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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열사 열전:9/金宜基 前 서강대생(정직한 역사 되찾기)

    ◎강요된 침묵속 ‘광주 항쟁’ 왜곡 항거/당시 기독교회관서 ‘서울 봉기’ 외치다 추락사/어둠의 시대 역방향 역사에 맞선 ‘진실의 불꽃’ ‘80년 5월의 학살’은 국민들을 극도의 공포로 몰아넣고 침묵을 강요했다. 항쟁 직후 정부와 제도언론에서 연일 뱉어내는 ‘광주폭동’이란 단어에 대해 누구도 ‘아니오’라고 나서지 못했다. 그러나 분노를 흠뻑 머금은 침묵은 오래갈 수 없었다. 그 강요된 침묵을 깨뜨리고 거짓과 왜곡으로 가득찬 어둠의 시기에 진실을 향한 한줄기 빛을 비춘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의 한 사람이 金宜基라는 젊은이였다. 광주항쟁이 무력으로 진압된 후 사흘째인 80년 5월30일. 서강대 4학년생 金宜基는 그날 오후 5시쯤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 6층에서 떨어졌다. 밑에는 계엄군 장갑차와 군인들이 있었으나 그를 병원으로 이송하는 대신,주위에 흩어진 유인물을 수거하기에 바빴다. ○가마니에 덮인채 방치 그는 가마니에 덮여 30여분 동안이나 그대로 방치된 채 죽어갔다. 그가 뿌린 유인물 ‘동포에게 드리는 글’은 이렇게 호소하고 있었다.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봉기가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동포여 일어나자. 우리의 힘모은 싸움은 역사의 정(正)방향에 서 있다…내일 정오 서울역광장에 모여 오늘의 성전에 몸바쳐 싸우자. 동포여!” 金宜基는 서울에서의 봉기야말로 짓밟힌 광주를 살리는 길이라고 굳게 믿고 이를 처음으로 실천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지 못한 채 젊은 생을 마감했다. 당시 경찰은 그가 유인물을 뿌리려다 발을 헛디뎌 떨어져 즉사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가 떨어지는 모습을 확실히 목격한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주위에 있었던 몇몇 사람들은 그가 계엄군에게 발각돼 쫓겨다니며 유인물을 뿌리다 떨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가 숨막히는 시대와 씨름했던 불꽃같은 투혼은 그의 삶 구석구석 스며있다. 막일로 생활을 꾸리던 부모님과 광부·공장노동자로 일하던 형들을 가슴속에 빚으로묻어둔 채 대학에 다녔던 金宜基. 그러나 그런 부채의식은 집안에서 유일한 대학생으로 장차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야심보다는 도리어 사회모순에 대한 천착으로 이어졌다. “나를 빼고 모두가 돈을 버는데 우리 가족은 왜 셋방을 전전해야 하나”“농사를 짓는 형님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데 왜 빚만을 불려가야 하는가”그런 의문은 그를 자연스럽게 책으로 안내했고,그는 우리 역사가 바로 서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다. ○감상적 농활에 실망 그는 농촌문제 연구에 빠져들었다. 2학년 여름 학교 동아리 ‘한국유네스코 학생회(KUSA)’의 하계농촌봉사활동에 참여했으나 깊은 실망감을 맛보았다. 대개 근로·의료봉사,아동지도 등으로 구성된 당시 농촌봉사활동이 저변에 감상적 인도주의를 깔고 있어 농민과 일체감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막연한 봉사보다는 농민들과 함께 농촌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짚어가고자 했다. 발이 닳도록 농촌현장을 누볐고 농민들과 대화를 나눴다. 보고서를 작성해 발표했고 토론을 통해 분석된 결과를 다시 농민들에게 전했다. 그가 얻고자 한 것은 농촌의 실물경제 파악과 그에 대한 농민들과의 공감대였다. 10차례에 걸친 농활과 연구에서 그가 보여준 집중력은 놀라웠다고 한다. 전국농민회총연합 조성우 상임부의장(42)은 “그에게는 대학 출신 농민운동가들이 갖기 쉬운 현장 농민들과의 위화감 따위는 전혀 없었다. 농민운동은 농민대중에 기반을 둔 자주적인 조직이어야 한다고 믿었고,후일 그와 가깝게 일했던 많은 사람들이 자주적 농민관을 갖게 됐다”고 회고했다. 그는 대학 2학년때부터 서울 신당동 형제교회의 농촌문제연구모임을 이끌면서 농촌문제에 대한 전문성을 키웠고,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EYC) 농촌분과위원회 간사로 활동하는 등 자신의 진로를 농민운동쪽으로 굳혀갔다. 80년 5월18일 광주시내에서 공수부대의 만행이 본격화할 무렵 그는 광주시내로 들어갔다. 항쟁 실상 파악과 19일 시내 한 성당에서 열릴 예정이던 함평고구마사건 승리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는 시민들이 고립무원 상태에서 무참히 살육되는 참상을 목도하고 이를전국에 알리기 위한 방법에 부심했다. 그리고 매주 금요일 기독교회관에서 열리는 ‘금요기도회’를 디데이로 잡았다. 기독교회관에는 그가 활동하던 EYC사무실이 있었다. “30일 낮 12시 EYC사무실에 나타난 그가 광주에 다녀왔다며 잠시 좀 쓸게 있으니 사무실을 비워달라고 부탁했어요. 오후 4시쯤 사무실로 돌아오니 그가 작성한 ‘동포에게 드리는 글’ 원본을 건네주더군요. 근처 상동교회에서 청년회장과 그것을 보고 이상한 예감이 들어 기독교회관에 오니 이미 상황이 끝나 있었어요” EYC에서 함께 활동했던 변광순씨의 회고다. 떨어진 쌀 수매가에 가슴치던 분노의 주먹. 농활을 준비하던 신명나던 손길. 광주를 향했던 발길. 5월의 학살을 남들처럼 가슴에 묻지 못하고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하고 터뜨린 피맺힌 절규. 이들은 모두 역(逆)방향의 역사에 맞섰던 金宜基 열사의 민중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실천 방식이었다. □金宜基 열사 연보 ▲1959년 경북 영주군에서 출생 ▲70년 영주 중부초등교 졸업 ▲76년 배명고 졸업.서강대 무역학과 입학. KUSA 가입. ▲78년 형제교회 농촌문제연구모임 참여. 감리교청년회전국연합회 참여 ▲79년 서강대 근대사연구모임 주도. ▲80년 EYC 농촌분과위원장으로 활동. ▲80년 5월 광주항쟁 목격. 30일 종로 기독교회관 6층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남기고 떨어져 숨짐 ▲90년 서강대에서 명예졸업장 받음 ◎어머니 권채봉 여사/“5·18 사망자 공식 인정” 소식 듣고 담담/“아들이 이루려 했던 세상보는게 소원” 광주광역시청 5·18 보상지원과에 전화를 했다. 담당 직원은 金宜基 열사가 ‘5·18 사망자’로 공식 인정됐다며 10월쯤 유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할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 권채봉 여사(74)는 그 소식에 의외로 담담했다. 아마도 아들의 큰 뜻과 죽음,‘빨갱이 가족’이라는 누명을 강요받아온 기나긴 고통의 세월이 금전으로 바꿔지는 듯한 허탈감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는 그저 “글쎄 다행인것 같기도 하고. 반갑다고 해야 하나”라고만 말했다. 어머니가 진정 바라는 것은 아들이 이루고자 했던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날(80년 5월30일) 저녁 8시30분쯤 동대문서 형사라는 사람이 와서 宜基가 서울대병원 응급실에 있으니 같이 가자고 하는거야. 그런데 그애는 영안실에 있었고,상부 명령이 없다고 다음날 낮 12시까지 시신도 안보여줬어. 사람을 오지 못하게 하고 화장을 하라고 갖은 협박을 했지” 그러나 김동완 목사의 주도로 장례식은 치러졌다. 수백명의 민주인사와 학생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참석,광주항쟁 후 첫 대규모 집회가 됐다. 어머니는 그때 자신의 울음을 신호로 학생들이 일어서기로 했다는 얘기를 들어 그들이 다칠까봐 자식의 관에 꽃을 던지면서도 울 수가 없었다고 했다. 권여사는 송파구 잠실의 한 아파트에서 노환으로 거동을 못하는 구순의 시어머니와 중풍을 앓고 있는 남편 김억씨(73)의 시중을 혼자 들며 살고 있다. ◎장석재 형제교회 목사가 전하는 농민사랑/농민과 일체감 위해 극도의 허름한 생활/농촌연구 삶의 일부 농민 향한 애정 각별 金宜基 열사의 농촌문제에 대한 관심과 농민을 향한 애정은 각별했다. 그가 교회에 다니게 된 것도 형제교회의농촌문제연구모임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에는 김동완 목사가 담임으로 있으면서 빈민·농민 선교를 통해 사회참여에 앞장서고 있었다. 金宜基는 특유의 적극성으로 이 모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는 농촌문제 연구의 핵심은 현장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형제교회 장석재 담임목사(42)는 “그는 당시 가장 어려운 곳이 농촌이라고 보고 농촌현실에 몰두했던 것 같다”고 했다. “미울정도로 허름한 생활을 했어요. 군복바지에 검정고무신 청자담배 등 가장 싼 것만을 입고 먹었지요. 친구들로터 티내지 말라는 구박도 많이 받았어요”그러나 그것들은 농민과 일체감을 느끼려는 그의 사랑의 표현법이었다고 했다. 교회사적으로 볼때도 金宜基 열사는 ‘사회선교의 순교자’로 기록될 것이라고 했다. 장례식때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뿌리다 체포돼 4개월간 감옥신세를 지기도 했던 장목사는 “사회운동가들이 정치인 등으로 기성화하면서 과거의 순수함과 진지함이 굴절돼 보일 때마다 宜基가 생각난다”고 했다. 당시 EYC 농촌분과위원장이었던 전국농민회총연합 조성우 상근부의장도 “金宜基는 현장에서 필요로 하면 두말 않고 달려갔다. 농촌은 그에게 있어 몸에 밴 생활의 일부였으며 농민에 대한 애정과 이해는 혈육에 대한 것 이상의 깊이를 갖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 민주열사 명예회복 학술회의 주제발표(정직한 역사 되찾기)

    ◎독재에 왜곡된 현대사 재정립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과 의문의 죽음 진상규명을 위한 학술회의가 1일 기독교회관에서 민주열사 유가족들과 민주화 투쟁에 헌신한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범국민추진위원회(열사범추위) 주최로 열린 98년도 2차 학술회의에서 李昌馥 열사범추위 상임대표는 기조연설을 통해 의문사 진상규명과 열사들의 국가유공자 예우에 관한 특별법 제정 및 범국민 추모사업의 조기 현실화를 강력 촉구했다. 이번 학술회의에서는 특히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이 마련한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과 의문의 죽음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안이 발표됐으며 ‘각국의 사례에서 나타난 과거청산의 문제점과 올바른 방향’(李昌洙 한국 국제문제연구소 대표),‘국가 보훈사업의 문제점과 개선방향’(金三雄 서울신문사 주필) 등의 발제 강연과 토론이 있었다. 참석자들은 또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서한을 채택했다. ◎기조연설/과거 청산돼야 국민 대통합/李昌馥 열사 범추위 상임대표 우리 현대사는 외세에 편승하여 국민을 배신하고 독재를 행사해 온 세력들의 불의에 항거한 위대한 투쟁의 역사였다. 4·19민주혁명과 5·18광주민중항쟁,6월항쟁,87년 노동자 대투쟁,그리고 50년만의 민주적인 정권교체에 이르기까지 국민대중은 민주발전과 통일,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한결같이 싸워왔다. 그리하여 마침내 본격적인 민주화시대를 열였고,통일을 위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고 있다. 金大中 대통령의 ‘제2의 건국’ 선언이 의미하는 바 역시 여기에 있다고 본다. 우리가 민주·통일시대를 향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려면 올바른 과거청산이 전제되어야 한다. 총체적 개혁을 통해 독재시대의 기득권 구조를 깨고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일,지역과 계층간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여 사회통합적 시민공동체를 건설하는 일,남북간 화해와 협력,평화체제를 구축하여 통일을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 일은 민주·통일시대의 역사를 개척하는 요체이다. 이를 위해서라도 민족민주열사의 명예회복과 의문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은 꼭 이루어내야 한다. 열사들의 죽음은 개인차원이 아닌 우리 현대사에 중요한 사변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족민주열사의 명예회복은 독재정권에 의해 왜곡되어졌던 우리 현대사를 바로잡는 성스러운 일이고,의문사 진상 규명은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하는 중요한 수단인 것이다.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과 의문의 죽음 진상규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국가와 민간 차원에서 동시에 노력이 경주되어야 한다. 국가차원에서는 이러한 작업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해야 하며 민간차원에서는 열사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이루고자 했던 염원을 실현하는데 범국민적인 사업을 펼쳐나가야 할 것이다. ◎각국 사례로 본 과거청산 문제점과 올바른 방향/청치세력화된 시민사회가 주체로/李昌洙 한국국제문제연구소 대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94년 4월 흑인정부가 들어서면서 과거 청산 작업을 시작했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란 헌법기관을 만들어 인권침해 조사,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및 보상,인권침해 및 가해자들에 대한 사면문제,국민 통합과 화해 촉진법 제정 등과거 청산 과제를 수행했다. 그러나 남아공 국민감정과 국가주도의 과거청산 활동간에는 일정한 괴리가 생기고 있다. 정치세력간의 타협성 때문이다. 또 흑빈백부(黑貧白富)의 구도가 그대로인 상태에서 과거 독재정권이 구조적으로 수행했던 인종차별 정책을 해소시키는 데는 법적인 해결과 진실규명만으로는 미흡하다는 점도 보여준다. 과거청산 작업은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설계와 공동체내의 빈부격차 해소 등과 같은 경제적·정치적 문제들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아르헨티나 과거청산 문제는 주로 실종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76년 이후 군사독재정권은 조직적인 인권침해 과정에서 3만여명의 실종자를 낳았다. 83년 과도정부는 그러나 ‘국민화해법’을 통과시켜 군부에 의해 저질러진 모든 형사적 범죄에 사면을 단행했다. 89년 메넴 정권도 거의 대부분의 군인들을 사면했다. 이렇게 아르헨티나 과거 청산문제가 번번히 무산된 것은 군부의 조직적 반대 때문이다. 남아공과는 달리 아르헨티나는 군부중심의 구세력이 여전히 정치적실세로 작용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위의 예에서 본다면 과거청산 작업은 과거청산에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있는 시민사회가 정치적 요구 수준을 벗어나 정치세력화 해 그 흐름을 주도해야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국가보훈법 문제점과 개선방향/국가유공자 예우 특별법 제정을/金三雄 서울신문 주필 우리나라 역대 정권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각급 보훈대상자와 그 유가족들을 홀대해 왔다. 특히 민주화와 통일운동,노동운동으로 희생된 민족민주열사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국민의 정부는 이제라도 보훈정책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친일경력자의 독립운동가로의 둔갑 사례를 바로잡고 4·19 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사람가운데 유신을 지지한 사람이나,5·18 광주 양민학살의 주범으로 훈장을 받은 쿠데타 주역들의 서훈을 치탈해야 한다. 아울러 민족민주열사들에 대해서는 ‘국가유공자 예우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예우하거나 광주민주항쟁 희생자와 똑같은 차원에서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 이밖에정부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첫째,열사·희생자 중 긴급조치·반공법·보안법·계엄법 등에 의해 ‘범죄자’로 기록된 경우 유죄선고를 무효화해야 한다. 둘째,정부와 국회 주관으로 희생자들에 대한 위령제를 지내고 위령탑을 세우는 한편,마석 모란공원을 민족민주열사 묘역으로 성역화해 산재된 시신을 모셔야 한다. 셋째,희생자들의 정신을 승화시키기 위해 교과서에 사실을 기록하고 추모주간을 설정해야 한다. 넷째,국회가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의문사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 다섯째,진실 규명과 국민화합을 위해 피해자와 가해자,그리고 국민대표로서 ‘과거청산과 미래창조를 위한 국민화합 위원회(가칭)’ 같은 것을 만들어 피해자의 한과 가해자의 참회가 한마당에서 융화되도록 해야 한다. ◎民辯 작성 2개 특별법 시안 열사 범추위는 민주열사 유가족 및 민족민주 운동단체들의 최대 현안인 의문의 죽음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민족민주 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 등 두가지 특별법이 올 가을 정기국회에서 제정되도록 힘쓰고 있다. 범추위는 이달말까지 자체 시안을 확정해 여야당에 보낼 예정이다. 이의 초기작업으로 민변이 작성한 두 특별법의 시안골자는 다음과 같다.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안) △의문사란 사인이 명백히 자연사로 확인되지 않고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해 사망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 △대통령 직속하에 9인의 위원으로 구성된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위원회’를 두며 대통령,국회,대법원장이 각 3인씩 선출. △위원회는 필요한 경우 검찰총장 등 관련기관의 장에게 수사협조 요청 및 소속공무원의 파견 등을 요청할 수 있음. △위원회가 관할 지방검사에게 영장청구를 요청하는 경우,검사는 이를 관할 지방법원에 신청하여야 함. △사건 조사기한은 2년 한정. △위원회는 혐의가 인정될 경우,관련자를 검사 등에 고발해야 하며 검사 등이 공소제기를 하지 않는 경우에는 관할 고등법원에 재정신청해야 함. 조사가 완료될 때까지 조사 사건과 관련된 공소시효는 정지되며,발효이전 공소시효가 만료된 경우에도 이 법률 적용.◆민족민주유공자 명예회복 및 예우에 관한 법률(안) △‘민족민주 유공자’는 해방 이후부터로 시기 제한. △민족민주 운동의 정의에 관해 전문가 의견 참고후 확정. △민족민주 운동을 위한 활동과 관련하여 사망했거나 상이를 입은 자와 함께 민족민주 운동에 특별한 공적을 남기고 사망한 자도 유공자 적용. △유족의 범위,등록 및 결정,예우에 관한 구체적 내용은 국가유공자등 예우및 지원에 관한 법률 5조를 적용. △보상은 공헌과 희생의 정도 및 생활정도를 고려하여 달리할 수 있도록 하고 구체적 내용은 시행령으로 정함. △유공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 위원회는 9인으로 하고 대통령,국회,대법원장 각 3인씩 추천. △민족민주 운동을 이유로 한 유죄 확정판결에 대해 형사소송법 420조 및 군사법원법 469조의 규정에 불구하고 재심을 청구할 수 있음. △민족민주 운동을 이유로 요시찰인 명부 등재,여권발급 절차 예외적 취급 등 불이익 행위를 당한 자는 서면으로 위원회에 불이익 행위의 판정을 신청할 수 있다. 심의 결과 불이익행위로 인정된경우 위원회는 수사기관에 고발해야 함. △정부는 민족민주 운동 정신을 계승하는 기념사업을 추진해야 함. 위원회의 의결에 의햐며 정부는 유공자를 추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에 사업비 등의 일부를 지원할 수 있음.
  • 민주열사 열전:1­1(정직한 역사 되찾기)

    ◎재조명의 의미/이제 ‘민족대통합의 빛’으로/60년대이후 319명 희생/진상규명·바른 평가 과제 한국의 민주화 과정은 처절한 투쟁의 역사였다.질식할 듯한 독재체제의 폭압과 최루탄 연기 속에서도 민주주의를 위한 많은 사람들의 투쟁은 끊이지 않았다.그들의 희생적 투쟁이 밀알이 되어 오늘의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그들은 굴절된 현대사에서 희망의 빛이었던 민주열사들이다. 그들은 거리에서,노동현장에서,학원에서 또는 감옥에서 민주화와 인권이 보장되는 인간다운 삶을 위해 싸웠다.때로는 분신과 투신으로,단식투쟁으로, 시위로 독재정권과 악덕 기업주들에 항거했다.그들의 위대함은 독재정권에 굴복하지 않고 물질적 풍요와 세속적 이익이 최고의 가치처럼 여겨지던 사회풍토 속에서도 개인의 이익이 아닌 사회정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점이다. 민주열사들은 비겁의 사회에서 진정한 용기를,억압의 구조에서 영원한 자유를 실천한 사람들이었다. 김상진 열사는 “무릎꿇고 사느니 차라리 서서 죽겠다”며 할복했다.대학생이던 그는 “숭고한 피를흩뿌려 이땅에 영원한 민주주의의 푸른 잎사귀가 번성하도록 하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젊은 생을 마감했다.‘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열사는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처럼 살지만 우리도 깨우쳐서 바보로 남지말자”며 노동운동에 나섰다.그리고 거대한 구조악 앞에 번민을 거듭하다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방울 이슬이 되기 위하여”란 말을 남기고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당겼다. 많은 목숨들이 이렇게 스러져 갔다.그러나 어디서 어떻게 숨졌는지 알 수없는 의문사와 고문사도 적지않았다.주위의 외면 속에 죽어간 ‘이름없는 민주열사’들도 많았다.그들은 비록 이름없이 죽어 갔지만 그들의 고귀한 희생은 오늘의 민주주의로 부활됐다. 전국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단체 연대회의(상임의장 李昌馥)가 집계한 60년대 이후의 민족민주열사는 319명.분신·투신·할복의 방법으로 목숨을 바치는가 하면 고문과 사건 조작으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또 오랜 운동과정에서 병을 얻거나 고문 후유증,불의의 사고 등으로 숨진 열사들도 있다.노동운동 와중에 92명,학생운동 과정에 60명이 숨졌고,처형이나 옥중사망,출옥후 사망자도 103명에 이른다. 5·18 광주민중항쟁에서 희생된 열사들은 제외하고 그렇다. 그러나 이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조치는 여전히 미미하고 의문사에 대한 진상규명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金三雄 친일문제연구회 회장(서울신문 주필)은 “민주열사들에 대한 법적·도덕적 예우와 진상규명이야말로 가장 먼저 서둘렀어야할 역사적 과제”라고 지적하고 있다.그는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희생당한 열사와 유족들에게 정부가 그동안 무엇으로 보답했는지 묻고 싶다”고 했다.朴元淳 변호사(참여연대 사무처장)도 “민주열사 의문사에 대한 망각은 정의의 망각”이라며 반드시 진상규명 노력이 있어야한다고 강조했다. 독재정권에 의해 역사의 변방으로 밀려났던 그들은 이제 역사의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민족의 화합과 통합을 위해서도 그들은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전 독일 대통령은 “과거를 기억하지 않고는 진정한 화해란 없다”고 강조했다. ◎李富榮 의원 인터뷰/“전과기록 없애 명예회복부터”/피살자 진상조사위 구성… 특별검사 둬야/과거·현재·미래 묶어 민족정통성 확고히 여야 정치권의 개혁그룹과 초·재선 의원을 중심으로 민주인사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제정이 추진되고 있다.그런 움직임을 주도하고 있는 李富榮 의원(한나라당)에게 특별법 추진의 의미와 전망을 들어 보았다. 李의원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수차례 투옥당한 경험이 있는 대표적 재야출신 인사다.부인 孫守珦씨는 고(故) 張俊河 선생의 비서였다. ­민주열사 명예회복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정치적으로 폭력,독재가 횡행했을 때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나라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자 했던 사람들의 값어치를 제대로 평가하는 것은 일제시대 때 독립을 되찾고자 했던 선열들을 받드는 것과 같은 연장선상에 있습니다.대한민국이 민족사의 유구한 전통을 잇고 통일된 조국의 주체가 되려면 독립정신과 민주주의 확립,그리고 경제발전이라는 세가지 시대적가치를 고양시켜야 된다고 봅니다.그런 의미에서 민주열사에 대한 재평가와 명예회복은 이 시대에 당연히 논의되어야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명예회복의 구체적 방안으로 어떤 조치가 필요합니까. ▲전과기록을 우선 없애야 합니다.또 민주화에 공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훈포상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더 중요한 것은 고문에 의했건,암살당했건 민주화운동과정에서 피살된 사람들이 있는데 그 진상을 밝히는 것입니다.특별법에 의한 진상조사위를 만들고 특별검사가 임명되어야 합니다.심지어 10여년전에 의문사한 사람의 사인규명이 되지않아 가족들이 유골을 묻지 못하고 집에 보존하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가족들의 노력으로 진상이 밝혀진 사례도 있는데 국가공권력이 외면하고 있습니다.민주주의를 앞세우는 정부라면 당연히 진상규명에 나서야 합니다. ­특별법은 언제쯤 제정되리라 예상하십니까. ▲연내에 마무리지어야 한다고 봅니다.올 정기국회에서는 특별법을 만들어야지요.이는 새 정부의 의지에 달린 것입니다.이런 일부터 여야의 벽을 깨야 합니다.실제로 여야 의원들 사이에 얘기가 되고 있습니다.여당에도,야당에도 이런 일에 소극적이거나 반대하는 분들이 있게 마련이지만 대화로써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과거보다는 미래를 지향하자는 의견도 있는데요. ▲우리 현대사는 아직도 독립운동 흐름과 친일파 흐름의 대결이 계속되고 있습니다.민족 정통성을 세우느냐,못세우느냐 그리고 우리 자식들에게 어떤 가치관을 물려줄 것이냐를 우선 고려해야 합니다.민주열사 명예회복이 지금의 세계화 추진과 맞부딪치는 것도 아닙니다.자기 정체성 확립없이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겠습니까.과거와 현재,미래를 함께 묶어 생각해야할 것입니다. ◎기고/고난·희생은 위대한 유산/張琪杓 신문명정책硏 원장 한평생 민족독립을 위해 투쟁하다 남의 나라 땅에서 옥사하신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는 애국심의 원천이다.그래서 사필(史筆)이 강해야 민족이 강해진다”고 설파하셨다.훌륭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라야 찬란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으며,자기 민족의 역사를 아는국민이라야 참된 번영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민족정체성 확립 시급 지금 우리는 IMF사태라는 경제위기를 맞아 경제적인 어려움을 가장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그러나 따지고 보면 정신적 빈곤 때문에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오늘의 이 시기는 경제만이 아니라 정치·사회·문화·윤리 등 사회의 전 부문에 걸친 총체적 위기이다. 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가? 많은 요인이 있겠지만 경제성장 위주의 서구 근대화에 몰두한 나머지 민족의 정체성(正體性)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한 데 가장 큰 원인이 있을 것이다.8·15해방 후 민족반역자를 제대로 처벌하지 못함으로써 민족정기를 세우지 못한 일은 두고두고 민족적 수치이자 민족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그러나 우리는 해방후 친일파를 제거하지 못한 일만을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군사독재시절 민주화와 민족통일과 민중해방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해온 살아 있는 역사를 외면하고 있는 것 또한 크게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한국의 현대사는 더 없이 아픈 역사이기도 하지만 자랑스러운 역사이기도 하다.제1차 세계대전 후 전세계 약소민족 해방투쟁의 선구자 역할을 한 3·1 운동을 비롯하여,4·19혁명,군사독재 반대투쟁,민주노동운동,부마항쟁,광주항쟁,6월 민주항쟁 등은 민족의 위대한 전통이 아닐 수 없다.이러한 민족적 전통속에는 수많은 사람의 희생과 고난이 담겨 있기에 우리는 이 전통을 더욱더 값진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특히 한국 현대사에서 잊을 수 없는 것은 분신자결과 고문사가 특별히 많았다는 사실이다.1970년대 이후 분신자결한 사람이 69명이나 되며 할복자결, 투신자결,고문사 등을 합하면 무려 226명이나 된다.전세계 어떤나라의 민족해방운동이나 민주화운동에서도 이런 예를 찾을 수 없다.수십년간 1,000여명의 ‘양심수’가 계속되어온 나라도 유례를 찾을 수 없거니와,특히 이념 문제 때문에 43년간이나 감옥생활을 한 나라도 없다.한없이 가슴아프고 수치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민족의 위대한 유산이 아닐 수 없다.그동안의 투쟁이 얼마나 치열하고 고난에 찬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이 소중한 유산을 어떻게 민족도약의 밑거름이 되게 하는가는 후세 사람의 몫이다. ○왜곡 현대사 논의 물꼬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E.H.카)라는 말이 있다.역사란 과거의 단순한 서술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보다 더 의미있게 하기 위해 과거를 재창조해 내는 인간의 합목적적인 행위이다.그러기에 역사를 서술하는 사람이 어떠한 세계관과 역사관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역사서술자의 세계관과 역사관에 따라 역사는 전혀 다른 내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역사적 소명감을 가져야 바른 역사를 쓸 수 있다.특히 민족정기가 훼손될 만큼 무시되고 왜곡되어온 한국현대사를 ‘역사의 장’에 올리는 일은 그 역사적 의미가 큰 만큼 책임도 클 것이다.
  • 白凡 재조명:1/金九 연구 어디까지(정직한 역사 되찾기)

    ◎그의 죽음은 ‘불행한 역사’의 시작/일그러진 권력의 바람에 참역사의 불꽃 스러지고/식민유산 씻을 주체 상실 평화통일론 어둠속 유배/국가차원 연구후원 全無 이젠 정당한 평가 필요 백범 金九 선생은 우리 현대사의 거인이다.순수한 열정으로 조국의 독립과 민족통일을 위해 헌신했다.온갖 어려움속에서도 임시정부를 이끌며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됐다.독립후에는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해 앞장섰다.그러나 그는 1949년 6월26일 암살됐다.타계한지 거의 반세기가 지났지면 현대사는 그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국민의 존경을 받았지만 권력은 그를 왜곡했다.이제 그는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 역사의 제자리로 돌아와야한다.정직한 역사를 되찾기 위해 金九 선생을 재조명한다. 어둠의 시대에 등불이었던 민족의 큰 스승 백범 金九.그는 일제식민통치의 암울한 시대를 끈질긴 생명력으로 밝혀온 민족의 등불이었다.그의 헌신적 민족사랑은 조국독립이라는 찬란한 불빛으로 빛났다.그러나 그 불빛은 정의의 역사로 승화되지 못한 채 일그러진 권력의 바람에 꺼지고 말았다.그의 비극적 죽음은 ‘정의의 역사’가 현실에서 패배한 민족의 비극이다. 그는 1949년 6월26일 안두희에게 암살됐다.암살범은 일본인이 아닌 그가 사랑했던 같은 민족이었다.그러나 ‘암살범’은 안두희라는 개인이 아니었다.그는 거대한 음모의 한낱 조연에 지나지 않았다.金九 선생은 권력에 의해 조작된 제도적 폭력에 희생된 것이다.권력의 하수인이었던 안두희의 총성은 일그러진 현대사의 시작을 알리는 ‘조종(弔鐘)’이었다.결국 잘못된 현대사에서 파생된 권력의 폭력은 5·18 광주민주항쟁도 무력으로 진압했다. 金九 선생을 죽인 권력과 친일세력들은 그를 낡은 역사속에 묻어두려했다.그들은 金九 선생의 최고 가치였던 독립과 민족통일론을 매도했다.그의 평화통일론은 냉전체제속에 공허한 메아리가 됐다.그는 자유당 정권에 의해 현실에서의 ‘패배자’로 왜곡됐다.자유당정권은 그의 자서전 ‘백범일지’의 출판도 금지시켰다. 그는 朴正熙 대통령과 그이후 全斗煥·盧泰愚 정권에서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군사정권들은냉전체제의 분단상황에서 백범의 민족통일론을 외면했다”고 창원대학의 都珍淳 교수(한국사)는 말했다. 金九 선생을 죽게한 일그러진 현대사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현대사의 첫단추가 잘못 끼워졌기 때문이다.마땅히 단죄됐어야 할 민족반역자 친일세력들이 해방후에도 부와 권력의 핵심을 차지한 것이다.백범의 죽음은 일제식민통치의 유산을 청산할 주도세력의 상실을 의미했다.그러한 불행한 역사과정은 민족정기와 사회정의를 무너뜨리며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왔다. 굴절된 현대사의 어둡고 긴 그림자 속에서도 백범은 일반대중들의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로 추앙받아왔다.SBS방송 조사결과,金九 선생은 광복이후 50년동안 한국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나타났다.그는 고대 신문이 실시한 가장 복제하고 싶은 인물조사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백범은 국민들에게는 가장 존경을 받으면서도 권력에 의해 의도적으로 평가절하된 독특한 위치에 있었다.현대사가 권력지향적 사회였기 때문에 백범연구는 활발할 수 없었다.문민정부에 들어와 그의 연구는좀더 적극화됐지만 국가차원에서 그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일부 정치세력이 그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 했을 뿐이다.가장 존경받는 지도자이면서도 그의 기념관도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중국에서 돌아와 업무를 보고 임시정부 국무회의까지 열렸던 경교장(京橋莊)의 복원도 불투명하다.그가 서울에 설립했던 2개의 ‘초등학교’ 등 교육기관들은 흔적조차 없어졌다.백범 푸대접은 정통성이 약한 과거의 권력이 그의 영웅화를 두려워하고 그의 통일론과 분단상황이라는 현실과의 괴리 때문이었다.그러나 냉전체제도 무너지고 金九 선생에 각별한 존경과 관심을 갖고 있는 金大中 대통령의 등장으로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都교수는 예상한다. 金九 선생은 국가적 차원에서 올바른 역사의 제자리로 돌아오게 해야한다.그것은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중요한 일이다.역사를 왜곡하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백범의 올바른 평가가 이루어지면 세계사적 보편성을 갖는 그의 열린 민족주의와 삶의 철학은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미래에도 ‘등불’이 될 것이다. ◎죽음을 초월한 생애 ▲1876년(고종13년) 해주에서 탄생 ▲1893년(18세) 동학에 입도 동학접주가 됨 ▲1896년(21세) 황해도 치하포에서 변장한 일본인 쓰치다 때려 죽임. 해주감옥에 감금됐다 인천으로 이감 ▲1898년(23세) 인천감옥 탈옥.마곡사에 들어가 승려가 됨 ▲1904년(29세) 최준례와 결혼 ▲1909년(34세) 안중근 의사 의거 관련자로 체포됐다 석방 ▲1919년(44세) 31운동 직후 상하이(上海)로 망명.임시정부 경무국장 취임 ▲1923년(48세) 임시정부 내무총장 취임 ▲1924년(49세) 부인 최준례 여사 사망 ▲1926년(51세) 임시정부 국무령에 선출 ▲1930년(55세) 이동녕·안창호·조완구·조소앙 등과 한국독립당 조직 ▲1932년(57세) 이봉창 의사의 日王 저격,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 지휘.상하이에서 자싱(嘉興)으로 피신 ▲1933년(58세) 중국의 장제스(蔣介石)와 만나 낙양군관학교에 한인훈련반 설치 합의 ▲1935년(60세) 난징(南京)에 학생훈련소 설치 ▲1938년(63세) 호남성 장사로 피신.민족진영3당 통합을 논의하던중 이운환의 저격으로 중상 ▲1939년(64세) 어머니 곽낙원(81세) 여사 사망 ▲1940년(65세) 임시정부 주석으로 선출 ▲1941년(66세) 대한민국 건국강령 제정.대한민국 임시정부 명의로 대일선전포고 ▲1945년(70세) 중국에서 귀국.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반대하여 신탁통치반대운동 전개 ▲1947년(72세) 제2차 반탁운동 전개.인재 양성을 위한 건국실천원양성소개설 ▲1948년(73세)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하는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발표.남북연석회의 위해 평양방문후 귀국 ▲1949년(74세) 백범학원·창암학원 설립.6월26일 육군소위 안두희의 저격으로 서거.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추서 ▲1969년 남산에 동상 세움(서거 20주년) □특별취재반 ▲특집기획팀=羅潤道 팀장,李昌淳·李穆熙 차장,金聖昊·任昌龍 기자 cslee@seoul.co.kr
  • 과거 청산과 미래 개척(대한민국 50년:21·끝)

    ◎이데올로기·개발독재 넘어 통일로/反民특위 “실종”… 건국 최초 과거청산 실패/‘제주 4·3’ ‘거창사건’ 아직도 어둠 속에/지역할거 정경유착 파당정치 악습 깨고 군사정권 시대 숱한 의문사도 밝혀내야 1948년 8월15일 신생정부 출범 당시의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약소국이었다.한반도 면적 22만1,487㎢ 가운데 3·8선 이남인 9만9,221㎢만 확보했고 인구도 2,002만명(48년 미군정청 추정치)에 불과했다.또 국민 가운데 80%가량이 농업 등 1차산업에 종사했고,그해 수출액이 2,230만달러에 그칠만큼 경제력도 볼품없었다. 정부수립 50돌을 눈앞에 둔 지금 대한민국의 자화상은 어떠한가.97년 말 현재 인구는 4,666만명,수출액은 1,361억6,430만달러,1인당 GNP는 9,511달러에 이른다. ○‘삶의 질’ 향상되지 않아 지난 50년동안 인구는 2.3배,수출규모는 6,106배로 급증했다.1인당 GNP는,가장 이른 통계치인 53년의 67달러에 비교해도 142배나 늘었다.가히 ‘세계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의 비약적인 성장’이라는 찬사가 부끄럽지 않은 양적 팽창이었다.그러면 이같은 성장이 우리 사회의 내적(內的) 발전이나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을 그대로 동반한 것일까.여기서 한국에 대한 외국의 시각을 잠깐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미국 의회도서관이 펴낸 책자 ‘South Korea’(92년 간)는 한국의 기본사항을 소개한 데 이어 ‘재벌 중심으로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었으나 독재정권 시대에 고착된 퇴행적인 정치질서에,통제받는 사회구조를 가진 나라’라고 덧붙였다.또 65만의 군대와 한해 100억달러(89년 기준)에 이르는 군사비도 주요항목으로 들었다.다른 나라의 일반적인 한국관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미 의회도서관 책자의 표현이 비록 유쾌하지는 않지만,우리 현실을 상당히 정확하게 지적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대한민국 성장의 뒤안길에는 필히 청산해야 할 역사적 잔재가 누적돼 있기 때문이다.이는 정치·경제 등 사회 각 분야에서 구조적으로 드러나기도 하고,특정사건의 진상을 은폐·왜곡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정치 분야에서의 청산대상은 분단체제에서 파생한 반공이데올로기의 악용과 개발독재 논리이다.해방이후 정치의 흐름을 살펴보자.3년동안의 극심한 좌우대립 끝에 남과 북에는 상호 배타적인 정부가 들어선다.2년이 채 못돼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져 분단체제는 더욱 굳어진다.이후 한국에서는 李承晩 정부가 장기집권하고 그에 따른 부정부패가 만연한다. 4·19혁명이 일어나 민주주의가 되살아나는 듯 했지만 곧바로 5·16쿠데타로 무너진다.朴正熙 정권은 개발논리를 앞세워 독재권력을 무소불위로 휘두른다.군사정권은 全斗煥­盧泰愚 시대까지 이어졌지만 80년의 5·18광주민중항쟁,87년의 6월항쟁 등 국민의 극심한 저항에 부딪쳤고 그 결과 93년에 문민정부가,그리고 50주년이 되는 올해 국민의 정부가 탄생한다. 대한민국 50년 정치사를 일별하면,그것은 정치적 억압과 이에 맞서 민주사회를 추구한 국민의 대항으로 요약할 수 있다.그 과정에서 억압적 정권이 양손에 든 무기가 반공이데올로기와 경제개발 논리였다. ○가치관 대혼란 초래 남북이 체제의 존립을 걸고 대립하는데다 6·25라는 비극을 겪은 마당에 반공이데올로기는 필연적인 역사의 부산물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문제는 권력이 이를 정치적 대항세력을 억누르는 수단으로 악용한 점에 있다. 멀게는 한국전쟁 전의 ‘국회 남로당 프락치 사건’에서 가깝게는 지난 대선의 ‘吳益濟 월북 및 편지사건’‘흑금성 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집권세력은 늘 ‘용공조작’을 통해 정적을 제거하려고 시도했고 대부분 목적을 달성했다. 朴正熙 정권이 들어서서는 경제성장을 내세운 개발독재 논리가 못잖게 위력을 발휘했다.국민 대다수가 절대빈곤에 시달리는 상태에서 ‘잘 먹고 잘 살려면 민주주의니 인권이니 하는 추상적 가치는 유보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는 쉽게 먹혀들어갔다.시민의식이 어느정도 성숙하기 전까지 ‘중단없는 전진’과 ‘잘 살아 보세’는 국민적 합의처럼 보였다. 이같은 정치적 적폐(積弊)는 지금도 파당정치·지역할거주의·정경유착 등 여러 유형의 악습으로 고착됐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의식 형성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전통을 잇는 문화와 사상은 ‘전근대적’이거나 ‘비효율적’이란 이유로 외면받는 대신 출세지상주의·이기주의가 넘쳐나면서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왔다.재벌의 소유 집중,극심한 빈부격차 등 경제 분야의 해묵은 과제도 해결이 쉽지 않은 부분이다. 정치사의 굴절이 가져온 또다른 폐해는 역사적 진실의 은폐·왜곡이라 할 수 있다.대한민국 최초의 ‘과거청산 실패’사례로는 48∼49년에 걸친 ‘반민특위 사건’이 꼽힌다.일제강점기에 친일과 반민족 행위를 한 자를 처벌하고자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한 제헌국회는 곧이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한다.위원회는 반민족행위자 305명을 검거하지만 참다운 활동을 벌이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고 만다.친일파에 권력기반을 둔 李承晩 행정부의 반발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나쁜 선례는 길이 남게 마련인가.해방정국에서 수차례 벌어진 정치지도자 암살사건,6·25를 전후해 빚어진 ‘제주 4·3’이나 거창사건을 비롯한 양민학살,군사정권에서 발생한 민주인사·학생들의 숱한 의문사와 실종들이 아직껏 그 실상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로 어둠에 묻혀 있다. 사건 발생 자체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례도 있다.예컨대 49년 12월24일 경북 문경군에서 일어난 국군의 양민학살 건이다.미국 국립공문서 보존관리청(NARA)에서 최근 발굴한 주한미군 군사고문단 보고서에 나타난 실상은 이렇다. 육군 25연대 7중대 병력이 석달이라는 산간벽지 마을에 들어가 주민들을 모은 다음 빨치산에게 협조했다는 죄목으로 무차별 살해한다.보고서는 “(주민들이) 도발하지도 않았는데 카빈 소총·수류탄·바주카포 등으로 공격해 성인 86명,학생 9명,어린이 3명이 숨졌다.또 집 27채 가운데 23채를 불태웠다”고 밝혔다.이 사건이 세상에는 빨치산의 만행으로 알려졌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민족의 성지’국립묘지에도 존재한다.문민정부 출범 초기인 93년 7월 국가보훈처가 金性洙·李甲成·尹致暎·李殷相·徐椿·李鍾郁·尹益善·全協 등 8명에 대한 친일행각을 조사해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이들은 모두 독립유공자로서 각종 훈·포장을 받았고 사회의 지도층인사로 행세했다.이 조사 역시 결말없이 끝났고 뒤이은 문민정부의 ‘역사바로 세우기’도 정치적인 의도라는 오해만 샀을 뿐 결실을 맺지 못했다. ○국민의 정부 특별한 책무 한민족이 빛나는 21세기를 향해 전진하려면 두가지 전제조건이 이뤄져야 한다.하나는 물론 통일이요,또 하나는 역사에 덕지덕지 낀 찌꺼기를 걷어내는 일이다.통일은 북한이라는 상대와 더불어 장기간에 해결해야 할 민족의 숙원이지만 잔재 청산은 우리의 의지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국민의 정부는 우리 현대사를 정화하는 데 앞장서야 하는 특별한 책무를 안고 있다.
  • 민주화 운동 희생자 재조명­왜 필요한가

    ◎왜곡된 진상 규명 명예회복해야/개인적 희생 정당한 평가 받아야/특별법 제정·합동묘역 조성 추진 한국 민주화의 분수령을 이룬 5·18 광주민중항쟁은 이제 우리 역사 속에 바르게 자리매김 되고 있다.그러나 해마다 5월이 오면 아직도 명예회복을 못한 민주화운동 희생자 가족들은 저며오는 가슴을 가누지 못한다.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희생된 이들.민주화를 달성한 우리의 역사속에 여전히 이들이 설 자리는 없는가.金大中 대통령은 최근 월간 ‘말’지와의 회견에서 “그 분들의 헌신과 공로에 상응하는 조치를 반드시 취할 것”이라면서 “무엇보다 정확한 진상규명을 통해 그 분들의 명예를 회복시킬 것이며 필요하다면 입법조치도 해야한다”고 밝혔다.이들의 명예회복은 어디까지 와있는가.민주화운동 희생자 특집을 꾸며본다. ▷진상규명◁ 60년대 이후 군사독재 시대가 30여년간 이어지면서 많은 이들이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희생됐다.4·19나 5·18처럼 집단화된 희생의 명예회복은 상당 부분 이뤄졌다.그러나 개인적 희생은 지금도 제대로된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개인적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이 되려면 먼저 진상이 규명되어야 한다. 민주화나 노동운동 과정에서 희생당한 이들의 유형은 다양하다.분신,투신,할복,음독,고문,사고,폭행,총상,익사,병,교수형 등이다.이들을 죽음에까지 이르게한 가해자는 주로 공권력으로 추정된다.안기부(중앙정보부),기무사,대공분실 등이 의혹의 대상이다. 가해자가 권력을 쥔 쪽에 있었기에 진상규명이 안된 경우가 많다.金學喆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 기획국장은 “살인죄의 공소시효는 15년이지만 가해자처벌은 추후 생각해볼 문제고 일단 진상규명이 이뤄져야한다”고 강조했다.그는 민관합동의 민주화희생자 진상규명특별위 설치를 제안했다. ▷명예회복◁ 진상규명과 동시에 추진되어야할 것이 민주화 희생자들의 명예회복 조치다.이를 위해 민주화운동 단체들은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시급한 것은 희생자 합동묘역 조성.현재 마석 모란공원묘지,망월동 구묘역,부산 솥밭산공원묘지 등 전국에 흩어져 있는 희생자 묘지를 한곳으로 모아 성역화해야 한다는 것이다.기념관도 만들어 유품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기념탑이나 위령제를 개최해야 한다.교과서에 이들의 활동을 수록하고 기념일도 제정,역사의 교훈으로 남기는 방안도 추진되고 있다. 일제시대 독립지사들을 국가유공자로 대우하듯 민주열사들도 유공자 예우를 받아야 한다는게 관련 단체들의 희망이다.‘민주유공자예우법’을 만들고 ‘열사공적사항심사위’를 설치,객관적 평가에 따른 대접을 하자는 것이다. □특별취재반 ▲특집기획팀=羅潤道 팀장.李昌淳·李穆熙 차장.金聖昊·任昌龍 기자
  • 전국민의 5·18로(사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오늘로 18주년을 맞는다.올해는 어느해보다 다채로운 기념행사가 마련돼 망월동 묘지에 참배객이 줄을 잇는 등 추모열기가 고조되고 있다 한다.5·18이 법정 기념일로 지정돼 공식적인 정부행사가 열리기는 지난해부터지만 오늘은 광주 민주화운동의 한복판에 있었던 金大中 대통령이 50년만의 정권교체를 이룬 후 처음 맞는 기념일이다.따라서 광주 시민들로서는 어느해보다 뜻깊은 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올해는 5·18이 광주 시민들만의 기념일을 벗어나 전국민의 기념일로 역사속에 자리매김 되는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朴正熙 대통령의 시해(弑害)로 초래된 권력공백기에 불법적으로 집권을 꾀하던 신군부 세력을 거부하며 민주화를 요구,80년 5월18일부터 27일까지 계속된 광주 민주화운동은 신군부 세력이 집권하는 동안 ‘폭동’으로 규정됐다.‘문민의 정부’에 들어서서야 ‘민주화 운동’으로 재평가받고 학계 등 일부에서는 4·19와 맞먹는 민중항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그러나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이해는 지역적으로 아직 편차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지금 내리기에는 金대통령이 5·18의 직접적인 당사자이고 지역주의라는 현실적 벽이 있기 때문에 어렵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바로 그 두가지 이유로 인해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그동안 왜곡돼 왔다는 점에서,지금이 감추어진 진실을 밝히고 5·18을 국민적 기념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기회라고 우리는 본다. 5·18의 실체는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이 광주·전남지역 사람들의 생각이다.그들이 군화발에 짓밟히며 신음할 때 당시 신문과 방송은 광주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양했고 형제와 자식의 시체를 옆에 두고 평화적 질서를 지킬때 광주 시민은 폭도로 묘사됐다.金대통령은 지난 15일 광주지역 방송과의 합동 회견에서 “5·18과 광주의 위대함은 비폭력”이라고 규정했지만 지금도 광주·전남 이외의 지역에서 5·18은 무질서와 폭력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없지 않다. 따라서 시민에 대한 발포명령자,정확한 사망자 숫자,참혹행위 등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사실 규명이 철저히 이루어지고 5·18의 진실이 널리 알려져야 한다.광주 민주화운동이 이나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시민들의 궐기이고 항쟁이며 광주의 울타리를 넘어서 우리 국민 전체의 역사가 되도록 ‘국민의 정부’에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 가감없는 실체 규명을/許萬鎬 경북대 교수·정치학(기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올해로 18주년을 맞이한다.이제 ‘광주폭동’과 같은 왜곡담론은 어느정도 시정되었다.그리고 5·18은 국가기념일이 되고 5·18 특별법도 제정되었다.그러나 5·18에 대한 이해들은 아직도 상당히 왜곡되어 있다.그리고 그것은 지역간에 상당한 편차를 보이고 있다.그간 5·18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들이 끊임없이 경주되어 왔지만 아직 중요한 부분들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가장 심각한 문제는 5·18이,올바른 사회적 담론이 형성되지 못한 채 역사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간 5·18에 대한 담론의 변화과정은 한국의 민주화 과정과 궤를 같이해왔다.점진적인 한국정치의 민주화와 함께 ‘폭동’이 ‘민주화운동’으로 자리하게된 것이다.이러한 ‘민주화론’과 더불어 5·18은 운동의 계승과 승화·발전 과정속에서 새로운 담론들을 확대·재생산해왔다.이른바 민족의 실질적인 ‘자주화’와 분단된 조국의 ‘통일’ 및 ‘국민통합’의 담론들이 그것이다.그중에서도 ‘실질적 민주화’는 가장 핵심적인 담론으로서 여타의 모든 다른 세부 담론들을 규정할 수 있는 요체로 자리하고 있다. ○국민정부와 시대적 과제 이렇듯 현재적 의미에서 제시된 5·18담론의 정치사회화 자체가 5·18의 실체를 규정하는 것이고 그것이 현재적 과제로 남아있는 진상규명을 마무리 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이것은 바로 현 金大中 정부의 역사적,시대적 과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5·18은 한국의 근현대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국민대중의 숭고한 애국의 역사다.그것은 분명 국헌문란을 일삼은 독재집단에 대한 국민대중의 애국 열정이었으며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이었다.강조되어야할 것은 바로 5·18의 역사성이다.국민대중의 숭고한 애국의 역사인 5·18이 더이상 정치권력의 이해관계에 근거한 정치적 협상이나 타협물 내지는 정치적 고려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참된 역사성 부여해야 그 누구보다 광주항쟁 당시 ‘준가해자’의 위치에 있었던 언론이 자기반성적 자세로 이에 적극 나서야될 것이다. 본 현안에 대한 가장 강력한 규정력은 역시 현 金大中 정부의 역할에 있다.그리고 그것은 金大中 정부의 올바른 역사의지와 시대정신에 달려있다.5·18은 80년 당시도 그러했지만,80년대의 변화·발전과정 속에서 이미 광주만의 문제가 아니며 전체 한국민중의 숭고한 애국의 역사로 자리하고 있다.역사적 사실에 참된 역사성을 부여하지못하고 이를 정치적 고려나 타협에 의해 각색하는 민족은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는 불행한 민족이다.그런데 지금까지 5·18은 현실정치권의 논리에 빠져 정치적 고려나 타협의 대상으로 전락해 있었다.5·18의 참된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서는 이제라도 정치권력이 실천의지를 가지고 가감없는 실체 규명에 나서야한다. 金大中 정부가 5·18의 직접적 당사자이고,지역주의라는 크나큰 현실적 벽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참과 거짓이 바뀌어 있었던 왜곡의 역사를 바로잡고 묻혀 있었던 민주의 역사를 발굴하여 그 진실을 밝혀간다는 관점에서 5·18의 해법들을 풀어간다면 그러한 노력들은 윤리적 정당성을 국민들로부터 획득하여 현실적 장애들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 망월동 르포­5·18 光州민중항쟁 18주년

    ◎차분한 추모행렬 “恨 잊을수 있나요”/망월동에만 플래카드 걸려/금남로선 지하철공사 소음 광주는 조용했다.50년만의 정권교체,金大中 대통령의 집권후 첫 5·18을 맞은 광주의 모습은 다른 지역 사람들의 예상과 달랐다.망월동 묘역을 빼고는 5·18 관련 플래카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5·18 18주년을 앞두고 하루 수천명의 추모 인파가 줄을 잇는 망월동 신·구묘역.그곳에서 만난 郭성환씨(45·자영업).“그동안 5·18만 되면 광주가시끄러웠던 것은 과거 정권탓이지요.가장 큰 피해자인 金大中 대통령이 취임했으니 시끄러울 이유가 있나요” 계엄군과 시민·학생 사이에 유혈공방이 벌어졌던 금남로,전남도청,전남대 교정도 5·18의 긴장된 느낌은 없었다.금남로에는 지하철공사가 한창이었다.전남대 등 광주지역 5개 대학 총학생회장단과 조선대 교수협의회는 5·18 기간중 폭력화할 수 있는 한총련 집회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18년전의 피맺힌 한이 어찌 쉽게 잊혀질까.전주에서 교회 신자들과 함께 처음 망월동 참배를 왔다는 金희선씨(여·43)는 묘비를 살피며 눈시울을 붉혔다.‘어머니,조국이 나를 부릅니다.민주 정의 자유를 위해 앞서 갑니다’,‘여보,당신은 천사였오,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애끓는 묘비명들에는 아직도 못다한 사연들이 절절이 배어있다.金씨는 “어린 생명까지 이토록 잔인하게 죽이다니…”라며 말을 잇지못했다. ‘5·18 연구소’ 朴秉基 상임연구원은 ‘광주의 차분함’은 ‘망각’이 아니라고 풀이했다.한 단계 승화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그는 “이제는 5·18이 지닌 보편적 가치,즉 민주주의·인류애를 실증적 연구를 통해 확산시키는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5·18의 전국화’를 바라는 광주시민의 염원이 담긴 것이 바로 망월동 구묘역의 돌탑과 신묘역의 헌수탑.전국 각지의 참배객이 작은 돌 하나씩 들고와 쌓은 탑이 이제 1m 높이에 이르렀다.묘역 헌수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명단도 빠르게 늘어가고 있다. 5·18 묘역 입구 표지석은 광주시민들이 정부에 가진 바램을 대변한다.길이 6.8m,높이 4m,무게 33t의 화강암으로 우리나라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5·18 묘지’라고 씌여진 표지석의 왼쪽 부분은 비어있다.‘국립’이라는 명칭을 써넣기 위함이다.5·18기념행사위 李基洪 위원장은 “묘역의 국립묘지 승격,5·18정신의 교과서 수록,국가차원의 전국적 기념식 거행 등이 뒤따라야 한다”고 촉구했다.올해 5·18 기념사업은 사상 처음으로 통합추진되고 있다.기념재단이 주축이 된 행사위원회를 만들었다.차분하고 내실있는 행사추진이 가능한 연유다. ◎곳곳에 남겨진 상흔/1천여명 부상·고무 후유증 시달려/金來香양 18년째 ‘휠체어 신세’… 올 대입 도전 “약사가 돼 나처럼 고통받는 사람을 돕고 싶습니다.” 5·18 당시 두차례 척추 관통상을 입고 휠체어에 18년째 몸을 의지하고 있는 金來香양(22)은 영문도 모른채 불구자로 운명지어체적 진실이 하루빨리 밝혀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문학속의 5·18/대하소설 봄날 “절규가 희망으로”/대부분 詩로 분노 표출… 제도 폭력 허위 고발 광주민주화항쟁은 여전히 진실규명이 미흡한채 세월과 함께 과거의 바다로 흘러가고 있다.문학속에서도 광주의비극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해왔다.그러나 임철우씨의 장편소설 ‘봄날’에서 마침내 ‘광주의 진실’이 총체적으로 형상화되어 한국인의 보편적 역사 흐름의 한 장으로 기록되고 있다. ‘봄날’은 왜곡된 정치형태 탓에 ‘광주정서’라는 감정적 모습으로 호도된 광주항쟁을 정면으로 다룬 최초의 장편소설이다.임철우(한신대교수)씨는 당시 전남대 휴학생으로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대하소설 봄날이 지난 2월,5권으로 완성되기 전에도 광주항쟁을 다룬 작품은 많이 발표됐다.상징과 은유라는 특성을 갖고 있는 시는 정치적 금기의 상징이었던 광주를 다루는데 소설보다 자유로웠다.광주항쟁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있던 80년 6월 김준태의 장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가 발표됐다.그후 광주 비극에 분노하는 시가 쏟아져나왔다.광주의 5월을 다룬 첫 소설로는 윤정모씨의 단편 ‘밤길’이 85년 발표됐다.그 2년후 ‘80년 5월 광주항쟁 소설집’이라는 부제가 붙은 ‘일어서는 땅’이 출간됐다.그러나 이러한 작품들은 사태의 본질에 제대로 접근하지못하고 역사적 진실을 우회하는 형식을 취하는 한계성을 드러냈다.판도라의 상자격이었던 광주 진상에 대한 통제 때문이었다.‘봄날’은 그러나 참담한 살육의 현장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며 광주항쟁 열흘동안의 처절하고 비극적인 모습을 장대한 한편의 드라마로 만들었다.시민들의 항쟁을 체계적으로 논리화하는 등장인물 윤상현은 현실에서 패배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라고 말한다.대학생으로 나오는 명기도 “인간과 삶을 향한 소망을 배워가리라” 다짐한다.그래서 이 소설은 ‘눈부시게 맑은,늦은 봄날의 아침’으로 끝난다.작가가 고발하고자 하는 권력에 의해 조작된 제도적 폭력이 사라지고 의식의 허위성이 제거된다면 광주의 5월은 찬란한 ‘봄날’로 빛날 것이다. ◎宋基淑 5·18 연구소장/“진실 밝히고 올바른 평가 내려야”/발포명령자 규명­군기록 보존 중요 광주문제라면 말도 꺼내기 힘들었던 5공시절부터 5·18이 제대로 평가받는데 앞장섰던 宋基淑 전남대 교수(5·18 연구소장)는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을 밝히고,그 진실을 바탕으로 5·18을 정치사회적으로 올바르게 평가하는 것”이라며 ‘5·18의 학문적 객관화’를 강조했다. ­5·18 18돌을 맞는 의미는. ▲지금까지는 정부주도의 배상논의가 주를 이뤘습니다.또 기념사업,망월동 묘역 단장도 기대만큼 이뤄졌다고 봅니다.5·18을 역사의 생생한 기록으로 남기려면 관련 자료를 챙겨 정리하는게 중요합니다.진실의 핵심은 발포명령자를 가리는 것인데 아직 전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80년 당시 군기록중 소멸시킨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현재 있는 것이라도 솔직히 공개하고,군사비밀로 분류되어 있다면 존재만이라도 확인해 두었다가 10∼20년뒤라도 공개해야 할겁니다. ­5·18의 전국화,세계화가 시급하다는 지적입니다. ▲그렇습니다.5·18은 광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때문에 5·18을 4·19,제주 4·3항쟁 등 국내의 다른 민중항쟁뿐 아니라 중국의 천안문사태,대만의 고웅사태 등과 비교연구하는게 필요합니다.나아가 아르헨티나 칠레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등 중남미국가들과의 비교도 필요하다고 봅니다.일부 남미국가들이 민중혁명에 실패,군사정권이 재등장하는 과정을 반추해보면 잘못된 역사의 반복을 막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金大中 대통령정부에 바라는 것은. ▲金대통령에게는 큰 부담을 주지않으려는게 이곳(광주·전남)의 정서인것 같습니다.金泳三 전 대통령때는 큰 소리쳤었는데….(웃음)사회단체들에서는 5·18 묘역의 국립묘지 지정,5·18관련 교과서 내용 재정리를 요구하고 있고,앞으로 정부도 이것들을 추진하리라 생각합니다. ◎5·18 광주민중항쟁 이란 5·18 광주민중항쟁은 1979년 유신독재를 자행해온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로 초래된 권력공백기에 불법적으로 집권을 꾀하려는 신군부세력을 거부하며 민주화를 요구,1980년 5월18일부터 27일까지 계속된 광주시민들의 봉기를 가리킨다.현재 정부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을 공식용어로 사용하고 있으나 5·18단체들을 비롯한 다수 학자들은 시민·학생들의 자발적 미주화 투쟁을 부각시키는 뜻에서 ‘5·18 광주민중항쟁’으로 부록 있다. □특별취재반 ▲특집기획팀=羅潤道 부장(반장),李昌淳·李穆熙 차장,金聖昊·任昌龍 기자 ▲전국팀=金守煥·崔治峰 기자
  • DJ납치사건 정국 새 화두로 부상

    ◎“처벌 안하되 진상 꼭 밝힌다” 분명한 의지/국회청문회 형태로 역사적 차원서 규명 ‘김대중과거사’의 진상규명이 정국의 화두로 떠올랐다.김대중 대통령당선자는 19일 기자단 오찬에서 73년 ‘김대중 도쿄납치사건’에 대한 단호한 해부 의지를 밝혔다.이에 따라 새정부 출범후 어떤 형태로든 이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이 추진될 전망이어서 향배가 주목된다. 과거정권에 의해 김당선자가 피해를 입은 대표적 사건은 ‘도쿄납치사건’과 80년 신군부의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이들 사건에 대한 김당선자의 인식은 ‘처벌은 않되,진상은 밝힌다’는 것이다.이날 오찬에서도 김당선자는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다.그러나 진상을 밝히는 것이 이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고 ‘정치보복’과는 분명한 선을 그었다.5·18민주화운동이나 최근 경제청문회에 대한 생각과 같은 맥락이다. 이들 사건은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증언과 관련문헌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실체가 드러나 있다.그러나 일부 왜곡돼 있고 미흡하다는 것이 김당선자의생각이다.도쿄사건에 대해서도 김당선자는 납치사건이 아닌 살해미수사건으로 보고 있다.김당선자의 진상규명 의지는 이처럼 잘못 알려진 실상을 바로잡고,사건의 성격을 공식적이고 역사적인 차원에서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향후 진상규명작업이 어떤 형태가 될 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다만 도쿄사건은 국민회의 주도로 국회 차원의 청문회 형태가 될 공산이 크다.박지원 당선자대변인도 이날 “당 차원에서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 이런 관측을 뒷받침했다.80년 내란음모사건은 재심청구를 통한 사법적 차원에서 이뤄질 전망이다.이해찬 인수위정책분과간사는 “특별법 제정이나 형사소송법 개정을 통해 재심을 청구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김대중과거사의 실체규명 작업은 국내외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당장 도쿄사건은 일본 정부와 직결돼 있다.당시 일본은 자국내에서 사건이 발생하자 우리 정부에 강한 유감의 뜻을 밝히고 진상규명에 적극 나섰으나 박전대통령측의 무마작업과 이듬해 터진 문세광사건으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박대변인은 이와 관련,“필요하다면 양국 정부간 협력도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내란음모사건은 일단 재판자료를 바탕으로 한 사법부의 법률검토가 중심이 될 전망이다.경우에 따라서는 현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로 단죄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신군부세력이 다시 ‘역사’앞에 진술해야 하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 「12·12」 항소심 선고­시민반응

    ◎“역사와 법의 심판은 이미 끝나”/“역사바로 세우기 의지 퇴색 납득못해”/“국가발전 이바지 인정해줘야” 엇갈려 16일 열린 12·12 및 5·18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전두환·노태우 피고인을 비롯한 대부분의 피고인들이 감형되자 국민정서를 무시한 판결이라는 반응이 대체로 많았다.그러나 국민화합 차원에서 적절한 재판이라는 주장도 적지 않았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유재현 사무총장은 『12·12 및 5·18에 이르는 일련의 행위를 군사반란과 내란으로 규정하고 5공 전기간을 폭동의 연속으로 규정하면서도 관련 피고인에 대해 대폭 형량을 낮춰 선고한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은 『피고인들을 감형하게 된데는 재판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며 『법원의 판결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고 밝혔다.이어 『1심에서 전·노 두 피고인에게 사형과 징역 22년6월이 내려진 것으로 이미 역사와 법의 심판을 받은 셈』이라고 덧붙였다. 5·18 기념재단 전 이사장인 조비오 신부는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지만 실망을 금할 수 없다』며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역사를 왜곡시킨 자들은 일단 법의 영역에서 정의와 진실에 입각해 처벌을 해야 하는데 이러한 중대한 범죄를 항소심에서 감형시킨 것은 법의 권위를 실추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경북도의회 김수광 의장은 『국민들도 전직대통령이 사형선고를 받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라며 『이들이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는 인정해줘야 하며 국민화합차원에서도 이번 선고결과가 바람직하다』고 평가했다. 대구지방변호사회 정한영 변호사도 『항소심에서 형량이 줄어든 점은 법률적으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역사바로세우기를 요구한 국민들의 법감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 변함없는 헌정파괴 단죄(사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 등에 대한 12·12 및 5·18사건 항소심 공판에서 피고인들에 대한 반란 및 내란목적살인죄등이 대부분 유죄로 인정돼 각기 엄한 형벌이 선고됐다.헌정질서를 어지럽힌 행위는 시효에 구애받지 않고 엄정하게 단죄,앞으로는 물리적 힘에 의해 헌정이 중단되는 일은 결코 있을수 없다는 명쾌한 사법적 판단이 내려진 것이다. 전두환씨에 대한 1심 형량인 사형이 무기징역으로 낮춰지고 여타 피고인의 형량도 일부 경감되었지만 성공한 쿠데타를 추후 처벌하여 역사의 왜곡을 바로잡는다는 응징의 추상 같음에는 한점의 변화도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특히 재판부는 『헌법제정의 권한을 가진 국민이야말로 법률에 규정된 국가기관보다 더 중요한 존재』라고 전제,『국민이 헌법수호를 위해 결집한다면 이 결집은 헌법기관으로 볼 수 있고 이 결집을 병력을 동원해 강제진압한 것은 명백한 헌법기관침해』라고 국민의 저항권을 명시하고 앞으로 어떤 쿠데타든 결코 용인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로써 범죄행위의 사실여부를 따지는사실심은 종료되었다.대법원의 법률심이 남아 있지만 이미 5·18특별법의 소급입법 위헌성 여부 논란과 관련,헌법재판소가 합헌결정을 내린 바 있어 상고심에서 1·2심 판결의 핵심이 바뀔 가능성은 없다. 다만 전두환씨의 형량경감에 대한 비난이 없지 않으나 『6·29선언을 수용하여 민주회복과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하고,권력이양이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관행을 탈피한 점』을 참작한 재판부 판단에 무리는 없었다고 보며 전직대통령을 극형에서 면제해준 것은 국제적 배려,국민적 화합차원에서 수긍할 수 있는 판단이라고 본다.이제 피고인들은 진지한 반성의 자세로 판결을 수용하여 국민과 더불어 80년대의 슬픈 역사로 기록된 뼈저린 아픔을 씻어내고 치유하는 일에 여생을 바쳐야 할 것이다.
  • 「12·12」「5·18」 결심공판/검찰 구형 의미·평가

    ◎굴절된 현대사 바로 세우기/「성공한 쿠데타」 단죄… 악순환 “쐐기”/과거의 아픔 딛고 21세기 진입 발판/권력형부패·정경유착 차단 큰 교훈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이 연루된 12·12 및 5·18사건과 비자금사건에 대한 검찰의 구형이 마침내 5일 내려졌다. 검찰은 이들 사건을 반국가적이고 반역사적인 반란 및 내란으로 규정, 「법과 정의」의 이름으로 준엄하게 단죄했다. 전·노 피고인을 비롯, 16명의 피고인 모두에게 사형∼징역 10년의 중형을 구형했다. 특히 전두환·황영시·정호용 피고인에게는 전혀 개전의 정이 없다며 최고형을 내렸다. 이로써 검찰의 수사착수 2백48일, 재판 시작 1백47일만에 이들 사건에 대한 1단계 법적 처리가 일단락됐다. 검찰의 구형은 무엇보다 현대사를 굴절시킨 12·12 및 5·18 두 사건을 16년만에 법정에 세워 역사를 바로잡도록 한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역사의 한 획을 새로 긋는 셈이다. 12·12라는 「성공한」 군사쿠데타를 단죄함으로써 정치군인에 의한 하극상과 정권찬탈의 악순환이 더이상 재연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았다. 또한 무고한 광주시민의 목숨을 빼앗고, 국보위라는 무소불위의 초헌법적인 비상기구를 통해 내란에 성공해 탄생한 5공정권의 정통성 결여를 역사적으로 새삼 자리매김했다. 둘째로 우리 사회가 과거의 아픔을 딛고 21세기의 희망찬 선진사회로 나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권위주의적인 사회에서 민주적인 사회로 나가는 과정에서 두 전직대통령을 포함, 왜곡된 역사의 주역을 사법처리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내실을 다지고 깨어 있는 시민의식을 거듭 확인시켰다.한국의 민주화가 한단계 성숙했음을 대내외에 과시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부도덕한 지도자와 정권이 국리민복을 볼모삼아 수천억원의 뇌물을 챙기는 권력형 부정부패와 정경유착의 연결고리를 끊었다는 점 역시 이 사건이 주는 커다란 교훈이기도 하다. 전 피고인은 재임중 정치자금명목으로 무려 2천2백59억원, 노 피고인은 2천8백38억원의 뇌물을 재벌총수들로부터 챙겼다. 특히 전 피고인은 퇴임후 2천억원을 남겨 검찰 수사과정에서 3백89억원을 압수당하고도 아직 1천4백28억원을은닉하고 있다고 검찰은 밝혔다. 역사에 대한 참회와 개전의 정이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라는 설명이다. 검찰은 이와 함께 한때 이번 사건에 대해 내린 「혐의 없음」과 「공소권 없음」 결정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씻고 사법권확립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지위고하를 떠나 죄를 지으면 처벌받는다는 사회정의와 법치의 원칙을 확인시켜준 셈이다.그러나 검찰의 신뢰성제고라는 측면에서 더욱 분발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 이로써 이번 사건은 오는 19일 1심판결을 남겨두게 됐다. 주요피고인들은 반란 및 내란, 권력형 부정부패 등 사안의 성격으로 미루어 중형을 면하기 어렵다. 감경사유가 별로 없는 전 피고인은 사형, 노 피고인은 무기징역형 등 구형대로 선고받을 것으로 보인다. 유학성 피고인 등은 정상참작여하에 따라 최고 절반까지 형량이 줄어들 수도 있다. 2심의 첫 재판은 준비기간을 거쳐 9월 하순에나 열릴 전망이다.〈박선화 기자〉
  • 역사에 큰 획 그은 재판(사설)

    12·12 및 5·18사건과 관련,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에게 검찰의 중형이 구형됐다.여타 이 사건 관련 14명의 피의자에게도 역시 무거운 형이 구형됐다. 굴절된 헌정사를 바로잡으려는 문민정부의 결연한 의지,그리고 군사반란으로 민주화의 염원을 짓밟은 소수 정치군인의 배신행위에 대한 국민의 추상 같은 징치의 결의를 그대로 반영한 구형이 아닐 수 없다. 이제 판단은 사법부에 맡겨졌다. 민주화와 개혁의 조치로서도 세계적 유례가 없는 「성공한 쿠데타」에 대한 사후징벌인 까닭에 5개월여에 걸친 재판과정은 우여곡절도 많았다.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래 10수년 무소불위의 통치권을 행사해온 이들을 사후에 단죄하는 재판이 순탄하게 진행될 리 만무한 일이다. 피고인들이 반란죄를 전면부인하는 까닭에 10여년전에 벌어진 일에 대한 증거와 증언을 놓고 피고인·변호인과 검찰간 사사건건 힘든 줄다리기가 벌어졌다. 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를 정치재판으로 몰아가려는 피고인측의 출정거부, 변호인단 집단사퇴 등 재판흠집내기전술에 따라공판의 진행은 매끄럽지 못했다.또한 피고인측의 철저한 비협조와 최규하 전 대통령의 출정증언거부 등으로 정권찬탈의 경위, 광주항쟁 당시의 구체적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에서 다소 아쉬움을 남긴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12·12와 5·18이 군사반란이라는 핵심적 사실확인에 충분한 증거가 확보됐으며 공판도 법적으로 흠을 잡을 수 없는 절차로 진행됐다. 그러나 구형공판 최후진술에서도 드러났듯 피고인들은 전비에 대한 자성의 빛을 보이지 않았다. 민주화를 최고의 가치로 높이 세운 역사의 흐름, 이 시대의 정신을 깨닫지 못하고 과거의 환상속에 헤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검찰의 중형구형이 결코 두 전직대통령 등 특정개인에 대한 보복이나 감정적 응징으로 풀이될 수 없음을 지적한다. 또한 과거 정부와 그 구성원의 정당한 국가운영행위까지도 모두 부인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한다. 옳지 못한 방법으로 권력을 장악할 경우 훗날 반드시 정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교훈을 남기고 역사의 왜곡될 기록을 바로잡아 다시는 이 나라에 민주정부를 전복하는 군사반란이 없도록 한다는 것이 역사바로세우기의 기본취지인 것이다. 또한 정통성을 결여한 정권이 대기업에 특혜를 주고 그 대가로 정치자금을 만들어 정통성을 확보하려 정치권과 국가를 부패시켜온 금권정치의 악의 고리도 이 땅에서 뿌리뽑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전직대통령 등에 대한 사법처리로 국민은 가슴에 응어리져 내려온 과거의 한, 지역간의 갈등 등 지난날의 검은 족쇄에서 말끔히 벗어나야 한다. 바로세운 역사를 바탕으로 이제 국민 모두가 화합해 21세기 재도약의 새 시대를 여는 작업에 나서야만 할 것이다.
  • 전씨 사형·노씨 무기 구형/반란수괴·내란혐의 등 적용

    ◎전씨 2천2백억·노씨 2천8백억 추징/정호용·황영시씨 등 14명 무기∼10년형/전두환씨 최후진술­“과거 잘잘못 본인 책임 어떤 처벌이든 받겠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사형과 무기징역이 구형됐다. 서울지검 형사2부 김상희 부장검사는 5일 서울지법 형사합의 30부(재판장 김영일 부장판사)심리로 열린 12·12 및 5·18 사건 및 비자금 사건 결심공판에서 이같이 구형했다. 전 피고인에게는 추징금 2천2백23억1천6백66만원을, 노 피고인에게는 추징금 2천8백38억9천6백만원을 함께 구형했다. 전피고인에게는 반란 및 내란수괴·내란목적살인·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법의 뇌물수수 등 10개 죄목을, 노 피고인에게는 반란 및 내란중요임무종사·특정범죄가중처벌법의 뇌물수수 등 9개 죄목을 적용했다. ◎19일 선고공판 황영시·정호용 피고인에게는 반란 및 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죄 등을 적용,무기징역을 구형했다 이희성·주영복·허화평·허삼수·이학봉·유학성·차규헌·최세창 피고인 등 8명에게는 반란 및 내란중요임무종사죄 등으로 징역15년을 구형했다. 장세동 피고인은 반란중요임무종사로 징역12년을,박준병·신윤희·박종규 피고인 등 3명도 같은 죄목으로 각각 징역 10년을 구형받았다. 검찰은 논고문에서 「12·12 및 5·18 사건은 하극상에 의한 군사반란과 헌정질서를 파괴한 내란,비자금 사건은 사상 최대의 권력형 부정축재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이어 『총제적으로는 국가권력을 불법적으로 이용,군의 통수체계 및 민주헌정질서를 뿌리채 와해시키고 건전한 경제구조를 왜곡시킴으로써 국민에게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고 역사 발전의 수레바퀴를 오욕과 퇴보의 늪으로 떨어뜨린 반국가적·반역사적·비인도적·반민주적 범죄』라고 강조했다. 검찰은 『전 피고인은 반란 및 내란의 수괴로서 정권을 장악한 뒤 「정의사회 구현」을 외치는 등 도덕성과 청렴성을 표방하면서도 43개 기업체로부터 2천2백억원 이상의 뇌물을 수수했다』며 『그럼에도 일말의 뉘우침도 없이 억지와 변명으로 자신의 범행을 합리화하려는 태도로 일관하는 등 전혀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다』고지적했다. 검찰은 또 『노피고인도 12·12 및 5·18사건, 5공화국 출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로로 전피고인에 이어 대통령에 취임한 뒤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를 국정의 슬로건으로 내걸고도 2천8백38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뇌물을 받았다』며 『그런데도 겉으로만 사죄한다고 말할 뿐 실제로는 자신의 잘못을 숨기고 합리화하는데 급급했다』고 밝혔다. 전 피고인은 최후 진술에서 『현정권은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구호 아래 과거 정권의 법통과 정통성을 심판하고 있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실의 권력이 제아무리 막강하더라도 역사를 자의로 정리하고 재단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전 피고인은 이어 『본인의 부덕으로 본의 아니게 정책수행이 불투명해져 국민에게 불편과 피해를 준 책임은 전적으로 본인 한사람에게 있으므로 본인의 처벌만으로 국론분열과 국력의 낭비를 막을 수만 있다면 하는 바람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노 피고인도 최후진술에서 『국정의 책임을 맡았던 사람으로서 참담한 심정을 금할 길 없다』며 『그러나 역사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지 지울 수도 다시 쓸 수도 없는 것이며, 평가의 대상은 될 수 있어도 심판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어 『오래된 정치적 관행을 고치지 못한 점이나 수많은 자금을 명예롭게 처분하지 못한 점은 송구스럽지만 단한번도 뇌물이나 개인적인 축재를 위해 돈을 받은 적이 없고,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국선변호인인 김수연 변호사는 최후변론을 통해 『12·12 및 5·18 사건은 역사의 심판에 맡겨야할 사건이지 재판 대상이 될 수 없다』며 『더욱이 16년전의 사건이므로 이미 공소시효가 지났고,공소시효를 정지시킨 5·18 특별법도 소급입법금지의 원칙에 어긋나는 위헌법률』이라며 면소판결 또는 무죄를 선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인식 변호사도 전·노 피고인의 비자금 사건과 관련,『수뢰죄는 공무원이 직무와 관련해 뇌물을 받았다는 증명이 있어야 하는데도 검찰은 직무관련성을 전혀 명시하지 않았다』며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는 있지만 실정법규에는저촉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편 재판부는 이날 상오 5·18 당시 김경일 1공수1대대장(현역 소장)에 대한 증인신문과 피고인들에 대한 보충신문을 마쳤다.선고 공판은 오는 19일 상오 10시에 열린다.〈황진선 기자〉
  • 전씨 5·18 혐의벗기 안간힘/14차 공판 이모저모

    ◎“검찰은 수사를 정확히 해야” 직격탄도/“반대 신문 천천히” 재판부 이례적 주문 17일 열린 12·12 및 5·18사건 14차 공판에서는 최대 쟁점인 5·18사건에 대한 변호인 반대신문이 시작됐다.전두환피고인은 『검찰이 5·18사건의 엄연한 역사적 진실을 왜곡해 (나를) 정치적 속죄양으로 만들었다』고 포문을 열었다. ○…전피고인은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5·18사건의 중요성을 의식한 듯 『민족의 아픈 상처』,『광주시민들의 명예회복의 필요성』이라고 언급하면서 『이 사건이 정치적인 당리당략에 따라 검증되지 않은 논리로 휩쓸려 왔다』고 주장. 이어 『이 법정에서 5·18사건의 진실을 규명,민족의 아픈 상처를 아물게 함으로써 올바른 역사창조의 산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호소. ○…전피고인의 변호인측은 지난 해 말 5·18사건에 대한 검찰의 재수사가 시작될 당시부터 『가장 중요한 쟁점은 5·18사건』이라며 전피고인이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음을 입증하는데 총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공언. 이양우 변호사는 당시 모 월간지와의인터뷰를 통해 『5·18 특별법을 제정해 처벌할 수 있으면 하라.그러나 5·18사건 만큼은 한발짝도 양보할 수 없다』고 배수진을 쳤었다. ○…이변호사는 지난 해 7월 5·18사건에 대해 「공소권 없음」이라고 판정을 내린 검찰의 애초 결정을 검찰 공소사실에 대한 반박논리로 제시.이변호사는 『검찰이 새로운 증거의 제시도 없이 정치권의 논리에 따라 수사를 재개했다』고 검찰의 약점을 파고든 뒤 『원래의 수사결론을 뒤집은 것은 검찰권의 남용』이라고 주장. ○…전피고인은 온갖 수사적 표현을 동원,5·18사건의 혐의를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 『검찰은 수사를 정확하게 해야 한다』,『모함을 받으며 법정에 서게 되니 허망하고 분한 생각이 든다』는 등으로 검찰에 직격탄을 쏘는가 하면,『죄가 있으면 엄하게 처벌받고 없으면 처벌받지 않아야 한다』는 말로 결연한 의지를 내비쳤다. ○…이에 앞서 열린 5·17사건에 대한 변호인 반대신문에서 거규헌피고인은 『검찰조사로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 과거는 기억하지 못한다』,『6·25전쟁 때 맞은 총탄이아직도 몸에 박혀있다』는 등의 사유를 들며 재판부에 『노병으로 하여금 안정된 마음으로 사라질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고 호소. ○…15대 총선에서 옥중당선된 허화평피고인은 검찰이 범죄사실을 입증하는데 주요 참고인으로 불러 조사한 권정달·한용원 전 보안사 정보처장을 상대로 인신공격성 발언까지 서슴지 않으며 공박. 허피고인은 『5·16혁명에 관해 연구하라는 전두환피고인의 지시를 받았다는 한씨의 진술은 악의에 가득 찬 거짓말』,『한씨의 거짓말은 장군진급에 실패한 데 불만을 가진데서 비롯됐을 것』이라고 주장. ○…익히 알려진대로 달변의 허피고인은 변호인 반대신문을 통해 70·80년대의 군계보를 상세히 설명하며 검찰의 공소사실을 반박. 검찰측에 유리한 진술을 한 것으로 알려진 한 전 보안사 정보처장과 백동림 전 보안사 대공과 수사과장은 신군부측과 대립관계에 있던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의 직계로 하나회의 숙청작업을 진행했던 주역이라고 주장. ○…이학봉피고인은 전피고인이 대통령에 취임한 것과 관련,『정권장악은생각지도 않았으며 당시 치열한 정쟁으로 혼란한 시국을 하나하나 수습해 나가는 과정에서 국민의 지지를 받아 자연히 지도자로 부상된 것』이라며 전피고인을 한껏 추켜세우기도.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김종필 자민련 총재 등 당시의 「3김씨」에 대해서는 『정부측과 협의해서 헌법개정과 정치일정에 합의하지 않고 집권욕 때문에 내각 사퇴·계엄해제·거국내각의 구성 등을 요구했다』고 비난. ○…전피고인에 대한 변호인 반대신문 도중 방청석에 앉아있던 5·18사건 피해자 가족 10여명은 전피고인이 답변할 때마다 비난조의 말을 하거나 한숨을 내뱉어 재판장으로부터 『신문에 집중할 수 없다』는 따끔한 질책을 받기도. 이들은 하오 5시쯤 휴정으로 퇴정하는 전피고인 등을 향해 『사람을 죽이고도 웃고 있느냐』며 고함을 지르는 등 소란을 피워 법정경위가 강제로 퇴정조치. ○…5·18사건과 관련,전두환 피고인에 대한 변호인 반대신문에 앞서 검찰은 공소장 정정 변경허가 신청서와 석명서를 재판부에 제출. 검찰은 이 날 5·18사건에 대해 국헌문란과 「자위권 보유 천명=발포명령」이란 두부분에 대해 공소장을 변경. 이에 대해 변호인단은 『반대신문이 시작되기 전에 공소장 변경을 마쳐야한다』며 난색을 표명하며 설전을 벌일 태세였으나 재판부로부터 공소장 변경에 따른 변호인 보충신문 기회를 약속받고는 곧바로 5·18사건 반대신문을 진행. ○…하오 공판에서 김영일 재판장이 이학봉 피고인의 반대신문을 맡은 조재석 변호사에게 이례적으로 『좀 천천히 신문하라』고 주문하는 해프닝이 발생.이에 대해 조변호사는 『빨리 빨리 하라고 해서 빨리한다』고 답변해 방청석에 잠시 웃음. 재판장은 『너무 빨라 내용을 잘 들을 수 없을 정도』라고 맞받았고 조변호사는 지친 듯 신문을 석진강 변호사에게 인계.〈박은호 기자〉
  • 역사 바로세우기는 험로(사설)

    꼭 70일만에 또 한사람의 전직대통령이 수의차림으로 재판정에 섰다.노태우씨에 이어 피고인석에 선 전두환 전 대통령의 모습에서 우리는 국민들의 뼈를 깎는 자괴의 아픔,한서린 분노를 만나게 된다. 전씨는 우선 노씨와 같이 비자금문제,즉 특가법상 뇌물죄로 법정에 섰다.이들 두 전직대통령에게는 「원죄」라 할 12·12,그리고 5·18관련 재판이 별도로 준비돼 있다.79년 박정희 대통령시해사건 이후 문민정부 출범때까지의 역사에서 굴절됐던 대목들이 모두 심판대에 오르는 것으로 그 「주범」이랄 수 있는 전씨의 재판은 바로 역사바로세우기의 핵이 아닐 수 없다.때문에 전씨는 7천억원대의 비자금과 관련한 이번 재판은 물론 추후 12·12,5·18재판에서 모든 진실을 올바로 밝히고 역사 앞에 참회해야 할 의무를 국민들에게 지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전씨는 첫날 재판에서 뇌물임이 분명한 비자금에 대해서까지 총선자금,정치자금이라 강변하며 지난날의 그릇된 관행에 책임을 전가하는 떳떳지 못한 자세를 보였다.새삼 역사바로세우기가 얼마나 힘든 과업인가를 느끼게 했다.그러나 전씨는 민의를 억압할 수 있었던 때의 과오를 더 이상 덮어둘 수 없는 문민시대임을 한시바삐 깨닫고 참회의 자세로 재판에 임해야 한다.그것만이 국가와 자신을 위하는 길이다.아울러 이 시대를 이끌어온 정치권,그리고 사회 상층부도 자신들이 머리속 또는 가슴으로 과거시대의 공범이 아니었던가 고해성사하는 마음으로 함께 자성해야 하리라고 본다. 전직대통령 재판은 상당기간 계속될 것이다.그러나 우리는 감정에 치우쳐 과거를 들춰가며 서로 헐뜯고,자학하거나 파당적 이해로 시대의 흐름을 왜곡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자괴심과 분노를 털어버리고 이성으로 시시비비를 가려 하루빨리 역사를 바로잡고 후손들을 위한 국가대계를 세우는 일에 나서는 것만이 전직대통령들을 법정에 세운 아픈 교훈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는 길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 전씨 수사검찰발표

    ◎전씨 뇌물공여자·측근·친인척 등 430명 조사/집권후기 고위직 동원 대선자금 명목 거액 거둬/출처불명 비자금 조성 경위·은닉 재산 계속 추적 ▷수사경위◁ 1.수사착수배경 ○서울지방검찰청은 오늘 전두환전대통령을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 과한 법상의 뇌물수사 혐의로 공소제기하였음 ○검찰이 12·12사건,5·18사건의 수사와 병행하여 전두환전대통령의 뇌물수수사건을 수사하게 된 것은 ­동인이 지난 1988년 11월23일 국민여론의 지탄 속에 백담사로 출발하면서 「국민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대국민사과성명을 통하여 『연희동 집 두채,서초동 땅 2백평,용평콘도(34평)1개,골프회원권 2개,금융자산 23억원 및 여당총재로서 사용하다가 남은 잔액 1백39억원 등 자신의 전재산을 국고에 헌납하고 숨겨진 다른 재산이 있으면 어떠한 책임추궁도 감수하겠다』고 공언하였음에도 ­퇴임후 계속하여 측근들을 관리하는 등 그 씀씀이가 거의 달라지지 않아 「동인이 재직중 엄청난 규모의 비자금을 조성하였고 퇴직후에도 이를 은닉해 두었을 것」이라는세간의 의혹이 끊어지지 않고 있던 중 ­금융실명제 실시 이래 끊임없이 나돌았던 「정체불명 비자금설」및 「전직대통령 4천억원 비자금설」이 그 의혹을 더욱 증폭시키면서,마침내 지난해 10월 「노태우전대통령 부정축재등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전두환전대통령의 수뢰혐의와 관련된 구체적 자료들이 입수되었기 때문임. ­검찰은 이 사건 역시 노태우전대통령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 헌법사상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권력형 부정부패사건」임을 직시하고,그 진상을 낱낱이 밝혀 엄정하게 처리함으로써 국민적 의혹을 해소하고 아울러 정경유착의 폐해를 뿌리뽑아 왜곡되어 온 우리의 역사를 바로 잡겠다는 사명감에서 이 사건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를 개시하게 된 것임. 2.수사경과 ○이에 따라 서울지방검찰청은 ­1995년 12월7일부터 전두환전대통령의 뇌물수수와 관련,뇌물공여자인 기업체 대표 42명등 기업관련자 1백60여명을 조사하였고 ­수수된 자금의 조성 및 관리와 관련하여,전 청와대 경호실 경리과장 김종상,전 은행감독원장 이원조를 비롯하여 전두환전대통령의 측근,친·인척,금융기관 관계자등 2백70여명을 조사하였고 ­압수수색영장에 의하여 1백83개의 시중 금융기관 계좌 및 5백50매의 채권증서등을 대상으로 광범위한 자금추적을 실시함과 아울러 ○전두환전대통령 본인에 대하여도 6회에 걸쳐 심문,조사를 실시하였음. ▷금품수수◁ 1.수수규모 ○전두환전대통령은 검찰이 특별수사부 검사 6명등 수사력을 집중투입하여 추적의 강도를 더해가자 수수금원의 조성경위에 관하여 『재임기간중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까지 포함한 기업체의 대표들로부터 일해재단·새세대육영회 기금,새마을성성금의 모금등과는 별도로 자금 7천억원 상당을 수수하였다』는 취지의 진술을 하였음. ○이에 따라 검찰은 금원 재공자,뇌물성 여부,자금의 행방등을 철저히 수사하였으나 ­범행후 15년 내지 8년 이상이 경과되어 관계자료의 폐기,보유 금융자산의 무기명 내지 가·차명화,관련자의 소재불명,기억소멸등으로 수사에 어려움이 있어 그 정확한 액수와 성격은 계속 추적중에 있고 ­현재까지 증거를 바탕으로 뇌물죄의 성립을 밝혀낸 금액은 기업체 대표 42명으로부터 최고 2백20억원,최저 2억원을 교부받아 조성한 총 2천1백59억5천만원임 *전두환전대통령은 위 7천억원과 별도로 기업인들을 상대로 새마을성금 1천4백95억여원,일해재단 기금 5백98억원,새세대육영회 찬조금 2백23억원,심장재단 기금 1백99억원 등 합계 2천5백15억원의 각종 성금 및 기금등을 조성함으로써,동인이 제5공화국 기간동안 기업인들로부터 거두어들인 금액은 총9천5백억원을 상회함. 2.기업 등으로부터 공여된 자금의 성격과 형태 ○전두환전대통령이 기업인등으로부터 수수한 위 2천1백59억5천만원은 기업체 대표등으로부터 특정사업의 수주나 세금의 감면등 이권과 관련하여 대통령의 권한 또는 영향력행사에 대한 대가로 제공되었거나 포괄적으로 기업경영과 관련하여 선처해 달라는 등의 취지에서 제공된 것으로서,모두 대통령의 직무와 관련하여 수수한 뇌물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바 ○동인은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행정각부의 장들을 지휘·감독하여 각종 재정·경제정책을 수립,시행하는 과정에서 국책사업자 선정,신규사업의 인·허가,금융지원,세무조사 등 기업활동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직무와 지위에 있음을 이용하여 ○주로 기업체 대표들을 은밀히 단독으로 만나 특정사안에 대하여 특혜를 부여하거나 해당기업의 현안문제에 관심을 표명하는 등의 방법으로 거액의 금품을 수수하였으며,이를 대별하여 보면 첫째,뇌물공여기업측이 공사발주등 특혜를 받은 사안으로 ­1986년 12월께 청와대 인근 안가에서,동아그룹 회장 최원석으로부터 4회에 걸쳐 1백80억원을 수수하였는바,동아그룹은 전두환전대통령 재임중 인천매립지의 정부매수 회피,원자력발전소 건설,댐 건설등 대형 국책공사를 수주하였고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으로부터는 7회에 걸쳐 2백20억원을,전 삼성그룹 회장 이병철로부터는 8회에 걸쳐 2백20억원을,대우그룹 회장 김우중으로부터는 6회에 걸쳐 1백50억원을 각 수수하였는바,이들 기업들 역시 고속도로 건설공사수주,차세대 전투기 사업,반도체 사업,율곡사업등 각종 대형 이권사업에 본격진출한 것으로 나타났음. 둘째,세무조사등 선처명목으로 기업체 대표 등으로부터 금품이 공여된 사안으로 ­미원그룹 회장 임창욱은 1986년 12월경 청와대 대통령집무실에서 70억원을 전두환전대통령에게 공여하고 조사중이던 세무조사와 관련,부과추징되어야 할 세금 2백억원을 감면받은 사실등이 확인되었으며 셋째,한진그룹 회장 조중훈으로부터는 1983년 10월께 청와대 인근 안가에서,그무렵 소련영공에서 발생한 대한항공 소속 케이이(KE)007 여객기 격추사고에 대한 불이익 방지의 취지로 제공하는 30억원을 교부받은 것을 비롯하여,김포공항 여객기 추락사고에 대한 무마등 명목으로 5회에 걸쳐 1백60억원을 수수하였는바,이는 사건·사고에 따른 불이익 방지차원에서 제공된 뇌물이라 할 것이고 넷째,각종 인·허가와 관련하여서도 금품이 제공되었는 바 ­1984년 11월 하순경 청와대 대통령집무실에서,국제그룹 회장 양정모로부터 통도골프장 건설 내인가를 해주어 사업승인을 받도록 영향력을 행사하여 준 데 대한 대가로 3개월 만기의 10억원권 약속어음 1매를 교부받은 것을 비롯하여,골프장 설립과 관련하여 애경그룹 회장 장영신 등 4개 기업체의 대표로부터 합계 45억원을 수수한 것이 그 예라 할 것임. 끝으로,기업경영에 수반되는 각종 금융·세제,국책사업 참여등 기업전반의 경영상의 불이익 방지 차원에 선거자금 명목으로 제공된 뇌물의 예로는 ­전두환전대통령은 특히 집권후기에 이르러 안현태전경호실장,안무혁전국가안전기획부장,사공일전재무부장관,이원조전은행감독원장등 고위공직자들을 동원하여 중소기업에 이르기까지 대선자금 지원 명목으로 거액의 자금을 집중적으로 수수한 사실등이 이에 해당됨. *기업체별 뇌물수수내역은 별첨 3.뇌물수수의 방법 ○전두환전대통령은 청와대 경호실장 등으로 하여금 기업체 대표들과의 비공식 면담을 주선하게 하여 본인이 직접 뇌물을 수수하거나,국세청장·은행감독원장·안기부장등에게 지시하여 기업인등으로부터 자금을 조성하게 하였는 바 ○현재까지의 수사결과 밝혀진 뇌물수수의 방법중 특이한 경우로는 ­경호실장 안현태가 위와같이면담을 주선하여 전두환전대통령이 수수한 금액은 4백억원,경호실장 장세동의 주선으로 수수한 금액은 2백억원 ­국세청장 성용욱,국가안전기획부장 안무혁등으로 하여금 조성하게 하여 수수한 금액은 1백14억5천만원 ­은행감독원장 이원조의 주선으로 수수한 액수는 30억원으로 밝혀졌음. 4.조성관여자들의 행위 ○안현태(전청와대경호실장) ­1985년 2월20일부터 1988년 2월25일까지 청와대 경호실장으로 근무하면서,전두환전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대기업 회장들에게 금원을 제공하도록 적극적으로 권유하거나 전두환전대통령과의 비공식 단독면담을 주선하는 방법으로 ­1985년 7월부터 1987년 10월까지 동아그룹 회장 최원석등 9개 기업체 대표들로 하여금 전두환전대통령에게 합계 4백억원을 제공하게 하였고 ­1986년11월 하순경 미원그룹 회장 임창욱으로부터 당시 미원그룹에 대하여 실시하고 있던 국세청 세무조사와 관련하여 대통령에게 세금감면을 부탁할 수 있도록 면담을 주선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5천만원의 뇌물을 수수하였음. ○성용욱(전국세청장) ­1987년 5월27일부터 1988년 3월5일까지 국세청장으로 근무하면서 기업체 대표들이 자신의 요구를 쉽게 거절할 수 없는 점을 이용하여 ­1987년 10월경 대한전선그룹 회장 설원량으로부터 세무업무와 관련하여 선처하여 달라는 취지로 제공하는 15억원을 교부받은 것을 비롯하여 11개 중견 기업체 대표들로부터 합계 54억5천만원의 뇌물을 교부받아 전두환전대통령에게 대선지원금으로 상납하였고,2개 기업체 대표들로 하여금 전두환전대통령에게 합계 60억원을 제공하게 하였음. ○안무혁(전국가안전기획부장) ­1987년 5월27일부터 1988년 5월7일까지 국가안전기획부장으로 재직하던중 1987년 10월경 전두환전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국세청장인 성용욱으로 하여금 위와같이 11개 기업체 대표들로부터 합계 54억5천만원의 자금을 조성하게 하였음. ○사공일(전재무부장관) ­1987년 5월26일부터 1988년 12월4일까지 재무부장관으로 재직하던중 1987년 8월께 전두환전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대농그룹 회장 박용학등 5개 기업체 대표들로 하여금 합계 1백억원을 제공하게 하였음. ○이원조(전은행감독원장) ­1986년 1월13일부터 1988년 4월15일까지 은행감독원장으로 재직하던중 1987년 8월경 전두환전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코오롱그룹 회장 이동찬등 2개 기업체 대표들로 하여금 전두환전대통령에게 합계 30억원을 제공하게 하였음. ▷자금관리·사용◁ 1.재직중의 관리 ○전두환전대통령은 재직중 위와 같이 조성한 자금을 본인이 직접 총괄하면서 1985년 2월24일경까지는 경호실장 장세동에게,그 이후는 경호실장 안현태에게 각 관리하도록 지시함과 아울러 당시 총무수석 이재식 및 경호실 경리과장 김종상으로 하여금 은행,신탁회사 등 금융기관의 입·출금업무를 전담하게 하였음. ○김종상이 관리한 예금계좌에서는 ­한국·대만·국민 등 3개 투자신탁회사와 서울·조흥·제일·신한 등 8개 시중은행 38개 점포에서 「경호실」,「박경호」,「김경호」등 가명을 사용하여 거래하였음이 판명되었다. ­자금의 관리방법으로서 최대한 외부노출을 피하면서도 높은 수익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매회 20억원 내지 50억원을 수억원 단위로 나누어 금리가 높은 개발신탁예금,수익증권정축,기업금전신탁,정기예금으로 분산예치하거나 양도성예금증서(CD)또는 무기명채권 등을 매입하면서 이자소득세가 면제되는 「경호실」등 기관의 사업자등록번호를 위장사용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1987년 4월중순경부터 그해 12월말까지 대부분 1천만원권 또는 1억원권 고액수표로 집중 인출되어 무기명채권 구입자금으로 사용되었음. ○한편 전 청와대 총무수석 이재식은 김종상이 관리한 규모 이상의 자금을 관리하면서 투자신탁회사의 장·단기 공사채 매입에 깊이 관여한 것으로 추정되자,1995년 12월14일 검찰이 김종상에 대한 조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수사에 돌입하자 같은 날 캐나다로 출국,도피하여 동인이 관리해 온 자금 전부를 규명하는 것은 상당한 기간이 소요될 전망임. 2·자금의 사용 및 퇴임후 남은 돈의 관리 전두환전대통령은 위 7천억원 상당의 조성자금에 대하여 구체적 사용항목의 진술을 거부하면서 ­퇴임시까지 친·인척 관리자금,정당 창당자금 등으로 사용하고 남은 자금은 약1천6백억원 상당이고 ­그 내역은 한국산업은행 발행 산업금융채권 약9백억원,장기신용은행 발행 장기신용채권 약2백억원,현금 및 예금 약5백억원 등 항시 처분가능하고 유동성 있는 금융자산으로 보유해 왔다고 주장하고 있음. ○검찰은 위와같이 전두환전대통령이 현재 채권과 예금 등 상당액의 금융자산을 보유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사용처와 보유형태 등에 대하여는 밝히기를 거부하면서 자료제출 요구에 불응하고 있어 자금의 구체적인 사용처 및 현 보유재산 은닉상황 등을 밝히기 위하여 김종상이 관리한 계좌 및 퇴임전후에 매입한 금융채권 등을 중심으로 계속 추적중에 있음. ▷관련자 조치◁ ○뇌물수수자인 「전두환전대통령」에 대하여 ­1996년 1월12일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 관한 법률위반(뇌물)으로 추가기소하고 ­동인의 현 보유재산 상황을 파악,「공무원범죄에 관한 몰수특례법」에 따라 몰수·추징의 보전청구를 할 방침임. ○뇌물수수를 방조하거나 수수한 뇌물을 상납한 관련자중 ­그 죄질이 중한 안현태·성용욱은 각 같은 날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 관한 법률위반(뇌물)등으로 구속기소하고 ­안무혁은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 관한 법률위반(뇌물)의 공범으로,사공일·이원조는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 관한 법률위반(뇌물)방조로 각 같은 날 불구속기소하며 ­장세동은 1984년 12월 이전의 범행으로 공소시효 완성되어 불입건 조치하였음. ○뇌물공여 기업체 대표들에 대하여도 공소시효 완성으로 법리상 처벌이 불가능하여 불입건 조치하였음. ▷향후 수사 계획◁ ○검찰은 그동안 우리나라의 정치·경제·사회적 근간을 뿌리채 흔들어 놓은 전직대통령 등의 부정축재와 정경유착 등 비리를 과감히 척결함으로써 흐트러진 국가기강을 바로 잡겠다는 역사적 소명의식 아래 최선을 다하여 수사에 주력해 왔음. ○그러나 전두환전대통령이 아직도 모든 진실을 털어놓지 아니하고 있고 자금추적에 어려움이 따르는 등 전체적인 진상확인에는 장시간이 소요될 전망이므로 일단 전두환전대통령을 비롯한 일부 자금조성 관여자들을 우선 기소하고 ○앞으로도 계속 수사력을 집중하여 아직까지 명백히 밝혀지지 아니한 이 사건 자금의 나머지 조성경위와 자금의 사용처 및 현재의 보유재산 은닉상황 등을 계속 수사해 나갈 것임.
  • 국회의장·대법원장·여야 대표 신년사

    ◎황낙주국회의장/“역사 바로세우기 대과업 완성” 지난해 우리는 참으로 가슴아픈 대형참사를 겪었으며 전직대통령이 연이어 구속되는 부끄러운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는 왜곡된 역사를 바로 세워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기틀을 마련했고 국민소득 1만불을 달성하는 경제발전을 이룩하였습니다. 새해에는 지속적인 개혁과 안정속의 경제발전을 동시에 추구해야 하며 특히 역사를 바로 세우는 거대한 과업을 완성하여 정의와 진실이 살아있는 역사의 새 지평을 열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제를 막힘없이 추진하기 위해서는 정치가 안정되어야 합니다.무엇보다도 4월에 실시되는 총선에서 공정하고 깨끗한 선거풍토가 뿌리내리도록 국민 한사람 한사람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윤관대법원장/“국민사법복지혜택 증진에 최선” 국민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고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법과 질서의 확립이 필요합니다. 사법부가 공정한 재판을 통해 법과 정의의 실현에 최선을 다하고 국민이 사법부의 권위와 법관의 판단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정착될 때 비로소 사법부는 튼튼해지고 이땅에 법치주의는 뿌리를 내릴 것입니다. 지난해는 근대 사법제도가 도입된 지 1백년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우수한 법조인력 확충의 기반도 조성했습니다. 사법부는 앞으로도 질 좋은 재판과 봉사기회의 확대를 통해 국민 여려분의 자유화 평등을 지키고 온 국민이 사법복지의 혜택을 골고루 누릴 수 있도록 더욱 더 노력할 것입니다. ◎김윤환신한국당대표/“안정바탕 민생개혁 지속적 추진” 지난해에는 구시대적 정치악습을 단절하고 지난 역사의 응어리를 풀었다는 점에서 이제 새 의지와 각오로 한해를 가꾸어 갈 수 있는 자세를 갖추었다고 확신합니다. 오는 4월에는 15대 총선이 실시됩니다.선거가 있는 해에는 물가문제를 비롯하여 민생이 주름잡히는 일이 왕왕 있었습니다만 올해는 그런 일이 없도록 집권당과 정부가 미리부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겠습니다. 새해에는 안보문제에 가일층의 경계를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당은 이러한 안정의 바탕위에서 민생을 중심으로 한 개혁 또한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가고자 합니다. ◎김대중국민회의총재/“과거청산·정국안정에 당력 결집” 올해는 해방 후반세기의 시작입니다.우리는 이 해부터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와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경제,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사회복지 그리고 정직하고 양심적인 사람이 성공하는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겠습니다. 첫째 무엇보다 오늘의 5·18군사쿠데타 척결의 과업을 성공적으로 실현해야 겠습니다.둘째 정국의 안정을 튼튼히 마련해야 겠습니다.셋째 민생문제를 하루속히 개선시켜야 겠습니다.넷째 남북관계에 있어서는 우리는 북한의 어떠한 도발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의연한 자세를 견지하는 한편 북한을 불필요하게 자극하거나 그들에게 오판의 자료를 주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김원기·장을병민주대표/“통일기반 조성·지역통합에 앞장” 21세기를 당당하게 맞이하기 위해 변화된 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더 이상 정치가 사회발전의 장애가 되서는 안되며 신선한 촉진제로서의 기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새해에는 민족통일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지고 지역할거구도를 탈피,지역통합을 이뤄야 하겠습니다. 민주당은 열린 정치를 선도하는 희망의 정당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고 낡은 정치에 의연히 맞서 새로운 정치를 이루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김종필자민련총재/갈등의 벽 허물고 화합의 시대를” 이제 송구영신의 새아침을 맞아 무엇보다 국민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정치다운 정치가 뿌리내려야 합니다.무한경쟁시대를 살아갈 수 있는 튼튼한 나라를 만들고 국민이 편하고 국민에게 이가 되는 일을 성심으로 챙기는 무실역행의 정치를 해야 합니다. 잘못된 과거를 정리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올해는 95년과는 사뭇 달라야 하고,달라져야 합니다.세계와 역사는 큰 굽이를 돌며 대전환하고 있는데 우리는 마냥 어제의 일에만 파묻혀 있을 수는 없습니다. 과거사의 법정이 아니라 미래사의 산실로서 보다 생산적이고 진취적인 해가 되어야 합니다.갈등과 증오의 벽을 허물고 사랑과 관용의 마당을 만들어 화합과 전진의 시대를 열어가야합니다.
  • 제2건국의 새 역사를 열자(신년사설)

    1996년 병자새해의 첫아침을 맞아 우선 우리국가와 국민모두에게 발전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가치있는 한해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이제 21세기를 눈앞에 둔 90년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지구촌은 전환기적 격변의 소용돌이속에 파묻혀 있다.동서냉전체제가 붕괴된 이후에도 세계곳곳에서 민족과 종교적 갈등으로 무력분쟁이 이어지고는 있으나 이같은 정치·군사적 전쟁보다는 삶의 질을 다투는 경제와 과학기술의 전쟁으로 대세는 바뀌고 있다. 그런 가운데 한반도 주변정세는 아직도 불확실성의 연속이며 국내상황 역시 한시대를 뛰어넘고 새로운 도약을 이룩하기 위한 진통 때문에 정치·사회적 불안정이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역사바로잡기가 첫 순서 우리는 이시대를 흐르는 세계적 조류를 직시하고 변화에 대비하면서 21세기에는 통일된 조국을 세계중심국가로 만들어 나가야 할 중차대한 과제에 직면해 있다.이같은 과제에 도전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려면 무엇보다도 국민적 역량을 결집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이를 위한 첫단추가 바로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고 역사를 바로잡는 작업이다. 지난해 김영삼대통령의 결단으로 시동을 건 역사바로세우기는 특별법제정이나 전직대통령의 인신구속이라는 차원을 넘어 올해에는 질적으로 확산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국민통합을 저해하고 사회적 대립과 갈등을 조장한 원인이 되어온 「12·12」와 「5·18」문제의 해소는 물론 지역대립,세대간의 갈등 등 과거의 잘못에서 기인되어 그동안 증폭되었던 문제들을 치유하고 왜곡·굴절되었던 의식과 질서가 바로잡히는 데까지 나가야 할 것이다. ○4월총선 새 정치의 계기 그러려면 이일에는 대통령이나 집권세력만이 아니라 정파와 지역을 떠나 국민 모두가 주체가 되어 나서야 한다.나름대로 역할을 분담하고 중지를 모으며 지난날의 응어리졌던 가슴을 풀고 법과 정의,사랑과 화해,안정과 화합이 실감나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려는 노력을 기울여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오는 4월의 15대 국회의원 총선거는 하나의 주요한 계기가 되어야 한다.특히 우리 모두는 지역감정의 극복과 세대교체라는 시대적 요청을 인식하고 과거와 다른 새로운 의식과 자세로 선거에 임해야 할 것이다. 지역감정도 이제는 극복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가질 때가 되었다.잘못된 과거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대두된 시대정신에 역행하여 이번에도 지역대립과 지역감정을 자극하고 선동하는 사람이나 세력은 그 역사적 책임과 지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우리는 세대교체가 단순한 연령적 구분이 아니며 역사청산의 바탕위에서 도덕적 바탕과 민주적 가치관을 갖춘 인재들이 정치의 주류를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한다.올해를 진정한 제2건국의 원년을 만들려면 새피를 제대로 수혈해야 할 것이다.그동안 세대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막아온 3김의 지역분할정치는 이제 종식되어야 마땅하다. ○경제안정과 일관성 중요 정치·사회적 격동에 따라 올해의 경제운용은 안정성과 일관성에 그 기조를 두어야 할 것이다.경제주체들이 정치논리에 좌우되거나 막연한 불안심리에 빠져서는 절대 안된다.경제의 흐름을 잘 파악하여 경기연착륙과 물가안정에 총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경제계는 이제 정경유착의 오명에서 벗어나야 한다.아울러 국가경제와 기업발전을 위한 국제경쟁력 배양에 모든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우리 경제가 제궤도에 올라서려면 국민들의 참여와 협조도 필요하다.특히 총선전후에 우려되는 사회이완 현상과 노동현장의 갈등같은 것은 국민 스스로 치유해 나가야 한다.책임과 의무도 권리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민주시민의 성숙한 의식이 요구된다. ○삶의 질 높여줘야 참개혁 문민정부수립 이후 계속된 개혁이 이제는 「명예혁명」의 단계로 승화되려는 시점에 이르렀다.이제는 과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벌주는 것에서 나아가 과거의 잘못된 정치·경제·사회적 관행과 질서까지도 바로잡아야 한다.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건강한 사회를 만들고 이를 기초로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의 체제를 세계의 흐름에 맞춰 바꾸는 일에도 나서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명예혁명이다.민주의식과 삶의 질이 하루빨리 G­7 국가수준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는 개혁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이같은 참개혁에 함께 참여하여 명실을 갖춘 제2의 건국이 실현되도록 뒷받침해야겠다는 다짐이 우리 모두의 합창으로 터져 나와야 할 새해 새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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