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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로자 룩셈부르크/김종면 논설위원

    “세계의 질서가 왜 이 모양일까. 그러나 한탄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는가. 세계를 받아들여야 한다. 세계와 맞서야 하고 세계를 바꾸기 위해 필요한 일을 해야 한다.” 폴란드계 유대인 출신 여성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 그는 1918년 독일 공산당 전신인 스파르타쿠스단을 창당한 유럽의 대표적인 좌파 혁명가다. 그는 진창에 빠진 자본주의는 해결할 수 없는 모순들로 인해 필연적으로 폭발할 수밖에 없다며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제창했다. 사회주의 혁명의 물결이 유럽을 휩쓸 무렵 활동한 그는 개인적 친분에도 불구하고 레닌의 관료주의와 공포정치를 끊임없이 비판하며 혁명과 사회주의, 민주주의의 화해와 공존을 역설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르크스 이후 최고의 두뇌’라는 찬사를 얻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피에 굶주린 로자’‘붉은 로자’라는 평가도 따른다. ‘거리의 전투나 감옥에 있는 나의 자리에서 죽기를 소망한다.’고 할 만큼 그는 타협을 모르는 강골이었다. 로자의 시신이 90년 만에 독일 베를린의 한 병원에서 발견됐다고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이 엊그제 전했다. 그는 47세이던 1919년 독일 우파 민병대에 의해 총살돼 란트베어 운하에 던져졌고, 피살 5개월 뒤에 시신이 발견돼 프리드리히스펠데 공원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진짜 시신은 따로 있다는 주장이 간단없이 제기돼 왔다. 생전의 로자는 150㎝의 단신이었다. 골관절염 때문에 양쪽 다리의 길이가 달라 평생 절뚝거렸다. 삶의 변방으로 밀려난 그는 인간 실존의 모순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체험했다. 그의 주검은 그 찬란한 불행의 완결판 같다. 슈피겔은 발견된 시신의 머리가 없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당시 두개골 수집이 유행했기 때문일 수 있으며, 민병대가 살해한 뒤 손발에 돌을 매달아 던져 수족도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좌파의 성소가 된 그의 ‘빈’ 묘지에서는 지금도 수많은 이들의 추모행사가 이어진다. 21세기다. 혁명의 우상은 스러지고 동상은 무너져내렸다. 하지만 로자는 여전히 혁명의 향수로 남아 있다. 그것은 아마 ‘혁명’이전에 ‘인간’ 그 자체를 위해 살고자 했던 그의 진정한 혁명의지 때문인지 모른다. 김종면 논설위원 jmkim@seoul.co.kr
  • [부고] 세계 최고령 130세 카자흐스탄 할머니 사망

    [부고] 세계 최고령 130세 카자흐스탄 할머니 사망

    세계 최고령으로 알려진 카자흐스탄의 사칸 도소바 할머니가 13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영국 일간 데일리 메일 인터넷판은 도소바 할머니가 지난달 자신의 아파트 화장실에서 미끄러져 엉덩이를 다친 뒤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했다고 1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카자흐스탄 정부는 지난 3월 빈민촌에 사는 도소바 할머니에게 130세 생일을 맞아 아파트를 선물했다. 당시 카자흐스탄 관리들은 카라간다시에서 인구조사를 하던 중 1879년 3월27일 출생인 도소바 할머니가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할머니는 옛소련 여권과 독립 카자흐스탄 여권을 모두 갖고 있었으며, 스탈린 치하였던 1929년 실시된 인구조사 때 47세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도소바 할머니는 지난 3월 한 인터뷰에서 장수비결을 묻자 “특별한 것은 없고, 병이 나면 할머니가 치료해 주던 요법으로 치료했다.”면서 “약이나 단 음식을 절대 입에 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19세기 카자흐스탄 인구조사의 신뢰성에 문제를 제기하며 할머니의 최고령 기록을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도 없지 않다. 현재 세계 최고령 공식기록을 가진 이는 올해 114세인 미국의 에드나 파커 할머니다.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오자와 日민주당 대표 사퇴

    │도쿄 박홍기특파원│일본 제1야당인 민주당의 오자와 이치로(67) 대표가 11일 전격적으로 대표직을 사임했다. 13선의 중의원이다.오자와 대표는 이날 오후 5시쯤 민주당 본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중의원 선거의 승리와 정권 교체의 실현을 위해 대표직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또 “중의원 선거에서 이기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라면서 “새 대표 체제에서 당원의 일원으로서 중의원 선거의 승리를 위해 앞장서겠다.”며 백의종군할 뜻도 분명히 했다.오자와 대표의 사임은 오는 9월10일 임기 만료를 앞두고 치러질 중의원 선거의 정국에 적잖은 파장을 미칠 전망이다. 특히 아소 다로 내각의 지지율이 30%에 다시 들어선 시점인 만큼 아소 총리의 중의원 해산에 대한 결단에도 영향을 줄 것 같다.오자와 대표는 지난 3월4일 자신의 비서관이 거액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된 이후 줄곧 당 안팎에서 사임 압력을 받아왔다. 게다가 오자와 대표가 정치자금수수 의혹에 휘말린 이래 민주당의 지지율은 추락한 반면 자민당의 지지율은 반사이익에 상승했다. 요미우리신문이 11일 내놓은 여론조사 결과 민주당 지지율은 23.4%, 자민당은 26.8%로 나타났다.오자와 대표는 지난 2007년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압승한 뒤 정권교체를 향해 달려왔다. ‘여소야대’의 정국을 최대한 활용, 아베 신조와 후쿠다 야스오 총리를 잇따라 중도 하차시켰다. 그러나 정치자금의 덫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때문에 자신의 손으로 정권 교체를 실현시키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대표직에서 물러앉는 신세로 전락했다. 오자와 대표는 일본 정계에서 ‘풍운아’로 불린다. 지난 2006년 4월 대표에 선출된 뒤 지난해 8월 무투표로 3선에 성공했다. 47세에 자민당 간사장을 지낼 정도로 정치적 역량도 뛰어나다. 오자와 대표의 사임으로 민주당은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중의원 선거의 전략에 차질도 불가피하다. 또 대표직 선출을 둘러싸고 오자와 대표 측의 주류와 비주류간의 갈등이 표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현재 민주당의 대표로는 오카다 가쓰야 부대표, 하토야마 유키로 간사장, 간 나오토 대표대행 등이 거론되고 있다.hkpark@seoul.co.kr
  • [부고] 류환길 전 IBF 챔피언 별세

    전 국제복싱연맹(IBF) 챔피언 류환길씨가 별세했다. 47세.고인은 지난 2006년 9월 자유로에서 당한 오토바이 사고로 병원에서 투병생활을 해 오다 21일 세상을 떠났다. 류씨는 1980년대 전형적인 왼손잡이 ‘헝그리 복서’로 통했다. 통산 전적 31전26승3무2패(11KO). 중학교 졸업 이후 본격적으로 글러브를 낀 그는 1979년 프로에 데뷔, 2년 뒤 페더급 동양챔피언에 오른 뒤 1984년 로드 세퀴난(필리핀)을 판정승으로 꺾고 IBF 주니어라이트급 챔피언 벨트를 찼다. 워낙 투지가 강한 데다 독특한 헤어스타일로 링에 올라 ‘한국판 헤글러’라는 별명도 얻었다. 1980년대 말 링에서 내려온 뒤 사고 이전까지 경기 고양시에서 음식점을 운영해 왔다. 빈소는 고양시 덕양구 화정동 명지병원에 마련됐다. 발인은 23일. (031)810-5444.
  • [씨줄날줄] 정약용의 안경/함혜리 논설위원

    1271년부터 1295년까지 원나라에서 관직을 맡았던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원나라의 늙은 신하들이 거북의 등껍질로 만든 볼록렌즈 안경을 끼고 있다고 썼다. 중국이 안경 발명국이라는 주장의 근거다. 그러나 대부분의 논문들은 안경이 1280년경 베니스의 유리공들에 의해 최초로 제작됐고 수도승들에 의해 중국 원나라까지 전해졌다고 본다. 우리나라에 안경이 처음 소개된 것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 즉 16세기 말로 추정한다. 안경알은 유리가 아닌 수정을 갈아서 만든 것이었는데 대부분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었다. 1600년대 초부터는 경주에서 안경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볼록하게 튀어나온 렌즈가 마치 ‘게눈’처럼 생겨서 체신이 안 선다는 이유로 초창기에 안경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18세기 들어 실용성을 중시하는 실학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안경이 보편화되면서 안경은 선비들의 필수품으로 자리잡기 시작한다. 말년의 정조도 안경을 착용했을 정도였다. 정조실록에 보면 정조는 정조 23년(1799년) 7월에 안경을 착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정조는 안경 다리를 비단실로 만들고 테는 옥으로 된 옥안경을 쓴 것으로 전해진다. 정조의 나이는 당시 47세였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정조를 도와 개혁을 주도했던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순조가 즉위하면서 생애 최대의 전환기를 맞는다. 소론과 남인 사이의 당쟁이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하면서 다산은 천주교인으로 지목받아 유배형을 받는다. 포항 장기에서 1차 유배생활을 마치고 47세에 강진의 귤동에 있는 초가에서 다시 유배생활을 했다. 정약용이 10년 동안 머물면서 역사에 빛나는 학문적 업적을 남긴 곳이 다산초당이다. 전남 강진군이 다산초당에 설치할 새로운 초상화를 공개했다. 한국전통문화학교 김호석 교수가 치밀한 고증을 거쳐 완성한 새 초상화에서 다산은 안경을 끼고 있다. 방대한 독서량과 저술로 인해 시력이 많이 약화됐다는 기록에 근거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후기 최고의 르네상스형 지식인으로 꼽히는 다산이 근엄함을 벗어던진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안경을 쓴 모습이 눈에 익으려면 아무래도 좀 시간이 걸릴 듯하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사우디 47세 男·8세 소녀 혼인무효 소송 기각 논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40대 남성과 억지로 결혼한 어린 소녀의 혼인무효 소송이 사회적 논란이 되고 있다.12일(현지시간) 미국 CNN방송 인터넷판은 47세 남성과 강제 결혼한 8세 소녀의 가족이 혼인무효 소송을 냈으나, 법원이 이를 연거푸 기각해 물의를 빚고 있다고 보도했다. 두 사람의 결혼 사실이 처음 알려진 것은 소녀의 어머니가 낸 혼인무효 소송을 사우디 법원이 기각한 지난해 12월. 소녀의 아버지는 빚을 갚는 조건으로 자신의 어린 딸을 친구에게 시집보내기로 했다. 당시 남편과 별거하고 있던 소녀의 어머니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오나이자시법원에 혼인무효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어머니가 소녀의 보호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녀를 법정에도 못 나오게 하다 결국 소송을 기각했다. 오나이자시법원 알 하비브 판사는 이 남성에게 소녀가 결혼 적령기가 되기 전까지 성관계를 갖지 않겠다고 서약하게 하고, 소녀에게도 적령기가 된 이후 이혼소송 제기 여부를 스스로 결정하도록 했다.이후 사우디 항소 법원은 1심 판결을 깨고 지난달 알 하비브 판사에게 재심을 권고했으나, 사우디의 복잡한 법적 절차 때문에 결혼은 계속 유효한 상태로 유지됐다.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8세 소녀, 47세 男에 결혼 무효소송 기각

    8세 소녀, 47세 男에 결혼 무효소송 기각

    “제발 이혼하게 해주세요!” 친아버지의 강요로 47세 남성과 결혼한 사우디아라비아의 8세 소녀가 결혼 무효소송을 제기했지만 기각돼 인권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사우디에 살고 있는 한 8세 소녀는 지난해 친아버지가 진 빚 때문에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인 47세 남성과 억지로 결혼했다. 당시 소녀의 아버지와 별거 중이었던 소녀의 어머니는 뒤늦게 자신의 어린 딸이 억지로 결혼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지난해 12월 법원에 혼인 무효소송을 제기했다. 어린 딸을 대신해 법적 대리인으로 나섰던 소녀의 어머니는 1심에서 “남편과 이혼했기 때문에 소녀의 어머니는 더이상 법적대리인이 될 수 없다.”면서 이혼소송을 법원으로부터 기각 당했다. 대신 법원은 소녀와 결혼한 47세 남성에게 소녀가 결혼적령기가 될 때까지 성관계를 맺지 않도록 서약을 하게 하고 성인이 된 뒤 소녀에게 스스로 소송을 제기하라고 판결을 내렸다. 몇 달 뒤인 지난 10일(현지시간) 다시 열린 재심에서도 해당 재판을 맡은 셰이크 파비브 알-파비브 판사는 1심과 같은 이유로 또 다시 이혼소송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소녀의 친척은 “알-파이브 판사는 1심의 판결 내용을 고집했고 이혼을 하려거든 소녀가 결혼적령기가 되서 스스로 소송을 제기하라고 재차 강조했다.”고 전했다. 2심 판결이 난 뒤 사우디아라비아 국내외 인권단체는 즉각 부당함을 주장하고 나섰다. 사우디 아라비아 여성인권보호협회(Society of Defending Women‘s Rights in Saudi Arabia) 측은 “어린 소녀의 안전이 위협 당하고 있으며 이런 결혼 생활은 소녀에게 평생 동안 큰 상처로 남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 역시 “한달에 4, 5건씩 미성년자 결혼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면서 “어린 소녀들을 결혼시킬 수 있도록 한 이슬람법이 법원의 영역을 장악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최고 종교지도자인 셰이크 압둘 아지즈 알-셰이크는 지난 1월 현지 신문과 인터뷰에서 “15살 이하인 소녀의 결혼이 허용되지 않는 것은 맞지 않다.”면서 “이들 소녀가 너무 어리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됐으며 소녀를 불공평하게 대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사진=Al-Arabiya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기자 newsluv@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性접대자리 제5의 인물 누구?

    청와대 김모 전 행정관의 성매매·로비의혹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이 3일 새롭게 등장한 ‘제5의 인물’에 대해 수사에 착수한 것으로 파악됐다. 경찰은 또 김 전 행정관과 술자리에 동석한 청와대 장모 전 행정관과 방송통신위원회 신모 전 과장을 성매매 혐의로 입건한 데 이어 신 과장과 케이블 방송업체 문모 전 대외협력팀장을 뇌물 혐의로 입건했다. 서울신문 취재 결과 경찰이 지난 1일 오후 8시30분쯤 이번 사건에 연루된 4명의 컬러 사진과 주민등록번호가 인쇄된 A4용지를 들고 티브로드의 문 전 팀장이 저녁식사 자리를 마련한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P식당 관계자들을 찾아 당시 참석 여부 등을 조사한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이날 오후 2시쯤 또다시 이곳을 찾은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신문 취재팀이 이날 오전 10시쯤 ‘제5의 인물’로 추정되는 인물 사진을 보여주자 “경찰이 확인해 달라고 가져왔던 사진 속 인물 가운데 한 명이 맞다.”고 밝혔다. 취재 당시 식당 관계자들에게 보여준 인물 사진은 경찰이 이번 사건에 연루됐다고 밝힌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날 경찰이 다시 방문한 뒤 입을 다물거나 말을 바꾸었다. 이들은 “경찰이 기자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했다. 많은 사진을 봐서 오전에 본 사진이 경찰 사진과 같은지 잘 모르겠다.”며 말을 바꿨다. 식당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경찰은 지난 1일(두 차례 방문)과 이날 방문조사에서 접대자리에 참석한 인원이 모두 5명인 것으로 확인했다고 한다. 식당의 한 관계자는 “경찰이 몇 명이 왔느냐고 묻기에 처음에는 사장님이 다른 테이블과 착각해 3명이 왔다고 얘기했지만 종업원들과 이야기해 본 뒤 5명인 것을 알게 돼 경찰에 연락했다.”면서 “경찰이 다시 와서 5명인 것을 거듭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경찰은 “식당 관계자가 5명이라고 말해 문 팀장에게 물었더니 대리운전 기사가 합석해서 5명이라고 했다.”면서 “하지만 대리운전 기사에게 물어봤더니 당일 식사자리에 온 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경찰은 “문 팀장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기존 4명 이외에) 나머지 1명이 누구인지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경찰이 김 전 행정관과 함께 모텔에서 적발된 민씨의 이름과 직업, 나이 등에 대해 연일 말 바꾸기로 일관하는 점도 석연치 않다. 경찰은 지난 1일 ‘무직, 43세, 민○호’라고 했다가 이날엔 ‘확실한 직장인, 47세, 민○우’라고 번복했다. 검거 경위도 마찬가지다. 경찰은 전날 “업소 아가씨가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해서 검거하게 됐다.”고 밝혔지만 이날엔 “일을 마치고 나오는 아가씨와 민씨를 복도에서 검거했다.”고 뒤집었다. 김승훈 오달란기자 hunnam@seoul.co.kr
  • [김수환 추기경 선종] 낮은 자의 삶 실천한 시대의 성자

    [김수환 추기경 선종] 낮은 자의 삶 실천한 시대의 성자

    한국 천주교의 최고 성직자라는 명성을 넘어 우리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로 살며 우리의 곁을 지켰던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했다. 용기있는 발언으로, 때로는 ‘무거운 침묵’을 지켜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잡아 온 시대의 양심이었다. 소외되고 억압받는 자를 품고 시대의 메신저로서 사회적 지침을 제시해온 그는 단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성직자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 정의와 진리에 바탕을 둔 인간성 회복에 앞장선 휴머니스트였다. 병인박해로 순교한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독실한 천주교 신앙을 이어온 아버지 김영석과 어머니 서중하 슬하의 5남3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옹기점과 농업으로 어렵게 생계를 꾸리는 부모 아래서 유아세례를 받아 자랐지만 원래 사제가 될 생각은 없었다. 남달리 자식에게 열정을 가진 모친은 그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사제가 되기를 권했지만 정작 소년 김수환은 썩 내켜 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모시고 남들처럼 처자를 거느리며 평범한 세상을 살아갈 요량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모친의 권유를 따라 결국 형(동한)과 함께 성직의 길을 택했다. 보통학교 5년 과정을 졸업하고 1933년 대구 성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에 진학한 게 성직자 인생의 첫걸음. 서울 소신학교인 동성상업학교 을조에 입학했으며 1941년 동성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천주교 대구교구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그해 4월 일본 유학을 떠났다. 조지(上智)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사제의 길을 놓고 망설임이 적지 않았다. 말할 것도 없이 나라 잃은 민족적 현실에의 고민이었다. 조지대학의 게페르트 신부가 “정치가가 될 것이냐, 신부가 될 것이냐.”고 물었을 때, “민족이 저를 부른다면 정치가라도 되겠다.”고 대답했던 것을 보면 당시 갈등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성직보다 항일 독립투쟁에 더 마음을 두던 중 졸업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1944년 학병에 징집되어 섬에 끌려갔다. 강제로 일본 국가를 부를 때마다 서러움이 사무쳐 미군에 투항할 생각으로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듬해 전쟁이 끝나 조지대에 복학, 1946년 12월 부산항에 도착했고 곧바로 서울의 성신대학에 편입해 4년 뒤인 1951년 9월15일, 대구 계산동 주교좌성당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남의 나라’를 위해 싸워야 했던 학병 시절 체험한 전쟁속 인간의 잔학상은 사제로서 “목숨 바쳐 지킬 가치가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했다. 경북 안동 본당에서 사목을 시작해 대구교구장 최덕홍 주교의 비서, 해성병원 원장을 거쳐 1955년 6월 경북 김천본당 주임 겸 성의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전임됐고 독일 뮌스터 대학에서 신학·사회학을 전공한 뒤 귀국해 1년 8개월간 가톨릭 시보(현 가톨릭신문)사 사장을 지냈다. 1966년 44세의 김 신부가 마산교구 설정과 함께 초대 교구장에 임명돼 주교 성성식과 교구장 착좌식을 가졌을 때 택한 사목표어가 바로 그 유명한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이다. 이 표어는 평생 소외받고 어두운 그늘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몸과 마음을 둔 채 어길 수 없었던 큰 나침반이었다. 1968년 서울대교구장에 착좌했을 때의 취임인사도 바로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교회 쇄신과 현실 참여로 이어가겠다는 다짐이었다. 다짐대로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에 초점을 맞춰 살면서 민중들에 대한 관심과 부조리한 정치사회 현실을 향한 강경 발언을 서슴지 않아 교회 안팎에서 ‘인권 옹호자’의 명성(?)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상계동과 목동의 철거민 주거지를 직접 방문했고 성탄 전야 미사는 항상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집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1987년 ‘도시빈민 사목위원회’를 교구 자문 기구로 설립해 놓았다. 그 때문에 서울대교구의 복지 시설은 200여 개로 크게 늘었다.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가 사임한 다음해인 1968년 제12대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되면서 대주교로 승품, 이후 30년 재임기간 중 서울대교구에서 6명의 주교를 탄생케 했고 48개이던 본당이 200여개로 늘어나는 교세확장도 일궜다. 한국 천주교사상 최초의 추기경으로 서임된 것은 서울대교구장 착좌 이듬해. 나이 47세로, 전세계 추기경 136명 가운데 최연소 추기경이 됐던 그는 2차례에 걸쳐 총 12년동안 한국 주교회의 의장을 맡은 것을 비롯, 아시아주교회의 연합회(FABC)를 출범시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현실에의 냉정한 처신을 비켜나지 않으면서도 늘상 이웃집 아저씨, 할아버지 같은 살가운 정과 웃음을 달고 살았던 김 추기경. 그는 떠날 때도 정확히 알고 지킨 인물이었다. 75세가 되던 1997년 교회법 제401조에 따라 로마 교황청에 서울대교구장 사임 의사를 단호히 밝혔다. 교황청이 자신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자 거듭 사임의사를 밝힌 끝에 마침내 이듬해인 1998년 5월29일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에서 물러났다. 목자 생활 47년 만이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7080’ 추억의 팝스타, 지금은?…”여전하거나 망가졌거나”

    ‘7080’ 추억의 팝스타, 지금은?…”여전하거나 망가졌거나”

    1970~80년대에는 해외 팝스타가 국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팝송 열풍이라 불릴 정도로 그들의 음악이 많은 사랑을 받은 것. 남녀, 그룹·솔로, 장르에 구분없이 고른 인기를 얻었다. 당시 국내 팬들에게 팝스타는 우상이었다. 이상형 혹은 부러움의 대상으로 꼽혔다. 빼어난 외모는 물론 음악성까지 갖췄기 때문이다. 70~80년대.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팝스타들. 지금 그들은 어떻게 변했을까? 여전히 멋지거나 확 망가져 있었다. 추억의 7080 팝스타. 그들의 과거와 현재 모습을 비교해봤다. ◆ “전성기 모습 여전해” 전성기가 20~30년이나 지났다. 강산이 두번은 변했을 긴 시간이다. 하지만 여전히 멋진 모습을 간직한 스타가 있었다. 주름만이 조금 엿보일 뿐. 외모나 분위기는 그때 그 시절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70년대 그룹 블론디의 보컬 데보라 해리. 그녀는 영화 ‘미녀는 괴로워’에서 김아중이 소화한 ‘마리아’의 원곡을 부른 당사자다. 해리의 올해 나이는 63세. 하지만 미모는 여전하다. 군살없는 몸매와 섹시한 눈빛이 전성기와 똑같다. 영국 출신 팝가수 클리프 리차드. 국내에는 ‘더 영 원스(The young ones)’로 유명하다. 그는 현재 68세다. 하지만 얼굴 어디에서도 나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마의 주름 외엔 세련된 옷차림과 환한 미소가 과거와 다르지 않다. 독일출신 여가수 가수 씨씨 캐치는 80년대 디스코 여왕이다. 대표곡은 ‘소울 서바이버(Soul survivor)’로 더블 플래티넘을 기록했다. 캐치는 올해 44살이 됐지만 미모는 여전히 눈부시다. 주름살 없는 얼굴과 탄탄한 몸매가 20대 못지 않다. ◆ “완전히 망가졌네?” 반면 세월의 흔적을 비껴가지 못한 스타도 있다. 살이 찐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기 절정의 순간과 비교해 스타일이 크게 변한 것도 한 몫했다. 왕년의 멋진 외모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영국 그룹 컬처 클럽의 보컬 보이 조지. 진한 화장과 여성스러운 외모로 인기를 끌었던 그는 중년의 아저씨가 됐다. 조지의 나이는 올해 47세. 두툼한 턱살과 입주변에 난 수염이 그 나이대 평범한 아저씨와 별반 차이가 없다. 과거와의 사뭇 다른 모습이다. 80년대를 풍미한 그룹 아담 앤더 앤츠의 아담 앤트. 솔로앨범인 ‘스트립(Strip)’으로도 유명한 그 역시 많이 변했다. 과거 날렵한 턱선과 특이한 분장이 트레이드 마크였다면 지금은 살이 찐 얼굴과 벗겨진 머리가 눈에 띈다. 다소 평범하다. 영국 여가수 킴 와일드. 80년대를 주름 잡았던 그녀도 세월의 힘을 막지 못했다. 전성기와 달리 너무 불어난 몸이 한 원인. 두겹이나 접히는 턱살과 목의 주름이 지나온 시간을 대변했다. 섹시함이 넘치던 외모는 온데간데 사라졌다. 기사제휴/스포츠서울닷컴@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데스크 시각] ‘한국의 오바마’를 기다리며/김균미 워싱턴 특파원

    [데스크 시각] ‘한국의 오바마’를 기다리며/김균미 워싱턴 특파원

    사흘 전 미국 워싱턴 시내를 가득 메웠던 미국인들은 역사의 한 자락을 가슴에 품고 일상으로 돌아갔다. 미국 233년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이 취임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직접 목격했다는 감격과, 책임의식과 희생·봉사정신을 강조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메시지와 함께. 지금도 그날의 열기와, 들떠 있던 미국인들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추운 날씨에도 워싱턴과 버지니아, 메릴랜드 주변 지하철 역들은 취임식장으로 향하는 인파로 새벽부터 북적였다. 지하철로 40분 정도 걸릴 거리가 이날은 2시간도 넘게 걸렸다. 지하철 안에서는 얼굴조차 돌리기 힘든, 좀처럼 보기 드문 광경이 연출됐지만 어느 누구도 불평하거나 신경질을 내지 않았다. 지하철들이 밀려 일시 정차한다거나, 의사당 근처 지하철역이 일시 폐쇄됐다는 기관사의 되풀이되는 안내 방송은 오히려 승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역에 내려 사람들에게 떠밀려 계단을 오르면서도 이들은 질서를 외치며 축제 분위기에 들떠 있었다. 취임식장 주변에 도착해 눈앞에 펼쳐진, 끝이 보이지 않는 줄을 따라가면서도 구시렁거리는 사람은 만나질 못했다. 오바마 캠프에서 자원봉사를 했다는 20대 백인 자매는 취임연설을 들으며 환호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역사를 이뤄냈다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50대 흑인 여성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지으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취임식장에 함께했다는 사실만으로 이들은 금방 친구가 됐다. 오바마의 연설 한마디 한마디에 열광하며 눈물을 흘리는 지지자들, 책임감과 봉사정신을 강조하며 동참을 요구하는 리더의 부름에 적극적으로 응하는 지지자들의 모습이 부러웠다. 상황은 전혀 다르지만 광화문과 시청앞 광장을 가득 메웠던 2002년 월드컵 당시 서울의 모습이 잠시 겹쳐졌다. 무엇이 미국인들을 47세의 흑인 초선 상원의원 출신 오바마에게 이토록 열광하게 할까. 미국 대선을 취재하면서 끊임없이 던졌던 질문이지만, 취임식장에서 만난 미국인들에게 또다시 던졌다. 되돌아온 답은 예의 영감을 불러일으키는(inspirational) 감동을 주는 지도자였다. 비전을 제시하고 희망과 열정을 불어넣는 사람, 미 정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소통 능력을 갖춘 사람,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내치지 않고 손을 뻗어 안을 수 있는 사람, 변함이 없는 한결같은 지도자, 믿음을 주는 지도자,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지도자 등등…. 물론 뛰어난 조직력과 장악력도 빠뜨릴 수 없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표현은 역시 국민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지도자가 아닌가 싶다. 현재의 상황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가진 것이 적어도,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질 수 있는 희망에 동참하고픈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낙관의 힘이 아닌가 싶다. 언젠가 한 지인으로부터 들은 얘기다. 한국에서 정치에 뜻을 둔 사람들로부터 오바마의 성공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부쩍 많이 받는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오바마의 정치인생을 벤치마킹하라고 대답한단다. 오바마가 2년간 가장 성공적인 선거캠페인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이나 요령만 배우지 말고, 그 밑에 깔려 있는 미국인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던 진짜 이유를 연구해 보라고. 질문을 던진 이들이 원하는 답을 찾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국민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정치에 관심을 갖고 있는 정치인들이 많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현재 한국에서 일고 있는 오바마 배우기 열풍이 한순간의 유행에 그치지 않길 바라며, 국민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담대한 희망을 품은 지도자를 하루빨리 만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김균미 워싱턴 특파원 kmkim@seoul.co.kr
  • [사설] 美 오바마 정부 출범과 새로운 세계

    버락 H 오바마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의 새 정부가 20일(현지시간) 출범한다. 47세라는 젊음도 신선하지만 미국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그의 취임은 미국 역사, 나아가 세계사에 한 획을 긋는 일대 사건이다. 미국 동부를 엄습한 강추위에도 수많은 미국인이 그의 취임을 보기 위해 몰려들고 있는 것은 그가 몸으로 상징하고 말로 외치는 통합과 변화의 가치에 미국민이 공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지구촌 또한 오바마 정부가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길 뜨겁게 기대하고 있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경제위기다. 다행히 상하원 모두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어 유리한 분위기다. 강력한 리더십으로 위기를 신속하게 극복해 나갈 것을 기대한다.세계는 각종 분쟁으로 영일이 없다. 부시 정부는 힘의 논리로 분쟁을 해결하려 했으나 이라크 등 곳곳에서 오히려 수렁에 빠져들고 말았다. 오바마 정부의 새 국무장관에 임명된 힐러리 클린턴은 인준청문회에서 “미국만으로는 난제를 해결할 수 없다. 세계도 미국을 빼놓고는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해 일방주의 외교와의 결별 의지를 시사했다. 오바마 새 정부가 각종 분쟁을 풀어나감에 있어 일방주의 및 힘의 외교와 진실로 결별할 것을 주문한다.새로운 세계는 기대하긴 쉽지만 이루긴 어려운 꿈이다. 그 꿈을 향한 기차가 출발하기도 전에 북한은 핵보유와 군사대응이라는 엄포를 내놓았다.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자극하면서도 끝내 북한에 끌려다닌 부시 정부와 달리 오바마 새 정부는 한·미간 긴밀한 공조하에 북핵 문제에 실질적 진전을 이뤄내야 한다. 한·미 FTA협정도 한·미간 갈등으로 치닫지 않도록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우리는 오바마 정부가 변화를 향한 미국민과 지구촌의 기대를 어떻게 충족시켜 나갈지 예의주시하고자 한다.
  • “한국이름 버리고 노래할 순 없었죠”

    “한국이름 버리고 노래할 순 없었죠”

    |도쿄 박홍기특파원|“일본인들의 재일 한국인들에 대한 차별·편견 등 잘못된 인식을 바꾸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했다고 봅니다.” 지난 1일 도쿄의 도시마구민회관에서 50회째 ‘한·일 자선 콘서트’를 가진 무명의 재일교포 가수 백옥선(76)씨가 털어놓은 감회다. 백씨의 콘서트는 지난 1979년 12월6일 처음 열린 이래 30년간 무려 50회나 개최됐다. 도쿄도의 전체 23개구를 두세 차례씩 찾아다니며 공연, 총관객만 3만 6700명에 달했다. “76년 한 음반회사에서 레코드를 냈는데 기모노를 입고, 일본 이름을 쓰라고 권유하더군요. 한국 이름으로 하다보면 한두번 노래하다 포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나요.” 노래를 좋아했지만 이름까지 고치면서까지 노래할 이유는 없다는 게 백씨의 당시 생각이었다. 그래서 몸으로 보여주겠다는 오기가 발동, 노래방인 ‘가라오케’를 운영하며 번 돈을 털어 무료 콘서트를 열기로 했다. 팸플릿 제작에서부터 공연장 임대까지 모든 과정을 혼자서 해결했다. 백씨는 지금도 신오쿠보역 근처에서 ‘가라오케’를 경영하고 있다. “이름없는 가수의 콘서트지만 관객들이 찾아주셨죠. 관객들의 대부분이 일본인들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정서를 전달하기 위해 일본어로 불렀습니다.” 백씨는 콘서트에서 아리랑과 함께 통일을 염원하는 내용을 담은 자신의 작사곡인 ‘38선의 어머니’를 꼭 불렀다. 또 2005년 46회 콘서트부터는 2001년 신오쿠보역의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려다 숨진 유학생 이수현(당시 26세)씨와 카메라맨 세키네 시로(〃 47세)를 추모하기 위해 직접 만든 ‘신오쿠보 비가(悲歌)’를 노래하고 있다. 백씨는 46회 콘서트부터 무료 공연을 유료로 바꿨다. 입장료 수익을 ‘LSH(이수현) 아시아 장학회’에 기부하기 위해서다. 벌써 5차례에 걸쳐 모두 110만엔을 전달했다. 특히 지난 2006년 47회에 이어 50회 콘서트에는 이씨의 부모도 참석했다. 무대 의상도 이씨의 의로운 희생을 기리는 마음에 한국의 상복을 뜻하는 흰색 저고리에, 일본의 상복인 검은색 치마를 입었다. 백씨는 “앞으로 더 공연을 하라고 격려해주시지만 나이도 있고 쉽지 않아요.50회 공연까지 마친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라며 웃었다. hkpark@seoul.co.kr
  • [인종 벽을 넘다-美 오바마 시대] 47세 검은 케네디 ‘노예 해방’ 완결짓다

    [인종 벽을 넘다-美 오바마 시대] 47세 검은 케네디 ‘노예 해방’ 완결짓다

    “숯처럼 까만 아버지에 우유처럼 하얀 어머니…” 소년 오바마는 혼란스러웠다. 미국 절반이 흑백결혼을 금지하던 시절이었다. 고민하고 또 고민해도 답은 찾을 수 없었다.‘흑백결혼’이란 단어가 괴기스럽고 추하게 느껴졌다. 혼란은 오래 갔다. 상처는 덧났다. 백인 가정에서 자란 흑인. 미국인도, 아프리카인도 아닌 정체성. 모든 게 모호했다. 위안이 필요했다. 당연한 듯 술과 마리화나에 손을 댔다.“술에 취하면 내가 누군가 하는 의문을 잠시 지울 수 있었다.”고 했다.“매일 아침 눈 뜨면 다시 눈을 질끈 감고 싶었다.”고도 했다. 방 안엔 안주 담은 그릇이 뒹굴고 재떨이엔 꽁초가 넘쳤다. 모든 게 황량했던 시절이었다. 흔한 마약쟁이로 일생을 보낼 뻔했던 이 흑인은 5일(현지시간) 미 합중국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세계 언론은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평가했다. 환호하는 지지자들 속에서 오바마의 검은 얼굴엔 흰 미소가 번졌다. 그는 당선이 확정된 5일(현지시간) “혼란스럽고 고단했던 날들이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고백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당선인은 1961년 8월4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프리카의 케냐 출신 유학생이었고 어머니는 대학에 갓 입학한 18세 소녀였다. 두 사람의 결혼식에는 단 한 사람의 축하객도 없었다. 하와이라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혼혈과 외지인이 많았던 하와이는 본토보다는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아버지 버락 후세인 오바마 1세는 케냐 루오족 출신이었다. 서부 빅토리아 호숫가의 작은 마을에 살았다. 오바마의 할아버지는 영국인 지주 집에서 요리사로 일했고, 오바마 1세는 염소를 몰았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아들을 식민지의 영국학교에 꼬박꼬박 출석시켰다. 그런 오바마 1세에게 일생일대 기회가 찾아왔다. 케냐가 독립하기 전날, 미국 유학 프로그램에 선발됐다. 오바마 1세는 하와이 대학에 입학했다. 거기서 어눌하고 수줍음 많던 스탠리 앤 던엄을 만났다. 금세 사랑에 빠졌고 곧 아기를 가졌다. 어머니 던햄은 학교를 중퇴해야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행복했다. 그러나 이별의 시간은 빨리 다가왔다. 새로운 장학금을 받아 아버지가 하버드로 떠났다. 어린 엄마와 흑인 아들은 하와이에 남겨졌다. 오바마가 두살 때였다. 어머니는 새삶을 살았다. 학교에 복학하고 인도네시아 유학생 롤로 수토르와 재혼했다. 여섯살 오바마는 새아버지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떠나게 된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오바마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동네 친구 에디 뿌르완또로는 오바마의 어린 시절을 기억했다.“사룽(인도네시아인들이 허리에 두르는 천)을 뒤집어 쓰고 해가 질 때까지 함께 닌자놀이를 했다.”고 했다.“서로 다른 신을 믿지만 그래도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기를 줄곧 기도했다.”고도 했다. 열 살 되던 해, 오바마는 호놀룰루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아들이 미국에 있는 학교에 다닐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호놀룰루에선 오바마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바마를 진정한 미국인으로 만들어 냈다는 평가를 듣는 사람들이다. 오바마는 외할머니를 ‘투트(Toot)’라 부르며 따랐다. 하와이 원주민 말로 할머니를 뜻하는 ‘투투(tutu)’를 변형한 애칭이다. 숨가쁜 대선 레이스가 계속되던 지난달 23~24일, 오바마는 외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선거운동을 중단했다. 하와이로 급히 날아갔다. 캠프 안팎에서는 이런 행보가 선거에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를 놓고 저울질이 한창이었지만, 오바마에게는 그저 ‘투트’가 소중했다. 오바마는 지난 3일 조용히 숨을 거둔 외할머니를 “미국의 수많은 ‘조용한 영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기렸다. 선거 전문가들은 “오바마의 외가쪽 이력이 백인 보수층의 거부감을 무너뜨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실제 대선전에서도 외할머니는 오바마의 큰 우군이 됐던 셈이다. 1979년, 고등학교를 마친 오바마는 로스앤젤레스 옥시덴털칼리지에 입학했다.2년 뒤엔 컬럼비아대로 편입했다.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그는 “당시 수도승처럼 공부만 했다.”고 회고했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공동체 운동가가 되기로 결심한다.“흑인을 조직해 풀뿌리부터 변화시키리라.”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거친 그는 시카고에서 운동가 생활을 시작했다. 쉽지 않았다. 곳곳에서 한계에 부딪혔다. 더 많은 지식, 한 단계 높은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1988년, 오바마는 하버드대 로스쿨에 입학했다.“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도서관에서 판례와 법전에 파묻혀 시간을 보내던 그는 1990년 ‘하버드 로 리뷰(Harvard Law Review)’ 편집장에 선출된다. 학술지 역사 104년 만에 첫 흑인 편집장이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일찌감치 흑인사회의 리더로 각인됐다. 당시 오바마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미국이 진보하고 있음을 뜻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1996년 오바마는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일리노이주 주상원의원 보궐선거에서 승리했다.1998년에 재선,2002년에는 3선에 성공했다. 그 사이 2000년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서 패배하는 아픔도 겪었다. 대통령선거가 있었던 그해에는 일리노이주 민주당 대의원으로도 선출되지 못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선 ‘구경꾼’이 될 수밖에 없었다. 4년 뒤 2004년 대선에서 기회가 찾아왔다. 존 케리 당시 민주당 후보가 보스턴 전당대회 기조연설을 요청했다. 케리는 “우연히 선거 행사장에서 오바마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오바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무명에 가깝던 이 흑인 정치가는 이날 연설 이후 전국적인 스타가 됐다. 그리고 흑인으로는 다섯번째로 연방 상원 입성에 성공했다. 그로부터 다시 4년이 지난 2008년 이 ‘검은 케네디’는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 금융위기로 흔들리는 ‘미국호’의 새로운 조타수가 됐다. 그는 “아직 미국에는 꿈꾸는 이들이 있고, 그들이 있으면 희망은 남아있다.”고 말했다. 아프리카계 흑인 몽상가의 도전은 이제 시작이다. 박창규기자 nada@seoul.co.kr
  • [정종욱 월드포커스] 오바마의 아버지가 남긴 꿈들

    [정종욱 월드포커스] 오바마의 아버지가 남긴 꿈들

    제44대 미국 대통령 선거가 코앞에 다가왔다. 다음 주 화요일까지 꼭 일주일 남았다. 아직 이르긴 하지만 지금의 상황으로서는 민주당 후보 바락 오바마의 당선이 거의 확정적이다. 공화당 텃밭이었던 지역들에서 오바마가 우세한 상황이고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처럼 공화당 원로이면서도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는 인사도 늘어나고 있다. 뉴욕 타임스나 워싱턴 포스트와 같은 유력 일간지들은 이미 오바마 지지를 선언했다. 그래서 존 매케인 후보가 열세를 극복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는 얘기마저 나오고 있다. 만약 오바마가 당선되면 이는 엄청난 역사적 사건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그의 당선은 미국 최초의 유색인 대통령의 탄생을 뜻한다. 생각조차 할 수 없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오바마는 유색인 치고도 특이한 편에 속한다. 올해 만 47세인 그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케냐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 버락은 케냐 말로 축복을 뜻한다. 부친이 지어준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름과는 달리 그의 어린 시절은 축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태어난 지 2년 만에 부모가 헤어졌고 여섯 살 때에는 인도네시아인과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자카르타로 갔다가 열 살 되던 해에 다시 하와이로 돌아와 그때부터 외할머니와 살았다. 백인 외할머니는 혼혈아인 손자가 길거리에서 흑인들에게 얻어맞지나 않을지 걱정했다고 한다. 이렇게 그의 어린 시절은 케냐와 하와이와 인도네시아 사이에서 흉물스럽게 망가졌고 이를 극복하려는 그의 노력 또한 그것이 성공적이었던 것만큼이나 눈물겨운 것이었다. 오바마는 정치적 신인이다. 동부의 명문 컬럼비아 대학에서 학부를 마치고 하버드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최고 엘리트이지만 정치 경력은 4년 전에 시카고에서 상원의원에 당선된 게 전부다. 경쟁자인 매케인은 상원에서 24년 동안 군림한 왕고참이고 자신의 부통령 후보인 바이든의 상원 경력은 36년이나 된다. 그런 정치 초년병인 오바마가 혼혈 가정 출신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드디어 대통령 꿈을 이룩하게 된다는 사실은 그 꿈을 이루는 과정이 어떠했든 간에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밖에 없다. 정치신인 오바마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4년 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그가 행한 연설이었다. ‘희망에의 도전’(the audacity of hope)이란 제목이 붙여진 이 연설은 대회장을 가득 메운 대의원들을 열광하게 했고 무명에 가까웠던 오바마를 일약 정치적 스타로 만들어 버렸다. 그는 이 연설에서 자신의 첫 저서인 “아버지가 남긴 꿈들”(The dreams from my father)을 말한다. 그의 아버지가 남긴 꿈은 한마디로 통합의 꿈이었다. 사람들이 제 각기 다른 꿈들을 꾸지만 결국은 하나의 꿈으로 합쳐져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는 이것을 에 플러리버스 우넘(E pluribus unum)이라 표현했다. 다수에서 하나로(out of many, one)라는 뜻이다. 다양한 인종이 모인 미국이 그 다양성을 하나로 결집시킬 때 비로소 미국적 가치가 구현될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었다. 오바마의 눈에는 그런 미국의 꿈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변화를 표방하면서 대통령 선거에 나선 것이다. 차기 미국 대통령은 지금까지 예상하지 못한 많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금융위기가 아니라도 미국이 일방적으로 세계를 이끌어 나가는 시대는 사라졌다. 흔들리고 있는 것은 미국의 꿈만이 아니다.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지위도 흔들리고 있다. 누가 되든 미국의 새 대통령은 다양한 가치를 포용하는 다원적 질서의 새 시대를 열어야 한다. 일주일 후에 있을 미국 대선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오마바가 이런 역사적 사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적임자인지를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정종욱 서울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 [미프로야구 포스트시즌] ‘꼴찌들의 가을잔치’ 형님이 먼저 웃었다

    1995년 미프로야구 디비전시리즈가 도입된 이래 디비전시리즈와 챔피언십시리즈, 월드시리즈 1차전 모두에 선발로 나와 승리를 거둔 투수는 3명뿐이었다.시리즈 전체 승부에 관건이 되는 1차전 부담을 털어내고 승리를 일궈낸 최고의 투수는 1996년 존 스몰츠(애틀랜타 브레이브스),1998년 데이비드 웰스(뉴욕 양키스), 지난해 조시 베켓(보스턴 레드삭스) 등이었다. 23일 플로리다주 세인트피터즈버그 트로피카나필드에서 열린 월드시리즈 1차전에서 네 번째 주인공이 나왔다.1980년 이후 28년 만에 창단 이후 두 번째 패권을 벼르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선발투수 콜 해멀스(25)가 홈런 1개를 허용했지만 6회까지 ‘꼴찌 돌풍‘을 일으킨 탬파베이 타선을 2실점으로 막아 승리투수가 됐다. 팀은 3-2로 짜릿한 승리를 거뒀다. 포스트시즌 3경기에 나와 평균 자책점 1.23을 기록하며 3승을 거둔 해멀스는 이날도 특유의 체인지업을 주무기로 모두 102개의 공을 던져 상대 타선을 유린했다. 해멀스가 7회 물러나자 라이언 매드슨이 8회를, 브래드 릿지가 9회 마운드에 올랐다.47세이브를 거두는 동안 단 한 번도 동점과 역전을 허용하지 않았던 최강의 소방수 릿지는 카를로스 페냐와 에반 롱고리아를 슬라이더만으로 공략, 연속 삼진으로 잡아내며 뒷문을 단단히 걸어잠갔다. 24일 2차전에는 탬파베이는 트로피카나필드에서 유독 강했던 제임스 실즈를, 필라델피아는 브렛 마이어스를 선발 투수로 예고했다.만약 마이어스가 6,7회까지 잘 막아주면 시리즈 전체의 분위기가 필라델피아로 기울 것이란 전망이다. 탬파베이로선 분명히 한 차례는 더 선발로 나올 해멀스의 벽을 넘어야 하는 난제를 앞에 두고 있다.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빚탈출 희망찾기-김관기 채무상담실] 2004년 폐업전 납품대금 밀렸다고…

    Q개인사업자로 운영하던 유통업을 2004년 12월에 폐업했습니다. 영업 부진으로 같은 해 2월 말 이후로는 납품 받은 것이 없으며, 거래처 결제는 현금으로 다 해주었다고 지금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S신용정보회사에서 채권회수를 위임받았는데 오는 15일까지 갚지 않으면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우편물이 왔습니다. 저는 그동안 주민등록이 불분명한 적이 없었고, 단 한번도 미지급금이 있다는 연락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이정헌(가명·47세)- A일단 과거의 서류철을 잘 챙겨 보시기 바랍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바로 이런 경우에 대비하여 거래에 관한 증빙을 보관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법도 회계장부·기타 중요 서류는 10년, 전표·기타 유사 서류는 5년간 보존할 것을 요구하고 있고, 세법에서도 5년간 전표와 영수증을 보관할 것을 요구합니다. 어디엔가 현금 지급이나 계좌 이체, 중간 정산에 관한 사항이 나와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반복된 거래에 관한 수많은 증빙 속에서 증거를 찾기 어려울 수도 있고, 폐업한 경우 특히 도산으로 인한 때에는 자료분실도 빈번합니다. 채무를 이행했다는 증명을 하기 어렵게 되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과거의 모든 자료를 보존해야 한다면, 법률이 보관기간을 한정한 취지에 반합니다. 소멸시효는 이같은 사회적 낭비를 방지하기 위해 채권을 행사할 수 있는 때로부터 일정 기간이 지나면 채권을 소멸시키는 제도입니다. 일반적으로 민사 채권은 10년이지만, 상사 채권은 전표의 보존기간과 같이 5년입니다. 다만 이자, 사용료,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업인의 보수, 상품대금, 공사대금과 같이 수시로 금액을 정산할 것이 기대되는 채권은 3년이며, 즉시 이행이 보통인 숙박료, 식대, 수업료와 같은 채권은 1년입니다. 어음발행인의 채무는 3년, 어음 배서인의 전자에 대한 책임, 수표발행인의 채무는 6개월입니다. 다만 소멸시효는 채권자의 소송 제기와 압류, 가압류와 같은 행위에 의해 중단될 수 있습니다. 질의하신 바에 의하면 일단 소송 등 법적 절차는 없었으니 중단사유는 없었던 것으로 보이므로 상품대금의 소멸시효 3년이 지나 청구를 거절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소멸시효의 경과 여부는 법원이 직권으로 고려할 사항은 아니고 피고의 항변이 있을 때 판단하게 되므로 나중에 상대방이 소송 등 법적 조치를 취했을 때에는 반드시 응소해야 합니다. 채무자의 승인에 의해서도 중단되는데, 채무자가 돈을 보낸 행위 같은 것도 승인한 것이라고 판단되는 예가 있으므로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고 판단될 때에는 채권을 주장하는 자와 접촉하는 것도 삼가야 합니다.
  • [월스트리트發 국제금융 패닉] BOA·리먼… 명암 엇갈린 두 CEO

    미국발(發) 금융위기 속에 가장 주목받고 있는 인물이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케네스 루이스(61) 최고경영자(CEO)와 딕 풀드(62) 리먼브러더스 회장이다. 메릴린치를 500억달러에 인수한 루이스 회장과 리먼브러더스와 함께 몰락의 길을 가는 풀드 회장의 명암은 당연히 엇갈렸다. CNN머니는 15일(현지시간) 루이스 회장을 두고 ‘모두가 공포를 느낄 때 기회를 찾은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지난 7월에도 미국 최대의 모기지업체 컨트리와이드파이낸셜 인수를 40억달러에 성사시켰다. 앞서 지난 1월 컨트리와이드의 인수에 나설 때는 어려움에 처한 모기지 관련 자산을 인수하면 모기지 사업을 이끄는 기회가 될 것이라며 어려운 상황의 ‘두려움’보다는 ‘기회’를 강조했다.BoA는 미국 국내 예금의 10%를 차지하는 최대의 소매은행이다.1조 9000억달러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고 지점이 6100개, 소매고객만 5900만명에 이른다. 여기에 메릴린치의 고객자산 2조 5000억달러, 금융전문가 2만명이 더해지면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대형 은행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는 메릴린치의 인수를 내년 1분기에 마무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면서, 메릴린치라는 이름과 증권중계 조직은 그대로 두겠다고 말했다. 풀드 회장은 1969년 47세라는 젊은 나이에 CEO에 오른 뒤 15년째 재임한 월스트리트의 최장수 CEO의 한 사람이다. 안정적 투자 전략을 구사하는 것으로 정평이 있다.2001년 IT 분야의 거품이 꺼지고 9·11 테러의 여파로 금융시장이 충격에 휩싸였을 때도 안정된 수익을 올려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풀드 회장은 적극적으로 기업인수에 나서지도 않고, 직원들을 대대적으로 감원하지도 않는 중도적인 경영 스타일이 특징이었다. 일각에서는 이번에도 그의 보수적인 사고가 패착을 불러온 것 아니냐는 분석을 낳고 있다. 분기마다 리먼의 손실규모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상황에서 우량 자산의 매각과 부실부문의 분리 등 과감한 구조조정이 필요했지만, 장부가격 아래로 우량자산을 매각하는 것을 주저하다가 위기를 키웠다는 것이다. 박창규기자 nada@seoul.co.kr
  • [2008 美 대선] 매케인 ‘애국심’으로 오바마 맞서다

    |세인트폴(미네소타주) 김균미특파원|존 매케인 상원이 4일(현지시간) 밤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직을 수락하고 강력한 변화를 앞세운 정권재창출을 다짐했다. 매케인은 이날 미네소타 세인트폴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 마지막날 행사에서 “감사함과 겸손, 신뢰를 갖고 받아들인다.”며 대통령 후보직을 수락했다. 이로써 오는 11월4일 치러지는 제44대 미국 대통령 선거는 72세 백인인 공화당의 매케인 후보와 47세 흑인인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후보간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백대결로 치러지게 됐다. 5년 동안의 전쟁포로 생활을 극복한 ‘베트남전의 영웅’ 매케인은 이날 “포로로 있는 동안 국가와 사랑에 빠졌다.”면서 “나는 조국이 싸워 이길 만한 명분이자 이상이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애국심을 자극했다. 매케인은 나아가 “변화가 오고 있다.”며 많은 돈을 쓰면서도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국가보다 ‘나’를 우선시하는 워싱턴의 낡은 정치문화에 대한 개혁에 나설 것임을 선언했다. 이는 오바마와의 차별화뿐 아니라 조지 부시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노린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에 따라 이번 대선은 ‘변화’의 방향과 구체적인 내용을 놓고 누가 변화를 추진할 적임자인지를 놓고 두 진영의 양보없는 공방이 예상된다. 매케인은 집권할 경우 초당적으로 국가를 운영하겠다는 구상을 밝힌 뒤 “투명성과 책임성에서 새로운 기준을 세울 것”이라고 부시 행정부와의 차별화를 강조했다. kmkim@seoul.co.kr
  • 수심 30cm 욕조로 12m 다이빙 도전한다

    미국 스턴트맨 다렌 테일러(Darren Taylor)가 오는 12일 40피트(약 12m) 높이에서 수심 30cm 욕조로 뛰어내리는 묘기 다이빙을 계획해 관심을 끌고 있다. ‘얕은 물 다이빙’ 전문가인 테일러는 지난 해 10월 33피트(약 10.5m) 높이의 사다리에서 깊이 30cm의 물로 뛰어내리는 다이빙에 성공해 이 부분 세계기록을 세웠다. 이번 도전은 약 1년 만에 자신의 최고 기록을 경신하려는 것. 처음 10m 높이에서 얕은 물 다이빙을 선보이기 시작한 그는 이후 꾸준히 자신의 기록을 경신해 나가고 있다. 올해 47세인 테일러는 스턴트맨으로서 적지 않은 나이지만 50세까지 계속해서 기록을 경신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위험한 도전을 앞둔 테일러는 “나는 많은 자료를 보면서 준비했고 더욱 뛰어난 실력을 갖추게 됐다. 전혀 두렵지 않다.”며 자신감을 나타냈다. 이어 “그러나 이 도전이 쉽다는 뜻은 아니다.”라며 “나는 늘 뛸때마다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누구도 쉽게 따라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했다. 이번 도전은 도전일인 12일 미국 ABC방송을 통해 생중계 될 예정이다. 한편 4살 때 다이빙을 시작한 테일러는 다이빙 강사와 스턴트 다이빙 등 프로 다이버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면서 ‘프로페서 스플래쉬’라는 사이트를 통해 자신의 활동을 알리고 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박성조 기자 voicechord@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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