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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정 박노수(이세기의 인물탐구:63)

    ◎세속과 거리먼 대쪽기상… 한국화의 대가/노송­여인의 머리결등 한국적 비감의 정서 관조/여백­색채 절묘한 조화… 관념­실경산수 넘나들어/내년 열번째 개인전 계획… 신품의 경지 기대 남정 박노수의 간원화실은 어느 듯 스산한 초동이다. 종로구 부암동에 자리잡고 있으나 인왕산자락에 파묻혀 마치 심산유곡인 듯 산새소리 바람소리만이 유랑한다.대문에서 작업실에 이르는 긴 길목은 가으내 진 낙엽이 산처럼 쌓여있고 화사의 화숙다운 청한한 적요가 사방에 깃들 뿐이다. 봄이면 진달래 철쭉이 지천을 이루고 여름은 울창한 수목,나목한천의 백색겨울등 간원에 머무르는 사계절의 변화는 눈에 닿는 풍경마다 살아있는 명화가 아닐수 없다.간원은 그의 옥인동집에서 보면 동북방에 위치한 동산이란 뜻이다. 남정은 아침 9시반에 집에서 나와 주로 이곳에서 그림을 그린다. 하루종일 별반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따로 시중을 드는 이도 없다.쉬고 싶으면 혼자서 마당에 나가 물을 뿌리거나 수석을 돌본다. 남정의 화실은 처음은 원효로에 있었고 70년대 후반에 비원앞 가든타워, 그후 사직동의 한 아파트로 옮겼다가 이곳에 정착했다. 널리 알려지다시피 그는 세속과 도무지 화통하는 법없이 그림에만 전념하는 화가다.대쪽같고 겨울강처럼 차가운 성격은 아무하고나 쉽게 만나지도 않을뿐더러 만나더라도 무슨 이야기든지 부담없이 나눌수 있는 친밀감을 주지도 않는다. 본인은 그런 소리가 나오면 수원시화중의 한구절을 들어 「가슴속이 탁 터지고 온화한 품격을 가진 이면 일자불식이라도 참 시인일것이요, 성미가 빽빽하고 속취가 분분한 자라면 비록 종일 글을 깨물거나 글씨를 씹고(교문작자) 쓸데없이 문장이 장황해도(연편누독) 시인이 될수없다」고 한것처럼 만약 소방하지 않다면 어찌 좋은 화가일수 있느냐고 반문한다.그러나 논리는 정연하고 음성은 따뜻할지라도 차고 냉정할 때가 오히려 그답다고 할 수 있다.그만큼 원칙을 중히 여기고 순리적인 흐름을 수용하는 주의다. ○목선이 긴 비마등 이채 옛선비의 의지가 몸에 밴 그의 기상은 지금도 내일모레면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라고는 짐작되지 않는다.그림의 격에 대한 식을줄 모르는 정열과 큰 그림을 그릴 때의 현완직)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아 보는 이로 하여금 범접 할 수 없는 위엄을 준다.그의 성격의 일면은 60년대 중반 일본 중국화풍을 모방한 국적불명의 그림들이 쏟아져나오자 이를 한심하게 여긴 나머지 한 신문에 기고한 글만으로도 알수 있다. 우리의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남의 나라에서 시도하는 것에 관심을 보이며 이를 모방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망국족자 상선자망기문화」,즉 「나라와 민족을 망치는 자는 언제나 먼저 스스로 그 문화를 망친다」는 내용이 그것이다.이는 화단의 경각심을 촉구하여 지식있는 많은 층의 호응을 받았었다. 그림도 그렇다.누구라도 그의 그림을 보면 그것이 남정화인줄을 한눈에 알아본다.한국적인 노송과 강안의 야트막한 산들,청결하게 빗어넘긴 여인의 머릿결과 잔잔히 치켜올라간 눈매,소년의 외로운 등모습과 목선이 긴 비마는 한국적인 비감의 정서를 무위로 관조하고 있다. 돛단배의 돛과 선비의 취월창의,멀리 지나는 여인의 치맛자락을 바탕색인 군청 비취록과는 달리 호박색이나 산호색으로 점을 찍어 청색 비단보에 싸인 별빛같은 효과를 내는 것도 그만의 채색기교라 할수 있다. 그의 색조는 초기에는 물기가 마르기전에 발묵 채색하는 선염법을 쓰다가 피카소에 심취했던 젊은 시절을 되살려 검푸른 청남과 여명으로 영롱한 운기를 살려낸다.이른바 오채가 깃든 먹과 쪽빛 섞인 청화색은 광활한 하늘로 배분하고 준열한 한 획의 선은 산의 기개로 과시된다.이때 강을 사이에 둔 언덕은 부세의 영욕을 적멸한 피안이며 인물들의 표정에는 상락이 깃들여 정중동의 관념산수와 동중정의 실경산수의 요소를 자연스럽게 함축시키고 있다. 「여기에 무한감을 수반하지 못하면 살아있는 그림이 될수 없다」는 생각에서 그는 화면에다 우주로 통하는 공간을 설정하고 먹과 선으로 공간을 공략하여 여백과 색채가 어울린 기운생동을 성취해낸 것이다. ○28세때 대통령상 받아 이런 측면으로 추적한다면 그림속의 주인공들은 그의 소년시절의 시심을 간직한 것처럼도 보인다.혹은 언덕에 기대어 앉거나혹은 범주에 몸을 실은채 먼 강산을 우러른 소년은 과연 무엇을 생각하며 그 시선은 어디에 두고 있는가. 그는 충남 연기의 한학자(부친 박상래)집안에서 태어났다. 비교적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외조모에게 천자문을 배우고 부친에게 붓글씨를 익히는 어린시절을 보냈다.청주상고에 다닐 때는 문학지망을 꿈꾸기도 했으나 부친은 그림 그리는 것을 말리진 않았다. 서울에 올라와 사직동에 있는 청전 화실에 드나들면서 초기엔 인물화를 그렸고 서울대 미대에 입학하자 「근원수필」로 유명한 김용준과 심산 노수현 월전 장우성을 사사, 일찍이 청전은 고귀한 품성을 지닌 이 미소년의 범상치 않은 재질을 보고 이미 「일총한 화가탄생」을 주변에 일러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학재학 시절에는 그림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상명여고 동흥중 성동고등에 시간강사로 출강,당시 상명여고 교감으로 있던 문학평론가 곽종원씨가 전임을 맡기려하자 그림 그리는 시간을 빼앗기게 된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는 강직한 청년기를 보냈다. 그 시기엔 학교 숙직실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서책들을 난독하면서 인생에 대한 무상에 빠져 술로 밤을 지새는 경우가 많았다.가슴속에 이유 모를 비감이 가시지 않아 그림의 소재도 유랑극단의 곡예사나 피리불며 정처없이 떠도는 소년의 방황에 그쳤다.그러다가 인생을 극도로 비관하는 염세주의와 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한 폐인이 되고 말리라는 자책끝에 새로운 정신세계를 열고 다시 화폭과 대좌했다. 28세때 제4회 국전에서 「선소운」이란 인물화로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그는 비로소 독자적인 채색과 여백의 미를 화면에 전개해 나갈수 있었다. 지금도 그는 골프나 바둑이나 술과 텔레비전에 이르기까지 그림에 방해가 되는 일은 일체를 삼간다.그의 취미는 일요일 등산하는 것과 난과 수석뿐이다.난은 섬세하고 유연한 동양화의 선을 감춘데다가 순수한 향기로 정신을 수려하게 정화시킨다는 차원에서 각별한 애정을 지니는 듯 하다. 그외 그의 일상생활은 비교적 단조로운 편이다.국전 대통령상 수상기념으로 그에게 남정이란 아호를 지어준 소전 손재형 소설가 유주현과 교분을 나누었으나 그들은 고인이 된지 오래이고 지금은 서울대 시절의 스승인 월전과 시인 김춘수 정병욱등과 담소를 즐긴다.가족은 부인 장신애여사와 큰자녀들은 출가하고 두딸이 있다. ○“품격 높은 예술” 극찬 그의 결벽한 일면은 그의 개인전 팸플릿에 반드시 이경성의 서문만을 고집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화단일각에서는 이를 섭섭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지만 이경성과는 이대교수로 함께 재직하면서 그의 제작의 내부까지를 일일이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평론가의 넘치거나 치우치지 않는 「남정화론」을 굳게 믿는 것 같다. 이경성은 남정의 작품을 「한마디로 격조의 예술」로 천명한다.「품격이 높고 예술적으로 성숙되어 정신과 기술을 아울러 갖췄을 뿐만 아니라 북화적인 큰 스타일과 남화적인 정신세계가 어울려 새로운 한국화를 만들어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색채를 화면에 부여함으로써 남정은 그곳에 반드시 존재돼야할 바위나 산이나 사람을 만들어낸다.이른바 모든 사물의 전화가 그의 날카로운 붓끝에서 창조되고 그렇게 창조된 사물은 영원한예술로서 존속된다.인위와 조작이 없는 「순도높은 인품이 담긴 작품」,그리고 세련되고 치밀하게 계산된 공간처리와 평면감각을 극도로 추구하여 회화의 본질을 회복시키고 있다.이렇게하여 그는 한국 현대회화사상 우뚝한 봉우리중의 하나로 서게 되었다. 내년은 그의 열번째 개인전이 잡혀있다.그러나 변화추구보다 신운이 깃든 절제의 필치로서 그는 진실하게 화면을 지휘하는 시기다.따라서 능란한 능품이나 기교적인 묘품,뛰어난 절품을 지나 화가 최고의 영예인 신품의 화경에서 명품절색을 경이로 펼칠 것에 틀림없다. ▷연보◁ ▲1927년 충남 연기출생 ▲1949년 국전 제1회부터 81년까지 30회출품 ▲1952년 서울대미대 회화과졸업 ▲1953년 국전 특선및 국무총리상 ▲1954년 대한미협전서 공보실장상 ▲1955년 국전 대통령상,대한미협전 국무총리상 ▲1956년부터 이대미대교수 ▲1957∼79년 국전초대작가,국립현대미술관초대전 심사위원·초대작가 선정위원,국전심사위원및 심사분과위원장,국전 운영위원 ▲1958년 첫 개인전 ▲1960년 묵림회 창립회원 ▲1962년부터 서울대미대 교수 ▲1964년 청토회 창립회원 ▲1964∼81년 「19 10년이후의 한국미술」「해방이후의 한국화」「오원 장승업연구」「신벽화 연구」등 논문발표 ▲1965년 도쿄 일동화랑 개인전 교토 토교화랑 개인전 ▲1973년 세종대왕기념관 기록화(역진개척도)제작 ▲1976년 스웨덴 스톡홀름 개인전(그라피오 테케트 화랑) ▲1977년 개인전(현대화랑),중앙미술대전 심사위원 ▲1980년 개인전(현대화랑) ▲1981년 3·1문화상,서울시 문화상심사위원,유럽및 미국의 미술관 박물관 미술교육시설 시찰 ▲1982년 일본서「한·일·중 동양화3인전」(주일 한국문화원),한미수교 1백주년기념 사절단으로 도미 ▲1983년 대한민국 예술원회원 이후 해마다 예술원회원전 ▲1986년 이대대학원 교수 ▲1987년 예술원상,박노수미술전(백악미술관),하와이 동서문화협회 초청전시 ▲1989년 서울미술전 추진위원장 ▲1991년 예술원미술분과회장,이대정년퇴직,현대미술초대전추진위원 ▲1994년 5·16민족상 학예부문상,예술원 개원40주년 기념전 ▲ 대한민국 예술원정회원
  • 구소,군동원 「인체 핵실험」/54년 우랄서

    ◎4만여명 폭심 진입… 상당수 사망/일 마이니치,당시 비디오 입수 폭로 【도쿄=강석진특파원】 일본의 마이니치신문은 20일 구소련이 지난 50년대와 60년대에 실시한 비밀 핵실험훈련의 영상을 입수했다면서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급의 슈퍼 수소폭탄 폭발모습을 1면 머리기사 및 사회면 2개면에 걸쳐 보도했다. 이 신문은 히로시마 투하 원자폭탄의 1천5백∼3천배 위력을 가진 슈퍼수소폭탄 및 원자폭탄 실험과 「인체실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군사훈련 및 구소련의 핵전략이 기록돼 있다고 전했다. 비디오에 담긴 강력 수소폭탄 실험은 61년 2차례 노바야젬랴에서 실시된 30메가t,58메가t의 슈퍼 수폭실험 기록으로 추정되며 「세계에서 행해진 최대의 핵실험.수천만톤의 위력」이라는 해설이 붙어 있어 냉전이 피크를 이루고 있던 당시 소련이 핵전력의 확충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음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또 비디오에 담긴 영상에는 한국전이 끝난 1년 뒤인 54년 9월 우랄평원 남부의 인구밀집도시인 쿠이비셰프시 부근에서 플루토늄 원자폭탄을실제 투하한 뒤 아무런 방호장비도 착용하지 않은 병사들을 폭발 중심지로 진격시키는 인명경시의 「인체실험」도 행해졌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당시 소련군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과의 핵전을 가상,실험동물등을 폭탄투하지역에 배치해 생물영향을 확인했을 뿐 아니라 병사 4만7천여명을 투하 1시간만에 방호장비 없이 폭심에 진격시킴으로써 이 가운데 상당수가 피폭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 인간문화재 만정 이소희(이세기의 인물탐구:62)

    ◎맑고 구성진 목소리 “당대의 명창”/13세때 이화중선 소리에 매료… 송만갑 문화 입문/19세때 「춘향전 전집」 내고 72년 미 카네기홀 공연/“팔순기념무대 열어 사그라진 목소리 펼쳐 보이고파” 「천지 삼겨 사람이 나고,사람 삼겨 글만글저,뜻정자 이별별자 어이허여 내셨던고.뜻 정자를 내셨거든 이별 별자를 없었거나…’ 이는 「춘향가」중 「옥중장탄」이다. 「천지삼겨」는 정정렬 바디로 박녹주이후 만정 김소희만이 꿋꿋한 옛맛을 이어받고 있다. 널리 알려진대로 만정은 국악의 대가이자 우리가 세계에 자랑해 마지않는 인간문화재다. 만정을 둘러싼 찬사는 책한권을 꾸며도 넘칠 것이다. 이대교수이며 국악작곡가인 황병기는 그의 소리를 「가을밤 기러기소리」에 비유했고 음악평론가 서우석은 「낭랑하고 확실하게 뻗어나가는 절세의 명창」,소설가 박경수는 「민족의 한이 담긴 애원성의 절창」으로 표현하고 있다. 과연 만정은 그 음색이 맑고 차가우면서도 그 안에 이른 봄의 매화향기를 머금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더구나 그의 비절한 계면조는 억지 눈물을 강요하는 청승푸념과는 달리 안으로 한을 참아낸 고고한 유열이 깃들여있다. 이는 곧잘 강주 사마의 청삼을 눈물로 적신 「비파행」의 한구절에 비유되어 「옥반에다 크고 작은 구슬을 떨어뜨리듯」 「홀연 은병이 깨지며 물줄기 쏟아져내리듯」 애절한 사연이 굽이굽이 엮어지고 우조 또한 「철갑두른 기마병이 돌격하여 창칼을 부딪치듯」 웅장청원과 기염만장을 토해낸다. 1936년 일본 빅터레코드가 출반(서울음반 복각)한 「춘향전 전집」을 들어보면 열아홉살의 앳된 목이지만 또박또박한 발음이 청순하고 수줍은 느낌을 살려 그의 가락위에서 듣는 이의 흥취가 잦아들고 휘몰아친다. ○동·서편제 나눔은 무리 애원성의 진양조로 인해 만정은 서편제의 일인자로 손꼽히고 있지만 넉넉하면서도 화평한 평조와 경드름 설렁제를 두루 구사하여 어느 한 창제에 그를 못밖는 것은 무리가 아닐수 없다. 명인의 자질은 무엇보다 타고 난 소리와 홍진을 뛰어넘는 격조라면 이를 고루 갖춘 이가 아마도 만정일 것이다. 만정은 무대에서 관중을 압도하는 자태와 인물과 예인으로서의 조건에서 한치의 허점도 찾아볼 수 없다. 「노래를 하다보니 노래가 모두 시라 가사와 창을 올바로 알고 노래부르기 위해」 그는 등불을 돋워놓고 고전을 탐독하고 묵필을 가다듬어 묵정 그윽한 속에 노래의 진수를 아로새겨왔다. 여기에 가야금 거문고와 양금 살풀이춤이 뛰어나 그에게 가야금 가락을 닦아주던 김윤덕은 「만정은 창의 최고이지만 만약 가야금을 했다면 누구도 미치지 못할 명인이 되었을것」을 아쉬워했고 원로국악인 성경린은 「김소희의 춤은 소리보다 뛰어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의 판소리 더늠은 방정하고 단아하다.그리고 단순한 득음이 아닌 심득의 창성으로 관중을 사로잡아 지금까지 그가 공연한 판소리 무대는 흥청거리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공연이 있는 날은 자주 댕기들인 쪽진 머리에 옥비녀,옥색치마로 화사하게 단장하고 쥘부채 하나만으로 만마를 다스리고 천하를 호령한다. 수많은 공연중에서도 지난 84년 동아일보가 주최한 명인명창초대 공연은 그의 판소리의 위력이 얼마나대단한가를 한눈에 증명한 감동의 무대였다. 그날의 청중은 대학생에서 직장인,멀리 지방에서 올라온 촌로에 이르기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을 구름같이 메웠고 객석은 시종 박수와 추임새로 「국창」에 대한 예우를 지켰다. 만정 역시 칠순을 눈앞에 둔 나이와는 상관없이 정확한 발음에 적절한 극적표현 그리고 구성진 수리성과 질감이 풍부한 방울목으로 목을 굴려 공연이 진행되는 2시간을 정교하게 수놓아갔다. ○전 일본 순회공연 가져 특히 「춘향가」중 「오리정 이별」대목은 자진모리 장단을 엇박으로 바꾸면서 원박으로 되돌아가 중모리로 마무리짓는 상성의 극치를 보였다. 이 대목에 이르면 아무리 「소리는 타고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의 소리목에 깃든 공력앞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런 공연은 그의 전성기인 60∼70년대에 미 카네기홀과 링컨센터에서의 기립박수를 꼽을수 있다. 또 일본 요미우리신문이 초청한 전일본 순회 공연도 한국 국창의 긍지를 마음껏 과시한 역사적 무대의 하나다. 만정은 평소 겸허하고 따사로우나저속하고 부당한 천격을 용납하지 않는다.후학들이 실수로라도 경박한 언행을 저지르면 그 자리에서 엄히 나무라고 자세를 바로잡아준다.그러나 사소한 일에 연연하거나 사적인 인맥으로 사람을 평가하기보다 상대방이 지닌 기량과 미점을 적소에 둘줄 안다. 예를들어 국악계는 계보에 엄격한 편이지만 그는 자신이 키운 성창순을 정권진에게 보내 강산제를 이어받게 했고 신영희를 박초월에게 소개하는등 그 스승의 좋은 대목을 제대로 배울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2년전 동숭아트홀에서 외동딸인 박윤초가 판소리 독창을 열었을때는 딸에게 『너 비위도 좋다.그 소리를 가지고 어떻게 노래하느냐』고 나무라면서도 막상 공연날은 무대에 나와 『아직 미거하나 후진을 키운다는 뜻에서 격려해달라』고 부탁하기를 잊지 않았다.후계자 자리를 딸에게 물려주게 되느냐는 문제도 『제가 잘하면 물려줄 것이요 잘못하면 어쩔수 없다』고 냉정한 면을 지킨다. 만정은 이제 국악계의 어른으로서 국악이 발전되어지는 과정을 그 한가운데서 지켜보는 위치다.지난해 신병으로 협회이사장 자리를 물러나면서 『원래 이사장 자리라는 것은 국악실력보다는 단체를 잘 이끌고 운영할수 있는 실무자가 바람직하다』는 이유로 이성림을 추천했고 이사장 선출로 야기될 마찰을 미연에 방지하는 결단을 보였다. 만정의 어린시절은 모든 「끼」있는 예인의 삶이 그러하듯 모진 가난과 슬픔의 기록이 점철된다. 판소리의 태두인 동리 신재효를 배출한 고창 흥덕에서 출생,부모의 불화로 부친은 타관으로 떠돌고 모친마저 친정으로 가버리자 친척집에 얹혀서 고아처럼 자라났다. ○「천에 하나」 어려운 천재 광주여고보에 들어간 13살 되던해 당대 명창이던 이화중선의 공연을 보고 장래 「소리하는 사람」이 될것을 결심했고 동편제 소리의 대가인 송만갑문하에 입문한지 1년만에 남원명창대회에서 1등,송만갑은 미려청아한 소리를 지닌 어린 소녀를 향해 「천에 하나 나오기 어려운 천재」임을 인정하여 수업료도 받지않고 그의 모든 것을 전수시켰다. 이어서 정정렬에게 「춘향가」를 비롯,화순의 박동실에게 「수궁가」「적벽가」,김계문에게 향제가곡을 사사하고 이승환에게 거문고,강태홍 김윤덕에게 가야금등 금과옥조와도 같은 스승들을 거치면서 국악의 가시밭 길을 무난하게 헤쳐나갔다. 21살에 결혼하여 10년만에 부군을 잃고 3남매를 혼자서 키우면서 속창 속악의 천시속에서 서너명을 앉혀놓고 공연을 한적도 있고 조선창극단 시절에는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내용때문에 왜경에게 붙잡혀 유치장 신세를 진적도 있다. ○소희이름 이모가 지어 조선성악연구회에 드나들던 소녀시절 본명 김순옥을 버리고 이모인 김남수씨가 지어준 「소희」란 이름을 가졌다.아호 「만정」은 「날이 갈수록 잔잔히 이름을 날리라」는 뜻으로 사주를 보는 이가 지어준 것이다. 만정은 지난 25년간 살았던 종로구 화동 골목안의 한옥을 떠나 84년 삼청동 쪽에 위치한 소격동으로 이사하면서 비로소 연탄불갈기에서 벗어났다. 지금도 결혼하지 않은 아들(준석·46·상업)과 둘이 살면서 손님이 오면 손수 문을 따주고 제자를 가르치고 밥짓고 빨래한다. 그만큼 그의 생활은 궁핍이 펼날이 없이 조금이라도 여유가생기면 가난한 제자들을 데려다 가르쳤다.지금은 국악계의 중진이 된 김소연 안향련이 그들이고 영화 「서편제」로 스타가 된 오정해는 8년간 이집에 머물면서 그가 세운 서울국악예고를 나왔다. 찬연한 오늘은 참담한 어제가 있었기에 얻어진 결과일 것이다. 지난 1,2년 병치레로 쇠잔해졌을 망정 그에게선 여전히 「닦은 자의 비어있는듯 차있는(수자 여하이유실)」예술불멸만이 돋보인다. 그리고 모진 시간속에서도 국창의 기개를 잃지않아 『만약 그때까지 살수 있다면 팔순 기념무대에 서서 사그라지면 사그라진대로 나의 목을 숨김없이 펼쳐보이고 싶다』고도 말한다. 한 시대를 주름잡던 화려한 흔적을 감추고 이제 역사의 뒤안길에 서려는 예인의 모습에는 자신을 끝없이 탁마하며 살아온 정제된 아름다움만이 하나의 구둣점처럼 선명하게 찍혀있다. □연보 ▲1917년 전북 고창 출생,본명 김순옥 ▲1930년 흥덕공립보통학교 졸업 ▲1932년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2년 수료 ▲1929∼34년 송만갑에게 「심청가」「흥보가」사사 ▲1936년 일본 빅터 오케이레코드 전속,「춘향전전집」취입 ▲1948년 여성국악동우회 설립 ▲1954년 민속예술학원(서울국악예고 전신)설립 ▲1959년 국악30년 김소희 판소리첫번째 독창회(서울 원각사) ▲1962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파리국제민속예술제 참가이후 해마다 세계 각국순회 공연,신호열씨에게 서예사사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제5호 판소리 기능보유자),뉴욕 아시아학회 초청 미국공연 ▲1967년부터 국전서예부 연3회입선 ▲1969년 일본 요미우리신문주최 요미우리홀 공연,전일본지역 순회 ▲1972년 미국카네기홀서 김소희 판소리독창회,뮌헨올림픽 참가공연 ▲1973년 국민훈장 동백장 수상,「심청가전집」(5장)출반 ▲1977년 불우이웃을 위한 회갑공연(서울시민회관)「춘향전」완창 출반 ▲1979년 김소희 국악50년 기념공연(세종문회회관),고향 흥덕에「만정 김소희여사 국창기념비」건립 ▲1982년 제1회 한국국악대상 수상,첫민요 발표회(공간사랑),민요전집 출반(성음사),이대 한양대 출강 ▲1984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동아일보주최 「명창 김소희 판소리의 밤 대공연」(세종문화회관 대강당) ▲1988년 서울 올림픽폐막식 공연,「김소희 구음과 민요」출반(성음사) ▲1993년 국악협회 이사장,94「국악의 해」지정기념 국악제 총지휘 ▲1994년 제1회 방일영국악상 및 11월28일 수상기념공연
  • 「선거혁명」의 메시지/이경형 워싱턴특파원(오늘의 눈)

    공화당의 석권,민주당의 대참패로 끝난 지난 8일의 미국 중간선거는 한마디로 선거혁명이었다. 공화당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집권시절인 지난 54년이후 40년만에 처음으로 상하원을 동시에 장악하는 신기원을 이뤘다.상하양원뿐아니라 주지사도 지난 70년이후 처음으로 과반수이상을 차지했다. 지난 30년간 하원의원자리를 지켜온 토머스 폴리 의장이 무명의 신인에게 패배했다.현직 하원의장이 선거에서 고배를 마신 것은 남북전쟁이후 1백34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이변은 이뿐이 아니다.민주당의 대통령후보감으로 두차례나 물망에 올랐고 정치거물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해온 천부적 대중연설가 마리오 쿠오모 뉴욕주지사 역시 무명의 공화당후보에게 4회 연임의 꿈을 앗겼다.더욱이 민주당의 현직상원의원으로 이번에 앨라배마주에서 당선된 리처드 셀비 의원은 9일 민주당을 탈당,공화당에 귀순하는 해프닝까지 연출했다. 클린턴 대통령의 민주당행정부는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에 완전히 고삐를 잡히게 되었다.공화당이 「예스」를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할 수 없다. 2년전 클린턴 대통령은 당시 부시 대통령의 공화당정부와 민주당이 지배하고 있는 의회가 양립,대결함으로써 『되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만년 교착상태를 지속하고 있다고 비판했다.그는 이를 깨부숴야 미국이 움직일 수 있다며 「변화」의 기치를 내걸고 결국 백악관에 입성했다. 9일 클린턴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민주당의 참패를 시인한 뒤 『국민은 이번 선거를 통해 워싱턴의 정치행태가 바뀌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었다』고 해석했다.이번 선거의 의미를 그의 주석대로 풀이한다 해도 「변화」를 내건 그가 「변화」를 제대로 실현 못한 셈이 된다. 불과 2년전 클린턴후보와 민주당을 밀어준 미국의 유권자는 언제부터 이같이 마음을 바꿔버린 것인가.클린턴 대통령에 대한 사실상의 중간평가에서 미국민은 분명히 그를 거부한 것이다. 이번 선거가 보여준 메시지는 「변화갈구」보다는 민심의 이반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일어날 수 있는지,그리고 누구나 자기들이 유리한대로 민심을 얘기하지만 민심의 계량화는선거를 통해서만이 최종적으로 입증된다는 엄연한 사실일 것이다.
  • 미정치 지각논평 시작됐다/아사히지/미·일·불 언론 사설·논평

    ◎「개혁법안」 양측 대립 격화 소지/NYT/“직무능력 실망” 클린턴의 패배/르몽드 ▷뉴욕타임스 논평◁ 공화당이 상하 양원을 지배하게 된 것은 1954년이래 처음 있는 일로 주요세력판도의 변화가 발생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그러나 과연 이 변화는 영원할 수 있겠는가. 공화당원들은 지나치게 반대만을 내세우다 그들의 기회를 날려버릴 수 있다.또 그들 내부적 이념갈등으로 스스로를 약화시킬 수 있다.클린턴 대통령이 뒤로 돌아 할퀼 수도 있다. 확실히 새로운 공화당지도자들의 금년 수확은 위험하게 보인다.차기 하원의장으로 지목되고 있는 조지아주의 뉴트 깅리치 하원의원은 8일 저녁 인터뷰에서 마치 의장이 된 듯 다수당의 책임을 강조했다.그의 상원 카운터파트가 될 캔자스주의 보브 돌 상원의원은 이날밤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함께 협력해나갈 것을 약속했다.그러나 기자들에게는 『클린턴정책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나타난 것으로 우리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해나갈 필요가 있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새로 의회에 들어온 공화당원들은 나간 사람들보다 더욱 보수적이며 남아 있는 민주당원들은 보다 진보적이다.이 두 그룹은 의료보험법안이나 복지개혁법안등에서 더욱 대립되는 견해로 맞설 것이다.더욱이 클린턴 대통령이 관련된 화이트워터문제등에서는 더욱 광범위하고 거칠게 대립돼 개선의 여지가 없게 될 것이다. 96년의 대통령선거전은 사실상 이미 시작됐으며 어느때보다도 험하고 둔탁하게 진행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보수진영으로부터의 도전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당내에서도 중간선거에서의 그의 패배책임을 물어 많은 도전자들이 나올 것이다. 소수당의 대통령은 협상과 거부권을 조화시켜나가는 능숙한 솜씨를 발휘해야 한다.레이건 대통령의 경우 훌륭한 통치술을 보인 예가 있다. 공화당도 당내 실용주의세력은 약해지고 관념론자들의 세력이 강해질 것이다.그것은 그들이 심하게 분열될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그래서 96년 선거에서의 공화당 대통령후보는 의외의 인물이 지명될 수 있다.이는 결국 이번 선거에서 큰 승리를 얻은 캘리포니아의 피티윌슨 주지사도,콜린 파월 전합참의장도 아닐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공화당은 다수당이 됐다.그러나 권력이란 일시적인 것임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일본 아사히신문 사설◁ 이번 미국 선거결과는 미국사회의 현실에 대해 불만을 누적시켜온 유권자들의 반란이다. 미CBS텔레비전 조사에 따르면 공화당에 투표한 유권자들은 97%가 후보자가 아니라 『클린턴대통령에게 반대의 뜻을 나타냈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워싱턴정치」의 비판자로서 등장했던 클린턴대통령이 2년만에 기성정치를 대표해 불만을 한몸에 뒤집어 쓴 것이다.미국민은 「변화」의 기치를 내걸고 당선된 대통령의 정치로부터 「변화」를 요구하면서 등을 돌렸다고 말할 수 있다. 미국은 일본과 달리 지방분권의 색채가 강하다.민주·공화 양당은 각지에서 걸러져 온 다양한 요구를 받아들여 대통령과 의회의 타협을 통해 국민적 합의를 이루는 것이 당연시된다.그러나 이번 결과는 심각해지고 있는 이민문제를 비롯,국민의 요구가 한층 복잡화하는 가운데 종래의 틀로는 대응하기 어려움을 시사하는 것은 아닐까.그러하다면 미국의 정치제도의 근본을 흔드는 지각변동의 시작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2년전 대통령선거 때 민주·공화 2대정당에 만족하지 못하는 분위기에 편승한 「페로현상」에서도 여실히 나타났었다. ▷프랑스의 르 몽드 사설◁ 미국 민주당은 이번 중간선거에서 예상밖의 놀라운 격차로 참패했으며 이는 클린턴 대통령의 정치적 패배다. 공화당이 상·하 양원을 장악하게 된 이번 선거는 그동안 클린턴대통령의 직무수행에 대한 평가다.그 결과는 미국 행정부의 대외정책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겠지만 국내문제와 관련,클린턴대통령에게 더많은 타협을 강요하게 될 것이다. 클린턴대통령은 실업감소 및 경제성장등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시키겠다는 공약을 지키지 못해 정치적으로 실패했다.그러한 실패의 배경에는 끊임없이 제기되어온 그의 과거문제가 크게 작용한 것 같다. 그러나 미국민들이 정책을 거부했다는 사실이 더 심각한 점이다.그동안의 선거캠페인은 클린턴대통령보다는 부패와 범죄등 미국의 문제를 치유하는데 무능하다는 비판을 받아온 기존 정치인을 겨냥한 것이었다.
  • 참패 민주 자중지란… 공화 잔칫집/미 중간선거 개표 이모저모

    ◎“클린턴과 협력”… 승리한 공화 여유/가주 이민규제법안 반대시위 비상/중산층·30∼40대 유권자 민주 외면 미국 중간선거가 사실상 선거혁명으로까지 불릴 만큼 상하원은 물론 주지사선거에서까지 공화당의 압승으로 끝나자 8일밤 공화당 선거사무실이 마련된 워싱턴의 르네상스호텔은 축제분위기로 들뜬 반면 민주당 선거본부측은 무거운 침묵에 휩싸여 상가집을 방불케 했다. 공화당측에서는 속속 들어오는 당선 소식에 즉석에서 댄스파티를 벌이며 기뻐하는데 비해 민주당측에서는 선거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식은 피자를 앞에 놓고 한숨만 쉬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환호하는 공화당이나 침울한 민주당 모두 이번 선거 결과가 클린턴 행정부의 지난 2년간 국내 치적에 분노한 유권자들의 심판 결과라는데는 한가지 의견을 보이는 모습. ○“그는 미국대통령” ○…공화당이 상하 양원과 주지사선거에서 우세를 보이는 가운데 백악관과 민주당 진영에서는 패배를 인식하면서도 이에대해 애써 초연해하는 모습. 개표 결과에 대한 백악관의첫반응은 대변인 디 디 마이어가 전했는데 『클린턴 대통령은 의회가 누구손에 있건 또 누구든지 그와함께 일하기를 원하면 같이 일하고 싶어할 것』이라면서 『클린턴대통령은 해낼 것이다.그게 그의 일이고 그는 미국의 대통령이며 한때에는 민주당원이지만 결국은 모든 미국인의 대통령이다』라는 것. ○…또한 민주당에 불리한 결과를 초래한 선거결과를 놓고 민주당원들간에는 클린턴 대통령이 막판 8일동안 벌인 선거유세가 유권자들에게 먹혀들지 않은 것이라는 비난성 푸념이 나오기도. 낙선한 사람들은 『수백만달러를 들인 텔레비전 선거유세등이 제대로 유권자들을 설득하지 못했고 클린턴 대통령을 민주당원으로 끌어들여 표를 잃게하는데 작용케 했다』고 패인을 지적. ○…공화당원으로 상원 원내총무인 봅 돌 의원은 『미국인들은 우리당을 다수당으로 만들어줬다』면서 『유권자들은 우리가 대통령과 같이 일할 것을 기대하는 것이지 「그를 잘라버리라」는 것은 아니다』라며 승리속에서도 다소 겸손한 분석을 내리기도. 그는 또『우리는 대통령과 함께 일을 해나가길 원한다.왜냐하면 한 시대에 대통령은 한사람뿐이기 때문』이라고 밝혀 다수당으로서 대통령과 정쟁을 하기보다는 협조할 것이라는 좋은 인식을 유권자에게 심어주기위해 애쓰는 모습. ○…투표장 출구 여론조사 결과 유권자들은 혼탁한 선거 운동과 관련해 공화·민주 양당을 모두 비난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는데 특히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조사 대상인 유권자의 3분의2가 다이안 페인스타인 민주당 상원의원과 경쟁후보인 공화당의 마이클 허핑턴이 상대방을 불공정한 방법으로 비난했다고 지적. ○뉴욕증시 상승세 ○…공화당의 우세가 점쳐지는 가운데 선거가 진행된 이날 월스트리트의 주가는 전반적인 상승세를 기록했으며 30대 공업주 평균지수인 다우 존수 평균치는 21.87포인트가 증가된 3천8백30.74를 기록했다. 이날 주식거래는 1천1백18개 종목이 상승세를 기록한 반면 1천61개 종목은 하락세를 보인것으로 나타났으며 거래 총량은 2억8천9백10만주로 집계됐다. 한편 달러시세는 이날도 하락을 계속,대 엔화비율이 전날 1달러당97.35엔에서 97.11엔으로 떨어졌으며 대 마르크화 비율도 1.5170마르크에서 1.5092마르크로 떨어졌다. ○…이번 선거에서 가장 관심을 모았던 뉴욕주 주지사에 예상을 뒤엎고 공화당의 조지 패터키 후보가 당선되자 4선을 노리던 민주당의 거물 정치인인 마리오 쿠오모 주지사 진영은 초상집 분위기. 공화당 출신인 줄리아니 뉴욕시장의 쿠오모 지지 선언으로 고전을 겪어야 했던 패터키후보 진영은 이날 개표 초반부터 패터키후보가 근소한 표차지만 리드를 계속해나가자 『바이 바이 쿠오모』를 외치며 승리를 자신하기도. 2%정도의 우세를 계속 유지,마침내 쿠오모 후보를 물리친 패터키 후보는 이날 맨해튼 힐튼호텔에 마련된 자신의 선거본부에서 당선수락연설을 통해 『변화를 선택한 뉴욕주민들에게 감사한다』고 말하고 『새로운 가능성의 뉴욕을 건설하는데 힘을 모으자』고 강조했다. ○남·북부 성향 분석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이 공화당에 참패를 당한 경과를 놓고 여러가지 분석이 나오는 가운데 남북의 성향차이를 놓고 분석한 내용이 상당히 설득력있게 지적되기도. 전통적으로 북부는 공화당성향을 보여왔고 남부는 민주당성형을 보여 왔었으나 이번 선거 결과에서는 남부에서 조차 유권자들이 공화당으로 돌아선 것이 민주당의 입지를 더욱 좁혀다는 분석인 것이다. 즉 민주당이 오랜기간동안 우세를 보여왔던 이유중의 하나가 남부지역의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 성향 때문인데 이는 남북전쟁에서 패배한 남부가 노예해방을 이룩한 공화당을 지금까지 기피해왔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민주당의 패인은 변화를 바라는 중산층유권자들이 상대진영인 공화당에 그들의 표를 던졌다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유력. 연간소득 3만∼5만달러인 유권자들의 과반수가 공화당후보를 지지했으며 이는 90년선거에서 야당이었던 민주당에 대한 이들의 지지를 상회하는 것이다. 또 학력도 선거에 큰 영향을 미쳤다. 90년 선거에서 민주당은 거의 모든 학력수준에서 골고루 지지를 받았으나 이번에는 고졸미만이나 대학원이상의 학력을 지닌 유권자들에게서 주로 지지를 얻었다. 반면 공화당은 고졸이나 대졸학력의 유권자표를 다수 획득했다. 또 연령상으로는 중간에 속하는 30세에서 44세사이 유권자의 절반이상이 공화당에 투표,지난90년의 42%에 비해 껑충 뛰어 올랐다. ○…8선 하원의원인 뉴트 깅리치 공화당 수석부총무(조지아주)는 민주당의 벤 존스전의원을 꺾고 9선 고지에 안착한 뒤 일성으로 『공화당이 40석 이상의 리드를 지켜 54년 이후 처음으로 하원을 장악할 것』이라고 말하고 자신이 이제 하원의장직을 맡아야 할 것이라고 호언. 그는 이어 그동안 소수당 원내 총무의 역할에서 벗어나 하원의장으로서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싶다고 희망의 일단을 피력. ○「금권선거」 무위로 ○…2천7백만달러 (2백16억원)라는 천문학적 금액을 선거자금으로 사용,상원선거사상 최고액수를 선거운동비로 뿌려댄 마이클 허핑턴후보(공화)는 엄청난 물량 공세를 폈으나 민주당의 현직 상원의원 다이앤 페인스타인에게 간발의 차이로 낙선. 허핑턴은 캘리포니아주 남부지역및 농촌·강변지역 등에서 선전했으나 막판에 한불법이민자를 자신의 자녀들을 돌보는 보모로 고용한 사실이 들통나 유권자들이 외면했다는것. ◎재선성공 김창준의원/동양인으론 처음… 60% 지지 압승 한국계 정치인 김창준 하원의원(55·공화·미국명 제이 킴)이 8일 실시된 미국 중간선거에서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본토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민주당의 에드 테이지 후보를 누르고 재선된 김의원은 『저의 압승은 한국교민과 아시아계 미국인의 승리』라는 당선소감을 밝히고 『교포들의 성원에 감사한다』고 말했다.그는 로스앤젤레스,샌 버나디노,오렌지 카운티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고 있는 연방하원 41선거구에서 60% 이상의 지지를 얻으며 압승했다. 그의 당선은 경제적 부의 「아메리칸 드림」을 정치적으로 승화시켜 미국내에서 한국인의 위상을 높였다고 할수 있다. 김의원은 예비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당선됐으며 선거구가 공화당 강세지역인데다 초선으로 활발한 의정활동을 했다는 평가를 받아 당선이 예상됐었다. 연세대를 졸업한후 지난 61년 미국으로 건너온 김의원은 남가주대학 공대에서 토목공학과 환경공학을 전공했다.그후 지난 77년 「제이킴 엔지니어링」이라는 설계회사를 설립했으며 현재 전문직원 1백50명의 중견기업으로 키웠다. 접시닦기 아르바이트등 어려운 시절을 극복하고 정치인으로 성공한 김의원은 부인 김정옥씨와의 사이에 2남1녀를 두고 있다. 그는 이번 재선으로 지난해 자신의 회사인 제이 킴 엔지니어링의 돈을 선거자금으로 유용했다고 선거법 위반혐의로 연방정부의 조사를 받은 불명예를 말끔히 씻은 셈이다.
  • 미 공화당 압승/중간선거/40년만에 상·하원 모두 장악

    ◎주지사도 민주보다 11석 앞서/클린턴 개혁­재선 타격 【워싱턴=이경형특파원】 8일 실시된 미국 중간선거 개표 결과 공화당이 40년만에 처음으로 하원에서 다수당 자리를 탈환하고 상원 역시 8년만에 다수당 위치를 되찾는 한편 주지사 선거에서도 민주당을 완전히 따돌리고 압승하는 등 사실상의 선거혁명을 이루었다. 이에 따라 남은 2년의 임기 동안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와 함께 정책을 펴나가야 하는 빌 클린턴 미대통령은 앞으로 의료보험개혁 등 주요 개혁입법 추진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물론 오는 96년의 대통령 재선 전략에도 큰 차질을 빚게 됐다. 예상을 뒤엎고 공화당에 압승을 안겨준 이같은 선거결과는 클린턴 대통령의국정운영 전반에 대한 미국민들의 불만이 표출된 때문으로 분석된다. 개표 결과 공화당은 4백35명 전원을 새로 뽑은 하원 선거에서 선거전보다 48명이 늘어난 2백26명을 당선시켜 1954년 이래 처음으로 하원에서 다수당의 위치를 되찾았으며 민주당은 현재의 2백56석에서 크게 준 2백8석 확보에 그쳤다. 또 1백개 의석중 35석을 개선하는 상원에서도 공화당은 22석을 휩쓸어 이번에 개선 대상이 아닌 21석까지 합쳐 상원내 총의석 수를 53석으로 늘렸다.공화당의 종전 의석수는 44석이었다.반면 민주당은 13석 당선에 그쳐 종전보다 9석이 줄어든 47석으로 상원내 소수당의 위치로 전락했다. 이밖에 36개 주지사를 새로 뽑는 선거에서도 공화당은 25개주에서 승리한 반면 민주당은 11개주에서의 승리에 그쳐 주지사 수에서도 24년만에 공화당이 민주당을 앞지르게 됐다. ◎김창준씨 하원의원에 재선 8일 실시된 미국 중간선거에서 한국계 김창준 연방하원의원(공화당)의 재선이 확정됐다. 김창준의원은 초반 개표결과 압승이 확실시됨에 따라 개표가 진행중인 상황에서 이날 밤11시30분쯤 승리를 선언했다.
  • 클린턴 「미온개혁」…미 국민 등돌렸다/미 중간선거 민주참패 원인

    ◎일관성 잃은 외치·잇단 스캔들에 “불만”/민주지배 정치에 대한 변화열망 한몫 8일 밤(현지시간) 미국의 중간선거 개표결과 공화당은 상하원에서 다수당을 차지하는등 압승을 거두었다.이번 선거에서 공화당이 대승하고 민주당이 참패를 한 원인은 무엇인가. 그 원인은 3가지로 나눠 분석할 수 있다. 첫째는 클린턴 대통령의 민주당행정부가 이끌어온 지난 2년의 치적에 대해 미국민이 평가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본래 중간선거는 현직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클린턴 대통령의 인기자체가 승패의 주요요인이 된다.이번에도 클린턴 대통령의 인기가 막판에 다소 상승하는 듯했으나 결국 하향곡선으로 끝나고 말았다.클린턴 대통령은 취임직후부터 화이트워터 스캔들과 성추문,그리고 이른바 「아칸소사단」의 잇따른 물의등으로 국민의 신뢰를 쌓지 못했고 그의 최대공약인 의료보험개혁은 사실상 물거품이 됨으로써 그의 내정개혁도 벽에 부딪친 것이다. 대외정책에도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물론선거 3주전의 북한핵문제의 타결을 비롯,중동평화구축,아이티사태의 해결등 몇가지 외교적 업적을 올리긴 했으나 전반적인 평가를 뒤집기는 역부족이었다. 뿐만아니라 지금까지 중간선거에서는 늘 대통령이 소속하고 있는 집권당이 평균해서 상원에서는 3∼4석을 잃었고 하원에서는 23∼24석을 잃어왔다. 이같은 집권당의 마이너스 프리미엄현상이 클린턴 대통령에 대한 낮은 지지도와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민주당에 패배를 안겨주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는 현역의원들이나 현직 지사등 기성정치인들에 대한 유권자들의 염증과 이들의 정치행태에 대한 불만·반발을 들 수 있다. 이번에 선거를 실시한 35석의 상원의원의석 가운데 22석은 민주당소속이었고 13석은 공화당이었다.또한 현직을 은퇴하는 9명 가운데 6명이 민주당소속이었다.이같은 분포는 상대적으로 기성정치인·현직의원에 대한 반감분위기가 민주당측에 더 많은 타격을 줄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기성정치권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만은 의회가 생산적인 운영을 하지 못하고 대립과 갈등만되풀이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이같은 유권자의 인식이 제도로서 구체화되고 있는 것이 의원의 연속임기제한운동으로 최근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가고 있다. 셋째 민주당의 장기적인 의회지배에 대한 거부가 미국민 사이에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시절인 지난 1954년이후 40년동안 하원을 지배해왔고 상원은 지난 8년간 다수당의 지위를 유지해왔다.40년간의 일당지배를 종식시켜 「변화」를 추구하자는 공화당의 호소가 상당히 먹혀들어갔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공화당 압승이후 미 정국 기류/의회 보수파… 클린턴 시련 불보듯/진보정책 주춤… 재선가도 먹구름 공화당이 사실상 상하원을 장악하고 주지사선거에서도 압승을 거둠으로써 클리턴 대통령의 민주당정권은 앞으로 상당한 시련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미의회의 지배정당이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바뀐 대역전현상은 이념면에서는 의회의 보수화색채를 강조하고 클린턴 대통령의 국정운영면에서는 공화당과 타협을 하지 않으면 한치도 움직이지 못하도록 족쇄를 채울 것으로 예상된다. 무엇보다 클린턴 대통령의 향후 국정운영방식은 지난 2년과는 사뭇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클린턴 대통령이 자신의 공약등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 입법 뒷받침을 받으려면 공화당의 의회지도부와 협의를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그러나 문제는 의회의 통과를 확보하려면 클린턴 대통령이 당초 추진하려한 노선이나 방향과는 상당히 달라지더라도 이를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민주당의 진보적 정책이 의회와의 타협과정을 통해 공화당의 보수노선과 혼합되어 본래 의도한 모습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대안으로 변하더라도 감수해야 되는 것이다. 이같이 타협이 가능한 성격의 입법이면 좋지만 사회보장확대,낙태허용,국방비대폭삭감,의료보험개혁등 양당간에 입장이 상이한 정책들은 행정부와 의회의 교착상태를 초래할 것으로 보인다.지난번 부시 대통령시절처럼 공화당행정부와 민주당지배의 의회가 대립할 경우 정치는 한걸음도 움직이지 못한 채 또다시 법안제출→부결,입법조치→거부권발동등 악순환의 쳇바퀴를 돌게 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둘째는 클린턴 대통령의 96년도 재선을 위한 정치기반이 상당히 취약해지는 결과를 초래하고 이는 결국 그의 재선도전을 무산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유권자의 민주당정권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도 그렇지만 대규모 대통령선거인단을 보유하고 있는 「빅 스테이트」의 주지사선거에서 민주당이 패배한 것은 클린턴 대통령의 96년 재선가능성을 크게 낮춘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민주당의 거물 쿠오모 현지사가 패배한 뉴욕주,조지 부시 전대통령의 아들인 부시2세후보가 당선된 텍사스주,피트 윌슨 현지사가 당선된 캘리포니아주등 「빅3」주가 모두 공화당의 수중으로 들어간 것은 클린턴 대통령의 재선기반에 결정적 위협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셋째 미의회의 보수화 혹은 민주당의 중도화현상이 이번 선거결과로 촉진되고 이에 따라 클린턴 행정부의 각종 시책이 이같은 이념적 분위기속에서 입안되고 집행될 것으로 예상된다.의회의 보수색채강화는 국방비의 대폭적 삭감에 제동을걸 가능성이 없지 않고 그동안의 진보적인 인권외교정책에도 다소 영향을 미칠 것으로 분석된다. 미의회가 공화당의 장중에 들어간다 해도 클린턴 행정부의 구체적인 대외정책이나 통상정책이 당장 변화되지는 않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
  • 미 오늘 중간선거… 공화 우세/상원 35·하원 4백35명 선출

    ◎민주당 패배땐 클린턴 입지 축소 【워싱턴 연합】 공화당이 최소한 상원의 다수의석을 차지할 것으로 전망되는 등 막판 우세를 확고히 하고 있는 가운데 미국 전역에서 8일 상원의석의 3분의 1과 하원의석 전부,그리고 36명의 주지사를 선출하기 위한 중간선거가 실시된다. 워싱턴 포스트지는 6일 야당인 공화당이 상원에서 다수의석을 장악하고 하원에서도 의석을 대폭 늘릴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이 신문은 전국 50개주를 분석한 결과를 취합,백중전이 벌어지고 있는 지역들을 민주·공화당이 똑같이 나눠가진다고 가정할 경우 공화당이 상원에서 51대 49석으로 다수의석을 차지하고 하원의 경우 과반수에서 4개의석이 모자라는 2백14석을 차지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포스트지는 선거전문가들과의 인터뷰 및 여론조사 등에 비추어 현역의원에 대한 유권자들의 반감,그리고 클린턴 대통령에 대한 저조한 지지도는 민주·공화후보간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는 백중지역에서 공화당 쪽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해줄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그러나 민주당측은 최근 클린턴 대통령이 연일 선거지원 유세에 나서고 미경제가 호전됐다는 통계가 잇따라 보도됨에 따라 의석이 그렇게 많이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특히 민주당원들에게 선거에 적극 참여토록 호소하고 있다.워싱턴포스트지는 설령 민주당이 백중지역의 대부분에서 승리,다수의석을 차지하더라도 새로 구성될 의회가 분명히 더욱 보수성향을 띨 것이라고 분석하면서 클린턴 대통령이 남은 2년의 임기동안 자신의 청사진을 펼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 중간선거 막판판세 전망/공화서 상원54·하원2백25석 확보 예측/일부조사선 “하원은 민주당 지배 유지” 8일 있을 미국중간선거는 현재 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집권민주당이 공화당에게 여소야대의 대역전패를 당할 것인지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로 부각되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가 6일 미전역에 걸쳐 각 정당선거대책간부,여론조사기관,중립적인 선거관측원 등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상원은 공화당이 7석을 더 얻어 51대 49로 민주당을 제압,다수당이 될 것으로 분석됐다. 현재의 상원의석분포는 민주 56석,공화 44석이고 이중 민주 22석,공화 13석 등 35석이 선거를 치르게 되는데 이 전망대로라면 상원의원선거에서 민주당이 대참패를 하게 된다. 반면 하원은 공화당이 현재보다 36석을 더 획득하게 되나 다수당을 차지하는데는 4석이 부족할 것으로 나타났다.현재 하원은 민주 2백56석,공화1백78석,무소속이 1석으로 되어있다.따라서 이같은 분석에 비추어보면 민주 대 공화의석은 2백21석,2백14석이 된다. 이같은 민주당의 대패 전망은 ▲현직의원들에 대한 염증 ▲클린턴대통령에 대한 낮은 지지도가 중요한 원인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만약 공화당이 현재 백중전을 펴고 있는 지역에서 4분의 3을 차지한다면 공화당은 상원에서 54대 46으로,하원에선 2백25대 2백10석으로 민주당을 제치고 의회를 완전장악하게 된다는 관측이다. 그러면 공화당이 8년만에 상원을 지배하는 것이 되며 하원에서 1954년이후 40년만에 처음으로 다수당이 되는 것이다. 의회에서 여소야대가 되면 클린턴대통령의 남은 임기 2년은 절름발이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물론 96년의 재선고지등정이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현재 유권자들중 20%는 일단 유동표로 분류될 수 있으나 현직의원에 대한 염증 등 전반적인 분위기에 비추어 예년보다는 이들의 지지성향이 돌발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은 적은 것으로 보고있다. 뉴욕 타임스는 워싱턴 포스트의 전망과는 다소 달리 공화당의 상원 장악가능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지난달 의회가 휴회에 들어간 직후인 2∼3주전보다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백중전을 벌이고 있는 6개 지역의 당락을 예상하기가 대단히 어렵고 지난 2주동안 각종 경제지표의 향상,외교성과의 확대 등으로 클린턴대통령의 민주당정부에 대한 지지도가 점차 상승하고 있다는 점 등 때문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공화당의 원내의석이 대폭 늘어날 것이라는 사실과 이에 따라 미의회의 보수색채가 지난 2년보다는 앞으로 2년이 훨씬 강할 것이라는 점이다.또한 클린턴대통령의 강력한 정책추진은 매우 힘들 것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전망이다. 지난주부터전국을 누빈 클린턴대통령의 백중지역 지원유세가 얼마나 효과를 거둘지는 알 수 없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상당히 효과를 내고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미의회의 공화당의석이 크게 늘어나 보수색채가 강화되면 클린턴행정부의 대북한관계개선속도,나아가 대북한정책추진에도 상당한 영향이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 중국,이념보다 평화공존 중시/이붕중국총리 이한회견 문답

    ◎“남북등거리정책은 한반도 안정에 도움/한국기업 수준높아… 포철 못가봐 아쉬움” 다음은 이붕중국총리의 내외신 기자회견 내용이다. ­제네바 북미합의를 북한이 이행하는데 중국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북한과 미국이 합의를 이룬 것을 환영하며 한반도 정세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북한이 자기방식대로 합의서를 이행하는 것을 지지한다. ­정전협정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는데 대한 입장은. ▲새로운 체제 수립을 위해 남북한과 관련측들이 참여,노력해야 한다. ­한국의 기업들을 방문하는 일정이 많았는데. ▲이번 방한은 주로 경제적 목적이었다.한국의 기업들은 실력과 기술수준이 높았다.일정이 짧아 포항제철등을 보지 못해 유감이다. ­북한을 방문하기 전에 남한을 방문했는데 둘 사이의 관계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가. ▲중국은 이데올로기나 사회제도보다는 평화공존의 원칙을 먼저 생각한다.중국은 반도의 남·북과 다 좋은 관계를 가질 수 있다.이 정책이 남북의 정세안정 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본다. ­북한의 경수로 건설지원을 위한 국제 컨소시엄에 참여할 뜻은,참여한다면 어떤 부분에서의 역할을 기대하는가. ▲북한이 북미합의서를 이행하도록 하는데 우리 방식으로 지원할 것이다.핵사찰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는 대화와 협상으로 해결토록 도모했다. ­북한내 권력승계 작업은 순조로운가,김정일의 건강상태는. ▲북한은 주권국가다.중국이 선린관계를 유지하지만 북한의 내정에 대해서 다 아는 것이 아니다. ­남북대화 재개를 위해 북한측을 설득할 용의는. ▲한반도 정세안정을 위해 남북간의 다단계 대화를 지지한다. ­등소평의 건강상태는,등소평이후의 중국 권력체제는 어떻게 되는가. ▲중국은 이미 강택민국가주석등 3세대 지도자들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현재 강주석을 핵심으로하는 지도체제가 단결돼 있다.중국정세에 대해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이붕총리 방한활동 뒷얘기/이 총리,서울·제주 오갈때 부인과 팔짱/제주숙소 객실 1백10개로도 모자라 이붕중국총리의 방한은 한반도 주변에서 일고 있는 해빙무드를 맞아 남북간의 화해만이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를 구축할 수 있다는 쪽으로 상호입장을 조율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중국통역원 서툴러 ○…이총리는 이번 방한에 김일성대학출신의 남녀 1명씩의 공식 통역요원을 대동.이 가운데 이총리의 기자회견 전에 심국방 외교부대변인의 두 차례 기자회견을 통역한 여성 통역원 학효비씨는 「한반도」를 「조선반도」로,남북관계를 「북남관계」로 표현하는가 하면 「인터뷰」나 「컨소시엄」등의 간단한 영어도 해석하지 못해 문제점을 노출.이에따라 한승주 외무부장관은 이총리의 기자회견 전날밤 통역자들이 용어선택을 올바르게 하도록 주의시키도록 당국자들에게 지시.결국 이총리의 회견에서는 「북남」대신 「남북」,「조선반도」대신 「반도」라는 용어가 사용. ○“이 총리 바느질 잘해” ○…이총리는 서울과 제주에서 비행기를 오르내리며 부인 주임여사와 팔짱을 끼는 등 사회주의 국가지도자로서는 매우 「자유분방한」 몸가짐을 나타내 관심을 끌기도.주여사는 3일 제주도지사가 베푸는 만찬에서 옆자리에 앉은한외무장관에게 『이총리가 지난 48년부터 54년까지 모스크바에서 유학생활을 해 요리와 바느질을 매우 잘한다』면서 온화한 인품임을 자랑했다고. ○신라호텔서 1박 ○…이총리는 제주도에서 90년 고르바초프 러시아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노태우 당시대통령이 묵었던 신라호텔 6층의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에서 1박.이총리의 일행은 신라호텔의 객실 3백30개 가운데 3분의 1인 1백10개의 방을 차지하고도 방이 모자라 함께 온 50여명의 경제인과 비공식수행원들은 부근 호텔에 묵었다고. ○등소평건강 등 답변 ○…기자회견장에서 이총리는 최고실력자 등소평의 건강상태와 강택민주석과의 관계등을 묻는 질문에 『민감하지만…』이라는 단서를 단뒤 두사람에 대해 「예우」를 갖춰 답변.회견이 끝난뒤 심중국외교부대변인은 『기자들의 질문이 남북관계에만 너무 집중됐던 것 같다』고 가벼운 불만을 표시.
  • 강상호 전북한 내무성 부상(인터뷰)

    ◎“북 세습체제 무너뜨려야 통일 가능”/매스컴통해 국제적인 반북여론 형상 긴요/식량 등 경제원조땐 군비확장 악용 소지 『김정일 북한체제의 실상을 소상히 파헤쳐 한민족이 단결해야 통일도 앞당겨질 수 있습니다』 북한정권 수립후 김일성에게 숙청당해 러시아로 망명했던 전 북한 내무성 부상 강상호씨(85)는 28일 열린 「북한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한 94서울대회」에 앞서 김정일체제 붕괴를 위해 모든 국민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서 열리는 이번 대회의 성격은. ▲서울대회는 북한체제에 반대해 탈출한 망명인사들로 구성된 「구국전선」의 미국·일본·러시아 등의 지부회원 3백여명이 지난해 10월 워싱턴에서 「북한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한 대회」를 가진데 이어 2번째 대회이다.서울에서 대회를 갖는 것은 김일성사후 변화하는 북한 정세에 맞춰 북한에 민주화바람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해외 인사들 뿐만 아니라 한국내 여러 사회단체들의 참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북한에서의 김정일 위치는. ▲그는 머리가 둔하고 영도력이 없다.김정일에 반대하는 삐라가 김일성 장례식이후 평양중앙거리에 뿌려졌다는 점은 인민들이 김정일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의 한 단면이다. ­남북통일의 방향은. ▲김일성이 유언으로 남긴 적화통일을 김정일도 그대로 지상목표로 삼고 있는 만큼 김정일 체제의 실상을 폭로,세습왕조체제를 무너뜨리고 인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제도를 세운뒤라야 통일이 될 수 있다.이를 위해 한국인들은 출판·방송등을 이용,국제적인 반왕조세습체제 및 개인숭배 반대여론을 형성하는게 중요하다. ­북한에도 반체제 활동이 있는가. ▲정확한 수와 규모는 파악되지 않지만 반체제 활동을 하는 단체들이 있다.또 이들 단체는 해외의 반북단체들과 극비리에 연락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김일성사후 북한의 변화는. ▲러시아 하바로프스크등지에서 일하는 북한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볼 때 김정일이 정권을 잡은 후에도 북한은 김일성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나 주민들은 김정일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다.그를 영도자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김정일정권은 어느 정도로 안정적인가.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처 김성애와 아들 김평일을 지지하는 세력과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있으나 이들은 아직 김정일세력에 대항할 힘을 모으지 못하고 있다.따라서 당분간은 김정일 체제가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핵개발 정도는.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지는 않으나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원료는 이미 갖고 있다는 추측과 이미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추측이 2가지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북한이 핵무기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은 높아진다. ­남북통일을 위한 한국정부의 역할은. ▲북한에 식량 등 경제원조를 할 경우 북한이 이를 군비확장에 이용할 수 있다. 따라서 북한을 지원하거나 자극하는 행동은 자제해야 한다. 강씨는 자신이 상임공동의장으로 있는 「조선민주통일 구국전선」과 「북한민주화추진협의회」(회장 이연길)가 공동주최하는 이날 대회에서 북한사회의 개방과 주민들의 인권회복을 요구하는 대회사를 하기 위해 지난 26일 입국했다. 러시아에서 태어난 강씨는 45년 구 소련군에 입대,북한에 진입한 소련군이 철수하면서 북한에 남아 조선노동당 당원으로 공산당 생활을 시작,54년 북한 내무성 부상겸 정치국장에 올랐다. 강씨는 그러나 「개인숭배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공통점이 없다」는 내용의 논문을 내무성 신문인 「내무원」에 게재,혹독한 사상검토를 당한뒤 59년 11월 소련으로 다시 돌아가 김일성부자체제 타도 활동에 앞장서왔다.
  • 금속피로(외언내언)

    철사를 반복적으로 이리저리 구부리면 표면에 금이 가고 한참만에 딱 끊기는 것은 피로가 쌓여 그렇게 되는 것이다.금속 표면에 조금이라도 상처가 생기면 그것을 중심으로 진동이 있을때마다 상처가 조금씩 퍼지고 항복점(강복점)이라 불리는 일정한 한계를 넘으면 금속이 극단적으로 약해져 균열이 생기는 것이다. 과학적 설명으로는 금속재료에 주기적으로 스트레스(stress·응력)가 가해지면 결정내부에 미세한 어긋남이 생겨 틈이 벌어지고 마침내 파괴되는 현상이라 한다.한번 어긋난 틈은 스트레스를 약화해도 본래대로 되돌아가지 않고 나중에는 균열 한계치보다 훨씬 약한 스트레스에도 부서진다는 것. 금속피로라는 단어는 19세기에 처음 나왔다.산업 현장에서 계속 돌아가는 압축기 터빈 펌프등 기계가 진동으로 인한 피로파괴를 일으키는 것을 발견하고도 사람들은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1954년 영국 항공기에서 여압실 사고가 일어난 후에야 공학분야에서 관심을 끌게 되었다고.70년대 후반 대량수송 항공시대에 들어서고 여러곳에서 항공사고가 터지면서 특히 항공기 접합부분의 금속피로 극복에 연구가 집중됐다.항공기나 다른 기계류 설계에서 스트레스가 집중되지 않도록 하는 문제가 집중 연구되고 피로에 강한 금속이 개발됐다. 항공기에 주로 쓰이는 알루미늄 합금에서는 일정한 진동이 1백만번 이상 되풀이되면 항복점에 이른다고 한다.지난 80년대에 있었던 외국 항공과 국내 항공 여객기추락 사고에서도 그 원인중 일부는 날개 꼬리등 이음매 부분이 바람 진동으로 금속피로를 일으킨데 있었던 것으로 진단되기도 했다. 피로파괴는 겉보기가 멀쩡해서 파괴되는 순간까지도 눈에 띄지 않는 일이 많다.따라서 그 예방에 유의해 강재이용 구조물이나 건물 다리등에도 스트레스가 집중되지 않게 설계 시공하는 것이 원칙이다.그리고 사후 점검에는 고도의 기술을 동원한다.한강다리마다 어떤 강재를 어느만큼의 스트레스 계산으로 시공했는지 궁금하다.
  • 시인 미당 서정주(이세기의 인물탐구:61)

    ◎팔순에도 샘 솟는 시정… 문단의 거봉/새로운 언어­독특한 깊이로 감동의 운율빚어/어릴적 가난­방랑 벽이 창작욕이 밑거름으로/“내 숨결 그칠 때까지 시어 더듬고 또 더듬겠다” 1948년 선문사가 발행한 미당의 두번째 시집 「귀촉도」에서 김동리 발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나의 유일한 정신상의 재보로서 쌓아왔다. 그의 뇌락불기한 인격과 자유분방한 시혼은 그 처녀시집 「화사집」을 통하여 이미 세상에 그「비늘을 번득인」바 있지만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건 싫어하는 사람이건 적어도 이 땅에서 시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오늘날 우리들의 머릿속에서 이 혹성의 찬연한 광망과 위치에 등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평자들이 미당을 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용되는 명평이다. 「뇌락불기」란 「마음이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고 남에게 구속되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그만큼 미당의 문학적 족적은 광활하고 높고 깊다. 그리고 훨훨 나는 그의 두루마기 차림처럼 시에 관한한 무장무애하고 무소불위하다. 지금은 문단의 거봉으로 우뚝 서 있지만 미당의 지난 세월은 가난과 슬픔과 방황과 방랑벽으로 그 인생의 절반이 혹독하게 얼룩져 있었다. 어릴 때는 당시를 배울수 있는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만14세 되던해 서울 중앙고보에 입학해서 광주학생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적이 있고 고향의 고창고보에 편입했다가 식민지 교육에 반대하는 집단행동으로 또 한번 퇴학을 당했다.다시 서울로 올라와 극예술연구회 연극배우노릇, 마포 도화동 빈민촌에 입주하여 넝마주이 행색으로 쓰레기를 줍기도 했고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교장이며 존경하는 스승인 석전 박한영을 만나 안암동 개운사에서 능엄경을 공부하게 되었다. ○어릴때는 당시배워 여기에 그치지 않고 만주로 건너가 만주곡량주식회사 연길지점에서 경리과직원이 되는가 하면 김좌진장군과 이승만대통령의 전기집필,「옥루몽」등 옛소설 번역으로 생계를 잇다가 인촌 김성수 집안과의 인연으로 동아일보 사회부장 학예부장을 지내는 등 그의 인생역정은 파란이 깊고 다양하기만 했다. 이토록이나곡절이 심한 방만한 생활덕분에 한때는 자살을 기도하다 미수에 그치고 생명의 존엄을 체험하고 나서야 미당은 비로소 삶에 대한 의욕과 생명의 활기가 몸속에 용솟음치게 되었다. 그는 마침내 조선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광주 무등산 자연속에서 「난생 처음 보는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들과 조우하게 되었고 이무렵 「무등을 보며」「학」「상리과원」같은 명품을 연달아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그의 시들은 끊일줄 모르는 시심과 계류와도 같은 운율의 감동을 자아내면서 마치 가을 한낮 거문고 소리처럼 청랑한 운기로 흥취와 운치를 자아내는 것이 일품이다. 그의 탁월한 시업은 과거로의 관념적 도피나 신비주의에 탐닉한 시절이 있었고 영원의 생명에 대한 명상으로 온자하고 정밀한 내면을 구축하면서 「육체적 인간의 본원적 충동을 순화시켜 어느 순간엔가 숭고한 정신적 표현의 극에 도달」한 것으로 회자되기 시작했다. 최근 「시와 시학」지에서 시인들이 「교과서에 실리고 싶은 시」로 추천한 「무등을 보며」는 명편중의 명편으로 미당이 아직 38세이던 19 53년 「현대공론」에 발표한 것이다. 그때 이 시를 읽은 젊은 이들은 「구구절절 감명을 사로잡는 명구」라든지 「화살처럼 꽂히는 충격」으로 이를 극구 찬양해 마지 않았다.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저 눈부신 햇빛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있는/여름 산같은/우리들이 타고난 살결/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수 있으랴/청산이 그 무릎아래 지란을 기르듯/우리는 우리의 새끼들을 기를 수 밖에 없다…」 미당의 주옥같은 시들을 일일이 다 열거 할 수는 없다. 단지 그가 낳는 시마다 절륜의 절창으로 평가되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평론가 유종호는 「창의성 있는 언어구사와 독특한 깊이와 지혜, 상당량의 시편이 그릇 큰 시인의 구비조건이라면 20세기 우리 시인 가운데서 이러한 조건을 가장 보기좋게 구비한 이로 미당」을 드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과연 언어를 부리는 장인적 기술에서나 직관과 상상의 능력에 있어서나 만인이 칭송하는 대가의 반열에 선 그는 한국적 릴리시즘의 탁월한 정형을 만들어냈고 안주를 모르는 시정신으로 한국의 운치와 위엄을 어느 시에서나 감동적으로 증명해 왔다. 해인사 체류시절 미당을 사로잡은 소쩍새 울음소리는 그에게 불치의 슬픔을 느끼게 하는 음향으로 다가와 저 유명한 「귀촉도」와 「국화 옆에서」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국민학교 시절에 벌써 일본여선생을 흠모하는가 하면 불혹의 나이때도 때때로 여난을 겪게 되어 「나 바람나지 말라고/아내가 새벽마다 장독대에 떠놓는/삼천 사발의 냉숫물」은 미당을 엿보게 하는 낭만시인의 일면이기도 하다. ○속과 선을 아는 성품 만년의 그는 인생을 관조하는 허허로운 마음과 가족을 거느린 가부장적 자세를 빌리고 있으나 「속도 알고 선도 아는 복합적인 성격」과 대체로 괴팍과 까다로움이 승한 편이다. 그 한 예로 70년대 초반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초청으로 영국시인 스티븐 스펜더가 한국에 왔을때 그를 환영하는 자리에서 미당은 취중이었는지 한국의 정상다운 자존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팡이를 휘둘러 「TS 엘리엇이 아니면 돌아가라」고 외친 에피소드를 남기고 있다. 시인 고은이 한때 주란과 폭소버릇으로 위아래없이 오만방자하게 굴자 처음에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어지로운 헛웃음으로 바라보기만 하다가 가족회의끝에 그를 공덕동에서 추방하고 「고은출입금지령」을 내린 일도 있다. 그의 풍류는 나무와 돌과 침향(심향)과 글씨 그림외에도 난취미가 으뜸이다. 지난 70년 25년간 살아온 공덕동을 떠나 관악산밑 사당동으로 거처를 옮기고는 택호를 쑥 봉자 마늘 산자를 따서 봉산산방으로 붙여놓고 그는 한동안 나무심기와 난수집에 주력했다. 시암 배길기와의 광동보세며 삼중당 일력에 자필 시를 써주고 받은 제주한란 이야기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여류시인 김양식과의 중국춘란에 얽힌 대화는 난향같은 일화다. 당시만도 그가 지닌 서른분쯤의 난들은 「겨우 여중 2학년 정도의 잎만 여남은게 솟아올린채 꽃필날이 아득하기만 한데」 난화부재의 겨울날 김양식이 불쑥 전화를 걸어 「대만에서 구해온 중국춘란이 아주 썩좋게 한송이 피었다」고 자랑삼았던 모양이다.이때 미당의 대답이 걸작이다. 「이웃하나가 명주바지를 입으면 여러 가호가 두루 따뜻한거라는데 나도 그 푼수니 염려말고 잘 만끽하시라」고 했다. 그러자 김양식은 가족들과 휴가를 가게되니 「그 사이 며칠만 돌보아주시며 즐겨보시는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미당은 그제서야 눈이 번쩍 띄게 반가워했고 비록 빌렸을 망정 책상위에 난을 놓고 보고 또 보고 난향을 맡으며 「시의 감동이란 것도 내 생애에서 항용 이런 식으로 일어났다. 내가 소유하는 것에서보다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간절해지는 감동으로 시를 쓴 것이 많았다」고 한 산문에 적고있다. ○커피보다는 맥주 즐겨 그의 정열과 의욕은 식을 줄을 몰라 한때는 영어단어를 하루에 수십개씩 외는가 하면 70년 초반부터는 세계를 두루 일주하며 끝없는 여행길에 오르더니 최근엔 세계의 산봉우리를 높이순으로 1천6백여개나 줄줄이 기억해내는 독특한 취미를 보이고 있다. 미당은 올해 팔순이지만 아직도 그 시작은 그의 방창앞에 심은 소나무처럼 청청한 천뢰의 소리를 잃지 않는 기상이다.요즘도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커피보다는 맥주」를 권하고 제자들이 마련한 시낭독회나 남을 축하하는 자리에 자주 모습을 나타낸다. 지난 9일에는 송파문화원에서 열린 국선문학회에 나와 「국선(국선)」이란 모임이름을 지어주고 후배들의 회장추대를 극구 사양하여 주변을 송구스럽게 했었다. 이제 자기자신을 홀연히 내쳐버리는 무집착의 상태에서 그의 최근의 시들은 글맛이 한층 무르익어「아무 말이나 붙들고 놀리면 그대로 시가 되는 경지」다. 산다는 것이야말로 사변의 연속이었던 시대를 거치면서 일찍이 김동리가 지적했듯이 미당은 지금도 「내 숨결이 아주 내 육신을 떠날 때까지는 더듬어보고 또 더듬어」 새로운 시에 대한 분방한 광망을 접어두거나 조금도 늦추려들지 않는다. ▷연보◁ ▲1915년 5월18일 전북고창 부안면 선운리 질마재 출생.서광한씨와 김정현여사의 2남2녀중 장남 ▲1929년 부안 줄포보통학교 졸업.서울 중앙고보 입학 ▲1931년 전북 고창고보2학년 편입,권고자퇴,서울 상경 ▲1935년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입학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시 「벽」당선 ▲1936년 시전문지 「시인부릭」편집인겸 발행인 ▲1941년 처녀시집 「화사집」(남만서고)1백부 한정판 출간 ▲19 48년 동아일보 사회부장 및 학예부장,문교부산하 예술과 초대과장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시분과 위원장 ▲1952년 광주 조선대학 부교수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초대회원 ▲1955년 미국아세아재단 자유문학상 ▲1960년 동국대 부교수 ▲1961년 제1회 5.16문예상 ▲1966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75년 서울 신문회관서 회갑연 ▲1976년 미당시를 주제로한 시화전 서울서 제주까지 6개월간 전시 ▲1977년 한국문인협회 회장 ▲1979년 동국대 정년퇴임,대우교수로 대학원 강의 ▲1980년 동아일보 문화대상 개인상부문 본상 「귀촉도」「서정주시선」「신라초」「동천」「질마재 신화」「안 잊히는 일들」「늙은 떠돌이의 시」「산시」등 시집 14권,「서정주 문학전집」(전5권) 「서정주 시선집」(전2권)등 시 8백여수와 「서쪽으로 가는 달처럼」등 산문집과 여행기가 있음.
  • 전후 일본의 비극 담아낸 양심/노벨문화상 오에는 누구

    ◎67년작 「침묵의 외침」으로 수상/일본 2회 아시아 세번째 영예 금년도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작가 오에 겐자부로(59)는 전후 신문학세대의 기수로 자신의 불운한 가정환경과 폭넓은 정치적 관심사를 진솔하게 문학의 틀에 담아낸 인물이다. 수상작은 초기 대표작 「침묵의 외침」(67년)으로 이 작품은 지식 열정 꿈 야망등이 혼재한 이 세계속에서 어우러지는 인간관계를 그린 것이다. 부유한 지주가문에서 태어난 오에는 57년 「분가쿠카이」라는 문예잡지에 「죽은자의 사치」가 실리면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도쿄대학 불문과 3학년 재학중 단편 「사육」으로 아쿠다가와상을 수상,문단의 촉망을 받으며 작가생활을 시작했다.같은해 3권의 단편집을 낼 정도로 단시일내에 일본 문단의 기린아로 성장했으나 두번째 장편 「우리들의 시대」를 발표하면서 사회·정치비판쪽에 눈을 돌려 신좌익 정치사상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오에의 정치편향은 우익 청년이 일본 사회당 당수 아사누마 이네지로를 암살한 사건에 자극받아 쓴 「세븐틴」과 「정치소년 죽다」등두편의 단편에 극명하게 나타나 우익단체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는 도쿄에서 개최된 「아시아 아프리카작가회의」에 참가하는가하면 구소련 프랑스 영국 등을 여행하며 문학영역을 넓혀갔다.그러나 이같은 범세계적인 활동은 비정상적인 아들의 출산으로 내면적인 성찰과 인간탐구에의 천착으로 변화하게 됐다. 한창 세계적인 문인으로 발돋움하던 60년 결혼,3년뒤 뇌가 비정상적인 아들을 낳은후 새로운 문학적 경지를 개척하게 된 것.이 불행한 체험을 소재로 한 장편 「개인적인 체험」으로 신조사문학상을 받았는데 이 작품은 기형아 출생을 주제로 삼아 인권을 유린당한 전후세대의 문제점을 실감있게 파헤치고 있다. 이후 제2차세계대전의 여파에 관심을 갖게된 그는 히로시마를 방문해 「히로시마 노트」(65년)를 쓰고 70년대 초반 핵시대의 힘의 정치에 대한 우려와 3차대전에 대한 의문들을 반영한 글들을 중점적으로 쓰게된다. 그러나 작품 전체를 강하게 휩싸는 분위기는 비정상적인 아들로 인한 괴로움을 인류의 생존문제로 연결한 것으로이는 83년 출간된 「새로운 사람이여 깨달아라」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은 정신적으로 발육이 부진한 소년의 성장과정과 그로 말미암은 가정내의 긴장과 불안을 그린 것으로 고도의 세련된 문학적 기교와 개인적 고백을 통한 작가의 진솔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한림원으로부터 『「단테」「발자크」「엘리어트」「사르트르」등 서구문학과 작가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는 평을 받은 오에는 부인과 2남1녀와 함께 현재 도쿄에 살고 있다. ▷오에 겐자부로 연표◁ ▲1935년 일본 에히메현에서 출생 ▲고교시절 잡지편집과 시·평론등 창작활동 ▲54년 동경대 문과 입학,그해 9월 희곡 「하늘의 탄식」발표 ▲55년 「화산」으로 「은행병목상」수상 ▲58년 단편소설 「사육」으로 일본 최고의 문학상인 「아쿠다가와상」수상,전후세대의 대표적 작가로 부상 ▲63년 선천성 기형아인 장남 출생 ▲65년 미국 하버드대에 머물면서 흑인시민권운동자들과 만나는등 인권운동에 관심 ▲주요작품으로는 중편소설 「성적 인간(성적 인간)」(63년·국내에번역 소개됨),장편소설 「개인적 체험」(64년·국내에 번역 소개됨),「침묵의 절규」(67년),「홍수는 우리 혼에 이르고」(73년),「핀치 러너 조서」(76년),「레인트리를 듣는 여자들」(82년),「하마에 물리다」(85년)등이 있음.
  • 경주박물관학교 개교 40돌 기념잔치(문화현장)

    ◎「서라벌」 지키고 가꾸기 40년/54년 10월10일 진홍섭·윤경렬씨 등 4인 뜻모아 열어/경주역사·미래교육… 3천여명 수료/학교 발자취 한데 모은 전시회도 개막 경주는 고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박물관이다.경주에서도 국립경주박물관은 문화유산의 보고이다.수많은 유물 가운데 국보로 지정된 성덕대왕 신종과 안압지에서 나온 나무배의 파편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를 따지는 일은 부질없는 일일 것이다. 경주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경주박물관에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하자.그러면 열사람 가운데 한두사람은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른다.『어린이 박물관 학교가 아닐까요』 이처럼 경주사람들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경주박물관학교가 10일 개교 40주년을 맞았다.이날 박물관에서는 그 시작만큼이나 조촐한 기념식이 있었다.이어 박물관학교의 산 역사로 개교때부터 지금까지 가장 중요한 일을 맡고있는 「마지막 신라인」 윤경렬옹이 학교의 지난날을 돌아보는 강연과 함께 그동안 어린이학교를 거쳐간 어른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학교의 발자취를 한데 모은 전시회가 개막됐다. 이날 기념식은 누구도 미래를 준비하지 못하던 6·25전쟁 직후 1954년 어린 꿈나무들에게 「경주의 미래」를 넘겨주려던 몇몇 선각자들의 높은 뜻을 다시 한번 기리는 자리이기도 했다. 참석자들은 「하늘도 내 교실 땅도 내 교실…」이라는 박물관어린이학교 교가를 오랜만에 따라 부르며 감회에 젖었다. 1954년 어느 여름날,진홍섭 당시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장과 윤옹,박일훈 학예연구사,이승을 문화고 교감 등 네사람은 『한주일에 한번쯤은 의미있게 모이자』고 약속하고 다음주의 주제를 「성덕대왕신종」으로 정했다. 그 다음 주의 주제는 「문화재 보호 목책」이었다.굵은 판자로 된 목책은 볼성사나운 흉물이었다. 이들의 의견은 『경주 시민들이 문화재의 참뜻을 안다면 목책이고 철책이고 필요없을 것』이라면서 『때묻지않은 어린이들에게 가르치면 시간은 걸리겠지만 자라서 어른이 됐을때는 이것이 가능해지지 않겠느냐』는 데로 모아졌다. 「하늘도 내교실…」이라는 교가는 이듬해 만들어진 것.윤옹이 가사를 써 진관장에게 건네주자 진관장은 이를 조지훈 시인에게 보여줬고 시인은 다시 이를 이제는 세계의 작곡가가 된 윤이상씨에게 보냈다.윤씨는 개교 1주년 기념식에 축하인사와 직접 교가를 부른 녹음테이프를 전해와 지금도 이 학교의 소중한 기념물이 되고 있다.이학교의 40년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50년대 초창기에는 박물관장실에서 경주여중 다시 미국으로 금관이 소개,되고 또 62년에는 경주 시립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겨 이름도 「경주어린이향토학교」로 바뀌었다.75년 현재 박물관이 지어진뒤 다시 옛이름과 옛터를 되찾을 수 있었다.이학교는 82년 중·고등부와 성인부가 신설된뒤 「경주박물관학교」로 불린다. 이학교는 40년전 개교때 규칙대로 입학과 퇴학이 자유이다. 정식 수료증을 받은 사람은 3천명이지만 87년 34기 입학식에 2천5백여명이 몰려와 한바탕 소동이 빚어졌던일에서 보듯 50년대이후 경주태생은 거의 한 번쯤은 모두 이곳을 거쳐갔다. 그들이 지금 경주를 지키고 있다. 박물관학교의설립목표가 이루어진 셈이다.이제는 경주를 제대로 지키는 일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 진로 3일 창립 70돌/작년 국내그룹 순위 25위

    ◎24년 평남용강서 진선양조상회로 출발/88년 제2창업선언… 작년매출 1조7천억 진로그룹(회장 장진호)이 오는 3일 창립 70주년을 맞는다. 그룹의 모체는 고 우선 장학엽씨가 지난 24년 10월3일 평남 용강군에 설립한 진선양조상회. 당시의 자본금은 1천5백원,연생산량은 3백60㎖ 기준 35만병이었다. 장씨는 6·25를 피해 남하,54년 서울에서 서광주조(66년 진로로 변경)를 설립했다.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것은 지난 59년. 국내 최초의 CM송인 「야야야 야야야 차차차」로 시작하는 CM송으로 크게 히트한 데 이어,70년대 초에는 당시 최대의 소주 업체인 삼학을 따 돌리고 업계 선두로 나서며 「두꺼비」신화를 엮어냈다. 그룹의 모습을 보인것은,장학엽씨의 둘째 아들인 진호씨가 지난 88년 회장으로 취임하면서이다. 장회장은 「제2의 창업」을 선언하며 술에 치우친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 진로유통센터 등을 설립하고,연합전선 세림개발(현 진로건설) 남부터미널 등을 인수하는 등 공격적인 경영에 나섰다. 취임전 6개이던 계열사가 89년 23개로 늘었다. 지난 85년에는 경영권을 놓고 사촌간(장진호회장 형제와 장익용 서광회장),90년에는 형제간(장진호회장과 장봉용 진로발효회장)에 불협화음을 보이기도 했다. 지난해 매출액은 1조7천억원으로,매출액과 자산 등을 종합한 그룹 순위는 25∼27위. 지난해부터 전문화를 위해 일부 계열사를 통합하고,처분해 현재 계열사는 9개사이다. 앞으로는 ▲건설분야의 적극적인 해외진출 ▲편의점 진출을 비롯한 유통사업 강화 ▲맥주(진로쿠어스맥주)및 위스키에도 주력하기로 했다. 장회장은 『오는 2010년에는 30조원의 매출로 10대그룹에 들어설 것』이라는 청사진을 밝혔다.
  • 대중국 외교(백제를 다시 본다:29)

    ◎4세기 서해안항로 개척… 동진과 첫 교류/송·진등과 교역,국력강화 계기삼아/6세기말 적극 외교… 수와 동맹까지/의자왕때 외교주도권 상실… 중국과의 해상통로도 막혀 고립 백제의 웅진천도는 고구려의 군사적 위협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였다. 그러나 웅진시대(475∼538년)는 문주왕을 거쳐 삼근왕(477∼479년),동성왕(479∼501년),무령왕(501∼523년),그리고 성왕(523∼554년)까지 5대왕의 통치기간으로서 백제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는 시기였다. 특히 기존의 진·해씨 세력이 약화되고 백·목씨등의 신흥세력이 강화되었고,실추된 왕권의 보강을 위해 정치적 개혁이 모색되었다. 우선 동성왕은 문주왕때 중수한 궁궐을 다시 고쳤다. 그래서 화려한 임류각을 세워 왕실의 위엄을 드높이기도 하였다. 이를 계기로 국민의 관심을 밖으로 돌려 고구려와 신라를 정벌하여 위축된 국력을 회생시키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어 무령왕은 백씨세력을 제거시킨후 양나라와 교섭하여 고구려를 견제하는 동시에 고구려에 대한 정벌을 적극 꾀함으로써 군사적 도발로 전제왕권을 추건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비천도가 준비될 수 있었다. ○선진문화 수용 의의 따라서 사비천도는 위축된 왕권을 재건시켜 웅진시대후기부터 이룩된 전제왕권을 재확립하려는 야심찬 국력만회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우선 이지역의 토착세력인 사씨와 제휴하면서 중앙관제를 기존의 좌평제에서 22부의 일원적 지배질서로 개편하였다. 특히 왕실(내관)과 행정(외관) 사무의 분리,중앙행정 각부와 왕과의 직결제,그리고 효과적인 지방제도개편을 통해 세련된 관료제를 모색하였다. 또한 무령왕은 빈번한 고구려정벌과 낙동강하류의 가야세력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함으로써 성왕의 중흥정치를 뒷받침할 수 있었다. 여기에 유학과 불교의 혁신이 사상적 배경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근초고왕때 성립된 학교교육은 무령왕을 거쳐 성왕때 다양한 교육제도의 정비로 나타났으며 율종을 중심으로 불교교단을 통합하여 흐트러진 민심의 수습과 국민적 단합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사비시대의 정치적 중흥과 국력만회는 활발한 외교로 이어진 동시에외교를 통한 국가재건을 꾀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백제는 372년(근초고왕 27년)에 동진과 처음으로 외교관계를 맺은후 송·남제·양·진 등 주로 남조와 교섭을 하였다. 고구려가 남북조 여러나라와 활발한 관계를 갖고 있음에 비하여,백제는 서해항해라는 어려움 때문에 외교적 진출이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조공이라는 대중국외교는 단순히 중국적 세계질서에의 편입이 아니라,선진문화의 수용이나 국가적 자립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대중국교섭은 불가피 하였다. 그러나 백제는 서해를 바로 건너가지 못하고 고구려 해안을 따라 북상한후 요동반도 남단에서 등주로 건너가야 했던 탓에 험한 파고보다는 고구려의 방해가 문제였다. 따라서 근초고왕이후 적극화된 요서진출은 독자적인 서해직항로의 개척에 아른 결과인 것이다. 백령도부근(초도)에서 적산까지는 2백여㎞에 불과하지만 이 직통항로 개척에는 3백여년의 긴 세월을 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에 의한 관미성(한강하구)의 함락과 한강유역 상실에 따른 웅진천도는 어렵게 확보한 서해항로를 고구려·신라에게 양도하는 결과가 되었다.그러므로 웅진시대의 백제는 안전한 서해항로의 확보에 따른 대외관계의 모색이 국력만회의 전제가 될 수 밖에 없었다.따라서 무령왕·성왕때의 남조(양·송·남제)와의 교섭은 서해를 남으로 가로지르는 위험한 항로를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나 6세기 초·중엽의 백제의 대외관계는 또하나의 활로로서 왜와의 문화전파·기술이전을 용이하게 만들었다.웅진시대 이후로 발전된 유학과 불교는 결국 일본(왜)문화개발이라는 현실로 나타나 중흥기 백제인들의 긍지를 그나마 심어줄 수 있었다. ○사신 가장먼저 파견 그러나 진·수·당등이 북방에서 자리잡게 됨에 따라 6세기말이후 백제 다시 서해 직항로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어 신라와의 충돌은 불가피하였다.더구나 수나라의 등장(581년)으로 삼국간에는 새로운 외교전쟁이 전개됨으로써 가장 불리한 여건의 백제는 대중외교에 국가의 활로를 맡기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백제는 일찍부터 발달된 항해술과 조선술을 활용하여 수나라 38년간(581∼618년)동안 고구려나 신라에 뒤지지 않는 교섭을 펴나갔다.삼국 중에 제일 먼저 사신을 파견하여 책봉을 받게된 까닭도 여기 있다.무엇보다도 성왕의 피살로 국가적 난국을 맞은 위덕왕(554∼598년)은 진(4회)·북제(3회)·북주(2회)등과 교섭을 계속하였다.특히 수나라에는 진의 평정을 축하하는 사신은 물론,수의 고구려정벌에 안내자 역할을 자청할 정도였다.이러한 위덕왕의 친수정책은 고구려가 양원왕이후 정난에 휩쓸린데다 돌궐관계로 어려움이 있음을 이용하려든 것이다.동시에 신라 진평왕(579∼632년)초기의 정치적 불안정을 목도함으로써 삼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의도도 깔고 있었다. ○중국 진출 봉쇄당해 그러나 당의 등장(618년)으로 외교적 주도권이 신라로 돌아감에 따라 무왕은 15차에 걸친 사절을 당에 보내 적극적인 접근을 꾀하였다.이에 맞서 신라 역시 진평왕이후 친당외교를 펴나가 김춘추 외교가 결실을 맺음으로써 대당외교를 주도하게 된다.여기서 백제는 무모한 신라와의 전쟁으로 난국을 수습하려 하였다.위덕왕은 2회,무왕은 13회,그리고의자왕은 11회에 걸친 신라와의 충돌을 시도 하였으나 외교적 주도권을 장악한 신라의 신흥세력(김춘추·김유신)에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국력탕진으로 이어졌다.서해직항로의 해로를 장악한 신라는 백제의 대중국 진출을 봉쇄하였으며,고구려정벌에 실패한 당나라와 쉽게 연결될 수 있었다. 결국 백제는 중국과의 통로가 봉쇄되었다.그리고 무모한 신라와의 충돌로 국력을 낭비한 의자왕은 정치적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백제의 멸망은 외교적 주도권을 빼앗긴 고립무원의 결과였다.간헐적인 왜와의 교섭으로는 중국과의 외교적 손실을 메울수가 없었던 것이다. ◎삼국의 외교전/대중관계따라 한반도 역학구도 재편/당과 손잡은 신라 결국 삼국통일 삼국의 분립은 역사발전과정에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나는 성읍국가의 성장에서 비롯되었다.이들 고구려·백제·신라는 고대국가의 기틀을 잡으면서 한결같이 민족통일을 꿈꾸었다.삼국이 경쟁적으로 영토를 넓히기 위한 정복전쟁을 수행하는 가운데 다른 민족국가와 동맹을 맺은 까닭도 민족통일과 맞물려 있었다. 고대 동북아의 국제질서 속에서 백제는 AD371년 고구려와 정복전쟁을 통해 만난다.중국 연의 침략으로 위기를 맞은 고구려를 침공,평양에서 고국원왕이 전사하게 된다.그러나 고구려는 연을 멸망시킨 중국의 전진과 재빠른 친교를 맺어 일단 난국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 다음은 백제가 AD475년 고구려 장수왕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도성인 한성을 잃는다.그 무렵 중국은 남북조로 분열되어 있었다.그래서 고구려가 북조의 위와,백제는 남조의 송·양과 연결고리를 맺는다.이는 결국 북위·고구려·신라를 연결하는 세력과 송·백제·위로 이어지는 관계로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재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가장 뒤늦었던 신라가 법흥왕(재위 AD514∼539년)과 진흥왕(〃AD540∼575년)을 거치는 동안 크게 발전한다.신흥세력으로 등장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가 다투던 한강유역을 점령,남양만에서 중국과 교통할 수 있는 해로를 확보하게 된다.그리고 동해를 따라 북상,함남 인원까지 진출하는 한편 가야까지병합하는 것이다. 이어 또 한차례 국제질서가 개편되는 시기를 맞는다.AD589년 남북조로 분열되었던 중국은 수가 통일하는 것이다.그러나 수는 AD618년 당에게 중국대륙을 내주고 만다.고구려는 수와 당으로 이어지는 동안 중국과 70여년의 세월을 전쟁으로 보냈다. 그 전쟁의 여파는 한강유역으로 몰아닥쳐 삼국이 각축을 벌였다.그러나 신라는 당과의 외교에 성공,나당연합국을 만들어 AD660년 백제를,AD 668년 고구려를 각각 멸망시킴으로써 삼국시대가 막을 내렸다.
  • 「용띠 대통령」의 금기사항(청와대)

    정치인들의 나이는 고무줄 비슷하다.상황에 따라 나이가 늘었다가 줄어들었다가 한다. 80년대 서울의 봄당시 3김씨의 나이들은 50대 초반이었다.한두살씩 올려서들 이야기했다.좀더 중후하게 보이려고 해서다.7년이 지난뒤 87년 대선에서는 반대현상이 나타났다.7년이 지났는데도 어떤 사람은 5살밖에 더 안먹은 희한한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92년 대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김영삼대통령과 부인 손명순여사는 동갑이다.용띠.1928년생들이다. 그러나 김대통령의 호적에는 27년생으로 돼 있다.실제보다 한살이 더 많은 이 호적도 그러나 사실은 고친 것이다.대통령의 측근들에 따르면 당초 김대통령의 호적은 실제 나이보다 한살이 적은 29년생으로 되어있었다고 한다.김대통령이 54년 선거에 출마하려고 보니까 호적상의 나이가 24살밖에 되지 않아 출마자격(25살)이 되지 않았고 본래 나이를 찾을 필요가 생겼다.김대통령은 호적정정 관계자를 찾아가 절차를 밟았다.그러나 이번에는 실제 나이보다 한살이 더 많은 27년생이 돼 버렸다.관계자들이 『나이를 한살고치기 위해 호적을 정정하는 것은 관례에도 없고,남보기도 이상하다.두살 정도는 차이가 나야 호적을 고칠 수 있는게 아니냐』고 해서다. 김대통령의 호적정정은 이런 탓으로 25살에 국회의원이 됐느냐,아니면 26살에 됐느냐를 놓고 재미있는 싸움이 일게 만든다.호적대로 해서 그동안 언론들은 줄곧 26살에 김대통령이 국회의원이 됐다고 써왔다.그러나 김대통령 스스로는 25살에 국회의원이 됐다고 주장한다.그렇다고 언론을 교정하기 위해 호적정정 배경을 장황히 설명해주기도 어려워 답답했을 것이다. 청와대에는 호랑이 그림이 없다.예전에도 없었는지는 모르지만,김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온 이후 호랑이 그림은 반입이 허용되지 않는다.청와대 살림의 책임자인 홍인길총무수석이 막는다. 대통령취임 초기에 한 중국화가가 김대통령에게 보내는 호랑이 그림을 취임축하용으로 보내왔다.이를 접수한 공보처의 이원종당시차관이 김대통령에게 보고하자 대통령은 얼른 청와대로 갖고 들어오라는 반응을 보였다.이런 이야기가 홍수석의 귀에 들어갔다.『우리한테 가져오지 말고 총무처에 바로 접수시키시죠』였다. 결국 대통령은 호랑이 그림을 구경도 하지 못했다.용띠에게는 호랑이가 상극이라는 속설을 믿어서다.기독교장로인 김대통령은 이런 속설이나 민간신앙 차원의 이야기에 개의치 않는것으로 알려져 있다.하지만 거제도에서 배를 자주 타고 생선도 많이 잡아본 홍수석에게는 어림도 없는 소리다. 홍수석은 9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꼭 1년넘게 좋아하는 음식 한가지를 끊었다.한국남자들 대부분이 좋아하는 음식이지만 큰일을 앞두고 부정을 탈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다.대통령은 기독교장로지만 홍수석의 역할로 해서 청와대에서는 불교적이거나 토속신앙적인 요소들이 배척되는 일은 없다. 청와대 본관에 들어가려면 한국인들에게도 이게 뭔가 싶은 큰 물건 두개가 보인다.현관 양쪽의,깊이가 1m쯤 되는 항아리 모양의 청동 주물이다.이름을 「드므」라고 한다.이곳에는 늘 물이 가득 담겨 있다. 풍수지리상 서울 남쪽에 있는 관악산은 화기가 강한 산이라고 한다.조선조 때의 궁궐마다 관악산 화기를 막기 위한 드므가 있었다고 한다.청와대본관을 신축하면서 드므가 재현됐는데 청와대의 침류각 앞에도 조선조 때 만든 드므가 하나 더 있다.
  • 북,미군유해 「값올리기」 열중/1구 3만불 제시에 미 난색

    ◎작년 2만불,유족보상비의 갑절/미/외화확보 노려 “수천구 더 있다”/북 지난해 9월 한미 군장교가 판문점의 협상 테이블에 89만7천달러가 든 서류 가방을 북한 인민군장교에게 건넸다.장교는 이 가방을 열어본 뒤 거액의 현금다발에 놀란듯한 표정을 짓다가 곧 의심스런 눈빛으로 지폐를 검사했다. 이같은 광경은 한 미국관리가 전한 한국전 참전 실종미군병사의 유해인도에 따른 양측간 후속절차 처리과정이다. 지난해 전달한 89만7천달러는 90∼92년 북한측이 인도한 46구의 유해에 따른 보상금이며 양측은 또 지난해 인도한 유해 1백48구와 지난 13일의 14구에 따른 보상문제를 현재 협의중이다. 미군 당국과 주한 유엔군사령부는 최근 인도된 유해가 대부분 미군 또는 외국인의 것이지만 이 가운데 한구만이 확인됐으며 일부에서는 동물의 뼈도 섞여있는 것으로 나타나자 유해 한구당 보상액 2천∼3천달러를 제시하고 있다.이에 비해 북한이 요구하는 보상액은 3만달러이다. 미국방부의 한 관리는 북한측이 유해인도에 따른 항목별 비용을 보내왔으며 미국도 신뢰의 표시로 비용을 지불하기를 바라지만 한구당 평균 1만9천5백달러로 책정한 지난해 보상금을 앞으로 있을 유해 인도에 따른 「지정가격」으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미군이나 유엔사령부는 공식적으로 유해를 사들이는 것은 아니며 유해발굴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물론 북한측도 유해를 파는 것은 절대로 아니며 인도적 차원에서 이를 넘겨주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90년 첫 유해 인도 협상에 참여한 한국전 참전 용사인 노먼 E 존스씨는 『솔직해지자.그 돈은 유해의 대가로 지불한 것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존스씨는 유해 인도 협상 당시 북한측 대표로 나왔던 허종 유엔주재 북한 부대사는 인도적 차원에서 유해를 인도하라는 미국측 제의에 『일을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고 반문,실제로 유해인도에 따른 금전적 보상을 바라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고 밝혔다. 그는 양측간에 앞으로의 유해인도절차를 위해 금전거래가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북한이 한국전 참전 병사의 가족들이 받는 보상금보다더 많은 돈을 받게 된다고 분개했다. 한국전이 끝난 뒤 지난 54년 사망자로 발표된 미군 병사의 유족들이 받는 생명보험액수는 현재 북한측이 유해 한구당 제시하고 있는 보상금 3만달러에 훨씬 못미치는 1만달러 수준이다. 한 북한관리는 최근 북한정부가 한국전에 참전했던 유엔군 등의 유해 수천구의 위치를 알고 있으며 이를 발굴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북한측이 밝힌 유해 수천구,아니 유엔이 파악하고있는 미송환 유엔군 전쟁포로 2천2백여명만 치더라도 북한측의 보상가를 수용할 경우,6천6백만달러가 들어간다.미국이 제시하는 최저 보상가인 2천달러를 준다 하더라도 4백40만달러를 지급해야 한다.
  • 우리 현대미술의 선구자/박수근화백 작품 6점 반입

    ◎평양미술대서 유출… 김희용씨 구입/「여인」·「풍경」·「소녀상」등 40년대 작품/최초 서양화가 김관호 작품 9점도 함께 우리 현대미술의 거장 박수근 화백의 40년대 중·후반의 것으로 보이는 작품 6점이 15일 국내로 반입돼 화단의 주목을 끌고 있다. 이번에 들어온 박화백의 작품은 지난 46년 자신의 아내를 모델로 해 그린 것으로 알려진 「앉아있는 여인상(66.5㎝×94㎝)」과 「금성여중 소년단원 리금자」라고 쓰여진 「소녀상(48년)」을 비롯해 ▲여인(48년) ▲풍경(46년) ▲교대시간(47년) ▲정물(46년)등 6점이다. 이들 작품은 특히 그가 아내의 고향인 강원도 김화군 김성면소재 김성녀중 미술교사로 재직(19 45∼19 49년)할 당시 그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우리 화단에 아직까지 공백으로 남아 있는 부분이다. 이와함께 망각속에 묻혀버린 한국화단 최초의 서양화가 김관호화백(18 90∼19 63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가야금 타는 두소녀(48년)」「소련여인(54년)」「꽃밭(60년)」등 작품 9점도 함께 반입됐다. 이번에 우리나라로 들어온 박화백과 김화백의 작품 모두도 평양미술대학 지하창고에서 잠자고 있던 것들로 지장보살 김교각을 소재로한 남북합작영화 교섭차 북경에 체류중이던 김희용씨(47·가야화랑대표)가 지난 11일 북경에서 평양미술대학 부교수출신의 북한오륜무역공사 사장 최모씨(49)로부터 구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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