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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의원 4선의 한국계 ‘개혁기수’/자살한 아라이 의원은 누구인가

    ◎동경대 나와 73년 대장성 입성/86년 38세 나이로 중의원 당선/94년 자민 탈당후 작년 재입당 【도쿄=강석진 특파원】 자살한 아라이 의원은 중의원 4선 가도를 달리고 있는 유일한 한국계 일본의원으로서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었다. 오사카 출신 교포 2세로 16세때 귀화했으며 동대 경제학부를 졸업한 뒤 신일본제철,대장성을 거쳐 86년 38세에 자민당 공천으로 중의원 의원에 첫 당선됐다. 자민당 시절인 92년 다케시타 노부루(죽하등) 전 총리의 자민당 탈당 결의에 앞장서는 등 자민당의 금권정치를 과감히 비판하면서 소장 개혁파로 이름을 날렸다.이같은 이미지를 업고 도쿄 선거구에서 4선에 성공하는 등 발판을 다졌으나 지난해말 불거지기 시작한 증권거래 의혹으로 정치 생명을 위협받아 왔다. 장래 각료 입각대상이란 기대를 모으기도 했던 그는 그러나 94년 자민당 탈당후 자유당,신진당,무소속을 거쳐 지난해 자민당에 재입당하는 등 소속이동이 잦았다. 항간에는 그가 궁지에 몰린데는 이같은 정치행적과 연관이 깊다는 소문도 떠돈다.이와함께주식거래 등을 통한 정치자금 조달이 공공연한 사실로 돼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그가 정계로까지 검찰의 수사가 확대된 금융계 비리의 희생양이 됐다는 지적도 있다. 이를 반영하듯 그는 최근 국회에서 자신이 한국계라는 이유로 비난받아 왔음을 주장하기도 했다. 슬하에 3남1녀를 두고 있으며 부친 등 그의 일가는 지금도 오사카에 거주하고 있다.
  • 아라이 의원의 자살/강석진 도쿄 특파원(오늘의 눈)

    일본 아라이 쇼케이(신정장경·50·자민) 의원이 19일 자살했다.마지막까지 강력하게 결백을 주장하던 그의 죽음은 일본 정치권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고 있다.형사사건에 연루된 현직 국회의원이 자살한 것은 일본에서 처음이다. 그는 니코증권사에 법으로 금지된 차명계좌를 개설하고 부당이익을 제공하도록 압력을 가해 온 혐의를 받고 있었다.구속영장은 이미 발부됐고 본회의에서 이날중 구속동의안이 처리되면 바로 구속될 예정이었다. 한국에서는 그가 한국계라는 점에서 특히 관심을 끌어 왔다. 그는 중의원 참고인 진술 때 16살 때까지 재일한국인으로 살아왔다고 말했다.그의 옛성은 박.귀화후 도쿄대 경제학과를 나와 일본에서 제일 어렵다는 고시를 거쳐 대장성에 입성했다. 86년 자민당 공천으로 도쿄에서 출마,당선된 이후 내리 4선을 기록했다.인생의 3분의 2가 넘는 34년을 일본인으로서 산 그였지만 선거 때는 ‘조센징(조선인)’이라는 스티커가 붙는 등 역풍에 시달렸다. 아라이 의원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일까,한국과의 연계를 극력 피해왔다.한국으로부터 이런 저런 접촉 제의가 오면 ‘일본 국헌을 준수하고 일본 국익을 도모하기 위해 일본 의원이 됐다’는 말도 했다.한국계임을 떳떳이 밝히고 한국과 활발한 접촉을 펴는 미국의 김창준 의원과 아라이 의원은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라이 의원도 검찰의 수사망에 걸려 든 이후에는 주위에 ‘한국계라서 당하는 것 같다’고 말하는가 하면 중의원에서는 재일한국인이었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입에 올리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그가 ‘평성시대의 료마(용마:명치유신을 성공시키기 위해 노력한 협객)’라고 불릴 정도로 개혁파임을 자임하면서 뒤로는 부정이익을 챙기는 파렴치 행위로 미운 털이 박혔다는 평가도 있다.또 자민당을 탈당해 이 당 저 당 옮기다가 다시 자민당으로 복당하는 등 갈 지자 정치 행보가 발밑을 팠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그의 개인적 이력을 보나 검찰의 수사과정을 되돌아 볼 때 특별히 한국계라고 해서 의미를 둘 이유는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한국인’이라는 둥지를 쳐다보면서 죽은 듯하다.애잔한 마음 금할 수 없다.
  • 한나라당 중앙위의장 정재문 의원

    한나라당 중앙위원회는 18일 하오 여의도 당사에서 운영위원회를 열어 4선의 정재문 의원(부산진갑)을 의장으로 선출했다.
  • 한국계 아라이 의원/일서 체포영장 청구/“증권거래로 부당이익”

    【도쿄=강석진 특파원】 일본 4대 증권사 등이 총회꾼과 검은 거래를 해온 이른바 총회꾼 사건으로 발단이 된 일본 검찰의 증권·금융계에 대한 수사가정계로 까지 파급되고 있다.도쿄 지검 특수부는 18일 증권거래를 통해 부당이익을 올린 의혹을 사고 있는 한국계 아라이 쇼케이(신정장경) 자민당 중의원에 대해 증권거래법위반(이익추가요구)혐의로 체포영장을 법원에 청구했다.검찰은 현재 국회가 회기중인 관계로 아라이 의원의 체포에 대한 내각과 국회의 동의 절차를 밟아 19일중 체포할 예정이다. 유일한 한국계 의원으로 4선인 아라이 의원은 지난 95년 10월 닛코증권 지점에 차명구좌를 개설한 뒤 지난해 3월까지 신용거래를 통해 2천9백만엔의 부당이익을 올린 혐의를 받고 있다.
  • 한나라 사무총장 서청원 의원

    한나라당 조순 총재는 16일 김태호 의원의 사표로 공석중인 당사무총장에 서청원 의원을 임명했다. 서의원은 서울 동작갑 출신의 4선의원으로 정무1장관,신한국당 원내총무를 지냈다.
  • ‘고졸 대통령’ 해리 트루먼(미국의 대통령 문화:8)

    ◎냉전속 국제질서 이끈 위대한 지도자/전후 서유럽 부흥위해 ‘마샬 플랜’ 강력 추진/일에 원폭 투하·맥아더 해임 등 결단력 돋보여/한국에선 “한반도 분단 책임자” 시선 곱지 않아 【인디펜던스(미 미주리주)=나윤도 특파원】 “그는 보통사람이 위대해 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였습니다.그리고 대통령도 일반 시민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1972년 12월26일 88세를 일기로 서거한 미국의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만의 조사(조사) 마지막 부분을 컬럼니스트 메리 맥그로리는 이렇게 끝 맺었다. 원폭투하라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고 2차대전후 극렬한 대립을 보인 민주진영과 공산진영 양극의 한 정점에서 냉전의 국제질서를 강력하게 이끌었던 트루만 대통령은 민주주의 수호와 대통력직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결단력을 보여준 지도자란 평가를 받고있다.그러나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가장 서민적인 ‘보통사람’대통령으로 꼽힌다. 45년 4월12일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4선 취임 80여일만에 숙환으로 급서,당시 부통령으로서 트루만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됐을 때 미 언론들 대부분은 루즈벨트의 큰 자리를 트루만이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우려했다.왜냐하면 트루만은 당초 민주당내 부통령 지명과정에서 최적의 인물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좌파 헨리 월리스와 보수파 제임스 번즈의 각축 중에 중도파로 있다 어부지리로 부통령 자리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두차례의 상원의원을 지내면서 2차대전중 수십억달러의 국방예산낭비 조사를 위한 소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을 당시 차분하고 공정한 업무처리로 인정받았던 그는 3차투표까지 간 부통령 지명전에서 막판에 루즈벨트로부터 제의를 받았을 때 정중히 사양했으나 거듭된 간곡한 부탁에 가까스로 응했다. 국민들이 우려를 나타낸 또 한가지 이유는 그가 20세기 미대통령 가운데 유일한 ‘고졸대통령’이라는 점이었다.과거 무학 대통령들의 입지전적인 스토리들이 있기는 했으나 20세기들어서는 직전의 루즈벨트가 하버드 출신인 것을 비롯,스탠퍼드 출신의 후버,프린스턴의 윌슨,예일의 태프트 등과 같이 최고의 학력이 대통령의 필수조건처럼 돼있었다. 그러나 막상 대통령으로서의 트루만은 어떤 명문대학 출신 못지 않은 업무수행능력을 보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2차대전 이후 새로운 전후질서 형성과정에서 미국을 부동의 지도국 위치에 올려놓았고 국내적인 안정도 가져와 라이딩스의 대통령 랭킹에 따르면 조사 각분야에서 상위를 기록,41명중 종합 7위로 나타났다. 2차대전 막바지 대통령직에 오른 그에게는 전쟁의 마무리가 가장 큰 임무였다.독일은 5월초 무조건 항복을 했으나 일본이 문제였다.45년 2월 맥아더 장군의 마닐라점령을 계기로 연합군이 승기는 잡았으나 일본군이 완강히 저항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본토상륙이 불가피한 시점이었다.그러나 그를 위해서는 100만명의 인명손실이 예상되고 있었다.따라서 때마침 실험에 성공한 원자탄이 자연스레 그 대안으로 부상했으며 트루만은 그해 8월6일과 9일 두차례에 걸쳐 일본에 원폭을 투하하라는 가장 고독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더우기 소련의 공산주의 팽창 야욕에 맞서 그는 외교안보적으로는 공산세력의 침투로부터 자유민주주의의 수호했다는 평가를 받는 ‘트루만독트린’을,경제적으로는 전후 피폐해진 서부유럽국가들의 부흥을 위한 대대적 경제원조인 ‘마샬플랜’을 강력히 추진했다. 이같은 그의 강공은 소련의 베를린봉쇄를 가져왔고,유엔 설립을 위한 대서양헌장 채택,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탄생 등 냉전체제의 골격을 완성시켰다.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국가안전보장법을 제정해 국방부와 CIA를 창설했다. 그러나 국내적으로 취임초기 물가상승과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인한 사회불안이 높아져 46년의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압승,여소야대 정국이 초래됐다.48년 마샬플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미국내 반대세력이 늘어갔으며 또한 민주당내 분열이 심화돼 언론들 대부분은 그해 말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의 토마스 듀이 후보가 당선할 것이라고 예측했다.그러나 트루만은 유명한 3만마일 역전유세를 통해 유권자에 직접 호소,재선할 수 있었다. 재선후 트루만은 농민보조금 제공,의무적 건강보험 실시 등 새로운 사회개혁정책을 시도했다.이 정책은 “모든 집단과 모든 개인은 정부로부터 공정한 대우(Fair Deal)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그의 연설에서 ‘페어 딜’정책으로 명명됐다.그러나 일련의 개혁정책들은 의회내 보수파들에 의해 대부분 묵살돼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편 한국전쟁을 둘러싸고 당시 연합군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가 중국군대의 개입을 저지하고자 만주에 원폭투하를 요청하면서 트루만과 공공연히 맞섰는데,이에 그는 맥아더 사령관을 전격 해임해 대통령직 권위에 대한 도전에 단호히 대처했다.한국쪽에서 볼 때에는 한반도 분단의 책임이 있는 당사자라 곱지 않은 시선이 있다.당시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되던 맥아더의 해임은 여론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나 결국 의회의 동의를 얻어냈다. 그러나 미국민들에게 남아 있는 트루만은 정치적 업적보다도 그의 인간됨이다.미주리주 인디펜던스 소읍을 둘러싸고 청년농부 트루만과 후에 퍼스트레디가 된 읍내 소녀 엘리자베스 월리스(베스라는 애칭으로 불렀음)와의 사랑이야기는 ‘아메리칸 러브스토리’로 남아 있다.그가 그녀에게평생을 쓴 1천600통의 사랑의 편지는 지금도 젊은이들의 연애편지로 읽히고 있다. 그는 52년 퇴임후 20년 동안 고향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에서 보여준 보통사람으로서의 삶 때문에 후세에 더욱 높은 인기도를 유지하고 있다.고향집으로 돌아온 그는 1마일쯤 떨어진 트루만도서관의 사무실로 매일 걸어서 출근했으며 강의와 회고록 집필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특히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와 동네사람들,옛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여생을 보내던 그가 가장 불편해 했던 것은 63년 케네디 암살 이후 통과된 전직대통령 경호법에 의해 경호팀이 집부근에 상주하면서 활동에 제약을 받게된 일일 정도로 그는 완벽하게 보통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인디펜던스의 그의 사저 일대는 역사공원으로 지정돼 있으며 인근의 언덕위에 높게 자리잡은 트루만도서관과 함께 보통사람 대통령의 체취를 느끼려는 관광객과 학생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랜드 스웰 트루먼 대통령 도서관 자료담당관/퇴임후 평범한 삶 후세에 귀감/한국 좋아해 고려청자 현관에 보관/어머니에 배운 피아노 연주 수준급 【인디펜던스(미 미주리주)=나윤도 특파원】 미주리주 캔자스시티 옆의 소읍인 인디펜던스시 북부의 언덕위에 넓게 위치한 트루만도서관은 냉전 초기의 역사에 관한 기록들로 가득 차 있다.이 도서관의 랜드 스웰 자료담당관은 “트루만대통령은 많은 정치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적인 측면이 더 부각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트루만 대통령이 높은 인기도를 유지하는 이유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린 지도자로서 결단력과 대통령직을 마친 후 평범한 이웃으로 다시 돌아온 점이다.대통령이 살던 집으로 돌아와 그 집에서 살다 죽은 예는 흔치 않다. ­대통령 퇴임후의 생활은 어땠는가. ▲인디펜던스 읍내 노스 델라웨어 스트리트 219번지 자택은 원래 트루만의 부인 베스 트루만의 집으로 1919년 결혼후 줄곧 이 집에서 살아왔다.그는 퇴임후 강연과 저술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59년 입법 후에야 전직대통령에 대한 연금이 지급됐기 때문에 그 전까지는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도서관의 특별한 활동은. ▲95년부터 그의 ‘50주년 행사’를 계속해오고 있다.지난해는 트루만독트린 50주년 세미나및 전시회를 가졌고 올해는 이스라엘 건국 50주년,99년에는 NATO 50주년,2000년에는 한국전쟁 50주년 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한국인들은 트루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그의 한국에 대한 인상은 어떤 것이었나. ▲공산주의 저지의 최후 보루로 인식했기 때문에 남침 즉시 유엔 결의를 기다릴 것 없이 미군의 참전을 명했다.다만 한국전쟁때 마샬플랜에 더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소 소극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개인적으로 한국을 좋아했다.46년 한국 교육계대표 장이욱 박사로부터 선사받은 고려청자가 현관에 보관돼 있는데 의 위치는 그가 잡은 것이다. ­그의 피아노를 잘 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어머니에게 배운 것이 수준급에 달해 45년 포츠담회담때 처칠과 스탈린 앞에서 연주했고 케네디 취임식때도 연주했다.트루만이 백악관 당시 즐겨 치던 피아노가 닉슨 대통령의 기증으로 전시관에 진열돼 있다.
  • 76세 글렌 미 상원의원 우주비행 재도전 의욕

    ◎62년 첫 비행 국민영웅 우주공간 노령화 연구 NASA도 “긍정적” 검토 【워싱턴=김재영 특파원】 우주비행사 출신의 존 글렌(민주) 미 상원의원이 36년 만에 다시 우주공간을 비행할 굳은 뜻을 세우고 있다. 62년 2월 ‘우정7호’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3바퀴 돌아 미국인으로 선 첫 우주비행에 성공했던 글렌 의원은 4선의 민주당 중진이며 현재 76세. 올 11월 중간선거에 나가지 않고 24년 상원 경력을 마감할 생각인 그는 대신 지난해부터 우주비행에 재도전하겠다는 의지를 밝혀왔었다. 대단한 노익장을 과시하는 셈인데 이 ‘노영웅’ 이미지가 글렌 의원의 희망 성취에 가장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 국가사업인 우주비행이 한 노익장의 영웅적 성취를 위한 소품거리로 변질되는 건 아닌가,상원의원이라고 봐주는 것이 아니냐는 등의 비난도 나왔다. 우주공간에서의 우주비행사와 지구에서의 노인은 간헐적인 현기증,뼈와 근육의 쇠약 현상,면역능력 감퇴,수면장애,혈행 문제 등 많은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NASA(국립우주항공국)도 글렌 의원의 제안을 아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글렌 의원의 ‘실험용 노인’ 가치에 주목해 그의 우주비행사 채택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는 NASA는 이 비행의 ‘노영웅’ 색채 때문에 결정을 주저하고 있다.
  • 인수위 경제1분과 정우택 의원(초점인물)

    ◎재경원도 쩔쩔매는 경제통/기획원 출신… 통상대표부 신설 줄기찬 주장 최근의 경제난을 반영하듯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분과위원회는 재경원과 통산부,건교부의 업무를 다루는 경제1분과다.자민련의 정우택 의원(진천·음성)은 4명의 경제1분과 인수위원 가운데서도 경제통으로 꼽힌다.경기고,성균관대 출신인 정우택 의원은 81년부터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과 심사평가국 근무를 거쳐 행정관리·기획예산·법무담당관을 지낸 예산분야의 전문가다.야당 4선의원으로 전당대회의장가지 지낸 고 정운갑씨의 아들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정의원은 아는 것 만큼 말도 잘한다.정의원은 매일 상오 10시 각 부처의 업무보고가 시작되기전 기자들과 만나 그날 보고하는 부처의 주요 정책 쟁점을 나름대로 설명한다.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뒤 청주대학 강사를 했던 경험으로 어려운 경제현상을 쉽게 풀어 설명하는 재주도 있다. 정의원의 설명에는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도 묻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재벌기업의 상호지급보증을 99년까지 전면금지하거나,결합재무제표 작성도 앞당겨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런 예다.올해의 세입·세출 예산이 10조 이상 감축돼야 할 것이라고 처음 공식제기한 것도 정의원이다.특히 재경원과 통산부,외무부의 대외통상기능을 묶어 통상대표부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줄기차게 제기하고 있다. 스스로도 “어쩔 수 없이 친정인 재경원의 업무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 사실”이라고 실토한다.정의원은 김대중 당선자가 주의한 ‘말조심’의 대상일 가능성도 크지만, 경제부처가 인수위를 쉽게 보지 못하게 만드는 역할도 한다. 정의원은 인수위의 활동이 끝나면 ‘경제청문회’ 준비에 들어갈 예정이다.
  • 가볼만한 해돋이 명소 4선

    ◎성산 일출봉/왕관같은 99개 기암절벽 훌륭 제주시에서 동쪽으로 48㎞ 떨어진 성산포 바닷가에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돌산이 있다.바로 높이 182m의 성산일출봉으로 왕관같은 99개 기암 봉우리와 짙푸른 바다위를 솟아오르는 아침 햇살이 장관이다.서쪽 항구에는 120t급 해상관광유람선이 1시간 간격으로 성산 일출봉 주변과 우도를 일주 운항하고 있다.(064­83­0959) ◎포항 구룡포해수욕장/소나무 가득찬 반달형 백사장 포항에서 24㎞,구룡포읍에서 1.5㎞ 떨어져 있다.백사장은 반달형으로 인근 산에는 소나무들이 가득 차 마치 정원을 걷는 느낌을 준다.특히 구룡포항은 동해남부 어항의 집결지로 많은 어선들이 출항과 회항을 한다.등대와 갈매기,회항하는 어선을 배경으로 붉게 솟아오르는 겨울 일출은 아름답기 그지없다.(0562­45­6061) ◎여천 향일암/남해 수평선 일출에 입이 절로 금오산의 기암절벽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암자로 남해 수평선의 일출 광경이 장관을 이룬다.마을에서 향일암으로 가는 산길은 제법 가파른 편인데 중간에 암벽을 타야 하는 등 등산코스도 아기자기하다.12월말부터 1월초순에는 이 곳 일출광경을 보기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0662­44­1181∼4) ◎주문진 남애/사진작가·관광객 발길 줄이어 주문진 북쪽 6㎞에 있다.남애해수욕장과 매호라는 민물석호가 있어 붕어와 잉어 등 민물낚시는 물론 바다낚시도 즐길수 있다.전형적 어촌인 남애항은 방파제와 등대,괴암봉우리가 일출과 조화를 이뤄 사진작가들의 발길이 잇고 있다.인근에는 한국관광공사가 운영하는 주문진 가족호텔이있다.(0391­661­7400∼4)
  • 뉴딜정책 기수 프랭클린 루즈벨트:하(미국의 대통령 문화:5)

    ◎2차대전 적극 개입… 1천만 실업자 구제/전후 평화 정착 기대속 4선 당선 영광/대통령 문화 요람 도서관 시스템 도입/부인 일리노어 적극적 사회 활동/헌신·박애정신 국민 마음속 각인/동상 선 세계 최초 퍼스트 레이디 【워싱턴〓나윤도 특파원】 대공황의 질곡에서 미 국민을 구출할 희망의 상징으로 32대 대통령에 취임한 프랭클린 루즈벨트(애칭 FDR)는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강력한 뉴딜정책을 추진했다.테네시강 개발사업,국가부흥청 설립,농업조정법 제정,사회보장제도 도입,노동조합 활성화 등 100일 입법을 통한 새행정부의 의욕적인 정책추진은 무기력과 절망에 빠졌던 국민들에게 ‘할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뉴딜정책 평가를 위한 국민투표의 성격을 띤 1936년 대통령선거에서 FDR은 선거인단수 523대 8의 미 역사상 최대의 표차로 재선고지에 오를 수 있었다.그러나 활기찬 뉴딜정책의 추진에도 불구하고 대공황으로부터의 탈출은 요원했다.36년 다소 회복되는 듯 하던 경기는 37년 중반부터 다시 불경기로 돌아섰으며 38년에는 최악의 상태로 떨어져 실업자가 전체 노동력의 5분의 1인 1천만명에 달할 정도였다. 당초부터 실험적 성격이 강했던 뉴딜정책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사방에서 FDR에 대한 비난의 소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그러나 그는 천운을 타고난 듯,뜻하지 않은 방향에서의 해결책이 마련됐다. FDR의 대통령 취임과 같은 해인 33년 독일의 권력을 장악한 아돌프 히틀러가 국제연맹을 탈퇴,인접국들에게 과거 독일영토의 반환을 요구하며 전쟁준비에 광분하면서 유럽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마침내 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대전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마침내 전쟁에 개입하게 되었고,이로 인해 군수산업이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면서 미국의 경제상황은 대공황에서 탈피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전후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전쟁이 미국을 구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전쟁이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던 40년,미 대통령선거의 최대쟁점은 참전문제였다.초기 FDR은 재선한 대통령으로서 명예로운퇴진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전쟁에 직면한 위기상황에서 민주당은 전폭적으로 그를 또 다시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그는 참전반대 의사를 명확히 했으나 미국이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막강한 군대가 필요함을 역설했다.미 국민은 그를 미 역사상 최초의 3선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전쟁 초기 FDR은 곤경에 처한 영국을 도우려 했지만 고립주의자들로 가득찬 미 의회의 거부로 소규모 제한적인 원조밖에는 할 수 없었다.그러나 그는 “미국은 민주주의의 거대한 무기고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며 의회와 국민을 설득,마침내 ‘무기대여법’을 통과시켜 본격적인 지원에 나설 수 있었다.39년 10월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핵폭탄에 관한 서신에 접한 FDR이 즉시 비밀계획팀을 만들어 연구에 착수,마침내 원자탄을 만들어내게 한 것도 이같은 그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던 중 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은 미국의 본격적인 참전 계기가 됐다.참전은 모든 미국 경제를 전시경제로 돌아서게 했고 미 전역의 공장들로부터 막대한 양의 군수물자들이 쏟아져 나왔다.1천만에 달하던 실업자가 방위산업 증강에 따른 구인수요와 군입대로 사라지게 됐다.또한 FDR의 활발한 전시외교는 그를 자연스레 국제지도자로 부상시켰다. 44년 11월,아이젠하워 장군 지휘하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연합군이 최후의 승리를 위해 독일로 진격하고 있을 때 미국은 다음 대통령선거를 치렀는데,FDR은 공화당의 토머스 듀이를 물리치고 4선 대통령에 당선됐다.전쟁의 마무리 뿐 아니라 전후평화에 있어서도 미 국민은 그의 영도력에 큰기대를 걸었던 것이었다.그러나 격무에 시달리던 그는 취임 3개월도 못된 4월12일 조지아주 웜스프링 휴양지에서 뇌출혈로 숨졌다.그의 나이 63세. 라이딩스의 대통령 순위에 따르면 FDR은 지도력과 정치력에서 각각 1위,업적 및 위기관리와 용인술에서는 각각 2위,성격 및 집중도에서는 15위를 기록해 전체 순위에서는 링컨에 이어 2위로 나타나 있다. 당시 육군참모총장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과의 일화는 그의 지도력 및 용인술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첫대통령 취임 직후 FDR의 군예산 대폭 삭감계획에 불만을 품은 맥아더 육군참모총장이 조지 던 전쟁장관과 함께 백악관을 방문했다.대통령과 부딪히는 것을 꺼리고 있던 던 장관을 제치고 맥아더가 국가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자 FDR은 빈정거리는 투로 평화시에 많은 군대를 유지할 필요가 있느냐고 답했다.두사람 사이에는 다소 설전이 오갔다. 마침내 맥아더가 자제력을 잃고 “만일 다음 전쟁에서 미국이 져 미국 병사들이 적의 군화발에 짓밟힌다면 그들은 맥아더가 아닌 루즈벨트를 원망할 것입니다”라고 대들었다.그러자 FDR 역시 화를 버럭내며 “당신이 대통령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라며 고함을 질렀다.잠시 침묵이 흘렀다.맥아더의 생명은 끝난 것과 다름 없었다.군통수권자에 대한 모욕은 군법회의 감이었다.그는 사과를 한 후 총장직 사의를 표하고 뒤돌아 나왔다. 맥아더가 막 집무실 문을 나서려는 순간 뒤에서 대통령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더글라스,어리석은 짓 말게.여기 당신의 목과 예산안을 함께 가져 가게” FDR의 정치생애에서 가장 주목을 받아야할 사람은 부인일리노어 여사라는데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그녀는 남편의 투병중 세심한 간호는 물론 그가 주민들로부터 잊혀지지 않도록 정치활동을 대신,남편의 정치적 재기를 가능케 했다.또 퍼스트 레디가 된 후에도 신문에 ‘마이 데이’라는 칼럼을 정기적으로 썼으며 적극적인 사회활동으로 현대적 퍼스트 레디상을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FDR이 죽은후 그녀는 남편 생가의 옆동네인 바킬의 고향집에서 17년을 더 살았으며 트루만 대통령의 요청으로 6년간 유엔총회 미국대표단장을 역임하는 등 공직생활을 하기도 했다.62년 78세로 생을 마감한 그녀는 국민들 마음에 헌신적이고도 박애적인 영원한 퍼스트 레디로 깊이 각인됐으며 지난 여름에는 워싱턴에 동상이 선 첫 퍼스트 레디가 됐다. FDR의 업적 가운데 주목받는 것으로는 대통령도서관 시스템의 도입이 있다.역사기록의 중요성과 대통령직 수행 자체가 국민의 위임에 의한 것임을 자각했던 그는 1기 임기가 끝났을 때 자신의 모든 자료들과 하이드파크의 생가를 국가에 기증,대통령도서관을 만들어 국민들이 언제라도 편하게 접할 수 있게 했다.현재 미국내 존재하는 대통령도서관은 모두 11개로 국립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s)의 관할 아래 제31대 후버 대통령부터 41대 부시 대통령까지 주로 생가에 건립돼 있으며 미 대통령문화의 요람이 되고 있다. ◎수잔 쿠퍼 미 국립문서보관소 대통령도서관 담당/“대통령직 관련 자료 보존·열람 FDR 투철한 역사의식서 시작” 미 국립문서보관소의 수잔 쿠퍼 대통령도서관 담당관은 “미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대통령직 수행과 관련된 자료들을 한데 모아 보존하고 열람시키는 전통을 수립한 것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투철한 역사의식에 의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통령도서관의 설립 동기는. ▲1939년 두번째 임기중이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하이드파크의 생가일부와 소장하고 있던 모든 자료들을 연방정부에 기증하고 그 관리를 의뢰하면서부터 시작됐다.도서관 건물은 이듬해인 40년 후원회에서 건립후 국가에 헌납했다.1955년 ‘대통령도서관법’이 제정돼 도서관의 건립은 대통령후원회 등 개인이 맡고 관리만 국립문서보관소에서 하도록 돼 있다. ­이전에는 대통령문서가 어떻게 보존돼 왔나. ▲대통령마다 의회도서관 또는 출신대학,거주지 도서관 등에 기증하거나 혹은 후손에 남기는 등 가지각색이었다.그래서 팔려나간 경우도 있고,훼손·분실되는 일도 많았으며 여러군데 흩어져 있는 경우도 많았다. ­현재 대통령도서관 현황은. ▲최근 텍사스 A&M유니버시티 내에 개관한 부시도서관을 포함 모두 11개이다.루즈벨트에 이어 트루만(미주리 인디펜던스),후버(아이오와 웨스트브렌치),아이젠하워(캔자스 애빌린),케네디(매사추세츠 보스톤),존슨(텍사스 오스틴),포드(미시간 앤아버),카터(조지아 애틀란타),레이건(캘리포니아 시미 밸리)도서관 등이 있다.워터게이트로 물러난 닉슨의 도서관은 캘리포니아 요루바린다에 있으나 의회명령으로 방대한 양의 워터게이트사건 관련 문서들은 아직 국립문서보관소의 닉슨자료실에 보관돼 있다. ­대통령 도서관에 전시되는 자료들의 내용은. ▲대통령이나 비서진에 의해 공식적으로 만들어진문서,국내외로부터 받은 문서 및 서신,취임전후의 자료,사진·필름 등 각종 오디오 비디오 자료,유품 등 개인소장물품과 공식선물 등이다.
  • 친구같은 대통령/나윤도 워싱턴 특파원(오늘의 눈)

    맨해튼 서쪽끝의 헨리 허드슨 파크웨이를 타고 두시간쯤 북쪽으로 올라가면 하이드파크 라는 작은 도시가 나오고 그 도시 한가운데 허드슨강 언덕에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생가가 자리잡고 있다.생가와 도서관과 무덤이 한데 어우러져 역사공원을 이루고 있다. 이 작은 마을이 매년 수백만명의 관광객으로 붐비는 것은 루즈벨트가 경제와 안보의 두위기,즉 대공황과 2차대전이라는 극단적 위기상황에서 미국을 구한 현대적 미 대통령의 모델로 미국민들의 마음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미국민이 그에게 3권을 초월하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고 미역사상 전무후무의 4선 대통령에 당선시킨 것은 그의 정치적 업적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국민의 친구가 됐기 때문이다.그는 취임 직후부터 ‘노변정담’이라는 라디오연설 시간을 만들어 수시로 국민과 대화를 나눴다.“친구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그의 연설은 어떤 어려운 상황의 사람에게도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국민들은 그의 연설을 듣고 있으면 배도 고프지 않았고 춥지도 않고 두렵지도 않았다.힘이 솟았다.내가 대통령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그가 현대적 대통령직의 본보기로 추앙받는 것은 바로 이러한 대통령과 국민과의 새로운 관계설정 때문이었다.그의 취임후 백악관에는 하루 4천통이상의 편지가 날아들었다.전임자 후버 대통령의 40통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92년 무명의 빌 클린턴 아칸소 주지사가 일약 미대통령에 당선됐을때 워싱턴 포스트는 ‘친애하는 대통령께’라는 제목하에 18세 이하를 대상으로 미지의 대통령에게 할 말 있는 청소년들의 편지를 모았다.3주만에 10만700통이 응모됐다.그렇게 할말이 많은지 미처 상상치도 못했으며 기발한 내용들로 가득차 있었다.이들 편지는 클린턴 당선자에게 전달되었다. 우리 대통령 선거날 TV가 다투어 비춰주는 김대중 당선자의 하의도 생가를 바라보면서 루즈벨트의 하이드파크를 떠올려본다.그리고 하의도가 ‘친구대통령’을 탄생시킨 한국 대통령문화의 새출발지가 되기를 기대해보면서 짧은 편지도 써본다.“국민들은 친구 같은 대통령을 원한다.할 말이 너무 많기 때문에.그리고솔직한 대통령을 원한다.믿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 정치권 박정희 가족 껴안기 경쟁

    ◎한나라·국민회의 영입대상 1호 지목/‘득표 노린 정치적 이용’ 비판 거세 나라살림이 어려워지면서 ‘한강의 기적’을 일군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와 함께 그의 가족들이 각당 ‘영입대상 1호’로 떠오르고,홍보전략의 핵심인물로 등장하고 있다.특히 한나라당과 국민회의가 연을 고리로 남은 가족들에 대한 입당을 기정사실화하면서 정치권 일각에서는 눈살을 찌푸리는가 하면,그들 주변에선 ‘정치적 이용’이라는 비판의 소리마저 나돈다. 대상인물은 박 전 대통령의 큰딸 근혜씨와 작은딸 서영씨,아들 지만군과 장조카이자 4선 의원인 박재홍 전 의원 등이다.박의원은 지난 9일 자민련을 탈당,한나라당에 입당함으로써 노선을 분명히 했다.그러나 그는 “나는 이미 정치에 몸담은 사람으로 괜찮지만,다른 사람들은 가만 놔두었으면 좋겠다”며 이미 가족들에게 그런 뜻을 전했노라고 했다. 최근 김대중 후보와 자민련 박태준 총재와 함께 부친 생가를 방문한 지만씨는 주위에 “부친과 오랜 인연의 정치인들을 요청에 따라 동행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실제 서영씨는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박 전 대통령 생가 방문행사에 동행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그러나 근혜씨는 이날 한나라당 중앙선대위 고문으로 추대됐고,한인옥 여사와 함께 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진다. 싫든 좋든,이들 박 전 대통령 가족들의 ‘수난’은 득표만능의 현실정치가 빚어내고 있는 언젠가는 지워야할 ‘삽화’라는 지적이다.
  • 박재홍 전 의원 한나라 입당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조카이자 4선의원 경력의 박재홍 전 국회건설교통위원장이 자민련을 탈당하고 9일 한나라당에 입당했다.이한동 대표실에서 열린 입당 환영식에는 이대표와 김태호 사무총장 등 고위당직자들이 참석,박 전 의원의 입당을 환영했다.
  • 뉴딜정책 기수 프랭클린 루즈벨트:상(미국의 대통령 문화:3)

    ◎휠체어 앉아 ‘미국’을 일으킨 영웅/맥빠진 국민에 “무엇이든 해보자”/노변정담 설득… 공황극복 견인/국민신뢰 대단… ‘대통령학’ 모델/정계입문 초기 잇따라 선거 패배/소아마비로 “정치생명 끝장” 중평/목발 짚고 민주 전대 웅변 감동적 “나는 여러분에게 맹세합니다.또 나 스스로에게 맹세합니다.미 국민을 위한 ‘새로운 정책’(New Deal)을 펼 것을 말입니다” 1932년 7월2일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장.대통령후보지명 수락연설에 나선 프랭클린 루즈벨트 당시 뉴욕주지사가 처음으로 ‘뉴딜’을 외쳤을때 아무도 그 한 단어가 미국을 절망에서 구출하고 세계최고의 번영으로 인도할‘키워드’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후 ‘뉴딜’은 ‘대공황’의 반대어로 자리매김했으며 미국민의 자존심과 긍지를 나타내고 승리를 대표하는 어휘가 됐다. 루즈벨트는 선거운동과정에서도 대공황 여파로 자신감을 상실한 채 무기력해져 있는 미국민들을 향해 외쳤다.“어떤 방법이든 택하여 그것을 해봅시다.만일 실패한다면 그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다른것을 해봅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든 해보자는 것입니다” 워싱턴 중심의 몰공원 남쪽 포토맥강가에 지난 여름 개장된 프랭클린 루즈벨트 기념공원은 어린 학생부터 노인들까지 하루종일 수많은 관람객들로 붐빈다.미 역사상 훌륭한 대통령 빅3에 들면서도 수도 워싱턴에 이렇다할 기념관 하나 마련돼 있지 않아 워싱토니안(워싱턴사람들)은 물론 관광객들로부터도 많은 아쉬움을 불러일으키던 참이어서인지 더욱 찾는 사람이 많다. 이 공원에는 그의 재임 4기를 시기별로 네개의 공간에 나누어 각종 상징적 조형물을 세우고 또한 대표적 어록을 벽에 새겨놓아 당시의 시대상과 루즈벨트 대통령의 업적 등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미시간주에서 관광온 테드 모간씨(74)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대국민 설득을 위해 자주 사용했던 라디오연설을 들은 기억이 있다”면서 한 실업자가라디오 앞에서 대통령의 방송을 듣고 있는 상징물 앞을 떠날 줄 몰랐다.‘노변정담’(fireside chats)이라는 이름으로 최초로 시도됐던 루즈벨트 대통령의 라디오연설은 당시 절망감에 사로잡힌 국민들에게 최고의 인기있는 복음이었다고 모간씨는 회상했다. 1차대전 이후 호황기의 절정에 다달았던 29년 말부터 갑자기 몰아닥친 대공황은 3년동안 5천개의 은행을 문닫게 했으며 그에 따른 기업과 공장들의 연쇄도산이 뒤를 이었다.근로자들이 땀흘려 저축한 돈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전체 노동력의 40∼50%에 달하는 3천4백만의 실업자가 하루하루의 생계를 위해 거리를 배회했다. 이같은 암흑기를 지나면서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불신이 눈덩이처럼 커진 미국민들에게 루즈벨트는 공황의 종식을 위한 ‘뉴딜’을 외치며 균형예산과 실업자 구조,금주법의 폐지 등을 공약으로 제시,무기력한 후버 행정부와의 차별성을 부각시켰다. 특히 루즈벨트가 실의에 빠진 유권자들에게 다가설 수 있었던 것은 선거공약의 내용및 실현성 여부를 떠나 ‘의욕’이라는 심리적인 자극을 줄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그는 희망이 사라진 곳에 희망을 불러 일으켰으며 확신이 상실된 곳에 확신을 심어주었다. 결국 선거결과는 루즈벨트가 유효표의 57%를 득표,선거인단 472명을 확보함으로써 40% 득표에 선거인단 59명을 확보한 후버 현직대통령을 압도적으로 물리치고 승리했다.이렇게 해서 대공황을 극복하고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미국을 세계 최강의 국가로 자리매김한 4선 대통령 루즈벨트시대가 개막된 것이다.초대 워싱턴 대통령 이래 불문율로 지켜져온 중임 전통에도 불구하고 미국민들로부터 네차례나 대통령직을 부여받을 정도로 그는 존경과 사랑을 받았으며 그같은 지지를 바탕으로 경제위기와 전쟁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미현대사에 있어 가장 훌륭한 대통령의 모델로 기록되고 있다. 1882년 뉴욕주 업스테이트의 허드슨강변 동쪽 언덕에 위치한 하이드 파크에서 출생한 루즈벨트는 부유한 가정형편 덕분에 개인교습을 받고 사립학교에 다녔으며 어려서부터 유럽여행을 다니는 등 풍족하고 귀족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다.특히 그의 성장기에 대통령으로 명성을 날리던 테오도어 루즈벨트(26대)는 먼 친척 형(12촌)뻘로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그의 부인이 된 일리노어 루즈벨트는테오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조카로 부친을 일찍 여의였기때문에 1905년 그들의 결혼식에는 현직 대통령이 신부를 데리고 입장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바드 대학과 콜럼비아대 로스쿨을 나와 변호사로 활동하다 1910년 뉴욕주 상원의원에 당선,정계입문한 루즈벨트는 각종 선거에서 여러차례 낙선을 경험하는 등 초기에 순탄치 않은 길을 걸었다.우드로 윌슨 대통령(28대)에 의해 해군성 차관보로 임명돼 1차대전 당시 중요한 해군전략 수립에 관여했으며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다.이같은 1차대전때의 그의 경험은 대통령으로 2차대전을 맞았을때 십분 활용됐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패배했으며 1920년 38세의 젊은 나이로 제임스 콕스 대통령후보의 런닝메이트로 출마해 고배를 마시는등 중앙정치무대와는 인연이 없는듯 했다.엎친데 덮친 격으로 잠시 금융회사의 임원으로 정치를 떠나 있을때 그는 엄청난 개인적 불행을 당하게 된다. 이듬해 8월 캐나다 해안에서의 휴가중 찬물에 빠져 감기에 걸린 것이 척수성 소아마비로 발전,양다리를 못쓰게 됨은 물론 팔과 손에까지 부분 마비가오게 되었다.당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그의 정치적 생명은 끝난 것으로 생각했다.그러나 그는 의지를 잃지 않았다.조지아주의 웜스프링스로 가서 3년동안 기적적인 투병으로 그는 스스로 휠체어를 타고 움직일 수 있었다. 1924년 그가 휠체어를 타고 민주당 전당대회장에 나타났을때 모든 사람들은 깜짝 놀랐으며 그가 목발에 의지해 단상에 기대서서 연설할 때는 그의 인간승리 모습에 감동적인 환호를 보냈다.결국 그는 1928년 뉴욕주지사로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했다. ◎루즈벨트 도서관 사서 레이몬드 타이크만/“항상 국민과 함께한 지도자”/4연임,전쟁 마무리 위한 국민의 선택 FDR(프랭클린 D.루즈벨트의 약자 애칭)학의 권위자인 뉴욕주 하이드파크 프랭클린 루즈벨트 도서관의 선임 사서레이몬드 타이크만 박사는 그가 신체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어느 대통령보다도 국민과 함께 하려고 노력한 대통령이었다고 소개했다. -FDR이 미국민들로부터 빅3로 추앙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공황으로 잃은 정부의 신뢰회복을 위하여 그는 국민들과의 직접대화를 택했다.라디오 연설시간인 ‘노변정담’을 통해 그는 정부정책에 대한 세세한 설명과 이해를 구했다.국민들은 그가 국민편에 있다고 생각했다. -뉴딜정책이 국민들에게 어필한 이유는. ▲후버 대통령이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제퍼슨적인 자유주의 입장에서 있었다면 FDR은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해밀튼적인 보수주의 입장에서 있었다.대공황으로 의욕을 상실하고 무력감에 빠져있던 국민들에게 정부와 대통령의 적극적인 유도는 기대감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당시 불문율로 돼있던 중임 전통을 깨고 3연임에 도전하게된 이유는. ▲FDR도 처음에는 주저했다.그러나 대공황의 그늘이 아직 걷히지 않은 가운데 2차대전이 발발했고 불과 수개월만에 프랑스가 붕괴되는 상황에서 그의연임은 국민적 합의의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4연임 역시 전쟁의 성공적 마무리에 대한 국민의 기대 때문이었다. -FDR에게 4연임까지도 허용했던 미국민들이 1951년대통령 임기를 중임으로 제한하는 22차 헌법수정안을 서둘러 마련한 이유는. ▲국민들이 경제위기및 전쟁위기 상황하에 있을때는 강력한 정부,강력한 지도력을 원했지만 일단 모든 것이 정상상태로 회복된 후에는 큰 정부의 필요성도,집중된 권력의 필요성도 인정치 않았기 때문에 견제와 균형의 기본원칙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 광양 컨테이너부두 11년만에 준공/5만톤급 4척 동시접안

    ◎부산항 만성적체 해소될듯 전남 광양항 1단계 컨테이너부두가 5일 고건 국무총리,김태식 국회농림수산위원회 위원장,조정제 해양수산부 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을 갖고 운영에 들어갔다. 부산항과 양항체계로 운영될 이 부두는 87년부터 공사비 5천억원(정부 2천87억원,컨테이너공단 2천9백13억원)을 들여 11년만에 준공됐다. 5만t급 선박4척을 동시에 접안할 수 있다.안벽 1천400m,야적장을 포함한 터미널부지 84만㎡를 갖추고 있으며 연간 96만TEU의 화물을 처리할 수 있다. 부두개발을 위해 각 1백67억원씩의 부두개발채권을 매입한 한진해운 현대상선 조양상선 대한통운 등 4개사가 1선석씩 맡아 전용으로 운영한다.해양부는 광양항 1단계 부두 준공으로 부산항에 집중되던 화물이 이곳으로 분산돼 부산항의 만성 체화현상을 크게 덜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광양항 2단계 사업은 오는 2001년까지 추진되며 5천2백65억원을 투입,5만t급 4선석,2만t급 4선석,배후도로 1.5㎞가 건설된다.
  •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미국의 대통령 문화:2)

    ◎절제·조화의 지도력 후세의 귀감/3연임 사양 민주주의 초석 다져… 국부 추앙/고향 마운트버논서 매년 귀향 환영연 재현 “여러분은 오늘 저녁 장군님의 추수감사절 만찬에 초대되셨습니다.칠면조를 즐기시고 장군님과 함께멋진 촛불 잔치로 결실의 기쁨을 감사하십시요” 안내원의 따뜻한 환영을 받으며 들어선 다이닝 룸의 대형식탁 위에는 잘 쪄낸 통통한 칠면조를 중심으로 갖가지 음식들이 차려져 있다.벽 주위 창가에는 촛불들이 환하게 켜져 있다. 200여년전 미 독립전쟁 영웅 조지 워싱턴 장군의 두차례에 걸친 역사적인 귀향을 맞이하던 때처럼 마운트 버논에서는 지금도 매년 추수감사절부터 크리스마스까지 밤마다 촛불 향연이 펼쳐진다. 조지 워싱턴의 첫번째 귀향은 1783년 12월.8년 동안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총사령관이었던 그는 왕으로 추대하려는 자기 부하들의 간청과 합중국의 새정부를 이끌어야 한다는 국민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홀연히 대륙회의에 군통수권을 반납하고 고향인 마운트 버논으로 돌아온다.원칙에 투철했던 그에게 총사령관 임명 당시 “전쟁이 끝나면 돌아가리라”던 자신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물론 정치인보다 농부로서의 삶을 더 갈구한 그의 본성도 작용했다. 두번째 귀향은 1797년 3월.8년의 대통령 두 임기를 마친 직후였다.혼신의 열정으로 불안했던 신생 미합중국을 확실한 독립국가로 기틀을 잡아놓아 변함없이 국민적 영웅으로 열광을 받는 그는 온국민들로부터 계속 재임하라는 압박을 받았다.그러나 그는 단호히 거부하고 다시 마운트 버논으로 돌아왔다.이처럼 마운트 버논은 워싱턴에게는 신비스런 힘의 원천이면서도 늘 회귀본능을 자극해왔다. 국민들과의 아쉬움속에서의 작별은 워싱턴을 국부로 추앙케 했다.또한 그의 강렬한 시민민주주의 정신은 미국의 기본정신이 되었고 그가 남긴 절제의 지혜와 조화의 지도력은 후세 미 정치지도자들에게 훌륭한 귀감으로 자리매김 해왔던 것이다. 1732년 워싱턴DC 남쪽 포프스 크리크라는 곳의 담배농장주 아들로 태어난 워싱턴은 11세의 어린 나이로 부친을 여의고 모친과 함께 농장과 다섯 동생을 돌봐야 했다.정규교육은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그는 성실하고 근면했으며 수학을 좋아했고 16살부터는 측량기사로 취직생활을 했다.군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세때 버지니아 민병대에 가담,영국군의 프렌치-인디언 전투에 참가하면서부터였다. 6년간의 민병대 생활을 마치고 민간인으로 돌아온 그는 버지니아 시민의회 의원,대륙회의 의원 등으로 활약하다 영국과의 사태가 악화되면서 75년 대륙회의에 의해 대륙육군 총사령관에 임명된다.이후 그는 엄청난 열세의 군대를 이끌고 강인한 인내와 탁월한 지도력으로 막강한 영국군을 끝내 물리치고 전쟁영웅으로 부상한다.그러나 그는 명예로운 은퇴를 택했으며 그로부터 6년후인 1789년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추대된다. 이무렵 미국땅에 타오른 국민주권주의 불길은 그해 말 전제정치의 억압에 신음하던 프랑스로 번져나가 프랑스혁명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마운트버논 맨션 현관에는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이 된 바스티유감옥의 열쇠가 기증돼 벽에 걸려 있어 미국민의 자존심을 한껏 높여주고 있다. 이 혁명을 주도한 파리 국민군사령관 라파예트 장군은 이듬해 이 열쇠와 바스티유 함락도를 워싱턴대통령에게 선사하면서 편지를 동봉했다.“친애하는 장군님,제가 함락을 명했던 바스티유의 파괴된 그림과 그 열쇠를 기증합니다.이것들은 제가 장군님께 빚진 덕에 얻어진 것입니다” 당시 전달을 맡았던 토마스 페인은 “미국의 원리와 원칙들이 유럽에 이식되어 거둔 첫열매가 프랑스혁명 입니다.그것들이 바로 바스티유감옥을 열리게 했습니다.그러므로 이 열쇠는 있어야 할 제자리로 온 것입니다”라고 후에 기록했다. 워싱턴은 이같이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존경을 받았으며 이는 신생 미합중국의 위상을 드높이는 계기가 됐다.또한 그의 두번 임기 정신은 2차대전중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4선 연임을 한 것을 제외하고는 이후의 대통령들에게 불문율의 전통으로 남게 됐다.미국 대통령은 1789년 초대 조지 원싱턴의 취임을 시발로 현재의 42대 빌 클린턴 대통령까지 208년 동안 모두 41명.대수와 명수가 틀린 것은 22대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한 임기를뛰어 24대 대통령을 또 역임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순위 매기기를 좋아하는 미국인들은 이들 역대 대통령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다.국부로 떠받들여져온 워싱턴은 대통령랭킹 조사에서 에이브러햄 링컨,프랭크린 루즈벨트와 함께 빅3로 불린다.어떤 조사던 상위 셋은 이들이 차지하고 있다.올봄 719명의 역사학자들을 대상으로 ▲지도력 ▲업적및 위기관리능력 ▲통치기술 ▲인재등용 ▲퍼스낼리티 등 5개분야로 나누어 점수를 매기고 종합점수를 산출한 라이딩스&매키버 조사에 따르면 1위는 링컨(16대),2위는 루즈벨트(32대),3위가 워싱턴으로 돼있다. 4위는 토마스 제퍼슨(3대),5위 테어도어 루즈벨트(26대),6위 우드로우 윌슨(28대),7위 해리 트루만(33대),8위 앤드류 잭슨(7대),9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34대),10위 제임스 매디슨(4대) 순으로 나타나 있다. 97년의 또 다른 조사인 위팔드의 조사와 96년 슐레진저 조사에는 10위까지에 매디슨 대신 제임스 폴크(11대)가,95년 닐의 조사에는 로널드 레이건(40대)이 포함되는 등 약간의 차이가 있을뿐 각 조사가 대체적으로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라이딩스 & 매키버 조사에서 워싱턴의 랭킹을 분야별로 보면 인재등용에서만 1위를 기록했고 퍼스낼리티 2위,지도력과 업적및 위기관리 3위,통치기술 7위를 보이고 있다.역사가들은 워싱턴의 토마스 제퍼슨 국무장관,알렉산더 해밀턴 재무장관,존 제이 대법원장 등 선택을 가장 환상적인 인선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당선 당시 국민적 성원을 한몸에 안고 취임했던 이들 대통령들에 대한 재임 4년후 혹은 8년후 국민들의 반응은 천차만별로 나타났다.워싱턴,프랭클린 루즈벨트와 같이 재임을 강요받을 만큼 성원을 받은 대통령이 있는가 하면각료들의 부정부패로 손가락질을 받은 워렌 하딩(29대)이 있고,무능한 대통령의 대표로 꼽히는 프랭클린 피어스(14대)는 고향주민들로부터 귀향 환영식조차 거부당할 정도로 배척된 대통령도 있다. 그러나 한가지 공통적인 것은 그들의 업적,능력,평판에 관계없이 미국의 대통령들 모두는 당대 역사의 주인공으로 한결같이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그들의 생가와기념관,도서관 등에 생애 모든 자료들을 집대성 해둔채 잘 보존하고 있으며,미래의 교훈으로 훌륭히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하이오대 역사학 교수 데이비드 스테베니/“역대 대통령 행태 분석 필요”/순위매김 바람직한 상정립에 무의미 미국의 대통령학을 연구하고 있는 오하이오대학 역사학 교수 데이비드 스테베니는 대통령랭킹 조사에 대해 회의를 표시했다. ­대통령들에 대한 순위조사는 언제부터 행해졌는가. ▲1948년 트루만 대통령의 첫임기가 끝날 무렵,아서 슐레진저 교수가 55명의 탁월한 역사학 교수들을 선정,그들에게 역대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요구한데서 시작됐다.당시 슐레진저는 취임후 수개월내에 사망한 윌리엄 헨리 해리슨(9대)과 제임스 가필드(20대)를 제외한 30명에 대해 훌륭함,보통훌륭함,평균,평균이하,그리고 실패 등으로 순위를 매기도록 했다. ­이같은 순위조사의 신뢰도는 얼마나 있다고 보는가. ▲대통령 자신의 능력과 시대적 상황,또한 업적 등에 대한 측정 기준이 모호한 가운데 순위를 매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또한 조사대상에 따라서도 차이가 심하다.한예로 역사학자들을 대상으로 할 때와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할 때 많은 차이가 난다.존 F.케네디(35대)나 레이건의 경우 학자들의 평가는 그다지 높지 않은데 시민들의 평가는 매우 높다. ­대통령들의 평가 순위가 변하는 이유는. ▲근본적인 큰 변화는 없지만 퇴임 이후의 업적이나 시대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늘 유동적이다.허버트 후버(31대)의 경우는 대공황의 여파로 초기에는 낮은 평가를 받았으나 퇴직후 32년동안 생존하면서 국제구호단체를 통한업적 때문에 평가가 좋아졌다. ­국부로 추앙받는 워싱턴이 링컨에게 순위에서 항상 밀리는 이유는. ▲그것은 응답자들이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달려 있다.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워싱턴의 건국 자체보다는 링컨의 국가 분열을 막은 업적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순위조사의 필요성이 있는 것인가. ▲순위 자체의 의미보다 바람직한 대통령상의 정립을 위해 과거 대통령들의 행태를 비교분석하는 일은필요한 일이다.
  • “대선 불법·탈법 엄단”/김 대통령,국회 예산안제출 시정연설

    김영삼 대통령은 20일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불법·탈법 행위도 법에 따라 엄정하게 다뤄질 것”이라고 밝혔다.〈관련기사 4면〉 김대통령은 이날 제185회 정기국회 본회의에서 고건 국무총리가 대독한 ‘98년도 예산안 제출에 즈음한 시정연설’을 통해 “선거가 그 어느 때보다 깨끗하고 공명정대한 선거가 되도록 엄정하게 관리할 것”이라며 이같이 밝히고 “선거분위기에 편승해 사회기강이 해이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대통령은 “정치적 전환기에 비리와 부정은 물론 무사안일·보신주의 등 해이된 공직기강에 대해 엄중하게 대처할 것”이라며 “사회질서를 문란케 하는 각종 탈법행위와 함께 성폭력·학교폭력·조직폭력 등 민생침해사범에 대해 끝까지 추적,엄단해 민생안전을 이루겠다”고 밝혔다. 김대통령은 경제문제와 관련,“지금의 어려움을 우리 경제의 체질개선을 위한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구조조정 노력을 강화해나가야 한다”며 “정부와 기업 모두가 구조조정의 과정에서 오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본회의는 사임한 백남치 건설교통위원장 후임으로 신한국당 김종하 의원을 선출했다. 본회의는 또 정치개혁입법특위의 활동시한을 이달말까지로 연장키로 의결했다. 국회는 21일부터 사흘간 신한국당 이회창 총재,국민회의 박정수 부총재,자민련 김종필 총재 순으로 원내교섭단체 대표연설을 들을 예정이다. ◎김종하 국회건교위원장/언론인출신 4선… 이 총재 경선승리 한몫 온화한 인품에 합리적인 사고력을 가진 언론인 출신의 4선의원.주요 당직 인선에서 줄곧 하마평만 오르다 대선을 앞둔 정기국회에서 상임위원장으로 선출됐다.지난 당 경선에서 민정계 모임인 ‘나라회’ 공동대표를 맡아 이회창 총재의 당선에 일조했다.부인 강귀희 여사와 2녀.평소 파이프 담배를 즐긴다.▲경남 창원 63세 ▲서울대 정치학과 ▲신아일보 정치부장 ▲10,11,14,15대 의원 ▲신한국당 당무위원.
  • ‘캐드캠·그래피디아 97’ 출품작 4선

    ◎21세기 산업혁명 컴퓨터 그래픽이 이끈다 캐드캠 ’97 및 그래피디아 ’97 전시회에서 선보일 제품들을 둘러보면 컴퓨터 기술이 부른 산업현장의 혁명적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제품 및 건축설계,제조 등의 과정에서 활용되는 고난도 소프트웨어들을 비롯,컴퓨터 주변기기,3차원 그래픽 소프트웨어 등 다양한 첨단 제품들이 망라돼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전시될 주요 제품들을 미리 알아본다. ◎CLC­1000/예열기간·복사속도 단축/이미지 선명도 대폭 높여 복사 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이고 작업안정성을 크게 향상시킨 프린터.토너 컬러마다 두개의 자동 토너 감지기를 사용,복사본끼리나 확장복사에서 일정한 농도를 유지시켜 준다.또 새로 개발한 고주파 마이크로 레이저를 장착,화질을 향상시켰다.레이저 점의 크기를 더 작게 해 이미지의 선명도를 높인 것이다. 이 제품은 또 어떤 문서라도 한장에서 999장까지 복사장수를 설정한 대로 대량복사할 수 있다.토너와 용지를 인쇄중에 갈아 줄 수 있게 설계돼 있어 사용이 편리하다. 무엇보다 이 제품의 장점은 짧은 복사시간.예열시간과 대량복사를 위해 해야했던 복잡한 프로그래밍들을 크게 단축했다.복사버튼을 누르면 15초안에 모든 복사가 끝난다. ◎아키캐드/2·3차원 설계작업 동시에 건축물 시뮬레이션 최적 건축전용 컴퓨터 응용 설계부문 소프트웨어.2차원과 3차원 설계작업을 동시에 할 수 있어 강력하다.예컨대 2차원 평면도로 그린 벽에 두께,높이,재질 등을 설정해 주면 3차원 영상으로 바뀌어 나타난다. 또 입면도와 단면도의 자동 생성기능도 있다.구조물을 자르는 방향과 위치를 설정해 주면 된다.머티리얼 메뉴를 사용,무궁무진한 건축 재질을 자체 제작할 수 있어 건축물 시뮬레이션에 활용할 수 있다.라이브러리 기능은 창문,가구,나무,자동차,사람 등 건축물과 조화를 이뤄야할 다양한 요소들을 모아놓고 각 요소들마다 크기,색상을 개발자가 임의로 설정,조화여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시네마 4D/3차원 애니메이션 SW/호환폭 넓고 렌더링 빨라 3차원 애니메이션 제작 소프트웨어다.영화,방송타이틀,만화영화,게임 등 응용분야가 광범위하다. 이 제품은 프레임단위의 그림작업(렌더링)의 속도를 크게 단축한 것이 장점.회사측은 현존하는 애니메이션 소프트웨어 가운데 가장 빠르다고 말한다.윈도95,윈도NT,매킨토시,DEC알파칩,SGI 등 호환 폭이 무척 넓다. 각종 특수 효과 기능도 있다.▲혜성의 꼬리같은 특이한 영상을 구현해주는 파티클 애니메이션 기능 ▲잔상효과를 주는 모션 블러 기능 ▲사람과 동물의 동작을 쉽게 표현해 주는 스켈리튼 앤드 본즈 기능 등이 그것들이다. ◎파워애니메이터/캐릭터 애니메이션 도구/영상변조 특수효과 탁월 3차원 그래픽 관련 소프트웨어 유통업체.이번에 전시할 제품으론 3차원 애니메이션 제작 소프트웨어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알리아스/웨이브프론트사의 파워애니메이터 등 7개 제품이다 파워애니메이터는 캐릭터 애니메이션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특수효과기능도 탁월해 영화 ‘배트맨과 로빈’제작에도 쓰였다.같은 회사 제품인 ‘스튜디오 페인트 3D’는 파워애니메이터로 만든 3차원 모델을 불러서 페인팅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다. 이밖에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 ‘코리피우스’,3차원 게임 제작 소프트웨어 ‘니치만 그래픽스’ 등 5개 제품도 등장한다.
  • 강삼재 총장 인터뷰/“이인제 지사 따라 누가 가겠나”

    ◎중진협 4선중량급 포함 20여명선 구성/대통합정치의 정신은 내각제 뜻 아니다 신한국당의 강삼재 사무총장은 17일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추석연휴 이후의 대선 전략 등을 밝혔다. ­이인제 경기지사 탈당후 수습책은. ▲이지사의 출마에 대해서는 광범위한 비난여론이 형성되는 것을 느꼈다.또 이를 계기로 4백만 당원사이에 어려울수록 힘을 합쳐야 한다는 분위기도 형성되고 있다. ­이지사 동반탈당 대책은. ▲원내에서야 누가 따라가겠나.일부 강경한 원외위원장들이 당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나간다해도 명분이 없기 때문에 공감을 얻지 못할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의 총재직 사퇴는. ▲김대통령은 오는 30일 전당대회전에 당사를 방문,당무회의를 주재한뒤 총재직 사퇴서를 제출할 것이다. ­개정되는 정강정책에 내각제 수용의 뜻이 반영되나. ▲이대표가 밝힌 대통합 정치의 정신이 담길 것이다.대통합이 내각제라는 뜻은 아니다.이대표가 정강정책에 대해 특별한 주문을 하지 않았다.정강정책개정소위가 가능한 모든 경우를 포함한다양한 안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지도체제는. ▲이대표가 제기했던 민주적 당운영 방안들이 함께 검토될 것이다. ­중진협의회 구성은. ▲경선출마자들과 5선급이상 의원을 모두 포함,20여명 정도의 협의체를 구성할 계획이다.4선 가운데도 중량급 인사가 포함된다.협의회에서 모아진 의견을 당무에 반영할 것이다. ­이지사 독자출마에 대한 김대통령의 반응은. ▲이지사의 마지막 전화를 받은뒤 김대통령이 내게 두번이나 전화했다.더할수 없이 허탈해하는 음성이었다.나와 이지사는 김대통령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다.최소한 그러지는 말아야 할 사람이,최소한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한데 대해 김대통령은 큰 충격을 받고 갖가지 상념에 젖은 것 같다.
  • 이 대표 대선 진군행보 힘 붙었다

    ◎오늘 대통합정치 후속조치·정치개혁 천명/당 지도체제 대폭 손질… 결속·단합 강조할듯 김영삼 대통령의 ‘9월말 총재직 이양’천명이후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의 행보에 탄력이 붙고 있다.그 첫발로 이대표는 10일 상오 기자회견을 통해 집권당 대선후보로서 정국 구상을 선보인다.당초 예정에 없던 일정으로 8일 밤 총재직 이양 방침 발표직후 마련됐다.이대표측은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도 몇시간 앞서 기자회견을 갖는 점을 고려,치밀한 사전전략을 짠 것으로 알려졌다. 회견에서 이대표는 당내 결속을 강조하고 대통합정치의 후속조치와 정치개혁방안 등에 대해 진일보된 견해를 밝힐 예정이다.돈 안드는 정치와 깨끗한 선거풍토 실현을 위해 지정기탁금 문제 등 여야간 현안에 대해 특단의 결단을 내리는 방안도 강구중이다.이인제 경기지사 등이 제안한 당내 민주화와 당 개혁 방안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제시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대표는 이날 기자들에게 “기대해도 좋을 것”이라고 말해 ‘대바구니’에 모종의 카드가 담겨 있음을 시사했다.강재섭 대표정치특보도 “함구령이 내려 공개할 수는 없지만 알맹이 있는 회견이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다른 측근은 “광의의 대통합 방안이 제시될 것”이라면서 “복수부총재나 복수최고위원제를 도입할지,도입한다면 직선제인지 임기제인지,대선전에 할지 대선이후에 할지 고심중인 것으로 안다”고 말해 이대표가 당지도체제에 대해서도 뚜렷한 복안을 피력할 것임을 암시했다. 이대표는 또 총재직 이양 이후 대선행보의 밑그림도 펼쳐 보인다.윤원중 대표비서실장은 “총재직이 이양되면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당내 문제는 정리될 것”이라고 내다봤다.이지사 등 일부 인사들의 독자행동에 더이상 연연하지 않겠다는 의미다.고흥길 대표특보는 “총재직 이양 이후 이대표는 명실상부한 대선후보 행보에 전념하며 당내 문제는 후임대표에게 맡길 것”이라고 밝혔다.이와관련 이대표는 이날 김진재 강용식 심정구 이웅희 서정화의원 등 3,4선급 의원들과 가진 구기동 자택 조찬에서 “당화합을 위해 중진들이 허리역할을 해달라”고 당부,총재직 이양을 전후해 중진들의 역할론을 강조했다.특히 이대표는 당 총재 자격으로 다음달 21일 국회 교섭단체대표 연설을 한 직후 의원직을 내놓고 불퇴전의 각오를 다질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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