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5·24
    2026-02-17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296
  • 결혼비용/한쌍 평균 3,162만원/94년 기준

    ◎도시근로자 월 평균소득의 18.6배/혼주·하객 직접비용 연 12조원/복지부,혼례제도 개선안 곧 마련키로 신혼부부 한쌍의 평균 혼례비용은 3천6백22만원이다.혼수감 준비,예식 및 피로연,축의금 등 혼주와 하객이 지출하는 직접비용을 합하면 연간 약12조원에 이른다. 이같은 사실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원장 연하청)의 이현송 박사팀이 보건복지부의 의뢰로 혼례관련 비용을 조사,추계한 결과 1일 밝혀졌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주택마련비용을 제외하고 혼주와 하객 양측이 결혼식을 올리는 신랑신부 1쌍을 위해 지출하는 돈은 94년기준 평균 3천6백22만4천원으로 추계됐다. 혼수,예식장 사용,이·미용,사진촬영,함들이,신혼여행 등 결혼식과 부대행사를 위해 신랑신부 양측이 지출하는 비용이 도시근로자 월평균소득 1백70여만원의 18.6배에 달하는 것이다. 연간 결혼건수 약40만건 가운데 80%인 33만2천여건은 일반상업예식장에서 치른다. 하객접대비용도 만만찮다.연간 결혼식장을 찾는 하객은 1억8백만명이다.이들 가운데 80%가 식사를 하는 것으로 여겨져피로연비용만도 5천5백24억4천8백만원에 이른다. 혼주측이 지불하는 돈은 모두 11조5백2억8천8백만원이 된다. 하객들이 내는 축의금도 연간 1조7천3백38억7천만원에 달한다.결혼식 1건당 평균축의금 총액은 5백22만원이다.이만큼 혼주의 부담을 덜어준다. 가구당 소득이 1백50만원이하면 2만원,1백50만원이상이면 3만원가량을 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혼식참석을 위해 1인당 평균 3시간을 소모,결혼식참석을 위한 기회비용도 9천7백68억8천만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계됐다.결혼식 1건당 기회비용은 2백94만원이다. 혼주측의 실질지출과 하객측이 부담하는 비용을 합하면 혼례관련 총비용은 연간 12조2백63억6천8백만원으로 추산됐다. 보건사회연구원관계자는 『신혼부부의 주택마련비용과 교통혼잡 등으로 인한 기타 사회적 비용을 더할 경우 1쌍이 결혼하는데 드는 비용은 더 늘어난다』며 『전국적으로 연간 20조원에 육박할 것』이라고 추산했다. 보건복지부는 혼례에 따른 낭비를 줄이고 혼례문화를 바로잡기 위한 혼례제도개선안을 곧 마련,발표할 예정이다.〈조명환 기자〉
  • 미,대북한 경제제재/미사일 수출 관련 5월24일자로

    ◎기업 기술계약 2년간 금지 【워싱턴=김재영 특파원】 미국이 지난달 24일자 관보(CFR)를 통해 이란에 미사일을 수출한 사실과 관련,북한에 경제제재 조치를 내린 사실이 최근 뒤늦게 밝혀졌다.〈관련기사 5면〉 이 조치로 미사일거래 사실이 확인된 북한 및 이란은 미국 기업과 향후 2년간 미사일관련 기술·설비 계약을 할 수 없게 됐다. 이번 경제제재 조치는 표면상으론 94년말 미·북간 제네바 핵합의 이후 미국의 첫 대북 제재조치이나 미국 국내법에 따른 자동적 적용이며 현재 한국전이래 미국이 행하고 있는 전면적인 대북한 경제제재 조치에 비하면 이 미사일관련 계약금지 제재라는 것은 실질적으로 별다른 의미가 없는 용어상의 조치에 불과하다. ◎실질적 변화없어/정부 논평 정부의 한 당국자는 미 국무부가 북한의 대이란 미사일 기술 수출과 관련해 무기수출통제법에 따라 대북제재를 지난달 24일부터 2년 연장하기로 한데 대해 『미국이 이미 적성국교역금지법과 수출관리법에 따라 북한에 대한 상품,기술의 수출을 포괄적으로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이번 제재에 따라 실질적으로 북한에 새로 부과되는 제재는 없다』고 밝혔다.
  • 북 경비정 3척 또 침범/어제 연평도 부근

    ◎해군 즉각 출동… 3시간만에 되돌아가/올들어 네번째 북한 고속경비정 3척이 14일 하오 서해 연평도 북방한계선을 침범,우리측 해역에 머물다 우리 해군의 제지로 2시간 49분만에 북쪽으로 되돌아갔다.북한 경비정이 해상 북방한계선을 월선한 것은 올들어 4번째다. 국방부는 이날 북한 고속경비정 3척이 하오 2시35분부터 9∼12분 간격으로 서해 연평도 서남쪽 10마일 해상에서 북방한계선을 잇따라 침범,남하하다 긴급출동한 우리 해군의 고속정등 7척의 제지로 하오 5시24분 북쪽으로 복귀했다고 발표했다. 국방부는 『이들 북한 고속정은 북방한계선 이북에서 근접 조업중이던 북한 어선의 남하를 막을 목적으로 북방한계선을 월선한 것으로 보이며,지난 5월과는 달리 무력시위의 의도는 없는 것으로 본다』고 분석했다. 당시 북방한계선 북쪽에는 북측 어선 14척이 조업중이었다. 이에 따라 우리 해군은 고속정 5척과 호위함 1척,초계함 1척 등 7척을 긴급출동시켜 2∼3㎞ 거리에서 북한 경비정의 남하를 차단하는 한편 만일의 사태에 대비,전투기의 비상출동대기태세에 돌입했다.〈황성기 기자〉
  • 남미­유럽세 대타협의 산물/한·일 월드컵 공동개최­결정 배경

    ◎아벨란제 세불리 확인뒤 막판 “수용” 선회/「공동안」 관철 요한손 차기대권 발판 마련 국제축구연맹(FIFA)의 2002년월드컵 한·일공동개최 결정은 FIFA내 양대세력의 대타협 결과라는 게 지배적인 시각이다. FIFA를 움직이는 양대산맥은 주앙 아벨란제 회장(브라질)을 축으로 한 남미세와 레나르트 요한손 유럽축구연맹(UEFA)회장(스웨덴)을 기수로 한 유럽세.두세력은 FIFA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어오다 2002년 월드컵 개최지 결정을 놓고는 힘겨루기 양상으로까지 치달았다.요한손을 축으로 한 개혁성향의 유럽세가 22년째 회장을 맡고 있으면서 일본을 노골적으로 지지한 「노회한 군주」 아벨란제에게 제동을 걸고 나섰기 때문. 유럽세는 ▲월드컵 수익의 공정배분 ▲TV중계권 선정의 투명성 보장 등을 내세워 아벨란제의 독단과 전횡을 비난하는 한편 「왕당파」에 대한 공세차원에서 공동개최안을 강력하게 밀어 붙였다. 아시아연맹이 처음 제기한 공동개최안을 요한손이 앞장 서 관철시킨데는 유럽권의 공동개최를 위한 선례를 만들려는 포석이기도 하지만 아벨란제를 압박해 FIFA의 개혁과 자신의 「차기대권」 도전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겠다는 계산이 짙게 깔려 있었다. 요한손은 지난 30일의 회견에서 『아벨란제는 그동안 3차례나 공식석상에서 2002년 월드컵은 일본에서 열려야 한다고 말했다.중립을 지켜야 할 회장이 취할 도리가 아니었다』면서 『아벨란제는 꽤 나이가 많다.98년 파리총회때는 유럽에서 FIFA회장 후보를 내야 한다고 본다』고 말해 공동개최 추진이 아벨란제 견제와 깊은 관계에 있음을 내비쳤다. 요한손은 아벨란제가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공동개최는 문제가 많다』며 일본지지를 노골화 한 지난 24일 로마 유럽연맹 확대집행위원회에서 공동개최안 상정을 결의하고 29일 스톡홀름에서 이 방침을 재확인하는 등 정면대결 태세를 갖췄다. 요한손의 이같은 대공세는 지난 29일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지가 『유럽연맹은 31일 FIFA집행위원회에서 아벨란제의 목에 칼을 들이댈 것』이라고 보도할만큼 큰 반향을 일으키며 유럽세를 하나로 묶었고 방황하던 아프리카를 끌어들이는 효과까지 가져와 일본의 「대리인」격인 아벨란제로 하여금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요한손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유럽세의 공동개최 요구를 거부하고 개최지 결정투표를 강행하면 유럽세가 한국에 몰표를 던질 가능성이 높아 자신이 민 일본이 패할 가능성이 있는데다 설사 일본이 근소한 표차로 이긴다 하더라도 유럽세의 반발을 더욱 키워 자신의 집권기반을 뒤흔드는 사태로 확산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아벨란제는 이같은 최악의 사태를 막고 자신의 영향력을 지키기 위해 공동개최를 받아들이는 타협에 나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결국 2002년 월드컵 개최지는 한국과 일본의 전쟁을 방불케 한 유치활동과는 관계없이 아벨란제와 반아벨란제 세력으로 나눠 진 FIFA의 역학관계에 의해 판가름 나고 만 셈이다.〈오병남 기자〉 □공동개최 추진 일지 ▲94년 4월8일=피터 벨라판 아시아축구연맹(AFC)사무총장,로이터통신과의 콸라룸푸르 인터뷰에서 『아벨란제 FIFA회장이 한일공동개최를 신중히 검토중인바 공동개최를 적극 제안한다』고 발언해 표면화.이후 벨라판은 기회있을 때마다 공동개최 촉구 ▲95년 3월3일=벨라판 사무총장 공동개최 다시 제안 ▲95년 3월3일=제프 블래터 FIFA사무총장,공동개최 불가 강조 ▲95년 7월11일=김윤환 한일의원연맹회장,미야자와 전 일본총리와의 회동에서 공동개최 제의 ▲95년 7월19일=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공동개최 반대 공표 ▲95년 7월21일=한국,정부차원서 단독개최로 공식입장 정리 ▲96년 3월=술탄 아마드 샤 아시아축구연맹(AFC)회장,4개 대륙연맹 회장에게 공동개최 제안,촉구서한 발송…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이 열린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서 정몽준·나가누마 양국 축구협회장에 의견 타진.정회장은 유연한 대응을,나가누마회장은 단독개최를 고수 ▲96년 3월=레나르트 요한손 유럽축구연맹(UEFA)회장,슐탄AFC회장의 공동개최 제안에 동의 표명…유럽측 FIFA집행위원 8일 회동으로 공동개최에 의견통일 ▲96년 4월=공로명 외무장관,공동개최안 수용의사 피력 ▲96년 4월=FIFA,1개국개최 원칙 확인 ▲96년 4월=하시모토 일본총리,단독개최 의사 확인 ▲96년 5월3일=이수성 총리,단독개최가 원칙이나 FIFA결정땐 공동개최도 수용 표명 ▲96년 5월4일=FIFA,공동개최 거부 재확인 ▲96년 5월4일=하시모토 일본총리,단독개최 재확인 ▲96년 5월8일=FIFA,한일 양국에 1개국개최 규정 준수여부 질의공문 발송 ▲96년 5월10일=정몽준 축구협회장,단독개최 의사 불변 발표 ▲96년 5월12일=일본축구협회,단독개최 준수 답신 FIFA에 발송 ▲96년 5월13일=일본 여당정책책임자 회의,공동개최론 대두 ▲96년 5월15일=대한축구협회,단독개최 준수할 것이며 FIFA 결정에 따르겠다는 답신 FIFA에 발송 ▲96년 5월21일=가와부치 일본유치위 부위원장,공동개최 가능성 발언…일본 축구계 고위인사로서는 첫 공동개최 공식 거론 ▲96년 5월23일=안드레아스 헤렌 FIFA대변인,공동개최에 대비한 FIFA정관 개정 가능성 시사 ▲96년 5월24일=UEFA집행위원회(로마),31일 FIFA집행위원회에 공동개최안 상정 최종결정 ▲96년 5월31일=공동개최안 FIFA집행위 통과
  • 북 경비정 침범­긴장의 1시간 27분

    ◎새벽녘 “북 함정 남하” 레이더에 포착/해군 고속정 12척 출동… 즉각 응징태세/2백70m까지 근접 추격하자 “꽁무니” 23일 새벽 서해 최전선 연평도 서남쪽 16마일 해상.부옇게 동이 터오는 가운데 짙은 해무가 깔린 바다에서 몇개의 점이 나타났다. ○국방부에 긴급 보고 우리의 백령·소청도 등의 레이더기지와 함정의 레이더는 육안으로 보이는 이들 점이 북한군의 함정인 것으로 식별,긴급하게 주변 우리측 고속정과 국방부 및 합참 등에 보고했다.우리 군은 연평도 부근에 대기하고 있던 호위함과 고속정에 출동대기명령을 내리는 등 즉각 대응태세를 갖췄다. 상오 5시24분쯤 북한군 10여척의 고속정 편대 가운데 5척이 기동을 시작했다. ○라이트 비추며 경고 우리측 고속정 12척이 긴급출항 했고 주변 기지에서 전투기의 비상출동대기 명령이 떨어졌다.적의 공격성 여부가 판단되면 즉각 출동,응징한다는 태세였다. 상오 5시51분쯤.이들 고속정이 빠른 속도로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해 들어왔다.새벽 시간대 이처럼 대규모로 북한군 함정이 북방한계선을 넘은 것은 처음이었다.그만큼 우리측의 긴장감은 고조됐다. 우리측 고속정은 1천5백t급 호위함 및 초계함의 지원을 받으며 즉각 대응에 나서 이들과 맞 시위기동을 벌였다.우리측은 「월선대응지침」에 따라 방송과 라이트를 비추어 경고를 했다.그러나 북한측 고속정은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하를 계속했다. ○사정거리까지 접근 상오 6시10분쯤 북한 고속정은 북방한계선 남쪽 4마일(7㎞)까지 남하를 계속하다 우리측 고속정이 2백70m까지 근접,시위기동을 했다.해상에서의 2백70m 거리는 사격도 할 수 없을 만큼 근접한 거리. 우리측의 응징의지가 단호함을 인식한 듯 북한 고속정은 북상을 시작했다.우리측 고속정이 바싹 추격하며 이들을 북방한계선으로 밀어내자 북한 고속정 5척은 상오 7시18분 북방한계선으로 모두 넘어갔다.도발을 감행한 지 1시간 27분만이었다.〈황성기 기자〉 ◎북한군 귀순 일지 ▲50.4.28=북한공군 이건순 중위(24세·이하 당시 나이),IL 10기를 타고 김해비행장에 착륙귀순 ▲53.9.21=북한공군 노금석 상위(21),평남순안비행장을 이륙,미그15기에 백기를 달고 귀순 ▲55.6.21=이운용·이인선 소위(24),YAK­18기를 몰고 귀순 ▲60.8.3=정락현 소위(24),미그15기를 몰고 귀순 ▲70.12.3=박순국 소좌(33),미그15기를 몰고 귀순 ▲83.2.25=북한군 이웅평 상위(29),중공제 미그19기 몰고 귀순 ▲83.5.7=북한군 제13사단 민경수색대대 참모장 신중철 대위(36),동부전선 넘어 귀순 ▲87.6.17=북한 사회안전부 인민경비대 소속 홍명진 중사(23),강원도 철원 동북쪽 아군 최전방초소에 귀순 ▲89.9.10=북한군 김남준 소위(27),김광춘 상사(24),소아병원간호사 임정희씨(24) 등 3명이 한강하류를 헤엄쳐 건너 귀순 ▲93.8.11=인민무력부 군사건설국 임영선 중위(30),북한 탈출 후 제3국 거쳐 망명 ▲94.3.18=인민무력부 총참모부 핵화학방위국 이충국 중사(26),제3국 통해 망명 ▲94.9.8=사로청 청년돌격대소속 김형덕 귀순 ▲94.12.8=함북 소재 경비여단 소속 최승학 중사(23),동남아 3국경유 귀순 ▲95.1.6=북한군 예술 선봉대 소속 정선산 상사(26),3국 경유 도착 ▲95.10.11=북한인민무력부 후방총국 소속 용성무역 합영부장 최주활 상좌(46),제3국 통해 귀순,발표(안기부) ▲95.11.30=북한군 안영길 대위(38.후방총국소속 공병대 참모),최근 제3국 통해 귀순,발표 ▲95.12.23=북한군 최광혁 하사,휴전선 넘어 탈출 ▲96.5.8=탈북자 이정국(30.북한군장교)·서병림(34)씨,제3국 체류중 귀순 입국 ▲96.5.23=북한공군소속 이철수 대위 미그19기를 몰고 귀순
  • 문신 선생 생전 예술세계 한눈에/마산 문신미술관서 1주기 추모전

    ◎청동·흑단조각·미공개 친필자료 등 전시 세계적인 조각가 문신선생의 타계 1주년을 맞아 생전 그의 예술세계를 보다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는 추모전이 23일부터 올 가을까지 경남 마산시 합포구 추산동 문신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문신미술관측은 지난해 5월24일 타계한 문선생의 1주기를 맞아 「문신 추모 1주년 흑단,친필자료전」을 마련해 이날부터 전시한다. 미술관 제1전시관 1층 전시실에는 지난 60년대이후 제작한 나무조각작품에서부터 20여점의 브론즈,타계직전 제작한 흑단조각작품 등 문씨의 열정이 깃들여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 전시된다. 2층 전시실에는 그동안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 문씨의 친필자료 등이 전시돼 눈길을 끌고 있다. 예술계에 처음 발을 디딜 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작품세계를 평한 평론가들의 친필원고를 비롯해 젊은 시절 그가 기고한 각종 수필원고,작품활동 틈틈이 적은 메모노트,그동안 국내외 여러 보도자료 등이 전시됐다.작품제작에 사용하던 여러가지 도구 등도 함께 진열돼 있다. 특히 이번 추모전을 계기로 문씨의 예술성을 대표하는 흑단조각작품을 미술관 전시실에서 다시 볼 수 있게 됐다.지난 94년 5월 미술관이 문을 연 뒤 잠시 전시를 한 흑단작품은 도난우려가 있어 전시를 하지 못했다.브론즈는 다시 찍어낼 수 있지만 단단한 나무인 흑단을 일일이 손으로 깎아 다듬은 흑단조각작품은 작품 하나하나가 귀중한 것이다.따라서 흑단은 문씨가 타계한 뒤 예술적 가치가 더욱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미술관측은 미처 정리가 안된 친필자료 등은 정리가 되는대로 2층 전시실에 계속 전시하는 등 문씨가 50년 예술여정에 쏟은 땀과 열정 등 생전의 숨결을 그가 직접 지은 전시관 공간에 모두 담아나갈 계획이다. 파리 유학시절 회화에서 조각으로 전환한 그는 80년 고향에 돌아와 정착했다.88년 올림픽때는 올림픽조각공원에 「올림픽의 조화」을 선보이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해왔으며 92년에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프랑스정부가 수여하는 프랑스 예술문화영주상을 수상했다.그는 사망 1년전 마산시 고향집터에 건평 3백40평의 실내전시장과 2천5백평의 야외조각전시장으로 이루어진 문신미술관을 개관,생전의 숨결을 담아두었다.〈마산=강원식 기자〉
  • 사할린 원유·가스 생산지(시베리아 대탐방:70)

    ◎원유생산 파이프 수천개 지상에 “우뚝”/야산꼭대기까지 생산관련기계 널려/대륙붕 개발땐 「러」 생산량 10% 차지 사할린은 극동지역에서 유일한 원유와 가스 생산지다. 사할린 북쪽끝 오하시에 본사를 두고 있는 사할린 최대 석유회사 모르네프테가즈는 연간 원유 1백50만t,가스 15억㎥를 생산한다.그중 3분의 1은 한국의 유공을 비롯한 외국으로 수출하고 나머지는 인근 하바로프스크주의 콤소몰스크 나 아무레 정유공장으로 보낸다. ○연간 원유 150만t 생산 이 회사의 세르게이 보그단치코프 사장은 직원 1만3천명을 거느린 총수답지 않게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다.91년 2만4천명이었던 직원수를 불과 몇년사이에 절반가량으로 줄였다.보그단치코프 사장은 『사할린 대륙붕 1·2공구의 본격개발이 빠르면 6∼7년내에 착수돼 생산량이 원유 3천만t,가스 2백50억㎥로 러시아 전체생산량의 10%를 차지하게 된다』고 강조한다. 산하회사인 오하 네프테가즈를 찾았다.미리 연락받은 선임 지질연구원 겐나디 마즈니친이 점심시간인 낮 12시를 넘기며 기다리느라무료한 듯 컴퓨터로 포커게임을 즐기다가 취재진이 들이닥치자 멋적은 듯 악수를 청하며 맞았다.이 회사의 생산현장은 8곳 모두 육지에 있고,중앙 오하지역 두곳에 박힌 원유생산 파이프만 1천개 이상이며 물과 수증기를 땅속에 넣어주는 파이프도 3백50개에 달한다.마즈니친씨는 『이 지역의 원유에는 파라핀 성분이 많아서 증기를 넣지 않을 경우 매장량의 20%밖에 채굴할 수 없지만 증기를 넣으면 60%까지 채굴이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넓은 벌판과 산꼭대기까지 원유를 퍼올리는 기계로 가득하다.사람은 없이 기계가 스스로 쉴새없이 원유를 퍼올린다.증기 생산기 12대도 쉴틈없이 가동돼 시간당 80t 가량의 증기를 생산,파이프를 통해 공급한다.온도는 4백℃,압력은 35㎏/㎠다. 아직 바다에는 생산현장이 없다.97년 오돕투지역의 해상유전에 해상 플랫폼을 설치하지 않고 육지에서 비스듬히 파이프를 박아 원유를 빼낼 계획이다.처음 시도하는 방식이다.이곳의 원유가 육지에서 3㎞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매장돼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한다.기술적으로4㎞ 이내까지 가능해 육지에서 14㎞ 떨어져 있는 차이포지역에는 해상 플랫폼을 설치해야 한다.육지의 원유는 대부분 파내 이제 바다밑 것만 남았다고 한다. ◎사할린 교포가 지사장 회사소유 시추대가 6대 있지만 2대는 베트남에 가서 일하고 나머지는 얼지않는 남쪽 홀름스크와 코르사코프 앞바다에 2대씩 대피시켜놓고 있다. 그는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살기가 좋아진 반면 술마시고 게으름피우는 사람들은 살기가 어려워졌다』고 말한다. 유공해운 러시아 지사장 일을 맡고 있는 사할린 교포 김덕수씨(48)는 요즘 새로운 일을 추진하고 있다.사할린에서 생산되는 원유를 전량 국내로 들여와 정유시켜 내보내는 일이다.콤소몰스크 나 아무레에 정유소가 있지만 운영이 잘 안된다.궁극적으로는 사할린에 정유소를 세우는 편이 좋겠지만 장기적인 목표일 뿐 당장은 실현가능성이 없다고 보기 때문에 우선 쉬운 일부터 하면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나가자는 것이다. 김지사장은 천재들만 모인다는 아카뎀 고로독을 나온 석사 출신이다.그것도 소수민족에게는 금기분야였던 전자학과를 전공했다.사할린의 해양연구소 부소장까지 지내다 93년 연구소가 문을 닫자 고민끝에 유공해운 일을 맡아 극동지역 선박에 대한 해상급유시장을 거의 장악하다시피 하고 있다.해양연구소에 근무하면서 이 분야에 발이 넓고 유력인사들과 친분이 있다는 점이 큰 힘으로 작용한다. 사할린에서 원유가 발견된 것은 1891년.원주민들이 『냄새나는 물이 있다』고 해 러시아 탐사대가 시추공을 1백20m 깊이까지 박아 원유매장이 확인됐다.당시에는 시추공을 박는 일도 수작업에 의존했다.1923년부터 일본과 소련이 공동으로 생산을 시작했다.호수의 지표면부터 지하 7백50m까지 14개 저장층이 확인됐다.25년 이 지역이 소련 영토가 됐고 28년에 오하란 도시가 생겨났다. ○도시 전체가 흔적 없어 오하시의 인구는 3만4천5백여명.식료품공장 등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석유회사가 먹여살린다.발레리 아르초모프 오하 부시장은 『우리 세금수입은 거의 전적으로 석유회사의 영업성과에 달렸다』면서 소득은 높지만 운송비 때문에 물가가 비싸서 생활수준은 타지역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오하에서 수십㎞ 떨어진 네프테고르스크.한때 2천9백79명이 거주했던 석유도시였으나 지난해 5월 대지진과 함께 사라져버린 도시다.95년 10월9일자로 도시자체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주지사가 공표했다고 아르초모프 오하 부시장은 설명한다. 마을 뒤쪽으로는 공동묘지가 두 곳 있다.한곳에 6백∼7백명씩이 묻혀 있다.「나제즈다 마루카 시제르니코바 (44.4.15∼95.5.28) 블라디미르 마루카(71.5.24∼95.5.28)」 초라하게 꽂힌 나무묘비에 씌어진 내용이다.모녀가 지진으로 같은 날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부모와 두 딸 등 일가족 4명이 묻히거나 할머니 딸 손녀가 한꺼번에 변을 당한 경우 등 기구한 사연들도 많다.93년10월18일생 야나 루비네츠의 묘에는 강아지 인형이 놓여 있다.
  • 조계종 겁타스님 입북/총무원장 방북 등 논의

    신겁타 조계종 총무부장이 지난 16일 북경을 거쳐 입북,부처님 오신날(5월24일) 공동법요문 채택과 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의 방북 등을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19일 밝혀졌다. 조계종에 따르면 겁타스님은 북한 조선불교도연맹(위원장 박태호)의 초청과 통일원의 방북 승인을 받아 평양을 방문,박태호 위원장 등과 만나 남북한 불교계 현안을 논의한 뒤 오는 23일 입국한다는 것이다.
  • 「학원담당 검사제」 출범/서울지검/선도위원 2천5백명 위촉

    서울지검(최환검사장)은 8일 학원폭력을 추방하기 위해 우범 청소년들을 특별관리하는 「학교담당 검사제」의 출범식을 갖고 본격 활동에 나섰다. 출범식에 참석한 검사와 교사·학부모 자원봉사자 등 5백여명은 결의문을 통해 학원폭력을 뿌리뽑는데 앞장서,우범 및 비행 청소년의 선도에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검찰은 이날 서울시내 중·고등학교 교사와 학부모 자원봉사자 2천5백24명에게 선도위원 위촉장 및 신분증을 주었다.
  • 89년이후 5천59명이 북 주민 접촉/통일원 「95년도통일백서」

    ◎이산가족 접촉 7백39건 “최다” 8백22명/초기 미·일서 중개… 최근 중국이 중심 무대 지난 89년 남북교류협력지침이 마련된 이후 지금까지 북한사람과 접촉한 남한사람은 1천5백39건 5천59명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로써 지난 7년간 북한주민접촉신청을 낸 우리 국민 1만2천9백23명(5천2백30건) 가운데 약 29%만 실제로 북한주민과 만난 셈이 됐다. 이같은 사실은 19일 통일원이 발간한 「95년도 통일백서」에 의해 확인됐다.이 자료에 따르면 남북 주민접촉이 이뤄진 경우를 분야별로 보면 이산가족 교류가 7백39건 8백22명으로 가장 많았다.그 다음으로 경제분야 5백24건(1천1백19명),학술 93건(1천3백18명),종교 37건(3백45명),문화 25건(4백52명)순이었다. 특히 이산가족의 경우 90년 남북교류협력법에 관한 법률 제정등 정부의 법적·제도적 보장으로 2천2백84 가족이 북한주민 접촉승인을 받아 이중 32%인 7백39 가족이 직간접으로 재북 가족의 생사를 확인했다. 다만 이산가족 교류시 체제동요를 우려한 북한의 소극적 반응으로 2천7백19가족이 서신교환에 성공했으나 실제 상봉이 이뤄진 경우는 72건에 그쳤다. 생사확인이 성사된 7백39가구 이산가족들의 접촉방식으로는 해외동포를 통한 경우가 6백27가구(86%)로 가장 많았고,교류알선단체 이용(1백2가구·13%),국제행사참가(10가구·1%)등이 뒤를 이었다. 제3국을 통한 이산가족의 생사확인,서신교환,상봉의 중개지역도 초기에는 미국,일본이 대종을 이뤘으나 한·중간 관계개선 이후 중국을 통한 교류가 급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연말까지 중개지역별 성사현황은 중국이 4백건(54%)이었으며,미국(2백38건·33%),일본(48건·6%),캐나다(22건·3%),기타(31건·4%)순이었다. 통일백서를 펴낸 통일원 통일정책실의 한 관계자는 이와 관련,『앞으로 우리 동포가 많이 거주하고 남북간 인적왕래가 잦은 중국 단동,연변지역이 이산가족의 주요 중개지가 될 가능성이 많다』고 귀띔했다. 이들 지역에는 사설 이산가족 중개센터가 성업중인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 올 종교계 최대이슈 대종교 안호상 총전교 밀입북

    ◎불교­석굴암·대장경 세계문화유산 등록/개신교­광복50주년 기념 희년행사 풍성/카톨릭­6월 명동성당 공권력투입 꼽아 올해 종교계는 대종교 안호상 총전교의 불법입북과 광복 50주년을 맞는 종교계 희년 행사,곽선희 목사의 방북,김수환 추기경 방북의사 표명,송월주 조계종총무원장의 방북추진등으로 북한종교와의 교류바람이 불었다. 케이블 TV 시대에 각 종교계도 적극 참여,영상포교의 막을 올리고 명동성당과 조계사의 공권력 투입도 큰사회적 이슈가 됐다. 불교신문,복음신문,평화신문 등 불교,개신교,카톨릭의 3개 신문은 각 종단의 10대 뉴스를 다음과 같이 선정했다. ◇불교 ▲불국사와 석굴암,해인사 대장경 판고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현장에서 불자들의 자원봉사.▲불교텔레비전 첫전파를 발사.▲송월주 총무원장이 북한의 조선불교도연맹 박태호위원장과 5월24일 중국 북경에서 만나,송원장의 방북에 합의.▲조계종의 개혁운동 깨달음의 사회화운동 전개.▲국립공원 가야산내 골프장 건설계획 취소등 사찰환경권정립을 위한 교계의 노력.▲조계종 징계승려 33명에 대한 사면복권.▲한국통신노조원들의 조계사 단식농성.▲송광사 국사전에 있는 보물 1043 고려국사 16영정중 13점이 1월27일 도난.▲사회복지시설인 원주 소쩍새 마을을 운영하고 있는 가짜 승려 일력의 구속. ◇개신교 ▲대한기독교서회 사장 김소영목사가 지난 7월 사장직을 사퇴함에 따라 인선위원회를 구성,3차례나 사장 선출을 시도했으나 실패.▲기독교연합봉사단의 삼풍백화점참사 긴급 봉사활동.▲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등 개신교회단체들이 특별검사제 도입을 포함한 5·18특별법 제정을 위해 활동.▲광복 50주년 희년행사가 「한국교회평화통일추진협의회」와 「광복50주년기념 평화통일희년대회」등으로 나뉘어 진행돼 교계에 큰 실망을 안겨줌.▲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예장통합측이 「교회협 개혁을 위한 실무위원회」를 구성했으나 연합운동은 부진했다.▲기독교 텔레비전 12월1일 개국.▲한국교회 북한 쌀보내기운동.▲홍정길목사등 개신교 목사 4명의 방북계획무산.▲장기기증운동본부의활동.▲북경여성대회에서 남북한여성의 만남. ◇카톨릭 ▲6월6일 명동성당에 공권력 투입.▲평화방송 케이블TV 3월 개국.▲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발족.▲미사통상문을 확정하고 한국사목지침서를 새로 마련.▲대구카톨릭대와 효성여대가 대구효성카톨릭대학교로 통합.▲주교회의 가을 정기총회에서 7월 셋째주일을 농민주일로 제정.▲남북한 및 해외 천주교 신자들이 10월30일 미국에서 「조국통일을 위한 천주교인의 연대강화」를 주제로 공동세미나개최.▲평화방송 대구·광주에도 설립허가.▲중국교회 종회덕주교 9월 방한▲전국 카톨릭 교회 종합전산화 착수.
  • 시신 암매장 집중조사/「5·18」 현장수사

    ◎12개 마을 40명 소환 방침 【광주=최치봉·김태균 기자】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 광주현장조사팀과 광주지검 공안부(이귀남 부장검사)는 29일 5·18당시 민간인이 학살된 주남마을과 송암동,광주교도소 주변 등 세곳의 목격자와 피해자들을 참고인으로 소환해 계엄군의 발포상황,사체 암매장여부 등에 대해 조사했다. 검찰은 특히 당시 간호보조원 김순희(35·여)씨를 불러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사건의 정확한 사망자수와 피습시간 및 부상자 추가사살경위 등에 대한 진술을 들었다. 김씨는 검찰에서 『80년 5월23일 하오3시쯤 집중사격을 당한 미니버스에 올라가보니 유일한 생존자인 홍금숙(당시 17세·춘태여상1년)씨와 부상당한 남학생 2명만이 살아있었고 남학생 2명은 계엄군이 차에 싣고 화순쪽으로 갔다』고 말했다. 검찰은 앞으로 화순 너릿재터널 등 계엄군에 의해 양민학살이 자행된 광주·전남지역 12개 마을의 목격자및 피해자 40명을 참고인으로 불러 조사할 방침이다. ◎5·18때 주남마을서 사체 21구 수습 주장/40대 시민 【광주=최치봉 기자】 80년 5·18 당시 양민이 학살당한 주남마을에서 민간인 사체 21구를 수습했다는 주장이 나왔다.이는 주남마을에서 10여명이 사망했다고 밝힌 지난 7월의 검찰 발표보다 훨씬 많은 사망자이다. 당시 앰뷸런스로 시민군 부상자와 사망자를 수송했다는 박대성(42·광주시 북구 문흥동 한신아파트 101동 1301호)씨는 29일 『미니버스 총격사건 다음 날인 80년 5월24일 하오 군의 요청으로 주남마을 도로변과 야산에서 시신 21구를 수습해 도청으로 운반했다』고 말했다.또 『당시 안내하던 사병으로부터 암매장한 시신이 더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 1995년에 사라진 별들

    ▷국내◁ ◎전 국무총리 진의종씨 해방후 상공부차관과 한전부사장을 거쳐 8대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으로 당선돼 정계에 입문.10대 선거에 낙선한뒤 10·26 이후 보사부장관으로 입각.11·12대 민정당의원으로 당선된뒤 대표위원과 국무총리를 지냈다. ◎의학박사 장기려씨 지난 25일 서울 백병원에서 86세를 일기로 별세한 「한국의 슈바이처」.서울대·가톨릭대 의과대학교수를 역임했으며 68년 영세민을 위한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인 부산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했고 79년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수상했다. ◎민법학자 안이준씨 지난 3월19일 서울 중앙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 향년 65세.안교수는 서울 법대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뒤 경희대교수로 재직했으며 민사법학회장을 지냈다.주요 저서로는 민법총칙,채권법 등이 있다. ◎법조인 김성일씨 법관의 정도로 일컬어졌으며 10월31일 상오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60세의 나이로 순직.그는 서울법대를 졸업한 후 천안지원 판사를 거쳐 대법원 재판연구관,제주지법원장을 역임했다.간결한 판결문 정착에 애썼다. ◎전 대법관 김갑수씨 강직한 대법관의 대명사로 꼽혀온 변호사.1월26일 하오 서울 삼성의료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향년 82세.김변호사는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나와 평양법원판사를 거쳐 법무·내무차관을 역임했고 지난 60년 대법원장 직무대리 시절 군사정권에 맞서다 법복을 벗었다. ◎충남방적 이종성 회장 지난 70년 부실기업인 국안방적을 인수한지 10년도 안돼 오늘날의 충남방적으로 키웠다.81년에는 국민당에 입당,11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국민당의 부총재·전당대회의장 등을 거쳤다.공직자·기업인·정치인으로 거듭된 변신을 하면서도 성공을 거뒀다. ◎명창 김소희여사 우리 시대의 소리꾼.지난 4월17일 78세로 별세.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기능보유자로 우리 국악의 양갈래를 이루는 「동편제」소리의 대명사로 불리는 「국창」.그의 소리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독보적인 존재로 제1회 한국국악대상,대한미국 문화예술상등을 수상했다. ◎추상조각가 문신씨 지난 5월24일 73세를 일기로 타계한 추상조각의 거장. 국내보다 세계화단에서 더 명성을 떨친 추상조각가로 90∼92년 미술의 본고장 유럽을 순회하며 가진 회고전에서 호평을 받았고 91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문학기사 훈장을 받았다. ◎작곡가 윤이상씨 세계적인 음악가이면서도 끝내 이역땅에서 유명을 달리 한 비운의 예술가.지난 11월4일 78세를 일기로 독일땅에서 서거한 그는 「현대음악의 5대 거장」으로 꼽힐 만큼 큰 족적을 남겼다.67년 동백림사건으로 「이데올로기의 멍에」를 쓰고 71년 독일에 귀화했었다. ◎작곡가 길옥윤씨 지난 3월 17일 68세로 별세한 우리 가요계의 대표적인 작곡가. 대표작으로는 「서울의 찬가」 「이별」 「빛과 그림자」 「4월이 가면」. 가요생활 50년을 통해 작사·작곡·편곡한 노래가 3천여곡이 넘는다. 서울 세종로공원에 「서울의 찬가」 노래비가 건립됐다. ◎소설가 김동리씨 지난 6월 17일 82세로 별세한 한국의 대표적인 소설가.60여년 작품활동을 통해 「무녀도」「황토기」「사반의 십자가」「을화」등 1백여편의 장·단편소설을 남긴 현대문학의 증인.서라벌예대 교수,한국문인협회장을 역임했다. ◎레슬링선수 송성일씨 위암으로 1월29일 타계한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1백㎏급 국가대표선수. 자신의 몸에 암세포가 번지는 것도 모른 채 위암으로 투병중인 어머니를 걱정하며 혼신의 투혼을 발휘,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냈다. ◎배구선수 김병선씨 대학졸업을 불과 4일 앞둔 2월21일 심장마비로 숨진 남자배구의 큰 별. 2m의 장신으로 성균관대학 1년 때부터 부동의 국가대표 센터로 활약하며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는데 주역을 담당했다. ◎경제학자 고승제씨 함남 출신으로 학술원회원을 지낸 원로 경제학자.일본 릿교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뒤 서울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서울대·고려대·연세대 교수와 미국 컬럼비아대학과 시카고대학에서 연구교수를 지냈으며 한국경제학회 회장도 역임했다. ◎대림창업주 이재준씨 지난 39년 대림그룹의 모태인 부림상회를 세워 목재업과 건자재업에 진출한뒤 한평생 건설 외길을 걸어왔다.한국전쟁후 복구특수를 활용해 기반을 다졌고60년대 중반부터 해외건설사업에 주도적으로 나섰다.지난 88년 장남인 이준용 대림그룹회장에게 그룹 경영권을 넘겼다. ▷국외◁ ◎반전기수 풀브라이트 풀브라이트 장학재단의 설립자이자 베트남전 당시 「권력의 오만」을 출간,반전운동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던 인물.지난 2월10일 워싱턴 자택에서 90세로 타계했다.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을 맹비난,미군의 베트남철수에 기여했다. ◎전 일 총리 후쿠다 지난 7월5일 노환으로 별세했다.그는 대장상과 외상 및 자민당 간사장을 역임한 뒤 76년 미키 다케오 전총리에 이어 67대 총리로 취임,중국과 평화우호조약을 체결하고 도쿄국제공항 개항등 현안을 처리했다.그는 86년 중의원 14선을 역임한뒤 90년 정계에서 은퇴했었다. ◎미 언론인 레스턴 미국 언론인들의 최고상인 퓰리처상을 두번이나 수상하는등 20세기를 대표하는 미국 언론인중의 한 사람.지난 12월6일 워싱턴DC의 자택에서 암으로 숨졌다.그는 뉴욕타임스에서 미국인들의 심금을 울리는 「제임스 레스턴 칼럼」을 연재,필명을 떨쳤다. ◎중 실용주의거두 진운 중국의 최고실력자 등소평과 함께 모택동사후 중국정치를 요리해온 인물.지난 4월10일 노환으로 90세에 사망했다.모택동으로부터 「당내 제일의 경제통」이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50년대부터 실용주의 경제노선을 지향,모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중동평화 상징 라빈 지난 11월4일 텔아비브에서 중동평화협상 지지집회에 참석중 극우파학생의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그는 군생활 28년을 거치는 동안 아랍세계와의 6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이었으며 팔레스타인과의 공존을 모색한 평화노력으로 9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케네디 모친 로즈 1월 1백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그녀는 19 14년 조지프 페트릭과 결혼,케네디가와 인연을 맺은후 대사의 아내로서,대통령과 두 상원의원의 어머니로서 최상의 영광을 누렸으나 9명의 자녀중 두명의 아들이 총탄에 목숨을 잃는 암살의 비극을 겪기도 했다. ◎전 영국총리 윌슨 60년대와 70년대초 영국 노동당의 전성시대를 이끌었으며 79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했다.그는 29세때 하원에 진출한뒤 2년후 무역장관으로 취임해 최연소 입각기록을 세웠다.64년 총선에서 승리한뒤 총리 재임기간동안 줄곧 미국의 베트남 파병요청을 거부하고 반전무드를 조성해 영국노동당 시대를 주도했다. ◎전 일 부총리 와타나베 지난 9월 72세를 일기로 사망한 그는 『한일합방은 원만하게 체결됐으며 36년간 통치했지만 식민지 지배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는 망언을 남긴인물.63년 고향에서 중의원에 당선된이래 대장상·당정조회장등 요직을 거쳤고 대북한 쌀지원 협상에서는 막후조정을 벌였다. ◎영국시인 스펜더 20세기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시인이자 지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지난 7월 86세로 타계했다.그는 20세기 영국의 인도주의적 사상을 대표한 강력한 자유주의적 운동을 펼쳤으며 30년대 비평가들로부터 이 시대의 가장 저명한 3인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유고의 양심 질라스 공산주의의 모순을 비판한 저서 「새로운 계급」으로 유명한 티토치하 유고의 대표적 반체제인사.83세를 일기로 4월20일 심장병으로 사망.부통령에 올라한때 티토의 후계자로 지목되기까지 했으나 공산체제에 염증을 느껴 반체제 이론가로 변신했다. ◎백신개발 선구자 소크 1955년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해 인류를 불구의 공포로부터 해방시킨 의료계의 선구자.80세를 일기로 지난 6월23일 사망했다.뉴욕대학 의학부를 졸업,면역학및 세균학을 연구했으며 「소크백신」개발 후에는 샌디에이고 소크연구소에서 다발성 경화증과 암연구에 몰두했다.
  • “공수부대 질책하지 말라/전 보안사령관 편지 보내”

    ◎「광주」 진압지휘 소준열씨 밝혀 【광주=최치봉 기자】 5·18 당시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 사령관으로 전남도청 진압작전 등을 지휘한 소준열(64)씨는 『80년5월23일 사령관 부임직후 「공수부대의 사기를 죽이지 말라」라는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친서를 받았다』고 밝혔다. 소씨는 9일자 「전남일보」와 인터뷰에서 『부임직후 사태악화의 책임을 물어 「너희 때문에 시민의 눈이 뒤집혔다」며 공수부대 지휘책임자인 최웅·최세창 여단장을 질책하고 공수부대를 광주비행장으로 철수시켰다』고 털어놨다. 그러자 5월24일 전씨가 정호용 특전사령관을 통해 16절지 크기 한면에 친필로 「공수부대원의 사기를 죽이지 말라,지나친 질책은 곤란하다」는 내용의 친서를 보내왔다는 것이다.그러나 친서는 보관하고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소씨는 또 80년5월25일 광주를 방문한 최규하 당시 대통령이 『군이(진압)작전을 해서는 안된다.희생자가 많으면 국제적인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강경진압에 반대했다고 증언했다. ◎전씨측 “사실 아니다” 전두환 전대통령의 법률고문인 이양우 변호사는 10일 5·18당시 전씨가 「공수부대원의 사기를 죽이지 말라」는 내용의 친필서한을 보냈다는 소준열 전광주전투병과 교육사령관의 주장에 대해 『그런 서한을 보낸 사실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해명했다.
  • 수능 가중치 올 대입 결정적 변수로

    ◎서울대 등 16개대 최고 2백50% 적용/5∼6점 차이가 13∼16점으로 벌어져 96학년도 대학 수학능력 시험에서 상위권 수험생들의 점수가 크게 하락,변별력이 낮아짐에 따라 올 대학입시는 수능 총점보다는 영역별 가중치 적용여부가 당락의 결정적 변수로 떠오를 전망이다. 올 입시에서 가중치를 적용하는 대학은 서울대·고려대·포항공대(특차)등 총 16개 대학이며 반영비율은 20∼2백50%까지 다양하다. 따라서 수험생들은 해당 대학및 학과의 전형방법을 면밀히 파악하는 게 절대 필요하다. 28일 입시전문기관인 중앙교육진흥연구소가 전국 44개교 고3년생 1만3천5백99명의 가채점을 토대로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60점 만점인 수리탐구Ⅱ를 1백60점으로 환산,총 1백67%의 가중치를 부여하는 서울대는 인문·자연계 모두 수능 총점 1백50∼1백70점대를 기준으로 했을때 가중치를 부여하기 전에는 점수차가 5∼6점에 불과하나 가중치 적용후에는 무려 13.4∼16점까지 벌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수리탐구Ⅱ 영역의 1점당 1.67점의 가산점을 더 받는 것이다.예를 들어 수능 총점 1백60점대를 받은 학생들중 수리탐구Ⅱ 영역의 최고점으로 추정되는 47점은 47+78.5=125.5점으로 환산되고 최저점으로 추정되는 42점은 42+70.1=112.1점으로 환산돼 결과적으로 13.4점까지 벌어지게 된다.그냥 앉아서 8.4점을 손해본다는 분석이다.이런 계산법에 따르면 수능총점이 1백50점대면 최고 10점까지도 손해볼 수 있다. 또 수리탐구Ⅱ와 외국어 영역에 각각 1백33%와 50%의 가중치를 적용하는 고려대는 인문계의 경우 1백40∼1백55점대가 지원했을때 점수차가 가중치 부여전 6∼9점에서 가중치 적용후에는 12.3∼18.5점으로,자연계의 경우 1백35∼1백55점대는 7.5∼12점에서 15.5∼24.6점으로 커질 것으로 분석된다. 수리탐구 Ⅰ·Ⅱ 모두 2백%의 가중치를 적용,각각 1백20점과 1백80점으로 환산하는 포항공대 특차의 경우는 1백60∼1백70점대를 기준으로 했을때 가중치 부여전 9점에서 가중치 적용후 27점으로 무려 18점이나 격차가 벌어진다. 덧붙여 지난해보다 반영비율이 높아진 내신성적도 당락의 주요 변수에서 빼놓을 수 없다.내신40%와 수능60%로 전형하는 대학의 경우 내신 1등급 차이에 해당하는 내신성적의 차이를 수능점수로 환산하면 1.67점이 되고 내신50% 수능50%로 전형하는 대학은 2.5점차까지나 된다.
  • 조각계 거목 문신 예술세계 재조명/서울 「예화랑」

    ◎내일부터 「문신 유작전」 개최/브론즈작품 등 20여점 사후 첫 전시/균형·질서의 독창적 조각품 “명성” 올해 5월24일 72세의 일기로 세상을 등진 조각계의 거목,문신선생의 대표작들을 만날 수 있다. 29일부터 12월12일까지 서울 강남구 신사동 예화랑(542­5543)에서 열리는 「문신유작전」에는 그의 예술세계를 살필 수 있는 20여점의 브론즈와 스테인리스 스틸작품이 망라된다. 50여년에 걸친 작품활동으로 국내를 넘어서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했으며 우리 조각사에는 큰 족적을 남긴 작가.그의 사후 첫 전시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문신의 작품은 결코 어느 누구의 것도 닮지 않은 유일한 것이다.흑단·브론즈 혹은 금속이나 웅장한 대작,사람 키 크기의 작품,혹은 간단한 크기의 사물이라 할지라도 그의 작품은 자연의 가장 총체적인 하나의 법칙에 순종하고 있다.그것은 바로 균형이다』 외국의 한 평문에서처럼 그의 작품은 균형과 질서를 따라 전개되는 독창적 추상작업에서 탄생돼왔다.직선과 곡선이 교차하는 역동적 변화를 이루기도 하고 풍성한 양감으로 변주되기도 하는데 끄트머리에 이르면 좌우균제가 미묘하게 깨지는 자연스러움에 의해 완성된다. 파리 유학시절 회화에서 조각으로 전환한 그는 80년 고향 마산에 돌아와 정착했다.88년 올림픽때 올림픽조각공원에 「올림픽의 조화」를 제작,세계적인 작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으며 92년에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프랑스정부가 수여하는 프랑스 예술문화영주상을 수상했다.90년대에 들어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프랑스를 비롯,헝가리와 유고슬라비아에서 초대전을 가져 세계적인 작가로 입지를 다졌다. 92년에는 세종문화상을 수상했으며 고향사랑하는 마음으로 94년5월 마산시 합포구 추산동에 지방의 예술명소가 될 문신미술관을 완공,그의 생전의 숨결을 담아두었다.
  • 「5·18」 「12·12」 수사 경과와 전망

    ◎「공소권 없음」에 불씨 내연/전·노씨 등 58명 이미 피소/헌재 위헌 결정땐 재수사 정부 여당이 25일 5·18특별법을 제정키로 함에 따라 5·18사건에 대한 재조명이 불가피해졌다.또 5·18의 사전 정지 작업이랄 수 있는 12·12에 대한 「공소권 없음」 결정도 뒤집어질 가능성이 크다. 5·18에 대한 수사는 94년 5월 정동년 「광주민주민중항쟁연합 상임의장」 등 6백16명이 지난해 5월13일 전두환·노태우 전대통령 등 35명을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고발하면서 시작됐다.5·18에 대한 고소·고발은 그 이후에도 잇달아 지난 4월3일까지 모두 70건에 58명이 고소·고발됐다. 검찰은 정동년씨의 고발이 있자 곧바로 서울지검 장륜석공안1부장을 팀장으로 하는 수사팀을 구성,관련 자료를 검토한 끝에 지난해 7월13일 피고소·고발인 가운데 현역군인 11명은 국방부에서 조사하도록 의뢰했다. 고소·고발인인 정씨 등 4명이 검찰의 첫 조사를 받은 것은 6개월여만인 11월23일.검찰은 이후 12월13일 소준렬 전 전교사사령관 등 피고소인에 대한 조사에 착수,지난 7월4일까지 피고소·고발인,참고인 등 모두 2백69명에 대한 조사를 마쳤다.이 가운데 전·노전대통령과 최규하 전대통령에 대해서는 서면 조사로 대신했다. 검찰은 이어 본격적인 법률검토에 착수,지난 7월18일 『5·18 등 일련의 행위는 헌법 질서를 바꾸는 고도의 정치행위로서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 공소권이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피고소·고발인들이 서울고검과 국방부에 즉각 항고한데 이어 대검에 재항고했으나 불기소 결정이 뒤집어지지 않자 헌법소원까지 제기,현재는 이 사건은 헌법재판소에 계류돼 있다. 또한 대한변협 등 재야 법조계,학계 등 대학교수,시민 등도 검찰의 불기소 결정이 내려지자 곧바로 5·18 관련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연대서명 운동을 펼치는 등 계속해서 불씨가 내연해왔다. 12·12 문제는 지난 1월20일 헌법재판소에 의해 1차 결론이 나 있는 상태다.헌재는 당시 내란죄는 94년 12월11일로 공소시효가 지났지만 군형법상 반란죄는 대통령 재임기간동안에는 공소시효가 정지된다는 결정을 내렸다.헌법 제84조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아니한다」는 규정을 원용한 것이었다.즉 내란죄의 성립 여부에 상관 없이 내란죄 자체가 대통령 재임기간동안에도 공소시효가 정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하지만 반란죄는 전두환전대통령에게 재임기간인 7년5개월24일,노태우전대통령에게는 5년동안 추가로 적용된다는 것이 헌재의 최종결론이었다.한마디로 12·12와 관련,전·노 두 전직대통령을 반란죄로는 충분히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이다.헌재는 그러나 검찰이 12·12 관련자들에 대해 기소유예 조치를 내린데 대해 『헌법재판소가 관여할 정도로 자의적인 결정이라고 볼 수 없다』고 정승화전육군참모총장 등 12·12 피해자들의 청구를 기각했다. 12·12 건은 정전총장 등 22명이 지난 93년 7월 전·노 전대통령 등 38명을 군형법상 반란 등 혐의로 검찰에 고소하면서 재차 법적 절차를 밟게 됐으나 검찰은 지난해 11월2일 피고소인 전원을 기소유예조치했다. 문민정부가 출범한뒤 김영삼대통령은 12·12에 대해「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했다.5·18에 대해서는 「문민정부는 광주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면서 5·18의 반역사적,반민주적 성격을 적극 부각시켰다.다만 이에 대한 최종결론은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는 것이 대체적인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제 시대의 흐름은 12·12와 5·18에 대한 분명한 진상규명과 관계자들에 대한 법적 제재쪽으로 기울고 있다.「역사적 판단」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5·18 관련일지 ▲80년 5·18 신군부 등장 및 비상계엄 확대에 분노한 광주시민들,민주화 항쟁 시작. ▲5·27 신군부 무력으로 광주시민 진압,국무회의 국보위 설치 의결. ▲8·16 최규하 대통령 하야 발표. ▲8·18 전두환 보안사령관 집권. ▲87년 12·29 민정당 광주사태치유 특별법제정 방침발표,민화위 출범. ▲88년 4·1 정부 광주사태 유감표명. ▲91년 5·11 광주사태 보상지급 완료. ▲93년 5·13 김영삼 대통령 광주문제관련 담화. ▲94년 5·13 정동년씨 등 전·노전대통령및 군지휘관 35명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 혐의로 고소·고발. ▲11·23 서울지검 수사착수. ▲95년 4·29 전·노전대통령에 질의서,최전대통령 방문조사 결정. ▲7·18 검찰 수사결과 발표(불기소처분). ▲7·24 5·18고소인 3백22명 검찰의 불기소처분에 대한 헌법소원 제출. ▲10·26 서울지검 5·18관련자 국회위증고발 「공소권없음」 결정.
  • 재소환 28시간만에 구속영장 발부/구씨 구속­영장 발부까지

    ◎수사기록 소설책 10권 분량 2천여쪽/연희동 주민 “측은하지만 구속은 당연 노태우 전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돼 집행된 16일 검찰청사는 하루종일 긴장감에 휩싸였다. 검찰이 구속영장 작성작업에 들어간 것이 이날 새벽 1시30분.구속영장을 청구한 시간은 하오 1시25분.법원에서 영장을 발부한 시간은 하오 6시51분.노전대통령이 서울구치소로 출발한 때가 하오 7시30분.영장 초안작성에서 집행에 이르기까지 18시간이 걸렸다. ▷영장청구◁ 이날 상오 1시30분쯤 노태우 전대통령에 대한 조사를 마무리지은 대검 중수부는 이정수 수사기획관과 주임검사인 문영호 중수 2과장,김진태 검찰연구관 등이 주축이 돼 밤을 새워가며 구속영장 초안을 작성,상오 9시쯤 안강민 중수부장을 거쳐 김기수 검찰총장에게 최종보고했다. 노씨에 대한 수사기록은 소설책 10여권에 해당하는 2천여쪽의 방대한 분량으로 노씨의 인적사항과 범죄사실,3백쪽의 피의자신문조서 등을 비롯,노씨의 범죄사실을 입증하는 기타 소명자료가 포함됐다.소명자료는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등 30여명의 재벌회장들과 이현우 전청와대 경호실장과 이태진 전경호실 경리과장등의 진술조서 및 계좌추적 결과등에 대한 기록이다. 이어 주임검사인 문과장은 영장원본에 서명한 뒤 내부결재절차에 따라 상오 11시45분쯤 푸른색 보자기에 싼 수사기록을 서울지검 이종찬3차장 검사실로 갔다.대검은 대응기관인 대법원이 구속영장을 접수하지 않기 때문에 절차상 서울지법의 대응기관인 서울지검을 통해 영장을 접수해야 하기 때문이다.검찰은 영장청구사실을 일체 비밀에 붙였다. 이차장검사는 20여분동안 기록을 꼼꼼히 검토한뒤 사건번호를 부여하는 서울지검 사건과에 범죄인지서를 보내고 낮 12시10분쯤 문과장과 함께 최종결재권자인 최환 서울지검장실로 갔다. 최검사장은 1시간여동안 문과장의 보고와 함께 기록을 검토한 뒤 하오1시10분쯤 결재,영장청구를 위한 절차를 끝냈다. 대검수사관은 하오1시25분 서울지법 가동2층 영장계에 수사기록과 영장을 전달했다.영장계 직원은 5분여만에 접수절차를 끝내고 이날 영장당직판사인 형사항소 6부 김정호판사에게 수사기록을 넘겼다. ▷영장발부◁ ○…노씨에 대한 구속영장은 청구된 지 5시간24분만인 하오 6시51분 발부됐다.이로써 노씨는 전날 하오 2시50분 대검찰청으로 재소환된지 28시간만에 구속영장이 떨어진 셈이다. 김정호 판사가 영장발부 직후 구속영장과 사건기록을 인계하기 위해 서울지방법원 영장계 오형식 주임(36)을 호출하자 3명의 대검 수사관은 영장계에서 대기하다 오주임을 뒤따라 황급히 김판사 방으로 직행. 수사관들은 오주임으로부터 자주색 보자기에 싼 1천쪽 분량의 사건기록 뭉치를 넘겨받은 뒤 영장계의 구속영장 원부에 서명하고 현관앞에 대기중이던 검은색 르망승용차 편으로 1분여만에 대검청사로 복귀. 문영호 중수 2과장은 11층 특별조사실에 있는 노씨에게 가 영장요지를 알려준 뒤 안강민 중수부장 사무실에 들러 잠시 대화를 나누고 곧 바로 영장집행에 착수. ○…노씨의 구속 집행을 보기 위해 대검청사 현관 로비에 나온 김유후 변호사(전청와대 사정수석)는 노씨가 현관에 내려오기 직전 기자들을 만나자 참담한 표정을지으며 자리를 애써 피하려는 모습. 김변호사는 「조사실에 들어가 보았느냐」는 질문에 대해 힘차게 고개를 저은 뒤 『아직 누구도 변호인 선임계를 내지 않았다』고 대답. 그는 「심정이 어떠냐」는 질문에 대해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다』며 『곁에서 잘 보필하지 못해…』라고 말꼬리를 흐리며 기자들을 회피. ▷연희동◁ 헌정사상 최초로 전직 대통령 구속을 지켜본 연희동 주민들은 『인간적으로는 안됐지만 구속은 당연하다』고 입을 모았다. 통장 양종환씨(50)는 『노씨의 집이 주변 집들에 비해 비교적 작고 초라해 깨끗한 정치를 했다고 믿었는데 이번 일로 더 큰 배신감을 느꼈다』면서 『전직 대통령이 교도소로 가는 것은 안된 일이지만 5천억원이라는 엄청난 돈을 부정하게 모은 죄값은 반드시 치러야 한다』고 말했다. ▷노씨 생가◁ 노씨의 생가가 있는 대구시 동구 신룡동 용진마을 67세대 2백50여 주민들은 16일 하오 노씨의 구속수감 소식이 전해지자 『당연한 결과』라면서도 착잡한 표정들. 인척간인 노병작씨(48)는 『개인적으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구속은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느냐』면서 『앞으로 다시는 전직대통령이 비리로 구속되는 불행은 사라져야 할것』이라고 말했다.
  • “제조업체 상반기 알찬 성장”/한은 기업경영 분석

    ◎매출 23%증가­수익률 4%… 7년만에 최고/건설·도산매업은 수익성·부채 비율 나빠져 올 상반기(1∼6월)에 제조업체는 성장과 수익·안정 등 모든 면에서 알찬 성장을 했다.그러나 건설·도산매업 등 비제조업체의 경우 매출은 크게 는 데 비해 수익과 안정성은 나빠져 실속이 없었다. 한국은행이 15일 2천1백30개사를 조사해 발표한 「95년 상반기 기업경영 분석」에 따르면 제조업체의 매출액은 작년 동기보다 22.8%나 늘어 89년 이후 최고의 증가율을 기록했다.전년의 증가율은 15.8%였다. 제조업체의 매출액 경상이익률도 4.2%로 역시 88년 이후 최고치다.매출액 경상이익률은 매출액에서 경상 영업이익이 차지하는 비중으로 기업활동의 수익성을 나타내는 지표다.매출액 경상이익률이 4.2%라는 얘기는 기업이 1천원어치의 상품을 팔아 42원의 이익을 남겼다는 뜻이다. 올 상반기에 제조업체들이 양(매출액 증가율)과 질(매출액 경상이익률) 모두에서 좋아진 것은 선진국의 경기회복 등에 힘입어 수출 증가세가 확대되고 설비투자와 민간소비도 크게 늘었기때문이다.매출액에서 금융비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5.5%로 작년 동기의 5.9%보다 낮아지고,외환차익 발생으로 영업외수지가 개선된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제조업체들은 작년에는 1천원어치의 상품을 팔아 27원의 이익을 보고 59원의 이자를 부담했지만 올해에는 이익은 42원,금융부담은 55원으로 돼 그만큼 개선됐다. 종업원 1명당 부가가치 증가율은 내수 증가와 수출 호조로 매출이 늘어나고 수익성도 나아짐에 따라 21.9%로 작년 동기의 17.6%보다 높아졌다.기업의 안정성을 나타내는 자기자본비율도 주식발행 확대와 수익성 향상에 따른 내부유보 증가로 작년 말의 24.8%에서 지난 6월 말에는 25.6%로 높아졌다.부채비율도 작년의 3백2.5%에서 2백90.1%로 떨어져 재무구조도 보다 견실해졌다. 전반적인 제조업체의 호황속에서도 중소기업과 경공업의 부진은 여전했다.대기업과 중화학공업의 매출액 경상이익률은 각각 5%와 5.2%인 반면 중소기업과 경공업의 증가율인 2.1%와 1.5%에 불과한 게 하나의 예이다. 제조업체의 호황과는 달리 비제조업인 건설업과 도산매업의 매출액 경상이익률은 각각 1.4%와 0.6%로 각각 작년 동기의 2%와 0.8%에 미치지 못하는 등 수익성이 악화됐다.건설업은 업계의 수주경쟁이 심화된데다 부동산 경기 침체로 미분양 주택이 늘어,도산매업은 금융비용과 카드매출 수수료의 부담으로 각각 수익성이 나빠졌다. 건설업과 도산매업의 부채비율도 지난 6월 말 현재 각각 4백41%와 5백29.2%로,작년동기의 3백75.2%와 5백24.4%보다 더 높아졌다.건설업과 도산매업의 매출액 증가율은 각각 19.8%와 26.4%로 각각 전년동기의 13%와 16.6%보다는 높아졌다.매출액에서 금융비용이 차지하는 비중도 6.4%와 2.4%로 각각 작년 동기의 6.2%와 2.1%보다 높아졌다.
  • 피납북자들의 비극(새로 쓰는 한국 현대사:42)

    ◎총 8만여명… 김규식·안재홍 등 각계 명사 다수/귀향길 막혀 고난의 세월… 대부분 비참한 최후 유엔군과 공산군이 한국전쟁을 마무리짓기 위해 협상을 벌이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소외됐던 무리가 있다.그들은 바로 납북인사들이다.전쟁의 와중에 북으로 끌려가 휴전후에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이들이야말로 영원한 에트랑제였다.그래서 더욱더 관심과 동정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서울서만 2만여명 한국전쟁 기간중 북한군에 납치당한 사람들은 서울 2만7백38명을 비롯해 전국에 걸쳐 8만4천5백32명이나 됐다.이 납북자들은 대부분 북에서의 삶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남과 북으로부터 모두 소외된채 베일에 싸인 이들이 만난 비극적인 운명은 전쟁 발발 3일째인 1950년 6월28일로 거슬러 올라간다.한강철교 폭파로 미처 피란을 못했던 요인들이 북한 노동당 군사위원회 결정에 따라 우선 포섭대상에 들어갔다. 이 계획은 7월4일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등이 참석한 연석회의에서 최종 결정됐다.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후 피란하지 못한서울과 점령지역의 주요 정치·종교·경제·문화인 등 각계 인사를 찾아내 포섭하려는 것이었다.군사위원회는 이 결정에 따라 남한의 저명인사를 친·반공의 정도에 따라 5개 부류로 분류했다. 북한은 7월4일부터 김응기 이주상 방학세 김창주 김춘삼 등 실무 집행자들로 하여금 이를 추진시켰다.이에따라 서울시 인민위원회(서울시청)와 성남호텔(서울 광교부근)에 납북 대상자 심사장이 설치됐다.국회의원과 정당·사회단체의 저명인사,임정요인에 대한 심사를 거쳐 이들을 북으로 연행해가기 시작했다.이들 중에는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김붕준 류동열 최동오 윤기섭 오하영 원세훈 엄항섭 등 임정요인이 들어있었다.안재홍 박열 백관수 정인보 이광수 최규동 방응모 등 전현직 국회의원과 정당 사회단체,문단 인사들이 포함됐다.납북 인사들은 대부분 평양을 거쳐 만포로 들어갔다.도중에 정인보와 이광수,최규동,방응모,김붕준,류동열이 미공군의 폭격과 지병으로 숨졌다. 해방정국에서 미국이 장래의 한국 지도자로 꼽았던 김규식은 만포에서 16㎞ 정도가 떨어진 별오동이라는 마을에서 1950년 12월10일 세상을 떠났다.납북인사들과 당시 함께 생활했던 북한 조국통일민주전선 부국장 신경완의 증언에 따르면 김규식의 최후는 너무 비참했다.별오동에는 유엔군에게 쫓겨온 북한의 주요기관이 모두 있었는데,김규식은 지병인 해소와 노환으로 생명이 경각을 다투었다. 그러나 서울을 떠날 때 지니고 간 약이 모두 거덜났다.당시 상황으로 약을 구할 수 없어 해소에 좋다는 토끼똥까지 달여 먹였다는 것이다.주변의 강력한 요구로 별오동에서 8㎞를 더 들어간 군병원에 입원했으나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었다.홍명희를 만나 중국에라도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그리고 결국 숨을 거두었다.그날 압록강변에는 많은 눈이 내렸다고 한다. 그의 장례식에는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의 꽃다발이 개인 이름으로 도착했다.추도사를 맡은 조소앙은 날씨가 하도 추워 말을 이어나가지 못할 정도였다.김규식의 시신은 상여에도 오르지 못하고 군 트럭에 실려 장지에 갔다.땅이 얼어붙어 내려놓은 관을 땅에 제대로 묻지못하고 가장을 하다시피 장례절차를 마쳤다.김규식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그렇게 한만국경에서 막을 내렸다. ○독자 휴전운동 불발 납북자들의 일관된 관심사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철저하게 정보가 차단됐던 납북자들은 전쟁이 끝나 남한으로 하루빨리 돌아가는 것을 학수고대하면서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1951년부터 시작된 휴전회담은 이들의 환향의지를 더욱 부채질한 것은 물론이다. 1951년 6월23일 소련의 말리크 유엔대사가 휴전과 관련한 토의를 제의한후 시작된 휴전회담은 납북인사들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납북자 대표들은 휴전회담이 답보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독자적인 휴전운동에 나설 것을 결의한 적도 있다.북한측 연락장교들의 인솔로 안재홍 조소앙 김약수 원세훈 윤기섭은 51년 1월25일 판문점까지 오기도 했다.그러나 북한의 조종을 받은 이들은 유엔군측 연락장교 키니대령을 만나는 선에서 활동을 끝냈다. 1953년 7월27일 휴전이 됐지만 납북자들은 여전히 환향의 길이 막힌채 감금에 가까운 상태로 북에서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휴전협정 체결 90일만인 19 53년 10월26일 판문점에서 정치회의 예비회담이 열렸으나 회의 초반부터 미국측과 북측이 회담방법 등 정치문제를 놓고 팽팽히 맞섰다.그러나 미·영·소·불 등 4개국이 1954년 4월부터 제네바에서 정치회의를 열어 한반도 문제를 토론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납북자들은 조소앙이 주창한 「중립화 통일론」을 제네바회의에 직접 전달할 수 있도록 주선해줄 것을 북한당국에 건의했다.북한은 납북자들의 의도가 자신들의 통치속셈에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표면적으로 이를 거부하지는 못했다.54년 4월 중순 엄항섭과 권태양 등 납북자 대표는 제네바로 들어가기 위한 입국사증을 받기 위해 소련 외무성의 안내를 받아 모스크바로 떠났다.그러나 소련주재 북한대사는 결국 이들을 제네바 국제회의에 보내지 않았다.스위스 정부가 입국사증을 발급해주지 않는다는 핑계로 이들을 되돌려보냈다.처음부터 북한당국이 납북자들을 제네바 회담에 참가시킬 의도가 추호도 없었다는 사실을 입증시킨 것이다. ○제네바회담 참가 무산 1955년부터 김일성은 평화통일과 평화이미지 선전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이를 계기로 북한은 납북인사들에게 자신이 내세운 평화통일 방안에 서명할 것을 강요하기 시작하는 등 이들의 정치적 이용을 서둘렀다.그래서 1955년 11월13일 납북요인들의 첫 공동성명으로 알려진 11·13성명을 발표하는데 납북자들이 실제 이용됐다.이 성명에는 납북인사들의 주장은 철저히 배제된채 전쟁 직전까지 북한이 내세운 정치적 허구라 할 수 있는 선전문구만 나열되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납북자들은 이후 북한에서의 독립적인 정치활동 보장을 위한 조직체 구성을 시도했다.1956년 7월2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재북 평화통일 촉진협의회」 결성대회가 그것이다.각지에서 모인 납북 및 월북 인사 4백여명 등 7백여명이 참석한 이날 대회는 조소앙 안재홍 오하영을 최고위원으로 선출하고 합법적 통일정부 구성과 국제적 중립화 선언,남북의 자유로운 내왕 등을 내용으로 하는 7개항의 행동강령을 채택했다. 그러나 이협의회에는 북한의 노동당 등 친공세력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또 분열이 이미 고질화돼 있었던 만큼 납북자들의 구심체 역할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결국 이 협의회는 1958년 9월9일 지도자인 조소앙이 숨을 거둔후 본래의 취지와는 멀어진채 북측의 대남 위장 정치선전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도쿄대 「납북자 행적」 단행본/“북,납북 인사들 협박… 대남공세 악용”/56년 조국 통일전선 중앙위에 “동원”/“총일 앞장” 조소앙 등 강요된 맹세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일본 도쿄대학 동양학연구소에서 한국전쟁 중 북한으로 끌려간 인사들의 족적을 기록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란 단행본 책자를 입수했다.이 단행본은 1956년 5월24일부터 25일까지 열린 북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확대회의의 주요문헌과 참가자들을 정리한 것이다. 이 책자는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납북 임정요인과 인사들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이들 재북인사들은 1956년 4월23일부터 29일까지 진행된 조선노동당 제3차대회에 참가한 것으로 돼있다.특히 당대회 직후인 같은해 5월24∼25일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확대회의에는 재북평화통일협의회를 준비하고 있던 재북인사들을 대부분 초청한 것으로 밝혀져 이들을 여러 수단으로 회유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홍명희의 보고와 토론으로 진행된 이날 회의에 남한출신 정치인 조소앙 안재홍 오하영 윤기섭 엄항섭 송호성 김약수,국회의원 출신 노일환 김병회 황윤호 박윤원 이구수 강욱중 최태규 김옥주 배중혁 구덕환 이문원 신성균이 참석했다.이밖에 남한의 각 정당 사회단체 인사들의 명단이 나열되어 있다. 그리고 남한 정치인을 대표해 토론에 나선 송호성 조소앙 안재홍 등의 토론 내용을 소개했다.이들은 분단의 원인과 평화통일의 방책에 대해 토론한후 자신들이 앞장설 것을 맹세했다고 전하고 있다. 어떻든 이 자료는 납북인사들이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이용됐음을 보여 주었다.더구나 휴전 이후 정치공세를 강화한 폐쇄사회의 실상을 어느 정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현대사 자료로도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