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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용차 불붙여 미 문화원 돌진/광주 20대 영장

    【광주=최치봉 기자】 광주 남부경찰서는 6일 검찰의 「5·18 공소권 없음」 결정에 항의하는 표시로 승용차에 불을 붙인 채 광주아메리칸 센터를 기습하려 한 광주 민주청년회 회원 채희관씨(26·광주시 북구 삼각동)에 대해 일반건조물 방화 등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 신3김시대 청산 촉구/「71 동지회」

    과거 군사정권 시절 민주화운동을 펼치다 71년 위수령발동때 대학에서 제적·강제징집된 40대 운동권 대학생 출신의 모임인 「71동지회」 회원 10여명은 4일 서울 중구 세실레스토랑에서 「현 정국에 대한 40대의 역사적 책무를 선언한다」라는 제목으로 기자회견을 갖고 5·18 책임자 처벌 및 특별법 제정과 「신3김시대」 청산을 촉구했다. 이날 회견에는 원혜영민주당 의원,장기표21세기 사회발전 연구회장,최열 환경운동 연합 사무총장,손예철 한양대 교수,임춘식 한남대 교수,이광택 산업사회 연구소장,김건만 칠원무역 대표,김영철 고려물산 대표,이대용 공인회계사 등이 참석했다.
  • 단국대 교수 69명/「5·18」 기소 성명

    단국대 교수 69명은 1일 검찰의 5·18관련자에 대한 불기소 결정과 관련,성명을 내고 특별검사제 도입등을 촉구했다. 교수들은 성명서에서 『성공한 쿠데타가 사법심사의 대상인지 여부는 검찰이 아니라 사법부에서 결정할 문제인 만큼 검찰의 「공소권없음」결정은 월권행위일뿐 아니라 역사의식을 망각하고 제2의 내란행위를 묵인한 반역사적인 행위』라고 주장했다.
  • “5·18 기소” 화염병 시위/서총련 5백명 집회

    「서총련」 서부지구(의장 신성필 서강대 총학생회장) 소속 대학생 5백여명은 31일 하오 4시쯤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 명지대 「민주계단」에서 집회를 갖고 5·18 관련자를 즉각 기소하라고 촉구했다. 학생들은 『5·18 관련자에 대한 검찰의 공소권 없음 결정은 역사의 죄인을 옹호하려는 현 정부의 의지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며 특별검사제 도입 등을 요구했다. 이들은 집회를 마친뒤 하오 5시30분쯤부터 교문밖으로 나가 화염병 1백여개를 던지며 2시간 가량 시위를 벌였다.
  • 서울대교수도 「5·18」 기소 촉구/2백21명 성명

    서울대교수 2백21명은 29일 상오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검찰의 5·18관련 불기소처분등에 대한 우리의 견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검찰은 5·18관련 불기소처분을 취소하고 국민에게 사과하라』고 주장했다. 교수들은 성명서에서 『정부와 국회는 특별법을 제정하여 5·18내란의 주동자를 수사하여 헌정질서를 바로잡고 헌법재판소는 검찰불기소처분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시민·사회단체의 헌법소원을 받아들이라』고 촉구했다. 이날 성명서에는 지난 87년 4·13호헌조치 반대성명에 참여했던 1백22명보다 훨씬 많은 16개 단과대학과 3개 전문대학원에서 모두 2백21명의 교수가 서명에 참여했다.
  • 「5·18」 대법 재항고/고소·고발 6백14명

    5·18 고소·고발인 6백14명은 25일 이 사건 당시 진압군 지휘관이었던 김동진 합참의장등 현역군인 11명을 상대로 낸 재정신청을 고등군사법원이 기각한데 불복,대법원에 재항고했다. 대법원은 이에 따라 ▲「공소권 없음」 결정의 당부 여부 ▲이 사건 공소시효가 최규하 전대통령의 하야시점인 80년 8월16일인지 여부 등을 심리할 계획이다.
  • 12·12재수사 촉구/서명교수 결의대회

    「5·18」 관련자들에 대한 불기소결정에 항의하는 전국 서명교수 대표자모임 소속 교수 1백여명은 24일 하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여성백인회관에서 「5·18 내란 주동자 구속기소및 특별법 제정 촉구를 위한 결의대회」를 갖고 검찰의 불기소결정을 즉각 취소하고 12·12 사건에 대해 재수사할 것을 요구했다.
  • 김영삼 정부 30개월/김 대통령 어록

    ◎“개혁중단 주장은 손으로 강물 막으려는 것”­93년 4월 15일/“세계화는 구각 탈피,새로 태어나려는 결단”­95년 1월 26일/깨끗한 부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자랑이 될것­93년 8월 12일/국제사회엔 적도 친구도 없고 경쟁자만 있다­94년 11월 10일 문민정부는 역대 어느 정권보다 「개혁과 변화」에 대한 대통령의 열의가 높았다.그래서인지 시선을 끈 대통령의 「말」도 유달리 많았다.김영삼 대통령의 「말」을 살피면 문민정부의 통치이념과 철학을 엿볼 수 있으며 국정의 전반적인 기류도 읽을 수 있다.집권 전반기 김대통령의 어록을 간추려본다. ▷93년◁ ▲『부정부패의 척결에는 성역이 있을 수 없다.단호하게 끊을 것은 끊고 도려낼 것은 도려내야 한다.신한국 창조에는 눈물과 땀이 필요하고 고통이 따른다』­2월25일 대통령 취임사. ▲『부처간 이기주의나 책임을 방기하는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2월27일 첫 국무회의. ▲『추석 때 떡값은 물론 찻값도 받지 않겠다』『정치자금을 포함해 어떠한 이유로도 돈을 한푼도 받지 않겠다』­3월5일 기자간담회. ▲『혁명은 누구를 제척하거나 떼어낼 수 있지만 개혁은 모든 것을 끌어안아야 한다』­4월1일 동아일보 회견. ▲『공직사회에서 돈많은 사람이 부끄러운 시대가 오고 있다』­4월13일 재외공관장을 위한 연설회. ▲『「개혁을 중단해야 한다」,「속도를 늦춰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으나 이는 「손으로 강물을 막으려는 것」과 마찬가지다』­4월15일 대전의 주요인사 접견. ▲『토지·건물 등 부동산을 갖고 있는 것이 고통이 되도록 하겠다』­4월16일 신경제계획민간위원 조찬. ▲『5·18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은 훗날 역사에 맡기는 것이 도리라고 믿는다』­5월13일 5·18관련 담화문. ▲『우리사회의 부정부패는 뿌리가 깊어 단시일안에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따라서 개혁은 결코 일과성,또는 한시적인 것일 수가 없다』『5·18 문제는 「잊지는 말되 용서하자」는 방향으로 매듭지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7월16일 전남일보 회견. ▲『금융실명제 없이는 정치와 경제의 검은 유착이 단절될 수 없으며 활력이 넘치는 자본주의도 꽃피울 수 없다.이제 깨끗한 부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자랑이 될 것이다』­8월12일 금융실명제 실시 담화문. ▲『정당도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자생력을 가져야 한다.정치개혁을 위해 정치자금은 투명해야 하고 정치지도자들도 자기희생이 필요하다』­9월21일 정기국회 연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갖가지 배타적인 집단 이기주의가 분출하고 있다.국민에게 고통을 주는 집단행동은 한국병 중의 한국병이다』­10월5일 신경제추진회의. ▷94년◁ ▲『개가 짖는다고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공허한 논쟁에 매달릴게 아니라 실질적인 일에서 옳은 것을 구해야 한다』­1월1일 신년 하례서. ▲『세계화와 국제경쟁은 이제 더 이상 사치스런 말이 아니라 우리 앞에 다가온 현실이다』­1월6일 연두기자회견문. ▲『정치권이 거듭나지 않고는 진정한 국가경쟁력을 높일 수 없다.더 이상 허송세월할 여유가 없다』­2월15일 민자당 창당 기념연설. ▲『가야할 길은 멀고 달라져야 할 것은 너무도 많은데 지난 날의 체질과 관행이 우리의 발목을잡고 있다』­2월25일 취임1주년 기자회견문. ▲『야망을 가진 사람에게 무한경쟁은 절호의 기회다.그러나 야망은 잠자지 않고 있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꿈이다』­2월26일 서울대졸업식 치사. ▲『변화와 개혁을 거부하는 집단에게는 멸망의 길밖에 없다』­4월17일 신한국인과의 오찬. ▲『나는 필사즉생,필생즉사의 각오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4월28일 현충사 다례행제. ▲『교육개혁은 국민학교 교실에서부터 이뤄져야 한다』­5월2일 전국교육장 연수. ▲『경제외적인 이유로 기업이 고통받는 일은 없을 것이며 정치적 배려로 특혜를 받는 예는 더욱 없을 것이다.그러나 국가와 국민에 누를 끼치는 기업은 도태될 수 밖에 없다』­6월22일 건설진흥촉진대회. ▲『정부는 기본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명심해 주기 바란다』­8월9일 신경제 추진회의. ▲『세무조사에 성역이 있어서는 안되며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엄정한 조사를 받아야 한다』­8월17일 국세행정 실무자 오찬. ▲『모든 것이 다 깨끗하게되기는 참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이 나라의 부정부패는 너무도 뿌리가 깊게 박혔다.로마제국이 망한 것은 외침이 아니라 내부의 부정부패 때문이었다』­9월17일 세계한인 상공인 접견. ▲『비용이 많이 드는 정치는 필연적으로 부정부패를 수반할 수 밖에 없다』­10월14일 전국여성대회 치사. ▲『성수대교 붕괴사고는 「일어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라는 관점에서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이제 「빨리빨리」와 「적당히 그냥」에서 벗어나도록 하겠다』­10월24일 특별담화문. ▲『오늘의 국제사회에서는 적도 없고 친구도 없으며 오직 경쟁자만이 있다』­11월10일 APEC정상회담 출국인사. ▲『모든 나라들이 오늘을 살아남기 위해,또 차세대의 번영을 위해 뛰고 있다.이 대열에서 한발짝이라도 뒤지면 우리는 후손들에 의해 「역사의 죄인」으로 기록될 것이다』­11월19일 APEC정상회담 귀국인사. ▲『위대한 국민일수록 역사를 창조하고 불행한 국민은 역사에 끌려다닌다』­12월24일 청와대 국무회의. ▷95년◁ ▲『내가 야당을 하던 시절에는민주주의가 없고 언론의 자유도 없었다.지금은 언론의 자유가 너무 많고 아무거나 쓴다』­1월6일 연두기자회견. ▲『세계화는 새로운 시대를 맞아 「옛 껍질을 깨고 새로 태어나고자」하는 결단이며 차세대를 위한 개혁이다』­1월26일 세계화구상 관련 연설.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후회하는 사람이다.나는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지난 2년동안 혼신의 힘으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2월25일 취임2주년 기자간담회. ▲『지방선거는 정치인이 아니라 살림꾼을 뽑는 것이다.지방자치제가 결코 정치투쟁의 무대가 돼서는 안된다』­4월17일 서울시순방. ▲『가장 개혁이 안된 곳이 정치와 언론이다.언론은 오보하고도 사과하지 않는다』­4월25일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오찬. ▲『임기동안 헌법을 개정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4월26일 기자간담회. ▲『신문사들은 20∼50%를 무가지로 찍어 전부 쓰레기로 버리고 있다.신문사가 쓰레기를 줄이자고 한 말은 거짓이다』­6월9일 확대경제장관회의. ▲『차기 대통령은 세대교체된 새인물 중에 나올 것이 확실시된다.또 남북이 분단된 상황에서는 강력한 대통령제가 적절하다』­6월19일 미국 타임지 인터뷰. ▲『지방선거의 결과는 내 부덕의 소치다.변화와 개혁을 계속 추진하되 국민과 함께 하겠다』­7월5일 민자당 의원과의 청와대 조찬. ▲『국민의 대다수가 정치지도층의 세대교체를 갈망하고 있다.국민적 열망에 비춰 이를 실현하는 것이 나의 책무다』­7월21일 미국 비즈니스위크 인터뷰. ▲『개혁으로 소수 불이익을 받는 사람이 이의를 제기한다면 싸워서 이겨야 한다』­7월27일 워싱턴주재 한국특파원과의 간담회. ▲『두려움없이 변화와 개혁을 통해 대도와 정도를 걸어가겠다는 생각에 변함없다』­8월1일 민자당 상근당직자 및 당무위원 초청 조찬회.
  • 김영삼 정부 30개월/개혁정책 평가­2

    ◎금융·부동산 실명제/경제정의 실현위한 혁명적 조치/비실명 금융거래·부동산투기 쐐기/기업비자금 줄어 공명선거 큰 기여/검은 돈 은신처 「차명계좌」 줄이는게 과제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 후세의 사가들은 문민정부의 양대 실명제를 「김영삼의 경제개혁」으로 정의할 지 모른다.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는 우리사회의 오랜 관행인 비실명 금융거래와 명의신탁을 이용한 부동산투기에 쐐기를 박고,경제정의를 한걸음 앞당긴 「혁명적 조치」로 평가된다. 경제개혁 1호,금융실명제는 문민정부 이전부터 첨예한 논쟁이 일었던 사안이다.그러나 기득권층의 반발과 반대논리에 밀려 번번이 무산됐다.자금이탈로 금융시장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질 것이란 게 우려섞인 반대논리였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단행된 금융실명제는 그같은 반론의 허상을 여지 없이 깨부셨다.금융실명제는 금융시장에 큰 충격을 주지 않고 연착륙 했다. 93년 8월 12일 대통령의 긴급 경제명령으로 전격 단행된 금융실명제로 30여년의 비실명 금융관행이 종지부를찍고,모든 돈에 꼬리표가 달리게 됐다.금융자산의 이동과 소득발생의 투명성이 한껏 높아지면서 금융소득 종합과세로 이어지는 「금융개혁의 대장정」이 시작됐다. 정부는 그 해 10월 12일까지 3개월간의 실명전환 유예기간을 주고 이후에 전환하는 계좌에 대해서는 예금액의 10%를 과징금으로 물렸다.1년 뒤마다 과징금을 10%씩 올려 98년 이후에는 증여세 최고세율인 60%까지 확대하고 실명전환 계좌 중 소득이 불분명한 거액계좌에 대해서는 자금출처 조사를 병행토록 했다. 이렇게 해서 그해 10월 12일까지 가명예금의 97%인 2조7천6백4억원과 3조4천7백억원의 차명예금이 실명으로 전환됐다.지난 6월말 현재로는 가명예금의 98.5%(2조7천9백12억원)와 차명예금 3조5천49억원이 실명으로 전환했다. 지금도 진행 중인 금융실명제는 무엇보다 금융소득 종합과세 등 공평과세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이 가장 큰 성과다.정치판,공무원 사회,기업에도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음성적인 정치자금 조달이 어려워지면서 깨끗한 선거의 틀이 마련됐고 기업의 비자금이나사채 거래,무자료 거래도 한층 줄었다.공직자윤리법의 실효성을 보장,맑은 공직풍토를 만들고 신용카드 이용확대 등 신용거래도 활성화됐다. 문민정부는 금융실명제가 안착조짐을 보이자 개혁2호,부동산실명제를 단행했다. 95년 1월 6일 김영삼 대통령이 연두 기자회견에서 부동산실명제 실시방침을 밝혔고,이어 실명법안 마련과 공청회 등을 거쳐 3월 30일 「부동산 실권리자 명의등기에 관한 법률」이라는 이름의 개혁법안이 확정·공표됐다.시행일은 7월 1일. 신탁법에 의한 신탁등기,가등기와 같은 채무변제 목적의 양도 담보,종중 재산 등을 제외하고 일체의 명의신탁이 금지됐다.위반자에 대해선 형사처벌(5년 이하 징역)과 과징금(부동산가액의 30%)을 물리고 기존의 명의신탁은 내년 6월 30일까지 명의를 변경토록 했다.물론 이 과정에서 부동산 투기 등 과거의 법위반 사실이 드러나면 처벌케 했다. 부동산실명제는 사실 금융실명제의 후속개혁이다.금융실명제의 완결판이라 할 금융소득 종합과세가 96년부터 실시될 상황에서 부동산의 차명소유를 계속놔둘 경우 금융시장을 빠져 나온 비실명 자금들이 부동산으로 흘러들 수 있다는 정책적 판단이 도입배경이 됐다. 이 전에도 부동산등기특별조치법 등 부동산의 명의신탁을 규제하는 법률은 있었다.그러나 이들 법률은 명의신탁으로 부동산 투기를 한 경우 등에 대한 처벌위주였으며,명의신탁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부동산 명의신탁은 1912년에 제정된 「조선부동산등기령」에 종중명의로 등기할 수 있는 규정이 없어 부득이 종중원 이름으로 등기하게 된 것이 시초다.이후 판례로도 그 유효성이 인정돼 투기수단으로 활용돼 왔다.외지인이 살 수 없는 농지를 현지인 이름으로 사둔 것들이 그것이다. 부동산실명제는 명의신탁의 법적효력을 무효화함으로써 부동산 투기 등 탈법과 탈세의 소지를 원천적으로 줄게 했다.금융실명제와 함께 경제의 흐름을 「합법적이고 아주 맑게」 만들었다. 그러나 양대 실명제의 성과이면에는 해결해야 할 과제도 있다. 아직도 검은 돈들이 차명계좌를 은신처로 삼아 실명화를 거부하고 있다.최근 4천억원 비자금설 파문도 차명계좌 때문에 증폭된 것에 다름아니다.93년 10월 이후 지금까지 차명예금 중 실명으로 전환된 돈은 2백74억원에 불과하다.가명예금의 미전환액은 4백30억원으로 드러나지만 차명예금은 그 규모가 얼마인지 추정조차 안된다. 물론 모든 계좌의 차명여부를 가려내기란 불가능하다.그러나 차명계좌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금융소득 종합과세 대상(연간 이자소득 4천만원 이상)을 확대,차명계좌를 줄여야 한다는 지적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부동산실명제와 토지종합전산망의 가동으로 부동산 투기가 현저히 줄게 된만큼 투기시대에 만든 토지거래허가제도 등의 규제완화도 병행돼야 할 것이다. ◎사회·교육분야 개혁/성역없는 사정… 「권력형 비리」 척결/입시 자율권 폭 넓혀 열린교육 제시/쓰레기 종량제 실시… 환경의식 고취/「4·19」·「5·16」등 왜곡된 역사도 바로잡아 김영삼 대통령의 사회분야 개혁은 제도개혁에서 생활개혁에 이르기까지 집권 30개월동안 숨가쁘게 진행돼왔다.교육·법조개혁은 기존의 교육제도와 사법체계를 완전히 뛰어넘는 혁명적인 「제도개혁」으로 평가됐고 부실공사 근절·교통난 해결·민생치안 확립 등 「생활개혁」은 국민의 의식개혁으로 이어지고 있다. 문민정부 출범직후 개혁의 첫 단추는 공직남용 및 부정 부패자를 척결하는데 끼워졌다. 김대통령의 「성역 없는 사정」은 군인사 및 율곡사업비리,슬롯머신사건,상무대비리사건,국회노동위돈봉투사건,수서택지개발사건 등 굵직굵직한 권력형 비리관련자의 숙정으로 이어지면서 국민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유력 외지인들이 김대통령에게 「미스터 개혁」이라는 애칭을 붙일 정도였다. 김대통령은 또 취임과 동시에 『집권기간동안 한푼의 돈도 받지 않겠다』고 천명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정치자금의 투명화와 돈안드는 정치를 몸소 실천함으로써 「한국병」의 전형으로 지적되어온 정경유착의 고리를 단호히 끊은 것이다. 「민생개혁」도 동시에 진행됐다.부동산투기,대학특혜입학,세무비리,교육계촌지 등 우리 사회 곳곳에 곰팡이처럼 번져 있던 온갖 비리 유형이 여지 없이 들추어지고 처벌됐다. 누구나 어디서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열린교육을 내세운 5·31교육개혁조치는 시행에 들어가봐야 성패를 가늠할 수 있겠지만 일단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국·공립대의 본고사를 폐지하고 사립대에 입시자율권을 준 것은 학생들의 입시고통을 덜어주고 인성교육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로 지나친 입시위주의 교육으로 왜곡된 우리 교육의 현실을 바로 잡는 획기적인 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에 들어가는 것을 최대의 과제로 삼고 암기·주입식 교육으로 치달아 왔던 초·중·고 교육의 뒤틀린 모습은 잘못된 입시제도에 가장 큰 원인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이같은 입시제도의 개혁을 포함한 교육개혁은 문민정부의 최대의 과제로 떠올랐고 정부출범이후 발족한 교육개혁위원회의 오랜 연구끝에 교육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울만한 교육개혁 조치들이 지난 5월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정보화·세계화사회로 격변해 가고 있는 새로운 역사적 도전에 대응하는 교육체제인 「신교육」을 이념으로 하는 5·31 교육개혁안은 입시개혁말고도 중학교와 고교의 선택권 부여를 내용으로 하는 평준화 제도의 보완,대학의 다양화·특성화·정원 자율화 등 교육제도의 근본을 혁신할 수 있는 개선책들이 여럿 들어있다. 또한 열린 교육사회,평생 학습사회를 목표로 학점은행제와 시간제 등록제를 실시하고 학교의 전편입학을 확대해 교육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았고 학교 운영에 학부모 등이 참석할 수 있게 해 학교운영을 자율화했다. 5·31 교육개혁의 성공여부는 개혁안의 취지에 따라서 얼마나 충실하게 시행에 옮기느냐 하는 것일 것이다. 아무리 좋은 계획이라도 제도적으로 시행되지 않는다면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최근 교육개혁추진기획단을 발족시켜 개혁안의 추진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개혁안의 내용을 48개로 구분해 시행 목표시기와 세부 계획을 마련,여론 수렴작업에 나서고 있다. 여론 수렴은 시행에 옮기기 위한 가장 중요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여론과 배치된 제도는 반발만 살 것은 뻔하다.벌써 중·고교의 학교선택권 부여문제 등 학부모의 반발을 부르고 있는 사안들이나타나고 있다. GNP 5% 수준을 1차 목표로 하는 교육재정의 확보문제도 선결과제다. 이같은 문제점들을 해결하며 신교육의 참된 뜻을 실현하는 것이 문민정부의 남은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밖에 국민의 피부에 와닿은 「체감개혁」의 성공 사례로는 교통난해소를 위해 한시적으로 실시된 10부제와 버스전용차선제,시민의 환경의식을 고취시킨 쓰레기종량제 등이 꼽힌다.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등산로의 개방,궁정동 안가해체와 같이 권위주의통치의 상징을 국민에게 되돌려 준 일은 「작지만 계산할 수 없는 변화」로 평가받았다. 민족사의 복원을 위해 왜곡됐던 역사를 바로 잡은 것도 김대통령의 치적.「4·19의거」를 「4·19혁명」으로 새로 자리매김시켰고 「5·16혁명」을 「5·16군사쿠데타」로 정리했다.또 「5·18광주사태」는 「5·18광주민주화운동」등으로 역사속의 사건이 국민의 역사 감정과 시대적 인식에 맞게 재정립시켰다. 교육개혁과 함께 김대통령의 사회개혁분야의 양축을 이루는 법조개혁 또한 오는 97년 실시를 목표로 세계화추진위원회와 대법원에 의해 최대공약수 도출작업이 한창이다. 법조개혁은 법조인 증원,법학교육제도 개선,그릇된 법조관행 철폐 등 3가지로 개혁방향이 요약된다. 특히 이른바 「전관예우」「정실재판」과 같은 법조관행은 법률서비스의 최대 수요자인 국민으로부터 오랫동안 원성을 사왔다는 점에서 김대통령이 임기중에 반드시 마무리지어야 할 숙제다.
  • 5·18 기소촉구 결의안 채택/서울시의회

    서울시 의회는 21일 제79회 임시회 2차 본회의를 열어 5·18 광주시민 학살 관련자에 대한 기소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시의회는 또 5·18 광주민주화 운동 진압관련자 전원에 대한 공소시효 연장을 위한 특별법제정,특별검사제 도입 등도 요구했다.
  • 남총련과 어느 경찰청장의 악연/양승현 사회부 기자(오늘의 눈)

    시위를 막던 전투경찰들의 사진기자 폭행사건이 과거 「시위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전경 6명을 형사입건하고 지휘책임자 6명에 대해 징계 조치를 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어 가는 느낌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위결과의 겉모습일뿐 시위에는 항상 숨겨져 있는 속사정이 있게 마련이다.예전에도 관할경찰서장과 그 지역 대학 총학생회가 서로 친하면 시위진압에 앞서 어느 정도 적정선을 찾곤했다.「어느 선까지는 나가면 안된다」 「학생연행은 가능한한 없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타협점을 찾아놓고 시위를 하고 이를 막았다. 80년대말 딸이 고려대를 다닌 L모 성북경찰서장과 당시 고려대총학생회의 관계가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인간적인 정리도 작용했겠지만 서로 미리 정보를 어느 선까지는 파악할 수 있었다.돌발상황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대화의 통로가 사라지고 신뢰가 무너지면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이번 「5·18 기소관철 국민대회」 시위의 주축은 누가 뭐래도 광주·전남지역 대학생들의 모임인 「남총련」 학생들이었다.남총련 학생들과 서울경찰의 책임자인 안병욱 청장과는 「시위=진압」의 역사로 볼때 인연이 매우 깊다.그 인연은 악연이라는 표현이 더 적확할지 모른다.경찰내에서는 내로라하는 경비통인 안청장이 전남청장 재직시절 가장 신경을 쓴 업무가 시위진압이었다.안청장과 남총련 학생들과의 결정적인 계기는 지난해 7월 김일성 사망이후 전남 모대학 총학생회의 빈소설치 사건이었다. 「조작이다」,「사실이다」로 한때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던 이 사건으로 불신의 골이 패어질대로 팬 상태였다.당시 학생들이 안청장을 지명수배자로 정해 현상금을 내건 것은 그 단면의 하나이다.사진기자 폭행사건 뒤 안청장은 곤혹스런 표정으로 기자실에 들러 여담 비슷하게 『남총련은 (원칙적인 시위진압에 정평이 나있는) 나를 잘 알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그의 얘기속에는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간 데에는 자기에 대한 감정도 작용했을 수도 있다는 심정적 분석이 깔려있다. 「남총련 학생들은 과격해지기 쉽고 안청장은 시위엔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 인물」­이러한 선입견이 학생들을 불법·폭력시위로 잔뜩 긴장한 전경들이 진압과정에서 사진기자의 카메라를 밀친 한 원인이 되지 않았나 싶다.
  • 재야 소장파 「3김청산」 요구/20∼30대 1천명 선언문 발표

    ◎“지역할거 기초한 정치지도자 배격”/새정치 세력 등장 「디딤돌 놓기」 분석 지난 70∼80년대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20∼30대 가운데 대표자 20여명은 17일 여의도 여성백인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해방 50주년 기념 청년선언문」을 발표하면서 현정치권을 『정파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전근대적 세력』이라고 신랄히 비난했다. 이들은 『김영삼 대통령은 5·18공소권을 포기함으로써 관련자들에게 면죄부를 줬고 김대중씨는 책임자 처벌을 위한 실천적 노력은 않은채 신당창당에만 열중하고 있다』고 비난했다.특히 87년 대선때 김대중후보에 대해 비판적 지지를 선언했던 「전대협」출신들도 『지역할거에 기반한 정치질서를 단호히 배격한다』며 김대중씨를 공격하는 등 「후3김구도」의 청산에 목소리를 높였다. 한마디로 정치권이 물갈이돼야 한다는 것이다.이같은 주장이 나온 것은 「3김구도」를 계속 방치할 경우,정치적 「공범」으로 몰려 공멸하거나 3김씨의 들러리로 정치생명을 마감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작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여진다.또신당창당 등 야권개편이 맞물린 현시점을 「3김구도」를 타파하고 신진세력으로 정치일선에 데뷔할 절호의 찬스로 본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기존 정치권과 전혀 다른 세력임을 강조하고 있다.특히 학생운동권 출신과 시민운동단체·각계 전문가를 내세우면서도 30대를 강조,신진세력임을 부각시키는데 애를 쓰고 있다.그러나 이들의 몸부림과 목소리가 현실정치에서 어느 정도 통할지는 미지수다. 선언문에는 이인영 제1기 전대협 의장·유기홍 한국민주청년 단체협의회 의장·오영식 국민회의 청년위 부위원장·심규철 변호사·이우재 반유신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대표이사·이정우 전 서울대 총학생회장·함운경 전 서울대 삼민투위원장·허인회 전 고려대 총학생회장 등 1천여명이 서명했다.
  • 최루탄 맞은 대학생 실명/한대앞서 시위하다

    16일 하오 한양대 정문앞에서 「5·18관련자 기소촉구시위」를 벌이다 경찰이 쏜 최루탄에 왼쪽눈을 맞은 장원호(24·단국대 경영 2)씨가 17일 상오 한양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시력을 상실했다. 병원측은 이날 상오6시30분부터 3시간동안 장씨의 왼쪽눈에 대한 수술을 실시,파열된 수정체 일부를 제거했으나 시력회복의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밝혔다. 한편 경찰이 지난 16일 서울 중구 장충단공원 등에서 열린 「5·18책임자 기소촉구시위」를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중경상을 입은 학생과 시민은 모두 30여명이며,경찰도 42명이 부상을 입었다.
  • 「5·18」불기소 항의 격렬시위/6천명 도심 곳곳서

    ◎경찰,진압과정 기자 넷 폭행 「5·18진상규명과 광주항쟁 정신계승 국민위원회」와 「5·18 학살자 재판회부를 위한 광주·전남 공동대책위원회」 소속 시민·대학생 7천5백여명은 5·18 관련자에 대한 검찰의 공소시효가 만료된 16일 하오 서울 중구 장충단 공원에서 「5·18 학살자 불기소처분 규탄과 기소관철을 위한 제3차 국민대회」를 갖고 『특별검사제와 특별법을 도입해 반드시 관련자를 처벌할 것』을 촉구했다. 참석자들은 집회가 끝난 하오 4시10분쯤 전두환·노태우 전대통령의 집이 있는 연희동쪽으로 진출을 시도했으나 경찰은 장충체육관 앞 네거리를 전면 통제하고 최루탄을 쏘며 강제 해산시켰다. 그러나 한총련 소속 대학생 6천여명은 하오7시40분쯤부터 3시간여동안 지하철 신당역,종로5가,을지로6가,한대앞 등 시내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이날 하오 4시40분쯤 중앙일보 장문기(32)기자가 경찰이 휘두른 진압봉에 배와 다리를 심하게 다쳐 병원으로 옮겨지는 등 중앙일간지 사진기자 4명이 부상을 입었다.이에 앞서하오 1시30분쯤에는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 전철역 구내에서 시위를 벌이던 학생 1백여명이 경찰에 강제 해산당하는 모습을 촬영하던 서울대 학보사 기자 김병기(19)군이 전경 10여명의 군화발에 밟혀 입술이 터지는 상처를 입었다.
  • 한국­격동의 반세기 발자취/1945∼95:2

    ◎전화폐허서 교역 13위 경제강국 건설/부·마사태­10·26사건… 박정권 18년 마감­1979년/「민추협」 발족… 민주화운동 본격 점화­1948년/금융실명제·재산공개 등 대대적 개혁조치­1993년 ▷1971년◁ 2월17일 남한의 한필성,북한의 필화 남매가 국제통화로 서로 생사를 확인했다.4월27일 제7대 대통령선거,5월25일 제8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됐다.7월28일 서울형사지법 판사 39명이 정부의 압력에 반발해 집단으로 사표를 내는 사법파동이 일어났다.8월23일에는 실미도 특수부대원이 서울로 난입해 난동을 부렸다.10월1일 전국에서 장발족 단속이 시작됐다.12월25일 대연각호텔에 화재가 발생했다. ▷1972년◁ 7월4일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8월3일 모든 기업의 사채를 동결하는 이른바 「8·3 조치」가 발표돼 기업들이 자금숨통을 트게 됐다.10월17일 유신이 선포,박정희의 장기집권 계획이 모습을 드러냈다. ▷1973년◁ 8월8일 김대중씨가 동경에서 괴한 5명에게 납치돼 강제송환됐다.10월6일 이화여대생들은 쌍쌍파티 중단을 결의했다.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원유생산량 25% 감축을 결정함으로써 석유파동이 발생,국내경제가 심한 몸살을 앓았다. ▷1974년◁ 4월17일 박영복 부정대출 사건이 일어나 금융시장이 크게 교란됐다.7월13일 민청학련사건 관련자 이철 유인태 김지하등 7명에게 사형이 선고됐다.8월15일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박대통령 저격사건이 발생,육영수여사가 재일교포 문세광의 총에 맞아 숨졌다.같은 날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됐다. ▷1975년◁ 2월12일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투표가 실시돼 가결됐다.3월17일 서울 면목동 YH무역 여공 2백여명이 신민당사에서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1976년◁ 8월1일 양정모가 몬트리올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에서 해방후 첫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했다.8월18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났다.10월24일 박동선이 로비활동을 펼친 것이 미국에서 문제화됐다. ▷1977년◁ 8월20일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고리 1호기가 시험송전을 시작했다.9월15일 고상돈이 에베레스트를 정복했다.11월11일 이리역에서 한국화약의 화약수송열차가 폭발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1978년◁ 1월14일 여배우 최은희가 홍콩에서 납북됐다.4월24일 전남 함평에서 고구마 수매부정에 항의하는 농민대회가 열렸다.6월30일 현대아파트 부정분양사건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다.7월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박정희 후보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1979년◁ 10월7일 박정희를 비난하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파리에서 실종됐다.10월18일 부산에 비상계엄령,10월20일 마산·창원에 위수령이 발동됐다(부마사태).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부 부장의 총에 맞아 숨졌다.12월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총격전이 발생했다(12·12사태). ▷1980년◁ 4월21일 사북광업소 광부 7백여명이 어용노조에 반발해 광산촌을 점거하고 경찰과 충돌하는 유혈사태가 일어났다.5월18일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시작됐다.5월31일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전두환)가 신설됐으며 8월27일 전두환이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됐다.10월13일 삼청교육 실시가 발표됐다. ▷1981년◁ 1월13일 대학졸업 정원제가 도입됐다.15일 민주정의당이 창당,전두환이 초대 총재로 선출됐으며 제12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다.23일 대법원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관련 피고인 12명의 형량을 확정했으나 김대중은 나중에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됐다.전두환은 2월25일 대통령선거인단 선거에서 제12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1982년◁ 3월18일 고신대생 문부식등이 부산 미문화원을 방화했다.3월27일에는 프로야구가 출범했다.5월7일 대검은 대화산업회장 이철희·장영자부부를 외국환 관리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18일에는 이 사건과 관련,대통령 처삼촌인 이규광등이 구속됐다. ▷1983년◁ 1월11일 나카소네 일본총리가 방한,한일정상회담을 갖고 40억 달러를 7년에 걸쳐 제공하기로 합의했다.3월17일 일본에서 활약중이던 프로기사 조치훈이 기성을 획득,일본 바둑계의 주요 타이틀을 석권했다.5월18일 김영삼 신민당총재는 민주화와 정치활동 피규제자 해금을 주장하며,자택에서 단식에 들어갔다.6월12일 청소년축구대표팀이멕시코에서 열린 세계청소년 축구대회에서 4강에 진출했다.9월1일 대한항공 여객기가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돼 탑승자 2백69명 전원이 사망했다.10월9일에는 버마 아웅산묘소 폭발사건이 발생,전두환 대통령의 버마 방문을 수행하던 서석준 부총리등 17명이 사망했다.11월17일 동아건설은 단일공사로는 세계최대 규모인 리비아 1단계 대수로 공사를 32억9천만 달러에 수주했다. ▷1984년◁ 5월18일 김영삼과 김대중이 주도하는 민주화 추진협의회가 발족됐다.22일에는 서울지하철 2호선이 완전개통됐다.9월6일 전대통령은 일본을 공식방문했다.일본의 히로히토 왕은 만찬에서 과거의 한일관계에 유감을 표명했다.9월 북한 적십자가 보내준 수재구호물자를 남한측이 인수했다.미국방송이 의정부에 핵배낭 특수부대가 배치돼 있다고 보도했다. ▷1985년◁ 5월23일 대학생 73명이 미 문화원을 점거하고 광주사태에 대한 미국 사과 요구 및 반미구호를 외쳐 충격을 주었다.9월20일 남북 고향방문과 예술공연단 각 1백51명이 서울과 평양을 교환 방문했다. ▷1986년◁4월들어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분신등 시위가 본격화됐다.7월2일 부천에서 시위중 체포된 여대생 권인숙양을 경찰관이 성고문한 사건이 처음 알려져 물의를 빚었다. ▷1987년◁ 1월14일 서울대 박종철군이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연행돼 조사받다가 고문사했다.4월8일 김대중·김영삼씨는 직선제 개헌을 강력히 추진하기 위한 신당창당을 선언했다.13일 전대통령은 특별담화를 통해 개헌논의 유보를 발표하고 직선제 요구를 거부했다.24일에는 통일민주당의 창당을 방해하는 용팔이 사건이 발생했다.6월10일 민정당은 전당대회에서 노태우대표를 차기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그러나 박종철 고문치사 규탄 및 호헌철폐 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29일 노대표가 직선제개헌 수용을 밝혔다.12월16일 실시된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당선됐다. ▷1988년◁ 1월14일 문교부는 새로운 한글 맞춤법과 표준어규정을 확정 발표했다.2월25일 노태우대통령이 취임했다.4월26일 13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됐다.그 결과 처음으로 여소야대의 현상이 나타났다.9월17일 역사적인 서울올림픽이 개막돼 10월2일까지 계속됐다.11월부터는 5공비리 청문회가 시작됐다.11월23일 전두환전대통령은 백담사로 은둔했다. ▷1989년◁ 3월25일 문익환목사가 방북,김일성과 면담했다.6월30일에는 외국어대 임수경양이 북한에 들어가 평양청년학생축전에 참석했다.9월11일 노태우 대통령은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발표했다. ▷1990∼1년◁ 90년2월9일 민정당과 민주당 공화당이 합당,민자당이 창당됐다.10월1일 한소양국이 수교했다.91년2월 수서지구 택지특별분양 사건이 발생,이원배등 의원5명과 청와대비서관,정태수 한보그룹 회장등 8명이 구속됐다.12월18일 노대통령은 한반도 핵부재를 선언했으며 같은달 31일 남북한은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 가서명했다. ▷1992년◁ 3월24일 14대 총선이 실시돼 2번째 여소야대가 실현됐다.정부는 6월30일로 예정된 지방자치단체장선거를 95년이후로 연기한다고 발표했다.8월22일 중국과 수교,주변 4강과 모두 외교관계를 수립했다.12월19일 14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자당의 김영삼후보가 당선됐다. ▷1993년◁ 김영삼대통령은 2월25일 취임후 공직자 재산공개,군 하나회 숙정,금융실명제 실시등 굵직한 개혁조치를 단행했다.이회창원장이 이끄는 감사원은 6월 율곡사업감사,7월 평화의 댐 감사등 과거비리를 사정했다. ▷1994년◁ 정부의 외교가 북한핵문제 해결에 집중됐다.그 결과 10월21일 제네바에서 미북기본합의서가 타결됐다.국내적으로는 구포 열차전복사건,위도 여객선 침몰사건,목포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사건,아현동 가스폭발사건,성수대교 붕괴등 대형사고가 잇따라 발생했다. ▷1995년◁ 6월27일 역사적인 4대 지방자치선거가 일제히 실시된 결과 수도 서울의 시장에 민주당의 조순후보가 당선되는등 시도지사에 대거 야당 후보들이 당선됐다.4월28일 대구가스폭발에 이어 6월29일 삼풍백화점 붕괴등 대형사고가 계속됐다.
  • 5·18 수사 14명/직무유기 고소/피해자 3백2명

    광주민중항쟁연합 상임의장 정동년(52)씨 등 5·18 관련 피해자 3백2명은 11일 「5·18 광주민주화운동 고소·고발 사건」의 주임검사인 장윤석 서울지검 공안1부장을 비롯,김도언 검찰총장,송종의 대검차장,안강민 대검공안부장,최영광 서울지검장 등 이 사건 수사 관계자 14명을 직무유기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했다.
  • 「5·18」 교수 성명 잇따라/어제 1천6백여명

    성균관대와 중앙대 교수 2백31명은 11일 검찰의 5·18 불기소 결정과 관련,성명을 내고 『정부당국은 특별법제정과 특별검사제 도입을 통해 5·18 관련자들을 기소하라』고 촉구했다. 한편 전남대와 조선대 등 광주·전남지역 10개대 1천1백1명,충북대·청주대 등 충북지역 3개대 1백14명,부산 동아대 73명,경남대와 창원대 60명,대전 한남대 55명 등 총 1천4백여명의 지방대교수들도 항의성명을 발표했다.
  • 「비자금 사건」과 정치권 신진대사/김석준(서울광장)

    전직대통령 4천억 가·차명계좌 보유설이 일과성 해프닝으로 마무리되는 때에 야권정치지도자의 거액비자금설에 연관된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세력확장이 한창이어서 씁쓸한 감을 더해주고 있다.항상 정치스캔들이나 정치비자금사건이 국민에게 의혹만 가져다주고 철저히 규명되지 못했던 것을 번번이 보아왔지만 이번에는 국민의 허탈감이 더한 것 같다.6·27지방선거에서의 지역패권주의 등장,삼풍참사,대북쌀지원과 관련한 남북간의 갈등,통신위성의 궤도진입 차질,5·18관련자 불기소,개혁정책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과 수정요구등 여러 복잡한 상황과 관련하여 정치권에 대한 질책과 기대가 혼존해왔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처리와 관련하여 여권은 물론 야권에서도 서로 혼선을 보인 것을 국민은 의아하게 생각한다.정치자금과 관련하여 여권내의 정파나 검찰이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인 점이나 야권내에서도 일부지도자에 대한 서로 다른 거액보유설 및 괴문서를 둘러싼 공방은 전·현직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명백한 검증의 필요성을 제기했던 것이다.그 성질상 검찰이 모든 것을 밝히기에는 어려움이 없지 않지만 앞으로도 정부나 국회는 반드시 그 실상을 국민에게 철저히 규명하여 국민의 의혹을 말끔히 씻어야 할 것이다. 현정부 출범이후 기업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통령 스스로 수차례 밝혔을 뿐만 아니라 국민도 그것을 대체로 믿고 있다.금융실명제와 정치개혁입법 등으로 지방선거에서도 선거비용이 역대선거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고 선거의 후유증이 거의 없음은 현정부에서의 정경관계를 입증하는 일이다.지방선거이후 기업에서는 과거로 되돌아가 지방차원에서의 정경유착을 염려하는 사람이 없지 않지만 분명히 과거와는 크게 달라질 것으로 예상한다. 이처럼 현정부에 들어서 정치자금관계는 과거와 달라졌음을 인정하지만 이번 사건과 같이 전직대통령이나 과거 정치인들에 대한 비자금이 철저히 규명되지 못하면 그 부담은 현정부에 어쩔 수 없이 가게 되어 있다.이 때문에 현정부는 이번 사건이 「실언에 의한 해프닝」이라 하더라도 금융실명제의 철저한 시행등을 통해 검은 비자금에 대해 명확히 규명하여야 하겠다. 정부만이 아니라 여야정치권도 이제는 크게 달라져야 한다. 각종 정치개혁이 국민의 기대와는 달리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데는 정치를 담당하는 정치권의 책임이 크다.정치권이 스스로 기득권을 포기하고 새로운 문민통일시대라는 시대정신을 수용하며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여 국민에 봉사하기보다는 자신의 권력이나 사익추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정치비자금사건과 관련하여서도 역대정권의 핵심적 지위에 있었던 정파나 야당지도급인사를 중심으로 한 사람들이 떳떳이 나서지 못하고 불안하게 지냈던 것은 이들이 모두 잘못된 과거정치의 타습과 유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새로운 역사전개 앞에 스스로 크게 변화하지 못한 구정치인들이 지역기반을 앞세워 자신의 정치세력확장에만 몰두한다면 이는 분명 민족사적으로 불행한 일이다. 항상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정신과 참신한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해 입증된 것이다.새로운 시대가 옴에도 구정치인들이계속 기득권과 세력확장에만 몰두할 경우에는 역사의 퇴보나 지연만이 있을 뿐이다.여야정치권 모두는 이제 구정치인들이 서서히 퇴장하고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하므로 역사발전을 위한 신진대사를 능동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야권신당에서 먼저 주도하고 있는 신당창당과 정치권 개편은 참신하고 유능한 인재를 중심으로 한 근본적인 신진대사에 따라 전개되기 바란다.발기인에 나타난 정도가 아니라 더욱 큰 폭의 신진세력이 창당사에 참여하길 기대한다.다른 야당들뿐만 아니라 여당도 「얼굴있는 세대교체」와 더불어 새로운 정치세력이 과감하게 참여하는 개혁정부에 걸맞는 개혁정당으로의 탈바꿈이 있어야 한다.「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평범한 진리가 여야정치권의 개편에 동시에 일어나 새로운 문민통일시대를 정치권이 국민과 함께 열어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 「5·18」관련자 기소 촉구/서강·동국대교수 성명

    서강대 교수협의회 의장 길희성(종교학)교수 등 53명은 9일 하오1시쯤 교내 교수휴게실에서 「5.18 검찰수사와 결정에 대한 우리의 견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국회는 특별법을 제정해 공소시효와 상관 없이 책임자를 처벌하고 특별검사제를 도입해 철저히 진상을 조사,책임자를 기소하라』고 촉구했다. 동국대 교수 60명도 이날 하오 성명을 내고 『정부당국은 5·18 관련자들을 기소하고 역사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법적 해결을 하라』고 촉구했다.
  • 중부 폭우피해 수십억/2명 사망·실종/충청·경북일부 가뭄 해소

    ◎농지 1천5백㏊·집 1백여채 침수 중부지방에 9일까지 내린 집중 호우로 1명이 숨지고 1명이 실종됐으며 농경지 1천5백여㏊가 침수되거나 매몰됐다.또 장항선의 철로 70m가 유실돼 운행이 중단됐다.그러나 가뭄에 시달려온 충청권의 가뭄이 완전 해갈됐고 경북 북부 지역의 가뭄 해소에도 도움이 됐다. 9일 중앙재해대책본부에 따르면 이 날 상오 5시18분 쯤 서울 한강 잠수교에서 취재하던 서울방송 영상취재부 박규국기자(20)가 실종되는 등 2명의 인명 피해가 났다. 홍성에 최고 3백30여㎜가 내린 충남에서는 예산군 삽교읍 신가리 70m 등 13곳에서 장항선 철로가 유실돼 열차 운행이 전면 중단됐다.홍성읍 용봉천의 제방 30m가 무너져 농경지 6백63㏊가 물에 잠기는 등 1천4백58㏊가 침수됐다. 충북에서는 증평에 최고 2백70여㎜가 내려 증평읍의 88채 등 1백여채의 집이 침수되고 음성군 음성읍과 원남·소이면 일대 농경지 28㏊를 비롯,모두 60여㏊가 물에 잠겼다. 또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고산리 국도 43호선 옆 야산이 무너져 한동안 교통이 두절되는 등전국 3곳에서 도로가 유실되거나 파손됐고 광주군 장지리 장지교의 상판이 내려앉았다. 서울에서는 경기도와 강원도 등 상류에 집중된 비로 한강물이 불어 잠수교의 통행이 9일 새벽부터 금지됐다. 그러나 이번 비는 충청권의 가뭄을 완전히 해갈시켰고 영주 등지에도 최고 1백15㎜의 강수량을 보여 경북 북부 일부 지방의 가뭄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중앙재해 대책본부는 『농경지 유실,가옥 침수,제방 붕괴 등 재산피해를 낸 것으로 잠정 집계됐으나 전국적으로 최종 피해액은 크게 늘어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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