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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쓰비시차 「꿈의 엔진」 개발

    ◎직접분사방식 채택 휘발유 소모 30% 줄여/출력 10% 향상… 시제품 새달 자동차쇼 선봬 【파리 연합】 일본의 주요 자동차메이커인 미쓰비시 자동차사가 최근 연료의 소모량을 대폭 줄이고 대신 출력은 향상시킨 새로운 휘발유 엔진개발에 성공한 것으로 밝혀졌다. 미쓰비시는 기존의 휘발유 엔진보다 연료 소모를 30%이상 줄이고 반면 출력은 10%이상 증가시킨 엔진(GDI)개발에 성공,시제품을 다음달(10월3∼13일) 파리 자동차쇼에 출품할 예정이다. 미쓰비시는 직접 분사방식에 의해 엔진의 효율을 이처럼 대폭 향상시켰는데 유럽 자동차업계는 지난 40여년간 세계의 자동차 제작자들의 꿈이 마침내 실현됐으며 미쓰비시는 이 「미래의 엔진」 개발로 유럽의 자동차 메이커들을 크게 앞지르게 됐다고 대대적인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미쓰비시가 개발한 직접 분사방식의 휘발유 엔진은 지난 54년 이래 자동차 설계자들이 그동안 수없이 개발에 도전했으나 아직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길림성 아랍저촌(송화강 5천리:4)

    ◎“조선족의 이상향” 도시화 농촌 건설/60년대 인근 11개 늪메워 거대한 농토조성/문혁시기에도 벽돌·기와·농기구공장 세워 우리 민족의 역사를 돌이켜 생각하면 송화강은 비극의 강이다.그 물굽이마다에 고구려와 발해,일제에 항거한 독입운동 등의 잔영이 어렸을지라도 모두 역사무대에서 사라진지 오래다.그러나 용기 있는 조선족이 그 강유역에다 또 다른 번영의 씨앗을 뿌렸다.거기가 길림성 연길현 납가진 아랍저촌이다.이 마을은 현성인 구전에서 75㎞,길림시에서는 35㎞ 떨어진 거리에 있다. 이 현의 이름 납가진은 만주어로 울라가진인데,강역이라는 뜻이다.또 알라디촌으로 부르는 아납저촌에는 언덕 아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마을은 지명에 걸맞게 송화강지류 장로하 강변 언덕에 둘러싸여 있다.그런데 터를 넓게 잡았다.단층의 벽돌집과 고층아파트가 길 양편에 오순도순 자리잡은 아납저촌은 촌단위의 마을이라기보다는 자그마한 도시였다.아늑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고 김용구씨 헌신적 노력 아랍저촌은 본래 대정촌에 사는 지주 정씨가 소유한 소택지였다.1931년 경상도 사람 고분동·정기호 등 일곱가구가 이주해와 자리잡은 데 이어 이듬해 열가구가 아랍저촌에 들어와 소작으로 농사를 지었다.지대 자체가 소택지라서 땅을 논으로 개간한 이들은 1936년 보둑을 쌓고 화수로부터 물을 끌어들여 본격적인 벼농사를 시작했다. 지금은 5백78가구에 2천3백2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광복 당시 83가구에 비하면 아납저촌은 크게 발전한 셈이다.문화혁명 후기인 1970년대초에 이미 국내외에 모범촌으로 소문난 이 마을은 지금도 길림성에서 첫손 꼽히는 도시화농촌이기도 했다.오늘의 아랍저촌이 있기까지는 별의별 우여곡절이 뒤따랐지만,그 뒤에는 조선족 지도자의 헌신적인 노력이 뒷받침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는 1980년에 타계한 김용구 선생이다.1914년 경북 김천 태생인 그는 1954년 군에서 대퇴(제대)한 이후 금주향 당위원회 부서기로 있다가 잔뼈가 굵은 아랍저촌으로 돌아왔다.아납저촌 당서기를 자청하여 하급직으로 내려앉은 그는 마을 사람을 일깨워 억척으로 일했다.당시 아랍저촌은 낡은 초가집에 살면서 근근이 밥술이나 뜨는 그런 마을이었다. 1962년 송화강유역에 큰 가뭄이 들었다.그는 송화강물이 줄어든 틈을 타서 관개수로를 이용한 발전시설을 갖추었다.그리고 등잔불 대신 마을을 백열전등으로 밝혔다.그의 집념은 크고 작은 11개의 늪을 메워 논을 만드는 대역사로 이어졌다.꼬박 3년에 걸쳐 1백만㎡의 흙을 파다 늪을 메운 끝에 3백17a의 논을 새로 얻었다.그는 욕심을 더 부려 1971년 경지정리를 서둘러 착수했다.3년에 걸쳐 올망졸망한 논 6천a를 평평하게 다듬고 네모가 나게 잘랐다.기계영농의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중국대륙 전역에서 파괴가 자행되던 시절,다시 말하면 문화혁명시기에도 아납저촌에서는 연생산량 5만장규모의 벽돌공장이 건설되었다.이와 더불어 연생산량 10만장규모의 기와공장·목기공장·농기구수리공장을 문화혁명시기에 세웠다.이들 공장의 수입은 아납저촌 전체수입의 40%를 점하고 있다.연변사범학교를 나와 마을에서 교편을 잡다 퇴직한 김규삼(61) 선생의 자랑은 액면 그대로라는 생각이 들었다.충북 충주시 이류면 태생인 그는 아납저촌에 대한 자랑이 대단했다. ○벽돌가옥 317채 지어 배당 『아랍저촌의 알곡수확은 1967년 이후 열두해 사이에 곱절이 늘어나 한 사람앞에 1천2백㎏씩 돌아간 셉입네다.나라에 바친 벼만해도 1천t이었디요.공동저축금은 10배나 늘어났으니 엄청 성장한 것 아닙네까.그래서리 1978년 길림성 당위원회에서는 「아랍저촌의 경험을 가일층 학습하고 보급하는데 대한 결정」을 내렸댔디요.길림성내 모든 농촌이 아납저촌을 본받으라는 내용이었습네다』 아랍저촌의 집체경제는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촌의 당서기인 김용구 선생은 새 농촌주택 건설과 함께 유치원·병원·마을회관을 짓는데 심혈을 기울였다.농촌주택은 1968∼80년 고래등 같은 벽돌기와집으로 3백17채를 지었다.집은 물론 거저 배당하면서 열사유가족·군인가족·영예(상이)군인·노인가정에 우선순위를 주었다.당시 아랍저촌에는 3백62가구가 살았다.마을 사람이 김용구선 생에게 우선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그는 막무가내였다.『나는 3백62번째 새 집에 들어가기로 작정했다』고 뜻을 굽히지 않았다는 것이다.그는 운명하는 날까지 초가집에서 살았다. 김용구 선생이 세상을 뜬 이후 아랍저촌은 개혁개방이라는 현실 앞에서 한동안은 휘청거렸다.토지를 개인한테 도급을 주고 공장도 전체의 80%를 개인에게 팔아넘겼다.그리고 촌 간부들도 개인 호주머니를 채우느라 열을 올렸다.이 때문에 집체경제는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민족사회는 허물어졌다.능력있는 사람은 개인기업을 경영하거나 한국을 찾아가 돈을 벌었다.재간없고 돈없는 사람이 겨우 마을을 지켰다. ○개방진통 겪고 다시 활기 1986년 아납저촌은 다시 자각의 깃발을 들었다.「농업으로 마을의 기초를 다지고 기업을 적극 발전시키는 가운데 상업을 흥성하자」는 것이 그 깃발이었다.아납저촌정부는 개인한테 판 기업을 다시 사들였다.농공상총공사)를 세우고 산하에 농업·목축업·공업공사를 두었다.개혁개방이후 8년간을 몸부림친 끝에 1994년부터 다시 기를 폈다.그해에 4천8백만원의 총생산액을 기록한 것이다.이어 1995년에 총생산액 1억1천만원을돌파한 아납저촌은 올해 목표를 1억5천만원으로 잡아놓았다. 오늘날 아납저촌은 김석배(47)서기가 이끌고 있다.그는 김용구 선생의 아들이다.촌정부로부터 경찰로 발탁된 적이 있으나 부친의 만류로 마을을 지키다 당지부 서기가 되었다. 『지난 71년 촌에서는 저를 경찰후보로 발탁했댔습네다.그 시절 농사꾼이 월급쟁이가 된다는 것은 장원급제나 다름없었디요.그런데 부친께서 촌에 올라가 농사꾼 자식은 그저 농사꾼이 되어야 한다고 반대를 했디 뭡네까.그때는 부친이 원망스러웠디만,지금 생각하면 마을에 남은 거이 다행스럽디요』 아랍저촌은 1994년에 도시화농촌건설 10개년계획을 세웠다.촌정부청사를 중심으로 서쪽에 5백가구가 입주한 아파트단지를 건설키로 하고 6층 아파트단지 하나는 이미 완공시켰다.그리고 일손이 모자라 62가구 3백여명의 외지 조선족을 받아들였다.마을 발전추세로 보아 아랍저촌의 적정인구를 1만명선으로 잡아놓았다.10개년계획기간에 교육지구 및 민속촌을 건설,민족성을 지킨다는 청사진도 제시했다.
  • 다시온 일 군함(외언내언)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페리제독이 이끄는 미국의 흑선단이 도쿄만에 진을 치고 일본의 개국을 강요한것이 1854년의 일이다.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이 시대 강제개국 현상을 「서양 악당들의 동양처녀 강탈시기」로 묘사하고 있다.여자를 강간하려면 먼저 강제로 옷을 벗겨야 하듯이 서양열강들이 나라문을 잠그고 있는 중국 일본 조선등 아시아 국가들을 무력을 통해 강압적으로 통상개방을 요구하던 시대를 말한다. 그로부터 21년 후인 1875년(고종 12년) 일본은 운양호를 비롯한 3척의 군함을 조선에 보낸다.조선측의 대일문호개방이 늦어지자 무력시위로 조선을 굴복시키려 했던 것이다.서구열강들에 앞서 한국을 선점해야 하는 일본은 초조했던 것이다.일본은 이를 통해 다음해인 1876년 강화도조약을 이끌어낸다.강화도조약은 일본의 강압으로 맺어진 대표적인 불평등조약.한반도가 일본에 강점되는 시발점이 됐다. 그래서 우리는 일본의 군함에 콤플렉스가 있다.지난 1일 일본 해상자위대 소속 군함 2척이 해방 이후 처음으로 부산항에 입항했다.일장기를 당당히 달고 우리 해군의 호위를 받으며 부산항에 들어오는 일본군함을 보며 감회가 새삼스럽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94년 한·일 국방장관회담 합의에 따라 그해 12월 한국순양함대가 일본 도쿄항을 방문한데 대한 답방형식으로 이루어진 것.따라서 일본함대의 부산입항을 딱히 피해의식을 갖고 볼 일만은 아니다. 한·일간에는 군사적으로 이미 상당수준의 협력관계가 형성돼 왔다.한·미,한·일간 군사동맹체제를 통해서도 얽혀있을뿐 아니라 3국간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한 바도 있다.한국과 일본은 냉전 이후 변화하는 동북아정세에서 대립하기보다는 공동대처해야 할 부분이 더 많아지고 있다.독도같은 까다로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현실적 국가이해와 국민감정간의 간극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 바그다드 공격뉴스 직전 공습사이렌/미 이리크 공격­이모저모

    ◎성난 이라크 군중 미 격렬 비난 가두시위/쿠르드족 “후세인에 죽음을” 외치며 춤판 ○…바그다드시내의 이라크인들은 3일 미국의 크루미즈사일 공격소식에 전혀 관심없다는 반응을 보였으며 거리의 일상생활은 아무런 변화없이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사담 후세인대통령의 아들인 우다이가 운영하는 한 TV방송이 이라크의 군사목표에 대한 미국측의 공격을 확인하기 직전 수도의 일부지역에서는 공습사이렌이 울렸고 대공포화가 목격되기도 했다. 『미국인들이 무슨 짓을 하든 지난번 걸프전당시의 행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미국의 위협적 행동은 그들의 국내에서나 관객을 동원할 것』이라고 한 택시운전사는 말했다. 한편 후세인 대통령의 대국민 성명이후 일부 성난 이라크인들이 3일 미국의 대이라크 미사일공격을 비난하는 가두시위를 벌였다고 국영이라크통신(INA)이 보도했다. INA는 수도 바그다드와 다른 도시들에서 미국의 공습을 비난하고 사담 후세인 대통령 정부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시위행렬이 잇따랐다고 전했다. ○…2일 선거유세를 돌연 중단하고 워싱턴으로 돌아온 빌 클린턴미 대통령은 이라크에 대한 경제 및 군사보복 조치를 승인한데 이어 자크 시라크 프랑스대통령 및 존 메이저 영국총리 등 몇몇 우방국수 뇌들과 전화통화를 해 이라크에 대한 군사공격이 임박했음을 시사.노동절로 휴일인 워싱턴 시내가 전반적으로 한산한 모습을 보인 것과 달리 유일하게 긴박한 모습을 보인 미국방부는 『이날 클린턴 대통령의 외국정상들과의 전화통화가 매우 유용하고 생산적이었으며 이날 논의를 통해 이라크상황에 대해 솔직한 의견 개진이 이루어졌다』고 발표하기도. ○…클린턴 대통령은 공습 하루전날인 2일 영·불·중·러시아 등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에게 동의를 구했으나 영국만 이에 찬성했고 나머지는 모두 유보적인 입장을 나타냈던 것으로 확인됐다. 프랑스 외무부는 공습직후 프랑스가 클린턴 대통령의 요구에 유보적 입장을 표했다고 발표. ○…사담 후세인 이라크대통령은 미국의 미사일공격후 수시간만에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오늘은 우리의 역사에서 영광의 날로 기록될것이며 침략자들에게는 저주를 받는 날이 될 것이다』고 호언. 후세인은 『연합군들이 설정한 비행금지구역을 비행하는 어떤 비행기도 격추시킬 것』이라면서『 지금부터 북위 32도에서 36도사이에 설정된 비행금지구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히면서 미국의 공격에도 결사항전할 것임을 거듭 주장. ○…수천명의 쿠르족들은 3일 이라크의 쿠르드 지역의 침공에 대한 보복조치로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거리로 뛰쳐나와 『사담 후세인에게 죽음』을 외치며 환호하는 분위기. 쿠르드족의 한 관리는 『외국방송을 통해 미군의 이라크 공격소식을 들은 쿠르족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없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거리로 몰려나와 기뻐하며 「사담 후세인에 죽음」을 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사담 후세인과 바르자니의 점령자들으로부터 아르빌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춤을 췄다』고 전언.
  • 불화 「화엄경변상도」 속 보살상(한국인의 얼굴:95)

    ◎살오른 볼·오뚝한 코… 육감적 동양미인 불화는 불교의 종교적 이념을 표현한 그림이다.그래서 예배의 대상이 되었다.또 대중교화 의도를 담아내기도 한 불화는 신앙을 자극했다.불화가 다른 전통미술에 앞서 높은 수준으로 발전한 까닭도 알고보면 신앙이 혼재한 종교미술이라는 사실에 있다. 우리나라 불화는 불·보살화,나한조사도,신중화 등으로 크게 나눈다.이들 불화의 요소는 불교전래와 더불어 유입되었을 것이다.그러나 초기불교가 남긴 작품은 하나도 없다.다만 8세기 중반의 통일신라시대 불화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가 전해내려오고 있을 뿐이다.호암미술관이 소장한 이 변상도는 국보196호로,현존 불화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변상도는 불교경전 내용을 그림으로 설명한 도설의 불화다.호암미술관 소장 변상도는 동양사상에서 큰 줄기를 이루었던 「대방광불화엄경」한 부분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화엄경」을 붓으로 써서 책으로 만들 때 표지화로 제작한 이 변상도의 크기는 세로 26㎝,가로 23㎝.금가루와 은가루를 아교풀에 개어 자색 닥종이에 불·보살을 그린 이른바 금은니 채색으로 되어있다. 실 금을 그어 선묘로 처리한 그림에는 크게 깨우치고 난 부처가 여러 곳을 찾아 법을 말하고 다니는 모습을 묘사했다.이를 「화엄경」에서는 7처8회,또는 7처9회라고 적었다.그러니까 부처가 일곱 곳을 돌면서 법을 말하는 모임을 여덟 차례,또는 아홉 차례를 가졌다는 이야기다.이 변상도는 그 모임의 하나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인물의 중요성에 따라 위치와 크기를 달리한 여러 불·보살이 그림속에 등장했다. 보광명전 앞에 마련한 사자좌 높은 자리에 부처가 앉아있다.그 본존은 「화엄경」대로라면 비로자나불이다.그러나 형체를 온전하게 가늠하기 어려울만큼 그림 바탕종이가 곰삭아버렸다.확실하게 남은 부분은 본존불 왼쪽에 자리잡고 앉아 설법을 듣고 있는 일단의 보살들이다.그중에서 맨 위쪽의 보살은 용모가 준수한 가인으로 표현되었다. 알맞게 살이 오른 볼이며,긴 목을 한 보살은 미모의 요건을 다 갖추었다. 그 보살은 고개를 약간 숙여 옆을 향한 반측면상 자세를 했다.그래서예쁜 곡선을 그린 뺨의 윤곽을 보기좋게 드러내 보였다.단순한 선묘로 처리했을 지라도 눈매도 곱거니와 눈동자가 살아 빛났다.길게 휜 눈썹은 청수미 그것이다.눈썹과 물려 시작한 코는 오뚝하고 길었지만 빈약하지 않다.불법을 들어 금방 깨우친 것일까.그 작은 입이 곧 열릴 듯 싶다. 「화엄경변상도」의 보살은 한마디로 우아한 모습이고,동양인들이 찬탄할 매력을 가득 담았다.거기에 탄력을 지녔으니 육감적일 수도 있다.이 그림이 있는 「화엄경」두루마리에는 의본 등 4명의 화가 이름과 서기754년에 시작해서 755년에 완성했다는 기록이 보인다.〈황규호 기자〉
  • 창작문학의 산실 「현대문학」 새달 5백호

    ◎「한국문학 꽃피우기」 41년 8개월/황동규·문병란·김후란 등 537명 등단시켜/「순수」 고수로 새 감각의 계간지에 밀리기도 국내 창작문학의 유서 깊은 산실 월간 「현대문학」이 8월호로 통권 5백호를 맞는다.지난 55년 1월호로 창간된 뒤 41년 8개월동안 한호의 결호없이 한국문학사상 유례없으며 깨지기 어려울 대기록을 세운 것. 당시의 대표적 순수문학지 「문예」가 폐간돼 전후 문예지 맥이 끊긴 54년 「한국현대문학의 건설」을 내걸고 출범한 「현대문학」은 60∼70년대초 한국문학의 가장 권위있는 지면으로 대접받았다.70년대 「창작과비평」「문학과지성」 등 인문사회과학을 망라하는 문학종합 계간지들의 출현에도 「현대문학」은 창작문학위주의 편집을 고수했다. 지금까지 「현대문학」이 등단시킨 문인수만 5백37명.지난 69년까지만 해도 어림잡아 5백명 미만의 중앙문인중 절반에 육박하는 2백23명이 「현대문학」출신이었다 시에서는 토속서정의 박재삼,지성적 시세계를 자랑하는 황동규,참여시인 고은,민중서정의 전범 이성부,80년 광주의시인 문병란,언어의 풍경을 말끔하게 그려온 오규원,현대시 실험에 몰두해온 이승훈,대표적 여류시인 김후란·김초혜·천양희 등이 배출됐다.소설쪽으로는 「오발탄」의 이범선,시민사회의 허위를 사회성 높게 고발해온 최일남,「토지」의 박경리,최근 역사소설의 진경을 보여온 서기원,토착 민중언어의 대가 이문구,이밖에 김원일·이동하·조정래·마광수·김홍신·유홍종·김채원 등이 「현대문학」에 의해 발굴됐다.또 박철희·김윤식·박동규·홍기삼·임헌영·이선영·김인환·최동호·이동하 등은 「현대문학」의 촘촘한 그물에 건져진 평론가들이다.한국문단의 허리를 이룬 「현대문학」출신은 이밖에도 무수하다. 5백호 특집으로 꾸며질 8월호에는 문학평론가 김용직·김윤식·전영태·이동하씨의 현대문학 역사를 되돌아보는 특별좌담,박완서·이수익씨 등 문인들이 현대문학에 얽힌 추억을 말하는 「현대문학과 나」 등이 실린다.서정주씨를 필두로 한 「현대문학」출신 시인 50명의 신작시 특집도 볼거리다. 동리의 문학론을 이어받아 이념보다 작품을우선한 「현대문학」은 한 시대 우리 문단의 명실상부한 저류를 이뤘다.특정유파에 치우치지 않고 문학성을 중시한 「현대문학」의 잣대에 검증받은 문인들은 역설적으로 참여·민중·시민문학의 모든 부면에서 한국문학을 화려하게 꽃피웠다.하지만 산업화의 모순으로 사회가 극심하게 앓던 70∼80년대 순수주의를 앞세운 「현대문학」은 보수적이라는 비난을 들으며 문학과 사회를 적극적으로 연결하려 했던 다른 세력들에 밀리기 시작했다.90년 2만부까지 이르렀던 발행부수도 최근 1만2천부로 떨어졌다.「문학동네」「상상」 등 새감각의 계간지 세력이 밀려오는 90년대 「현대문학」이 살아남으려면 단순히 「좋은 시와 좋은 소설을 평면적으로 싣는 것」이상의 체질개선을 모색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손정숙 기자〉
  • 일 중앙은행 권한 강화 검토/54년만에 법개정 검토

    ◎대장상 “독립성 보장 지지” 【도쿄 UPI 연합】 구보 와타루(구보단)일본 대장상은 제정된 지 54년된 금융법을 개정하는 데 대한 권고안을 마련해주도록 자문기구에 곧 요청할 것이라고 18일 말했다. 그는 중의원의 한 위원회에서 금융문제에 언급하면서 대장성이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을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연정을 구성하고 있는 정당과 총리산하의 연구그룹의 권고를 고려해 문제를 구체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밝혔는데 그는 일본은행의 권한과 「일본은행총재의 독립성을 강화하기 위해 일본은행법을 개정할 것인지를 두고 금융계에서 일고 있는 논쟁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 고대생 “교양필수”/「현대음악 이해」 곽연 교수(화제의 인물)

    ◎매주 화·수요일 하오 1시 피아노 연주로 시작/강의 20여년째… 폭발적 인기 대강당 빈틈없어 매주 화요일과 수요일 하오1시쯤이면 고려대 대강당에는 피아노소리가 울려퍼진다.수업시작을 알리는 연주다. 고려대 교양선택과목인 「현대음악의 이해」를 20년이 넘도록 강의하는 곽연(61)교수가 연주의 주인공.대강당은 발디딜 틈 없을 정도로 수강생 3백여명으로 꽉 차 있다.수업을 듣는 학생은 곽교수의 강의에 폭소를 터뜨리기도 하고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그는 이 강좌를 학생과 함께 느끼고 호흡하는 수업으로 바꿔놓았다.『수업을 통해 한가지 음악이론이나 시대배경을 가르치는 것에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한다.음악을 느끼고 감정을 풍부히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게 곽교수의 철학이다. 학생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다.고려대생이면 졸업 전에 누구나 한번은 수강하는 과목으로 알려져 있다.외부에는 교양필수과목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다.「현대음악의 이해」를 수강한 이상현(22·지구환경과학과2)씨는 『수업시작과 함께 피아노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솔직히 휴식 같은 수업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수강느낌을 말한다. 곽교수는 지난 54년 서울대 음대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고려대에서 철학을 공부했다.음악을 알려면 인간내면에 깔린 철학적 사고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 중퇴이유다. 음악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못해 69년에 연세대 음대 대학원에 입학,피아노를 전공했다. 곽교수는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학생에게 강조한다.또한 통일이 되기 전까지 학생이 민족음악에 대해 가져야 할 사고를 주문한다.때문에 이번 기말고사 출제문제도 「우리겨레 하나됨을 위한 음악정서생활의 한방향」.물론 학점은 후하다. 곽교수는 『현재 유행하는 발라드나 트로트등 대부분의 음악이 일본음계를 따라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한다.〈강충식 기자〉
  • 한국무용가 배정혜(이세기의 인물탐구:98)

    ◎춤사위 40년… 「한국 창작품」 토양 일궈/민주적정서·사회풍습 등 현대기법으로 표현/안무 생각할땐 3­4일간 식음 전폐하며 상념 「당신은 큰 모란,내일 사경/ 당신의 영위에 첫이슬 내려/ 그 이슬로 원귀들 씻겨 필경/ 삼도천건느리라」 이는 91년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올려진 서울시립무용단의 「떠도는 혼」을 보고 시인 김지하가 춤을 만들고 춤춘 배정혜에게 보낸 즉흥헌시다. 실제로 그의 춤을 본 사람이라면 구천을 떠도는 푸르른 영혼과 젖은듯이 파도치는 슬픔,가슴저미는 한과 창백한 분노가 천상의 불꽃으로 산화되어 장과 한과 원화까지도 춤속에 용해하고 있음을 체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무대는 음악이 춤을 능가하지 않으면서 의상과 장치,소품하나라도 춤의 일부이며 흑백속의 적,흑적속의 백으로 절제된 조명은 깃털처럼 가벼운 움직임과 강철같은 강인함,내딛는 보폭마다 백태의 곡선이 연출되는 모든 장면마다 절륜의 명화를 그리고 있다. 무용평론가 김태원은 배정혜의 춤을 「낮은 강둔덕에 선 건강한 갈대」에 비유한 적이 있다.「배정혜의 마르고 뾰족한 몸짓은 우리 전통춤의 정적 자태를 잃지 않으면서 춤의 본체적 바닥을 드러낼뿐 멋부림이나 태깔부림을 외면한 순수서정춤」이라고 했다.그리고 87년 예년의 평균 1백50여회에 비해 2백40여회가 넘는 폭등한 공연중에서도 단연 배정혜의 「유리도시」를 「문제작」으로 손꼽았고 「올해의 값진 수확」·「분명 한국춤의 진일보를 뜻한다」고 춤평론집 「예술춤시대의 탐색」에서 밝히고 있다.이 「유리도시」는 「문학성과 창작성」이 두드러진 작가의 야심작으로 한때 「그것이 한국춤이냐 현대무용이냐」라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나 연극연출가 오태석은 「우리 몸짓 가운데 힘이 숨어있는 곳을 그는 꿰뚫어보고 있다」면서 무용계의 찬반을 불식시켜버렸다. 그가 평론가들에게 집중적으로 조명된 것은 77년 김소희창에 황병기음악을 쓴 「타고남은 재」가 먼저다.그해 박용구씨는 춤지에다 「배정혜의 작품세계,지평을 여는 한가닥의 빛」이란 제목으로 「우리민족이 다듬어온 정밀하고 유현한 세계를 드높은 차원에서 구현하였고 기백을 뼈대로 하면서 흥과 멋을 훌륭히 살려낸 남성무를 개발해 보여준 것은 우리춤의 신기원을 이룩한 또하나의 위업」이라고 평가한바 있다.이순열도 「놀랍고도 영감적인 춤」,정병호 역시 「수제천의 아름다움을 일깨운 배정혜의 춤은 원형을 재해석하면서도 자기주관을 강하게 투입시켜 또다른 원형을 만들고 있다」고 그의 춤세계를 세밀하게 분석해내고 있다. 배정혜의 「춤언어의 정확성」과 「춤사위마다의 변화」,그의 역동적 동작은 그가 춤추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예정된 결과다. 어릴때는 강원도 원주 산골에서 농사를 짓던 배석균씨와 장옥여씨의 3남1녀중 장녀,본명은 배숙자.해방과 더불어 서울에 올라와 춤꾼인 삼촌 배명균씨를 만나면서 6세이전부터 춤추기 시작했고 12살되던 해 첫무용발표회를 열자 당시 경향신문(55년 4월16일자)은 「장추화 조광 김백봉제씨들의 지도밑에 무용을 전공했다는바 그 앙증스럽고 간드러진 춤은 만장의 관객을 도취시켰다」고 특필했다. 69년 제3회 창작무용발표회를 가졌을 때는 그가 안무하고 춤춘 「가랑잎」에 대해 현대무용가 육완순이 「그의 춤은 깨끗하고 섬세하며 오랫동안 연마해온 기교는 놀랄만큼 정확하다」고 감탄을 보냈고 「현대적인 감각과 극적 이미지를 되살린 새로운 시도와 민족적 정서와 사회적 풍습을 현대적 수법으로 미화시킨 무대」(서울신문 69년 12월11일자)로 그의 창작성을 격려하고 있다.그러나 조동화는 「춤의 성년기로 접어든 여유와 저력있는 공연」은 호평하면서도 「춤사위나 표현의 체질개선을 시도한 창작무용」이라는 어휘에는 별로 호의를 보이지 않다가 「떠도는 혼」「타고남은재」가 잇따라 발표되자 78년 신동아(10월호)에 「말없이 자기힘의 실체를 보여준 사람」으로 배정혜를 지칭하고 「춤사위 하나하나를 결코 허툴게 다루지 않으면서 한국무용이 감히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보완 발전시킨 새해석」으로 창작성을 인정고 있다. 서울시립무용단장 배정혜.그의 수많은 예술가적 배경의 특징중에서도 그는 무용이 아닌 문학을 전공한 문학도출신이란 점이 남과 다르다. 숙대 국문과를 졸업할 때까지 그의 주임교수이던 김남조시인을 비롯,그의 주변에서는 그가 「춤추는 배숙자」임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또 묵고적 기질은 안무를 할 때는 생각이 무르익을 때까지 3,4일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시체처럼 누워있다가 가없는 상념에 침잠한 끝에 지혜의 극에 치달아야만 비로소 춤의 선을 성취해낸다. 그의 이런 다부지고 묘한 면은 지난번 서울시립무용단장에 내정된 무렵에도 원로 박용구 조동화 차범석과 전임자인 문일지가 그를 추천하여 아무런 장애가 없는 데도 단원들에게 먼저 작가로서의 「작품성」과 「창의력」을 보여준 다음 자신이 정한 것을 말없이 지키면서 지난 7년동안 무용단을 이끌어왔고 4년전 프랑스와 스위스공연에서는 주최측으로부터 체류비와 개런티를 받는 자존심을 세우기도 했다. 철저한 춤꾼으로서의 그의 정신은 73년 재미교포인 김광섭씨(사업)를 만나 약혼,10년이나 지체하다가 39세이던 83년에 뒤늦게 결혼했으나 춤때문에 아이를 갖지 않았고 부군 역시 이를 이해하여 「춤추는 아내」로만 그를 아끼고 외조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지난 4월,스승이자 삼촌인 「배명균선생 고희기념」무대에서 초기에 추었던 「주마등」「풀잎」「혼령」으로 한국고전무용의 「정중동」과 「미선의 지고함」을 펼쳐보이더니 지난주에는 서울시립무용단 정기공연에서 「우리춤 50년 뿌리찾기」로 원로들의 간판춤을 정리하여 무용계의 리더다운 사명감을 실천하고 있다. 무대에 오른지 40여년이 넘는 오늘,그의 춤은 「한국창작춤의 토양을 일궈가는 세대」로서 정상에 서있으며 그의 재능을 극구 찬양하는 정병호씨에 의하면 「당대 그를 빼고는 한국무용사를 말할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객석에 엄숙과 침묵을 던지는 무위적정의 춤」은 언제 어디서나 새로 태어나고 새로운 것을 지향하면서 앞으로도 그는 그만의 춤언어로 「지혜의 향기」를 끝없이 길어 올리게 될 것이다. □연보 ▲1944년 강원도 원주출생 ▲49년 장추화무용연구소입소 ▲53년 김백봉사사 ▲54년 전국무용콩쿠르1등,최현사사 ▲55년 제1회 무용발표 ▲58년 제2회 무용발표 ▲59년 조광(발레)사사 ▲60년 도쿄 나고야 오사카순회공연 ▲69년 제3회 무용발표 ▲70년 숙명여대국문과졸업 ▲74년 숙대체육대학원졸업 ▲74∼87년 선화예고무용부장,한영숙 이매방 임준동의 「승무」「살풀이」,이정범「농악」사사 ▲77년 제4회 무용발표,작품「타고남은 재」로 「그해의 최우수작」선정,김천흥「양주탈춤」「춘앵무」사사 ▲78년부터 김선봉「봉산탈춤」,이동안「태평무」사사 ▲84년 리을무용단창단 ▲86∼88년 국립국악원상임안무자 ▲87년 「유리도시」안무·출연,국립오페라단 「처용」안무 ▲89∼현재 서울시립무용단단장 ▲90년 「불의여행」안무·출연,한국무용가협회선정 「90 최우수무용가」,90 북경아시안게임 문화예술축전참가 ▲91년 88올림픽기념및 유엔가입경축공연 ▲92년 프랑스 스위스전역 총19회공연 ▲94년 서울시립무용단 20주년기념 「녹두꽃이 떨어지면」안무 ▲95년 평론가 7인이 선정한 ’95 우수무용작품전 「두례」공연,「서울까치」안무,프랑스순회공연 ▲96년 배명균선생고희기념 배정혜무용발표(정동극장),「우리춤 50년 뿌리찾기」공연
  • 스커드 미사일/채연석 항공우주연 책임연구원(굄돌)

    요사이 신문에 보면 MTCR라는 단어와 북한의 스커드·노동이라는 미사일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본격적인 미사일의 시작은 독일의 「V2」이다.현대 로켓의 아버지로 불리는 폰 브라운 박사팀에 의해 1942년 10월3일 만들어진 V2로켓은 1t의 폭탄을 싣고 3백20㎞를 날아갈 수 있는 미사일이었다.MTCR(미사일 기술통제체제)는 5백㎏의 폭탄을 싣고 3백㎞이상을 날아가는 미사일에 관련된 기술을 다른 나라로 이전하는 행위를 규제하는 것인데 V2미사일은 지금으로부터 54년전에 벌써 이 범위를 훨씬 넘는 고성능이었다. 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소련·프랑스·영국·중국 등은 독일로부터 획득한 V2미사일과 관련자료를 기본으로 대륙간탄도탄(ICBM)을 만들었고 후에는 이를 다시 개량하여 인공위성을 발사하는 우주로켓을 만들었다.현재 인도와 이스라엘을 제외한 미국·러시아·중국·프랑스·일본의 우주로켓이 이러한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이다.스커드 미사일은 독일의 V2미사일 기술을 이용하여 소련의 코를이에프 설계국에서 1955년 개발하여 사용하기 시작한 소형 미사일로 1백80㎞를 날아가는 성능이었다.개량된 스커드B 미사일은 1965년 동구권과 중동지역 국가에 많이 배치되었다.이라크는 소련의 스커드 B를 개량하여 알 후세인,알 아바스,알 아베드 등의 미사일을 개발하였는데 이중 알 아베드는 2천㎞를 날아가는 성능이었다.북한은 이집트로부터 스커드를 얻어 이를 개량하여 스커드 B 및 노동1호,대포동 등의 미사일을 개발하여 주변국가를 괴롭히는 것이다. 전세계에서 만든 수십종의 미사일중 스커드처럼 많은 나라에서 오랫동안 사용되고 있는 미사일도 드물 것이다.미사일이 처음 만들어진후 많은 나라에서 미사일을 전쟁에 사용하였는데 미사일을 먼저 사용한 나라치고 전쟁에 승리한 나라가 없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 「한·일 월드컵조약」 모델 엘리제조약

    ◎불­독/“과거 청산” 63년 화해조약 체결/외교·국방·교육 등 전반적 분야서 협력관계 규정/30여년후 양국국민들 “가장 가까운 나라”로 꼽아 한·일 양국도 월드컵 공동개최를 계기로 프랑스와 독일간의 엘리제조약과 같은 화해·협력조약(월드컵 조약)의 체결을 추진하고 있다.한·일관계를 불·독관계와 직접 연결시키는 것은 어렵다는 지적도 있으나 양국의 노력에 따라 결실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크다. 조약이 체결되면 한·일 두나라의 긴장,협력의 무드는 한층 높아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는 전통적으로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나폴레옹 3세 당시의 보불전쟁이후,제1차·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양국관계는 급속히 악화됐다. 이러한 두나라 국민간의 적대적 감정을 해소하고,통합유럽의 정치·경제를 이끌어가는 두 주역으로 프랑스와 독일을 우뚝 서게한 기반은 1963년 양국간에 맺어진 화해·협력조약이었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당시 프랑스의 드골대통령과 서독의 콘라드 아데나워총리는 모두 누구못지 않은 민족주의자였다. 두 사람은 54년 체결된 파리강화조약으로 2차대전의 수습책은 마무리됐지만,양국간의 포괄적 관계발전을 위한 조약이 필요하다는 데 합의했다.불·독간의 화해·협력조약은 1963년 1월22일 프랑스 파리의 엘리제궁에서 서명됐기 때문에 주로 엘리제조약이라고 불린다. 조약은 양국의 외교·과학·문화·환경·교육 등 전반적인 분야에서의 협력관계를 규정하고 있다.우선 양국의 국가원수와 외교·국방·교육·문화장관이 조약에 따라 정기적인 회담을 갖고 있다. 또 ▲교류재단을 통한 양국 청소년간의 빈번한 교류 ▲연료순환·원자로등 핵분야 공동연구 ▲우주항공산업 기술 교류 ▲환경협의회 설치 ▲불·독 교육대학 설립 ▲TV아르트(문화체널) 설립 ▲불·독 문화협의회 설치등이 조약에 의해 이뤄졌다.엘리제조약에 따른 협력 관계를 바탕으로,양국은 이제 단순히 우호·친선의 단계를 넘어 통합된 유럽을 공동으로 이끌어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 조약체결 30주년이되는 지난 93년 양국은 『유럽공동체 가운데 어느 나라가 가장 밀접한 느낌을 주는가』라는 여론조사를 실시했다.그 결과 프랑스는 독일을,독일은 프랑스를 가장 친근한 국가로 답변한 것으로 나타났다.〈이도운 기자〉
  •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유치 이후

    ◎한국축구 르네상스 맞이한다/전용구장 6개 탄생… 꿈나무 육성 “청신호”/프로리그도 입장객 1백만 넘어 붐 고조 2002년 월드컵의 한·일 공동개최가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면서 한국축구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할 전망이다. 딱히 월드컵 개최가 아니더라도 한국축구의 발전사는 늘 월드컵대회와 긴밀한 상관관계를 가져왔기 때문이다.지난 54년 스위스 대회를 시발로 총 4차례,그리고 3회연속 출전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한국축구는 그동안 월드컵 출전이 확정될 때마다,그리고 월드컵 출전으로 한국축구의 진면목을 전세계에 드러낼때마다 국민적인 환호를 한몸에 받으며 축구에 대한 열기를 드높여온게 사실이다. 지난 83년 출범해 한국축구를 이만큼 끌어올리는데 직접적으로 기여한 코리안리그도 따지고 보면 86멕시코 월드컵을 겨냥,32년만의 월드컵 출전이라는 숙원을 풀기 위한 정지작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마침내 한국은 86년 멕시코 무대에 올랐고 1무2패로 예선탈락하는데 그치긴 했지지만 박창선이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와의 싸움에서 월드컵 사상 첫골을 올리고 불가리아와의 2차전에서는 김종부의 동점골로 1­1 무승부를 기록,첫승점을 올리는 감격을 선사했다.당연히 축구팬들은 경기장으로 몰려들었고 프로리그 출범 이래 내리막길을 달리던 입장객수가 86년 처음으로 전년의 45만명에서 52만명으로 역전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2002년 대회의 경우는 단순한 출전이 아니라 우리가 주최국이 된다는 점에서 축구팬들을 더욱 열광시키기에 충분하다.이는 월드컵 유치전이 본격적으로 펼쳐진 95년 프로축구 입장객수가 전년도의 76만명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1백25만명으로 늘어난데서도 확연히 드러났다. 또하나 월드컵 유치는 시설 확충이라는 면에서도 축구붐과 축구발전을 부추기는 중요한 요인이 될 전망이다.특히 유치를 계기로 축구인들이 꿈에도 그리던 전용구장이 6개나 탄생한다는 점은 팬서비스 차원에서 더 없이 좋은 선물이 될 것으로 보인다.팬들은 전용구장이 생기면 지금까지 육상 트랙 뒤편의 멀리 떨어진 스탠드에서 관전하던 것과는 달리 사이드라인 바로 앞에 앉아서 선수들의 숨소리까지 느끼며 생생한 경기를 즐길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전용구장 탄생이 축구팬들을 경기장으로 끌어모을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은 또 애초에 16개 도시를 유치 신청서에 명기했기 때문에 기존 구장들도 보다 나은 시설을 갖출 수 있게 됐다.이같은 경기장 시설확충은 성인 축구발전은 물론 축구 꿈나무들에게 잔디구장에서 뛸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함으로써 한국축구의 미래를 밝게 하는 요인이다. 결국 2002년 월드컵 대회 유치는 질적 양적인 면에서 한국축구의 위상을 한차원 높이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박해옥 기자〉
  • 한국 54년 첫 출전…86년이후“단골손님”/월드컵 66년 발자취

    ◎줄리메 주도로 30년 우루과이서 첫 개최/브라질 펠레 앞세워 4회우승 “최다기록” 올림픽과 함께 지구촌스포츠의 최고제전으로 꼽히는 월드컵축구의 탄생은 66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4년 프랑스 파리에서 벨기에·스페인 등 6개국이 국제축구연맹(FIFA) 설립을 위해 첫 모임을 가졌다. 여기서 아마추어리즘을 추구하는 올림픽이 더이상 축구의 진수를 보여줄 수 없다며 4년마다 프로축구 국가대항전을 열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축구 종주국의 자존심을 내걸고 내륙국가들끼리 주동이 된 FIFA에 참여하지 않은 영국(2차대전이 끝난뒤 46년 가입)의 따돌림속에서 대회탄생은 20여년동안 산고가 거듭됐다. 우여곡절끝에 제1회 월드컵대회는 30년 7월13일 우루과이에서 개막됐다. 오늘날 지구촌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월드컵의 태동이다. 갖은 난관을 축구에 대한 정열가 추진력으로 극복,월드컵창설의 산파역을 톡톡히 해낸 인물은 프랑스의 줄 리메 FIFA 초대회장이다. FIFA가 우승컵을 「줄 리메컵」으로 이름지은 것도 이같은 공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초창기대회는 재정 및 교통상의 이유 등으로 단촐하게 치러졌으나 갈수록 인기를 거듭하면서 지역예선전이 도입됐고 FIFA회원국도 현재 1백92개국이나 된다. 또 1·2차세계대전 등의 변고를 겪으면서도 94년 미국대회까지 15번이 치러졌다. 각본없는 드라마인 월드컵은 대회때마다 갖가지 이변과 파란,명승부가 이어져 수많은 화제를 쏟아냈다. 70년 맥시코월드컵 북중미예선 2차전이 벌어진 69년 7월. 홈팀 엘살바도르가 온두라스에 3­0으로 승리한뒤 홈관중이 온두라스응원단을 집단 폭행한 것이 알려지자 온두라스국민들이 자국 엘살바도르인에게 무차별 린치를 가해 수십명이 숨졌다. 이어 멕시코에서 벌어진 3차전에서도 유혈참극이 빚어져 국교단절과 함께 전쟁으로까지 치닫는 최악의 사고를 낳았다. 82년 스페인대회때는 브라질이 이탈리아와의 결승리그에서 2­3으로 패하자 비탄에 잠긴 브라질축구팬 32명이 자살,세계에 충격을 줬다. 66년 잉글랜드대회에서는 개막 8일전 줄 리메컵이 증발하는 대회사상 최대의 해프닝이 벌어지기도했다. 또 나라이름조차 생소한 북한이 잉글랜드대회에서 34·38년 두차례 우승한 「거함」 이탈리아를 1­0으로 격침시킨 것이 월드컵에서의 일대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렵다는 우승은 개인기의 브라질이 통산 4차례,조직력의 독일과 수비력의 이탈리아가 각각 3차례씩 차지했다. 특히 브라질은 스웨덴(58년) 칠레(62년) 멕시코(70년) 대회 등 3회 우승,줄 리메컵을 영구 보관하고 있다. 브라질 3회 우승의 주역 「축구황제」 펠레,74년 서독대회의 프란츠 베켄바워(독일)와 요한 크루이프(네덜란드),82년 스페인대회의 이탈리아 「축구영웅」 파울로 로시,86년 멕시코와 90년 이탈리아대회의 아르헨티나 「축구신동」 디에고 마라도나,90년 미국대회에서 브라질의 로마리우와 이탈리아의 바조 등 대회마다 불세출의 스타가 등장,팬들의 우상이 돼왔다. 한국이 처음으로 본선무대를 밟은 것은 6·25의 상처가 채 가시지 않은 54년의 스위스대회. 미공군 수송기에 몸을 싣고 64시간의 지루한 비행끝에 경기전날 밤 취리히에 도착한 한국선수단은 도착 10여시간만에 헝가리와의 월드컵데뷔전에 나서야했다. 당시 유럽최고의 축구스타로 군림하던 투스카스가 이끈 헝가리와의 경기결과는 0­9. 닷새뒤 터키와의 2차전도 0­7. 16실점에 무득점,참혹한 패배였다. 이후 32년만인 86년 멕시코 월드컵은 한국축구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대회였다. 신동 마라도나가 이끄는 우승팀 아르헨티나와의 1차전에서 1­3으로 졌으나 박창선이 월드컵출전사상 한국의 첫 득점을 뽑았다. 불가리아와의 2차전은 선제골을 허용했으나 김종부가 동점골을 넣어 1­1 무승부로 첫 승점을 기록했다. 이어 82년 스페인대회 우승팀 이탈리아와의 3차전에서 최순호·허정무가 득점하며 아깝게 2­3으로 지고 말았다. 90년 이탈리아대회에서는 졸전끝에 벨기에전 0­2,스페인전 1­3,우루과이전 0­1로 져 한국축구에 의구심을 전져줬다. 그러나 94년 미국월드컵에서는 한국은 놀라운 투혼을 발휘했다. 강호 스페인(2­2) 볼리비아(0­0)와 무승부를 이룬뒤 세계 최강 독일에 2­3으로 분패해 세계를 놀라게했다.
  • “DJ의 용인 가족묘원 터 육관도사가 잡아준 명당”

    ◎“자손중에 반드시 큰인물 날자리”/말년운도 좋아… 돈문제가 옥에 티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가 지난해 5월 명당으로 알려진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묘봉리 산 156의 1에 마련한 가족묘원은 베스트셀러인 풍수지리서 「터」의 저자인 육관 손석우씨가 잡아준 것으로 밝혀졌다. 22일 발매된 시사주간지 NEWS+(뉴스 플러스)에 따르면 손씨는 이 터를 잡아주면서 『자손중에 반드시 큰 인물이 나며 하기에 따라서는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자리』라고 설명했다는 것이다.그 이유는 『이 터가 풍수지리상 「천선하강」의 자리,즉 신선이 내려오는 터로 흩어졌던 인물들이 주위에 다시 모이고 좌절했던 일이 다시 복구되는 특성을 갖고 있다』고 이 시사주간지는 소개했다.그러나 이 터는 말년 뒤끝도 좋은 명당이지만 한가지 돈문제로 끊임없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이 주간지는 손씨의 제자 도선의 말을 인용,덧붙였다. 손씨는 경위에 대해 『지난해 초 친지가 찾아와 「누가 남북통일을 완수할 영도자가 날 명당을 찾아달라」고 부탁해 왔다』면서 『그래서북한산에 봐 둔 명당을 소개했다』고 전했다.그러나 『이 터는 국립공원이어서 묘를 쓸 수 없으니 다른 자리를 봐달라』는 그 친지의 거듭된 부탁으로 다시 용인 땅을 소개했다고 말했다.그 과정에서 김총재의 차남 홍업씨가 찾아와 김총재가 명당을 찾고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덧붙였다. 이후 김총재 가족들은 1차로 김총재의 고향인 전남 신안 하의도에 있던 김총재 부모의 묘를 이 곳으로 옮겨와 합장했고,다시 한달 쯤 뒤 경기도 포천 천주교 묘역에 있던 김총재의 전처 거용애씨(54년 사망)와 여동생의 묘도 이장했다고 손씨는 전했다. 손씨는 『제자가 그려온 하의도 묘역도를 보니 그 곳은 「오공비천의 터」로서 지네가 하늘을 나는 형상이어서 이곳에 묘를 쓰면 그 자손은 심복부하가 많고 생명력이 끈질기나 최고의 자리에는 오를수 없다』고 덧붙였다.〈양승현 기자〉
  • 대전국립묘지에 1천5위모셔

    ◎6·25때 전설의 유격대/켈로부대원 위패 봉안/휴전가지 4,445차례 전투/기습작전으로 7만여명 살상 6.25전쟁때 군번도 계급도 없이 북한 및 38선 접경지역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다 숨져간 유격대원 1천5위에 대한 위패봉안식이 대전국립묘지 현충탑에서 15일 하오 「한국유격군전우회 총연합회」회원및 국방부관계자 등 5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한국유격군전우회 총연합회」에 따르면 지난 50년6월 북한군이 남침하자 공산집단에 맞서 일어선 청년,학생등 유격대원들은 4만여명에 이른다.이들은 38선 접경 동·서해연안 30여개 도서에서 해상침투와 적후방교란 등 기습작전에 참여했다. 이번에 봉안된 1천5위의 혼령들은 이들중의 일부다. 이들은 그동안 시신이 없으면 국립묘지에 봉안할 수 있는 제도가 없어 그대로 방치돼오다 40여년만에 안치됐다.지난해 6월 2천4백10위의 위패가 대전국립묘지에 봉안된데 이어 두번째다. 흔히 「켈로부대」라고 불린 유격부대중 「돈키부대」와 「울프 팩」등이 특히 유명했다.이들 부대는 백령도와 강화·교동도에 각각 1만2천여명,속초·주문진에 6천여명,영도·덕소에 1천여명이 활동했으며 지역별로 「구월산」 「백호」 「백마」 「커크랜드」 「타이거여단」 「활민」 등 별도의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이들은 휴전때까지 모두 4천4백45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벌여 7만여명의 적을 살상했다. 유격부대원들은 휴전후인 54년2월 7백53명이 장교로,1만2천여명이 사병으로 입대하는 등 우리 육군에 편입됨으로써 발전적으로 해체됐다. 권승훈 유격군전우회총연합회 사무국장은 『6.25기간중 모두 1만여명의 유격대원들이 전사 또는 실종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며 『때늦은 감이 있지만 국립묘지에 안장돼 고인들에 대한 짐을 던 것같다』고 말했다.〈구본영 기자〉
  • 한국전쟁 미군포로 시베리아 강제이송/미 비밀문서 공개

    【워싱턴 AP 연합】 한국전 당시 포로가 된 미군병사들이 옛소련 첩보당국에 의해 비밀리에 시베리아로 이송된 사실이 지난 54년 미국으로 망명한 옛소련 고위관리의 증언이 담긴 55년 1월31일자 미정부 비밀문서에 의해 확인됐다. 최근 비밀해제돼 공개된 이 비밀문서에 따르면,당시 주일 소련대사관에 근무했던 유리 A 라스트보로프는 55년 1월28일 당시 아이젠하워 행정부 관리들과의 면담에서 50년부터 53년까지의 한국전 기간동안 미군 및 유엔군 포로들이 시베리아에 억류돼 있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50년대 미중앙정보국(CIA)에서 옛소련 담당책임자였던 도널드 제임슨도 한국전에 참전했던 미군 전쟁포로들이 시베리아로 강제이송됐다는 말을 라스트보로프로부터 들었다면서 『그 당시 받은 인상으로는 시베리아로 끌려간 미군포로들이 대부분 조종사들이었고 그 수는 10명에서 15명 정도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 강우포탄(외언내언)

    인공적으로 비를 내리게 하려는 것은 인류의 오랜 꿈이었고 이 꿈은 지금 실현단계에 와 있다.미국은 록키산맥에서 인공강설로 눈을 내리게 한 다음 그 물을 댐에 저장하여 갈수기에 쓰고 있다.54년이후 실용화한 방안이다.중국도 57년 인공강우에 성공한 뒤 과수원이나 담배농사에 이용하고 있으며 일본은 94년 가뭄때 41㎜의 인공비를 내리게 하는 데 성공한 일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95년 소백산 이화령부근 계곡에서 첫 인공강우실험을 했으나 실패. 물방울을 뭉치게 하는 요드화은(AgI)을 지상에서 태워 연기가 바람을 타고 구름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방식이었다.실패원인은 구름이 예상보다 높이 떠 있었기 때문.그뒤 인제·설악산등 지상에서 5차례,항공실험을 3차례 했지만 아직은 초보단계다. 인공강우는 비행기로 구름 위에서 요드화은을 뿌리는 것이 목표지점이 정확하고 실패율도 적다고 한다. 3주간이나 계속되던 몽골의 대화재가 「강우포탄」에 의해 진화되었다고 외신이 전한다.지난 30일 새벽 수십발의 강우포탄이 발사된 뒤 울란바토르부근에 15㎝나 되는 눈이 내리면서 불길이 잡혔다.포탄이 눈을 쏟아지게 했다니 요술쟁이같이 신기한 일이다.그러나 원리는 인공강우와 똑같되 다만 영하7∼10도의 차가운 구름속에 요드화은분말을 장전한 포탄은 폭발시키는 방식이 다르다.이같은 강우포탄은 중국에서 매우 발달하여 연간 50만개의 포탄을 수출하고 있다.수도를 위협하던 몽골의 화재를 진압한 「강설포탄」도 중국제로 추정된다.중국은 포탄뿐만 아니라 「강우미사일」도 보유하고 있으며 포탄 폭발지점도 고도 4㎞에서 7㎞까지 연장시키는 데 성공했다. 단군신화에서는 환웅이 인간세상에 하강하면서 풍백·운사를 거느리고 온 것으로 돼 있다.바람과 구름,그리고 비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환풍호우의 신통력을 지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대의 주술에서 흔히 행해지던 환풍호우의 기적이 오늘의 과학에 의해 실현되고 있다.그러나 인공강우가 아무곳에서나 조화를 부리는 것은 아니고 구름이 떠 있어야 한다는 제약이 붙어 있다.〈반영환 논설고문〉
  • 오늘 육사개교 50돌… 인맥과 약사

    ◎영욕의 역사속 「간성」 1만5천명 배출/2기 박 전 대통령·김재규씨 등 79명 별 달아/8기 5·16주도… 11기 전·노씨 12·12의 핵심 육군사관학교(교장 장창규·육사 21기)가 1일로 개교 50주년을 맞는다.육사출신의 일부군인이 정치에 개입,지난 30여년간 권력을 장악하고 문민정부들어 이들 가운데 11명이 구속되는 불행한 과거를 낳았으나 대부분의 장교들은 야전에서 본연의 임무인 국토방위에 충실하며 우리군을 세계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군」의 반열에 올려놓는 데 공헌했다.건군에서부터 6·25전쟁,국가건설,5·16쿠데타와 12·12 및 5·18 등 명암의 현대사와 맞물린 육사의 50년을 약사와 인물중심으로 정리해본다. ▷약사◁ 육사는 46년5월1일 창설된 남조선 국방경비사관학교를 모태로 한다.조선 경비사관학교로 개칭됐다가 48년 8월15일 정부수립과 함께 육군사관학교로 확정됐다.1기부터 9기까지는 6개월 이내의 단기교육과정이었다가 49년 선발된 10기생은 2년제과정(입교후 1년제로 단축)으로,이듬해 생도2기생은 4년제과정으로 선발했으나 6·25전쟁 발발로 임시휴교한다. 51년 정규4년제 사관학교로 다시 진해에서 문을 열면서 11기생을 선발하고 미육사의 교육제도를 모델로 정규대학 교육체계를 갖추게 됐다. 54년 서울 태릉으로 복귀하면서 「화랑대」라는 별칭이 제정됐고 55년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4년제 첫 졸업생을 배출한다. 63년 미국 군사고문단이 육사에서 철수한 뒤 교수양성,생도 훈육제도개선,외국사관학교 파견 등 자주적인 교육체계 정비를 단행,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맥◁ 육사1기는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갔다가 폐교되면서 경비사관학교로 넘어온 66명을 포함,88명.서종철 전 국방장관,김점곤 육사총동창회장 등이 있다.2기는 박정희 전 대통령,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등 임관된 1백96명 가운데 79명이 장군이 됐다. 2기에 이어 눈길을 끄는 기는 5·16의 핵심세력이자 최대 졸업생을 배출한 8기.특별반을 포함,육사사상 최대인 2천42명이 임관했다.초대 중앙정보부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김종필 자민련총재를 비롯,7명의 장관,16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했다.파리에서실종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희성 전 교통·조철권 전 노동,오치성 전 내무장관이 모두 8기다.이들과 함께 5·16 양대 주체세력이었으나 「반혁명세력」으로 대부분 제거된 5기로는 정승화 전 참모총장,김재춘전 중앙정보부장,채명신 전 주월사령관 등이 있다. 12·12의 주역으로 2명의 대통령을 배출한 11기는 5명의 장관,3명의 의원,차관 1명을 배출했다.정호용·이기백·이상훈 전 국방장관과 김식 전 농수산,김성진 전 과기처장관 등이 11기 출신이다. 11기에 이어 두각을 나타낸 기는 17기로 3명의 장관과 4명의 국회의원,2명의 차관을 배출했다. 장관으로는 이병태(국방)·김용갑·이문석(총무처)씨가,국회의원으로는 허화평·허삼수·임복진·정선호씨 등이 꼽힌다.17기는 육사출신의 가장 큰 꿈인 참모총장을 유일하게 2명(김진영 예비역대장·김동진 현합참의장)을 배출했다. 이밖에 체신부장관 등을 지낸 오명씨와 얼마전 작고한 최창윤 전 공보처장관,이학봉 전 의원이 18기이며 19기로는 현역인 윤용남 참모총장과 4선인 서정화 의원이 있다.〈황성기 기자〉 ◎통계로 본 육사 반세기/대통령 3명·장­차관 92명 배출/현역 6천5백명… 1천6백명 전사·순직 육사는 지난 반세기동안 3명의 대통령과 2명의 국무총리,92명의 장·차관,31명의 대사,80명의 국회의원,76명의 교수를 배출했다. 인원비율로 치면 단일 학맥으로는 서울대를 능가하는 인력배출이다. 1기에서 올해 임관한 52기에 이르기까지 졸업생은 1만5천5백70명. 이 가운데 현역은 윤용남 참모총장(19기)을 비롯,6천5백82명이고 예비역은 5천6백58명,전사를 비롯한 사망자는 3천3백30명이다. 동문 가운데 10% 가까운 1천3백22명이 별을 달았다. 6·25나 월남전,공비토벌 작전 등에서 전사하거나 순직한 사람은 모두 1천6백20명이고 이같은 공로로 47명이 영예의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동문 가운데 육사 교수출신으로는 박세직의원(12기·경북 구미갑),오명 전 건설교통부장관(18기) 등이 있으며 비육사출신으로는 조순 서울시장,공로명 외무부장관,김종운 전 서울대총장 등이 영어교수를,윤형섭 건국대총장이 50년대에 정치학교수를 지냈다.□육사 연표 ▲46년 5월1일=국방경비사관학교 태릉에 창설.1기생(88명)입교 ▲46년 6월15일=1기생 40명 졸업 ▲46년 6월16일=조선경비대사관학교로 개칭 ▲48년 9월5일=건국후 육군사관학교로 개칭 ▲50년 7월8일=6·25로 임시 폐교 ▲51년 10월30일=4년제 육군사관학교 진해에서 개교.11기생 입교 ▲54년 6월21일=진해에서 태릉으로 학교 이전 ▲57년 3월16일=육사 주둔지 태릉을 화랑대로 개칭 ▲61년 5월18일=사관생도 5·16지지 시가행진 ▲69년 11월1일=문과 및 이과로 구분하는 등 교과과정 개편 ▲78년 1월1일=「육사 30년사」간행 ▲81년 7월=화랑대연구소 설치 ▲88년 1월30일=육사회관 준공 ▲94년 4월27일=화랑관 준공식 및 입주 ▲95년 2월23일=군사과학대학원 개원 ▲96년 2월=56기생 입교
  • 제주시 이도1동 돌하루방(한국인의 얼굴:70)

    ◎왕방울 눈·굳게 다문 입에 정감이…/훤칠한 키·비껴쓴 벙거지에 멋도 잔뜩 제주도의 돌하루방은 육지로 말하면 돌장승이다.옛날 기록에는 돌하루방을 일러 옹중석이라했다.돌하루방은 돌할아버지라는 뜻을 가진 제주도 사투리다.어린 아이들이 돌하루방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 이름으로 굳어버렸다.어딘가에 정감이 어린 이름이기도 하거니와 실제 돌하루방에서는 온화스럽고 푸근한 체취가 우러난다. 제주도에 돌하루방이 처름 등장한 시기를 확실히 밝힐 수는 없다.다만 김석익의 「탐라기년」을 보고 어렴풋 짐작할 뿐이다.영조30년(1754년) 김몽규가 성문밖에 세웠다는 기록이 그것이다.그는 당시 제주 방어사로 전해인 영조29년에 관덕정(보물 322호)을 중창한 인물이기도 하다.그러나 전에도 있었는 데 다시 세운 것인지,또 처음 새로 세운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나오지 않는다. 어떻든 「탐라기년」을 18세기 중엽 제주에 돌하루방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일러주고 있다.제주도내에 옛날부터 전해내려온 돌하루방은 현재 45기에 이른다.모두 제주도 민속자료2호로 지정 받았다.제주목과 대정현,정의현을 행정구역으로 한 조선시대 제주 삼현소재지에 집중 분포되었다.그래서 제주시내에 21기,대정면 인성·안성·보성리와 표선면 성읍리에 각각 12기씩이 남아있는 것이다. 옛 제주성 성문밖이 본래 제자리였던 제주시 돌하루방은 시내 여러 군데로 뿔뿔히 흩어졌다.제주시의 돌하루방은 대정면이나 표선면 성읍리 것들에 비해 우선 키가 크다.평균치가 1백80㎝를 넘는 훤칠한 키를 했다.그리고 대정면 돌하루방과는 달리 기단을 밟고 서 있다.제주도 돌하루방 하면 얼핏 그것이 그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지역 단위로 특성을 지닌터라 지역별로 비교하면 조금씩 차이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제주시 이도1동을 지키고 있는 돌하루방은 아주 멋이 든 돌할아버지다.제주시 이도1동은 제주목의 제주성 옛 터전인지라 이 돌하루방이야 말로 적자격의 돌하루방이라 할 수 있다.제주도 섬 전체의 돌하루방이 그렇듯 벙거지를 썼으나 멋을 부려 비스듬이 머리에 걸쳤다.닷새장 저자거리에 나갔다가 거나하게 한잔을 하고 손자 주전부리를 사들고 오는 흐뭇한 할아버지 얼굴이다. 퉁방울눈은 이를데 없이컸다.눈이 하도 커서 눈을 만드느라 오목새김한 가장자리 선각이 자루병처럼 생긴 코와 아주 닿아버렸다.병자루 같이 생긴 코허리는 물론 코방울에까지 눈 가장자리가 맞물렸으니 크기는 큰 눈이다.역시 선각으로 표시한 큰 입을 굳게 다물었다.위엄을 갖춘 얼굴은 분명한데 무섭기 보다는 온화한 쪽에 비중을 더 실었다.그러니까 아주 인간화한 섬의 돌장승이 돌하루방일 것이다. 돌하루방을 성문밖에 세웠다는 기록과 본래의 자리 성문 앞길이 방어상 유리한 S자형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육지의 장승들처럼 돌하루방 또한 수호신 기능이 부여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기 때문이다.〈황규호 기자〉
  • 소설가 이청준(작가를 찾아:6)

    ◎“문학은 「불쟁의 멋」을 먹고 자라는 괴물”/70∼80년내 검열 피하려다 내 글도 복잡해져/현실이 험악할수록 문학이 꽃피는 덴 유리/신작 「축제」는 치매로 세상 떠난 팔순모모 초상치른 애기/창작의 고통은 천형 같아… 판소리 동화로 풀어쓰며 소일 그가 곁에 있다.그러나 어느 순간 저만큼 가 있다.분명히 함께 얘기하고 있었는 데….그러나 갑자기 야릇한 미소로 입꼬리를 치켜올리는 그.그와의 대화는 역광으로 거멓게 죽은 사진속 얼굴을 알아보는 일처럼 애를 닳게 만들었다.건너야 할 못이 왜그리 깊은지.「병신과 머저리」에서의 형,「이어도」의 천기자,「눈길」의 노인….자기 소설속의 주인공처럼 작가 이청준은 아무리 작은 일에도 허투루속을 내주지 않았다.그의 소설을 읽을 때처럼 그와의 대화도 꼬인 미로를 찾듯 양파껍질 벗기듯 진행됐다. 아파트1층에 자리잡은 이청준씨의 거실에선 베란다 창을 통해 만개한 4월의 백목련이 내다보였다.나른한 봄의 적막.이게 거추장스러운 듯 그는 슬며시 먼저 말을 꺼냈다.첫화제는 역시 신작 「축제」.소설을 쓰는동안 임권택감독이 영화화를 병행했다 해서 말그대로 화제가 됐던 작품.영화개봉일에 못미칠세라 그는 4월중순까지 꼼짝없이 원고에 매달렸었다. ○「서편제」멤버 재집결 『재작년 연말 우연히 임감독을 봤어요.인젠 유행을 좇아다니기보다 인생을 정리해보는 영화를 해야 겠다더군요.지나가는 말로 그해 11월 팔순노모 초상치른 얘기를 했는 데 이사람이 흥미를 보이더라구요.어머니를 두번 장사지내게 될 것 같아 껄끄러웠지요.한데 임감독이 「죄짓는 일 않겠다」해서…』 제법 알려진 얘기지만 작가의 노모는 말년에 치매를 앓았다.마침 임감독의 노모도 치매로 고생중이었다.작년 나온 작가의 「할미꽃은 봄을 세는 술래란다」는 치매노인의 죽음을 손녀딸의 눈으로 아름답게 그려본 동화.이를 테마로 육상효가 시나리오를 쓴 오정해 주연의 영화가 크랭크인했다.이래저래 「서편제」의 멤버들이 다시 모인 셈. 『영화와 조절을 해야 했기에 작품도 시간순으로 죽 써내려갈 수 없었지요.그래서 편지형식을 택했어요.임감독에게 매번 편지로 자료를주는 거지요.영화진도에 맞춰 보충도 할 수 있고 먼젓번 글에 해석도 달 수 있게끔 말이에요』 아버지를 일찍 여읜 작가에게 어머니는 곱건 밉건 유일한 근원이었다.지독한 가난의 부끄러움,게자루를 짊어진채 찾아든 친척집,젖은 속옷을 몰래 말리는 열적음….작품에 나타나는 이같은 사연들이 모두 어머니 체험의 변형이다.그는 늦게 어머니에게 빚이 많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축제」엔 노모의 중요한 패물로 비녀가 나와요.시집올 때부터 간수해온 이 비녀를 잃어버리곤 어머니는 걷잡을 수 없이 치매에 빠져들지요.한평생 부끄러움을 걸어잠근 이게 없어지면서 삶의 빗장이 풀려 그만 정신이 흩어져버리는 겁니다』 어머니의 물림인 부끄러움은 그에게서 섬세한 자의식으로 개발됐다.이 희귀한 자의식은 그 우울하던 70˘∼˘80년대 그를 당대의 대표작가로 만들었다.당시 그는 고도의 우회를 통해 시대를 꼬집은 지적인 작품들을 썼다.「소문의 벽」「비화밀교」「당신들의 천국」같은. ○실존과 사회 화해 모색 『억압이 심한 사회일수록 우화가 성하는법입니다.검열을 피하려니 내 소설들도 알게 모르게 복잡해졌어요.안된 말이지만 그런 점에서 현실이 험악할수록 문학이 꽃피는 데 유리하다는 말도 수긍이 갑니다.문학이란 불행의 멋을 먹고 자라는 괴물이지요』 의사소통의 기초인 말이 사람들사이에 혼선을 일으키는 현실을 비꼰 「언어사회학 서설」연작도 당시의 작품이다.그런가하면 이때 그는 응어리진 한을 소리를 통해 해원하려는 「남도사람」연작도 썼다.이청준의 가장 아름다운 단편에 속하는 「선학동 나그네」「서편제」가 여기 들어있다.두 연작은 마지막 단편에서 하나로 합쳐져 실존과 사회와의 화해를 꾀한다.그렇지만 이는 모두 지난 연대의 작품 아닌가. 인터뷰도중 초인종이 울리고 20대 여성 가스검침원이 찾아들었다.그는 작가집의 계량기를 체크하곤 집주인의 이름을 확인한다. 『이…창준이요? 그게 아니라 이청준이라구요』 영화 「서편제」쯤은 봤겠지만 그는 원작자인 작가를 알지 못하는 듯 했다. 작가 스스로 『이젠 많이 행복해진 것 아니냐』고 하는 시절,사람들이 점점 문학을읽지않는 요즘,작가는 아직도 화해를 모색하는 소설을 쓸까.그렇지 않으면 다른 관심사가 있는지.그는 넌지시 웃었다. 『20∼30대 때는 고전을 읽을 때「이것밖에 못했어? 난 이보다 나은 글 쓸 수 있을거야」했지요.그런데 나이들수록 소설쓰기가 고통스러워지더군요.창작에 따르는 노동이 어떨 때는 천형 같아요.그래서 긴 글을 탈고한 요즘은 한박자 쉴겸 아이들 글을 쓰고 있어요.수궁가·흥보가 같은 판소리 다섯마당을 동화로 풀어보는 거지요.판소리는 들을 수록 예술형태로 보태고 뺄 것이 없는 데 이를 모르는 이들이 너무 많아요.이 좋은 것을 누리게 하려면 어릴 때부터 접촉하도록 해줘야 합니다』 완벽주의자답게 성기지만 멈추지 않고 그는 작업계획을 세워간다.그런걸 보니 「고통」을 말하지만 이 대작가가 쉽게 붓을 놓을 성 십지는 않다. ○“판소리는 완벽한 예술” 작가의 집을 나서자 기우는 햇살이 따가웠다.어두운 실내에서 나온 탓인지 흐린 빛에도 금새 눈이 시렸다.이 시린 햇빛을 말한 작가의 작품 「눈길」이 있었다.집안이 망해 다섯칸집을 팔아야 했던 어머니.도시에 유학중이던 중학생 아들은 눈치를 채고 귀향한다.하지만 어머니는 아무일도 없는 듯 돌아온 아들을 그집에서 밥먹이고 재운다.새주인에게 사정해 하루 집을 빌린 것.이튿날 새벽 눈길을 걸어 아들을 차부에까지 바래다 주고 돌아오다 마을어귀에서 주춤하는 어머니.더이상 돌아갈 집이 없어서가 아니다.햇살이 너무 눈에 시려서,시린 눈에 맑간햇살이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이라는 것.『이청준이 아니라 그의 고향과 어머니가 썼다』는 어떤 이의 이 작품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적절한지 몰랐다.〈손정숙 기자〉 □연보 ▲1939년 전남 장흥군 대덕면 진목리에서 출생 ▲6세때(44년)막내동생과 맏형,8세때(46년)아버지 등 유년시절 잇단 가족의 죽음을 체험,심층정서에 큰 흔적이 남음 ▲광주서중(54년)광주일고(57년)졸업.서울대 독문과(60년)입학 ▲대학 1학년때 겪은 4·19는 그의 문학에 원형적 틀을 제공.평론가 김현과는 4·19세대의식으로 평생 긴밀한 문학적 연계. ▲4학년때 「사상계」신인문학상에 「퇴원」이 당선돼 등단(65년)졸업과 동시에 사상계 입사(66년)10여년간 근무 ▲대표작 「병신과 머저리」「별을 보여드립니다」「매잡이」「이어도」「당신들의 천국」「서편제」「눈길」「황홀한 실종」「잔인한 도시」「선학동 나그네」「새와 나무」「시간의 문」「비화밀교」「키작은 자유인」「인간인」 등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이산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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