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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8 광주 민주화 운동
    2025-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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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당이 그 당…경제 살릴 당 지지하겄소”

    “그 당이 그 당…경제 살릴 당 지지하겄소”

    호남이 이상하다. 최근 정당지지도 조사에서 한나라당이 1위를 차지하는가 하면, 한나라당 경선에서는 예상보다는 높은 투표율을 기록하면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를 밀었다. 범여권 후보 등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뜨거운 지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무슨 변화가 있는 것일까. 호남 민심의 중심지인 광주시민의 여론을 들어보았다. “그 당이 그 당이고 이제까지 지지하고 밀어줬는데 밀어봤자 다 똑같고. 차라리 경제 살릴 수 있는 그런 당을 지지하겄소.”(이모씨·51·택시기사) “투표하러 안 갈 거요. 너무 빤하니까. 한나라당 대통령도 시켜봤고 민주당도 시켜봤지만 결과는 다 똑같았어. 먹고 살기도 힘들고 취직도 힘들고. 애들 가르치고 하루 먹고사는 데만 관심 있지.”(김모씨·56·상인) 민주신당 지도부가 현장정치를 구현하겠다며 첫 방문지로 23일 달려간 광주의 민심은 싸늘했다. 마음 줄 곳을 찾지 못하는 듯했다. 한나라당이 이명박 전 서울시장을 후보로 확정짓고 일방적 독주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분열양상만 보이고 있는 민주신당과 민주당에 신물이 난다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달라진 호남 민심… 한나라당 지지율 1위 광주 서구 양동시장에서 만난 상인 고모(59)씨는 “여기저기 얘기를 들어보면 한나라당 얘기를 많이 한다. 우리도 이제 한나라당 국회의원도 시켜야제. 이명박씨도 추진력 강하고 경제를 살릴 수 있다며 평판이 좋아.”라며 최근 들어 급격하게 변해 가는 민심을 전했다. 범여권의 정신적 지주인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비난도 잇따랐다. 한나라당을 지지한다는 이모(48)씨는 “김 전 대통령이 도청을 무안으로 옮겨 광주 경제는 더 안 좋아졌다. 먹고살기 어려운데 더 이상 그쪽(범여권)을 찍을 이유가 없지. 김 전 대통령을 일방적으로 밀었던 것은 광주 사람이 한이 맺혀서 그랬지. 한번 했으니까 이젠 DJ 얘기를 들을 필요가 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은 싸늘, 대선되면 바뀌지 않을까?” 그러나 현재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는 범여권에 대한 반발일 뿐이며 대선이 임박하면 다시 범여권 후보를 지지할 것이라는 시각도 여전하다. 식당을 하는 김모(48)씨는 “지금은 싸늘하지만 대선에 임박하면 바뀌지 않겠느냐. 범여권이 통합하고 후보 한 사람이 나와 1대1 대결이 되면 그쪽(범여권)을 찍을 것”이라며 민주신당과 민주당의 후보 단일화를 기대했다. ●민주신당-민주당의 치열한 텃밭 싸움 호남인들의 차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민주신당과 민주당은 이날 호남 맹주를 차지하기 위한 독자행보를 가속화했다. 오충일 대표와 김효석 원내대표를 비롯한 민주신당 지도부는 이날 광주 5·18국립묘지를 참배한 데 이어 김대중 컨벤션센터에서 최고위원회의를 가졌다. 오후에는 광주지역 시민사회단체 인사들과 간담회를 갖는 등 호남에 대한 ‘러브콜’을 보냈다. 오 대표는 “어떻게 싸워서 여기까지 왔는데 박정희의 딸이란 사람이 대선 (예비)후보가 되고,70∼80년대 군사독재 개발시대에, 창업한 것도 아니라 큰 기업에서 조그만 사업을 한 사람이 대통령 후보가 되느냐.”며 한나라당에 대립각을 세웠다. 민주당도 이날 전주 전북대 삼성문화회관에서 당원 3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북 당원 전진대회를 갖고 호남 지지층 다지기에 나섰다. 박상천 대표 등 지도부와 조순형·이인제 의원 등 대선 경선 예비주자들은 연설회에서 자신들이 호남과 민주화 운동의 적자임을 강조하며 민주신당을 집중 성토했다. 광주 박창규기자 nada@seoul.co.kr
  • 광주에 ‘5·18 기념관’ 들어선다

    광주시 동구 광산동 옛 전남도청에 들어설 국립 아시아문화전당 안에 5·18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기념공간이 들어선다. 또 아시아문화교류센터가 민주평화교류원으로 바뀌는 등 일부 프로그램과 전당내 구조물 명칭 변경이 추진된다. 17일 광주시와 문화부에 따르면 다음달 초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 종합계획’ 확정을 앞두고 이 같은 내용을 공개했다. 문화부가 잠정 확정한 전당 시설물은 ▲민주평화교류원 ▲문화예술정보관 ▲문화창조원 ▲아시아예술극장 ▲어린이 지식문화원 등이다. 문화부는 민주평화교류원 내에 5·18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민주·인권·평화기념관’을 새로 도입하고, 문화창조원 산하에 ‘아시아 문화예술전시관’을 신축할 방침이다. 민주·인권·평화기념관은 옛 전남도청 본관, 전남경찰청 등을 활용해 조성하며,5·18을 주제로 한 전시실과 자료실, 콘퍼런스홀 등을 배치한다. 또 ‘아시아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공간’ 개념으로 ‘아시아문화예술 전시관’을 새로 짓기로 했다.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일해공원’ 명칭 논란 재점화될 듯

    5·18광주민주화 운동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가 인기를 끌면서 경남 합천의 ‘일해 공원’ 명칭을 둘러싼 논란에 다시 불이 붙을 것으로 보인다. 5일 일해공원 반대 경남대책위원회에 따르면 대책위는 영화 개봉일인 지난달 26일에 맞춰 창원, 진주 등의 영화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원 명칭 철회를 촉구했다. 또 지난 3일 합천군에 일해 공원이라는 안내표지판의 철거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합천군의 공식 답변이 없으면 오는 15일을 전후해 공원의 표지판을 직접 철거하는 직접 행동에 나서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9일 합천 군민들을 대상으로 영화 함께 보기 운동을 하는 한편 영화 제작사와 협의해 일해 공원에서 야외 영화를 상영하는 방안도 추진하기로 했다. 논란은 올해 초 합천군이 ‘새천년 생명의 숲’이라는 공원의 이름을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호를 딴 일해 공원으로 바꾸면서 촉발됐다. 합천군 관계자는 “영화 한 편 때문에 군의 입장을 바꾸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합천 이정규기자 jeong@seoul.co.kr
  • 손학규 “신당 ‘80년 광주’에 갇혀선 안돼” 발언

    손학규 “신당 ‘80년 광주’에 갇혀선 안돼” 발언

    범여권 대선 주자들이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손학규 전 지사의 독특한 해석에 일제히 손 전 지사를 공격하고 나섰다. 손 전 지사는 3일 광주에서 “신당이 말로는 미래세력이라면서 아직도 ‘80년 광주’에 갇혀선 안 된다.”며 “광주정신은 광주를 털어버리고 대한민국, 세계를 향해 뻗어갈 때 더 빛날 것”이라고 말했다. 손 전 지사의 이같은 발언은 광주 민주화운동에 가담하지 않은 자신의 약점에 대한 예상되는 공세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뜻으로 보인다. 손 전 지사는 80년 광주민주화 운동시절 영국 유학 중이었다. 범여권 대선주자들은 손 전 지사 발언을 강력 비판했다.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측은 “그동안 광주정신에서 벗어나 살아온 사람에게는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라며 “광주정신이 담고 있는 정의, 인권, 평화 정신은 21세기에도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고 비판했다. 또 “광주정신에 대한 폄하·왜곡은 광주와 민주개혁세력을 모욕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천정배 의원도 공격의 날을 세웠다. 천 의원은 논평에서 “일전에 ‘광주정신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는 말장난으로 놀라게 하더니 이번에는 ‘광주를 털어 버려야 한다.’는 경악스러운 발언으로 본심을 드러냈다.”고 비판한 뒤 “정말 털어버리고 싶은 것은 지난 14년간 수구·기득권세력의 하수인이 돼 광주를 공격했던 자신의 과거 아니냐.”고 반문했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측도 “얼마전까지만해도 ‘5·18당시 몸은 영국에 있었지만 마음은 광주에 있었다.’고 하던 분 아니냐.”면서 “스스로 민주화 운동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음을 폭로하는 것으로,IMF 사태 때 정권에 몸 담았던 사람이 광주정신을 일자리와 묶어서 말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라고 비난대열에 동참했다. 이에 대해 손 전 지사측 배종호 대변인은 “광주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미래로 세계로 나가자는 뜻”일 뿐이라며 “의도적으로 의미를 왜곡하는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든다.”고 공세를 일축했다. 박창규기자 nada@seoul.co.kr
  • 신군부, 80년 5월초부터 비상계엄 확대 계획…‘北 남침설’ 5·17에 악용

    신군부, 80년 5월초부터 비상계엄 확대 계획…‘北 남침설’ 5·17에 악용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신군부가 학생시위가 본격화되기 전인 5월초부터 비상계엄 확대를 통한 정국 장악을 치밀하게 계획했던 것으로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해동) 조사결과 드러났다. 하지만 관심을 모았던 5·18 발포명령자는 이번에도 밝혀내지 못했다. 국방부 과거사위는 24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12·12,5·17,5·18사건과 1990년 보안사 민간인 사찰사건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과거사위에 따르면 5월초 육군본부는 ‘학생시위 대처방안’이란 문건을 통해 ▲군 투입 준비(5월7∼10일) ▲포고령 발표(11∼13일) ▲휴교령·계엄포고문 발표(14∼15일) ▲계엄군 투입(17일)으로 이어지는 단계별 계획을 수립했다. 과거사위는 “문건 작성 당시 학생시위는 학원민주화를 요구하는 교내시위 수준이었다.”면서 “시위로 사회가 혼란해져 군이 나섰다는 신군부 주장은 5·17 계엄확대를 정당화하려는 거짓주장”이라고 결론지었다. 신군부가 계엄확대 명분으로 활용한 ‘북한남침설’에 대해선 당시 육본조차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했던 사실도 새롭게 드러났다. 육본 보고서를 통해서다. 과거사위는 “정치개입의 명분을 찾기 위해 대북정보를 악용한 것”으로 규정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 앞 발포의 최종 명령권자는 끝내 밝혀내지 못했다. 다만 과거사위는 “5월21일 작성된 2군사령부 문서를 통해 전두환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이 ‘자위권 발동’을 강조했다는 사실을 새롭게 확인했다.”고 밝혔다. 과거사위가 공개한 ‘광주권 충정작전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이란 문서에는 “전(全) 각하(전두환 지칭):초병에 대해 난동시에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라는 내용이 수기(手記)로 적혀 있다. 초기 강경진압 과정에 황영시 당시 계엄부사령관이 깊숙이 개입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전차 투입을 명령하고 자위권 발동 논의를 주도한 것도 황 부사령관이었다고 과거사위는 전했다. 한편 5·18 발포명령자 등 핵심 의문점들이 해소되지 못한 것과 관련, 이해동 위원장은 “미흡하더라도 자기고백적 진상조사결과를 군 스스로 국민 앞에 공개했다는 점에 주목해 달라.”고 말했다. 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李·朴 ‘민심잡기’ 행보 가속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도 포용해서 갈 것이다.”(이명박 후보) “큰 대의를 위해 뭉친 우리가 승리할 수밖에 없다.”(박근혜 후보)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 경선 후보는 5일 대구·경북 지역 선대위 발대식에 참석하는 등 이틀째 영남 지역 당심잡기에 나섰다. 박근혜 대선 경선 후보는 아침 일찍 춘천 강원도청을 찾아 도민들을 위로하고 오후에는 특보단 간담회를 가졌다. 이 후보는 대구·경북 지역 기자간담회에서 “제가 경선에 당선되면 (대운하 공약에) 반대하던 의원들도 다 지지로 돌아설 것”이라면서 “정치적으로 반대했던 사람들도 다 포용해 하나로 같이 가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단호하게 “정치적 목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대꾸할 필요가 없다.”며 청계천 복원 당시 반대 목소리를 예로 들었다. 일부에서 도심으로 접근하는 차량 20만대를 걱정했지만, 시뮬레이션 등을 통해 도심을 관통하기만 하는 차량 15만대를 위한 대체도로를 만들어 오히려 도심 차량속도를 빠르게 했다는 설명이다. 이 후보는 “저는 권력자의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찬물에 손넣지 않고 살 수 있는 부잣집에 태어나지도 않았다.”며 박 후보와 차별화를 꾀했다. 동석한 김광원 선대위 부위원장은 “이 어려운 나라를 공주님께서 살릴 수 없다.”며 박 후보를 겨냥했다. 박 후보는 여의도 선거 사무소에서 열린 특보단 간담회에서 “시대정신을 꿰뚫어 알고, 대의를 위해 뭉친 사람들에 의해 역사가 이어져 왔다. 큰 대의를 위해 뭉친 우리가 승리할 수밖에 없다.”고 자신했다. 이 자리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산 증인이자 1세대 인권변호사인 고 홍남순씨의 셋째아들 기섭씨와 13대 민자당 국회의원 문준식씨의 둘째아들 성용씨가 박 후보 지지선언을 했다. 박 후보는 앞서 이날 오전7시40분쯤 강원도청에 도착해 태극기를 흔들고 파도타기를 하며 평창을 응원했다. 유치 실패 소식이 들리자 박 후보는 “이번에는 꼭 될 줄 알았다.”며 여러 차례 안타까움을 표시했지만 곧 “강원도민이 한 마음을 가지고 열정을 다해 또 한번 도전할 것이고, 반드시 더 멋진 기회가 올 것”이라고 위로했다. 한편 박 후보 캠프의 최원영 공보특보는 이 후보측의 ‘공주님’ 발언과 관련,“표현이 너무 지나치셨다. 상대후보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 주시기를 부탁드린다.”고 논평했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진실화해위 재심권고 ‘아람회 사건’ 피해자 김난수씨

    “딸 아람이가 벌써 스물일곱 살입니다. 지금 수의사로 일하고 있어요. 아람이도 소식을 들으면 기뻐할 겁니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약칭 진실화해위)는 5일 반국가단체 구성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은 ‘아람회’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피해자 김난수(54)씨는 이날 소식을 전해듣고 “취업이 안 돼 고통받은 지난 세월이 너무 억울하다.”면서 “재심을 통해 무죄를 인정받고 손해배상까지 받으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단순 친목모임이 반국가단체로 ‘아람회’ 사건은 1981년 대전경찰서가 김난수씨와 박해전씨 등 12명을 불법감금 상태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를 한 뒤 법원에서 징역 10년과 자격정지 10년 등 중형을 선고한 사건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미국을 비판했다는 이유였다. 피해자들은 2년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아람’은 김씨의 딸 이름이다. 경찰은 81년 7월 아람씨의 백일잔치를 계기로 김씨 집에 모인 사람들이 단순 친목모임 명칭으로 거론한 ‘아람회’를 반국가단체로 몰았다. 진실화해위는 “국가는 피해자들과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김씨는 당시 육군 대위로서 직업군인의 길을 걷고 있었다. 김씨는 “장교 선배들과 친구들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딸아이 백일을 축하했을 뿐”이라면서 “사건 이후 집안은 거의 파탄이 났다.”고 안타까워했다. ●보안부대 지하실서 한달간 고문 김씨는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81년 8월 혼자 제507보안부대로 이첩돼 조사를 받고 군 검찰에 송치됐다. 김씨는 “무릎 사이에 몽둥이를 끼운 채 군홧발에 밟히는가 하면 발가벗긴 상태로 구타당하는 등 보안부대 지하실에서 한 달간 고문을 받았다.”고 밝혔다.83년 12월 특사로 풀려났지만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고 김씨는 전했다. “출소 직후 3개 회사에 합격했지만 신원조회 과정에서 불합격처리됐고, 노태우 정권 때까지도 보안관찰 대상이라 취업이 안 됐습니다. 사면복권된 후엔 나이가 너무 들어 취업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 됐습니다.” 김씨는 식당과 독서실 등을 운영해 봤지만 모두 실패하고 지금은 10여년째 무직상태다. 김씨는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아람이도 아빠의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빠에 대한 불신이 컸을 것”이라며 가슴아파했다. 태어나자마자 반국가단체의 이름이 돼버린 딸 아람씨는 지금 어엿한 성인으로 자라 수의사로 일하고 있다. 5·18광주민주항쟁 유공자이기도 한 김씨는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에 따라 2004년 4월 재심을 청구했고 현재 대전지법에 계류 중이다. 박해전씨 등 다른 피해자들의 재심청구는 작년 7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재판이 개시됐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부고] ‘5·18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씨 별세

    5·18민주화운동 ‘마지막 수배자’인 윤한봉 민족미래연구소 소장이 27일 지병인 폐기종으로 5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전남 강진 출신인 윤 소장은 1974년 전남대 농대 축산과에 재학중 ‘민청학련 사건’과 ‘긴급조치’ 위반 등으로 투옥과 제적을 되풀이했다.‘민청학련 조작 사건’ 당시엔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1년 만에 석방된 뒤 광주지역 청년운동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 그는 다시 79년 10월 긴급조치 위반으로 붙잡혀 석달 동안 모진 고문을 당했다.5·18 때는 신군부로부터 배후 주동자로 지목받아 전국에 수배돼 11개월 동안 도피하다가 81년 4월 무역선 화장실에 몸을 싣고 미국으로 밀항했다. 윤 소장은 밀항 후 미국 워싱턴주 벨링햄 등지에서 활동하며 민족학교를 세웠고, 미국·일본·유럽 등에 ‘한청련’ 등의 운동단체를 결성해 해외에서 민주화운동을 펼쳤다.‘살아남은 자의 부채 의식’ 때문에 미국 망명 중 의도적으로 미국 생활에 적응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지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1993년 수배가 풀리면서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5·18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에게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냈다. 이후 5·18기념재단 설립을 주도하고, 들불야학 열사기념사업회 등도 이끌었다. 윤 소장의 유족으로는 부인 신경희(46)씨가 있다. 장례는 민주화운동을 했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장례위원회를 구성해 30일 오전 민주사회장(4일장)으로 치러진다. 고인의 빈소는 조선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062)220-3352.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사법연수원 24시] (중) 변화의 바람 부는 연수원

    [사법연수원 24시] (중) 변화의 바람 부는 연수원

    5일 찾은 경기도 일산 사법연수원에서 말쑥한 정장 차림의 연수원생들을 만나리라는 기대는 빗나갔다. 강의실과 도서관에는 야구모자에 면 티셔츠, 청바지와 운동화 차림의 연수원생들이 대부분이라 연수원이라기보다는 대학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다. ●복장 자유화에 짧은치마·청바지 유행 “요새 여성 연수원생들의 치마가 자꾸 짧아지는 통에 부장 판·검사까지 지낸 점잖은 교수님들이 꾸짖지도 못하고 얼굴만 벌개지는 경우가 있어요.” 연수원에서 만난 2년차 남성 연수원생의 말이다. 연수원생들의 복장이 완전 자유화된 것은 지난해. 원래는 정장 차림이 원칙이었지만, 지나친 규제라는 비판에 자유화된 것이다. 그는 “연수원 과정이 시작된 3월까지는 눈치를 봐가면서 정장을 입지만,4월로 접어들면서 대부분 청바지, 면바지로 바꿔 입었다.”고 말했다. 프린트 티셔츠에 무릎 위로 올라오는 면 스커트를 입은 여성 연수원생의 모습은 연수원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대한민국 최고의 공부벌레’라는 딱딱한 이미지의 사법연수원생들에게 이같은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윤성식 교수는 “연수원생들이 너무 대학생 차림을 하고 다녀서 제발 공무원증이라도 패용하고 다니라고 잔소리를 할 정도”라며 웃었다. ●남다른 승부욕…체육대회 때는 부상자도 속출 연수원에 가까운 지하철 3호선 역이 마두역. 그래서 붙여진 사법연수원의 별칭이 ‘마두고등학교’다. 고3이나 마찬가지로 빡빡하게 공부를 해야 하는 데다 담임선생님에 해당되는 지도교수가 정해져 있다.4월이면 체육대회도 갖고,2학기에는 수학여행과 엠티도 떠난다. 이윤식 기획총괄교수는 “공부에 다른 활동까지 하려면 스트레스도 받겠지만 사회 경험이 없는 연수원생들에게는 이런 경험이 예비 사회인으로서 소양을 쌓는 과정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체육대회에서는 연수원생들의 남다른 승부욕 때문에 부상자가 나와 휴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외교통상부에 근무중인 이지형(32·여·34기) 변호사는 “축구 시합을 하다 사람에 깔려 갈비뼈가 부러진 동기생도 있었다.”면서 “남성 연수원생들은 같은 반 여성 연수원생들이 발야구에서 지는 걸 참지 못해 응원석에서 훌리건처럼 흥분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부상과 시비가 잦아 올해부터는 국제공인심판제가 도입됐을 정도다. 축구·농구·발야구 등 구기종목 예선경기는 원래 한 달 동안 토너먼트로 진행됐지만 일부 팀이 “그 시간에 공부나 더하자.”면서 일찌감치 일부러 탈락하는 현상이 빚어지자 올해부터 리그전으로 바뀌었다. 연수원생 1000명 시대이지만, 교수와 연수원생들의 관계는 전보다 훨씬 친밀해졌다고 한다. 이윤식 교수는 “분위기가 자유로워지면서 교수를 스승이라기보다는 법조계 선배나 멘토(조언자)처럼 스스럼없이 대하는 연수원생이 많아졌다.”면서 “많은 연수원생 사이에서 자기 존재감을 느끼기가 어렵고, 장래에 대한 불안도 커지면서 지도교수에게 의지하려는 분위기도 많다.”고 말했다. ●5급 공무원…월급은 150만원 연수원생들은 5급 공무원 신분이다.150만원 정도의 월급을 받아 자치회비·동창회비·세금 등을 떼고 나면 실제 손에 쥐는 것은 100만원 남짓. 연수원생은 기본적으로 국가공무원법의 적용을 받으며, 품위손상 행위 등으로 연수원 규정을 어기면 징계대상이다. 수업에 빠지면 결석이 아니라 결근 처리가 되고, 근무태도 평정 점수도 깎인다.50점 만점의 근무태도 평정 점수에서 무단 결근 한 번에 2점, 무단 지각·조퇴는 1점씩 감점된다. 지난 2005년 수료한 연수원 34기 출신의 변호사는 “2003년 노동법학회 동기 회원들이 연수원생 500명으로부터 이라크 파병 반대 서명을 받아 청와대에 제출한 적이 있다.”면서 “공무원의 집단행동 금지 규정 위반 등으로 1명이 3개월 감봉의 징계를 받았다.”고 소개했다. 지난 2003년에는 휴대전화 통화로 알게 된 여성의 나체사진을 찍은 뒤 협박, 금품 등을 빼앗은 혐의로 한 연수원생이 구속됐다. 연수원 사상 최초의 파면이다. 윤성식 교수는 “연수원생들이 월급을 받으며 공부하는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에 공무원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도 많다.”고 말했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연수원생의 ‘사랑이야기’ “저희 정보업체에 괜찮은 신부감이 많은데 관심 없으세요?” “전 결혼했는데요.” “결혼 생활은 행복하세요?저희가 재혼도 전문인데요.” 실제로 한 연수원생이 결혼정보업체로부터 받은 전화 내용이다. 예전처럼 ‘열쇠 3개’를 들먹이면서 노골적으로 접근하는 ‘뚜쟁이’는 거의 없지만, 사법연수원생은 여전히 제1의 신랑감·신부감이다. 수백만원씩 하는 일류 결혼정보업체 특별 회원 가입비도 연수원생들에게는 몇십만원 수준으로 대폭 할인된다. 연수원생들의 이름과 사진, 연락처 등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연수원생 수첩이 나오는 날이면 자치회 사무실에 전화가 빗발친다. 맞선 시장에서는 수첩이 적게는 수십만원에서 많게는 100만원 이상의 가격에 거래되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래서 연수원생 1인당 수첩 1부의 원칙이 세워져 있지만, 수첩은 어떻게든 유출되고야 만다고 한다. 과거와 달라진 점은 연수원생들이 맞선에 당당하게 나가기가 쉽지만은 않다는 점이다. 맞선 자리에서 상대방이 연수원 성적까지 꼼꼼하게 따지고 드는 경우가 많아 맞선 자리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한다. 변호사로 활동 중인 한 35기 수료생은 “보통 1학기가 끝나면 벌써 대형 로펌 등 쟁쟁한 곳으로 갈 사람이 정해진다.”면서 “그 시점에서 진로가 확정되지 않거나 성적이 상위권이 아니면 맞선 시장에서 등급도 내려간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최근 들어 연수원 커플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도 새로운 현상이다. 반·조 모임을 하면서 늘상 붙어지내는 데다 사시 합격자 1000명 시대의 치열한 취업전선을 함께 헤쳐나가는 입장에서 서로의 처지를 가장 잘 이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의 경우 헤어지기라도 하면 남은 연수원 생활이 힘들어지기 때문에 커플 선정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자치회 이정원 사무국장은 “연수원 커플을 두고 ‘총알은 한 방’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라면서 “보통 1학기는 사귀어도 절대 티내지 않는 커플 잠복기이고,2학기가 되면 공식 커플이 서서히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한다.”고 전했다.‘총알은 한 방’이란 표현은 커플이 됐다 헤어지기라도 하면 남은 연수원 기간동안 여간 불편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편 한 결혼정보회사가 올해 초 미혼 남녀들이 선호하는 배우자 직업을 조사한 결과, 남성의 경우에는 1위가 판사·고위공무원·해외스포츠선수로 나타났고 검사는 4위, 변호사는 14위였다. 여성의 경우에는 판사 8위, 검사 14위, 변호사 15위였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자치회’ 이야기 사법연수원에서는 기수별로 ‘자치회’가 구성된다. 자치회란 후생 복리 문제 등을 다루는 학생회 성격의 자율적인 모임이다. 체육대회, 수련회 등 연수원생 친목 도모를 위한 행사를 주관하고, 학회활동 지원 및 학회 세미나 자료집 발간도 자치회의 역할이다. 연수원생들의 경조사를 챙기는 것도 자치회 몫이다. 자치회 회장·부회장 등의 간부진은 나이순으로 정해진다. 최고령자가 회장을 맡고 다음 고령자가 부회장을 맡는 식이다. 연수원의 전통이다. 조·반장 등 다른 팀 리더도 나이순으로 뽑는다. 그러다 보니 자치회 등의 간부는 나이만큼 늦어진 이색 경력의 ‘늦깎이 예비 변호사’들이 많다. 올해 연수원에 발을 디딘 38기 자치회장은 최고령자인 김재용(47)씨. 그는 전남대 80학번으로 대학 1학년때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겪은 뒤 노동운동에 투신, 인천에서 위장취업을 했다가 구속됐다. 조원룡(46) 부회장은 한국해양대 81학번으로 소위 임관까지 두 달을 남겨놓고 반강제로 학교를 자퇴해야 했다. 서울대 학생회에서 활동하던 형이 프락치 사건에 연루돼 지명수배가 내려진 것. 조 부회장은 일반 사병으로 군생활을 한 뒤에도 대학 중퇴의 학력으로 제대로 된 직장을 잡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포장마차에서부터 유흥업소 종업원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 대입학원에서 강사로 일하게 됐고, 이를 계기로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봐서 서울대 법대 99학번으로 입학했다. 박성구(39) 기획실장은 지상파 방송사 PD출신이고, 정영선(36) 언론매체실장은 6년 동안 변리사로 일하다 진로를 바꿔 1년 반 만에 사법시험을 통과했다. 사회생활을 하다 사시에 합격한 이들은 임관보다는 경력과 관련있는 분야에서 일하는 쪽으로 이미 진로의 가닥이 잡혀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여유있게 자치회 활동을 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정권재창출 관심없다고? 절대 아냐”

    “정권재창출 관심없다고? 절대 아냐”

    노무현 대통령이 18일 지역주의 심판론과 민주세력 정권재창출론을 꺼내들었다.“지역주의는 오로지 일부 정치인들에게만 이로울 뿐”이며 “어느 누구도 도도한 진보의 흐름을 가로막거나 되돌리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이날 오전 광주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열린 ‘5·18민주화 운동 27주년 기념식’에서였다. 기념식에 이어 지역 경제인과 가진 오찬 간담회에서는 “일부에서 내가 정권재창출에 관심 없는 것처럼 얘기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면서 “그건 절대 아니다.”고 민주세력의 정권재창출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고 한 참석자가 전했다. ●“지역주의 부활 조짐” 노 대통령은 이날 기념사에서 “가슴 아픈 일이지만 우리 정치의 지역주의가 아직 남아 있다.”면서 “광주 시민이 영남사람인 저를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영남에서도 30% 안팎의 국민이 지역당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선거제도가 합리적으로 바뀌지 않아 (지역주의 극복 노력에)후퇴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군사정권의 업적은 부당하게 남의 기회를 박탈하여 이룬 것”이라면서 “그 업적이 독재가 아니고는 불가능했다는 논리는 증명할 수도 없고, 국민의 역량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민주세력임을 자처하는 사람 중에도 민주세력이 무능하고 실패했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민망하기 짝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광주 중소기업종합지원센터에서 열린 광주·전남 지역 경제인과 가진 오찬 간담회에서 노 대통령은 “내가 탈당은 했지만, 열린우리당이 결정하면 따르겠다.”며 질서있는 통합의 결과를 존중하겠다는 뜻을 거듭 밝혔다. ●열린우리당 해체와 ‘도로민주당’ 회귀에 우려 표시 노 대통령의 발언은 열린우리당의 해체와 도로 민주당식 지역주의 회귀 움직임을 경계하고, 지역 중심의 호남·충청연대론보다는 지역주의를 벗어나려는 ‘영남의 30%’에 정권재창출의 단초가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으로 풀이된다. 군사독재 정권의 후신이라고 보는 한나라당과 민주세력 무능론을 주장하는 일부 진보진영 인사들을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반(反)지역주의와 ‘김대중-노무현’을 계승하는 민주세력 단결을 역사 진전의 해법으로 내놓은 셈이다. ●“2단계 균형발전계획 밀어붙여 보자” 노 대통령은 이날 경제인 오찬간담회에서 2단계 균형발전계획과 관련,“대통령 선거판에 국회에 내놓고 밀어붙여 보자.”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지난해 하반기만 해도 금년 1·4분기가 되면 (정책 입안이)마무리될 줄 알았는데 그게 늦었다.”며 “(현재)입안 중”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2단계 균형발전 계획의 핵심 내용과 관련,“(기업이)지방 가면 비용이 훨씬 줄도록 세금·인건비 확실히 줄여주고, 지방 가면 사람이 확보되게 해줘야 한다.”면서 “2010년쯤에는 보따리 싸서 가겠다고 기업이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 겨냥? 한편 노 대통령은 “2011년 (혁신도시 건설이) 끝나고 나면 대운하 만든다는 사람도 있고 하니까 건설물량은 끊임없이 나올 것 같다.”며 듣기에 따라선 한나라당의 유력 대선주자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을 겨냥한 듯한 발언을 해 미묘한 여운을 남겼다. 혁신도시 조성사업과 관련, 노 대통령은 “삽 뜨는 게 60조원쯤 되고 거기에 건설이 100조원 정도 될 것”이라면서 “제 임기 동안은 큰 건설을 못했고, 건설업이 썩 잘 돌아가지 않았다고 하는데 앞으로 5년 동안은 우리나라 건설업이 잘 돌아갈 것”이라고도 했다. 박찬구기자·광주 구혜영기자 ckpark@seoul.co.kr
  • [5·18 민주화운동 27주년] 그 날 그 함성 다시 듣다

    국내외 석학들이 18·19일 이틀 동안 광주에서 5·18민주화운동을 재조명한다. 전남대 등에서 열리는 ‘5·18 민중항쟁 27주년 기념국제학술대회’에는 미국 시카고대 브루스 커밍스 교수가 ‘광주항쟁과 한·미관계’, 일본 도쿄대 와다 하루키 전 교수가 ‘동아시아와 두개의 코리아, 과거 현재 미래’, 고려대 최장집 교수가 ‘한국민주주의와 광주항쟁 세 가지 의의’, 서울대 윤영관 교수가 ‘21세기 세계 정치와 한반도 평화’를 주제로 발표를 한다. 이들은 ‘한국전쟁론’ 등에서 ‘수정주의’ 시각을 보여온 진보 학자로, 미리 배포한 원고에서 5·18과 당시의 국제정세 등에 대해 다양한 담론을 제시했다.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교수 미국 정부는 한반도에서 안보와 안정을 얻기 위해 전두환 등 독재 세력을 지원하고 5·18 당시 한국군 유혈 진압을 용인했다. 그리고 인권과 민주주의 문제로 어떤 심각한 이의제기도 하지 않는 것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다. 이는 카터 행정부의 비밀해제 문서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980년 5월22일 ‘중대한 백악관 회의’에서 국가안보 보좌관 브레진스키는 독재자(전두환)들에 대한 ‘단기적 지원, 정치적 발전을 위한 장기적 압력’을 암시했다. 당시 정책심리위원회는 ‘한국인들이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병력동원이 필요할 경우 이를 배제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이어 광주시민의 진압에 대해 많은 희생이 따른다면 다시 모여 이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다. 그러나 정작 많은 희생이 발생했을 때, 브레진스키는 또다시 독재자에 대한 인내와 북한의 도발 우려를 조언했다. 그리고 수일 만에 항공모함 미드웨이호가 한국해역으로 출항했다. 카터·홀부르크·브레진스키에서 시작해 1981년 취임한 레이건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전두환이 창조한 ‘새시대’를 ‘환대’하기에 이르기까지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의 정치 엘리트들이 전두환의 권력 찬탈을 후원했다. 전두환을 지지했던 유력한 미국인들은 나중에 그들의 수고 대가로 후한 보상을 받기도 했다. 스칼라피노 교수, 스피로 에그뉴 전 부통령, 리처드 홀브루크, 알렉산더 헤이그 등 당시 저명 교수와 관료들이 대우와 현대 등 한국 거대 기업의 고문으로 위촉돼 거액의 자문료를 받은 것이 그 예이다. 커밍스 교수는 미국의 대한국 정책은 일부 정치 엘리트들이 좌지우지한다며 북한을 견제하는 데 정책의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 한국인들의 의지는 존중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광주항쟁은 인권과 정치적 권리를 원한다면 그것을 위해 싸워야 하며, 싸우지 않으면 결코 얻지 못한다는 교훈을 남겼다.”고 평가하며 “미국 지도자들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원해 줄 것이라 믿어서는 안 되며 여러분 스스로 민주주의를 건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 전 교수 1894∼1975년 80년 동안 한·중·일과 동남아 지역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이 때문에 이 지역 사람들은 갈기갈기 찢기고 갈라졌다. 남북한이 대립하고 일본과 주변국가들이 지금까지 화합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을 포함해 가해자는 사죄하고 희생자의 비애와 아픔이 치유돼야 한다. 손해도 보상돼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움이 극복되고 용서가 이뤄져야 한다. 동북아의 중심에 위치한 한반도는 중국과 일본, 대륙과 해양을 잇는 가교이다. 유럽공동체와 같은 평화와 공생의 질서가 이 지역에서 구축되는 것이 꿈이다. 동북아 공동체 창설이 필요하며 그 중심에 한반도가 있다. 그러나 한반도의 분단과 대립은 동아시아 지역공동체 실현에 걸림돌이다. 다행히 한국은 민주혁명 진전의 결과로 대북정책의 결정적인 전환을 맞게 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북한에 대해 포용정책을 취하고 남북정상회담을 실현했다. 이 정책은 누가 대통령이 돼도 기본적으로 유지될 것이다. 앞으로 남북한이 함께 지역 평화와 협력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과제다. ●최장집 고려대 교수 광주항쟁은 한국 민주화의 원천이다.‘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도 하나의 축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항쟁의 결과는 곧바로 민주화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군부권위주의의 해체와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가져오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또 민주화 이행으로부터 공고화를 포함하는 전체 민주화 시기를 통해 지속적인 영향력을 갖는 이념과 거대 담론을 창출했다. 구질서에 대한 총체적 안티테제로서, 대안적 질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온 갈등은 ‘민주대 반민주’로 집약된다. 광주항쟁은 그 핵심 구성 요소이자 가치로서 민족·민주·민중이란 세개의 언어를 창출했다. 광주항쟁이 창출한 이들 세개의 중심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항쟁 과정에서 그렇게 인식되고 스스로 자각된 ‘민중’이다. 민중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적인 시민민중 또는 민중시민의 출현을 의미한다. 한국사회에서도 프랑스혁명을 주도한 시민처럼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실행하려는 주체가 등장한 것이다. 이점에서 1980년대 민주화는 그 이전 4·19나 광복 직후 상황과 구분된다. 압도적인 보수 헤게모니가 관철됐던 1980년대 말 이래 민주화가 진전된 것은 광주항쟁을 경험한 호남이라는 민주주의 지지 기반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는 그 후 대선과 총선 등에서 보수세력을 견제하고 민주화세력을 이끈 동력이 됐다. 많은 사람들은 지역당 구조를 ‘망국병’으로 규정하고 부정적 요소를 갖고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호남지역 유권자들의 결집된 투표성향은 그들이 광주항쟁을 경험하고 민주화 선봉에 섰다는 자긍심을 바탕으로 한다. 편견과 차별을 철폐하겠다는 민중적 욕구의 표현이다. 민족·민주·민중 3개의 중심적 거대담론은 민주화운동의 탈동원화와 일상화 과정 속에서 현저하게 쇠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민중이 정당을 매개로 삶의 현장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을 때 민주주의는 보통사람의 사회경제적으로 확고한 입지를 다질 수 있다. 광주항쟁의 정신과 역사적 의미는 민중이 주체가 되는 민주주의의 실현이다. 이를 통해 정치적 민주화를 경제적 민주화로 진전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 ●윤영관 서울대 교수 21세기 초 세계정치 구조는 미국의 패권적 지위 유지와 중국의 상대적 권력상승을 특징으로 한다. 미국은 9·11테러 이후 중국과의 우호 증진을 꾀하고 있다. 한편으론 일본·호주·인도 등과 동맹강화를 통한 대 중국 견제전선도 형성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이 이라크전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동북아·동남아·중앙아시아·아프리카 등지에서 조용한 영향력 확대를 시도하고 있다. 러시아 역시 자원을 무기로 강대국의 영향력 회복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반도는 북핵 개발로 위기가 진행 중이다. 이 위기가 어떻게 해소되느냐에 따라 한반도 및 동북아의 평화지속 여부가 달려 있다. 강대국의 이해가 달려 있는 북핵문제를 풀기 위해 미국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평화정착에 대한 밑그림을 그려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 국민들은 자기비하의식을 버려야 한다. 즉, 한국을 ‘고래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로 바라보는 무기력한 의식부터 버리지 않고서는 결코 우리 문제를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주도해 나가지 못한다. 한국은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이지만 강대국들에 비해 아직도 작은 나라이다. 그러나 아예 처음부터 포기해버린다면 능력 범위 안에서 해낼 수 있는 것도 해내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우리의 적은 주변 국가들이 아니라 스스로의 패배의식이다. 한국의 상대적 국력 상승을 고려한다면 지금은 새우가 아니라 돌고래 정도는 됐다. 돌고래는 다른 고래들보다 덩치는 작지만 영민한 머리를 갖고 있다. 돌고래처럼 현명하고 영민하게 처신하는 방법을 익히고 미래를 도모한다면 험한 파도가 밀려오는 세계정치의 대양에서도 나름대로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며 활로를 개척해 나갈 수 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5·18 민주화운동 27주년] ‘광주항쟁 사망자’ 정부기록물 첫 공개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희생된 사망자 명단과 사망 원인 등을 담은 정부의 공식 기록물이 일반에 처음으로 공개됐다. 국가기록원은 광주민주화운동 27주년을 맞아 광주시가 작성한 관련 기록물을 17일 공개했다. 공개된 자료와 1988년 이후 생산된 기록 원문 등 70권은 국가기록포털(http:///contents.archives.go.kr)을 통해 18일 오후부터 내용이 제공된다. 광주시가 작성한 기록은 ‘광주사태사망자철’과 ‘광주사태수습철’,‘광주사태복구상황’ 등이다.‘광주사태사망자철’에 포함된 사망자명단은 1980년 광주시 보건사회국 사회과에서 만든 것이다. 부검 자료와 피해 접수대장, 검시 자료 등이 공개됐지만 희생자 162명의 인적 사항과 사망 원인, 사고 경위 등이 종합 정리돼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정부대전청사 박승기기자 skpark@seoul.co.kr
  • [5·18 민주화운동 27주년] “오월에서 유월 함성으로”

    5·18민주화운동 27돌인 18일 광주에서는 기념식과 추모제 등 5월 영령들의 넋을 달래는 각종 행사가 개최된다. 오전 10시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서는 유족과 정부 주요 인사, 여야 대표 등 정치인, 시민 등 2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이 열린다. 이날 행사는 개회식과 묵념, 헌화·분향, 경과보고, 기념사 등의 순으로 1시간 동안 진행된다. 기념일을 하루 앞둔 17일 옛 전남도청 앞과 금남로 일대에서 전야제가 열렸다.5·18묘지에는 이날 하루 동안 2만여명의 참배객들이 몰리는 등 추모열기가 절정에 달했다. 대구에서 온 김영석(49·택시기사)씨는 “TV에서만 보던 현장을 직접 느끼기 위해 시간을 냈다.”면서 “묘에 묻힌 수많은 희생자들을 대하니 숙연해 진다.”고 말했다. 이날 묘지를 찾은 전남대생 박모(21·여)씨는 “광주에서 태어났으나 5·18을 경험하지 못한 탓에 5·18이 낯설게 느껴져 왔다.”며 “5월 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교육 등을 통해 더 널리 알려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임채정 국회의장과 한명숙 전 국무총리 등 정치인들의 광주 방문도 잇따랐다. 한 전 총리는 “1980년 5월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으로 광주교도소에 수감됐을 때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면서 “당시 교도소안에서 헬리콥터 굉음과 총성, 함성이 울리는 역사적인 현장을 함께했다.”며 5·18과의 인연을 소개했다. ‘5월에서 6월의 함성으로’를 주제로 열린 이번 전야제는 공연난장, 거리행렬굿, 진혼마당, 체험마당, 주제공연 순으로 밤늦게까지 진행됐다.금남로에서는 ‘주먹밥 나누기 행사’가 열려 시민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옛 도청 앞 특설무대에서는 일본 우타고에의 특별공연,‘무등합굿’‘님을 위한 행진곡’ 춤꾼 김은희의 넋풀이 ‘생명의 바다’가 이어졌다. 횃불행진에 이어 1980년 당시 시민군과 계엄군의 대치상황을 묘사한 상황극도 펼쳐졌다. 계엄군의 발포에 시민군이 결사 항쟁하는 모습, 시민들이 계엄군이 발포한 총알에 맞아 쓰러지는 모습 등이 재현돼 그날의 아픔을 되새기게 했다. ‘가자 오월에서 유월 함성으로’란 분수대 탑돌이 노래시극과 대동놀이가 펼쳐지면서 추모열기는 절정에 달했다. 이밖에 시내 일원에선 5·18 사진전, 어린이 환경극,5·18 퀴즈, 통일체험행사 등의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펼쳐졌다.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Local] 광주 ‘민주의 종’ 타종 또 무산

    올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에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광주 ‘민주의 종’은 울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5·18 민중항쟁 제27주년 기념행사위원회’는 16일 광주시가 제안한 기념일 타종에 동의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행사위원회 관계자는 “시에 민주의 종 앞에 설치된 표지석과 기념비를 철거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타종을 않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지난해에도 같은 이유로 타종이 무산됐다.5·18기념재단 등은 민주의 종 앞에 설치된 기념비와 표지석에 ‘적절 치 못한 일부 인사의 이름’이 새겨졌다.”며 철거를 요구해 왔다. 시는 그러나 ‘민주의종관리·운영규정’때문에 직접 나서 이를 철거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이 종은 2005년 11월 시민모금 등으로 모두 15억원을 들여 건립했으며,3·1절,5·18,8·15, 시민의 날(11월1일),12월 마지막 날 등에 타종하도록 돼 있다.
  • YS ‘5·18 감사패’ 받는다

    YS ‘5·18 감사패’ 받는다

    5·18기념재단,5·18 유족회 등 5월 단체는 14일 “5·18 주간인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을 광주로 초청, 감사패를 전달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광주에 도착,5·18묘지를 참배한 뒤 감사패를 받고 5·18단체 관계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정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중 두차례 묘지 참배에 나섰으나 5월단체와 남총련 학생들이 ‘3당합당’을 이유로 저지해 무산됐다. 한나라당 지역화합발전 특별위원장인 정의화 의원은 “김 전 대통령 측에서 22일 광주방문에 동행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며 김 전 대통령의 광주방문 사실을 확인했다. 김 전 대통령은 임기 중인 1995년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 피해자 배상과 기념사업, 국가기념일 제정,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5월 가해자들’에 대한 사법적 단죄 등을 통해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1993년 특별담화를 통해 현재의 5·18 묘지의 성역화 사업을 주도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Local] 5·18묘역에 추모관 개관

    광주시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 한쪽에 5·18추모관이 14일 문을 열었다. 박광태 광주시장과 유족회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이날 개관한 추모관은 5·18묘지 내 ‘민주의 문’ 왼쪽에 자리잡았다. 추모관은 5·18민주화운동을 배우고 체험하는 공간으로 지상 2층,500여평 규모로 국비 52억원이 투입됐다.1층에는 추모 촛불을 물에 띄우는 ‘한줄기 눈물의 촛불’ 코너가 마련됐다. 영상실에는 고 홍남순 변호사, 정상용 전 국회의원 등이 군사법정에서 최후 진술한 내용을 육성으로 듣고 재판 장면을 영상으로 볼 수 있도록 했다. 유물 전시실은 유해 이장 과정에서 발견된 시계와 총알, 관을 덮었던 태극기 등이 전시된다. 역사체험관인 2층에서는 ‘5월상회’라는 전시공간을 통해 1980년 이전 상황을 라디오 방송을 통해 듣고,5·18민주화운동 당시 10일간의 항쟁을 영상으로 볼 수 있다.
  • ‘5·18부터 6·10까지’

    ‘5·18부터 6·10까지’

    올 5·18민주화운동 제 27주년 기념행사는 ‘6월 항쟁’과 연계해 추진된다. 5·18기념재단은 1일 6월 항쟁 20주년을 맞아 ‘5월 항쟁’과 ‘6월 항쟁’의 연관성을 드러내는 데 행사의 초점을 두고, 이날부터 금남로 등 시내 전역에서 5·18 민주화운동 공식 행사에 돌입했다. 5·18 민중항쟁 제 27주년 기념행사위원회는 이를 위해 최근 공모를 통해 행사의 주제를 ‘참여해요 5·18, 함께해요 6·10’으로 선정했다. 18일 국립 5·18묘지에서는 기념식이 열리며, 전날인 17일 옛 전남도청 앞 특설무대에서는 ‘5월에서 6월의 함성으로’란 주제로 전야제가 펼쳐진다. 행사위는 기본행사 이외에도 정신계승·문화예술·학술대회·시민참여·국제연대·타지역 행사 등 모두 10개 부문 40여개의 각종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5·18 기념재단 조진태 사무처장은 “올 행사는 6월항쟁과의 연관성을 규명하는 데 역점을 뒀다.”고 말했다. 한편 기념재단은 최근 ‘2007년 광주인권상’ 공동 수상자로 인도의 인권운동가인 레닌 라흐바니시(37)씨와 이롬 샤밀라(여·35)씨를 선정하고,18일 시상식을 갖는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광주 국군통합병원 터 공원으로

    광주시 서구 화정동 ‘광주국군통합병원’이 43년 만에 도심 공원으로 조성돼 시민의 품에 안긴다. 광주시는 17일 “다른 지역으로 이전을 앞둔 국군통합병원 일대 10만 9000㎡에 도심공원 9만 6000㎡를 조성하고 여자고등학교 1만 3000㎡를 신설하기 위해 도시계획을 결정고시했다.”고 밝혔다. 이곳은 당초 제1종 일반주거지역으로 대규모 택지개발이 가능하지만, 시는 도시재정비 과정에서 도심 녹지공간 확보와 교육여건 개선을 위해 이같이 결정했다. 시는 900억원에 달하는 부지 비용은 장기 분할 납부하는 방식으로 지급하기로 국방부와 협의하고 있다. 1964년 문을 연 광주국군통합병원은 시설 노후화 등으로 함평군 해보면에 신축, 오는 6월 이전한다. 국방부는 2005년 노후시설 이전 계획에 따라 통합병원 부지를 감정가 890억원에 매각하거나 국민임대주택을 건설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시와 5·18단체, 환경단체들은 병원 부지가 5·18항쟁의 역사적 장소라는 상징성과 수목원으로서의 보존 가치가 높다는 이유를 들어 시민공원 조성을 요구해 왔다. 통합병원 부지가 공원으로 조성되면 지난해 시민공원 겸 청소년 관련 시설로 조성된 인접 옛 국정원 광주지부 터 2만㎡와 함께 대규모 도심 녹지 공간이 들어서게 된다. 특히 이곳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과 계엄군이 대치하고, 사망자의 시신을 안치했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광주문화전당 ‘설계안 백지화’ 요구 확산

    건축물의 대부분이 지하로 설계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랜드마크 기능을 놓고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12일 광주시 동구에 따르면 주민들의 설계변경에 대한 요구가 이어지자 문화전당 설계자인 우규승씨가 최근 광주를 직접 방문해 설명회를 가졌다. 우씨는 설명회에서 “건물의 랜드마크 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어린이지식박물관(길이 165m)은 지상에서 12m가량 올리고 20m 높이의 태양열집광판(20×60m)과 대형 전광판 등을 지상으로 노출시키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며 ‘대안’을 제시했다. 또 공연문화 진흥을 위해 기존 1500석 규모의 아트플렉스를 2000∼2500석으로 늘리고,5000명 정도가 앉아서 야외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잔디광장도 만들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우씨는 “광주의 대표적인 랜드마크인 무등산의 조망권을 해치지 않으면서 전당을 지상으로 돌출시켜 상징성을 부각시키겠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우씨가 제시안 방안은 랜드마크 기능으로서 손색이 많다.”며 “대폭적인 설계 변경이 필요하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주민들은 “그동안 수차례 청와대와 문화관광부 등에 설계변경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지역민의 바람을 수용해 주기 바란다.”고 입을 모았다.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 광주동구비상대책위원회’ 조영수 위원장은 “작품만 보면 세계적인 명작이 될 수 있겠지만 광주 현실에는 전혀 맞지 않는다.”면서 “완전히 백지상태에서 시민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다시 설계해 달라.”고 호소했다. 설명회에 참석한 박광무 문광부 정책관리실장은 “주민들의 요구를 설계에 최대한 반영할 수 있는 방안을 찾겠다.”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 공약사항인 아시아 문화중심도시 조성사업에는 오는 2023년까지 국비 등 모두 4조 8772억원이 투입된다. 국립아시아전당은 그중의 하나로 2010년 5·18민주화운동 30주기에 맞춰 준공 및 개관할 예정으로 터닦기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6월항쟁 20주년 ‘그날의 함성’ 그 이후]“자랑스런 역사 한획”

    [6월항쟁 20주년 ‘그날의 함성’ 그 이후]“자랑스런 역사 한획”

    민주적 헌법을 두고도 숨어서 민주주의를 그리워해야 했던 시절.20년 전 6월이었다. 유시춘 전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은 12일 참으로 오랜만에 서울시청앞 광장을 찾았다. 당시 항쟁 지도부의 상임집행위원에서 지금은 6·10항쟁 20주년사업 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이 되어 그 당시를 떠올렸다. 하루 뒤인 13일은 전두환 정권이 일체의 개헌논의를 금지하고 ‘체육관 선거’로 권력을 세습하겠다는 ‘4·13호헌조치’를 발표한 날이다. 고(故)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 “고문정권 물러가라.”는 분노의 외침이 정국을 뒤흔들자 군사정권이 ‘구국의 결단’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들불처럼 일어난 국민들은 길고 어두운 군사독재의 밤을 뒤바꿔놓는 대장정을 시작했다. 유 집행위원장은 “4·13 호헌조치는 국민들에게 더 이상 군사정권과의 타협은 불가능하다는 결심을 갖게 했다.”고 말했다. 87년 5월18일, 광주항쟁 7주년을 맞아 희생자를 위한 추모미사가 열렸던 서울 명동성당. 당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김승훈 대표가 떨리는 목소리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은 조작됐다.”는 한 장의 성명서를 낭독했다. 인천사태 배후조종 혐의로 구속된 민통련 이부영(전 열린우리당 의장) 사무처장이 화장지에 깨알같이 정황을 적어 사제단에 넘겨준 내용이다. 사제단의 폭로는 전국의 ‘호헌철폐 독재타도’ 함성에 불을 붙였다.6·10항쟁을 이끈 지도부인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가 결성되는 계기가 됐다. 우리 역사를 뒤흔든 3대 항쟁은 4·19와 5·18,6·10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4·19와 5·18항쟁에는 지도부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지도부를 먼저 구성한 것은 민주화운동의 ‘진화’였다. 유 집행위원장은 국본에서 기록의 임무를 맡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시 부산지역 국본 집행위원장이었다. 국본 결성식을 치르기로 한 87년 5월27일 아침. 장소도, 시간도 정할 수 없었다. 종로골목에 숨어 대기하고 있던 참석자들은 형사들의 감시를 따돌리고 ‘향린교회’라고만 적힌 쪽지를 서로에게 건네주며 이동했다. 무사히 결성식을 치른 지도부는 전두환 정권이 노태우씨를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세우기로 했던 6월10일 맞불을 놓기로 결정했다. 슬로건은 ‘호헌철폐 독재타도’였다. 유 집행위원장은 박종철 사건 이후 유인물을 나르기 위해 운전면허증을 따야 했고, 유치원에 다니던 두 아이들은 ‘운동권’ 엄마를 둔 덕에 셀 수 없이 많은 끼니를 마른 라면으로 떼워야 했다며 잠시 목이 멨다. 해직교사, 운동권 작가, 민가협 활동가 유시춘은 온갖 집회의 선언문을 쓰고, 교도소를 오가며 수많은 동지들을 면회하는 데 청춘을 바쳤다. 그는 거사 당일인 6월10일, 성공회 대문을 박차고 나오는 길에 곧바로 연행됐다. 남대문서와 구로서, 청량리서를 거쳐 시경 대공분실로 끌려가면서 밤이 깊도록 군부독재에 정면으로 맞서는 시위현장을 목격했다. 마치 “어두운 방을 가르고 들어오는 칼날 같은 빛을 본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눈앞 이익 급급한 정치권은 6월정신 배신 운전자는 경적으로, 여성들은 스카프로 항쟁의 물결에 동참했다. 그것은 군부독재체제의 파열음이었다. 그는 6월 항쟁과 결혼 10주년 기념일을 감옥에서 보냈지만 직선제 개헌 쟁취를 위해 뜨거운 열정을 바쳤던 국민들의 힘으로 긴 고통을 이겨냈다고 한다. 그가 당시 항쟁에 참여했던 40여명의 소회를 원고지 6000여장 분량으로 정리하는 기록사업에 몰두하는 까닭이다. 이제 성년을 맞은 6월항쟁. 남아 있는 마음의 빚이 있을 법도 하다. 그는 당시 범야권이 사실상의 승리를 거두고도 후보 분열로 지지율 36%짜리 여당 후보에게 결국 정권을 내줘, 군부독재의 합법적 연장을 가져왔다는 비극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4·19와 5·18뒤에는 5·16과 신군부 출현이라는 즉각적 반동이 있었다.”면서 “6월항쟁 이후에는 그 누구도 역사를 되돌리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절차적 민주화의 길로 들어섰다는 자부심으로 들렸다. 그러면서 “당시 항쟁의 적자인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 등 승리의 기억을 갖고 있는 정치권이 정파적 이익에 갇혀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국민을 보지 않고 눈앞의 이기심에 갇혀 난맥상을 초래하는 자체가 6월 정신을 배신한다는 것이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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