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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8 민주화운동 시 기념일로 제정/광주시

    【광주=최치봉 기자】 광주시는 24일 연내에 광주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5월18일을 시 기념일로 제정하고 97년에는 국가기념일로 제정할 것을 건의키로 했다고 밝혔다. 시는 이를 위해 이달중에 5·18 기념일 제정에 따른 의견을 수렴,조례 입법예고를 하고 11월중 시정 조정의원회심의·시의회 조례안 승인신청을 거쳐 조례를 제정한 뒤 16주년 기념행사부터 시 주관으로 치를 계획이다. 시는 5·18 기념일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기 위해 5·18묘역 성역화사업이 끝나는대로 국립묘지승격을 추진키로 했다.
  • 5·18 특별법 공방/쟁점과 배경

    ◎여­청산합의 잊었나/야­진상규명 덜끝나/“용서” 동의한 DJ 해명 요구­민자/총선호재 판단… 몰아붙이기­국민회의 정기국회 국정감사가 다소 처진 분위기속에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야당이 주장하는 5·18 관련 특별법 제정 문제가 시시각각 정기국회 최대 쟁점으로 부상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그러나 여야의 시각차가 워낙 큰 데다 내년 총선을 겨냥한 정치적 이해까지 개입하는 듯한 징후도 나타나고 있어 정치권의 공방은 갈수록 치열해질 전망이다. ○…민자당은 「용서」에 동의했던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의 발언번복을 들어 야당측의 요구를 「정치목적의 선전공세」로 치부하며 학생·교수 등과의 연계가능성 차단에 나섰다. 손학규 대변인은 3일 『김총재는 정부를 공격하기에 앞서 5·18관련자 처벌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변경에 관해 납득할만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고 특별법제정 및 관련자 처벌 요구의 논리적 모순을 거론했다. 한마디로 지난 89년 여야가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회청문회 증언과 정호용 의원의 의원직사퇴,보상법제정등으로 종결짓기로 합의했던 사안이라는 것이다. 김총재도 당시 평민당총재로서 합의에 참여해 놓고 이제와서 이 문제를 다시 들고 나오는 것은 정치도의에 어긋나고 국민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처사라는 얘기다. 특히 김총재가 14대 대선 직전인 92년 12월2일 관훈클럽토론회에서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과거를 과감히 용서하고 잊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 대목을 상기시키고 있다. 또한 국민회의가 『정부는 진상규명이나 관련자 처벌,피해자들의 명예회복도 외면하고 있다』고 비난한데 대해 민자당은 『진상규명은 검찰의 5·18수사로,명예회복은 광주관련자 전과말소와 보상법제정 등으로 이루어진 상태』라고 반박했다.전직대통령 등의 처벌여부와 직결된 검찰의 불기소처분 문제는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이 제출돼 있으므로 헌법재판소의 최종판단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사법적 영역이지 정치적인 타협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민자당의 한 중진의원은 『야당은 진상규명을 위한 기소를 얘기하지만 진상규명은 국회와 검찰수사에서 이루어진 상태』라면서 『사법부는 재판을 하는 곳이지 진상규명에 동원되는 기관이 아니다』고 말했다. 강삼재 사무총장도 『우리는 냉정한 판단으로 당당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할 것』이라고 말해 정기국회에서 「정면돌파」 의지를 분명히 했다. ○…국민회의 등 야권은 「5·18」의 진정한 진상규명은 법의 심판이 내려질 때만이 완결된다는 주장이다.관련자들을 우선 재판에 회부,유죄여부를 가린 뒤 처벌여부를 따지자는 것이다. 이미 5공청문회와 검찰수사등으로 진상규명이 이뤄졌다는 여권의 주장에 대해서는 5공특위가 공식 종결된 것이 아니라고 반박하고 있다.또 김대중총재가 태도를 바꾸고 있다는 비난에 대해서는 김영삼대통령도 과거 야당 총재 때 5·18관련자에 대한 처벌을 주장했다는 논리로 대응하고 있다. 국민회의와 민주당은 일단 국회에 제출한 5·18관련 특별법을 회기안에 통과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는 방침이나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회의적이다.다만 학생시위 등으로 5·18문제가 사회이슈화하고 있는 만큼강도 높은 투쟁 자체가 그만큼 내년 총선에 유리한 고지를 확보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5공청산」 89년 1노3김 합의로 매듭/6공때 피해보상… 문민정부서 「민주의거」 규정 5·18의 아픈 상처를 달래려는 노력은 87년 7월1일 노태우 당시 민정당대표의 광주사태 치유책 마련 지시로부터 시작됐다.노대표의 이같은 지시는 그가 그해 12월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후 88년 1월11일 민주화합 추진위원회(민화위·위원장 이관구)발족으로 이어졌다. 민주발전·민주화합·사회개혁등 3개 분과위로 구성된 민화위는 2월13일 ▲광주 위령탑 건립및 망월동 묘지 공원화 ▲사상자 재신고 접수 ▲유가족 및 부상자에 대한 조속하고 충분한 보상과 이를 위한 특별법 제정 및 취업 알선 ▲광주어린이공원 관리권의 유가족단체 이관등 4개 항을 노대표에게 건의하고 해산했다. 노대통령 정권이 출범한 뒤 4월1일 정부는 광주사태 치유방안을 발표하면서 광주사태를 「민주화를 위한 노력」으로 규정했다.4월15일 광주를 방문한 노대통령은 『광주시민의 명예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노대통령은 11월26일 특별담화를 통해 광주특별법 제정을 발표했다. 88년 7월25일 첫 전체회의를 갖고 활동을 개시한 국회 광주특위(위원장 문동환)는 11월18일 청문회를 시작했다.광주특위는 11월19일 전두환 전 대통령을 증인으로 채택하기로 결정하고 당시 백담사에 머무르고 있던 전전대통령을 89년 12월31일 광주특위·5공특위 연석회의에 증인으로 세우기도 했다. 광주특위는 89년 2월24일까지 모두 6차례 청문회를 열어 65명의 증인을 신문하고 피해자들의 증언을 들었다. 89년 2월27일 정부는 중앙에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지원협의회」,광주에 광주시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심의회」를 각각 설치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등에 관한 법률안」을 마련,본격적 보상작업에 착수했다.3월10일 노대통령과 김대중 평민당 총재는 양자 회동에서 상무대의 시민공원화 등 치유책에 일부 합의했다. 드디어 89년 12월15일노대통령과 당시 김대중 평민당·김영삼민주당·김종필 공화당 총재 등 네 정치지도자들은 5·18을 비롯,과거청산에 대한 대타협의 내용을 담은 11개항의 합의문을 도출해 냈다.이 합의문에 따라 그해말까지 전전대통령의 국회 증언과 정호용의원의 공직사퇴가 이루어졌다.정치적으로 5·18문제가 매듭된 것이다.그 바탕위에 90년 1월 전격적인 여야 3당 합당이 단행되기도 했다. 90년 4월20일에는 5·18 사상자들에 대한 생활안정금 지급이 시작됐다.사망자 유족과 중상자 2백78명에게는 3천만원씩,일반 상이자 5백85명에게는 1천만원씩,일반 경상자 4백39명에게는 5백만원씩이 지급됐다.7월30일에는 광주보상법이 국회를 통과해 8월17일부터 보상신청 접수가 시작됐다.8월29일 광주보상지원위원회가 구성돼 광주사태 피해자들에 대해 모두 1천5백87억원의 보상금이 지급되었다. 93년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광주사태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차원을 넘어 광주의거로 규정됨으로써 4·19와 같은 수준으로 대접받게 됐다.정부는 5월2일 5·18을 민주의거로 규정하기로 했다.5월4일에는 광주사태와 관련해 형을 선고받은 6백16명에 대한 전과를 말소한다는 정부의 발표가 있었다.김대통령은 5월13일 5·18과 관련한 특별담화를 통해 광주사태 관련자 전과기록 말소와 전남도청 이전등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5·18」처리관련 일지 ▲87·7·1 노태우 당시 민정당대표 광주사태 치유책 마련 지시. ▲88·1·11 민화위발족. ▲〃2·23 민화위 4개항 건의문 노대통령 당선자에게 제시하고 해산. ▲〃4·1 정부,광주사태 치유방안 발표.광주사태를 「민주화를 위한 노력」으로 규정. ▲〃4·15노대통령 광주방문,「광주시민 명예회복 최선」다짐. ▲〃11·18 광주특위 광주청문회 시작. ▲〃11·26 노대통령 특별담화 통해 광주특별법 제정 발표. ▲89·2·24 광주청문회 마감. ▲〃2·27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등에 관한 법률안」 마련. ▲〃3·10 노대통령·김대중 당시 평민당총재 회담에서 치유책 합의. ▲〃12·15 민정·평민·민주·공화 4당 총재 11개항 합의. ▲〃12·31 전두환 전대통령 광주특위·5공특위 연석회의 증언. ▲90·7·30 광주보상법 통과. ▲〃 5·13 김영삼 대통령 5·18관련 특별담화 발표.전남도청 이전하고 그 자리에 기념공원 조성,광주사태 관련자 전과기록 말소 등.
  • 내년 공휴일 총 67일/설연휴 3·추석 4일(조약돌)

    ○…병자년인 1996년에는 일요일을 포함한 공휴일이 67일로 올해와 같다.최근 시중에 나온 내년도 달력에 따르면 96년에는 1월1일이 월요일로 시작,맨 마지막 날인 12월31일이 화요일로 끝나기까지 모두 67일의 공휴일이 있고 이중 어린이날(5월5일)은 일요일과 겹친다. 또 내년에는 설이 2월19일,추석은 9월27일로 올해보다 각각 19일,18일씩 늦게 오며 올해 4일간이었던 설연휴는 3일(2월18∼20일)로 줄어들고 올해 3일간이던 추석연휴는 4일(9월26∼29일)로 늘어난다.
  • 「5·18 특별 법안」 국회 제출/국민회의

    ◎특별검사·공시시효법안 포함 새정치국민회의가 22일 5·18 관련자 기소 등을 위한 3개 법안을 국회에 제출한데 이어 민주당도 23일 「12·12 군사반란및 5·18내란사건 처리특례법」을 제출할 예정이어서 이 문제가 이번 정기국회의 최대 쟁점으로 부각될 전망이다. 그러나 민자당은 검찰의 사건 관련자 불기소 처분에 대한 위헌신청이 헌법재판소에 계류중인데다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사안을 문제삼아 소급입법을 하는 자체가 위헌의 소지가 있다고 지적,야당의 정치공세적 요구에는 응하지 않겠다는 방침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 국민회의가 이날 제출한 법안은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특별검사임명법」「헌법파괴범죄 등의 공소시효법」등이다. 「5·18특별법」은 지난 80년 5월18일부터 5공화국이 종료된 88년2월24일까지의 8년을 5·18관련자들에 대한 공소시효가 정지되는 기간으로 규정토록 하는 것을 주요내용으로 하고 있다.
  • 「돈 선거」 노원구청장 구속/국민회의 최선길씨

    ◎지자선거때 친목회 통해 거액 돌려/돈받은 5명도 함께 서울경찰청 형사부는 19일 지난 6·27지방선거에서 지역의 친목회 단체장들에게 선거운동을 도와달라며 모두 1천만원을 돌린 새정치국민회의 소속 서울 노원구청장 최선길씨(56·서울 생활테니스현합회 명예회장)를 공직선거및 선거부정방지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경찰은 또 최구청장으로 부터 1천만원을 받아 이 가운데 7백만원을 친목회단체장들에게 나눠준 손국원씨(58·서울시 생활테니스연합회장·월간지 임상의학 대표)와 손씨로부터 각각 1백만∼2백만원을 받아 챙긴 김기홍(58),이병익(50·한일섬유 대표),조영자(49·주부),이미옥씨(40·주부)등 5명도 같은 혐의로 구속했다. 6·27선거 이후 선거법 위반 혐의로 서울시의 민선구청장이 구속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최구청장은 투표일을 나흘 앞둔 지난 6월23일 하오 3시쯤 노원구 상계2동 선거사무실에서 핵심 선거참모인 손씨를 통해 선거에 앞서 이미 친분을 쌓아둔 서울시 개인택시 운송사업조합 사무처장 김씨에게 5백만원을 줘 운송사업 조합원들을 동원해 선거운동을 부탁한 혐의를 받고있다. 손씨는 당시 5백만원 가운데 2백만원만 김씨에게 주고 3백만원은 자기가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앞서 최구청장은 참모인 손씨를 시켜 같은달 19일 낮 12시쯤 중계동 U암자 신도회장인 조씨에게 2백만원,하루뒤인 20일 하오 3시쯤에는 노원구 배드민턴연합회장인 이씨에게 2백만원을 전달했다. 최구청장은 이어 같은 달 21일 하오 1시쯤 노원구 어머니테니스회장인 이씨를 선거사무실로 몰래 불러 손씨를 통해 1백만원을 주고 회원들을 상대로 선거운동을 하도록 부탁한 혐의도 받고 있다. 경찰조사결과 개인택시 운송조합 사무처장 김씨는 조합원 주모씨등 조합원 10명을 동원,지난 6월18일부터 26일까지 9일동안 노원전철역에서 최구청장의 소형홍보물을 배포한 것으로 확인됐다.김씨는 이때 손씨로부터 받은 2백만원에다 빌린돈 1백10만원을 합친 모두 3백10만원을 조합원들에게 각각 20만∼40만원씩 나눠준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최구청장이 본격적인선거운동이 시작되기 전인 지난 5월초 김씨에게 지역내 그린벨트를 해제,택시 전용주차장을 건설하고 버스전용차선에 택시운행을 허용하며 택시의 합승단속을 완화하겠다는 공약을 제시하는등 택시기사를 상대로 사전선거운동을 한 혐의도 포착됐다고 밝혔다. 최구청장은 64년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한뒤 77년 김천세무서장,88년 국무총리 행정조정실 부이사관을 거쳐 91년 노원구청장으로 재직했으며,도봉구청장으로 있던 93년 공직자 재산등록때 일부재산을 고의로 신고하지 않아 물의를 일으켜 사직했다.처음 민주당으로 출마,당선된뒤 새정치국민회의로 당적을 옮긴 최구청장의 재산은 33억원에 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폭죽… 횃불행렬… 「빛의 축제」절정/광주비엔날레 전야제 이모저모

    ◎남사당·택견 등 3개마당 흥겨운 놀이/금남로 2㎞ 길 따라 수만시민 환호 제1회 광주비엔날레 개막일을 하루 앞둔 19일 금남로와 행사장 주변 등 광주시 곳곳에서 「빛의 축제」인 전야제가 성대히 펼쳐졌다. 하오 4시부터 9시까지 5시간동안 수창국교∼전남도청에 이르는 금남로 2㎞구간에서 열린 전야제에는 모두 55개팀 2천1백여명이 참석했다. 「세계로 미래로」라는 주제로 4시30분부터 1시간동안 길놀이 팀이 금남로를 지나는 동안 수만명의 시민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울리며 광주비엔날레의 성공을 기원했다. 광주비엔날레를 상징하는 마스코트인 「비두리」와 호돌이 등 남녀 어린이 롤러스케이트단과 횃불행렬,전통 민속혼례,남사당 놀이,농악대,고싸움 놀이팀,해동검도,세계 전통 의상행렬,인도 민속예술단 등 국내외 39개 행렬이 뒤따랐다.도로 양쪽 건물에서는 오색 색종이가 일제히 뿌려져 두달동안의 행사의 서막을 장식했다. 하오 5시30분부터 1시간동안 광주은행 본점 4거리에서는 군졸 복장과 평상 한복을 입은 2백50명이 2개팀으로 나뉘어 고싸움 놀이를 펼쳐 박수갈채를 받았다. 전남도청 앞 광장에 설치된 특설무대에서는 대회장인 송언종 광주시장과 허경만 전남지사 등 기관장과 예술계 인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새역사 창조」라는 주제로 축원제가 열렸다.송시장은 『이번 행사의 성공을 통해 광주가 세계속의 예술도시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고 역설했다. 이어 풍선박이 터지며 풍선과 오색 꽃가루가 밤하늘을 수놓고 폭죽과 불꽃놀이 행사에 이어 국제 열기구대회 참가선수들이 열기구를 띄우면서 축제분위기가 절정에 달했다. 이어 열린 축하공연에서는 국수호 무용단이 연출한 「천지창조」,시립 관현악단과 도립 국악단의 연주와 판소리·가야금 병창·부채춤·진도북춤 등 각종 문화행사가 다채롭게 이어져 예향 광주의 이미지를 한껏 뽐냈다. 하오 9시까지 「경계를 넘어」라는 주제로 펼쳐진 거리축제 행사는 첫째마당 무등빌딩∼구 동구청,둘째마당 상업은행∼가톨릭센터,셋째마당 광주은행 4거리로 나뉘어 이어졌다. 마당별로 패션 카니발·농의상 패션·각시탈 인형극·택견·취타대·남사당놀이·장성 방구다리 농악등이 준배돼 시민들의 흥을 돋우고 축제무드를 높였다. ◎눈길 끄는 전시작품/싱가포르 작가 리 웬/「털 벗긴 닭」 출품/전수천씨 「뽕잎 먹는 누에」도 중외공원 안 광주 비엔날레 아트홀 1·2층에 전시된 「국제현대미술전」의 작품 88점(50개국 92작가 출품)은 한마디로 「현대미술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들이다. 18∼19일의 프레오프닝에 참석한 사람들중 미술과 관련이 없는 일반인들은 전시장을 둘러보며 『이것도 미술인가?』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할 정도였다. 광주 비엔날레의 본전시인 「국제현대미술전」에 참여한 국내외 작가들의 작품 대부분이 『현대 미술작가들이 추구하는 예술성의 한계가 과연 어디까지 이르는가』를 생각하게 할만큼 별나고 기이하기 때문이다. 「닭들은 죽었으나 당신은 살아있다」는 제목으로 작품을 내놓은 싱가포르의 작가 리 웬은 전시코너앞에 털벗긴 닭들을 병에 넣어둔채 코너안에는 깨끗한 식탁을 차려놓았다. 한국작가 신경호씨는 광개토대왕비의 형상과 비문으로 엄숙한 작업공간을 꾸몄고 미국의 작가 척 클로즈는 자화상이란 주제아래 흑백명암이 다양하게 구사된 대형얼굴상의 실크스크린으로 벽면을 채웠다. 크로아티아의 달리 보르 마르티니스는 「표면사이에 위치한 원」이란 작품으로 폐쇄된 검은 공간속에 한줄기 빛의 화면을 만들어내고 있다. 본전시장 밖에는 전시관앞 공터에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상 수상작가인 전수천씨가 30평의 유리박스에 누에를 놓아 뽕잎을 먹이는 장면을 연출했다.또 바로 옆에 벼를 베어 낸 논을 만들고 유리관 안에 설치된 60여대의 TV화면을 통해 누에가 뽕잎을 먹는 장면과 로켓이 발사되는 모습 및 각종 도형을 화면에 표시해 원시와 현대가 공존하는 모습을 재현했다. 미술관 1층에는 고도의 첨단 과학예술작품을 선보이는 「정보예술(Info Art)」전이,2층에는 예술과 역사의 고리를 이어주는 「광주5월정신전」과 「증인으로서의 예술전」이 자리를 잡았다. 본 전시가 아닌 특별전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비엔날레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전시인 「정보예술전」은 정보사회인 현대에서예술이 지향할 바가 무엇인가를 실감나게 보여주는 자리.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씨와 미국의 폴 개린,일본의 게이고 야마모토등의 독특한 작품들이 전시장을 환상적으로 꾸미고 있다.빛과 소리와 영상이 한데 어우러진 전시장은 미래의 우주전시장을 연상케 한다. ◎“체제 항거 「5·18도시」 오고 싶었다”/리투아 전 대통령 란스베르기스 내한/오늘 개막 축하공연서 피아노 연주 1990년부터 2년동안 리투아니아의 초대국가원수를 역임한 란스베르기스씨(63)가 20일 하오 7시 광주문예회관 대강당에서 열리는 광주비엔날레 개막축하공연에 참가하기 위해 18일 밤 광주에 왔다. 란스베르기스씨는 19일 기자들을 만나 『거대한 예술이벤트인 광주비엔날레에서 과연 예술이 삶을 위해서 어떤것들을 창작해내고있나 살펴보겠다』고 말했다. 현재 리투아니아 야당 당수이며 상원의원이자 리투아니아의 수도에 있는 빌리우스 음악 아카데미의 교수인 그의 본래모습은 정치가 이전에 피아노를 치는 예술가이다. 그는 지난 60년대 백남준씨와 조셉 보이스등이일으킨 독일의 전위예술운동 플럭서스를 통해 오늘까지 이어오고있는 백씨와의 친분으로 비엔날레공연에 참여하게 됐다. 그는 이어 『백씨와의 친분도 있지만 광주가 겪은 5·18이라는 역사적 현실이 과거 내가 구 소련체제에 항거하며 페레스트로이카를 겪었던 경험과 유사하다는 생각으로 더욱 남다르게 광주를 찾게됐다』고 말했다. 21일 아침 광주를 떠나는 그는 『예술은 인간의 고정관념을 넘어 보다 열린 세계를 지향하는 고귀한 작업』이라는 예술관을 피력했다.
  • 주택/주차장 기준강화/서울시/다가구·다세대도 가구별 설치

    ◎건교부에 개정안 서울시는 18일 주택가의 주차난을 줄이기 위해 면적 기준인 주차장 확보비율을 가구수 기준으로 바꾸는 것을 골자로 하는 주차장법 개정안을 건설교통부에 건의했다. 이 건의안은 다가구·다세대 주택도 전용면적에 관계없이 입주가구만큼 주차장을 갖추고 대형 단독주택과 전용면적 50평을 넘는 공동주택은 1가구에 2대 이상의 주차장을 의무화하도록 했다. 또 차고설치자금 융자제도도 도입,주차장을 지을 때 3억원까지 지원해주고 주택 지하 차고에 물리는 지방세도 면적에 관계없이 면제하도록 했다. 현행 주차장법은 20가구 이상의 주택은 연면적 1백30㎡에 1대,20가구 미만의 공동·단독주택은 1백20㎡에 1대씩 주차장을 확보하도록 규정하고 있어 이같은 기준을 넘지 않는 소형 주택들은 주차장을 짓지 않고 있어 주차장 부족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서울시가 지난 3월부터 5월까지 주택가 야간 주차실태를 조사한 결과,주차수요는 1백70만1천대이나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은 1백39만5천대여서 18%인 30만6천대가 멋대로 주차를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 「무고한 사람 무고」 17명 구속/검찰,올 상반기 46명 적발

    서울지검 동부지청은 18일 지난 연초부터 허위 고소 고발을 남발하는 무고꾼에 대한 집중단속을 벌여 모두 46명을 적발해 17명을 구속했다고 밝혔다. 구속된 이모씨(37·유통업·서울 강동구 상일동)는 돈을 빌려준 사실이 없는데도 『93년 10월 3천만원을 빌려주었는데 갚지 않는다』며 지난해 5월 권모씨(40)를 송파경찰서에 고소했다. 그러나 검찰 조사결과 이씨가 돈을 빌려주었다고 주장하는 93년 10월 권씨는 4억원의 부도를 낸 혐의로 구속돼 교도소에 수감중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성수동 D주점에 근무하던 김모양(18·여·성수동2가)은 지난 1월 초 자신의 얼굴등을 흉기로 자해한 뒤 사장 김모씨(30)가 구타한 뒤 강제로 성폭행했다고 강동경찰서에 고소했다.김씨는 경찰에 구속돼 김양에게 합의금으로 5백만원을 물었으나 수사과정에서 김양의 허위고소가 확인돼 김씨는 무혐의 석방되고 대신 김양이 무고혐의로 구속됐다. 동부지청은 이같은 무고사범 적발건수는 지난 93년 24명이던 것이 94년 40명,올들어 상반기에만 이미 46명이 적발돼 지속적인단속에도 불구,꾸준한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 전쟁포로(새로 쓰는 한국 현대사:36)

    ◎미­북한,송환방법 싸고 2년간 첨예 대립/이 대통령,반핵포로 2만여명 전격 석방 1951년 7월 8일 개성회담을 시작으로 2년간 지속된 휴전협상에서 가장 큰 쟁점은 포로문제였다.한국전쟁에서 독특한 양상을 표출한 포로문제는 이데올로기적 관점으로까지 비화됐다.그래서 휴전협상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됐던 이 포로문제는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줄곧 난항을 거듭했다. 북한은 포로문제를 불리해진 전황정비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또 전쟁 조기 종료를 바란 미국 주축의 유엔은 휴전회담에서 북한측에 끌려다니는 인상을 지우지 못했다.전세가 아군에 유리하게 전개되면서 한국전쟁을 통일의 기회로 여겼던 이승만 대통령은 처음부터 휴전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특히 포로문제에 있어서 유엔 협상대표들이 북한측의 요구를 수용하자 마침내 독단적인 결정을 내려 반공포로들을 석방해 버렸다. 그렇다면 한국전에서 포로문제가 복잡하게 꼬였던 이유는 무엇일까.여기에 대한 대답은 유엔군에 생포된 포로의 성분이다.생포된 공산측 포로중에는 북한에 의해 강제 징집된 수많은 남한출신과 함께 장개석의 국부군 출신 중공군이 끼어 있었다.이에따라 휴전회담에서 포로송환문제가 거론되자 이들이 북한과 중공으로 돌아가길 거부하면서부터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북·중 송환거부자 급증 미국은 휴전회담이 개막되기 전인 7월에 접어들어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당시 미 육군 심리전감 매클루어 준장은 콜린스 참모총장에게 정전이 될 경우 국부군 출신 포로들을 대만으로 보낼 것을 건의해놓고 있는 상태였다.워싱턴에서는 51년 가을내내 포로문제에 대한 논의가 계속됐다.그러나 자원송환과 강제송환,1대1교환과 전체대 전체 교환,인도주의적인 입장과 제네바협정 준수가 엇갈려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해 10월 판문점에서 협상이 재개됐으나 협상 벽두부터 북한측은 휴전협정 조인즉시 양측의 모든 포로들을 석방하자는 의견을 강력하게 들고 나왔다.그러면서도 북한측이 제시한 포로 숫자도 터무니 없게 축소돼 의혹을 불러일으켰다.유엔군은 공산군 포로 13만2천4백74명(중공군 2만7백명)의 명단을 제출하면서 민간인 수용자로 별도 격리 수용한 3만7천명이 더 있다고 미리 밝혀두었다. 반면 공산측은 한국군 7천1백42명과 유엔군 4천4백17명을 합쳐 고작 1만1천5백59명의 포로숫자를 제시했다.북한측이 한달전 평양방송을 통해 주장한 포로수가 6만5천명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너무나 큰 차이가 났다.유엔군측은 그 때까지 실종인원을 한국군 8만8천명,미군 1만1천5백명 이상으로 파악해 놓고 있었다. 휴전회담은 이렇다할 진전을 보지 못한채 51년을 마감했다.그러나 해가 바뀌면서 양상이 달라져 양측이 좀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자세로 나왔다.19 52년 1월2일 회담에서 유엔군측 대표 R E 리비 미 해군 소장은 자원송환 원칙을 강력히 담은 포로교환을 제안하고 나섰다.공산군측은 이를 즉각 거절했다.이무렵 워싱턴에서는 자원송환의 원칙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종전의 입장을 바꾸었다.반드시 고수해야 한다는 강경론으로 선회했던 것이다. 송환원칙으로 인해 협상이 교착되자 쌍방은 세부적인 사항의 타결을 시도해 어느 정도 성과가 보이는 듯 했다.3월5일 공산측은 전년도 12월18일 교환된 명단에 입각한 송환을 제의하면서 꼬리를 달았다.전선에서 석방했다는 유엔군측 포로 5만여명의 행방을 유엔군이 묻지 않는다면 유엔군이 억류하고 있는 3만7천명은 불문에 붙이겠다는 것이었다.유엔군측은 이미 명단을 제출한 공산군 포로 13만2천여명에 대한 조사결과 겨우 7만명이 송환을 원한다는 사실을 통고했다. 공산측은 이를 유엔군의 강압에 의한 것이라고 맞서 회담은 또 교착상태에 빠졌다.4월28일 유엔군측은 일괄타결안을 제시하고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과 미 트루먼 대통령은 각각 성명을 내놓았다.유엔군측이 제시한 일괄 타결안에는 공산측이 통고한 송환가능 유엔군 포로 1만2천여명을 인정하고 송환을 희망하는 유엔군 억류 공산군 포로 3만여명과 교환한다는 조건이 포함됐다.당시의 분위기를 볼때 상당히 완화된 이 조건은 공산군측에 실리를 넘겨준 것이었다. ○공산포로,소장 인질로 이같은 분위기속에서 5월7일 거제도 제76포로수용소장 F T 도드 준장이 공산포로들에 의해 피랍되면서 공산측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다.도드 준장을 인질로 잡은 공산포로들은 포로수용소측에 ▲독가스 및 세균무기 사용,원자탄 실험중지 ▲불법 부당한 인민군과 중공지원군의 자원송환 즉각 중지 ▲수천명의 포로를 재무장시키려는 강제조사 중지▲포로대표단 구성 승인등을 요구했다.도드준장 후임인 새 포로수용소장 C F 콜슨 준장은 포로들의 요구를 대부분 받아들였다.공산측은 콜슨 준장의 회신내용을 들어 유엔군측이 지금까지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를 학대하고 세균전까지 서슴지 않은 것으로 선전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유엔군측은 10월8일 마침내 최종안을 제출했으나 공산군측이 거부함으로써 협상은 끝이났다.이후 10월14일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에서 교착상태에 빠진 포로문제를 다시 다루어 휴전문제가 유엔으로 옮겨갔다.유엔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스위스,스웨덴등 4개국으로 포로송환위원회를 구성해 본국송환을 원하는 포로는 본국으로 송환한다는 원칙을 세웠다.그리고 모든 포로가 선택의 권리를 갖고 90일의 시한을 넘기고도 결정하지 못한 비송환자들은 휴전회담에서 위임한 정치회담에 이양하자는 인도의 절충안이 채택됐다.그러나 공산군측은 기본적으로 자원송환을 지지하는 유엔결의안을 수락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이런 와중에 1953년 1월 미국에서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행정부가 들어서고 3월에는 소련수상 스탈린의 죽음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판문점 연락장교회의를 통해 병상포로교환에 우선 합의했다.이에따라 4월26일 판문점에서 양측의 대표단 전원이 만났으나 회담은 다시 교착상태에 빠졌다.미국정부는 5월25일 회담대표자회의를 통해 최종안을 전달했다. 이 최종안은 6월4일 회의에서 약간 수정됐지만 송환을 원하는 포로는 휴전조인후 2개월내에 송환완료하고 잔여포로에 대해서는 그후 90일간의 설득기간을 갖도록 한다는 내용을 일단 도출해냈다.또 30일이내에 송환거부 포로문제를 정치회담에서 처리하되 합의를 보지못한 해당포로는 민간인 신분으로 변경키로 합의했다.민간인이 된 포로들은 뒷날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의해 한국도 북한도 아닌 제3국으로향하는 운명이 결정되었다. ○첫 석방계획은 실패 그로부터 14일후인 6월18일 자정 남한에 수용됐던 반공포로 2만6천4백24명이 국군의 도움으로 수용소를 탈출했다.이른바 반공포로 석방으로 불리는 이 한국판 엑서도스는 이승만 대통령이 결정했다.유엔군과 공산군간에 휴전회담이 본격 진행되자 휴전반대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던 이승만 대통령은 10일 헌병총사령관 원용덕 중장등 군 수뇌들을 불러들였다.이 자리에서 반공포로 석방문제를 검토하고 다음날 정오 이를 시행토록 명령했다.그러나 한국군 병력배치등 준비미흡으로 첫 계획은 실패하고 1주일뒤인 18일 북한행을 거부한 포로들이 미군 경비 수용소를 빠져나와 자유의 품에 안겼던 것이다. ◎미 힉컬슨 작성 문서/미,공산군포로 난동에 시종 곤욕/북·중서 강력 항의… 정전협상 불리/도드 수용소장 피랍사건 상세 기록 미군은 한국전쟁 기간내내 공산군 포로문제로 시달렸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MARA)에서 입수한 문서더미 가운데 국제정치관계철 북한 전쟁포로 관련 시리즈는 이같은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문서시리즈는 미 국무성 차관보 힉컬슨이 1952년 2월18일 「한국의 전쟁포로」라는 제목으로 작성해 극동과 간부 엘리손과 존슨에게 발송한 문서로 국내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이 문서시리즈에 따르면 미군측은 공산포로로 인해 지휘체계 상부의 갈등을 불러 일으키는 등 심한 타격을 받았다. 이 문서가 작성된 당일만 해도 한국인 포로를 조사하기 위해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제62동에 진입한 미군병력과 포로들의 충돌로 미군1명과 포로 77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했다.이밖에 미군 38명,포로 1백40명이 부상당하는 유혈사태를 빚었다.공산군측은 이사건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고 유엔군측은 「민간인이 관련된 내부사건」으로 일축했지만 결국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유엔군과 미군측은 협상에서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됐다고 분석했다. 리지웨이 장군이 이 시리즈 4월29일자 전문에서 수용소 상황에 대해 기술한 내용도 이같은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다.장군은 전문을 통해 『이들 수용소는 잘 조직돼 수용자들을 죽이거나 부상을 입힐 정도의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는 다스릴 수가 없다.하지만 위험한 폭동이나 유혈사태등의 모험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기술하는 등 포로문제로 고심한 흔적을 나타내고 있다. 이 문서 시리즈는 또 52년 5월7일 도드 거제도 제76포로 수용소장의 납치사건도 기록하고 있다.콜슨장군은 도드의 석방을 위해 포로들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이 사건으로 5월20일 도드와 콜슨장군이 모두 대령으로 강등하는 과정도 잘 드러내 보였다.
  • 부산 정치파동(새로 쓰는 한국현대사:35)

    ◎우남,「대통령 직선」 시도… 야서 강력 반대/계엄 선포·민의 조작… 발췌개헌안 통과 1952년 초 한국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다.유엔군과 공산군이 51년 11월 판문점 휴전회담에서 양쪽의 접촉선을 일단 군사분계선으로 인정키로 합의한 뒤 큰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1월 초 서부전선인 문산 북쪽 두매리고지와 중동부전선의 크리스마스고지에서 충돌이 있었을 뿐 양쪽의 작전은 수색·정찰,간헐적인 포격전 등 일상적인 군사활동에 그쳤다.이 군사분계선은 거의 변하지 않은 채 휴전까지 이어져 지금의 휴전선으로 고정됐다.한편으론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정전회담이 거듭 열려 휴전과 포로교환 문제를 논의했다. 이때쯤 후방은 전쟁의 공포에서 어느정도 벗어나 안정을 되찾아갔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1월19일에는 제32회 전국체전 동계대회가 수원에서 열리기도 했다.그러나 백성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웠다.월남 동포 1백20만∼1백50만명을 포함해 전국에서 모두 7백만명가량의 피란민이 발생했고 이들이 대부분 도시로 몰리는 바람에 생필품은 매우부족했다.대한민국 임시수도 부산의 경우 전쟁전 43만명이었던 인구가 1백50여만명으로 늘어났다.52년 초 물가는 「6·25」전보다 13배나 뛰어올라 있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정치권에서는 헌정사에 큰 오점을 남긴 「부산정치파동」이 서서히 싹터갔다.부산정치파동은 1952년 5월25일 계엄령선포에서 7월7일 제1차 헌법개정,이른바 발췌개헌 공포에 이르기까지 부산에서 벌어진 일련의 정치사건들을 말한다.그 발단은 51년 11월 이승만 대통령의 의도에 따라 정부가 발의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에서 비롯됐다. ○첫 표결 압도적 부결 이승만은 개헌발의에 앞서 자유당을 창당,이를 발판으로 국회에서 개헌안을 통과시키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자유당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반대하는 원내세력과 지지하는 원외세력으로 갈라져 결국 창당 한달여만에 원내자유당과 원외자유당으로 분리됐다.이런 가운데 헌법개정안은 해를 넘겨 1월18일 국회 표결에 부쳐졌는데 찬성 16,반대 1백43,기권 1표라는 압도적 표차로 부결됐다. 이승만은 자신을 반대하는 국회에더이상 미련을 두지 않는 대신 충성을 다하는 경찰력을 이용,민의를 동원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꿨다.이때부터 원외자유당 주도로 「개헌안 부결반대 민중대회」가 열리는가 하면 헌법규정에도 없는 국회의원 소환운동을 벌이는 등 갖은 수법을 동원해 국회에 압력을 가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은 이승만에게 유리하게 전개됐다.먼저 4월25일 실시한 읍·면의원선거와 5월10일의 도의원선거 등 첫 지방의회 선거에서 여당인 원외자유당이 압승을 거두었다.이승만은 지방의회와 원외자유당을 양대 축으로 삼아 직선제개헌안을 더욱 거세게 밀어붙였다. 내각책임제 개헌에 앞장서던 서민호 의원이 4월24일 육군대위 서창선을 저격한 사건도 반이승만파에게 큰 타격을 입히는 계기가 됐다.서의원은 지방의회선거 감시차 전남 순천에 갔다 숙소에서 술취한 서대위와 시비가 벌어졌다.서대위가 먼저 권총 6발을 쏜 뒤 서의원이 응사했지만,서의원은 살인 혐의로 구속됐다.국회는 서의원의 살인이 정당방위인데도 그를 구속한 것은 내각책임제 개헌을 방해하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서의원 석방결의안을 의결했다. ○대낮 야 의원에 테러 서의원이 5월19일 석방되자 부산 거리에는 이를 항의한다는 구실로 조작된 민의가 활개를 쳤다.민족자결단·백골단·땃벌떼 등 정체모를 집단들이 때를 만난듯 거리를 누비며 대낮에 야당의원들에게 공공연하게 테러를 가했다.이들은 또 「살인 국회의원 석방한 국회는 해산하라」며 정부·국회·대법원 청사를 습격하기도 했다.피란수도 부산시내에는 공포 분위기가 확산됐다.때맞춰 이승만지지파가 주를 이룬 7개 도의회가 국회해산 요구를 결의했고,지방의회 대표는 반민의국회 해산궐기대회를 열었다. 정부의 공세는 5월25일 0시를 기해 부산·경남북과 전남북 일부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공비소탕을 내세운 계엄을 악용,야당의원을 철저히 탄압한 것이다.계엄당국의 언론 검열이 시작됐고 25일 밤부터 서민호의원 등 내각제 지지의원들을 잡아들였다.26일에는 헌병대가 국회의원 40명이 탄 통근버스를 크레인에 달아 끌고갔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우방들의 비난이쏟아졌다.맨 처음 반응은 유엔한국통일 부흥위원단(UNCURK)에서 나왔다.언커크는 5월28일 이승만에게 성명을 보내 『한국에서 유엔을 대표하는 본 위원단은…부산시의 계엄령을 즉각 해제하고,현재 체포·구금된 국회의원들을 석방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트루먼 미국대통령도 항의각서를 보냈지만 이승만은 「계엄령은 공비토벌을 위한 것이며,국회의원 체포는 공산당과의 공모여부를 밝히기 위해서」라고 둘러대며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어 6월25일 반이승만 세력에게 결정타를 먹인 「이대통령 암살미수 사건」이 발생했다.부산 충무로광장에서 벌어진 「6·25기념식전」에서 유시태(당시 62)가 이승만에게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그러나 총알이 발사되지 않는 바람에 이승만은 암살을 면할 수 있었다.이 사건으로 유시태에게 신분증과 옷을 빌려준 민주국민당 김시현의원 등 야당의원 5명이 배후세력으로 체포됐다.「이대통령 암살미수 사건」은 온갖 테러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재집권 야욕을 꺾으려던 야당에게 치명적인 악재로 작용했다. ○장택상의 수정안수용 이처럼 반이승만 세력이 궁지에 몰렸을 때 장택상 국무총리가 제안한 제3의 개헌안이 등장했다.이 개헌안이 바로 정부의 안과 국회의 안을 적당히 절충한 「발췌개헌안」이었다.하지만 대통령직선제·양원제를 뼈대로 한다는 점에서 이승만의 개헌의도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국회안을 몇가지 수용하긴 했지만 이는 야당의원들에게 타협할 명분을 주기 위한 치장에 불과했다.「이대통령 암살미수 사건」으로 기진맥진한 야권은 장총리의 「발췌개헌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952년 7월4일 밤 발췌개헌안은 기립표결로 통과됐다.출석 1백66명 가운데 1백63명이 찬성했고 3명이 기권했다.정부는 7월7일 개정헌법을 공포함으로써 부산정치파동은 막을 내렸다.이 개헌에 따른 정·부통령 직접선거가 8월5일 실시돼 이승만은 다시 대통령 권좌에 올랐다. 우리 헌정사에 첫 개헌으로 기록된 발췌개헌은 이처럼 불미스러운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고 이후 거듭된 정치파동의 선례가 됐다.역사는 부산정치파동을 「여야간의 정치운영 방식을 폭력을 통한 극한대립 양상으로 바꾸어 놓았으며,헌정사에서 평화적 정권교체의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게 만든 분기점이 됐다」고 평가하고 있다. ◎「부산 정치파동」에 미 직접개입 주장/휴전협상·군사작전에 악영향 판단/한때 이승만 제거·임정수립을 암사 1952년 한국 정정이 부산정치파동으로 위태로워지자 미국은 한때 이승만 대통령의 제거를 고려하는 등 대책 마련에 크게 고심했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당시 미국 정부의 입장을 보여주는 극비문서를 최근 워싱턴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 보관중인 「정책수립처 문서」(Records of Policy Planning Staff)더미에서 발굴했다. 국내에 처음 공개되는 이 문서는 「한국에서 정치적 위기의 지속」이라는 제목으로 모두 3쪽분량.미 국무성 유엔과장 힉컬슨이 1952년 6월13일 작성,정책수립처의 니체를 포함해 국무차관보 매튜,극동과의 앨리손과 존슨등 간부들에게 발송한 것으로 돼 있다. 힉컬슨은 이 문서에서 부산 정치파동의 해결책으로 미국의 직접 개입을 주장하고 있다.그는 미 국무성이 제한적인 차원에서 개입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전제아래 위기의 책임을 이승만보다는 그의 측근인 이범석·임영신·윤치영에게 돌렸다.그 까닭은 한국에서 이승만을 대체할 만한 『전 국가적인 명망성』을 지닌 인물이 없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때문에 이승만의 지위는 인정해 주면서도 주변의 추종자를 거세함으로써 그의 독재적 경향을 제어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며칠 뒤 발췌개헌안을 내놓은 장택상 국무총리를 미국이 비난대상에서 제외한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당시 미국은 지지부진한 휴전협상보다 한국의 정치적 위기를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미국은 이 위기가 휴전협정 뿐만 아니라 군사작전의 시행마저도 위협한다고 보았다.따라서 이승만을 제거하고 임시정부를 세울 계획이 한때 있었음을 이 문서는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서는 미국의 개입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음을 밝혔고 이 내용대로 미국은 발췌개헌안 통과­이승만 재선의 과정을 묵인하게 된다.
  • 불 핵실험 왜 밀어 붙였나/늦출수록 반대여론 고조 판단

    ◎미수준 「모의 실험기술」 갖추기 프랑스가 국제적인 거센 반발과 비난,국내의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밀어붙이기식」으로 핵실험을 강행했다. 프랑스의 이같은 핵실험강행배경은 미국등에 비해 미흡한 모의핵실험 기술을 완성시켜 21세기에 걸맞는 핵억지력을 보유하겠다는 의도때문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또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신드골주의의 기수」로서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이 국제사회에서 프랑스의 위상을 높이는 확실한 방편이라고 믿고 있는 등 대통령의 개인적 성향도 빼놓을 수 없다. 남태평양 무루로아섬의 핵실험에서 발생된 에너지는 히로시마 원폭투하 당시와 비슷한 20kt 수준이다. 전문가들이 당초 30kt수준의 에너지가 발생될 것으로 예상한데 비하면 상당한 에너지가 모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핵실험은 이런 국내외의 반발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듯하다. 우선 핵실험의 실시횟수 등에서 신축성을 보이고 있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핵실험의 충분한 정보만 얻으면 내년 5월 21일 이전이라도 정해진 핵실험을 다하지 않을수 있다』고 말했다. 계획된 8차례의 핵실험 가운데 몇차례는 축소할 수 있다는 양보의 카드인 셈이다. 그의 발언은 핵실험을 불과 10여시간 앞두고 나왔다는 점에서 다분히 계획된 카드라는 인상을 준다. 국제적인 반발분위기를 희석해보려는 정해놓은 수준의 하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핵실험개시의 시점도 약간 조절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우선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은 자신이 하와이에 가 있을 주말동안에 실험을 하지 말 것을 됴청했다. 30여년동안 핵실험 연료를 미국영공을 통과해 수송해온 프랑스로서는 결국 주말은 피할 수 밖에 없게 됐다. 게다가 국제적인 반발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국내적인 반대여론바저 고조돼가는 것은 견디기 어려웠을 것으로 여겨진다. 「넘어야 할 산」인 핵실험 시점을 늦출수록 반발과 반대여론만 더욱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파리의 연쇄폭탄테러 가운데 최근 발견된 불발탄들이 핵실험과 연관돼 있다는 설이 확인도 되지 않고 그럴듯하게 나오고 있다. 다시말해 핵실험의 비난여론을 희석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프랑스는 핵실험의 첫단추는 뀌었지만 앞으로 반대여론은 수그러들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20kt의 폭파에너지가 발생한데 대해 그린피스는 이미 시라크 대통령을 「자연파괴의 주범」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내년 5월까지 실시될 프랑스 핵실험에서 나올 에너지의 최대치는 첫번째의 10배인 2백kt이라고 전문가들은 밝히고 있다. 국제사회 및 환경론자들의 반대도 발생되는 에너지의 양만큼 증폭될 것으로 전망된다. □불 핵실험 관련 일지 ▲45년 10월18일:드골 장군,원자력위원회 설치 명령. ▲60년 2월13일:알제리 레가네에서 최초의 원폭 실험. ▲66년 7월2일:프랑스령 무루로아 환초서 핵실험 첫 실시. ▲68년 8월24일:팡가타우파서 첫 수소폭탄 핵실험 실시. ▲75년 6월5일:팡가타우파 환초의 산호속 갱도에서 첫 핵실험. ▲85년 7월10일:프랑스요원들,오클랜드항에서 레인보우 워리어호 격침. ▲91년 6월3일:미테랑 대통령,NPT(핵확산금지조약)가입 천명. ▲92년 4월8일:미테랑 대통령,핵실험 1년간 중지 선언.▲95년 6월13일:자크 시라크 대통령,핵실험 재개 선언. ▲95년 9월5일:무루로아 환초서 핵실험 실시. ◎「불 핵실험 강행」 이모저모/항의 시위대 “시라크는 범죄자” 맹렬 규탄/불 반핵단체들도 “정부 청사앞 시위” 선언/중 군축대사 “일은 핵실험 비난 자격없다” ○…남태평양에 위치한 타히티의 주요 반핵시위 주도자들은 무루로아섬에서 프랑스의 핵실험이 실시됐다는 보도를 접한뒤 깊은 충격을 받은 모습. 파페에데에서 오랫동안 핵실험 반대활동을 전개해온 마리­테레제 다니엘슨씨는 시위가 폭력화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며『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두렵다』고 말했다. ○…프랑스 원자력위원회 관계자들은 『이번에 실시된 핵실험에서 바다 수면위로의 방사능 누출이 전혀 관측되지 않았다』고 설명. 무루로아 환초지역 프랑스군 사령관인 폴 베리셀 장군도 『이번 실험은 실시전 모든 안전조치가 완벽하게 이루어져 최상의 조건속에서 조용하게 이루어 졌다』고 발표. ○…타히티 수도 파페에데의 프랑스 시위진압 경찰은 5일 프랑스가 무루로아 환초에서 핵실험을 실시한 직후 폭력사태를 우려해 방패·곤봉 등 폭동대비 장비를 완전히 갖춘 70명의 경찰관을 프랑스 총독관저 및 청사에 배치. 한편 파페에데의 핵실험 항의 시위자들은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을 「범죄자」라고 규탄하며 현지 프랑스군 부대 홍보실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다 경찰과 헌병에 의해 강제로 운반돼 나갔다. ○…칠레와 뉴질랜드가 프랑스의 핵실험에 항의,자국주재 프랑스대사를 소환하겠다고 밝힌 가운데 그린피스는 6일 호주정부에 대해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 비무장 해군함정을 파견하라고 촉구. ○…제네바에서 열린 군축회의에 참가하고 있는 사조강 중국 군축대사는 5일(현지시간)연설을 통해 일본의 침략전쟁 책임문제를 거론하면서 일본은 프랑스·중국등의 핵실험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고 강력히 비난. 사군축대사는 포괄 핵실험금지조약(CTBT)문제를 논의중인 이날 군축회의 본회의 연설에서 일본은 히로시마(광도)에 원폭이 투하된 배경은 언급하지 않은채 원폭 참상만을 말하고 있다고 지적. ○…볼리비아·콜롬비아·페루·베네수엘라등 중남미의 안데스협정 국가들은 5일 정상회담중 공동성명을 발표해 프랑스의 핵실험에 대해 강력히 비난하고 『프랑스의 핵실험이 태평양 연안 국가들을 환경위험에 직면케 할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 ○…프랑스 야당 정치가들과 환경보호 운동가들은 6일 프랑스의 핵실험 재개를 규탄함으로써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국외에서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부정적 반응을 얻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야당인 사회당·공산당·녹색당 정치가들과 저명한 해양탐험가 자크 이브 쿠스토씨(85)는 프랑스 시간으로 5일 밤 무루로아환초에서 핵실험이 실시된 것으로 밝혀지자 6일 이른 새벽 격노에 찬 항의 성명을 발표. 저명한 환경운동가 쿠스토씨는 『생물무기·화학무기들을 모두 금지시켰음에도 더욱 위험한 핵무기가 불법화되지 않은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핵무기를 실험하지 말고 폐기하자고 촉구했으며 그린피스 프랑스지부를 포함한 수개의 반핵단체들은 이날 하오 파리의 바스티유광장과 정부청사 앞에서 시위를 벌이겠다고 선언.
  • 시·도 교육감과 오찬/이 총리

    이홍구 국무총리는 18일 『지난 5월31일 교육개혁위원회가 발표한 「신교육체제 수립을 위한 교육개혁방안」에 대한 국민들의 호응과 기대가 큰 만큼 이번에야말로 교육개혁 실현을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강조했다.
  • 한중 전면파업 돌입/창원/노조­4백여명 본관 점거 철야농성

    ◎부분파업 43일만에 임금파업 결렬로 지난 달 6일부터 부분파업을 계속하던 창원공단내 한국중공업 노조(위원장 김창근)가 18일 본관을 점거,철야농성하는 등 이날부터 사실상 전면파업에 들어갔다. 이 회사 노조는 이날 상오 9시부터 단조공장옆 노동광장에서 2천여명의 조합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집회를 가진뒤 이중 1천여명이 하오 2시까지 본관 앞과 중역실이 있는 12층을 점거해 농성을 벌였다. 노조측은 그러나 하오 2시 농성을 풀고 집회를 가진 뒤 4백여명이 다시 본관 12층 복도 등에서 철야농성을 벌였다. 한편 회사측은 노조원들의 본관 옥상 농성에 대비해 옥상으로 통하는 출입구 2곳을 폐쇄했다. 이 회사 노사는 지난 5월부터 임금및 단체협상을 벌였으나 기본급과 상여금인상폭,성과급 지급시기,일방중재등 6개항에 대한 의견차이가 커 협상을 타결짓지 못하고 노조측은 지난달 6일부터 부분파업을 계속해 생산 손실액이 하루 평균 56억여원씩 1천8백억원에 이르고 있다.
  • 타인명의로 당좌개설… 부도/「실명제 위반」 공방/피해자·경기은

    경기은행이 회사대표의 대리인에게 허용한 금융거래에서 부도가 나자 돈을 떼인 업체들이 금융실명제를 어겼다고 주장하고 있다. 18일 경기은행에 따르면 인천시 남동구 남동공단 황산정공 직원 박용태(41)씨는 92년 5월 이 은행 역곡지점에서 회사 대표 박용석(45)씨의 주민등록증과 인감증명 등으로 당좌를 개설했다. 대표 박씨의 친동생인 박용태씨는 그후 계속 대표명의로 어음을 발행했는데 최근 회사경영이 어려워지며 지난 12일 어음 5천만원을 부도내는 등 지금까지 6억여원을 부도냈다. 경기은행은 『박용태씨가 형의 동의를 받아 대신 거래했고,관행상 친동생은 표현(표견) 대리인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법적 하자가 없다』고 밝혔다. 한편 이 회사와 거래해 온 30여 업체들은 『황산정공이 발행한 어음이 20억∼30억원으로 추정돼 연쇄부도가 불가피하다』며 『은행이 장기간 대리인에게 당좌개설 및 어음거래를 묵인,이같은 사태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 한은 폐지폐 대량 유출/부산지점 직원이 수차례 세단기 조작

    ◎경찰,공범여부 집중조사 한국은행 부산지점 직원의 낡은 지폐 절도사건을 수사중인 부산 중부경찰서는 18일 전 서무과 직원 김태영씨에 대해 절도 및 절도미수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은 또 당시 상급자인 편봉규 화폐정사과장(46)과 정사실 김응호 심사역(44),홍덕순 계장(42·여) 등 3명을 소환,참고인 조사를 벌였다. 경찰은 전서무과직원 김씨에 대해 다른 직원들과의 공모 및 다른 범행 여부를 집중추궁했으나 이를 완강히 부인했다. 김씨는 경찰조사에서 『지난 93년 12월 손상지폐 세단작업 마감후 기계청소 및 보수를 하던 중 비닐 테이프나 스테이플러(철사기),침 등 불순물이 붙은 지폐들이 절단장치에 들어가지 않고 롤러 벨트 부분에 남아 있는 것을 발견,이 돈을 챙겼다』고 진술했다. 세단기에 불순물이 붙은 지폐가 투입되면 제대로 절단장치에 들어가지 않아 초당 9장씩 투입되는 지폐들이 적체현상을 일으켜 쉽게 발견되지만 마감직전에는 투입량이 많지 않아 벨트부분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는 것이다. 김씨는 『이같은 원리를이용해 지난 94년 4월 26일에는 세단기의 마크네틱 스위치 간격을 미세하게 넓혀 지폐가 절단되지 않은 채 통과되도록 기계를 조작해 5만원을 훔쳤다가 적발됐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김씨가 매일 마감후에 기계청소와 보수를 혼자서 담당했고 파면직후 주택을 구입하고 수천만원을 증권에 투자한 점으로 미뤄 도난규모가 한국은행이 자체 적발한 2차례 55만원보다 훨씬 더 클 것으로 보고 조사하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가 파면되기 전까지 연봉이 1천7백만원에 불과했고 사원용 연립주택에서 생활해 왔으나 지난 5월 파면된 뒤 1개월만인 지난 6월 중순 현재 사는 부산시 남구 민락동 11의 1 36평짜리 세종연립주택(시가 1억여원)을 구입했고 7천여만원 상당을 증권에 투자했다는 것이다. ◎“금명 책임자 문책” 정부는 18일 한국은행의 화폐 불법 유출사고에 대한 재경원 감사실의 경위조사가 끝나면 금명 책임자에 대한 문책을 단행할 방침이다. 이와 관련,말레이시아를 방문중이던 김명호 한은총재는 이날 하오 급거 귀국,청와대를방문해 한이헌 경제·김영수 민정수석에게 사건의 경위를 해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 “실명제로 땅투기 억제 불구/지자제로 가격상승 불가피”

    ◎토개공 의식조사 국민들의 대다수는 부동산실명제가 땅투기를 막고 땅값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그러나 2명 중 1명 이상이 지방자치제의 실시로 땅값은 계속 오른다고 내다봤으며 아직도 기회가 오면 땅투기를 하겠다고 응답했다. 이같은 사실은 16일 한국토지개발공사가 한국갤럽조사연구소에 의뢰,만 20세이상의 일반국민 1천2백명등 전국의 2천명을 대상으로 지난 4월18일부터 5월15일까지 실시한 토지에 대한 의식조사 결과에서 나타났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일반국민의 74.5%가 재산증식을 위한 땅매매를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답했으나 53.1%는 기회가 되면 땅투기를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 국내 최연소 24년10개월 박사 탄생

    ◎내일 KAIST서 이학학위 받는 김용진씨/광주 과기고 월반… 종전기록 9달 단축/반도체관련 논문 미 학회서도 “호평”/어려운 가정환경속 초·중·고 줄곧 1등 국내 최연소 박사가 탄생한다.18일 하오 2시 대전시 한국과학기술원(KAIST·원장 윤덕용)에서 열리는 졸업식에서 박사 학위를 받는 김용진군(25·물리학과·서울시 송파구 잠실본동 239의 1).김군의 박사 학위는 지난 87년 같은 학교 김대영씨가 받은 25년7개월보다 9개월이 빠른 24년10개월로 국내 최연소 기록이다.학위 논문은 「전자 싸이클로트론 방전식 플라즈마 식각장치 내에서 SF6 방전시 F활성원자의 분포특성에 관한 연구」이다.반도체를 생산하는 첨단 장비의 개발에 관한 연구로 지난 5월 미국의 학회에서 발표돼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는 지난 70년 전남 해남에서 사업을 하는 아버지 김정홍(55)씨와 어머니 박승애(49)씨의 사이에서 3남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아버지가 사업에 거듭 실패,가정 형편은 상당히 어려웠다. 다른 아이들보다 1살 적은 7살에 해남읍에 있는 현암서 국민학교에 들어간 뒤 고교를 졸업할 때까지 줄곧 1등을 놓치지 않았다.광주과학고를 2년만에 졸업할만큼 성적이 매우 뛰어났다. 집착이 강한 성격으로 목표를 세우면 꼭 이뤄내는 끈기를 지녔다.가정형편이 어려워도 늘 쾌활했다.국민학교 시절에는 겨울철 눈이나 여름에 냇가에 빠져 죽을 고비를 2번이나 넘길 정도로 개구쟁이였다. 18세의 어린 나이로 한국과학기술원에 입학한 그는 한때 조기진학에 대한 회의에 빠져 방황하기도 했다.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그 이유는 학문적으로 앞서 간다고 해서 인성이나 사회활동등 다른 분야에서 반드시 뒤떨어지라는 법은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오히려 모든 면을 성공적으로 이끌수 있다는게 요즘의 생각이다. 마음을 고쳐먹고 대학 4년과 대학원 2년을 열심히 공부했다.결국 박사학위는 남들이 4년걸리는 기간을 6개월 앞당겨 이번에 받게 됐다. 반도체를 제조하는 장비나 공정에 대해 관심을 지닌 것은 석사과정에 들어간 뒤였다.반도체를 생산하는 장비나 공정을 개발하는 일은 한국 산업을 이끌어갈 유망한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는 공부벌레가 아니다.운동과 노래를 좋아하며 특히 배구와 농구를 즐긴다.고교 때는 음악교사가 음악대학을 추천할 정도였다.대학 때는 대학합창단에서 활동했다. 가정형편 때문에 시스템공학연구소와 표준연구소 부설 천문대에서 각각 3개월씩 아르바이트도 했다.이때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맡아 컴퓨터를 상당히 익혔다. 그는 지난 5월부터 삼성전자의 장학생으로 선발돼 회사로부터 장학금을 받아왔다.모 경제신문에 입사한 첫째 동생과 함께 부모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준 일이 기쁘기만 하다.아직도 동생 2명이 모두 대학생이라 지출이 많기 때문이다. 그는 『훌륭한 과학기술인이 돼 우리 산업이 발전하는 데 최선을 다 하겠다』며 『그동안 뒷바라지해 주신 부모님과 교수님들의 은혜도 갚을 줄 아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했다.
  • 한국­격동의 반세기 발자취/1945∼95:1

    ◎분단대결 구도속 민주주의 꽃피우다/동족상잔의 전쟁 발발… 전국토 초토화­1950년/5·16 쿠데타… 본격 개발독재시대 돌입­1961년/유신 선포… 장기집권의 「정치암흑기」로­1972년 95년 8월15일.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되찾은지 쉰번째 맞는 광복절이다.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민족상잔의 비극과 국토의 허리가 꺾이는 분단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분단을 원죄 삼아 정치·사회등 각부문에서 여러가지 사건들이 꼬리를 물었으며 최근들어서는 고속성장의 후유증으로 붕괴·폭발등 인재가 속출,광복 반세기사에 깊은 골이 패이게 했다.그러나 한민족은 이같은 역사의 도전을 끈질김과 슬기를 갖고 성공적으로 극복,전쟁의 폐허속에서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눈부신 꽃봉오리를 피워냈다.광복 및 분단 반세기동안 빚어진 영욕의 역사를 연도별로 간단히 정리해본다. ▷1945년◁ 8월15일 한민족은 36년간의 일제강점에서 벗어났다.그러나 얼마뒤 9월2일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소양군의 한반도 분할점령이 발표돼 분단의 씨앗이 심어졌다.김일성은 9월19일 원산항을 통해 북한에 들어왔다.이 가운데 10월25일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을 중심으로 2백여 정당대표가 회합해 조선독립 촉성중앙협의회를 발족시켰다.김구등 임정요인들은 11월23일 개인자격으로 뒤늦게 환국했다.연합국은 12월2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조선 신탁통치를 결정,12월31일 반탁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됐다. ▷1946년◁ 조선공산당은 1월2일 입장을 급선회,신탁통치 지지에 나섰다.5월23일에는 군정장관의 허락없이 38선을 무단 월경하는 것이 금지돼 분단이 사실화됐다.이에 따라 이승만은 6월3일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천명했으며 소련은 7월2일 서울영사관을 철수했다.대구에서 쌀배급요구를 내세운 10·1폭동이 일어나 3천7백명이 체포돼고 16명이 숨졌다. ▷1948년◁ 2월26일 유엔은 남한단독 총선거 실시를 결의했다.김구등 한독당 대표들은 이에 반발해 4월19일 38선을 넘어 김일성과 남북연석회의를 갖고 통일방안을 논의했다.또한 제주도에서 4월3일 남한단정에 반대하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그러나 결국 5월10일 유엔 한국위원회의 감시 아래 남한단독 첫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됐다.총선 이후 첫 소집된 국회는 7월1일 대한민국을 국호로 결정했으며 원내 선거로 초대대통령에 이승만을 선출했다. ▷1949년◁ 5월20일 남로당 국회프락치사건이 일어나 국회의원들이 체포됐다.미국은 같은날 미군철수를 발표했으며 6월29일 철수를 완료했다.이에 앞서 6월26일 민족지도자 김구선생이 안두희에 의해 피살,국민의 깊은 슬픔을 자아냈다. ▷1950년◁ 미 애치슨 국무장관은 1월12일 미방위선에서 한국이 제외된다고 말했다.반면 1월26일에는 외침시 미군의 개입을 보장하는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이 체결됐다.마침내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53년7월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년여간 전국토가 전화에 휘말려 폐허화됐다.3일만인 6월28일 서울이 인민군에 함락됐으며 같은날 새벽 3시 한강인도교가 폭파됐다.미국은 6월27일 참전을 결정하고 유엔 안보리에 연합군 결성을 제안,7월7일 안보리에서 유엔군 최고사령부 설치를 채택됐다.부산까지 계속 밀리던유엔군은 9월15일 새벽 인천상륙작전을 감행,9월26일 서울을 수복한데 이어 38선을 돌파하고 북진에 들어갔다. ▷1951년◁ 중국군은 1월1일 6개군단으로 38선을 넘어 남하했고 정부는 다시 1월4일 부산으로 후퇴했다.이 가운데 공비토벌을 이유로 거창양민 6백63명을 국군이 학살한 사건이 벌어졌다. ▷1953년◁ 이승만은 미측의 조기 휴전 추진에 반발해 6월18일 반공포로 2만7천여명을 석방하는등 미측에 압력을 가했다.그러나 7월27일 유엔과 북한·중국이 당사자로 서명한 가운데 휴전협정이 조인됐다.북한에서는 8월7일 박헌영등 남로당 계열을 간첩혐의로 사형을 집행했다고 밝혔다. ▷1960년◁ 전년의 사라호 태풍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은 것을 간신히 수습하고 3월15일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돼 4대 대통령에 이승만대통령이 당선됐다.그러나 부정선거였음이 밝혀져 거센 항의시위가 빚어졌다.4월11일 마산에서 최루탄에 맞아 숨진 김주렬군의 사체가 발견되면서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됐다.4월19일 서울에서 2만명의 학생들이 대대적인 도심시위를 벌여 4·19혁명의 불길이 당겨졌다.4월26일 이승만대통령은 마침내 하야성명을 발표했다.이에 따라 4월28일 과도내각이 구성됐으며 이승만은 5월29일 하와이로 망명길을 떠났다. ▷1961년◁ 5월16일 박정희소장의 주도로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전두환대위가 이끄는 육사생도들은 18일 쿠테타지지 시위를 벌였다.박정희는 20일 국가재건 최고회의를 결성하고 의장에 취임했다.이어 용공분자와 깡패 6천2백여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7월27일 미측은 한국군사정부를 지지하는 성명을 냈다. ▷1962년◁ 한일양국은 3월12일 외무장관 회담을 개최했다.또 3월19일 최고회의는 63년 민정이양을 발표했으며 정치활동정화법을 공포했다.이에 따라 윤보선대통령이 사의를 표명하자 박의장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했다.또 6월10일에는 10환을 1원으로 평가절하하는 화폐개혁이 단행됐다.10월15일에는 한미행정 협정실무자회담이 학생들의 반대속에 18개월만에 재개됐으며 11월12일 김종필은 일본 오오히라와의 비밀메모를 작성했다. ▷1963년◁ 1월18일 민주공화당이 발기선언을 가졌으며 박정희는 민정불참을 발표했다.25일 김종필은 순회대사 자격으로 자의반 타의반 외유길에 올랐다.11월26일 실시된 6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공화당은 압승을 거두고 이어 박정희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1964년◁ 4월1일 국회에서 김종필과 오히라간의 비밀메모가 공개되면서 학생시위가 격렬해지자 정부는 6월3일 각급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1965년◁ 국회는 1월26일 베트남에 대한 국군공병단의 파견동의안을 통과시켰다.또 2월20일에는 한일기본조약이 가조인됐다.군은 한일조약에 대해 반대하는 시위가 날로 거세지자 4월19일 위수령을 발동했으며 정부는 6월22일 한일협정을 정식조인했다. ▷1966년◁ 6월18일 장창선이 세계아마레슬링 플라이급 자유형에서 금메달을 땄다.1주일 뒤인 6월25일에는 김기수가 국내 처음으로 주니어미들급으로 세계챔피언에 올랐다. ▷1967년◁ 3월22일 북한 중앙통신부사장 이수근이 위장 귀순했다.5월3일 제6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돼 박정희후보가 당선됐다.7월8일 중앙정보부는 동베를린 간첩단사건 관련자1백94명 가운데 1백4명을 구속했다. ▷1968년◁ 1월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무장공비31명이 청와대기습을 위해 서울에 잡입했다.1월23일에는 푸에블로호가 납북됐다.4월 파라과이와의 이민협정에 체결됨으로써 남미 이민의 막이 올랐다. ▷1969년◁ 2월5일 서울시 중학교 무시험 전형이 실시됐다.3월22일에는 3·1고가도로가 개통됐다.3월28일 김수환대주교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추기경에 선임됐다.10월17일 3선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가결됐다. ▷1970년◁ 3월17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강변로에서 정인숙이 피살,배후를 놓고 전국이 들끓었다.4월8일 와우아파트가 무너져 33명이 사망했다. 11월13일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이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 자살해 노동운동의 험난한 앞길을 예고했다.
  • 한국­격동의 반세기 발자취/1945∼95:2

    ◎전화폐허서 교역 13위 경제강국 건설/부·마사태­10·26사건… 박정권 18년 마감­1979년/「민추협」 발족… 민주화운동 본격 점화­1948년/금융실명제·재산공개 등 대대적 개혁조치­1993년 ▷1971년◁ 2월17일 남한의 한필성,북한의 필화 남매가 국제통화로 서로 생사를 확인했다.4월27일 제7대 대통령선거,5월25일 제8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됐다.7월28일 서울형사지법 판사 39명이 정부의 압력에 반발해 집단으로 사표를 내는 사법파동이 일어났다.8월23일에는 실미도 특수부대원이 서울로 난입해 난동을 부렸다.10월1일 전국에서 장발족 단속이 시작됐다.12월25일 대연각호텔에 화재가 발생했다. ▷1972년◁ 7월4일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8월3일 모든 기업의 사채를 동결하는 이른바 「8·3 조치」가 발표돼 기업들이 자금숨통을 트게 됐다.10월17일 유신이 선포,박정희의 장기집권 계획이 모습을 드러냈다. ▷1973년◁ 8월8일 김대중씨가 동경에서 괴한 5명에게 납치돼 강제송환됐다.10월6일 이화여대생들은 쌍쌍파티 중단을 결의했다.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원유생산량 25% 감축을 결정함으로써 석유파동이 발생,국내경제가 심한 몸살을 앓았다. ▷1974년◁ 4월17일 박영복 부정대출 사건이 일어나 금융시장이 크게 교란됐다.7월13일 민청학련사건 관련자 이철 유인태 김지하등 7명에게 사형이 선고됐다.8월15일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박대통령 저격사건이 발생,육영수여사가 재일교포 문세광의 총에 맞아 숨졌다.같은 날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됐다. ▷1975년◁ 2월12일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투표가 실시돼 가결됐다.3월17일 서울 면목동 YH무역 여공 2백여명이 신민당사에서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1976년◁ 8월1일 양정모가 몬트리올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에서 해방후 첫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했다.8월18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났다.10월24일 박동선이 로비활동을 펼친 것이 미국에서 문제화됐다. ▷1977년◁ 8월20일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고리 1호기가 시험송전을 시작했다.9월15일 고상돈이 에베레스트를 정복했다.11월11일 이리역에서 한국화약의 화약수송열차가 폭발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1978년◁ 1월14일 여배우 최은희가 홍콩에서 납북됐다.4월24일 전남 함평에서 고구마 수매부정에 항의하는 농민대회가 열렸다.6월30일 현대아파트 부정분양사건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다.7월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박정희 후보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1979년◁ 10월7일 박정희를 비난하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파리에서 실종됐다.10월18일 부산에 비상계엄령,10월20일 마산·창원에 위수령이 발동됐다(부마사태).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부 부장의 총에 맞아 숨졌다.12월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총격전이 발생했다(12·12사태). ▷1980년◁ 4월21일 사북광업소 광부 7백여명이 어용노조에 반발해 광산촌을 점거하고 경찰과 충돌하는 유혈사태가 일어났다.5월18일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시작됐다.5월31일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전두환)가 신설됐으며 8월27일 전두환이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됐다.10월13일 삼청교육 실시가 발표됐다. ▷1981년◁ 1월13일 대학졸업 정원제가 도입됐다.15일 민주정의당이 창당,전두환이 초대 총재로 선출됐으며 제12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다.23일 대법원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관련 피고인 12명의 형량을 확정했으나 김대중은 나중에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됐다.전두환은 2월25일 대통령선거인단 선거에서 제12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1982년◁ 3월18일 고신대생 문부식등이 부산 미문화원을 방화했다.3월27일에는 프로야구가 출범했다.5월7일 대검은 대화산업회장 이철희·장영자부부를 외국환 관리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18일에는 이 사건과 관련,대통령 처삼촌인 이규광등이 구속됐다. ▷1983년◁ 1월11일 나카소네 일본총리가 방한,한일정상회담을 갖고 40억 달러를 7년에 걸쳐 제공하기로 합의했다.3월17일 일본에서 활약중이던 프로기사 조치훈이 기성을 획득,일본 바둑계의 주요 타이틀을 석권했다.5월18일 김영삼 신민당총재는 민주화와 정치활동 피규제자 해금을 주장하며,자택에서 단식에 들어갔다.6월12일 청소년축구대표팀이멕시코에서 열린 세계청소년 축구대회에서 4강에 진출했다.9월1일 대한항공 여객기가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돼 탑승자 2백69명 전원이 사망했다.10월9일에는 버마 아웅산묘소 폭발사건이 발생,전두환 대통령의 버마 방문을 수행하던 서석준 부총리등 17명이 사망했다.11월17일 동아건설은 단일공사로는 세계최대 규모인 리비아 1단계 대수로 공사를 32억9천만 달러에 수주했다. ▷1984년◁ 5월18일 김영삼과 김대중이 주도하는 민주화 추진협의회가 발족됐다.22일에는 서울지하철 2호선이 완전개통됐다.9월6일 전대통령은 일본을 공식방문했다.일본의 히로히토 왕은 만찬에서 과거의 한일관계에 유감을 표명했다.9월 북한 적십자가 보내준 수재구호물자를 남한측이 인수했다.미국방송이 의정부에 핵배낭 특수부대가 배치돼 있다고 보도했다. ▷1985년◁ 5월23일 대학생 73명이 미 문화원을 점거하고 광주사태에 대한 미국 사과 요구 및 반미구호를 외쳐 충격을 주었다.9월20일 남북 고향방문과 예술공연단 각 1백51명이 서울과 평양을 교환 방문했다. ▷1986년◁4월들어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분신등 시위가 본격화됐다.7월2일 부천에서 시위중 체포된 여대생 권인숙양을 경찰관이 성고문한 사건이 처음 알려져 물의를 빚었다. ▷1987년◁ 1월14일 서울대 박종철군이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연행돼 조사받다가 고문사했다.4월8일 김대중·김영삼씨는 직선제 개헌을 강력히 추진하기 위한 신당창당을 선언했다.13일 전대통령은 특별담화를 통해 개헌논의 유보를 발표하고 직선제 요구를 거부했다.24일에는 통일민주당의 창당을 방해하는 용팔이 사건이 발생했다.6월10일 민정당은 전당대회에서 노태우대표를 차기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그러나 박종철 고문치사 규탄 및 호헌철폐 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29일 노대표가 직선제개헌 수용을 밝혔다.12월16일 실시된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당선됐다. ▷1988년◁ 1월14일 문교부는 새로운 한글 맞춤법과 표준어규정을 확정 발표했다.2월25일 노태우대통령이 취임했다.4월26일 13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됐다.그 결과 처음으로 여소야대의 현상이 나타났다.9월17일 역사적인 서울올림픽이 개막돼 10월2일까지 계속됐다.11월부터는 5공비리 청문회가 시작됐다.11월23일 전두환전대통령은 백담사로 은둔했다. ▷1989년◁ 3월25일 문익환목사가 방북,김일성과 면담했다.6월30일에는 외국어대 임수경양이 북한에 들어가 평양청년학생축전에 참석했다.9월11일 노태우 대통령은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발표했다. ▷1990∼1년◁ 90년2월9일 민정당과 민주당 공화당이 합당,민자당이 창당됐다.10월1일 한소양국이 수교했다.91년2월 수서지구 택지특별분양 사건이 발생,이원배등 의원5명과 청와대비서관,정태수 한보그룹 회장등 8명이 구속됐다.12월18일 노대통령은 한반도 핵부재를 선언했으며 같은달 31일 남북한은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 가서명했다. ▷1992년◁ 3월24일 14대 총선이 실시돼 2번째 여소야대가 실현됐다.정부는 6월30일로 예정된 지방자치단체장선거를 95년이후로 연기한다고 발표했다.8월22일 중국과 수교,주변 4강과 모두 외교관계를 수립했다.12월19일 14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자당의 김영삼후보가 당선됐다. ▷1993년◁ 김영삼대통령은 2월25일 취임후 공직자 재산공개,군 하나회 숙정,금융실명제 실시등 굵직한 개혁조치를 단행했다.이회창원장이 이끄는 감사원은 6월 율곡사업감사,7월 평화의 댐 감사등 과거비리를 사정했다. ▷1994년◁ 정부의 외교가 북한핵문제 해결에 집중됐다.그 결과 10월21일 제네바에서 미북기본합의서가 타결됐다.국내적으로는 구포 열차전복사건,위도 여객선 침몰사건,목포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사건,아현동 가스폭발사건,성수대교 붕괴등 대형사고가 잇따라 발생했다. ▷1995년◁ 6월27일 역사적인 4대 지방자치선거가 일제히 실시된 결과 수도 서울의 시장에 민주당의 조순후보가 당선되는등 시도지사에 대거 야당 후보들이 당선됐다.4월28일 대구가스폭발에 이어 6월29일 삼풍백화점 붕괴등 대형사고가 계속됐다.
  • 제헌국회의 공과(새로쓰는 한국현대사:29)

    ◎헌법·각종 기본법률 제정… 민주주의 토대구축/일제잔재 청산 미비·농지개혁 실패 등 실정도 1950년 5월 30일 제헌국회는 두번째 정기회기를 마침으로써 2년여만에 막을 내렸다.이 날은 마침 제2대 국회 구성을 위한 국회의원선거를 실시한 날이었다.대한민국 출범이후 지금까지 14대의 국회가 구성됐지만 제헌국회의 의미는 각별할 수 밖에 없다. 제헌국회는 헌법을 비롯한 각종 기본적인 법률의 제정,초대 대통령 선출등 대한민국 탄생의 산실이었기 때문이다.또 일제 잔재 청산등 묵은 시대를 정리하고 민주주의에 기초한 새 시대의 문을 열었다는 점에서 그 업적은 대단하다.물론 새로 도입한 민주주의 제도가 우리 사회에는 생소한 것이어서 시행착오가 적지 않았고 일제 청산이 미흡한 점 등 부족한 부분도 많았다고 지적할 수 있겠지만 이는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제헌국회 2년을 수치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1948년 5월 10일 실시한 선거에서 의원 1백98명이 선출됐다.회기는 그해 5월 31일 개막해 2백3일동안 계속된 임시회를 비롯,임시회와 정기회를 합쳐 6차례,6백40일동안 문을 열었다.임기 7백30일 가운데 90일을 제외하곤 늘 개회 상태였으니 신생국가의 첫 의회답게 엄청난 열정을 보였던 것이다.실제로 첫 임시회는 정기국회 개회를 이틀 앞둔 48년 12월 18일 폐회,하루만 쉬고 다시 회기에 돌입할 정도였다. 이같은 열의로 제헌국회는 2백34건의 법률안을 통과시켰다.또 2백26건의 청원을 접수해 65.5%인 1백48건을 처리했다.국회 자체의 건의·결의안은 모두 1백45건이나 됐으며 1백1건을 가결했다. 이같은 활동 중에서도 제헌국회가 다룬 주요 의제로는 반민족 친일파의 처벌,미군 철수대응,국가보안법 제정,농지개혁과 지방자치제 실시 등을 꼽을 수 있다.특히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대응은 새로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로서는 사활이 걸린 최대 현안이었다.남북에 별개의 정부가 들어서기 전부터 분단은 곧 전쟁을 불러오리라는 예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더욱이 북한의 군사력이 대한민국의 수준을 능가한다는 사실도 이미 확인된 상태였다.따라서 주한미군의 존재는 국가안보를 위해 꼭필요했고,만약 미군이 떠난다면 그에 앞서 자체 국방력을 대폭 강화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주한미군 철수의 칼자루는 물론 미국 정부가 쥐고 있었던 만큼 당시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미 정부는 1947년 9월 말 한반도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함으로써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정지작업을 했다.하지만 미 국무성과 육군성,그리고 주한 미 군정 사이에는 입장에 따른 견해차가 있었다. 육군성은 『한국에 대해 군사전략적인 이해를 거의 갖고 있지 않다』는 합동참모부(JCS)의 분석을 바탕으로 미군 철수를 강력하게 주장했다.미 군정도 군정을 지속시킬 수 없을 정도로 한국 상황이 악화됐다는 이유로 철군을 지지했다.국무성도 철군주장에는 동의했다.다만 한국이 공산화하지 않도록 철군에 앞서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결국 미정부는 1948년 4월 초 「한국에 대한 미국의 입장(NSC 8)」이라는 문서를 채택함으로써 주한미군 철수를 결정했다.이 문서에는 주한미군이 그해 12월 31일까지 철군을 완료하도록 규정돼 있었다.하지만대한민국 정부 수립후 남북한간 정세가 불안정해지자 철수는 계속 연기됐다. 한국 정부는 처음부터 미군철수를 반대하지만 일단 기정사실로 굳어지자 더 많은 경제원조와 군사원조를 확보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꿔 미 정부에 집요하게 요구했다.이에 미국도 군사고문단을 설치하고 국방경비대를 강화하는 등 철군이후 한국의 안전보장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제헌국회 내에서도 미군 철수는 최대의 논쟁점이 되었다.1948년 10월 13일 제87차 본회의에서 의원 46명은 「외군철회 요청에 관한 긴급동의안」을 제출했다.그들은 『자주국가로서 자율권이 엄연한 이상 외군의 주둔을 허용할 수 없다』고 주장한 다음 유엔을 겨냥,『유엔은 총회에서 19 47년 11월 14일 결의한 기록을 회상해』외군철수를 조속히 시행하라고 요구했다.이에 대해 많은 의원들은 「공산당 모략」이라고 흥분했고 양쪽 의원들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국회의장이 경위를 출동시키기 까지 했다. 이어 11월 19일에는 최윤동 의원 등 99명이 『대한민국의 방위태세가 정비될 때까지 미군의남한주둔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미군주둔에 관한 결의안」을 제출했다.이 결의안은 약간의 논란을 거친 뒤 표결에 들어가 재석 1백13명 가운데 찬성 88,반대 3의 압도적인 표차로 가결됐다.「외군철회 동의안」이 나온 뒤 빗발치는 여론의 비난 속에서 미군철수 주장이 급격히 사그라든 결과였다. 일제강점기 때 민족반역자 노릇을 한 친일파를 처벌코자 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사안이다.제헌국회는 48년 9월 친일파를 사형까지 시킬 수 있도록 규정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고 곧 이어 이를 실행할 기구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반민특위」는 김상덕 의원을 위원장으로 뽑고 중앙과 지방에 사무국을 설치했다.또 친일파를 기소·재판할 특별재판부·특별검찰부도 정하는 등 발빠르고 치밀하게 움직였다. 위원회는 넉달동안 3백5명의 친일분자를 검거하는 실적을 올리지만 곧 활동이 벽에 부딪힌다.친일파를 대거 기용한 이승만 정부가 시국이 불안정한데 사회지도급 인사를 대량검거하면 사회불안을 가중한다며 반대했기 때문이다.게다가 19 49년 6월에는 친일파의 조정을 받은 사회단체가 『반민특위를 해체하라』며 시위를 벌이는가 하면 특위 소속 사법경찰관이 습격을 받는 등 온갖 행패가 자행됐다.국회는 그해 8월 22일 「반민특위 폐지안」을 통과시킴으로써 행정부에 굴복했고 친일파 처리는 흐지부지돼 아직도 역사의 짐으로 남아 있다.제헌국회가 친일파 처리에 좌절한 것은 당시 국회·행정부를 차지한 계층의 본질적 한계였다고 할 수 있다. 제헌국회는 이밖에도 국가보안법·농지개혁법·지방자치법등을 제정해 국가의 기틀을 튼튼히 하고 개혁 의지를 보였다.『국헌을 위배해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구성한』사람들을 처벌하기 위한 국가보안법은 48년 11월 19일 통과됐다.이 법에 대한 논의과정에서 일부 의원들이 『악용할 소지가 있다』고 반대했고 일부 문구의 수정이 있었지만 투표에서는 찬성 84,반대 3으로 가결됐다.남북이 대치하고 「여순반란사건」등 공산주의 폭동을 여러차례 겪은 그때 상황에서 국가보안법 제정은 어쩔 수 없는선택이었을 것이다. 「농지개혁법」은 49년 6월 21일 제정됐다.헌법 제86조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소유의 한도,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는 규정에 따라 하위법으로 마련된 이 법은 유상매수­유상분배를 골자로 했다.농지개혁법도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결국 대농에게 토지가 집중되는 현상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주한미군사령부 전문/이 대통령,49년4월11일 미군철수 동의/1년간 강력반대… 미,계획 수차례 연기/무기이양·군사고문단 설치 조건 수락 대한민국 수립직후부터 한국과 미국 양 정부는 주한미군 철수를 둘러싸고 협의를 계속했다.한국은 철군을 강력하게 반대한 반면 미국은 한국 안보를 위한 보완책을 제시하며 설득했다. 미 정부는 1948년 4월 2일 국가안보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에서 정리한 「한국에 관한 미국의 입장 (NSC 8)」을 미군철수의 지침으로 삼고 있었다.그 내용은 49년 3월 31일까지 철군을 끝낸다는 것이었다.그러나 한국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미국이 계획한 철수 일자는 점차 늦어졌다. 시한은 5월 10일로 한번 수정됐다가 49년 3월 23일 채택한 「NSC 8­2」에서 그해 6월 30일로 최종 결정됐다.따라서 49년 4월 미국으로선 상당히 초조한 상태였다. 서울신문 특별취재팀은 당시 양국에서 오간 문서 가운데 한국측 입장 변화를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전문을 발굴했다.워싱턴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에서 입수한 이 문서는 주한미군사령부가 49년 4월 12일 미 국무성에 보낸 것이다. 그 내용은 「이승만 대통령이 전날 미군철수에 마침내 동의했으며 며칠안에 이같은 사실을 국민에게 공개하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이와 함께 철군에 앞서 미군이 한국의 육군,해안경비대,경찰에 장비를 이양하며 정식으로 군사고문단을 설치한다는 조건에 합의했음을 밝혔다. 이대통령은 합의에 따라 4월 18일 주한미군 철수를 공표했으며,주한미군 1천5백여명은 49년 6월 27일 인천항을 통해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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