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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민국 50년 거리 사진전”/반세기 한민족史

    ◎그 역사의 현장들 오는 8월15일은 오랜 압제에서 벗어나 ‘우리 정부’를 갖게 된지 50년이 되는 날이다.그날 우리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이 열린 중앙청 광장과 세종로거리에서 벅찬 가슴으로 목이 터져라 만세를 외쳤다.바로 그곳에서 지난 반세기동안 우리 민족사의 흐름을 재조명하는 사진전이 열린다.‘대한민국 50년 거리사진전’이다. 17일 정부수립 경축기간 선포에 맞춰 개막되는 이 사진전은 정부수립 50대 기념사업중 맨 먼저 열리는 행사로 8월15일까지 세종로공원과 광화문지하도에 이르는 구간에서 열린다. 행정자치부가 주최하고 한국사진기자회가 주관하는 사진전에는 6·25 전쟁과 4·19 혁명,5·16과 5·18로 이어지는 격동의 순간들은 물론 88 서울올림픽, 황영조의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우승 장면 등 감격의 순간을 포착한 사진들이 전시된다. 또 대전엑스포 등을 거치면서 선진국의 문턱에 이르렀다가 최근 IMF 체제로 전락해버린 한국경제,헌정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와 박세리의 골프여왕 등극 등 대한민국 정부수립에서부터 ‘국민의 정부’ 출범에 이르는 한국 현대사의 순간 순간을 담은 사진들이다. 생생한 기록사진들을 통해 우리 민족의 삶의 궤적과 IMF 체제를 극복하고 제2의 건국을 이루어내기 위해 다시 뛰는 한국인의 참 모습을 볼수 있을 듯. 이달말 개관을 앞두고 있는 사진역사박물관이 수집한 미공개 사진 등을 포함해 500여점의 각종 기록사진을 320매의 판넬에 부착해 전시한다.모든 사진은 특수코팅돼 날씨에 관계없이 전시된다.서울전시를 마치면 지방 대도시에서도 순회전을 가질 예정이다.
  • 광주시/虛찌른 實인사(2期 지자체 인사태풍:11)

    ◎경선경쟁자 부시장 전격 기용/능력·행정경험 겸비땐 중용/공무원 신분 최대보장 약속/서기관급 5개자리 사라져/고령·과잉인력 처리 고심 高在維 광주시장은 지난 1일 취임과 동시에 金泰弘 전 광주 북구청장을 정무부시장으로 임명했다. 시장후보 경선 때의 경쟁자를 전격 기용한 것이다. 이를 두고 주변에서는 1차후보 경선 때 많이 득표한 후보에게 표를 모아주자는 서로의 ‘묵계’가 있지 않았느냐는 추측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관계자들은 억측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 高시장의 인사 방침은 능력과 행정 경험을 고루 갖춘 인사를 중용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金 전 구청장은 이같은 요건에 가장 적합해 임명됐다고 배경을 밝힌다. 金부시장은 한국 기자협회장과 광주 북구청장 등을 지냈다. 高시장은 소속당인 국민회의 측과 사전 조율을 거쳐 개혁적 이미지를 가진 金부시장을 임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소속 당 및 언론과의 관계를 매끄럽게 유지하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지난 5월 부임한 柳秀澤 행정부시장과 吳炫燮 기획관리실장은 유임이 확실시된다. 柳부시장은 폭넓은 인간관계와 추진력을 갖춘 실무형 참모이다. 高시장은 柳부시장에게 첨단과학 산업단지 활성화와 지하철 등 각종 현안사업을 꼼꼼히 챙길 것을 지시했다. 전문 행정가에게 행정을 ‘믿고 맡긴다’는 자세이다. 자신은 현장을 뛰거나 중앙 정치권과 접촉을 갖고 지역 현안을 해결하는데 힘을 쏟으려 한다. 吳炫燮 기획실장에게는 가장 민감한 조직개편 과제를 맡겼다. 조직장악력과 추진력을 갖춘 吳실장의 능력을 십분 활용하기 위해서다. ‘공무원 신분을 최대한 보장하겠다’는 高시장의 인사 스타일은 다음달중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실·국장급 이동에 적극 반영될 전망이다. 高시장은 14일 공석인 서구 부청장에 金宗植 도시계획국장을 발령했다. 金국장 스스로가 원하고 서구청장도 이에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시계획국장은 최근 지방자치단체 국제화재단 도쿄사무소장을 지낸 宋光運씨(지방3급)를 임명했다. 高시장은 그러나 조직개편 과정에서 발생하는 잉여인력 처리에 고심하고 있다. 이번 조직개편에서는 4개 국(局) 5개 과(課)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감사실·민방위 재난관리국·빛고을 정책개발본부·국제협력관·5·18지원 협력관 등이 폐지되면서 서기관급이상 5개 자리가 없어진다. 또 해외연수 등을 마치고 대기 중인 간부도 2명이나 있다. 시와 산하 사업소·구청 등에 있는 38∼39년생 서기관급 이상 간부도 5∼6명이다. 高시장은 이들 고령자와 실국 폐지에 따른 과잉인력을 어떻게 배치할 지에 대해 일절 함구하고 있다. 다만 내무국장에는 현 鄭鎔奉 국장의 유임 또는 林宇鎭 재정경영국장의 전보가 거론되고 있다. 교통도로국과 건설주택국이 통합돼 신설되는 기구에는 朱玉均 교통도로국장이 유력시 되며 朴喆鉉 감사실장,安秉龍 경제통상국장,金正洙 공보관,鄭大植 환경보건국장 등은 부구청장을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高시장은 “조직개편이 끝나는 대로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할 계획”이라며 “기준은 능력위주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모범용사들 5·18묘지 참배/서울신문사 초청 4일째

    ◎OB맥주공장 들러 대구로 서울신문사가 선정한 국군 모범용사 60명과 부인 등 117명은 25일 광주를 방문,5·18묘지와 OB맥주 광주공장 등을 둘러 봤다. 일행은 이에 앞서 宋彦鍾 광주시장이 베푼 오찬에 참석했다. 宋시장은 이 자리에서 “광주는 임진왜란 등 예부터 나라가 어려울때 힘을 모아 국난 극복에 앞장선 의향”이라며 “이같은 전통이 80년 불의와 독재에 항거한 5.18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宋시장은 특히 “시민들은 5·18 진압작전에 참여해 명령대로 행동한 군인들도 같은 피해자로 인식하고 있으며 여러분의 방문을 적극 환영한다”며 “외부에 잘못 알려진 광주의 ‘과격한 이미지’를 제대로 알려주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모범용사 일행은 이어 許京萬 전남지사가 마련한 만찬에 참석한뒤 26일 대구로 향했다.
  • 자민련 사무총장 경질/후임에 朴俊炳씨 임명

    자민련 朴泰俊 총재는 9일 밤 6·4지방선거에서의 강원도지사 선거패배 등에 대한 책임을 물어 朴九溢 사무총장을 전격 경질하고 朴俊炳 부총재를 후임으로 임명했다. 朴 전 총장의 경질은 이날 하오 朴총재와 명예총재인 金鍾泌 명예총재간의 단독회동에서 결정됐다. ◎자민련 새 총장 朴俊炳씨/5공때 정계입분 3선… 민자당 사무총장 경력 4성(星)장군 출신으로 5공때 정계에 입문,3선(選)의원을 지냈다.합리적인 스타일로 문무를 겸비했다는 평.5·18 및 12·12사건 재판에 연루되자 15대총선을 포기,한때 정계를 은퇴하기도.민자당 초대 사무총장 경력이 정계개편을 추진중인 공동여당 사무총장에 발탁 배경이 됐다는 후문. ▲충북 옥천(65)▲육사 12기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 ▲보안사령관 ▲12·13·14대 의원 ▲민자당 사무총장 ▲자민련 부총재
  • 민주화 희생자 재조명 활발

    ◎고귀한 희생에도 300여명 아직 ‘범법자’ 낙인/추모단체 학술토론·대학 명예졸업장 추진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숨진 ‘민주열사’들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70년대 이후 분신이나 투신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죽음을 당한 민주화 희생자는 300여명에 이른다.이들의 재조명 작업은 ‘민주열사·희생자 추모단체 연대회의’(상임의장 李昌馥)와 80여개의 추모사업회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들은 “희생자들이 아직도 범법자로 낙인 찍혀 있다”면서 “5·18 희생자들과 마찬가지로 민주유공자 예우를 해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희생자 가운데는 노동운동 분야가 85명으로 가장 많고 학생운동 81명,재야·빈민·농민분야 및 일반시민 41명,사형·옥사하거나 출옥 뒤 사망한 장기수 등이 83명이다. 추모 단체들은 올초부터 학술토론회를 개최하고 서명운동을 하는 등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연대회의는 지난 4월 ‘민주열사 정신 계승을 위한 학술제’를 개최하고 한달동안 5만여명의 서명을받았다. 서울대 국민대 숭실대 전남대 등은 재학 중 희생된 학생들에게 명예졸업장 수여를 추진하고 있다.서울대는 87년 6·10 민주화운동의 불씨가 됐던 朴鍾哲씨를 비롯,75년 유신반대를 외치며 할복자살한 金相眞씨 등 재학중 숨진 10여명에게 명예졸업장 수여를 추진 중이다.국민대도 학교를 중퇴하고 노동현장에서 활동하다 89년 노조탄압에 맞서 분신자살한 金윤기씨에게 명예졸업장을 줄 계획이다. 88년 5월 ‘군사독재타도’를 외치며 숭실대에서 분신 자살한 朴래전씨의 추모사업회는 지난 1일부터 1주일 동안 숭실대에서 10주기 추모제를 열고 그의 뜻을 기려 동화(冬花)문학상을 신설했다. 서울 평화시장의 노조 투쟁과정에서 분신자살한 全泰壹씨 추모사업회는 지난달 23일 고려대에서 민가협 및 민주노총 등이 참석한 가운데 ‘98 다시 만나는 全泰壹’행사를 열었다. 88년 ‘조국통일과 양심수 석방’을 외치며 명동성당에서 할복·투신자살한 趙城晩씨 추모사업회와 ‘광주항쟁 진상규명’을 외치며 88년 분신자살한 崔덕수씨 추모사업회,91년 시위 도중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 姜慶大씨의 추모사업회 등도 명예회복을 위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대우조선 노조는 87년 8월 ‘노동자 대투쟁’ 당시 시위를 하다 최루탄에 맞아 숨진 李錫圭씨 추모사업회를 결성했다. 광주항쟁 진상규명을 외치며 80년 서울 기독교회관 6층에서 투신자살한 서강대 金의기씨에 대해서는 학교민주동우회에서 추모 활동을 펴고 있다.
  • “5·18 불기소 損賠 책임 없다”/서울지법

    ◎기소여부는 검찰 고유권한 서울지법 민사합의24부(재판장 閔庚道 부장판사)는 2일 5·18 사건 피해자 168명이 “검찰이 95년 7월 全斗煥 盧泰愚 전 대통령 등 5·18사건 관련자들을 불기소 처분한 것은 부당하다”며 국가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이유 없다”고 기각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5·18 사건에 대해 군사반란 혐의를 충분히 인정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헌법질서를 창출한 행위는 사법심사의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불기소처분한 것은 잘못”이라면서 “그러나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만으로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고 볼 수는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범죄자에 대한 기소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검찰의 고유권한인 만큼 가혹행위나 증거조작 등 명백한 불법행위가 없는 한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鄭東年 광주민중항쟁연합 상임이사 등 피해자들은 94년 5월 5·18 관련자 35명을 내란 혐의 등으로 서울지검에 고소했으나 95년 7월 불기소 처분을 내리자 헌법에 보장된 평등권,피해자 진술권,범죄피해 배상청구권 등을 침해당했다며 1인당 1,000만원씩 16억8,000만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었다.
  • 白凡 재조명:1/金九 연구 어디까지(정직한 역사 되찾기)

    ◎그의 죽음은 ‘불행한 역사’의 시작/일그러진 권력의 바람에 참역사의 불꽃 스러지고/식민유산 씻을 주체 상실 평화통일론 어둠속 유배/국가차원 연구후원 全無 이젠 정당한 평가 필요 백범 金九 선생은 우리 현대사의 거인이다.순수한 열정으로 조국의 독립과 민족통일을 위해 헌신했다.온갖 어려움속에서도 임시정부를 이끌며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됐다.독립후에는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해 앞장섰다.그러나 그는 1949년 6월26일 암살됐다.타계한지 거의 반세기가 지났지면 현대사는 그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국민의 존경을 받았지만 권력은 그를 왜곡했다.이제 그는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 역사의 제자리로 돌아와야한다.정직한 역사를 되찾기 위해 金九 선생을 재조명한다. 어둠의 시대에 등불이었던 민족의 큰 스승 백범 金九.그는 일제식민통치의 암울한 시대를 끈질긴 생명력으로 밝혀온 민족의 등불이었다.그의 헌신적 민족사랑은 조국독립이라는 찬란한 불빛으로 빛났다.그러나 그 불빛은 정의의 역사로 승화되지 못한 채 일그러진 권력의 바람에 꺼지고 말았다.그의 비극적 죽음은 ‘정의의 역사’가 현실에서 패배한 민족의 비극이다. 그는 1949년 6월26일 안두희에게 암살됐다.암살범은 일본인이 아닌 그가 사랑했던 같은 민족이었다.그러나 ‘암살범’은 안두희라는 개인이 아니었다.그는 거대한 음모의 한낱 조연에 지나지 않았다.金九 선생은 권력에 의해 조작된 제도적 폭력에 희생된 것이다.권력의 하수인이었던 안두희의 총성은 일그러진 현대사의 시작을 알리는 ‘조종(弔鐘)’이었다.결국 잘못된 현대사에서 파생된 권력의 폭력은 5·18 광주민주항쟁도 무력으로 진압했다. 金九 선생을 죽인 권력과 친일세력들은 그를 낡은 역사속에 묻어두려했다.그들은 金九 선생의 최고 가치였던 독립과 민족통일론을 매도했다.그의 평화통일론은 냉전체제속에 공허한 메아리가 됐다.그는 자유당 정권에 의해 현실에서의 ‘패배자’로 왜곡됐다.자유당정권은 그의 자서전 ‘백범일지’의 출판도 금지시켰다. 그는 朴正熙 대통령과 그이후 全斗煥·盧泰愚 정권에서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군사정권들은냉전체제의 분단상황에서 백범의 민족통일론을 외면했다”고 창원대학의 都珍淳 교수(한국사)는 말했다. 金九 선생을 죽게한 일그러진 현대사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현대사의 첫단추가 잘못 끼워졌기 때문이다.마땅히 단죄됐어야 할 민족반역자 친일세력들이 해방후에도 부와 권력의 핵심을 차지한 것이다.백범의 죽음은 일제식민통치의 유산을 청산할 주도세력의 상실을 의미했다.그러한 불행한 역사과정은 민족정기와 사회정의를 무너뜨리며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왔다. 굴절된 현대사의 어둡고 긴 그림자 속에서도 백범은 일반대중들의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로 추앙받아왔다.SBS방송 조사결과,金九 선생은 광복이후 50년동안 한국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나타났다.그는 고대 신문이 실시한 가장 복제하고 싶은 인물조사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백범은 국민들에게는 가장 존경을 받으면서도 권력에 의해 의도적으로 평가절하된 독특한 위치에 있었다.현대사가 권력지향적 사회였기 때문에 백범연구는 활발할 수 없었다.문민정부에 들어와 그의 연구는좀더 적극화됐지만 국가차원에서 그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일부 정치세력이 그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 했을 뿐이다.가장 존경받는 지도자이면서도 그의 기념관도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중국에서 돌아와 업무를 보고 임시정부 국무회의까지 열렸던 경교장(京橋莊)의 복원도 불투명하다.그가 서울에 설립했던 2개의 ‘초등학교’ 등 교육기관들은 흔적조차 없어졌다.백범 푸대접은 정통성이 약한 과거의 권력이 그의 영웅화를 두려워하고 그의 통일론과 분단상황이라는 현실과의 괴리 때문이었다.그러나 냉전체제도 무너지고 金九 선생에 각별한 존경과 관심을 갖고 있는 金大中 대통령의 등장으로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都교수는 예상한다. 金九 선생은 국가적 차원에서 올바른 역사의 제자리로 돌아오게 해야한다.그것은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중요한 일이다.역사를 왜곡하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백범의 올바른 평가가 이루어지면 세계사적 보편성을 갖는 그의 열린 민족주의와 삶의 철학은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미래에도 ‘등불’이 될 것이다. ◎죽음을 초월한 생애 ▲1876년(고종13년) 해주에서 탄생 ▲1893년(18세) 동학에 입도 동학접주가 됨 ▲1896년(21세) 황해도 치하포에서 변장한 일본인 쓰치다 때려 죽임. 해주감옥에 감금됐다 인천으로 이감 ▲1898년(23세) 인천감옥 탈옥.마곡사에 들어가 승려가 됨 ▲1904년(29세) 최준례와 결혼 ▲1909년(34세) 안중근 의사 의거 관련자로 체포됐다 석방 ▲1919년(44세) 31운동 직후 상하이(上海)로 망명.임시정부 경무국장 취임 ▲1923년(48세) 임시정부 내무총장 취임 ▲1924년(49세) 부인 최준례 여사 사망 ▲1926년(51세) 임시정부 국무령에 선출 ▲1930년(55세) 이동녕·안창호·조완구·조소앙 등과 한국독립당 조직 ▲1932년(57세) 이봉창 의사의 日王 저격,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 지휘.상하이에서 자싱(嘉興)으로 피신 ▲1933년(58세) 중국의 장제스(蔣介石)와 만나 낙양군관학교에 한인훈련반 설치 합의 ▲1935년(60세) 난징(南京)에 학생훈련소 설치 ▲1938년(63세) 호남성 장사로 피신.민족진영3당 통합을 논의하던중 이운환의 저격으로 중상 ▲1939년(64세) 어머니 곽낙원(81세) 여사 사망 ▲1940년(65세) 임시정부 주석으로 선출 ▲1941년(66세) 대한민국 건국강령 제정.대한민국 임시정부 명의로 대일선전포고 ▲1945년(70세) 중국에서 귀국.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반대하여 신탁통치반대운동 전개 ▲1947년(72세) 제2차 반탁운동 전개.인재 양성을 위한 건국실천원양성소개설 ▲1948년(73세)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하는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발표.남북연석회의 위해 평양방문후 귀국 ▲1949년(74세) 백범학원·창암학원 설립.6월26일 육군소위 안두희의 저격으로 서거.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추서 ▲1969년 남산에 동상 세움(서거 20주년) □특별취재반 ▲특집기획팀=羅潤道 팀장,李昌淳·李穆熙 차장,金聖昊·任昌龍 기자 cslee@seoul.co.kr
  • 과거 청산과 미래 개척(대한민국 50년:21·끝)

    ◎이데올로기·개발독재 넘어 통일로/反民특위 “실종”… 건국 최초 과거청산 실패/‘제주 4·3’ ‘거창사건’ 아직도 어둠 속에/지역할거 정경유착 파당정치 악습 깨고 군사정권 시대 숱한 의문사도 밝혀내야 1948년 8월15일 신생정부 출범 당시의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약소국이었다.한반도 면적 22만1,487㎢ 가운데 3·8선 이남인 9만9,221㎢만 확보했고 인구도 2,002만명(48년 미군정청 추정치)에 불과했다.또 국민 가운데 80%가량이 농업 등 1차산업에 종사했고,그해 수출액이 2,230만달러에 그칠만큼 경제력도 볼품없었다. 정부수립 50돌을 눈앞에 둔 지금 대한민국의 자화상은 어떠한가.97년 말 현재 인구는 4,666만명,수출액은 1,361억6,430만달러,1인당 GNP는 9,511달러에 이른다. ○‘삶의 질’ 향상되지 않아 지난 50년동안 인구는 2.3배,수출규모는 6,106배로 급증했다.1인당 GNP는,가장 이른 통계치인 53년의 67달러에 비교해도 142배나 늘었다.가히 ‘세계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의 비약적인 성장’이라는 찬사가 부끄럽지 않은 양적 팽창이었다.그러면 이같은 성장이 우리 사회의 내적(內的) 발전이나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을 그대로 동반한 것일까.여기서 한국에 대한 외국의 시각을 잠깐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미국 의회도서관이 펴낸 책자 ‘South Korea’(92년 간)는 한국의 기본사항을 소개한 데 이어 ‘재벌 중심으로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었으나 독재정권 시대에 고착된 퇴행적인 정치질서에,통제받는 사회구조를 가진 나라’라고 덧붙였다.또 65만의 군대와 한해 100억달러(89년 기준)에 이르는 군사비도 주요항목으로 들었다.다른 나라의 일반적인 한국관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미 의회도서관 책자의 표현이 비록 유쾌하지는 않지만,우리 현실을 상당히 정확하게 지적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대한민국 성장의 뒤안길에는 필히 청산해야 할 역사적 잔재가 누적돼 있기 때문이다.이는 정치·경제 등 사회 각 분야에서 구조적으로 드러나기도 하고,특정사건의 진상을 은폐·왜곡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정치 분야에서의 청산대상은 분단체제에서 파생한 반공이데올로기의 악용과 개발독재 논리이다.해방이후 정치의 흐름을 살펴보자.3년동안의 극심한 좌우대립 끝에 남과 북에는 상호 배타적인 정부가 들어선다.2년이 채 못돼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져 분단체제는 더욱 굳어진다.이후 한국에서는 李承晩 정부가 장기집권하고 그에 따른 부정부패가 만연한다. 4·19혁명이 일어나 민주주의가 되살아나는 듯 했지만 곧바로 5·16쿠데타로 무너진다.朴正熙 정권은 개발논리를 앞세워 독재권력을 무소불위로 휘두른다.군사정권은 全斗煥­盧泰愚 시대까지 이어졌지만 80년의 5·18광주민중항쟁,87년의 6월항쟁 등 국민의 극심한 저항에 부딪쳤고 그 결과 93년에 문민정부가,그리고 50주년이 되는 올해 국민의 정부가 탄생한다. 대한민국 50년 정치사를 일별하면,그것은 정치적 억압과 이에 맞서 민주사회를 추구한 국민의 대항으로 요약할 수 있다.그 과정에서 억압적 정권이 양손에 든 무기가 반공이데올로기와 경제개발 논리였다. ○가치관 대혼란 초래 남북이 체제의 존립을 걸고 대립하는데다 6·25라는 비극을 겪은 마당에 반공이데올로기는 필연적인 역사의 부산물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문제는 권력이 이를 정치적 대항세력을 억누르는 수단으로 악용한 점에 있다. 멀게는 한국전쟁 전의 ‘국회 남로당 프락치 사건’에서 가깝게는 지난 대선의 ‘吳益濟 월북 및 편지사건’‘흑금성 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집권세력은 늘 ‘용공조작’을 통해 정적을 제거하려고 시도했고 대부분 목적을 달성했다. 朴正熙 정권이 들어서서는 경제성장을 내세운 개발독재 논리가 못잖게 위력을 발휘했다.국민 대다수가 절대빈곤에 시달리는 상태에서 ‘잘 먹고 잘 살려면 민주주의니 인권이니 하는 추상적 가치는 유보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는 쉽게 먹혀들어갔다.시민의식이 어느정도 성숙하기 전까지 ‘중단없는 전진’과 ‘잘 살아 보세’는 국민적 합의처럼 보였다. 이같은 정치적 적폐(積弊)는 지금도 파당정치·지역할거주의·정경유착 등 여러 유형의 악습으로 고착됐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의식 형성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전통을 잇는 문화와 사상은 ‘전근대적’이거나 ‘비효율적’이란 이유로 외면받는 대신 출세지상주의·이기주의가 넘쳐나면서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왔다.재벌의 소유 집중,극심한 빈부격차 등 경제 분야의 해묵은 과제도 해결이 쉽지 않은 부분이다. 정치사의 굴절이 가져온 또다른 폐해는 역사적 진실의 은폐·왜곡이라 할 수 있다.대한민국 최초의 ‘과거청산 실패’사례로는 48∼49년에 걸친 ‘반민특위 사건’이 꼽힌다.일제강점기에 친일과 반민족 행위를 한 자를 처벌하고자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한 제헌국회는 곧이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한다.위원회는 반민족행위자 305명을 검거하지만 참다운 활동을 벌이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고 만다.친일파에 권력기반을 둔 李承晩 행정부의 반발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나쁜 선례는 길이 남게 마련인가.해방정국에서 수차례 벌어진 정치지도자 암살사건,6·25를 전후해 빚어진 ‘제주 4·3’이나 거창사건을 비롯한 양민학살,군사정권에서 발생한 민주인사·학생들의 숱한 의문사와 실종들이 아직껏 그 실상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로 어둠에 묻혀 있다. 사건 발생 자체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례도 있다.예컨대 49년 12월24일 경북 문경군에서 일어난 국군의 양민학살 건이다.미국 국립공문서 보존관리청(NARA)에서 최근 발굴한 주한미군 군사고문단 보고서에 나타난 실상은 이렇다. 육군 25연대 7중대 병력이 석달이라는 산간벽지 마을에 들어가 주민들을 모은 다음 빨치산에게 협조했다는 죄목으로 무차별 살해한다.보고서는 “(주민들이) 도발하지도 않았는데 카빈 소총·수류탄·바주카포 등으로 공격해 성인 86명,학생 9명,어린이 3명이 숨졌다.또 집 27채 가운데 23채를 불태웠다”고 밝혔다.이 사건이 세상에는 빨치산의 만행으로 알려졌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민족의 성지’국립묘지에도 존재한다.문민정부 출범 초기인 93년 7월 국가보훈처가 金性洙·李甲成·尹致暎·李殷相·徐椿·李鍾郁·尹益善·全協 등 8명에 대한 친일행각을 조사해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이들은 모두 독립유공자로서 각종 훈·포장을 받았고 사회의 지도층인사로 행세했다.이 조사 역시 결말없이 끝났고 뒤이은 문민정부의 ‘역사바로 세우기’도 정치적인 의도라는 오해만 샀을 뿐 결실을 맺지 못했다. ○국민의 정부 특별한 책무 한민족이 빛나는 21세기를 향해 전진하려면 두가지 전제조건이 이뤄져야 한다.하나는 물론 통일이요,또 하나는 역사에 덕지덕지 낀 찌꺼기를 걷어내는 일이다.통일은 북한이라는 상대와 더불어 장기간에 해결해야 할 민족의 숙원이지만 잔재 청산은 우리의 의지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국민의 정부는 우리 현대사를 정화하는 데 앞장서야 하는 특별한 책무를 안고 있다.
  • 민주화 운동 희생자 유가족 대담

    ◎“젊은이들 값진 죽음 관심 가질때”/묻어둔 진실 캐 역사속의 자리 찾아줘야 연세대생 李韓烈군이 전경이 쏜 직격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숨진게 87년 7월5일.그의 어머니 裵恩深씨(58)는 10년이 더지난 지금도 아들 얘기만 나오면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裵씨는 자신처럼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된 가족을 둔 사람들이 모인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회장을 맡고 있다. 이보다 앞서 같은해 1월14일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끝에 사망한 서울대생 朴鍾哲군의 부친 朴正基씨(69) 역시 이들의 명예회복에 앞장서고 있다.두사람의 대담을 통해 민주화 희생자 가족의 바램을 알아본다. ▲朴씨=서울신문이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신 것에 정말 감사드립니다.서울신문 독자들,나아가 전 국민들이 피지도 못하고 죽어간 젊은이들에게 깊은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裵회장=자식이 그렇게 되기까지는 내 가족만 생각하며 살았습니다.자식이 죽은 뒤 많은 것을 배웠어요.자식의 죽음이 행여나 헛될세라 노력하면서 10년 세월을 보냈습니다.회원 어머님들이 매달에 만원씩 내고 대학생 축제에서 장터를 열어 협의회 운영비를 대지만 돈 불평은 없습니다. ▲朴씨=유가족협의회는 86년 만들어졌습니다.87년 韓烈,鍾哲이가 죽었을때만 해도 회원수가 20명을 넘지 않았으나 5·6공과 金泳三 정부를 거치면서 328명으로 늘었습니다.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된 학생,그리고 노동운동을 하다 사망한 근로자 등 희생자들은 자기 개인을 위해 일하지 않았습니다.양심에 따라 하다보니 죽음에까지 이른 것 아닙니까. ▲裵회장=5·18 18주기 행사를 보고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을 했어요.저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피와 땀과 눈물이 배어 있을까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구요.4·19나 5·18희생자들은 명예회복이 되는데 전국에서 산발적으로 희생당한 이들도 빨리 명예회복이 되어야한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朴씨=군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사람,공권력에 의해 죽어간 사람이 많습니다.지금 진상을 덮는다고 앞으로도 밝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정부와 기성세대가 의문사 진상규명과 민주 희생자 명예회복의책임을 져야 합니다.민주희생자 합동묘지를 만들고 기념관도 건립,후세에 남겨야 합니다.정부는 지금 경제가 어렵다고 경제에만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경제도 중요하지만 민주화도 중요합니다.인권 이상 가는 가치가 어디 있습니까.바로 특별법을 제정해 민주 희생자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이뤄져야 합니다. ▲裵회장=金대통령을 직접 만나기 힘들어 이렇게 언론을 통해 말씀드립니다.대통령께서도 유신시절 일본에서 납치되어 바다에 산채로 던져질뻔한 경험이 있고,또 민주화 과정에서 얼마나 사상시비로 고초를 겪었습니까.대통령 스스로는 저희들의 심정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그때문에 金대통령의 당선과 50년만의 정권교체를 손꼽아 기다려온 것입니다.대통령 혼자 새기시지 마시고 바로 실천하도록 지시를 내려주십시오.민주희생자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은 대통령 직권으로 해주셔야 합니다.양심수 추가석방도 간절히 호소합니다.
  • 60년대 이후 민주화 희생자 328명

    ◎정치적 의문사·학생운동 강제징집 사망 등 60년대 이래 민주화 투쟁이나 노동운동 과정에서 사망한 희생자는 모두 328명(4·19,5·18희생자 제외)에 이른다고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 연대회의는 밝히고 있다.이중 사인이 은폐·왜곡된 의문사가 42건.의문사 유형은 공권력이 개입한 것으로 추정되는 정치적 타살,학생운동을 이유로 강제징집되어 사망한 이른바 녹화사업 희생자,시위와 노조활동 관련 희생자 등이다.대표적 사례를 모아본다. ◇정치적 의문사 ▲장준하선생=오랜 민주화투쟁과 통일운동을 하던 그는 유신헌법 철폐를 목적으로 한 개헌운동을 벌이다가 75년8월17일 포천 약사봉밑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최종길 서울법대교수=중앙정보부에서 ‘동백림사건’으로 조사받다가 73년 10월19일 의문의 죽음. ◇녹화사업 희생자 ▲정성희씨=연세대 학생으로 시위과정에서 연행되어 강제징집된 뒤 철책초소 야간근무중 82년 7월23일 의문의 죽음.▲한영현씨=한양대 학생으로 부천의 야학활동을 한 선배의 조사과정 중 그의 이름이 나와 조사를받고 강제징집된 직후 군수사기관에 끌려가 조사받다 83년 7월2일 의문의 죽음. ◇시위·노동운동 ▲우종원씨=서울대 운동권에서 핵심적 위치에 있던 그는 민추위 관련으로 수배를 받아오다 86년 10월11일 경부선 철로변에서 변사체로 발견.▲이내창씨=중앙대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으로 활동중 안기부 직원과 함께 학교를 나간뒤 89년 8월15일 남해안 거문도 앞바다에서 변사체로 발견.▲정경식씨=대우중공업 창원공장 노동자로 노조활동을 하던중 노조지부장선거뒤 87년 6월8일 의문의 죽음.
  • ‘민주화 재조명’ 학술회의 姜萬吉 교수 기조연설

    ◎“抗日 열사­민주희생자 역사성 동일”/개인 투쟁이 釜馬­光州­6월 항쟁 잇는 고리역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의장 李昌馥)와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회장 裵恩深)는 22일 서울 종로성당에서 ‘민족민주열사·희생자정신계승과 명예회복을 위한 학술회의’를 가졌다.‘한국현대사에서의 열사·희생자들의 지위와 역할과 의문의 죽음 진상규명,명예회복의 원칙과 방향’을 주제로한 고려대 姜萬吉 교수(한국사)의 기조연설을 요약 소개한다. 朴正熙 정권에서 全斗煥·盧泰愚 정권까지로 이어지는 30여년간의 군사독재시대에는 釜·馬 항쟁과 광주민중항쟁,그리고 87년 6월항쟁과 같은 대규모 민중항쟁이 일어났다.그러나 군사독재정권의 가혹한 탄압 아래 이들 대규모 민중저항이 계속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이들 대규모 민중저항이 일어나기까지에는 수많은 개인차원의 의열투쟁이 계속되었고,이같은 개인차원의 투쟁이 계속 공백을 메워줄 수 있었기 때문에 대규모 민중항쟁이 가능했다. 이 개인차원의 의열투쟁은 첫째,윤봉길·이봉창·나석주 등 일제 강점시대 개인차원 항일열사들과 그 역사적 역할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둘째,李承晩 독재정권에 대항했던 4·19 희생자나 군사독재정권의 재등장에 대항했던 5·18 희생자와도 그 역사적 역할이 전혀 다르지 않다는 점이 중요하다.다만 그들이 희생된 경위가 다를 뿐이다. 4·19 희생자나 5·18 희생자들은 시위와 ‘전투’의 현장에서 희생되었다.개인차원의 민주열사들은 시위현장에서 희생된 경우도 있지만 혹은 고문실에서 희생되거나 희생된 장소가 분명치않은 의문사의 경우도 있다.사인이 분명하지 않은 경우는 더 조사해야겠지만 분명한 경우는 그 역사성이 4·19 희생자나 5·18 희생자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일제 강점시대의 독립유공자와 마찬가지로 해방후 민주열사의 경우도 집단적 희생과 개인차원의 희생 사이에 차별을 둘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역사적·민주주의적 정통성이 강한 정권일수록 양심수 및 민주열사에 대한 정책이 강화되기 마련이라 생각해보면,양심수정책이 거의 답보상태였고 개인 차원 의열투쟁에 대한 명예회복 조치가 없는 점은 金泳三 문민정권의 민주정권으로서의 한계성이 극명하게 드러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5·16 세력 일부와의 연합정권임에도 불구하고 金大中 정권이 짊어진 역사적 과제의 중요한 부분은 역시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민주주의의 획기적 발전과 평화적 통일에의 적극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획기적 발전문제 속에는 민주열사들의 명예회복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의 하나로 포함되어 있다.金泳三 정권이 군사정권 집권자들을 사법처리하고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적 정당성을 회복한 후에 성립된 金大中 정권으로서는 이제 개인 차원에서 활동한 민주열사들의 명예회복과 보상사업,그리고 양심수 석방의 과감한 확대를 통해서 金泳三 정권과의 또하나의 중요한 차별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 민주화 운동 희생자 재조명­왜 필요한가

    ◎왜곡된 진상 규명 명예회복해야/개인적 희생 정당한 평가 받아야/특별법 제정·합동묘역 조성 추진 한국 민주화의 분수령을 이룬 5·18 광주민중항쟁은 이제 우리 역사 속에 바르게 자리매김 되고 있다.그러나 해마다 5월이 오면 아직도 명예회복을 못한 민주화운동 희생자 가족들은 저며오는 가슴을 가누지 못한다.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희생된 이들.민주화를 달성한 우리의 역사속에 여전히 이들이 설 자리는 없는가.金大中 대통령은 최근 월간 ‘말’지와의 회견에서 “그 분들의 헌신과 공로에 상응하는 조치를 반드시 취할 것”이라면서 “무엇보다 정확한 진상규명을 통해 그 분들의 명예를 회복시킬 것이며 필요하다면 입법조치도 해야한다”고 밝혔다.이들의 명예회복은 어디까지 와있는가.민주화운동 희생자 특집을 꾸며본다. ▷진상규명◁ 60년대 이후 군사독재 시대가 30여년간 이어지면서 많은 이들이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희생됐다.4·19나 5·18처럼 집단화된 희생의 명예회복은 상당 부분 이뤄졌다.그러나 개인적 희생은 지금도 제대로된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개인적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이 되려면 먼저 진상이 규명되어야 한다. 민주화나 노동운동 과정에서 희생당한 이들의 유형은 다양하다.분신,투신,할복,음독,고문,사고,폭행,총상,익사,병,교수형 등이다.이들을 죽음에까지 이르게한 가해자는 주로 공권력으로 추정된다.안기부(중앙정보부),기무사,대공분실 등이 의혹의 대상이다. 가해자가 권력을 쥔 쪽에 있었기에 진상규명이 안된 경우가 많다.金學喆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 기획국장은 “살인죄의 공소시효는 15년이지만 가해자처벌은 추후 생각해볼 문제고 일단 진상규명이 이뤄져야한다”고 강조했다.그는 민관합동의 민주화희생자 진상규명특별위 설치를 제안했다. ▷명예회복◁ 진상규명과 동시에 추진되어야할 것이 민주화 희생자들의 명예회복 조치다.이를 위해 민주화운동 단체들은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시급한 것은 희생자 합동묘역 조성.현재 마석 모란공원묘지,망월동 구묘역,부산 솥밭산공원묘지 등 전국에 흩어져 있는 희생자 묘지를 한곳으로 모아 성역화해야 한다는 것이다.기념관도 만들어 유품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기념탑이나 위령제를 개최해야 한다.교과서에 이들의 활동을 수록하고 기념일도 제정,역사의 교훈으로 남기는 방안도 추진되고 있다. 일제시대 독립지사들을 국가유공자로 대우하듯 민주열사들도 유공자 예우를 받아야 한다는게 관련 단체들의 희망이다.‘민주유공자예우법’을 만들고 ‘열사공적사항심사위’를 설치,객관적 평가에 따른 대접을 하자는 것이다. □특별취재반 ▲특집기획팀=羅潤道 팀장.李昌淳·李穆熙 차장.金聖昊·任昌龍 기자
  • 80년 계엄법 위반 실형/기자 4명 재심서 무죄

    서울고법 형사3부(재판장 李昌求 부장판사)는 21일 계엄포고령 위반죄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전 기자협회 간부 金동선씨(55)와 전 한국일보 기자 朴정삼씨(55) 등 4명에 대한 재심청구 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신군부가 79년 12·12반란과 80년 5·18내란을 전후로 행한 일련의 행위는 군사반란죄 및 내란죄가 성립돼 헌정질서 파괴 범죄에 해당한다는 대법원 확정판결이 이미 내려졌고,원고들의 행위는 신군부의 헌정질서 파괴범행을 저지하려고 한 것인 만큼 헌법수호를 위한 정당한행위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 K1TV 개혁실천특별기획 ‘5·18 광주항쟁’

    ◎돋보인 성역없는 보도·비판 KBS 1TV가 지난 18일 하오 10시에 60분간 방영한 ‘개혁실천특별기획 5.18 광주민중항쟁’은 두가지 점에서 시사적이다. 우선 KBS 노사가 방영문제를 놓고 산고를 거듭한 끝에 세상밖으로 내놓은첫 출산아라는 점을 들 수 있다.방송개혁의 기치를 들고 나섰던 특별기획 시리즈가 언론 내부로의 비판을 금기시한 풍토로 하마터면 창고에 묻힐뻔한 운명 직전에 극적으로 햇빛을 보게된 결실이라는 점에서 방영전부터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다음으로 광주항쟁을 바라보는 시각의 확대를 들 수 있다.지금까지 전파매체에서 학살의 주역으로 신군부를 거론한 적은 많았다.하지만 이 프로그램에서는 기존의 머뭇거림을 과감히 탈피했다.확대된 학살의 공범으로 미국이나 KBS를 포함한 언론을 포함시킨 점은 파격적 편성이었다.광주를 역사의 화석으로 남기지 않고 현재형으로 되살리려는 야심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의도는 처음과 마지막 장면에 생존 시민군 김영철(50)씨를 등장시킨 구성에서 확연히 드러난다.그는 80년 5월에갇혀 있는 인물이다.의식의 흐름이 18년전에 멈춰버린 그의 상처를 오버랩시키며 광주학살과 민주 항쟁이 지금도 움직이는 시계임을 주장한다.또 산술적 시계추는 열흘간 움직였으나 그 역사적 폭과 자장은 수치화 할 수 없다는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긴박했던 열흘을 추적하면서 동원된 자료나 증언담 하나하나에도 세심한 배려의 흔적이 배어 있었다. 하루하루의 사건을 추적하며 전문가의 견해나 실제 참가자들의 증언을 적절히 배치,리얼리티를 높이는데 성공했다.그 결과 차분한 시선으로 사건을 이끌고 나갔다. 그러나 여러가지 성공요소중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성역없는 비판에 있는 듯하다.누가 뭐래도 가해자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 광주의 한을 달래는 처방이다.눈가리고 아웅식의 적당주의론 통하지 않는다.더구나 지난 85년 KBS가 제작한 특별기획을 예로 들며 언론의 냉담과 외면에 메스를 댄 장면은 제작의 기본정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김철수 기획팀장은 “이번 작품의 주안점은 항쟁과 학살이었다.그를 통해 부당한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폭력의 진상을 말하고 싶었다”며 “앞으로 계속될 시리즈에서도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성역없는 보도에 최선을 다하겠다 ”라고 덧붙였다. 한편 계엄군의 도청진압을 저지하기 위한 수습대책위원회의 ‘죽음의 행진’장면이나 도청사수대의 상징 윤상원의 사후 모습은 사료적 가치도 지녀 이번 프로그램의 의미를 더 빛내주는 조연역을 톡톡히 하고 있다.
  • 혼미의 인도네시아… 총은 ‘약자’가 쏜다(박갑천 칼럼)

    인도네시아 사태는 암담하고 처참했던 우리 80년대를 떠올리게 한다. 학생시위와 과격 진압에 분노하는 시민의 합세와 장갑차와 한겨레 가슴에 불을 뿜는 총부리와….다만 방화·약탈 등 일부 시민들의 빗나간 난동만은 우리 경우와 다르다.결과는 모르나 대통령 하야설은 문득 40년전 李承晩을 연상케도 한다. “그 이승만의 4·19때 최루탄이 있었다면…”하는 가상론이 곧잘 나온다.피를 본 군중의 가세로 해서 파국은 더 빨리 다가왔기에 하는 말들이다.5·18광주민중항쟁은 어떤가.진압군의 무차별 발포와 잔혹행위가 사태를 악화시키고 만 것 아니던가.그동안 최루탄 망국론도 나온 터이지만 사실은 그후의 수많은 시위에서 인명살상을 줄였다는 것이 최루탄 예찬론.그 최루탄을 넘어선 인도네시아 총소리는 마침내 쏜자의 조총(弔銃)으로 되들리게 될 것인지도 모른다. 부부싸움만해도 불뚝 성질내며 막말하는 남편은 아내한테 지는 법이다.백성을 네뚜리로 보면서 총기를 쓰는건 그런 남편에 비유할 수 있다.총기보다 무서운 것은 민심이기 때문이다.(31장)이 “무기는 상서롭지 못하다”(兵者不祥)고 말한 뜻도 그런 원리에서 출발되었다 할 것이다.는 계속하여 “남의 나라와 전쟁하며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는 자는 천하에서 뜻을 얻지 못하는 법”이라고 덧붙인다.한데 하물며 내겨레 가슴에 총을 겨누는 일이겠는가. 중국·인도·미국에 이은 세계 제4위 인구대국 인도네시아.13세기말께 기세등등 주변국을 굽잡아나간 원(元)나라 쿠빌라이의 침공군을 물리친 싱고사리왕국도 그들 조상이다.그에 이은 모조파이트왕조는 한때 동남아시아를 꺼두르는 황금시대를 구가하기도.오늘날 수도 자카르타거리나 대학이름에 보이는 ‘하얌=우르크’‘가자=마다’는 그 왕조때의 왕과 그를 보좌한 재상이름을 딴 것이다. 모조파이트왕조가 있었던 자바에서는 인도네시아를 ‘섬과 섬의 나라’란뜻으로 ‘누산타라’라 부른다.인도네시아란 이름은 독일 인류학자 A.바스티안이 ‘인도의 섬들’이란 뜻으로 ‘인도스 네소스’(Indos Nesos)라 부른데 기원한다고 한다.수도 자카르타는 ‘자카트라’라고도 하는데‘승리의 도시’라는 뜻이다. 천혜의 자원 가멸진 저력의 나라 인도네시아.승리의 도시 자카르타에서 울릴 승리의 소리는 어디서 어떻게 날 것인지.우리경제와도 관계가 깊은 나라이기에 우리의 관심도 유다르다.
  • 光州시민 박수받은 JP/“현정부는 5월 정신 존중” 연설

    ◎묘역 순례뒤 광장에 기념식수 金鍾泌 국무총리서리가 18일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 열린 5·18 18주년 기념식에 주빈으로 참석했다.金총리서리는 기념식에서 정부를 대표한 기념사를 마친 뒤 묘역을 순례하고 잔디광장에 기념식수도 했다. 金총리의 이날 광주행은 金大中 대통령을 대신 한 것으로 볼 수 있다.광주와 끊을 수 없는 인연을 갖고 있는 金대통령도 행사에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 컸을 것이다.그러나 현재의 경제·정치 상황은 金대통령의 광주행을 쉽게 허락하지 않은 것 같다. 金총리서리가 5·18 묘역을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87년 신민주공화당총재 시절 처음 망월동에 참배했으며,이후 자민련총재 시절을 포함해 다섯차례 더 5·18 묘역을 찾았다고 한다.총리실 관계자는 “金총리서리도 5·18의 큰 피해자”라고 주장했다.80년 5·18을 전후해 신군부 세력에의해 부정축재자로 몰린뒤 연금당하는 등 심한 고초를 겪었다는 것이다. 한국현대사에서 유난히도 정치적 사건이 많은 달이 5월이다.‘풍운아’라는 金총리서리의 느낌은 또 남다를 것이다.金총리서리는 이날 기념사를 통해 ‘국민의 정부’가 5월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규정했다.金대통령의 과거 발언을 토대로 보좌진이 작성해온 연설문안을 金총리가 ‘좋다’고 받아들인 것이다.그런 金총리서리의 연설에 광주시민들은 박수를 보냈다.
  • 어제 ‘5·18’ 18돌 추모행사 1만여명 참가

    ◎민주의 꽃으로 핀 5월의 넋이여…/망월동 묘역서 씻김굿 등 진혼의식 엄숙히/독일 목사 등 7명 방한 국제적 위상 확인도 【광주=崔治峰 기자】 5·18광주민주화운동 18주년 기념식이 18일 상오 10시 광주시 북구 운정동 5.18묘지 참배광장에서 金鍾泌 국무총리서리와 유가족 시민 등 1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히 거행됐다. 기념식에는 金鍾泌 국무총리서리를 비롯,金正吉 행정자치부 장관 朴相千 법무장관 등 정부인사와 趙世衡 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 鄭水萬 5·18유족회장 등이 참석했다. 金 총리서리는 묘지순례 및 유영봉안소 추모분향을 마치고 추념문 잔디광장에서 기념식수를 했다. 5·18묘지에서는 기독교 대학총학생회연합의 추모예배가 열렸으며 광주공원에서도 5·18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는 씻김굿 등이 펼쳐졌다. ○…기념식장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헤센나사오 개신교회 바그너 노 회장과 목사,평신도 등 7명이 참석해 시종 행사광경을 지켜보며 달라진 5·18기념행사와 한국의 민주주의 위상에 대해 관심을 표명. 하오 광주 한빛교회에서열린 5·18기념 예배에 참석한 바그너 노 회장 일행은 “그동안 2∼3차례에 걸쳐 5·18 연합예배에 참석하고 5·18묘지를 방문했으나 이처럼 조용하고 엄숙한 가운데 치러진 기념식은 처음”이라고 밝히고 “이는 국민의 정부 탄생과 한국의 민주주의를 선도한 5·18관련자의 희생대가 때문”이라고 평가. ○…추모광장 입구에는 조선대 구속자가족들이 ‘모든 양심수를 어머니의 품으로’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구속학생 9명의 조속한 석방을 눈물로 호소. 97년 총학생회 부회장 강성일씨의 어머니 박명자씨(55)와 97년 동아리연합회장 정재형씨의 어머니 기흥순씨(59) 등은 “全斗煥 盧泰愚씨도 사면하는 마당에 죄없는 아들들을 차디찬 교도소에 가둬 두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국가보안법의 멍예를 씌어 2∼3년씩 실형을 선고한 아들들을 학교와 가족에 돌려보내야 한다“고 밝히고 “金大中 대통령이 약속한 5·18양심수 사면에 이들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 ○…묘역앞에서는 씻김굿 무형문화재인 李상조씨가 초혼가를 시작으로 지전춤·넋올림·씻김·고풀이·길닦음 등으로 5·18 영령들의 영혼을 달래는 의식을 진행했다. ○…행사장 주변에는 동광주병원 의사와 간호사들이 비상진료팀으로 나와 봉사했으며 광주 전남 적십자사 무선봉사자들이 햄(HAM)으로 기념식 상황을 해외에 생중계하고 참배객을 안내했다.
  • 光州 2만명 숙연한 전야제/망월동 참배객 추모의 열기

    ◎5월 정신으로 우리 하나 되리라 【광주=南基昌 기자】 ‘광주의 아픔을 전 국민과 함께…’ 5·18 광주 민주화운동 제 18주년을 하루 앞둔 17일 전남 도청 앞에서 전야제가 열리고 5·18 묘역에는 전국 각지에서 온 참배객들이 줄을 잇는 등 추모 열기가 높았다. 하오 7시30분부터 2만여명의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전야제는 ‘민주를 위한 투쟁’ ‘오월 민주정신으로 살아’ ‘우리 하나 되리라’ ‘생명,희망의 나라로’ 등 4부로 나눠 3시간 남짓 진행됐다. 참석자들은 손에 손을 잡고 5월의 노래와 민요·가요를 불렀으며 김자연무용단의 넋풀이 공연을 관람했다. 이어 5·18단체 대표와 어린이의 5월 횃불 점등식과 당시 도청 앞 차량시위,6·10항쟁 모습 등을 담은 영상물을 지켜보았다.또 노래패와 인기가수 공연이 계속됐으며,인권과 화합·평화를 주제로 한 희망의 메시지가 낭독되고 시민 학생들의 5월의 노래 합창으로 막을 내렸다. 아들 손을 잡고 도청 앞에 나온 文碩虎씨(36·광주시 북구 운암동 운암아파트 42동 101호)는 “5·18 당시 고교 3학년이었는데 50년만에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뤄진 후 전야제 행사에 참석하니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상오 5·18 묘역에서는 희생자 유가족들의 오열 속에 5·18 민중항쟁 유족회 주관으로 추모제가 열려 가신 님들의 숭고한 뜻을 기렸다.宋彦鍾 광주시장은 추모사에서 “불의에 항거해 민주주의를 외치다 스러져 간 영령들의 고귀한 뜻을 받들어 5·18 정신을 올바로 계승하고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아 현재의 국가위기를 극복하자”고 말했다.한편 18일 상오 10시 광주시 북구 운정동 5·18 묘역에서는 金鍾泌 국무총리서리를 비롯해 정부 주요 인사와 유족회원 시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이 열린다.
  • 5·18 정신 세계의 자랑/金 대통령

    金大中 대통령은 15일 ‘5·18’ 18주년을 앞두고 광주 KBS,MBC 및 광주방송 등 지역 방송 3사와 합동회견을 갖고 “민주주의를 향한 광주정신은 평화와 질서의식을 바탕으로 한 우리 국민의 위대한 정신이며 또한 전세계의 자랑”이라고 말했다. 金대통령은 합동회견에서 “광주시민들은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결코 굴복하지 않았으며,폭력을 사용하지 않았다”며 “이러한 광주정신을 올바르게 계승하는 것이 오늘의 의무”라고 강조했다.
  • 전국민의 5·18로(사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오늘로 18주년을 맞는다.올해는 어느해보다 다채로운 기념행사가 마련돼 망월동 묘지에 참배객이 줄을 잇는 등 추모열기가 고조되고 있다 한다.5·18이 법정 기념일로 지정돼 공식적인 정부행사가 열리기는 지난해부터지만 오늘은 광주 민주화운동의 한복판에 있었던 金大中 대통령이 50년만의 정권교체를 이룬 후 처음 맞는 기념일이다.따라서 광주 시민들로서는 어느해보다 뜻깊은 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올해는 5·18이 광주 시민들만의 기념일을 벗어나 전국민의 기념일로 역사속에 자리매김 되는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朴正熙 대통령의 시해(弑害)로 초래된 권력공백기에 불법적으로 집권을 꾀하던 신군부 세력을 거부하며 민주화를 요구,80년 5월18일부터 27일까지 계속된 광주 민주화운동은 신군부 세력이 집권하는 동안 ‘폭동’으로 규정됐다.‘문민의 정부’에 들어서서야 ‘민주화 운동’으로 재평가받고 학계 등 일부에서는 4·19와 맞먹는 민중항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그러나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이해는 지역적으로 아직 편차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지금 내리기에는 金대통령이 5·18의 직접적인 당사자이고 지역주의라는 현실적 벽이 있기 때문에 어렵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바로 그 두가지 이유로 인해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그동안 왜곡돼 왔다는 점에서,지금이 감추어진 진실을 밝히고 5·18을 국민적 기념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기회라고 우리는 본다. 5·18의 실체는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이 광주·전남지역 사람들의 생각이다.그들이 군화발에 짓밟히며 신음할 때 당시 신문과 방송은 광주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양했고 형제와 자식의 시체를 옆에 두고 평화적 질서를 지킬때 광주 시민은 폭도로 묘사됐다.金대통령은 지난 15일 광주지역 방송과의 합동 회견에서 “5·18과 광주의 위대함은 비폭력”이라고 규정했지만 지금도 광주·전남 이외의 지역에서 5·18은 무질서와 폭력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없지 않다. 따라서 시민에 대한 발포명령자,정확한 사망자 숫자,참혹행위 등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사실 규명이 철저히 이루어지고 5·18의 진실이 널리 알려져야 한다.광주 민주화운동이 이나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시민들의 궐기이고 항쟁이며 광주의 울타리를 넘어서 우리 국민 전체의 역사가 되도록 ‘국민의 정부’에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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