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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8, 희망의 씨앗돼야 한풀이식 행사 의미없어”/ 5·18 동지회 상임의장 김준태 시인

    ‘이제 5·18은 무덤이 아닙니다.둥근 씨앗입니다.배달겨레 씨종자입니다.’ 시인 김준태(55)씨가 올해로 23돌을 맞는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바친 헌시의 일부이다.이 시에서처럼 그는 5·18을 항상 ‘희망’으로 노래한다. ‘아아,광주여 무등산이여/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중략)…(‘아아 광주여,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중에서) 그가 5·18을 주제로 쓴 시는 500여편에 달한다.‘5월 시인’이란 별명이 항상 그를 따른다.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 ‘국밥과 희망’ ‘불이냐 꽃이냐’ ‘통일을 꿈꾸는 색주가’ ‘아아 광주여,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등이 그것들이다. 지금도 난립한 5·18단체의 통합을 위해 ‘5·18민주유공자항쟁동지회’ 상임의장직을 떠맡고 있다.5·18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적’ 시인인지도 모른다. ●‘건준' 참여로 총살당한 아버지 그의 시 정신과 이력은 우리나라 역사와 이데올로기적 대립에서 잉태된 듯싶다.일제 때 할아버지는 일본 오사카의 탄광노무자로 징용됐다. 아버지는 남태평양 남양군도에 끌려갔다.천신만고 끝에 전장을 탈출한 아버지가 6·25전쟁 와중에 여운형이 이끌던 ‘건국준비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고향의 한 산골짜기에서 총살형을 당했다.당시 시인의 나이는 3살.6·25를 거쳐 군복무 시절 직접 베트남전에 참전한 그는 80년대는 5월 항쟁의 한가운데 서게 된다.그의 시와 삶의 여정에는 전쟁과 대립에 대한 증오와 평화에 대한 갈망이 넘쳐난다. 그는 대학시절인 스무살 때 고(故) 조태일 시인이 주관하던 시전문지 ‘시인’을 통해 김지하 등과 나란히 등단했다. 20대 당시 그의 시를 관통하던 주제는 ‘고향’ ‘대지’(흙)였다.시집 ‘참깨를 털면서’는 70년 개발독재시대 이농현상과 땅,고향에 대한 사랑과 감정 등을 비판적 시각으로 담아낸 초기 작품으로 꼽힌다. 그는 80년 초 광주의 전남고교에서 독일어 교사로 재직 중 5·18을 맞는다.그의 운명은 평범한 교사에서 ‘저항시인’ ‘참여시인’으로 바뀐다. ●평범한 교사에서 저항시인으로 살벌한 군부독재 시절 그는 ‘아아 광주여,우리나라의 십자가여’란 107행짜리 장편 시를 발표한다.이 시가 80년 5·18 항쟁기간 중 ‘전남매일’ 1면에 실리면서 ‘필화’를 겪게 된다.이 시는 원문이 외신을 탔고 ‘민중 선동혐의’로 계엄당국의 수배조치가 내려졌다.해당 신문사는 폐간되고 만다.그 역시 사랑하는 제자들을 뒤로한 채 한달여 동안 잠적했다. ‘가족이 너무 그리웠다.’는 그는 잠시 집을 방문했다가 주변에 잠복 중이던 보안사 요원에게 붙잡혔다.한달여 동안 각종 고문과 협박 등으로 교육청이 아닌 보안사에 사표를 제출하고 교단을 떠난다. ‘현실을 외면하는 문학은 살아 있는 문학이 아니다.’ 그는 호구지책으로 시내 학원 강사로 전전하는 동안에도 역사와 민주와 통일을 노래한 시들을 쏟아냈다.지금까지 시집 12권과 산문,평론,5·18항쟁 창작 오페라,콩트 등 모두 23권을 펴냈다. ‘역사는 소금 뿌린 생선이 아니라 펄펄 살아 뛰는 생선’이란 그의 지론처럼 역사와 통일,민족문제 등에 천착한 시기였다.시대정신을 외면하고는 시를 쓸 수가 없었다고 회고한다. 3년여 학원강사 생활을 마친그는 전남 영암의 한 중학교를 거쳐 광주과학고로 전입했으나 수업을 배정받지 못하고 ‘자리만 지키는 교사’ 생활이 이어졌다. 교단을 영원히 떠나기로 마음먹은 그는 88년 신생 지방지였던 전남일보 문화부장으로 입사한다.그는 언론인으로서 5·18의 원인과 경과·결과 등을 총괄하는 ‘광주·전남 현대사’를 기획,일부 왜곡된 5월정신을 바로 잡는다.1944∼1961년의 이 지역 항쟁사 등을 담아냈다. ●“史草는 사관이 아닌 기자가 기록” ‘오늘날의 사초(史草)는 사관이 아닌 기자가 기록한다.’는 그는 광주매일로 자리를 옮겨 ‘정사 5·18팀’을 만든다.프랑스,미국,베트남 등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혁명현장 등을 돌며 방대한 자료를 수집한 뒤 5·18 특집 시리즈를 내고 그 위상을 재정립하는 데 혼신의 힘을 쏟는다. IMF위기 때 잘려나가는 동료 기자들을 보고 스스로 언론 현장을 떠난 그는 광주대 문예창작과를 거쳐 지금은 조선대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글쓰는 것과 가르치는 일 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그는 5·18을 통해 ‘출세’를노리는 일부 인사들과 다르게 살아왔다.그래서 금기시되곤 했던 5월단체 등에 대한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는다. “5·18기념식은 바뀌어야 한다.”는 그는 “언제까지 한을 붙들고 살풀이하는 식의 행사가 되풀이돼야 하느냐.”고 반문한다.추모제도 없애고 시민 누구나가 하나되는 공동체 축제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5·18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새 이정표를 만든 역사적 사건’이라고 규정한 그는 ‘5월정신이 남남(극우-진보) 및 남북화해와 통일로 이어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앞으로 ‘지역주의’ 타파를 위한 강연과 집필활동에 열중할 것이라고 다짐한다.‘우리 후세에게 좋은 세상,전쟁과 갈등이 없는 나라를 물려주는 게 꿈’이란다. 글·사진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
  • [편집자문위원 칼럼] 국민 편에 서는 신문

    신문의 생명은 정확성과 객관성에 있다.정확성이 없다면 객관성이 있을 수 없고,객관성이 없다면 편파성을 면치 못한다.이런 점에서 최근의 방송과 신문을 포함하는 미디어 매체들의 오랜 관행이었던 암묵적 카르텔이 깨지고 다양한 비판의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으로 여겨진다.대한매일도 지면의 확장과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다만미디어면 신설과 확장이 ‘자사(自社) 이기주의’라든가,‘억지부리기’식의 비판이 아니기를 바란다. 최근 대한매일은 여러 가지로 많은 변신을 해왔다.NGO면이신설되고 교육면이 확대됐다.지면에 미처 담아내지 못한 국민의 목소리를 접할 수 있어 참신함을 더하고 있다.그동안의 관제 언론의 때를 벗고 신문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고자하는 것 같아 언론개혁이 시대의 화두(話頭)로 제기되고 있는 현실에서 반갑기 그지없다. 그러나 대한매일의 바람직한 모습은 지면의 확장과 신설,여러 코너의 확대만으로 담보되지 않는다.국민 의사의 대변과우리 사회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국민의 편에서 진솔하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이 점에서 지난 한 주간의대한매일은 여전히 아쉬운 면이 없지 않다.특히 재벌개혁에대한 논쟁을 접하면서 더욱 그러했다. 대한매일은 나름대로 재벌개혁에 대한 여·야의 시각차,재벌과 정부의 입장을 제시하고,5월16일자 사설을 통해 재벌개혁 후퇴에 반대입장을 밝혔다.그러나 우리가 좀더 냉철하게 판단한다면 현재 재벌이 요구하는 규제완화와 정부 간섭의 축소 등에 대해 더 강도 높은 비판이 있어야 했다.1997,98년의 IMF 위기 당시 정부와 국민 그리고 방송·신문까지 나서서그간 우리 경제를 이끌어왔던 재벌의 선단식 경영과 문어발식 확장을 통한 ‘몸집 불리기’식의 경제성장을 얼마나 비판했는가? 더이상 재벌의 과거와 같은 경영을 허용해서는 안된다며 전문경영과 투명경영 등을 얼마나 요구했는가? 그러한 재벌들의 피해로부터 국민들은 많은 고통을 분담해야 했고 아직도 그 상처가 다 아물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다시 재벌이 과거와 같은 선단식 경영을 꾀하는 규제완화에 대해 객관적이고 엄정한 중립의 자세를 보이는 것은과거의 교훈을 잊어버리고 또 한번 과거를 되풀이할 가능성을 높여주는 것이다. 신문은 객관과 중립이라는 그늘로 손쉽게 피해가서는 안된다.5월15일자 대한매일의 재벌규제 완화에 대한 기사는 여러 입장을 정리할 수 있었으나,IMF 이후 재벌의 경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를 국민들에게 보여주는 알기쉬운 설명을 첨부하고 그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과 대안을함께 실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편 지난 주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21주기가 있었던 주간이었다.흘러간 사실이 으레 그렇듯이 광주민주화운동의 현재적인 의의를 밝히는 기사가 없어서 안타까웠다.그러지 않아도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으로 우리 역사에 대한 요구가 한창 높아지고 있는 시기에 굴절된 현대사에 대한 관심을 지면을 통해서라도 좀더 부각시켰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5월19일자의 광주관련 기사가 그나마 체계적인 기사였지만 4면,15면,19면으로 분산·취급돼 있고 행사 중심의 보도여서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기에는 부족했다. 정영철동국대 강사
  • ‘광주의 굴레’ 못벗은 한국언론

    80년 5월 광주.그로부터 21년이 지난 지금 한국언론은 ‘광주’로부터 과연 얼마나 자유로운가. 언론이면서도 보도를 외면하였고,뒤늦게 시작한 보도는 계엄사령부의 발표내용만 ‘중계방송’하였다.사태가 수습된후에는 진실규명은 커녕 신군부의 집권가도에서 나팔수를 자처하고서도 아직 제대로 사죄 한번 한 적이 없다. 5·18당시 국내언론의 보도태도를 질타하는 자리가 항쟁21주년을 맞아 곳곳에서 마련되고 있다.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주최로 지난 17일 서울 프레스센터 12층에서 ‘5·18과 언론보도’를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주제발표자인 임종일 5·18민중항쟁 서울·경기동지회 사무국장은 5·18 전후 광주 현지상황과 당시 국내언론의 보도태도를 정밀분석,왜곡 실상을낱낱이 공개했다. 임 국장은 “거대언론들이 5·18의 가해자인 전두환 정권하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한 것은 광주항쟁에 대한 ‘침묵의 대가’였다”면서 “언론은 광주항쟁의직접적인 가해자임을 망각한 채 인정도,반성도 하지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임 국장에 따르면,중앙일간지의 ‘5·18’ 첫보도는 사태 3일 뒤인 21일자 석간,22일자 조간부터였다.그러나 지면은 ‘광주사태’라는 용어만 적혀 있을 뿐 계엄당국의 게시판·공고판이나 다름없었다.18∼19일 공수부대의 강경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살상을 당했으나 당시 라디오에서는 ‘사람 하나 죽지않고 군경만 약간 부상을 당했다’는 식으로보도하자 성난 시민들은 20일밤 MBC 사옥에 불을 지른데 이어 KBS·CBS도 공격하였다.항쟁세력들은 국내언론에 대한 극도의 불신과는 반대로 사실보도에 충실한 외신에 대해서는기자증 발급,정례브리핑 등으로 적극 협조했다. 국내언론의 왜곡보도는 공수부대가 물러간 후 현지취재를시작한 이후에도 여전했다.조선일보는 25일자 사설에서 항쟁세력들을 ‘분별력을 상실한 군중’으로 몰아부치고는 “…57년전 일본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학살의 역사가 반교사적으로 우리에게 쓰라린 교훈을 주고 있다…”며 마치 광주시민들을 무자비한 일본인 폭도들에게 비유하였다.임 국장은 “조선일보는 24일부터 보도태도가 동아,중앙과는 달랐는데 이는 신군부에게 조기진압 명분을 주려한 듯 하다”고 지적했다.아니나다를까 27일 새벽 계엄군 투입으로 사태가 일단락되자 조선은 28일자 사설에서 “국군이 취한 이번 행동에 어려움이 따를 수 밖에 없었다.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우리는 잊지 않는다…”고 썼다.조선일보는 5공시절 물적 성장을 거듭하였고,당시 방우영 사장은 국보위 입법의원을 지냈다. 이날 토론자로 나온 김성 호남신문 편집국장(당시 전남일보기자)는 “아직도 언론학계에서 당시 국내언론의 보도태도를연구한 논문이 드물다”고 지적하고 “이는 광주문제가 아직도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증거”라고 말했다.당시 MBC기자로제작을 거부하다 해직된 정상모 MBC 전문위원은 “당시 계엄군을 밀치고 스튜디오를 점령했어야 옳았다”며 아직도 ‘광주의 기억’으로부터 탈피하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했다. 또 19일 MBC ‘미디어비평’(밤9시45분)에서는 ‘5·18특집’을 내보낸다. 정운현기자 jwh59@
  • 5·18 기념행사 집안잔치 전락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지 4년째를 맞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올해도 전국 자치단체들의 참여 저조로 아예 행사가치러지지 않거나 시민단체만이 참여하는 ‘집안잔치’ 행사로 전락하고 있다. 광주시와 5월 단체들은 5월정신의 전국화를 위해 인터넷을 통한 홍보 등 각종 대책을 추진하고 있으나 뿌리깊은지역감정과 자치단체의 무관심 등으로 제자리에 맴돌고 있다. 경북도와 울산의 경우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5·18관련 행사가 하나도 없다. 대구는 대구참여연대 주최로 21일부터 다음달 10일까지열리는 민주화운동 20년 기획전 ‘새천년의 빛’ 순회 전시회가 유일하다. 다만 부산만이 부산민주공원과 지역 대학가에서 여러가지 행사를 펼치고 있다.5·18기념재단과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는 “17일부터 27일까지 기념식과사진전,영상굿,초청강연등을 연다”고 17일 밝혔다.기념식은 19일 오후 3시 중구 대청동 민주공원 중극장에서 열리고 20일에는 5·18영상비디오와 다큐멘터리를 방영하는 영상굿과 광주 놀이패의 ‘일어서는 사람들’ 마당극이 공연된다.광주시 관계자는 “다른 지자체로부터 현지의 지역 정서등으로 자체기념행사를 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며“5·18이 ‘광주의 전유물’이라는 일부 왜곡된 역사의식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한편 5월단체 협의회는 지난 임시국회에서 민주화 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민주유공자법) 제정이 무산되자 행정자치부가 5ㆍ18묘역에서 주관하는 기념식에는 참석하지 않고,서울 국회의사당 앞에서 별도의 기념식을 개최하기로 했다. 광주 최치봉·부산 이기철기자,전국 종합 cbchoi@
  • 왜 ‘안티조선운동’인가

    왜 ‘안티조선운동’인가. 거침없는 글쓰기로 ‘성역과 금기’에 도전해온 강준만 전북대 신방과교수는 ‘안티조선운동을 해야 할 10대 이유’로▲ 사상으로서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제도로서의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극심한 남북대결구도 청산과전쟁방지를 위해 ▲국가안보를 위해 ▲군사독재정권 유산 청산을 위해 ▲지역분열주의 청산을 위해 ▲공적기관이 사회적책임을 지는 풍토조성을 위해 ▲언론인이 윤리적 책임을 지는 풍토정착을 위해 ▲경제정의 실현을 위해 ▲엘리트계급의사회적 책임을 묻기 위해 등을 들었다. 강 교수는 “안티조선운동은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운동”이라고 정의한바 있다. 2000년대 초 한국 지식인사회에서 또하나의 사회개혁운동으로 자리잡은 ‘안티조선운동’은 1998년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이던 최장집 고려대교수에 대한 조선일보의 ‘사상검증 사건’이 단초가 됐다.조선일보의 반지성적 행태를 비판한 강준만 교수와 월간지 ‘말’의 정지환 기자는 조선일보관계자로부터 명예훼손 혐의로 피소돼법원에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이를 계기로 네티즌들 사이에서 성금모금과 함께자연스럽게 ‘안티조선운동’이 거론됐다. 지난해 1월9일 이들은 인터넷상에 ‘안티조선 우리모두’(www.urimodu.com) 사이트를 출범시켰는데 1년2개월 남짓한 11일 현재 사이트 방문자가 150만명을 넘어섰다.조선일보가 두사람을 고소한 것을 두고 프랑스에 있는 평론가 홍세화씨가‘나를 고소하라’라는 글을 일간지에 발표한 뒤 이에 동조서명한 네티즌도 4,300여명에 이른다. 이처럼 사이버상에서 시작한 ‘안티조선운동’은 지난해 8월7일 진보적 지식인 154명의 ‘조선일보 기고·인터뷰 거부선언’을 계기로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기 시작했다.이들은선언문에서 “과거 독재정권과 유착해 여론을 왜곡해온 조선일보가 극우냉전 논리를 여전히 고수한 채 지식인들을 활용해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언론처럼 국민을 호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달 뒤인 9월20일 제2차 지식인선언을 겸해 참가자들은 ‘조선일보반대 시민연대’(약칭 안티조선연대)를 정식 발족했다.2차 선언에는지식인 153명이 동참했으며,41개 시민단체가 안티조선연대 결성에 참가했다.이날 행사장 입구에는 ‘조선일보기자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내걸렸다.상임공동대표를 맡은 김동민 한일장신대 신방과교수는 “조선일보 거부운동은 단순한 신문개혁 차원을 뛰어넘는 사회운동의 성격을띠고 있다”며 “조선일보라는 한 신문과의 싸움이 아니라조선일보로 대표되는 냉전적 수구·기득권세력과의 대결”이라고 말했다. 지난 연말 MBC ‘100분 토론’을 통해 전국적으로 알려진이 운동은 올들어 더욱 활기있게 출발했다.조선일보 창간 81주년인 지난 5일 안티조선연대 주최로 제3차 지식인 거부선언이 있었는데 서명자 수가 1·2차를 합친 수보다 많은 531명에 달했다. 특히 3차 선언에는 서울대 교수들이 처음으로 참여하였으며법조계·언론계·의사·한의사·약사 등 전문직 종사자들이대거 동참했다.주최측은 상반기 주요행사로 ▲조선일보반대1인 릴레이시위 ▲신방과교수 조선일보반대운동 지지선언 ▲‘5·18과 조선일보’ 토론회 개최 ▲조선일보 친일 민간법정 개최 등을 공개했다. 정운현기자 jwh59@. *지식인선언 서명인사들. ‘조선일보 거부 지식인선언’에 서명한 인사는 1차 154명,2차 152명,3차 531명 등 모두 837명에 이른다.이들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취재는 물론 기고도 거부할 것을 선언했다. 서명자의 면면을 보면 분야별로 다양한 지도급 인사들이어서이 운동이 특정 집단·계층의 주장이 아님을 보여준다. 주류를 이루는 학계에서는 강만길 상지대 총장을 비롯해 강정구(동국대)강준만(전북대)김동춘(성공회대)김세균(서울대)김의수(전북대)김종엽(한신대)김진균(서울대)오세철(연세대)주종환(동국대)최갑수(서울대)한상권(덕성여대)한상범(동국대)교수 등이 참여했다.문화계 인사로는 소설가 문순태·박태순·송기숙씨,시인 김준태씨,영화평론가 이효인씨,영화감독 변영주씨 등이 동참했다.종교계에서는 문규현·함세웅 신부,진관 스님,김진호·한상열 목사가 나섰다. 시민단체에서는 성유보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이사장,김용태 민예총 부이사장,박원순 참여연대 사무처장,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이사장,이동연 문화개혁시민연대 사무처장,최문순 언론노조위원장이,법조계에서는 김칠준·금병태·김택수변호사 등이 동참했다. 이밖에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한의사 권태식씨,의사 김미정씨,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원장,김민수 전 서울대 미대교수등도 서명했다. 서명과 관련, 한 참여교수는 “평소 친분이 있는 조선일보기자가 전화를 걸어와 서명 배경·경위 등을 따져 물은 적이있다”고 밝혔고 또다른 교수는 “조선일보가 원고청탁 문제로 애를 먹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지역사회 대표중심 곳곳서 ‘안보기운동’. 조선일보 반대운동인 ‘안티조선운동’이 날로 확산되고 있다.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중앙에서 지방으로 공간차원을뛰어넘어 번져간다.구체적으로 조선일보 절독이란 결과를 가져와 조선일보 판매에 타격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1일 충북 영동에서는 한겨레신문 영동지국장 이주형씨(53) 주도로 ‘조선일보 바로보기 영동시민모임’(약칭 영동조선바보)이 결성됐다. 이 모임은 앞서 인근 옥천에서결성된 ‘조선일보 바로보기 옥천시민모임’(www.mulchong.com)에 이어 결성된 것으로 지역 안티조선운동의 ‘세포분열’인셈이다. 지난해 8월15일 결성된 ‘조선일보 바로보기 옥천시민모임’(대표 전정표)은 기미독립선언서를 패러디한 ‘조선일보로부터의 옥천독립선언서’를 제작,배포해 주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들은 참가자를 ‘독립군’으로 부르는데 현재 ‘독립군’수는 330명 정도.군의회의원 9명 전원과 도의원 1명을 비롯해 이 지역 바르게살기협의회·재향군인회·상이군경회 등보수단체 및 대표들이 대거 가입해 지역사회에서 튼튼한 기반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전정표 대표는 “‘민족정론지인줄 알고 그간 구독했는데 속은 게 억울하다’며 조선일보를끊는 독자가 잇따른다”면서 “이 운동을 시작한 지 4개월만에 옥천에 투입되는 조선일보 1,200부 가운데 10%에 해당하는 120부가 줄었다”고 밝혔다. 이밖에 ‘조선일보 반대 광주전남 시민모임’‘안티조선 경남시민연대’ 등이 결성돼 전국 각지에서 안티조선운동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정운현기자
  • [김삼웅 칼럼] 현대사의 순교자들

    헤겔이 “세계의 역사는 자유의식의 진보과정이다”라고 했을 때 압제에 시달리던 수많은 사람이 냉소했다. “인간의역사는 학대받는 자의 승리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다”고 타고르가 설파했을 때도 반응은 비슷했다. 사람들은 오히려 사마천의 “천도는 공평해서 언제나 선인편을 든다고 말하는 자도 있다. 그러나 백이숙제는 선인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면서도 굶어죽지 않았는가. 안연(顔淵)은공자 문하 제1의 호학자라고 불리면서 먹는 것도 부족하였고젊어서 죽지 않았는가. 이것이 하늘(역사)이 선인에게 보답하는 방식인가. 도척은 날마다 죄없는 사람을 해치고난폭방자한 수천의 도당을 모아 천하를 횡행하였지만 천수를다하였다. 이는 대체 무슨 까닭인가”라는 말에 공감했다. 조선시대 기득세력은 ‘벽이숭정(闢異崇正)’을 지배논리로써먹었다. 이단을 배격하고 정학(正學)을 높인다는 이 논거는 정통유학 이외의 모든 학문을 ‘사문난적’으로 몰았다. 얼마나 많은 선비학자가 희생됐는지는 묻지 말자. 어둠이 채 걷히기 전에 고정희는 ‘망월리비명’을 썼다. “한 세대 긋고 지난 업보가 어디/망월리에 잠든 넋뿐이랴만/한 세대가 쌓아올린 어둠의 낟가리에/불쏘시개 되어 하늘 툭 틔우고/황산벌 숯가마로 묻힌 저들이/오늘은 가는달 붙잡고 묻는구나/내 죄값을 달에게 묻는구나.” 어찌 망월리나 황산벌뿐이랴. 서대문형무소, 안기부지하실,남영동독방,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고 불구가 되고 골병이 들었던가. 그리고 정의와 역사를 원망했던가. 군사정권 치하에서 300여명이 암살·옥사·고문사·옥고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분신·투신·자결 등으로 산화했다. 폭력정치에 희생된 4·19와 5·18 희생자를 포함시키면 800여명에 이른다. 잘못된 정치가 빚은 6·25전쟁의 와중에 민간인 수십만명도 학살당했다. 우리 현대사는 굽이마다 이른바 특정 ‘메인 스트림(main stream)’이 국민의 희생과역사왜곡의 가해세력이 되어온 것이다. 국민은 긴 날들을 ‘가는 달 붙잡고’한탄하면서 힙겹게 살았다. 그리고 역사를 원망하고 하늘을 저주하는 사람이 늘었다. ‘자유의식의 진보’나 ‘학대받는 자의 승리’는 언어의 유희일 뿐이었다. 그러나 누가 역사앞에 오만한가. 우리는 친일파들이 설땅을 잃어가고 독재자와 하수인들이 단죄되고 심판받는 것을 보았다. 이승만이 쫓겨나고 박정희가 암살되고 전·노씨가 수감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군사독재를 미화하고 남북화해협력에 발목을 잡아온 족벌언론이 ‘안티’의 대명사가 되고있음도 지켜본다. 반면에 ‘죄값을’ 달에게나 물어야 했던 현대사의 순교자들이 역사앞에 복권되는 모습도 지켜본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가 구성된 것을 필두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제주4·3진상규명위원회가 날개를 펴고,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의 활동이 민주화운동으로 결정된 데 이어, 80년대 신군부 집권시절 30여명이 옥고를 치르고 500여명의 해직노동자가 발생한 원풍모방사건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았다. 5공시절 서울·부산·광주의 미문화원점거농성사건도 ‘반미’의 딱지를 떼고 역시 민주화운동으로규정되었다. 때맞추어 ‘민족일보’사건에 대한진상규명의요구가 터져나오고 사법살인의 희생자 진보당사건도 재조명이 기대된다. 그동안 뒤틀린 폭력정치의 희생물이 되었던사건들이 하나씩 밝은 하늘 아래 진상을 밝히고 있는 것은 역사의 승리다. 비록 아직도 어둠의 역사를 지키려는 검은 손길이 수구의커튼을 움켜쥐고 반격을 노리지만 시시각각 밝아오는 정의의태양이 어찌 손바닥으로 가려지겠는가. 밖에서도 정의의 종소리가 들려온다. 일본의 우익 교과서에 대한 검정통과가 굳혀져가는 때에 유엔인권고등판무관실(UNHCR)이 최근 주관한회의에서 “식민지정책과 노예제도의 책임을 지고 희생자에대해 배상해야 한다”는 테헤란선언을 채택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죄지은 자에 벌을 주고 공세운 사람에 상 주는 것은 만고의진리다. 그래야 질서가 잡히고 정의가 선다. 화해나 용서는그 다음의 문제다. 상벌이 뒤바뀌어도 안되지만 사적인 온정주의로 공적인 범죄의 용서도 안된다. 비록 더디게 ‘학대받는 자의 승리’가 가능하더라도 우리는 역사의 법칙을 믿는다. 현대사의 순교자들에게 명예와 영광있으라!■김삼웅 주필 kimsu@
  • [대한광장] 도대체 책임지지 않는 사회

    여야가 국회에서 40조원의 공적자금 추가 조성을 놓고 오랫동안 공방을 벌였다.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지금까지 조성한 공적 자금을어떻게 썼는가인데 이에 관해서는 만족할만큼 걸러지지 않았다.이미소진해 버린 1차 공적자금 91조원(공적자금 64조원+공공자금 27조원)을 누가 탕진했는지에 대해 책임을 가리려고 하지 않는다.이런 식인데 새로 조성될 공적자금이 앞으로 어떻게 쓰일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40조원이면 한해 예산의 반 정도가 되는데 이를 탕진해도 누가 책임질지 명확하지 않은 것이다.따라서 이를 나눠주고 쓴 사람의 책임이 명확히 드러나도록 하여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는 책임을 지지 않는 풍토가 만연해 있다. “과거는 빨리 잊고 미래만을 생각하자”또는 “과거를 자꾸 들추어내기만 해서 좋을 것이 무엇이냐”는 아주 그럴싸한 말들이 설득력을얻어간다. 몇년전 발생한 IMF 환란 때에도 책임 지는 사람은 없었다. 청문회가 열렸어도 책임자는 없었다.IMF환란으로 고통을 당한 서민만이 있을 뿐이다. 5·18민중항쟁에서도피해를 본 사람들은 많은데 가해자는 명확히밝혀지지 않았다.그런데도 우리 사이에선 용서를 하자느니,과거를 잊고 5.18을 미래지향적인 축제의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들이 나온다.용서를 할 대상이 없는데 누구를 용서하고,지금도 이루 말할 수없는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많은데 왜 축제의 장이되어야 하는지 명확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다. 해방이 된 후에도 우리는 친일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그러다보니 누가 무엇을 구체적으로 잘못하였는지,누가 민족의 이익을 위해 일했는지,누가 민족의 반역자였는지를 알 길이 없다.지금은 모든것이 뒤죽박죽되어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아노미 현상이 가속화하고 있다.각종 범죄가 발생하여도 내가 죄를 지었고 그렇기 때문에 반성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법정에서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라고뻔뻔하게 말하는 자들뿐이다.그들은 법정에서 유죄가 밝혀지더라도사면이니 가석방이나 보석이니 해서 다 풀려난다.책임지는 사람도 없고,법적 책임도 조금만 지나면 유야무야되고 마는 사회이다. 한국의 보수 신문들은 이런 논리 개발에 가장 앞장선다.조선일보는과거에 저지른 천황에 대한 맹세와,전두환정권 하에서 그를 입이 닳도록 극찬한 것에 대하여 침묵하며 과거를 잊자고 한다.동아일보도일제하에서 저지른 친일 행각과 손기정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에 대하여도 역사 왜곡을 하며 그 사건이 자세하게 밝혀지는 것을 꺼린다.어쨌든 일장기 말소는 우리가 했다는 식이다.한국언론은 5·18 민주항쟁 때에도 광주시민들을 폭도로 몰아간 것에 대해 전혀 책임지지 않는다.각종 사건에서 왜곡 보도를 일삼으면서도 이에 대한 반성과 책임을 지지 않는다. 우리에게 역사가 중요한 것은,잘못된 과거를 반성하고 이를 거울 삼아 그러한 일이 다시는 반복하지 않도록 우리를 뒤돌아 볼 수 있기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역사를 배울 필요도 없고 초·중·고,대학교에서도 역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그런데도 친일 행각을 옹호하거나권력에 빌붙어 성장해 온 세력들은 과거에 얽매이지 말자는 주장을펼치며 자기들의 과거 행동을 적당히 얼버무리려고 한다. 역사는 바로 세워져야 하고,잘못된 행동은 반성을 통해서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우리의 사회,정확히는 지배계층은 그런 점에서 도대체 책임을 지지 않는 사회이다.오히려 책임을 떠안는 사람들은 묵묵히 국가와 지배 세력의 말에 따라준 기층민중이다.돈을 빼먹은 사람은 책임지지 않고,그에 대한 책임이 기층민중에게만 전가되는뻔뻔한 사회이다. ■임 동 욱 광주대교수·언론학
  • [대한시론] 구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

    지금 돌아가는 한국정치를 보면 아무리해도 좋게 봐줄 수가 없다.왜이 지경일까? 4·19혁명후 거의 반세기만에 처음 자유를 만끽하는분위기에서,독재하에선 숨도 못쉰 겁쟁이들까지 날뛰는 판국이 돼 결국 쿠데타의 구실을 제공한 일이 새삼 생각난다.물론 지금은 사정이다르지만 말이다.21세기로의 전환기를 맞아 우리가 홀로 서려면 책임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책무를 다하려고 몸부림쳐도 부족한 난국이다.그런데 돌아가는 꼴을 보면 시민정치의 기본조건인 자기억제와,반대파에 대한 최소한의 에티켓조차 없이 마구 치고받는 식이 되어버렸다.더욱 가소로운 일은 독재하에서 출세해 행세하던 부류가 어느덧민주투사로 치장하고 도도한 시류를 거스르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정치인이란 직업은 “과거를 묻지 마세요”가 통하는 별종 직업인가?과거는 없고 현재만 있는 이들의 행실이 후세에 모범이 될까 소름끼친다.이 판국에서 가장 잘못된 것이 무엇일까? 무엇보다 공적 인물의자질부족과 문제의식 빈곤을 꼽을 수 있다.공직자로서 가장 위험한행실은 정직하지 못한 것이다.‘정직이 어쩌구’하는 말이 유치하게들릴지 모르지만 정상적인 시민사회가 되려면 정직이 통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제 아무리 뛰고 나는 재주가 있어도 끝장이다.근대상업문명이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사회철학으로 해도 정직의 윤리를 바탕에 깔았기에 가능했다.상업문명이란 약속·계약으로 맺어지는 사회관계를 기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미국문화에서 풍요 속의 과소비와 사치는 배워들이고 독점 수법은 본뜨면서 정직이란 알맹이를 빼먹으면 어떻게 되는가? 지금 우리 지배층의 추한 모습이 바로 그 예다.우리처럼 정치고 사업이고간에 마키아벨리즘의 기법과 샤일록의 탐욕만을 밑천으로 하는 자가,명사나 유지의 탈을 쓰고 날뛰는 세상이라면 그야말로 개판인 것은 자명하다. 행적이 떳떳하지 못한 부류가 독재정권에서 연마한 아첨술,시세영합술,기회주의,밀실흥정 기술을 계속 써먹으려고 안달한다.지금 우리는바로 그런 것을 털어버리자는 것이 아닌가?어느 재벌 총수가 허풍떨며 망발한 “기업은 일류인데 정치는 삼류”라고 한 그럴듯한말에 속아선 안된다.일부 재벌과 정권의 유착구조가 개발독재의 핵심이 아니었나? 부패구조의 쌍두마차에 정치인과 일부 재벌이 각기 한쪽이지 않았나? 정권교체로 그런 모순구조를 더 유지할 수 없게 되자,부패한 기득권층의 일부나 그를 대변하는 정치인·어용 나팔수들은 개혁을 흠집내려고 ‘좌경’이라 매도했다. 또 국가가 은행을 관리·지배하는 ‘사회주의’라고 낙인찍으며,심지어는 입에 담지 못할 말로 ‘이적행위’라 떠들어댄다.현정권이 인권탄압이란 원성을 듣지 않으려고 수사와 소추를 자제하는 것을 알고,법률상 면책특권도 교묘하게 이용해 마구 물어뜯는다.이에 일부 국민은 속사정을 모른 채 강건너 불구경하듯 하며,당장의 불편과 불평을그들이 대변하여 주는듯 착각하여 동조함으로써 그 기세를 돋워주고있다. 우리가 1997년 외환위기로 벼랑에 몰렸을 때 개발독재 체제의 맹점과허점을 외신은 ‘패거리=파벌 자본주의(Cronny Capitalism)’ 또는‘유교 자본주의’라고 표현했다.유감스럽게도 우리 기득권층은 이러한 비판에서 하나도 배우지못했다.3대 연고주의인 혈연·지연·학연의 패거리(파벌)문화를 탈피하려는 진실된 노력은 어디에서도 볼 수없다.오히려 개발독재 시대의 특혜와 특권 및 안정(?)을 그리워하는부패한 기득권층은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해 개혁을 방해한다.헌법을 파괴한 독재자를 우상화·신격화해 찬양하며 ‘발전 주역’이라고과대포장·왜곡해 복고 반동의 공세에 총력으로 나섰다. 그들은 아직도 대중을 니체의 말처럼 ‘시장의 파리떼’정도로 보는오만함을 풍긴다.더욱 놀라운 일은 불의에 대한 대중의 열화같은 분노를 까맣게 잊었다는 사실이다.4·19의 젊은이의 분노,5·18 광주시민의 목숨건 항거,1987년 밀실 고문살인에 대해 하늘을 찌른 울분과분노….이런 과거사를 조금이라도 생각해 봤는가? 지금 민주화를 깔아뭉개고 개발독재 시대로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것을 좌시할 순없다. 그때 얻은 기득권을 굳히려는 ‘사보타주’를 방관함으로써 자멸할 수도 없다.우리는 피눈물의 고난을 통해 얻은 기회를 멍청하게놔두어 친일파와 그 아류에게 권력을 가로채게 한 어리석은 과거를가졌다. 독재시대를 그리워하는 기득권세력은 그러한 역사를 되풀이하려고 역량을 총동원했다.우리는 더 이상 ‘못난이’가 아니라는 것을 뚜렷이보여주어, 기득권에 안주해 독재시대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이를 알게끔 해야 한다. ■한 상 범 동국대교수·헌법학
  • [기고] 여성시인 폭행사건을 보고

    최근 여기저기에서 술자리와 관계된 성추문들이 터져나오고 있다.일부에서는 젊은 정치인들의 광주 술자리를 같은 맥락에서 도덕적으로 성토하기도 하지만,나는 이 문제는 왜곡된 성문화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그건 전혀 다른 문제이다.이 사건을 빌미로,수구 언론들이 사뭇 거룩한표정을 짓고 호통을 치는 장면은 정말 바라보기 역겹다.5·18을 폄하하고 훼손하는 데 앞장서 왔던 언론이 갑자기 5·18을 들고나와서 ‘도덕성’을 운위하며 호통을 치다니,소가 웃을 일이다.언제부터 한국의 수구 언론들이 그렇게 5·18에 대해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나. 나는 5월 18일 광주에서 술자리를 가졌다는 젊은 정치인들의 행태를 두둔하려는 것이 아니다.그들은 정말 경솔했고,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다.다른 사람들은 다 몰라도 그들은 5·18을 그렇게 허랑하게 보내어서는 안되는 사람들이다.그들은 모두 광주의 아들들이 아닌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그들을 향해 저주의 철퇴를 내리치는 극우 언론의 자세가 가당키나 한 것인가. 광주의피값으로호의호식하고 있는 당신들이 무슨 자격으로 현장에서 젊음을 불살랐던 젊은 정치인들의 도덕성을 단죄하는가? 이 사건이 우리나라 특유의 술문화와 연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그 뒤에 터져나온 진보인사들의 성추행 사건과 이 사건을 묶어서 바라보는 것은 온당하지않다. 장원 교수의 성추행 사건은,젊은 정치인들의 술자리와는 달리,‘성’의 문제가 직접적으로 문제의 복판에 놓여 있다.진보적인 이념을 가지고 있는 남성조차 여성의 문제에 관해서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마쵸(남성우월주의자)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대부분의 성공한 한국 남성들은 여성을 성공의전리품 정도로 생각한다.권력을 가진 자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을 ‘차지하는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이런 관계 안에서 성은 인격체의 발현으로서기능하지 못한다.얼마전에는 중견 남성시인이 후배 여성시인을 성적으로 모욕하며 폭력을 휘두른 사건이 일어났다.가해자는 사건이 불거지자,사과는 커녕 오히려 피해자를 모욕하는 언동을 계속하고 있다.이러한 행태는 피해자인여성을 두 번 모욕하는 행위이다. 적어도 떳떳하게 인정하는 태도라도 볼 수있다면 좋겠다. 이 남성 시인 역시 세련된 어법을 구사하는 현대적인 인사이다.그러나 성 문제에 관한 한,역시 전근대적 마쵸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인터넷 안에서 이 사건은 네티즌들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 있지만,이 사건에대해서 유감을 표현하는 남성문인들은 한 사람도 없다.그저 사건을 쉬쉬 덮느라고 바쁠 뿐이다.이런 사건이 두드러질 때마다 나오는 단골 메뉴 중의 하나는 여성이 유혹자로서 원인을 제공했다는 논리이다.그러면서 늘상 남성은성적 유혹에 약하기 때문에,어쩔 수 없다는 논리를 편다.나는 성이 한가운데에 놓여있는 남녀간의 사랑의 문제는 생물학적인 결정론으로 환원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사랑과 섹스 역시 역사적 산물이며,문화적 훈련의 소산이다. 따라서 양성이 진정한 사랑의 실현을 위해서 함께 문화적으로 노력해야 할의무를 가지고 있다.인간은 이미 문화의 인격적 단계로 넘어왔기 때문에 동물의 비인격적성을 인간의 성을 설명하기 위한 분석틀로 사용할 수 없다.성추행이란 바로 성이 인격적 발현물이 되지 못하게 하는 사건이기 때문에,성추행을 겪은 여성은 심한 인격적 모멸감을 느끼게 된다.한 인간이 진보적이라는 것은,일차적으로는,세계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방식보다 더 나은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과거의 바람직하지 않은 구태를 실천적으로 극복해간다는 뜻이다. 여성에 관한 태도는 남성의 진정한 진보성을 가늠할 수 있는가장 확실한 바로미터이다.여성에게 가해지는 폭행에 대해 부끄러운 마음이들지 않는다면, 당신은 과거의 사람이다.그런데 지금 세계는 과거의 사람을원치 않는다.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거나,아니면 가만히 당신들의 자리에 머물러 있기 바란다. 김정란 성지대교수‘ 시인.
  • [사설] 광주항쟁 20주년 아침에

    광주 민중항쟁 20주년이 되는 이 아침,옷깃을 여미고 ‘5월 광주’를 새삼다시 생각해 본다.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시해로 초래된 권력공백기에 불법적으로 집권을 꾀하던 신군부의 군홧발과 총칼에 맨몸으로 저항하다가 ‘해방구’까지 만들어 내고 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계속된 광주 민중항쟁.흔히 5·18로 불리는 이 민중항쟁은 4·19혁명과 맞먹는 한국 민주화의금자탑으로 이제 자리매김 되고 있다.4·19가 반독재 투쟁에 머물렀던데 비해 5·18은 한걸음 더 나아가 반외세 민족민중운동과 민족통일운동을 촉발시켰다는 평가도 받는다. 그 20주년이 되는 올해,광주는 우리 국민의 한 가운데,아니 세계의 한 복판에 놓인 듯한 착각이 든다.5·18 기념 민중예술제가 서울을 비롯해 전국에서열리는가 하면 정부 주관의 공식기념식에 앞서 제1야당인 한나라당 총재가주요당직자들과 함께 광주 망월동 5·18 희생자 묘역을 참배했고 여·야 신진정치인의 공동참배도 이루어졌다.정부와 민주당은 망월동을 국립묘지로 승격하고 광주민중항쟁 희생자를 비롯해‘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법’대상자들을 민주유공자로 지정,예우하는 내용의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광주항쟁의 세계사적 의미를 재평가하는 국제학술대회가 잇따라열리는 가운데 전남대가 주최한 국제학술대회에서는 “5·18이 아시아 민주화의 기폭제”(미국 웬트워스 대학 조지 카치아피카스 교수)라는 평가도 받았다. 그러나 광주 민중항쟁을 ‘폭동’으로 규정했던 사람들은 정작 한마디 사과의 말도 하고 있지 않다.지난해 그들은 오히려 “폭동 진압의 정당성을 결코포기할 수 없다”고 강변하기까지 했다. 한나라당 총재의 망월동 참배에 당내의 옛 민정계 인사들은 탐탁치 않은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한다.광주 항쟁을 지역주의로 몰아 붙인 당시 신군부의 책략은 재갈 물린 언론의 협조아래오랜 세월 국민들을 세뇌한 결과 호남 이외의 지역에서는 아직도 5월광주의 진상을 제대로 모른다. 광주 민중항쟁이 이렇게 역사 속으로 묻혀버리게 해서는 안된다.“광주 시민들에게는 아직도 피눈물 솟구치는 현실이 일반 국민들에게는 수습끝난 과거로 인식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아무리 떠들썩한 기념행사와 정치적제스처가 많고 세계사적 평가를 받는다 하더라도 5월 광주의 진실이 우리 국민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 한 아무 의미가 없다.왜곡된 지역주의의 벽을넘어서 5·18정신의 전국적인 공감대가 형성될때 광주의 비극은 끝난다.그동안의 직무유기에 대한 책임을 조금이라도 지는 의미에서 언론은 꾸준히 그진실을 알려야 하고 일반 국민들도 이제 마음을 열고 5월 광주를 받아들여야할 것이다.
  • [승화되는 ‘5·18’정신](4)학계의 평가

    “이 땅의 자주·민주·통일된 사회로의 변혁을 위한 진보적 움직임과 사상·이론의 복원·성장은 모두 ‘광주에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 출발했거나 적어도 거기서 심대한 충격을 받은 것이다.” 이 글은,한국정치학회 주최로 오는 20일 외교안보연구원에서 열리는 학술회의 때 정대화 상지대 정치학과 교수가 발표할 예정인 논문 ‘광주항쟁과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일부분이다.5·18민주화운동에 관한 이같은 인식은 현재 국내 정치·역사학계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20년이라면 한 사건이 학문연구의 대상으로 자리잡기에 길지 않은 기간이다.그런데도 ‘1980년 5월 광주에서 열흘 동안 벌어진 일’에 대한 평가는 그동안 간단찮은 우여곡절을 겪어왔다.이는 물론 정치상황과의 연관성 때문이다. 광주를 밟고 일어선 5공화국 시절 제도권 내의 공개적인 학문연구 대상에서 ‘광주’는 철저히 제외됐다.집권 신군부세력은 “불순분자 책동으로 유발된 폭도들의 무장난동”이라고 선전하며 ‘광주사태’라는 용어로 본질을 왜곡했다.실제로 ‘광주’를겪지 않은 일반 국민으로서는 실상을 전혀 알지못하는 상태였다. 이 시기 ‘광주’는 지하에서 급진 학생운동권에 의해 연구됐다.그리고 그영향력은 알게 모르게 퍼져나가 80년대 사회과학 운동에 밑거름이 되었다(임혁백 고려대 정치학과교수). 87년 6월 항쟁은 “위대한 어머니 광주가 낳은 아들”(이름없는 한 유인물에서)이었다.이어 출범한 노태우 정권에서 ‘광주’는 “광주 학생·시민의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그 의미가 다소 격상한다. 6월 항쟁을 전후해 ‘광주’는 비로소 햇빛 아래로 나왔다.우선은 진상을알리는 다큐멘터리·증언집들이 쏟아졌고 정치·사회학 논문도 하나둘씩 선보였다.김영삼 정권에 들어서서야 한국 민주주의의 초석인 ‘5·18 민주화운동’으로 복권되었다. 90년대 들어 ‘광주’ 연구는 급류를 탄다.“광주항쟁이 전두환 정권을 비롯한 군사정권의 퇴진과 한국사회 민주화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정대화교수),“우리 사회가 질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역사적 계기를 제공했다”(안병욱 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는평가는 이제 보편적 인식이 되었다. 지난 88년 노재봉 당시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가 발언해 물의를 빚은,“김대중씨가 외곽을 때리는 노련한 정치기술을 활용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유의 해석은 더이상 학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울러 학계는 ‘민주화운동’이라고 하지 않고 ‘민중항쟁’이라고 정의한다.기층민중이 항쟁을 주도했다고 해석하기 때문이다(손호철 서강대 정치학과 교수). 이제 광주민중항쟁에 관해 학계가 떠안은 과제는 그 외연(外延)을 계속 확대하는 일이다.고착화한 지역대결 구도를 극복해,정치적으로 복권한 ‘광주’를 사회적으로도 해결하는 것이 그 첫째다.5·18 민주화운동을 전후해 일어난 79년의 부마항쟁,87년 6월 항쟁과의 연속성 속에서 그 역사적 위상을제대로 매김하는 일은 두번째다.또 광주항쟁의 의의를 세계사적 보편성으로자리매김하는 일은 그 마지막 과업이 될 것이다. 1980년 5월 ‘광주’는 처절하게 패배함으로써 시작했다.그러나 그곳에서민중들이 흘린 피는 씨앗이 되어 ‘한국 민주주의 실현’이라는 열매를 민족사에 선사했다. 이용원기자 ywyi@
  • [승화되는 ‘5·18’정신](2)발포명령자 아직도 오리무중

    ◆풀리지 않는 문제. 새 천년에 처음 맞는 5·18 20주년을 용서와 화해를 바탕으로 통일과 국민통합의 원년으로 삼자는 각계의 목소리가 높다. 김동원(金東源) 5·18기념재단 이사장은 “5·18 20주년은 나눔과 공존을 위한 문화를 창출하고 5·18이 역사 속에 화석화되지 않고 시민들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작용,보편적인 가치로 자리잡게 하는 계기가 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5월 정신의 공감대 확산 즉 전국화는 ‘그날의 희생’이 한 지역의 불행했던 사태가 아니라 민주화를 위한 희생,국가를 위한 희생으로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뜻한다.5·18의 전국화는 국민통합과 깊게 연결돼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화합의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풀어야 할 숙제가 남아 있다. 우선 발포명령자 및 암매장의 진상이 아직 밝혀지지 않아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또 5·18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만큼 이에 상응하는 국가유공자 대우와 국립묘지 승격 등을 통한 완전한 명예회복이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도 계속 제기되고 있다. 5월 단체들은 ‘5월문제’ 해결을 위한 전제 조건으로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명예회복 ▲피해보상 ▲기념사업 등 5대 원칙을 제시해 왔다. 이중 책임자 문제는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 두 전직 대통령이 사법적 심판을 받았고,피해 보상에서도 지난 90년 제정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지금까지 3,860명이 모두 2,100억여원의 보상금을 지급받았다. 마지막 4차보상으로 868명이 보상을 신청,심의중이며 5·18묘지 성역화 사업,5.18기념공원,5·18자유공원,사적지 보전사업,전남도청 기념공원 사업 등도 이미 마무리됐거나 추진중이다. 최대 쟁점중 하나인 민간인 사망자 수는 현재 정부의 보상을 기준으로 부상후 사망한 93명을 포함,259명이다. 지금까지 3차 보상을 통해 행불자로 인정받은 사람은 64명,현재 심의중인 행불자는 43명에 이른다.하지만 이를 근거로 암매장 여부에 대한 주장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국가유공자 예우문제는 15대 국회에서 추진된 ‘국가유공자예우 및 지원에관한 법률 개정안’이 지난 1월 임시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하고 16대 국회로 넘겨진 상태. 이에 대해 5월단체 관계자는 “5·18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해 놓고도 희생자를 유공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반쪽짜리 명예회복일 뿐”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진상규명 문제는 지난 95년말 검찰이 5·18 수사와 재판 등을 통해 80년 당시 신군부의 광주진입 행위가 국헌을 문란케 해 정권을 찬탈하기 위한 내란 또는 내란 목적 살인을 저지른 폭동이라는 법률적 결론을 내린 것으로 사실상 매듭지어졌다. 수많은 인명이 총탄에 맞아 희생됐으나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발포명령자는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5·18국제학술대회에서 글라이스틴 80년 당시 주한미국 대사가 “진압결정은 전두환씨가 하고 최규하 대통령이 형식적으로 재가한 것으로 확신한다”는 발언을 통해 발포명령자를 추론할 수있을 뿐이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 *5·18기념재단 내의 '진실조사위원회' 활동. 5·18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는 숙제를 풀고자 나선사람들이 있다.5·18기념재단 내의 ‘진실조사위원회(위원장 姜信錫목사)’. 지지부진한 진상규명 문제에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고,진정한 명예회복을이루자는 취지로 지난해 10월 구성됐다. 조사위는 ▲행방불명자 추적 ▲암매장 여부 조사 ▲무연고 사망자 가족찾기 ▲발포 명령자 규명 등을 연차적으로 추진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5·18 20주년을 맞은 올해의 첫 사업으로는 5·18 후유증으로 정신질환 등을 앓고 있는 환자와 그 가족들의 증언을 채록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일반인이 상상하기 어려운 아픔과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의 생활상을 공개해 비도덕적 국가권력이 개인에 미친 참상을 알리기 위함이다. 조사위는 이같은 후유증 환자 채록을 토대로 18일쯤 ‘부서진 풍경’이란제목의 350쪽짜리 책을 펴낸다. 또 올부터 5·18 구묘역에 묻혀 있는 11기의 무연고 사망자 가족찾기 사업을 전개한다.유골에 대한 유전자 감식 등을 통해 이들의 주검을 가족에게 되찾아줄 계획이다. 이와 함께 매년 5월이면 논란이 거듭돼온 암매장 여부에 대한 조사도 편다. 그동안 접수된 50∼70여건의 제보를 토대로 장소가 겹치는 부분에 대해 정밀 조사에 나설 방침이다. 조사위 김선미(金善美·35)간사는 “조사위 활동은 책임자를 찾아 법적으로 처벌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사실을 바로잡아 시민의 명예를 되찾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 [승화되는 ‘5·18’정신] (1)전국화 어디까지 왔나

    5·18민주화운동이 올해로 20주년을 맞았다.‘폭동’ ‘사태’로 매도되기도 했던 5·18은 이제 ‘성년’이 되어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섰다.4·19혁명,70년대의 반유신투쟁,유신독재를 끝낸 부마항쟁,5공을 굴복시킨 6월항쟁과 함께 한국 민주주의의 버팀목이 되고 있는 것이다.대한매일은 5·18 20주년을 맞아 ▲ 전국화 어디까지 왔나 ▲아직도 풀리지 않는 문제 ▲아픔은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학문과 문화 분야에 비친 5·18 ▲20돌을 맞아서(기고)의 순으로 20주년의 의미를 조명한다. 5·18은 한국 민주화의 금자탑이다.왜곡하거나 폄하하던 시각들은 거의 사라졌다.선진국에서는 물론 민주화를 지향하는 제3세계 나라에서는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의 이정표로 여겨진다. 국내에서도 20주년을 맞아 5월정신의 전국적 확산을 위한 많은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전국화의 주요한 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5월정신의 공감대 확산 즉,전국화는 이제야 걸음마 단계라고 할 수있다.많은 축제와 행사들이 행사 수준에 머물고 있을 뿐 국민의 마음에 녹아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80년 당시 언론과 권력에 의해 각인된 5·18에 대한 그릇된 시각이 잔상처럼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왜곡된 지역감정이 바른 인식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80년 5월 이후 신군부 정권은 지역감정을 이용해 5·18을 정권 유지를 위한도구로 사용했다. 5·18이 ‘광주만의 문제’로 묶여 버린 것이다.이렇게 왜곡된 정보는 지역감정만 더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때문에 5·18을 직접 체험하지 못한 호남 이외의 지역 국민 중에는 아직까지도 낯설고 거부감이 든다는 사람들이 적지않다. 대구에 사는 박모씨(38·회사원)는 “부마항쟁 등 민주화를 위한 역사적 사건이 많지만 이미 피해보상을 받은 5·18 관련 단체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높다”고 말한다. 이러한 배경 아래서 5·18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고 첫 정부 주관의 기념식이 열린 것은 97년.그나마 광주·전남을 제외한 타 지역 자치단체들은 한 곳도 여기에 동참하지 않아 전국적인 공감대 형성이 얼마나 어려운지 극명하게보여주었다. 5·18기념재단의 이성길(李成吉)사무처장은 “전국화의 선결과제는 무엇보다 지역감정을 극복하는 것”이라면서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에서 5·18을민주화의 산 교과서로 여기는 등 세계화가 전국화를 앞서는 실정”이라고 안타까워 했다. 전국화를 가로막는 원인은 그밖에도 적지않다. 보상금을 둘러싼 잡음,기념재단 이사진 구성 등을 둘러싸고 불거졌던 잡음,단체들의 난립,일부 인사들의 5.18을 기반으로 한 정계 진출 움직임 등도 5월정신의 순수성을 훼손하고 있다.최근에도 5·18구속자회장 이모씨(43) 등7명이 ‘가짜 피해자’를 조작해 거액의 보상금을 가로챈 사건이 일어나기도했다. 5·18기념재단 허연식(許然植·37)기획부장은 “5·18의 전국화가 확산되고는 있으나 정당한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상대 지역에 대한 오해를 푸는 것이급선무”라며 “이와 함께 5월단체를 중심으로 도덕 재무장운동을 펴야 할것”이라고 강조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 *'5·18전야제' 주요행사·특징을 보면. 5·18민주화운동 20주년을 맞아 5·18정신의 확산과 전국화를 위한 행사가잇따르고 있다. ‘새로운 빛을 향하여’란 주제의 ‘민족 통일을 향한 국토 종단 대행진’이 지난 1일 부산과 목포에서 시작됐다.이들 양 지역 시민 60명(각 30명씩)은 해당 지역을 출발,10일 대전에서 합류한 뒤 서울을 거쳐 18일 임진각에도착한다. 타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5·18전야제가 ‘살아 있는 신화 5·18’이란 주제로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열리며,서울 부산 대구 인천 등 전국 11개 도시에서도 기념식이 열린다. 18일 오후 7시 임진각 야외 특설무대에서는 정태춘 박은옥 조영남 등 대중가수가 참여하는 통일음악회가 열린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는 5·18기념재단 및 5·18민주항쟁 20주년기념행사위원회와 공동으로 ‘부산 시민과 함께하는 광주민주화운동 20주년 기념 대동 한마당’ 행사를 18일부터 28일까지 부산 민주공원에서 개최한다.이에 앞서 지난 10일 호남대에서는 5·18기념재단과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제주4·3연구회 등이 공동으로 ‘민주주의의 연대와 승화’란 주제로 학술행사를가졌다. 이들 단체는 제주 4·3항쟁,부마항쟁,5·18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위해공동 대응하고 지역 화합과 국민 통합 등을 위한 결의문도 채택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 [대한시론] 집단무의식과 망국병

    일본은 고대 이래 정복과 개척의 역사를 이어왔으며,천황이 모두를 지배한다는 이른바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정신으로 새롭게 정복한 무리들을 노예화했었다.일본인의 무의식에는 정복당하는 자는 악이며 그들을 억압하는 것을정의로 여기는 가치관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이따금씩 터지는 일본고관들의 망언은 선거구민의 집단무의식을 자극하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그것이폭발한 것이 1923년 관동대지진이었고 오직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7,000명 정도가 삽과 몽둥이로 무참히 학살당했다. 지난달 도쿄시장 이시하라는 일본 자위대 제1사단 창설 기념식의 축사에서그때의 만행을 미화하며 앞으로 그런 상황이 되면 다시 그럴 것이라는 발언으로 우리를 격분시켰다. 조직화된 대중의 집단무의식은 때로는 악에 의해 조작되기도 하며 매우 부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수년전 히틀러가 아리안 민족우수론으로 독일인의 집단무의식을 자극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C.융은 ‘오딘(Odin)’에서 타민족에 대한 차별이 결국 유럽 전역에 피의 강풍으로 인류적 대재난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언했었다.독일인의 집단무의식에는조상 대대로 이어온 피에 물든 ‘오딘’의 신화가 상징하는 대학살의 충동이잠재하고 있었으며 역사는 유태인 600만명 학살 등으로 그의 예언이 사실이었음을 입증했다. 차별과 오만은 악의 씨앗이며 역사 이래 타부족,타민족을 차별하면서 만행의 정당화 구실이 돼왔다.최근 한미간에 물의를 빚어낸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도 미국인의 한국인에 대한 멸시,차별이 근본원인이었을 것이다.역사적 만행에 대한 비판과 반성의 정도에서 그 나라 문명의 발달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자기나라 군대가 저지른 만행을 전세계에 고발한 미국 언론인이 표창받았음은 미국인의 역사의식이 그만큼 성숙함을 보여준다. 한편 우리는 많은 비극적 사건을 겪으면서도 스스로에게 잠재하는 왜곡된집단무의식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한번도 없었다.제주 4·3사건의 근본원인은 섬 주민을 멸시하는 의식이었고 거창사건의 비극은 산간벽지의 사람에 대한 군경의 오만 때문이었을 것이다.국군창설 초기 군대에서 일제 군대가 하던 것과 같이 민간인을 지방인으로 호칭하고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72년 대선 당시 공화당의 중진 이효상은 ‘신라 천년의 영광을 위해 경상도사람은 경상도 사람에게 투표합시다’라며 지역차별의 불씨를 지폈다.이 발언은 ‘조조’로 불리던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선거전략상 지방간 감정대립공작을 실시하는 시기와 일치하며,계산된 정치공작이었음을 능히 짐작케 한다(청와대비서실,중앙일보 출판부). 하지만 그들은 엄청난 결과가 올 것을 전혀 몰랐을 것이다.융의 예지를 지닌 사람이었다면 그 후에 일어난 5·18 광주학살은 예견할 수 있는 일이다. 집단무의식에 몸을 맡길 때는 도취감을 수반하여 양심을 마비시키고,“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성경,누가복음)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일본 극우파는 계속 망언을 되풀이하여 일본인의 단결을 호소하는 가운데한국 내에서의 차별발언을 비웃고 있다.그런데 우리의 경우,일부 정치인은기회가 있을 때마다 특정지역에 내려가 고의적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겨 국민간에 적대심을 계속 확대 재생산하며 정치적으로 이용해 왔다.종교,교육,법과 언론 등은 추상적인 애국론 보다는 지역차별의 요인을 하나씩 청산하는일에 힘써야 할 것이다. 특히 현 한국 호적법의 기본틀은 근대화 이후 일본이 제정한 호적법을 기초로 하고 있다.그것은 일종의 노예문서로서 식민지화된 한국인을 차별하기 위한 것이었다.전 세계에서 호적제도가 남아있는 곳은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과 대만 뿐이다(호적이 만드는 차별,佐藤文明 저,일본 현대서관 발행).초등학교에서부터 반(反)차별 교육을 실시하여 차별식 발언이나 행동을 규제하는법제도도 마련되어야 한다.한국인의 집단무의식에 내재하는 왜곡된 의식의퇴치가 통일을 위한 첫걸음인 것이다. 金 容 雲 한양대 명예교수·수학
  • [기고] 新사색당쟁의 참회를 염원하며

    ‘국민의 정부’들어 제2건국을 주창하는 목소리가 번지고 있다.해방과 함께 찾아온 건국이 감격적인 것이긴 했지만 내부적으로 불완전한 점이 많았음도 주지되는 바다.국권회복 과정에 수반된 외세 의존의 부산물로 그들을 엎고 동족대결을 소리 높인 세력들이 남북 공히 득세해 갔음도 하릴없는 시류였던 것이다.이 틈에 전 시대의 매국노들은 거리를 활보할 공간을 얻고 민의를 왜곡하는 관제데모가 범람하는 가운데 이에 부화뇌동하는 언론들이 여론을 지배하게 된 것도 어쩔수 없는 세태였던 셈이다. 이렇게 형성 고착된 남북의 지배세력들은 반세기를 견고히 이어왔으니 북쪽은 김일성 일가가 그의 사후에도 여전히 권부를 장악하고 있으며 남한은 치열한 민주화운동에도 불구하고 보수기득권 세력의 지배권 장악만 요지부동이어졌던 것이다.그러나 그 육중하던 장벽도 세월의 흐름과 민의의 끈질긴망치질에 금이 가고 마침내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것은 역사에 한획을긋는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는 한국사 수천년에 왕조정부와 외래 식민정부,그리고 권위주의적 독재정부를 거쳐 처음으로 민의에 의한 정부로 가는 것으로 보였다.이는 4·19와 5·18,그리고 6·10항쟁을 잇는 민주주의에 대한 민중의 피땀의 노력 결실이라 하겠다.따라서 8·15에 제1의 건국이 이루어졌다면 사상처음 민의에 따라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민간정부 출범은 그 자체 제2건국의 초석이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첫걸음이란 항용 불안하기 마련이며 과제는 산적될 수밖에 없다.여기서 그 미결 과제 극복의 길도 지식의 기본원리인 과학에서 찾아질 수밖에없다.이를 역사에 대입할 경우 과학의 기초공리인 인과의 법칙을 수용하지않을 수 없다.그리고 이에 따라 최근 역사 현상의 선행 원인을 객관 추적할경우 일제 36년이나 남북 분단이 사악한 일본인들 탓이거나 제국,또는 패권주의적 미소 양대국 때문이라고만 규정함도 너무 주관적이거나 부분적인 설명일 개연성이 크다. 물론 그 점도 상정되어 마땅하나 원인은 우리 스스로에게도 냉철히 찾아져야 하니 조선후기,실학자들의 자체 개혁노력을 좌절시킨 보수세력들의몰역사적인 게으름과 지연과 학연,혈연에 얽매어 지루하게 반복하던 ‘당파싸움’에서 또다른 중요원인을 찾지 않으면 한국의 역사교육은 절름발이가 되고말 것이다.자국사의 단점을 침소봉대함도 옳지 않지만 장점만 내세우며 단점을 경시함도 과학적 자세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과학적으로 파악한 역사지식은 성경에서처럼 인격을 부여해 인식할수 있으며 이 경우 지난날의 단점을 민족적 죄악으로 각성·참회함은 역사학의 또다른 의무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돌아볼 때 암담한 점이 많다.세상에 한 나라의 선거에 지역적으로 이토록 편차가 심한 경우가 있는지 과문한필자는 알지 못한다.일본인들이 한국인의 성격이 당파성 심하다고 힐난하자이를 일제 식민사학의 대표 이론으로 치부,격렬히 비난해왔지만 과연 오늘의우리는 그같은 논리를 비난만 할 수 있을지 곤혹스럽다. 이제 2000년 새 시대이다.긴 세월 수난받던 한국인도 세계사의 주역으로 부상할지 모른다는 기대감들이 아지랑이처럼 번지는 듯 하다.이는 고무적인 현상이다.그러나 이것이 현실화되려면 한국인의 마음 또한 선진화되지 않고는불가능할 것이다.한국인은 세계사를 선도할 능력이 있는 민족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선거를 앞두고 전국으로 번진 지역적 당파싸움의 극복과,세계사진운에 발맞출 역사의 화목한 어깨동무가 열쇠를 쥐고 있을 것이다. 사리가 그러하다면 우리는 작금의 일련의 사태에 참회해야 하며 2000년대국운을 좌우할 선거를 앞두고 옷깃을 여미어야 마땅할 것이다.과거 ‘대한매일신보’에 우국의 필봉을 곧추세우시던 민족 사학자 박은식 선생과 신채호선생의 넋을 빌려 외람되나마 일언하는 바이다. [김재경 경일대교수·
  • [인터뷰] 고승우 한겨레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해직언론인 문제는 정부는 물론,언론계에서도 절대 지나쳐서는 안될 언론개혁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지난 80년 언론 검열거부 등 ‘자유언론운동’을 벌이다 신군부에 의해 강제해직됐던 고승우(高昇羽·51)한겨레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부국장).그는 최근 언론개혁시민연대(언개연) 등에 의해 다시 제기된 ‘80년 해직언론인 배상 특별법’에 대해 이같이 강조했다.고 위원은 “20년 가까이 방치되어온‘해직언론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일이며 진정한 언론개혁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해직 당시 합동통신(연합뉴스 전신)에서 기자로 근무하다가 ‘언론검열 철폐운동’에 뛰어들었던 고 위원은 84년 1,000여명의 해직기자들과 함께 ‘80년 해직언론인 협의회’를 만들었다.지난 85년 월간 ‘말’과 88년 한겨레신문 창간멤버로 언론계에 다시 투신했으며 3년째 협의회의 총무를 맡고 있다. 고 위원을 비롯한 해직언론인들은 5·6공 때 대량해고의 진상규명과 원상회복을 외쳐왔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그러던 중 95년 5·18특별법 제정과 97년 12·12,5·18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통해 해직언론인 문제가빛을 보기 시작했다.고 위원은 “6공화국 이후 해직언론인들이 제기한 민·형사 소송은 공소시효 만료 등으로 번번히 패소했다”면서 “지난해 국민회의 국회의원 전원의 이름으로 국회에 제출한 ‘80년 해직언론인 배상 특별법’은 이번 정기국회에 반드시 통과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최근 해직언론인 문제와 관련,언개연과 함께 9개 언론사를 대상으로 공개질의서를 보냈던 고 위원은 “언론사마다 ‘역사 바로잡기’에 나서는 자율적 움직임이 없다”고 아쉬워하면서 “중앙일보 사태와 ‘언론대책 문건’ 등 일련의 사태를 볼 때 언론개혁은 언론사 내부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
  • [김삼웅 칼럼] 민주열사들을 잊지말자

    피와 땀과 눈물의 양분없이 자유의 나무는 자라지 않는다 했으니 보아다오 이 나무를 민족의 나무 해방의 나무 투쟁의 나무를 이 나무를 키운 것은 이 나무를 이만큼이라도 키워낸 것은 가신 임들이 흘리고간 피가 아니었던가 자기 시대와 격정적으로 노래하고 자기 시대와 격정적으로 싸우고 자기 시대와 더불어 사라지는데 기꺼이 동의했던 사람들 바로 그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지금은 우리곁에 없는 김남주시인이 암울한 시대에 쓴 ‘전사2’의 중간 부분이다. 이 시에는 다음의 내용도 포함된다. 어떤 사람은/투쟁의 초기단계에서 죽어갔다/경험의 부족과 스스로의 잘못으로/어떤 사람은/승리의 막바지 단계에서 죽어갔다/이름도 없이 얼굴도없이/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아내는 지하의 고문실에서/쥐도 모르게 새도모르게 죽어갔다/감옥의 문턱에서 /잡을 손도 없이 부를 이름도 없이 죽어갔다. 모레(10일)는 6·10민주항쟁의 날이다. 녹음방초의 어간에 다시 6월항쟁의 날을 맞는다. 우리는 흔히 해방후 친일파 척결을 하지 못하고 독립지사들을 홀대해온 것을 두고 애국심이 부족한 이승만정권과 친일세력의 발호로 치부한다. 그리고 왜곡된 역사와 그 시대 사람들을 원망한다. 밤사이 스러져간 사람들그러면서 막상 우리는 지금 군사독재 청산과 민주열사들에 대한 추모와 대접을 소흘히 한다. 후세로부터 비판받고 원망들을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호세 리잘(Jose Ri Zal)을 기억할 것이다.스페인 관리들에 의해 최초의 아시아 민족주의자로서 기록된 인물, 젊은 의사이자 작가·시인이면서 필리핀 독립운동가,1861년 35세로 스페인 정부군에 의해 총살된 사람, 지금 필리핀에서는 그가 사망한 12월 30일을 법정공휴일로 기념한다. 필리핀 독립운동은 리잘의 처형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리잘은 형장에서유언을 남겼다.“나는 조국의 밝은 새벽을 보지못하고 죽는다. 그러나 밝은세상의 사람들은 밤사이 스러져간 사람들을 잊지 말아달라.” 적당한 강우량과 이상고온 현상으로 올 6월의 신록은 여느해보다 짙고 싱그럽다. 이좋은 계절을 우리와 함께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밤사이에 스러져간’이들이다. 그들의죽음을 잊은채 우리는 찬란한 녹음과 햇볕을 즐긴다. 지금 국회에는‘민주화운동 관련 유공자 명예회복 및 예우등에 관한 법률안’이 지난해 12월 국회에 제출된 이래 동면상태이고 바로‘민의의 전당’건너편에서는 민주화운동과정에서 자식과 형제 남편을 잃은 유가협과 추모연대 회원들이 200일도 넘는,기약없는 천막농성을 계속하고 있다.또 의문사 관련 회원들이‘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제정’을 요구하며 국민회의당사에서 농성을 하고 있다. 새정부는 민주화운동의 중심이었던 세력이고,국민회의에는 수많은‘민주인사’들이 포진한 상태이고, 자민련은 그런 인식을 공유하는 ‘공동여당’이며, 한나라당에도 상당수의‘민주인사’들이 참여해 있다.그런데도 이 법안이 긴 잠에서 깨어날줄을 모르는 이유는 무엇때문인가. 민주화 참여의원들 각성을 최근 국민회의 관계자는 이 법률안을 철회하거나 심의를 보류하는 대신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등에 관한 법률안’을 제정하기로 했다한다.‘유공자’를‘관련자’로 바꾸고 5·18광주 민주화운동 관련자에게 했던 것처럼 특별법 형식으로 일시 보상금을 주는 쪽으로 방침을 바꾸겠다는것이다. 그 이유는 일부 보훈단체와 자민련, 한나라당이 반대하기 때문이라 한다. 보훈단체의 경우 형평성의 이유등을 들어 반대한다 치고,자민련과 한나라당의 반대이유는 이해하기 어렵다. 또 국민회의의 소극적 태도도 납득하기 어렵다. 대한민국의 ‘국시’인 민주주의를 지키다가 희생된 민주열사들의 명예회복과 예우를 하자는데 반대할 명분이 무엇이란 말인가.‘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대로 ‘민주화운동하면 3대가 망하는’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국회의원 특히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의원들의 각성을 촉구한다. [주필 kimsu@]
  • [특별기고] 前·現職 대통령들께 드리는 충언

    요즘 언론이나 항간에는 전·현직 대통령들에 대해 여러가지 말들이 무성하다.나는 여론에 편승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전·현직 대통령들께 사심 없는 충언을 드리고자 한다. 먼저 최규하 전대통령께. 노후를 평안히 보내고 계시는 최전대통령은 역사와 국민 앞에 진솔한 증언을 통해 당시 하야와 5공 집권과정에 대한 진상을 밝혀야 합니다.회고록을준비하고 계시다니 회고록에라도 명확한 진상을 공개하실 것을 국민은 바랍니다. 전두환 전대통령께. 폐일언하고 5·18의 영령들과 희생자 유가족들에게 그리고 지금도 고통으로 신음하는 부상자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사과의 말 한마디쯤 해주시는 것이어려운 일인지요.광주시민은 오랫동안 따돌림과 차별을 당해 왔지만 지역감정 해소와 동서화해를 호소하며 국민화합을 위해 마음을 열었습니다.망국지병인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 누군가 앞장서 풀어야 하겠기 때문입니다.한을삭이고 통분을 억누르면서 우리는 화해하자,용서하자,지역감정을 해소하자,동서화합을 이루자,구걸하듯이 손길을 내밀며 진정한 화해의악수를 애원해왔습니다.사죄와 사과는 강요할 수 없듯 화해와 용서도 강요할 수 없는 것임을 아린 마음으로 체험했습니다.어렵지만 동서화합 차원에서 마음을 비우고사과하기를 기대합니다. 노태우 전대통령께. 다른 전직 대통령을 당신 생전에 평가하는 발언은 현명하지 못합니다.다른분도 더한 말로 당신을 비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상호비방하면 똑같이 명예만 실추되고 위상만 떨어집니다.국민들은 대통령에 대한 냉소와 당혹과 황당감으로 상처를 받습니다. 김영삼 전대통령께. 당신의 아호처럼 ‘거산(巨山)’ 같은 지도자로 남아 주도록 국민은 기대했습니다.그러나 IMF로 기업인과 국민에게 큰 실망과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당신이 남겨놓은 실패의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국민과 현 정부는 안간힘을쏟고 있습니다.지역감정 유발로 힘을 분산시켜서는 안됩니다.당신의 취임사에서 5·18 선상에 놓였다는 문민정부는 5·18 진상과 명예회복과 보상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공소권 없음’이라던 ‘성공한 쿠데타’도 주모자들을 법적 처리했습니다.그때 당신의 용단을 환영했습니다.그러나 요즈음 당신의 행보는 결코 환영받을 수 없습니다.당신의 현직 대통령에 대한 비방과 독재자 운운하는 발언은 당신에게도 국가사회에도 결코 이롭지 않습니다.선진국의 전직 대통령들처럼 참고서가 될 수 있는 회고록 저술에 전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대중 대통령께. 부도 직전의 나라살림을 물려받아 노심초사하신 결과 일년반 만에 위기에서 벗어나 회복세로 접어든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반DJ세력이 아직도사사건건 과한 비판과 공격을 가하고 퇴임대통령까지 원색적 비난을 마구 퍼붓는데도 의연한 바위처럼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존경을 받을 만한 지혜로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공조와 화합의 기치 아래 보수세력,비민주 인사,독재 전과자들,반개혁 기득권세력,반개혁 언론까지 수용하고 아우르는 것은 DJ의 개혁 이미지를 흐리게 하고 여타 정권과의 차별성과 참신성이 희석된다고 우려합니다. 지역감정 해소와 국민화합,용서는 대통령의 평생 소신이요,덕목인 것도 이해합니다.한 신앙인으로서도 사랑과 용서를 한결같이 실행하는 것은 복음정신입니다.그러나 ‘박정희 전대통령 기념관 건립’ 지원을 약속하는 것은 화합과 화해의 차원이 아닌 역사왜곡이라는 비난이 빗발치고 있습니다. 경제개발과 근대화는 정당하게 평가받아야 하겠지요.그러나 그것으로 상쇄할 수는 없습니다.5·16쿠데타,4·19혁명 무효화,비민주 일인 독재 장기집권,지역차별 심화,정의와 인권·자유 탄압에 대한 역사적 반성과 조명없이는국민들에게 가치관의 전도와 선악의 무분별을 가져다 줄 뿐이라고 우려합니다.정치적 역학 관계와 복잡한 복선이 얽힌 현실에서 힘과 지혜를 겨루는 것이 아슬아슬하게 비쳐지는 데 통치의 지혜와 힘을 다수 국민들로부터 얻고모으기 바랍니다.국민들은 국민의정부의 제2건국의 성공을 열망하고 기대에차 있습니다.
  • [외언내언] 특별전형

    그야말로 백화제방(百花齊放)이다.100개에서 1개가 모자라는 2002학년도 대학입시의 특별전형 유형을 들여다보노라면 옛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각양각색이다. 특별전형은 대학의 학생 선발 방법이 얼마나 다양해졌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특기자,농어촌 학생,산업체 근무자를 대상으로 한 특별전형은 100개 이상 대학에서 실시하고 실업고 출신자,국가(독립)유공자(손자녀),만학도(고령자),재외국민·외국인,소년·소녀 가장,국가공인 전문자격 소지자 등을뽑는 특별전형은 50개 이상 대학이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눈길을 끄는 것은 이런 보편적인 유형보다는 5·18희생자,장기양심수 자녀,영농후계자,귀농자 및 그 자녀,북한 귀순동포,이재민 또는 그자녀,인간문화재(자녀),고교3년 개근자,고학자,벤처기업 경영자 등을 선발하는 특별전형이다.오랫동안 그늘진 곳에 머물러 사회적 보상이 필요하거나 그만한 대접을 받을 만한 계층을 배려했다는 점에서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느낌이 든다. 반면 논란의 여지가 많은 특별전형도 없지 않다.“미인대회 입상자,교육발전 유공자 자녀,국가 경제·지역사회·언론발전 공로자 등 사회기여자 자녀,사회 헌신·봉사 공무원 자녀 등을 대상으로 하는 특별전형이 그것이다. 미인대회 입상자를 뽑겠다는 특별전형은 지난 98학년도 입시에서 일부 전문대학이 시도했다가 여론의 반발에 부닥친 바 있다.당시 교육부장관은 대학의 자율성을 보장한다는 차원에서 “대학이 미인대회 수상자에게 입학 기회를주는 것 등도 막지 않겠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기도 했지만 여성의 외모를 특별대우한다는 것은 비교육적이다. 교육발전 유공자,사회 기여자,공무원 자녀 등을 대상으로 하는 특별전형은선발기준이 모호해 기여입학의 변형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자아낸다.정부 부처 고위공직자나 기업체 임원 자녀,해당 대학 교수 자녀들에 대한 특혜 입학의 방법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기여입학제 도입은 지난 86년부터 사립대학을 중심으로 꾸준히 제기돼 왔지만 우리 현실에선 아직 시기상조다.사립대학의 재정난 해소라는 순기능도 있지만 치열한 입시경쟁 풍토에서 교육의 기회균등 훼손,계층간 위화감 조성,황금만능주의 조장 등 부정적인 요소가 더 많기 때문이다. 특별전형이 금지된 기여입학제를 구렁이 담 넘어 가듯 허용하는 결과를 가져오거나 성의 상품화를 조장하는 비교육적 기준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대학입시의 다양성이나 대학의 자율성은 크게 왜곡된 셈이다. 임영숙 논설위원
  • 대한매일의 성과와 과제 좌담회

    ◎구국언론의 혼 이어 국난극복 선도 기대/을사조약 고종 거부 보도·국채보상 주도/‘삼국공영’ 부당 지적… 자주적 사관 펼쳐/순한글판 발행… 국문학·여성계몽 큰 기여/관제 구각 깨고 민족지 위상 되찾아야/권력·자본에 예속된 언론 병폐 개혁주도를/‘벌떼 언론’ 악습벗고 냉철한 시각 가져야 □토론자 金泰昊 서울대 정치학과 석사과정 高濟奎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석사과정 金旻貞 외국어대 신문방송학과 석사과정 대한매일신보사는 11일 재창간을 맞아 참신한 시각으로 대한매일신보의 언론사적 의의와 현대 한국언론의 문제점 등을 진단하고 새롭게 태어난 ‘대한매일’의 바람직한 언론상을 제시해보기 위해 한국정치와 언론학 등을 전공하는 대학원생 3명을 초청,좌담회를 가졌다. ‘대한매일신보의 역사적 의의와 한국 언론비판’을 주제로 열린 좌담회에는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金泰昊씨(28)와 고려대 대학원 신문방송학과 석사과정 高濟奎씨(26),한국외국어대 대학원 신문방송학과 석사과정 金旻貞씨(24)가 참석했다. ▲金旻貞=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 배설(裵說)을 발행인으로 내세워 梁起鐸 등 우국지사들에 의해 1905년 창간된 뒤 1910년 폐간될 때까지 항일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특히 발행인이 영국인이어서 통감부의 탄압이나 검열 없이 자유로운 논조를 펼칠 수 있었다. 대한매일신보의 주요 활동을 보면 일본대사가 요청한 을사보호조약에 대한 고종의 조약거부 기사와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철폐요구 기사 등을 실었으며 국채보상운동 당시 의연금 모집의 중심 역할을 하기도 했다. ▲高濟奎=대한매일신보는 당시 최고의 발행 부수를 기록하는 등 민의(民意)를 가장 폭넓게 반영했던 신문이었다. 가장 독자가 많았던 것은 대한매일신보가 독립신문과 황성신문에 비해 세계사의 흐름을 자주적인 시각에서 정확하게 파악해 전달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당시 독립신문 등은 ‘동양 삼국 공영론’과 ‘중립 외교론’을 주장했다. 하지만 대한매일신보는 ‘동양 삼국 공영론’은 일본의 동양 침탈을 합리화하기 위한 구실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간파해 알렸다. 또 ‘중립외교론’보다는 우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힘을 키워야 한다는 ‘무비강병’(武備强兵) 등 자주적인 민족사관을 줄기차게 주장했다. 일제가 통감부를 통해 대한매일신보를 몰래 사들인 뒤 ‘매일신보’로 제호를 바꿔 친일 기관지로 만든 것은 당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신문에 대한 직접적이며 가장 강력한 탄압 조치였다. 이를 통해 당시 대한매일신보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쉽게 집작해볼 수 있다. ▲金泰昊=독립신문에 비해 연구 사료가 거의 없어 일반인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한매일신보는 항일투쟁과 반제국주의 입장에서 자유언론을 펼친 민족 정론지였다. 朴殷植 申采浩 張道斌 등 애국지사 논객들이 총결집해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침략과 관료의 무능 등에 맞선 자유언론의 표상이었다. 특히 다양한 독차층의 요구를 수용해 영문판,한글판,국한문 혼용판 등 다양한 형태의 신문을 펴냈다. 순한글판을 발행하며 국문학 발전과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등 변화하는 시대의 요구에도 부응한 신문이었다. ▲高濟奎=신문의 제호를 바꾼 것은 상징적인 의미 이상이어야 한다. 서울신문이 본래의 뿌리를 찾아 대한매일로 제호를 바꾼 것은 해방후 군사독재정권을 거치면서 관제 언론으로 왜곡된 서울신문의 폐단을 극복하고 대한매일신보가 보여줬던 민족지로서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金泰昊=오늘의 한국언론은 대부분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또 신문마다 특징이 없고 주장하는 목소리도 거의 같다. 비판의 논조와 대상도 비슷하다. 대한매일이 재창간과 더불어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서는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롭고 또 특징있는 신문이 돼야 한다. 독자들에게 대한매일의 강직하고 신선한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서는 너나없이 한 목소리로 외쳐대는 특색없는 비판에서 벗어나 나름대로 독특한 색채를 지녀야 한다. ▲金旻貞=한마디로 한국 언론은 ‘벌떼’근성을 지녔다. 모든 신문들은 자기만의 사고나 판단없이 사회적으로 부각된 이슈에 벌떼처럼 달려든다. 그리고 다른 언론의 비판 수위와 강도 등을 살피며 자기의 시각이나 기사의 밸류 등을 판단한다. 거듭나는 대한매일은 이같은 기존 언론의 행태를 떨쳐버려야 한다. 아울러 과거의 잘못에 대한 철저한 자기 반성을 토대로 기존의 틀을 깨치고 대한매일만의 눈으로 모든 사물을 보고 판단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특히 과거 정권에 예속돼 언론으로서의 제 구실을 못했던 구태를 과감히 떨쳐내야 한다. ▲高濟奎=언론의 가장 큰 문제는 아무리 문제점을 지적해도 개선이 되지 안는다는 점이다. 한국 언론의 문제를 다시 한번 지적하면 권력과 언론의 유착 문제다. 당근과 채찍 논리로 볼때 정권이 건네는 ‘당근’에 너무 길들여져 있다. 또 재벌과의 문제로 기업이 언론을 소유하고 언론은 기업을 보호하는 유착관계가 문제의 핵심이다. 대한매일신보는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국권수호에 나섰던 신문인 만큼 시대의 중심이 돼야 한다.IMF 사태라는 시대적인 어려움,지역감정,통일 등 여러 문제를 푸는데 선봉이 돼야 한다. ▲金泰昊=언론에 대한 시민의 감시가 언론을 건강하게 만든다. 잘못된 정치의 문제는 곧 언론의 문제이며 잘못된 언론의문제는 곧 한국 시민사회의 문제다. 신문이 건강해지려면 시민운동이 더욱 건강해지고 질적 수준도 높아져야 한다. 일제 치하 대한매일신보가 독자들의 지지를 받은 것은 당시 시대에 부응하는 항일운동과 교육계몽운동을 펼쳤기 때문이다. 새롭게 창간되는 대한매일은 이처럼 목표를 확실히 표방해야 한다. 또 과거의 전통을 이어 현재의 국난극복을 사시로 정해 놓고 이를 실현하하기 위해 힘을 쏟아야 한다. ▲金旻貞=한국언론은 소외된 계층의 목소리 보다는 지배계층의 목소리 만을 대변해왔다. 이로 인해 기사의 중립성과 공정성은 크게 결여됐다. 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나 87년 6.10 민주화운동 당시 모든 신문이 그러했듯 거의 모든 기사가 강자의 편에서 작성됐다. 또 언론의 상업성은 위험수위를 넘어 큰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특히 일부 신문들은 광고가 지면의 50%를 넘어 광고지인지 신문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다. 신문별 발행 부수도 공개되어야 한다. ▲高濟奎=사실 보도와 의견은 구분되어야 한다. 자사의 이익을 위해 사실을 왜곡,의견을펴는 신문이 많다. 모 신문의 이승복 사건과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인 崔章集 고려대교수(정치학과)에 대한 음해 보도 등 사회여론을 무시하고 자사의 이익에 따라 보도하는 행태을 많이 보았다. ▲金旻貞=10개의 중앙 일간지는 모두가 ‘우리는 국민의 여론을 반영한다’는 애매한 사시를 가지고 있는데 사시를 구체적화할 필요가 있다. 특정 정당이나 단체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당파성을 가져도 무방하다고 본다. ▲高濟奎=신문사간 비판도 허용되어야 한다. 최근 신문사간 서로 공방이 오가는 것도 오히려 언론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 ▲金泰昊=신문사 마다 뚜렷한 개성을 내세우지 못하고 있어 서로 비판을 못하는 것 같다. 한 사건에 대해 각 신문이 서로 다른 시각과 입장을 갖고 다룰 수 있어야 한다. ▲高濟奎=50년만의 여야 정권교체후 서울신문은 ‘민주 열사에 대한 재조명’ 등 신선한 내용을 게재하는 등 많은 변화를 보였다. 변화를 위해 여기저기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이제 대한매일로 새롭게 뿌리를 찾은 만큼 흔들림 없는 굳건한 위상을 가져야 할 것이다. ▲金旻貞=과거에서 배우라는 말을 하고 싶다. 대한매일이 과거의 대한매일신보에서 배울 점은 역사를 바라보는 눈을 갖는 것이다. 과거의 대한매일신보가 반제국주의와 항일 등 뚜렷한 역사의식을 지녔던 것처럼 과거의 전통을 계승해 새로운 역사 의식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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