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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일 TV 하이라이트]

    ●!느낌표(오후 9시45분) 인천지방경찰청에서 근무하는 경찰들을 상대로 ‘효짱’을 찾아나선다.여순경들이 털어놓는 자신들만의 고민거리가 공개되고,일선에서 활약하는 형사들이 말하는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도 이어진다.‘아시아!아시아!’코너에서는 특집으로 중국 숙주에서 살고있는 일본군 위안부 곽예남 할머니의 ‘60년만의 귀향’을 준비했다. ●씨네24(낮 12시25분) 누구나 한 번씩은 해볼만한 상상을 토대로 한창 제작중인 영화 ‘내 남자의 로맨스’ 촬영 현장을 찾아간다.‘대한민국 최고의 코미디 여왕’으로 등극한 김정은과,진지하고 깊이 있는 연기로 팬층을 확보하고 있는 배우 김상경이 함께한다.‘자유,독립,소통’ 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2004년 전주 국제영화제를 소개한다. ●애니토피아(오후 9시10분) 제5회 전주국제영화제(JIFF)가 오는 23일부터 열린다.‘독립정신’을 주제로 열리는 이번 영화제에서는 35개국에서 출품된 250여편이 전북대 문화회관과 영화의 거리 등 전주 시내 일원에서 상영된다.소개되는 작품에는 어떤 애니메이션이 있는지,그 작품들을 미리 만나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한다. ●뮤직n조이(오후 6시) 앨범 홍보차 처음으로 한국을 찾는 세계적인 R&B스타 ‘어셔’.99년 첫 앨범을 발표한 이후 감미로운 목소리와 파워댄스를 겸비한 신세대 스타로 팝계를 주름잡아 온 그를 만나본다.우리 나라의 신세대 가수 비,세븐,휘성 등 많은 스타들이 자신들의 음악적 모델로 삼고 있다는 뮤지션 어셔.그동안 그가 보여준 멋진 라이브무대를 만나본다. ●솔로몬의 선택(오후 6시50분) 혼자서 비디오로 작성한 유언,아들에게 대필을 부탁한 유언,유언자 스스로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한 유언,이름대신 별명으로 작성한 유언 중에서 유언으로 효력이 있는 것은 어떤 것인지 살펴본다.이밖에 커플 여행을 가기로 했다가 여행이 취소될 경우 여행 취소와 관련한 위약금을 배상받을 수 있는지 살펴본다. ●속 보이는 밤(오후 10시) 복잡하고도 미묘한 사람의 속마음,극과 극을 오가는 인간의 심리,그 심리의 세계로 가는 지름길을 안내한다.‘사과 따는 사람’그리기를 통해 알아본 스타의 인간관계,사랑,돈.스타들의 개성만큼이나 다양한 그림들 속에 감춰진 결과를 공개한다.그리고 미술치료 전문가의 재치 넘치는 해석으로 숨겨진 스타의 속마음을 들여다본다. ●무인시대(오후 10시20분) 두두을은 이의민에게 자선의 죽음과 양민학살을 한 죄를 질타하며 이제 이의민과의 인연을 끊어버릴 것이라 한다.박진재는 암살을 도모하는 최충수를 찾아가 음모가 발각되었으니 거사를 포기하라 말한다.최충헌은 최충수와 함께 이지영을 찾아가 명백한 증좌도 없이 우봉가문에 누명을 씌우지 말라며 항의한다. ˝
  • 백설공주 오승현의 수다

    누군가의 ‘아류’라는 소리를 듣는 것만큼 배우로서 실속 없는 일도 없을 것이다.그런 점에서 오승현(26)은 무척 경쟁력있는 연기자다.172㎝·48㎏의 시원스러운 몸매,얼굴 전체를 다 덮을 것 같은 선 굵은 이목구비,야무진 말투 등 당당하고 세련된 도시적 이미지는 그녀만의 강력한 브랜드다. 출연작부터 살펴보자.드라마 ‘루키’‘잘난걸 어떡해’‘그대를 알고부터’‘스크린’‘천생연분’,영화 ‘킬러들의 수다’,현재 출연중인 드라마 ‘백설공주’까지….여러가지 색깔이 뒤섞인 우중충한 분위기와는 전혀 거리가 먼 작품들이다.같은 색이 겹겹이 덧칠돼 더욱 화려한 광채를 발하는 느낌.새 영화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그녀는 오는 7월 개봉 예정으로 한창 촬영중인 영화 ‘내 남자의 로맨스’(감독 박제현 제작 메이필름)에서 한 여인(김정은)으로부터 7년 간 사귄 애인(김상경)을 빼앗는 인기 절정의 여배우 은다영 역으로 첫 영화 주연 신고식을 치른다. #‘날씨’같은 여자 말투가 시원시원한 것을 보니 똑 부러지는 성격같다. -활발하지만 혼자 있길 좋아하고,털털하고 낙천적이면서도 세심하다.주위에선 변화무쌍한 ‘날씨’같은 여자란다.적당한 긴장감을 줘 항상 새롭다나.(웃음)내숭떠는 짓은 딱 질색이다. 드라마 ‘백설공주’에서 엽기적인 모습의 추녀로 분장해 기존 이미지를 180도 뒤집었다. -그동안 따라다녔던 ‘럭셔리 우먼’‘부(富)티 걸’‘여우’ 등의 수식어에서 잠시 벗어나는 기회가 됐다.‘망가지는’ 모습에서 오히려 진정한 나를 찾은 듯한 느낌이었고,주위의 반응도 괜찮았다. 드라마 ‘천생연분’을 통해 영화에도 캐스팅되는 등 스타 반열에 올랐는데. -‘연기가 이런거구나.’하고 스스로 깨닫게 만든,평생 잊을 수 없는 작품이다.악역이지만 예상과 달리 ‘욕’을 먹지 않았다.나의 ‘진심’을 실어 연기한 것을 시청자들이 알아봐 주신 것이 아닐까. #이젠 ‘영화배우’오승현 영화에서의 첫 주연이라 욕심도 많겠다. -올해 안에 이름 앞 ‘탤런트’라는 수식어가 ‘영화배우’라는 말로 바뀌도록 혼신을 다해 연기하고 있다.영화속 배역처럼 실제에서도 최고의 영화배우가 됐으면 좋겠다. 어릴적부터 연기자를 꿈꿨나? -우연히 연기에 입문해 욕심이 생긴 케이스다.욕심이 계속 커지는 것을 보니 이런 경우가 더 무서운 것 같다.97년 슈퍼 엘리트 모델대회에서 입상했지만,쉬다가 2년 뒤 ‘길거리 캐스팅’돼 SBS 드라마 ‘루키’를 통해 데뷔했다.나중에 연기대상을 타면 내 인생을 바꿔놓은 SBS고흥식 감독 얘기를 꼭 할 것이다.(웃음) 짧은 연기 경력이지만 고비도 있었을 것 같다. -지난해 SBS 드라마 ‘스크린’에 출연하면서 연기를 그만둘까 심각하게 고민했다.드라마 첫 주연을 맡았지만 내 스스로 연기에 성이 차지 않아 매일 고민속에서 살았다.하지만 연기의 ‘맛’을 알게 되면서 연기자로서 한층 성숙해질 수 있었던 ‘터닝 포인트’가 됐다. #‘프로’가 되고픈 ‘깡순이’ 어떤 연기자로 남고 싶나. -진정한 ‘프로’연기자로 각인되고 싶다.정영숙 선배님처럼 눈빛만 봐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있게 만드는 그런 배우 말이다. 몸이 말라 건강 유지에 신경 쓰이겠다. -어릴적부터 심한 약골이었다.지금도 ‘추어탕’‘장어’‘홍삼’ 등 보신음식을 입에 달고 산다.하지만 ‘깡’하나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오승현만의 ‘남자’는 어떤 모습인가. -1남 3녀 중 막내라서 그런지 큰오빠 같이 나를 포근하게 감싸 줄 수 있는 남자를 만나고 싶다.솔직히 귀티나는 용모에 키가 컸으면 좋겠다.남자친구가 이미 있지 않으냐고요? 제 성격 알텐데? 생기면 제일 먼저 말씀 드리겠다.(웃음) 이영표기자 tomcat@ ■ 女봐라 “나 만큼 남자 파트너 복 많은 여배우 나와보라고요∼.” 오승현의 기(氣)가 엄청난 탓일까?연기경력이 4년 밖에 안되고 출연한 작품도 10편이 채 되지 않는 그녀지만,출연한 작품마다 당대 최고 인기의 남자 배우와 함께 하는 행운을 경험했다. 드라마 ‘루키’에서는 조재현·유동근·박정철,‘그대를 알고부터’에서는 류시원·이서진,‘천생연분’에서는 안재욱,영화 ‘킬러들의 수다’에서는 원빈·신현준·신하균 등과 호흡을 맞췄다. 오승현은 이들 드라마에 주로 조연으로 출연했지만,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톱 클래스 남자배우들 틈바구니에 끼어 단시일내에 안방극장 시청자들에게 얼굴을 알릴 수 있었다. 특히 이 남자배우들의 첫사랑을 빼앗거나 그들의 연인관계에 개입해 분위기를 흐리는 ‘악역’으로도 출연하면서,시청률 상승을 주도해 영화 ‘내 남자의 로맨스’ 주인공으로 전격 발탁되는 행운도 잡았다.오승현은 “내가 출연만 하면 작품 속 남자 파트너들은 톱 클래스 배우들로 포진하는 ‘징크스’가 생겼다.”면서 “곧 나 자신도 신인 남자 배우들을 상대로 ‘여복’징크스를 고스란히 물려줄 때가 오지 않겠느냐.”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영표기자 tomcat@˝
  • [조영증의 킥오프] 선수도 변해야 한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42위 몰디브와의 A매치 졸전의 후폭풍이 거세게 휘몰아쳤다.월드컵 4강의 자부심을 갖고 있던 국민들의 실망감은 컸다.대한축구협회는 책임을 물어 총지휘관인 움베르투 코엘류 감독의 경질 여부를 놓고 고민중이다.졸전에 대해 감독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전쟁에서 패하면 책임은 병사들을 지휘한 최고지휘관에게 돌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그러나 이와 함께 선수들의 정신자세도 다시 한번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아무리 훌륭한 지휘관이 있더라도 선수들이 이에 따라주지 않으면 모든 전술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국가대표 공격수로 일본무대에서 활약중인 안정환(요코하마)이 최근 자신의 홈페이지에 사과의 글을 올렸다.그는 “경기에 임하는 자세가 좋지 못했고,준비도 철저하지 못했다.”고 진솔하게 고백했다.그리고 “몰디브전을 거울삼아 앞으로는 더 이상 실망시키는 경기는 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빼놓지 않았다. 안정환의 ‘자아비판’적인 사과의 글이 한국축구의 발전을 위한 ‘채찍’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스포츠는 경기장 내에서의 상황변화가 심하다.축구도 마찬가지다.실제경기는 연습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따라서 선수들의 대처능력이 중요하다.상황변화에 적응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도 플레이를 그르칠 수밖에 없다.때문에 선수는 기술과 함께 정신력이라고 하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그리고 개인보다는 ‘우리’라는 마음가짐도 중요하다. 2002월드컵때 우리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4강 신화를 일궈냈다.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것은 능력이 뛰어났다기보다는 선수와 코칭스태프,그리고 온 국민 모두가 똘똘뭉쳐 “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후 월드컵 4강의 환상에 젖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월드컵 멤버 9명이 투입된 몰디브전을 비롯해 그동안의 A매치에서 대표팀은 월드컵 4강에 걸맞은 위용을 좀처럼 보여주지 못했다.특히 팀을 이끌고 위기에서 후배들을 독려해야 하는 고참들이 경기가 잘 풀리지 않으면 오히려 더 흥분하는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다.이런 행동은 팀의 응집력을 떨어뜨려 결국 경기를 그르치는 결과로 이어질 뿐이다. 올해 국가대표팀이 가야 할 길이 아직 멀다.2006독일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도 남아 있다.7월엔 중국에서 아시안컵도 열린다.한국은 44년 만에 우승을 노린다.이제 더 이상의 시행착오는 없어야 한다.이를 위해서는 선수들의 새로운 마음가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안정환 선수의 말대로 환상에서 깨어나 이제부터는 철저한 준비로 경기에 임해야 한다. 국제축구연맹(FIFA) 기술위원 youngj-cho@hanmail.net˝
  • [삶과 경영 이야기 ⑤] 유한킴벌리 문국현 사장

    유한킴벌리 문국현(55) 사장은 점심 시간도 아까워한다.이동하는 차 안에서 점심을 때우기 일쑤다.기자와 가진 인터뷰 시간도 오전 11시부터 오후1시30분까지로 정했다.집무실에서 샌드위치로 점심을 같이 하면서 얘기를 나눴다.하루를 ‘25시’처럼 쓰는 그의 일과는 삶과 경영의 현장이었다.생활 자체가 경영의 연속이었고,그의 경영은 생활이었다. 최근 유한킴벌리의 4조2교대가 일자리 창출의 새 모델로 부각되면서 눈코뜰새없이 바빠진 그에게 ‘너무 유명해져 힘든 것 아니냐.”고 묻자 “체력이 남아 있는 한 회사와 국가,가정을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유한킴벌리는 기저귀·생리대 등 유아·여성용품 전문업체로 유한양행과 캐나다 킴벌리클라크의 합작회사다.시장점유율이 60%대에 이른다.짧은 시간이었지만 ‘짧지 않은 이야기’를 들어봤다. ●경영을 곁눈질하며 자란 유년시절 -나는 서울토박이다.이승만 전 대통령이 초기에 살았던 서울 동소문동 3가 돈암장 옆에서 살았다.돈암초등학교와 동성중학교를 나왔다.아버지는 운수업체 3∼4개를 운영하셨고,어머니는 경제인 집안의 딸이었다.모친의 4촌 오빠가 임흥순 전 서울시장이었고,외숙부인 임홍순씨는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을 지냈다.경제인 집안의 피를 물려받은 셈이다.그래서 어릴 때부터 경영에 대해 주워듣는 기회가 남달리 많았다. -4남2녀 가운데 넷째인 나는 학창시절부터 사회봉사활동에 관심이 많았다.중동고등학교에 다닐 때에도 입시공부 못지않게 봉사활동을 많이 했다.친구들이 공부만 할 때 사회에 눈을 떴다고 할 수 있다.친구들이 ”너 봉사활동에 너무 매달리면 서울대에 못간다.”고 놀려댔지만,아랑곳하지 않았다.‘악담’이 맞았는지,가까운 친구들이 모두 서울대에 갔는데 나 혼자만 낙방했다. -한국외국어대 영어과에 들어간 뒤에도 사회봉사활동은 계속했다.총학생회,영미문학회 등에서도 활동했다.지금도 가끔 시를 쓰는 건 학창시절의 서클활동 덕분이다.대학에 다니면서는 영어와 경영학을 주로 공부했다.그래서 누가 물어보면 전공은 경영학,특기는 통역이라고 말하곤 한다. ●유한과의 인연 -ROTC(학군장교)로 군복무를 마칠 무렵 취직문제가 불거졌다.군 동기생들과 대학동창들은 주로 삼성·현대 등 대기업에 취직했다.하지만 나는 대학때부터 눈여겨 본 ‘유한’에 관심이 많았다.1971년 전 재산을 사회에 기증하면서 돌아가신 유한의 창업자 유일한 박사의 ‘윤리경영과 사회적 책임’이 마음을 사로잡았다.아버지 회사를 더 발전시킬 수도 있었지만 마음은 유한에 가 있었다.아버지도 유한에 대해서는 좋은 얘기를 많이 해주셨다.유 박사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도입한 종업원지주제,전문경영인제 등은 당시 기업으로서는 획기적인 사건들이었다. -삼성·태광·유한킴벌리 등 여러 곳에 합격했지만 결국 유한킴벌리를 택했다.72년이었다.지금으로 말하면 비서실에 해당되는 기획조정실로 배치받았다.다만,입사조건으로 대학원 진학을 허락받아뒀다.경영학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판단에서였다.나는 투자담당으로 고정자산과 신규 자산의 투자업무를 맡았고,유한양행의 장기 투자계획팀에 투입되기도 했다.이후 전산실장,기획조정실장 등을 맡으면서 회사의 경영진단과 발전전략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82년 기획조정실장을 마쳤을 때는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고 해외 유학을 떠나려 했다.어릴 때부터 꿈이었던 교수가 되기 위해서였다.입사한지 5년만인 77년 서울대에서 경영학석사를 받아두었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았다.하지만 회사가 이를 허락해 주질 않았다.“유한킴벌리를 위해 일을 같이 해야 하지 않느냐.필요하다면 1년간 안식년으로 해서 머리를 식히고 오라.”는 것이었다.고민 끝에 이를 받아들이고,해외로 떠났다.호주와 미국이었다.이때 미국의 경영혁신과 신기술(뉴테크놀로지) 경험을 했다.맑고 푸른 숲을 보면서 경제적 성과 못지 않게 환경·생태적 발전의 중요함도 깨닫게 됐다.기업의 사회적 책임도 느낄 수 있었다. ●끝내 교수의 꿈을 접고 -귀국 후 사업본부장,마케팅본부장 등을 맡으면서 ‘우리강산 푸르게’라는 캠페인을 시작했다.민둥산을 푸르고 울창하게 가꾸자는 이 운동은 초창기에는 정부측으로부터도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이 운동에 들어가는 사업비를 손비로 인정받지 못해 법인세(44%)를 물기도 했다.그러다 10년이 지난 94년부터는 손비로 인정받고 있다.이 운동은 98년 시민환경단체인 ‘생명의 숲’을 탄생시켰고,‘평화의 숲’(북한 나무 심기) ‘동북아 산림포럼’ ‘학교숲운동’ ‘서울 그린트러스트’ 등의 단체를 태동시키는 데도 밑거름이 됐다. -최근 붐이 일고 있는 일자리 창출의 일환인 ‘4조2교대’도 미국이 1929년 대공황 때 젊은이들의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도입한 숲가꾸기 운동(CCC)에서 착안했다.오늘날 미국이 수많은 국립공원(National Park)을 갖게 된 것도 이 운동 덕분이다.실제 우리나라에서도 나의 제안으로 98∼2002년 5년동안 외환위기 때 정부예산 1조원을 투입해 실직자를 산림녹화에 투입한 적이 있었다.적지 않은 보람이었다. ●위기를 기회로 -85년부터 95년까지 10년 남짓 회사로서는 위기였다.국내외 대규모 경쟁사들의 진입,수입품 범람,과잉설비 등으로 주종 제품인 기저귀와 생리대 등 유아·여성용품의 경쟁력이 뚝 떨어졌다.여기에다 노사갈등으로 노조가 본사를 점거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경영진과 중간관리자,현장 근로자간에 불신의 벽은 높아만 갔다.제품의 질이 수입품에 비해 떨어졌고 시장점유율은 절반으로 감소했다.이 와중에 신설된 대전 제3공장에 예비조,혁신조,평생학습조 등 ‘4조2교대’의 근무방식을 도입했다.부사장이었던 93년의 일로,당시로서는 혁신능력을 실험하는 새로운 경영기법이었다. -저간의 노력과 실험들이 성공한 덕분인지 95년 2월 10여명의 선배 임원진을 제치고 사장에 올랐다.신임 사장의 신고식은 간단치 않았다.시험대는 노조였다.대전공장에 이어 군포·김천공장에도 4조2교대 방식을 도입하려 하자 ‘구조조정을 위한 노림수’라며 직격탄을 퍼부었다.그러나 신뢰·윤리·투명을 경영철학으로, ‘도전과 혁신’을 생존전략으로 내건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다.4조2교대는 정착됐고,지금은 너도나도 벤치마킹(모방)하려 할 정도로 새로운 근무방식으로 자리잡았다. -그 결과 지난해 매출액 7036억원,순이익 904억원이라는 성과를 거뒀다.96년과 비교하면 각각 2배,6배나 되는 수치다.유한킴벌리는 이제 아시아 제일의 기업이 되기 위해 2005년도의 미래상으로 인력과 근무환경,신용 및 재무능력,성장 및 투자효율,시장점유율(40%),매출액(1조 6000억원) 부문의 1위를 목표로 하고 있다. ●준비된 CEO,비전 제시만이 살길 -외환위기는 유한킴벌리로서는 또 하나의 기회였다.4조2교대를 통해 업무 효율을 높여나갔고,고정자산 투자 등도 환율이 달러당 800원대였을 때 대거 집행했다.때문에 환율이 1800∼2000원대로 뛰었을 때는 투자할 필요가 없어져 그만큼 돈을 아낄 수 있었다.미리 준비한 덕분이었다. -요즘 말하는 기업가 정신도 좁게 보면 창조적인 개척정신,창업정신을 말한다.지속가능하게 하려면 사회적 책임을 소화하는 창조적 경영을 해야 한다.CEO는 신뢰와 전문성(기술),비전을 가져야 한다.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앉아 있으면 항상 먼 곳을 보며 대비해야 한다.두달에 한번씩 ‘미디어사보’(비디오)를 만들어 팀장과 사원들에게 회사의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일을 잊지 않는다.신뢰와 투명경영을 위해서다.기업가 정신을 가진 CEO는 회사의 경영방식을 국가적 개념에서 접근한다.나는 우리나라를 아시아의 보석으로,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합친 나라로 가꿔 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주병철기자 bcjoo@seoul.co.kr ■문국현 사장은 문 사장은 골프를 치지 않는다.숲가꾸기, 운동하기도 바쁘다고 한다.산책,등산,여행이 취미다. 주변에서 그를 지켜본 사람들은 그를 ‘냉혈한과 열혈한의 잡탕’이라고 말한다.장소·일·사람에 따라 스탠스(입장)의 다름이 분명하다.일할 때는 냉정하고 열정적이어서 용광로에 비유된다.냉정할 때는 얼음장으로 통한다.의사결정은 차갑게,토론은 뜨겁게 하라고 직원들에게 주문한다.성격이 급해 스스로 다혈질로 분류한다. 공사(公私) 구별이 워낙 분명해 친구나 친·인척들은 그의 주변에 얼씬거리지 못한다.동창회 등에 나가면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로 넘어간다. 밤늦게 들어가지만 가족들과 1시간 이상 대화를 나눈다.술·담배는 못하지만,대화는 즐기는 편이다. ˝
  • ‘청소년음악회’ 3년 프로젝트 맡은 피아니스트 김대진

    피아니스트 김대진(42·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은 누구보다 정통 클래식 레퍼토리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연주인이다.소팽 피아노 협주곡 전곡연주(99년),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일 전곡연주(2000년),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전곡 도전(2001년) 등 지금까지 보여온 행보가 이를 입증한다. 하지만 이 길이 그가 추구하는 음악의 전부는 아니다.클래식의 정통성을 고집하면서 한편으론 늘 클래식의 대중화를 고민한다.팬과 대화하며 연주하는 ‘교감’시리즈나 어린이 합창단과 정상의 연주자가 함께 꾸미는 ‘크리스마스 음악회’ 등은 클래식과 관객의 거리를 좁히고자 하는 그의 바람을 담아낸 소박한 무대들이다. ●17일 첫 공연… 연주·지휘·해설 1인3역 음악적 깊이와 넓이를 동시에 추구하는 그의 남다른 욕심이 이번엔 청소년과 일반인을 위한 ‘음악교실’로 이어졌다.예술의전당이 기획한 ‘청소년음악회’가 그 무대.오는 17일 오후 5시 첫 공연을 시작으로 2006년까지 3년간 18차례(매월 셋째 토요일,방학 기간은 제외)에 걸쳐 열리는 장기 프로젝트다.그는 무대에서 연주자와 지휘자,해설자의 1인3역을 도맡는다. “초등학생때 TV에서 레너드 번스타인의 청소년 음악회를 즐겨봤어요.그때 ‘나도 나중에 저런 음악회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이렇게 기회가 찾아오니 기대감과 함께 부담감이 큽니다.” 예술의전당 ‘청소년음악회’는 올해로 15년째를 맞는 장수 프로그램.지금까지 1년 단위로 레퍼토리를 반복하던 고정 형식에서 탈피해 과감히 새로운 기획을 시도했다.음악의 본질에 좀더 다가가고,폭넓은 관객층을 개발하려는 취지에서다. ●10년후에도 자연스럽게 음악회 찾도록 하고파 그는 “청소년음악회라는 타이틀을 내건 연주회는 많지만 학교 숙제용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면서 “10년전 청소년음악회에 왔던 학생들이 어른이 된 후에도 자연스럽게 음악회를 찾도록 만드는 것,즉 클래식 인구의 수명을 늘리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기존 청소년음악회와 달리 ‘절반은 음악회,절반은 수업’처럼 진행되는 방식도 독특하다.무대 뒤 스크린에 노트북을 연결해 이론 강의를 하면서 연주를 병행한다. 첫해에는 ‘솔로에서 합주까지 다양한 연주형태들’이라는 주제아래 독주,이중주,삼중주에서 오케스트라까지 다양한 규모와 형태의 연주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으로 짜여졌다.내년에는 ‘오보에에서 하프까지 특별한 악기들’을,그리고 내후년에는 ‘바로크에서 현대까지 서양음악사’를 연대별로 짚어볼 예정이다.청소년음악회라는 이름이 붙긴 했지만 학생뿐 아니라 클래식에 처음 입문하는 일반인에게도 유용한 프로그램이다. “클래식 음악을 알고,좋아지는 과정은 자기 힘만으론 되지 않습니다.클래식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누군가 제공해야지요.클래식이 주는 감동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거기에 이르는 다양한 길을 찾는 것,저는 그것이 클래식의 대중화라고 생각합니다.” 본인은 극구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예술의전당측은 스타성있는 그로 인해 ‘오빠 부대’가 몰려오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다. ●‘클래식의 감동’ 훼손않고 다양한 접근 시도해야 그는 국내 공연문화의 활성화에도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일본과 비교했을 때 세계적인 솔리스트들은 우리가 훨씬 많지만 티켓 예매나 초대권 관행 같은 공연 문화는 뒤져 있다.”면서 “연주자와 관객,공연장 모두가 이런 문화를 깨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가장 자주 무대에 서는 연주자답게 올해 ‘청소년음악회’외에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전곡 시리즈’마지막 연주를 비롯한 각종 협연 공연이 빽빽이 잡혀 있다.지난 연말 크리스마스 콘서트에서 지휘자로도 데뷔한 그는 앞으로 지휘 분야의 경험도 점차 넓힐 계획이다.지난 82년 서울대 음대 재학중 도미해 줄리아드음대에서 석박사를 마친 그는 85년 로베르카자드시 피아노콩쿠르에서 1위에 입상한 뒤 미국·유럽 등지에서 활동하다 94년 귀국해 활발한 연주 활동과 후학 양성을 병행하고 있다.(02)580-1300. 글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
  • [서울광장] 누가 벼랑 끝에 서 있는가/김경홍 논설위원

    무릇 모든 권력에는 쏠림 현상이 있다.부자가 돈을 빌리기 더 쉽듯,있는 척해야 괄시받지 않는다.정치도 마찬가지.힘이 있는 쪽에 힘이 더 쏠리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번 총선에서는 독특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한마디로 나는 힘이 없고 가진 것도 없으니까 도와달라는 식이다.‘눈물정치’ ‘엄살정치’라는 생소한 용어까지 등장했다.한나라당이 ‘거여(巨與) 견제’를 주장하며 지지를 호소하는 것이나,열린우리당이 ‘거야(巨野) 부활’을 경계하며 옹색한 표정을 짓는 것이 그렇다. 우리 정치사에서 거여나 거야 상황이 빚어낸 정치발전은 미미하다.거여는 독선과 독재의 바탕이 되었고,거야는 국론을 결집시키는 데 실패했다.특히 대통령중심제 하에서 거여는 권력의 부패와 쏠림현상을 심화시켰고,거야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비효율의 정치 폐단을 초래했다.결국 거여를 뒤집으면 거야가 되고,거야를 뒤집으면 거여가 된다.또 거여나 거야를 선택해야 하는가. 천막 당사에다 공판장 당사,눈물과 엄살의 정치는 어디에서 비롯됐을까.이유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크게 두가지를 들자면 대통령의 권한이 정지된 독특한 국가 상황과 부패집단으로 몰린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그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대통령과 정치권에 대한 불신은 정치권력의 공백을 초래했고,그 권력의 공백에 시민사회,즉 유권자가 자리잡았기 때문이다.따라서 정치권이 잃어버린 권력을 돌려받으려면 시민사회를 향해 울면서 편을 갈라주기를 구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번 총선 과정에서 보스정치나 지역주의,금권에서 비롯된 권력이 눈에 띄게 사라져가고 있는 것은 획기적인 정치발전이다. 하지만 그 빈자리를 희망정치나 상생정치,이념과 정책의 정치가 자리잡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지금까지 정당들의 선거운동은 기껏해야 이미지나 감성에 호소하는 전략외에는 크게 드러난 것이 없다.더욱이 위기감까지 조성해 표를 구걸하는 한심한 전략도 노출하고 있다.내가 무엇을 하겠다는 자신감보다는 상대가 무엇을 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열등감을 부각시켜 정당의 존재를 확인받으려 해서야 되겠는가. 열린우리당의 정동영 의장은 최근 “벼랑 끝에 선 절박한 심정”이라면서 거야 위기감을 조성했다.한나라당도 당선예상 의석수를 줄여가면서 엄살을 피우기는 마찬가지다.오히려 고군분투하는 민주당이나 민주노동당이 지지율이 상승하고 있다면서 힘을 실어줄 것을 호소하는 반대 현상마저 빚어지고 있다.국회는 정파들이 모여 협조하고 견제하는 상생의 장이어야지,거대 정파의 독무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부자 몸조심하는 것인지,웃어야 할 쪽이 더 걱정이 많아 보인다.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이 감성에 호소하고 그릇된 정보와 엄살로 유권자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것도 일종의 자만으로 비쳐진다. 일반 시민들은 옷 한벌 사는데도 고민한다.색상은 어떤지,질감은 어떤지,다른 옷과 조화가 잘될 것인지.돈을 지불하는 순간까지도 망설인다.감성에 휘둘려 충동구매를 한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다.옷 한벌도 이런데 하물며 앞으로 4년동안 지역을 대표하고 국정과 민생을 좌지우지할 국회 권력을 동정이나 감성으로 선택해서는 안 된다. 김경홍 논설위원 정당들이 벼랑 끝에 서 있다고 엄살을 떨고 있지만,오히려 벼랑 끝에 서 있는 쪽은 시민 유권자들이다.총선 선거일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효능이 불확실한 과대광고나 이미지에 현혹되지 않는 것만이 유권자들이 벼랑 끝을 탈출하는 유일한 길이다. honk@˝
  • [삼성하우젠 K-리그 2004] 수원 차범근감독 9일 전북과 한판

    ‘차붐의 귀환’ 10년 만에 그가 프로축구 수원의 사령탑으로 돌아와 10일 전북과의 원정경기를 시작으로 K-리그에 다시 한번 출사표를 던진다. 차범근(51) 수원 신임 감독은 지난 1994년 11월12일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부천과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K-리그를 떠났다.당시 울산의 지휘봉을 잡은 4년간 남긴 기록은 55승50무46패.첫 해에 정규리그 2위를 차지한 것이 최고 성적이다. 독일 분데스리가 308경기에서 통산 98골을 넣으면서 ‘갈색 폭격기’로 명성을 날린 현역시절에 견주면 초라한 성적표.97년 1월부터 국가대표팀을 맡아 98프랑스월드컵 본선에 올랐으나 체코(1-3)와 네덜란드(0-5)에 연패한 뒤 사상 첫 대회 도중 해임이라는 멍에를 뒤집어 쓰기도 했다. 지금 차 감독이 손에 쥐고 있는 카드는 그 어느 때보다 좋다.‘폭주기관차’ 김대의를 영입,브라질 올림픽대표 출신 마르셀과 투톱으로 내세웠고,‘포스트 홍명보’ 조병국과 ‘거미손’ 이운재가 골문을 걸어 잠근다.일본에서 돌아온 고종수도 조만간 가세해 공수를 조율할 예정이다.스피드를 앞세운 공격축구를 선호하는 차 감독으로서는 팀내에 쓸 만한 인재들이 많다는 것도 행복한 고민 중의 하나.올림픽호 골잡이 조재진과 관록의 서정원,나드손·남궁웅·김동현 등 주전 공격수를 다툴 만한 선수들이 즐비하다. 반면 신임 감독 4명 가운데 1주일 늦게 데뷔하는 것이 부담이 되는 눈치.‘충칭의 별’ 이장수 전남 감독은 지난주 대구를 4-1로 격파하며 대박을 터뜨렸고,분데스리가 전우인 베르너 로란트(인천) 감독과 ‘히딩크 사단’ 정해성(부천) 감독도 승리를 따내지는 못했지만 경기 운영에서 합격점을 받은 상태.차 감독은 “컴백 무대를 앞두고 떨리고 흥분된다.”면서 “동계훈련을 통해 전력을 끌어올린 만큼 좋은 경기를 펼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팬들 앞에서 다시 선 차붐이 분데스리가 선수시절 못지않은 활약을 보여줄지 자못 기대된다. 홍지민기자 icarus@˝
  • 우리 꽃 따라 30년 김태정 한국야생화연구소장

    설악산 한계령 고갯마루,오전 11시.따뜻한 아침 햇살에 데워진 용담꽃이 천천히 봉오리를 연다.그러자,붓끝처럼 뾰족이 말린 자주색 꽃봉오리 안에서 커다란 호박벌 한 마리가 고개를 내민다.용담꽃이 매일 오후 2시쯤 꽃잎을 닫고 다음날 오전 11시쯤 봉오리를 여는 생태를 이용한 ‘얌체투숙객’이다. 그러나 용담꽃에 이보다 더 고마운 손님은 없단다.김태정(金泰正·62) 한국야생화연구소장은 “용담꽃은 수술과 암술이 길쭉한 몸통 안쪽 깊이 있어서 ‘밤손님’인 호박벌이 꽃가루를 다른 꽃으로 전해주지 않으면 수정이 불가능하다.”면서 “나 역시 그 호박벌처럼 우리 들꽃과 사람들 사이의 인연을 맺어주는 중매쟁이로 살고 싶다.”며 웃었다. ●목숨살린 이름모를 열매 찾으려 시작 그는 ‘국졸’이면서 ‘박사’다.‘걸어다니는 식물도감’ 김태정 소장은 학계에서도 “현장답사 경험만 놓고 보면 어떤 학자도 따르지 못한다.”고 한수 접어주는 인물.1971년부터 우리 들꽃을 카메라에 담고자 산과 들을 헤매고 다녔으니 벌써 30년이 넘는다.남녘끝 한라산에서 태백산 설악산 거문도 독도 백령도까지 휴전선 남쪽 땅은 밟아보지 않은 데가 거의 없단다.정부나 언론사가 민통선이나 휴전선,백두산 등지를 현장답사할 때면 으레 그에게 참가 요청 또는 문의가 들어온다. ‘한국의 자원식물’(전5권) 등 그동안 쓴 관련 서적이 60여권이고,찍은 사진도 100만컷을 넘는다.그 필름을 연결한다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3번은 왕복할 양이다.이 사진자료들은 학계에서 식물도감 등을 만들 때 고스란히 사용되는 귀중한 자료다.지난 84년에는 LA국제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관련책 60여권·찍은 사진 100만컷 김 소장과 우리 들꽃과의 인연은 18세 때인 19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16세 때부터 앓던 간염이 악화해 당시 김 소장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서울 큰 병원에서도 고개를 내저을 때,그가 마지막으로 매달린 것은 미심쩍은 민간처방이다.한동네 할아버지가 전해준 이름모를 열매를 복용하자 병은 일주일 만에 나았다.완치의 기쁨도 기쁨이었지만,그 힘든 병을 조그만 열매 하나가 간단히 고쳤다는 사실은 큰 충격이었다. 김 소장은 이후 롯데 ‘고구마깡’ CM송 등 CM송 작곡가로 활동하면서도 그때의 충격을 잊지 못했다.결국 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우리 들꽃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그 열매가 무엇인지 궁금했기 때문이기도 했지요.그러나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도 제 자리에 꿋꿋하게 핀 소담스러운 들꽃들을 보다가 그만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웃음)” ●야생화 찍느라 왼쪽눈 머는 것도 몰라 작고한 송주택 전 전북대 농대 식물분류학 교수를 스승으로 모신 김 소장은 밤에는 개인강의를 듣고,낮에는 산속을 누비고 다녔다.“스스로 좋아서 미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적어도 3대의 카메라에 필름 100여통,침구·취사도구 등 30㎏에 이르는 장비를 짊어지고 길도 없는 들과 산을 며칠씩 헤매고 다녔다.“한창때는 일주일에 네댓새를 현장에서 살았습니다.3월부터 10월까지는 주로 산에,나머지 겨울철 4개월 동안은 남녘 섬에 가지요.” 암벽에 핀 꽃을 찍으려다 추락해 다리를 다쳐도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는,외롭고 힘든 일이다.“그래도 이산 가면 더 좋은 꽃이 있고 저산 가면 더더욱 좋은 꽃이 반기는데 어쩝니까.집에 하도 안 들어가다 보니 나중에는 아이들 얼굴도 생경해졌지요.그래도 별 수 없어요.속된 말로 마누라 도망가는 것 무서우면 이짓 못합니다.(웃음)” 김 소장이 우리 산들을 돌아다니며 찍은 필름 가운데 지금 남은 것만 100만여컷.하루에 평균 1000컷은 찍었단다.“나중에는 종로세무서에서 ‘무슨 필름을 이렇게 많이 쓰느냐.탈세수법 아니냐.’며 조사나온 적도 있지요.” 필름값뿐만 아니라 20대도 넘게 부서뜨린 촬영용 카메라,여행경비 등으로 빚도 많이 졌다.“지금껏 쓴 돈을 합하면 집 두세 채는 거뜬히 살 수 있을 겁니다.80년대 후반에 인세 등으로 생활이 조금 피기 전까지는 빚쟁이 피해 다니느라고 고생 많이 했지요.” 그러나 현장에 나가 꽃만 보면 모든 고통이 일순간에 사라졌다.“산에 가면 잡념이 사라집니다.그럴 틈이 없어요.대부분의 꽃 촬영은 아침 한때 승부입니다.그 시간에는 미친 듯이 뛰어다녀야 합니다.다른 사람들도 ‘저이와 같이 현장 나가면 점심은 당연히 굶고 빨치산처럼 산만 타야 한다.’고 꺼리더군요.” 김 소장은 촬영에 너무 열중하다가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87년 민통선 북방지역 종합학술조사단에 참가했을 때였습니다.직사광선 속에서 모자도 안 쓰고 사진 찍으러 돌아다니다가 땀이 너무 많이 눈에 흘러들었나 봅니다.현재 왼쪽 눈은 아예 보이지 않습니다.그래도 카메라는 오른쪽 눈으로 찍으니 별 상관없잖아요?” ●미친듯 산속 누비고 다녀 ‘빨치산’ 호칭 그에게는 요즘 한 가지 고민이 있다.제 일을 누군가에게 물려줘야 할 텐데 아직 적임자를 찾지 못한 것.의욕적으로 덤비던 사람도 김 소장과 함께 3일만 현장 생활을 겪고 나면 도망가기 일쑤란다.“들꽃도 생명인지라 시시각각 변해요.내 뒤에도 누군가는 그것을 찍어서 남겨야 하는데….”우리 식물이,번식력도 강하고 병충해에 강한 외국산에 밀려 점차 빠르게 사라지고 있기에 안타까움은 더욱 크다. “모두들 조금만 더 우리꽃에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습니다.굳이 도와주지는 않더라도 제발 꺾거나 밟지는 마세요.꽃이 꽃으로 피는 이유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그렇게 하지 못할 텐데….어떻게든 자손을 이으려고 그렇게 고생하는,우리와 같은 생명체입니다.” 김 소장은 오는 18일부터 7월 중순까지 전국 초·중·고 교사들이 주로 참여하는 300명 규모의 ‘우리들꽃사랑 가족교실’을 준비중이다. “애정을 가지려면 먼저 관심을 가져야지요.이름부터 알고 어떤 꽃인지를 알고….그것을 조금이라도 돕는 것이 제 일입니다.내 발로 돌아다닐 수 있는 한 이 중매쟁이 노릇을 계속할 겁니다.” 글 채수범기자 lokavid@seoul.co.kr 사진 이종원기자 jongwon@ ■ 약력 1942년 충남 부여 출생 55년 부여 양화초등학교 졸업 71년 한국야생화연구소 설립 84년 LA국제대학 명예박사 85년 제10회 서울시발전상 은상(서울시) 87년 민통선 북방지역 자연생태 학술조사단 참가 88년 서해 외연열도 자연실태 학술조사단 참가 89년 영광 안마군도 자연생태 학술조사단 참가 90년 스포츠서울 백두산 야생화 학술탐사단 단장 90∼91년 서울신문·스포츠서울 국토종단 야생화 대탐사단장 91년 제9회 과학기술도서상 저술부문 수상(과기처장관·출판문화협),제19회 세계환경의날 환경보존 유공포상(국무총리상-환경처) 97년 제37회 한국출판문화상 사진부문 수상(한국일보),MBC 대학생 백두산 자연생태 탐사단장 2000년 환경보전 표창(환경부장관),환경부 환경홍보사절 위촉 01년 KBS 북한지역 백두고원 탐사단 ˝
  • [삶과 경영 이야기 ④] 삼성생명 23년연속 ‘보험왕’ 송정희 팀장

    이루기보다 지키기가 더 힘든 게 비즈니스 세계의 현실이다.23년 연속 보험왕 수성(守城)과 14년 연속 100만달러 판매기록 유지는 그래서 더 빛난다.송정희 팀장은 “아무리 높이 쌓은 탑도 단 한번의 방심에 무너져 내린다.”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했다.평범한 전업주부에서 최고의 보험세일즈맨이 되기까지 지독한 자기수련과 자기최면 등 험난했던 과정을 들어봤다. ●‘사모님’에서 ‘보험아줌마’로 -1980년 1월은 정말 추웠다.남편 사업(건축업)이 폭삭 망했다.남부럽지 않던 48평 큰 집에서 3평 남짓 월 3만원짜리 단칸 사글세 방으로 내려앉았다.눈덩이처럼 불어난 빚은 평생 일해도 못갚을 것 같았다.죽을 결심도 해봤지만 그러기엔 여덟살과 여섯살 난 아이들이 가여웠다. -쌀 한 톨이 아쉽던 때,현실은 절망에 취해 있을 잠시의 여유도 주지 않았다.이웃의 권유로 보험을 시작했다.그해 2월이었다.우선 발이 넓었던 남편 친구들과 친척들을 상대로 영업을 했다.난생 처음 내 손으로 번 돈이었다.액수에 상관없이 너무 기뻐 잠자리에서 몰래 1000원짜리 돈냄새를 맡아보기도 했다.2개월째 들면서 “돈버는 게 별 것 아니구나.”하는 우쭐한 생각까지 들었다.하지만 그것은 자만이었다.보험을 부탁할 친구와 친척들이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3개월째로 접어들자 더 이상은 문 두드릴 데가 없었다. -“뭐가 문제일까.” 고민이 시작됐다.문제는 내 속에 있었다.납입기간이 길고 끝까지 돈을 부어야 하고,해약하면 큰 손해를 보는 상품들.나라면 이런 상품에 선뜻 가입할까.그런 상품을 왜 들어야 하는지 사람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대답은 ‘노(No)’였다.“보험계약 한 건 하면 수당이 얼마냐.”고 묻는 고객에게 “그런 거 계산할 줄도 모르고 얘기하고 싶지도 않다.”고 쌀쌀맞게 대꾸하던 나였다.알량한 자존심.그때까지도 내 안의 나는 ‘사장부인’이었지 ‘보험아줌마’가 아니었다. -무작정 거리로 나섰다.청량리부터 제기동,동대문을 거쳐 종로5가까지 그냥 걸었다.다들 나와 똑같은 사람들인데,왜 나는 사람들 만나기가 두려운 걸까.작은 수첩을 샀다.청량리와 종로5가 사이에 있는 모든 상점의 이름들을 적어갔다.한 번 방문할 때마다 ‘바를 정(正)’을 한 획씩 그어나갈 심산이었다.한 상점에 正자 두 개씩 10번을 채우자는 목표였다. -“개시도 하기 전에 아침부터 재수없게 보험쟁이가 왔느냐.” 처음 들어간 청량리의 한 약국에서 나는 약사의 욕설과 함께 물벼락을 맞는 기가 막힌 봉변을 당했다.시계를 봤다.오전 10시였다.열정만 있었지 전략이 없었다.그때부터 방문시간을 내가 아닌 상대방에게 맞췄다.오전에는 방문대상의 성향을 파악하고 실제 방문은 오후 1시에 시작했다.오뉴월 땡볕은 온몸을 때렸다.부르트고 물집 잡힌 발은 감각이 없었다.불과 몇달 전의 ‘사모님’은 흔적도 없었다.열흘째 되던 날,아홉번째 방문했던 식당주인 아주머니가 “눈빛이 선해 보인다.”며 보험을 들어줬다.첫 수확이었다.자신감이 붙었다.동대문∼종로5가 상점이름 옆에는 더욱 빠르게 ‘正’자가 쌓여갔다. -월 보험료 1만 2500원을 받기 위해 7∼8시간 걸리는 지방까지 다니기도 했다.81년에는 군부대 지역인 경기도 연천군 대광리에 수금하러 갔다가 갑작스러운 군작전으로 통행이 금지됐다.날은 어둑어둑해지는데 아이들과 남편은 어떻게 하나.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것 어쩔 수 없었다.용기를 내어 이장 아주머니를 찾아갔다.집집마다 방문할 수 있게 해달라고 졸랐다.스무 집을 방문해 여섯 건의 보험계약을 따냈다.하지만 신출내기 보험사원을 더 기쁘게 한 것은 ‘용기’라는 선물이었다. -이듬해 초에 신입직원에게만 주는 영업사원상을 탔다.그런데 3등이었다.억울했다.누구보다도 많이 뛰었는데.“왜 내가 1등이 아니냐.”고 선배에게 따졌다.그는 부잣집 딸들은 노력을 안해도 된다고 했다.‘나의 환경이 안 좋으니까,스스로 좋은 환경을 만들도록 더욱 힘써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게으른 사람은 돈 만지려고 해선 안된다.”는 어릴 적 아버지 말씀을 되새겼다.주말에도 출근했다.나의 월요일 실적은 남들과 비교가 안됐다.통상 월요일은 주말에 쉬는 탓에 계약실적이 떨어진다.실컷 놀고서 다른 사람들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 가봐야 얻을 것은 허탈함밖에 없다. -약속장소에는 반드시 10분 일찍 나갔다.상대방이 나를 기다리며 스트레스를 받으면 이후 대화에서 엄청난 손해를 본다.출근시간도 마찬가지다.당시 보험설계사들은 오전 10시가 넘어서야 나왔지만 나는 오전 8시 이전에 회사에 도착해 그날 할 일을 챙겼다.한때 동료들은 나를 ‘버스 차장’이라고 불렀다.서울시내 버스노선을 모두 외우고 있었기 때문에 고객을 방문할 때마다 나에게 몇번 버스를 타야 되느냐고 묻곤 했다.나는 고객들의 전화번호도 다 외웠다.자나 깨나,앉으나 누우나 오직 고객 생각뿐이었으니 안 외워지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투자도 적지않이 했다.제주산 갈치를 고객 가정으로 배달시켰고,때가 되면 인절미를 맞춰 보냈다.이러한 노력 덕분에 한꺼번에 120억원(보험료)짜리 계약을 성사시킨 적도 있다. ●“내 보험 들어야 당신 빚 갚는다” -생각을 바꾸면 모든 상황을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끌 수 있다.84년 어느날 퇴근을 했더니 집안이 온통 빨간 딱지투성이였다.살림이 좀 펴지자 사업을 재개한 남편이 다시 약속어음을 남발,차압이 들어온 것이었다.4년 전 아픈 기억이 떠오르며 왈칵 눈물이 솟았다.빚쟁이들을 만났다.“당신이 나에게 보험을 들어야 내가 당신 빚을 갚을 수 있다.”고 당당하게 말했다.목 디스크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도 병원을 내 텃밭으로 삼았다.의사와 간호사,심지어 옆 침대 환자까지 고객으로 만들었다.병원에 있는 한 달 동안 72건의 계약을 성사시켰다. -부자는 부자를 몰고 다닌다.고객 한 명을 잡으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소개를 받는다.처음 VIP 고객 한 사람을 확보하는 것은 어렵지만 두 번째는 쉬워지고 세 번째는 더 쉬워진다.한 사람에게 신뢰를 얻으면,그 사람이 협력자가 돼 또 다른 VIP 고객을 소개해 주기 때문이다.계약액도 크다.돈 2000원 내는 사람은 어렵게 내지만,3만원 내는 사람은 쉽게 낸다. -98년 외환위기 때였다.한 건물임대업자가 입주자들이 빠져나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그에게 “회장님,제가 입주자들을 몰아오겠습니다.하지만 제 보험을 큰 걸로 하나 들어주셔야 합니다.” 나는 고객 리스트와 삼성생명 본사를 총동원해 사무실이 필요한 사람들을 물색했다.10개층 사무실들이 대부분 채워졌다.임대업자는 고맙다며 무려 1200만원짜리 보험을 계약했다.그는 나를 ‘송팀장’이 아닌 ‘송선생’이라 부른다.“나는 이분 마음 속에서 컨설턴트로서 자격증을 땄구나.”라는 생각에 뿌듯했다.다른 고객들도 나를 단순한 ‘보험인’으로만 생각하지 않는다.주택 임대부터 자녀 혼사에 이르기까지 생활 전반의 모든 문제를 상담하러 온다.나 역시 그들과 살아가는 삶이 행복하다. -고객에 대한 친밀감이 전부는 아니다.영업의 통로가 열려야 한다.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상대방이 보험에 가입할 준비가 돼 있는지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나는 고객을 만나기 전 그 사람의 성향을 파악하는 데 시간의 50% 이상을 투자한다.출근한 뒤 1시간 동안 인터넷을 통해 뉴스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잘 안풀릴 땐 무조건 활동량 늘려 -솔직히 한다고 하는데도 안될 때가 많다.명색이 ‘보험왕’인데 1주일에 한 건도 못할 때가 있다.이럴 때는 무조건 활동량을 늘린다.10건을 뛰어 1건을 성사시켰다면 100건을 뛰면 10건이 성사될 것 아닌가.반면 실패하는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길 꺼린다.대개 전화통을 붙잡는다.하지만 전화야말로 가장 거절받기 좋은 수단이다.내 진심이 상대방 가슴에 꽂히기 전에 끊겨버린다.한때 유명했던 보험왕들이 소리없이 사라져 버리는 가장 큰 이유다.한마디로 현실 안주다.계속 관리해야 할 고객들의 얼굴을 생각하면 그럴 수 있을까. -고객들은 나에게 천사같은 존재다.그들이 있었기에 내가 빚을 모두 갚을 수 있었고 밥을 먹을 수 있었고 아이들을 키울 수 있었다.나는 송정희라는 이름 석자를 하나의 주식회사로 시장에 올리고 싶다.매일매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업그레이드되는 나 자신을 보고 싶다.객관적인 자료로 나 자신을 평가하고 내 자신의 주가가 올라가는 기쁨과 주가가 내려갈 때의 공포스러운 긴장감을 함께 느끼고 싶다. ■ 송정희 팀장은 송정희(宋貞姬·57)씨는 삼성생명은 물론 삼성그룹 내에서도 기록제조기로 통한다.우선 국내에 한 명뿐인 ‘100만달러 원탁회의(MDRT-Million Dollar Round Table)’ 종신회원이다.연간 보험계약 실적 100만달러(약 12억원) 이상인 사람들의 전세계 모임인 MDRT는 10년 연속 자격을 유지해야 종신회원이 될 수 있다.송 팀장은 1991년 이후 MDRT 자리를 지켜왔다.80년 보험업에 뛰어든 이후 지난해까지 단 한 차례도 사내 보험왕 타이틀을 놓치지 않은 것 역시 유일하다.올 1월 이건희 삼성 회장으로부터 받은 ‘자랑스러운 삼성인상’은 보험 세일즈맨으로 최초일 뿐 아니라 삼성그룹 정식 임직원이 아닌 사람 중에서도 처음이다. 공식직함은 삼성생명 서울 종각지점 수석팀장.현재 그의 고객은 1800명.지난해 300여건의 보험계약을 성사시켰다.연봉은 5억 7000만원.매월 250만원씩 연간 3000만원을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내놓고 있다.연봉의 5%가 넘는다.지금까지 받은 2억원가량의 상금도 전액 사회복지단체에 기부했다.나누고 베푸는 미덕도 지닌 아름다운 ‘철의 여인’이다. 정리 김유영기자 carilips@˝
  • [우리 결혼해요]박임준(30)·김미영(31)씨

    1997년 가을 K대 H고시실로 한 여학생이 들어왔습니다.당시 고시실에 있던 한 청년은 한눈에 자그마한 호감을 갖게 되었으나 그 마음을 꼭꼭 숨겨놓고 있었습니다.그런데 인연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나 봅니다.두 사람은 너무나 자연스럽게도 친구사이로 점점 가까워져 가고 있었습니다.신기하게도 주위에서 그 두 사람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당사자들조차도 말입니다. 그 후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자그마한 마음을 아주 조금씩 키워가던 청년은 결국 ‘거사’를 결심합니다.친구들의 우정어린 도움을 얻어 어설픈 고백에 성공을 했지만 여학생은 그때는 그 청년을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었습니다.그것을 알게 된 청년은 고민 끝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군대에 갈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그때서야 그의 마음을 조금씩 깨닫게 된 여학생은 이번에는 청년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었습니다.그 후 4년 반이 넘는 연애 끝에 두 사람은 결국 결혼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5년 가까이 연애를 하면서 서로에게 믿음을 심어 주려고 노력했던 것이 저희가 결혼까지 이르게 된 큰 힘이었던 것 같습니다.서로의 마음을 시험하지 않고 자신의 진심만을 오랫동안 보여준 결실을 거두었는지 이제는 어떤 경우라도 상대방의 마음을 의심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희는 4월에 결혼을 하는데 생각보다 결혼준비가 쉽지만은 않습니다.작은 것 하나에도 서로간에 이견이 있으면 양 집안에 서운함 없이 조정해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신경 쓰이는 일입니다.저희는 둘 다 무난한 성격이라 결혼 전까지 서로 절대 싸우지 말자고 약속하였는데 솔직히 작은 위기는 몇 번 있었지만 다행히 아직은 별 탈없이 준비가 진행돼 너무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다 보니 이제 호칭을 바꿔야 하는데 잘 안되네요.큰맘먹고 ‘자기야아∼’하고 부르면 어느새 닭이 되어 날아가 버립니다.항상 친구 같은 사이로 남는 것도 좋고 에로틱하게 발전하는 것도 좋습니다.서로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결혼해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자는 약속을 지켜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국내 유일 ‘석채’ 작가 이직씨

    이직(李直·44).그는 이름도 생소한 석채(石彩) 도자기 작가다.도자기에 색깔이 있는 돌가루를 입혀 다양한 문양과 그림을 표현하는 실험작가다.국내에선 이씨가 유일하다. 석채자기 한 점 만드는 데는 짧게는 석 달에서 길게는 수년까지 걸린다.일반적인 도자기들이 초벌,두벌구이로 완성되는 반면,석채 자기는 입히는 돌가루 종류만큼이나 도자기 굽는 횟수가 늘어난다.이는 암석마다 열에 의해 변형되는 온도가 달라 그림을 완성한 뒤 한꺼번에 구우면 작품을 망치기 때문이다. 현재 이씨가 쓰는 암석은 17가지.대부분 준보석류 암석으로,국내에선 자수정이나 옥돌을 쓰고 나머지는 아랍 쪽에서 수입한 것들이다. 이씨는 원래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서울에서 작품활동을 했으나,항상 만족지 못했다.우연히 여행을 떠났다가 독특한 모양과 색상의 도자기들을 보고 강한 매력을 느꼈고,그게 그의 예술 행로의 전환점이 됐다. 그는 지난 1994년 도예가들이 모여 있는 경기도 이천 사기막골에 둥지를 틀었다.손 끝의 놀림대로 표현되는 점토,불의 조절에 의해 만들어지는 미세한 도자기 빛깔.그는 도자예술의 매력에 푹 빠져 도자기를 굽고 또 구웠다.하지만 3년여 만에 그는 새로운 고민에 빠지게 된다.지나친 모방,천편일률적인 작품 경향에 실망했다.그래서 눈을 돌린 게 석채자기였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어렵게 돌가루를 입혀 도자기를 구우면 색깔이 변형된다는 점이었어요.재료를 변형 없이 다루는 방법을 아는 데만 5년이 걸렸습니다.” 이씨는 서양화에서 도자기로 장르를 바꾼 지 3년 만에 석채자기 작업에 뛰어들었다.그러나 이후 3년은 시행착오와 실험의 시간이었고,본격적인 작품활동은 4년 전부터 시작했고 구워낸 작품은 100여점이 채 안된다. 글 이천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막오르기전 여전히 새색시처럼 떨려요”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갈한 자태가 상대방을 압도한다.평생을 바쳐 한길을 걸어온 예인(藝人)들이 대개 그렇듯 범접하지 못할 강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저 작고 갸날픈 체구 어디에 그토록 강렬한 무대 열정이 숨어있을까,새삼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원로배우 백성희(79).국립극단의 최고령 배우이자 한국 연극의 산 역사로 불리는 그가 올해로 연기 인생 60주년을 맞았다. “연극이 무작정 좋아서 시작했고,연극의 매력에 빠져 살다보니 어느새 그 만큼의 세월이 흘렀네요.자동차 헤드라이트처럼 옆도,뒤도 안돌아보고 오직 앞만 보며 달려왔지요.이젠 연극이 나인지,내가 연극인지 구별이 안될 정도예요.” ●배우인생 담은 자전극 ‘길’ 평소 ‘무슨무슨 기념공연’식의 행사성 무대를 꺼려온 그이지만 ‘이번엔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후배들의 성화에 조촐한 판을 벌였다.4월14일부터 19일까지 문예진흥원 예술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길’이 그 무대.한 시대를 풍미한 최고의 여배우로서,또 배우 이전에 한 여성으로서 그가 걸어온 지난 60년의 인생길을 반추하는 자전극이다.그는 못내 쑥쓰러운지 홍보 포스터에서 ‘60주년 기념공연’이라는 문구는 기어이 뺐다. 연극 ‘길’은 올초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된 연출가 이윤택이 대본을 썼고,미국 뉴욕 오프브로드웨이에서 20년간 배우와 연출가로 활동하다 최근 귀국한 김혜련이 연출을 맡았다.백성희가 그동안 출연했던 ‘메디아’‘뇌우’‘달집’‘베니스의 상인’‘갈매기’ 등 5개 작품을 극중극으로 보여줌으로써 ‘연극이란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메타연극의 형식을 취했다. 인터뷰 기록을 바탕으로 쓴 대본에는 남편(소설가 나도향의 동생 나조화)이 외도를 하다 사망하자 빈소조차 찾지 않았던 일화 등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생활도 진솔하게 담겨있다.국립극단 후배인 권성덕,손숙 등이 함께 무대에 오른다. 백성희가 처음 배우의 꿈을 품은 건 소학교 5학년 때.일본에서 유학하던 외삼촌이 가져온 일본 소녀가극단의 팸플릿에 나와있는 소년 배우의 멋진 모습에 반했다.나중에 그 배우가 여자인 것을 알고는 ‘그럼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그는 “백지에 떨어진 먹 한방울이 점점 번지듯 그때 내 가슴 속에 새겨진 강한 인상이 나이를 먹으면서 같이 자랐다.”고 회고했다. 본격적으로 배우의 길에 들어선 계기는 동덕여고 3학년 때 신문에 난 ‘빅타무용연구소 단원모집’광고였다.한달음에 연구소로 달려갔고,5대1의 경쟁을 뚫고 당당히 합격했다.연구소에 들어간 이듬해 대역으로 부민관 무대에 선 것이 인연이 돼 43년 극단 현대극장에 정식 입단했다. 데뷔작은 44년 함세덕 작·연출의 ‘봉선화’.당시 무명의 신인이 일약 주인공을 따냈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47년 이해랑 선생이 대표로 있던 극단 신협으로 옮긴 그는 50년 극단 신협이 국립극장의 전속 극단이 된 이후 지금까지 한시도 국립극단을 떠나지 않고 든든한 버팀목 노릇을 해왔다. ●아버지 몰래 연극하다 매맞기도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서 집안의 반대는 너무나 당연했다.‘이어순’이란 본명을 버리고 서항석 선생(2대 국립극장장)이 지어준 ‘백성희’라는 예명으로 가족 몰래 지방 순회 공연을 다니다 아버지에게 들켜 매를 맞기도 했다.“아버지께서 결국 ‘넌 내 딸이 아니다.’라며 포기하셨지요.요즘 대학입시에서 연극영화과의 인기가 높고,부모들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걸 보면 정말 격세지감을 느껴요.그때 한이 남아서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이 생기자마자 1기로 입학했어요.” 지금까지 출연한 작품은 대략 400여편.극성 맞고 대사가 많은 힘든 역할을 단골로 해왔다.이번 ‘길’연극에서도 “혀에서 쥐가 날 정도로 대사가 많다.”며 웃었다.1시간40분 공연에서 그가 등장하지 않는 분량은 20분에 불과하다. 그는 연극에서 정직함을 배운다.더도 덜도 아닌,딱 노력한 만큼만 보여주는 무대가 그의 천성과 잘 맞는다고 했다.그는 “정직하게,어쩌면 경직되게 한평생을 살아왔다.”면서 “융통성 없고,순발력 없는 외고집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원동력”이라고 말했다.72∼75년,91∼93년 두차례에 걸쳐 국립극단 단장직을 맡았을 때도 무대에 몰입할 수 없다는 이유로 두번이나 사표를 썼다. 60년 연기 인생에서 ‘유전의 애수’(53년)‘봄날은 간다’(2001년)등 단 2편의 영화에만 출연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그는 “배우는 무대에 서면 관객과 자웅을 겨루는 재미가 있지만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 재미가 없다.”고 했다.출연 분량은 적었지만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봄날은 간다’는 허진호 감독이 맘에 들어 두달 고민 끝에 어렵사리 출연을 결정했다. ●“연극에는 관객과 자웅 겨루는 재미 있어” 50년 넘게 술과 담배를 즐겨왔지만 타고난 건강 체질에다 채식위주의 식습관 덕에 체력에는 아직 문제가 없다.‘완벽주의자’‘강철 여인’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강한 신념과 정신력이 신체의 허술함도 용납 하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무대에 오르기 전 항상 두 손을 모으고 수도자같은 모습으로 대기하는 그를 후배 연극인들은 ‘교과서적인 배우’라고 칭한다.‘백성희 화술’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연기에 있어서 일가견을 이룬 그이지만 정작 스스로는 “배우로서 부족한 점이 말할 수 없이 많다.”며 겸손해했다.그토록 오래 무대에서 살았으면서도 여전히 막이 오르기 전에는 새색시처럼 떨린단다. “연극을 가볍게 다루지 마세요.연기에는 배우의 인격까지 드러납니다.품격있는 연기를 위해 노력하고,연극을 생명처럼 아껴야 합니다.” 후배 연극인들에게 주는 충고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정성으로 인해 한층 울림있게 다가온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백성희씨는… ●1925년 서울 출생 ●1942년 동덕여고 졸업 ●1943년 극단 현대극장 단원 ●1947년 극단 신협 단원 ●1972∼75년,91∼93년 국립극단 단장 ●1992년 연극협회 부이사장 ●2001년∼현재 국립극단 원로 단원,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수상 경력) 동아연극상(66년)대통령표창(80년)대한민국문화예술상(94년)백상예술대상(98년)대한민국예술원상(99년)예총예술문화상(2002년) (출연작품) 베니스의 상인,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무의도 기행,나도 인간이 되련다,무녀도,산불 등 400여편.˝
  • [총선 D-19] (1) 한나라 박세일교수

    서울신문은 주요 정당의 4월 총선 선대위원장 릴레이 인터뷰를 싣는다.첫번째로 26일 박근혜 대표와 함께 한나라당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은 박세일 서울대 교수와 인터뷰를 했다. ‘박세일 교수가 한나라당에?’ 적지 않은 이들이 품었을 의문이다.그의 이력과 보수정당이 썩 어울려보이지 않았기 때문일 게다.최근 국회 자문기구인 ‘범국민정치개혁협의회’ 위원장을 지냈고,김영삼 정부에서 정책기획수석 등을 맡으며 교육·사법개혁을 이끈 그다.그의 저서 ‘대통령의 성공조건’은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시절 대통령직인수위의 필독서로 꼽혔다. 박 위원장은 3가지 이유를 들었다.“여당과 야당의 예상 의석비율이 250대 50으로 나오는 현재의 구도는 민주주의의 위기라 할 수 있습니다.또한 ‘감성’과 분열의 정치는 ‘합리’와 통합의 정치가 돼야 합니다.박살난 한나라당이 최근 엄청난 쇄신의 노력을 보이기에,고민 끝에 입당 제의를 수락했습니다.” ‘박세일 효과’는 얼마나 될까.당의 한 인사는 “정책과 인재풀에 관한 한 그의 전력은 ‘사단급’”이라고 평했다.그는 25일 입당이후 만 하루도 안 된 이날 아침까지 쟁쟁한 이력을 가진 5명의 공천심사위원들을 당에 추천했다.그의 ‘인적 인프라’를 드러내는 단적인 사례다.이 기간 “박 위원장에게 걸려온 전화만 300통이 넘었다.”는 게 주변의 전언이다.당이 ‘박근혜+박세일’이 가져올 시너지 효과에 기대를 거는 것도 이런 점에서다. 그 스스로도 “박 대표는 정치에,저는 정책에 주력하게 될 것”이라고 역할을 분담했다.각당의 비례대표 주자들이 나설 TV정책 토론에도 자신이 선두에 나설 뜻을 분명히 했다. 한편 그가 주도할 비례대표 후보명단에는 대대적인 외부수혈이 예고된다.‘현재 당이 보유한 비례대표 후보명단에 만족하느냐.’는 질문에 썩 흡족한 표정을 짓지 않은 데서 그 구상의 일단을 읽게 했다. 그러면서 그는 “신 정책세력을 국회에 진입시키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이는 자신의 ‘인재 풀’의 자질과 규모가 일정 수준이상이라는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하다.그는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개혁적이고 참신한 젊은 사람들이 (비례대표의) 주력이 될 것”이라면서 “순수한 학계보다는 기업·정부의 정책연구소 인사들도 포함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그는 탄핵국면을 돌파할 비책으로 ‘사람’과 ‘정책’을 내놓았다.“우선 당은 계속 자기반성과 자기개혁을 해나가야 합니다.국민에게는 총선은 앞으로 4년간 일할 국가의 일꾼을 뽑는 선거라는 점을 인식시키고,구체적이고 현실성있는 비전과 정책을 제시한다면 ‘한나라당=기득권·부패 체제’라는 국민적 인식을 어느정도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향후 일정에 대해 박 위원장은 “다음 주초까지 외부인사 영입과 비례대표 선정작업을 마무리한 뒤 바로 정책에 초점을 맞출 것”이라고 설명했다.그는 ‘이미 외부에 여러 형태의 정책팀이 있지 않으냐.’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오랜 기간 ‘준비된 정책’을 쏟아내는 일만 남았음을 암시했다. 이지운기자 jj@˝
  • 中 - 日 이중적 관계?

    |도쿄 황성기특파원|‘외교 난항,경제 순항’.지금의 중국,일본 관계를 여덟자로 표현하면 그렇다. 일 총리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에 이어 센카쿠(중국명 댜오위타이) 열도에 상륙한 중국인 체포로 양국관계는 악화일로다.반면 양국간 경제적 상호의존도는 깊어지고 있다. 일본 재무성이 25일 발표한 2월중 대중(對中) 무역수지에서 일본은 200억엔 가까운 흑자를 기록했다.1994년 3월 이후 10년 만의 흑자전환이다.일본의 수출은 작년 같은 달에 비해 14.9% 증가한 5900억엔,수입은 5.2% 늘어난 5700억엔이었다. 대중 수출은 4분의1가량이 전기제품이다.세계적인 경기회복 기조를 바탕으로 일본 기업이 중국 현지의 생산거점용으로 공급하고 있는 반도체,액정 등 부품수출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중국의 소득향상에 힘입어 박형(薄型)TV 등의 소비재 수출도 급증추세다.얼마전까지만 해도 값싼 소비재를 들여오던 곳에서 매력적인 수출시장으로 중국이 달라진 것이다.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중국이 ‘생산기지,최종소비지’의 성격을 강하게 띨수록 미국 경제에 의존해 온 일본의 무역구조 변화에 탄력이 붙을 것”으로 내다봤다. 또 하나,보이지 않는 매력적인 시장은 관광이다.관광입국을 내건 일본에 있어서 중국은 외국인 관광객 배증계획을 달성할 수 있는 절호의 시장이다.베이징 등 일부 지역에 한정된 방일 단체관광객 유치를 확대하기 위한 교섭도 중국 당국과 진행 중이다. 경제는 순조롭지만,외교는 꽁꽁 얼어붙었다.당장 영향이 없더라도 정치문제가 장기화할 경우 경제교류에도 그늘을 드리울 가능성이 있다.거기에 중·일 양쪽의 고민이 있다. 센카쿠 사건은 일본에 던져진 악재다.후쿠다 야스오 관방장관은 25일 정례 기자회견 때 “냉정히”라는 말을 4차례나 썼다.중·일관계를 더이상 악화시켜서는 안된다는 인식이다.가와구치 요리코 외상은 26일 “국내법에 따라 의연히 대응하겠다.”면서도 “양국이 국민감정을 부채질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일본 당국은 체포된 7명의 중국 활동가를 26일 중국 상하이로 추방했다.당초 이들의 신병을 검찰로 송치해 형사처리하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다른 범죄혐의가 없는 것으로 파악,난민법에 따라 처리한 것이다.이들의 추방에는 이민국 관리들도 동행하지 않았다.이같은 조치는 이번 사건이 양국간 심각한 외교문제로 비화되는 것을 막으려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중국 정부는 이들의 ‘즉각석방’을 요구해 왔다. 일본 당국에 체포된 중국 활동가들이 소속한 단체에서 오는 29일 센카쿠 열도 재상륙을 시도한다는 정보가 나돌고 있는 가운데 양국이 어떻게 센카쿠 갈등을 봉합할지 주목된다. marry04@˝
  • [국·공립 師大출신 미발령 교사] “날아간 교사의 꿈… 학교만 봐도 눈물이”

    ‘낮은 소리’는 사회의 그늘진 곳의 목소리를 담고 있습니다.다수의 큰 목소리에 가려,외면되고 있는 소외층의 목소리를 드러내 보이려는 것입니다.방치할 경우 사회의 대형 갈등요인으로 번질 수 있는 사안을 미리 공론화함으로써 대안을 모색해보자는 것입니다.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제보를 기다립니다.서울신문 편집국 사회교육부(02)2000-9173,www.seoul.co.kr 또는 www.kdaily.com으로 연락 주십시오. “국적까지 바꾸면서 체육선생님이 되고자 했던 저의 오랜 꿈은 하루아침에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임칙성(38·대구)씨는 부친이 화교여서 지난 1986년 경북대 체육교육과에 입학하기 전까지 외국인으로 살아왔다.운동을 잘해 당시 고려대 체육특기자로 합격통지서까지 받았지만 국립대를 나와야 국·공립 중·고교 교사로 우선 발령받을 수 있었기에 국립 사범대로 방향을 바꾸었던 것이다. 대학 4학년 때 임씨는 다시 중대한 결심을 해야 했다.외국인은 공무원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교사가 되기 위해 고민 끝에 대한민국 국적을 선택했다.90년 2월 졸업과 함께 교사자격증을 딴 그는 ‘교사임용후보자 명부’에도 이름이 올라 발령이 나기만을 기다렸지만 14년이 지난 현재까지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하고 있다. 90년 10월 ‘국·공립 사범대 학생의 우선 교사임용’을 규정한 옛 교육공무원법 제 11조 1항이 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판결을 받았기 때문이다.국·공립 사범대 졸업생이 사립 사범대나 비사범대 학생들보다 우선적으로 교직에 임용되는 것은 평등권과 직업선택권을 보장하는 헌법에 위배된다는 것이 헌재의 판결내용이었다.교육공무원법이 개정됐음은 물론이다.이 판결로 그의 교사발령은 어렵게 됐고 인생까지 뒤틀리기 시작했다. 더욱이 교육당국이 교사발령을 받지 못한 이들에게 개정된 교육공무원법을 소급적용하는 바람에 문제는 더욱 커졌다. 헌재의 판결로 임씨를 비롯,국립 사범대를 졸업하고 교원임용후보자 명부에 올라 발령을 기다리던 미발령 교사들은 개정된 교육공무원법을 소급적용받아 ‘임용대기’ 교사로서의 권리를 졸지에 잃어버렸다.위헌 판결 이전에 43년간 시행된 제도를 믿고 국립 사범대를 택한 예비교사들은 호소할 데가 없었다.자연스럽게 2001년 ‘전국 교원임용 후보명부등재 미발령 교사 완전발령추진위원회’(미발추)라는 모임을 결성했다.이후 자신들의 억울한 사연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상처받은 삶 미발령 교사들은 지금 계약직 교사,학원강사,교육 관련단체 근무 등 대부분 학교 주변을 맴돌며 ‘주변인’으로 살아가고 있다.가게를 운영하거나 택시운전을 하는 등 험난한 생활전선에서 뛰는 사람도 있다. 대구에서 자동차 영업사원으로 일하고 있는 임씨는 “영업상담을 위해 학교를 방문,학생과 교사들을 보면 ‘내가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이미향(39·여·부산)씨는 눈 앞에 학교가 보이면 일부러 먼 길을 돌아다닐 정도로 교사가 되지 못한 ‘좌절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부산대 사범대 동기 중 전공이 달라서 운좋게 먼저 발령을 받은 친구들을 동창모임에서 만나면 괜히 주눅부터 든다. 이런 마음고생은 결혼해 아이들을 키우면서 더욱 커졌다.“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의 학교에도 가기 싫다.아들의 선생님을 만나면 내 처지를 돌아보게 되기 때문이다.학교만 바라봐도 눈물이 난다.” 이씨는 ‘미발추’ 홍보부장을 맡으면서 일주일에 두세 번 서울을 찾는다.공부 잘하고 착하기만 했던 딸이 교사가 되는 걸 바랐던 그녀의 어머니는 딸이 교단이 서지 못하고 매주 서울행 버스를 타야 하는 ‘투사’가 된 것을 보면 마음이 미어진다. ●실패한 교원정책의 피해자 ‘미발추’는 “미발령 교사들의 문제는 당시 교육당국의 교원임용정책 실패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한다.이선순(39·여·서울)씨는 “교사들의 임용 적체가 심각한데도 정부가 81년에 졸업정원제를 실시하고 교원대를 설립해 적체를 가중시킨 게 근본원인”이라고 지적했다.이씨는 특히 “정부가 이러한 적체를 해소하기 위해 헌재의 위헌판결을 계기로 관련 법을 소급적용하면서 임용명부에 올랐던 국립 사범대생들의 발령을 막아버렸다.”며 교육당국을 비난했다. 87년 2월 공주대 불어교육과를 졸업한 조사비나(40·여·김포)씨는 발령이 나지 않자 취업을 시도한 경우다.“일반 회사에 취직하려고 했지만 ‘2∼3년 안에 발령나면 사표 쓸 것 아니냐.’는 시선 때문에 취업마저 어려웠다.”면서 “미발령 교사는 이래저래 피해자”라고 불평을 터뜨렸다.조씨는 교사 발령까지 받았지만 연기신청을 하는 바람에 미발령 교사로 남아 있는 케이스다.3년 정도 있으면 발령이 날 것 같다는 교육당국의 설명에 남편과 함께 88년 9월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유학 중이던 89년 9월 교사 발령을 받았지만 “3년 이내에 언제든지 다시 발령이 가능하다.”는 교육당국의 답변을 듣고 조씨는 임용 연기를 신청했다.90년 12월 귀국했지만 그 사이에 관련 법이 위헌판결을 받는 바람에 교단에 서지 못한 것이다. 90년 당시 7000여명(미발추 추산)에 달했던 미발령 교사들은 14년이 지난 현재도 4000명 안팎에 이른다.나머지는 과거의 기득권을 포기한 채 교사 임용고사를 치렀거나 시국사건 관련자 배려 케이스(99년과 2001년 시국관련자 구제를 위한 특별법)로 구제됐다고 한다.미발령 교사들은 아직도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며 자신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한 의지를 버리지 않고 있다. 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 [삶과 경영 이야기 ②] LG화재 ‘8년연속 보험왕’ 조주환 씨

    조주환씨는 지난해까지 8년 연속 LG화재의 ‘골드마스터’(보험판매왕)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지난해 소득이 5억 7000만원으로 웬만한 대기업 CEO(최고경영자) 못잖다. 공식직함은 LG화재 김포사업소 산하 하나로대리점㈜ 대표.직원 4명을 두고 있는 독립 보험대리점의 사장이다.지난해 자동차보험,화재보험 등 6000여건의 계약을 성사시켰고,이를 통해 44억원의 매출을 회사에 안겨줬다.현재 월 평균 450여건의 자동차보험을 계약한다.건당 보험료를 40만원으로 치면 자동차보험에서만 월 2억원 가까운 매출을 올리는 셈이다. 주 활동무대인 김포시의 경우,전체 등록차량 4만여대 중 10%인 4000여대가 조 대표를 통해 자동차보험에 든 차들이다.전 김포시장이 “김포에서 나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다.2002년 1월 ‘386의료건강보험’ 판촉캠페인 때 다리 골절로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전화로만 10여일간 64건을 판매,1위를 차지한 것은 두고두고 얘기된다.직접 발로 뛰며 유치한 2위의 실적은 25건이었다.일선에서 물러나면 강원도에 민박집을 지어 자신의 고객을 위한 휴양시설을 운영하는 게 꿈이다. 조주환씨는 지난해까지 8년 연속 LG화재의 ‘골드마스터’(보험판매왕)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지난해 소득이 5억 7000만원으로 웬만한 대기업 CEO(최고경영자) 못잖다. 공식직함은 LG화재 김포사업소 산하 하나로대리점㈜ 대표.직원 4명을 두고 있는 독립 보험대리점의 사장이다.지난해 자동차보험,화재보험 등 6000여건의 계약을 성사시켰고,이를 통해 44억원의 매출을 회사에 안겨줬다.현재 월 평균 450여건의 자동차보험을 계약한다.건당 보험료를 40만원으로 치면 자동차보험에서만 월 2억원 가까운 매출을 올리는 셈이다. 주 활동무대인 김포시의 경우,전체 등록차량 4만여대 중 10%인 4000여대가 조 대표를 통해 자동차보험에 든 차들이다.전 김포시장이 “김포에서 나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다.2002년 1월 ‘386의료건강보험’ 판촉캠페인 때 다리 골절로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전화로만 10여일간 64건을 판매,1위를 차지한 것은 두고두고 얘기된다.직접 발로 뛰며 유치한 2위의 실적은 25건이었다.일선에서 물러나면 강원도에 민박집을 지어 자신의 고객을 위한 휴양시설을 운영하는 게 꿈이다. ‘8년 보험왕’ 조주환(趙周煥·46)씨와 시간을 맞추기는 쉽지 않았다.계약자,거래처 등 갖은 약속이 첩첩으로 쌓여 있었다.서울신문 경제부와의 워크숍은 그래서 지난 22일 저녁 늦게야 가능했다.중간중간 휴대전화 벨이 연신 울어댔다.그는 지금 자기 모습에 대해 “불현듯 놀랄 때가 있다.”고 했다.하지만 성공이 거저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주위 사람들을 하나씩 둘씩 원군(援軍)으로 만들어 촘촘한 ‘인간 그물’을 엮어낸 그의 노하우를 들어봤다. -학교 친구들 중에 나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몸집이 크든지,공부라도 잘하든지,가정이라도 변변하든지,성격이라도 활달하든지….어느 것 하나에도 자신이 없었다.열등감과 콤플렉스 덩어리였다.학창시절(김포 양곡중-양곡종고)의 몇몇 기억을 떠올리면 너무 수치스러워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나는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쭉정이 취급을 받았지만,세살 위인 형은 정반대였다.수완이 좋았던 형은 일찌감치 기아자동차에 영업사원으로 입사,많게는 한달에 50대 이상 차를 팔았다.한때 전국 차 세일즈맨 ‘톱5’에 들기도 했다. ●학창시절 체격작아 열등감에 시달려 -우리 형제의 영업감각은 선천적으로는 어머니로부터,후천적으로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일찍부터 보따리 행상을 했던 어머니는 타고난 장사꾼이었고,완고한 아버지는 동물적인 영업감각을 익힐 수 있게 해줬다.혼나지 않고,잔소리 안 듣고,맛있는 것을 많이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가 어릴 적 최대 고민이었다. -군대를 마친 뒤 1984년(27세)부터 고향에서 젖소(비육우) 사육을 시작했다.하지만 첫해 소 농사는 완전한 실패였다.송아지를 마리당 105만원에 4마리를 사서 키웠는데 15개월 뒤 팔 때에는 성우(成牛) 한마리 값이 80만원으로 떨어져 있었다.그때 소 농사를 접은 사람이 많았다.그러나 나는 거꾸로 8마리를 샀다.송아지 값이 17만원으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비싸게 사서 비싸게 팔지 말고,싸게 사서 싸게 팔자.”는 생각이었다.성공이었다.이듬해에는 송아지를 16마리 살 수 있었고,그 다음해에는 32마리를 들였다.이런 식으로 80마리까지 늘었다.괜찮을 때에는 소 한마리에 60만원 정도 마진이 남았다.80마리로 치면 5000만원에 육박하는 고소득이었다. ●소농사 실패후 형님권유로 보험 시작 -그러나 90년대 들면서 우루과이라운드(UR)의 위기감이 고조됐다.참기 힘든 불안감이 밀려왔다.술독에 빠져 살았다.그러던 92년 어느날 형이 대뜸 “나는 시베리아에서도 냉장고를 팔 수 있지만 너는 숫기도 없고 몸도 약해 도대체 뭘 하겠느냐.”고 윽박지르며 “농사를 접고 보험장사를 해보라.”고 했다.당시 형은 자동차 세일즈를 하면서 LG화재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형은 “내 고객들을 LG화재 자동차보험에 연결시켜 주고 있는데,모르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느니 차라리 네가 LG화재에 들어가 내 손님을 받아가라.”고 했다. -그래도 싫었다.내 성격에 보험영업이라니….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고 새 인생이 시작됐다.하지만 “우리 형님이 보험 들어주신다고 해서 왔습니다.”라며 찾아가는 로봇 같은 심부름꾼이었다.큰맘 먹고 내 고객을 개척한다며 밖에 나갔다가도 남의 집 문고리에 손도 못 대보고 돌아오기 일쑤였다.그렇게 10개월이 무의미하게 흘러갔다. -93년 나를 통해 자동차보험에 든 친구가 사람을 치어 그 사람이 사망하는 사고가 났다.부랴부랴 경찰서로 달려갔는데 겁에 질려 있던 친구가 너무나 고마워 눈물을 흘렸다.나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형 심부름만 했지 아무런 책임감 없이 일해온 나는 이 사회에서 어떤 존재인가.”하는 고민이 들었다.나만의 영역을 개척해야 했다. -나를 도와줄 원군을 찾는 일이 급했다.신차 세일즈맨,중고차 매매인,119 응급구조대,병원,자동차 정비업체,견인차 기사,경찰관,LG화재 보상직원 등 나에게 도움 줄 사람과 조직을 기초부터 공략해 갔다.우선 응급구조대와 생활을 같이하기 시작했다.밥 먹을 때나 술 먹을 때나 나는 항상 그들과 함께 있었다.사고발생 무전이 들어오면 동시에 출동했다.내 고객이 아니어도 LG화재 고객이면 다 보살폈다.서서히 ‘조주환’ 이름 석자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94년에 김포시내에서 5중 충돌이 일어났다.여느 때처럼 제일 먼저 현장에 달려갔다.세 명이 숨진 참혹한 사고였다.나는 5대의 차량번호를 다 조회해 어느 보험사 소속인지 확인했다.2대가 LG화재였고,그 중 하나는 내 고객이었다.우리 회사 가입차량 2대는 내가 책임졌고,나머지 3대는 경찰에 보험사를 알려줬다.사고처리에 고심하던 경찰관은 “알려줘서 고맙다.”며 해당 보험사에 연락을 했다.경찰관들 사이에 내 이름이 퍼졌다. -95년에는 나를 통해 자동차보험에 든 인천의 목재회사 사장이 강원도 철원지역 국도에서 자동차 사고를 당했다.얼굴에 유리파편이 박힌 중상이었다.오후 2시쯤 현장으로 출발했지만 여름 휴가철이라서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자정이 넘어 있었다.한밤중에 환자를 인천의 종합병원으로 후송했다.철원의 담당 경찰관은 “김포에서 어떻게 여기까지 올 생각을 했느냐.”고 했다.경찰이 그 정도였으니 사장의 감동은 말할 것도 없었다.먼동이 트는 것을 보며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날아갈 듯 했다.예상대로였다.그 회사 직원의 대부분이 내 고객이 됐고 그 회사의 거래처들까지 나에게 연락을 해 왔다.고객만족이 나의 성공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확인했다. -김포에서 인지도가 높아지자 견인차 기사들이 사고차량의 보험사가 LG화재이면 다짜고짜 운전자에게 “조주환 사장 고객이냐.”고 묻기 시작했다.가끔 고객들의 이런 전화가 온다.“어떻게 사고가 나자마자 견인차를 보내셨습니까.” 내 대답은 간단하다.“하하하,제가 귀신 아닙니까.” 영업하면서 하는 선의의 거짓말은 나쁜 게 아니다. -기존 고객의 성취감을 높이면 무한한 고객을 소개받을 수 있다.아무 기반도 없는 데를 힘들여 개척할 필요가 없다.나는 핵심고객을 150여명 선별해 이들을 집중 공략한다.이들에게는 한마디로 ‘오버’를 한다.보험 관련서류를 직접 떼어주고,경조사는 친척보다 먼저 달려간다.바쁠 때에는 공장에 가서 일도 해주고,가을철엔 볏가마도 날라준다.이삿짐도 운반해 준다.심지어 돈도 꿔주었다. ●고객에 치밀하고 완벽한 보상서비스 -내 고객들은 사고가 났을 때 견인차 운임을 안 낸다.통상 기본주행만 보험사에서 내 주고 나머지는 개인이 부담하지만 내 고객들은 전국 어디에서 사고가 나도 공짜다.정비공장에서 낸다.부산에서 김포까지 견인비용이 30만원 정도니까 상당한 액수다.“정비공장이 이문을 얼마나 많이 남기는지 내가 다 아니까 견인료는 당신들이 부담해라.대신에 사고차량은 이쪽으로 최대한 몰아주겠다.”고 거래 정비소들을 설득한 결과다.바가지 요금도 있을 수 없다. -나는 지방에서 사고가 나도 반드시 집 근처에서 수리를 받게 한다.정비업소들에 미안한 얘기지만 다른지역 사람들이 와서 차를 맡기면 절대로 좋게 수리해 주지 않는다.중고·불량 부속을 쓰기 일쑤고 바가지 요금을 청구하기도 한다.특히 피서철 휴양지 근처 정비소들은 차를 쌓아놓고 수리한다.수리가 제대로 되기 힘든 이유다.당장이야 현지에서 정비를 맡기는 게 편하지만 차를 생각하나 비용을 생각하나 차는 반드시 집 근처에서 고쳐야 한다. -보험영업을 처음 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소문을 듣고 나를 찾아온다.솔직하게 내 노하우를 다 말해준다.그러면 보통 “언젠가는 제가 사장님을 능가하겠다.”고 다짐하지만 대개 중도에서 탈락한다.노하우를 행동으로 옮기는 게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다.나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출근하지 않은 날이 없다.밤 12시 전에 퇴근한 적도 없다.너무 늦게 끝나면 차 안에서 잤다.토·일요일은 물론이고 어린이날도 내게는 없었다.솔직히 가정은 돌보지 못했다.부인과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요즘 인터넷보험 등 값싼 상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어 긴장되는 것은 사실이다.하지만 내 고객들은 별로 움직이지 않는다.사고가 났을 때,내 고객의 상대방이 인터넷보험 가입자이면 모든 채널을 동원해 더욱 열과 성을 다한다.‘싼 게 비지떡’이라는 생각이 내 고객이나 상대방에게 들도록 하기 위해서다.간혹 그 상대방이 보험만기가 끝난 뒤 나에게 연락하기도 한다.그때의 기쁨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고객은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존재다. 정리 김태균기자 windsea@˝
  • [기고] 고구려사 제대로 지켜내려면/조법종 우석대 사학 교수

    최근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을 주도하는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의 ‘동북공정’ 2004년도 연구과제가 서울신문을 통해 소개되었다.이는 ‘동북변강연구총서’로 간행된 2003년 과제와 연결된 것으로 고구려,발해문제를 중심으로 우리민족 기원문제와 명·청시기 조·중관계사 등 중국이 동북3성(헤이룽장성,지린성,랴오닝성) 지역에 대한 역사적 장악활동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또한 이와 관련된 각 연구자 및 관련기구들의 범위와 성격도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동북공정에 참여한 조직이 35개에 달하며 관련인력은 수백명에 달한다는 것이다.즉,동북3성지역의 모든 사회과학원과 대학,전문연구소가 중앙의 변강사지연구중심을 정점으로 연결되어 역할 분담을 통해 관련연구를 조직적으로 진행하고 있다.그리고 이 조직이 고구려를 중심으로 고대사에서 근현대사까지 동북3성지역과 관련된 중요 쟁점사항들을 다양하게 망라하여 연도별로 진행하고 있음이 실제 확인된 것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2004년 3월15일에 공포된 ‘동북공정 과제연구지침’내용이다.이 지침에는 동북공정이 추진하는 6개의 연구항목과 과제목표가 제시되어 이에 근거한 연구계획 수립을 관련 연구자들에게 요구하고 있다.그런데 이 내용 중 새롭게 ‘고구려발해국문제연구’가 추가되어 나타난 점이 주목된다.동북공정에서 고구려,발해가 핵심 연구분야임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또한 2003년의 세부연구주제였던 ‘발해유적현상조사’가 2004년 내용에는 생략되어 있다.이는 2005년에 헤이룽장성 닝안(寧安)과 지린성 둔화(敦化)지역의 발해유적을 20억위안(약 2800억원)을 들여 중국고대도시로 복원한다는 최근 보도와 연결된 것임을 보여준다. 결국,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와 발해가 중국사라고 학술적으로 부각하고 곧바로 그에 대응되는 역사공간인 시안의 고구려유적과 둔화의 발해유적 등을 중국역사유적으로 복원,정비하여 명실상부한 중국역사화 작업을 완수하려는 의도를 이번에 명확히 보여준 것이다.또한 북방지역의 고대 종족,고조선,한국민족 및 고대 국가기원을 연구해 중국과 우리 민족의 관계사,국경문제,이민문제 등을 중국적 입장에서 정리하여 결국 이들 역사마저도 중국 역사범주에 있음을 강변하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특히 2004년 연구과제인 ‘조선반도민족,국가의 기원과 발전’이란 제목의 연구과제는 중국의 연구가 고구려,발해와 함께 우리민족의 성격까지도 중국측 논리로 파악하려는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주고 있다.이 과제의 연구책임자가 다른 연구논저에서 이미 한국민족은 중국계통의 유이민 세력이며 중국문화가 한국문화의 모태라는 식의 철저한 중국중심주의 입장을 피력한 사실을 감안할 때 심각한 상황임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볼 때 2004년 중국의 동북공정이 추진하는 연구사업은 중국의 역사왜곡과 고구려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등과 연결된 것이다.그리고 이를 통해 중국은 동북지역을 장악한 현재의 정치적 상황이 수백-수천년 전에도 같은 상황인 것처럼 호도하려는 정치적 목적을 더욱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이는 우리 민족의 존립근거와 역사문화적 정체성마저 부정하는 폭거이자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공존을 위협하는 역사침략이다. 이제 우리는 후손에게 우리 역사를 당당히 지켜내고 동아시아의 평화와 공영을 지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지금 무엇을 했고 또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실천할 때이다.특히,지난 1일 출범한 고구려연구재단이 중국의 역사왜곡과 한민족 정체성부정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리 학자들의 열정과 노력,체계적인 정부의 지원,그리고 보다 많은 국민의 관심과 우리 역사사랑이 요청된다. 조법종 우석대 사학 교수˝
  • 代이어 파일럿 된 박인철 소위

    “대한민국 최고의 전투기 조종사가 돼 영공 방위를 책임지겠습니다.” 비행 훈련 중 사고로 순직한 공군 전투기 조종사의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조종사의 길에 들어섰다. 17일 충북 청원 공군사관학교 교정에서 개최된 공군사관학교 제 52기 졸업·임관식에서 ‘조종’ 특기를 부여받아 소위로 임관한 박인철 생도가 주인공. 박 소위의 부친은 지난 1984년 팀스피리트 훈련에 참가해 F-4 팬텀기를 몰다가 산화한 고(故) 박명렬 소령(공사 26기)으로,이런 가족사 때문에 그가 선친의 뒤를 이어 조종사의 길에 들어서기까지는 적잖은 어려움이 많았다. 5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성장하면서 비행기에 유난히 관심이 많아 조종사의 꿈을 키워왔지만 “너만은 절대로 군인이 되지 말라.”는 할머니의 거센 만류 때문에 심각한 고민을 했다. 하지만 조종사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계속 고민하던 중,미용학원 강사인 어머니 이준신(48)씨가 “굳이 사관학교를 간다면 말리지는 않겠다.”고 힘을 실어줘 결국 공사 입교를 최종 결심했다. 조승진기자 redtrain@˝
  • [시론] 노무현과 正祖/이덕일 역사평론가·명예논설위원

    나는 ‘월간중앙’ 2003년 1월호에 ‘당선자에게 주는 역사의 교훈’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그글에서 “노당선자가 처한 현실은 (조선조 임금) 정조와 비슷합니다.”라며 정조시대를 참고할 것을 권유했다. 비단 상황이 비슷했기 때문만은 아니고 정조가 성공한 국왕이었던 것처럼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정조 즉위 초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은 사도세자를 죽인 정당으로서 정조를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노대통령 취임 후 대통령 노무현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한나라당이 국회다수당인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실제로 노론은 정조가 이가환 정약용 등의 남인들을 등용하려 하면 극력 저지하는 등 사사건건 발목을 잡았고 즉위 초에는 암살까지 기도했다.거대야당 역시 대통령 노무현의 거의 모든 정치행위에 대해서 발목을 잡았다. 이처럼 처한 상황은 마찬가지였으나 정조와 노무현의 대응방식은 판이했다.정조는 노론이 장악한 정치현실을 부인하지 않고 그들을 정치 파트너로 삼았다. 그러면서 미래지향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국정을 개혁해 나갔다.그것은 초인적인 인내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정조는 ‘두통이 심할 때 등쪽에서도 열기가 많이 올라오니 이는 다 가슴의 화기 때문’이라고 토로한 적이 있는데 이는 부친을 죽인 적당(賊黨) 노론과 마주 앉아 정치를 하는 데서 생긴 화병이었다. 그러나 200여년 후의 대통령 노무현은 달랐다.1년2개월 전에 쓴 그 글에서 나는 “국회의 권한이 강한 우리 정치 현실에서 의회 소수당을 가지고 개혁을 추진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릅니다.김대중 대통령이 의원 빼가기를 시도한 것도 그것이 비난받을 행위인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국회의 동의 없이는 개혁을 완결지을 수 없는 현실 때문이었습니다.”라고 국회현실을 직시하라고 권유했다. 노대통령이 이런 정치 지형을 현실로 인정하지 않고 국회와 대립할 경우 우리 사회가 겪게 될 고통과 혼란,그리고 개혁의 실종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주의자에 가까운 노무현 대통령은 이런 정치현실을 부인했고,나아가 소수 여당이던 민주당까지 나누어지면서 야당은 대통령 탄핵 의결정족수를 넘겨버렸다.헌법이 부여한 권한을 갖고 있는 양자는 양보없이 충돌했고,그 결과는 모든 국민의 가슴에 큰 상처를 준 탄핵정국이었다. 보다 큰 문제는 우리 사회가 진퇴양난에 빠졌다는 점이다.회복되어 가는 세계경제에 맞춰 국내경제 회복에 전념해도 시간이 부족한 이 시점에 우리는 소모적인 정쟁으로 밤을 지새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결말이 어떻든 극심한 분열을 야기하게 되었다.헌재의 결정이 내려지는 날 만세를 부르는 세력과 통곡하는 세력이 함께 뒤섞일 것이니 지구상에 이런 나라가 또 있을까? 정조가 성공한 국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인내했기 때문만은 아니다.현실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미래지향적 개혁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정조는 자신의 정당성을 노론의 전횡에서 찾지 않고,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는 국정 수행에서 찾았다. ‘노무현 대통령 싫지만 수구세력 횡포 더 싫다’(서울신문 3월15일자 10면)’는 기사 제목처럼 현 상황에서 헌재 기각판결이 내려지면 우리 사회는 과연 4년 후 성공한 대통령을 가질 수 있을까? 노대통령과 함께 우리가 오늘 진정으로 고민해야 할 주제는 바로 이것일 것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명예논설위원˝
  • 경기도 비만증 ‘헉…헉’

    경기도에서 해마다 30만명이 넘는 도시가 새로 생겨난다.이에 따라 택지,학교부지 등으로 여의도(2.95㎢) 13배 넘는 38.85㎢의 산림이 없어진다.오는 4·15 총선에서는 서울보다 1명 많은 49명의 의원을 선출,최다의원배출 광역단체가 된다. 서울보다 커진 경기도의 자화상이다. 얼마전만해도 서울과 인천의 배후지에 불과했던 경기도가 폭발적인 성장세를 기반으로 거대 자치단체로 부상하고 있다.이에 따라 급격한 인구팽창으로 60,70년대 서울이 겪었던 학교난,주택난,교통난 등 도시화의 고민을 경기도가 앓고 있다. ●48년만에 서울인구 앞질러 경기도 인구는 지난해 12월말 현재(주민등록기준) 1036만 1638명(외국인 포함)으로 서울시 인구(1017만 6968명)보다 많다. 경기도는 2002년말 1000만 17명으로 서울에 이어 두번째로 1000만명을 넘어선 이후 연간 웬만한 도시 규모인 36만여명의 인구가 늘고 있다.5년 단위로 이뤄지는 정부의 인구주택 총 조사가 1925년 시작된 이래 55년까지는 경기도 인구가 서울보다 많았다.이후부터는 서울이 경기도를 앞서다 지난해 역전된 것이다. 자동차등록대수도 323만 2000여대로 4년전에 서울을 추월했다.학교(1688개)를 비롯한 교원(7만 1117명),학생수(172만 7000명)도 전국 시·도 가운데 가장 많다. 17대 총선에서는 경기도에서 선거구가 8개 늘어 49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등 수도권에서 지역구의원의 44.85%인 109명이 배출된다.수도권 지역구의원은 16대 97명(점유율 42.7%),15대에서 96명(점유율 37.9%)으로 점점 늘고 있다. ●빠른 성장속 문제점 산적 고성장 이면에는 난개발을 비롯한 교육난과 교통난 등 풀어야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폭증하는 인구수용을 위한 각종 택지개발로 지난 20년 동안 서울시와 수원시를 합친 면적과 같은 777㎢의 산림이 사라졌다. 서울의 집값을 잡기 위해 닥치는 대로 아파트만 짓다 보니 용인 서북부지역은 도로와 학교 등 기본시설 부족으로 주민들이 고통받고 있다.교육환경도 열악해 교사 1인당 평균 학생수와 학급당 학생수도 전국 평균이나 서울시보다 높다.경원대학교 이창수(도시계획학과) 교수는 “양적인 팽창속에서 계획적인 개발을 도모하지 못한 게 난개발 등 각종 수도권 문제를 불러왔다.”며 “‘선계획 후개발’ 원칙을 제대로 준수할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장기적으로는 지방균형발전을 꾀하면서 수도권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도록 중앙정부와 경기도가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수원 김병철기자 kbch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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