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4·3 희생자
    2026-03-14
    검색기록 지우기
  • 유흥가
    2026-03-14
    검색기록 지우기
  • 러닝 코스
    2026-03-14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808
  • 범인차 트렁크서 유골 발견/지존파 수사

    ◎불에 탄 1㎏… 제3의 희생자 가능성/수첩·밧줄 등 12개 증거물도 수거/경찰,닷새 방치했다 뒤늦게 찾아/김기환,“부친·백부유골” 주장 【영광=최치봉기자】 「지존파」일당의 또다른 범죄행위여부를 밝힐 수 있는 두개골조각등 인골과 증거물이 추가로 발견됐다. 전남 영광경찰서는 23일 지존파에 대한 검거작전이 전개된 지난 19일 이들로부터 압수한 전남 1러 1239호 르망승용차 트렁크에서 인골·나침반·철사줄·수첩등 12개 품목의 증거물을 수거,공개했다. 이 차는 19일 상오9시쯤 김현양과 이경숙이 경찰의 추적을 피해 불갑지서에서 8㎞쯤 떨어진 영광읍 학정리까지 달아날 때 사용한 두목 김기환소유 승용차로 경찰은 이같이 중요한 증거물이 들어 있는 차를 경찰서 뒷마당에 닷새동안이나 방치해두었었다. 경찰이 이날 공개한 압수품목은 검은 비닐봉지에 들어 있는 두개골조각과 불에 탄 인골 1·04㎏과 이들에게 살해된 소윤오씨의 것으로 보이는 수첩 1개,김현양의 수첩 1개,나침반,현금 5만4천원이 든 지갑,성분이 밝혀지지 않은 이물질이 들어있는 박카스병 1개,길이 3m의 철사줄,대검집등이다. 소씨의 것으로 추정되는 수첩에는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간절한 사연이 기록돼 있었다. 지난 13일 납치된 직후 범인들에게 건네주기 위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글에서 소씨는 『긴급으로 마련할 수 있는 금액은 4천3백만원뿐이며 현금으로 준비할 테니 선처바랍니다』라고 쓴 뒤 『경찰에도 알리지 않겠으니 제 아내와 딸들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시오』라고 애원했다.소씨는 또 범인들이 요구한 듯 서울 중화동 자신의 집 약도와 회사운영상태가 적힌 울산공단내 회사약도,두 딸의 이름·나이·학교와 부인의 이름등을 상세히 적어놓았다.이 수첩에는 또 범인들이 써넣은 것으로 보이는 예금주 「이주현」이름의 국민은행계좌번호와 적외선망원경·소총·탄환·일본도·도청장치·무전기등 범행도구의 가격이 적혀 있었다. 또 김현양의 수첩에는 『넉넉한 생활 한번 못해보고 일생을 마감한다는 것은 너무나 억울하고 불공정한 세상이다』라는 독백이 적혀 있었다. 경찰은 이번에 발견된 인골이 주범김기환의 부친과 큰아버지의 것으로 묘소이장을 위해 발굴,함께 분쇄해 섞은 뒤 가지고 다녔다고 범인들이 진술하고 있어 진위여부를 가리기 위해 국립과학연구소에 정밀조사를 의뢰했다. ◎지존파에 첫 희생/여인신원 곧 확인 【대전=최용규·이천렬기자】 지존파 일당의 살인연습 첫번째 희생자로 살해·암매장된뒤 지난 22일 현장검증에서 드러난 20대여자의 신원이 곧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대전서부경찰서는 23일 신원미상의 20대 여자는 대전시 유성구 세동 노적산 기슭의 암매장 발굴 현장에서 5㎞쯤 떨어진 곳에 사는 최기성씨(47·충남 논산군 두마면 두계리 140의 1)의 셋째딸인 미자양(당시 20세)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최씨의 혈액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내 발굴된 유골과 비교 감식을 의뢰했다.
  • 6·25전 좌익활동 학계의견 정리

    ◎“대구폭동­제주 4·3사건 항쟁일수 없다”/박헌영의 「미군정 타도」 폭력 노선이 원인/민중사관 주장 극복… “분명한 폭동” 결론 「대구폭동」인가 「10월항쟁」인가,「제주도 4·3사건」인가 「제주도 4·3항쟁」인가.지난 봄 교과서의 역사용어 변경을 위한 시안을 놓고 벌어졌던 이같은 논란은 과거와 같은 권위주의 정부 아래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비록 논의 차원이기는 했지만 새 정부가 그처럼 진보적인 사관을 교과서개편 문제에까지 개방했기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다.그만큼 정부의 자신감이 바탕이 되었다는 평가였다. 그러나 나라 전체가 들썩거렸을 만큼 파문이 길었던 것은 이 시비가 대한민국의 정통성 시비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6·25 44주년을 앞두고 이 문제가 다시 기억되어야 하는 것도 「10월 항쟁」「4·3항쟁」이라는 시각이 수용된다면 6·25 또한 「민족해방전쟁」이라고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박성수한국정신문화연구원교수는 『「10월항쟁」이나 「4·3항쟁」이라는 표기는 첫째 국내의 민중사관,둘째 북한의조선전사,셋째 중국의 혁명사관에서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고 단언했다.그들의 시각에 따르면 일제하의 독립운동은 이른바 「민족해방투쟁」인 만큼 8·15는 광복이 아닌 「민족해방」이다.또 일제하 「민족해방투쟁」은 8·15이후 미군정 치하 남한에서 「민중항쟁」이라는 형태로 계속 진행된다는 것이다. 박교수는 『이같은 논리에 따라 그들은 「민족의 통일염원을 저버린 대한민국의 건국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징벌을 받게되며 6·25는 북침이었을지도 모르는 단지 한국전쟁일 뿐」이라고 해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현강연세대교수는 『그같은 민중사관을 그동안 적지않은 학자들이 편향적이 아닌가 우려하면서도 용인해 온 것은 학문의 자유를 존중했기 때문』이라면서 『학계를 벗어나면 용인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학자들은 「폭동」과 「사건」이라는 단어의 차이만큼 현재 국사 교과서의 표기대로 「대구폭동」과 「4·3사건」을 차별화한다. 이현희성신여대교수는 먼저 『「대구폭동」은 폭동일 뿐』이라고 말했다.아무리 진보적인 연구성과가 나와 있다고 해도 그 때를 체험·목격한 격앙의 세대가 악의적의 공산 파괴공작의 맥락에서 비롯된 당시 상황을 증언·열변하고 있는 한 달리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덕규이화여대교수는 『1948년 대구에서 일어난 사건을 폭동으로 보느냐 항쟁으로 보느냐는 문제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면서 『이는 우리 국가의 이념까지 연결되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이현희교수는 그러나 『과거 일반화된 표기였던 「4·3제주폭동」은 그 간의 연구와 지역적 특수성으로 볼 때 「폭동」이라 표기하기에는 사실과 거리가 있다는 것이 학계 대다수의 시각』이라고 전하고 『이같은 시각은 교과서에 「4·3사건」이라고 표기됨으로써 이미 수용된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승조고려대교수는 이 두 사건을 남로당 총책 박헌영과 직접적으로 연결시켰다.남로당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하자 1946년 가을부터 폭력투쟁 노선으로 전술을 바꿨으며 이는 좌익세력에 대한 과신과 우익 세력에 대한 과소평가에서 비롯된 과오로「대구폭동」과 「4·3사건」이 대표적이라는 것이다.한교수에 따르면 박헌영이 보기에는 미군정이 국민적 지지기반을 갖지 못했고 보수세력도 한줌 밖에 안되므로 밀어붙이면 된다고 계산했다.한편으로는 북한 인민군이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해 3만명의 경찰과 5만명의 국방경비대를 상대로 폭력과 무장투쟁을 하다 좌익세력은 모두 소진됐다.또 박헌영은 남로당 조직에게 모두 총탄이 되어서 「5·10총선거」를 저지할 것을 명했으나 많은 인명의 살상과 대량 구속을 초래했을 뿐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저지하지 못했다.결론적으로 상대방의 전력을 정확하게 평가하지 못하고 극한투쟁을 벌이다 좌익세력의 총 붕괴를 재촉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정통주의적 입장에 서는 학자들 사이에는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다.사람에 따라 다르기는 하나 좌익·혁신적인 학자들에 비해 무기력하고 나약하며 기회주의적인 경향이 없지 않았다는 것이다.좌파학자들에게 보수·반동·어용으로 낙인찍히며 공격당할까 두려워 사실과 다른 억지주장을 하고 있음에도 이의나 반론을 제기하기를 꺼려온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우려 속에서도 이제 폭동을 폭동이라고 제목소리를 내는 학자가 많아졌다는 것은 폭동이냐 항쟁이냐의 논쟁을 계기로 우리 학계가 한부분의 건강은 되찾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평가이다. ◎46년10월 대구폭동/경찰서 등 방화·군수 살해/식량요구 시위가 발단… 경남북 등 확산 「대구폭동」은 1946년10월1일 상오 쌀을 나누어준다는 풍문을 듣고 대구시청 앞에 모인 1천여명의 시위가 발단이 됐다.당시는 미군정 아래 좌우대립으로 정국불안이 계속되고 물자부족과 군정당국의 식량공출로 생활고가 극심한 가운데 좌익계열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주도한 이른바 「9월총파업」이 전국을 휩쓸고 있는 상황이었다. 사태는 하오 들어 시위군중이 1만여명으로 늘어난 가운데 하오7시쯤 대구역 앞에서 경찰의 사격으로 한 시민이 숨지면서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흥분한 시민들은 이튿날인 2일 아침부터 경찰서·역·시청 앞 등에서 대규모시위를 벌였고 당초 식량배급을 요구하던 구호도 애국자석방,조선인에게 행정권이양 등 정치적 문제로 발전되어갔다.경찰서를 점거해 무기를 탈취하고 대구시청 간부의 집을 습격하기에 이르렀다.이에 군정당국은 하오7시 대구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미군의 출동으로 대구의 소요사태는 진정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시위는 다음 날인 3일 저녁부터 영천·달성 등 주변지역으로 번져나가 11월 중순까지 경북전역과 경남·전남·강원지역에서 계속됐다.시위가 일어난 대부부의 지역은 경찰서가 습격당하고 교량·철도가 파괴됐다.특히 시위가 극심한 영천의 경우 경찰서·군청·재판소가 불타고 군수가 살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48년4월 4·3사건/좌익의 지서습격이 원인/9년간 희생자 3만∼8만명 추정 「4·3사건」은 제주도에서 1948년4월부터 만9년동안 최소 3만명에서 최대 8만명으로 추정되는 희생자를 낸 해방후 최대의 유혈사태였다. 사건은 단독정부수립을 위한 5·10총선을 한달남짓 앞둔 4월3일 상오2시,산중에 집결해 있던 제주도민 2천여명이 도내 15개 경찰지서 가운데 14개를 일제히 습격하면서 시작됐다.이들은 「미군철수」와 「단독선거반대」 「이승만매국도당타도」 등 구호를 외치며 일부는 일본군이 남기고 간 99식소총으로 무장한 상태에서 좌익세력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미군정은 즉각 1천7백여명의 경찰을 비롯,국방경비대와 우익인사들인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대규모 진압군을 파견했다.이에 봉기대와 이에 동조한 도민들은 한라산으로 들어가 장기적인 유격전의 성격으로 전환됐다. 이후 봉기대를 주민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근거지가 되는 마을전체를 불살라버리고 주민들을 집단이주시키는 군·경의 소개작전과 이에 맞선 봉기대의 격렬한 저항이 이어졌다.이 과정에서 양민을 포함해 수많은 인명피해가 났다. 이 사건은 또 진압을 명령받은 군대가 이를 거부하고 소요를 일으킨 48년10월 「여순반란사건」을 촉발시키기도 했다.「4·3사건」은 1957년4월2일 마지막 「빨치산」 오완권이 생포되어서야 비로소 막을 내렸다.
  • 3·15희생자 묘역 성역화/마산시,연내 착수

    【마산=이정규기자】 마산 3·15의거 희생자묘역이 올해안에 성역화된다. 마산시와 3·15의거 기념사업회(회장 이순항)는 20일 3·15의거 희생자묘역 성역화사업 추진계획을 확정하고 20억원의 사업비로 올해안에 착수한다고 밝혔다.이 계획에 따르면 현재 마산시 회원구 구암1동 산96의4 3·15의거 희생자묘역을 3만여평으로 확장,시내에 있는 영령봉안소와 기념탑등을 옮기고 위령탑과 자료전시실등 기념관을 건립키로 했다. 기념사업회는 이와함께 희생자묘역을 보훈처에는 국립묘지로,건설부에는 3·15공원으로 지정해줄 것을 건의하는 한편 재조사를 실시해 새로운 희생자를 발굴하고 이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생존자의 생계지원대책을 세우기로 했다.
  • 4·3은 말한다(1·2)/제민일보 4·3취재반 지음(화제의 책)

    ◎제주 「4·3사건」 전말 밝힌 보고서 광복후 미군정 치하였던 19 48년 4월3일 제주도에서 발생한「도민봉기」의 전말을 상세히 밝힌 취재보고서. 「6·25」가 휴전되고도 1년여가 지난 54년 9월에야「공식적」으로 끝난 이 비극적인 사건은 적어도 3만5천여명의 희생자를 낳았다. 그럼에도 그 실상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채「좌익의 폭동」또는「민중항쟁」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아 왔다. 제민일보 취재단은 6년여동안 제주도내 각마을과 서울·부산·일본등지에서 당시 관련됐던 3천여명으로 부터 생생한 증언을 들었으며 미국·일본 것을 포함,8백여종의 자료를 섭렵해 방대한 규모의 이 증언록을 완성했다. 지난해 한국기자협회 제정 한국기자상을 수상한 이 내용은 국내와 동시에 일본에서도 출판됐다. 전예원 각 8천원.
  • 북한서열 22위… 대남공작 총책

    ◎「남한 조선로동당」 이선실의 실체와 암약상/80년 조총련모국방문단 위장 잠입/서울에 집 3채 구입… 아지트로 활용/교회 침투해 문익환목사 등과 교분 이선실.71세의 그녀는 북한내 권력서열 22위로 지금까지 남파된 공작원중 최고 거물이다. 이화여전 출신의 이는 남한내 북한공작지도부의 총책으로 북한의 장관급 공작원을 포함,직파간첩 10명을 거느리고 20년가까이 북한을 제집 드나들 듯했다. 이는 「신순녀」「이선화」「이옥녀」 등의 가명을 사용하며 71년이후 북한측 공개석상에도 잘 나타나지 않아 「베일속의 여인」으로 알려졌으며 이 때문에 수사당국이 신원파악을 하는데 애를 먹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조사결과 이는 고령임에도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주었으며 66년부터 90년10월 입북시까지 모두 3차례나 남한에 침투,20년 가까이 암약해왔다. 특히 이는 80년부터는 북송된 재일교포 신순녀(74)의 이름으로 위장잠입,합법적 신분을 얻은 뒤부터는 민중당창당에 적극 나섰으며 구속된 사북탄광사태 주동자 황인오(36·중부지역당총책)등 인물들을 적극 포섭,해방이후 최대 간첩망을 구축했다. 이는 8·15광복전 이화여전을 졸업했으며 6·25후 대남 간첩 양성소인 로동당 중앙당 금강학원을 수료하고 당경공업위원회 과장,황해도 여맹간부,평양시여맹부위원장 등을 지낸 관록을 갖고 있다. 63년 이는 김일성에게 직접 『조국통일사업에 일생을 바치고 싶다』고 말해 대남 공작원으로 선발돼 공작원양성소인 「695정치대학」에서 전문교육을 받았다. 이후 66년 1차 남하해 5년동안 암약하다 71년 월북했고 다시 73년 2차로 남파돼 2년뒤인 75년 복귀했으며 76년부터는 북송재일교포 신씨를 가장,일본에 잠시 기거하다 모국방문단에 끼어 국내에 들어온뒤 80년에 영주귀국형식으로 국내에 잠입했다. 신씨를 가장한 이는 전북 전주시에 사는 신씨의 언니 신양근씨 집에 머물다 신씨의 장남 백덕산씨(66)가 전주 평화동사무소 사무장으로 근무하는 점을 이용,백씨형제들에게 집을 사주는등 환심을 사 신순녀란 이름의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아 「가짜인생」을 살기시작 했다. 위장합법잠입에 성공한 이는 바로 주거지를 서울로 옮겨 동작구 대방동344 단독주택을 구입,본적까지 옮긴채 6년5개월동안 활동했다. 신길동 영동교회에 신도로 잠입,여기서 알게된 김옥기(53·보험사원·구속)를 수양딸로 삼아 함께 살면서 권중현(50)등을 포섭,간첩망을 꾸며나갔다. 이는 83년이후 영등포구 신길동 집외에 안양시 비산동 부흥아파트와 동작구 대방동391 단독주택등을 사들여 비밀아지트로 활용했다. 이는 87년 서울 미아리 한빛교회에 침투,자신을 「독립운동가」 「제주4·3사태 희생자유족」 「통혁당사건 관련자가족」등으로 자처하면서 문익환목사등과 친분을 유지하다 신당창당에 가담했다. 89년 마포 서교동 「진보정당건설을 위한 모임」(대표 이우재)에 헌금을 내며 정당결성자들과 친분을 맺은 이는 90년 YWCA에서 열린 민중당창당발기인으로 참가,당기를 이대표에 건네주기도 했다. 이는 구속된 김락중공동대표에게 2백만달러,창당헌금 2천만원,5백만원짜리 복사기등을 기증해 일약 「창당유공자」로 떠오르면서 장기표씨 등과 밀착했고 「민가협」에도 침투했다. 한편이에 간접 포섭된 황인오는 90년 10월 이와 함께 경기도 강화군 양도면부근 해안에서 무장안내원들과 반잠수정을 이용,입북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잠수정은 83년 부산 다대포앞바다에서 격침된 것과 같은 종류로 몸체길이 8.75m,너비 2.5m,무게 5t에 승선인원 5∼6명 규모로 물위에서는 시속45∼50노트,잠수시에는 6노트정도인 것으로 전해졌다.
  • “대공경계태세 허점” 드러나/중부지역당 사건

    ◎서해안 통해 제집 드나들듯 왕래/간첩신분 밝혔어도 신고 “전무” 「남한조선로동당 중부지역당」사건은 국민의 대공(대공)의식과 대간첩경계태세에 문제점이 있음을 단적으로 반영해준 사건이었다. 안기부가 5일 밝힌 자료에 따르면남파된 북한의 공작원들이 직·간접적으로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언동을 해왔으나 수사기관에는 단 한건의 신고도 없었으며 이들이 서해안등을 통해 북한을 「제집 드나들듯」오갔어도 적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북한이 당서열22위인 거물 공작원을 남파해 장기간 남한에 머물게하면서 동조자를 포섭,대규모 지하당을 구축하는등 대담한 대남공작을 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처럼 어느새 무디어진 우리사회의 대북경계의식에도 원인이 있다고 안기부는 분석하고 있다. 수사결과 북한 로동당 정치후보위원인 이선실(71·여)은 80년초 귀화한 조총련 신분으로 입국,서울등지에 아지트를 설치해 놓고 「제주 4·3사태 희생자유족」,「아들이 통혁당사건에 연루돼 행방불명된 가족」임을 자처하면서 재야단체에 접근했고,특별한 생계수단없이 풍족한 생활을 하는등 여러가지 의심스러운 행동을 해 왔으나 주위사람들은 물론 집주인마저도 「평범한 할머니」정도로 생각하고 지나쳤던 것으로 밝혀졌다. 오히려 이가 『이 세상에서 김일성장군만한 사람이 없다』는등 북한을 찬양·미화하고 무전교신을 하는 것을 목격하고도 함께 동거해 온 김옥기씨(53·여·구속·보험외판원)처럼 대부분의 관련자들이 이가 간첩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일체 신고하지 않았다는 게 안기부의 설명이다. 또 이와 함께 활동해온 북한공작원 권모(40대)는 90년초 제주도에 침투,시내 한 여관에서 주인에게 화장실을 북한에서처럼 「위생실」로 말해 스스로 크게 당황했으나 전혀 의심을 받지 않았고 같은해 8월쯤 땅투기꾼으로 신분을 위장,유성의 한 온천여관에 투숙하고도 부동산 거래를 전혀 하지않는등 의심스러운 행동을 했지만 오히려 주인한테 극진한 대접만 받았을 정도였다는 것. 이에게 포섭돼 입북까지 했던 「중부지역당」 총책 황인오(36·노동)도 3백명에 가까운 동조자를 끌어들이면서 수차례에 걸쳐단순한 반체제·반정부 인물이 아니라 「조선로동당원」임을 밝히고 증거로 권총과 무전기를 보여주기도 했으나 역시 황씨에 대한 신고는 한차례도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 K탄광 해고근로자 손근금씨(33)는 90년 11월초 황씨로부터 로동당가입을 권유받고 『간첩임을 증명할 징표를 보여달라』한 뒤 황씨가 권총을 보여주자 『대단한 사람』이라며 부러워 하기까지 하면서 신고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함께 수명의 북한공작원이 경기 강화및 제주도 해안으로 여러차례 잠입해 김락중과 황등을 지도해 왔음에도 침투흔적조차 발견치 못한 해안선 대간첩경계의 허점도 드러나 개선이 요구된다. 김락중씨 간첩사건으로 구속된 심금섭씨의 경우 지난 2월중순 남파공작원 임모와 이모를 월북시키기 위해 승용차에 태우고 강화도로 가는 도중 검문을 당했지만 검문자가 형식적으로 뒷좌석을 훑어보고 『그냥 가라』고 통과시켜 『진짜를 몰라보는 멍청이』라고 조소까지 했다는 것이다.
  • 4·3사태 희생자 위령제(단신패트롤)

    「제주 4·3사태 민간인희생자 합동위령제」가 3일 상오 11시 제주시내 신산공원에서 유족과 제주도내 각급 기관장등 1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제주도 4·3사태 민간인희생자유족회」(회장 김병언)가 4·3사태 발생 44주년을 맞아 지난해에 이어 두번째로 마련한 이날의 위령제는 유족대표의 헌화및 분향과 종교의식,각급 기관장의 추도사,유가족과 일반시민의 분향등 순으로 진행됐다.
  • 「4·3사건」관련 추정/유골 11구 발견

    【제주=김영주기자】 제주 4·3사건 44주기를 하루 앞둔 2일 북제주군 구좌읍 세화리 월랑봉 속칭 「다랑쉬굴」에서 4·3사건의 희생자로 보이는 유골11구와 유물들이 대량 발굴됐다.
위로