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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朴殷植·申采浩·張道斌 3人의 주필(다시 태어난 ‘대한매일’:4)

    ◎민족사관 巨木 키워낸 ‘둥지’/겨레정신 부활 외친 예리한 필봉/세사람 구국운동·망명 등 공통된 삶/각종 역사서 편찬 근대사학 선구자 白巖 朴殷植과 丹齋 申采浩,그리고 汕耘 張道斌 등 세 사람에게는 여러가지 공통점이 있다.그 가운데 우뚝한 것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 민족의 정기를 벼린 민족주의사학의 거목이라는 사실이다. 아울러 이들은 대한매일의 주필직을 주고 받은 언론사(言論史)적인 인연을 갖고 있다.대한매일은 이들의 필봉에 힘입어 예리하고 격조높은 논조를 일관되게 유지할 수 있었다.대한매일이야말로 이들이 민족사관을 키우고 다듬는데 둥지 구실을 했다고 평가할 만하다. 백암 박은식(1859∼1925)은 성리학자로 이름을 높인뒤 사회·정치활동에 나선다.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만민공동회에서는 문교부장급 간부로 활약한다.이해 9월 ‘황성신문(皇城新聞)’이 창간되자 張志淵과 함께 논설기자(주필)를 맡는다.황성신문은 한일합병후 문을 닫을 때까지 대한매일과 더불어 민족지를 대표했다. 백암이 대한매일과 인연을 맺은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일설에는 대한매일 창간때 이미 梁起鐸의 추천으로 주필에 취임했다고도 하고,황성신문이 정간당한 직후인 1905년 11월에 옮겼다고도 한다. 확실한 것은,일제가 1907년 1월18일자로 파악한 보고서에는 대한매일 사원으로 돼 있지만 1908년 5월28일자 기록에는 빠졌다는 사실이다.따라서 그가 주필로 일한 기간은 1905년 말에서 2년여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대한매일은 을사조약의 전말을 상세히 보도했을 뿐 아니라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게재로 정간당한 황성신문을 찬양한 ‘황성 의무’ ▲을사조약 강제 체결을 다시 비판한 ‘시일에 우(又=다시)방성대곡’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흉계를 비난한 ‘이등후(伊藤侯)’ 등의 논설을 잇따라 실었다.주필인 백암의 민족정신이 그대로 드러나는 글들이다. 단재 신채호(1880∼1936) 역시 26살에 성균관 박사가 된 촉망받는 한학자였다.그러나 벼슬길을 마다하고 황성신문에 들어간다.단재는 박은식에게서 대한매일 주필직을 넘겨받아 1910년 4월 중국으로 건너갈 때까지힘찬 붓자루를 휘둘렀다. 그가 대한매일에 남긴 논설은 ‘일본의 3대 충노(忠奴)’ ‘서호문답’ ‘영웅과 세계’ ‘한국 자치제의 약사’ ‘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 등이다.또 ‘독사신론’ ‘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 ‘동국 거걸(巨傑) 최도통전’등 역사 논문들을 연재했다.이때 이미 민족주의사학자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백암이나 단재의 위명(偉名)에는 다소 미치지 못하지만 산운 장도빈(1888∼1963)이 민족사에 끼친 공헌도 결코 작지 않다.박은식이 한성사범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을 때의 제자인 산운은 그의 추천으로 1908년 봄 대한매일에 입사한다. 20살 나이에 논설위원이 된 그는 양기탁·신채호와 함께 논진을 이룬다.몇달뒤 신채호가 병이 나자 주필직을 대신했고,그가 대한매일을 떠나자 정식으로 주필을 맡아 대한매일의 막바지 성전(聖戰)에 앞장선다.한일합병으로 대한매일이 일제에 넘어가자 산운은 분연히 자리를 떨치고 나온다. 박은식­신채호­장도빈 세 사람은 개인적으로도 인연이 깊은데다 구한말 언론구국운동에서서로를 이끌어주고 뒷받침한 선후배이자 동지였다.그들의 사상적 동질성은 대한매일의 주필직을 차례대로 이어받았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대한매일을 거쳐 각자의 길로 나선 뒤에도 세 애국자는 하나의 종착점을 지향한다.바로 민족의 바른 역사를 되살려 겨레와 국가를 부활케 하려는 목적을 향해서다. 백암은 1911년 4월 만주로 망명,동지 집에 1년간 머물면서 ‘동명성왕실기’ ‘발해 태조 건국지’ ‘몽배금태조’ ‘천개소문전’등 역사서를 정력적으로 저술한다.이후 상하이(上海) 블라디보스토크 등지로 옮겨다니면서 항일무장독립운동과 신문간행 등을 했으며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등 중임을 맡는다.‘한국통사(韓國痛史)’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등의 역사서를 남겼다. 단재의 삶의 궤적도 백암과 비슷하다.그도 1910년 중국으로 가 항일무장단체 결성,신문발간 등으로 온 삶을 조국광복에 쏟는다.그는 특히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와의 투쟁’으로 파악하는 변증법적 역사발전 인식을 보였고,역사연구에서 실증(實證)을 강조,우리근대사학과 민족주의사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가 첫손에 꼽힌다. 백암과 단재에 이어 산운도 1913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 신채호 등 독립지사들과 일하는 한편 ‘근업신문’의 논설을 쓴다.그러나 1916년 병이 심해져 귀국한뒤 민족혼을 일깨우는 역사서‘국사’를 발간한다.曺晩植이 교장인 오산학교 교사를 거쳐서 출판사를 설립,잡지·역사서를 냈다.‘조선역사대전’ ‘조선위인전’ ‘조선역사록’ 등의 저서가 남았다. ◎대한매일신보 보도 원칙/“공중평화 문란케 하는 기사 받지 않는다”/창간후 1년 가까이 1면 머리에 매일 社告/제작원칙 밝혀 대한매일신보는 창간 후 1년 가까이 1면 머리에 동일한 ‘사고’를 실어 제작원칙을 밝혀왔다.그 전문을 옮긴다. 우리 대한매일신보의 목적은 대한의 안녕질서에 관한 모든 제목에 대하여는 공평한 변론을 주장함이라.우리 통신원의 탐보는 신문 보시는 독자에게 항상 보도하리며 편지를 써보내주시는 이는 성명과 번지를 적어 부치시기를희망하오니 이것을 신문상에 게재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극히 신용하는 증거를 삼고자 하노라.기자는 아무 기사든지 기재함을 퇴각하는 권리를 가졌으나 퇴각하는 이유를 말할 터이오며 공중평화를 문란케 하는 듯한 기사는 의례히 받지 않겠사옵나이다.
  • “80년도 광주민주화운동/폭동 규정 경찰발표 조작”

    ◎홍종수씨 말誌서 폭로 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폭동을 선동한 간첩으로 경찰에 체포됐던 洪종수씨(68)는 “광주민주화운동이 간첩에 의해 선동된 폭동이었다는 당시 경찰의 발표는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洪씨는 20일 발행된 월간 ‘말’지 11월호에서 인터뷰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洪씨는 자신을 광주사태를 무장폭동으로 유도하기 위해 급파된 간첩이라고 규정한 서울시경의 발표에 대해 “인천에서 암약하고 있던 한 고정간첩을 ‘조직수습’하는 임무를 맡았을 뿐 광주사태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洪씨는 또 “북한에서 떠난 것이 5월11일이었는데 어떻게 18일에 일어난 광주사태에 개입할 수 있었겠느냐”면서 “체포 직후 독약을 먹은 데다 혀를 18㎜나 깨물었기 때문에 한달 가까이 아무런 진술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따라서 체포 다음날의 서울시경 발표는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했다.
  • 裴說과 梁起鐸의 삶(다시 태어난 ‘대한매일’:3)

    ◎‘구국민족지’이끈 울타리­대들보/배설­1904년 들어와 넉달만에 창간.35세 짧은 삶 마감 때까지 이국땅서 일제와 목숨건 싸움 대한매일의 역사를 말하자면 裴說과 梁起鐸 두 사람을 첫머리에 올리지 않을 수 없다.창간자이자 발행인인 배설이 대한매일의 울타리요 지붕이었다면 양기탁은 이를 떠받친 기둥이자 대들보였다. 두 사람 가운데 양기탁의 삶은 그 당시 애국지사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준다.대한매일이 일제에 넘어간 뒤의 행적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평생을 국권수호와 광복에 바쳤다. 반면 영국인 배설(Ernest T.Bethell)이 한국사와 맺은 인연은 독특하다.그는 31살(앞으로 배설의 나이는 생일까지 따져 만으로 표기)때인 1904년 한반도 땅을 처음 밟아 넉달 만에 대한매일을 창간했다. 배설은 입국 전까지 16년 동안 일본에서 사업을 벌였다.더욱이 영국과 일본은 러시아를 공동의 적으로 삼아 영·일동맹을 1902년 이미 체결했다.일본에서의 오랜 생활 경험이나 영국이 일본의 동맹국이란 사실에서 배설은 친일 성향 가능성이 높은 인물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낯선 땅에서 일본제국주의를 상대로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일 수 있던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그의 삶에서 단초를 찾을 수밖에 없다. 배설은 1872년 11월3일 영국 브리스톨에서 태어났다.아버지는 당시 양조회사 경리사원이었으나 후에 극동을 상대로 한 무역회사를 차린다.배설은 고향에서 전문대 수준의 상업·기술학교를 마친 뒤 아버지 회사의 일본 사무소가 있는 고베로 건너간다.만으로 15살 때이다. 고베에서 골동품상을 하던 배설은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터지자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지로부터 특별통신원으로 종군취재를 해달라는 제의를 받는다.이에 앞선 기자 경력은 명확하지 않지만 그 자신은 1908년 6월 열린 재판에서 “일본에서도 신문에 관계한 일이 있다”고 진술한 바 있다. 배설은 1904년 3월10일 한국땅에 들어와 크로니클지 4월16일자에 ‘경운궁 화재’를 특종 보도하기도 했다.그러나 곧 해임되는데 ‘친일적 기사를 싣는 신문사 방침’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곧 이어 그는 대한매일 창간에 들어간다.중국·일본에서는 영자지가 여럿 나오는데 한반도에는 없었다는 사실이 가장 매력적인 요소였을 것이다.그의 성격도 창간에 한몫을 했으리라고 여겨진다.배설 사후 대한매일에 실린 ‘배설공의 약전(略傳)’에는 ‘공의 성질을 대강 의론할진대 의협강의(義俠剛毅) 네 글자에 지나지 않으니’라고 밝혔다.곧 정의를 위하는 뜻이나 기질이 굳세다는 의미다. 양기탁과의 만남도 큰 힘이 됐을 것이다.배설은 입국 직후 통역 겸 번역자로서 양기탁을 소개받았다.이후 신문사를 만들어 함께 일하면서 같은 또래(양기탁이 한살 많다)로서 우정과 신뢰를 쌓아갔다. 배설은 일제에 의해 1907년 10월과 이듬해 6월 두차례 법정에 선다.두번 다 영국인이 재판장이었지만 판결은 일본측 입김을 강하게 받는다.1908년 재판에서 배설은 3주간의 금고형과 6개월의 근신,또 이를 어길 경우 추방한다는 판결을 받는다.그럼에도 기는 꺾이지 않아 1909년 1월 영자지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속간했다.이때 워싱턴 포스트지는 ‘배설을 중단시키는 방법이란 암살밖에 없을 것’이라는 서울발기사를 실을 정도였다. 배설은 그해 5월1일 35살의 길지 않은 삶을 이 땅에서 마감한다.일본은 물론 영국·미국 등 제국주의 열강은 그의 죽음이 ‘눈엣가시’를 뺀 듯 후련했겠으나 ‘한국인들은 투쟁으로 일관한 가장 믿었던 벗을 잃은’(후임 발행인 만함의 애도사 중에서)것이다. 우강(雩岡) 양기탁이 대한매일에 기여한 공은 어쩌면 배설을 훌쩍 뛰어넘을지도 모른다.배설이 일제 탄압을 가로막는 보호막을 대한매일에 제공했다면 그 안에서 실제 신문제작과 경영을 도맡다시피한 사람은 그이기 때문이다. 양기탁은 1871년 4월2일 평양에서 한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어려서 한학을 배워 10대 중반에 이미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우국지사,동학당과의 교류로 애국심을 키워나갔다.서울의 한성외국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웠고 일본 나가사키상업학교에서는 2년반 동안 한국어교사로 일해 영어 일어에도 능통했다. 그는 정부기관인 예식원에서 번역관보로 일하다 1904년 8월22일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자 다음날로 그만두고 대한매일 제작에 본격적으로 매달린다.창간호가 7월18일 나왔을 때도 이미 간여한 만큼 그는 신문사 일과 예식원을 한동안 같이한 것으로 여겨진다. 양기탁은 대한매일에서 ‘총무(general manager)’로 통했다.공식 직함은 아니지만 편집과 업무일을 두루 책임지고 맡아해 모두들 그렇게 불렀다.지금 직제로는 전무쯤에 해당되는 셈이다. 대한매일이 1905년 영문과 국한문판을 분리하면서부터는 국한문판 제작이 중심이 되었고 그 제작은 전적으로 양기탁이 맡았다.배설 스스로도 “나는 한국말을 모르기 때문에 지면제작의 전권을 그에게 맡겼다”고 밝혔었다. 1908년 5월 일제 통감부의 기관지인 영자지 ‘서울 프레스(Seoul Press)’의 다음 기사는 양기탁의 지면제작 방향을 그대로 보여준다.이 신문은 대한매일 국한문판·한글판에 대해 ‘아주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는 원본으로 보이는 영문판과 판이하게 다르다.한국어판들은 영문판에 비해 훨씬 나쁘고,있는 그대로 못된 신문’이라고 비난했다. 결국 양기탁은 한민족에게 직접 배포되는 국한문·한글판에서 더욱 강력하고 공격적으로일제를 비판한 것이다. 1910년 6월14일 대한매일의 발행인이 만함에서 李章薰으로 바뀌자 양기탁은 ‘대한매일에서 손을 뗀다’는 광고를 신문에 낸 뒤 단호히 물러났다.이후 대한매일을 기반으로 조직한 신민회(新民會)사건으로 6년 동안 옥고를 치렀으며 1923년 만주로 건너가 무장독립단체인 의성단·통의부·정의부 등을 만들어 항일 무장투쟁에 나섰다.1933∼35년에는 남경 임시정부의 국무령을 지냈으며 38년 그 땅에서 서거했다.그의 유해는 지난 5월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 풍전등화의 대한제국과 창간(다시 태어난 ‘대한매일’:2)

    ◎‘排日護國’ 민족혼 일깨운 횃불/여론조작 친일紙 득세하던 1904년/치외법권 혜택 裴說 발행인 내세워/첫호부터 日 야욕 고발한 민족지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이하 대한매일)가 한국사 무대에 등장한 1904년은 일본의 한반도 병탄 야욕이 막바지에 달한 때였다.그해 2월8일 일제는 인천항에 정박한 러시아 군함 2척을 격침해 러일전쟁을 도발한다. 이를 빌미로 서울을 점령한 일본군은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한반도에 주둔하면서 자유롭게 군사활동을 하는 권한을 획득한다.이어 7월20일에는 ‘군사경찰 훈령’을 공표해 ‘집회나 신문이 치안을 방해한다고 인정할 때는 그 정지를 명령하고 관계자를 처벌할 수 있다’는 규정을 마련한다. 배일(排日)민족언론의 숨통을 죌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이같은 올가미가 드러나기 이틀 전인 7월18일 대한매일은 그 거대한 족적의 첫걸음을 내디뎠다.당시 국내에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발행하는 신문이 뒤섞여 있었다.한국인 신문(민족지)으로는 ‘황성신문’‘제국신문’이,일본인 신문(친일지)으로는 ‘한성신보’‘대한일보’‘대동신보’가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민족지들은 일본군 주둔 이후 갖가지 탄압에 시달려 활기를 잃은 반면 수적으로도 우세한 친일지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일제는 19세기 말 한반도 침략을 시작하면서 여론 조작수단으로 일본인 경영의 신문을 많이 발간했다.1881년 이래 한반도 전역에서 발간한 한글·일본어·영자 신문이 총 30여종에 이를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매일 창간은 한민족에게 한줄기 빛과도 같은 희망을 주었다.발행인인 배설(裴說)이 치외법권을 누리는 영국인이어서 일제의 검열을 피할수 있을 뿐더러 발간 즉시 ‘한민족과 대한제국의 편에 서서 일제침략에 맞서는’태도를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한매일의 영문판인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는 당시 유일한 일간 영자지여서 한반도 정세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 지지를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크게 작용했다. 대한매일 창간 무렵 한민족의 관심이 집중된 사건은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였다.일본은 6월6일 ‘한국인이 명백하게이용·경작하는 토지를 제외한 전국토’를 개간해 50년 동안 경영하는 권리를 달라고 대한제국 정부에 요구했다.표면상 개간권을 요청한 자는 일본 각료 출신인 나가모리(長森藤吉郞)였지만 실제로는 일제의 치밀한 ‘식민지화’ 계획의 하나로 추진된 것이다. 이 일이 알려지자 한반도는 당연히 들끓었다.요구를 받아들이면 적어도 국토의 6분의 1(당시 일본 외상의 발언)에서 많게는 3분의 2(윤치호 주장)까지 일본에 넘어가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아울러 황무지 개간을 내세워 일본인들이 떼지어 한반도로 몰려올 것도 불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민족지들은 일제히 일본의 야욕을 비난했고 농광회사(農鑛會社),보안회(保安會)등의 단체가 생겨나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시작했다.이같은 상황에 제동을 걸고자 일제는 ‘군사경찰 훈령’을 공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대한매일도 당연히 ‘황무지 개간’건 보도의 일선에 나섰다.현재 대한매일의 창간호부터 15호까지는 남아 있지 않고 제16호(1904년 8월4일자)가 가장 오래된 지면이다. 그 날짜 영문판 톱기사는일본의 영자지 ‘고베 크로니클’의 논설 ‘프로텍팅 코리아(Protecting Korea)’를 절반 가까이 전재했다.‘일본 정부는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허용하지 않으면서 코리아에는 부당한 요구를 한다’는 기사를 자세히 소개한 뒤 대한매일은 ‘이같은 고발에 대해 일본 정부는 무슨 말로 대답할 것인가’라고 비판했다.이어 16일자에도 ‘나가모리 어게인(Nagamori Again)’(18일자 한글판 제목 ‘장삼씨의 문제 갱론이라’)이란 톱기사로 이 문제를 계속 거론한다. 대한매일이 배일 논조를 뚜렷이 하자 친일지들은 즉각 대한매일과 배설(裴說)을 비방하는 기사를 실었다.대한일보 10월5일자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이 신문은 ‘영국인 배설이 경성에서 발행하는 대한매일신보는…번번이 일본이 패전한다는 설을 논하고,러시아의 제2군이 이미 일본군의 후방을 차단하여 포위했으므로 머잖아 일본군이 대패하리라는 등의 거짓말을 싣고 있다’고 비난했다.이어 ‘이 영국인은 (일본)고베에서 장사꾼으로 생활하던 천인(賤人)이기로 전국(戰局)을 알 리가 없다’고 인신공격을 달았다. 이 신문은 이밖에도 11월10일자,12월23일자 등에서 대한매일을 ‘일본에게 공정하지 못하다’거나 심지어 ‘친러시아 기관지’라는 등의 악의에 찬 비난을 거듭 퍼부었다. 창간하자마자 민족지의 대표로 떠오른 대한매일신보.민족과 국가의 명운을 두 어깨에 짊어진 대한매일이 6년여 동안 일본제국주의를 상대로 벌인 대전쟁은 이처럼 막을 올렸다. ◎대한매일신보 발행 체제/영문·순한글 6면 합쇄/타블로이드판으로 출발 대한매일신보(1904.7.18∼1910.8.28)는 6년여 동안 4가지 체제로 발행됐다.창간시에는 영문판인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 4면과 순한글판인 대한매일신보 2면 등 모두 6면을 합쇄 형태로 냈다.지면 비율로는 2대1일이지만 영문판 4면 가운데 2면은 광고였으므로 처음부터 한글·영문 기사의 비중은 같게 출발했다.판형은 타블로이드판이다. 그즈음 영문으로 나온 정기간행물은 미국인 헐버트(Homer B.Hulbert)가 내는 월간지 ‘코리아 리뷰(Korea Review)’뿐이어서 일간지인 코리아 데일리 뉴스는 처음부터 널리 주목받았다. 영문·한글판 합쇄 체제는 다음해 5월10까지 이어졌으나 인쇄시설에 문제가 생겨 다섯달 동안 휴간한다.1905년 8월11일 속간하면서는 영문판과 국한문혼용판을 분리해 발행했다.2년쯤 뒤인 1907년 5월23일에는 한글판을 부활해 영문판·국한문혼용판·한글판 세 가지가 동시에 나왔다.우리 언론 사상 유일한 사례다. 裴說이 영국인 만함(Alfred Weekly Marnham)에게 신문사를 넘긴 며칠 뒤 영문판 발행이 중단돼 1908년 6월1일부터는 국한문판과 한글판 2종만을 내었다.영문판은 이듬해 복간되지만 곧 사라진다. 이같은 발행체제의 흐름을 살펴보면 초기에는 독자층이 넓어지면서 국한문판·한글판으로 점차 확대하다가 후기에는 일제의 압박이 거세지면서 영문판이 사라짐을 알 수 있다.1900년대 초 시대요구에 부응해 다양한 독자층의 욕구를 수용한 대한매일의 발행체제는 진실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대한매일신보 연구 현황/韓末 담아낸 시대그릇/각 분야별 연구 활발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연구는 100여년 한국 언론사 연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대한매일신보가 이같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첫째 정치적 압력에 굴하지 않고 언론의 소임을 다한,우리 언론사에 거의 유일한 신문이었다는 원론적 의미에서다.둘째는 한말 우리의 사회상과 국제정세를 가장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대한매일에 대한 지금까지 연구는 우리 언론사 연구에서 항일과 관련,독립적으로 다뤄져온 부분도 많다.언론 자체 문제뿐 아니라 한말 우리의 시가(詩歌),한글,산업진흥,광고,자주의식,국제 외교사 등 다양한 분야로 연구 영역이 확대돼왔고 특히 80년대와 90년대 들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현재 대한매일신보만을 독립적으로 다룬 단행본은 △‘제국주의와 언론­배설·대한매일신보 및 한·영·일 관계’(구대열·이화여대출판부 1986) △‘대한매일신보 연구’(이광린 유재천 김학동 공저·서강대출판부 1986) △‘대한매일신보와 배설’(정진석·나남 1987) 등이 있다. 한말 저항시가연구서는 가장 많아 ‘대한매일신보 가사연구’(조현경·전남대 석사논문 1995),‘대한매일신보소재 가사문학연구’(유정선·이화여대 〃 1990),‘개화기의 저항시가연구’(박을수·경희대 박사논문 1984),‘우국가사 연구­대한매일을 중심으로’(김준태·고려대 석사논문 1980) 등이 있다.한글 신문에 대한 연구로는 ‘대한매일신보 국문판 연구’(오선화·이화여대 〃 1988)가 있다. 한말 대한매일신보가 산업진흥을 역설한 논설들에 대한 연구로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에 나타난 실업진흥론’(이윤정·서울시립대 〃 1997)이,당시의 신문광고에 대한 연구로는 ‘대한매일신보에 나타난 광고에 관한 연구’(김영희·효성여대 〃)가 있다. 그밖에 ‘대한매일신보의 항일 자주의식연구’(김영애·성신여대 〃 1979),‘대한매일보에 나타난 의병 동향’(윤경숙·인하대 〃 1988),‘대한매일신보의 항일 언론활동’(권만용·건국대 〃 1993) 등이 있다. 또한 한말 국제관계를 다루는 논문들에는 특히 영국과 일본과의 관계에서 대한매일신보와 배설을 다루고 있다.
  • 大韓每日申報/任英淑 논설위원(外言內言)

    서울신문의 뿌리인 대한매일신보는 한국 민족운동사와 언론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우선 한국언론사의 측면에서 이 신문은 몇가지 기록을 가지고 있다.1904년 7월18일 창간돼 1910년 5월21일 일본 통감부에 팔리기까지 대한제국 말기 6년동안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최대 민족지였다. 창간호는 타블로이드판으로 총 6면에 4개면은 영문,2개 면은 한글전용의 2개국어 신문체제였으나 이듬해 8월 국한문 혼용판과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뉴스’를 분리했고 1907년 5월에는 한글전용 신문을 새로 발간했다.국한문·영문·한글등 3종의 신문이 한꺼번에 발행되기는 한국 언론사상 초유의 일이었다.발행부수도 당시 발행되던 모든 신문의 부수를 합한 것의 2배가 넘는 1만부를 기록했다. 민족운동사의 측면에서 ‘대한매일신보’는 독립운동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했다.항일 구국의 선봉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고 을사조약의 강제체결,高宗의 헤이그 밀사 파견과 퇴위,구한국 군대해산등을 국내외에 널리 알린것은 물론 고정란을 두고 의병활동을 집중 보도하는 등기사와 사설로 민족의식을 고취했다.당시 많은 의병들이 이 신문의 영향을 받아 무장 항일투쟁에 가담했음을 증언했을 정도다. 대한매일신보의 이같은 성격은 발행인 裴說(Ernest Thomas Bethell)이 영국인이어서 치외법권적 지위를 누리고 일본측의 검열을 피할 수 있었던 것에도 기인하지만 신문발간에 참여했던 梁起鐸 朴殷植 申采浩 등 우리 선각자들의 역할이 컸다. 裴說이 신보를 지킨 울타리였다면 梁起鐸은 전무·주필·편집국장을 겸한 위치의 총무로서 제작 및 운영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항일논조를 주도했다.부친과 함께 캐나다 선교사 게일이 만든 한국 최초의 한영사전 편찬에도 관여했던 그는 한학의 바탕에 양학문을 접목하고 동학당과도 관련을 맺었던 우국지사였다.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조직 신민회의 총감독으로 활동했고 일제 강점이후 서간도로 망명,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데 앞장섰다. 한편 황성신문의 논설기자였던 朴殷植은 梁起鐸의 추천으로 대한매일신보로 자리를 옮겨 신교육 구국,사회관습 개혁,대동사상등 애국계몽사상을 고취하는데 앞장섰고 나중 ‘한국통사’‘한국독립운동지혈사’등 역사저술을 통해 민족적 자부심과 독립투쟁정신을 심는데 크게 공헌했다.또 朴殷植의 뒤를 이어 주필이 된 丹齋 申采浩는 민중계몽을 위한 사설과 함께 ‘독사신론’등 역사관계 논문을 연재해 민족의식을 일깨웠다.그의 대표적 저서 ‘조선상고사’의 주체적 민족주의 사관은 이때 싹텄다. 대한매일신보의 정신을 이어받아 다시태어나는 서울신문의 일원으로서 민족과 언론자유를 위해 앞장섰던 선배들의 꿋꿋한 기상과 애국애족의 정신을 기억하며 옷깃을 여민다.
  • 어떤 신문이었나(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

    ◎日帝 총칼에 맞선 ‘자유언론 표상’/애국지사 논객 총결집/日 침략­관료 무능 질타/국채보상운동 등 이끌어/항일투쟁·국권수호 선봉 ‘不允’(불윤).1905년 11월18일 아침.러일전쟁의 포연이 가시지 않은 서울 장안 거리의 화두는 “허락지 않으심”을 의미하는 이 한 마디였다. “韓皇陛下게옵셔 韓國獨立을 重念하시와 正大한 義理로 拒絶하신즉 伊藤 대사가 再三强請하되 强경 하신 勅語로 不允하셨다더라”(한국황제폐하께서는 한국의 독립을 중요하게 생각하시어 정대한 도리로서 거절하시자,이토 대사가 재삼 강청하였으나 강경한 말씀으로 허락지 않으셨다 한다) 이날자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된 ‘勅語嚴正’(칙어엄정) 제목하의 잡보(보도기사) 첫 기사 중에 있는 이 말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국민들은 일제 앞에서 “No”라고 당당히 말한 황제에 박수를 보냈다.전날 이토 일본대사가 고종 황제를 알현,소위 을사조약으로 알려진 외교권 박탈을 요청한 4가지 내용을 보도하고 이에 대한 황제의 강력한 반대를 전한 것이었다. 이는 일제의 총칼이번득이는 상황하에서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 당시 신문중 대한매일신보만 유일하게 보도했다.특히 본문활자로 된 기사내용에서 유독 ‘不允’ 두 글자만 가장 큰 2호활자로 두드러지게 인쇄한 것은 고종의 반대 강도에 대한 표현이자 대한매일 입장의 대외적 천명이기도 했다. 1904년 7월18일 영국인 배설(裵說)을 발행인으로 내세워 총무 양기탁(梁起鐸)등 우국지사들이 모여 창간한 대한매일신보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던 일본의 한반도 침략 야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던 상황에서 자유언론을 통한 항일투쟁으로 조국의 국권수호를 위해 태어났다. 이후 한일합방 다음날인 1910년 8월29일 종간될 때까지 6년 1개월여간 대한매일신보는 우리민족의 국운이 백척간두에 선 역사상 가장 위급한 시기에 굳건한 자세로 항일의지를 불태웠고 국민의 든든한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했다. 대한매일신보가 이같이 민족정론지로서의 소임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은 발행인이 영국인 배설로 돼있어 치외법권적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총무 양기탁과 주필 박은식을 비롯,필진 신채호 장도빈 안창호 등의 투철한 애국심과 자주의식에 따른 것이었다.그들은 일제 침략과정의 부당성을 낱낱이 공개하고 당시 무능한 대신 및 관리들의 실정과 부패상을 질타했다. 반대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벌어지고 있던 의인들의 애국적 활동상에 대해서는 대서특필을 아끼지 않았다.국채 1,300만원을 갚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국채보상운동 캠페인을 주관했고,그 활동상 소개와 함께 매일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참가자 명단을 2∼3개 면에 걸쳐 상세히 게재함으로써 전국적인 참여의 불을 지폈다. 또 을사조약과 고종 퇴위 및 군대 해산 직후에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의병활동을 적극적으로 보도,항일 투쟁의식을 고취해 나갔다.산발적인 보도가 아니고 ‘처처의병’ 등 고정란을 만들어 매일 소개했고 13도 창의군의 서울진격 때는 격문을 게재,의병지원자가 구름같이 모이게 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의 실업’‘동양척식회사 설립문제’등 논설로 일제의 경제적 침투 반대와 우리민족의 자주적 산업 건설의 필요성을 일깨우기도 했다.교육의 중요성을 강조,민족교육자들의 학교설립취지서를 적극 지면에 게재,1907년 말 공사립 보통학교가 전국에 4,000개에 달하게 하는 등 교육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밖에도 대한매일신보가 순한글판 발행을 통한 국어 발전,연재소설 게재를 통한 국문학 발전,또 여성교육 필요성 제기로 여권 신장 등에 미친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능한 정부와 역적무리들의 매국은 대한매일신보의 노력을 미완(未完)에 그치게 하고 말았다.그러나 그 불굴의 자유언론 정신과 국난극복의 의지는 우리 언론사에 금자탑으로 남아있다.그리고 이제 그 숭고한 정신과 의지의 완성을 위해 ‘대한매일’의 첫걸음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대한매일신보 연표 ▲1904년 7월18일 창간.(영문판 4면,국문판 2면) ▲1905년 8월11일 영문판(The Korea Daily News) 분리 발행. ▲ 〃 11월18일 을사조약 다음날.고종의 조약거부 기사 ‘칙어엄정’게재. ▲1907년 1월16일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고종의 칙서공개.(영문판에도 번역 게재) ▲ 〃 2월21일 국채 1,300만원 보상운동 제창. ▲ 〃 5월23일 국문판 대한매일신보 별도 발간. ▲ 〃 11월말 전국 지사수 32곳. ▲1908년 3월6일 관보 전재 폐지. ▲ 〃 4월29일 신문지법 개정.외국인 발행 신문도 발매 금지 및 압수 가능. ▲ 〃 5월27일 발행인 만함(Alfred W. Marnham)으로 변경. ▲ 〃 5월말 현재 부수 1만3,400부. ▲ 〃 7월12일 통감부, 양기탁을 국채보상의연금 횡령으로 몰아 구속케 함 ▲1909년 5월 1일 배설 사망.영문판 중단. ▲1910년 5월21일 통감부,만함에게 7,000엔(700파운드) 주고 대한매일신보사 인수. ▲ 〃 8월29일 한일합방으로 대한매일신보 종간. (국한문판 1,461호,국문판 938호)
  • 재위 20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84차례 118개국 돌며 사랑 실천/주한교황청대사관 내일 명동성당서 기념미사/금세기 최장수… 한국도 2번 방문/종교간 갈등 해소·냉전 종식 기여 전세계 10억 가톨릭 신자들의 대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6일로 즉위 20주년을 맞는다. 역대 교황의 평균 재위기간인 7.3년의 3배에 가까운 금세기 최장수 기록이다. 2차대전 기간을 포함해 7,152일동안 교황에 착좌했던 비오 12세의 기록을 지난 5월21일로 뛰어넘어 신기록 행진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주한교황청대사관(대사 조반니 바티스타 모란디니)은 15일 오후 7시 서울명동성당에서 피선 2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하는데 이어 16일 오후 6시30분에는 종로구 궁정동 대사관에서 각계 인사 300여명을 초청해 리셉션을 갖는다. 요한 바오로 2세는 1920년 5월18일 폴란드 크라코프 인근의 작은 마을 바도비체에서 태어나 1978년 10월16일 교황으로 피선됐다. ‘베드로의 후계자’로 불리는 교황은 천주교의 으뜸사제로 이탈리아 수석주교겸 로마관구의 관구장 대주교이며 국제법상으로 바티칸시국의 국가원수이기도 하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전의 교황들과는 달리 끊임없이 전세계를 누비며 ‘행동하는 교황’으로 꼽혀왔다. 착좌 이후 84차례나 해외사목방문에 나서 순방거리만 지구를 28번 돌수 있는 112만여㎞에 달하며 전세계 191개국중 118개국을 방문했다. 한국에는 84년과 89년 두차례 방문했고 84년 방한때는 순교성인 103위의 시성식을 가졌다. 특히 조국인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를 여러차례 방문해 동서 냉전의 빙하를 녹이는데 앞장섰고 지난 1월엔 미국의 반대를 뿌리치고 쿠바를 방문,가톨리과 쿠바의 불편한 관계를 해소하기도 했다. 내년에는 루마니아를 방문,그리스정교회를 비롯한 동방교회들과 일치를 꾀할 계획이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업적은 재임기간이나 해외순방 횟수등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는 신앙의 차이를 뛰어넘어 ‘생명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모든 인류에게 뚜렷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다른 종교에도 ‘진리의 씨앗’이 있음을 선언함으로써 종교간 갈등을 줄이는데도 힘썼다.또 갈릴레오에 대한 교회의 비난이 잘못되었음을 인정,“진화론은 논리적으로 옳은 것”이라면서 과학과 신앙의 화해를 촉구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병마와 싸우느라 노년의 풍모가 완연해지기는 했지만 교황청관계자들은 “교황이 오는 2000년 21세기 축하행사를 마치기 전까지는 사임하지 않을 것이며 그해 5월18일 교황의 80세 생일에는 기념잔치도 열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주한교황청대사관은 “로마교황청에서도 같은날 기념미사와 리셉션을 개최하지만 20주년을 기해 특별히 마련하는 행사는 없다”고 전했다.
  • 그린벨트 45% 외지인 소유/건교부 조사

    ◎총 5,231㎢중 2,330㎢ 취득 우리나라 그린벨트 총 면적은 전국토의 5.4%인 5,231㎢이다.97년 공시지가를 기준으로 할 때 46조7,000억원어치에 이르며,구역지정 후 외지인이 전체 면적의 45%인 2,330㎢를 취득했다. 건설교통부가 7일 내놓은 ‘그린벨트구역 현황조사’ 결과에 따르면 그린벨트로 묶여 있는 지역은 그동안 파악된 5,397㎢보다 166㎢ 작은 5,231㎢였다. 이번 조사는 지난 5월18일부터 8월17일까지 3개월동안 광역시 이상 7대 도시와 106개 시·군·구(702개 읍·면·동)의 토지대장과 건축물대장,지형도,지적도 등의 도면을 기초로 이뤄졌다. 그린벨트 총면적 가운데 임야는 3,220㎢로 61.6%를 차지했으며 농경지 1,309㎢(25%),대지 84㎢(1.6%),잡종지는 73㎢(1.4%)였다. 대지 가운데 건축물이 들어선 곳은 80.6%인 68㎢(15만필지)이고 나머지 19.4%는 나대지였다.구역내 전체 건축물은 45만동으로 이 중 6만8,000동이 무허가인 것으로 조사됐다. 토지 가운데 사유지는 147만3,000필지 4,059㎢로 77.6%였고 나머지 22.4%가 국공유지였다. 토지가격은 97년 공시지가를 기준으로 할 때 ㎡당 전국 평균지가(1만4,688원)보다 23% 낮은 1만1,309원으로 전체 가격은 46조7,000억원으로 평가됐다. 한편 구역내 거주자는 74만2,000명으로 지난 93년 조사때의 96만4,000명보다 22만2,000명이 줄었다.구역지정 이후에 전입한 사람이 58만9,000명(20만 가구)으로 전체의 79.4%였다.
  • 민주열사 열전:9/金宜基 前 서강대생(정직한 역사 되찾기)

    ◎강요된 침묵속 ‘광주 항쟁’ 왜곡 항거/당시 기독교회관서 ‘서울 봉기’ 외치다 추락사/어둠의 시대 역방향 역사에 맞선 ‘진실의 불꽃’ ‘80년 5월의 학살’은 국민들을 극도의 공포로 몰아넣고 침묵을 강요했다. 항쟁 직후 정부와 제도언론에서 연일 뱉어내는 ‘광주폭동’이란 단어에 대해 누구도 ‘아니오’라고 나서지 못했다. 그러나 분노를 흠뻑 머금은 침묵은 오래갈 수 없었다. 그 강요된 침묵을 깨뜨리고 거짓과 왜곡으로 가득찬 어둠의 시기에 진실을 향한 한줄기 빛을 비춘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의 한 사람이 金宜基라는 젊은이였다. 광주항쟁이 무력으로 진압된 후 사흘째인 80년 5월30일. 서강대 4학년생 金宜基는 그날 오후 5시쯤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 6층에서 떨어졌다. 밑에는 계엄군 장갑차와 군인들이 있었으나 그를 병원으로 이송하는 대신,주위에 흩어진 유인물을 수거하기에 바빴다. ○가마니에 덮인채 방치 그는 가마니에 덮여 30여분 동안이나 그대로 방치된 채 죽어갔다. 그가 뿌린 유인물 ‘동포에게 드리는 글’은 이렇게 호소하고 있었다.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봉기가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동포여 일어나자. 우리의 힘모은 싸움은 역사의 정(正)방향에 서 있다…내일 정오 서울역광장에 모여 오늘의 성전에 몸바쳐 싸우자. 동포여!” 金宜基는 서울에서의 봉기야말로 짓밟힌 광주를 살리는 길이라고 굳게 믿고 이를 처음으로 실천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지 못한 채 젊은 생을 마감했다. 당시 경찰은 그가 유인물을 뿌리려다 발을 헛디뎌 떨어져 즉사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가 떨어지는 모습을 확실히 목격한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주위에 있었던 몇몇 사람들은 그가 계엄군에게 발각돼 쫓겨다니며 유인물을 뿌리다 떨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가 숨막히는 시대와 씨름했던 불꽃같은 투혼은 그의 삶 구석구석 스며있다. 막일로 생활을 꾸리던 부모님과 광부·공장노동자로 일하던 형들을 가슴속에 빚으로묻어둔 채 대학에 다녔던 金宜基. 그러나 그런 부채의식은 집안에서 유일한 대학생으로 장차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야심보다는 도리어 사회모순에 대한 천착으로 이어졌다. “나를 빼고 모두가 돈을 버는데 우리 가족은 왜 셋방을 전전해야 하나”“농사를 짓는 형님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데 왜 빚만을 불려가야 하는가”그런 의문은 그를 자연스럽게 책으로 안내했고,그는 우리 역사가 바로 서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다. ○감상적 농활에 실망 그는 농촌문제 연구에 빠져들었다. 2학년 여름 학교 동아리 ‘한국유네스코 학생회(KUSA)’의 하계농촌봉사활동에 참여했으나 깊은 실망감을 맛보았다. 대개 근로·의료봉사,아동지도 등으로 구성된 당시 농촌봉사활동이 저변에 감상적 인도주의를 깔고 있어 농민과 일체감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막연한 봉사보다는 농민들과 함께 농촌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짚어가고자 했다. 발이 닳도록 농촌현장을 누볐고 농민들과 대화를 나눴다. 보고서를 작성해 발표했고 토론을 통해 분석된 결과를 다시 농민들에게 전했다. 그가 얻고자 한 것은 농촌의 실물경제 파악과 그에 대한 농민들과의 공감대였다. 10차례에 걸친 농활과 연구에서 그가 보여준 집중력은 놀라웠다고 한다. 전국농민회총연합 조성우 상임부의장(42)은 “그에게는 대학 출신 농민운동가들이 갖기 쉬운 현장 농민들과의 위화감 따위는 전혀 없었다. 농민운동은 농민대중에 기반을 둔 자주적인 조직이어야 한다고 믿었고,후일 그와 가깝게 일했던 많은 사람들이 자주적 농민관을 갖게 됐다”고 회고했다. 그는 대학 2학년때부터 서울 신당동 형제교회의 농촌문제연구모임을 이끌면서 농촌문제에 대한 전문성을 키웠고,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EYC) 농촌분과위원회 간사로 활동하는 등 자신의 진로를 농민운동쪽으로 굳혀갔다. 80년 5월18일 광주시내에서 공수부대의 만행이 본격화할 무렵 그는 광주시내로 들어갔다. 항쟁 실상 파악과 19일 시내 한 성당에서 열릴 예정이던 함평고구마사건 승리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는 시민들이 고립무원 상태에서 무참히 살육되는 참상을 목도하고 이를전국에 알리기 위한 방법에 부심했다. 그리고 매주 금요일 기독교회관에서 열리는 ‘금요기도회’를 디데이로 잡았다. 기독교회관에는 그가 활동하던 EYC사무실이 있었다. “30일 낮 12시 EYC사무실에 나타난 그가 광주에 다녀왔다며 잠시 좀 쓸게 있으니 사무실을 비워달라고 부탁했어요. 오후 4시쯤 사무실로 돌아오니 그가 작성한 ‘동포에게 드리는 글’ 원본을 건네주더군요. 근처 상동교회에서 청년회장과 그것을 보고 이상한 예감이 들어 기독교회관에 오니 이미 상황이 끝나 있었어요” EYC에서 함께 활동했던 변광순씨의 회고다. 떨어진 쌀 수매가에 가슴치던 분노의 주먹. 농활을 준비하던 신명나던 손길. 광주를 향했던 발길. 5월의 학살을 남들처럼 가슴에 묻지 못하고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하고 터뜨린 피맺힌 절규. 이들은 모두 역(逆)방향의 역사에 맞섰던 金宜基 열사의 민중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실천 방식이었다. □金宜基 열사 연보 ▲1959년 경북 영주군에서 출생 ▲70년 영주 중부초등교 졸업 ▲76년 배명고 졸업.서강대 무역학과 입학. KUSA 가입. ▲78년 형제교회 농촌문제연구모임 참여. 감리교청년회전국연합회 참여 ▲79년 서강대 근대사연구모임 주도. ▲80년 EYC 농촌분과위원장으로 활동. ▲80년 5월 광주항쟁 목격. 30일 종로 기독교회관 6층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남기고 떨어져 숨짐 ▲90년 서강대에서 명예졸업장 받음 ◎어머니 권채봉 여사/“5·18 사망자 공식 인정” 소식 듣고 담담/“아들이 이루려 했던 세상보는게 소원” 광주광역시청 5·18 보상지원과에 전화를 했다. 담당 직원은 金宜基 열사가 ‘5·18 사망자’로 공식 인정됐다며 10월쯤 유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할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 권채봉 여사(74)는 그 소식에 의외로 담담했다. 아마도 아들의 큰 뜻과 죽음,‘빨갱이 가족’이라는 누명을 강요받아온 기나긴 고통의 세월이 금전으로 바꿔지는 듯한 허탈감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는 그저 “글쎄 다행인것 같기도 하고. 반갑다고 해야 하나”라고만 말했다. 어머니가 진정 바라는 것은 아들이 이루고자 했던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날(80년 5월30일) 저녁 8시30분쯤 동대문서 형사라는 사람이 와서 宜基가 서울대병원 응급실에 있으니 같이 가자고 하는거야. 그런데 그애는 영안실에 있었고,상부 명령이 없다고 다음날 낮 12시까지 시신도 안보여줬어. 사람을 오지 못하게 하고 화장을 하라고 갖은 협박을 했지” 그러나 김동완 목사의 주도로 장례식은 치러졌다. 수백명의 민주인사와 학생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참석,광주항쟁 후 첫 대규모 집회가 됐다. 어머니는 그때 자신의 울음을 신호로 학생들이 일어서기로 했다는 얘기를 들어 그들이 다칠까봐 자식의 관에 꽃을 던지면서도 울 수가 없었다고 했다. 권여사는 송파구 잠실의 한 아파트에서 노환으로 거동을 못하는 구순의 시어머니와 중풍을 앓고 있는 남편 김억씨(73)의 시중을 혼자 들며 살고 있다. ◎장석재 형제교회 목사가 전하는 농민사랑/농민과 일체감 위해 극도의 허름한 생활/농촌연구 삶의 일부 농민 향한 애정 각별 金宜基 열사의 농촌문제에 대한 관심과 농민을 향한 애정은 각별했다. 그가 교회에 다니게 된 것도 형제교회의농촌문제연구모임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에는 김동완 목사가 담임으로 있으면서 빈민·농민 선교를 통해 사회참여에 앞장서고 있었다. 金宜基는 특유의 적극성으로 이 모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는 농촌문제 연구의 핵심은 현장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형제교회 장석재 담임목사(42)는 “그는 당시 가장 어려운 곳이 농촌이라고 보고 농촌현실에 몰두했던 것 같다”고 했다. “미울정도로 허름한 생활을 했어요. 군복바지에 검정고무신 청자담배 등 가장 싼 것만을 입고 먹었지요. 친구들로터 티내지 말라는 구박도 많이 받았어요”그러나 그것들은 농민과 일체감을 느끼려는 그의 사랑의 표현법이었다고 했다. 교회사적으로 볼때도 金宜基 열사는 ‘사회선교의 순교자’로 기록될 것이라고 했다. 장례식때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뿌리다 체포돼 4개월간 감옥신세를 지기도 했던 장목사는 “사회운동가들이 정치인 등으로 기성화하면서 과거의 순수함과 진지함이 굴절돼 보일 때마다 宜基가 생각난다”고 했다. 당시 EYC 농촌분과위원장이었던 전국농민회총연합 조성우 상근부의장도 “金宜基는 현장에서 필요로 하면 두말 않고 달려갔다. 농촌은 그에게 있어 몸에 밴 생활의 일부였으며 농민에 대한 애정과 이해는 혈육에 대한 것 이상의 깊이를 갖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 2002 忠南 꽃박람회 국제공인/국제원예생산자협서 만장일치 결정

    ◎태안 안면도서 4월19일부터 한달간 ‘2002년 충남 국제꽃박람회’가 국제공인대회로 치러진다. 沈大平 충남지사는 24일 기자회견을 갖고 “캐나다 퀘벡시에서 열리고 있는 AIPH(국제원예 생산자협회) 제50차 총회가 참가 회원국의 만장일치로 한국의 AIPH회원국 가입과 2002년 충남 국제꽃박람회의 공식승인을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AIPH의 공인은 한국의 화훼산업이 국제무대에 공식 데뷔하는 의미를 갖는다. 지난해 열린 경기도 고양 국제꽃박람회는 비공인 대회였으며 AIPH의 공인대회는 충남 국제꽃박람회가 국내 처음이 된다. AIPH는 27개 회원국인 각 대륙별로 지역조직을 두고 있는 원예작물 생산자의 국제적인 이익을 대변하는 국제협회로,화훼분야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제조직이다. 충남도는 또 금낭화 등 자생화를 중점 개발해 세계적인 상품으로 개발하는 한편 외래종의 품종개량을 통해 보라색 장미 등 신상품을 소개하는 전문박람회를 목표로 하고 있다. 꽃박람회는 충남 태안군 안면읍 승언리 꽃지 일원의 12만9,000평에서 2002년4월19일부터 5월18일까지 한달간 열린다. 꽃·바다(바다에 물든 꽃)를 대표이미지로,금낭화와 튤립·하늘나리·백합 가운데 하나를 주제꽃으로,소나무(안면송)를 주제나무로 해 개최된다.
  • 노숙자 살해후 ‘자신사망’ 위장/빚 독촉 시달린 40대 자살극

    서울경찰청 지하철수사대는 20일 거액의 빚을 갚을 수 없게 되자 술취한 노숙자를 야산으로 유인,불에 태운 뒤 자살한 것으로 위장한 玄在浩씨(40·상업·충북 충주시 교현1동)에 대해 살인 등 혐의로 구속했다. 玄씨는 지난 5월1일 밤 11시쯤 강원도 원주시 원주역의 의자에서 잠자던 30대 후반의 노숙자를 자신의 봉고승합차에 태워 충북 괴산군 감물면 오창리의 고추밭으로 데려가 소주를 먹여 정신을 잃게 한 후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질러 숨지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玄씨는 범행 직후 상경,서울 광진구 자양동 J고시원에서 생활하면서 지난 8월 자양파출소 앞에서 술에 취해 잠이 든 정모씨(41)의 주민등록증과 현금 7만원,휴대폰을 훔친 것을 비롯,3차례에 걸쳐 68만원 상당의 금품을 훔치는 절도행각을 벌여왔다. 경찰은 지난 8월13일 지하철2호선 잠실역 현금인출기에서 정씨의 신용카드로 현금을 빼내려던 玄씨를 적발,절도미수 혐의로 불구속 입건한 후 풀어줬다가 신분증과 지문이 일치하지 않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지난 18일 검거했다.
  • 親日의 군상:7­2/尹致暎家의 빛과 그림자(정직한 역사 되찾기)

    ◎독립협회 회장 尹致昊/현실 비관… ‘대세 순응주의’ 빠져 민족 외면/日·中·美 유학한 대표적 선각자의 한사람/105인사건 연루뒤 ‘친일전향’ 조건 출옥/日 귀족원 의원까지 역임… 끝내 반성 안해 좌옹(佐翁) 尹致昊(1865∼1945년·창씨명 伊東致昊)는 개화기의 대표적 지식인 중 한 사람이다.그는 조선인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자 중국·미국에서 유학한,당시로선 드문 식견가였다.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그는 조선(한국)의 잠재역량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 데다 식민지라는 ‘상황논리’에 빠진 나머지 결국 일제와 타협하고 말았다.그의 친일은 갑작스런 변신이 아니라 해외유학 경험을 통한 자기확신에서 비롯한 것이다.그의 친일 행적보다도 친일 논리에 눈길이 쏠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尹致昊는 신식군대 별기군(別技軍) 창설의 주역 尹雄烈(1840∼1911년)의 장남으로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본관은 해평(海平).부친은 무관이었지만 일찍 개화에 눈뜬 사람으로 그의 진로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尹致昊의 첫 유학지는 일본.1881년 일본의 신문물 견학차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일원으로 파견된 것이 계기였다.그는 조사(朝士) 魚允中의 수행원으로 따라갔는데 당시 나이는 17세로 일행 62명 중 막내였다.3개월간의 시찰을 마친 후 그는 귀국치 않고 兪吉濬 등과 함께 일본에 남아 신학문을 공부하였는데 이들이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된다. ○신사유람단 따라 日 시찰 그는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井上馨)의 소개로 중등 과정의 사립학교인 동인사(同人社)에 입학하였다.그는 여기서 일본어와 영어를 공부하였다.이 시절 金玉均 등 국내 개화파 인사는 물론 일본인 개화파 인사,재일 외국인 외교관들과도 교류하며 국제 정세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2년간의 일본생활은 그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아! 슬프다.조선의 현상이여,남의 노예보다 더 심한 처지에 있으면서 어찌 진작(振作)하려 하지 않는가” 당시 그의 눈에 비친 조국의 현실은 이러했다. 1883년 5월 그는 초대 주한 미국 공사(公使)로 부임하는 푸트의 통역관으로 귀국하였다.그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主事)로 임용돼 통역과 공문서 번역 일을 보면서 개화파 인사들과 친분을 쌓아갔다.하지만 개화파 인사들의 급진적 개혁론에는 찬동치 않는 입장이었다.그러나 이들과의 친분 때문에 갑신정변 실패 후 공모자로 몰려 상하이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1885년 상하이로 간 그는 현지 미국 총영사의 알선으로 중서서원(中西書院)에 입학하였다.이 학교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알렌이 설립한 미션 스쿨로 그는 여기서 3년반 동안 수학했다.그러나 원치 않았던 상하이생활 초창기 그는 한동안 술과 여자로 방황의 세월을 보냈다.망명객의 울분과 20대 초반 객지생활의 외로움이 겹친 것이었으리라.그의 방탕한 생활은 기독교를 수용하면서 막을 내렸다.상하이에서 3년반을 보낸 후 그는 청나라를 ‘더러운 물로 가득 채워진 연못’으로 비유했다.반면 일본은 그에게 ‘동양의 한 도원(桃 園)’이었다. 미국 유학은 그에게 또 하나의 자극이었다.선거로 대통령을 뽑는 미국의 ‘위대함’을 목격하고는 미국은 일본보다도 한수 위의 나라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이같은 생각은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로 깨지고 말았다.그가 강대국 미국·러시아를 제치고 친일로 나선 데는 미국에서 경험한 인종적 편견이 작용한 면이 없지 않다.러일전쟁 무렵 그는 ‘황인종단합론’을 들고 나오는데 이는 당시 일본의 대륙침략자들이 주창한 ‘아시아주의’‘동양평화론’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민족패배주의에 빠져 尹致昊가 친일로 나선 것은 ‘105인사건’(소위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이 계기다.한일병합 2년 뒤인 1912년 일제는 식민통치의 걸림돌인 민족운동세력과 기독교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이 사건을 조작했었다.그는 이 사건에 연루돼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15년 2월13일 친일 전향을 조건으로 출감했다.출감 후 첫 기자회견에서 그는 ‘일선동화(日鮮同化)’를 부르짖었다.“…이후부터는 일본 여러 유지 신사와 교제하여서 일선(日鮮)민족의 행복되는 일이든지 일선 양민족의 동화(同化)에 대한 계획에는 참여하여 힘이 미치는 대로 몸을 아끼지 않고 힘써볼 생각이다”(‘매일신보’,1915년 3월14일) 그가 변절한 직접적 요인은 가혹한 고문과 일제의 강요였다.그러나 그 내면에는 오랜 사상적 기반이 모태가 됐다고 볼 수 있다.‘개화기의 尹致昊 연구’의 저자 柳永烈(숭실대 사학과) 교수는 “개화기 이후 그의 의식 속에 잠재돼 있던 ‘민족패배주의’와 현실적으로 일본의 조선 통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대세순응주의’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충량한’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 변신한 尹致昊의 친일 행보를 따라가보자. 1919년 ‘3·1만세의거’ 직전 그는 민족대표로 참여할 것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했다.그리고는 의거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강자와 서로 화합하고 서로 아껴가는 데에는 약자가 항상 순종해야만 강자에게 애호심을 불러일으키게 해서 평화의 기틀이 마련되는 것입니다”(‘경성일보’,1919년 3월7일)라며 약자인 조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제에 순종하는 길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일제가 선전하던 ‘조선독립불능론’‘투쟁무용론(無用論)’ 등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그의 친일논리의 한 축을 이루는 것이다. 1920년대 들어 그는 일제의 ‘문화정치’ 선전과 청년층의 반일 동향을 억제하는 데 이용된 교풍회(矯風會)의 회장을 맡는 등 각종 친일단체에서 일제의 식민정책 선전에 주력했다.당시 그는 민족개량·애국계몽운동을 펼치고 있었는데 이는 근본적으로는 일제 통치를 수용하는 범위 내에서의 타협적 민족운동이었다. ○학병 참가 전국 순회 강연 그의 친일은 중일전쟁 발발(1937년 7월7일)을 계기로 강도를 더해갔다.총독부 주최 시국강연반의 연사로 전국을 돌며 순회강연을 하는가 하면 이듬해 1938년 육군특별지원병제가 실시되자 이는 ‘내선일체(內鮮一體)에 합당한 조치’라며 환영하였다.또 그해 7월 ‘황국신민화’의 실천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상무이사로 선정돼 창립총회에서 ‘천황폐하 만세’를 삼창(三唱)하기도 했다. 1941년 ‘대동아전쟁’ 때는 전시결전단체인 임전대책협의회에 참가하여 ‘우리는 황국신민으로 일사보국(一死報國)의 성(誠)을 맹서하여 협력할 것을 결의함’이라는 결의문을 낭독하였다.징병제에 이어 1943년 학병 동원이 시작되자 ‘조선 학도들에게도내지(內地·일본)동포들과 어깨를 겨누어 싸움터로 나설 수 있는 영광스런 길이 열렸다’(‘매일신보’,1943년 11월18일)며 학도들의 출진을 촉구하였다.이같은 공로로 45년 2월 그는 일본 귀족원의원에 선출돼 부친에 이어 2대에 걸쳐 ‘일본 귀족’ 반열에 올랐다. “…(일제하)조선인은 좋든지 싫든지 일본인이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일본 속국의 상태에서 그가 한 일로 누군가를 비난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질 않습니다….”사망(1945년 12월16일) 2개월 전 그가 남긴 글의 한 구절이다.지식인으로서의 ‘반성’은 차치하고 기독교인으로서의 ‘참회’ 한마디도 없다.독립협회 회장과 ‘독립신문’ 사장을 지낸 그가 해방 후 남긴 ‘자기 고백’은 겨우 이런 모습이다. ‘일본의 스코틀랜드화(化)’가 조선이 살 길이라며 일제의 ‘우호적인 식민통치’를 기대했던 그의 나약한 역사관이 결국 그를 친일의 길로 안내하고만 것이다. ◎尹致昊 일기/60년간 쓴 일기 시대상 상세히 담아/사생활도 솔직히 기록 ‘윤치호 일기(尹致昊 日記)’는 한말의 선각자 尹致昊가 188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60여년간에 걸쳐 기록한 개인적 메모.초창기 일기는 한문·국문으로,1889년 12월 이후부터는 영문으로 기록돼 있다. 일본·청국·미국 등 해외유학 시기의 ‘일기’에는 당시 그 나라의 발전상과 시국 상황,그리고 그곳에 체류중이던 한국인들의 동정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국내 체류기인 1883∼84년 당시의 ‘일기’에는 자신이 목격한 갑신정변과 개화당의 활동이 소상히 기록돼 있다.특히 일제 강점기 그가 국내에서 활동할 당시의 ‘일기’에는 자신의 입장과 국내 지식인들의 동향 등도 담고 있다. 이‘일기’는 개화기와 일제강점기,특히 尹致昊 인물연구에서는 필수불가결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한 사람의 ‘일기’치고는 방대한 분량도 놀랍지만 자신의 행적도 비교적 솔직하게 기록했다. ◎‘尹致昊 일기’에 나타난 親日 어록 “만일 내가 살 곳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면 일본이 바로 그 나라일 것이다.…오,축복받은 일본이여!동양의 파라다이스여!세계의 정원이여!”(1893년 11월1일) “나는 국경일에 일장기의 게양을 반대하지 않는다.왜냐하면 우리가 일본의 통치하에 있는 한 우리는 그 통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다”(1919년 10월1일) “일본은 동양에 있어서 백인 지배의 마력(魔力)을 깬 데 대하여 모든 황인종의 영원한 감사를 받을 만하다” (1941년 12월26일) “우리는 조선의 청년을 영광스런 일본 해군의 자랑스런 대열에 받아들인데 대해 감사하지 않으면 안된다” (1943년 5월12일)
  • 대구 미래대 학장 영장/청탁감사 로비 혐의

    교육부 감사관의 청탁감사 사건을 수수중인 서울지검 동부지청 형사5부(부장검사 李翰成)는 18일 청탁감사를 배후조정한 혐의를 받고 있는 대구미래대 학장 李예숙씨(42)에 대해 뇌물공여 및 횡령 등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李씨는 지난 95년 5월 당시 교육부 감사관 太七道씨(60·구속) 등 교육부 감사관실 관계자들에게 대구대 관선이사들의 비리를 캐내고 감사과정에서 대구미래대를 잘 봐 달라는 부탁과 함께 5,000여만원을 제공한 혐의를 받고 있다.
  • 공업용 牛脂서 떼낸 오염 쇠고기/피자­음식점 22억대 유통

    ◎부정 식­의약품 사범 특별단속… 165명 구속 식용유지나 사료 등의 원료로 쓰이는 공업용 우지방(쇠기름)에 붙어있는 오염된 살코기가 일반 식당이나 유명 피자회사의 재료로 유통된 사실이 검찰수사에서 드러났다. 서울지검 형사2부(李相律 부장검사)는 18일 식육판매업체 ‘진흥상사’ 대표 박문찬씨(48)를 축산물가공처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고 李모씨(50)등 5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또 徐홍석(45)·형석씨(38) 형제를 같은 혐의로 수배했다. 朴씨 등은 93년 1월부터 지난달까지 수도권 식육공급의 중심지인 서울 성동구 마장동에서 축협과 한국냉장 등 축산물 판매업체로부터 우지방을 1㎏에 150∼360원씩에 산 뒤 아무런 위생 조치없이 힘줄 및 잡육 등 고기부분을 떼어내 인근 식당과 정육점,피자원료 제조업체인 O사 등에 시중가격의 3분의 1 가격에 모두 22억여원어치를 판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이들이 팔아온 잡육의 표본검사 결과,일부 쇠고기에서 식중독 및 장티푸스를 일으키는 살모넬라균,사이트로박터균 등 병원성 미생물과 대장균이 다량으로 검출됐다고 밝혔다. 특히 D피자,P피자,K피자 등에 피자용 고기를 대는 일부 피자 제조업체에도 이같은 잡육이 공급된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대검찰청 형사부(安剛民 검사장)는 지난 5월부터 부정식품 및 의약품 제조판매사범에 대한 특별단속을 펼쳐 식육판매업자,무면허 치과의,한약사 등 812명을 적발해 165명을 구속하고 647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적발된 사범은 부정식품 제조·판매 610명,부정의약품 202명 등이다.
  • 민주열사 열전:7/朴寬賢 前 전남대 총학생회장(정직한역사되찾기)

    ◎시민 민주역량 결집한 ‘광주의 아들’/5·18 당시 특유의 지도력으로 평화 시위 주도/교도소내 비인간적 처우에 항거 단식중 사망 역사는 검은 음모를 뿌리치지 못하지만 가끔 환한 광장으로 가는 길을 가리킨다.음모의 시대가 갈듯말듯 하던 1980년 봄 사람들은 광장을 찾았다. 1980년 봄 광주의 도청앞 광장은 일개 지리적 점에서 드넓은 역사적 공간으로 빠르게 변신하고 있었다.이 변신은 朴寬賢이란 촉매제 덕분이었다. 80년 5월14일 박관현이 주도하는 ‘민족민주화 성회(聖會)’가 도청앞 광장에서 개시될 때 1만명의 참가자 중 대학생 아닌 시민은 소수였다.박관현을 아는 시민은 더더구나 적었다.성회 마지막날 5월16일 야간 횃불시위를 마치고 다시 광장에 모였을 때 참가자는 5만명이 넘었고 시민 수가 학생 못지 않았다.그리고 50만명 이상의 광주 시민들이 朴寬賢을 ‘광주의 아들’‘무등의 아들’로 부르고 있었다. 朴寬賢은 광주의 희망으로 우뚝섰다.그러나 도청앞 광장은 그의 존재보다 더 큰 부피로 살아나고 있었다. “민주화의 성스런 횃불이 꺼졌다 할지라도 그것은 영원히 꺼진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활활 타오르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한 朴寬賢은 “휴교령이 발동되면 정오에 도청앞 광장에 모이자”고 당부했다.광장은 광주 시민을,역사를 안을 태세가 되었다. 80년 4월9일 직선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에 뽑혔던 朴寬賢은 5·18 광주민중항쟁이란 역사의 핏빛 숲으로 똑바로 난 푸르른 길이다.광주에 박관현이 있음으로 해서,박관현의 결집력과 지도력이 있음으로 해서 5·18의 야만적 폭거와 승화된 공동사회체의 대조적인 두 측면이 뚜렷하게 부각된다. ○민주화운동에 남다른 열정 그는 한달이 약간 넘는 짧은 기간에 전남대 학생들과 광주 시민들에 잠재된 민주역량을 깊은 속까지 파내고 정연한 모양새로 다듬었다. 광주 시민들은 이 민주역량의 판석들을 꺼내 비록 가장 불행한 형태이긴 하지만 거대한 항거의 피라미드를 구축했던 것이다. 79년 10월26일 朴正熙 대통령의 사망과 함께 유신철폐와 민주화에의 기대가 드높기만 했으나 崔圭夏 과도정부는 애매한 이원집정제의 정부주도 개헌을 고집하고 있었다.무엇보다 全斗煥 중앙정보부장 겸 보안사령관이 이끄는 신군부는 비상계엄 상태를 유지하면서 정권찬탈의 야욕을 구체화해 갔다.분열과 대립으로 내닫는 정계보다는 대학이 민주화의 기수로 나섰으며 특히 광주의 전남대가 그러했다.박관현이 4월 27세의 나이많은 법대 3년생으로 총학생회장에 당선할 때 그의 사회 및 학원 민주화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탁월한 대중지도자 자질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소수였다. 고시 합격을 통해 사회정의 실현을 강력하게 꿈꾸었던 그는 1학년 말 야학운동에 뛰어드는 일대 방향전환을 한다.‘들불’ 야학을 통해 박관현은 尹祥源,金永哲 등 광주 빈민·노동 운동의 선구자들을 만나는데 박관현과 깊은 신의를 맺은 이들은 5·18 때 시민투쟁군의 중추로 활약했다. ○현상금 눈먼 동료 공원이 고발 朴寬賢은 5월 중순 단 며칠새 민주화를 희원하는 모든 광주 시민의 가장 믿음직한 아들로 자리잡았다.변혁에 대한 갈망은 리더에 대한 갈구를 깊게했고 민주화 변혁 갈망이 유달랐던 광주에 때마침 청중의 귀와 마음을 사로잡는 연설력의 박관현이 등장한 것이다.전남대와 박관현의 주도로 계엄령 아래 3일 연속 도청앞 광장에서 열린 민족민주화 성회는 비상계엄 즉각해제를 요구했으나 평화스럽게 마무리되었다.朴寬賢은 이때 방관자,구경꾼으로 머물러 있던 시민들을 민주화 희원의 역군으로 동참시키는 자력을 발휘했다. 그의 이같은 능력은 세계 역사상 드문 5·18 항쟁의 일반시민 주도 사실과 맞물려 전설이 되다시피 했으나 정작 박관현은 5·18 때 현장에 있지 못했다.신군부가 5·17 비상계엄 확대 쿠데타로 민주 인사들을 사전검거하자 18일 아침 격렬한 논쟁 끝에 학생회장 박관현의 피신이 결정됐다. 인간의 야수적 본성을 그대로 드러낸 만행과 함께 사람들의 더불어 같이 사는 소질이 꽃처럼 만개한 열흘간의 항쟁 상황을 여수 앞바다 돌산섬에서 전언으로만 듣게된다.몇번 잠입을 시도하다 실패한 박관현은 항쟁이 진압된 뒤 6월6일 서울로 도피한다.항쟁후 ‘공수부대원들이 조각조각내 버렸다’는 소문이 돌았던 朴寬賢은 82년 4월 서울 편물공장에서 현상금을 탐한 동료 공원의 고발로 체포돼 광주로 압송됐다. “도청앞 광장에서 만나자”는 자신의 ‘말’을 금쪽같이 지켜줬던 광주에 23개월 만에 발을 디딘 박관현은 드디어 ‘행동’한다.내란 중요임무 종사 죄목으로 5년형이 선고됐으나 朴寬賢의 눈은 다른 곳을 천착하고 있었다.그는 광주교도소 수감 3개월 후인 7월부터 교도소 내의 비인간적 처우에 항거하는 단식을 실시한다.믿을 수 있는 단 하나의 무기로 육신을 택한 그의 단식은 철저한 것이었고 3개월 동안 3차에 걸쳐 50여일에 달했다. ○단식중 외부진료 한번 못받아 교도소 당국은 처우개선 약속을 조롱하듯 파기하면서 점점 한계 상태로 빠져드는 그를 외부진료 한번 없이 방치했다.10월10일 온 신경이 돌처럼 굳어 도무지 음식을 음식으로 여기지 못할 지경이 되어서야 전남대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급성 심근경색증에다 급성 폐부증 증세로 12일 새벽 숨지고 말았다.만 29세였다. 朴寬賢의 젊고 강한 넋은 5·18의 핏빛 숲 뒤꼍에 언제나 푸르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朴寬賢 열사 연보 ▲1953년 전남 영광군 불갑면 출생 ▲70년 광주동중 졸업 ▲73년 광주고등학교 졸업 ▲74년 군입대 ▲78년 전남대학교 법대 입학 ▲78년 12월 광주공단 노동자실태 조사작업에 참여 ▲79년 광천 들불야학 강학 활동 ▲80년 4월 전남대 총학생회장 당선 ▲80년 5·17조치로 서울 피신 ▲82년 4월5일 체포,12일 광주교도소 수감 ▲82년 7∼10월 3차례에 걸쳐 50여일 간 단식투쟁 ▲82년 9월 ‘내란중요임무종사자’로 5년형 선고 ▲82년 10월12일 전남대 병원에서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사망 ◎누나 朴幸順 여사/어머니는 아들 검거된뒤 생존 사실 알아/동생 죽기전 “전면 단식” 조언 지금도 恨 朴寬賢 열사의 셋째 누나인 朴幸順 여사(49)는 광주대에서 구내매점을 열고 있다. 항쟁이 끝난 후 寬賢이 죽지 않고 서울에 은신한 사실을 서울의 큰언니를 통해 알았지만 寬賢의 부탁대로 아들의 생사를 몰라 애태우는 어머니에겐 체포 때까지 비밀에 부쳤다.아들이 살아 있다는 말을 들으면 아무래도 어머니의 안색이 달라져 당국의 주의를 끌까 우려해서였다. 체포된 뒤 단식 소식을 전해듣고 찾아간 그에게 寬賢은 새벽 2시 무렵에 고문하는 소리가 수시로 들리고 수형자의 부식비를 빼먹는 비리와 함께 생명 유지도 어려울 정도로 형편없는 음식만 지급한다며 “안에서 이런 악을 해결하지 못하면 바깥에 나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한편 누나는 자신의 잘못된 조언이 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며 지금도 가슴아파한다.단식이 30일째에 가까웠을 무렵 재소자 폭행 근절,주·부식 정량 지급,정치범 부당 차별대우 개선 등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았다며 다시 전면 단식을 강행할 것인가,부분 단식으로 나갈 것인가를 寬賢이 자신에게 물었다는 것이다.이때 누나는 다소라도 자신을 희생할 생각이 있으면 ‘전면’으로 나가라고 말했는데 동생이 죽기 열흘 전쯤 한 이 ‘매정한 조언이 두고두고 한이 된다는 것이다. ◎동료 宋善泰씨 회고/결벽 심해 현실적 타협 거부/뜻 정하면 끝장보는 성격… 自身에 철저/검정고무신 신고 술·노래 잘하던 학생 朴寬賢 총학생회장 아래서 제2선의 비공식 기획실장 역을 맡았던 宋善泰 현 광주 시의회 전문위원은 “결벽증이 있을 만큼 자신에게 철저했던 朴寬賢은 뜻을 정하면 끝장을 보고 말지 결코 어설프게 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학생회장 취임 직후 학원민주화 현안으로 어용교수들의 퇴진 문제가 대두됐을 때 朴寬賢은 타협안이나 다른 이슈와 함께 추진하자는 의견에 반대,어용교수의 발본색원과 문제의 완전해결을 강력 주장했다.또 학생들이 단식 농성에 들어간 후 몇몇 집행부 학생들이 투쟁 지도를 위해 김밥을 먹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는 이를 빼앗아 내팽겨쳐 버렸다고 한다. 소금장수,모기장 행상,편물공장 공원 등으로 서울에 피신하고 있을 때 광주 민주인사들에게 연락을 해 고향에서 잠적하거나,자수를 해서 형을 살고 나와 ‘내일’을 도모할 수도 있었다고 본 宋위원도 그의 강직한 성품이 이런 현실적 타협책을 거부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학생회장이 되기 전까지 쭉 검정 고무신 차림으로 학교에 다녔던 朴寬賢은 술도 잘 먹고 노래도 곧잘하는,놀 줄아는 젊은이였다고 한다.
  • 감사원,6·4선거이후 공직기장 특감/금품수수 등 非違80건 적발

    감사원은 지난 6·4지방선거일부터 새 지방자치단체장이 취임한 7월1일까지 자치단체를 중심으로 공직기강을 점검한 결과 금품수수를 비롯한 80건의 부당행위를 적발했다고 15일 밝혔다. 공무원들은 자치단체장 공백기인 이 시기에 金大中 대통령이 미국 국빈방문을 위해 외유를 떠나자 평소보다 많은 부정과 비리를 저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감사원에 따르면 지난 6월18일 인천시 계양구의 李모 구청장은 재활용품 집하선별업무 위탁계약을 체결하면서 절차를 무시한 채 구청장 개인인감을 날인해 계약을 체결했다는 것이다. 감사원은 현재 이 계약의 효력여부가 문제되고,업자와의 유착 혐의도 불거짐에 따라 李씨를 수사의뢰했다. 李씨는 또 96년 1월부터 지난 4월까지 특수활동비 2억3,919만원 가운데 843만원을 개인용도로,9,262만원은 불명확한 용도에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감사원은 아울러 강진세무서 梁모 세무주사보가 지난 1월 부가가치세 2,980만원을 환급하면서 현금 400만원을 받은 사실을 적발,재정경제부에 파면하도록 요구하는 한편 검찰에고발했다. 감사원은 또 지난해 1월부터 지난 5월까지 15개월 동안의 총 근무일수 389일 가운데 무려 174 차례나 무단 외출하는 등 근무상태가 불량한 경기도 광주군 金모 지방건축주사 등 2명을 해임토록 통보했다. 포항시 남구에서는 지난해 11월 호텔업자가 제출한 호텔 혼인예식업 장소변경 신청을 고의로 135일이나 지연시켜 처리한 관계자 3명이 징계됐다.
  • 민주열사 열전:6/尹祥源 5·18시민군 대변인(정직한역사되찾기)

    ◎‘폭동’ 아닌 ‘민중항쟁’ 자리매김 큰몫/은행원서 노동운동가로… 광주야학 주도/5·18 鬪士 회보 제작·배포… 막힌 언로 틔워 80년 5월28일자 미국 일간지‘ 볼티모어 선’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나는 이미 그가 죽을 것임을 예감했다.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표정에는 부드러움과 친절함이 배어있었지만,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었다.지적인 눈매와 강한 광대뼈가 인상적인 그는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80년 5월26일 있었던 광주도청에서의 최초이자 마지막 내외신 기자회견의 모습을 마틴 브래들리 기자는 이렇게 그렸다.기사에서의 ‘그’는 항쟁지도 부인 ‘청년학생투쟁위원회’ 대변인 尹祥源이었다.그는 다음날 아침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상반신이 불탄 시신으로 공개됐다.계엄군은 그를 성명불상자로 처리했지만 주머니에서 나온 10여개의 외신기자 명함은 그가 대변인 尹祥源임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었다. 尹祥源은 5월 항쟁이 터지자 ‘분노한 시민들의 민주화의지를 어떻게 수렴할 것인가’‘죽음을 무릅쓴 투쟁을 어떻게 조직화하고 가속시킬 것인가’를 고민했다.그리고 그가 이끌던 ‘들불야학’ 강학(교사)들과 함께 각종 유인물을 대량 제작해 뿌렸다.19일 항쟁관련 첫 호소문 ‘광주시민 민주투쟁회보’를 비롯,9호까지 나온 ‘투사회보’의 편집·제작·배포를 밤을 새워 지휘했다.언론이 눈을 감고 있던 당시 투사회보는 시민들의 눈과 귀가 됐다.시민들은 항쟁의 의미를 깨달았고 투쟁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었다. 시종일관 무기반납을 주장하며 투항적 자세를 보여온 5·18 시민수습대책위원회를 견제하기 위해 도청앞 광장에서 매일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를 이끈 이도 그였다.그는 각계 각층이 참가한 광주항쟁에 질서를 부여했으며 이것은 당시 신군부와 얼어붙은 언론에 의해 규정된 ‘폭동’이 ‘민중항쟁’으로 새로 자리매김되는데 실마리가 됐다. 대변인 尹祥源은 26일 밤 총을 달라는 고등학교 학생들을 설득했다.“우리들이 싸울테니 집으로 돌아가라.너희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마틴브래들리 기자는 이때의 尹祥源 모습에서 “세계 어느 무장조직에서도 볼수 없었던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진정한 투사의 진면목을 발견했다”고 회고했다.그의 죽음을 옆에서 지켜봤던 이양현씨의 말대로 그는 “광주항쟁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민주투사’란 수식어가 의아스러울 정도로 尹祥源 열사는 지극히 평범한 학교생활을 했다.어려운 살림에 중학교때부터 광주시내에서 하숙을 했지만 부모님 기대에 부응치 못했고 고등학교때는 ‘에덴클럽’이라는 질이 안좋은 서클에 가입해 술과 담배를 하기도 했다.삼수끝에 전남대 정외과에 입학,공부보다는 연극활동과 친구들 사귀는데 1학년을 보내고 군에 입대했다. 그의 삶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온 것은 한 선배를 만나고부터였다.복학후 외무고시를 준비하던 그는 친구 소개로 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15년형을 받았던 전남대 2년 선배 金相允(50·하실의료기상사 대표)을 만났다.그때부터 尹祥源은 자신이 처한 시대적 상황과 대학인의 정당한 삶 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金相允과 학습모임을 꾸려가며 한국현대사에 대한 시각을 재정리했다.“5·18이 터지자 마자 예비검속으로 끌려간 후 상무대 영창에서 상원의 죽음을 알았어요.그후 오랫동안 祥源이가 도청옥상에서 총을 맞고 저를 부르며 죽어가는 환시현상을 겪었습니다” 金相允씨의 회고다. 졸업후 현실에 떠밀려 주택은행에 입사해 서울서 근무하던 은행원 尹祥源은 6개월만에 사표를 내고 광주로 돌아와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자신만을 바라보던 부모님과 동생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지만 그의 마음은 확고했다.그는 “부정과 불의가 판치는 이 나라 이 민족의 현실을 좌시할 수 없어 그만두려 하니 용서해 주십시요”란 편지를 부모님께 썼다.그리고 광주 한남플라스틱공장에 일용노동자로 취업하고 광주 광천공단 지역 야학인 ‘들불야학’에 적극 참여하면서 한 사람의 완숙한 노동운동가가 된다. 들불팀은 야학 운영 외에도 광천공단의 노동자 실태를 조사해 언론을 통해 폭로하기도 했으며 지역 주민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그리고 이들은 5·18이 터지자 항쟁 내내 시민들의 눈과 귀가 되는역사적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다. 尹祥源 열사는 들불에서 후일 천상(天上)의 부부가 될 박기순씨와의 운명적 만남을 이룬다.전남대 휴학생이던 그녀는 광주지역 노동운동의 토대를 마련해보고자 들불야학을 연 당찬 여학생이었다.그와 함께 광주·전남지역 최초의 ‘위장취업자’로 불리기도 한다.그러나 박기순씨는 선배 尹祥源이 들불의 중심이 될 무렵 연탄가스 중독으로 78년 12월 꽃다운 청춘을 마감한다.몇군데가 얼룩져 있는 12월 27일 일기장에 尹祥源은 “불꽃처럼 살다간 누이여…아무리 쳐다보아도 넌 아직 살아 있을 뿐이다…”라고 기순에 대한 애타는 추모의 마음을 적어놓았다. 82년 2월,5·18 항쟁에서 살아남은 후배들은 유족들과 함께 尹祥源 열사와 박기순씨의 영혼을 불러 혼례의 예식을 치렀다.이 영혼결혼식을 위한 노래굿 ‘넋풀이’가 만들어졌고 그 마지막 소품에 黃晳暎씨가 노랫말을 붙였다.그것이 ‘님을 위한 행진곡’이다.“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이 노래와 함께 두 젊은 넋은 80년대 이후 노도와 같은 민주화투쟁 현장에 언제나 있었다. ◎그의 가족들/공장다니며 학비 대던 동생들 모두 출가/맏아들 가슴에 묻고 부모님만 생가 지켜 尹祥源 열사는 역사적 영광을 얻었지만 그의 죽음은 육친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아픔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 570­1번지(전남 광산군 임곡면 신룡리에서 87년 광주광역시로 편입됨) 尹열사 생가.그가 초등학교 졸업때까지 자란 이곳에는 부모님이 2남4녀의 자녀를 모두 출가시키고 구순 노모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아드님이 자랑스럽지 않느냐는 물음에 어머니 金仁淑씨(67)는 그저 말없이 눈물만 글썽였다.아버지 尹錫同씨(72)도 몇차례나 재촉한 끝에 말문을 열었다. “은행을 그만두고 내려오자 기가 막혔지요.동생들은 형을 공부시키기 위해 낮에 공장에 다니며 야간고를 다녔는데 노동운동이라니….자식취급을 안하겠다고 나무라기도 하고 돈을 벌어 남을 도우면 되지 않느냐고 달래기도 했지요.그랬더니 ‘그래서 몇사람이나도와주겠느냐.구조적 모순을 고쳐야한다’고 하더군요” 尹씨는 “오히려 동생들이 공장에 다니며 터무니없는 착취를 당하는 모습이 祥源이를 부채질한 것 같다”고 했다. 尹열사 대학 시절 광주시내에서 함께 자취를 했던 남동생 정원씨는 “형은 제 갈길을 훌륭히 갔다”고 담담히 말했다.역시 같이 자취를 했던 여동생 현희씨는 “늦게나마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아 위안이 된다”고 했다.정원씨는 당시 조대부고 야간부에 다니며 낮에는 자전거 배달을 했고 현희씨는 야간상고에 다니며 맥주안주 공장에서 돈을 벌었다.이들은 대학생인 祥源에게 용돈까지 주고 밤을 새워가며 시위 유인물 제작을 돕기도 한 착한 동생들이었다. ◎들불야학 동료 林洛平씨/“독재 뿌리뽑는게 산자들의 참된 의무” “도망갔던 사람이 무슨…” 林洛平씨(41·광주 전남 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는 아주 겸연쩍어 했다. 들불야학 때부터 尹祥源 열사와 고락을 같이했던 그지만 항쟁이 터지던 80년 5월18일 광주 인근 친구집으로 피신했기 때문이다.그는 尹열사의 평전 ‘들불의 초상’을 정리했다.“18일 공수부대가 들어와 온갖 만행을 저지르며 시내를 장악하자 사실 모든 상황이 끝난 것으로 보았지요.27일까지 거기 있으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林씨는 尹열사를 비롯한 들불팀이 5·18이 ‘사태’나 ‘폭동’이 아닌 ‘항쟁’ 이게끔 계기를 만든 사람들이라고 했다.항쟁초기 지도부가 없는 상황에서 조직적인 홍보·선전활동은 간접적인 지도부가 됐고 너나 없이 무기를 든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묶어주는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尹열사의 인간적 면모에 대해 그는 “민중적 품성이 물씬 풍기는 사람”이라고 평했다.원칙을 존중하는 그였지만 누구도 싫어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친화력이 돋보였다고.“방년 29세 尹祥源입니다”란 첫 인사로 7·8세나 어린 들불 강학들에게 스스럼 없이 녹아들어 이내 그들과 혼연일체가 됐다고 한다.그가 뽑아대는 현대판 판소리 ‘소리내력’의 구성진 가락은 모든 이들의 넋을 빼놓았다고 했다. “祥源이형은 5·18이 부마항쟁의 전철을 밟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죠.결과를 뻔히 예측하면서도역사적 사건의 마지막 증거로 남기를 바랐던 겁니다” 林씨는 그가 남긴 역사적 증거를 토대로 다시는 독재가 발을 못붙이게 하고 민족통일을 앞당기는 것이 산자들의 참된 의무라고 했다. ◎尹祥源 열사 연보 ▲1950년 전남 광산군 임곡면에서 출생 ▲63년 임곡초등학교 졸업 ▲69년 광주 사레지오고 졸업 ▲71년 전남대 정외과 입학 ▲72년 군입대.상주에서 일반하사로 복무 ▲75년 복학 ▲78년 주택은행 입사.6개월만에 그만두고 광주 광천공단내 한남플라스틱공장 취업.들불야학 참여. ▲80년 4월 전국민주노동자연맹 중앙위원 피선 ▲80년 5월19일 들불야학팀들과 함께 항쟁 호소 유인물 제작·배포 시작 ▲80년 5월25일 청년학생투쟁위원회 대변인 ▲80년 5월27일 새벽 전남도청 민원실 2층 회의실에서 계엄군에 항전중 사망
  • 姜慶植­金仁浩씨 석방/서울지법 保釋 결정

    ◎“기간 제한없이 충분한 심리 필요”/자택으로 주거 제한 외환위기와 관련,직무유기 및 직권남용 혐의로 구속 기소된 姜慶植 전 경제부총리와 金仁浩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법원의 보석 결정으로 석방됐다. 서울지법 형사합의22부(재판장 李鎬元 부장판사)는 4일 姜·金피고인의 변호인단이 지난 7월에 낸 보석신청에 대해 “구속기간에 제한 없이 충분히 심리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며 각각 보석 보증금 1,000만원에 보석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姜·金피고인은 지난 5월18일 구속 수감된 지 110일만에 서울구치소에서 풀려났다. 재판부는 그러나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는 검찰의 의견을 받아들여 姜·金피고인의 주거를 자택으로 제한한다.
  • 포항제철(한국경제를 이끌어온 기업)

    ◎적자 모르는 초우량 경영/제철보국 30년 국가경제 개발 견인/정부주식 연내 매각 민간기업 변신 서둘러/대기업들 황금알 잡기 지분 확보전 후끈 ‘창업 이래 한차례의 적자도 없었던 초우량 기업’‘올해 상반기 순이익만 6,800억원에 이르는 알토란 기업’­포항제철을 이르는 말이다. 올해로 창업 30년을 맞은 이 포항제철이 연말까지 정부보유 주식 26.7%를 매각,공기업에서 민간기업으로 탈바꿈한다. 제2의 창업을 하는 셈이다. 정부는 공기업 민영화 계획에 따라 오는 10월 포철 지분 가운데 10% 정도를 국내외 민간기업에 매각하는 것을 시작으로 연말까지 보유주식 모두를 일반에 매각할 방침이다. 재정경제부가 갖고 있는 882만주(9.14%)와 산업은행 소유의 2,274만주가 대상이다. 정부는 지분매각과 관련,동일인 지분한도를 2001년까지 3%로 묶어 특정기업이 포철의 지배주주로 등장하는 것을 막는다는 방침이다. 포철 역시 이같은 주주의 분산으로 소유와 경영이 완전 분리되는 전문경영인체제를 꾀하고 있다. 그러나 이 포철의 지분 3%는 그동안 철강시장을 넘보지 못했던 대기업들에게 있어서 놓칠 수 없는 ‘황금알’이나 다름없다. 더구나 2001년이면 지분 한도가 폐지되는데다 당장이라도 다양한 경로를 통해 지분을 추가확보할 수 있어 대기업들의 포철지분 확보전은 갈수록 치열해질 전망이다. 이미 각 대기업들은 사내에 태스크포스를 구성하고 관련 정보 수집에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들 대기업에 맞서 인천제철 동국제강 강원산업 한국철강 등 기존 철강업체들도 포철지분을 공동 매입,핵심주주그룹을 형성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포철로부터 공급받고 있는 열연 냉연 강관소재 등 철강제품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조치다. 이같은 업계 움직임에 대해 정부는 특정기업의 독과점에 따른 폐해를 막기 위해 소유를 최대한 분산시켜 누구도 경영권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복안이다. 이를 위해 우리 사주와 국민주 방식을 적극 활용할 것으로 알려졌다. 포철 역시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강도높게 요구하고 있다. 포철 관계자는 “영국 브리티시 스틸의 황금주 제도나 프랑스 유지노사의우호적 주주그룹 구성,일본 신일본제철의 전문 경영인 체제 등을 도입해 기초 소재산업체로서의 공익적 기능이 훼손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민영화 방침으로 포철은 지금가지 성공적인 경영으로 다진 기반을 바탕으로 명실공히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초일류 철강기업으로 발전할 수 있는 체제가 마련됐다는 지적이다. 특히 해외투자가들의 자본 및 경영 참여를 통해 선진 경영기법을 적극 도입함으로써 전문 경영인에 의한 책임경영체제가 강화되리라는 전망이다. 나아가 포철의 민영화를 계기로 국내 철강산업과 수요산업의 구조조정 및 체질개선이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68년 창립… 세계 2위 제철社로 급성장 포항제철은 70년대 개발경제시대의 고도성장과 궤를 같이해 왔다. 68년 자금 기술 경험 자원 등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철강불모의 상태에서 포철은 ‘우향우 정신’만으로 문을 열었다. 제철사업의 대역사를 성공적으로 이루지 못할 때는 건설현장의 모두가 영일만 앞바다에 뛰어든다는 각오였다. 그러나 적수공권(赤手空拳)의 창업은 결코 쉽지 않았다. 66년 미국 영국 독일 등 5개국 8개사로 이뤄진 국제제철차관단(KISA)이 돌연 종합제철 건설의 타당성에 이의를 제기했고,곧 이어 해외 차관이 끊기면서 창업 자체가 무산될 뻔 했다. 여기서 이른바 ‘하와이구상’이 나왔다. 한·일 수교를 계기로 일본으로부터 제공받은 자금의 일부를 당초 농업부문에 지원하려던 계획을 바꿔 제철소 건립에 사용키로 한 것이다. 포철의 고속 성장과 흑자경영은 ‘제철보국(製鐵報國)’의 창업정신이 바탕이 됐다. ‘국가 최대 숙원사업의 수행자로서의 책임감과 노력으로 국민 여망에 보답한다’는 것이다. 창업 초기 포철은 외국으로부터 설비를 들여오면서 제반 조업기술과 노하우를 함께 배우고 익혀 나갔다. 그러나 이같은 기술이전은 포철의 급성장을 일본 등 선진 각국이 경계하기 시작하면서 제동이 걸렸다. 하지만 선진국들의 이런 견제가 오히려 포철에게는 자생력을 키우는 계기가 됐다. 77년 기술연구소,86년 포항공과대학,87년 포항산업과학연구원을 잇따라 세워 생산현장과 연구소,대학의 연구기능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산학연 협동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세계적 수준의 자체 기술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창업 30주년과 함께 올해 완전 민영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 포철은 정부의 보호막에서 벗어나 전문경영인 체제를 바탕으로 흑자경영기조를 지속해나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를 위해 포철은 ‘최대생산­최대판매’의 양적 성장전략에서 ‘적정생산­최대이익’이라는 이익경영을 꾀하고 있다. 나아가 21세기의 세계화·개방화에 맞춰 생산 판매 구매 투자 등 각 부문에 걸쳐 글로벌 스탠다드에 입각한 혁신운동을 강도높게 전개한다는 방침이다. 포철의 연간 철강 생산능력은 지난해 2,643만t으로 세계 2위 규모다. 제철소 1기 설비가 준공된 73년 103만t에 불과했던 것이 25년만에 40배 이상 성장한 셈이다. ◎포철 劉常夫 회장 취임후 국제통화기금(IMF)체제는 초우량기업 포철에도 변신을 강요하고 있다. 지난 3월 劉常夫 회장이 취임한 뒤포철은 적지 않은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경영전략을 양 대신 질 위주로 전면 수정했다. “본업에 충실하자”는 劉회장의 경영철학을 반영한 것이다. 劉회장의 첫 구조개혁 조치는 지난 6월 단행한 판매구조의 일원화. 포철과 판매전문 계열사인 포스틸로 나뉘어 있던 열연·냉연 등 주력제품 판매를 포철로 단일화했다. 유통비용 절감과 가격변화에 적절히 대응하기 위한 전략이다. 劉회장이 두번째로 손 댄 부문은 투자 쪽이다. 국내외 투자를 줄이며 ‘호흡조절’에 나섰다. 광양에 건설중이던 연산 200만t 규모의 제2 미니밀사업과 중국 대련의 석도강판 합작사업 및 광동성 전기아연도금강판 합작사업,인도네시아의 100만t 미니밀 건설사업 등을 전면 중단했다. 공급과잉과 고금리,자금시장의 불안정 등에 따른 조치다. 이밖에 포스코개발과 포스에이씨,포스코경영연구소 등 계열사에 대해 인원감축 등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이같은 작업들은 그러나 소리소문없이 추진돼 왔다. 바로 그것이 劉常夫 회장의 경영스타일이라는 게 포철 관계자의 설명이다. 尹錫萬 상무는 “劉회장 취임 후 포스코개발 415명,포철로재 215명 등 계열사에 대해 감원 등 강도높은 구조조정작업이 추진됐지만 별다른 마찰없이 이뤄졌다”며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는 劉회장의 경영스타일이 이런 조용한 구조개혁을 가능케 했다”고 말했다. 劉회장의 향후 개혁방향은 이같은 군살빼기를 바탕으로 수요산업 고도화를 선도할 전략제품을 집중 공략해 나가는 데 맞춰져 있다. 전략 품목은 석유수송용 강관,강구조물,타이어코드·스프링,자동차,스틸캔,법랑,셰도우 마스크,스테인리스 등 8개 품목. 포철은 이들 품목마다 전문가 그룹을 구성,품질향상과 함께 고객서비스 증진을 꾀하고 있다. □포항제철 연혁 68년 4월1일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창립 70년 4월1일 포항제철소 1기 설비 착공 73년 7월3일 포항제철소 1기 설비 준공(조강 연산 103만t) 76년 5월31일 포항제철소 2기 설비 준공(조강 연산 260만t) 78년 12월8일 포항제철소 3기 설비 준공(조강 연산 550만t) 81년 2월18일 포항제철소 4기 설비 종합준공(조강 연산 850만t) 83년 5월25일 포항제철소 4기 2사 설비 준공(조강 연산 910만t) 85년 3월5일 광양제철소 1기 설비 착공 86년 12월3일 포항공과대학교 개교 87년 3월3일 포항산업과학연구원 개원 5월7일 광양제철소 1기 설비 준공(조강 연산 1,180만t) 88년 6월10일 기업공개(국민주 1호) 7월12일 광양제철소 2기 설비 준공(조강 연산 1,450만t) 90년 12월4일 광양제철소 3기 설비 준공(조강 연산 1,750만t) 92년 10월2일 광양제철소 4기 설비 종합준공(조강 연산 2,080만t) 94년 6월1일 포스코경영연구소 설립 10월14일 뉴욕증시 상장 12월7일 포항 방사광 가속기준공 95년 9월1일 포스코센터 개관 10월27일 런던증시 상장 11월28일 신제선공장 준공 97년 3월14일 사외이사제 도입 8월28일 광양 4냉연공장 준공
  • 왜곡보도 50건 선정

    언론개혁시민연대는 한국 언론의 대표적인 왜곡 보도사례 50건을 선정,27일 서울 지하철 2호선 시청역 전시실에서 시민들에게 공개했다. 새달 2일까지 계속되는 전시회는 독재권력을 정당화하거나 용공조작·인권유린 등에 앞장섰던 허위 왜곡기사들의 실체를 생생하게 고발하고 있다. 언개련이 선정한 허위 왜곡보도 사례 50건을 소개한다. □왜곡보도 50건 내용 ▲권력의 정당화­민주화 외면 ­자유당 4사 5입 개헌 정당화(서울 56년 3월) ­이승만 우상 숭배(서울 56년 3월) ­박정희 군부쿠데타 지지(경향,조선 61년 5월) ­10월 유신 지지(조선,중앙,서울,한국 72년 10월18일) ­부마사태 왜곡(경향,서울,중앙,한국 80년 10월) ­전두환의 권력 장악 정당화(서울 80년 4월) ­광주민주화 운동 포고로 매도(조선 80년 5월) ­전두환 미화­‘인간 전두환’(81년 8월) ­4·13 호헌 조치 옹호 ­김대중 친서설(연합 89년 7월) ▲냉전이데올로기 강화와 용공조작 ­이승복군 허위보도(조선 68년 12월) ­경향신문 기자 6명 용공혐의 구속(80년 5월)­김근태 용공조작 사건(경향,중앙 85년 10월) ­‘대학가의 음영’ 시리즈(경향 85년 10월) ­건국대 사태(86년 10월) ­평화의 댐(86년 10월) ­문익환 목사 기자회견(조선 89년 5월) ­북한 핵실험 보도(92년 6월) ­김평일 망명설 보도(94년 8월) ­성혜림 망명 사건(96년 2월) ­북한 공군 이철수 대위 귀순 사건 컬러 조작(96년 5월) ­북한정치범 수용소 보도(97년 7월) ­이석현 의원 명함 파문(97년 8월) ▲민중생존권 외면 인권 유린 ­광주대단지 사건(71년) ­함평고구마 피해보상 요구(76년) ­삼청교육대 왜곡(80년 8월) ­YH여공 신민당사 농성 사건(79년 8월) ­권인숙양 성폭행 왜곡(86년 8월) ­노동자 대투쟁(87년) ­김기설 유서대필 논쟁(91년 7월) ­여의도 농민시위(94년 6월) ▲선정주의에 의한 오보 ­김구,이승만 동석 사진 조작 ­중공군 인해전술 사진 ­압록강변 병사 사진 ­일본군 독립군 작두 처형 사진 ­호랑이 출몰 사진(동아 80년 1월) ­김일성 주석 사망설(조선 86년 11월) ­사노맹 백태웅씨 옥중 결혼(중앙 92년 6월) ­서해 훼리호 백두운 선장 생존(한겨레 등 93년 10월) ­육영수 여사 파격 의혹(국민 90년 5월) ­뉴스위크 이대생 ‘돈의 노예들’ 사진보도(91년 11월) ▲언론사의 이기주의에 의한 왜곡 ­신문제작 거부 사태에 대한 견해(조선 75년 3월) ­동아투위에 대한 왜곡(동아 75년 3월) ­류근일 칼럼 ‘정주영 변수’(92년 7월) ­선거유세장 인파 조작(제주신문 92년 6월) ­지역민방 케이블TV 경영 수지 과장(95년 5월) ­중앙일보 대선 편파보도(97년 12월) ­월 펀슨 세계은행 총재 발언(97년 9월) ­재경원 발표(97년 11월) ­한국경제 위기 아니다(9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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