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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공화국과 張勉] (6) 尹潽善과의 갈등(上)/장면·윤보선

    1960년 8월19일 오후 1시24분 ‘張勉총리 인준’투표를 막 끝마친 민의원 본회의장에는 긴장과 흥분이 감돌았다.두번째로 총리 지명을 받은 장면이 인준에 성공해 취임할 것인가,아니면 그마저 실패해 정국이 계속 표류할 것인가. 1시37분 郭尙勳 민의원의장이 결과를 발표했다. “총투표수 225,가(可)에 117,부(否)에 107,기권 1.가가 정족수인 과반수이상이므로 가결된 것을 선포합니다.”4·19가 일어난 지 딱 4개월 만에 민주혁명 수행의 대임(大任)이 장면에게맡겨지는 순간이었다.총리가 된 장면은 곧바로 그를 지명해준 尹潽善대통령을 청와대로 찾아가 취임인사를 한다. 장면과 윤보선의 이날 만남은 유쾌해야 마땅한 자리였다.통합야당인 민주당을 창당한 지 5년 만에 ‘李承晩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새 정치의 주역이 된 두 사람이었다.같은 당의 오랜 동지인 총리와 대통령은 ‘4·19정신’을현실정치에 구현하고자 서로를 격려하고 협조를 다짐했을 법했다. 하지만 둘 사이의 분위기는 어색하다 못해 냉랭하기까지 했다.‘총리 지명’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전개된 민주당 신·구파간 갈등이 앙금으로 짙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4월혁명으로 자유당정권이 무너진 뒤 정권을 맡을 정치세력으로는 민주당이유일했다.민심도 이를 인정해 7월29일 치른 민의원·참의원(상원)선거에서민주당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민의원 219개 선거구에서 민주당은 무려 172석(78.5%)을 차지했다. 문제는 민주당 신·구파가 우열을 가리지 못할 정도로 팽팽한 의석 분포를이룬 사실이었다.따라서 신·구파 모두 내각책임제에서 국정을 실질적으로책임지는 국무총리를 차지하려고 암투에 들어갔다. 그즈음 민주당 지도층의 면면을 보면 장면이 단연 으뜸이었다.그는 56년 선거에서 부통령으로 선출됐고,‘3·15선거’에서는 자유당의 부정 탓에 낙선했지만 민주당의 대표주자였다.게다가 59년 11월부터 당수인 대표최고위원을맡아왔다. 반면 구파쪽은 조병옥 서거 후 명확한 리더가 없었다.당시 구파였던 高興門(국회부의장 역임,98년 작고)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조병옥이 없는 민주당은 곧 신파인 장면의 천하가 될게 분명해 보였다.민주당 내에서 국민적 인기로 보아 그에 맞설 수 있는 인물은 없었다.평소 말이 없는 윤보선과 고집이 센 金度演이 있었으나 장면의 맞수는 아니었다.”국민 여론이나 당내 인식이 이같았는데도 구파는 윤보선을 대통령으로,김도연을 총리로 밀어 두 자리를 독점한다는 전략을 세웠다.그 까닭은 국회 부의장선거에서 표대결로 신파를 누른 적이 있어 자신을 가진 데다 구파 내 세력이 윤보선·김도연으로 양분돼 양쪽을 함께 배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반면 신파는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추대해 구파에게 일단 한 자리를 준 뒤 총리는 자파의 장면이 차지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8월12일 열린 민·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윤보선은 208표(재석 259명)를 얻어당선된다.이제 관심은 윤대통령이 누구를 총리로 지명할 것인가에 쏠렸다.신파의원들이나 국민 대다수는 ‘설마 구파가 총리까지 차지하겠느냐’는 막연한 기대를 품었고 구파 내에서도 鄭憲柱·閔寬植의원 같은 이들은 정치 도의를 내세워 독점에 반대했다. 8월16일 윤대통령은 김도연을 총리로 지명한다.통보를 받은 민의원의장 곽상훈은 장면을 지명하리라는 믿음이 깨지자 즉시 청와대로 쫓아가 항의한다.윤대통령의 해명을 들은 그는 “아마 김도연씨는 안 될거요” 라고 말하고는물러나와 김도연의 총리 인준을 적극 방해한다(회고록에서 발췌). 김도연은 다음날 총리 인준 투표에서 정족수보다 3표 모자라게 득표해 인준에 실패한다.8월18일 윤대통령은 장면을 총리로 2차 지명했고 장면은 다음날 인준을 받는 데 성공한다. 60년 8월 민주당의 선택은 마땅히 장면이어야 했다.그런데도 당내 파벌의 이익을 앞세워 김도연을 1차로 총리 지명하는 바람에 신·구파의 갈등은 깊어졌다. 그렇다고 신·구파 갈등이 장면총리와 윤보선대통령에게 그대로 옮겨갈 이유는 없었다.내각제 하에서 대통령은 당적(黨籍)을 떠나 국내정치에 초연하게끔 자리매김돼 있었다. 하지만 윤대통령은 이후에도 구파의 지도자처럼 행세하며 장면총리와 팽팽한긴장관계를 유지한다.그리고 그 긴장은 정치불안의 주요소로 작용한다. 이용원- 張勉과 尹潽善 장면과 윤보선은 제2공화국의총리와 대통령으로 만날 때까지 외형상 비슷한 삶을 살아온 듯 보인다.둘 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해외유학을 다녀오고 광복 후에는 정치인으로서 차근차근 위상을 높여나간다.그러나 그같은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장면은 인천세관 간부인 張箕彬의 맏아들로 출생해 21살때 카톨릭측의 주선으로 도미,뉴욕 맨해튼대에서 교육학·종교철학 등을 공부한다.귀국해 잠시카톨릭 평양교구 일을 보다 서울 동성상업학교에서 교직을 시작,그 학교 교장으로서 광복을 맞는다. 윤보선은 구한말 중추원 의관을 지낸 尹致昭의 장남으로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한다.본인말고도 6촌 이내에 집권당 당의장서리,장관,서울대총장 등 장·차관 이상만 13명이 나온 대표적인 명문가 출신이다.영국 에든버러대에서 고고학을 배웠다. 둘은 1948년 제헌의원 선거에 출마하지만 장면만 당선된다.윤보선은 54년 3대 의원 선거때 비로소 국회에 진출한다. 대한민국이 출범하자 장면은 UN총회 한국수석대표,초대 주미대사,제2대 국무총리를 잇따라 하며 건국의 기초를 닦는 데 큰 공을 세운다.이 기간 윤보선은 4대 서울시장,2대 상공장관을 지내지만 각각 재임기간이 1년도 안돼 물러난다. 두 사람은 55년 출범한 민주당에서 한식구가 된다.장면은 처음부터 최고위원 5명 가운데 하나였고 신파의 지도자였다.56년 부통령으로 당선된 데 이어 59년 전당대회때는 대통령후보 경쟁에서 조병옥에게 지지만 대표최고위원 선출에서는 조병옥을 누른다.윤보선은 이 대회에서 조병옥의 구파 몫을 이어받아 처음으로 최고위원이 된다. 60년 8월 제2공화국이 출범할 때까지 정치적인 경력에서 장면은 단연 윤보선을 앞선다.하지만 본질적인 차이는 다른 데 있다. 장면은 삶의 어느 시점에서 무슨 일을 했건 ‘성실하고 근면했다’는 점에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반면 윤보선은 달랐다.이는 66년에 발표한 회고록(‘사실의 전부를 기술하다’에 수록)에서 스스로 밝힌 심경을 보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윤보선은 상공장관에 취임해 “업무를 거의 파악한 서너달 후엔 벌써 입맛이 떨어져 버렸다”고밝혔으며,국회에 진출해 원내총무를 맡고는 “사임을 해도 안받아줘 병 난 것을 기화로 부산에 내려가 요양하며 겨우 수리시켰다”고 회상했다.심지어 대통령 시절 청와대를 찾은 민원인들로부터 들은 여러가지 하소연 내용을 설명하고는 “이같이 되풀이되는 고통은 하루빨리 청와대를 떠나야겠다는 생각만 굳혀줄 뿐이었다”고 술회했다. 그러던 그가 5·16쿠데타 후에는 애매모호한 태도로 열달 동안 대통령직을유지한다.청와대를 떠난 뒤 반(反)朴正熙 투쟁의 선봉에 서지만 박정희 사후 또 한차례 변신한다.全斗煥정권을 인정하고 87년 대선에서 盧泰愚를 지지한 것이다. 이같은 윤보선의 정치역정을 두고 학자들은 ‘명사(名士)정치’의 한 행태로 풀이한다.劉載一 대전대 정외과교수는 “명사정치의 특징은 시대적 과제를고민하기 보다 권력 획득,품위유지에 더 집중하는 데 있다”면서 “따라서명사 정치인들은 종종 기회주의적 속성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비슷한 궤적을 걸은 듯한 장면과 윤보선의 삶에는 이처럼 본질적인 차이가있었다.이는 제2공화국 붕괴의 책임을 재조명할 때 필히 고려해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이용원
  • [기고]”한반도문제 주체는 南北 美 일방적 조치 없어야”

    미국의 대북정책조정관 윌리엄 페리가 다녀갔다.관련 사항 몇가지를 살펴본다. 먼저 대북정책을 전반적으로 재조정하는 동기가 된,북의 ‘인공위성’발사를 보자.북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결과적으로 무엇을 얻었을까.결산하기는아직 이르다. 그러나 그 ‘모험’으로 인해 있었을 ‘강성대국’의 자존심 고조는 차치하고,후속된 관련국과의 교섭과정은 북이 얻고 있는 것이 결코 적은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즉,발사 50일후인 10월에 시작하여 오늘까지 4자회담 2회,북-미협상 4회로 한반도평화체제구축분과위·긴장완화분과위 구성 합의,금창리시설 2회 방문허용(미측은 정규적 사찰 등 요구)에 대한 식량 50만t+α지원이 합의단계에 있다. 또 94년 제네바합의 이후 계속 촉구하던 경제제재 완화, 관계개선 및 수교가 가닥을 잡고 있다. 북의 핵,미사일 개발 수출 등에 대한 미국이나 일본의 시각과 대응 조치가한국과 반드시 같을 수는 없다.그럴 필요도 없다.또 상호 강경 온건을 역할분담,보완할 수도 있다.북한에 대한 군사폭격은 그동안의 북의 행동전형으로보아 바로 서울 보복폭격,테러,전면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 우방과의 긴밀한협조가 있어야 하나 한반도 문제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남북한 당사자이다. 金大中 대통령은 한반도에 있어 냉전구도의 해체를 주창하였고,애초의 분단에 관련된 강대국의 협력을 호소했다.포용정책의 당위성과 그 효율을 설득하고 제네바합의의 포괄적 접근 이행을 제시했다.페리 방문결과 보도문에서 ‘접근 방법은 한국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을 기초로 한다’하고,‘그 과정에서긴밀하게 공조한다’고 했다. 한국측이 제시한 포괄적 협상안을 북이 거부할 경우의 대응방안에 있어,한반도의 긴장고조,특히 미국의 대북 군사제재 행동을 분명히 반대하는 한국으로서는 미국이 다른 일방적 조치를 취하는 일이 없도록 확인해야 한다. 포용정책이 실패할 경우의 대응방안이 명시돼 있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책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그러나 그 대비책이 있어도 꼭 공개할 필요는 없다.필요시 그 조치의 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하여 비밀을 유지해야하기 때문이다.화해정책을추진하면서 상대를 자극,불신을 초래해야하는가.결혼하면서 ‘당신이 부정을 하면 나는 이렇게 하겠다’는 것과 같다. ‘인공위성’발사에 과잉 반응한 일본이지만,고위인사가 평양을 방문,연락사무소 설치를 제안하고 외상이 대북 대화채널의 확대 필요를 말한 것은 국면의 전환을 보여준다. 일본의 과오에 대한 사죄와 배상이 54년이 지난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고있음은 옳은 일이 아니다.민족정기 면에서 한국은 이를 촉구해야 하며,이는상호의 신뢰구축에 이바지한다. 국가와 체제의 안전을 의도하며, 당면의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북은 미­일과의 관계정상화가 필수적이다. 이 목표 추구에 있어 한국의 지원과 포괄적 타결안이 소중하다. 비료·농사기술·전력 지원, 경제협력과 하반기당국자회담 등 활발한 교류가 예상된다. 일부 강경론을 페리조정관의 2단계 정책안에 수용하되 한국이 주창하고 있는 포용정책을 기초로, 남북이 공조의 슬기를 발휘함으로써 한반도는 새로운모습으로 새 천년을 맞이할 것을 기대한다. 손장래 현대정공 상임고문 前말레이시아 대사
  • 외규장각 도서‘望鄕의 恨’언제 풀리나

    외규장각 도서는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프랑스가 최근 외규장각 도서 반환협상을 전담할 권위자로 자크 살로와(58)를 선정하면서 외규장각 도서를 언제쯤 돌려받을 수 있을지에 다시 관심이모아지고 있다. 외규장각 고문서 반환은 6년 넘게 끌어 온 한국과 프랑스간의 현안으로 지난 93년 9월 서울에서 열린 김영삼 대통령과 미테랑 대통령간의 정상회담에서 교환 기본원칙이 합의됐다.프랑스가 도서를 영구 임대형식으로 돌려주고우리나라는 그에 상응하는 고문서를 제공한다는 것으로 이른바 등가(等價)의 문화재 교환방식이다.그러나 추후 실무자들간의 협상에서 교환 문화재의 가치에 대한 견해 차이로 도서반환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답보상태를 거듭해온 도서반환 문제는 지난해 4월 새로운 해법이 제시됐다.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양국 역사 문화 전문가간’ 협의를 통해 해결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프랑스는 최근 자크 살로와의 선임 사실을 통보하고 우리측에 전문가를 선정해줄 것을 요청해왔다.자크 살로와는 감사원 최고감사위원이지만 박물관 협회 회장(89∼93년),문화부 박물관장(90∼94년)을 지내 문화계,학계에서도 폭넓은 교분과 지명도를 갖고 있다.지난해 9월에는 피에르 족스 감사원장을 수행,방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외교통상부는 현재 교육부,문화관광부의 협조를 받아 전문가 선정작업을 벌이고 있다.지난달 말에는 교육부와 문화부에서 추천한 10명의 명단을 놓고관계 부처 협의를 가졌다.전문가는 추천인물에 대한 검토작업을 거쳐 이달말 쯤 임명될 것으로 보인다.외교부는 가능하면 정치외교적 감각과 문화적 식견이 있으면서도 국민들을 이해시킬 수 있는 인물이 뽑히기를 기대한다.문화재 반환이라는 좁은 시각보다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양국의 전반적인 관계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외교부는 전문가 선임은 도서반환 협상의 첫 단추를 연 것이지만 섣부른 예단은 갖지 말 것을 주문한다.서로 반환협상에 부담을 느끼는 탓이다.외교부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최근 한 파리 특파원발 기사에서 주불대사가 “등가의 문화재 교환원칙에 얽매일 필요가 없으며 양국 문화교류 확대,유물 보전기술전수 등 다양한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개인의견이 확대 해석된 것으로 현재로선 완전한 백지상태라는 것이다. 외교부는 전문가가 선임되면 그동안의 경과를 설명해준 뒤 준비과정을 거쳐 프랑스와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갈 계획이다.그러나 우리나라와 프랑스는 심각한 견해차이를 보여 협상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일례로 프랑스는 당시 책을 가져간 것은 서고가 불에 탔기 때문이며 책을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말한다.또 외규장각 도서는 프랑스 국내법상 공공재산으로 등록돼 있는 국가재산이라며 미리 못을 박는다. 영국,프랑스 등 문화선진국들은 2차대전 이후에 만들어진 전시문화재 보호를 위한 헤이그협약(1954년),문화재 불법 반출입 및 소유권 이전금지와 예방수단에 관한 협약(1970년) 등 문화재 반환에 관한 국제협약에 가입하지도 않았다.더욱이 외규장각 도서의 해외 유출사건은 19세기 후반에 발생,전시문화재에 대한 국제협약의 적용을 받지도 않는다.문화재 반환의 선례가 될 것이라는 점도 부담이다.미국과 영국 등이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그러나 관계 전문가들은 경제협력 등 정치적 해결보다는 학술,학문적으로접근해야 한다고 말한다.즉 문화재 반환에 대한 국제법,판례,문화인류학적입장 등을 토대로 반환을 촉구해야 한다는 것이다.이들은 역사적 진실 앞에서는 어느 나라도 자유로울 수 없다며 이같이 주장한다.이들은 한 나라의 왕실재산은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국가재산인 만큼 프랑스가 외규장각도서를 자국의 공공재산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강조한다.또 문화선진국들은 문화재 보존기술이 낙후돼 있는 후진국들에게는 귀중한 문화재를 맡길 수 없다며 반환을 거부하고 있으나 외규장각 도서는 지난 75년 발견당시 이미 훼손된 상태여서 이러한 주장도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고 지적한다.또 덴마크가 아이슬랜드의 중세문학 필사본을 250년이 지난 뒤 반환한 데에서 보듯 불법으로 빼내간 문화재는 원소유국으로 반환되는 것이 국제적인 추세라고 말한다.한마디로 정치적 타결보다는 각종 관련 국제법에 의한 정공법을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외규장각 도서 반환 협의 일지]▒1886년 외규장각 도서 피탈▒1975년 박병선씨 외규장각 도서 발견▒1991년 10월 서울대 외무부 통해 반환요청▒1993년 9월 한불 정상회담에서 합의로 해결하기로 합의▒1994∼97년 한불간 협의 난항▒1998년 4월 한불 정상회담에서 전문가 협의로 해결하기로 합의▒1999년 1월 프랑스,전문가 자크 살로와 선정- 외규장각 도서란 외규장각 도서는 세자 및 왕비의 책봉행사와 결혼,국장(國葬) 논의 및 준비과정,의식절차 및 경비,행사 유공자들의 포상 등을 규정한 왕실 의전 궤범이다.보통 4권으로 만들어져 4대 서고에 보관된다.이 가운데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돼 있던 도서는 왕이 보던 어람(御覽)용으로 원본인 셈이다.관청 등에서 이를 복사,보관해왔기 때문이다.게다가 국내 보관본의 3분의1 정도는소실된 상태라 프랑스 보유 문서의 학술적 가치는 매우 높다.외규장각 도서는 188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극동함대가 빼앗아 갔다.현재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지난 75년 국립도서관 사서로 일하던 박병선씨가 베르사이유 별관 파손창고에서 처음 발견,세상에 알려졌다.파손 도서는 이후수리 복원됐으며 현재는 마이크로 필름으로 보관돼 있다.고서 반환은 91년 10월 서울대총장이 외무부에 추진을 의뢰,이듬해 7월 주불 한국대사관이 외규장각 도서반환을 요청하면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 사라진 ‘ML전설’ 조 디마지오 타계 전세계 애도

    ┑할리우드(미 플로리다주)외신종합연합┑ ‘메이저리그의 영웅’ 전설속으로-.미국 프로야구 뉴욕 양키스의 전설적인 스타 조 디마지오(84)가 8일 미국 플로리다 할리우드 자택에서 숨져 전세계 팬들을 비탄에 빠뜨렸다. ‘섹스심벌’마릴린 먼로와의 결혼으로 화제를 뿌렸던 디마지오는 지난해 10월 폐암수술후 폐렴 등의 합병증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오다가 지난달자택으로 옮겨진 뒤 이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타계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쾌유를 빌 만큼 전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그는 고향인 샌프란시스코 근교에 영면하게 된다. 30∼50년대초까지 양키스의 중견수로 활약한 디마지오는 개인통산 타율 3할2푼5리,홈런 361개를 기록했고 41년에는 56게임 연속 안타라는 ‘불멸의 대기록’을 세웠다.아메리칸리그에서 3차례 최우수선수(MVP)에 뽑혔고 명예의전당에도 올랐다. 특히 그를 더욱 유명하게 한 것은 여배우 마릴린 먼로와의 결혼.그는 은퇴3년뒤인 54년,1년여의 열애끝에 먼로를 아내로 맞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그러나 두사람의 결혼생활은 9개월만에 끝났다. 한편 디마지오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가 몰려있는플로리다 등 미국 전역은 슬픔에 잠겼다. 버드 셀리그 메이저리그 커미셔너는 “디마지오는 그라운드에서 우아함과품위,그리고 권위를 보여준 주인공”이라면서“그에 대한 추억은 그라운드가 아닌 우리들 마음속에 남아있으며 미국의 희망이자 이상”이라고 말했다. 양키스 구단주 조지 스타인브레너도 디마지오를 ‘사상 최고로 위대한 인물’이라고 추모하고 “그의 삶은 바로 품격과 권위였다”고 회상했다. 이탈리아 언론들은 ‘스포츠에는 스타와 전설이 있는데 디마지오는 전설이었다’며 이탈리아계인 디마지오의 죽음을 애도했다. - 디마지오는 누구인가 “신에게 야구선수의 전형이 될만한 인물을 창조해 달라고 부탁하면 신은조 디마지오같은 사람을 만들어낼 것이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톰 라소다 부사장은 이같이 말했다.디마지오는 그만큼 미국 프로야구에서 불멸의 전설이자 프로야구의 위엄과 품위를 갖춰놓은 인물로 숭앙받고있다. 1914년 이탈리아 이민 출신 어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디마지오는 자식들도 고기를 잡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희망과는 달리 일찍부터 야구에 매달려프로야구선수로 대성했다.대공황으로 어려움에 시달리던 미국인들은 그의 플레이를 보면서 희망을 찾았고 그의 성공은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으로 꼽혔다. 그는 1936년부터 51년까지,2차대전 참전으로 빠진 3년을 제외한 13시즌 동안 뉴욕 양키스의 중견수로 뛰면서 양키스를 10차례 월드시리즈에 진출시켜9번의 우승을 일궈냈다.통산 6,821차례 타석에 서 2,214개의 안타를 쳐 타율 .325를 기록했으며 361개의 홈런에 1,537점의 타점을 쌓았다.이같은 기록으로 디마지오는 11차례 올스타전에 출전했으며 3번에 걸쳐 아메리칸리그의 최우수선수로 뽑히기도 했다. 그러나 디마지오는 야구에서의 재능 외에도 인간적인 면에서 더 팬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타이 콥이나 베이브 루스 등 디마지오 이전의 스타들이 화려함으로 팬들에게 다가섰다면 그는 조용하고 소탈한 이웃의 모습으로 팬들과 가까와졌다.은퇴후에는 헐리우드에 ‘조 디마지오 어린이병원’을 설립해 사회사업에 힘썼다. 헤밍웨이가 그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서 디마지오를 언급한 것이나 듀엣 사이먼 & 가풍컬이 영화 졸업의 삽입곡인 ‘미세스 로빈슨’에서 디마지오를 노래한 것도 인간 디마지오에 대한 미국인들의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 디마지오는 한편 1954년 여배우 마릴린 먼로와 결혼,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이들의 결혼생활은 오래 가지 못하고 9개월만에 깨졌지만 디마지오는 먼로 사후 그녀의 묘소에 계속 장미꽃을 보내 여성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 2차 정부조직 개편안-역대 정부기구 변천사

    정부조직은 지난 48년 11부4처3위원회로 처음 모습을 갖춘 뒤 지금까지 모두 47회나 바뀌었다.특히 정권이 교체될때 마다 정부조직이 개편돼 부침을계속해 왔다. ◆최초 조직개편은 49년 보건부를 신설하면서 이뤄졌다.54년 개헌으로 국무총리제가 폐지됐고 55년에는 국토재건을 위해 부흥부를 신설하는등 12부3청1위원회로 개편했다. ◆60년 제2공화국 출범과 더불어 행정권이 국무원으로 넘어가면서 정부조직은 1원12부1처4청2위원회로 정비됐다.경찰의 중립확보를 위해 공안위원회를설치하고 감찰위원회를 부활시켰다. ◆61년 5·16이후 들어선 군사정권은 부흥부의 산업정책기능과 산업개발위원회를 묶어 경제기획원을 만들었다.63년 출범한 3공화국은 대통령권한을 강화하면서 경제부처를 대폭 보강,2원13부4처12청으로 정비했다. ◆72년 유신체제와 함께 등장한 4공화국은 고속 경제성장과 행정권 집중을위한 정부조직개편을 단행했다.공업진흥청 동력자원부 등을 신설,정부조직은 2원14부4처14청으로 정리됐다. ◆80년 출범한 제5공화국은 정의사회구현이라는구호 아래 노동청을 노동부로 승격시키고 체육부를 신설하는 등 2원16부4처13청 체제를 갖췄다. ◆88년 등장한 제6공화국은 작은정부 기조를 유지하면서 내무부 치안본부를경찰청으로 개편하고 문화공보부를 문화부와 공보처로 나눠 2원16부6처15청으로 재정비됐다. ◆94년 문민정부는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를 재정경제원으로,교통부와 건설부를 건설교통부로 통합했다.해양수산부와 중소기업청이 새로 생겨 2원14부5처14청1외국으로 조직을 정비했다. ◆98년 들어선 국민정부는 재정경제원을 재정경제부로,통일원을 통일부로 개편하는 한편 총무처와 내무를 행정자치부로 통합하고 외무부를 외교통상부로 각각 개편했다.또 기획예산위원회,예산청,식품의약품안전청 등이 신설돼 17부2처16청1외국으로 정립됐다. 張澤東 taecks@
  • [‘99 지구촌 점검] 생명과학(4) 장기 이식

    지난해 10월 프랑스에서 세계 최초로 ‘팔이식’ 수술이 성공을 거두자 의료계는 물론이고 전 지구촌이 술렁댔다.그동안 심장 간 골수 등 내부장기에만 국한됐던 ‘이식수술’이 이를 계기로 ‘몸통이식’까지도 가능하게 됐다는 흥분과 기대감 때문이었다. 1954년 미국에서 사상 최초로 쌍둥이간의 신장이식수술이 시도된 이래 장기이식은 놀라운 속도로 발전을 거듭해왔다. 최근엔 인공장기에 대한 개발도 활발해져 21세기엔 거의 모든 장기를 인공장기로 대체할 수 있을 것으로 과학자들은 예측하고 있다. 인공심장을 비롯해 간처럼 체내에서 화학적 기능을 하는 인공장기들도 속속 개발될 예정이다.실제 97년 미국서 열린 국제인공장기학회에서는 간세포를인공배양해 인공간을 만든 뒤 이를 특수 용기에 심어 혈관을 연결시키는데성공했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됐었다. 한편 간세포의 인공배양 성공은 이후 인간장기의 ‘대량생산’을 가져올 수도 있는 획기적 사건으로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간세포는 인간장기에서 피부조직에 이르기까지 각종 신체조직으로 성장하는 일종의 모(母)세포.따라서 간세포를 무한히 인공배양할 수 있다는 것은 곧인간의 각종 세포와 조직,장기를 대량생산할 수도 있게 됐다는 뜻이다. 비록 많은 전문가들이 실제 임상적용에 이르기까지 10년을 전망하지만 동물장기이식(이종간 장기이식)의 발전과 함께 간세포 배양의 성공은 이식분야에 있어 큰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동물의 기관이나 장기를 인간에게 이식하는 ‘이종이식’은 최근 유전조작을 통해 DNA를 인간유전자로 바꾼 이식용돼지를 별도로 사육하는 단계까지 와있다. 인간이식용 유전조작 돼지를 사육중인 미 얼렉션 제약회사는 유전조작 돼지의 뇌세포를 파킨슨병과 유사 증세를 나타내는 쥐에 이식한 결과,호전을 보였다며 연말쯤 사람을 대상으로 임상실험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이식된 동물장기에 대한 신체의 거부반응을 막고 돼지 등 동물에게만 있는 바이러스의 신체 침투를 차단하는 일이다. 장기이식 수술은 미국에서만 매년 1만8,000건이 행해지고 있다.수술대기자수는 약 4만명.매일 10∼12명이 장기기증자를 찾지 못해 죽어간다. 현재 미국에서 장기기증자를 기다리고 있는 환자는 골수환자 10만명을 제외하고도 6만명에 이를 정도다. 수천만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는 암과 에이즈 못지 않게 세계 생명과학계가 장기이식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 재건축 계획

    조계종의 제1교구 본사이자 종단행정의 총본산인 서울 종로구 견지동의 조계사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한다.조계종 총무원은 조계사를 수행및 기도처로서의 분위기와 현대적 포교와 행정기능을 갖춘 도량으로 만든다는 방침아래 조계종 총무원 건물과 조계사 대웅전 신축에 대한 활발한 논의를 거듭하고 있다.조계종은 현재의 총무원 청사가 너무 낡고 파손이 심하게 돼있는데다 거듭된 폭력점거사태로 분규의 상징처럼 돼있어 이를 허물고 다시 짓는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있다. 종단관계자들은 물론 일반불자들도 조계사가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한국불교의 얼굴인만큼 공간 재배치와 함께 대대적인 보수및 조경작업을 실시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조계사 대웅전이 전통적인 사찰 전각의 형태가 아니라 타종교의 전각을 옮겨온 것이라는 지적도 끊임없이 제기돼왔으며 ‘총무원 청사가 대웅전보다높기때문에 분규가 잦다’는 속설까지 등장,환골탈태가 불가피한 실정이다. 조계사는 1895년 고종황제가 승려들의 도성 출입금지를 해제한 뒤 이회광이 지금의 수송공원 자리에 세운 각황사에서 비롯된다.이후 조선불교 선교양종은 31본산 주지회의의 결의로 1937년 각황사를 허물고 바로 옆 현재의 위치에 총본산으로 태고사를 세웠으며 1954년 조계종 정화불사를 계기로 조계사로 이름을 바꾸었다.대웅전 건물은 차경석이 창종한 보천교의 십일전 건물을 옮겨온 것으로 팔작지붕에 정면 7칸,측면 4칸의 다포식 건물이다.총무원 청사는 고산 총무원장이 조계사 주지로 있던 75년 3층 높이로 지었으며 후임주지인 월탄스님이 5층으로 올렸다. 조계사 경내 재배치작업및 총무원 청사 신축계획은 전 송원장 시절인 97년에 이미 세워졌으며 30억원의 기금도 마련돼 있다.계획안에 따르면 현재의대웅전을 뒤편의 교육원 자리(우정국 옆)로 옮기고 대웅전 자리와 포교원 건물 사이에 새 총무원 청사를 포함한 종합불교회관을 짓도록 했다. 그러나 고산 총무원장은 조계사 대웅전은 그대로 둔 채 교육원 자리에 지상 3층,지하 2층 규모로 새로운 청사를 짓는 반면 장기적으로 대웅전 앞쪽의건물매입을 완료해 고층건물로 종합불교회관을 건립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지난달 9일 ‘종단 안정과 개혁을 위한 범불교연대회의’가 마련한 조계사 발전방향 공청회에서 유정길 한국불교환경교육원 사무국장은 “조계사는 불교의 귄위를 상징하는 곳이면서도 시민이 함께 공유하는 열린 마당이 되어야 한다”며 불자와 전문가,시민이 함께 참여해 만드는 종합적인 마스터 플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관태 포교원 연구과장도 “1,600년 한국불교의 역사를 대변하는 조계사는 21세기 미래지향적 불교상을 웅변하는 모습으로 새롭게 정비돼야 한다”면서 “종도들의 중지를 모아 전통사찰의 풍미를 살린 전각과 기능성을 함께갖춘 현대적 빌딩을 신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朴
  • 의정부 풍치지구 해제 추진

    풍치지구로 지정돼 수십년동안 도시발전을 가로막았던 의정부 호원동일대 170만㎡가 풍치지구에서 해제될 전망이다. 의정부시는 지난 54년 풍치지구로 지정돼 각종 개발에 규제를 받아왔던 신흥전문대 부근과 라전모방 부지 등 호원동일대 170만㎡에 대해 지구해제를추진하기로 했다고 9일 밝혔다. 풍치지구가 해제되면 현재 자연녹지지역(90만㎡)이 주거지역으로 바뀌게 되며 시가 토지구획정리사업 등을 펴 토지소유주가 자체개발하도록 하거나 도시기본계획을 다시 수립,지주조합 또는 공영개발 방식으로 시가지 조성을 유도하게 된다. 시는 이를 위해 지난해 착수한 시 도시기본계획 정비작업을 하면서 풍치지구 해제 대상지역과 이 지역 건축물현황 및 개발실태 조사작업도 벌여 풍치지구 해제안을 마련할 방침이다. 또 해제안을 경기도 도시계획위원회에 상정,심의가 통과되는대로 도시기본계획에 반영한 뒤 건설교통부의 승인을 받을 계획이다.
  • ‘목포의 눈물’三鶴島 섬 복원 공원 만든다

    이난영의 노래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전남 목포시 만호동 삼학도(三鶴島)가 훼손된지 45년여만에 복원된다. 전남 목포시(시장 權彛淡)는 8일 삼학도를 올해 공원지구로 전환한 뒤 2005년까지 총사업비 571억원을 들여 복원,목포를 상징하는 공원으로 조성하기로했다. 시는 운하를 건설하고 기념관,상징탑,밀레니엄 다리,밀레니엄 광장 등을 조성할 계획이다.올해는 25억원을 들여 대삼학도 특정지역의 건물과 유류탱크,모래부두 이전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삼학도는 예전에는 다도해가 시작되는 대·중·소학도 등 3개의 아름다운섬이었다.원래 무인도였고,50년대까지만 해도 집이 2채 뿐이었다. 그러나 54년부터 개발사업이 시작된 이후 육지와 연결돼 산허리가 잘려나가고 방조제 사이 60만평이 매립되면서 도심지로 개발됐다.섬 기능을 상실한채 완전히 훼손돼 옛 모습은 찾을 수 없고 지도에서조차 사라진 지 오래다.현재는 6,000여가구 2만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전체 면적 14만9,000평 가운데 4만6,000평이 공원으로 지정돼 있고 나머지 10만3,000평은 공업지역이다. 시는 재정형편상 삼학도 복원사업을 자체사업으로 추진하기는 곤란하다고판단,이를 해양수산부의 목포항 정비계획에 반영해 국가사업으로 추진해 줄것을 전남도와 중앙정부에 건의했다.시의회도 석탄과 한국제분의 원맥을 수송하는 삼학도 인입철도와 석탄부두를 하루 빨리 철거해 줄 것을 요구하는건의문을 채택해 중앙 관계부처에 전달했다.
  • 해외칼럼-나카에 요스케 前 駐중국 일본대사

    한국,중국,일본 등 동북아 3개국은 우연찮게도 1940년대 후반 차례로 중차대한 역사적 전기를 맞은 뒤 20세기 후반을 숨가쁘게 질주해왔다.21세기를 몇배의 속도로 질주하고자 하는 이들 3개국이지만 하나같이 민첩함을 떨어뜨리는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있다고 나카에 요스케(中江要介)전 주중국 일본대사는 진단한다.일본 도쿄신문에 게재된 그의 컬럼 ‘한 일 중 3인3색의 고민’을 소개한다. 세월은 모질게 흐르고 흘러 20세기는 가고 21세기가 온다. ‘대일본제국’이 패하고 1947년 신헌법이 시행돼 ‘일본국’으로 다시 태어난 지 52년. ‘중화민국’이 무너져 타이완(臺灣)으로 옮겨가고 1949년 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한 지 50년. 한반도가 1945년 일제 식민지지배에서 해방되어 독립의 길을 열은 지 54년. 일본 중국 한반도는 반세기,초강대국에게 휘둘리면서도 안전과 발전을 위해 제각기 노력을 기울여왔다. 모두들 밝은 기분으로 21세기를 맞고 싶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이들 3자는 좋든 싫든 21세기로 미룰 수 없는 나름대로의 고민을 갖고있다. 먼저 일본.두번 다시 무모한 전쟁을 하지 못하도록 세계에 유례가 없는 헌법을 갖게 된 일본은 냉전체제에서 자유주의 진영의 일원으로 오랫동안 국방을 미일안보체제에 맡겨왔다. 그 결과,냉전이 끝난 지금도 여전히 대미(對美)의존의 습성에서 벗어나지못하고 있다.밖에선 ‘그래도 독립주권국가인가’,안에서는 ‘자국의 방위를 다른 나라에 통째로 맡겨도 좋은가’하는 의문을 던진다. 핵무기 실험 반대에도 박력이 없고 미일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을 둘러싼 논의도 티격태격한다. 왠가.‘국방’에 대한 국론이 취약하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타이완 해협이나 한반도가 ‘불안정요인’이라고 하면 곧바로 위기관리의 측면만을 다룰뿐 근본적인 불안정요인을 제거하기 위한 ‘외교노력’이라고 하는 국방의기본은 거의 잊혀진다. 다음은 중국.60년대 초까지는 옛 소련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다 자력갱생 노선으로 전환했다.가시밭길의 선택이었다. 80년대 이후 개혁개방에 몰두하고 있는 중국은 그러나 건국이념으로 공산주의 체제를 선택한 후유증이 적지 않다.사회주의 시장경제는 성공할 지,정치의 민주화는 순조롭게 진행될 지 등 가시밭길은 이어진다. 이런 중국에 있어서 홍콩 마카오의 반환에 뒤따르는 현안은 타이완 문제다.이 문제에 개입할 국내법상의 근거를 갖고 있는 미국,중국과의 앞으로의 대응이 주목된다. 덧붙이면 대만을 식민지배했던 일본에는 개입하거나 간섭할 자격이나 권한이 없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마지막으로 한반도.연합국이 패전국 일본에게 지운 의무는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는 것이었다.그런데도 냉전은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단시켰다.민족의 비극이다. 냉전 이후 남북대화가 시도됐다.그러나 북한에 대한 핵 의혹이 문제가 되면서 한미일 사이에는 ‘태양’(유연노선)과 ‘북풍’(北風·강경노선)의 두정책이 뒤섞여 있는 상태가 됐다.과거 미소 패권다툼의 결과 민족의 비극은이들 분단의 책임자들로부터 보상되지 않고 있다. 한반도를 식민지배했던 일본이 해야 할 일은 ‘조선의 독립’을 승인했던것처럼 북한도 빨리 승인하는 것이다. 이상 이들 3자(者)3색(色)의 고민에는 미국이 깊이 연관돼 있다.우리는 미국이 이 고민을 더욱 심각화하지 않도록 충분히 경계할 필요가 있다.
  •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자유부인’의 정치사회적 접근(1회)

    휴전 직후인 1954년 1월 1일부터 8월6일까지 ‘서울신문’에 215회(많은 연구서와 논문들이 8월 9일까지 251회라고 하나 잘못임)에 걸쳐 연재되었던 정비석의 ‘자유부인’은두 달 남짓만에 서울법대 황산덕교수가 “대학교수를양공주에 굴복시키고 대학교수 부인을 대학생의 희생물로 삼으려”는 “스탈린의 흉내”를 내는 작가의 고집으로 “중공군 50만명에 해당하는 조국의 적”이라는 공격으로 야기된 논쟁 때문에 더욱 유명해졌다. 왜 하필 중공군 50만명인가란 문제는 한국전 때 참전했던 중국인민해방군의 숫자가 적게는 10만부터 많게는 100만명 설까지 분분한데 당시에는 대략 50만명으로 잡았던 데서 유래한 것 같다.그러나 정작 중요한 대목은 공격자가 매카시즘적 수사법을 태연하게 동원하고 있다는 점이다.말하자면 이 소설의 작가는 ‘빨갱이’같은 한국사회 파괴범이라는 은유가 스며있어 휴전 직후의 상황에서는 끔찍한 사상적 표적사격의 효과를 노리고 있다. 역사는 ‘자유부인’이 중공군이 아니라 오히려 한국 전후사회 체제를 공고히 다져준 유엔군과 같은 역할을 했음을 증명하고도 남는지라 굳이 이 냉전체제의 낡은 논쟁을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다만 황교수가 제기한 문제 때문에 ‘자유부인’이 윤리적인 측면에서만 논의되어 왔다는 점은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황교수가 첫 공격의 화살을 쏜 것은 ‘대학신문’ 1954년 3월 1일자였다.그러니까 ‘자유부인’의 장태연 교수가 아내를 찾아온 이웃집의 미군부대 타이피스트(황교수는 그녀를 양공주라 했다) 박은미양을 맞아 “감색 스커트밑으로 드러나 보이는 은미의 하얀 종아리”에 “별안간 가슴이 설레었다”는 유명한 장면이 나오고(이 소설 중 가장 에로틱한 장면인데 그 싱거움이라니!),그녀의 전화를 받고 아내가 사 준 약혼기념 회중시계를 전당포에 맡기곤 돈 3,000원을 갖고 나갔으나 그녀가 낸 돈으로 영화를 한 편 보았으며,아내가 돌아오지 않은 밤 열 시 넘은 시각에 자신도 모르게 백지에다 박은미란 이름을 낙서하는 이야기가 2월 28일 경까지의 내용이다. 장교수의 아내 오선영은 옆집 대학생 신춘호의 방에서 춤을 배우던 중 “입술을 고요히 스쳐”가자 “그의 미지근한 태도에 오히려 불만”을 느끼는가하면 두 번째엔 짙은 포옹과 탱고 스텝으로 발전하며,화장품 상점 파리양행관리인으로 취직해 사기꾼 백광진과 사장 한태석을 번갈아가며 만나는 게 2월 말일 까지의 줄거리다. 1950년대 중반 무렵의 한국사회는 이혼율이 0.27%(1955년도 수치)에다 댄스 붐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70여 여성을 농락한 박인수 사건(1954)이 터졌던가 하면 부산 피난 국회에서 개정된 간통쌍벌죄 형법의 첫 고소 사건(1954)이세인의 시선을 끄는 등에서 엿볼수 있듯이 윤리의 붕괴현상이 가속화되고 있었다.다만 춤다운 춤을 추자면 해군 장교구락부에나 가야할 정도로 사회적인 시설은 미비했었음을 이 소설은 밝혀주고 있다. 그러나 황교수의 우려와는 달리 논쟁 이후의 소설 전개에서 장교수는 박은미를 처음 보았을 때의 에로티시즘에서 오히려 후퇴해 버렸는데,‘교수’의위신 세우기에 작가가 협조한 흔적이 역력하다.오선영은 신춘호와 세 번,한태석과 한 번,도합 네 번이나 육체관계 직전까지의 분위기를 조성했지만 아이들이 부르러 오거가 오빠나 남편이 불쑥 나타나는가 하면 본처가 미행하다가 현장을 덮치는 등 번번이 방해 당하고 만다. 결국 ‘자유부인’은 ‘자유를 꿈꾸는 부인’으로 자유의 미수에 그치고 말았는데도 세인들은 이 소설의 윤리적인 측면만을 주시해 왔다.그러나 작가는 신춘호의 뺨을 쓸어주는 오선영을 “젊은 대학생이 제멋대로 씨부리는 말을 그대로 믿고” 황홀해 하는 어리석음을 꼬집으며 결국은 가정의 소중함을깨닫는 귀가형 결말로 대미를 장식하지 않았는가. [任軒永 문학평론가]
  • 무소유 실천 명진스님 100齋

    해인사를 오늘의 대가람으로 일군 동광당(東光堂) 명진(明振)스님의 100재(齋)가 2월 8일 해인사 길상암에서 열린다. 조계종 분규가 한창이던 지난해 11월1일 세수 60세,법랍 49세로 열반에 든명진스님은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54년 충남 계룡산 신원사로 출가한 뒤 57년부터 해인사에서 주석하며 해인사 교무국장,총무국장,주지(82∼84년)등을지냈다.주지시절엔 대규모 중창불사를 이뤄냈고 길상암과 부산의 사리암,대구의 청룡사 등을 창건했다. 명진스님은 평생 철저한 무소유와 봉사로 일관,손수 옷을 짓고 외출할 때는 항상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녀 ‘도시락스님’이라 불리기도.80년대초부터는 오갈데 없는 아이들을 돌봐 왔다.지금까지 이렇게 길러낸 고아는 모두 300여명.현재도 길상암에는 고아 8명이 살고 있다. 명진스님 문도회(회장 德雲)는 스님의 유업을 잇기 위해 경남 합천군 가야면 매화리 해인사 아랫마을에 300여명 수용 규모의 무료 양로원을 짓기로 하고 가을부터 공사를 시작할 계획이다.또 장학기금을 만들어 해인사 학인승려들에게 장학금을지급하기로 했다.朴燦
  • 中 사유제 공식 인정

    ?맏@兼? 연합?망薩? 최초의 현대적 헌법으로 불리고 있는 82년 제정 헌법의 부분 개정안 초안이 오는 3월5일 열리는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에 상정,심의된다.전인대 상무위원회 제 7차회의는 30일 두차례 정치국 상무위 원회의 심의,결정과 정치국 회의의 통과를 거친 헌법개정안 초안을 전인대 제2차 회의의 심의에 부치기로 결정했다. ‘중화인민공화국헌법’은 지난 54년 제정돼 75년,78년에 이어 82년에 또 한차례 전면개정된 뒤 88년,93년 부분적으로 손질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개정안은 서언에서 ‘덩샤오핑(鄧小平)이론’을 마르크스-레닌주의,마오쩌 둥(毛澤東)사상과 동열에 놓고,‘사회주의시장경제 발전’을 국민의 국가 기 본임무 달성을 위한 지침의 하나로 명시했다.지난 97년 9월의 15전대가 당의 지도사상으로 확립시킨 ‘덩샤오핑이론’이 헌법에도 그대로 적용돼 당과 국가의 지도지침으로서 확고부동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셈이다. 개정안은 또 현행 헌법에 공유경제를 보충하는 것으로 돼 있는 개체경제와 사영경제 등 비공유경제를 사회주의시장경제의 중요한 구성부분으로 격상시 킴으로써 법적으로 사유제를 공식 인정했다. 비공유경제 이른바 사유제는 지 난 20년간 급속히 늘어나 97년에는 그 비중이 국민총생산 23.3%, 사회고정자 산투자 32%,국가재정수입 11.6%,공업생산 21.2%,농업생산 27.5%,건축업 19.3 % 등을 차지했다.
  • 민족일보 조용수(金三雄 칼럼)

    기원전 399년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인정하는 신들을 믿지 않고,새로운 다이모니온을 끌어들여 청년들을 부패 타락케 한 혐의로 아테네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독배를 들기에 앞서 최후진술에서 “클리톤이여,아스크레피오스 신에게 닭 한마리 빚진 것을 갚아다오”라는 유언을 남긴채 권력의 제물로 사라졌다. 2,000여년이 지난후 한 청년이 비슷한 유언을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니,“민족을 위해서 할 일을 못하고 가는게 억울하다. 정규조(친구이며 민족일보상무) 동지에게 돈을 꾸어다 신문 만드는데 썼는데,갚아주지 못하고 가게돼 미안하다”는,민족일보 조용수사장의 유언이 그것이다. 1961년 12월21일 오후 서대문형무소 사형집행장에서 조용수는 32세의 짧은 생애를 접으면서 민족을 위해서 할 일을 못하고 가는 ‘억울함’과 친구에게 돈을 꾸고 갚지 못한 ‘미안함’을 유언으로 남겼다. 건국 이래 수 많은 언론인이 정치적 수난을 겪었지만 순수한 언론활동을 이유로 극형을 당한 사람은 조용수 사장이 처음이다. ○박정권의 이념적 희생양 친일언론인 출신으로 해방후 평화일보·국제신문 편집국장을 지내다가 1949년 1월 반민특위에서 재판을 받고 석방되어 동양통신 편집국장을 지낸 정국은은 재일 조총련계의 국제공산당원이었다는 죄목으로 54년 2월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리고 월간 ‘청맥’과 관련한 김질락의 경우 간첩혐의로 박정희정권에 의해 72년 7월 처형되었다. 정국은과 김질락의 처형에 대해 이의를 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간첩이란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조용수 사장의 경우는 크게 다르다. 친일과 공산주의 경력을 가진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사상적 콤플렉스에서 ‘민족일보’를 희생양으로 삼고 마침내 유망한 젊은 언론인의 생명을 앗아갔다. 조사장은 61년 2월 4월혁명 공간에서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고,부정부패를 고발하며,노동대중의 권익을 옹호하고,양단된 조국의 비원을 호소한다는 사시 아래 민족일보를 창간하여 진보세력을 대변하다가 5·16 쿠데타로 구속되어 이른바 ‘혁명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고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확인절차로 형이 집행되었다. 군사정부는 국제펜클럽과 국제신문인협회 등의 항의와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한 젊은 언론인을 처형하는 잔인성을 보였다. 민족일보의 자금이 조총련에서 나왔다는 혐의와 북한정권이 주장하는 평화통일론을 보도·선동하여 반국가 행위를 했다는 죄목이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조총련계 자금유입의 흔적은 나타나지 않았으며,평화통일론이 극형의 죄목이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당시 검찰과 재판부가 유일한 ‘물증’으로 내세운 이영근씨는 민단계통의 인물이었으며,노태우정부는 1990년 그가 일본에서 사망하자 국가에 기여한 공적을 이유로 국민훈장을 추서하여 간첩이 아님이 입증됐다. 또 당시 이 사건에 연루되었던 많은 인사들이 역대 정권의 요직에서 활동하고 더러는 정부가 훈장을 줌으로써 이 사건은 이미 정치적으로 사면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문제는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다.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조사장의 37주기에 즈음하여 지난 20일 낮 남한산성에 있는 묘소에서 추도식과 민족일보사건 진상규명위 발족식이 있었다. 참석자들은 그동안 검찰이 자료공개를 거부해온 민족일보 재판관련 자료를 찾아 진상을 밝히고,국회에서 특별법(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이 제정되면 재심을 청구하며,기념사업을 통해 평화통일의 유지를 잇는 것으로 뜻이 모아졌다. 조용수 사장을 죽음으로 몰아간 당시 검찰,재판관 등 생존자들은 증언을 통해 진실을 밝혀야 한다. 언론계도 건국 이래 최초의 필화사건으로 생명을 잃은 한 언론지도자의 억울함을 밝히고 신원(伸寃)하는데 뜻을 모았으면 한다.
  • 호치민/李慶衡 논설위원(外言內言)

    金大中 대통령은 15일 하노이에서 열리는 아세안정상회의에 참석중 베트남을 국빈방문,우리나라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호치민(胡志明)묘소를 참배할 예정이다. 베트남 민족의 위대한 ‘붉은 별’로 추앙을 받고 있는 호치민(1890∼1969)은 프랑스 식민지 치하의 베트남 북부 예안에서 출생,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아래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베트남 독립의 초석을 닦은 인물. 그가 사망한지 30년이 가까운 오늘날까지도 베트남 국민들의 정신적 우상이 되고 있으며 언제나 다정한 ‘胡아저씨’로 통하고 있다. 호치민은 청년기에 고국을 떠나 파리 등 해외에서 30년간을 보내며 혁명의 지도자로 성장했고 51세 때 귀국하여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을 결성해 주석자리에 올랐다.2차 대전후 프랑스가 영국·중국과 거래끝에 베트남 전역에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자 그는 대불(對佛)항전을 시작했다. 프랑스와의 전쟁은 1954년 그의 동지인 지압장군이 이끈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로 일단락되었으나 이어 체결된 제네바평화협정으로 베트남은 북위17도선을 경계로하여 남북으로 분할되고 말았다. 프랑스군이 물러나자 동서냉전체제하의 미국이 그 공백을 메웠고 1960년대에 접어 들어서는 베트콩·북베트남(越盟)과 미군이 맞붙은 ‘정글속의 지루한 전쟁’이 계속되었다. 결국 그가 사망한지 6년 뒤인 75년4월 월맹은 월남을 적화하고 전체 베트남을 통일하는데 성공했다. 우리나라는 월남전 참전기간(64년 9월∼75년 4월)동안 연인원 31만명의 장병을 파견했고 이중 4,624명이 전사했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호치민의 월맹군과 베트콩을 상대로 피를 흘렸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국제사회에선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지난 96년 당시 金泳三 대통령은 베트남을 방문했지만 베트남측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월남참전의 과거사를 의식,호치민묘소를 참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金대통령의 호치민묘소 참배는 양국이 솔직하게 구원(舊怨)을 씻고 양국관계를 한 단계 끌어 올려 놓겠다는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인 것같다. 우리로서도 이제 베트남 인민들이 국부(國父)로 우러러 보는 호치민을 그들의 입장에 서서,그리고 우리만의 존재가 아니라 상호간의 관계속에서 바라보는 성숙한 외교적 시각을 가져볼 시기가 온 것 같다.
  • 국민훈장 받은 李敦明 변호사/세계인권선언 50주년

    ◎“현정권 인권보호 진일보 환영”/‘정부가 주는 賞’에 세상 변화 실감/인권 지키는 것은 법조인의 기본 사명/약자들 위해 정부가 끝까지 노력해야 “인권을 지키는 것은 법조인의 기본 사명입니다.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상까지 받게 돼 쑥스럽습니다” ‘인권운동의 대부’로 알려진 李敦明 변호사(76)는 10일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세계 인권선언 50돌 기념식에서 인권신장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은 데 대해 “앞으로도 흔들림없이 정진하라는 채찍으로 알겠다”고 소감을 말했다. 35년동안 변호사로 재직하면서 한국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인권침해 사건의 변론을 도맡았던 李변호사는 스스로 말하듯 꿈도 꾸지 않았던 ‘정부가 주는 상’에 세상의 변화를 실감했다. 이같은 사회진보에 작게나마 역할을 했음을 인정받은 것 같아 기쁘다고 그는 덧붙였다. 52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법조계에 투신한 그는 54년 대전지법 판사를 시작으로 10년동안 법관을 지냈다. 지방판사여서 정치적 사건을 맡을 기회는 없었지만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구속적부심을 적용,피의자를 석방해 ‘인권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대통령 비방으로 구속된 한 야당 정치인을 적부심으로 풀어 준 것이다. 63년 변호사 개업을 하면서도 법률신문 기고를 통해 “변호사로 성공과 실패의 판단기준은 돈을 많이 벌어 큰 집을 사고 자가용을 굴리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기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사회적 책임을 얼마나 실천했느냐로 따져야 한다”는 올 곧은 법조인관을 피력하기도 했다. 72년 10월유신 선포는 그가 본격적으로 인권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였다. 그는 “유신이 선포되던 날 정부가 입법 및 사법권을 독점하고 무엇보다 국민에게서 정부를 선택할 권리를 빼앗아 간데 대해 분노하며 밤잠을 설쳤다”면서 “이 때문에 인권운동에 앞장 서겠다고 결심했다”고 회고했다. ○金芝河씨 사건 변론 李변호사가 인권운동차원서 첫 변론을 맡은 사건은 지난 75년 시인 金芝河씨의 반공법 위반사건이었다. 이후 청계피복노조사건,朴正熙 대통령 시해사건,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삼민투 사건,權仁淑양 성고문사건,金槿泰씨 고문사건 등 한국 인권운동사의 한가운데에 늘 자리했다. 金大中 대통령이 연루된 76년 명동성당 3·1 구국선언사건의 변론도 그의 몫이었다. 동아일보 광고해약사태 땐 동료 변호사들의 협조를 얻어 광고게재운동을 주도했었다. ○5共때까지 암흑시대 그는 “유신이후 全斗煥 정권때까지 인권의 암흑시대라고 할만큼 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이 극심했다”면서 “당시만 해도 인권변호사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여서 힘들기도 했지만 가장 보람된 기간이었다”고 회고했다. 또 “부지런히 뛰었지만 법관이 용기있는 판결을 내리지 않아 항상 졌다”면서 “나중엔 법관을 보고 변론하는 것이 아니라 방청객을 향해 변론하게 되더라”고 말했다. 李변호사를 중심으로 한 인권변호사 그룹은 80년대 이르러 그 趙永來씨. 李相洙 국민회의 의원 등 소장변호사들의 합류로 세를 불려 88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을 조직했으며 李 변호사는 초대 고문을 맡았다. 87년에는 5·3 인천사태로 수배중이던 李富榮 현 한나라당의원을 숨겨준 죄로 6개월동안 옥고를 치렀다. 이 때 그는 “정치보복으로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처단하는 마지막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유명한 최후진술을 남겼다. 88년 모교인 조선대의 총장직을 제의받고 적임자가 아니라며 극구 사양했지만 학교측에서 수십 번을 찾아와 부탁해 할 수 없이 승낙했다.어차피 정부의 승인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 승인이 나 총장을 맡게 됐고 재직중 李哲揆군 변사사건,어용교수 해직 등 큰 사건에 휘말리기도 했다. ○인권은 곧 민주주의 총장직에서 물러난 뒤 92년부터 한동안 변호사 업무에서 손을 떼고 재야운동에만 전념했다. 현재 덕수합동법무법인에 적은 둔 李변호사는 건강문제로 사건 변호는 맡지 않고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 천주교 인권위원회 고문과 지난달 발족한 ‘인혁당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대책위원회’의 공동대표도 맡는 등 인권운동에 관한 식을 줄 모르는 열정을 보이고 있다. “암울했던 군사정권 시절에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던 인권변호사가 이젠 인권 신장에 관심을 갖는 후배들이 많아 든든합니다” 천주교 신자인 李변호사의 세례명은 ‘유토피아’의 저자 이름과 같은 토머스 모어. 성인(聖人) 이름을 쓰는 관례를 따르지 않은 것은 정의를 위해 단두대에 선 용기에 감명받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권리를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인권은 곧 민주주의라는 신념이다. 李변호사는 “현 정권이 전 정권보다 인권에 관한 한 진일보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을 환영한다”면서 “아직도 그늘 속에 있는 약자들을 위해서 할 일이 많은 만큼 정부가 끝까지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한다”고 기대했다.
  • “金영훈 중사 北 초소서 술판까지”/전역 소대원들 증언 내용

    ◎일주일에 1∼3회 찾아가 담배 등 선물 갖고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근무중 수시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군과 접촉한 것으로 드러난 金영훈 중사(28)는 북한군으로부터 선물을 받고 술판까지 벌인 것으로 밝혀졌다. 또 金중사가 부소대장으로 있던 소대원들 가운데 일부 사병들도 북한군과 접촉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같은 사실은 지난 2월24일 공동경비구역내 벙커에서 권총에 맞아 숨진채 발견된 金勳 중위의 아버지 金拓씨(55·예비역 중장)가 지난 10월26일 金중위의 소대원 출신 전역자들을 상대로 증언을 녹취해 최근 천주교인권위원회에 넘긴 자료에서 드러났다. 증언록에 따르면 이들은 金중사가 판문점 회담장 근무 때 일주일에 3회 정도 담배와 구운 고기 등을 들고 우리초소와 20∼60m쯤 떨어진 북한군 초소에 가서 인삼주,담배,독일제 의약품 등을 갖고 왔다”면서 “심지어 술을 마시고 취해 돌아올 때도 많았다”고 증언했다. 특히 金중사가 월경 때마다 공동경비구역내에 설치된 감시용 비디오 카메라의 방향을 돌려놓으라고 부하들에게 지시하는 용의주도함을 보였다고 증언했다. 이들은 또 “북한군 원사가 견학단 경호임무 차원에서 합법적으로 우리측 구역으로 넘어와 ‘金중사와 친구’라면서 ‘오늘밤 0시00분에 1초소앞 군사분계선에서 보자고 전해달라’고 했다”고 말해 상당히 친밀한 관계였음을 반증했다. 전역병들은 金중위가 소대장으로 부임했을때는 물론 신병이 올때마다 북한군이 이름을 미리 알고 불러 놀란 적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金중사의 북한군 접촉행위를 알면서도 상부에 보고하지 못한 데 대해 “金중사가 북한군에게서 받은 물품을 소대원들에게 나눠주면서 이를 습득물인 것처럼 거짓 신고를 하도록 꾀어 그 덕에 휴가 등 포상을 탄 소대원들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토로했다. 또 “金중사도 자신의 행동이 위험한 짓인 줄 알았지만 적 초소앞에서 술을 마신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협박할 지 모른다면서 만나기 싫어도 만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었다”고 증언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이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JointSecurity Area)은 군사분계선상에 세워진 회담장을 축으로 하는 반경 400m의 원형지대. 54년 유엔과 북한의 협정에 따라 만들어져 양측 35명씩의 군인들이 공동 경비한다. 76년 8월18일 ‘도끼 만행사건’ 이후 양측 군인들간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군사분계선이 그어졌고 경비병 등 모든 군인들은 특별한 때를 제외하고는 군사분계선을 넘지 못하도록 했다. 우리측은 현재 4개 소대 160여명의 카투사들이 교대로 경비하고 있으며 북측 경비요원들은 모두 대남심리전 특수요원인 ‘적공조’ 소속인 것으로 알려졌다.
  • 한용운 선사 묘소에서(金三雄 칼럼)

    마지막달 첫 일요일 오후, 황초(黃草) 소슬한 망우리공원 만해 한용운선사 묘소에 엷은 햇살이 꽂힌다.선사 가신지 54년,생애를 조국독립과 불교유신에 바친 선사는 광복을 한해 앞두고 60년의 삶의 나래를 접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조국을‘님’으로 기리며 빼앗긴 님을 찾고자 애태우던 ‘선사님’가시고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흘렀다.광복된 조국이 아직도 선사를 공원묘지 일우에 방치해온 것도 가슴 아픈 일이지만,지금 삭발에 장삼 걸치고 폭력 휘두르는 불교계 현상은 더욱 가슴아픈 모습이다. 사바중생은 실업과 생활고에 허덕이고 나라가 온통 환난에 시달리는데 승려들은 광제창생은커녕 법력아닌 폭력 의존의 부끄러운‘소림사혈투’를 계속한다. 부끄럽지 않은가. 석가모니는 ‘유교경(遺敎經)’에서 “부끄러움의 옷은 모든 장식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것이다.부끄러움은 쇠갈퀴와 같아 사람의 법(法)답지 못함을 다스린다.그러므로 부끄러워하는 생각을 잠시라도 버려서도 안된다.만일 부끄러워하는 생각을 버린다면 모든 공덕을 잃게될 것이다.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은 곧 착한 법을 가질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짐승과 다름없다”고 질타했다. 조계종단의 일부 승려들이 염불보다 잿밥에 눈이 멀어 야단법석(野壇法席)을 친지 한달,폭력과 기물파손 혐의로 승려 39명에 경찰의 소환장이 나와도,사부대중의 간절한 화합 기원도 아랑곳없다. 만해는 조선불교가 일제와 결탁하여 호국불교의 전통을 잃을 때 ‘불교유신회’를 통해 “진실로 본래의 생명을 회복하고자 할진대 재산을 탐하지 말고 이 재산으로써 민중을 위하여 법을 넓히고 도를 전하는 실제적 수단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고 설파했다. 어찌 오늘의 불교계에 던지는 설법,화두는 제외된다 할까. 부처님 가르침에 ‘선불수보(善不受報)’라 했던가.“좋은 일에 어찌 보수가 있을 것이냐”란 뜻,무소득의 경지를 말한다.무소득과 무소유는 바로 불도의 알파요 오메가다. 젊은 나이에 즉위하여 광대무변의 대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더대왕은 늘그막에 “내가 누울 곳은 기껏 이 정도면 족한 것을 그 넓은 땅을 위해 아까운 일생을 바쳤구나”라고 탄식했다 한다. 출가승의 신분으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채우려 하는가.만해 선사 가로되, 공(空)은 가히 분별치 못할 뿐만 아니라 분별자체도 또한 공하여 비로소 공이 되느리라. 이로 말미암아 보면 객관적 실재의 공은 없느니라.공이라 하면 어떤 것도 없음을 의미함이니 곧 유형도 없고 따라서 무형도 없음을 공이라 할지라. 나라 어려울 때면 분연히 일어나 국난 극복에 앞장섰던 호국불교의 전통은 이어져야 한다.원효와 서산과 만해의 정신이 계승돼야 이나라 불교가 산다. 풍란화 매운향내 당신에야 견줄손가 이날에 님 계시면 별도 아니 빛날런가 불토(佛土)가 이의없으니 혼아 돌아오소서. 위당 정인보가 만해 영전에 띄웠던 조사처럼 ‘이날에 님 계시면’오늘의 조계종단 사태를 어찌 볼 것인가. 총독부 건물이 보기싫어 북향한 심우당에서 변절 崔麟에게 절교를 선언하고,최남선이 인사하자 “내 아는 육당은 죽어장송했는데 당신 누구냐”고 물리치며,무소유와 민족적 기개로 불맥을 이은 만해 선사가 오늘 승려들의 행동을 보고 뭐라 하실지,그 해답을 조계종단 승려들께 묻는다.
  • 日軍 학병서 광복군까지(항일독립군 장정따라 6천리:下)

    ◎臨政 선열의 애국혼 생생/54년만에 다시 찾은 그 건물 앞에 태극기 게양/金九 주석·李靑天 장군의 격려 눈에 선한데…/광복군 제1지대 거점 공사장 흙더미로 변해 “동해물과 백두산이…”.충칭(重慶)시 중심 치싱깡(七星崗) 린엔화츠(蓮花池)38호.‘대한민국 중경임시정부’청사앞이 애국가로 가득했다. 베이징(北京)을 떠나 쉬저우(西州),푸양(阜陽),시안(西安)을 거쳐 충칭에 온 독립유공자협회 회원 9명이 청사앞 국기게양대에 태극기를 게양한뒤 눈물을 글썽이며 애국가를 부르고 있었다.베이징 출발 9일만인 10월15일이었다. 54년전 대륙을 가로질러 73일만에 도착했던 임시정부.이들을 포함한 25명의 광복군은 44년 11월21일 6,000리 길을 걸어 충칭에 도착했었다.출발지는 광복군 간부훈련(韓光班)을 마친 안후이성(安徽省) 린촨(臨泉).일본군 점령지역도 지나야 하는 목숨건 장정(長征)이었다. “청사앞에서 아무말없이 한사람씩 손 잡아주시며 눈시울을 붉히시던 金九 주석,장하다며 호기롭게 격려해 주시던 李靑天 장군 등이 지금이라도 불쑥 나오실것 같은데…” “정문에 들어서 바로 오른쪽 건물인 2호동 2층에 趙素昻 외무부장 집무실,그 위의 3호동에 申翼熙 선생 집무실,그리고 그 위는 내 방…”.44년말부터 해방전까지 임시정부 경위대장으로 이곳서 지냈던 尹慶彬 회장과 金九 주석 비서장출신의 鮮于鎭씨의 눈이 빛났다. 당시 충칭은 일본과 항전하던 중국의 임시수도.미국,영국 등 세계주요국 대사관,영사관이 집결돼 있었다.일본 명문대출신의 청년들이 일본군을 탈출, 대거 임시정부에 합류했다는 소식은 중국정부와 제3국 외교관들에게 한국인의 독립의지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서양인들은 물론 중국 지식층조차 한국인은 식민통치에 동화돼 일본사람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이 점에서 우리들의 탈출과 광복군 합류는 한반도내 국민들이 심정적으로나마 일본에 강력히 저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연합국에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임시정부와 합류한뒤 고 張俊河 선생과 金柔吉 부회장 등 일부는 시안(西安)으로 가 미군과 함께 한반도 상륙훈련을 준비한다. 시 남쪽에 위치한 파난취(巴南區) 투치아오(土橋).일행들이 신치춘(新柒村) 1­49호 허름한 가옥에 도착하자 집 주인 저우한장(周漢江·72)씨가 환한 얼굴로 노 독립군들을 맞았다.임시정부 요인들과 閔弼鎬 선생(임시정부 외무차장)부인 등 독립군 가족 20여가구가 집단 거주하던 곳이다.임시정부가 환국하면서 조우씨 등에게 집을 물려주고 갔었단다. 시 서북쪽의 라오허커우(老河口).일행들은 ‘광복군 제1지대’ 거점지를 찾았다.창장(長江)부근에 있는 옛터는 다리건설 공사로 파헤쳐인 흙더미만이 쌓여있었다.“1지대는 좌익계열인사들이 주도했지만 金九선생은 이들까지도 하나로 묶어 대일항전의 공동전선을 형성했다”는 설명도 있었다. 일행들은 10월16일 베이징출발 10일만에 상하이(上海)에 도착했다.45년 11월 金九 선생이 귀국길에 상하이를 드르셨을때 수천명의 청중을 모아놓고 연설하셨다는 훙커우공원(虹口공원·현 魯迅공원)의 옛 장소는 숲이 돼 있었다. 노 독립군들은 지난4월 공원안에 새로 세워진 尹奉吉 의사 의거 표석앞에서 묵념을 올리고 11일간의짧고도 긴 장정을 마쳤다.“1919년 상하이에 수립된 임시정부는 27년동안 항저우(杭州) 등 9곳을 옮겨다니며 선열들의 피와 땀위에서 비바람을 견뎌냈는데…”.서울로 향하는 비행기안에서도 선배 독립군들과 지난 50여년전의 기억은 마지막 광복군들의 눈시울과 가슴을 적시고 있었다. ◎충칭 광복군 총사령부 건물/李靑天 총사령관 등 20여 대원들 상근/발족 당시 周恩來·孫文 아들 참석 축하 충칭시 중심가에 남아있는 광복군 총사령부의 옛 건물과 터가 도심 재개발에 따라 역사속으로 사라질 운명이다. 충칭의 명동,민족로(民族路)부근의 쩌우룽로(鄒容路) 37·38번지.웨이원(味苑)이란 국영음식점과 광고회사 등이 들어있는 낡은 3층건물이 42년 9월부터 45년8월까지 광복군 총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대지 270여평.李靑天 총사령관 등 20여명의 대원들이 상근했고 중국의 고위 장성들과 미군 OSS(전략사무국)관계자들의 발걸음도 끊이지 않았다. 현재 건물자체가 낡아 철거는 불가피한 상태. 柳在沂 주중대사관 문화관은 “현 위치에 50평정도의 땅을 확보,광복군들의 활동을 기리는 표지석과 건물 모형 설치 방안을 충칭시와 협의하고 있지만 어려움이 크다”고 말했다. 당시 광복군의 활동은 국제적인 주목거리.40년 9월 광복군 총사령부가 충칭서 발족될때 중국의 초대총리 저우은라이(周恩來),중국공산당 창시자중 한사람인 동삐우(董必武),쑨원(孫文)의 아들 순커(孫科) ,대군벌 바이쭝시(白崇禧)등 기라성같은 인물들이 참석,축하하기도 했다. ◎충칭 임시정부 청사/관리 소홀… 복원 3년만에 곳곳 퇴락/金九 주석 집무실 벽·창문·마루 등 파손/밀랍인물 전시사업 등으로 관람객 끌어야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건물곳곳이 관리소홀로 퇴락해가고 있다. 복원 3년여만에 일부 마루 바닥이 내려앉거나 칠이 떨어지고 창문이 부서져 나가는 등 보수가 아쉽다.5동의 건물가운데 전시실인 1호동과 의정원 건물인 2호동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들은 전반적인 보수가 필요한 상태다. 金九 주석의 집무실 벽마저 습기로 칠이 떨어져 보기 흉한 상태.5호동의 외빈 접대실은 마루바닥이 부서져 있다.3·4호동 계단 곳곳과 창문도 부서진 채 있다. 청사관리를 맡고있는 펑카이원(彭開文) 부관장은 예산부족으로 보수·보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지난 한해동안 중국인 200명을 포함,관람객이 800명에 불과,입장료 수입이 적은 것도 예산부족 이유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올 관람객은 10월중순까지 180명.현장에 온 독립유공자협회 회원들은 “보수뿐아니라 독립기념관처럼 당시 인물들을 밀랍인형으로 만들어 전시하는 등 다채롭게 꾸며 관람객들의 흥미를 끌고 생동감을 주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日軍 탈출 한국 청년 25명 臨政과 합류/中 언론들 “한국의 미래와 희망 보았다” 평가 50여년전 충칭의 주요 언론에게도 일본군에서 탈출한 韓光班 출신 한국청년 25명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합류사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충칭도착 4개월이 지나도록 관련 기사는 끊이지 않았다.45년 2월 4일자 충칭의 유력지 따궁바오(大公報).“한국은 망하지 않았다.한일합방이후 성장한,일본 동화(同化)교육을 받고 일본서 유학한 한국청년들의 항일사상과 민족관념은 지워지지 않고 살아있었다.한국의 미래와 희망을 보았다…”고 보도했다. 이틀뒤인 6일에도 따궁바오는 ‘탈출 한국청년을 환영한다’는 제목으로 중국의 한중문화협회에서 한국청년들의 환영회를 열어주었다고 보도했다.협회관계자뿐아니라 20여명의 내외기자들이 참석했다는 보도 내용은 당시 관심의 열기를 느끼게 한다. 중국의 三民主義靑年團,全國慰勞總會 등 사회단체들의 환영회와 중국군의 천청(陳誠)대장 등 주요인사들의 행사 참가소식도 중양르바오(中央日報) 등은 보도했다.언론의 대서특필은 당시 이들에 대한 관심과 환영을 보여주는 한 편린이었다.
  • 조계종 분규 약사/54년 비구·대처승 사찰 접수싸고 유혈충돌

    ◎80년 신군부에 의한 10·27 법난 발생/94년 서의현 원장 축출 개혁회의 출범 ·1938년­일제의 불교 왜색화 정책에 저항,서울 종로구 견지동에 조선불교 총본산 태고사(현 조계사)를 건립 ·46년 12월­선학원 중심의 진보적인 승려 ‘불교혁신총동맹’ 결성,사찰령 폐지,주지전횡 타파,농민에게 사찰토지 무상분배 등 기치로 제1차 불교혁신운동 ·54년­李承晩 대통령 유시로 정화불사(태고종에서는 법난으로 규정)시작. 비구­대처 사찰 접수 둘러싸고 유혈극 ·62년­통합종단 출범으로 비구­대처의 극한적인 대립 주춤. ·66년­대처승 처리문제와 동국대 재단운영 등을 둘러싸고 청담 종정과 경산총무원장간 대립. ·67년­대처승 분종선언,한국불교 조계종(70년 한국불교 태고종 개명) ·73년­경산 총무원장,고암 서옹 양대 종정과 대립 격화. 총무원장의 구속과 종정 감금 사태 발생. ·78년­총무원장 중심제파 월하스님(현 종정) 총무원장 선출,개운사에 총무원 개설. ·80년­개운사측 조계사측과 법적 합의,월주스님 통합 총무원장 선출,신군부에 의한 10·27 법난 발생. ·81년­불국사와 월정사에서 총무원측이 발령한 주지측과 전임 주지측간 난투극. ·83년­설악산 신흥사에서 주지 취임과정에서 살인사건 발생,비상종단운영위원회 출범. ·84년 6월­성철종정 사퇴,성철지지파 해인사에서 승려대회,록원스님 총무원장 선출,종권 접수. 소장파 해인사 승려대회 불법 규정,범어사종무소에서 총무원 현판식. ·88년 4월­서의현 총무원장 총무원장 해임결의안 상정 시도한 밀운 봉은사 주지(현 봉선사 주지) 해임. 밀운스님측 신도 봉은사 점거. ·88년 12월­밀운측 비상종단운영위원회 구성,봉은사에 총무원 개원. 1년여에 걸친 분규 양측 합의로 종결. ·91년­종정추대를 둘러싸고 성철 종정유임파와 월산 불국사 조실 옹립파 해인사와 통도사에서 승려대회 개최. 월산옹립파 강남총무원 개설. ·94년 4월­서의현 총무원장 3선으로 범종추 조계사에서 전국승려대회 개최, 서의현 원장 축출. 개혁회의 출범. ·94년 11월­월주 총무원장의 개혁종단 출범. ·97년 3월­해인사와 봉은사에서 주지문제로 마찰. ·98년 11월­송월주원장 3선 출마강행 분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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