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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년 통일교 창시…194개국에 신도 300만

    1954년 통일교 창시…194개국에 신도 300만

    3일 별세한 문선명 통일교 총재에게는 다양한 수식어가 붙는다. 종교 지도자, 평화운동가, 사회사업가, 교육사업가, 기업가…. 1991년 영국 선데이타임스는 문 총재를 ‘20세기를 만든 1000명의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꼽았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주목받고 이름을 떨친 문선명. 그의 생애를 일관되게 관통하는 철학이자 신념은 다름 아닌 ‘통일원리’와 ‘통일사상’, 그리고 ‘참사랑’이다. 문 총재가 평생 꿈꿨던 세상은 ‘인간 조상이 타락하기 이전의 본연의 평화이상세계’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문선명은 14세가 될 때까지 서당에서 공부를 했다. 어릴 적부터 ‘세 개 이상의 박사를 취득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품었던 그는 늘 중심에 서야 직성이 풀리는 강한 사람이었다. 평양장로회신학교를 나와 덕흥·이언·연봉교회에서 목회를 했던 종조부 문윤국(1877~1958)을 비롯해 적지 않은 조상들이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일까. 정주공립보통학교 재학 중엔 교회 유년주일학교 반사로 어린이들을 지도했고 학생들 앞에서 설교할 때면 목사와 장로들이 특별한 관심을 쏟았다고 한다. 세계 194개국에 300여만 신도를 거느린 통일교 교회를 세운 종교 지도자. 그의 종교 인생은 16세가 되던 해인 1935년 부활절 날 예수님과의 영적 만남에서부터 시작된다. “부활절 아침, 오랜 시간 눈물어린 기도 끝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 많은 계시와 교시를 주셨습니다. 지상에서의 하나님 역사에 대한 특별한 역할을 해 달라고 요구하셨습니다.”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사양했지만 결국 대명을 받아들였고 그 대명은 인류구원사업이다. 서울에서 중학교를 마친 문 총재는 3년간에 걸친 일본 도쿄 유학(와세다대학 부속 와세다고등학교 전기과) 시절 ‘통일원리’ 구명에 모든 것을 쏟았다. 유학 길 부산으로 가는 열차에서 “학업을 마치고 오는 날 나라를 찾아 세우리라.”고 다짐했던 그의 실천은 해방 이듬해 평양행으로 이어진다. 공산체제하 종교인의 생활은 당연히 가시밭길. 이승만 대통령이 밀파한 간첩으로 지목돼 흥남형무소에서 2년8개월의 혹독한 수감생활을 마치고 월남해 1954년 5월 1일 서울 성동구 북학동에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창립해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사실상 통일교의 태동이다. 이후 그에게 이어졌던 시련은 통일원리가 씨앗이다. ‘태초의 이상세계는 모든 인류가 한 하나님 아래 한 가족이며 인간 창조 목적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부모, 부부, 자녀가 4위기대의 가정을 형성해 하나님에게 기쁨을 돌려드리는 데 있다.’ 그리고 그 통일원리에 바탕을 둔 통일사상은 바로 좌익과 우익의 대안인 ‘두익사상’이다. 인류의 참 평화는 좌익이나 우익으로는 안 되며 머리와도 같은 중심사상인 공생공영공의의 두익사상으로 남과 북의 가치관을 통일함으로써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일찍부터 ‘공산주의 종언’을 선언했던 그가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만나고 평양으로 김일성 주석을 찾아간 것이나 민간예술단으론 분단 이후 처음인 리틀엔젤스예술단의 평양공연을 성사시킨 것도 바로 그 통일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분열과 갈등, 전쟁으로 점철된 종교로는 세계평화와 인류 구제사업에 한계가 있다던 문 총재가 눈을 돌린 것은 참가정 운동이다. 인류시조가 타락으로 잃어버린 순결을 되찾아 참사랑의 역사를 출발시킨다며 거행해 온 국제축복결혼식은 국제적으로 눈길을 끈 세기의 이벤트이다. 그는 2007년 미수 기념행사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불쌍하신 하늘을 위해, 그리고 사망 권에서 허덕이는 타락인류를 구해 주기 위해 혀를 깨물며 참고 살아온 비참한 생애였습니다. 지금이라도 누군가가 이런 심정의 내연을 들여다보고 한마디만 던져도 본인의 눈물은 폭포수가 될 것입니다.” 그의 고백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도 그가 일군 통일교의 위상은 한국 기독교에선 이단이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월요 인포 그래픽] 찬란한 중동의 古都, 전쟁의 불꽃 앞에 스러지다

    [월요 인포 그래픽] 찬란한 중동의 古都, 전쟁의 불꽃 앞에 스러지다

    혈안이 된 권력 다툼 앞에 세계인의 유산이 덧없이 무너지고 있다. ‘북아프리카의 작은 로마’(팔미라) ‘향기로운 도시’(다마스쿠스) ‘지중해의 하얀 신부’(트리폴리)…. 별칭만큼이나 찬란한 문명을 품은 중동의 고도(古都)들이 역사책에서 자취를 감출 위기에 놓였다. 지난해 봄부터 중동·북아프리카를 뒤흔든 내전과 소요 사태가 인류 최초의 문명지인 메소포타미아에서 싹튼 수천년 역사의 유적들을 앗아가고 있다. 18개월째 내전을 치르고 있는 시리아는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문화유산만 6곳에 이르는 중동의 박물관이다. 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시리아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심장부로 바빌로니아인, 페르시아인, 그리스인 등 수많은 민족들이 서로 이 땅을 차지하겠다고 전투를 벌였다. 이 때문에 이슬람교, 기독교 등 온갖 종교와 인종을 공유하며 인류 역사에서 가장 소중한 유산을 일궜다.”고 말했다. 특히 5000년 역사의 도시 다마스쿠스, 알레포는 도시 자체가 유적이다. 이런 도시를 시리아 정부군과 반군이 군사 기지, 무기 저장고로 전락시키며 잔혹하게 파괴하고 있다. 도심 깊숙이 파고들어 시가전을 벌이고 유적을 은신처나 방패막이로 삼으면서 수천년간 난공불락이었던 성(城)과 요새들을 무너뜨리고 있다. 십자군 전쟁 때도 함락된 적 없는 알레포성의 철문은 정부군의 미사일 공격으로 부서져 나갔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유명한 영국군 장교 TE 로렌스가 “세계에서 가장 경이롭고 완벽하게 보존된 성”이라고 감탄했던 십자군 요새 ‘크라크 데 슈발리에’도 정부군의 폭격을 맞아 내부 교회 등이 파손됐다. 지중해 연안에서 가장 굳건했던 12세기 요새 ‘알마디크성’은 지난 1월 심한 폭격으로 성벽에 구멍이 뚫리는 수모를 당했다. 동서 교역의 중심지로 중동에서 가장 화려한 로마 시대 문화를 꽃피웠던 팔미라도 정부군의 제물이 됐다. 유적지에 탱크 등 군용차량을 대놓는 것은 물론이고 지하에는 참호까지 판 것으로 알려졌다. 정교한 아름다움으로 유명한 아파메아의 로마 시대 모자이크화 12점은 전쟁통에 도둑맞았다. 도굴꾼들이 불도저를 끌고 와 모자이크가 박힌 신전 벽과 바닥을 무참히 떼어 갔다. 인터폴까지 수색에 나선 상태다. 정부군 탱크는 1850m에 걸쳐 있는 로마 시대의 도로에 늘어선 기둥까지 공격했다. 혼란 속에 도굴꾼들만 신이 났다. 요르단, 터키 등 인접국 미술시장에서는 시리아에서 유출된 유물들이 넘쳐난다는 증언이 잇따른다. 25개에 이르는 지역 박물관들은 약탈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마랏 알누만의 모자이크 미술관에서는 북부 고대 도시에서 출토된 작품 다수를 도난당했다. 전 국토의 문화유산들이 비상사태에 놓이자 지난 5월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은 “모든 분쟁 당사자들은 시리아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호해 달라.”고 촉구했다. 인터폴도 시리아 문화유산이 위험에 직면했다고 경고했다. 이는 시리아만의 재앙이 아니다. 지난해 1~2월 반정부 시위로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의 독재를 종식시킨 이집트는 소요 기간 동안 유물 1000여점을 도난당하는 상처를 입었다. 이집트 역사를 축약한 12만 점의 유물을 보관한 카이로 이집트박물관은 지난해 1월 도굴꾼들에게 유물 18점을 빼앗기고 70여점을 훼손당했다. 아시아까지 세력을 떨쳤던 아크나톤 왕의 석회 석상과 투탕카멘 왕 금박 목재 석상 2개 등이 사라졌다. 같은 달 고대유적지 다흐슈르의 보관소도 파괴됐다. 이집트 고·중왕국 시기 왕족과 귀족들의 묘지로 굴절 피라미드와 붉은 피라미드가 유명한 곳이다. 지난해 8개월간의 리비아 내전은 북아프리카 최고의 로마 유적, 렙티스 마그나를 위험으로 몰아넣었다. 무아마르 카다피군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군의 공습을 피하려고 로켓, 탱크 등 무기와 군수품을 숨기며 렙티스마그나를 ‘방패’로 내세웠다는 보도가 잇따랐다. 일부 언론은 이에 나토군이 렙티스마그나와 페니키아인들의 무역항 사브라타를 폭격했다고 전했다. 1만 4000년 전 작품인 세계문화유산 아카쿠스산 암각화도 파손됐다. 도굴꾼들은 실크에 특수 화학물을 묻혀 벽화를 옷감에 찍어 가는 수법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역사적으로 전쟁 중의 문화재 파괴는 민간인 학살만큼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두 이슈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에마 컨리프 영국 던햄대 교수는 “사람이나 유물의 희생 어느 한쪽만 봐서는 안 된다. 인류의 기반이자 후대의 자산인 문화재의 재앙은 결국 인간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에드 후세인 전미외교협회 중동 선임 연구위원은 “국민을 대량 학살한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의 아버지도 모스크를 폭격했다. 국민들을 쉽게 죽이는 정부는 문화유산을 보호하지도 못한다.”고 비난했다. 국제사회는 2차 세계 대전의 상흔을 반성하며 1954년 전시 문화재 보호를 위한 헤이그 협약을 맺었다. 현재 126개국이 가입돼 있다. 하지만 군사 행위 시 문화재 보호 의무와 처벌 조건을 강화한 제2의정서 가입국은 63개국에 그치는 등 실질적인 구속력은 없다. 심우찬 국방부 군법무관은 “제2의정서에 가입하면 군부대가 유적지 근처를 통과하거나 인접 지역을 숙소, 식량 배급 등을 위해 이용하는 것마저도 처벌을 받게 돼 군사작전에 크게 제한을 받는다.”고 말했다. 주요국들이 가입을 미루는 이유다. 이 때문에 역사의 비극은 되풀이되고 있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 세계 최대 불상인 바미얀 석불 폭파, 2003년 이라크전 때 자행됐던 이라크 유적 파괴, 약탈이 대표적인 예다. 한마디로 문화유산은 ‘파괴되면 그만’인 게 현실이다. 이 교수는 “문명국가임을 자인하는 미국조차 이라크전 때 문화재를 파괴했다는 보도가 잇따랐다.”면서 “이런 마당에 민주사회에 도달하지 않은 국가들에까지 이를 기대하는 것은 시기상조인 만큼 인류의 문화유산을 고의로 약탈, 파괴하면 전범처럼 엄정하게 단죄하는 국제법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배기동 국제박물관협의회(ICOM) 한국위원회 위원장은 “문화유산을 파괴하는 정권이나 종파 등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켜 정당성을 훼손하거나 무역을 제재하는 것도 방법”이라면서 “무엇보다 각국 정부와 비정부기구(NGO) 등 민간이 평소에 문화재 보호 의식을 키우고 전시 대비 문화재 보호 전략을 마련하는 등 예방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한일 독도갈등] 金외교 “日 추가도발 단호하게 대응할 것”

    정부는 21일 독도 문제의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 결정에 대해 강경 대응에 나섰다. 일본의 의도적인 ‘독도 분쟁화 전략’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다. 조태영 외교통상부 대변인은 외교부 청사에서 브리핑을 갖고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적으로 명명백백한 우리의 고유 영토로서 영토 분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며 “독도를 ICJ에 회부하자는 일본 측의 제안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일축했다. 일본 정부가 이날 구상서(외교 공한)를 우리 정부에 전달한 데 대해 조 대변인은 “우리도 외교 공한을 통해 우리의 기존 입장을 분명히 밝히겠다.”고 말했다. 일본이 독도 문제를 ICJ에 회부하자고 한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제안한 것은 1954년과 1962년 이후 50년 만이다. 주한 일본대사관의 오쓰키 고타로 참사관은 이날 오후 4시 54분께 외교부 청사를 방문, 구상서를 전달했다.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도 독도 문제의 ICJ 제소 제안에 대해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밝혔다. 김 장관은 이날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앞으로도 일본 정부가 독도와 관련해 부당한 조치를 취할 경우 독도는 우리의 고유 영토라는 확고한 입장에 따라 단호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오일만기자 oilman@seoul.co.kr
  • [부고] ‘빨간마후라’ 배우 윤인자씨

    [부고] ‘빨간마후라’ 배우 윤인자씨

    원로배우 윤인자씨가 지난 20일 오후 6시쯤 노환으로 별세했다. 89세. 고인은 1954년 한형모 감독의 영화 ‘운명의 손’으로 데뷔한 후 신상옥 감독의 ‘빨간 마후라’, 김수용 감독의 ‘춘향’, 임권택 감독의 ‘아제아제 바라아제’ 등에 출연했다. 강한 성격의 여성 캐릭터를 주로 연기한 고인은 ‘한국 최초’란 수식어가 많이 붙는 영화인으로 꼽힌다. 데뷔작 ‘운명의 손’에서 한국 영화 사상 처음으로 배우 이향과 키스신을 선보였고, 1957년 ‘전후파’에서는 최초로 누드신을 찍기도 했다. ‘빨간 마후라’로 대종상 여우조연상(1965)을 받았고, 대종상 심사위원 특별상(1989), 백상예술대상 특별상(1989), 여성영화인축제 공로상(2005) 등을 수상했다. 2000년에는 한국영상자료원 주최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다. 빈소는 서울 수유동 대한병원, 발인은 22일 오전 9시. (02)992-4444.
  • 日 “독도 제소” 韓 “일고 가치도 없다”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관련, 일본은 17일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에 회부하겠다고 제안했고 우리 정부는 이를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반박했다. 일본은 또 한·일 통화 스와프(교환) 규모 축소를 공식 거론하고 나서 한·일 간 외교갈등이 경제적 부담으로 확산될 전망이다. 겐바 고이치로 일본 외무상은 오전 신각수 주일 한국대사를 외무성으로 불러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자고 공식 제안했다. 일본이 독도 문제와 관련,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한국에 제안한 것은 1954년과 1962년 이후 50년 만이다. 겐바 외무상은 “(한국이 불응할 경우) 1965년의 교환 공문에 따라 조정에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1965년의 교환 공문은 한·일 양국이 국교정상화 과정에서 교환한 분쟁해결 각서를 의미한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후지무라 오사무 관방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조만간 ‘독도는 일본땅’이라고 주장하는 구상서를 한국 정부에 보낼 예정이라고 밝혔다. 일본은 한국이 국제사법재판소 공동 제소를 거부할 경우 일본의 단독 제소로 전환하기로 했다.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는 이날 이 대통령에게 독도 방문 및 일왕 사죄요구 발언에 대한 유감을 표시하는 서한을 보냈다. 노다 총리는 이 서한을 통해 양국이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일본이 언론을 통해 서한을 보낸 사실을 공개한 의도를 이해할 수 없다.”면서 “독도 문제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아즈미 준 재무상도 내각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10월 말 만료되는 한·일 통화스와프 확대 협정에 대해 “(수정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일본 재무상이 통화 스와프 규모 축소를 검토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처음이다. 아즈미 재무상은 양국이 지난해 10월 통화 스와프 규모를 130억 달러에서 700억 달러로 늘린 데 대해 “심각한 한국의 경제 상황에 손을 내밀어 도울 생각이었는데 매우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조태영 외교통상부 대변인은 이날 논평에서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적으로 명명백백한 대한민국의 고유 영토로서, 영토 분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ICJ에 회부하자는 일본 정부의 제안 계획 등은 일고의 가치도 없음을 분명히 한다.”고 밝혔다. 외교부 당국자는 “독도는 분쟁 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ICJ 회부뿐 아니라 교환 공문에 따른 조정에도 응하지 않을 것”이라며 “통화 스와프와 관련해서는 일본 측의 구체적 행동이 나온 것은 아니기 때문에 향후 상황에 따라 필요한 조치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 이종락특파원·서울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부고] ‘안동 경안학원 설립자’ 반피득 선교사 노환 별세

    한국 교육과 복지 사업에 반평생을 바친 벽안(碧眼)의 선교사 반피득(Peter van Lierop)씨가 지난달 28일 미국 시카고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94세. 1949년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와 경북 안동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했다. 1954년 학교법인 경안학원(경안고·경안여고·경안중·경안여중)을 설립해 초대 이사장·교장을 지냈다. 이후 연세대 신과대학 및 연합신학대학원 목회상담학 교수로 정년까지 봉직했다. 1960년 서울 서대문구에 미혼모 보호시설인 애란원을 세웠다. 장례식은 오는 23일 미국에서 치러지며 22일 경안학원 주최로 안동 경안고에서 추모예배가 열린다.
  • [사설] 日, 독도문제 자중자애하는 것이 해법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에 일본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현해탄 기류가 냉랭하게 바뀌고 있다. 일본은 독도 영유권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고, 일본 정부 내에 독도와 센카쿠 열도를 다루는 조직 설치를 검토하겠다고 한다. 그제는 히로시마 주재 한국 총영사관이 벽돌 피습을 당하는 등 우려할 만한 일도 벌어졌다. 일본 내 9개 우리 공관의 위해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이 대통령은 엊그제 독도를 방문한 자리에서 독도는 진정한 우리 영토이고 목숨 바쳐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곳이라고 강조했다. 앞으로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대한민국 영토를 굳건히 지켜 내겠다는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한 것이다. 일본은 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는 일본이 틈만 나면 꺼내 왔던 카드다. 1954년 독도에 등대를 설치했을 때도, 1962년 수교협상 당시에도 일본은 국제사법재판소행의 목소리를 높였다. 국제사회에 독도가 분쟁 지역이라는 점을 알리겠다는 속셈이 뻔히 들여다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정부가 일본의 국제사법재판소 요구 가능성에 응하지 않기로 방침을 세운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노다 요시히코 내각은 지난해 9월 출범하면서 전 정권에 비해 독도 영유권 ‘생떼’의 수위를 높여 왔다. 겐바 고이치로 외무상은 지난 1월 일본 중의원 본회의에서 “독도문제에 대해 한국에 할 말을 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일본은 독도·동해 문제를 빌미로 여수엑스포 ‘일본의 날’에 관료 파견을 취소하기도 했다. 일본군 위안부 등 과거사 문제에도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했다. 올해로 8년째 방위백서를 통해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을 늘어놓고 있다. 일본은 점점 고조되는 일본 내 우경화 기류에 편승해 한·일 긴장의 수위를 높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史實)이다. 앞으로도 대통령의 독도 방문은 이어질 것이다. 일본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기보다 왜 우리 정부가 ‘조용한 외교’ 기조를 접고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었는가를 먼저 따져 봐야 한다. 자중자애해야 한다. 그것만이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위한 해법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 정부 “독도 국제사법재판소행 불응”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관련, 일본 정부가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지만, 우리 정부는 이에 응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일본이 제소하더라도 당사국인 우리 정부가 제소에 응하지 않으면 독도 문제의 국제사법재판소행은 불가능해진다. 외교부 당국자는 12일 독도 문제의 국제사법재판소 제소 방안을 검토하겠다는 겐바 고이치로 일본 외무상의 발언과 관련해 “우리 정부는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입할 때 강제관할권(강제재판권)을 유보했기 때문에 일본이 원한다고 재판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 측은 1954년 우리가 독도에 등대를 설치했을 때와 1962년 양국 간 수교 협상을 시작했을 때도 국제사법재판소행을 요구했지만 우리 정부는 응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일본 정부는 양국 정상 간 셔틀 외교 등 고위급 교류를 당분간 중단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올해로 예정된 노다 요시히코 총리의 방한을 미루고, 외교장관의 상호 방문이나 고위급 정기 협의를 당분간 중단하겠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이후 일본 내 반한 여론도 들끓고 있다. 지난 11일 오전 2시 50분쯤 히로시마시 미나미구 히로시마 총영사관에 Y(44)씨가 오토바이를 타고 접근해 출입용 유리문을 붉은 벽돌로 깨뜨리고 달아났다. 이 남성은 이날 오후 경찰에 출두해 자신을 우익단체 구성원이라고 밝힌 뒤 “한국 대통령의 다케시마 상륙에 화가 났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부는 현지 경찰에 일본 소재 9개 한국 공관에 대한 경비 강화를 요청했다. 김미경기자·도쿄 이종락특파원 chaplin7@seoul.co.kr
  • ‘1954년 KOREA’ 사진 전시회

    한국전 참전용사가 찍은 1950년대 한국의 모습이 서울 세종문화회관 광화랑에 전시된다. 두모C&C(대표 강석환)는 8일 한국전 참전용사이자 미국 아마추어 사진작가인 클리퍼드 스트로버스의 사진을 모아 ‘사진으로 만나는 1954년 KOREA’ 전시회를 개막했다. 스트로버스는 1953년 주한미군으로 파병돼 부산 미군수기지사령부에서 근무했다. 2010년 정부 초청으로 방한하면서 1950년대 한국의 모습을 담은 컬러 사진을 모아왔고, 2011년 사진집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전시회는 14일까지 열린다.
  • [김문이 만난사람] ‘푸른 눈’ 원로 국악학자 해의만의 국악사랑 50년

    [김문이 만난사람] ‘푸른 눈’ 원로 국악학자 해의만의 국악사랑 50년

    쇼팽과 바흐, 베토벤 등 우리나라 사람이 서양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보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교양과 품격이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렇다면 외국인이 우리 전통음악을 연주하고 부르는 모습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아마도 대부분 의아해하거나 놀라워할 것이다. 특히 한평생 직업으로 여기며 살아간다면 더욱 그러하지 않을까. 해의만(81·본명 알렉 헤이먼)씨는 29살 때부터 한국에서 우리의 전통음악을 공부하고 익히며 연구해 온 보기 드문 원로 국악학자이다. 1931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1953년 위생병으로 6·25 전쟁에 참전, 강원도 양구에서 근무할 당시 국악과 처음 접한 것이 인연이 돼 우리의 전통음악에 푹 빠져 살아오고 있다. 국악 연구는 물론 가야금, 단가, 민속장고와 북, 거문고, 태평소, 설장고 등 우리의 전통악기를 대부분 아주 능숙하게 다룰 줄 안다. 그동안 뉴욕과 파리 등에서 ‘삼천리 나라 무용’, ‘한국 판소리 해설’, ‘한국 민속음악과 무용’, ‘한국음악, 음악대사전’ 등을 직접 펴냈으며 ‘한국 무가’, ‘한국 무속’, ‘한국 가면극’, ‘한국 민속무용 해설’, ‘한국 전통무용과 탈춤’, ‘한국 전통악기’ 등 수십 권을 영문 번역해 해외에 알리기도 했다. 이런 공로로 지난해 4월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또 한국외국어대학과 국민대, 한세대 등에서 학생들에게 영어와 전통음악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한국인 여성과 결혼, 아들과 딸을 두었으며 ‘서울 해씨’의 시조가 됐다는 점도 흥미롭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음악에 빠진 그를 지난달 27일 서울 강서구 화곡동 자택에서 만났다. 부인이 문을 열어주면서 “집에 에어컨이 고장나서 좀 더울 텐데….”라고 친절하게 맞이한다. 해씨도 “어서 와요.”라고 말한다. 몸이 약간 불편했던지 부인의 부축을 받으며 의자에 앉았다. 옆에 놓인 가야금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악기를 다루는지 먼저 물었더니 가야금은 홍원기 선생, 민속장고와 북은 지영희 선생, 거문고 산조는 신쾌동 선생, 태평소는 최인서 선생 등에게 배웠다는 대답이 나지막이 돌아온다. 그는 요즘 외부 활동을 거의 안 하고 있다. 대신 집에서 전화로 영어를 가르치면서 국악자료를 번역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 몸이 불편해 부인이 항상 옆에서 도와 주고 있다. 가끔 제자들이 찾아와 목욕탕에 가는 것이 유일한 외출이다. 부인한테 이런 얘기를 잠깐 들으며 거실 벽에 세워진 한문 글씨의 병풍을 바라봤다. 글씨 끝 부분에 그의 이름 ‘해의만’(海義滿)이라고 적혀 있었다. 성씨를 왜 바다 해(海)라고 했을까. “원래는 내가 좀 더 일찍 (한국에)오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때(1950년대 말) 민간인 신분이라 입국이 안 된다고 하더군요. 좀 기다렸다가 입국허가가 풀리는 1960년에 한국행 배를 탔습니다. 일본을 거쳐 왔지요. 그때 배 안에서 선교사를 만났는데 한국식 이름을 지어 주더군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는 뜻의 바다 해(海)와 옳은 일로 가득 차라고 해서 의만(義滿)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한양(서울) 해씨의 시조가 됐지요(웃음).” 슬하에 자녀가 있으니 서울 해씨가 새로운 성씨로 대대손손 쭉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쯤 해서 그가 국악을 좋아하게 된 사연을 듣기로 했다. “강원도에 있는 야전병원에서 근무할 때였어요. 중국군과 북한군 빨치산들이 산속에 있었는데 새벽 2~3시만 되면 북, 태평소, 징, 꽹과리 소리가 요란했습니다. 다른 군인들은 잠을 못 자 아주 싫어했지만 저는 아주 매력적으로 들렸습니다. 그중 가장 재미있는 소리가 있었어요. 다른 군인한테 물어봤더니 태평소 소리라고 하더군요.” 정전협정 이듬해인 1954년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뉴욕 컬럼비아대학원에서 음악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면서도 한국에서 들었던 국악 소리를 늘 잊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인 유학생을 만났다. 궁금했던 차에 한국음악에 대해 자세히 들을 기회가 됐다. 한국에는 5000년 역사를 간직한 전통악기가 많을 뿐 아니라 다양한 국악 장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른바 ‘필이 꽂혔다’라는 말처럼 무작정 한국 전통음악을 배워 보겠다는 생각에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다시 한국행을 결심했다. “그때 수소문해서 인사동 근처에 있는 한국국악예술학교에 무작정 찾아갔지요. 교장 선생님한테 ‘전통음악을 배우고 싶다. 공부하게 해주면 영어를 가르치겠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교장 선생님께서 흔쾌히 승낙해 주셨습니다. 내가 미국에서 음악을 전공했기 때문에 오선보 사용법도 동시에 가르쳤습니다. 그때 여류 명창 박녹주 선생 등 훌륭하신 분들과 만나게 되면서 국악을 열심히 배웠지요.” 이와 동시에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 펴낸 교재를 구입해 독학으로 한국어를 익혀 나갔다. 그렇게 3년이 지난 1963년,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뉴욕 아시아학회’에서 한국전통음악에 대한 발표와 함께 바라춤을 직접 선보여 주목을 끌었다. 이듬해에는 우리 전통공연예술단의 미국 공연을 성사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때 현지 대학과 대학원 등을 포함, 27곳에서 순회공연을 했다.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 등 유럽에 한국전통음악을 알리는 데에도 노력했다. 영국의 음악가 존 레비(1910~1976)가 1964년 우리나라에서 50일간 머물렀을 당시 가곡, 판소리, 기악연주, 궁중음악, 민속음악 등의 전통음악을 집대성할 수 있도록 주선했던 것. 레비는 당시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스위스제 녹음기 나그라를 사용, 모두 10장의 CD에 담았는데 지금도 중요한 음원으로 평가받고 있다. 해씨는 또 전국을 다니며 귀중한 국악 자료를 수집, 연구하면서 국악강연과 번역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지난해 말에는 그가 평생 모아 온 국악 자료 중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서애악부’(1504), ‘정축진찬의궤’(1877), ‘설중회춘곡’(1905년 추정) 등을 비롯해 200여점의 고서적과 녹음자료를 국립국악원에 기증해 화제를 모았다. 이에 대해 해씨는 “연구하는 후학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기증하게 됐는데 문화적 자산으로 활용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한국음악을 듣는다. 밤중에는 가끔 소리를 크게 틀어놓아 옆집에서 항의를 받기도 한다. 그에게 한국의 전통음악이 왜 좋은지 다시 물었다. “한국음악은 아주 즉흥적이면서도 기쁨과 슬픔 등 인생의 혼이 담겨 있어요. 서양음악은 4분의3박자인 경우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똑같이 반복되지만 한국의 민속음악은 그렇지 않아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반복 없이 진행됩니다. 넓은 사상이 있어요. 각 지역의 서민들의 삶이 담겨 있지요.” 그런데도 요즘 젊은이들이 한국음악을 좋아하지 않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때문에 대학강의나 초청 강연 때에는 전통의 중요성을 늘 강조했단다. “국악은 중요한 것입니다. 결코 잊어버리면 안 되지요. 세월이 갈수록 잊어버리는 가락이 많습니다. 그런 가락들을 악보로 써서 남겨야 하는데…. 가야금 악보도 써야 하고, 요즘 들어 기력이 별로 없어요.” 푸른 눈의 백발, 국악학자의 길을 오롯이 걸어온 그는 살아 있는 동안 국악을 영문으로 번역하는 작업만큼은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요즘에는 ‘전국민속예술축제 50년사’를 번역하고 있다. 기력이 떨어지고 불편한 몸에도 여전히 국악사랑에 대한 열정은 변치 않고 있다. 어쩌다 가끔 집에서 염불하며 바라춤을 추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염불은 최인서 선생에게 배웠다. 바라춤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춤이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부인과 어떻게 만나 결혼했느냐고 하자 “머릿결이 곱고 아주 길었다.”며 웃는다. 옆에 있던 부인이 “간호사로 독일 가려고 학원에서 공부할 때 남편이 영어 선생이었다. 3년 동안 사귀다가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렸다.”고 거들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 He is ~ 1931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1952년 콜로라도 주립대에서 음악학사를 받았으며 1953년 6·25 전쟁에 참전, 위생병으로 근무할 당시 국악을 처음 접했다. 1959년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음악석사를 마친 뒤 1960 다시 한국으로 와 4년 동안 한국국악예술학교에서 전통음악을 공부했다. 이때 홍원기, 박녹주, 지영희, 신쾌동 선생에게 가야금과 시조, 단가, 민속장고와 북, 거문고 산조 등을 익혔다. 이후 태평소(취타와 염불), 태평소 시나위, 범패와 작법, 설장고 등을 배웠다. 국립국악원 장기과정(1990~1994)을 수료했다. 주요 저술은 삼천리 나라의 무용(1964), 한국 판소리 해설(1972), 한국 민속음악과 무용(1974) 등 5권이 있다. 영문번역으로는 한국가면극(이두현·1974), 한국민속무용해설(성경린·1974), 한국전통악기(이혜구·1982) 등 수십권이 있다. 이 밖에 1964년 한국삼천리가무단을 인솔해 미국 27개 대학과 뉴욕 카네기홀 공연 및 강의를 통해 한국 전통음악과 무용을 소개했다. 1973년 국립국악원연주단과 함께 이란, 프랑스, 서독 등 여러 차례 공연 및 강의를 통해 한국의 전통음악을 알렸다. 주요 수상으로는 한국국제문화협회 문화상(1982), 국악의 해 유공표창(1995), 한국유네스코위원회 문화상(1991), 은관문화훈장(2011) 등이 있다.
  • 세계적 권위 佛 아틀라스 출판사 지도책, 동해-일본해 대등하게 첫 병기

    세계적 권위 佛 아틀라스 출판사 지도책, 동해-일본해 대등하게 첫 병기

    프랑스 아틀라스출판사의 2012년판 세계지도책에 동해와 일본해가 체계적으로 대등하게 병기된 것으로 밝혀졌다. 세계적인 대형 정밀지도책에 동해와 일본해가 대등하게 표기된 것은 처음으로, 올 들어 프랑스의 ‘라루스출판사’와 ‘미슐랭’의 세계지도에 동해가 처음 병기된 사례와 함께 획기적인 일로 평가된다. 24일(현지시간) 프랑스 출판계에 따르면 ‘아틀라스 세계지도책 2012년판’은 8개 면에서 동해를 ‘일본해(MER DU JAPON)/동해(MER DE L’EST)’라는 명칭 아래 같은 크기의 글자로 표기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지난 4월 국제수로기구(IHO)가 일본의 반발에 밀려 동해 표기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5년 뒤 재논의하기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동해 병기’는 세계적인 추세가 될 전망이다. 아틀라스 세계지도책은 407쪽에 무게가 4㎏인 대형 지도책으로, 미국의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펴내는 세계지도책과 함께 세계 정밀지도의 양대 산맥으로 통한다. 그동안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비롯한 몇몇 세계적인 출판사들의 세계지도책들이 동해와 일본해를 병기해 오긴 했으나, 동해를 일본해 아래 괄호 속에 작게 넣어 표기함으로써 일본해가 사실상 주명칭이라는 뉘앙스를 풍겼다. 이 지도책은 또 독도에 대해 ‘DOKDO/TAKE-SHIMA’로 표기했으나, “1954년 이래 한국이 지배하고 있으며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는 주석을 달아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분명히 했다. 파리 연합뉴스
  • 노벨상 두 번 받았다, 그런데 틀린 논문 그대로다

    노벨상 두 번 받았다, 그런데 틀린 논문 그대로다

    기본적인 질문을 하나 던져 보자. “잘못된 논문은 왜 철회해야 하는가?” 당연한 얘기지만 잘못됐기 때문이다. 특히 과학에서 잘못된 논문을 바로잡는 것은 과학의 학문적 특성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과학은 본질적으로 지식을 쌓아가는 분야다. 하나의 사실이 밝혀지면 이를 기반으로 또 다른 연구가 이뤄지고, 새로운 사실이 밝혀진다. 과학저널의 역사는 수백년에 이른다. 최초의 과학저널은 영국의 ‘왕립학회 철학회보’(Philosophical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로, 1665년에 만들어졌다. 최초의 논문 철회 역시 이 저널에서 이뤄졌다. 1746년 벤저민 윌슨은 이 저널에 “1746년 발표한 ‘라이덴병’에 관한 논문은 벤저민 프랭클린의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틀린 것으로 보이는 만큼 철회한다.”고 1756년에 썼다. 언급된 프랭클린은 바로 그 미국의 정치가이자 과학자인 프랭클린이고, 등장한 연구는 피뢰침의 발명으로 이어진 연을 이용한 번개 실험이었다. 과학적으로 완벽하다고 여겨지는 이론이나 실험이 추후에 잘못된 것으로 밝혀지는 사례는 무수히 많다. 천동설과 지동설, 창조론과 진화론이 그랬고 인체에 대한 신비 등 셀 수 없이 많은 분야가 과학적 발전에 따라 새롭게 쓰여진다. 위대한 과학자들 역시 잘못된 주장으로 역사에 오명을 남긴다. ●과거의 잘못된 논문 다 철회해야 하나 최근 해외 과학계에서는 ‘과거의 잘못된 논문은 무조건 철회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서로 다른 분야에서 노벨상을 두 차례나 받은 최초의 사람. 화학자이자 반전운동가 라이너스 폴링(1901~1994)이 1953년에 미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한 ‘DNA의 3중 나선구조’ 논문에 대한 얘기다. 폴링은 일찍부터 화학에 관심을 가졌고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 대학 졸업 전에 이미 원자의 전기적 구조와 분자의 화학결합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머릿속에 갖고 있었다. 졸업 후에는 유럽에 머물며 보어(1922년 노벨 물리학상), 슈뢰딩거(1933년 노벨 물리학상) 등 세계적인 석학들 속에서 꿈을 키웠다. 폴링은 1927년부터 오리건대의 화학 교수를 지내면서 분자의 구조가 물질의 화학적, 물리적 특성은 물론 인체내의 생리적 기능도 결정한다는 사실을 알아채기 시작했다. 결국 오랜 기간의 연구 끝에 폴링은 각 원자들이 모여 적절한 방법으로 서로 결합해 분자를 이루고, 분자가 모여 물질이 될 수 있는 원자의 가장 기본적인 결합 방법을 규명했다. 이 공로로 그는 1954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폴링의 업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원자와 분자구조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기반으로 단백질, 변성된 단백질, 엉긴 단백질 등 다양한 형태의 단백질 구조를 규명했다. 아미노산, 폴리펩티드 등 현재 알려진 단백질의 구조분석 기법이 바로 폴링에서 시작된 것이다. 현대 의약학의 아버지인 셈이다. 폴링에게 노벨상을 안겨 준 또 다른 업적은 핵무기와 관련이 있다. 1940년대 원자폭탄 개발을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오펜하이머는 폴링에게 화학부문 책임자를 맡아 달라고 요청했지만 폴링은 이를 거절했다. 전쟁이 끝나자 폴링은 적극적인 반핵운동을 시작됐다. 폴링은 1955년 51명의 노벨상 수상자와 함께 전쟁종식 및 핵실험 금지 서명운동을 시작했고, 1958년 49개국 과학자 1만 1000여명의 서명을 받은 청원서가 유엔 사무총장에게 전달됐다. 이해 폴링은 ‘더 이상의 전쟁은 없어야 한다’는 책을 통해 과학이 전쟁의 도구가 되어 가는 과정을 고발했다. 이 같은 운동의 결과로 폴링은 196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폴링은 노벨상을 두 차례 수상한 네명의 인물(나머지 셋은 마리 퀴리·존 바딘·프레데릭 생어) 중 한명이자 과학과 다른 분야에서 상을 수상한 최초의 인물이며, 두 차례 모두 단독 수상한 유일한 인물이다. ●“과거의 오류도 의미 있어 철회 반대” 폴링은 두 차례 부정적인 논란의 중심에 섰다. 가장 유명한 것이 현재까지 학계의 의견이 갈리고 있는 ‘비타민C 과다섭취’ 요법이다. 비타민C 신봉자였던 폴링은 1973년 직접 연구소를 차려 비타민C를 연구했고, 많이 먹을수록 건강해진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항암효과가 뛰어나며 필요량의 수백배를 섭취하면 20년에 이르는 경이적인 수명 연장이 이뤄질 것이라고 발표했다. 폴링은 94세로 세상을 떠나 충분히 장수했지만 그의 연구소가 진행한 비타민C 관련 임상실험들은 추후에 과장되거나 조작됐다는 것이 입증됐다. 폴링이 이를 알았는지 여부는 확실치 않다. 이보다 앞선 논란은 ‘20세기 과학계 최고의 경쟁’으로 불렸던 DNA에 관한 얘기로, 앞서 언급한 논문 오류 사건이다. 단백질과 분자 구조를 입증한 폴링은 DNA 구조 규명에서도 가장 앞서 있었다. DNA 구조를 발견한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 역시 폴링을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꼽았고, 폴링의 연구기법을 이용했다. 하지만 폴링은 DNA가 3중나선이라고 믿었고, 이 같은 믿음을 토대로 1953년 2월 PNAS에 논문을 실었다. 그러나 다음해 4월 왓슨과 크릭이 ‘2중 나선 DNA’ 논문을 네이처에 발표하면서 폴링의 주장은 불과 두달 만에 틀린 것으로 판명됐다. 폴링 역시 자신의 연구가 잘못된 정보에 기반했으며, 오류를 인정했지만 왓슨과 크릭의 노벨상에 대해서는 “너무 젊다.”면서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지난 5월, 논문철회 및 조작 감시사이트인 리트렉션 워치는 아직까지 PNAS에 그대로 실려 있는 폴링의 논문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해 화두를 던졌다. PNAS는 “너무나 당연히 틀렸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논문”이라는 이유로 지금까지 폴링의 논문에 대해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전세계에서 583명의 전문가들이 참여한 투표에서 47.17%는 ‘그냥 내버려 둬야 한다’, ‘잘못된 논문이라고 명시해 남겨둔다’가 36.88%였다. 반면 ‘온라인에는 남겨둔 채 철회됐다고 기재한다’(14.58%)와 ‘아예 철회하고 삭제한다’(1.37%)는 소수에 머물렀다. 로이터헬스 대표인 이반 오랜스키는 “잘못된 논문을 무조건 철회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나름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도 중요하다는 교훈을 보여 주는 사례”라고 평가했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이승만 집권 때도 독립운동가 수감했다”

    “이승만 집권 때도 독립운동가 수감했다”

    서울 통일로 ‘서대문형무소’는 1905년 을사늑약 때일제가 만든 경성감옥이었고 1912년 서대문형무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이 형무소의 신세를 졌다. 해방 이후 독립운동가들이 다 떠난 서대문형무소에는 누가 수감됐을까? 왜 곧바로 일제의 악행을 고발하는 역사박물관으로 직행하지 못했을까? 김삼웅(69) 전 독립기념관장은 4일 오후 2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독립관 무궁화홀에서 열리는 ‘이승만 집권기의 서대문형무소’란 학술대회에서 ‘1948~1959년 서대문형무소’란 제1주제 논문을 통해 서대문형무소 수감자들의 변천사를 밝혔다. 김 전 관장은 “1948~1959년 12년은 이승만의 1인 통치와 자유당의 전횡기였다.”면서 “1949년 1월 반민특위의 검거활동으로 서대문형무소가 악질적 친일파인 소설가 이광수, 일제경찰관 노덕술 등 친일파로 가득했지만, 겨우 1개월 만인 그해 2월 15일 이승만이 반민특위 활동을 비난하고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등으로 서대문형무소가 다시 독립운동가들로 가득 차게 됐다.”고 탄식했다. 소설가 이광수는 수감 20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고, 노덕술은 이승만 대통령이 “경찰의 기술자이며 경험자이므로 그를 제거하고는 국가의 치안을 유지하기 어렵다.”면서 석방을 요청하던 중 그해 6월 6일 반민특위가 와해되자 풀려났다. 1949년 6월 ‘국회프락치사건’이 발생했다. 신의주 등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김약수 의원과 반민법 제정에 남다른 열정을 보인 노일환·서용길 의원 등 13명의 의원이 체포됐다. 김 전 관장은 “헌병사령부 산하에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이들을 심하게 고문해 ‘자백’을 받아 냈다.”면서 “당시 헌병대에는 친일경찰 김정채, 윤우경, 최운하, 김호익 등이 핵심이었다.”고 말했다. 노일환은 재판 과정에서 “남로당 가입 사실과 남로당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는 자백이 고문을 못 이긴 허위 자백”이었다고 진술했다. 즉 반민특위 활동이 와해된 후 서대문형무소에는 일제강점기와 비슷하게 독립운동가들이 가득해졌다는 것이다. 1947~1954년 제주 4·3사건으로 2530여명이 일반재판 및 군정재판, 군법회의 등을 통해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 중 16~30세 여자 수감자 70여명이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됐다. 제주도에는 형무소가 없어서 전국 각지 형무소에 분산·수감된 탓이다. 김 전 관장은 “일제강점기에 총독부가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수감하기 위해 특별히 여사(女舍)를 지어서 관리했기 때문”이라면서 “6·25전쟁으로 이 중 일부는 인민군에 편입되거나 여맹에 들어갔고, 또 일부는 잡혀서 총살됐다.”고 설명했다. 6·25전쟁 직후부터 3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는 북한군이 사용했다. 반공·친미 인사라고 추정되는 사람들을 투옥하고, 후퇴할 때는 대량 학살하거나, 북으로 끌고 갔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이승만 정부는 서울시민 중 북한군에게 협조한 부역자들을 색출해 서대문형무소에 가두기 시작했다. 당시 서울시민은 대략 145만명이었고, 이 중 40만명만이 피란을 떠났다. 김 전 관장은 “서울시민은 안심하라는 라디오방송을 거듭하다가 한강다리를 폭파시켜 피난도 못하게 해 놓고는 잔류한 서울시민을 부역자로 모는 것은, 임진왜란 때 한성을 떠난 선조나 병자호란 때 인질로 잡혀 갔던 처자를 ‘환향녀’라며 비난했던 인조와 다를 바가 없다.”고 비판했다. 실제 사형에 처해진 사람은 다소 줄었지만, 당시 부역자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자는 867명에 이르렀다. ‘종로의 협객’ 김두한은 1947년 4월을 시작으로 1954년 5월, 1965년, 1966년 ‘국회오물투척사건’ 등으로 4차례 수감됐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데스크 시각] 대선 후보자와 국제 통찰력/이기철 국제부 부장급

    [데스크 시각] 대선 후보자와 국제 통찰력/이기철 국제부 부장급

    #1.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 데 싸우지 않으면 즉, 화친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짓이다(洋夷侵犯 非戰卽和 主和賣國).” 흥선대원군이 병인·신미양요 승리 이후 서울 종로 네거리를 비롯해 전국 곳곳에 세운 척화비 내용 일부다. 집권 이전 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건달들과 어울리며 구걸을 서슴지 않는 파락호 생활을 했다. 서민과 생활하며 당시 조선사회의 모순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1863년 둘째 아들이 12살에 왕위에 오르자 그는 조선 최고의 실력자가 됐다. 당쟁의 근거지였던 서원을 철폐했고, 60년 세도정치에 가렸던 왕권의 위엄을 되찾고자 경복궁을 재건하는 등 국내문제 개혁에 치중했다. 긴박했던 국제사회의 움직임에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권력 기반 약화를 우려해서다. 반면 중국은 1840년, 일본은 1854년 개방했다. 조선은 1860년대 프랑스·미국 등에 의한 통상교섭 즉, 개방 요청이 잇따랐지만 대원군은 빗장을 걸어잠갔다. #2. 원나라의 억압에 100여년간 신음하던 14세기 고려. 12살 때 원나라 연경에서 10년 볼모 생활을 했던 왕전은 1351년 고려로 돌아와 31대 공민왕이 됐다. 몽고 풍속을 없애고, 고려 조정 안팎을 장악했던 기씨 일족을 비롯한 친원세력을 제거했다. 내정을 간섭하던 쌍성총관부를 폐지해 자립 왕조로 다시 태어났고, 원나라에 빼앗겼던 서북면과 동북면 일대의 영토를 되찾았다. 세계를 호령한 원나라지만 남쪽에서 무서운 기세로 일어난 홍건적에 정신이 팔렸다는 공민왕의 국제적 통찰력이 없으면 펼 수 없는 정책들이었다. 홍건적은 얼마 후 원나라를 무너뜨리고, 지도자 주원장은 명나라를 세웠다. #3. “일본이 다음해(1592년)에 조선의 땅을 빌려 명나라를 정복하려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가 조선 조정에 올라왔다. 보고서는 묵살당하고, 이를 보고한 관리는 파직당했다. 왜의 동태가 수상하다는 보고는 수시로 올라왔다. 대마도 도주 소 요시토시는 조선 조정에 몇 차례 전쟁 발발을 경고했다. 전쟁에 휘말리기 싫었던 그는 증거로 소총 2자루도 갖다줬고, 조선의 눈으로 일본의 정세를 보라고 통신사 파견도 요청했다. 통신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의 보고는 엇갈렸다. 부산포에 살던 일본인들은 모두 철수하면서 전쟁 분위기가 완연했다. 국제정세에서 듣고 싶었던 것만 들었던 선조는 명나라를 향해 피란갔고, 경복궁은 불탔다. 선조가 최강국인 줄 알았던 명나라는 몇년 지나지 않아 지도에서 사라졌고, 조선은 전란으로 쑥대밭이 됐다. 과거 최고 지도자가 국제적 통찰력이나 감각이 없을 때와 있을 때의 우리의 판도가 달라진 대표적 사례들이다. 지금은 실시간으로 국제 소식이 전해지는 개방된 세계여서 국제문제 대처에서는 과거와는 전혀 다르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불과 9년 전인 2003년 미국이 요청한 이라크 파병을 두고 국론이 첨예하게 갈렸다. 이라크전 소식은 실시간으로 들어왔지만 국가 지도자들은 강 건너 불보듯했다. 지금 다시 그와 유사한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국제적 이목이 집중된 이란 핵프로그램에 대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이 겉돌았다는 것이 최근의 외신 보도다. 미국이 이란 핵시설에 대해 군사적 타격에 나서면서 한국에 동참을 요청하면 우리는 나서야 할까 말아야 할까. 이란 핵프로그램의 해결방식은 북한 핵문제에 대해 국제사회의 선례가 된다는 점에서 우리에겐 더욱 중요한 문제로 와 닿는다. 또 최근 법 개정을 통해 핵무장의 길을 연 일본에 대해서는 우리 정부의 말마따나 ‘예의주시’만 하면 될 일인가. 일본이 당장은 아니겠지만 현재의 관료와 정치인이 모두 바뀐 다음에는 핵무장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만은 없다. 중국, 북한에 이어 일본의 핵무장 여지는 동북아의 핵 도미노 우려를 가중시킨다. 6개월 앞으로 다가온 대선에 나서려는 이들에게서 우리를 옥죌 수도 있는 국제 문제에 대한 말도 듣고 싶다. chuli@seoul.co.kr
  • [사설] 무상 복지정책 포기한 日 민주당 본받아라

    일본 집권여당 민주당이 총선 때 약속한 무상복지 정책을 사실상 포기했다. 더욱이 야권과 소비세 인상안에 합의함으로써 국민에게 선심 대신 고통분담을 요구한 형국이다. 일본 집권당이 중의원 해산과 총선을 치를 각오로 내린 결단으로, 연말 대선을 앞둔 우리 정치권은 반면교사로 삼기 바란다. 일본 정치권은 현행 5%인 소비세율을 2년 후 8%, 3년 뒤에는 10%로 올리기로 합의했다. 벼랑 끝에 몰린 재정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다 요시히코 총리 등 민주당 지도부가 당내 반발을 무릅쓰고 자민당·공명당 등 야권과 타협한 것이다. 2009년 총선에서 자민당의 54년 집권을 종식시켰던 민주당으로선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최저보장연금 도입 등 복지 확대와 소비세율 인하 유보 등 민주당이 내건 공약이 누울 자리도 안 보고 다리를 뻗은 꼴임을 자인했다는 점에서다. 민주당은 집권 3년도 안돼 자녀수당 확대와 고교 무상교육 등 ‘무상 시리즈’ 공약을 대부분 폐기했다. 특히 지난 3월 기준 국가부채 잔액이 959조 9500억여원 규모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자 국제신용평가사 피치가 일본의 국가신용등급을 두 단계나 하향조정했다. 일본 정치권은 막다른 상황에서 이번에 일말의 희망을 보여줬다. 집권당이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최저보장연금제, 75세 이상 고령자 무상의료제 등 마지막 ‘당의정 공약’까지 기꺼이 포기했기 때문이다. 4월 총선에서 영·유아 무상보육 확대(새누리당), 대학등록금 반값 인하(민주통합당) 등 온갖 복지 정책을 쏟아내 놓고도 정작 재원 마련 대책은 나몰라라 하는 우리 정치권이 외려 걱정되는 이유다. 우리나라의 재정 건전성이 일본보다 나은 편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최근 국가·공기업의 부채 누진 추세를 보면 일본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보장도 없다. 정치권이 앞장서 국민에게 단물 먹이기 경쟁을 벌이다 결국엔 고통스러운 긴축을 강요받는 그리스 사태를 보라. 지금이라도 여야 대선주자들은 재원 대책이 뒤따르지 않는 ‘묻지마 복지’ 공약을 자제해야 한다. 일본 노다 내각이 복지 대신 소비세율 인상이라는 ‘쓴 약’ 처방을 선택한 뒤 내각 지지율이 급등한 사례를 참고하기 바란다.
  • [최동호 새벽을 열며] 숲속의 오솔길 ‘월든’의 지혜

    [최동호 새벽을 열며] 숲속의 오솔길 ‘월든’의 지혜

    지난 5월 16일 필자는 우연한 기회에 미국 보스턴 외곽 콩코드에 있는 소로의 월든 호수를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숲속의 집은 멀리 있어야 할 것 같은 선입견과는 달리 찾아가 보니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나를 오솔길로 부르고 있었다. 우리들이 자진해서 숲으로 향하는 길을 낸다면, 그 길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이번 방문으로 깨닫게 되었다. 살던 콩코드 마을을 떠나 숲 속으로 들어가 홀로 자연과 대화하며 명상에 잠기고자 했던 소로의 오두막집을 찾아가는 일은 도심의 거리를 헤매던 필자에게 숨겨진 비밀을 찾는 흥분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막상 현장에 도착하고 보니 옛 오두막집은 사라지고 돌무더기와 함께 그 터만 남아 있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내가 숲 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 인생의 본질적 사실들만을 직면해 보려는 것이었고,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으며,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 하고 생각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는 글이 새겨진 밤색 간판이 옛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소로는 1845년 7월부터 1847년 9월까지 오두막집에서 생존을 위한 극소의 필수품만으로 살며 자연과 대화하고 인생에 대해 명상한 것들을 사실적 기록으로 집필했다. 소로는 생존 당시 극단적 무소유의 삶을 실천했던 까닭에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에머슨의 명성에 가려 그 아류에 불과한 존재로 평가되었다. 후일 유명해진 ‘월든’의 경우에도 10년 가까이 출판할 곳을 찾지 못하다가 1854년에 가서야 2000부를 간행했는데 거의 판매되지 않았다. 명성을 얻지 못한 그는 에머슨의 숲이나 집을 관리하는 정도로 미미한 존재였다. 따라서 그의 오두막집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갔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며 그는 혁신적인 사상가요 예언자적 지성으로 부활했다. 그가 오두막집을 지은 지 100년 후인 1945년 집터가 다시 발굴되었으며, 그는 19세기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평가받게 되었던 것이다.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이 한 권의 책으로 소로는 우리가 미국에서 가졌던 모든 것을 뛰어넘었다.’고 말한 바 있다. 재평가된 소로는 이후 세계적 명성을 지닌 미국의 문인 중 하나가 되었다. 자연생태문학의 대두와 더불어 그는 생태문학의 원조로 추앙되었다. 그의 예언자적 성찰을 생각하며 오두막집터에서 숲 속의 오솔길을 바라보았다. 주변은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어디선가 숲 속을 어슬렁거리다 불쑥 나타날 것 같은 소로의 그림자가 스쳐가는 것 같기도 했다. 숲길을 걸으며 소로의 월든이 지니는 힘이 무엇일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이 머나먼 곳으로 사람들을 찾아오게 만드는 것일까. 우선 물신주의를 넘어서는 청교도적인 금욕주의에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것으로 멈추는 것은 아니다. 그의 세밀한 자연관찰 또한 높이 평가할 만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보여준 명상의 심오함이었을 것이다.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하려고 한’ 그의 자세는 사후 150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에게도 훌륭한 표본이 될 것이다. 쓸데없는 일로 인생의 대부분을 소모하거나 쓸데없는 일들로 사회적 동력을 소모하고 있다는 느낌이 스쳐갈 때 소로의 ‘월든’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바른 길을 가르쳐 줄 것이다. 혼탁한 사회적 격류에 휩싸일수록 우리는 가야 할 길을 잃어버리기 쉽다. 오늘의 한국은 가치 혼돈의 양극시대이다. 격한 사회변화는 경제적 불균형의 심화로 사회적 갈등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국가의 미래를 선도하는 지도자는 부재하고 누구도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대안 부재의 갈등이 분출되면 분출될수록 멀리 떨어져 있는 숲 속의 길에서 지혜를 찾아야 한다. 숲 속으로 가는 길은 우리의 내면으로 향하는 진정한 길을 알려줄 것이며 찌는 더위를 식혀줄 서늘한 힘도 거기서 생성되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81) 경기 남양주 수종사 은행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81) 경기 남양주 수종사 은행나무

    강원도 태백의 깊은 골, 금대봉 기슭의 검룡소(儉龍沼)에서 솟아오른 샘은 남한강이 되고, 금강산 금강천에서 흘러온 또 하나의 물줄기는 북한강이 된다. 두 강 줄기는 경기 양평 양수리 ‘두물머리’에서 만나 호흡을 고른 뒤, 민족의 젖줄 한강이 되어 수도 서울에 접어든다. 두 강물의 합강(合江) 풍경을 가장 잘 내다볼 수 있는 곳은 맞은편의 운길산 중턱쯤이다. 제법 가파른 운길산 등산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두물머리의 저녁 노을 풍경을 사진에 담기 위해 오르는 사진가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최근 걷기 열풍과 함께 늘어난 등산객들이 부쩍 눈에 띈다. 주말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동방의 사찰 가운데 최고의 풍광 “깊은 산은 아니지만, 수도권에서 이만큼 울창한 숲도 흔치 않아요. 숨이 찰 정도로 헉헉거려야 하는 가파른 산길을 오르다 보면 수종사에 닿지요. 숲도 좋지만, 절집 마당에서 보는 두물머리 풍경이 여느 등산 코스보다 좋지요.” 주말마다 수종사를 찾는다는 등산객 박순철(64)씨는 천천히 산을 오르며 한마디 던진다. 도시에 살면서 가까이에서 숲과 강이 어우러지는 풍경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어 좋다는 이야기다. 그가 느릿느릿 오르는 해발 610m의 운길산은 큰 산은 아니라 해도, 길이 가팔라서 제법 숨이 턱에 찬다. 그 중턱에 아름다운 절집 수종사(水鐘寺)가 있다. 법당을 비롯한 대부분의 전각은 새로 지은 것이지만, 수종사는 유서 깊은 천년 고찰이다. 이 지역 태생인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수종사를 “신라 때 지은 고사(古寺)”라며 “절에는 샘이 있어 돌 틈으로 물이 흘러나와 땅에 떨어지면서 종소리를 내기 때문에 수종사라 한다.”는 기록을 ‘수종사기’(水鐘寺記)에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의 자취를 찾기 위해 수종사를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예의 등산객처럼 건강을 위한 등산 코스로, 혹은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기 위해 찾는 곳일 뿐이다. 특히 저녁 노을 붉게 물들 무렵 수종사 법당 앞마당에서 내다보는 두물머리 풍광은 더할 나위 없는 장관이다. 이 풍광을 조선 전기의 명문장가 서거정(徐居正·1420~1488)은 ‘동방의 사찰 풍광 가운데 최고의 전망’으로 꼽았다. 수종사의 아름다운 풍광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사람들이 쌓아 온 심미안의 역사가 차곡차곡 쌓여 있는 셈이다. ●옛 절 중건 지시한 세조가 손수 심어 절집을 찾는 사람들의 자취는 허공으로 흩어지지만 그 안에는 수종사의 긴 역사를 증거하는 자취가 하나 있다. 큰법당을 비롯한 여러 전각 가장자리 언덕에 서 있는 은행나무가 바로 그것이다. 알아보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도 나무의 기세는 대단하다. 산림청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 앞의 안내판에는 나무의 키를 35m, 가슴높이 줄기 둘레를 6.5m라고 했다. 나무를 보호수로 지정한 1982년에 측정한 값이지만, 선뜻 수긍하기 어렵다. 눈짐작으로는 대략 25m가 채 안 돼 보인다. 큰 줄기가 부러진 흔적도 찾을 수 없으니, 갑자기 나무의 키가 줄어들었을 리도 없다. 아무래도 애당초 부실한 측정이었지 싶다. 그러나 나무에는 숫자로 드러낼 수 없는 넉넉한 기품이 담겼다. ‘수종사’라고 이 절을 명명한 조선의 임금 세조가 손수 심은 나무인 까닭이다.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세조는 전국의 물 좋은 곳을 찾아다녔다. 그가 오대산 상원사의 약수로 목욕을 하고 돌아오면서 이곳 운길산 아래 마을에 머무른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날 밤 세조는 신비롭다 해야 할 만큼 청아한 종소리를 들었다. 세조는 신하들을 시켜서 소리의 정체를 알아보라고 했다. 신하들은 “운길산 중턱에 폐허가 된 천년 고찰이 있는데, 그 터의 한쪽 바위 굴에 열여덟 나한이 줄지어 앉아 있다.”며 “신비로운 종소리는 그 바위 굴 옆의 큰 바위 틈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라고 아뢰었다. 물소리의 신비를 지키고 싶었던 세조는 옛 절을 다시 고쳐 세우라고 지시하면서 그 절의 이름을 손수 물 수(水)와 쇠북 종(鐘)을 써서 수종사라 했다. 1459년의 일이다. 절집이 완공되자 세조는 몸소 가파른 산길을 올라 종소리를 내는 샘물을 다시 찾아보고는 절집 마당 한켠에 은행나무를 심었다. 때가 정확하니 나무의 나이도 정확하게 554살이라고 할 수 있다. 옛 임금의 손길을 말없이 증거하는 음전한 생김새의 나무다. ●500년에 걸친 역사의 흐름으로 남아 세조의 은행나무는 사방으로 팔을 넓게 펼쳤다. 그 폭이 무려 20m나 된다. 더 넓은 세상을 품고자 했던 임금이 심은 나무여서인지 그의 품은 의젓하고 넉넉하다. 오래도록 거침없이 흘러야 할 민족의 젖줄 한강을 굽어 살피는 늠름함이 나무 줄기 깊숙한 곳에 배어 있다. 은행나무가 서 있는 언덕은 산 아래의 두물머리 주변 풍광을 조망하기에 좋은 자리다. 수종사 법당 앞마당과 함께 ‘동방 최고의 풍광’을 즐길 수 있는 자리다. 넓게 펼친 나뭇가지 아래에 들어서서 강촌 풍경을 바라보면 마음까지 평화로워진다. 나무 앞에 놓인 벤치에는 짧은 시간 동안 몇 쌍의 젊은 연인들이 스쳐 지났다. 이 땅의 평화와 역사를 지키며 서 있는 임금의 나무 아래로 이 시대 젊은이들의 사람 살이가 그렇게 하나 둘 쌓인다. 강마을에 땅거미 지고, 나뭇잎 사이로 비껴드는 햇살에 노을 빛이 스며든다. 옛 임금이 심은 은행나무 아래로 지금 이 땅을 살아가는 민초들의 가쁜 숨결이 새 역사 되어 천천히 내려앉는다. 글 사진 남양주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 가는 길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1060. 수종사는 자동차로도 찾아갈 수 있지만, 수도권에서 출발한다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좋다. 등산로가 좁고 가팔라서 운전이 쉽지 않은 데다 주변 풍광이 걷기에 좋기 때문이다. 용산역에서 출발하는 중앙선 전철을 이용하면 남양주 조안면의 운길산역까지 1시간 남짓 걸린다. 운길산역 앞 삼거리에서 강변으로 이어진 국도 45호선의 청평 방면으로 800m쯤 가면 나오는 보건소 삼거리에서 수종사 입구를 알리는 안내판을 볼 수 있다. 300m쯤 가서 오른쪽 길로 약 1.5㎞ 오르면 수종사에 닿는다.
  • 태양빛이 소행성 경로 바꿨다…“딥임펙트 빨라지나?”

    태양광선이 지구를 위협하는 소행성의 경로 바꿨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영화 ‘딥임펙트’처럼 운석이 지구에 충돌하는 시기가 빨라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1일(현지시각) 스페이스닷컴 등 과학매체에 따르면 미항공우주국(NASA)의 과학자들이 지난달 19일 일본 이가타현에서 열린 ‘소행성, 혜성, 유성 2012(ACM 2012)’ 회의에서 지구위협 소행성으로 잘 알려진 ‘1999 RQ36’의 궤도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나사 산하 제트추진연구소(JPL) 연구진은 이 소행성이 지난 12년간 ‘야코프스키 효과’로 인해 태양 주변에 도달했을 때의 경로가 100마일(약 160km) 정도 변화했다고 밝혔다. 야코프스키 효과는 19세기 러시아 과학자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이론으로, 소행성 같은 우주 암석이 태양광선을 흡수한 뒤 다시 열로 방출할 때 궤도가 미소하게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이번 연구는 무려 지름이 560m나 되는 소행성 1999 RQ36 마저 야코프스키 효과에 영향을 받는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에 학계는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연구진은 이번 결과를 얻기 위해 지난 1999년부터 2005년까지 아레시보와 골드스톤에 있는 전파관측소에서 측정한 자료를 토대로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에 참여한 스티븐 체슬리박사는 “소행성 1999 RQ36가 태양에 가장 가까울 때 미치는 야코프스키 힘은 0.5온스(약 14g) 정도”라면서 “반면에 그 소행성의 질량은 약 6800만톤으로 추정된다. 매우 정밀한 측정을 위해서는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연구진은 지난 1654년부터 오는 2135년까지 지구를 지나갔거나 지나 갈 소행성의 궤도를 보여주기 위해 새로운 측정법을 사용했다. 특히 오는 2135년에는 소행성이 지구에서 22만마일(약 35만km) 정도 떨어진 지점을 지날 것으로 계산됐는데, 이는 지구에서 달까지 거리인 24만마일보다 가까운 지점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연구진은 소행성 충돌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체슬리 박사는 “2135년에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할 확률은 여전히 몇 천분의 일인 것으로 계산된다.”고 말했다. 한편 나사는 소행성 1999 RQ36의 샘플을 수집하기 위해 오는 2016년 ‘오시리스-렉스’ 탐사선을 발사할 계획이다. 윤태희기자 th20022@seoul.co.kr
  • [씨줄날줄] 구동화이(求同化異)/구본영 논설위원

    상수리나무가 번성하는 숨은 이유가 있다. 다람쥐들이 겨우내 먹거리로 곳곳에 숨겨놓은 도토리가 봄에 싹을 틔운다는 것이다. 다람쥐의 건망증처럼 역사 발전에도 뜻밖의 비결이 있는 걸까. 올 8월 24일 수교 20주년을 맞는 한·중 관계의 괄목상대할 진전을 보며 사학자 버터필드의 말이 생각난다. 그는 “역사적 사건엔 역사의 진로를 사람들이 의도하지 않은 쪽으로 돌리는 성질이 있다.”고 했다. 요즘 국내 어디에서든 가장 많이 보는 외국인은 중국인이다. 서울 명동이나 가평의 남이섬 할 것 없이. 지난해 한국을 찾은 일본인과 미국인이 1인당 평균 126만원, 165만원을 쓴 반면 중국 여행객은 평균 229만원을 썼다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의 대중 수출액이 대미·대일 수출액을 합친 것보다 더 커진 지 오래다. 중국의 입장에서도 한국은 3대 무역 파트너이자 요긴한 자본 유입국이다. 한·중 관계의 상전벽해는 우리의 북방외교와 당시 중국 최고지도자의 실용주의가 맞물리면서 시작됐다.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이 ‘구동존이’(求同存異)라는 모토와 함께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는 본래 1954년 저우언라이 총리가 실리외교를 강조하며 쓰던 용어로 “차이점을 인정하면서 공동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뜻으로 새겨진다. 당시 덩은 한·중 수교의 발목을 잡는 김일성에게 거꾸로 북한도 개혁·개방에 나서야 한다고 충고했다고 한다. 덩의 예상 이상으로 한·중관계는 진전됐지만, 아직도 복병은 도처에 숨어 있다. 고구려사를 자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서해 어로분쟁 등도 그 하나다. 그중에서도 탈북자 문제나 북핵을 둘러싼 양국의 입장차는 그야말로 아직 ‘존이’(存異)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조간 신문에 실린 ‘구동화이’(求同化異)란 낯선 조어가 설득력 있게 와 닿았다. “공동의 이익은 추구하되 이견이 있는 부분까지 공감대를 확대한다.”는 중국 인민일보 왕팡 부주임의 의견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반만년 역사에서 한반도의 대격변 때마다 항상 ‘중국 변수’가 작동했다. 오래전 삼국통일, 근래의 한국전쟁이 그랬다. 수교 20주년을 맞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한국 경제를 도약시킬 수도, 잘못 빠지면 헤어나기 어려울 수도 있는 거대한 갯벌과 같은 이웃이 아닌가. 한·중 관계를 ‘구동존이’에서 ‘구동화이’로 업그레이드하는 게 한국외교의 핵심 과제가 되어야 한다. 구본영 논설위원 kby7@seoul.co.kr
  • [씨줄날줄] YS·이석기·김재연/곽태헌 논설위원

    고(故)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경쟁관계였던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는 늦게 됐지만, 청와대 입성은 DJ보다 빨랐다. DJ는 1971년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신민당 후보 경선에서 1차에서는 YS에게 뒤졌지만, 2차에서 이철승 후보를 지지하는 표를 상당수 흡수하며 역전승했다. DJ는 1971, 1987, 1992년 대선에서 고배를 마셨지만 1997년 꿈을 이뤘다. YS는 1987년 첫 출마 때에는 노태우 후보에게 뒤져 2위에 그쳤으나, 1992년에는 여당 후보로 출마해 DJ를 190여만표 차로 제치고 대통령이 됐다. 첫 본선 출마 때 대통령에 당선된 노태우 전 대통령,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이명박 현 대통령에 비하면 좋은 기록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괜찮은 성적표다. YS의 국회의원으로서의 기록은 의미가 작지 않다. YS는 1954년 만 26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50여년 전의 26세와 현재의 26세는 차이가 있겠지만 그의 최연소 기록은 앞으로도 깨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 지난 4월 치러진 19대 국회의원 선거 때 최연소는 민주통합당의 김광진 의원(비례대표)으로 31세, 지역구 의원으로는 무소속 문대성 의원으로 35세다. 한때 차세대 주자라는 평을 받았던 김민석 전 의원은 1996년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32세에 당선되며 최연소 기록을 세웠다. YS는 김종필(JP) 전 국무총리, 박준규 전 국회의장과 같은 9선(選)으로 다선 공동 1위 기록도 있지만 최연소나 다선보다 ‘명예로운’ 기록은 국회의원 ‘제명 1호’가 아닐까. 1979년 10월 4일 당시 여당인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소속 153명의 국회의원은 제1야당 총재인 YS를 제명했다. YS가 이란 팔레비 왕정이 무너진 것과 관련, 미국 뉴욕타임스와 기자회견을 한 내용을 문제 삼았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의 일이다. 1978년 말 실시된 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이 공화당을 득표율에서 1.1% 포인트 앞선 데다, 1979년 8월 가발 수출회사인 YH무역의 여성 근로자들이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는 등 박정희 정권이 풍전등화일 때였다. YS가 제명되자 그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마산을 중심으로 반정부 시위가 본격화했고, 10·26으로 유신체제의 종말을 고하게 됐다. 통합진보당 이석기·김재연 의원을 자격심사를 통해 퇴출시키는 방안이 ‘묘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석기·김재연 의원이 퇴출된다고 해도, YS와는 성격이 180도 다를 것이다. YS의 국회의원 제명 1호는 ‘자랑스러운’ 기록이지만, 이석기·김재연 의원의 퇴출은 ‘부끄러운’ 기록일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곽태헌 논설위원 tiger@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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