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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보선 전대통령 별세/어제 하오

    ◎지병 악화로 퇴원 직후… 향년 93세 해위 윤보선 전대통령이 18일 하오 8시50분쯤 서울 종로구 안국동 8 자택에서 9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윤 전대통령은 그동안 지병인 당뇨병으로 고생해오다 노환으로 인한 급성심근경색증세까지 겹쳐 지난 3월30일 서울대병원에 입원,치료를 받아왔으나 이날 하오부터 갑자기 혈압이 떨어지며 증세가 악화돼 하오 8시쯤 퇴원,자택으로 옮겨진 직후 곧바로 운명했다. ◎정부와 장례 협의 유족들은 장례절차에 대해 장지는 충남 아산으로 하며 가족장으로 5일장을 치르되 22일이 일요일인 점을 감안,월요일인 23일 상오 9시 고인이 다니던 안동교회에서 영결예배를 치르기로 희망하고 있으나 구체적인 장례절차는 총무처와 협의를 거쳐 19일 확정할 것으로 알려졌다. 해위는 1897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영국 에든버러대를 졸업했다. 일제치하에서는 중국 상해의 대한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냈고 해방직후에는 미 군정청농상국 고문을 거쳐 정부수립이 되면서 초대 서울시장이 되었고 이어 상공부장관으로 영전됐다. 부산정치파동을 계기로 야당에 몸담은 그는 54년 3대민의원선거에서 종로갑구에서 출마,원내에 진출한 이래 4,5대때 잇따라 당선됐으며 6대때는 전국구로 진출했다. 60년 4ㆍ19이후 의원내각제의 민주당 정권출범과 함께 제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5ㆍ16군사혁명으로 이듬해 하야했다. 63년 5대 대통령선거에 민정당 대통령후보로 출마,박정희후보와 싸웠으나 고배를 마셨고 67년 6대 대통령선거때 신민당 후보로 다시 박후보와 한판승부를 겨뤘으나 패했다. 70년대에 들어서는 정치 2선으로 물러났으나 유신체제하에서는 재야의 중심인물로 반정부활동을 적극 펴기도 했다.
  • 5ㆍ16­유신등 헌정 굴곡 한몸에/윤보선 전 대통령의 정치 역정

    ◎군사혁명에 “올 것 왔다” 이듬해 퇴진/대권경쟁 2번 실패… 반 박정희 투쟁 93세의 일기로 타계한 해위 윤보선. 그는 고집의 거목정치인이었다. 그의 일대기는 40년 헌정사의 점철된 굴곡을 그대로 투영해 주고 있다. 이 나라 최후의 구 정치인 1세대의 보루를 지켜온 그는 해방후 손꼽히는 과묵한 선비형 정치가로 입신하다가 조병옥박사를 잃어버린 민주당구파가 그를 보스로 추대하면서부터 무섭도록 고집센 지도자가 되었다. 4ㆍ19혁명후 민주당정권시절 실권은 없지만 국가원수인 대통령의 지위에 오른 그는 5ㆍ16군사혁명을 만나 고독한 몸부림으로 대처하다가 박정희씨와 두차례나 대권경쟁을 벌여 패했고 만년에 이르러서는 반독재의 강기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1961년 5월16일 상오 9시30분 윤대통령은 혁명군지도자 박정희장군과 첫 대좌를 하게되자 그 유명한 『올것이 왔구나』하는 탄식을 지었다. 훗날 해위는 이 대목과 관련,군사쿠데타가 오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온다고 걱정하던 일이 마침내 현실로 나타났구나』하는 탄식조의 말이었다고 해명했다. 그의 생애중 가장 긴 날은 5ㆍ16 새벽부터 17일 밤까지 40여시간이었다. 윤대통령은 매그루더 미8군사령관의 쿠데타군 진압작전의 승인요청에 『적이 집결하고 있는 휴전선을 눈앞에 두고 아군끼리 피를 흘릴 수는 없다』며 거절한 것은 유명한 얘기다. 그는 1897년 8월26일 충남 아산군 음봉면 신정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매우 부유했으며 그의 조부는 육군부장으로서 삼남도포사를 지내는등 무골의 집안이었다. 그는 조부를 따라 서울로 와 소학교를 마친 후 17살때 일본으로 건너가 현 경응대학 전신 중학부에 들어갔다. 20살때 몽양 여운형을 따라 상해로 가서 독립운동의 실황을 알리는 진단보를 주보로 발간하기도 했다. 22살때 영국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대로 유학을 가 3년동안 공부를 하면서 영국과 영국국민성을 배웠다. 그는 언제나 단추 3개가 달린 전통적인 영국식 신사복을 착용하기를 즐겨했는데 이같은 격식도 이때 몸에 익힌 것이라고 한다. 에든버러대를 졸업한 후에도 수년간을 유럽대륙등을 여행하며 세계정세를 살펴본 뒤 35살되던 해인 1932년 여름 16년만에 고국에 돌아왔으며 이때부터 침묵의 칩거생활을 시작했다. 1945년 8ㆍ15해방이 되자 아놀드소장이 군정장관으로 있는 미군정청 농상국고문으로 일했다. 48년 제헌국회의 5ㆍ10선거에 고향인 아산에서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고 이승만박사가 국회의 초대의장으로 당선되자 국회의장 비서실장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정부수립이 되고 이승만대통령이 조각을 하면서 서울시장에 그를 임명했는데 이는 그에 대한 이대통령의 각별한 신뢰감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는 일찍이 19세때 치렀던 민씨와의 혼인은 처음부터 결합이 되지 않았고 민씨에게 딸들이 있었으나 모두 출가시켰기 때문에 서울시장이 된 그로서는 매우 외로웠다. 그는 주위의 권유에 따라 지금의 공덕귀여사(당시 한국여자신학교 교수)와 연분을 맺었다. 서울시장을 6개월여 맡은 그는 다시 임영신장관 후임으로 상공장관으로 전임된다. 6ㆍ25동란중 국민방위군사건이 터지자 당시 대한적십자사 총재였던 그는 이대통령에게 그가 본 처참한 정경을 보고했으나 이대통령은 귀담아 듣지 않고 오히려 역정을 내자 이때부터 이박사와는 인연을 끊고 야당운동에 적극 나섰다. 그는 부산 정치파동을 계기로 야당인 민국당(한민당 후신)에 몸을 담고 54년 5월 제3대 국회의원선거에 입후보하였다. 그는 종로갑구에서 박순천ㆍ주휘한ㆍ장후영ㆍ유석현씨 등 쟁쟁한 인물과 한판 승부를 겨뤄 윤씨이외의 12명 입후보자들의 득표수를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많은 표를 얻어 압승했다. 56년 5월 정ㆍ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이자 대통령후보였던 신익희씨가 급서하자 민주당은 당을 개편,조병옥박사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했고 이때 윤보선씨는 당내 구파이면서도 신파의 지지를 얻어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59년 가을 다음해에 있을 정ㆍ부통령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은 후보자지명을 위한 전당대회를 개최,대통령후보에 조병옥박사,부통령후보와 대표최고위원에 장면박사를 선출했고 해위는 신파의 곽상훈ㆍ박순천씨와 함께 최고위원에 선출됐다. 그는 구파보스인 조병옥박사가 대통령선거 한달을 앞두고타계하자 조박사의 정치적 유산을 이어받으면서 지금까지의 「과묵한 영국신사」에서 「행동하는 투사」로 변신하게 된다. 4ㆍ19학생의거와 이승만정권의 몰락으로 4대 민의원선거에서 민주당은 압승을 했고 신ㆍ구파간의 불꽃튀는 협상끝에 그는 60년 8월12일 민ㆍ참의원 양원합동회의에서 제2공화국의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는 국무총리지명을 하면서 신파의 장면씨 대신에 자신과 같은 구파이 김도연씨를 지명했으나 신파의 벌떼같은 반발로 과반수에서 3표미달로 인준안이 부결되자 하는 수 없이 2차에 장면씨를 지명했다. 그는 5ㆍ16군사혁명 사흘뒤 대통령직 사임을 결심,하야성명까지 발표했으나 이를 번의,이듬해 물러났다. 그는 63년 10월 5대 대통령선거에 민정당후보로 공화당의 박정희후보와 맞서 15만여표로 고배를 마셨으나 스스로를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면서 박정권과의 극한대결에 앞장섰다. 박정권이 65년 타결한 한일협정을 매국이라고 단정,흡사 「아파치족의 추장」처럼 싸웠고 같은해 한일협정 준비파동이 절정에 달할 무렵 의원직 사퇴에 미온적인 민중당 온건파와 손을 끊고 탈당,의원직을 사퇴했다. 67년 4월 6대 대통령선거에서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다시 박정희후보와 숙명의 대결을 벌였으나 1백10여만표차로 패배했다. 그후 그는 정치2선으로 물러났으며 박정권의 유신체제아래서 재야의 거두로서 박정권의 비정을 공격했다. 10ㆍ26으로 박정권이 붕괴되고 5공화국이 출범하자 그는 전직대통령의 위치에서 전두환대통령에게 이따금 조언을 하는등 박정권때와는 다른 우호적 태도를 보였고 노태우대통령의 6공정부에 대해서도 같은 자세를 취해왔다. 해위,그는 60년대 한국정치사에서 대여 극한투쟁의 화신이었다. 굳은 신념에 불퇴전의 강경노선을 견지한 그는 박정권과의 투쟁 당시 이렇게 말했다. 『정책대결이 정당정치의 원형임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나 우리네와 같은 군사독재와 부정부패와 정보정치아래서는 무기력한 대안제시와 무원칙한 타협을 앞세워서야 야당의 사명이 말살되고 만다』 그는 훗날 또 이렇게 말했다. 『싸우는 게 최선이 아니고 싸우는 게 유일한방법일 때 싸워야 한다,정권을 무너뜨리는 게 민주투쟁은 아니다』
  • “날씨와 30년” 박용대 중앙기상대장(안녕하십니까)

    ◎“요즘 태풍진로 종잡을 수 없어요”/기상이변 잦아 예측 빗나가기 일쑤/산업 발전따라 「예보수요」 늘어나/장비개선 덕분에 정확성 향상… 올엔 물난리 없을 듯 【대담:장정행사회부장】 요즘들어 날씨가 확실히 이상하다. 장마가 너무 일찍 시작한다 했더니 전국을 한증막처럼 달군 무더위가 며칠째 계속된다. 비도 유난히 많이 온다. 세계가 겪고 있는 기상이변이 틀림없는 것 같다. 31년동안 기상대를 지키며 날씨와 함께 생활해 온 「날씨박사」 박용대중앙기상대장(58)을 만나 도대체 날씨가 왜 이런지를 물어보았다. ­요즘 날씨가 왜 이렇게 이상합니까. 『왜 이상한지는 저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만 올들어 정상이 아닌 것만은 확실합니다. 우선 지난 겨울의 평균 기온이 예년보다 높았고 장마가 6∼12일 가량 빨리 시작됐으며 강수량도 예년의 두배입니다. 이같은 현상은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이웃 일본의 경우 매년 6월이면 어김없이 찾아왔던 장마가 올해는 없어 식수가 모자라는 기현상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우리나라보다 비가 적게오던 이북이 올여름에는 우리보다 더 많이 오고 있습니다. 아직 본격적인 철은 아닙니다만 태풍도 올해는 영양부족에 걸렸는지 예년같은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채 소멸되고 진로도 엉뚱하기 일쑵니다. 오펠리아가 그랬고 이번의 로빈도 비만 잔뜩 뿌리고 갔습니다. 현재까지 많은 학자들은 이같은 기상이변의 원인으로 엘니뇨현상이니 태양흑점극대기니 오존층파괴니 하는 여러가지 설을 내놓고 있으나 확실히 이것이다고 짚지는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러다가 올여름 물난리는 물론 80년에 경험했던 극심한 냉해를 올해에도 겪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나오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날씨는 어떻겠습니까. 『장마는 이달말쯤 끝날 것 같습니다. 20일쯤 한 두차례 집중호우가 걱정되는 것외에 큰 물난리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로서 가장 걱정되는 것은 올들어 비가 자주 내리고 흐린날이 많아 일조량이 예년의 80%수준 밖에 안돼 가을철 농작물에 피해를 주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마가 끝나면 일조량도 점차 많아져 영동등 일부지역을 제외하고 80년과 같은 전국적인 냉해는 없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습니다』 ○국민들 관심도 높아져 ­최근 수년사이 날씨가 농사는 물론 레저ㆍ산업 등 국민생활 전반에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관심들도 무척 높아졌습니다. 『산업 특히 반도체ㆍ전자등 첨단산업에 날씨가 끼치는 영향은 지대합니다. 따라서 기상수요도 크게 늘어나는 것은 물론 단순히 비가 온다,안온다는 예보에서 몇시에 얼마나 올 것인가로 보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것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날씨에 대한 일반국민들의 관심도 대단해 자동예보 전화가 불이 날 정도이고 어떡하다 주말에 예보라도 틀릴 때는 기상대 때문에 주말 스케줄을 망쳤다는 항의전화가 빗발칩니다. 물론 정확한 예보로 모든 국민들의 다양한 수요에 응하려 최선의 노력을 다 하고 있습니다만 우리가 가장 주력하는 것은 아무래도 재해방지 쪽입니다. 요즘에는 기상대뿐 아니라 내무부 건설부등 관계부처들도 방재에 전력을 다해 웬만큼 큰 비가 오거나 태풍이 불어도 피해는 많이내지않게 되어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기상이변이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라면 이에 대처하는 공동노력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물론입니다. 세계기상회의등을 중심으로 꾸준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연구결과에 의해 한가지 확실해진 것은 기온의 상승입니다. 21세기까지 대기의 온도가 평균 3도정도 높아지고 이에따라 해수면도 높아질 것이라는 결론입니다. 이같은 전망에 대처하기 위해 오는 8월 스톡홀름에서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회의(IPCC)」가 열리며 이 회의에서 결정되는 대책을 추진하기 위한 각료급 회의도 잇따라 열릴 예정입니다. 기상및 환경문제에 대한 각국의 입장을 살펴보면 여러나라가 밀집해 있고 산업화도 일찍이 이루어졌던 유럽 각국이 아무래도 심각한 듯 굉장히 서두르는 편이고 미국은 아직 여유가 있는 듯 과학적으로 좀더 규명을 한 뒤 대책을 추진하자는 입장입니다. 일본은 이 사이에서 눈치를 보는 입장인 것 같고 개도국들은 산업화에 여러가지 제한이 가해질 수밖에없기 때문에 별로 달가워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옛날엔 경험으로 맞춰 ­아직도 틀리는 경우가 많긴 합니다만 우리 일기예보가 몇년전에 비해서는 상당히 잘 맞는다는 평인 것 같습니다. 역시 그동안 계속 개선해 온 각종 현대시설 덕분이겠죠. 『사실 제가 처음 기상대에 들어 올 때만 해도 장비하고는 거의 없는 것은 물론 바로 이웃인 일본이나 중국,심지어 이북의 기상상태가 어떤지도 모른 채 우리하늘만 쳐다보면서 경험으로 적당히 맞히었습니다. 그야말로 예측을 했던 셈이죠. 신경통환자나 개구리들이 기상대보다 더 잘 맞힌다는 말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지난 84년부터 차관사업으로 추진해 온 기상장비현대화계획과 정부의 지속적인 투자로 장비나 시설면에서 선진국들과 비교해도 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위성에서 찍은 구름사진을 그때 그때 받아보고 전국 주요 지점에 설치돼 있는 기상관측레이다가 필요한 정보를 수집해주면 전국 측우소에서 보내온 자료와 함께 컴퓨터가 모두 처리해 예보자료를 내놓습니다. 예보관은 이 자료들을 과학적으로 분석만 하면 됩니다. 이제 앞으로 유능한 인력을 길러 보강만 하면 선진수준의 정확한 예보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비와 인력이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갑자기 변하는 기상이나 극히 일부지역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어쩔수 없이 놓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치 큰 그물로 고기를 잡을 때 송사리는 빠져나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은 기상대요원들의 부단한 노력과 그 지역 주민들의 재빠른 신고등으로 불의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재해 예방에도 큰 효과 ­해마다 홍수 태풍등 자연재해로 입은 피해가 인명을 제외하더라도 재산상으로만도 수백억원에 이르고 있는데 예보업무에 좀 더 투자를 하여 정확한 예보로 피해를 줄여가는 것이 훨씬 경제적일 것 같은데. 『확실한 통계는 없습니다만 예보업무에 대한 투자는 대략 20배의 재해예방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이 세계기상 기구등의 계산입니다』 ­날씨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까. 『54년 연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교관이나 할까하고 공군에 입대했습니다. 당시는 천문기상학과가 없을 때라 공군에서는 교관보다 기상이 더 중요하다며 날더러 기상장교를 하라는 바람에 그렇게 돼버렸습니다. 맡아보니 기상분야가 대단히 중요한데 비해 거의 미개척분야라 물리학보다 더 마음이 끌렸습니다. 5년동안 근무하고 59년 제대를 하고 나왔더니 마침 연세대 은사였던 이원철박사가 일제시대부터 있었던 서울관측소를 중앙관상대로 확장해 초대관장으로 있으면서 저를 오라고 해 기상대와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지내다보니 거의 평생을 기상대에서 보내게 됐습니다만 후회는 없습니다. 기상변화의 오묘함을 겪을수록 과학장비가 아무리 개발되더라도 완전하게 변화를 예측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며 경외감마저 느끼고 있습니다』 ○평생 해수욕 한번 못가 ­평생을 날씨와 함께 지내다보면 재미있는 일도 많았을텐데. 『재미있는 일보다는 혼났던 일만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보가 늦거나 미처 하지못해 많은 피해가 났을 때 우리 예보만 믿고 주말에 소풍을 갔던 어린 유치원생이나 국민학생들이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피해 고궁의 처마밑에 오돌오돌 떨며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이 신문에라도 났을 때는 정말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미안함을 느낍니다. 그럴 때마다 다시는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더욱 노력하는 걸로 속죄를 하고 있습니다』 박대장은 얼마전 아들을 결혼시켰다. 토요일로 날짜를 받았으나 예식장이 만원이라 하는 수 없이 금요일로 하루 앞당겼다. 날짜를 잡고보니 날씨가 어떻게 될지 은근히 걱정이 됐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명색이 기상대장이라 만약 그날 비라도 오면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기상대장이 자기 아들 결혼식날의 날씨도 못맞힌다고 우습게 볼 것 같았다. 장마중이라 예보는 계속 비가 내리는 것으로 돼 있었으나 하늘이 박대장의 고민을 알아주었든지 결혼식날은 날씨가 활짝갰다. 과연 기상대장이 다르다는 주위의 부러움을 들을 때마다 예식장에 고마움을 느낀다고 한다. ­일년 열두달이 항상 바쁘고 긴장되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바쁜 때는 언제입니까. 『역시 여름입니다. 9월 하순쯤되어 태풍이물러가야만 겨우 한숨을 돌립니다. 요즘은 차량이 많이 늘어 겨울에도 한밤중에 갑자기 눈이 내릴까봐 신경을 무척 쓰고 있습니다』 자나깨나 날씨걱정만 하느라고 평생 해수욕 한번 가보지 못했다는 박대장은 찾아준 선물이라며 『올여름 휴가는 이달 하순이나 8월초에 가는 것이 가장 좋다』고 넌지시 일러준다.
  • 서독 「아디다스」사 불에 팔린다(특파원수첩)

    ◎불 타피재단의 주식 인수 안팎/「나이키」등에 추격당해 연4백억원 적자/“독일의 명성”이 3천7백억원에 넘어가/불 회사의 “대도박”… 외형 15배 큰 기업 흡수 서독의 간판상표중의 하나인 「아디다스」가 프랑스에 팔린다. 사들인 측은 프랑스의 베르나르 타피재단(BTF). 이 재단의 베르나르 타피회장은 지난 7일 아디다스 주식의 80%를 인수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세계 최대의 스포츠용품 메이커인 아디다스의 거래가격은 공식확인되지는 않고 있으나 대략 30억프랑(한화 3천7백억원상당)정도가 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벤츠자동차와 함께 고급스럽고 견고한 「독일제」의 이미지를 대표해오던 아디다스가 소리 소문없이 프랑스에 넘어가게 된데 대해 독일사람들은 놀라움과 아쉬움을 금치 못하고 있으며 프랑스쪽에서는 「타피의 대도박」으로 표현하면서 추이를 흥미있게 지켜보고 있다. 이번 국제거래와 관련한 관심의 초점은 타피재단이 외형거래로 보아 자기 몸집의 열다섯배나 되는 기업을 인수해 과연 제대로 운영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또한엄청난 인수자금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에 쏠리고 있다. 신발 추리닝 경기복 각종볼등 스포츠와 동의어로 사용될 정도로 유명한 빗금3개의 아디다스제품은 전세계 1백60개국에 수출되고 있으며 시장 점유율은 독일에서 23% 미국 20% 프랑스 13%선이다. 코크 스포르티브 아레나 포니에리마등의 상표도 모두 아디다스제품들이다. 연간 외형거래액은 1백70억프랑 안팎. 10억프랑 남짓한 베르나르 타피재단의 15배가 넘는 규모이다. 아디다스에 눈독을 들여온 타피는 지난해 9월부터 아디다스의 모체인 서독의 다슬러 그룹측과 비밀접촉을 시작,9개월동안의 협상끝에 인수ㆍ인계가 결판난것이다. 타피는 아디다스 인수결정 사실을 7일 하오 이탈리아 로마에서 공식 발표했다. 이날은 바로 90이탈리아 월드컵 결승전이 열리기 바로 전날. 서독팀의 우승이 점쳐지던 상황에서 월드컵 결승전의 분위기를 아디다스 인수에 따른 선전에 적절히 이용하겠다는 치밀한 계산아래 한 택일이었다. 예상대로 서독팀은 아르헨티나를 누르고 우승했으며 그들이 착용한 유니폼과축구화의 아디다스상표는 전날의 주인교체 사실발표에 힘입어 더욱 시선을 끌었다. 광고효과 1백%였다. 타피는 인수사실 발표 자리에 안토니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ㆍ주앙 아벨란제 국제축구연맹회장등을 배석시켰다. 이 역시 국제적 신용과 선전을 겨냥한 조치였다. 올해 47세인 베르나르 타피는 마르세유출신 현역 국회의원이기도 하지만 정치가로서보다는 프랑스 프로축구단의 하나인 올림픽 마르세이예즈팀의 구단주로 또는 모험을 마다 않는 전문 경영인으로 더 유명하다. 타피는 침체의 늪에 빠져 있던 마르세이예즈팀을 맡아 지난해 우승팀으로 키웠으며 몰락해가거나 경영난으로 도산직전에 있는 기업을 인수,흑자경영으로 돌려놓는 비범한 수완을 발휘해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베르나르 타피재단은 아직 재벌그룹에 속할 정도로 대단한 규모는 아니지만 스포츠용품제조업체ㆍ가정용품제조업체ㆍ식품제조업체등 6개 업체를 거느린 알찬 기업이다. 89년 재단의 총 외형거래액은 10억5백만프랑으로 2천7백만프랑의 흑자를 냈으며 이는 전년도보다 54% 늘어난 수치이다. 타피가 사들이기로 한 아디다스는 1948년 아디 다슬러가 창업,54년 아디다스의 삼색선이 새겨진 신발ㆍ유니폼을 착용한 독일축구팀이 월드컵에서 첫우승을 하면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뒤부터는 독일 선수들은 으레 아디다스 상표를 부착하고 세계를 누볐으며 거의 모든 종목의 국제경기에 막강한 스폰서로 등장,이번 이탈리아월드컵에서도 24개 출전팀 가운데 15개팀이 아디다스 마크를 사용했다. 제시 오웬스,제러드 뮐러,모하메드 알리가 제왕의 자리에 오르는 순간 그들은 예외없이 아디다스신발을 신고 있었다. 이같은 세계 굴지의 스포츠용품메이커인수 사실을 발표하면서 타피는 『내 생애에 가장 멋진 날』이라면서 올해 8천만 프랑의 수익을 올리고 92년에는 10억프랑의 흑자를 내겠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관계자들의 시각은 기대보다는 염려쪽으로 쏠리고 있는게 사실이다. 야망이 너무 성급했다는 지적도 있고 아주 위험한 게임이라는 분석도 따르고 있다. 그 첫번째 장애요인은 아디다스가 세계 최고임은 분명하지만 번창하고 있는 기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아디다스는 자본금의 3배에 이르는 24억프랑의 부채를 안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3억5천만프랑의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나이키 리복 푸마등에 추격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또 1만1백50명에 이르는 종업원중 2천5백명 정도가 과잉인원으로 경영쇄신을 위해서는 감원이 불가피하나 그에 따른 노사문제 등이 불씨로 잠복하고 있다. 게다가 아디다스의 모체인 다슬러 그룹 자체가 족벌체제로 구성되어 있어 기업의 현대화ㆍ국제화에 커다란 장애요소로 지적되고 있으며 유산상속권자들의 분쟁도 정리되지 않고 있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타피가 엄청난 인수자금을 어디서 끌어대느냐 하는 점이다. 프랑스증권당국은 지난 9일부터 타피 그룹 계열의 주식거래를 잠정정지시켰다. 「보고누락」이 정지 이유였으나 전망이 불투명한 상태에서 빚어질 증시 혼란을 막기 위한 조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같은 문제점들에 대해 당사자인 타피는 『위험요소가 있는 거래이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인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그의 새로운 도박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관심거리다.
  • 세종대 족벌운영 44년/설립자 주영하ㆍ최옥자씨 부부는 누구

    ◎번갈아 학장 취임… 아들ㆍ딸 요직에/운수업으로 번돈 투자,호텔도 경영 세종대사태가 재학생의 무더기유급이라는 파국을 맞으면서 이 대학의 실권자인 주영하재단이사장(78)이 11일 전격적으로 사표를 냈다. 이로써 지난2일 주이사장의 부인 최옥자씨(71)가 명예총장직과 재단이사직에서 사퇴한뒤 꼭 10일만에 세종대의 사실상 실권자들이 모두 세종대와 관련된 공식적인 자리에서 떠나게 됐다. 대양학원의 전신으로 지난46년 설립된 서울여자학원의 재단이사장직과 부이사장직을 함께 맡아온 이래 44년만에 타의에 의해 학교재단과 처음으로 인연을 끊게 된것이다. 이들은 46년 서울여자학원을 설립,다음해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를 세우고 54년에는 수도여자사범대학으로 교명을 바꾼뒤 78년 남녀공학인 현재의 세종대로 발전시키기까지 학교주인으로 운영을 주도해왔다.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 초대학장에 주씨가 취임한 이후 80년까지 5차례에 걸쳐 부부가 학장직을 번갈아 맡아온 것만 봐도 사정을 짐작케 한다. 주씨는 1912년 함남 단천에서 태어나 연희전문문과를 졸업했다. 그후 최씨와 결혼한뒤 한교를 세웠으며 그동안에 운수사업과 농장경영 등을 통해 모은 재산으로 57년 현재 학교의 위치인 구황실소유의 군자동 교지를 매입,학교를 이곳으로 옮겼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계자들은 사실상 학교 를 이끌어 온 사람은 부인 최씨라고 말하고 있다. 최씨는 1918년 강릉에서 태어나 42년에 일본 데이고쿠(제국)여의전을 졸업했고 61년 의학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최씨는 또 독실한 기독교신자로 67년 여성크리스천클럽회장직을 지내기도 했으며 지난 80년부터 군자동 캠퍼스옆 군자교회인 담임목사를 맡고 있다. 이들 부부가 학교외에 갖고 있는 법인계열기업은 5개. 서울 세종호텔을 비롯,춘천세종호텔ㆍ대양농장ㆍ한국종합산업ㆍ세종투자개발 등이다. 그리고 법인아래 세종대외에도 세종고교와 대양유치원 등 2개의 교육기관을 갖고 있다. 이 가운데 학교법인 부분은 맏아들 명건씨에게,기업운영은 둘째아들 장건씨에게 맡겨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명건씨는 69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대 경제학과를 졸업,70년부터 5년동안 공군사관학교에서 교수생활을 하다 78년 세종대 경영대학 원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88년 학생들로부터 족벌체제의 표본이라는 비난을 받자 경영대학원장직을 사퇴했다. 특히 명건씨는 자신의 학교 동창중에서 우수한 인재들을 세종대교수로 영입하는 등 「자기사람」을 많이 만들려고 노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현재 학교에는 딸 경란씨가 교육학과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물론 족벌체제에 따른 재단의 전횡이라는 주장도 일리는 있으나 오늘의 세종대로의 발전이 이들 부부에 의해 이뤄진 것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도 드물다. 이처럼 『평생을 바쳤다』는 소유자들의 기득권 주장과 장기간 카리스마적인 족벌체제에 따른 부작용의 척결을 요구하는 학생들간의 충돌이 증폭되면서 이번 사태를 촉발시켰다는데 지배적인 여론이다.
  • 「아시아에서의 미의 역할」 그레그대사 관훈클럽 연설

    ◎“한반도 평화통일이 미 정책의 목표”/「공산남침」막아 한ㆍ일 경제성장 부축/45년간의 협력이 아태발전 디딤돌/때로는 성공,때로는 실패했지만 값진 민주체제 유지 도널드 P 그레그 주한미대사는 27일 관훈클럽 초청토론회에서 「한국ㆍ베트남 그리고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역할」이라는 연설을 했다. 다음은 그레그대사의 연설 요지이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미국은 과연 한국에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흔히 듣는다. 40년전 미국인들도 「한국은 과연 미국에 무엇인가」라고 자문했었다. 우리는 냉전에서 가장 위급한 시점에서 그 물음에 결단성있게 응답했다. 자유정부제도를 수립하는 한국민의 권리보전을 돕는 것이 한미양국,나아가 세계인의 최선의 이익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결코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베트남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을 갖지 못한채 회의를 품고 있다. 「베트남」이 미국에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수많은 글들이 발표됐으나 아직도 해답은 찾아지지 않았다. 나는 그 해답을 미국의 자기민족중심적인 시각이 아니라 아시아의 배경에서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때 시작된 사건들의 흐름의 일부라는 차원에서 찾고자 한다. 동남아에서 미국이 수행해 온 역할을 더불어 검토함으로써 한국인들은 미국의 이상과 희망이 끝까지 추구하는 바를 폭넓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미국인과 미국의 정책을 이해하고 한미양국관계를 효과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2차대전후 미국은 태평양 지역에서 맨 먼저 그 에너지와 주의를 일본으로 돌렸다. 미국의 복구계획과 그들의 비범한 에너지를 바탕으로 일본는 예상을 넘는 성공을 거두었다. 1950년 6월 북한군이 남침을 했다. 미국은 즉각 대응했다. 한반도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세가지 일을 이룩해 놓았다. 첫째 자유남한을 보전한 일이다. 한국은 꾸준히 참여민주주의를 지향하며 인상적인 경제성장의 성과를 거두었다. 둘째로 일본의 계속적인 재건이 보장됐다. 한국전쟁으로 일본산업은 활력을 얻었다. 한반도가 공산주의 지배하에 통일됐다면 일본의 발전에 심대한 부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김일성지배하에 통일된 한반도는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일본으로 하여금 완전무장을 갖추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전쟁은 북한의 공산주의를 밖으로 뻗어나오지 못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년전 공동으로 치른 희생들이 오해받거나 왕왕 고의적으로 그릇되게 해석돼왔다. 하지만 이제 한국정부가 북한과뜻있는 대화를 갖고자하는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오해의 공허성이 노출되고 있다.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이 미국정책의 목표이며 이것이 이뤄진다면 40년동안의 노력이 절정에 이를 것이다. 2차대전후 동남아시아도 폭력사태로 고통받아 왔다. 인도네시아는 1945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키 위해 항쟁했었으며 65년에는 공산당의 쿠데타로 거의 넘어갈 뻔했다. 필리핀에는 1946년 「후크」단의 반란이 있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공산반도들이 10년이나 소란을 피웠다. 베트남에서는 식민통치를 재확립하려는 프랑스의 노력이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끝났으나 월맹측의 끈덕진 통일열망이 불안한 정세를 조성하고 있었다. 1965년 최초의 미군부대가 베트남에 투입됐을때 동남아시아는다루기 힘들고 장래성 없는 지역이었다. 또한 중국은 당시 마르크스주의자 주도의 세계 혁명을 공공연하게 촉구한 임표가 강력한 지도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미국의 건설적인 정책의 결과로 아세안국가들은 결속되고 자신감 넘치는 호황지역이 됐으며 75년 베트남 패망,78년 공산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등을 다룰 태세를 갖추었다. 반면 베트남은 세계 최빈국의 하나이다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3개 주요한 개입 즉 일본의 부흥,한국의 수호,베트남에서의 공산주의 팽창 저지등을 아시아인들은 충분히 이용했다. 미국은 베트남전 패배를 슬퍼하고 있지만 아시아인들은 이득을 보게 된 것이다. 1945년 이래 태평양 지역에서 아시아인들과 미국의 상호노력은 때로는 성공을 때로는 실패를 기록했지만 아시아인들의 집단적인 노력덕택으로 동남아는 앞날이 밝고 생기있는 지역으로 떠올랐다.
  • 재미작가 김은국씨의 「민족사적 6ㆍ25론」

    ◎한민족,자의건 타의건 「자유로운 삶의 길」로/“살상ㆍ폐허ㆍ굶주림” 고정관념 벗어날때/개개인의 체험 역사적 맥락서 조망해야/반억압 선택은 바로 「인간해방의 길」/이제야 변혁하는 동구를 보니 큰 대가 치렀지만 값진 경험/서울신문 6ㆍ25 40주 특집 6ㆍ25니 8ㆍ15니 그러한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어마어마한 뜻을 갖고 있는 역사적인 날이 찾아올 때마다 느끼는 것들 중의 하나이지만 우리는 참으로 쓸데없이 거창하고 모호한 말을 즐겨쓰는 민족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지 궁금하기도 하다. 한문을 토대로 한 우리의 언어의 덕분인지 아니면 우리 민족에 개인적이든 공동체적이든 세상의 경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심리적인 특이한 태도가 있어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흔히 겉잡을 수 없는 허황한 상투용어로 한마디하고 넘어가 버리는 버릇이 있다. 8ㆍ15가 오면 언제나 「과거 36년간 혹독한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로 시작하고 끝나고 6ㆍ25가 오면 으레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시작하여 「조국분단의 쓰라림」 등으로 끝난다. 상투용어란 것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써먹어 오다보니 누구나가 다 이해할 수 있는 말처럼 그럴듯하게 들리는 것이지만 따져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그러니까 한번쯤은 다른 사람들이 쓰는 상투용어를 빌려 쓰지 말고 자기의 말로써 인생의 경험을 이해하려고 애써 볼 만하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을 아는 것 같으면서도 모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요사이 한국에서 흔히 듣는 말이지만 「6ㆍ25를 모르는 세대」라는 표현이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대개는 「6ㆍ25를 모르는 세대」가 이렇고 저렇고 할때 풍기는 뜻은­그런 표현을 쓰고 사람들에게서 오는­그 세대가 좀 한심하다는 것이다. 그 세대가 한심한건 말건 그것은 둘째로 치고 우선 그러면 그 표현이 내포하는 즉 「6ㆍ25를 아는 세대」는 과연 6ㆍ25를 얼마나 어떻게 알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인생과 역사의 결합 누가 시작한 진담­농담인지는 몰라도 어린애들(물론 6ㆍ25를 모르는)에게 6ㆍ25때 얼마다 먹을 것도 없고 고생했었던가 하는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그 애들이 「그럼 왜 라면이라도끓여먹지 않았냐」하더라고… 원 그런 어처구니 없는 한심한 것들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6ㆍ25를 아는 세대」가 6ㆍ25때는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고 피란만 다녔다는 식으로 「고생」했다고 말을 시작하면 어린애들은 역시 그런 식으로 반문을 할 것이 뻔하다. 고생했다,굶었다,헐벗었었다,많이 죽었다,도시는 폐허가 됐었다,가족이 흐트러졌다­물론 6ㆍ25의 경험속에는 그런 것들이 다 들어간다. 6ㆍ25라는 것이 빚어낸 현상이며 결과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6ㆍ25를 참으로 설명해 주지도 않고 해줄 수도 없다. 경험이란 것은 왜 그 경험이 있게 되고 그 경험이 나에게 무엇을 주었는가를 알지 못하면 그 경험의 참 뜻을 이해할 수 없지 않을까. 그러니 한편으로는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공동체가 쓰는 상투용어로,또 한편으로는 「고생했다」는 개인이 쓰는 역시 상투용어로만은 6ㆍ25와 같은 어마어마한 민족공동체적 개인적인 경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힘들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6ㆍ25를 체험한 세대에게나 6ㆍ25를 모르는 세대에게나 마찬가지의 문제라고 본다. 이러한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역사관,그 역사관과 개인을 연결시켜주는 개인의 인생관­나는 이렇게 살고 싶다하는­가치관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할 때 나에게는 6ㆍ25는 「선택」의 경험이라고 여겨진다. 그 「선택」에는 두가지의 선택이 있었다고 본다. 하나는 개인적인 한가지 한가지의 「작은 선택」들이고 또하나는 커다란 역사적인,나아가서는 철학적인 「커다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커다란 역사적인 철학적인 「선택」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중에 온 것이다. 우선 「작은」 선택들이 모이고 쌓이고 하다 좀더 철이 들고 배우고 사색하게 되면서 그 개인과 역사를 연결시켜 주는­인생관과 역사관의 결합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고향이 이북이어서 8ㆍ15를 이북땅에서 맞았다. 그 덕분에 남한으로 넘어오기 전 3년여를 북한식 공산주의체제 밑의 생활을 경험하였다. 그러한 경험에 바탕을 둔 「작은 선택」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이 글에서는 내게 중요한몇개만을 들어보겠다. 첫째로 생각되는 것은 하나하나의 개인의 특이한 「작은 역사」를 무시하고 말살시키려는 주의와 사상을 거부하고 그것에 반항하는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의 공산당 권력체제가 주장하고 실행한 소위 계급투쟁으로 「소지주 계급」의 낙인이 찍힌 우리는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고향에서 추방을 당했다. 그때의 우리의 재산이란 한때 가난했던 조부모님이 일하고 저축하여 쌓았던 것이다.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을 바라고­본인들과 후손의­노력해온 그들의 구체적인 「작은 역사」는 「계급투쟁」이라는 추상적인 커다란 주의ㆍ사상으로부터 아무런 이해와 「용서」를 받지 못하였다. 그 경험은 개개인의 작은 역사를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가치관을 나에게 심어주었고 그것을 말살시키려는 주의ㆍ사상ㆍ정치체제에는 반항해야 한다는 정치관을 갖게 했다. 또한 그러한 소위 「계급투쟁」의 발단,심리적 원시점은 인간의 가장 천한 본능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의 것을 탐내고 남을 시기하는 원시적인 본능을 부추겨서 『잘산다』 『못산다』의 개념과 정의를 오로지 물질적인 차원에만 두는 가엾은 인생의 가치관을 보았고 나는 그러지 않겠다는 「선택」을 했다. 나아가서는 그러한 추한 인간의 본능을 『그럴듯한』 정치이념과 주의로 장식하여 인간의 증오심을 정의감으로 가장시켜 그것을 이용하여 권력을 잡으려는 어떠한 사상에는 반항해야 한다는 「선택」을 했다. 목사이셨던 외조부께서 일본통치하에서도 억압을 당하시고 북한공산체제 밑에서도 억압을 당하시는 것을 경험하고 「나의 외조부님을 억압하는 자들」에게의 반항의 「선택」에서 시작하여 특정한 종교를 믿지 않는 입장이면서도 「종교의 자유」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정치이념ㆍ주의사상은 반대해야 한다는 「선택」을 하였다. ○한국은 운좋은 나라 그렇게 하여 내가 6ㆍ25가 일어나기 얼마전 남한으로 넘어 왔을 때는 이미 수많은 작은 「선택」들이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6ㆍ25가 왔을 때 그 전쟁은 나에게는 혹독하게 말한다면 죽느냐 사느냐의 선택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나」를 없애버리려는 권력에는 방항ㆍ대항해야 하는 선택밖에는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 대한민국이 더 좋아서 더 귀중해서 대한민국을 사수하기 위해서 참전한 것 같지는 않다. 또 「동족상잔의 비극」이니 어쩌니 하는 감상을 품고 전쟁을 겪은 것 같지도 않다. 우선 「나」라는 하나의 인간의 「자신」이 살아 남아야겠다는 것 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개인의 개성,특이한 작은 역사,개인의 존엄성­이러한 것들이 보존되고 살아 남아야겠다는 신념과 행동의 선택에서 이윽고 자유에의 「선택」이 있게 됐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인생관 가치관이 그 당시에는 지극히 구체적인 것이었으면서도 이념적으로는 뚜렷한 것은 아니었다고 하겠지만 그것이 훗날에 「나」라는 하나의 개인과 그 개인의 경험을 역사와 연결시켜주는 역사관을 찾았을 때 6ㆍ25를 비롯한 지난날의 경험을 좀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나는 인간의 역사를 이렇게 생각한다. 즉 인간의 역사는 「해방」으로의 과정이라고 본다. 자연의 공포와 횡포로부터의해방,질병으로부터의 해방,굶주림으로부터의 해방,무식으로부터의 해방,인간이 타인에게 행하는 무자비한 잔인으로부터의 해방­끝없이 많은 인간해방이 필요하고 하나하나씩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자유」로의 행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참혹한 인간역사의 사실이 증명하듯 그것은 하루이틀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꾸준한 해방의 과정은 조금씩이나마 인간의 자유의 범주를 넓히고 차원을 높여가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는다면 그러한 역사관을 「선택」해야 한다. 개개의 구체적인 경험과 그 경험을 바탕으로하여 여러 작은 「선택」을 해온 나로서는 그러한 역사관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그럴 수 있었다는 것을 지극히 행복하게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6ㆍ25란 나에게는 하나하나의 개인이 나름대로의 해방을 찾고 자유를 찾아야 한다는 인생관과 역사관을 얻게 해준 경험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흔히 진담­농담으로 말하듯이 대한민국은 참으로 운이 좋은 나라라고 생각한다(그렇게 말할수 있는 나도 운이 좋은 사람이 되겠지만). 6ㆍ25는 대한민국에도 역시 하나의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한 전환기라고 할 수 있다. ○싫건 좋건 이끌린 삶 강대국간의 냉전이니,국제정세의 배경이니,국토의 분단이니­「동족상잔의 비극」이니­그런 것들을 지금 이 자리에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다만 6ㆍ25라는 역사적 사건과 경험은 한국으로 하여금 되돌릴 수 없는 그야말로 역사적인 선택을 하도록 했다. 그 「선택」으로 한국은 공산주의 체제가 아닌 자유주주의체제 쪽으로,공산주의의 국가통제경제가 아닌 자유시장경제체제 쪽으로,그 당시에 싫건 좋건 알건 모르건 이끌려 간 것이다. 그리하여 온갖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싫건 좋건 알건 모르건 간에 개개인의 역사가 존중되고 개개인의 나름대로의 자유가 존중될 수 있는,앞서 말한 인간해방의 역사관의 과정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우습게 볼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반드시 한국이라는 사회공동체가 의식적으로 또한 고의적으로 그러한 역사의 길을 기꺼이 선택했다는 말은 아니다.한국이 운이 좋은 나라라는 말이 그래서 나오게 된다. 6ㆍ25를 전후한 국제정세와 6ㆍ25라는 처참한 경험을 겪고 살아남은 한국은 어쩌다 싫건 좋건 그러한 길을 선택하게 됐고 그리하여 오늘의 한국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한 선택을 한 이상 한국은 어쩔 수 없이라도 한걸음 한걸음 인간해방의 역사의 대열에 끼여 따라가게 돼있다. 지난 몇년동안 한국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변화와 발전을 생각해 보면 짐작이 가리라 생각한다. 커다란 인간역사라는 것은 하나하나의 개인은 물론 국가사회라는 공동체도 예측할 수 없는 현상과 결과를 빚어내는 버릇이 있다. 6ㆍ25라는 역사는 어쩌면 한국사회가 자진해서 이룬 것이 아닌 하나의 선택을 한국사회에 강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 선택이 나 자신의 선택과 어울리는 것이기에 지극히 흡족하게 느낀다. 그러기에 나는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이라는 사회공동체는 6ㆍ25를 겪었기 때문에,또 6ㆍ25를 계기로 하여 전세기적인 인간가치관과 인간통치관에서 탈피하여 전진적인 인간해방의 역사적 흐름에 함께 낄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나의 생각을 기다랗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동독을 비롯하여 폴란드ㆍ헝가리ㆍ체코ㆍ루마니아 심지어는 불가리아 등­동구 여러나라에서 일어난 역사적 변화를 생각만 해보면 된다. 그들의 역사야말로 인간해방의 역사이다. 40여년간의 공산주의 독재체제 밑에서 억압당해 왔던 하나하나의 인간들을 해방하고 자유를 이루어준 역사의 흐름이 파도를 친 것이다. 불평ㆍ불만이 많고 걸핏하면 「한」이 어쩌고 하는 우리는 동구의 그들에 비하면­나아가서 소련의 일반 시민들과도 비하면­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6ㆍ25라는 참혹한 경험이 있었지만 그 경험이 헛되지 않게 해준 그 「선택」 덕분에 우리는 인간해방의 역사의 대열에서 그들보다 훨씬 앞서 있게 된 것이다. 동구의 그들 뿐인가. 소련의 사정을 살펴보며 리투아니아ㆍ에스토니아ㆍ라트비아 국민들의 자유독립에의 「선택」을 생각해 본다. 우크라이나의,그루지야의,아르메니아의,아제르바이잔의 모든 개인들의 자유독립으로의 「선택」을 생각해 본다.2차대전이후의 세계역사를 소위 냉전의 역사라고 한다. 하지만 따져보면 그 냉전의 역사는 실은 자유와 억압의 대결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선택하고 자유시장경제 제도를 선택한 진영은 꾸준히 인간의 자유의 범주를 넓히고 차원을 높이면서 인간을 억압하고 불안하게 만들고 인간을 조롱하는 것들에서부터의 인간해방을 이루어왔다고 본다. 그것을 인정 안하다면 동구공산권의 붕괴와 동구 사람들의 자유의 「선택」을 인정하지 않고 이해하려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인간가치관의 대결 이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는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즉 2차대전후부터의 이른바 냉전은 결국은 정치이념의 대결이었고 인간의 가치관의 대결이었다고 본다. 인간의 「자유와 개방」을 위주로 하는 이념과 절대적인 정치권력 체제속에서의 「인간통치」에 전념하는 이념과의 대결이 아니었던가. 6ㆍ25에 참전하면서 「동족상잔의 비극」이니 하는 감상을 품고 있지 않았었다고 나는 앞서 말한 바 있다. 어떻게 보면 냉혹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6ㆍ25전쟁이 내게는 단순히 부족간의 영토싸움이라든가 조국통일이라는 미명아래에서의 권력다툼이라든가 그러한 전세기적인 단순한 전쟁이 아니었었기에 그랬었는지도 모른다. 그 전쟁은 2차대전때 이미 시작되고 그 후에 냉전으로 계속된 이념의 대결이 터져나온 전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싫건 좋건 틀렸건 옳건간에 사람은 각자각자 나름대로의 작은 역사를 창조하고 자유와 개방을 이루고 인간해방을 이룰 수 있도록 풀어주고 돌봐주어야 한다는 가치관과 이념과 역사관을 「선택」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6ㆍ25의 그날이 돌아올 때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상투용어로 그 경험을 「설명」해 버리려는 것을 싫어한다. 그 전쟁이 그것뿐이었다면 그야말로 전세기적인 관념으로 그 전쟁의 경험을 소화하려는 것이 된다. 그 보다는 「나는」 「우리는」 그러한 참혹한 역사적 경험으로 인하여 「이러한 선택」을 하였노라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김은국 □32년 함남 함흥출생.□황해도 황주,중국 만주에서 성장. □48년 평양 제2중(평양고보)재학중 월남. □50년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 중퇴(6ㆍ25발발로). □51∼54년 육군장교복무. □55년 도미,미들버리대(정치학 및 역사철학전공),존스 홉킨스대(영문학 전공),아이오와대 대학원,하버드대 대학원 졸업. □64년 6ㆍ25를 배경으로 한 소설 「순교자」를 하버드대 대학원 졸업논문 대신 발표,세계적 명성얻음. □이후 「심판자」 「잃어버린 이름」 「잃어버린 영혼」 등 발표. □미국 매사추세츠 주립대,시라쿠스대,캘리포니아 주립대교수 서울대 교환교수 역임. □현 매사추세츠 소재 「트랜스 리트 에이전시」 (국제저작권대행회사)대표.
  • 분단 45년… 북한의 생활상 어떻게 이질화됐나

    ◎다른 길로 달린 「남과 북」… “한핏줄의 이방인”/서울신문 6ㆍ25 40주 특집 한핏줄의 남북한은 하나의 역사,하나의 언어,그리고 공통된 생활관습 등을 지켜왔다. 그러나 1945년 해방과 더불어 분단의 길로 들어선 남과 북은 6ㆍ25전쟁이라는 민족최대의 비극을 겪으면서 분단이 고착화됐고 이 결과 전쟁후 40년이 지난 오늘까지 삶의 모든면에서 이질화가 심화되어 왔다. 최근 동서독이 통독의 길로 나아가는등 세계의 냉전구조가 타파되면서 세계유일의 분단국이 되고만 한반도에도 냉전의 장벽을 허물어 뜨릴 수 있는 변혁의 물결이 밀려들고 있다. 분단 45년,전쟁발발 40년이 지난 오늘 제각기 달려온 남과 북의 삶의 모습이 어떻게 변화됐고 이질화됐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언젠가는 맞이할 통일에 대비해 서로가 극복해야 할 과제로 삼고자 한다. ◎문화ㆍ예술/인간개조의 도구화… 순수예술 명맥 끊겨 지난해 우리는 두개의 서로 다른 경험을 했다. 그 하나는 비록 결렬되고 말았지만 북경아시안게임 출전을 위한 남북단일팀 구성논의에서 「아리랑」을 단가로 하자는데 양측이 비교적 손쉽게 합의,문화적 민족정서의 공유가능성을 확인한 일이다. 또 하나는 남북이산가족의 재회를 무산시킨 이른바 북한의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와 「피바다」 공연여부를 둘러싼 논쟁에서 실감했던 남과 북의 현저한 문화ㆍ예술관의 차이다. 이렇듯 남과 북의 문화ㆍ예술은 공감대를 같이하는 한 뿌리에서 출발했으나 분단이후 45년간 서로다른 이념과 사회체제 속에서 이질화의 과정을 밟아옴으로써 오늘의 남과 북사이에는 엄청난 높이의 문화적 장벽이 가로놓이게 됐다. 한국의 문화정책이 이어령 문화부장관의 구상처럼 『후기산업사회로의 급격한 전환에 따른 세대간ㆍ계층간ㆍ지역간ㆍ성별간의 이질화와 갈등현상을 문화의 힘으로 치유』하는데 놓여져 있다면 북한의 문화ㆍ예술은 주체사상과 3대혁명에 입각한 공산주의적 정치사회화의 수단적 목적만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북한의 문화예술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기초하에 체제보위 및 최고통치자에 대한 우상화 및 공산주의적 인간개조를 위한철저한 도구로 기능함으로써 전통적 순수예술의 성격은 물론 대중예술과도 거리가 먼 주체예술ㆍ혁명예술ㆍ이데올로기예술로 변모돼 있다. 가령 북한가요 45년사에서 3대명곡으로 꼽히고 있는 「조선의 별」,「김일성장군의 노래」「동지애의 노래」 등이나 최고의 명작으로 꼽히는 시작 「묘향산의 가을날에」,80년대 최고의 미술작품이라는 「강선의 저녁노을」 등은 모두가 김일성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북한의 문화ㆍ예술의 성격을 대변해 주고 있다. ▲사상성이 좋고 ▲가사가 좋으며 ▲선율이 부드럽고 지루하지 않다는 점에서 불후의 「혁명송가」라는 「조선의 별」은 김일성이 항일빨치산 투쟁을 할때 그의 추종자들이 김일성을 흠모해 지었다는 노래이며,「동지애의 노래」는 김일성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촉구한 노래이다. 「강선의 저녁노을」은 남포시 강선제강소를 소재로 김일성을 찬양한 조선화이며 주체예술의 상징인 5대혁명가극의 하나인 「피바다」는 항일혁명투쟁을 주제로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앞세운 목적극이다. 특히 6ㆍ25전쟁 전까지 순수예술과 목적예술간의 대립속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하지 못한채 주로 소련에 의존해왔던 북한의 문화ㆍ예술은 전쟁중 전쟁의식을 고취하는 내용의 전쟁영웅 형상화에 몰두,목적예술적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전후복구와 「주체」의 슬로건 등장등 상황적 요청에 따라 문예정책은 사회주의 건설에 역점을 두는 새로운 전형을 형상화하는 한편 소련식 문화활동에서 탈피,김일성체제를 뒷받침하는 혁명전통확립과 주민들에 대한 공산주의 교양을 주제로 한 창작활동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또한 자연만을 노래하거나 예술지상주의 태도는 반혁명적이고 형식주의적인 문화예술이라는 인식하에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와 ▲당성ㆍ계급성ㆍ인민성의 구현이 모든 창작활동중에서 반드시 지켜야할 원칙으로 대두됐다. 현재 북한에서는 이러한 문화예술의 원칙과 과제의 이행을 지원하기 위해 작가 미술가 영화인 연극인 무용가 사진가 등 모든 예술인들을 망라한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이란 조직이 결성돼 있으며 당은 이 조직을 통해 각 분야 종사자들에게 창작 및 공연활동계획서의 제출을 강요,▲혁명전통(30%) ▲전쟁(30%) ▲사회주의건설(20%) ▲조국통일(20%) 등 4개 주제별로 창작활동을 하도록 하고 있다.◎의식구조/어휘마다 정치색… 전투ㆍ파괴적 성격 강조 『서울말은 남존여비사상과 썩어빠진 부르주아적 생활이 지배하는 말로서 오늘 남조선방송에서는 여자들이 남자에게 아양을 떠는데 쓰이는 코맹맹이 소리를 그대로 쓰고 있으며,그것마저 고유한 우리말은 얼마 없고 영어 일본말 한자어가 반절이나 섞인 잡탕말이다. 우리는 혁명의 수도이며 요람지인 평양말을 기준으로 해야한다. 오늘 평양말은 서울말보다 비할 바 없이 우월하다』 김일성이 1969년 평양말을 「문화어」로 삼은 이유를 설명한 교시의 내용으로 북한의 언어정책을 잘 보여준다. 김일성은 또 「표준말」이란 용어 대신 「문화어」를 쓰는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표준어라고 하면 마치도 서울말을 표준하는 것으로 그릇되게 이해될 수 있으므로 그대로 쓸 필요가 없다. 「문화어」란 말도 그리 좋은 것은 못되지만그래도 그렇게 고쳐쓰는 것이 낫다』 특히 북한은 「언어를 혁명투쟁과 건설사업의 힘있는 무기」로 보는 언어관을 토대로 일찍부터 용의주도하고 치밀한 언어정책을 펴옴으로써 분단 45년이 지난 현재 남북한간에 벌어지고 있는 언어의 이질화는 단순한 언어 자체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남북한간의 사고와 행동양식 및 의식구조의 이질화에까지 파급되고 있다. 실제 북한에서는 언어를 씩씩하고 힘있는 무기로 다듬는다는 명분하에 『미제의 각을 뜨자』『돌탕을 쳐 죽이자』는 등의 살벌하고 소름끼치는 말들이 공공연히 사용되고 있다. 언어가 인간의 사고와 성격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않음을 감안할때,북한의 이같은 극단적인 언어관과 언어정책은 결과적으로 이러한 언어를 쓸 수 밖에 없는 북한주민자신을 공격적이고 전투적이며 파괴적인 성격으로 만드는 잠재요인이 된다는 점에서 남북한간의 언어이질화에서 빚어지는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북한의 언어정책은 1949년에 단행된 한자폐지와 이에 따른 한글전용정책에서 시작된다. 문맹퇴치와 인민대중의 조속한 사상교육을 목표로 추진된 한자폐지는 결과적으로 한글전용화로 이어졌고 이결과 북한의 각급학교 교과서 문예작품 신문 및 대중매체에서 한자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다만 한자교육은 통일후 남한문헌을 읽기 위해 또한 고전연구를 위해 하나의 외국어처럼 전공과목으로서만 남게됐다. 한글전용에 이어 가로쓰기도 시행되었으나 한자어의 어원을 가진 낱말을 한글로만 표기,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속출하면서 「말다듬기운동」이 새로 일어났다. 이에 따라 1954년 일제하 조선어학회에서 제정한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수정한 「조선어철자법」이 생겨났고 1966년에는 「조선말규범집」과 함께 「문화어」라는 새로운 개념의 어휘까지 등장했다. 문화어의 등장은 남북한간 언어이질화의 본격적인 시발점이 되고 말았는데 그 성격은 서울말을 배격하고 평양말을 토대로 다듬은 그들의 공용어를 표준어로 삼는 데 있다. 한편 한자폐지와 한글전용,말다듬기운동의 결과 새로운 사전의 편찬이 불가피하게 됐는데 1968년 나온 「현대 조선말사전」의 경우 18만어휘가 수록됐던 「조선말사전」(61년)에 비해 어휘가 5만으로 크게 줄었다. 그 이유는 한자가 하나도 없고 옛말 사투리 고유명사 및 이른바 「퇴폐적 사상표현」등을 완전히 제외했기 때문. 또 어휘마다 정치성이 담겨져 있어 김일성의 인용구는 굵은 활자에 별표까지 달아놓았다. 현재 남북한의 언어는 발음의 차이,리듬의 차이,억양의 차이 등과 같은 음성학적인 차이를 비롯해 어휘ㆍ문법ㆍ의미ㆍ문체 및 맞춤범 등 언어전반에 걸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가장 심각한 차이는 어휘부문에서 나타난다. 예를들면 산책길→유보도 채소→남새 화장실→위생실 고기잡이→추어전 개고기→단고기 도시락→곽밥 레코드→소리판 대중가요→군중가요 투피스→동강옷 커튼→창문보 그룹→그루빠 소년단→삐오네르 주제→쩨마 등이다. ◎경제생활/「남농북공」무너져 GNP 남한의 12%/생필품 부족… 암시장 쌀값 배급의 18배 8ㆍ15해방 당시 남북한의 산업배치는 「남농북공」으로 일컬을 만큼 지역적 보완관계가 가능한 상태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남북분단으로 이같은 보완관계는 무너졌으며 설상가상으로 6ㆍ25가 남과 북 모두의 각종 산업시설을 파괴,경제활동의 토대조차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말았다. 이후 남과 북은 40여년간 천연자원 및 산업구조의 불균형이라는 악조건속에서 통합적 발전이 아니라 개별적이고 분리적인 발전을 계속해왔다.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로 굳어진 한국과 북한은 각기 다른 경제질서를 형성ㆍ유지하면서 치열한 체제경쟁을 벌여왔고 이 결과 88년을 기준으로 국민총생산액(GNP)의 차이는 한국이 북한에 비해 8배나 앞서는 비교우위로 나타났다. 한국은 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착수한 이래 고도의 경제성장을 거듭,개발도상국에서 일약 중진국의 일원으로 도약했다. 1960년 1백달러 미만이었던 1인당 국민소득은 89년말 현재 5천달러에 육박해 있다. 반면 6ㆍ25로 인해 공업생산 수준이 1949년에 비해 3분의 2 수준으로 떨어진 상태에서 출발했던 북한경제는 전후복구 3개년계획(1954∼56년)과 뒤이은 5개년계획(1957∼61년)에서는 이례적으로 높은 성장을 기록했으나 그후 침체의 늪에 빠져들었다. 이에 따라 북한은 70년대전까지만 해도 한국에 비해 부분적인 비교우위내지는 형평을 유지해 왔으나 이후부터는 전분야에서 큰 격차를 보이고 있다. 체제가 다른 북한의 국민총생산액등 각종 경제지표의 개념은 우리와 크게 다를 수 있지만 국토통일원이 북한의 각종 선전자료를 검토ㆍ분석해 추정한 수치는 다음과 같다. 국민총생산액은 88년을 기준으로 2백6억달러로 우리의 1천6백92억달러에 비해 8분의 1 수준이며 1인당 GNP는 9백80달러(한국 4천40달러),자동차 생산능력은 연간 2만대(한국 1백70만대),TV보유율은 10%(한국 1백%),전화는 7%(한국 67%),냉장고는 6.5%(한국 79%) 등이다. 한편 북한주민의 의ㆍ식ㆍ주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평등한 방식에 의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직종과 직급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급되는 임금과 그 임금에 따른 불균형한 소비형태로 이뤄지고 있다. 임금은 당간부 및 고위직 군인의 급료가 상대적으로 높으며 사무직보다는 기술직이 높다. 또 경노동 보다중노동이,중노동 가운데도 위해노동종사자들이 더 많은 임금을 받으며 85년부터는 「사회주의적 노동보수제」가 도입돼 동일직종이라도 숙련도나 생산성 등 노동의 질에 따라 급수를 달리하는 「차등임금제」가 실시되고 있다. 북한은 이같은 화폐소득의 차이를 완화하기 위해 보건ㆍ교육분야를 국가예산으로 충당하는 한편 대중소비물자의 가격을 낮게 책정하고 사치품의 가격을 높게 매기고 있다. 이에 따라 쌀ㆍ채소ㆍ옷감ㆍ비누ㆍ치약 등 생필품의 경우 아주 싼값으로 공급되는데 가족수와 연령,직업에 따라 품목과 수량,종류가 정해진 구입카드에 의해 국영상점에서 구입한다. 그러나 최근 몇년간 「먹는 문제」의 해결이 최우선 과제이듯이 국가에서 싼 값으로 공급하는 생필품의 배급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일반주민들은 부족분을 구하기 위해 1㎏당 8전에 불과한 쌀을 「장마당」이라고 부르는 암시장에서 이 가격의 18배가 넘는 1㎏당 15원에 구입하려해도 어려운 실정이다. 주택은 협동적 소유로 행정당국에 의해 직업과 직급에 따라 차등적으로배분되며 그 보급율은 70% 안팎. 북한은 주택건축률이 경제발전을 대변하는 전시적 기능이 크고 남북한 사회비교의 중요한 징표가 된다는 점에서 70년대 이후 평양ㆍ남포ㆍ원산ㆍ함흥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현대식 고층아파트를 신축하는 한편 농촌의 문화주택을 2층 3가구용,3층 5가구용으로 다양화하고 문화적으로 보이도록 하는 등 주거양식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또한 북한은 지난 40년간 중공업위주의 경제정책을 펼친 결과 주민들의 소비생활이 크게 압박을 받아 불만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지난해를 「경공업의 해」로 지정하는 등 최근 경공업발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생활풍습/“봉건잔재 없앤다” 관혼상제도 통제ㆍ규격화 북한은 우리민족의 전통적 예의범절에 대해 『봉건지배계급이 착취하는데 편리하게 만들어 놓은 규칙』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민족 고유의 예절이나 유교적 도덕관은 북한의 사회주의체제와 당의 이익에 맞도록 변형되어 있다. 또 관혼상제를 포함한 전통적인 민속과 세시풍속 등도사회주의적 내용으로 변질됐다. 북한에서의 결혼은 『철저히 동지적이고 혁명적인 관계에 의해 이뤄지며 일생을 동지로서 당과 수령께 충성할 수 있는 정신적 풍모가 조건이 된다』고 정의되고 있다. 따라서 결혼연령도 노동과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남자 29세 여자 26세로 제한해 놓고 있으나 불만이 많아 80년대 이후에는 조혼추세가 묵인되고 있다. 배우자선택은 중매(60%)와 연애(40%)가 병행되고 있으나 최근 북한의 남녀대학생들은 서로 손을 잡기도하고 데이트를 즐기는 등 연애결혼 풍조가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 노동자계층의 남녀가 만나는 채널은 연애보다는 부모 친척 등을 통한 중매가 지배적이다. 신랑감으로는 직업에 관계없이 평양거주총각이 최고의 배우자로 꼽히고 있으며 길흉을 가리는 결혼의 택일 풍습은 사라져 대개 일요일이나 공휴일에 치러진다. 회갑이나 생일,돌잔치는 50년대에는 경제적 여유가 없다는 이유와 식량절약이라는 명분으로 일체 금지되었으나 60년대 후반기부터 묵인되고 있다. 그러나 「60청춘 90회갑」이라는 구호아래 공식적인 회갑잔치는 거의 치르지 못하고 있으며 고위간부의 경우에만 김일성이 하사하는 일정한 규격의 회갑상을 받는다. 장지는 지정된 공동묘지만을 쓰도록 돼있다. 상복은 따로 만들어 입는 것이 없고 머리에 건을 쓰고 팔에는 검은 천을 두른다. 장례식과 매장은 도시의 경우 녹화사업소,편의협동조합 등이 맡아서 처리해 주며 직계존속이 사망했을 경우 상주에게는 3일간의 공식휴가와 장례보조금 10원,쌀 1말이 배급된다. 제사도 다른 풍습과 같이 6ㆍ25전까지는 별다른 통제를 받지 않았으나 휴전후부터 단속대상이 되었었다. 그러나 60년대 후반기부터 추석에 성묘하는 것과 직계존속에 대한 탈상까지의 제사는 묵인하고 있다. 또한 북한은 60년대 중반까지 「봉건잔재를 뿌리 뽑아야 한다」는 김일성 교시에 따라 추석등 고유의 세시풍속을 공식명절에서 제외하고 김일성의 생일,김정일 생일,북한정권 창건일,노동당 창건일,사회주의 헌법제정일 등을 「사회주의 명절」로 지정,공휴일로 해왔으나 지난 88년부터 추석 음력설 단오 한식 등을명절로 부활시켰다. 또한 70년대까지만 해도 인민복,검은 통치마 차림이었던 주민들의 옷차림이 두드러지게 바뀌기 시작해 80년대 중반이후부터는 남자는 양복이나 잠바,여자는 양장이나 짧은 치마차림이 보편화됐으며 머리모양이 다양해지고 화장을 한 여자들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러나 올해초부터 시행될 것으로 보이던 주민들의 부분적 여행자유화 조치가 전면 보류됨으로써 일반 주민들의 북한내 여행 및 휴가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이에 따라 금강산ㆍ묘향산 등 유명관광지의 이용자는 주로 외국인 관광객이며 주민들의 경우 공장ㆍ직장별 단체관광 정도일 뿐 가족단위의 여행은 거의 없다. 따라서 북한주민들의 주요한 오락수단은 TV와 라디오이다. 또 최근 바둑협회가 새로 결성되고 실내 골프장이 생기는 등 부분적인 변화가 있으나 대중이용은 상상조차 할 수 없으며 주민들이 가장 많이 즐기는 놀이는 주패놀이로 불리는 서양식 카드놀이와 장기이다. 가정생활은 지난 80년 『셋은 양심이 없습니다. 둘은 많습니다. 하나가 좋습니다』라는 김정일의 지시이후 가족계획이 보편화되기 시작해 점차 대가족에서 핵가족 형태로 옮아가고 있다. 남녀평등권에 관한 법령이 제정되는 등 남녀평등이 제도적으로 보장돼 있으나 실제로는 가부장적 사회가 유지되고 있으며 여자들이 가정경제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 남편들이 봉급을 타서 여자들에게 넘겨 주기는 우리와 마찬가지다. ◎언론ㆍ교육/비판기능은 무시… 선전ㆍ선동의 매체로 활용 최근 북한은 소련언론들의 잇따른 대북한 비난보도에 대응,소련의 평양주재 기자들에 대한 취재봉쇄조치를 취한데 이어 타스통신기자 1명을 추방함으로써 내외의 관심을 끌었었다. 특히 북한은 『우리 혁명을 지지하는 기사를 쓰라,그러면 당신들의 요청이 충족될 것』이라고 주장한데 반해 소련언론들은 북한언론들의 보도태도와 관련,「목적지향성」보도에만 집착할뿐 진실을 숨기고 있다고 비난해 같은 사회주의 국가이면서도 북한과 소련의 언론관이 상이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현재 북한에서 발행되는 신문은 노동당기관지인 「로동신문」과 정무원기관지인 「민주조선」을 비롯해 도단위 일간지 등 모두 30여종. 방송은 TV의 경우 「조선중앙TV」(평양TV)「만수대TV」「개성TV」 등 3개가 있고 라디오는 「조선중앙방송」「평양방송」「구국의 소리방송」「평양인민 FM방송」 등이 있다. 북한에 있어 언론이란 「김일성의 교시와 당의 정책을 해설ㆍ선전하며 그것을 철저히 비호ㆍ관철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가일층 강화하여 인민들을 수령의 두리에 튼튼히 묶어세우는데 복무해야 한다」는 정치사전(73년도판)의 규정처럼 정치선전도구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또한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기사가 아닌 모범적이고 감동적인 이야기로써 사람들을 교양해야 한다는 김일성의 교시(1960년 11월)에 따라 우리의 사회면 기사에 해당되는 범죄나 비행ㆍ사고 등의 기사는 신문ㆍ방송 등 언론매체에 일체 실리지 않는다. 우리의 언론들이 사회의 비리ㆍ부조리 등을 파헤침으로써 비판적인 기능을 하고 있는데 반해 북한은 긍정적ㆍ모범적인 기사를 통해 사회를 계도하겠다는 언론관을 고집하고 있다. 또 북한의 언론은 자본주의언론이 중시하는 속보성보다는 매스미디어의 이념적 이용,즉 당의 정책적 선전에 중점을 두고 있다. 특히 「정론성」과 「당성」이 강조되고 있는데 정론성이란 어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선전ㆍ선동ㆍ조직ㆍ교육ㆍ동원에 필요한 요소들을 가미하여 「사실」을 각색하는 것을 말한다. 한편 북한의 방송은 정무원직속 조선중앙방송위원회의 지도아래 운영되고 있는데 이 기구는 조직ㆍ편제상 정무원에 속해 있지만 당중앙위 선전선동부의 지시와 통제를 받고 있어 사실상 2원화 되어 있다. 북한의 새 학기는 우리와 달리 9월에 시작된다. 북한은 지난 75년부터 유치원 1년,인민학교 4년,고등중학교 6년과정으로 된 「11년제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우리의 국민학교에 해당하는 인민학교의 취학연령은 만6세. 그러나 만4세부터 시작되는 2년과정의 유치원교육중 「높은반」부터 의무교육기간에 포함되므로 실질적인 의무교육은 만5세부터 시작되는 셈이다. 11년제 의무교육기간에는 수업료는 물론 면제이며 교과서ㆍ교복ㆍ학용품이 무상 또는 일부 부담으로 지급된다. 16세부터 시작되는 고등교육단계로는 2∼3년 과정의 고등전문학교와 교원대학(3년),종합ㆍ단과ㆍ사범ㆍ공장대학(4∼6년) 등이 있다. 현재 북한에는 인민학교 5천여개,고등중학교 4천2백여개,전문학교 5백여개,대학 2백70여개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북한은 80년중반부터 낙후된 과학기술을 진흥하기 위해 각 시도별로 「제1고등중학교」를 세우는 한편 기술계 대학의 수를 크게 늘리고 있다. 학생들은 또 「한가지 이상의 기술과 기능을 소유해야 한다」는 당의 방침에 따라 예능 또는 실업 등의 실기과목을 배우고 있으며 소년단이나 사로청 등의 조직에 의무적으로 가입,단체활동을 한다. 특히 의무노동이 중시돼 인민학교는 연간 2∼4주,고등중학교는 4∼8주,대학교는 12주정도씩 생산현장노동에 참여한다. 한편 북한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이것을 주체적,창조적으로 적용했다는 「주체사상」을 교육이념으로 삼고있다. 또 계급투쟁을 위해서는 「공산주의적 인간」이,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생산기술적 인간」이,전쟁승리를 위해서는 「체력이 튼튼한 인간」이 바람직하다는 「이상주의적인 인간상」때문에 정치사상교양 및 과학기술교육,그리고 국방체육이 북한교육내용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 외언내언

    파라과이란 나라 이름은 파라과이강에 유래한다고 말하여진다. 브라질 남부에서 파라과이를 거쳐 파라나강으로 합류하는 이 강은 2천4백여㎞. 「앵무새(그 종류의 새)의 강」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나라를 흔히 여다의 나라라고들 말한다. 1864∼1870년의 이른바 3국동맹 전쟁으로 젊은이(남성)를 거의 잃은데서 연유하는 것. 1865년의 조사때 총인구는 약 50만이었는데 전쟁을 치르고 나자 그 인구는 절반으로 줄었다. 여자 20여만에 남자 2만8천의 비율로. 20세기 들어서도 볼리비아와의 사이에 차코전쟁이 벌어져 승전했지만 남자는 또한번 준다. 하지만 인구 4백만의 지금에야 그런 불균형도 스러졌다. ◆1811년,파라과이는 스페인 치하에서 독립한다. 그 이후 프란시아를 비롯하여 로페스 부자등의 독재정권을 겪는다. 1936년의 혁명으로 임시대통령 파르바를 거쳐 39년 에스티가리비아장군이 대통령으로. 그가 죽자 파라과이의 정정은 다시 소연해진다. 54년 알프레드 스트로에스네르장군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지만 「공포의 공화국」으로 불리는 독재. 89년까지 그는 35년동안 법위에 군림했다. ◆「대통령각하 축하합니다」라는 노래가 연일 최고인기가요로 발표되는 스트로에스네르정권을 무너뜨린 사람이 안드레스 로드리게스장군. 지난해 2월 쿠데타를 일으켜 공포정치를 청산한다. 이어 5월에 치러진 총선거에서 압승을 거두고 4년 임기의 대통령으로 취임. 그는 인권을 존중하고 파라과이의 민주화를 추진할 것이라고 강조해 온다. 그러나 계속된 경제난을 어떻게 풀어 나갈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다. ◆로드리게스 파라과이대통령이 노대통령 초청으로 20일 우리나라에 왔다가 오늘 떠난다. 21일에는 양국 정상회담을 갖고 교류확대·경협강화방안을 논의했다. 62년 수교한 파라과이에는 우리 동포가 1만2천여명(88년 현재) 살고 있다. 이번 방한이 밑거름되어 더욱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기를 바란다.
  • “너무나 높은 벽”월드컵 16강/김종일 체육부장(데스크 메모)

    월드컵축구의 열기로 지구촌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지난 9일 이탈리아 밀라노등 12개도시에서 시작된 제14회 월드컵축구대회는 개막전부터 연일 이변과 파란을 연출,전세계 10억 축구팬들을 열광케 하고 있다. 경기가 열리고 있는 이탈리아 전역에서는 월드컵과 관련된 갖가지 집단난동이 발생,주최측이 안전대책에 골머리를 썩히는가 하면 세계 곳곳에서 극성팬들이 떼지어 몰려들고 있어 이탈리아 당국을 긴장케 하고 있다. ○2백억이 TV시청 세계 24개국 강호들이 펼치는 묘기는 챔피언팀을 가려낼 오는 7월9일까지 세계 1백50여개국에 중계될 예정으로 있어 월드컵이 열리는 한달동안 연인원으로 따져 2백억명이 TV로 경기를 시청할 것으로 추산된다니 세계가 월드컵으로 열병을 앓고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월드컵 열기는 도대체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월드컵축구를 환호하고 열광하는 이유는 나라마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것이다. 그러나 공통된 원인을 찾아보면 대회규모도 규모려니와 축구라는 경기만이 갖고 있는 특징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축구는 많은 스포츠 가운데 유일하게 발로 득점하는 종목인데다 룰이 단순해 누구나 이해하기가 쉽다. 또 세계 최고수준의 선수들이 녹색의 그라운드에서 펼치는 갖가지 묘기와 박진감 넘친 플레이,그리고 골네트를 출렁 흔들정도의 통쾌한 슈팅…. 아마 이런 것 때문에 월드컵에 매료되는게 아닌가 싶다. 「이기고 돌아오라. 그러면 돈과 명예를 주겠다. 그러나 지면 단두대에 올려놓겠다」 월드컵때마다 자주 인용되는 이 말은 이 대회에 참가하고 있는 나라 국민들이 얼마나 큰 관심과 긍지를 갖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설명해주는 것이리라. 월드컵에 관한한 어느 나라 국민이나 극성을 지나 그 관심은 가히 살인적이라 할 만하다. 특히 남미 국가들은 월드컵 축구가 바로 정치이며 외교이고 전쟁이다. 54년 서독이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자 한 서독학자는 「라인강의 기적보다 오히려 더 서독국민들의 자존심을 높여주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번 대회에서도 첫 출전한 중미의 소국 코스타리카가 축구의 본고장 스코틀랜드에 승리하자 대통령까지 거리로 나와 국민과 기쁨을 함께 했다. 또 개막전에서 지난대회 우승팀 아르헨티나를 꺾어 대파란을 일으킨 아프리카의 카메룬은 이날을 국경일로 선포한 반면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해졸전을 벌인 자국팀을 비난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월드컵의 열기는 국내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국내 양방송사가 거의 전경기를 생중계 또는 녹화해 방영하고 있고 국민들은 모이기만 하면 축구얘기이다. 한국과 벨기에의 첫경기가 벌어진 12일 자정엔 대다수 국민들이 TV앞에 앉아 뜬눈으로 밤을 새며 가슴 죄었다. 집집마다 TV를 켜놔 전력소비량이 최고치에 달했고 맥주ㆍ음료ㆍ과자를 파는 가게는 평소보다 매상고가 30%나 늘었다 한다. 관광호텔ㆍ백화점 등에서는 월드컵열기를 틈타 뜨거운 판촉전까지 벌여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월드컵축구는 단일종목행사로는 물론 올림픽 다음으로 큰 스포츠 행사다. 이 때문에 월드컵이 개막되면 세계는 국경ㆍ이념ㆍ종교를 초월해 「둥근공」하나로 관심을 모은다. ○국민에게 자부심을 국제축구연맹(FIFA)회장을 지낸 줄리메(프랑스)씨의 제창에 의해 1930년 창설돼 4년마다 열고 있는 월드컵은 지난 60년간 숱한 화제와 명연기를 펼친 영웅들을 배출했다. 매대회때마다 「축구왕」이 탄생했고 몇몇은 황제칭호까지 얻기도 했다. 69년 멕시코대회 예선때는 판정 시비끝에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가 진짜 전쟁을 일으키기까지 했다니 그 열기가 어느 정도였나 짐작이 갈만하다. 1933년 조선축구협회가 창립된이래 일제하에서 우리 국민의 울분을 풀어주는 기폭제 역할을 하며 커 온 한국축구는 지난 54년 스위스월드컵에 처음 출전,헝가리에 9대0,이집트에 7대0으로 대패했으나 32년만에 출전한 86년 멕시코월드컵에서는 이 대회에서 우승한 아르헨티나에 3대1,불가리아에 1대1,82년 12회 스페인대회 우승팀 이탈리아에 3대2로 질 정도로 선전함으로써 비록 예선탈락은 했으나 한국축구의 가능성을 세계에 떨쳤었다. 한국축구가 아시아권에서는 처음으로 2회연속 월드컵에 진출하는 금자탑을 쌓았지만 국내에서의 「현주소」를 찾아보면 장래가 걱정될 정도다. 선수를 키우는 팀수가 해마다 줄고 있고 관중이 없어 선수들은 텅빈 그라운드에서 경기를 펼치고 있는 실정이다. 프로축구가 출범한 83년 40게임에 41만명에 이르던 관중은 6년이 지난 지난해 1백20게임을 치르고도 49만명에 불과했다. ○국내축구 열기 시들 프로야구가 연간 2백만명 이상의 팬을 동원하는 것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다. 국내축구열기가 시들한 이유는 프로야구에 밀린 탓도 있지만 무기력한 경기,잦은 판정시비등 축구인 스스로가 반성할 대목도 많다. 그러나 결코 실망할 필요는 없다. 비록 팬들이 국내경기를 외면하고 있다 하더라도 국가대항전등 국제대회 때마다 보여준 관심으로 치면 아직도 축구는 우리의 국기임엔 틀림없는 것 같다. 대벨기에 전에 쏠린 온 국민의 관심이 그 증거가 아니겠는가. 한국이 체력과 기술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첫 경기에서 져 16강진출이 불투명해 지긴 했지만 선수들에게 지나친 짐을 지우지 말자. 물론 좋은 성적을 거두면 다행이지만 월드컵은 본선에 나간 것 자체가 영광이라 생각해야 한다.이번 월드컵본선무대에 진출하기 위해 예선에 참가했던 나라는 1백21개국이나 된다. 이중 24개국만이 예선을 통과,본선에 올랐다. 이 때문에 월드컵 본선무대를 밟는 것조차 「낙타가 바늘귀 빠져 나가는 것 만큼 어렵다」하지 않는가. 이기면 갖가지 미사여구를 동원해 칭찬하다가 지면 한순간 매도해 버리는 악습도 이제는 버려야 할때가 왔다. 아직 스페인과 우르과이와의 2경기가 남아 있다. 설령 3경기를 모두 놓쳐 목표인 16강에 들지 못한다 하더라도 지난 수년간 뼈를 깎는 강훈련을 해온 선수들의 어깨를 다독거려주는 아량을 갖자. 이제 한국축구는 3개월뒤 북경 아시안게임에서 월드컵본선에 진출했던 팀답게 중국ㆍ일본의 거센 도전을 물리치고 계속 아시아의 정상을 유지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머나먼 외국에서 초조해 하고 있을 우리의 선수 임원을 마음으로나마 격려해주자.
  • 솔로몬 미 국무성 차관보 1문1답

    ◎“미­북한 관계개선은 남북대화가 전제”/대북관계 진전되면 접촉경로 확대/한반도문제 자결에 미­소 의견일치 ­노­고르바초프회담으로 상징되는 한소 관계개선에 대해 미국은 터트와일러 국무부대변인을 통해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는 한국에서 미의 이익과 상충되는 것이 아닌가. ▲솔로몬차관보=한소 정상회담은 극히 바람직한 일이다. 공산주의는 대내외정책에서 실패했다. 그들은 지금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고 있다. 아울러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국 모두가 지금 자유세계국과의 긴장완화를 시도하고 있다. 노대통령은 이번 고르바초프와의 회담을 통해 이 변화를 아시아로 끌어들였다. 우리는 노대통령의 소련과의 건설적인 대화노력이 아시아의 긴장완화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믿는다. 부시대통령은 노대통령의 북방정책을 지지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물론 두 나라 국교정상화의 절차가 아직 완전히 매듭지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적절한 시기에 완전정상화가 이루어질 것으로 본다. ­노­고르바초프회담의 결과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이 회담은 회담에 임한 두사람 스스로가 말했듯이 두 지도자가 서로의 의중을 헤아려보는 기회였다. 나의 느낌으로는 노대통령이 북한이 남북대화에 긍정적인 반응을 하지 않는데 대해 큰 실망을 전달한 것 같았다. ­미국은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가. 북한에 대한 제재조치들을 철회하거나 미ㆍ북한간의 관계개선으로 내세우고 있는 전제조건들을 완화할 방침인가. ▲미국은 지난 88년 북한과 직접대화를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10차례 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회담들은 남북대화처럼 별로 생산적이지 못했다. 북한은 우리가 동의할 수 없는 요구를 계속하고 있다. 북한은 한국과 대화하겠다면서 선거에 의해 선출된 관리가 아니라 반정부세력을 포함한 비민선관리들과 상대하겠다고 고집한다. 한미 안보관계의 종결도 계속 요구하고 있다. 이런 것은 모두 건설적이지 못한 주장들이다. 우리는 남북한관계뿐 아니라 미ㆍ북한관계도 개선되기를 바란다. 2주전에 북한은 한국전 실종미군유해 5구를미측에 반환했다. 이것은 54년 이후 첫 유해송환이다. 우리는 이것을 긍정적인 조치로 본다. 미ㆍ북한관계는 하룻밤사이에 개선될 수는 없고 단계적으로 진전돼야 한다. 북한이 계속 긍정적인 조치들을 취해주기 바란다. 우리도 이에대해 반응을 보일 것이다. 우리가 소련이나 북한과 만날 때 반드시 강조하는 핵심사항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한반도문제를 둘러싼 우리와의 관계개선은 남북대화에 기초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미국에 대해 외교접촉 수준을 격상할 것과 외교관 접촉장소를 유엔으로 옮길 것을 제안했다. 이러한 북한의 제의를 미국은 받아들일 것인가. ▲우리는 현재 유지하고 있는 북경에서의 접촉창구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보고 있다. 물론 미ㆍ북한관계나 남북대화에 진전이 있게 되면 현재의 접촉경로를 확대할 용의가 있다. 그러나 북한은 먼저 현시점에서 무엇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검사규정에 조인해야 한다. 이는 미ㆍ북한관계개선의 필수적인 조건이다. ­한소접근을 계기로 미국이 주한미군철수를 가속화할 가능성은 없는가. ▲미군이 한국에 가 있는 주된 이유는 북한의 위협 때문이다. 북한이 소련과 같이 소위 「방어에 충분한 수준」으로 병력을 감축한다면 미국은 주한미군 추가철수시 이점을 고려할 것이다. 최근에 발표한 주한미군의 약 10%감축은 한국군 자체의 군사력 증강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미군이 보완역할을 하고 한국군이 주도적 역할을 맡도록 할 계획이다. ­북한의 핵개발계획과 잠재력은 어느 수준으로 평가하나. 또 미국은 핵무기의 한국내 보유여부를 시인 않는 정책을 계속 유지할 것인지. ▲북한은 자국내 핵무기가 없고 개발할 계획도 없다고 주장한다. 북한은 NPT(핵확산방지조약) 가입국이다. 그러면 핵분야에서 위협을 주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어야 한다. 북한도 한국과 같이 IAEA로 하여금 국내핵발전소 시설의 안전검사를 하도록 허용해야 한다. 만일 북한이 NPT를 탈퇴한다면 한반도의 안정을 깨뜨리는 행위가 될 것이다.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위해선 상호신뢰회복을 먼저 이룬 다음 DMZ양편군사력을줄이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미소 정상회담에서 한반도문제는 얼마나 논의됐는가. ▲한반도의 장래는 남북한 국민과 정부가 결정해야 한다는데 입장의 일치를 보았다. 이 과정에서 미는 북한의 핵개발가능성,소련의 대북한 최신예 항공기ㆍ미사일공급이 한국에 대한 위협을 증대시킨다는 점에 우려를 표명했다. ­한국이 시베리아개발에 미일과 공동참여하는 방안을 비췄는데. ▲좋은 방법이지만 소련경제구조자체가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수용할 만큼 변화되기 전에는 어렵다고 본다.
  • 최선을 다하면 된다(사설)

    이탈리아 월드컵 축구의 팡파르가 전파를 타고 지구촌 1백49개국에 메아리졌다. 현지 시간으로는 8일 하오 6시이지만 한국 시간으로는 9일 새벽 1시이다. 올림픽 말고 단일종목경기로는 월드컵축구의 열기를 덮을 것이 없다. 앞으로 한달동안 월드컵 축구의 그 열기는 지구촌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 갈 것이다. 출전하고 있는 우리의 경우 또한 예외는 아니다. 참가할수 있게 된 것만도 대견하다면서 미리 겁먹거나 자조할 필요는 없다. 전쟁 치른 상흔을 안고 출전했던 54년 스위스 대회의 악몽을 굳이 회상해 낼 필요도 없다. 두번째 출전한 86년의 멕시코 대회에서는 1무2패로 비록 16강 진출이 좌절되기는 했지만 강호들을 상대하여 3게임에서 4골을 뽑아내면서 옛날과는 달리 대량 실점하는 수모를 겪지도 않았다. 그만큼 우리의 기량도 향상된 것이다. 생각하자면 오일달러를 부어 넣으면서 열을 올린 중동세를 꺾은 예선전의 실적도 결코 가볍게 볼 일은 아니라 할 것이다. 어느 나라가 우승할 것이냐,어느 나라들이 8강에 혹은 4강에 진출할 수 있을 것이냐를 두고 추측은 벌써부터 난무해 왔다. 갤럽조사연구소가 세계 축구팬들을 상대로 뽑아낸 자료에 따르자면 한국팀의 4강 진출가능성은 0.7%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로마에 입성한 이감독이 16강 진출에 자신감을 보인다고는 해도 사실 그것마저 불확실한 터에 4강은 더구나 넘보기 어려운 고지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66년 런던에서 열린 제8회 대회에서 북한이 칠레ㆍ이탈리아 등을 젖히고 8강에 오른 일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공은 둥글다. 투지와 전술이 살 때 우리는 세계를 경악시키는 결과를 얻어낼 수도 있는 것이다.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을 치른 우리는 올림픽 4위의 전적과 함께 스포츠에서도 세계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같은 상승세가 이번 월드컵 축구에로 이어지게 될 것을 국민들은 바라고 있다. 경기란 어느 경우고 이기기위하여 벌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설사 기대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각 경기마다 펼쳐지는 예술과도 같은 신기들을 즐기는 것으로써 만족하는 성숙성도 지녀야 할 것이다. 출전한 선수들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은 두말할 것이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13일 우리와 첫 대결하는 벨기에 팀이 벌인 폴란드팀과의 평가전을 본 우리측은 해 볼 만한 상대라는 자신감을 보였다. 하지만 지난 멕시코 대회때 4강에 오른 벨기에 팀을 경시 할 수는 없다. 세계축구팬들이 이번 대회 8강으로 점치는 스페인(18일),두번이나 우승컵을 안았던 남미의 강호 우루과이(21일)가 또한 만만한 팀이겠는가. E조 4팀중의 최약체라는 것이 객관적 평가인 상황 아래서 16강에의 고지도 험난하기만 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속단 못한다. 그러기에 우리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번 월드컵 축구에 즈음하여 우리의 또다른 관심은 2002년의 월드컵 개최국 문제에 쏠린다. 아벨란제 FIFA회장은 이와관련하여 『한국등 아시아 국가가 가장 유력하다』고 말하면서도 한국의 경우 남북한이 통일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이고 있는 점에 주목한다. 21세기의 초엽 통일된 조국땅에서 월드컵의 열기를 세계로 발산시켜 나갈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해진다.
  • 미수교국 정상회담 모두 20차례/한ㆍ소대좌 계기로 본 「전례」

    ◎상대국 방문 13회,제3국 회담 7회/미 닉슨,72년 북경 전격방문/일 다나카,모 만나 수교달성 이번 한소 정상회담은 양국 정상간 회담이 미수교상태에서 이뤄지는데다 제3국에서 개최되는 만큼 외교관례상 흔한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한소 정상회담이 양국간 수교이후에나 상호교환방문을 통해 이뤄질 것으로 전망돼 왔다. 외무부도 그동안 『한소 정상회담은 양국간 수교이전에 개최될 가능성은 없다』고 누누이 강조한 바 있다. 그만큼 이번 정상회담은 빠른 시일내에 수교를 달성하려는 양국 정상들의 굳은 의지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미수교국 정상간의 회담과 관련,상대국 방문을 통해서나 제3국에서 정상회담이 이뤄진 경우는 지금까지 모두 20차례에 이르고 있다. 우선 미수교국상태에서 상대국 방문을 통해 정상회담이 이루어진 사례는 모두 13차례. 이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미국과 중국간의 정상회담. 닉슨 미 대통령은 72년 2월21일 중국을 방문,북경과 상해에서 모택동주석과 한차례,주은래총리와 여섯차례의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 관계정상화를 위한 상해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포드 미 대통령도 같은해 12월 중국을 방문해 모와 한차례,등소평 당시 외교담당부총리와 가진 세차례 회담을 통해 상해공동성명을 재확인한 바 있다. 이같은 양국 정상회담을 거쳐 양국은 73년 4월 연락사무소를 교환설치했고 79년 1월1일을 기해 역사적인 수교를 달성했다. 양국간 수교 연도보다 무려 8년전에 양국 정상회담이 이뤄진 셈이다. 일중관계도 비슷한 방식을 택했다. 다나카(전중) 일 총리는 수교전인 72년 9월25일 방중,모및 주와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간 국교정상화 공동성명을 발표,72년 9월29일 양국간 수교를 달성했다. 중동의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현재까지 미수교국상태이지만 13년전 양국 정상회담을 가진 바 있다. 사다트 당시 이집트대통령은 77년 11월 이스라엘을 방문,베긴 이스라엘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중동평화방안을 논의하는 한편 이스라엘의회에서 아랍권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연설하기도 했다. 베긴 이스라엘총리도 이집트를 답방,사다트 이집트대통령과 두차례 정상회담을가졌다. 지금 한창 통독열기로 들끓고 있는 동서독은 브란트 당시 서독총리의 「동방정책」에 힘입어 이미 20년전 정상회담을 가진 바 있다. 브란트총리는 70년 3월 동독을 방문,쉬토프 동독총리와 양독의 국제적 지위ㆍ유엔동시가입문제등을 폭넓게 협의한 데 이어 쉬토프 동독총리도 답방,동서독은 72년 12월 기본조약을 체결했으며 74년 6월 상설대표부를 설치하기까지 했다. 서독은 소련과도 이같은 방식으로 수교를 달성했는데 아데나워 서독총리가 55년 9월 방소,흐루시초프 당시 소 서기장과 정상회담을 가진 끝에 56년 3월 수교를 이룩했다. 이밖에 싱가포르와 대만,폴란드와 로마교황청,남북예멘,남아공과 모잠비크,남아공과 잠비아등도 미수교상태에서 정상간의 상대국 방문을 통해 양국간 관계진전을 논의한 바 있다. 미수교국 정상이 제3국에서 회담을 가진 사례도 일곱차례나 된다. 망데스 프랑스총리와 주은래 중국총리는 54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정상회담을 가졌고 아데나워 서독총리와 메이어 이스라엘총리는 60년 미국 뉴욕에서 회담을 갖고원조및 수교문제를 논의,65년에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또 쿠바와 칠레는 브라질에서,남아공과 모잠비크는 나미비아에서,이집트와 이스라엘은 78년 카터 당시 미 대통령 초청으로 미국에서 각각 정상회담을 가진 바 있다.
  • 북한,미군유해 5구 인도/어제 판문점서 휴전이래 두번째

    ◎미 원호위장,“관계개선 계기로” 【판문점=김원홍기자】 6ㆍ25때 실종된 미군유해 5구가 28일 상오 11시 판문점에서 북한측에 의해 미국측에 인도됐다. 이날의 미군유해 송환은 전쟁직후인 54년 8월17일 전몰자 유해를 대량으로 상호교환한 이래 36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이날 판문점에는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겸 「조선대외문화연락협회」 부위원장인 이성호등 북한측 대표 3명이 나와 27일 내한한 미 하원 원호위원회(재향군인위원회) 위원장 소니 몽고메리 의원(민주)등 미국측 인수단 3명에게 유해를 인도했다. 이번에 인도된 5구의 유해는 87년 5월 황북도 토산에서 발견된 공군 1명과 같은 해 7월 수안에서 발견된 육군 4명의 것으로 29일 미 공군 특별기편으로 하와이로 운구,미 육군 중앙신원확인연구소로 옮겨져 신원을 확인한 뒤 유가족들에게 인도될 예정이다. 유해 5구중 2구는 인식표가 있어 북한측에 의해 이미 신원이 확인됐으나 나머지 3구는 3∼6개월 뒤에나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알려졌다. 양측은 이날 상오 11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군사정전위원회 본회담장에서 유해인도및 인수서명을 했다. 유해인도가 끝난 뒤 몽고메리 위원장은 『실종미군유해 1백여구 이상이 이미 북한에 의해 발굴되거나 발굴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이번 유해송환을 계기로 더많은 유해가 송환되고 양국관계가 개선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 대미 공식창구 노린 유화책/북한의 미군유해 송환 안팎

    ◎미 의회와 직접 접촉… 관계개선을 모색/남북대화 진전·긴장완화에 「한몫」 기대 북한이 미국의 현충일인 28일 한국전쟁에서 실종된 미군병사 유해 5구를 판문점을 통해 미 의회대표단(단장 GV 몽고메리하원 원호위원장·민주·미시시피주)에게 인도한 것은 시기가 시기인 만큼 외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북한이 유엔군사령부소속 장병들의 유해를 유엔사에 마지막으로 인도했던 것은 휴전협정이 발효된 1년뒤인 54년 8월17일로 당시 유해는 북한의 한만 국경지역 14개 포로수용소에 수감중 사망한 미군 1천8백69명을 포함한 4천23구로 올해 유해송환은 만 36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유엔군사령부는 휴전이후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해 공산측과 80여차례나 유엔군장병 유해송환을 위한 협상을 벌였으나 북한측의 무성의로 결실을 보지 못했었다. 미국은 서울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인 88년 12월6일 북경에서 북한과 외교접촉을 전개하고 지난달 26일까지 8차례의 비공식접촉을 통해 양국간의 현안을 토의해왔다. 미국측은북한과의 접촉에서 ▲남북대화 진전 ▲비무장지대안 긴장완화를 위한 군사적 신뢰구축 ▲실종미군유해 인도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안전협정 가입 ▲테러포기 ▲대미 비방중지등을 촉구하고,북한측은 ▲주한미군 철수 ▲남북한 상호감군 ▲휴전협정의 평화협정 대체 ▲팀스피리트훈련 중지 ▲한미 정부간 직접대화및 관련개선 ▲실종미군 송환을 위한 양국정부간 협의등을 내세웠다. 지난 1년 5개월동안 수차례에 걸쳐 계속된 북경접촉과 주유엔 북한대표부 허종부대표의 워싱턴에서의 미 정계·관계인사들과 빈번한 접촉끝에 이번 일이 이루어진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해송환에는 북한측이 미국측에 보내는 상당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한국전쟁에서 전투중 혹은 포로수용소에서 행방불명된 미군은 모두 8천1백77명이며 이밖에 한국군과 영국·프랑스·터키·캐나다 등 참전 16개국의 유해도 2천2백33구나 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만3백여구의 유해중 이번에 인도되는 5구의 유해송환을 시작으로 앞으로 한국군과 참전 16개국의 유해송환문제도 계속 협상이 이루어질 것으로 군사관계자들은 예측하고 있다. 유엔군사령부 대변인 링크대령은 『북한이 어떤 의도로 5구의 유해를 미국측에 인도하는지 알 수 없으나 외교적인 루트를 통하지 않고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해 판문점을 이용하는 것은 앞으로 남북대화나 긴장완화를 위해서도 긍정적으로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북한은 당초 미군의 유해발견 사실을 뉴스를 통해 흘린 뒤 군사정전위원회의 유엔군측 대표들의 인도주의적인 인도요구를 무시하고 미국과의 공식대화의 무기로 이용하려는 기도를 보여왔다. 유해반환은 교전 당사국간의 군사적 문제로 정전위원회 소관사항이나 북한이 유해인도계획을 몽고메리의원에게 직접 서한으로 통보한 것은 미 의회와 접촉해 보려는 외교적인 의도가 깔려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측은 처음 미 의회대표단이 직접 평양에 와서 유해를 인수해 가라는 제의를 했었으나 미국이 이를 거부하자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로 인도장소를 바꾸었다. 이번 인도된 5구의 유해는 판문점에서 헬리콥터를 이용,오산 미 공군기지로 이송된 뒤 29일 C141 미 수송기로 미 육군중앙신원감식소(USACIL)에 보내져서 첨단과학 장비를 이용,신원확인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신원감식소에서는 인식표·단추·만년필 등 유류품이 있을 경우 이를 토대로 1차 감정을 하고 2차로 X선·레이저빔·유골의 조직검사 등으로 신원을 최종 확인한 뒤 유가족에게 통보한다. 1975년 월남전쟁이 끝난 뒤 설립된 미 육군신원감식소는 그동안 태평양전쟁이나 월남전에 희생된 유해를 정밀하게 분석,신원파악을 해와 이 방면에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미군 관계자들은 이번의 경우 전쟁이 일어난지 40년이나 지나 유해만 가지고 신원파악이 어려운 데다 설령 신원을 파악한다 하더라도 유족을 찾는 작업이 더 어려워 이들의 대부분이 무명용사로 처리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고 있다. 37개월간의 한국전쟁을 통해 미군은 8천1백77명의 실종자이외에 3만3천6백29명의 사망자와 10만3천2백84명의 부상자를 내고 3백89명의 돌아오지 않는 포로를 내었다. 미국이 무명용사의유해반환을 위해 과거의 적이었던 일본이나 베트남·북한과 공개접촉 혹은 비밀접촉을 하는등 끝까지 송환노력을 계속하는 것은 유족들의 슬픔을 달래주려는 인도주의적인 면도 있으나 미국군복을 입고 전사한 장병들의 시신은 끝까지 국가가 신경을 써 응분의 대우를 한다는 것을 보여 국민들의 애국심과 긍지를 높이려는 의도도 짙다. 북한도 그동안 회피해왔던 미군유해 송환에 적극성을 보이면서 생색을 내고 있는 것은 이를통해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꾀하려는 계산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의 전인철외교부부장이 지난 15일 핀란드의 헬싱키에서 『우리는 미군의 유해를 더 발견하는 경우 유해를 모두 반환할 것이나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종류의 협상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이런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엔군실종·미귀환포로 현황 (유엔군사령부 집계) 국적 실종 미귀환포로 계 한국군 1,647 1,647 미군 8,177 389 8,566 기타참전국 18 197 215 계8,195 2,233 10,428
  • 중국 「서안사건」의 주역 장학량 54년만에 “자유의 몸”

    ◎장개석을 감금,홍군회생에 기여/대만,연금 풀고 망백연개최 추진/중국과 관계개선 노린 유화제스처인듯 지나간 역사의 페이지속에 오랫동안 묻혀있던 장학량이 54년만에 처음으로 공개석상에 나타나게 됐다. 만주군벌이던 장은 중국대륙에서 장개석과 모택동에 의한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1936년 12월7일 독전차 그를 만나기 위해 서안으로 온 장을 감금,국공합작을 통한 항일전선을 구축케 함으로써 역사의 흐름을 바꾸게 한 인물. 당시 모의 홍군은 막 장정을 마친뒤여서 세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으며 장은 이러한 홍군에 대공세를 감행,완전 소탕하기 위해 국민당정부군산하 만주군지휘책임자인 장에게 공격명령을 내렸었다. 그러나 장학량은 그의 부친 장작림이 일본군에 의해 폭사한 원한 등으로 공산당이 내건 항일민족통일전선전략에 동조,장을 구금했고 이에 따라 괴멸직전에 놓였던 모택동의 홍군은 숨을 돌려 세력확장에 힘을 기울인 결과 대세를 역전시키는데 성공했다. 장은 그후 장개석에게 지휘권을 박탈당하고 체포돼 1949년 국민당정부와 함께죄인의 몸으로 대만에 온뒤 줄곧 외부와의 접촉이 금지된 채 연금생활을 해왔던 것. 대만의 중국시보 17일자보도에 따르면 장학량은 오는 6월1일 대북시 원산호텔에서 90회 생일축하연회를 가질 예정이며 이 연회에는 이등휘총통을 비롯한 국민당 고위간부 등 2백여명이 참석하는 것으로 돼있다. 이 신문은 「서안사건」이후 54년만에 장이 처음으로 공개석상에 나타나는 사실은 국민당 정부가 그에게 특사의 혜택을 주는 것이며 앞으로 장은 기나긴 연금상태에서 풀려나 자유인으로 여생을 마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대만으로 끌려온 이후 그는 대북시 북투의 한 가옥에서 부인 조일적과 살고 있으며 생활비는 국민당에서 마련해 주고 있다. 이번 장의 90회 생일잔치를 위해 국민당측은 「장한경(장학량의 호)선생 9순경축위원회」까지 조직,요란스레 축하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고 한다. 관측통들은 오늘의 초라한 국민당정부를 있게 만든 장에 대한 대만 당국의 이러한 움직임은 그가 너무 연로해 더이상 연금의 필요성이 없는데다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해선 불필요한 구원을 간직하는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장을 비롯,모택동과 서안사건의 중재를 맡았던 주은래 등 동시대의 관련인물들이 이미 타계한지 오래됐음에도 장이 90세를 맞아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은 늦은 감이 없지 않은 것 같다.
  • 외언내언

    요즘도 우리의 국민학교에서 공통적인 문제로 자주 거론되고 있는 것이 몇가지 있다. 그것은 책가방이 여전히 무겁다는 것이고 학교에서 따뜻한 점심식사가 제공되었으면 하는 학교급식에 대한 바람이다. 학생들은 학교 안에 각자 소유의 조그만 것이라도 서가가 있으면 책가방의 무게를 덜 수 있고 또 급식이 실시되면 각종 숙제물과 함께 손에 들고 다니는 도시락이 없어져 편리하겠다는 얘기들을 많이 하고 있다. 그러나 결식아동이 많은 지방소도시 학교의 경우 급식문제는 불편여부를 넘어 보통 심각한 게 아니다. ◆선진국의 경우 학교급식이 철저하게 시행되고 있다.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하고 있고 내용이 좋아 완벽에 가깝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 영국은 지난 44년,미국은 46년에 각각 급식법을 만들어 전학생에게 식사를 공급하고 있다. 일본은 54년부터 초ㆍ중학교를 대상으로 해 국민학생은 전체의 99.5%,중학생은 82.3%가 급식혜택을 받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의 경우는 너무나 미미하다. 우리는 6ㆍ25동란후 모두가 굶주리고 있을 때인 53년 유니세프가 주동이 돼 학교급식을 시작했다. 빵과 우유가 이때 제공됐다. 그러다가 66년부터 우리 정부주관으로 벌여왔으나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 언제나처럼 예산부족이 그 이유이다. 현재 급식대상 학생은 전체학생의 6%,학교수는 10%수준에 불과하다. ◆거의 전체학생을 대상으로,그것도 다양한 메뉴로 과학적인 칼로리계산과 위생처리로 세계 제1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일본에서조차 매년 학교급식문제가 학부모들 사이에서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현재의 메뉴로는 너무 일률적이어서 다양한 개성을 지니도록 해야 할 어린이들에게 학교급식부터가 잘못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또 편식이 고쳐지고 있지 않다는 등의 학교급식을 통한 식생활교육의 문제도 제기하고 있다. 부러운 얘기이다. ◆우리도 내년부터 학교급식제도를 확대하겠다는 소식이다. 우선 두메ㆍ섬에 실시하고 점차적으로 늘려 나가겠다는 것이나 이것으로는 너무 미흡하다. 일의 경중완급을 가릴때 학교급식은 가장 앞서야 될 일이다. 선진국의 문턱에 들어섰느니 쌀 생산과잉,과소비가 논의되는 요즘에 결식아동문제는 보다 빨리 해결해야 될 일이기 때문이다.
  • 미군 역할조정… 한미 안보협력 재정립/양국 국방장관,무얼 논의했나

    ◎“작전 주도서 지원으로” 미 기능 변화/분담금 양측 이견 커 줄다리기 예상/10월 서울 연례 안보협의회서 대부분 타결될 듯 15일 서울에서 열린 이상훈국방부장관과 리처드 체니 미국방부장관과의 회담에서는 90년대의 한미 안보협력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한 중요한 군사정책들이 깊이 있게 논의됐다. 이장관과 체니장관이 논의한 주한미군의 한국측 방위비분담 증액문제와 주한미지상군 일부의 감군,용산기지의 이전과 한국군의 작전통제권 이양문제등은 오는 10월 서울에서 열리는 제22차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SCM)에서 확정될 예정이다. 체니장관의 방한목적은 첫째 미국의 국방장관으로 극동지역에 배치된 미국의 병력배치를 확인하고 주한미군의 역할변경및 규모축소와 함께 한국의 경제성장 규모에 맞는 방위비의 증액에 관한 한국측의 의도를 타진하려는 것이다. 체니장관은 미 의회의 넌 워너 수정안에 따라 오는 95년까지 주한미군의 변화 가능성과 한국측의 부담가능성을 타진,오는 4월1일까지 의회에 보고하게 되어 있어 이번 극동순방에서 이에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마무리지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90년대 주한미군의 역할은 한국 방위의 주도적 역할에서 지원적 역할로 전환한다는 전략을 세워놓고 있다. 오는 7월1일 국방참모본부의 설립으로 90년대에는 「한국방위의 한국화」를 이루려는 우리의 자주국방 구도와 일맥상통한다 할 수 있다. 주한미군의 기능도 공세적 대북억제력에서 지역안보용 안전판으로 바뀌며 이에따른 부대배치와 구조ㆍ역할ㆍ규모도 크게 변모할 것이 틀림없다. 현재 주한미군은 F16 60여대와 3개 전투비행대대 1만1천여명의 병력을 갖춘 공군과,3만1천8백여명의 병력과 헬리콥터수송여단ㆍ포병대대ㆍ탱크대대ㆍ기계화대대ㆍ각종 지원부대 등 정규사단의 규모를 넘는 육군으로 편성되어 있다. 레이건대통령 출범때 3만8천여명이던 병력이 10년가까이 지나는 동안 4만3천여명으로 늘어나 5천여명의 자연증가를 보였으며 미국 조야에서는 필요이상으로 비대해 군살빼기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미국의 언론과 군사관계 학자들은 주한미2사단을 보병여단 수준으로 대폭 감축하고 90년안에 용산기지를 이전하며 작전통제권도 평화시에는 한국군에 이양하고 전시에만 미군이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약 2조원으로 추산되는 기지이전비용을 모두 한국측에서 부담하며 3억달러의 방위비분담액을 6억8천만달러로 대폭 증액,일본 수준으로 올리도록 요구해왔다. 미국은 신데탕트에 의한 동서 긴장완화에 따라 유럽과 아시아에서 대규모 감군을 추진하고 있으며 재정적자와 무역적자에 따른 국방비의 삭감으로 92년부터 94년까지 3년동안 모두 1천8백억달러의 국방예산을 삭감해야 한다. 이 때문에 미국은 지난 1월28일 해외 미군기지 1백26곳을 통폐합하면서 주한미공군이 사용하고 있던 3개 공군기지를 폐쇄하고 2천여명의 비전투행정요원을 철수시킨다고 발표했다. 3개 공군기지에서 미군이 사용하던 전투기와 지상장비등은 한국군에 무기판매형식으로 이양하게 되어 있어 운영비 절감효과와 함께 군수물자수출의 효과도 얻게 된다. 미국은 국방비 삭감을 위해 한국측이 부담하고 있는 주한미군의 방위비 분담액 22억달러(간접비19억달러ㆍ직접비 3억달러)에 주한미군을 위해 일하고 있는 한국인 노무자의 임금과 퇴직금등 3억8천만달러를 한국측이 추가 부담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우리 국방당국자들은 우리의 경제력이 일본ㆍ서독 등과는 비교가 안되며 70만에 가까운 병력을 유지하고 있어 파격적인 방위비분담금의 증액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미 양측은 이번 회담이후 분담규모를 계속 협의해나갈 것에 합의함으로써 오는 10월까지 한미 상호간에 이 문제는 계속 줄다리기가 될 전망이다. 서울 도심지 한복판에 위치한 1백만여평의 용산기지는 도시발전과 교통난 해소를 위해 필수적으로 옮겨야 하나 이전비용 2조원을 전액 한국측 부담으로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측은 1백만평이 넘는 1개 도시를 옮기는 대역사를 한국에서만 부담할 수 없으며 소요시간이나 예산도 엄청나 단시간안에 이전할 수도 없는 실정이다. 용산기지 이전문제는 지난 54년 7월 대전협정에 의해 미국측에 이양한 작전통제권문제와 한미 행정협정 개정등 많은 전제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작전지휘권 이양문제는 국군조직법 개정안의 통과로 설치될 국방참모본부와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한국 방위의 한국화를 목표로 하고 있는 국방부는 한미 연합사령부의 지상군구성 군사령관과 군사정전위원회 유엔군측 수석대표를 한국군 장군으로 보임하는 문제와 한미 야전군의 편제및 지휘권에 한국군이 주도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변경하는 문제등을 추진하고 있다. 이번 회담에서 미국측은 주한미군 감군은 현실을 무시한 추측이며 미군의 역할을 주도적 역할에서 지원적 역할로 변화시켜갈 것이고 그것도 점진적ㆍ단계적으로 할 것이라는 외교적 언사로 감군이 없는 것처럼 강조했으나 미군의 국내외 사정상 감군은 불원간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주한미지상군 일부 감군문제와 방위비 증액에 대한 문제가 이번 회담에서는 결론이 나지 않았지만 앞으로 4인 위원회를 통해 토의를 계속,오는 10월 SCM때 점차 현실로 다가올 것으로 보인다. ◎이상훈ㆍ체니 국방장관 일문일답/감군은 남침 저지력 손상 없도록/북한 긴장완화조치 가시화 기대 이상훈국방부장관과 리처드 체니 미국방부장관의 공동기자회견이 15일 하오 3시55분부터 45분동안 국방부 제1회의실에서 있었다. 내외신기자 2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날 회견은 질문에 대해 먼저 이 국방장관이 견해를 밝히고 뒤이어 체니장관이 답변을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다음은 일문일답의 내용이다. ­한미 연합지휘체제의 개선문제와 관련해 구체적으로 협의된 것이 있는가. ▲이장관=미국측은 주한미군이 한국방위에 있어서 지금까지의 주도적 역할에서 지원적인 역할이 되어야 한다고 했으면 본인도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한미지상군의 편성문제나 정전협정의 대표자를 한국인으로 바꾸는등의 세부적인 문제는 앞으로 한미 연합사 사령관과 대한민국합참의장등 군사실무자간에 협의를 거쳐 나중에 결정하자고 말했다. ▲체니장관=이장관이 말한 대로이다. 앞으로 미국은 지원적인 역할에 치중할 것이며 한국이 방위의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최근 미소간에 외무장관회담이 열리는등긴장완화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소련과 북한간에도 긴장완화쪽으로 진전되고 있는가. ▲이장관=특별히 할 말이 없다. ▲체니장관=말할 수 있는 것은 미소간의 접촉을 통해 북한이 최근 그들이 서명한 핵 비확산조약에 완전히 가입할 수 있도록 쌍무적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한미군의 감축을 논의하는 것이 북한의 가시적 긴장완화조치를 촉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는데 가시적 조치란 무엇인가. 또 한국의 외무ㆍ국방장관과 주한미국대사ㆍ한미연합사령관으로 구성된 「4인 위원회」를 만든다고 했는데 「4인 위원회」는 상설기구인가. ▲이장관=가시적인 긴장완화조치란 북한이 적화통일이 명시된 노동당 규약을 바꾼다든지,전방배치된 부대를 후방으로 조정하는 등의 조치를 말한다. 「4인 위원회」는 지금까지도 계속 만나왔고 앞으로도 필요성이 있다면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명시한 것이다. ▲체니장관=미국은 어떠한 긴장완화조치도 환영하나 아직 진전이 없다. 한국에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이 상존하고 한국민이 원하는 한 주한미군은 계속 주둔할것이다. 미군의 한국 주둔은 한미 양국과 동북아시아의 안전에 기여하고 있다. ­앞으로 3년동안 5천명의 미군이 감축된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게 되면 한국의 방위비 부담이 늘어날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장관=미군의 감축은 전투병력을 제외한 지원요원이 대상이며 미국의회의 의견등 미국의 사정에 따라 긍정적으로 검토되고 있다. 5천이니 6천이니 하는 병력의 숫자는 한미 군사책임자간에 충분한 시간을 갖고 검토한 뒤 한국방위력이 손상되거나 전력의 저하가 일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결정될 것이다. ▲체니장관=감축되는 숫자는 협의가 계속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감군된다고 말할 수 있다. 시간을 가지고 기본전투력의 손상이 없는 범위에서 추구될 것이다. 예산절감을 위한 미국의 노력은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아시아ㆍ태평양지역차원에서 검토되고 있으며 91년 예산부터 시행될 것이나 우방과의 안보공약을 지키고 침략을 저지하는 범위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비용부담문제에 대해 다시한번 설명해달라. ▲이장관=미국의 국방비 삭감은충분히 이해하며 한국의 방위비 부담을 능력범위안에서 점진적으로 늘려나간다는 데 동의한다. 주한미군에 고용된 한국인 근로자의 임금을 모두 한국정부가 부담해달라는 것이 미국의 요청이었으나 이번에 의료보험료와 퇴직금을 부담키로 결정했다. 방위비 부담에 대한 미국측의 요청을 앞으로도 긍정적으로 검토해나가겠지만 GNP가 4배ㆍ5배나 되는 일본ㆍ서독과 비교할 수 없지 않는가. 미국만 국회가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도 국회가 있다. 앞으로 국회ㆍ경제기획원 등과 상의해 성의를 다하겠다.
  • 불가리아 공당,개혁파 지도자 선출/신설 「평의회」 의장에 릴로프

    ◎5월총선 대비, 내부개혁 추진할듯/11일 사회당으로 발족 【소피아 AP 로이터 연합】 불가리아 집권 공산당은 2일 정책결정 최고 지도부를 새로 구성하고 의장에 개혁파인 알렉산더 릴로프(56)를 선임했다고 관영 BTA통신이 보도했다. 게오르기 아타나소프 내각이 총사퇴함에 따라 정국 수습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긴급총회를 개최,철야 비공개회의를 가진 불가리아 공산당은 최근 당헌에 따라 중앙위의 대체기구로 신설된 당 정책결정 최고지도부 최고평의회를 새로 구성,릴로프를 평의회 의장으로 선출했다고 이 통신은 밝혔다. 1백53명 정원의 최고평의회에는 정치국원 민초 요프체프,정치국 후보위원 판텔레이 파초프,페테르 듈게로프 등 전문기술관료ㆍ경제관료 등이 주로 선출됐으며 1일 사임한 아타나소프 총리등 일부 당지도자들이 탈락한 것으로 전해졌다. 신 지도부 구성에 따라 서기장직에서 물러나게될 페타르 믈라데노프 서기장은 겸임하고 있던 국가원수직은 계속 보유할 것으로 알려졌다. 릴로프 신임 불가리아 공산당 지도자는 지난해 11월 토도르 지프코프 전 당서기장이 축출되고 개혁파인 믈라데노프 서기장이 당을 이끌면서 한직에서 부상,개혁운동을 주도해 왔으며 건강상 문제가 있는 믈라데노프의 뒤를 이을 후임 당지도자 물망에 올라왔다. 그는 오는 5월로 예정된 다당제 총선에 대비,당조직을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 앞으로 경제난 해결 등 정국 수습과 함께 공산당 내부개혁을 추진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에앞서 노동분규등 경제난을 해결하라는 압력을 받아온 게오르기 아타나소프 총리의 내각이 1일 총사퇴했다. 당내 개혁파 대변인 니콜라이 바실레프는 그들이 오는 11일 소피아에서 특별대회를 갖고 정식으로 불가리아 사회당을 발족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공산당 정치국원인 아타나소프는 작년 11월 35년간에 걸친 지프코프의 독재를 종식시킨 정치국원들에 가담함으로써 총리직을 계속 유지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불가리아의 경제난을 해결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지프코프의 그늘에서도 벗어나지 못해 금주 열린 특별 당대회에서 여러차례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사임은 이미 널리 예상되고 있었다. ◎릴로프는 누구/지프코프노선 비난,83년 축출/복귀 5개월만에 최고직 올라 불가리아 공산당의 초대 최고평의회 의장으로 선출된 알렉산데르 릴로프(56)는 개혁파로 알려진 합리적 인물. 축출된 지프코프 전 국가평의회 의장 밑에서 이념담당 정치국원을 지냈으나 지프코프의 강경노선을 비난하다 83년 정치국에서 축출됐었다. 기술관료 출신으로 지난해 11월 정치국원에 다시 복귀한후 4개월여만에 당 최고위직에 올랐다. 1933년 불가리아 북부 미하일로프그라드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54년 공산당에 입당했다. 지방당 관료로 출발,69년 당의 선전부 부책임자로 승진한 이래 72년 당비서,74년부터 83년까지 정치국원을 역임했다. 지프코프 시절에는 특히 터키계 주민들에 대한 탄압정책에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앞으로 불가리아내 터키인들에 대해 유화정책을 펼 것으로 보인다. 소련 과학아카데미에 유학,문학을 연구했으며 정치국원 복귀 전에는 대학에서 철학강의를 맡기도 했다.
  • 동서 군축바람 한반도 “상륙”/미군기지 감축 저변과 향후의 전망

    ◎소군의 동구 철수로 거부명분 상실/근본적 수정 없다지만 감군은 대세/국방비 의회삭감 요구액과 차이 커 논란 예상 주한 미공군기지 3개의 폐쇄를 포함하는 29일 미국의 국방예산 감축조치 발표는 눈덩이처럼 커가는 미국의 재정적자 문제와 최근의 동서해빙 무드가 맞물려 만들어낸 하나의 명작품이라 할 수 있다. 레이건이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8년간 계속 불어난 미국의 재정적자(89년 1천5백20억달러)는 1천3백70억달러(88년)의 무역적자와 함께 소위 쌍둥이 적자를 형성,미국 경제를 위협하는 큰 압박요인으로 작용해왔으며 미의회는 과감한 재정적자의 삭감조치를 끊임없이 행정부에 요구해왔다. 이에대해 미정부는 소련의 군사적 위협이 상존하고 있음을 내세워 국방예산 감축을 거부해왔다. ○미 경제의 압박요인 그러나 89년 들어 동구에서는 민주화 개혁이 돌이킬 수 없는 추세로 뿌리를 내리게 됐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소련군의 부분적인 철수가 시작되었고 헝가리와 폴란드 등은 소련군의 완전철수를 요구하고 나섰다. 소련도 오는 2천년까지 국방비를 현재의 절반 수준으로 감축한다는 목표 아래 해외주둔군 철수및 감군계획을 일방적으로 실천에 옮기고 있다. 미국이 소련의 군사위협을 이유로 국방비 감축을 더이상 거부할 명분이 없어진 것이다. 따라서 29일의 국방예산 삭감발표는 전략적이라기보다 다분히 예산적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체니장관도 강조한 바 있다. 문제는 국방비 삭감발표에도 불구하고 의회의 삭감 압력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체니장관은 29일 국방비 삭감을 발표하면서 표면적으로 볼 때 소련의 군사적 위협이 상당히 감소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이나 이를 이유로 미군사 전략의 근본적인 수정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번 국방비 삭감조치가 지난해 86개의 미국내 기지폐쇄에 이어 주로 국내ㆍ외의 군사기지 폐쇄와 재래전력 감축 부문에 집중됐을 뿐 많은 논란을 빚고 있는 SDI(전략방위구상ㆍ별들의 전쟁)나 B2 스텔스폭격기 부문에선 오히려 예산을 증액시킨 것,또 전략핵 부문에선 현대화 계획이 강화된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 ○현대화 계획엔 증액 그러나 레이건대통령 시절 무리한 군비증가로 사회복지 부문에의 투자가 희생당했다는 불만을 갖고 있는 민주당소속 의원들은 바로 SDI나 스텔스폭격기 같은 부문에서의 대폭적인 국방비 삭감을 요구하고 있으며 삭감요구 규모에 있어서도 행정부 제시액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어 29일 부시대통령이 제시한 예산안은 앞으로 미의회에서 많은 논란을 빚을 것으로 예상된다. 부시대통령은 91회계연도(90년 10월1일∼91년 9월30일) 예산안의 재정적자가 6백31억달러로 크램­레드먼의 균형예산법안이 규정하고 있는 91회계연도 목표액 6백40억달러보다 미달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10년이래 가장 낮은 재정적자일 뿐 아니라 이같은 추세로 재정적자를 삭감한다면 오는 95년이면 국방비를 GNP의 4% 이내로 묶는다는 목표가 실현될 수 있을 것으로 보는 부시는 이번 예산안의 국방비 삭감조치가 획기적인 것임을 애써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의회쪽의 반응은 부시행정부가 91회계연도의 경제전망을 너무 장미빛으로 잡아 6백31억달러라는 「환상적 재정적자」가 나온 것일 뿐이라며 이를 일축하고 있다. 실제로 경제성장이 예상보다 1%포인트 미달될 때마다 1백80억달러의 재정적자가 추가로 발생하는데 이를 예방하기 위해선 보다 과감하고 대규모의 국방비 삭감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 국방비 삭감으로 생기는 여유예산 소위 「평화배당금」을 어떻게 이용하느냐도 앞으로 많은 논란을 빚을 것으로 보인다. 부시대통령은 이와 관련,국방비 삭감으로 생기는 여유예산은 앞으로의 경제성장을 겨냥해 미래에의 투자에 집중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반해 민주당이 지배하는 의회에서는 그동안 군비증강으로 희생돼온 사회복지 부문의 확충이나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확대 등을 요구하고 있다. ○GNP의 4% 목표 그러나 이른바 평화배당금이 어떻게 쓰일 것인가에 대한 논란은 미국내에 국한된 문제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번 국방예산 삭감 발표를 시작으로 미국의 국방비 감축이 하나의 추세로 굳어지느냐의 여부이다. 현재 소련ㆍ동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개혁운동과 이에따른 긴장완화 분위기가 어떤 계기로 인하여 다시 냉전시대로 되돌아가지 않는 한 미국의 국방예산 감축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는 또 주한미군의 계속적인 감군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한미군철수 문제는 이제 현실로 다가왔다. 우리의 안보와 한반도의 긴장완화 문제를 우리들이 주도적으로 추진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를 맞고 있는 것이다. □주한미군 주요 일지 ▲45년9월=미 제24군단과 7함대 병력 7만여명 일본군 무장해제위해 인천상륙 ▲48년=정부수립과 함께 1만6천명으로 감축 ▲49년=군사고문단 5백명을 제외한 모든 주한미군 철수 ▲50∼53년=6ㆍ25 남침으로 미 제24사단 상륙에 이어 종전 무렵 육군 7개 사단,해병 1개 사단 등 36만명 주둔 ▲54년=2개 사단 7만여명만 남기고 나머지 모두 철수 ▲71년=닉슨독트린(69년)에 따라 제7사단 2만여명 철수 ▲77년7월=제10차 한미안보협의회의 공동성명 통해 「78년말까지 주한미지상군 전투병력 6천명 철수」 발표 ▲77년9월∼78년=3천4백명 추가 철군,주한미8군참모장 싱글러브소장의 「주한미군 철수정책은 한반도 전쟁재발 위험」 경고로 철수규모 축소 ▲81∼89년=레이건 재임중 주한미군 3만8천명에서 4만3천명선으로 증원 ▲89년6월=범퍼스 미상원의원 주한미지상군 1만명 철군법안 제출 ▲89년11월=넌­워너수정법안 미상ㆍ하원 통과(미행정부는 주한미군의 단계적 감축등에 대한 보고서를 90년 4월1일까지 의회에 제출토록 요구받음) ▲90년 1월=현재 병력 4만3천여명(공군 1만1천명,해군및 해병대 5백여명) 이밖에 5천2백여명의 한국군인(카튜사)과 한국인 용역단 3천2백여명의 미군을 간접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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