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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30, 노령화사회 스스로 대비해야”

    “지금의 20∼30대가 노인이 되는 50년후에는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요.우선 늙은이들로 가득찬 초노령화 사회를 연상할 수 있겠지요.노령자 집단은 커다란 고객이 되며 정치인 역시 노령자 그룹을 찾아서 표를 구걸하게 될 것입니다.” 주명룡(58) 대한은퇴자협회 회장은 평소 “인생에 은퇴란 없으며 다만 제2의 인생을 위한 새로운 준비를 할 뿐”이라는 지론으로 점점 왜소해지는 장·노년층의 ‘기살리기’운동에 앞장서왔다. 그가 오는 2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4층 콘퍼런스홀에서 ‘서기 2054년-50년후 한국의 노령화 사회/50년후 우리는 어디에 있나’를 주제로 포럼을 개최한다.딱딱한 학문적 접근이 아닌 세대간 통합의 기치를 내걸고 ‘풍자적’으로 접근하는 다소 이색적인 포럼이어서 눈길을 끈다.특히 참석자 중에 ‘늙은이’보다 20∼30대 ‘젊은이’들이 더 많단다.이들이 장차 노인이 되면 오늘날의 장·노년층보다 더욱 많은 압박과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다. “50년 후 노령화사회의 주인공은 지금 방바닥을 기고 있거나,혹은 엄마 뱃속에서 꿈틀대거나 하는 세대이지요.그러나 이들은 열심히 벌어 노령화 부담금과 자신의 노후를 대비해야 하기 때문에 버는 돈의 절반 이상은 세금으로 내야 하는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결국 지금의 젊은 세대는 노인이 되면서 고액의 세금을 내는 이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우리나라의 65세 이상 인구비율은 2004년 현재 9% 미만에서 2025년 20%, 2050년에는 34%까지 상승한다는 통계청 예상수치만 보더라도 이를 뒷받침한다는 분석이다. “장차 우리 사회는 80세가 넘은 고령 근로자들이 바쁘게 출퇴근하는 모습도 보게 될 것입니다.” 은퇴자협회는 지난 96년 미국에서 창립됐으며 유엔에 등록된 비영리·비정부기구(NGO)로 세계 각국에 지부를 두고 있다.주 회장은 5년 동안 미국에서 활동해 오다 2002년 1월 한국에 건너와 ‘대한은퇴자협회’를 만들었다.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에 밀려나는 한국 장·노년층의 실상을 보고 용기를 냈다.회원수만 벌써 3만 7000여명(미국의 경우 3600만명)에 이를 만큼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회원이 되면 간행물을 통한 정기적인 서비스를 제공받는다. 은퇴자협회는 출범 2년여 동안 ‘여성에게도 은퇴는 있는가’ 등 여섯차례 포럼을 개최했다.올 가을에는 ‘나이든 사람들은 왜 옷차림이 우중충하고 꾀죄죄한 것인가’라는 포럼을 개최할 예정이다.주 회장은 “아름다운 은퇴문화의 형성과 조기퇴직 종용 금지법 촉구 등을 비롯해 회원 권익 확장을 위해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김문기자 km@seoul.co.kr
  • [100년기업 100년상품] 100년기업 성공조건

    “회사가 10년,20년 뒤에 뭘 먹고 살아야 할지 걱정”이라는 삼성 이건희 회장의 말에는 지속적인 성장유지에 대한 기업총수의 고민이 녹아있다.그러나 이것이 비단 이 회장만의 문제일 수는 없다. ●유럽·日 기업 평균수명 13년 최근 유럽의 한 컨설팅사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유럽과 일본 기업들의 평균수명은 단 13년에 불과했다.또 30년 안에 기업의 80%가 사라지는 것으로 나타났다.미국에서도 2000개의 기술관련 기업을 조사한 결과,평균수명이 고작 10년이었다. 우리나라의 단명(短命)현상은 이보다 더 심각하다.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1965년 국내 100대 기업(금융회사 포함)에 들었던 곳 가운데 30년이 흐른 95년까지 여전히 이름을 걸치고 있는 곳은 제일제당,조흥은행,상업은행 등 15개에 불과했다.65년 10대 기업 중 95년에도 10대 기업에 들어있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기업 운명이 이렇게 ‘파리목숨’일진대 한 회사가 100년을 넘게 존속한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임에 틀림없다. 서울대 학생들로 구성된 장수기업연구회 조사에 따르면 프랑스에는 서기 1000년 전후에 시작된 와인제조회사 ‘샤토 굴랭’이 여전히 활발한 기업활동을 하고 있다.독일에는 1304년에 시작한 호텔기업 ‘필그림하우스’,영국에는 1541년 세워진 모직회사 ‘존 브룩’,네덜란드에는 1554년 설립된 비누제조회사 ‘데베르굴데한트’,핀란드에서는 1649년 시작한 가위제조회사 ‘휘스카스’가 있다.일본에서는 ‘공고구미’(金剛組)라는 건설회사가 578년부터 지금까지 1427년째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최고(最古)의 기업이래야 구한말에 세워진 100년 남짓한 곳들이 전부다.그나마 세는 데 다섯손가락도 다 필요없다.게다가 상업은행(1899년 설립)은 우리은행과 합쳐져 이미 뿌리가 사라졌고,조흥은행(1896년)은 신한은행과의 합병을 앞두고 있다. 결국 지금도 유지되는 민간 100년 기업은 서울신문(1904년 대한매일신보)과 두산(1896년 박승직상점),동화약품(1897년 동화약방)이 고작이다.더구나 현재의 기업이름과 출범당시의 기업이름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으로 따지면 80년이 채 안된 유한양행(1926년)이 가장 오래됐다. 서울대 조동성 교수는 “우리나라 경영자들은 재벌그룹과 같이 외형과 이익이 큰 기업을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국민들로부터 사랑받고 장수하는 기업을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면서 “특히 조흥은행과 상업은행의 사례처럼 장수기업을 지키는 데 관심을 안 보인다.”고 지적했다. 한국경제연구원 이수희 기업연구센터 소장은 “우리나라에서는 기업의 기원을 어디서부터 잡을지,기업의 연속성을 가리는 기준을 어떻게 정할지조차 제대로 연구돼 있지 않을 만큼 기업사 연구가 빈약하다.”면서 “상업과 공업을 천대했던 과거 전통 때문에 역사적인 뿌리를 찾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기업 생태계 이해·활용 중요 최근 출간된 ‘100년 기업의 조건’(케빈 케네디 등 저,한스미디어 간)은 기업이 장수하기 힘든 이유로 성장에 따른 복잡성을 든다.시간이 지나면서 ▲혁신 ▲제품교체 ▲전략 ▲제휴 등 4가지 경영상 도전과 ▲학습문화 ▲리더십 ▲지배시스템 ▲이사회 감시 등 4가지 지배구조상 도전에 직면한다고 했다.일본 닛케이신문은 장수기업이 되기 위한 명제로 ‘변하지 않는 절대가치의 추구’를 든다.103년 된 미국 디즈니는 ‘아이들과 가족들에게 꿈을 주자’,137년 된 스위스 네슬레는 ‘좋은 음식과 좋은 삶’이란 이념을 간단없이 좇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경영학자들은 장수기업들 사이에 구체적인 실행차원의 공통점은 발견하기 힘들다고 말한다.한마디로 왕도(王道)는 없다는 것이다.이를테면 미국에서 일찌감치 포기한 그룹 계열화가 우리나라의 특수상황에서는 ‘재벌’이라는 형태로 성공했고 선진국에서 통하는 경영전략이나 지배구조,노사관계,임금구조 등이 국내에 그대로 통용되지 않는 것들에서 잘 나타난다는 것이다. 인하대 경영학부 손동원 교수는 “기업이 지속적인 성장을 하려면 그 기업이 처해있는 기업 생태계를 잘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특히 미래기술을 잘 예측하는 산업적 리더십을 갖추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김태균기자 windsea@seoul.co.kr˝
  • [열린세상] 통일 국기·국가를 만들자/임춘웅 언론인

    오는 8월 아테네에서 열리는 올림픽에도 남북한 선수단은 개회식과 폐회식 때 공동 입장키로 했다.함께 입장할 때는 관례대로 흰바탕에 청색 한반도가 그려진 한반도기를 들고,배경 음악으로는 아리랑을 연주할 것도 남북이 합의했다. 남북한 선수단이 한반도기를 앞세우고 함께 입장하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좋고 어느새 우리들의 눈에도 익숙해져 있다.4년전 시드니 올림픽 때도 그랬고 2년전 부산 아시안게임 때도 그랬기 때문이다.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는 남북한이 공동입장을 넘어 아예 단일팀으로 참가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참으로 좋은 일이다.그런데 남북이 함께하는 국제행사에 그동안 임시방편으로 사용해 왔던 한반도기와 아리랑을 계속해서 사용할 것인가를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한다.잘못하다간 임시방편이 그대로 굳어질 가능성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그러니 이제는 남북이 통일 국기와 통일 국가를 새로 만들어 올림픽이나 다른 남북 공동행사 때마다 사용해 나가면 어떨까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통일국기와 국가를 만들어 쓰면 편리하기도 하려니와 그것 자체가 하나의 통일 운동이 되겠기 때문이다.우선은 국제 행사때나 쓰게 되겠지만 점차로 사용범위를 넓혀 나간다면 그 효과는 의외로 커질지도 모른다.남북이 공통으로 쓰는 하나의 국기와 하나의 국가를 갖게 된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커다란 의미가 있다. 한반도기는 1991년 일본 지바에서 열렸던 세계탁구선수권 대회에 남북이 단일팀으로 출전하면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당시 한반도기는 재일 민단과 조총련이 합의해 사용하게 됐다고 전한다.그러나 50년대부터 체육계 취재를 해왔던 원로 언론인 연병해씨는 1954년 홍콩에서 열렸던 남북 홍콩체육회담때 남측의 손기정 대표가 한반도기 사용을 제안했고 북한이 수용했으나 그후 기를 사용할 기회가 없어 잊혀져 왔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어떤 것이 옳은지는 차차 밝혀질 것이다. 통일 국기와 국가 제정 움직임은 그동안에도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한민족아리랑 연합회’는 1989년 창립이래 통일후의 국가로 아리랑을 쓰도록 캠페인을 벌여오고 있다.아리랑은 127개국에 흩어져 있는 한민족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유일한 노래고 영원히 살아있는 우리의 노래란 것이다.아리랑이 통일 국가가 돼도 좋고 더 훌륭한 국가를 새로 만들 수 있다면 그렇게 해도 될 것이다.중요한 것은 남북이 합의하는 일이다. 국기분야에서는 2000년 9월에 성균관대학교 백금남(디자인 전공) 교수가 교내에서 ‘통일 조국의 국기전’행사를 연 일이 있다.모두 49점의 잠재적 통일국기 디자인이 제시됐는데 당시 국기전은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그밖에도 많은 분들이 이 문제에 대해 각기 생각이 있을 것이다.그러나 이제는 이 문제를 공론화해야 할 때가 됐다.민간차원에서부터 활발한 공론화 과정을 거쳐 합의점을 도출해 나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종국에는 남북의 정부차원에서 결정해야 한다.혹자는 통일 국기와 통일국가는 당연히 태극기와 애국가이지 무슨 다른 게 있을 수 있느냐고 항변할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억지다.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평화적인 방식으로 통일을 하게 되는 경우에 대비해서는 남북이 합의해 통일국기와 국가를 만드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베이징 올림픽때 남북이 단일팀을 구성해 출전하게 되고 남북이 함께 만든 통일 국기와 국가로 나갈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멋있는 일인가.그런데 그것이 꿈같은 얘기뿐일까.결코 그렇지 않다.생각의 틀을 조금만 바꾼다면 어려운 일이 아니다.한반도기와 아리랑은 되는데 다른 것은 안될 까닭이 없는 것이다.산뜻한 아이디어로 새 국기를 만들고 한민족의 이상을 담아 통일국가를 만든다면 그것 자체가 통일로 가는 길이다. 임춘웅 언론인˝
  • 천주교, 北교회 재건행보 빨라진다

    북한 지역에 천주교 교구장이 별도로 임명되는 등 남한 천주교계의 북한 지역 교회 재건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전망이다.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하고 있는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가 2007년 교구 설정 80주년에 앞서 정식으로 평양교구 틀을 갖추기로 결정,동서울지역 교구장 대리인 황인국(68) 몬시뇰을 평양교구장 대리로 임명했다고 7일 발표했다. 교구장 대리는 교회법에 따라 교구장이 위임한 교구의 특정 부분과 업무 등에 관하여 직권을 갖는 만큼 황 몬시뇰은 교구장이 위임하는 바에 따라 북한교회 재건을 위한 구체적인 역할을 부여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이에 따라 1950년 캐롤 안 몬시뇰(메리놀외방전교회)이 평양교구장 서리로 임명된 이래 54년간 교구장 없이 서리 체제로 이어져 오던 평양교구는 실질적인 체계를 갖추게 됐으며 북한교회 재건을 위한 인력양성 등 한국교회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지고 있다. 한편 서울대교구는 최근 평양교구장 대리를 임명한데 이어 서울 광장동 동서울지역 교구장대리 집무실에서 평양교구 출신 사제 10명이 참석한 가운데 공식적인 첫 ‘평양교구 사제회의’를 열어 통일에 대비해 구체적인 교회 재건 사업을 준비해 나가기로 뜻을 모았다.지난 98년 정 대주교가 평양교구장 서리에 임명된 이후 평양교구 사제회의가 공식 개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회의에서 정대주교는 “북한교회 재건을 위한 구체적인 노력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며 민족화해와 일치를 위한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1927년 3월17일 서울교구에서 지목구로 분리돼 설립된 평양교구는 1939년 7월 대목구로 승격된 이후 1962년 3월 한국의 교계제도 설정에 따라 평양교구로 승격,오늘에 이르고 있다.평양교구장 대리로 임명된 황인국 몬시뇰은 평양 출신으로 1964년 사제품을 받고 서울 상계동·노원·잠실·삼각지본당·전농동·돈암동 주임을 거쳐 서울교구 상서국장,미 필라델피아 한인천주교회주임,서울교구 제1지구장 겸 한강본당 주임을 지냈으며 98년 6월 교황명예전속사제(몬시뇰)에 임명됐다. 김성호기자 kimus@seoul.co.kr˝
  • 동국제강 “2008년까지 매출 7조”

    동국제강은 2008년까지 철강 판재류 강화와 물류·해운·건설 등 신규사업 진출을 통해 매출 7조원을 달성키로 했다. 동국제강은 7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구본무 LG그룹 회장과 일본 JFE홀딩스의 에모토 회장 등 7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사 50돌 기념행사를 열고 중장기 비전과 새 CI(기업이미지)를 발표했다.장세주 회장은 기념사에서 “인재와 혁신,열정을 향후 경영의 핵심 키워드로 설정하고 변화와 성장을 주도하는 기업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밝혔다. 동국제강은 철강사업의 경쟁력 강화를 통해 지난해 3조 6000억원의 매출액을 2008년까지 5조원으로 확대하고,운송·물류·해운·건설 등의 신사업 진출로 2조원의 매출을 달성할 예정이다.이를 위해 브라질에 합작 슬래브공장 건설을 검토하는 한편 영국의 슬래브공장 인수를 추진하고 있다.또 충남 당진의 20만평 부지에 철강공장을 건설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이와 함께 영문 이니셜인 ‘D’와 ‘K’를 형상화한 새 CI를 선포하고,반세기의 역사를 담은 사사(社史)를 발간했다. 동국제강은 1954년 창업주인 장경호 회장이 쇠못공장 운영을 통해 축적한 자본으로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에 철강공장을 설립한 것이 모태가 됐다.66년에는 국내 최초로 전기로 제강기술을 도입했고,71년에는 처음으로 후판공장을 준공했다.계열사로는 유니온스틸과 국제종합기계,유니온코팅,국제통운,동국통운,DK해운,부산항 4부두 등이 있다.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50년후 한국의 노령화 사회’ 포럼

    주명룡(朱明龍) 대한은퇴자협회장은 21일 세종문화회관 4층 콘퍼런스홀에서 ‘서기 2054년-50년후 한국의 노령화 사회/50년후 우리는 어디에 있나’를 주제로 포럼을 개최한다.
  • [씨줄날줄] 참전용사/손성진 논설위원

    고지로 돌진하다 총탄에 맞고 쓰러지는 국군 용사.혹한 속에 부상당한 전우를 업고 걸어서 후퇴하는 병사.6·25 기록 필름에서 본 장면이다.6·25가 난 지도 어언 54년.점점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간다.꽃다운 스무살에 참전한 용사들.벌써 고희를 넘긴 노병이 됐다. 참전 용사들은 우리의 아버지요,할아버지들이다.조국을 지켜낸 그들은 산업의 역군으로 나라를 살리는 데 다시 온몸을 던졌다.그런데도 노년이 행복하지는 않다.생존한 6·25 참전용사는 47만여명.13만 7899명은 전장에서 산화했고 살아남은 사람도 하나둘 세상을 떠났다.생존 용사들중에는 생활고로 만년을 힘들게 보내는 용사들도 많다.그들을 위해 국가가 보훈정책을 편 것은 종전 40년이 지나서다.지난 1993년에야 참전군인지원법이 제정됐다.그것도 처음에는 병원진료비 감면 정도였다.그뒤에 경북 영천과 전북 임실에 참전용사들을 위해 국립묘지를 조성했고 경기도 이천에도 묘역을 만들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장례보조비로 15만원을 주고 월 6만원의 참전수당도 지급하고 있다.그러나 이미 많은 참전용사들이 유명을 달리한 뒤다. 우방을 위해 머나먼 타국에서 젊음을 희생한 미군은 3만 6940명,유엔군은 3730명에 이른다.부산 대연동 유엔기념공원에는 11개국 2293명의 이방인 참전용사들이 잠들어 있다.에티오피아에는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모여사는 코리안 빌리지가 있다.이들은 한국전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공산정권의 핍박을 받아 궁핍한 삶을 살고 있다.외국의 참전용사들은 아직도 한국을 잊지 못하고 있다.이들을 위해 국가가 초청행사를 갖는 등 조그만 성의라도 보인 것은 겨우 수년전이다. 참전용사 지원은 아직 미흡하다.지하철 무료 탑승 등 실생활에서의 혜택은 없다.미국에는 1차 세계대전부터 이라크전쟁까지 참전한 470여만명의 베테랑이 생존해 있다.이들을 위해 미국 정부는 장례비,묘비,의료보험 혜택과 병원왕래 교통비를 준다.취업 우대,대부 지원 등의 혜택도 있고 연금은 전액 국가가 부담한다.캐나다에서는 베테랑을 위해 토지도 분양해 준다고 한다. 참전용사들은 말한다.조국을 위해 이 한 목숨 바쳤노라고.그들이 후세들에게 바라는 것은 물질적 혜택보다 고귀한 희생을 기억해주는 것이다. 손성진 논설위원 sonsj@seoul.co.kr˝
  • 너희가 전쟁의 참혹함을 아느냐

    올해는 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54년이 되는 해.케이블·위성 채널에서는 6·25를 맞아 다양한 전쟁 관련 특집을 마련했다. Q채널은 ‘체험다큐,참호속을 가다’(24·25일 오후 8시)에서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다.영국 BBC가 24명의 지원자를 모아 2주동안 이스트 요크셔 연대 제 10대대의 참호생활을 프랑스 북부지역에서 재현한 프로그램. 히스토리채널은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를 재조명하는 프로그램 2편을 잇따라 방영한다.‘사라지지 않은 노병,맥아더’(24일 오후 8시)는 맥아더의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일대기를 훑는다. ‘맥아더의 오판’(25일 오전·오후 8시30분,27일 오후 8시30분)에서는 영웅으로 간주되는 맥아더를 뒤집어본다.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해 서울 수복에 성공한 뒤 파죽지세로 압록강까지 진격하지만 중국 40만 대군의 남하로 전쟁은 53년까지 이어진다.유엔의 군사적 정책을 잘못 이해한 맥아더의 판단 착오와,중국군의 움직임에 관한 정보와 경고를 무시한 오만함 때문이었다. DCN(오후7시30분)과 시네포에버(오후9시)는 24일 미국 남북전쟁을 그린 ‘라이드 위드 데블’,25일 전쟁 속 사랑이야기 ‘러브 앤 워’를 방송한다.Home CGV에서는 ‘고군’(24일 새벽 2시45분),‘용사를 위하여’(25일 새벽 2시45분)를,XTM에서는 ‘침묵의 사선’(25일 오후 9시45분),‘비욘드 랭군’(27일 오후 2시)을 방영한다. 김소연기자 purple@seoul.co.kr˝
  • “대학친구 이종혁선생 꼭 한번 보고싶소”

    “북조선을 버리고 망명한 옛 대학친구를 만나줄런지….이종혁 선생.꼭 한번 보고 싶소.” 옛 동독 라이프치히 대학 출신의 정형외과 전문의 장태호(69·경기도 의정부시 신곡1동) 박사는 14일 이국의 대학 기숙사에서 꿈을 나누던 친구를 애타게 그렸다.그 친구는 6·15남북공동선언 4주년을 맞아 이날 입국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이종혁(69) 부위원장이다. 장 박사의 고향은 최근 폭발참사로 잘 알려진 평안북도 용천군 북중면 북현리이다.1954년 북한의 정부 장학생으로 동독에 유학한 그는 라이프치히대학 의대를 졸업한 뒤 1961년 서독으로 망명했다.이후 독일 최고의 정형외과 전문의로 쉬타트하겐 도립병원장을 역임하는 등 망명객의 신분을 털고 의사로 일가를 이루었다.그는 정년퇴직한 2000년 10월 한국에 왔다.독일생활 46년 만이다. 장 박사가 이 부위원장을 꼭 만나고 싶어하는 것은 옛 친구이기도 하지만,북한에 남겨진 부모님과 동생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19세에 용천을 떠난 뒤 1959년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남동생의 편지로 가족들과의 소식이 끊겼다.1972년 스웨덴 북한대사관 직원을 통해 어머니 안원선씨와 남동생 장태손씨,여동생 금실·금녀·금숙씨 소식을 전해들은 것이 전부였다. 장 박사는 자신보다 1년 앞선 1953년 이 부위원장이 동독으로 유학을 떠난 것으로 기억했다.장 박사는 “이 부위원장이 처음에는 드레스덴에서 공학 공부를 하다 56년 라이프치히로 옮겨 독문학으로 전공을 바꿨고 같은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친해지게 됐다.”고 말했다.당시 이 대학에서 공부한 북한 유학생은 10명 안팎에 불과했다. 장 박사가 기억하는 이 부위원장은 쾌활하고 유머가 있었다.“그이는 나보다 키가 좀 작고 통통했지요.농을 잘했고,내가 문학을 동경해서 리기영 선생의 아들인 그이와 어울리길 좋아했어요.기숙사를 드나들며 함께 밥 먹고 맥주도 마시고는 했지요.” 장 박사는 용천군 북중고급중 3학년 때 150명의 군후보로 선발된 뒤 시험과 출신성분 심사를 거쳐 신의주 도후보로 뽑혔고,최종 유학강습소 입학시험에도 통과됐다.장 박사는 “당시 유학강습소가 이번에 사고가 난 용천역에서 불과 2㎞ 거리에 있었다.”고 기억했다.장 박사는 1954년 8월15일 용천역을 출발,러시아를 거쳐 9월1일 동독에 도착했다. 동독 유학생들은 중도에 소환되는 경우가 많았다.55명 가운데 20명이나 망명했기 때문이다.두 사람은 끝까지 대학을 마쳤지만,장 박사는 결국 18번째 망명자가 됐다.자유가 없는 감시받는 생활을 견딜 수 없었다. 장 박사는 그러나 “부모님과 동생들을 고향에 남겨두고 혼자 망명했다는 죄책감에 평생 괴로웠다.”고 눈시울을 붉혔다.그는 지난 10일 이 부위원장이 입국한다는 뉴스를 듣고 서울 동교동 김대중 도서관을 찾아갔다.이 부위원장과의 만남을 요청했지만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관리자의 답변만 들었다.장 박사는 “마지막 인생을 사무친 그리움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옛 친구가 혹여 이 그리움을 실현시켜 줄 수 있을까 그를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 장 박사는 15일 ‘6·15 남북공동선언 4주년 기념 국제토론회’가 열리는 서울 그랜드힐튼호텔을 찾아 이 부위원장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다시한번 부탁을 해볼 작정이다. 의정부 안동환기자 sunstory@seoul.co.kr˝
  • [꼬불 꼬불 뒷골목] 광주 금남로 예술의거리

    경기침체로 화랑가들이 된서리를 맞으면서 예술의 거리를 찾는 발걸음도 뚝 끊어졌다.요즘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다는 화랑 주인들의 푸념이 허튼소리로만 들리지 않는다. 부르는 게 그림값,눈먼 돈을 마구 챙길 때가 있었다.개발독재가 서슬퍼렇던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말,5월 광주의 상징인 금남로 뒤편 화랑골목에는 돈이 넘쳐났다. 지난 87년 예술의 거리로 지정된 광주시 동구 궁동 동부경찰서 앞에서 중앙로를 잇는 300여m.남도의 멋과 끼가 배어 있어 ‘예향’ 광주를 찾은 이방인들이 꼭 들러가는 곳이다.표구점과 화랑,갤러리(전시관),화방과 필방(서양화와 수묵화 재료상),골동품 공예품점,미술 서점,전통찻집,소극장 등 53개가 어깨를 맞대고 있다.토요일이면 차 없는 거리가 되고 개미장터가 열린다.고서예품·엽전·떡살·비녀·놋그릇·민화·향로·연적·목각품 속에는 쓸 만한 물건도 있다.야외 전시대에는 학생들의 창작품이 선보이고 매달 한차례는 음악회,빛의 축제 등으로 열기가 더해진다. 예술의 거리는 원래 50∼60년대에 막걸리 골목이었다.이후 여고생들의 수예표구가 유행하면서 광주여고,전남여고,조대부여고 등 이들 학교의 중간지점인 지금의 장소로 표구점들이 모여들면서 화랑가로 변모했다. 이후 70년대 후반 80년대 말까지 호황기를 구가하다 90년대 들어 극심한 불황에 빠져 있다.자유당 때는 그림을 그린 화가들이 직접 내다팔아 호구지책으로 삼았다.한 화랑주인은 “당시 힘이 세던 검사 명함 뒤편에다 ‘잘 부탁한다.’는 검사 사인을 받아서 기관에 들러 그림을 팔았다.”고 말했다. 그림값은 경기침체와 정비례한다.이 골목이 내리막길로 들어선 것은 95년 민선단체장 시대부터.또 문민정부 때 공직자 선물 안주고 안받기로 대못이 질러졌다.그림값을 결정하던 진급용이나 선물용 구입이 사실상 사라졌기 때문이다.주 고객은 90%가 건설업자들이나 이들이 그림 대신 현찰 박치기로 관행을 바꾸었다.송림화랑 양원호(52)씨는 “80년대 후반 소나무 몇개만 그려놔도 없어서 못 팔 때가 있었다.”고 호시절을 회고했다. 또 그림값은 권력자들의 눈치를 본다.붓글씨를 잘 썼던 박정희와 JP,5공의 실세인 전경환은 의제 허백련 그림을 선호했다.전씨가 광주에 뜨면 광주 화랑가에 그림이 동났다고 한다.DJ는 남농 허건의 조부인 소치 허유의 산수화를 좋아했다. 이 골목에서 남종화(시·서·화를 겸함)의 일맥인 남농 허건의 그림은 전지 크기(40호·1호는 엽서크기) 산수화가 7년 전 1000만원에서 500만원으로 떨어졌다.표구값은 30년 전보다 2만원 오른 12만원.30∼40년 된 중견화가들의 산수화는 같은 크기에 80만∼100만원이다.이마저 팔리지 않아 “입에 풀칠하려면 공사판이라도 나가야 할 상황”이라고 화가들이 말한다.반면 의제의 그림은 희귀성으로 수요가 높아 전지 1장에 3000만∼4000만원을 호가한다. 70년대 그림 전시회는 다방.Y다방,희다방에서는 ‘배보다 배꼽이 큰’ 낭만도 있었다.제자 전시회에 스승이나 선·후배들이 자신들의 그림을 찬조 출품했다.전시자의 그림을 사면 수백배 비싼 유명인사의 찬조작품을 추첨해 덤으로 나눠줬다. 예술의 거리에서 ‘살아있는 전설’로 통하는 터줏대감이 있다.한국화와 고미술품 감정가인 박당화랑 박환승(66)씨.정확히 50년에 이쪽에 뛰어들었으니 올해로 만 54년째다.의제와 남농의 어깨너머로 눈썰미를 익혔다.그는 “가짜에도 솜씨에 따라 등급이 있다.요즘에는 인쇄술 발달로 정교하게 인쇄된 가짜가 많지만 돋보기로 보면 인쇄지는 그물망이 나온다.”고 웃었다.가짜는 현금과 맞교환이 가능한 유명인사의 것이 많다고 했다. 가짜중에는 남농의 것이 많다.범인은 대개 제자들로 드러났다.수요자들이 작품 내용보다는 유명화가의 그림만을 선호하기 때문에 가짜 시비가 줄지 않는다.설경(雪景) 작가로 일본인 고객들이 많은 영창필방화랑 안재홍(56) 화백은 “손님들이 표구해 달라고 가져온 유명한 작품 중에 가짜도 있었다.하지만 그림을 판 상대가 있기 때문에 절대 가짜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나이 든 화가들은 가짜와 뒤섞인 자신의 작품도 분간해 내지 못해 가짜를 양산하는 빌미를 주기도 한다.한때 다방이나 여관 등에 내걸렸던 그림은 무명화가들이 판화찍듯이 개수치기로 그린 것들이다.건달들이 유명화가들을 여관방에 가둬두고 억지로 그림을 그리게 한 뒤 이를 강매해 활동자금으로 쓰기도 했다. 광주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가평격전지 흑백사진 주인공 유해 귀향

    6·25전쟁의 격전지였던 중부전선 화악산 기슭에서 나온 빛바랜 흑백사진의 주인공은 피란지 부산에서 자원입대한 학도병이었다. 전투가 벌어진 그날 쓰러졌던 그 모습 그대로 반세기가 넘도록 가족을 기다리던 그 학도병은 법원 서기 출신 나영옥(당시 18세) 상병이다. 현충일인 6일 사진 속의 미소년은 유해가 돼 경기도 가평군 북면 소법1리 전사자 유해 발굴 현장에서 동생들과 상봉했다. ●똑같은 사진 54년간 간직 나 상병의 동생 나영일(59·서울 중랑구 신내동)씨는 이날 태극기가 덮인 형의 관을 어루만지며 “하늘나라에서 아버지,어머니와 만나 행복하게 잘 사시라.”며 상상하지 못했던 ‘재회의 슬픔’을 나누었다. 여동생 옥자(64)씨도 “전쟁터에 나갔다가 소식이 없는 오빠 때문에 아버지는 눈도 감지 못하고 돌아가셨다.”고 흐느끼면서 전쟁이 낳은 가족사의 아픔을 비로소 털어내는 모습이었다. 나 상병의 신원을 확인한 것은 육군이 벌이고 있는 전사자 유해 발굴 사업의 결실이다.육군 27사단은 지난 2일 341번 지방도로변 고추밭에서 발굴한 전사자의 주머니에서 비닐에 싸인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나영일씨는 “언론에 공개된 사진을 본 아들이 ‘큰아버지와 비슷하다.’고 하기에 집에 있던 사진을 꺼내보니 바로 같은 사진이었다.”면서 “보관하던 사진은 어머니가 간직하고 계시다가 돌아가시면서 ‘형님을 잊지 말라.’고 물려주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현장을 찾은 나 상병의 가족은 모두 20여명.가족들에 따르면 나 상병은 8남매의 둘째로 순천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벌교에서 법원 서기로 근무하다 전쟁이 터지자 피란지 부산에서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했다. 이후 그는 5사단 36연대 본부 소속으로 1951년 1월 이른바 1·4후퇴 당시 화악산을 타고 내려오는 중공군에 맞서다 전사한 것으로 유해발굴단은 추정하고 있다. 가족들은 “이 사진을 찍을 때 입은 옷은 군복이 아니라 법원에 근무할 때 입었던 옷”이라면서 “공무원시험에 합격하면서 선물로 받은 만년필 2개를 왼쪽 가슴에 꼽고,손목시계를 차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나영일씨는 “휴전협정에 따라 다른 사람들은 다 돌아왔지만 둘째 형님만은 소식이 없었다.”면서 “가족들은 명절이나 현충일이 되면 그저 꽃 한다발을 사들고는 동작동 국립묘지를 서성이곤 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발굴된 29구 유해 국립묘지 안장 계획 한편 육군 27사단은 이번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에서 나 상병을 비롯해 모두 29구의 유해를 발굴했다.27사단은 오는 17일 사령부 연병장에서 합동 영결식을 가질 예정이다.나 상병 등의 유해는 영결식이 끝난 뒤 국립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 나영일씨는 이날 “아직까지도 착잡하고 떨려서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그동안 국군포로 얘기만 나와도 혹시 형님이 아닐까 안절부절 못했다.”면서 “형님을 찾아줘서 정말 고맙다.”고 발굴단 관계자의 손을 꼭 잡았다. 서동철기자 dcsuh@seoul.co.kr˝
  • 젊어진 한국축구 ‘부활 희망’ 쐈다

    한국축구가 부활의 날개를 폈다. 한국은 지난 5일 대구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7위 터키와의 친선경기 2차전에서 2-1로 역전승하며 월드컵 4강의 위용을 어느정도 회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끝없는 추락을 거듭하던 한국축구는 침몰 일보직전에서 기사회생,침체탈출의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특히 이전 경기까지 맞대결에서 1무4패로 단 한번도 이겨보지 못한 강호 터키를 상대로,그것도 역전승한 점을 높이 살 만하다.지난 1954년 스위스월드컵에서의 첫 맞대결 대패(0-7)를 50년 만에 설욕했고,2002한·일월드컵 3·4위전에서의 빚도 갚았다. 한국축구는 지난 2일 터키와의 1차전까지만해도 극심한 난조를 보였다.올해 초 약체 오만전(5-0,2월14일)과 레바논전(2-0,2월18일)은 무난하게 치렀다.그러나 움베르투 코엘류 전 감독의 중도하차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2006독일월드컵 지역예선 몰디브전(3월31일) 무득점 무승부를 비롯해 파라과이전 무승부(4월28일),그리고 지난 2일 터키전 패배(0-1)로 이어지면서 침체의 터널에서 허우적거렸다.상황이 이렇게 되자 월드컵 지역예선마저 통과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그러나 5일 터키전 승리는 한국축구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었다.특히 올림픽대표팀 출신을 중심으로 한 신예들의 맹활약으로 세대교체 성공 가능성도 확인했다. 1차전에서도 비록 패하긴 했지만 최성국 조병국 등 신예들의 패기로 체면치레를 했다.2차전에서는 선발로 나와 오래만에 한국 특유의 압박축구를 선보이며 활력소가 됐다.결국 이들의 과감한 플레이가 후반 대역전 드라마로 이어졌다.신예들의 맹활약은 2개월여 앞으로 다가온 아테네올림픽 본선무대에서의 선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 더욱 고무적이다. 박성화 감독대행은 오는 9일 베트남과의 독일월드컵 지역예선 3차전에서 “기존 성인대표팀 선수들을 주로 기용하겠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은 선수는 과감히 제외시키겠다.”고 말했다.기회가 오면 다시 한번 ‘신예 승부수’를 띄우겠다는 의중을 드러낸 것이다. 박준석기자 pjs@seoul.co.kr˝
  • [레이건 사망] ‘세계제국’ 꿈꿨던 배우대통령

    |워싱턴 백문일특파원|대통령에 취임한 지 69일만에 로널드 레이건이 6발의 총격을 받아 수술실로 갈 때였다.그는 병상에 누워 의사들에게 “당신들 모두가 공화당원이기를 바란다.”고 농담을 던졌다.그의 낙천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동시에 정치적 감각이 비상함을 보여 준다. 1991년 자서전에서 그는 ”나의 꿈은 모두 실현됐다.”고 말했다.그러나 출발은 화려하지 않았다.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연거푸 지냈지만 1980년 공화당 대선후보로 나섰을 때만 해도 ‘3류 배우’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레이건은 1911년 일리노이주 탐피코에서 구두 세일즈맨인 존 레이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음주벽이 심한 부친과 지병으로 고생한 모친을 두는 등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그러나 종교를 강조한 모친의 영향으로 미소와 희망을 잃지 않았으며 늘 ‘영웅주의’에 이끌렸다.10대 때 좌우명은 ‘인생은 위대하고 달콤한 노래같은 것’이었다. 유레카 대학을 졸업한 1932년 그는 아이오와 지역 라디오 방송의 아나운서로 취직했다.당시 시카고 컵스팀의 야구경기를 ‘전신’만 보고 실황중계,능력을 인정받았다.이후 워너브러더스의 테스트를 받아 합격한 뒤 영화배우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B급 영화에만 출연제의가 왔고 맡은 역할도 침팬지를 기르는 대학 교수나,풋볼 선수 등으로 대중적 이미지를 얻지 못했다.그보다는 ‘위대한 전달자’ 라는 평판에 걸맞게 뛰어난 언변과 협상력으로 영화배우조합 활동에 주력,두차례나 조합장을 맡았다. 그는 1954년 제너럴 일렉트릭(GE)의 주말 TV 시리즈물로 종업원들의 사기를 복돋우고 애로사항을 전하는 사회자 역할을 맡았다.당시만해도 레이건은 뉴딜 정책을 추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을 영웅으로 신봉하는 민주당원이었다.그러나 근로자의 과중한 세금부담과 정부규제 등에 눈을 뜨면서 점차 보수주의자로 바뀌었다. 전국적 인물로 알려진 것은 1964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배리 골드워터를 위한 연설을 하면서부터다.민주당의 린든 존슨 대통령에 패배했지만 그의 직설적 언변은 시사 주간지 타임이 ‘암울한 선거운동 가운데 한줄기 빛’으로 묘사할 만큼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이후 1980년 지미 카터 당시 대통령을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미 40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를 일관한 사상적 배경은 두가지다.‘작은 정부’와 ‘반공주의’다.작은 정부는 세금감면과 정부지출 감소 및 규제완화라는 ‘레이거노믹스’로 실현됐다.취임 2년간 기록적인 실업률과 은행과 농장의 파산으로 레이거노믹스는 비판을 받았으나 1983년부터 인플레이션이 꺾이고 고용이 늘면서 2차대전 이후 최고의 팽창기를 맞았다. 반공주의는 옛 소련과의 군비경쟁과 ‘스타워스’로 이어졌고 결국 소련이 핵감축 등에 합의,냉전종식의 밑바탕이 됐다.그러나 국방비 과다지출로 재정적자가 심화돼 1987년 10월 19일 미국 증시가 대폭락,‘레이거노믹스’는 역사의 뒷전으로 사라졌다.니카라과 좌파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이란에 무기를 판 돈으로 콘트라 반군에 지원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레이건은 정확한 사실을 모른다고 말해 행정 장악력이 취약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대통령에서 물러날 당시 역사학자들로부터는 최악의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최근에는 케네디 이후 최고의 대통령으로 재조명됐다.1994년 알츠하이머 병에 걸려 10년간 투병생활을 했다. mip@seoul.co.kr ■로널드 레이건 일생 -1911.2.6. 일리노이주에서 출생 -1932. 일리노이 유레카대 경제학과 졸업 -1937.영화‘사랑은 방송중’으로 데뷔 -1947. 미국영화배우협회 회장 당선 -1952.3. 낸시 데이비스와 재혼 -1962. 공화당 입당 -1966.11. 캘리포니아 주지사 당선 -1976.공화당 대통령 예비선거 낙선 -1980.11. 40대대통령 당선.81년 1월 취임 -1981.3.30. 워싱턴의 호텔에서 피격 -1984.11. 대통령 재선 -1989.1. 퇴임,캘리포니아로 귀향 -1994.11. 알츠하이머 병 앓아왔다고 발표 -2001.10.11. 가장 오래 생존한 미국 대통령이 됨 -2004.6.5. 93세 일기로 타계
  • [레이건 사망] ‘세계제국’ 꿈꿨던 배우대통령

    |워싱턴 백문일특파원|대통령에 취임한 지 69일만에 로널드 레이건이 6발의 총격을 받아 수술실로 갈 때였다.그는 병상에 누워 의사들에게 “당신들 모두가 공화당원이기를 바란다.”고 농담을 던졌다.그의 낙천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동시에 정치적 감각이 비상함을 보여 준다. 1991년 자서전에서 그는 ”나의 꿈은 모두 실현됐다.”고 말했다.그러나 출발은 화려하지 않았다.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연거푸 지냈지만 1980년 공화당 대선후보로 나섰을 때만 해도 ‘3류 배우’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레이건은 1911년 일리노이주 탐피코에서 구두 세일즈맨인 존 레이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음주벽이 심한 부친과 지병으로 고생한 모친을 두는 등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그러나 종교를 강조한 모친의 영향으로 미소와 희망을 잃지 않았으며 늘 ‘영웅주의’에 이끌렸다.10대 때 좌우명은 ‘인생은 위대하고 달콤한 노래같은 것’이었다. 유레카 대학을 졸업한 1932년 그는 아이오와 지역 라디오 방송의 아나운서로 취직했다.당시 시카고 컵스팀의 야구경기를 ‘전신’만 보고 실황중계,능력을 인정받았다.이후 워너브러더스의 테스트를 받아 합격한 뒤 영화배우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B급 영화에만 출연제의가 왔고 맡은 역할도 침팬지를 기르는 대학 교수나,풋볼 선수 등으로 대중적 이미지를 얻지 못했다.그보다는 ‘위대한 전달자’ 라는 평판에 걸맞게 뛰어난 언변과 협상력으로 영화배우조합 활동에 주력,두차례나 조합장을 맡았다. 그는 1954년 제너럴 일렉트릭(GE)의 주말 TV 시리즈물로 종업원들의 사기를 복돋우고 애로사항을 전하는 사회자 역할을 맡았다.당시만해도 레이건은 뉴딜 정책을 추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을 영웅으로 신봉하는 민주당원이었다.그러나 근로자의 과중한 세금부담과 정부규제 등에 눈을 뜨면서 점차 보수주의자로 바뀌었다. 전국적 인물로 알려진 것은 1964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배리 골드워터를 위한 연설을 하면서부터다.민주당의 린든 존슨 대통령에 패배했지만 그의 직설적 언변은 시사 주간지 타임이 ‘암울한 선거운동 가운데 한줄기 빛’으로 묘사할 만큼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이후 1980년 지미 카터 당시 대통령을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미 40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를 일관한 사상적 배경은 두가지다.‘작은 정부’와 ‘반공주의’다.작은 정부는 세금감면과 정부지출 감소 및 규제완화라는 ‘레이거노믹스’로 실현됐다.취임 2년간 기록적인 실업률과 은행과 농장의 파산으로 레이거노믹스는 비판을 받았으나 1983년부터 인플레이션이 꺾이고 고용이 늘면서 2차대전 이후 최고의 팽창기를 맞았다. 반공주의는 옛 소련과의 군비경쟁과 ‘스타워스’로 이어졌고 결국 소련이 핵감축 등에 합의,냉전종식의 밑바탕이 됐다.그러나 국방비 과다지출로 재정적자가 심화돼 1987년 10월 19일 미국 증시가 대폭락,‘레이거노믹스’는 역사의 뒷전으로 사라졌다.니카라과 좌파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이란에 무기를 판 돈으로 콘트라 반군에 지원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레이건은 정확한 사실을 모른다고 말해 행정 장악력이 취약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대통령에서 물러날 당시 역사학자들로부터는 최악의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최근에는 케네디 이후 최고의 대통령으로 재조명됐다.1994년 알츠하이머 병에 걸려 10년간 투병생활을 했다. mip@seoul.co.kr ■로널드 레이건 일생 -1911.2.6. 일리노이주에서 출생 -1932. 일리노이 유레카대 경제학과 졸업 -1937.영화‘사랑은 방송중’으로 데뷔 -1947. 미국영화배우협회 회장 당선 -1952.3. 낸시 데이비스와 재혼 -1962. 공화당 입당 -1966.11. 캘리포니아 주지사 당선 -1976.공화당 대통령 예비선거 낙선 -1980.11. 40대대통령 당선.81년 1월 취임 -1981.3.30. 워싱턴의 호텔에서 피격 -1984.11. 대통령 재선 -1989.1. 퇴임,캘리포니아로 귀향 -1994.11. 알츠하이머 병 앓아왔다고 발표 -2001.10.11. 가장 오래 생존한 미국 대통령이 됨 -2004.6.5. 93세 일기로 타계 ˝
  • 캐나다 ‘랄랄라‘·스페인 코르테스 새달 공연

    고전발레의 진수를 보여준 러시아 볼쇼이발레단에서부터 최첨단 현대무용의 기수 벨기에 세드라베무용단, 혁신적인 안무가 나초 두아토,샤샤 발츠,매튜 본,그리고 지리 킬리안까지.세계적 명성의 무용단 내한공연이 꼬리에 꼬리를 문 지난 몇달은 무용 팬들에게 그야말로 환상의 뷔페 코스였다.지갑이 얇은 이들에겐 시차를 두지 않고 한꺼번에 몰리도록 공연 일정에 무심했던 기획사들의 무성의(?)가 야속하기도 했을 터.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어느 해보다 화려했던 올 상반기 춤의 향연에 마침표를 찍을 두 편의 화제작이 더 남아 있다.새달 3∼5일 서울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하는 캐나다 랄랄라 휴먼스텝스와 24∼28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선보이는 스페인 플라멩코 무용수 호아킨 코르테스가 주인공이다. ●캐나다 정상의 무용단,랄랄라 휴먼스텝스의 ‘아멜리아’ 안무가 에두아르 록이 이끄는 ‘랄랄라 휴먼스텝스’는 인기 팝그룹처럼 어느 곳이든 열광적인 관객을 몰고다니는 것으로 유명하다.속도감있는 움직임과 순간적인 정지로 대변되는 이들의 신체 언어는 세계 무용계에 커다란 충격과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특히 발레 무용수들이 신는 토슈즈를 신고 구사하는 고도의 ‘포인트 테크닉’은 이 단체를 특징짓는 주요 안무 기법이다. 1954년 카사블랑카에서 태어난 에두아르 록은 19세에 무용을 시작해 80년 랄랄라 휴먼스텝스를 창단했다.본격적으로 무용단 이름을 알린 작품은 85년에 선보인 ‘휴먼 섹스’.신선한 안무법과 넘치는 에너지,상상을 초월하는 스피드로 관객과 평단의 눈을 사로잡았다.이어 98년 일본에서 초연된 ‘소금’으로 일약 세계 정상급 무용단으로 발돋움했다. 에두아르 록과 ‘랄랄라‘는 외부 단체와의 협력 작업을 선호한다.네덜란드댄스시어터의 안무가 지리 킬리안·한스 반 마넨과 합동무대를 가졌고,지난해에는 파리오페라발레단을 위해 안무한 작품으로 세계 최고 권위의 ‘브누아 드 라 당스’안무상을 받았다. 공연작 ‘아멜리아’는 2002년 프라하에서 초연된 이후 로마,파리,베를린 등 유럽 순회공연을 통해 격찬을 받은 작품.원래 LG아트센터에서 처음 선보일 예정이었으나 무용수의 부상으로 공연이 취소되는 바람에 2년 늦게 한국에 오게 됐다.토슈즈를 이용한 빠른 회전,한치의 오차없는 움직임 등으로 타인과의 교류를 갈망하는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고 있다.생생한 라이브 연주와 애니메이션 영상을 활용한 역동적인 무대도 볼거리.(02)2005-0114. ●스페인 플라멩코 댄서,호아킨 코르테스 ‘라이브’ ‘안토니오 반데라스 이후 스페인 최고의 섹시 아이콘’.21세기형 플랑멩코의 창시자로 불리는 호아킨 코르테스의 매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찬사이다.그의 이름 앞에 따라붙는 수식어는 이것 말고도 많다.조르지오 아르마니의 패션 모델,슈퍼모델 나오미 캠벨의 옛 애인,가수 제니퍼 로페스의 뮤직비디오 출연….섹스 심벌로서의 스타성을 입증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례들이다. 그러나 호아킨 코르테스의 진면목을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건 바로 무대에서다.그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 집시들의 춤인 플라멩코를 정통 그대로가 아니라 현대성을 가미한 퓨전 양식으로 새롭게 변모시켰다.1969년 코르도바에서 태어난 집시 출신의 코르테스는 12세에 마드리드로 옮겨와 무용수업을 시작했다.15세에 스페인국립발레단에 입단해 솔로이스트로 활약했고,발레단을 떠난 뒤에는 수많은 공연단의 게스트 무용수와 안무가로 활동했다.92년 자신의 이름을 딴 무용단 ‘호아킨 코르테스 발레 플라멩코’를 창단하면서 ‘시바이’ ‘집시열정’ 등의 작품을 선보였다. ‘라이브’는 2001년 초연돼 폭발적인 호응을 얻은 대표작.모차르트부터 재즈,쿠바음악 등 타악과 현악으로 구성된 18명의 연주자들이 라이브로 펼치는 다양한 리듬에 맞춰 호아킨 코르테스가 두 시간 내내 홀로 무대에 서는 단독 공연이다.(02)3446-6418.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춤사위로 본 ‘공자’ 예술의 전당서 공연

    중국 유학자 공자(孔子)의 사상과 생애를 춤으로 풀어낸 무대가 마련된다.20·21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하는 ‘임학선 댄스 위’의 한국 무용 ‘공자’(안무 임학선 성균관대 교수).독특한 소재만큼 막이 오르기 전부터 여러 면에서 화제를 불러모았던 작품이다. 공자를 주제로 한 세계 첫 무용작이라는 것 말고도 서울시와 문화관광부의 2004년 무대공연예술지원 최고액 수혜작,오페라극장을 대관받은 첫 한국무용,무용수 70여명과 국악관현악단 30여명 등 100여명이 출연하는 규모 면에서 눈길을 끈다.또 유학자인 이기동 성균관대 교수가 대본을 쓰고,피나 바우슈와 작업하는 조명디자이너 안드레아스 린케스의 동참도 귀를 솔깃하게 하는 대목. 무용 ‘공자’는 성인군자의 모습보다는 열정적 삶을 살았던 인간 공자에 초점을 맞춘다.자연과 더불어 하늘을 노래하고 물의 흐름처럼 유연했던 공자의 삶을 탄생·학문·고난·임종·부활 등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표현한다. 중국에서 전래돼 성균관을 통해 보존되고 있는 의식무용인 ‘문묘일무(文廟佾舞)’의 재현도 관심거리.구체적 내용이 알려지지 않았던 문묘일무의 동작 하나하나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된 중국 고대문헌을 입수해 수년간 동작을 다듬어왔다. 지난해 9월 공자의 출생지인 중국 산둥성(山東省) 곡부(曲阜)에서 열린 ‘공자 탄신 2554년 기념 국제공자문화축제’에서 일부를 미리 선보여 호평을 받았고,올 가을 같은 행사에서 전막을 공연할 예정이다.한편 공연 기간중 공자에 관한 국제학술세미나가 성대 600주년 기념관에서 마련된다.(02)760-1038. 이순녀기자˝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6)통일을 기다리는 건봉사 불이문(不二門)

    불교에서 불이(不二)는 크게 세 가지 뜻을 지닌 것으로 가르쳐 온다. 첫 번째는 다르지 않은 것,같음,한 몸을 말한다.그 다음은 둘이 대립하지 않는 것,두 가지가 평등한 것을 말한다.상대와의 차별을 넘어선 절대 평등의 경지,대립을 멀리한 뛰어난 이치를 추구한다.세 번째는 앞의 두 경우가 경전의 이론적 해석을 통하여 관념 세계의 본질을 밝히려는 것과 달리,실천적인 상태를 추구한다.그리하여 불이(不二)란 상대의 마음이 되는 것을 뜻하고 거기 도달하기 위해 고행 정진한다. 무릇 웬만한 사찰에는 이같은 뜻의 불이문(不二門)이 세워져 있다.수많은 불이문 중에서 금강산 건봉사(乾鳳寺)의 불이문은 단연코 다른 불이문들과는 차별화되는 매우 특별한 내력을 지니고 있다.오늘은 금강산 건봉사의 전설적인 역사와 함께 이곳 불이문을 감상하기 위해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로 떠난다. 바야흐로 진달래꽃이 심심산천에 불을 놓아 아름다움을 향한 소리 없는 소리가 강원도 산과 들에 뿌리 없는 봄바람 나무를 휘젓는다.옛사람들이 이르기를 양간지풍(襄杆之風)이요 통고지설(通高之雪)이라 했다.즉 양양과 간성은 바람이 많고,통천 고성엔 눈이 많이 온다는 뜻을 제법 그럴싸한 문자풍으로 읊조렸는데,오늘은 고성 땅에도 봄바람이 폭풍처럼 인다.고성 땅은 서쪽의 태백 준령과 동쪽의 비취빛깔 동해 수평선을 지방의 특성으로 꼽을 만큼 서쪽은 지대가 높고 동쪽은 낮은 들판으로 장엄했다.이런 지형을 두고 조선시대 이곳 현감을 지낸 이식(李植)은 ‘높은 산에는 눈이 희끗희끗 남아 있는데,바닷가 흰모래밭에는 벌써 해당화가 지고 있구나.’하고 노래했었다. 건봉사는 대한민국에서 금강산 이름을 앞에 거느린 유일한 사찰이다.한때 우리나라 사대명찰(四大名刹) 중 하나였으며,강원도의 모든 절을 거느렸던 호국불교를 대표하는 매우 큰 도량이자 불교 미술의 박물관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유구한 역사와 화려하고 굵직 굵직한 승려들의 처소였었다. ●6·25전쟁 치열한 전투현장 되기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의승군(義僧軍)을 일으키기도 했다.허망하게 붕괴되어 패주하는 조선군대를 대신하여 조선의 운명을 구원한 의승군의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 건봉사다.경전과 목탁 대신 칼과 몽둥이를 들고 중생구원을 실천한 1000여명의 승려들이 군사훈련을 했다. 건봉사는 평소에도 700여명 승려들이 수행하던 전국 최대규모의 사찰이었고,1500년 동양불교의 민중구제에 대한 불멸의 증험 도량이었다.이곳 수행자와 불교 신도들이 이루어 낸 여러 종교적 성취와 영험들은 한국 불교의 자존심이었다. 이같은 건봉사는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 6·25의 상처가 가장 잔혹하게 남은 곳이기도 하다.3000 칸이 넘는 거대한 건봉사가 역사의 회오리 속에 빨려 든 것은 해방되던 해부터였다.건봉사는 3·8선 이북에 속했다.소련군이 들어와 인민위원회가 생기고 북한 정권이 세워지자 반종교정책이 강행되었다.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의 토지개혁으로 건봉사 소유 토지가 몰수되고 종교활동이 금지되자 승려들은 남쪽으로 피신해왔다.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다.건봉사는 1951년 4월부터 휴전이 될 때까지 2년 동안 적군과 아군이 물고 물리는 일대 접점지역의 중심무대가 되었다. 1951년 5월10일 당시 건봉사는 금강산 줄기를 따라 후퇴하는 북한군의 중간집결지였다.유엔군 공군과 미8군 소속 한국 1군단,국군수도사단 기갑연대의 합동공격이 시작되었다.유엔군 전폭기 편대가 폭격을 시작하여 건봉사 핵심 건물들이 불타고 수많은 국보들이 모조리 파괴되고 불타버렸다.1951년 6월 이후부터는 중국군의 5월 공세에 맞선 국군 3군단과 1군단의 이른바 건봉산전투가 건봉사를 사이에 놓고 16차례의 공방전을 벌였다. 국군이 쏘아댄 포탄만 10만 발이 넘었고 미7함대의 함포사격과 공군기까지 가세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1951년 6월의 건봉산 전투로 건봉사는 국군에 의하여 점령되었다.이곳 수행자들과 마을 주민들은 모두 속초 이남으로 강제 이주되고 그때까지 형체가 남아 있던 몇몇 사찰 건물은 국군부대의 막사로 이용되었다. 사찰 빈터에는 천막을 짓고 이 일대 부대를 지휘하는 지휘소나 보급 전진기지로 삼았다.주둔 부대는 겨울이 되자 사찰 건물의 목재를 뜯어내어 난방용 화목으로 썼다.기둥과 건물 곳곳의 목재들은 이렇게 자취를 감추어 갔다.전투 양상에 따라 교차 투입되면서 건봉사에 주둔했던 국군부대로는 수도사단,3사단,5사단,8사단,9사단,11사단,15사단,육본직할81야포대 등이었다.1953년 7월27일 휴전후에도 건봉사는 군부대 막사로 사용되었는데,1954년 9월 주둔중이던 국군부대의 촛불에 의한 실화로 남아 있던 건물들이 불타버렸다.이 때의 화재로 더 이상 주둔시설로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주둔 부대는 건봉사를 버리고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다.그때부터 건봉사는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는 민통선 안에서 철저한 폐허로 변해갔다. ●1988년까지 민간인 출입통제구역 1988년까지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었지만 이곳의 역사를 아는 문화재 도굴꾼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땅속에 매몰되어 있는 불교미술품과 문화재를 훔쳐내기 시작했다.임진왜란 때 양산 통도사에 보관 중이던 부처님의 치아 사리를 왜군들이 빼앗아 일본으로 가져갔던 것을 사명대사가 되찾아와서 건봉사에다 보관해 왔다.이런 사실을 아는 도굴꾼들의 집요한 접근으로 마침내 도굴당했다.그때까지 남아 있던 수많은 석조 조형물들이 밀반출되어 서울의 부잣집 정원석으로 사용되고,울창하던 아름드리 소나무들은 군부대에 의하여 도벌당했다.군부대에서는 비무장 지대의 경계에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워 엄청난 양의 소나무를 베어 민간업자들에게 팔아넘기기도 했다.특히 1967∼1968년 고성군에 의한 대대적인 벌목으로 사찰경내는 황무지가 되었다. 그렇게 베어내고도 아직 남아 있는 몇 그루의 소나무들을 보면 이곳 소나무들이 겪은 수난의 역사가 새삼 떠오른다.원래 솔숲이 울창하기로 유명했던 이곳은 일제 때 동경대학 연습림이 되면서부터 수난이 시작되었다.그때 일본의 목재업자들은 이곳 좌우 산골짝에서 수령 수백년되는 아름드리 소나무를 벌채하여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발구’라는 기계로 실어 날랐다.이곳 소나무들은 모두 일본으로 실려가서 일본 귀족들의 집을 짓는데 사용되었다.그때 동경대학 연습림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한국의 소나무들을 베어 일본으로 실어가는 이른바 민족경제 수탈을 연습하던 것이었음을 알 수 있겠다.아무튼 이같은 일제와 한국전쟁의 포화속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 하나 있다.그 엄청난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총상 하나 크게 입지 않고 살아 남은 건물이 다름 아닌 불이문이었다. ●만일염불회… 민중불교의 성지 원래 건봉사는 우리나라 불교 역사상 가장 이채로운 종교적 체험을 하던 도량이었다.만일염불회(萬日念佛會)가 그것이다.1만일 동안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는 기도를 통하여 아미타불을 직접 만나고 극락에 오르는 좀체 믿기 어려운 수행이었다.758년부터 시작된 이 특이한 수행에는 수천 명이 함께 참여했는데,무려 27년여 동안이라는 긴 시간 동안 집단으로 수행하는 이 모임은 1908년까지 이어져 내려왔고,건봉사는 한국 민중불교의 성지로 자리잡게 되었다.누구든,그 신분이나 재산,성별이나 유·무식에 걸림없이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실천적 평등관이 이곳에서 1000년이 넘게 시도되었던 것이다. 지금 기적처럼 남아 있는 불이문은 남북이 이념이나 체제를 뛰어 넘는 평등,서로의 고통과 아픔을 안아주고 치유해쥬는 실천적 공존을 통하여 통일 민족이 이루어지는 날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불이문을 찾던 날,불이문 오른편에 서 있던 산벚꽃나무 꽃잎이 기도에 대한 응답인 듯 분분히 흩날리고 있었다.통일은 상대의 마음이 되어주는 불이법문(不二法門)의 완성이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6)통일을 기다리는 건봉사 불이문(不二門)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6)통일을 기다리는 건봉사 불이문(不二門)

    불교에서 불이(不二)는 크게 세 가지 뜻을 지닌 것으로 가르쳐 온다. 첫 번째는 다르지 않은 것,같음,한 몸을 말한다.그 다음은 둘이 대립하지 않는 것,두 가지가 평등한 것을 말한다.상대와의 차별을 넘어선 절대 평등의 경지,대립을 멀리한 뛰어난 이치를 추구한다.세 번째는 앞의 두 경우가 경전의 이론적 해석을 통하여 관념 세계의 본질을 밝히려는 것과 달리,실천적인 상태를 추구한다.그리하여 불이(不二)란 상대의 마음이 되는 것을 뜻하고 거기 도달하기 위해 고행 정진한다. 무릇 웬만한 사찰에는 이같은 뜻의 불이문(不二門)이 세워져 있다.수많은 불이문 중에서 금강산 건봉사(乾鳳寺)의 불이문은 단연코 다른 불이문들과는 차별화되는 매우 특별한 내력을 지니고 있다.오늘은 금강산 건봉사의 전설적인 역사와 함께 이곳 불이문을 감상하기 위해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로 떠난다. 바야흐로 진달래꽃이 심심산천에 불을 놓아 아름다움을 향한 소리 없는 소리가 강원도 산과 들에 뿌리 없는 봄바람 나무를 휘젓는다.옛사람들이 이르기를 양간지풍(襄杆之風)이요 통고지설(通高之雪)이라 했다.즉 양양과 간성은 바람이 많고,통천 고성엔 눈이 많이 온다는 뜻을 제법 그럴싸한 문자풍으로 읊조렸는데,오늘은 고성 땅에도 봄바람이 폭풍처럼 인다.고성 땅은 서쪽의 태백 준령과 동쪽의 비취빛깔 동해 수평선을 지방의 특성으로 꼽을 만큼 서쪽은 지대가 높고 동쪽은 낮은 들판으로 장엄했다.이런 지형을 두고 조선시대 이곳 현감을 지낸 이식(李植)은 ‘높은 산에는 눈이 희끗희끗 남아 있는데,바닷가 흰모래밭에는 벌써 해당화가 지고 있구나.’하고 노래했었다. 건봉사는 대한민국에서 금강산 이름을 앞에 거느린 유일한 사찰이다.한때 우리나라 사대명찰(四大名刹) 중 하나였으며,강원도의 모든 절을 거느렸던 호국불교를 대표하는 매우 큰 도량이자 불교 미술의 박물관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유구한 역사와 화려하고 굵직 굵직한 승려들의 처소였었다. ●6·25전쟁 치열한 전투현장 되기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의승군(義僧軍)을 일으키기도 했다.허망하게 붕괴되어 패주하는 조선군대를 대신하여 조선의 운명을 구원한 의승군의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 건봉사다.경전과 목탁 대신 칼과 몽둥이를 들고 중생구원을 실천한 1000여명의 승려들이 군사훈련을 했다. 건봉사는 평소에도 700여명 승려들이 수행하던 전국 최대규모의 사찰이었고,1500년 동양불교의 민중구제에 대한 불멸의 증험 도량이었다.이곳 수행자와 불교 신도들이 이루어 낸 여러 종교적 성취와 영험들은 한국 불교의 자존심이었다. 이같은 건봉사는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 6·25의 상처가 가장 잔혹하게 남은 곳이기도 하다.3000 칸이 넘는 거대한 건봉사가 역사의 회오리 속에 빨려 든 것은 해방되던 해부터였다.건봉사는 3·8선 이북에 속했다.소련군이 들어와 인민위원회가 생기고 북한 정권이 세워지자 반종교정책이 강행되었다.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의 토지개혁으로 건봉사 소유 토지가 몰수되고 종교활동이 금지되자 승려들은 남쪽으로 피신해왔다.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다.건봉사는 1951년 4월부터 휴전이 될 때까지 2년 동안 적군과 아군이 물고 물리는 일대 접점지역의 중심무대가 되었다. 1951년 5월10일 당시 건봉사는 금강산 줄기를 따라 후퇴하는 북한군의 중간집결지였다.유엔군 공군과 미8군 소속 한국 1군단,국군수도사단 기갑연대의 합동공격이 시작되었다.유엔군 전폭기 편대가 폭격을 시작하여 건봉사 핵심 건물들이 불타고 수많은 국보들이 모조리 파괴되고 불타버렸다.1951년 6월 이후부터는 중국군의 5월 공세에 맞선 국군 3군단과 1군단의 이른바 건봉산전투가 건봉사를 사이에 놓고 16차례의 공방전을 벌였다. 국군이 쏘아댄 포탄만 10만 발이 넘었고 미7함대의 함포사격과 공군기까지 가세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1951년 6월의 건봉산 전투로 건봉사는 국군에 의하여 점령되었다.이곳 수행자들과 마을 주민들은 모두 속초 이남으로 강제 이주되고 그때까지 형체가 남아 있던 몇몇 사찰 건물은 국군부대의 막사로 이용되었다. 사찰 빈터에는 천막을 짓고 이 일대 부대를 지휘하는 지휘소나 보급 전진기지로 삼았다.주둔 부대는 겨울이 되자 사찰 건물의 목재를 뜯어내어 난방용 화목으로 썼다.기둥과 건물 곳곳의 목재들은 이렇게 자취를 감추어 갔다.전투 양상에 따라 교차 투입되면서 건봉사에 주둔했던 국군부대로는 수도사단,3사단,5사단,8사단,9사단,11사단,15사단,육본직할81야포대 등이었다.1953년 7월27일 휴전후에도 건봉사는 군부대 막사로 사용되었는데,1954년 9월 주둔중이던 국군부대의 촛불에 의한 실화로 남아 있던 건물들이 불타버렸다.이 때의 화재로 더 이상 주둔시설로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주둔 부대는 건봉사를 버리고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다.그때부터 건봉사는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는 민통선 안에서 철저한 폐허로 변해갔다. ●1988년까지 민간인 출입통제구역 1988년까지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었지만 이곳의 역사를 아는 문화재 도굴꾼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땅속에 매몰되어 있는 불교미술품과 문화재를 훔쳐내기 시작했다.임진왜란 때 양산 통도사에 보관 중이던 부처님의 치아 사리를 왜군들이 빼앗아 일본으로 가져갔던 것을 사명대사가 되찾아와서 건봉사에다 보관해 왔다.이런 사실을 아는 도굴꾼들의 집요한 접근으로 마침내 도굴당했다.그때까지 남아 있던 수많은 석조 조형물들이 밀반출되어 서울의 부잣집 정원석으로 사용되고,울창하던 아름드리 소나무들은 군부대에 의하여 도벌당했다.군부대에서는 비무장 지대의 경계에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워 엄청난 양의 소나무를 베어 민간업자들에게 팔아넘기기도 했다.특히 1967∼1968년 고성군에 의한 대대적인 벌목으로 사찰경내는 황무지가 되었다. 그렇게 베어내고도 아직 남아 있는 몇 그루의 소나무들을 보면 이곳 소나무들이 겪은 수난의 역사가 새삼 떠오른다.원래 솔숲이 울창하기로 유명했던 이곳은 일제 때 동경대학 연습림이 되면서부터 수난이 시작되었다.그때 일본의 목재업자들은 이곳 좌우 산골짝에서 수령 수백년되는 아름드리 소나무를 벌채하여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발구’라는 기계로 실어 날랐다.이곳 소나무들은 모두 일본으로 실려가서 일본 귀족들의 집을 짓는데 사용되었다.그때 동경대학 연습림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한국의 소나무들을 베어 일본으로 실어가는 이른바 민족경제 수탈을 연습하던 것이었음을 알 수 있겠다.아무튼 이같은 일제와 한국전쟁의 포화속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 하나 있다.그 엄청난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총상 하나 크게 입지 않고 살아 남은 건물이 다름 아닌 불이문이었다. ●만일염불회… 민중불교의 성지 원래 건봉사는 우리나라 불교 역사상 가장 이채로운 종교적 체험을 하던 도량이었다.만일염불회(萬日念佛會)가 그것이다.1만일 동안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는 기도를 통하여 아미타불을 직접 만나고 극락에 오르는 좀체 믿기 어려운 수행이었다.758년부터 시작된 이 특이한 수행에는 수천 명이 함께 참여했는데,무려 27년여 동안이라는 긴 시간 동안 집단으로 수행하는 이 모임은 1908년까지 이어져 내려왔고,건봉사는 한국 민중불교의 성지로 자리잡게 되었다.누구든,그 신분이나 재산,성별이나 유·무식에 걸림없이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실천적 평등관이 이곳에서 1000년이 넘게 시도되었던 것이다. 지금 기적처럼 남아 있는 불이문은 남북이 이념이나 체제를 뛰어 넘는 평등,서로의 고통과 아픔을 안아주고 치유해쥬는 실천적 공존을 통하여 통일 민족이 이루어지는 날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불이문을 찾던 날,불이문 오른편에 서 있던 산벚꽃나무 꽃잎이 기도에 대한 응답인 듯 분분히 흩날리고 있었다.통일은 상대의 마음이 되어주는 불이법문(不二法門)의 완성이다.
  • LG 성장발판 ‘럭키치약’ 쉰살

    소금 대신 치약으로 이를 닦는 문화를 국내에 정착시킨 ‘럭키치약’이 27일 쉰 살이 됐다. LG생활건강은 1954년 국내 첫 치약 제품인 ‘럭키치약’을 내놓으며 세간의 눈길을 모았다.고 구인회 회장이 세운 락희화학공업사에서 만든 럭키치약은 미군PX를 통해 흘러나오던 ‘콜게이트치약’과 경쟁 끝에 불과 3년 만에 치약시장의 정상에 올랐다. 럭키치약은 해방 이후 외국제품을 물리친 최초의 국산제품이자 LG그룹 성장의 발판이 됐다.신제품을 알리기 위해 트럭에 럭키치약의 대형모형을 세우고 전국을 누볐던 사례는 한국 현대 마케팅의 효시로 꼽힌다.57년 국내 최초의 애니메이션 광고도 만들었다. LG생활건강이 81년 선보인 잇몸질환 예방 치약인 ‘뽀드득∼ 페리오치약’의 누적 판매량은 5억개로,국민 1인당 사용량이 10.4개나 된다. 이후에도 죽염치약,클링스치약 등을 잇달아 내놓은 LG생활건강은 50년 동안 줄곧 국내 치약 시장에서 1위 자리를 지켰다.2500억원 규모의 국내 치약시장에서 지난 1·4분기에는 평균 시장점유율 50.6%를 차지했다.현재 가장 잘 팔리는 치약은 페리오다.2위는 애경의 2080,3위는 LG의 죽염치약이다. LG생활건강측은 “5∼8세의 유아를 찾아가 치아건강 교육을 하는 ‘페리오키즈 스쿨’을 운영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치아건강 캠페인을 펼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LG생활건강은 치약 사업 50주년을 기념,이날 서울 명동 남산초등학교에서 ‘어린이 치아건강 캠페인’ 선포식을 갖고 남산초등학교에 50여명의 어린이들이 함께 양치할 수 있는 ‘양치교실’을 열었다.연말까지 모두 5개의 학교에 빈 교실을 이용한 양치교실을 만들 예정이며 매년 양치교실 학교를 늘려 나갈 방침이다.한국 어린이의 충치경험률이 선진국의 3배에 이르는 것은 학교에서 점심식사 뒤 양치질할 공간이 없기 때문이란 판단에서다. 윤창수기자 geo@˝
  • [하프타임]NBA PO 밀워키·마이애미 승리

    밀워키 벅스가 22일 열린 미프로농구(NBA) 플레이오프 원정 2차전에서 26점을 올린 마이클 레드의 맹활약에 힘입어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를 92-88로 제압했다.지난 1차전에서 7개의 턴오버를 범해 패배의 빌미를 제공했던 레드는 경기 종료 3초전에 자유투 2개를 성공시켜 승리에 쐐기를 박았다.이로써 밀워키는 원정경기에서 1승1패를 기록,25일에는 편한 마음으로 홈에서 3차전을 갖게 됐다.에디 존스(19점) 등 주전들이 고르게 활약한 마이애미 히트도 극도의 슛 난조를 보인 뉴올리언스 호니츠를 93-63으로 가볍게 제치고 2연승했다.뉴올리언스는 공식 집계가 시작된 54년 이후 플레이오프에서 두번째로 낮은 24.4%의 야투성공률을 기록하며 자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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