북한과 중국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일본은 군사용 인공위성도 지구 자원 관측위성이라고 평화적인 이미지를 내세웠다. 그러나 북한 미사일을 계기로 이제는 아예 드러내 놓고 정보 수집 위성 10기 보유를 선언했으며 2025년이면 완성된다. 거기에다 공격형 무기인 항공모함도 2척 보유하기로 선언했으니 실로 동북아 관련 국가들은 치열한 군비경쟁에 돌입해 있는 상태다. 러시아도 냉전체제가 종식되면서 경제력이 취약한 국가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으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집권하고 풍부한 석유와 천연가스를 수출하면서 경제력을 크게 회복했으며, 미국과 대항할 국력을 키우고 있다. 우려되는 건 중국의 시진핑과 러시아의 푸틴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패권주의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지정학적으로 그 틈새에 있는 한국은 미래에 대한 걱정이 커져만 간다. 시진핑과 푸틴은 장기 집권을 하기 때문에 패권적 세력을 증강시키는 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미국은 어떠한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에 미국의 영향력을 증대하는 정책에는 변함이 없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군을 감축하지 않을까 하는 점에서 국가의 고민이 크고, 과도한 방위비 상승 압력으로 한국 정부로서는 안보 부담이 큰 상태다. 크게 보면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국ㆍ미국ㆍ일본이 한 축을 형성하고, 중국ㆍ북한ㆍ러시아가 한 축을 형성해 대립하는 구도인데, 한국과 일본은 과거사 문제로 관계가 최악의 상태이고, 미국은 미국 우선주의로 가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생각으로 3국 간 동맹이 흔들릴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질까봐 우려되는 상황이다. 해방 75주년을 맞은 지금 한국은 해방될 때보다 강성한 국력을 갖게 된 것은 분명하나 동북아의 세력 구도가 변화하고 있는 점을 주시하며 미래를 대비할 필요가 있다. 진정한 의미의 해방은 국력을 더욱 키워야 주변국들이 얕보지 않고 평화와 번영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되새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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