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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란에 소실된 왕들의 초상화는 어떻게 되살아났을까

    전란에 소실된 왕들의 초상화는 어떻게 되살아났을까

    조선 16대 왕인 인조의 생부 ‘원종’을 그린 국립고궁박물관의 ‘원종어진’은 한눈에 보기에도 깔끔하다. 보존을 잘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사실 이 그림은 1872년 작품과 1935년 작품을 디지털로 합성해 완성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조선시대에 그린 왕의 초상화 ‘어진’의 복원 과정을 담은 ‘어진, 왕의 초상화’를 발간했다고 20일 밝혔다. 책은 2012~2017년 어진 보존처리 과정에 참여한 ‘국내 1호 미술사학자’ 조선미 성균관대 명예교수의 어진 연구 집대성이다. 한국전쟁 때까지만 해도 함경도 영흥 준원전과 전라도 전주 경기전의 태조어진을 비롯해 창덕궁 신선원전에 12명의 임금 어진 48점이 봉안됐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피해 부산에 옮겨졌다가 1954년 화재로 거의 다 타버려 겨우 몇 점만 남았다. 정부는 2012~2017년 홍룡포본 태조어진을 시작으로 원종, 숙종, 순조, 익종, 철종, 고종, 순종어진을 보존처리했다. 태조와 원종, 순종 어진 등 원형 모사가 가능한 어진은 새롭게 모사작업을 병행했다. 작업 모든 과정에 참여한 조 명예교수는 남은 어진은 물론 복원 후 모습과 모사를 위한 디지털 합성 과정, 얼굴·손·귀 등 각 부분 복원에 참고될 관련 비교 이미지 등을 책에 수록하고 자세한 설명을 곁들였다. 조 명예교수는 “어진 제작은 당대 최고의 화사가 모여 만든 협업의 산물이자 그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품으로 한국학 및 미술학적 의미가 크다”면서 “책을 통해 새롭게 복원된 어진이 (관련) 연구에 이바지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기고]향후 10년이 문화유산회복의 최적기이다/(재)문화유산회복재단 이사장 이상근

    [기고]향후 10년이 문화유산회복의 최적기이다/(재)문화유산회복재단 이사장 이상근

    21세기 들어와 국제사회는 과거 불법반출당한 문화유산의 원상회복을 위해 여러 노력을 경주하였다. 1954년 ‘무력충돌 시 문화재 보호에 관한 헤이그협약’, 1970년 ‘문화재 불법 반출입 및 소유권양도 금지와 예방 수단에 관한 협약’, 1995년 ‘도난 또는 불법 반출 문화재의 국제적 반환에 관한 유니드로와 협약’, 1998년 ‘나치약탈 문화재 회복을 위한 워싱턴 회의’를 거치면서 문화재를 대상이나 수단이 아닌 ‘정신적 인격체’로서 가치를 정립하여 왔다. 국제협약이 진전되면서 문화재반환에 있어 소장자의 의무를 엄격하게 하고 피해자 권리를 강화하였다. 대표적으로 국제박물관협의회 윤리강령은 합법적 소유권 충족과 출처 및 소장 내력 공포 나아가 문화재가 유래한 지역사회와 긴밀히 협력하여 활동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처럼 박물관 윤리강령의 정립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대단히 중요한 진전이다. 워싱턴회의 이전에는 피해자가 합법적 소유권 및 피해사실을 입증해야 했으나, 이제는 소장자가 취득과정의 정당성을 입증해야 한다. 또한 소장자는 원산지 주민들과의 협력을 통해 문화유산의 가치를 발굴하고 보전방안을 적극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2000년대 이후 한국사회는 지난 날 침략과 강점을 겪으면서 약탈당한 문화재의 반환문제에 있어 국민적 관심과 참여가 고조되었다. 특히 2005년 일본 야스쿠니 신사로부터 북관대첩비가 반환된 사례를 통해 문화재반환의 대상과 시기, 반환 방향 등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첫째, 북관대첩비의 반환은 65년 한일협정으로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반환문제가 마무리되었다는 일본 정부의 주장을 스스로 부정한 사례이다. 둘째, 1905년 약탈당한 이후 1909년 조소앙 선생이 야스쿠니 신사에 있다는 소재를 밝힌 이후 1978년 최서면 박사의 발표와 지속적인 민간단체의 반환 노력으로 결실을 맺었다. 셋째, 반환운동과정에 북관대첩비의 주인공인 정문부 장군의 후손인 해주 정씨 종친회가 야스쿠니 신사에 반환 청원서를 보내는 등 당사자 자격으로 참여했다는 점이다. 넷째, 북한 소재 문화재의 반환을 위해 남북이 공조하여 결실을 얻었다. 다섯째, 한국으로 반환이후 원소재지인 북한의 함경북도 길주로 귀환했다는 점이다. 북관대첩비의 반환은 이처럼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무엇보다 국외소재 문화재의 절반을 능가하는(문화재청의 공식 조사결과는 7만 4천여 점으로 약43%라 하지만 일본 학계나 정계의 보고는 30만 점에 이른다는 보고)일본 소재 한국기원 문화재의 반환에 있어 어떠한 노력과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조성 내력과 소장 경위 등 내력 조사의 필요성, 소재지 유물의 상황과 소장자의 입장 파악, 당사자와 원산지 주민의 참여, 정부 협상의 적정성, 원소재지 반환 원칙 등 박물관윤리강령의 원칙과 방향을 반영하고 각각이 처한 여건에 맞게 대응함으로 소장자를 설득하기 위한 노력을 다해야한다. 북관대첩비의 반환이후 일본으로부터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도서가 유사한 과정을 걸으면서 국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뿐만 아니라 여러 문화재가 반환을 위해 지난한 과정을 겪고 있다. 세계 20개국 약 600여 기관에 있는 한국기원문화재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자료에 따르면 2018년 4월 현재 국외에 있는 한국기원문화재는 20개국, 582여 기관에 17만 2천여 점이다. 그러나 개인이나 소규모 기관에서 비공개하거나 조사 대상을 확대하면 더 많아질 것이다. 일례로 정부 발표에 따르면 2005년 7만4천여 점이었으나 2018년 17만 2천여 점으로 약 10만이 증가한 것이다. 광복이후 약 1만여 점의 문화재가 돌아왔다. 이중에는 65년 한일문화재협상이나 92년 영친왕유물 반환 등 정부의 협상이 한몫 했다. 반면에 재외동포나 민간의 노력도 상당했다. 외규장각의궤, 조선왕실 유물, 겸재정선화첩 등 프랑스, 미국, 독일 등지에서 돌아 온 유물에는 동포들의 헌신적 노력이 함께였다. 지난 해 프랑스정부는 과거 식민지로터 약탈한 서아프리카 유물의 반환을 발표하고 11월 23일, 베냉정부에 23점의 유물을 반환하였다. 미국은 워싱턴원칙에 기초하여 합법적 소유가 아닌 유물의 반환을 지속하고 있다. 2013년 호조태환권, 2014년 황제지보, 2017년 문정왕후 어보반환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제는 일본 정부가 일제강점기를 비롯하여 임진왜란, 왜구침구 등의 시기에 약탈한 유물의 반환에 답해야 한다. 더구나 일본정부가 한국기원문화재를 국보 등으로 지정하면서 취득불명이라고 밝히는 것은 국제사회의 원칙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최근 북한과 미국이 협상하고 남북관계가 변화하면서 일본이 북한과 수교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이는 미국이 중국과 수교 전에 일본이 수교한 전례를 보아도 가능한 일이다. 2002년 일본 총리 고이즈미 평양선언에는 문화재의 반환문제가 포함되어 있다. 당연한 내용이지만 65년 한일협상에서 일본정부에 뒤통수를 맞은 우리로서는 기회를 살리기 위해 소재지 조사와 반환목록 작성 등을 철저히 해야 한다. 미국과 프랑스의 원산지 반환 방향에 불법적 취득여부를 밝혀 반환요청을 가속해야 한다. 미군에 의해 반출된 조선왕실의 국새와 어보, 프랑스로부터 빌려온 외규장각의궤의 소유권 이전 등 문화유산의 원상회복을 위해 해야 할 과제들이 많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 내부에서 문화유산회복에 대한 국제사회의 원칙을 이해하고 피탈국의 입장을 헤아리는 방향성이 필요하다. (재)문화유산회복재단 이사장 이상근
  • [양진건 유배의 뒤안길] 바람처럼 자유롭게

    [양진건 유배의 뒤안길] 바람처럼 자유롭게

    전설의 유배지 탈출기, 영화 ‘빠삐용’(Papillon)이 다시 만들어져 개봉됐다. 스티브 매퀸과 더스틴 호프먼이 열연하던 영화 장면들이 아직도 강렬하게 남아 있어서 나는 새로 만들어진 영화는 일부러 보지 않았다. 1973년에 제작된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그 유명한 탈출 장면과 ‘바람처럼 자유롭게’(Free as the wind)라는 주제곡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빠삐용´은 앙리 샤르에르라는 실제 인물의 자전적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샤르에르는 1930년 살인 사건에 연루돼 누명을 쓰고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의 섬’(Devil’s Island)에 유배된다. 13년간 그는 아홉 번에 걸친 치열한 시도 끝에 마침내 그 섬을 탈출한다. ‘악명 높은 세계 10대 유배지’ 가운데 하나인 ‘악마의 섬’은 1854년 나폴레옹 3세가 유배지로 지정한 이래 1940년대까지 8만여명의 죄수가 수감됐고, 사망률이 워낙 높아 사형수들의 목을 자르는 ‘건조한 기요틴’이라 불릴 정도였다. 유배지 탈출의 예는 비단 ‘빠삐용’만이 아니다. 패배한 나폴레옹은 1814년 지중해의 작은 섬 엘바로 유배된다. 그러나 ‘제비꽃이 피면 돌아오겠다’던 약속처럼 10개월 후 그는 탈출해 파리로 돌아온다. 유배지에서도 황제의 복장을 벗지 않고 노심초사하던 그는 승전국들이 영토 배분 문제로 탁상공론을 벌이는 틈을 타서 탈출했던 것이다. 소비에트 연방의 최고 권력자였던 스탈린은 여덟 번 체포돼 일곱 번 시베리아로 유배됐지만 여섯 번이나 탈출을 했던 기이한 경력자다. 미하일 바쿠닌은 시베리아 유배지를 탈출해 육로로 북태평양 연안까지 가서 이곳에서 일본으로 간 뒤 일본에서 미국으로 갔다가 미국에서 서유럽으로 건너가 제네바에서 무정부주의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유배지 탈출 시도는 무궁무진하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물러나게 된다.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영창대군을 살해한 폐모살제(廢母殺弟)의 부도덕과 명나라를 배반하고 후금과 우호관계를 맺었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이로써 광해군과 폐비 유씨, 폐세자 이지와 폐빈 박씨는 강화도로 유배된다. 이때 폐세자 이지는 땅굴을 파고 탈출을 시도한다. 그런데 땅굴을 파서 밖으로 나가기는 했지만 곧 발각돼 인조의 명에 따라 자진을 하게 된다. 한편 동정을 살피던 폐빈 박씨도 남편이 체포되는 것을 보고 역시 자진을 한다. 아들 부부를 잃은 충격으로 폐비 유씨 또한 세상을 하직하자 광해군은 제주도로 옮겨지고 4년 후 죽는다. 왜 그들은 탈출하려 했을까? 그러나 탈출은 쉽지 않다. 체포가 항시 뒤따르기 때문이다. 소련의 비밀경찰들은 ‘체포학’이라는 이론을 정립할 만큼 치밀했다. 소련의 민낯을 파헤친 솔제니친의 소설 ‘수용소 군도(群島)’의 제1장은 바로 체포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체포! 이것은 당신 전 생애의 파멸을 뜻한다”고 했다. 그렇다. 파멸하고 싶지 않기에 우리는 탈출을 감행한다. 우리는 현재 신자유주의라는 투기적 욕망과 이기적 경쟁 체제 안에 갇혀 살고 있다. 이 아비규환 속에서 과연 탈출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애초 탈출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유배된 채 이것이 삶이라며 자위하고 때로 강변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삶이 과연 정상인가? 정상처럼 보이는 이상한 정상은 아닌가? 그 끝은 혹시 파멸이 아닌가? 그렇다면 탈출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악마의 섬을 탈출했던 빠삐용처럼 투기적 욕망과 이기적 경쟁이라는 악마의 체제를 탈출할 수는 없는가? 나는 유배인인가 탈주자인가? 대체 나는 누구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 미군의 눈에 비친 ‘1950년대 속초의 일상’

    미군의 눈에 비친 ‘1950년대 속초의 일상’

    강원 속초시립박물관은 미국인 리처드 록웰로부터 1950년대 초반 속초와 양양, 고성지역을 촬영한 슬라이드 필름 278점을 기증받았다고 19일 밝혔다. 1953년과 1954년 양양군 속초리(현재 속초시)에서 해군으로 근무했던 록웰이 직접 촬영한 것이다. 위 사진은 속초 동명항과 파티마성당을 담은 것이고, 아래 사진은 속초 설악산 신흥사 적묵당 앞에서 가마를 든 미군 모습이다. 속초 연합뉴스
  • 공군 병사가 디자인한 ‘캐릭터 브랜드’, 국제 디자인대회 수상

    공군 병사가 디자인한 ‘캐릭터 브랜드’, 국제 디자인대회 수상

    공군 병사가 직접 기획한 ‘공군 의복 캐릭터 브랜드’가 국제적인 디자인 어워드에서 수상할 예정이다. 공군은 15일 “독일 뮌헨 비엠더블유 벨트(BMW Welt)에서 개최되는 ‘아이에프 디자인 어워드’(iF Design Award) 브랜딩 부분에서 본상을 수상한다”고 밝혔다. 공군의 본상 수상작은 공군 의복 캐릭터 브랜드다. 이번 작품은 공군 병사가 직접 기획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공군본부 미디어콘텐츠과에서 근무하는 서희강(29) 병장은 ‘누구한테 주더라도 자신 있게 줄 수 있는 기념품을 만들어 보자’라는 생각에서 이번 기념품 뱃지를 제작하게 됐다.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과를 재학하며 미술을 공부한 서 병장은 자신의 경험을 살려 이번 공모전에 지원하게 됐다. 이번 수상작인 공군 의복 캐릭터 브랜드는 전투복, 정복, 약정복, 비행복, 정비복 등 공군 장병이 임무를 위해 착용하는 50여종의 피복을 캐릭터로 디자인한 것으로, 이번 공모전에서 디자인의 독창성과 창의성, 활용성을 높게 평가받았다. 1954년부터 실시된 독일 아이에프 디자인 어워드는 미국 ‘아이디이에이 디자인 어워드’(IDEA Design Award), 독일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Red Dot Design Award)와 함께 세계 3대 디자인 공모전으로 인정받는 세계적인 대회다. 올해 아이에프 디자인 어워드에는 6400여 점의 작품이 출품돼 20개국 67명의 전문가가 심사를 진행했다.서 병장은 “”입대 전만 해도 이런 멋진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라면서 “제가 속한 곳에서 쓸모 있고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며 수상 소감을 밝혔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주민 발의 조례안 1년 내 의결 의무화

    주민 발의 조례안 1년 내 의결 의무화

    회사원 지역내주민자치활동 공가 인정 인구 100만명 이상 특례시 지원 확대 행정대집행 폭염·한파 때 제한 인권보호 국가안전대진단에 점검 실명제도 도입 업무보고 지각 브리핑… “소통기회 상실”앞으로 직장인이 지역 내 주민자치 활동에 참여하면 ‘공가’(공적 업무를 위한 휴가)로 인정받는다. 인구 100만명이 넘지만 광역시로 승격하지 못한 대도시에 ‘특례시’ 명칭을 부여하고 맞춤형 지원책을 제공한다. 국민의 안전권을 대폭 강화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안전기본법을 제정한다. 국가안전대진단 점검실명제를 도입하고 제정한 지 반세기가 넘은 행정대집행법을 개정해 한파나 폭염 땐 행정대집행(철거 등 강제집행)을 중단한다. 행정안전부는 11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브리핑을 열고 이런 내용의 ‘2019년 업무계획’을 발표했다. 김부겸 행안부 장관은 “‘모두가 안전한 국가, 다 함께 잘사는 지역’이라는 목표 아래 분권과 균형발전, 국민안전을 정책 방향으로 설정했다”고 설명했다. 우선 민간기업 회사원이 주민자치회에 참여하면 공가를 낼 수 있게 해 지역자치 활동 참여를 독려한다. 주민이 발의한 주민조례안을 지방의회가 1년 안에 의결하도록 해 지방의회 심의 의무를 강화했다. 인구 100만명 이상 대도시에 ‘특례시’ 명칭을 부여하고 추가 지원을 확대한다. 현재 대통령 소속 자치분권위원회가 지역거점도시와 특례시 육성을 위한 구체적 지원 방안을 논의 중이다. 소방공무원을 국가직으로 전환해 소방관 처우를 개선한다. 2022년까지 소방공무원 2만명을 충원하고 소방복합치유센터(소방전문병원) 건립도 추진한다. 위험 시설에 대한 데이터베이스(DB)를 구축하고 점검 이력을 국민에게 공개한다. 이르면 내년에 ‘국가안전정보 통합정보시스템’이 마련된다. 현재 270개 안전관련법에 대한 안전 개념을 통일하기 위해 ‘안전기본법’을 제정한다. 1954년 제정된 행정대집행법을 65년 만에 전부개정한다. 인권보호를 위해 폭염과 한파 땐 집행을 제한하고 10일 이상의 최소 이행 기간을 주기로 했다. 김 장관은 “올해 행안부의 최고 역점과제 가운데 하나는 지방자치법 전면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해 자치분권의 법적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라며 “그렇게 돼야 국가 기능을 지방에 이양해서 지방자치단체의 권한과 책임을 높이고 재정분권도 설득력을 얻을 수 있게 된다”고 강조했다. 관가에서는 ‘이번 업무보고 브리핑 시기가 너무 늦은 것 아니냐’고 지적한다. 중앙부처의 신년 업무계획 보고는 연말이나 연초에 이뤄진다. 보통은 대통령에게 대면 보고한 뒤 질의응답을 주고받는 형식으로 이뤄진다. 문재인 정부 초기에는 업무 영역이 비슷한 부처들이 함께 모여 토론을 하는 등 형식에 변화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올해 문 대통령은 고용노동부와 산업통상자원부 등 7개 부처만 직접 보고를 받았고 나머지 21개 부처는 최근에야 이낙연 국무총리에게 서면 형태로 업무계획을 전달받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서울 방문과 제2차 북미 정상회담 등 외교 일정에 지나치게 힘을 쏟다가 부처와의 업무 소통 기회를 놓쳤다는 비판이 나온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월드피플+] 6명 고아 키우며 평생을 바친 100살 독신 할아버지의 삶

    [월드피플+] 6명 고아 키우며 평생을 바친 100살 독신 할아버지의 삶

    6명의 고아를 키우며 한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100살 할아버지의 사연이 큰 감동을 주고 있다. 하얼빈 TV는 지난 4일 100세 생일을 맞은 펑윈송(彭云松) 할아버지의 사연을 소개했다. 사연은 1954년 당시 35살의 펑 씨가 철길 위에서 굶주린 8살 남자아이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금세 쓰러질 듯 굶주린 아이에게 만두를 건넨 펑 씨는 차마 아이를 두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나랑 함께 가자꾸나”라고 말하며 아이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15년간 그는 5명의 남자아이와 1명의 여자아이를 집에 들였다. 모두 버림을 받거나 부모를 여읜 채 오갈 데 없는 고아들이었다. 이렇게 각기 성이 다른 6명의 아이는 한집에 살면서 가족이 되었다. 펑 씨는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하얼빈의 공사장에서 막노동하거나, 폐지를 주우며 돈을 벌었다. 1954년 당시 한 달 월급은 30위안(한화 약 5000원)에 불과했지만, 귀갓길에는 늘 아이들이 좋아하는 먹거리를 들고 왔다. 또 누가 맛있는 걸 주면 잘 간직했다가 집에 돌아와 아이들에게 먹였다. 아이들은 날마다 아빠가 돌아오는 시간을 손꼽아 기다렸다. 동네 어귀에 푸른 작업복을 입은 아빠의 모습이 보이면 6명의 아이는 한꺼번에 달려가 아빠를 맞았다.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나눔의 기쁨은 컸다. 한번은 중추절에 펑 씨가 받은 월병이 하나뿐이었다. 펑 씨는 월병 하나를 6조각 내어 아이들에게 한 조각씩 먹였다. 아이들은 평생 먹어본 음식 중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그 시절 나누어 먹었던 작은 월병 조각을 꼽는다. 펑 씨에게는 한가지 신념이 있었다. 아이들을 비단 먹고, 입히는 것뿐 아니라 제대로 교육을 받도록 키우겠다는 것이었다. 비록 가난했고, 아이들 학비를 벌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야 했지만, 아이들을 돈벌이에 동원하지 않았다. 한번은 아이들이 돈을 벌기 위해 폐지를 줍다가 펑 씨에게 들켰다. 그는 “또다시 폐지를 줍는다면 다시는 너희를 키우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돈을 벌려고 욕심을 내다보면 그릇된 길로 들어설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웃들은 펑 씨에게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내고, 어서 장가를 들라”며 여자를 소개해 주었다. 여성은 펑 씨를 마음에 들어 했지만, 6명의 고아를 키운다는 사실을 알고는 줄행랑을 쳤다. 아이들은 아빠가 결혼하면 버림받을까 두려워 “아빠, 제발 우리를 버리지 마세요”라고 울며불며 매달렸다. 펑 씨는 “누가 너희들을 버린다고 했느냐?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고, 절대 그럴 리도 없다”고 말했다. 이후 누가 선을 보여준다고 하면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펑 씨의 보살핌에 아이들은 모두 바르게 자라나 성인이 되어 제각각 가정을 꾸렸다. 자식들은 서로 아버지를 모시겠다고 했지만, 펑 씨는 홀로 고향인 산동성의 누추한 집에서 생활했다. 하지만 2013년 펑 씨가 94살 되던 해, 더는 참을 수 없던 자식들의 간곡한 설득에 비로소 하얼빈으로 돌아와 자식들과 살고 있다.한편 각기 성이 다른 6명의 자식의 평생소원은 성씨를 ‘펑’ 씨로 바꾸는 것이다. 하지만 펑 씨는 “너희들이 비록 고아일지라도 근본을 나타내는 성이 있는데 이를 바꿀 순 없다”고 고집했다. 하지만 2013년 그의 자식들은 눈물을 쏟으며 “다음 생에 태어나도 우리는 한 가족이다”라면서 ‘성’을 바꾸게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펑 씨는 자식과 함께 한 지 60여 년 만에 아이들에게 ‘펑’ 씨 성을 허락했다. 한때 세상에 버림받아 홀로 남겨져 어둠 속에서 살아갔을 아이들이 지금은 모두 반듯하게 자라 행복한 가정을 일구었다. 장성한 자식들은 펑 씨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이룰 수 없었던 ‘기적’이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받은 사랑을 더 큰 사랑으로 갚고 있다. 다섯째 아들은 17년 전부터 노인을 위한 무료 서비스 여관을 운영 중이다. 지금까지 130명이 넘는 과부, 빈곤 노인을 위해 무료 숙박, 음식을 제공하는데 100만 위안(1억7000만원)이 넘는 돈을 썼다. 그는 “아버지에게 배운 인애(仁爱) 정신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올해 100살이 된 펑 씨는 “내가 아이들을 훌륭한 인재로 키우지는 못했을지라도 반듯하게는 키웠다”면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했다. 지금은 손주들이 할아버지에게 수시로 연락을 하고 찾아온다. 빈곤한 생활이었지만, 가슴으로 품은 고아들은 아들, 딸이 되어 그에게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한 사랑의 열매를 가져다주고 있다. 이종실 상하이(중국)통신원 jongsil74@naver.com
  • 한미 UFG도 폐지… 하반기 ‘전작권 전환 검증’ 별도 훈련한다

    대북 유화책 차원… 美방위비 압박도 작용 UFG 대신 5월말 민·관·군 ‘을지태극연습’ 테러·재난 대응 등 포괄적 안보 훈련으로 軍, 안보 우려에 “한미 공조는 이상없어” 한미가 ‘3대 연합훈련’ 중 하나인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연습을 폐지하고 하반기에 새로운 연합 지휘소 연습(CPX)을 대체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앞서 한미는 지난 2일 연합훈련인 키리졸브 연습(KR)과 독수리 훈련(FE)을 폐지한 바 있어 3대 연합훈련이 모두 폐지되는 셈이다. 군 관계자는 6일 “한미 간 결정으로 올해부터 UFG는 사실상 종료될 예정”이라며 “대신 연합 지휘소 연습인 ‘19-2 동맹’ 연습을 시기와 규모를 결정해 하반기 중 실행할 계획”이라고 했다. UFG 연습은 매년 한미가 유사시 작전 수행에 필요한 협조관계와 업무수행 절차 계획을 평가하고 개선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행되는 훈련이다. 1954년부터 유엔사 주관으로 시행하던 포커스렌즈 연습과 한국 정부 훈련인 을지연습을 1976년 통합하면서 을지포커스렌즈(UFL) 연습으로 시작됐고 2008년 지금의 UFG 연습으로 명칭을 바꿔 실시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한반도 안보상황 변화에 따라 한국 정부는 지난해 을지연습을 유예하고, 5월에 실시되는 한국군 단독 훈련인 태극연습과 통합해 실시하는 방향으로 계획해 왔다. 이에 따라 UFG 연습 중 한국 정부 훈련인 을지연습을 떼어내 태극연습과 통합한 민·관·군 훈련인 ‘을지태극연습’이 오는 5월 27일부터 30일까지 나흘간 실시된다. 새로운 을지태극연습은 외부로부터 무력공격을 격퇴하는 군의 독자적인 작전 수행 능력 배양과 테러, 대규모 재난 대응 등을 포함하는 포괄적 안보개념을 적용해 실시된다. 특히 올해 한미는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에 따라 하반기 연합 지휘소 연습에서 한국군 주도로 이뤄지게 될 전작권 검증 절차인 최초운용능력평가(IOC) 훈련을 병행해 실시한다는 방침이다. 전작권 전환 검증 절차는 최초운용능력평가와 완전운용능력(FOC) 평가, 완전임무수행능력(FMC) 평가 등 단계적으로 이뤄지는데 군은 올해 진행되는 최초운용능력평가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군 관계자는 “하반기 연합 지휘소 연습은 ‘19-1 동맹’ 연습과 같이 위기관리와 방어 개념의 작전 위주로 진행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잇따른 연합훈련 폐지는 ‘하노이 회담’ 결렬에도 비핵화 대화 국면을 이어 나가기 위한 ‘대북 유화책’ 차원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이와 함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연합훈련 중단 배경으로 비용 문제를 연일 강조하고 나서면서 한국에 대한 방위비 추가 압박 의도도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김열수 한국군사문제연구원 안보전략실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하노이 회담 후 문재인 대통령에게 중재자 역할을 부탁하면서도 연일 전략자산 전개 비용 등을 언급하며 한국에 대한 압박을 통해 내년도 방위비 분담금을 증가시키려 하는 의도”라고 분석했다. 일각에서는 연합훈련이 잇따라 폐지됨에 따라 우려의 목소리도 계속 나오고 있다. 아직 북한의 비핵화 조치가 확실히 담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섣부른 연합훈련 폐지 및 축소는 안보 공백 발생과 함께 한미 동맹이 흔들릴 수 있다는 비판이다. 이에 대해 군 관계자는 “한미가 외교적 노력을 뒷받침하고 새로운 안보환경에 맞는 형태의 훈련으로 대체한다는 것에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며 “대비태세와 한미 공조에는 문제가 없다”고 반박했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서울광장] 국가교육위, 독립기구로 위상 높여야/박현갑 논설위원

    [서울광장] 국가교육위, 독립기구로 위상 높여야/박현갑 논설위원

    최근 한국유치원총연합회(한유총) 사태는 이윤 추구라는 시장 논리로 사업하던 사람들이 공교육에 대한 이해 없이 기득권만 외치다 빚은 참사다. 국가의 중장기적 교육정책 입안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사례이기도 하다. 국가의 인재 양성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무상교육은 1954년 초등학교에서 출발해 2004년 중학교 3학년 전면 실시까지 50년이 걸렸다. 생애 학습주기 중 첫 단계인 무상 유아교육은 1999년 저소득층 자녀부터 시작됐다. 재원 문제로 유아교육은 필수가 아닌 선택에서 뒤늦게 공교육 영역으로 들어온 것이다. 지난주 정권과 관계없이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을 토대로 안정적이고 일관된 중장기 교육정책을 세울 문재인 정부의 국가교육위원회(국교위) 설치안이 공개됐다.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인 국가교육회의와 교육부가 밝힌 방안에 따르면 국교위는 대통령 소속 합의제 행정위원회로 직무의 독립성을 보장받는다. 위원회는 장관급 위원장과 상임위원 2명을 포함해 15명 이내로 구성한다. 대통령 지명 5명, 국회 추천 8명, 교육부 차관과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 대표 등 당연직 2명이다. 위원 임기는 3년이며 연임도 가능하다. 위원장은 국무위원은 아니지만 국무회의에 출석해 발언하며 예산 편성 및 인사권도 행사한다. 위원회 기능은 10년 단위 국가교육기본계획 수립, 국가인적자원 정책, 대입·교원·학제개편 등 주요 교육정책의 장기적 방향 수립, 교육과정 연구·개발·고시, 지방교육자치 강화, 교육정책에 대한 국민 의견 수렴 등이다. 정부는 국교위 설치 법안을 상반기 중 국회에 발의해 연내 출범시킨다는 방침이다. 설치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현 방식으로는 정치적 중립성 담보가 힘들 것이다. 국교위의 법적 지위를 대통령 소속이 아니라 헌법재판소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처럼 헌법에 근거한 독립적 국가기구로 만드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고 본다. 하지만 개헌이라는 현실적 문제가 있는 만큼 국가인권위원회처럼 행정부와 입법부로부터 독립적 국가기구로 규정하는 게 차선책이다. 위원 구성안도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을 담보할 수 있도록 손봐야 한다. 방안은 전체 15명의 위원 중 교육부 차관에다 5명의 위원 등 6명을 대통령이 지명하게 된다. 국회 추천 8명 가운데 여당 추천까지 감안하면 10명 안팎을 친정부 인사로 채우는 식이다. 10년 단위 기본계획 마련 등 장기적 교육정책을 다루겠다면서 5년 단임제 대통령과 여당이 위원들을 절반 이상 임명하는 것은 국교위 설립 취지와 배치된다. 대통령이 교육단체, 학부모 등으로부터 추천받아 위원을 지명 추천한다고 하지만 이는 간접 추천 방식으로 추천의 실효성 논란이 제기될 수 있다. 국회도 민의의 대변자인 만큼 야당 추천 몫은 제외하고 대통령 몫 5명의 위원 지명권을 관심 있는 모든 교육단체나 학부모 단체 등에 넘겨 이들이 합의해 추천한 인사를 대통령이 임명하면 정치적 중립성 시비는 해소될 것이다. 이 같은 사회적 합의 과정을 거친 뒤에도 국교위 구성이 지지부진하다면 그때는 현 방안대로 해도 논란이 없을 것이다. 위원의 정당 가입 등 정치활동 금지도 기본 요건이 돼야 한다. 교육부 개편도 필요하다. 교육부는 사회부총리 부서로 존치하되 유·초·중등교육 분야는 시도교육청으로 더 넘기고 고등·평생·직업교육 중심으로 개편한다고 한다. 개편될 교육부가 맡는다는 대학의 공공성과 자율성 확대는 규제 강화와 혁신을 동시에 요구하는 이중적 성격이 강하다. 이로 인해 대입 정책을 다룰 국교위와 업무가 중첩될 수 있다. 교육부는 국교위의 고등교육 정책을 집행하는 기구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그동안 소홀히 했던 직업 및 평생교육 중심으로 역량을 키울 필요가 있다. 이 경우 고용노동부의 노동 부문과 합쳐 인적자원부 등으로 부처 명칭을 변경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우리 교육은 정권 교체기마다 정권의 입김아래 혼란과 갈등을 되풀이해 왔다. 박근혜 정부 시절 국정교과서 파동은 권위적이고 획일적인 정책 추진이 얼마나 큰 폐해를 일으키는지 보여 준 대표적 사례였다. 헌법과 교육기본법에 명시된 교육의 전문성과 정치적 중립성은 허언이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육개혁심의회, 교육혁신위원회 등 대통령 직속 위원회가 있었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 정권의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미래교육 청사진을 그릴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교육의 자주성과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을 구체화할 방안마련에 초점을 둬야 할 것이다. eagleduo@seoul.co.kr
  • 해방 뒤 경찰간부는 다 친일파? “독립운동가들도 있었다”

    해방 뒤 경찰간부는 다 친일파? “독립운동가들도 있었다”

    광복군 출신 장동식·백준기·송병철 등 다수경찰청, 독립운동가 경찰 유공자 추진‘순사’로 대표되는 일제 강점기 경찰은 3·1운동 당시 민초들을 잡아들이는 등 암울했던 시대에 부역했다. 당시 조선인 경찰 다수는 광복 뒤 미군이 진주하자 미군정 경찰로 재차 채용됐다. 무장 독립투쟁의 선봉에 섰던 약산 김원봉을 해방 뒤 체포·고문했던 친일 경찰 노덕술(1899~1969)이 대표적이다. 이 때문에 우리 근·현대사에서 ‘경찰=부역’ 이미지가 있었다. 실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따르면 해방 직후인 1946년 기준으로 서울시내 10개 경찰서장 가운데 9명이 일본경찰 출신이었다. 나머지 1명은 군수 출신이다. 하지만 경찰청은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해방 뒤 경찰을 이끌었던 간부들도 많았다”며 3·1운동 100주년인 올해 독립운동가 출신 경찰관 32명을 발굴해 알리고 있다. 26일 경찰청이 발굴한 독립운동가 출신 경찰관의 면면을 보면 광복군 소속으로 일제와 싸우다 해방 이후 경찰관이 된 이들이 많다. 경찰 최고위직까지 오른 장동식 치안총감이 대표적이다. 그는 1943~1945년까지 광복군 정보장교로 복무하면서 일본군 내 한국 병사들을 탈출시킨 뒤 광복군에 합류시키는 역할을 했다. 광복 이후 순경으로 입직했다. 1954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1960년 총경으로 다시 임용된 뒤 1971년 6~12월 내무부 치안국장을 지냈다. 독립운동의 공을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기도 했다.또 광복군에서 적(敵) 정보수집 등의 임무를 수행했던 백준기 경위, 광복군에 입대해 항일활동을 하다 임시정부에서 근무한 송병철 순경, 천호인 등도 광복군 출신 경찰관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비밀결사 조직이나 학생단체 등에서 활동하다 해방 이후 경찰관이 된 경우도 있다. 노기용 총경은 1920년 항일 비밀결사 조직 ‘군사주비단’에 가담해 임시정부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했다. 1923년 군자금 모금 계획 도중 일제에 체포돼 7년을 감옥에서 보내기도 했다. 노 총경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1924년부터 학생단체를 조직해 항일 학생운동을 하고 일본 동경에서 신간회 활동을 했던 박노수 총경, 경찰이 되기 전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 활동 중 체포되어 1년 복역했던 최철룡 경무관 등도 해방 이후 경찰조직에 몸 담았다. 안창호 선생의 조카딸이기도 한 안맥결 총경, 초대 수도여자경찰서장이었던 양한나 경감, 부산여자경찰서장을 지낸 이양전 경감도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하거나 항일단체에서 활동했다. 경찰청은 자체적으로 발굴한 독립운동가 출신 경찰 가운데 서훈을 받지 못한 경찰에 대한 독립유공 심사를 보훈처에 요청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통영 수용소에서 극적으로 만난 동생… 인제 전투서 생사 달리해”

    “통영 수용소에서 극적으로 만난 동생… 인제 전투서 생사 달리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 20회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5)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실종 군인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9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했다. 20년간 노력해 마침내 이규원 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은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1926년 10월 25일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를 졸업하고 해병 소위로 참전하여 1950년 11월 12일 24세 때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 송성환 어머니·친형 인터뷰 일시: 1999년 2월 15일 장소: 인천광역시 연수구 옥련동 271-5 장간란 씨 자택 대담: 장간란(전사학생 송성환 어머니) 송종환(전사학생 송성환 친형) 이경종(인천학생 6·25 참전관 설립자) 이규원 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 ※송성환은 전쟁 중에 전사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와 친형의 인터뷰로 대신합니다.친동생 송성환에게 부모·집 지키라고 당부 6·25사변 때 나(송성환의 친형 송종환)는 철도공무원으로 철도국에 다녔다. 1950년 가을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하여 우리 인천이 또다시 북한괴뢰군에 점령당할 위기에 몰리자, 그해 12월 초에 국민방위군(제2국민병) 소집통지서가 나한테 왔다. 1950년 12월 17일 6년제 인천중학교(현재 제물포고교)에 모인 국민방위군(제2국민병)들과 같이 남하하였다. 나는 남하하는 전날 밤 내 동생 성환이에게 너는 아직 어리니까 부모님 모시고 집을 지키고 있으라고 당부의 말을 하였다. 하루 50㎞씩 걸어 국민방위군 수용소 도착 1950년 12월 17일 날 나는 인천에서부터 걸어서 내려가서 이듬해 1951년 1월 3일이 되어서야 경상남도 통영방위군 제3수용소(통영충렬국민학교)에 도착하였다. 그때 하루에 120리(약 50㎞) 길을 걸었을 때도 있었는데 내려가는 도중에 참으로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때 굶거나 얼어 죽은 국민방위군(제2국민병)들이 많이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문경새재도 걸어서 넘어갔으며, 고생고생하며 경상남도 통영에 도착하였다. 그때 통영충열국민학교에 들어갔는데 들어가 보니까 그곳은 국민방위군(제2국민병) 제3 수용소였으며 그곳이 마지막 집결지였다. 통영충열국민학교에서 친동생 송성환 만나 그때 막 통영충열국민학교에 도착하였는데 “형”하고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까 거기에는 생각지도 않게 내 동생 송성환이가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면서 “네가 여기까지 웬일이냐”고 물으니까 동생 성환이가 “형이 인천에서 내려간 이튿날 친구들과 같이 인천학도의용대를 따라 남하하여 여기 통영까지 오게 되었는데 와서 보니까 인천에서 떠난 국민방위군(제2국민병)이 여기 온다는 소식을 듣고 혹시 형님이 이곳에 오지 않나 하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 내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그때 이러한 내 모습이 안 돼 보였던지 성환이는 자기가 갖고 있던 양담배 채스타 한 갑과 끼고 있던 은반지를 내게 빼 주면서 “형, 나는 아직 쓸 돈이 남아 있으니까 염려 말고 이것 받아요. 우리들은 곧 부산에 있는 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들어가니까 형 몸조심하세요.”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친동생 송성환이 준 은반지 팔아 밥 사 먹어 그때 나도 동생에게 “군에 입대하더라도 몸조심하고 우리 다음에 다시 만날 때는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자”라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그때 내 동생이 준 은반지를 팔아서 허기를 달랜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통영 방위군 제3 수용소(통영충열국민학교)에서 3월까지 수용되어 있다가 제주도로 건너가 육군 제1 훈련소에 입소하여 훈련받고 060 군번을 받고 육군이 되었다. 그 후 나는 육군 보충대를 거처 강원도 전투지역으로 배치되었다. 당시 5사단장은 민기식 준장이었다. 그때 내가 간 전투부대가 5사단 27연대 2대대였다. 이때 3대대에는 인천학도의용대로 인천에서부터 같이 온 내 아우 친구들도 많이 보였다. 그때 우리 5사단이 속해 있는 군단이 포위되면서 후퇴할 때 많은 병력 손실이 있었다. 인제 전투에서 당한 손 부상으로 명예제대 그때 포위당해 매일 걸어서 후퇴하는데 며칠 몇 밤을 잠을 못 자고 후퇴만 하니까 그때는 ‘잠 한번 실컷 잤으면…’ 하는 것이 제일 큰 소원이었다. 그때 내가 인제 전투에서 손에 부상 당해 육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게 되었을 때인데 며칠을 후퇴하면서 전투하느라 씻지를 못해 손을 치료해야 하는데 손에 때가 많이 묻어 있어 간호사한테 손 내밀기를 주저한 일이 있었다. 그 후 육군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그 해 1951년 10월에 그 부상으로 인하여 나는 상이 명예제대를 하게 되었다. 친동생 송성환의 전사 사실 뒤늦게 알아 이렇게 제대를 하여 인천 집에 돌아와 보니까 내 동생 성환이의 전사통지서가 와 있는 것이었다. 그 당시 동생 전사통지서를 받으신 우리 아버지께서 낙담하시는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때 속이 상하셨던 우리 아버지께서는 전사한 동생 때문에 한이 되시어 상심하시다가 동생의 전사통지서를 받고 2년 뒤 44세의 젊은 나이에 그만 세상을 하직하셨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5사단 강원도 인제지구 전투에서 거의 같은 날에 동생은 전사하고 나는 부상당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제대한 후에야 알게 되었으며 제대하기 전 5사단에 있을 때 내 동생 친구들은 동생이 전사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나한테 숨기고 있었던 것이었다.송성환 어머니 “전사 아들 생각 때마다 눈물” 우리 성환이는 6년제 공립 인천공업중학교 3학년이었던, 사변 나던 해(1950년) 겨울 집을 떠날 때 전쟁에 나가는 것을 큰 영광으로 알고 떠났어… 어렸을 때부터 전쟁놀이를 좋아했는데 전쟁놀이를 하다가 총에 맞아 죽는시늉을 할 때는 쓰러지면서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면서 쓰러지곤 하였는데 끝내는 피어보지도 못하고 전쟁터에서 쓰러져 전사했어. 49년 전에 전사한 아들이지만, 그 전사한 아들을 생각할 때마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요.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다음호에 21회 계속 ■ 참전기 20회를 마치며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중학교 3학년 16살에 자원입대 후 참전하여 전사한 아들을 49년간 그리워하면서 슬퍼한 어머님의 눈물이 이 나라를 지킨 것이다. 이규원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
  • [박상익의 사진으로 세상읽기] 사브리나의 아버지

    [박상익의 사진으로 세상읽기] 사브리나의 아버지

    영화 ‘사브리나’를 기억하시는지. 빌리 와일더 감독이 1954년에 만든 로맨틱 드라마(오드리 헵번 주연)를 1995년 시드니 폴락 감독이 리메이크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연출자 시드니 폴락은 ‘인디아나 존스’의 톱스타 해리슨 포드와 ‘가을의 전설’ 등으로 급부상한 줄리아 오몬드를 전격 캐스팅해 한 편의 아름다운 로맨틱 드라마를 완성했다. 일부 평론가들은 오드리 헵번이 맡았던 사브리나 역을 줄리아 오몬드에게 맡긴 것은 역사상 최악의 캐스팅이라면서 리메이크 작품을 혹평했다. 세기의 여우(女優) 오드리 헵번에 대한 흠모가 줄리아 오몬드에 대한 폄하로 이어졌으리라. 하지만 나는 ‘각별한 이유’로 원작보다는 리메이크 작품에 주목한다. 리메이크 작품에는 1954년 원작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인상적인 장면이 추가됐기 때문이다. 사브리나의 아버지 페어차일드는 부잣집 운전기사다. 영화에서 그는 딸 사브리나에게 옛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자신이 왜 자가용 운전기사로 취직했는지를 설명한다. 그가 젊은 날 직업 선택에서 고려한 조건은 오직 하나, ‘독서할 시간적 여유’를 많이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영화에서도 그는 대부분 독서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고용주가 살림집으로 내준 별채도 온통 책으로 가득하다. 부잣집 운전기사 일을 하면서 틈만 나면 책을 손에 드는 그의 모습은 무척 낯설고 신기하다. 한국 사회의 통념과 상식으로 보면 지극히 이질적이고 운전기사답지 않은(!) 모습이다. 리메이크 ‘사브리나’의 특별한 대목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한국 영화에서도 ‘독서할 시간적 여유’만을 직업 선택의 기준으로 삼는 페어차일드 같은 캐릭터를 설정할 수 있을까? 물론 가능하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감, 즉 리얼리티가 뚝 떨어질 것이다. 책과 점점 멀어지고 있는 우리네 풍토에서는 대단히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설정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은 2005년 대전의 헌책방 모습. 그러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한때 신간을 먼저 읽으려는 학생들로 북새통을 이루던 대학가 서점들도 폐업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더이상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부자연스러운 풍경이기에.
  • 1시간 3500번 ‘명품 가위질’… 남자가 완성됐다

    1시간 3500번 ‘명품 가위질’… 남자가 완성됐다

    호텔서 근무 땐 총리·재계 총수 등 단골 홍대에 숍 열고 3년간 제자 16명 키워 “젊은층이 찾는 한국만의 바버숍 목표”지난 9일 서울 마포구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인근의 ‘찰스바버샵’. 폐점 시간인 오후 8시인데도 손님 머리를 매만지는 정철수(68)씨의 손놀림이 분주했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가위로 다듬어 자르고 드라이기로 말린 뒤 2대8로 빗어 넘겨 포마드까지 꼼꼼히 바르고 나서야 작업이 마무리됐다. ‘바버숍’은 일종의 프리미엄 이발소다. 기존 이발소의 낡은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남성만을 위한 일대일 스타일링과 면도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54년 경력의 이용기능 장인인 정씨가 2015년부터 운영하는 숍도 이런 ‘세련됨’을 추구한다. ‘마스터’인 정씨는 푸른색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나머지 ‘바버’(이발사) 3명은 로고가 새겨진 새하얀 가운을 입는다. 오전 10시부터 정씨가 하루에 맡는 손님은 많아야 10명. 1명의 머리를 만지는 데 1시간 이상 걸리기 때문이다. 보통 미용실이나 이발소에서 성인 남성 커트는 20~30분이면 끝난다. “바리캉 대신 가위만 쓰다 보니 시간이 두 배로 든다”는 게 정씨의 설명이다. 그는 “바리캉으로는 아무리 잘해도 1~2주 지나면 머리가 삐죽삐죽 튀어나오는데, 가위로만 커트하면 자랄 때도 모양이 예쁘게 난다”고 말했다. 그는 “커트 한 번에 3500번 정도 가위질을 한다”고 했다. 쓰는 가위 종류도 수십 가지다. 긴 머리와 짧은 머리용이 다르고, 숱치기용도 따로 있다. 이런 정성 덕에 그의 숍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계산하면서 한 달 뒤 예약을 잡고 가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10대 시절 가위를 잡은 정씨는 조선·힐튼·신라 등 일류호텔 이발소에서 일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자연스레 정·재계 유명 인사들의 ‘전용 이발사’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의 손을 거친 국무총리만 정일권, 신현확, 정원식, 한승수 등 4명.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등 대기업 총수도 단골손님이었다. 코오롱그룹은 이원만 초대회장부터 이동찬 명예회장, 이웅열 회장과 이규호 전무까지 집안 4대의 머리를 모두 정씨가 도맡을 정도로 사이가 각별했다. 김무성 자유한국당 의원, 홍정욱 헤럴드 회장 등은 아직도 정씨의 ‘손맛’을 잊지 못해 홍대까지 찾아온다. 은퇴할 나이인 환갑을 훌쩍 넘겨 바버숍을 차린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이용기능사가 살아남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과거 시내 곳곳의 이발소는 퇴폐 업소라는 편견 때문에 젊은층이 찾지 않죠. 이 때문에 우리 이용 기술은 일본에 비해 수십년이나 뒤처졌습니다.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바버숍을 만들어 한국만의 기술을 개발하고 시장을 키워나가는 게 꿈입니다.” 홍대에 숍을 연 뒤 3년이 조금 넘는 동안 길러낸 제자는 16명. 숍이 입소문을 타 유명해지고 이발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달라지며 바버가 되고 싶다는 청년들의 문의가 늘고 있다. 그는 “외국에선 90살 먹고도 일하는 바버가 많다.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활동하고, 돈이 없어서 배우지 못하는 친구들에게 기술 전수도 해주고 싶다”며 활짝 웃었다.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
  • 反외세 항전의 성지 ‘하노이’… 北 의지 내보이자 美 전략적 양보

    反외세 항전의 성지 ‘하노이’… 北 의지 내보이자 美 전략적 양보

    하노이, 佛에 대항한 독립전쟁 중심지 김정은, 외교 지위·정상국가 면모 부각美는 中 겨냥 베트남과 밀접 과시 소득베트남 수도 하노이가 오는 27∼28일 열릴 북·미 2차 정상회담 개최지로 결정된 것은 북한의 강한 의지와 미국의 양보 및 전략적 고려가 작용했다. ‘천년 고도’인 하노이는 프랑스에 대항한 독립전쟁 중심지였고, 북베트남 수도였다가 1976년 통일 베트남의 수도가 된 ‘반(反)외세 항전의 성지’다. 북한은 그동안 하노이를 개최지로 주장했고, 미국은 중부 해안도시 다낭을 지목하면서 물밑 줄다리기를 벌여 왔다. 개최 장소의 정치적 상징성뿐 아니라 경호·의전 등을 고려하며 수싸움을 전개해 온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하노이에 자국 대사관이 있어 경호·회담 준비가 용이하고, 베트남 국가주석 및 총리와 연쇄 회담 개최 등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국제 외교무대에서 최대 부각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했다. 김 위원장의 베트남 국빈방문설도 이런 맥락에서 흘러나왔다. 김 위원장에게는 조부 김일성 주석이 1958·1964년 당시 호찌민 등 베트남 지도부와 회담을 가졌던 곳을 54년 만에 방문한다는 점에서도 각별한 의미가 있다. 김 위원장의 전용기 ‘참매1호’의 가능한 항속거리 및 베트남까지 열차 이용이 가능하다는 점도 고려됐다. 반면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017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방문했던 다낭을 원했다. 현지에서의 경호 및 의전 경험도 쌓여 있다. CNN은 지난 8일 “다낭과의 경합 속에서 하노이를 선택한 것은 미국의 ‘작은 양보’”라고 지적했다. 워싱턴포스트는 “하노이는 김정은에게 베트남 지도자들과의 별도 양자 회담을 열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 그의 국제적 지위를 강화해 줄 수 있다”고 분석했다. 북한의 ‘정상국가’로서의 이미지 부각도 극대화할 수 있다. 미국에도 미·중 간 무역전쟁, 남중국해 갈등 등 전략적 경쟁 구도 속에서 ‘체제 전환국’이자 미측에 가까운 베트남과의 밀접한 관계를 과시한다는 점에서 밑질 것이 없는 선택이다. 하노이는 2006년 APEC 정상회의를 열었고, 회담 인프라도 잘 갖춰져 있다. 가장 유력한 트럼프 대통령의 숙소 후보는 JW메리어트 호텔이다. 도심에 있으면서도 입구를 봉쇄하면 섬처럼 외부와 단절된다. 2016·2017년 두 차례 하노이를 방문한 버락 오바마 당시 미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지난해 베트남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도 이 호텔을 이용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2017년 하노이를 찾았을 때 묵었던 소피텔 메트로폴 호텔도 물망에 올라 있다. 김 위원장의 숙소로는 멜리아 호텔이 거론된다. 북측 인사들이 이용하는 5성급 호텔로 북한대사관과 가깝다. 지난해 말 베트남을 방문한 리용호 북한 외무상도 이곳에 묵었다. 2006년 APEC 정상회의 당시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 이용한 쉐라톤 호텔과 인터컨티넨탈 호텔도 물망에 오른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만날 회담장은 APEC 정상회의를 치렀던 국립컨벤션센터(NCC)가 꼽힌다. 시설도 좋고 트럼프 대통령의 유력 숙소 후보지인 JW메리어트 호텔과 붙어 있어 외부 접근을 차단한 채 도보 이동도 가능하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反외세 항전의 성지 ‘하노이’… 北 의지 내보이자 美 전략적 양보

    反외세 항전의 성지 ‘하노이’… 北 의지 내보이자 美 전략적 양보

    베트남 수도 하노이가 오는 27∼28일 열릴 북·미 2차 정상회담 개최지로 결정된 것은 북한의 강한 의지와 미국의 양보 및 전략적 고려가 작용했다. ‘천년 고도’인 하노이는 프랑스에 대항한 독립전쟁 중심지였고, 북베트남 수도였다가 1976년 통일 베트남의 수도가 된 ‘반(反)외세 항전의 성지’다. 북한은 그동안 하노이를 개최지로 주장했고, 미국은 중부 해안도시 다낭을 지목하면서 물밑 줄다리기를 벌여 왔다. 개최 장소의 정치적 상징성뿐 아니라 경호·의전 등을 고려하며 수싸움을 전개해 온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하노이에 자국 대사관이 있어 경호·회담 준비가 용이하고, 베트남 국가주석 및 총리와 연쇄 회담 개최 등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국제 외교무대에서 최대 부각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했다. 김 위원장의 베트남 국빈방문설도 이런 맥락에서 흘러나왔다. 김 위원장에게는 조부 김일성 주석이 1958·1964년 당시 호찌민 등 베트남 지도부와 회담을 가졌던 곳을 54년 만에 방문한다는 점에서도 각별한 의미가 있다. 김 위원장의 전용기 ‘참매1호’의 가능한 항속거리 및 베트남까지 열차 이용이 가능하다는 점도 고려됐다. 반면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017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방문했던 다낭을 원했다. 현지에서의 경호 및 의전 경험도 쌓여 있다. CNN은 지난 8일 “다낭과의 경합 속에서 하노이를 선택한 것은 미국의 ‘작은 양보’”라고 지적했다. 워싱턴포스트는 “하노이는 김정은에게 베트남 지도자들과의 별도 양자 회담을 열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 그의 국제적 지위를 강화해 줄 수 있다”고 분석했다. 북한의 ‘정상국가’로서의 이미지 부각도 극대화할 수 있다. 미국에도 미·중 간 무역전쟁, 남중국해 갈등 등 전략적 경쟁 구도 속에서 ‘체제 전환국’이자 미측에 가까운 베트남과의 밀접한 관계를 과시한다는 점에서 밑질 것이 없는 선택이다. 하노이는 2006년 APEC 정상회의를 열었고, 회담 인프라도 잘 갖춰져 있다. 가장 유력한 트럼프 대통령의 숙소 후보는 JW메리어트 호텔이다. 도심에 있으면서도 입구를 봉쇄하면 섬처럼 외부와 단절된다. 2016·2017년 두 차례 하노이를 방문한 버락 오바마 당시 미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지난해 베트남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도 이 호텔을 이용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2017년 하노이를 찾았을 때 묵었던 소피텔 메트로폴 호텔도 물망에 올라 있다. 김 위원장의 숙소로는 멜리아 호텔이 거론된다. 북측 인사들이 이용하는 5성급 호텔로 북한대사관과 가깝다. 지난해 말 베트남을 방문한 리용호 북한 외무상도 이곳에 묵었다. 2006년 APEC 정상회의 당시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 이용한 쉐라톤 호텔과 인터컨티넨탈 호텔도 물망에 오른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만날 회담장은 APEC 정상회의를 치렀던 국립컨벤션센터(NCC)가 꼽힌다. 시설도 좋고 트럼프 대통령의 유력 숙소 후보지인 JW메리어트 호텔과 붙어 있어 외부 접근을 차단한 채 도보 이동도 가능하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강경화 외교·비건 특별대표 ‘악수’강경화(오른쪽) 외교부 장관이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 청사에서 2박 3일간 방북 실무협상을 마치고 돌아온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를 만나 협상 결과를 설명받기에 앞서 웃으며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 ‘원조 섹시’ 마릴린 먼로의 이혼 발표 드레스 가격은

    ‘원조 섹시’ 마릴린 먼로의 이혼 발표 드레스 가격은

    20세기 최고의 섹시 배우로 꼽히는 여배우 마릴린 먼로가 이혼 발표 당시 입었던 드레스가 경매에 붙여진다. AP통신 등은 먼로가 1954년 미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의 전설 조 디마지오와 이혼 기자회견 때 입었던 검은색 드레스를 경매에 붙인다고 6일(현지시간) 전했다. 먼로는 1954년 10월 6일 디마지오와 이혼 발표 기자회견 때 모직 소재의 이 드레스를 입고 나왔다. 은막의 톱스타 먼로와 56 경기 연속 안타 기록을 갖고 있는 미 메이저리그 톱스타 출신 디마지오는 그해 1월 14일 결혼했지만 9개월만에 헤어졌다. 먼로는 기자회견 당시 말을 하지 않았고, 변호사 제리 기슬러가 두 사람이 갈등으로 인해 헤어진다고 이혼 사유를 말할 때 눈물만 글썽거렸다. GWS옥션 관계자는 “먼로의 이혼 드레스의 경매 가격은 10만~15만 달러(약 1억 1200만~1억 6800만원) 사이가 될 것”이라면서 “당시 먼로를 추억하는 이들에게 아주 가치있는 애장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GWS옥션측은 판매자의 이름을 공개하지 않았다. 한편 디마지오가 먼로에게 직접 손글씨로 써서 보낸 러브레터는 2014년 12월 다른 경매에서 7만 8125달러에 팔리기도 했다. 워싱턴 한준규 특파원 hihi@seoul.co.kr
  • “끌려간 학생들 대부분 실종…참전 중인 나 대신 모친이 졸업장 받아”

    “끌려간 학생들 대부분 실종…참전 중인 나 대신 모친이 졸업장 받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 19회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5)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실종 군인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9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했다. 20년간 노력해 마침내 이규원 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은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1926년 10월 25일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를 졸업하고 해병 소위로 참전하여 1950년 11월 12일 24세 때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김춘식 ▲인천학도의용대 창영분대 ▲인천중학교 3학년 15세 때 참전 1935년 5월 25일 인천에서 태어나서, 6년제 공립 인천중학교 3학년 재학 중 자원입대한 후에 참전하여 1954년 4월 만기 명예 제대함.김춘식 인터뷰 일시 1997년 8월 23일 장소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이규원치과 3층) 대담 김춘식 이경종(인천학생 6·25 참전관 설립자) 이규원 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6·25 사변이 터지고 인민 횡포에 시달리다 6년제 인천중학교(현재 제물포 고교)에 다닐 때 6·25 사변이 일어났다. 당시 우리 집은 동구 창영국민학교 옆에 있었으며 가족으로는 부모님과 나 이렇게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인민군이 인천에 들어오자 곧바로 학생들을 인민의용군으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나중에 보니까 끌려간 학생들은 대부분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실종되었다. 그해 여름을 집에서 숨어 지내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맞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자유의 몸이 된 나는 우리 동네에 생긴 인천학도의용대 창영분대에 가입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기억나는 대원은 박희송과 해병으로 참전하여 전사한 동네 친구 최춘국이다. 인천학도의용대 따라 남하 이후 국군의 후퇴로 전세가 불리해져서 우리들은 1950년 12월 18일 남하하게 되었다. 그날은 눈이 많이 내려 미끄러운 길을 걸어서 밤이 깊어서 안양까지 갔다. 안양에서 민박으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수원으로 또 걸어갔으며 수원부터는 기차도 타고 걸어서 가면서 20일 정도 걸려서 부산에 도착하였다. 부산진국민학교의 육군 제2 훈련소 입소 나는 1951년 1월 10일 부산진국민학교에 있었던 육군 제2 훈련소에 입소하였다. 이후 20여일 훈련받은 후 군번 받고 정식 군인이 되어, 경상남도 진주농업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8사단에 배치받았다. 그때 내 소속은 8사단 16연대 2대대 8중대 소속이었다. 이렇게 배치된 8사단은 병력보충 등 재편을 끝나게 되었으며 그런 얼마 후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그때 우리 부대가 진주에서 이동하여 주둔한 지역이 경상남도 산청이라는 곳이었다. 그 후 함양, 거창 등 많은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공비토벌작전에 참전하였다.지리산 공비토벌 작전 당시 공비토벌은 주로 겨울에만 하는데 산속에 있는 갈대가 눈이 내려 쓰러질 때가 공비들이 활동을 못 하고 노출이 되니까 그때가 토벌작전 하는데 제일 좋은 시기였다. 이후 다시 공비토벌작전에 투입됐다가 다시 전방 중동부 전선으로 이동하여 지형능선 전투에 참전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 부대가 전투했던 지형능선이라고 하는 것은 산세가 다섯 손가락처럼 뻗었다고 해서 지형능선이라고 하였다. 나는 휴전이 되고 9개월 후인 1954년 4월달에 만기명예제대를 하였다. 어머니가 대신 받은 나의 인천중학교 졸업장 당시 군에서의 제대는 상이제대뿐이었으며 휴전 후 내가 1차로 만기 명예 제대를 하였다. 나는 인천중학교 3학년 15세에 국군에 자원입대해서 만 3년 4개월 만에 제대했다. 이때는 전쟁 중이라서, 제대는 심하게 다치거나 아니면 특별한 경우에만 제대를 시켰고, 1954년에 만기제대라는 것이 생겼다. 나는 군에서 제대한 후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내가 다니던 인천중학교에 찾아갔으나 제대 후 당시는 6년제 중학교가 3년제 중·고등학교로 분리가 되는 학제개편 때문에 고등과는 없어지고 3년제 중학교만 그대로 있는 것이었다. 6·25 당시 나는 인천중학교 3학년 재학 중에 국군에 자원입대하였고 내가 전쟁터에 있을 때인 1951년 8월에 어머니께서는 전쟁터에 있는 아들을 대신하여 눈물을 흘리시며 중학교 졸업장을 받으신 것이었다.6년제에서 3년제로 바뀐 인천중학교 그리하여 1954년 제대 후 인천중학교 졸업장을 갖고 인천중학교를 찾아갔을 때는 중학교 3학년이 최고 학년이 되어 내가 돌아갈 학년은 없는 것이었다. 교장선생님을 만난 자리에서 나의 재입학 문제를 의논했더니 교장선생님은 “아직 고등학교 인가가 안 나서 그런데 이제 곧 고등학교가 인가되면 받아줄 터이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실망하여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서 돌아갔다. 나의 재입학을 받아준 인천기계공고 집에서 실망하여 지내고 있었는데, 같이 자원입대하고 제대한 한 친구가 인천기계공고에 알아보았더니 학교에서 한번 학교로 오라는 연락이 왔으니까 같이 가보자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친구를 따라 인천기계공고에 가서 교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이 있는 자리에서 “어릴 때 입대하여 제대하게 된 과정과 제대한 후 다시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말을 하였더니, 학교 측에서는 내 말을 다 듣고 나서 “좋다”고 하더니 “담배나 술을 하는가?” 하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네, 합니다”라고 대답하니까 그것은 전부 군대에서 배운 거라 하니까 학교에서는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학교에 와서는 절대로 담배나 술을 할 수 없으며 그 대신 집에서 사복 갈아입고 마시되 학교 재학생들에게는 절대로 나쁜 영향이 미치지 않게 한다면 입학을 허락하겠다”고 하면서 조건을 붙이는 것이었다. 나는 위 조건을 지키기로 하고 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 1학년에 편입학하고 평탄히 학교생활을 하고 졸업하였다.남기고 싶은 말 6·25 때 우리 인천의 어린 학생들이 전쟁터에 나가 싸운 것은 그 시대에 닥쳐온 우리들의 운명이려니 하고 자원입대하여 전쟁에 참전하였다. 그리고 배움의 시기를 놓치고 전쟁터에서 세월을 보낸 데 대하여는 그 개인마다의 손실은 컸겠지만 고향 인천과 나라를 위하여서는 보람 있는 행동이었다고 나름대로 생각하고 지내왔다. 6·25 참전 인천학생들의 참전 역사를 찾는 일은 국가나 지방 자치단체가 함이 당연한 일인데도 큰 비용과 정신 그리고 시간이 소모되는 이 엄청난 일을 개인이 하는 데 대하여 감사한 마음은 뭐라 표현할 수 없으며 부디 이 인천학생 6·25 편찬사업이 무사히 성공하여 우리 인천의 후대(後代)들에 인천의 자랑으로, 그리고 좋은 본보기로 남겨졌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다음호에 20회 계속
  • 제주4·3 수형인들 ‘무죄’… 71년 恨 풀었다

    제주4·3 수형인들 ‘무죄’… 71년 恨 풀었다

    군사재판 불법 인정한 첫 사법적 판단 ‘억울한 옥살이’ 18명 재심서 명예회복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제주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제주 4·3사건 수형인 18명이 71년 만에 조금이나마 한을 풀게 됐다. 법원이 17일 4·3 당시 국가의 부당한 공권력으로 이뤄진 군사재판은 불법이었다고 처음으로 판단했다. 제주지법 형사2부(부장 제갈창)는 17일 임창의(98) 할머니 등 제주 4·3 생존 수형인 18명이 청구한 ‘불법 군사재판 재심’ 선고공판에서 공소기각 판결을 내렸다. 공소기각은 형사소송 절차에 문제가 있다고 법원이 판단하면 실체를 심리하지 않고 소송을 끝내는 것으로, 수형인들에게 사실상 무죄가 선고된 셈이다. 재판부는 “군법회의는 법률이 정한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면서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는 절차를 위반해 무효”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특히 “피고인들이 일관되게 ‘어떤 범죄로 재판받았는지 모른다’고 진술했고, 어떤 자료에서도 예심과 소장 자료를 찾을 수 없다”면서 “단기간에 그 많은 사람들을 군법회의에 넘겨 절차가 제대로 이뤄졌다고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제주 4·3사건은 1947년 3·1절부터 1954년 9월까지 7년 7개월간 제주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군경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양민이 희생된 사건이다. 제주4·3도민연대 등에 따르면 최소 1만 4000여명, 많게는 3만여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수형인들은 내란죄, 국가경비법 위반죄 등의 누명을 쓰고 불법 군사재판을 받은 뒤 전국 각지 형무소로 끌려갔다. 수형인 명부에는 2530명의 명단이 기록돼 있지만 대부분 행방불명되거나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현재 생존자는 32명으로 파악된다. 이 가운데 김경인(87·여)·김순화(86·여)·김평국(89·여)·박내은(88·여)·박순석(91·여)·부원휴(90)·양근방(86)·양일화(90)·오계춘(94·여)·오영종(89)·오희춘(86·여)·임창의(98·여)·정기성(97)·조병태(90)·박동수(86)·한신화(97·여)·현우룡(94)·현창용(87)씨 등 18명은 2017년 4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법원은 지난해 9월 5일 재심을 결정했고, 네 차례의 재판이 열렸다. 이들은 ‘공소기각’ 판결이 내려지자 재판부만 멍하니 바라보며 한 많은 세월을 곱씹었다. 글 사진 제주 유영재 기자 young@seoul.co.kr
  • 불법재판으로 옥살이한 제주 4·3 수형 생존자, 70년 만에 무죄 인정

    불법재판으로 옥살이한 제주 4·3 수형 생존자, 70년 만에 무죄 인정

    부당한 국가폭력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제주 4·3 수형 생존자 18명이 70년 만에 사실상 무죄를 선고받았다. 제주지법 제2형사부(부장 제갈창)는 제주 4·3으로 군사재판에 넘겨져 징역을 지낸 제주 4·3 수형 생존자 18명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불법 군사재판’ 재심 청구사건 선고공판에서 청구인에 대해 공소기각 판결을 내렸다. ‘공소기각’은 공소제기 절차가 법률에 위반해 무효일 경우 유·무죄 판결에 앞서 소송을 그대로 끝내는 결정 또는 판결을 말한다. 결국 이번 재심 사건에서 공소기각 판결이 나왔다는 것은, 제주 4·3 당시 이뤄진 군사재판이 불법적으로 이뤄져 재판 자체가 무효임을 뜻하는 것이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제주 4·3 수형 생존자들)에 대한 군법회의는 법률이 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이번 판결로 재심을 청구한 제주 4·3 수형 생존자들은 사실상 무죄를 인정받았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일관되게 ‘어떤 범죄로 재판을 받았는지 모른다’고 진술하고 있는 점, 당시 제주도에 소개령이 내려진 시기 등 제반사정을 종합할 때 단기간에 그 많은 사람들을 군법회의에 넘겨 예심조사나 기소장 전달 등 절차가 제대로 이뤄졌다고 추정하기 어렵다”면서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는 절차를 위반해 무효일 때에 해당한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즉 제주 4·3 당시 공소제기 절차가 법률의 규정을 위반해 무효인 경우에 해당한다고 판단하고 공소기각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번 판결은 제주 4·3 당시 계엄령 아래 이뤄진 군사재판이 불법이며, 그로 인해 감옥에 갇힌 수형인들이 무죄임을 인정한 최초의 사법적 판단이다. 앞서 검찰도 지난달 17일 열린 결심공판에서 청구인들에 대한 공소사실이 특정되지 않았다며 ‘공소기각 판결’을 선고할 것을 재판부에 요청했다. ‘제주 4·3’은 1947년 3월 1일 미군정 경찰이 제주도민을 향해 발포한 사건을 시작으로 좌익 진영의 무장대가 1948년 4월 3일 일으킨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무장대와 군·경 토벌대 간 무력 충돌, 그리고 군·경이 토벌대를 무력 진압하는 과정에서 최대 약 3만명의 도민들이 학살당한 사건을 가리킨다. 이 중 제주 4·3 수형인은 당시 불법 군사재판으로 영문도 모른 채 서대문형무소와 대구·전주·인천형무소 등 전국 각지로 끌려가 수감된 사람들을 말한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수형인 명부에는 2530명의 명단이 올라 있으며, 상당수가 행방불명되거나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재심을 청구한 수형 생존자 18명은 1948∼1949년 내란죄 등 누명을 쓰고 징역 1년에서 최대 20년 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이들 외에도 10여명의 수형 생존자가 더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황성기 칼럼] 한·일은 파탄을 두려워 말라

    [황성기 칼럼] 한·일은 파탄을 두려워 말라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2008년 금융위기 때 얘기다. 위기의 불똥이 독감 백신 원료를 일본에서 수입하던 국내 업체에까지 튀었다. 2007년 100엔에 700원대이던 엔·원 환율이 그해 연말 사상 최고치인 1600원대까지 치솟은 것이다. 일본에 지불해야 할 대금이 두 배 가까이 늘어난 업체 대표는 발만 동동 굴렸다. 수입을 줄이면 되지만,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에서 독감 백신 대란이 일어날 것은 불 보듯 했다. 결국 대표는 일본으로 달려갔다. 사정을 털어놓자 백신 원료를 공급해 주던 일본 업체는 흔쾌히 가격을 깎아 줬다. 당시 일본에는 독감 백신을 제조하는 업체가 6곳 있었다. 5곳이 일본 국내 공급을 전담하고 1곳만이 한국 등에 원료를 공급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 업체는 거래처인 한국 업체와의 수십년 신의를 고려해 값을 내려 주고, 원료 공급에도 차질이 없도록 해 줬다. 백신 원료를 전량 수입하던 시절이다. 대표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지금도 제약업계에서는 한·일 간의 정치적 위기에도 상관없이 상생하는 일들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과 일본의 갈등이 최고조로 치닫고 있다. 아베 신조 총리의 “한국 대법원 징용 판결은 국제법 위반” 발언(1월 1일)에 외교부가 유감을 표명하고, 문재인 대통령의 “일본 정부는 좀더 겸허해져야” 언급(1월 10일)에 외무성 부대신이 “심히 유감”이라고 되쳤다. 양국 정상의 발언에 대해 외교 당국자가 신경질적으로 일일이 대응하는 것은 근래에 드문 일이다. 서로 대포만 안 쐈지 ‘할 테면 해봐라’ 식의 전쟁 일보 직전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지난해 10월 강제징용 판결이 지금 한·일 위기를 불렀지만, 뿌리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 있다. 1951년부터 시작된 한·일의 국교정상화 협상은 근본적인 문제는 외면한 채 정치 타결로 끝났다. 일제 식민지배가 합법(일본)이냐 불법(한국)이냐를 협정에 분명히 하지 못했다. 한국이 첫 회담부터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제기하자 일본이 맹반발하고 미국이 얼른 개입해 봉인해 버렸다. 외과 수술로 치면 몸 안에 메스를 놔두고 봉합한 것이다. 한·일의 지난 54년은 청구권협정이란 부실한 불쏘시개로 일제 강점이란 역사 문제를 강제 소각시키려 한 과정이었다.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한 대법원 판결이 보여 주듯 결코 태울 수 없는 불완전 연소였는데도 말이다. 한·일이 식민지배의 불법·합법성, 개인청구권의 소멸 여부를 명명백백 가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 타지 못한 역사 문제로 언제든 불타오를 수 있다. 한·일이 65년 이전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고 그래서 파국을 맞을 수도 있지만, 각오를 해야 한다. 일본은 링에 올라와 있다. 법원이 배상판결의 강제집행 신청을 받아들이자 분쟁 상태라 보고 국제사법재판소(ICJ)에 끌고 가기 위한 전 단계로 우리 측에 외교 협의를 요청했다. 우리는 총리실 주도로 관계 부처 대책을 짜고 있다고 하나 두 달 넘게 감감무소식이다. 한국 정부 책임하의 징용 피해자 보상, ICJ 회부 등의 아이디어가 나오고 있으나 이참에 협정의 근본을 따져 화근을 남기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 양국의 포털 사이트를 보면 반일에 비해 반한·혐한 보도가 압도적으로 많은 데 놀란다. 2000년대까지 한국의 반일 보도가 양적에서 우세했으나 지금은 한국은 무관심에 가깝고 일본 혼자서 지글지글 들끓는다. 2002년 김정일·고이즈미 평양 정상회담 이후 일본에 불어닥친 ‘북한 때리기’가 십수년 지나 ‘남한 때리기’로 바뀐 느낌이다. 한국에 대한 혐오와 증오가 증식되는 게 남의 나라 일이라고 방치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1000만명이 왕래하고 물건, 돈이 자유롭게 오가는 21세기에 외교 대립이 뭔 대수냐 할 수 있다. 그러나 양국의 정치 갈등이 앞서 든 제약회사 사례와 같은 풀뿌리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옳지 않다. 파탄과 관계 회복의 갈림길에 왔다. 단기처방, 백약이 무효한 시대다. 파탄을 두려워 말고 한·일이 끝까지 싸워 보기를 권한다. 파탄 뒤의 후유증이 두렵거나 역사에 오명을 남길 것 같다면 두 지도자가 무릎을 맞대는 길밖에 없다. 문 대통령이나 아베 총리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서울 답방, 북·일 정상회담에 관심이 팔려 있다. 현해탄을 끼고 번지는 가까운 불부터 끄는 게 순서다. 정상의 셔틀외교가 7년간 중단된 지금의 한·일은 정상이 아니다.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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