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순원씨 전·노씨 구형공판 방청기
◎이제 국민이 심판할 차례다/전·노씨는 구형순간 터진 박수의 의미 알아야
우리 같은 일반 사람들에게 법원이나 검찰청은 왜 그 주변분위기부터 삼엄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서울 형사지방법원 417호 대법정.10시부터 열리는 이 역사적 재판을 구경하기 위하여 진작부터 입장한 방청객들은 숨소리를 죽이고 조용히 앉아 있다.늦게 들어갔는데도 방청석 제일 앞에 자리를 잡고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소복차림의 아주머니들과 베잠방이를 입은 나이드신 촌로들,묻지 않아도 어디에서 올라온 누구인지 알겠다.목발을 짚고 뒤늦게 자리를 찾는 40대 남자의 모습도 눈에 아프게 들어온다.그래서 더 엄숙하게 보이는 법정은 마치 긴 회랑의 한 부분을 잘라놓은 것 같다.
잠시 후 검사들이 들어오고 변호인들이 자리를 채우고,부장판사를 포함한 세명의 판사가 들어왔다.늘 그렇듯 재판부 판사들의 얼굴은 근엄하다.가운데 앉은 재판장이 이 재판의 성격이 피고인들에 대한 반란수괴,내란수괴,내란중요임무 종사,반란중요임무 종사 등에 대한 것임을 알리며 개정을 선언하고 한사람 한사람 피고인을 호명해 법정 안으로 불러들였다.
전두환.그와 그 이름에 대한 어떤 선입견 때문이었을까.그는 하늘색 수의를 입고도 재판장보다 더 근엄한(?)얼굴로 꼿꼿이 들어와 재판부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하곤 지정된 피고인석 앞에 서서 잠시 허리춤에 두 손을 짚어보았다간 자리에 앉았다.검찰이나 방청석을 향해선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였다.
노태우.안으로 들어서며 그는 재판부를 향해 인사를 하고 방청석을 향해서도 조금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인사를 했다.어쩌면 그것은 이제까지 우리가 보고 들어 알고 있는 두 사람의 성정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뒤를 이어 유학성,차규헌,박준병,최세창,장세동 등 16명의 피고인이 수의를 입거나 양복을 입은 채로 차례로 들어와 피고인석을 채웠다.
상오 중 공판에선 김경일 전1공수1대대장에 대한 증인신문과 피고인들에 대한 재판부 보충신문이 있었다.재판부 보충신문에 대해 전두환 피고인은 『답변을 하지 않겠다』고 했고,다시 재판장이 『노태우 피고인도 답변을 않겠느냐』는 물음에 그는『아직 그런 결심을 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해 작은 웃음을 자아냈다.
전두환 피고인은 마치 봉건시대의 상왕과도 같은 태도로 반란 및 내란 수괴의 피고인이 아닌 한때 만인지상의 권력자로서의 오로지 자신의 옛 영화와 명예만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피고인석에 앉아서도 그토록 자신의 그릇된 명예만을 중시하는 그가 이 재판이 열리기까지 16년간이나 땅에 떨어져 있던,한때는 스스로 「폭도」로까지 몰았던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의 명예를 단 한번이라도 생각해 보았을까.그리고 상오 공판의 휴정과 함께 터져나온 죽은 사람들의 목숨도 아니고 『어디에 묻었는지도 모를 뼈다귀를 돌려달라』는 유가족들의 절규를 들으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재판은 하오2시에 속개되어 검찰측의 논고로부터 시작되었다.「현대사의 오욕」이 나오고 「잘못된 과거에 대한 철저한 청산」이 나오고,「역사와 국민 앞에 심판받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사건을 수사했으며,「법은 만민에게 평등하며 어떤 권력을 가진 자라도 법의 천강을 벗어날 수 없다는 교훈을 주는역사의 심판장이 되어야 한다」던 검찰 논고는 그 자체로서는 더없이 준엄하다.그러나 94년과 95년 두 차례에 걸쳐 공식적으로 12·12사건에 대한 기소유예와 5·18 사건에 대한 공소권 없음 등 결정을 내렸던 검찰이 아니던가.그래서인지 그 논고문의 울림까지 준엄하게 들리지는 않았다.논고 도중 전두환 피고인은 애써 검사와의 시선이 마주치길 피했고,노태우 피고인은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이윽고 구형순간이 다가왔다.
전두환 피고 사형.속으로야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그 순간에도 그는 미동조차 않고 있었다.방청석도 숨을 죽이고 다음 차례를 기다렸다.노태우 피고 무기징역.그는 움찔 몸을 떨었다.유학성 징역 15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호용 피고 무기징역.
검찰의 구형이 끝나는 순간 커다란 박수소리가 들렸다.어쩌면 그 박수는 15년만에 처음으로 그렇게 터져 나온 것인지 모른다.우리는 지켜볼 것이다.그들의 죄과도 이 재판도 결국은 우리가 심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