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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디어플러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9월창간

    프랑스 정론지인 ‘르몽드’가 발행하는 국제관계전문 월간지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Le Monde diplomatique)’ 한국판이 9월 공식 창간된다. 르몽드 코리아(대표이사 겸 발행인 박승흡)는 지난해 12월 프랑스 본사와 판권계약을 맺고 6월부터 창간준비호와 온라인판(www.lemonde.co.kr)을 선보인 뒤 9월15일 공식 창간한다고 24일 밝혔다. ‘르몽드’가 1954년 자매지로 창간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외교세계’란 뜻으로 국제 이슈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과 참신한 문제 제기를 통해 정론지로 자리를 굳혔으며,‘유럽의 지성’ 이냐시오 라모네 편집인이 주도하면서 유럽 지성계에 대안적 세계화 운동의 흐름을 확장시켜 세계적 권위지로 확고한 위치를 구축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세계 56개 판형,21개 언어로 모두 150만부가 발행되고 있으며 22번째 언어로 발행되는 한국판은 프랑스어판의 기사 70%와 한국판 편집진이 기획취재한 기사 30%를 실을 예정이다.
  • [요리조리 명사와 함께] 두산식품 전풍 사장

    [요리조리 명사와 함께] 두산식품 전풍 사장

    두부와 김치만 있으면 음식 걱정없다. 종가집 맏형 전풍 사장의 손끝이 닿으면 우리의 전통 음식 김치와 두부가 무한 변신을 시도한다. 특히 그의 진두지휘 아래 업계 최초로 선보인 발아콩두부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 발아콩두부 요리 전도사로 나섰다. 콩의 영양을 극대화시켰다고 자랑이 대단하다. 두산식품 종가집의 전풍 사장은 ‘맛집 네비게이션’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맛있는 곳을 잘 찾아 다닐 정도로 음식에 관심이 많다. 미식가는 대개 요리도 잘하는 법. 전 사장의 음식 솜씨가 어떤지 궁금해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 자택을 찾았다. 딸 수완(22)씨는 전 사장의 뒤를 이어 미국 피츠버그 카네기멜론대학에서 공부 중이어서 부인 임종빈(55)씨와 단둘이 살고 있다. 직업이 ‘CEO’라고 불릴 만큼 그동안 주로 경영 일선에서 바쁘게 지내 온 그다. 언제 요리를 할까 싶지만 그래도 유학간 딸이 방학 중 집에 돌아오면 주저하지 않고 앞치마를 두르는 멋진 아빠다. # 남들보다 김치 더 많이 먹게 되죠 고향 부산을 떠나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거쳐 미국 유학까지 다녀오다 보니 언제부터인지 요리하는 즐거움을 알게 됐다. 그가 자주하는 요리는 종가집에서 나오는 대표주자 두부와 김치를 이용한 두부 된장찌개와 묵은지 김치찜이다.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여 비결을 물었더니 “두부와 김치를 즐겨 먹기 때문”이라는 너무나 속보이는(?) 답변이 돌아왔다. “두산주류 사장일 때는 술을 많이 먹었고요. 광고회사 오리콤 사장일 때는 TV를 봐도 광고만 봤지요. 지금은 예전보다 김치를 몇배 더 많이 먹어요.” 잘하는 요리가 무엇이냐는 거듭된 질문에 오므라이스와 홍합수프를 꼽았다. 질레트 싱가포르 사장으로 일하던 시절 단골 식당의 프랑스인 주방장으로부터 배운 홍합수프는 가족들로부터 점수를 따는 비장의 카드다. “깊은 프라이팬에 버터를 넣고 양파를 잘게 다져서 볶은 다음 싱싱한 홍합을 넣어 뚜껑을 덮으세요. 홍합이 조금 익으면 달콤한 화이트와인을 프라이팬 절반 정도를 넣어 다시 한번 불에 익히면 됩니다.” 홍합에서 나온 바닷물과 양파에서 나온 물이 와인과 어우러져 정말 맛있는 수프가 된단다. 포인트는 물을 전혀 넣지 않는다는 점. 부인도 그의 실력을 넘보지 못하는 것은 양념. 그가 특별히 비율을 맞춘 초고추장과 초간장이 일품이다. 요리 고수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양념이라, 이쯤되면 누구든 전 사장의 요리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 과학이 숨쉬는 전통 식품회사로 키울 터 “가끔은 전혀 궁합이 맞지 않을 것 같은 재료들이 잘 어우러져 놀라운 맛의 요리를 탄생시키듯 경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생각하는 요리와 경영의 공통점이다. 회사에서 잘 맞지 않는 사람들끼리 부딪치기도 하지만 결국 좋은 결과물을 탄생시킨다는 설명이다. ‘인내’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기다림이 없이는 요리든 경영이든 좋은 결과를 얻기 힘들다는 게 그의 철학. 얘기를 듣다 보니 종가집은 그에게 딱 맞는 기업이다 싶다. 우리의 대표적인 전통음식인 김치와 두부 모두 오랜 장인의 인내가 필요한 대표적인 슬로 푸드이기 때문. 그가 종가집의 총 사령탑을 맡은 이후 두부와 김치 모두 과거의 낡은 방식이 아닌 종가의 전통 맛을 그대로 살리면서 새로운 제조 공정과 과학의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 또 ‘꼭짓점 경영론’도 펼친다. 꼭짓점인 경영자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수 있지만 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다며 직원들과의 열린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직원들에게 직접 이메일을 보내고 팀·직급별로 나누어 전 직원들과 점심 식사를 하며 자유로운 토론의 시간을 갖는다. ‘살아 숨쉬는 발아콩두부’와 ‘류코노스톡 유산균’의 탄생도 직원들과의 열린 의사소통 구조 덕분. 발아콩두부는 발아식품의 열기를 두부로까지 확대시킨 것으로 1년여의 연구 개발 끝에 업계 최초로 지난해 12월부터 선보였다. 김치의 시원하고 싱싱한 맛을 유지시켜 주는 류코노스톡 유산균은 저장기간과 신선도를 향상시켜 수출을 증대시키는 등 톡톡히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전통은 낡은 게 아니라 멋스러운 것입니다. 종가집 제품을 구매하는 계층이 20∼30대로 젊은 만큼, 기업 역시 젊어지는 것은 숙명입니다. 앞으로 완전식품 콩제품을 보다 강화할 계획입니다. 어떤 제품이 나올지는 비밀입니다.” 글 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김치파전 재료: 쪽파 100g, 김치 50g, 오징어 50g, 조갯살 50g, 부침가루 1/2컵, 풋고추·홍고추 각각 1개씩 만드는 법: (1)쪽파 100g은 깨끗하게 손질하여 씻은 후 반으로 자르고 김치 50g은 송송 썬다.(2)오징어와 조갯살은 50g씩 준비하여 굵게 다지고 풋고추와 홍고추는 1개씩 송송 썬다.(3)부침가루 1/2컵에 물 3/4컵을 부어 반죽한 뒤 손질한 쪽파를 넣는다.(4)식용유를 두른 팬에 반죽을 얹고 준비한 김치와 오징어, 조갯살, 고추를 고루 올린 뒤 위에 반죽을 약간 끼얹어 앞뒤로 노릇하게 지진다. ■ 생두부 야채샐러드 재료: 생두부 200g,그린샐러드(양상추, 치커리, 양파링, 체리토마토)200g,토마토드레싱(토마토소스 100g, 다진 양파 30g(1/4), 올리브유 10g, 케첩 30g(2큰술), 꿀 혹은 조청 30g(2큰술), 레몬즙 5g(1큰술),2배식초 1/2큰술, 발효겨자 4g, 소금 1g, 후추 약간) 만드는 법: (1)분량대로 드레싱을 만들어 차가워지도록 냉장해 둔다.(2)생두부는 물기를 거둔 다음 2×4㎝크기,1㎝두께로 썰어 준다.(3)양상추, 치커리는 손으로 알맞은 크기로 뜯어둔 것과 썰어놓은 양파링을 얼음물에 씻어 건져 차게 보관해둔다.(4)먹기 직전 야채와 함께 두부를 담고 드레싱을 뿌려 낸다. ■ 김치보쌈 재료: 돼지갈비, 묵은지,돼지갈비 양념(간장, 물엿, 설탕, 생강, 마늘, 양파, 계피, 감초, 황기, 월계수 잎, 후추, 조미료, 조미술 혹은 청주) 만드는 법: (1)손질된 돼지갈비를 준비한다.(2)간장물(물4:진간장1)과 월계수잎, 저민 생강을 넣고 1시간 이상 끓인다. 끓인 간장물이 식으면 마늘즙과 양파즙을 섞어서 후추를 뿌려 놓는다. 그리고 설탕 약간과 물엿 약간을 넣고 잘 저어준다. 그 후에 조미료와 조미술을 넣고 저어준다.(3)(2)의 양념장에 재워둔 후 굽는다.(4)접시에 구워진 양념 갈비와 묵은지를 함께 낸다. ■ 두부 튀김탕 재료: 두부 250g, 소금, 흰후추, 녹말가루, 튀김기름, 볶은 검은깨 약간, 강판에 간 무즙 30g, 송송썬 실파 약간,간장소스(간장 3큰술, 다시마물 2큰술, 미림 1큰술, 식초 1작은술, 녹말가루 3g) 만드는 법: (1)분량대로 간장소스를 약간 걸쭉한 농도로 끓여 식힌 다음 차게 보관한다.(2)두부는 3∼4㎝ 굵기로 싹둑 썰어 약간의 소금, 후추, 참기름을 골고루 뿌려 준다.(3)두부에 녹말가루를 골고루 묻혀 충분히 흡수시킨다.(4)튀김기름 온도 180℃에 (3)의 두부를 넣고 표면이 바삭하게 튀겨지면 들어낸다.(5)간장소스에 무즙을 넣고 저어 뜨거운 두부 위에 부어 올리고 볶은 검은깨와 실파를 뿌려 낸다. ■ 묵은지 두부찌개 재료: 두부 1/2모, 미나리 5줄기, 묵은지 1포기, 쑥갓 약간, 양파 1/2개, 육수 3컵, 제육삼겹살 200g, 파 1뿌리, 팽이버섯, 풋고추, 홍고추 만드는 법: (1)두부는 1㎝ 두께로 썰고 제육은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놓는다.(2)묵은지는 5㎝ 길이로 자른다.(3)간장, 고춧가루와 파, 마늘, 깨소금, 설탕, 참기름을 넣고 버무린다.(4)양파는 1cm 두께로 썰고, 파는 1㎝ 넓이로 어슷썰기하고 미나리는 4∼5㎝ 길이로 자른다.(5) 팽이버섯은 밑동을 잘라내고 홍고추, 풋고추는 어슷썬다.(6)쑥갓은 다듬어 놓는다.(7)전골냄비에 준비한 재료를 각각 돌려담고 육수를 부어서 끓인다.(8)소금이나 국간장으로 간 맞춘다. ■ 프로필 ▲1954년 부산 출생 ▲81년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 졸업 ▲83년 피츠버그 카네기멜론대학 공학석사 ▲84년 피츠버그대학 MBA 졸업(마케팅&파이낸스 전공) ▲84년 ㈜한화 뉴욕지사 근무 ▲87년 ㈜유한양행 근무 ▲90년 질레트코리아 초대 대표이사 사장 ▲97년 오랄비코리아 대표이사 사장 ▲98년 질레트싱가포르 대표이사 사장 ▲2000년 ㈜두산주류BG 부사장 ▲02년 오리콤 대표이사 사장 ▲04년∼현재 ㈜두산식품BG 사장
  • [송두율칼럼] 축구의 사회학

    [송두율칼럼] 축구의 사회학

    6월9일 독일 뮌헨에서 시작해 7월9일 베를린서 끝나는 이번 월드컵경기는 명실공히 ‘세계화’된 축구의 축제다. 현재 191개 유엔회원국보다 많은 207개 회원국을 거느린 국제축구연맹(FIFA)이 주관하는 독일 월드컵은 출전국은 물론, 그러지 못한 나라의 수많은 사람들까지 매체를 통해 중계되는 경기를 보며 한달 동안 밤낮으로 열광할 것 같다. 중국이 원조로 알려진 축구가 영국을 시작으로 해서 전 세계에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오늘에 이르렀지만, 체조를 국민스포츠로 여겼던 독일은 19세기말까지만 해도 축구를 ‘비독일적 영국경기’라고 폄하했었다. 미식축구, 야구와 농구에 비하면 변방적인 위치를 지녔던 미국의 축구도 특히 중산층자녀를 중심으로-자녀교육에 극성스러운 엄마를 ‘축구엄마’(soccer mom)라고까지 부를 정도로-그동안 꾸준히 확산되어 이제 월드컵 본선에까지 진출할 정도로 성장했다. 다른 어떤 운동경기보다 스포츠, 사회, 경제, 언론매체 그리고 정치가 서로 얽혀있는 구조를 잘 보여주는 축구는 사회의 집단적 정체성을 강하게 각인하지만 동시에 극히 모순적인 모습도 드러낸다.1954년 스위스대회(베른)에서 독일이 우승을 차지, 패전후의 국민들에게 큰 자신감을 심어준 경우는 물론,2002년 한국의 ‘붉은 악마’ 응원단이 보여주었던 분위기는 분명 축구가 강력한 사회통합의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주었다. 그러나 축구는 또 배타적인 인종주의나 편협한 애국주의를 폭발적으로 일거에 분출시켜 심지어 국가간의 전쟁을 유발한 경우도 있었다.1969년에 열린 중미지역 예선전에서 비롯된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간의 무력충돌이 바로 그러한 예다. 그러나 축구는 또 지금 자주 이야기되는 ‘세계화’의 특징적인 모습도 잘 보여주고 있다. 식민주의의 경략(經略)이 비교적 오랜 영국이나 프랑스와는 달리 독일에서는 지금까지 검은 피부색을 지닌 선수를 독일의 국가대표로서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는데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또 한국은 물론, 같은 조에 속한 토고의 감독도 역시 백인이다. 이와 더불어 축구선수는 이미 지역적이거나 국가적 우상이 아니라 ‘지구촌’의 우상이 되었다. 또 영국의 축구스타 베컴처럼, 축구선수는 젊음과 건강을 표상(表象)하는 몸이 문화적 삶의 중심에 자리잡은 ‘탈현대’의 화신이기도 하다. 의심할 것 없이 월드컵 축구경기는 올림픽과 더불어 상업성이 가장 짙다. 이의 로고 사용권을 둘러싼 그치지 않는 법적 공방이 있긴 하지만 상품으로서의 월드컵 축구경기는 경기시작 오래 전에 이미 손익계산을 끝낸다. 축구는 또 정치와 자주 비유되어 이야기된다. 선수는 장관으로, 감독은 대통령이나 총리로, 통치 스타일도 화려한 개인기를 바탕으로 한 남미식이냐, 아니면 팀의 조직력을 중시하는 유럽식이냐는 비유로서 설명되기도 한다. 원래 유희로서 시작된 축구는 마침내 ‘세계화’ 속에서 이렇게 복잡한 과제를 안게 된 ‘엄중한 경기’(serious game)가 되었지만, 그래도 축구의 본원(本源)에 대해서 한번쯤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축구공은 둥글다. 심판관은 불공평할 수 있지만, 개인기와 조직력을 결합하는 전략과 전술, 그리고 경기의 행운을 좇는 둥근 축구공은 공평하다. 이번 독일 월드컵 대회에서 4년 전 그때의 열광과 환희를 직접 현장에서 기대해본다.“비상(飛上)중에도 공중에서 두 손의 온기를 계속 지닌 둥근 너, 원래처럼 걱정 없구나”라는 구절로 시작해서 “그래서 높이 손으로 받쳐 든 우승컵 안에 무엇보다도 빠르고, 단순하며, 꾸밈없는 온 자연이 채워지길 기대하고 희망하네”라는 구절로 끝나는 독일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축구에 대한 시를 떠올린다.
  • [시론] 日 독도 영유권 주장은 거짓/신용하 한양대 석좌교수·독도학회 회장

    [시론] 日 독도 영유권 주장은 거짓/신용하 한양대 석좌교수·독도학회 회장

    일본 정부가 지난 12일 내각회의에서 1954년 이후 한국의 독도영유는 ‘불법점거’라며,“일본은 늦어도 17세기 중반 독도 영유권을 확립했고,1905년 내각회의가 이 독도영유권을 재확인 의결했다.”는 답변서를 공식 결정했다. 이는 전혀 근거가 없는 새빨간 거짓이다.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두 어부가 조선 울릉도와 독도에 월경하여 고기잡이 다녀오겠다고 청원을 내자,1618년 ‘죽도(울릉도)도해면허’와 1656년 ‘송도(독도)도해면허’를 내 준 일이 있다. 이때 도해면허는 외국에 월경하여 나갈 때만 내어주는 오늘날의 여권과 유사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도해면허는 도리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영토이고 일본영토가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측 항의를 받은 도쿠가와 막부는 1696년 1월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재확인하고 ‘죽도(울릉도)도해면허’와 ‘송도(독도)도해면허’를 취소했으며, 울릉도·독도로 일본어부들의 출어를 엄금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 사실은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 일본 내무성 ‘공문록(公文錄)’,‘조선통교대기(朝鮮通交大紀)’ 등 일본고문헌에 잘 기술되어 있다. 17세기 중엽 일본의 독도영유 확립은 커녕 도리어 독도는 조선고유영토였고, 일본 도쿠가와 정부도 이를 조선영토로 재확인하여 조선정부에 보내 온 1696∼1699년의 공식 일본외교문서가 보관되어 있다.1905년에 일본정부 내각회의가 일본의 독도영유를 재확인했다는 일본정부의 의결도 거짓이다. 일본정부는 1905년 1월28일 한국정부와 국민 몰래 독도를 처음으로 영토편입을 결정할 때 독도가 ‘주인없는 땅(무주지)’이고, 나카이라는 일본어업가가 1903년 독도 연해에서 고기잡이한 일이 ‘무주지선점(無主地先占)’이 된다고 근거로 내세웠다. 이때에 일본 내무성은 그 섬이 조선 우산도(于山島)여서 한국영토라는 의견을 냈고, 나카이도 이 섬이 한국영토이므로 한국정부에 고기잡이 청원서를 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해군성·외무성이 앞장서서 ‘무주지’라고 억지를 부리며 영토야욕으로 독도를 침탈키로 하였다. 주목할 것은 1905년 일본 내각회의가 독도는 ‘무주지’이기 때문에 처음으로 일본에 영토 편입한다는 결정은 현 일본정부의 17세기 중엽 일본 영유권 확립주장을 부정한다는 사실이다.17세기 중엽에 일본 독도영유권이 확립되어 있었다면 1905년에 새삼스럽게 일본 정부가 독도를 무주지라고 하면서 ‘처음으로 영토편입’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일본정부가 1905년 내각회의에서 일본의 독도영유권을 재확인했다는 주장은 따라서 새빨간 거짓말이다. 일본은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잘 알면서도 영토탐욕으로 독도 ‘영토편입’결정을 하고 한국정부와 국민 몰래 독도를 침탈한 것이다. 그리고 1910년에는 아예 한반도 전체를 강점 침탈하였다. 국제법상의 기관인 연합국최고사령부는 청·일전쟁의 해인 1894년 1월1일을 기준일로 일본제국주의가 그 이후 침탈·편입한 모든 영토는 원주인에게 반환하기로 결정했다. 연합국은 1946년 1월29일 연합국최고사령부 지령 제677호로 독도를 탐욕에 의해 일본제국주의가 침탈한 토지로 규정해서 일본영토에서 제외하여 한국에 반환하였다. 이제 일본의 극우파 신팽창주의 정권이 구 일본제국주의를 계승하여 궤변을 토하며 또 독도를 침탈하려고 도발해 온다. 한국 국민과 정부는 일본의 신팽창주의적 도전에 당당히 적극 대응하여 주권과 영토를 굳게 지켜야 한다. 신용하 한양대 석좌교수·독도학회 회장
  •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로버트 카파 지음

    전설적인 포토저널리스트이자 세계적인 보도사진 에이전시 매그넘(MAGNUM)의 창시자인 로버트 카파. 열여덟 살 되던 해에 조국 헝가리에서 좌익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추방돼 독일로 건너간 그는 사진을 배운 뒤 18년에 걸쳐 다섯 차례의 전쟁(스페인 내전, 중일전쟁,2차대전, 중동전쟁, 인도차이나전쟁)을 취재한다. 전장에서 병사보다 더 적진 가까이 다가가 촬영한 것으로 유명한 그는 1954년 41세의 나이로 인도차이나전을 취재하러 갔다가 베트남에서 지뢰를 밟아 폭사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투철한 기자정신을 일컫는 ‘카파이즘(Capaism)’이란 말까지 낳으며 그는 보도사진계의 신화가 된다.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로버트 카파 지음, 우태정 옮김, 필맥 펴냄, 원제 Slightly Out Of Focus)는 전설적인 종군기자 로버트 카파(본명 엔드레 에르노 프라드만)의 2차대전 종군기다. 카파의 사진철학은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너무 멀리서 찍었기 때문”이라는 그의 말에 그대로 담겨 있다. 그같은 철학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진이 바로 1936년 스페인내전 당시, 어느 병사보다도 더 적진에 바싹 다가가 찍은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이다.“삶과 죽음의 확률이 반반이라면 나는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리는 길을 택하겠다.”고 한 카파. 전쟁사진의 백미로 꼽히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사진을 비롯한 60여점의 사진이 카파이즘의 극치를 보여준다.1만 2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日 “한국, 독도 불법점거” 국회답변서 채택

    |도쿄 이춘규특파원·서울 김수정기자|일본 정부가 12일 각의 결정을 통해 “일본이 늦어도 17세기 중반에 영유권을 확보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며 1954년부터 계속되고 있는 독도에 대한 한국의 실효 지배는 ‘불법 점거’라는 국회 답변서를 채택했다. 스즈키 무네오(鈴木宗男) 중의원 의원의 서면질의에 대한 답변 형식을 취한 문서에서 일본 정부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 영유권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전제한 뒤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 이름)의 영유권 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주장하고 문제의 평화적인 해결을 시도하는 한편 유효한 방책을 끊임없이 검토해 가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추규호(秋圭昊) 외교통상부 대변인 명의의 논평을 통해 “역사적·지리적·국제법적으로 고유한 영토인 독도에 대한 우리의 정당한 주권행사에 대해 일본 정부가 불법 점거라고 주장하는 것을 결코 용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11일 열린 부(副)대신회의에서는 초·중·고 교과서에 ‘독도는 일본땅’이라는 내용을 적극 기술해야 한다는 촉구가 잇따랐다고 산케이(産經)신문이 12일 보도했다.taein@seoul.co.kr
  • [부고]

    ●김진만 전 국회 부의장 제3대 민의원부터 7선 의원을 지낸 김진만 전 국회 부의장이 10일 오후 숙환으로 별세했다.89세. 동부그룹 김준기 회장의 부친인 고인은 강원도 동해 출신으로 1954년 3대 민의원에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7선 의원을 지냈고, 공화당 원내총무, 국회부의장을 역임했다. 유족으로는 김준기 회장과 김택기 전 국회의원 등 8남매와 사위인 신동윤 율촌화학 부회장이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이며 발인은 오는 13일.(02)3010-2631. ●이함녕(재미 의사)호영(극동유리 대표)찬녕(예진건설 대표)씨 부친상 허인범(전 현대건설 부사장)조영래(삼양가전 대표)씨 빙부상 10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2일 오전 8시 (02)3410-6903 ●홍진태(한국상역개발 회장·전 신아일보 논설위원)국태(필명 홍상화·한국문학 주간)기태(미국LA 한미은행 이사)씨 모친상 강인구(전 연암공업대 학장)김석산(미국 거주)씨 빙모상 9일 서울대병원, 발인 12일 오전 7시 (02)2072-2012 ●김승묵(전 인천변호사회 회장)창묵(전 대림요업 상무)양묵(전 대림산업 과장)성묵(아버지학교 해외총본부장)씨 모친상 강정삼(전 한국전력 부장)씨 빙모상 9일 인하대병원, 발인 12일 오전 9시 (032)890-3199 ●이철규(삼성카드 목포지점)재종(이형석 전 광주시의회의장 비서관)씨 모친상 이동주(광영석재 대표)김수정(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전북지원 농업정보통계과장)김기종(민족사관학교 교사)정형철(전남대 언어교육원 교수)전국일(세우건설 대표)씨 빙모상 9일 광주 무등장례식장, 발인 12일 오전 9시 (062)515-4488 ●박종일(주택관리사)종덕(법무사)씨 모친상 하형주(동아대 교수)씨 빙모상 10일 동아대병원, 발인 12일 오전 9시 (051)256-7011 ●가안길(전 소원초등학교 교장)성길(다인아이디 대표)명길(자영업)씨 모친상 9일 천안 단국대병원, 발인 11일 오전 10시 (041)550-7186
  • 한라산의 모든것 담았다

    “한라산 제대로 알고 오릅시다.” 연간 국내외에서 75만여명의 등산객이 찾는 한라산. 한라산 정상에는 누가 처음 올랐을까. 제주도가 9일 발간한 ‘한라산총서’에 따르면 한라산 정상에 오른 기록을 처음으로 남긴 사람은 조선조 학자인 임제(1549∼1587)다. 과거에는 급제했으나 정치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전국을 유람했던 임제는 1577년 11월에 제주에 왔다가 한라산에 오른 후 ‘남명소승’이라는 등정기를 남겼다. 임제는 2월 중순 한라산 등반에 나섰지만 변덕이 심한 날씨가 발목을 잡자 ‘신이시여, 밝은 아침에 밝은 햇빛을 보게 하소서’라는 ‘발운가’를 짓는 등 간절한 기도 끝에 마침내 정상에 올랐다. 한라산에서 최초로 비박(노숙)을 한 인물은 구한말 의병장으로 유명한 최익현(1833∼1906)이다. 흥선대원군에게 맞서다 제주도에 유배된 최익현은 ‘유한라산기’에서 1875년 2월 제주목을 출발, 동쪽마을인 죽성을 거쳐 탐라계곡, 삼각봉, 백록담 북벽으로 정상에 오른 후 남벽으로 하산, 선작지왓의 바위돌에서 잠(비박)을 잤다고 기록하고 있다. 외국인으로는 독일인 지그프리트 겐터(1870∼1904)가 처음으로 한라산 정상에 올랐다. 신문기자이자 지리학박사인 겐터는 1901년 정상에 올라 무수은기압계 2개를 이용, 가장 가파른 곳에 있는 최외각 분화구(백록담)의 높이가 1950m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아냈다. 한라산 최초의 조난사고는 1948년 1월 한국산악회 5명이 등정에 나서 전탁 대장이 탐라계곡에서 악천후로 조난, 사망했다. 전 대장 일행은 요즘 등산 애호가들의 인기를 끌고 있는 한라산 최초의 적설기(눈이 많이 내리는 시기) 공식 등반이기도 하다. 1601년 선조의 특사자격으로 제주에 왔다 한라산을 오른 김상헌(1570∼1652)은 ‘남사록’에서 ‘얕은 곳은 종아리가 빠지고 깊은 곳은 무릎까지 빠진다.’고 백록담의 깊이를 기록했다. 2003년 7월 한라산연구소 조사결과 백록담은 최대 만수위시 최대수심 4.05m, 담수량 5만 7000t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1948년 제주 4·3사태가 일어나자 10월 해안선으로부터 5㎞ 떨어진 한라산 중산간지대에 대한 입산금지령을 내려 1954년 가을 해제될 때가지 한라산은 암흑시대였다. 5공화국 시절에는 실권자가 한라산 등반에 나서자 제주의 유지들이 줄을 대기 위해 정상까지 살아있는 다금바리를 공수했다는 웃지 못할 소문도 전해진다. 군사 독재권력은 눈 덮인 겨울 한라산 정상에서 최고급 어종인 살아있는 다금바리회를 먹을 수도 있었다. 제주도를 찾은 전두환 대통령 경호에 나선 공수부대원을 태운 헬기가 한라산에 추락,50여명이 사망했으나 당시에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한라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 관계자는 “4월말 현재 등산객은 21만 433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19만 643명보다 10% 늘어났다.”면서 “주 5일제 확산과 웰빙바람 등으로 한라산을 찾는 등산객은 계속 늘어날 전망”이라고 말했다.한편 제주도는 2억 5400만원을 투입, 한라산의 자연과 생태, 경관, 역사, 문화 등의 10개 분야와 동·식물 목록이 포함된 모두 11권짜리 ‘한라산총서’를 펴냈다.제주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가정의 달 특집] 5월11일 입양의 날

    [가정의 달 특집] 5월11일 입양의 날

    # 입양은 또 하나의 아름다운 출산 어머니의 뱃속에서 열 달을 인내하며 힘든 산통 끝에 세상에 나온 소중한 생명, 그러나 이보다 더 아름다운 탄생의 순간이 있다. 지난달 14일 찾은 성가정 입양원. 서울 성북동 북악산 자락에 있는 국내입양기관이다. 봄 햇살이 따사롭게 내려앉은 오솔길을 따라 들어서자 입구에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인연은 입양입니다’라는 팻말이 보였다. 마침 그날은 강인중(36·충남)·한여빈씨 부부가 건이(4·친생자) 동생 상우(가명·8개월)를 입양하는 날이었다. “떨리고, 설레고, 고맙고... 상우를 만날 생각에 어젯밤엔 잠이 오질 않더군요. 건이가 병원에서 태어나던 날, 그런 감정이에요.” “오늘부터 건이와 상우가 형제가 되잖아요. 서로 ‘형제라는 느낌의 끈’을 하루라도 빨리 이어주고 싶어 일부러 새 옷을 사지 않고 건이가 입던 옷과 양말을 깨끗이 세탁해 왔어요.” 첫아들 건이를 낳고 둘째는 애초부터 입양을 계획했던 강씨 부부.“입양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사랑의 표현”이라면서 “입양문화가 확산돼 버림받은 아이들이 가정에서 행복하게 자랐으면 한다.”고 말했다. 성가정원을 나서는 강씨 가족에게 윤영수(48) 원장 수녀가 “이 아이는 하느님이 주신 겁니다. 상우야, 이젠 형과 마음껏 뛰어놀며 건강하고 예쁘게 자라라.”고 하자, 양부모 품에 꼭 안긴 상우는 ‘천사의 미소’를 지으며 성가정원 식구들과 작별인사를 나눴다. 1954년 전쟁고아와 혼혈아동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입양이 시작된 이래, 해외입양 일변도에서 최근 국내 유명인들의 입양사실 발표와 사회적 인식의 변화 등으로 차츰 국내공개입양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땅에서 태어난 많은 아동들이 사회적 무관심과 경제적인 이유로 국내가정에 입양되는 숫자보다 외모, 언어, 문화가 다른 먼 이국땅으로 더 많이 보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2005년 한해 입양 아동 수는 3562명이고 이중 2101명이 해외로 입양됐다. 국내입양은 절반에 못 미치는 1461명(41%)으로 특히, 국내입양의 경우 대부분 ‘비밀입양’을 하는 것이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대한사회복지회 선혜경 입양부장은 “유독 핏줄을 중시하는 혈연주의와 경제적 부담이 국내입양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며 “ 고아수출국이라는 오명을 씻기 위해서는 입양문화 의식의 변화와 함께 제도적 개선책도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입양가족에 대한 정부의 경제적 지원은 미미한 상태다. 지난 2월 세 번째로 새별(8)이를 공개입양한 안나오미(33·서울 노원구)씨는 “입양할 때 알선기관에 내는 200만원 상당의 알선료가 경제적으로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 ‘돈을 지불하고 아기를 사온 것’으로 바라보는 사회적 편견이 더 힘들다.”며 “입양수수료 문제만이라도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취재기간 내내 눈 맞출 곳 없어 허공만 쳐다보는 아기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입양이라는 제도를 통해 가정에서, 사랑과 관심으로 이 아이들을 보살펴야 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자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이들은 ‘부자(富者)인 부모가 필요한 것도, 완벽한 환경도 아닌, 오직 가족의 사랑과 눈 맞춤’이 필요한 연약한 아이들이다. 글 사진 최해국기자 seaworld@seoul.co.kr
  • 2남1녀 박사로 키운 미셸위 조부 위상규 옹

    2남1녀 박사로 키운 미셸위 조부 위상규 옹

    천재 골퍼 미셸위(위성미·17)의 할아버지이자 우리나라 항공공학박사 제1호인 위상규(魏祥奎·80)옹. 27일 전남 장흥군 부산면 기동리 자택에서 위 박사를 처음 대면했다. 순간 텔레비전으로 본 손녀가 연상돼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갸름한 얼굴, 콧날, 꼭 다문 듯한 입술…. 위 박사는 고령으로 걷는 게 조금 어색할 뿐 정정한 모습이었다. 상대방을 응시하는 눈빛과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젊은 시절을 짐작케 했다. 위 박사는 지난 2003년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고향에 잘 왔어. 늙으면 고향으로 와야지.” 13살 때 고향을 떠난 그는 77살에 돌아와 여생을 보내고 있다. 어릴 적 가시에 손을 찔렸던 대문앞 탱자나무가 흰꽃을 터트리며 그를 반겼었다고 낙향 소회를 밝혔다. ●대한민국 항공공학박사 1호 미공군 파견근무 중 한국전쟁을 만난 그는 전투기 조종사로 전장을 누비며 생사고비를 수없이 넘겼다. “97회나 출격했지. 지금도 경기도 장단·고성·온천 일대는 눈 감고도 지도를 그릴 수 있어.”당시 되돌아오는 전투기는 손에 꼽을 정도. 죽었는가 싶으면 나타나기를 수십번, 어느새 그는 ‘불사조’로 불렸다. 가슴에 단 화랑무공훈장, 그래서 그는 남다른 애착을 갖는다. 사진을 찍자고 하자 방안에서 ‘대한민국 공군 전쟁동지회’란 글자가 새겨진 모자를 애써 찾아 썼다. 전투기 앞에서 찍은 그때 그 사진을 벽에 걸어 두고 ‘운명론’을 되뇌었다. 위옹은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다. 생활신조는 노력과 겸손이다. “나 정말 열심히 살았어. 돈이 있나, 배경이 있나. 노력하지 않고 되는 게 있겠어.” 손녀인 위성미 선수의 골프중계를 보고 전우들이 전화를 걸어왔다.“위 박사. 니 손녀니까 잘 해낼 수 있을 거야.”라고 격려했다. 위 박사의 제자인 조선대 이상기(49·항공우주공학) 교수는 “스승님은 엄하면서도 재미있게 공부를 가르치셨고 세상을 보는 눈도 정확하고 원칙대로 살려고 노력한 분”이라고 기억했다. ●한국전쟁때 ‘불사조´ 전투기 조종사 오늘날 우리나라가 이만큼 잘 살게 된 것은 모두 조상덕이라고 박사는 강조했다.“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가 피땀 흘리고 자식농사 지은 결과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야.” 박사는 종교가 없다. 믿는다면 조상이다.“종교는 때론 거짓말도 하지만 과학은 절대 거짓말을 안 해. 사실대로 가는 과학이 그래서 좋아.” 요즘 젊은이 얘기가 나오자 발끈했다.“대학생들 공부 좀 했으면 좋겠어. 관련책을 제대로 읽고 알고 비판을 해야지. 꽁무니 따라다니면서 어영부영하지 말고,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위옹은 대안 없는 반대에는 눈길도 안 준다.“시대의 흐름과 이데올로기는 다르다.”며 보수나 진보보다는 잘사는 방법, 즉 실리를 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우리 공무원들 충성심이 없어. 또 기록이 없는 나라야. 더욱이 행정경험도 일천하고.” ●“고집센 성미… 탁구치면 나한테 공 주워오래” 위 박사 집안은 수재로 유명하다. 부인(78)과의 슬하에 2남(54·46) 1녀(50)를 두고 있다. 큰아들은 서울대와 미 스탠퍼드대를 나와 현재 애리조나주립대 교수이다. 피를 물려받아 세계항공우주공학회에서 기조연설을 할 정도로 유도항법분야의 권위자다. 큰며느리(52)는 피닉스대(수학과) 교수다. 작은아들이 미셸위 아버지이다. 그는 한양공대와 미 펜실베이니아대를 나와 하와이주립대(도시교통공학) 교수이다. 어머니는 미스코리아 서울진(1985년) 출신. 성미는 운동을 하면서도 학업성적도 거의 A학점을 받았다. 위옹은 “성미와 탁구를 치면 공을 나한테 주워오라고 해. 고집이 보통이 아니야. 하와이에서 홍어를 먹어선지 장흥 집(2003년)에서도 두 접시를 먹어치우더라고.”라며 손녀의 기백을 소개했다. 손자 둘은 미국에서 고교를 수석졸업했다. 자녀 가운데 가장 영리했다는 딸은 서울의대를 나왔고 사위(52)는 연세대의대 교수이다. “아이들이 영리하고 체격이 큰 것은 외가쪽을 닮아서 그래. 할머니 집안이 키도 크고 보통 수재가 아니야.”라며 공을 외가로 돌렸다. “자식들 교육은 엄하게 해야 돼. 잘못하면 꾸짖고 때리고, 나는 그렇게 했어.” “부모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돈만 주면서 공부하라고 하면 어떤 자식이 따르겠어. 부모가 자신을 되돌아 봐야지. 공부할 만한 애인가, 아닌가.”그래서 그는 조기유학을 절대 반대한다. 최소한 한국에서 대학을 나와야 한다는 게 지론이다. 아이들 스스로 정체성을 세우고 우리 선조와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게 먼저라는 논리이다. “외국 나가면 자칫 술·담배·여자 등 못된 것만 배운단 말이야. 또 우리나라 교사들 실력이 미국보다 세배는 낫거든.” 국내에서도 얼마든지 영어를 배울 수 있다고 했다. ●조기유학 반대… 아이들 정체성이 우선 “성미가 29일 오후 2시에 자가용비행기로 인천공항에 도착해. 바빠서 장흥에 못오게 했어.” 위옹의 말에 여운이 흘렀다. 손녀가 택배로 텔레비전을 보내준다고 전화했다며 다소 들뜬 표정이었다. 미국에 사는 두 아들은 1년에 한번가량 부모님을 찾는다. 위옹은 노환으로 누워 있는 부인을 보살피며 온종일 곁을 떠나지 않는다.“이렇게 물 좋고 공기 맑고 아늑한 곳이 고향이야. 왜 진작 못 왔는지 안타깝구먼.” “종일 평상 그늘에 앉아서 지난 일을 생각해. 잘못한 일이 너무 많았어. 늘 반성하면서 살지.” “내가 오래 살아야 돼. 병든 할머니를 돌봐야 하거든….” 말끝을 흐린 채 허공을 바라보는 그의 뒷모습이 왠지 적적해 보였다. 장흥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서울대 공대 항공공학과 1회 졸업,1958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에서 항공우주공학 석·박사 학위. ▲1951∼1954년 미 공군 파견근무 중 전투기 조종사. 화랑무공훈장 수상.1955년 소령 예편. ▲1956∼1992년 서울대 항공우주공학과 교수. 이후 명예교수.1967년 한국항공우주학회 설립 주역.
  •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보이지 않는 소리의 마술사’ 손인호[1]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보이지 않는 소리의 마술사’ 손인호[1]

    미남(美男), 미성(美聲)의 가수 손인호씨는 ‘얼굴 없는 가수’였다.‘비 내리는 호남선’ ‘울어라 기타줄’ ‘해운대 엘레지’ ‘하룻밤 풋사랑’ ‘한 많은 대동강’ 같은 우리의 1950∼60년대를 대표하는 숱한 노래들을 히트시키며 10여년 간 정상에 서 있는 동안에도 방송 무대에 전혀 서지 않았다. 심지어 일반 무대에서조차 거의 볼 수 없었다. 당시 일반 대중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의 본 직업은 영화 녹음기사였다. 그는 가수로서 150여곡의 노래들을 발표했지만 영화 녹음기사로는 무려 2000여편 이상을 작업했다.‘돌아오지 않는 해병’ 그리고 ‘로맨스 빠빠’ ‘빨간 마후라’ ‘미워도 다시 한번’ 등이 모두 그가 녹음작업을 한 영화들. 이로 인해 대종상 녹음상을 무려 일곱 차례나 수상했을 만큼 영화녹음작업에 있어 독보적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한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 손인호씨가 가수로서 받은 상은 단 한차례도 없다. 보릿고개 시절, 라디오와 영화가 국민들에게 최고의 오락수단이었던 때, 그 두 무대를 동시에 장악한 인물로 ‘소리의 마술사’라고까지 불리던 손인호씨는 속칭 ‘38 따라지’다. 본명 손효찬(孫孝燦).1927년 평북 창성에서 출생해 창성보통학교 6학년 때, 수풍댐 건설로 인해 마을 일대가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가족 모두 만주 창춘(長春)으로 이주해 생활했다. 광복 후 신의주로 옮긴 손인호씨는 평양에서 열렸던 이북 도민 전체 노래자랑대회인 ‘관서콩쿠르대회’에 참가,‘집 없는 천사’를 불러 1등을 차지한다. 이때 심사위원장으로부터 ‘가수가 되려면 이남으로 가야 소질을 살릴 수 있다.’는 권유를 받고 이남 행을 결심, 광복 이듬해인 46년 12월 여섯 살 터울의 형과 단둘이 서울로 내려온다. ‘환영합니다’라는 플래카드가 시내 곳곳에 걸려 있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그들 몸에 뿌려진 것은 DDT, 즉 살충제였다. 나이가 어려 곧바로 수용소에서 생활을 시작해야 했던 그는 당시 서울생활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사람은 1주일 동안 굶어도 물만 먹으면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고 회고할 정도다. 그는 당시 작곡가 김해송씨가 이끌던 KPK악단에서 실시한 가수모집에 응모, 참가자 300명 중 1등을 차지해 악단생활을 시작했고 이어 윤부길씨가 이끌던 ‘부길부길쇼단’에서 가수로 활동했다. 곧이어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는 군예대에 들어가 ‘군번 없는 용사’로 전쟁터를 누볐다. 제대 후 공보처 녹음실에 입사한 그는 ‘대한뉘우∼스(뉴스)’ 녹음을 담당하며 아울러 영화 녹음기사로도 활동을 시작한다. 그 무렵 많은 음악인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작곡가 박시춘씨. 이 인연으로 그는 노래 두 곡을 받아 취입하게 되는데 그 노래가 바로 ‘나는 울었네’와 ‘숨쉬는 거리’다. 휴전 이듬해인 54년도의 일이다. 그의 노래 중 56년에 발표한 ‘비 나리는 호남선’과 관련, 유명한 일화가 있다. 자유당 시절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야당 대통령후보로 출마한 해공(海公) 신익희 선생이 유세 도중 호남선 열차 내에서 심장마비로 급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선거를 불과 열흘 앞두고 발생했기에 충격에 빠진 국민들은 마치 추도곡처럼 ‘비 나리는 호남선’을 애창했다. 때를 같이 해 온갖 유언비어가 꼬리를 물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신익희 선생의 미망인이 직접 이 노래를 작사해 만든 노래라는 것.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진 이 소문으로 인해 노래를 부른 주인공 손인호씨를 비롯해 작사가 손로원, 작곡가 박춘석씨도 줄줄이 당국에 의해 조사를 받아야 하는 수모를 겪는다. “담당 수사관이 대뜸 ‘이 노래를 취입할 때 어떤 감정으로 불렀느냐.’고 묻더군. 그래서 ‘가수는 감정을 가지고 노래를 해야지, 감정 없이 노래 부르면 그건 가수가 아니죠.’라고 대답했지. 그러자 수사관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쳐다보는 거야.” 손인호씨의 회고다. 사실 이 곡은 바빠서 일년 이상 차일피일 취입을 미뤄왔던 곡으로 취입 도중 반주가 틀렸음에도 별로 히트되지 않을 곡이라고 판단,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긴 곡이었다. 노래 역시 단 한번 만에 OK사인이 났다.(계속) sachilo@empal.com
  • [우리는 맞수 CEO] 토털 부동산 마케팅 ‘선두주자’

    [우리는 맞수 CEO] 토털 부동산 마케팅 ‘선두주자’

    부동산 마케팅 환경이 확 변했다. 사업 인·허가를 받고 말뚝만 박으면 아파트가 팔리던 시대는 지났다. 과학적인 시장 분석과 마케팅 전략이 따르지 않고 주먹구구식으로 분양에 나섰다가 미분양으로 땅을 치는 업체가 한두 곳이 아니다. 송영민 리얼티소프트 사장과 김신조 ㈜내외주건 사장은 시장 환경이 어려울수록 ‘주가’가 상한가를 치는 부동산 마케팅 전문가다. 이들 회사는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 첫 단계인 기획단계부터 참여해 상품을 만들고 판매(분양)까지 책임지는 토털 부동산 마케팅업체로 보면 된다. ●탄탄한 실력으로 뭉친 ‘대박’제조기 두 사람은 건설업체 부동산 개발·영업·마케팅 부서에서 10여년간 근무하다 독립한 것이 닮았다. 송 사장은 고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1978년부터 동부건설 개발사업부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1997년 부동산 컨설팅 회사를 차렸다. 김 사장은 1989년부터 우방 주택영업팀에서 10여년간 근무하다 1999년 내외주건을 설립했다. 건설사에서 다양한 개발실무와 영업 마케팅을 익힌 전문가다. 이들의 손을 거친 사업은 모두 인기를 끌면서 초기 분양에 성공했다. 업체에서는 두 사람을 ‘대박 제조기’로 부른다. 송 사장은 50여개 프로젝트를 성공시켰다. 포스코건설, 대우건설,SK건설,GS건설 등이 짓는 아파트 사업에 참여했다. 포스코 더 잠실, 부산 부곡동 푸르지오 아파트, 대우트럼프월드센텀 등이 송 사장의 손길을 거쳤다. 김 사장도 40여개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대표적인 사업이 대우 트럼프월드Ⅱ·Ⅲ를 비롯해 시티파크, 롯데캐슬 천지인 등이다. 김 사장이 기획 단계부터 참여해 마케팅까지 성공시킨 프로젝트다. ●단순 분양대행은 ‘노(No)’, 토털 마케팅으로 승부 남들이 만들어 놓은 부동산을 파는 단순 분양대행은 사절한다. 상품을 기획하는 단계부터 참여한다. 철저한 시장 조사를 거쳐 팔릴 수 있는 물건을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운세나 시장 흐름에 맡기는 주먹구구식 마케팅도 거부한다. 두 업체 모두 인·허가, 설계, 시공, 법률·세무 전문가를 확보하고 있어 자체적으로 사업성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웬만한 대형 건설사 마케팅팀보다 뛰어난 실력을 지녔다. 시행사나 건설사가 지나치게 분양가를 올리거나 흐름에 맞지 않는 상품을 고집할 경우 가장 고민스럽다. 하지만 이들의 과학적인 컨설팅·마케팅 앞에서는 모두 고집을 꺾는다. 그렇다 보니 분양이 어려운 주상복합이나 지방 사업이 많이 들어온다. 현재 두 업체는 앞으로 3∼4년간의 일감을 확보한 상태다. 최근 들어 조심스럽게 자체사업도 시작했다. 두 사람은 서로 잘 안다. 칭찬도 아끼지 않는다. 송 사장은 “김 사장은 영업·마케팅 능력이 뛰어난 전문가”라고 칭찬한다. 김 사장은 “송 사장이야말로 개발 노하우가 풍부한 전문가”라고 치켜세운다. 류찬희기자 chani@seoul.co.kr ■ 김신조 내외주건 사장 -1963년생 -1989∼1999년 ㈜우방 주택영업팀 -1999년 ㈜내외주건 창립 -2002년 ㈜내외주건 사장 ■ 송영민 리얼티소프트 사장 -1954년생 -1978∼1996년 동부건설 개발사업부 -1997년 리얼티소프트 창립 -현 리얼티소프트·디엔씨 사장
  • 은행 最古지점 보면 역사 보인다

    은행 最古지점 보면 역사 보인다

    ‘본 은행 지점을 본월 10일 인천항 탁포(坼浦)에 창설하였음을 알려드리오니 여러분께서는 부환(付換·입금)과 출환(出換·출금)에 관한 일이 있으시면 오셔서 문의하기 바랍니다.’구한말인 1899년 5월10일 대한천일은행(현 우리은행)장이 황성신문에 낸 인천지점 개점 광고다.1899년 1월에 설립된 천일은행은 4개월 뒤에 은행 역사상 처음으로 인천지점을 개설했다. 이 지점이 바로 인천시 중구 인현동에 있는 현재 우리은행 인천지점이다. 우리은행은 인천에만 여러개의 지점을 갖고 있지만 최고(最古) 지점이라는 점 때문에 이름을 ‘인천지점’으로 유지하고 있다. ●지점 역사가 은행의 정통성을 말한다? 규모의 경쟁을 벌이고 있는 시중은행들이 앞다퉈 지점을 내고 있다. 목 좋은 건물을 놓고 하룻밤 새 계약 은행이 바뀌는 진풍경도 벌어진다. 금융연구원은 최근 지점 늘리기 경쟁이 은행의 영업건전성을 훼손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렇다면 은행들의 최초 지점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국내은행 가운데 가장 역사가 깊은 곳은 조흥은행을 인수한 신한은행이다. 신한은 1982년에 창립돼 은행사에 ‘명함’도 내놓지 못했지만 109년 역사를 자랑하던 조흥을 인수해 일약 최고(最古)의 반열에 올랐다. 그런데 조흥은행의 전신인 한성은행은 천일은행(우리은행)보다 2년 앞선 1897년에 설립됐지만 1906년 8월에야 수원지점을 내는 바람에 지점 역사에서는 7년이 뒤진다.7년 동안 한성은행은 광통교 본점에서만 영업을 했다. 우리은행은 “개화기 당시 인천항은 조선, 청나라, 일본 상인들의 각축장이었다.”면서 “인천지점은 조선상인의 상권을 보호하는 게 주요 임무였다.”고 설명했다. 인천지점은 일본제일은행, 일본58은행,HSBC 등 외국은행들과의 환전업무도 수행했다. 지금도 국내에서 법인화가 안돼 지점 형태로만 운영되는 HSBC가 당시에 벌써 지점을 냈다는 사실이 이채롭다. 한성은행은 곡류, 포목, 어류, 생우(生牛) 등의 총집결지였던 수원에서 영업력을 확대하기 위해 수원지점을 먼저 낸 것으로 풀이된다. 신한은행은 오는 10월 수원지점 100주년 기념식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해 출범한 SC제일은행도 1929년에 생긴 제일은행(조선저축은행) 덕택에 유서깊은 은행이 됐다. 조선저축은행은 산업은행의 전신인 일제의 조선식산은행의 저축예금업무를 승계해 국내 최초의 저축예금 전담 특수은행이 됐다. 조선저축은행은 1931년 10월 처음으로 부산지점을 냈다. ●후발은행들은 처음부터 마당발? 외환은행을 인수해 ‘글로벌 뱅크’로 거듭나려는 국민은행은 근로자·서민의 금융을 돕는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국민은행법(현재 폐지)’에 따라 1963년 2월 설립과 동시에 전국에 50개의 지점을 개설했다. 시작부터 ‘마당발’의 면모를 보인 셈이다. 국책은행인 산업은행과 기업은행도 각각 1954년,1961년 창립과 함께 전국 주요 공업도시에 10개,28개의 지점을 냈다.1967년 1월 한국은행에서 분리된 외환은행은 창립일에 곧바로 부산지점을 설립했다. 당시 경제성장전략의 핵심인 수출을 지원하기 위해 부산에 우선 지점을 낸 것이다. 하나은행에서 가장 오래된 지점은 옛 서울은행의 을지로 4가지점으로,1960년 개설 당시 을지로에는 인쇄소, 미싱제조, 건축자재, 철공소 등이 밀집돼 있어 요즘의 ‘테헤란 밸리’나 다름 없었다. 하나은행이 최근 영세자영업자(소호) 대출에 주력하는 것도 지점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씨티은행은 특이하게도 인수은행의 역사가 더 깊다. 인수자였던 씨티은행 서울지점은 1967년 광화문에 설립됐고, 피인수자였던 한미은행은 1983년 금융의 중심지였던 여의도에 처음으로 지점을 개설했다. 이창구기자 window2@seoul.co.kr
  • [부고] 스위스월드컵 참가 축구원로 한창화씨

    한국 축구가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에 올랐던 1954년 스위스대회에서 뛴 축구 원로 한창화(韓昌華)씨가 18일 밤 노환으로 별세했다.84세. 한씨는 1922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나 조선방직, 특무대 등에서 미드필더로 활약했고 스위스월드컵에서는 터키와 조별 리그 2차전(0-7패)에 출전했다. 현역에서 물러난 뒤로는 1966년 방콕아시안게임 대표팀 사령탑을 지냈고, 1970년대에는 실업팀 자동차보험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미망인 윤혜미자씨와 사이에 아들 정수, 딸 혜정씨 등 1남1녀가 있으며, 빈소는 강남성모병원 영안실이다. 발인은 20일 오후 2시.(02)590-2561.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14년만에 재기 혼혈가수 박일준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14년만에 재기 혼혈가수 박일준

    떠남과 돌아옴이 무척 길었다. 그 간격에 켜켜이 쌓여진 고독과 시름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그랬다. 살면서 늘 떠나야 했다. 반기는 사람보다 멀리하는 사람이 많았다. 행복보다 참아야 하는 눈물이 더 기다리고 있었다. 인생길의 유일한 친구는 술이었다. 술과 같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이제 웃는다. 새로 시작한다. 얼굴엔 술픔이 사라지고 기쁨으로 채워진다. 진정한 행복도 알았기에 사랑의 정열도 생긴다. 노래를 부른다. 경쾌하고 빠르다. 사랑과 진실을 그리워한다.‘누구는 소주먹고/누구는 양주먹고/세상이 왜 이렇게 불공평할까/사랑과 진실은 실종된 지 너무 오래야/왜 왜 왜 왜 그럴까 말도 안돼’ 가수 박일준(52). 혼혈 고아 출신이다.1977년 ‘오 진아’로 데뷔해 ‘아가씨’ 등의 히트곡으로 많은 팬을 거느렸다.20대에겐 다소 낯설지만 지금의 30대 중반 이후에는 여전히 기억된다. 박씨는 91년 7집 앨범을 내고 팬들의 곁을 훌쩍 떠나버려 한동안 기억에서 멀어졌다. 이후 꼭 14년이 지났다. 최근 존재의 이유를 다시 드러내고 있다. 제2의 가수 인생을 시작한 것. 신곡 이름은 앞서 언급된 ‘왜 왜 왜’이다. 앨범 발표 소식은 지난해 있었지만 아직 시중에 내놓지 않았다. 우선 ‘가수 박일준’을 다시 기억하게 하는 일이 먼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궁금해진다. 앞으로의 음악활동과 대중과 멀어졌던 지난 세월이…. 또 혼혈로서 겪었던 많은 사연들, 이제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생각에서 박씨를 만났다. ●신곡 ‘왜왜왜´ 양극화된 세상 풍자 먼저 신곡 얘기부터 나왔다.“노랫말처럼 양극화된 세상을 풍자하면서 빈부차이와 못 사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이지요.”라고 설명했다. 친한 후배 형제가 작사(성주)·작곡(성현)을 하면서 권유한 것이 신곡 발표를 앞당기게 됐다고 부연한다. 이어 “원래 저는 쉽게 따라부를 수 없는 ‘팝쪽’이거든요. 그래서 이번에는 세월이 오래 가도 가깝게 지낼 수 있는 곡을 불러보자고 했어요.”라고 덧붙인다. 하지만 방송국에 찾아갔더니 알아주는 PD들이 없어 애를 먹었다.“중고신인이세요?”라는 말만 들어야 했다. 할 수 없이 지방공연부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박씨 자신이 직접 홍보물을 제작하고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재기’를 알리는 모든 일을 혼자 도맡아 했다. 이같은 외로운 노력끝에 차츰 반응이 좋다는 소문이 퍼졌다. 최근에는 ‘가요무대’와 ‘가요큰잔치’ 등 전국 공중파 방송에도 얼굴을 내밀어 팬들과 만났다. 다행스럽게도 요즘 들어 각종 가요차트 상위에 랭크될 정도로 인기가 올라가고 있다. “아내와 같이 이번 일을 하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위에서 ‘박일준이 다시 왔구나’ 하는 얘기를 들으니 행복해요. 모든 것이 고맙죠.” 그동안 노래와 멀어진 이유에 대해 “가수는 후속타가 없으면 서서히 잊혀져가지요.”라고 대답한다. 박씨는 81년부터 3년간 MBC의 간판 코미디 프로그램인 ‘폭소대작전’에 출연했다. 코미디언 배일집씨가 운영하는 햄버거집 종업원 역을 맡았다.4일 연습하고 하루 녹화하다 보니 일주일이 금방 지나간다. 또 영화 ‘상한 갈대’ 등에 출연하다 보니 자연히 노래와 멀어졌다. 아차 싶어 신곡을 내려고 했으나 아무 곡이나 낼 수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서서히 공백이 생겼다. ●간경변으로 쓰러져 “살 확률 50%” 진단받기도 때마침 벌이는 사업마다 실패의 연속이었다. 혼혈인으로서 사업을 이끌어가기가 정말 힘들었다. 자연히 술만 퍼 마셨다.4년전 어느날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간경변으로 식도정맥이 파열됐던 것. 병원에서 살아날 확률이 50%라는 얘기를 들었다. 식구들이 막 울자 “그러면 나보고 죽으라는 얘기냐.”고 하면서 밝게, 또 밝게 마음을 먹었다. 몇달간 입원끝에 다행히 호전돼 퇴원할 수 있었다. 이때 가수의 길을 다시 걷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박씨는 “열다섯때부터 술을 마셨어요.”라고 고백한다. 혼혈이라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 늘 혼자 있게 만들어 술에 의지했다. 이렇게 말못할 스트레스를 혼자 떠안고 30년 넘게 술을 마시다 보니 죽음 직전까지 갔던 것. “다시 살아났기에 식구나 모든 사람들이 고맙게 여겨지더군요. 가수로서 국민들을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고 다짐했지요. 용서하는 마음도 아울러 생겨났습니다. 조금 전 인터뷰하러 오는 도중 자동차 접촉사고가 났어요. 가해자가 젊은 친구였는데 화를 내지 않고 대신 ‘일진이 안 좋으니 조심해서 운전하라’고 타일렀지요.” 부인과도 새로 연애하는 기분이 든단다. 남편이 잘나가던 과거에는 그저 돈을 벌어오는 수준으로 생각했으나 신곡을 준비하면서 같이 발품팔고 고생을 하다 보니 진정한 동반자로 거듭 태어났다며 웃는다. ●代이어 놀림받던 아들 9년간 미국에 보내 박씨는 아들과 딸, 자식 둘을 두었다. 아들이 미국에 가 있지 않으냐고 했더니 “얼마전 9년만에 돌아왔습니다. 정말 보내고 싶지 않았거든요.”라고 한맺힌 듯 말꼬리를 흐린다. 잠시 먼 곳을 응시하더니 “제 아들도 파키스탄이나 인도인, 동남아쪽 사람처럼 생겨 초등학교때부터 놀림을 많이 받았어요.”라고 말을 이었다. 박씨 자신도 어렸을 적부터 혼혈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지낸 터에 아들한테도 똑같이 벌어지자 더는 참지 못했다. 결국 미국 뉴저지에 사는 지인에게 부탁, 아들을 그곳에 등 떠밀듯 떠나보냈다. 세월이 지나 아들이 커서 현지 대학에 진학하자 “얘야, 이젠 견딜 수 있는 나이가 되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귀국시켰다. 아들은 목사가 되려고 현재 모 신학대 4학년에 재학중이다. “곁에 두어야 할 자식을 보내는 부모의 마음이 오죽했겠습니까. 장애인이 따로 없어요. 혼혈이라는 편견으로 멀쩡한 사람이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갑니다. 정말이지 우리 대(代)에서 모든 것이 끝나야 합니다.” 박씨는 6·25전쟁이 끝난 직후 54년에 태어났다. 미군이 돌아가면서 아버지도 미국으로 건너갔고 박씨는 세살 때 친어머니에 의해 고아원에 맡겨졌다. 어렸을 때부터 얼굴이 검어 ‘연탄’으로, 머리가 곱슬이어서 ‘라면’이란 별명으로 늘 놀림의 대상이었다. 이후 양부모 밑에서 자랐다. 양부모는 박씨가 가수로 성공을 거둘 무렵인 70년대 후반 세상을 떠났다. 다시 혼자가 된 박씨는 결혼을 선택한다. 하지만 혼혈이란 이유로 거절당한다. 예비 장모가 워낙 완강하게 반대했다. 고민끝에 ‘임신작전’을 썼다. 하지만 예비 장모는 “그래도 안 된다. 애를 떼라.”며 성화가 대단했다. 할 수 없이 예비신부가 산부인과 병원에 갔으나 때마침 점심시간이어서 그냥 돌아오는 바람에 결국 결혼에 골인했다. 처음 낳은 자식이 아들. 장모는 손자를 무척 사랑했다. 미국에 갈 때에도 직접 따라가 온갖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다. 박씨 역시 25년동안 장모(지난해 작고)를 친어머니처럼 극진히 모시고 살았다. 박씨 자신의 팔자에 모두 다섯 부모를 둔 셈이다. “워드가 한국에 왔을 때 워드 어머니의 얼굴을 자세히 봤어요.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 모습이었어요. 저의 친어머니도 아마 그렇게 생겼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워드로 인해 혼혈에 대한 인식이 조금이나마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냄비처럼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식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베트남의 혼혈아 위한 사업 하고파 혼혈이라는 말은 우리 민족의 슬픔인 6·25전쟁이 있었기에 생겨나지 않았느냐고 반문한다. 남들과 똑같이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죄를 지은 것처럼 차별과 편견의 굴레속에서 살아야 하느냐고.“내 것은 소중하고 남의 것은 장난을 쳐도 되는 건가요?” 잠시 침묵을 지키던 박씨는 혼혈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 방법을 제시한다. 부모와 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쟤 하고 놀지 마라. 시커멓게 된다.’가 아니라 ‘쟤 하고 놀면 영어도 배우고 재미있거든’하고 유도해주면 된다는 것. 이어 “농촌 총각들이 왜 베트남 처녀와 결혼합니까. 우리가 안 봐주기 때문이죠. 자연히 혼혈이 생겨납니다. 늘 내 생각만 하는 쪽으로 가면 안 돼요.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가 아닙니까.”라고 호소한다. 박씨는 앞으로 우리 사회에, 국민들에게 기쁨을 주는 가수의 길만 걷겠다고 거듭 다짐했다. 어느정도 자리를 잡으면 베트남의 혼혈아들을 위한 사업을 펼칠 계획이다. 베트남 전쟁으로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게 살아가는 그들을 한국으로 초청, 서로 부둥켜 안고 반쪽 모국인 한국을 이해시키는 일이다. 주말매거진 We팀장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54년 서울 출생 ▲77년 ‘오 진아’로 가수 데뷔 ▲79년 ‘잘가요’ 발표 ▲80년 ‘아가씨’ 발표 ▲81년 ‘누나야’ 발표 ▲81∼83년 코미디프로 ‘폭소대작전’ 출연 ▲84년 영화 ‘상한 갈대’ 출연 ▲83년 ‘너는 지금 어디에’‘닻’ 등 발표 ▲91년 ‘가 가지마’‘사랑은 3.14’ 등 발표(7집 앨범) ▲2005년 9월 신곡 ‘왜왜왜’ 등 8집 앨범 제작 ▲06년 지방공연 및 방송활동 재개
  • [일요영화] 故신상옥감독 작품 다시 본다

    지난 11일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한국 영화계의 거목이자 풍운아였던 고 신상옥 감독을 추모하기 위해 신 감독의 작품이 잇따라 긴급 편성됐다. 스크린을 통해서도 그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도 마련됐다. EBS는 신 감독의 초기 작품 가운데 하나인 ‘지옥화’를 16일 오후 11시 방송한다. 한국전쟁 직후 혼란스러운 서울을 배경으로 한 통속 멜로물이지만 파격적인 소재와 한국전쟁 이후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담아내며 리얼리즘 계열의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남자를 파멸로 몰아가는 팜므파탈 역을 신 감독의 부인 최은희가 맡았다. 원제는 ‘육정(肉情)’이었으나 공모를 통해서 ‘지옥화’라는 이름으로 개봉됐다고 한다. 정사 장면과 추격, 총격 장면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소재와 부조리한 사회에서 변화되는 젊은이들의 삶을 담은 주제, 영화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미군 부대의 물건을 빼돌려 먹고 사는 건달 영식(김학)과 기지촌 양공주 쏘냐(최은희)는 연인처럼 지내는 사이다. 어느 날 영식의 동생 동식(조해원)이 찾아오며 이들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쏘냐는 동식을 유혹하고, 동식은 형 때문에 갈등한다. 영식은 미군 물품을 털 계획을 꾸미고 쏘냐는 이런 계획을 경찰에 신고하고 동식과 함께 도망치려고 하는데….1958년작품으로 88분. SBS도 16일 밤 12시55분 ‘시네클럽’에서 당초 편성됐던 멜 깁슨 주연의 ‘매드맥스’ 대신 신 감독의 미개봉작이자 유작이 된 ‘겨울이야기’를 방송한다. 중견 배우 신구와 연극스타 김지숙을 주연으로 2002년 만들어졌으나 극장 개봉을 하지 못했던 작품이다. 아내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정신을 놓은 채 치매에 걸린 노인(신구)을 돌보는 며느리(김지숙)와 그녀의 가족들이 겪게 되는 갈등과 화해, 또 노인이 숨진 뒤 유족이 느끼는 회한을 그리고 있다.100분. 한편 한국영상자료원(원장 이효인)은 추모전을 마련했다.‘거목(巨木)’이라는 제목을 단 이번 행사는 19일부터 23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 내 영상자료원 고전영화관에서 진행된다. 신 감독의 영화 인생 54년 동안 연출했던 75편 가운데 ‘성춘향’(19일) ‘빨간 마후라’(20일) ‘로맨스 빠빠’(21일) ‘벙어리 삼룡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이상 22일) ‘내시’ ‘지옥화’(이상 23일) 등 대표작이 상영된다. 주말에 상영되는 작품은 외국인 관람객을 위해 영문 자막도 서비스하게 된다.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부고]

    ● 원로사학자 이광린씨 별세 서강대 부총장과 중부대 총장을 역임한 원로 역사학자이자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인 이광린(李光麟)씨가 11일 오후 2시30분 별세했다.82세. 평남 용강 출신으로 아호가 ‘칠리(七里)’인 고인은 해방 직후 연희전문(연세대 전신) 전문부 영문과에 입학했으나 1946년 문과대학 사학과로 옮겨 1950년 5월에 졸업했다. 이후 연세대 사학과 대학원을 거쳐 54년 모교 사학과 교수로 부임한 뒤 64년 서강대 사학과로 옮겨 89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이곳에 봉직하면서 이기백·차하순 교수 등과 함께 이른바 ‘서강사학’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고인은 한국근대사 분야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세웠다.1973년 펴낸 ‘개화당 연구’와 79년 ‘한국개화사상사연구’(일조각)는 이 분야의 지평을 연 저서로 정평이 났다. 유족으로 부인 권오경씨, 춘국(신한카드 마케팅 팀장)·춘건(사업)·춘희(국제변호사)씨 등 2남1녀가 있다. 빈소는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13일 오전 8시.(02)392-0299. ●박찬호(환경부장관 비서관)찬희(등지학원 원장)찬혁(캐슬 사장)씨 부친상 홍계완(충남농업기술원)씨 빙부상 정정자 배순희(북토피아 실장)씨 시부상 11일 분당 서울대병원, 발인 13일 오전 6시 (031)787-1506 ●오용무(사업)용국(캐나다 거주)용욱(동방 감사·전 조흥은행 부행장)씨 모친상 여인철(전 대구문화방송 편성국장)씨 빙모상 11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3일 오전 9시 (02)3410-6915 ●이승휘(전 인천시 초대의사회 회장)씨 별세 영근(경기대 교수)형근(일리노이대 〃)씨 부친상 박동국(단국대 교수)최웅렬(썸팜 대표)박일홍(연세가나성형외과 원장)씨 빙부상 10일 인하대병원, 발인 13일 오전 8시 (032)890-3199 ●서병기(전 서울국토관리청장)병태(전 대구은행 여신관리부장)상원(전 쌍용제지 총무부장)씨 모친상 11일 서울 강남성모병원, 발인 13일 오전 7시 (02)590-2660 ●김정남(전 대한주택공사 기획본부장)씨 모친상 11일 분당 서울대병원, 발인 13일 오전 8시 (031)787-1508 ●정병학(전 전기공사협회 동부지부장)씨 별세 근환(동광전업 대표)옥환(서울여대 교수)씨 부친상 오성준(메티스메디컬시스템 전무이사)허수(전 고제 총무부장)민병국(공무원)나병진(한국사이버대 교수)김영호(군산대 〃)김윤중(세방전지 부장)씨 빙부상 11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3일 오전 6시 (02)3010-2291 ●최종협(특허청 국장급 교육파견)씨 모친상 반명환(광주시의회 의장)씨 빙모상 11일 대전 건양대병원, 발인 13일 오전 8시 (042)544-4157 ●황재호(천용운수 사장)재경(세광운수 〃)혜숙(성악가)씨 부친상 김정만(LS산전 사장)김영락(서울치과 원장)씨 빙부상 11일 부산 침례병원, 발인 13일 오전 7시 (051)583-8914 ●김상준(서일전력 대표)상운(남일전력 상무)상교(남일전력 이사)씨 모친상 11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3일 오전 6시30분 (02)3010-2266 ●정선채(제일합판상사 대표)웅채(대성합판상사 〃)호채(보성합판상사 〃)현채씨 모친상 전용대(자영업)이양원(삼일엘텍 대표)씨 빙모상 11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3일 오전 8시 (02)3410-6914 ●박병두(에이스관리)씨 모친상 정달영(평화엔지니어링 전무)씨 빙모상 11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3일 오전 7시 (02)3010-2239 ●김문국(광주 각화중 교사)문선(자영업)문필(무안군청)씨 부친상 정택성(완도고 교감)박현덕(한국은행 전산정보국장)김재천(자영업)씨 빙부상 10일 무안 한국병원, 발인 12일 오전 10시 (061)454-9342 ●나규일(중소기업진흥공단 이사)규성(재미)임순(자영업)정순(한남대학교)씨 부친상 황순호(자영업)공희성(대주회계법인 공인회계사)씨 빙부상 10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2일 오전 9시 (02)3410-6916 ●박명도(자영업)명구(〃)인호(헤럴드경제 생활경제부 차장)씨 모친상 이종철(한국마사회)김학수(자영업)씨 빙모상 10일 신촌세브란스병원, 발인 12일 오전 9시 (02)392-0899 ●김철규(금융결제원 감사)철주(인천시 택시운송사업조합 이사장)철호(내고향꽃게장 대표)씨 모친상 왕길수(자영업)이옥식(〃)씨 빙모상 11일 군산 금강장례식장, 발인 13일 오전 9시 (063)445-4188 ●김태동(현대모비스 베이징사무소 상무)씨 부친상 11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3일 오전 6시 (02)3010-2294 ●김천복(파발마 총무부장)씨 별세 우진(엠오티엑스텍 이사)우영(금강오길비그룹 차장)수지(익산 이리마한초등학교 교사)씨 부친상 김유진(서울아산병원 수출간호팀 계장)김선영(한국씨티은행 인사운용부 과장)씨 시부상 11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3일 오전 9시 (02)3010-2263
  • [우리는 맞수 CEO] 8000억대 속옷시장 ‘은밀한 전쟁’

    속옷업계의 판이 살벌해졌다. 국내 속옷업계 양대산맥인 BYC(옛 백양)와 트라이브랜즈(옛 쌍방울)의 신경전이 한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다. 두 회사는 최근들어 지난해의 매출을 두고 기싸움을 한층 가열시키고 있다. ●1조 가까운 시장 놓고 서로 1등 두 회사는 “속옷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는 것에는 한 목소리를 낸다. 하지만 그 절반을 두고는 갈라선다.BYC와 트라이브랜즈는 서로 시장 점유율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트라이브랜즈가 11일 “지난해 우리 속옷의 매출이 1355억원으로 1위”라고 밝히자 BYC는 “1506억원으로 우리가 시장 1위”라고 맞받았다. 또 트라이브랜즈가 “BYC의 매출에 속옷 외의 다른 매출도 포함돼 있다.”고 주장하면,BYC는 “창사 이후 60년 동안 내의 1위를 놓친 적이 한번도 없다.”고 강조한다. 국내 속옷시장은 8685억원 규모로 추산된다. 전체 의류시장 크기(11조원)에 비하면 ‘파이’가 작아 경쟁은 더욱 치열하다. 좁은 속옷시장을 잡기 위해 들고 나온 것이 ‘감성’이다. 안에 껴입은 속옷을 누가 볼까마는 이들은 “속옷도 패션이다.”고 늘 강조한다. 속옷 패션쇼도 연간 10여차례 연다. ●2세 경영인 vs 전문 경영인 ‘속옷 전쟁’을 이끄는 최고경영자(CEO)는 ㈜BYC의 한남용(48) 대표와 트라이브랜즈의 이호림(46) 대표다. 회사 창립 60돌을 맞은 BYC가 올해 성대한 환갑을 준비하는 반면, 트라이브랜즈는 지난 98년 부도 이후 지난해 처음 흑자로 돌려놓으면서 화려한 부활을 꿈꾸고 있다. 두 CEO는 40대의 젊은 패기를 가졌지만 경영 스타일은 전혀 다르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설립된 BYC는 사풍(社風)이 안정적이다. 이런 회사를 이끄는 한 대표는 창업주 한영대(83) 회장의 맏아들이다.84년 고려대를 졸업한 뒤 회사에 합류했다.20여년을 회사에 몸담으면서 구석구석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나서기 싫어하는 경영 스타일을 보이고 있다. BYC 관계자는 “회사가 생산에서 출발한 만큼 한 대표도 고지식할 정도로 보수적인 경영 스타일을 보인다.”고 말했다. 창업주 한 회장의 카리스마에 가려 나서지 않고 있지만 조만간 특유의 경영 스타일을 보일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반면 1954년 설립된 트라이브랜즈는 지난 98년 부도와 워크아웃,2004년 대한전선 계열사 편입 등으로 우여곡절을 겪었다. 회사의 정상화 책임을 진 이 대표의 경영스타일이 상당히 적극적이다. 열네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한 그는 다국적기업에서 경영 수업을 받았다. 펩시 기획실장, 피자헛코리아 CEO, 월마트코리아의 최고운영책임자(COO) 등을 지냈다. 그는 의사 결정을 빨리 한다.‘돈이 되는’ 청바지 브랜드 리를 과감하게 접고 속옷사업에 주력하기로 결정을 내린 데서 엿볼 수 있다. ●쌍방울 때는 백양 제품받아 팔아 80년대 초 두 회사는 상표를 두고 탐색전을 벌였다. 세겹 내복을 만들어 두 회사 모두 ‘보온메리’라고 불렀다. 그러나 쌍방울이 ‘보온메리’라고 상표 등록을 하자 BYC는 고민 끝에 공기를 품는다는 사실에 착안,‘에어메리’로 등록했다. 지금도 두 회사의 대표적인 브랜드다. 그러나 업계 관계자들은 “두 회사의 신경전은 치열하지만 그렇다고 아옹다옹하지는 않는다.”고 전한다. 트라이브랜즈의 전신인 쌍방울의 이복영 전 회장이 BYC의 전신인 백양에서 물건을 공급받아 팔았기 때문이란다. 이런 사풍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래서 생산적 마인드의 BYC는 다소 보수적인 반면, 판매·영업쪽 마인드가 강한 트라이브랜즈는 공격적이고 진취적이다. ●사업 다각화 vs 속옷 올인 섬유가 사양산업이라고 하지만 속옷 산업이 보기보단 어려운 첨단산업이다. 속옷은 전세계 사람들이 입기 때문에 소비자들의 욕구를 모두 충족해야 한다. 최근엔 웰빙 바람을 타고 기능성 제품을 쏟아내고 있다. 쌍방울은 ‘대나무내의’,‘발열가공내복’,‘인삼보온내의’ 등을 내놓았고,BYC는 ‘우유섬유’,‘에어키토산내복’,‘데오니아’ 등을 출시했다. 두 회사의 경영에는 최근 다른 기류가 흐르고 있다.‘내의 원조’ BYC가 건설업을 통한 사업 다각화를 추구하는 반면, 트라이브랜즈는 여성 란제리 및 보디케어 브랜드 ‘더뷰’를 시작하면서 유통부문 강화에 힘을 쏟고 있다.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 한남용 BYC 대표이사 ▲1958년생 ▲84년 고려대 농학과 졸업 ▲89년 ㈜백양 이사 ▲91년 ㈜베비라 이사 ▲96년 BYC 부사장 ▲98년 베비라 부회장 ▲2004년 BYC 대표이사 ■ 이호림 TRY 대표이사 ▲1960년생 ▲82년 미국 밴더빌트대 기계공 졸업 ▲87년 몰렉스코리아 마케팅 ▲92년 다트머스대 MBA ▲96년 피자헛코리아 대표이사 ▲2003년 월마트코리아 COO ▲2005년 트라이브랜즈 대표이사
  • [통계로 본 서울] (21) 대학

    사회 생활을 하면서 대학교 입학연도인 ‘학번’은 대화 수단으로 요긴하게 쓰인다. 학번을 통해 낯선 상대방의 나이를 파악하고, 학창시절을 회상하며 어색한 대화를 풀어나간다. 학번을 통해 동질의식을 느끼기도 한다. 대학동창은 중·고교만큼 오랜 친구는 아니지만 낯선 사람으로부터 발견하는 학번의 동질성은 큰 위안이 된다. 물론 대학교를 나오지 않은 사람이나 만학도에게는 실례일 수 있기 때문에 남발해서는 안된다. 서울은 명실상부한 ‘대학 교육의 메카’. 대한민국 명문 대학들이 대부분 서울에 자리를 잡고 있다. 때문에 팔도의 젊은이들이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 유학길에 오른다. ●대학생 51만명… 여학생 24만명 2005년 서울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서울의 대학 수는 4년제 대학 41개교, 전문대 12개교, 교육대(서울교대) 1개교 등 모두 54개에 달한다. 학생 수는 4년제 대학생 44만 6599명, 전문대생 6만 6852명, 교육대생 2441명 등 모두 51만 5892명이다. 이 가운데 여학생은 23만 9949명, 남학생은 27만 5943명이다.4년제에는 남학생이 많았지만 교육대는 여학생(1870명)이 남학생(571명)의 3배가 넘었다. 전문대는 남학생과 여학생이 각각 3만 3450명과 3만 3402명으로 비슷했다. 학생수는 4년제의 경우 고려대가 2만 8402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이어 연세대 2만 6681명, 서울대 2만 5741명, 한양대 2만 3310명 등의 순이었다. 학생수가 1만 5000명이 넘는 대학으로는 건국대, 경희대, 국민대, 단국대, 동국대, 성균관대, 숭실대, 이화여대, 중앙대, 홍익대 등이다. 전문대는 명지전문대가 1만 2821명, 동양공전 1만 1847명, 인덕대학 1만 815명 등이다. 대학은 학생수가 감소하는 중·고등학교와는 달리 학생수가 꾸준하게 늘고 있다.4년제 대학은 지난 1999년 40만 8911명에서 4만명 가량 늘었고, 전문대도 6만 2166명에서 다소 늘었다. 교원수는 4년제 1만 3187명, 전문대 939명이다. ●가장 오래된 대학은 어디? 그렇다면 가장 오래된 대학은 어디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각 대학이 주장하는 설립 연도에 대한 이견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건학 600년’을 맞는 성균관대는 1398년(조선 태조 7년) 국립고등교육기관으로 설립된 성균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성균관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일 뿐 실제 정규 단과대학 설립 연도는 1946년이다. 연세대는 1885년 선교사 앨런이 고종의 명으로 세운 제중원(광혜원)을 모체로 하고 있으며, 이화여대는 1886년 선교사 스크랜턴 부인이 만든 이화학당에 뿌리를 두고 있다. 숭실대는 1897년 선교사 배위량이 개설, 평양에 교사를 신축 1905년 한국 최초의 대학이 되었으나 일제 탄압으로 1938년 폐교됐다.1954년 서울에 숭실대학으로 재건됐다. 한국인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인 고려대는 1905년 보성전문학교로 개교했다. 동국대는 1905년 불교계에서 세운 명진학교가 전신이다. 서울대는 1924년 설립된 경성제국대학을 모체로 하고 있으나 그 기원을 부정한다. 서울대는 국립종합대학안이 확정·공포된 1946년을 개교연도로 잡는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儒林(577)-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13)

    儒林(577)-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13)

    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13) 순간 과장 안은 물을 끼얹은 듯 숙연해졌다. 그러나 그런 정적은 일순간 사라지고 한꺼번에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현제판 안으로 몰려들어 종이 위에 문제를 베끼기 시작하였다. 시험문제를 출제한 시관의 이름은 정사룡(鄭士龍)과 양응정(梁應鼎). 이들은 과거시험의 출제관으로 선택되자 몇날 며칠을 출제하는데 전념하느라 끙끙 앓았으며, 또한 시험문제의 유출을 막기 위해서 집에 들르지도 못하고 격리되기도 했던 것이다. 출제관이었던 정사룡(1491∼1570)은 별시문과의 합격자로서 일찍이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부제학을 지냈으며,1554년 대제학을 지냈던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다. 또한 양응정 역시 식년 문과의 합격자로서 공조좌랑에 이르렀다가 한때 윤형원에 의해서 파직되었으나 다시 복권되어 대사성에까지 이른 대학자였다. 또한 이들은 시험을 치르는 유생들의 직계 선배이기도 했었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그해 봄에도 정사룡은 과거시험의 출제자였는데, 그는 신사헌(愼思獻)에게 뇌물을 받고 시험문제를 미리 가르쳐줌으로써 부정행위를 저질렀던 것이다. 신사헌은 당대의 권신이었던 신수근(愼守勤)의 손자였는데, 은밀히 시관이었던 정사룡에게 뇌물을 주고 시제를 미리 알고 차술(借述)케 함으로써 그해 별시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하였던 것이었다. 훗날 부정행위가 드러나자 대간의 공박과 공론의 압박으로 정사룡은 파직되고 부정행위로 합격한 신사헌은 삭과(削科)되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정사룡은 곧 복직이 되어 공조판서가 되었으며 그해 겨울에 열린 별시문과에서도 다시 출제자로 위촉되었던 것이다. 그뿐인가. 부정행위를 저지른 신사헌도 당대 최고의 권신이었던 이량(李樑)의 배려로 곧 복과되었으니,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어두운 그림자는 이처럼 독버섯처럼 횡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험의 출제관이었던 정사룡과 양응정은 출제자인 동시에 채점자였으므로 명륜당 계단 위에 앉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과장을 관장하고 있었다. 맨 후미에 앉았던 율곡은 좀체로 현제판 가까이 다가갈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좋은 자리를 선접하고 있던 거자들은 이미 종이 위에 답안지를 작성하기 시작하였으므로 마음이 급해진 거자들은 우왕좌왕하였으나 율곡은 제자리에 앉아서 벼루에 먹을 갈고 있을 뿐이었다. 한겨울이었으므로 은행잎들도 모두 떨어져 헐벗은 나목이었으나 몇 점 남은 낙엽이 바람에 실려 침착하게 먹을 갈고 있는 율곡의 벼루 위에 떨어져 내렸다. 이윽고 모든 유생들이 문제를 베껴온 후에야 율곡은 일어서서 천천히 현제판 앞으로 다가갔다. 시험문제는 ‘책(策)’이었다. ‘책’이란 과거시험의 한 종류로서 사안을 질문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서술토록 하는 형식 중의 하나였다. 일반 세시에 대해서 기술하는 평소의 시험문제와는 달리 꽤 까다로운 질문 중의 하나였던 것이었다. 특히 이번의 ‘책’은 천문이나 바람의 순행과 이변 등에 대한 책론으로 ‘하늘의 길’, 즉 ‘천도(天道)’에 관한 질문이었으므로 난해하기 짝이 없는 철학시험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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