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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재발 가능성있다”45%/1천5백명 「6·25」인식도 조사

    ◎“학교에서 배웠다”등 64%가 간접 경험/절반이 피난생활… 32%는 “숨어 살았다” 국민의 70%이상이 6·25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로 이루어진 오늘의 한국인들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어떻게 보고 있으며 6·25의 상처가 어떤 형태로 얼마나 크게 남아있을까. 6·25가 발발한지 40주년을 맞아 한국 갤럽조사연구소가 지난 1월20일부터 30일까지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의 18세이상 남녀 1천5백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결과 5개항의 응답자의 53.1%가 피란생활을 경험했으며 전쟁재발가능성이 있다고 대답한 사람도 45.3%나 됐다. 6·25에 대해서는 약간알고 있다가 59.2%,많이알고 있다가 22.9%로 국민의 대부분인 82.1%가 6·25에 대해 잘알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15.2%는 그다지 알고 있지 못하다고 응답한 반면 전혀 알고 있지 못하다고 대답한 사람도 2.3%나 됐다. 6·25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응답한 계층에 남자가 29.3%로 여자의 16.7%보다 높고 나이가 많고 학력이 높을수록 높았다. 50세이상은 45%,40대는 22.8%,30대 17.5%,20대 11.5%가 6·25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응답했다. 6·25에 관한 지식은 학교에서 배웠다는 사람이 33.9%,조부모 또는 부모혹은 그 세대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고있는 사람이 30.9%,자신의 기억을 통해서 알고있는 사람은 28.4%로 간접인지가 64.8%,직접경험은 30%미만인 것으로 밝혀졌다. 20대의 59%,고졸이상 51.9%,대학재학생의 50.7%가 학교교육을 통해 6·25를 배웠으며 조부모와 부모세대 사람들의 중언으로 알게되었다는 응답은 30대 44.2%,40대 40.3%로 나타났으며 50세 이상의 87%는 직접 경험한 것으로 밝혀졌다. 6·25당시의 민족의 비극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있느냐는 질문에 매우 관심있다가 30.7%,약간 관심있다가 47.2%로 77.9%가 관심이 있다고 응답하고 별로 관심이 없다가 18.4%,전혀 관심이 없다가 3.2%로 21.6%는 관심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지역별로는 서울 51.6%,경기 50.4%,강원 52.2%가 6·25에 관심이 많고 경남 39.5%,경북 42.3%,호남 46.3%로 남부지방 사람들이 중부지역보다 관심이 약간 낮은 것으로 밝혀졌다. 6·25때 피란경험(부모경험 포함)을 한 사람은 53.1%로 응답자의 절반이 넘었으며 32·5%가 숨어 살아야 했다고 대답했고 친인척중에 부상자와 사망자가 있다고 대답한 사람은 26.1%나 됐다. 군인으로 복무한 사람이 17.3%,비행기의 폭격이나 함선의 포사격을 당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 16.2%,전쟁포로 경험이 있는 사람도 3.7%나 됐다. 지역별로는 강원 60.3%,경북 60.2%가 피란경험이 있으며 전라 46.7%,경남 39.1%도 살던곳에서 쫓겨 났었다고 응답했다. 6·25와 같은 전쟁의 재발가능성에 대해서는 가능성이 약간 있다가 39.4%,많다가 5.9%로 45.3%이며 가능성이 없다도 42%나 돼 한반도의 전쟁재발 가능성에 대해서는 견해가 엇비슷한 것으로 나타났다. 학생의 36.8%는 전쟁재발 가능성이 약간 있다고 응답하고 55.9%는 가능성이 없다고 대답했다.
  • 「한국전 기원과 성격」… 「6ㆍ25」 40돌 국제학술회의

    ◎스탈린,49년 3월 김일성 만나 “남침”확정 한국전쟁연구회(회장 김철범)가 주최하고 통일원이 후원한 한국전쟁 40주년기념 국제학술회의가 14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렸다. 「한국전쟁과 한반도의 평화 정착」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회의에서는 한국전쟁의 기원과 미소가 한국전쟁에 미친 영향 등이 집중 토의됐다. 이중에서 한국전쟁은 미소의 갈등으로 빚어진 특수한 내전이면서도 국제전의 양상을 띠었다고 주장하는 존 메릴 미국무성연구관의 논문 「한국전쟁의 기원 대답없는 질문」과 소련이 서유럽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북한을 사주 한국전쟁을 도발했다는 윌리엄 스투웨크 미조지아대교수의 논문 「소련과 한국전쟁의 기원」을 소개한다. ◎6ㆍ25의 기원/윌리엄 스투웨크 미 조지아대교수/크렘린,미ㆍ서구 밀착 저지 겨냥/극동에 긴장 조성… 미 경제난 유도 속셈도 한국전쟁은 주모자인 북한과 주요 군사물자 제공자이자 군사고문단 및 병력의 결정적인 공급자였던 소련,그리고 중국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일어났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정보다. 그러나 하필 이 시기에 소련이 이같은 모험을 추진할 것을 결정했느냐의 의문이 남는다. 당시 소련은 팽팽한 긴장속에 미국의 핵무기와 잠재된 기동력에 눌려 극도로 취약한 상황에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은 49년 가을 마샬플랜의 시행,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결성,서독정부의 출범,미의회의 대서유럽군사원조결의 등 일련의 사태로 미루어 볼때 미국의 관심이 서유럽에 집중됐다고 판단,미국과 서유럽 동맹국들의 단결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 국내외 문제의 최종결정권자였던 스탈린은 대외정책에 관한한 공개토론을 허용했다. 49년에서 50년에 걸쳐 프라우다지는 몰로토프,스슬로프와 같은 온건관료층의 견해를 주로 반영했고 이즈베스티야지는 말렌코프,베리야와 같은 강경군국주의자들을 지지했다. 강경파들은 미국경제가 점차 퇴조하고 있으므로 소련이 서유럽에 압력을 가중한다면 미국은 곧 해외원조를 포기하고 서유럽에서 물러날 것으로 믿었다. 반면 온건파들은 서유럽에서의 미국의 영향력 강화와 경제적으로 유리한 여건을 강조,소련의 압력이 오히려 서방국가를 결속시켰으므로 긴장상태를 완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온건파의 주장을 받아들여 서유럽에서는 평화정책을 쓰는 대신 극동지역으로 관심을 돌려 팽팽한 긴장상태를 유지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이같은 결정의 배경에는 국제긴장상태 조성을 통해 ▲국내에서 권력을 유지하고 ▲소련주변 위성국들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며 ▲유럽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분산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스탈린은 소련의 정책전환에 따라 미국이 아시아 문제에 휘말리게 되면 미국의 경제적 위기가 촉진되고 상대적으로 중국이 소련에 의존하게 되리라는 계산도 했음직하다. 이에 따라 스탈린은 가장 위험성이 높은 북한의 남침 등 여러조치들을 아시아 지역에서 잇따라 시행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남한으로부터 미국이 멀어져 가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같은 모험을 할 수 있었다. 49년 한햇동안 미국은 남한주둔 미군을 모두 철수시켰으며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50년 1월12일 연설을 통해 미국의 태평양 방위체계에서 남한을 제외시켰음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어 1월 중순에는 미하원에서 남한에 대한 경제원조안이 거부됐다. 스탈린은 이같은 상황이라면 남한이 위기에 처하더라도 미국동맹국들의 집단적인 개입은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스탈린과 김일성은 49년 3월 김의 모스크바 방문시 북한의 침공을 논의했을 것이다. 스탈린은 마지막 남아 있던 미군이 철수하게 되니 침공계획을 세우라고 격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북한 김일성과 군사원조 합의안에는 서명했지만 상호안전보장 조약의 체결은 피했다. ◎6ㆍ25의 성격/존 메릴 미 국무성연구관/초강국갈등서 비롯된 「특수내전」/이해 엇갈린 미ㆍ소ㆍ중의 대리전 양상도 지녀 김일성이 살아있는 한 북한은 결코 그들이 전쟁을 시작했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폐쇄체제의 영웅적인 자화상을 훼손하고 평양 당국으로 하여금 1백50만명에 달하는 한국인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을 일으켰다는 죄를 스스로 인정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일성에 대한 영웅적인자화상은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 지속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 수년동안 평양에서 열리는 반미투쟁월의 경축행사를 계속 지켜보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누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는가에 관해 북한사람들이 형식주의에 의존한다는 것은 그들이 전쟁을 시작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자신의 입장을 아주 자신있게 변호하지도 않는다. 평양 당국은 전쟁초기의 며칠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상세한 설명을 결코 출판물을 통해서 밝히지 않고 있다. 또 한국전쟁에 관한 학술토의에 참가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인민공화국에서 발간한 한국전쟁사를 유심히 살펴본 비판적인 독자라면 북한이 먼저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을 인정하는 모호한 표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도 평양을 격하하거나 40년전의 엄청난 사건에 대해 그들을 비난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 사람들은 이러한 역사적인 짐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특히 그들이 남한과의 신뢰를 구축하고 통일이라는 공동목표를 공유하려면 이러한 태도는 더욱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알 수 있듯이 남한도 나름대로의 짐을 지고 있다는 얘기다. 바로 이 대목에서 시작한 문제,즉 한국전쟁은 침략인가 아니면 민족해방전쟁인가에 대한 해답은 두가지 모두 해당된다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다. 북한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 「조전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강제적으로 가로놓여진 경계선이 존재하고 있는 동안 1950년에 국토의 분단을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발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그것을 영구적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도 드물었을 것이다. 수단과 기회가 주어졌더라면 이승만대통령도 김일성이 남한으로 쳐 들어왔던 것처럼 북진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전쟁이 국제전인가 아니면 내전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여기에서도 해답은 양자가 모두 해당된다는 것이다. 한국의 분단은 일본으로 부터의 해방과 마찬가지로 미국과 소련에서 비롯된 것이다. 초강대국의 불간섭과 그에 따른 한국에서의 경쟁적인 양체제의창출은 한국내의 좌익과 우익간 투쟁의 국내적인 측면을 강화했다. 이제 소련이 미묘하게 표명하고 있듯이 한국전쟁은 그 이후 미국과 중국의 개입(현재 우리가 조심스럽게 표명되고 있는 것을 듣고 있듯이 소련의 개입도 있었다)에 따라 국제화의 성격도 띤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은 냉전의 종식과 함께 두개의 한국이 상호 경쟁하는 국내적 성격이 다시 중요성을 더하고 있다.
  • 중국학자가 밝힌 「중국의 6ㆍ25참전 배경」

    ◎김일성,남침2개월전 북경에 통보/모택동,유엔군 38선 넘자 심한 불안감/중국,미 무력위협 견제위해 참전 선언/소의 공군ㆍ물자지원 조건으로 병력 파견 6ㆍ25발발 40주년을 앞두고 한국전쟁에 대한 재평가작업이 국내외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전쟁을 중국의 시각에서 조명한 논문이 중국학자에 의해 발표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국전쟁연구회(회장 김철범)주최로 14일부터 이틀간 서울힐튼호텔에서 열리는 한국전쟁40주년기념 국제학술회의에서 중국국제전략연구소의 적지해연구원이 발표할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결정에 대한 재고찰」이란 제목의 논문은 중국의 한국전 참전배경을 새 시각에서 조명하고 있다. 중국의 한국전 참전은 국민당정부를 후원하는 미국으로부터의 무력개입위협을 견제하기 위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중국공산당은 1950년6월20일 5천1백만명에 달하는 인민해방군을 주은래 책임아래 1천4백만명을 감축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에 앞서 김일성은 50년4월 모스크바에서 평양으로 귀환도중 밀사를북경에 파견,모택동에게 군사적인 수단으로 조국을 통일키로 했다는 사실을 통보했으나 군사계획과 그밖의 상세한 내용을 알려주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지도자들은 처음부터 한국전에 개입할 의도는 없었고 김일성의 요청에 따라 인민해방군에 속한 한국계 중국군을 보내는 것만으로 평양을 돕고자 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트루먼이 6월27일 중국본토와 대만사이에 제7함대를 배치하자 미국이 국민당을 구하기 위해 중국내전에 다시 참가하기로 결정할 것으로 믿었다. 이에 따라 7월10일 「미국의 대만 및 한국침략에 대한 중국인민위원회」가 북경에 설치됐고 모택동은 등후아장군으로부터 급속한 남진,보급선 확대,후방의 공백상태등 한국전의 상황을 보고받고 김일성에게 「남진속도를 늦추고 확실한 방어망을 구축하라」는 충고를 했다. 9월초 북동부지역 사령관인 가오강은 한국전 상황을 분석한 보고서에서 북한이 통일할 기회는 이미 지나갔으며 김일성의 군사행동은 처참하게 실패하리라고 확신했다. 이에 모택동은 9월9일 동부군사지구 제10군에게 철도에근접하게 병력을 배치,압록강에 대한 병력보강에 대비할 것을 지시했다. 10월2일 주은래는 당시 인도대사인 파니카를 통해 만약 미군이 북한을 점령한다면 중국은 전쟁에 개입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한뒤 영국외상 포리스트 버빈은 네루를 통해 유엔군이 만약 38도선을 넘어야 할 경우에는 압록강 40마일 앞에서 멈추겠다고 중국지도자들에게 통보했다. 미국은 인도를 통해 전달한 자신의 약속을 두차례나 어겼으므로 중국지도자들은 미국의 맹서는 사기술이라고 믿게됐다. 1천㎞에 이르는 압록강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병력이 필요하겠는가. 더구나 언제 적이 침입해 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중국은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었다. 50년 10월1일 김일성은 불리한 전황을 알리면서 인민의용군의 즉각 투입을 요청하는 전문을 모택동에게 보내왔다. 그러나 북동부지역 사령관 가오강과 임표는 이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들은 중국경제력의 열세와 군사력의 열세,후방의 취약성 등을 그 이유로 들었다. 그러나 이어 열린 정치국특별확대회의에서 ▲한국은 미국의 세계전략의 취약한 고리이며 ▲전면적인 핵전은 불가능하며 ▲한반도지형은 미군의 기계화부대와 화력운용에 불리하다는 결론에 따라 장기적으로 어느 정도 희생을 치르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게 됐다. 만약 중국이 전쟁을 회피한다는 것은 국민당에 대한 해방전쟁이 몇년 더 지체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10월2일 정치국 특별회의에서 모택동은 소련이 공중지원과 전쟁물자를 원조한다는 조건으로 병력파견을 승인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후 전황이 김일성에게 크게 불리해지자 스탈린은 딜레마에 빠지게 됐으며 이러한 딜레마의 탈출구로서 지상은 중국군이,공중은 소련공군이 기꺼이 맡기로 합의했다. 결국 10월13일 모택동은 김일성이 중국으로 후퇴하기 전에 한반도에 군대를 보내는 것이 낫다고 판단,압록강을 건너 진격키로 결정했다. 소련은 합의대로 50년말 공군 2개사단(2백대전투기)을 파견,압록강철교와 1백㎞에 이르는 의용군 보급로를 엄호했으며 중국군복을 착용한 이들 소련군조종사는 생포되더라도중국계러시아 소수민족이라고 속였다. 한국전에 투입된 2백30여만명의 중국인민의용군은 당시 중국이 보유하고 있던 전야전군의 66%,전포병사단의 60%,전기갑사단의 1백%에 해당하는 수준이었다. 모택동이 중국과 미국의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았거나 모택동이 본토를 석권했을 당시 트루먼이 보다 유연한 자세를 보였다면 스탈린은 당시 상황으로 봐서 모택동의 결정을 제지했는지도 모른다. 한국전에서 이데올로기는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지난 30년동안 서구의 역사가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중국공산당과 트루먼행정부가 서로를 좀 더 잘 이해했더라면 중국의 참전이라는 비극은 분명히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 “통화관리에 최선”김 한은총재

    김건 한은총재는 우리경제가 해결해야할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물가를 안정시키는 일이며 이를 위해 통화총량을 적정수준에서 관리하는데 총력을 기울여 나가겠다고 밝혔다. 김총재는 이날 한은창립40주년 기념식에서 이같이 밝히고 『총통화증가율을 목표이내로 억제하기 위해선 민간신용의 적정한 공급과 재정면에서의 적극적인 협조가 따라야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총재는 『최근 정부의 강력한 부동산투기대책에 힘입어 부동산투기가 어느정도 진정돼 가고 있으나 인플레심리가 가시지 않은데다 소비가 지나치게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원화절하효과도 가세되고 있어 물가안정을 위한 비상한 노력이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하반기에는 정책자금 등 통화증가요인이 내재해있고 통화환수수단도 상당한 제약이 따를 것으로 보여 통화관리여건이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보고 불요불급한 소비성대출이나 비생산적인 부문에 대한 대출을 억제,자금배분의 효율을 높여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동서고금의 화폐 한눈에/한은40돌 맞아 화폐전시실 개관

    ◎8천만짜리 금화등 3,992점 전시 사적 2백80호로 지정된 한은 본관건물에 화폐전시실이 들어섰다. 한은이 창립4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12일 개관한 화폐전시실은 동서고금의 화폐와 우리나라 화폐사를 한눈에 보여주고 있다. 본관2층에 마련된 1백30평 크기의 화폐전시실에는 국내외 고화폐,견본형태의 엽전인 별전 기념주화 외국화폐 등 총 34만여점의 한은소장품 가운데 3천9백92점이 2개의 전시실에 나뉘어 전시되고 있다. 제1화폐전시실은 우리나라 화폐의 생성과 변천과정을 고대 고려 조선 근대 조선은행 한국은행순으로 구분하고 고려시대때 중국 당나라의 건원중보를 모방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화폐인 건원중보 배 「동국」전,해방전후의 조선은행권,현재 사용중인 한국은행권과 기념주화 등을 선보이고 있다. 이 가운데 은제화폐로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알려진 고려시대의 소은병,조선말기인 1901년 전환국에서 주조한 순금화(5원짜리)등도 전시돼 있다. 5원짜리 금화의 현재 시가는 8천만원 가량이며 함께 주조된 10원 20원짜리와함께 시중에서 1세트에 1억8천여만원에 거래되고 있다고. 제2화폐전시실에는 외국의 화폐를 색상 형태 소재 크기 디자인 등 특징별로 분류하고 있으며 외국의 금은화 기념화폐 고화폐 별전 현용화폐 등을 망라하고 있다. 이 전시실은 관람자의 시각적 이해를 돕기위해 현대박물관의 전시기법을 살려 그림ㆍ사진ㆍ도표ㆍ디오라마(인물모형을 이용한 상황재현) 등의 설명자료를 함께 전시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화폐전시실과 함께 본관2층에 문을 연 한은사료실에는 한은보유 사료9백여점중 2백19점을 65평의 공간에 전시하고 있다. 사료실 전시품 가운데는 지난 62년까지 지폐에 사용된 한은총재직인과 「9ㆍ28수복」후 제작돼 휴전으로 사용하지 못하게 된 한은 평양ㆍ함흥ㆍ원산ㆍ해주 지점장 직인이 진열돼 눈길을 끌고 있다. 1950년 6월5일에 열린 제1차 금융통화위원회의 회의록,일본에서 압수한 1907년 제일은행 한국총지점건물(현 한은본관) 설계도원본 등 한은의 발자취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 사료들이 시대별 기능별로 나뉘어 전시되고 있다. 한은은앞으로 화폐전시실과 사료전시실을 개인관람자에게는 개방하지 않고 사전예약된 단체관람자에게 한해 공개할 방침이다.
  • “인재의 산실”… 고도성장에 기여/“불혹” 맞은 한은

    ◎통화가치 안정ㆍ중립성확보가 과제 한국은행이 12일로 창립 40주년을 맞았다. 지난 50년 중앙은행으로 태동한지 40성상이 흘러 불혹의 나이로 접어 들었다. 창립당시만해도 조선은행법등 일제시대의 금융법령이 잔존,그대로 통용되고 있던데다 미군정과 신정부에 의해 발효된 행정명령과 통첩까지 혼재돼 금융질서가 극도로 문란했던 상황이어서 자주적 금융체계를 확립하기 위한 중앙은행의 설립이 절실히 요청되던 때였다. 당시 구용서 초대한은총재가 한은창업사에서 『한국은행은 그 기본구상이 경제적 민주주의와 국민경제의 균형적 발전을 지향하는 헌법의 기본정신을 창달하는데 있다. 한은은 국가의 기관이면서도 어떠한 정치적 압력으로부터도 초연할 수 있는 참된 국민의 기관으로 경제안정에 획기적 공헌을 하게 될 것』이라고 천명한 것은 한은의 창립정신을 잘 말해주고 있다. 40년이 지난 지금 한은은 이같은 초기창업정신에 얼마만큼 부응하고 있는가. 한은이 통화가치의 안정이라는 대명제를 위해 그동안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여온 점은 일단부인키 어려운 사실로 평가될만하다. 창립 10여일만에 6ㆍ25동란을 맞아 전시인플레수습에 나서야 했고 전후에는 경제재건을 위한 자금의 효율적 지원에 힘썼다. 60년대들어 정부가 경제개발정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면서 경제정책의 최우선순위가 성장과 고용확대에 두어짐에 따라 성장에 필요한 자금동원과 배분의 효율화에 금융정책의 역점을 두었다. 70년대에는 석유파동이후 내외경제여건의 급격한 변동에 대처하기위한 선별금융지원과 더불어 수출산업과 중화학공업등 성장주도부문에 자금이 공급될 수 있도록 수출지원금융등 각종 정책금융을 도입ㆍ운용함으로써 연평균 8%를 상회하는 고도성장을 달성하는데 견인차역할을 하기도 했다. 80년대 들어서도 고도성장과정에서 누적된 부작용을 극복하고 시장기능을 존중하는 민간주도의 경제운용으로 정책기조가 바뀌면서 한은의 정책은 이에 부응,물가안정에 최우선의 목표를 두고 통화안정등 경제안정화시책에 노력해 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앙은행으로서 정치적 중립내지는 독립성확보문제가 불혹의 나이를 맞는 오늘에도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그것은 중앙은행으로서의 한은이 내외의 간섭과 압력없이 통화신용정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에 현실적으로 많은 제약이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멀리 거슬러 갈것 없이 지난해 12ㆍ12증시부양조치때 발권주체인 한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무려 2조8천억원의 돈이 증시에 지원됨으로써 올들어서도 두고두고 통화정책에 부담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좋은 예이다. 한은의 독자성과 중립성문제는 지난해 국회에서도 활발한 논의가 있었지만 결실을 맺지 못한 채 기약없이 개정이 유보되고 말았다. 중앙은행으로서 한은은 그 초기 입법정신과 다르게 지난 62년 군사정권하에서 결정적으로 권한이 축소되고 기능이 약화됐다. 62년 5월24일 한은법 1차개정에서 금융통화위원회가 금융통화운영위원회로 개칭되고 기능도 통화신용 및 외환정책의 수립에서 통화신용의 운영관리에 대한 정책수립으로 권한이 대폭 축소되고 금통운위의 결정사항에 대한 재무부장관의 재의요구권이 신설되는등 금융정책에 대한 최종결정권이정부로 귀속됐다. 이후 82년12월까지 4차례개정이 더 있었지만 골격은 그대로 존속돼 왔다. 한은은 그러나 중앙은행으로서의 역할 뿐아니라 인재의 산실로도 국가경제에 이바지 했다. 그동안 한은을 거쳐간 사람은 4천여명으로 배출인재 가운데 금융계ㆍ경제계ㆍ관계ㆍ정계에까지 진출한 인사가 많았다. 6대 총재를 지낸 유창순씨,12대 신병현씨,13대 김준성씨가 부총리를 역임했고 15대 최창락씨는 동자부장관을 지냈다. 장기영씨가 50년대 부총재를 거쳤고 정춘택은행연합회장,정인용 전재무부장관이 은행감독원장 출신이다. 이밖에 김재윤 신한은행장,송병순 광주은행장ㆍ황창기 외환은행장ㆍ전영수 주택은행장ㆍ이상근 한미은행장 등이 한은출신이다. 나웅배 전부총리ㆍ이경식 전대우자동차사장(현 금통운위원)ㆍ이만기 한양증권사장 등은 57년 공채1기로 입행동기이다. 그간 한은총재로는 초대 구용서,2대 김유택,3대 김진형,4대 배의환,5대 전예용,6대 유창순,7대 민병도,8대 이정환,9대 김세련,10대 서진수,11대 김성환,12대 신병현,13대 김준성,14대 하영기,15대 최창락, 16대 박성상씨 등이 거쳐갔고 17대 김건 총재가 임기 4년중 2년을 맞고 있다. 창립 당시 4부6국1실,7개 국내지점 및 1개 해외지점에서 현재 17부3실11국에 국내지점과 사무소 27개,해외사무소 8개로 기구가 확대됐고 임원 6명,직원 1천1백22명에서 임원 13명,직원 4천84명으로 늘어났다. 조직이 커지고 하는 일도 많아졌지만 중앙은행의 본업이랄 수 있는 통화신용정책의 결정권한은 오히려 축소되는 역설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 한은의 오늘이다.
  • 충용회원 1천여명/6ㆍ25 40주년 기념식

    6ㆍ25당시 육군괴 해병의 초급장교 양성기관이었던 육군종합학교출신 예비역장교들의 모임인 충용회(회장 윤기태ㆍ62)회원 1천여명은 6ㆍ25 40주년을 맞아 9일 상오11시 태릉 육군사관학교에서 기념행사를 가졌다.
  • 「김일성 독전 명령서」등 첫 공개/공보처

    ◎「6ㆍ25」 40돌 맞아 「한국전쟁」 펴내/수송ㆍ전투계획등 남침준비 한눈에/미공개 미국 무성자료 8점도 수록 공보처가 6ㆍ25 40주년을 맞아 6ㆍ25의 민족사적ㆍ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9일 펴낸 「실증자료로 본 한국전쟁」에 실린 자료중에 북한의 남침준비ㆍ전투훈련ㆍ수송계획ㆍ독전명령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미공개자료가 8점이 포함돼 있어 관심을 끌고있다. 북한의 남침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발간된 이 책자의 자료들은 그동안 전사편찬위원회ㆍ미국무성 및 미의회도서관ㆍ조지 타운대도서관에서 소장해 오던 것이다. 이 책자에 실린 미공개자료를 연대별로 살펴본다. ①46년 7월1일부터 3일까지 개최된 「북한보위국(내무성)회의록」. 이 회의록 목록 6번째에는 소련군 「주구루잔 대좌의 지시」가 포함돼 있는데 당시 북한이 소련의 지휘아래 있음을 밝혀주는 것으로 볼수 있다. ②북한군이 작성한 「1950년 하기전투 정치훈련계획표」. 부대장 안일성과 부부대장 조인석 명의로 된 이 계획표는 6ㆍ25남침을 준비하기 위한 훈련임을 보여주고있다. ③「371군부대 참모부명령」 50년 6월8일 철원에서 제00118호로 대대전술훈련실시에 관해 하달된 명령서에는 「포병부상동지의 지시에 의하여 50년도 하기전 훈련계획을 일부 개정하게 됨에 따라 새로운 대대계획표를 하달하면서 이를 원만히 진행하기 위하여 아래와 같이 명령한다(중략). 군관 및 하사관 훈련은 이미 하달된 계획표대로 실시할 것」이라고 적혀있다. ④⑤「철도수송에 대한 명령서와 열차적재계획」 특히 50년 6월15일 남포에서 작성된 제466군부대 철도수송에 관한 명령의 전문에는 「현하조국이 조성된 정치정세하에서 우리 부대는 금번 보위성에 실시하는 하기 대연습에 참가하기 위하여…(이하 생략)」라고 쓰여있어 북한군이 치밀한 수송계획을 세워 병력과 보급품을 운송했음을 알 수 있다. ⑥북한보위성 전투훈련국이 50년 8월5일 작성한 「단기정치훈련계획」. 11번째 줄에 「우리조국을 통일시킬 시기는 왔으며 승리는 반드시 우리 인민들 편에 있을 것이다」고 명시돼 있다. ⑦⑧북한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이 후퇴하는 인민군에게 전열재정비를 지시한 「독전명령서」와 북한인민군 총정치국장 박헌영이 김일성의 독전명령서 집행을 위해 하달한 지령서. 김일성의 「명령서」(50년 10월14일작성) 서두에는 「지난 6월에 미제국주의자들의 지시에 의하여 우리 조직에 동족상쟁의 내란을 도발시킨 이승만 괴뢰군의 불의의 공격을 받고…」 운운해 6ㆍ25남침을 북침으로 호도하고 있다. 이 책자에는 이밖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선전성명서(41년 12월10일) ▲태극기가 걸려있는 48년 5월1일의 북한노동절행사 ▲인민군 총사령부가 50년 6월18일 각사간에 하달한 러시아어 정찰명령1호 ▲우리 6사단의 방어계획 ▲6ㆍ25당시 우리 주민진술서 등 6ㆍ25전후의 희귀한 자료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 공보처는 이 책자가 정치학적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보고 시판도 계획하고 있다.
  • 「당위」와 「호도」와… 현해탄에 “사죄파고”/서울의 시각

    ◎“주체분명히… 일왕이 직접 솔직하게/과거청산 없인 진정한 동반자관계 기대난” 오는 24일로 예정된 노태우대통령의 일본방문을 앞두고 한일 양국이 불행했던 과거사에 대한 사과문제로 인해 또 한차례 홍역을 치르고 있다. 노대통령의 방일시 아키히토(명인)일왕의 과거사에 대한 사과수준을 놓고 양국정부가 현격한 입장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방일까지 불과 열흘도 남지않은 시점에서 이 문제가 원만하게 처리되지 못할 경우 양국간에는 자칫 불편한 관계마저도 초래될 우려가 증폭되고 있는 실정이다. 당초 노대통령이 미국 캐나다 멕시코 등 3개국 순방을 연기하면서도 일본방문만은 예정대로 실현시키겠다고 한 것은 다름 아닌 「다가오는 21세기를 맞아 아태시대를 함께 이끌어갈 한일 양국의 미래지향적인 협력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불행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이제는 첨단과학기술,산업기술협력,통상 등 보다 경제적 실익이 있는 분야로 양국협력의 초점이 모아져야 한다는 정부방침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해방된지 45년이지났건만 과거에 대한 협상은 아직 완전하게 처리되지 않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지난달 30일 한일외무장관회담을 통해 재일한국인차별의 상징이면서 역시 과거청산문제의 일환인 지문날인제,외국인등록증 상시휴대의무 등 이른바 4대악 제도의 개선에 양국간합의를 이끌어낼 때만해도 일왕의 명백한 사과표명문제는 그다지 표면화되지 않은 다분히 「잠복성 이슈」였다. 이 문제는 노대통령이 지난 14일 청와대에서 가진 주한일본특파원들과의 회견에서 『일본이 한일 양국간의 과거사에 대해 사과의 주체임을 명확히 해야하며 사과발언도 아키히토일왕에 의해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양국간 최대현안으로 떠올랐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각 일본에서는 집권 자민당의 4역(간사장ㆍ정조회장ㆍ총무회장 참의원의원회장)이 회동,『한국에 대한 유감표명은 84년 고 히로히토(유인)일왕이 전두환 전대통령에게 했던 수준 이상을 벗어날 수 없고 특히 이번에는 일왕 대신 가이후(해부)총리가 해야만 한다』고 결론짓고 이같은 의견을 일행정부에 전달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양국간의 국민감정까지 겹쳐 사태는 점차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게 현재의 상황이다. 일왕의 사과수준에 대한 양국간의 입장차이는 너무나도 분명하다. 우리측은 이번 방일에서 불행했던 과거에 대해 보다 분명하고 구체적인 사과표명이 반드시 있어야 하며 일본의 상징인 아키히토 일왕이 직접 한국민을 상대로 이를 밝혀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즉 84년 당시 일왕이 밝힌 『금세기의 한시기에 있어서 양국민의 불행한 과거가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유감이며 다시 되풀이 되어서느 안된다고 생각한다』는 표현은 사과가 아닌 유감인데다 과거사에 대해 사과하는 측의 주체가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일본이 명백한 사과와 함께 사과의 주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외무부의 고위당국자는 이와관련,일본이 지난 72년 대중국국교 정상화때 발표한 양국 공동성명에서 『일본은 전쟁을 통해 과거 중국인민들에게 끼친 큰 손실에 대해 깊이 책임을 느끼고 깊이 자책한다』고 밝혔다시피 이번에도 일측으로부터 이정도 수준의 사과는 받아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를테면 깊은 자책은 분명한 사과의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84년 당시의 「유감표명」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설명이다. 정부는 또 사과표명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이번 기회에 일왕의 사과는 물론 가이후총리의 직접적인 사과표명,그리고 일본의회의 불행한 과거사에 대한 사과결의까지 얻어낸다는 강도높은 전략을 짜놓고 외교력을 총동원하고 있다. 정부는 이를 위해 이원경 주일대사와 방일에 따른 최종실무협의차 도일한 김정기외무부아주국장에게 이같은 지침을 시달,일정부측에 전달하도록 해 『과거청산및 미래지향적 동반자관계 구축을 위해서는 일왕의 구체적인 사과가 있어야 할 것』임을 강력 촉구할 방침이다. 만약 이번에도 일측으로부터 만족할 만한 사과표명을 얻어내지 못할 경우 내년초로 예상되는 일왕의 방한을 심각하게 재검토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그만큼 노대통령은 이번 방일로 인해 엄청난 정치적 부담을 안고있으며 방일성과에 대한 국내 평가와 관련,자칫 잘못되면 「통치력의 위기국면」까지 초래될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때문에 정부 일각에서는 지난번 노대통령의 3개국 순방연기 발표때 일본도 연기했어야만 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우리측의 이러한 강경한 방침에 비해 일측은 『천황은 「국민의 상징」이며 헌법상으로도 「국정에 관한 권능을 갖지 않는」 존재일 뿐이므로 그의 발언에는 한계가 있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나아가 가이후총리가 「국민의대표」인 만큼 그가 직접 나서 유감표명을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외무부의 한 당국자는 이에 대해 『엄청난 경제력 상승에 힘입어 일본도 이제는 타국에 의해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자존심 외교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정부는 양국간의 이같은 입장차이에도 불구,방일을 전면 취소하는 최악의 카드를 쓰지 않고 방일직전까지 절충을 계속해 나갈 방침이다.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양국간 협상이 어떻게 결말지어질지는 모르지만 이번에도 일측이 과거청산과 관련,애매모호한 표현으로 어물쩡 넘기려 한다면 한일 양국간의 불신의 골은 더욱 깊어질 것이고 양국민간의 앙금은 더이상 치유되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결국 이 문제는 해결의 열쇠가 일측에 있기 때문에 전후처리과정에서 유태인 및 이스라엘정부에 대한 완벽한 보상을 한 서독과 같이 일측이 대승적 차원에서 능동적으로 나설 때만 말 그대로 「양국간의 밝은 미래」로 나아갈 것으로 보여진다. ◎동경의 입장/자민당선 84년 유인발언 수준 고수 압력/죄과 반성않고 경협구실,우회 속셈 오는 24일부터의 노태우대통령 일본공식방문을 불과 1주일 남짓 앞두고 한일 양국간에는 일왕의 「사죄의 말」을 둘러싸고 새로운 냉기류가 흐르고 있다. 핵심은 반성의 표현을 어떻게 할 것이냐의 문제이다. 군국주의 일본에 강점당해 36년간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한국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다 진지하고 명확한 사죄를 요구하고 있는 반면 대동아전쟁을 일으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제국을 전쟁의 참화속에 몰아 넣었던 일본은 과거의 죄과를 반성하기는 커녕 여러가지 이유를 둘러대며 사죄를 거부한다. 강한자 앞에서는 비굴하며 약해 보이는 존재 앞에서는 무차별 짓밟으려 드는 일본인 특유의 교활한 근성을 단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외교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민족적 자존에 직결되는 감정의 문제로 치달을 가능성마저 안고 있다. 한국측의 요구는 물질적 보상에 있지 않다. 『잘못했다』라는 한마디 사과의 말을 정신적 위자로 바라고 있는 것이다. 노태우대통령도 14일 상오 청와대 정원에서 열린 일본특파원들과의 회견에서 이같은 뜻을 밝혔다. 노대통령은 임진왜란과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예로들며 지난 84년 전두환 전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때 쇼와(조화)일왕이 표명한 「유감의 뜻」은 『사죄인가 아닌가가 확실하지 않은 표현』이라고 말하고 아키히토(명인)일왕이 말할 내용은 쇼와일왕보다 더욱 진전된 사죄표현이 되도록 기대한다는 뜻을 표명했다. 노대통령은 특히 『짧은 기간이었지만 불행한 역사가 있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 대해 「잘못되었습니다.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사죄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강한 쪽이 넓은 마음을 보여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도 「괜찮습니다. 이제부터는 잘해 나갑시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말하고 한국국민이 과거 역사에 대한 일본측의 사죄를 희망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같은 한국측의 기대와는 달리 일본측은 짜증과 불쾌감까지 나타내며 인색한 반응을 보인다. 자민당의 한 수뇌는 14일 밤 이문제에 관해 『더 깊은 내용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며 애당초 우리들이 이런 문제를 논의하는 것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다』며 비판적인 견해를 나타냈다. 이 수뇌는 식민지 지배와 더불어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에 의한 임진왜란까지 예를 들며 『히데요시까지 끌어내는 것은 (일본측이)땅에 꿇어 앉아 빌어도 부족하다는 말인가』라는 망언에 가까운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이날 상오 오자와이치로(소택일랑) 간사장을 비롯한 자민당4역은 모임을 갖고 아키히토 일왕이 말할 내용에 관해 『쇼와일왕이 말한 내용보다 더 진전되어서는 안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이를 정부측에 전달했다. 일본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은 「과거의 역사」에 관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반성의 빛을 보인다. 그러나 그 반성은 솔직ㆍ명확한 것이 아니라 『반성하고 있기 때문에(경제적인)협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자민당수뇌의 표현대로 오만한 자세의 그것이다. 올바른 역사인식하의 반성이라고는 볼 수 없다. 일본의 「천황」과 총리는 침략행위를 저질렀던 국가에 대해,원수나 수뇌가 방일하거나 자신의 상대국을 방문했을때 「과거의 역사」를 반성한다는 말을 해왔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나 「유감의 뜻」 표명에 머물고 있다. 이것은 같은 침략국이었던 서독의 바이츠제커 대통령이 몇번이나 반복했던 명확한 「사죄」와는 다르다. 85년 5월 바이츠제커 대통령은 독일패전 40주년을 기념하는 연방의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전쟁과 폭력지배 아래서 억울하게 숨진 많은 사람들을 애도합니다. 독일의 강제수용소에서 목숨을 앗긴 6백만 유태인,전쟁에 시달렸던 모든 민족,그중에서도 소련ㆍ폴란드의 무수한 사자,레지스탕스의 희생자를 생각하며 삼가 경의를 표합니다』 일본의 경우는 달랐다. 지난 68년 3월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방일했을때 쇼와일왕은 『귀국과 일본은 함께 아시아의 일원으로서,또 예부터 깊은 관계를 가진 사이로서 우호적인 접촉을 계속해 왔습니다. 지난번의 대단히 불행한 전쟁후에도 이 전통적인 관계는 급속히 회복되었습니다』라며 얼버무렸다. 74년 포드미 대통령의 방일때에도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상접하는 양국은 2세기에 걸치는 연대를 통해 여러가지 기복은 있었으나…』라고 전제하고 『한때 참으로 불행한 시대를 가졌던 것은 유감이었습니다』라는 것이 고작이었다. 또 78년 10월 등소평 중국부총리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에도 『양국의 오랜 역사 사이에는 한때 불행한 일도 있었습니다만 과거의 것으로 끝나고…』라고 말했다. 일본의 가장 큰 피해국이었던 한국에 대해서도 애매모호한 말로 사죄아닌 사죄를 대신했다. 84년 전두환 전대통령을 맞은 쇼와일왕은 『금세기의 한 시기에 있어 양국사이에 불행한 과거가 존재했었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이며 다시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라는 것이 전부였다. 일본측이 자신의 죄과에 대한 사죄에 인색하고 있는 것은 이제 세계 초일류의 경제대국이 되었다는 자만때문이라고 외교가에서는 보고 있다. 헌법상 규정의 「상징 천황」 여부를 떠나 일본국민의 정신적 구심체 역할을 맡고 있는 「천황」은 「천황의 이름으로」 저지른 전쟁책임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반성의 빛을 보여야만 한다는 것이 도쿄 외교가의 시각이다.
  • “한국전 참전기념비 세우자” 미서 1천만불 모금운동

    ◎부시도 참여… 5백50만불 이미 모아/링컨기념관부근에 93년까지 완공 【워싱턴=김호준특파원】 미국의 한국전 참전기념비 건립을 위한 모금 만찬이 1일 저녁(미국시간)워싱턴의 옴니 쇼람호텔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및 상ㆍ하의원 40여명을 비롯한 미 정ㆍ재계 고위인사 1천여명과 이 모금행사를 지원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등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부시대통령은 축사를 통해 『한국전은 공산주의의 조류를 최초로 되돌린 전쟁이었으나 역사에 의해 종종 무시돼 「잊혀진 승리」로 불려지고 있다』고 회고하며 『이 기념비가 세워지면 미국인들은 미국의 용감한 아들 딸들이 침략을 저지하면서 부딪쳤던 자유의 시험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시대통령은 『오늘날 우리가 전 세계에 걸쳐 목도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행진은 한국전에서의 자유수호가 그 기초를 놓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1백만달러의 모금을 목표로 마련된 이날 행사에는 왕년의 명코미디언 보브 호프와 여가수 로즈메리 클루니가 여흥을 맡아 한국전 당시를 회고케 했으며 한국전을 배경으로 한 「3일의 약속」이란 소설을 출간,그 판매대금 20만달러를 기념비 건립기금으로 기부한 교포의사 정동규씨도 참석했다. 한국전 참전기념비 건립위원회(위원장 리처드 스틸웰 전주한미군 사령관)는 모금 목표액 1천50만달러 가운데 이날 만찬전까지 총 10만명으로부터 5백50만달러를 모금했다고 밝히고 1만달러이상 기부자 가운데는 포드자동차,크라이슬러사,IBM,두폰,필립 모리스 등 미국굴지의 기업과 현대 포철 대우 등의 미 현지법인들이 포함돼 있다고 공개했다. 위원회는 6ㆍ25동란 발발 40주년을 맞아 워싱턴 뉴욕 로스앤젤리스 등 미국 각지에서 80여건의 모금운동이 활발하게 진행중이라고 설명하고 91년 10월까지 모금을 완료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모금은 지난 86년 10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미 의회를 통과한 기념비건립법안에 서명한 뒤부터 착수됐다. 기념비는 휴전협정 40주년 기념일인 오는 93년 7월27일까지 완공될 예정이다. 링컨기념관 부근 2천4백평 부지위에 세워질 한국전 참전기념비는 한국의 38선을 상징하는 무장병사 38명의 행군 입상이 중심을 이루며,이곳을 찾는 참배객들은 병사들의 조상 사이를 걸어서 대형 성조기가 게양된 경배구역에 다다르도록 설계돼 있다.
  • 중국­북한 미묘한 시각차/일 통신,강택민ㆍ김일성 연설내용 분석

    ◎반미투쟁 강조,개방문제 침묵 김/북측 통일안외 합리적 대안도 지지 한국ㆍ미 비난 삼가며 국제협력 촉구 강택민 북한을 방문중인 강택민 중국 공산당 총서기와 김일성은 특히 미국과 한국에 대해 미묘한 인식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김일성은 14일 환영연에서 『중국이 항미수조의 슬로건아래 한국전에 참여한지 40주년이 된다』며 반미를 기조로 발언을 한데 반해 강택민 총서기는 미국을 비판하지 않았다. 한국에 대해서도 김일성은 『남조선 인민은 반미ㆍ자주화ㆍ반파시스트 투쟁을 용감히 전개하고 있다』고 했으나 강택민은 「파시스트 비판」에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으며 북한이 내건 고려 연방제에 대해서도 『북한외의 많은 합리적 주장과 제안을 지지한다』고 말한 것으로 15일 교도(공동)통신이 북경발로 보도했다. 뿐만아니라 강택민은 『북남간의 장벽타파,최고당국자 회담,조선반도 정세의 완화』등 서방측에서도 쓰이는 좋은 말을 사용,대한 유화자세를 내보였다. 강은 평화공존 5원칙에 입각한 세계 모든 나라와의 관계발전을 목표로 한다고 말함으로써 대외개방 정책의 불변을 강조한 반면 김일성은 반제국주의에 역점을 둔채 대외개방에는 언급하지 않았다고 교도는 말했다.
  • 전몰군경 미망인 2천명 「광주」수준 보상 요구,농성

    대한민국 전몰군경 미망인회(회장 양순임ㆍ60)소속 전국 14개지부회원 2천여명은 21일 하오2시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국회의사당 앞길에서 소복차림으로 「국가유공자상 정립을 위한 결의대회」를 갖고 전몰군경에 대한 보상을 현실화할 것을 촉구했다. 이들은 이날 대회에서 『국권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전몰군경의 미망인들이 6.25전쟁 40주년이 되는 오늘날까지 국가에서 받은 보상금은 평균 4백34만원에 불과하다』며 『광주사태 희생자에 대한 보상금을 3억원으로 입법추진하고 있는 국회는 전몰군경 유가족들에게도 이에 상응하는 보상기준을 마련해줄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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